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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인문

철학의 기원 - 가라타니 고진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6.07.12|조회수107 목록 댓글 0


철학의 기원 




한국어판 서문

 

소크라테스에게는  매번 다이몬(정령)이 나타나 지시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같은 자질의 소유자는 현재도 드물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특이한 것은 다이몬이 명령한 사항이 특이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에게 공인(公人)으로 활동하는 것을 금지한 점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민회에 나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민회에 가는 것은 아테네 시민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그런데 다이몬이 그것을 방기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민회에서 활약할 때에야 비로소 어엿한 시민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부자의 자제들이 소피스트에게 돈을 주고 배운 것은 민회에서 훌륭히 행동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다이몬은 민회에 가지 말고 정의를 위해 싸우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택한 것이 아고라(광장·시장)에 가는 것이었다.

민회가 공적인 장(場)인 데에 반해 광장(아고라)은 사적인 장이다.

하지만 그곳이 그저 사적인 곳만은 아니다. 민회 이상으로 보편적으로 열린 장소이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오늘날 직접민주주의로 불리며 종종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것으로 간주된다.

민주주의란 바로 데모스=시민의 지배이다.

그런데 여성, 외국인, 노예는 민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데모스'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대거 광장에

있었다.

'정의'는 오히려 거기서 발견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광장에 나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13.


 

소크라테스는 광장에서 누구하고든 문답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문답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그것은 스무스하게 일정한 끝(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여기에서 대화란 자기대화, 즉 내성(內省)이지 타자와의 대화가 아니다.

타자와의 대화가 그처럼 보기 좋게 완결될 리가 없다.

예를 들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쓰고 있는 것처럼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종종 상대방을 화나게 했다.

그 때문에 두들겨 맞고 걷어채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그것을 참았다.

친구가 소송하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만약 당나귀가 나를 걷어찼다고 하면, 내가 당나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야 하겠는가."(『그리스철학자열전』). 13.


 

민회와 광장.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이들의 가치서열은 아테네에서는 명백했다.

그런데 다이몬은 소크라테스에게 공인으로서 활동하는 것을 금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폴리스나 정치로부터

몸을 빼지 말고 사인(私人)으로서정의를 위해 활동하라고 말한다.

다이몬의 지령은 바꿔 말해 폴리스를 공인과 사인의 구별이 없는 곳으로 만들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이몬의 요구는 공소(空疏)한 것이 아니다.

공인과 사인의 구별이 없는 사회, 즉 민회와 광장의 구별이 없는 사회가 일찍이 이오니아에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소노미아(무지배)이다.

그것은 이오니아 몰락 후 상실되었을 뿐 아니라 망각되었다. 단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흐름 속에 의미하게

계속 살아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 시절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을 공부했다고 이야기된다.

그것은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에도 풍자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오니아적 정신을 그처럼 이어받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의식을 넘어서 다이몬의 지령이라는 형태로 상기된 것이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말로 이야기하자

면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강박적인 것이다.

그 결과 소크라테스는 말하자면 아테네에 이오니아의 이소노미아를 회귀시키려고 했다.

그가 아테네의 데모크라시에 위협으로 간주된 것은 그 때문이다.

 

이윽고 『철학의 기원』의 연재를 개시한 시점에서는 전망이 분명해졌다.

소크라테스는 이오니아의 철학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회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환언하자면, 그는 아테네의 데모크라시 안에 이오니아적인 이소노미아를 회복시키려고 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를 수수께끼로 만들었다. 하지만 수수께끼는 오히려 우리가 아직 데모크라시의 허구 속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2015년 1월 가라타니 고진

15.​


서론


1.보편종교



기원전 6세기 무렵, 에스겔로 대표되는 예언자가 바빌론의 포로 가운데에서 등장하고, 이오니아에서는 현인

탈레스가, 인도에서는 붓다와 마하비라(자이나교 개조開祖​)가, 그리고 중국에서는 노자와 공자가 등장했다.

이들의 동시대적인 평행성은 놀랍다.

이것을 단순히 사회경제사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는 종교나 철학을 경제적 토대(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이데올로기적·관념적인

상부구조로 간주해왔다.

하지만 경제적인 토대의 변화를 본다고 해서 이 시기에 일어난 변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잇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변화를 관념적 상부구조의 차원에서 일어난 정신적 혁명이나 진화로 보는 관점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앙리 베르그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인간사회는 작은 '닫힌사회'이며 도덕도 그에 맞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그것이 열린 것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가?

인류사회가 이 시기에 닫힌 씨족사회에서 다민족이 교역을 하는 세계제국으로 확대되어간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열린사회'가 초래되는 것은 아니다.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닫힌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도시(cite)에서 인류로의 이행은 단순한 확대에

의해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이 양자는 동일한 본질의 것이 아니다."

베르그송은 이런 변화를 종교의 레벨에서 보려고 했다. '닫힌사회'는 종교로 말하면 '정적(靜的)종교'이고 '열린

사회'는 '동적(動的)종교'다.

정적종교에서 동적종교로의 비약을 가져온 것은 '특권적 개인'이다.

베르그송은 그 근저에 elan d'amour(사랑의 비약)가 있고, 그것이 특권적 개인의 행위를 통해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22.​

막스베버가 보편종교의 특질을 '탈주술화'에서 발견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옳다.

탈주술화는 대체로 자연과학과의 관계에서 생각되지만, 베버가 말하는 탈주술화란 제사와 기원(祈願)의 형태

로 신을 인간의 의지에 따르도록 하는 것에 대한 부정이다.

"종교적 행위는 '신 예배'가 아니라 '신 강제'이고, 신에의 호소는 기도가 아니라 주문이다."

신 강제의 단념을 통해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태도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25.


2.윤리적 예언자



솔로몬시대에 신은 왕권의 강화를 반영하여 초월화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씨족신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초월적인 신이라고 하더라도 전쟁에서 지면 내버려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신에 대해 복종하면서 신을 증여에 의해 '강제'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종교는 본질적으로 주술적이다.


실제로 솔로몬 이후 분열된 두 개의 왕국 중의 하나인 이스라엘왕국이 멸망했을 때, 신은 내버려졌다.

이어서 유대왕국이 멸망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때 포로로 바빌론에 끌려간 사람들 사이에서 미증유의 사태가 생겨났다.

즉 전쟁에 패하여 국가가 멸망해도 신이 내버려지지 않고, 역으로 인간에게 그 책임을 묻는 전도가 생겨난 것

이었다.

바로 이것이 '신 강제'의 단념이고 종교의 '탈주술화'이다.

그것은 신과 인간이라는 관계의 호수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로 인해 신과 인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관점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27.​


3. 모범적 예언자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보편종교가 오로지 유대교와 이 계열의 예언자에 의해서 개시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점에서 베버가 예언자에 관해 서술한 구별이 시사적이다.

그는 예언자를 윤리적 예언자와 모범적 예언자라는 두 가지로 나누었다.

전자의 경우, 예언자는 구약성서의 예언자, 예수, 무함마드처럼 신의 위탁을 받아 그 의지를 고지하는 매개자가

되어 이 위탁에 근거하는 윤리적 의무로서 복종을 요구한다.

후자의 경우, 예언자는 모범적인 인간으로서 붓다, 노자, 공자처럼 자신의 범례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종교

적 구원의 길을 가리켜 보여준다.

즉 베버는 통상적으로는 예언자로 간주되지 않은 사상가를 예언자로 간주함으로써 기존의 세계종교 구분을

괄호에 넣은 셈이다. 29.

제1장 이오니아의 사회와 사상


붓다나 노자는 고대사회가 전환기에 있었을 때 출현한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후 그들은 종교적 개죠(開祖)로 간주되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자유사상가로 다시 봐야 한다.

