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이상국전집 제23권
●기(記)
○지지헌기(止止軒記)
성(城) 동쪽 봉향리(奉香里)의 서쪽에 초당(草堂) 수십 칸이 있으니, 백운거사(白雲居士)가 기거한 곳이다. 그러나 몸만이 기거할 뿐, 마음은 기거하지 않는다. 거사는 누구인가? 춘경(春卿 이규보)이 스스로 부른 호다. 그 헌호(軒號)를 ‘지지(止止)’라 한 것은 거사가 스스로 이름한 것인데, 대개 《태현경(太玄經)》으로 점쳐 지(止)의 수(首)를 얻어 이름한 것이다. 지의 수 인현양(人玄陽) 가팔목(家八木) 에, ”초일(初一)은 그칠 데에 그쳤으니, 속이 밝아서 허물이 없다.”하였는데, 이것은 군자가 그칠 때가 되면 그쳐서 그 지혜의 밝음이 마치 물 속의 밝음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음(陰)과 양(陽)은 격절(隔絶)되어 각각 그곳에 그쳐 있기 때문에 능히 물 속이 스스로 청명한 것과 같다. ”초이(初二)는 말이 그치고 수레가 대기한다.”하였는데, 이것은 초이가 평인(平人)이 되어서 숨지도 않고 벼슬도 하지 않기 때문에 수레가 대기하고 말이 그치는 데에 나아가는 것을 말함이다. 거사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나의 뜻이다. 내가 능히 그 그칠 곳을 알아서 그치면 초일의 체(體)에 응하였다고 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벼슬하는 데에 급급하지 않고 물러가서는 숨는 데에 구차하지 않아, 이것으로 평인이 되면 초이의 사(辭)에 합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이것을 얻어서 헌호를 ‘지지’라고 하였으니, 과연 나의 출처(出處)와 같지 않은가? 이른바, ‘지지’라는 것은 능히 그 그칠 곳을 알아서 그치는 것이니, 그 그칠 곳이 아닌 데에 그치면, 그 그침은 그칠 곳에 그친 것이 아니다. 또 호표(虎豹)ㆍ미록(麋鹿)ㆍ교룡(蛟龍)은 수택(藪澤)이나 굴혈(窟穴)에 있어야 그 그칠 곳을 알아서 그치는 것인데, 가령 본고장을 떠나서 성시(城市) 가운데에 그친다면 사람들이 재앙으로 여기고 따라서 해칠 것은 필연한 일이다.
거사는 세상에 있어서 거만스러워 남과 합하는 일이 적으니, 길들여진 물건이 아니다. 만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가고 나란히 달려서 명리(名利)의 지경에 그치게 된다면, 이는 호표ㆍ미록ㆍ교룡이 성시에 그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은 내가 그 그칠 곳을 구하여 그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으로 여기고 따라서 해치는 자가 이를 것이다.”하였더니, 어떤 이가 말하기를, “자네의 말과 같이 한다면 산림(山林)ㆍ궁곡(窮谷)에 처하여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혼처하지 않은 연후에야 그칠 곳에 그쳤다고 할 수가 있다. 이제 자네가 그친 곳은 곧 성시의 가운데인데, 오히려 그칠 곳에 그쳤다고 하여, 호표ㆍ미록ㆍ교룡이 수택이나 굴혈에 처하는 것에 비유하는 것은 무엇인가?”하기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벌레와 짐승이 수택이나 굴혈에 처하는 것과 사람이 성시에 처하는 것은 역시 각각 그 그침의 떳떳한 것이다. 가령 사람이 수택에 엎드리고 굴혈에 들어간다면, 역시 호표ㆍ미록ㆍ교룡이 성시에 들어간 것과 같으니, 독충(毒蟲)이나 맹수(猛獸)가 또한 반드시 재앙으로 여기고 떼를 지어 해칠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피하여 벌레와 짐승에게 해를 당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하지 못한다. 또 사람이 사람을 꺼리어 해치기를 꾀하는 것은, 성시가 좁아서 같이 처하는 것을 인색해서가 아니라, 그 구하는 것과 그 이익을 다투기 때문이다. 진실로 사람들과 다투지 아니하여, 비록 대낮에 내 상자[篋]를 훔쳐가는 자가 있더라도 피하고 보지 않는다면, 사람이 성시에 처하는 것이 또한 호표ㆍ미록ㆍ교룡이 수택이나 굴혈에 처하는 것과 같은데, 어찌 해칠 자가 있겠는가? 거사가 헌호를 이렇게 이름한 것은 대개 이러한 뜻이다.”
정묘년 3월 10일에 기(記)한다.
[주D-001]지(止)의 수(首) : 지(止)는 《주역》의 간괘(艮卦)에 준한 것이며, 수(首)는 《주역》의 단(彖)과 같이 지(止) 전체의 뜻을 통론한 것이다. 《태현경》에는 - 삼방 이주(三方二州) 삼부 이가(三部二家) -로 되어 있다.
[주D-002]초일(初一)은……없다 : 사마광(司馬光)의 주에 의하면, 지혜가 밝지 못한 것은 외물에 끌리기 때문이니, 그칠 데에 그치면 속이 밝아서 허물이 없다는 것이다.
[주D-003]초이(初二)는……대기한다 : 《태현경(太玄經)》에는 “차이는 수레가 대기하고 말이 그친다.[次二車軔 俟馬酋止]” 하였는데, 사마광의 주에 의하면, 소인의 지혜는 이치에 밝지 못하니, 그치면 좋고 가면 흉하다는 것이다.
[주D-004]상자[篋] : 《동문선(東文選)》에는 여(廬) 자로 되어있다.
止止軒記
城之東奉香之里之西肘。有草堂數十楹。白雲居士所寄也。身寄而已。心不寄也。居士謂誰。春卿自號也。榜其軒曰止止。居士自名之也。蓋以玄筮之。得止之首而名之也。止之首 人玄陽家八木。曰。初一。止于止。內明無咎。此言君子時止則止。其智之明如水之內朗也。陰陽隔絶。各止其所。故能如水之內自淸明。初二。馬酋止。車軔俟。此言二爲平人。不隱不仕。故車軔俟而馬就止也。居士喜曰。是皆予之志也。予能識其所止而止。則可謂應初一之體。進不急於仕。退不苟於隱。以是而爲平人。則可謂叶初二之辭。予得是而名軒曰止止。果不類予之行藏耶。夫所謂止止者。能知其所止而止之者也。非其所止而止。其止也非止止也。且虎豹麋鹿蛟龍之於藪澤窟穴。識其所止而止之者也。設客行旅寄。以止于城市之中。則人以爲祅。而從而害之必矣。居士之於世。偃蹇寡合。非馴擾之物也。若與人同趨竝騖。以止于名利之域。則是何以異於虎豹麋鹿蛟龍之城市哉。此予所以求其所止而止之者也。不然。祅而害之者至矣。或曰。若子之所言。則必山林窮谷之是處。不與人雜然同域。然後可謂止止矣。今子之所止。乃城市之中。而猶謂之止止。譬之虎豹麋鹿蛟龍之藪澤窟穴。何也。曰。蟲獸之藪澤窟穴。人之城市。亦各其所止之常也。假使人庬然伏藪澤。仄然入窟穴。則亦猶虎豹麋鹿蛟龍之入城市也。毒蟲猛獸。亦必以爲祅。而群而害之矣。人而避人。被蟲獸所害。吾不忍爲也。且人所以忌人規有以害之者。非城市之隘而與處之吝也。徒以競其所求。爭其所利而已。苟與人不爭不競。雖白日有胠吾篋者。避而不見。則人之城市。亦虎豹麋鹿蛟龍之藪澤窟穴也。庸有害之者乎。居士之名軒。蓋以此也。丁卯三月十日。記。
○접과기(接菓記)
일 중에 처음에는 허탄 망괴한 것인 듯하다가 나중에는 진실한 것이 있으니, 그는 바로 과목(菓木)을 접(接)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나의 선군(先君) 때에 키다리 전씨(田氏)라 불리는 이가 과목 접을 잘하였으므로 선인이 시험삼아 접하게 하였다. 동산에 나쁜 배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전씨는 모두 톱으로 자르고 세상에서 유명하다고 한 배나무를 구하여 몇 개의 가지를 깎아서 자른 나무에 꽂고 기름진 진흙으로 봉하였다. 그때에 그것을 보니, 허탄한 것만 같았고, 비록 싹이 뾰족이 나오고 잎이 필 때에 이르러서도 또한 괴이한 요술만 같았다. 그러다가 여름에 지엽이 무성하고 가을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게 된 다음에야 마침내 진실이라는 것을 믿어서, 허탄 망괴하다고 여긴 의심이 비로소 마음에서 없어졌다.
선군이 별세하신 지가 무릇 아홉 해라 나무를 보고 열매를 먹으니, 그 엄하시던 얼굴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고, 혹은 나무를 부여잡고 목이 메어서 차마 떠나지 못한 적도 있다.
또 옛사람은 소백(召伯)과 한 선자(韓宣子)의 일 때문에 감당(甘棠)을 꺾지 않고 아름다운 나무를 잘 북돋아 가꾸는 일이 있었는데, 하물며 아버지가 일찍이 보유하고 계시다가 자식에게 물려주신 이것이야 그 공경하는 마음이 어찌 꺾지 않고 북돋아 심은 그 정도일 뿐이랴? 그 열매도 또한 꿇어앉아서 먹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생각하건대, 선군이 이것을 나에게 물려주신 까닭은, 나로 하여금 개과천선을 마땅히 이 나무처럼 하도록 하신 것이리라. 이에 기록하여 경계하는 바이다.
