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학이란 무엇인가
수사학이라는 주제를 놓고 어느 두 사람이 토론을 벌이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어떠한 주제에 대한 대화나 토론으로부터 최대한의 합의나 긍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에 관한
최소한의 선이해가 대화 상대자들에게 그 전제로 깔려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사학에 관한 전문가나 학자가 아니라면 그에 대한 토론은 별 성과 없이 끝나기가 십상이다.
어느 한쪽이 수사학이란 말의 표현에 관련된 기법들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쪽은 사고의
엄정한 논리성과 추론의 즐거움에 관련된 학문이라고 맞서기 쉽기 때문이다.
한쪽에선 은유와 환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맞은편에서는 수사적 삼단 논법, 즉 생략 삼단 논법이
수사적 논증에서 행하는 역할을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사학은 문학에 대한 연구나 시학적 관점에 이론적 자양분을 제시해준다고도 하고 철학이나 논리학 심지어는
정념의 심리학과 밀접한 상관 관계를 가진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이른바 정보화 시대에 대중들의 의사 소통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는 지금 우리는 ‘수사학
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1)
이렇듯 수사학이라는 용어나 그와 관련된 일련의 용어들─‘수사’ ‘수사적’ ‘수사법’─은 하나로 통합되기 힘든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의미들을 포괄하고 있다는 데서 어떤 근본적인 어려움, 즉 ‘수사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수사학의 정의에 관련된 어려움에 부딪힌다.
그 원인을 대략 두 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일상적으로 수사학은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즉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는 ‘수사학’ ‘수사’ ‘수사적’이란 용어들을 대상의 부정적 가치 폄하를 위하여 사용한다. 예를 들어 내용은 없고 겉치레만 번지르한 담론을 우리는 “공허한 수사의 남발”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수사’란 내용의 알맹이가 아닌 겉포장을 가리키며 일종의 허식으로서 꾸며지고 장식된 담론을 뜻한다.
수사란 단어의 뜻을 “말이나 문장을 꾸며서 보다 묘하고 아름답게 하는 일 또는 기술”이라고 풀이한 어느 사전
(이희승, 『국어대사전』, 민중서림)의 정의는 수사의 미학적인, 보다 정확히 말해서 장식적인 기능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문제는 수사학에 대한 이러한 일상적인 인식이 수사학에 관한 보다 진지한 접근에 일종의 인식론적 장애물을
구성한다는 데 있다.
수사학을 표현의 층위에 두건 아니면 내용의 층위에 두건간에 그것을 보다 진지하게 파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수사학에 대한 부정적 수사의 남발을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수사학에 보다 근본적인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수사(학)를 그 일상적이고 부차적인 기능에서 구해내야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수사학이란 이천 년도 더 넘게 지속되어온 긴 연원을 지닌 학문이라는
점이다.
서구의 지적 전통이 대개 그러하듯이 수사학도 고대 그리스의 정신적 유산에서 비롯된 학문이다.
그러나 수사학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조감해볼 때 다른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전통과 쇄신의 상호
작용을 통해 전개되어왔다는 사실이다.
즉 어느 시대에나 나쁜 수사학과 좋은 수사학, 극복해야 할 말(또는 글)의 병폐와 실현해야 할 말의 표본이
공존하고 있었다.
각각 수사학에 상반된 입장을 보였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고전주의의 수사학 지향적 태도와
낭만주의의 반수사학적 태도는 그 한 예로 기억할 만하다.
즉 수사학의 역사는 끊임없이 수사학을 대상 언어에서 메타 언어로, 그리고 메타 언어에서 대상 언어로
뒤바꿈하면서 전개되는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 수사학에 대한 일련의 정의들이,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상호 적대적인 정의들이 마치 연원이 깊은
나무의 테들이 동심원을 이루며 겹겹이 이어져 있듯이, 공존하게 된 것이다.
수사학에 대한 정의의 다양성 및 상호 모순성은 바로 수사학의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 기인한 바가 크다.
수사학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거론되었던 시기 중의 하나인 20세기 중반을 그 예로 들어본다면 수사학은 학문적으로 거의 합치되기 힘든 내포들을 지닌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극단적인 예들을 살펴보자.
