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漢書
東夷列傳
동이열전
前言
王制云東方曰夷夷者柢也言仁而好生萬物柢地而出
[事見風俗通]
왕제가 전했다. “동방은 이라 한다. 이라는 것은 바탕이다. 말이 어질고 만물을 살리기 좋아하니, 땅을 바탕
으로 하여 나오는 것이다”
[이 기사는 풍속통에 보인다]
故天性柔順易以道御至有君子不死之國焉
[山海經曰君子國衣冠帶劒食獸使二文虎在旁]
[外國圖曰去琅邪三萬里]
[山海經又曰不死人在交脛東其爲人黑色壽不死]
그러므로 천성이 유순하여 도로써 제어하기에 쉬워, 군자와 불사의 나라가 있기에 이르렀다.
[산해경이 말했다. “군자국은 관을 쓰고 허리에 검을 찬다. 짐승을 먹는데, 두 마리 무늬 있는 호랑이를 곁에
두고 부린다”]
[외국도가 말했다. “랑야에서 3만 리를 간다”]
[산해경이 또 말했다. “불사인은 교경 동쪽에 있다. 그 사람됨은 검은 빛이고 수명은 죽지 않는다”]
並在東方也夷有九種
[竹書紀年曰后芬發卽位三年九夷來御也按殿本無發字汲本三作二]
나란히 동방에 있다. 이에는 아홉 종류가 있으니
[죽서기년이 말했다. “후분발 즉위 3년에 구이가 와서 제어했다” 안찰한다. “전본에는 發자가 없고,
급본에는 3이 2로 되어있다”]
曰畎夷于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
[竹書紀年曰后泄二十一年命畎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后相卽位二年征黃夷七年于夷來賓後少康卽位方夷來賓也]
견이와 우이, 방이, 황이, 백이, 적이, 현이, 풍이, 양이라 한다.
[죽서기년이 말했다. “후설 21년에 견이와 백이, 적이, 현이, 풍이, 양이에게 명하였다. 후상 즉위 2년에 황이를
정벌하였다. 7년에 우이가 와서 국빈으로 머물렀다. 소강이 즉위한 후에 방이가 와서 국빈으로 머물렀다”]
故孔子欲居九夷也昔堯命羲仲宅嵎夷曰暘谷蓋日之所出也
[孔安國尙書注曰東方之地曰嵎夷暘谷日之所出也]
그러므로 공자가 구이에서 살고자 하였다. 옛날 요가 희중에게 명하여 우이에 집짓게 하니, 양곡이라 하였다.
대개 해가 뜨는 곳이다.
[공안국상서주가 말했다. “동방의 땅이 우이라고 했다. 양곡은 해가 뜨는 곳이다”]
夏后氏太康失德夷人始畔
[太康啓之子也槃于游田十旬不反不恤人事爲羿所逐也]
하나라 태강이 덕을 잃으니, 이인이 갈라서기 시작했다.
[태강은 계의 아들이다. 여기저기 사냥을 놀러가서 백일 동안 돌아가지 않고 인사를 돌보지 않아, 예가 내쫓은
바 되었다]
自少康已後世服王化遂賓於王門獻其樂舞
[少康帝仲康之孫帝相子也]
[竹書紀年曰后發卽位元年諸夷賓于王門諸夷入舞]
소강 이후로부터 세세토록 왕화에 복종하여, 마침내 왕문에서 국빈으로 머무르며 그 음악과 춤을 바쳤다.
[소강은 제중강의 손자이고 제상의 아들이다]
[죽서기년이 말했다. “후발 즉위 원년에 여러 동이가 왕문에서 국빈으로 머물렀다. 여러 동이가 들어와 춤췄다”]
桀爲暴虐諸夷內侵殷湯革命伐而定之至于仲丁藍夷作寇
[仲丁殷大戊之子也]
[竹書紀年曰仲丁卽位征于藍夷也]
걸이 포학하니, 여러 동이가 국내로 침구하였다. 은나라의 탕이 혁명하고서, 정벌해 평정하였다. 중정에 이르러
남이가 중국을 도둑질했다.
[중정은 은나라 대무의 아들이다]
[죽서기년이 말했다. “중정이 즉위하고 남이를 정벌하였다”]
自是或服或畔三百餘年武乙衰敝東夷寖盛遂分遷淮岱漸居中土
[武乙帝庚丁之子無道爲革囊盛血仰而射之命曰射天也]
이로부터 혹은 복종하고 혹은 갈라서기가 삼백여 년이었다. 무을이 쇠폐해지고 동이는 차츰 강성해지니,
마침내 회와 대로 옮겨와 분거하며 점점 중국에서 살았다.
[무을은 제경정의 아들이다. 무도하였다. 가죽주머니에 피를 담아 채우고서 우러러보더니 활로 쏘았다.
명하여 ‘하늘을 쏜다’라고 했다]
及武王滅紂肅愼來獻石砮楛矢管蔡畔周乃招誘夷狄周公征之遂定東夷
[尙書武王崩三監及淮夷畔周公征之作大誥又曰成王旣伐管叔蔡叔滅淮夷]
무왕이 걸을 멸하자, 숙신이 와서 석노와 고시를 바쳤다. 관숙과 채숙이 주나라와 갈라서고 이내 이적을 꾀어
불러들이니, 주공이 정벌하여 마침내 동이를 평정하였다.
[상서에서 “무왕이 죽었다. 여러 차례 살폈으나 회이가 갈라서고야 말았다. 주공이 정벌하고 대고를 지었다”
또 말했다. “성왕은 관숙과 채숙을 정벌하자, 회이를 멸했다”]
康王之時肅愼復至後徐夷僭號乃率九夷以伐宗周西至河上穆王畏其方熾乃分東方諸侯命徐偃王主之
[博物志曰徐君宮人娠而生卵以爲不祥棄於水濱孤獨母有犬名鵠倉持(得)所棄卵銜以歸母母覆煖之遂成小兒生而
偃故以爲名宮人聞之乃更錄取長襲爲徐君]
[尸子曰偃王有筋而無骨故曰偃也]
[按校補引柳從辰說謂持乃得之譌博物志及卿覽九百四引徐偃王志可證各本注失正今據改]
강왕의 때에 숙신이 다시 이르렀다. 뒤에 서이가 참람하게 왕호를 칭하더니 이내 구이를 이끌고 종주를 정벌
하려 서쪽으로 황하에 이르렀다. 목왕은 그 치솟는 기세를 두려워하여 동방의 제후들을 나눠주고 서언왕에게
명하여 주관토록 했다.
[박물지가 말했다. “서이 군후의 궁인이 임신하여 알을 낳았다.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버렸다. 한 홀어미
에게 개가 있어 이름을 곡창이라 하였는데, 버려진 알을 얻어 입에 물고는 홀어미에게 돌아갔다. 홀어미가 알을
뒤집어가며 따뜻하게 하니 마침내 작은 아이가 되었다. 생기자마자 엎어지므로 이로써 이름을 삼았다.
궁인이 이를 듣고서 다시 아이를 취하였다. 아이가 장성하니 자리를 물려받아 서이의 군후가 되었다”]
[시자가 말했다. “언왕에게는 근육이 있으나 뼈가 없었으므로 偃이라고 하였다”]
[안찰한다. “교보는 류종신의 설을 인용하여, 持를 가리켜 得의 와전이라 하였다. 박물지 및 경람 904는 서언왕지
를 인용하였으니, 증명할 수 있다. 각 전본의 주석이 정확성을 잃었으므로, 이제 의거하여 고친다”]
偃王處潢池東地方五百里
[水經注曰黃水一名汪水與泡水合至沛入泗]
[自山陽以東海陵以北其地當之也]
언왕은 황지의 동쪽에 거처하였는데 지방이 5백리였다.
[수경주가 말했다. “황수는 일명 왕수이다. 포수와 합하여 패수에 이르고 사수로 들어간다”]
[산양의 동쪽으로부터 해릉의 북쪽이니, 그 땅이 틀림없다]
行仁義陸地而朝者三十有六國穆王後得驥騄之乘
[史記曰造父以善御幸於周繆王得赤驥盜驪驊騮騄耳之駟西巡狩樂而忘歸]
행실이 어질고 의로워, 육지에서 조공하는 자가 삼십이고 여섯 나라가 있었다. 목왕이 뒤에 기록의 수레를 얻어
[사기가 말했다. “조부는 수레를 잘 몰아 주나라 무왕에게 아낌을 받았다. 적기와 도려, 화류, 녹이의 사마를
얻어 서쪽으로 순수하니 즐거워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
乃使造父御以告楚令伐徐一日而至
[造父解見蔡邕傳]
조부로 하여금 몰고 가 초나라에 알려 서이를 정벌토록 명령하니, 하루 만에 이르렀다.
[조부는 채옹전에 보인다]
於是楚文王大擧兵而滅之偃王仁而無權不忍鬪其人故致於敗乃北走彭城武原縣東山下百姓隨之者以萬數因名其山
爲徐山
[武原縣故城在今泗州下邳縣北徐山在其東]
[博物志曰徐王妖異不常武原縣東十里見有徐山石室祠處偃王溝通陳蔡之閒得朱弓朱矢以己得天瑞自稱偃王穆王
聞之遣使乘駟一日至楚伐之偃王仁不忍鬪爲楚所敗北走此山也]
이에 초나라 문왕이 크게 거병하여 멸했다. 언왕은 어질었으나 권위가 없었다. 남과 싸우는 것을 견디지 못하
므로 패하기에 이르렀다. 이내 북쪽으로 달아나 팽성 무원현 동산 아래에 이르렀는데, 백성으로 따라온 자가
수만이었다. 말미암아 그 산을 일러 서산이라 하였다.
