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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인문

철학의 딜레마 (2) - 본질 속 변화.장자,유가,힌두,불교의 사상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6.07.17|조회수203 목록 댓글 0

본질 속의 변화



길은 원래부터 있는 것인가, 아니면 길은 만들어지는 것인가?


노자에게 도道는 모든 개체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절대적 원리였다.

따라서 다양한 개체들이 상호 조화로운 관계를 맺으려면 이 개체들은 자신을 낳은 절대적 원리인 도를 먼저 회복해

야만 한다.


반면에 장자에게 길은 사람이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고, 사물은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구분된 것

이다.


장자에 의하면 등산로는 그 길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녔기 때문에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지 미리 정해진 길

은 없다고 한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주장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 걸어 다녀서 생긴 길’이 곧 ‘사람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본질과 변화와의 관계.

즉 세상에 불변하는 본질로서의 도道란 것이 과연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세상에는 오직 변화만이 있을 뿐인가?

세계를 본질로서 볼 것인가, 아니면 변화로서만 볼 것인가?

변화는 본질을 토대로 발생하는 것인가, 아니면 변화는 그런 것 없이 변화무쌍할 뿐인가?


변화 속에서도 불변하는 본질이나 법칙이란 걸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세상을 보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것도 있다.

1+1은 항상 2이고, A=B B=C A=C다”라는 논리학의 명제나 “두 점간을 연결하는 최단거리는 직선이다”라는 기

하학의 명제. 그리고 “모든 결과에는 그 원인이 있다”라는 순수물리학의 명제와 같이 변화와는 무관하게 언제나

으로써 성립하는 필연적인 진리도 있다.


그러나 현대철학은 객관적, 보편적, 필연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한다.

현대철학의 한 분파인 논리실증주의와 분석철학에서는 이상의 불변하는 진리에 대해, ‘공은 둥글다’라는 명제처럼

“거기서 술어는 주어에 대한 분석에 불과하며, 따라서 술어는 주어에 대해 아무 것도 추가적으로 말하지 않는 동어

반복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실용주의 등 진화론 계통의 현대철학에서는 그것을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에 유리한 새로운 일 처리 방식

이나 새로운 사고방법이 ‘관례’로써 정착되고 그것이 생득적이거나 선천적인 원리들이 되어 다음 세대에 전수된

특수한 사례에 불과하다”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수학적 진리 또한 ‘인류의 무수한 시행착오가 확신으로써 굳어진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객관적이고 필연적이면서 의미 있는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마당에 가치의 영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현대철학은 객관적 가치의 존재를 부정한다. 모든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심지어 가치의 영역에서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한다면, 객관적, 보편적, 필연적인 진리

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세상의 ‘불변하는 본질’의 존재를 부정하려 하는 주류 현대철학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다.


필자는 <정의가 이끄는 삶>에서 가치영역에서도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만약에 가치의 원천이 희소성에 있다면 모든 가치는 그 희소성의 원리에 근거하여 재정립되어야 한다.

중력의 법칙을 따르는 광대한 우주의 물질 속에 ‘중력으로부터의 자유’인 생명은 극히 희소하다.


그 생명들 중에 동물처럼 본능에 종속된 ‘영원한 현재’에 붙잡혀있지 않고 자신의 현재에서 영원한 과거와 영원한 미

래를 조망하면서 이성적으로 판단하면서 자유롭게 행동할 줄 아는 인간은 절대적 희소성이다.


그에따라 절대적 희소성을 가진 생명에 대한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라”라는 명제와 최고의 생명인 인간에 대한 도

덕의 최고원칙인 칸트의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라”라는 정언명령과 존 롤스의 “약자 우대의 원칙”, 그리고 “인간

존재의 절대적 가치를 존중하라”라는 명제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옳고 그름이 바뀌는 상대적 가치가 아니라 언제나

참인 필연적인 명제로서 성립한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불변하는 본질의 영역과 가치의 영역

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변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세상은 변화하지만 아무런 법칙이 없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본질의 토대 위에서 변화한다.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같지만 불변하는 사계절의 순환법칙 속에서 동일성을 반복하고 있으며, 그에따라 이

계절의 풍경은 앞으로 백만 년 후에도 비슷하게 반복될 것이다.


사람들 또한 천차만별인 것 같지만 모두 종적인 불변하는 공통성을 토대로 한 개별성들이다.


따라서 세상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관점은 마치 자연의 토대 위에서 인간의 삶이 성립하듯이, 그리고 마치 기초학문

의 토대 위에서 응용학문이 발달하듯이,"불변하는 본질의 토대 위에서 변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과학의 발전과정도 결국 변화 속에서 법칙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현상을 보면서 어떤 일관된 패턴을 발견했을 때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하여 법칙으로 세우는 과정이 과학의 발달

과정인 것이다.


검증과 경험의 축적에 따라 확신이 굳어질수록 ‘모든 물질은 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과 같은 물질의 법칙을 따른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와 같은 물리학의 기본법칙은 ‘불변하는 진리’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다.


따라서 ‘본질과 변화에 대한 균형 잡힌 관점’에 유의했을 때 노자의 도道와 장자의 길은 상호 교류하는 관계여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노자의 도는 모든 개체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원리로써 모든 개체들과 동떨어져 그것들의 존재방식을 좌지우지하는 독단적인 도道여서는 안되고 물질에 대해서는 물리학의 기본법칙과, 인간에 대해서는 <도덕의 최고

원칙>과 일치하는 도여야 한다.