(1) 고양이를 고양이라고 부르지 않고 ‘집 안의 자존심’ ‘털 달린 작은 공’ ‘야옹 소리’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에
다의성의 논리를 도입하는 것이다.
이는 규범에서는 벗어나는 용법이지만 엄밀한 규칙을 갖는 용법이다.
수사학이라는 이 오래된 학문에 대한 경애로서 우리는 이를 수사학적 규칙이라고 명명하는 바이다.
수사학은 이러한 현상들을 심각하게 고려할 줄 알았으며 그 전체 속에서 파악할 줄 알았다.2)
(2) 수사학을 정감적이 아닌 지적인 동의를 얻어내려는 설득적 담론과 일치시킴으로써 우리는 비개인적인 유효
성을 주장하지 않는 모든 학문은 수사학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의사 소통이 하나 또는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사유를 이끌고 정감들을 자극하거나 진정시키고 행위를 촉발할 경우 그것은 수사학의 영역에 속한다.
수사학은 그 개별 분야로 논쟁의 기술인 변증법을 포괄한다. 그럼으로써 수사학은 형식화되지 않은 사유의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수사학의 제국’이라는 표현을 해볼 수 있다.3)
(1)의 경우 수사학은 문체, 보다 엄밀히 말해서 문채(文彩, figure)들에 대한 연구로 국한되며 주어진 텍스트를
문학적인 것으로 만드는 어떤 것에 대한 연구를 지향한다.
(2)의 경우 수사학은 설득하고 논증하는 기술로 정의되며 그러한 기술을 잘 드러내주는 예들은 문학 텍스트가
아니라 변론가나 웅변가 또는 철학자의 텍스트에서 취해진다.
전자가 주네트, 토도로프, 코앙, 그룹 뮈(Groupe μ)와 같은 문학 이론가의 진영에서 다듬어진 수사학의 방향
성이며 시학·문체론·문학 비평 등과 같은 인접 분야들과 연결된다면 후자의 경우 수사학은 철학이나 논리학
또는 변증법과 같은 ‘진지하고 무거운’ 담론들과 관련된다.
이렇듯 20세기 중반의 서구의 수사학은 서로 ‘분열된’ 수사학의 양상을 보인다.
‘문채의 수사학’과 ‘논증의 수사학’은 서로 양립되기 힘들어 보이며 각각의 진영에 속한 이론가들은 다른 진영에 속한 이론 또는 이론가들에 대한 논의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배제해버린다.
‘문채’와 ‘논증’은 서로 합치되기 힘든 두 용어들로 간주된다.
그러나 수사학의 본질에 관련된 이러한 대립은 어느 한 시대에 고유한 것은 아니며 수사학에 관한 거의 모든
시대의 정의들을 양분하고 있다.
즉 한편으로 수사학은 ‘잘 표현하는 기술’로 귀착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수사학은 표현의 형식적이고 문체론적인 기술을 다루지만 그것의 논증적 성격은 쉽게 인정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수사학은 줄곧 ‘잘 말하고 잘 쓰는 기술’로 환원되곤 한다.
수사학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담론의 내용과 그것이 말해지거나 씌어지는 방식, 이른바 내용과 형식간의 이분법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문제점을 야기한다.
다른 한편으로 수사학은 ‘논증하는 기술’ 또는 ‘설득하는 기술’로 정의된다.
그것은 ‘잘 말하고 쓰는 기술’로서의 수사학이 지향하는 장식성과 화려함 또는 유쾌함의 성향들을 지양하고
효능·진실·유용성 등을 그 미덕으로 추구한다.
이 경우 수사학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이 분명히 드러난다. 우선 수사학은 정치적 또는 제도적 틀 내부
에서 인간들 간의 태도·관계·입장 들의 역학 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그 사회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즉 수사학은 그것을 준수하는가의 여부가 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관습·풍속·법칙·규범 들의 세계 속에서 유통
되는 말의 의미와 양상을 따진다.
