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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료

삼국지 - 동이전 (원문. 번역본)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3.09.20|조회수1,344 목록 댓글 0

三國志

魏書

 

삼국지

위서

 

東夷夫餘高句麗東沃沮挹婁濊韓倭

 

書稱東漸于海西被于流沙其九服之制可得而言也然荒域之外重譯而至非足跡車軌所及未有知其國俗殊方者也自

虞曁周西戎有白環之獻東夷有肅愼之貢皆曠世而至其遐遠也如此及漢氏遣張騫使西域窮河源經歷諸國遂置都護

以總領之然後西域之事具存故史官得詳載焉魏興西域雖不能盡至其大國龜玆于寘康居烏孫疎勒月氏鄯善車師之

屬無歲不奉朝貢略如漢氏故事而公孫淵仍父祖三世有遼東天子爲其絶域委以海外之事遂隔斷東夷不得通於諸夏

景初中大興師旅誅淵又潛軍浮海收樂浪帶方之郡而後海表謐然東夷屈服其後高句麗背叛又遣偏師致討窮追極遠

踰烏丸骨都過沃沮踐肅愼之庭東臨大海長老說有異面之人近日之所出遂周觀諸國采其法俗小大區別各有名號可

得詳紀雖夷狄之邦而俎豆之象存中國失禮求之四夷猶信故撰次其國列其同異以接前史之所未備焉

 

  동이부여고구려동옥저읍루예한왜

 

서경에서 이르기를 “동쪽으로 바다에 닿고 서쪽으로 유사에 다다른다”하였으니, 그 구복의 제도를 얻을 수 있어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량한 지역의 바깥, 이중으로 통역해가며 이르는 곳은 발자취와 수레바퀴가 미친바 없어,

그 나라의 속습과 수방의 것을 알지 못하였다.

하나라로부터 주나라까지 서융은 백환의 헌상이 있었고 동이는 숙신의 조공이 있었는데, 모두가 오랜 세월을

지나서야 이르니 그 머나먼 것이 이와 같았다.

 

한나라가 장건을 보내 서역에서 황하의 원류를 찾아보도록 하였는데, 여러 나라를 거쳐 가니 마침내 도호를 설치

해 총령토록 하였다. 그런 연후에야 서역의 사실이 갖춰지므로 사관이 상세한 것을 얻어 책에 실었다.

위나라가 일어나고서 서역이 비록 모두 이르지는 못했으나 그 큰 나라인 구자와 우치, 강거, 오손, 소륵, 월씨, 선선,

거사가 속하여 해마다 조공을 받들었으니 대략 한나라의 옛 일과 같았다.

 

공손연이 아비와 할아비로 말미암아 삼대가 요동에 있었는데, 천자는 절역이라 하여 해외의 일을 맡겨두니,

마침내는 끊기고 떨어져 동이가 중국에 통하지 못하였다. 경초 중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 공손연을 주살하고

몰래 바다를 건너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거두어들였다. 이후로 바다가 고요해졌으며 동이가 굴복하였다.

 

그 뒤 고구려가 배반하여 다시 군사를 보내 토벌하기에 이르렀는데, 극히 먼 끝까지 뒤쫓아 가니 오환과 골도를

넘어 옥저를 지나치고 숙신의 조정을 밟게 되었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니, 한 장로가 설하기를 얼굴이

다른 사람이 있어 해 뜨는 곳에 가까이 산다고 하였다. 마침내 여러 나라를 두루 관찰하고 그 법과 속습을 채집

하여, 크고 작은 것을 구별하고 저마다 명호가 있어 상세히 기록할 수가 있게 되었다.

비록 이적의 나라라 하여도 조두의 형상이 있으니, 중국이 예를 잃으면 사이에게서 구한다는 것도 믿을 만하다.

그러므로 그 나라들을 차례대로 찬술하고, 그 같고 다름을 열거하여 이전의 사서가 갖추지 못한 바를 덧붙인다.

 

夫餘在長城之北去玄菟千里南與高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方可二千里戶八萬其民土著有宮室倉庫牢

獄多山陵廣澤於東夷之域最平敞土地宜五穀不生五果其人麤大性彊勇謹厚不寇鈔國有君王皆以六畜名官有馬加

牛加豬加狗加大使大使者使者邑落有豪民名下戶皆爲奴僕諸加別主四出道大者主數千家小者數百家食飮皆用俎

豆會同拜爵洗爵揖讓升降以殷正月祭天國中大會連日飮食歌舞名曰迎鼓於是時斷刑獄解囚徒在國衣尙白白衣大

袂袍袴履革鞜出國則尙繒繡錦罽大人加狐狸狖白黑貂之裘以金銀飾帽譯人傳辭皆跪手據地竊語用刑嚴急殺人者

死沒其家人爲奴婢竊盜一責十二男女淫婦人妒皆殺之尤憎妒已殺尸之國南山上至腐爛女家欲得輸牛馬乃與之兄

死妻嫂與匈奴同俗其國善養牲出名馬赤玉貂狖美珠珠大者如酸棗以弓矢刀矛爲兵家家自有鎧仗國之耆老自說古

之亡人作城柵皆員有似牢獄行道晝夜無老幼皆歌通日聲不絶有軍事亦祭天殺牛觀蹄以占吉凶蹄解者爲凶合者爲

吉有敵諸加自戰下戶俱擔糧飮食之其死夏月皆用冰殺人殉葬多者百數厚葬有槨無棺

[魏略曰其俗停喪五月以久爲榮其祭亡者有生有熟喪主不欲速而他人彊之常諍引以此爲節其居喪男女皆純白婦人

着布面衣去環珮大體與中國相彷彿也]

 

  부여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고, 현토에서 천리를 간다. 남으로는 고구려와, 동으로는 읍루와, 서로는 선비와 접한다.

그리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으니, 사방이 가히 2천리이다.

호수는 8만이며 그 백성은 토박이들이다.

궁실과 창고, 뇌옥이 있다. 산과 큰 언덕, 넓은 늪이 많은데 동이의 지역에서 가장 평평하고 널찍하다.

토지는 오곡에 마땅하나 오과는 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추하나 장대하며, 성정이 굳세고 용감 근후하니 중국을 도둑질하지 않는다. 나라에는 군왕이 있다.

모두 육축으로써 관직을 이르는데 마가와 우가, 저가, 구가, 대사, 대사자, 사자가 있다.

읍락에는 호민이 있어 하호를 일러 모두 노복이라 한다. 여러 가들은 따로 사출도를 주관하니 큰 자는 수천 가호

를 주관하고 작은 자는 수백 가호이다. 음식에는 모두 조두를 쓴다. 회동에서는 술잔을 받을 때 절하고 술잔을

넘길 때 씻어주며, 읍양하면서 오르내린다.

은나라의 정월로써 하늘에 제사하니 나라 안의 큰 모임이다.

날마다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일러 영고라 한다. 이때에는 형벌과 가두기를 그만두고 죄수들을 풀어

준다. 나라 안에 있을 때는 흰색을 숭상하여 입으니, 소매가 큰 도포와 바지를 흰색으로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나라 밖을 나설 때면 비단과 수놓인 비단 융단을 숭상하는데, 대인은 여우와 살쾡이, 검은 원숭이, 흑백의 담비

가죽을 더하고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 역인이 말을 전할 때는 모두 꿇어앉아 손을 땅에 짚고서 속닥속닥

말한다. 형벌을 쓰는 것은 엄하고 급하니, 살인자는 죽이고 그 집안사람들을 잡아다 노비로 만든다.

절도는 하나를 열두 배로 책하고, 남녀가 음란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인다.

더욱이 투기를 미워하여, 이미 죽였어도 나라의 남쪽 산 위에 시신을 버려두어 썩어문드러지게 한다.

여자의 집에서 시신을 얻고자 하면 소와 말을 보내고, 이에 시신을 내준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으니

흉노와 같은 속습이다. 그 나라에서는 희생에 쓰이는 소를 잘 기르고 명마와 붉은 옥, 담비, 검은 원숭이, 아름

다운 구슬이 나는데 구슬은 큰 것이 대추만 하다. 활과 화살, 칼, 창으로써 병기를 삼고 집집마다 스스로 개갑과

병장기를 갖춰둔다. 나라의 늙은이가 스스로 설하기를 옛 망인이라고 하였다. 성곽과 목책을 모두 둥글게

지으니 뇌옥과 비슷한 데가 있다. 길을 가면서 밤낮으로 늙은이와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 부르니, 하루

내내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군사가 있으면 또한 하늘에 제사하는데, 소를 죽여 발굽을 보고 길흉을 점친다.

발굽이 벌어진 것은 흉하게 여기고 붙은 것은 길하게 여긴다. 적이 있으면 여러 가들은 스스로 싸우고, 하호들은

군량과 마실 것을 떠맡아 먹인다. 여름에 죽으면 모두 얼음을 쓴다.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데 많은 자는 수백이다.

장사를 후하게 치른다.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위략이 말했다. “그 속습은 상사를 다섯 달이나 머무는데 오래될수록 영화롭게 여긴다. 망자를 제사하는데

것도 있고 익힌 것도 있다. 상주는 서두르려 하지 않으나 다른 사람은 강권하니 항상 말다툼하며 끌어내고 이를

예절로 삼는다. 그 거상은 남녀 모두가 순백이고, 부인은 포면의를 착용하며 환패를 제거한다.

대체로 중국과 서로 방불케 한다”]

 

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彊度以夫餘在二 虜之間妻以宗女

尉仇台死簡位居立無適子有孽子麻余位居死諸加共立麻余牛加兄子名位居爲大使輕財善施國人附之歲歲遣使詣

京都貢獻正始中幽州刺史毌丘儉討句麗遣玄菟太守王頎詣夫餘位居遣大加郊迎供軍糧季父牛加有二心位居殺季

父父子籍沒財物遣使簿斂送官舊夫餘俗水旱不調五穀不熟輒歸咎於王或言當易或言當殺麻余死其子依慮年六歲

立以爲王漢時夫餘王葬用玉匣常豫以付玄菟郡王死則迎取以葬公孫淵伏誅玄菟庫猶有玉匣一具今夫餘庫有玉璧

珪瓚數代之物傳世以爲寶耆老言先代之所賜也

[魏略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嘗破壞]

 

부여는 본래 현토에 속했으나, 한나라 말 공손도가 해동에서 웅지를 펼쳐 바깥의 동이들을 위엄으로 복종시키니,

부여왕 위구이는 다시 요동에 속했다.

