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에 대한 이해
《금사》는 금나라의 역사로서 《이십오사(二十五史)》에 들어 있다.
금나라는 여진족이 1115년에 건립한 왕조로서 1234년에 멸망하였는데 10제를 전하였고 120년간 중국를
지배하면서 송나라와 대결한 나라였으며 우리 나라 고려와 북쪽으로 국경을 마주 대하고 있었다.
중국의 어느 왕조든지 단대사는 그 다음 왕조에서 편찬하는 것이 전례가 되어 있었다. 금나라는 요나라를 이었
으니 《요사(遼史)》를 편찬해야 했을 터인데 거의 수십년 동안 《요사》를 정사로 편입할 것인가의 문제로
해결이 되지 못하고 결국 원나라로 대로 편찬사업이 미루어져 원나라 때 오래 동안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요사(遼史)》와 《금사(金史)》를 정사로 편입하기로 결정하여 원나라 순제 2년(1344)에 완성되었으니
금나라가 망한지 110년 만에 만들어진 책이라 할 수 있다.
《요사(遼史)》와 《금사(金史)》에 대해서는 사료로서 믿음성이 별로 없다고 학계에서 많은 비판이 있는 줄
알고 있다.
봉오 선생은 《만주원류고》를 역주하기 위해 국내 서적을 참고하려고 했으나 찾을 수 없고 다만 《요사》
《금사》를 한꺼번에 다룬 《요.금사》란 책이 1996년에 김위현이란 분에 의해 씌여진 것 같은데 절판이라 구할
수 없어 중국 책을 많이 보았다.
《만주원류고》에 금나라의 시조는 어떤 곳에서는 고려에서 어떤 곳에서는 신라에서 왔다는 기록이 있어 매우
흥미를 느꼈다.
《 금사 》 책 첫머리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금나라의 시조는 이름이 함보(函普)로서 처음에 고려(高麗)로부터 왔는데 나이는 벌써 60세나 되었다.
형 아고내(阿古내)는 부처님을 좋아하여 고려에 남겠다고 하면서 따라 나서지 않으려 했다.
그려면서 하는 말이 "후세에 자손들이 반드시 서로 만날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이니 그래서 나는 갈 수 없다"하였
다고 한다. 그래서 함보는 유독 아우 보활리(保活里)를 데리고 함께 갔다.
시조는 완안부 복알수(僕斡水)라는 물가에 살았고, 보활리는 야라(耶懶)에서 살았다.....
《만주원류고》에서는 함보를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고 합부(哈富)로 되어 있고 이는 주에서 예전에 함보였던
것을 고쳤다고 하였다. 또 전체적인 주석에서 《통고(通考)》와 《대금국지(大金國志)》에서는 신라에서 왔다..
......고 하였다.(졸저, 《만주원류고》, 232쪽 참조)
그 나라의 태조는 아골타(阿骨打)이다. 그가 요나라에 반기를 들어 칭제 건원을 한 해는 1115년이라는 설이
정설이다.
조선조 단종 때 왕성된 정인지 등이 편찬한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예종 10년 정월 기사에 "이달, 생여진의
아골타가 칭제를 하였는데, 이름을 민(旻)으로 고치고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권14 예종 10년조 참조)
그런데 《금사(金史)》를 읽어 보면 아골타 이전에 시조 함보로부터 기록이 전해 온다.
그 계통을 설명하면
(1)시조 함보(函普) → (2) 덕제 오로(烏魯) → (3)안제 발해(跋海) → (4)헌조 수가(綬可) → (5)소조 석로
(石魯) → (6)경조 오고내(烏古乃) → (7)세조 핵리발(劾里鉢) → (8)숙종 파랄숙(頗剌淑) → (9) 목종 영가
(盈可) → (10) 강종 오아속(烏雅束) 등이다. 오아속과 아골타는 영가의 형 핵리발의 아들이다.
금태조 이전의 선대들에게 황제로 추존한 것은 마치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뒤 그의 선대를 목조. 덕조.
환조 등을 왕으로 추존한 것과 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오고내 이전은 애비가 죽으면 아들이 위를 계승하였고, 세조 이후 숙종 파랄숙, 목종 영가 등은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었다.