한편 내가 여기서 시도하고 싶은 것은 거의 동시대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국가에서 출현한 자유사상가, 그리고

그것을 계승한 일군의 사상가를 '모범적 예언자'로서 다시 보는 일이다.


오늘날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은 근대자연과학의 선구적인 형태로 발견될 뿐, 그 이외의 것은 무시된다.

마치 이오니아의 사상가가 자연만을 대상으로 삼고 그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 (오늘날 대부분의 자연과학자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관점은 아테네 철학자(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형성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외적 자연의 연구에서 인간의 연구로, 즉 사회에서 인간적 행위가

가진 목적들에 대한 연구로 전향시켰다고 말한다(『파이돈』).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자연학이며, 소크라테스에 의해 비로소 윤리적 고찰로 전향

했다고 말한다(『형이상학』 제1권 3-6장).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은 아테네에서 시작되었고, 이오니아에는 그저 그 맹아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만든 퍼스펙티브는 지금도 남아 있다.

이 편견을 뒤집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오니아의 사상가와 관련하여 우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

레스가 쓴 것 이외의 자료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남은 자료에만 의거하면, 두 사람이 말하는 '철학'적 틀에 의해 절취된 것만 보게 된다.

이와같은 편견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 아테네중심주의적 관졈에 대한 의심이다.


사실 그리스적 특징이라고 생각되느 거의 모두가 이오니아에서 시작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 민주정의 원인으로 페니키아문자를 개량하여 누구나 습득할 수 있는 표음문자(알파벳)를

만든 것이 이야기되는데, 그것은 이오니아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인의 공통문화가 된 호메로스의 작품도 이오니아방언으로 씌어졌다.

또 가격의 결정을 관료가 아니라 시장에 맡긴 것이 그리스 민주정을 가져온 요인의 하나로 이야기되는데,

그것 역시 이오니아에서 시작된 것이다. 통화를 주조하기 시작한 것도 이오니아인이다.

그들은 이웃나라 리디아왕국에서 행해진 것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이오니아에서는 매우 일찍부터 통화경제와

해외무역이 발전했다.

이오니아의 도시들에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 아시아 전역의 과학기술, 종교, 사상이 모였다.

이오니아인은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아시아적 전제국가에서 발달한 시스템 몇 가지는 결코 받아

들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관료제, 상비군 내지 용병이 그것들이다.

그들은 아시아의 전제국가처럼 국가관료를 통해 가격을 통제하지 않고 시장에 맡겼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다른 지역으로 퍼져갔다.


폴리스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그리스의 폴리스는 그때까지의 씨족사회가 혈연에 의해 규정되었던 것과 달리 각자의 자주적 선택

에 의해 성립한다고 이야기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원리가 그리스의 폴리스 전체에 똑같이 존재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오니아의 식민도시에서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식민에 의해 파생된 폴리스로 확대되엇다.

그 후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에까지 퍼진 것이다. 37. 


2. 이소노미아와 데모크라시



그리스 민주주의(democracy)의 발전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이야기된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잘못이다.

이오니아에서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그와 같은 관점은 옳다.

왜냐하면 이오니아에는 데모크라시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오니아에 있었던 것은 데모크라시가 아니라 이소노미아이다.

이소노미아와 데모크라시는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역사』에서 이소노미아라는 개념을 사용한 헤로도토스 역시 예외가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이 두 개념을 구별하고 그 차이에서 중요한 의미를 보려고 한 사람은 한나 아렌트뿐이다.



정치현상으로서의 자유는 그리스도시국가의 출현과 함께 생겨났다.

헤로도토스 이래 그것은 시민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분화되지 않고 무지배(no rule) 관계 하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정치조직의 한 형태를 의미했다.

이 무지배라는 관념은 이소노미아(isonomia)라는 단어로 표현되었다.

고대인들이 서술하고 있는 것에 따르면, 여러 가지 통치형태 속에서 이 이소노미아의 두드러진 성격은 지배의

관념(군주정monarchy이나 과두정oligarch의 αρχειν-통치하다-에서 온 '-archy'나 민주정democracy의 κρατειν-

지배하다-에서 온 '-cracy')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 있었다. 도

시국가는 민주정이 아니라 이소노미아라고 생각되었다. '

민주정'이라는 ㅁ라은 당시도 다수 지배, 다수자의 지배를 의미하고 있었지만, 원래는 이소노미아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만든 말이었다.

"여러분이 말하는 '무지배'란 실제로는 다른 종류의 지배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최악의 통치형태, 즉 민중(데모스)에 의한 지배이다."

즉 토크빌의 통찰에 따라 우리가 자주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되는 평등은 원래 자유와 거의 같은 것이었다.


아렌트는 이 이소노미아라는 원리가 그리스 전반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보면 다양한 모순이 생긴다.

후술하는 것처럼 그녀의 이론에서 보아도 그것은 이오니아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한다.

이소노미아(무지배)는 그저 이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오니아 도시들에 현실적으로 존재했던 것이고, 이오니

아가 몰락한 후에는 이념으로서 다른 폴리스로 퍼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소노미아(무지배)는 왜 이오니아의 도시들에서 시작된 것일까?

그것은 식민자들이 그때까지의 씨족·부족적인 전통을 한번 단절시키고 그때까지의 구속이나 특권을 방기하여

새로운 맹약공동체를 창설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아테네나 스파르타와 같은 폴리스는 씨족의 맹약연합테로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씨족적

전통을 농후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폴리스 안의 불평등이나 계급대립으로 남았다.

이와 같은 장소에서 이소노미아를 실현시키려고 하면, 데모크라시 즉 다수결원리에 의한 지배밖에 없었다.


이오니아에서 사람들은 전통적인 지배관계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런데 거기서 이소노미아는 그저 추상적 평등성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실제 경제적으로도 평등했다.

화폐경제가 발달했지만, 그것이 빈부의 격차를 가져오는 일은 없었다.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지만, 일단 간단히 말하자면, 이오니아에서 토지가 없는 자는 타인의 토지

에서 일하는 대신에 다른 도시로 이주했다.

그러므로 대토지소유가 성립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가 평등을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에서는 화폐경제의 발전이 심각한 계급대립을 가져왔다.

많은 시민이 채무노예로 전락했다.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 스파르타에서는 화폐경제나 교역을 폐지하고 경제적 평등을 철저화했다.

그것은 '자유'를 희생하는 일이었다.

한편 아테네에서는 시장경제와 자유를 유지한 채로 다수읜 빈곤계층이 국가권력을 통해 소수의 부자로 하여금

부의 재분배를 하도록 강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아테네의 데모크라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민주제적 국가제도의 근본원리는 자유이다. …… 그리고 자유의 원틱 중 하나는

번갈아가며 지배하거나 지배받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제는 무-지배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재산에 있어 불평등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주제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보다 힘이 있

는데, 그들은 다수이고 다수의 결정은 최고의 권위를 갖기 때문이다."

즉 민주제는 다수자의 지배이다. 그곳에서 평등은 소수 귀족계층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실현된다.

그렇다고 해서 근대의 대의민주주의와 달리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에 자유와 평등의 배반이 없었다고 말할 수

는 없다. 오히려 거기에 근대의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가 전부 노출되어 있다.


근대의 민주주의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 즉 자유-민주주의이다.

그것은 상극하는 자유와 평등의 결합이다. 자유를 지향하면 불평등하게 되고, 평등을 지향하면 자유가 손상을

입는다.

자유-민주주의는 이런 딜레마를 넘어설 수 없다.

그것은 예를 들어 자유를 지향하는 리버테리언(신자유주의)이라는 극과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복지

국가주의)의 극을 진자처럼 오가며 움직이게 된다.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는 인류가 도달한 최종적인 형태이기에 인내하면서 그 한계까지 천천히 나아가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자유-민주주의는 마지막 형태가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길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열쇠를 고대 그리스에서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아테네가 결코 아니다.