[주D-001]옛사람은……있었는데 : 주(周) 나라 때 소백(召伯)이 남국(南國)에 가서 문왕(文王)의 정사를 펼 적에 간혹 감당(甘棠 : 팥배나무) 아래에서 쉬는 일이 있었는데, 뒤에 그 지방 사람이 소백의 덕을 사모하여 그 나무를 아꼈다. 《詩經 國風 召南 甘棠》 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한 선자(韓宣子 한기(韓起))가 노(魯) 나라에 사신 가서 “주(周) 나라의 예법이 모두 노 나라에 남아 있구려.” 하고 노 나라를 높이 찬양하니, 계무자(季武子 계손숙(季孫宿))가 “당신이 우리에게 희망을 갖게 해 준 데 대해 사례한다.” 하고, 자기 집으로 한 선자를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한 선자가 이때 계무자의 집에 아름다운 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 그 나무를 칭찬하자, 계무자는, “내가 이 나무를 잘 가꾸어서 당신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 하였다. 《春秋左傳 昭公 2年》
接菓記
事有初若妄誕幻怪。而其終乃眞者。其接菓之謂乎。予先君時。有號長身田氏者善接菓。先君使試之。園有惡梨凡二樹。田氏皆鋸斷之。求世所謂名梨者。斫若干梢。安於斷株。以膏泥封之。當其時見之。似妄誕矣。雖至茸抽葉茁。亦似幻怪矣。及鬱然夏陰茂。蕡然秋實成。然後乃信其終眞者。而妄誕幻怪之疑。始去於心矣。先君沒凡九稔。覩樹食實。未嘗不思嚴顔。或攀樹嗚咽。不忍捨去。且古之人以召伯韓宣子之故。有勿翦甘棠。封植嘉樹者。況父之所嘗有而遺之於子者。其恭止之心。何翅勿翦封植而已哉。其實亦可跪而食矣。抑慮先君以此及予者。豈使予革非遷善。當效玆樹耶。聊志而警之耳。
○사가재기(四可齋記)
옛날 나의 선군(先君)이 서쪽 성곽 밖에 별장을 두었었는데, 계곡이 깊숙하고, 경지가 궁벽하여 즐길 만한 딴세상을 이루어 놓은 것 같았다. 내가 그것을 얻어서 차지하고 자주 왕래하면서 글을 읽으며 한적하게 지낼 곳으로 삼았다. 밭이 있으니 갈아서 식량을 마련하기에 가하고, 뽕나무가 있으니 누에를 쳐서 옷을 마련하기에 가하고, 샘이 있으니 물을 마시기에 가하고, 나무가 있으니 땔감을 마련하기에 가하다. 나의 뜻에 가한 것이 네 가지가 있기 때문에 그 집을 ‘사가(四可)’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또 녹봉이 많고 벼슬이 높아 위세를 부리는 자는 무릇 얻고자 하는 것이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음이 없거니와, 나 같은 사람은 곤궁하여 평생에 백에 하나도 가한 것이 없었는데, 이제 갑자기 네 가지나 가한 것을 차지하였으니, 그 얼마나 참람한 일인가? 대저 태뢰(太牢)를 먹은 것도 명아주국에서 시작하고 천 리를 가는 것도 문 앞에서 시작하니, 대개 점진적으로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집에 거하면서 만일 전원(田園)의 낙을 얻게 되면, 세상 일을 팽개치고 옷을 떨쳐 입고서는 고원(故園)으로 돌아가 늙으면서 태평성세의 농사짓는 늙은이가 되어서, 격양(擊壤)하고 배를 두드리며 성왕의 교화를 가영(歌詠)하여, 그 가영 소리를 관현(管絃)에 올리면 또한 무엇이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일찍이 이 집에서 시 3수를 지었는데, 시집 가운데 있는 ‘서교초당시(西郊草堂詩)’가 바로 그것이다. 그 한 글귀에
쾌하구나 농가의 즐거움이여 / 快哉農家樂
전원에 돌아감이 이제부터 시작된다 / 歸田從此始
하였는데, 이것이 참으로 나의 뜻이다.
모월 모일에 백운거사는 기(記)한다.
[주D-001]태뢰(太牢) : 소ㆍ양ㆍ돼지를 아울러 갖춘 제수(祭需)로, 여기서는 성대한 음식을 말한다.
四可齋記
昔予先君。嘗置別業於西郭之外。溪谷窅深。境幽地僻。如造別一世界。可樂也。予得而有之。屢相往來。爲讀書閑適之所。有田可以耕而食。有桑可以蠶而衣。有泉可飮。有木可薪。可吾意者有四。故名其齋曰四可。且祿豐官重。乘威挾勢者。凡所欲得無一不可於意者。若予則旣窮且困。顧平生百無一可。而今遽有四可。何僭如之。夫大牢之享。始於藜羹。千里之行。起於門前。蓋其漸也。予居是齋也。若有得田園之樂。則其唾棄世網。拂衣褁足。歸老故園。作大平農叟。擊壤鼓腹。歌詠聖化。以被于管絃。亦何有不可哉。嘗於是齋。著詩三首。詩集中有西郊草堂詩是已。其一句云。快哉農家樂。歸田從此始。是眞予志也。某月日。白雲居士。記。
○통재기(通齋記)
여러 사람이 믿어주는 통인(通人) 양생 응재(楊生應才)라는 자가 성(城) 북쪽에 살면서 화목(花木)을 잘 접양(接養)하는데, 그 원림(園林)의 승경이 경도(京都)에서 소문이 났다. 내가 일부러 가 보았더니, 둘러 있는 담만이 쓸쓸할 뿐, 처음에는 소문과 같은 좋은 경치가 없는 듯하였다. 그러다 주인의 안내로 그 동산에 이른 다음, 두루 살피며 좋은 경치가 있는 곳을 찾다가 소문난 곳을 보았더니, 동산의 넓이는 사방이 40보(步) 남짓한데, 진귀한 나무며 유명한 과목들이 늘어서 있되, 가까이 있는 것은 서로 닿지 않고 떨어져 있는 것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이것은 모두 양생이 소밀(疏密)을 고르게 하여 질서가 있게 심은 것이었다. 따로 화단을 만들어 여러 가지 꽃을 심었는데, 꽃이 각각 수십 종으로서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막 피는 것도 있고 이미 떨어진 것도 있어, 숲에 비치고 땅에 수놓여 서로 뒤섞였다. 해에 비친 붉은 꽃송이는 장여화(張麗華)의 아름답게 취한 얼굴과 같고, 이슬에 젖은 꽃송이는 양 귀비(楊貴妃)의 갓 목욕한 몸과 같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는 조비연(趙飛燕)의 가벼운 몸과 같다. 그리고 떨어진 꽃은 신 부인(愼夫人)이 자리에서 물러난 것과 같고, 꽃이 아직 활짝 피지 않은 것은 이 부인(李夫人)이 이불로 가린 것과 같다. 꽃이 이처럼 눈길을 끌기 때문에 그것이 사랑스러워서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풀을 깔고 앉아 한참 동안 구경하고 나서 화단에서 일어나 조금 북쪽으로 갔더니, 석대(石臺)가 있는데, 바둑판과 같이 펀펀하고 또 자리를 깔지 않아도 앉을 정도로 정결하였다. 포도가 나무에 감기어 아래로 늘어진 것은 마치 영락(纓珞)과 같아 사랑스러웠다. 아래에는 석정(石井)이 있어 물맛이 매우 청감(淸甘)한데, 새어나와서는 작은 옹달샘을 이루고 어린 갈대가 뾰족뾰족하게 나기 시작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다시 그 둘레를 조금 높여서 물이 더 고이게 하면 못이 되어서 오리를 기를 수도 있겠다.”하였다. 석대를 되돌아와서 술을 두어 순배 마신 뒤에 주인이 나에게 눈짓을 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 집을 지니고 있으나 아직 표방(標榜)을 마련하지 못한 것은 선생에게 부탁드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한번 수고해 주십시오.”하였다. 그래서 나는 ‘통재(通齋)’라고 이름을 지었다. 대저 도(道)로 말미암아 명관(冥觀 대관(大觀))하여 만 가지의 형체를 모두 없앤다면, 이른바 통(通)과 색(塞)이라는 것을 얻어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천도(天道)로써 논한다면, 일월(日月)ㆍ성수(星宿)ㆍ산천(山川)ㆍ구릉(丘陵)은 물(物)의 커다란 것이다. 그러나 영허(盈虛)ㆍ소식(消息)ㆍ비태(否泰)ㆍ통색(通塞)의 변(變)을 면하지 못하니, 그것은 일찍이 음양(陰陽)의 수(數)를 떠나지 못했기 때문인데, 하물며 그 나머지임에랴?
그렇다면 지경(地境)은 통경(通境)이 되고 싶으나 사람에게 장애를 받으면 연기가 근심하고 달이 슬퍼하므로 마침내 통경이 되지 못할 것이요, 사람은 이미 통인이 되었는데 지경에게 막히는 바가 되면 고인(高人)ㆍ재자(才子)가 외면하고 이르지 않을 것인데, 누가 통인이 있음을 알겠는가? 지금 이 집은 지경이 이미 통하였고 통인이 살고 있으니, 어찌 ‘통(通)’으로 이름을 짓지 않으랴? 비록 사양하고 받지 않으려 하나 어찌 이 이름을 피할 수 있겠는가? 또 천지는 사(私)가 없는데 어찌 양생에게만 천석(泉石)을 사사로이 주며 양생에게만 화류(花柳)를 사사로이 주겠는가? 다만 심장(心匠)의 묘(妙)에 말미암을 뿐이다. 만일 그렇다면 농화(濃花)ㆍ방초(芳草)는 하늘에서 받은 것이 아니라, 양생의 손에서 받은 것이요, 벽정(碧井)ㆍ청천(淸泉)은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양생의 마음에서 나는 것이다. 아, 내가 잘 알 수는 없지만, 이 집이 옛날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을 때에는 땅과 동산이 완속(頑俗)하고 풀과 나무가 황로(荒老)하여 모든 경치가 묻혀서 나타나지 못하였다가 양생을 만난 다음에야 신선의 특별한 동리가 되었다. 가령 양생이 버려두고 살지 않아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된다면 또 어찌 돼지 구유와 말 마구의 땅이 되지 않겠는가? 양생이 또 기(記)를 지어달라고 부탁하므로 눈으로 본 것에 따라 적는다. 양생은 자못 협기(俠氣)를 숭상하여 남의 급한 일을 돕기를 좋아하니, 함께 놀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주D-001]장여화(張麗華)의……같다 : 장여화는 남북조 시대의 진 후주(陳後主)에게 총애받던 미녀이다. 조비연은 한 성제(漢成帝)에게 총애받던 미녀로, 사람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출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한다. 신 부인(愼夫人)은 한 문제(漢文帝)에게 사랑받던 여자로 궁중에 있을 때 언제나 황후와 나란히 앉았었다. 하루는 황제가 상림(上林)에 행행하자 황후와 신 부인이 함께 따라왔다. 이때 상림을 관리하던 낭서장(郞署長) 원앙(袁盎)이 황후의 자리와 신 부인의 자리를 구분해서 깔고 신 부인을 그 낮은 자리로 끌어다 앉혔다. 《漢書 卷49 袁盎傳》 이 부인(李夫人)은 한 무제(漢武帝)가 사랑하던 여자로, 죽을 때에 무제가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자고 하였으나 그녀는 죽을 때의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보이지 않았다.
[주D-002]영락(纓珞) : 보살(菩薩)들이 목이나 팔이 두르는 구슬을 꿴 장식품이다. 영락(瓔珞).
