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종말과 엔드게임
[목차]
서론
1. 동일성 신화의 마감
2. 예후로서의 포스트해체주의
1장 엔드게임으로서의 철학과 미술
1) ‘마지막 쇼’로서 엔드게임
2) 엔드게임하는 철학과 미술
2장 엔드게임하는 해체주의
1) 데리다의 엔드게임과 해체주의
2) 엔드게임으로서의 해체주의 예술론
3장 엔드게임과 포스트모더니즘
1) 엔드게임의 두 얼굴
2) 리오타르의 엔드게임
3) 엔드게임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
4장 엔드게임 시대의 현대미술
1) 현대미술의 엔드게임으로서 탈구축 현상
2) 탈구축 표현양식의 방법적 특징
3) 해체주의와 추상미술
4) 엔드게임의 서막과 외광파의 등장
5장 포스트모더니즘과 현대미술
1) 두 개의 시계인가, 양면성인가?
2)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징후와 양식
3) 엔드게임하는 미술사
6장 현매미술 - 발광하는 엔드게임
1) 인간의 본성으로서 광기
2) 광기의 시대와 현대미술
3) 엔드게임과 회화적 실존주의
7장 종말의 예후와 탈구축 이후
1) 미술의 종말과 해체의 후위
2) 탈구축 이후와 미래서사
3) 포스트해체주의 시대의 미술
결론
* 보드리야르는 “사물들이 다양한 모조품으로서 기호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따라서 사물을 소비한다는 것은 기호의 체계적인 조직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은 모든 것을 시뮬라크르로 만든다는데 있다. 즉,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외에
어떠한 ‘실재’도 없으며 복제품의 ‘원본’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해 말한다.
그에게는 더 이상 ‘실재’의 영역 대 ‘모방’또는 ‘모조’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시뮬라시옹’의 지평만이 있을
뿐이다.
특히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던 사회를 ‘시뮬라시옹’ 혹은 ‘하이퍼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 개념들은 원본과 복제본, 진상과 가상, 기의와 기표를 구분하여 의미를 달리 부여하는 것이 완전히 쓸모없게 되었
음을 알려준다.
워홀의 <브릴로 상자> 처럼 이는 대량생산을 지향하는 현대의 현실이 바로 복제본 체계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있다는
것, 굳이 진상과 가상을 구분하는 것은 진상이라고 하는 것이 알고 보면 가상적인 것임을 감추기 위한 수법이라는 것,
저 멀리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서부터 내려오는 기표들의 부산물이라는 것 등을 나타낸다.
이러한 생각을 근거삼아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던 문화와 예술의 특징에 ‘초미학’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모더니즘의 종언이나 미완의 폐기품도
아니다.
제임슨이 이해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궁극적인 상태의 모더니즘이 아니라 생성상태에 있는 모더니즘이다.
그는 이러한 생성을 지속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소 기계적인 의미에 얽매어 두려 하지 않는다.
그는 만일 근대성이 사실로부터 후퇴하면서 표상할 수 있는 것과 인식할 수 있는것 사이의 숭고한 관계에 따라 생겨
나는 것이라면, 이 관계에서 우리는 음악가들의 용어를 빌어 두 음계를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표상능력에 대한 무력감, 즉 인간 주체가 느끼는 존재에의 향수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보다도 인간주체를
사로잡는 모호하면서도 부질없는 의지라는 것이다.
4장. 엔드게임시대의 현대미술
1. 현대미술의 엔드게임으로서의 탈구축현상
1)해체주의와 현대미술의 조우
미술의 역사를 조감해보면 철학과 미술의 조우와 상관관계는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미술이란 심층의식이나 사유와는 무관한 채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을 손으로 재현해내는 심미적 기술이라기보다
사유의 조형적 표층화 작업이라고 보아야하기 때문이다.
재현보다 표현을 더욱 중요시하기 시작한 현대미술에 이르면 심층의식과 내성적 통찰은 더욱 중요해진다.
예컨대 철학의 역사가 구축해온 것을 송두리째 뿌리뽑으려하는 해체욕망이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은 재현미술이
구축해 놓은 역사의 종말을 외칠 정도다.
인간의 조망욕구는 본래 가시적/ 비가시적 대상을 조망하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을 선취하려 한다.
인간은 ‘선취된 방법’에 의해 세상을 조망한다. 인간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다양한 조망렌즈를 사용하여 세상을 말하고,
글쓰고 사색하고 그리려 한다.
조감 욕망이 역사에 대한 순리적 조망뿐만 아니라 반리적 스펙트럼을 인간의 사유흔적 전체로 확장할 경우 그 조감도
위에 투사된 역사들은 적어도 탈구축의 대상이 된다. 그로 인해 해체주의가 출현하는 것이다.
해체라는 철학적 엔드게임은 구축에 대한 일종의 탈구축 전략이자 방법이다. 그러나 전략적 방법은 단순하지 않다.
그것의 본질은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부정에 있기 때문에 기존의 시스템에 순응하려하지 않는다.
사유방법의 혁명적 반역으로서의 해체주의는 이전의 모든 철학적 구축에 대한 해체나 다름없다.
니체의 선구를 따라 사유의 관점과 방식을 역전시켜서 ‘철학의 종언’과 ‘반철학의 철학’을 부르짖어온 푸코와 데리다,
들뢰즈와 리오타르등 엔드게임을 시도한 새로운 전위의 철학들이 그것이다.
푸코의 탈구축
자신을 니체주의자라고 자칭한 푸코는 탈구축이나 해체를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도 사유의 역사를 지배해온 권력과
이성의 초과와 과잉을 해체하려 했다.
그는 『광기의 역사』를 통해 보편적 이성의 득세가 비이성을 어떤 사유에서 얼마나 무자비하게 배제시켰는지를
폭로한다.
그는 광기가 이성에 의해, 그리고 성이 생체권력에 의해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이성과 권력의 타자로 구성되어온
비이성의 고고학과 계보학에 관해 쓰려 했다.
그에 의하면 “나는 늘 ‘당연하다’고 간주하고 있는 것, 모든 경우에 ‘적합하다고’고 간주되는 것을 파괴하는 지식인
으로 있고 싶다.
그러한 지식인은 현재의 다양한 타성이나 강제의 한복판에 서서 다양한 돌파구를 끝까지 살핀다”는 것이다.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파괴하는’지식인이란 곧 이성과 권력기제를 ‘해체하는 ’지식인이다.
이를 위해 그는 정치적 제도의 해체를 암묵적으로 요구해온 것이다.
그가 재현미술에서도 “언젠가 이미지 그 자체와 그것이 달고 있는 이름이 함께, 길다란 계열선을 따라 무한히 이동
하는 상사에 의해 탈동일화되는 날이 올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데리다의 철학에 대한 해체
데리다에 있어서 엔드게임의 욕망은 푸코보다도 적극적이고 직접적이다.
그는 이른바 ‘철학의 머리 절단하기’, ‘형이상학의 욕망 폭로하기’, ‘형이사학의 파산선고’, ‘철학적 구토와 이성의 거세’
등 다양한 해체놀이를 주장한다.
데리다는 1973년에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철학적 관심이 ‘철학의 머리를 절단하는 것, 철학을 토해내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가 보기에 형이상학을 비롯한 전통적인 철학적 사유의 흔적은 로고스가 형성한 가치관적, 위계서열적, 목적론적인
현전의 시스템일 뿐이다.
그가 니체를 모방하여 신적인 존재를 모두 단두대에 올려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데리다는 철학자들이 생생한 직접성을 지닌 말로 된 언어를 현전성이 없는 글로 된 언어(문자언어)보다 우위에 두어
온 것은 모두 로고스(말)중심의 형이상학적 음모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러한 위계를 전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글쓰기와 차이』(1967)에서 그가 현전성의 중독에 대한 구토와 해독의 방법으로써 ‘차연’과 해체전략을 제시한것도
그 때문이다.
들뢰즈의 리좀적 해체
들뢰즈의 탈구축과 해체는 욕망의 중심화를 표적으로 삼는다.