당시에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였는데, 공손도는 부여가 두 오랑캐 사이에 있다고 하여 부여왕의 종녀로써

아내를 삼았다. 위구이가 죽고 간위거가 섰다.

간위거는 적자가 없고 얼자 마여가 있었다. 간위거가 죽자, 여러 가들이 함께 마여를 세웠다.

이때 우가의 형의 아들도 이름이 위거였는데, 대사가 되었다.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베풀기를 잘하니, 나라사람

들이 붙었다. 해마다 사신을 보내 경도에 이르러 공헌하였다.

정시 중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고 현토태수 왕기를 보내 부여에 이르자, 위거는 대가를 보내

교외에서 맞아들이고 군량을 이바지하였다. 계부 우가에게 두 마음이 있어, 위거는 계부와 그 아들을 죽이고

재물을 적몰하였다. 그리고 사자를 보내 장부와 거두어들인 것들을 관청에 보냈다.

옛 부여의 속습에 수재와 한재가 고르지 않아 오곡이 익지 않으면 번번이 왕에게 허물을 돌리어 혹은 마땅히

바꿔야한다고 말하며 혹은 마땅히 죽여야한다고 말하였다. 마여가 죽고 그 아들 의려가 나이 6살로 왕이 되어

섰다.

 

한나라 때 부여왕의 장사에는 옥갑을 썼는데, 항상 미리 현토군에 부탁해두었던 것으로써 왕이 죽으면 가져다가

장사지냈다. 공손연이 주살되었을 때도 현토의 창고에 옥갑 한 구가 있었다.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과 벽, 규,

찬 등 수대의 물건이 있어 세세토록 전하며 보물로 여긴다. 늙은이들이 말하기를 선대에 하사받은 바라고 한다.

[위략이 말했다. “그 나라는 매우 부유하다. 선대로부터 내려오면서 일찍이 파괴된 적이 없었다”]

 

其印文言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蓋本濊貊之地而夫餘王其中自謂亡人抑有(似)以也

[魏略曰舊志又言昔北方有高離之國者其王者侍婢有身王欲殺之婢云有氣如雞子來下我故有身後生子王捐之於

溷中豬以喙噓之徙至馬閑馬以氣噓之不死王疑以爲天子也乃令其母收畜之名曰東明常令牧馬東明善射王恐奪其

國也欲殺之東明走南至施掩水以弓擊水魚鼈浮爲橋東明得度魚鼈乃解散追兵不得渡東明因都王夫餘之地]

 

그 인장에 ‘예왕지인’이라고 새겨져있고 나라에 ‘예성’이라고 이르는 옛 성도 있으니, 대개 본래는 예맥의 땅으로

부여가 그중에서 왕 노릇하였을 것이다. 스스로를 가리켜 망인이라고 하니 이 또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위략이 말했다. “구지에서 또 말하기를 옛날 북방에 ‘고리의 나라’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 왕자의 시비에게 아이가 생겨, 왕이 죽이려고 하였다. 시비가 전했다. ‘달걀 같은 기운이 있어 나에게로 내려

오므로 아이가 생겼습니다’ 뒤에 아들을 낳았다. 왕이 돼지우리에 내버리자 돼지가 숨을 불어주었고, 마구간으로

옮기자 말이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하늘의 아들이 아닌가 의심하여 이내 그 어미에게 거두어 기르

도록 명령하였다. 이름을 동명이라 했다. 항상 말치는 일을 맡았다. 동명이 활을 잘 쏘니 왕은 그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였다. 왕이 죽이려 하자,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시엄수에 이르렀다.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가 되어주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해산하니 뒤쫓는 병사들은 건널 수가 없었다.

동명은 도읍으로 말미암아 부여의 땅에서 왕 노릇하였다”]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都於丸都之下方可二千里戶三萬多大山深谷無原澤隨

山谷以爲居食澗水無良田雖力佃作不足以實口腹其俗節食好治宮室於所居之左右立大屋祭鬼神又祀靈星社稷其

人性凶急喜寇鈔其國有王其官有相加對盧沛者古雛加主簿優台丞使者皁衣先人尊卑各有等級東夷舊語以爲夫餘

別種言語諸事多與夫餘同其性氣衣服有異本有五族有涓奴部絶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本涓奴部爲王稍微弱今

桂婁部代之漢時賜鼓吹技人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高句麗令主其名籍後稍驕恣不復詣郡于東界築小城置朝服衣

幘其中歲時來取之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溝漊者句麗名城也其置官有對盧則不置沛者有沛者則不置對盧王之宗

族其大加皆稱古雛加涓奴部本國主今雖不爲王適統大人得稱古雛加亦得立宗廟祠靈星社稷絶奴部世與王婚加古

雛之號諸大加亦自置使者皁衣先人名皆達於王如卿大夫之家臣會同坐起不得與王家使者皁衣先人同列其國中大

家不佃作坐食者萬餘口下戶遠擔米糧魚鹽供給之其民喜歌舞國中邑落暮夜男女羣聚相就歌戱無大倉庫家家自有

小倉名之爲桴京其人絜淸自喜善藏釀跪拜申一脚與夫餘異行步皆走以十月祭天國中大會名曰東盟其公會衣服皆

錦繡金銀以自飾大加主簿頭著幘如幘而無餘其小加著折風形如弁其國東有大穴名隧穴十月國中大會迎隧神還于

國東上祭之置木隧于神坐無牢獄有罪諸加評議便殺之沒入妻子爲奴婢其俗作婚姻言語已定女家作小屋於大屋後

名壻屋壻暮至女家戶外自名跪拜乞得就女宿如是者再三女父母乃聽使就小屋中宿傍頓錢帛至生子已長大乃將婦

歸家其俗淫男女已嫁娶便稍作送終之衣厚葬金銀財幣盡於送死積石爲封列種松柏其馬皆小便登山

 

  고구려

 

고구려는 요동에서 동쪽으로 천리에 있다. 남으로는 조선 예맥과, 동으로는 옥저와, 북으로는 부여와 접한다.

환도의 아래에 도읍한다.

사방이 가히 2천리이고, 호수는 3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평원이나 늪은 없다.

산골짜기를 따라 거처하며 개울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서 비록 힘써 밭을 경작한다 하여도 입과 배를 채우

기에 부족하니 그 속습이 먹을거리를 절약한다. 궁실을 치장하기 좋아하고 거소의 좌우에 큰 가옥을 세워 귀신

과 영성, 사직에게 제사한다.

사람들의 성정이 흉하고 급하여 중국을 도둑질하기를 좋아한다. 나라에는 왕이 있다. 벼슬에는 상가와 대로,

패자, 고추가, 주부, 우이승, 사자, 조의, 선인이 있어 저마다 존비에 등급이 있다.

 

동이의 옛 말에 부여의 별종이라 하였는데, 언어와 여러 가지 일이 부여와 같은 게 많다.

그러나 성정이나 기질, 의복은 다르다. 본래 연노부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의 다섯 부족이 있었다.

본래는 연노부가 왕이 되었으나 차츰 미약해져, 이제는 계루부가 대신한다.

한나라 때 북을 치고 피리 부는 기예인을 하사하여, 항상 현토군을 좇아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고구려가

그 명적을 맡아 주관하였다.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 다시는 군에 이르지 않아,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쌓고

그 가운데 조복과 의책을 놓아두어 세시마다 와서 가져가게 하였다.

이제 호인들마저 이 성을 일러 책구루라 하는데, 구루라는 것은 구려에서 성을 이르는 말이다.

관직을 두는 것은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왕의 종족으로 그 대가들은 모두 고추가라 칭한다. 연노부는 본래 나라의 주인으로 이제 비록 왕이 되지는

못하나, 적통의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어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제사드릴 수 있었다.

절노부도 세세토록 왕과 혼인하여 고추가의 칭호를 더하였다. 여러 대가들 역시 사자와 조의, 선인을 두는데

명적은 모두 왕에게 전달한다.

마치 경대부처럼 가신 같은 것으로 회동에서 왕가의 사자와 조의, 선인들과 동렬에서 앉고 일어설 수는 없었다.

 

그 나라의 큰 가문들은 밭을 경작하지 않으니, 앉아서 먹는 자가 만여 구이다.

하호들이 멀리서 쌀과 양식, 물고기, 소금을 가져다가 공급한다. 그 백성들이 노래 부르고 춤추기를 좋아하는데,

나라의 읍락에서는 밤에 남녀가 무리지어 서로를 좇아 노래하며 희롱한다.

따로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스스로 작은 창고를 짓는데 일러 부경이라 한다. 그 사람들이 청결한 것을 스스로

좋아하고 술을 빚어 저장하기를 잘한다. 꿇어앉아 절하면서 다리 하나를 펴는데 부여와 다르다.

행보는 모두 달린다.

10월로써 하늘에 제사하는데 나라 안의 큰 모임으로 일러 동맹이라 한다.

공적인 모임에서의 의복은 모두 수놓인 비단과 금은으로써 스스로 장식한다.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쓰는데,

마치 관과 같으나 여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쓰는데 형상이 마치 고깔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어 수혈이라 이르는데, 10월 나라 안의 큰 모임 때 수신을 맞이하여서 다시 나라의

동쪽 위로 돌아가 제사하고 신좌에 나무 수신을 둔다. 따로 뇌옥이 없고 죄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평의하여

죽이고 처자를 잡아다가 노비로 만든다.

그 속습에 혼인하는 것은 미리 말로써 정해두고, 여자의 집에서 큰 가옥 뒤로 작은 가옥을 짓는데 일러 사위의

가옥이라 한다. 사위가 저물녘에 여자의 집 밖에 이르러 스스로 이름을 밝히고 꿇어 절하면서 여자와 머물기를

비는데, 이 같은 것을 세 차례 되풀이하면 이에 여자의 부모가 들어주어 작은 가옥에 머물도록 하고,

사위는 머리를 조아리며 돈과 폐백을 내놓는다.

