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철학 인문

철학의 딜레마 (1) - 동서 철학 주제. 공,노자 사상.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6.07.17|조회수125 목록 댓글 0

철학의 딜레마에 대하여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중심주제


철학의 역사는 ‘그들이 생명과 인간이라는 중심주제를 어떻게 다뤘는가’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때 가장 유의미한 통찰

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서양철학은 세계 속에서 물질과 생명, 사람의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않은 채 ‘물질’을 설명하는 원리로써 생명과

사람을 똑같이 다뤘고, 그에따라 생명의 신비와 인간의 신비에 주목하지 못했다.


그리스철학자들은 실재의 두 특성으로서 '항존성' '변화'에 내재되어 있는 역설을 풀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자연에서 운동과 변화의 현상들 속에 항존적이자 불변하는 궁극적인 실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을

설명하고자 노력하였다.


플라톤은 자신의 ‘이데아’라는 개념을 통해 세상 속에 존재하는 ‘변화 속의 항존성’을 설명하고자 했다.


플라톤에 의하면 만물은 변화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 그것이 원인이 된다고 한다. 예컨대 인간은 수없이

다양하고 누구나 변화한다. 하지만 플라톤에 의하면 변하지 않는 것은 "인간 그 자체"이다.

이 불변하는 "인간 그 자체"가 동시에 ‘인간의 본체 원형’으로서 모든 인간의 ‘인간다움’을 형성하는 원인이기도 한 ‘인

간의 이데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불변하는 "인간 그 자체"이자 ‘인간의 본체 원형’인 ‘인간의 이데아’가 현실 세계의 인간에 대한 원인으

, 인간의 이데아가 어딘가에 실재하기 때문에 현실세계에 인간이 실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과 실체를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비롯된 철학의 오랜 혼란은 이제 정리되어야 한다.


본질은 모든 존재에서 논할 수 있지만 실체는 오직 생명에 대해서만 논할 수 있다.


그리고 만물은 변화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 그것이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변화하는 생명의

원인이다. 다시 말하면 불변하는 이데아가 존재의 원인이 아니라 실체가 원인이다.

존재의 불변하는 공통성인 본질은 실체가 현상하는 가운데 그 핵심을 차지할 뿐이다.


장미의 실체는 생명활동 전체를 뒷받침하는 원인이자 기체이며 장미의 본질은 그 생명활동 전체에서 드러나는 장미

다움, 혹은 장미에서 그것을 빼면 더이상 장미가 아닌 핵심을 말한다. 즉 장미의 본질 혹은 장미의 불변하는 공통성,

장미 그 자체, 장미의 본체원형은 장미의 실체가 현상하는 가운데 그 그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플라톤은 만물, 즉 삼각형이나 책상과 같은 물질과 생명이나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이데아’라는 하나

의 동일한 원리로써 존재들을 설명한다.


물론 책상은 책상의 이데아로써 설명하고 사람은 사람의 이데아로써 설명하지만 책상을 설명하는 원리와 생명이나

사람을 설명하는 원리가 본질적으로 '같은 차원'에서 설명된다.


즉 불변하는 이데아가 모든 존재의 본질이면서 동시에 원인이다. 그리고 이같은 한계는 서양철학에서 근본적인 현상

이 된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해서 “존재와 개념은 구분해야 하며 이데아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개념적인 추상물'에 불과하다”라고 대립각을 세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본질 혹은 세계의 보편적인 측면을 부여하는 어떤 이데아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단지 인간의 머리 속에만 있는 편리한 정신적 추상물, 어떤 유에 속하는 모든 것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이름,

혹은 주관적 관념에 불과하다며 그것을 ‘형상’이라는 개념으로써 설명한다.


여기까지는 발전이다사물의 본질 혹은 세계의 보편적인 측면을 설명하는 이데아는 인간의 머리 속에 있는 개념에 불과하며, 개념은 개념일 뿐 결코 존재이거나 존재의 생성의 원리가 될 수 없다. 세상사물 속에 불변하는 공통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의 원인이 될 이유는 없다. 전자는 개념의 영역이고 후자는 실재의 영역이다.