장자의 길 또한 사람이 그냥 걸어 다녔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길이어서는 안되고 <도덕의 최고원칙>으로써

‘사람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로 검증된 것이어야 한다.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은 생명 존중과 인간 존중을 뒷받침하는 <도덕의 최고원칙>의 지도指導를 따르는 길이다.


따라서 장자의 길이 <도덕의 최고원칙>에 종속되는 가운데 마치 과학에서처럼 경험 -> 가설 -> 검증 ->법칙의 과정

을 통해 수렴되는 궁극적인 지점이 바로 노자의 도()여야 하며,

그것이 세계의 ‘변화’ 속에서 불변하는 ‘본질’이 올바르게 자리하는 방식일 것이다.





장자의 '자연의 도'와 유가의 '인간의 도'



공자 맹자의 인간의 본성에 대한 사상은 노자 장자에 의해 매우 정교하게 비판이 이루어져, 우리는 노자, 장자에 의

해 이루어진 천재적이고 창조적인 비판을 검토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서양에서 객관적 진리와 가치를 주창한 최고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정교하게 주관적 진리론과 가치론을 주장한 소피스트들이 있었고, 인의를 내세운 동양 최고의 철학자 공자와 맹자의 시대에 천재적인 논리와

기지로써 유가의 인의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만물의 본성에 덧씌워진 허울일 뿐’이라고 비판한 노자와 장자가 있

었다.


유가에 대한 거부와 비판은 장자사상의 출발점 중 하나다.


도덕성을 바탕으로 사회를 다스리려는 유가의 인위적인 시도를 반대한 장자의 사상에 대해 지금까지 동양철학은

‘어느 쪽이 옳은지’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장자에게 진정한 도道는 언어가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다.

바퀴를 깎는 기술조차 말이나 글로써 옮길 수 없듯이, 언어로는 참된 도를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퀴를 깎는 기술은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하는 것이지 언어로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진정한 도는 직접적인 체득과 실천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과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사람에 의해 묶여진 세계 즉 인위의 세계로도 존재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에 의해

묶일 수 없는 방식으로도 존재한다. 장자는 이를 ‘자연’이라 부른다.


장자에 의하면 소와 말의 네 다리가 ‘자연’이고, 말의 머리에 굴레를 씌우고 소의 코를 뚫는 것이 ‘인위’다.


모든 것이 엉겨 있고 모든 것이 함께 있는 무질서한 자연성 그 자체를 인위적인 방법으로 질서 짓고 교정하려고 하

는 순간 자연성은 이미 힘을 잃고 비극적인 결과가 발생한다고 한다.


인위를 통해 질서 지으려는 태도는 또한 모든 것을 인간 중심적으로 판단하는 폭력적인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장자는 ‘바다새의 죽음’의 사례를 들며 인간의 지식으로 제각각 다른 것들을 억지로 줄 세우려 할 때 사물들이 자연

스러움과 자기만의 생존방식이 위협받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참다운 도의 차원에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를 중심으로 다른 것들을 줄 세우려는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과 동물을 사례로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장자의 사유는 존재의 층구조를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고, 그에따라 노자에서 볼 수 있듯이 사물과 동식물, 그리고 인간의 존재의 층구조가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있다.


물질에는 물질의 도가 있고 동식물에는 그들의 도가 있으며 인간에게는 인간의 도가 있다.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과 동물을 지배하는 법칙은 대부분 과학자들에게 밝혀지고 있어 이미 도라고 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물질과 동식물의 도의 파악은 그것들에 대한 ‘예측가능성’으로써 뒷받침된다.


문제는 인간의 도이다.


물론 바퀴를 깎는 기술조차 말이나 글로 옮길 수 없듯이 인간의 도를 함부로 언어로 재단할 수 없다는 장자의 주장

은 매우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바다새에게 계속 돼지고기를 먹일 때 결국 죽음에 이르듯이, 사물을 인간중심적인 사고로 줄 세우려 할 때 자기만의 생존방식은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통찰 또한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천하무도無道의 시대로 불리던 춘추전국시대에 인의仁義라는 도덕으로써 세상을 구하고자 했던 공자와 사단四端이라는 선한 본성을 발전시켜 인간다운 세상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던 맹자의 주장을 ‘무위자연’을 내세워 무력화하고자 했던 장자의 비판은 ‘자연 그대로 내버려둬라’라는 방임으로써 오히려 약육강식을 일삼던 당시 제후

들의 이해에 적극적으로 부합할 수 있는 논리였다.


인의는 결합된 것이며, 따라서 ‘인간 존중’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무위자연’의 태도를 주장할 수는 없다. 자연에게 무위자연이 좋다고 인간에게 무위자연의 태도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무위자연이 자연에게 꼭 좋은 것만도 아니다. 인간과 자연은 같은 층위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명중심적 세계관과 매개적인 자기의식으로써 자연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며 실존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존

재이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에 사람이 약육강식의 동물의 법칙에 따라 비참하게 살고 있는 상황에서 인의로써 인간의 도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유가의 시도에 대해 “인의는 인간의 기준일 뿐”이라며 무위자연을 주장한 장자의 비판은 명백

히 전도顚倒된 것이다.


유가의 인의仁義가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라’ ‘약자우대의 원칙’ ‘인간존재의 절대적 가치에 대한 존중’이라는

덕의 최고원칙에 부합하는 한 그것은 객관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옳다.


‘참다운 도의 차원에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를 중심으로 다른 것들을 줄 세우려는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야 한다’라는 장자의 주장은 근래에 ‘다양성 존중’의 미명 하에 포스트구조주의에서 도덕적 상대주의의 근거로써 인용

되며 악용되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자연의 도로써 인간의 도를 함부로 재단하는 중대한 오류에 해당된다.