아이를 낳아 장대해지면 아내는 시집으로 돌아간다. 그 속습이 음란하여 남녀가 시집가고 장가들면 슬슬 서로

가 죽어서 입을 옷을 만든다. 후하게 장사를 치르니 죽은 자를 보내면서 금은과 재물, 폐물을 다한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줄지어 심는다. 그 말이 모두 작아 산을 오르기에 편하다.

 

國人有氣力習戰鬪沃沮東濊皆屬焉又有小水貊句麗作國依大水而居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麗別種依小水作

國因名之爲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王莽初發高句麗兵以伐胡不欲行彊迫遣之皆亡出塞爲寇盜遼西大尹田譚追

擊之爲所殺州郡縣歸咎于句麗侯騊嚴尤奏言貊人犯法罪不起于騊且宜安慰今猥被之大罪恐其遂反莽不聽詔尤擊之

尤誘期句麗侯騊至而斬之傳送其首詣長安莽大悅布告天下更名高句麗爲下句麗當此時爲侯國漢光武帝八年高句麗

王遣使朝貢始見稱王至殤安之間句麗王宮數寇遼東更屬玄菟遼東太守蔡風玄菟太守姚光以宮爲二郡害興師伐之宮

詐降請和二郡不進宮密遣軍攻玄菟焚燒候城入遼隧殺吏民後宮復犯遼東蔡風輕將吏士追討之軍敗沒宮死子伯固立

順桓之間復犯遼東寇新安居鄕又攻西安平于道上殺帶方令略得樂浪太守妻子靈帝建寧二年玄菟太守耿臨討之斬首

虜數百級伯固降屬遼東(嘉)熹平中伯固乞屬玄菟公孫度之雄海東也伯固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助度擊富山賊破之

伯固死有二子長子拔奇小子伊夷模拔奇不肖國人便共立伊夷模爲王自伯固時數寇遼東又受亡胡五百餘家建安中公

孫康出軍擊之破其國焚燒邑落拔奇怨爲兄而不得立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還住沸流水降胡亦叛伊夷模

伊夷模更作新國今日所在是也拔奇遂往遼東有子留句麗國今古雛加駮位居是也其後復擊玄菟玄菟與遼東合擊大破

之伊夷模無子淫灌奴部生子名位宮伊夷模死立以爲王今句麗王宮是也其曾祖名宮生能開目視其國人惡之及長大果

凶虐數寇鈔國見殘破今王生墮地亦能開目視人句麗呼相似爲位似其祖故名之爲位宮位宮有力勇便鞍馬善獵射景初

二年太尉司馬宣王率衆討公孫淵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正始三年宮寇西安平其五年爲幽州刺史毌丘儉所破語

在儉傳

 

나라사람은 기력이 있어 전투를 익힌다. 옥저와 동예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였다. 또 소수맥이 있다.

서안평현 북쪽에 소수가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가 나라를 세우면서 대수에 의거하였는데, 구려의 별종이 소수에 의거하여 나라를 세우고 말미암아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좋은 활이 나니 소위 맥궁이다.

 

왕망이 처음 고구려의 병사를 징발하여 호를 치려하였다. 고구려가 행하고자 않으니, 강박하여 보냈는데, 모두

변새를 도망 나와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추격하였으나 살해되었다.

주와 군, 현 모두가 구려후 도에게 허물을 돌리자, 엄우가 말씀을 올렸다.

“맥인이 법을 범한 것은 그 죄가 도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으니, 마땅히 안무하고 위로하십시오. 함부로 큰 죄를

덮어씌우면 마침내 반역할까 두렵습니다”

왕망은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공격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엄우가 구려후 도를 꾀어내어 참수하고 그 머리를 장안

으로 보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고구려의 이름을 고쳐 하구려라 하였다.

당연히 이때에 후국이 되었으며, 한나라 광무제 8년에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비로소 왕을 칭한 것이

보인다.

 

상제와 안제 사이에 이르러 구려왕 궁이 수차례 요동을 도둑질하였다. 다시 현토에 속하였다.

요동태수 채풍과 현토태수 요광은 궁이 두 군에 해가 된다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다.

궁이 거짓으로 항복하며 화친을 청하니 두 군이 진군하지 않았는데, 궁은 몰래 군사를 보내 현토를 공격하여

후성을 불사르고 요수로 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뒤에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니, 채풍이 경솔하게 관리

와 병사를 거느리고 추격해 토벌하였으나 군이 패하여 전몰하였다.

 

궁이 죽고 아들 백고가 섰다. 순제와 환제 사이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과 거향을 도둑질하고 또 서안평을

공격하여 길 위에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아갔다.

영제 건녕 2년에 현토태수 경임이 토벌하여 포로 수백 급을 참수하니,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희평 중에 백고가 현토에 속하기를 빌었다. 공손도가 해동에서 웅위를 떨치자, 백고가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

등을 보내 공손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백고가 죽었다. 백고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는 발기였고, 소자는 이이모였다. 발기가 불초하여 나라

사람이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백고의 때로부터 수차례 요동을 도둑질하고 또 도망친 호인 5백여 가를 받아들였다.

건안 중에 공손강이 출군하여 그 나라를 격파하고 읍락을 불살랐다.

발기는 형인데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와 각기 하호 3만여 구를 거느리고 공손강에게

이르러 항복하고 돌아가 비류수에 거주하였다. 항복한 호인 역시 이이모를 배반하였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이 나라를 세우니, 금일의 소재가 이것이다.

발기는 마침내 요동으로 갔는데, 아들이 있어 구려국에 남으니 지금의 고추가 박위거이다.

그 뒤 다시 현토를 공격하니, 현토가 요동과 합격하여 대파하였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와 간음해 아들을 낳으니 위궁이라 일렀다. 이이모가 죽자, 위궁을 세워 왕으로

삼으니 지금의 구려왕 궁이다. 그 증조부의 이름도 궁인데, 나면서부터 능히 눈을 뜨고 보아, 나라사람들이 꺼려

하였다. 장대해지자 흉하고 사나워져 수차례 중국을 도둑질하니 나라가 쇠잔해지고 파괴되었다.

지금의 왕도 나면서부터 역시 눈을 뜨고 사람을 보았다.

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라고 부르는데, 그 증조부와 닮았으므로 이름을 위궁이라 하였다.

위궁은 힘과 용기가 있고 말을 잘 타며 활을 잘 쏘았다.

경초 2년에 태위 사마의가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을 토벌하니, 궁이 주부와 대가를 보내 수천인을 거느리고 군을

돕게 하였다. 정시 3년에 궁이 서안평을 도둑질하였다. 정시 5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격파되었는데,

이 일은 관구검전에 실려 있다.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濱大海而居其地形東北狹西南長可千里北與挹婁夫餘南與濊貊接戶五千無大君王世

世邑落各有長帥其言語與句麗大同時時小異漢初燕亡人衛滿王朝鮮時沃沮皆屬焉漢武帝元封二年伐朝鮮殺滿孫右

渠分其地爲四郡以沃沮城爲玄菟郡後爲夷貊所侵徙郡句麗西北今所謂玄菟故府是也沃沮還屬樂浪漢以土地廣遠在

單單大領之東分置東部都尉治不耐城別主領東七縣時沃沮亦皆爲縣漢(光)建武六年省邊郡都尉由此罷其後皆以其

縣中渠帥爲縣侯不耐華麗沃沮諸縣皆爲侯國夷狄更相攻伐唯不耐濊侯至今猶置功曹主簿諸曹皆濊民作之沃沮諸邑

落渠帥皆自稱三老則故縣國之制也國小迫于大國之間遂臣屬句麗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使相主領又使大加統責

其租稅貊布魚鹽海中食物千里擔負致之又送其美女以爲婢妾遇之如奴僕其土地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人性質

直彊勇少牛馬便持矛步戰食飮居處衣服禮節有似句麗

[魏略曰其嫁娶之法女年十歲已相設許壻家迎之長養以爲婦至成人更還女家女家責錢錢畢乃復還壻]

 

  옥저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닷가에 거한다. 그 지형이 동북으로 좁고 서남으로 긴데 가히

천리이다. 북으로는 읍루 부여와, 남으로는 예맥과 접한다. 호수는 5천이다. 큰 군왕은 없고 세세토록 읍락마다

장수가 있다. 그 언어는 구려와 거의 같고 때때로 조금 다르다.

 

한나라 초에 연의 망인 위만이 조선의 왕이었는데 당시 옥저는 모두 속하였다. 한무제 원봉 2년에 조선을 정벌

하고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였다. 그 땅을 나누어 사군으로 만들고 옥저성을 현토군으로 삼았다.

뒤에 이맥이 침범하니 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지금의 이른바 현토의 옛 부가 이것이다.

옥저는 낙랑에 환속하였는데, 한나라는 단단대령의 동쪽에 있는 땅이 너무 멀다고 하여 동부도위를 나누어 설치

하고 불내성을 치소로 삼아서 따로 동쪽의 7현을 맡아 주관토록 하였다.

당시 옥저 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한나라 광무제 건무 6년에 변방의 군을 살피어 도위를 이로 말미암아 파하였다. 그 뒤로 모두다 그 현의 거수들

로써 현후를 삼으니 불내와 화려, 옥저의 여러 현 모두 후국이 되었다.

이적이 다시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였으나, 오직 불내의 예후만이 지금까지도 공조와 주부의 여러 조를 두었으니

모두 예의 백성들이 맡았다.

옥저의 여러 읍락 거수들 모두가 스스로 삼노라 칭하는데, 옛 현국의 제도이다. 나라가 작고 큰 나라 사이에서

핍박받더니 마침내 구려에 신속하였다. 구려는 다시 그 중에서 대인을 사자로 삼아 서로 맡아 주관토록 하고

또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통틀어 책임지게 하니 맥포와 물고기, 소금, 바다 속 식물을 천리에서 짊어 메고 이르

렀다. 또 미녀를 보내 비첩으로 삼게 하였는데 노복과 같은 것이다.

 

그 토지는 기름지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며 오곡에 마땅하고 밭농사에 좋다. 사람들의 성질은 곧고 강용

하다. 소와 말이 적어 창을 가지고 보전을 잘한다. 음식과 거처, 의복, 예절은 구려와 비슷하다.

