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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미학

[스크랩] 홍예문

작성자물의나라|작성시간16.01.18|조회수341 목록 댓글 0

 

 

▲ 불국사 극락전 앞 칠보교와 연화교 1919년.

 

 

홍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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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예문
(虹霓門)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Incheon Hongyemun.JPG
지정번호 유형문화재 제49호
(2002년 12월 23일 지정)
소재지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 2가
20번지외 4필지
제작시기 대한제국
소유자 국유외 1인

홍예문(虹霓門)은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1908년에 화강암으로 축조된 아치형 터널이며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49호이다.

 

역사[편집]

개항 당시 인천항과 인접한 중앙동관동 등지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전동만석동으로 거류지를 확대하기 위해 뚫은 석문이다.[1] 당시 일본 조계지나 항구에서 만석동으로 이동할 때 내동과 용동마루턱을 거쳐 화평동을 우회하는 게 유일한 통로였다. 하지만 통행하기에 불편하였기 때문에 응봉산 남쪽 마루턱을 깎아 홍예문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2] 폭 4.5m, 높이 13m, 통과 길이 13m의 홍예문은 일본 공병대가 1905년에 착공하여 1908년에 완공하였다.[1]

 

우리는 이와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 불국사 극락전 앞 칠보교와 연화교 1919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종목 국보 제1호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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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崇禮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남쪽의 대문이다.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르는데[1],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이 붙인 명칭이 아니라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다.[2][주 1]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3] 숭례문의 편액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설이 많다.

1396년(태조 5년)에 최유경이 축성하였다. 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고쳐 지었다.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이 도로에 의해 고립되어 버리는 것을 막고 시민들에게 문화재를 가까이 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숭례문의 중앙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 방화범 채종기방화로 인해 불타기 시작해 약 5시간 후인 11일 오전 1시 54분,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어 소실되었다. 서울 중구청에서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기 위한 가림막을 설치했고, 기온이나 강수, 바람 등 기상요인에 의한 추가 붕괴 방지를 위하여 덮개를 씌웠다. 문화재청에서는 소실된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2013년 4월 29일 완공되어, 2013년 5월 4일 복원 완료를 기념하는 완공식이 있었다.[4]

 

 

홍예문 개항 당시 인천항과 인접한 중앙동관동 등지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전동만석동으로 거류지를 확대하기 위해 뚫은 석문이다.

 

1396년(태조 5년)에 최유경이 축성하였다. 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고쳐 지었다.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이 도로에 의해 고립되어 버리는 것을 막고 시민들에게 문화재를 가까이 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숭례문의 중앙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 홍예문은 우리 조상님들이 일본인들이 만들기 전에 우리 전통 건축물에 널리 축성하고 활용한 문門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 <한국건축조사보고>, <조선고적도보>, <경성부사> 등에 두루 수록된 남대문의 사진자료이다.

전차가 지나다니기 이전에 채록된 모습인데, 지표면에 드러난 홍예의 폭과 높이가 거의 1:1의 비율이어서 전차선로부설 이후와 별차이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영국 외교관 조지 커즌(George Curzon)이 지은 <극동의 제문제(Problems of the Far East)> (1894)에 수록된 남대문의 사진자료이다.

여기서도 남대문 홍예의 가로세로 비율은 거의 1:1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의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1906)에 수록된 남대문의 사진자료이다.

전차가 부설되어 남대문 홍예를 통과하던 시절의 모습이다. 하지만 홍예문의 바닥높이는 전차부설 이전이나 이후나 별 차이가 없다.

 

▲ <경성부사>에 수록된 "명치 43년(즉 1910년) 촬영" 남대문의 모습이다.

1907년 이래 좌우성첩이 헐어진 이후의 일이라서 전차는 더 이상 홍예를 통과하고 있지 않으나, 통로의 지표는 여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변을 에워싼 석축은 대부분 지금도 남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 왼쪽은 <정부기록사진집> 제5권에 수록된 '남대문수리기공식(1961.7.21)' 장면이고,

오른쪽은 <정부기록사진집> 제6권에 수록된 '남대문 수문장(1965.3.30)'의 모습이다.