通齋記
衆允通人楊生應才者。卜築于城北。善接養花木。其園林之勝。頗有聞於京都。予遂往觀焉。環堵蕭然而已。初若無奇觀勝致。殊不類所聞者。及主人贊至其園。然後環視周矚。求勝之所從有而得有聞者。則園方可四十步許。有珍木名菓。植植爭立。昵不相侵。離不至迂。是皆生之均疏數而序植者也。別爲塢以居衆花。花各數十種。皆世所罕見。或方開或已落。映林繡地。交錯糾紛。日萼紅。張麗華之嬌醉也。露葩濕。楊貴妃之始浴也。風枝擧。趙飛燕之體輕也。落者如愼夫人之却座。覆者如李夫人之掩被。以花之諭乎目如此。愛之不能移去。藉草良久而後起。自花塢而少北。有石臺平如局。又潔淨可不席而坐。蒲桃之緣樹下垂者。如纓珞然可愛。下有石井。味極淸甘。洩而爲小泓。有稚葦戢戢始生。予曰。更少高其廉。益以渟滀。則可池而放鳧鴨也。還至石臺酒數巡。主人目予曰。僕之有是齋。莫有標榜。若將有待於先生者。請一溷可乎。予於是遂名之曰通齋。夫由道以冥觀。齊泯萬體。則夫所謂通與塞。了不可得見者也。然以天道論之。日月星宿山川丘陵。爲物之巨者也。然未免盈虛消息否泰通塞之變者。由未嘗離陰陽之數故也。況其餘哉。然則境欲爲通境。而爲人所礙。則煙愁月慘。終不爲通境矣。人已爲通人。而爲境所塞。則高人才子北首而莫有至者。孰知有通人哉。今是齋也。境已通而通人居之。盍以通貺名耶。雖欲讓而不受。又焉逃是名哉。且天地無私。豈獨私楊生以泉石。私楊生以花柳歟。直由心匠之妙耳。若爾則濃花芳草。非受於天也。受於楊生之手也。碧井淸泉。非產於地也。產於楊生之心也。噫。吾不知是齋昔爲人有。則地頑園俗。草荒木老。萬景韜晦而不出。及遇楊生。然後爲神仙別洞耶。假使楊生棄而不居。又屬於人。則又焉知不爲豕槽馬廏之地哉。生又乞爲記。故因目之所寓而志之耳。楊生頗尙俠。喜趨人之急。不可不與遊者。
○초당(草堂)의 작은 동산을 손질한 데 대한 기
성 동쪽의 초당(草堂)에 상원(上園)과 하원(下園)이 있는데, 상원은 세로와 가로가 모두 30보(步)나 되고, 하원은 세로와 가로가 겨우 10보쯤 된다. 보(步)는 예전에 밭을 산정하던 방법으로 계산한 것이다. 매년 여름 5~6월이면, 무성한 풀이 자라서 사람의 허리에 닿았는데 그래도 베지 못하였다. 집에는 키 작은 종 3명과 파리한 아이 종 5명이 있는데, 그들은 이것을 보고 부끄럽게 여겨, 무딘 호미 하나로 서로 번갈아가며 풀을 베되, 겨우 3~4보쯤 베면 걷어치우고, 10일이 지난 다음에 또 다른 곳에 난 풀을 베는데, 전에 베었던 곳에 풀이 다시 나서 우북하게 된다. 또 10일이 지난 뒤에 다시 우북한 풀을 베면 풀이 또 뒤에 베었던 곳에 나서 우북하게 된다. 이와 같아 마침내는 다 베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내가 일을 감독하는 것이 해이하고 종들이 힘을 쓰는 것이 게으른 때문이다. 드디어 그들을 용서해 힐책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 아래쪽에 있는 작은 동산을 손질하였다. 작은 동산은 나의 힘으로도 충분하므로 결국 게으른 종들은 그만두게 하고 내가 몸소 손질하였다. 썩은 나무나 더부룩한 풀을 자르되, 낮은 데는 덜 자르고 높은 데는 더 잘라서 바둑판처럼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갈포 옷과 사모를 착용하고 그 위를 거닐며, 대자리와 돌베개를 사용하여 그 가운데 누웠노라면, 숲 그림자는 땅에 흩어지고 맑은 바람은 솔솔 불어온다. 아이는 나의 옷자락을 잡고 나는 아이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며 유쾌한 기분으로 날을 보낼 수 있으니, 이는 또한 한가히 사는 자의 한 낙지(樂地)인 것이다. 아, 30보 되는 동산을 능히 다스리지 못하고 10보 되는 동산으로 범위를 좁힌 다음에야 겨우 다스릴 수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졸자(拙者)의 공효가 아니겠는가?
이것을 미루어 조정으로 옮겨서 생각한다면, 다시 그 직무를 황폐시켜 다스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옛적에 진중거(陳仲擧)는 방 하나 쓸지 않았어도 그 뜻이 원대하였으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말한다면, 대장부의 온축한 뜻을 또한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스스로 웃으면서 사사로이 이것을 기록하고, 이것을 기록하여 보고는 또한 가끔 스스로 크게 웃으니, 웃음이 다시 낙이 된다.
갑인년 5월 23일에 기(記)한다.
[주D-001]진중거(陳仲擧)는……원대하였으니 : 중거(仲擧)는 후한(後漢) 때 진번(陳蕃)의 자(字)이다. 15세 때에 방에 한가히 있으면서 뜰도 쓸지 않았다. 그 아버지의 친구인 설근(薛勤)이, “젊은이는 어찌 청소를 하지 않는가?” 하니, 진번은 “대장부는 마땅히 천하를 청소해야하지, 어찌 방 하나를 청소하겠소?” 하였다. 그는 뒤에 벼슬이 태위(太尉)와 태부(太傅)를 거쳐 고양후(高陽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卷66 陳蕃傳》
草堂理小園記
城東之草堂。有上園下園。上園縱三十步。橫如之。下園。縱橫纔十許步。步則依古算田法而計之也。每夏五六月。茂草競秀。至捋人腰。而猶不使之翦之也。家有矮奴三羸僮五。見之不能無愧。以鈍鋤一事更相刮薙。纔三四步而輟。閱旬日。又理他處。則草生前所理處。蓊然菶然矣。又旬日。復理蓊然菶然者。則草又生後所理處。蓊菶然滋茂矣。如是而終不能盡去焉。此予之督役弛。而奴之用力怠故也。遂貰而不詰。乃自理下之小園。小園力足勝。故遂去怠奴。而躬自理之。剗翦椔蘙。增卑落高。使平如棋局之面焉。於是葛衣紗帽。徙倚乎其上。竹簟石枕。偃臥乎其中。林影散地。淸風自來。兒牽我衣。我撫兒項。煕熙怡怡。足以遣日。此亦閑居者之一場樂地也。嗚呼。有三十步之園。不能勝理。移於十步之地。然後僅能理焉。是豈拙者之效歟。推是而移之朝廷。顧復穢其務而不理耶。然昔陳仲擧不掃一室。其志遠也。由是言之。大丈夫之蓄意。亦豈了言哉。因自笑而私志之。志而觀之。亦往往自大笑。笑復以爲樂也。甲寅五月二十三日。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내가 일찍이 사방을 두루 다녀 무릇 나의 말발굽이 닿는 곳에 만일 이문(異聞)이나 이견(異見)이 있으면, 곧 시(詩)로써 거두고 문(文)으로써 채집하여 후일에 볼 것을 만들고자 하였으니, 그 뜻은 무엇인가? 가령 내가 늙어서 다리에 힘이 없고 허리가 굽어서 거처하는 곳이 방안에 불과하고, 보는 것이 자리 사이에 불과하게 될 때, 내가 손수 모은 것을 가져다가 옛날 젊은날에 분주히 뛰어다니며 유상(遊賞)하던 자취를 보면, 지난 일이 또렷이 바로 어젯일 같아서 족히 울적한 회포를 풀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나의 시집 가운데 강남시(江南詩) 약간 수(首)가 있는데, 이제 와서 그 시들을 읽으면, 당시 노닐던 일이 역력히 마치 눈앞에 있는 듯하다. 그 뒤 5년 후에 전주막부(全州幕府)로 나가 2년 동안에 무릇 유력(遊歷)한 바가 자못 많았다. 그러나 매양 강산(江山)ㆍ풍월(風月)을 만나 휘파람이 겨우 입에서 나올 듯하면 부서(簿書)와 옥송(獄訟)이 번갈아 시끄럽게 침노하여 겨우 1연(聯) 1구(句)를 얻고 그마저 다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았으므로 전편을 얻은 것은 불과 60여 수뿐이었다.
그러나 열군(列郡)의 풍토(風土)와 산천의 형승(形勝)으로 기록할 만한 것이 있으되, 창졸간에 그것을 능히 가영(歌詠)에다 나타내지 못할 경우에는 간략하게 단전(短牋)ㆍ편간(片簡)에 써서 일록(日錄)이라고 하였는데, 거기에는 방언(方言)과 속어(俗語)를 섞어 썼다.
경신년(1200, 신종 3) 계동(季冬) 서울에 들어와 한가히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꺼내 보았더니 너무 소략해서 읽을 수가 없었으니, 자신이 기록한 것인데도 도리어 우습기만 하였다. 그래서 다 가져다가 불살라버리고 그 중에서 한두 가지 읽을 만한 것을 모아서 우선 차례로 적어보겠다.
전주(全州)는 완산(完山)이라고도 일컫는데 옛날 백제국(百濟國)이다. 인물이 번창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고국풍(故國風)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백성들은 질박하지 않고 아전들은 모두 점잖은 사인(士人)과 같아, 행동거지의 신중함이 볼 만하였다.
중자산(中子山)이란 산이 가장 울창하니, 그 고을에서는 제일 큰 진산(鎭山)이었다. 소위 완산(完山)이란 산은 나지막한 한 봉우리에 불과할 뿐인데, 한 고을이 이로써 부르게 된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주 소재지에서 1천 보(步)쯤 떨어진 지점에 경복사(景福寺)가 있고 그 절에는 비래방장(飛來方丈)이 있다. 이것을 내가 예전부터 들었으나 사무에 바빠서 한 번 찾아보지 못하였다가 하루는 휴가를 이용하여 결국 가보았다. 이른바 ‘비래방장’이란 것은 옛날 보덕대사(普德大士)가 반룡산(盤龍山 함흥(咸興)에 있다)으로부터 날려서 옮겨온 당(堂)이다. 보덕(普德)의 자(字)는 지법(智法)인데, 일찍이 고구려 반룡산 연복사(延福寺)에 거처하더니, 하루는 갑자기 제자에게 말하기를, “고구려가 도교(道敎)만을 존숭하고 불법(佛法)을 숭상하지 않으니, 이 나라는 반드시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피난을 해야 하겠는데 어느 곳이 좋을까?”
