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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인문

철학의 딜레마 (4) - 현실로서의 이상 규정자 .칸트.쇼펜하우어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6.07.18|조회수109 목록 댓글 0



'현실'로써 '이상'을 규정하려 한 철학자들



장자는 ‘길’는 사람이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 걸어 다녀서 생긴 길이 곧 ‘사람이 마땅히 걸어가야 하는 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철학사에는 대단한 천재로 알려진 사람 중에 올바른 도덕이나 이상으로써 현실을 지도, 혹은 인도하려 하지 않고,

거꾸로 현실로써 도덕이나 이상을 규정하거나 규제, 혹은 재갈을 물리려 한 웃지 못할 오류가 종종 있어 왔다.


그러나 현실을 지도해야 할 도덕을 현실을 통해 규정하려는 것은 지극히 우매한 시도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규정했다.

그 근거로써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서두에서 “모든 기술과 탐구, 모든 고의적인 행위와 추구는 그 목표가 어

떤 ‘좋음’을 달성하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이란 모든 것이 목표로 삼는 것이라는 견해에 찬동해도 좋을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기술과 탐구는 주로 실용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모든 기술과 탐구, 모든 고의적인 행위와 추구의 목표

가 어떤 ‘좋음’을 추구하는 것을 보니 그 ‘좋음’이야말로 모든 것의 목표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상으로써 현실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현실로써 이상을 규제하려는 어리석음이 밑바탕

에 깔려 있다.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나 자긍심으로써 실존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행복이 바로 인생의 목적

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이자 그의 철학의 출발점이 이렇게 도출된 것이다.


그에따라 아리스토텔레스를 존경해마지 않던 서양문명 전체가 그를 철석같이 믿고 그가 제시한 행복의 길을 따라

갔다.


또한 철학사에서 이례적인 천재로 칭송 받는 스피노자조차 그의 철학책 <에티카>에서 “그러므로 이상의 모든 것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진다.

즉 우리는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향하여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라고 주장하는 터무니없는

오류를 범한다.


이와 똑같은 실수가 영국이 자랑하던 천재적인 공리주의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에게서도 발견된다.


‘모든 가치를 하나의 저울로 계량하려 한다’라는 벤담의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해 밀은 벤담을 옹호하기 위해 공리주의자들이 ‘저급 쾌락’과 ‘고급 쾌락’을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썼는데, 그렇다면 어떤 쾌락이 질적

으로 더 우수한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밀은 간단한 실험을 제안한다. “두 가지 쾌락이 있을 때, 그 둘을 경험한 사람들 전부 또는 거의 전부가 어느 하나를 절대적으로 좋아한다면, 어느 것을 좋아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 따위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더 바람직한 쾌락이

.라고 말했다.


(어떤 행위가) 바람직한 무언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실제로 사람들이 그것을 바란다는 사실뿐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은 실제로 사람들이 그것을 바란다는 사실에 달렸다’라는 밀의 이 주장이야말로 웬만한 바보도 빠지지

않는 오류다.


‘사람으로서의 도리나 의무’가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이 바라는 것’에서 도덕의 원천을 구한 것에서, 우리는 아무리 천재일지라도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하는 사례를 본다.


철학사에서 대단한 천재로 알려진 이들 철학자들의 해프닝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만약에 사람들이 실제로 걸어가는 것, 추구하는 것, 혹은 바라는 것, 욕구하는 것이 도덕의 원천이라면 우리는 도덕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상적인 도덕사회에 도달했을 것이다.


인간이 현재 그렇게 하고 있는 ‘현실태’를 통해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최상의 상태인 ‘가능태’를 규정하려는 이

같은 철학의 시도들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폐해는 그 어떤 것보다 크다.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라는 칸트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한가?



필자가 대학 다니던 시절만 해도 칸트와 헤겔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서양철학의 양대 산맥이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오늘날 헤겔의 시대는 저물고 서양철학의 중심축은 확실히 칸트 쪽으로 기운 것 같다.


인식의 원천을 경험에서 구한 영국의 경험론자 흄은 ‘경험 없이는 인식도 없다’라는 입장을 철저히 밀고 나아가,

“그렇다면 절대적으로 확실한 기초 위에 서 있는 인식은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A B의 원인이다’와 같은 주장이 B가 항상 A 이후에 발생한다는 다양한 관찰과 경험들에 기초한다면, 그러한

주장은 결코 엄밀하게 증명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경험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과학의 확실성’조차 의심했던 흄의 회의주의다.


그러나 칸트는 흄과 반대로 ‘A B의 원인이다’라는 주장의 확실성은 증명될 수 있다고 믿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형식’과 지성의 능동적인 작용을 위한 ‘개념형식’인 범주를 경험에 앞

서 ‘선천적으로’ 갖고 있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이 경험을 통해 ‘인식 대상’을 담는 틀이고, 범주는 개념을 통해 지성이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틀이다.