함보는 60세의 노처녀와 혼인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오로(烏魯)였는데 나중에 덕제로 추시되었으며,
둘째 아들은 알로(斡魯)요, 딸은 주사판(注思板)이었다.
오로의 아들이 발해(跋海)인데 안제로 추시를 받았으며, 그의 아들이 수가(綏可)로서 헌조로 추시를 받았다.
수가의 아들이 석로(石魯)인데 소조로 추시를 받았으며 《만주원류고》에 가끔 소조의 활동 상황이 나온다.
소조 때에 점차 조교(條敎)로써 통치를 하니 부락이 점차 강해지게 되었는데 요나라에서 척은(惕隱)이라는 벼슬
을 주었다고 한다.
시조 함보에서 소조에 이르기까는 생몰 년대가 확인이 되지 않고 그들이 죽은 뒤 천회 15년(1137) 각각 아무아무
황제 등으로 추시를 하고, 황통 4년(1144)에 각각 안장을 하고 능이라 하였다.
헌조, 소조, 경조, 숙종, 목종, 강종은 묘호라고 해서 죽은 뒤에 붙여진 시호이다.
생몰년대가 확인 되는 사람은 경조 오고내로서 요태평 원년 신유생, 시조로부터 6대가 되었다는 《금사》의
기록으로 보아 그의 생년은 서기로 1021년으로 확인된다.
그의 활약상은 《만주원류고》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백산. 통문. 야라. 토골론 등으로부터 오국(五國)의 추장에
이르기까지 점차 역속시키자 모두 그의 명을 따랐다고 한다.
그의 죽은 날자는 요 함옹(咸翁) 8년으로 나이 54세였다고 하는데 서기로 1072년이다. 여기서 백산은 백두산
일대를 가리킨다.
경조의 둘째 아들이 절도사를 습직하였는데 그가 세조 핵리발이다. 그의 출생년도 요 중희(重熙) 8년 기묘생이니
서기 1039년이요, 함옹 10년(1074)에 절도사를 습직한 것으로 되었다. 요 대안(大安) 8년(1092) 5월 15일에
죽었다.
동모제 파랄숙이 절도사를 습직하였는데 경조의 네째 아들 숙종으로 요 중희 임오생(1042)이다.
대안 3년(1087)에 죽었다.
동모제 영가(盈歌)는 목종이니 경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남인, 즉 송나라에서 양할태사(揚割太師)라고 하는 사람
이다. 《만주원류고》에도 그같은 기록이 있다. 요 중희 22년(1053) 계사생이다. 나이 42세 때인 대안 10년(1094)
에 절도사를 습직했다.
목종 10년 계미(1103)에 고려 처음으로 와서 통호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그해 10월 29일 죽었는데 나이는 51
세라 하였다.
목종의 형의 아들 즉 조카 강종의 이름은 오아속(烏雅束)이요, 자는 모로완(毛路完)인데 세조의 장남이다.
요 청녕(淸寧) 7년 신축생(1061)으로 건통(乾統) 3년(1103)에 43세의 나이로 절도사를 습직했다.
이때부터 오아속의 이름은 고려사에 정식으로 이름이 등장한다.
학자들은 함보가 생존한 연대는 금사 세기로 추산하여 대략 서기 10세기쯤으로 보고 있으며 대략 거란 아보기가
건국하던 그 무렵으로 보는 것 같다.
금나라의 시조 함보가 고려 또는 신라라고 하는 기록이 서로 다른 것은 고려가 건국된 것은 거란 신책 3년(918)
이고, 신라가 망한 것은 거란 천현 10년(935년)이기 때문에 위 두 기록중 어느 것이 딱이 옳다고 말할 수 없으며
다들 맞는 주장이라고 한다.
《고려사》에는 함보에 관한 기록이 없다. 다만 이러한 기록이 있다. 《고려사》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예종 12년(1117) 3월 계축일: "금나라 임금 아골타(阿骨打)가 아지(阿只) 등을 시켜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형벌되는 대여진 금국 황제는 아우 고려국 왕에에게 이 편지를 보낸다.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한 쪽 지방에 있으면서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조심스럽게 섬겨
왔는데 거란이 오만하게도 우리 국토를 유린하고 우리 인민을 노예로 생각하였으며 빈번히 까닭없는 군사 행동
을 감행하였다. 우리가 하는 수 없이 그를 항거하여 나섰더니 다행히 하늘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섬멸하게 되었다.