아테네의 데모크라시를 모범으로 삼아 근대민주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근대민주주의에 존재하는 곤란함의 원형을 아테네에서 발견해야 한다.


현대의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상반된 것의 결합이라는 점을 통찰한 이는 칼 슈미트였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의회제민주주의와 동일시되지만, 의회제가 없어도 민주주의는 가능하다.

슈미트는 의회제란 민주주의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며 자유주의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첫째로 동질성이라는 것이고, 둘째로-필요한 경우에는-이질적인 것의 배제

내지 절멸이다." 다라서 다음처럼 말한다. "볼셰비즘과 파시즘이 다른 모든 독재체제와 마찬가지로 반자유주의

적이지만 반드시 반민주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로 말하자면 스파르타는 국가사회주의적이고 아테네는 자유-민주주의적이다.

개인성을 희생하여 경제적 평등을 실현한 스파르타와 대조적으로, 아테네는 시장경쟁과 언론의 자유를 인정

했는데, 그렇게 한 만큼 불평등과 계급분해라는 사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란 부의 재분배를 통해 평등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구성원의 '동질성'에 근거하고 잇다.

그것은 이질적인 자를 배제한다. 이와 같은 체제는 앞서 서술한 것처럼 아테네 민주정의 황금기로 간주되는

페리클레스시대에 강화되엇다.


더욱이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노예나 기류외국인을 착취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폴리스를 지배함으로써

실현되엇다.

예를 들어, 페리클레스는 시민의 경제적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델로스동맹으로 다른 폴리스에게서 수탈한 금

을 유용(流用)했다.

그것은 시민들에게 의회에 출석한 일당으로서 배분되었다.

즉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는 제국주의적인 팽창에 의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대중을 선동하는 민중지도자(Demagog)를 낳기도 하였다. 이렇게 보면,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를 아테네

에서 발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을 해결하는 열쇠를 아테네에서 발견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빗나

간 것이다. 44.



4. 국가와 민주주의



이오니아의 폴리스가 몰락한 것은 스스로를 방어할 군사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공업을 중시한 이오니아인은 군사력을 중시하지 않앗다.

한편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전사=농민공동체여서 군사력이 우선시되엇다.

이오니아의 화폐경제 발전과 더불어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에도 화폐경제가 침투했지만, 시민이 상공업에

종사하는 일은 없엇다.

다만 화폐경제의 침투는 전사=농민공동체를 와해시켰다. 많은 시민이 채무노예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자비(自費) 중장보병에 근거하는 폴리스로서 이것은 곧 군사적 위기를 의미했다.

다라서 폴리스의 존속을 위해 사회개혁이 불가결하다고 여겨졌고, 귀족도 그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인이 민주화를 촉진시킨 동기는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이오니아의 이소노미아가 성립하는 과정과 전혀 다르다.

한편 스파르타에서도 민주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모든 교역과 화폐경제의 폐지, 그리고 토지소유의 평등화

였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철저한 '민주주의'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근처 메세니아인을 정복하여 노예(helot)로 삼고, 그 지역이 비옥한 농업 지역이어서

교역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스파르타인은 끊임없이 헬로트의 반란에 대비하여 전사공동체를 강고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스파르타적인 군사주의란 바로 여기서 생겨났다.


한편 아테네에서는 교역이나 화폐경제의 폐지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계급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데모크라시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테네의 데모크라시는 무엇보다도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즉 군사(軍事)가 데모크라시를 요청한 것이다. 기원전 7세기 중반에 채용된 중장보병에 의한 밀집전법은 기존

에 귀족이 말을 타고 평민이 보병이던 기마전법과는 완전히 달랐다.

귀족은 이제 불필요해졌다. 이 전법이 스파르타만이 아니라 아테네에서도 민주화를 촉진시켰다.

더욱이 페르시아전쟁에서 페르시아 측은 노예가 군함의 노잡이였지만, 그리스 측은 스스로 무기를 조달할 수

없는 가난한 시민이 조수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의 승리는 이런 시민들의 정치적 지위를 점점 향상시켰다.


요컨대 이오니아의 이소노미아가 독립 자영농업이나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형성되었다면, 아테네의 데모크라

시는 오로지 군사적인 이유에서 혹은 전사=농민의 요구에 의해 형성되엇다.

아테네에서 엄밀한 의미의 데모크라시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사후에 그 뒤를 이은 참주가 추방된 후에 이루

어진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B.C. 508년)에 의해 초래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에 의해 비로소 '데모스'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는 귀족의 권력기반이었던 낡은 부족제도를 폐지하고 지역별로 새로운 부족을 창설했다.

이때 지연적인 성격을 가진 '데모스'가 출현했다.

그것은 혈연적 관념으로서의 씨족사회를 부정하는 한편, 호수원리로서의 씨족사회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의미에서 데모스는 '상상의 공동체'(앤더슨)로서의 근대의 네이션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테네의 데모크라시는 그와 같은 '내셔널리즘'과는 분리할 수 없다. 외국인은 아무리 부유해도 토지를 가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시민이 될 수도 없었다.

또 법적으로 보호되지 않았지만, 높은 세금이 부과되었다. 아테네의 시민은 표면상으로는 농민이었지만 실제

농업에 종사하지 않았다.

전쟁에 나가기 위해, 또 국정에 참여하기 위해 노예에게 노동을 맡긴 것이다.

토지가 있어도 노예가 없는 자는 시민의 의무를 다할 수 없었다. 시민이기 위해서는 노예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데모크라시의 발전이 점점 노예를 필요하게 만들었다.

이오니아의 시민과 대조적으로 아테네의 시민은 손으로 하는 일을 노예가 하는 일로서 경멸했다.

이오니아 사상가와 아테네 사상가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이 점에 있었다. 52.


제2장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배경


1. 자연철학과 윤리



이오니아의 철학과 관련해서는 주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사료밖에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그것은 그들이 만든 철학사적 퍼스펙티브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오니아 학파가 외적 자연을 탐구했던 데에 반해,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적 행위의 목적에 대한 연구로 전향시켰다.

즉 이오니아의 사상가는 자연에 대해 사고했지만, 윤리나 자기의 문제에 대해서는 사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윤리란 개인이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계가 있다.

하지만 공동체에 내속된 상태에서 진정한 의미의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처음으로 '자기'가 발견되고, 또 '윤리'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리나 자기의 문제가 등장한 것은 우선 이오니아에서다.

동시대의 아테네에는 그와 같은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개인은 씨족적 단계 이래의 공동체로부터 자립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다양한 공동체에서 온 식민자들로 이루어진 이오니아에는 처음부터 '개인'이 존재했다.

이오니아의 폴리스는 그와 같은 개인의 '사회계약'에 의해 성립했다.

그곳에서 개인은 전통적인 공동체로부터 자립해 있었지만, 스스로 선택한 폴리스에 대해서는 충실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운명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 폴리스가 불평등하다면, 그곳을 떠났던 것이다. 이소노미아는 이와 같은 폴리스에서만 가능한

원리이다.


아테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아테네의 폴리스 또한 일종의 계약에 의해 성립했지만, 그것으 다수 씨족 간의

'계약'이었지 개인간의 사회계약은 아니었다.

개인은 씨족공동체에 내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테네에서도 화폐경제의 침투에 의해 개인이나 개인주의가 생겨났다.