개념실재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공격할 때는 이데아를 형상으로 바꿔 부르며 그것을 정신적 추상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가 다시 주관적 관념에 불과한 그 ‘형상’을 ‘형성하는 힘’, 곧 단순한 재료를 특수한 모양과 목적에 맞도록 형

성하는 내적 필연성이자 충동으로써 사용한다.


그에따라 ‘형상’은 사물의 본질 혹은 세계의 보편적인 측면을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질료의 잠재적 능력을 실현하는,

만물에 깃들여있는 활동의 힘, 생성의 힘의 총화로 둔갑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버리기 위해 이번에는 ‘자신의 목적대로 사물을 생성해내는’ 어떤 목적론적인

힘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본체 원형’이라는 기발한 개념을 이용하여 이데아를 불변하는 "존재 그 자체"로 사용하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의 ‘그것다움’을 형성하는 원인으로 사용하여 어려움을 피해나갈 수 있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어

떻게 인간의 개념적인 추상물에 불과한 사물의 본질 혹은 보편적 측면이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생성의 힘’이 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난관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물질을 설명하는 원리와 생명과 인간을 설명하는 원리를 구분하지 않는 형이상

학의 한계는 근본적인 문제였다. 즉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책상과 같은 물질을 설명하는 원리와 개나 사람을 설명하

는 원리를 구분되지 않고 똑같이 ‘형상’의 개념과 ‘질료’의 개념으로써 설명하고자 했다.


이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그의 ‘실체’에 대한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에 대한 설명에서 ‘그 자

체로서 존재하는 것’과 ‘부대해서 존재하는 것’을 구분하여 전자를 ‘실체’로서 포착하고자 하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

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인 실체에서 사람, , 책상 등 인간과 생명이 물질과 구분되지 않고 ‘실체’라는 한 범주

로써 취급될 뿐이었다.


물질과 생명, 인간은 존재의 층구조가 다르므로 서로 다른 차원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한계는 중세의 ‘보편논쟁’을 통해서 그대로 반복된다.


보편논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의 사물의 개별존재와 보편성에 대한 논리적 증명의 문제가 중세에 또다시

쟁점의 중심이 된 것인데, 중세 초기 ‘실재론자’들은 플라톤의 철학을 따라 이데아와 같이 특정 사물의 존재에 앞서

그 사물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어떤 것이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중세 중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특정 사물의 존재에 앞서 그 사물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어떤 것이 실재한다는 플라

톤의 입장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을 결합하여 구체적인 사물을 형성하는 질료와 영원불멸의 본질인 형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 중에서도 ‘순수한 본질’인 형상을 신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은

정신적 추상물이면서 동시에 생성의 힘이었기 때문에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을 통해 궁극적으로 신의 존

재를 증명하고자 한 자신의 신학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반면에 중세 후기의 ‘유명론자’들은 ‘이데아는 단지 개념적인 추상물에 불과하다’라는 이데아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

의 입장을 철저하게 밀어붙여 개별존재만이 현실성을 가질 뿐 사물의 보편성이란 단지 ‘명목’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중세의 ‘실재론’과 ‘명목론’은 “사물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어떤 것이 실재하느냐 아니면 그것은 단지 명목에 불과한 것이냐?”에 관한 논쟁이었던 것이다.


그에따라 서양의 근현대철학은 아직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의 그늘에 가려 허우적대고 있다.


이데아와 같이 ‘특정 사물의 존재에 앞서 어떤 보편성을 부여하는 것’의 실재를 부정하는 유명론을 물려받은 근현대철학에서, 인간에게 항존성과 인간다움을 부여하는 어떤 것은 더 이상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에따라 현대철학은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러 단지 명목으로 존재하던 사물의 보편성마저 부정하면서 “세상에 항존

성을 의미하는 본질이란 없다. 단지 가족유사성이 있을 뿐이다”라는 상대주의에 도달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데아와 같이 특정 사물의 존재에 ‘앞서’ 어떤 보편성을 부여하는 것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

에도 “참나무다움”이란 게 있기에 참나무를 참나무라고 부르고, “개구리다움”이란 게 있기에 개구리를 여전히 개구리

라고 부른다.