그러므로 고독의 수사학, 사막 또는 은거의 수사학이나 더 나아가 침묵이나 사색의 수사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수사학의 세계란 삶, 움직임, 이동, 의사 소통 그리고 사회적 관계들의 세계이다.
또한 수사학이 지향하는 사회적 실천은 인간 집단들을 결집시키고 역동화시키는 상징적 가치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을 때에만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문화적 차원을 지닌다.
즉 이러한 가치들에 의거하여─그것들에 찬성하던 반대하던간에─행동할 수 있어야 하며 수사학은 이러한 신념·기호·이해 관계의 세계와의 관련하에서 움직인다.
그러므로 문명 이전의 수사학이나 반문명 또는 야만성의 수사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수사학에 대한 두번째 접근법에서 수사학이란 여러 상반된, 심지어는 모순되기까지 한 주장들에 봉사한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여기서 수사학은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무관한, 중성적 도구일 수는 없다.
즉 모든 논쟁에서 사용되는 수사학은 논쟁에 참여하는 당사자들로 하여금 상대방의 신념과 가치 체계들을 고려
할 것을 요구한다.
바로 거기서 앞서 말한 ‘잘 말하는 기술’로서의 수사학과 대립되는 이른바 ‘내용’ 위주의 수사학으로 흐를 위험성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앞서 인용된 (2)의 정의에 나타나는 것처럼 수사학을 정감적이 아닌 ‘지적인’ 동의를 얻어내려는
‘논증’에 일치시킬 경우 수사학은 차갑고 추상적인 논리적 범주들에 대한 연구로 환원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 위주의 수사학’과 ‘내용 위주의 수사학’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는 것은 수사학 연구의 중요한 과제로 남겨져 있다.
이렇게 분열된 수사학들간의 틈새를 메우고 수사학의 전체성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수사학이 탄생했던 고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수사학의 최초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수사학에 대한 최초의 정의들은 ‘설득(persuasion)’의 개념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내용과 형식의 이분법이나─즉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설득에 필요한 논리적 범주들을 잘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표현적 층위를 도외시할 수도 없다─ 지적인 범주들과 정감적 차원에 속하는 가치들 사이의 대립을 그 전제로
하지 않는 일종의 통합된 수사학의 모습, 또는 그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흔히 수사학을 ‘말을 통한 설득의 기술’로 정의할 경우 ‘말을 통한’이란 예컨대 선물이나 돈 또는 다른 유혹의
수단을 통한 설득이나 폭력을 앞세운 강제적인 설득의 형태들과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고대 수사학의 쟁점들을 훌륭하게 설명한 바 있는 프랑수아즈 데보르드에 의하면4) 설득의 개념은 그리스적
사유의 중요한 요소이다.
타인에 대한 행위의 수단으로서 설득은 물리적 또는 육체적 힘과 근본적인 대립 관계에 놓이며 인간/동물, 문명인/선사 시대인, 그리스인/야만인 등의 다른 대립들과 겹쳐진다.
또한 설득한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청중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의미하며 청중이 자유로이
거부할 수 있는 어떤 것에 관한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담론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그런 뜻에서 본다면 말을 통한 설득은 물리적인 억압과 대립될 뿐 아니라 절대적인 권위와도 대립된다.
왜냐하면 말을 통한 설득은 다음과 같은 조건 속에서만 실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평등한 위치에 있어야 하며, 말을 자유로이 할 수 있고 말해진 것을 동의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부여된 상태이어야 한다.
말을 통한 설득의 기술로서 수사학은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태어났으며 수사학이 기원전 6세기말경에 몇몇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에서 생성되었던 민주주의 체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수사학이 훨씬 나중에 말의 모든 형태의 생산, 그리고 더 나아가 시를 포함한 문학 전체에 적용되면서 ‘잘 말하고 쓰는 기술’을 가르치는 규칙들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그것은 단지 ‘대중들을 향한 연설’에
관련되어 있었다.