남대문 수리 이전에는 성문 아래에 사람이 기어서 통과할 만한 공간이 남아 있었으나,

수리 이후에는 그 부분이 메워지면서 지표면이 다시 조금 높아진 것을 볼 수 있다.
 
ⓒ2006 정부기록사진집

 

▲ 지난 3월 3일부터 중앙통로(홍예문) 자유통행이 허용된 국보 제1호 숭례문(남대문)의 모습이다.

최근에는 다시 좌우성벽을 복구하고 원래의 높이대로 바닥을 낮추겠다는 복원계획이 발표된 바 있다.
 
ⓒ2006 이순우

 

▲ 지난해 11월에 벌어진 시굴조사부위는 다시 흙으로 덮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켜 탐방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 구조로만 본다면 원래의 남대문은 지금 바닥면보다 사람 키높이 만큼 더 낮은 지표면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던 것은 분명하다.
 
ⓒ2006 이순우

 

남대문 통로바닥이 높아진 것이 전차 때문?

오마이뉴스 | 입력 2006.12.17. 15:28

출처:http://media.daum.net/culture/art/newsview?newsid=20061217152809251

 

 

수원 장안문

 

 

▲ 수원 화성 화홍문

 

 

강화산성 서문인 첨화루. 성 밖에서 정면으로 바라본 모습이다.

창경궁

 

옥천교

 

 

 

 

도깨비 문양.

 

 

도깨비

 

우리나라 민간 전설에서 동물이나 사람 형상 하고 있다는 잡된 귀신 하나.

신통술() 가지고 있어 사람 홀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 하기 한다.

 


 

입력 F 2015.06.18 14:10  수정 2015.06.18 14:14

http://www.kormedi.com/news/culture/it/1215264_2968.html

 

 

▲ 통일신라시대의 토기 기와 ‘귀면와’ 

 

 

신라 귀면와鬼面瓦

 

 

삼척 도계읍 흥전리 절터의 금당 자리 근처에서 귀신의 얼굴을 형상화한 귀면와를 출토했다고 19일 밝혔다. 2015.10.19 << 문화재청 제공 >>

 

일본 전통화가 오카 노부타카씨는 한일 관계증진을 기원하며 자신이 평생 모아온 한국 유물 158점을 10일 동국대 박물관에 기증한다. 사진은 고구려시대에 만들어진 수막새와 귀면와. 수막새는 기왓골 끝에 사용되는 기와로 구름, 연화, 보상화 등의 모양으로 만들어지며, 귀면와는 추녀마루 끝에 박아 빗물에 나무가 썩는 것을 방지하는 기와로, 도깨비와 같은 형상을 새겨 악귀를 쫓는 뜻을 담고 있다. 2012.10.9 < < 사회부기사 참고, 동국대 제공 >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도깨비

유형 개념용어
분야 종교·철학/민간신앙

 

요약 민간신앙에서 믿어지고 있는 초자연적 존재 중의 하나.

[내용]

도채비·독각귀(獨脚鬼)·독갑이[狐魅]·허주(虛主)·허체(虛體)·망량(??)·영감(제주도)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삼국유사≫ 등 여러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삼국시대도 이미 도깨비신앙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인간에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양면성을 보이고 있으나 인간을 살해할 만큼 악독하지 않고, 인간의 꾀에 넘어가 초자연적 힘을 이용당하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 특징적이다.

 

불도깨비·거인도깨비 등과 같이 가시적인 도깨비와 형체는 보이지 않고 사발 깨지는 소리, 말발굽소리, 기왓장 깨지는 소리와 같이 비가시적인 도깨비가 있다. 형체가 있는 도깨비의 모습은 머리를 산발하고 다닌다든지, 다리가 하나밖에 없어서 껑충껑충 뛰어다닌다든지, 키가 커서 하늘까지 닿고 머리가 구름 위에 솟아 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하나밖에 없는 다리는 옻칠한 것같이 검으며, 키가 너무 커서 옷을 못 해 입고 백지로 가릴 곳만 가리고 있다고도 한다. ≪포박자 抱朴子≫에도 도깨비는 발이 하나밖에 없다고 기록된 것을 볼 때 도깨비의 발이 하나라는 이야기는 고대부터 동양에 널리 퍼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도깨비가 발이 하나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민담이 전한다.

