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영혼의 물리학
1장: 물리학에서 철학으로
Chapter 1: From Physics to Philosophy
"... 사물의 본성의 깊이를 타진하려는 노력이 참으로 천박하고 미약하며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철학적 논의에서는 어떤 진술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려는 독단적인 확실성을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어리석음의 징표가 된다." ――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철학은 경이驚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끝에 가서 철학적인 사고가 최선을 다하고 난 후에는 경이는 남아 있게 된다."
―― 화이트헤드 사고의 양태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철학의 중요성은 주로 전문 과학들의 추상 관념들에 대한 비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철학은, 저마다 추상 관념들의 소규모 도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의 완성과 개선에 힘쓰는
여러 과학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 것이다. - 화이트헤드, 과학과 근대세계
그 대신에 철학자는 항상 추상적인 과학들(예를 들면,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심리학 그리고 사회학)를
그것들 사이에 내부적으로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우주에 내재하는 원형적 가치들에 대한 우리의
심원한 도덕적 직관들과 미학적 느낌들과 더불어 조화시키려고 하는 작업에 관여한다.
그래서 당연히 철학의 범위는 자연과학의 범위보다 더 넓은데, 왜냐하면 철학적 도식은 과학적 발견
물들을 통합해야 하는 한편으로, 또한 더 큰 정합성을 추구하기 위해, 즉 "종교과 과학을 하나의 합리
적인 사고의 도식 속에 융합시[키기]"[<<과정과 실재>>, p. 73] 위해 노력해야 한다.
결국 인류의 종교적 및 영성적 경험들과 관련된 데이터도 이 코스모스의 일부이다.
이 에세이를 저술하게 된 주요한 동기들 가운데 하나는 현대 과학적 우주론이 이론적 발달의 주전원적
단계로 이행되어 버렸다는 당혹스러운 인식―물리학자들은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이다.[<<과학과 근대
세계>>, p. 228]
이것은 최소한 일 세기 동안 그랬는데, 왜냐하면 과학에 의해 명시적으로 표명된 수학적으로 가장 아름
답고 경험적으로 예측 능력이 가장 좋은 두 이론(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이 여전히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그래서 우주의 궁극적 본성에 관한 양립 불가능한 두 시각을 제공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물질적 성분들과 근본 법칙들에 대한 현재의 통합되지 않은 과학적 가설들의 조립체는 현대 우주
론을 태양중심설 또는 진화주의의 중요성도 넘어설 실존적 중요성을 갖는 패러다임적 전환(이런 패러다
임들과 충돌하기보다는 포함할 필요가 있을 것이지만)의 직전에 처하게 만들었다.
화이트헤드는 이십 세기의 새로운 우주론적 이야기에 처음으로 입문한 사람들에 속했지만, 그의 전망의
참신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맥락 속에서 고대인들의 통찰들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 에세이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우주론을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양 자연 철학의
더 큰 역사적 궤적의 맥락 속에 위치시킨다.
또한 그것은, 전통적인 유물론적-기계주의적인 형이상학적 해석의 부적절성을 예시하는 동시에 현대
과학적 우주론의 여러 성분들―상대성 이론, 양자론, 진화론 그리고 복잡성 이론을 비롯한―과 그것들의
데이터를 인간 문명의 전제들과 통합하는 학제적 기획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적 도식의 적실성을
과시하기 위해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을 이런 이론들과 대화하게 만든다.
이런 데이터는 우주론적으로 영혼이 불어넣어진 해석을 몹시 필요로 하는데, 예를 들면, 물리학과 화학은
생물학이 궁극적으로 환원될 수 있는 분자들의 무의미한 운동에 대한 서술로 더 이상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 자체가 생물학적 규모 외에 생태적 규모들에서 살아 있는 조직체에 관한 연구가
된다.
그러므로 생태학―즉, 진화하는 유기체들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들에 관한 연구―은 물리학을 대체하여
자연과학의 가장 일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대략 1세기 전에 화이트헤드는, 물리학자들이 기계주의적 유물론이라는 낡은 상상적 배경을 그들 자신의
가장 최근의 우주론적 발견들에 비추어 재평가하기 시작하지 않는다면, 과학적 기획은 결국 "임시변통을
위한 가설들의 잡다한 집합으로 전락"[<<과학과 근대세계>>, p. 42]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19세기와 20세기의 개념적 혁명(예를 들면, 진화론, 상대성 이론, 양자론 그리고 복잡성 이론)에도 불구
하고, 과학적 유물론이 여전히 서양 문명의 사실상의 자연 철학이다.
그것은 우주를 다음과 같이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배치 구조 속에 들어 있으면서...환원시키기 어려운 단순한 물질...그 자체
로는 아무런 감각도, 가치도, 목적도 지니지 않는...외적인 관계에 의해서 부과된 일정한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과학과 근대세계>>, pp. 42-3]
궁극적 실재에 대한 그런 그림은 생명이나 의식에 대한 여지가 전혀 없다.
이런 형이상학적 간과는 (탈)근대 문명의 생태적 및 사회경제적 위기들을 초래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인
듯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민감하고, 가치를 추구하며, 목적에 의해 추동되는 인간 유기체들이 지구
에서 외계인처럼 느끼게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우리 문명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정합적인 자연 철학은 여전히 정착되어야 한다.
지금부터 여러 세기 동안, 역사가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그리고 새로운 우주상과 그것과 더불어 새로운
문명이 개화 중에 있다면, 20세기는 세계 대전과 광범위한 생태적 파괴뿐 아니라 혼란스럽게 만드는
과학적 발견들(상대성 이론과 양자론 같은)과 초래된 획기적인 기술적 발명품들(원자 폭탄과 마이크로칩
같은)로 돋보일 것이다.
일 세기 동안 우리 문명의 생각하는 수뇌들의 대부분이 기술과학에 의해 제공된 전시 영화와 전자 기기에
의해 주의가 산만해졌다.
이런 주의 산만 때문에 그들은 기계주의적 유물론의 철학적 비정합성을 간과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도록 역사적 기초 지식을 충분히 익힌 소수의 과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화이트헤드는 1925년에 "과학의 진보는 이제 전환기에 접어들었다"고 적었다.
물리학의 안정된 기초는 무너졌고...과학 사상의 낡은 기초는 그 의미를 잃어 가고 있다.
시간, 공간, 물질, [재료], 에테르, 전기, [메커니즘](mechanism), 유기체(organism), [배치]
(configuration), 구조, 패턴, 기능 등의 의미가 모두 새롭게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역학의 의미를 모르면서 역학적 설명에 대해 말한다면 대체 그것이 무슨 뜻이 있게는가?
... [과학은] 철학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과학과 근대세계>>, pp. 41-2]
기계주의적 유물론의 비정합성은 자연에 관한 우리의 이론적 지식을 우리의 윤리적 가치들, 예술적
기획들 그리고 영성적 열망들의 전제들과 조화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인류의 비근대적 우주론들의 어느 것과도 달리 지금까지 근대의 과학적 유물론은 인간 의식을 주변
코스모스와 분리시키는 형이상학적 이분화(bifurcation)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의식과 코스모스 사이의 이원론은 근대 과학적 우주론의 핵심에 놓여 있는 치명적인 단점이다.