직관은 수동적, 수용적이고 개념은 능동적, 자발적, 구성적이다.


칸트의 유명한 명제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는 말에서 ‘직관’은 쉽게 말해 경험에 해당한다. 요컨대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유는 내용이 없어 공허하고, 지성의 능동적 활동에 따른 개념이 없는

경험은 아직 틀과 형식으로써 정리되지 않아 맹목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경험론은 기본적으로 사진기와도 같은 ‘모사론’의 입장으로서 대체로 상식에 부합되지만 흄과 같이 경험론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보편적 진리를 부정하는 회의주의로 흐르기 쉽다.

같은 것을 놓고서도 나의 경험과 너의 경험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같은 것에 대한 나의 경험이라는 것도 때에 따

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론은 '주체가 대상을 향한다'는 대상 중심의 관점이었기 때문에 회의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반면에 합리론

은 경험을 도외시하고 '명석판명'한 실체와 인식을 추구했기 때문에 독단으로 치우치기가 쉬웠다.


그리하여 칸트는 이러한 양자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주체가 대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주체로 향한다

라는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주장했다.


인간의 ‘인식내용’은 경험으로부터 얻을 수밖에 없지만 인간의 ‘인식형식’은 본래부터 갖고 있는 선천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경험을 인식의 재료로 삼되, 경험과는 상관없이 타고난 인식형식을 통해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알 수

있다.

파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파랗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공간과 시간은 ‘아 프리오리'(a priori)한 필연적인 표상, 즉 모든 감성적 직관에 ‘앞서’

있으며 감성적 직관을 비로소 ‘가능하게 만드는’ 표상이다.


따라서 칸트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관적’인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이 사물들

을 바라볼 때 선천적으로 수반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똑같은 안경을 쓰고 있고 또한 이 안경은 변치 않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

타나는 세계는 법칙적 성격을 띤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에 기초를 둔 수학과 ‘공간’에 기초를 둔 기하학에서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심리학 등 현대과학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각과 동물의 지각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 핵심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주관적 시간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은 세계에 시간이라는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

이며 우주의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이 있다.


즉 감각직관을 할 뿐인 동물에게는 영원한 ‘현재들’이 있을 뿐 ‘시간’, 즉 과거와 미래가 없다.


반면에 인간은 시간을 선천적 인식형식으로써 갖고 세계에 시간이라는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7+5=12

라는 수학의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분석론’에서 ‘순수한 오성 개념’ 다시 말해 전반적인 개념적 인식의 틀을

만드는 기본 개념인 ‘범주’들을 다루면서 감성적 직관을 위해 발견한 해결책을 오성을 위해서도 사용한다.


우리가 세계를 지각할 때 함께 하는 ‘인식의 안경’에는 시간과 공간뿐만 아니라 우리가 개념의 도움을 받아 세계를

정리하는 방식도 속한다. 예를 들어 인과관계는 우리가 사물들에게 ‘부가’하는 어떤 것, 즉 우리가 소위 세계의 사물

과 과정에 대해 ‘투사’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보면서 ‘지금까지는 어떤 결과에 대해서 어떤 원인이 존재했다’라는 경험적 개연성에서 그치지 않고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어야 한다’라는 필연성에 대한 확신으로써 바라보는 이유가 그것으로써 설명된다.


즉 인간은 인과관계라는 범주의 파란 안경으로써 세상을 본다는 사실이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뒷받침한다.


순수 오성의 범주에는 원인과 결과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실체’와 ‘우연’, ‘단수’와 ‘복수’, ‘개연성’과 ‘필연성’ 등 12

범주가 이에 속한다.


우리는 이러한 범주를 가지고 사물에 있어 본질적 핵심과 변하기 쉬운 속성을 구분하고, 사물이 단수로 있는지 복수

로 있는지, 어떤 사실이 개연적인 것인지 필연적인 것인지를 비롯한 다양한 판단을 수행한다.


이에 대해 현대철학은 칸트가 인간의 개념과 판단을 이끄는 오성의 틀로서 제시한 12개 범주에 대해 대체로 ‘지나친 욕심’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으나, 인간이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이고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라는 칸트의 중심

사상을 이해한다면 현대철학의 입장은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미숙한 이해에 기인한다.


현대철학은 ‘과거에 근거한 현재’를 사는 인간에게 시대와 사회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무수한 관점이 성립한다는

점을 들어 칸트의 순수오성, 즉 범주라는 인간의 개념적 인식의 틀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칸트는 여기서

객관적인 자연과학을 뒷받침하는 인간의 보편적 인식구조를 다룬 것이다.


현대인들은 물론 과거의 조상들도, 문명인은 물론 아프리카 원주민들도 보편적으로 사물을 보면서 원인과 결과에

따라, 그리고 실체와 우연, 단수와 복수, 개연성과 필연성을 구분함으로써 개념을 형성하고 판단을 한다는 사실이

칸트의 12개 범주가 인간 오성의 선험적 형식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즉 “인식의 ‘보편성’이 바로 인식의 선험성의 일차적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순수이성비판>의 후반부 ‘선험적 변증론’에서부터는 칸트의 논증이 그리 엄밀하지 않다.