즉 초기에 수사학은 다수의 청중들(예를 들어 법정의 심판관들이나 군중 집회에 운집한 청중들)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 또는 담론을 통해 어떠한 주장을 받아들이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5)
이렇듯 ‘말을 통한 설득’이라는 수사학에 대한 최초의 정의를 자세히 살펴본 까닭은 수사학이란 서구의 고대 문화 즉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본질적 요소로 출발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이다.
즉 설득의 기술로 정의되어온 수사학은 말이 가장 큰 역할을 수행했던 사회의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해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더 중요한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고 로마에서 채택되었으며 고대의 마지막까지 지속되었던 수사학은 그 탄생을 주재했던 조건들을 뛰어넘어 살아남았으며 ‘잘 말하고 쓰는 기술’로서의 수사학은 결코 최초의 수사학으로부터의 타락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 아니라 변화된 상황에 수사학이 적응한 결과로 보아야만 한다는 점이다.6)
그렇기 때문에, 예컨대 내용 위주의 수사학과 표현 위주의 수사학간의 분열된 양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고대
그리스 시대의 통합된 수사학으로 ‘거슬러 올라가라’는 또는 ‘되돌아가라’는 주장은 그 취지를 빼놓고 생각해
보면 상당히 시대 착오적인 발상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되돌아가서’ ‘복원시켜야 한다는’ 성급한 주장보다는 우선 수사학의 세계를 양분하고 있는 이러한 두 가지 접근법들이 생겨나게 된 각각의 역사적·사회적·문화적 조건들과 상황들을 면밀히 이해하고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수사학의 다원성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식은 수사학의 본질 및 내용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수사학을─그것이 ‘잘 말하고 쓰는 기술’로서의 수사학이건 아니면 ‘말을 통한 설득’으로서의 수사학이건간에─ 어떠한 제도적 층위에서 파악하는가에 연결되어 있다.
이른바 전통 수사학의 역사와 개념망에 대해 상당히 체계적이고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한 바 있던 롤랑 바르트7)는 이와 관련해 수사학의 제도적 층위들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기술·교육·학문.8)
(1) 기술로서의 수사학: 이 경우 수사학이란 앞서 말한 설득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technique), 즉 규칙들과 비법들의 총체를 뜻한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설득에 도달할 수는 없으며 효과적인 설득은 항상 그 ‘비법’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뜻에서 본다면 수사학이 아니라 ‘수사술(修辭術)’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뒤에서 자세히 거론되겠지만 수사술로서의 수사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이러한 규칙들과 비법은 변론가의 타고난 재능에 기인하는가, 아니면 습득된 기술과 반복된 훈련에 기인
하는가.
규칙과 비법들은 가르쳐지고 전수될 수 있는가. 바로 여기서 수사학과 관련된 뜨거운 쟁점들 가운데 하나인
수사술에 있어 자연(본성)/기술의 대립의 문제가 생겨난다.
다른 한편으로 수사술이라는 용어는 이 기술을 발휘하면 설득시키려는 내용이 ‘거짓’일지라도 담론의 청중들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람들이 바로 소피스트 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로부터 수사학의 윤리성의 문제, 즉 수사학은 그 자체로 도덕적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가 생겨난다.
(2) 교육으로서의 수사학: 처음에는 이른바 ‘수사학자(rhéteur)’라는 개인적인 인맥에 의하여 전수되어온 수사술은 급속히 교육 제도 속으로 편입되어간다.
즉 수사학이 학교 교육의 중요한 대상이 된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우선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수사학의 방향성이 변모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주었다는 점이다.
학교에서의 수사학 교육의 목표가 겉으로는 공적인 연설이나 설득하는 기술을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구체적 ‘상황’과는 독립되어 있는 담론, 즉 실제 사건에 의해 촉발되지 않고 청중으로부터의 어떠한 승인도 요구하지 않으며 현실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 ‘무상의 담론(discours gratuit)’을 지향하게 된다.
아울러 학생들에게 대가들의 모방, 또는 위대한 변론가나 시인들에 대한 독서나 주석으로부터 이끌어낸 모방을 강조함으로써 문학적(또는 문화적) 유산이 계승되고 전수될 수 있는 학습 기회를 만들어준다.