특정 사물의 존재에 앞서 보편성을 부여하는 이데아와 같은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에서 항존성 혹은

불변하는 측면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변화와 항존성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존재들의 ‘그것다움’ 혹은 ‘불변하는 공통성’을 보면서 '본질'을 이해하고, 생명의 현상들을 보면서 그것들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서양철학은 변화와 항존성과의 관계에서 불변하는 공통성을 설명하는 ‘본질’ 개념과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원리인 ‘실체’개념을 구분하지 못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늘에 가려 ‘불변하는 공통성’을 설명하는 본질과 ‘생성의 원리’인 실체가 하나로 혼합된 ‘이데아’나 ‘형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서양철학이 여전히

방황을 거듭하고 있는 근본원인이다.


"만물은 변화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 그것이 원인이 된다"고 했을 때 그 ‘무언가’는 ‘생성의 원리’와 ‘불변

하는 공통성’이 결합된 어떤 신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체와 본질을 하나로 통합하려 할 경우 ‘불변하는 실체’로 귀결되고, ‘불변하는 실체’에 집착하게 될 경우 '변화하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경우 변화에 의해 실체가 끊임없이 방해를 받게 되어 결국

실체도 본질도 부정하는 상대주의에 이르게 되고, 그 결과 생명과 인간을 비롯한 세상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변화와 항존성과의 관계에서 변화를 긍정할 뿐 항존성을 부정할 경우 남는 것은 상대주의뿐이다.

그래서 철학에서 변화와 항존성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는 문제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서양철학은 세상에 존재하는 실재의 두 특성으로서 항존성과 변화를 실체와 본질의 개념이 하나로 통합된 이데아나

형상을 통해 설명하고자 노력했으나, 서양철학이 ‘어떤 일반성으로써 개별성을 재단하는’ 독단적인 형이상학의 한계

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거꾸로 ‘개체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일반성의 이해에 도달하는’ 과학적 자세가 필요했다.


그리고 세계의 개별성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일반성의 이해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개체와 보편을 함께 설명하기 위해

서는 그들의 이데아나 형상을 떠나 생명의 원리인 ‘실체’의 개념과 세상의 불변하는 공통성을 설명하는 ‘본질’의 두

개념으로써 세상을 이해하고자 노력했어야 했다.


생명현상을 보면서 어떤 이데아나 형상의 산물로써 그것을 일방적으로 ‘재단’하려 하지 않고 ‘현상’에 대한 관찰을 통

해 발견되는 불변하는 공통성에서 그 존재의 ‘본질’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원인이자 기체인 생명의 ‘실체’를 이해

하고자 할 때에야 비로소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는 사고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현상을 통해 그것의 본질과 실체에 접근할 때에야, 세계에 대한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위해

서는 물질과 생명, 인간에 대해 각각 차원이 다른 본질과 실체를 전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만약에 개체의 ‘현상’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일반성에 도달하고자 할 때, 물질과 동물, 인간의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결코 어떤 하나의 원리로써 설명되지 않고, “층 구조 간에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원리가 필요하다는 사실

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의 과학발달을 이끈 현상에 대한 관찰과 실험정신은 이제 철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문제는 서양철학이 이렇게 만물의 변화와 항존성의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사이에,

물질을 설명하는 원리와 생명과 인간을 설명하는 원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형이상학적 사고가 완전히 고착화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서양철학이 끝까지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는 사고가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일반성을 통해 특수성을 ‘독단’하는 형이상학을 끝내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따라 그것이 서양철학이 아직도 물질을 설명하는 원리로써 독단적으로 생명과 인간을 설명하려 하고(유물론

