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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미학

한국 불교미술의 원류 12 - 삼국의 불교미술 8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5.08.16|조회수456 목록 댓글 0

 

 

석굴암 호위보살상 좌우 바뀐 채 100년간 방치됐다

[한국 불교미술의 원류 21]     

1. 석굴암은 석가세존이 상주하는 영산(靈山) 불국세계 

  



  경덕왕(景德王, 723년경∼765년)이 부왕인 성덕왕(聖德王, 690년경∼737년)과 모후인 소덕왕후(炤德,

700년경∼724년)의 추복을 위해 부모의 왕릉이 모셔진 산자락의 주산(主山)인 토함산에 화엄불국사(華嚴

佛國寺) 창건을 기획하여 불국사를 지을 때 석굴암도 석불사(石佛寺)라는 이름으로 함께 지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의 ‘대성이 2세 부모에게 효도하다(大城孝二世父母)’라는 항목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이에 현생(現生)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창건하였다.

또 신림(神琳)과 표훈(表訓) 두 성사(聖師)를 청해다 각각 머물러 살게 하였다.

성대하게 상설(像設; 예배를 위한 불보살상 등 조각상과 불사를 위한 각종 설비)을 베풀어서 길러준 노고에

보답하니 한 몸으로 2세 부모에게 효도한 것이다.

예전에도 듣기 어려웠던 일이니 보시를 잘한 영험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차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 하나의 큰 돌을 다듬어 감실 덮개로 삼으려 했더니 돌이 홀연 세 쪽으로 갈라

졌다. 분하고 성이 나서 자는 척하는데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서 만들기를 끝마치고 돌아갔다.

대성이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남쪽 잿마루로 달려 올라가서 향을 살라 천신에게 공양하였다.

그래서 그 땅을 일컬어 향령(香嶺)이라 한다.”

이로 보면 경덕왕이 토함산에 화엄불국사를 지어 화엄불국세계를 지상에 구현(具顯)해 내려는 원대한 포부를

품었을 때 벌써 그 설계도 속에 석굴암이 불국사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화엄불국사가 일체 경전에서 얘기하는 각종 불국세계의 총체적 집합체로서 전륜성왕으로 군림한 자신의 절대

권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석굴암은 전대의 전륜성왕으로 자신의 절대 왕권 기반을 마련해놓은 부왕 성덕왕과

모후 소덕왕후의 불변하는 근원적 권능을 상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국유사’에서도 김대성이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짓고 현세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지었다고 표현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근원적이고 불변적이며 신라 국토에 현실로 존재해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에 합당한 부처님을

석굴암의 주불로 삼아 성덕왕의 모습으로 재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신라화엄종에서는 종조(宗祖) 의상대사(義湘, 625∼702년)가 문무왕 16년(676)에 그 근본사찰

인 부석사를 세울 때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전통이 세워져 있어 신라화엄종의 독특한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영원히 열반에 들지 않는다는 불변적인 요소를 지닌 아미타불상이 주불로 모셔질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를 주재하는 부처님이 아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도하는 타방교주(他方敎主; 다른 지방의 교주)이시다.

그러니 신라 국토에 상주해야 한다는 조건에 맞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가능성이 있는 부처님은 화엄불국세계의 구심점인 화엄교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인데,

이 부처님은 법신불(法身佛)로 형상 없는 이념의 세계인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주불이시니 현실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조건에 더욱 맞지 않는다.

이에 각종 불교 경전에 정통했던 경덕왕과 그의 측근 참모 내지 표훈, 신림 등 의상대사의 법통을 이은 신라

화엄종 대덕들은 고심 끝에 석굴암의 주존을 기사굴산(耆山), 즉 영취산(靈鷲山) 석굴 속에 상주하여 영원히

열반에 들지 않고 있다는 석가세존을 택했던 듯하다.

‘신동아’ 20회에서 밝힌 바와 같이 ‘법화경’ 권5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서 석가세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냈을 뿐 실제로는 멸도하지 않고 한량없는 세월 동안 영취산 상봉 석굴 속에

머물러 살아오고 계시며 또 영원히 이곳에 상주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영취산에 상주하시는 석가세존이라면 근원적이고 불변적이며 현실적이라는 세 가지 요건을 충분히

갖추게 된다.

‘화엄경’을 비롯한 일체 경전의 설주(說主; 말씀하신 주인공)이시니 근원적이라는 조건은 충분하게 되고,

영취산 즉 영산 정토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무수한 세월을 상주하신다고 하니 불변적인 조건도 충분하다.

따라서 인도의 영취산을 신라로 옮겨오기만 하면 되는데, 이미 낙산사나 금강산, 오대산 등을 신라 국토 안

으로 옮겨다 놓은 경험이 있으니 영취산을 토함산으로 옮겨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 인도의 영취산은 마가다국 왕사성 동북쪽 14∼15리 지점에 위치했다 하니, 경주를 왕사성으로 생각하는

신라 사람들로서는 위치로 보아도 경주에서 동남쪽으로 40리 쯤 떨어진 토함산이 왕사성의 영취산과 비슷

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성덕왕릉을 그 기슭에 쓰고 토함산에 화엄불국사 건립을 계획하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법화경’을 비롯한 수많은 대승경전이 이 기사굴산, 즉 영취산 중에서 설해지고 있어서 불경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그 경전의 첫머리에서 항상 이 이름을 접해 무척 친근감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통도사가 있는

영취산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도처에 영취산이란 이름이 이미 번져가고 있었다.

그러니 신라 오악(五嶽) 중 동악(東嶽)에 해당하는 토함산을 왕사성의 동악인 영취산으로 인식하는 것에는

조금의 무리도 없었을 것이다.
  


2. 인공 석굴을 조성한 까닭  

  

  당 태종 정관 20년(646)에 현장(玄, 602∼664년)이 지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권29 길속타라구타산

(粟陀羅矩山), 즉 영취산 대목에서 그 산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궁성(宮城; 왕사성의 궁성) 동북으로 14∼15리를 가면 길속타라구타산에 이른다.

당나라 말로는 취봉(鷲峯)인데 또 취대(鷲臺)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기사굴산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북쪽 산의 남쪽에 이어져서 외롭게 우뚝 솟아 있고 독수리가 이미

많이 깃들이고 있으며 고대(高臺)와 비슷하다.

하늘 빛과 푸르름을 서로 비춰 짙고 옅음이 나누어진다.

(석가)여래께서 세상에 사시던 50년 동안 이 산에 많이 계시며 신묘한 법을 널리 설하셨다. (중략)

그 산정(山頂)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좁은데 서쪽 절벽에 기대 벽돌집 정사가 지어져 있다.

높고 넓고 제도가 기이하며 동쪽으로 그 문이 열려 있다.

여래께서 예전에 많이 계시며 설법하셨다고 한다. 요즘 설법상(說法像)을 만들었는데 크기는 여래의 몸과

같다.”

현장이 갔을 때인 636년경까지 이 영취산 정상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거하시던 곳인 벽돌집 정사가 남아

있고 그 안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크기와 같은 장륙(丈六; 16자)의 설법좌상이 모셔져 있었다는 얘기다.

그 장륙설법좌상은 그 어름에 새로 조성했던 듯 ‘지금 만들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진다.

“정사 동쪽에 긴 돌이 있으니 여래께서 경행(經行; 좌선하다가 졸음을 막거나 운동을 하기 위해 일정 구역을

거니는 것)하시며 밟던 것이다. 곁에 큰 돌이 있는데 높이가 14.5자(당나라의 큰 자 1자는 30cm)가 되고

둘레가 30여 보(步; 1보는 151cm)이다. 이는 제바달다(提婆達多; 석가세존의 사촌아우로 석가세존을 시기

하여 항상 해치려 하다가 지옥에 떨어져 죽었음)가 멀리서 부처님께 돌을 던져 공격한 곳이다.

그 남쪽 절벽 아래에 스투파가 있는데 예전에 여래께서 이곳에서 ‘법화경’을 설하셨다.

정사의 남쪽 산 절벽 곁에 큰 석실이 있는데 여래께서 예전에 여기서 선정(禪定)에 드셨다.”

이어서 시자인 아난(阿難)존자가 거처하던 석실과 10대 제자 중에서 지혜가 가장 뛰어나 경전을 설할 때마다

문답의 대상으로 선발되던 사리불(舍利弗)이 거처하던 석실이 남아 있는 것도 밝히고 있다.

실재하는 영취산의 형상을 묘사해 놓아 영산정토의 실상을 짐작하게 한 것이다.

이런 기록과 더불어 이곳을 참배하고 왔을 신라 출신 구법승이나 인도 출신 전도승들의 신심에 의해 윤색된

순례담(巡禮談)은 이 영산정토의 신비감을 더욱 고조시켜 나갔을 것이다.

그러니 ‘법화경’을 통해 영산정토의 분위기를 머리 속에 새겨 놓고 있던 석굴암 설계자들은 자연히 토함산

정상에 가까운 동쪽 절벽 아래에 그 영산정토를 구현해 내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토함산 정상 부근의 동쪽 기슭에는 인도의 영취산처럼 자연 석굴이 뚫려 있지 않았다.

그리고 석굴을 뚫을 만한 절벽도 없으려니와 절벽이 있다 해도 바위의 성질이 굳센 화강암이라 도저히 석굴을

뚫을 수가 없었다.

이에 그 단단한 화강암을 다듬어 석실을 지어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하에 석실을 짓는 것은 이미 고구려에서 봉토 석실 벽화분을 지은 경험이 있었으므로, 평양 이남의 영유권을

확실하게 보장받은 당시의 신라 조정이 그 기술의 확인이나 전수자를 확보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터이니 이런 기획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고구려 석실 고분은 그 천장 처리를, 4면에서 판석을 켜켜이 덮어 층급을 좁혀 내려오다가 마지막 단계에서는

네 모서리를 차례로 줄이면서 마름모를 만드는 형식으로 마무리짓는 소위 말각조정법(抹角藻井法; 모를 죽이

고 마름모를 만드는 천장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무덤과 같은 석실일 경우 평면이 네모진 형태일 것을 전제로 하는 이런 천장 마감법은 짜임새로나 생김새 및

네 벽과의 어울림에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화엄경’을 비롯한 일체 불경을 설하여 갖가지 불국세계가 어우러진 화엄불국세계를 토함산에 재현케

한 주인공인 석가여래께서 상주하는 영산 불국토의 상징으로 조성되는 석굴암이 이런 통속적인 구조에 머무

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천연동굴로부터 비롯된 수행생활 공간인 인도의 석굴사원과 인공으로 굴착하여 예배 대상을 조각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 중국 석굴의 특징을 종합하여 이상적인 불국세계를 꾸미려 하였다.
  


3. 수호(守護)대중과 전법(傳法)대중  

  

  부처님과 그 권속(眷屬; 돌봐야 하는 식솔, 즉 딸린 식구)이 사는 생활공간인 불국세계도 안과 밖의 구분이

있다. 부처님으로부터 불법을 전수받아 이를 일반 대중에게 전파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지고 있는 성문

(聲聞; 가르침을 받고 깨달은 이), 연각(緣覺; 스스로 깨달은 이), 보살(菩薩; 일체 중생과 함께 깨달으려고

깨달음을 유보하고 있는 이) 등 전법대중이 부처님을 모시고 생활하는 공간은 불국세계 안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수호대중은 당연히 불국세계 밖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석굴암도 내외 2실 구조로 설계되어 문으로 들어오는 전실(前室; 앞방)과 현관은 8부중(八部衆)과

금강역사(金剛力士) 및 사천왕(四天王) 등 불법을 수호하기로 맹세한 수호대중이 차지하고 있으며, 주실

(主室; 주인 방)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를 둘러싼 여러 보살과 제자들로 가득 차 있다.

다만 이 주실 안에도 부처님을 밀착 보호하는 경호원이 있으니 범왕(梵王)과 제석(帝釋)이 그들이다.

범왕은 대범천왕(大梵天王; maha--bra-hman)의 줄임말로 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정상을 다스리는

천왕이다.

색계는 음욕(淫欲)이나 식욕(食欲)과 같은 욕망에서는 벗어났으나 아직 무색계(無色界)와 같이 완전히 물질을

여의어 순정신성만 존재하는 세계가 아닌 세계, 즉 색신(육신)이 존재하는 세계를 일컫는다.

