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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미학

새로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 이선영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6.05.29|조회수101 목록 댓글 0



새로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현대미술은 어떤 분야보다도 새로움이 강조된다. 새로움은 거의 훌륭한 예술을 판단하는 기준처럼 작동한다. 

예술계 구성원에게 ‘새롭지 않다’는 평가는 치명적이다. 

실험성, 다양성, 현대성 등 예술이 갖추어야할 필수적인 다른 덕목들도 새로움이라는 단어의 변주에 불과하다. 

새로움의 기준이 늘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술은 무조건 새로워야했으며 새롭지 않으면 단죄되었다. 

새로움은 강박관념이 되었고, 근대미술은 ‘새로움의 전통’이 되었다. 

‘새로움’과 ‘전통’이라는 두 모순적 단어의 합체는 새로움이 급속히 낡아지는 역설을 표현한다. 


그러나 새로움 역시 역사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새로움은 전무후무한 어떤 것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 속에서만 가능하다. 

예술과 새로움이 짝을 이룬 것은 그것들이 근대에 같이 탄생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 전까지 ‘예술’은 조금씩 변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관례에 충실했다. 그래서 예술은 공동체의 소통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새로움의 지배가 생겨난 이후, 소통보다는 충격이 보편화 되었다. 


충격이 없다면 소통도 되지 않았다. 그 충격은 곧 소비되는 충격으로 변했지만, 


‘새로움의 충격’은 예술적 전략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새로움은 어떤 시간적 질서를 암시한다. 그것은 과거를 지나와 한쪽 방향으로 향하는 임박한 미래에 관련된 것이다. 

시간과 역사가 앞, 또는 위를 향한 직선형 진행으로 간주되었던 특정 시기, 또는 사고방식에서 새로움은 각광받는 

제 1의 가치였다. 

그러한 선형적 시간 질서는 태초와 종말을 가지는 특정한 종교적 세계관과 밀접했으며, 근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기술은 이를 또 다른 차원으로 고양시켰고, 예술 또한 그러한 패러다임을 내면화했다. 


그러나 인류 문화사에서 선형적인 역사관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다만 그 역사관을 가진 세력이 먼저 생산력 혁명을 이룩하고, 그 생산력을 유지 확장할 수 있는 시장과 식민 지배를 

통해 권력을 선점하면서 하나의 표준적 과정처럼 보편화되었을 뿐이다. 

고만고만한 ‘발전’ 단계에 머물렀던 근대 이전과 달리, 먼저 치고 나감으로서, 유례없는 선형적 질서가 구축된 때가 

근대이다. 국민국가가 형성된 근대에 이미 ‘선진국’의 지도는 확실해졌다. 



그때 확립된 질서는 너무나 확고하여, 근대 이후에 등장한 다양한 ‘post’ 증후군에도 불구하고, 근대는 일종의 본질 

및 유형처럼 자리 잡았다. 그것은 누구나 따라가야 하거나 극복할 무엇이 되었다. 


유럽은 여타의 다른 지역과 달리, 세계 각지에서 발명되어 장난감처럼 향유하던 기계들을 굴뚝 산업으로 성장시켰다. 

지역적 특수성이라는 우연은 필연이 되었다. 그때 이래 진보와 성장은 종종 혼동 되었다. 

재료와 완성된 상품을 실어 나르는 증기기관차나 증기선은 마치 무한 소실점을 가진 원근법처럼 선형적 질서를 확장

하는 동력을 상징한다. 


속도는 공간을 점령한다. 그 전에는 띄엄띄엄 각자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의지와 상관없이 얽히고설킨다. 

비교할 수 없었던 것이 비교 되고, 경쟁하지 않아도 될 것도 경쟁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얽힘에 의해 보다 쉽게 다양함에 접할 수 있었지만, 다양함은 그자체로 인정되지 않으며, 언제라도 힘의 

위계질서에 복속될 잠재성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질성은 받아들일만한 것으로 두리뭉실하게 순화된다. 그것은 이국적인 것이 되어 색다르게 소비할 만한 상품으로 

품목화 되곤 한다. 

