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을 바치는 전(箋)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大匡輔國崇
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 신(臣) 이행(李荇),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예문관제학 세자우부빈객(資憲大夫吏曹判書兼同知經筵春秋館事藝文館提學世
子右副賓客) 신 홍언필(洪彦弼) 등은 명령을 받자와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을 마쳤기에 삼가 정서(淨書)하
여 바칩니다.
신 이행 등은 진실로 황송하고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말씀을 올리나이다. 삼가 아룁니다.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자손이 계승하여 강토의 둘레는 사방의 넓이를 다하였고, 풍습과 시속이 변하였으니 도적
(圖籍)은 한 시대의 마땅함에 따라야 하나이다. 이미 이전에 창작함이 있었으니 어찌 뒤에 기술함이 없사오리까?
이런 것은 이제 시작된 것이 아니오라 예로부터 그러하옵나이다.
<우공(禹貢)> 편(篇)이 이루어졌음은 당우(唐虞)의 전(典)을 이은 것이며, <주관(周官)>에서 직(職)을 나눔은 실
로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규모를 이은 것이니, 전 시대를 빛나게 한 것으로 진실로 뒷사람이 본받아야 할 바
입니다.
비록 물려받기도 하고 개혁하기도 해서 각기 다르지만 덜 것은 덜고 보탤 것은 보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하옵건대, 우리 조선이란 나라는 기자(箕子)가 교화를 일으킨 데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산천은 아름답게도 울울총총(鬱鬱??)하고 예악 문장은 빛나게도 빈빈욱욱(彬彬郁郁)하였는데,
그 뒤에 분열(分裂)과 통합이 한결같지 못하여 변경이 무상(無常)하였나이다.
우리 태조가 일어나셔서 융성했던 옛날의 강토를 회복하시니, 동서남북의 먼 곳까지도 모두 우리의 영토가 되었
으며, 조수어별(鳥獸魚鼈)의 미물(微物)까지도 모두 우리의 덕화를 입었습니다. 그런데도 국사(國史)의 저술이
없었음은 열성(列聖)께서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우리 성종 강정대왕(康靖大王)께서, 도(道)는 선천(先天)
에 합하고 뜻은 계고(稽古)에 있어서 이르시기를, “오는 시대에 보여주려 한다면 어찌 당시를 드러내어 밝히는
것만한 것이 있으랴?” 하시고, 유신(儒臣)에게 편수할 것을 명하시니 연충(淵衷)의 지시를 받았나이다.
가로와 세로로 수천 리가 되는 지역을 문을 나서지 않고도 볼 수 있으며, 앞과 뒤 몇백 년의 사적이 손바닥을 보
듯 매우 분명하옵나이다. 그러나 햇수가 오래 지났으니 혹 믿음과 의심이 서로 섞였을 것이옵니다.
일찍이 폐조(廢朝 연산군 시대)에서 수정한 적이 있었으나 성전(盛典)을 크게 드러내지는 못하였는데,
공손히 생각하건대, 주상전하께서는 성스럽고 신령하시어 크게 잇고 크게 나타내셨나이다.
거듭 빛남이 제요(帝堯)에게 합하시니[重華協于帝], 다스림이 이미 정해지고 공이 이미 이루졌으며, 거듭 하늘
로부터 명을 받으시니 천지가 개벽하고 백성이 다시 모였나이다.
성종께서 끼치신 뜻을 이어서 밝은 시대의 전서(全書)를 편찬하려 하시어 신등의 미련하고 소략함을 비루하게
보지 않으시고 선정(先正)의 못다 하신 사업을 맡기시니 두렵고 황공하와 어찌할 줄 모르겠사옵니다.
힘쓰기는 하겠지만 어찌 감당하오리까? 민간에서 찾고 조정에서 찾아 전에 누락된 것을 널리 채집하여 오늘과
옛날에 징험하여 당대의 회통(會通 집성)을 크게 갖추어 수년에 걸쳐 일을 마쳤는데, 어리석은 신의 많은 노력
을 기울였나이다.
옛날 항목 그대로 한 것이 50여 권이고, 새로 첨가하여 기록한 것은 모두 약간의 글자이오나, 선성(先聖)인 성종
의 규모를 따랐으니 감히 한 구절인들 보태리까? 미리 세운 계획을 받드는 데에 조심하였으니 아마도 대강은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다행히 편집이 끝났으므로 삼가 제본(製本)하여 바치오니, 혹 한가로운 여가에 부지런히 읽어주시어 땅은 선왕
에게서 받은 것이오니 조종(祖宗)께서 개창(開創)하기 쉽지 않았음을 생각하시고, 법도는 후세에 전할 것이오니
자손이 받들어 지켜서 어기지 말도록 경계하소서.
신 이행 등은 지극히 감격하고 간절하와 어쩔 줄을 모르면서 삼가 받들어 올리오며 전(箋)을 붙여서 아뢰나이다.
가정(嘉靖) 9년 8월 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신 이행 등은 삼가 전을 올리나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서문
《동국여지승람》은 우리 성종대왕조에 편찬한 것이다. 성종대왕께서는 계속하여 밝히는[緝熙] 학문으로 온갖
정치를 하시는 여가에 <여지도지(輿地圖誌)>에 유의하시어 선성부원군(宣成府院君) 노사신(盧思愼) 등에게 명
하여 편찬하여 책을 만들었는데, 첫머리에는 경도(京都)에서부터 아래로는 각 도까지의 연혁(沿革)의 차이와
풍속의 다름을 실었으며, 높은 것으로는 묘사(廟社)ㆍ능침(陵寢)과 엄한 것으로는 궁궐과 관청이고,
학교는 가르치는 곳이고, 토산물은 의식(衣食)의 근원이고, 인물을 논하는 데는 효자 열녀를 으뜸으로 하고,
형승(形勝)을 말하는 데는 성곽과 산천을 요긴한 것으로 삼았고, 누(樓)ㆍ정(亭)ㆍ사(寺)ㆍ사(社)ㆍ역(驛)ㆍ원
(院)ㆍ교량(橋梁), 명현의 사적과 문인의 제영(題詠)의 섬세하고 은미한 것까지도 두루 기록해서 비록 시대가
오래된 것이나 사경(四境)의 먼 것이라도 한번 책을 펼치면 환히 손바닥에 놓고 가리키는 것과 같으니, 실로 일
국의 좋은 볼거리로서 열성(列聖)께서 미처 하지 못하셨던 것이다.
이는 <주관(周官)>의 체국경야(體國經野)의 법도에서 나온 것으로 성대하게 문채로운 것이다.
폐조(廢朝)에서 다시 편찬하게 하여 상당히 보탤 것은 보태고 뺄 것은 뺀 것이 있었는데,
그 말년에 이르러서 개인이 보관하는 것을 금하였으므로 이 책이 민간에 남아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주상전하께서는 성품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뛰어난 자질을 타고나셨고,
운수는 중흥(中興)을 만나시와 문명한 다스림이 전 시대보다 빛남이 있다.
이 책은 폐조(廢朝)에서 편찬된 것에 혹 미진함이 있고, 폐정(?政) 끝에 제도를 많이 변경하기를 일삼았으니, 그
연혁(沿革)의 내력도 증거할 바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어, 드디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속편(續編)
을 만들어 그릇된 것은 고치고 누락된 것은 보충하게 하셨다. 그리고 또 신 이행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시므로 공경히 명령을 받들고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여, 편찬실을 개설하고 인원을 임명하여 기한을 정해서
끝마치기를 독촉하였으나, 사실에 의심이 가나 뺄 수 없는 것은 반드시 문서로라도 그 지방을 왕복하여야 하므
로 두 해를 거쳐서야 비로소 일의 가닥이 잡혔다.
아! 신등이 어리석고 노둔하여 비록 서울 안에서 귀와 눈으로 듣고 본 것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혹 빠뜨리고 잘못
된 것이 있는데, 하물며 사방에 멀리는 혹 수천 리 밖에 모두 문서를 보내어 정하자니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그릇되고 망녕된 죄는 감히 피할 바가 없다. 비록 그러하나, 전하의 생각의 미치신 바는 어찌 구구히 사물(事物)
이나 문자(文字)의 말단에 있었겠는가? 묘사(廟社)에 대해서는 공경히 할 것을 생각하시어 신(神)이 계시듯이
하는 정성을 다하셔서 후손에게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시고, 궁궐에 대해서는 편안함을 생각하시되
짓기에 힘듦을 생각하시어 후세로 하여금 더 보태지 못하게 하시며, 넓은 토지를 보고는 선왕에게서 받은 것임
을 생각하시어 한 백성도 제 살 곳을 얻지 못할까를 염려하시고, 많은 생산을 보고는 백성의 힘에서 나온 것임
을 생각하시어 사방에서 정당하게 바치는 것만을 쓰시며, 훌륭한 인물이 많은 것을 보고는 그것이 조종(祖宗)의
배양(培養)하신 공이고 정사만으로는 거저 행해질 수 없다는 것임을 생각하시고, 웅장한 산천을 보고는 역대의
흥하고 망한 자취로 험준한 지세도 끝까지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을 생각하시어 생각하시고 또 생각하시어 작은
것까지도 다 그렇게 하지 않음이 없게 하시어, 뺄 것은 빼고 보탤 것은 보태어 시대에 따라 알맞게 하였으니 이
책의 편찬이 성명(聖明)의 정치에 또한 만분에 일의 도움이라도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정 9년경인 8월 상한(上澣)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신 이행은 절하고 조아리며 삼가 서문을 쓴다.
어명을 받들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수한 관원의 직(職)과 이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신 이행(李荇)
정헌대부 행 동지중추부사 겸 지춘추관사 동지경연사 세자좌빈객(正憲大夫行同知中樞府事兼 知春秋館事同知經
筵事世子左賓客) 신 윤은보(尹殷輔)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세자좌부빈객(資憲大夫戶曹判書兼世子左副賓客) 신 신공제(申公濟)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동지경연 춘추관사 예문관제학 세자우부빈객 신 홍언필(洪彦弼)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副摠管) 신 이사균(李思鈞)
가선대부 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判) 신 황효헌(黃孝獻)
절충장군 행 용양위대호군(折衝將軍行龍?衛大護軍) 신 이희보(李希輔)
절충장군 행 의흥위호군(折衝將軍行義興衛護軍) 신 정사룡(鄭士龍)
통훈대부 홍문관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 승문원참교(通訓大夫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
講官春秋館編修官承文院?校) 신 심사순(沈思順)
통훈대부 홍문관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 예문관응교(應敎) 신 심언광(沈彦光)
통훈대부 승문원판교 겸 춘추관편수관 한학교수 신 윤개(尹漑)
봉정대부(奉正大夫) 수(守) 홍문관전한(典翰)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 신 원계채(元繼蔡)
봉정대부 수 장악원(掌樂院) 정(正) 신 어영준(魚永濬)
통덕랑 수 성균관사예(通德郞守成均館司藝) 겸 승문원교감(校勘) 신 채세영(蔡世英)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호분위(虎賁衛) 부호군 신 윤계(尹溪)
조봉대부 행 이조정랑(朝奉大夫行吏曹正郞) 신 이억손(李億孫)
봉직랑(奉直郞) 수 의정부검상(檢詳) 신 홍서주(洪敍疇)
봉직랑 수 이조정랑 겸 승문원교리 신 황염(黃恬)
승의랑 수 사헌부지평(承議郞守司憲府持平) 신 이임(李任)
승훈랑 수 승문원교리 신 박광우(朴光佑)
《동국여지승람》을 바치는 전(箋)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좌리공신 보국숭록대부 선성부원군 겸 영경연사(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佐理功臣輔國崇
祿大夫宣城府院君兼領經筵事) 신 노사신(盧思愼),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좌리공신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 겸
지경연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진산군(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佐理功臣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知經筵事五衛都摠
府都摠管晋山君) 신 강희맹(姜希孟), 순성명량좌리공신 숭정대부 달성군(達城君)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
학 지경연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신 서거정(徐居正), 정헌대부 지중추부사(正憲大夫知中樞府事)
신 성임(成任), 통정대부 예조 참의 신 김자정(金自貞) 등은 명령을 받자와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마쳐 삼
가 정서하여 바치면서 신 사신 등은 진실로 황송하고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말씀을 아뢰나이다.
삼가 아룁니다. 참으로 총명한 이가 임금이 되시어 정히 역수(曆數)의 돌아옴을 받았으며, 이 토지는 선왕에게
서 물려받으시어 문득 넓은 둘레를 차지하였나이다. 이에 도지(圖志)를 편찬하여 왕 앞에 올리나이다.
저으기 보옵건대,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에는 모두 서적의 편찬이 있었나이다.
<우공(禹貢)>은 하 나라 사관에게서 이루어졌으니 토지를 구획함이 지극히 상세하고, 직방(職方)은 주서(周書)
에 나타났으니 들의 거리를 측량함이 모두 갖추어졌는데, 역대로 내려오면서 각기 토지에 대해 기재하였사오며,
빛나게 명 나라가 통치하게 되어서는 《일통지(一統志)》를 만들어 밝게 하였다. 바다 모퉁이에 있는 우리 땅은
실로 하늘이 낸 나라이옵니다. 앞서 단군(檀君)이 나라를 열었고, 뒤에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았나이다.
한 나라가 사군(四郡)을 설치했을 때에는 범처럼 다투어 영토가 찢어지고, 삼국(三國) 시대에는 사소한 일로 쓸
데없이 싸워서 국가가 무너졌습니다.
왕씨가 통합한 이후로 강토를 대략 보유(保有)하였사오나, 여진(女眞)이 공험(公險)에 웅거해서 땅을 점점 많이
베어가고, 원 나라가 멀리 탐라(耽羅)를 통치해서 국토가 줄어든 지 오래되었나이다.
고려 말기에 사슴을 잃게 되자 거룩하신 우리 태조께서 등극하셨나이다.
집을 바꾸어 큰 터전을 세우니 땅이 다시 개척되며 백성이 다시 모였사오며, 집을 지으려고 터를 닦으시니 성자
(聖子)가 잘 잇고 신손(神孫)이 잘 계승하였나이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주상전하께서는 예지(睿智)의 자질이 뛰어나고 영성(盈成)의 운(運)에 당하셨나이다.
계획을 환히 드러내시고 공렬을 계승하셨도다. 거룩한 공이고 찬란한 문장이로다. 제도의 경장(更張) 시점이
바로 이 시기인데, 하물며 판도(版圖)의 편찬을 어찌 그만두리까.
신등의 미련하고 소략함을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서국(書局)의 편집을 맡기셨나이다.
자(子)ㆍ집(集)의 기록을 채택하고, 아울러 전해지는 군승(郡乘 각 고을의 읍지(邑誌))도 모았나이다.
첫머리에는 서울의 묘사(廟社)와 공서(公署)를 엮었으며, 다음에는 각 도의 성곽과 관방(關防)도 기록하였나
이다.
연혁이 복잡하여 한결같지 않았고 명칭도 따라서 같지 않았나이다.
어찌 형승 산천뿐이리오? 풍속과 물산에서 누정(樓亭)ㆍ궁실(宮室) 및 원우(院宇)ㆍ교량(橋梁)ㆍ고적(古跡)ㆍ
능묘(陵墓)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록하였고, 사찰과 사우(祠宇)도 갖추어 썼사옵니다.
역정(驛程)은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며 학교는 인재를 기르는 곳입니다.
열녀는 살았건 죽었건 빠짐이 없고 명현은 옛날과 현재의 사람들을 아울러 취하였사옵니다.
관원에서 정적(政績)을 상고하였사옵고, 제영(題詠)으로 시가(詩歌)를 채집하여 모두 이 책에 모았으니, 실로
명을 받자온 것입니다. 신등이 모두 조전(雕篆)의 하찮은 재주로 외람되이 편찬의 중한 일을 맡았나이다.
문헌(文獻)의 상고할 수 있는 것과 증거할 수 없는 것에 따라 기재(紀載)가 어떤 것은 자세하고 어떤 것은 간략
함이 있기도 하옵니다.
오랫 동안 정력을 써서 4년 만에 바야흐로 몇 편으로 손을 떼었나이다.
수만 리 강역(疆域)의 구분은 지도를 펼치면 마음에 환하고, 천백년 흥폐(興廢)의 자취는 한번 책을 열면 눈에
들어옵니다. 혹 한가로울 때에 읽어주소서. 이미 온 국토가 소유가 아닌 것이 없으니 조종(祖宗)의 개척하기
어려움을 생각하시고, 천명(天命)은 일정한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 자손이 지키고 백성을 부지런히 구휼
하도록 하소서.
신 사신 등은 감격하고 간설하와 어쩔 줄 모르면서 삼가 받들어 이 책을 바치오며, 전(箋)을 붙여 아뢰나이다.
성화(成化) 17년 4월 19일에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좌리공신 보국숭록대부 선성부원군 겸 영경연사 신 노사신
등은 삼가 전을 올리나이다.
《동국여지승람》 서문
토지에 관한 책이 있은 지가 옛날부터입니다. 황제(黃帝)는 들을 구획하여 나누었고, 당우(唐虞) 때에는 12주로
나누었으며, 하 나라 때에는 <우공(禹貢)>이 있었고, 주 나라 때에는 직방(職方)이 있었으며, 진한(秦漢) 이후로
는 각각 지(誌)와 도(圖)가 있었습니다.
송 나라 가희(嘉熙) 연간에 건안(建安)의 축목(祝穆)이 《방여승람(方輿勝覽)》을 편찬하여 사물의 중요한 것을
널리 채택하여 구절마다 각 주(州) 밑에 나누어 넣었으니, 그 문장이 칭찬할 만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송(南宋) 시대에 천지가 분열되어 남쪽과 북쪽을 다 차지하지 못한 탄식이 있었습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명 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여 문자와 궤도(軌道)가 통일되자, 《일통지(一統誌)》를 지어서
온 천하를 포괄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아, 훌륭합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은 단군이 나라를 처음 세우고,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았는데 모두 평양(平壤)에 도읍
하였고, 한 나라 때에는 사군(四郡)과 이부(二府)를 두었습니다. 이로부터 삼한(三韓)이 오이처럼 나뉘어져
마한(馬韓)은 54국을 통솔하고,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각각 12국을 통솔하였습니다.
그러나 상고할 만한 도적(圖籍)이 없고, 그 뒤로는 신라ㆍ고구려ㆍ백제 세 나라가 솥발처럼 나뉘어졌습니다.
신라의 땅은 동남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지리산, 북쪽으로는 한강에 이르렀으며, 고구려는 동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며, 서북으로는 요하(遼河)를 넘었습니다.
백제는 서남으로는 바다, 동으로는 지리산, 북으로는 한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삼국이 강토가 비등하여 서로 위가 되지 못하다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니 강토가 더욱 넓
어졌으나, 그 말기에 이르러 영역이 날로 줄어들어 궁예(弓裔)는 철원(鐵原)에 웅거하여 후고려(後高麗)라 칭
하고, 견훤(甄萱)은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후백제(後百濟)라 칭하니, 강토가 갈기갈기 찢어져 통일되지 못하
다가 고려 태조가 계림(鷄林)인 신라를 멸망시키고 압록강(鴨綠江)을 차지했던 후고려를 쳐서 삼한을 합쳐 통일
하였습니다.
성종(成宗)이 비로소 열 개의 도(道)를 정하고, 현종(顯宗)이 3경(京)ㆍ4도호(都護)ㆍ8목(牧)을 정하고 56지주
(知州)ㆍ28진장(鎭將)ㆍ20현령(縣令)을 두었습니다. 예종(睿宗)이 여진을 쳐서 쫓아내서, 9성(城)을 두고 뒤에
5도(道)ㆍ양계(兩界)로 정하였으니, 지리(地理)의 융성함이 이때가 최고였습니다.
다만 서북으로는 압록강, 동북으로는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삼았으니, 서북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고 동북
은 그보다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그 역대의 지지(地誌)는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대강 보이지만 자세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태조 강헌대왕이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한양에 도읍을 정하시어 열성(列聖)이 서로 이
으니, 강토가 날로 개척되어 8도(道)로 정하였으니, 사방의 복판에 있는 것을 경기라 하고, 서남은 충청, 동남은
경상, 남쪽에 치우친 것은 전라, 정동은 강원, 정서는 황해, 동북은 영안(永安 함경(咸鏡)), 서북은 평안이라
하였습니다.
경(京)이 둘이고, 부(府)가 넷, 대도호부(大都護府)가 넷, 목(牧)이 20, 도호부가 44, 군(郡)이 83, 현(縣)이 1백
7십 3이니 안팎의 산하(山河)의 세로와 가로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우리 전하가 즉위하신 10년 무술년 봄 1월에 신 양성지(梁誠之)가 《팔도지지(八道地誌)》를 바치고,
신등이 《동문선(東文選)》을 바쳤더니, 전하께서는 드디어 선성부원군 신 노사신, 우찬성 신 강희맹, 지중추
부사 신 성임, 남원군(南原君) 신 양성지, 대사성 신 정효항(鄭孝恒), 참의 신 김자정, 승문원 판교 신 이숙함
(李淑?), 좌통례(左通禮) 신 박숭질(朴崇質), 행 호군 신 박미(朴楣) 및 신 거정 등에게 명하여 시(詩)와 문(文)
을 《지지(地誌)》에 넣게 하셨습니다.
신등이 공손히 엄하신 명을 받자와 사신(詞臣)을 가려서 거느리고 분과를 나누어 이루기를 구하여 위로는 관각
(館閣)의 도서(圖書)로부터 아래로는 개인이 보관한 초고(草藁)까지 열람하지 않음이 없이 일체 나누어 넣었습
니다.
연혁(沿革)을 먼저 쓴 것은 한 고을의 흥폐를 먼저 몰라서는 안 되기 때문이고, 풍속과 형승을 다음에 쓴 것은
풍속은 한 고을을 유지시키는 바이며, 형승은 사경(四境)을 공재(控帶)하는 바이므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경위(經緯)로 삼고, 높은 성과 큰 보루를 금포(襟抱)로 삼았습니다.
묘사(廟社)를 맨 먼저 기재한 것은 조종(祖宗)을 높이며 신기(神祇)를 존경해서이고, 다음에 궁실(宮室)을 쓴 것
은 상하의 구분을 엄하게 하고, 위엄과 무거움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오부(五部)를 정해서 방리(坊里)를 구분
하며, 여러 관청을 설치하여 모든 사무를 보는데, 능침(陵寢)은 조종의 길이 편안한 곳이며,
사(祠)와 단(壇)은 또 국가의 폐하지 못할 전례입니다.
학교를 일으키는 것은 일국의 인재를 교육하려는 것이고, 정문(旌門)을 세우는 것은 삼강(三綱)의 근본을 표창
하려는 것입니다. 사찰(寺刹)은 역대로 거기에서 복을 빌었고, 사묘(祠墓)는 선현(先賢)을 사모하여 추숭(追崇)
한 것입니다.
토산은 공부(貢賦)가 나오는 바이고, 창고는 공부를 저장하는 곳입니다.
누대(樓臺)는 때에 따라 놀며 사신(使臣)을 접대하는 것이고, 원우(院宇)는 여행객을 접대하고 도적을 금하는
것입니다.
관장(關防)을 웅장하게 한 것은 도적을 방비하기 위해서이고, 참(站)과 역(驛)을 벌여 놓은 것은 사명(使命)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인물(人物)은 과거의 어진 이를 기록한 것이고, 명환(名宦)은 장래에 잘하기를 권한 것입니다.
또 제영(題詠)을 마지막에 둔 것은 물상(物像)을 읊조리며 왕화(王化)를 노래하여 칭송함은 실로 시(詩)와 문
(文)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도(京都)의 첫머리에 총도(摠圖)를 기록하고, 각각 그 도(道)의 앞에 도(圖)를 붙여서 이 양경(兩京) 8도로 50
권을 편찬하고 정서하여 바치나이다.
신등이 지금 세상에 살면서 역대의 사적을 모두 찾아야 하고, 서울에 거처하면서 사방의 먼 곳까지를 상고하자
니, 이것은 들고 저것은 빠뜨리며 그릇된 것은 그대로 따르고 진실은 잃은 것을 어찌 면할 수 있사오리까? 그러
하오나, 책을 펴서 그 일을 상고하고 도(圖)를 펼쳐 그 자취를 본다면 태산(泰山)에 오르거나 황하(黃河)의 근원
을 끝까지 파고들 것 없이 8도의 지리가 마음과 눈에 환하여 문을 나가지 않고도 손바닥을 보듯이 분명히 알 것
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한때의 선비들이 임금의 총명을 열어 넓히고 융성한 정치를 도울 뿐이겠습니까?
반드시 장차 성자(聖子)ㆍ신손(神孫)이 조종의 넓은 토지와 멀리까지 미친 왕화(王化)를 이어받아 길이 만세토
록 지킬 것이 의심이 없습니다.
성화(成化) 기원 17년 창룡(蒼龍 태세(太歲)) 신축 4월 하완(下浣)에 순성명량좌리공신 숭정대부 달성군 겸 홍문
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신 서거정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서문을 쓰나이다.
명령을 받자와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한 관원의 직(職)과 이름 :
총재(總裁)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좌리공신 보국숭록대부 선성부원군 겸 영경연사(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佐理功臣輔國崇
祿大夫宣城府院君兼領經筵事) 신 노사신(盧思愼)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좌리공신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 겸 지경연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신 강희맹(姜希孟)
순성명량좌리공신 숭정대부 달성군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신 서거정(徐居正)
정헌대부 지중주부사 신 성임(成任)
순성명량좌리공신 자헌대부 전 공조판서 겸 지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남원군 신 양성지(梁誠之)
찬집(纂集)
통정대부 성균관대사성 신 정효항(鄭孝恒)
통정대부 예조참의 신 김자정(金自貞)
통훈대부 승문원판교 지제교 신 이숙함(李淑?)
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 신 박숭질(朴崇質)
어모방군 행 충무위 호군 신 박미(朴楣)
통훈대부 내자시 정(內資侍正) 겸 승문원참교 한학교수(漢學敎授) 신 정효종(鄭孝終)
통훈대부 행 성균관사예 신 박제순(朴悌順)
통훈대부 행 승문원교감 신 안처량(安處良)
통훈대부 행 승문원교검 신 이맹지(李孟智)
어모장군 행 오위도총부도사 신 김화(金?)
봉렬대부 행 성균관전적(典籍) 겸 서학교수 신 조평(趙枰)
봉직랑 승문원교리 신 김석원(金錫元)
봉훈랑 행 성균관전적 겸 동학교수 승문원교검 신 조형문(趙亨門)
선교랑 수 이조좌랑 신 이복선(李復善)
선무랑 수 사헌부감찰 겸 승문원교검 신 박문효(朴文孝)
선무랑 수 성균관전적 겸 승문원교검 신 이의무(李宜茂)
선무랑 행 승문원박사 신 황린(黃璘)
계공랑 행 승문원저작(著作) 신 최한원(崔漢源)
종사랑 승문원 정자(正字) 신 이승건(李承健)
권 1 경도 상
고조선(古朝鮮)은 마한(馬韓)의 지역이다. 서울은 북으로 화산(華山)을 진산(鎭山)으로 삼아, 동과 서는 용이
서리고 범이 쭈구리고 앉은 형세이고, 남쪽은 한강(漢江)으로써 요해처(要害處)를 삼았으며,
멀리 동쪽에는 대관령이 있고 서쪽에는 발해(渤海)가 둘러싸고 있어서 그 형세의 훌륭함이 동방(東方)의 으뜸
으로서, 진실로 산하(山河) 중에, 백이(百二)의 땅이다.
백제(百濟) 중엽에 한산(漢山)에서 옮겨와 살다가 얼마 후에 남쪽으로 파천(播遷)하였다.
고려(高麗) 숙종(肅宗)이 비록 남경(南京)을 두었지만, 가끔 와서 순행하였을 뿐이니, 모두 그 형세의 훌륭함을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천명(天命)을 받고 여기에 도읍을 정하여, 사방에서 조정으로 오는 길의
거리를 균등하게 하고, 영원토록 뽑아 낼 수 없는 큰 터를 세우니, 동경ㆍ서경ㆍ개경의 삼경(三京)의 형세로서는
그 만분의 일도 여기에 방불할 수 없는 것이다. 아름답고 훌륭하구나.
신증 국도 : 명 나라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살펴보건대, 저 동국(東國)은 조가(朝家)의 바깥 울타리
로, 서쪽은 압록강(鴨綠江)이 한계가 되고, 동쪽은 상돈(桑暾)에 닿았으며, 천지(天池)는 거의 그 남쪽 문이 되고,
말갈(靺鞨)은 그 북쪽 문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나라는 동남쪽이 모두 바다에 닿아있고, 서북쪽은 건주(建州)이고, 정북쪽은 모련(毛憐) 해서(海西)이다.
팔도(八道)가 별처럼 벌여 있는데, 경기(京畿)가 홀로 으뜸이 되고, 충청(忠淸)ㆍ경상(慶尙)ㆍ황해(黃海)ㆍ강원
(江原)을 날개로 삼았으며, 동북쪽의 명칭을 영안(永安 지금의 함경도)이라 한 것은 그 뜻이 경계를 견고히 하려
는 데에 있다.
평안(平安 지금의 평안도)은 땅이 조금 척박하고, 전라(全羅)는 물산이 가장 풍부하였다. 경기ㆍ충청ㆍ경상ㆍ
황해ㆍ강원ㆍ영안ㆍ평안ㆍ전라는 모두 도(道)의 이름인데, 평안은 곧 옛날 변한(弁韓)의 땅이고, 경상은 옛날
진한(辰韓)의 땅이며, 전라는 옛날 마한의 땅이다.
그 넓이는 거리가 2천 리이고, 길이는 배가 된다.
그 나라는 동서가 2천 리이고, 남북은 4천 리라고 <지서(誌書)>에 쓰여져 있다.
옛날을 살펴보면, "그 나라는 서너 나라로 봉해졌는데, 지금은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신라(新羅)ㆍ백제(百濟)ㆍ탐라(耽羅)가 지금은 다 그 소유가 되었다.
생각건대, 앞 사람의 실패한 자취를 밟지 않았으니, 그 까닭은 당시대의 깊은 은혜를 홀로 입었기 때문이다.
조서(詔書)로써 나라 세운 것을 허락하여 독자적으로 덕화를 펴게 하니,
본조 홍무(弘武) 2년에 고려국의 왕 왕전(王?)이 표(表)로써 즉위(卽位)를 축하하여 조서로 독자적으로 교화를
펴도록 허락하고, 구뉴(龜紐)와 금인(金印)을 내려주었다.
시(詩)와 서(書)가 있고, 상(庠)과 교(校)가 있다. 선비가 궁하면 향(香)을 피우거나 좀을 물리고,
문장이나 꾸미는 하찮은 일을 하며, 벼슬길이 트이면 붕새를 잡거나 표범을 변하게 한다.
그 나라는 조정의 정삭(正朔)을 받들고, 향시(鄕試)는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년(酉年)에 행하고,
회시(會試)와 전시(殿試)는 진(辰)ㆍ술(戌)ㆍ축(丑)ㆍ미년(未年)에 행한다.
농사를 부지런히 짓고 기술을 잘 익히며, 관청에서는 옛것을 많이 본뜨고, 봉급으로는 논밭을 주며,
형벌은 궁형(宮刑)은 쓰지 않고, 도적이라야 옥에 가두어 큰 칼을 씌운다. 환관들도 모두 궁형(宮刑)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오직 어릴 때에 다쳤거나 질환이 있는 자를 뽑아 썼기 때문에 매우 적었다. 그러나 도적은 가벼이 용서해주지 않
았다. 이 일은 서너명의 통역관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들의 말이 모두 같았다. 무역은 한결같이 곡식이나 베로써
하되, 그 쌓아두는 것에 따라 이익을 남기고, 쓰는 것으로는 금이나 은은 모두 다 금하였으므로, 비록 매우 적은
양이라도 따졌다. 민간에서는 매우 적은 양의 금은이라도 쌓아두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곡식이나 베를 많이 가진 이를 부잣집이라 하였다.
무역 매매는 한결같이 이 곡식과 베로써 하였다. 그 나라에 탐관(貪官)이 적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전답의 세(稅)는 결(結)로써 묘(畝)를 대신하였는데, 소로 나흘을 갈 정도라야 4두(斗)의 조세(租稅)를 내었다.
한 마리 소의 힘을 다해서 나흘 동안 가는 땅을 1결이라 한다.
태학(太學)에서 선비를 양성하는 데에는 종류에 따라 인원을 정하는데, 두 개의 재(齋)에 기숙(寄宿)하는 자는
모두 두 때의 녹(祿)을 먹는다. 성균관(成均館)에는 항상 5백 명을 양성하는데, 3년마다 명경(明經)으로써 뽑은
자를 생원(生員)이라 하고, 시부(詩賦)로써 뽑은 자를 진사(進士)라 하며, 또 남(南)ㆍ중(中)ㆍ동(東)ㆍ서(西)의
사학(四學)에서 승보(升補)된 자를 승학(升學)이라 한다. 사학에서 북쪽을 기피하여 감히 이름짓지 못한 것은
조정을 높여서이다.
생원과 진사는 상재(上齋)에 거처하고, 승학은 하재(下齋)에 거처한다. 생원과 진사로 전시에 합격한 자들만이
식년(式年)에 과거를 보아 비로소 관리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그대로 성균관에서 양성된다.
식년은 3년마다 있는데, 33명만 뽑는다. 관리로서 삼품이 아니면 비단으로 몸을 치장하지 못한다.
낮은 관리는 모두 주포(紬布)를 입고 저사(紵絲)는 입지 않는데, 그 짙푸른 색깔의 베옷도 항상 입지 않고 잔치
때라야 입는다. 백성들은 한 전(廛)씩을 받되 벼나 삼은 모든 움을 파고 넣어둔다.
그 간직하는 것도 요(遼) 나라 사람들과 같다.
그 가장 말할 만한 것은 그 나라에 80세가 되는 노인이 있으면 그 남녀들에게 모두 나라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어
은혜를 널리 베푼다. 해마다 늦가을에 왕은 팔십 노인에게 전(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고, 왕비는 팔십 부인에
게 궁(宮)에서 잔치를 베풀어준다. 자식에게는 삼년상(三年喪)이 있어서, 비록 종이라도 그렇게 행하는 것을 허
락하여 그 효를 이루게 한다.
그 나라 풍속에 상복을 입는 것은 반드시 3년이고, 또 여묘(廬墓)살이 하는 것을 숭상한다. 종에게는 보통 백일
의 상기(喪期)를 허락하고, 3년상을 원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허락한다.
왕도(王都)에는 귀후서(歸厚署)를 설치하고 관곽(棺槨)을 쌓아두었다가 빈궁한 사람들을 도와준다.
그 나라의 관곽은 소나무를 많이 쓴다. 그러나 한 도(道)에서 보면 적당한 재목이 적은 듯하기 때문에 왕도에
관청을 설치하여 편리를 보아준 것이다.
향음주례(鄕飮酒禮)에는 술잔을 드는 의식을 엄격하게 하고, 제기를 놓는 것은 질서 있게 하여 그 시끄러움을
경계한다. 의식은 중국과 같고 조정이라는 두 글자만을 고쳐서 국가라고 하였다.
혼인에는 중매하는 것을 신중히 하고 재가(再嫁)해서 난 자식은 아무리 학문이 많아도 사류(士流)에 끼이지 못
한다. 그 풍속에는 재가를 부끄럽게 여겨 재가해서 낳았거나 행실이 나쁜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모두 사류
의 등사판(登仕版)에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문벌에는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을 가장 중히 여겨,
대대로 양반(兩班)에 속한 사람이 혹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면 모두 예답지 못한 행동이라 한다.
조상 때부터 일찍이 문무(文武)의 벼슬을 겸한 사람을 양반이라 한다. 양반의 자제에게는 다만 글 읽기만 허락
하고 기예(技藝)는 익히게 하지 않는다.
혹 소행이 착하지 못하면 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난한다. 심지어는 집안에 도박 기구의 소장(所藏)도 허락
하지 않는다. 바둑판이나 쌍륙 따위는 민간 자제들에게도 모두 익히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제사에 있어서는 모두 가묘(家廟)를 세우는데, 대부(大夫)는 삼대까지 제사를 지내고, 선비와 서민들은 할아버
지와 아버지의 제사만을 지낸다.
이것은 모두 기자(箕子)로부터 그 풍습을 전한 것이고, 또 중국에서 하는 것을 보고 본받은 것이다.
이상은 모두 관반사(館伴使) 이조 판서(吏曹判書) 허종(許琮)의 《구도풍속첩(具到風俗帖)》에 나와있다.
대개 성곽을 쌓을 때에는 모두 높은 산 앞에 쌓아서 가끔 산봉우리나 산기슭으로 나오더라도 활처럼 굽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큰 것은 날고 나는 듯한 높은 성이 솟아 있고, 작은 것도 높고 높은 표관(豹關)처럼 웅장하다.
대개 의순(義順)에서 선천(宣川)을 지나는 곳에 의순은 객관(客館)의 이름으로 의주 압록강 동쪽에 있으며,
압록강은 바로 중국과 조선의 경계가 된다.
선천은 군(郡)의 이름으로 의주 동쪽에 있다. 그 사이에 비록 험준한 용호(龍虎)나 산 이름으로 용천군(龍川郡)
의 진산(鎭山)이다. 웅골(熊骨) 산 이름으로 철산군(鐵山郡)의 진산이다 이 있지만,
곽산(郭山)이 더욱 높이 하늘에 솟아 있다. 곽산은 군의 이름으로 그 성은 산꼭대기에 있다. 《지서(志書)》에는
능한성(凌漢城)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신안(新安)에서 객관의 이름으로 정주(定州)에 있는데, 그 앞에는 누각이
있다. 대정(大定)을 지나는 곳에 강 이름으로 박천군(博川郡)에 있다.
바로 옛날 주몽(朱蒙)이 남으로 달려오다가 이곳에 이르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래서 또 박천강(博川江)이라고도 한다. 그 산으로서 비록 천마(天馬) 산 이름으로 정주(定州)의 진산이다.
봉두(鳳頭)의 놓은 산이 있지만, 봉두는 곧 가산군(嘉山郡)의 진산이다.
압록강에서 동으로 가면 오직 가산령(嘉山嶺)이 가장 높다. 그 재에는 효성(曉星)과 망해(望海)란 곳이 있는데,
모두 사절(使節)들이 지나는 곳이다.
안주(安州)가 또 졸졸 흐르는 강물에 의지하고 있다. 안주성에서 살수(薩水)를 내려다보면 위에 백상루(百祥樓)
가 있는데, 곧 수(隋) 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치다가 패한 곳이다. 이 강을 또 청천강(淸川江)이라고도 하며,
성 안에는 안흥관(安興館)이 있다.
군(郡)으로는 숙천(肅川)이 있고, 읍(邑)으로는 순안(順安)이 있는데, 지세는 모두 들판에 있지 않다.
누(樓)는 숙녕(肅寧) 숙녕관 앞에 누각이 있다 이고, 관(館)은 안정(安定) 관의 이름으로 순안현에 속해 있다.
인데 지대는 조금 널찍하고 조용한 편이다.
오직 저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만은 지대가 가장 평탄하고 넓기 때문에, 그 지세에 따라 이름을 평양(平壤)이
라 하였다. 여기에 나라가 생길 때부터 이미 물을 임해서 성을 높이 쌓았는데, 얼마를 지내다가 또 가까운 북쪽
산의 험한 곳으로 옮겼다. 평양성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자가 처음 봉해질 때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또 그것이 험한 곳에 의거하지 않은 것을 흠으로 여겨서, 다시 그 성 북쪽에 한 성을 쌓았
는데, 동으로는 대동강(大洞江)이 내려다보이고, 북으로는 금수산(錦繡山)이 닿아 있다.
기자 이후로 전승하여 동한(東漢)에 이르러, 준(準)이란 사람이 연(燕) 나라 위만(衛滿)에게 쫓기어 마한 땅에
도읍을 옮겼으나, 지금은 자취조차 없어졌다.
이 밖의 여러 고을은 토질이 대부분 마르고 붉으며, 간간이 누런 흙이 있으나 또한 모래와 돌이 섞여 있다.
오직 이 성 가까이에 있는 흙만이 차져서 밭도랑이나 봇도랑의 형상이 남아 있다.
옛 성 안에 기자가 구획한 정전제(井田制)의 형상이 아직 남아 있으니, 곧은 길 같은 따위가 바로 이것이다.
벼나 삼이나 콩이나 보리를 심기에 적당하며, 그 풀은 무성하고 그 나무는 키가 크다.
이때에 와서야 중국에서처럼 높은 버드나무가 있게 되었다. 나뭇잎에는 우는 매미가 있고, 풀은 빼어나고 무성
하였다. 그리고 금수봉(錦繡峯)은 멀리 우뚝한 용산(龍山)에 접해 있고 용산은 구룡산(九龍山)이라고도 하고,
또 노양산(魯陽山)이라고도 하는데, 금수산 북쪽 20리에 있고, 산꼭대기에는 99개의 못이 있다.
부벽루(浮碧樓)는 아래로 도도(滔滔)히 흐르는 패수(浿水)를 굽어본다.
대동강이 바로 옛날 패수이다. 옛날의 기린(麒麟)은 아직도 석굴(石窟)에 남아 있고, 기린석은 부벽루 밑에 있는
데, 대대로 전하기를, "동명왕(東明王)이 기린마(麒麟馬)를 타고 이 굴로 들어갔다가, 땅 속에서 조천석(朝天石 :
하늘에 조회하는 돌) 위로 나와 승천(昇天)하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말 발자국이 남아 있다 한다.
타양(駝羊)은 반쯤 산허리에 버려져 있다. 옛날의 돌말과 구리 낙타가 모두 가시덤불 속에 있다.
궁전은 옛터가 남아 있고, 소나무는 위태로운 다리에 비스듬히 누워 있으니, 석양에 지는 해처럼 그대로 머물지
않는 지난 일을 슬퍼한다.
공묘(孔廟)의 뜰에 세워져 있는 형상은 모두 면류관 쓰고 의상을 갖추고 있고, 또한 청금(靑衿 선비들)도 길가에
성대하게 늘어서 있다. 부드러운 비단으로 만든 건과 띠는 나부끼고 날리며, 가죽으로 만든 신은 밑이 뾰족하면
서 판판하다. 문후할 때는 몸을 굽히고 나아갈 때는 종종 걸음으로 걷는다. 생도들은 모두 부드러운 비단 건을
썼고, 푸른 비단 적삼에 하나의 띠를 늘어뜨렸다. 발에는 코가 뾰족하고 밑이 판판한 가죽신을 신었는데,
모두 버선을 신었다.
동쪽에는 기자의 사당이 있어 나무 신주를 예설(禮設)하고, 거기에 쓰기를, "조선 후대 시조"라 하였다.
이는 단군을 높이어 그 나라를 개창(開倉)한 이라 하였으니, 기자가 그 대를 잇고 왕통(王統)을 전했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단군은 요(堯) 임금 갑진년에 여기에 나라를 세웠다가, 뒤에 구월산(九月山)으로 들어갔는데, 그 후의 일은 알 수
없다. 나라 사람들이 대대로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는 것은 그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지금 그의 사당은 기자 사당의 동쪽에 있는데, 나무 신주를 세우고 쓰기를, "조선 시조 단군 신위(神位)"라 하였다.
기자묘는 토산(?山)에 있으니, 유성(維城)의 서북방이다. 기자묘는 성의 서북쪽 토산에 있는데, 성에서 반 리도
되지 않으며 산세는 매우 높다.
두 개의 석상(石像)이 있어서, 마치 당 나라의 건거(巾?)와 같은데, 알록달록한 이끼가 끼어 있어, 마치 무늬가
있는 비단옷을 입은 것과 같다. 좌우에는 젖을 먹이면서 꿇어앉은 석양(石羊)이 벌여 있고, 비갈(碑碣)은 머리를
든 귀부(龜趺)에 실려 있다. 둥근 정자를 지어 절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어지럽게 돌을 포개 놓아 뜰의 한계를
정하였다. 이것은 그 근본에 보답하려는 뜻은 융성하지만, 물건을 갖추는 예의로서는 소홀한 것이다.
대동강을 건너면 산이 차츰차츰 높아져서, 생양(生陽) 관 이름 에 비로소 다다르게 되지만, 길은 더욱 꼬불꼬불
하다. 영루(營壘)가 소나무 그늘 사이에 남아 있어서, 마치 겹겹이 있는 옛 무덤과 같다.
서로 전하기를, "당 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의 진터다." 하는데, 크고 작은 것이 뒤섞여 있어서 전혀 질서가 없는
것이 너무도 기주(冀州)와 유사한 점이 있다.
내가 처음 기주에 갔을 때에 의심하여 어떤 늙은 군인에게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 이것이 당 나라 왕이 고구
려를 칠 때의 양식이라고 속인 무더기"라 하였다.
즉 그 밑에는 모두 흙을 쌓고 그 위에는 쌀을 덮어서, 마치 단도제(檀道濟)의 양사창주(量沙唱籌) 따위와 같은
것이다. 생각건대 이 곳의 영루도 그런 따위일 것이다.
바다 위에서 파도를 바라보니, 넓은 도량의 크고 넓음을 알겠다. 땅은 황해도에 속했는데,
북쪽은 모두 산이고, 그 남쪽은 바다에 접하였다.
성불(成佛) 고개 이름 의 웅장한 관문에는 버려진 돌들이 층층이 쌓였는데, 북으로는 자비(慈悲) 고개 이름 에
접하고, 남으로는 발해(勃海)에 다다랐다. 앞서 원(元) 나라에서는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는데,
국조(國朝 명(明))에 이르러서는 바깥이 없음을 보였다. 성불재는 북으로는 뒤에 산이 있고,
남으로는 뒤에 바다가 있다.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면 구름 속에 높이 솟아 있다.
한 관문 어귀에 옛날 쳤던 추성(?城)의 방석(方石) 두어 무더기가 있었다. 한 역관에게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그 북쪽은 곧 자비령으로 원 나라 때에는 여기를 그어 경계로 삼았으니, 이것이 곧 그 관문의 어귀이다." 한다.
만일 그렇다면 압록강에서 동으로 평양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내지(內地)가 될 것이니,
조선이 통치하는 8도에서 이미 그 한 도 남짓을 버린 것이 된다.
우리 성조(聖祖 : 명태조)는 그것을 모두 경계로 삼았으니, 공손히 예를 행하는 것이 옛날에 비해서 차이를 두는
것이 당연하다. 그 고개는 황주에 속해 있다.
연진(延津) 강 이름ㆍ검수(檢水) 관의 이름ㆍ봉산(鳳山) 주(州) 이름ㆍ용천(龍川) 관의 이름의 환취(環聚)는 으리
으리하고 화려하며, 환취는 누대 이름으로 봉산주 관내(館內)에 있다.
총수(?秀)에는 구름이 연해 있다. 산이 벽처럼 서서 물가에 임해 있는데, 높이 솟고 빼어나고 아름답다.
옛 이름은 총수(總秀)였는데, 내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일찍이 기문을 지은 일이 있다.
보산(寶山)에는 서기(瑞氣)가 날아오르고 금암(金巖)에는 고인 물이 뚫는다. 보산과 금암은 모두 관의 이름으로
평산부(平山府)에 속해 있다. 성거(聖居)ㆍ송악(松嶽)ㆍ천마(天磨)ㆍ박연(朴淵)은 성거ㆍ송악ㆍ천마는 모두 산
의 이름이고, 박연은 폭포 이름이다.
송악이 그 진산이다. 성거와 천마는 동북쪽에서 뻗어나와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모두 푸른 하늘에까지
꽂혀 있고, 그 가운데 세 개의 봉우리는 마치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 같다.
그 중의 한 봉우리가 더욱 높고 좌우의 두 봉우리는 조금 물러앉아 낮은 편이니, 마치 시자(侍者)의 모양과
같은데, 항상 안개와 구름 속에 쌓여서,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내 일찍 시를 지은 일이 있다. 개성(開城)으로
돌아와 머무니 유도(留都)가 있는 곳이다.