여기서 논증의 핵심은 과연 칸트의 유명한 명제, 즉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인가’에

있다.


현대철학의 후설은 인간의 직관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본질직관’임을 밝힌 바 있다. 즉 인간은 세상사물들을

보면서 이미 그 속에서 ‘불변하는 공통성’, 혹은 사물들에게 ‘그것을 빼면 더 이상 그것이 아닌’ 본질을 직관적으로

온전하게 파악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만약에 인간이 세상사물들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존재라면 ‘개념 없는 직관’은 결코 맹목적이지 않다.

본질이야말로 인간이 사물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핵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칸트는 선험적 변증론에서 “직관 없는 개념은 맹목적”이라는 것, 즉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유는 공허한 것임

을 증명하기 위해 신의 존재에 관해, 그리고 영혼 불멸과 자유의지의 존재에 관해 그것을 지지하는 훌륭한 근거 못지

않게 그와 반대되는 근거도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신이나 영혼, 자유 등의 개념은 시공간의 직관이나 오감을 통한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성이 그것들을 다룰

때는 경험으로써 검증할 수 있는 영역을 떠났기 때문에 점점 더 풀 수 없는 모순 속으로 얽혀 들어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생성에 있어 우리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점이 칸트의 새로운 인식이론의 핵심이다.

인식은 재료에 관한 수동적 수용도 아니고, 순수한 논리적 분석의 결과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외부 세계에서 받아들이는 인상이라는 측면과 인간이 자신의 인식 도구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인상에 부여하는 질서라고 하는 다른 측면이 합쳐지는 과정이다.

이러한 두 측면 가운데 어떤 한 측면만으로는 인식이 산출될 수 없다.


칸트에 의하면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며, 직관과 개념의 합주 속에서만 우리의

인식 세계가 생겨난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에 대해 확신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파란 안경을 쓰고 이 세계 자체의 ‘산출’에 관여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에 의해서 생겨난 인식의 세계를 칸트는 ‘현상계’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자체의 세계가 정말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칸트에 의하면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그리고 신이나 영혼과 같이 현상을 떠난 물자체나 자유의지 등의 개념은 ‘직관 없는 개념’에 해당한다.

우리는 인식을 넘어 ‘물자체’의 세계로 들어갈 통로가 없다. 오성은 현상계에 머물 뿐이다.

그러나 이성은 물자체의 세계에 대해서 묻는다. 그렇지만 이성은 현상세계를 초월해 넘어가기 때문에 결코 확실

한 결과에 도달할 수 없다.


칸트에 의하면 감성적 직관과 오성은 공동으로 우리의 경험세계의 생성에 기여하며, 그것들은 정당하고도 입증

가능한 인식들을 생산한다.

이에 반해 이러한 경험세계의 연관과 최종 근거를 묻는 이성은 이성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예를 들면 ‘신은 존재하는가? 인간의 자유는 존재하는가? 영혼 불멸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이성은 우리에게 어떠한 인식도 제공하지 못하며, 오히려 우리를 사변으로 잘못

인도한다는 냉철한 답변을 제시한다.


따라서 칸트는 고대 그리스에서 18세기까지 이르는 형이상학의 전통은 실패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형이상학을 신학과 밀접하게 결합된 것으로 보는 하나의 전통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최초의 운동자로서 그리고 세계의 제1원인으로서의 신에 대한 물음은 형이상학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지만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결코 신, 자유, 영혼 불멸에 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실적

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경험세계의 영역 안에, 즉 감성적 직관과 오성 인식의 영역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 변증론’에서 칸트는 과거의 형이상학과 신학 및 합리주의의 논거들과 논쟁한다.


칸트는 경험세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존재와 영혼 불멸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의 존재에 관해 그것을 지지

하는 훌륭한 근거 못지않게 그와 반대되는 근거도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른 바 ‘이율배반 논쟁’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이 활동할 수 있는 확실한 영역은 이전의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근본적으로 훨씬

작다.


칸트에 의하면 한 대상의 존재는 어떤 논리나 개념적 분석에 의해서 증명될 수 없다. 우리는 경험자료를 필요로 하며, 그러한 경험자료가 없는 신의 존재나 자유 혹은 불멸하는 영혼의 존재를 우리는 확실하게 추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우리는 세계의 현상에 대해서만 알 수 있을 뿐 인간에게는 ‘물자체’의 세계로 들어갈 통로가 없다"

는 칸트의 결론이다.