초선천에 3천(天)이 있고 2선천에 3천이 있으며 3선천에도 3천이 있고 4선천에 9천이 있어 도합 18천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는데 대범천왕은 초선천의 제3천을 다스리는 천왕이다.

이 대범천왕은 아득한 옛날 사바세계를 만들어냈다고 해서 사바세계주(主) 범왕이라고도 일컬었으니 ‘잡아

함경(雜阿含經)’ 권44에서 구가리(瞿迦梨)가 네가 누구냐고 묻자 사바세계의 주인인 범천이라고 대답하는

것이나,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권3 탄생품(誕生品)에서 탄생하는 석가태자를 받아내는 장면을 서술

하는 데서도 사바세계주 범천왕이라 표기하고 있다. 이제 그 대목을 옮겨서 이를 확인해 보겠다.

“비구는 마땅히 알라. (석가)보살이 태 속에 머물면서 위와 같이 가지가지 공덕과 신통변현(神通變現; 신통을

부려 변화를 나타냄)을 성취하고 몇 달을 다 채운 다음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편안하게 탄생하셨다.

(중략) 이때에 제석(帝釋) 및 사바세계주 범천왕이 공경 존중하는 태도로 몸을 굽히고 나아가서 일심정념

(一心正念;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고 바르게 생각함)으로 양손에 교사야의(奢耶衣, ka-sika-; 산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실로 짜낸 얇고 투명한 비단)를 가지고 있다가 곧 보살을 받들어 올렸다. 그 일이 끝나고 나자 곧바로

보살을 태 속에 계시던 때 거처하시던 보전(寶殿)으로 옮기고 범궁(梵宮)으로 돌아갔다.”

석가여래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범왕과 제석은 그 호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밀착경호를 하고 있는 것이다.

탄생하는 석가를 둘이 기다리고 있다가 함께 받아낸 것이다.

그렇다면 제석천은 누구인가. 본 이름은 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 s첺kra-deva-na-m-indra)로 욕계

(欲界) 6천(天) 중 제2천에 해당하는 도리천(利天)의 천왕이다.

욕계는 식욕과 수욕(睡欲; 자고 싶은 욕망), 음욕 등 3욕을 버리지 못한 하늘세계를 일컫는데 사천왕천(四天

王天), 도리천, 야마천(夜摩天), 도솔천(兜率天), 화락천(化樂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6천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 석가제바인다라천왕, 즉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은 땅과 허공이 나뉘는 수미산(須彌山) 상봉에

있어 수미산 사방에서 각기 한쪽씩을 차지하고 사는 4천왕천과 함께 지거천(地居天; 땅에 사는 천인)으로

불린다. 도리천은 33천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4방에 각각 8천씩 있고 중앙에는 제석천이 사는 선견성

(善見城)이 있어 모두 33천이 되기 때문이다.

제석천을 교시가(尸迦, kas쳃ka)라고 부르기도 하고 마가바(摩伽婆, maghava-n)라고도 부른다. ‘대지도론

(大智度論)’ 권56에 따르면 이것이 제석천 전생의 성과 이름이라고 한다.

제석천은 원래 마가다국의 바라문으로 성이 교시가, 이름이 마가바였는데 지혜가 출중하여 그 친구 32인과

함께 복덕(福德)을 많이 닦았으므로 죽은 뒤에 친구 32인과 함께 도리천으로 상생하여 그 자신은 천왕이

되고 그 친구인 32인은 32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제석천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또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싸움을 좋아하는 악신인 아수라(阿修羅, asura)의 군대를 가끔 쳐부수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든다.

그런데 세상에 착한 무리가 늘어나면 제석천의 힘이 커지고 악한 무리가 늘어나면 아수라의 힘이 커지므로

일찍이 석가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루고 그 깨달은 불법(佛法)을 사람들에게 전파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착한 무리들이 늘어나야 하니 불법을 설해야 한다고 범천왕과 함께 간청하여 석가세존의 허락을 얻어냄

으로써 불교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권10 대범천왕권청품(大梵天王勸請品)에서 그 정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증득한 심히 깊고 미묘한 법은 가장 지극히 고요하여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려우며 분별하고 생각

하여 풀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오직 여러 부처님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중략)

만약 이 법으로 사람들을 위해 연설한다면 저들은 모두 깨달아 알 수 없을 터이니 헛되이 그 공력만 버리고

이익될 바 없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응당 잠자코 있어야 한다.

저때에 대범천왕이 부처님의 위대한 신통력으로 여래께서 가만히 계시는 까닭을 알고 석제환인의 처소에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교시가야 너는 지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간 중생들이 사는 곳에 생사의 검은 수풀이 드리워져서 선법(善法)이 줄어들고 악법이 늘어나고 있다.

어째서냐 하면 여래께서 버리시고 법륜(法輪)을 굴리시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땅히 부처님 계신 곳으로 함께 가서 여래께 권청(勸請)해야 한다.

어째서냐 하면 (과거의) 여러 부처님께서도 만약 권청하지 않으면 모두 가만히 계셨기 때문이다.(중략)

저때에 대범천왕 및 석제환인, 사천왕천, 33천, 야마천, 도솔타천, 낙변화천, 타화자재천, 범중천(梵衆天),

범보천(梵輔天), 광음천(光音天), 광과천(光果天), 편정천(遍淨天), 정거천(淨居天) 내지 아가니타천(阿迦

尼天)이 빛을 발하며 한밤중에 다연림(多演林)에 이르러 부처님께 향하여 정례(頂禮)를 드리고 나서(중략)

석제환인이 합장하고 부처님께 향하여 게송으로 법륜을 굴리시기를 청하였다.

(중략) 저때에 여래께서 그대로 가만히 계시니(중략) 대범천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편단우견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며 합장하여 부처님께 향하여 법륜 굴리시기를 게송으로 청하였다.”

이렇게 제석천과 범천왕이 계속 권청하였으나 석가세존은 계속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면서 어찌할지를 고심

한다. 그 결과 중생을 상·중·하 3종의 근기(根機)로 나눌 수 있는데 상근기를 타고난 이들은 설법을 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고 하근기의 중생은 설법을 해도 깨닫지 못하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근기의 중생들은

설법을 하게 되면 바로 깨달아 알 수 있으니, 자신이 출현한 것은 이들에게 설법해주기 위해서라는 판단을

내린다.

그래서 게송으로 대범천왕에게 설법하기로 한 사실을 통보한다. 이 허락을 받아낸 범왕이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다가 세존께 정례를 드리고 날아가버리자 이때에 지신(地神)이 허공신(虛空神)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여래께서 지금 범왕의 권청을 받아들여 법륜을 굴리고자 하신다. 한량없는 여러 중생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고, 한량없는 여러 중생을 이익되게 하시려는 때문이며, 한량없는 여러 중생을 안락하게 하시려는

때문이고, 선인(善人)을 늘리고 악한 무리를 줄이려는 때문이며, 여러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려 하신 때문

이다.” 지신이 이 말을 마치자 한 순간에 허공신이 듣고 차례로 전해서 아가니타천까지 이르렀다.
  


4. 석굴암의 범왕과 제석 자리배치 틀리다  

  

  범왕과 제석은 석가세존께 이렇게 친근하고 특별한 존재였으므로 수호대중임에도 불구하고 전법 공간에

배치되어 석가세존을 밀착호위하고 있다.

그러니 이 범왕과 제석은 당연히 밖을 경계하는 자세로 서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석굴암 주실에 배치된 범왕상과 제석상은 거꾸로 내면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으니 이는 그

밀착호위 임무와는 상반된 자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덩달아서 좌우 협시보살로 등장한 문수(文殊)보살상과 보현(普賢)보살상까지 시선을 안으로 돌려 10대

제자와 마주보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는 주불을 협시하는 시위(侍衛)대중이 지을 자세는 아니다.

더구나 그 지물을 보면 아수라와 싸워야 할 제석천이 마땅히 금강저를 들고 있어야 하고 사바세계를 창조

했다는 범왕은 정병(淨甁, 물병)을 들어야 하니 현재 보는 쪽으로 좌측에 정병과 불자(拂子, 떨이개)를 들고

서 있는 인물을 범왕으로 보고, 보는 쪽으로 우측에 금강저(金剛杵)와 불자를 들고 서 있는 인물을 제석천

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제석천보다 우위(優位; 윗자리)에 있어 제석천으로부터 최고의 경례를 받는 범왕이 당연히 부처님의

좌측, 즉 보는 쪽에서 우측에 시립해야 한다.

그런데 그 위치가 바뀐 것이다.

제석이 범왕자리에 와 있고 범왕이 제석자리에 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범왕과 제석의 위치가 뒤바뀔 때 함께 움직인 문수보살상과 보현보살상도 그 위치가 서로

바뀌고 말았다.

그래서 금강저라는 확실한 지물 때문에 범천왕과 제석천의 이름은 바뀌지 않았으나 문수보살을 상징하는

확실한 지물인 경권(經卷; 두루말이 형태로 되어 있는 경전)의 표현에도 불구하고, 주불을 협시할 때 주불

쪽에서 보아 좌측이 문수이고(보는 쪽에서는 우측) 우측은 보현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원칙에 따라 보현을

문수라고 부르고 문수를 보현이라고 부르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

사실 부처님을 시위할 경우 좌범왕, 우제석의 원칙은 깨뜨릴 수 없는 철칙이다.

아마 문수보살과 범왕상이 제자리를 찾는다면, 즉 현재의 문수보살상과 범왕상을 보현보살상과 제석천상과

맞바꿔 놓는다면 범왕과 제석 및 문수와 보현의 시선이 모두 십대 제자의 시선과 가지런하게 밖을 향하게

될 것이고 문수보살의 지물인 경권(經卷)도 본디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밖을 경계하는 범왕과 제석의 경호 의미가 되살아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실수는 석굴암의 주실 천장 앞부분이 붕괴되었던 1900년 전후한 시기에 저질러진 것이 아닌가 한다.

나라가 망해가는 정신없던 때에 천장이 무너지며 그에 연결되었던 앞부분 석벽까지 휩쓸려 쓰러지자 대강

응급 복구한다고 하다가 좌우를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 관한 식견도 부족하고 옛 모습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능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다.

그런데 일제가 1913년부터 중수를 시작하면서 학술적인 진단을 거치지 않은 채 이런 현상을 고착시켰기

때문에 그 오류를 바로잡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5. 대승불교가 피워낸 마지막 꽃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이를 뿌리로 하여 불상이 출현하였다.

문화를 식물에 비유할 때 이념이 뿌리라면 예술은 꽃에 해당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대승불교사상이라는 새로운 뿌리에서 불상이라는 새로운 꽃이 피어난 것이다.

이 꽃은 비단길을 통해 동서남북을 잇는 길목에서 국제무역의 차익을 얻어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성장한

쿠샨제국이라는 기름진 밭에서 거름을 먹으며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데, 그 뿌리도 계속 성장하여 인류가

이제까지 보지 못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게 된다.

그것이 이른바 팔만사천 경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승경전이다. 수많은 천재 학승이 국가와 대중의 전폭

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으며 편찬해낸 대승경전들은 그것이 출현하던 서기 1세기 전후부터 점차 그 분량을

더해가고, 그 체제와 내용도 더욱 정비되어 나간다.

그래서 ‘법화경’이나 ‘반야경’같이 수준 높은 철학체계를 자랑하는 대승경전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불상미술이 예배의 대상으로 화려하게 발전해 나가는 것과 바퀴자국을 함께 남기는 현상이었다.