[무원현의 옛 성은 지금의 사주 하비현 북쪽에 있다. 서산은 그 동쪽에 있다]
[박물지가 말했다. “서왕은 요사하고 기이하며 범상치가 않았다. 무원현의 동쪽 십리에 가보면 서산의 석실 제사
터가 있다. 언왕이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 물길을 파서 통하게 하였는데 붉은활과 붉은 화살을 얻으니 자기가
하늘의 상서를 얻었다 하여 자칭 언왕이라 했다. 목왕이 이를 듣고서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에 사자를 태워
보내니, 하루 만에 이르렀다. 초나라가 정벌하였다. 언왕은 어질어서 싸우는 것을 견디지 못하니 초나라에게
패한 바 되었다. 북쪽 이 산으로 달아났다”]
厲王無道淮夷入寇王命虢仲征之不克宣王復命召公伐而平之
[毛詩序曰江漢尹吉甫美宣王也能興衰撥亂命召公平淮夷]
[其詩曰江漢浮浮武夫滔滔匪安匪游淮夷來求王命召虎式辟四方徹我土疆]
려왕이 무도하니, 회이가 들어와 침구하였다. 왕이 괵중에게 명하여 정벌토록 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선왕이
다시 소공에게 명하여 정벌토록 하니 평정하였다.
[모시서가 말했다 “강한의 윤길보가 선왕을 찬미하였다. ‘능히 쇠함을 일으키고 난을 다스렸도다. 소공에게
명하여 회이를 평정하였네’”]
[그 시가 말했다. “강한이 두둥실, 싸울아비가 철철, 안이하지 않고 놀지 않네. 회이가 와서 구하니 왕이 소호
에게 명했네. 사방을 불러들여 우리 강토를 밝혔네”]
及幽王淫亂四夷交侵至齊桓修覇攘而卻焉及楚靈會申亦來豫盟
[左傳楚靈王蔡侯陳侯鄭伯許男淮夷會于申]
유왕이 음란하니, 사이가 교대로 침구하였다. 제나라 환공에 이르러 패업을 닦아 물리쳤다. 초나라 영왕이 신
에서 회합하니, 역시 회이가 와서 맹세하였다.
[좌전에서 “초나라 영왕과 채나라 후작, 진나라 후작, 정나라 백작, 허나라 남작, 회이가 신에서 회맹하였다”]
後越遷琅邪與共征戰遂陵暴諸夏侵滅小邦秦幷六國其淮泗夷皆散爲民戶陳涉起兵天下崩潰燕人衛滿避地朝鮮
[前書曰朝鮮王滿燕人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爲置吏築障漢興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東走度浿水居秦
故空地稍役屬朝鮮蠻夷及故燕齊亡(任)在者王之都王險也漢興屬燕據前書朝鮮傳補及故燕齊亡(任)在者據汲本
殿本改]
뒤에 월나라가 랑야로 천도하고서 동이와 함께 정벌해 싸우니, 마침내 중국의 여러 나라들을 능멸하고 폭행하여
작은 나라를 침범해 멸하였다. 진나라가 육국을 병탄하니 회수와 사수의 동이들은 모두 흩어져 민호가 되었다.
진섭이 기병하고 천하가 붕궤되자, 연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의 땅으로 피하였다.
[전한서가 말했다. “조선왕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전성기의 연나라 시대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속국으로 경략하여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한나라가 일어나니, 연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 로관이 반역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비어있는 땅에 거하였다.
차츰 조선에 속하여 부역하더니 만이와 옛 연나라, 제나라에서 망명한 자들의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
漢興屬燕는 전한서 조선전에 의거하여 보충한다. 及故燕齊亡(任)在者는 급본과 전본에 의거하여 고친다]
因王其國百有餘歲武帝滅之於是東夷始通上京王莽簒位貊人寇邊
[前書莽發高句麗兵當伐胡不欲行郡縣彊迫之皆亡出塞因犯法爲寇州郡歸咎於高句麗侯騶嚴尤奏言貉人犯法不從
騶起宜慰安之因犯法爲寇據前書王莽傳補]
그 나라의 왕이 된 지 백여 년이 지나, 무제가 멸하였다. 이에 동이들이 비로소 상경과 통하였다. 왕망이 제위를
찬탈하고서 맥인이 변경을 침구하였다.
[전한서에서 “왕망이 고구려의 병사를 징발하여 호를 정벌하려는데, 고구려가 행하고자 않으니, 군현이 강박
하였다. 고구려의 병사가 모두 장새로 도망쳐 나와, 말미암아 법을 범하는 도둑이 되었다. 주군이 허물을
고구려후 추에게 돌리니, 엄우가 상주하여 말하기를 맥인이 법을 범하여 좇지 않았고, 고구려후 추가 기병할
것이니 마땅히 위안해야 한다고 하였다” 因犯法爲寇는 전한서 왕망전에 의거하여 보충한다]
建武之初復來朝貢時遼東太守祭肜威讋北方聲行海表於是濊貊倭韓萬里朝獻故章和已後使聘流通. 逮永初多難始入
寇鈔桓靈失政漸滋曼焉自中興之後四夷來賓雖時有乖畔而使驛不絶
[按刊誤謂驛當作譯郵驛中國可有之不可通於四夷自前書皆言使譯使卽使者譯則譯人]
건무 초, 맥인이 다시 와서 조공하였다. 당시 요동태수 제융이 북방에 위엄을 떨쳐 명성이 바다까지 퍼졌다.
이에 예와 맥, 왜, 한이 만 리에서 조공을 바치므로 장제와 화제 이후로 사신이 빙문하며 유통하였다. 영초에
다난하니, 들어와 중국을 도둑질하기 시작했다. 환제와 영제가 실정하니, 점점 자만하였다. 중흥 이후로부터
사이가 와서 국빈으로 머물렀다. 비록 때때로 떨어져 갈라서기도 했으나 사자와 역인이 끊이지 않았다.
[안찰한다. “간오는 驛을 가리켜 당연히 譯으로 되어있다고 하였다. 우역은 중국에서만 통할 수 있고 사이에게서
통할 수가 없다. 전한서로부터 모두 使譯이라고 말한다. 使는 사자이고 譯은 역인이다”]
故國俗風土可得略記東夷率皆土著憙飮酒歌舞或冠弁衣錦器用俎豆所謂中國失禮求之四夷者也
[左傳曰仲尼學鳥名官於郯子旣而告人曰吾聞之天子失官學在四夷其信也仲尼學鳥名官於郯子汲本殿本鳥作官按
仲尼學鳥名官於郯子見左傳昭公十七年今補一官字]
그러므로 나라의 속습과 풍토를 대략 얻을 수 있어 기록한다. 동이는 모두 토박이들을 이끈다. 술 마시고 노래
하며 춤추기를 기뻐한다. 혹은 고깔을 쓰고 비단을 입는다. 그릇은 조두를 쓴다. 소위 중국이 예를 잃으면 사이
에게서 구한다는 것이다.
[좌전이 말했다. “仲尼學鳥名官於郯子旣而告人曰吾聞之天子失官學在四夷其信也” 仲尼學鳥名官於郯子는
급본과 전본에 鳥가 官으로 되어 있는데, 안찰한다. “仲尼學鳥名官於郯子는 좌전 소공 17년에 보인다. 이제 官자
하나를 보충한다”]
凡蠻夷戎狄總名四夷者猶公侯伯子男皆號諸侯云
무릇 만과 이, 융, 적을 통틀어 사이라 이르는 것은 마치 공과 후, 백, 자, 남을 모두 제후라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夫餘國在玄菟北千里南與高句驪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地方二千里本濊地也初北夷索離國王出行
[索或作橐音度洛反]
부여국은 현토에서 북쪽으로 천리에 있다. 남으로는 고구려와, 동으로는 읍루와, 서로는 선비와 접한다.
북쪽에는 약수가 있고, 지방이 2천리이다. 본래는 예의 땅이다. 처음에 북이 색리국의 왕이 출행하였는데,
[索은 혹 橐으로도 되어있다. 음은 度와 洛의 반음이다]
其侍兒於後姙身
[姙音人鴆反]
그 시아가 뒤에 아이를 배었다.