하자, 제자 명덕(明德)이 말하기를, “전주에 있는 고달산(高達山)이 바로 편안히 머무를 만한 땅입니다.”하였다. 건봉(乾封) 2년(667, 보장왕 26) 정묘 3월 3일에 제자가 문을 열고 나와 보니, 당(堂)이 이미 고달산으로 옮겨갔는데, 반룡산에서 1천여 리의 거리였다. 명덕이 말하기를, “이 산이 비록 기절(奇絶)하기는 하나 샘물이 없다. 내가 만일 스승이 옮겨올 줄 알았더라면 반드시 옛 산에 있는 샘물까지 옮겨왔을 것이다.” 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이 전(傳)을 지어 이에 대한 것을 자세히 기록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약한다. 11월 기사일(己巳日)에 비로소 속군(屬郡)들을 두루 다녀 보았더니, 마령(馬靈)ㆍ진안(鎭安)은 산곡간(山谷間)의 옛고을이라, 그 백성들이 질박하고 미개하여 얼굴은 원숭이와 같고, 배반(杯盤)이나 음식에는 오랑캐의 풍속이 있으며, 꾸짖거나 나무라면 형상이 마치 놀란 사슴과 같아서 달아날 것만 같았다. 산을 따라 감돌아 가서 운제(雲梯)에 이르렀다. 운제에서 고산(高山)에 이르기까지는 높은 봉우리와 고개가 만길이나 솟고 길이 매우 좁으므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고산은 다른 군에 비하여 질이 낮지 않았다. 고산에서 예양(禮陽)으로, 예양에서 낭산(朗山)으로 갔는데, 모두 하룻밤씩 자고 갔다.
다음날 금마군(金馬郡)으로 향하려 할 때 이른바 ‘지석(支石 고인돌)’이란 것을 구경하였다. 지석이란 것은 세속에서 전하기를, 옛날 성인(聖人)이 고여놓은 것이라 하는데, 과연 기적(奇迹)으로서 이상한 것이 있었다.
다음날 이성(伊城)에 들어가니, 민호(民戶)가 조잔(凋殘)하고 이락(籬落)이 소조(蕭條)하여 객관(客館)도 초가(草家)요, 아전이라고 와 뵙는 자는 4~5인에 불과하였으니, 보기에 측은하고 서글펐다.
12월에 조칙(朝勅)을 받들어 변산(邊山)에서 벌목(伐木)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변산이란 곳은 우리나라의 재목창(材木倉)이다. 궁실(宮室)을 수리 영건하느라 해마다 재목을 베어내지만 아름드리 나무와 치솟은 나무는 항상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벌목하는 일을 항시 감독하므로 나를 ‘작목사(斫木使)’라고 부른다. 나는 노상에서 장난삼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군사 거느리고 권세부리니 그 영화 자랑할 만한데 / 權在擁軍榮可詑
벼슬 이름 작목사라 하니 수치스럽기 그지없네 / 官呼斫木辱堪知
이는 나의 맡은 일이 담부(擔夫)ㆍ초자(樵者)의 일과 같기 때문이다.
정월 임진일(壬辰日)에 처음 변산에 들어가니, 층층한 봉우리와 겹겹한 멧부리가 솟았다 엎뎠다 구부렸다 폈다 하여, 그 머리나 꼬리의 놓인 곳과 뒤축과 팔죽지의 끝난 곳이 도대체 몇 리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옆에 큰 바다가 굽어보이고 바다 가운데는 군산도(群山島)ㆍ위도(猬島)ㆍ구도(鳩島)가 있는데, 모두 조석으로 이를 수가 있었다. 해인(海人)들이 말하기를, “순풍을 만나 쏜살같이 가면 중국을 가기가 또한 멀지 않다.”고 한다. 산중에는 밤[栗]이 많은데 이 고장 사람들이 해마다 이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얼마쯤 가노라니, 수백 보 가량 아름다운 대나무가 마치 삼대처럼 서 있는데, 모두 울타리로 막아놓았다. 대숲을 가로질러 곧장 내려가서 비로소 평탄한 길을 만났다. 그 길로 가서 한 고을에 이르렀더니, 거기는 바로 보안(保安)이란 곳이었다.
밀물이 들어올 때는 평탄한 길이라도 순식간에 바다가 되므로 조수의 진퇴를 보아서 다니는 시기를 정해야 한다. 내가 처음 갈 때에는 조수가 막 들어오는데 사람이 선 곳에서 오히려 50보 정도의 거리는 있었다. 그래서 급히 채찍질하여 말을 달려서 먼저 가려고 하였더니, 종자(從者)가 깜짝 놀라며 급히 말린다. 내가 듣지 않고 그냥 달렸더니, 이윽고 조수가 쿵쾅 하고 휘몰아 들어오는데, 그 형세가 사뭇 만군(萬軍)이 배도(倍道)로 달려오는 듯하여 매우 겁이 났다. 내가 넋을 잃고 급히 달려 산으로 올라가서 겨우 화는 면하였으나, 조수가 거기까지 따라와서 말의 배에 넘실거린다. 푸른 물결, 파란 멧부리가 숨었다 나타났다 하고, 음청(陰晴)ㆍ혼조(昏朝)에 경상(景狀)이 각기 다르며, 구름과 노을이 붉으락푸르락 그 위에 둥실 떠 있어, 아스라이 만첩(萬疊)의 화병(畫屛)을 두른 듯하였다. 눈을 들어 그 경치를 바라볼 때 시를 잘하는 두세 명과 더불어 말고삐를 나란히하고 가면서 함께 읊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그러나 만경(萬景)이 넋을 건드리매 정서(情緖)가 스스로 뒤흔들려서 시를 지을 생각을 하지 않는데도 나도 모르게 시가 저절로 지어졌다. 일찍이 주사포(主史浦)를 지날 때 밝은 달이 고개에 올라 해변의 모래 벌판을 휘영청 비추어서 기분이 상쾌하기에 고삐를 놓고 천천히 가며 앞으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침음(沈吟)하였더니 마부가 이상히 여겼는데, 그러는 중에 시 한 수를 지었었다…….
윤12월 정미에 또 조정의 영을 받아 여러 고을의 원옥(冤獄)을 감찰하게 되어 먼저 진례현(進禮縣 금산(錦山))으로 향하였다. 산이 매우 높고 들어갈수록 점점 깊숙하여 마치 딴나라의 별경을 밟는 듯하여, 마음이 울적하고 무료하였다. 낮이 지나서야 비로소 군사(郡舍)에 들어가니, 현령(縣令)과 수리(首吏)가 모두 부재중이었다. 밤 2경(更) 무렵에 현령과 수리가 각기 8천 보 밖에서 헐떡거리면서 달려왔다. 그들은 문기둥에 말을 매어놓고 여물을 주지 못하게 경계하였다. 무릇 매우 달린 말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는 척하면서 들었다. 그 두 사람이 이 노부(老夫)를 돌보는 데 정성을 다하는 것을 알고서는 부득이 술자리를 허락하였다. 한 기생이 비파(琵琶)를 타는데, 꽤 들을 만하였다. 내가 다른 고을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다가 여기에 와서 유쾌히 마시고 또 현악(絃樂) 소리를 들었으니, 그것은 아마 머나먼 길을 달려왔으므로 마치 딴나라에 들어온 기분으로 사물을 보고 쉽게 감동되어 그런 것이리라.
진례현에서 떠나 남원부(南原府)에 이르렀다. 남원은 옛날의 대방국(帶方國)이다. 객관(客館) 뒤에 죽루(竹樓)가 있는데, 한적하여 사랑스럽기에 하룻밤을 자고 떠났다.
경신년 춘3월에 또 바다를 따라 배를 조사할 때 수촌(水村)ㆍ사호(沙戶)ㆍ어등(漁燈)ㆍ염시(鹽市)를 유열(遊閱)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만경(萬頃)ㆍ임피(臨陂)ㆍ옥구(沃溝)에 들러 며칠을 묵고 떠나 장사(長沙)로 향하였다. 길가에 한 바위가 있고 바위에 미륵상(彌勒像)이 우뚝 서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위를 쪼아 만든 것이었다. 그 미륵상에서 몇 보 떨어진 지점에 또 속이 텅 빈 큰 바위가 있었다. 그 안을 경유하여 들어갔더니, 땅이 점차 넓어지고 위가 갑자기 환하게 트이며 집이 굉장히 화려하고 불상이 준엄하게 빛났는데 그것이 바로 도솔사(兜率寺)였다. 날이 저물기에 말을 채찍질해 달려서 선운사(禪雲寺)에 들어가 잤다.
다음날 장사에 들렀다 장사에서 떠나 무송(茂松)에 이르렀는데, 모두 잔폐(殘弊)한 작은 고을인지라, 기록할 만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다만 바다를 따라 배를 조사하고 척수를 계산했을 뿐이다.
평소에 샘 하나 못 하나를 만나면 움켜마시기도 하고 헤엄치기도 하여 그지없이 애완(愛翫)하였던 것은, 강해(江海)를 그리워하되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바다와 함께 노닌 지 오래라,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물이요, 귀에 들리는 것도 역시 물이 고함치는 소리이므로 싫증이 날 지경이다.
왜 하느님은 마치 배고픈 자를 갑자기 배불리 먹여서 도리어 맛있는 음식을 물리치게 하는 것처럼 이같이 실컷 먹이는가?
이해 8월 20일은 내 선군(先君)의 기일(忌日)이었다. 하루 앞서 변산 소래사(蘇來寺)에 갔는데, 벽 위에 고(故) 자현거사(資玄居士)의 시가 있으므로 나도 2수를 화답하여 벽에 썼다.
다음날 부령 현령(扶寧縣令) 이군(李君) 및 다른 손님 6~7인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었다. 듣건대, 이따금 범과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속어에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이가 옛날 머물던 곳이다. 원효(元曉)가 와서 살자 사포(蛇包)가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던 중, 이 물이 바위 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8척쯤 되는데,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해어진 누비옷에 도모(道貌)가 고고(高古)하였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內室)과 외실(外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佛像)과 원효의 진용(眞容)이 있고, 외실에는 병(甁)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만이 있을 뿐, 취구(炊具)도 없고 시자(侍者)도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齋)에 참여할 뿐이라 한다. 나의 배리(陪吏)가 슬그머니 나에게 말하기를, “이 대사는 일찍이 전주에 우거했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힘을 믿고 횡포하매, 사람들이 모두 성가시게 여기더니 그 뒤 간 곳을 몰랐는데, 지금 보니 바로 그 대사이옵니다.”하였다. 내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대저 중품ㆍ하품의 사람은 그 기국이 일정하기 때문에 변동이 없지만, 악(惡)으로써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자는 그 기국이 보통 사람과 다르므로 한번 선(善)으로 돌아오면 반드시 이처럼 초월하는 것이다. 옛날에 사냥하던 장수가 우두 이조대사(牛頭二祖大士)를 만나 허물을 고치고 선을 닦아 마침내 숙덕(宿德)을 이루었고, 해동(海東)의 명덕대사(明德大士)도 매사냥을 하다가 보덕성사(普德聖師)의 고제(高弟)가 되었으니, 이런 유로 미루어본다면, 이 대사가 마음을 고쳐 개연(介然)히 특이한 행실을 닦게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하였다.
