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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미학

푸전위안의 『의경(意境),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을 읽고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4.08.28|조회수235 목록 댓글 0

- 푸전위안의 『의경(意境),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을 읽고 -

 

 

푸전위안의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각주:1] 동아시아 미학을 들여다보는 창으로서 의경이란 개념을

중심에 두고 그 역사와 쟁점들, 의경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기존 학자들과 저자 간의 차이를 설명해놓은

책이다.

이처럼 의경 개념만을 철두철미하게 주제로 삼아 해설한 책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책은 거의 7백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 말해주듯이 워낙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다가 처음 접하는 분들

에게는 사뭇 낯설게 다가올 수 있는 미학용어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읽는 분들로 하여금 의경의 세계에 보다 부드럽게 다가가게 하기 위하여, 본 내용은 본인의 미적

체험에서 시작하여 차츰 책의 핵심 내용의 소개로 이어지는 조금 색다른 전개방식을 취해가고자 한다. 

 

그림을 보다 보면 유독 그 여운이 오래 남는 그림들이 있다.

내게도 유년시절 보았던 몇 장의 그림이 그렇게 물먹은 솜처럼 오래도록 기억 속에 스며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유년시절의 경험은 그것이 단 한 번에 그쳤다 할지라도 지워지지 않는 강렬함으로

각인되곤 한다.

아홉 살 때 동네 할아버님께 서예를 배우다 3학년이 되어 서예학원 문을 처음 열고 들어갔던 어느 날 오후,

창가에 걸려 있던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이었던가...

그 자비로운 눈빛과 풍염하면서도 유연한 곡선의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고 얼마인가 지난 어느 날, 먹을 갈면서 우연히 들여다본 화첩을 한 장, 두 장을 넘기는데, 한 선비가

미소 띤 얼굴로 바위에 턱을 괸 채 흐르는 냇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그 그림에 매료되어 더 이상 화첩 장을 넘기지 않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러는 사이 어느덧

마음이 평온해졌다. 무엇보다도 그 웃음기 어린 무구하고 넉넉한 선비의 인상이 좋았다.

훗날 알게 된 그 그림이 바로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였다.

세월이 흘러 스무 살 고개에서 고사관수도의 실물을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관에서 보았을 때 그토록 작은

편 폭(23.4x15.7cm)에 그려진 것을 보고 적이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젊은 날 사두셨던 『이중섭화집』에 실린 성당부근’, ‘달과 까마귀’, ‘흰 소등이

떠오른다.

그 중 교회당을 그린 성당부근이 내게는 모종의 멜랑콜리를 안겨주어 이중섭의 그림이 전부 어둡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물론 이후 그와 관련된 평전들, 그의 내면을 알 수 있는 글들을 읽어가며 어린 시절 우울하게만 다가왔던

이중섭 이미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의 일이다. 미술 시간에 동양화는 여백餘白을 강조한다고 배웠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양화의 특징을 그렇게 알고 있지 않나 생각되는데, 나로서는 중학교 시절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서양화는

화면을 가득 채우지만 동양화는 일정 부분 비워둔다고 배웠다.

현직 화가였던 선생님은 미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분이셨다. 그런 분의 말씀이었던 만큼, 그 말을

그대로 묵수한 채 동양화하면 여백의 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와 동양화에 대한 책과 관련 문서들을 읽고, 또 그림들을 보면서 뭔가 알 수 없는 허전

함을 느꼈다.

여백의 미라는 것이 꼭 동양화에만 국한된 것일까?’ 라는 의문과 함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동양화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옳을까? 라는 또 하나의 의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평소 무언가 화자가 다 말해버리지 않는, 그래서 다 드러내지 못한 말이 있는 듯한 한시(漢詩)림을

좋아하고 있었지만, 미학이라는 분야에서 형성된 동양미학의 개념으로 그러한 문예작품들에서 경험되는

울림과 반향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잘 몰랐다.

그와 같은 궁금증으로 말미암아 동양미학 책들을 이 책 저 책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렇게 해서

동양미학의 개념들이 참으로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양미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처음에 접한 개념은 익히 알려진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의미였다.

그 후로 문/, /, /, /, /, /, /, /, /

, /, /, /등의 개념 쌍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동아시아 미학의 단면들을

다각도에서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앞서 말한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는 보면 볼수록 새롭게 다가왔다.

그 그림에 담긴 사유와 정서를 동양의 고전을 읽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그 앎을 토대로 하여

다시 그림으로 눈을 돌려 찬찬히 들여다보곤 했다.

느끼는 만큼 보이는 것이겠지만, 또 아는 만큼 보인다고도 했다. 그림의 정신세계라고나 할까, 그런 방면에

차츰 관심이 닿기 시작했다.

