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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미학

거리두기와 미학 - 데리다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7.08.24|조회수387 목록 댓글 0

거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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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이론의 선구자인 자크 데리다는 "크라마톨로지","말과 현상" ,"글쓰기와 차이" 3개의 책을 발표하여 1967 기존의

현상학과 구조주의 ,소쉬르의 언어학,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했다

모더니즘에서 중요시했던 시각 중심주의 ,로고스.언어의 음성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언어를 실체없는 은유이고 언제나 대체 가능한 비결정태로 보았다.

기표는 하나의 기의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말해도 우리는 다른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

모든 언어는 은유라고 말했던 니체와 같이 모든 사물은 자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표상이며 우리는 자의식에 의해 각각의 해석만 있을 뿐 물리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

이러한 언어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데리다는 대립 관계에 있어서 서로 대체 가능한 선에 두어 대립 관계를 무효화

시키는 "전치"란 개념을 말한다.

 

그는 근원적 글쓰기를 통해 space,trace-공간두기,거리두기 를 이런 말로 설명한다

 

"그녀를 보지 못할때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목소리의 흔적, 무덤같은 문자로 표현되는 공간두기는 대상이 부재할 때 오히려 있다는 것이고 이는 헤겔이 말하는 현전의 조건인 "지금,여기"와는 차이가 있다

이로서 이분법을 흐리는 차연(differance)적 개념혁명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

 <parergon>이론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파레르곤

 

파레르곤은 본래 칸트의 개념이다.

데리다는 그의 <회화의 진리(The Truth of Painting)>‘Parergon'이라는 장에서 칸트의 판단력 비판(Critique of

Judgement)의 논의를 펼친다.

여기에 그의 파레르곤 개념을 볼 수 있다.

 

작품(예술작품)의 프레임은 작품과 그것에 외부적인 것 사이의 구분을 표기하고 혹은 그 효과를 가져오게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갖는 그 작품에 대한 이해나 반응 안에서, 이러한 경계나 구분이란 비가시적으로 되는 것이다.

데리다는

 

“There is always a form on the ground, but the parergon is a form which has as its traditional determination

not that it stands out but that it disappears, buries itself, effaces itself, melts away at the moment it deploys

its greatest energy.”(Derrida, 1987, p.61)

 

데리다의 파레르곤(the parergon), 즉 프레임(the frame)의 개념은 차연(différance)’의 개념을 구체화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작품의 '프레임'공간두기(spacing)'와 직결되는 것인데, 이는 대상과 벽, 미술작품과 맥락 등의 용어들를 생산하고

또 분리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이항대립과 그러한 용어의 위계를 염두에 두고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상은 용어(개념)의 각각의 지성(intelligibility)은 오로지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잡아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면, 어떤 용어나 개념의 지성의 조건은 그것과 차이가 나는 것, 그것이 아닌 것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렇듯, 개념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지식으로 취하건, 지식으로 남겨두던 간에, 그것이 아닌 것(what-it-is-not ), 혹은 그것과 다른 것(the what-it-is -different-from )은 의존적인 지식이 아니라, 개념과의 관계에서 그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 개념에 대해 외부적이라고, 혹은 구별된다고 여긴 감각은 실은, 결코 외부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분류(differentiation)의 체계가 우리 사고의 논리적 조건이라면, 그렇다면 내부성(internality)'외부성(externality)' 사이의 구분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데리다가 논의하듯, 만약, 이러한 용어의 각각의 지성이 그것이 갖고 있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존돼 있다면, 각각은 상호적으로 타자의 의미를 산출하고 규명할 것이다.

 

보통 예술에 대하여 말할 때, ‘예술작품과 그 외부적인 것(extrinsic to it) 사이의 일반적인 구분이 근본적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실행(실천)을 구조짓는 것이다.

, 우리는 예술작품을 생각할 때, ‘작품 그 자체라고 상정한다.

그에 외부적인 것은 이를 테면, 다양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들, 이론들, 비평적 토론 등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리고는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재료를 가져와 작용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식의 기본 가정을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예술을 생각하는 데 문제(!)라고 데리다는 지적하는 것

이다.

말하자면, 미술에 대해 이론화시키는 것은 이제가지 작품의 내부성(interiority: 해석학자, 기호학자 등의 탐구)'

대한 것이나, 혹은 외부성(exteriority: 외부적인 것에 대한 모든 경험주의적 접근) 중에서 둘 중의 하나만 집중해 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데리다의 생각이 주는 함의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작품 그 자체라는 것, , 우리가 특정하게 그렇다고 여기는 작품, 우리가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고 이해하는가 하는

그것의 내부성에 대한 시각은 우리가 외부적이라고 여기는 것에 의해 형성되고 채워질 것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예술 오브제들이 물리적, 신체적인 오브제들이었기에, 그것은 예술대상을 하나의 물리적(신체적) 오브제로서 인식하는 게 필요한 조건들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하나의 물리적 오브제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은, 어떤 조건들이 취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해와 경험, 이론, 비평, 역사적 맥락 등은 그 오브제에 외부적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인식은 데리가가 예술작품이나 오브제로서의 무언가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때에 정확히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데리다가 제시하는 Parergon 개념은 사고의 분류체계, 인식의 구분에 관한 도전적 논의이다.

내부성과 외부성 사이의 분류에 대한 회의이자 해체적 도전이다.

그는 내부성과 외부성 사이의 관계의 논리(logic)을 노출시키므로서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의 작용 아래 깔린

조건과 방식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데리다의 파레르곤 설명은 이 개념은 우리의 사고과정, 개념의 인식 과정이 뚜렷한 경계와 구분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 사고구조의 안과 밖, 개념형성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라는 것이 이분법적이지 않다는 것을

피력한다.

 

'파레르곤(parergon)'은 미술작품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프레임에 관한 개념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파레르곤은 이렇듯 프레임 혹은 작품 바깥의 부록을 뜻하며,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닌 어떤 것

이다.