[姙의 음은 人과 鴆의 반음이다]
王還欲殺之侍兒曰前見天上有氣大如雞子來降我因以有身王囚之後遂生男王令置於豕牢
[牢圈也]
왕이 돌아와 죽이려고 하니, 시아가 말했다. “일전에 하늘 위를 보니, 큰 달걀 같은 기운이 있어 나에게로 내려
오므로, 말미암아 아이가 생겼습니다” 왕이 시아를 가두었다. 뒤에 시아가 마침내 남아를 낳았다. 왕이 돼지
우리에 두라 명령하니,
[牢는 圈이다]
豕以口氣噓之不死復徙於馬蘭
[蘭卽欄也]
돼지가 입김을 불어줘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에 옮기니,
[蘭은 欄이다]
馬亦如之王以爲神乃聽母收養名曰東明東明長而善射王忌其猛復欲殺之東明奔走南至掩○水
[今高麗中有蓋斯水疑此水是也]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은 신인가 하여 이내 어미에게 거두어 기르도록 하였다.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
동명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니, 왕이 그 용맹을 꺼려 다시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으로 엄○수에
이르러
[지금 고려 땅에 개사수가 있는데, 여기가 아닌가 한다]
以弓擊水魚鼈皆聚浮水上東明乘之得度因至夫餘而王之焉於東夷之域最爲平敞土宜五穀出名馬赤玉貂豽
[豽似豹無前足音奴八反豽似豹按原作貂似豽譌逕據汲本殿本改正]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물 위에 떠올라 모이므로, 동명이 건널 수가 있었다. 말미암아 부여에
이르러 왕 노릇하였다. 동이의 지역에서 가장 평평하고 널찍하다. 토지는 오곡에 마땅하다. 명마와 붉은 옥,
담비, 놜,[豽은 표범과 비슷하나 앞다리가 없다. 음은 奴와 八의 반음이다. 豽似豹를 안찰한다. “원래는 貂似豽
으로 되어있으니, 와전이다. 급본과 전본에 의거하여 바로 고친다”]
大珠如酸棗以員柵爲城有宮室倉庫牢獄其人麤大彊勇而謹厚不爲寇鈔以弓矢刀矛爲兵以六畜名官有馬加牛加狗加
[校補謂魏志作有馬加牛加豬加狗加犬使今按魏志犬使之犬宋本皆作大]
대추만한 큰 구슬이 난다. 둥근 목책을 성으로 삼는다. 궁실과 창고, 뇌옥이 있다. 그 사람들은 추하나 장대하며,
굳세고 용감 근후하니 중국을 도둑질하지 않는다. 활과 화살, 칼, 창을 병기로 삼는다. 육축으로써 관직을
이르니 마가와 우가, 구가가 있다.
[교보는 위지를 가리켜 有馬加牛加豬加狗加犬使로 되어있다고 하였는데, 지금 위지를 안찰한다. “犬使의 犬은
송본에 모두 大로 되어있다”]
其邑落皆主屬諸加食飮用俎豆會同拜爵洗爵揖讓升降以臘月祭天大會連日飮食歌舞名曰迎鼓是時斷刑獄解囚徒有
軍事亦祭天殺牛以蹏占其吉凶
[魏志曰牛蹏解者爲凶合者爲吉]
읍락은 모두가 여러 가들에게 속하여 주관된다. 음식에는 조두를 쓴다. 회동에서는 술잔을 받을 때 절하고 술잔
을 넘길 때 씻어주며, 읍양하면서 오르내린다. 섣달로써 하늘에 제사하니 큰 모임이다. 날마다 먹고 마시며 노래
하고 춤추는데 일러 영고라 한다. 이때는 형벌과 가두기를 그만두며 죄수들을 풀어준다. 군사가 있으면 또한
하늘에 제사하는데, 소를 죽여 발굽으로써 길흉을 점친다.
[위지가 말했다. “소의 발굽이 벌어진 것은 흉하다 여기고, 붙은 것은 길하다 여긴다”]
行人無晝夜好歌吟音聲不絶其俗用刑嚴急被誅者皆沒其家人爲奴婢盜一責十二男女淫皆殺之尤治惡妒婦
[按校補謂通志作尤憎妒婦此治字亦當作憎蓋後人回改之失]
길가는 사람은 밤낮없이 노래 부르고 읊조리기를 좋아해서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 속습이 형벌을 쓰기에
엄하고 급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그 집안사람들을 모두 잡아다가 노비로 만든다. 도둑질은 하나를 열 두 배로
책하며, 남녀가 음란하면 모두 죽인다. 더욱이 투기하는 부인을 증오해
[안찰한다. “교보는 통지를 가리켜 尤憎妒婦로 되어있다고 하였다. 이 治자 역시 당연히 憎자로 되어있으니,
대개 뒷사람이 고치다 실수한 것이다”]
旣殺復尸於山上兄死妻嫂死則有槨無棺
[校補謂魏志作有棺無槨通志同此誤今按百衲本三國志亦作有槨無棺不誤校補說非]
이미 죽였어도 다시 산 위에 시신을 버려둔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죽으면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교보가 위지를 가리켜 有棺無槨로 되어있고 통지도 같으니 이것은 오기라 하였는데, 지금 안찰한다. “백납본
삼국지 역시 有槨無棺으로 되어있으니, 오기가 아니라 교보의 설이 잘못이다”]
殺人殉葬多者以百數其王葬用玉匣漢朝常豫以玉匣付玄菟郡王死則迎取以葬焉建武中東夷諸國皆來獻見二十五年
夫餘王遣使奉貢光武厚荅報之於是使命歲通至安帝永初五年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殺傷吏民後復歸附
永寧元年乃遣嗣子尉仇台(印)詣闕貢獻天子賜尉仇台印綬金綵順帝永和元年其王來朝京師帝作黃門鼓吹角抵戱以
遣之桓帝延熹四年遣使朝賀貢獻永康元年王夫台將二萬餘人寇玄菟玄菟太守公孫域
[按集解引惠棟說謂東觀記魏志公孫度傳域皆作○]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데 많은 자는 수백이다. 그 왕의 장사에는 옥갑을 쓴다. 한나라 때 항상 미리 현토군에 부탁
해두었던 옥갑으로써, 왕이 죽으면 가져다가 장사지냈다.
건무 중에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와서 헌상하고 알현하였다. 25년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받드니
광무제가 후히 보답하였다. 이에 사신이 해마다 통하였다. 안제 영초 5년에 이르러 비로소 부여왕이 보기 7, 8천인
을 거느리고 낙랑을 도둑질하여 관리와 백성을 살상하였으나, 뒤에 다시 귀부하였다. 영녕 원년에 부여왕이
후사를 이을 아들 위구이를 보내 궁궐에 이르러 공헌하니, 천자는 위구이에게 인수와 금채를 하사하였다.
순제 영화 원년에 그 왕이 경사에 와서 입조하니, 황제는 황문을 지어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씨름을 즐기게
하고서 돌려보냈다. 환제 연희 4년에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 조하하고 공헌하였다. 영강 원년에 부여왕 부이가
2만여 인을 거느리고 현토에 들어와 침구하니, 현토태수 공손역이
[안찰한다. “집해는 혜동의 설을 인용하여 동관기와 위지 공손도전을 가리켜 域이 모두 ○로 되어있다고 하였다”]
擊破之斬首千餘級至靈帝熹平三年復奉章貢獻夫餘本屬玄菟獻帝時其王求屬遼東云
격파하여 천여 급을 참수했다. 영제 희평 3년에 이르러 다시 부여왕이 글을 올려 공헌하였다. 부여는 본래 현토에
속하였으나, 헌제의 때에 그 왕이 요동에 속하기를 구하였다고 전한다.
挹婁古肅愼之國也在夫餘東北千餘里東濱大海南與北沃沮接不知其北所極土地多山險人形似夫餘而言語各異有五
穀麻布出赤玉好貂無君長其邑落各有大人處於山林之閒土氣極寒常爲穴居以深爲貴大家至接九梯好養豕食其肉衣
其皮冬以豕膏塗身厚數分以禦風寒夏則裸袒以尺布蔽其前後其人臭穢不絜作廁於中圜之而居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 부여에서 동북으로 1천여 리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닷가이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며
북쪽의 끝은 알지 못한다. 토지가 험한 산이 많다. 사람의 형상은 부여와 비슷하나 언어는 저마다 달랐다.
오곡과 삼베가 있고 붉은 옥과 좋은 담비가죽이 난다. 군장은 없고 읍락마다 대인이 있다. 산과 숲 사이에 거처
한다. 땅의 기후가 매우 추워 항상 굴에서 사는데 깊을수록 귀하게 여긴다. 큰 집은 사다리 아홉을 타고 내려
간다.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수 푼 두께로
두껍게 몸에 발라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발가벗고 1자 되는 베로써 그 앞뒤만 가린다. 사람들이
악취가 나고 불결하여 중앙에 측간을 짓고 둘레에 거한다.
自漢興已後臣屬夫餘種衆雖少而多勇力處山險又善射發能入人目弓長四尺力如弩矢用楛長一尺八寸靑石爲鏃鏃皆
施毒中人卽死便乘船好寇盜鄰國畏患而卒不能服東夷夫餘飮食類(此)皆用俎豆唯挹婁獨無法俗最無綱紀者也
한나라가 일어난 이후로부터 부여에 신속하였다. 종족의 무리가 비록 적으나 용력이 많다. 험한 산에 거처한다.
또 활을 잘 쏘아서 쏘았다하면 사람의 눈을 맞춘다. 활의 길이는 네 자인데 힘이 쇠뇌와 같다. 화살은 싸리
나무를 쓰고 길이가 1자 8치이다. 청석으로 촉을 만드는데, 촉에는 모두 독이 발라져서 사람이 맞으면 바로
죽는다. 배를 잘 타고 도둑질하기를 좋아하여, 이웃나라들이 두려워하고 근심거리로 여겼으나 끝내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동이와 부여는 먹고 마시는데 모두 조두를 썼으나 오직 읍루만이 조두가 없었다. 법속에 가장
기강이 없는 것이다.