[위략이 말했다. “그 시집가고 장가드는 법은 여자의 나이 열 살에 이미 서로 말로써 허혼하여 사위의 집에서

맞아들인다. 며느리를 키우고 길러 성인이 되면 다시 여자의 집으로 돌아가는데, 여자의 집에서는 돈을 책정

하고 돈이 떨어지면 이에 다시 사위에게로 돌아간다”]

 

其葬作大木槨長十餘丈開一頭作戶新死者皆假埋之才使覆形皮肉盡乃取骨置槨中擧家皆共一槨刻木如生形隨死者

爲數又有瓦置米其中編縣之於槨戶邊毌丘儉討句麗句麗王宮奔沃沮遂進師擊之沃沮邑落皆破之斬獲首虜三千餘級

宮奔北沃沮北沃沮一名置溝婁去南沃沮八百餘里其俗南北皆同與挹婁接挹婁喜乘船寇鈔北沃沮畏之夏月恆在山巖

深穴中爲守備冬月冰凍船道不通乃下居村落王頎別遣追討宮盡其東界問其耆老海東復有人不耆老言國人嘗乘船捕

魚遭風見吹數十日東得一島上有人言語不相曉其俗常以七月取童女沈海又言有一國亦在海中純女無男又說得一布

衣從海中浮出其身如中(國)人衣其兩袖長三丈又得一破船隨波出在海岸邊有一人項中復有面生得之與語不相通不

食而死其域皆在沃沮東大海中

 

그 장례는 큰 나무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 장이고 한쪽을 열어두어 문호를 만든다.

새로 죽은 자는 모두 가매장하여 엎어진 형태로 놔두었다가 피부와 살이 다 썩어 없어지면 이에 뼈를 꺼내어 곽

안에 둔다. 가족 모두가 함께 하나의 곽에 들어가고 생전의 형상처럼 나무에 새겨두니 죽은 자의 숫자가 된다.

또 기와가 있어 그 안에 쌀을 두고 곽의 문호 가장자리에 엮어 매달아둔다.

 

관구검이 구려를 토벌하니 구려왕 궁이 옥저로 달아났다. 마침내 진군하여 격파하니 옥저의 읍락 모두가 파괴

되었다. 참수하거나 포로를 사로잡은 것이 3천여 급이었다. 궁이 북옥저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인데 남옥저에서 8백여 리를 가고 그 속습은 남과 북 모두 같다. 읍루와 접하는데 읍루가

배를 타고 도둑질하기 좋아하니, 북옥저가 두려워하여 여름이면 늘 산과 바위, 깊은 굴속에 있어 수비하고

겨울에 얼음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이에 내려와 촌락에 거한다.

 

왕기가 따로 군사를 보내어 궁을 추격해 토벌하였는데, 그 동쪽 경계에 다다라 늙은이에게 묻기를 동쪽에 또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하였다.

늙은이의 말에 나라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다가 풍랑을 만나 수십 일을 떠밀려갔는데 동쪽으로

한 섬에 닿았다고 한다. 섬 위에 사람이 있었으나 언어는 서로 통하지 않았으며 그 속습이 항상 7월에 동녀를

데려다 바다에 빠뜨린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바다 중에 한 나라가 있어 오로지 여자이고 남자는 없다고 하였다. 또 설하기를 바다에서 떠밀려온

베옷 하나를 얻었는데, 그 몸이 중인의 옷과 같았고 그 양 소매의 길이가 3장이었다고 하였다.

또 해안가에서 물결에 밀려온 난파선을 하나 얻었는데, 한 사람이 있어 정수리 가운데 또 얼굴이 있고 살아있었

으나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았으며 먹지 않아 죽었다고 하였다.

그 지역은 모두 옥저의 동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다.

 

挹婁在夫餘東千餘里濱大海南與北沃沮接未知其北所極其土地多山險其人形似夫餘言語不與夫餘句麗同有五穀

牛馬麻布人多勇力無大君長邑落各有大人處山林之間常穴居大家深九梯以多爲好土氣寒劇於夫餘其俗好養豬食

其肉衣其皮冬以豬膏塗身厚數分以禦風寒夏則裸袒以尺布隱其前後以蔽形體其人不絜作溷在中央人圍其表居其

弓長四尺力如弩矢用楛長尺八寸靑石爲鏃古之肅愼氏之國也善射射人皆入(因)目矢施毒人中皆死出赤玉好貂今

所謂挹婁貂是也

 

  읍루

 

읍루는 부여의 동쪽 천여 리 큰 바닷가에 있다. 남으로는 북옥저와 접하고, 그 북쪽의 끝은 아직 알지 못한다.

토지는 험한 산이 많다. 사람의 형상은 부여와 비슷한데 언어는 부여나 구려와 같지 않다.

오곡과 소, 말, 마포가 있다. 사람들은 용력이 많다. 큰 군장은 없고, 읍락마다 대인이 있다. 산과 숲 사이에 거처

한다. 항상 굴에서 사는데, 큰 집은 깊이가 아홉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만큼이고 많을수록 좋게 여긴다.

땅의 기후가 부여보다 훨씬 춥다. 속습이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수 푼 두께로 두껍게 몸에 발라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발가벗고 한 자 되는 베로써 그 아랫도리의 앞뒤만 가린다.

사람들이 깨끗하지 못하여 중앙에 돼지우리를 짓고 사람은 그 둘레에 거한다. 활은 길이가 네 자이고 힘이 쇠뇌

와 같다. 화살은 싸리나무를 쓰고 길이가 1자 8치이며 청석으로 촉을 만든다.

옛 숙신씨의 나라이다. 활을 잘 쏘아 사람을 쏘면 모두 눈을 맞춘다. 화살에 독을 발라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

붉은 옥과 좋은 담비가죽이 나오는데 지금의 소위 읍루초이다.

 

自漢已來臣屬夫餘夫餘責其租賦重以黃初中叛之夫餘數伐之其人衆雖少所在山險鄰國人畏其弓矢卒不能服也其

國便乘船寇盜鄰國患之東夷飮食類皆用俎豆唯挹婁不法俗最無綱紀也

 

한나라 이래로부터 부여에 신속하였다. 부여가 조세와 부역을 무겁게 책정하니, 황초 중에 배반하여, 부여가

수차례 정벌하였다. 그 사람들이 비록 적으나 험한 산에 소재하고 이웃나라사람들이 그들의 활과 화살을 두려

워하여 끝내는 굴복시킬 수가 없었다. 그 나라가 배를 타고 도둑질을 잘 하여서 이웃나라들이 근심거리로

여겼다. 동이는 먹고 마시는데 모두 조두를 썼으나 오직 읍루만이 그렇지 않았다. 법속이 가장 기강이 없다.

 

濊南與辰韓北與高句麗沃沮接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戶二萬昔箕子旣適朝鮮作八條之敎以敎之無門戶之

閉而民不爲盜其後四十餘世朝鮮侯(淮)準僭號稱王陳勝等起天下叛秦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燕人衛滿魋結夷

服復來王之漢武帝伐滅朝鮮分其地爲四郡自是之後胡漢稍別無大君長自漢已來其官有侯邑君三老統主下戶其耆

老舊自謂與句麗同種其人性愿慤少嗜欲有廉恥不請(句麗)匃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衣服有異男女衣皆著曲領男

子繫銀花廣數寸以爲飾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自領以東七縣都尉主之皆以濊爲民後省都尉封其渠帥爲侯今不

耐濊皆其種也漢末更屬句麗其俗重山川山川各有部分不得妄相涉入同姓不婚多忌諱疾病死亡輒捐棄舊宅更作新

居有麻布蠶桑作緜曉候星宿豫知年歲豊約不以珠玉爲寶常用十月節祭天晝夜飮酒歌舞名之爲舞天又祭虎以爲神

其邑落相侵犯輒相罰責生口牛馬名之爲責禍殺人者償死少寇盜作矛長三丈或數人共持之能步戰樂浪檀弓出其地

其海出班魚皮土地饒文豹又出果下馬漢桓時獻之

[臣松之按果下馬高三尺乘之可于果樹下行故謂之果下見博物志魏都賦]

 

  예

 

예는 남으로 진한과, 북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한다. 동쪽은 큰 바다에 다다른다. 지금 조선의 동쪽은 모두가

그들의 땅이다. 호수는 2만이다. 옛날 기자가 조선에 이르러 팔조지교를 지어 가르쳤으므로, 문호를 잠그지

않고 백성들은 도둑이 되지 않는다.

 

그 뒤 40여 세가 지나, 조선후 준이 참람하게 왕을 호칭하였다. 진승 등이 봉기하여 천하가 진나라를 배반하니

연과 제, 조의 백성들이 조선 땅으로 피했는데 수만 구였다. 연인 위만이 북상투를 틀고 이적의 옷을 입고서 다시

와 왕 노릇하였다. 한무제가 조선을 정벌하여 없애고 그 땅을 나누어 사군으로 만들었다.

이 뒤로부터 오랑캐와 한나라가 차츰 구별되었다.

 

큰 군장은 없고 한나라 이래로부터 그 벼슬에 후와 읍군, 삼노가 있어 하호들을 주관해 통솔하였다.

그 늙은이들은 옛날에 자기들이 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일렀다. 그 인성이 삼가고 참되며 즐기려는 것이 적다.

염치가 있어 청하거나 빌지 않는다. 언어와 법속은 대저 구려와 같지만, 의복은 달라 남녀의 옷 모두 현저하게

옷깃이 굽었다. 남자는 널따랗고 몇 치나 되는 은화를 매달아 장식으로 삼았다.

 

단단대산령으로부터 서쪽은 낙랑에 속하였고, 단단대산령으로부터 동쪽의 7현은 도위가 주관하였는데,

모두 예를 백성으로 하였다. 뒤에 도위를 살피면서 그 거수를 봉하여 후로 삼았는데, 지금의 불내예 모두가

종족이다. 한나라 말에 구려에 속하였다.

 

그 속습이 산천을 중시하며, 산천마다 부가 나누어져 있어 망령되이 서로 건너 들어가지 않는다. 같은 성씨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 꺼리는 것이 많아 질병으로 사망하면 번번이 옛 집을 버리고 다시 새로 거처를 짓는다.