다른 한편으로 수사학은 교육 제도 속에 편입되고 교과목의 하나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현실의 구체적 상황과의 연계성 속에서 유지할 수 있었던 탄력성·가용성 등과 같은 기존의 특성들 또는 장점들을 상실해버리고 ‘진부하고 낡은 지식들’의 총체로 변모해버린다.
수사학 개론서(manuel)의 등장과 범람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수많은 개론서들의 내용이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 구성이나 내용에 있어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은 현실과 유리된 지식의 운명이 밟아가는 궤도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아무튼 수사학은 중세 때 3학문 또는 7학문의 한 분야로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서구의 교육 체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9) 19세기에 들어 중등학교(lycée)의 마지막 반을
‘수사학 반(classe de rhétorique)’이라고 불렀다는 점은 교육의 대상으로서 수사학에 부여했던 중요성이 상당
기간 지속되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3) 학문으로서 수사학: 이 경우 수사학은 대상 언어─그것은 논증적 언어일 수도 있고 문채 또는 비유적 언어
일 수도 있다─에 대한 일종의 메타 언어로서 기능한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수사학은 바로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가 있다.
문제는 수사‘학(學)’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학’의 원칙과 방법들을 따르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우선 모든 학문은 그것이 다루고자 하는 대상의 명확한 설정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관점에서 그렇다면 수사학의
대상 언어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문제는 수사학이 그 대상 언어를 비유적 언어로 한정시키는 경우라 하더라도 비유적 언어와 자연적 언어의 경계가 수사학이 주장하는 것만큼 명확하게 설정될 수 없다는 데 있다.
또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생겨난 모든 언어는 비유적이라는 주장은 오히려 언어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한다.
또한 메타 언어로서 수사학이 동질적인 현상들로서 대상 언어를 관찰하고 분류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는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체계적인 방식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자의적인 판단이나 경험에서 비롯될 가능성이
크다.
문채나 전의들의 목록과 체계가 수사학자들마다 다양한 편차를 갖는 것도 이러한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수사학은 시기에 따라 위에서 설명한 일련의 함의들을 동시에 또는 연속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사학을 기술·교육·학문의 세 가지 층위들 가운데 어느 층위의 관점에서 파악하는가에 따라 수사학에 대한 접근 방식과 평가는 상당히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수사학을 ‘기술’로 파악하게 되면 그것은 고대나 지금이나 여전히 중요하게 습득되고 전수되어야 할
분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의회나 법정 같은 공적인 연설 및 토론의 장소는 적어도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채택하고 유지하고 있는 국가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보다 사적인 영역에서도 예를 들어 ‘웅변과 토론(speech and debate)’은 (민주)시민 함양의 필수적인 요소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수사학을 교육이나 학문의 체계로 간주하면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보다 상대적인 인식과 평가가 가능해
진다.
예를 들어 니체는 낙후되고 노화된 수사학의 운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는 엄밀히 말해서 교육과 학문의
대상으로서 수사학에 해당되며─이는 수사학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낭만주의의 등장으로 심화되는데 특히 프랑스의 경우 19세기말에(보다 정확히 말해 1885년) 중등학교에서 ‘수사학 반’이 공식적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은 이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기술’로서의 수사학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니체와 비슷한 시기에 쇼펜하우어는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10)의 중요성을 여전히 설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사학에 대해 포괄적으로 이야기할 경우 이 세 가지 층위들 가운데 어디에 강조점을 두는가를 명확히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수사학이란 이 세 가지 층위들간의 복합적인 관계에 의해 규정될 것이다.
수사학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과 그것이 지니는 일련의 함의들은 수사학이 포괄하고 있는 사실들이 그만큼 광범위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입증해준다. 이렇듯 수사적 사실들의 광범위한 폭은 이른바 수사적 제국(또는 수사학의 제국)이라는 표현을 가능하게 해준다. 실제로 몇몇 이론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수사적 제국’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쓰고 있는데11) 롤랑 바르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사학이─그 체계의 내적인 변화가 어떠했을지라도─ 고르기아스에서 나폴레옹 3세에 이르기까지 2500년
간 서양을 지배해왔음을 생각해보라. 부동적이고 무감하고 불멸해 보이던 수사학과는 달리, 그것을 혼란에 빠뜨리지도 변질시키지도 못한, 태어나선 자라나고 결국 사라져버린 모든 것들을 생각해보라. 아테네의 민주주의,
이집트 왕국, 로마 공화국, 로마 제국, 게르만의 대침입, 봉건 제도, 르네상스, 왕정, 대혁명을 생각해보라.