그 시점에서 그들도 마침내 이오니아에서 생겨난 이소노미아나 자연철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통적인 공동체에 위협적인 것이어서 끊임없이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자연철학은 폴리스의 신들을 부정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폴리스(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페리클레스의 친우였던 아낙사고라스는 신에 대한 불경건을 이유로 추방상태에 있었는데, 같은

이유로 소크라테스가 처형되기 한참 전의 일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획기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처럼 보이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이오니아적 사상과 다른 무언가를 가져왔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이오니아적 사상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처음으로 '개인'으로서 살려고 한 사람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아테네공동체로부터 독립한 코즈모폴리턴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아테네라는 폴리스의 일원이라는 것을,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선택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는 처형을 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아테네에 머물면서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다.


플라튼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를 그가 태어난 공동체를 위해 순교한 사람으로 보고 잇다.

그리고 외국인 소피스트와 동일시되었던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로부터 구별하여 옹호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말하자면 아테네 내부에서 나온 소피스트이며 근볹거으로 이오니아적 사상가의 흐름을

이어받은 자였다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소크라테스의 사고로 말하고, 『소피스테스』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이름 하에서 이오니아적인 유물론자에 대한 자신의 사움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신화의 거인족에 대한 신들의

싸움에 견주었다. 이오니아 자연철학과의 싸움은 플라톤에게 있어 평생에 걸친 작업이었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플라톤과 달랏다.

소크라테스의 본령은 플라톤보다도 오히려 소크라테스의 직계 제자이자 키니코스학파를 창시한 안티스테네스

나 그 제자 디오게네스와 같은 개인주의적이고 코즈모폴리턴적인 사상가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그리스철학자열전』에 따르면, 안티스테네스는 이데아를 부정하고 "플라톤이여,

나는 말(馬)은 보지만, 말인 것(이데아)은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디오게네스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세계시민(코스모폴리테스)이다"라고 답했다.

이로부터 추측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이데아론을 부정하는 코즈모폴리턴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이오니아학파에 반(反)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흐름을 이어받은 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오니아의 사상가들은 폴리스의 사상가였다. 그들은 코즈모폴리턴으로서 보편적인 윤리를 생각했지만, 동

시에 자신이 선택한 폴리스 속에서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폴리스적=정치적이었다. 76.


2. 히포크라테스



히포크라테스(B.C. 460 ~ 377)는 그때까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신성병(神聖病)'이라고 불리고 있던,

즉 신이나 악령 탓으로 간주되는 간질을 그저 자연적 원인에 의한 것으로 생각햇다.

이것은 신들에 의해 설명되고 있었던 세계의 생성을, 신을 배제하고 자연(physis)에 의해 설명하려고 한 이오

니아 자연학의 태도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이오니아인은 탈레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집트, 바빌로니아 등에서 천문학이나 수학을 도입했지만, '점성술'

은 거부했다. 히포크라테스가 '신성병'이라는 관념을 거부했을 때, 그와 같은 태도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소위 신성병이라고 불리는 병은 다음과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병은 특별히 신업(神業)에 의한 것도 신성에 의한 것도 아니며,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원인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경험 부족으로 인해 이런 병이 다른 것들과 닮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업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본성을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신업이라 여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현재 이것을 치료하는 

방법 즉 푸닥거리와 주문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업이 아니라는 생각도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 병을 최초로 신성화한 사람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요술사, 기도사, 탁발승, 돌팔이들인데, 이

자들은 신에게 경건한 척하고 뛰어난 지혜가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

이처럼 무지의 폭로를 두려워하기에 이 병을 신성시한 것이다. (중략) 하지만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경건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

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의 경건과 신업은 역으로 불경과 불경건이다.

(*히포크라테스, 『신성한 질병에 관하여』, 124-125쪽)

히포크라테스는 병의 원인으로 신을 들고 오는 것을 부정했다. 하지만 이것은 신의 부정이 아니다.

단지 주술적인 종교(신관념)를 부정하는 것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이런 태도는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고유한 것이었다.

그는 간질을 오로지 뇌의 질환으로서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때 그것을 횡격막에서 오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론

을 비판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횡격막이 이지력(理智力, phrene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우연과 관습(nomos)에 의한 것이지 진실이나

자연(physis)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자연철학자에게 신은 'physis'의 작용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고, 의학은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한편 사람들이 표상하는 신들은 사람이 만든 'nomos'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히포크라테스를 의학의 모범으로 삼는 것은 그런 의학이론이 아니라 의료자로서의 윤리성이다.

그는 가난한 자를 무료로 치료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어떤 집을 방문하든지 자유인이냐 노예냐를 묻지 않고, 부정을 범하지 않고 의술

을 행한다", "의(醫)에 관한 것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타인의 생활에 대해 비밀을 준수한다"라는 모토가 걸려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태도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것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는 말할 것도 없이 아테네로부터도 절대 오지 않는다.

이오니아에서는 기술(techne)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도 그것이 발전했다. 그런데 아테네에는 그것이 없었다. 

아테네에서는 '지(知)에 대한 사랑'(철학)이 존중받았는데, 그것은 기술이 노예 내지 하층민의 작업으로서 경멸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히포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기술에 대한 사랑도 있다." '인간

에 대한 사랑'은 아테네에서의 '지(知)[에 대한 사랑'(철학)'과 다르다. 아테네의 철학자에게는 '기술에 대한 사랑'

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에게 '인간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오니아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을 노모스가 아니라 피시스에 보는 태도, 즉 인간을 폴리스, 부족, 시족,

신분과 같은 구별을 괄호에 넣고서 보는 태도와 분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태도를 가져온 것이 이소노미아이다.

이소노미아(무지배)는 단순히 개개인이 참정권에 있어 대등하다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으로 생산관계

에서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부재하단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임금노동이나 노예와 같은 시스템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피시스에 반(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3.

호메로스라는 한 사람의 작자가 이 서사시들을 만들었다는 견해는 일찍붙어 의심받아왔다.

현재는 기원전 8세기 중반에 호메로스라는 인물이 그때가지 음송시인 집단에 의해 보존되어 온 영웅시대의

기억에 근거하여 현재의 시와 거의 가까운 것을 완성시켰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승인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의심스럽다.

거기에 그려지고 있는 것은 '영웅시대', 즉 공동체의 귀족층이 평의회를 구성하고 왕이나 귀족을 포함하는 공동

체 일반성원이 민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회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트로이전쟁이 있었던 시대는 미케네국가의 말기(B.C. 1200년경)에 해당된다.

그곳에는 이미 고도로 발달된 청동기문명을 배경으로 가산관료제를 가진 아시아적 국가가 성립해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호메로스가 그린 '영웅시대'는 없었고, 따라서 존재하지 않은 것을 '전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누구에 의해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지

이다.

물론 그것은 일단 동시대 이오니아 시민을 향해 만들어졌다.

이 점에서 보지 않으면,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이해할 수 없다. 미케네국가가 붕괴된 후의 '암흑시대'에 그리스

각지에서 도시국가(왕정 내지 귀족정)가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그들 간의 항쟁이 이어졌다.

호메로스나 그의 독자가 보고 듣고 있던 것은 그와 같은 상태였다.

그런 의미에서 호메로스가 그린 '영웅시대'란 그 이후의 시대, 아니 그리스 도시들의 사회적 현실을 과거에 투사

한 것이다.

따라서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영웅들의 전쟁을 그린 무훈시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

하다. 예를 들어, 『일리아드』의 전편에 존재하는 것은 전쟁에 대한 여자들의 비탄과 원망의 목소리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전사나 귀족계급의 '영웅'예찬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씨족이나 폴리스 사이의 끊임없는 항쟁에 대한 비판이다.

일리아드』의 마지막에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인 후 더 이상의 보복을 단념한다.

또 『오디세이아』에는 더 이상 영웅이 그려지고 있지 않다. 오디세우스는 일개의 외국인으로 방랑을 하고

걸식을 하면서 귀환한다.