그는 일체의 탈중심화, 탈고정화, 파편화를 주장함으로써 강력하게 욕망의 파시즘을 해체하려 했다.
그가 무엇보다도 붕괴시키고 해체하려 했던 것은 욕망의 중심화, 총체화, 체계화에만 빠져버린 근대의 정주적 질서다.
그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교류시켜 어떤 것에도 억압되는 일이 없는 사태를 실현시키려 한다.
이러한 사태는 욕망기계들의 의사소통이 종횡으로 이루어져 어떤 가로막힘도 없는 세계의 출현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그는 습관적으로 영토를 고집하고 공간 넓히기만을 욕망하는 정주적 사고를 버리도록 주문한다.
그 대신 그는 상호 이질적인 지식이 서로 복잡하게 얽힌 ‘리좀’으로서의 세계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오타르의 탈구축
리오타르가 노리는 탈구축의 대상은 주로 인간을 미혹해온 이른바 근대적 거대이야기나 메타이야기이다.
리오타르에게 근대적 신화와 신학인 해방이야기들은 더 이상 해체망원경 밖에 방치되지 않아야 했다.
그것들은 모두 이제 그 신뢰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근대성의 거대한 기획은 사이비 종교의 종말론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세에 이어서 보편사적 구원을 약속하거나 탈중세적 근대사의 보편적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보편적 합의를
강요하는 거대이야기들을 해체하는 대신, 그 자리는 국지적인 작은 이야기들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 이래 서구의 지적 전통은 지식 자체가 독단적이며 그로 인해 보편적인 본질적 존재성을 부여하려는 철학적
성격을 강화시켜왔다.
이는 철학이 형이상학적 체계 내에서 존재의 의미를 객관적으로 확연히 드러난 인식가능한 현전하는 대상에 부여
해왔음을 뜻한다.
이러한 서구 철학이 지닌 현전의 형이상학 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해체주의 철학이 되어 문학뿐 아니라 미술
분야에까지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형예술인 미술에서의 해체대상은 음성중심주의적 언어나 논리일 수 없다.
또한 이성중심적 관념일 수도 없다. 그것은 기원과 원본에 충실하려는 재현양식일 뿐이다.
회화는 언어적 논리나 관념으로 말하지 않고 마치 규정할 수 없는 미지세계의 특성과 같은 변하기 쉬운것, 즉 감성적
이거나 즉각적인 것으로 말하고 감상하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의 특수성은 어떤 원리, 이념, 담론, 양식들에 기여한다기 보다는 그런것들에 기생하면서 그 허구를 들춰
내는 전략이나 혹은 차이에 의존하는 개인적 양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현대미술에서 특정한 예술적 실천에서의 실제적인 것과 철학적 운동사이의 조우관계를 기술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문제다. 특히 현대미술은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푸코의 지적대로 어느 시대에도 그 시대마다의 인식의 하부구조로서 고유한 에피스테메가 있었듯이 현대
에도 철학적 해체이론과 반재현적 현대미술 간의 상호연관성을 지적할 수 있는 공유면적은 존재한다.
한마디로 말해 동일성에 대한 극단적 거부가 그것이다.
20세기 후반 들어 미술과 철학에서 엔드게임의 가속도가 붙은 것도 그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매개로 하여 활발해진 직간접적 상호작용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탈구축 표현양식의 방법적 특징
간격(거리두기)의 미학
또한 모더니즘 시대의 재현미술에서는 작가의 의식과 사물 사이에 틈이 벌어질 수 없는 소위 무간격의 원칙을 고수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해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에 형향받은 현대미술은 대체적으로 사실성보다는 관념성을 우위에 놓고 작가의
주관적 시각으로 모든 것을 바라봄으로써 작가의 의식과 사물사이에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객관적 시각을 중시
한다.
이 점에서 현대미술은 데리다의 말대로 의미가 완결되지 않은 채 좌우로 활동하는 이른바 거리두기라는 차연작용,
즉 간격의 원칙 아래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해체의 방법으로서 원본과의 거리두기 원칙은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제도가 만들어낸 산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 원칙을 가장 잘 실행한 극단적인 예로서 제프 쿤스와 하임 스타인바흐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작품은 기능적 역동성이 미적 재생과정에서 소거되어버린 오브제의 문화적 소비자로서의 관람자의 주체성을
분명하게 일깨워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오브제는 낯설지 않다.
3. 해체주의와 추상미술
미술에서의 추상은 재현의 무덤이다. 재현은 추상으로 인해 원본 상실되고 무형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현의 반작용이 표현이라면 반재현은 추상에서 그 극단의 표현에 이른다.
추상이 재현의 해체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원본부재의 추상에서 재현의 억압은 표현의 자유에게 권리이양한다.
이 점에서 추상은 엑소더스다.
추상적 이미지와 그 표현으로 인해 재현/ 권력의 미술사는 종말을 고한다.
일치와 무간격의 대감금시대가 막을 내리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구축의 철학사에서 해체주의가 반철학으로서 철학
이듯이 재현의 미술사에서 추상미술은 반미술로서의 미술인 셈이다.
..한편 마이어 샤피로에게 오늘날의 추상화는 ‘생성의 드라마’나 다름없다.
1960년에 발표한 『 추상화의 휴머니티에 관하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추상화에 대해 제기되는 비인간적이라는 비난은 작품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는 데 기인한다.
그 작품들은 다른 영역에서 나오는 관념들 때문에 이해될 수 없게 되었다. ‘추상적’이라는 말은 논리학과 과학에서 나온, 실제로 미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의미를 내포한다.
‘추상적’이란 잘못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비객관적’, ‘비대상적’ - 모두가 부정적 개념이다.
또는 ‘순수회화’라는 이름도 이보다 더 나을 바가 없다.
모든 회화가 대상적이었던 19세기에 미술에서 추상적이란 여러 가지 의미, 다시말해 간략화된 선, 장식, 평면을 가리켰다.
천사라든가 과거의 형태와 같은 비가시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은 이미 추상미술을 뜻하고 있었다.
- 그러나 오늘날 추상화는 논리적 추상능력이나 수학과는 거의 무관하다. 그것은 화면 저편의 대상세계를 전제하지 않는다
- 그러나 화가의 작업에 의해, 그의 필치와 활력, 무드에 의해 그것은 이전보다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것이 바로 미술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생성의 드라마이다.’
‘합성’의 추상미술
푸코, 들뢰즈와 가타리, 리오타르 같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게 추상미술은 해체미술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곧 형상
이나 이미지의 부재나 부정이라는 미술에서의 초월적인 부정의 신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푸코가 생각하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닌 유일한 원리는 ‘침범’이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는 현대예술의 ‘대항언설’속에서 침범하기를 요구하는 문화이다.
푸코에게 추상은 부재나 부정이기보다 광기의 외화처럼 바깥으로 열려 있는 낯선 새로운 가능성들로 이뤄진 것, 즉
보이지 않는 가상성들로 채워진 것이다.
그에게 추상은 외부의 긍정과 관계된다. 그 때문에 그것이 형상이나 이미지의 부재로 간주되는 것은 단지 새로운 가상
들에 대한 우리들의 눈멂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이처럼 예술적 언설의 순수한 자기 현현은 미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현대미술사도 마네로부터, 세잔 그리고 폴록에 이르는 변천과정을 통해 자기기만적인 고전주의 시대나 모더니즘
시대의 미술과는 다른 회화공간을 형성함으로써 미술의 순수한 언설을 스스로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까닭도 다르지
않다.
문학이건 미술이건 해체주의 시대의 예술언어는 외부의 타자적인 어떤 것을 묘사한다거나 재현해야 하는 타율적인
의무나 기만적인 언설에 의해 더 이상 구속받지 않는다.
푸코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무한한 도서관 속에서 책을 다른 책과 연결시키고 언어를 다른 언어와 연결시키는 행위를
뜻한다.
푸코에 의하면 오늘날의 언어공간은 ‘수사법’이 아니라 ‘도서관’에 의해 규정된다.