왕은 우리에게 화친을 허락하고 형제의 의를 맺아 영세 무궁한 관계를 가지기 바란다'라고 하면서 좋은 말 한 필
을 보냈다.(《고려사》 권14, 예종3 참조)
예종 기해 14년(1119)년의 기록을 보기로 하자.
○ 2월 정유일에 금나라 임금이 사신을 시켜 예빙하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고려 국왕에게 이 글을 보낸다. 내가 군사를 출동하여 요나라를 쳐서 하늘의 도움으로 적병을 여러 번 패배시켰
으며 북쪽 상경으로부터 남쪽 바다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족들은 전부 평정하였다. 이제 발근(발근)을 출발시켜
이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말 한 필을 보내니 도착되는 대로 받을 것이다."
○ 그해 8월 정축일 기록에 의하면 "중서주사(中書主事) 조순거(曺舜擧)를 금나라에 파견하였다.
그가 가지고 간 편지에 '...."하물며 귀국의 근원이 우리나라에서 시작되었다" 는 말이 있다고 트집을 잡아 금 나라
임금이 그 편지를 받지 아니하였다.
○ 이해에 장성을 석 자 더 높히 쌓았다. 금 나라 변방 관리가 군사를 발동하여 이를 방해하려 하였으나 우리가
듣지 않고 옛성을 수리한다고 통보하였다.
처음에 금나라가 일어나기 전에는 아골타의 선대는 생여진으로서 백두산 일대에서 요나라의 벼슬인 절도사를
습직해 오다가 걸출한 지도자 아골타를 만나 그 지배의 고리를 끊고 나라를 세운 것이다.
처음에는 고려에 대하여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였다면서 형제관계를 요구하고 나중에 요나라를 쳐 없애고부터는
태도를 돌변 부자의 나라 관계를 요구하였다. 고려에서 금나라의 연원이 고려에 기인하였다는 내용의 국서를
보냈다가 도리어 국서의 접수를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었음을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구성과 관련된 자료
고려사
〈박인량전(朴寅亮傳)〉에 ....예종 때에 중서사인으로 임명되었으며 병마부사로 윤관을 따라 여진을 정벌하는
전쟁에 출전하였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다리에 부상하고 정주에서 머물고 있을 때 윤관이 구성을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보내기를 "전투에서 이미 승리를 얻었고 국가의 위력도 이미 떨치였으니 이제는 그만 전쟁을
종결하는 것이 안전한 계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다시 적지로 깊이 들어 가서 성을 축조하면 지금은 비록
성사되었다고 보여도 후일에 그 성들을 고수하기 어려운 시기가 올가 염려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윤관이
그의 의견을 채용하지 않았더니 마침내 그 말대로 되고 말았다.(권95, 열전8, 18쪽 참조)
〈김한충전(金漢忠傳)〉... 윤관이 여진을 정벌할 때에 김한충은 중군 병마사로 힘껏 싸워서 공을 세웠고,
또 행영병마사로 되었는데 윤관 등이 각 군대들에게 군령을 내려 내성의 재목과 기와를 거두어 새로 9개소에
성을 쌓게 하고 남녁의 주민들을 그곳에 이주시켜 변경을 굳건히 하자고 하여는바 김한충은 이 방안이 불가하
다고 고집하였다...(권95, 열전8, 37쪽 참조)
〈김인존전(金仁存傳)〉에 ....왕이 동여진을 정벌하려 할 때 대신들은 모두 그것을 찬성하였고 김인존이 홀로
상소하여 불가하다고 극력 간언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후에 윤관 등이 여진을 격파하고 9개 성을 쌓았는데
여진 사람들이 소굴을 잃게 되니 해마다 우리나라 변경을 침범하여 고려의 병사들도 손실을 많이 입었으며
여진도 싫증이 나서 사신을 파견하여 강화를 청하면서 옛 땅을 달라고 제의하여 왔다. 그래서 조정에서 회의를
했으나 의견들이 구구하였으며 왕도 망설이며 결정을 못하고 있을 때...(권96, 열전 9, 4쪽 참조)
〈오연총전(吳延寵傳)〉에 ...왕이 여진을 정벌하기로 작정하고 오연총을 윤관의 부 원수로 임명하였는데 그 때
대신들은 모두 여진 정벌을 찬성하였으나 오연총은 매우 의아해 하며 윤관에게 귀속말로 의견한즉 윤관이 말하
기를 국책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무엇을 의심하느냐고 하므로 오연총도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출정하여
여진을 격파하고 영토를 개척하여 9성을 쌓은 경위 윤관의 전기에 기록되어 있다.....(권96, 열전9, 40쪽 참조)
그밖에 지(志)에도 구성에 관한 기사가 3건이 더 나온다.(연세대학교국학대학원, 신서원,증보고려사색인,참조)
금사의 기록
○ 강종이 건통 3년(1103)에 절도사를 습직했다.