그러나 ‘현상세계를 초월해 넘어가기 때문에 결코 확실한 결과에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은 ‘신의 존재’나 ‘영혼 불멸’

등으로 엄밀하게 제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철학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경험세계의 영역 안에, 즉 감성적 직관에 의해 제한된

다’라는 칸트의 바로 그 결론에 근거해서 감성적 직관의 대상이 아닌 모든 형이상학과 도덕판단, 그리고 미적 판단을

철학의 영역에서 몰아내고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계 현상의 뒤에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로서의 자아물자체에 대해, 그리고 도덕의미의 세계에 대해서 결코 객관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 또한 “철학은 뉴턴이 자연과학에 도입했던 것과 같은 방법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의미하는 ‘뉴턴의 방법’이란 개별적 사례에 대한 관찰로부터 일반적인 법칙을 도출해내는 귀납적 방법을 의미

한다.


귀납적 방법은 개념과 판단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인식을 도출해내는, 따라서 일반자로부터 특수자를 도출해내는

연역적 방법과 대립적이다.


칸트에 따르면, 연역적인 논리적 분석만 가지고는 경험적 세계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형식적 논리는 사상누각이다.


그러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물자체는 현상한다"라는 헤겔의 명제다.


헤겔의 "물자체는 현상한다"라는 명제가 중요한 이유는, 세계는 ‘현상’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원인이자 기체인 ‘물자

체’가 짝을 이루어 쌍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생명현상을 보면서 현상만을 바라보고 그 생명현상을 가능하게 하고 그 생명현상에 일관성과 통일성을 뒷받침하는 원인이자 기체인 ‘물자체’ 혹은 ‘실체’를 하나의 쌍으로써 같이 보지 않으면 그 생명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그 현상의 예측가능성 또한 사라진다.


생명을 물질처럼 현상으로써만 바라보고 그 생명현상을 뒷받침하는 원인이자 기체인 생명의 실체’, 즉 ‘물자체’와

함께 보지 못한다는 점이 현대인들이 ‘우주의 신비가 생명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세계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머물러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생명현상은 현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이자 기체인 ‘물자체’와 짝으로서 존재한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중력의 법칙을 따르지만 오직 생명에서만 나무의 수액이 중력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위로 올라

간다. 그런 신비로운 생명현상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자 기체가 바로 생명의 실체’, 혹은 ‘물자체’이다.


따라서 식물조차도 실체가 존재하며, 인간의 실체는 ‘자아’이다.


확실히 생명의 실체나 인간의 자아는 ‘직관’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네모도 동그란 모양도 아니며, 무슨 냄새로써 구별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직관의 대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오늘날 상식적으로 자아의 실재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아나 생명의 실체는 ‘현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바로 ‘생명현상에 의해 그 존재가 입증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대상이 감성적 직관의 대상이나 감각 혹은 인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철학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면 형이상학의 핵심주제인 ‘실체’에 대한 이해에 영원히 접근할 수 없다.


인간의 실체인 '자아'나 동식물의 생명현상을 뒷받침하는 원인이자 기체인 '물자체'는 “경험적 세계를 떠난 어떤 것”

이 아니라 바로 “그 경험적 세계에 의해 존재가 뒷받침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뉴턴의 방법을 따라 개별적 사례에 대한 면밀한 관찰로부터 인간의 ‘자아’나 동식물의 ‘물자체’에 대해 귀납적 방법으로 그 존재와 함께 일반적인 속성법칙들을 도출해낼 수 있다.


현대철학이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라는 칸트의 명제를 근거로 감성적 직관이나 인상으로써 주어지는 대상이 아닌 모든 인식은 공허한 것으로써 철학에서 배제하고자 할 때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구성하는 정신의 5대 특성에 대한 이해도, 도덕의 최고원칙에 대한 이해도, 존재의 의미에 대한 이해도 불가능해

진다.


인간의 자아는 직관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현상에 의해 그 존재가 뒷받침되는 영역이며, 도덕판단 또한 가치의 원천이 희소성에서 근원한다고 할 때 ‘감각적 인상’이 아니라 물질과 생명, 그리고 인간의 절대적 희소성에 대한 매개

적인 ’비교판단’으로써 성립하는 판단이며, 아울러 미적 판단 또한 상당부분 인간의 본질직관능력을 토대로 성립하는

존재의 의미에 관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신의 존재’나 ‘불멸하는 영혼의 존재’는 개별적 사례에 대한 관찰로부터 그것을 입증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경험이나 관찰을 통해 신이나 영혼 불멸에 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이나 관찰을 통해 도달할 수 없는 인식의 영역은 가능한 한 최소화되어야 한다.


칸트 또한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이 과연 자유를 가진 존재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라고 주장하다가 나중에 <실천이성비판>에서 행위자의 자유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책임 또한 있을 수 없는데, “만약에 자유가 없다면 인간

에게 도덕적 판단능력이 있으며 책임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인간자신에 대한 자기 이해가 성립할 수 없다”라며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음이 분명하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인간의 자유 또한 인간의 도덕적 판단능력과 책임적 존재인 인간들의 개별적 사례에 대한 관찰로부터 그 존재가

입증되는 진리인 것이다.