즉, 단편화된 언어의 무한한 연결에 의해 규정되며 그것은 수사법의 이중연쇄를 방임한 언어, 자신이 무한하게 됨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언어의 단순하고 연속적인 단조로운 열로 바꾼다.
결국 오늘날의 문학적 글쓰기가 비수사법적 연결행위이듯이 미술작품도 환영주의와는 무관한 예술공간과의 무한한
연결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예술을 자유화하는 데 있어서 최초의 근대적 성공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1793)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데리다는 자율미학 - 예술적 미를 영역화, 심미화하는 예술론 - 을 대변하는 칸트의 예술론을 해체함으로써 근대적
예술이해의 전통에 종언을 고할 뿐 아니라 예술에 간섭하는 철학적 이론화 작업의 내재적 결함을 들추어내고 있다.
이것은 이미 푸코의 지적대로 어느 시대건 그 시대 특유의 에피스테메, 즉 공통의 지지점과 인식소가 있었듯이 반재현
주의적인 현대미술에도 철학적 해체이론과의 상관성을 떠올릴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했다.
사실 메타언설을 거부하는 현대미술의 내재적 해체와 코기토로서의 주체 또는 중심의 해체를 주장하는 해체주의의
외재적 해체는 모두 모던적 관행이나 동일성에 대한 극단적 거부라는 점에서 이미 손잡은 지 오래다.
그것은 해체주의가 이성 중심주의를 해체하기 위한 전략일 뿐 고유의 ‘이념’을 갖지 않음으로써 이해하기도 어렵고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무엇인 것 같으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서 결국 니힐리즘 정도로 평가되기 쉽듯이 해체미술
행위 역시 분명히 창조적 사고와 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덧없는 낙서나 진짜 모방행위와 구분이 모호하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내재적이건 외재적이건 양자 모두의 해체적 전략에는 동일성이나 전체성을 깨뜨리는 미덕이 있음을 반드시
전제할 필요가 있다.
회화는 논리나 관념으로 말하지 않고 마치 규정할 수 없는 미지세계의 특성과 같은 변하기 쉬운것, 즉 감성적이거나
직각적인 것으로 말하고 감상된다.
그러므로 현대미술의 특수성도 어떤 원리, 이념, 언설, 양식들에게 기여한다기 보다는 그런 것들에 기생하면서 그
허구를 들춰내는 전략이나 혹은 차이에 의존하는 개인적 양식에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결국 내광(계몽주의) - 외광(인상주의) - 탈내광(해체주의)의 과정을 거치면서 해체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온 해체
주의 미술에서 어떤 특권적 위치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텍스트로서의 표면만 있게 된다.
그래서 메를로 퐁티의 말처럼 해체는 기존의 닫힌 의미들의 체계에 도전하고, 또한 허구적 실재라는 환영을 문제시
하거나 어떤 의미들이 지시물과의 대응관계에 의해 구성되는 것, 즉 재현 또는 표상의 논리에 도전한다.
또한 생산된 텍스트 -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현상으로서의 텍스트’에 대한 책임은 이제 전지적인 작가에게서 유희를
즐기는 관객이나 청자에게로 넘어간다.
결국 해체미술도 해체주의가 인과성, 동일성, 동일한 구조, 구조의 내적 정합성, 모티브 등의 개념에 제기한 것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이처럼 예술의 존재 이유는 언제나 예술로부터 인간 본성의 심층에 대한 이해나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이 삶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진리를 드러내지 않은 채 단지 감각적 즐거움이나 정서나 상상작용을 일으키는
것에만 불과하다면 예술은 한낮 오락물이나 자극제와 같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5장. 포스트 모더니즘과 현대미술
1. 두 개의 시계인가, 양면성인가?
철학사에서 모더니즘, 즉 근대정신의 출발점인 데카르트의 물심이원론을 가리켜 ‘두 개의 시계 이론’이라고 부른다.
그는 정신과 신체는 서로 무관한 독립적 실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일원론은 이른바 ‘양면성 이론’이라고 불린다.
그는 정신과 물체가 독립적 별개일 수 없고 오직 신이라는 하나의 실체가 지닌 두 가지 속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보다 3백년뒤에 근대의 이성 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근대성이나 모더니즘과의 인식론적 단절과 그것의
탈구축을 주장하며 탈근대주의나 반근대성을 외치고 등장한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는 어떠한가?
두 개념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인가, 아니면 그와 반대인가?
결론적으로 말해 두 개념은 별개의 것일 수 없다. 그것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가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잇몸과 이의
관계와도 같다. 그러므로 양자는 개별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는 두 개의 시계 이론이라기보다 서로 분리해서 다룰 수
없는 양면성 이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모더니즘에 대한 탈구축은 때로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때로는 포스트구조주의나 해체주의로 얼굴을 내민다.
그러나 이것들은 달리 부르는 용어처럼 다른 얼굴들이 아니다.
그것은 본명과 별명의 차이일 수 있지만 논의되는 분야만을 달리하는 두 개의 이름일 수도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선전자인 안드레아스 후이센은 「포스트모던 지도 그리기」라는 논문에서 ‘해체주의는 주로 모더
니즘의 언설이자 모더니즘에 관한 언설’이라고 하여 그 양면성을 분명히 하려 한다.
그가 “매우 일반적인 차원에서 보건대 우리는 예술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대결구도 속에서, 그리고 문화의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의 구별 속에서 길게 보아 오늘날 서구사회의 문화와 이데올로기에 관한 가장 깊숙한 곳
까지 들어가면서도 가장 은폐적인 논쟁을 발견하게 된다고 나는 확신한다”고 주장하는 배경에도 탈구축의 시대의식이
강조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이번에는 해체주의의 얼굴이 모더니즘을 탈구축한다.
예컨대 크리스토퍼 노리스는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미친 영향을 강조하면서 미국의 포스
트모더니즘 계열의 비평가들에게 “데리다의 영향은 해방의 힘처럼 다가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데리다의 저작이 비평가들을 철학자들과 동등한 반열에 올려 놓았을 뿐아니라 철학자들과 복잡한 관계로
위치짓는 일련의 완전히 새로운 강력한 전략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철학적 주장들은 수사학적 문제제기나 해체에 개방되었다는”는 것이다.
또한 양면성의 실험은 리오타르에 의해서도 진행되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내가 미국인들로부터 넘겨받은 개념이다”라고 핑계대면서도 1985년 초 현대미술의 메카
인 뉴욕의 현대미술관이 아니라 파리의 퐁피두 센터 현대미술 전시관에서 자신이 직접 총감독으로서 기획한 철학적
수퍼미디어쇼인 <비실물 Les immatériaux> 을 선보임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의 양면성을 확인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2.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징후와 양식
..모더니즘은 그렇게 오래 전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린다 노클린은 고작해야 1855년 쿠르베의 「사실주의 선언」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이클 프리드는 <풀밭위의 점심>과 <올랭피아>의 마네로부터 잡는다.
그런가 하면 수지 개블릭은 모더니즘의 출현을 그보다 더 늦게 “우리의 그림이 주는 느낌은 조용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림이 캔버스위에서 우렁찬 승리의 나팔 소리에 맞추어 노래하고 소리치게 할 것이다”라고 외친 1909년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과 때를 같이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그들에게 모더니즘의 기원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출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더니즘의 탈구축 징후를 기술공학과 기계문명의 영향이 뚜렷
했던 시기로 잡은 모더니즘의 기원에 못지 않게 아주 좁은 의미에서 파악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반모던적 탈구축의 징후가 분명해진 시기까지 기다려야 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미술문화에 반모더니즘 운동을 불러일으킨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처음으로 도입되던
시기와도 일치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의 해후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이유가 거기에 있다.
..어빙 샌들러도 1969년에 쓴 한 전시회의 카탈로그 서문에서 “아방가르드는 종식됐다.