이는 에멀링(Jae Emerling)이 말한 대로, "미술작품의 결정하는 한계(the determining limit of the work of art)”

설명할 수 있다.

프레임은 장벽(barrier)가 아니라 일종의 '경첩(hinge)'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품에 외부적인 모든 것과의 관련을 끊으면서도 작품에 연계돼 있는 것이다.

이는 외부를 창조하면서 동시에 내부를 포함하고 규정하는 개념이다.

그리스어인 파레르곤은 따르기 마련인 부차적인 것을 뜻한다.

미술작품의 프레임은 그 작품을 그것의 외부적인 것으로부터 분리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프레임은 이 내부와 외부 사이의 담론(a discourse between this interior and its exterior)

유지한다.

파레르곤은 본문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관한 것도 아닌, 일종의 덧붙여진 담론이자 그것의 필요

성과 중갑감에 대한 언급을 동반하는 개념이다.

칸트의 저술에서 프레임은 미술작품이 보여지는 공간이고, 휘장(drapery) 등 부수적 장식이 파레르곤을 구성한다.

데리다는 우리가 이렇듯 부과된 한계나 경계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밝힌다.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바레리오 아다미의 <물에 빠진 여자>(1975)<벤야민의 초상>

(1973), 그리고 제라르 타튀스-카르멜의 <포켓판 틀링깃 관>(1975)이다.

이 두 화가의 그림이 형상화한 것은 이제껏 한 폭의 회화, 즉 작품으로서의 에르곤(ergon)을 형성하는 바깥, 즉 파레

르곤(paregon)으로 규정돼 온 화가의 서명, 액자의 틀, 그림 해설, 제작 연도, 제목 같은 담론적, 부차적 요소들이

화폭 내부에 담긴 작업 내용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문자와 그림 간의 이분법이 해체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데리다의 개념은 연구의 대상(object)을 규정하려는 미학의 본래 시도를 혼란에 빠뜨린다.

왜냐하면 명백하게 규명된 대상 없이, “미학의 과학은 그 미학적 경험, 미적인 판단 혹은 그 진리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학문의 경계 혹은 담론의 구분이라는 점에서 파레르곤을 확장해 생각할 수 있다.

데리다에게 이 프레임은 일반화된 텍스트(generalized text)"의 이론을 제시하는 데에서 사료된다.

결국 미학에만 특정한 연구의 대상은 없기 때문이다.

미술사와 철학의 담론 사이의 경계를 규정 혹은 규제하는 프레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데리다의 파레르곤의 개념도 그가 현전의 논리(the logic of presence)를 해체하려는 전반적인 그의 철학적 의도

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데라다가 언급했듯, 어떤 것이 파레르곤이 되는 까닭은 단지 잉여로서의 외재성때문이 아니라 그 외재적 보충물을 작품의 내부에 존재하는 결핍에 못 박아두는 내부의 구조적 연계성때문이기에, 이 이중의 결핍은 역설적으로

작품의 통일성 그 자체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파레르곤의 역설적 논리는 이것이 한 작품의 존재 가능성이자 동시에 궁극적인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결핍의 기표인

셈이다.

다른 말로, 파레르곤은 작품이 걸린 벽과 대비되어서는 작품의 일부(개별 텍스트)로 여겨지고, 작품과 대비되서는

벽을 포함하는 배경(텍스트일반)으로 간주되는 존재인 것이다.

어느 한쪽에도 포함되지 않으면서 어느 한쪽으로부터 배제되지도 않는 이러한 파레르곤의 이중적 지위는 사물의

외부와 내부를 확연히 구분하는 칸트로 대표되는 전통적 미적 개념 일반을 위협한다

 

나가기

 

데리다의 철학은 결정불가능하다는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

이러한 시각으로 보면 영화 "매트릭스"가 데리다적인 분석으로 읽혀질 수 있다.

지각가능한 세계이자 현전하는 세계에 대한 회의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지각하는 대로 믿는 주인공 네오의 세계는 현실과 매트릭스와의 경계가 모호해 지면서 가상의 세계에서의

일들이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이 지점에서 다시 크리스토퍼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을 떠올릴 수 있다 .

돌리던 팽이 는 언젠가 멈추겠지만 우리들의 뇌는 계속 돌아 갈 것이라고 지각하는 대로 믿는다 .

그래서 영화는 열린 결말로 각자의 해석에 맡겨둔다





데리다의 미학 

1.
해체의 철학으로 널리 알려진 자크 데리다의 미술론을 어떻게 해야 정리할 수 있을까. 
데리다의 해체 개념이 본디 철학의 영역에서 '결정 불가능한 것들'을 활성화하는 작업인 까닭에, 혹은 미술론을 독립적인 
영역으로 다루기가 애초부터 어렵기 때문에 정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데리다는 회화에 관한 사유를 담은 <회화의 진리>의 서두에서 해체를 분석의 도구로 활용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해체는 담론이나 의미를 형성하는 표상들뿐만 아니라 단단한 구조들과 '물질적' 제도들도 교란시키기 때문에 분석 혹은 
'비판'과 항시 다르다"고 주장한다. 
미술에 관한 논의가 예술철학 담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사 및 제도로서의 회화 일반의 문제들과도 불가분 연관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미술에 관련된 데리다의 해체 작업은 철학적 해체와 동일하게 두 차원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이중 과제이다. 
예술철학 및 미술을 포함하는 철학적 예술론의 해체와 서양 미술의 역사를 떠받치고 있는 물질적-제도적 차원에 대한 
해체를 한꺼번에 수행하려는 것이다.