혹은 기계주의), 인간을 설명하는 원리로써 자연의 물질과 동식물을 설명하려 하며(애니미즘), 동물을 설명하는 원리

로써 함부로 인간을 설명(진화론)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지고 서양인들이 그런 사상체계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게 하는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의 철학에서 인간은 물질이나 동물처럼 언제든지 쉽게 수단화될 수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리고 인간과 생명을 쉽게 수단화할 수 있는 사고는 인간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세계관으로 이용

되고 있으며, 현대사회 지배계급은 인간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물질과 생명,

인간을 근본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서로 뒤섞으려 하는 철학사상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이것이 서양철학의 근본

적인 취약점이자 함정이다.


그러나 본능의 지배를 받는 동물의 현상을 설명하는 원리로는 결코 정신적 실체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현상을 설명

할 수 없다.


한편 동양철학에서는 일찍이 공자의 인의사상이나 맹자의 성선설과 왕도정치, 그리고 인내천사상 등에서 보듯이

‘사람’이 중심주제였다.


그러나 동양철학 또한 성리학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와 유사한 방식으로, 즉 만물을 이理와 기氣의

결합으로써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양철학의 기氣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는 달리 생성과 변화의 바탕이 되는 무력한 재료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생성의 원리이다.


하지만 동양의 성리학에서도 물질과 동물, 인간 간에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못하는 형이상학의 한계는 근본적

인 것이었다. 성리학에서도 인간과 우주만물을 모두 기氣의 작용에 따른 결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 철학들과 성리학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성리학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책상을 책상답게 만드는 우주의

원리로서 이理와 생성의 원리인 기氣가 결합하여 우주만물을 생성한다고 보면서도,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원리로써’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정이가 이해한 본성은 장재와 같은 자연적인 생명이 아니라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이다.

하늘이 명령한 인간의 본성, 즉 천명지성天命之性은 단순히 먹고 마시고 자고 생활하는 생명활동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로부터 받은 도덕성을 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천명지성은 기氣의 제한에 속박되지 않는 도덕적 본성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정이는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바로 '이理'라고 선언한다.

인간이 천성적으로 갖추고 있는 본성은 동물적인 본능이나 자연적인 성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이미 우주의 질서 즉 '이理'를 하늘의 명령으로 받은 존재다.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도 이 '이理'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정이는 '성즉리性卽理' '인간의 본성은 이理다'라고 정식화한다.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생명의 기氣가 조금도 관여하지 않은 순수한 이理가 흐르는 영역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이理는 우주의 근원이며 가치의 원천이기 때문에 '이理'를 본성으로 부여받은 인간은 이미 모든 가치의 원천을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안에는 이미 '인의예지'가 갖추어져 있다.

이것이 정이가 생각하는 '인간이 본래부터 선하다'는 말의 본래 의미였다."


 

성리학의 고유한 이론인 이기론理氣論은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차원과는 구분되는 순수한 원리의 영역을 이理 또는

태극太極으로써 설명한다. 성리학의 최고개념인 태극은 이理의 정수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동양철학에서도 이理는 플라톤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같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책상을 책상답게

만드는 우주의 원리지만, 동앙철학에서는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생명의 기氣에 속박받지 않고 그것이 조금도 관여하

지 않은 순수한 이理가 흐르는 본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에따라 이理의 정수로써 이루어진 태극太極은 만물의 근원이면서 도덕적 가치의 원천이기도 하다.


성리학은 인간은 이理와 기氣의 결합으로 생성된 우주만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정수를 받아 가장 빼어난 존재가 되

었다고 본다.


이처럼 동양의 유학이나 신유학, 즉 성리학은 인간관계와 인간다운 삶에 대한 고민을 중심주제로 삼았기 때문에

동양철학의 핵심에는 물질이나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사고가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사고의

산물인 성선설이 뿌리내리고 있다.