위봉(威鳳) 문의 남은 터가 있어 북쪽 기슭에 버려져 있고, 위봉은 누대의 이름인데 왕건(王建)이 앞문이다.
반룡(蟠龍 청룡(靑龍))의 옛 언덕이 있어 동쪽의 밭두둑 길로 나온다. 동쪽에 능묘(陵墓)가 있으니 바로 지금
국왕 이씨(李氏)의 선대 무덤이다.
신물(神物)은 영추(靈湫)에 엎드려 있고 폭포는 긴 내를 걸려 있다. 산꼭대기에 용추 폭포가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왕씨가 여기에 도읍했을 때 가뭄을 만나 임금이 친히 거기에 가서 기도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어떤 도술을 부리는 자가 용을 쳤더니, 용이 물에서 나와 왕을 뵈었다. 왕이 지팡이로 용을 쳐서 비늘 몇 개를
떨어뜨렸는데, 지금도 그 비늘이 국고(國庫)에 수장되어 있다."고 하였다. 통역관 이의(李義)는 개성 사람으로
일찍이 내게 이 사실을 말하고, 또 왕에게 아뢰어 그 비늘을 꺼내어 내게 보여 주려 하였으나, 나는 쓸데없는 일
이라 여겨 드디어 그만두게 하였다. 여염집은 만 정(井)이나 되고 곡물은 백 전(廛)이 된다.
관청은 당속(堂屬)의 높낮이를 한정하고 묘학(廟學 개성의 성균관)에는 성현의 엄중한 소상(塑像)을 안치하였다.
지금의 군학(郡學)은 바로 왕건 때의 성균관으로, 성현을 모두 소상(塑像)으로 한 것은 평양과 같다.
그 망루(望樓)는 곧 왕씨 시대의 태평관(太平館)인데, 다른 관보다 유독 빼어나 웅장하기 때문이다.
미나리는 반수(泮水)에서 향기를 피우고 운초(芸草)는 묵은 책 속의 좀을 물리친다.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펄럭
이고 달 밝은 밤에 피리 소리 들린다. 그 생산물은 풍성하여 원래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도 밀집(密集)하여 서경(西京)이 견줄 바가 아니니, 이는 왕씨가 여기에서 왕천하한 것이 4백 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요(瑤 공양왕)가 혼미(昏迷)해서 비로소 나랏일을 이씨에게 임시로 맡기고 명목상 고려가 이곳을 통치한 것은
서너 개의 성(姓)을 바꾸었을 뿐이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얻자 다시 옛날로 돌아가기를 청하여 조선이라 이름
하였다.
본조 명 홍무(弘武) 25년에 고려 국왕 왕요(王瑤)가 혼미하여 사람을 많이 죽여서 민심을 잃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문하시랑 이씨인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국사를 임시로 맡기고, 그 나라의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조반
(趙?)을 보내와서 명령을 청하였다. 뒤에 우리 태조의 옛날 이름을 지금의 휘(諱)로 바꾸고, 또 국호(國號)의
개칭을 하니, 상(上 : 명제)이 이르기를, "동이(東夷)의 이름 중에는 오직 '조선'이 가장 좋고도 가장 오래된 것
이다." 하고 명하여, '조선'으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명을 받은 뒤에 드디어 지금의 한성부(漢城府)로 천도하였다.
이 때문에 개성을 유도(留都)라 한 것이다 한다. 임진(臨陣)을 건너고 임진은 강 이름으로 장단부(長湍府)에 속
해 있다. 파주(坡州)에 멈추어 멀리 한성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기운이 높이 오른다.
이에 벽제(碧蹄 관의 이름)를 지나고 홍제(弘濟) 관의 이름 에 오르면 여기가 왕경(王京)으로 동쪽에 우뚝 솟아
있으니, 높고 높은 삼각산(三角山)으로 자리를 정하였는데, 삼각산은 곧 왕경의 진산으로 산세가 가장 높은데
왕궁은 그 산허리에 있다.
그 산마루를 바라보매 여러 높은 봉우리들이 마치 톱니와 같다. 푸르고 푸른 소나무들로 뒤덮여 있다.
북으로는 천길이나 되는 형세가 연이어 있으니, 어찌 천 명의 군사만을 누를 뿐이랴? 서쪽으로 한 관문을 바라
보면 그 길은 한 기마(騎馬)만이 다닐 만하다.
홍제에서 동으로 반 리를 못 가서 자연적으로 된 한 관문이 있어서, 북으로는 삼각산에 접하고 남으로는 남산에
접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한 기마가 다닐 만하니, 그렇게 험할 수가 없다. 산이 성 밖을 둘어싸매 힘차게 나르는
봉황이 빛을 내뿜는 듯하고, 동으로 여러 산을 바라보면 그 형세가 모두 팔짱을 끼고 둘러 있는 듯하다.
모래가 소나무 뿌리에 쌓였으매 하얗게 쌓인 눈이 막 개인 듯하다.
삼각산에서 남산까지의 산빛이 모두 희고 희미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눈과 같다.
모화관(慕華館)은 서남쪽 산기슭에 세워졌고, 숭례문(崇禮門)은 바로 남쪽에 있다.
모화관은 성에서 8리에 있는데, 가운데는 전(殿)이고, 앞에는 문이다. 모든 명제의 조서가 이르면 왕이 나가 길
왼쪽에서 맞이한다. 숭례는 그 나라의 남문이다.
하나는 주원(周爰)의 황화(皇華)가 쉬는 것이고, 하나는 회동(會同)의 문궤(文軌)를 맞이하는 것이다.
조서가 오면 왕은 곤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교외에 나가 맞이하고, 신하는 예복(禮服)을 차려 입고 고니처럼
반듯이 서서 모신다.
거리는 모두 늙은이 어린이들로 가득 차고, 누대는 모두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찬다.
여염집들은 모두 반포하여 내려준 예제(禮制)처럼 채색 비단을 벌여 놓고 그림을 걸어 둔다.
음악 소리는 느린 듯하면서 빠르고, 차린 음식은 빛나고도 화려하다. 침단(沈檀)은 새벽해가 연기와 안개를 내
뿜는 듯하고, 도리(桃李)는 봄바람에 날리는 비단처럼 아름답다. 계속해 모여드는 거마(車馬) 소리가 울리고
끝없는 어룡(魚龍) 유희가 나온다.
이하는 모두 온갖 놀이를 베풀어 조서를 맞이하는 광경을 말한 것이다. 자라는 산을 이고 봉영(蓬瀛)의 바다해
를 싸고, 광화문 밖에 동서로 두 오산(鰲山)의 두 자리가 벌여 있는데, 고흥문(高興門) 등은 지극히 교묘하다.
원숭이는 아들을 안고 무산협(巫山峽)의 물을 마신다. 사람이 양 어깨에 춤추는 두 명의 동자를 세운다.
곤두박질을 하매 상국사(相國寺)의 곰은 셀 것도 없고, 긴 바람에 우니 어찌 소금 수레를 끄는 기마(驥馬)가 있
겠는가?. 많은 줄을 따라 내려가매 가볍기가 사뿐사뿐 걷는 미녀와 같고, 외나무다리를 밟으매 날뛰는 산귀신
인가 놀라며 본다.
사자와 코끼리를 장식하는 데에는 모두 벗긴 말가죽을 뒤집어씌웠고, 원추새와 난새의 춤을 추는 데에는 들쭉
날쭉한 꿩 꼬리를 모았도다.
이는 황해도나 서경(西京 평양)에서 추는 솔무(率舞)를 보아도 모두 이처럼 좋고 아름답지는 못하였다.
평양과 황주에서도 모두 오산붕(鰲山棚)을 만들어 놓고, 온갖 놀이를 베풀어 조서를 맞이하였지만, 유독 왕경이
가장 훌륭하였다. 태평관(太平館)이 있고, 숭례문 안에 있는 것으로 가운데는 전이고, 앞에는 전문(殿門)이 있으
며 뒤에는 누각이 있고 동서에 곁채가 있다. 그 까닭은 그곳에서 천사(天使)를 기다리기 위해서이다.
종과 북이 있는 누대가 있어 성 안의 네거리 종로 한복판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또한 길가에 높고 높도다. 잔치하고는 쉬고 즐기며 또 논다.
와탑(臥榻)에는 여덟 폭 병풍을 둘러치고 이 나라 풍속에 그림을 거는 일은 적은데, 모든 공관(公館)에는 네 벽
에 모두 병풍을 세웠다. 병풍에는 산ㆍ물ㆍ대ㆍ돌을 그리거나 혹 초서(草書)를 썼는데, 높이는 2ㆍ3척이다.
와탑도 그러하다.
성긴 주렴에는 반즘 걷힌 향구(香鉤)를 올려 둔다. 닭이 울면 문안오는 사자(使者)를 기다리고, 날마다 일찍 왕
은 그 나라의 재상 한 명과 승지 한 명을 보내어 문안한다.
말을 타고 나가면 길 곁의 망아지가 운다. 집어(緝御)가 있어서 심부름을 해 주고, 종이와 먹이 있어서 글을 주고
받는 데에 이바지한다. 이는 임금을 공경함에는 반드시 그 사자에게까지 미치므로 예의상 우대하지 않으면 안되
기 때문이다.
궁실(宮室)의 제도는 중화와 같아서 모두 단청을 칠하고 이 나라에는 은주(銀?)가 없기 때문에 단청으로 대신한다.
오동나무 기름도 없다. 기와를 얹는다. 문무(門?)와 편전(便殿)에는 모두 기와를 쓰는데, 중화의 관공서의 덮개와
같다. 문은 세 겹으로 하여 배라(杯螺)의 번쩍이는 빛을 죽이고 대궐의 앞 문은 광화, 둘째 문은 홍례, 셋째 문은
근정(勤政)으로, 쇠못과 고리만을 썼다. 전(殿) 중앙에는 푸른 유리가 있다. 오직 정전(正殿)만을 근정이라 하고
푸른 유리를 쓰고, 다른 곳에는 쓰지 않는다.
당사(堂?)는 일곱 계단의 차등이 엄격하고 계단은 모두 거칠게 간 석추(石?)로써 하였는데, 형세가 매우 높고 위
에는 자리로 덮었다. 비단창은 여덟 창문의 영롱함에 맞추었다. 전의 동서의 벽에는 모두 요격자(腰膈子)를 설치
해 놓고 조서를 받을 때에는 다 갈구리로 건다. 혹은 높은 산으로 한계지어 따로 이궁(離宮)을 짓기도 한다.
근정전과 인정전에는 모두 각각 문을 만들어 들어가니, 모두 산으로 막혀있기 때문이다.
대개 모두 편편한 곳을 가려서 터를 잡지 않는 것은 오직 그 기세가 웅장하게 보이고자 해서이다.
조서가 전(殿)의 뜰에 이르면 임금은 몸을 굽히고, 세자(世子)와 배신(陪臣)들은 좌우에서 부축하고, 헌가(軒架
경쇠를 다는 시렁)를 섬돌 위에 설치하고, 장막을 정우(庭宇)에 둘러친다. 전의 앞과 섬돌 위에는 모두 흰 베로
만든 장막을 둘러치니, 흰색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의장(儀仗)은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음악을 연주해서 축어
(祝?)로 마친다.
소호(召虎)가 절하는 것과 숭산(嵩山)에서 외친 세 번의 만세 소리와 같고,
봉왕춤과 사자춤으로 양반을 거느린다. 비록 음성은 알 수 없으나 그 예의는 또한 취할 것이 있다.
예는 한결같이 중화를 따르는데, 좋은 향을 세 번 피우고 머리를 세 번 두드리며, 만세를 부를 때에는 시위(侍衛)
들이 모두 팔짱 끼고 응한다. 궐정(闕廷)의 설치물도 거두고 하사품도 내려지면 동서로 갈라서서 손과 주인을
나눈다.
조서를 펴기를 마친 뒤에 인례(引禮)가 천사(天使)를 인도하여 중간에서 내려와 장막이 있는 동쪽으로 간다.
왕이 옷을 갈아입기를 기다려 천사를 인도하여 중간 계단에서 동으로 전에 오르고,
왕을 인도하여 역시 중간 계단에서 서쪽으로 전에 오르게 한다. 천사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고 왕은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자리에 앉는데, 왕의 자리는 부사(副使)의 자리와 마주 대하되 조금 아래로 반 자리
에 앉는다. 서로 절하고 예를 마친 뒤에는 드디어 통역을 빌어 말을 전한다.
즉 명 나라의 울타리가 되는 것은 진실로 소국(小國)으로서 마땅한데, 베풀어 주시는 큰 은혜를 욕되게 하였습
니다.
물방울과 먼지를 다 없애더라도 보답할 수 없으니, 비록 죽은들 어떻게 보답하리까? 오직 날마다 하늘이 보호
하신 주 나라 시를 노래하고, 멀리서 해가 떠오르는 듯한 황제의 도움을 빌 뿐입니다.
비로소 《시경》의 습상(?桑) 편의 희견(喜見)을 읊고, 《춘추》의 예서(禮序)를 강합니다. 생각하건대, 여러
나라가 모두 천자의 사자를 앞세우는데, 더구나 맑은 빛이 날로 과인에게 가까움이겠습니까? 근정전에 차례로
앉은 뒤에 인삼탕 한 잔씩을 다 마시고, 왕이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가 통역 장유성(張有誠)과 이승지(李承旨)
를 돌아보고, 말을 전하기를, "소국의 신하로서 명 나라 조정을 높여 섬기는 것이 예의에 마땅하온데,
칙서(勅書)를 내려 이처럼 나를 격려하시니, 큰 은혜를 갚기 어렵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대답하기를, "명 나라
는 조선이 본래부터 충성과 공경으로 지키기 때문에 그 은전(恩典)이 다른 나라와 같지 않습니다." 하니,
왕이 또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연이어 말하기를, "보답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말을 마친 뒤에 우리 두 사람을 보내어 홍례문으로 나가 가마에 타기를 기다려 물러갔다.
우리 두 사람은 태평관으로 돌아와 여러 배신들을 차례로 다 만났다. 왕이 따라와 잔치를 베풀려고 관문 밖에서
기다리며 동쪽을 향해 서서 들어오지 않았다.
집사(執事)가 나에게 알리자, 우리 둘이 나가 맞이하여 읍하고 사양하면서 들어가, 뜰에 이르러 서로 읍하고
차례로 앉아 술잔을 들어 주고받았다. 술잔을 마시려 하자, 임금이 턱으로 두 통역을 시켜 말하기를, "《시경》
에, '습지에 뽕나무가 아름다우니 그 잎이 무성하도다. 이미 군자를 만나보니 그 즐거움이 어떠한고.'라고 하였
소이다. 나는 두 분 대인(大人)을 뵈오매 마음속의 기쁨이 끝이 없소." 라고 하였다. 우리 두 사람도 그의 어짊
을 칭찬하고 또 지나온 길에서 후히 대접받은 것을 사례하였다. 장차 자리에 나아가려 할 때 다시 왕과 예로
사양하자, 왕이 이내 말하기를, "《춘추》의 예에 천자의 사자가 비록 미천하나 제후(諸侯)의 윗자리에 앉는다."
고 하였는데, 더구나 두 분의 대인은 바로 어떤 지위입니까? 모두 천자의 가까운 신하로서,
오늘 멀리 여기까지 오셨는데, 어찌 감히 사양하지 않겠소?" 하고, 다시 빙그레 웃으면서 두 통역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가까운 신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그는 바로 황제 앞에서 직접 거행하는 사람이다." 하였다.
우리도 웃으면서 통역에게 답하기를, "본래부터 왕이 글을 읽고 예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뵈오매
과연 그렇습니다." 하니, 왕이 또 공손히 팔짱을 끼고 "황공. 황공."이라고 잇달아 말하였다.
문무(門無))와 전정(殿庭)에는 모두 자리를 깔고, 손과 주인이 자리를 나누면 겹으로 더 깐다.
저 자리는, 등급을 밝히기 위해서 용이 나란히 누워 있지만 비늘은 없고, 이 자리는, 무늬를 짜는데 봉황이 쌍으
로 날면서 날개를 편다. 집사는 자리 세 벌을 말아 가지고 따라다니다가, 서로 절할 때에 각각 펴서 놓는다.
음식 그릇은 금ㆍ은ㆍ동ㆍ자(瓷)를 섞어 쓰고, 식품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골고루 많다.
주인이 손에게 잔을 드릴 때에는 한결같이 중화의 예를 따르므로, 손이 주인에게 잔을 드릴 때에도 중국 연회
(燕會)의 의식을 따른다.
밀이(密餌)를 벌여 놓을 때에는 그 수가 다섯 겹이고, 상에 차린 음식의 높이를 재면 크기가 한 자 둘레이다.
그릇마다 모두 은과 구리로 둘레를 만들어 푸른 구슬이 이어진 줄을 붙였고, 그 위에는 모두 비단을 잘라 꽃과
잎을 만들고 아롱진 봉황의 깃으로 춤추게 한다.
그 줄은 다섯 겹인데 모두 과실을 쓰지 않고, 꿀로 밀가루를 반죽하여 모나고 둥글게 만들어 떡과 유전(油煎)
을 높게 낮게 맞추어, 영롱하게 첩첩이 쌓아 올리니 높이와 크기가 한 자쯤 된다.
다시 흰 은이나 흰 구리로 여덟 모가 난 둘레를 두르고 푸른 구슬로 그물을 만들어 그 위를 덮는다.
그리고 푸른 비단을 잘라 네 개의 꽃잎을 만들고 또 붉은 비단을 잘라 네 개의 꽃잎을 만드는데, 꽃잎마다에는
흰 구리를 작은 못으로 엮으니 중국의 진주화(珍珠花)의 모양 같다.
그 꼭대기에 동선(銅線)으로 다섯 빛깔의 채색실을 얹어 나는 봉이나 공작이나 혹은 나는 신선을 만들었는데,
꼬리는 치켜올리고 날개는 펴져 있으며 손님을 향해 모두 머리를 숙였다. 절조(折俎)를 보낼 때에 제거한다.
두변(豆?)은 보기에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앞의 것은 크고 뒤의 것은 작은 것으로 차례를 삼고, 진열(陳列)하
는 것은 향배(向背)를 적당히 하기 위하여 겉은 높고 안은 낮은 것으로 차별을 삼는다.
그 상은 일(一) 자 모양으로 가로 진열하니 상마다 모두 그렇다. 쌀가루를 섞어 끓인 국과 안주를 섞고 이것
또한 중화의 쌀떡과 여뀌꽃 따위를 만든다.
장조림과 젓갈을 섞으며, 술은 멥쌀로 빚는데, 수수는 쓰지 않는다.
비록 청주종사(靑州從事)로도 거의 그 우열을 다툴 수 없고, 빛과 향기가 잔에 넘치면 평원독우(平原督郵)도
감히 멀리서 그 울타리나마 바라볼 수 없다. 술맛이 뛰어나니 산동(山東)의 추로백(秋露白)도 빛깔과 향기가
같다. 일 자로 벌여 놓고 중간에는 비단으로 덮는다.
이(二) 자로 가로 벌여 놓은 상에서 복판의 한 상에만 붉은 비단으로 덮고, 그 위에 기름 종이를 깔고서 거기
에 그릇을 벌여 놓는다. 좌우의 세 자리에는 모두 희뢰(?牢)를 진열하고, 가까이 한 의자에 앉는데 착석하기를
기다려서야, 왕이 직접 들고 온다.
처음 자리에 들어 설 때에, 갖다 놓은 의자가 상에서 세 자쯤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몰랐더니,
왕이 직접그 한 의자를 들고 오는 것을 보고서야, 그것은 자신이 공경하는 뜻을 펴려고 하여 그렇게 하는 것임
을 알았다.
상에 가득한 희생을 자를 때에는 신하가 반드시 친히 잡는다. 희생에는 소ㆍ양ㆍ돼지ㆍ거위의 네 종류가 있는
데 모두 익힌 것이다. 최후의 한 상에는 큰 만두를 놓고 그 위에는 은으로 덮개를 만들어 덮었다.
한 대신이 칼을 잡고 그 희생을 자른 뒤에는 큰 만두 껍질을 가르는데, 그 속에는 만두가 호두처럼 큰 것이 들었
는데, 맛이 그럴 듯하다.
특별히 죽였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희생은 모두 그 심장을 올리고, 살지고 맛난 것을 취하여 세 개의 창자에
창자기름을 채웠다. 양 등살 위에 세 개의 양 창자를 꿰고, 그 속에는 구운 고기와 여러 가지 과실을 넣는다.
속헌(續獻)하는 데에는 동성(同姓)으로서 군(君)에 봉해진 이가 먼저 한다.
동종(同宗)의 현자는 모두 군에 봉해지는데, 모두 왕신(王臣)이라 일컫는다.
여러 신하들 중에서 무공(武功)이 있는 이도 군에 봉하고, 문직(文職)으로서 공이 있는 이를 봉하는 것도 그와
같다.
다음에는 정부의 육조(六曹)에까지 미친다. 잔을 드릴 때에는 왕이 반드시 그 자리에 나와 드리는 사람이 오르
고 내릴 때마다 언제나 따른다. 탕(湯)을 한 번 올릴 때에는 반드시 다섯 사발로 한다.
왕이 직접 드리지 않는다. 오직 이것만은 중국과 다르다. 아무리 그릇을 포개더라도 그 높이는 한 자를 넘지
않는다.
그 밥상이 매우 작은데 굽고 지진 음식이 너무 많으므로 여러 개를 포개게 된다. 그 상에 다 들어가지 못하면
그것을 걷어 깔아 놓은 자리에 둔다. 안주와 탕을 두 번 올릴 때, 상 위에 들어갈 자리가 없으면 그것을 걷어 자
리 사이의 맨땅에 놓는다. 이것은 그 나라 풍속이다.
고기를 배불리 먹고 나면 채소를 올리는데 시종관들이 모두 안팎에 반듯이 서서 모신다. 집사(執事)들은 모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린다. 내시와 통역관들은 그 주위에 엎드리고 있다. 내시들은 모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검은 각띠를 띠고 엎드려서 왕이 앉은 의자의 발을 받들고 있으며, 통사와 승지는 좌우에 엎드려서 그 분부하
는 말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의 뒤에도 통사가 엎드려 있고, 내시만이 없다.
대개 세 번의 잔치는 태평관에서 하는데, 그 예는 모두 같고 의식을 감한 것이 없다.
한 번의 잔치는 인정전(仁政殿)에서 하는데, 정성이 더욱 지극하고 힘이 더욱 드는 것이다. 태평관에서의 처음
잔치는 말에서 내리는 잔치이고, 두 번째 잔치는 정연(正燕)이며, 세 번째 잔치는 말에 오르는 잔치이고,
인정전의 잔치는 사연(私燕)이라 한다.
처음에는 이 예가 마땅치 못한 것 같기에 의논하여 고치려 하였는데, 이르러서야 태평관과 모화관의 제도가
모두 전(殿)으로 그것은 오로지 천조(天詔)를 맞이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며, 일이 없을 때에는 왕이 거기에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매양 거기 와서 잔치를 베풀 때에는 왕이 반드시 먼저 관문 밖의 작은 전에서 기다리고서 들어온다.
비로소 고칠 필요가 없는 줄을 알았다. 내가 일을 마치고 동쪽에서 돌아오려고 수레를 빨리 재촉할 때에,
왕이 먼저 모화관에 나와 잔치를 베풀고 기다리라고 하는데 그 말이 더욱 친절하여 싫증을 내지 않고,
예는 더욱 성의 있어 게으르지 않았다.
천작(天爵)을 닦는다는 말에 감사하기 그지없고, 좋은 말을 두 번이나 하는데 감사하였다.
귀중한 《맹자(孟子)》의 천작(天爵)이란 말을 외우기까지 하면서 우리들을 다 능하다고 하였으며,
또 안자(晏子)의 증언(贈言)을 인용하여 스스로 그 재주의 미치치 못함을 한하였다.
대개 그 뜻은 장차 우리들에게 시구(詩句)를 주려 한 것이었는데, 아깝게도 우리가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이날 왕은 우리 두 사람이 여러 번 선사품을 물리치자 통역을 통해 뜻을 말하기를. "우리 선대로부터 천사(天
使)가 멀리서 오면 언제나 약소한 물품으로나마 뜻을 표하였는데, 지금 두 분 대인이 그처럼 하는 것을 보니,
나는 황공하여 더 할 말이 없소. 다만 내가 듣건대, 옛날 사람의 말에, '인자(仁者)는 작별할 적에 말을 주고,
그렇지 못한 자는 금(金)을 준다.'고 하였소. 나는 지금 좋은 말을 해주지 못하고 한갓 약소한 물품만을 드리
니 마음속으로 매우 황공하오.
나는 마침 또, '옛날 사람은 천작을 닦으면 인작이 따른다.'는 맹자 말씀이 생각나오.
지금 두 분 대인은 진실로 천작을 닦은 분이니, 이번에 돌아가면 특별한 은혜를 입을 것이오. 이것이 곧 내가
말을 주는 것이오."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왕이 우리를 덕으로 사랑하는 데에 감사한다."라고 답하였다.
우리가 술을 다 마시지 않자 통역을 시켜 "이 한 잔을 다 드시오. 내일이면 천연(天淵)의 거리가 될 것이오."
라고 하였다. 통역은 그 천연을 '천원(天遠)'이라고 잘못 전하였다. 우리가 그 말을 알기 때문에 해석해 주니,
왕은 웃고 문을 나와 전송하면서 또 술을 내어 권하고 다시 '원별천리(遠別千里)'라고 말하였다.
통역은 또 '원별'을 '영결(永訣)'이라고 잘못 전하였다. 이는 장유성(張有誠)이 중국어는 잘하나 글을 많이 읽지
못하였고, 이승지는 글은 읽었지만 중국어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매양 그 말을 전할 때에 땀을 빼면서도
여전히 통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우스웠다.
이날 밤에는 벽제관에서 자면서, 허이조(許吏曹)의 왕이 시짓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 뜻을
깨달았다. 산천과 길은 한 달 동안이나 지났으나, 풍물(風物)과 인정(人情)은 5일 만에 안 것이므로,
비록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상당히 기억이 난다.
국학(國學) 성균관(成均館)은 뒤에는 산 앞에는 물이 있는데, 앞뒤에는 전당(殿堂)이고 좌우에는 뜰이 있다.
성전(聖殿)은 앞에 있고 명륜당(明倫堂)은 뒤에 있으며, 사학(四學)은 동서로 갈라져 있다.
관원으로는 대소사성(大小司成)이 있고 생도들은 상ㆍ하의 기재(寄齋)에 산다. 생원과 진사가 있는 곳을 상재
(上齋)라 하고, 승학(升學)들이 있는 곳을 하재(下齋)라 한다.
생원은 3년 동안 경전에 밝은 이로 뽑힌 사람이고, 진사는 시부(詩賦)로 뽑힌 사람이며, 승학은 민간의 뛰어난
사람들이니 기재(寄齋)라고도 한다.
서경(西京)에서도 견줄 수 없고, 개성에서도 짝할 수 없는 것은 제사에 소상(塑像)을 두어서 더럽히거나 어지
럽히지 않으며, 생도는 공부함으로써 친구가 된다. 기내(畿內)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가 높아 구름
을 막고 물이 푸르러 거울이 떠 있는 것 같다. 나루로는 양화도(楊花渡)가 있어서 물산이 번성한데 팔도(八道)
에서 운반된 곡식이 모여, 일국의 금령(襟領)이 된다.
가장 높은 정자에서 긴 물가를 굽어보면 백제의 옛 경계에 닿아 있다. 나는 일찍이 여기서 배를 띄우고 말을
타고서 하루 동안 논 적이 있는데 저들도 그 즐거운 일과 완상하는 마음이 백년 만에 있는 다행이라고 스스로
경하하였다. 트인 골목과 통한 거리는 쪽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깎아지른 듯한 처마에 우뚝히 빛나는 집이
다. 집집마다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으로 들창을 내어 더위를 피한다. 그 밖은 모두
관청에서 나누어 받으므로, 빈부에 따라 그 제도가 다르지 않고, 그 안은 자기들 마음대로 지을 수가 있다.
그 곧은 거리 양쪽에는 모두 관청으로서 동와(●瓦)를 얹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으니, 밖에서 보면
누가 가난하고 부자인 지 분별할 수가 없고, 안으로 들어가 그 방과 집을 보아야 비로소 같지 않다.
관청도 제도는 다르지 않다. 모두 당침(堂寢)이 있는데 모두 모서리를 꾸미고, 누각은 난간을 날개처럼 내고
들보에는 동자 기둥을 댔다.
관사(館舍)와 전사(傳舍)의 벽 사이에는 다 수묵(水墨)의 변변찮은 그림을 바르고, 문과 들창이 합한 곳에는
모두 혼돈(混沌)이 처음으로 나누어지는 그림을 그려 놓았다.
이것은 꼭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다만 내가 본 것을 근거로 하여 곧장 쓴 것이다. 가난한 집의 벽은 대로 얽되
새끼를 꼬아서 튼튼하게 하고, 그 위에는 띠풀로 지붕을 이었으며, 구멍이 있는 곳에는 진흙덩이로 막았다.
그 벽은 잡목 따위를 가져다 바로 세우고 엮지 않고 다만 새끼로 얽는다. 새끼로 얽은 곳은 마치 그물 눈과
같은데, 그 한 눈금마다 진흙덩이 한 개씩으로 틀어막았다.
서울의 작은 골목은 이와 같고, 길에서 본 것으로는 모두 완전히 진흙을 발랐다. 어떤 집은 가시나무 가지가
도리어 처마 끝에까지 나왔고, 어떤 집은 겨우 동그란 소반만하다.
이것을 봉황새에 비하면, 비록 천 길을 날지는 못하지만, 뱁새에게 비하면 한 나뭇가지에 편안함을 의탁할 만한
것과 같다. 부잣집은 그 기와가 모두 동(●)으로서 무서(?序)가 동서로 뻗은 것은 그 마룻대가 도리어 남북으로
솟아 있고, 모두 흙으로 벽을 바른 집으로 당침(堂寢)이 앞뒤에 있는 것은 그 등마루가 도리어 중간보다 낮다.
당침은 모두 한 칸인데 무서가 도리어 세 칸이다. 문은 모두 동서(東序)의 마룻대를 돌아 있기 때문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되 바로 걸어가야 당침으로 갈 수 있다.
그 문은 모두 남향이지만 가운데에서는 열리지 않고, 모두 동무(東?)의 마룻대로 나아가 남쪽을 향해 열리는 것
은 그 터가 매우 높아서 사다리가 있어야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서로 향한 것도 그와 같다. 지대는 모두 낮고 습한 것을 두려워해서 널빤지를 깔아서 습기를 막았으니, 만일
책상다리하고 앉으려면 모두 띠풀을 깔아야 한다. 그 풍속이 모두 땅에 자리를 깔고 앉는다. 사람들은 네모진
하나의 방석을 만들거나, 베나 비단으로 하나의 큰 베개를 만드는데, 그 속에 풀을 채워 앉는 사람의 안석으로
쓴다.
관부에서는 만화좌(滿花座)로 방석을 만드는데, 그 제도 역시 네모로 만들고 녹색 모시로 초침(草沈)을 만들어
다닐 때에는 사람이 그것을 지고 따른다. 알 수 없는 일은 집에서 돼지를 기르지 않고 채소밭에는 울타리를 치
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끄는 데에는 오직 소나 말 외에는 쓰는 것이 없고, 말을 부리는 사람은 많고 소를 부리는 사람은
적다. 목축에는 전혀 양을 볼 수 없다.
고기를 먹으려면 산이나 바다에 그물이나 통발을 쓰고, 나물을 먹으려면 강이나 바다에 나가 캔다.
평안도에서 황해도까지 오면서 본 것이 이러하였다. 촌늙은이 중에는 한 번도 돼지고기 맛을 모르다가 우연히
관청에서 베푸는 잔치에서 먹게 되면, 곧 꿈속에서 돼지가 채소밭을 망치게 되는 꿈을 꾸는 자도 있다.
관청에서라야 양이나 돼지를 두었다가 향음례(鄕飮禮) 때에 더러 쓰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산마루에 장사지내고, 귀한 사람이라야 교외 언덕에 묘자리를 잡는다.
평안도에서 황해도로 오면서 멀리 산꼭대기를 바라보면 성가퀴처럼 벌여 있는 것이 모두 무덤이었다.
귀한 사람은 지형을 선택하고 또 화표(華表)와 석양(石羊) 따위도 있다. 그러나 비를 세운 것은 볼 수 없었다.
이것들은 모두 특별한 지방의 이상한 풍속에서 나온 것이나, 굳이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논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총환(總環)을 드러내어 귀천을 분별한다. 그 나라에서는 머리를 싸매는 망건(網巾)은 모두 말총으로
만들었고, 환(環 : 관자(貫子))으로 등급을 정하였으니, 1품은 옥이고 2품은 금이며, 3품 이하는 은이고,
서인(庶人)은 뼈ㆍ각(角)ㆍ동(銅)ㆍ방(蚌) 따위로 만들었다.
아기의 어릴 때의 머리카락을 그대로 보존하여 먼저와 뒤의 구별이 없어서, 어떤 아이는 어릴 때에 머리카락이
벌써 어깨에 드리우며, 어떤 아이는 6ㆍ7세가 되면 뿔 모양으로 쌍 상투를 묶는다.
헤아려 보건대 태아 적 머리카락을 보존하려는 것은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모두 갓을 쓰기 전인 것이다. 백성들은 초모(草帽)를 쓰는데 턱에는 구슬을 드리우고, 정수리는
둥글거나 혹은 모나며 색깔은 모두 검다.
천한 사람은 네 잎의 푸른 적삼을 입고, 정수리에는 새 깃을 꽂는다. 보통 사람은 여러 겹의 삼베옷을 입고 걸을
때에는 긴 옷자락을 끈다.
시끄러움을 싫어할 때는 길에서 하루를 묵고, 충돌하는 것을 말리려면 뜰 끝에서 지팡이를 끈다.
천한 사람의 네 잎 적삼은 오직 평안도와 황해도의 두 도만이 이렇게 하였고 경기도는 그렇지 않다. 지팡이를
끄는 사람이란 모두 키 큰 사람을 뽑는 것이니, 큰 모자를 쓰고 누런 베옷을 입고, 둥근 깃에는 노끈을 달고 다
만 정수리에 새 깃을 꽂지 않았다.
신은 가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진흙 속을 다니더라도 상관이 없고, 버선은 바지에 한데 묶으므로 물을 건너더
라도 구애를 받지 않는다.
옷은 모두 흰색인데 굵은 베옷이 많고, 치마는 펄렁거리는데 주름도 성글며, 등에 짐을 지고서 구부리고 가는
것은 마치 거북이가 볕을 쬐는 것 같고, 그 풍속에 남자들은 모두 등에 짐을 졌다. 어른의 명이 있으면 구부리고
가는 것은 마치 오리가 뒤뚱뒤뚱 걷는 것과 같다.
그 풍속에 사람을 보면 구부리는 것으로 공경을 표하고, 어른이 부르면 구부리고 달려가서 대답한다.
가마를 멜 때에는 반드시 24명이 한 가마를 메는데, 가다가는 30리도 못 가서 또 백 사람이나 바꾼다.
이는 무거운 것은 모두 어깨로만 질 수 없으므로, 이렇게 모두 손으로 붙잡아 드는 것이 당연하다.
가마 한 채에 앞뒤에 전부 24명을 쓰고, 또 곁에서 붙드는 사람이 있다. 그 가마는 중국의 교의와 같은데, 네 발
이 짧고 좌우에 두 개의 긴 가마채를 끼운 것도 중국의 제도와 같다. 자리 밑에는 나무 하나를 가로질러 그 양쪽
끝이 나왔는데 길이는 6ㆍ7척이고, 앞뒤에 또 두 개의 나무를 가로질렀는데, 길이는 자리 밑의 가로지른 나무
와 같다. 들려고 할 때에는 붉은 베로 가로지른 나무 양쪽 끝에 불들어 매고, 사람은 다만 그 베를 어깨에 걸고
손으로 들고 간다. 또 가마 중간에는 뒤에서 앞까지 긴 베 두 폭을 바로 대어서 사람의 두 어깨에 나누어 걸어
서, 마치 말 멍에에 가로지른 나무 모양과 같은데, 이것은 한쪽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 나머지는 10여 명을 시켜 앞에서 끌게 한다. 여자들의 귀밑털은 귀를 덮어 귀고리가 보이지 않고, 머리에는
흰 권(圈)을 써서 바로 눈썹을 내리누른다. 개성부에서 왕경으로 오는 길가에서 이런 것을 보았다.
부유하고 귀한 여자는 검은 비단으로 얼굴을 가리고, 부유하고 귀한 집 부인들은 머리에 한 광(匡)을 썼는데 큰
모자와 같다. 앞 채양에 검은 비단을 드리워 얼굴을 가렸다. 비록 얼굴을 가렸지만 이것도 사람을 피하는 것이
다. 이것은 서울에서 보았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은 흰 치마가 장딴지를 가리지 못한다.
지위가 있고 존귀하여야 가마를 타고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고, 지위가 없으면 아무리 부자라도 말타는 것만을
허락한다. 이 두 글귀는 허 이조(許吏曹)가 써 준 《풍속첩[風俗帖]》에 나온다.
버선과 신은 베나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발을 묶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었다.
신은 보통 사람은 소 가죽이고, 귀한 사람은 사슴 가죽이며, 버선은 비단이 많다. 3ㆍ4명의 통사의 말이 모두
같았다.
옷은 베나 비단으로 만드는데, 소매는 넓으나 길지는 않다. 윗옷은 모두 무릎 밑에까지 내려가고 아랫도리 옷은
모두 마루에까지 닿는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볼 때에는 꿇어앉는 것을 예의로 삼고, 천한 사람이 일이 있
을 때에는 머리로 이는 것이 보통이다.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도 손으로 붙들지 않고, 열한 말의 쌀을 지고도 그 걸음은 빠르다.
이것은 내가 직접 본 것을 간단히 말한 것이고, 보지 못한 것은 자세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이른바 냇가에서 남자와 함께 목욕하고 역(驛)에서 심부름하는 자는 모두 과부라는 것은, 처음 전해 들을 때
에는 매우 놀라웠지만, 지금은 이미 고친 것을 알았으니, 어찌 이 또한 성스런 황제의 거룩한 교화에 젖은 것으
로 넓은 한수(漢水)를 뗏목으로 건널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전에는 모두 전하기를, '그 풍속에 과부들이 관역(館驛)에서 일을 한다' 하였다.
나는 그들의 추잡함을 매우 미워하였는데, 와서 보매, 와서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그 고을 아전들이고,
부인은 역 밖의 별실(別室)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서로 전하기를 '이 풍속은 경태(景泰) 연간에 그 국왕이 즉위한 이후에 변하였다.' 하니, 요동(遼東)의 부총병
(副摠兵) 한빈이 한 말이다.
냇가에서 남녀가 같이 목욕한다는 사실은 옛날 기록에 나오는데, 지금은 변하였다. 새로는 꿩ㆍ비둘기ㆍ참새ㆍ
메추라기가 많고, 짐승으로는 고라니ㆍ사슴ㆍ노루ㆍ포(?)가 많다. 포는 노루와 같은데 뿔이 하나이고, 그 고기
는 매우 맛나다. 산에서는 포가 나지 않는다.
해산물(海産物)로는 곤포ㆍ김ㆍ굴ㆍ조개이고, 곤포는 종려나무 잎과 같은데 녹색이다.
김은 자채(紫菜)와 같은데 크다. 생선으로는 금문(錦紋)ㆍ이항(飴項)ㆍ중순(重唇)ㆍ팔초(八稍)이다.
금문은 붕어와 비슷한데 몸이 둥글고, 이항은 피라미와 같은데 홀쭉한 것 밖에 볼 수 없다. 왕이 사람을 시켜
음식상을 차려 보내어, 중도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것들이 모두 거기 있었다.
중순은 중국의 눈이 붉은 고기와 같은데, 입술은 말코 같고 살은 매우 맛나며, 그 새끼는 조기 새끼 같은데 잘
고도 많다. 팔초는 곧 절강(浙江)의 망조(望潮)인데 맛은 그다지 좋지 못하고 길이는 4ㆍ5척이 된다.
잉어와 즉어(?魚)는 내와 못 어디서나 모두 잡을 수 있다. 청천(淸川)ㆍ대정(大定)ㆍ임진(臨陣)ㆍ한강의 여러
물에 다 있고, 즉어는 길이가 한자쯤 되는 것도 있다.
황새는 정원(庭院)에도 그 보금자리가 많이 보인다. 대합조개 같은 결명(決明)은 그 맛이 해산물에서 제일 맛
나고, 석결명(石決明)은 약에 넣는 것이다. 그 살이 밖으로는 껍질에 붙고 속은 돌에 붙었는데, 복어라고도
한다.
껍질은 바닷가의 구멍이나 바다 복판에 있다. 주먹 같은 자궐(紫蕨)은 그 맛이 산채(山菜) 중에서 제일 낫다.
고사리에는 푸른빛과 자줏빛 두 가지가 있는데, 중국에서 나는 것과 같다.
그 지방 사람들은 잘 캘 줄을 모른다. 대개 그것을 캘 때에는 반드시 송곳으로 땅을 파서 흙을 제거하고서 그 뿌
리 밑동을 잘라야 한다. 내가 허 이조에게 그 캐는 법을 가르쳐 주었더니, 매우 기뻐하였다.
시내나 육지에서 나는 기이한 물건에 있어서는 난초 향기를 피우는 것은 필관(筆管)ㆍ산장(酸漿)과, 필관은 싹
을 먹는데 맛이 부드럽고 달다. 그 잎은 알 수 없는데 혹은 황정(黃精) 싹이라 한다.
산장의 잎은 뾰족하고 줄기는 푸르거나 붉으며 맛은 달고 시다. 자근(紫芹)과 백고(白蒿)가 있다.
왕도와 개성 사람들 집의 작은 못에는 다 미나리를 심는다. 수료(水蓼)의 싹ㆍ당귀(當歸)의 싹ㆍ송부(松膚)의
떡ㆍ산삼(山蔘)의 떡은 소나무의 겉껍질은 벗겨내고, 그 희고 부드러운 속껍질을 벗겨 멥쌀을 섞어 찧어서 떡을
만든다. 산삼이란 약에 쓰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이는 손가락만한데 형상은 무와 같다.
요동사람들은 그것을 산무라 하고, 거기에 멥쌀을 섞어 찧고 구워서 떡을 만든다. 또 3월 3일에 그 보드라운 쑥
잎을 뜯어 멥쌀가루를 섞어 쪄서 떡을 만드니 그것을 쑥떡이라 한다. 그 멥쌀은 빛이 희고 맛이 향기롭다.
모두 상에 차릴 만하여 모두 술안주에 쓴다. 과실로는 배ㆍ밤ㆍ대추ㆍ감ㆍ개암ㆍ송화(松花)ㆍ살구ㆍ복숭아ㆍ
감자ㆍ귤ㆍ매실ㆍ오얏ㆍ석류ㆍ포도이고, 배ㆍ대추ㆍ개암이 가장 많아서 어디에나 있고, 감자와 귤은 전라도
에서 난다.
가죽으로는 범ㆍ표범ㆍ고라니ㆍ사슴ㆍ여우ㆍ담비ㆍ들고양이ㆍ돈피이니, 토인들은 담비를 돈피라 하고,
들고양이의 가죽은 알지 못한다.
그것들을 가지고 무늬 자리ㆍ겹갖옷ㆍ화살통ㆍ활집들을 만든다. 꽃으로는 장미ㆍ철쭉ㆍ작약ㆍ모란ㆍ차꽃ㆍ
정향(丁香)ㆍ작미(雀眉)ㆍ산반(山礬)이 있다. 2월이 한창인데 앵두꽃은 다 지고, 늦봄이 다 가지 않았는데도
오얏꽃이 모두 시들었다.
내가 3월 8일 그 나라에서 떠날 때에 당리화(棠梨花)가 거의 떨어졌는데, 또 며칠을 걸어 압록강을 지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막 피는 것을 보았다. 이는 그 나라가 동남쪽에 가까울수록 따뜻했기 때문이다.
풀은 대부분 무성하게 우거졌으며, 나무는 대부분 동글고 고불고불하다. 산에 모래와 돌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노송은 단단하기가 잣나무와 같은데, 사람들이 그것을 가져다 등불 기름을 만들려 하나 송진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소나무의 결이 가장 단단하고 누른 빛이 잣나무와 같으나 기름이 적다.
어디를 가나 있다. 그 향기로운 꽃은 한번 지나면 모두 따고, 맺은 열매는 2년 만에라야 먹는다.
소나무에는 두 종류가 있다.
열매를 맺는 것은 껍질이 그다지 거칠지 않고 가지와 잎은 위로 치솟았으며, 맺은 열매는 2년 만이라야 딸 수가
있다. 경기도에 가서야 있었다. 작은 것은 시내의 다리를 만들고, 큰 것은 묘당(廟堂)의 기둥이 된다.
대개 가는 길에 물이 있는 곳이 있으면 모두 소나무를 베어 다리를 놓고, 그 가지를 잘라서는 난간을 만들며 잎
을 가지고서는 좌우의 흙을 막는다.
보산관(寶山館)에 가까운 한 시내는 저탄(猪灘)이라 하는데, 넓이가 20여 길이나 되며 소나무로 다리를 놓았다.
들보나 마룻대를 만들려면 곧은 것을 얻기가 어렵고, 만일 다락 기둥으로 쓰려면 아래 위의 두 동강으로 하여야
한다. 이것은 그 종류가 같지 않으므로 그것을 씀에는 각각 알맞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금(金)에 있어서는 그 캐는 곳을 자세히는 모르나 가장 많은 것은 구리이다. 땅에서 캐는 구리가 가장
단단하고 또 빛이 붉다.
밥그릇과 수저는 다 이것으로 만드니, 즉 중국에서 이르는 고려동(高麗銅)이 그것이다. 다섯 가지 빛깔에 있어
서는 각각 그 쓰이는 바를 따르는데, 금하는 것은 붉은 빛이다. 왕이 입는 옷이 모두 붉기 때문에 그것을 금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맛에 있어서는 초와 장이 많이 쓰이고, 다섯 가지 소리에 있어서는 음운(音韻)을 잘 알지 못
한다.
그 나라의 소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글을 읽으면 평성(平聲)이 거성(去聲)과 같으니 이를테면 성(星)을 성
(聖)이라 하고, 연(煙)을 연(燕)이라 하는 따위와 같다. 일상어는 여진(女眞)과 비슷한 것이 많다.
심지어 한 글자를 서너 자로 부르는 것은 8로써 위(爲)ㆍ야(也)ㆍ득(得)ㆍ리(理)ㆍ불(不)로 부르는 따위와 같고,
한 글자를 두 자로 만들어 부르는 것은 더욱 많으니, 부(父)를 아필(阿必)이라 하고, 모(母)를 액파(額婆)라 하는
따위와 같다.
《지(志)》에 실린 것은 이리 꼬리로 만든 붓이고, 《일통지(一統志)》에, 생산되는 것에 이리 꼬리로 만든 붓은
그 대롱은 작기가 화살 같고, 수염 길이는 한 치 남짓하며 붓 끝이 자루에 들어 둥글다고 하였다. 물어보았더니,
그것은 누런 쥐의 털로 만든 것이고 이리 꼬리가 아니었다. 무인(武人)이 숭상하는 것은 벚나무 껍질로 만든 활
이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베는 삼으로 짜는데 모시로 이름 지은 것
은 잘못 전해들은 데서 나왔고, 종이는 닥나무로 만드는데 누에고치로 만든다고 하니, 인식하는 것은 도련(搗鍊)
한 것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모두 전하기를, "그 나라에서 나는 종이는 고치로 만든다." 하였는데, 지금 와서야 비로소 닥나무로 만드
는데, 그 만든 솜씨가 교묘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일찍이 불에다 시험해 보고 그런 줄을 알았다.