 

옛날 한 젊은이가 장에 갔다오는 길에 도깨비를 만났다. 도깨비는 젊은이에게 씨름을 하자고 청하였고 젊은이는 도깨비와 여러 번 씨름을 해서 이겼다. 도깨비는 계속해서 대들었지만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젊은이는 다리를 감아 쉽게 넘어뜨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도깨비의 성(性)은 구분되지 않으나 제주도의 도깨비신의 신화인 <영감본풀이>에 의하면 서울 허정승의 일곱째 아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머리를 산발한 도깨비는 남성도깨비로서, 성질이 거친 경우가 많으며 대개 산길이나 들길에서 마주치게 된다. 또한, 민간에서는 음력 정월 14일 밤과 상원날 밤에 도깨비불을 보아 그해 농사의 흉년과 풍년을 점치기도 한다.

 

도깨비들이 불을 켜고 왕래한다는 그날 밤에 도깨비불이 동에서 서로 가면 풍년이고 서에서 동으로 가면 흉년의 징조라고 해석한다. 이때 도깨비는 정체를 잘 드러내지 않으나 걸음이 빨라서 넓은 들을 순식간에 건너간다. 도깨비는 변화무쌍하고 신출귀몰해서 형체가 일정하지 않고 다양하다. 어린이·거인·노인·총각·처녀 등의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며, 차일(遮日)도깨비는 차일처럼 넓게 생겼는데, 하늘에서 사람의 머리 위를 덮어씌운다고 한다.

 

불을 켜고 다니는 등불도깨비, 굴러다니는 달걀도깨비, 멍석도깨비, 홑이불도깨비 등과 같이 그 모양과 생김새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사람이 죽은 다음 그 영혼이 변해서 되는 귀신과는 달리, 도깨비는 나무·돌 등의 자연물이 변해서 되고 산과 들에서 흔히 나타난다. 또한, 도깨비를 만나는 사람에 따라 도깨비의 종류도 달라지게 된다.

 

도깨비는 자연물이나 사람이 쓰던 물건이 변하여 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밤길을 가다가 도깨비가 나타나 심술을 부리기에 칡덩굴로 묶어놓고 다음날 가보았더니 헌 빗자루 하나가 묶여 있었다는 이야기나, 나그네가 밤길을 가다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깨어보니 부지깽이 하나를 안고 누워 있었다는 이야기가 그러한 예화이다.

 

장계이(張繼弛)의 ≪해동잡록 海東雜錄≫에 의하면 도깨비는 산과 바다의 음령(陰靈)한 기운이며, 풀·나무·흙·돌의 정기가 변해서 된 것이라 한다. 옛 문헌에 망량은 물도깨비·산도깨비·목석괴(木石怪)를 가리킨 것이고, 양매(?魅)는 다리가 하나인 도깨비, 이매(?魅)는 산속의 이기(異氣)에서 생긴 도깨비를 가리킨 것이다.

 

이와 같이, 도깨비는 한편으로는 자연물이 변해서 되는 경우와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사용하던 것이 변해서 되는 경우가 있는데, 후자의 예는 빗자루와 부지깽이 이외에도 짚신·절굿공이·체·키·솥, 깨어진 그릇, 방석 등과 같이 사람의 손때가 묻은 것과 여성의 혈액이 묻었던 것이 대부분이어서, 시골에서는 그러한 물건은 불에 태우는 일이 많다.