화이트헤드의 과학 철학은 이분화라는 근본적인 오류와 더불어 그것의 따름 오류, 즉 잘못 놓인 구체성
(misplaced concreteness)이라는 오류의 광범위한 전개를 교정하려고 하는 시도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사실상, 근대 과학은 수학적으로 형식화된 기계적 모형들에 관한 추상적 지식을 위해 현실적 우주의
구체적 이행과 유기체적 통일성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희생했다.
자연의 이분화보다 화이트헤드의 비판적 주의를 더 차지한 오류는 전혀 없었는데, 이제 알게 되듯이,
애초에 그는 분리되어 버린 것들을 통합한다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수리물리학에서 벗어나서 전면적인
형이상학적 우주론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적는다.
"정합성은 합리주의적 건전성을 위한 강력한 예방약이다."
[<<과정과 실재>>, p. 56] 정합성이 없다면, 우주론도 문명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 과학적 우주론에서 더 큰 철학적 정합성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도적인 물리학자들이 철학
자들에 대해 점점 더 짜증을 내고 있다.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은 이렇게 적는다.
"기록된 역사가 시작된 이후 2500년의 대부분 시기 동안 철학자들은 중요했다..."
그들은 과학과 학문의 지성적 세계뿐 아니라 정치와 도덕의 실천적 세계에서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과거의 거인들에 비해 [20세기와 21세기의 철학자들은] 빈약한 일군의 난장이들이다.
..일반 대중에 관한 한 철학자들은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최소한 다이슨은, 철학이 다시 한 번 기꺼이 거대한 의문들을 제기하게 되기만 한다면, 철학의 미래 중요
성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
다른 물리학자들은 철학이라는 기획 전체를 노골적으로 일축하게 되었다.
"철학은 이제 죽었다"고 스티븐 호킹은 적는다.
왜냐하면 "철학은 현대 과학의 발전, 특히 물리학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위대한 설계>>, p.9]
마찬가지로 로렌스 크라우스(Lawrence Krauss)도 현대 철학의 대부분이 "지적 파산"[<<無로부터의 우주>>, p. 29]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리적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관장하는 실제적인 조작적 쟁점에 관한 한, 내 견해에 따르면,
고전 철학자들의 존재론적 규정들은 쓸모없다. [<철학의 위안(The Consolation of Philosophy)>]
호킹 및 크라우스와 마찬가지로 스티븐 와인버그(Stephen Weinberg)도 과학자들은 철학자들의 불평을
진지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지니고 있다.
자연 법칙은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고 물리학자에게 말하는 것은 먹잇감에 살그머니 다가
서는 호랑이에게 모든 고기는 풀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
[철학자들]의 도움이 있건 없건 간에 우리는 계속해서 [자연 현상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탐구]할
것이다. [<<최종 이론의 꿈>>, p. 48]
그런 비판들에 대응하여 먼저 화이트헤드는 우리의 현재 규정들이, 수리물리학의 언어로 표현되든 사변
적 형이상학의 언어로 표현되든간에, 아무튼 이미 체험적 실재의 분석에 응용할 수 있는 모든 낱말,
어구 또는 공식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가정하는 것의 위험을 잘 자각하고 있었다는 점을 언급해야 한다.
그는 이런 가정을 "완전한 사전의 오류(The Fallacy of the Perfect Dictionary)"[<<사고의 양태>>,
p. 235]라고 불렀다.
우리는 우리가 분석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주 전체를 경험하는 데 반해 우리가 의식적으로 분석해 내는 것은 우주에서
추출된 소수의 세부사실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고의 양태>>, p. 126]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철학자의 역할은 시인의 역할과 유사한데, 그것은 진행 중인 문명의 모험에 대한
보조 수단으로서 참신한 근본적인 관념들과 음성적 표현들을 도입하는 것이다.[<<사고의 양태>>, p.
237]
이것은 명백히 철학의 목적을 물리학의 목적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것으로 만든다.
그런데 내가 이 에세이를 저술하는 동안 분명히 설명하기를 바라듯이, 철학과 과학 사이의 소통 노선들이
여전히 개방되어 있고, 그래서 그것들이 상호적으로 서로 특징지울 수 있다는 것은 문명의 건강에 필수
적이다.
수리물리학자로 훈련받은 화이트헤드는 철학의 습관에 대한 비판만큼이나 그 자신의 분과학문의 습관에
대한 비판도 행했다.
그는 주로 전문화의 과정에서 비롯된 두 분과학문의 서글픈 상태를 비난했는데, 그 과정은 사회의 가장
명석한 정신들로 하여금 자기 분야의 조작적 추상 관념들 이외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이
없거나 존중하지 않는 편협한 전문가와 기술자들이 되도록 밀어붙인다.
19세기와 20세기 동안 이루어진 기술과학적 분과학문들의 파편적인 번영은 대체로 과거 철학자들의
시도와 유사한 거대한 통합적 시도를 단념시켰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적는다.
때때로 추상 관념의 한 도식이 한 시대의 지배적인 관심사를 표현하는 데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게
됨으로써 철학의 공헌이 완전히 빛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 [<<과학과 근대세계>>, p. 108]
철학과 과학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접근 방식들은 당대의 전형이 아니다.
타고난 통합자인 화이트헤드는 다양한 각도에서 동시에 그것들에 이르렀는데, 수학자로서 조화로운
패턴을 추구했고, 물리학자로서 자연의 근본적인 힘들을 서술하려고 시도했고, 실용주의적 교육자로서
실행 가능한 교육법을 탐색했으며, 낭만주의 시인들의 동지로서 우주에 내재하는 구체적인 가치들을
위해 추상화에 맞섰다.
현대의 해석자 이사벨 스탕제(Isabelle Stengers)에 따르면, 화이트헤드의 주요한 관심사는 바로
추상화를 벗어나는 모든 것을 시시하거나 하찮거나 감상적인 것으로 선언하는 추상 관념들의 참을
수 없는 역할에 대한 근대 과학의 저항 부족이다.
[이사벨 스탕제, <<화이트헤드와 함께 생각하기>>, p. 136]
앞에서 언급된 물리학자들에 의해 철학자들에 정향된 대부분의 적대감은 그들의 저항 부족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의식적 경험의 협소함을 둘러싸고 있는 불가사의한 깊이를 해명할 수 있는 추상 관념들의
힘에 대한 노골적인 찬사의 결과이다.
과학적 유물론에 의해 강화된 의기양양한 태도와 대조적으로 화이트헤드는 환원적 설명을 위해 자연
과학이나 철학을 참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철학하기는 "아직껏 말로 표현되지 않고 있는 심오한 지평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을
추구한다.[<<사고의 양태>>, p. 237]
철학의 목적은 불가사의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사물들의 광대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파악 및
이해력에 의한 감정의 부분적인 순화"를 추가하는 것이다.[<<사고의 양태>>, p. 230]
화이트헤드의 성숙한 우주론적 도식의 급진적인 참신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보조 수단으로서
과학사 및 과학철학에 관한 그의 초기 성찰의 핵심적인 특징들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 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바로 이런 성찰이다.
2장: 화이트헤드의 과학철학
Chapter 2: Whitehead's Philosophy of Science
"헬리오스가 더없이 아름다운 바다를 떠나 청동 하늘로
떠올랐으니 불사신들에게도, 양식을 대주는 대지 위의
필멸의 인간들에게도 빛을 안겨주기 위해서였다."