베의 정(精)하고 세밀하기가 고운 명주와 같고, 종이의 귀한 것은 통처럼 말 수 있는데, 기름을 먹이면 비도 막
을 수 있고, 그 두꺼운 종이는 어떤 것은 네 폭으로 한 장을 만들고, 어떤 것은 여덟 폭으로 한 장을 만드는데,
통틀어서 유석(油席)이라 한다. 자기네들도 중하게 안다. 폭을 잇대면 바람도 막을 수 있다.
가는 곳마다 모두 흰 베로 장막을 만들었는데, 육지로 다닐 때에는 말에 싣고 따른다.
그리고 이른바 남자의 머리에 쓰는 건은, 당 나라 제도와 같은데 지금은 옛날과 같지 않고, 아주 작은 과하마
(果下馬)도 키가 3척 되는 것이 없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르기를, "그 나라 사람들은 절풍건(折風巾)을 쓰는데, 남자의 건은 당나라의 것과
같다." 하였다. 지금 남자들은 모두 대모(大帽)를 쓰고, 오직 왕도에서 왕의 가마를 메는 자들만은 육각(六角)
으로 된 흰 비단 건을 쓴다.
육각에는 다 흰 솜공을 붙였고, 자색 비단으로 깃이 둥근 옷을 입었는데, 발에는 뾰족한 코의 가죽신을 신었으
니, 마치 당 나라 말을 탄 해관(奚官)을 그려 놓은 것과 같다.
생각건대, 그 때의 옷은 모두 그와 같았기 때문에 당 나라와 같다고 말한 것인 듯하다.
또 《일통지》에, "백제에서 과하마가 나는데 그 키는 석 자로써 과실나무 밑에서도 탈 수 있다." 하였다.
지금 백제의 국경은 바로 양화도(楊花渡)의 남쪽 언덕에 있었으니, 왕경에서 2ㆍ30리 밖에 안 된다. 사람들에
게 물었더니, "벌써부터 나지 않는다." 하였다.
다만 그 나라 길에서 보이는 짐 실은 말이 비록 석 자 이상이긴 하지만 중국 말에 비하면 조금 작다.
아마 그 종류일 것이지만 우선 기록하고 다음 날을 기다린다. 오직 오엽(五葉)의 인삼과 만화석(滿花席)이 있
어서 오엽의 인삼이란 즉 《본초(本草)》에서 말한 인삼이다. 만화석의 풀빛은 누르고 또 부드러워 아무리 접
어도 꺾어지지 않으니, 소주(蘇州)의 것에 비하면 훨씬 좋다.
해마다 중국에 조공으로 바치고 때때로 상국(上國)에게도 공물로 바친다.
1백 20년 이래로 중국에서 내려주신 물품의 자주하고 많은 것이 비록 성명(聖明)의 주신 바에서 나왔지만, 또
그 공물의 끊이지 않음에 말미암은 것이다.
아, 육의(六義) 중에 부(賦)처럼 오직 바로 진술함을 취한 것이나 겨우 달포를 돌아다니면서 어떻게 그 진상을
다 알았겠는가? 하물며 내가 말선(襪●)의 얕은 재주로 창해(滄海)의 가는 비늘과 다르지 않음에랴?
그러나 이제 붓끝의 조화(造化)를 잘 부려 육합(六合)의 동춘(同春)을 그려 보노니, 감히 보고 들은 것을 많이
속이지 않았다면 거의 자순(諮詢)에 부끄럽지 않을까 한다.
○ 상고하건대 동월의 주석에, "향시(鄕試)는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에 있고,
회시와 전시(殿試)는 진(辰)ㆍ술(戌)ㆍ축(丑)ㆍ미(未)년에 있다."고 한 것이나 "개성 동쪽에 능묘가 있으니 바로
지금 국왕 이씨의 선영이다." 한 따위는 모두 진실이 아닌데, 아마 통역(通譯)이 말을 잘못 전한 것인 듯하다.
성곽 경성(京城) : 우리 태조 5년에 돌로 쌓았고 세종 4년에 다시 수리하였다. 둘레는 9천 9백 75보(步)요, 높이
는 40척 2촌이다. 여덟 개의 문을 세웠으니 정남에 있는 것은 숭례(崇禮), 정북은 숙청(肅淸), 정동은 흥인(興仁),
정서는 돈의(敦義), 동북은 혜화(惠化), 나라를 세운 처음에는 이 문을 홍화(弘化)라 하였는데, 성종 계묘년에
창경궁(昌慶宮)의 동문을 역시 홍화라 하여, 지금 왕 6년에 두 문의 이름이 혼동되기 때문에 혜화라고 고쳤다.
서북은 창의(彰義), 동남은 광희(光熙), 서남은 소덕(昭德)이다.
궁성(宮城) : 경성 복판에 있다. 둘레는 1천 8백 13이고, 높이는 21척 1촌이다. 네 개의 문을 세웠으니 남쪽의 문
을 광화(光化)라 하는데, 옛 이름은 정문(正門)이었다. 북쪽의 문은 신무(神武), 동쪽의 문은 건춘(建春), 서쪽의
문은 영추(迎秋)라 한다.
○ 정도전(鄭道傳)이 오문(午門)을 정문이라 이름하고, 아울러 그 이름을 지은 뜻을 써서 올리며 이르기를,
"천자와 제후(諸侯)의 형세는 비록 다르나, 남쪽을 향하여 정치를 하는 것은 모두 올바름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니, 그것은 그 이치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고전(古典)을 참고해 보면 천자의 문을 단문(端門)이라 하였는데, 그 단(端)은 곧 바르다는 뜻입니다.
지금 오문을 정문이라 하는 것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을 지나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살핀 뒤에
나오므로 참소하는 말이 행해지지 못하고, 거짓으로 속이는 것도 발을 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올리는 의견과 사뢰는 복명(復命)이 반드시 이 문을 지나 들어오는 것이니, 이미 자세히 살핀 뒤에 들어오므로
바르지 못하고 편벽되는 말이 저절로 나아올 수 없고 그 공적은 상고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 문을 닫아서는 괴이한 말을 하는 부정한 백성을 거절하고, 이 문을 열어서는 사방의 어진 이를 오게 할 것이
니, 이것이 모두 정(正)의 큰 것입니다." 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이 광화문의 종명(鐘銘)을 짓고, 그 서문에, "지금 임금 12년 겨울 10월 7일에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종을 만들어 궁궐문에 달았으니, 그것은 옛날 제도를 따른 것입니다.
거기에 공덕을 새기고 또 여러 신하들의 조회(朝會)의 시간을 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살피건대,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공훈과 덕이 이미 높았으므로 인심이 날로 따랐
습니다. 그러자 거짓 참소가 들끓기 시작하여 그 화는 거의 불측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막 제릉(齊陵) 곁의 여막에 계시다가 급변을 듣고 와서, 그 정세에 응해 제어한 뒤에 드디어
공훈이 있는 친척들과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추대하여 큰 기업을 세웠습니다.
그 뒤에 간사한 신하들이 다시 난리를 꾸밀 때에, 우리 전하는 곧 그것을 평정하고 종사(宗社)를 안정시켰습니
다. 신이 생각건대,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경하였으니 그 덕이 그보다 훌륭할 수가 없고, 나라를 세우고
사직(社稷)을 정하였으니 그 공이 그보다 클 수가 없으니, 진실로 종과 가마솥에 새겨 만세에 전하는 것이 당연
합니다. 즉위하신 뒤로는 뜻을 이어받아 수성(守成)하여 하늘을 공경하며 대국을 섬기어 두 번이나 황제의 명을
받들어 선대의 공덕을 빛나게 하였으며, 학문을 계승하고 넓히는 데에 극진히 하여 다스린 교화가 융성한 데에
이르렀습니다. 나아가서는 상례(喪禮)와 제사에 대한 정성과,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기르는 인(仁)과, 기강
(紀綱)을 세우는 넓은 규모와 큰 계략은 실로 모든 왕의 위에 뛰어났습니다. 지금 또 특별히 명하시어 종을 달아
새벽과 밤의 한계를 엄하게 하시니, 그것은 스스로 힘써 쉬지 않고 모든 정사를 부지런히 하여 만세의 태평의 터
를 닦으려는 것이니 진실로 지극합니다. 끼쳐 주신 은택이 길이 전해짐과 국가의 복조가 오래감은 마땅히 이 종
과 함께 영원함이 의심할 바 없습니다.
아, 훌륭하여라. 또 그 계책을 펴고 힘을 바쳐서 공훈을 세운 데에 참여한 사람들도 다 후면에 새겨 영원히 전할
까 합니다. 신 계량은 삼가 손을 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짓습니다." 하였다.
그 명에, "크고 아름다워라. 성조(聖祖)께서 동토(東土)에 나셨도다. 하늘의 큰 명을 받아 비로소 큰 기업을 열었
도다. 옛날 고려 말기에 정사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이반(離叛)하자, 하늘이 우리의 덕 있는 이를 돌보사 사람들
의 마음이 돌아갈 곳이 있게 되었다.
그때에 음흉하고 간사한 자들이 그 무리들을 미혹시키어 우리를 해칠 꾀를 매우 급히 하여, 그 화가 아침 저녁에
절박하였다. 효성스럽도다. 거룩한 아들이여! 여막으로부터 달려왔네. 신령스런 기틀을 한번 결정하자 진실로
어려운 일이 해결됨이 마치 저 해가 높이 떠올라 큰 빛을 뚜렷이 내는 것 같았네. 또 나쁜 싹이 틈을 타서 위태롭
게 하려 하자, 하늘이 태조를 돌보시어 그 후사를 번창하게 하시려고 우리 왕의 손을 빌려 더러운 무리들을 쓰러
뜨렸다. 여러 어진 이들이 계획에 맞추어 돕고 도와 인륜이 바르게 되고 종묘와 사직이 영구하게 되었네.
높은 공을 두 번이나 세운 이는 실로 오직 우리 임금뿐이라네. 공이 높아도 높은 체하지 않고 덕이 꽉 찼는데도
있는 체하지 않네. 하늘의 거울이 매우 밝아서 거듭 보호하여 주셨네. 황제의 명령이 거듭 내리매 때맞추어 총애
를 받들고 금보(金寶 명에서 내린 금인(金印))가 빛나매 그 크기가 말만큼이나 하였네. 황제의 사랑의 빈번함이
전대(前代)에 짝이 없어, 우리가 도읍으로 돌아와서 선대의 업적을 이어받았네.
정성스러워라. 그 효성이여! 처음부터 끝까지 어김이 없었고, 기강이 바로 서매 온갖 제도가 빛났다. 새벽과 밤을
엄하게 하려고 여기에 종을 다는 것이니, 모든 관리들은 그 직분에 힘써 감히 조금도 허물을 짓지 말라.
영원히 이어 나갈 종묘 사직은 땅과 하늘처럼 오래고 영원하리라. 신은 절하고 명을 지어서 무궁한 세대에 전합
니다." 하였다.
궁궐 경복궁(景福宮) : 태조 3년에 세우다. 정도전에게 명하여 그 이름을 짓도록 하였으니, 그 글에 살피건대,
궁궐은 임금이 정사를 보는 곳이고,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곳이며, 신민들이 모두 나아가는 곳이다.
그러므로 그 제도를 웅장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이고,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보고 느끼게 하여야 한다.
한당(漢唐) 이래로 궁전의 이름이 이어지기도 하고 고쳐지기도 하였지만, 존엄함을 보이고 보고서 느끼게 한 데
에 있어서는 그 뜻이 같았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 만에 도읍을 한양에 정하시고, 먼저 종묘를 세우고 다음에 궁실을 지었다. 그 이듬해
10월 을미일에 친히 곤면(袞冕)을 입으시고, 선왕(先王)과 선후(先后)를 새 사당에서 제사지낸 뒤에 여러 신하
들과 새 궁전에서 잔치를 베푸셨으니, 그것은 신(神)의 은혜를 넓혀서 후일의 복을 넉넉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술잔이 세 번 돌자, 신 도전에게 명하시기를, "지금 도읍을 정하고 종묘에 제사드렸고 새 궁전이 이루어졌으므로,
즐거이 여러 신하들과 여기에서 잔치하는 것이다. 그대는 빨리 궁전의 이름을 지어 나라와 함께 끝없이 그 경사
를 같이하게 하라." 하였다.
신이 명을 받은 뒤에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가 영원히 큰
복을 크게 하리라.'는 주아(周雅)를 외고, 청컨대, 새 궁궐 이름을 경복(景福)이라 하소서. 장차 전하와 자손들이
만년의 태평의 업을 누리시고 사방의 신민들도 영원히 보고 느끼는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춘추》에, '백성들의 힘을 소중히 여기어 토목공사를 삼가라.' 하였으니 어찌 임금이 한갓 백성을
수고롭게 함으로써 자신을 받들게 해서야 되겠나이까? 큰 집에 편안히 계실 때에는 빈한한 선비를 덮어 줄 것을
생각하고, 시원한 바람이 전각(殿閣)에 불 때에는 맑은 그늘을 나누어 줄 것을 생각하셔야 거의 떠받드는 만민
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근정전(勤政殿) :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正殿)으로, 남쪽에는 근정문, 또 그 남쪽에는 홍례문,
동쪽에는 일화문(日華門), 서쪽에는 월화문(月華門)이 있다.
홍례문 안에는 개울이 있는데, 다리 이름은 금천(錦川)이고, 동서에 수각(水閣)이 있다.
○ 정도전의 글에, "천하의 일은 부지런히 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폐해지게 되는 것이 필연의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크나큰 정사이겠습니까? 《서경》에, '걱정이 없을 때에 경계하여 법도
를 잃지 말라.' 하였고, 또 '안일과 욕심으로 제후들을 가르치지 마시어 삼가고 두려워하소서.
하루 이틀 사이에도 기미가 만 가지나 됩니다. 모든 관직을 폐하지 마소서. 하늘의 할 일을 사람이 대신한 것입
니다.' 하였으니, 이것은 순(舜) 임금과 우(禹) 임금이 부지런히 한 바입니다.
또 《서경에》,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뜰 때와 해가 기울 때에 이르도록 한가히 밥 먹을 겨를도 없으시어,
만민을 모두 화합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문왕(文王)이 부지런히 한 바이니, 임금이 부지런히 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마음과 몸이 오랫동안 편안하면 교만과 방탕이 생기기 쉬운 것입니다.
또 어떤 아첨하는 사람이 따라서 유혹하기를, '천하와 국가 때문에 내 정력을 피로하게 하여 내 수명이 줄어들게
해서는 안된다.' 하며, 또 '이미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데, 어째서 함부로 혼자 스스로를 낮추고 굽히어 괴롭게
하겠는가?' 하면서, 이에 혹은 여자와 음악, 사냥과 놀이, 진기한 놀이개와 토목(土木) 등 모든 주색(酒色)에 빠
지는 일을 가지고 유혹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임금은, '이것이 바로 나를 매우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자신도 모르게 태만하고 음탕함에 빠져 들어갑니다.
한당(漢唐)의 임금들이 다 삼대(三代)의 임금만 못한 까닭이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어찌 하루
인들 부지런히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한갓 임금이 부지런히 해야 하는 것만을 알고, 부지런히 해야
하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히 하는 것이 번잡하고 까다로운 데로 흘러 보잘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 선비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보고, 낮에는 찾아가 물으며, 저녁에는 명령을 내고,
밤에는 몸을 편안히 하는 것이 임금이 부지런히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찾는 데에 부지런히 하고 어진 이에게 맡기는 것을 편안히 여기라.' 하였으니, 청컨대,
신은 이것으로써 드립니다." 하였다.
사정전(思政殿) : 근정전 북쪽에 있다.
○ 정도전의 글에,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습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만 사람 중에는 지혜롭고 어리석은 이와 어질고
어질지 않는 이가 섞여 있고, 만 가지 일에는 옳고 그름과 이롭고 해로움이 얽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깊
이 생각하고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어떻게 일의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을 분별하여 처리할 수 있으며,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을 분별해서 쓰고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옛날부터 임금이 누군들 존귀함을 좋아하고 위태
함을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나쁜 사람과 친하게 지내어 계획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화를 당하고 실패하게 되는
것은 진실로 생각하지 않은 때문입니다.
《시경》에, '어찌 너를 생각하지 않으리요마는 집이 멀구나.' 하였는데, 공자(孔子)가 그 시를 해석하기를, '
생각하지 않아서이지 무엇이 멀겠는가?' 하였고, 《서경》에서는, '생각[思]함은 지혜롭고[睿] 지혜로움은 성
스러움을 만든다.' 하였으니, 생각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전(殿)은 아침마다 여기에서 일을 보아 모든 정무가 복잡하게 되면, 모두 전하께 아뢰어 조칙(詔勅)을 내려서
지휘하게 될 것이니, 더욱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신이 청컨대, 그 이름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소서."
하였다.
강녕전(康寧殿) : 사정전 북쪽에 있다.
○ 정도전의 글에, "신이 상고해보니, <홍범(洪範)>의 아홉 번째는 다섯 가지 복으로, 그 중에 셋째는 강녕(康寧)
이라 하였습니다. 대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큰 표준을 세우면 강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다섯 가지 복 중에 하나로 한가운데에 있는 강녕을 들어서 그 나머지를 모두 포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이 모두 보는 곳에서도 억지로 노력해서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한가로이 혼자 있을 때에는 그 안일한 데에 빠지기 쉬워 경계하는 마음이 매양 게으르게 되는 것입니
다. 그래서 마음이 바루어지지 못하고 덕이 닦여지지 못하여, 큰 표준이 서지 못해서 다섯 가지 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무공(衛武公)이 스스로를 경계한 시에, '네가 군자(君子)를 벗함을 보건대, 네 얼굴을 환하게 하고 유순히
하여 어떤 잘못이 있지 않은가 하는구나. 네가 집에 있음을 보건대, 구석진 방에 혼자 있을 때에도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 하였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삼감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나이가 90이 넘도록 큰 표준을 세워서
다섯 가지 복을 누림은 밝은 징험이 이러하니, 그 덕을 닦는 데에 힘쓰는 것은 편안히 혼자 있는 곳에서 시작
해야 할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는 무공의 시를 본받으시어 안일함을 경계하고, 경외심을 보존하여, 큰 표준이
되는 복을 누리소서. 그렇게 되면 성자(聖子)와 신손(神孫)이 대대로 이어받아 만세에 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침(燕寢)을 일컬어 '강녕'이라 하나이다." 하였다.
연생전(延生殿)ㆍ경성전(慶成殿) : 정도전의 글에, "천지는 만물에 대해서 봄에는 나게 하고, 가을에는 성숙하게
하며, 성인은 만백성에 대하여 인(仁)으로써 나게 하고, 의(義)로써 절제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늘을 대신해
서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니, 그 정령(政令)과 시행하는 것은 한결같이 천지의 운행(運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동쪽의 작은 침전(寢殿)을 연생(延生)이라 하고, 서쪽의 작은 침전을 경성(慶成)이라 한 것은 전하가 천지의
생성(生成)을 본받아 그 정령을 밝힘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였다.
교태전(交泰殿) : 강녕전 북쪽에 있다.
함원전(含元殿) : 강녕전의 서북쪽에 있다.
양심당(養心堂) : 강녕전의 서북쪽에 있다.
비현각(丕縣閣) : 사정전 동편에 있다.
인지당(麟趾堂)ㆍ자미당(紫薇堂)ㆍ청연루(淸?樓) : 모두 교태전 동쪽에 있다.
융문루(隆文樓)ㆍ융무루(隆武樓) : 근정전의 동각(東閣)의 누(樓)를 융문이라 하고, 서각의 누를 융무라 한다.
○ 정도전의 글에,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고 무(武)로써 어지러움을 평정시키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마치 사람의 팔 중에 어느 하나도 없앨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대개 예악문물(禮樂文物)이 찬란
하여 볼 만하고 융병무비(戎兵武備)가 정연히 다 갖추어져, 사람을 쓰는 데에 있어서 문장을 잘 짓고 도덕이
있는 선비와 과감하고 용력이 있는 사람을 안팎에 벌려 놓는 것은 모두 융문과 융무의 지극한 것이니,
전하께서 문과 무를 아울러 써서 장구한 다스림에 이르름을 드러나게 함입니다." 하였다.
경회루(慶會樓) : 사정전 서쪽에 있다. 누(樓) 둘레에 못을 만들었는데, 못이 깊고도 넓다. 연꽃을 심었으며,
그 못 속에 두 개의 섬이 있다.
○ 하륜(河崙)의 기문(記文)에, "전하의 13년 봄 2월에, 경복궁 제거사(提擧司)가 '그 후전(後殿)의 서쪽 누각이
기울어져 위험하다.'고 의정부에 보고하여 아뢰니, 전하께서 놀라 탄식하기를, '경복궁은 나의 선고(先考)께서
처음 창업하실 때에 세운 것인데, 지금 벌써 그렇게 되었는가?' 하고, 드디어 거둥하여 보시고,
이르시기를, '누각이 기울어진 것은 지대가 습하여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조 판서 신 자청(子靑) 등에게 명하시기를, '농사철이 다가오니, 마땅히 일없이 노는 사람들을 부역시
켜 빨리 수리하라.' 하셨습니다.
자청 등이 땅을 측량하여 약간 서쪽으로 옮기고, 그 터에 제도를 조금 넓혀 새롭게 만들고, 또 그 지대가 습한 것
을 염려하여 누각 둘레에 못을 만들었습니다. 공사를 마치자, 다시 거둥하시어 그 누에 올라 말씀하시기를,
'나는 옛모습 그대로 수리하고자 하였을 뿐인데, 옛날의 제도보다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셨습니다.
자청 등이 엎드려 대답하기를, '신등은 후일에 또 기울어져 위태로울까 염려하여 이렇게 하였나이다.' 하였습니
다. 이에 종친(宗親)ㆍ공신(功臣)ㆍ원로(元老)들을 불러모아 함께 즐기고, 누의 이름을 '경회'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내 신 하륜에게 명하여 기문을 쓰라 하셨는데, 신은 감히 문장이 졸렬하다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습니
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공자가 애공(哀公)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임금이 정사하는 것은 인재를 얻는 데에 달려 있다.' 하였습니다.
임금의 정사는 인재를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인재를 얻은 뒤에라야 '경회(慶會)'라 할 수 있는 것입
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태조 강헌대왕은 성문신무(聖文神武)의 덕으로써 한 나라를 잘 다스려서 편안하게
하시자, 천자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내리므로 드디어 화산(華山)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마침내 궁실(宮室)을
세우고, 그 전(殿)을 '근정(勤政)'이라 이름짓고, 또 그것으로 문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음이 지극하십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그분의 덕을 잘 본받고 그분의 큰 기업을 계승하여 대국을 섬기기를 더욱 정성스럽게 하시
자, 천자가 고명(誥命)을 내리시고, 정치 교화가 아름답고 밝아져서 경내(境內)가 더욱 편안해졌습니다.
지금 한 누를 수리하면서도 농사철이 가까운 것을 염려하셔서 일없이 노는 사람들을 부역시키도록 하시어,
며칠이 되지 않아서 준공되자 경회라고 이름하셨습니다. 대개 조용히 혼자 계시는 여가에 도덕이 있고, 다스리
는 법을 아는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여 면회하시고, 그들의 계책을 살피어 받아들이며 도의(道義)를 강론하여
정치하는 근원을 바르게 하시니, 더욱 이로써 전하께서 참으로 정사를 부지런히 하는 근본을 아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논하건대, '경회'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건(乾)의 구오(九五)가
그 큰 덕으로서 구이(九二)의 큰 덕을 만남이 이로와서 뜻이 같고 기운이 합하여 그 도를 행하게 될 것 같으면,
여러 어진 이들이 함께 나아와서 국가가 밝고 창성해질 것이니, 이른바 '구름이 용을 따르고 바람이 범을 따른다.'
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덕으로써 하지 않으면 간사한 무리들이 함께 나아와서 국가가 어두워질 것이고, 가끔 덕으로써 나
오는 이를 쓰더라도 그 재주를 다쓰지 못하고 간사한 무리들과 섞이게 되면 역시 어두운 상태로 같이 돌아가고
야 말 것입니다.
옛일을 상고해 보면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무(文武)가 다스릴 때에 고요(皐陶)ㆍ기(夔)ㆍ익직
(益稷)ㆍ이윤(伊尹)ㆍ부열(傅說)ㆍ여상(呂商)ㆍ주공(周公)ㆍ소공(召公)의 보좌가 있었으니, 이야말로 참으로
'경회'라 할 수 있고, 한고조(漢高祖) 때의 소조(蕭曹)와, 당태종(唐太宗) 때의 방위(房魏)와, 송조(宋祖) 때의
조보(趙普)도 경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덕에 순수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삼대(三代)와 견줄 수 있겠습니까?
한 나라 무제(武帝)의 공손홍(公孫弘)과 송 나라 신종(神宗) 때의 왕안석(王安石) 같은 이도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을 꾸며 명예를 낚았다는 비방과 큰 간사함은 충성과 비슷하다는 탄핵도 면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경회이겠습니까? 또 당 나라 현종(玄宗) 때의 송경(宋璟)ㆍ장구령(張九齡)과 송 나라 진종(眞宗) 때의 구준(寇準
)도 서로 만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임보(李林甫)가 대신하고 왕흠약(王欽若)이 섞이매 경위(涇渭)의
분별과 훈유(薰?)의 구별도 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경회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본다면 임금과 신하
의 경회는 옛날부터 실로 그리 많이 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천년 만에 한 번 만난다면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습니까? 우리 태조께서 이미 근정(勤政)으로 나라를 소유
하는 근본으로 삼아 다스렸고, 전하는 또 경회를 근정의 근본으로 삼아 힘쓰시니, 창업의 아름다움과,
계승의 훌륭함이 아, 성하기도 합니다.
능히 삼대(三代)의 경회를 따라 삼대의 치적(治績)을 이루어 영원한 세대에 규모를 물려주고, 끝없이 큰 복을 누
릴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저 산악(山岳)의 기이하고 빼어남과 동산과 연못의 그윽하고 깊음과 얼음과
눈이 자리에서 나고 강과 호수가 난간과 섬돌에 닿았으며, 소나무와 잣나무는 우거지고 꽃과 풀은 무성하며,
바람과 연기와 구름과 달이며, 아침저녁의 흐리고 개이는 경치가 모두 관람(觀覽)하는 사이에 있는 것을 감히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다만 누를 다시 짓는 것이 나라를 다스림과 비슷함이 있으니, 기울어진 것은 바르게 하고 위태로운 것은 편안하
게 하는 것은 선조의 업을 보전함이고, 흙을 쌓되 튼튼히 하고 땅을 깊이 파서 습기를 없애는 것은 큰 기업을 튼
튼히 하는 것이고, 들보와 마룻대와 기둥과 주춧돌을 웅장하게 함은 무거운 것을 지탱하는 것은 약해서는 안되
기 때문이고, 대공과 지도리와 문설주를 모두 갖춤은 작은 재목이 큰 소임을 맡을 수 없기 때문이고,
시원스레 추년 끝이 트이게 함은 사방에서 보고 들어 총명하게 하려는 것이고, 높은 뜰에 사닥다리가 엄한 것은
등급의 차별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반드시 두려운 것은 경외심을 보존하려는 것이고, 멀리 보아 빠트리지 않는
것은 포용함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제비들이 와서 서로 하례함은 인민들이 기뻐함이고, 파리가 붙지 않음은 간사하고 참소하는 무리들이 물러감이
고, 그림이 사치스럽지 않음은 제도와 문물이 중도를 얻음이고, 때를 맞추어 여기서 노는 것은 문무(文武)의 늦추
었다 당겼다 함이 알맞은 것이니, 진실로 오르고 내릴 때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정치를 행하면 이 누의 유익함이
진실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감히 이것으로 아울러 기록하나이다.
○ 윤회(尹淮)의 시에, "화산(華山) 남쪽 한수(漢水) 머리에 범이 걸터앉고 용이 서리어 하늘이 구역 지었네.
성신(聖神)이 갑자기 일어나 신도(神都)를 정하매 구서(龜筮)가 함께 따라 사람 꾀에 합하도다.
묘사(廟社)를 먼저 짓고 다음에 궁실(宮室)을 짓는데 침전(寢殿) 서쪽 모퉁이에 층루를 경영한다. 조회를 마치고
조용히 혼자 올라가는 것은 수고와 편안함을 절제하려 함이지 구경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 땅이 습하여 터가 단
단하지 않으며 세월이 오래되어 기울어져서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우리 임금 그 말을 듣고 당을 지으려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수리하라 했다.
옛것을 철폐하고 서쪽으로 옮겨서 높은 터를 다지고 밑으로 맑은 못을 파서 사방을 둘러쌌다. 왕이 빨리 하지 말
라 해도 백성들이 다투어 와서 넓은 궁실이 얼마 안되어 하늘의 두우성(斗牛星)에 닿았네. 헌영은 시원하고 계단
은 높아서 멀리 바라봄에 빠트리지 않고 다 보이네. 준공을 아뢰매 새로 '경회'라는 이름을 내리시고 세자는 편액
(扁額)을 쓰매 은구(銀鉤)를 가로질러 놓았네. 굽어보매 남강이 천 길이나 깊은데 꿈틀거리는 용이 일어나 구름
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돌아보매 북악(北岳)이 만 길이나 높은데 누워 있던 범이 휘파람 불자 바람이 우수수 부
네. 하늘은 나직하고 해는 누에 걸려 있고 바람은 훈훈한데 자욱한 서기(瑞氣)가 일어난다.
빛나면서도 사치하지 않고 검소하면서도 비루하지 않으니 진실로 군자가 여기에서 쉬리로다. 거룩하신 임금님이
정남을 향하시매 좌우에는 공후(公候)가 질서정연히 늘어섰다.
임금님은 기쁘구나. 보필하신 신하들이 일어나서 잘한다 못한다고 문답함이 얼마나 좋은가.
염매(鹽梅)로 계옥(啓沃)하여 내를 배로 건너는데 같은 소리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 서로 찾네. 때로는 악공(樂工
)에게 명하여 녹명(鹿鳴)을 노래하니 술잔은 굽었고 맛난 술은 부드럽다. 비파를 타고 피리를 불고 훈지(壎?)를
연주하니 치소각소(徵招角招)에 대한 생각이 그립다. 임금과 신하가 즐기는 데에는 예의(禮義)가 있음이 좋으니
끊임없는 많은 말이 모두 큰 계책일세. 신하들은 덕에 취해 머리를 조아려 절하면서 천보(天保)에 이어서 천추
(千秋)를 기원하네.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남은 고금에 드무니, 큰 고기가 골짜기에 놓여짐이 어찌
여기에 비하랴?
미미한 이 신하가 다행히 태평 시대에 났으매 눈을 들어 우러러 더위잡고 길이 머뭇거린다.
원컨대, 높은 데 있을수록 더욱 위태함을 생각하여 영원히 만백성으로 하여금 고루 편히 쉬게 하소서." 하였다.
흠경각(欽敬閣) : 강녕전 서쪽에 있다.
○ 김돈(金墩)의 기문(記文)에, "만일 제왕(帝王)이 정사를 펴고 일을 이루려면 반드시 먼저 역법(曆法)을 밝혀
철을 알려 주어야 한다. 철을 알려주는 요긴한 방법은 실로 천문의 기상을 관찰하여야 하니, 이것이 기형(璣衡)
과 의표(儀表)를 설치한 까닭이다. 그러나 고찰하고 시험하는 방법은 지극히 정밀하고 세밀하니, 한 가지 기구
나 형상으로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상전하가 그 해당 관청에 명하여 온갖 상의(象儀)를 만들었
으니, 대간의(大簡儀)ㆍ소간의(小簡儀)와 혼의(渾儀)ㆍ혼상(渾象)ㆍ앙부일구(仰釜日晷)ㆍ일성정시규표(日星
定時圭表)ㆍ금루(禁漏) 따위의 기구는 모두 지극히 정밀하고 교묘하여 옛날 것보다 아주 월등하다.
그런데도 오히려 제도가 미진할까 염려하시고, 또 모든 기구가 후원(後苑)에 설치되어 있어서 때때로 살피기가
어렵자, 마침내 천추전(千秋殿) 서쪽 뜰에다 한 간의 조그만 전각(殿閣)을 세우고, 종이를 발라 산을 만드니 높
이가 7척쯤 되었다. 그것을 그 전각 안에 두고 그 안에는 옥루(玉漏)의 기륜(機輪)을 설치하고, 물로 그것을 쳐
서 돌게 하고 금으로 해를 만드니 크기가 탄환만하였다.
다섯 가지 빛깔의 구름이 그것을 에워싸고 그 산허리 위로 도는데, 하루에 한 바퀴를 돌되 낮에는 산 밖에 나타
나고 밤에는 산 속으로 빠진다. 비스듬한 형세는 하늘의 운행을 본떠서 북극(北極)과 멀고 가까움과 나고 드는
분수(分數)를 각각 절기(節氣)를 따라 하늘의 해와 합하게 하였다.
그 해 밑에는 옥녀(玉女) 네 사람이 손에 금방울을 들고서, 구름을 타고 사방에 서 있다. 인(寅)ㆍ묘(卯)ㆍ진(辰)
시의 처음에는 정 동쪽에 있는 사람이 매양 방울을 흔들고,
사(巳)ㆍ오(午)ㆍ미(未)시의 처음에는 정 남쪽에 있는 사람이 방울을 흔드는데, 서쪽과 북쪽도 다 그러하다.
그 밑에는 네 신(神 청룡(靑龍)ㆍ주작(朱雀)ㆍ백호(白虎)ㆍ현무(玄武))이 각각 자기의 방위에 서서 모두 산을
향해 있다. 인시(寅時)가 되면 청룡이 북쪽으로 향하고 묘시가 되면 동쪽으로 향하며, 진시가 되면 남쪽으로 향
하고, 사시가 되면 도로 서쪽으로 향하는데, 주작이 다시 동쪽으로 향하여 차례로 그 방위로 향하는 것은 앞의
것과 같다.
산의 남쪽 기슭에 높은 대(臺)가 있고, 사신(司辰) 한 사람은 붉은 공복(公服)을 입고 산을 등지고 서있으며,
무사(武士) 세 사람은 다 갑옷과 투구를 갖추었는데, 한 사람은 종 방망이를 들고서 서쪽을 향해 동쪽에 서 있고,
한 사람은 북채를 들고서 동쪽을 향해 서쪽에 서 있는데 북쪽에 가까우며, 한 사람은 징채를 들고서 역시 동쪽
을 향해 서쪽에 서 있는데 남쪽에 가깝다. 시간이 될 때마다 사신(司辰)이 종인(鍾人)을 돌아보면 종인도 사신을
돌아보면서 종을 치고, 경(更)마다 고인(鼓人)은 북을 치며, 점(點)마다 징인(鉦人)은 징을 치는데, 그들이 서로
돌아보는 것도 그와 같으며, 경(更)ㆍ점(點)ㆍ징(鉦)ㆍ북의 수는 모두 항상 같은 법칙이다.
또 그 밑의 평지 위에는 열두 명의 신(神)이 각기 그 위치에 엎드려 있고, 신 뒤에는 각각 구멍이 있는데 항상 닫
혀 있다. 자시(子時)가 되면 쥐 뒤의 구멍이 저절로 열리고, 옥녀(玉女)가 시패(時牌)를 들고 나오면 쥐가 그 앞
에서 일어나며, 자시가 끝나면 옥녀는 도로 들어가고 그 구멍은 저절로 닫혀지며 쥐는 다시 엎드린다.
축시가 되면 소 뒤의 구멍이 저절로 열리고 옥녀가 나오면 소도 일어나는데, 열두 시(時)에 모두 그렇다.
오위(牛位)의 앞에 또 대(臺)가 있고 대 위에는 의기(?器)가 있으며 의기 북쪽에는 관인(官人)이 있어 금병을 들
고서 물을 붓는데, 누수(漏水)의 남은 물을 계속 흘려 끊어지지 않는다.
의기가 비면 기울고 알맞으면 바르며 가득 차면 엎어지니, 모두 옛날의 제도와 같다. 또 산 동쪽에는 봄 석 달의
경치를 만들고, 남쪽에는 여름 석 달의 경치이고, 가을과 겨울도 그러하다.
빈풍(?風)의 그림에 따라 나무에다 사람 짐승 초목의 형상을 새기고, 절후(節候)를 따라 나열하여 놓아 <7월>
한 편의 일이 모두 다 갖추어져 있다.
각(閣)의 이름을 '흠경(欽敬)'이라 한 것은 <요전(堯典)>의 공경히 하늘을 따라서, 공경히 백성에게 농사철을
알려준다."는 뜻을 따온 것입니다.
대개 당우(唐虞) 시대로부터 천문이나 기상을 관측하는 기구가 그 시대에 따라 각각 제도가 있었다.
당송(唐宋) 이후로 그 법이 점점 갖추어졌으니, 이를테면 당 나라의 황도유의(黃道遊儀) ㆍ 수운혼천(水運渾天)
과 송 나라의 부루(浮漏) ㆍ 표영(表影) ㆍ 혼천의상(渾天儀象)에서 원 나라의 앙의(仰儀)와 간의(簡儀)까지를
모두 정묘하다고 일컬었다. 그러나 대개 각각 한 시대의 제도가 되었으므로 모두를 상고할 수는 없으나,
그 운용하는 기틀은 사람의 힘을 많이 빌렸다.
지금은 하늘의 해의 도수와 구루(晷漏)의 시각은 저 4신과 12신과 고인ㆍ종인ㆍ사신(司辰)ㆍ옥녀와 더불어 온
갖 기관이 차례차례로 함께 만들어졌으되,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저절로 가고 저절로 치는 것이 마치 귀신이
그렇게 시키는 것과 같아서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괴상히 여기면서도 그 까닭을 헤아리지 못하는데,
위로는 하늘의 운행과 조금도 틀리지 않으니, 그 만든 법이 참으로 교묘하다 할 만하다.
또 누수(漏水)의 남은 물로 의기(?器)를 만들어 천도(天道)의 찼다 비었다 하는 이치를 관찰하고, 산의 사방에
빈풍(?風)을 나열하여 백성의 농사짓기 어려움을 드러냈으니, 이것은 또 전대(前代)에 없던 아름다운 뜻이다.
이것을 항상 좌우에 두어 매양 마음에 경계하고, 또한 부지런히 정사를 해야 하는 뜻을 붙이니, 어찌 다만 성탕
(成湯)의 목욕하는 반(盤)과 무왕(武王)의 호유(戶?)의 명(銘)일 뿐이겠는가?
그 하늘을 본받고 시절을 따르는 흠경(欽敬)의 뜻이 지극하고 극진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소중히 여기는
어질고 후덕한 덕이 마땅히 주 나라와 함께 아름다워 무궁토록 전해질 것입니다.
각(閣)이 이미 이루어지매 신에게 명하여 그 일을 기록하라 하시므로 삼가 대강을 서술하여 절하고 머리를 조아
리며 올리나이다." 하였다.
보루각(報漏閣) : 경회루 남쪽에 있다.
○ 김돈(金墩)의 기문(記文)에, "임금님께서 옛 누기(漏器)는 그다지 정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누기를 다시 만들
라고 명하였다. 파수호(播水壺)는 서쪽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는 수수호(受水壺) 두 개가 있는데, 물을 갈 때
에 쓰는 것이며, 길이는 11척 2촌이고 원의 직경은 1척 8촌이며, 두 개의 화살은 길이가 10척 2촌이다.
그 면(面)은 12시(時)로 나누고, 시(時)마다 8각(刻)으로 나누어 초정(初正)의 나머지를 백 각으로 나누고 한 각
을 12분(分)으로 만들었다.
야전(夜箭)은 옛날에는 21개였는데, 한갓 갈아 쓰기에 번거로워서 다시 수시력(授時曆)에 의거하여 밤과 낮에
오르고 내림으로 나누고, 대략 두 기운이 화살 한 개와 맞먹게 하였으니, 화살은 모두 13개이다.
간의와 대조해 보니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또 임금님은 때를 알리는 자가 착오를 면치 못함을 염려하여 호군(護
軍) 신 장영실(蔣英實)에게 명하여, 나무인형으로 된 사신(司辰)을 만들어 때에 따라 저절로 알리게 하고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그 제도는 먼저 전각 세 채를 짓고 동쪽 채 사이에 2층의 자리를 만들고, 윗 층에 세 신을 세워 하나는 시(時)를
맡아 종을 울리고, 하나는 경(更)을 맡아 북을 울리며, 하나는 점(點)을 맡아 징을 울린다.
가운데 층 아래에는 평륜(平輪)을 설치하고, 윤(輪)을 따라 12신을 배열하여 각각 쇠줄로 간(幹)을 삼아 오르내
리며 각각 시패(時牌)를 잡고 번갈아가며 때를 알린다.
그 기계 운전하는 법은 가운데 채 안에 다락을 만들고, 그 다락 위에는 파수호(播水壺)를 벌여 놓고, 밑에는 수수
호(受水壺)를 두었으며, 수수호 위에는 모가 난 나무를 꽂되 속도 비고 겉도 비었는데, 길이는 11척 4촌이고,
너비는 6촌이며, 두께는 8푼(分)이고, 깊이는 4촌이다.
빈 속에는 격(隔)이 있으며 면(面)에서 1촌쯤 들어가서 왼쪽에 동판(銅版)을 설치했는데, 길이는 화살과 같고 너
비는 2촌이다. 판면에 구멍 열두 개를 뚫어 조그만 구리 알을 받는데, 알의 크기는 탄환과 같으며, 구멍에는 모두
기계가 장치되어 열리고 닫히게 할 수 있는데, 12시를 맡았다.
오른쪽에도 동판을 설치했는데, 길이는 화살과 같고 너비는 2촌 5푼이며, 동판 면에는 구멍 25개를 뚫어 조그만
구리 알을 받는 것을 왼쪽 동판과 같게 하고, 화살은 12개를 썼는데, 모두 12개의 동판은 절기에 따라 갈아 쓴다.
경(更)과 점(點)을 주장하는 수수호에 화살을 띄워 화살 머리에 가로지른 쇠를 받쳐 놓은 것이 젓가락 같은데,
길이가 4촌 5푼이다. 호 앞에는 구덩이가 있고 구덩이 안에는 넓은 동판을 비스듬히 설치했는데, 그 머리는 모가
나면서 속이 빈 나무 밑에 이어져 있고 꼬리는 동쪽 채에 이어졌다.
자리 밑에는 네 개의 격을 용도상(甬道狀)처럼 설치하고, 격 위에는 큰 철환(鐵丸)을 설치했는데 크기는 달걀만
하며, 왼쪽의 열두 개는 시(時)를 맡고, 가운데 다섯 개는 경(更)과 경마다의 첫점을 맡았으며, 오른쪽 20개는 점
을 맡고 있다.
그 철환을 설치한 곳에는 모두 고리가 있어서 열고 닫힌다. 또 횡기(橫機)를 설치하였으니, 그 기계의 모양은 숟
가락 같은데, 그 한 끝은 굽어서 고리를 걸 수 있고 한 끝은 둥글어 철환을 받을 수 있으며, 가운데 허리에는 모두
둥근 축이 있어서 내리고 오르게 한다. 그 둥근 끝은 동통(銅筒)의 구멍에 당했는데, 동통은 두 개로서 비스듬히
격 위에 장치되어 있고, 왼쪽 것의 길이는 4척 5촌이고, 원의 직경은 1촌 5푼이며, 시(時)를 맡고 있다.
그 아래 면에는 12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오른쪽 것의 길이는 8척이고, 원의 직경은 왼쪽의 통과 같으며 경과
점을 맡고 있다.
하면에는 2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구멍에는 모두 기계가 있어서 처음으로 그 구멍이 모두 열려 동판의 조그만
알들이 밑으로 떨어져 기계에 닿으면, 기계는 저절로 그 구멍을 막아 다음 알이 굴러 지나가는 길을 만드는데,
차례차례로 모두 그렇게 된다.
동쪽 채 자리의 윗 층 밑의 왼쪽에는 두 개의 짧은 동통을 달아, 하나는 철환을 받고 하나는 그 안에 숟가락 같은
기계를 장치하여, 숟가락의 둥근 끝이 반쯤 나와 철환을 받게 되어 있다.
통 밑 오른쪽에는 둥근 기둥과 모난 기둥이 각각 두 개씩 있다. 둥근 기둥은 속이 비어 그 안에 기계를 장치하였
는데, 모양은 숟갈과 같은데 반은 나오고 반은 들어갔다. 왼쪽 기둥에는 다섯 개이고, 오른쪽 기둥에는 열 개이다.
모난 기둥에는 비스듬히 작은 통을 꿰어 기둥마다 네 개씩 설치했는데, 한 끝은 연잎 모양이고, 한 끝은 용의 입
모양인데, 연 잎은 철환을 받고 용의 입은 철환을 토한다. 용의 입과 연잎은 위 아래로 서로 마주보고, 그 위에는
따로 짧은 통 두 개가 달려 있어서, 하나는 경(更)의 철환을 받고 하나는 점(點)의 철환을 받는다.
오른쪽 모난 기둥에는 연잎 밑마다 각각 세로로 된 짧은 통 두 개와 가로로 된 짧은 통 하나씩을 붙여, 그 가로로
된 짧은 통 한 개는 왼쪽 모난 기둥의 연잎 밑에 이어져 있고, 왼쪽 둥근 기둥의 다섯 개 숟가락과 오른쪽 둥근
기둥의 다섯 개 숟가락은 그 둥근 끝이 각각 용의 입과 옆잎 사이에 당해 있고, 오른쪽 둥근 기둥의 다섯 개 숟가
락은 그 둥근 끝이 곧은 통 안에 반만 들어간다.
누수가 밑으로 수수호에 닿으면 떠 있던 화살이 점점 올라가, 때에 응하여 곧 왼쪽 동판의 구멍의 기계를 건드
리며, 작은 철환이 밑으로 떨어져 동통으로 굴러 들어가 구명에서 떨어지면서 그 기계를 건드리면 그 기계가
열리고, 큰 철환이 떨어져 자리 밑으로 굴러 들어가 달아 놓은 짧은 통에 떨어진다.
기계의 숟가락을 움직이면 기계의 한 끝이 통 안에서 올라와 시를 맡은 신(神)의 팔꿈치에 닿아 곧 종을 울리는
데, 경과 점도 그와 같다. 다만 경의 철환은 달아 놓은 짧은 통으로 들어가 떨어지면서 기계 숟가락을 건드리면
왼쪽 둥근 기둥 속으로부터 위로 올라가 경을 맡은 신(神)의 팔꿈치에 부딪쳐 북을 울리고는 점통으로 굴러 들
어가 거기서 다시 첫 점(點)의 기계를 건드리고, 오른쪽 기둥 속에서 올라와 점을 맡은 신을 부딪쳐 징을 울리고
는 연잎 밑의 곧은 작은 통에서 멎는데, 그것이 굴러 들어가는 곳에 기계를 장치하였다.
처음에 경의 철환의 길과 그것이 굴러 들어가는 길을 닫으면 그것이 들어갔던 길은 닫히고 경의 길이 열리는데,
나머지 경도 다 그와 같아서 오경(五更)이 끝남을 기다려서 빗장을 빼고 낸다.
경마다 두 점 이하의 철환이 아래에 달린 짧은 통에 닿아 연잎으로 굴러 들어가서, 그 점의 기계를 건드리고서
그치면 다음 점의 철환이 굴러서 또 그 점의 기계를 건드리고서 멈춘다. 그 철환을 멈추게 하는 통에는 구멍이
있어서 빗장을 걸고 닫게 하고, 다섯 개의 철환이 떨어지면서 가장 밑에 있는 기계를 움직이면 기계에 연결된
쇠줄이 차례로 모든 빗장이 빠져 먼저의 세 점의 철환과 한꺼번에 내려온다. 시를 맡은 큰 철환은 달아 놓은 짧
은 통에 굴러 떨어져 둥근 기둥에 붙은 통에 굴러 들어가 가로지른 나무의 북쪽 끝을 누른다.
나무 길이는 6척 6촌이고, 너비는 1촌 5푼이며, 두께는 1촌 7푼이다.