범박하게 말해 자연과 인공의 이분법에 기초를 두고 예술의 "유일하고 투명한 의미"를 따져온 담론들의 기원에 "예술
작품들의 존재"를 중심에 두는 철학적 전제가 있었음을 비판한다. 
또, 데리다는 예술철학이 예술을 이러한 "유일하고 투명한 의미"의 역사로 간주해왔기 때문에 예술사 및 예술의 역사성에 
대한 특정한 관념들은 주장되기 어려웠다고 본다. 
바꿔 말하면, 미술을 포함한 이제까지의 예술은 개별 역사를 갖지 못한 채 철학이 제공하는 보편사의 관점에서 작품 안과 
밖의 의미가 확연히 분리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져왔다. 
그 결과, 철학자들은 예술이란 무엇이며 예술작품의 기원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의 "존재물음의 구조"를 해체함이 
없이, 미술을 포함한 전체 예술의 영역을 담론적 진리, 즉 음성과 로고스에 종속시켜왔다. 
"원의 형상"을 통해 예술작품의 '안과 밖'을 확연히 분리해 작품의 의미를 내재적인 것으로 보는 헤겔과 하이데거뿐만 
아니라 미적 판단과 작품의 내적 목적성 간의 유기적 관계를 전제하는 칸트의 미학이 모두 데리다의 비판을 받은 건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술론에 전제된 서양 철학의 로고스 및 진리를 해체하려는 데리다는 왜 하필 미술을 다룬 자신의 저서에 "회화의 진리"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회화에서의 진리는 과연 가능한가?

데리다는 <회화의 진리>의 서두에서 세잔이 베르나르에게 보낸 1905년 10월 23일자 편지에서 따온 문구, "당신에게 회화의 진리를 빚지고 있는데 그게 뭔지 말해보겠소"를 인용한다. 
세잔의 서명이 붙은 이 발언에서 회화의 진리와 관련해 데리다가 읽어내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진리를 증여에 의한 빚으로 간주한다는 사실, 다른 하나는 진리가 글의 형태로 약속된다는 것.

데리다에 따르면, 세잔의 이 발언은 단지 일종의 언어적 약속으로서 사실상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지만, 회화의 진리가 
그림 그 자체가 아닌 그림에 관한 진술로 주어진다는 관념을 드러낸다. 
데리다는 그림에 관한 진술로서의 진리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회화의 진리에 관한 담론적 진술이 적어도 네 가지 차원
에서 의미의 잔여 혹은 계기를 환기한다고 본다.


1. 회화에서 진리는 그 자체로 아무런 매개 없이 투명하게 현현하는 것으로서 진리 중의 진리, 혹은 진리에 관한 진리를

뜻할 수 있다.
2. 회화에서 진리는 대상의 진리를 정확하게 담론적으로 재현하는 행위를 가리킬 수 있다.
3. 현현과 재현을 막론하고 담론이 아니라 그림의 형태로만 화폭에 한 줄 한 줄 재현 가능한 회화적 진리를 지칭할 수 있다.
4. 회화에서 진리는 담론적 혹은 회화적 진리의 재현과 달리 회화에 관한 진리, 즉 회화의 진리성에 대한 관념일 수 있다.


그런데 이렇듯 착종되고 중첩된 진리 관념들 간의 모순 내지는 그것들 모두가 드러내는 심연에도 불구하고 회화의 진리

라는 문구가 모종의 진리를 담고 있다면, 그것은 회화에 있어서는 '진리'가, 진리에 있어서는 이 '심연'이 여전히 핵심적인 

문제라는 사실일 것이다. 

데리다는 과연 세잔이 "약속을, 정말로 약속을, 말하겠다는 약속을, 진리를 말하겠다는 약속을, 그림에서 그림의 진리를 

말하겠다는 약속"을 했는지 묻는다. 

화가 세잔은 그림의 진리를 그림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의 진술로 전달하려는 불가능한 약속을 실행하려 한다. 

이렇게 '회화의 진리' 및 '회화적 진리에 관한 진술'의 결정 불가능성에 깊이 뿌리받고 있으면서도 회화에 있어서 진리의 

문제가 여전히 관건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기에, 데리다는 진리에 관한 물음 자체를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하는 허다한 

탈근대 이론가들과 분명 다르다. 

데리다의 관심은 회화의 진리가 과연 무엇이냐를 묻고 그에 대한 유일하고 투명한 해답을 찾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이 일이 가능하다면, 과연 어떤 조건들에 의거해서 우리가─진리에 관한─이 모든 문제틀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예술철학의 유산, 특히 칸트와 헤겔의,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하이데거의 유산을 넘어서고 무너뜨리며 대체할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정신은 <회화의 진리>를 구성하는 원리에서도 확인된다. 

데리다는 결정 불가능한 회화의 진리를 논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네 가지 개념적 분석틀을 도입한다. 


첫째, 작품(ergon)도 아니고 작품의 바깥(hors-d'oeuvre)도 아닌 것으로서, 이 둘을 나누는 구분법을 해체하지만 동시에
작품을 가능케 만드는 어떤 분명한 존재를 가리키는 파레르곤의 문제를 다룬다. 


둘째, 발레리오 아다미의 그림에 나타나는 문자와 서명, 그림에 대한 서술의 문제를 중심으로 음성적-문자적 특징과 도상적 특징 간의 차이를 분석한다. 


셋째, 티튀스-카르멜이 그린 127개의 성냥갑 모양을 한 관 그림 연작을 거론하면서 그림에 화가의 서명을 활자의 틀로 

만들어 넣는 행위와, 그림을 통해 진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를 관련시킨다. 

특히, 이집트 왕들의 이름이 상형문자로 새겨진 타원형의 반지, 건물 끝에서 말려 올라가는 양각 양식, 그리고 탄약상자를 두루 뜻하는 카르투슈(cartouches) 개념을 주체가 없는 애도의 방식 및 작품과 파레르곤 간의 대리보충에 대한 상징

으로 활용한다. 


넷째, 반 고흐의 구두 그림을 놓고 벌어진 하이데거와 샤피로의 논쟁을 예로 들어 진리를 귀속(restitution)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를 비판한다.

회화의 진리를 묻는 데리다에게 이 네 가지 분석틀은 그림의 프레임(passe-partout) 2 작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요컨대 데리다에게 회화의 진리란, 한 폭의 그림을 그림으로 가능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 그림이 "유일하게 투명한 

진리"의 현현이나 재현이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다층적인 구조 효과들과 연관되어 있다. 