장자에게 ‘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곧 변화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을 말한다.

그에따라 도의 관점에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으면 자기를 내세우는 것을 잊을 수 있다고 한다.

자기를 내세우는 것을 잊는다는 것은 고착된 자의식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장자에게 도는 사물과 사태의 다양성이 가져오는 변화 그 자체이며, 도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그 변화

에 적응하는 능력을 얻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변화에 참여하는 사람은 선과 악 같은 대립적인 구분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하며, 이런 상태를 묘사한 장자의

용어가 바로 좌망坐忘과 심재心齋다.


그러나 장자의 좌망과 심재에는 상대주의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변화를 중시하면서 그것과 하나 되어 ‘자신을 잊는

것’을 목표로 삼을 때 거기에 원활한 현실적응은 있을지언정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이 없이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도의 관점에서 변화를 받아들이고 고착된 자의식을 벗어난다는 명분으로 선과 악의 대립구분을 벗어나고자

할 때 결국 상대주의로 흐르게 되며, 그에따라 장자의 사상은 현대철학에서 ‘상대주의 옹호를 위한 최고의 근거’로써 활용되고 있다.


장자의 좌망坐忘과 심재心齋, 그리고 그에따른 변화에의 적응은 도덕의 최고원칙의 토대 위에 성립하는 것들이어야

한다.


유가사상의 근본적인 한계는 ‘극기복례克己復禮’에 있었다.


공자에 있어 자기를 극복하고 되돌아가고자 하는 예禮의 지점이 왕은 왕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를 다하

며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리를, 자식은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정명正名’이었고, 맹자의 사상 또한 근본적으로 상하의

분명한 위계를 바탕으로 하는 불평등한 신분질서 옹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장자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주장이 고대사회 신분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한 빤한 술수로 보였을 수도 있다.


당시 시대상황을 토대로 도덕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공자 맹자의 입장에서도 신분질서 폐지는 너무 이상적 주장으

로 여겨졌을 수 있으나, 신분질서를 옹호한 유가사상은 도덕의 최고원칙 중에 특히 ‘약자우대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가의 사상에는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가치가 있다.

실로 인간에게 부족한 것은 ‘인간의 도’에 대한 이해다.


‘어떻게 해야 인간이 진실로 행복해질 수 있는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인간은 아직도 충분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바다새에게 돼지고기를 먹일 만큼 자연에 대해 그렇게 무지하지 않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경험을 통해 남에게 좋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온몸으로 이해한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도가 있

으며, 사람의 도를 되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중해줘야 하며, 이 경우 인간은 자신의 개별성과 주체성으로써 스스로 알아서 발현한다.


인간에게 있어 ‘자연’은 ‘인간존중의 환경’이며 그 중심에 ‘인의’를 중심으로 하는 도덕과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라’

와 같은 도덕의 최고원칙이 있다.








힌두교의 범아일여와 윤회사상에 대하여



<우파니샤드>는 우주의 본질과 인간의 자아에 관한 동양 최초의 깊이있는 탐구의 산물이다.


힌두교의 가장 큰 특징은 우주와 인간을 하나로 여기는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이다.

여기서 범梵은 우주의 보편자로서의 브라흐만, 아我는 개별자로서의 아뜨만을 가리킨다.

인간과 우주는 소우주와 대우주의 관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범아일여사상에서는 우주 전체의 근원인 브라흐만이 곧 아뜨만이기 때문에, 아뜨만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우주 전체

와 소통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라고 한다.


또한 우주가 끝없이 순환하고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듯 인간 역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재생으로 이어진다는 윤회사상

은 힌두교뿐 아니라 불교 등 인도에서 발원한 종교와 사상체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인도인들은 생명이 끝없이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를 믿었으며, 세계는 끝없이 순환한다고 본다.


그에따른 힌두교의 또다른 특징은 모든 것이 나타났다가 곧 사라지는 이 세계를 본래 무상하고 끝없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보면서 생명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설정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범아일여에 대한 ‘깨달음’이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추는 신神적인 일을 한다.

범아일여를 깨달아 자아와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순간 인간은 고통스런 윤회에서 벗어나 근원적인 해방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자유를 얻은 채로 자타 구별이 없는 전체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고 하며,

이것이 바로 힌두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다.


인간은 우주의 근원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육체에 갇힌 제한적 존재가 아니며, 진정한 행복과 자유는 자신의 참된

자아를 이해하고 깨닫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이같은 <베다> <우파니샤드>의 교리는 인도인들을 자유와 깨달음으로 이끄는 삶의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먼저 힌두교의 범아일여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범梵, 즉 브라흐만을 이해해야 한다.

만물은 제각각 다르지만 그 근원은 하나로 통일되는데 그것이 바로 브라흐만이다.


따라서 브라흐만은 만물을 낳는 원인이자 기체인 신과 비슷한 개념이나, 그보다는 만물의 근원으로서 만물을 산출

하는 노자의 도와 비슷한 것이다.


노자의 도와 만물 사이에 차별이 없듯이 브라흐만과 만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별이나 위계가 없다.


아울러 범아일여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我’를 이해해야 한다. 브라흐만은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 인간에게도 존재하는데, '인간에 깃든 브라흐만'을 아뜨만이라고 한다.


아뜨만은 생명의 본질이며 근원이다. 아뜨만은 개별적 존재로서의 내가 어떤 경험을 할 때 그 경험의 바탕이 되는

이며, 무엇인가를 의식할 때 그 의식의 바탕이 되는 것, 한마디로 말해 참된 나 또는 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나는 수없이 변화를 만나지만 그 가운데는 영원히 변치 않는 본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의 아뜨만이라는 것이다.


