도가 사상의 현대적 독법
노자는 확실히 무無와 박撲의 계열을 유有와 기器의 계열과 동등한 수준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으므로 전통적인
체용론이 설득력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 체용론은 체의 개념을 형이상학적 실체나 주체로 해석하지 않고 용을 형이상학적인 체의 속성이나
종속적인 파생체로 보지 않는 조건일 때 우리의 주장과 어느정도 유사하게 된다.
우리의 주장은 이러하다.
예컨대 무와 박이 유와 기의 근거이기는 하지만, 그 근거는 하이데거나 데리다가 말한 '근거 없는 근거'(der Ab-
grunt, le fond sans fond)가 되어 허공의 비어 있음처럼 모든 만물이라는 존재자들의 존재를 가능케 해주는 터전
의 의미를 지닌다.
비유컨대 만약 이 세상에 허공의 비어 있음이 없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물有物들이 존재할 수도 없거
니와 물과 물 사이의 상호연계성도 성립될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노자의 도는 무의 비어 있음이 모든 유를 그 품안에 포용하고 있고 유의 상호적인 상관 작용을 가능케
한다는 의미를 내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무는 자족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닌(無名) 비어 있는 공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무에는 어떤 힘이 있고 역동성이 있다.
그것을 노자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라고 언표하였다.
비어 있는 빈 허공이 이미 어떤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작용은 바로 존재자들을 존재케 하는 힘을 뜻한다.
허공의 비어 있음이 없다면 모든 존재자들이 어떠한 이름도 가지지 못하는 암흑의 밤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
이다.
존재자들을 존재케 하는 허공의 차이가 모든 존재자들을 갈라놓음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존재자들을 명명할
수 있게 된다(有名).
플라톤이 말한 어머니의 포용성과 같은 빈 허공으로서의 '코라(khora)와 노자의 무는 서로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유有를 무無의 자식이나 속성과 같은 무에게 종속된 개념으로 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유가 없으면 무가 무라는 인식을 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
아무런 것도 새겨져 있지 않는 허공은 이미 허공이 아니다.
거기에 별빛의 반짝거림과 해와 달의 빛과 어둠, 온갖 종류의 구름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거소가 같은 변화
무상은 유물有物들이 새들의 이동과 함께 유희하는 흔적들이 새겨져 있기에 우리는 그 하늘을 허공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유가 무의 아들인 것이 아니라 유무有無는 서로 상생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즉 데리다적인 의미에서 유무는 서로가 상대방의 존재를 '보충대리'(le supplement)하고 있는 것이다.
유와 무의 차이差異(la differerence)의 '갈라짐'속에서 자기 것을 상대방에게 이송시켜 거기에 상감됨으로써
상대방을 보충하기도 하고 대리하기도 한다. 즉 유와 무의 관계는 차이로 드러나는 '갈라짐'과, 그 갈라짐 속
에서 이른바 자기 것을 타자의 것에로 연기延期(le delai)하거나 접목하는 '모음'(die Sammlung)을 동시에
지시하는 '차연差延'(la differance)과 다르지 않다.
원효는 이런 보충대리적인 불법의 의타기성(依他起性)을 일컬어 '대사代謝'라고 하였다.
따라서 노자의 도를 현대적인 의미의 텍스트(le texte)의 직물(le textile)짜기 이론이나 하이데거적인 의미의
로고스, 또는 데리다적인 의미의 차연이나 원효적인 의미의 대사라고 불러도 오진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그러면 노자의 특색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생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동서고금의 철학 사상을 성찰해 보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의외로 서로 유사한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유사성은 인간 사유가 무한정으로 다양하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한하고 유형적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사성이라는 것을 동일성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동일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다만 수학과 형식논리학의 세계에서만 성립한다.
유사하다는 것은 서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이 동시적으로 성립하면서 하나의 공통적인 유형을 형성
하고 있음을 뜻한다.
다르다는 것은 서로 모순적이어서 같이 동거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상호간에 보충대리될 수 있는 그런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말하다.
그러므로 여러 개의 유사성의 계열체가 성립될 수 있다.
우리의 주장은 하이데거와 데리다와 후기의 메를로 퐁티를 아우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과 도가 사상,
불교의 교학적인 사유 등이 모두 하나의 유사한 계열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25.
도가 사상을 현대적으로 다시 깊이 반추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유행을 좇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세간의
흐름에 편승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다.
그처럼 시류에 편승학 대중적 환심을 사려는 것은 자기 정신의 판매 행위와 같다.
도가 사상은 모든 것을 하나의 가치로 환원시키려는 근현대(modernity)사상의 독성을 일깨워 줄 정신적 각성
제이자 21세기적 사유의 기본 틀을 놓을 수 있게 해 줄 설게도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는 환원적인 진리관이 대종을 이루던 그런 세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사회주의적 환원과 자본주의적 환원이다.
사회주의적 환원은 모든 것을 집단적 공동체 중심의 이념으로 수렴·귀일시키려는 발상이다.
극단적으로 개인을 소멸시키고 집체주의적 실체론을 중심으로 여기는 그런 환원이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도구주의적 관념으로 환원시키고, 도구적 가치를 초탈하려는 초월성을 실증
주의의 이름 아래 무의미성으로 낙인찍는 그런 이념이다. 그 도구를 대표하는 힘이 돈이다.