중국 송대의 유학자 정이의 “인간의 본성에는 자연적인 생명의 기氣가 조금도 관여하지 않은 순수한 이理가 흐르는

영역이 있다”라는 주장은 주희라는 성리학의 집대성자에 의해 계승되어, 이후 수백 년 동안 동아시아의 정치, 사회,

학문을 관통하는 핵심적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동아시아에서 성리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통치원리이자 근간이 되었고 교육의 바탕이자 사회규범의 뿌리였으며

모든 문화의 토대역할을 하게 된다. 그에따라 동양에서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기조가 면면이 유지되고 있다.


거기서 ‘사람’은 서양철학에서처럼 물질이나 동물과 구분되지 않는 ‘논리적 주체’가 아니라 정치가 가장 중심에 두고

중시해야 할 개개의 주체였다. 정치는 개개의 백성들이 억울함 없이 행복하도록 하기 위해 존재해야 하며, 그것이

왕도정치였다.


그러나 서양철학은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여전히 사물과 생명,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고 "어떤 하나의 원리로써

세상 만물을 설명하려는 독단적인 형이상학"에 머물러 있다.


니체의 생철학 또한 ‘동물의 원리’로써 인간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서양철학은 동양철학처럼 애초에 ‘인간다운 삶’을 중심주제로 삼지 않고 세상 만물을 단지 ‘이해의 대상’으로 삼아

‘인식론’을 중심주제로 철학을 전개했기 때문에 물질과 동물, 사람을 구분하지 못했고, 우주의 주인공이 바로 생명

과 사람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철학은 아무리 발달해도 ‘중심’을 잃은 철학이기 쉽다.


서양철학은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이고, 개개의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동양철학 고유의 문제의식을

배워야 한다.






공자의 인의사상과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



사마천은 <사기>에서 주나라로 여행 중이던 공자와 노자와의 대화를 소개한다.

 


“노자 : 당신 생각의 요점을 듣고 싶소.

공자 : 요점은 인의에 있습니다.

노자 : 인의는 사람의 본성이요?

공자 : 인의는 진실로 사람의 본성입니다.

노자 : 무엇을 인의라 하오?

공자 : 두루 사랑하며 사사로움이 없는 것입니다.

노자 :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이 사사로움이오. 자연의 도를 따르면 될 것이지, 무엇하러 북치듯 인의를 내걸며

         도피한 사람을 찾는 일을 하오? 선생이 사람의 본성을 어지럽히고 있는 거요.

 


유학과 노장사상을 대표하는 공자과 노자로부터 출발하는 ‘인위’에 관한 이 끝없는 논쟁은 어떤 주장이 옳은 것인지

시비가 가려져야 한다.

‘이것도 옳을 수 있고 저것도 옳을 수 있다’라는 상대주의에 머물러 있는 것은 태만의 표시일 뿐이다.


먼저 공자는 ‘인의’를 사람의 본성이라고 주장한다. 공자의 사상이 서양사상과 다른 핵심은 어진 마음과 옳음을 추구

하는 마음을 사람의 본성으로 본다는 점이다.

공자의 어진 마음은 서양에서는 먼 훗날 흄에게서 ‘동정심’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웃의 불행을 나의 불행으로 아파하는 어진 마음은 이웃을 괴롭히는 악인을 그대로 지나칠 수 없다.

즉 공자에 의하면 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의로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인仁한 사람은 의義할 수밖에 없다’라는 명제에는 인간에 대한 공자의 매우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다.


그런데 노자는 이웃을 괴롭히는 악인을 그대로 지나지지 않는 것을 사사로움이요, 자연의 도가 아닌 인위人爲라고

주장하며, 공자를 북 치듯 인의를 내걸며 인의로부터 도피한 군주들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은 일을 한다며 비난한다.


만약에 노자가 공자 또한 교묘한 언변으로 왕에게 아첨해 벼슬에 오르기를 바라는 사람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서 그것

을 ‘사사로움’으로 표현했다면 정당한 비판이겠지만, 이웃을 괴롭히는 악인을 그대로 지나지지 않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사사로움’으로 표현했다면 그것은 그릇된 비판이다.