가로지른 나무 가운데에 즉 심을 맞추어 짧은 기둥을 세우고, 가로지른 나무를 끼우고 둥근 축으로 받아 아래위
로 내리고 오르게 한다. 가로지른 나무의 남쪽 끝에 손가락만한 둥근 나무를 세웠으니 길이는 2척 2촌인데, 때
를 알리는 신(神)의 발 밑에 해당한다. 발 끝에 조그만 윤축(輪軸)이 있어서, 큰 철환이 떨어지면서 그 북쪽 끝을
누르면 남쪽 끝이 치켜올라가 신(神)의 발을 쳐들어 자리 가운데층의 위로 오르게 한다.
가로지른 나무의 북쪽 끝에는 조그만 판자를 세워 열고 닫게 하였으며, 판자에는 쇠줄이 있어서 위로 시를 맡은
달린 통의 기계 숟가락에 이어져 있는데, 숟가락이 움직이면 판자가 열리어 앞의 철환을 나오게 한다. 가로지른
나무의 남쪽 끝이 낮아지면 시를 알리는 신은 바퀴의 면(面)으로 돌아오고, 다음 시를 맡은 신이 곧 대신 돌아
온다.
그 윤전(輪轉)의 제도는 바퀴 겉에 조그만 판자를 가로질러 놓았는데, 길이는 1척쯤 되고 그 중간은 4ㆍ5촌쯤
되며, 동판(銅板)을 그 위에 가로로 걸쳐 놓았는데 그 형세는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고, 한 끝에는 굴대를 장치
하여 열리고 닫히게 하였다.
시를 알리는 발은 처음에 동판 밑으로 반치쯤 들어가 있는데, 올리면 동판을 열고서 올라오고, 올라오면 도로
닫힌다. 시가 다 되어 바퀴 면으로 돌아오면 발 끝의 쇠바퀴는 순하게 동판을 굴러 내려가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 다음의 시를 맡은 신도 그와 같다. 모든 기계가 다 감추어져 있어 드러나지 않고, 보이는 것은 관(冠)
과 띠를 갖춘 나무로 만든 사람뿐이다. 이것이 그 대략이다." 하였다.
○ 김빈(金?)의 명(銘)과 그 서문에, "제왕의 정사는 때를 맞게 하고 날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상고하고 실험할 것은 의상(儀象)과 구루(晷漏)에 있다. 이는 의상이 아니면 천지의 운행을 살필 수 없고, 구루
가 아니면 낮과 밤의 한계를 잴 수가 없기 때문이며, 천년을 헤아림도 한 시각의 어긋나지 않는 데서 비롯하고,
모든 정무의 순조로운 것도 한 치의 세월도 허송하지 않는 데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대의 성왕(聖王)들이 하늘에 순응하여 정치를 하는 데에 모두 여기에 정성을 다하였다. 삼가 생각
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요(堯)의 공경히 따르던 것을 보존하며, 순(舜)의 선기(璿璣)와 옥형(玉衡)으로 살피
던 것을 본받아서, 해당 관청에 명하여 의상(儀象)을 만들어 천문과 기상을 관측하는 데에 도움을 받고,
다시 누기(漏器)를 새로 만들어 구각(晷刻)을 바르게 하였다.
이에 궐내의 서쪽에 전각 세 채를 세우고 호군 신 장영실에게 명하여 사신(司辰)하는 나무 사람과 3신(神)과 12
신을 만들어서, 계인(鷄人)의 직분을 대신하게 하였다. 동쪽 채 안에 자리 2층을 마련하고 3신을 윗층에 두고,
한 신 앞에는 종을 두어 그것을 쳐서 시(時)를 알리게 하고, 한 신 앞에는 북을 두어 그것을 쳐서 경(更)을 알리
게 하며, 한 신 앞에는 징을 두어 그것을 쳐서 점(點)을 알리게 하였다.
12신은 각기 신패(辰牌)를 잡고 평륜(平輪)에 둘러서서 가운데 층 밑에 숨었다가 때에 따라 번갈아 올라온다.
가운데 채 안에는 항아리를 두고 기계를 장치하여 철환(鐵丸)으로 그 기계를 퉁기는데, 때가 이를 때마다 여러
신들은 곧 응한다.
의상(儀象)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하늘과 조금도 틀리지 않아서 참으로 귀신이 지키고 있는 것 같아서 보는
사람이 모두 놀라고 감탄하니, 진실로 우리 동방에서는 과거에 일찍이 없었던 훌륭한 제도이다.
그리하여 그 전각 이름을 '보루(報漏)'라 하고, 이제 신 김빈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후인들에게 보여 주라 하셨다.
신은 절하고 명(銘)을 지어 올립니다." 하였다.
그 명에, '음과 양이 차례를 바꾸고 밤과 낮이 엇갈린다. 천도(天道)는 묵묵히 돌아가고 신공(神功)은 자취가 없
도다. 천지(天地)의 도(道)를 도와서 이룩하여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들었도다.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시대마다
제도가 달랐도다. 오
직 우리 동토(東土)에는 옛 제도가 소홀했는데 비로소 빛나는 법을 만들었으니, 우리 임금의 깊은 지혜였다.
먼저는 선기옥형(璿璣玉衡)을 만들고, 다음에 물시계를 만들었도다.
네 개의 파수호(播水壺)에 두 개의 수수호(受水壺)로다. 낮과 밤의 교대는 시간의 차이에서 비롯하나니, 이에
시초점을 치는 산가지를 세워서 이륙(二六)으로 나타내고, 목탁을 치고 혹은 꽹과리를 치는 것은 측후가 어긋
날까 함이로다. 나무로 신(神)을 만들어 지키는 관리가 필요없네.
신을 두어 물시계를 맡기느라 높은 집을 지었도다. 동쪽 채에는 위와 아래로 자리를 설치했는데, 윗쪽에 세 신
이 있어 종과 북과 징을 나누어 가졌나니, 닭을 대신해 소리를 치매 그 소리는 차례가 있다. 그 아래 열두 신은
제각기 신패(辰牌)를 갖고 평륜(平輪)의 면에 둘러섰다가 번갈아 올라와 때를 알린다. 그 기계의 움직임은 가운
데 채에 징험하도다. 층층의 다락으로 칸막이를 하고, 항아리로 서로 이었도다. 구리로 두 개의 판자를 만들고
구멍을 뚫어, 화살을 끼우고 기계를 얹어서 철환을 받아 항아리 안에 쏟아 넣는다. 화살이 올라와 기계를 움직
이면 철환이 떨어져 구르도다. 철환의 길은 가로로 비스듬히 신(神)의 밑에 있도다. 두 개의 갈림길이 넷으로
나뉘어져 마치 용도(甬道)와 같고, 통의 좌우에 잇대어 있어 쏟아지는 철환을 받도다. 통에는 기계와 구멍이 있
어 동판의 수와 맞추었도다. 또 따로 큰 철환이 있어 통가에 벌여 있다가 번갈아 기계를 건드리니,
마치 빠른 번개와 같도다.
기계가 닿는 곳에 사신(司辰)이 그 직분을 다하도다. 귀신과도 같아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한다.
훌륭하여라. 이 큰 규모여! 천도(天道)에 순응하여 만드니 제도가 조화(造化)와 짝하여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도
다. 이 한 치의 광음(光陰)을 생각하여 온갖 업적을 빛내도다. 버들가지를 꺾어 울타리를 만들어도 백성들 스스
로 의혹하지 않는다. 이에 여기에 준정(準程)을 세우노니 밝게 보이어 끝이 없으리." 하였다.
○ 김돈(金墩)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의 명과 그 서문에, "의상(儀像)이 있은 지는 옛날부터이다. 요순(堯舜)
으로부터 한당(漢唐)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소중히 여겼다. 그 글은 경사(經史)에 자세히 나타나지만, 지금은
그때와 시대가 매우 멀어서 그 법이 자세하지 않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신성(神聖)하여 고금에 으
뜸가는 자질로써, 모든 정사를 보시는 여가에 마음을 천문법상(天文法象)의 이치에 두시어 옛날의 이른바 혼의
(渾儀)ㆍ혼상(渾象)ㆍ규표(圭表)ㆍ간의(簡儀)와 자격루(自擊漏)ㆍ소간의(小簡儀)ㆍ앙부천평(仰釜天平)ㆍ현주
일구(懸珠日晷) 등의 기구를 만들어 빠뜨림이 없었으니, 그 하늘에 공경히 순응하여 물건을 개발하여 실효를
거두는 뜻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해가 도는 데에는 백 시각이 있어서 낮과 밤이 그 반을 차지한다. 낮에는 해 그림자를 측량하여 때를 알
게 되니 그 기구는 이미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밤에 있어서는 《주례(周禮)》에, 별로 밤을 분별한다는 글이 있
고, 《원사(元史)》에는, '별로써 밤을 측정한다.'는 말은 있어도, 그 별을 측정하여 활용하는 기술은 말하지
않았다.
이에 명하여 밤낮의 시각을 아는 기구를 만들게 하고, 그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하였다.
그것을 만드는 제도는 구리를 써서 만드는데, 먼저 바퀴를 만들어 그 형세는 적도(赤道)에 표준했는데, 자루가
있고 바퀴의 직경은 2척이고, 두께는 4푼이며 너비는 3촌이다. 가운데에 십자(十字)의 거(距)가 있는데, 너비는
1촌 5푼이고, 두께는 바퀴와 같으며, 십자 속에는 축이 있는데, 길이는 5푼 반이고 직경은 2촌이다.
북쪽 면에는 그 중심을 깎아 파서 1리(厘)의 두께로 만들었으며, 가운데에는 겨자씨만한 둥근 구멍을 만들고,
축(軸)으로 계형(界衡)을 꿰고 구멍으로 별을 본다. 밑에는 서려 있는 용이 있어서 바퀴 자루를 물고 있는데,
자루의 두께는 1촌 8푼으로 용의 입에 들어간 것이 1척 1촌이고, 밖으로 나온 것이 3촌 6푼이다. 용 밑에는 대
(臺)가 있는데 너비는 2척이고, 길이는 3척 2촌이다.
거기에 도랑이 있고 못이 있으니, 그 까닭은 판판하기를 취하려고 한 까닭이다. 바퀴 윗면의 대에 세 개의 고리
가 있으니,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과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과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이다. 주천도분환은
밖에서 운전하는데, 두 개의 귀가 있으며 직경은 2척이고, 두께는 3푼이며 너비는 8푼이다. 일구백각환은 가운
데에 있으면 돌지 않는데, 직경은 1척 8촌 4푼이고, 너비와 두께는 바깥의 고리와 같다. 성구백각환은 안에서
운전하는데, 두 개의 귀가 있으며 직경은 1척 6촌 8푼이고, 너비와 두께는 가운데와 바깥 고리와 같다.
귀를 만든 것은 운전하기 위함이다.
세 개의 고리 위에 계형(界衡)이 있는데, 길이는 2척 1촌이고, 너비는 3촌이며 두께는 5푼이다. 두 머리 속은
비었는데, 길이는 2촌 2푼이고 너비는 1촌 8푼이니, 그 때문에 세 개의 고리에 그어 놓은 것을 가리우는 것이다.
허리와 좌우에는 각각 용 한 마리씩이 있으니, 길이는 1척으로 모두 정극환(定極環)을 받치고 있다.
고리 두 개가 있는데, 바깥 고리와 안 고리 사이에는 구진대성(句陳大星)이 보이고, 안 고리의 안에는 천추성
(天樞星)이 보이는데, 이는 남북과 적도를 정한 것이다. 바깥 고리는 그 직경이 2촌 3푼이고 너비는 3푼이며,
안 고리는 직경이 1촌 4푼 반이고 너비는 4리이며, 두께는 모두 2푼이 조금 모자라는데 서로 십자(十字)처럼
이어져 있다. 계형의 양쪽 끝은 비었고 안팎에는 각각 조그만 구멍이 있으며, 정극외환(定極外環) 양쪽에도
조그만 구멍이 있는데, 가는 노끈으로 여섯 개의 구멍을 꿰어 계형의 양쪽 끝에 매었는데, 그것은 위로는 해와
별을 살피고 아래로는 시각을 상고하려는 것이다.
주천환(周天環)에는 주천도(周天度)를 새겼는데, 매 도(度)를 4푼으로 만들었으며, 일구환에는 백 각을 새겼는
데 매 각을 6푼으로 만들며, 성구환에도 일구환과 같이 새겼는데, 자정(子正)이 새벽 전 자정을 지나는 것이
주천의 1도를 지난 것과 같은 것이 다를 뿐이다. 주천환을 사용하는 방법은 먼저 수루(水漏)를 내리어, 동지(冬
至)의 새벽 전 자정이 되면 계형으로 북극의 두 번째 별이 있는 곳을 측후해서 바퀴 옆에 기록하고 주천의 첫
도수의 시초에 맞춘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면 하늘의 해도 반드시 어긋나니, 수시력(授時曆)으로 상고하면 16년이 조금 지나면 1분
이 퇴각하고, 66년이 조금 지나면 1도가 퇴각한다. 이렇게 되면 다시 측후하여 바로잡아야 한다.
북극의 두 번째 별은 북극성에 가까워서 가장 붉고 밝아서 누구나 보기 쉽다. 그러므로 그것으로써 기후를 측정
하는 것이다.
일구환을 쓰는 방법은 간의에 성구환을 쓰는 법과 같다. 첫해 동지 첫날 새벽 전의 밤중 자정을 처음으로 하여
주천의 첫 도수의 처음에 맞춘다. 1일에 1도, 2일에 2도, 3일에 3도, 이리하여 3백 6십 4일이 되면 바로 3백 6십
4도가 된다. 다음 해의 동지 첫날 자정이 3백 6십 5도가 되는데, 1일에는 영도(零度) 3분, 2일에는 1도 3분이며,
3백 6십 4일이 되면 바로 3백 6십 3도 3분이 된다. 또 다음 해의 동지 첫날에 3백 64도 3분이 되면 1일은 영도 2
분, 2일은 1도 2분이며, 3백 6십 4일이 되면 바로 3백 6십 3도 2분이 된다.
또 다음 해 동지 첫날에 3백 6십 4도 2분이 되고, 1일은 영도 1분이고 2일은 1도 1분이며, 3백 6십 5일이 되면 바
로 3백 6십 4도 1분이니, 이것을 일진(一盡)이라 하고, 한 바퀴가 다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대개 사람의 동정(動靜)의 기틀은 실로 해와 별의 운행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해와 별의 운행은 의상 속에 밝게
나타나 있다. 옛날의 성인들은 반드시 이로써 다스리는 방법의 첫째 임무로
삼았으니, 요(堯)의 역상(曆象)과 순(舜)의 선기(璿璣)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 전하의 이것을 만든 아름다운 뜻
은 바로 요순과 그 규모를 같이하는 것으로, 우리 동방의 천고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훌륭한 일이다. 아, 지극
하여라. 이것을 마땅히 새겨 후세에 밝게 보여 주어야 하리라.
신 김돈은 감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올리나이다." 하였다.
그 글에 요 임금은 역상을 공경히 정하였고 순 임금은 기형(璣衡)을 사용했다. 대대로 서로 전하니 만든 솜씨가
더욱 정묘해졌다. 의(儀)이니 상(象)이니 하여 그 이름은 같지 않으나 굽어 살피고 우러러 관찰하여 백성에게
철을 알려 주었는데, 시대가 멀어지자 제도가 더욱 폐해졌다.
그것을 기록한 책이 남아 있다 하지만 누가 그 참뜻을 알리? 우리 성신(聖神) 세종대왕이 시기에 응해 요와 순
두 임금 이어받아 만들었나니, 표(表)ㆍ누(漏)ㆍ의(儀)ㆍ상(象)이 모두 옛 제도를 회복하였네.
시에는 백 각이 있어 낮과 밤으로 나누어지니, 해를 측정하는데 갖추지 못한 기계가 없다. 또 밤까지 측후하고자
하여 새로운 의(儀)를 만드니 그 이름은 무엇이던가? 그것은 바로 일성정시(日星定時)이다.
그 쓰임새는 어떠한고? 별을 보고 해 그림자를 측정한다. 그 바탕은 구리인데 만든 솜씨는 견줄 데가 없다.
먼저 둥근 바퀴를 만들고 거(距)가 서로 설치되었다. 남북이 높고 낮은 것은 적도(赤道)의 법을 본떴네.
용이 그 대에 도사리고 있어 입으로 바퀴의 자루를 물었고, 도랑이 있어 못에 잇대었으니 그 물이 지극히 수평
을이루었도다. 바퀴 위의 세 개의 고리가 스스로 서로 의지해 붙었으니, 바깥고리는 주천으로서 도(度)와 분(分)
을 벌여 놓았다. 그 안에 있는 두 개의 고리는 일환과 성환이 그 길을 나누었다.
성환의 각(刻)은 하늘의 도수와 같은데, 안팎의 것은 움직이고 가운데 것만은 꼼짝하지 않는다.
저울대는 그 면(面)에 가로질러 있고 굴대는 그 가운데를 꿰었다. 굴대를 파서 구멍을 만드니 마치 바늘과 겨자
씨 같은데, 속이 빈 저울대의 끝에는 도(度)와 각(刻)이 선명하고 뚜렸하도다.
한 쌍의 용이 굴대를 끼고 정극환(定極環)을 받들었고, 고리에는 거죽과 속이 있어서 별이 그 사이로 보인다.
보이는 별은 무엇인가? 구진(勾陳)과 천추(天樞)로 남쪽과 북쪽을 정하였으매 묘(卯)와 유(酉)가 서로 기다린다.
그것을 어떻게 관찰하는가? 선(線)으로 그것을 살펴보나니, 바로 고리의 위에 걸치고 밑으로는 저울대의 끝을
꿰었다. 해를 측량하려면 그 두 가지를 쓰고 별을 살펴보려면 한 가지를 쓴다.
제왕의 자리는 붉고 빛나서 저 북극성에 가까이 있나니 선으로 그것을 엿보면 때와 시각을 알 수 있도다.
먼저 수루(水漏)를 내려놓으면 자정을 바로 거기서 볼 수 있고, 바퀴와 고리에 기록해 표시하나니 천주(天周)가
처음 시작되는 곳이다.
밤마다 지나고 돌고 할 때에 도와 분이 함께 한다. 기계는 간단하나 정묘하며 작용은 두루하고 또 세밀하네.
몇 번이나 선철(先哲)들이 지나갔지만 그래도 이 제도 결함이 있도다. 우리 임금님 하늘을 예측하여 이 의(儀)를
일찍이 만들어서 저 천문을 맡은 관리에게 주시니 만세에 보배 되리로다." 하였다.
간의대(簡儀臺) : 궁성(宮城)의 서북쪽 모퉁이에 있다.
○ 김돈(金墩)의 기문(記文)에, "선덕(宣德) 임자년 가을 7월 어느 날, 임금님께서 경연에서 역상(曆象)의 이치를
논하다가, 이내 예문관 제학 신 정인지(鄭麟趾)에게 이르시기를, '리 동방은 멀리 바다 밖에 있어서 모든 하는 일
이 한결같이 중화(中華)를 따르는데 오직 하늘을 관측하는 기계는 없다.
그대는 역산(曆算)의 제조(提調)로 있으니, 대제학 정초(鄭招)와 고전을 상고하고 의표(儀表)를 창제(創制)하여
측험(測驗)하는 데에 쓰이도록 하라. 그러나 중요한 일은 북극성이 나온 땅에 높낮이를 정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먼저 간의(簡儀)를 만들어 올려라.' 하였다. 이리하여 신 정초와 신 정인지는 옛날 제도를 상고하는 것
을 맡고, 중추원사(中樞院使) 신 이천(李?)은 공사를 감독하는 것을 맡았다. 먼저 목양(木樣)을 만들어 북극성이
땅에 나온 36도를 정하니, 원사(元史)의 측정한 바와 대략 부합하였다.
드디어 구리쇠로 의(儀)를 만들어 그것이 장차 이루어지려 하자, 호조 판서 신 안순(安純)에게 명하여 후원에 있
는 경회루(慶會樓) 북쪽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었는데, 높이가 31척이고 길이는 47척이며, 너비는 32척이었다.
돌 난간으로 두르고 그 꼭대기에 간의를 두고 네모반듯한 상을 펴고, 그 남쪽 대의 서쪽에 구리로 된 표를 세우니,
높이는 8척의 얼(?)의 다섯 배이고 푸른 돌을 깎아서 규(圭)를 만들고, 규의 면(面)에는 장(丈)ㆍ척(尺)ㆍ촌(寸)ㆍ
분(分)을 새겼으며, 영부(影符)로써 한낮의 그림자를 취하여 음과 양 이기(二氣)의 차고 줄어드는 단서를 추측하
여 알았다. 표의 서쪽에 조그만 집을 짓고 혼의(渾儀)와 혼상(渾象)을 두니, 의는 동쪽에 있고, 상은 서쪽에 있다.
혼의의 제도는 역대에 같지 않지만, 지금은 원 나라 오씨(吳氏 오징(吳澄))가 편찬한 글에 의해서 옻칠한 나무로
의를 만들었다. 혼상의 제도는 옻칠한 베로 본체를 만들어 둥글기가 탄환 같은데 둘레는 10척 8촌 6푼이다.
세로와 가로로 주천(周天)의 도수를 그었는데, 적도는 가운데에 있고, 황도(黃道)는 적도(赤道)의 안팎에 나왔다
들어갔다 한 것이 각각 24도가 조금 모자라고 중외(中外)의 관성(官星)을 두루 나열하였다.
하루에 한 번씩 돌아 1도를 지나는데, 노끈으로 해를 묶어 황도에 매어 두었다. 날마다 1도씩 뒤로 물러가는 것이
하늘의 운행과 부합한다.
그 물을 치는 기계의 운행은 매우 교묘하여 깊이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이 다섯 가지는 옛날 역사책에 자세히
적혀 있다.
경회루 남쪽에 집 세 채를 세우고 거기에 누기(漏器)를 두었는데, 이름을 보루각(報漏閣)이라 하였다.
동쪽 채 안에 2층으로 된 자리를 설치하고 그 위에 세 신이 있는데, 시를 맡은 자는 종을 치며, 경을 맡은 자는 북
을 치며, 점을 맡은 자는 징을 친다. 자리 밑에 있는 열두 신은 각각 신패(辰牌)를 잡고서, 사람의 힘을 빌지 않고
때에 따라 스스로 알린다.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조그만 집을 세우고, 이름을 흠경각(欽敬閣)이라 하였다. 종이를 발라 산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7척쯤 된다. 그것을 그 집안에 두고 또 그 안에 기륜(機輪)을 설치하고 옥루(玉漏)의 물로 치면,
다섯 빛깔의 구름이 해를 싸고 나왔다 사라졌다 하며, 옥녀는 때를 따라 방울을 흔들고, 때를 맡은 무사(武士)들
은 서로 돌아보며, 4신(神)과 12신은 차례로 향해 일어났다 엎드렸다 한다.
산의 4면에는 빈풍(?風)의 네 철의 경치를 벌여 놓았으니, 백성들의 의식(衣食)의 어려움을 생각해서이다.
의기(?器)를 두어 누수의 남은 물을 받는데, 그것은 천도의 찼다 비었다 하는 이치를 살피기 위해서이다.
간의(簡儀)가 비록 혼의(渾儀)보다는 간단하지만, 운전해 쓰기가 어렵기 때문에 작은 간의 두 개를 만들었으니,
이는 작은 간의가 비록 지극히 간략하나 그 작용은 간의와 같기 때문이다.
하나는 천추전 서쪽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書雲觀)에 내려 주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은 시각에 어둡기 때문
에 앙부일구(仰釜日晷) 두 개를 만들고 그 안에 시신(時神)을 그렸으니 이는 무지한 사람들도 그것을 굽어보고
때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는 혜정교(惠政橋) 곁에 두고 하나는 종묘(宗廟) 남쪽 거리에 두었으니 낮에 대한
측후기는 이미 갖추어졌다.
그러나 밤이 되면 상고하고 실험할 수 없기 때문에 밤과 낮으로 때를 알 수 있는 기구를 만들고, 이름을 '일성정
시의(日星定時儀)'라 하였다. 모두 네 개를 만들어 하나는 만춘전(萬春殿) 동쪽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에 내려
주고, 두 개는 동서 양계(兩界) 원수영(元帥營)에 내려 주었다.
일성정시의는 무거워서 행군할 때에 불편하기 때문에 다시 작은 정시의를 만들었는데, 그 제도는 비슷비슷하다.
이 여섯 가지에 대해서 각각 그 서문과 명(銘)이 모두 있다. 또 현주일구(懸珠日晷)를 만들었는데 방부(方趺)의
길이는 63푼이다.
부(趺)의 북쪽에 기둥을 세우고 부의 남쪽에 못을 파고, 부의 북쪽에는 십자를 긋고 추를 기둥 꼭대기에 달아 십
자와 서로 맞게 하니, 꼭 수준(水準)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평평하고 바르게 되었다. 작은 바퀴에 백 각을 그었으
니 바퀴의 직경은 3촌 2푼이고, 자루가 있어서 비스듬히 기둥을 꿰고 있다.
바퀴의 중심에는 구멍이 있는데 한 개의 가는 줄로 꿰어 위로는 기둥 끝에 매고 밑으로는 부의 남쪽에 매어,
줄의 그림자가 있는 곳을 보고 곧 시각을 알게 된다.
그러나 흐린 날에는 때를 알기 어렵기 때문에 행루(行漏)를 만들었으니, 몸체는 작고 제도는 간단하다.
파수호와 수수호가 각각 하나씩인데 쏟고는 갈오(渴烏)로써 물을 붓고, 물을 가는 때에는 자(子)ㆍ오(午)ㆍ묘(卯)ㆍ
유(酉)시를 쓰고, 작은 정시의와 현주행루(懸珠行漏)는 각각 몇 개씩을 만들어 양계(兩界)에 나누어 주고, 남은
것은 서운관에 두었다. 말 위에서도 시각을 알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천평일구(天平日晷)를 만들었는데,
그 제도는 현주일구와 대략 같다.
다만 남북에 못을 파고 부(趺)의 복판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 꼭대기에 노끈을 꿰어 두어서 남쪽을 가리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만일 하늘을 관측하고 시를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정남침(定南針)을 써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힘을 쓰기를 면치 못하므로 정남일구(定南日晷)를 만든 것이다. 이는 비록 정남침을 쓰지 않으나
남북이 저절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부(趺)의 길이는 1척 2촌 5푼이고, 두 머리의 너비는 4촌이고, 그 길이는 2촌
이며, 허리의 너비는 1촌이고, 그 길이는 8촌 5푼이다. 복판에는 둥근 못이 있으니 직경은 2촌 6푼이다.
거기에 수거(水渠)를 두어 두 머리와 통하게 하여 기둥 곁에 두었는데, 북쪽 기둥의 길이는 1척 1촌이고, 남쪽
기둥의 길이는 5촌 9푼이다. 북쪽 기둥의 1촌 1푼 아래와 남쪽 기둥의 3촌 8분 밑에는 각각 굴대가 있어서 사유
환(四游環)을 받치고 있다.
동서로 운전하는데 여덟 개의 주천도(周天度)를 새겨 4분으로 만들었는데 북쪽의 16도에서 167도에 이른다.
속은 비어 쌍가락지 모양 같고 나머지는 다 온고리로 되어 있다. 안에는 중심에 한 획을 새겼고 밑에는 모난 구
멍이 있는데 가로로 직거(直距)를 설치하였다. 거(距)의 중간은 6촌 7푼으로서 비어서 규형(窺衡)을 받치고 있다.
규형의 위에는 쌍고리를 꿰어 밑으로 온고리에 닿았고, 남북으로 내려갔다 올라갔다 한다.
평평하게 지평환(地平環)을 설치하여 남쪽 기둥 꼭대기와 가지런한데, 오직 하지(夏至)에 해가 뜨고 지는 시각
에 준하고, 반환(半環)을 지평환 밑에 가로로 설치하고 안에는 획(?)과 각(刻)을 나누어 모난 구멍에 당하게 한
다. 부의 북쪽에는 십자를 긋고 북쪽 굴대에 추를 달아 십자와 서로 당하게 하였으니, 이 또한 판판함을 취하기
위해서이다.
규형으로 날마다 태양이 극(極)에서 떨어진 도분(度分)에 당하게 하여, 해의 그림자를 투입시키면 정원(正圓)이
된다. 모난 구멍에 의거하여 반환의 시각을 굽어보면 저절로 남쪽이 정해져 시를 알게 된다.
그 기구는 대략 15종인데 구리로 만든 것이 10종이다.
여러 해를 지나서야 준공하게 되니, 그것은 실로 무오년 봄이었다.
유사(有司)가 그 전말을 적어 후세에 밝게 보이기를 청하였다. 이에 신이 그 의논에 참여하였으므로 신에게 명하
여 그 일을 기록하라 하였다. 신은 가만히 생각건대, 때를 알려주는 요점은 하늘을 측량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하늘을 측량하는 요점은 의표(儀表)에 있다.
그러므로 요(堯)는 희씨와 화씨에게 명하여,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역상(曆象)을 밝히게 하고, 순(舜)은 기형(機
衡)으로 살펴 일월오성(日月五星)인 칠정(七政)을 고르게 하였으니, 진실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함을 늦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당(漢唐)으로부터 여러 대로 내려오면서 각각 그 기구가 있었으나 혹은 잘되기도 하고 혹은 잘못 되기도 하여
갑자기 다 헤아리기가 쉽지 않고, 오직 원 나라의 곽수경(郭守敬) 이 만든 간의(簡儀)ㆍ앙의(仰儀)ㆍ규표(圭表)
등의 기구는 정교하다 할 만하다. 그런데 우리 동방에서는 그것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하늘이 아
름다운 운수를 열어 문교(文敎)가 한창 일기 시작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는 신성(神聖)한 자질과 흠경
(欽敬)하는 마음으로 온갖 정사를 하는 여가에 역산(曆算)의 정묘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상고하라 시키시고,
측험(測驗)의 갖추어지지 못함을 걱정하여 기구를 만들라 하셨다. 비록 요순의 마음씀인들 어찌 여기에 더할 수
있으랴? 그 제작한 기구는 한두 가지가 아니나, 몇 가지에 이르러서는 참고에 대비하였고, 그 규모는 오직 옛것
만 본받은 것이 아니라 모두 임금의 마음에 헤아리시어 모두 극히 정묘하니, 비록 원 나라의 곽수경이라 하더라
도 그 교묘한 기술을 베풀 수 없으리라.
아, 이미 수시(授時)의 역(曆)을 대조하고 또 하늘을 관측하는 기구를 만드니, 위로는 천시(天時)를 받들고 아래
로는 백성들의 일에 부지런히 하셨다. 우리 전하의 물건을 개발하여 실용을 이룩하는 지극한 인(仁)과 농사에
힘써서 근본을 소중히 여기는 지극한 뜻은 실로 우리 동방에 일찍이 없었던 훌륭한 일이니, 장차 이 높은 대(臺)
와 함께 무궁토록 전해질 것이다." 하였다.
○ 정초(鄭招)의 소간의(小簡儀)에 대한 명(銘)과 그 서문에, "당요(唐堯)가 세상을 다스릴 때에 먼저 희화(羲和)
에게 명하여 일구(日晷)를 바루었고, 그로부터 여러 대로 내려오면서 각각 기구가 있었으나 원 나라에 이르러서
야 갖추어졌다.
지금 임금 16년 가을에 이천(李?)ㆍ정초ㆍ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조그만 모양의 간의를 만드니, 비록 옛날 제도
를 본떴다 하나 실은 새로운 규모에서 나온 것이다. 정교한 구리로 부(趺)를 만들고 물길을 만들어 두르고 둘러
서 준평(準平)을 정하였으니, 자오(子午)가 바로 자리잡았다. 적도의 한 고리의 면에 주천(周天)의 도분(度分)을
나누어 동서로 운전하여 일곱 가지 정사를 측량하였다. 중외(中外)의 관(官)은 별의 도분에 들어가고 백 각의 고
리는 적도에 있다. 고리의 내면에는 12시와 백 각으로 나누었다. 낮에는 일구(日晷)를 알고 밤에는 중성(中星)을
정한다. 사유환(四遊環)은 규형(窺衡)을 받쳤는데 동서로 운전하고 남북은 낮아졌다 높아졌다 하면서 규측(窺測)
을 기다린다. 이에 기둥을 세우고 세 개의 고리를 꿰었으니 비스듬히 기대면 사유(四遊)는 북극을 표준하고 적도
는 천복(天腹)을 표준하며, 꼿꼿이 세우면 사유는 입운(立運)이 되고 백 각은 음위(陰緯)가 된다. 공사를 마치자
여러 사람들은 그것에 명(銘)을 새겨 후세에 보이기를 청하니,
임금님은 신 정초에게 명하시므로 신은 절하고 올립니다." 하였다.
그 명에, "하늘의 도가 생색내고 함이 없으매 기구도 간단한 것을 숭상한다. 옛날의 간의는 기둥을 가설하여 얼기
설기 엮어 놓았는데 지금의 이 기구는 가까이로는 가지고 다닐 만하다. 그러나 그 작용은 간의와 같으니 대개 간
단하고도 간단한 것이다." 하였다.
동궁(東宮) : 일화문(日華門) 밖에 있다.
창덕궁(昌德宮) : 북부(北部)의 광화방(廣化坊)에 있다.
인정전(仁政殿) : 조회를 받는 정전(正殿)이다. 남문은 인정문(仁政門), 또 서남문은 진선(進善),
또 그 남문은 돈화(敦化), 그 동문은 건양(建陽), 또 그 동문은 선인(宣仁), 서문은 금호(金虎), 북문은 광지(廣智)
이다.
선정전(宣政殿) : 인정전 동쪽에 있다.
보경당(寶慶堂) : 인정전 서쪽에 있다.
동궁(東宮) : 건양문(建陽門) 밖에 있다. 옛날 구현전(求賢殿)과 광연정(廣延亭)의 터로서 앞에는 연못이 있다.
성화(成化) 22년에 세우고, 춘궁(春宮)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창경궁(昌慶宮) : 창덕궁 동쪽에 있다. 옛날 수강궁(壽康宮)의 터로서 성화 계묘년에 성종(成宗)이 정희왕후
(貞熹王后)와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와 안순왕후(安順王后) 세 분을 위해서 세웠다.
명정전(明政殿) : 성종이 정월과 동지 때마다 신하들을 거느리고서 세 분에게 하례하고는 이어서 이 전에서
조회를 받았다. 동문은 명정문(明政門), 또 그 동문은 홍화문(弘化門)이다. 문 안에는 개울이 있고,
다리 이름은 옥천(玉川)이다.
문정전(文政殿) : 명정전 남쪽에 있다.
인양전(仁陽殿) : 명정전 서쪽에 있다.
경춘전(景春殿) : 수녕전(壽寧殿) 북쪽에 있다.
통명전(通明殿) : 경춘전 북쪽에 있다.
양화당(養和堂) : 환경전(歡慶殿) 북쪽에 있다.
여휘당(麗暉堂) : 통명전 서쪽에 있다.
환경전(歡慶殿) : 경춘전 동쪽에 있다.
수녕전(壽寧殿) : 인양전 북쪽에 있다.
환취정(環翠亭) : 통명전 북쪽에 있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기문에, "창경궁 후원에 새 정자가 있으니 이름이 환취(環翠)이다.
바로 통명전 북쪽 모퉁이에 있는데, 언덕과 멧부리의 형세는 곁으로 비끼고 옆으로 펼쳐졌고,
장송(長松) 만 그루가 뱅 둘러 서 있으며, 또 빽빽한 대나무 수천 그루를 심어 그 빈틈을 메웠다. 앞으로는 대궐
에 다달았으니 결구(結構)가 들쭉날쭉한데 원앙와(鴛鴦瓦)의 비늘이 푸르게 새겨졌고, 잔디 뜰과 이끼 벽돌이
서로 도와 푸르스름한 산기운을 이루었다.
가까운 데로부터 멀리는 높은 담 밖에 시가(市街)가 있으며, 시가 밖에는 성곽이 있고 성곽 밖에는 산들이 있다.
남산(南山)의 연운(烟雲)과 동교(東郊)의 풀과 나무들은 파란 색을 모으고 녹색을 칠하여 난간 밑에 와서 서로
기이함을 다투어 바치니 그 형태가 천 가지 만 가지이다. 이것이 정자가 환취(環翠)라는 이름을 갖게 된 까닭이
다. 그러나 그것이 임금의 사사로이 쉬는 장소가 된 바는 실로 저기에 있고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정자는 구중궁궐의 문턱의 막힌 것을 지나고 육침(六寢)의 그윽한 곳에 연해서 그윽하고 고요하고 깊숙하며
높고 밝으며 시원하니, 이는 그 땅이 조종(祖宗)이 여기에 별궁을 만든 이래로 상서를 모으고 복을 쌓아 비밀히
감추어 둔 지 거의 90여 년만에 마침 전하가 왕업(王業)을 계승하신[堂構] 때를 만나 갑자기 이루어졌으니,
어찌 기다림이 있어 그러했던 것이 아닌가?
조회에서 물러나와 맑고 조용한 여가에 가끔 걸으시어 이 정자에 오르실 떄, 법궁의 의장(儀仗)은 일체 물리치
고 하후(夏后)의 옷을 입고, 광무(光武)의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서 정신을 온화하게 가지고, 생각을 맑게 하여
도(道)와 더불어 합치한다.
더구나 봄 기운이 화창하여 초목이 무성할 때에는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인(仁)을 느껴서 고달프고 병든 이
와 홀아비와 과부들이 어떻게 하면 굶주림이 없으며, 훈훈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뜨거운 볕이 허공을 녹일
때에는 순 임금의 해온(解?)의 곡조를 읊조리며, 이 가득 찬 골짜기의 시원한 그늘을 어떻게 하면 사방에 고루
베풀어 줄까 하고, 누런 나뭇잎이 떨어지는 절기에 온갖 열매가 성숙할 때에는 내 백성들의 세금을 10분의 1을
내는 세금 제도에서 지나치게 해서는 안되겠다 하시고, 눈이 내려 찬 기운이 갖옷 속으로 스며들면 내 백성들은
손발이 얼어 터지고 주리니, 다시는 더 부역으로 수고롭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하실 것이니,
모든 사시(四時)의 경치가 임금의 눈에 한번 지나면 그것을 모두 취하여 정치를 펴고 인(仁)을 베푸는 자료로
삼으실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당기기만 하고 늦추지 않는 것은 문왕 무왕도 하지 않고, 늦추기만
하고 당기지 않는 것은 문왕 무왕도 하지 않는다." 하였다. 그렇다면 한번 늦추고 한번 당기는 기구는 또한 폐할
수 없는 것이니, 만일 경전(經傳)에서 뽑아내어 의심나는 것을 물으려면 위대한 학자들을 모두 부를 것이며,
활 쏘는 이를 뽑아 덕을 관찰하려 하면, 활을 쏘는 무사(武士)를 짝지어 나오게 할 것이다.
이것으로써 조용히 학자에게 묻고, 무비(武備)를 익힌다면 어느 것인들 나라에 임금 노릇하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아름다운 계획과 훌륭한 규범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우리 전하가 이 정자를 지은 깊은 뜻으로 중화(中和)의 위육(位育) 의 지극한 공이 점차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송 나라 효종(孝宗)은 취한당(翠寒堂)을 대궐 안에 짓고, 일찍이 조웅(趙雄)과 왕유(王維) 등을 불러서 일
을 아뢰게 하였는데, 당하(堂下)의 수십 그루 늙은 소나무에서 맑은 바람이 솔솔히 불어왔다.
효종은 '소나무 바람 소리가 매우 맑아 악기 소리보다 훨씬 낫다.'고 하였다.
대개 효종은 송 나라의 어진 임금이다. 평상시에는 잔치 놀이나 음악과 여색의 받듦과 궁실(宮室)과 원유(苑?)
의 즐김이 없었는데, 이 당을 세우고도 안일을 꾀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재상들을 불러 물어서 옹폐(擁蔽)의 해
를 방지하였으니, 그 꽃답고 아름다운 풍도가 지금까지도 역사에서 빛난다.
지금의 우리 전하는 총명(聰明)하고 인성(仁聖)하기가 효종보다 훨씬 뛰어났는데, 이 정자를 지은 것도 우연히
그와 같다. 앞뒤의 성현의 규모와 제작은 시대는 다르면서 그 부합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저 부용(芙蓉)과 쌍요(雙曜)의 높은 것이 상양궁(上陽宮)에서 장관(壯觀)이 되고,
응사(凝思)와 소방(韶芳)의 개조함이 미앙궁(未央宮)에서 거듭 빛나던 것은 다 놀이와 사냥으로 거둥하기 위함
이었다. 어찌 오늘에 와서 말할 거리가 되겠는가? 진실로 원컨대, 전하께서는 게으르거나 방종하지 말고 언제나
한 마음을 가지시어, 이 정자에 오를 때마다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세월이 흐르기 쉬움을 깊이 두려워하여 반드
시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하늘에 빌어 나라의 운명을 길게 하는 진실을 삼기를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하신
다면 우리 조선의 억만세의 끝없는 아름다움이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나이까? 신은 감히 이것으로 올리나이다."
하였다.
신증 선원전(璿源殿) : 문소전(文昭殿)의 동북에 있는 것으로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수용(?容 화상(?像))을 봉안(奉安)한 곳이다.
비궁당(匪躬堂) : 즉 창덕궁의 남빈청(南賓廳)으로 연영문(延英門) 밖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주역》의 건괘(蹇卦) 62에 이르기를, '임금의 신하가 어려움에 어렵게 함이 자신
의 연고가 아니다[匪躬].' 하였으니, 이는 비궁이란 임금이 있는 것만 알고, 내 몸이 있는 줄은 모른다는 말이다.
무릇 우리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비궁의 도를 아는가? 이제 시험삼아 논해 보리라.
삼공(三公)은 위로는 태계(台階)를 본받고 아래로는 세 발이 있는 정상(鼎象)을 취하나니, 모든 관리의 위에 위치
하고 모든 백성이 우러러보는 지위에 있어서, 높은 관면(冠寃)이고, 깊고 넓은 묘당(廟堂)이다.
우뚝히 국가의 기둥과 주춧돌이고, 밝기는 인물의 서구(筮龜)와 같으니, 가히 임금을 보좌하는 직책과 논섭(論燮)
의 도리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곤직(袞職)에 빠뜨림이 있으면 어떻게 보충하며 왕의 계획이 빛나지 못하면 어떻
게 드러낼 것인가? '도(都)'라 하고, '유(兪)'라 하는 문답을 어떻게 할 것이며, 좋은 꾀와 아름다운 계획을 어떻게
아뢸까를 마땅히 생각하여, 조화(造化)를 도와 만물을 양육하고, 하늘의 꾸지람[天災]을 겁내어 삼가고 두려워하
여, 한 마디 말도 임금을 깨우치기를 생각하고 온갖 꾀로 임금을 협박할 것을 생각하지 말라.
약석(藥石)으로써 아뢰도록 생각하고, 짐독(?毒)으로써 미혹시키지 말라.
일을 도모하고 계책을 헤아려서 성심(誠心)을 열어 공정한 도(道)를 펴고, 안색을 바로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려서
대체(大體)를 보존하고 하찮은 일을 생략하면 비궁(匪躬)의 뜻에 거의 가깝게 되리라. 만일 혹 지위가 아주 높아
공명(功名)이 마음에 걸리고, 녹(祿)이 많아서 부귀(富貴)가 그 뜻을 방탕하게 한다면 귄세는 독차지하고 싶고
재물을 탐내어, 나라가 위태하여도 붙들지 않고, 기울어져도 일으키지 않으며, 또는 일에 다달아서는 어름어름하
여 세상과 함께 하면서 베 이불로 이름을 낚으며, 상아(象牙)의 산가지로 이익을 도모하기도 하여,
반식(伴食)의 비웃음을 받거나, 복속(覆?)의 비방을 초래한다면 비궁이라 하겠는가?
저 삼공(三公)의 부관(副官)인 이공(貳公)은 덕화를 넓히고, 육경(六卿)은 직분을 나누고, 모든 대부와 중신들은
지위가 높고 봉록이 후하고 임무가 전일하고 책임이 크니 만나기 어려운 좋은 때를 만났고, 일할 만한 때를 마침
만났으니, 마땅히 삼가 정성을 다해 공경히 받들어 보좌하기를 어떤 도로 하며, 임금의 마음을 열어 드리며 돕기
를 어떤 계책으로 할까를 생각하라.
제작하는 데에 있어서는 윤색(潤色)할 것을 생각하고, 현준(賢俊)은 추천해 등용할 것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형벌을 없게 하고,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재물을 풍부하게 할까 하며, 어떻게 하면 전쟁을 쉬게 하고, 어떻게 하
면 토지를 개간할까 하여, 큰 계책을 의논하고 큰 의심을 결정할 때에는, 말은 국가의 중요함이 되어,
나라만 알고 집을 잊고, 공(公)만 알고 사(私)를 잊어 몸이 안위(安危)를 맡아서 충신(忠信)과 절의(節義)로 스스
로를 가다듬기를 생각하고,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으로써 스스로 움츠러들지 말며,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몸과 힘을 다하면 비궁의 뜻에 거의 가까우리라. 만일 혹 대중을 따라 나아가고
물러나서,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얻으려고 걱정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를 걱정하여 임금의 총애를 빙자하여 권세
를 굳히고, 능력도 없으면서 지위만 차지해서 어진 이의 진출을 방해하여, 조정에 서서는 큰 절개가 없고,
세상에 도적질하는 것은 모두 헛이름뿐이며, 현실에 어두우면서 재능이 없고 고집불통이어서 스스로 옳다 하여
정사를 방해하고 다스림을 해치며, 직무를 게을리 하고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만족할 줄 아는 기미에
는 어둡고 시소(尸素)의 비웃음을 산다면 비궁이라 할 수 있겠는가?
또 임금이 사랑하고 신임하는 신하로는 근시(近侍)만한 사람이 없고, 신하로서 임금과 친밀한 이가 근시만한 사
람이 없다. 이는 근시란 것은 항상 임금의 좌우에 있으면서 홀로 요직을 맡은 사람으로 천안(天顔)이 지척에 있
고 구중궁궐이 매우 가까우매 임금의 말이 간곡하고 임금이 자주 돌아본다. 근시는 귀와 눈과 같은지라 임금의
총명을 틔워 주고, 목구멍과 혀와 같은지라 임금의 명령을 대신 발표하니, 추기(樞機)는 비밀히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출납(出納)은 성실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정을 참작하여 의견을 아뢰어 조용히 선한 것은 진술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바꾸게 한다. 임금의 은택이 혹
백성에게로 내려가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통하여 내려가게 하고, 백성의 마음이 임금에게로 전달되지 못함을
두려워하거든 진술하여 알릴 것이다. 넓은 집 부드러운 담요 위에서 임금을 모시고 의논하며 생각하고 장막 속
에서 일을 계획한다. 위에서는 지나친 행동이 없고 밑에서는 실정을 숨김이 없이 정하고 깨끗한 한마음으로 오
직 삼가 받들어야 하나니, 만일 그렇게 한다면 비궁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또 혹 임금의 성내고 기뻐함을 살피고 임금의 얼굴빛을 맞추어 교묘한 생각으로 기쁘게 하고 기이한 꾀로 유혹
하여, 충성된 말은 임금의 귀에 미치지 못하고 남을 참소하고 중상하는 말을 묘하게 얽어 만들어, 말을 들이는
승지(承旨)의 직분을 폐하고 아첨을 하는 것이 풍습이 된다면 비궁이라 할 수 있겠는가? 또 대간(臺諫)으로 말
하면 조정의 공론(公論)을 맡은 사람이다.
임금은 건괘(乾卦) 구오(九五)의 높은 자리에서 억조(億兆) 백성의 위에 있으니, 높기는 해와 달과 같을 뿐만이
아니고, 그 위엄은 우레나 천둥 같을 뿐만이 아니다.