그 선비가 흐르는 물을 바라보듯 나도 홀로 그 선비를 바라보곤 하는 날들이 잦아졌다.

너럭바위에 팔을 괸 채 넉넉하고 둥근 얼굴로 물끄러미 흐르는 산속 계곡의 물을 바라보고 있는 선비는

도대체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걸까? 아니 선비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림에서 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음과 몸, 얼굴을 비추는 거울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선비는 흐르는 물에서 자신의 얼굴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요한 산속 계곡을 흐르는 물, 툭툭 뻗어 내린 가지와 잎새, 굵은 칡덩굴이 별다른 기교 없는 붓질로

채워진 화면, 고요함이 흐르면서도 정 속에 갇히지 않아 답답하지 않고, 움직임과 고요함이 함께 배어

나니, 저절로 그 여미(餘味)가 그림을 보고 난 후에도 남아, 어느덧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그것이 바로 동양화에서 말하는 기운(氣韻)이 아닐까? 이처럼 그림 자체가 지니는 내면세계의 힘과 리듬

으로서 기운생동의 의미가 실감 되었고, 그 의미가 이렇게 생생하게 느낌으로 와 닿는구나 싶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그림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유가와 도가 정신의 그 어떤 앎도 고사관수도

자체가 전하는 울림과 여향(餘香)을 잦아들게 하지는 못했다.

 

 

그동안 무수하게 보아왔지만 내게 고사관수도는 그 선비의 모습, 혹은 그 바위, 나뭇잎새들이 따로따로

분리되어 기억되지 않았으며, 그 형상이 사진처럼 고정적으로 재현되지도 않았다.

그림의 가치를 자연모방에 둘 때, 고사관수도와 같은 작품은 그리 성공작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강희안은 몇 번의 붓끝으로 계곡 속의 선비를 재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한 선비의 내면세계를

드러내 보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희안이 그림을 그림에 있어서 형상의 재현[形似]이 아닌 내면세계의 표현[神似]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그림 안에는 사실적인 자연의 묘사보다는 그의 마음과 의식에 떠오른 풍요로운 정취와 분위기가

담겨 있다. 아마도 그의 마음자리에는 『논어』공자가 냇가에서 말씀하셨다.

지나가는 것은 이와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네라는 구절이 떠올랐을 수도 있고, 요산요수(樂山樂水)

말하면서 인자(仁者)와 지자(知者)의 특징을 선문답처럼 간결하게 말한 구절이 떠올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붓은 그의 몸에 육화된 정신세계를 그림으로 구현해놓았을 뿐이다. 많은 생각을 하고 나서

그린 그림이 아니라 그려보고 나니 그러한 그의 정신세계가 드러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고사관수도의 세계는 내게 이러한 감상만으로 그치지 않고, 기억에 남아, 끊임없는 상상을 이어가게 한다.

바로 그러한 상상과 연상을 동양미학의 언어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푸전위안은 바로 이와 같은 예술작품과의 만남에서 우리의 의식 속에 일어나는 움직임의 다양한 정취와

분위기, 정신의 경계를 의경(意境)’이란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의경이란 개념은 워낙에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다 보니 어느 한 가지로 합의된 정의가 없다.

저자는 마정핑이란 학자가 의경을 정경교융설(情景交融說), 전형형상설(典型形象說), 상상연상설(想像

想說), 정감기분설(情感氣氛說) 등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고 한다.

그중에서 저자 푸전위안 교수의 입장은 상상연상설에 속한다. 이 중 정경교융설과 전형형상설을 간단히

소개하면 저자의 의경 개념의 특징이 부각될 듯하다.

 

저자에 따르면 정경교융설은 그동안 의경 개념과 일치하는 듯 이해되어왔다.

정경교융이란 우리가 예술작품에서 받는 인상(체험)과 예술작품에 반영된 현상이나 장면의 결합을 말한다.

그러나 정경교융은 의경의 한 특징을 말해줄 뿐 의경 자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정과 경의 기계적 결합이나 융합이 바로 의경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의경에 담긴 풍부한 함의는 죽어버리고 마는데, 그것은 이미지(形象)로 고착되면 더 이상

작품의 해석과 감상이 다양해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일상에서도 어떤 작품의 이미지에 대한 해석이 고정되면 그 작품을 바라볼 때 다른 상상으로 잘 이어

지지 않는다. 그리고 작품 속에 있는 특정한 이미지에 매이면 풍요로운 상상의 날개를 펼치기가 힘들어진다.

따라서 저자는 정경교융설은 의경의 풍부한 함의를 충분히 드러내기가 어렵게 된다고 주장한다.

예술작품에서 경험되는 상상연상은 무궁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전형형상설이다. 전형형상설은 의경을 예술작품의 형상(이미지) 또는 전형과 동일하게 본다.