그 결과 취지를 달리하는 수많은 경전이 나오게 되니 이들을 총괄하여 원융무애한 논리로 종합할 필요가

있어 ‘화엄경’ 같은 방대한 체계의 경전이 출현하기도 한다. 백천 줄기의 강과 시내가 모여들어 바다를

이루는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그러니 석가세존이 대각을 이루어 성불(成佛)한 다음 최초로 설했다고 하는

‘화엄경’은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가장 최후에 형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시내와 강과 같은 소규모 경전들이 없고서는 바다와 같은 대부의 경전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방대한 고급 대승경전들은 무착(無着)이나 세친(世親) 같은 대승논사(大乘論師)들이 키다라

쿠샨왕국을 중심으로 서북인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4∼5세기에 정비를 끝내는 듯하다. 5세기 초에

서역계의 대역경사(大譯經師)들인 구마라습(鳩滅什, 343∼413년)이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359∼429년)

에 의해서 ‘법화경’ 7권(406년 번역)과 ‘화엄경’ 60권(418년 번역)이 번역되는 것으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 중국에서는 ‘법화경’을 이념 기반으로 하여 돈황석굴과 운강석굴을 비롯한 거대한 불상굴(佛像窟)을

굴착하는 등 대규모 조상(造像)활동을 벌여 중국 조각사상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긴다.

그 영향은 우리에게도 미쳐와서 삼국시대에 법화신앙과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백제의 태안반도에서는 <예산

사방불>이나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 등이 조성되고 백제와 신라에서는 <국보 78호 금동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 과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과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미륵반가상을

조성해낸다.

이후 신라가 통일하는 과정에는 신라화엄종의 독자적인 선도(先導)에 의해 화엄종 사찰에서 아미타불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아미타불상과 관세음보살상 조성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제 통일신라왕국이 문화 절정기를 맞이하여 토함산에 화엄불국세계를 구현해 내려 하면서는 만법

귀일(萬法歸一; 차별을 이루는 만 가지 현상은 근본을 이루는 하나의 원리로 돌아옴)과 원융무애(圓融無碍;

원만하게 녹아들어 서로 거리낌이 없음)의 화엄종지에 입각하여 그 동안 꽃피워왔던 각종 불교상들을 화엄

일승(一乘)의 질서 아래 총체적으로 함축 표현하려 하였다.

그래서 불국사 대석단 위에 각종 불국세계를 원융무애하게 함축해 놓듯이 석굴암 석굴 안에는 각종 대승

경전에서 설하는 서로 다른 불국세계의 모든 성중상(聖衆像; 신성한 무리들의 형상)의 성격을 함축하여

최소한의 표현으로 일체를 상징하려는 욕심을 부리게 된다.

이는 신라 화엄종의 종조(宗祖)인 의상대사(義湘, 625∼702년)가 일찍이 40권 내지 60권 혹은 80권 등으로

번역되어 10조9만5048자(字)로 그 분량이 과장 표기된 방대한 ‘화엄경’의 내용을 다만 210자의 ‘일승법계

도시(一乘法界圖詩)’, 즉 법성게(法性偈)로 함축 표현해 놓은 사실을 반영하는 현상이었다.

우리의 기후풍토는 사계절이 분명하고 거의 전 국토가 바위산이어서 초목(草木)의 일시적인 조락(凋落;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짐)을 항상 경험하게 되므로 우리 민족은 아무리 복잡한 표현이라도 그것을 극도로

단순화시켜 줄거리만 파악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일승법계도시’의 제작이나 석굴암의 조성은 모두 우리 민족성의 발로(發露)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210자의 ‘일승법계도시’(법성게)도 다만 14자의 7언(言) 대구(對句; 상대를 이루는 한 쌍의 시구)로

압축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원리 속에는 일체의 현상이 있고 수많은 현상 속에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그러니) 하나의 원리는 곧 일체의 현상이 되며 수많은 현상은 곧 하나의 원리가 된다.

(一中一切 多中一, 一卽一切 多卽一)’

이런 신라 화엄종의 ‘일중일체다중일’의 이념이 석굴암의 조형정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석굴암은 각종 대승경전에서 서술하는 불국세계의 모든 특징을 함축 표현하여 하나로 종합하는

양상을 드러낼 수 있었다.


6. 일본 제압하는 석굴암 본존불 

  

  우선 영산정토의 터전은 ‘법화경’ 권1 서품과 권5 여래수량품에 기술되고 있는 영취산, 즉 기사굴산의

실상과 비슷한 토함산 상봉 동쪽 기슭에 잡았다.

그리고 본존 석가여래좌상은 막 마군(魔軍)을 항복시키고 대각(大覺)을 이루어 부처님이 되신 순간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편단우견(偏袒右肩; 오른쪽 어깨를 드러냄)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게 하였다.

이는 아마 ‘구화엄경’ 권1 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이나 ‘신화엄경’ 권1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에서 밝힌 것

처럼 마가다국 적멸도량(寂滅道場)에서 대각을 얻어 막 부처님이 되고 나서 환희에 넘쳐 ‘화엄경’을 설하려

하는 장면을 상징하는 것일 듯하다.

그러면서 백제와 고구려를 항복받아 삼국통일을 이루어냄으로써 전륜성왕으로 군림해온 신라 진골 왕통의

절대 권위를 과시하는 동시에 문무왕 이래 신라 왕실의 숙원이던 일본의 항복을 염원하는 표현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특히 이 본존불이 성덕왕의 초상조각이라 할 때 일본 제압은 당면문제였으니 항마촉지로 동쪽을

향해 위엄을 과시할 필요가 절실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상 형식은 편단우견에 결가부좌한 6∼7세기 굽타 말기 사르나드식 항마촉지인 상 양식을 따르는 것으로,

이런 상 양식은 이미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삼존상에서 그 선구를 보였다.

김리나(金理那)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밝혀냈듯이 이런 상 양식은 현장법사(玄, 602∼664년)와 왕현책

(王玄策)에 의해서 중인도 마가다국 부다가야의 석가여래 성도처(成道處)로부터 전해져온 초당 시기

(618∼712년)의 새로운 양식기법이었다.

현장은 당 태종 정관 3년(629) 3월8일에 태종의 공식적인 후원 아래 서역(西域, 인도 문화권)으로 구법

(求法; 불교 경전을 구함)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17년 동안 130여 개국에 이르는 인도 곳곳을 돌아보고 대소승 경전 520질(帙) 657부(部)와 불상

8구(軀) 불사리(佛舍利) 150과를 가지고 정관 19년(645) 1월에 장안으로 돌아온다.

표면적으로 내건 명분은 구법여행이었으나 사실 천하 제패를 꿈꾸던 야심만만한 당 태종이 서역의 영토확장

가능성과 교역의 득실을 탐색하기 위해 밀명을 내려 보낸 탐색여행이었다.

그래서 현장은 정관 10년(636)에 중천축 마가다국에 이르러 마침 4천축의 맹주로 군림하던 시라일다(尸羅

逸多)왕을 만나고 이를 설득하여 정관 15년(641)에 당나라로 사신을 파견하게 하여 중인도와 중국이 최초로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한다.

당 태종은 중인도와 교역이 성사될 듯하자 중국과 중인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티베트와 동맹이 필요하다고

생각, 이미 정관 15년 1월에 종실녀(宗室女; 종실의 딸)를 문성(文成)공주로 삼아 티베트왕 기종농찬(棄宗

弄讚)에게 시집보내 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정관 15년부터 마가다왕 시라일다와 몇 차례 사신을 교환한 다음 정관 17년(643) 3월에는 위위

시승(衛尉寺丞) 이의표(李義表)를 정사(正使)로 하고 황수현령(黃水縣令) 왕현책(王玄策)을 부사(副使)로

하여 22인의 공식수행원을 거느리고 가는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한다.

왕현책 등은 이해 12월에 마가다국에 도착하여 시라일다왕의 배려로 각처의 불교유적지를 순례하고 정관

19년(645) 1월27일에는 왕사성 기사굴산, 즉 영취산에 오른다.

여기서 영산정토를 배관한 감격과 당 태종의 위덕을 칭송하는 기념비문을 석벽에 새겨 놓고 2월 초에는

부다가야로 내려와 마하보리사, 즉 대각사(大覺寺)에 들러 석가여래의 항마성도상에 참배한다.

그러고 나서 2월11일 여기에다가도 기념비를 세운다.

그 다음 대각사의 항마성도상 등에 매료되어 수행했던 송법지(宋法知) 등의 화가들에게 이를 모사하게 하여

10권의 도상집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당나라에 우호적이던 시라일다왕이 정관 20년(646)경에 죽자 혼란을 틈타 왕위를 찬탈한 아라나순

(阿羅那順)은 왕현책 일행을 구금하고 그 사이 여러 나라로부터 받은 교역품을 빼앗는다.

이때 왕현책은 우위솔장사(右衛率長史)로 벼슬이 올라 정사의 지위에 있었는데 밤중에 탈출하여 티베트로

달려가 구원을 요청한다.

문성공주의 남편인 농찬왕은 정예병 1200명과 네팔 기병 7000명을 내주어 중천축국, 즉 마가다국을 정벌

하게 한다.

정사 왕현책과 부사 장사인(蔣師仁)은 왕성을 공격한 지 3일 만에 아라나순왕과 그 일족을 사로잡고 남녀

포로 1만2000인 및 소와 말 2만 여 필을 획득한다.

그래서 드디어 정관 22년(648) 5월에는 왕현책 일행이 이들을 이끌고 장안으로 개선해 돌아온다.

왕현책은 귀국한 다음에 6년 동안 중천축을 여행하며 겪은 일들을 ‘중천축행기(中天竺行記)’ 10권으로 저술

하고 또 ‘서역국지(西域國志)’ 100권을 지어 그 풍물을 소개하는데 그중에 도화(圖畵)가 40권이었다 한다.

아마 석굴암 불상 형식의 조본(祖本)이 되었을 <편단우견항마촉지인석가불좌상>도 그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석굴암 본존불의 좌상 총 높이는 345cm다. 당나라 큰자 한 자가 30cm이니 이를 당나라 큰자로 환산하면

11자 5치가 된다.

그런데 현장법사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권8에서 부다가야의 마하보리사, 즉 대각사에 모셔진 항마

성도상의 치수를 기록하면서 총 높이가 11자 5치라 하였다.

여기에 착안하여 석굴암 본존상이 대각사 항마성도상을 모본으로 삼았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나 이는

우연의 일치일 개연성이 크다.

만약 석굴암을 조성하면서 당나라 자를 기준으로 썼다면 하필 11자 5치 높이로 치수를 놓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석굴암 주불 좌상은 장륙상(丈六像)일 터이므로 그 높이가 16자에 해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나라 큰자로 이것을 재어보니 11자 5치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굴암 본존좌상을 조성하면서 쓴 자는 당나라 큰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따라서 석굴암 주불을 조성할 때 사용한 영조척(營造尺)의 기본 단위는 좌상 높이를 16자로 놓고 계산해야만

산정될 것이다.

인도에서는 보통 사람의 크기가 8자라 하는데 이는 자기 뼘(걸)을 한 자로 쳤을 때 그와 같은 수치가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키가 172cm인 사람의 한 뼘(1자 혹은 1걸) 길이는 21.5cm가 되어 이 자로 8자의 두 배인 장륙상의

높이를 계산하면 344cm가 나오므로 석굴암 본존상이나 부다가야 대각사 본존상의 높이가 비슷하게 산정

된다. 따라서 장륙상의 일반적인 기준을 적용하다 보면 이런 치수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높이로 좌상을 조성하게 되면 어깨 폭이나 무릎 폭, 좌대 높이, 좌대 폭 등은 자연스레 그 비례를 따르게 되니

서로간의 유사성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마련이다.

키가 얼마만한 사람을 기준으로 장륙 높이를 산정했느냐에 따라서 장륙상의 크기가 결정되는 것이니 석굴암

본존상이 성덕왕의 초상조각이었다면 성덕왕의 키는 172cm 정도가 되었을 듯하다.

따라서 석굴암을 짓는 영조척의 길이는 바로 본존좌상을 장륙(16자) 높이로 계산할 때 산출되는 1자의 길이가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불상 조성 기준자가 각각 키에 따라 달랐다는 사실을 우리는 <황복사지3층석탑출현 금제아미타여래

좌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성 내역을 밝히는 명문(銘文)에 높이가 6치라 했는데 현재 높이가 12cm이니 기준자가 20cm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이 자로 재어 8자 높이라면 160cm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불상이 효조왕을 위해 조성한 것이고 효조왕은 불과 16세에 돌아갔으므로 돌아갈 때의 키가 이쯤

이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7. 밀교에서 비롯된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  

  

  석굴암 본존불좌상 바로 뒷면의 후벽 정중앙에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다.

입상 높이가 220cm이니, 석굴암 영조척으로는 10자 남짓 되는 높이로 8자인 보통 사람보다는 큰 키다.