현대철학은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라는 칸트의 명제를 통해 직관의 대상으로 주어지지 않는 실체나 도덕,

의미를 철학의 대상에서 몰아내고자 하나 “직관 없는 개념이 모두 공허한 것은 아니다”.


인간과 세계의 ‘의미’는 본질과 실체를 다루는 형이상학에서 도출되고 ‘가치’는 도덕철학에서 도출된다.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인간의 본질과 실체,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라는 도덕에 대한 물음에 답할 수

없으면 ‘인간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실존에 대한 물음에 결코 영원히 답할 수 없다.


인간의 본질 혹은 본래적인 자아가 뭔지 모르고 도덕이 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에 도달하여 인간으로서 자신

의 본질을 다하며 도덕적으로 실존을 누릴 수 있겠는가?


따라서 철학은 개별적 사례에 대한 관찰로부터 일반적인 법칙을 도출해내는 뉴턴의 귀납적 방법에 따라 스스로 어

떤 제한도 설정하지 말고, 세계와 인간 자신의 본질과 실체, 의미와 가치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발걸음을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개별적 사례에 대한 더 많은 관찰은 세계와 인간 자신의 본질과 실체, 의미와 가치에 대한 더 많은 이해로 연결되어야 한다.


칸트의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라는 명제를 이용하여 인간에게서 본질과 실체, 가치, 의미를 몰아내고자 하는 현대철학의 시도는 인간을 자신의 본질과 실체, 가치와 의미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기계의 톱니바퀴나 생산요소,

그리고 대중으로서의 정체성에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게 하고 영원히 ‘상대주의’에 묶어두려는 거대한 음모일 뿐

이다.



쇼펜하우어와 인도철학의 잘못된 만남


끝없이 보다 많은 뭔가를 추구하는 ‘욕망’은 인간을 지배하는 거대한 힘이다.

따라서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간의 삶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때때로 ‘철학의 아웃사이더’로 취급되면서도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있는 이유는, 철학사에서 이성에 가려져 단지 금기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인간의 욕망과 본능을 철학의 중심주제로서 탁월하게

다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본능과 욕망이 ‘은폐된 세계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모든 존재’의 뿌리는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비이성

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당시의 낭만주의 정신 속에서 인간존재의 어두운 면을 그 최종근거까지 파헤치려 한 염세주의자였다.


인간은 육체와 그로 인한 병, 고통과 죽음에 묶여 있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인간의 운명은 결함, 비참, 근심, 고통

과 죽음이다.


칸트가 ‘현상계’라고 했던 우리의 감각기관에 의해 경험되는 이 세계를 쇼펜하우어는 ‘표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말로 그의 관심을 끈 것은 가상적 실재 뒤에 있는 참된 실재였다.

플라톤은 이것을 이데아 속에서 보았고 칸트는 물자체라 일컬었다.


쇼펜하우어는 낭만주의의 대표자 괴테와의 토론을 통해 ‘생명의 다양한 모습 뒤에는 어떤 통일적인 힘이 있다’라고

하는 자신의 기본적 생각을 더욱 확고히 했다.


쇼펜하우어가 고대 인도의 철학서 <우파니샤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시 정점에 올랐던 낭만주의의 문화적

분위기 덕분이었다.


<우파니샤드>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경험하는 생성과 소멸의 세계를 ‘마야’로 나타낸다.

마야는 동시에 기만과 고통의 세계이기도 하다.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세계의 본래적인 기본 원리는 ‘브라흐만’, 즉 세계 혼이다.


그는 ‘마야’를 칸트의 현상계나 자신의 ‘표상’세계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브라흐만, 즉 모든 것을 관통해 있는 세계 혼 속에서 그는 칸트의 물자체를 보았다.


칸트는 물자체를 자세하게 규정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했다.

왜냐하면 칸트에 의하면 물자체는 우리의 인식능력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쇼펜하우어는 우파니샤드철학의 도움을 받아 이 ‘물자체’를 추적해가기로 결심을 한다.



“쇼펜하우어는 표상과 고통의 세계로부터 탈출한다는 것은 인간을 쉬지 않고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의지’로

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통찰하였다.

그는 의지 속에서 오랫동안 찾았던 물자체라고 하는 세계의 입구를 발견했다.

그러므로 이성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가 참된 실재로 인도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우리는 육체를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의학처럼 육체의 행태와 기능들을 외부에서 관찰하고 기록함으로써 우리는 객체로서, 표상으로서 우리의 육체를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육체를 욕구를 통해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의지는 배고픔, 목마름, 성적 욕구를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알린다.

나는 이러한 의지로부터 유추해서 다른 사람의 의지를 추론할 수 있다.

인간의 의지는 전체 자연 속에서 작용하는 보편적 힘과 에너지의 표현에 불과하며, 이것을 인도사람들은 ‘브라

흐만’이라고 표현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경험할 수 있는 개별적 의지와 유사하게 이 보편적 에너지를 ‘의지’라고

명명한다.