高句驪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地方二千里多大山深谷人隨而爲居少田業力作不足以
自資故其俗節於飮食而好修宮室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故言語法則多同而跪拜曳一脚行步皆走凡有五族有消奴部
[按集解引惠棟說謂消魏志作涓]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으로는 조선 예맥과, 동으로는 옥저와, 북으로는 부여와 접한다.
지방이 2천리이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아, 사람은 이에 따라 거처한다. 밭이 적어 힘써 경작하여도 스스로
먹고살기에 부족하므로 그 속습이 음식을 절약한다. 궁실을 수리하기 좋아한다. 동이가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언어와 법칙이 같은 게 많다. 꿇어앉아 절하면서 다리 하나를 끈다. 행보는 모두 달린다.
무릇 소노부와
[안찰한다. “집해는 혜동의 설을 인용하여 消를 가리켜 위지에 涓으로 되어있다고 하였다”]
絶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
[案今高驪五部一曰內部一名黃部卽桂婁部也二曰北部一名後部卽絶奴部也三曰東部一名左部卽順奴部也四曰
南部一名前部卽灌奴部也五曰西部一名右部卽消奴部也]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의 다섯 부족이 있다.
[안내한다. “지금 고려의 오부는 하나가 내부라 하여 일명 황부이니 즉 계루부이다. 둘이 북부라 하여 일명
후부이니 즉 절노부이다. 셋이 동부라 하여 일명 좌부이니 즉 순노부이다. 넷이 남부라 하여 일명 전부이니
즉 관노부이다. 다섯은 서부라 하여 일명 우부이니 즉 소노부이다”]
本消奴部爲王稍微弱後桂婁部代之其置官有相加對盧沛者古鄒大加
[按魏志作古雛加古鄒大加高驪掌(賀)賓客之官如鴻臚也據汲本殿本改]
본래 소노부가 왕이 되었는데 차츰 미약해져 뒤에 계루부가 대신하였다. 벼슬에는 상가와 대로, 패자, 고추대가,
[안찰한다. “위지는 고추가로 되어 있다. 고추대가는 고려에서 빈객을 관장하는 벼슬로, 중국의 홍려와 같다.
급본과 전본에 의거하여 고친다”]
主簿優台使者
[按補注謂魏志使者上有丞字]
주부, 우이, 사자
[안찰한다. “보주는 위지를 가리켜 사자 위에 丞자가 있다고 하였다”]
帛衣先人
[補注謂魏志帛作皁今按皁帛形近易混趙一淸三國志注補引寰宇記皁衣頭大兄東夷相傳所謂皁衣先人也字亦作皁]
백의, 선인이 있다.
[보주는 위지를 가리켜 帛이 皁로 되어있다고 하였는데, 지금 안찰한다. “皁와 帛의 형상이 비슷해 혼동하기
쉽다. 조일청의 삼국지주보가 환우기를 인용하여 조의두대형은 동이가 서로 전하기를 이른바 조의선인이라
하였는데, 글자 역시 皁로 되어 있다”]
武帝滅朝鮮以高句驪爲縣
[前書元封中定朝鮮爲眞番臨屯樂浪玄菟四(部)郡按張森楷校勘記謂部字當依前書作郡今據改]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
[전한서에 “원봉 중에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과 임둔, 낙랑, 현토의 사군으로 만들었다” 안찰한다. “장삼해의
교감기는 部자를 가리켜 당연히 전한서에 따라 郡이라 하였는데, 지금 의거해 고친다”]
使屬玄菟賜鼓吹伎人其俗淫皆絜淨自憙暮夜輒男女羣聚爲倡樂好祠鬼神社稷零星
[前書音義龍星左角曰天田則農祥也辰日祠以牛號曰零星]
[風俗通曰辰之神爲靈星故以辰日祠於東南也]
현토에 속하게 하고, 북치고 피리 부는 기예인을 하사하였다. 그 속습이 음란하여 모두가 스스로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밤에 번번이 남녀가 무리지어 노래 부르며 풍악을 즐기고 귀신과 사직, 영성에 제사하기 좋아한다.
[전한서음의에 “용성의 좌각을 천전이라 하는데, 즉 농사에 상서로운 것이다. 진일에 소를 잡아 제사하고
영성이라 부른다”]
[풍속통이 말했다. “진의 신을 영성이라 한다. 그러므로 진일 동남쪽에 제사한다”]
以十月祭天大會名曰東盟其國東有大穴號禭神
[按校補謂禭魏志通志並作隧]
10월로써 하늘에 제사하며 크게 모이는데 일러 동맹이라 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어 수신이라
부르는데
[안찰한다. “교보는 禭를 가리켜 위지와 통지에 나란히 隧로 되어있다고 하였다”]
亦以十月迎而祭之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大加主簿皆著幘如冠幘而無後其小加著折風形如弁無牢獄有
罪諸加評議便殺之沒入妻子爲奴婢其昏姻皆就婦家生子長大然後將還便稍營送終之具金銀財幣盡於厚葬積石爲
封亦種松柏其人性凶急有氣力習戰鬪好寇鈔沃沮東濊皆屬焉句驪一名貊(耳)有別種
[集解引沈欽韓說謂案文當云句驪有別種一名貊耳按校補謂通志但云名貊無耳字此耳字衍今據刪]
역시 10월에 맞이하여 제사지낸다. 공적인 모임에서의 의복은 모두가 수놓인 비단과 금은으로써 스스로 장식
한다. 대가와 주부는 모두 책을 쓰는데 마치 관책과 같으나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쓰는데 형상이 고깔과
같다. 뇌옥은 없고 죄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평의하여 죽이고 처자를 잡아다가 노비로 만든다. 혼인은 모두
아내의 집에서 치르고, 아이를 낳아 장대해진 연후에야 돌아가며, 슬슬 서로가 죽어 보내려는 기구를 갖춰둔다.
후하게 장례를 치러 금은과 재물, 폐물을 다한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역시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그 사람들의 성정이 흉하고 급하며 기력이 있어 전투를 익힌다. 중국을 도둑질하기를 좋아한다. 옥저와 동예가
모두 고구려에 속해있다. 구려는 일명 맥이다. 별종이 있어
[집해는 심흠한의 설을 인용해 안문을 가리켜 당연히 句驪有別種一名貊耳이라 전하였는데, 안찰한다. “교보는
통지를 가리켜 단지 名貊이라고만 전하였고 耳자는 없다. 이 耳자는 부연한 것으로, 지금 의거하여 뺀다”]
依小水爲居因名曰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
[魏氏春秋曰遼東郡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驪別種因名之小水貊]
소수에 의지하여 거처로 삼으니, 말미암아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좋은 활이 나니 소위 맥궁이다.
[위씨춘추가 말했다. “요동군 서안평현의 북쪽에 소수가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이
말미암아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王莽初發句驪兵以伐匈奴其人不欲行彊迫遣之皆亡出塞爲寇盜遼西大尹田譚追擊戰死莽令其將嚴尤擊之誘句驪
侯騶入塞
[按集解引惠棟說謂魏志騶作騊前書王莽傳作騶]
왕망이 처음에 구려의 병사를 징발하여 흉노를 정벌하려 하였는데, 그 사람들이 행하고자 않았다. 강박하여
보내니, 모두 변새를 도망쳐 나와 도둑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추격하였으나 전사하였다. 왕망이 장수
엄우에게 명령하여 공격토록 하니, 엄우는 구려후 추를 유인하여 변새로 들어가
[안찰한다. “집해는 혜동의 설을 인용하여 위지를 가리켜 騶가 騊로 되어있다고 하였다. 전한서 왕망전에는
騶로 되어있다”]
斬之傳首長安莽大說更名高句驪王爲下句驪侯於是貊人寇邊愈甚建武八年高句驪遣使朝貢光武復其王號二十三年
冬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二十五年春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皆
復款塞後句驪王宮生而開目能視國人懷之
[殿本考證謂魏志懷作惡按校補謂懷當爲怪之譌古懷字多混爲怌故轉寫易譌]
참수하고 그 머리를 장안으로 전송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며 고구려왕의 명칭을 고쳐 하구려후로 하였다.
이에 맥인이 변경을 도둑질하기가 더욱 심해졌다. 건무 8년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광무제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다. 건무 23년 겨울에 구려의 잠지락대가 대승 등이 1만여 구를 이끌고 낙랑에 이르러 내속
하였다. 건무 25년 봄에 구려가 우북평과 어양, 상곡, 태원을 도둑질하니 요동태수 제융이 은의와 신뢰로써
초대해 모두 변새를 회복하였다. 뒤에 구려왕 궁이 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볼 수 있어, 나라사람들이 품었다.
[급본은 고증하여 위지를 가리켜 懷가 惡로 되어있다고 하였다. 안찰한다. “교보는 懷를 가리켜 마땅히 怪의
와전이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懷자가 怌와 많이 혼동되었으므로 전사에 와전되기 쉽다”]
及長勇壯數犯邊境和帝元興元年春復入遼東寇略六縣太守耿夔擊破之斬其渠帥安帝永初五年宮遣使貢獻求屬玄菟
元初五年復與濊貊寇玄菟攻華麗城
[華麗縣屬樂浪郡]
장성하자 용감하고 건장하니 수차례 변경을 침범하였다. 화제 원흥 원년 봄에 다시 요동으로 들어와 여섯 현을
도둑질하였다. 태수 경기가 격파하여 그 거수를 참수했다. 안제 영초 5년에 궁이 사신을 보내 공헌하며 현토에
속하기를 구했다. 원초 5년에 다시 예맥과 현토를 도둑질하여 화려성을 공격했다.