아뜨만에 대한 설명에서 인도철학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모든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로서의 자아’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나온다. 그러나 그 실체는 여전히 영원히 변치 않는 본질을 가진 어떤 신적인 것이었다.


만물 안에는 외적인 변화에 관계없이 언제나 영원히 존재하는 참된 존재로서의 아뜨만이 존재하며, 나 자신도 근원

적 존재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참된 존재로서의 아뜨만은 나의 참존재이기도 하다.


<우파니샤드>는 나의 아뜨만이 곧 우주의 브라흐만이며, 따라서 집착이 불러오는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길은 우주 전체의 근원인 브라흐만과 나의 참된 존재인 아뜨만이 같은 것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인간이 병과 죽음에 휘둘리는 나약한 존재로 살아가다 죽는 것은, 자신이 위대한 아뜨만의 존재이며 또 모든 존재의

근원인 브라흐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네가 바로 그것이다.’ 즉 브라흐만과 아뜨만이 하나라는 점이 <우파니샤드>가 가르치고자 한 핵심사상이다.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불멸의 아뜨만을 깨달음으로써, 그리고 내 안의 참된 존재 즉 아뜨만이 브라흐만이고 브라흐

만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더 이상 사람은 고통 속에서 윤회를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우주의 보편자인 브라흐만으로써 모든 개별자를 설명하는 이같은 형이상학은 아무리 읽어도 좀처럼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 원인은 이들의 주장이 현대적 감각으로 전혀 이해가 안되기 때문이다.


힌두교의 범아일여사상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어떤 하나의 ‘일반성’을 통해 우주만물을 설명하려고 하는 수많

은 고대의 형이상학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다.


즉 거기서는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않고 어떤 하나의 우주의 근원이 물질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생명의 원인

이기도 하며 인간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런 사상에는 공통적으로 “물질이나 동식물을 지배하는 법칙은 인간에게는 결코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라는 ‘상층구축관계’가 완전히 무시되어 있다.


그리고 층구조간의 상층구축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하나의 근원으로 우주만물을 설명하려는 사상은 물질의 원리로

써 ‘생명’을 설명하려 하고 생명의 원리로써 ‘인간’을 설명하려 하는 철학상의 중대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우파니샤드>를 자기 철학의 뿌리로 삼은 쇼펜하우어에서 보듯이 물질과 동식물에 적용되는 원리를 그대로 ‘인간’

에게 적용하려 할 때 그것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악영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일반성과 개별성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과학적인 방법이 있다.

그것은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라고 정의되는 ‘실체’에 대한 정의로부터, 현상을 통해 그 원인이자 기체로서 체계적

으로 입증되는 것에 대해서만 그것을 낳는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 즉 일반성의 지위를 인정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이제 일반성과 개별성의 관계는 우주만물의 개별성을 낳는 원인이자 기체가 ‘이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현상을 통해 뒷받침되는 실체에 한해서만 실체로서의 지위를 인정하는 엄밀한 방식으로 정리되

어야 한다.

물질의 현상과 생명의 현상은 차원이 다르다. 즉 물질은 영원히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지만 생명은 중력

의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우주 속 유일한 존재다.

생명의 현상과 인간의 현상 또한 차원이 다르다. 생명의 본질은 본능이지만 인간의 본질은 ‘본능으로부터의 자유’로

서의 정신이다.


따라서 물질을 낳는 ‘일반성’으로써는 생명을 설명할 수 없고, 인간을 설명할 수 없다.


범아일여사상에서 발견되는 또다른 문제점은 ‘영원히 변치 않는 본질’로서의 아뜨만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즉 만물 안에는 외적인 변화에 관계없이 언제나 영원히 존재하는 참된 존재로서의 아뜨만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영원히 변치 않는 본질의 속성이 아니라 끊임없는 성장, 변화 속에서도 개체 고유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잃지 않는 ‘실체’의 속성으로써 설명되어야 한다.


특히 인간의 경우 매개적이고 반성적인 자기의식을 갖고 있어 자신의 현상을 통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변화

하면서도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유지하는 자아는 인간의 본질인 정신적 실체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본질’과 ‘실체’는 구분되어야 하며, 철학은 이제 영원히 변치 않는 ‘본질’로써 생명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설명

하려는 고대적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본질과 실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는 그들이 아뜨만을 설명하기 위해 보리수나무 열매나 소금물을 사례로 드는

것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범아일여사상에 의하면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들도 아뜨만을 갖고 있는데, 예컨대 보리수나무의 열매를 계속 작게

쪼갠다면 점점 더 미세한 것만 남게 되는데 커다란 보리수나무가 이 미세함으로 이루어진 것이듯,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이 아주 작고 미세한 존재, 보이지 않지만 미세한 존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자기의 아뜨만이라는 것이다.


또한 소금을 사례로 들어 물에 녹은 소금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소금은 물의 모든 곳에 존재하듯이 참된 존재 역시

볼 수 없지만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라며, 아뜨만 만이 참된 존재이고 모든 것이고 바로 너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물질인 소금물에 대해서는 ‘그 본질이 소금이다’고 정당하게 설명할 수 있으나, 생명인 보리수나무와 열매와

의 관계는 미세하게 쪼개서 발견되는 어떤 불변하는 본질이 아니라 현상과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와의 관계로써 설명되어야 한다.