― 호메로스[<<오뒷세이아>>(천병희 옮김), p.67]
"신은 시각을 고안해서 우리에게 주었는데, 이는 하늘(우주)에 있는 지성(nous)의 회전들을 보고서
이것들을 우리 쪽의 사고(思考: dianoia)의 회전들을 위해 우리가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입니다." ― 플라톤[<<티마이오스>>(박종현, 김영균 옮김), p. 129]
"태양과 대기와 지구의 자전에 관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저녁놀의 광휘를 미처 간파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 화이트헤드[<<과학과 근대세계>>, p. 320]
호머 같은 고대 시인들에게 태양은 엄청난 영성적 의미를 갖춘 존재자였다.
일출과 일몰의 강렬한 아름다움은 코스모스를 추동하는 영속적인 도덕적 및 미학적 조화의 인상적인
전시를 낳았다.
플라톤 같은 고대 철학자들에게 태양은 마찬가지로 최고선의 징표였지만, 태양의 가시광선은 땅과 하늘을
흠뻑 적시는 색상들의 소나기에 대한 부분적인 원인일 뿐이라고 간주되었다.
눈에서 나오는 내부의 본체적 빛이 외부 세계의 밝은 현상에 참여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이런 내부의 빛이 태양을 활성화시키는 불과 동류의 정신적 불로부터 눈을 통해 부드럽게 밖
으로 흘러 나온다고 넌지시 주장했다.
그것은 햇빛(또는 밤에는 달빛과 별빛)을 만나 함께 결합하게 되어 우주의 아름다움과 장관을 낳는다.
[<<티마이오스>>, 45a-d]
플라톤의 설명은 자연에 관한 우리 지식에 대한 참여적 해설이었고, 그래서 영혼과 세계는 각각의 지각
행위에서 서로 혼합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플라톤은 시각을 감각들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 "우리에게 있어서 최대 혜택의 원인"으로 간주했다.
이는 우리가 별들이나 태양이나 또는 하늘을 보지 못했다면, 지금 우주에 관해 하고 있는 이야기들
가운데 아무 것도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낮과 밤이 관찰되고, 달들과 해(年)들의 회전 주기들이 그리고 춘분과 추분, 지일(至日)
이 관찰됨으로써 수를 고안하게끔 하는 한편으로, 시간의 관념과 우주의 본성에 관한 탐구 활동을
갖도록 해 주었습니다.[<<티마이오스>>, 47a]
플라톤의 우주론은 자연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지각적 경험들을 포함할 뿐 아니라, 코스모스 전체에
걸쳐서 작동하는 신성한 에로스(eros)를 느꼈고 영원한 에이도스(eidos)를 보았다.
순환하는 별들, 태양 그리고 달은 살아있는 신, 인류의 가장 현명한 스승으로 간주되었다.
유럽 역사에 대한 개관에서 화이트헤드는 플라톤을 지성적 발달의 첫 번째 위대한 시기―이후의 모든 서양
사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던 시기―의 중심에 위치시켰다.
주로, 대화편 <<티마이오스>>에서 가장 깊게 명시적으로 표명되어 있듯이, 플라톤의 우주론적 도식과
시각적 지각에 대한 설명은 1500년 이상 동안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다.
그의 참여적 전제들이 위대한 천재들의 두 번째 물결에 의해 거부된 것은 과학혁명이 한창 진행 중인 17
세기였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적는다. "1500년경의 유럽은 기원전 212년에 죽은 아르키메데스보다도 아는 것이
적었다."[<<과학과 근대세계>>, p. 23]
1500년경에 살아가던 사람의 공통 감각적 가정은 지구가 영원히 순환하는 천체들의 신성한 계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달 아래의 영역에서는 네 가지 원소들이 만물을 구성했다.
달 위의 영역에서는 훨씬 더 미묘한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화이트헤드는 계속해서 적는다. "1700년대에 이르러서는 뉴턴의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쓰
였고 마침내 세계는 근대를 향하여 당당한 첫발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과학과 근대세계>>, p.
23-4]
데카르트, 갈릴레오 그리고 뉴턴의 새로운 해석적 방법들은 영혼의 본체성과 세계의 현상성 사이의
결합을 끊고 자연을 별개의 두 가지 실체―연장된 물질과 지향적 정신―로 이분화하는 데 성공했다.
인류가 우주와 맺고 있는 관계(아니면 관계의 부재)에 대한 인류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변형되었다.
근대 물리적 과학의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삼백 년 후 21세기의 보통 사람은 여전히 아무 망설임도 없이
일몰, 태양 주변 하늘의 붉은 색조 그리고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짐에 따른 온기의 감퇴를 언급한다.
잘 훈련된 수리물리학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그런 사람의 상식은 잘못된 것인데, 태양은 지지 않고,
따뜻하지도 않으며, 주변 분위기는 붉지도 않다.
태양의 온기 및 색깔과 마찬가지로 일몰도 주관적 외양, 즉 자연의 사실이 아니라 우리 지각의 인공물일
뿐이다.
일차적인 물리적 특징과 이차적인 심리적 특징이라는 견지에서 자연의 이분화를 최초로 형식화한
갈릴레오는 이렇게 주장했다.
"살아있는 생명체가 제거된다면, 이런 성질들은 모두 지워지고 소멸될 것이다."
그것들은 코스모스의 고유한 본성이 아니라 의식의 임의적인 이름들에 놓여 있다.
내부의 영성적 빛과 외부의 물리적 빛의 관능적인 결합에 대한 플라톤의 통찰은 "하나는 추측이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꿈...두 개의 자연"에 관한 이원론적인 근대적 이론으로 격하되었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 유물론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사사로운 경험(꿈)과 그런 경험의 사사롭지 않은
원인으로 이론화된 자연의 추상적 모형(추측)을 대조시키게 되었다.
갈릴레오가 처음으로 행한 자연의 이분화를 좇아서 데카르트는 근대 과학적 유물론의 존재론적 및 인식
론적 기초를 멋지게 표명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 모형(케풀러에 의해 개선된)의 수학적 우아함에 의한 환영적인 지구중심적
코스모스의 소멸은 데카르트에게 감각적 지각은 과학적 목적에 대해 신뢰받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과학은 자연의 연장된 사물들(res extensa)의 메커니즘들에 관한 학문, 즉 길이, 너비, 높이, 질량 그리고
운동 같은 일차 성질들의 정밀한 수학적 측정에 의해 인도되는 학문이 되어야만 했다.
반면에, 종교는 영혼의 비현세적 실체를 형성할 책임을 유지해야 했는데, 그래서 우리 같은 실존적으로
괴로운 사유하는 사물들(res cogitans)에게 도덕적 지침을 제공했다.
색깔, 소리 그리고 맛 같은 이차 성질들은 실재의 원형적 차원들로 더 깊이 통찰하기보다는 외양의 쾌락을
고양할 목적으로 조합되고 재조합될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연출에 맡겨진다.
과학혁명 이후 개재하는 시기에 계몽주의의 이상을 지침으로 삼은 새로운 문명이 모든 대륙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세기 중엽에 과학적 유물론의 기계주의적 우주론에 의해 정당화된 산업 자본주의의 가치들이 서양
세계의 대부분에 영향을 끼쳤고, 그래서 농경, 제조, 교육, 건축, 수송, 통신 그리고 종교의 전통적인 형식
들을 영원히 변화시켰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적는다.