덕종 말년에 아소(阿疎)가 달기(達紀)를 시켜 변방 백성들을 꼬이고 선동하여 갈라전(曷懶甸) 사람들을 잡아서
보냈다. 목종이 석적환(石適歡)을 시켜 갈라전을 어루만저 항복을 받으려 하였으나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목종
이 죽자 이에 이르러 보내게 된 것이다. 이보다 앞서 고려와 통호하였으나 얼마 후에는 간격이 상당히 있었는데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상의할 것이 있다고 청하여 사자를 고려에 보냈더니 고려에서 거절을 하면서 받아 들이지
않았다. 오수(五水)의 백성들이 고려에 붙고 단련사 14명을 잡아갔다. 이런 기록은 《고려전》 중에 있다.
○ 강종 2년 갑신(1104)년에 고려에서 재차 정벌하러 왔으나 석적환이 다시 이를 격퇴했다. 고려에서 다시 강화
를 창하고 전에 붙잡아 간 단련사 14명을 모두 되돌려 보내니 석적환은 변방 백성들을 어루만저 안정시키고
돌아왔다....
○ 강종 4년 갑술(1106)년에 "고려에서 흑환방석(黑歡方石)을 파견하여 절도사의 습직을 축하하매 배로(盃魯)를
보내어 이에 보답했다. 고려에서 그 나라로 달아난 사람들을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하므로 아첨(阿甛). 승곤(勝昆)
을 사신으로 보내어 그 나라로 가서 인수해 오도록 하였다. 고려가 약속을 저버리고 두 사신을 살해하고 갈라전
에 구성(九城)을 쌓았으며 군사 수만명으로써 침공하여 왔다. 알새(斡賽)가 이들을 격퇴했다.
알로가 역시 구성(九城)을 쌓았는데 고려의 구성(九城)과 마주 보고 있었다. 고려가 다시 침공하여 왔으나 알새가
다시 이들을 격퇴했다. 고려가 다시 도망해 달아난 사람들을 돌려 주겠다고 약속하고서 구성의 군사를 물리므로
다시 침탈당한 옛땅을 수복하였다. 9월에 이내 전쟁이 끝났다. (금사 권1)
○ 수국 3년(1117) 해란전에 장성을 쌓으니 고려도 2자나 더 증축하였다. 조서를 내려 진영을 지키라고 하였다.
따라서 《금사》의 기록상으로 보면 고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9성을 쌓은 것은 요나라의 절도사의 직임을 수행
하던 강종 때인 1106년 경에 갈라전(曷懶甸)에 구성을 쌓자 고려가 이에 대항하여 마주하여 구성을 쌓았으며
국경에서 잦은 마찰이 있던 중 금나라가 정식으로 건국이 된 수국 3년 1117년에 해란전(海蘭傳)에 장성을 쌓으니
고려도 성의 높이를 2자나 더 높이 쌓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두 나라의 기록상 9성을 쌓게 된 경위 등은 대충 맞는데 년도 등에서는 2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금사》의 기록상으로는 9성을 쌓았다가 양국 관계가 정상화 되면서 고려는 9성을 돌려 주고 국경 분쟁은 일단
종식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려가 북쪽으로 강역을 넓히는 과정에서 9성을 쌓았으나 이를 유지한 기간은
단기간이었던 것으로 보여지며 그래서 정확한 위치를 아직도 규명되지 않는가 생각된다.