그렇지만 임금께 항거하고 임금을 거스르는 것은 오직 대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금문(金門)을 헤치고 들어
가 대궐에서 부르짖는 것도 오직 대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임금의 좌우에 서서 임금과 시비를 다툴 때, 임금이 '옳다.' 해도, 대간은 '옳지 않다.' 하며,
임금이 '옳지 않다.' 해도, 대간은 '옳다.' 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꺼리지 않으며 강직하여 흔들리지 않아서 비
록 머리를 부수는 것이라도 사양치 않는데, 어찌 죽음을 피하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임금의 옷자락을 끌어당김
도 다시 할 수가 있으니, 난간을 부러뜨림이 어찌 홀로 옛적에만 아름답겠는가. 이러하여야 비궁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또 혹 만일 겉으로는 대간인데 마음은 대간이 아니며, 말은 대간인데 행동은 대간이 아니어서 임금 앞
에서는 밝게 다투고 숨김없이 간하여 그 책망을 면하고는 이세(利勢) 속에서 몰래 옮기고 묵묵히 빼앗아서 그
욕심을 채우며, 그 의논이 사사로운 비밀에서 나오고 그 논박(論駁)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에서 나오며,
일을 만나되 말하지 않기는 금인(金人)과 같고, 일을 의논하되 입을 다물기는 촉추(蜀椒)와 같으며, 또 일을 의
논할 줄만 알되 그 대체는 모르며, 사람을 의논할 줄만 알되 그 장단점은 몰라서, 어지럽게 떠들고 자질구레하
게 따져서 위로는 임금의 이목을 번거롭히고 아래로는 조정의 이목을 놀라게 하여, 아무개는 충성하고 아무개
는 간사한 지를 알지 못한다면, 또한 누구를 헐뜯고 누구를 칭찬하겠는가?
그렇다면 그를 비궁이라 하는 것이 옳겠는가? 또 혹은 크거나 작거나간에 요(寮)라 하고 채(寀)라 하여 밝고
거룩한 이들이 지위에 벌려 있어, 문무(文武)를 아울러 쓰되 각각 그 장점을 다하게 하고, 잘거나 굵거나 버리지
않고 오직 그 그릇에 맞도록 쓴다면 재주를 품고 기예를 가진 뛰어나고 영걸스런 선비들이 떼지어 활발히 일어
나, 훌륭한 계책을 떨치고 좋은 기예를 발휘하여, 평소에 뜻한 바를 행하고 평소의 포부를 펴려고 힘써 직무에
나아가고 다스림을 도와 덕화를 받든다면 비궁의 뜻에 가까울 것이다. 또 혹은 만일 요행히 출세하기를 바라서
시세를 엿보아 권세 있는 사람의 집에 대해서 더우면 붙고 차가우면 등져서, 비록 성문을 지키고 야경을 도는
변변치 못한 자리라도 얻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성내어서 분주히 달려가는 것으로 출세의 길을 삼고 뇌물을 쓰는
것으로 벼슬에 나아가는 발판을 삼으면서도 낯가죽이 두꺼워 수치심이 없고, 무지해서 아는 것이 없는데도 비궁
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아, 우서(虞書)에 구관(九官)을 임명한 것이나, 상훈(商訓)의 벼슬하는 이를 경계한 것이나, 〈주관(周官)〉에서
육직(六職)으로 나눈 것은 모두 안팎의 모든 벼슬을 총괄하여 정한 것이니, 위로는 이것으로써 훈계하고 인도하
려 하였고, 아래로는 이것으로써 서로 깨우치고 경계하였으니, 그 상하 사이에서 권하고 경계함의 깊고 간절함
이 후세에서 미칠 수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왕우칭(王禹稱)은 〈대루원기(待漏院記)〉를 지어서 재상들만 경계하고 일반 관리에게는 미치지 않았
던가? 선성(先聖)이 말하기를, '임금되기도 어렵고 신하되기도 쉽지 않다.' 하였으니, 임금 되기 어렵다는 것은
성상(聖上)은 밤낮으로 부지런히 정사하는 것을 본받아 행해야 하기 때문이고, 신하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신
하들로서 그것을 아는 이가 적기 때문이다. 진실로 신하되기가 쉽지 않은 줄을 안다면 비궁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이고, 또 비궁의 뜻을 안다면 신하된 직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써서 벼슬 자리에 있는 이들을 경계하고, 이어서 이것으로 내 자신을 경계하노라." 하였다.
단묘 사직단(社稷壇) : 경성(京城) 안 서쪽 인달방(仁達坊)에 있는 것으로, 사(社)는 동쪽에 있고 직(稷)은 서쪽에
있다. 두 단은 각각 둘레는 2장 5척이고, 높이는 3척이며, 사방의 섬돌은 각각 3급(級)이다.
단의 장식은 그 방위(方位)의 빛깔을 따르고 누런 흙으로 덮었다. 사(社)에는 돌로 된 신주(神主)가 있는데,
길이는 2척 5촌이고, 둘레는 1척이며, 위는 뾰족하게 하고 밑은 흙으로 복돋았는데 반이 단의 남쪽 섬돌 위에 당
한다. 사방의 문은 담을 같이하고 있는데 모로는 25보(步)로 담을 두르고 있다. 국사(國社)와 국직(國稷)의 신좌
(神座)는 나란히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있는데, 후토신(后土神)은 국사에 짝하였고 후직신(后稷神)은 국직에 짝
하였다. 각각 바른 위치의 왼쪽에 있으면서 북쪽 가까이에 있으면서 동쪽을 향했다.
○ 《사전(祀典)》에는 대사(大祀)에 실려 있다.
풍운뇌우산천성황단(風雲雷雨山川城隍壇) : 남교(南郊)에 있는데, 둘레는 2장 3척이고, 높이는 2척 7촌이며,
사방에 섬돌을 놓았고, 두 낮은 담은 25보이다. 바람ㆍ구름ㆍ우레ㆍ비의 신좌(神座)는 복판에 있고, 산천은 왼
쪽에 있으며, 성황은 오른쪽에 있는데, 모두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있다.
악해독단(嶽海瀆壇) : 남교(南郊)에 있다. 그 제도는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과 같은데, 오직 낮은 담 하나가
있으며, 단은 없고 사당 세 칸이 있다.
○ 악(嶽)은, 남악(南岳)은 지리산으로 남원(南原)에 있고, 중악은 삼각산(三角山)이고, 서악은 송악(松嶽)으로
개성(開城)에 있고, 북악은 비백산(鼻白山)으로 정평(定平)에 있다.
○ 바다는, 동해(東海)는 양양(襄陽)에 있고, 남해는 나주(羅州)에 있으며, 서해(西海)는 풍천(豊川)에 있다.
○ 독(瀆)은, 남으로는 웅진(熊津)은 공주(公州)에 있고, 가야진(伽倻津)은 양산(梁山)에 있으며, 중(中)은 한강
이고, 서쪽으로는 덕진(德津)은 장단(長湍)에 있고, 평양강(平壤江)은 평양에 있으며, 압록강은 의주(義州)에
있고, 북쪽으로는 두만강은 경원(慶源)에 있다.
선농단(先農壇) : 동교(東郊)에 있다. 그 제도는 풍운뇌우단과 같고, 신좌는 북에서 남을 향해 있다. 성종 7년에
두 단의 남쪽 10보쯤에 관경대(觀耕臺)를 만들고, 1월에는 임금이 친히 선농단에 제사하고 적전(籍田)의 예를
행하였다.
선잠단(先蠶壇) : 동교에 있다. 그 제도는 풍운뇌우단과 같고, 신좌는 북에서 남을 향해 있다.
성종 9년 봄에 또 창덕궁 후원에 단을 쌓고 왕비가 명부(命婦)들을 거느리고 친히 제사하고 친잠(親蠶)의 예를
행하였다. 우사단(雩祀壇) : 동교에 있다. 그 제도는 풍운뇌우단과 같고, 오직 둘레가 4장이다.
구망(句芒)ㆍ축융(祝融)ㆍ후토(后土)와 욕수(?收)ㆍ현명(玄冥)ㆍ후직(后稷)의 신좌(神座)는 모두 북쪽에서
남을 향해 서쪽으로 향해 있다.
○ 이상은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영성단(靈星壇) : 남교(南郊)에 있다. 둘레는 2장 1척이고, 높이는 2척 5촌이며, 사방에 섬돌이 있고, 담이 하나
인데 25보이다. 신좌는 북에서 남을 향해 있다. 노인성단(老人星壇) : 남교에 있다.
마조선목마사마보단(馬祖先牧馬社馬步壇) : 모두 동교에 있다. 마제단(?祭壇) : 동교와 북교에 있다.
사한단(司寒壇) : 남교에 있다. 그 제도는 영성단(靈星壇)과 같다.
명산대천단(名山大川壇) : 제도는 영성단과 같다. 신좌는 북에서 남을 향해 있는데, 단은 없고 사당 세 칸이 있다.
○ 명산으로는 동쪽에는 치악산(雉岳山)으로 원주(原州)에 있고, 남쪽에는 계룡산(鷄龍山)으로 공주(公州)에 있
으며, 죽령산(竹嶺山)은 단양(丹陽)에 있고, 우불산(?佛山)은 울산(蔚山)에 있으며,
주흘산(主屹山)은 문경(聞慶)에 있고, 금성산(錦城山)은 나주(羅州)에 있으며, 중부(中部)는 목멱산(木覓山)이고,
서쪽에는 오관산(五冠山)은 장단(長湍)에 있고, 우이산(牛耳山)은 해주에 있으며,
북쪽에는 감악산(紺岳山)은 적성(積城)에 있고, 의관산(義館山)은 회양(淮陽)에 있다.
○ 대천(大川)으로는 남쪽에는 양진명소(楊津溟所)는 충주(忠州)에 있고, 양진은 양주(楊州)에 있으며, 서쪽에는
장산곶(長山串)은 장연(長淵)에 있고, 아사진(阿斯津) 송곶(松串)은 장련(長連)에 있으며,
청천강(淸川江)은 안주(安州)에 있으며, 구진익수(九津溺水)는 평양에 있으며,
북쪽에는 덕진명소(德津溟所)는 회양(淮陽)에 있고, 비류수(沸流水)는 영흥에 있다.
○ 만일 가뭄이 들어 기도할 때에는 북교에 악(岳)ㆍ해(海)ㆍ독(瀆) 및 모든 산천의 신위(神位)를 각각 그 방위에
설치하는데, 모두 안으로 향하게 한다.
여단(?壇) : 북교에 있는데, 그 제도는 영성단과 같다. 신좌는, 성황은 단 위의 북에서 남으로 향하였고, 제사지낼
주인이 없는 귀신은 단 아래 좌우에 두어 서로 향하게 하였다.
○ 이상은 소사(小祀)에 실려있다.
종묘(宗廟) : 경성 안 동쪽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태실(太室)이 가운데에 있는데, 남쪽으로 향하였고 모두 일곱
칸이다. 앞에는 세 계단이 있고, 동서에는 각각 협실(夾室) 두 칸이 있으며, 협실 남쪽에는 각각 낭정(廊庭)이 있
고, 또 동서에는 각각 세 칸의 사당이 있으며, 서쪽에는 7사(祀)의 신주를 모시고, 동쪽에는 배향(配享)하는 공신
들의 신주를 모셨다.
신좌는 태조(太祖)가 1위(位) 소목(昭穆)이 각각 2위로 각각 실내(室內)에서 남쪽으로 향하였는데, 서쪽을 상(上)
으로 하였다. 7사 신주의 자리는 묘정(廟庭)의 서쪽에 있어 동으로 향하였고, 공신들의 신좌는 사당 뜰에 있는데,
동서로 향하였다.
영녕전(永寧殿) : 종묘의 서쪽 대실(大室)에 있다. 북에서 남을 향해 앉았는데, 모두 네 칸이다. 앞에는 세 계단이
있는데, 천주(遷主)를 봉안하였다.
○ 이상은 대사(大祀)에 실려 있다.
문소전(文昭殿) : 경복궁 성 안의 동쪽에 있다. 후침(後寢)이 다섯 칸, 전전(前殿)이 세 칸으로 각각 감실(龕室)
있고, 앞에는 세 계단이 있다. 신좌는 전전에는 태조가 중앙에 있어 남으로 향하였고, 소(昭) 2위는 동에서 서로
향해 있으며, 목(穆) 2위는 서쪽에서 동으로 향하였다. 후침에는 모두 북에서 남으로 향하였는데 서를 상(上)으
로 하였다.
삭망(朔望)에는 후침에 제사지내고, 사시(四時)의 대향(大饗) 때에는 신주를 전전에 모셔 내어 합하여 제사지
낸다.
○ 참봉(參奉) 두 사람이 있다.
연은전(延恩殿) : 경복궁 성 안의 서북 모퉁이에 있다. 성종 때에 명 나라 조정에 주청(奏請)하여 덕종(德宗)을
추존하여 회간왕(懷簡王)을 삼고 종묘에 부제(?祭)하고는 곧 이 전을 세우고 신주를 봉안하였다.
향사(享祀)는 문소전에서 지낸다.
○ 참봉 두 사람이 있다.
효사묘(孝思廟) :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다.
문묘(文廟) : 성균관 명륜당의 남쪽에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북에서 남을 향해 앉았는데, 모두 다섯 칸이다.
앞에는 두 계단이 있으며, 동서에는 각각 무(?)가 있다. 신주(神廚)는 서무(西?)의 서북에 있고, 전사청(典祀廳)
은 또 그 서쪽에 있다.
○ 신좌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은 중앙에 있어 남으로 향하였고, 그 배향(配享)으로는 곤국복성공
(袞國復聖公) 안자(顔子)와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 자사(子思)는 정위(正位)의 동남에 있어 서로 향하였으며,
성국종성공(?國宗聖公) 증자(曾子)와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 맹자(孟子)는 정위(正位)의 서남에 있어 동으로
향하였는데, 모두 북으로 상(上)을 삼았다.
전(殿) 안의 종향(從享)으로는 비공(費公) 민손(閔損)ㆍ 설공(薛公) 염옹(?雍)ㆍ여공(黎公) 단목사(端木賜)ㆍ
위공(衛公) 중유(仲由)ㆍ위공(魏公) 복상(卜商)은 동쪽 벽에서 모두 서쪽으로 향하였고,
운공(?公) 염경(?耕)ㆍ제공(齊公) 재여(宰予)ㆍ서공(徐公) 염구(?求)ㆍ오공(吳公) 언언(言偃)ㆍ영천후(穎川候)ㆍ
전손사(? 孫師)는 서쪽 벽에 있어 나란히 동으로 향하였는데, 모두 북을 상으로 하였다.
동무(東?)의 종향으로는 금향후(金鄕侯) 담대멸명(澹臺滅明)ㆍ임성후(任城侯) 원헌(原憲))ㆍ여양후(汝陽侯)ㆍ
남궁괄(南宮适)ㆍ내무후(萊蕪侯) 증점(曾點)ㆍ수창후(須昌侯) 상구(商瞿)ㆍ평여후(平輿侯) 칠조개(漆雕開)ㆍ
수양후(?陽侯) 사마경(司馬耕)ㆍ평음후(平陰侯) 유약(有若)ㆍ동아후(東阿侯) 무마시(巫馬施)ㆍ양곡후(陽穀侯)
안신(顔辛)ㆍ상채후(上蔡侯) 조휼(曹?)ㆍ지강후(枝江侯) 공손룡(公孫龍)ㆍ풍익후(馮翊侯) 진상(秦商)ㆍ뇌택후
(雷澤侯) 안고(顔高)ㆍ상규후(上?侯) 양사적(壤駟赤)ㆍ성기후(成紀侯) 석작촉(石作蜀)ㆍ거평후(鉅平侯) 공하수
(公夏首)ㆍ교동후(膠東侯) 후처(后處)ㆍ제양후(濟陽侯) 해용잠(奚容箴)ㆍ부평후(富平侯) 안조(顔祖)ㆍ전양후
(全陽侯) 구정강(句井彊)ㆍ견성후(甄城侯) 진조(秦祖)ㆍ즉묵후(卽墨侯) 공조구자(公祖句?)ㆍ무성후(武城侯)
현성(縣城)ㆍ연원후(?源侯) 연급(燕伋)ㆍ완구후(宛句侯) 안지복(顔之僕)ㆍ건성후(建城侯) 악해(樂?)ㆍ당읍후
(堂邑侯) 안하(顔何)ㆍ임려후(林慮侯) 적묵(狄墨)ㆍ운성후(?城侯) 공충(孔忠)ㆍ서성후(徐城侯) 공서잠(公西箴)ㆍ
임복후(臨僕侯) 시지장(施之掌)ㆍ화정후(華亭侯) 진천(秦川)ㆍ문등후(文登侯) 신정(申?)ㆍ제음후(濟陰侯) 안쾌
(顔?)ㆍ사수후(泗水侯) 공리(孔鯉)ㆍ난릉백(蘭陵伯) 순황(荀況)ㆍ수양백(?陽伯) 곡량적(穀梁赤)ㆍ내무백(萊蕪
伯) 고당생(高堂生)ㆍ약수백(藥壽伯) 모장(毛?)ㆍ팽성백(彭城伯) 유향(劉向)ㆍ중모백(中牟伯) 영중(●衆)ㆍ
후지백(?氏伯) 두자춘(杜子春)ㆍ양향후(良鄕侯) 노식(盧植)ㆍ영양백(榮陽伯) 복건(服虔)ㆍ사공(司空) 왕숙(王肅)ㆍ
사도(司徒) 두예(杜預)ㆍ창려후(昌黎侯) 한유(韓愈)ㆍ예국공(豫國公) 정호(程顥)ㆍ신안백(新安伯) 소옹(邵雍)ㆍ
온국공(溫國公) 사마광(司馬光)ㆍ화양백(華陽伯) 장식(張?)ㆍ위국공(魏國公) 허형(許衡)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였다.
서무(西?)의 종향에는 선보후(單父侯) 복부제(宓不齊)ㆍ고밀후(高密侯) 공야장(公冶長)ㆍ북해후(北海侯) 공석애
(公晳哀)ㆍ풍부후(豊阜侯) 안무요(顔無繇)ㆍ공성후(共城侯) 고시(高柴)ㆍ수장후(壽長侯) 공백료(公伯寮)ㆍ
익도후(益都侯) 번수(樊須)ㆍ거야후(鋸野侯) 공서적(公西赤)ㆍ천승후(千乘侯) 양전(梁?)ㆍ임기후(臨沂侯) 염유
(?孺)ㆍ목양후(沐陽侯) 백건(伯虔)ㆍ제성후(諸城侯) 염계(?季)ㆍ복양후(●陽侯) 칠조차(漆雕?)ㆍ고원후(高苑侯)
칠조도보(漆雕徒父)ㆍ추평후(鄒平侯) 상택(商澤)ㆍ당양후(當陽侯) 임부제(任不齊)ㆍ모평후(牟平侯) 공량유(公
良孺)ㆍ신식후(新息侯) 진염(秦?)ㆍ양문후(梁文侯) 공견정(公肩定)ㆍ요성후(聊城侯)ㆍ효단(●單)ㆍ기향후(祈鄕
侯) 한문묵(罕文墨)ㆍ유천후(溜川侯) 신당(申黨)ㆍ염차후(厭次侯) 영기(榮?)ㆍ남화후(南華侯) 좌인영(左人?)ㆍ
구산후(?山侯) 정국(鄭國)ㆍ낙평후(樂平侯) 원항(元亢)ㆍ조성후(?城侯) 염결(廉潔)ㆍ박평후(博平侯) 숙중회(叔
中會)ㆍ고당후(高堂侯) 규손(?巽)ㆍ임구후(臨?侯) 공서여(公西輿)ㆍ여내황후(如內黃侯) 거백옥(?伯玉)ㆍ장산후
(長山侯) 임방(林放)ㆍ남중후(南中侯) 진항(陳亢)ㆍ양평후(陽平侯) 금장(琴張)ㆍ박창후(博昌侯) 보숙승(步叔乘)ㆍ
중도백(中都伯) 좌구명(左丘明)ㆍ임치백(臨淄伯) 공양고(公羊高)ㆍ승지백(乘氏伯) 복승(伏勝)ㆍ고성백(考城伯)
대성(戴聖)ㆍ강도백(江都伯) 동중서(?仲舒)ㆍ곡부백(曲阜伯) 공안국(公安國)ㆍ기양백(岐陽伯) 가규(賈逵)ㆍ
부풍백(扶風伯) 마융(馬融)ㆍ고밀백(高密伯) 정강성(鄭康成)ㆍ임성백(任城伯) 하휴(何休)ㆍ언사백(偃師伯) 왕필
(王弼)ㆍ신야백(新野伯) 범녕(范寗)ㆍ도국공(道國公) 주돈이(周敦?)ㆍ낙국공(洛國公) 정이(程?)ㆍ미백(?伯)
장재(張載)ㆍ휘국공(徽國公) 주희(朱熹)ㆍ개봉백(開封伯) 여조겸(呂祖謙)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였는데,
모두 북쪽을 상으로 삼았다. 본국(本國)의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ㆍ문창공(文昌公) 최치원(崔致遠)ㆍ문성공
(文成公) 안유(安裕)는 서무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였는데, 서쪽으로 상을 삼았다. 중사에 실려 있다.
○ 변계량(卞季良)의 비명(碑銘)에, "영락(永樂) 7년 기축년 가을 9월에 국왕 전하께서 신 계량에게 명하여 이렇
게 이르기를, "우리 선고(先考) 태조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비로소 나라를 이룩하여 도읍을 한양에 정하고,
서둘러 묘학(廟學)을 세웠으니, 선성(先聖)을 높이고 문교(文敎)를 소중히 여긴 까닭이다.
나는 그 큰 업을 이어 받들어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 다시 묘궁(廟宮)을 중수하여 이미 이루었다.
학관(學官) 최함(崔?) 등이 글을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하기를 청하니, 그대는 붓을 들어 지으라." 하셨다.
신 계량은 그 명을 받고 황송하여 물러나와 그 전말을 기록한다. 갑술년에 태조가 이미 도읍을 정하매,
종사(宗社)와 조시(朝市)ㆍ성곽(城廓)ㆍ궁실(宮室)이 모두 알맞게 갖추어졌다.
그리하여 다시 묘학(廟學)을 지으려고 도읍의 동북 모퉁이에 땅을 가리니, 산은 그치고 땅은 펀펀하며,
물은 돌아 흐르는데, 그 위치는 남쪽을 향하였다.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신 민제(閔霽)에게 명하여 경영하게 하매, 그는 목수들을 모으고 재목을 갖추어 정축
년 3월에 시작하여 무인년 7월에 성철(聖哲)의 높은 집과 종사(從祀)하는 방서(旁序)의 일을 마쳤다.
태학은 종묘 뒤에 있는데, 가운데는 명륜당(明倫堂)이며, 좌우에는 협인(夾引)이 있고, 양협(兩夾)의 남쪽에는
길다란 집을 세웠다. 왼쪽 협 동쪽에 청랑(廳廊)을 두니 사생(師生)의 위치와 학정(學正)ㆍ학록(學錄)의 거처가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규모는 크고 넓으며, 그 얽고 쌓은 것이 튼튼하고 크고 작은 칸의 수는
96이다. 전토(田土)를 두어 제사에 쓸 쌀을 제공하며, 생도들을 먹이고 복호(復戶)하여 응대(應對)와 쇄소(?掃)
로 심부름 시키기에 넉넉하니 묘학(廟學)의 일이 구비되었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진년 2월에 화재를 만났다.
그해 11월에 전하께서 송경(松京)에서 즉위하고 태학에 나아가 선성(先聖)을 뵙고, 맏아들을 태학에 들어가게
하였다. 기유년에 환도(還都)하여 친히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의 제사를 지내고, 3년을 지나 정해년 1월에 묘
(廟)의 옛터에 새로 짓도록 명하였다.
성산군(星山君) 신 이직(李稷)과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 신 박자청(朴子靑)이 역사의 감독을 맡아 밤낮으
로 감독하고 살펴서 마음에 계획하여 지휘하니, 목수들도 힘을 다하여 4개월 만에 묘(廟)가 이루어지니, 높고
깊고 단정하고 크기가 옛것에 비해 더욱 훌륭하였다.
신주(神廚)는 묘(廟)의 서쪽에, 동서의 문은 양서(兩序)의 아래에 세우고, 전토(田土)와 노비를 더 주니, 전토는
만여 묘이고 인구(人口)는 3백 명이나 되었다.
의정부 좌의정 신 하륜(河崙)의 의견을 받아들여 성국종성공 중자와 기국술성공 자사를 배위(配位)에 올리고,
자장(子張)을 십철(十哲)의 묘궁(廟宮)에 올리니, 더욱 유감이 없었다.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성인의 도는 크기 때문에 칭찬할 수가 없으니, 비록 억지로 무어라 말하더라도 그것은
천지와 일월을 그리는 것과 거의 다를 것이 없다. 우리 부자(夫子)께서 주 나라 말기에 태어나서 여러 성인들을
집대성하고 절충하여 모든 왕의 큰 법을 만들어 교훈을 펴시니, 그 공은 천지의 처음 생긴 조화(造化)보다도 지
극하고, 그 은택은 무궁토록 흐르니, 인류가 생긴 뒤로 그처럼 훌륭한 이가 없었다.
재여(宰予)의 이른바 요순(堯舜)보다도 훌륭하다 한 것이 까닭이 있는 것이다.
당 나라로부터 이후로 하늘에까지 닿고 땅에 두루하여 사당이 곳곳에 세워져 높여 제사함이 변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우리 동방은 옛날부터 그 풍속이 예의를 숭상하여 기자(箕子)의 8조의 교훈과 떳떳한 윤리의 질서를
받들어 법도와 문물의 갖추어짐이 중국과 짝하였다.
우리 부자께서 일찍이 와서 살고자 하신 뜻이 있었으니, 묘학을 경영해 세우고 문교를 일으켜 숭상한 것은 원래
다른 나라에 견줄 바가 아니다.
삼가 생각건대, 태조 강헌대왕이 천명에 순응하고 인심을 따라서 처음으로 큰 업을 이룩하여 동방을 차지하여
도읍을 정하던 초기에 곧 먼저 성인의 제사를 높이고 유학을 일으켰으니,
이는 그 덕을 높이고 도를 즐기는 정성이 천성(天性)에서 나와 우뚝히 정치를 하는 근본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급선무로 여기는 데에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손에게 규모를 끼쳐 주어 사람의 마음을 착하게 하고
나라의 명맥을 길게 한 것이 아, 지극하기도 하도다. 전하는 인자하고 효도하며, 겸손하고 공손하며, 강건하고
슬기로워서 선대의 업을 빛나게 이어받았다. 정사하는 여가에 경사(經史)를 즐겨 보아 매양 밤중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학문을 다하였고, 지영수성(持盈守成)의
도를 다하였으니, 그것은 옛날에 찾아 보아도 전혀 없었던 일이다.
세도(世道)가 한창 형통하고 인문(人文)이 밝아지매, 당시의 훈친(勳親) 대신들과 백관(百官)들로부터 숙위(宿
衛)하는 신하에 이르기까지도 학문에 뜻을 두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은 어찌 우리 태조가 문(文)을 숭상하
여 교화를 일으켜 인재를 길렀고, 우리 전하가 선대의 공업을 넓히고 크게 하여 위에서 몸소 행함으로써 많은
선비들을 격려하고 이 백성들을 진작시켰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학업을 연마하는 데에는 학(學)이 있고,
제사를 받드는 데에는 묘(廟)가 있으니, 주선하고 오르내릴 때에 삼가 성현을 대하듯이 하여, 보고 느껴서 떨쳐
일어나 부지런히 힘써서 순서있게 문에서 당(堂)에 오르고, 당에서 방에 들어가기를 구한다면 덕을 이루고 재목
을 성취하여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베풀 자가 잇따라 나올 것이니, 점차로 삼대(三代) 때에 인재를
만들어 내던 것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그것이 오직 보는 것을 고치고 듣는 것을 바꾸어 한 때를 빛낼 뿐이겠는가?
진실로 우리 조선 종사(宗社)의 만세(萬世)의 복이다. 신 계량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명(銘)을 드리나이다."
하였다. 그 명에, "아, 선성(宣聖)이 때맞추어 태어나서 포희(包羲)부터 주공(周公)까지를 집대성하였도다.
인류가 생긴 이후로 누가 그 거룩함을 견주랴. 크게 빛나도다. 높여 제사지냄이 온 천하에 두루 하였네.
하물며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은 우리나라는 예의(禮義)를 먼저 하였음에랴? 제사지내고 읍양(揖讓)하는 것
은 옛날의 법칙을 따라 그러하였네. 하늘이 태조를 내려 주시니 신(神)하고 성(聖)하고 무(武)하고 문(文)하셨네.
황제의 명을 밝게 받들어 능히 큰 공을 이루었네. 거룩한 신도(神都)는 한강의 언덕이라네. 이에 학궁(學宮)을
경영해 지으니 성묘(聖廟)가 중앙에 있도다. 제사드리고 강습(講習)하매, 많은 선비들이 그림자처럼 따르네.
밝고 밝도다. 우리 왕이여! 왕업을 이어받아 공을 더 쌓았네. 성인의 학문을 밝게 계승하매 고금에 짝할 이 드무
네. 우뚝하도다. 새 학궁(學宮)이여! 새로 종사한 두 분을 제사에 올렸도다. 세자가 입학하니 나라의 근본이 중
해졌도다. 내가 짓고 내가 기술하매 성인을 높이도다. 인재는 거기서 길러지고 풍속과 교화는 거기서 아름다워
진다. 누군들 착한 본성이 없어 자포자기(自暴自棄)할 것인가? 사람들은 날로 학문에 나아가고 세상은 날로 태
평 시대가 되어 가네. 삼왕(三王)ㆍ오제(五帝)와 같이 되기를 날짜를 정하고 기대하네. 화산(華山)은 높고 한수
(漢水)는 쉴 새 없이 흘러가네. 나라와 함께 끝이 없기는 성인의 제사로다. 돌에다 글을 새기어 영원히 후세에
보이노라." 하였다.
○ 권근(權近)이 지은 신간 <석전의식발문(釋奠儀式跋文)>에, 옛날에 태학에서 석전(釋奠)하는 예는 지극히 간
단하고 자세한 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당 나라의 개원례(開元禮)와 송 나라의 정화신의(政和新儀)가 있었으나,
그 또한 폐해져서 대부분 행해지지 않았다.
자양(紫陽) 주문공(朱文公)이 늘 이것을 탄식하면서 여러 번 거행하기를 청하였고, 또 그 절차를 고치는 데에 뜻
을 두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영국부학(寧國府學)에서 간행한 의식(儀式)은 선유(先儒) 맹군(孟君) 지진
(之縉)이 자양의 <석전의(釋奠儀)>와 <호학면복도(湖學冕服圖)>를 취해서 한 편을 만들면서 <석전수지(釋奠須
知)>와 <창주사채의(滄洲舍菜儀)>도 아울러 그 뒤에 실었다. 신위(神位)의 향배(向背)와 제기(祭器)와 제복(祭
服)의 제도와 저 오르내리며 잔을 드리는 의식이 모두 갖추어져 실리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이른바 자양의(紫陽儀)라는 것도 개원 시대의 옛 제도를 따른 것으로 문공(文公)이 일찍이 개정하려 하
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건문(建文) 경진년에 전라도 관찰사 함공(咸公)이 주현(州縣)의 석전 의식의 잘
못됨을 애석히 여겨 나라에 아뢰어 그 의식에 관한 글을 성균관에서 찾아서 장차 판목(板木)에 새기려고 전주부
윤(全州府尹) 유공(柳公)에게 부탁하였더니, 그도 기꺼이 승낙하였다.
얼마 안 되어 염찰사(廉察使) 조공(趙公)이 함공을 대신해 가서 그것을 이어받아 공사를 감독하는 데에 더욱 힘
썼다. 이때에 판관 허군(許君)은 일찍이 성균관에 있으면서 이 예를 강구하여 매우 밝은 사람으로 그가 구한 의
식에 관한 글이 완전치 못함을 보고, 마침내 조공에게 아뢰어 다시 나라에 아뢰어 비로소 영국(寧國)의 전문(全
文)을 얻어 발간하였다.
또 원 나라 때의 지원의식(至元儀式)까지 거기에 덧붙였다. 이것은 그 절차의 선후가 문공이 개정하려던 것과 거
의 가까웠다.
그러므로 지금 성균관에서 그것을 그대로 쓰고, 이것을 영국의 글에 덧붙였으니, 석전의 예문이 찬란히 모두 구
비되어 완전한 책을 이루어 후세에 전할 만하게 된 것이다. 여러 군자들이 여기에 정성을 다한 것은 반드시 예를
다하여 선성의 제사를 지내려 해서이니, 묘학(廟學)에 공이 있고 또 풍화에 도움이 있음이 참으로 가상하다.
○ 이숙감(李淑?)의 전사청(典祀廳) 기문에, "문묘가 있음으로부터 곧 이 제사지내는 법이 있게 되었다.
한 달에는 삭망에 제사지내고, 한 해에는 춘추(春秋)로 제사지내는데, 반드시 서무(西?)의 빈방을 빌어 제물을
만드는 장소로 삼았다.
또 악기를 신문(神門) 옆의 노천(露天)에 두매, 바람과 비가 들이쳐 썩어 망가지기 쉬웠다. 사생(師生)으로서 묘
정(廟庭)에 종사하는 자들은 오랫동안 이것을 근심하였다.
임진년 가을에 대사성 이극기(李克基)가 지관사(知館事) 서거정(徐居正)과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와 의논하고
이 일을 자세히 아뢰었더니, 임금께서는 재목과 기와와 목수를 내려 주시고, 이어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종들
을 부려 짓게 하였다.
드디어 서무(西?)의 서쪽 빈땅을 가려 동쪽에는 세 칸을 지어 악기를 보관하고, 남쪽에는 네 칸을 지어 제물을
만드는 곳으로 쓰게 하였다. 그리고 그 동서 양쪽에 담을 쌓아 튼튼하게 하였다.
이윽고 제사를 올려 그 사유를 고하고, 그 서쪽 벽에 문을 내어 출입을 편리하게 하니, 다섯 달이 걸려서 완성되
었다. 나는 생각건대, 인류가 생긴 이후로 공자 같은 이가 없었으니, 그의 훌륭함은 요순(堯舜)보다도 나으니,
우뚝히 남면(南面)으로 모시어 영원토록 떳떳한 제사를 지냄이 당연하다.
노애공(魯哀公) 때부터 송원(宋元)에 이르기까지 각각 제사지내는 예와 높이는 법이 있었던 것은 역사에 갖추어
져 있으므로 상고할 수 있다.
우리 태조 강헌대왕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는 맨 먼저 문묘(文廟)를 세우매 묘(廟)가 빛났는데, 여러 임금께서
서로 이어 그 아름답게 꾸밈을 더하였다. 지금까지 70여 년 동안 선성(先聖)을 높이고 제사를 소중히 여겨 그 예
문과 정성과 공경이 지극하면서도 청사(廳舍)가 없었던 것은 어찌 오늘을 기다림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겠
는가?
삼가 생각건대, 주상 전하는 하늘이 내신 위대한 성인으로 태평의 운수를 누리어 몸소 묘(廟)에 알현하는 예를 행
하여 문교(文敎)가 성하게 일어나고, 또 태뢰(太牢)의 제사를 거행하여 그 제사가 지극히 풍성하니, 그 근본을
복돋우고 선비들을 격려하심은 바로 주왕(周王)의 〈한록(旱麓)〉시와 그 기틀을 같이하는 것으로 여러 대에
미처 하지 못했던 전례(典禮)가 하루 아침에 거행되어 묘정(廟庭)의 일이 마쳐졌으니,
이것은 바로 우리 유도(孺道)의 하나의 큰 다행이라 하겠다.
아, 한 나라 고조(高祖)가 선비에게 거만하여 관(冠)에 오줌을 싸고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으니, 시서(詩書)를
어찌 일삼으랴?' 하였지만, 노 나라에서의 한 번 제사가 오히려 한 나라의 4백 년의 운수를 터 닦았는데, 하물며
임금님이 도를 소중히 여기고 선비를 높여 제사지내는 법을 엄하게 하고 묘(廟)의 제도를 새롭게 하는 아름다운
뜻이 이와 같으니, 우리 조선의 억만년의 무궁한 명맥과 정신이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신증 지금 임금 12년에 고려 시중 정몽주(鄭夢周)를 서무에 종향(從享)하였다.
독신묘(纛神廟) : 예조의 서쪽에 있고, 신좌는 북에서 남으로 향하였다.
원유 경복궁후원(景福宮後苑) : 서현정(序賢亭)ㆍ취로정(翠露亭) ㆍ관저전(關雎殿)ㆍ충순당(忠順堂)이 있다.
창덕궁후원(昌德宮後苑) : 창경궁 후원과 통해 있다. 여기에는 열무정(閱武亭)이 있고,
그 정자 곁에는 우물 네 개가 있으니, 마니(摩尼)ㆍ파려(??)ㆍ유리(琉璃)ㆍ옥정(玉井)으로 세조 때에 판 것이다.
○ 최항(崔恒)의 서문에,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6년 겨울 11월에 창덕궁으로 옮겼다. 임금께서는 본시 샘물
을 사랑하였는데, 하루는 영순군(永順君) 신 보(溥)에게 팔 만한 곳을 찾게 하여 광연정(廣延亭) 남쪽을 얻어서
팠더니, 그 물이 맑고 차서 먹을 만하였다. 계양군(桂陽君) 신 증(?)이 인정전(仁政殿) 앞을 팠더니,
옛날의 도랑이었다. 그곳을 묻어 버리고, 그 뒤에 또 보 등에게 명하여 후원 서쪽과 수강궁(壽康宮) 북쪽에서
찾았으나, 모두 더럽고 낮기 때문에 버렸다.
임금께서는 열무정(閱武亭) 옆에 맛있는 샘물이 있으리라 생각하시고, 보와 오산군(烏山君) 신 주(澍) 등을 불
러 좌우로 나누어 살펴보았더니, 과연 정자 옆에서 각각 두 군데씩을 찾았는데, 모두 반석 틈에서 물이 나와
깨끗하고 맛도 매우 좋았다.
임금님은 매우 기뻐하여 보 등에게 빨리 파게 하고, 고운 돌을 갈아 벽돌처럼 쌓으니, 그 모양이 쳐들고 있는
가마솥과 같으며, 겨우 물이 두어 섬쯤 있어서 사람이 엎드려 물을 뜰 만하였다. 공사가 끝나자, 임금님은 가장
좋은 우물을 마니(摩尼)라 하고, 다음은 파려(??), 다음은 유리(琉璃), 다음은 옥정(玉井)이라고 이름하여 각각
차등을 두어 불렀다. 그리고 각각 돌로 우물 위에 현판을 붙이고, 임금이 친히 <마니정가(摩尼井歌)> 한 편을
짓고, 또 간단히 해설하여 신하들에게 보이고 각기 우물 하나씩에 대해 시를 지어 화답하라 하셨다.
권 2 경도 하
문직공서 종친부(宗親府) : 북부 관광방(觀光坊)에 있다. 종실(宗室) 여러 군(君)의 관부이다.
그 속사(屬司)로는 전첨사(典籤司)가 부속되어 있다.
○ 종친은 정해진 수가 없고, 전첨(典籤)이 1명인데 정4품이고, 전부(典簿)가 1명인데 정5품이다.
의정부(議政府) : 광화문(光化門) 남쪽 왼편에 있고, 하나는 창덕궁 인정전 서쪽에 있다. 그 직임은 백관을 통솔
하고 모든 정사를 다스리며, 음양(陰陽)을 고르게 하고 나라를 경륜하는 것이다. 부속으로는 사인(舍人)과 검상
(檢詳)의 두 관사가 있다.
○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이 각각 1명씩인데 정1품이고, 좌찬성ㆍ우찬성이 각각 1명씩인데 종1품이고,
좌참찬ㆍ우참찬이 각각 1명씩인데 정2품이고, 사인이 2명인데 정4품이고, 검상이 1명인데 정5품이고,
사록(司錄)이 2명인데 정8품이다.
○ 이극감(李克堪)이 지은 사인사(舍人司) 제명기(題名記)에, "만기(萬機)의 번거로운 일을 임금 한 사람이 능히
다스릴 수 없으므로 재상(宰相)을 두고, 재상도 혼자 다스리지 못하므로 보좌하는 속관을 두는 것이다.
한 나라의 일은 정승에게 위임하는데, 정승이 날마다 같이 국정을 계획하고 논의하는 자는 보좌하는 속관이다.
주 나라에는 재사(宰士)가 있었고, 한 나라에는 승상 장사(丞相長史)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그 관직이다.
고려에서는 도평의사(都評議司)가 국사를 총괄하고, 그 밑에는 경력(經歷)과 도사(都事)를 두었는데,
모두 다른 관직에 있는 자로 이를 겸임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정부를 설치하여 주 나라의 삼사(三師)와 삼소(三少)의 관직을 모방하여 재상의 직위와 명호
를 바르게 하고, 또 사인 2명을 두어 돕게 하되, 상신(相臣)으로 하여금 스스로 임용하게 한 것은 임명을 신중히
하기 위함이었다. 사인사(舍人司)에 전에는 제명기(題名記)가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종이가 더러워지고
먹물이 흐려졌으므로, 노숙동(盧叔仝)이 사인으로 있은 지 몇 해 안 되어 호남 지방의 관찰사로 나가 있으면서
《제명책(題名冊)》 한 권을 만들어 보냈는데, 보관하는 궤도 마련해 주었다. 드디어 그 새 책에 등사하여 그 전
책과 같이 보관해 두었으니, 옛것도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사인 벼슬에 선임되는 자가 윗사람에게 옳은 일은 말해 주고 그른 것은 고치게 하기를 생각지 않고, 그냥 명령에
공손히 답하여 받들기에만 힘쓴다면 하나의 이원(吏員)에 불과할 것이니, 어찌 국가에서 이를 설치한 본의가 되
겠는가? 이 점을 뒤에 오는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 전인(前人 이극감)이 지은 검상사(檢詳司) 제명기에, "정부에서 여러 관사를 총괄하여 다스리는데, 사인과 검
상 두 사(司)를 설치하여 보좌하는 속관으로 삼고 모든 일을 나누어 맡게 하였으니, 가려서 임명하는 것이 중요
하다.
갑오년 의정부의 서사(署事)하던 것이 혁파될 때에, 사인사만 두고 검상사의 직무는 예조에 넘겼다가, 병진년
다시 서사(署事)가 회복된 이후로 검상사를 다시 두었다.
여기에는 옛날부터 제명기가 있었으나, 갑오년 이전 것은 모두 실려 있지 않고, 병진년 이후에 임명된 관원의
성명만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보는 자들이 그 내용이 소상하지 못함을 유감스럽게 여겼다. 한가한 날에 문서를
찾아서 정리하다가 최상국(崔相國) 이하 몇 분의 이름을 알아내어,
인하여 새로 《제명책(題名冊)》을 만들고서 권두에 써서 지난날의 미비한 점을 보충 하였다." 하였다.
충훈부(忠勳府) : 북부 광화방(廣化坊)에 있으며, 여러 공신(功臣)의 관부이다. 그 속사로는 경력소(經歷所)가
부속되어 있다.
○ 정1품의 친공신(親功臣)과 왕비의 아버지는 부원군(府院君)이라 하고, 그 나머지 종2품까지는 모두 군(君)
이라 하고, 정해진 수는 없다.
경력(經歷)이 1명인데 종4품이고, 도사(都事)가 1명인데 종5품이다. 경력과 도사의 관품(官品)은 다른 관사
(官司)와 같다.
○ 권남(權擥)이 지은 기문(記文)에, "인신(人臣)으로 국가에 공이 있는 자는 먼저 금과 비단으로 상주고, 벼슬과
녹으로 우대하며, 그 공적을 태상(太常)에 기록하고, 그 공훈을 종정(鐘鼎)에 새긴다. 그러나 오히려 공신에 대한
처우가 흡족하지 못하고 혹 결함되는 점이 있을까 염려하여 또 관부를 설치하여 그 일을 맡게 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도록(圖?)을 좇아서 집을 화하여 나라를 다스리니, 재주와 지혜 있는 문무의 신하들이 풍운의 기
회를 만나서 공을 떨쳐 힘을 모아 같이 큰 공훈을 이루었다. 위대한 공적이 간책(簡策)에 빛나서 이미 단서(丹書)
와 철권(鐵券)을 맹부(盟府)에 간직하고, 충훈사(忠勳司)를 설치하여 이 일을 주관하게 한 것은 그 일을 중히 여
기기 때문이었다.
태종께서 반역한 신하를 없애고 두 차례나 내란을 평정하실 때에, 그 전후 좌우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운
고비를 헤쳐 나간 자를 정사(定社)와 좌명(佐命)의 공으로 논하였으니, 이것은 앞사람(태조 때의 개국공신)보다
뒤지지 않는다.
우리 전하께서는 왕실이 중간에 미약함을 당하여 왕권이 실추됨을 분하게 여기시어, 맨손으로 분발하여 간흉을
몰아내고 다시 국가를 바로잡으시니, 이것은 참으로 영특한 계책을 혼자서 쓰신 것이지만,
그의 밑에서 일신을 잊고 나라에 목숨을 바쳐 지혜를 짜고, 힘을 다하여 조그마한 공로라도 있는 자는 모두 기록
하여 빠지지 않게 하였다.
그 뒤 왕위에 오르시게 되어 나라 안의 모든 일이 새롭게 된 것은 진실로 인력으로 된 것이 아니나,
봉황 날개에 붙고 용의 비늘에 붙어서 가만히 큰 일을 도와서 적은 공로라도 바친 자는 또한 버리지 않으셨으니,
위대하도다. 천지 같은 거룩한 덕은 이름지어 말할 수 없도다.
특별히 이 때에 또 충훈사(忠勳司)를 부(府)로 승격시켜 양부(兩府)와 같게 하고, 경력과 도사를 두어 전토 수백
결(結)과 노비 5백 구(口)를 내려주고, 옛 관청이 좁고 더러워서 걸맞지 않다 하여 북부 광화방에 있는 종부시
(宗簿寺)의 공해(公?) 한 구역을 주시고, 또 그 터에 새로 청사를 중수하라 명하셨다. 준공된 뒤에, 모두들 '글이
없어서는 안된다.' 하며, 나에게 기문 짓기를 청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공사의 전말은 소상히 쓸 필요없고, 여
러분을 위해서 한 마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원컨대, 지금부터 권세를 믿거나 임금님의 은혜를 믿지 말며,
하찮은 사감으로 큰 우호를 깨트리지 말고, 어진 임금을 저버리지 말라. 이것으로 큰 은덕에 보답하면 이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한 나라 광무제(光武帝)는 공신을 잘 보전하였다고 칭찬하고, 고제(高帝)는 그렇
게 하지 못했다고 책망하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령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이 구순(寇恂)과 등우(鄧禹)와 같았다면, 고제도 반드시 그들을 보전시켰을 것이
고, 구순과 등우가 한신이나 팽월과 같았다면 광무제도 그들을 보전시켰을지 알 수 없다. 그들이 보전되고 보전
되지 못한 것은 신하들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여러분들이 모두 황송하게 들었다. 나는 이것
을 써서 경계하노라." 하였다.
신증 중부 관인방(寬仁坊)에 있다. 연산 갑자년에 옛 관부를 철폐하였다가 금상(今上) 초년에 이곳으로 옮겨서
창건하였다.
의빈부(儀賓府) : 중부 정선방(貞善坊)에 있다. 공주(公主)와 옹주(翁主)의 배필이 된 자의 관부이다.
그 속사로는 경력소(經歷所)가 있다.
○ 종2품 이상은 위(尉)라 하고,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은 부위(副尉)라 하고, 당하관은 첨위(僉尉)라 하고,
종3품도 첨위라 하는데, 모두 일정한 수는 없다. 경력과 도사는 각각 1명씩이다.
신증 연산군 갑자년에 철폐하여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금상 11년에 북부 광화방에 창건하였다.
돈녕부(敦寧府) : 중부 정선방에 있으며, 왕의 친(親)ㆍ외척(外戚)의 관부이다.