데리다가 미술론의 중심에 파레르곤 개념과 프레임의 문제를 놓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
데리다에 따르면, 본디 "작품 바깥의 부록"을 뜻하는 파레르곤 개념은 칸트에 의해 "형식 차원의 일반적인 서술적 구조의 

하나"를 가리키는 의미로 확장된다. 

칸트가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의 각 장에 붙인 '총론'이 담론으로서 갖는 지위와 관련해 이 개념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건대, 파레르곤은 본문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관한 것도 아닌, 일종의 덧붙여진 담론이자 그것의 

필요성과 중압감에 대한 언급을 동시에 가리킨다.

파레르곤은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는 책에서] 본문의 바깥에 첨가된 어떤 것이지만, 그 초월적인 외재성을 통해 한계 자체를 작동하게 만들고 한계를 인접하여 마찰을 일으키며 접촉하고 압박하면서, [본문의] 내부에 어떤 것이 결핍

되어 있는 한에서만 그 내부에 개입하는 그 무엇을 기록한다.

그것은 어떤 것 내부의 결핍이자 자신으로부터의 결핍이다. '자신의 도덕적 필요를 스스로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을 의식하기 때문에' 이성은 파레르곤과 은총과 신비와 기적에 의탁하게 된다. 보충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첨가된 이것은 명백히 위협적이다.

우리가 하나의 작품 내지는 담론으로 간주하는 '본문'이 그렇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은 작품의 고유 영역 외부에 추가된 해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게 파레르곤의 원리라면, 이는 필연적으로 작품 및 담론 내부의 구조적인 결핍을 지칭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이 파레르곤 역시 그 자체로는 고유 영역을 형성할 수 없고 본문에 의존하는 파편(fragment)에 불과하기에 

이중의 결핍을 나타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문에 파레르곤이 덧붙여졌다고 해서 작품 고유 영역이 본래의 의미를 완성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 자체로 결핍을 나타내는 파레르곤은 고유 영역의 구조적인 결핍을 끊임없이 지칭하기 대문에 작품의 경계에 존재하는 

위협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데리다가 언급하듯, 어떤 것이 파레르곤이 되는 까닭은 단지 "잉여로서의 외재성" 때문이 아니라 그 외재적 보충물을 

"작품의 내부에 존재하는 결핍에 못 박아두는 내부의 구조적 연계성" 때문이기에, 이 이중의 결핍은 역설적으로 "작품의 

통일성 그 자체를 형성"한다.

 파레르곤의 역설적 논리는 한 작품의 가능성이자 동시에 궁극적인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결핍의 기호인 셈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칸트의 미적 판단 개념이 등장하는 <판단력 비판>을 다루면서 파레르곤의 작용과 관련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회화의 경우, 작품에 외접하는 파레르곤은 작품의 고유 영역과 분리될 뿐만 아니라 작품이 걸린 벽, 즉 작품의 외적 환경과도 구분된다. 파레르곤은 작품이 걸린 벽과 대비되어서는 작품의 일부로, 작품과 대비되어서는 벽을 포함하는 배경으로 

간주되는 존재인 것이다. 

어느 한쪽에도 포함되지 않으면서 어느 한쪽으로부터 배제되지도 않는 이러한 파레르곤의 이중적 지위는 사물의 외부와 

내부를 확연히 구분하고, "내적인 형식의 미"를 반성의 대상으로 삼는 칸트의 미적 판단 개념 전체를 위협한다. 

칸트에게 파레르곤이 의미하는 작품의 프레임은 필수 불가결한 동시에 성가신 존재가 된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 <순수 이성 비판>의 논리 구조를 도입해 이 난제를 해결한다. 그 결과, "하나의 대상이 지식의 

대상으로서 맺는 관계와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미적 판단의] 구조, 즉 그 비논리적인 구조에 강제되기 위해 

논리적 프레임이 이식된다."

형식적-논리적 프레임의 부과로 인해 칸트의 미적 판단에 관한 분석에는 일종의 '폭력'이 벌어지며, 이로 인해 "감각론은 

미론에, 미론은 취미 이론에, 취미 이론은 판단론에 종속" 되버린다. 

칸트의 미학이 전제하는 프레임, 혹은 파레르곤의 논리에서 데리다가 발견하는 것은 "파레르곤으로서의 프레임을 결정

하는 분석론이 그 프레임을 형성하는 동시에 파괴하며, 지탱하는 동시에 붕괴"시키는 모순이다. 

칸트의 미적 판단을 지배하는 개념인 "목적 없는 합목적성(Zweckmäβigkeitohne Zweck)"과 이를 상징하는 들판에 핀 

야생 튤립의 사례는 바로 이러한 프레임의 모순을 이론화한 것에 불과하다. 데리다에 따르면, 목적 없이는 미가 불가능

하지만 그 목적이 결정력을 행사하는 한 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역설이 칸트 미학의 핵심에 자리한다. 

그렇다면 야생 튤립 같은 자연물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목적 없는 합목적성" 개념이 인간의 손에 의해 제작된 예술품, 

특히 회화의 경우에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회화에서 목적을 제거한다면 과연 무엇이 남는가.


3.
작품의 고유 영역에 내재된 것으로 간주되는 목적을 그 작품에서 제거하고 남는 것이 프레임, 곧 칸트적 의미의 파레르곤이 궁극적으로 뜻하는 바라면,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작품의 미를 판단하는 궁극적 기준이 아니라 작품의 프레임 

작용, 곧 파레르곤의 본질 규정이 되어버린다. 

어떤 대상을 재현하기보다 그저 나뭇잎 문양을 촘촘하게 배열한 벽지 그림처럼, 작품 혹은 작품의 의미로부터 "부정성도 

없이 완전히 잘려진" 프레임의 반복이 칸트가 의미하는 또 다른 파레르곤 개념이라면, 이는 완전히 절단 가능한 의미 

없는 프레임을 그린 작품이 나뭇잎이라는 대상을 재현한 작품보다 더 미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역설을 성립시킨다.