아방가르드는 수많은 예술의 한계에 봉착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신기한 것을 보고 감탄을 터뜨리는 대중들도 거의
없다. 엘리트들도 이에대해 동정을 표시하기보다는 예술과 그들의 미적 체험의 질에 관해 의심을 품을 뿐이라고 주장
한다. 사실상 당시의 이런 변화는 모더니즘 미술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프랑스의 지식인 사회에서도 1968년은 이성주의와 과학주의 그리고 보편주의의 마지막 보루였던 구조주의 시대가
그 마감을 알린 해였다.
또한 반구조주의인 포스트구조주의와 해체주의가 근대적 이성의 구축물에 대한 적극적 탈구축을 선언한 해이기도 했다.
1986년 보스턴 미술관에서 제프쿤스나 하임 스타인바흐의 작품으로 시작된 미술의 ‘엔드게임’보다 철학적 엔드게임은
적어도 20년정도 먼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현대미술이 어떤 일정 기간에 존재했던 양식, 즉 어떤 역사적인 실재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있다.
모더니스트의 시대는 막을 내렸으며 놀라고 있는 우리들의 눈앞에서 과거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 과거는
미래를 위한 열쇠를 찾기 위해 낱낱이 검색되고 있다.
모더니즘 양식들은 이제 장식을 한 하나의 어휘, 다시 말해 나머지 과거와 함께 얻어 낼 수 있는 형식들의 한문법이
되었다.
양식이란 제거되고 재순환되어 인용되고 의역되며 희문화되는 말하자면 언어처럼 사용되는 하나의 임의적 선택권이
되어버렸다. ..많은 작가들에게 양식이란 더 이상 어떤 필연성이 아니라 불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회의와 반성은 말기증세다. 그러므로 그것은 대개 묵시록과 더불어 역사에서 사라져버린다.
정체성에 대한 각오와 다짐이 이미 그 자리에 새롭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미술에서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대교체도 결국 미술이란 무엇인지, 그 정체성을 묻는 새로운 질문방식
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랙스트러우 다운스도 그러한 변화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모더니즘은 일종의 회화적 자기도취에 빠졌다. 그리하여 회화는 그 자신만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모순을 존재이유로 파악한 뒤 자신의 존재위상을 회화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것
이라는 데서 찾았다.’
‘ 패스트푸드’로서의 포스트모던 양식들
더그 데이비스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후기자본주의 사회의한 현상인 ‘패스트푸드’에 비유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격식을 갖춘 모던 아트식의 정찬보다는 어디서나 일정한 격식없이 손쉽게 먹을 수 있는 햄버거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주민의 이성적 권위, 객관적 규준과 절차, 그리고 합리적 체계등을 모두 거부한 채 언제 어디서,
누구와도 제약없이 즐길 수 있는 노마드의 열린 식탁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더니즘이 정주민의 이데올로기적이고 사고방식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유목민의 이념이고 양식이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 양식들은 이른바 유목미술 시대의 기호들일 수 있다.
로잘린드 클라우스도 격자모양이 형식적, 반복적, 평면적, 배열적이고 정확한 형식과 양식에 열중하는 모더니즘을
상징하는 한 양식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음 과학적 이성과 논리, 그리고 객관성의 요구에 근거를 두지 않고 현존재와
주관적 체험, 행위 다시말해 반드시 믿거나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불가사의한 양식들의 치료의학적 현시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식들은 모더니즘의 순수성을 지양하고 그 대신 비순수를 지향한다.
조이스 코즐로프는 1976년 알렉산드라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의 카탈로그 서문 「부정을 부정하며 - 애드 라인
하르트의 <부정에 관하여>에 대한 반박문」에서 다음과 같은 용어들을 부정적/긍정적으로 사용하여 반모더니즘
양식의 특징을 규정한 바 있다.
3) 엔드게임하는 미술사
미술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로 70~80년대의 경향이라면 다양한 양식들의 실험무대였던 60년대 중반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본격적인 탈구축과 더불어 반모더니즘에로의 급선회가 시작되기 이전까지의 5~60년대는 포스트모더
니즘 미술의 전사나 다름없다.
..이들 가운데서도 그린버그는 물감→붓→화면이라는 과정에서 붓의 개입을 생략함으로써 그림 그리기 과정의 혁명
적 반성을 불러온 폴록을 통해 뉴욕파의 정체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는 만일 새로운 미술운동이 현대미술의 본령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뉴욕미술계는 이 운동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강조한다.
..한편 뉴욕파의 절정은 아마도 추상표현주의의 붕괴가 시작된 1958~59년일 것이다.
1959년 여름 뉴욕에서 전시회가 개최되기 직전, MoMA가 기획한 <새로운 미국회화>라는 주제로 유럽의 8개 수도를
순회전시함으로써 그들의 국제적인 명성이 절정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정점은 종점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1956년 폴록의 갑작스런 사고사는 뉴욕파파와 추상표현주의 시대의 마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59년 가을 MoMA의 큐레이터 피터 셀츠가 <인간의 새로운 이미지>전을 개최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6장 현매미술 - 발광하는 엔드게임
1) 인간의 본성으로서 광기
지금은 왜 비상중인가? 지금의 문화현상은 왜 정상이 아닌 비상인가? 한 마디로 말해 그것은 이동성 때문이다.
정지에 길들여진 욕망이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회화가 평면을 거부하고 캔버스로부터 대탈주를 시도한 것도 근본적으로는 이동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본래 정주민에게 이동은 정지보다 불안정하고 불안하다. 그래서 유목민에게 정주가 비상이듯 정주민에게도 이동이란
곧 비상이다. 붙박이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이동은 일종의 표류이고 일탈이다.
그것은 궤도이탈이자 탈선이나 다름없다.
그 때문에 이동하는 순간부터 우리들은 긴장한다. 정지가 안정을 결과하듯 이동은 긴장을 동반한다.
..우리의 일상은 이제 정상인지 비상인지도 분간하기 힘들 만큼 비상이나 광기에 익숙한, 심지어 그것을 즐기기까지
하는 거대한 시뮬레이션 구조 속에 놓여버린 것이다.
단선적 규준에서 해방된 현대미술이 차이와 차별마저 무의미해진 발광의 병동화나 다름없이 되어버린 까닭이 거기에
있다.
2) 광기의 시대와 현대미술
문명과 문화는 본질적으로 자연에 대한 위반이다. 문명화된 사회일수록 위반을 즐기고 정상보다 비상을 좋아한다.
오늘날과 같은 고도의 문명사회에 병기로서의 광기가 만연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근대적 이성 안에 비이성이 잠복해 있듯이 현대문화 속에도 이미 광기가 잉태되어 있다.
문화가 위반이라면 광기는 잠복된 문화인 것이다. 문화는 이성에 유난히 관심이나 호기심을 기울인다.
문화는 자연과 거리두기, 자연으로부터의 이탈, 나아가 자연에 대한 위반, 즉 반 자연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문화인은 이성을 즐기며 공감하고 동화하며 소유하기 위해 종아하지만 문명인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정기와 구별하고
그것을 통해 자아를 재인식하기 위해 광기를 좋아한다.
문화인은 항상 교활하다. 언제나 자연을 간섭하고 침범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위반이 늘 지능적인 이유도 마찬가지다. 광기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들은 광기를 조롱하고 차별하며
혐오하기까지 하면서도 그것을 즐긴다. 그들의 해체놀이도 그런 것이다.
..예술가운데서도 미술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미술이 지금까지 진화해온것도 미술가의 위반욕구에서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동경과 동일화의 욕구, 나아가 미메시스나 대리표상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미술가는 자연에 대하여 나르시시즘에 빠지면서까지 살아있는 예술혼을 발휘하려 한다.
광기는 저항이고 불복종이다. 광기는 정기에 대한 사보타주이다 광기도 또 하나의 능력이고 권한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광기는 정기와는 다른 에너지이다. 그것은 정기에는 결여되고 부재하는 에너지이다.