 

도깨비가 사는 곳은 일정하지가 않으나, 들판·산길·계곡·절간이나 헌 집 등에 흔히 나타나고 있으므로 거처도 그러한 곳이라고 여겨진다. 도깨비는 음기(陰氣)의 영이고 음귀라고 불리고 있는 만큼, 음침하고 그늘진 곳에 거처하고 있다가 사람이 좀처럼 내왕하지 않는 곳이나 야음에 나타난다. 어쩌다 장날 장터 복판에 나타나는 수도 있으나 그러한 일은 매우 드물다.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온 영감 이야기는 산 속에 있는 헌 집에서 발생한 사건이며, 골짜기가 깊고 숲이 우거져 있으며 개울물이 흐르는 곳에서 나타난 도깨비 이야기와 수백 년 묵은 고목이나 거대한 바위, 절벽 아래에서 나타난 도깨비 이야기가 많다.

 

특히, 큰 나무는 귀중(鬼衆)이 모이는 곳으로 되어 있어, 거목의 죽은 가지는 베지도 않고 아궁이에 때지도 않는다. 사용하지 않는 우물에도 흔히 도깨비가 모이며,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 광야나 덤불 숲도 도깨비의 거처가 된다.

 

도깨비는 음귀인 까닭에 어두운 때나 밤에 주로 나타난다. 낮이라 하여도 궂은비가 부슬부슬 내려 어두컴컴한 때 나타나기 때문에, 속담에 ‘도깨비 놀기 좋은 날이다.’, ‘김서방 올 것 같은 날이다.’라는 뜻은 궂은 날을 가리킨다. 도깨비가 아는 사람의 성은 김서방 밖에 없기 때문에 도깨비를 ‘김서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비오거나 안개낀 날과 같이 궂은 날과 야음에 주로 활동하다가 새벽이 되어 닭이 울면 활동을 멈추고 사라진다. 닭의 울음은 날이 밝아온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도깨비뿐만 아니라 모든 음귀들이 밝은 것을 피하는 것이다.

 

도깨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심술궂은 장난을 매우 즐긴다는 점이다. 예컨대, 장에 갔다오는 사람에게 씨름을 청하여 하나뿐인 다리 때문에 자꾸 져도 끈질기게 덤비는 이야기라든지, 잔치가 벌어진 어느 집에 나타나 솥뚜껑을 솥 안에 우그러뜨리고 황소를 지붕 위에 올려놓았다는 이야기는 도깨비의 심술됨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 꾀가 없고 미련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깨비의 미련함을 이용하여 재물을 얻거나 이득을 보기도 한다. 혹 때문에 노래를 잘 한다 하여 보물방망이를 혹과 바꾼 이야기, 도토리를 깨물어 나는 소리를 집 무너지는 소리인 줄 알고 도망친 도깨비 이야기, 한번 돈을 꾸어주었더니 매일 저녁 꾼 돈을 가져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예화이다.

 

셋째, 꾼 돈 갚은 도깨비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비록 미련함과 건망증이 심한 도깨비이지만 빌린 돈을 갚을 줄 아는 윤리성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도깨비가 실수를 깨닫고 화가 나서 사람이 싫어하는 일을 함으로써 심술을 부리려고 하였지만, 영악한 인간에게 또 속아넘어가는 순진함을 지니고 있다.

 

넷째, 노래와 춤을 즐기고 놀이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영감 이야기’에서처럼 흥겨운 가무를 즐기며, 씨름과 놀이에 끈질기게 몰두한다. 이밖에도 제주도의 경우, 도깨비신인 영감은 돼지고기나 수수범벅, 그리고 소주 등을 즐겨 먹으며, 또한 해녀나 과부 등 미녀를 좋아하여 같이 살자고 따라붙어 병을 주거나 밤에 몰래 여자방을 드나들기도 한다.

 

이 신의 범접으로 병이 났을 때 치료를 위한 굿으로 ‘영감놀이’를 행하는데, 이때 제상에는 영감이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놓는다. 이와 같이, 도깨비도 인간과 같은 성정을 지니고 있어 희로애락을 모두 느끼며, 특히 기쁘고 즐거운 일에 몰두한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도깨비는 변화무쌍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체가 될 수도 있고, 신통력을 가지고 있어서 초인간적인 괴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기도 하고 청상과부로 변하여 소복을 입고 나타나는 등 여러 형체로 변한다. 그래서 도깨비는 한가지 모습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일정한 형태로 묘사할 수가 없다.