수사학은 여러 정체·종교·문명 들을 흡수하였다. 또 르네상스 이후 시들해진 수사학이 사멸하는 데는 3세기가
걸렸다. 그러나 아직도 수사학의 종말은 분명치 않다. 수사학은 상위 문명이라 칭해야 할 것에 접하도록 해준다. 그것은 역사와 지리적 의미에서의 서구의 상위 문명이다.12)
이렇듯 수사적 제국은 그것이 걸쳐 있는 ‘영토’나 존속되었던 ‘역사적 시기’가 그 어느 정치적 제국보다 광범위
하고 더 지속적인 완전한 제국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르트는 수사적 제국에 대한 의미있는 통합이나 역사적인 해석이 손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수사적 제국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과학적 관찰과 역사적 고찰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우리는 바르트가 제안하고 있는 것처럼 광범위한 수사적 제국에 대한 탐색을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시키고자 한다. 하나는 체계적인(또는 공시적인) 방향이며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또는 통시적인) 방향이다. 전자는 수사학을 형성하는 기본 개념들과 분류들의 구조망을 뜻하며 후자는 2500년 간 서양을 지배해왔던, 또는 여전히 그러하다고 간주되고 있는 수사적 제국에 대한 역사적 탐색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탐색의 방향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공시적인 방향 속에서의 한 매듭은 통시적인 방향 속의 다른 매듭들로 뻗어나가며 통시적인 방향 속의 한 매듭은 공시적인 방향 속의 다른 매듭들과 복잡한
구조망을 형성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우선 공시적인 방향에서의 탐색을 가능하게 해주는 요인들부터 생각해보기로 하자.
수사적 제국의 다양한 시기들에 걸쳐 생겨난 수사학 개론서들은 그 가치가 보편적이며 시간을 초월한 듯이
보이는 규범들을 제시해준다. 그것들은 언제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으며 국가나 시대(바르트가 말하는 정치적
제국) 혹은 담화가 실행되는 조건 및 제도들과 무관한 특성들을 보여준다.
즉 수사학은 사람들간의 의사 소통의 커다란 동인들을 뚜렷이 보여주며 그 점에서 그것이 탄생했던 개별적이고 특수한 틀을 뛰어넘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수사학 개론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규범들이 한 수사학자에서
다른 수사학자에게로 아무런 변화 없이 옮겨지는 현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심지어는 고대 수사학의 규범들이 현대의 수사학 개론서에서조차 거의 수정되지 않은 채 재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수사학은 어떠한 사회의 산물이기도 하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수사학은 언어나 의사 소통, 논리학 또는 심리학이나 문학 연구에 관련된 보편적인 특성들을 드러내줄 수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수사학이
제기하고 있는 질문들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동시에 수사학이 적용되었던 환경이 수사학에 부여했던 개별적이고 변화하는 특성들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바로 여기서 역사적 탐색의 중요성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고르기아스의 수사학은 퀸틸리아누스의 수사학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또한 수사학의 개념망은 상당히 더딜지라도 내적인 진화 과정을 겪으며 이는 수사학이 기대고 있는 제도적이고 문화적인 환경에 있어서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 수사학의 이론적 체계는 그뒤에 이어올 고전주의 수사학이나 현대의 수사학에 이론적인 원형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보다 특수한 상황,
즉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 특히 아테네의 의회와 법정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상황에 대한 분석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뒤이어 올 수사학의 개념망과 수사학의 역사는 바로 이와 같은 원칙을 따라 구성된 것이다.