사회 조직에 관련된 모든 사상은 물질적 사물과 자본이라는 것에 의해 표현되었다.
궁극적인 가치는 거기서 제외되었다.
사람들은 그러한 가치들에다 정중하게 예의를 표하고 나서 그것들을 성직자에게 넘겨 줌으로써
일요일에만 문안 인사를 하는 정도로 끝냈다.
경쟁을 위주로 하는 상업도덕의 신조는 몇 가지 점에서 기이하리만큼 고양되기도 하였으나, 인간
적인 삶의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노동자의 노동의 공동 자원에서 끌려온 단순한 일손으로밖에는 간주되지 않았다.
하느님의 물음에 대해서 사람들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사람인가요?"라는 카인의 답변으로써
대답하였으며, 그 결과 그들은 카인의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과학과 근대세계>>, p. 325-6]
자연에 대한 인류의 기술과학적 지배가 정점(몰락의 시작이 아니라면)에 이른 오늘날, 문명의 모험을
안전하게 다음 새천년으로 인도할 수 있는 정합적인 우주론은 막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지식은 여전히 파편화되어 있고, 우리 사회는 자기 파괴와 세계 파괴의 문턱에서 비틀거리고
있다.
17세기에는 모든 무지에 대한 치유책인 듯 보였던 것이 그후에 저주가 되어버렸다.
우리의 기술과학적인 앎의 방식―주체와 객체, 사실과 가치, 의미와 물질의 이분화라는 형이상학적 가정
위에 구성된―은 지구 생명 공동체의 지속적인 현존을 위협한다.
1920년대 초부터 화이트헤드는 근대 과학과 산업주의를 심문했는데, 그것들을 일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일축해버렸던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 따져 물었다.
그는 묻는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스탕제에 따르면, 이 질문은 문명의 걷잡을 수 없는 행로에 대해 과학적 유물론을 책망하려고 하는
시도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한 방식으로, 우리를 다른 상황에 처하게 하는 방식―과거에 의해 규정된 대로가 아니라, 다른
한 방식으로 과거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을 방식―으로 우리 이야기들을 진술하기 위한 자원이다.
[<<화이트헤드와 함께 생각하기>>, p. 14]
화이트헤드는 자연 철학의 역사를 창의적으로 복구하고, 자연 철학을 자연에 관한 새로운 개념과 과학
활동에 대한 참신한 해석을 둘러싸고 구성되는, 그가 "유기체 철학(philosophy of organism)"으로 부
르는 것으로 전환시킨다.
과학의 과업을 객관적 실재에 이르기 위해 주관적 환영을 극복하기로 해석하는 대신에 화이트헤드는
자연을 달리 규정하는 사변적 위험을 무릅쓰는데, 꽤 간단히, 자연은 "우리가 지각 속에서 자각하는 것"
[<<자연의 개념>>]이 된다.
"지각되는 모든 것은 자연 속에 있다"라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우리는 고르고 선택할 수 없을 것이다."[<<자연의 개념>>] 자연에 대한 과학의 이해의 이런 재구성은
선험적으로 "참" 아니면 "거짓"으로 판정될 수 없다.
그것을 공정하게 판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수반하는 "상상적 비약"[<<과정과 실재>>, p. 53]를
취하기에 충분할 만큼 그것을 신뢰해야 하고, 그래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경험을 변환시키는지 보
려고 열렬히 기다려야 한다.
자연에 관한 화이트헤드의 새로운 개념의 진실성을 판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채택하고, 우리의
경험 세계에서 그것이 미치는 영향으로 실험하며, 현실적 삶의 가치들에 대한 그것의 적실성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화이트헤드 철학의 유물론주의자 적들은 우주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이분화되지 않은 이미지의 귀결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부정적 역량을 결여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화이트헤드의 개념들이 중요하게 만드는 것에 주목하기를 거부한다.
그 대신에 그들은 오래된 동일한, 서툴게 제기된 의문들과 서툴게 구성된 문제들(예를 들면, "뇌는 의식
을 어떻게 산출하는가?" 또는 "시공간은 어떤 모양인가?")의 한계 속에 여전히 갇혀 있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과 과학철학은 공간, 시간, 인과성 그리고 의식에 관한 참신한 개념들의 발명과
전개를 필요로 한다.
이런 개념들은 과학의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는데, 과학으로 하여금 자연의 이행에 있어서 구성 요소
들로서의 정량적 패턴들과 정성적 지각들 모두의 적실성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들은 과학적 유물론을 구체적인 경험을 추상적인 설명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부조리하고 논쟁적인
강박에서 해방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의 과학적 방법은 괴테의 "부드러운 경험주의(gentle empricism)"에 비견될
수 있는데, 괴테의 방법은 마찬가지로 기계적 설명들을 거부하는 대신에 자연과의 육화된 심미적
만남들에 직조되는 원형적 패턴들에 더 철저히 참여하게 됨으로써 자연의 이유들을 추구하는 접근 방식
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주장한다.
"자연에 관한 정식들과 자연 현상 간의 괴리는 그 정식들로 하여금 모든 설명적 성격을 상실케 해왔다."
[<<사고의 양태>>, p. 211]
화이트헤드의 새로운 유기체 철학으로 무장한 우리는 다시 물을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자연에 관한 화이트헤드의 개념과 더불어 그것이 어둠 속으로 물러나게 하는 것에 민감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 그것은 과학과 문명의 모험을 변형시키는가?
자연 철학의 과업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가치, 의미 그리고 주체성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자연의 이분화를 회피하는 것이라면 무엇이 중요해지는가?
우리가 그것을 신봉한다면, 자연에 관한 화이트헤드의 새로운 개념은 다음과 같은 점을 함축한다.
저녁놀의 붉은 광휘도 과학자들이 그 현상을 설명할 수단인 분자와 전자기파만큼이나 자연의 일부
이어야 한다.[<<자연의 개념>>, p. 29]
화이트헤드의 자연의 재규정과 더불어 과학의 과업의 재구성은 과학적 지식에 대한 한계의 부과로 해석
되지 말아야 한다.
그의 목적은 과학이 알 수 있는 것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과학 지식이
전제하는 것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자연을 "우리가 지각 속에서 자각하는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화이트헤드는 자연에서 "마음"(즉, 지각
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괄호 안에 넣는다.
이런 괄호 안에 넣기는, 뇌가 어떻게 마음을 산출하는가라는 이른바 "어려운 문제(hard problem)" 같은
서툴게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을 피하기 위해 수행된다.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즉시 과학을 형이상학으로, "지각되는 것과 지각하는 것"[<<화이트헤드와
함께 생각하기>>, p. 34-6]에 관한 성찰로 끌고 간다.
형이상학은 우리가 지각 속에서 자각하는 것을 넘어 자연의 본성을 탐구하고, 그래서 그런 의문들을
추구하는 것은 화이트헤드의 과학철학이 상세히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경험에 대한 결과를 낳는
사변적 내기를 무화시킬 것이다.