이러한 프레임으로서의 파레르곤은 목적성 자체를 파괴해 "부정적 쾌락"을 불러일으키는 숭고(sublime) 개념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어떤 대상의 숭고함을 결정하는 데 작용하는 칸트 특유의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파레르곤의 논리와 관련시켜 볼 때, 우선 칸트의 숭고 개념은 미 개념에 부착된 파레르곤의 일종이지만 역설적으로 칸트의 미적 판단 전체를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 자체로 한계가 없고 한정되지 않는 무한한 대상에 대한 판단인 숭고는 본질상 파레르곤을 이용해 프레임에 

담는 것이 불가능하며, 데리다 역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데리다에 의하면 칸트는 숭고의 무한성이 그의 미학 전체를 

궁지에 빠뜨리는 일을 막기 위해, 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순수이성 분석의 프레임을 이식한다. 

그러나 순수이성의 논리적 프레임으로는 재현의 불가능성과 대상 재현의 부적합성만을 재현할 수 있을 뿐이다. 

고야의 그림으로 추정되어온 <거인>이 예시하듯, 칸트는 숭고의 무한성 대신 "거대함(kolossos)에서 기원하는 인간 

정신"을 재현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숭고의 '근본 척도'로 내세운다. 

데리다가 지적하듯, 거대함을 사유하기 위해 "스스로를 척도로 세우는 것은 바로 몸이다."

데리다에게는 이 거대한 인간 정신과 근본 척도로서의 인간의 몸이라는 이성적 프레임이야말로 예술의 진리를 로고스적인 이성의 진리에 복속시키는 칸트의 휴머니즘을 상기시키며, 경계에 작용하는 파레르곤의 역설을 다시 한 번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그 자체로는 거의 현현 불가능하고 어떤 것과도 비교측정도 거부하는 존재의 재현 불가능성을 지정하는 기표로서의 파레

르곤, 데리다가 칸트의 숭고론에서 읽어내는 것은 바로 결핍의 기표로서의 파레르곤이 작품을 근간으로 하는 예술철학 

내부의 구조적인 결핍과 폭력의 자화상, 즉 거대함 속에 존재하는 "괴물적인 것(das ungeheure)"의 형상을 통해 논리적 

분석 도구로 포섭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데리다에게 칸트의 숭고는 단지 재현의 한계에 대한 사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회화를 포함한 모든 

예술이 쉽사리 받아들이거나 부정할 수 없는 '파레르곤의 논리'의 근본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파레르곤은 서양 예술철학이 기반을 두고 있는 작품의 죽음이자 주체의 죽음을 나타내며, 튤립이라는 

자연물을 그리든 인간의 몸을 그리든 간에 회화에 담긴 진리 역시 그러한 인간적인 것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회화는 마침내 조종이자 죽음의 기록이 된다.


4.
파레르곤의 작용을 통해 회화가 진리의 죽음이나 부재의 기록일 수 있다는 데리다의 생각은 아다미와 티튀스-카르멜의 

회화를 다루는 부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데리다는 헤겔적 진리관을 해체한 자신의 책 <조종>에 담긴 개념들을 회화로 표현한 아다미의 그림들을 의도적으로 

<회화의 진리>라는 책에 덧붙여진 부록인 양 취급하고, 티튀스-카르멜의 성냥갑 모양의 관 그림 연작에는 카르투슈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한마디로 말해, 데리다는 두 화가의 그림이 실재하는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는 몸"의 부재 혹은 결핍을 기록한다고 주장하는 쪽에 가깝다. 칸트에서 미와 숭고를 판단하는 근본 척도였던 인간의 몸이 사라지는 것이다. 

아다미의 그림에서 인간의 몸을 대체하여 부재의 기록, 결핍의 기표 역할을 하는 것은 손으로 쓰인 글자들이고, 티튀스

-카르멜의 그림에서는 시체를 담는 용도를 상실한 텅 빈 관의 형상들이다. 두 화가의 그림이 형상화하는 것은 이제껏 한 

폭의 회화─작품으로서의 에르곤─를 형성하는 바깥, 즉 파레르곤으로 규정되어온 화가의 서명, 액자의 틀, 그림 해설, 

제작 연도, 제목 같은 담론적-부차적 요소들이 화폭 내부에 담긴 독립된 작품이 됨으로써, 문자와 그림 간의 이분법이 

해체되는 과정이다. 

특히 아다미가 데리다의 책 <조종>에 나오는 문구나 벤야민의 캐리커처 또는 콰트로 마니의 피아노 콘서트를 형상화한 

그림은 화폭 안에 펜으로 그려진 선 및 형상 들과 글자 간의 충돌을 묘사한다. 동시에 같은 형상을 데칼코마니처럼 하나의 짝으로 만들어 의도적으로 거울에 비친 듯 겹쳐놓음으로써, 그림의 안팎을 구분하려는 관람자의 시선은 혼란에 

빠진다.

이렇게 회화의 부착물로 여겨진 파레르곤들이 돌출하여 전경에 등장하는 아다미의 그림에서 데리다가 주목하는 것은 

극중 극,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림 속의 그림을 의미하는 소위 미장아빔(mise en abime) 효과에서 산출되는 주체의 

소멸이다.

"<조종>을 따른 소묘 공부"라는 부제가 붙은 <Noyée>를 두고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조종>에서 분리되어 나온 이 인용구는 일종의 상승작용, 즉 무한성에 대한 사유를 능가하는 과정을 미리 보여준다.

누가 서명하는가? 누가 읽는가? 타자를 바라보고 묘사한느 것은 누구인가? (중략) 아다미에게는 늘 그렇듯이발화중지된

것, 연결이 파괴된 것, 탈구된 것은 전시되는 바로 그 순간에 고정된 채 배경으로 물러난다.

떨어져나온 것이 이제 작품을 형성하는 것이다.

아다미는 그림의 화폭 안에 원래의 작품─<조정>이라는 책─에서 떨어져나온 문자들을 담은 액자, 즉 프레임을 선으로 묘사하여 들어앉힘으로써 작품의 고유 영역과 분리된 파레르곤들을 또 다른 작품으로, 또 하나의 고유 영역으로 그려낸다. 