또 이른바 ‘불사의 발장(不思議方丈)’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서 구경하였는데, 그 높고 험함이 효공의 방장의 만배였고 높이 1백 척쯤 되는 나무사다리가 곧게 절벽에 걸쳐 있었다. 3면이 모두 위험한 골짜기라, 몸을 돌려 계단을 하나씩 딛고 내려와야만 방장에 이를 수가 있다. 한번만 헛디디면 다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나는 평소에 높이 한 길에 불과한 누대(樓臺)를 오를 때도 두통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아찔하여 굽어볼 수 없던 터인데, 이에 이르러는 더욱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들어가기도 전에 머리가 벌써 빙 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 승적(勝跡)을 익히 들어오다가 이제 다행히 일부러 오게 되었는데, 만일 그 방장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또 진표대사(眞表大士)의 상(像)을 뵙지 못한다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그래서 어정어정 기어 내려가는데, 발은 사다리 계단에 있으면서도 금방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들어가서 부싯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향(香)을 피우고 율사(律師)의 진용(眞容)에 예배하였다. 율사는 이름이 진표(眞表)이며 벽골군(碧骨郡) 대정촌(大井村) 사람이다. 그는 12살 때 현계산(賢戒山) 불사의암(不思議巖)에 와서 거처하였는데 현계산이 바로 이 산이다. 그는 명심(冥心)하고 가만히 앉아 자씨(慈氏 미륵보살)와 지장(地藏 지장보살)을 보고자 하였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자 이에 몸을 구렁에 던지니, 두 명의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손으로 받으면서 말하기를, “대사의 법력(法力)이 약한 때문에 두 성인이 보이지 않습니다.”하였다. 그래서 그는 더욱 노력하여 삼칠일(三七日)에 이르니, 바위 앞 나무 위에 자씨와 지장이 현신(現身)하여 계(戒)를 주고, 자씨는 친히 《점찰경(占察經)》 2권을 주고 아울러 1백 99생(栍)을 주어 도왕(導往 중생을 인도해 감)의 도구로 삼게 하였다. 그 방장은 쇠줄로 바위에 박혀 있기 때문에 기울어지지 않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바다 용이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돌아오려 할 때 현재(縣宰)가 한 산꼭대기에 술자리를 베풀고는 말하기를, “이것이 망해대(望海臺)입니다. 제가 공(公)을 위로하고자 먼저 사람을 시켜서 자리를 베풀고 기다리게 했으니, 잠깐 쉬십시오.”하였다. 내가 드디어 올라가서 바라보니, 큰 바다가 둘러 있는데, 산에서 거리가 겨우 백여 보쯤 되었다. 한 잔 술, 한 구 시를 읊을 때마다 온갖 경치가 제 스스로 아양을 부려 도무지 인간 세상의 한 점 속된 생각이 없어 표연히 속골(俗骨)을 벗고 날개를 붙여 육합(六合) 밖으로 날아나가는 듯, 머리를 들어 한 번 바라보니 장차 뭇 신선을 손짓하여 부를 듯하였다. 동석한 10여 인이 다 취하였는데, 내 선군의 기일(忌日)이므로 관현(管絃)과 가취(歌吹)만이 없을 뿐이었다.
무릇 내가 지난 곳에 기록할 만한 것이 없으면 적지 않았다. 대저 경사(京師)를 몸으로 보고 사방(四方)을 지체(支體)로 보면, 내가 노닌 곳은 남도의 한쪽, 한 지체 중에도 한 손가락일 뿐이다. 하물며 이 기록은 다 잊고 빠뜨린 나머지인데 어찌 후일의 볼 만한 것이 되랴? 우선 이것을 간직하여, 뒤에 동서남북을 모조리 노닐며 온통 기록할 때를 기다렸다가 합하여 1통(通)을 만들어서 늘그막에 소일할 자료를 삼는 것도 또한 좋지 않겠는가?
신유년 3월 일에 쓴다.
南行月日記
予嘗欲遊踐四方。凡吾馬足之所到。若有異聞異見。則詩以拾文以採。以爲後日之觀。其意何哉。假得老以至脚衰腰僂。所處不過房櫳之內。所見不出衽席之間。則取吾手集。覩昔少壯時奔馳步驟遊賞之跡。赫赫若前日事。尙足以舒暢其幽鬱也。予詩集中有江南詩若干首。至今讀其詩。則當日之遊。了了然若在眼前矣。後五載。出補全州幕府。二年間凡所遊歷。頗亦多矣。然每遇江山風月。嘯才出吻。而簿書獄訟。來相侵軼。止得一聯一句。而其不能卒就者多。故所得全篇。不過六十餘首。然列郡風土山川形勝。有所可記。而倉卒不能形于歌詠。則草草書于短牋片簡。目爲日錄。雜用方言俗語也。及庚申季冬。入洛閑居。始出而見之。莽莽焉不可讀之。其所自爲而反自笑也。盡取而焚棄之。拾一二可讀者。姑次而記之云。夫全州者。或稱完山。古百濟國也。人物繁浩。屋相櫛比。有故國之風。故其民不椎朴。吏皆若衣冠士人。進止詳審可觀。有中子山者。最蓊鬱。州之雄鎭也。其所謂完山者。特一短峯耳。異哉。一州之以此得號也。距州理一千步。有景福寺。寺有飛來方丈。予自昔聞之。以事叢務劇。不得一訪。一日。因休暇遂往觀焉。所謂飛來方丈者。昔普德大士自盤龍山飛來之堂也。普德字智法。嘗居高句麗盤龍山延福寺。一日。忽謂弟子曰。句麗唯尊道敎。不崇佛法。此國必不久矣。安身避難。有何處所。弟子明德曰。全州高達山。是安住不動之地。乾封二年丁卯三月三日。弟子開戶出見。則堂已移於高達山。距盤龍一千餘里也。明德曰。此山雖奇絶。泉水枯涸。我若知師移來。必幷移舊山之泉矣。崔致遠作傳備詳。故於此略之。十一月己巳。始歷行屬郡。則馬靈,鎭安。山谷間古縣也。其民質野。面如獼猴。杯盤飮食腥膻。有蠻貊風。有所訶詰。則狀若駭鹿然。似將奔遁也。循山繚繞而行。乃得至於雲梯。自雲梯至高山。危峯絶嶺。辟立萬仞。路極窄。下馬而後行。高山於他郡中。頗爲不陋。自高山至禮陽。自禮陽至朗山。皆一宿而去。明日將向金馬郡。求所謂支石者觀之。支石者。俗傳古聖人所支。果有奇迹之異常者。明日。入伊城。民戶凋耗。籬落蕭條。客館亦草覆之。吏之來者。不過纍纍四五人而已。見之惻然可傷。十二月。奉朝勑。課伐木邊山。邊山者。國之材府。修營宮室。靡歲不採。然蔽牛之大。干霄之幹。常不竭矣。以其常督伐木。故呼予曰斫木使。予於路上。戲作詩曰。權在擁軍榮可詑。官呼斫木辱堪知。以類於擔夫樵者之事故也。正月壬辰。初入邊山。層峯複岫。昂伏屈展。其首尾所措。跟肘所極。不知幾許里也。旁俯大海。海中有群山島猬島鳩島。皆朝夕所可至。海人云。得便風直若激箭。則其去中國。亦不遠也。山中尤多栗。一方之人。歲相資以爲食焉。行若干里。有美箭植植立如麻。僅數百步。皆以樊籬障之。絶竹林直下。始得平路。行至一縣。曰保安者也。方潮汐之來。雖平路。忽漫然爲江海。故候潮之進退。以爲行期。予始行也。潮方來。尙去人五十許步。於是促鞭馳馬欲先焉。從者愕然急止之。予不聽猶馳之。俄而崩奔蹴踏而至。其勢若萬軍倍道趨來。穹豐然甚可畏也。予然急走登山。而後僅得免焉。然亦能追及而蕩馬腹也。其或蒼波翠巘。隱見出沒。陰晴昏旦。每各異狀。雲霞綵翠。浮動乎其上。縹緲如萬疊畫屛。擧目眺賞。恨不與二三子之能詩者齊轡而同吟也。然萬景觸惱。使人情張王。初不思爲詩。不覺率然自作也。嘗過主史浦。明月出嶺。晃映沙渚。意思殊蕭洒。放轡不驅。前望蒼海。沈吟良久。馭者怪之。得詩一首云云。閏十二月丁未。又承朝旨。監諸郡冤獄。先指進禮縣。山極高。入之漸幽奧。如蹈異邦別境。邑邑然意漸無聊。日過午。始入郡舍。令尉皆不在。夜二更許。令尉各自八千步許。皆奔喘而來。以馬縛懸於門柱。戒人不給蒭粟。凡馬之極於馳者不如是。恐斃也。予陽睡而聞之。知二君顧老夫頗誠。故不得已聽置酒。有妓彈琵琶。頗可聽。予於他郡不飮。至是稍痛飮。又聽絃聲。豈以路遠境絶。如入異邦。而觸物易感之然耶。自進禮至南原府。南原。古帶方國也。客館後有竹樓。閑敞可愛。一宿而去。庚申春三月。又沿水課船。凡水村沙戶漁燈鹽市。無不遊閱。入萬頃,臨陂,沃溝。凡留數日而行。將指長沙。有一巖。巖有彌勒像。挺然突立。是因巖鑿出者。距其像若干步。又有巨巖枵然中虛者。自其中入之。地漸寬敞。上忽通豁。屋宇宏麗。像設嚴煥。是兜率寺也。日侵暮。促鞭絶馳。入禪雲寺宿焉。明日入長沙。自長沙到茂松。皆殘敗小郡。事亦無可記者。但沿江問船計艘而已。平昔遇一泉一池。挹酌游泳。愛翫不足者。慕江海而不見故也。今竝海久矣。態於目者。皆水也。聲於耳者。亦水之哮怒也。則倦然已猒見矣。何天之餉人驟過。如使飢者暴飽。而反猒見甘旨耶。是年八月二十日。予先君諱旦也。先一日遂往邊山蘇來寺。壁上有故資玄居士詩。予亦和二首書于壁。明日。與扶寧縣宰李君及餘客六七人至元曉房。有木梯高數十級。疊足凌兢而行。乃得至焉。庭階窓戶。上出林杪。聞往往有虎豹攀緣而未上者。傍有一庵。俗語所云蛇包聖人所昔住也。以元曉來居故。蛇包亦來侍。欲試茶進曉公。病無泉水。此水從巖罅忽湧出。味極甘如乳。因嘗點茶也。元曉房才八尺。有一老闍梨居之。庬眉破衲。道貌高古。障其中爲內外室。內室有佛像元曉眞容。外則一甁雙屨茶瓷經机而已。更無炊具。亦無侍者。但於蘇來寺。日趁一齋耳。予陪吏竊語予曰。此師嘗遇全州。所至恃力橫暴。人皆病之。其後莫知所去。今見之則其師也。予歎曰。夫中下人。其器有常。故滯而莫遷。凡以惡駭人者。器必有異於人。故其反於善。必岌岌超卓如此者。昔有獵將遇牛頭二祖大士。改過修善。卒成宿德。海東明德大士。亦自捉鷹。爲普德聖師之高弟。推此類言之。此師之折節易行。介然有殊行。殊不爲怪也。又問所謂不思議方丈者求觀之。其高險萬倍於曉公方丈。有木梯高可百尺。直倚絶壁。三面皆不測之壑。回身計級而下。乃得至於方丈。一失足則更無可奈何矣。予平日登一臺一樓高不過尋丈者。以頭病故。猶眩眩然不得俯臨。至是益悚然股抃。未入而頭已旋矣。然自昔飽聞勝跡。今幸特來。若不入見其方丈。又不得禮眞表大士之像。則後必悔矣。於是盤桓蒲北而下。足猶在級而若將已墮者。遂入焉。敲石取火。焚香禮律師眞容。律師者。名眞表。碧骨郡大井村人也。年十二。來棲賢戒山不思議巖。賢戒山者。卽此山是已。眞心宴坐。欲見慈氏地藏。踰日不見。乃投身絶壑。有二靑衣童子以手奉之曰。師法力微小。故二聖不見也。於是努力益勤。至三七日。巖前樹上。有慈氏地藏現身授戒。慈氏親授占察經二卷。幷與一百九十九栍。以爲導往之具。其方丈。以鐵索釘巖故不欹。俗傳海龍所爲也。將還。縣宰置酒一巓曰。此望海臺也。吾欲勞君。先使人設席而待。請小休焉。予遂登眺。則大海周廻。距山才百餘步。每一杯一詠。萬景自媚。殊無人世間一點塵思。飄然若蛻俗骨傅羽翰。飛出六合之外。而擧首一望。若將以手招群仙也。坐者十餘人皆醉。以予先君諱日故。但無管絃歌吹耳。凡所歷無可記則不載。夫以京師爲身。以四方爲支。則予所遊者。南道之一偏。而特一支之一指耳。況此錄也皆忘漏剗削之餘。烏足爲後日之觀乎。姑藏之。以待東西南北之窮遊極踐。摠記備錄。然後合爲一通。以爲老境忘憂之資。不亦可乎。辛酉三月日。志。