당분간 "인식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의 종합은 형이상학에 맡기자"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전면적인 우주론적 사변에 집중하게 되는 철학적 경력의 말년에 화이트헤드는 그런 형이상학적 쟁점
들을 다룰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초기의 과학철학에서 그는 경품, 즉 자연에 관한 과학적 지식에 대한
정합적인 설명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화이트헤드의 재구상된 관점에서 바라보면, 과학의 의문들은 "[과학으로 하여금] '마음'의 문제를 형식
화할 수 없게 만드는데, 왜냐하면 이런 의문들과 그것들에 대한 대답들은 마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와 함께 생각하기>>, p. 35]
과학은 자연을 아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러므로 자연에 관한 지식의 추구는 인식자, 즉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지식은 궁극적인 것이다.
지식의 "왜"에 대한 설명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지식의 "무엇"을 서술할 수 있을 뿐이다.[<<자연의 개념>>, p. 32]
과학이 자연에 관한 지식의 추구에 헌신하는 것이라면, 지식의 배후에서 더 근본적인 어떤 활동으로
그것을 설명할 방법 따위(예를 들면, 신경화학)는 있을 수 없다.
과학적 설명의 가능성 자체는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우리가 지각 속에서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마음을 괄호 안에 넣고자 한 화이트헤드의 결정은 자연을
일차(물리적-과학적) 성질과 이차(심리적-심미적) 성질로 이분화하고자 한 유물론자의 결정은 같지 않다.
과학을 "해명하는 영웅적인 위업"을 통해서 공통 감각적 경험에 대립시키는 대신에 화이트헤드는 과학의
진리를 그것의 실험적 성취와 경험적 폭로에 의거하여 규정한다.
시인에 의해 경험되는 대로의 저녁놀의 본체적 광휘는 다시 자연에 뿌리를 두게 되는데, 물리학자의
정교한 실험법에 의해 탐지되는 광자들의 파장들에 못지 않게 우리가 지각 속에서 자각하게 되는 것의
한 양태이다.
과학의 데이터는, 아무리 추상적이고 일상 경험에서 명백히 벗어나 있더라도, 궁극적으로 어떤 조작적
기법이나 직접적인 관측으로 다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한다.
이 [과학의] 추상 관념들이 확고한 토대를 가지고 있다면, 즉 그것들에 경험에 있어 중요한 것을
모조리 사상하지 않는다면, 이들 추상 관념에만 주목하는 과학 사상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관련된 갖가지 중요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과학과 근대세계>>, p. 107]
예를 들면, "광자"는 물리학자의 발명품에 불과한 것도 아니고, 자연의 사실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광자는 어떤 재현 가능한 실험들, 실험실 기술들, 이론적 이미지들 그리고 수학적 방정식들의 결과로서
물리학자가 빛에 대한 자신의 지각 속에서 자각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과학적 객체로서의 광자는 그것이 속하고 그것이 존속하게 되는 "사건들의 총체적 구조" 또는 "활동의
장"과는 별개로 파악될 수 없다는 점에서만 추상적인 것이라고 한다.[<<자연의 개념>>, p. 170-1]
화이트헤드 과학철학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추상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을 결코
제공할 수 없다.[<<화이트헤드와 함께 생각하기>>, p. 99]
광자의 파장은 과학자의 빨강의 지각을 설명할 수 없으며, 신경화학의 연결주의적 모형도 예술가의
아름다운 저녁놀과의 심미적 만남을 설명할 수 없다.
과학적 유물론자들이 그런 영웅적인 설명을 제공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그들은 당대에 가장 유행하는
과학적 객체들에 의거하여 서술적 논평―그들이 해명했다고 감히 우기는 바로 그것, 즉 의식을 전제하는
논평―을 제공하는 데 성공할 뿐이다.
화이트헤드의 관점에서 유일하게 타당한 설명 방법은 유물론자의 설명 방법을 반전시키는 것인데, 추상
관념들의 생성을 그것들이 비롯된 지각적 만남과 구체적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설명이다.[<<화이트
헤드와 함께 생각하기>>, p. 110]
추상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과학은, 자체의 적절성이 생태적으로, 즉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역량에 의거하여 판정되기보다는 도구적으로, 즉 자연을 변형
시키고 제어할 수 있는 역량에 의거하여 판정되는 지식 생산 형식의 제물이 너무나 쉽게 된다.
과학철학을 추구함에 있어서 화이트헤드의 목적은 대체로 실제적 경험과 공통 감각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한편으로는 실재적인 물리적 사실들로 다른 한편으로는 외관상의 심리적 가치들로
자연을 이분화하는 균열을 뛰어넘어 오가려고 했다.[<<화이트헤드와 함께 생각하기>>, p. 38]
이런 화해를 이루기 위해 화이트헤드는 자연에 주목하는 참여적 양식―소외된 기술과학적인 앎의 양식
에 의해 도구적으로 조작되는 불활성의 질료로 더 이상 대상화되지 않는 자연―을 상상하려고 노력했다.
그 대신에 화이트헤드는 자연을 살아 있는 유기체들의 개체적 결단들과 사회적 욕망들에 의해 형성된
생태적 연결망으로 지각시키려고 노력했다.
살아 있는 유기체들은 자체의 질량, 연장 그리고 속도에 의거하여 결코 설명될 수 없다.
그것들은 독자적인 경험, 즉 애초에 타자들의 느낌들로부터 물려 받은 경험의 가치를 향유하는 생명체
들이다.
갈릴레오, 데카르드 그리고 뉴턴과는 대조적으로, 화이트헤드의 우주관은 생태적인 것인데, 최종의 실재적
사물들은 개별적인 살아 있는 유기체들이며, 각각의 유기체는 자체로서의 지속적인 존속을 위해서 타자
들과 맺는 관계들에 의존한다.
1920년대 말에 화이트헤드는 더 위험한 형이상학의 모험을 추구하기 위해 과학철학에 대한 초기 탐구의
뼈대를 구성했던 문제들을 포기해 버렸다.
"더 위험한" 까닭은 "형이상학에 대한 의지는 탄약고에 성냥을 던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 지역을 날려 버린다."[<<자연의 개념>>, p. 29]
더 명시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후기의 화이트헤드에게 "정신"은 더 이상 매끈하게 한정된 "자연"으로부터
괄호 안에 집어넣을 수 없게 된다.
지고 있는 태양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되는 시인의 상상적 향유와 이론가의 지성적 성찰은 그것들 자체로
우주의 창조적 진전을 구성하는 요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정신은 사물들 자체 속에서 그것의 발판을 찾아내야 하는데, 정신은 자연을 초월하는 인식자가 아니라
자연의 거주자이다.
다음 장에서는 화이트헤드가 과학철학을 넘어서 인간 사회의 문명화 단계들을 정당화하는 정합적인
우주론을 구성하기라는 엄청난 기획으로 기도한 모험을 한층 더 풀어놓는다.
3장: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존재론
Chapter 3: Whitehead's ontology of Organism
화이트헤드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성공적인 우주론적 도식은 자체를 "문명 사상의 복잡한 구조물...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적절한 것으로"[<<과정과 실재>>, p. 42] 밝히고자 해야 한다.
이런 목적을 위해 우주론자의 주요한 동기는 이러해야 한다.