그리고 그는 부재중에 가족을 괴롭힌 적에게 보복을 하지만, 보복을 적의 친족에게까지 증폭시키는 것은 단념

한다. 두 작품 모두 복수의연쇄를 단념함으로써 끝나고 있다.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보면, 사투(私鬪: 개인적 싸움)나 보복은 적대적인 호수성(교환양식A)의 표현이다.

그것은 다수부족의 맹약에 의해 형성되는 도시국가에서 억제된다.

하지만 지배층 사이에서는 사투가 소멸되지 않으며, 다른 도시국가와의 사이에서도 항쟁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적대적인 호수성이 존속한다. 그것이 종식되는 것은 다수인 도시국가의 항쟁을 통해 그것들을

통합한 전제국가에서다, 즉 폭력의 호수성(A)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사회계약', 즉 교환양식B에 의해 극복된다.


전제국가(가산관료국가)는 호수적인 인간관계에 의거하지 않는 관료와 상비군체제를 만들었다.

 '법에 의한 지배'는 그곳에서 등장한다.

그것은 지배자(왕)가 발포한 법을 스스로 따름으로써 성취된다. 이와 같은 법의 지배는 적대적인 호수성을 일소

시킨다. 예를 들어, 함무라비법전에는 '눈에는 눈을"이라는 유명한 조항이 있다.

이것은 보복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보복의 증폭을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서술한 것처럼 그리스에서도 미케네국가는 가산관료국가였다. 그것이 붕괴한 이후의 '암흑시대'에 부족

내지 도시국가 간의 항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때 그리스인은 전제국가를 재건하는 길을 걷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전제국가를 거부하면서 어떻게 해서 적대적인 호수성을 지양할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은 이오니아의 식민도시에 있다. 그곳에서는 씨족이나 폴리스를 떠나온 식민자 상이에 동등한 사람

끼리의 사회계약이 생겨났다.

호메로스와 그의 독자는 그와 같은 폴리스의 원리가 계속 성립하고 있던 곳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세키 히로노는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우스가 보복을 단념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 폭력의 악순환적 증식을 단절시키는 것일까.

호메로스의 답은 이미 시사되고 있다. -여신 테티스가 아들 아킬레우스에게 그의 전열(戰列) 복귀를 한탄하면

서 준 새로운 방패에 대한 묘사에서, 그 방패의 면(面)에는 평화의 아름다움, 풍요와 전쟁의 재앙이 예리하게

대조를 이루면서 부조되어 있고, 평화로운 세계의 중심에는 광장에서 재판을 여는 시민들의 모습이 있다.

이 재판을 행하는 시민집회야말로 트로이로부터의 철수를 주장하는 반전병사 테르시테스가 오디세우스의

홀(笏)로 늘신 얻어맞은 아타이아군의 집회와는 정반대의 제도이다.

변론과 토론에 의해 이루어진 판결은 저 제우스의 황금저울이라는 엉터리 결정도 무용으로 만든다.

맹목적으로 사태를 악화시킬 뿐인 폭력적 결정에 대하여 여기에서는 말(言)의 활력이 등장하여 사람들을 우애

와 평화로 이끈다.

여기에서 주의학 싶은 것은 호메로스가 사랐던 기원전 8세기에 '광장에서 재판을 여는 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리스 전체가 아니라 호메로스와 그의 독자가 있었던 이오니아 도시뿐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법'은 왕이나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민 사이의 동의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론이나 공동의 음미가 요청된다.

호메로스는 이오니아에서 시작하는 이소노미아를 전제하거나 그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명확한 점은 호메로스에게 있어 신들의 의인화란 신화적인 것과 무관하고 인간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메커니즘을 극복하는 열쇠가 고아장에서의 재판과 평의회

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호메로스는 이오니아의 종교비판과 자연철학의 선구라고 해도 좋다. 97.


제3장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특질



하지만 자연철학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무엇이 시원물질인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스스로 운동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는 물질과 운동이 분리불가하다.

신화에서 물질에 운동(변화)을 가져오는 것은 신들이다.

신들을 내쫓을 때, 운동의 원인을 물질 그 자체에서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탈레스는 '물'이 스스로 운동한다고 생각한다. 그 배후에 운동의 원인은 없다.

탈레스가 발견하는 시원물질은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것은 생명 내지 혼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탈레스 자신이 '만물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콘퍼드는 자연철학에 미개의 사고를 이어받는 물활론(사물에 혼이 있다는 견해)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탈레스는 주술적인 사고를 도입한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주술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기 위해 스스로 운동하는 시원물질을 생각한 것이다. 111.

패링턴이 지적한 것처럼 여기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술한 인간이란 선천적으로 폴리스의 동물이거나

이성을 갖춘 동물이라는 사고가 철저히 부정되고 있다.

그런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아테네철학이 이오니아적 사고를 압도하고 억압하게 된 것은

그들의 동시대나 헬레니즘시대보다는 오히려 기독교가 확립된 시기였다.

즉 아테네의 철학은 기독교의 신학 안에서 계속 살아남은 것이었다.

다른 한편 이오니아적 진화론은 서양에서 근대 물리학이 발전해도 부활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학파에 의한 주박(呪縛)은 다윈의 『종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으로 부정된 적이 없엇다.


다윈 이전에도 진화론은 있었다.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는 무기물에서 식물, 동물, 인간, 신으로의 진화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진화는 신=제작의 관점, 또는 목적론

적 관점에서 생각되고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획기적인 것은 진화를 목적론 없이 파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121.

다윈과 동시대에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문제에 주목한 사상가가 있다. 『자본론』을 다윈에게 헌정한 마르크

스다.

그는 학위논문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차이'를 논했다.

에피쿠로스는 기본적으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기계적 결정론을 받아들였지만, 단 원자의 운동에서 우연

적인 편차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젊은 마르크스가 이 논문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양자의 차이만이 아니었다.

그의 진짜 표적은 이 두 사람이 대립하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마르크스는 한편으로 감각론자이자 기계론적 결정론자인, 또 그 결과로서 회의론자인 데모크리토스를 놓고,

다른 한편으로 목적론적·합리론적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놓은 상태에서 야자 '사이'에 유물론자로서 원자운동

의 편차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에피쿠로스를 놓았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생각하기에 이 원자운동의 우연한 편차야말로 기계론적이면서 결과적으로 목적론적으로 보이는

'변이'를 가져온 것이다.

이처럼 젊은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에게서 목적론과 기계적 결정론이라는 쌍방을 원자운동의 편차에서 비판

하려는 시도를 발견했다. 이오니아학파의 사상은 이처럼 마르크스의 유물론에서 소생한 것이다.


다양한 점에서 이오니아학파의 사상은 지금도 활력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질료와 운동을 분리하지 않는 이오니아학파의 사고는 '마술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실제 근대의 피직스(물리학)은 그것들을 분리함으로써 성립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같은 분리는 데카르트가 보여준 것처럼 '신'이나 신과 같은 시점을 전제하고 있다.

즉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메타피직스=신학을 계승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관점을 결정적으로 파괴한 것이 양자역학이다. 양자역학은 어떤 의미에서 질료와 운동은

분리할 수 없다는 이오니아학파의 사고를 회복시킨 것이었다.

즉 양자(빛이나 전자와 같은 미립자)는 입자(질료)임과 동시에 파동(운동)이다. 123.


제4장 이오니아 몰락 이후의 사상



피타고라스에 대해 생각할 때, 이상과 같은 경험을 중시해야 한다.

그는 이오니아를 떠나 이집트,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갈리아, 인도를 편력하면서 온갖 학문을 익혔고, 60세

무렵 남이탈리아의 크로톤에 주거지를 정하고 그곳에서 밀의(密儀)학교로서 교단을 창립해다고 이야기된다.