 

때로는 투명체가 되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는데, 도깨비감투나 등거리를 얻어 착용하면 사람도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도깨비의 등거리를 얻어 입고 시장에 드나들면서 물건을 집어가고 돈도 가져오는 등 재미를 보았는데, 사람들은 물건이 저절로 없어지고 돈이 없어진다고 야단법석이었지만, 등거리를 얻어 입은 사람은 계속 심술궂은 장난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인파 속을 지나치면서 그만 등거리를 태우게 되어 빨간 헝겊으로 기운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은 잡히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러한 예화이다. 또한, ‘도깨비방망이 이야기’에서처럼 도깨비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마련해줄 수 있는 신통력이나 그러한 물건을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의 <비형설화 鼻荊說話>는 도깨비의 초인간적 능력을 잘 나타내어주는 것으로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도깨비 이야기이다. 신라 진평왕 때 비형은 도깨비의 두목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원사(神元寺) 북쪽 도랑에 큰 다리를 놓아 다리이름을 귀교(鬼橋)라고 붙였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연못을 평지로 만들고 육지를 바다로 만드는 능력도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도깨비 대동강 건너듯’이라는 속담도 있는 것처럼 큰 바다 위를 걸어서 건너간다고도 한다. 경상북도 청송군에서는 도깨비다리라고 하는 돌다리가 냇가에 걸려 있는데, 물이 넘치기만 하면 무너질 듯이 보이지만 홍수가 나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도깨비들이 나타나 떠내려가고 있는 다리를 밤새 제자리로 원상복구해 놓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이러한 초인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는 도깨비는 제주도의 경우 신격화되어 집안의 수호신인 ‘일월조상’, 어선의 선신(船神), 대장간의 신, 그리고 마을의 당신(堂神)으로 모셔져 수호신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도깨비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살아 있어서 물질적 욕구충족의 영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러 다른 민족이 제각기 설정하고 있는 초자연적 존재와 유사하면서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성격을 지닌 도깨비를 산출한 것은 한국인 사유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도깨비는 귀신처럼 악독하게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결국에는 원만한 해결과 권선징악이 보장된 바탕 아래서 밉지 않은 심술을 부릴 뿐이다.

 

도깨비가 지닌 초자연적 신통력은 결국 인간에게 유익하게 이용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이루고 있지 못한 소원을 성취하고 싶은 생각, 가령 돈을 벌고 싶고 큰 권력을 잡고 싶고 좋은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 좋은 집에서 호의호식하고 싶은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여의하지 않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도깨비를 믿음으로써 부분적으로 그러한 욕망과 소원을 충족시키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도깨비신앙은 이러한 일반적 기능 이외 한민족의 사고방식과 인생관·우주관을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치우(蚩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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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로 추정되는 한나라 때의 조각

 

치우(중국어 간체: 蚩尤, 정체: 蚩尤, 병음: Ch?y?u 치요[*])는 중국의 여러 기록과 전설에서 헌원과 함께 탁록의 전투에서 싸웠다고 전해지는 전쟁의 신 또는 옛 부족(구려)의 지도자로, 현재의 묘족의 조상신이다.

 

역사[편집]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오제본기〉를 비롯한 중국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치우는 신농의 후예로 황제 헌원탁록지전 등 여러차례 전쟁을 벌였다. 신농의 치세 말기에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헌원이 신농을 대신하여 세상을 안정시켰는데, 이때 치우가 가장 포악하여 염제도 손을 대지 못하였다. 헌원이 신농을 대신하여 제후들을 다스리고 세상을 평정하였을 때 치우가 다시 난을 일으키자 헌원은 군대를 일으켜 치우를 탁록(?鹿)에서 잡아 죽였다고 한다.[1] 중국의 일부 신화에는 치우에게 81명(또는 72명)의 형제가 있었으며, 여섯 개의 팔과 네 개의 눈, 소의 뿔과 발굽이 있고 머리는 구리와 쇠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창과 방패 등의 무기를 사용하였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치우의 부족은 일부가 헌원에 협조했고, 일부는 여족(黎族), 일부는 요족(瑤族)이 되었다고 한다.