삼베가 있고 누에를 쳐서 면을 짓는다. 기후와 별자리에 훤하여 그 해에 풍년이 들지를 미리 안다.

주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항상 10월의 절기로써 하늘에 제사하는데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니 일러 무천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한다. 그 읍락이 서로 침범하면 번번이 서로 생구나 마소로 벌책하는데 일러

책화라 한다. 살인자는 죽음으로 갚는다. 도둑이 적다.

창을 만드는데 길이가 3장이고 혹 여러 사람이 함께 가지고서 보전에 능하다.

낙랑단궁이 그 땅에서 나고 바다에서는 반어피가 나며 토지에서는 요문표와 과하마가 나는데, 한나라 환제의

때에 이것들을 바쳤다.

[신 송지가 안찰합니다. “과하마는 높이가 3자로, 올라타고서도 과수 아래를 지나갈 수가 있었으므로 과하라

일렀습니다. 박물지와 위도부에 보입니다”]

 

正始六年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興師伐之不耐侯等擧邑降其八年詣闕朝貢詔更拜不耐濊王居

處雜在民間四時詣郡朝謁二郡有軍征賦調供給役使遇之如民

 

정시 6년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영동의 예가 구려에 속하자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다. 불내후

등이 읍락을 들어 항복하였다. 정시 8년에 궐문에 이르러 조공하니, 조서를 내려 다시 불내예왕으로 배하였다.

거처는 민간에 섞여 있고 사시마다 군에 이르러 조알하였다.

두 군은 군사의 정벌과 부조, 사역의 공급에 있어 백성 같이 대우하였다.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

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綿布各有長帥大者自名爲臣智其次爲邑借散在山海間無城郭有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

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

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

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古臘國臨

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凡五十餘國大國

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辰王治月支國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其

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侯準旣僭號稱王爲燕亡人衛滿所攻奪

[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見周衰燕自尊爲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爲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

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爲界朝鮮遂弱及秦幷天下使

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準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綰爲燕王朝鮮與燕界於浿水及綰反入匈奴燕人衛滿亡命爲胡服東度浿水詣準

降說準求居西界(故)收中國亡命爲朝鮮藩屛準信寵之拜爲博士賜以圭封之百里令守西邊滿誘亡黨衆稍多乃詐遣人

告準言漢兵十道至求入宿衛遂還攻準準與滿戰不敵也]

 

  한

 

한은 대방의 남쪽이 있다. 동과 서로는 바다를 한계로 하고, 남으로는 왜와 접한다. 사방이 가히 4천리이다.

세 종족이 있는데 하나는 마한이고, 둘은 진한이며, 셋은 변한이다.

진한은 옛 진국으로, 마한의 서쪽에 있다.

백성은 토박이들이다. 씨앗을 심고 누에를 칠 줄 알며 면포를 짓는다. 저마다 장수가 있어 큰 자는 스스로 일러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며 성곽은 없다.

 

원양국과 모수국, 상외국, 소석색국, 대석색국, 우휴모탁국, 신분고국, 백제국, 속로불사국, 일화국, 고탄자국,

고리국, 노람국, 월지국, 자리모로국, 소위건국, 고원국, 막로국, 비리국, 점리비국, 신흔국, 지침국, 구로국,

비미국, 감해비리국, 고포국, 치리국국, 염로국, 아림국, 사로국, 내비리국, 감해국, 만로국, 벽비리국, 구사오단국,

일리국, 불미국, 지반국, 구소국, 첩로국, 모로비리국, 신소도국, 막로국, 고랍국, 임소반국, 신운신국, 여래비리국,

초산도비리국, 일난국, 구해국, 불운국, 불사분사국, 원지국, 건마국, 초리국이 있으니 무릇 50여국이다.

큰 나라는 만여 가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이니, 총 10여만 호다. 진왕은 월지국에서 다스린다.

신지는 혹 ‘우호신운견지보안사축지분신리아불예구사진지염’의 호칭을 더한다.

그 벼슬에는 위솔과 선읍군, 귀의후, 중랑장, 도위, 백장이 있다.

 

후 준이 참람하게 왕을 호칭하고서, 연의 망인 위만에게 공격받아 빼앗긴바 되어[위략이 말했다. “옛 기자의

후손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한 것과 연나라가 스스로를 존칭하여 왕이 되고 동쪽의 땅을 경략하려는 것을 보자,

조선후 역시 자칭 왕이 되고 병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해 주나라 왕실을 높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대부 예가 간하여 그만두고 예로 하여금 서쪽 연나라에 가서 설득하도록 시키니, 연나라도 중지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뒤에 자손들이 차츰 교만하고 사나워지니,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보내 그 서방을 공격하도록

하여 땅 2천여 리를 빼앗아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로 삼으니 조선이 마침내 미약해졌다.

 

진나라가 천하를 병합하고 몽념을 시켜 장성을 쌓게 하였는데 요동에까지 도달했다.

당시 조선왕 부는 진나라가 습격할까 두려워하여 진나라에 복속했으나 조회하지는 않았다. 부가 죽고 아들 준이

섰다.

20여년 만에 진승과 항우가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과 제, 조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걱정하여 차츰 도망

해 준에게로 가니, 준이 서방에 안치하였다.

한나라 때에 로관이 연왕이 되고, 조선은 연과 패수로 경계를 하였다.

로관이 반역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연인 위만도 망명하여 호복을 하고서 동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이르러 항복

하였다. 준을 설득하여 서쪽 경계에 거하며 중국의 망명자들을 수습해 조선의 번병이 되기를 구하니, 준이 믿고

총애해 배하여 박사로 삼고 규를 하사하며 백리를 봉해 서쪽 변경을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위만이 망명한 도당을 꾀니 무리가 차츰 많아졌다. 이에 사람을 보내 준을 속여 고하기를 한나라 병사가 열 갈래

길로 이르렀으니 들어가 숙위하기를 구한다고 하면서 마침내 돌아가 준을 공격하였다.

준이 위만과 싸웠으나 적수가 되지 못했다”]

 

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

[魏略曰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準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

 

그 좌우와 궁인들을 거느리고 달아나 바다로 들어가니, 한의 땅에 거하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호칭하였다.

[위략이 말했다. “그 아들과 친척이 본국에 남아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성을 한씨라 하였다.

준왕은 바다 가운데서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其後絶滅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漢時屬樂浪郡四時朝謁

[魏略曰初右渠未破時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至王莽

地皇時廉斯鑡爲辰韓右渠帥聞樂浪土地美人民饒樂亡欲來降出其邑落見田中驅雀男子一人其語非韓人問之男子

曰我等漢人名戶來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爲韓所擊得皆斷髮爲奴積三年矣鑡曰我當降漢樂浪汝欲去不戶來曰可

(辰)鑡因將戶來(來)出詣含資縣縣言郡郡卽以鑡爲譯從芩中乘大船入辰韓逆取戶來降伴輩尙得千人其五百人已死

鑡時曉謂辰韓汝還五百人若不者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辰韓曰五百人已死我當出贖直耳乃出辰韓萬五千人弁

韓布萬五千匹鑡收取直還郡表鑡功義賜冠幘田宅子孫數世至安帝延光四年時故受復除]

 

  그 후손이 끊여 없어졌으나 지금 한인들로 오히려 그 제사를 받드는 자가 있다.

한나라 때에 낙랑군에 속하여 사시마다 조알하였다.

[위략이 말했다. “처음 우거가 아직 격파되지 않았을 때, 조선의 재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하였으나 쓰이지

않았다. 동쪽의 진국에서 당시 백성들로 따라 나와 거한 자가 2천여 호였고, 역시 조선이나 공번과 서로 왕래

하지 않았다. 왕망 지황의 때에 이르러 염사착이 진한의 우거수가 되었는데, 낙랑의 토지가 기름지며 인민이

넉넉해 즐겁다는 것을 듣고 도망하여 와서 항복하고자 했다.

읍락을 빠져나오자 밭 가운데서 참새를 쫓아내는 남자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 언어가 한인이 아니었다.

물으니 남자가 말했다. ‘나는 한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호래입니다. 우리들 천오백 인이 벌목하다가 한인에게

격파되어 끌려와 모두 머리털을 잘리고 노비가 되었는데 벌써 3년째입니다’ 염사착이 말했다.

‘내가 한나라 낙랑에 항복하려는데, 너도 가고 싶은가?’ 호래가 말했다. ‘물론입니다’ 염사착이 말미암아 호래를

데리고 나와 함자현에 이르렀다. 현이 군에 말하니, 군이 즉시 염사착을 통역으로 삼아 금중을 따라서 큰 배에

타고 진한으로 들어갔는데, 호래도 함께였다. 항복한 무리 1천인은 찾았으나, 5백인은 이미 죽어 있었다.

염사착이 당시 진한에게 밝혀 일렀다. ‘너희가 5백인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러지 않으면 낙랑이 의당 1만 병사를

배에 태워 보내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 진한이 말했다. ‘5백인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당연히 속바칠 값을

내겠소’ 이에 진한이 1만 5천인을 내고 변한이 베 1만 오천필을 냈다. 염사착이 거두어 돌아오니, 군이 염사착의

공과 의리를 표하여 관책과 밭, 집을 내려주었다. 자손이 수 세대를 지나 안제 건광 4년에 이르러 때이므로 다시

제수를 받았다”]

 

桓靈之末韓濊彊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興

兵伐韓濊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景初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

君印綬其次與邑長其俗好衣幘下戶詣郡朝謁皆假衣幘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

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환제와 연제의 말에 한과 예가 강성하여 군현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자 백성이 많이 한국으로 유입하였다.

건안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을 나누어 남쪽의 거친 땅을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와 장창 등을 보내 유민을

수집하며 병사를 일으켜 한과 예를 치니 옛 백성들이 차츰 나왔다. 뒤에 왜와 한이 마침내 대방에 속하였다.

경초 중에 명제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보내 바다를 넘어 두 군을 평정하고, 여러 한국의

신지들에게는 읍군의 인수를 더해주며 그 다음에게는 읍장을 주었다.