사회주의는 절대권력의 힘을, 자본주의는 돈의 절대성을 각각 숭상하는 환원주의적인 장악의 문화이고,
그 장악의 실상을 보다 더 근사하게 보이게끔 화장해 온 것이 각각 역사 변증법과 자유주의의 신학이었다.
그 두 가지의 일원론적인 환원주의적 장악의 신학 가운데 하나인 역사신학은 이미 거의 명맥이 끊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자유신학은 아직도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
이 신학의 공로는 찬연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에게 빈곤으로부터의 탈출과 물질 생활의 쾌적함을 가져다
주었으며 보다 오래 건강하게 사는 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빛나는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 사상은 모든 존재자를 존재로서 존중해 주는 재유在有의 길을 폐색
시켜 버렸다.
오직 인간에게 도구적 가치가 있는 것만을 존중하는 이해타산적 관심으로만 충일케 함으로써 인간 관계에서든
대자연 관계에서든 무와 초탈의 의미를 무의미한 잠꼬대로 만들어버리고 물物의 세계를 오직 소유의 대상으로
만 여기게 하였다.
자유신학은 형이상학의 일원론적 진리를 신앙의 영역으로 절대화하고, 그 절대적 신앙에 대한 경배의 대가로
세속 생활에서의 소유의 무제한적 만족을 위한 경쟁을 합법화시켜 주었다.
그 결과 소유의 힘이 존재의 힘을 누르고 있다.
하이데거의 용어로 표현하면, 일상적인 일에의 관심이 소유의 이해타산적인 욕심으로만 채워져서, 인간의
본래적인 실존이 '세상 사람'(der Man)이라는 다수의 평균성에 짓눌린 채 고고학적인 유물로 파묻혀 가고 있는
것이다.
도가 사상은 이런 20세기의 문명의 흐름을 넘어서 대로운 21세기의 문명을 창조하려는 우리의 철학적인 견분
見分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회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는 환원적인 진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그런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세기에 몇몇의 철학적 선구자들이 나타나서 인간에게 새로운 견분을 깨칠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그런 고독한 외침이 문명으로 승화되기에는 환원적 진리와 그 추종자들의 현실적인 힘은 너무도 강했다.
그러나 이 세기말에 바로 그 힘들이 스스로 자기 한계를 느껴 새로운 견분의 철학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견분의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사상이 바로 도가 사상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 도가 사상이 새로운 세기의 사실학事實學으로서의 물학物學이라고 생각한다.
물학은 결코 물질학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반드시 불교 유식학唯識學의 사상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그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려 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보게 된다.
견분을 바꾸지 않는 한 세상은 늘 같이 보인다. 그래서 견분의 학學이 중요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 한국에서 이 견분의 학이빈곤할 뿐만 아니라, 또한 푸대접을 받고 있다.
언젠가 이 빈곤과 푸대접의 응보가 우리 모두에게 부메랑의 효과로서 되돌아오리라. 35.
도와 언어 - 이영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위의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에 따르면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명제와 사태가 공유하는 논리적 형식, 기호의 의미와 명제의 뜻, 명제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 기호들의 논리-
구문론적 범주 등과 같은 것들은, 해당 기호나 명제(들)의 올바른 사용을 통해 보여지기는 하지만 유의미하게
말해질 수는 없다.
언어와 사고와 세계의 한계, 그리고 가치 있는 것과 신비스러운 것들 역시 말해질 수는 없고, 오직 유의미한
명제들의 총체를 통해서 스스로 드러날 뿐이다.
이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은 우리의 언어와 사고와 세계의 선험적 조건들을 이룬다.
만일 우리가 이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면, 우리는 말하자면 철학적인 진술들을 하려는 셈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이 철학적 진술들도 역시 사이비 명제들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의 저 유명한 말이 등장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사상이 그의 언어 그림 이론의 필연적 귀결임을 염두에 둔다면, 노장의 언어관이 표상
주의적이라 할 때 그 궁극적 귀결이 어떠할지는 매우 분명하다.
만물에 근원적인 것으로서의 도는 언어로 유의미하게 기술될 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도는 우리가 가리키거나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도에 대해 떠든다 해도, 그것은 결국 무의미한 헛소리가 될 뿐이다.
도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마치-눈과 시야와의 관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을 빌려 비유하자면-보는
눈 자체를 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시야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눈들은 모두 사물화된 것들일 뿐이다. 시야의 원천이자 한계로서의 보는 눈 자체는
결코 시야 속에서 발견될 수 없다.
우리의 시야 속에 있는 모든 것은물론 우리의 눈에 의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시야 속에 있는 어떤 것도,
그것이 눈에 의해 보여지고 있다는 추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보는 눈 자체를 보려고 하는 것이 헛된 일인 것처럼, 도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태도는 비트겐슈타인이 권고한 바와 같이 그저 침묵하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점은 노장에서도 이미 충분히 인식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자』2장에 "성인은……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라는 말이 나오며, 56장에는 "아는 자는 말하지 않으며
말하는 자는 아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장자는 「지북유知北遊」편에서 도에 대한 물음에 아무 대답도 못하는 무위위無爲謂를 올바로 도를 체득한
사람으로, 도를 설명해 주고자 하나 곧 할말을 잊어버리는 광굴狂屈을 거의 도에 가까이 간 사람으로, 그리고
도에 대해 그러 듯하게 잘 이야기하는 황제黃帝는 결국 도와 가깝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한다
김형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