공자는 노자류에 대해 “자기만 깨끗한 척 하는 고루한 태도를 미워한다”라고 속마음을 나타낸 바 있다.

공자는 철저히 의를 쫓은 사람이었기에, 세상의 불의를 초탈하려 했던 노자류와는 달리 공자는 그렇게 살 수 없었다.


인과 의는 함께 하는 것이어서, ‘의하지 못한 사람은 인을 주장할 수 없다’. 즉 이웃을 괴롭히는 악인을 모른 체 하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할 자격이 없다.


‘인위’에 관한 공자와 노자의 논쟁은 인간의 정신 속 ‘매개적인 자기의식’의 존재에 주목할 때 근본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정신 속 매개적인 자기의식의 존재로 인해 자신의 현상을 통해 매개적으로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을 정립한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이웃을 괴롭히는 악인을 외면하면서 본질적으로 자기자신은 깨끗한 사람으로 남을 수 없다.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인 이상 이웃의 불행을 외면하는 사람은 아무리

자기자신을 변명하려 해도 ‘나는 남의 불행을 외면하는 비겁한 사람’으로 남는다.


인간은 세상의 불의를 초탈하면서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할 수 없다.


따라서 인의로써 세상을 구하고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내세우며 천하를 주유한 공자의 행보는 올바른 것이었다.


노자는 부와 권력의 정상을 향해 아귀다툼하는 세속을 버리고 나비가 되어 창공을 자유로이 날아다니고자 했으나,

분명한 것은 ‘불의를 보고도 행동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다는 증거일 뿐’이다.


따라서 자기만 고고하게 살겠다고 세상을 초탈하는 삶을 추구한 노자보다 인의의 세상을 만들고자 천하를 주유한

공자나 ‘세상의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관세음보살이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 자신의

내면에 대한 훨씬 깊은 통찰에 도달한 사람이다.


인과 의는 본질적으로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어서 인한 사람은 결코 의를 외면할 수 없고 의 없이는 인을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공자의 인의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왜 성서에서 하느님이 한편에서는 지극하신 '사랑의 하느님'으로 나오고 다른 한편에서는 서슬 퍼런 '공의의 하느님'으로 나오는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의와 결합된 인이 바로 '사랑의 완성'인 것이다.


노자사상의 핵심은 유가와의 대결에서 세상에 대한 ‘초탈’을 주장한 대목이 아니라, 아마도 무위자연의 소박한 삶을

가르친 대목일 것이다.


노자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하늘의 뜻대로 사는 사람’으로, 인위적인 것을 하지 않는 ‘무위’로써, 봄이 오면 씨 뿌리고

겨울이 오면 곰이 겨울잠 자듯 휴식을 취하면서 자연의 흐름대로 사는 사람이다.


그저 말없이 곡식이 자라게 비구름 보내주고, 그저 열매 맺으라고 양분을 보내줄 뿐인 하늘과 땅처럼 스스로를 드러

내지 않는 사람이다.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하여 전쟁 같은 경쟁을 치르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저 냇물처럼 만물을 이롭게 도우면서 다투지 않으며 사람들이 머물기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무는 사람이다.


세상에 이름 석 자 알리려는 입신양명의 뜻을 버리고, 설사 공을 이루면 몸은 물러서는 사람이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이런 기구 저런 기계 많아도 쓰지를 말고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지를 말고", "죽는 일은 중요한

일이니 갑옷과 칼, 무기가 많아도 싸움을 벌이지 말고 전쟁터에 나가지 말자’" 대목이 나온다.  


현대인들이 물질문명의 기계화에 따른 실업율 증가와 출생율 감소의 근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런 기구 저런

기계 많아도 쓰지를 말아야 한다.


노자는 이미 문명이 인간성에 미치는 폐해를 꿰뚫어본 사람이었으며, 또한 철저한 반전주의자였던 것이다.