그 결여와 부재가 저항과 발작을 유혹하고 불복종을 유발한다. 그것이 창조적 에너지로 발현되는 20세기의 미술가
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결여와 부재는 저항과 불복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정기는 결여에 대한 저항을 발작으로 규정한다. 이렇듯 평균인의 이성과 정기의 입장에서 보면 미술가의
광기는 억압적 저항이나 불복종, 열광이나 발광을 통해 정기에 파고들어 대립적 상대, 즉 안티테제로서 존재론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또한 광기는 정기의 타자로서 존재한다. 광기는 적어도 정기를 타자로서 반사하기 때문이다.
광기는 정기에 대해 존재론적 안티테제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설사 광기의 본향이 정기의 피안일지라도 광기는
정기와 마찬가지로 인위가 아닌 자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광기는 인간의 또 다른 본성, 즉 정기가 알 수 없는 ‘피안의 본성’인 것이다.
더구나 예술가의 천재성과 광기의 경계나 접경조차도 정기에는 더욱 미지의 피안일 뿐이다. 그것은 불가해한 불가침
의 처녀지나 다름없다.
20세기의 미술양식이 어느때보다도 발작적인 것도 저항하고 불복하려는 천재적 광기가 캔버스 위에 그만큼 깊고
넓게 삼투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아리아드네의 미로찾기마저도 불가능할 지경이다.
20세기의 미술의 파노라마가 마치 깨져버린 거울처럼 원형에 대한 반사능력을 잃어버림으로써 수없이 조각난 만화
경이 되어버린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라틴어 격언에 따르면 ‘광기가 조금도 없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는 없다’, 천재성은 광기에 가깝다는 것이다.
플라톤도 ‘파이드로스’에서 천재들은 쉽게 화를 내고 습관적으로 제정신을 잃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예술가의 광기만은 천재성과 동의어라는 묵시적 동의하에 사회로부터 감금과 배체가
유예되어온 게 사실이다.
천재성과 예술의 결합이 ‘배제된 광기’와 '유예된 광기‘를 구별짓게 했던 것이다.
새로운 창조적 예술의 통로로서 천재성과 광기는 어떤 발작에 대해서도 면책특권을 부여받은 셈이다.
그 때문에 질 네레가 ‘백치화의 시대’라고 부를 만큼 미술가들에게 자살충동적 우울증과 광기가 두드러졌던 20세기
에는 그것이 미술과 미술가를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광기와 광인에 대한 사회적 기준과는 달리 이와 같은 예외적 묵인과 유예가 없었더라면 20세기의 미술가들은 제정신
으로 매크로 엔드게임도 감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미술사는 플러스 울트라로 나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20세기가 광기와 우울증에 대하여 그토록 너그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미 세상을 향해 “나는 다이너마이트다”라고 발작하는 니체를 통한 광기와 천재성에 대한 이중적
체험이 그 충격의 흡수장치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는 도발적인 반항의 목소리로 “우리가 예방접종을 받아야 할 광기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라고 외친다.
이처럼 선체험을 통한 선이해가 자살충동적 우울증과 광기를 낯설지 않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20세기 미술의
인식소가 되게 했던 것이다.
..사비에르 프랑코트에 의하면 광기와 천재는 동일한 인격구조의 표현이다.
분명한 것은 광기가 있을때 광기의 체험은 천재성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천재는 광기의 현현이고 존재양태나 다름없다. 그런데 천재는 광기와 마찬가지로 항상 과도함 쪽에 위치
한다. 명작일수록 일상적 의미가 과도하고 초과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광기는 예외적 운명을 타고난 20세기 소수자들의 작품 속에 많이 배어 있듯이 그들의 삶과 작품에 직간접적
으로 작용하며 투영된다.
다시 말해 예외적 창조자들의 작품 내용은 그 만큼 광기를 반영하게 마련이다.
그 때문에 광기는 작품을 해독하는 암호나 다름없을 정도다. 각종 우울증과 광기의 기호화가 시니피앙으로서 평면
위에서 자유분방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그것이 광인의 천재성과 결합하여 작용할 때 작품은 더욱 예외적이 된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점에서 20세기의
명작일수록 그만큼 유치하거나 병리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광기와 천재성의 공통분모는 그 유치성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엔드게임과 회화적 실존주의
미술가의 우울증이나 광기, 또는 천재성이 개인의 창의적 작품들을 탄생시키지만 미술사에서의 시대적 우울증과
광기는 시대적 양식의 발작을 야기한다.
미술사에 남긴 뚜렷한 실존의 흔적으로서 큰 주름잡기, 즉 매크로 엔드게임이 전개되는 것이다.
앞에서 자주 언급했듯이 재현편집증이나 대피표상 강박증의 장기지속으로 인해 우울증에 빠져 있던 미술사가 20세기
중반 이후 새로운 실존양태로서 반모던 양식들의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인간존재에 대한 회화적 실존을 확인하려는 엔드게임의 시도가 없었던것은 아니다.
예컨대 세잔 이래 고갱의 야만적 원시회귀, 마티스의 야수적 기호화, 피카소의 모방적 큐브놀이 달리의 현실초과적
과대망상쇼, 뭉크의 절규하는 회화, 그리고 모딜리아니의 몽환적 초상등 ‘자연속의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나아가
‘인간존재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저마다 새로운 방법과 양식을 고안해내며 그 실존적 주체성을 다시 묻는 일련의
‘회화적 실존주의’가 그것이다.
이미 고갱과 고흐, 마티스와 피카소 그리고 뭉크와 달리 등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막연
한 인간존재로서 보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속에 있는 즉 ‘지금 여기에 있는 존재’로서의 구체적 인간과 나의 실존
- 이 점에서 존재는 탈존이다 - 문제에 스스로 직면한 많은 미술가들은 재현강박증에 시달리던 미술사에 본질(원본)
선행적 실존의 확인을 위해 세계를 투사하는 각자의 방식대로 시비 걸기를 해본 것이다.
하지만 복제신화의 권태에 진저리치고 있던 미술사에서 보면 그것은 일종의 회화적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하다.
또한 전통주의자라고 자칭하는 달리도 자연의 대리표상화에 반기를 들기는 그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의 성도착적 유희 역시 평면 위에서 잠시 즐기고 있는 대자적 존재로서 현존재의 주체적 자아 확인을 위한
현실도피적 환각파티에 지나지 않는다.
고작해야 그것들은 일직선적 발전모델의 종말을 고하게 할 엔드게임의 전초전에 나선 용기있는 첨병들의 고군분투일
뿐이다. 그것들로써 20세기 미술사가 일직선적 재현편집증에서 지그재그형의 표현분열증으로 획기적인 궤도변경을
했다고 말할 수 없다.
현대의 미술양식에서 ‘원본(본체)과의 거리두기’나 원본에 대한 더 이상의 반사거울이 필요없는 ‘원본복제’의 포기로
인한 거울무용론(회화적 실존주의)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야수파, 입체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등의 시도에서도 보듯이 ‘물체로부터의 이탈’을 몸부림치던 자위적 일탈행위들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러서였다.
다시말해 양식에 나타난 사르트르가 말하는 ‘출구없음’의 바상사태에서는 다양한 종말의 시그널과 때를 맞춰 광기
발작적인 엔드게임의 전개가 불가피해진 것이다.
그 때문에 많은 미술가들이 엔드게임을 통해 실존의 기투성을 성실하게 실천하려 했다. 직관력과 통찰력이 뛰어난
20세기의 화가들일수록 더구나 각종 우울증과 광기에 시달려온 엔드 게이머들일수록 본질에 선행하는 실존적 자각
을 통해 ‘시비걸기에서 끝내기’로의 전환, ‘그림 없는 그림 그리기로’의 변신. ‘본질에서 실존으로, 즉 대상지시적인
의재적, 감성적 형상성에서 자기지시적인 내재적, 내성적, 즉물성에로’의 탈바꿈 등 이른바 ‘눈속임으로부터의’
대탈주를 서둘러 감행하고 나섰다.
금기의 위반에 대한 긴장과 불안으로부터의 실존적 자유, 더구나 구속의 종말이 가져다주는 해방감이 발광이나 발작
으로 표출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다.