머리에 모란당초무늬를 두른 화관(花冠)을 쓰고 그 관띠를 양쪽 귀 뒤로 층층이 내려뜨렸는데 화관 아래

보발(寶髮; 보배로운 머리칼, 불보살의 머리칼을 높여 부르는 말) 위로 좌3면(左三面; 왼쪽으로 세 개의 얼굴),

우3면(右三面; 오른쪽으로 세 개의 얼굴)이라는 6면의 관세음보살 얼굴을 조각하고 화관 위 정면에 다시

3면의 관세음보살 얼굴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화관 정면 중앙에는 모란꽃잎 한 장을 높이 세워 놓고 나서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짓고 서

있는 아미타불상을 높은 돋을새김으로 그 안에 표현해 놓았다.

온몸에서 솟아오르는 광명(光明)을 상징하는 거신광(擧身光)과 연화대좌(蓮花臺座)까지 모두 갖춘 모습이다.

위층에 있는 3면의 관세음보살상 머리 위로 현재는 아마타화불좌상이 표현되어 있지만, 이는 1962년에서

1964년에 걸친 중수 기간에 잘못 보충해 넣은 것이고 원래는 불면(佛面; 부처님 얼굴)이 새겨져 있던 곳이다.

1907∼1908년에 이 석굴암의 존재가 일본인들에게 알려지자 일본인 불량배들이 아랫단 화불 우측(보는

방향에서) 보살면과 함께 이 불면도 떼어 갔다고 전해진다.

앞에 3면, 좌에 3면, 우에 3면, 합하여 9면인데 뒷면에 있어야 할 1면은 이 조각상이 돋을새김상이라 표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화관을 쓰고 있는 본 얼굴과 합하면 11면이 되는 까닭에 11면관세음보살이라 부른다.

이런 11면관세음보살상도 현장이나 왕현책이 정관 19년(645)과 정관 22년(648)에 각각 그려오거나 가져온

굽타 말기 내지 팔라 왕조 시대의 중인도 밀교상에서 비롯된 신형식 불보살상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당나라에서는 이미 측천무후(則天武后) 장안(長安) 3년(703)경에 장안 보경사(寶慶寺)에다 이런 11면

관세음보살입상을 많이 조성하여 봉안한다.

현장이 당 고종 현경(顯慶) 원년(656)에 ‘십일면신주심경(十一面神呪心經)’ 1권을 번역하여 11면관세음

보살입상의 조성 공덕을 널리 소개하였기 때문이다.

11면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해 모시고 11면관세음보살신주를 독송하면 이익과 안락을 얻을 수 있고 일체 병

이나 좋지 않은 일을 소멸할 수 있으며 악몽에서 벗어나고 비명횡사를 막을 수 있으며 악심 먹은 사람이나

원망하는 사람을 달랠 수 있고 귀신의 장애를 막을 수 있으며 소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8.  11면관세음보살입상을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응당 먼저 단단하고 틈이 없는 좋은 전단향나무로 관자재(관세음)보살상을 만들어야 한다.

길이는 1걸수(手, 뼘) 반이어야 한다. 왼손은 붉은 연꽃이 담긴 군지(軍持; 정병, 즉 물병)를 잡고 오른쪽

팔뚝을 펴서 염주를 걸되 손은 시무외인을 짓는다.

그 상은 11면을 짓는데 앞에 해당하는 3면은 자비상(慈悲相; 자비로운 상호)으로 만들고 왼쪽 3면은 진노상

(瞋怒相; 성나서 분노한 상호)으로 만들며 오른쪽 3면은 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 흰 이빨을 겉으로 드러낸

상호, 으르렁거리며 위협하는 상호)으로 만들고 뒤에 해당하는 1면은 포악대소상(暴惡大笑相; 포악함을

드러내기 위해 크게 웃는 상호)으로 만들며 정상(頂上; 정수리 위) 1면은 불면(佛面; 부처님 얼굴)상으로

만든다.

여러 머리의 보관 속에는 모두 불신을 만들고 그 관자재보살 몸 위에는 구슬꿰미 등 여러 가지 장엄을 갖춘다.”

사실 이 밀교경전은 이미 후주(後周) 무제(武帝, 재위 561~577) 때 천축 삼장(三藏) 야사굴다(耶舍多)가

 ‘불설십일면관세음신주경(佛說十一面觀世音神呪經)’이란 이름으로 번역해 놓고 있었다.

내용은 현장이 번역한 ‘십일면신주심경’과 대동소이한데 문장이 오히려 평이하고 담박하며 뜻이 분명히 드러

나서 현장의 신역경전보다 읽기에 편하다.

그래서 현장이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을 전해와 이의 조성과 신앙을 권면하기 위해 ‘십일면신주심경’을 번역해

내자 사람들은 오히려 야사굴다가 번역한 ‘불설십일면관세음보살신주경’을 재평가하여 이를 더욱 널리 읽고

이에 의해 십일면관세음보살을 만들어낸 듯하니 이제 그 십일면관세음보살의 조성 방법을 지시한 대목만

옮겨 보겠다.

“저때에 관세음보살마하살이 이렇게 (석가)세존께 아뢰었다.

만약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으로 능히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만드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저 선남자 선여인은 반드시 흰 전단향나무로 관세음보살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 나무는 반드시 정밀하고 속이 차야 하니 마르고 터져서는 안 된다.

몸 길이는 1자 3치다. 11개의 머리를 만드는데, 앞에 해당하는 3면은 보살면(菩薩面; 보살 얼굴)을 짓고

왼쪽 3면은 진면(瞋面; 성난 얼굴)을 짓고 오른쪽 3면은 보살면과 같으나 개 이빨이 위로 솟아나게 한다.

뒤에도 1면이 있는데 대소면(大笑面; 크게 웃는 얼굴)으로 만들고 정상(頂上)의 1면은 불면(佛面)으로

만든다.

얼굴은 모두 앞을 향하고 뒤에는 광배를 붙인다.

그 십일면은 각각 화관(花冠)을 쓰고 그 화관 안에는 각각 아미타불이 있다.

관세음의 왼손은 물병을 잡는데 병 주둥이에 연꽃이 나와 있다.

그 오른손을 펴서 구슬꿰미를 걸고 시무외의 손을 짓는다. 그 상의 몸에는 반드시 구슬 꿰미를 새겨서 구슬

꿰미로 장엄해야 한다.”

이런 ‘불설십일면관세음보살신주경’과 ‘십일면신주심경’이 널리 유포되면서 중국에서는 초당 시기 후반부터

11면관세음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듯하다.

일본 내량 법륭사에 전해 내려오는 전단목 <구면관세음보살입상>이 이 시기 당나라에서 조성된 것으로

자재장(資材帳)에 원정(元正) 천황 양로(養老) 3년(719)에 전래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719년은 성덕왕 18년이며 동시에 당 현종 개원(開元) 7년에 해당하여 성덕왕과 현종의 밀월(蜜月)관계가

한창 무르익어 가던 시기이니 신라에 이런 당나라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이 얼마나 많이 들어와 있었는지는

짐작되고도 남는다.

삼국 통일 과정에서 양국간의 빈번한 외교관계와 문물교류를 생각해 보면 이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의 유입과

모각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나라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은 하나도 없다.

다만 그 신라화의 성공결과인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현존하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으로 중국과 일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유례라면 아무래도 장안

<보경사 전래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 군(群)과 법륭사 소장 <구면관세음보살입상>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과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너무 커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이 우수하다.

그 사이 무수한 시험조각을 거치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보경사 전래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을 조성하던 시기와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 조성 시기의

시차가 거의 반세기에 이르니, 당나라에서 보경사상을 만들 때부터 신라가 이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의

조성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면 족히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과 같은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 양식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가사유상 양식이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에서 완성되듯이 십일면관세음보살 양식도 석굴암에서 그 상

양식이 완성되었다고 보고 있으니 통일신라 사람들은 이 십일면관세음보살 신앙에 매료되어 그 조각에

몰두하였던 모양이다. 이제 그 완성된 양식이 어떤 것인지 대강 살펴보기로 하겠다.
  


9. 소덕왕후 모습 그려낸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상  

  

  우선 관세음보살의 11면과 화불 및 불면의 배치를 경전에서 말한 대로 완벽하게 이루어냈다.

<보경사 관세음보살입상>에서는 11면을 배치하는 데 급급하여 중앙 정면에 화불을 배치하는 것을 놓쳤고

<법륭사 구면관세음보살입상>에서는 구면의 무게에 눌리고 말아 11면을 다 채우지 못하고 3면을 생략하

였다.

그런데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에서는 이를 경전에서 설한 내용대로 완벽하게 처리하였다.

보관 정면에 화불을 입불로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좌 3면, 우 3면의 6면을 그 좌우로 배치하였으며 정면 3

면은 보관 위 보계(寶; 보배로운 상투, 불보살의 상투를 일컫는 정중한 말) 앞에 올려놓고 그 위에 불면

하나를 올려놓았다.

3층 표현법으로 11면의 배치를 유감없이 처리해낸 것이다. 물론 뒷면 1면은 숨겨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으니

이는 뒷면은 보이지 않는 부조상(浮彫像; 돋을새김 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관 위에 배치된 9면의 관세음보살 보관에도 아미타여래의 화불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경전 내용을

실현하기 위해 아미타좌상을 화관에 크게 돋을새김해 내었는데 무게와 공간을 줄이기 위해 화불좌상만 크게

표현하고 화관 전체를 거신광(擧身光)으로 삼게 하였다.

화불 표현을 엄두도 내지 못한 <보경사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과 화불을 표현했으되 쓸데없는 연꽃테 장식

으로 무게와 간격만 늘리고 화불을 왜소하게 만든 <법륭사 구면관세음보살입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조형감각이다.

그리고 십일면이 쌓인 머리 위의 무게를 가능한 한 정수리 위로 집중시켜 무게의 사방 확산을 막고 부피를

축소시키기 위해 좌3, 우3, 상3의 구면 간격을 최소화하고 화불을 세워 그 구심점을 이루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본 얼굴을 압박하는 머리 위 10면의 무게와 부피를 분산시키기 위해 화관의 끈치레를 장엄하게

하고 층층이 귀 뒤로 내려뜨려 어깨를 지나가게 함으로써 얼굴 폭을 넓히지 않아도 아래 위 균형이 잡히게

한 것이다.

이것이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의 얼굴을 보살면의 특징인 지마면(芝麻面; 참깨와 같이 길쭉한

얼굴)을 유지하게 하여 청수(淸秀)한 기품이 드러나게 한 비결이다.

귀를 정도 이상 크게 표현하고 귀고리를 무겁게 단 것도 머리 위의 무게에 대응하려는 지혜다.

상대적으로 얼굴은 조금의 과장도 필요 없게 되었는데, 보경사 상이나 법륭사 상이 완벽하게 표현해 내지도

못한 머리 무게 때문에 도리 없이 얼굴 폭이 넓어져 비만(肥滿)과 둔중성(鈍重性)이라는 반보살성(反菩薩性;

보살과 배치되는 성품)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머리 무게를 단속하여 무게중심을 귀 뒤로 옮겨 놓은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은 목 놀림이

자유로워져 긴 목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보경사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이나 <법륭사 구면관세음

보살입상>은 머리 무게에 짓눌려 목이 짧게 움츠러들 수밖에 없으니 답답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목을 타고 전해 내려오는 무게를 가슴과 배에서 받아내야 하므로 가슴과 배의 근육이 긴장하여

전신이 경직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이 유연한 몸매를 뽐내는 것은 기본적으로 머리 무게중심을 귀 뒤로 보내는

조형적 기지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의복 표현은 잠자리 날개처럼 가볍고 투명하게 처리하면서 여러 벌을 덧입혀 속살이 비칠 듯 가려

주었다. 그래서 더욱 신비감이 고조되는데, 깔끔하게 접혀 구분이 명확하게 층급진 옷주름은 다림질을 막

끝내고 새로 입은 옷인 듯 산뜻한 청결미를 보태준다.

그리고 미풍을 맞은 듯 살랑거리는 옷자락들에서 넘쳐나는 율동감은 돌로 다듬은 육신에서 숨결을 느끼도록

부추긴다.