○태재기(泰齋記)
대저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은 사람의 상정이다. 귀로는 시끄러운 소리가 싫어서 맑게 흐르는 물소리를 듣지 않고, 눈으로는 화려한 것이 싫어서 푸른 산빛을 보지 않는다면, 번거로운 마음이 때로 싹트는 것이다. 그러나 산수의 좋은 경치를 먼 곳에서 구하기는 쉬우나 가까운 곳에서 구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성중(城中)에서 구하여 얻지 못하면 교외(郊外)에서 구하고 교외에서도 얻지 못하면 그때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오직 비둔(肥遯)을 사모하고 독선(獨善)을 즐거워하여 세속과 떨어져 원유(遠遊)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 이런 때문에 산수를 몹시 사랑하는 사람은 부귀의 낙을 누릴 수 없고, 부귀를 매우 즐기는 사람은 산수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없으며 이를 겸하는 자가 적다.
지금 지주사(知奏事) 우공(于公)이 부귀를 누리면서 산수의 아름다움을 얻으려 하되, 제성(帝城)도 오히려 멀다 하여 마침내 대궐 곁에 터를 잡아 집을 지었으니, 이는 옛날 정 원외(鄭員外 원외는 벼슬 이름)가 살던 곳이다. 당시에는 황무한 동산과 잔폐한 별장뿐이었는데, 공이 얻은 뒤에는 샘물 줄기를 찾아 돌을 쌓아 우물을 만들어서 마시고, 세수하고, 차 끓이고, 약 달이는 수용을 모두 이 우물로 하며, 샘이 넘쳐 흐르는 것을 이용하여 저수해서 큰 못을 만들어 연꽃을 가득 심고, 거위와 오리를 그 가운데 놓아 길렀다. 심지어 풍헌(風軒)ㆍ수사(水榭)ㆍ화오(花塢)ㆍ죽각(竹閣)까지도 그 제도를 사치하게 하였으니, 삼십육동(三十六洞)의 경치를 모조리 주문(朱門)ㆍ화옥(華屋)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어찌 반드시 비돈(肥遯)하고 원유(遠遊)한 연후에야 산수의 낙을 누릴 수 있으랴?
공(公)이 높은 구릉(丘陵)의 평평한 것을 가리켜, 이것은 나의 망궐대(望闕臺)라 하였다. 내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뜻이 있구나, 공이 이 대를 이름지은 것이. 지금 공이 후설(喉舌 승지)의 책임을 맡아, 조석으로 용안(龍顔)을 가깝게 모시는데도 오히려 부족하다 하여 사는 곳을 대궐에 가깝게 하고, 그래도 또 부족하게 여기어 망궐대를 이루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옛사람이 말한 ‘마음이 왕실(王室)에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과 같다.”하였다.
또 우뚝 솟은 것을 가리켜, 망월대(望月臺)라 하고, 날개치며 나는 듯한 것을 가리켜 쾌심정(快心亭)이라 하고, 따라서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름지은 것은 이와 같네. 내가 아직 이름짓지 못한 것을 그대가 나를 위하여 지어 주게.”하였다. 내가 이름짓기를, 동산은 방화(芳華), 우물은 분옥(噴玉), 못은 함벽(涵碧), 죽헌(竹軒)은 종옥(種玉)이라 하였으니, 모두 그 형상을 말한 것이다. 총합하여 그 재(齋)를 태(泰)라고 이름하였다. 《주역》 태괘(泰卦)에 이르기를, “천지가 사귀어 만물이 통하고 상하가 사귀어 그 뜻이 동일하다.”하였는데, 지금 공이 군자의 도(道)가 성한 때를 당하여 임금을 도와 뜻을 같이하고, 지나친 점을 제재하고 미급한 점을 도와서 만물로 하여금 크게 통하고 천지로 하여금 교태(交泰)하게 한 다음,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이 우유(優游)한 낙을 얻었으니, 내가 태(泰)로써 재를 이름한 것이 적중하지 않는가?
이에 앞서 공이 내한(內翰) 이미수(李眉叟 이인로(李仁老))로 하여금 쾌심정기(快心亭記)를 짓게 하여, 이미 생견(生絹)으로 만든 장자(障子)에 써서 정자의 바른편에 세우고, 또 나에게 이 기(記)를 짓게 하여 그 왼편에다 마주 세우려 하니, 그의 호사(好事)함이 이와 같다. 미수는 문장에 뛰어난 사람이라, 물건을 형상한 것이 치밀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단지 이름지은 까닭만을 서술할 뿐이다.
[주D-001]비둔(肥遯) : 여유 있는 은둔이란 뜻이다. 《주역》둔괘(遯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에 “여유 있는 은둔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肥遯旡不利]” 하였다.
[주D-002]독선(獨善) : 자기 일신만을 수양함을 말한다. 《맹자(孟子)》진심( 盡心) 상에 “궁하면 그 몸만을 수양한다.[窮則善其身]” 하였다.
[주D-003]삼십육동(三十六洞) : 여기서는 삼십육동천(三十六洞天)의 약칭으로, 온 천하라는 뜻인 듯하다.
泰齋記
夫緣境而漸染者。人之情也。耳猒嘈哳而不聞淸溜之聲。目倦華靡而不矚靑山之色。則煩滯之心。有時而萌矣。然山水之勝。求諸遠則易。求諸近則難。故求之城中而未得。則之郊圻之外。之郊圻之外而未得。則尙無可奈何矣。惟其慕肥遁樂獨善。高蹈遠遊者然後得之也。是以。愛山水之篤者。不可享富貴之樂。嗜富貴之深者。不得致山水之美。而兼之者鮮矣。今知奏事于公居富貴之中。致山水之美。以帝城猶謂之遠。遂卜於帝闕之傍。是昔鄭員外所居也。當時茂苑殘莊而已。公得之。尋泉脈之攸出。築石而甃之。凡飮吸盥漱。煎茶點藥之用。皆仰此井。因泉之汎濫者。瀦作大池。被以菱芡。放鵝鴨其中。至於風軒水榭花塢竹閣。無不侈其制。使三十六洞之景。盡入於朱門華屋之內矣。又何必肥遁遠遊。然後享山水之樂耶。公指崇丘之亞然者曰。此予之望闕臺也。予歎曰。旨哉。公之名是臺也。今公以喉舌之任。朝夕密邇龍顔。猶謂之未足居。必近於帝闕。又尙以爲未足。而乃成望闕之臺。此眞古所謂心罔不在王室者也。又指岌然高者曰望月臺也。翼然如飛者曰快心亭也。因謂予。曰予之標榜也如是。予所未名者。子爲我名之也。予謹名其園曰芳華。井曰噴玉。池曰涵碧。竹軒曰種玉。皆言其狀也。摠而名其齋曰泰。易泰卦。有之曰天地交而萬物通。上下交而其志同。今公當君子道長之時。佐王同志財成輔相。使萬物大通而天地交泰。然後體逸心泰。得此優游之樂。則吾以泰名齋。不中的歟。先是。公使內翰李眉叟記快心亭。已書于生絹障子。立其亭之右。又使予作此記。欲對峙於其左。其好事如此。眉叟。文之雄者也。狀物周悉。故於此略之。第敍所以名之之意耳。
○소금(素琴)의 등에 새기는 데 대한 지(志)
《풍속통(風俗通)》에 이르기를, “거문고는 악(樂)의 으뜸이라, 군자가 항시 사용하여 몸에서 떠나지 않는다.”하였다. 나는 군자가 아니지만 오히려 소금(素琴) 하나를 간직하고 줄도 갖추지 않고서 어루만지며 즐겼더니, 어떤 손이 이것을 보고 웃고는 따라서 5현(絃)을 갖추어 준다. 나는 사양치 않고 받아서 이에 장측(長側)ㆍ단측(短側)으로 타며 대소의 놀이에서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
옛날 도잠(陶潛)은 무현금(無絃琴)을 두어 그에 의해 뜻을 밝힐 뿐이었는데, 나는 구구한 이 거문고를 가지고 그 소리를 들으려 하니, 도잠에게 미치지 못한 점이 멀다. 그러나 내 스스로 즐기는 것인데, 어찌 반드시 옛사람을 본받아야 하겠는가? 한 잔 마시고 한 곡조 타서 이것으로 가락을 삼으니, 이것 또한 일생을 보내는 한 가지의 낙이다.