그러나 물이 무지개로 변하지만, 무지개가 그러한 변화를 낳을 수 있는 물과 같지는 않은 것처럼(p.65)

의경은 예술전형이나 예술작품 속의 이미지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런데 전형형상설은 다채롭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의경을, 그것을 낳는 모체인 예술전형이나 이미지 자체

로 확정 하거나, 그 둘을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고정된 작품해석에서 벗어나는 이론에 주목하는데, 의경의 한 특징을 보여주는

초이상외설 [超以象外], 형상 밖으로서의 초월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화가가 산수 속에 오두막집을 그렸다. 그런데 오두막집 주인을 그려 넣지 않았다.

하나 우리는 그 집 속에 주인이 분명 있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형상 밖으로 초월하여 자유로운 변화의 묘리를 얻다.”라고 말하는 것이다.(p.66)

 

푸교수는 청대 학자 손련규가 보여준 예를 든다.

산속 오두막집을 그렸지만, 그 주인을 그려 넣지 않아도 주인이 있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

그래야 그 그림의 분위기와 풍류의 정취를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

그 둘을 욕심껏 다 그려 넣었다면 오히려 다른 풍부한 상상을 제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경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형상이나 화면(장면) 또는 부호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것에

의해 표현되는 예술의 정취와 분위기, 이러한 것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풍부한 예술 환상과 연상 세계를

모두 담아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산속 오두막집이 없다면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정신의 경계를 알 길이 없다.

또 화가 자신도 그 오두막집을 그리지 않고서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그려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의경은 구체적인 예술 형상을 떠날 수 없다반드시 구체적인 형상을 포괄해야 한다.

 

요컨대 의경은 특정한 예술이나 심지어 비예술적 부호를 떠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예술 형상

이나 화면(장면) 또는 부호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그것은 다만 우리 의식 속에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형상이나 화면(장면) 또는 부호를 가리

키고, 또 그것에 의해 표현되는 예술 정취와 분위기, 그것에 의해 불러일으킬 수 있는 풍부한 예술, 환상

과 연상 세계를 포괄하는 총화이기 때문이다.(36, 244쪽)

 

이처럼 의경은 단 하나로 귀결 지을 수 없는 풍부한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술작품에 대한 평가를 어떤 특정한 예술적 이미지로 환원시키거나 동일시해서는 안 된

다고 저자는 말한다.

왜냐하면, 특정한 예술적 이미지는 우리에게 자유로운 해석의 차이를 허용하지 않고 강제된 해석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작품도 동일하게 체험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작품해석은 끊임없이 열려 있는 것이다. 의경이란 요컨대 이러한 해석의 다양성, 그리고, 그러한

해석과 감상, 연상, 환상이 함께 어우러진 총화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경 개념을 뒷받침하고 있는 토대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경의 토대를 이루는 철학적 토대를 저자는 우주대생명이론이라고 한다.

조금은 장황한 개념처럼 보이기도 하겠으나 우주 전체와 모든 사물은 공통적 으로 내재적인 활발한 생명

을 간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그 이론의 요지이다.

이는 인간의 개체 생명을 넘어 전체 우주와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조화를 궁극의 목표로 삼는

이론이다.

우주의 생명이 연속적으로 이어짐을 결정하는 존재는 형태도 없고 소리도 없지만,

그것의 있음을 경험하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도()이다.


우리는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세계의 형상을 통해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가득 찬 도를 깨달을 수 있고 또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저자는 보는 것이다.

저자는 기존 학자들의 이론을 정리하며 우주 전체가 커다란 생명의 운행이고, 리듬이고 조화이며 모든

예술의 경계는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저자의 논리를 따른다면 도의 리듬을 깨닫는 것이 궁극적인 예술의 경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그림이나 풍경, 영화를 보고, 또는 문학작품을 읽고 난 뒤 그 울림은 어떻게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일까?

시간은 마법처럼 그 첫 그림을 다른 그림으로 변모시켜 간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것은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라 그림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주름이 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데, 하나의 그림, 한 편의 문학 작품이 나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상상과 환영은 왜 사라지거나 식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와 같은 상상과 환영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까?

그것은 나의 마음과 그 풍경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상상의 연속이 내 마음속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재가

아니라 활발한 생명력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 울림과 감응의 현상을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재현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의 재현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예술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 나아가 예술작품에 대한 고정된 시각이나 해석은 우리의

정서를 얼마나 메마르게 만드는 것일까? 문제는 작품과 나와의 만남에서 빚어지는 상상, 연상, 울림이

중요한 게 아닐까?

그것은 한순간으로 그치지 않고 여러 삶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빛을 발하고, 새롭게 해석되며, 무궁한

상상의 연속으로 이어지도록 이끈다. 그 점은 같은 작품을 두고도 다시 보게 하는 힘일 수 있다.