경전에서 왼손으로 붉은 연꽃을 꽂은 물병을 든다고 했으므로 그와 같은 표현을 하였는데, 손목을 부드럽게

휘감아 병목을 왼쪽 젖가슴에 지그시 대고 끌어안은 모습에서 진정 남을 사랑할 줄 아는 뜨거운 마음을 읽어

낼 수 있다.

구슬꿰미를 오른손에 건다든지, 오른손을 구슬꿰미에 꽂으면서 시무외인을 짓는다는 내용은 그에 얽매이지

않고 대담하게 번안(飜案)하였다.

오른손을 내려 두 어깨에서 발 아래까지 걸어 내린 긴 구슬꿰미를 엄지와 중지로 가뿐하게 들어올린 것이다.

치렁거려 걸음걸이를 방해하는 장신구를 살짝 걷어드는 것은 마치 치맛자락을 그렇게 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드러내니 지금 동작을 진행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더구나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있는 듯한 사려 깊은 표정은 그대로 대자대비로 가득 찬 어머니의 얼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얇은 옷감만큼이나 희미할 정도로 투명한 구슬꿰미들의 흐릿한 표현은 고귀한 신분을 한껏 돋보이게 하는데,

연꽃 위의 씨방을 힘주어 밟고 있는 오른발 표현에서는 어린 자식을 우물가에 내놓은 듯 조마조마 애태우는

모정을 읽을 수 있다.

경덕왕이 한두 살 젖먹이 때 여의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모후 소덕왕후 김씨(700년경∼724년)의 모습을

이렇게 재현해 놓았으리라 생각된다.

복잡한 십일면 주변으로는 아무 장식이 없는 두원광(頭圓光)이 단순하게 돌려지고, 발 밑에는 연꽃 한 송이가

사실적으로 돋을새김되어 생동감을 더해준다.






 

세계 최고수준의 석굴암 10대제자상 [한국 불교 미술의 원류 22] 


  
1. 유마경(維摩經)의 세계   


대승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중생의 성불(成佛)이다.

즉 모든 사람이 해탈을 얻어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보살의 서원(誓願)은 일체 중생을 남김없이 대승(大乘; 큰 수레)에 태워 함께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

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승불교는 세속을 벗어난 소수의 출가자(出家者)가 수행 득도하여 해탈을 얻는 데 최종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해가는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이 해탈을 얻는 데 그 최종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이에 대승경전의 출현 과정 최종 단계에서는 재가불자(在家佛子; 세속에 사는 불교 신도)가 성불하여 설법

하는 내용의 경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대승사상을 마무리짓는 경전으로 출현한 것이 이른바 ‘유마경(維摩經)’이다.

이 ‘유마경’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중국에서 최초로 번역된 시기가 삼국시대 오(吳)의 건흥

(建興) 2년(253)이니, 이 경전이 인도에서 편찬된 것은 대승불교의 극성기이던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에

걸치는 시기가 아니었던가 한다.

이 경전을 최초로 번역한 이는 대월지(大越氏, 越氏를 月氏 또는 月支로 표기하기도 함) 우바새(優婆塞; up-

asaka, 淸信士, 재가 남자 불교 신도) 지겸(支謙)이라 한다.

그가 ‘불설유마힐경(佛說維摩詰經)’ 상·하 2권으로 번역한 것이다.

지겸은 대월지의 혈통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 조부 법도(法度)가 그 나라 사람 수백 명을 거느리고 후한 영제

(靈帝) 때(168∼189년) 한나라에 귀화했다고 한다. 그러니 대승불교가 일어났던 쿠샨제국의 간다라 지방이

그의 고향인 것이다.

지겸은 총명한 자질을 타고나서 10세 때 이미 중국 글을 터득하고 13세 때에는 인도 문자를 모두 배워 6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한다.

수많은 책을 널리 읽어 모르는 것이 없었는데 특히 불교 경전에 통달했고 각종 예술에도 정통했다.

몸이 가늘고 길며 빛이 검었고 눈은 흰빛이 많고 눈동자는 노랬으나, 총명이 뛰어나서 사람들이 그를 꾀주

머니라고 불렀다.

그는 후한 헌제(獻帝, 재위 190∼220년) 말년 경에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같은 고향사람 수십 명과 함께

남쪽 오나라로 피난해 오나라 대제(大帝) 손권(孫權, 재위 222∼252년)에게 발탁되어 박사(博士)가 되고

동궁(東宮; 태자)을 보도(輔導; 도와서 이끌어 감, 즉 가르침)하는 직책을 맡는다.

이때 이미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했으나 인도 문자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므로 일반 사람들이 불경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겸은 중요한 불교경전들을 모아다 번역하기 시작했다. 오나라 대제(大帝) 황무(黃武)

원년(222)부터 후관후(候官侯) 건흥 2년(253)에 걸치는 31년의 긴 세월이었다. 그 사이 ‘유마힐경’ ‘대반니

원경(大般泥洹經)’ ‘법구경(法句經)’ ‘아미타경(阿彌陀經)’ ‘서응본기경(瑞應本起經)’ 등 129부(部)를 번역해

냈다 하는데, 그중 첫손가락으로 꼽아야 할 것이 바로 ‘유마힐경’ 상·하 2권이다.

그러나 아직 불보살에 대한 이해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 거사성불(居士成佛; 재가신도가 부처가 됨)이라는

대승불교의 고차원적인 신행(信行) 단계를 대중이 이해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시대를 앞서간 천재의 오산으로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유마힐경’은 빛을 보지 못한 채 200여 년의

세월을 보낸 다음, 대역경사(大譯經師)인 구마라습(鳩滅什, 344∼413년)이 후진(後秦) 홍시(弘始) 8년(406)에

이를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상·중·하 3권으로 다시 번역한 뒤에야 서서히 이해되어 나간다.

이런 사실은 북위 헌문제(獻文帝, 454∼476년)가 그 재위 기간(465∼471년)에 생모인 원황후(元皇后)

이(李)씨로 추존된 이귀인(李貴人, ?∼456년)을 위해 조성했으리라 생각되는 운강석굴 제7동 주실(主室) 남벽

제1층의 입구 좌우 감실에 새겨진 <유마거사상>(도판 1)과 <문수보살상>(도판 2)의 대담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유마거사상>과 <문수보살상>을 한데 합쳐 완벽한 <유마경변상도(維摩經變相圖; ‘유마경’의 내용

을 읽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도록 도설적으로 그려 놓은 그림)>를 이루어내게 되니, 480년 경에 조성되었으

리라 생각되는 헌문제 굴인 운강석굴 제6동 남벽 하층 중앙부의 <유마경변상도>(도판 3)가 바로 그것이다.

석가삼존 형식으로 그 상 양식을 완성해 놓은 모양이다.

아마 불교와 도교에 심취해서 불과 18세에 5세밖에 안된 황태자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승려와 도사를

불러 그 심오한 뜻을 얘기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는 헌문제가 ‘유마경’에 심취했기 때문에 이런 <유마

경변상도>를 출현시켰을 것이다.

사실 헌문제는 부황인 문성제(文成帝, 440∼465년)가 돌아갔을 때 12세의 소년이었다.

그래서 문성제의 정비(正妃)인 문명(文明)태후 풍씨(馮氏, 442∼490년)가 섭정이 되었는데, 그녀는 정치적

야망이 커서 헌문제가 장성하자 그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손자인 젖먹이 어린아이를 보위에 올려놓고 계속

섭정을 했다.

이 때문에 헌문제는 불교에 심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유마경’에 심취하고 <유마경변상도>까지 그려내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유마경’의 내용이 어떠하기에 헌문제가 심취했는지 그 내용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2. 법력이 높은 유마거사   



   ‘유마경’은 지겸이 ‘불설유마힐경’ 상·하 2권으로 번역해낸 이후에 도합 7종의 번역이 있었다 하나 현존하는

것은 3종뿐이다.

지겸의 ‘불설유마힐경’과 구마라습이 번역한 ‘유마힐소설경’ 상·중·하 3권 및 당나라 현장(玄, 602∼664년)이

고종 영휘(永徽) 원년(650)에 번역한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6권이 그것이다. 3종류의 경전이 내용은

대동소이한데 분량이 많을수록 설명이 장황할 뿐이다.

그런데 운강석굴의 <유마경변상도>는 구마라습이 번역한 ‘유마힐소설경’이 저본(底本)이 되었다.

그리고 3본의 ‘유마경’ 중에 지금까지도 중간 분량인 ‘유마힐소설경’이 가장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유마힐소설경’을 통해 그 줄거리를 요약해 보겠다.

어느 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비야리(毘耶離, vai쳒-ali)성 암라(菴羅, -amra, 망고)나무 과수원에서

대비구(大比丘) 8000인과 보살 3만인과 1만의 범천왕과 1만2000의 제석천과 제천(諸天), 용신(龍神),

야차(夜叉), 건달바(乾婆),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 마후라가(滅伽)와 여러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및 비야리성의 500장자(長者)들과 함께 불국정토(佛國淨土)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다.

이때에 비야리성 안에는 유마힐(維摩詰, vimalakrti)이라는 장자(長者; 덕망이 높은 어른)가 있었다.

그는 이미 과거세에 한량없는 여러 부처님을 공양한 공덕으로 대승법문(大乘法門)을 체득하였으므로 그

법력(法力)이 여러 보살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대중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비야리성에 거주하면서 대승법을 얘기하고 그 법을 실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유마힐 거사는 다시 방편으로 몸에 병을 나타내어 문병 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몸의 병에 비유

하여 불이법문(不二法門; 살고 죽는 것이 둘이 아니고 있고 없는 것이 둘이 아니라는 이치)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니 부처님 회상(會上; 모임)에서도 유마힐에게 문병할 사람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10대제자(十大弟子)인 사리불(舍利弗, 쳒--ariputra), 대목건련(大目連, mah-

amaudgaly-ayana), 대가섭(大迦葉, mah-ak--a쳒yapa), 수보리(須菩提, subht-u),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

那彌多羅尼子, p-urnamaitr-aya), 마하가전연(摩訶迦延, mah-akaty-ayana), 아나율(阿那律, aniruddha),

우바리(優婆離, up-ali), 라후라(羅羅, r-ahula), 아난(阿難, --ananda)을 차례로 불러 문병갔다 오라고 시키

지만 유마거사의 법력이 높아 감당할 수 없다고 모두 사양한다.

다시 미륵보살과 광엄동자(光嚴童子) 및 선덕(善德)장자에게 시켜보지만 이들 역시 유마거사의 법력을 감당

할 수 없다고 사양한다. 할 수 없이 석가세존의 좌협시보살로 석가 회상의 제일 보처(補處)보살인 문수보살이

응대하기 어려울 줄 알면서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명령을 받들고 문병하러 유마힐 거사를 찾아간다.

이때 석가모니불 회상에 모인 대중들은 이 두 큰 선각자들의 대화에서는 반드시 신묘한 법이 얘기되리라

생각하고 모두 따라가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8000보살과 500성문(聲聞, 大弟子) 및 범왕, 제석, 사천왕 등

수많은 대중이 문수보살을 따라 유마거사 자택으로 문병하러 찾아간다.

유마거사는 아무 것도 없는 빈 방 침상에 홀로 누워 있다가 이들 일행을 맞는데 문수보살이 문병하는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내 병은 미련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애착에서 생겨났는데 일체 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나도 앓고 있다.

일체 중생이 낫는다면 나도 나을 것이다. 보살은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윤회에 드는데 삶과

죽음이 있다면 병도 있기 마련이다.

병의 근원은 나에게 집착하는 데 있으므로 이를 차단하는 것이 치료의 첩경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며 있고 없는 것이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

둘이 아닌 법)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유마거사는 앉을 자리가 없다고 투정하는 사리불에게 동방 수미상(須彌相) 세계의 수미등왕불

(須彌燈王佛)로부터 3만2000 개의 사자좌를 빌려다 준다.