그러나 예술은 다양함을 그자체의 가치로서 인정하고 향유하려 한다는 점에서, 소수자의 입장에 놓여있다. 

차이를 동일성의 질서에 복속시키려 애쓰지 않고, 차이를 차이로서 알아보고 기꺼이 즐기는 것, 그것이 예술의 특징

이다. 

새로움은 다양함보다는 통일된 규약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경쟁력’이 있다. 

과학 기술은 언어의 통일을 통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물론 그러한 통일성은 상대적인 것이지만, 오늘날에도 최종적 통일이론을 꿈꿀 수 있는 분야는 과학이 유일하다. 

포스트모던 이론가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 조건]에서 잘 정리 한 바 있듯이, 인문학에서 메타 서사는 거의 폐기 

처분 되었다. 

성장은 언어가 다름으로서 생겨나는 비효율을 일신하고, 보다 많은 다수가 참여하는 게임이 됨으로서 촉진되었다. 



나를 배제하고 일단 따라야하는 그 공통 문법은 권력의 자동장치로 기능한다. 

그러나 보다 많은 다수가 같은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서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자동적으로 높아지지는 않

는다. 

동질성은 이질성을 위한 바탕이긴 하지만, 여전히 이질성의 생성에 저항적이다. 

과학기술은 다양함을 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고 그 유통을 촉진시키기도 하지만, 보다 큰 시장을 위한 상품이라

는 기본 틀을 여전히 유지한다. 


과학기술은 마치 대중문화가 그러하듯이 대자본이 아니면 활성화될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진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개인적 연구에 바탕 하지 않는다. 

개인으로 고립된 과학자는 극히 예외적이며, 같은 종족보다는 예술가와 훨씬 더 닮았으리라. 


한편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1920년대 유럽 미술계에 불었던 과학기술주의에 대한 파토스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술가는 과학 기술자의 정체성과 하나가 됨으로서 예술의 구습을 돌파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과 예술의 조화로운 동거란 마치 정치와 예술의 관계처럼, 서로의 오해에 근거한 짧은 시기에만 가능하

다는 것은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시대의 첨단에 서 있던 과학기술은 예술이 아니라, 대중문화처럼 많은 자본이 투자되어야하는 거대 사업이다. 

무한 경쟁의 최종 판본은 총력전이기에 과학기술이 집중하는 목표 또한 점차 그 본모습을 드러낸다. 

전쟁은 지금도 국가 권력과 결탁한 군산복합체에게는 대량 생산/소비에 관한 가장 유혹적인 기회로 간주된다. 

큰 이익을 낳는 사업으로서의 과학기술은 무기류 생산 같은 ‘첨단’ 부문에서 힘을 발휘하며, 가끔은 일상에도 낙진처럼 

떨어지곤 한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인터넷이 그 예이다. 

촘촘히 나뉘어진 분업 시스템을 채우면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언제라도 누구와도 교체될 수 있는 ‘자율적’ 

개인이다.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개인은 또다른 시스템에 복속된다. 

막스 베버 이래로 수많은 근대 이론가들이 말한 계몽의 역설이다. 



효율성과 생산력을 검증받은 그러한 방식은 모든 분야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무너진 바벨탑의 후손들에게 과학으로 대변되는 통일 언어란 사실이기 보다는 희망사항에 가깝다. 

마누엘 데란다는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에서 과학적 장을 채우고 있는 이론적 구성요소들의 구조는 공리적

(axiomatic)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과학의 객관적인 내용은 몇 개의 근본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 맞추어져 있는 

수많은 인과적 모델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누엘 데란다에 의하면 적어도 2백년동안 물리학자들의 실제 작업은 통계적 모델들을 사용해서 원자료들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개별적인 진리들이 기계적으로 따르는 일반 진리를 표현하는 공리

라고 해석한다. 

근대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데카르트는 이미 모든 과학의 법칙들이 이 우주에 대한 단 하나의 기본법칙으로부터 끌어

내어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표명했다. 