 

그 속습이 옷과 책을 좋아하여 하호조차도 군에 이르러 조알할 때면 모두 옷과 책을 빌려 스스로 인수와 옷,

책을 갖추니 1천여 인이 있었다.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솔하였다 해서 진한의 여덟 나라를 낙랑에게 떼어주었다. 관리가 통역

하여 전하는데 같고 다른 게 있어, 신지 격한이 분노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당시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병사를 일으켜 쳤는데, 궁준이 전사하였으나 두 군은 마침내 한을 멸했다.

 

其俗少綱紀國邑雖有主帥邑落雜居不能善相制御無跪拜之禮居處作草屋土室形如冢其戶在上擧家共在中無長幼男

女之別其葬有槨無棺不知乘牛馬牛馬盡於送死以瓔珠爲財寶或以綴衣爲飾或以縣頸垂耳不以金銀錦繡爲珍其人性

彊勇魁頭露紒如炅兵衣布袍足履革蹻蹋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諸年少勇健者皆鑿脊皮以大繩貫之又以丈許

木鍤之通日嚾呼作力不以爲痛旣以勸作且以爲健常以五月下種訖祭鬼神羣聚歌舞飮酒晝夜無休其舞數十人俱起相

隨踏地低昂手足相應節奏有似鐸舞十月農功畢亦復如之信鬼神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名之天君又諸國各有別邑名

之爲蘇塗立大木縣鈴鼓事鬼神諸亡逃至其中皆不還之好作賊其立蘇塗之義有似浮屠而所行善惡有異其北方近郡諸

國差曉禮俗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無他珍寶禽獸草木略與中國同出大栗大如梨又出細尾雞其尾皆長五尺餘其男

子時時有文身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其人差短小言語不與韓同皆髡頭如鮮卑但衣韋好養牛及豬其衣有上

無下略如裸勢乘船往來市買韓中

 

  그 속습은 기강이 적다. 국읍에 비록 주수가 있어도 읍락이 잡거하니 능히 서로 잘 제어하지 못했다.

꿇어 절하는 예가 없다.

거처는 풀로 옥외를 짓고 흙으로 실내를 짓는데 형상이 마치 무덤 같고 문호가 위에 있다.

가족 모두가 함께 그 안에 살며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 그 장례는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소와 말을 탈 줄 모르고, 소와 말은 죽은 자를 보낼 때에 다한다.

영주를 재보로 여기며 혹 옷에 꿰매 장식으로 삼거나 목에 매달고 귀에 늘어뜨린다. 금은이나 수놓인 비단은

진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 성정이 강용하고 머리에 상투를 튼 것이 마치 경병과 같다.

베로 만든 도포를 입으며 발에는 가죽신을 신는다. 나라에 해야 할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도록 시킬

때면 용감하고 건장한 소년 여럿의 등뼈 가죽을 모두 뚫어 큰 새끼줄로 꿰뚫고서 다시 1길 되는 나무 가래에

묶어 하루 내내 소리 지르며 힘을 쓰게 하는데,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힘쓰는 것을 권한다 하며 또 건장한 것

으로 여긴다.

항상 오월에 씨 뿌릴 때로써 귀신에게 제사하는데, 무리지어 노래 부르며 춤을 추고 술을 마시며 밤낮으로

쉬지 않는다. 그 춤은 수십 인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땅을 밟으면서 낮추었다 올렸다 손발이 서로 응하는데,

리듬이 탁무와 유사하다.

10월에 농사를 마치면 또 다시 이처럼 한다. 귀신을 믿어 국읍마다 한 사람을 세워 천신에게 제사 드리는 것을

주관토록 하는데, 천군이라 이른다.

또 여러 나라마다 별읍이 있어 일러 소도라 하는데,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긴다.

여럿이 도망하여 그 안에 이르면 모두 돌아가지 않으니, 도적질하기에 좋다.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와 유사하나

선악의 소행이 다르다. 북방으로 군에 가까운 여러 나라들은 예속을 조금 알지만, 먼 곳은 마치 죄수들이나 노비

가 서로 모인 것과 같았다. 남달리 진귀한 보배는 없다. 금수나 초목은 대략 중국과 같다.

큰 밤이 나는데 크기가 배와 같고, 또 꼬리가 가는 닭이 나는데 꼬리의 길이 모두가 5자가 되고도 남는다.

남자들은 때때로 문신이 있다.

 

또 주호가 있는데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 위에 있다. 사람들이 조금 작다. 언어는 한과 같지 않다.

모두 머리털을 깎는데 마치 선비와 같다. 다만 무두질한 가죽을 입는다.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 옷은 위는 있는데 아래는 없으니 대략 벌거숭이나 마찬가지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과 장사한다.

 

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地與之有城柵其言語不與馬韓同名國爲邦

弓爲弧賊爲寇行酒爲行觴相呼皆爲徒有似秦人非但燕齊之名物也名樂浪人爲阿殘東方人名我爲阿謂樂浪人本其殘

餘人今有名之爲秦韓者始有六國稍分爲十二國弁辰亦十二國又有諸小別邑各有渠帥大者名臣智其次有險側次有樊

濊次有殺奚次有邑借有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

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

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弁辰韓合二十四國大國四五千家小國六七百家總四五萬

戶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辰王不得自立爲王

[魏略曰明其爲流移之人故爲馬韓所制]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그 늙은이가 세계를 전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옛 망인들로 진나라의 부역을 피하여 한국에 오니, 마한이 그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주었다고 한다.

성곽과 목책이 있다. 그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아 나라를 일러 邦이라 하고, 활을 일러 弧라 하며, 도적을 일러

寇라 하고, 술잔 돌리기를 行觴이라 하며, 서로 모두를 불러 徒라 하니 진나라 사람과 유사하고 연나라와 제나라

의 말하고만 비슷한 것이 아니다.

낙랑 사람을 일러 阿殘이라 하는데, 동방 사람이 나를 일러 阿라 하니 생각건대 낙랑 사람이 본래는 그 남아있는

사람들로 지금 秦韓이라는 명칭이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6국이 있었으나 차츰 나눠져 12국이 되었다.

 

변진 역시 12국이다.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고 저마다 거수가 있다. 큰 자는 신지라 이르고, 그 다음에는 험측이

있으며, 다음에는 번예가 있고, 다음에는 살해가 있으며, 다음에는 읍차가 있다.

 

이저국과 불사국, 변진미리미동국, 변진접도국, 근기국, 난미리미동국, 변진고자미동국, 변진고순시국, 염해국,

변진반로국, 변진악노국, 군미국(변군미국), 변진미오사마국, 여담국, 변진감로국, 호로국, 주선국, (마연국),

변진구사국, 변진주조마국, 변진안사국, 변진독로국, 사로국, 우유국이 있다.

변진과 진한 합하여 24국이다.

큰 나라는 4~5천가이고 작은 나라는 6~7백가이니, 총 4~5만호이다. 12국은 진왕에게 속한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을 썼으며 세세토록 서로 이어지니, 진왕은 자립하여 왕이 될 수가 없었다.

[위략이 말했다. “유입하여 이주해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으므로 마한에게 제어된바 되었다”]

 

土地肥美宜種五穀及稻曉蠶桑作縑布乘駕牛馬嫁娶禮俗男女有別以大鳥羽送死其意欲使死者飛揚

[魏略曰其國作屋橫累木爲之有似牢獄也]

 

  토지가 기름지고 오곡과 벼를 심기에 마땅하다. 누에치기에 훤하여 겸포를 짓는다. 소와 말이 끄는 수레를

탄다. 시집가고 장가드는 예속은 남녀의 구별이 있다. 큰 까마귀 깃털로써 죽은 자를 보내는데 그 뜻은 죽은

가 날아오르도록 하려는 것이다.

[위략이 말했다. “그 나라는 가옥을 지으면서 나무를 가로로 엮어 만드는데, 뇌옥과 유사하다”]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市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俗喜歌舞飮酒有瑟其形似筑彈之亦有音曲兒生便以

石厭其頭欲其褊今辰韓人皆褊頭男女近倭亦文身便步戰兵仗與馬韓同其俗行者相逢皆住讓路弁辰與辰韓雜居亦有

城郭衣服居處與辰韓同言語法俗相似祠祭鬼神有異施竈皆在戶西其瀆盧國與倭接界十二國亦有王其人形皆大衣服

絜淸長髮亦作廣幅細布法俗特嚴峻

 

  나라에서 철이 나고 한과 예, 왜 모두가 좇아 취한다.

여러 시장에서 매매하면서 모두 철을 쓰니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두 군에 공급한다.

속습이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

슬이 있어 그 형상은 축과 비슷하고 튕기면 역시 음률과 곡조가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돌로 누르는데

납작하게 하려는 것으로 지금 진한 사람들은 모두가 편두이다.

남녀는 왜에 가까워 역시 문신한다. 보전을 잘하고 병장기는 마한과 같다.

속습이 길가는 자가 서로 만나면 모두 길을 양보한다.

 

변진은 진한과 잡거하고 역시 성곽이 있다.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고 언어와 법속도 서로 비슷하나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 달라 조왕신을 모시는 게 모두 문호의 서쪽에 있다.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한다. 12국 역시 왕이 있다.

사람들의 형상은 모두 크고 머리털은 길다. 의복은 청결하고 가는 베로 폭이 넓게 짓는다. 법속이 특히 준엄하다.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爲國邑舊百餘國漢時有朝見者今使譯所通三十國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

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始度一海千餘里至對馬國其大官曰卑狗副曰卑奴母離所居絶島方可四百餘里土地

山險多深林道路如禽鹿徑有千餘戶無良田食海物自活乘船南北市糴又南渡一海千餘里名曰瀚海至一大國官亦曰卑

狗副曰卑奴母離方可三百里多竹木叢林有三千許家差有田地耕田猶不足食亦南北市糴又渡一海千餘里至末盧國有

四千餘戶濱山海居草木茂盛行不見前人好捕魚鰒水無深淺皆沈沒取之東南陸行五百里到伊都國官曰爾支副曰泄謨

觚柄渠觚有千餘戶世有王皆統屬女王國郡使往來常所駐東南至奴國百里官曰兕馬觚副曰卑奴母離有二萬餘戶東行

至不彌國百里官曰多模副曰卑奴母離有千餘家南至投馬國水行二十日官曰彌彌副曰彌彌那利可五萬餘戶南至邪馬

壹國女王之所都水行十日陸行一月官有伊支馬次曰彌馬升次曰彌馬獲支次曰奴佳鞮可七萬餘戶自女王國以北其戶

數道里可得略載其餘旁國遠絶不可得詳次有斯馬國次有已百支國次有伊邪國次有都支國次有彌奴國次有好古都國

次有不呼國次有姐奴國次有對蘇國次有蘇奴國次有呼邑國次有華奴蘇奴國次有鬼國次有爲吾國次有鬼奴國次有邪

馬國次有躬臣國次有邑利國次有支惟國次有烏奴國次有奴國此女王境界所盡其南有狗奴國男子爲王其官有狗古智

卑狗不屬女王自郡至女王國萬二千餘里

 

  왜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다. 산과 섬에 의거하여 국읍으로 삼는다.