8만4000 유순의 크기를 가진 사자좌를 좁은 방안에 넉넉하게 들여 놓지만, 너무 높아서 사리불을 비롯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대제자들은 올라가 앉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 천녀(天女)가 천화(天華; 하늘 꽃)를 대중들 위에 뿌리자 여러 대보살에게 뿌려진 꽃들은 그대로

미끄러져 떨어지는 반면 대제자들에게 뿌려진 꽃들은 옷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유마거사는 이런 현상을 보고, 있고 없음이나 살고 죽는데 대한 분별심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아서 생사

(生死)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이를 극복하려면 유(有) 무(無)가 둘이 아니고, 생(生) 사(死)가

둘이 아니며, 병(病) 유()가 둘이 아니고, 인(人; 남) 아(我)가 둘이 아니며, 색(色; 현상) 공(空; 근본)이

둘이 아닌 불이법문을 철저하게 증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점심 때가 되자 유마거사는 신통력으로 상방(上方) 중향세계(衆香世界) 향적불(香積佛) 모임에서

점심 공양한 나머지를 화보살(化菩薩)로 하여금 얻어오게 하여 향을 맡게 하는 것으로 모인 대중을 배부르게

먹인다. 그리고 유마거사는 중향세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 공양 올리기 위해 화보살을 따라온 900만

보살과 함께 모든 대중을 거느리고 망고나무 과수원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찾아간다.

유마거사가 문병하러 왔던 모든 대중과 향적세계에서 온 보살들과 함께 석가모니 부처님께 나아가 예불

하고 공양을 드리자 석가모니 부처님은 향적세계의 향 공양을 받은 다음 유마힐이 말한 것이 최고의

대승법문임을 인정하고 이를 크게 칭찬한다.

그리고 이 경전을 받아 가지고 외우거나 말한 대로 수행하는 공덕은, 일겁(一劫) 동안 삼천 대천세계의 모

든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넓이가 4천하에 미치고 높이가 범천에 이르는 칠보탑을 계속 세우는 것보다

더 크다고 가르친다.

이에 제석천을 비롯한 제천과 미륵보살이 이 경전의 수호(守護)와 전승(傳承)을 맹세하고 아난존자는 이를

받아 널리 유포할 대명(大命)을 받는다.


3. 유마거사와 문수보살 상   

  

  이런 내용들을 도설(圖說; 그림으로 그려 설명함)적으로 표현한 것이 각종 유마경변상도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470년 경에 북위 헌문제에 의해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큰 운강석굴 제7동 남벽

입구 정문 동·서벽에 따로 따로 새겨진 <유마거사상>(도판 1)과 <문수보살상>(도판 2)이 가장 초기의

유마경변상도일 듯하다.

여기는 보는 쪽에서 좌측에 유마거사가 새겨지고 우측에 문수보살이 새겨져 있다.

유마거사는 네모진 침상에 걸터앉아 고무나무 잎새처럼 생긴 포선(蒲扇; 부들 부채)을 흔들며 얘기에

열중한 모습인데 병든 몸을 가누기 힘든 듯 오른손은 몸 뒤에서 상을 짚어 몸을 지탱하고 있다.

의복은 깃과 섶에 검은 천을 댄 심의(深衣)를 입었으나 왼쪽으로 여며서 북위의 옷 입는 풍습에 선비족

전통이 가미됐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머리에 쓴 관(冠)은 마치 조선시대 탕건(宕巾)처럼 층급진 원뿔형이다.

휘장을 드리우고 침상 뒤로 가리개 병풍을 둘러서 실내의 침상임을 상징하였다.

그 반대쪽에 반가 좌세로 좌대 위에 걸터앉은 문수보살은 설법하는 손짓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유반가

좌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오른손 팔굽을 오른쪽 무릎에 붙이고 머리까지 오른쪽으로 기울여 미륵보살이

짓는 사유반가의 앉음새를 계승하고 있다.

유마거사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며 대답하고 있는 표현으로 알맞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했을 듯하나, 아직

유마거사와 대담하는 문수보살의 자세가 확립되지 않아 미륵보살사유반가상의 자세를 빌려 왔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문수보살 머리 뒤에는 원형광배가 새겨져 있고 그 뒤로는 일산(日傘)을 상징하는 덮개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많은 수행대중(隨行大衆)이 새겨졌을 듯한데 하단의 마멸이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이에 뒤따라 480년경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운강석굴 제6동 남벽 하층 중앙부의 <유마경변상도>

(도판 3)에서는 석가삼존상 양식으로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을 석가모니불 좌우에 배치하여 담론하게 하고 있다.

기왓골이 분명한 전각 안에 3존상이 가득 차도록 새겨져 있는데 중앙의 수미좌 위에는 석가여래가 시무외인

을 짓고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고, 그 왼쪽(보는 방향에서는 오른쪽)에 유마거사가 역시 침상에 걸터앉아

있으며, 오른쪽(보는 방향에서는 왼쪽)에는 문수보살이 네모진 좌대 위에 걸터앉아 있다.

그러나 문수보살은 좌대의 높이가 낮아 반가좌의 앉음새를 제대로 짓지 못하고 오른쪽 무릎을 비스듬히 눕혀

유희좌(遊戱坐)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의 의복 표현은 모두 포복식불의(袍服式佛衣)로 중국화되어서 <운강 제16동 본존

시무외 포복불입상(袍服佛立像)>(제5회 도판 10)이 조성된 이후에 그와 같은 양식 기법으로 조성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가부좌한 석가모니불좌상의 발목 부근을 덮어내린 옷자락 주름이 다만 4겹으로 단순해진 것은, 이 <유마

경변상도>가 6동에서도 비교적 늦은 시기에 조성됐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요소다.

석가불좌상 뒷면은 두광과 신광이 겹겹으로 표현되어 있고 화불도 새겨져 있으나 문수보살상은 다만 두원광

만 표시되어 있다. 유

마거사와 문수보살의 어깨 뒤로는 가리개 병풍이 둘러쳐져 석가모니불의 화려한 광배와 대조를 이룬다.

이후 이런 유마경변상도는, 헌문제굴인 운강석굴 제6동을 조성했던 효문제(孝文帝, 467∼499년, 헌문제의

장자)가 태화(太和) 17년(493) 8월 낙양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고 10월에 용문(龍門)에 석굴을 뚫기 시작

하면서 용문석굴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6세기 전반 이곳에서 그 유행의 절정기를 맞이한다.

그 결과 용문석굴 고양동(古陽洞)이 태화 17년 10월부터 굴착되기 시작한 가장 초기 석굴인데도 그 북벽

2층 3감에 <유마경변상도>가 얕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진다.

그런데 보는 쪽으로 오른쪽에 새겨진 <문수보살상>(도판 4-I)에는 포복식불의를 입은 문수보살 좌상 뒤로

무수한 비구승이 표현되어 있어 석가모니불의 10대 제자를 비롯한 500제자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던 것이 효명제(孝明帝, 516∼527년) 시기에 조성되었으리라 생각되는 용문석굴 미륵동 북2동 북벽

불감 <유마경변상도>(도판 5)나 용문석굴 육사동(六獅洞) 정벽 좌측 상부의 <유마경변상도>(도판 6)에

이르면 10대제자로 압축 표현하려는 의지가 엿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효문제가 돌아간 후 그를 위해 경명(景明) 원년(500)부터 빈양중동(賓陽中洞)을 거대한 규모로 굴착

하기 시작한 선무제(宣武帝, 483∼515년)가 27세 때인 영평(永平) 2년(509) 10월에 식건전(式乾殿)에서

승려와 조정 신하들을 위해 ‘유마경’을 직접 강의했다고 할 정도로, 역대 황제들이 ‘유마경’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 듯하다.


4. 10대 제자의 출현   


  

 사실 8만4000으로 헤아리는 대·소승경전 속에서 10대 제자를 열거한 경전은 ‘유마경’이 처음이다.

동진(東晋) 안제(安帝) 융안(隆安) 원년(397)에 승가제바(僧伽提婆)가 번역한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권3 제자품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1250 제자 중 뛰어난 능력을 지닌 대표적인 제자 100명을 그 특기와

더불어 거명한 것이 불제자에 대한 언급의 시초에 해당한다.

또 다른 원시경전(原始經典; 소승경전)에 속하는 ‘잡아함경(雜阿含經, 435∼443년, 求那跋陀羅 번역) 권16

에서는 13명의 대표제자를 열거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촌 아우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시기하여 해치려는 마음으로 악행을 일삼다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는 제바달다(提婆達多)도 있다.

선악을 불문하고 대표적인 인물을 숫자 개념 없이 뽑아내니 13인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런 것을 100인이라는 숫자 개념을 가지고 모범이 될 만한 대표자를 추린 것이 ‘증일아함경’ 권3 제자품에

열거한 인물들이다.

석가모니불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아서 깨달음을 얻은 성문제자(聲聞弟子; 음성, 즉 말씀을 듣고 깨달은

제자)를, 자기 자신의 깨달음만을 목표로 삼고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다 하여 소승(小乘)이라고 깎아내리던

대승(大乘)경전에는 이 성문제자들에 대한 체계적인 언급이 별로 없다.

이웃을 모두 함께 깨닫게 하려는 서원을 세운 보살의 존재를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마경’은 성문제자들이 유정(有情)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여 불이법문을 체득하지 못함을 강조하기

위해 오히려 그 대표격인 10대 제자를 일일이 열거함으로써, 석가모니불의 10대 제자를 분명하게 밝혀 놓는

최초의 경전이 되었다.

대승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대승적인 경전에서 소승 성문제자의 대표자를 분명하게 확정짓는 모순적인

결론을 맺어준 것이다. 양극이 상통하는 이치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오나라 지겸이 번역한 ‘불설유마힐경’ 권상 제자품 3(253년 번역)에서는 ① 사리불(舍利弗)

② 대목건련(大目連) ③ 대가섭(大迦葉) ④ 수보리(須菩提) ⑤ 반욕문타니자(頒褥文陀尼子)

⑥ 가전연(迦延) ⑦ 아나율(阿那律) ⑧ 우바리(優婆離) ⑨ 나운(羅云) ⑩ 아난(阿難)의 10대 제자를 들고 있다.

후진(後秦) 구마라습(鳩滅什, 344∼413년)이 번역한 ‘유마힐소설경’ 권상 제자품 제3(406년 번역)에서도

똑같은 10대 제자를 열거하는데 다만 ⑤ 반욕문타니자를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라 표기하고

⑥ 가전연을 마하가전연(摩訶迦延)으로 표기하며

⑨ 나운을 라후라(羅羅)로 표기하여 음역을 달리하는 차이를 보였을 뿐이다.

현장(玄, 602∼664년)의 ‘설무구칭경’ 권2 성문품(聲聞品) 제3에서는 더욱 소리 번역과 뜻 번역을 뒤섞어

바꿔놓고 있으나 결국 같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사리자(舍利子) ② 대목련(大目連) ③ 가섭파(迦葉波) ④ 대선현(大善現)

⑤ 만자자(滿慈子) ⑥ 마하가다연나(摩訶迦多衍那) ⑦ 대무멸(大無滅) ⑧ 우파리(優波離) ⑨ 나호라(羅羅)

⑩ 아난타(阿難陀)가 그것이다.

앞의 번역들과 억지로 다르게 하려고 소리가 비슷한 다른 한자로 바꾸었거나 뜻 번역으로 바꾸고 소리번역과

뜻번역을 합쳐서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① 사리자는 소리 번역과 뜻 번역을 뒤섞어 놓은 것이고,

④ 대선현 ⑤ 만자자 ⑦ 대무멸의 경우 각기 수보리, 부루나미다라니자, 아나율의 뜻 번역이다.

현장의 신역(新譯)이라는 것이, 이와 같이 이미 통용되고 있던 이전의 잘된 번역을 혼란스럽게 원칙없이

흐트려놓은 경우가 많다. 내용도 이전 번역이 잘 요약해 간추려 놓은 것을 중언부언하여 지루하게 해놓은

경우가 허다하다. 이전 번역에 대한 개선이 아니라 개악인 것이다.

어떻든 3종의 ‘유마경’에서 소리 번역이나 뜻 번역을 어떻게 했든 간에 10대 제자의 인물내용과 그 차례는

동일하여, 이들 10대 제자가 이후 석가모니 부처님의 1250인 성문제자의 상수(上首; 우두머리)제자로

점차 석가 회상(會上; 모임)의 시위(侍衛)를 담당해간다.