그러나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은 과학적 지식이 ‘기계들, 도구들, 개념적인 구조들, 숙달된 관행들, 사회적 

행위자들, 그리고 그들의 관계들 등의 다양하고 이질적인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상호적 안정화에 의해 유지되는 것’

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마누엘 데란다는 과학의 비통일성, 이질성, 발산적인 전개를 강조한다. 

과학적 규범도 통일적이지 않다. 그러나 어떤 본질 및 유형학에 근거한 총체성은 어떤 역사적 한 순간을 물화시킴으

로서 그것은 영원한 진리처럼 고착시키려 한다. 

마누엘 데란다는 본질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유형학적(typological) 사유에 특히 비판적이다. 

유형학적 사유는 예술에 있어 재현주의와 밀접하다. 

가령 19세기의 리얼리즘이나 20세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그 이즘의 이름이 지시하는 바와 같은 사실이 아니라, 

전형에 충실할 뿐이다. 

유형학적 사유에서 개체화란 분류들의 창조 및 그러한 분류들에서 성원되기를 위한 형식적 규준의 창조를 통해 획득

된다.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에 의하면, 유형학적 사유는 17, 18세기 유럽에서는 일반적이었는데, 특히 린네의 

식물학적 계통학이 전형적이다. 

이 분류들은 충분히 형성된 개체들 중에서 지각되는 유사성들을 출발점으로 취했다. 

그리고 나서 그 개체들 사이에서 다른 것과 같은 것을 충분히 헤아려 도식화해 비교했다. 

이것은 그것들의 가시적 특징들을 언어적 표상으로 번역하는 것이었으며, 차이들과 동일성들의 표를 만드는 것이다. 

질서 잡힌 표에서의 한자리에 개체들을 정확히 앉힐 수 있었다. 

이렇게 수립된 생물학적 계통학들은 역사적인 우연들이 만들어낸 불연속들에 상관없이 고정되어 있고 연속적인 자연

적 질서를 재구축할 수 있었다. 


푸코 및 들뢰즈와 함께 데란다는 하나의 식(동)물 종은 하나의 본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질을 생산한 과정들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관성적 사고에 쉽게 편승할 수 있는 본질주의적 일반화는 과학에서 문화 일반, 사회 일반 등으로 반복된다. 



그러한 총체화는 현대에 가속화되기 시작한 관료제에 의해 확고해 진다. 

사회의 총체적인 관료화는 예술 또한 예외 지대로 만들지 않는다. 

제도적 장치 속의 예술은 현실 속에서 가까스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예술의 굳건한 알리바이가 되어주기는 하지만, 

때로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나타나며, 세상의 질서가 예외 없음을 알려주는 씁쓸한 예이다. 


제도 속에서 재현의 질서는 강력하게 작동한다. 

현대사회의 강력한 패러다임이 되고 있는 과학자체가 반복가능성, 즉 재현에 근거한다.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과학적 가설의 중요한 기반이 되는 실험은 동일한 조건이 주어지면 동일한 

결과가 반복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반복성은 과학적 지식의 기본인 것이다. 

과학적 발견이 제3자의 손에 의해 그대로 반복 가능하지 않으면 거짓이다. 

대자본의 투자가 필수적이기에, 연구능력 보다는 정치력이 더 필요한 현실의 과학계에서 지적 사기가 빈번한 이유

이다. 



맥루한에 의하면 관찰과 실험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것은 만져서 감각 가능한 실체이며, 반복가능하고 시각적인 것이다. 

제도라는 선형적 질서 속에서 따라야 할 것들이 개인에 앞서 강고히 존재한다. 

순순히 따라가는 동안 길들여지는 것이다. 


효율성과 자유는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엇나간다. 

분할 불가능한 예술의 정체성은 이리저리 재단되어 재현하기 용이하게 변하며, 그것이 재현주의를 극복하고 진정한 

생성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기적이 거듭해서 일어나야할 지경이 된다. 

사회의 상징적 질서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주체는 주체에게 일어나는 사건들로 해체되어야 한다. 