그 때문에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이오니아에서의 경험과 단절되어 오로지 아시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는 윤회전생이라는 관념을 가져왔다고 이야기된다.

그에 따르면, 혼은 원래 불사 즉 신적인 존재인데, 무지로 인해 스스로를 더럽히고 그 죄를 씻기 위해 육체라는 

무덤에 매장되어 있다.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지상의 생활이란 실은 바로 혼의 죽음이다.

다시 신적 본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영원히 윤회전생의 바퀴 안에 머무를 수박에 없다.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혼은 지혜(소피아)를 구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필로소피)이란 윤회전생의 바퀴로부터 해탈하기 위한 방법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철학(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고 스스로를 철학자(지혜를 사랑

하는 자)라고 부른 최초의 인간이 피타고라스라고 쓰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인생을 경기에 비유하며 그곳에는 관객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관상(觀想)'(관조)에 의해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다양한 의미에서 피타고라스의 생각을 이어받고 있다.

예를 들어, 『파이드로스』에서 피타고라스학파로부터 받아들인 윤회전생이라는 설을 소개하고 있다.

또 『파이돈』에서 혼의 불사에 관한 피타고라스학파의 생각에서 이데아론을, 그리고 『메논』에서는 윤회

에 의한 '상기(想起)'라는 설을 이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윤회전생이나 관상이라는 사고는 피타고라스만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그가 방랑한 아시아, 특히 인도에서는 오히려 흔한 것이었다.

또 윤회전생이라는 관념을 설파하는 오르페우스교가 이미 그리스 전체에 유행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이오니아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타고라스 자신도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그것을 받아들인 것은 아시아 각지를 오래 방랑하던 동안이다.

하지만 그 원인은 아시아의 사상 자체가 아니라 그 자신이 겪은 이오니아시대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남이탈리아에서도 윤회전생이란 관념을 처음 전달한 것은 피타고라스가 아니다.

오르페우스교가 이미 유행하고 있었고, 그런 비교 집단에 들어가 육식을 단념하고 선행을 쌓으면, 다음 세상에

서는 행복한 생활을 얻게 된다고 이야기되었다.

조지 톰슨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운동이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유로 이 지역의 후진성을 들고 있다.

"매우 현세적이고 합리적인 인생관을 가졌던 이오니아인과는 반대로 이 서방사람들은 사상에 있어 종교적이

었고 예언이나 기적을 믿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히브리인과 닮았다." 확실히 이와 같은 면이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 오르페우스교가 널리 퍼진 것도 피타고라스교단이 뿌리를 내린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남이탈리아 지방의 사람들이 아니라 '매우 현세적이고 합리적인 인생관을 가졌던' 이오니아

출신 피타고라스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있다.

피타고라스의 교단은 오르페우스교의 집단과 닮긴 했지만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오르페우스교의 수호신이 오르페우스인 데 반해, 피타고라스교의 수호신은 아폴론이다.

아폴론은 이오니아도시의 수호신이다.

그것은 피타고라스가 이오니아와 강한 연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피타고라스학파 운동이 남이탈리아에서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원을 

이오니아에 둔 점이다.

아니 '매우 현세적이고 합리적'이었던 이오니아가 소멸되었다는 것에 기원을 둔 것이다.

바꿔 말해, 그것은 피타고라스 자신의 정치적 좌절이라는 체험에서 왔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피타고라스가 말하는 '관상'으로부터 수동적이고 비행동적인 자세를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사회개혁에 실패했다.

하지만 남이탈리아의 크로톤에서 그는 '관상'에 틀어박히기는 커녕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확실히 피타고라스교단에서 구성원은 청정을 지키고 육식을 끊고 침묵속에서 자신의 혼을 주시하는 수행을

부과받았다.

하지만 오르페우스교단과 달리 피타고라스학파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었다.

예를 들어, 크로톤에서 피타고라스학파는 화폐주조에 종사했고 신흥 상공업계급과의 결부를 기반삼아 폴리스

의 정치와 관계했다.

톰슨도 이렇게 쓰고 있다. "크로톤에서 피타고라스학파는 일반적으로 인정되어온 의견이나 전통에 도전장을

던졌을 뿐 아니라 토지귀족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그 권력을 상품생산의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 사용했다.

그 결과 크로톤은 남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력한 폴리스가 되었다.


이는 피타고라스가 크로톤에서 비정치적인 명상가집단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일찍이 실패한 사회

개혁을 여기서 다시 시도하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타고라스교단이란 그와 같은 집단이었다. 피타고라스가 목표로 한 것은 모두가 경제적으로 평등하고,

또 남녀도 평등한 공산주의적인 사회이다.

이 때문에 교단과 국가 사이에서 불화가 생겼고 최종적으로 교단이 탄압을 받았다.

그 결과 교단은 각지로 흩어졌고 비밀결사로서 존속했다. 132.


피타고라스가 남이탈리아에서 만든 교단조직의 존재방식은 그가 이오니아의 경험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대중의 자유로운 의지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대중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제로 귀결되기 대문이다.

다른 하나는 지도자가 '육체'(감성)의 속박을 넘어선 '철학자'여야 한다는 것이엇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지도자는 그저 독재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피타고라스의 교단에는 철저한 평등이 있었다. 하지만 '자유'는 없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교설이 피타고라스 한 사람의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교설이 피타고라스 한 사람의 것이었다. 그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구루였다.

하지만 피타고라스가 생각하기에 구루는 독재자가 아니엇다.

또 통상적으로 이야기되는 개인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육체(감성)이 지배된 상태에 지나지 않았다. 진정한 자유는 타인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개개인이

혼을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실현되는 것이었다. 133.


왜 수학에 의해 세계의 근원을 알 수 있는지는 수수께끼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것을 승인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현대 소립자론의 첨단에서 근원적인 물질이란 수학적

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 말해, 그것은 관계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근원이 궁극적으로 물질인지 관계인지 정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따라서 피타고라스가 만물의 근원을 수라고 생각한 것을 간단히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로부터 감성적인 세계와 이데아적인 세계라는 이중세계를 도출한 것은 부정할 수 있고, 또 부정해야

한다. 143.


다른 폴리스와 연대하여 싸우는 대신에 페르시아에 대한 예속의 길을 받아들이고 교묘하게 살아남는 길을

선택한 것이 바로 에페소스의 민중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와 같은 민중을 경멸하고 저주했다.

그것이 반민주주의적이고 '귀족주의'적일까. 에페소스에서 참주정이나 페르시아에서의 예속은 민중의 의향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 민중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 데모크라시라면, 확실히 헤라클레이토스는 반데모크라시이다.

하지만 그의 민중혐오나 반데모크라시는 이오니아적 사상=이소노미아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이소노미아(무지배)는 국가 내부에서의 지배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당연히 외부국가로부터의 지배또한 부정

한다.

그것은 일단 외부국가로부터의 독립을 필수로 삼는다.

따라서 그것을 위해 싸우기를 회피하면, 이소노미아는 성립하지 않는다.

"공민(demos)은 성벽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처럼 법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에페소스인은 '이오니아의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다. 민중은 종속 속에서 평온한 날들을 보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그와 같은 '평화'를 싫어했다. 그것은 종속을 감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을 읽는 살마은 거기서 전쟁·투쟁을 칭찬하는 말을 많이 발견할 것이다.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요 모든 것의 왕이다.

어떤 자들은 신들 쪽에 세우고 어떤 자들을 인간들 쪽에 놓았다. 또 어떤 자들을 노예로 삼고 어떤 자들을 자유

인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것들이 싸우지 않고 종속상태 하에서 안전을 향유하던 에페소스에서 이야기된 말들이라는 점에 유의

해야 한다.