본질로써 실체를 설명하려는 오류는 우파니샤드뿐만 아니라 플라톤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에서

보듯이 동서양의 고대적 사유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편 현재의 행위는 심어진 씨앗과 같이 미래에 반드시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서 인간이 죽으면 자신의 행위에 따라

소나 돼지, 귀족이나 천민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고대 인도 특유의 윤회사상은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고체계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거기서 현세의 의미는 다음 생을 위해 덕을 쌓는 과정으로 전락하며, 사람들은 현세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현재

자신들의 삶에 문제의식을 가질 수가 없게 된다.


현세 그 자체의 의미를 부정하고 다음 생애의 보다 나은 삶이나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삶의 목표로 제시하는

윤회사상은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피지배계급이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할뿐만 아니라,

나아가 피지배계급으로서 덕을 쌓고 자기 삶에 대해 책임지는 윤리적 존재까지 요구할 수 있는 정교한 장치이다.


윤회사상은 인도 지배계급이 카스트제도를 뒷받침하기 위한 사상적 무기였으며, 그것이 카스트라는 최고의 계급제

도를 가진 고대 인도에서 윤회사상이 태동된 근본 배경이었고, 카스트제도가 폐지된 오늘날까지도 인도인들이 빈부

격차가 극심한 자신들의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핵심장치로써 역할하고 있다.


윤회사상은 결코 경험을 통해 검증될 수 없는 미신적 측면은 물론이거니와 앞에서 언급한 존재의 층구조를 완전히

무시한 고대적 사유의 산물일 뿐이다.


만물의 생성소멸을 근거로 인간의 생명을 당연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삶의 목표로 설정하는 것은 한 마디로 현실도피의 ‘전도된 철학’이다.


인간과 우주를 하나로 여기는 사상이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은 우주 전체의 근원인 브라흐만이 곧 아뜨만이고, 아뜨만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만물의 사물들이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을 우주 전체

와 소통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로 이끄는 사상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을 동물과 물질로 환원시키는 사상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범아일여사상은 인간을 우주 전체와 소통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로 상승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물질과

동물의 수준으로 하락시킬 근본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범아일여를 깨달아 자아와 대상에 대한 집착과 윤회에서 벗어나는 순간은 실은 해탈의 순간이 아니라 인간

의 정신이 물질과 동물을 낳는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이다.


거기서 인간을 기다리는 것은 모든 생성과 소멸에서 해탈한 환희의 감정이 아니라 영원한 물질의 법칙과 음습한

본능의 법칙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범아일여의 깨달음을 통한 해탈을 삶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되며, ‘존재의 층구조를 구별하여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의 도에 대한 깨달음을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우주가 끝없이 순환하고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듯 인간 역시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윤회사상

의 모든 오류를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동물이나 물질로 폄하하는 사상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유물론이나 진화론, 생철학처럼 인간을 동물이나 물질로 끌어내리는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힌두교처럼 인간

의 아뜨만을 불멸의 신적 위치로 끌어올릴 뿐 아니라 다른 생명들은 물론 물질에까지 아뜨만이라는 신성을 부여하여

신적인 위치로 끌어올리는 사상이다.


따라서 힌두교는 언뜻 무해하고 어찌보면 모든 존재를 신적인 위치로 끌어올리는 고상한 사상인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정교하게 '상대주의'를 뒷받침하는 사유체계이다. 


거기서는 인간과 물질이나 다른 생명들과의 '존재의 층구조'가 무시된다.


이같이 인간과 다른 생명들, 그리고 물질의 '존재의 층구조'를 무시하는 모든 사상이 가치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상대주의의 중요한 원천이 된다.


<베다> <우파니샤드>는 긴 세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축적되어온 인도사상의 정수가 담긴 방대한 사상의 축적물

이다. 이렇게 형성된 다른 문명의 사상에 대해 비판한다는 것은 항상 부담스럽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세계관의 난립은 다양성 존중이 아니라 오히려 ‘정답은 없다’라는 상대주의의 빌미가 되므로 모든 시대는 당대까지의 과학과 철학의 성과를 모아 끊임없이 고대의 그릇된 세계관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불교의 핵심사상인 무아사상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육식을 금하는 불교의 생명존중사상과 승려들의 검소한 생활, 그리고 고행과 끊임없는 정진을 통한

깨달음과 법열을 추구하는 그들의 삶의 방식에 호감을 갖는다.


불교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깨달음과 자기 구원을 위한 수행의 종교이다.

오늘날 불교는 인도의 전통에 속한 민족종교가 아니라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가르침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위대한 불교의 핵심사상이 사태를 근본에서 들여다보는 철학과 크게 충돌한다.


불교는 기독교나 힌두교처럼 우주의 근원이나 시초를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비롯하

여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나게 되는 ‘고통’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에따라 불교에서는 힌두교의 브라흐만이나 노자의 도와 같이 우주의 시초나 근원을 설명하는 일반성의 원리가

없다. 불교는 인간의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 ‘집착’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원인분석이 정확해야 근본적으로 올바른 해법이 도출되는 법이다.

 


“집제는 괴로움이 왜 생기는지에 관한 진리다.

인간이 끝없이 괴로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에게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갈애渴愛라 부른다. 타는 목마름처럼 인간에게는 영원히 채울 수 없는 욕망이 있다.

갈애는 일차적으로 감각기관에 의해 발생한다.

보고 듣는 모든 것에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욕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욕구가 대상에 대한 집착을 낳는다. 따라서 이 갈애를 끊어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괴로움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탐욕을 버림으로써 갈애를 소멸시켜 집착이 없는 상태, 즉 열반涅槃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멸제滅諦이다. 열반이란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열반은 계속적인 수행을 통해 마음이 이를 수 있는 경지를 말한다. 열반을 체득한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부른다.