외적 경험, 이성인식, 그리고 과학의 세계는 ‘표상’이다. 그리고 모든 것 뒤에 있으며 오성의 범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참된 실재가 물자체, 즉 의지이다.

맹목적, 우주적, 보편적 에너지가 세계의 근거이고, 표상은 세계의 현상이다.


그와 동시대인이자 독일관념론을 대표했던 위대한 인물 피히테, 셸링, 헤겔이 아직 현실의 최종 근거로서의 이성

을 믿고 있을 때, 쇼펜하우어는 이 이성을 포괄적인 비합리적 의지의 ‘부수적 현상이라고 여겼다.

의지는 이성적으로 행하는 ‘세계정신’이 아니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의지의 결과로 고통이 뒤따른다는 이론으로 쇼펜하우어의 비합리주의는 염세주의가 된다.


 


칸트의 ‘현상계’를 쇼펜하우어는 ‘표상’이라고 불렀으므로, ‘표상이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경험세계를 말한다.


인간의 끊임없는 야만의 역사를 감안할 때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표상의 세계 뒤에는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참된

실재가 있으며, 맹목적, 우주적, 보편적 에너지가 그 참된 실제이고, 우리가 보는 표상은 그 참된 실재의 현상에 불과

하다는 쇼펜하우어의 설명은 막강한 설득력을 갖는 것 같다.


현상을 통해 그 원인이자 기체인 물자체를 파악하는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류의 역사를 결함, 비참, 욕망, 근심,

고통으로 볼 때 그것을 뒷받침하는 인간의 물자체는 필연적으로 맹목적이고 사악한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힌두교에서 ‘브라흐만’이라고 부르는 자연 속에서 작용하는 보편적 힘과 에너지의 표현에 불과하다”라는 쇼펜하우어의 기본사상은 물질, 동물, 인간으로 구분되는 ‘존재의 층구조’를 완전히 무시하고 인간

에게 동물의 피를 뒤섞으려 하는 근본적인 오류를 안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우파니샤드철학과 스피노자, 그리고 당시 낭만주의의 대표자 괴테의 뒤를 따라 “진실로 모든 것은 하나다”라고 주장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지배하는 ‘의지’를 설명하면서 손을 사례로 든다.


방금 나는 내 손이 주스 잔을 잡으려고 뻗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을 꼭 눈으로 보지 않고도 내 손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외부에서 내 손을 관찰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부로부터 내 손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따라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손을 움직일 때 손과 의지는 ‘동일한 실재의 두 양상’이라고 주장한다.

쇼펜하우어의 언어로 말하면 손은 “구체화된 의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손을 움직일 때 실제로 그것이 맹목적이고 목적과 합리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 우리의 손은 명백히 목적과 합리성으로써 움직인다.


여기서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과 관계로서의 현상 혹은 인간의 표상을 맹목적이고 분별없고 탐욕스런 갈망이자

무의미한 충동인 의지로써 설명하고자 한 쇼펜하우어의 시도는 산산이 부서진다.


그러나 “인간이라고 다른 동물들과 다르지 않고 모든 존재의 근원은 하나”라며 인간의 피와 동물의 피를 뒤섞으려는

이같은 사상은 진화론과 결합하여 현대철학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인간 또한 맹목적, 우주적, 보편적 에너지의 표상에 불과하다면 동물처럼 본능과 욕망이 인간의 본질이 되고, 이성

이나 객관적 정신, 도덕 등의 인간 고유의 특징들은 본능의 부산물로 전락한다.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찬양하는 현대사회의 조류는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성의 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기만적인 것이며 육체적 욕구 속에서 삶과 행위의 본래적 추진력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프로이트가 부각시킨 성의 역할은 ‘성은 생명을 위한 의지의 주요한 현상’이라고 파악한 쇼펜하우어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의지는 합리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의지는 맹목적이고 격렬한 투쟁이며 분별없고 탐욕스런 갈망이며 무

의미한 충동이다.

의지는 특별한 목적이 없다. 의지는 경험의 세계에서 자신을 먹고 마시며 그 향연은 소름 끼치고 섬뜩할 정도로

헛되고 고통스럽다.

인간의 삶은 오직 이것 아니면 저것을 얻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으로 규정되며 때로는 만족하는 순간도 있지만

대개는 절망한다.

의지가 자신을 가까스로 만족시키더라도 삶을 마비시키는 권태가 재빨리 자리잡고 의지가 다시 깨어나 또 다른

욕망을 충족하고자 한다.

쇼펜하우어의 시각에서 보면 삶이란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악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와 우파니샤드철학과의 만남은 잘못된 만남이었다.