[화려현은 낙랑군에 속한다]
建光元年春幽州刺史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
[集解引惠棟說謂魏志北史諷作風今按安帝紀作諷通鑑同]
건광 원년 봄에 유주자사 풍환과 현토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집해는 혜동의 설을 인용하여 위지와 북사를 가리켜 諷이 風으로 되어있다고 했는데, 이제 안찰한다. “안제기
에는 諷으로 되어있고 통감도 같다”]
等將兵出塞擊之捕斬濊貊渠帥獲兵馬財物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遣使詐降光等信之遂成因據險阨以遮
大軍而潛遣三千人攻玄菟遼東焚城郭殺傷二千餘人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涿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而貊人已去夏
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
[縣名屬遼東郡也]
병사를 거느리고 변새를 나가 공격하여 예맥의 거수들을 사로잡아 참수하고 병사와 말, 재물을 노획하였다.
궁은 이에 후사를 이을 아들 수성을 보내 2천여 인을 거느리고서 요광 등을 역습하도록 하고 또한 사신을 보내
거짓 항복하니 요광 등이 믿었다. 수성은 험하고 좁은 곳에 의거해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천인을 보내 현토와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인을 살상했다. 이에 광양과 어양, 우북평, 탁군의 속국 3천여 기병이
함께 구원했으나 맥인은 이미 물러가버린 뒤였다. 여름에 다시 요동의 선비 8천여 인과 요대를 공격해
[요대는 현의 이름이다. 요동군에 속한다]
殺略吏人蔡諷等追擊於新昌戰歿功曹耿耗兵曹掾龍瑞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俱沒於陳死者百餘人秋宮遂率馬韓
濊貊數千騎圍玄菟夫餘王遣子尉仇台
[按集解引惠棟說謂台一作治]
관리와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아갔다. 채풍 등이 추격해 신창에서 싸웠으나 몰사하였다. 공조 경모와 병조연
용서, 병마연 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막아 지켰으나 진영에서 함께 죽으니, 죽은 자가 백여 인이었다.
가을에 궁이 마침내 마한과 예맥의 수천 기를 이끌고 현토를 포위하였으나, 부여왕이 아들 위구이를 보내
[안찰한다. “집해는 혜동의 설을 인용하여 台가 治로도 되어있다고 하였다”]
將二萬餘人與州郡幷力討破之斬首五百餘級是歲宮死子遂成立姚光上言欲因其喪發兵擊之議者皆以爲可許尙書陳
忠曰宮前桀黠光不能討死而擊之非義也宜遣弔問因責讓前罪赦不加誅取其後善安帝從之明年遂成還漢生口詣玄菟
降詔曰遂成等桀逆無狀當斬斷葅醢以示百姓幸會赦令乞罪請降鮮卑濊貊連年寇鈔驅略小民動以千數而裁送數十百
人非向化之心也自今已後不與縣官戰鬪而自以親附送生口者皆與贖直縑人四十匹小口半之遂成死子伯固立其後濊
貊率服東垂少事順帝陽嘉元年置玄菟郡屯田六部質桓之閒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
[郡國志西安平帶方縣並屬遼東郡]
2만여 인을 거느리고서 주군과 아울러 힘써 토벌해 격파하니 머리를 벤 것이 5백여 급이었다. 이 해에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섰다. 요광이 말씀을 올려 그 상을 말미암아 병사를 발해 공격하자고 하니,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허가하였다. 상서 진충이 말했다. “궁이 전에 매우 약아서, 요광이 능히 토벌하지 못했습니다. 죽어서야
공격한다는 것은 도의가 아닙니다. 마땅히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말미암아 전의 죄를 꾸짖은 다음 사면해야지
주살하려 해서는 아니 되십니다. 그 뒤에 친선하십시오” 안제가 좇았다. 다음해 수성이 한나라의 생구를 돌려
보내고 현토에 이르러 항복하였다. 조서에서 말했다. “수성 등은 그 반역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으니, 마땅히
머리를 자르고 몸을 토막 내어 젓갈을 담아 백성에게 보여야 할 것인데, 요행히도 사령을 틈타 죄를 빌며 항복
을 청하는구나. 선비와 예맥은 해마다 중국을 도둑질하여 백성을 잡아가니 수천인을 동요케 하고 수백 인을
재송하는데 교화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지금 이후로부터 현의 관리들과 싸우지 않고 스스로 친부하여 살아
있는 자를 돌려보낸다면 모두 값을 치러 어른은 비단 40필, 아이는 비단 20필로 바꿔주겠노라” 수성이 죽고
아들 백고가 섰다. 그 뒤로 예맥이 솔복하니, 동쪽은 일이 적어지게 되었다. 순제 양가 원년, 현토군에 둔전과
육부를 설치했다. 질제와 환제 사이에 다시 요동의 서안평을 침범하여 대방령을 죽이고
[군국지에서 서안평과 대방은 현으로, 나란히 요동군에 속한다]
掠得樂浪太守妻子建寧二年玄菟太守耿臨討之斬首數百級伯固降服乞屬玄菟云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아갔다. 건녕 2년에 현토태수 경임이 토벌하여 머리를 벤 것이 수백 급이었다.
백고가 항복하여 현토에 속하기를 빌었다고 전한다.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
[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卽王險城也]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개마는 현의 이름이다. 현토군에 속한다.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 서쪽에 있다. 평양은 왕험성이다]
東濱大海北與挹婁夫餘南與濊貊接其地東西夾南北長
[夾音狹]
동쪽은 큰 바닷가이다. 북으로는 읍루 부여와, 남으로는 예맥과 접한다. 그 땅은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길다.
[夾의 음은 狹이다]
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有邑落長帥人性質直彊勇便持矛步戰言語食飮居處衣服有似句驪其葬作
大木槨長十餘丈開一頭爲戶新死者先假埋之令皮肉盡乃取骨置槨中家人皆共一槨刻木如(王)生
[校補謂魏志作刻木如生形則主乃生之譌作主不須言刻也今據改]
가히 사방이 천리이다. 토지는 기름지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며 오곡에 마땅하고 밭농사에 좋다. 읍락에
거수가 있다. 사람들의 성질은 곧고 강용하다. 창을 가지고 보전을 잘한다. 언어와 음식, 거처, 의복은 구려와
비슷하다. 그 장례는 큰 나무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 장이고 한쪽을 열어두어 문을 만든다. 새로 죽은 자는
먼저 가매장해서 피부와 살이 다 썩어 없어지게 하고 뼈를 꺼내어 곽 안에 둔다. 가족사람 모두가 하나의 곽을
공유하며, 생전의 모습처럼 나무에 새기니
[교보는 위지를 가리켜 刻木如生形으로 되어있다고 하였다. 즉 主는 生의 와전이다. 主로 되어있으면 刻은
말이 되지 않는다. 지금 의거하여 고친다]
隨死者爲數焉武帝滅朝鮮以沃沮地爲玄菟郡後爲夷貊所侵徙郡於高句驪西北更以沃沮爲縣屬樂浪東部都尉至光武
罷都尉官後皆以封其渠帥爲沃沮侯其土迫小介於大國之閒遂臣屬句驪句驪復置其中大人(遂)爲使者
[集解引何焯說謂以魏志參校衍遂字今據刪]
죽은 자의 숫자가 된다.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옥저의 땅을 현토군으로 삼았다. 뒤에 이맥이 침범한바 되니,
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다시 옥저를 현으로 삼아 낙랑동부도위에 속하게 하였다. 광무제에 이르러
도위의 벼슬을 파하고 뒤에 모두 그 거수를 봉하여 옥저후로 삼았다. 그 땅이 큰 나라 사이에 끼어 핍박받고
작아 마침내 구려에 신속하였다. 구려는 다시 그 중에서 대인을 사자로 삼아
[집해는 하작의 설을 인용하여 위지를 참고 교열해 遂자를 부연하였으나, 지금 의거해 뺀다]
以相監領(貴)責其租稅貂布魚鹽海中食物發美女爲婢妾焉
[據汲本殿本改]
서로 감독하며 그 조세인 맥포, 물고기, 소금, 바다 속 식물과 미녀를 징발하여 비첩을 삼도록 하는 것을 책임
지고 맡게 하였다.
[급본과 전본에 의거하여 고친다]
又有北沃沮一名置溝婁去南沃沮八百餘里其俗皆與南同界南接挹婁挹婁人憙乘船寇抄北沃沮畏之每夏輒臧於巖
穴至冬船道不通乃下居邑落其耆老言嘗於海中得一布衣其形如中人衣而兩袖長三丈又於岸際見一人乘破船頂中
復有面與語不通不食而死又說海中有女國無男人或傳其國有神井闚之輒生子云
[魏志曰毌丘儉遣王頎追句驪王宮窮沃沮東界問其耆老所傳云]
또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이다. 남옥저에서 8백여 리를 가고, 그 속습은 남과 모두 같다. 경계는 남쪽
으로 읍루에 접하는데, 읍루 사람들이 배를 타고 도둑질하기 좋아하니, 북옥저가 두려워하여 매번 여름이면
번번이 바위굴에 숨었다가 겨울에 이르러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내려와 읍락에 거처한다. 그 늙은이의 말에
일찍이 바다에서 베옷을 하나 얻었는데, 그 형상이 중인의 옷과 같았고 양 소매의 길이가 3장이었다고 한다.