미적, 도덕적, 종교적 관심사를 자연과학에 기원을 둔 세계의 개념과 연관시키는 관념 체계를
구축하는 것.[<<과정과 실재>>, p. 43]
이미 현대 과학적 우주론과 우주론 구성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더 철학적인 접근 방식 사이에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두드러질 수 있다.
1920년대 말 형이상학적 전환 이후에 화이트헤드는 바로 우리의 예술적, 종교적 그리고 과학적 직관들을
한 가지 일반적인 사유 도식으로 통합하는 것을 추구했다.
근대 과학적 우주론자의 전형적인 목표는, 그들이 "대통일 이론", 즉 "만물 이론"을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할 때에도, 범위에 있어서 명백히 훨씬 덜 통합적인데, 물리적 세계의 경험적-수학적 특징들이 체계
적으로 다루어질 뿐이고, 다른 모든 것은, 문명화된 인간의 삶에 대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기껏해야
무관한 것으로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며, 최악의 경우에는 환영적인 것으로 해명된다.
현대 과학적 우주론은 자체의 전문화된 조작적-도구적 방법들 덕분에 알려진 세계의 대부분을 정확히
측정하고 주의 깊게 해부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의 상상적 배경을 제공하는 유물론적 존재론 때문에
"일상생활의 평범하고도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로부터 유리되게"[<<과정과 실재>>, p. 45] 되었다.
예를 들면, 법을 준수하는 보통 시민들은, 신경과학의 유물론적 해석들이 의식을 닮은 그 어떤 것에 대해
서도, 더군다나 자유의지에 대해서, 뇌 속에 전혀 아무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어떤 책임이 있다는 가정을 품고서 자기 일을 해야 한다. 과학적 유물론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긍정해야 하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부인해야 하는 불가능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근대 과학의 기술적 응용들이 계속해서 문명을 변환시킬 것이라는 점에 대해 거의 의심하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과학은 일상생활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과학의 기술적 응용들은 인간의 삶뿐 아니라 행성적 체계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빠른 기술과학적 진보에서 비롯된 물리력의 증가가 지금까지 문명에 사회적 개선을 위한 기회를 제공했
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위험하게도 자신을 파괴시킬 지경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적는다.
문명은 기계의 도입을 둘러싸고 있는 그릇된 사상의 풍토에서 결코 빠져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세계는 이제 세계가 저지할 수 없는 하나의 자발적인 조직과 대치하고 있다.
[<<과학과 근대세계>>, pp. 326, 328]
앞에서 논의했듯이, 근대 기술과학은 지금까지 적절히 이해되지 않았고 도덕적으로 또는 심미적으로
음미할 수 없는 것을 변형시키고 제어하는 데 탁월했다.
"미적 가치란 외부에서 덧붙여진 비논질적인 것"이 되도록 "운동하는 물질이 자연에 있어 유일한 구체적
실재이다"라는 과학주의적 전제는 유감스러운 오류인 것으로 판명되었다.[<<과학과 근대세계>>, p. 327]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적 도식이 재구상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유물론적 존재론과 그것이 동반
하는 도구주의적 인식론이다.
지상의 삶의 가치들과 유리된 과학을 추구하는 대신에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은 기계주의라는 전통적인
과학적 구상과 유신론이라는 전통적인 종교적 구상을 유기체주의라는 참신한 구상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기계주의적 실체를 자체의 토대적 개념으로 삼는 근대 과학이 자연을 객관적인 자연적 사실들과 주관적인
인간적 가치들로 이분화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유기체적 과정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는 화이트헤드는 도덕적 책임감, 심미적 욕구 그리고
참다운 지식(또는 차례로 선, 미 그리고 진) 같은 문명화된 삶의 상식적 가치들을 제거하기보다는 해명
하는 세부 내용을 갖춘 우주론을 표명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의 현대 해석가들 가운데 다른 한 사람인 브뤼노 라투르는 이렇게 주장한다.
자연이 실제로 이분화되어 있다면, 그 어떤 살아있는 유기체도 가능하지 못할 것인데, 왜냐하면
유기체라는 것은 자체의 일차적[물리적] 성질과 이차적[정신적] 성질―그것들이 현존한다면―이
끝없이 흐릿해지는 그런 종류의 사물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와 함께 생각하기>>, p. xiii]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은 자연의 이분화를 거부한다.
그래도, 근대 시대 동안 이원론의 광범위한 수용은 이원론이 하나의 추상적 도식으로서 어떤 사례들에서
경험의 결을 해명하는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부정합성과 과도한 추상화에 대해서 데카르트의 정신/물질 이원론을 비판하지만 이렇게
덧붙인다.
"데카르트의 체계가 참된 무언가를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과정과 실재>>, p. 57]
화이트헤드는 근대 자연 철학적 전통에서 많은 것을 전용하는데, 언제나 "철학에서의 주된 과오는 과잉
주장에 있다"[<<과정과 실재>>, p. 59]는 점을 명심한다.
상상적 일반화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화이트헤드는, 궁극적으로 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창조적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정신, 표상 그리고 물질이 아니라 현실적 계기, 파악 그리고 영원한 객체를 근본적인
범주들로 삼는 대안적인 우주론적 도식을 실험적으로 구성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원론적인 데카르트적 문제가 제거되거나 해명되는 것이 아니라 변형된다.
현실적 계기와 영원한 객체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이원성(duality)의 관계―존재의 두 범주 가운데 어떤
것도 현존하기 위해 나머지 다른 범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아니라, 양극성(polarity)의 관계―영원한
객체의 존재가 현실적 계기의 생성과 유리되어 파악될 수 없으며, 역으로도 마찬가지인―이다.
모든 유기체적 계기 또는 계기들의 생태계―그것이 전자이든, 박테리아 군체이든, 세쿼이아이든, 청백돌
고래이든, 인간 문명이든, 항성이든, 항성 사회(은하)이든 간에―가 실현된 현실적 사실들에 대한 느낌들을
물려받는 물리적 극과 더불어 실현 가능한 영원한 가능성들을 예상하는 정신적 극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인식함으로써 화이트헤드는 근대적인 자연의 이분화(경험적 가치를 인간 권역에만 제한하고 비인간
적인 모든 것은 "공허한 현실태"의 지위로 격하시키는)를 벗어난다.
인간 권역의 특별한 중요성에 대해, 호모 사피엔스 같은 "고등" 유기체들의 의식을 갖춘 정신적 극은
정도에 있어서 매우 선진적인 것이어서 종류에 있어서도 다른 것이 된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의식적인 인간 경험은 더 일반적인 우주적 경험 양태의 특수한 사례일 뿐이라는 점을 인식함으로써
유기체 철학은 정신의 물질로부터의 창발, 또는 가치의 공허로부터의 창발에 대한 부정합적인 설명을
거론해야 하는 것을 피한다.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도대체 현존한다는 것은 이미 경험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경험한다는 것은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실현이란 그 자체가 가치의 달성이다...미의 달성은 실현 형태의 구조적 짜임 속에서 이루어진다.
[<<과학과 근대세계>>, pp. 168-9]
정통적인 유물론적 자연 철학은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두 개의 실체, 정신과 물질을 가정함으로써 시작
되는 반면에―여기서 물질적 객체들은 운동의 외부적 관계들에 의해 수정되고, 정신적 주체들은 외부적
(또는 공적) 객체들을 표상하는 내부적(또는 사적) 착상들에 의해 수정된다―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은
"서로 연결된 조직체 내에 배치되어 있는 사건들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을 분석하는 데서 출발한다."