즉 소묘의 대상인 책의 구절과 데리다의 서명이 물고기와 물에 빠진 여자의 형상과 함께 인용되며, 상하좌우로 그림을 

나누는 프레임이 마치 책을 펼친 것처럼 그림의 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소묘 자체가 <조종>이라는 책의 파레르곤이면서 동시에 책에서 "떨어져나온 것"이 하나의 작품이 된다.


<Benjamin Thinking> 역시 상하좌우로 불연속적인 선들이 대상을 분할하며 최소한의 윤곽만으로 철학자의 지적 초상을 

묘사한다. 이렇듯 아다미에 의해 문자와 그림, 에르곤과 파레르곤의 이분법은 해체되어, 문자로서의 책과 그림, 인물로서의 벤야민과 그림은 둘 중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의 진리를 표상하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거울에 비추는 시뮬라크르로 

변한다. 이들 그림은 문자와 인물을 인유하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다미의 그림들은, 아니 회화 자체는 데리다가 진리에 관하여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차원의 잔여들 모두를 해체

하는 과정을 묘사하게 되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회화의 진리란 바로 이러한 시뮬라크르의 영역에 거주하면서 서구 형이상학의 진리관을 해체하는 기표로 

존재한다.



티튀스-카르멜의 관 그림 연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127개의 틀링깃 부족의 관을 연작으로 그린 티튀스-카르멜의 '포켓판 틀링깃 관 시리즈(The Pocket Size Tlingit Coffin)'는 어떤 원본, 혹은 모델이 되는 작품의 변주나 반복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모델이 부재한" 시뮬라크르이다. 

데리다가 지적하듯, "그것들은 모두, 각각, 홀로, 독자적이며, 대체 불가능하다. 관 그 자체, 그것, 타자이다."
성냥갑 모양의 관은 관이라는 이데아나 원본 혹은 특정한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생산품이다. 

티튀스-카르멜의 관 그림 연작은 도구적 존재로서의 관의 진리를 재현하지 않고, 각각이 마치 하나의 관에 기생하는 

미생물처럼 형상화된다. 

부패한 관의 모습이 다양하게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흡사 생명을 산출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여성의 

성기처럼 보인다. 

티튀스-카르멜은 "시리즈를 통해 반복을 거부"하는 역설과, 회화에 있어서 "구조적인 모델 부재 상태에 대한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결국 틀링깃 부족의 관 그림 형상은 모델이나 선행하는 범례가 존재하지 않는 결핍의 기표, 즉 부재

하는 죽음에 대한 애도이다.

어떤 면에서 애도란 본디 죽음을 나타내는 대상이자 모델인 "살아 있는 몸"의 결핍을 지칭하는 또 다른 차원의 파레르곤은 아닐까? 데리다는 티튀스-카르멜의 관 그림 연작이 그 자체로 카르투슈이자 작품으로 기능하는 파레르곤의 역설을 

나타낸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내가 카르투슈를 작품의 바깥에, 그 작품의 메타언어적이거나 메타조작적인 진리로 놓는다면, 카트라슈의 범접할 수 없는 진리는 괴멸되고 만다. 그것은 외재적이 되고 나는 작품의 내부를 감안하여 그 시리즈의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만들거나

뒤집어놓을 수 있으며, 어느 지점에서든 패러다임을 태연하게 재삽입할 수도 있다.

나아가 그것을 두 명의 사산아들처럼, 두 개의 제외된 엉터리 모사본들처럼 없애버릴 수도 있다.

반대로 내가 내부에, 혹은 프레임의 가장자리 안쪽에 카르투슈를 위한 자리를 마련한다면 그것은 그저 하나의 일반적인

작용에 불과하며 압도적인 진리로서의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결과는 동일해서 패러다임과 함께 서사가 그 시리즈의 내부에 다시 기입되고 만다. 카르투슈는 어디로 가버렸나? 자기 자신을 훔쳐버린 것이다.

더 이상 서사는, 더 이상 진리는.

티튀스-카르멜의 그림은 문자와 그림의 경계를 허물어서 파레르곤이 작품에 선행하고, 재현된 것이 재현 대상을 앞서며, 

시리즈가 패러다임에 선행하는 역설적 상황을 형상화한다. 그럼으로써 결핍의 기호인 파레르곤이 일종의 시뮬라크르로서 행하는 진리의 해체 작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데리다가 궁구하는 파레르곤의 작용은, 회화의 진리가 결코 화폭에 덧붙여 진 서사의 영역에 존재하지 않으며, 문자와 그림은 공히 작품의 고유 영역의 부재와 결핍을 가리키는 기표로서 시뮬라크르의 영역에 속해 있음을 나타낸다. 

아다미와 티튀스-카르멜의 그림을 통해 데리다는 다시 한 번 회화가 파레르곤으로서 원본 대상 및 재현된 진리의 죽음, 

진리의 결핍에 대한 애도와 관련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화에 있어서 진리의 귀속을 따지는 일은 회화가 기록하는 그 죽음의 언어로 돌아가는 부질없는 일이다.


5.
회화에서 네 가지 진리 계기들의 해체와 관련된 논의는 <회화와 진리>에 실린 '지침에 있어서 진리의 귀속'에 이르러 본격

화된다. 