또 해안에 올라 보니 한 사람이 난파선에 탔는데 정수리에 다시 얼굴이 있었으며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먹지
않아 죽었다고 하였다. 또 설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여국이 있어 사내는 없고 혹 전하기를 나라에 신정이 있어
슬쩍 엿보기만 해도 번번이 아이가 생긴다고 했다.
[위지가 말했다. “관구검이 왕기를 보내 구려왕 궁을 추격하도록 했는데, 옥저의 동쪽 경계에 다다라 늙은이
에게 물으니 전한 것이라고 했다”]
濊北與高句驪沃沮南與辰韓接東窮大海西至樂浪濊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也昔武王封箕子於朝鮮箕子敎以禮義
田蠶又制八條之敎
[前書曰箕子敎以八條者相殺者以當時償殺相傷者以穀償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女子爲婢欲自贖者八五十萬]
[音義曰八條不具見也]
예는 북쪽으로 고구려 옥저와, 남쪽으로 진한과 접한다. 동쪽은 큰 바다에 다다르고 서쪽은 낙랑에 이른다.
예와 옥저, 구려는 본래 모두가 조선의 땅이다. 옛날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는데, 기자는 예의와 밭농사,
누에치기를 가르쳤고 또 팔조지교를 지었다.
[전한서가 말했다. “기자가 가르친 팔조라는 것은 서로 죽인 자는 바로 죽여서 갚고, 서로 다치게 한 자는
곡식으로 갚으며, 서로 훔친 자는 남자라면 잡아다가 그 집의 노복으로 만들고 여자라면 비첩으로 만든다.
스스로 대속하고자 하는 자는 400만이다”]
[음의가 말했다. “팔조를 모두 갖추어 보지는 못했다”]
其人終不相盜無門戶之閉婦人貞信飮食以籩豆其後四十餘世至朝鮮侯準自稱王漢初大亂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
口而燕人衛滿擊破準而自王朝鮮傳國至孫右渠元朔元年
[武帝年也]
그 사람들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잠그지 않았다. 부인은 정절과 믿음이 있었다. 음식에는 변두를 쓴다.
그 뒤 40여 세가 지나 조선후 준에 이르러 스스로 왕을 칭하였다. 한나라 초의 대란에 연과, 제, 조의 사람들로
땅을 피하여 간 자가 수만 구였다. 연인 위만이 준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의 왕이 되어 나라를 전하니 손자
우거에 이르렀다. 원삭 원년에
[무제의 연호이다]
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武帝以其地爲蒼海郡數年乃罷至元封三年滅朝鮮分置樂浪臨屯玄菟
眞番四(部)郡
[據殿本改番音潘]
예군 남려 등이 우거를 배반하여 28만 구를 이끌고 요동에 이르러 내속하였다.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는데 수년 만에 파하였다. 원봉 3년에 이르러 조선을 멸하고 낙랑과 임둔, 현토, 진번의 사군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전본에 의거하여 고친다. 番의 음은 潘이다]
至昭帝始元五年罷臨屯眞番以幷樂浪玄菟玄菟復徙居句驪自單單大領已東沃沮濊貊悉屬樂浪後以境土廣遠復分
領東七縣置樂浪東部都尉自內屬已後風俗稍薄法禁亦浸多至有六十餘條建武六年省都尉官遂棄領東地悉封其渠
帥爲縣侯皆歲時朝賀無大君長其官有侯邑君三老耆舊自謂與句驪同種言語法俗大抵相類其人性愚慤少嗜欲不請
匃男女皆衣曲領其俗重山川山川各有部界
[按校補謂魏志界作分]
소제 시원 5년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파하여 낙랑과 현토에 병합하였다. 현토가 다시 구려로 옮겨가고,
단단대령으로부터 동쪽의 옥저와 예맥은 모조리 낙랑에 속하였다. 뒤에 변경의 땅이 너무 멀다 하여 다시
영동의 7현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였다. 내속한 이후로부터 풍속이 차츰 각박해져 법으로 금하는 것
역시 점점 많아지니 60여 조에 이르게 되었다. 건무 6년에 도위의 벼슬을 살피면서 마침내 영동의 땅을 버리고
모조리 그 거수들을 봉하여 현후로 삼았다. 모두 세시마다 조하하였다. 큰 군장은 없고 그 벼슬에 후와 읍군,
삼노가 있다. 늙은이들은 옛날 자기들이 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일렀는데, 언어와 법속이 대저 서로 동류
이다. 그 인성이 어리석고 참되 즐기려 하는 것이 적으며 청하거나 빌지 않는다. 남녀의 옷 모두 옷깃이 굽었다.
그 속습이 산천을 중시하고 산천마다 부의 경계가 있어
[안찰한다. “교보는 위지를 가리켜 界가 分으로 되어있다고 하였다”]
不得妄相干涉同姓不昏多所忌諱疾病死亡輒捐棄舊宅更造新居知種麻養蠶作緜布曉候星宿豫知年歲豊約常用十
月祭天晝夜飮酒歌舞名之爲舞天又祠虎以爲神邑落有相侵犯者輒相罰責生口牛馬名之爲責禍殺人者償死少寇盜
能步戰作矛長三丈或數人共持之樂浪檀弓出其地又多文豹有果下馬
[高三尺乘之可於果樹下行]
망령되이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같은 성씨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 꺼리는 바가 많아 질병으로 사망하면
번번이 옛 집을 버리고 다시 새로 거처를 짓는다. 마를 심을 줄 알고 누에를 칠 줄 알아 면포를 짓는다. 기후와
별자리에 훤하여 그 해에 풍년이 들지를 미리 안다. 항상 10월로써 하늘에 제사하는데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니 일러 무천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써 제사한다. 읍락에 서로 침범한 자가 있으면
번번이 서로 생구와 마소를 벌책하는데 일러 책화라 한다. 살인자는 죽음으로 갚는다. 도둑이 적다. 보전에 능
하고 창을 만드는데 길이가 3장으로 혹 여러 사람이 함께 가지고 싸운다. 낙랑단궁이 그 땅에서 나오며 또
문표가 많고 과하마가 있으며
[높이가 3자로 올라타고서도 과수의 아래를 지나갈 수가 있다]
海出班魚使來皆獻之
바다에서 반어가 나오는데 사신이 와서 모두 이것들을 바쳤다.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殿本考證王會汾謂晉梁二書皆作弁韓當從改今按魏志亦作弁韓]
한은 세 종족이 있어 하나는 마한이고, 둘은 진한이며 셋은 변진이다.
[급본은 왕회분을 고증해 진서와 양서 두 사서를 가리켜 모두 弁韓으로 되어있으니 의당 고친다고 하였는데,
지금 안찰한다. “위지 역시 弁韓으로 되어 있다”]
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
倭接凡七十八國伯濟是其一國焉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東西以海爲限皆古之辰國也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
[魏志作治月支國校補謂魏志及通志目均作月附載五十餘國亦作月支國則此作目支誤也今按月支乃西域國名魏
志及通志之作月支或後人習見月支之名而臆改與當考]
마한은 서쪽에 있고 54국이 있으며 북으로 낙랑과, 남으로 왜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고 12국이 있으며
북으로 예맥과 접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고 12국이 있으며 남으로 왜와 접한다. 무릇 78국으로, 백제는
그 가운데 한 나라이다. 큰 것은 만여 호이고 작은 것은 수천 가이다. 저마다 산과 바다 사이에 있다. 지방이
합하여 4천여 리이고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삼으니, 모두 옛 진국이다. 마한이 가장 크고 그 종족을
함께 세워 진왕으로 삼으며 목지국에 도읍한다.
[위지에는 治月支國으로 되어 있다. 교보는 위지와 통지를 가리켜 目이 月로 되어있다고 하였으며 부록으로
실린 50여국 역시 月支國으로 되어있으니 目支는 잘못이라 했는데, 지금 안찰한다. “月支는 서역 국가의
이름이다. 위지와 통지는 月支로 되어있는데, 혹 후세 사람이 月支의 명칭을 익히 보아서 억측해 고친 것일까?
마땅히 고증해야 한다”]
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馬韓人知田蠶作緜布出大栗如梨有長尾雞尾長五尺邑落雜居亦無城郭
作土室形如冢開戶在上不知跪拜無長幼男女之別不貴金寶錦罽不知騎乘牛馬唯重瓔珠以綴衣爲飾及縣頸垂耳大
率皆魁頭露紒
[魁頭猶科頭也謂以髮縈繞成科結也紒音計]
삼한의 땅 모두에서 왕 노릇하는데, 여러 나라의 왕들은 선대에 모두가 마한 종족의 사람들이었다. 마한 사람
들은 누에를 칠 줄 알아 면포를 짓는다. 큰 밤이 나는데 크기가 배와 같다.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 길이가
5자이다. 읍락은 잡거하고 역시 성곽은 없다. 흙으로 집을 짓는데 형상이 무덤과 같아 문호를 위에 낸다.
꿇어 절할 줄을 모르고 어른과 아이, 남녀의 구별이 없다. 금과 보화, 비단, 융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소와
말을 탈 줄 모른다. 오직 영주만을 중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으로 삼거나 목에 매달고 귀에 늘어뜨린다.