쇼펜하우어가 삶의 본질을 고통으로 파악하는 순간 염세주의자로서의 그의 운명은 예정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현실이 축복이 아니라 고통일 뿐이라면 삶은 ‘극복해야 할 것’이 되고 힌두교와 싯다르타의 현실

부정의 사상으로 흐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철학은 고대, 중세 계급사회의 고통의 원인과 해법을 설명하는 과거의 사상으로 적합했을지 모르나 이성

과 휴머니즘정신을 중심으로 계급사회의 모순을 극복해 나가고자 하는 근현대의 사상으로는 부적합하다.


이성을 포괄적인 비합리적 의지의 ‘부수적 현상이라고 여겼던 쇼펜하우어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최종 근거로서의

이성을 믿었던 칸트나 헤겔이 여전히 인간의 미래를 위한 사상으로 적합하다.


인간은 정신을 본질로서 가진 존재다. 인간의 육체는 정신이라는 우주의 신비를 담고 있는 소중한 그릇이며, 인간의 신비로운 정신현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 내 혈관을 흐르고 있는 피와 100조개에 가까운 내 세포들에서

온 우주의 물질을 통해서는 단 한 개도 형성되기 어려운 단백질이 형성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내 혈관을 흐르고 있는 피와 내 몸에서 생성되고 있는 단백질들은 본능과 욕망의 존재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인간의 정신적 실체를 받들기 위한 것이다.


본능과 욕망의 삶은 ‘덧없음’으로 특징지어진다.


인간에게 동물의 피를 섞으려 할 때 ‘인간도 본능과 욕망을 추구할 뿐인 다른 동물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라는

인간에 대한 성악설이 도출되고, 더 나아가 ‘인간에게 선은 동물처럼 정직하게 본능과 욕망을 긍정하고 강함을 최고

선으로 추구하는 것이고, 도덕은 위선에 불과하다’라는 니체의 초인사상이 출현하는 근거가 된다.

전체주의라는 야만과 정치적 파국이 지배했던 20세기에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가 특별한 의미를 획득했던 것은 놀

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형태의 성악설은 계급사회의 이데올로기에 기여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사악하고 게으른 존재’라는 전제

하에서, ‘질서’와 ‘강제노동’와 ‘동원’을 위한 계급사회의 강제의 당위성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오류와 혼란의 근원은 “모든 존재의 근원은 하나”라는 쇼펜하우어의 명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은 생존의 역사에서 결함, 비참, 근심, 고통 속에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신적 실체인 인간이 생존의 역사에서 경험하는 결함, 비참, 근심, 고통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것’이지, 그것을 근거로 인간의 참된 실재를 동물처럼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는 브라흐만으로 포착한 쇼펜하우어

의 철학은 한마디로 전도된 것이다.


지금까지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생존의 역사에서 욕망을 극복한다는 것

이 그만큼 힘든 과제일 수밖에 없었던 인간을 상대로, 인간의 본질은 본능과 욕망이며, 이성이나 객관적 정신, 도덕

등의 인간 고유의 특징들은 본능의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쇼펜하우어의 분석은 한 마디로 완전히 전도된 것이다.


지금까지 물질중심적 세계관 속에서 끈질기게 인간을 지배해온 욕망 또한 생명중심적 세계관과 도덕의 최고원칙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렇게 인간의 현상에서 ‘극복되어야 할 것’을 인간의 본질적 현상’으로 포착할 때 인간을 경멸하고 비하하며 인간

을 불행으로 이끄는, 완전히 거꾸로 된 철학이 도출된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사회의 결함, 비참, 근심, 고통을 부채질한다.


다른 모든 동식물들은 본능적, 맹목적인 원천으로써 설명될 수 있지만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실체의

이성과 자유, 도덕, 실존을 설명하기 위한 또 하나의 원리가 필요하다.


인간으로서 자기 혼자만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욕망과 투쟁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면서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며 자긍심을 느끼면서 여한 없이 실존하고자 하는 의지와 욕망이 인간에게는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따라서 쇼펜하우어가 <우파니샤드>에서 ‘모든 존재’의 근원을 설명하는 ‘브라흐만’을 끌어와 ‘인간’을 규정하려 한 것이야말로 서양철학사상 최대의 실수에 해당한다.


모름지기 인간의 참된 삶을 위해서는 인간을 동물로 비하하는 철학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다움’이라는 ‘가능태’로서

실존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철학을 해야 하며,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극과 극이다.


그렇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끝없이 보다 많은 뭔가를 추구하게 하는 ‘욕망’의 거대한 힘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물질중심적 세계관과 가치관, 물질지상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


절대빈곤에 고통 받던 인류에게 산업화를 중심으로 ‘보다 많은 물질’을 절대선으로 여기며 그것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물질문명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물질중심적 세계관과 가치관, 이데올로기로 인해 인간이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동물적인 약육강식의 질서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이나 다른 가치를 생각할 겨를 없이 ‘보다 많은 물질’에

흠뻑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역사를 통해 과거에 배고프던 시절을 계속 되새기며 ‘보다 많은 물질’을 절대선으로 여기고 그것을 ‘행복으로

이끄는 길’로 여기는 한, 그것에 대단한 매력을 느끼고 다른 가치들을 한낱 ‘위선’으로 간주하는 한 끝없는 욕망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명중심적 세계관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가진 생명과 건강, 가족을 비롯한 본래적 가치들을 중심으로 자

신의 생명에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된다.