○ 영사(領事)가 1명인데 정1품이고, 판사(判事)가 1명인데 종1품이고, 지사(知事)가 1명인데 정2품이고,
동지사(同知事)가 1명인데 종2품이고, 도정(都正)이 1명, 정(正)이 1명인데 모두 정3품이고,
부정(副正)이 1명인데 종3품이고, 첨정(僉正)이 2명인데 종4품이고, 판관(判官)이 2명인데 종 5품이고,
주부(主簿)가 2명인데 종6품이고, 직장(直長)이 2명인데 종7품이고, 봉사(奉事)가 2명인데 종8품이고,
참봉(參奉)이 2명인데 종9품이다.
○ 영사로부터 참봉까지의 관품은 다른 관사와 같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첨정ㆍ판관ㆍ주부ㆍ직장ㆍ봉사ㆍ참봉 각 1명씩 혁파했던 것을 금상 초년에 다시
두었다.
의금부(義禁府) : 중부 견평방(堅平坊)에 있으며, 교지(敎旨)를 받들어 죄인을 추국(推鞫)하는 일을 관장한다.
그 속사로는 경력소가 부속되어 있고, 또 당직청(當直廳)이 있어서, 낭청(郎廳) 1명씩이 날마다 바꿔 가면서
당직하여, 사(士)ㆍ서인(庶人)의 소청(訴請)과 고첩(告牒) 등의 사건을 관장한다.
○ 판사ㆍ지사ㆍ동지사가 모두 4명인데, 모두 다른 관직에 있는 자로 겸임케 한다.
경력과 도사가 모두 10명인데, 모두 이전의 자급(資級)을 띠고 있다.
○ 유성원(柳誠源)이 지은 제명기(題名記)에, "관부에 이름을 쓰는 것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연표
(年表)에서 근본한 것이니, 성명을 쓰고 옮겨간 월 일을 기록하여 뒤에 보는 사람이 위로 그 시대를 논하여 그
사람됨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옥사를 관장하는 관청으로는 형조와 의금부가 있는데, 형조는 주로 도적을 다스리고 난폭한 자를
형벌하며, 금부는 옛날의 조옥(詔獄)으로, 조정의 큰 옥사와 중앙과 지방의 오랫동안 지체되어 처결하기 어려운
사건은 다 여기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니, 소임이 더욱 중하다. 고려 때에는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라 하고서
도만호(都萬戶)ㆍ상만호(上萬戶)ㆍ부만호(副萬戶)ㆍ진무천호(鎭撫千戶)를 두어 이를 관장하게 하다가,
공민왕 18년에 사평순위부(司平巡衛府)로 고쳐서 제조(提調)ㆍ판사(判事)ㆍ참상관(參詳官)ㆍ순위관(巡衛官)ㆍ
평사관(評事官)을 두었다. 신우(辛禑) 때에는 다시 순군만호부로 고쳤더니, 국조(國朝)에서도 그대로 따르다가,
태종 2년에 순위부(巡衛府)로 고치고, 3년에 와서 다시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로 고쳤고, 14년에 지금의 이름
으로 고치고는 제조(提調)ㆍ진무(鎭撫)ㆍ지사(知事)ㆍ도사(都事)를 두었으니, 이것이 설치하여 내려온 연혁의
대략이다.
국초로부터 지금까지의 제명(題名)의 기록이 없어서 부중(府中)에서 한스럽게 여겼다.
하루는 제조 권준(權?)이 진무 안위(安位)에게 부탁하여 옛날 문서를 두루 찾아 그 중에서 고 의정(議政) 박평
도공(朴平度公) 이하 몇 사람의 것을 얻었는데, 순금(巡禁)의 호칭 이상은 문적(文籍)이 유실되어 상고할 길이
없으며, 발견된 것도 간간이 빠진 것이 있으므로 우선 참고할 만한 것만 가려내어 책에 연서(聯書)하니, 뒤에
오는 자들이 참고함이 있기를 바란다. 제명(題名)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으니,
중국 당ㆍ송 이후로 비록 궁벽하고 작은 고을이라도 제명의 기록이 없는 데가 없었는데, 하물며 법을 맡은 중요
한 관부로서 없어서야 되겠는가?
이것이 바로 오늘날 여러분들이 간절히 원하는 뜻이다. 보는 자가 제명된 그 사람됨을 인해서 위로 올라가 옛
시대를 평가한다면 볼 만한 그분들의 성씨와 날짜만을 취할 뿐만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이조(吏曹) : 의정부 남쪽에 있으며, 문관의 선임(選任)ㆍ훈봉(勳封)ㆍ고과(考課)의 정사를 관장한다.
그 속사(屬司)로는 문선(文選)ㆍ고훈(考勳)ㆍ고공(考功)의 3사가 있고, 충익부(忠翊府)ㆍ내시부(內侍府)ㆍ
상서원(尙瑞院)ㆍ종부시(宗簿寺)ㆍ사옹원(司饔院)ㆍ내수사(內需司)ㆍ액정서(掖庭署)가 예속되어 있다.
○ 판서(判書)가 1명인데 정2품이고, 참판(參判)이 1명인데 종2품이고, 참의(參議)가 1명인데 정3품이고, 정랑
(正郞)이 3명인데 정5품이고, 좌랑(佐郞)이 3명인데 정6품이다. 다른 조(曹)도 모두 이와 같으나,
병조에는 참지(參知) 1명이 더 있고, 정랑과 좌랑이 각각 1명씩이고,
형조에는 정랑과 좌랑이 각각 1명씩 더 있다.
호조(戶曹) : 한성부(漢城府) 남쪽에 있으며, 호구(戶口)ㆍ공부(貢賦)ㆍ전량(田粮)ㆍ식화(食貨)의 정사를 관장
한다. 그 속사로는 판적(版籍)ㆍ회계(會計)ㆍ경비(經費)의 3사가 있고, 내자시(內資寺)ㆍ내섬시(內贍寺)ㆍ
사도시(司導寺)ㆍ사섬시(司贍寺)ㆍ군자감(軍資監)ㆍ제용감(濟用監)ㆍ사재감(司宰監)ㆍ풍저창(?儲倉)ㆍ
광흥창(廣興倉)ㆍ전함사(典艦司)ㆍ평시서(平市署) ㆍ사온서(司?署)ㆍ의영고(義盈庫)ㆍ장흥고(長興庫)ㆍ
사포서(司圃署)ㆍ양현고(養賢庫)ㆍ오부(五部) 등이 예속되어 있다.
예조(禮曹) : 광화문 남쪽 오른편에 있으며, 예(禮)ㆍ악(樂)ㆍ제사(祭祀)ㆍ연향(宴享)ㆍ조빙(朝聘)ㆍ학교(學校)ㆍ
과거(科擧)의 정사를 관장한다. 그 속사로는 계제(稽制)ㆍ전향(典享)ㆍ전객(典客)의 3사가 있고,
홍문관(弘文館)ㆍ예문관(藝文館)ㆍ성균관(成均館)ㆍ춘추관(春秋館)ㆍ승문원(承文院)ㆍ통례원(通禮院)ㆍ
봉상시(奉常寺)ㆍ교서관(敎書館)ㆍ내의원(內醫院)ㆍ예빈시(禮賓寺)ㆍ장락원(掌樂院)ㆍ관상감(觀象監)ㆍ
전의감(典醫監)ㆍ사역원(司譯院)ㆍ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ㆍ종학(宗學)ㆍ소격서(昭格署)ㆍ종묘서(宗廟署)ㆍ
사직서(社稷署)ㆍ빙고(氷庫)ㆍ전생서(典牲署)ㆍ사축서(司畜署)ㆍ혜민서(惠民署)ㆍ도화서(圖?署)ㆍ
활인서(活人署)ㆍ귀후서(歸厚署)ㆍ사학(四學) 등이 예속되어 있다.
병조(兵曹) : 사헌부(司憲府) 남쪽에 있고, 또 하나는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으며, 무관의 선임ㆍ군무
(軍務)ㆍ의위(儀衛)ㆍ우역(郵驛)ㆍ병갑(兵甲)ㆍ기장(器仗)ㆍ문호관약(門戶管?) 등의 정사를 관장한다.
그 속사로는 무선(武選)ㆍ승여(乘輿)ㆍ무비(武備)의 3사가 있고, 오위(五衛)ㆍ훈련원(訓鍊院)ㆍ사복시(司僕寺)ㆍ
군기시(軍器寺)ㆍ전설사(典設司)ㆍ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등이 예속되어 있다.
형조(刑曹) : 병조의 남쪽에 있으며, 법률(法律)ㆍ상언(詳●)ㆍ사송(詞訟)ㆍ노예(奴隸) 등의 정사를 관장한다.
그 속사로는 상복(詳覆)ㆍ고율(考律)ㆍ장금(掌禁)ㆍ장예(掌隸)의 4사가 있고, 장예원(掌隸院)ㆍ
전옥서(典獄署)가 예속되어 있다.
공조(工曹) : 형조의 남쪽에 있으며, 산택(山澤)ㆍ공장(工匠)ㆍ영선(營繕)ㆍ도야(陶冶)의 정사를 관장한다.
그 속사로는 영조(營造)ㆍ공야(攻冶)ㆍ산택(山澤)의 3사가 있고, 상의원(尙衣院)ㆍ선공감(繕工監)ㆍ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ㆍ전연사(典涓司)ㆍ장원서(掌苑署)ㆍ조지서(造紙署)ㆍ와서(瓦署) 등이 예속되어
있다.
○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제명기에, "상고하건대, 《서경》 〈주관(周官)〉에 이르기를, '사공(司空)은 방토(邦
土)를 관장하여 사민(四民)을 편히 살게 하고, 천시(天時)에 순하여 지리(地利)를 나게 한다.' 하였으니, 즉 6경
(六卿)의 하나로 동관(冬官 공조(工曹))의 장(長)이다. 한 나라에서는 민조(民曹), 위 나라에서는 좌민(佐民), 진
(晉)ㆍ송(宋)은 기부(起部)라 하였고, 수(隋)는 공부(工部)라 하였으며, 당(唐)ㆍ송(宋)ㆍ원(元)은 이를 그대로
따랐다.
우리 나라에서는 6조를 두었는데, 공조는 그 중 하나로 바로 옛날의 동관(冬官)이고, 조(曹)의 장(長)은 판서(判
書)이니, 즉 주 나라때의 사공(司空)이며, 역대의 상서(尙書)이다. 다음에는 참판과 참의 각 1명씩이 있는데,
모두 판서 다음 가는 벼슬이다. 낭속(郞屬)이 6명으로, 정랑(正郞) 3명은 관질이 정5품이며, 좌랑(佐郞) 3명은
관질이 정6품이니, 이것이 역대의 낭중(郎中) 또는 원외랑(員外郞)이다.
그 관장한 것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영조사ㆍ공야사ㆍ산택사이다. 그 관원을 선임하는 것은 매우 신중히 하여
반드시 국량과 예능이 모두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일을 맡겼으니, 국초부터 지금까지 60여 년 동안에 이 직임을
지낸 자로서 어진 이가 몇 사람이며, 재능 있는 이가 몇 사람이며, 당시에 이름 있는 재상이 된 자가 몇 사람이나
되었던가?
전후에 왔던 이들이 그럭저럭 지내기를 좋아하여 관원의 성명을 기록하지 않아서 매몰되어 전해짐이 없게 하였
으니, 어찌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정랑 조변융(曺變隆)ㆍ김량경(金良璥)ㆍ신선경(愼先庚), 좌랑 강윤범(姜允範)ㆍ성율(成慄)ㆍ이영부(李永
敷),전 정랑 신윤보(申允甫)ㆍ좌랑 임수겸(林守謙) 등이 이를 개탄하여 지난날의 문적을 찾아서,
정랑 조상치(趙尙治) 이하 몇 분의 것이 발견되었으므로 그 이름들을 써서 선생안(先生案)을 만들었으니, 이에
계속하여 오는 사람은 비록 백 명이나 천 명이 된다 하더라도 여기에 모두 이어 써서 길이 썩지 않고 전해질 것
이다.
내가 일찍이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를 보니, 모두 연표(年表)가 있어서, 인물의 성명
을 기록하였으니, 후세에 관부의 청벽(廳壁)에 제명기가 모두 있는 것은 대개 그 뜻을 이어 받은 것이라 하겠다.
지금도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청에 간혹 제명기가 있는데, 하물며 공조는 6조 중에서도 일이 가장 많은 곳이고,
낭청(郎廳)은 당시의 높이 가리는 자리로 6경을 보좌하여 온갖 공무를 잘하게 하는 것이니, 그 소임이 너무도
중하지 않은가?
어찌 제명(題名)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여러분들이 늘 마음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 아마 이것으로 인하여 인물
의 성하고 쇠함과 공적의 근실하고 게으름과 다른부서로 옮겨간 월일 등을 상고하여 그 중에서 취하고 버림이
있다면 도움이 되는 것이 어찌 적으랴? 이에 기문(記文)을 쓰노라." 하였다.
사헌부(司憲府) : 중추부(中樞府) 남쪽에 있으며, 행정을 검사하고, 백관을 사찰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원통
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 주며, 외람되고 거짓된 행위를 금하는 등의 일을 관장한다. 그 속사로는 감찰방(監察房)
이 부속되어 있다.
○ 대사헌(大司憲)이 1명인데 종2품이고, 집의(執義)가 1명인데 종3품이고, 장령(掌令)이 2명인데 정4품이고,
지평(持平)이 2명인데 정5품이고, 감찰(監察)이 24명인데 정6품이다.
○ 서거정의 제명기에, "《주례(周禮)》에 어사(御史)라는 관직이 실려 있고, 한 나라에서는 어사대부(御史大夫)
를 두었으니, 그 위치는 승상(丞相) 다음이었고, 그 다음에는 중승(中丞)이 있었다. 속관으로는 어서(御史)를
두어 어사대(御史臺)라 하고, 혹은 난대(蘭臺)라고도 하였다. 또 상서(尙書)와 알자(謁者)를 합쳐서 3대(三臺)라
고도 하였다.
당 나라는 또한 어사대(御史臺) 혹은 숙정대(肅政臺)라고 하였으며, 송 나라는 당 나라의 제도를 따라서 어사대
라 하고, 그 속사로 삼원(三院)을 두었으니, 대원(臺院)ㆍ전원(殿院)ㆍ찰원(察院)이다. 원 나라에서도 어사대를
두었고, 명 나라는 도찰원(都察院)을 두고서 좌우도어사(左右都御史)ㆍ좌우도부어사(左右都副御史)ㆍ좌우첨
도어사(左右僉都御史)ㆍ제로감찰어사(諸路監察御史)가 있었다.
고려는 처음에 사헌대(司憲臺)라 부르다가 다시 어사대라 하였고, 뒤에 다시 사헌대로 고쳐서 대부(大夫)ㆍ중승
(中丞)ㆍ잡단(雜端)ㆍ시어(侍御)ㆍ전중(殿中)ㆍ감찰(監察) 등을 두었으며, 문종(文宗) 때에 판사(判事)와 지사
(知事)를 더 두었고, 충렬왕조(忠烈王朝)에는 감찰사로 고치고서 제헌(提憲)ㆍ시승(侍丞)ㆍ시사(侍史)ㆍ감찰사
(監察史)를 두었고, 충선왕조(忠宣王朝)에는 비로소 사헌부(司憲府)로 고치고, 대부를 대사헌(大司憲), 중승
(中丞)을 집의(執義), 시어사를 장령(掌令), 전중어사를 지평(持平), 감찰어사를 규정(糾正)으로 고쳤으며,
그 뒤에도 대명(臺名)과 관제가 일정하지 않았다. 본조에서는 고려의 옛 제도를 따라서 사헌부라고 하고, 대사헌
1명, 집의 1명, 장령 2명, 지평 2명을 두고, 전적으로 간쟁(諫諍)과 논핵(論劾)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그 속관으로는 감찰 25명을 두되 다른 관직에 있는 자로서 겸임하게 하다가, 세조 때에 모두 본직으로 하게 하고
한 명을 감하여 24명으로 하였다.
아, 어사의 직위를 역대 왕조에서 중하게 여겼으니, 그 소임이 중하고 그 책임이 크며 그 근심하는 것도 깊기 때문
이다. 왜냐하면, 어사에 적임자를 얻으면 임금에게 과실이 있을 때에, 용린(龍鱗)에도 거스르고 우레 같은 위엄에
도 항거하여 형벌을 받아 죽음을 당하는 것도 사양치 않으며, 장상 대신(將相大臣)에게 허물이 있으면 규탄하여
바로잡고, 종실의 귀척으로 교만하고 간악하면 탄핵하고, 간사한 소인이 조정에 있으면 반드시 쫓아내고, 탐관오
리가 관직에 있으면 반드시 물리치고, 정직한 사람은 등용하고 바르지 못한 자는 내치며, 악한자는 제거하고,
선한 자는 선양하여, 낯빛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서면 모든 벼슬아치가 두려워 떨게 되니, 그 직책이 어찌 중하고
도 크지 않겠는가? 만약 혹 어사에 적임자가 아니면 임금이 잘못된 일을 하거나, 정승과 장수가 적임자가 아니거
나, 조정에 잘못된 정사가 있거나, 국가 일에 결함이 있어도 보거나 듣지도 못하는 것 같이하여, 귀는 물건으로
막은 것 같고 눈은 손으로 가린 것 같으며, 입은 재갈이 물린 것처럼 꾹 다물고서 아무 말도 못하고 구차하게 지
낸다면 비록 자기 몸은 보전하여 화를 면할지라도 그 맡은 직책에는 어찌할 것이며, 백성의 여론에는 어찌할 것
인가?
그러니 그 근심됨이 어찌 깊지 않겠는가? 조종조(祖宗朝) 이후로 임금의 귀와 눈인 대헌(臺憲)의 선임을 중하게
여겨 강직하여 과감히 윗사람에게 말하는 기상을 길렀으니, 이 벼슬에 뽑힌 자는 누군들 자기의 명예와 절개를
갈고 닦아서 임금의 기대하는 뜻에 부응하기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천순(天順) 계미년 가을에 내가 재능도 없으
면서 대사헌이 되어, 임금의 결점을 보완하여 임금의 덕을 보태지도 못한 지가 이미 11년이나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 다시 중한 직책을 외람되게 맡았으니, 천박한 재능에다 노쇠함이 더욱 심하여 오직 위태롭고 송구스런 마
음으로 지내는데, 하루는 집의 현석규(玄碩圭), 장령 허적(許?)ㆍ김자정(金自貞), 지평 김윤종(金潤宗)ㆍ안호(安
瑚) 등 여러 사람들과 같이 대중(臺中)의 고사(故事)를 의논하였는데, 전에 제명기(題名記)가 없었다.
근래에 뜻 있는 대장(臺長 집의(執義))이 익성(翼成) 황희(黃喜) 이하로 2백 20여 명의 제명을 찾아내었다.
그러나 그들이 임명된 것과 전임한 연월이 소상히 기록되지 못하였으므로, 제군들이 대충 수정하고 나서는 나에
게 기문을 쓰라고 위촉하였다.
관부의 제명이란 옛날부터 있던 것이지만, 헌부(憲府)에 있어서는 그 관계가 더욱 중한 것이다. 지금부터 계속하
여 치관(?冠)을 높이 쓰고 백필(白筆)을 꽂고 앉아 이 제명기를 읽는 자가 아무는 어질었고, 아무는 충성하였고,
아무는 아첨하였고, 아무는 간사했다고 하면서 착한 것은 법을 삼고 악한 것은 경계한다면 임금의 옷자락을 당기
면서 간한 위 나라의 신비(辛毗)와, 문턱에 머리를 부수면서 죽음으로 간하던 진목공(秦繆公)의 신하 금식(禽息)
의 충성만이 옛날에서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이며, 이 직위에 있는 자들이 모두 나라를 맑게 하려는 강개
(慷慨)한 뜻을 가진다면 이 제명록(題名錄)의 도움이 어찌 적다 하겠는가? 내가 또 들으니, 옛날에는 장인들은 각
기 자기 기예의 일을 가지고 간하였다 하고, 지와(??)는 제 나라 사사(士師 법관)가 되어 임금에게 간하였다 한다.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조정에 나가 벼슬하면서 도를 시행하지 못하는 것은 수치이다.' 하였으니,
장인과 사사는 간관(諫官)이 아니라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대간(臺諫)의 직에 있는 자이랴? 대간의 직
에 있으면서 간하지 못하여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 자이랴? 나는 이런 것이 두려워 삼가 이렇게 써서 동관(同官)
들의 경계하는 말로 삼고, 또 뒤에 오는 자에게도 일러 주려 한다." 하였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지평을 혁파
하고, 병인년에 장령 2명을 더 두었다가 금상 초년에 모두 옛날대로 복구하였다.
충익부(忠翊府) : 북부 양덕방(陽德坊)에 있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의 관부이다.
○ 도사(都事)가 2명이다.
승정원(承政院) : 월화문(月華門) 밖에 있는데, 하나는 창덕궁 인정전 동쪽에 있고,
하나는 창경궁 금마문(金馬門) 남쪽에 있다.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을 관장한다.
○ 도승지(都承旨), 좌(左)ㆍ우승지(右承旨), 좌(左)ㆍ우부승지(右副承旨), 동부승지(同副承旨)가 각각 1명씩
인데 정3품이고, 주서(注書)가 2명인데 정7품이다.
○ 유의손(柳義孫)이 지은 제명기에, "제명기가 있는 것은 옛날부터이다.
고려 말엽에 깨끗하고 중요한 벼슬자리를 지낸 자는 모두 그 이름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였으니,
대언방선생안(代言房先生案)이라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여러 번 병화(兵禍)를 겪고 나서 거의 다 유실되었는데, 홍무(洪武) 17년 갑자년 겨울에 우대언(右代言)
김영진(金永珍)이 이를 수집해서 다시 기록하였으니, 그 뜻은 오래도록 전하려 한 것이다.
25년 임진년 가을에 우리 태조 강헌대왕이 개옥(改玉)하셨는데, 이때부터 승정원 관직에 제수된 자를 다음과
같이 따로 기록하였으니, 이는 다시 시작한 것이다. 우리 태종 공정대왕(恭定大王)도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이 관직에 뽑혔으므로 이름이 분명히 실려 있어 해와 별처럼 빛이 나고 있으니, 더욱이 이 기록을 공경하고 중
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거의 60여 년이나 지나서 전해 온 지가 너무 오래되므로 파손된
곳이 많다.
그래서 도승지 영천이공(永川李公) 승손(承孫), 우승지 진산강공(晉山姜公) 석덕(碩德), 좌부승지 장수황공(長
水黃公) 수신(守身), 우부승지 상산박공(商山朴公) 이창(以昌), 동부승지 완산이공(完山李公) 사철(思哲) 등이
개연히 탄식하고 사유를 갖추어서 주달하였더니, 이 책을 마련하는 데에 쓸 물건을 모두 특별히 하사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새 종이에 다시 쓰고 책을 새로 장황(裝潢)하여 궤에 넣어서 영원히 전하게 하였으니, 정통(正統)
갑자년 5월이었다. 처음에도 갑자년에 고쳤고, 이번에도 갑자년에 고쳤으니, 실로 이 선생안(先生案)이 두 번째
로 시작된 것이다. 가만히 생각건대, 옛날 순(舜) 임금은 그 신한 용(龍)에게 명하기를, '그대는 아침부터 밤까지
나의 명을 내고 들이는 데에 오직 성실하게 하라.' 하였고, 상 나라 고종(高宗)은 부열(傅說)에게 명하기를,
'조석으로 좋은 말을 하여 나를 가르쳐서 나의 임금 노릇하는 덕을 도우라.' 하고, 또 '그대의 마음을 열어서 나의
마음을 적셔다오.' 하였으니,
내고 들이고 열어서 적셔주는 사이에 신하의 마음이 충성스러운가 간사한가와 임금의 덕이 닦여지고 닦여지지
못함이 달려 있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으며 경계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 조서강(趙瑞康)의 신당(新堂) 기문(記文)에, "승정원의 옛집은 주위에 집들이 4면으로 막고 있으므로 답답한
기분을 시원히 펴서 맑고 넓은 맛을 볼 수 없었더니, 집현전 북쪽과 보루각 남쪽 사이에 넓고 조용한 빈터가 있
었는데, 하루는 임금께서 선공감에 명하여 춘추관(春秋館)과 상서사(尙瑞司)를 그 동쪽과 서쪽에 새로 지어 실
록(實錄)과 보새(寶璽)를 모셔 두게 하고, 또 그 서남쪽에 행랑 30여 칸을 둘러서 세우게 하였다. 공사가 끝나자,
신 등이 행랑의 동쪽 두 칸을 내려주기를 청하여 마침내 승정원의 청사로 쓰니,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
으며, 앞은 터지고 뒤는 통창하여 맑은 바람이 자연히 불어오고 밝은 달빛도 잘 들어왔다. 조회에 참여한 뒤와
말씀을 주달하는 여가에 북으로 화산(華山)을 대하고 남으로 관악(冠嶽)을 바라보면 채색 구름이 모였다 흩어
졌다 하고, 층층이 솟은 산봉우리가 보였다 숨었다 하여 아침해와 저녁노을에 기이한 경치가 천만 가지로 달라
진다. 눈을 들어 바라보는 사이에 마음이 너그럽고 정신이 화평해져서 초연히 속세에서 벗어난 듯한 취향이 있
으니, 이것은 모두 우리 성상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 집이 어찌 놀고 구경하는 곳이겠는가? 여러 관사의
직무와 만백성의 목숨이 이 승정원이란 한 관청에 다 모여 있고, 임금의 말씀을 내고 들이는 기틀의 잘잘못이
달려 있으니, 삼가지 않겠는가?
지금 성상께서 즉위하시어 준수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여, 정사는 간소하고 형벌은 적으며, 도가 높고 덕이 흡
족하여, 오랑캐들도 다 복종하고 만물도 성하고 편안하다. 이에 날마다 임금을 모시고 두터운 은총을 받아 다행
히 어수(魚水)의 기쁨이 있으니, 그 즐거움이 지극하지 않은가? 만약 이와 반대로 정사는 번거롭고 세금이 많아
서, 백성은 초야에서 원망하고 관리는 관청에서 고달프다면, 아무리 이런 집이 있은들 어찌 즐거움이 되겠는가?
나는 우서 이것을 써서 뒤에 오는 군자들에게 보이려 한다." 하였다. 신증 연산 갑자년에 주서 2명을 더 두었다
가 금상 초년에 도로 혁파하였다.
○ 성현(成俔)의 시와 그 서문에, "성화(成化) 5년 2월에 임금께서 백자 종지 한 개와 법온(法?) 한 항아리를 승
정원에 내려주고, 이르기를, '이것을 술잔으로 삼아 마시라.' 하였다.
신 등이 삼가 이 종지를 보니 도기(陶器)로써 만듦에 기예가 정교하며 제도가 법도에 맞고 안팎이 맑고 깨끗하
여 한 점의 티도 없으니, 실로 세상에 드문 보물이었다.
돌아보건대, 신 등이 납언(納言)의 직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황송한 마음으로 조심하여 항상 헛되이 녹이나 먹는
다는 비방을 들을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성상께서는 특별히 어여삐 여기시는 은총을 더하시어 날마다 면접하는
영광을 주시고, 또 내탕(內帑)의 진기한 보물을 하사하셔서 특별히 총애하시는 마음을 보이시니, 신 같은 천박한
재질로써 보답해 드릴 수는 없으나, 오직 이 보배를 열 겹으로 거듭 싸서 간직하여 임금께 내려주신 것임을 오는
세대에 자랑할 뿐이야. 그러면 뒤에 이 관직에 있는 자들이 반드시 '이 종지는 아무가 승정원에 있을 때에 임금
께서 내려주신 것이다.'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성상께서 진심으로 신하들을 대우하시는 성대하고 아름다운 뜻
이 마땅히 무궁토록 길이 전해질 것이며, 신 등도 일월의 남은 빛에 의지하여 이 영광을 함께 누릴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서로 경사스럽고 다행히 여기며 성수(聖壽)를 축원하는 나머지에 삼가 소회를 써서 우러러 성덕(聖德)을 송축하
나이다.
사(詞)에 이르기를, '바다 동쪽 푸른 하늘에 아침해가 솟아오르니, 바람과 구름이 무럭무럭 나는 용을 따른다.
봉소(鳳沼) 가까이에, 봉래궁(蓬萊宮)이 있네. 붉은 뜰에서 지척간에 임금님을 모시었네. 아침 나절 구중(九重)
에서 중사(中使 내시(內侍))가 내려오니 목전에 내린 은총 빛나고도 높도다. 임금님의 말씀 막 전해듣고, 황봉
(黃封)을 열어 보니 한 개의 파려(??) 종지가 같이 있네. 황금을 녹여 부어 하심(荷心)에 둘렀으며, 티 없는 옥색
(玉色)이 백홍(白虹)처럼 뻗치네. 조금도 흠이 없이 자연스런 모양이 자연이 만든 것 같네.
희준(犧樽)이나 옥찬(玉瓚)과도 혹 견줄 수 있잖은가? 누런빛 법주를 그 잔에 가득 부우니, 잔 속의 불로액(不老
液)에 봄빛이 무르익네. 기쁘게 받들자 심신이 흐뭇하니, 이 몸이 황홀하여 홍몽(鴻?)에서 초월한 듯하네. 취하
고서 머리 조아려 다투어 우리 임금의 천세 만세 부르며, 천보시(天保詩)를 읊어서 하늘의 공덕을 갚으리라.
원하노니 이 보배를 끝까지 받들어서, 천년만년 길이길이 보전하세.' 하였다." 했다.
장예원(掌隸院) : 공조 남쪽에 있으며, 노예(奴隸)의 문적(文籍)과 송사(訟事)의 사무를 관장한다.
○ 판결사(判決事)가 1명인데 정3품이고, 사의(司議)가 3명인데 정5품이고, 사평(司評)이 4명인데 정6품이다.
신증 금상 11년에 겸 판결사(判決事) 1명을 두었다가 15년에 도로 혁파하였다.
사간원(司諫院) : 북부 관광방(觀光坊)에 있으며,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대사간(大司諫)이 1명인데 정3품이고, 사간(司諫)이 1명인데 종3품이고, 헌납(獻納)이 1명인데 정5품이고,
정언(正言)이 2명인데 정6품이다.
○ 서거정이 지은 기문에, "경(經)에 이르기를, '옛날에 천자는 간쟁(諫諍)하는 신하 7명이 있었다.' 하였고,
춘추전(春秋傳)에는, '제 나라 환공(桓公)이 간하는 신하 5명을 두었고, 허물을 들어 말하는 자가 30명이나 있었
다.' 하니, 비록 그 벼슬 이름은 말하지 않았으나, 간관을 두는 뜻은 또한 오래된 것이다. 한 나라 무제(武帝)가
처음으로 간대부(諫大夫)를 두었는데 그 품질(品秩)이 6백 석(石)이었고, 광무제(光武帝)는 간의대부(諫議大夫)
를 두었는데 품질이 8백 석이었으며, 그 뒤에는 혹 두기도 하였고 혹 두지 않기도 했으며, 당 나라 제도에는 간대
부의 위에 산기상시(散騎常侍)가 있고, 그 아래에 보궐(補闕)과 습유(拾遺)가 좌우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좌는 문하성(門下省)에 속하였고 우는 중서성(中書省)에 속하게 하여 그 자리가 비로소 중해졌다.
송 나라가 일어나서는 대개 당 나라 제도를 그대로 따랐는데, 그 사이에 더하기도 하고 줄인 것도 있고, 폐하기
도 하고 두기도 하여 일정하지 않다가, 건염(建炎) 이후로는 처음으로 간대부를 별직(別職)으로 하여 양성(兩省
)에 예속시키지 않고 때때로 양성과 서로 만나서 논의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후세에 간관의 명칭이 붙게된 대략
이다. 아조(我朝)에서는 개국한 처음에는 고려의 옛 제도를 따라서 간관은 모두 문하부(門下府)에 속하게 하고
낭사(郎舍)라고 하였다.
그 관원으로는 좌우산기(左右散騎)ㆍ좌우간의(左右諫議)ㆍ직문하(直門下)ㆍ기거주(起居注)ㆍ내사사인(內史舍
人)ㆍ좌우보궐(左右補闕)ㆍ좌우습유(左右拾遺) 등인데, 당시의 재능과 명망과 문벌이 모두 우수한 자를 엄히
가려서 임명하였다.
우리 태종 2년 신사에 비로소 별국(別局)을 두고서 좌우사간으로 장(長)을 삼았는데 품질(品秩)은 정3품이고,
다음은 지사간(知司諫)인데 종3품이고, 다음은 좌우헌납(左右獻納)인데 정5품이고, 다음은 좌우정언(左右正言)
인데 정6품이니, 이들은 간하는 직책만 오로지 담당하고 다른 사무는 겸하지 않게 하였다.
생각건대, 여러 성군(聖君)이 서로 이어받아 현자를 임명하고 간하는 말을 따라서 강개(慷慨)히 바른 말하는 기
풍을 길러 왔으니, 이 자리에 뽑힌 자들은 누구나 충절을 다하여 더욱 가다듬고 강직하게 하여 임무를 맡긴 본의
를 저버리지 않고자 하지 않겠는가?
나는 우대부(右大夫)의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능히 직무를 감당하여 나라의 은혜를 갚지 못할까 두려워하
고 있다. 전에 벽상(壁上)에 제명기가 있어서 선생들의 이동(移動) 월 일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낡아서 길이 전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므로 동료인 좌대부 김공(金公) 종순(從舜), 지원사(知院
事) 송공(宋公) 처검(處儉), 좌헌납 이공(李公) 영은(永垠), 우헌납 최공(崔公) 이로(泥老), 좌정언 조공(趙公)
효동(孝同), 우정언 이공(李公) 숙함(淑?) 등과 의논하여 조금 수정을 가하니, 국초부터 지금까지 제명(題名)한
자가 산기(散騎) 안경검(安景儉) 이하로 총계 7백 6십 8명이나 되니, 아, 성대한 일이다. 내가 전에 사마공(司馬
公)의 기(記)를 읽으니, 거기에 이르기를, '후인들이 장차 기록된 이름을 보고서 지적하기를, 누구는 충신이고,
누구는 간사하고, 누구는 정직하고, 누구는 사특하다고 할 것이니, 가히 두렵지 않은가?' 하였다.
선생의 말이 할 말을 다하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 말로써 우리 동렬(同列)들이 서로 경계하는 말로
삼을까 한다." 하였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정언 1명을 혁파하고, 헌납 1명을 더 두었고, 병인년에는 본원을 전부 혁파하였다가 금상
초년에 아울러 다 복구하였다.
홍문관(弘文館) : 승정원 서쪽에 있으며, 옛날 집현전(集賢殿)으로서 장서각(藏書閣)이 있다. 하나는 창덕궁 도
총부(都摠府) 남쪽에 있으니 곧 옛날 사인사(舍人司)이고, 하나는 창경궁 승정원의 동쪽에 있으니, 내부(內府)의
경적(經籍)과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에 대한 임무를 관장한다.
○ 영사(領事)가 1명이며 대제학(大提學)이 1명인데 정2품이고, 제학(提學)이 1명인데 종2품이니,
이상은 다 다른 관원으로 겸하게 한다.
부제학(副提學)과 직제학(直提學)이 각각 1명인데 모두 정3품이고, 전한(典翰)이 1명인데 종3품이고,
응교(應敎)가 1명인데 정4 품이요, 부응교(副應敎)가 1명인데 종4품이고,
교리(校理)가 2명인데 정5품이고, 부교리(副校理)가 2명인데 종5품이고, 수찬(修撰)이 2명인데 정6품이고,
부수찬(副修撰)이 2명인데 종6품이고, 박사(博士)가 1명인데 정7품이고, 저작(著作)이 1명인데 정8품이고,
정자(正字)가 2명인데 정9품이다. 대제학ㆍ제학ㆍ직제학ㆍ응교ㆍ박사ㆍ저작ㆍ정자의 관품은 다른 관사도 이와
같다.
○ 세조 때에 양성지(梁誠之)가 건의하기를, "신이 그윽이 보건대, 역대에서 서적을 혹 명산(名山)에 간직하였고,
혹 비각(?閣)에 간직하기도 한 것은 유실을 방지하고 영구히 전하려 한 것입니다.
고려 숙종(肅宗)이 처음으로 경적(經籍)을 저장하였는데, 그 도장(圖章)에 하나는 고려국십사엽신사세어장서
(高麗國十四葉辛巳歲御藏書)ㆍ대송건중정국원년(大宋建中靖國元年) 대요건통9년(大遼乾統九年)이라고 새겼
고, 하나는 고려국어장서(高麗國御藏書)라고 새겼으니, 숙종 때로부터 지금까지가 3백 6십 3년이나 되었으나,
그 인문(印文)이 어제 찍은 것 같아서 문헌(文獻)을 상고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장(內藏)되어 있는 만권의 서적이 그 때에 간직하여 전해 온 것이 많으니, 청컨대, 장서(藏書)의 뒷면에
쓰는 도서는 조선국 제6대 계미세어장서(朝鮮國第六代癸未歲御藏書)ㆍ대명 천순 7년(大明天順七年)이라고 하
여 진자체(眞字體)로 쓰게 하고, 앞면에 쓰는 도서는 조선국어장서(朝鮮國御藏書)라고 하여 전자체(篆字體)로
써서 두루 여러 책에 올려 만세에 전하여 밝게 보이도록 하고, 또 서적을 수장하는 내각(內閣)을 홍문관(弘文館)
이라고 이름하고 대제학ㆍ직제학 등의 관원을 두되, 예문관 관원으로 겸임하게 하여 서적 출납을 맡게 하소서."
하니, 세조가 그 말에 좇아서 서적을 옛날 동궁 동편에 있는 작은 집에 간직하여 두게 하고 홍문관이라고 이름하
고, 예문관 봉교(奉敎) 이하로 박사(博士)ㆍ저작(著作)ㆍ정자(正字)의 관원을 겸임시켜서 그 일을 맡게 하였다.
우리 전하 원년에 예문관에 명하기를, "집현전에 의하여 관원을 두고 모든 문한(文翰)ㆍ경연(經筵)ㆍ기주(記注)
등의 사항을 한결같이 집현전의 전례(前例)대로 하라." 하였다.
이에 홍문관의 서적도 예문관 장서각으로 이전하였다. 그 후 10년에 또 대신의 건의에 따라 본관을 홍문관이라고
개칭하고, 예문관은 따로 옛날 서연청(書筵廳) 자리에 두고 사명(辭命)에 관한 일만 맡게 하였다.
신증 연산군 갑자년에 본관을 진독청(進讀廳)이라 이름을 고쳐서 그 관원을 혁파하고 예문관 관원으로 겸임하게
하다가, 금상 초년에 복구하였다.
성균관(成均館) : 동부 숭교방(崇敎坊)에 있으며, 유생(儒生)을 교회(敎誨)하는 일을 관장한다. 명륜당(明倫堂)은
문묘(文廟) 북쪽에 있고, 존경각(尊經閣)은 명륜당 동쪽에 있고, 향관청(享官廳)은 명륜당 북쪽에 있다.
명륜당 북쪽은 송림이 울창하여 벽송정(碧松亭)이라 한다. 그 속사(屬司)로는 정록청(正錄廳)이 부속되어 있고,
중학(中學)ㆍ동학(東學)ㆍ남학(南學)ㆍ서학(西學)이 예속되어 있다. ○ 지사(知事)가 1명이고 동지사(同知事)가
2명인데, 모두 다른 관원으로 겸임케 하고, 대사성(大司成)이 1명인데 정3품이고, 사성(司成)이 2명인데 종 3품
이고, 사예(司藝)가 3명인데 정4품이고, 직강(直講)이 4명인데 정5품이고, 전적(典籍)이 13명인데 정6품이고,
박사(博士)가 3명인데 정7품이고, 학정(學正)이 3명인데 정8품이고, 학록(學錄)이 3명인데 정9품이고, 학유(學
諭)가 3명인데 종9품이다.
○ 성간(成侃)이 지은 〈명륜당기(明倫堂記)〉에, "우리 태조께서 즉위하시던 모년(某年)에 서울 동북편에 국학
(國學)을 설치하시니, 경영하고 설계한 규모와 제도가 모두 알맞게 되어 완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대략을 살피
면, 남쪽에 묘(廟)가 있고, 그 좌우에 무(?)가 있다.
묘에는 주로 선성(先聖)을 모셨고, 무에는 주로 선사(先師)를 모셨는데, 나라의 예전 법도이다. 동에는 정록소
(正錄所)가 있고, 그 남쪽에는 주방(廚房)이 있고, 또 그 남쪽에는 식당이 있다. 묘 북쪽 양편 옆으로는 긴 행랑을
늘어 놓았고, 행랑 북쪽에는 터를 높여서 중간에 큰 마루를 내고 양편에 협실(夾室)을 꾸며서 스승과 학생들의
강학(講學)하는 곳으로 하였으니, 이것이 명륜당이다.
재목 다루기를 순수하게 하고 공사를 견고하게 하여 우뚝하게 높이 솟고 빛나게 새롭다. 학관(學官)으로서 대사
성 이하 몇 사람이 날마다 이른 아침에 북을 쳐서 학생을 소집하면 학생들이 뜰 밑에 벌여 서서 한 번 읍하고 마
루에 올라와서 경서(經書)를 펴서 토론하여, 군신ㆍ부자ㆍ장유ㆍ붕우간의 도를 강론하는데, 굽은 것은 바로잡고
서툰 것은 익숙하게 해주고, 허물을 경계하고 도와주어, 움직임과 쉬는 것을 때맞추어 적당히 당기고 풀어주고
해서, 날마다 교화하여 갈고 닦아서 기질을 변화하게 하여, 후일에 장차 나라에 충신이 되고 집에서는 효자가 될
인재가 쏟아져 나오게 하는 것이니, 아, 참으로 성하기가 우리 동방에서는 처음 보는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성인의 가르침이 여러 갈래인데 이 집을 명륜(明倫)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
거늘, 내가 답하기를, '부자와 군신과 부부와 장유와 붕우의 사귐이란 천리(天理)의 본연에서 근본한 것이므로
이 천지가 다하도록 함께 할 것이니, 사람의 도리로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옛날 하(夏) ㆍ 상(商)ㆍ주(周)의 교(校)와 서(序)와 상(庠)과 학(學)이 이 인륜을 밝히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
다. 인륜이 위에서 밝혀지면 아래에서 백성들이 친하게 될 것이다. 공부자(孔夫子)는 큰 성인이시니, 여러 길 되
는 높은 담과 같아서 그 문을 찾아 들어가는 자가 또한 적다.
그러나 그 성인된 까닭을 구하여 보면 능히 인륜의 도를 다한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인륜의 지극한 분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규(規)와 구(矩)가 방(方)과 원(圓)의 극치인
것과 같아서 단연코 털끝만치도 거기에 더 보탤 수 없는 것이다. 진(秦)ㆍ한(漢) 이후로 바른 학문이 전해지지
못하여 신(申)ㆍ한(韓)이 망가트렸고 노(老)ㆍ장(莊)이 어지럽혀서 인륜이 밝지 못하게 되었고, 또 훈고(訓?)로
구구하게 하고 사장(詞章)으로 떠들어서 인륜이 전혀 밝지 못하게 되어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름이 거의 없게 되
었으니, 아,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닌가? 지금 이 집에서 머물고 이 집에 드나드는 자들은 이 명륜이란 이름을 보
고서 그 뜻을 알고, 뜻을 알 뿐만 아니라 참으로 실천하여 성조(聖朝)에서 유생을 교육하는 본의를 저버리지 않
아야 옳을 것이다.
그 공부의 절목(節目) 같은 것은 비록 한 마디 말로 다 할 수는 없으나, 접촉하는 것에 따라 비유하여 깨우친다면
또한 이 집 안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지붕이 위에 있고 기둥이 아래에 있는 것은 높은 이가 낮은 이에게 임한
것이고, 어둠을 등지고 밝은 것을 향함은 안과 밖을 분별하는 것이고, 문에서 마루에 오르고 마루에서 방에 들어
감은 질서가 있어 등급을 뛰어 넘을 수 없는 것이며, 분명하여 동(東)ㆍ서(西)를 구별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구한
다면 학문의 길은 거의 다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 신석조(辛碩祖)가 지은 〈수사종준기(受賜鍾樽記)〉에, "성균관은 옛날 태학으로, 예문(藝文) 교서(校書)와
함께 3관이 되니, 실로 사문(斯文)의 표준이 되는 곳이다. 우리 태종공정대왕이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여기에
서 배워 벼슬길에 나아가셨기 때문에, 어휘(御諱)가 벽상에 있는 제명기에 실려 있으니, 이로 말미암아 선비들
의 영광과 국가의 대우가 다른 관(館)에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성균관에 전부터 푸른 빛깔의 종지 한 개가 있어
기묘한 절품(絶品)이므로 관에서 보배로 여겼는데, 태종이 즉위하셔서 옛 물건을 생각하여 유사(有司)에게 명
하여 갑에 넣어 간직하게 하시고, 여러 번 술과 과일을 내리셨다. 이때부터 더욱 보물로 여겼으나, 세월이 오래
되어 한 쪽이 이지러져서 유림(儒林)들이 모두 애석해 하더니,
정묘년 8월에 겸 대사성 이조 판서 정인지(鄭麟趾)공이 조용히 계주(啓奏)하니, 임금께서 즉시 백준(白樽) 두
쌍과 백종(白鍾)과 화종(?鍾) 각각 한 쌍을 내려주셨는데, 백자(白磁) 바탕에 푸른빛이 선명하고 윤이 났으며,
다 갑에 넣었고, 종지에는 백금으로 테를 둘러서 만든 수법이 극히 정교하고 치밀하였다.
아울러 술과 고기를 많이 주시어 사부학당(四部學堂)에까지 미치니, 진실로 세상에 다시없는 특별한 은전이었
다. 학관들이 학생들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전문(箋文)을 올리고 머리를 조아려 아름다운 은총에 사례하고,
춤을 추면서 즐거워하였다. 며칠 뒤 중양절(重陽節)에 정부와 육조의 대신들이 명륜당에 모여서 여러 학생을
고과(考課)하였는데, 3관의 선비들이 모두 모여서 하사하신 그릇으로 황봉주를 잔에 따라 선생을 불러서 권하
고, 잔을 들고서 서로 경하하였다.
술이 반쯤 취했을 때, 우의정 하공(河公) 연(演)이 시를 지어 송축하고, 경사(卿士)들이 잇달아 그 시에 화답하니,
임금의 하사를 영광으로 여기고 임금의 덕을 노래한 것이다. 이때에 학관들이 이 일을 오래도록 전하고자 나에
게 기문(記文)을 지어 후인들에게 보여 주자고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으로 왕도정치(王道政治)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이니, 옛날 당(唐)ㆍ우
(虞) 때의 사도(司徒)와 전악(典樂)의 관직으로부터, 교(校)ㆍ상(庠)ㆍ서(序)라 하는 3대(三代) 때의 학(學)은 모
두 인륜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후세로 내려오면서는 학교에 대한 정사가 혹 닦여지기도 하고 폐해지기도 하여, 민속의 낮고 높음과 나라의 복조
의 길고 짧음이 모두 여기에 말미암았으니, 중하지 않은가? 우리 태조께서는 상성(上聖)의 자질로 고려의 운기
(運氣)가 쇠할 때를 당하여 개연히 강상을 붙들고 세도(世道)를 돌이킬 뜻을 가져 매양 이름 높은 학자들을 불러
경서와 역사책 보기를 즐겨 하고, 모든 행동은 반드시 옛일을 본받으셨다.
천운에 응하여 개국(開國)하셔서는 모든 일을 처음으로 시작하느라고 겨를이 없었으면서도 맨 먼저 성묘(聖廟)
와 태학을 세우셨으니, 규모가 원대하였다.
태종이 그 뜻을 이으셔서 정일(精一)의 학문으로 군사(君師)의 책임을 맡아서 몸소 실행하여 모범이 되니, 문화
의 치적이 성하게 일어났다. 매양 학교에 대해서 간절한 생각을 하시어 모든 정치가 번거로운 가운데서도 전일
의 뜻을 잊지 않으시어, 적은 그릇 하나에까지도 이렇게 하셨으니, 그 나머지 일에 대해서 지극히 마음을 쓰지
않음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총명하시고 지혜로워, 학문이 하늘이 낸 성인에 가까워
서 스승을 높이고 도를 중히 여겨, 즐겁게 영재(英才)를 교육하시니, 정치와 교화의 융성함을 삼대(三代)에 견줄
만하다.