대솔은 모두 머리에 상투를 틀고
[魁頭는 마치 科頭와 같다. 머리털을 둘러 감아 科結을 이루는 것을 이른다. 紒의 음은計이다]
布袍草履其人壯勇少年有築室作力者輒以繩貫脊皮縋以大木嚾呼爲健常以五月田竟祭鬼神晝夜酒會羣聚歌舞舞
輒數十人相隨蹋地爲節十月農功畢亦復如之諸國邑各以一人主祭天神號爲天君又立蘇塗
[魏志曰諸國各有別邑爲蘇塗諸亡逃至其中皆不還之蘇塗之義有似浮屠]
베로 만든 도포를 입었으며 풀로 만든 신발을 신었다. 사람들이 건장하고 용감하여 어린 나이에도 궁실을 지을
때 힘쓰는 자가 있어 번번이 등뼈 가죽을 새끼줄로 꿰뚫고서 큰 나무에 매달아 소리 지르는데 건장하다고
여긴다. 항상 밭갈이가 끝나는 오월로써 귀신에게 제사하는데, 밤낮으로 모여 술을 마시고 무리지어 노래
부르며 춤을 춘다. 춤은 번번이 수십 인이 서로 따르며 땅을 밟는데 리듬으로 여긴다. 10월에 농사가 끝나면 또
다시 이처럼 한다. 여러 국읍마다 한 사람으로 천신에게 제사하는 것을 주관토록 하는데, 천군이라 부른다. 또
소도를 설립하여
[위지가 말했다. “여러 국읍마다 별읍이 있어 소도로 삼는다. 여럿이 도망하여 거기에 이르면 모두 돌아가지
않는다. 소도의 의의는 부도와 유사하다”]
建大木以縣鈴鼓事鬼神其南界近倭亦有文身者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其名國爲邦
弓爲弧賊爲寇行酒爲行觴相呼爲徒
[按王先謙謂魏志爲上有皆字]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긴다. 남쪽 경계는 왜에 가까워 역시 문신하는 자가 있다.
진한의 늙은이가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의 망인으로 고역을 피하여 한국에 오니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갈라
주었다고 한다. 나라를 일러 邦이라 하고, 활을 일러 弧라 하며, 도적을 일러 寇라 하고, 술잔 돌리기를 行觴이라
하며, 서로를 불러 徒라 하는데
[안찰한다. “왕선겸은 위지를 가리켜 爲자 위에 皆자가 있다고 하였다”]
有似秦語故或名之爲秦韓有城柵屋室諸小別邑各有渠帥大者名臣智次有儉側次有樊秖
[按集解引惠棟說謂魏志秖作穢]
진나라의 말과 유사하므로 간혹 이름을 진한이라고 하였다. 성곽과 목책, 옥실이 있다. 여러 작은 별읍마다
거수가 있어 큰 자는 신지라 이르고, 다음은 검측이 있으며, 다음은 번지가 있고
[안찰한다. “집해는 혜동의 설을 인용해 위지를 가리켜 秖가 穢로 되어있다고 하였다”]
次有殺奚次有邑借
[皆其官名]
다음은 살해가 있으며, 다음은 읍차가 있다.
[모두 벼슬의 이름이다]
土地肥美宜五穀知蠶桑作縑布乘駕牛馬嫁娶以禮行者讓路國出鐵濊倭馬韓並從市之凡諸(貨)貿易皆以鐵爲貨
[據殿本改按汲本貿易作質易]
토지가 기름지어 오곡에 마땅하다. 누에치기를 알며 겸포를 짓는다. 소와 말이 끄는 수레를 탄다. 예로써 시집
가고 장가든다. 길가는 사람은 길을 양보한다. 철이 나는데 예와 왜, 마한이 나란히 장사하며 무릇 여러 가지
무역에는 모두 철을 화폐로 삼는다.
[전본에 의거해 고쳤는데, 안찰한다. “급본에는 貿易이 質易으로 되어있다”]
俗憙歌舞飮酒鼓瑟兒生欲令其頭扁皆押之以石
[扁音補典反]
속습이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술 마시고 북과 슬을 즐긴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려고
모두 돌로써 누른다.
[扁의 음은 補와 典의 반음이다]
弁辰與辰韓雜居城郭衣服皆同言語風俗有異其人形皆長大美髮衣服絜淸而刑法嚴峻其國近倭故頗有文身者初朝
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建武二十年韓人
廉斯人蘇馬諟等詣樂浪貢獻
[廉斯邑名也諟音是]
변진은 진한과 잡거하며 성곽과 의복이 모두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다르다. 사람들의 형상이 모두 장대하고
머리털이 아름다우며 의복이 청결하다. 형법이 준엄하다. 그 나라가 왜에 가까우므로 문신하는 자가 꽤 있다.
처음에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격파되자 이에 남은 무리 수천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 들어갔는데, 마한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자립해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끊여 없어지고,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건무 20년에 한인 염사읍의 사람 소마시 등이 낙랑에 이르러 공헌하니,
[염사는 읍의 이름이다. 諟의 음은 是이다]
光武封蘇馬諟爲漢廉斯邑君使屬樂浪郡四時朝謁靈帝末韓濊並盛郡縣不能制百姓苦亂多流亡入韓者馬韓之西海
島上有州胡國其人短小
[按集解引沈欽韓說謂魏志人下有差字]
광무제가 소마시를 봉하여 한염사읍군으로 삼고 낙랑군에 속하게 하여 사시마다 조알토록 했다. 영제 말에 한과
예가 나란히 강성하여 군현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자, 백성이 난을 괴로워하여 많이 한으로 유입해 도망하여
들어갔다. 마한의 서쪽 바다 섬 위에 주호국이 있다. 사람들이 조금 작고
[안찰한다. “집해는 심흠한의 설을 인용해 위지를 가리켜 人자 아래에 差자가 있다고 하였다”]
髡頭衣韋衣有上無下好養牛豕乘船往來貨市韓中
머리털을 깎는다. 무두질한 가죽옷을 입는데 위는 있고 아래는 없다.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배를 타고
한에 왕래하며 장사한다.
倭在韓東南大海中依山島爲居凡百餘國自武帝滅朝鮮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
[刊誤謂驛當作「譯說已見上按魏志作譯]
왜는 한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다. 산과 섬에 의지하여 거처하는데 무릇 백여 국이다. 무제가 조선을
없애고서부터 사자와 역인이 한나라와 통한 게 30여 국이었다.
[간오가 驛을 가리켜 마땅히 譯으로 되어 있다고 했는데 그 설은 이미 위에서 보였다. 안찰한다. “위지에도
譯으로 되어 있다”]
國皆稱王世世傳統其大倭王居邪馬臺國
[按集解引惠棟說謂魏志臺作堆案今名邪摩惟音之訛也邪摩惟按汲本殿本作邪摩推此作惟形近而譌又集解引惠棟
說謂案北史推當作堆今據改]
나라마다 모두 왕을 칭하며 세세토록 왕통을 전하였다. 대왜왕은 사마대국에 거하는데
[안찰한다. “집해는 혜동의 설을 인용해 위지를 가리켜 臺가 堆로 되어있다고 하였다” 안내한다.
“지금은 사마유라 이르고 惟의 음은 訛이다” 사마유를 안찰한다. “급본과 전본에는 사마퇴라 되어 있다. 여기에
惟로 되어있는 것은 형상이 비슷하여 잘못한 것이다. 또 집해가 혜동의 설을 인용해 안내를 가리켜 북사의 推는
당연히 堆로 되어있다고 했으니, 지금 의거하여 고친다”]
樂浪郡徼去其國萬二千里去其西北界拘邪韓國七千餘里其地大較在會稽東冶之東與朱崖儋耳相近故其法俗多同土
宜禾稻麻紵蠶桑知織績爲縑布出白珠․靑玉其山有丹土氣溫冬夏生菜茹無牛馬虎豹羊鵲
[鵲或作雞]
낙랑군에서 그 나라를 가려면 1만 2천리이고, 서북쪽의 경계인 구사한국에 가려면 7천여 리이다. 그 땅은 대략
회계와 동야의 동쪽에 있고, 주애나 담이와 서로 가까우므로 법속에 같은 것이 많다. 토지는 벼와 삼, 모시,
누에치기에 알맞고 길쌈하여 겸포를 만들 줄 안다. 백주와 청옥이 나며 산에는 단토가 있다. 기후가 온난하여
겨울과 여름에도 나물이 난다. 소와 말, 호랑이, 표범, 양, 까치는 없다.
[鵲은 혹 雞로 되어있다]
其兵有矛楯木弓竹矢或以骨爲鏃
[汲本竹作其校補謂傳本以其兵其矢相次成文作其矢於義爲長今按御覽七百八十二引作竹矢魏志亦云兵用矛楯木
弓木弓短下長上竹箭或鐵鏃或骨鏃似以作竹矢爲是]
병장기에는 창과 방패, 나무 활, 대나무 화살이 있다. 혹 뼈로 촉을 만들기도 한다.