그러므로 매크로 엔드게임에서 보면 “자연은 강간당하기 위해 존재한다”든지 “미술가들은 감성적 강간범이다”라는
피카소의 도발적 대사도 그 자유와 해방의 실존 드라마에서는 서막에 불과하다.
원본을 아무리 찌그러뜨리고 대칭이 어긋나게 기형적으로 형상화한들 그것은 원본에 대해 묵시적으로 허가받은
실존의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다.
눈속임에 대한 회화적 시비걸기, 즉 기투는 존재론적 이의제기다. 미술가들은 실존적 자각의 순간 그것에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새롭게 발견한 실존적 자아를 평면 위에서 확인하기 위해 주저없이 그리고 성실하게 엔드게임을 벌였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엔드게임은 종말의 징후다. 그것은 언제나 게임의 마지막 판이다.
예컨대 세잔의 <목욕하는 세 여인>같은 19세기의 전위적 회화는 가장 지적이고 세련된 형태로 전통미술의 정수를
무시함으로써 풍경화나 정물화에 있어서 종말의 징후, 즉 눈속임의 포기를 시작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에게 회화는 세부적인 감각들을 포착하여 평면위에 구성하는 지극히 난해한 작업
이며 자연을 모방하기보다 ‘자연에 대응하는’형상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빛에 대한 관심이 강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그는 사물의 물질적 현존과 그것들 간의 공간적 관계와
긴장감을 보여주는 시각에서 주제를 포착하려 했다. 동시에 그의 작품은 보는 행위에 의해서 보여진것에 부여되는
삶의 진동을 드러내고 있다.
이같이 보는 행위를 강조하는 점에서 그는 모더니즘의 가장 급진적인 선구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망막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외부세계와 물리적, 정신적으로 연관시키는 복합적 과정
이다.
..그러나 추상화에서 사물이나 대상으로부터 거리두기란 그것의 부재나 결여를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을 순전히 무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추상화는 캔버스에 대상을 더 이상 재현하지 않으려는 혁명적
게임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평면 위에서 환영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환영주의의 종말이라고 부르거나 나아가 미술 이데올로기의 종언으로까지 간주할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상화에서의 이러한 부정 신학이 일체의 욕망으로부터의 해탈인 욕망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추상화는 오히려 ‘무로부터의 창조’, 즉 무의 조화를 욕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원초적인 장소가 어떤 사물에 의해서도 점령되지 않는다면 그 공간은 무에 의해 점령된다고 하여
‘있지 않은것’, 즉 비존재나 빈 공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부인하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주장과 발상
의 토대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평면 위에서 무의 조화나 무에 의한 점령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렇게 추상화함으로써 미술이 눈속임의
고뇌로부터 영원히 해탈하는 것은 아니다.
비사물로의 지향성이냐 자기지시적 즉물성을 상징하는 모노크롬 같은 추상화도 한낱 재현강박증으로부터 도피의
방편일 뿐 완전한 해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재현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이거나 물상화의 한계를 탈출
하는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회화적 결과물이 감각적 현시태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내성적 잠재태에서 생겨난 것임을 증명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재현강박증은 결국 현시기피증을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그것이 원시적 무한을 동경하는 회화적 욕망을 실존의 공간 너머 추상적 공간에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폴록의 전면성에서도 보듯이 추상화가들이 캔버스의 전면을 거침없이 누비며 자유를 예찬하고 구가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무의 무한대를 만끽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면의 현실 안에서만 누리는 자유
일 뿐이다. 아무리 미술가의 광기와 천재성이 공모한다 하더라도 현실이 사바인 한 거기에서 진여의 발견이나 표현
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초현실로 주저없이 탈출한 미술가의 광기가 미래에는 추상에서 가상에로도 거침없이 몰입하려
할 것이다.
노마드로서 미술가의 이동 욕망은 공간예술의 태생적 조건인 현실의 이동과 그 양태의 변동마저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공간에 대한 미술가의 꿈은 무한한 확장현실의 실현일 것이다.
미래의 엔드게임은 잠재태와 가상태 간에 전개될 것이고 그 울트라 엔드게임장도 실제현실이나 초현실이 아닌 가상
현실로 옮겨 갈 것이다.
7장 종말의 예후와 탈구축 이후
1) 미술의 종말과 해체의 후위
..예컨대 취리히의 후고 발, 트리스탄 차라, 베를린의 리하르트 휠젠베크, 파리의 프란시스 피카비아와 앙드레 브르통
등에게 다다이즘은 제멋대로이면서도 예술의 전통적 권위주의에 대한 일종의 저항수단이고 해체운동이었다.
그래서 그것도 해체의 전위에 있었다.
또한 ‘부재’의 추상미술은 폴록의 드리핑이 시도하는 질료의 표현주의적 해체보다 훨씬 더 해체주의적이다.
그것은 일체의 판단중지를 거쳐 결국 적극적 부정의 길인 즉물주의에 도달한 것이다.
‘합성’의 추상미술이 선이나 면의 경계가 없는 유목민적 무경계의 연관관계 속에서 탈중심적 무제약적 이미지의 형성
과 연쇄를 실천한다면 ‘부재’의 추상미술은 미니멀리즘에서 보듯이 부정적인 침묵의 논리속에서 형식의 연쇄를 공동
화 시킨다. 모더니즘은 블랙홀 같은 그 침묵 속으로 빨려들어가 종언마져도 빼앗겨버린 것이다.
근대적 이성주의가 지배하던 철학의 종언과 동시에 다수다양한 해체주의가 철학의 전방위적인 노마드를 강조하고
나서듯이 예술에서도 이처럼 모더니즘으로부터의 역사적 이탈이 빠르게 시작되었다.
특히 미술에서 워홀의 <브릴로 상자>나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에서 보았듯이 이제는 어떠한 재현의 경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떠한 존재도 허용되는 노마드가 가능해졌다. 패스트푸드와 같은 탈구축 양식에서는 경계설정이나 침범
불허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어떠한 정주적 특권의 소유자(주체)도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토의 주장에 따르면, 오히려 ‘방향의 부재가 새 시대의 특징적인 징표이며 신포현주의 마저도 하나의 방향이라기
보다 방향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단토는 재현의 내러티브가 팝아트의 등장으로 끝났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팝아트의 등장을 통해서 ‘단순한 실제 실물’과 예술이 지각적 측면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무엇이든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때 비로서 예술에 관한 진정한 철학적 자기반성이 가능해지게 되었고 이러한 반성 덕분에 ‘나는 갖고 있지만 다른
예술은 가질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제공하고 있는 모더니즘의 역사는 끝나게 된다.
다시 말해 미술작품은 어떠해야 한다는 특수한 방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였을때 미술의 내러
티브는 종말에 이르렀다고 단토는 보고있다. 옥타비오 파즈도 종말 아닌 종말의 선언을 변호한다.
‘현대미술은 그 부정의 위력을 잃기 시작하고 있다. 지금까지 몇 년 동안은 현대미술에 있어서
거부가 의례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즉 반란이 하나의 절차가 되고 비평은 웅변이 되어버렸으며 이탈은 의식이 되어버렸다.
부정은 더 이상 창조적이지 못하다. 나는 우리가 미술의 종말을 실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현대미술의 개념의 종말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미술의 종말, 그리고 그 해체 증후군을 더욱 가속시키고 있는 것은 정보통신 기술이다.
시간, 공간 모두의 스펙터클을 바꾸고 있는 그것이 종말과 해체 이후인 포스트해체주의, 즉 해체의 ‘후위시대’를 전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0세기 이래 미술사의 거시서사도 해체의 전위→해체 증후군→해체의 후위의 파노라마를 전개하고 있다.
포스트해체주의에서의 ‘포스트’는 곧 ‘후위’이다.
포스트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포스트’는 구조주의나 모더니즘의 연장, 확대, 발전이 아니라 그것의 단절,
마감, 해체를 더욱 강조하려는 경향이 강하므로 반이나 탈의 의미에서의 의미와 통한다.