이 글에서 데리다는 반 고흐의 구두 그림들을 둘러싼 저 유명한 하이데거와 샤피로 간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서구 형이상학 및 그에 바탕을 둔 예술철학에서는 진리가 작품 내부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파레르곤의 작용을 통해 이러한 진리관을 해체하려는 데리다의 입장에서는, 독자적인 미학을 저술한 칸트와 헤겔 못지않게 예술작품의 기원을 묻는 

하이데거의 예술론이 비판적 점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하이데거와 샤피로 간의 논쟁을 진리의 귀속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다루는 데리다의 목소리는 

흥미롭게도 중첩되어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대화체로 구성된 이 논의에서 데리다는 여성 화자로 추정되는 '목소리'에 

질문자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반 고흐의 '구두'에 관한 논쟁을 예로 들면서 여성 화자가 데리다에게 제기하는 의문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 구두를 한 켤레라고 확신하기 힘들다는 것.
둘째, 하이데거나 샤피로의 주장과 달리 그 구두의 주인이 농촌의 아낙네인지 도시의 화가인지 결정할 수 없다는 것.
셋째, 구두 주인의 농민적 의미를 설파하는 하이데거나 그에 반박하는 샤피로 역시 그 구두 주인의 신상에 주관적인 투사를 행하고 있다는 것.

샤피로는 구두가 누구의 것이냐가 하이데거에게는 부차적인 문제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림이 나타내는 진리를 앞의 네 가지 진리 계기 중 재현적 진리로 국한함으로써 회화에서의 진리 개념을 후퇴시켰다. 데리다에 따르면, 샤피로는 그림 속의 구두가 실제의 주체에게 귀속 가능하다고 보았고, 실재하든 그려진 것이든 구두는 인간의 발에 

속하는 사물이라고 규정했으며, 구두의 주체인 발은 인간의 몸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중요한 쟁점은, 샤피로가 근거하고 있는 이 세 가지 차원의 귀속이 "그림 속에 존재하는 것, 그림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의해 즉각적으로 폐기된다"는 사실이다. 데리다는 도구로서의 신발과 신발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발이 뒤섞인 채 

대지나 도시와는 무관한 배경에 놓여 있는 마그리트의 <붉은 모델>을 예로 들어, 신발의 진리를 주체나 대지로 귀속시키는 재현적 진리론을 일축한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반 고흐의 그림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에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주지하다시피, 작가가 아니라 작품에 담긴 진리의 일어남, 즉 존재자로서의 그림이 보여주는 존재론적 진리에 관심을 두는 하이데거에게 구두가 누구의 것인지는 전혀 중요치 않다. 먼저 하이데거는 그림에 그려진 구두의 유용성을 문제 삼으면서, 그림 속의 구두가 물리적 대상도 아니고 사용가치도 결여했으며 신발이라는 도구의 도구 존재를 지칭하지도 못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삼중의 쓸모없음으로부터 구두의 도구 존재는 실재하는 구두가 아니라 그림 속의 구두에서만 나타난다고 설파한다. 요컨대, 하이데거가 반 고흐의 그림을 택한 것은 순전히 경험적인 투사의 결과로, 구두 그림이 존재의 

진리가 일어남을 설명하는 은유로서 대지를 연상시키는 "신뢰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태도는 분명 샤피로보다 앞선 진리관을 보여준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데리다는 그런 진리관에도 불구하고 그 구두 그림을 굳이 농민적 진리의 일어남에 귀속시키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림 속의 구두를 실재하는 주체에 귀속시킨 샤피로 못지않게 그 구두를 농촌 아낙네를 거쳐 대지에 귀속시킴으로써, 결국 하이데거도 구두를 화가 자신의 이념적 자화상으로 만들어버린 셈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데리다에 따르면 그 구두를 한 켤레로 보아야 할 객관적 근거가 전혀 없다. 반 고흐의 구두 

그림은 각기 다른 짝을 지닌 두 구두일 수도, 두 개의 같은 쪽 구두일 수도, 구두 한 짝과 그것의 유령을 그린 것일 수도 있다.

데리다가 보기에 반 고흐의 그림을 두고 벌어진 하이데거와 샤피로의 논쟁이 주는 교훈은 그 그림이 실상 아무것도 재현

하지 않는다는 것, 그 그림의 진리는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결국 두 사람은, 아다미와 티튀스-카르멜의 그림에 나타난 파레르곤의 작용처럼, 반 고흐의 구두 그림 역시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시뮬라크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 채 회화에 관한 전통적인 진리관에 갇혀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의 해석학은 회화의 진리와 무관하게 불필요하며, 반 고흐의 그림 역시 주체와 그 주체에 귀속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진리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반 고흐의 '구두'에서 샤피로는 어긋난 주체를, 하이데거는 진리의 일어남을 읽어냈지만, 데리다는 유령의 형상을 본다. 데리다는 회화의 진리에 관한 한 서양 철학은 눈먼 장님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6.
데리다의 <맹인들에 관한 회상: 자화상과 다른 잔재들>은 <회화의 진리>에서 개진되었던 미술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책에서 데리다는 맹인들을 그린 다양한 그림들과 화가의 자화상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어떤 은유 작용에 관심을 

갖는다. 

그가 눈멂에 관해 언급하면서 화가의 자화상을 주로 거론하는 까닭은 '회화의 진리'가 진리의 진리성, 재현으로서의 진리, 회화적 진리, 그리고 회화의 진리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해체와 관계하며, 동시에 그것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진리의 '심연'에 대한 성찰이라는 앞서의 진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맹인 그림과 자화상은 바로 이 심연, 즉 "대상에 눈이 먼 상태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어떤 지점의 존재에 결박되어 있다. 

이 두 장르는 구조적으로 화가의 시선이 그림의 대상 혹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그려진다는 점에서 모종의 

'맹점'을 포함한다. 

요컨대 맹인을 그린 그림이나 자화상은 공히 주어진 대상에 대한 표상이 아니라 대상 자체의 괴멸을 그려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데리다는 회화에 있어서 이러한 맹점의 작용과 자신의 글쓰기 행위를 연관시킨다. 그는 자신의 손을 

보지 않고 글을 쓸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으면서, 자기에게는 글쓰기가 마치 눈먼 사람의 손이 몸에서 분리된 채 초라하기 그지없는 좁은 영역을 헤쳐 나아가는 것과 흡사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손이 시각에 의존하지 못하는 순간에 "기호들에 대한 기억에 의존해 시각을 보충하면서 무언가를 써 넣는 동시에 쓰다듬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이는 마치 "눈꺼풀 없는 눈이 손가락들의 끝에서 열리는 것"과 흡사하고, 손끝은 "글쓰기의 순간을 비추는 광부의 램프처럼 스스로는 드러

나지 않는 관찰자의 보철물"과 유사한 구실을 한다고 본다.