[급본에는 竹이 其로 되어 있다. 교보는 전본을 가리켜 其兵과 其矢가 서로 차례대로 문장을 이루어 其矢로
되어있으며 뜻은 長이라 했는데, 지금 안찰한다. “어람 782는 竹矢로 되어있다고 인용했으며, 위지 역시 兵用矛
楯木弓木弓短下長上竹箭或鐵鏃或骨鏃라 전했으니 竹矢로 되어있는 것과 비슷하고 그럴 듯도 하다”]
男子皆黥面文身以其文左右大小別尊卑之差其男衣皆橫幅結束相連女人被髮屈紒衣如單被貫頭而著之並以丹
朱坋身
[說文曰坋塵也音蒲頓反]
남자는 모두 얼굴과 몸에 자문하는데, 문신의 좌우와 대소로써 존비의 차이를 구별하였다. 남자의 옷은 모두
가로의 폭이 결속하여 서로 이어진다. 여인은 머리털을 풀어헤쳐 굴곡지게 상투를 틀며, 옷은 마치 홑이불
같아 구멍을 뚫고 머리를 넣는다. 나란히 단사를 몸에 붉게 뿌리는데
[설문이 말했다. “坋은 塵으로, 음은 蒲와 頓의 반음이다”]
如中國之用粉也有城柵屋室父母兄弟異處唯會同男女無別飮食以手而用籩豆俗皆徒跣以蹲踞爲恭敬人性嗜酒多壽
考至百餘歲者甚衆國多女子大人皆有四五妻其餘或兩或三女人不淫不妒又俗不盜竊少爭訟犯法者沒其妻子重者滅
其門族其死停喪十餘日家人哭泣不進酒食而等類就歌舞爲樂灼骨以卜用決吉凶行來度海令一人不櫛沐不食肉不近
婦人名曰持衰
[校補謂魏志衰作哀今按百衲本三國志亦作衰]
마치 중국에서 분을 쓰는 것과 같다. 성책과 집이 있다. 부모형제가 달리 거처하나 회동에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 손으로 먹고 마시며 변두를 쓴다. 속습이 모두 맨발로 돌아다니며 몸을 웅크려 공경을 나타낸다. 인성이
술을 즐기고 오래 사는 사람이 많아 백여 세에 이르는 자가 심히 많다. 나라에 여자가 많아 대인은 모두 4, 5의
처가 있고 나머지는 혹 둘이나 혹 셋이다. 여인은 음란하거나 투기하지 않는다. 또 속습이 절도하지 않고 쟁송
이 적다. 법을 범한 자는 처자를 몰입하고 중죄를 지은 자는 가문과 종족을 멸한다. 사람이 죽으면 10여 일
동안 상을 머무는데 집안사람들은 서서 곡하며 술과 음식을 들지 않으나. 다른 사람들은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즐거움으로 여긴다. 뼈를 불살라 점복해 길흉을 결정짓는다. 바다를 건너 오고갈 적에 한 사람을 시켜
빗질이나 머리를 감지 못하게 하고 고기도 먹지 못하게 하며 부인까지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는데, 일러 지쇠라
하였다.
[교보는 위지를 일러 衰가 哀로 되어있다고 했는데, 지금 안찰한다. “백납본 삼국지 역시 衰로 되어있다”]
若在塗吉利則雇以財物如病疾遭害以爲持衰不謹便共殺之
[按校補謂魏志共作欲]
만약 오고가는 길에 있어 길하고 이로우면 지쇠에게 재물을 건네고, 질병이나 해를 입으면 지쇠가 삼가지
않았다 하여 다함께 죽였다.
[안찰한다. “교보는 위지를 가리켜 共이 欲으로 되어있다고 했다”]
建武中元二年倭奴國奉貢朝賀使人自稱大夫倭國之極南界也光武賜以印綬安帝永初元年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
十人願請見桓靈閒倭國大亂更相攻伐歷年無主有一女子名曰卑彌呼年長不嫁事鬼神道能以妖惑衆於是共立爲王侍
婢千人少有見者唯有男子一人給飮食傳辭語居處宮室樓觀城柵皆持兵守衛法俗嚴峻自女王國東度海千餘里至拘奴
國雖皆倭種而不屬女王自女王國南四千餘里至朱儒國人長三四尺自朱儒東南行船一年至裸國黑齒國使驛所傳極於
此矣
[按此驛字亦當作譯]
건무 중원 2년에 왜노국이 공물을 봉헌하고 조하하였는데, 사인이 자칭 대부라 했다. 왜국의 남쪽 끝 경계이다.
광무제가 인수를 내려주었다. 안제 영초 원년에 왜국왕 수승 등이 생구 160인을 바치며 알현하기를 청원
하였다. 환제와 영제 사이에 왜국이 크게 어지러워져 다시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니, 여러 해가 지나도록 주인이
없었다. 한 여자가 있어 이름을 비미호라 하였는데 나이가 장성하도록 시집가지 않았으며 귀신의 도를 섬겨
능히 요술로써 대중을 홀리니, 이에 함께 세워 왕으로 삼았다. 시비가 1천인이었으나 본 자는 적었고, 오직 남자
한 사람이 있어 음식을 공급해가며 말을 전했다. 거처하는 궁실과 누관, 성책 모두 병장기를 가지고 지키며
호위하였다. 법속이 준엄하다. 여왕국에서부터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1천여 리면 구노국에 이르는데,
비록 모두가 왜의 종족이나 여왕에게 속하지는 않았다. 여왕국에서부터 남쪽으로 4천여 리면 주유국에 이르는데,
사람의 키가 3, 4자이다. 주유국에서부터 동남쪽으로 1년 동안 뱃길로 가면 라국과 흑치국에 이른다. 사인과
역인이 전하는 바는 여기서 끝난다.
[안찰한다. “이 驛자 역시 당연히 譯으로 되어있다”]
會稽海外有東鯷人
[鯷音達奚反]
회계의 바다 밖에 동제인이 있는데
[鯷의 음은 達과 奚의 반음이다]
分爲二十餘國
[按校補引錢大昭說謂閩本二作三]
나뉘어 20여국이 되었다.
[안찰한다. “교보는 전대소의 설을 인용해 민본을 가리켜 二가 三으로 되어있다고 하였다”]
又有夷洲及澶洲傳言秦始皇遣方士徐福將童男女數千人入海
[事見史記]
또 이주와 단주가 있다. 전하여 말하기를 진시황이 방사 서복을 보내 동남동녀 수천인을 데리고 바다에 들
어가 [이 일은 사기에 보인다]
求蓬萊神仙不得徐復畏誅不敢還遂止此洲世世相承有數萬家人民時至會稽市會稽東冶縣人有入海行遭風流移至
澶洲者所在絶遠不可往來
[沈瑩臨海水土志曰夷洲在臨海東南去郡二千里土地無霜雪草木不死四面是山谿
봉래의 신선을 구하도록 했는데 얻지 못하니, 서복이 주살될까 두려워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이 주들에 머물러
세세토록 서로 계승했다고 한다. 수만 가가 있다. 인민이 때때로 회계에 이르러 장사하였다. 회계의 동치현
사람으로 바다에 들어가 풍랑을 만나 단주로 흘러들어간 자가 있었다지만, 매우 먼 곳에 있어 왕래할 수는 없다.
[침영의 임해수토지가 말했다. “이주는 임해의 동남쪽에 있으니, 군에서 2천리를 간다. 토지에 서리나 눈이
없고, 초목이 죽지 않으며, 사면에 산과 계곡이 있다.
人皆髡髮穿耳女人不穿耳土地饒沃旣生五穀又多魚肉有犬尾短如麕尾狀此夷舅姑子婦臥息共一大牀略不相避地有
銅鐵唯用鹿格爲矛以戰鬪摩礪靑石以作(弓)矢鏃取生魚肉雜貯大瓦器中以鹽鹵之歷月所日乃啖食之以爲上肴也
[摩礪靑石以作(弓)矢鏃據御覽七百八十引改]
사람들은 모두 머리털을 밀고 귀를 뚫는데, 여인은 귀를 뚫지 않는다. 토지가 기름져 오곡이 나며 또 물고기가
많다. 개가 있는데 꼬리가 짧아 마치 노루 꼬리의 형상과 같다. 이 오랑캐들은 시아비와 시어미, 자식, 며느리가
모두 하나의 큰 침상에 누워 쉬는데, 서로 피하지 않는다. 땅에 구리와 철이 있으나 오직 사슴의 뿔만을 써서
창을 만들어 전투하고 파란 돌을 갈아 화살촉을 만든다. 물고기들을 날것으로 큰 기와 그릇 속에 섞어 두고
소금에 절였다가 꺼내먹는데 좋은 술안주로 삼는다.
[摩礪靑石以作(弓)矢鏃는 어람 780에 의거하여 고친다]
論曰昔箕子違衰殷之運避地朝鮮始其國俗未有聞也及施八條之約使人知禁遂乃邑無淫盜門不夜扃
[扃關也]
回頑薄之俗就寬略之法行數百千年故東夷通以柔謹爲風異乎三方者也苟政之所暢則道義存焉仲尼懷憤以爲九夷可
居或疑其陋子曰君子居之何陋之有亦徒有以焉爾其後遂通接商賈漸交上國而燕人衛滿擾雜其風
[擾亂也]
於是從而澆異焉老子曰法令滋章盜賊多有若箕子之省簡文條而用信義其得聖賢作法之原矣
贊曰宅是嵎夷曰乃暘谷巢山潛海厥區九族嬴末紛亂燕人違難
[謂衛滿也]
雜華澆本遂通有漢
[衛滿入朝鮮旣雜華夏之風又澆薄其本化以至通於漢也]
眇眇偏譯或從或畔
[偏遠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