5. 10대 제자들의 독특한 특기   


 

 이들 대제자는 모두 능력이 달라 무엇이 제일이라는 특기가 밝혀져 있는데, 이는 승조(僧肇, 383∼414년)가

지은 ‘주유마힐경(注維摩詰經)’ 권2 제자품 3에서부터 비롯된다.

승조는 처음에는 노장학(老莊學; 도가사상)에 심취했던 사람이나 지겸이 번역한 ‘불설유마힐경’을 읽고

감명을 받아 불교에 귀의하여 구마라습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그는 구마라습의 수제자로 교리에 가장 밝아 습문4철(什門四哲; 구마라습 문하에 있는 4명의 밝은 제자) 중

으뜸으로 꼽혀 역경에 많이 참여하였으니 구마라습 번역의 ‘유마힐소설경’ 3권은 사실 거의 승조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다시 그 주석서를 낸 것이 ‘주유마힐경’인 것이다.

이미 ‘유마경’ 제자품에서도 석가모니불이 10대 제자의 능력에 따라 차례로 불러 유마거사에게 문병을

가라고 명령하고 제자들이 자신의 능력이 어떻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사양하는데서 10대 제자의 특기를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승조의 ‘주유마힐경’ 권2 제자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그 특기를

밝히고 있다.

① 사리불은 제자 중 지혜(智慧) 제일 ② 대목건련은 신족(神足, 神通力) 제일

③ 대가섭은 두타(頭陀; 빌어먹는 일) 제일 ④ 수보리는 해공(解空; 공을 이해함) 제일

⑤ 부루나미다라니자는 변재(辯才; 말 잘하는 재주) 제일 ⑥ 마하가전연은 해의(解義; 뜻을 해석함) 제일

 ⑦ 아나율은 천안(天眼; 天人들처럼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눈) 제일

⑧ 우바리는 지율(持律; 계율을 지킴) 제일 ⑨ 나후라는 밀행(密行;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닦는 수행) 제일

⑩ 아난은 총지(總持; 모두 다 가짐) 제일이다.

이는 대체로 ‘잡아함경’ 권16에서 열거한 13존자(尊者) 중 9존자의 이름과 능력을 옮겨오고, 여기에다 소

승불교에서는 그리 중시되지 않던 공(空) 사상의 대표로 수보리 하나를 더 첨가한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13존자 중 옮겨온 9존자의 차례와 이름 그리고 그 특기를 나열해보겠다.

② 존자 대가섭은 적은 욕심에 만족할 줄 알고 걸식 고행하며 나머지를 저축하지 않는다.

③ 존자 사리불은 큰 지혜와 말재주가 있다. ④ 대목건련은 신통한 큰 힘이 있다.

⑤ 아나율은 천안(天眼)이 뚫어지게 밝다. ⑧ 우바리는 율행(律行)에 통달했다.

⑨ 부루나는 말재주가 있어 설법을 잘하는 사람이다.

⑩ 가전연은 여러 경전을 분별하여 법상(法相)을 잘 설명한다. ⑪ 아난은 많이 듣고 모두 기억해 가진다.

⑫ 나후라는 율행(律行)을 잘 지킨다.

‘증일아함경’ 권3 제자품에서 열거한 100대 제자 중 ‘유마경’에서 뽑아낸 10대 제자는 상위에 속하지도

않고 그 차례도 일치하지 않는다. 100대 제자 중에서 10대 제자가 차지한 위치가 어떠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100대 제자 중의 서열과 그 특기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⑫ 지혜가 무궁하여 여러 의심을 풀어내니 이른바 사리불 비구가 이 사람이다.

⑬ 신족(神足)이 가벼워 여러 곳으로 날아다니니 이른바 대목건련 비구가 이 사람이다.

⑮ 12두타행의 하기 어려운 수행을 하니 대가섭 비구가 이 사람이다. ?

천안 제일로 모든 곳을 보니 이른바 아나율 비구가 이 사람이다. ? 뜻을 잘 분별하여 가르침을 펼쳐내니

이른바 대가전연 비구가 이 사람이다.

널리 법을 설하여 의리를 분별해 내니 이른바 만원자(滿願子) 비구가 이 사람이다.

계율을 받들어 가지고 건드려 침범하는 바가 없으니 이른바 우바리 비구가 이 사람이다.

금지하는 계율을 무너뜨리지 않고 외우고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니 이른바 나운 비구가 이 사람이다.

때를 알고 사물에 밝아 이르는 곳마다 의심이 없고 기억하는 것마다 잊지 않으며 넓고 멀리 많이 들어

윗사람을 받드는 일을 맡길 만하니 이른바 아난 비구가 이 사람이다.

항상 공정(空定; 空속에 몰입함)을 즐기고 공의 뜻을 분별하니 이른바 수보리 비구가 이 사람이다.

이로 보면 ‘유마경’에서 선발한 10대 제자는 100대 제자 중 10위 안에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10위권에 드는 이가 4명, 20위권이 1명, 40위권이 2명, 50위권·60위권·70위권이 각각 1명이다.

대·소승 경전의 선발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차이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10대 제자가 ‘증일아함경’의 100대 제자 밖에서 선발된 것은 아니고, ‘잡아함경’의 13제자 중에도

수보리 하나만 빠지고 9대 제자가 모두 들어 있으므로 ‘유마경’의 10대 제자는 객관성이 있는 선발이라고

하겠다. 수보리를 10대 제자에 넣은 것은 대승사상에서 공(空)의 개념이 중시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6. 석굴암에 등장한 유마경변상도   


 

  이런 10대제자가 석가모니불의 시위대중으로 본격 등장하는 것은 대체로 수양제 대업(大業) 연간(605∼

616년)부터인 듯하다.

대업 6년(610)경에 조성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돈황막고굴 298굴 서벽 불설법도>(도판 7)에서 10대제자가

설법인을 짓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뒤편에 좌우로 5인씩 시립(侍立)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정영(淨影)대사 혜원(慧遠, 523∼592년)이나 천태(天台)대사 지의(智, 538∼597년)와 같은

대덕이 출현하여 중국 불교를 종파(宗派)불교로 심화 발전시키는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대승경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유마경’에 주목하여 혜원은 ‘유마의기(維摩義記)’ 8권을

짓고, 지의는 ‘유마경현소(維摩經玄疏)’ 6권을 지었다.

혜원은 여기서 10대제자의 특기 표현을 몇 항목 고쳐 놓는다. 승조의 ‘주유마경’ 권2에서 ② 대목건련은 제자

중 신족(神足) 제일이라고 한 것을 신통(神通) 제일이라 하고, ⑤ 부루나미다라니자의 변재(辯才) 제일을

설법(說法) 제일로, ⑥ 마하가전연의 해의(解義) 제일을 논의(論議) 제일로, ⑩ 아난의 총지(摠持) 제일을

다문(多聞) 제일로 바꾸어, 한결 쉽고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하였다.

대덕들이 이처럼 ‘유마경’을 중시하여 주석서를 연달아 지어내자 유마신앙은 더욱 일반화되었던 듯하다. 돈

황석굴 380굴 서벽에서 수말당초 양식의 <유마경변상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고, 돈황석굴 220굴의

동벽에서 당태종 정관(貞觀) 16년(642)에 그려낸 <유마경변상도>(도판 8)를 찾아볼 수 있다.

10대제자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위대중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과 거의 비슷하게 나타난 현상이었다(도판 9).

이후 당고종 영휘 원년(650)에 현장이 ‘유마경’을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이라는 뜻 번역의 이름으로 6권

으로 늘려 다시 번역해내자 당나라에서 유마신앙은 저녁 노을처럼 마지막 불꽃을 찬란하게 피워내어 초당

(618∼712년), 성당(713∼765년), 중당(766∼820년)으로 계속 이어지면서 수많은 <유마경변상도>를

각처에 남겨 놓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당현종 천보(天寶) 연간(742∼756년)에 그려진 <돈황 막고굴 제 103굴 동벽 유마경

변상도>(도판 10)이다.

이는 석굴암이 조성되는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그래서 비록 유마와 문수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다 하더라도 그 생김새와 몸짓, 손짓에서 상당한 공통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석굴암 감실 유마거사상>(도판 11)과 <돈황막고굴 제103굴 동벽 유마경변상도의 유마도>(도판

10-I)를 비교해보면 두 상 모두 수건을 머리 위에 인 듯한 두건(頭巾)형식이 같다.

그리고 코밑과 턱에 수염이 풍부한 것이 같으며 코가 크고 눈썹이 짙은 것도 같다.

중국식 도포 형태의 옷을 입고 그 위에 가사와 같은 대의(大衣)를 걸친 옷매무새도 같으며, 한 무릎을 세우고

한 무릎은 뉘고 앉아서 누인 쪽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괴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대화하는 자세를 취한

몸짓도 같다. 누인 쪽 무릎에 얹은 손으로는 부들부채(蒲扇)를 쥐고 있는데 부채머리가 아래로 숙여진 것도

같다.

470년경에 조성된 <운강석굴 7동 주실 남벽 유마상>(도판 1)이나 480년경 조성된 <운강석굴 6동 남벽

하층 중앙부 유마경변상도>(도판 3) 및 515년경 조성의 <용문석굴 고양동 북벽 제2층 제3감내 유마상>

(도판 4-Ⅱ), 520년경 조성의 <용문석굴 미륵동 북2동 북벽 불감내 유마상>(도판 5) 등 초기 유마상에서는

한결같이 부들부채 머리가 위를 향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양쪽 다 부채머리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세운 무릎쪽 손이 그 세운 무릎 뒤로 자연스럽게 따라 내려간 것도 같고 네모진 침상 다리가 안상(眼象)

표현을 한 것도 같다.

다만 <석굴암 감실 유마상>은 감실에 독립적으로 안치되어 있기 때문에 휘장 표현이 없을 뿐이다.

<석굴암 감실 유마상> 맞은 쪽에는 유마거사의 병세를 묻는 <석굴암 감실 문수보살상>(도판 12)이 같은

규격의 감실 안에 안치되어 있다.

그런데 마치 생사(生死)가 둘이 아니고 유무(有無)가 둘이 아니며 색공(色空)이 둘이 아닌 불이법문의 요체를

말하고 있는 장면을 상징이라도 하는 듯, 한 손은 들어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둘을 펴 보이고 다른 손은

무릎 위에 댔는데 이것도 <돈황 막고굴 제103굴 동벽 유마경변상도 문수보살도>(도판 10-2)와 서로 같다.

그런 중에 <석굴암 감실 문수보살상>에서는 무릎 위에 댄 손에서조차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둘을 펴

보여서 더욱 불이법문의 상징을 뚜렷이 하고 있다.

따라서 석굴암의 조성 이념 기반에 유마사상이 깊이 투영된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이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의 감실이 <석굴암 본존석가여래좌상>(제21회 도판 7)의 뒷면 정중앙이자

<11면관세음보살입상>(제21회 도판 9)의 머리 위에서 양쪽으로 조성됨으로써 10개 감실 조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보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거기에다 그 10개의 감실 아래로 높이 262.5cm, 폭 119.5cm 정도의 판석 15매를 짜맞추어 석굴암 주실

(主室)의 둥근 벽을 만들어가면서 그 위에 주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권속을 돋을새김으로 표현했는데

그 구성비례가 10대제자 위주이다.

즉 중앙의 11면관세음보살과 양 끝의 범왕 제석 및 문수, 보현의 5성(聖)을 제외한 10면에 모두 10대제자상을

새겨놓고 있는 것이다(도판 13).

오나라 지겸(支謙)이 253년에 번역한 ‘불설유마힐경’ 권상 제자품에서 처음 열거한 그 10대제자상이다.

406년 구마라습이 ‘유마힐소설경’ 3권으로 다시 번역한 뒤에 이를 조형 이념으로 삼아 출현하기 시작한

중국의 <석가설법도> 등에서 10대제자의 표현이 간혹 출현하기 시작하여 북위시대(470년경)에 그려진

돈황 막고굴 254굴 전실 북벽의 <난다출가인연도(難陀出家因緣圖)>나 수나라 시대(603년경)에 조성된

<돈황막고굴 423굴 주벽 석가설법상>(도판 14)및 610년경에 그려졌으리라 생각되는 <돈황막고굴 298굴

서벽 불설법도>(도판 7)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유례들 속에 표현된 10대제자상은 모두 그림이거나 좌우 양대비구 협시상만 조각상이고

나머지 8대제자상은 그림인 경우뿐이다.