역사적 탐색과 개념적 구조망에 대한 탐색 가운데 어떤 것을 먼저 다루는가에 대해서는 일단 수사학의 기본 개념들이나 구조적 틀을 먼저 숙지한 다음 그 역사적 변형 과정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판단되어 ‘수사학의 개념망’과 ‘수사학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은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수사적 제국에 대한 여행을 떠나면서 수사학의 개념망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은 수사학의 역사부터 시작해도 좋고
아니면 수사학의 역사보다 개념망에 대한 탐색을 우선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
요한 점은 수사학의 개념망과 수사학의 역사를 서로 긴밀히 연결시켜 각각의 매듭을 서로 꼬여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주
- 1 예컨대 『수사적 인간』이라는 매혹적인 제목의 책의 저자는 수사학의 시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우리는 전파 매체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인해서 또다시 수사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지구촌 시대라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살림살이가 복잡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복잡해지면 그만큼 논쟁이 많아진다. 논쟁의 기술은 설득을 목표로 하는데 설득의 기술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무력이 등장한다. 역사 이래 한번도 그친 적이 없는 전쟁은 인간의 설득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 것인가를 증명한다. 그러나 설득을 목표로 하는 수사학이 갖는 현실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수사학의 필요성이 절실한 시대도 없을 것이다”(박우수, 『수사적 인간』, 도서출판 민, 1995, p. 11).
- 2 Groupe μ, Traité du signe visuel, Seuil, 1992, p. 9.
- 3 Ch. Perelman, L’empire rhétorique, Vrin, 1977, p. 177.
- 4 F. Desbordes, La Rhétorique antique, Hachette, 1996.
- 5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의 본질적인 요소들이 바로 이러한 ‘수사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밝힌 아롱 키베디-바르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사학은 담론을 ‘상황 속에서만’ 인식한다. 즉 수사학은 담론을 수신자와 발신자간의 또는 변론가나 청중간의 또는 법정에서의 변론의 경우 두 변론가들간의 의사 소통의 수단으로 간주한다. 수사학에 있어 담론은 독자적인 텍스트가 아니며 수사적 담론은 대상(objet)이 아니며 그 자체로는, 즉 구체적 상황이나 청중이 배제된 상태에서는 ‘미완성의 상태’에 놓여 있을 수밖에는 없다”(A. Kibédi-Varga, Rhétorique et littérature, Didier, 1970, p. 22).
- 6 예를 들어 수사학이 그 탄생을 주재했던 조건들을 뛰어넘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또는 변형될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로 수사학이 교육 체계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즉 수사학은 의회나 법정 같은 의사 결정의 공간이 아니라 학교나 극장과 같은 이른바 ‘무상성(無償性)의 공간’에서 실행된다. 학교에서의 수사학 교육은 대부분의 경우 ‘수사적 미문(美文, déclamation)’의 훌륭한 작성을 그 목표로 하는데 이는 ‘잘 말하고 쓰는 기술’의 연마로서 수사학의 변신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
- 7 R. Barthes, “L’ancienne rhétorique,” Communications 16, 1970(「옛날의 수사학」, 김현 편, 『수사학』, 문학과지성사).
- 8 바르트는 그 이외에도 도덕, 사회적 실천, 유희적 실천의 범주들을 더 제시하고 있으나 그것들은 기술·교육·학문으로서의 수사적 층위와 비교해볼 때 부수적이거나 이에 이미 포함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여기서는 제외시켰다.
- 9 특히 고대에 있어 수사학과 교육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H.-I. Marrou의 다음 책을 참조할 것: Histoire de l’éducation dans l’Antiquité(Seuil, 1948, ‘Points,’ 2 vols.).
- 10 쇼펜하우어, 김재혁 역,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7. 이 책의 원제는 ‘논쟁에서 이기는 법’이며 이는 쇼펜하우어가 지향하는 ‘논쟁적 토론술’에 기초하고 있다.
- 11 그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카임 페렐만(Ch. Perelman)으로서 그는 ‘수사적 제국’이라는 제목의 저서를 발표한 바 있다: L’empire rhétorique, Vrin, 1977.
- 12 롤랑 바르트, 「옛날의 수사학」, 김현 편, 『수사학』, p. 21.
(낙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