하나의 작품이 어떤 시간, 마음, 분위기에서 접하였는가에 따라 그 만남의 흔적은 얼마든지 다르게 풀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일상과 예술 작품 속에서 형상 너머의 형상이란 무슨 뜻일까?

우리의 육안은 형상 너머를 볼 수 없다. 우리는 형상 앞에 마주하고 형상 앞에 시선을 둔다.

그 형상은 형상 그대로의 모습이 보존된 채 우리 마음 안에 머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마음의 흐름과 주름, 시간의 심층으로 발효되어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면서 무궁한

상상과 연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형상 너머의 형상이라고

그런데 작품에 대한 해석들이 이미 나와 있는데도 어째서 특정 작품들은 유독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감흥을 일으키며 살아 숨 쉬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러한 작품의 분위기가 내 정서를 이루기도 하면서,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걸까? 그림은 나(의 한 부분)를 이루기도 하고, 나의 변화가 그림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바꾸어가기도 한다.


한 편의 시, 한 편의 소설과 영화가 또 다른 시와 소설, 영화를 낳을 수 있다.

그것은 그것을 마음으로 바라본 이들의 마음속에 살아남아 또 다른 경험으로 되풀이된다.

문자 언어로 이루어진 소설이나 시를 비롯하여 모든 예술작품은 언어를 낳고 언어를 파생시킨다.

뭔가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는 말들이 똬리를 틀고 있지만, 그 말들조차 사실은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 언어가 가진 태생의 한계가 바로 끊임없는 언어를 낳고, 해석의 차이를 낳고,

그로부터 다양한 작품과 감상을 가능하게 한다.

 

말과 글은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는 말은 오랫동안 회자되어 왔다.

뜻을 깨달았으면 말/형상을 잊는다’, 언어 너머의 뜻 등등... 왜 이렇게 동아시아 미학에서는 뜻을 중시

해온 것일까? 저자를 따르면, 뜻이란 고정되고 획일화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뜻이란 우리가 어느 한 가지 틀이나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는 상상과 연상의 풍요가 숨 쉬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자가 작품 속에 자신의 의도를 심어놓아 그 의도를 강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자신의 작품이라 해도 자기의 소유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양한 낱말들이 이루는 전체가 작품이 되고, 그 작품은 자신의 의도와 생각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도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전달했지만, 그 말을 자기가 의도했던 말 그대로가 아니라고 깨닫는

순간이 있다. 화가 중에는 목적의식을 갖고 그림을 그리면 그림이 안 되고, 그냥 붓끝을 움직였는데,

그림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이들도 있다.

이것은 특수한 신비체험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도 흔히 겪는 몸의 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은, 보이는 형상을 부정하지 않고, 다만 보이는 형상에 고착되어서는 진정으로 그 형상이 드러내려

고 하는 형상을 보거나 맛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고착된다면 풍부한 상상의 날개는 펼쳐지지 못한 채 꺾이고

말 것이다.

 

의경이란 개념은 고정된 형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형상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작품과 나와의 만남에서 빚어지는 울림, 상상(), 번져 나오는 연상들이 이루는 전체이다.

예술작품과 나의 만남에서 빚어지는 상상과 연상, 정취, 분위기는 언어로 완전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저자는 말할 수 없는 세계를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말없이는 말을 넘어선 세계를 표현할 수

없다고 본다.

형상 너머의 형상, 말이나 그림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 의식 안에 떠올라 생성되는 그 형상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세계와 말로 표현되는 세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끊임없이

오가며 그 가운데 생성되는 흐름과 리듬을 예술작품 안에서 발견하고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예술 작품과의 만남과 체험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존재의 전환마저 이루어

가는 것은 아닐까...

 

 

임종수 (현 감리교신학대 및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학술원 외래교수)

 

감리교신학대에서 종교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고전번역원(전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을 졸업.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명말청초 방이지의 자연관으로 석사, 같은 대학 동아시아학술원에서 명대 삼교합일

론자 임조은의 종교사상 연구로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취득. 이후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BK21 박사후

연구원을 지냈고, 성균관대,감리교신학대, 대안연구공동체 등에서 강의 중이다. 아울러 시민과 중고생, 대학생을

위한 인문학 고전 읽기와 한문 강좌를 글쓰기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 과제로 선정된 청대(淸代)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공역에 참여,

공저(종교철학이야기, 문사철) 공역서(논어, 새물결)가 출간 예정이며, 동아시아 철학, 미학, 종교, 명청

사상사와 근대에 이르는 동아시아 사상사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고전번역, 고전과 현대의 다리 놓기, 전통과 현대

의 소통을 꾸준히 모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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