아라한은 온갖 욕망 특히 자신에 대한 집착을 끊고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존재를 일컫는 불교용어다.

열반을 체득한 아라한에게는 욕망의 세계와 물질세계 그리고 물질 없는 세계에 자신을 묶어두는 결박이라는

번뇌가 사라진다.


 

인간은 왜 괴로운가? 늙고 병들어서 고통스러운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붓다는 그 사람의 고통의 원인을 젊고 건강하던 시절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 자신을 영구불변하는 실체로 보고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이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해법으로서 ‘인생이란 본래 집착할 만한 것이 없는 허무한 것’임을 주장하기 위해 ‘자아를 해체하는

작업’에 주력한다.

 


“붓다가 진짜 중요하게 여긴 것은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어떤 것에 대한 질문이다.

불교에서는 현상의 배후에 영혼이나 자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를 ‘무아’ 또는 ‘공’이라고 한다.

무아를 문자적으로 푼다면 스스로 자기라고 주장할 자아가 없다는 뜻이 된다.

‘자성自性이 없다’는 말도 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자아’가 무엇인지에 따라 무아의 실질적인 의미가 달라진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아는 현대적 의미의 자아 즉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실체로서의 자아 개념과는 다르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아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다양한 경험들을 의미한다.

육체로서의 자신도 있을 것이고 감정의 주체, 생각의 주체로서의 자아도 있을 것이다.

국 무아란 내가 나라고 믿었던 것들, 즉 나의 육신, 나의 기억, 나의 욕심, 나의 기분, 나의 판단, 나의 의지 같은

것들이 여러 요소들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관념일 뿐이라는 의미가 된다.


경험의 근거로서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다고 믿는 여러 가지 ‘관념’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무엇으로 진정한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이 ‘오온五蘊’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라고 믿고 있는 것은 오온이라고 불리는 다섯 가지 덩어리의 일시적 결합에 불과하다.


 

힌두교에서는 생명의 영원불멸하는 본질이자 실체인 아뜨만이 존재하여 내 경험과 의식의 바탕이 된다고 보지만,

붓다는 현상의 배후에 영혼이나 자아 같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현상의 배후에 스스로 주장할만한 자아란 없으며, 경험의 근거로서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다

고 믿는 여러 가지 ‘관념’들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무아사상은 불교의 핵심사상을 이룬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다양한 경험들과 자아를 분리하기 위해 불교에서는 ‘오온’이라는 개념을 도입

한다.


불교에서는 몸이라는 물질적인 부분과 감각, 지각, 성향, 의식이라는 심리적인 부분으로 구성되는 다섯 가지 요소를 오온五蘊이라고 부른다.


싯다르타는 괴로움의 기원을, 자아란 오온이 결합되어 발생한 일종의 표면효과에 불과한 것임에도 오온의 다양한

경험에 불과한 것들을 인간이 ‘자아’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이라고 집착하는 데서 찾았다.


인간에게 자아란 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다양한 경험들이 있을 뿐이며, 우리가 자아라고 믿

는 것은 오온의 일시적 결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아를 ‘지각의 다발’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한 흄과 비슷한 입장이다.

즉 여기서는 인간은 ‘여기서는 이런 지각을 하고 저기서는 저런 지각’을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몸이 건강하였을 때 오온이 결합되어 나타난 자아를 자아 A, 그리고 몸이 병들었을 때 나타나는 자아를

자아 B라고 가정해 보자.


자아 A로 있을 때의 건강한 몸을 기억하고 있다면, 자아 B는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해 슬픔과 비탄의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의식’의 기능이다. 의식은 기억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육체적 상해를 입은 사람, 실연을 당한 사람, 부자였다 가난해진 사람, 권력을 잃은 사람이 고통의 나날을 보내

고 있는 이유를 그들이 모두 건강했을 때, 사랑에 빠졌을 때, 부자였을 때, 권력을 가졌을 때 과거에 구성된 자아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따라서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과거의 오온 상태에서 파생되어 나온 자아에 대한 현재의 집착을 무화시키

는 것밖에 없다. 이것이 싯다르타의 유명한 무아론無我論이다.


그러나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은 인간의 정신적 실체를 부정하고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우리가 ‘나’라고 믿고 있는 것은 오온이라고 불리는 다섯 가지 덩어리의 일시적 결합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생각과

행동과 관계 등 인간의 모든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를 이루는 실체를 부정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실체의 중요한 특징은 자신의 모든 현상을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자신의 현상’으로 연결지우는 긴밀한 통일성에

있다.


그러나 불교의 오온은 인간의 실체인 자아와 현상과의 긴밀한 통일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며, 고통으로부터의 해탈

을 위해 오히려 그 통일성을 해체하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신의 측면에서 자신의 현상과 자아를 연결시키는 실체의 힘이 없기 때문에 인격의 일관성과 통

일성을 담보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내가 나라고 믿었던 나의 육신, 나의 기억, 나의 욕심, 나의 기분, 나의 판단, 나의 의지 같은 것들은 여러 요소

들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관념일 뿐이며, 오온을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자아의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

다는 무아론은 인간의 주체적 자아로서의 실존을 위한 해법과 정확히 반대방향이다.


인간은 자신의 모든 현상에 대해 단 하나도 자기 것이 아니라고 회피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그것을 나의 육신, 나의

기억, 나의 욕심, 나의 판단으로써 자아와의 연결을 굳건히 할수록 본래적 자아로서 실존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

이다.