기록과 전승의 해석[편집]

치우와 헌원이 전쟁을 벌였던 사실은 흔히 '황제 신화'라고 부르며 이러한 신화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많은 의견이 존재하였다. 치우가 이끌었던 구려족(九黎族)은 먀오족의 조상이라고 하며 양쯔 강 유역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치우로 상징되는 양쯔 강 유역의 남방 부족과 황제로 상징되는 황하 유역의 한족이 전쟁을 벌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였다.[2] 청나라 말기의 강유위, 고힐강 등의 의고학파(疑古學派)는 황제 신화를 비롯한 삼황오제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성을 부인하고 전국시대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로 판정하였다.[2]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의 학계는 국가의 개입 아래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영향으로 황제 신화를 한족의 국조 설화로 중요시 여기면서, 황제나 치우를 역사적 실존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3]

중국, 베트남, 태국 등에 흩어져 사는 묘족, 흐몽족 등은 구려족의 후예를 자처하며 치우를 민족의 조상으로 추앙한다.[4] 한국의 일부 야사에서는 치우씨(蚩尤氏), 치우천왕(蚩尤天王) 등으로 부르며 치우 또는 그 부족이 한민족에 속했다고 주장한다.[5]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은 위서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문헌[편집]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기》, 《국어》, 《산해경》, 《상서》 등 춘추·전국시대 이후의 여러 서적을 통하여 전하여지지만, 모든 기록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산해경》(山海經)[편집]

산해경》〈해경〉에 치우와 황제(黃帝)가 서로 힘을 겨룬 내용이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 치우가 무기를 만들어 황제를 치자 황제가 이에 응룡으로 하여금 기주야에서 그를 공격하게 하였다. 응룡이 물을 모아 둔 것을 치우가 풍백과 우사에게 부탁하여 폭풍우로 거침없이 쏟아지게 했다. 황제가 이에 천녀인 발을 내려 보내니 비가 그쳤고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 발이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없게 되자 그가 머무는 곳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 〈대황북경〉[6]
  • 치우가 버린 차꼬와 수갑이 단풍나무(楓木)가 되었다고 한다. - 〈대황남경〉

관련 문화[편집]

중국에서 치우는 전쟁의 신으로 모셔졌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유방항우와의 마지막 전투 전에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고, 그 전투에서 이겼다고 한다. 동양 천문에는 특이한 형태의 혜성이 '치우기(蚩尤旗)'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어 있다. 한나라 시대의 무덤인 마왕퇴에서 치우기를 묘사한 백서가 발굴되었다. 한국의 옛 기록에는 치우와 관련된 제례나 풍습이 전해지는데, 이는 모두 중국의 예법에 정해진 제례를 받아들여 제사한 것으로 중국이 전쟁의 신으로 치우를 숭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풍습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둑제 -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군영을 대표하는 대장기로서 치우의 형태라고 전해지는 ‘둑’이라는 깃발을 둑소에 두고 매년 갑옷을 입고 제를 지냈다.[7]
  • 마제 - 강무(講武)시에 치우에게 제를 지내는 것으로, 조선 세종 이후 주나라의 제도를 본따 실시하였다.
  • 천중부적 - 단오날에는 치우를 이용하여 악귀를 쫓는 부적을 그리기도 했다.