에페소스인은 다른 이오니아인의 반란과 멸망을 곁눈질하면서 살아남았다.

"전사자에게는 신들도 인간들도 모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에페소스인에게 그와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깨어난 자들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세계가 존재하지'만 잠을 자고 있는 자는 각각 '자신만의' 세계로 돌아간다."

에페소스인은 폴리스의 공공적 세계에 등을 돌리고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가장 뛰어난 자들은 모든 것 대신에 하나를, 즉 사멸해야 할 것 대신에 불멸의 영예를 선택한다.

하지만 많은 자들은 가축처럼 배부르게 먹는 것에만 애를 쓸 뿐이다."148.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아직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했던 시대이다.

아테네가 패권을 잡은 기원전 5세기 중반부터 각 폴리스의 자치는 유명무실해졌다.

그리고 이오니아계의 사상가는 정치적 중심인 아테네로 모이게 되지만, 비(非)폴리스적=비(非)정치적이 되었다.

그곳에서 외국인은 시민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코즈모폴리터니즘과 개인주의적 경향을 강화했다. 원자론이 지배적이 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을 폴리스의 사회적 관계를 떠나 보다 넓은 공간(코스모폴리스)에서 보는 관점이었기 때문이다.

데모크리토스는 말한다.

"현명한 살마은 어느 땅이든 답파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 세계가 선한 혼의 조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개인을 다른 개인과의 사회적 관계에서 생각하는 것, 즉 폴리스적=정치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한다.

이때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에 깊게 commit(관여)하지 않는 것, 다라서 회의주의적이 되는 것이다.

아테네에서 소피스트라고 불렸던 외국인은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태도를 취했다.

또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외적인 것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의 정신을 평정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아테네가 알렉산드로스가 만든 '제국'에 종속된 후 일반적인 사조가 되었다.

즉 스토아 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이다.

스토아학파는 지자(知者)는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원리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 소(小)카토,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정치가를 배출했다.

하지만 그들은 근본적으로 비폴리스적=비정치적이었다.

제국의 정치에 종사하면서 그것에 흔들리지 않고 정신적 평정의 유지를 지향하는 것이 그들의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177.



제5장 아테네제국과 소크라테스



그리고 데모크라시의 확립이 노예제의 발전과 연결되어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솔론의 개혁 이후 아테네시민은 채무노예가 되는 것은 모면했지만, 아테네의 민주정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노예가 불가결했다.

아테네군은 스스로 무기를 갖춘 시민에 의한 밀집전법에 기초하고 있었고, 그것이 귀족에 대한 민주파의 우위

의 근거가 되었다.

특히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자발적으로 전함의 노잡이가 된 하층시민의 공헌이 그들의 정치력을 강화시켰다.

그 결과 데모크라시가 확립되었다.

하지만 시민이 농업노동을 해서는 민회에 출석할 수 없었고 전쟁에도 나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테네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노예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많은 시민은 노예를 농장에서 일을 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은광산에 빌려주고 돈을 받았다.

따라서 아테네 직접민주주의의 발전은 노예제생산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게에 있었다.


그리고 아테네는 정치적·군사적 중심이었기 때문에 지중해무역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밀레토스 등의 이오니아의 폴리스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테네의 시민은 상업에 종사하지

않았다.

외국인에게 맡기고 과세를 했다. 외국인은 아무리 경제적으로 공헌을 하더라도 시민이 될 수 없고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이처럼 아테네의 민주정이란 다른 폴리스, 외국인 그리고 노예에 대한 수탈에 기초하여 성립한

것이다.


2. 소피스타와 변론의 지배



아테네는 데모크라시의 확립과 함께 변론이 우위에 놓이는 사회가 되었다.

무력(군사)이나 주술력(종교)이 아니라 언어(로고스)에 의한 지배가 정착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폴리스 내부만의 이야기다. 또 무력이나 주술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민회든 법정이든 공적인 활동이 변론에 기초하게 되자 사람들은 변론술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부유한 시민은 자식들에게 그것을 공부시켰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전혀 의문시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변론술을 가르친 교사가 왜 외국인이었나 하는 것이다.


이 시기 아테네는 정치적·문화적으로 가장 발전한 폴리스였다고 이야기된다.

그런데 변론술 등의 교사가 주로 외국인이었던 것은 왜일가.

그것은 아테네가 정치적·경제적으로는 강국이 되었지만, 언론(言論)이나 사상에서는 매우 뒤처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것을 이오니아나 그곳 출신 식민자가 만든 남이탈리아 도시들에서 온 사람들에게 배웠다.


플라톤의 「고르기아스」에는 변론술이란 타인을 설득하는 기술이기에 지배기술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이가 소피스트라고 말이다.

하지만 변론을 단순히 지배를 위한 기술로 간주한 것은 소피스트가 아니라 아테네시민이다.

그들은 외국인으로부터 '기술'로서의 변론술 이상의 것을 배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변론이 타인을 지배하는 수단이 되는 것은 데모크라시(다수자지배) 하에서이다.

하지만 변론이 발전한 이오니아에서 그것은 타인을 지배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법정에서든 민회에서든 변론은 토의하는 데에 있어 불가결한 것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공동적 음미

(elenchos)의 수단이었다.그것은 또 자연탐구의 방법이기도 했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엘레아학파의 특징으로 보이는 간접증명과 같은 변론은 이미 밀레토스학파에서도 발견된다.

즉 그곳에서 변론은 타인을 지배하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하는 자연인식을 위한 방법이었다.

대조적으로 아테네인은 자연인식이나 기술개발에는 무관심했다.

아테네에서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공적인 활동에서 타인을 설득하고 복종시키는 기술뿐이었다.

이것이 인간 지배를 위한 기술로서의 변론술이다. 엘레아학파의 논법도 여기서는 타인을 논박하고 농락하는

기술로 이용되었다.

또 외국인도 아테네에서는 '기술' 이상의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외국인이 시민(공인)으로 활동하는 것은 불가

능했고 폴리스 내부의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페리클레스의 친구였던 아낙사고라스가 태양을 타오르는 돌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신을 모독한 죄로

추궁당한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사건은 페리클레스에 대한 정치적 음모 대문에 발생한 것이었지만, 외국인인 사상가에게는 그런 종류의

허물로도 탄압당할 위험이 항상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이야기한 것은 프로타고라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기껏해야 회의주의·상대주의적인 의견이었다. 188.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의 눈에 아테네의 사회규범에 대한 가장 도전적인 존재로 비친 것은 고소에 존재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아테네에서 공인으로서의 삶이 갖는 가치를 부정했다는 데에 있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다이몬은 그가 '나랏일〔國事〕을 하는 것'에 반대했다.

"오히려 진정으로 정의를 위해 싸우려고 하는 사람은, 그러고도 잠깐이나마 몸을 지키려고 한다면, 사인(私人)

으로서 있는 것이 필요하며 공이능로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다이몬의 목소리는 전대미문으로 이상한 것이었다.

아테네라는 폴리스에서 시민이란 공인으로서 나랏일에 참여하는 자를 가리킨다.

공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이 모든 일의 전제였다. 이에 반해 사인(私人)은 비정치적이다.

그러므로 공인이 될 수 없는자, 예를 들어 외국인, 여자, 노예는 비폴리스적=비정치적 존재였다.

아테네에서 '덕'이란 정치능력, 즉 공적인 장에서 능숙히 언론(로고스)을 조작하는 기술이다.

부유한 시민이 자제들에게 소피스트로부터 변론술을 배우도록 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와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다.

"돈을 번다든지 가업을 돌본다든지 또는 군대를 지휘하거나 민중에게 호소하는 활동을 한다든지, 그밖의 국가

의 요직에 오르거나 도당을 만들어 소동을 일으키거나 하는 지금 이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에 무관심했습

니다."