[<<과학과 근대세계>>, p. 252]
우주를 구성하는 최종 실재로서의 현실적 계기들은 스스로 창조하는 경험의 싹인데, 각 싹은 우주라는
창조적 공동체에서 모든 다른 계기와 여전히 내부적으로 관련되더라도 고유하게 독자적이다.
계기들은 영원한 객체들의 공동체에서 그것들 각각에 대해 여타 계기들의 정성적인 양상들을 특징짓는
영원한 객체들의 패턴의 방식으로 서로 관련된다.
영원한 객체들은 그것들이 어떤 불변의 기하학적 원리들―다음 절에서 아인슈타인의 기계주의적 우주론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비판에 관한 논의의 맥락에서 탐구될 원리들―에 따라서 확대된 시공간 다양
체에서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도록 "[계기들] 사이의 통역자가 된다"
[<<과학과 근대세계>>, p. 250]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적는다.
"우주의 연대성은 영원한 객체의 관계적 기능에 기초를 두고 있다."[<<과정과 실재>>, p. 342-3]
관계적 존재자들, 영원한 객체들은 자체적으로 현실적 계기들을 초래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파악의
방식을 특징지울 수 있을 뿐이다.
화이트헤드의 해석자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에 따르면, "영원한 객체들은 현실적 계기들이 서
로 관련을 맺고, 서로 받아들이며, '서로의 구성에 진입하는' 방식을 결정하고 표현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것들은 명사적이라기보다는 부사적인 것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각각의 현실적 계기는 그것이 통일하는 다른 계기들(영원한 객체들에 의해 부사적으로
특징지워지는 대로의)에 대한 파악들의 다양체에 불과하다.
그런데 다른 한 의미에서, 자기통일적 생명체로서 한 계기는 안정된 과거의 실현된 시공간적 패턴을
파악하여 반복할 뿐 아니라, 우주의 진행 중인 진화에 새로운 가치(그것 자체)를 추가한다.
화이트헤드는 경험의 각 계기의 충족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공재성의 산출"을 가리키기 위해 "합생"
이라는 술어를 고안했다.[<<과정과 실재>>, p. 84]
합생으로써 어느 특수한 현실적 계기의 다른 계기들에 대한 많은 파악들이 하나가 되는데, 그래서 한
가지 더 실현된 경험의 단위체―또 하나의 "나 여기 있어요!"―를 우주적 공동체의 진행 중인 창조적 전진에
추가한다.
"다자는 일자가 되며 그래서 다자는 하나씩 증가된다."[<<과정과 실재>>, p. 84]
하나의 계기가 "변화의 불변적 주체"[<<과정과 실재>>, p. 97]인 것처럼, 파악이 다른 계기들에 대한
경험을 "갖는" 현실적 계기에서 비롯된다고 간주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불가피하게도 이것은 이른바 공적인 물질적 객체들에 대한 사적인 표상들에 의해 자격이 부여되는 정신적
주체들의 고전적인 이분화된 구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가 이 점을 인정할 경우, 우리는 유아론(solipsism)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과학과 근대세계>>, p. 251]
오로지 전능한 신의 선함에 자의적으로 호소함으로써 데카르트는 영혼 속 관념들과 자연 속 사실들
사이의 어떤 유의미한 인식적 관계를 재확립할 수 있었다.
유기체 철학의 경우에, 현실적 계기는 기성 객체들에 대한 표상들에 의해 자격을 부여받는 선재하는
주체가 아닌데, 오히려 한 계기는 양극성의 "자기초월적 주체(subject-superject)"로 더 잘 특징지워진다.
어느 합생하는 계기의 "주체" 단계는 그것이 통일하는 선행 계기들의 파악들에서 비롯된다.
"자기초월체" 단계에서 그 계기는 후속적으로 합생하는 현실적 계기들에 의해 파악될 수 있도록 "객체적
불멸성"으로 즉시 사라진다.
화이트헤드는, "<있는 것>의 본성에는 모든 <생성>을 위한 가능성이 속해 있"도록, 자신의 "상대성의
원리"에 의거하여 주체의 객체적 불멸성으로의 영원한 사라짐을 표현한다.[<<과정과 실재>>, p. 86]
그러므로 현실적 계기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즉 "존재"와 "생성"으로 서술할 수 있다.
이런 존재론적 지시자들은 독립적이지 않는데, 왜냐하면, 화이트헤드의 상관적인 "과정의 원리"에 따르면,
어느 계기의 "존재"는 그것의 "생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현실적 [계기]가 어떻게 생성되고 있는가라는 것이 그 현실적 [계기]가 어떤 것인가를 결정한다."[<<과정
과 실재>>, p. 87]
어느 계기에 대한 그것의 유적 "생성"에 의한 서술은 그 계기의 독자적인 주체적 목적(=그것의 목적인)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며, 그것의 연장적 "존재"에 의한 서술은 그것 자체 너머 다른 계기들에 의해 파악되는
대로의 그것의 자기초월체적 결과(=그것의 작용인)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세계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들을 우연적인 술어들에 의해 자격을 부여받는 정적인 분리된 실체들이라기
보다는 인과적 유산과 개념적 예상의 파악적 과정들로 간주함으로써 화이트헤드는 다른 유기체들의 더
큰 생태계와의 연속성이 파괴되도록 분리성을 매우 과장하지 않는 동시에 각각의 개별적 유기체의 독특한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다.
현대 물리적 이론의 맥락에서 화이트헤드 유기체 철학의 형이상학적 범주들의 함의들을 더 해명하기 위해
그런 범주들에서 벗어나기 전에 추상화 자체가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적 도식에서 정확히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검토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한다.
어떠한 인식의 계기에 있어서도 인식되는 것은 경험의 현실적 계기이다.
그것은 그 직접 계기를 초월하는 존재들의 영역―이런 존재들은 다른 경험적 계기와 유사한 관계를
갖기도 하고 상이한 관계를 갖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 직접적 계기를 초월한다―과 관련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과학과 근대세계>>, pp. 260-1]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일종의 우주적인 기하학적/유전자적 코드를 함축하"는 "영원한 객체들" 또는
"순수한 가능태들"의 영역을 언급한다.
영원한 객체는 어떤 특수한 계기의 경험으로도 환원되지 않은 채 현실적 계기들의 확정성에 기여하는데,
왜냐하면 "영원한 객체는 모든 현실적 [계기들]에 대해 동일하"기 때문이다.[<<과정과 실재>>, p. 86]
근대 시대의 유명론적 전제들을 품은 많은 현대 사상가들은 모든 것이 내재적 과정만으로 설명될 것
이라고 기대하면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화이트헤트가 영원한 객체의 관계적 위계를 도입하는 것과 신이 그런 위계를 직시한다는 것에
놀라는데, 그 두 가지는 일견 그의 우주론에 대한 임시방편적인 추가물인 듯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화이트헤드는 그가 제시하는 도식의 총체적인 정합성을 유지할 목적으로 그것들을 도입한다.
그는 이렇게 적는다.
현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념 세계를 끌어들어야만 한다는 것이 내가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입장의 기반이다.