조선 후기 이후로 저술된 일부 기록에서는 치우를 한민족의 일부로 서술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위서로 판단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사실들은 인정되지 않거나 언급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가 있는데, 전자에서는 '치우씨(蚩尤氏)'라 불리며, 환웅의 부하로 일족을 이끌고 환웅에 협력하였던 부족 및 부족장으로 설명된다. 치우씨는 환웅의 명령에 따라 집을 만들고 방어와 병기 제작을 담당하였고, 신농의 말기에는 중국 본토에서 천왕이 되었으며, 후자에서 치우는 배달국의 제14대 환웅인 자오지환웅으로 등장한다. 중국의 역사서 및 신화의 내용과 반대로 《환단고기》의 치우는 헌원(軒轅)에게 승리하였다고 한다. 또한 2002년 FIFA 월드컵 때 유명해진 붉은악마의 트레이드 마크 도안이 치우라는 주장되었는데,[8] 해당 도안은 신라 귀면와를 토대로 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귀면와의 형상은 치우와 관련짓지 않는다.[9][10] 그러나 붉은악마 측에서는 이 그림이 치우의 형상이라 주장하고 있다.

 

 

'치우(蚩尤)'를 알고 있는가!
 
기사입력: 2014/12/03 [14:31]  ㅣ 최종편집: 

http://www.mooye.net/sub_read.html?uid=9025

 

치우는 가슴 아픈 이름이다. 동이족 73전 73승의 무신인 14대 단군이다. 치우에 대한 기록은 실존의 역사로 중국사서에 무수히 나오고 유적, 유물도 너무나 많다. 이에 대한 논문도 수두룩하다.
 
치우는 성이 강씨이고 염제의 후예며, 유망의 뒤를 이어 염제가 됐다.(일주서. 사기편, 로사. 치우전) 중화는 치우를 중화의 시조 황제와 싸운 적장으로 치우를 '어리석은 버러지'라는 나쁜 개념으로 한자의 의미를 왜곡했다.
 
탁록 전투에서 승리한(한국 측 기록은 도리어 헌원이 패하고 신시의 규범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여 물러갔다고 한다.) 황제만을 중화의 시조로 인정한 중국이 지금 동이족인 치우와 염제를 중국의 시조로 편입하여 삼조당을 세워 숭배를 한다. 동이족 두 분이 중국의 시조가 됐다. 불과 십수년의 일이다. 

 

중국이 홍산문화의 발굴과 상고의 유물들을 연구한 결과 치우의 실존역사 뒤에는 중국이 감당할 수 없는 동이족의 역사가 드러난 것이다. 바로 단군조의 역사이다. 치우와 염제를 중국역사로 편입하는 것은 한민족의 상고 역사를 편입하려는 것으로 동북공정의 실체이다.
 
치우동은 소림사 뒷산에 있는 동굴이다. 달마대사가 면벽수도한 곳이어서 달마동'라 바뀐 것이다. 참으로 마음이 허하다. 역사는 이렇게 슬그머니 바뀌고 잊혀지는 것이다.
 
달마가 수련한 역근경이 소림사 무술의 시원처럼 말하는데 달마는 인도인이고 인도는 요가의 나라다. 역근이란 말도 몸을 틀고 비튼다는 것으로 요가의 냄새가 풍긴다.
 
지금의 소림무술에서 인도의 무술형태를 볼 수 없다. 오히려 소림사에서 조선세법의 검결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선세법의 기법과 중국검법이 유사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치우동의 이름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치우의 모습의 특징은 소뿔, 왕방울 눈, 호탕하게 웃는 입이다. 이것을 도철문이라 한다. 치우의 모습은 중국 무예역사에 치우회나 남북조나 한대 화상전 등 많이 남아있다. 특히 상대의 청도기에도 있다. 신라의 귀면와와 백제의 도철문, 고구려의 망와 도철문에도 그 모습이 형상화 되어있다.
 
동양 삼국의 무신 치우가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지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전쟁에 출진 전 제사를 지냈던 치우사당 역시 모두 허물어졌다. 사대에 빠진 조선이 전국에 산재한 치우사당의 치우상을 관우상으로 바꾼 것이다.
 