지금 또 선왕의 뜻을 이으셔서 특별히 내부(內府)의 기물을 나누어 주시고, 또 주식(酒食)을 내려주시니, 어찌
이것이 한 때에 빛날 뿐이겠는가? 이로써 우리 유도(儒道)가 더욱 중해지고 문풍(文風)이 더욱 떨쳐져서,
영광이 옛날보다 갑절이나 될 것이며, 아름다운 이야기가 무궁토록 전해질 것이니, 사문(斯文)이 있은 이래로
보기 드문 성대한 일이다. 봉액(縫掖)을 입은 무리들이 눈을 닦고 공손히 보며 함께 도견(陶甄)의 교화를 입고
고르게 우로(雨露) 같은 은택에 젖어 덕을 성취하거나 재목을 이루어 모두 유용한 인재가 될 것이다.
이리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태평을 즐기면서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어노는 활발하고 자연스런 속에서 고무
될 것이니, 〈청아(菁莪)〉와 〈풍기(??)〉같은 시편을 지어 올리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비록 재
주가 없으나 다행히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고, 또 사국(史局)의 일을 겸했으니, 노래하고 짓는 것이 바로 나의
직분이므로 감히 나의 졸렬하고 천박함을 생각지 않고 기꺼이 기문을 지어 여러 시편 머리에 서문으로 붙이노
라." 하였다.
○ 서거정이 지은 〈존경각기(尊經閣記)〉에, "공손히 생각건대, 태조 강헌대왕은 하늘의 큰 명을 받아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고 나서 성묘와 태학을 세워 서둘러 문교로 다스렸으며, 태조 공정대왕은 크게 큰 유서(遺緖)
를 이어서 학궁(學宮)을 다시 새롭게 지어 대성전을 더 넓히고, 성국종성공 증자(?國宗聖公曾子)와 기국술성공
자사(沂國述聖公子思) 두 분을 배향(配享)하고, 자장(子張)을 십철(十哲)에 올리고서,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비
문(碑文)을 지어 비를 세우게 하여 문치(文治)를 빛나게 이루었으며, 세종 장헌대왕은 문(文)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켜 인재를 교육하여 성취시킨 공이 선왕(先王)의 공적보다 빛이 났다.
이처럼 삼성(三聖)이 서로 계승하여 이룩하였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학자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김이 백왕
(百王) 위에 높이 뛰어나서 즉위한 3년 신묘 2월 을유일에 면복(冕服)을 갖추고 규장(圭璋)을 잡고서 태뢰(太牢)
로 친히 선성(先聖 공자)에게 제사하고, 명륜당에 납시어 성균관 관원과 유아(儒雅)하고 노성(老成)한 신하를
불러 경서(經書)를 가지고 문답하고 논란하였다.
강학이 끝나자, 임금이 친히 꿇어 앉아 폐백을 주시고, 학생들에게 술과 찬을 대접하고, 또 과거를 보여서 선비
를 뽑게 하였다. 그 해 겨울 11월에 임금께서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지금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자들은 모
두 비단옷 입는 귀한 집 자제로서 학문을 하지 않아 학술이 없는 자들이다.
이 성균관 학생 중에는 필시 경서와 역사에 통달하고 정치의 대체를 알아 재능이 관직을 맡을 만한 자가 있을 것
이니, 본관에게 천거하게 하라.' 하였다. 본관에서 진사 안양생(安良生)을 추천하였더니, 임금이 품계를 높여 등
용하였다. 또 달마다 초하루와 보름에는 성균관 관원과 여러 학생을 내전(內殿)에 불러들여 경서(經書)의 글뜻을
강론하고, 그 중 우수한 자에게는 포상을 더하였다.
4년 임진년에 임금께서 좌의정 최항(崔恒), 판중추부사 이석형(李石亨), 좌찬성 노사신(盧思愼), 이조 판서 성임
(成任),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 이조 참판 이예(李芮), 함종군(咸從君) 어세겸(魚世謙) 등을 윤번으로
본관에 나와 일을 보게 하고, 대사성 권륜(權綸)과 거정(居正)에게도 때때로 서로 모여서 경서와 역사를 강의하
여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고, 자주 근신들을 보내서 술과 찬을 내려 주셨다. 6년 갑오년에는 반궁(泮宮)을 수리하
라 하셔서 주위를 전부 돌로 쌓게 하였으며, 7년 을미년 봄 갑인일에는 임금께서 예의(禮儀)를 갖추어 성묘에 배
알하고, 드디어 명륜당에 납시어 친히 책문(策問)으로 선비를 뽑았다. 이 해에 좌의정 한명회(韓明澮)가 건의하
여 장서각(藏書閣)을 짓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윤허하시고 명륜당 북쪽에 짓게 하였다.
집이 준공되자, 지금까지 내장(內藏)하였던 오경(五經)과 사서(四書) 각 백 부씩을 하사하고, 또 전교서(典校署)
와 8도(八道)에 유시(諭示)하여 책판[書板]으로 되어 있는 것은 즉시 다 인쇄해서 책으로 만들어 성균관에 보내
게 하였다.
이리하여 경서(經書)ㆍ사서(史書)ㆍ백가제자잡서(百家諸子雜書)와 전부터 본관에 저장되었던 서적을 합해서
무려 수만 권이나 되었다. 사예(司藝)ㆍ학정(學正) 각각 1명씩을 명하여 서적 출납을 맡게 하였더니,
성균관 관원과 학생들이 모두 기뻐하여 춤추고 뛰면서 서로 경하하고서 임금이 내려주신 은혜를 무궁한 후세에
까지 자랑하기 위하여 나에게 기문을 짓도록 부탁하였다.
거정은 그윽이 생각건대, 본조에서 조종조(祖宗朝)이래로 왕도(王道)의 표준을 세우고 법칙을 만들어 학교를
개설하고 스승을 세워서 많은 인재를 인의(仁義)로 길러온 지가 백 년이 되어 간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선대에 이루어진 법도를 공경히 계승하여 성균관에 두 차례나 거둥하여 엄숙히 선성
(先聖)에게 제사하는 등, 교화를 숭상하고 어진 이를 장려하여 학문을 일으키고 선비를 기르는 일에 지극히 마
음을 쓰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경적(經籍)이 적어서 보고 읽는 데에 넓지 못할까 염려하여 특별히 명하
여 장서각을 짓게 하고, 존경(尊經)이라 이름하였으니, 존경이란 것은 경(經)을 높이고 공경히 받들고 지키라는
말이니, 아, 크도다! 성인의 말씀이여. 신은 들으니, '하늘과 땅이 지극히 신묘하나, 비와 이슬과 바람과 우레가
없다면 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도(道)가 지극히 크나, 성스럽고 밝은 임금이 없다면 교화를 일으킬 수 없으며,
사람의 성품이 지극히 선하나, 글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지 않으면 국가에 필요한 인재가 될 수 없다.' 하였다.
더구나 태학은 어진 선비의 관문(關門)이고, 사문(斯文)의 근본이 되는 곳이며, 경(經)은 도(道)를 싣는 그릇이고,
도는 성인의 마음이니, 이 경을 높이지 않고서 성인의 마음을 찾을 수 있으며, 이 경에 통달하지 않고서 성인의
도를 행할 수 있겠는가? 스승이 되는 학자가 이것을 체득하면 글을 통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고, 선택하는 것이
정묘하지 않음이 없어서 가르치는 것이 밝을 것이며, 어진 선비가 이것을 체득하면 이치를 연구하고 천성(天性)
을 그대로 행하며 도의 체(體)에 밝고 용(用)에 적당하여 장차 크게 등용됨이 있을 것이니, 성인이 인재를 배양
하고 세도(世道)를 부지하는 기틀이 무엇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재주 있는 많은 선비가 있어서 문왕(文王)이 편안해졌다.' 하였으니, 이것은 문왕이 인재
를 많이 육성한 것을 말한 것이다. 신이 보건대, 우리 전하께서 인재를 육성하신 거룩한 공적이 어찌 문왕에게
양보함이 있겠는가? 신 거정은 장구나 새기는 졸렬한 재능으로 외람되이 본관의 장이 되었지만, 눈으로 이처럼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을 보고서 글 한 편 찬술함이 없을 수 없기에, 삼가 이 글을 써서 기문으로 하나이다." 하
였다.
○ 명 나라 예겸(倪謙)이 지은 시에, "새벽에 성균관에 가서 성묘(聖廟)에 배알하니, 푸른 산 양지에 있는 행단
(杏壇)이 넓고 통창하도다. 8조의 교전(敎典)에서는 기자(箕子)를 생각하고, 만세의 유종(儒宗)으로는 소왕(素
王)을 사모하네. 재주 있는 많은 관원들은 즐겁게 좌우에 있고, 푸른 옷 입은 선비들은 기쁘게 줄지어섰네.
문풍(文風)이 어찌 동해 나라에만 퍼졌으랴? 천자의 덕화가 지금 팔방 먼 곳까지도 두루 미치었네." 하였다.
○ 명 나라 진감(陳鑑)의 시에, "새벽에 재계하고 붉은 뜰에 절을 하니, 높은 담 두어 길을 엿보기 어렵구나.
가까이 이 때를 향해서 옛날을 추억하니, 성인이 중국으로부터 곧장 조선국에 이르렀구나.
옛 성인을 이어받아 오는 사람 열어줌이 어디에서 비롯했나? 금(金) 소리로 시작하고 옥(玉) 소리로 끝마치는
이 다시 누가 있는고? 하물며 우리 조정(명나라)의 문교(文敎)가 멀리 퍼졌으니 어디서나 높이고 스승삼지 않
는 땅이 없으리라." 하였다.
○ "선사(先師)에 배알하고 강당에 모이니, 준수한 선비들이 줄지어 벌여섰네. 시서(詩書)로 모두 문명의 교화를
입었고, 준주(樽酒)로 서로 글을 짓는 자리에서 수작하네. 구름은 뜰 앞 소나무를 덮어 그늘이 한창 푸르고,
과일은 단(壇)의 은행알을 돌리는데 그 맛이 향기롭다. 한 때의 좋은 모임 참으로 얻기 어려우니, 천년토록 사문
(斯文)에 밝은 빛이 있으리." 하였다.
○ 명 나라 고윤(高閏)의 시서(詩敍)에, "우리 황제가 신성하고 문무(文武)하여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처음 정사
를 조심하여 천하 신민(臣民)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모두 새로운 치화(治化)에 참여하게 하실 때, 조선국은 의관
(衣冠)과 문물(文物)이 훌륭하고 대대로 독실한 충성을 바쳤다 하여 한림 수찬 진감(陳鑑)과, 태상박사(太常博士)
고윤(高閏)에게 명하여 사신으로 이 곳에 오게 되었다. 조서를 반포하고 3일이 지난 정유일에 나는 수찬 진선생과
함께 목욕 재계한 후 성균관에 가서 선사(先師)께 배알하고 물러나와 강당(講堂)에 좌정하니, 사성 김말(金末)이
북을 쳐서 학생들을 모아 뜰 아래에서 읍하게 하였다.
왕은 의정부 좌찬성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서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두어 잔씩 대접하게 하고, 또 승지 조석문
(曺錫文)을 보내어 좋은 안주로 대접하며 학생들을 장려해 주기를 청하므로, 드디어 그 말을 좇지 않을 수 없어
글제를 내어 학생들에게 글을 짓게 하고는 장려하는 뜻으로 상을 차등하게 주고, 취하도록 마시고 헤어졌다.
이날은 구름이 걷히고 날이 청명하여 풍경이 평상시보다 아름다웠다. 수찬이 먼저 율시(律詩) 두 수를 짓자, 자리
에 있던 일곱 명도 모두 화답하여 총계가 여러 편이었는데, 문장이 찬란하여 구슬을 꿰어 놓은 것 같았다.
오직 내가 지은 것은 졸렬하여 여러분들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없어 땀이 날 정도로 부끄러웠다. 아, 공자의 도는
덮어 주지 않음이 없는 하늘과 같고 실어 주지 않음이 없는 땅과 같아서 중국으로부터 외국에 이르기까지 그 도
를 높이고 믿지 않는 곳이 없으니, 삼강(三綱)ㆍ오상(五常)의 큰 것으로부터 한 가지 일과 한 물건의 적은 것에
이르기까지 포함되지 않음이 없어, 그것으로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공평하
게 다스릴 수가 있다. 위로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 같은 성인도 이 도가 아니면 다 밝
힐 수 없으며, 아래로 주염계(周濂溪)ㆍ정명도(程明道)ㆍ장횡거(張橫渠)ㆍ주회암(朱晦庵) 같은 현인도 이 도가
아니면 발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에는 차례가 있고 그 진도에는 차례가 있으니, 한갓 자기 능력으로는 미칠 수 없는 높고 먼 데
로만 달리고 가깝고 작은 일에는 소홀히 해서도 안 되며, 또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가깝고 작은 데에만 머무
르고 원대한 데에 이르려고 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
이것은 반드시 크게 훌륭한 일을 할 만한 임금이 위에서 흥기시키고 진작함이 있은 뒤에야 배우는 자들이 아래
에서 사모할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태조 고황제(高皇帝)가 이 세상을 다시 만들어 정치가 도에 근본하여
공자를 국도(國都)에서 왕의 예로 제사하고, 군현(郡縣)의 학교에까지 미치게 하였다. 그 뒤에 성자신손(聖子神
孫)들이 왕위를 이을 때에, 모두 태학에 친히 가셔서 천자에게도 스승이 있다는 것을 밝게 보였다.
능히 이 세상을 교화하고 인재를 고무시켜 모난 것을 깨트려 둥글게 만들고, 아로새긴 것을 깎아서 소박하게 만
들어서 당우삼대(唐虞三代)의 훌륭한 정치를 계승하려는 것으로, 다른 백왕(百王)이 방불할 수 없는 것이다.
한 나라 문제(文帝)ㆍ경제(景帝)와 당 나라의 태종(太宗)도 공자를 높일 줄은 알았으나, 그 도를 몸소 실행한
진실이 없었으니, 이 점이 겨우 소강(小康) 상태에 그쳤으므로 사대부들이 끝없는 한탄을 하는 것이다.
하물며 다른 임금이야 말할 것도 없다. 조선국에서는 그 선왕들이 공경히 충심을 다하여 태조 고황제가 책봉하
여 영지를 나누어 주어 동쪽 제후국의 중한 직책을 맡겼다. 그 밖에 모든 제도가 비록 중국과 모두 합치된다고는
할 수 없으나,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어 과거길을 열어서 선비를 뽑는 데에 모두 시서육예(詩書六藝)의 글로
하고, 괴이하고 허탄하여 법이 될 수 없는 말은 없으니, 이는 진실로 사람의 떳떳한 본성과 사물의 법칙은 없어
질 수 없기 때문이겠으나, 그 국왕의 자질이 남보다 뛰어나서 공자를 높일 줄 알고, 수고로운 자를 위로하고 오
는 자를 맞아주며, 굽은 자를 바로 잡아 주고 곧지 못한 자를 곧게 하여 주는 등, 확장시키고 빛나게 하지 않았다
면 능히 의관이나 문물이 이처럼 더욱 빛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스런 옛 왕업을 보전하여 흘러 넘치는 명망이 중국에까지 퍼져서 단서(丹書)가 여러 번 내리고 후
한 상이 특별히 내려져서 여러 제후중에 으뜸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길래 눈으로 직접 그 아름다움
을 보게 되었는고? 스승이나 제자된 이는 오히려 교육의 본의를 알아서 삼가 그 몸을 닦아 부자간에는 친함이
있고,
군신간에는 의가 있고, 부부간에는 분별이 있고, 장유간에는 차서가 있고, 붕우간에는 신의가 있어서, 어두운
방에서도[屋漏] 환하게 밝은 대낮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여 다스리는 도를 넓혀서 이 백성들에게 보답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덕에 나아가고 학업을 닦는 순서에 어긋남이 없어서 공업이 이룩되어 벼슬과 녹이 저절로
이를 것이니, 공자의 도도 거의 밝아질 것이다. 더욱 힘써서 진실이 없는 문식(文飾)에만 일삼지 말 것이다."
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태산(泰山)이 몇천 길이나 되어 위에 뜬 구름과 나란히 있네. 나는 일찍이 여기에 올라
서 뭇 인간들을 내려다 보았네. 하늘에는 사다리가 없으니 오르려 한들 어찌 하리? 높고 높은 공부자는 그 도가
하늘과 같도다. 해와 달이 하토(下土)를 비추고, 비와 이슬은 사심없이 적셔 주네.
자유(子游)와 자하(子夏)가 비록 문학에 뛰어났지만, 어찌 한 구절인들 도왔으리? 의란(?蘭)이 길가에 났으니
만고에 제왕의 스승이시다. 중국에 이미 교화가 두터워서 해외의 이 나라에도 입혀졌구나. 재주 있는 많은 관원
들의 풍속이 밤낮으로 시서(詩書)를 읽네. 마침 임금의 명을 받아서 표연히 이 나라에 오게 되었네.
시달(豺獺)도 물고기와 짐승에게 제사하니, 이 선한 마음을 어찌 속이겠는가? 옛날에 배우지 못함을 부끄러워
했더니, 오늘 한갓 추모하기만 하네. 행단(杏壇)의 가르침 아직 남아 있으며, 목탁(木鐸) 소리도 아직 없어지지
않았네. 향을 올리고 두세 번 절하고 머리를 드니 바람이 서늘하네.' 하였다."
○또 규벽(奎壁)에, "구름이 걷히고 오성(五星)이 모이니, 주인이 예를 좋아하는 것이 동평(東平)과 같구나.
술잔이 흥취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문(斯文)에 옛 정이 있는 것일세. 울창한 송백은 비를 맞아 윤택하
고, 뾰족한 봉우리는 아지랑이 끼었다가 개는도다. 석양에 이별하며 부자(夫子)를 쳐다보니, 두어 길 높은 담에
송성(頌聲)이 가득하여라." 하였다.
○ 명 나라 김식(金湜)의 시에, "천년의 지성(至聖)이고 백왕(百王)의 스승이시니, 참 선비가 되지 않고는 알지
못하리. 한결같은 덕이 넓고 넓어 천지에 표준되고, 육경(六經)의 밝은 거울 해와 별처럼 드리워졌네. 생전에는
수레바퀴로 여러 나라 돌았고, 돌아가신 뒤에는 위령(威靈)이 천하에 모셔졌네. 동쪽 나라 부자묘(夫子廟)에
오늘 와서 참배하니, 우리 유도(儒道) 대통할 때 지금 바로 만났네." 하였다.
○ 또, "옛날부터 어진 인재 진신(縉紳)을 중히 여기니, 전해오는 모범이 성균관에 있네. 조정에는 이미 산등성이
에서 우는 봉(鳳)이 나타나고, 상서로운 세상에서는 도리어 동산에 있는 기린(麒麟)이 보이네.
즐거운 현송(絃誦) 소리 삼사(三舍)의 새벽이고, 재주 있는 많은 관원들은 구재(九齋)의 봄이로다.
대수롭지 않은 문자(文字)는 논할 것도 없을지니, 도덕이 장차 지극히 순화(醇化)하리." 하였다.
○ 명 나라 기순(祁順)이 문묘(文廟)에 배알한 시서(詩序)에, "나는 중국에서 벼슬하면서 듣기를, '외국에서 문헌
(文獻)이 있는 나라로는 조선이 제일이니, 그 사람들은 유학(儒學)을 업으로 하여 경서에 통달하며 공자의 도를
높이고 숭상하니, 기자(箕子)의 유교(遺敎)만을 지키고 있을 뿐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천자의 명을 받고서 행인(行人) 사부관(司副官) 장정옥(張廷玉) 군과 함께 사신으로 이 나라에 와서 조서를
전하고, 성균관에 가서 공자묘에 배알하였다. 성균관은 나라 도성 동북쪽에 있어서 지세가 가장 높고 시원한 곳
이다. 묘가 다섯 칸인데 대성전(大成殿)이라고 편액(扁額)하였고, 제사하는 예법은 중국과 같다.
대성전 뒤에 명륜당이 있고, 그 뒤에 장서각이 있어 학업에 힘쓰는 자가 3백여 명이나 된다. 그들의 학습하는 사
부(詞賦)와 책문(策問)을 구하여 보니, 중국의 체제와 같다. 명륜당에 앉아 있노라니 마침 한참 동안 비가 내렸다.
장정옥이 알묘시(謁廟詩)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고, 나도 칠언 율시(七言律詩) 두 수를 지었는데,
하나는 학생들을 위해서 권면한 것이다. 같은 자리에 있던 조선국 관원이 여덟 명이었는데, 모두 운(韻)에 따라서
시를 짓고, 또 서문(序文)을 써 달라고 하였다. 그윽이 생각건대, 공자의 도가 사방에 두루 퍼지고 만세에 행해지
지만, 조선에서 능히 이 도를 받들어 동방에서 제일이 되었으니, 역시 소중히 여길 바를 안다 하겠다.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조선은 그 풍속이 글 읽기를 좋아하여 서민들의 미천한 집에서도 각기 마을 거리에
경당(?堂)을 설치해서 서로 학문을 강습한다.' 하였다.
이 나라 사람으로 김행성(金行成)ㆍ최한(崔罕)ㆍ왕빈(王彬) 등이 서로 잇달아 송 나라 국자감(國子監)에 취학하
여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고 돌아왔으니, 이 나라 사람들이 시서(詩書)에 교화된 것이 이미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우리 명 나라가 문교를 크게 펴서 동방으로 점차 파급되었는데, 더욱 근래에는 조선 인사들이 해마다
중국 서울에 오게 되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소득이 매우 크고 많으므로, 이 나라의 전장문물(典章文物)이
중국과 다름이 없고, 다른 나라에 비해서 월등히 나음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지금 여러 학생들이 성현의 학문
을 배워서 항상 생각하기를, '속이 쌓이면 도덕이 되고 밖으로 나타나면 공업(功業)이 되니, 고명하고 원대한
경지에 이르도록 힘쓰고, 구차하고 비루한 습성에 안주하지 않아야 학문을 잘 하는 자이다.'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글을 짓는 말기(末技)에만 얽매여서 근본이 되는 도의를 궁구하지 않는다면 중국에서 들었던 조선
이 아니라 하겠다. 내가 시로써 서로 권면하려는 것도 그 본의가 대개 이와 같으니, 여러 학생들은 선택할지어다."
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조선의 시례(詩禮)가 홀로 제일이라 칭해지더니, 공자묘의 규모도 중국과 같도다.
담장 두어 길이나 되니 들어갈 길이 없되, 천 년 동안 내려온 음악 소리에는 정신이 통하네. 사문(斯文)은 절로
하늘과 함께 오래 가고, 우리 도는 해가 하늘 한가운데 있는 것과 같네. 궤도와 문자가 온 세상이 다 같으니
공부자의 전장문물(典章文物)을 어디 간들 높이지 않으리." 하였다.
○ 또, "청포(靑袍) 입고 벌여 선 수많은 생도들은 천리화류(千里??) 한혈구(汗血駒)로세. 수재(秀才)를 뽑는 것
은 멀리 주 나라의 준사(俊士)를 모방하였고, 중화(中華)를 사모하여 노 나라 진유(眞儒 공자(孔子))를 함께 섬
기네. 공명(功名)은 옛날부터 어려운 일 아니지만, 도덕의 유래(由來)가 큰길이 되었네. 수(隋)ㆍ당(唐)의 선비
들 근본에는 어둡고 사부(詞賦)에만 힘을 쓴 것 배우지 말라." 하였다.
○ 명 나라 장근(張瑾)의 시에, "공자는 강상(綱常)으로 만대의 스승이니, 수레에서 절하며 추모한다. 당시에도
뗏목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려 하였으니, 구이(九夷)에 묘(廟)를 모심이 당연하구나." 하였다.
○ 명 나라 동월(董越)의 명륜당시(明倫堂詩)에, "그대의 패물이 푸르구나. 녹수(綠樹)의 그늘에 백 년 동안 왕의
덕화 깊이 입었네. 문장은 이미 서곤체(西崑體)로 바뀌었지만, 관현(管絃)은 아직도 태고의 소리가 남아 있네.
푸른 마름 봄바람에 장구(杖?)를 따랐고, 부상(扶桑)에 뜨는 해는 구림(?琳)에 비추었다. 동국에는 의관이 훌륭
하다고 옛날부터 말하더니, 지금 보니 명(名)과 실(實)이 꼭 맞네." 하였다.
○ 서거정이 지은 창화시(唱和詩)의 서문에, "전하께서 즉위한 10년 무술 4월 갑오일 새벽에,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시고 선성(宣聖 공자)께 배알하고, 작헌례(酌獻禮)를 마치고는 원류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로 바꿔
입으신 뒤에 명륜당에 납시어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셨는데, 여러 노인들은 동쪽에 앉고 시강관(侍講官)은 서쪽
에 앉았으며, 모신 신하들은 섬돌 위에 서고 학관과 여러 생도는 섬돌 아래에 섰다.
술이 다섯 잔씩 돈 뒤에 그치고, 임금께서 여러 노인들과 신하들에게 명하여 앞에 가까이 오게 하고 정치의 도를
강론하시는데, 임금이 맨 먼저 천재를 당해서 몸을 닦고 반성하는 방법을 물으니, 여러 신하가 각기 그 뜻을 말
하였다. 임금께서 또 이르기를, '군주가 천하를 다스리는 대경대법(大經大法)이 모두 《서경》에 실려 있다고
채침(蔡沈)의 서문(序文)에 모두 말하였다. 경들은 마땅히 각기 논란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
《서경》에 이른바 안으로 여색에 빠지거나 밖으로 사냥에 빠지거나, 술과 음악에 빠지거나 집을 높게 짓고 담장
을 조각하거나 하여 사치하는 등 이와 같은 네 가지 허물은 내가 늘 경계하는 바이니, 그대들은 각기 경계하는 말
을 진술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마땅히 경들의 뜻을 본받아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결같이 하리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크신 말씀과 한결같으신 마음은 참으로 천고에 드문
성주(聖主)로소이다.' 하였다.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가 근체시(近體詩 율시(律詩)) 한 수를 지어 임금의 아름답고 성대한 덕
을 찬양하니, 진신ㆍ사대부들이 서로 화답하여 짓고, 신 거정(居正)에게 서문을 쓰라고 하였다. 신은 그윽히 생
각건대, 잘 다스리기를 원하고 문(文)을 좋아하는 임금이 시대마다 항상 나오지 않는데, 오직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예지(睿智)로 학문을 계속하여 밝히시어 학자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것이 여러 임금 위에 뛰어나시어
즉위하신 3년 신묘 2월 을묘일에 태뢰(太牢)로 선성(宣聖)께 제사하시고, 명륜당에 납시어 문신(文臣) 2품 이상
과 성균관원을 인견하시고 경서를 가지고 문답하고 논란하시며, 술과 명주를 내려주시고, 6년 갑오에 유사(有司)
에게 명하여 반궁(泮宮)을 수리하게 하시되, 주위를 돌로 둘러 쌓게 하셨다.
7년 을미 3월 병인일에 예의를 갖추어서 석전(釋奠)을 올리고, 명륜당에 납시어 친히 책문(策問)으로 선비를 뽑
았으며, 가을에 명륜당 북쪽에 존경각(尊經閣)을 새로 짓도록 명하시고, 9년 8월 정유일에 친히 석전을 올리고,
드디어 사단(射壇)에 납시어 여러 신하와 잔치하고 대사례(大射禮)를 거행하고, 또 과거를 보여서 선비를 뽑았
으며, 지금은 이렇게 노인을 봉양하고 좋은 말을 요청하고,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강론하여 여러 조정에서 하지
못하던 전례(典禮)를 거행하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
신은 그윽이 생각건대, 이 도와 이 문(文)은 천지를 꿰고 고금에 뻗치어 한결같은 것이다. 그러나 흥하고 패하는
것은 임금의 한 몸에 달려 있는 것이니, 3대(三代) 이전에는 도통(道統)의 전함이 임금에게 달려 있었으니, 요
(堯)ㆍ순(舜)ㆍ우(禹)의 정일(精一)과,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중극(中極)이 이것이다. 삼대 이후에는 임금
으로서 도통을 전해 받은 자를 들을 수 없고, 능히 이 도와 이 문이 중하다는 것을 알고서 높이고 숭상한 이도 두
어 임금 뿐이다. 태학(太學)을 일으키고 유아(儒雅)함을 숭상한 것은 광무제(光武帝)에서 비롯되었고, 삼로오경
(三老五更)을 높여서 봉양하고 경서를 가지고 문답하고 논란하는 예(禮)는 명제(明帝 광무(光武)의 자(子)) 때
더욱 성하였고,
당 태종(唐太宗)은 친히 석전을 행하고 학궁(學宮)을 증축하여 넓혔다. 이 임금들의 한 가지 일도 오히려 역사책
에서 빛을 내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이 임금들의 행한 일을 겸하여 다 하셨다.
하물며 제왕(帝王)의 도와 문은 모두 마음에 근본하는 것인데, 광무제는 도참(圖讖)을 좋아하였고, 명제(明帝)는
불교(佛敎)를 높였으며, 당 태종은 인의(仁義)를 빌려서 한갓 문을 좋아했다는 이름은 있었으나 문을 좋아한 실
상은 없었다. 우리 전하께서는 치도(治道)를 강론하시되 천재를 만나서 몸을 닦고 반성하는 도리를 먼저 하시고,
다음으로 고금의 제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대경대법(大經大法)으로 하시고 끝으로는 《서경》의 네 가지 훈계로
경계하였으니, 그 마음은 바로 요ㆍ순ㆍ우ㆍ탕ㆍ문ㆍ무의 마음이고, 그 도는 바로 정일 중극(精一中極)의 도이
다. 여러 신하가 경계를 진술한 것도 이제삼왕(二帝三王)의 도를 인용하고, 삼대 이하의 일로 말한 것은 하나도
없어서 한 당(堂) 위에서 문답한 것이 융성한 세대의 기풍이 있었으니, 아,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
선유(先儒) 호인(胡寅)이 논하기를, '명제(明帝)는 예의(禮儀)가 예물보다 못하였는데,
환영(桓榮)은 한갓 경서의 장구(章句)만 일삼고,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의 도를
알지 못하여 그 임금으로 하여금 덕업이 겨우 그 정도에서 그치게 하였다.' 하였다.
성상(聖上)께서는 문(文)을 좋아하기를 실제로 하고 형식으로 하지 않으며, 여러 신하들은 임금을 도에 이르도록
끌어올리고 명분만으로 하지 않아서, 이 때문에 위로는 이제삼왕의 도를 전해 받고, 아래로는 밝은 임금을 이제
삼왕의 위에 올려서 임금의 높은 품격과 제왕의 성대한 일이 극치에 이른 것이니, 어찌 한당(漢唐)을 족히 논하
겠는가? 내가 재능은 없으나 이같은 성대한 의절(儀節)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노래하고 읊고 찬송하여 찬술(撰述)
하는 것이 또 나의 직분이다. 여러분들의 시는 곧 주 나라 〈벽옹(?雍)〉 시와 노 나라 〈반궁(泮宮)〉시와 같은
것인지라. 내가 자하(子夏)의 뜻을 이어서 이 서문을 지어 첫머리에 싣는다." 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하늘이 밝은 임금을 도와서 천명(天命)이 새로우니, 태평의 성대한 사업이 밝은 때에
응하였다. 벽옹에 친림(親臨)한 것은 선성(先聖)을 높이는 것이고, 노인을 봉양함은 바야흐로 지극한 인(仁)을
체행함을 알겠다. 본받아 서술하는 데에는 멀리 요ㆍ순의 도를 높이고, 평론하는 데에는 한(漢)ㆍ당(唐)의 사람
을 취하지 않는다. 역사책에 특별히 써서 남은 빛이 발하여 오는 세대 몇만 년에 밝게 비추게 하리라." 하였다.
신증 연산군 갑자년에 다른 곳에 철거하여 옮기고, 을축년에는 박사 이하의 관원을 혁파하였다가 금상 초년에
다 복구하였다.
상서원(尙瑞院) : 보루각(報漏閣) 남쪽에 있으며, 새보(璽寶)와 부패(符牌)와 절월(節鉞)을 지키는 것을 관장한다.
○ 정(正)이 1명인데 도승지가 겸임하고, 판관(判官)과 직장(直長)이 각각 1명이고, 부직장(副直長)이 2명인데
정8품이며, 부직장의 관품은 다른 관사(官司)와 같다.
춘추관(春秋館) : 상서원 서쪽에 있으며,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일을 관장한다.
○ 영사가 1명이고, 감사ㆍ지사ㆍ동지사가 각각 2명씩이다. 수찬관(修撰官)은 정3품이고, 편수관(編修官)은 종
4품 이상이고, 기주관(記注官)은 종5품 이상이고, 기사관(記事官)은 정9품인데,
이상은 모두 다른 관원으로 겸임하게 한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기사관을 녹고관(錄考官)으로 바꿨다가 금상 초년에 복구하였다.
예문관(藝文館) : 경복궁 승정원 서쪽에 있으며, 사명(辭命)을 짓는 일을 관장한다.
○ 영사ㆍ대제학ㆍ제학이 각각 1명씩인데 모두 다른 관원으로 겸임하게 하고, 직제학이 1명인데 도승지가 겸임
하고, 응교(應敎)가 1명인데 홍문관의 직제학 이하와 교리 이상의 관원으로 겸임하게 한다. 봉교(奉敎)가 2명인
데 정7품이고, 대교(待敎)가 2명인데 정8품이고, 검열(檢閱)이 4명인데 정9품이다.
○ 최항(崔恒)이 지은 사연서(賜宴序)에 "임금께서 즉위하신 6년 여름에 정부와 이조에 명하여 문학하는 선비
15명을 뽑아서 예문관 본사(本司)의 일을 겸임하게 하고, 간간이 본관에 나가서 서로 강론하게 하였으며, 경연
(經筵)에 간직된 보기 드문 서적들도 마음대로 상고하고 열람하여 널리 아는 데에 자료로 삼도록 허가하며,
매월 상하한(上下澣)에 문장에 관한 일을 주관하는 대신과 본관 대제학이 모여 앉아 읽은 글을 강(講)하게 하
고, 또 글제를 내어 제술하기를 명하여 등급을 매겨서 위에 아뢰는데 매월 두 차례씩 하게 하고, 그 해 섣달에
가서는 1년 성적의 우열을 통틀어 상고해서 그 중에 가장 좋고 나쁜 자를 승진 또는 출삭(黜削)하게 하였는데,
녹관(祿官)도 이와 같이 하였다. 8월 임자일에, 처음 시험을 보이는데, 신이 대제학 신 아무와 같이 시관이 되
었다.
임금이 신에게 명하기를, '문(文)이나 무(武)는 한 쪽이라도 폐해서는 안된다. 나는 본래 유술(儒術)을 중히 여
기면서도 변방에 일이 많아서 자주 경 등과 같이 강론하지는 못하였으나, 어찌 잠깐이라도 마음에서 잊은 적이
있겠는가? 유술을 일으키는 데에 경 등도 마음을 다해야 한다. 지금 술과 풍악을 내리노니,
나의 뜻을 여러 선비에게 유시하고, 또 마음껏 즐겁게 놀라.' 하시니, 여러 선비들이 명을 듣고는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였다.
조금 있다가 우부승지 유자환(柳子煥)이 선온(宣? 임금이 내리는 궁중의 법주)을 받들고 왔다. 이에 화려한 자리
를 펴고 임금께서 주신 음식이 차려져서 여러 선비들이 차례로 엎드려 내려주신 술을 마시는데, 선악(仙樂)이
번갈아 연주되어 마치 균천악(鈞天樂)을 하늘 위에서 듣는 것 같았다. 술과 풍악을 하사하신 데 대해서 사례하는
절구(絶句) 한 수씩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으니, 임금의 은총을 더 빛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러 선비들은 각기
붓을 잡고 곧 시를 지었다. 그리고는 주령(酒令)이 엄하여 술잔을 드는 차례가 도는 데에서 빠지지 못하게 하였다.
포식하고 취해서 즐겁게 뛰고 환호하니, 만족하고 화락하여 춤추는 자, 뛰노는 자, 노래 부르는 자, 시 읊는 자,
벽에 기대고 잠자는 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시 읊는 자 등등 그 모양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모두 임금의 은혜
에 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매우 즐거워하여 밤이 늦어서야 파하고, 다음날 아침에 일찍 대궐에 나아가 사은
(謝恩)하고 지은 시를 올리니, 임금께서는 보시고 가상히 여기시어 드디어 화공(?工)에게 명하여 그림을 그려서
오래도록 전하여 보게 하시니, 아, 참으로 유림의 성대한 일이다.
신이 그윽이 생각건대, 인재는 국가의 이기(利器)로 문(文)은 경(經)이 되고, 무(武)는 위(緯)가 되니, 체(體)는
다르나 용(用)은 같음이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새의 두 날개와도 같아서, 처음부터 피차와 경중의 구분이 없으니,
늦추었다 당겼다 만났다 숨겼다 하는 것을 임금이 어찌 한쪽만을 편벽되게 하랴? 그러나 그 본말과 선후를 몰라
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도학은 정치를 하는 근본이고 문장은 세상을 다스리는 도구이니, 예악과 교화는 어느
것이나 모두 문(文)의 드러남이고, 정사와 호령 또한 도의 전파이기 때문이다. 참다운 선비의 사업을 귀히 여기는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글줄이나 읽고 글귀나 다듬는 데 있을 뿐이겠는가? 문사(文士)가 많이 일어나는 것이
비록 나라의 운수에 관계된다고는 하나, 진작시키고 완성하는 기틀은 군사(君師)에게 힘입지 않는 적이 없으니,
참으로 임금이 진심으로 좋아하여 오랫동안 잘 길러 내어 장려하고 권면하는 데에 그 방법대로 하면 후일에
거두는 효과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신(聖神)으로 크게 천명을 받으셔
서 이미 무공(武功)이 이루어지고 문치가 더욱 드러나서, 천지를 경위하고 고금(古今)을 열고 닫으시면서도
오히려 유아(儒雅)한 선비를 널리 맞아서 나라의 터전을 북돋아 기르시니, 청아(菁莪)의 은택이 깊고, 역박(?樸)
의 교화가 흡족하여, 큰 집과 부드러운 담요 위에서 때때로 신하를 불러 학문을 강론하여 많이 들으시고 멀리 보
시어 날마다 은총을 내려주시니, 한 세대를 고무시키는 신묘한 교화와 만물(萬物)을 도야시키는 큰 규모가 지극
히 성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유도를 완성케 하는 방법에 오히려 깊이 유의하시어 또 시험 보이는 방법을 세워서 여러 영재(英才)를
더욱 면려하여 장차 날랜 기운을 격동하게 하고, 사봉(詞鋒)을 더욱 가다듬게 하여 문장의 기예의 마당에 노닐고,
도서(圖書) 속에 출입하여 날로 모르던 것을 알고, 달마다 능한 바를 잊지 말아서 포부는 더욱 커지고 조예(造詣)
는 더욱 정교해져서, 오직 도학이 주자(周子)ㆍ정자(程子)의 마루에 오를 뿐만이 아니라, 문장도 한유(韓愈)ㆍ
유종원(柳宗元)의 뒤를 따르게 하여, 나라의 벼리가 되어 성스러운 덕화를 빛내는 자가 떼지어 나와 성하게 쏟아
져 나오게 하려는 것이다. 그 계획이 이같이 원대하고 기대가 이 같이 무거우니, 선비된 자가 어찌 감동하고 분발
하여 흥기되지 않겠는가?
옛날 주 문왕(周文王)이 인재를 양성한 것과 한 명제(漢明帝)가 선비를 높이던 것과 거의 서로 부합되되, 돈독히
장려하는 방법과 총애하는 융성함은 더욱 그보다도 더하다고 할 것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왕업을 이룩하던 초
기에 또한 궁궐 서쪽에 관(館)을 세우고 사방의 문학하는 선비를 맞아들였다. 방현령(房玄齡)ㆍ두여회(杜如晦)ㆍ
우세남(虞世南)ㆍ저수량(?遂良) 같은 이가, 모두 본관에서 학사(學士)의 직을 띠고서 번갈아 입직하였는데,
그때마다 어주(御廚)의 진찬을 나누어 내려주었다. 태종은 정사 보는 여가에 경적(經籍)을 토론하여 더러는 밤
이 깊어도 쉬지 않고서 염립본(閻立本)에게 명하여 그림으로 그 형상을 그려서 후세에 전해지도록 한 것이 지금
도 미담으로 내려오는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일과 비교해 볼 때 거의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때에 인의(仁義)를 힘써 실행한 덕화는 우리나라와 어느 것이 나은가? 또한 문교를 높이고 유학(儒學)
을 일으킨 것이 과연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 우리 성상(聖上)과 같은가? 만약 그것이 겉으로만 시행하고 억
지로 한 일이라면 그림을 그린 일은 다만 화공(?工)의 웃음거리를 만들어 주었을 뿐일 것이니, 또 무엇을 볼 것이
있겠는가? 신이 용렬한 재주로 전하가 알아주시는 은혜를 잘못 입어서 예문관 대제학 자리에 있게 되었는데,
친히 총애하는 명을 내리시어 영광과 다행이 비할 데 없으니, 은밀히 성상께서 도를 중히 여기고, 선비를 높이는
훌륭하고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한 마디 말이 없을 수 없기에, 우선 전말을 서술하여 뒤에 오는 무궁한 세대에 일
러 주려 한다." 하였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홍문관을 혁파하고, 본관으로 겸하게 하고, 봉교(奉敎) 2명과, 대교(待敎)ㆍ검열(檢閱)
각 1명씩을 더 두게 하였는데, 병인년에는 본관도 혁파하고, 봉교 이하의 관원은 다른 관청의 직을 주고, 녹고관
(錄考官)이란 칭호만 겸하게 하였다가, 지금 임금이 즉위하시자 복구되었다.
승문원(承文院) : 홍례문(弘禮門) 밖에 있으며,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의 문서를 관장한다. ○판교(判校)가 1명
인데 정3품이고, 참교(參校)가 1명인데 종3품이고, 교감(校勘)이 1명인데 종4품이고, 교리(校理)가 2명인데 종5
품이며, 교검(校檢)이 2명인데 정6품이고, 박사(博士)ㆍ저작(著作)ㆍ정자(正字)가 각각 2명이고, 부정자(副正字)
가 2명인데 종9품이다. ○ 이숙함(李淑?)이 지은 제명기(題名記)에, "본원은 중국을 섬기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중국에서 오는 조서(詔書)와 칙서(勅書)도 이곳에 간직한다. 그 직분에는 이문(吏文)과 사자(寫字)가 있고,
또 서계(書契)가 있으니, 이웃 나라와 교제하기 때문이다. 고려조에서는 문서감진색(文書監進色)이라 하여 별감
(別監)을 두었는데, 뒤에는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로 고치고 사(使)ㆍ부사(副使)ㆍ판관(判官)을 두었는데, 모두
다른 관원으로 겸하게 하고 정원(定員)이 없었다. 우리 태종 공정 대왕 9년 경인일에 고쳐서 지사(知事)ㆍ첨지사
(僉知事)ㆍ검토관(檢討官)ㆍ교리관(校理官)ㆍ수찬관(修撰官)ㆍ서기(書記) 등을 두고, 그 직위마다 모두 임시직
이 있게 하였다. 그 이듬해 신묘년에 승문원이란 지금의 명칭으로 고치고, 판사ㆍ지사ㆍ첨지사 각각 1명씩과
교리ㆍ부교리ㆍ정자ㆍ부정자 각각 2명씩을 두었고, 15년 정유년에는 박사ㆍ저작 각각 2씩명을 더 두었으며,
세종 장헌대왕 15년 계해에 첨지(僉知)를 부지(副知)고 고치고, 또 본원이 북부 양덕방(陽德坊)에 있어서 민간이
거주하는 곳에 섞여 있으므로, 천자가 내려준 조서나 칙서를 간직하는 데에 공경하고 중히 여기는 뜻이 매우 아
니다고 하여 드디어 궁궐 안으로 옮겨 따로 북쪽 모퉁이에 집을 지어 간직하였다. 세조 혜장대왕 12년 병술에
관제를 고쳐서 판교(判校)ㆍ참교(參校)ㆍ교감(校勘)이라 하고, 뒤에 부교리(副校理)를 교검(校檢)으로 고쳤으니,
이것이 본원의 명호(名號)와 건물과 관원 수의 연혁의 대강이다."하였다. 신증 연산군 병인년에 박사 이하를 혁파
하였다가 금상 초기에 다시 두었다.
통례원(通禮院) : 서부 적선방(積善坊)에 있으며, 조하(朝賀)ㆍ제사(祭祀)ㆍ찬알(贊謁) 등의 일을 관장한다. 좌ㆍ
우통례(左右通禮)가 각각 1명씩인데 정3품이고, 상례(相禮)가 1명인데 종3품이며, 봉례(奉禮)가 1명인데 정4품
이고, 찬의(贊儀)가 1명인데 정5품이며, 인의(引儀)가 8명인데 종6품이다.
봉상시(奉常寺) : 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으며 제사(祭祀)와 시호(諡號)를 정하는 등의 일을 관장한다.
동적전(東籍田)과 서적전(西籍田)이 소속되어 있다. ○ 정(正)ㆍ부정(副正)이 각각 1명씩이고, 첨정(僉正)ㆍ판관
(判官)ㆍ주부(主簿)가 각각 2명씩이며, 직장(直長)ㆍ봉사(奉事)가 각각 1명씩이고, 부봉사가 1명인데 정9품이며,
참봉이 1명이다. 부봉사의 관품(官品)은 다른 관청과 같다.
○ 윤자영(尹子濚)이 지은 제명기에, "봉상(奉常)은 곧 옛날 태상(太常)이다. 직책이 제사를 관장하였으니, 위임의
중함이 다른 유사(有司)에 비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이 벼슬을 둔 지가 오래되었다. 우리 태조께서 관제를 정하
였는데, 판사는 정3품이고, 경(卿)은 종3품이며, 소경(少卿)은 정4품이고, 승(丞)은 종5품이며, 박사(博士)는 정6
품이고, 협률랑(協律郞)은 정7품이며, 대축(大祝)은 정8품이고, 녹사(錄事)는 정9품이다.
태종 원년에 박사를 주부(主簿)로 고치고, 또 경을 영(令)으로, 소경을 부령(副令)으로, 승을 판관(判官)으로
고쳤고, 9년에는 봉상시를 전사시(典祀寺)로 고쳤다. 14년에는 영을 윤(尹)으로, 부령을 소윤(少尹)으로 고치고,
세종 3년에는 다시 봉상시로 개칭하였으며, 뒤에 또 소윤 이하는 모두 문관으로 제수(除授)하고, 위로 판사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오래도록 재직(在職)하게 하고, 임기가 만료되어 옮겨 주어야 할 사람은, 판사는 당상관으로
제수하고 그 외의 관원도 모두 관품을 고쳐 주었다. 지금까지도 이대로 따라서 길이 제도화하였으니, 이는 그
직임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이 벼슬을 거쳐서 경상(卿相)의 높은 자리에 올라간 이가 전후에 많이 있으니,
진실로 후세로 하여금 그 사람들을 상상해 보고 사모할 바를 알게 하려면, 제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송(唐宋) 이후로 비록 궁벽한 작은 고을이라도 그 관청의 벽에 전임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
진실로 이 때문인데, 하물며 예의(禮儀)를 맡고 있는 태상(太常)에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최숙정(崔淑精)이 지은 〈세심당기(洗心堂記)〉에 "동료(同僚) 무송(茂松) 윤선생(尹先生)이 봉상시에 두 번째
로 들어와서, 그가 일을 하는 청사(廳舍)를 세심(洗心)이라고 이름지었는데, 창녕(昌寧) 성중경(成重卿 성임(成
任)) 선생이 큰 글자로 편액(扁額)을 써서 붙였고, 진산(晉山) 강경순(姜景醇 강희맹(姜希孟)) 선생과 달성(達城)
서강중(徐剛中 서거정(徐居正)) 선생이 서로 시를 지었는데, 글씨와 글이 난새와 봉황처럼 아름다운 광채가 벽상
에 빛나고 있다. 무송이 공사를 다스리는 여가에 조용히 앉아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 당에 있는 자는 먼저 그 마
음을 깨끗이 씻어야 할 것이니, 마음에 조금이라도 누가 있으면 이 당을 욕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란 실로 형체가 없으니, 이 관직에 있는 자로 뒤에 와서 지금을 잇는 자가 당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뜻과 마음을 씻는 방법을 혹 모르지 않겠는가? 그러니 자네는 글을 엮어서 기문을 지으라.'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마음이란 신명(神明)의 집이며, 한 몸의 주재(主宰)이다. 아직 사물과 접촉이 없을 때에는 고요한
가운데에서 거울처럼 비고 저울처럼 공평한 것이 깨끗하고 맑아서 비록 귀신도 엿볼 수 없지만 외물과 접하게
되면 선과 악이 기미를 따라서 생기게 되어 기품(氣稟)의 구속과 물욕(物慾)의 가리움을 면할 수 없어서, 어두워
지고 더러워지는 것이 거의 다 그러하다.' 옛날에 그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이들은, '날마다 새롭게 하여야 한다.'