인간이 자신의 현상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거나 외면할수록 자기의식과 자각이 작동하지 않으며,

그에 따라 자신의 현상을 바로잡기 위한 의지가 작동하지 않게 된다.


현재의 집착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적극적으로 긍정해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자각과 동력이 생긴다.


따라서 싯다르타의 무아론은 인간을 본래적 자아로서의 실존과 멀어지게 하는 잘못된 사상이다.


싯다르타는 인간의 자아란 오온이 결합되어 발생한 일종의 표면효과에 불과하다고 설파했지만 인간의 자아는 오온

의 일시적 결합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아는 생각과 행동과 관계로써 현상하며, 자신의 모든 현상을 통해서 매개적으로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

이라는 자기의식을 형성한다.


인간은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어 자신의 현상에 의해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이 형성되는 존재이므로 나의

육신, 나의 기억, 나의 욕심, 나의 기분, 나의 판단, 나의 의지 같은 여러 요소들은 결코 자아와 분리되지 않으며, 그것

들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자 실체인 자아를 형성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그에따라 오온의 다양한 경험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와 긴밀히 결합한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자아란 게 있어 그것이 자신의 모든 현상의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그 현상을 통해서 다시 매개적으로 자기의식을

형성한다. 그런 자아로써 인간은 자신의 모든 현상과 경험에서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담보하며 살 수 있는 것

이다.


따라서 자신의 다양한 경험들을 오온의 일시적 결합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스스로 자기라고 주장할 자아가

없다고 주장하는 무아론과 공사상은 정확히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실체로서의 현대적 의미의 자아를 부정하는 사

상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영구불변하는 실체로 보고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에게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깨닫고 자신을

포함하여 생성소멸의 법칙 속에 놓여있는 세상만물을 관조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다고 해서 인간이 죽음의 고통

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이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마음이 괴로운 것은 사랑하는 사

람의 살아있을 때의 기억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은 잠시 동안 생존하다가 결국 사라진다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 그 자체’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그 ‘기억’은 버려야 될 집착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은 일시적으로 생존하다가 덧없이 사라진다는 사실

로 인해 고통 받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마음이 괴로운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은 죽음과 함께 영원한 물질로 되돌아간다. 내가 죽으면 ‘그나마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에라도 남을 것’이라는

것이 죽음 앞에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위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죽음이 초래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나마 나에 대한 기억을 집착이라고

규정하며 의식적으로 지우려 노력한다면 이 얼마나 엉뚱한 사고인가?


고통을 ‘벗어나야 할 절대악’으로 간주하는 사고체계 자체가 오류다.

그것은 물질중심적 세계관과 아무런 고통이 없는 편안한 상태가 행복이라는 그릇된 행복론의 산물이다.


고통조차 인간이 실존을 위해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껴안아야 할 요소인 것이다.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싯다르타처럼 과거의 오온 상태에서 파생되어 나온

자아에 대한 현재의 집착을 무화시켜 인생의 모든 것을 집착할만한 것이 없는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 고통에서 벗어

나고자 하는 ‘현실부정의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는 여전히 절대적 가치를 갖는 인간으로서의 생명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이에 감사하며 죽은 사람들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면서 자신의 하루하루를 자신의

절대적 가치에 걸맞는 소중한 시간들로 만들어나가는 ‘현실 긍정의 방향’이다.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생명의 현실을 축복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생각하게 하며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면서 생명의 윤

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세계관이야말로 계급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 노예의 눈으로써 세상

을 보는 전도된 세계관이다.


인간에게는 다양한 고통이 있다.

그리고 각각의 고통의 종류에 따라서 해법이 달라서 일률적으로 하나의 해법을 제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노예계급의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그들에게 채울 수 없는 욕망이나 집착이 귀족들보다 더 많기 때문이

아니며, 또한 자유로운 신분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이 그들에게 해법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을 끊임없이 내면화시킴으로써 계급사회의 존속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뿐이다.


철학은 인간이 생명에 대한 수동성을 극복하고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생명을 축복으로 여길 수 있도록 도덕의 최고

원칙에 입각하여 객관적으로 정의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인간이 숙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고통은 회피하지 말고 겪어야 한다.

그것이 절대적 가치를 가진 존재로서 너무나 짧은 삶을 살다 간 사람에 대한 아직 남은 자로서의 예의일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은 생명의 유한성에 대한 절실한 자각을 통해 남은 자의 실존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죽음의 고통과 공포가 과거의 경험을 자아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무아론의 원천이 되어선 안된다.


그동안 인류가 겪어온 죽음의 고통은 죽음을 '생명'에 대한 이해를 통해 매개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자체로서 직접

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비롯된 절망이었다.


생명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죽음을 매개적으로 바라볼 때 인간은 비로소 "생명의 목적은 죽음에 있지 않다"는 생

중심적 세계관에 입각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잃어버린 건강이나 미모 등에 대한 집착으로 괴로운 경우에도 해법은 ‘내가 나라고 믿었던 것들은 오온의 결합에 의

해 만들어진 일종의 관념일 뿐’이라는 무아사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나마 생명이 남아있는 지금 자기가 가진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상성의 함정에서 벗어나 이 순간이 머지않아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영원히 물질의 법칙을

따를 뿐인 물질의 시간들보다 훨씬 행복한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 있다.


따라서 무아사상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성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고통에 대

한 근본적인 해법이다.


인간은 뻔히 눈앞의 현재를 보면서도 자신의 현재가 뭔지를 모른다. 인간은 지금 눈앞의 현재가 바로 자신이 ‘꿈에

그리던’ 소중한 현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생명, 건강, 가족, 평화 등의 인간의 ‘본래적 가치’에는 등급이 있다.