이것이 BC 6세기경 노자의 사상이라는 점에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노자는 일찍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즉 우주의 신비인 인간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이해에 도달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자녀들을 길러본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면 저 아이가 자신의 잠재성과 도덕성을 최대한 발현하며 살 수 있도록 할 것

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실감할 것이다.

그만큼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노자의 사상에는 철두철미 사람을 철학의 중심에 두고 인위를 극도로 경계하면서 ‘어떻게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를 평생 화두로 삼아 사유한, ‘인간성’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통찰이 엿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지향하며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무위로써 자연의 흐름대로 사는 사람이면서 ‘이웃을 괴롭히는 악인을 그대로 지나치지 않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간직하며 살면서도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공을 이루면 몸은 물러서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





과학의 시대와 노자의 도




과거 형이상학의 시대에 철학자들은 서양의 ''이든 '이데아' '형상'이든 '절대정신'이든, 혹은

인도힌두교의'브라흐만'이든 중국의 '태극'이든 ''이든, 세계의 근본 원인이라는 어떤 ‘일반성’을 통해 세상만물의 ‘특수성’을 설명하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의 시대에는 어떤 일반성을 통해 세계의 특수성을 함부로 독단하려는 형이상학적 시도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으며 오직 특수성을 통해 경험과 실험으로써 검증된 것에 한해서만 그것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원리를 ‘일반성’으로서 용납한다.


그럼에도 철학은 여전히 과거 형이상학의 시대에 일반성으로써 세상만물의 특수성을 함부로 재단하려던 독단론들

을 ‘과학의 시대’의 장점을 살려 극복하지 못하고, 과거 조상들과 똑같이 독단론에 휘둘리며 원점에서 논의가 맴돌고

있다.


노자의 도에 대한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자의 도가 인간사회가 지켜야 할 보편적인 원리나 도리, 혹은 인간사회와 문화를 이끄는 힘이었다면,

노자가 말하는 도는 우주 만물의 근원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공자의 도는 인간사회의 경험을 통해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로써 검증될 수 있다.

즉 공자의 인의는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형이상학적인 힘으로 일방적으로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특수성에서 일반성

의 방향으로, 즉 인간사회의 경험을 통해 ‘그것이 과연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지 아닌지’ 검증될 수 있는

원리라는 점에서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노자의 도는 천지보다 먼저 생겨났고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이 홀로 서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개별적인 만물로 분화되기 이전의, 서로 뒤섞인 도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도는 무엇인지 말할 수 없고 말로 옮길 수도 없고 감각경험으로 포착할 수 없는 근원적인 상태 또는

그 안에 흐르는 힘을 말하며, 경험할 수 있는 사물들의 근거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도는 만물의 근원이라고 여겨져 왔다. 만물로 분화되기 이전의 우주는 혼돈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러한 우주의 근본적인 상태가 바로 ‘도’다.


혼돈으로서의 도는 만물의 배후에 있으면서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의 역할을 한다.

도에는 만물을 생성시키는 창조적 동력이 있다. 여기에 다른 학파에서 말하는 도와 노자가 말하는 도의 차이점이

있다. 노자의 도는 우주의 질서 또는 인간사회의 올바른 원리라는 유가적인 도의 개념과 다르다.

원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다른 것들이 따라야 할 표준역할은 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창조적인 생산력을 가질

수는 없다.

이에 비해 노자의 도는 자연계의 모든 만물을 산출하는, 만물 배후의 어떤 실재 또는 힘을 가리킨다.


그러나 만물의 생성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물이 산출되는 과정이 아니다. 절대적인 무에서 유로 변화하는

과정이 아니다.

우주 전체는 이미 도로 가득 차 있다. 이때 도는 형체를 갖고 있지 않으며 개별적인 것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노자는 도의 이러한 상태를 무라고 말한다. 만물은 무에서 유로 변화된 것이지만 그 과정은 없던 것이 생기는

과정과는 다르다. 차라리 파악 불가능하던 것이 파악 가능한 것으로 바뀐 것에 가까울 것이다.