서울에 마지막 남은 치우사당은 뚝섬 근처에 있었는데 그 장소를 못 찾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또한 치우에 대한 흔적은 일본에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바로 쇼군(將軍)이다. 쇼군은 일본의 장군으로 우두머리이다. ‘將’자가 일본 발음으로 소우이다. 즉 ‘우두’는 소머리이다. 우두머리란 치우의 이름이다. 그리고 일본 장수의 갑옷이 치우의 모습을 상형한 것이다. 일본의 장군들은 '將(장)' 자를 왜 소우라 발음하는지 그 뜻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상징의 소중함을 안다. 일본은 잃어버린 한민족 문화의 박물관이다. 일본은 문화를 지키는 힘이 있기에 철학적 색깔이 분명히 있는 나라다.
 
치우천황을 붉은 악마의 상징으로 다시금 일깨우지만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새로운 종교와 사상이 들어오면서 전통과 정체성을 모조리 갈아 치우고 있다. 우리의 철학과 정체성이 사라진 이유다. 민족적 철학이 위정자에게 없기 때문이다. 지키는 자가 결국 자기 것을 만드는 것이다. 치우를 잃어버린 가엽고 슬픈 민족이여 치우를 다시 기억하라.

 

이와같은 사실과 유물을 볼때 남과 북,중국,일본 모두 같은 피를 나눈 형제들이며 한민족 입니다.

 

이제 이런 사실을 깨닫고 함께 잘사는 세상을 열어 나가야 할것입니다.

 

 

 

홍예문?

 

 

홍예 [虹霓/虹?]

 

(1) 대기 중에 떠 있는 물방울들이 햇빛에 굴절, 반사되어 반원 모양으로 길게 뻗쳐 나타나는 일곱 가지 색의 줄. 흔히 비가 멎은 뒤에 일어나는 현상인데, 보통 바깥쪽으로부터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의 차례를 이룬다.

 

(2) [건축] 문의 윗부분 무지개 모양으로 반원형 되게 만든 .


무지개가 하늘天에 생기잖아요?


사람이 죽으면 하늘 나라 간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홍예문虹霓門은 잘난 너 문門을 보고 하늘天,죽음(도깨비)을 깨닫고 살으라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주고 있는 타인캡슐 인것입니다.

 

 

옥천교?

 

죽음을 밝게 꼐닫고 건너서 잘 살아가라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주고 있는 타인캡슐 인것입니다.

 

 

 

나이 들어가면 누구도 고노병사孤老病死에서 벗어날수 없고 벗어나려면 젊어서부터 건강챙기며 사십시오.

 

20세 이상 나이 들어가면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하여 여기저기 아픈곳이 나타나고 세월가면 갈수록 당신 몸은 병들어 고통뿐이 없습니다.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앉아만 계십시요(좌욕).

물에 앉는것을 실행하시면,건강을 지킬수 있습니다.

하루에 오전,오후30분이상 실행하며,매일 습관을 들이는것이 중요합니다.

(오래 앉아 있을수록 좋으며,1분1초라도 더 물에 앉으면 자신에게 좋은 것이나, 힘이들때는 쉬어가면서 하세요)<==이것도 못해 먹겠다고요?

 아픈것도 못 아프겠다고 해서 않 아플수 있으면 좋으련만,죽는것도 못죽겠다고 해서 않 죽으면 좋으련만,마음대로 않되지요.


사람마다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니 모두에게 꼭 좋은일이 있다고 말씀 드릴수는 없으나,인연있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은 실행하며 살아 가십시오.


 

단,노력과 극복없이 기쁨은 얻을수 없습니다.

 

 

늙어서 병과 고통,죽음에서 벗어나려면 젊어서부터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대단히 잘난 당신이 죽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면,물에 앉는것을 실행 않하고 살아도 됩니다.

 

그냥 살다가 죽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물에 앉는것을 실행 않하고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대단히 잘난 당신이 죽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없다면,물에 앉는것을 실행 하고 살아가십시오.

 

그냥 살다가 죽을 생각이 없는 사람은,물에 앉는것을 실행 하고 살아가십시오.

 

 

 

자신의 몸과 생명을 소중히 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도깨비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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