그러나 포스트해체주의에서 ‘포스트’의 의미는 그렇지 않다.
포스트해체주의 시대에는 인상주의에서 후기 인상주의로의 전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밖으로의 열림이 확장
될 것이다. 앞으로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할 우주적이고 동시편재적인 정보통신 기술에 의해 그것의 열림 에네
르기는 전위의 차단 에네르기보다 훨씬 더 강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해체의 후위시대에는 분산화, 파편화, 스키조화, 열 개화를 지향해온 해체주의가 디지털 기술, 융합기술, 계면 기술
등과 결합하면서 그 시대의 미술과 문화를 가공할 속도로 펼쳐나갈 것이다.
물론 융합이나 계면은 용어의 의미만으로는 해체와 상치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해체의 특성들이 실현되는 시공간을
동시편재적으로 그리고 우주의 무한공간으로 펼쳐나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능한 기술을 모두 동원하여 융합하거나
공유하려 한다. 그것들은 해체를 가로막거나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대로 확장시킬 것이다.
나아가 기술적인 융합과 계면은 우주적 커뮤니케이션 양태로 미술뿐만 아니라 예술과 문화도 통섭하고 포월하며
해체의 후위시대를 초래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래에는 융합과 계면이라는 새로운 에피스테메가 미술에서도
새로운 시간, 공간적 이미지의 가공할 파종 수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시대는 미술에 빠져 있는 시대이며, 예술을 ‘불멸’과 동일시한다”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관장이었던
토머스 하우빙의 말대로 그 불멸의 신화가 계속된다면 미래사회는 미술의 광대역으로 토플러가 기대하는 아름다운
프랙토피아의 실현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2) 탈구축 이후와 미래서사
..미술에서의 서사는 이것들만큼 경험적 사실과 상상적 허구의 경계 구분이 확연치 않다.
미술은 두 경계 가운데 한쪽을 은신처로 이용하는 서사의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의 배제와 삭제를 주장하는
서사의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사실과 허구, 또는 경험과 상상사이를 무가 점령한 공허한 서사도 있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크르의 유희공간이 그러하다. 그는 속물의 근성 속에 함몰된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현대
미술의 운명적 내러티브를 그곳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처럼 미술의 서사 영역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미술의 서사는 사실과 허구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서사의 종말까지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미술이 대상에 대한 감각적 경험을 아름답게 표상하는 이미지 서사라면 미술사는 이미지 서사의 역사다.
미술이 표상하려는 이미지의 서사는 인식소의 변화에 따라 미술의 역사를 달리해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양식사에서의 인상주의의 서사는 광학이론과 빛의 반사이론을 지배적인 인식소로 하기 때문에 그 이전
이나 이후의 서사들과는 구조와 양식을 달리한다.
인식소, 즉 ‘순수 가시성’으로서의 시각 형식이 바뀌면 미술이 표상하려는 이미지의 서사도 달라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지의 인식방법이 달라지면 그에 따른 서사구조와 전개양식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미술은 서사의 변화만큼이나 역사적이다.
미술의 역사가 다름 아닌 서사의 역사일 수 밖에 없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3) 포스트해체주의 시대의 미술
..디지털 기술, 융합기술, 계면 기술등 시공간의 놀라운 확장기술 시대로 진입할수록 우리는 지금과 전혀 다른 생성
을 더욱 야기하며 새로운 존재양태의 내재성을 표현하는 힘들의 관계나 권력의지를 호출해야 한다.
새로운 존재양태의 내재성을 표현하는 힘들의 관계나 권력의지를 호출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물리적 현실과
동시에 공존하게 될 가상현실, 나아가 ‘증강현실’ - 각종 시간 융합이 이루어지는 -에서 미술과 과학기술, 그리고
철학은 생성의 화신으로 잠재태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다시말해 포스트해체주의의 미술은 과거, 현재, 미래의 코드를 포월하며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현실에서 후위시대의
잠재적 사건들을 통섭한 작품들을 창조해낼 것이다.
예를 들어 지각과 시각에 관한 한 정서의 제시자이자 창안자며 창조자인 미술가들에 의해 회화에서 꽃의 역사가
지각, 정서, 감각의 집적으로 구성된 시대마다의 기념비가 되어 왔듯이 후위 시대의 새로운 미술도 꽃들에 대한 참신
한 지각과 정서의 창조를 부단히 실험하면서 그 생성과 창조를 위한 투쟁을 멈추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확장된 표현형으로써 주체, 즉 신인류의 주거지는 더 이상 단선형 아날로그 네트워크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현실에서 가상까지 ‘확장된 현실의 회전도시’에 살고 있다.
피에르 레비도 동시편재적 에이전트들이 인터페이스하는 스펙터클 스페이스, 즉 “가상공간은 일종의 실내건축이고
기호들로 된 지붕을 가진 회전도시”라고 부른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현실에서만 실존하는 세계-내-존재가 아니다.
다층의 세계를 디지털로 통섭하는 ‘세계-간-존재’가 된 것이다.
결론
..그러면 탈구축과 반모더니즘은 20세기의 회화와 미술을 왜 죽음의 축제로 초대한 것일까?
그것들은 어떻게 죽음과 종말을 맞이했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이후의 미술진로를 어떻게 예후할 것인가?
‘탈구축’이란 본래 이탈과 구축의 합성어이다.
즉 구축에 대한 이탈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이탈은 다의적이다.
그것은 거부이자 부정이고 불연속이자 단절이며 해방이자 도주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구축에 대한 해체이다.
그래서 반모더니즘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구축 운동이고 해체주의이다.
모더니즘을 부정하고 거부하며 해방하고 해체하려 하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에서 탈구축과 해체를 위한 엔드게임의 의미도 그와 다르지 않다.
예진→진단→예후의 과정을 통해 살펴본 현대미술의 탈구축적 특성도 모더니즘의 구축 결과에 대한 회의, 거부, 환멸,
실패, 결별, 붕괴 등 반모더니즘적 수사로 나열되다가 결국 종말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부정적 해체를 표현하는 용어
들로 마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에서의 엔드게임이 미술에서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자세히 비교해보면 시기와 동기, 방법과 내용에서 전적으로 같은 개념으로 간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모더니즘과 반모더니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철학과 미술에서의 이들 대립관계는 시기를 소급해 갈수록 그 친연성이 멀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더니즘에 대한 반모더니즘 운둥으로서의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철학과 미술의 영역에서 상호인과적으로, 즉 외재
적 인과작용에 의해 발생하거나 진행되었다기보다 내부적 인과작용에 의해 발생되거나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탈구축과 해체가 철학과 미술 모두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20세기중반을 넘어서면서 ‘모더니즘은 끝났는가, 또는 모더니즘은 실패했는가? 의 문제를
두고 전개된 보수주의 대 신보수주의의 진영 간의 대논쟁이 학문과 예술을 대표하는 두 영역에서도 활발하게 진행
되었기 때문이다.
본래 하버마스와 칼리니코스 같은 마르크스주의자 진영과 다니엘 벨과 푸코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 진영 사이
에서 점화된 모더니즘 논쟁은 그 특성상 철학적 문제로만 끝날 수 없고 과학과 예술, 나아가 문화로 확대될 수 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러므로 탈구축과 해체는 70년대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철학이나 미술, 또는 그 밖의 특정 영역에만 국한된 것일 수
없는 20세기 후반의 문화전반을 아우르는 시대정신이자 에피스테메가 된 것이다.
그러면 20세기 들어 광범위한 시대적 지평융합 속에서 진행된 현대미술에서의 매크로 엔드게임, 즉 탈구축과 해체
놀이를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의 특징을 어떻게 의미규정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말해 회화의 죽음과 미술의 종말을 특징적으로 진단하건대
그 징후들이 회화적이었다면 그 양식들은 발작적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정의나 이해가 저마다 다르고 애매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그만큼 불확정적이고 불가공
약적인 그 징후와 양식들 때문일 것이다. 그것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징후
첫째, 해방적이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적어도 억압의 강도만큼 아니면 그 이상으로 반작용하게 마련이다.