옛날에는 백여 국으로 한나라 때 입조하여 알현하는 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신과 역관이 통하는 곳이 30국

이다. 군으로부터 왜에 이르려면 해안을 빙 돌아 물길로 한국을 거치는데, 남으로 갔다가 동으로 가서 구사

한국의 북쪽 해안에 이르니 7천여 리이다.

그리고 비로소 바다를 건너 1천여 리면 대마국에 이른다.

그 대관은 비구라 하고, 부관은 비노모리라 한다. 절해고도에 거하는데, 사방이 가히 4백여 리이다.

토지는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다. 도로는 마치 날짐승과 사슴이 지나다니는 길과 같다.

1천여 호가 있다. 좋은 밭은 없고 해물을 먹으며 스스로 살아간다. 배를 타고 남북으로 장사하며 쌀을 사들인다.

 

또 남쪽으로 한해라 이르는 바다를 건너 1천여 리면 큰 나라에 닿는다. 역시 대관은 비구라 하고 부관은 비노

모리라 한다. 사방이 가히 3백 리이다. 대나무와 수풀, 숲이 많다. 3천여 가가 있다. 차등 있는 전지가 있고,

밭을 갈아도 먹기에 부족하여 역시 남북으로 장사하며 쌀을 사들인다.

 

또 바다를 건너 1천여 리면 말로국에 이른다. 4천여 호가 있고 산자락이나 바닷가에 거한다. 초목이 무성해

을 가면 앞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물고기와 전복을 잡기 좋아하는데, 물에는 깊고 얕음이 없어 모두가 들어가

잡는다.

 

동남쪽으로 5백 리를 뭍으로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대관은 이지라 하고 부관은 설모고와 병거고라 한다.

1천여 호가 있다. 세세토록 왕이 있었으나 모두 여왕국에 속해 왔다. 군의 사자가 왕래하며 항상 머무르는 곳이다.

동남쪽으로 1백리이면 노국에 이른다. 대관은 시마고라 하고 부관은 비노모리라 한다. 2만여 호가 있다.

동쪽으로 1백 리면 불미국에 이른다. 대관은 다모라 하고 부관은 비노모리라 한다. 1천여 가가 있다.

남쪽으로 투마국에 이르는데 물길로 20일이다. 대관은 미미라 하고 부관은 미미나리라 한다.

가히 5만여 호이다.

남쪽으로 사마일국에 이르는데 여왕이 도읍하는 곳이다. 물길로 10일을 가고 뭍길로 1달을 간다. 대관은 이지마

가 있고 다음은 미마승이라 하며 다음은 미마획지라 하고 다음은 노가제라 한다. 가히 7만여 호이다.

 

여왕국으로부터 북쪽으로는 호수와 길의 거리를 얻을 수 있어 간략하게나마 실었으나,

나머지 나라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 상세한 것을 얻을 수 없었다.

다음에는 사마국이 있고, 다음에는 이백지국이 있고, 다음에는 이사국이 있고, 다음에는 도지국이 있고, 다음

에는 미노국이 있고, 다음에는 호고도국이 있고, 다음에는 불호국이 있고, 다음에는 저노국이 있고, 다음에는

대소국이 있고, 다음에는 소노국이 있고, 다음에는 호읍국이 있고, 다음에는 화노소노국이 있고, 다음에는

귀국이 있고, 다음에는 위오국이 있고, 다음에는 귀노국이 있고, 다음에는 사마국이 있고, 다음에는 궁신국이

있고, 다음에는 읍리국이 있고, 다음에는 지유국이 있고, 다음에는 오노국이 있고, 다음에는 노국이 있으니

여기까지가 여왕의 경계가 끝나는 곳이다.

 

그 남쪽에는 구노국이 있어 남자가 왕이 된다. 대관에는 구고지비구가 있다. 여왕에게 속하지 않는다.

군으로부터 여왕국에 이르려면 1만 2천여 리이다.

 

男子無大小皆黥面文身自古以來其使詣中國皆自稱大夫夏后少康之子封於會稽斷髮文身以避蛟龍之害今倭水人好

沈沒捕魚蛤文身亦以厭大魚水禽後稍以爲飾諸國文身各異或左或右或大或小尊卑有差計其道里當在會稽東冶之東

其風俗不淫男子皆露紒以木緜招頭其衣橫幅但結束相連略無縫婦人被髮屈紒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種禾稻

紵麻蠶桑緝績出細紵縑緜其地無牛馬虎豹羊鵲兵用矛楯木弓木弓短下長上竹箭或鐵鏃或骨鏃所有無與儋耳朱崖同

倭地溫暖冬夏食生菜皆徒跣有屋室父母兄弟臥息異處以朱丹塗其身體如中國用粉也食飮用籩豆手食其死有棺無槨

封土作冢始死停喪十餘日當時不食肉喪主哭泣他人就歌舞飮酒已葬擧家詣水中澡浴以如練沐其行來渡海詣中國恆

使一人不梳頭不去蟣蝨衣服垢汚不食肉不近婦人如喪人名之爲持衰若行者吉善共顧其生口財物若有疾病遭暴害便

欲殺之謂其持衰不謹出眞珠靑玉其山有丹其木有柟杼豫樟楺櫪投橿烏號楓香其竹篠簳桃支有薑橘椒蘘荷不知以爲

滋味有獮猴黑雉其俗擧事行來有所云爲輒灼骨而卜以占吉凶先告所卜其辭如令龜法視火坼占兆其會同坐起父子男

女無別人性嗜酒

[魏略曰其俗不知正歲四節但計春耕秋收爲年紀]

 

  남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얼굴과 몸에 자문하는데, 예로부터 그래온 것이다.

그 사신이 중국에 이르러 모두 자칭 대부라 하였다. 하나라 임금 소강의 아들이 회계에 봉해졌는데, 머리털을

자르고 문신하여 교룡의 해를 피했다.

지금 왜에서 물질하는 사람들이 물고기와 조개 잡기를 좋아하니 문신 역시 큰 물고기와 물짐승을 쫓아내려한

것이었는데, 뒤에 차츰 장식으로 여겼다.

여러 나라마다 문신이 달라 혹 왼쪽에 혹 오른쪽에 혹 크게 혹 작게 하여 존비에 차등이 있었다.

그 거리를 계산하면 회계와 동치의 동쪽에 있다. 풍속은 음란하지가 않다.

남자들은 모두 상투를 틀고 무명으로 머리를 묶는다. 남자의 옷은 가로의 폭이 다만 서로 이어지도록 결속하고

간략하게나마 꿰매는 것도 없다. 부인은 머리털을 풀어헤쳐 굴곡지게 상투를 튼다.

부인의 옷을 짓는 것은 마치 홑이불 같은데 그 중앙을 뚫어 머리를 넣어 입는다. 벼와 모시, 삼을 심고 누에를

쳐서 길쌈해둔다. 가는 모시와 겸면이 난다.

그 땅에 소와 말, 호랑이, 표범, 양, 까치가 없다. 병장기로 창과 방패, 나무 활을 쓴다. 나무 활은 아래가 짧고

위가 길며, 대나무 화살은 혹 쇠로 만든 화살촉이나 혹 뼈로 만든 화살촉을 쓴다.

담이와 주애 같은 것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왜의 땅은 온난하여 겨울에도 여름에도 생나물을 먹는다.

모두 맨발로 돌아다닌다.

집이 있고 부모와 형제가 함께 누워 쉬지만 거처는 다르다. 붉은 단사를 신체에 바르는데 마치 중국에서 분을

쓰는 것과 같다. 음식에는 변두를 쓰며 손으로 먹는다.

죽음에 관은 있지만 곽은 없다. 봉토는 무덤처럼 짓는다. 죽으면 처음 십여 일간 상을 치르는데 당시에 고기를

먹지 않고 상주는 서서 울며 곡하나, 다른 사람은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술을 마신다.

장사를 마치면 가족 모두가 물에 들어가 몸을 씻는데 마치 연목과 같다.

바다를 건너 중국에 오고갈 때 늘 한 사람을 시켜 상중인 사람처럼 머리털을 빗지도 않고 이나 서캐를 잡지도

않으며 의복은 더럽히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부인을 가까이 하지도 않게 하는데 일러 지쇠라 한다.

만약 길가는 자들이 길하고 잘되면 함께 생구나 재물을 나눠주고, 만약 질병이 있거나 폭풍의 해를 만나면

지쇠가 삼가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죽이려 든다.

진주와 파란 옥이 나고 산에는 단사가 있다. 나무에는 柟杼豫樟楺櫪投橿烏號楓香이 있고 대나무는 篠簳桃支

이다. 생강과 귤, 산초, 양하가 있으나 맛을 보태는 것인 줄 알지 못한다. 선후와 검은 꿩이 있다.

속습에 큰일을 치를 때면 출행하거나 돌아와서 전하는 바가 있는데 번번이 뼈를 불살라 길흉을 점복한다.

먼저 점복하려는 바를 고하는데 그 말이 거북이 등껍질로 점복하면서 명령하는 말과 같고, 그 뒤 불에 타서

터진 금으로 조짐을 점친다. 회동에서 앉고 일어서는데 부자나 남녀의 구별이 없다. 인성이 술을 즐긴다.