이때 늙고 젊은 두 협시 비구상은 유마경에서 열거한 10대제자 중 첫째인 사리불과 맨 끝의 아난일 것이다.

사리불이 마하가섭으로 완전히 바뀌는 것은 선종이 풍미한 이후의 일일 터이니 석굴암이 건설된 뒤인

만당(晩唐, 820∼907년)시기부터일 듯하다.

어떻든 석굴암에서 10대제자상을 조성하기 이전 시기에 ‘유마경’에서 말한 10대제자상을 중국에서 조각상

으로 표현해 놓은 예는 아직 학계에 보고된 예가 없다.

그런데도 석굴암에서 10대제자를 모두 표현하여 굴실의 주역으로 삼고 있으니 석굴암 조성의 주역들이

‘유마경’의 가치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감지할 수 있다.

‘유마경’이 대승경전의 꽃이란 사실을 분명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마경’ 제자품의 서술 내용을 과감하게 조형적으로 표출해내는 모험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유마경’ 제자품을 기반으로 조성해낸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10대 감실 중심에

<유마거사상>(도판 11)과 <문수보살상>(도판 12)을 안치하여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문병을 가서

불이법문을 문답하는 내용의 유마경 변상조각을 확실하게 표현해 놓았다.

그 결과 이 둘을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석굴암의 10대제자상이 ‘유마경’ 제자품에서 열거한 10대제자상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7. 부처의 의발이 동쪽으로 전해지다   



   중국에서 성문제자상을 집중 조각한 예는 용문석굴 뇌고대동(鼓臺洞)과 간경사동(看經寺洞)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모두 측천무후 재초(載初) 원년(690)에서부터 장안(長安) 4년(704)에 걸친 시기에 굴을 뚫기

시작한 것으로 완성은 현종 개원(開元) 6년(718)과 15년(727)경에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그런데 뇌고대동은 성문제자상이 25체이고 간경사동은 29체이다. 따라서 <뇌고대동 25성문제자상)

(도판 15)은 북위 효문제 연흥(延興) 2년(472)에 길가야(吉迦夜)와 담요(曇曜)가 함께 번역한 ‘부법장인연전

(付法藏因緣傳)’ 6권에서 밝힌 대로 서천(西天; 서쪽 천축국, 즉 인도) 24조사(祖師)의 법맥상승도(法脈相

乘圖; 법맥이 서로 이어져 내려오는 상황을 그린 그림)일 가능성이 크다.

<간경사동 29성문제자상>(도판 16)은 당 대종(代宗) 대력(大曆) 9년(774) 직후에 지어졌을 ‘역대법보기’ 1권

에서 밝힌 대로 서천 29조의 법맥상승도일 것이다. 모두 석가세존의 법맥 정통(正統)이 마하가섭과 아난에게

차례로 이어져 내려와 각각 24대와 29대에 이른다는 내용인데, 정법전수의 상징으로 석가세존이 입으시던

가사와 사용하던 발우(鉢盂), 즉 의발(衣鉢)을 전해주어 그 징표를 삼았다고 하였다.

그러니 여기에 그려진 성문제자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의발을 전수받아 지녔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의발을 전수받은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옴으로써 부처님의 의발은 중국으로 전해지게 되고

이후부터는 동토(東土; 동쪽 땅)에서 정법 전수자가 나오게 된다는 사실을 조각상으로 표현한 것이 이

성문제자들의 돋을새김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정법동래(正法東來; 정법이 동쪽으로 옴) 사상은 중국 선종의 정통(正統) 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다.

북송 진종(眞宗) 경덕(景德) 원년(1004)에 도원(道原)이 편찬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30권에서는

서천 28조 동토 6조로 체제를 정비하여 서천 28조(祖)인 달마대사가 동토의 초조가 되므로 동토 6조(祖)인

혜능까지 합산하면 33조가 된다는 내용으로 남종선 위주의 법맥상승체계를 확립해 놓는다.

그러나 ‘역대법보기’에서는 달마대사까지를 서천 29조로 열거하고 달마대사가 동토의 초조가 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온 석가모니 부처님 의발은 동토 5조(祖)인 홍인(弘忍)대사까지 전수되다가 그것이

측천무후에 의해 홍인의 제자인 지선(智詵)대사에게 전해지고, 지선은 처적(處寂)대사에게 전해주며, 처적은

신라 왕족 출신인 무상(無相, 680∼756년)대사에게 전해주고, 무상은 다시 신라 왕족 출신인 무주(無住, 714∼

774년)대사에게 전해준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간경사동 29성문제자상>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의발이 동쪽으로 동쪽으로 전해져서 신라 출신의

무상대사와 무주대사에게까지 이른다는 사실을 밝히는 정법상승도(正法相承圖; 정법의 법맥이 서로 이어져

내려오는 내용을 그린 그림)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석굴암 10대제자상과는 그 성격이 근원적으로 다르다 하겠다.

다만 이런 선종적 정법상승도가 뇌고대동과 간경사동에 조성된 것을 신라 유학생이나 사신들이 배관하고

성문제자상의 존재를 말하여 석굴암을 유마굴로 만들어가게 하는 동인(動因)을 제공했을 수는 있다.

이들 <뇌고대동 25체성문상>과 <간경사동 29체성문상>의 비구들이 입고 있는 가사(袈裟)는 모두 불상의

대의(大衣)처럼 흠집없는 새물 옷감으로 표시되고 있다.


8. 석굴암의 10대제자상   



     그런데 석굴암의 10대제자상에 이르면, 제5상(도판 17)과 제9상(도판 18)을 빼고는 모두 조각을 내

기워낸 할절의(割切衣; 천을 조각조각 끊어내 밭과 밭두둑 모양으로 잇대 기워 만든 옷, 버려진 옷감을

주워다가 서로 나누어 옷을 해 입기 위해 고안된 방법임)의 표현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성문제자, 즉 승려의 생김새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순서는 문명대 선생이 지적했듯이 보는 쪽에서 오른쪽 밖에서부터 안으로 5번까지 진행되고 다시 보는

쪽에서 왼쪽 밖에서부터 안으로 10번까지 진행되는 순서를 보이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래야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 오른쪽 곁에 선 가장 젊은 비구(도판 19)가 아난존자가 되어 석가세존이

대각을 얻는 순간에 태어났다는 사실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사리불은 석가세존보다 몇 달 앞서 열반에 드는 나이든 비구라 했는데 1번에 해당하는 비구의

모습(도판 20)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로 보면 석굴암은 ‘법화경’에서 말한 영산불국세계에 ‘화엄경’의 설주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

면서 ‘유마경’에서 처음으로 등장시킨 10대제자를 시위대중의 주축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승경전의 핵심인 ‘법화경’과 ‘화엄경’을 바탕에 깔고, 대승사상이 마지막으로 피워낸 찬란한 꽃인 ‘유마경’

으로 장엄함으로써 완벽한 석가모니불의 영산불국토를 이상적으로 구현해낸 것이다.

그러면서도 재가신도인 유마거사의 해탈 경지가 아라한과를 얻은 성문제자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강조

하기 위해 선발한 10대제자로 하여금 주불인 석가모니불을 집중 시위하게 함으로써, 비록 영산불국세계에서

재가신도들이 해탈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기는 하지만 불법을 지키고 이어가는 것은 그래도 승단(僧團)

이라는 사실을 묵시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9. 소승과 대승, 현교와 밀교의 총화   


  이는 신라 사람들이 얼마나 대승사상에 정통하여 그에 대한 확실한 이해 위에 소승사상까지 포섭해 들일

수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라 할 수 있다.





당시 신라의 이런 불교상황은 북송 때 비탁(非濁)이 지은 ‘삼보감응요략록(三寶感應要略錄)’ 권중 제9 ‘신라

승유(僧兪)가 아함경을 외워 정토에 왕생한 감응(新羅僧兪誦阿含生淨土感應)’에서 짐작할 수 있으니

그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승려인 승유(僧兪)라는 이는 신라 사람이었다. 어려서 출가하여 정토교(淨土敎)에 마음을 두고 여러

아함경(阿含經)을 읽는 이들을 헐뜯어 꾸짖으며 버리라고 말하였다.

꿈에 극락세계의 동쪽 문에 이르러 장차 문 안으로 들어가려 하니 그때에 무량천동자(無量天童子)가 문 밖에

서 있다가 보장(寶杖; 보배로 만든 장대)으로 승유를 쫓아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소도(小道; 소승교)가

사라지면 곧 대교(大敎; 대승교)가 사라질 조짐이다. 소승법을 사다리로 삼아 대승도(大乘道)로 오르는 것이

네 나라의 법식이다. 아함경을 경멸하여 업신여기었으니 대승문으로 들어올 수 없다.’

꿈을 깨고 슬피 울며 잘못을 참회하고 겸해서 4아함경을 가지고 다니며 외워서 극락정토(淨土)의 영접을

얻게 되었다. 그 제자가 또한 꿈을 꾸니 스승이 연꽃을 타고 와서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사바세계에서

겸하여 아함경을 외웠는데 본래의 습기(習氣; 습관적 기운)에 의지한 까닭으로 먼저 소도(小道)를 얻고

머지 않아 대도(大道)로 다시 돌아왔다.’”

이는 신라 불교계가 대·소승 경전을 모두 중시하여 대·소승을 원융무애하게 융합하는 데에 성공한 사실을

밝혀주는 내용이다.

이런 회통불교(會通佛敎; 한데 모아 통합한 불교)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석굴암 굴실 안에 전개한

영산정토다.

실로 대·소승경전에서 얘기하고 있는 모든 불국정토의 이상을 총체적으로 종합하여 집약해 놓은 것이다.

거기에다 <11면관세음보살입상>까지 첨가하여 밀교적인 요소까지 포섭하고 있다.

당시까지 전개된 불교 교리사(敎理史)의 총화일 뿐 아니라 불교 미술사의 대단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에서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신라까지 전해진 소승과 대승, 현교(顯敎)와 밀교(密敎)의 모든 교리가 화엄

일승의 기준으로 간단 명료하게 정리되면서 그 복잡한 불국세계들이 둥근 방 하나에 함축 표현되기에

이른 것이다. 정녕 석굴암은 교종 불교가 피워낸 마지막 꽃이라 할 수 있다.

외호대중인 사천왕(四天王)이 복도 좌·우벽에 각각 2구씩 새겨져 있는데 칼을 빼든 채 악귀를 짓밟고 서 있는

모습이다.

기합이 가득 차서 촌각도 방심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케 한다.

북방 다문천(多聞天)(도판 21)만 오른손에 탑을 들고 서 있고, 나머지는 모두 칼을 빼들었는데 검세(劍勢)와

시선이 각기 달라 입체적인 경호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도판 22).

복도 밖의 현관 문 입구 좌우에는 금강역사 한 쌍이 주먹을 치켜들고 ‘아’와 ‘흠’의 자세로 기합을 넣으며

문을 지키고 서 있다(도판 23).

그리고 그 밖에 네모 평면의 전실 좌·우벽에는 8부중(八部衆)이 좌우 4체씩 돋을새김되어 있는데,

그 기법이 주실 조각에 비해 떨어져서 뒷시대의 추보(追補; 추가로 보충함)인 듯하다(도판 24).

4천왕과 8부중은 어느 경전에서나 불법을 수호하고 경전을 보호해 간직하며 이를 널리 전파하겠다는 맹서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경전을 받아가지고 독송하는 사람까지도 지키고 보호해주겠노라고 하였다.

그러니 당연히 수호대중으로서 복도와 전실에 서서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수호 임무를 담당해야 한다.

따라서 그런 모습으로 조성해 나가려 했을 터인데 주실을 겨우 완성하고 복도의 조성이 끝나갈 때 혜공왕이

시해(弑害)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던 듯하다.

그래서 석굴암 조성은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다시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초창기에 이를

주도하던 인물이나 그에 종사하던 장인들이 모두 교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열정과 신심(信心)도 모두

사그라들어 8부상 조각에서는 그 기운이 급격히 소멸해갔던 것이 아닌가 한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출처] :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2 /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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