이 두 영역은 본래 형이상학적 상황 전반에 내재하고 있는 것들이다.[<<과학과 근대세계>>, p. 261]
다시 한 번 수리물리학과 시 둘 다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드러내면서 화이트헤드는, 우주생성을 구성하는
"사건들의 융합"이 시간만큼이나 영원에 참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데, 그것은 "자연에 불가결한 것이면
서도 자연에서 비롯되지도 않는 빛깔, 소리, 향기, 기하학적 성질"들의 유령 같은 흔적들만큼이나 현실적
자연의 가치들에 의해 감염되어 있다.[<<과학과 근대세계>>, p. 183]
현실태만이 가치를 갖고 있지만, '현실적 가치'가 자체의 형이상학적 정의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관념태에
의해 제공되는 인접한 가능성들에 대한 어떤 준거가 필요하다.
경험의 현실적 계기 각각은 가치가 부여된 유형화의 복잡한 통일체로 실현된다.
이런 유형화는 문제가 되는 계기의 인과적 과거에 의해 달성되는 구체적으로 파악된 자기초월체적 가치
들의 주체적인 조화로 드러난다.
다소 복잡한 어느 유형화의 통일체의 경험적 성취는 문제가 되는 계기에 대해서만 가치가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왜냐하면 이 계기는 자체의 합생에서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추상적인 확정된
가능성들을, 영원한 객체들의 무한 집합에 대한 신에 의해 직시된 등급 매기기를 통해서, 동시에 느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 방울의 경험은
그것에 관한 여러 비진의 명제들이 (그것에 대해) 중요성을 가지면 가질수록 결정적인 것이 된다.
즉 그 [계기]에 대한 이 명제들의 관련은 성립 형태로서의 그 [계기] 자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
이다.[<<과학과 근대세계>>, pp. 261-2]
각 계기는 지금의 그것이 아닌 것이 되지 않음으로써 지금의 그것이 된다. 확
정된 구체적인 가치들의 실현이 "지금의 그것"에 대한 파악과 더불어 "지금의 그것이 아닌 것"의 진입을
어떻게 필요로 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화이트헤드는 현실태와 관념태 사이의 이원론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태에 대한 파악과 가능태의 진입은 별도로 정의될 수 없다.
우주의 연대성과 분리 가능성 둘 다에 대한 정합적인 설명이 표명될 수 있으려면 각자는 서로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영원한 객체들은, 그것들이 계기들을 서로 관련시키며(창조적인 다자가 하나의 창조된 우주가 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계기들을 독립적으로 통일시킨다(하나의 우주가 다시 다자가 될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있
어서, '이중 역할"을 수행한다.
우주의 끝없는 창조적인 전진은 이런 식으로 연접 및 이접, 통일 및 분화에 의존한다.
창조성을 "궁극적인 사태를 특징짓는 보편자들의 보편자"[<<과정과 실재>>, p. 83]로 장식한 다음에
화이트헤드는 더 범속한 사태(즉, 유한한 현실적 계기)들의 고유한 특징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우주를 규정하는 무한한 창조성이 어떻게 독특한 유한한 생명체들 각각의 합생을 특징짓는 결정적인
파악들과 적실한 평가들로 나뉘질 수 있는가?
이런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 화이트헤드는 신에 관한 참신한 개념을 제시하게 되었다.
신과 여타의 현실적 계기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신의 정신적 극이 일차적인 것이고 신의 물리적 극은
결과적인 것이 되도록 신의 경험이 유한한 경험들의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발생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신의 정신적 극은 원초적인 창조성의 피조물로 서술되는데, 최초의 속박되지 않은 개념적 가치 평가
행위가 영원한 객체들의 영역의 질서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신은 창조성의 피조물인 동시에, 유한한 현실적 계기들의 결정들에 미치는 자체의 설득적
영향에 의해, 창조성의 혼돈적인 잠재력을 제약하는 조건이다.
이 완전한 가치 평가로 말미암아 개개의 파생적인 현실적 [계기]에 있어서의 신의 객체화는, 그
파생적인 계기의 합생 중에 있는 위상과 영원한 객체와의 관련성의 등급 매기기로 귀착된다....
신을 도외시할 경우, 현실 세계에서 실현되지 않은 영원한 객체는 문제의 합생에 있어 상대적으로
비존재(非存在, non-existent)가 될 것이다.[<<과정과 실재>>, p. 101-2]
"창조성의 원초적인 자기초월체"로서의 신은 공적인 창조적 전진에 어떤 확정된 얼굴을 부여하는 최초의
사실이다.
신의 원초적 본성은, 신의 최초의 직시 행위에 이어지는 모든 경험의 유한한 계기가 현실 세계에 대한
그것의 물리적 파악 속에 그것에 관련된 대로의 가능태들의 무한한 영역에 대한 개념적 파악을 포함시킨
다는 것을 보장한다.
이런 점에서, 어느 특수한 계기의 현실 세계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추상적인 가능태들은
난데없이 자체의 상황으로 흘러들 필요가 없이 그런 계기 및 그것의 세계에 대한 자체의 확정된 관계를
찾아낸다.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적 원리"에 따르면, "우주의 일반적인 가능태도 어떤 곳에 있어야 한다...이
<어떤 곳>은 비시간적인 현실적 존재[자]이다".[<<과정과 실재>>, p. 131] 신.
이미 언급되었듯이, 신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양극성의 현실적 계기인데, "공통의 세계 속에서
능동자와 수동자로서의 이중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과정과 실재>>, p. 604]
영원한 객체들에 대한 신의 원초적인 직시는 유한한 현실적 계기들로부터의 추상화에서 일어나는데,
그것은 신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그런 것으로서 신의 본성의 원초적인 양상은 여전히 현실태를 결여하고 있다.
창조의 추상적인 질서는 신의 행위자적인 "영원한 객체들의 공재성의 조정"에 의존하는 반면에, 창조의
구체적인 가치들은 신의 결과적 극의 "무한한 인내", 신의 "그 어떤 것도 버리지 않는 애정 어린 배려"에
의존한다.[<<과정과 실재>>, p. 655]
완전히 구체적으로(즉, 살아 있는 우주적 인격체로서) 경험되는 신은 멀리 떨어져 있는 부동의 원동자도
아니고 전통적인 종교적 형이상학의 전능한 창조자도 아니라, 세계의 시인이자 애호가, "이해하는 일련
탁생(一蓮托生)의 수난자"이다.[<<과정과 실재>>, p.663]
신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상상력이 풍부한 서술은 "무로부터 [명령으로] 우연적인 우주를 창조하는" 뉴턴의
<<주해(Scholium)>>의 "전적으로 초월적인" 여호와보다도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의 매개적인 세계
영혼과 공유하는 점들이 더 많다.[<<과정과 실재>>, p. 218]
이 에세이의 마지막 장에서 화이트헤드의 신과 플라톤의 세계 영혼 사이의 비교가 계속 이루어진다.
다음 장은 진화, 상대성, 양자 그리고 복잡성 이론들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의 적실성을 차례로
하나씩 다룬다.
―― 매튜 데이비드 시걸(Mattew David Segall), <<세계 영혼의 물리학: 현대 과학적 우주론에 대한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의 적실성(Physics of the World-Soul: The Relevance of
Alfred North Whitehead's Philosophy of Organism to Contemporary Scientific Cosm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