만주원류고의 기록
목종 말년에 덕제가 변방 백성을 꼬여 해란전(海蘭甸) 사람들을 이곳에서 잡아 갔는데 강종이 사신을 보내
달래어 항복을 받았다. 해란전에 구성을 축조하고 군사 수만 명으로써 침공하여 왔는데 알색이 이를 퇴패시키고
역시 구성을 쌓으니 고려의 구성과 마주 바라다 보였다. 고려가 다시 침공을 하니 알색이 다시 이를 무찔렀다.
고려가 약속하기를 도망온 사람들을 돌려 주겠다고 하므로 구성의 군사를 물렸는데 다시 옛땅을 침략하였다.
(역주자는 이글 맨 마지막 부분에 관하여 원래의 뜻을 잘못 이해하여 이렇게 번역하였으나 사실은 고려가 도망온
사람들을 돌려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군사를 물리므로 다시 빼앗긴 옛땅을 회복하였다고 번역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만주원류고》는 해란로의 건치연혁만 염두에 두고 《금사》의 원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핵심어 몇 마디를
적당히 연결하여 문장을 만드는 바람에 원문과 대조확인하기 전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인지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문장으로 되고 말았다. 《금사》 원문에 의하면 달기(達紀=德濟)를 시켜 변방 백성들을 꼬여 선동하여 갈라전
사람들을 잡아 보낸 사람의 주체가 누구인지 생략이 되었지만 원문 확인결과 그 주인공은 아소(阿疏)였는데
주어를 생략해 버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원문도 이상하게 되었고 번역문 또한 이상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점이 《만주원류고》의 사료로서 가치를 반감시키는 문제점의 하나임을 역주자의 서문에서 잠간 언급
한바 있다.
해란전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옛날에 방목지에는 지명에 전(甸)이란 글자를 붙여 쓴다. 길림성에 있다는 화전(樺甸)이 그러하고 요녕성에 있다
는 관전(寬甸)이 그러하다. 《만주원류고》에도 관전처(寬甸處)란 말이 있다.(졸저, 475쪽 참조)
《만주원류고》에 의하면 이에 대한 주석을 통해 《황여전도(皇輿全圖)》에 의하면 봉황성 동남쪽에 구련성
(九連城)이 있고 조선의 의주(義州). 애주(愛州)와 가까운 것으로 보아 그 유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졸저, 380조 참조)
생각건대 구련성의 유지를 글자가 비슷한 구성으로 비정한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는 아직 그 방면의 연구가
없어 모르겠다.
《황여지도》에 관하여는 졸저 446쪽 주8)에 자세히 소개 되어 있다. 강희제 때 만든 지도로서 《황여전람도》
라고도 한다. 선교사들을 시켜 만든 지도로서 강희 이래의 역사.지리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구성과 관련된 여론
《 새국사사전》에 의하면 "1108년(예종 3)에 윤관이 별무관이라는 특별 정예부대를 조직하여 함흥 평야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쌓은 함주(咸州). 복주(福州). 영주(英州). 길주(吉州). 웅주(雄州). 통태진(通泰鎭). 진양진
(眞陽鎭). 숭녕진(崇寧鎭). 공험진(公險鎭) 등인데 자세한 위치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일본과 조선의 학자
들간에 학설이 구구하다.
윤관이 9성을 쌓아 여진족을 몰아내자 여진족은 생활의 근거지를 잃어 버리게 되었으므로 여진족에서는
완안부 오아속(烏雅束)이 중심이 되어 무력으로써 대항하고 한편으로는 강화를 청하여 그들의 생활 근거지였
던 9성의 환부를 요청하니 고려 조정에서는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중앙으로부터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과 변방
문제로 백성을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는 이유로 9성을 철수하였다. 여진족은 이 처사를 감사하여 고려에 조공
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힘이 약할 때는 자기들 말마따나 고려를 어버이 나라라고 하여 한껏 추켜세워 주다가 국력을 신장,
나중에 예종 14년에 형세가 역전되어 금나라는 형, 고려가 아우가 되었던 것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힘의 우위를 누가 차지 하느냐에 따라 형이 되기도 하고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국제간의 냉엄한 현실이었음을 어이하겠는가.
두 나라 사료상의 차이에 관한 문제는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 더 검토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된다.