실제로 재능이 뛰어난 형에 밀려 화가가 되지 못하고 글쓰기의 영역에 만족하게 된 데리다의 자전적 이야기는 어느덧 글쓰기와 그리기 일반의 관계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며, 글쓰기와 그리기에 공통적으로 개입하는 '손'의 작용─파레르곤으로서의 손─에 집중된다.

맹인을 그린 그림들의 주제는 다른 무엇보다도 손이다. 왜냐하면 손은 헤쳐 나아가고 덤벼들며 분명 앞으로 달려나가지만, [글쓰기와 달리] 이 경우에는 손이 머리를 대신하여 마치 머리보다 앞서고 머리를 준비하며 머리를 보호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중략) 자신의 두 발로 선 맹인은 애초에 알지 못하면서도 인식해야만 하는 영역을 더듬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가 감지하는 것, 그가 조짐을 느끼는 것은 사실 절벽, 낭떠러지인데, 그는 빈손이거나 손톱, 지팡이, 연필로 무장한 채 어떤 치명적인 선을 이미 넘어섰기 때문이다. 맹인을 그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손을 보여주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림을 그릴 때 이용하는 손의 도움으로 우리가 무엇을 그리는지, 즉 도구로서의 신체 일부, 그림을 그리는 화가, 수제품을 만들고 조작과 활동과 예절을 행할 때의 손, 손의 유희 혹은 작용, 다시 말해 외과수술로서의 그리기에 우리가 주목하기 위해서이다.

데리다는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앙투안 쿠아펠의 그림 <맹인 연구(Etude d'aveugle)>와 <오류(L'Erreur)>를 예로 들어, 

맹인의 손이 눈을 대체하는 모습을 통해 작가나 화가의 손이 글쓰기와 그리기에 있어 시각을 대체하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읽어낸다. 지각 과정에서 손이 눈을 대체하는 맹인의 이미지는 어느덧 눈과 시각의 우위성을 전제하고 그에 기반을 

둔 앎의 형식을 추구하는 현상학 및 서구 형이상학의 존재론 전체에 대한 의문으로 확대된다. 

데리다에 따르면 맹인은 알려고 하지도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봄, 형상, 이데아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에서 유래

했다고 알고 있는─그렇게 보고 있는─유럽의 이념과 관련된 모든 역사, 모든 의미론은 보는 행위를 앎과 연관 짓는다."


 

쿠아펠의 <맹인 연구>는 이러한 과정을 매우 극적으로 보여준다. 앞을 못 보는 맨발의 맹인은 두 손을 앞으로 뻗어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는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지만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며, 무언가를 만지려 하지만 허공만을 움켜쥐고 있다. 맹인의 손은 눈의 역할을 대신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시각이란 곧 촉각과 동일하다. 그리고 그의 보이지 않는 

눈과 맨손은 빛(진리)을 갈구하듯 하늘을 향해 있다. 더구나 쿠아펠의 맹인은 지팡이를 비롯한 어떤 도구에도,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은 채 홀로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맹인의 그림과 극적으로 비교되는 인물로 플라톤의 '동굴에 우상'에 갇힌 인간 형상을 떠올릴 수 있지만, 쿠아펠의 맹인은 맹목에 갇힌 인간 군상의 알레고리도 아니고 사물의 진리에 눈멀어 

있는 인간도 아니다. 또한 진리에 관한 기억을 상실한 플라톤의 "눈뜬 장님들"은 동굴에 갇힌 가련한 존재인 데 반해, 

쿠아펠의 맹인은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으나 모든 것을 보이게 하는 그 무엇을 향해 손을 뻗고 있다.

쿠아펠의 맹인은, 시각의 상실이 진리에 대한 앎의 상실─진리의 망각으로서의 회상(anamnesis)─과 직결되는 플라톤의 

진리관, 나아가 진리란 그러한 망각으로부터의 탈은폐─알레테이아(alētheia)─라고 보는 하이데거의 진리관과 달리, 인간의 앎이 시각에서 유래한다는 현전의 형이상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는 시각을 상실한 채, 홀로, 손의 촉각에 

의탁하여, 눈에서 유래하는 대상적 앎이 아닌 다른 앎을 모색하는 인물이며, 시각과 앎이 진리의 특정한 계기와 연결되어 온 역사의 괴멸을 형상화한다.

그런데 쿠아펠의 맹인이 촉각과 청각에 의존하여 찾고자 하는 그 무엇은 서구 기독교의 맥락에서 보면 전혀 다른 울림을 

지닐 수 있다. 렘브란트의 그림 <아버지의 눈을 뜨게한 토비아>처럼 손은 계시적 치료와 치유의 효력을 지닐 수 있고, 

더구나 맹인의 손은 예수의 이미지와 결합해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가 갖는 구원의 위력을 떠올리게 한다. 

서구 역사에서 오이디푸스나 티레시아스 같은 눈먼 맹인들이 눈을 지닌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진리와 치유의 계시를 

전하는 선지자로 간주되어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맹인 화가의 경우는 어떠한가? 

맹인이 과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1. 본래 대상의 이미지 혹은 그림자 환영을 뜻하는 시뮬라크르는 데리다가 <산종(La dissémination)>에서 말라르메를 두고 말한바, "아무것도 모방하지 않는 흉내 내기", 다시 말해 "어떠한 단일한 원품도 복제하지 않는 복제품"이라고 지칭한 

것을 가리킨다. 시뮬라크르는 자신에 선행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복제물을 가리키며, 따라서 지시작용, 재현의 진리를 

해체하는 개념이다. 이는 마치 무언극에서 배우의 동작이 인유 행위인 동시에 그 어떤 것의 인유도 아닌 것과 같으며 

"거울을 깨뜨리거나 거울 너머로 진행하지 않고 인유"하는 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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