드디어 그 등에 ‘백운거사금(白雲居士琴)’이라고 새겼는데, 그것은 이후에 이것을 보는 자로 하여금 아무의 손을 거친 것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주D-001]도잠(陶潛)은……뿐이었는데 : 도잠은 음률도 모르면서 줄 없는 거문고 하나를 비치하고는 술에 취할 때마다 그것을 타서 그 뜻을 밝혔다 한다. 《文選 陶靖節傳》
素琴刻背志
風俗通曰。琴者。樂之統也。君子所常御不離於身者也。予非君子人也。尙蓄一素琴。絃㢩不具。猶撫而樂之。客有見而笑者。因具五絃以與之。予授之不辭。於是。彈爲長側短側大遊小遊。凡皆如意也。昔陶潛有無絃琴。寓意而已。予以區區此一蛹絲。要聽其聲。則其不及陶潛遠矣。然予自樂之。何必效古人哉。酌一杯弄一曲。以此爲率。是亦遣一生之一樂也。遂刻其背曰白雲居士琴。欲使後之見者知某之手段所嘗經也。
○사륜정기(四輪亭記)
승안(承安) 4년(1199, 신종 2)에 내가 처음으로 설계를 하여 사륜정(四輪亭)을 동산 위에 세우려 하였는데, 마침 전주(全州)로 부임하라는 명이 있어서 이룩하지 못하고, 그 뒤 신유년에 전주로부터 서울에 와서 한가하게 지내던 중에 바야흐로 지으려고 하였으나 또 어머니의 병환으로 성취하지 못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성취하지 못하고 또 설계한 계획을 잃을까 염려하여 드디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대저 사륜정이라 한 것은 농서자(隴西子 이규보)가 설계하고 아직 짓지는 못한 것이다. 여름에 손님과 함께 동산에다 자리를 깔고 누워서 자기도 하고, 앉아서 술잔을 들기도 하고, 바둑도 두고 거문고도 타며 뜻에 맞는 대로 하다가 날이 저물면 파한다. 이것이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햇볕을 피하여 그늘로 옮기면서 여러 번 그 자리를 바꾸는 까닭에 거문고ㆍ책ㆍ베개ㆍ대자리ㆍ술병ㆍ바둑판이 사람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지므로 자칫 잘못하면 떨어뜨리는 수가 있다. 그래서 비로소 설계하여 사륜정을 세우려고 하는데, 아이 종으로 하여금 이것을 밀어 그늘진 곳으로 옮기게 하면, 사람과 바둑판ㆍ술병ㆍ베개ㆍ대자리가 모두 한 정자를 따라서 동서로 이동하게 되리니, 어찌 이리저리 옮기는 것을 꺼려하랴? 지금은 비록 성취하지 못하나 뒤에 꼭 지을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그 형상을 자세히 설명하려 한다.
바퀴를 넷으로 하고 그 위에 정자를 짓되, 정자의 사방이 6척이고 들보가 둘, 기둥이 넷이며, 대나무로 서까래를 하고 대자리를 그 위에 덮는데 그것은 가벼움을 취한 것이다. 동서가 각각 난간 하나씩이요, 남북이 또한 같다. 정자가 사방이 6척이니 그 칸수를 총계하면 모두가 36척이다. 그림을 그려서 시험해 보리라.
세로 가로를 계산하면 모두가 6척인데, 그 평방이 바둑판 같은 것이 정자이다. 판국 안에 또 둘레로 돌아가며 자로 헤아려보면 한자의 평방이 바둑판의 정간과 같다. 정간[罫]이란 선(線)사이의 정(井) 자처럼 네모 반듯한 것이다. 정간이 각각 1평방척이니, 36정간은 곧 36평방척이다. 여기에 여섯 사람을 앉게 하는데, 두 사람이 동쪽에 앉되 4평방 정간을 차지하고 앉는다. 세로 가로가 모두 2척인데 두 사람의 분을 총계하면 모두가 8평방척이다. 나머지 4평방 정간을 쪼개어 둘로 만들면 각각 세로가 2평방척이다. 2평방척에다가는 거문고 하나를 놓는다. 짧은 것이 흠이라면 남쪽 난간에 걸쳐서 반쯤 세워둔다. 거문고를 탈 적에는 무릎에 놓는 것이 반은 된다. 2평방척에다가는 술동이ㆍ술병ㆍ소반그릇 등을 놓아 두는데, 동쪽이 모두 12평방척이다. 두 사람이 서쪽에 앉는 데도 또한 이와 같이 하고, 나머지 4평방 정간은 비워 두어서 잠깐씩 왕래하는 자는 반드시 이 길로 다니게 한다. 서쪽도 모두 12평방척이다.
한 사람은 북쪽 4평방 정간에 앉고 주인은 남쪽에 앉는데 또한 이와 같다. 중간 4평방 정간에는 바둑판 하나를 놓으니, 남쪽과 북쪽 중간이 모두 12평방척이다. 서쪽의 한 사람이 조금 앞으로 나와 동쪽의 한 사람과 바둑을 두면, 주인은 술잔을 가지고 한 잔씩 부어서 돌려가며 서로 마신다. 안주와 과일 접시는 각각 앉은 틈에다 적당하게 놓는다.
이른바 여섯 사람이란 누구인가 하면, 거문고 타는 사람 1인, 노래하는 사람 1인, 시에 능한 중[僧] 1인, 바둑 두는 사람 2인, 주인까지 여섯이다. 사람을 한정시켜 앉게 한 것은 동지(同志)임을 보인 것이다.
이 사륜정을 끌 때에 아이 종이 힘든 기색이 있으면 주인이 스스로 내려가서 어깨를 걷어붙이고 끈다. 주인이 지치면 손님이 교대하여 내려가 조력한다. 술에 취한 뒤에는 가고 싶은 대로 끌고 가지, 꼭 그늘로만 갈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하여 저물 때까지 놀다가 저물면 파한다. 명일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정자의 평방이 6척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계산한 뜻은 깨닫기 어려울 것이 없으나 무엇을 따지느라고 이처럼 자세히 계산하여 바둑판 정간으로 비유해서 사람을 천박하게 여기는가?”하기에 대답하기를,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난 것은 사람이 모두 아는 바이지마는, 음양을 말하는 자가 일산과 수레로 비유를 하니, 세로 가로의 보(步)ㆍ척(尺)까지 모두 들어 말한 것은 만물이 모나고 둥근 데 들어가는 것이 모두 형기(形器)에 응한다는 것을 논하려 함이다. 지금 이 정자에 사람을 계산하여 앉히는 데 있어, 틈이나 중간이나 변(邊)을 유루함이 없이 모두 쓰임에 맞도록 하자면 자세한 계산이 아니고서 어떻게 하겠는가? 바둑판 정간으로 비유한 것은 처음 설계할 때에 혼자서 표를 만들어서 현혹되지 않게 하자는 것이요, 남을 가르쳐 주자는 것은 아니다.”하였다.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정자를 짓는 데 그 아래에 바퀴를 타는 것이 옛날에도 있었는가?”하기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취미에 맞도록 할 뿐이지, 어찌 반드시 옛것이어야 하겠는가? 옛날에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았으나 안처(安處)할 수 없으므로 비로소 기둥 있는 집을 세워 풍우를 막았는데, 후세에 와서 점점 제도를 증가하여 판(板)을 대어 높이 쌓은 것을 대(臺)라 하고, 난간을 겹으로 한 것을 사(榭)라 하고, 집 위에 지은 것을 누(樓)라 하고, 활연히 툭 틔게 지은 것을 정(亭)이라 하였으니, 모두 시기에 임하여 참작해서 취미에 맞는 것을 취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정자의 밑에다 바퀴를 달아서 굴려 옮기는 것을 대비하는 것이 무엇이 불가한가? 비록 취미에 맞는 것을 취한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이유가 없겠는가? 밑은 바퀴로 하고 위는 정자로 한 것은 바퀴로 굴러가게 하고 정자로 멈추게 한 것이니, 행할 때가 되면 행하고 그칠 때가 되면 그치는 뜻이다. 바퀴를 넷으로 한 것은 사시를 상징한 것이고, 정자를 6척으로 한 것은 육기(六氣)를 상징한 것이며, 두 들보와 네 기둥을 한 것은 임금을 보좌하여 정사를 도와 사방에 기둥이 된다는 뜻이다. 아, 정자가 이루어진 뒤에는 마땅히 동지(同志)들을 맞아서 낙성식을 행하고 각기 시를 지어 그 자세한 것을 기록하게 해야겠지만, 이제 대략만을 취해서 먼저 친구에게 자랑하여 머리를 들고 성취되기를 기다리게 하는 바이다.”
신유년 5월 일에 기(記)한다.
[주D-001]육기(六氣) : 음(陰)ㆍ양(陽)ㆍ풍(風)ㆍ우(雨)ㆍ회(晦)ㆍ명(明)이다.