자살충동적 우울증이나 조광증 등 광기의 해방적 발산이 그렇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가 소란스럽고 불안정하며
강렬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에는 그만큼 창발의 기회도 제한 없이 주어진다.
어떠한 획일성에서도 창의와 창조를 기대할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둘째, 지나치게 선언적이다.
철학과 미술에서 종말을 선언하고 그것의 죽음을 외치는 경우들이 그러하다.
구축의 종언과 죽음이 엔드게임의 뚜렷한 징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그 선언적 의미만큼 부정적이다.
추상표현주의를 비롯한 라이크만이 말하는 이른바 ‘부재’의 양식들이 부정신학의 산물로 간주되는 까닭도 그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들뢰즈처럼 죽음과 종말에 동의하지 않는 이도 있다.
그는 추상화를 ‘추상적 기계’가 원래의 형태와 혼합하거나 합성함으로써 다른 형태를 창출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셋째, 경계짓기에 민감하다
역사적이란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의 경계짓기를 의미한다. 반모더니즘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우선적인 징후가
역사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다시말해 그것이 모더니즘과 단절적 구획정리부터 시작한다는 점에 있다.
거기서는 동질화 대신 차별화가 의미의 기준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은 20세기중반 이후 위세를 떨쳐온 해체주의의 배후지원이나 그것과의 야합과도 무관하지 않다.
넷째, 탈권위적이다.
엔드게임은 본래 권위싸움이다. 엔드게임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 모더니즘 적 권위에 대한 도전의 징후가
도처에 깔려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이 개방적인 이유, 무차별적으로 열려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것은 본래 해킹을 제거하려는 엔드게임의 전략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 많은 미술작품들이 유럽의 궁정에서 뉴욕의 지하철로 나온 이상 권위는 무의미한 장애물일 뿐이다.
2) 양식
첫째, 배타적이다.
동질성이 포용적이라면 차별성은 배타적이다. 동질에 대한 배타가 우선이지만 상호배타적이기도 하다.
좁은 의미로 탈구축 양식의 특징을 규정할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양식에 대한 배타성을 의도적으로 강조
한다. 심지어 배타적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장하는 어빙 샌들러도 아방가르드의 종식을 선언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을 ‘부친살해범’이라고 부를 정도로 모더니즘양식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양식들 간에도 배타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둘째, 만화경적이다.
광기의 발작에는 정해진 유형이 있을 수 없다. 단토가 미술의 표현양식에 있어서 20세기 후반을 ‘양식의 발작기’로
규정하는 것도 창의적 잡종화가 만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다원주의도 잡종화의 고상한 표현에 불과하다. 지금까지만으로도 양식의 발작은 만화경을 방불케 할
정도로 다양하다.
양식의 소진이 모더니즘 미술의 종말을 불러왔다면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수명연장이 좀 더 가능해 보인다.
셋째, 지나치게 의도적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모더니즘과 경계짓기의 징후가 뚜렷할수록 그 차별성을 강조하려는 양식들도 두드러진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는 해체주의에서처럼 양식에 있어서 관념적 임계압력에 의한 전방위적 도주와 차별의
의도가 우선적으로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화경적 징후가 그대로 양식화된 것이다.
넷째, 저속하다.
모더니스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리켜 모더니즘의 세속화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탈권위와 저속함이나 세속화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양식에서의 해방과 해체의 대상이 무차별적이기
때문에 고상함이나 고귀함과 저속이나 세속과의 구별조차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유럽의 궁정을 뛰쳐나오는 순간 미술은 이미 자유와 저속을 거래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다섯째, 비형식적이다.
매크로 엔드게임의 성과는 형식파괴일 수 있다. 미술사에서 탈형식주의가 가져온 가장 큰 충격은 ‘이젤로부터의 해방’
즉 2차원 ‘평면으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다.
평면예술의 탈영토화만큼 미술사에서 가장 큰 사건도 드물 것이다. 표현양식상 평면으로부터의 도주는 회화에 있어
서 죽음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자유에 이르는 일종의 엑소더스(대탈주)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도주선도 지금 으로서는 끝이 없어 보인다.
여섯째, 탈 장르적이다.
노마드 시대의 일반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동성이 가져온 리좀적 잡종화에 있다.
직물 구조처럼 전방위로 퍼지는 리좀현상이 그것이다. 20세기 회화의 양식에서도 마찬가지다.
탈평면화는 조각으로의 경계침입이나 영토확장을 서두르게 했다.
특히 도널드 저드의 실험 이래 두드러진다. 또한 회화의 디자인화도 뚜렷하다. 미니멀니즘이나 옵아트가 디자인이나
일러스테레이션에 미친 영향 못지 않게 회화의 정체성에도 의문을 자아내게 했다.
무엇보다도 회화가 물체성의 문제를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사진과의 공모는 적과의 동침을 연상시킬 만큼 회화의 이념적 개방을 가져왔다.
심지어 많은 회화작품이 사진에 의존하여 그려지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예컨대 사진을 남달리 강조하여 러시아 혁명기 동안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 각종 군상들의 사진들로 작업실을 도배
했던 프랜시스 베이컨으 작업과정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일곱째, 의존적, 조작적이다.
현대미술의 탈구축 징후와 양식은 자발적으로 생성되었다기보다 외부의 조건에 의해 조작적으로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20세기 미술작품들은 작가에 의해 탄생되었다기보다 비평가나 갤러리들에 의해 세상에 출현했다.
예컨대 그린버그가 없었다면 폴록을 비롯한 뉴욕파는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상에서 보듯이 징후에서건 양식에서건 엔드게임을 통해 적극적인 탈구축과 해체를 지향해온 현대미술은 전체적
으로 낙천적이면서도 매우 민감하고 신경질적인 강박관념 때문에 별로 따듯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현대미술의 온도는 오히려 차갑고 냉랭하다.
라인하르트나 스텔라의 작품들에서 보이듯 거기에는 미술의 본성에 대한 냉정한 태도와 절제된 야망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처럼 탈구축과 해체의 양식에 따라서 그 마지막 게임은 지나칠 정도로 차갑게 진행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든 변혁이 그렇듯이 ‘0도에의 지향’이 그것의 암묵적 동의일 수 있다.
그 때문에 현대미술의 엔드게임은 인간에게 미술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한다.
나아가 그것은 예술의 본질에 대해서도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한다.
끝으로 해체주의(탈구축)와 반모더니즘이 전개해온 엔드게임 이후가 궁금하다.
탈구축은 어떤 ‘이후’를 예후하게 할까?포스트해체주의 시대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리고 미술은 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리고 미술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디지털 기술,
융합 기술, 계면 기술 등 시공간의 놀라운 확장기술 시대로 진입할수록 우리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의 양태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물리적 현실과 동시에 공존하게 될 가상현실, 나아가 각종 시간 융합이 이루어
지는 증강현실에서 미술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미궁과도 같은 증강현실의 입구는 어디일까?
아리아드네의 실마리가 미술으로 안내하듯이 전방위적 접속만이 무한한 미래, 입구 없는 미래의 입구가 될 것이다.
추측컨대 미래에는 캔버스도 거기에 있고, 갤러리나 옥션의 출입구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미술가와 관람객들 모두가 잠잘때와 휴식할 때를 제외하곤 증강현실인 실제공간과 가상공간의 융합공간 속에서
생활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제와 가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무한지대인 융합공간에서 살아야 할 신유목민인 우리는 머지않아 ‘접속의
미학시대’에 들어설 것이다. 국외자가 아닌 한 미술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작가라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비관적이든 낙관적이든 자기시대와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를 원하지 않는 한
가늠하기 힘든 융합공간을 왕래해야 하는 융합미술 현상속에서 활동해야 할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빠져들어야 했던 단층적 빛의 공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무한한 상상의 다층적 복합공간이
미래의 화가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end -
이광래, 심명숙 지음(미술문화,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