‘재현이 아닌 생성’, ‘주체가 아닌 사건’(들뢰즈)이 현대철학의 중요한 주제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학이나 정치, 종교 등 다른 분야로부터의 자율성을 중시했던 근대미술은 유독 새로움의 총아였던 과학기술의 도입

에는 관대했고, 과학자들 또한 종교인이나 예술가에 특유했던 예언자나 선지자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등장하곤 한다.

 


사진이나 영화가 근대에 탄생한 이래, 자동차나 컴퓨터 같은 새로운 상품이 출시되는 행사들은 미술 전시 못지않은 

볼거리와 이벤트들로 가득 차 있다. 

지금도 새로움의 이미지는 업그레이드 된 기계의 번쩍거림과 밀접하며, 미술을 대신하여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스펙터클, 

요컨대 일상에 두루 펼쳐져 있는 크고 작은 인터페이스에는 새로운 기계 장치를 탑재한 가상현실의 영웅들이 총체적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원하기 위해 애쓴다. 

새로움은 기계적 ‘일상성이 지배하는 현대성’(앙리 르페브르)에서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생활의 권태를 잠시나마 견디

게 해줄 수 있는 가치로 부상했다. 

동시에 새롭지 못한 것들, 새로움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하는 굼뜬 방식들은 가혹한 도태를 준비해야 했다. 

새로움은 시험으로 친다면 가혹한 상대평가 이다. 

1등 빼고 나머지를  ‘잉여’로 간주 하는 1등주의가 번성하는 것도 새로움의 지배아래서이다. 



소수자의 언어인 예술은 다수의 경쟁을 전제하는 1등주의와는 거리가 있지만, 지배질서를 재현하는 예술계라는 

소우주 속에서 반향 된다. 

그러나 한 개인이 가지는 역량은 무한하지 않다. 예술가라고 예외는 아니다. 

지배적 질서를 따라가는 동안 소진된 것들은 애초에 생성을 위해 비축해야 하는 잠재성의 몫이다. 

새로움, 보다 정확히는 ‘적당한’ 새로움은 상품, 즉 좀 더 많은 이익을 위한 자본의 요구, 그리고 이 요구에 대한 여러 

상부구조들의 반응이다. 

새로움이 바탕 하는 직선적 역사관은 과거를 원인으로 현재를 과도기로 미래를 결과로 간주하며, 역사라는 축에 모든 

것을 배열하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합리화한다. 

그러나 합리화란 도구적 이성의 필요에 부합하고 순응하는 순차적 과정일 뿐이다. 

그러한 시간관은 공간화 되어, 새로움이란 지구의 모든 구성원들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과정을 먼저 거친 ‘선진’을 

향한 선망과 추종으로 나타난다. 



저곳에 이미 도래할 미래가 있으며, 또 다른 곳에 이미 지나온 과거가 있다. 

계층화된 시공간 속에서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타임캡슐 시승자들은 기득권을 챙긴다. 

그 때이기도 한 그 곳에 다녀와 ‘새로움’이라는 선물을 풀어놓으면 된다. 

새로움이 그러한 기계적 인과관계 속에 놓인 촉진제나 징후라면, 예술 또한 속도전처럼 단순해진다. 

그러나 세계는 점차 평탄해지고 속도의 차이 또한 줄어들어 거의 동시적이 되었다. 

물론 작은 차이를 큰 차이로 만들려는 권력에의 의지는 여전하며, 더욱 강고해지기도 한다. 

‘진보’로 대변되는 근대적 시간-역사관이 세계 시장화로 귀결되어 그 경악스러운 결과를 펼치고 있는 시대에, 새로움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은 예술을 위한 예술처럼 낡았다. 또는 어제 신문처럼 시시하다. 

순간적인 기분전환을 야기하지만, 보다 지속적인 억압을 낳곤 하는 새로움은 이제 그 기호를 허수아비처럼 걸치고 

있던 예술 스스로가 갱신해야 할 것이다. 




이선영(미술평론가)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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