[위략이 말했다. “속습이 정월과 사계절을 모르며 다만 봄에 밭 갈고 가을에 거들어 들이는 것으로 계산하여

년을 삼는다”]

 

見大人所敬但搏手以當跪拜其人壽考或百年或八九十年其俗國大人皆四五婦下戶或二三婦婦人不淫不妬忌不盜竊

少諍訟其犯法輕者沒其妻子重者滅其門戶及宗族尊卑各有差序足相臣服收租賦有邸閣國國有市交易有無使大倭監

之自女王國以北特置一大率檢察諸國諸國畏憚之常治伊都國於國中有如刺史王遣使詣京都帶方郡諸韓國及郡使倭

國皆臨津搜露傳送文書賜遺之物詣女王不得差錯下戶與大人相逢道路逡巡入草傳辭說事或蹲或跪兩手據地爲之恭

敬對應聲曰噫比如然諾其國本亦以男子爲王住七八十年倭國亂相攻伐歷年乃共立一女子爲王名曰卑彌呼事鬼道能

惑衆年已長大無夫壻有男弟佐治國自爲王以來少有見者以婢千人自侍唯有男子一人給飮食傳辭出入居處宮室樓觀

城柵嚴設常有人持兵守衛女王國東渡海千餘里復有國皆倭種又有侏儒國在其南人長三四尺去女王四千餘里又有裸

國黑齒國復在其東南船行一年可至參問倭地絶在海中洲島之上或絶或連周旋可五千餘里

 

  대인이 공경하는 바를 보면 단지 손을 잡고 꿇어 절한다. 사람들의 수명은 혹 백년이나 혹 8, 90년을 헤아린다.

속습에 나라의 대인은 모두 네다섯의 부인이 있고 하호는 간혹 둘 셋의 부인이 있다. 부인은 음란하지 않고 투기

하지 않는다. 절도하지 않고 송사로 다투는 것이 적다. 법을 범하면 가벼운 자는 그 처자를 몰입하고 무거운

자는 그 집안과 종족까지 멸한다. 존비마다 차등과 서열이 있어 서로 신복하는 것에 만족한다. 조세와 부역을

거둔다. 집에 문설주가 있다.

  나라마다 시장이 있으나 교역은 있거나 없다. 대왜로 하여금 이를 감독하게 하니 여왕국으로부터 북쪽에

특별히 대솔 한 사람을 두고 여러 나라를 검찰토록 한다. 여러 나라가 이를 두려워하고 꺼린다. 대솔은 항상

이도국에서 다스리는데, 나라 안에 마치 자사가 있는 것과 같다.

  여왕이 사신을 보내 경도나 대방군에 이르면 여러 한국과 군은 왜국을 시켜 모두 나루터로 와서 찾아가게

하는데, 전송한 문서나 하사하여 보낸 물건이 어긋나거나 섞이지 않고 여왕에게 이른다.

  하호가 대인과 서로 도로에서 만나면 뒷걸음쳐 풀 속으로 돌아 들어간다. 말을 전하거나 일을 설명할 때면 혹

몸을 웅크리고 혹 꿇어앉아 양손을 땅에 짚는데 공경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응하는 소리로 희라고 하는데 이는

그렇게 하겠다는 것과 같다.

  그 나라도 본래는 역시 남자를 왕으로 삼았었는데 왜국이 어지러워져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기가 7, 80년 동안

이어지니 이내 함께 여자 하나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일러 비미호라 했는데 귀도를 섬기고 능히 대중을 현혹

하였다. 나이가 이미 어른이었으나 지아비는 없었고, 남자 아우가 있어 나라를 다스리는데 보좌하였다. 왕이 된

이래로부터 보았다는 자가 적고 시비 1천인이 따로 모셨다. 오직 남자 한 사람이 있어 음식을 공급하고 드나들

며 말을 전했다. 거처하는 궁실과 누관, 성책이 엄히 설치되어 항상 사람들이 병장기를 가지고 지키며 호위한다.

  여왕국의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1천여 리면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의 종족이다. 또 주유국이 그 남쪽에

있다. 사람의 키가 3, 4척이다. 여왕국에서 4천 여리를 간다. 또 라국과 흑치국이 다시 그 동남쪽에 있어,

배로 1년을 가야 이른다. 왜의 땅은 머나먼 바다 가운데의 섬들 위에 있어 혹은 떨어져 있고 혹은 이어져 있다.

둘레가 가히 5천여 리이다.

 

景初二年六月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求詣天子朝獻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其年十二月詔書報倭女王曰制詔

親魏倭王卑彌呼帶方太守劉夏遣使送汝大夫難升米次使都市牛利奉汝所獻男生口四人女生口六人班布二匹二丈以

到汝所在踰遠乃遣使貢獻是汝之忠孝我甚哀汝今以汝爲親魏倭王假金印紫綬裝封付帶方太守假授汝其綏撫種人勉

爲孝順汝來使難升米牛利涉遠道路勤勞今以難升米爲率善中郞將牛利爲率善校尉假銀印靑綬引見勞賜遣還今以絳

地交龍錦五匹

[臣松之以爲地應爲綈漢文帝著皂衣謂之弋綈是也此字不體非魏朝之失則傳寫者誤也]

 

경초 2년 6월에 왜의 여왕이 대부 난승미 등을 보내 군에 이르러 천자에게 입조해 헌상하기를 구하니, 태수 유하

가 관리와 장수를 보내 경도에 이르도록 전송하였다.

그 해 12월에 조서를 내려 왜의 여왕에게 회보해 말했다. “친위왜왕 비미호에게 제조한다.

대방태수 유하가 사자를 보내 너의 대부 난승미와 차사 도시우리를 전송하여 네가 공헌한 남자 넷과 여자 여섯,

반포 두 필 두 장을 봉헌하였다. 네가 있는 곳이 매우 먼데도 사신을 보내 공헌하니 너의 충효가 이러하다.

내가 너를 심히 애달피 여기는바, 이제 너를 친위왜왕으로 삼고 금인과 자수를 대방태수에게 부쳐 너에게 내려

주도록 한다. 너희 종족 사람들을 어루만져 충효와 순리를 다하게끔 힘쓰라.

네가 보내온 사신 난승미와 우리는 먼 길을 부지런히 건너왔으니 이제 난승미를 솔선중랑장으로 삼고, 우리를

솔선교위로 삼아 은인과 청수를 준다. 또 그 둘을 인견해 돌려보내며 이제 강지의 교룡금 5필과

 

絳地縐粟罽十張蒨絳五十匹紺靑五十匹答汝所獻貢直又特賜汝紺地句文錦三匹細班華罽五張白絹五十匹金八兩

五尺刀二口銅鏡百枚眞珠鉛丹各五十斤皆裝封付難升米牛利還到錄受悉可以示汝國中人使知國家哀汝故鄭重賜

汝好物也正始元年太守弓遵遣建忠校尉梯儁等奉詔書印綬詣倭國拜假倭王幷齎詔賜金帛錦罽刀鏡采物倭王因使

上表答謝恩詔其四年倭王復遣使大夫伊聲耆掖邪狗等八人上獻生口倭錦絳靑縑緜衣帛布丹木短弓矢掖邪狗等壹

拜率善中郞將印綬其六年詔賜倭難升米黃幢付郡假授其八年太守王頎到官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弓呼

素不和遣倭載斯烏越等詣郡說相攻擊狀遣塞曹掾史張政等因齎詔書黃幢拜假難升米爲檄告喩之卑彌呼以死大作

冢徑百餘步狥葬者奴婢百餘人更立男王國中不服更相誅殺當時殺千餘人復立卑彌呼宗女壹與年十三爲王國中遂

定政等以檄告喩壹與壹與遣倭大夫率善中郞將掖邪狗等二十人送政等還因詣臺獻上男女生口三十人貢白珠五千

孔靑大句珠二枚異文雜錦二十匹

 

강지의 추속계 10장, 천강 50필, 감청 50필을 내려주어 네가 공헌한 것에 화답한다. 또 특별히 너에게는 감지의

구문금 3필, 세반화계 5장, 백견 50필, 금 8냥, 오척도 2구, 동경 100매, 진주와 연단 각 50근을 하사해 모두

난승미와 우리에게 딸려 보내니 돌아가면 받아서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보이고 국가가 너희를 애달피

여기는 것을 알게 하라. 이런 까닭으로 네가 좋아하는 물건들을 정중히 하사하는 것이다”

  정시 원년에 태수 궁준이 건충교위 제준 등을 보내 조서와 인수를 받들고 왜국에 이르러 왜왕을 배하며 아울러

하사한 금과 백, 금, 계, 도, 경, 채색 물품을 가져가게 하였다. 왜왕은 말미암아 상표하여 은혜와 조서에 답사

토록 하였다. 정시 4년에 왜왕은 다시 대부 이성기와 액사구 등 여덟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 생구와 왜금, 강청

겸면의, 백포, 단목, 단궁시를 헌상하였다. 액사구 등 모두를 솔선중랑장으로 배하고 인수를 주었다.

정시 6년에 조서를 내려 왜의 난승미에게 황당을 하사해 군에 부쳐 주도록 하였다. 정시 8년에 태수 왕기가 관가

에 이르러 말하기를, 왜의 여왕 비미호가 구노국의 남왕 비미궁호와 평소 불화하더니 왜의 재사와 오월 등을

보내 군에 이르러 서로 공격하는 상황을 설명했다고 하였다. 색조연사 장정 등을 보내 조서와 황당을 가져가서

난승미를 배하고 격문으로 알려 타이르도록 하였다. 비미호가 죽자 지름이 백여 보나 되게 무덤을 크게 짓고

노비를 순장한 것이 백여 인이었다.

다시 남왕을 세웠으나 나라 안이 복종치 않고 다시 서로 주살하니 당시에 천여 인을 죽였다.

다시 비미호의 종녀 일여를 세우니 나이 13에 왕이 되었다. 나라 안이 마침내 평정되었다.

장정 등이 일여를 격문으로 알려 타이르자, 일여는 왜의 대부 솔선중랑장 액사구 등 20인을 보내 장정 등이 돌아

오는 것을 전송하고 말미암아 대에 이르러 남녀 30인을 헌상하며 백주 5천매와 공청대구주 2매, 이문잡금 20필

을 조공하였다.

 

後論

 

評曰史漢著朝鮮兩越東京撰錄西羌魏世匈奴遂衰更有烏丸鮮卑爰及東夷使譯時通記述隨事豈常也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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