중화서적 《금사》 1권 첫머리에 나오는 〈금사출판 설명〉에 의하면 금나라는 역대로 실록을 편찬하였으며
금나라가 원나라에 망할 때 원나라 장령 장유(張柔)란 사람에게 빼앗겨 원나로 실려 가서 사관에 고스란히 보관
되었다고 한다.
《요사(遼史)》.《 금사(金史)》를 정통 사서에 편입시킬 것인지 80여년간의 치열한 논쟁 끝에 마침내 논란의
종지부를 찍고 원나라 지정 3년(1343)년 양 사서가 완성되었다.
물론 고려에서도 실록이 있었는데 온전하게 보전되었는지는 아직 연구가 없어 모르겠으나 고려사가 최초로
쓰여진 것은 김종서 등에 의해 《고려국사》가 만들어졌다가 이들이 실각되는 바람에 다시 편찬을 명해 정인지
등이 손을 대었으며 우여곡절 끝에 단종 때 비로소 완성이 되었다고 한다.
《금사》의 첫 부분은 요나라의 절도사직을 습직하던 그의 선대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고려의 첫 부분은
사실은 후고구려국의 왕 궁예의 부장이었던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그의 역사를 훔쳐 쓴 역사이기 때문에 그
자신 궁예의 부하로서의 활동 상황이 고려의 역사 자체로 포장되어 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고려의 무장으로서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나라를 훔치는 역성혁명에 성공, 새로운 나라
를 여는 주인공이 되었으며, 그들의 선대가 대대로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래서 일제 때
부터 최근까지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이라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나도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 권1 총서 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제왕이 되면 자기 선대를 높혀 추존하고 하는 것이 어찌 우리 일만이겠는가. 바로 이게 역사이다.
금나라의 시조 함보가 신라 또는 고려에서 왔다는 기록이 우리 나라에 전해져 오면서 갖가지 재미 있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대표적이 예를 들자면, " 《동국여지승람》 등에 의하면 북만주 송화강유역 아르치카(안출호를
말함) 지방에 생여진의 완안부가 있었다.
고려국 평산지방에 김함보라는 인물이 그의 형 아꼬내와 아우 보화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60이 지난 김함보가
요초에 큰 뜻을 품고 그 형 아꼬내에 난세의 만주로 가자고 하니, 아꼬내가 불교를 좋아하여 그 고장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함보는 그 아우 보활이와 함께 북으로 향하여 완안부에 낙착하게 되었다. 황해도 평산인 김함보는
금태조 아골타의 8대조이며 그러한 김함보의 계보를 《요사》는 바로 전하지 않았다."(문정창, 《한국고대사》,
인간사, 1988년, 449쪽 참조)
더욱 재미 있는 것으로는 인터넷에서 확인한 바 김모씨의 함보가 김모씨의 시조로 둔갑하였고, 권모씨 집안에
서는 자기 선대일 것이라고 하였다. 《금사》에는 함보의 성이 완안(完顔)이라고 하였지 김씨란 말은 일언반구도
없다. 완안이란 여진말로 왕이란 뜻이라고 한다.
앞서 고려에서 금나라에 보낸 국서에 "금나라의 선대는 고려와 연관이 있다"는 내용으로 써서 보냈다가 국서의
접수를 거절당하는 망신(?)을 당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와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만주원류고》 권7에는 부록으로 《금사성씨고(金史姓氏考)》라는 것이 있다.
졸저에서는 분량 때문에 초고에 들어 있었던 것을 생략했는데 그 첫머리에 완안(完顔)이란 성씨가 있다.
거기에 주석하기를 금나라의 시조는 신라에서 와서 완안부에 살았다, 그래서 이로써 성씨를 삼았다고 하였을
뿐이다.(金始祖自新羅來, 居完顔部, 因以爲氏)
따라서 아전인수식으로 함보의 성씨를 김씨나 권씨로 추단하는 것은 이른바 환부역조(換父易祖)라 하는 것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글을 닫으며
이 글은 논문이 아니다. 《만주원류고》의 역주자로서 이 책을 번역하기 위해 국내 서적을 찾아 보았으나 너무나
참고할 자료가 없었다. 초고를 작성하면서 참고하기 위해 모아 두었던 자료들을 정리하여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에 대하여 붓가는 대로 쓸 예정이다. (가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