생명중심적 세계관이 '인간은 기본적으로 의식주로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하며, 따라서 생명중심

적 세계관이 바로 인간이 욕망의 거대한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한편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 뒷부분에서 충동과 욕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인간은 도덕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이기주의와 충동 규정성을 파괴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 현상하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관계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을 형성

하는 존재이므로, 세계 속에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관계가 이기주의와 충동과 ‘반대되는도덕적인 방향으로 현상

할 때 본능과 욕망의 존재로서의 자기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점차 소멸된다.


아울러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스스로 방향 전환을 하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째는 미적 경험 혹은 아름다운 것의 관조다. 훌륭한 예술을 체험한 뒤에는 평화와 일종의 정지상태가 찾아오고

우리 앞에 있는 것을 초월하는 느낌마저 든다고 한다.


이것은 도덕적 행위와 같은 원리이다. 즉 인간은 생각과 행동과 관계로써 현상하므로 미적 경험이나 아름다운 것의

관조를 자주 하는 사람에게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정체성이 형성된다.

그러나 생각을 통한 정체성 형성의 힘은 행동을 통한 정체성만 못하며, 행동이 어긋날 때 쉽게 흐트러진다.


두 번째 방식을 쇼펜하우어는 보다 고차원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금욕을 통한 모든 욕망의 소멸’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금욕속에서 신성함의 이상이 실현된다고 한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많은 사람들과 인도철학

의 현자들에게서 이 이상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동정과 금욕을 통해 ‘개별화의 원리’를 성공적으로 지양한다. 그런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의 사슬로부터 벗어나고 그것을 통해 의지의 맹목적인 에너지를 잠재운다.


그러나 ‘동정과 금욕을 통한 개별화의 원리의 지양’을 목표로 하는 것은 과도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는 불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체 부정의 사상이 깔려있다.


인간에게는 개별성이 핵심이며, 거기서 말하는 개별성이 바로 실존철학이 인간이 지켜야 할 핵심가치로서 제시하고

있는 주체성인 것이다. 따라서 그 개별성, 주체성을 무로 환원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철학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인간의 개별성을 지양하고 동물의 동일성으로써 인간을 설명하려 한 것은 세계의 본래적인 기본 원리

로서 모든 존재를 낳는 공통조상인 ‘브라흐만’을 상정한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욕망을 잠재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끝없이 보다 많은 뭔가를 추구하는 욕망에 대해 금욕을 통해 완전한 소멸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력’을 해칠 우려가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못하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활용

되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의지와 욕망’을 잠재우는 것이 과제여서는 안되고 ‘그것이 어떤 의지이고 어떤 욕망인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삶이란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악이다”라고 파악했기 때문에, 의지와 욕망

의 횡포를 탈피하기 위한 금욕과 이를 통한 모든 욕망의 소멸을 철학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차원의 욕망이 있다.


하나는 끝없이 자기 안으로 향하는, 이웃의 피해를 불사하면서 자신만의 생존과 본능,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자신의 욕망에 환멸을 느끼고 오히려 자신의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면서 세계와의 올

바른 관계를 정립하면서 여한 없이 실존하고자 하는, 세상 밖으로 향하는 의지와 욕망이다.


따라서 자신의 본능과 생존, 명예와 출세를 향한 욕구가 인간의 의지와 욕망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이제 그것은 정신적 실체로서 자신의 본질에 충실하면서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주체성으로서의 실존하고자

하는 의지와 욕망,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으로서 세계와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자기자신

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강렬한 ‘꿈’의 원동력으로써 활용되어야 한다.


그것은 정신적 실체로서 인간의 참된 생명력을 북돋우는 욕망이다.


인간의 삶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축복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존재가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우주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위대한 인간존재의 생명을 ‘빨리 이 고통스런 시간들이 지나가버렸으면...’하는 염세

적 인생관으로써 살게 하는 치명적으로 해로운 철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유한한 생명이 다하기 전에, 생명이 남아있는 동안 순간순간을 자신의 절대적 가치에 걸맞는 절대적 현재로 만들 수 있는 ‘참된 삶을 위한 철학’을 시급히 회복해야 한다.


인간은 비록 육체와 정신을 가진 존재지만, 인간의 본질은 육체나 본능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


그동안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지 못하고, ‘동물의 원리로써 인간을 규정하려 한 철학’이 인간의 인간관과 세계관,

가치관, 나아가 인생관에 미친 악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제 인간과 동물의 피를 뒤섞으려 한 어리석음과 그에 따른 세계관의 엄청난 혼란은, 물질과 생명, 인간의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할 줄 아는 철학적 사고를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





(태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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