무와 유는 절대적인 무와 절대적인 유가 아니라 만물의 변화과정에 각각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노자의 도는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사물들의 근원이자 근거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만물의 근원’이자 사물에 ‘불변하는 공통성’이라는 본질을 부여하는 특징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와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천지보다 먼저 생겨났고 만물로 분화되기 이전의 혼돈된 우주의 상태라고 한다. 그 혼돈으로서의 도가 만물의 배후에 있으면서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 부를 수 있다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라며,

도는 억지로 가져다 붙인 이름에 불과하고, 그것을 ‘하나인 것’, ‘황홀한 것’, ‘소박한 것’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면서,

그러나 어디에도 명확한 정의를 하지 않는다.


어떤 정의를 하는 한 실체의 모습이 제한되어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가 주장하는 만물의 다양성의 근원인 도가 만물로 분화되기 이전의 혼돈된 우주의 상태라면, 고대 노자의 시각에서는 그것이 신비로웠을지 몰라도, 우주과학의 발달로 우주탄생 당시의 빅뱅의 원리와 상태까지 밝혀내고 있

는 현대사회에서는 ‘만물로 분화되기 이전의 우주의 혼돈된 상태’는 더 이상 신비의 영역이 아니다.


현대과학에 의하면 빅뱅 당시의 혼돈된 우주의 상태는 단지 물질의 초고온, 초고압력의 상태였을 뿐,

그것은 노자가 묘사한 만물 배후의 어떤 신비로운 실재 또는 힘과는 거리가 멀다.


과학의 시대에 노자의 도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道라는 일반성을 통해 세상만물의 특수성을 일방적으로 주장하

는 것에 그쳐서는 안되고, 동시에 세상 사물의 특수성을 통해서 일반성의 방향으로 그 도가 설명되어야 한다.


어떤 의지도 목적도 없이 단지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일 뿐인 혼돈된 우주의 상태인 어떤 것으로써는 ‘물질의 분리와

결합’을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생명’과 ‘인간’을 설명할 수 없다. 심지어 노자도 과학의 시대의 '검증가능성'이나 '재현가능성'이라는 기준을 비켜가지 못한다.


지금까지 현대과학의 실험결과에 의하면 물질의 원리로는 결코 생명의 기본 요소인 '단백질'조차 설명하지 못하며,

따라서 물질의 이합집산을 설명하는 원리로는 결코 생명과 인간을 설명할 수 없다


세계는 물질과 생명, 그리고 인간의 서로 다른 층구조로써 이루어져 있다.


생명이 신비롭고 인간이 신비로울 뿐이지, 물질은 아무리 광대해도 물질의 법칙에 따를 뿐이다.

물질은 영원히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에 기계적으로 따를 뿐 생명과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그런 신비가 없다.


만약에 노자의 도가 생명과 인간의 신비를 배제한 수많은 우주 생성의 원리에 관한 주장 중 하나일 뿐이라면 그것

은 또 하나의 독단론적인 형이상학적 세계관일 뿐 새로울 게 없고, 우리의 관심의 대상도 아니다.


노자의 도를 과소평가하자는 게 아니다.


현대인들은 경험과 실험을 통해 특수성에서 일반성을 도출하고 검증하는 훌륭한 장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철학은 여전히 일반성을 통해 세상만물의 특수성을 함부로 재단하는 형이상학에 발이 묶여 인간이 주목해야

할 생명과 인간의 영역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영향력 있는 세계관들이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검증되어 정리되지 않은 채 난립할 때 철학의 최대

해악인 ‘정답은 없다’라는 식의 상대주의를 낳게 된다.


따라서 철학은 이제 과학의 방법론이 갖는 장점을 살려서 과거 독단적인 형이상학적 세계관들을 현재까지의 과학과

철학의 모든 성과를 토대로, 차분하게 하나씩 극복해 나가야 한다.





(태기석)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