四輪亭記
承安四年。予始畫謀。欲立四輪亭於園上。俄有全州之命。未得果就。越辛酉。自全州入洛閑居。方有命搆之意。又以母病未就。恐因此不能便就。且失其謀畫。遂記之云。夫四輪亭者。隴西子畫其謀而未就者也。夏之日。與客席園中。或臥而睡。或坐而酌。圍棋彈琴。惟意所適。窮日而罷。是閑者之樂也。然避景就陰。屢易其座。故琴書枕簟。酒壺棋局。隨人轉徙。或有失其手而誤墮者。於是始設其計。欲立四輪亭。使童僕曳之。趨陰而就。則人與棋局酒壺枕席。摠逐一亭。而東西何憚於轉徙哉。今雖未就。後必爲之。故先悉其狀。四其輪。作亭於其上。亭方六尺。二梁四柱。以竹爲椽。以簟蓋其上。取其輕也。東西各一欄。南北亦如之。亭方六尺。則摠計其間凡三十有六尺也。請圖以試之。則縱而計之。橫而計之。皆六尺。其方如棋之局者亭也。於局之內。又周回而量各尺。尺而方如棋之方罫。罫綀道間方非也。罫各方一尺。則三十六罫。乃三十有六尺也。以此而處六人。則二人坐於東。人坐四罫。各方焉縱二尺橫二尺。摠計二人凡八尺也。餘四罫之方者。判而爲二。各縱二尺。以二尺置琴一事。病其促短。則跨南欄而半豎。彈則加於膝者半焉。以二尺置樽壺盤皿之具。東摠十有二尺。二人坐於西亦如之。餘四罫之方者虛焉。欲使往來小選者。必由此路。西摠十有二尺。一人坐於北四罫之方者。主人坐於南。亦如之。中四罫之方者。置棋一局。南北中摠十二尺。西之一人小進。而與東之一人對棋。主人執酌。酌以一杯。輪相飮也。凡肴菓之案。各於坐隙。隨宜置焉。所謂六人者誰。琴者一人。歌者一人。僧之能詩者一人。棋者二人。幷主人而六也。限人而坐。示同志也。其曳之也。童僕有倦色。則主人自下袒肩而曳之。主人疲則客遽下而助之。及其酒酣也。隨所欲之而曳之。不必以陰。如是而侵暮。暮則罷。明日亦知之。或曰已言亭方六尺。則其所以計之之意。非有難曉者。何至詳計曲算。以棋罫爲喻而期人之淺耶。曰。天圓地方。人所皆知。然說陰陽者。以蓋輿爲喻。至於縱橫步尺。無不摠擧者。欲論萬物之入於方圓。皆應形器也。今以是亭計人而坐。至於陬隙中邊。無使遺漏。皆入於用。則非詳計曲算而何耶。其以棋罫爲喻者。方圖畫之初。私自爲標。以備不惑耳。非款款指人也。曰。作亭而輪其下。有古乎。曰。取適而已。何必古哉。古者巢居。不可以處。故始立棟宇以庇風雨。至於後世。轉相增制。崇板築謂之臺。複欄檻謂之榭。構屋於屋謂之樓。作豁然虛敞者謂之亭。皆臨機商酌。取適而已。然則因亭而輪其下。以備轉徙。庸有不可乎。雖曰取適。亦豈無謂下輪而上亭者。輪以行之。亭以停之。時行則行。時止則止之義也。輪以四者。象四時也。亭六尺者。像六氣也。二梁四柱者。貳王贊政。柱四方之意也。嗚呼。亭成之後。當邀同志者落之。使各賦詩以記其詳。今取大槪。先夸於朋友。欲令翹首而待成耳。辛酉五月日。記。
○진강후(晉康侯) 모정기(茅亭記)
곡령(鵠嶺)을 뒤에 지고 용수(龍首)를 옆에 끼고서 사방이 모이는 곳, 신경(神京)의 가운데 웅거하여 울창하게 아름다운 기운이 있는 것은 남산(男山)이다. 그 산기슭에 잇달아 지은 천문(千門)ㆍ만호(萬戶)의 집들은 마치 고기비늘이 겹친 듯 즐비한데, 그 중에서 특히 끌어당기는 형세가 마치 교룡이 일어나는 듯 봉황이 춤추는 듯한 것은 상국(相國) 진강후(晉康侯)의 갑제(甲第)이다.
그 조용히 쉬면서 유관(遊觀)하는 장소로 말하면, 바로 모정(茅亭)이 있어 그 꼭대기는 뾰족하고 그 몸은 둥글어서, 바라보면 마치 깃으로 덮은 듯한 것이 반공에 높이 휘날린다.
대저 정신을 깨끗하게 하고 생각을 맑게 하는 데는 청산(靑山)ㆍ백운(白雲)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우거한 처지가 거기와 너무도 거리가 멀어서 반 걸음 정도로 이를 수 없음을 항시 안타깝게 여기는데 어찌 선관(蟬冠)에 구대(龜帶)를 띤 고관이 항상 밟을 곳이겠는가?
이 정자는 성시(城市)를 벗어나지 않고도 초연히 운산(雲山)의 정취를 가져서 사람의 마음을 자연 맑게 한다. 궤석(几席) 사이에서 부앙(俯仰)하며 앉아서 사방을 굽어보니, 장교(長橋)가 마주 보이고 구규(九逵)가 다 드러나, 초헌을 탄 자, 말에 걸터앉은 자, 걷는 자, 뛰는 자, 짐을 지고 가는 자, 물건을 끌고 가는 자 등 천태만상이 털끝만한 것도 시야에서 도망하지 못하니, 무릇 먼 경치를 바라보는 데는 이 정자만한 것이 없다.
비록 공수반(公輸般)으로 하여금 먹줄을 퉁기고 자귀를 휘두르게 하더라도 그 제도의 웅장하고 화려함은 혹 이와 근사하게 할 수는 있겠지마는, 안계가 탁 트여서 마치 표표(飄飄)히 봉래산에 올라가 사해를 바라보는 것 같은 이 환경은 공의 지시를 받지 않고서는 어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아, 천지가 생긴 이후로 원래 이런 경치가 있었겠지만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일조에 환히 드러나니, 어찌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간직하였다가 공에게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단 장막이 높이 걷히고 주옥(珠玉)과 비취(翡翠)로 꾸민 미인들이 죽 늘어서서 노래ㆍ생황ㆍ퉁소ㆍ피리 소리가 바람을 따라 울려 퍼지고, 혹은 문채나는 바둑판에 옥 바둑알의 쩡쩡 울리는 소리가 대숲 밖으로 울려 퍼지니, 생각하건대 호천(壺天)과 동부(洞府)도 이보다 낫지 못하리라. 연당(蓮塘)과 압소(鴨沼)가 있어 매년 여름 6월이면 연꽃이 만발하고 붉은 옷ㆍ비단 깃의 새들이 물결을 따라 떠다니니, 그 경치는 강호에서 보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혹은 기이한 꽃, 이상한 풀, 아름다운 나무, 진귀한 과일이 겨울을 지나도 마르지 않으매 하늘이 능히 그 시기를 믿지 못하고, 여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피기도 하매 봄이 시령(時令)을 동일하게 할 수가 없다. 혹은 화분 가운데 심어져서 비록 지맥(地脈)을 끊고 있으나 오히려 번성하기도 하고, 혹은 정자 위에 심어져서 지붕을 뚫고 위로 솟아나기도 하며, 심지어 강남(江南) 땅을 편안히 여기고 중하(中夏)에서 생산되어 다른 땅에 옮겨가기를 꺼리는 것과 만 마리의 소를 이용하여 옮기려 해도 옮길 수 없는 꾸불꾸불하고 울퉁불퉁한 반송(盤松)도 한 번 공의 동산에 들어와서 한 번 공의 돌봄을 받으면, 번쩍번쩍 윤기가 나서 번창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생각하건대 초목의 상정도 오히려 영광스럽게 대우하는 것을 아는 것일까, 천공(天公)과 지온(地媼)의 도운 바가 있어서일까?
또 물(物)은 천지에서 나는 것인데 공이 능히 변화(變化)ㆍ이역(移易)하기를 조물자(造物者)와 함께 표리가 되므로 물 중에는 공에게 사역(使役)되어 공에게 이용된 것이 많다. 비단 물뿐 아니라, 사람의 신심(身心)을 닦아 기르는 데도 또한 두루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데 누가 공에게 이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겠는가? 나는 평범한 사람으로 이러한 청경(淸境)을 보매 눈이 휘둥그레지므로 오래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물러가겠다고 아뢰었더니, 공은 갑자기 기(記)를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물러나온 지 여러 날이 지나도 구상하지 못하고 공의 분부를 저버려 포만(逋慢)하다는 죄를 얻을까 염려되어 감히 붓을 들어 적으니 뜻은 오히려 불만스럽다. 따라서 송(頌)을 덧붙이니, 그 사(詞)는 이러하다.
정자가 익연하여 / 亭翼然
봉이 나는 것 같도다 / 鳳將騫
누가 지었을까 / 誰其營
어진 우리 후(侯)로다 / 我侯賢
후가 잔치를 베푸니 / 侯式宴
술이 샘 같구나 / 酒如泉
잔을 받들어 권하니 / 奉觴酢
손은 천 명이로다 / 客指千
무엇으로 권할 것인가 / 何以酢
만년토록 수하소서 / 壽萬年
산은 변하더라도 / 山可轉
정자는 옮겨지지 않으리 / 亭不遷
[주D-001]공수반(公輸般) : 춘추 시대 노(魯) 나라 사람. 그는 교공(巧工)으로 유명하였다.
[주D-002]호천(壺天)과 동부(洞府) : 모두 선경(仙境)이란 뜻이다.
[주D-003]천공(天公)과 지온(地媼) : 천공은 천제(天帝), 지온은 땅의 여신(女神)이니 즉 천지라는 뜻이다.
晉康侯茅亭記
負鵠嶺腋龍首。扼四方之會。據神京之中。蔥蔥有佳氣可掬者。男山也。麗其麓而家焉者。門千戶萬。若鱗錯櫛比。而特控引形勢。螭起鳳舞者。相國晉康侯之甲第也。其燕息遊觀之所。則有茅亭在焉。銳其顚圓其體。望之若羽蓋而軒翥於半空者是已。夫澄神汰慮。莫若靑山白雲。然所寄遐阻。恒苦其不可跬步到也。豈蟬首龜腰者之所常履也。玆亭也不出城市。超然有雲山之趣。令人心地自然澄汰。俯仰几席。坐撫四方。長橋相望。九逵互湊。乘軒者。跨馬者。行者走者。擔者挈者千態萬狀。無一毫敢逃。凡遐眺遠覽。莫玆亭若也。雖使公輸督墨。般匠揮斤。其制度宏麗。或可髣髴。至於洞朗豁眼。飄飄若登蓬萊望四海。則非稟公之目授頤指。曷若是耶。噫。自始剖判。固有斯境。曠世伏匿。一朝發朗。豈天作地藏。有待於公耶。羅幕高褰。珠翠森列。笙歌蕭笛之聲。隨風嘐亮。或文楸玉子丁丁然響落竹外。想壺天洞府。殆無以過也。有蓮塘鴨沼。每夏六月。荷花盛開。紅衣錦羽之禽。隨波容與。差不減江湖中所見者。或奇葩異卉。佳木珍菓。其經冬不凋。則天不能信其時。後夏乃發則。春不得一其令。或安於盆盎中。雖隔絶地脈。猶得繁秀。或柱立亭上。罅屋而上出者。至若便江南產中夏而忌客於他土者。與夫盤松之輪囷磊砢。廻萬牛而不可移者。一入公之園囿。一被公之顧眄。則猗猗曄曄。莫不暢茂。意者草木之情。猶有知於榮遇耶。將天公地媼有所相耶。且物生於天地。而公能變化移易。與造物者相爲表裏。故物之役於公。而爲公之用者衆矣。非獨物也。其陶冶生人。亦可謂周矣。孰有不願爲公之用者耶。予以凡骨。誤塵淸境。目駭毛豎。不得久留。方局然告退。公遽以記命之。退彌日不得搆思。懼負公命。獲逋慢之罪。敢濡翰而文之。意尙有慊。仍系以頌。其詞曰。
亭翼然。鳳將騫。誰其營。我侯賢。侯式宴。酒如泉。奉觴酢。客指千。何以酢。壽萬年。山可轉。亭不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