하지만 그것은 '공적인' 일이나 정의에 관해 무관심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 소크라테스가 사인에 머무른 것은 공인으로서의 활동을 하면 '몸을 지킬' 수 없기 때문도 아니었다.

전장에서의 활약이나 최수의 자사(自死)가 보여주는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이몬의 목소리는 그에게 무언가를 금지시키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이몬은 소크라테스가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을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공인으로서 그것과 싸우는 것을 금지한 것이었다. 이 금지는 정말로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공인으로서

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이 금지를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일반적으로 승인되고 있는 가치, 즉 공인으로서 활약하고 정치적

지도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그것은 또 그것을 위한 '덕'을 폄하하는 것이 된다.


소피스트가 돈을 받고 변론술을 가르친 데에 반해, 소크라테스는 돈을 받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부유한 아테네시민이었기 때문도, 지식을 주고 돈을 받는 것을 '매춘'적인 것으로서 경멸했기

때문도 아니다.

원래 그는 시민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돈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외국인이 가르치는 변론술은 민회나 법정에서 활동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사용가치)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은 정당한 교환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민회나 법정에서 활약하고 권력을 얻는 것을 가치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가 가르치는 것은 공인으로서 활동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단념시키는 사고이다.

'청년을 타락시킨다'는 것은 오히려 이것을 말한다.

한편 소피스트는 공적인 권력을 얻는 것에 가치를 두는 아테네시민의 상식을 뒤집지는 않았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반감을 품든 경의를 품든 아테네시민이 불가해하게 여긴 것은 그가 그와 같은 행동을

한 이유였다.


4. 소크라테스의 수수께끼



소크라테스의 수수께끼는 공인이 되지 않고 사인으로서 '정의를 위해 싸운다'는 그의 자세에 있다.

이것은 배리이다.

사인이라는 것은 비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배리를 살았고 그것이 그의 삶의 방식과 죽음의

방식을 수수께끼로 만들었다. 이는 그의 제자들이 가진 소크라테스의 이미지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것이다.

여기에 크세노폰을 추가해도 좋다. 이것은 폴리스에 commit(관여)하는 소크라테스의 자세를 이어받는 것이다.

또 하나는 소크라테스의 고참제자이자 키니코스학파(견유학파)의 창시자였던 안티스테네스, 그리고 그의

제자 디오게네스 등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에게 있었던 사인으로서 행동하는 자세를 이어받은 것이다.

전자가 대(大)소크라테스학파라고 불리는 데에 반해 후자는 소(小)소크라테스학파라고 불렸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저작에서 '소크라테스'를 등장인물로 삼은 플라톤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묘사한 사람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소(小)소크라테스학파 쪽에 가깝다.


소크라테스가 들고 온 것은 공인인 것과 사인인 것의 가치전도다.

그것은 우선 사인(私人)이라는 것을 공적=정치적인 것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키니코스학파라고 불렸던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이와 같은 가치전도를 수행했다.

디오게네스와 같은 외국인은 공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일부러 단념할 필요는 없었다.

공인이 될 수 없는 자는 원래 '개(犬)'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디오게네스는 단순히 '개'라는 것을 감수한 것이 아니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그리스철학자열전』에 따르면, 디오게네스는 그를 개처럼 취급한 자에게 개가

하는 것처럼 소변을 갈겼다. 또 그는 구걸하고 길가의 통속에서 살았다.


이처럼 철저하게 사적=개(犬)적인 것을 통해 폴리스에서 공적인 것의 가치를 scandalous하게 부정하는 키니코

스학파의 사상은 폴리스를 지향하는 플라톤학파에 대항하는 것이 될 수 있었다.

또 그것은 폴리스가 독립을 잃어가던 시기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했다.

디오게네스는 어느 곳의 시민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나는 세계시민(코스모폴리스의 시민)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키니코스학파는 그리스의 모든 폴리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에 종속되기 시작한 시기에 인기를 얻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이 디오게네스 앞에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자 그는 내 앞에서 햇빛을 가로막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키니코스학파의 저항이 유효했던 것은 아직 폴리스가 번영했던 시대의 잔영이 남아있던 시기였다.

제국의 지배 하에서 폴리스가 더욱 무력화되자 플라톤학파도 키니코스학파도 모두 무력해졌다.

그 후 키니코스학파를 이어받는 형태로 에피쿠로스나 스토아학파의 제논이 등장했다.

그들은 이제 키니코스학파처럼 도전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의 폴리스가 제국의 행정단위가 된 이후의

사회에서 '무감동'으로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개인주의적 철학을 제시했다.


한편 플라톤이나 크세노폰은 공인으로서의 활동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아테네시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그들 자신이 폴리스에서 정치가로 활동하기 위한 가르침으로서 받아

들였다.

소크라테스 사후,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 있었던 한 가지 측면, 즉 어떤 형태든 폴리스에 관여하는 것을 그

나름대로 추구했다. 

플라톤은 이데아론이나 철인왕 등의 가르침의 기원을 '소크라테스'에게서 찾았다.

그런데 그것은 허구적 소크라테스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곡해라고 말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결코 '공인'이 되지 않았지만 단순히 '사인'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폴리스에서 사인으로서 있었지만 '정말로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을 계속했다.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에 근거하여 플라톤은 진정한 국제(國制, politeia)를 사고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입장은 디오게네스와 플라톤의 입장 어느 쪽과도 달랐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은 따지고 보면 사인이면서 공적이라는 데에 있다.

다른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폴리스 안에 있으면서 코즈모폴리턴이라는 데에 있었다.

이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키니코스학파에 비해 폴리스적이고 플라톤에 비해 코즈모폴리턴적이었다.


소크라테스가 가져온 가치전도를 이해하기 위해 참조해야 하는 예는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한

말이다.

그는 국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사적인 것이며 보편적(세계시민적)인 것이 공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진정으로 공적이기 위해서는 국가를 넘어선 사인(私人)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국가(폴리스)를 넘어선 코스모폴리스가 있는 것이 아니다.

칸트가 말하려고 한 것은 각자가 국가 안에 있으면서 세계시민으로서 판단하고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즉 칸트에 의한 공사의 가치전도는 플라톤적이지도 디오게네스적이지도 않은 소크라테스적인 것이었다. 200.

플라톤에게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 있었던 부정성, 위태로움, 우연성이라는 요소가 완전히 소멸되어 있다.

물론 플라톤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철학자를 왕으로 삼는 것이 곤란한 이상, 왕을 철학자로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켈리아의 왕을 철학자로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하여 노예로 팔릴 뻔하기도 했다.

여기서 플라톤이 타자와의 대화를 시도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때의 타자는 왕이지 민중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의 방법을 받아들인 것은 오히려 소(小)소크라테스학파였다.

디오게네스는, 저 녀석에게 물리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을 듣고, "걱정마라, 개는 풋내기를 물거나 하지 않는다"

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이와 같은 방식의 문답 때문에 화가 난 상대에게 걷어차여도 참으면서 "만약 당나귀가 나를 찼다면, 당나

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야 할까"하며 시치미를 뗀 소크라테스에게 배운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플라톤 이상으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계승했다.


플라톤과 달리 디오게네스는 실제로 노예로 팔렸다.

는 노예의 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사람을 지배하는 일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또 한낮에 램프를 들고 "인간은 없는가"라고 외치며 광장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이런 언동은 일종의 문답법이다. 디오게네스는 문답을 할 상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타인으로 하여금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이든 경멸을 사는 것이든 개의치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사람 앞에서 자위를 했다.

그것은 자연(피시스)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타인에게 말히기 위해서였다. 211.



- 가라타니 고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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