본래적 가치에서 한 등급 밑에 있는 사람, 예컨대 어떤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건강한 사람의 현재가 꿈에 그리는

미래다. 그것이 삶의 비밀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현재가 바로 아래 등급에 있는 사람에게는 꿈에 그리는 미래라는 사실과, 자신도 언제든 그

아래 등급으로 떨어지면 지금 자신의 현재가 영원히 꿈에 그리는 미래가 될 것임을 깨닫고, 자기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소중한 현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자신의 현재를 감사와 축복의 절대적 현재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가진 본래적 가치들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상성

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생명중심적 세계관에 도달해야 한다.


인간이 물질중심적 세계관에서 생명중심적 세계관에 도달할 때 비로소 일상성의 함정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행복의 중요한 원천으로 만들 수 있다.


잃어버린 재산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경우에도 그 해법은 과거의 자신의 경험을 집착으로 규정하며 부정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래서는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게 없고, 조금만 지나면 다시 집착이 되풀이된다.


인간에게 불교에서 ‘타는 목마름처럼 인간에게는 영원히 채울 수 없는’ 갈애渴愛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적극

적인 방법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매개적인 자기의식에 근거한 실존의 변증법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실존의 변증법에 의하면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이므로, 인간이 세계

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손해와 불편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을 염원하며 살아갈 때 그것이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켜 인간에게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욕구가 근본적으로 해소된다. 인간은 그런 자신에게

진실로 내면의 자긍심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도 과거의 경험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경험에 대한 집착을

자신의 것으로 적극적으로 긍정할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동력이 생긴다


인간의 고통은 자신을 영구불변하는 실체로 보고 자아에 집착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그릇된 행복론과 물질중심적

세계관에 젖어 자신이 가진 것이 뭔지를 모르고 자신의 생명을 당연시하고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현재를 불행해하는 인간의 ‘일상성의 함정’에서 근원한다.


겹겹이 둘러싸인 물질지상주의 이데올로기들과 현실에 영합하는 철학들이 이러한 일상성의 함정을 견고하게 떠받

치고 있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일상성의 함정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명의 현재를 감사하며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부족한 뭔가를 찾아 남과 비교하게 하는 욕망을 찬양하고 부추기는 물질중심적 세계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탐욕을 버림으로써 갈애를 소멸시켜 집착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불교의 수양방법이 여전히 영향력

을 갖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마음에 평안을 주는 방법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착을 버리기 위해 '자아'를 버리려는 불교의 시도는 전형적으로 ‘목욕물을 버리려다 소중한 아기까지 내다

버리는’ 오류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불교의 수양방법이 오류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집착으로 규정하면서 인생의 모든 것을 집착

할만한 것이 없는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무아론이 오류이다.


오히려 인간의 자아안에 욕망과 집착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이 숨어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관계를 비롯한 모든 현상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의 생각,

자아의 행동, 자아의 관계로써 적극적으로 긍정할 때 욕망과 집착을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동력이 생긴다.


실체의 핵심은 ‘통일성’에 있으므로, 인간이 과거의 기억을 비롯한 모든 자신의 ‘현상’과 자신의 ‘실체’인 자아와의

통일성을 굳건히 할수록 인간은 반성적 자기의식이 원활히 작동함으로써 본래적 자아로서 실존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정신적 실체인 자아의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이용하여 실존의 변증법을 중심으로 자아의 실존을 위해

손해와 희생을 무릅쓰고 세계와의 올바른 관계정립을 도모함으로써 인간은 근본적으로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불교는 집착을 버리기 위해 자아와 실체를 버리려는 엉뚱한 시도를 중단하고 근본적으로 물질중심적 세계관

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무아사상이 공격 당하면 자신들은 ‘근대적 의미의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그렇

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나’라고 믿고 있는 것은 오온이라고 불리는 다섯 가지 덩어리의 일시적 결합에 불과하다는 무아사상은 현상

과 실체와의 긴밀한 ‘통일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이며, 따라서 정확히 인간의 모든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를

이루는 정신적 실체인 ‘자아’를 부정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생명중심적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의 ‘자아’는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우주의 중심점이다.


칸트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처럼 감각과 인상을 수동적으로 모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에 시공간의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자아라고 믿는 것은 오온의 일시적 결합에 불과하다"라며 정신적 실체인 자아를 부정하는 불교의 무아사상

은 인간을 감각과 인상을 수동적으로 모사하는 존재로 간주하는 과거 경험론의 상식적 세계관의 일종이다


그러나 신비로운 인간의 실체에 주목하지 못하고 계속 실체부정에 빠져들 경우 세상의 핵심이자 주인공을 놓치게

될 뿐만 아니라, 문제의 근본적인 해법을 간과하게 된다.


싯다르타는 인간이 욕망에 따른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나’에게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설파하면서 ‘나’라는

자기중심주의에서 물러서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고집하고 붙들 자아가 없다는 선언은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자신에게는 여전히 절대적 가치를 갖는 인간으로서의 생명이 남

아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이에 감사하는 생명중심적 세계관에서는 자아는 부정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긍정된다.


물론 실존을 위해 욕망과 집착은 배제되지만, 나의 일거수 일투족 자신의 모든 현상이 자아의 호흡, 자아의 발걸음

으로써 자아와의 연결이 굳건해진다.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조차 ‘자신의 소중한 경험’으로 적극적으로 긍정된다.


그에 따라 순간순간 자신의 모든 현상을 자신의 것으로 긍정하며, 자신의 생명의 순간들에 감사하게 된다.



(태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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