하고, 또는 '욕심을 적게 하라.' 하였으니, 이는 더러운 물욕을 씻어 버리고 양심을 기르는 공부가 천리(天理)의
바름을 회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성현이라도 이 공부에 종사하면서 오히려 중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목욕통과 그릇에 새기고, 서재에 써서 마음속으로 수양한 것이 비록 성성(惺惺)한 경지에 이르더라도, 밖에서
경계하는 것도 애썼다. 이것은 마음이 물욕에 따라서 옮겨지는 것이 있으면 닳아지고 검어지기가 쉽다는 것을
알아서이다. 조금이라도 더러워지면 마치 보배로운 구슬이 탁한 흙탕물에 빠지고 맑은 거울이 티끌 속에 묻힌
것처럼 되니, 진실로 빛을 회복하거나 다시 비출 수 있는 기약이 없게 되어, 오관(五關)이 한번 열리면 사지와
몸의 모든 부분이 드디어 풀어져서 본체(本體)의 밝음이 날로 어두워져 외부에서 오는 물욕을 막아낼 수 없게
되고, 끝내는 천지와 귀신까지도 함부로 대하여, 그 몸을 해치고야 말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날 군자가 그 마음
을 씻기를 마지 않은 바이다. 우리 무송 선생이 세심(洗心)이라고 그 당의 이름을 지은 것은 벗과 동료들과 같이
경계하고 반성하려는 것이다.
동료들이나 뒤에 이 당에 오는 이들이 이 당의 이름을 따라 그 본뜻을 연구하여 사욕을 이기고 공심으로 돌아가
서 날마다 새롭게 하여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 소리가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리고,
눈을 즐겁게 하는 채색이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리고, 입을 즐겁게 하는 고기가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리고,
코를 즐겁게 하는 향기가 마음을 가리면 씻어 버려서 모든 외부의 물건이 내 마음을 유혹하고, 내 진심을 해롭게
하는 것은 다 씻어 버린다면 마음속이 탁 트이고 밝아져서 사욕이 깨끗이 없어지고 천리가 유행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공부가 곧장 반명(盤銘)과 같이 날로 새로워지며, 강한(江漢)의 물로 씻는 것과 같이 깨끗하게 될 것이
다. 이러한 마음을 확장하여 가게 되면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힐 수도 있는데, 하물며 이 자그마한 관청의 일이랴?
그런 즉 이 당이 어찌 우리들의 한때의 경계하는 장소만이 될 것이랴?
뒤에 오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착하게 하는 것이 무궁할 것이다. 보는 분들은 여기에 뜻을 다하기 바란다."
하였다.
무송 선생의 이름은 자영(子濚)이고, 자(字)는 담수(淡?)로, 현재 봉상시 부정(副正)이라 한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직장(直長)과 봉사(奉事) 각 1명씩 더 두었다가 금상 초기에 도로 혁파하였다.
종부시(宗簿寺) : 중부 정선방(貞善坊)에 있으며, 《선원보첩(璿源譜牒)》을 편찬하고, 종실(宗室)의 과실을
규찰하는 임무를 관장한다. 정(正)ㆍ첨정(僉正)ㆍ주부(主簿)ㆍ직장(直長)이 각 1명씩이다.
○ 윤자영(尹子濚)이 지은 제명기에, "본 종부시는 옛날의 종정시(宗正寺)로, 그 직책은 왕족의 허물을 규탄하
고, 선원(璿源)을 편찬하여 보첩(譜牒)을 바르게 하는 일을 관장하니, 관직을 설치한 엄격함이 사헌부ㆍ사간원
과 서로 관계가 깊은 관청이다.
처음 이것을 맡은 관원은 모두 4명으로, 판사ㆍ부령ㆍ판관ㆍ직장이었다. 뒤에 부령은 소윤(少尹)으로 고쳤다.
정통(正統) 기미년에 주부 1명과 겸 주부 1명을 더 두었으니, 그 임무를 중히 여긴 때문이다. 천순(天順) 4년
경진에 판관과 겸 주부를 혁파하고, 성화(成化) 2년 병술에는 판사를 정(正)으로, 소윤을 첨정으로 고쳤으니,
이것이 연혁의 대략이다." 하였다.
신증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으니, 금상 때 효사묘(孝思廟)를 폐하여 본시(本寺)의 청사로 하였다.
교서관(校書館) : 경복궁 사옹원(司饔院) 남쪽에 있는 것은 내관(內館)이라 하고, 남부 훈도방(薰陶坊)에 있는
것은 외관(外館)이라 한다. 경적(經籍)을 인쇄ㆍ반포하고, 향축(香祝)과 인전(印篆)에 관한 임무를 관장하고,
문무루(文武樓)의 서적 출납도 주관한다. 세조 때에 종5품 아문(從五品衙門)의 예(例)로써 전교서(典校署)라
하였다가, 성종 갑진년에 다시 옛 이름으로 회복하고, 정3품으로 승격하였다.
○ 판교(判校) 1명은 다른 관원으로 겸임하게 하고, 교리(校理)가 1명이며, 박사ㆍ저작ㆍ정자ㆍ부정자가 각 2명
씩인데, 교리ㆍ 박사 이하의 관품은 승문원(承文院)과 같다. 또 별좌(別坐)ㆍ별제(別提)가 4명인데, 모두 이전의
품계를 띠고 있다.
○ 이승소(李承召)가 지은 기문(記文)에, "관서(官署)의 이름이 옛날에는 비서감(?書監)이라 하고, 혹 교서관이
라고도 하여 그 이름은 비록 같지 않지만, 직무는 오로지 서적(書籍)을 인출하여 중앙과 지방에 널리 반포하는
것이다. 개국 초에는 훈도방에 창설하였는데, 그 터는 동향으로 대청 세 칸을 중앙에 세워 일을 하는 청사로 쓰고,
그 서쪽에는 판당(板堂) 다섯 칸을 짓고, 그 밑에 또 네 칸을 지었으며, 북쪽에는 일곱 칸을 지어서 사서오경(四書
五經)과 모든 사자집(史子集) 등의 판각(板刻)을 저장하였다. 세종조에 이르러 명 나라 황제가 새로 편찬한 사서
오경대전(大全)과 《성리대전(性理大全)》등의 서적을 내려 주자, 임금이 경상도ㆍ전라도에 명하여 새로 목판에
새겨 본관에 보내게 하였다. 이에 신구(新舊) 목판이 구름처럼 쌓여 있어서 인쇄할 때마다 판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고, 심지어는 목판이 서로 부딪쳐 부서지고 글자가 마멸(磨滅)된 것이 매우 많아서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북판당(北板堂) 동쪽에 네 칸의 집을 더 세웠으나, 여전히 부족하였다.
갑오년에 도제조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와 서평군(西平君) 한계희(韓繼禧),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 등이 서적을 인출하여 널리 펴고자 하여 드디어 계획을 의논하여 아뢰었더니, 임금이 특별히
전라도 나주(羅州)ㆍ영광(靈光) 두 고을에서 받는 염세(鹽稅)를 내려 주어, 그 비용을 보충하게 하니, 수년이 못되
어 거두어 들인 종포(?布)가 거의 수백 필이나 되었다. 하루는 부원군이 서평군과 남원군에게 말하기를, '판당(板
堂)이 아직 좁아서 목판을 다 넣을 수가 없으니, 집을 더 지어서 나누어 간직하여 내고 들이는 데 편리하게 하겠다.'
하고, 즉시 사유를 갖추어 아뢰니, 또한 윤허를 받았다. 그래서 서적을 인출하고서 남은 경비를 계산하여 서판당
(西板堂) 남쪽에 여섯 칸의 집을 세웠는데, 정유년 6월에 시작하여 그 해 10월에 준공하였다. 그 집은 서판당과
행랑채가 이어져 있었으며, 주춧돌과 뜰이 튼튼하고 집이 크고 통창하였다.
예전에는 많은 목판을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던 것을 지금은 종류대로 가려서 구분하여 두게 되니, 여러
해를 두고 내려오던 폐단이 하루아침에 제거되었다. 이는 모두 이분들의 계획에 의한 것이다. 뒤에 이곳에 벼슬
하는 이나 제조(提調)가 되는 이는 마땅히 그들의 아름다운 공적을 생각하여 널리 그것을 전하도록 힘쓸 것이다."
하였다. 신증 연산군 병인년에 박사 이하의 관직을 개혁하여 다른 관사(官司)를 나누어 맡기고, 본직을 겸임하게
하였다가, 금상 초기에 복구하였다.
사옹원(司饔院) : 승정원 남쪽에 있다. 하나는 창덕궁 승정원 동쪽에 있고, 또 하나는 창경궁 명정전(明政殿) 북쪽
에 있는데, 어선(御膳)과 궐내에서 음식을 마련하는 일들을 관장한다.
○ 정ㆍ첨정ㆍ판관ㆍ주부가 각 1명씩이고, 직장이 1명, 봉사ㆍ참봉이 각 3명씩이고 또 제거 ㆍ제검이 모두 4명
인데, 모두 이전의 자격을 띠고 있다.
내의원(內醫院) : 관상감(觀象監) 남쪽에 있으며, 임금의 약을 화제(和劑)하는 일을 관장한다.
○ 정ㆍ첨정ㆍ판관ㆍ주부가 각 1명씩이고, 직장이 3명, 봉사가 2명, 부봉사가 2명, 참봉이 1명이다.
상의원(尙衣院) : 영추문(迎秋門) 안에 있으며, 임금의 의복과 내부(內府)의 재화, 금은보화 등을 관장한다.
○ 정ㆍ첨정ㆍ판관이 각 1명씩이고, 별좌ㆍ별제가 모두 2명, 주부가 1명, 직장이 2명이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판관ㆍ주부ㆍ직장 각 1명씩과 별좌 3명을 더 두었다가, 금상 초기에 도로 혁파하였다.
사복시(司僕寺) : 중부 수진방(壽進坊)에 있다. 내사복(內司僕)은 영추문(迎秋門) 안에 있고, 또 하나는 창경궁
홍문관 남쪽에 있는데, 여마(輿馬)와 구목(廐牧)의 사무를 관장한다.
○ 정ㆍ부정ㆍ첨정ㆍ판관이 각 1명, 주부가 2명, 겸 사복(兼司僕)이 50명, 내승(內乘)이 3명인데, 그 중에 1명은
정(正)이 겸직한다.
○ 이숙함(李淑?)이 지은 〈내승제명기(內乘題名記)〉에, "우리나라 제도에 여마와 구목을 맡은 자를 사복시
(司僕寺)라 하는 녹관(祿官)이 있고, 궐내에서 노마(路馬)와 연곡(輦?)을 맡은 자를 내승이라 하여 으레 다른
관직에 있는 자로 이 직책을 띠게 하는데, 반드시 의표(儀表)가 단정하고 근엄하며 재능과 덕망이 모두 우수한
자를 가려서 보임하여, 한때의 선임을 지극히 하였고, 여기에서 다른 데로 옮겨갈 때에는 모두 고관에 제수(除
授)되거나 중요한 외직(外職)으로 나가게 되었다. 세상에서는 이 때문에 모두 여기에 들어오는 것을 부러워하
였다.
옛날에는 제명도(題名圖)가 없었는데, 첨지(僉知) 심정원(沈貞源) 공이 처음 만들었다.
내가 삼가 상고해 보건대, 《주서(周書)》에 목왕(穆王)이 백경(伯?)에게 태복정(太僕正)을 임명하면서 이르는
말에, '네가 거느리고 있을 요속(僚屬)을 신중히 선택하되, 말을 잘하고 얼굴빛을 좋게 하며 편벽(偏僻)되고 아첨
하는 자를 쓰지 말고, 다만 길사(吉士)만 쓰도록 하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복신(僕臣)이 바른 사람이면 임금도
바르게 될 것이고, 복신이 아첨하는 소인이면 그 임금도 스스로 성인이로다 할 것이니, 임금이 덕이 있게 되는
것도 신하 때문이고, 임금이 부덕하게 되는 것도 신하 때문이다.' 하였다. 선유(先儒)들이 논하기를, '임금을 조석
으로 같이 모시고 거처하는 자가 임금의 기상과 체모(體貌)를 변화시킨다.' 하였으니, 지금의 일로써 상고해 보면
내승이란 즉 복신이니, 이들을 쓰는 데 단정하고 근엄하며 재능과 덕망이 있는 자를 가려야 된다는 것은 옛날 주
나라에서 신중히 선택하던 뜻이다. 이들이 어주(御廚)의 음식을 먹고 윤번으로 숙직하면서 이두(?頭) 곁에서 생
활하고, 표미(豹尾) 사이에 조용히 모시고 있어서, 직무가 가까운 자리에 있으니, 비록 임금과 같이 생활한다고 말
하더라도 가할 것이며, 임금의 기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더라도 가할 것이니, 그 직책의 중대함이 어떠하겠
는가? 후인들이 이 그림을 보고서 지목하기를, '아무는 비루한 자이고, 아무는 좋은 사람이며, 아무는 아첨하였고,
아무는 정직하였다.' 한다. 그 공정한 비평이 곤월(袞鉞)보다도 더 중할 것이니, 이것이 두렵지 않겠는가?
아, 후세에서 지금을 보는 것이 지금 사람이 옛날 사람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가령 이 직책에 있는 자가 스스로
보고 반성하여 그 소임이 지극히 무겁고 공론이 두렵다는 것을 알아, 좋고 정직한 복신(僕臣)이 되기를 원하고,
비루하고 아첨하는 복신이 되기를 원치 않아서, 옛날 주 나라의 복신들만이 전대에서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게
하지 않는다면 심공이 그림을 만들어 영원히 전하는 것이 또한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내승 7명 첨정ㆍ판관ㆍ주부 각 1명, 직장ㆍ부직장 각 3명, 봉사 4명, 부봉사 5명, 참봉 7
명을 더 두었다가, 금상 초기에 도로 개혁하였다.
군기시(軍器寺) : 서부 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병기 제조(兵器製造)를 관장한다.
화약고(火藥庫)는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있고, 자문감(紫門監)은 궐내에 있다.
○ 정ㆍ부정이 각 1명, 첨정ㆍ판관ㆍ별좌ㆍ별제ㆍ주부가 각 2명, 직장ㆍ봉사ㆍ부봉사ㆍ참봉이 각 1명이다.
○ 정이오(鄭以吾)가 지은 화약고기문에, "군기시부정(副正) 최해산(崔海山) 군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선군
(先君)이 일찍이 왜구(倭寇)가 침입하면 제어하기 어려움을 근심하여, 수전(水戰)에서 화공(火攻)을 쓸 방책을
생각하고서 염초(焰硝)를 구워서 쓸 기술을 찾았다.
당 나라 이원(李元)이란 자는 염초 굽는 장인(匠工)인데, 공(公)이 매우 후하게 대우하고, 은밀히 그 기술을 물
어서 집에서 부리는 종 몇 명을 시켜 사사로이 기술을 익히게 하여, 그 효과를 시험한 뒤에야 조정에 건의하여
홍무 10년 정사 10월에 처음으로 화통도감(火?都監)을 설치하여 염초를 굽고, 또 당 나라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자를 모집하여 전함(戰艦)을 만들게 하고 공이 직접 감독하였다.
그러나 모두 공의 이러한 일을 위험하게 여겼더니, 왜구가 전라도ㆍ충청도에 크게 침입하여 그때 인심이 흉흉
하였으나, 심덕부(沈德符)ㆍ나서(羅?)와 우리 선군(先君)이 세 원수(元帥)가 되어 누선(樓船) 80척에 화통(火?)
과 화포(火砲)를 비치하고서, 진포(鎭浦)에서 맞아 공격하여 왜선 30척을 불사르고 괴수 손시라(孫時剌)를 잡아
죽였으니, 이것은 흥무 13년 경신 8월에 있던 일이다. 그 공로에 대한 상으로 금과 비단이 하사되었고, 순성익찬
공신(純誠翊贊功臣)의 호가 내리고, 광정대부문하부사(匡靖大夫門下府事)에 제수되고, 조금 뒤에는 중대광영성
군(重大匡永城君)에 제수되었다.
우리 태조가 즉위하시던 이듬해 계유년에는 정헌대부 검교참찬 문하부사(正憲大夫檢校參贊門下府事)가 되고,
판군기시(判軍器寺)를 겸임하게 하였으니, 공(公)을 등용하려 한 것이다.
을해년 봄 3월에 70세로 사망하였다. 금상 전하께서는 건문(建文) 3년 11월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정승
판병조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政丞判兵曹事)에 추증(追贈)하고,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에 봉하였다.
내가 그 끼친 은택을 입어 벼슬길에 나간 지 1년 사이에 군기시주부에 제수되었다가, 감승(監丞)으로 승진되고
지금은 부정(副正)이 되었다. 나는 위로는 전하의 위임하심이 융숭함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선신(先臣)이 전해
준 비밀의 기술을 이어받아 밤이나 낮이나 혹 직책을 이행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도읍을 옮기던 초기에 본감(本監)의 청사가 비좁고 누추하였으나, 다시 수리하지 못하였는데, 기축년에 이르러
별감 이도(李韜)와 같이 겸 판사 면성군(沔城君) 한규(韓珪)에게 보고하여 임금께 아뢰게 하여 먼저 무고(武庫)
를 자문(紫門) 안에 세워서 각 도에서 바친 무기를 오는 대로 받아서 보관하고, 다음에는 본감을 수리하고 정유
년에는 화약 제조를 감독하는 청사가 비로소 준공되었다. 마땅히 화약에 대한 시말을 기록하여 청사의 벽에 써
붙여서 선군(先君)이 애쓰던 뜻을 무궁한 후세에 드러나게 해야 하겠기에, 오직 자네에게 이것을 부탁하는 것
이니, 부디 써 주기 바란다.' 하였다.
지금 상고하건대, 본감의 구조가 대청(大廳)ㆍ야로소(冶爐所)ㆍ조갑소(造甲所)ㆍ대고(臺庫)ㆍ제조고(提調庫)
등과 여러 공장(工匠)들이 거처할 행랑방을 합하여 82칸이다. 최군은 생각하기를,
'이만하면 본감은 거의 완성되었다고 하겠으나, 아직 화약감조청(火藥監造廳)이 구비되지 않았다.' 하고,
금년 정유년 봄에 또 제조 이종무(李從茂) 공에게 고하여 임금께 구체적으로 아뢰게 하였더니,
마침내 공조(工曹)에 명하여 개성에 있는 예빈시(禮賓寺)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재목과 기와를 가져다가 짓게 하
되, 공무의 여가로 감독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단청을 칠하여 두어 달 만에 준공하고, 남은 재목으로 궁전소
(弓箭所)등 15칸을 지었으니 모두 최군의 계획과 지휘에 의한 것이다.
최군이 본감에 처음 들어 왔을 때는, 화약이 겨우 6근 4냥이 있었고, 각궁(角弓)이 2백 장 정도이고, 중소(中小)
화통(火?)이 겨우 각궁의 수효와 같았는데, 지금은 화약이 6천 9백 80근 9냥이고, 각궁이 1천 4백 20장이며,
중소 화통이 1만 3천 5백 자루이고, 다른 병기도 이 정도이니, 이상이 화약고 연혁의 대략이다. 처음 당선(唐船)
에 있는 화기(火器) 한 개를 깨뜨려 가지고, 충청도에서 의정부에 가서 그 이름을 군기시판사 곽해룡(郭海龍)에
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화기는 중국에서도 비밀로 취급하는 기술이므로, 내가 비록 중국에 오래도록 있었으나
나 또한 모른다.' 하였다.
그 후 최군이 이 직책에 들어와서 그 화기를 보고서 말하기를, '이것은 완구포(碗口砲)이니 평소 선군(先君)에게
서 그 이름과 제도를 익숙하게 들은 것이다.' 하였다. 전하께서 최해산에게 명하여 그것을 주조하라 하니, 최군
이 물러나와 대ㆍ중ㆍ소 20개를 만들어 올리자, 이것을 해온정(解?亭)에 나가서 발사 시험을 하니,
화석포(火石?)가 1백 50보의 거리까지 나갔으므로 최군은 내승마(內乘馬)를 상으로 받았다.
아, 최군은 위로는 융숭한 위임을 저버리지 않았고, 아래로는 그 아버지가 비밀리에 남겨 준 기술을 잃지 않아,
아버지가 앞에서 시작한 것을 아들이 뒤에서 계승하였으니, 참 유능한 신하라 하겠고, 또한 유능한 아들이라 하
겠다.
부원군의 이름은 무선(茂宣)인데, 성품이 통달ㆍ민첩하여 각 분야의 책을 널리 상고하였고,
또 중국어를 잘 알았다. 나라를 위하여 마음을 썼으므로 능히 이원(李元)의 기술을 얻었으니, 그의 사려가 깊고
멀다 하겠다. 지금 왜구가 우리 수군과는 감히 배를 타고 승부를 비교하지 못하는 것은 앞서 진포(鎭浦) 싸움이
있었고, 뒤에는 남해(南海)의 승전(勝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마음을 고쳐먹고, 정성을 바치는 것은 비록 전하께서 펴신 교화에 의한 것이지만, 애당초
빠른 우레와 세찬 번개처럼 폭발한 화통과 화포가 그들의 혼을 빼앗고 간담을 서늘하게 하지 않았다면, 그 완악
하고 사나운 왜구를 쉽게 굴복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화약이란 것은 오병(五兵)을 보조하는 물건으로 제왕(帝王)이 이것을 써서 국위(國威)를 성대하게 선양하고,
포악하고 난동하는 자들을 제거하며, 백성을 사랑하여 공(功)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어 태평 시대를 유지
하는 큰 벼리가 되는 물건이다.
30년 동안 왜구의 침략을 당했을 때에도 태평을 유지하게 된 것은 다른 힘이 아니고 여기에 있었던 때문이니,
아, 참으로 힘쓸 바를 안 분이라 하겠다. 옛날에는 국가에 공로가 있으면 사당을 세워서 향사(享祀)하였으니,
이렇게 크고 영원히 썩지 않을 공로를, 향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향사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는 최공에게는
관계가 없을 것이나, 어찌 밝은 시대의 결함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런 말을 오래전부터 하였으므로 여기에
아울러 기록하는 것이니, 이 청사(廳事)에 오르는 이들도 마땅히 생각해 볼 것이다." 하였다.
내자시(內資寺) :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있으며, 궁중에 공급하는 미면(米?)ㆍ주장(酒醬) ㆍ유밀(油蜜)ㆍ
소과(蔬果)ㆍ내연(內宴)ㆍ직조(織造) 등의 일을 관장한다.
○ 정ㆍ부정ㆍ첨정ㆍ판관ㆍ주부ㆍ직장ㆍ봉사가 각 1명씩이다.
내섬시(內贍寺) : 북부 준수방(俊秀坊)에 있으며, 여러 궁전의 공진주(供進酒)와 왜(倭) ㆍ
야인(野人)의 공궤(供饋)와 직조(織造) 등의 일을 관장한다.
○ 정ㆍ부정ㆍ첨정ㆍ판관ㆍ주부ㆍ직장이 각 1명씩이다.
사도시(司?寺) : 전에는 내의원(內醫院) 남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밖으로 옮겼다.
어름(御?)의 미곡(米穀)과 개장(芥醬) 등의 물품을 관장한다.
○ 정ㆍ부정ㆍ첨정ㆍ판관ㆍ주부ㆍ직장이 각 1명씩이다.
예빈시(禮賓寺) : 의정부 남쪽에 있으며 빈객(賓客)의 연향(宴享)과 종재(宗宰)에 공궤(供饋)하는 등의 일을
관장한다.
○ 정ㆍ부정ㆍ첨정이 각 1명씩이고, 제검(提檢)ㆍ별좌(別坐)ㆍ별제(別提)가 6명이며, 판관ㆍ주부ㆍ직장ㆍ봉사ㆍ
참봉이 각 1명씩이다.
사섬시(司贍寺) : 동부 숭교방(崇敎坊)에 있으며, 저화(楮貨) 제조(製造)와 모든 도의 노비(奴婢) 공포(貢布)
등의 사항을 관장한다. ○ 정ㆍ부정ㆍ첨정ㆍ주부ㆍ직장이 각 1명씩이다.
군자감(軍資監) : 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는데, 분감(分監)은 숭례문 안에 있고, 강감(江監)은 용산강(龍山江)
북쪽에 있다. 군수(軍需) 물자의 저장을 관장한다.
○ 정ㆍ부정이 각 1명, 첨정이 2명, 판관ㆍ주부가 각 3명, 직장ㆍ봉사ㆍ부봉사ㆍ참봉이 각 1명씩이다.
제용감(濟用監) : 중부 수진방(壽進坊)에 있으며, 진헌(進獻)하는 저마포(苧麻布)ㆍ피물(皮物)ㆍ인삼(人蔘)ㆍ
하사하는 의복(衣服)과 사라(紗羅)ㆍ능단(綾段)ㆍ포백(布帛)ㆍ채염(綵染)ㆍ직조(織造) 등의 사항을 관장한다.
○ 정ㆍ부정ㆍ첨정ㆍ판관ㆍ주부ㆍ직장ㆍ봉사ㆍ부봉사ㆍ참봉이 각 1명씩이다.
선공감(繕工監) : 북부 의통방(義通坊)에 있는데, 용산강(龍山江)에 있는 것은 강감(江監)이라 하고,
창덕궁 금호문 밖에 있는 것은 자문감(紫門監)이라 한다. 토목(土木) 영선(營繕)을 관장한다.
○ 정ㆍ부정ㆍ첨정ㆍ판관ㆍ주부ㆍ직장ㆍ봉사ㆍ부봉사ㆍ참봉이 각 1명씩이다.
사재감(司宰監) : 북부 의통방에 있으며, 어염(魚鹽)ㆍ소목(燒木)ㆍ축거(杻炬) 등의 사항을 관장한다.
○ 정ㆍ부정ㆍ첨정ㆍ주부ㆍ직장ㆍ참봉이 각 1명씩이다.
장악원(掌樂院) : 서부 여경방에 있으며, 아악(雅樂)ㆍ속악(俗樂)의 교열(敎閱)을 관장한다.
○ 정ㆍ첨정ㆍ주부ㆍ직장이 각 1명씩이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연방원(聯芳院)이라 이름을 고치고, 정ㆍ부정ㆍ
첨정ㆍ판관ㆍ주부 각 2명과 직장 1명을 더 두었다가, 금상 초기에 도로 개혁하였다.
○ 성현(成俔)이 지은 기문(記文)에, "사람은 음악을 몰라서는 안되니, 음악을 모르면 기운이 막히고 답답하여 기
운을 펼 수 없는 것이고, 나라는 하루도 음악이 없어서는 안 되니, 음악이 없으면 질서가 없고 비루하여 화평을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이 음악의 방법을 세우고 음악의 관직을 설치하여 인심의 공통점으
로 인하여 착한 마음을 감발시키고 나쁜 마음을 징계함이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노래 부르고 읊음으로써 감발
시키고, 종과 북ㆍ피리와 젓대로써 그 뜻을 부치고, 성곡(聲曲)과 음률(音律)로써 바르게 하며, 빠르고 늦게 춤추
는 절차로써 조절하였으니, 조정에 쓰게 되면 임금과 신하가 모두 즐거워하고, 교제(郊祭)와 종묘(宗廟)에 쓰면
귀신이 감응하며, 가정에 쓰고 향당(鄕黨)에 쓰면 모두 화락하고 분발하며 고무되고 밝아져서 풍속이 좋은 쪽으
로 변하게 될 것이다. 옛날에 후기(后?)가 음악을 맡아서 당우(唐虞)의 다스림을 일으켰고,
《주례(周禮)》에는 대사악(大司樂)이 성균(成均)의 법을 맡아서 공경대부의 자제들을 교양하였으며,
또 6률(律)ㆍ5성(聲)ㆍ8음(音)으로써 크게 음악을 합하여 귀신을 감동시키고, 만민을 조화롭게 하며 빈객(賓客)
을 유쾌하게 하고,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런데, 진 나라와 한 나라 때에는 악관(樂官)들이 통일
되지 않아서 태악서(太樂署)와, 고취서(鼓吹署)가 있었는데, 그 일은 승(丞)과 협률랑(協律郞)으로 하여금 주관
하게 하였다.
당(唐)ㆍ송(宋) 이후에는 관제가 크게 갖추어졌으나, 의식에 관한 글이 너무 번잡하여 옛날부터 내려온 원기(元
氣)를 손상시켰다. 신라ㆍ고려에는 시대마다 각기 음악이 있었으나,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것은 모두 민간의 남녀
가 서로 좋아하는 음란한 노래뿐이어서 혹은 음탕하고 추잡하며, 혹은 슬프고 원망하는 노래로 중국의 정(鄭)ㆍ
위(衛)의 음란한 음악과 다를 것이 없어서 마침내 말세에 임금과 신하가 음탕하게 놀아나서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게 된 것이다.
우리 세종대왕께서 전대(신라 고려)의 음악이 타락하였음을 개탄하여 옛날 음악을 회복하고자 아악(雅樂)을 태
상시(太常寺)에 소속시키고, 관습도감(慣習都監)을 설치하여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가르치게 하고,
맹사성(孟思誠)과 박연(朴堧) 등으로 잇달아 제조를 삼아서 음악을 제작하는 일을 위임하였다.
그 중에 아악이라 하는 것은 제사 때에 쓰는 정악(正樂)의 노래이고, 당악이란 것은 조회와 조정에서 쓰는 음악
이고, 향악이란 것은 우리나라 민속의 노래이다.
이 음악들이 비록 같지는 않지만, 그 5음과 6률이 돌아가면서 서로 궁(宮)이 되어 내리고 오르고 덜고 더하는
제도는 같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생(笙)과 우(?), 훈(塤)과 지(?) 등의 악기가 아악에만 해당되고, 향악과 당악에
는 해당되지 않겠는가?
진실로 소리로 인하여 합하고, 곡조(曲調)로 인하여 완성한다면 세 가지 음악이 통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세조대왕께서는 그러한 줄을 아셨으므로 이 세 가지 음악을 한 부서에 합치고서 장악서(掌樂署)라고 이름을 지어,
장악(掌樂) 1명, 별제(別提) 1명을 두었으나, 일은 크고 인원은 적어서 그 제도를 맞출 수 없었다.
뒤에 또 장악원(掌樂院)으로 고치고, 정 1명을 두고, 그 밑에 부정ㆍ첨정ㆍ판관ㆍ주부ㆍ직장의 관원은 때에 따라
다만 3명을 두었으니, 모두 4명이었다. 제조(提調)가 된 이가 한 분만이 아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에 전념한 이는 중추(中樞) 정침(鄭沈) 공이다. 일정한 관서가 없어서 처음에는 태시(太寺)
에 붙어 있다가, 뒤에는 태상시(太常寺)의 악학(樂學)에 있었는데, 건물이 비좁고 낮아서 있을 수 없었다.
금상께서 특명을 내려 태상시 동쪽 수십 보 떨어진 자리에 민가 여러 집을 철거하고, 크게 관부(官府)를 건축하여
옮겨 갔다. 이리하여 당상관과 낭청들의 일하는 방이 따로 구별이 있고, 아악과 속악의 스승ㆍ생도와 영인(伶人
악공(樂工))ㆍ기생(妓生) 수천 명이 각기 거처할 장소를 가지게 되었고, 또 악기를 보관하는 집을 지어 방을 마련
하였으며, 또 동서로 뜰을 넓게 닦아서 신정(新正)과 동지(冬至) 때에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을 때 의식을 연습하
는 장소로 삼고, 겸직 관원을 더 두었다. 이리하여 겸직 관원은 기술을 익히게 하며, 실직 관원은 사무를 보게 하
였다.
나는 적당한 인재가 아니면서도 거기에 뽑혀서 옥당(玉堂)의 관원으로서 이원(梨園 장악원(掌樂院))에 출입한
지가 수십 년이 되었다. 돌이켜 생각건대, 나의 학술이 보잘것없고, 배워서 익힌 것이 가짜와 찌꺼기뿐으로
음악의 근본 원리를 알지 못하니, 어찌 감히 대성인(大聖人)의 음악을 제작한 거룩한 일을 도울 수 있겠는가?
지금은 또 승정원에 있으면서 맡고 있는 일이 역시 예악(禮樂)에 관한 것이니, 지난날 지내던 곳을 생각하고,
그때 같이 일하던 동관들과 악공(樂工)을 볼 때에 어찌 애착이 없겠는가? 제군들이 내가 장악원에 오래 있던
사람이라 하여, 나에게 기문을 지으라고 촉탁하므로, 대략 처음부터 끝까지의 사적을 서술하여 돌려 보내노라."
하였다.
관상감(觀象監) : 상의원(尙衣院) 남쪽에 있고, 하나는 북부 광화방(廣化坊)에 있는데,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
역수(曆數)ㆍ점산(占算)ㆍ측후(測候)ㆍ각루(刻漏) 등의 일을 관장한다.
○ 영사(領事)가 1명, 정ㆍ부정ㆍ첨정이 각 1명, 판관ㆍ주부가 각 2명이다. 천문ㆍ지리 교수(敎授)가 각 1명인데
종6품이고, 직장ㆍ봉사가 각 2명, 부봉사가 3명, 천문ㆍ지리학 훈도(訓導)가 각 1명인데 종9품이고, 명과학(命課
學) 훈도(訓導)가 2명, 참봉이 3명이다. 교수와 훈도의 관품은 다른 관사와 같다.
신증 연산군 병인년에 사역서(司曆署)로 개칭(改稱)하고, 영(令) 1명, 주부ㆍ직장ㆍ봉사 각 2명, 참봉 3명을 두었
다가, 금상 초기에 모두 복구하였다.
전의감(典醫監) : 중부 견평방(堅平坊)에 있으며, 의약(醫藥)을 진공(進供)하는 일을 관장한다.
○ 정ㆍ부정ㆍ첨정ㆍ판관ㆍ주부가 각 1명, 의학 교수ㆍ직장ㆍ봉사가 각 2명, 부봉사가 4명, 의학 훈도가 1명,
참봉이 5명이다. 신증 연산군 병인년에 부정ㆍ직장ㆍ봉사 각 1명씩과, 부봉사ㆍ참봉 각 2명씩을 개혁하였다가,
금상 초기에 모두 복구하였다.
사역원(司譯院) : 서부 적선방(積善坊)에 있으며, 여러 외국의 말을 통역하는 일을 관장한다.
○ 정ㆍ부정ㆍ첨정이 각 1명, 판관이 2명, 주부가 1명, 한학(漢學)교수가 4명, 직장이 2명, 봉사가 3명, 부봉사가
2명, 한학 훈도가 4명, 몽고학(蒙古學)ㆍ왜학(倭學)ㆍ여진학(女眞學) 훈도가 각 2명, 참봉이 2명이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 세자에게 경사(經史)를 시강(侍講)하고 도의(道義)를 강설(講說)하는 일을 관장한다.
○ 사(師) 1명, 부(傅) 1명인데 정1품이고, 이사(貳師)가 1명인데 종1품이며, 좌우 빈객(左右賓客)이 각 1명인데
정2품이고, 좌우 부빈객(副賓客)이 각 1명으로 종2품인데, 모두 다른 관직에 있는 이가 겸한다.
보덕(輔德)이 1명인데 종3품이고, 필선(弼善)이 1명인데 정4품이며,
문학(文學)이 1명인데 정5품이고, 사서(司書)가 1명인데 정6품이며, 설서(說書)가 1명인데 정7품이다.
종학(宗學) : 북부 관광방(觀光坊)에 있으며, 종실(宗室)을 교육하는 소임을 관장한다. 도선(導善)이 1명인데 정4
품이고, 전훈(典訓)이 1명인데 정5품이며, 사회(司誨)가 2명인데 정6품으로 모두 성균관 관원으로 겸하게 한다.
신증 연산군 갑자년에 혁파하였다가, 금상 초기에 다시 설치하였다.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 : 종루(鐘樓) 동쪽에 있으며, 궁성(宮城)과 도성(都城)의 수축과 궐내(闕內)의 공해(公?)
와 방리(坊里)의 화재를 막는 일들을 관장한다.
○ 제검(提檢)이 4명인데, 그 중 3명은 다른 관직에 있는 자로 겸직하게 하고, 별좌(別坐)가 6명인데,
그 중 4명은 다른 관원이 겸직하며, 별제(別提)가 3명인데, 그 중 1명은 다른 관직으로 겸임하게 한다.
전설사(典設司) : 홍례문 동쪽에 있으며 장막(帳幕)을 진공(進供)하는 일을 관장한다.
○ 수(守)가 1명인데 정4품이고, 제검ㆍ별좌ㆍ별제가 5명이다. 수의 관품은 다른 관사와 같다.
풍저창(?儲倉) : 북부 의통방에 있으며 미두(米豆)ㆍ초둔(草芚)ㆍ지지(紙地) 등의 물품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 수ㆍ주부ㆍ직장ㆍ봉사ㆍ부봉사가 각 1명씩이다.
광흥창(廣興倉) : 서강(西江) 북쪽에 있으며 백관의 봉록을 관장한다.
○ 수ㆍ주부ㆍ봉사ㆍ부봉사가 각 1씩명이다.
전함사(典艦司) :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고, 외사(外司)는 서강에 있는데,
서울과 지방의 주함(舟艦)을 관장한다.
경기 좌우도(京畿左右道)의 수참(水站)이 여기에 속한다.
○ 제검ㆍ별좌ㆍ별제가 모두 5명이다. 신증 남곤(南袞)이 지은 기문에, "전함사는 배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으로,
처음에는 아문(衙門)이 없고, 다만 전선빛[典船色]이라고만 하여 거리의 행랑에 붙어 있으면서 녹사(錄事)를
시켜 문서를 임시로 주관하게 할 뿐이었다. 성화(成化) 초년에 처음으로 지금의 명칭으로 고치고, 부서를 설치
하고 관원을 두고 또 재상 두사람으로 총괄하게 하였다. 이는 대략 송 나라 전운사(轉運司) 제도를 모방한 것이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직책이 전일하지 못하여 일을 잘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덕(正德) 경진년에 내가 도제조가 되어 광산(光山) 김자성(金子誠) 공과 영전함사사(領典艦司事)가 되었는데,
그때에 속관(屬官)에 있던 이는 제검 이결(李潔) 군과 별좌 홍사신(洪嗣愼)ㆍ김선(金璿), 별제 한홍택(韓弘澤)ㆍ
장세강(張世綱)으로, 모두 선비들 중에서 우수한 인재들이다.
모든 관장하는 일들이 다 질서 있게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어서 우리들은 그저 결재만 할 뿐이었다.
하루는 제군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관청이 있으면 반드시 제명록(題名錄)이 있음은 옛날부터 내려온 관례인데
우리 전함사에만 없으니, 어찌 결함된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전에 이 관사에 임명되었던 사람의 성명을 상고
해 찾아내어 몇 사람의 것을 수집하여 종이를 사서 책을 만들어 쓰고, 근자에 나에게 와서 그 책머리에 기문을
쓰라고청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우리나라에서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서 동남 지방의 곡식을 배로 실어다가 서울에 공급하게 되니,
힘입는 이로움이 큰 것이다. 더구나 조운(漕運)에는 강운(江運)과 해운(海運)의 구별이 있고, 배에는 병선(兵船)
과 조선(漕船)의 차이가 있는데, 모두 이 전함사에서 총괄하여 관리하게 되어 있으니, 그 소임이 무겁지 않겠는가?
이 관사 중에 옛날부터 내려온 일을 살펴보면, 제검은 4품관인데 반드시 특석(特席)에 앉고,
해운(海運)ㆍ수운(水運)의 판관들은 벼슬이 비록 높다 하나, 모두 그 아랫자리에 앉게 되어 감히 대등한 예로써
하지 못하여 연해(沿海)의 진장(鎭將)들이 임지에 갈 때에는 반드시 본사에 나와서 참알례(參謁禮)를 조심성스레
한다.
배를 만들거나 해안 수비를 감독ㆍ시찰하는 일일 때에는 반드시 본사의 관원을 여러 도에 보내는데,
이들을 경차관(敬差官)이라고 하였으니, 나라에서 본사에 대한 대우가 융숭하다 하겠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관원을 각 도에 보내어 감독과 순찰을 폐하고 하지 않으니,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혹시 사명(使命)을
받들고 지방에 갔던 관원이 그 행동을 신중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사군자(士君子)가 태평한 시대를 만나서 벼슬길에 서서 장차 조정에 일을 하려고 하는 데에는 이런 자리가 처음
출발하는 길이 되는 것이니, 비록 위리(委吏 창고 출납의 관리)나 승전(乘田 가축을 사육하는 관리)같은 미천한
자리라 할지라도 그 맡은 직책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이 자리는 저 위리나 승전에 비할 수 없는
중요한 자리임에랴? 이름을 제명기록에 올려서 오래도록 전해지게 되면 뒤에 그 이름을 지목하면서 비난하는
자가 반드시 없지 않을 것이니, 가히 두려워하고 삼가지 않겠는가?" 하였다.
전연사(典涓司) : 홍례문 서쪽에 있으며, 궁궐을 소제하고 정리하는 일을 관장한다.
○ 제검ㆍ별좌ㆍ별제가 5명, 직장ㆍ봉사가 각 2명, 참봉이 6명이다.
내수사(內需司) :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있으며, 궐내에서 쓰는 쌀ㆍ베와 잡물 및 노비를 관장한다.
○ 전수(典需)가 1명인데 정5품이고, 별좌ㆍ별제가 2명, 부전수(副典需)가 1명인데 종6품이고,
전회(典會)가 1명인데 종7품이며, 전곡(典穀)이 1명인데 종8품이고, 전화(典貨)가 2명인데 종9품이다.
소격서(昭格署) :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다. 삼청전(三淸殿)이 있는데, 삼청(三淸)의 성신(星辰)에 대한 초제
(醮祭)를 관장한다.
○ 영(令)이 1명인데 종5품이고, 별제ㆍ참봉이 각 2명이다. 영의 관품은 다른 관사와 같다.
○ 이직(李稷)의 시에, "푸르른 송백들이 경궁(瓊宮)을 둘렀는데 우개(羽蓋)와 예정(霓旌)이 이 가운데 머무네.
열 번이나 경(經)을 읽고 도사(道士)들 맞아와서, 사시(四時)로 초제 올려 임금의 정성 다하셨네. 밤에는 달빛
아래 학 소리 들려오고, 새벽에 구름 속에 난새 탄 수레에 절하였다. 옥경(玉境)에 머무르도록 못해 드림이 서러
워서, 망연히 홀로 서서 허공만을 바라보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땅에는 영천(靈泉)의 맑은 물 솟아나고, 산에는 도경(道境)의 그윽함이 간직되었네.
경영하여 보전(寶殿)을 열었으니, 지척 간에 티끌 세상이 막혔네. 하늘 위의 신선 집은 멀기도 한데, 학을 타고
구름 속에 머무네. 들으니 신선되는 비결(?訣)이 많다 하니, 천추에 길이 길이 복 내리소서." 하였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사면 바위 골짜기 연하였으니, 티끌 세상과 떨어진 곳에 삼청(三淸)이 여기로다.
산 속에 보슬비 촉촉이 적셨는데, 섬돌 위에 떨어진 꽃송이 새롭구나. 어슴푸레 모녀(毛女)도 만날 것 같고,
아슴푸레 우인(羽人)도 만날 것만 같네. 도사(道士)들은 일도 많아 밤중에 또 예배(禮拜)하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푸른 산 이마에는 옥으로 만든집이 높이 섰고, 제단 가에 늙은 솔은 나이를 알 수
없네. 소매 속에 간직하여 전해온 비결(?訣)! 신선들을 꿈 속에서 혹 보리. 금장(金章)이나 자수(紫綬)는 나의
본분 아니거니, 백갈(白葛)과 오사(烏紗 도사의 옷차림)가 숙세(宿世 전생(前生)의 인연인가?
속세의 잡념이 이제부터 가시리니, 그대와 같이 학을 타고 지전(芝田)으로 갈까 보다." 하였다.
○ "만년에 사람들은 미쳤다고 나를 비웃네. 내가 미친 것은 장차 늙지 않으려 하는 것일세. 늙어서야 세상의
과비자(?毗子)들이 산림(山林) 속의 자유로운 신선(神仙)만 못한 줄 알았네. 때로는 대낮에 도인법(導引法)도
할 수 있고, 푸른 산 어디서나 오르지 못할 곳이 없네. 마침내 신선을 비밀히 만날 묘한 비결 얻었으니,
마치 농가에서 부지런히 밭갈면 추수하는 것처럼." 하였다.
사직서(社稷署) : 사직단(社稷壇) 밖 북쪽에 있으며, 단유(壇?) 청소하는 일을 관장한다.
○ 영이 1명, 참봉이 2명이다.
종묘서(宗廟署) : 종묘의 담 안 동쪽에 있으며, 침묘(寢廟) 수비를 관장한다.
○ 영ㆍ직장ㆍ봉사ㆍ부봉사가 각 1명이다.
평시서(平市署) : 중부 견평방에 있으며, 시전(市廛)을 관리하고, 말ㆍ섬ㆍ장[丈]ㆍ척[尺]을 고르게 하며, 물화
의 값을 올리고 낮추는 등의 일을 관장한다.
○ 영ㆍ직장ㆍ봉사가 각 1명이다.
사온서(司?署) : 서부 적선방에 있으며, 주례(酒醴)의 진공(進供)을 관장한다.
○ 영ㆍ주부ㆍ직장ㆍ봉사가 각 1명이다.
의영고(義盈庫) : 서부 적선방에 있으며, 유밀(油蜜)ㆍ황랍(黃蠟)ㆍ소물(素物)ㆍ후추[胡椒] 등의 물품을 관장
한다. ○ 영ㆍ주부ㆍ직장ㆍ봉사가 각 1명이다.
장흥고(長興庫) : 남부 호현방(好賢坊)에 있으며, 석자(席子)ㆍ유둔(油芚)ㆍ지지(紙地) 등의 물품을 관장한다.
○ 영ㆍ주부ㆍ직장ㆍ봉사가 각 1명이다.
빙고(氷庫) : 얼음을 저장하고 꺼내는 일을 관장한다. 서빙고(西氷庫)는 둔지산(屯智山)에 있는데, 얼음을 어주
(御廚)에 진공하고 백관(百官)들에게 나누어 주며, 동빙고(東氷庫)는 두모포(豆毛浦)에 있는데, 얼음을 제사에
진공한다.
○ 별좌ㆍ별제ㆍ별검이 4명이다.
장원서(掌苑署) : 북부 진장방에 있는데, 원유(苑?)와 화과(花果)를 관장한다.
○ 장원(掌苑)이 1명인데 정6품이고, 별제가 3명이다. 신증 연산군 병인년에 장원을 혁파하였다가, 금상 초기에
다시 두었다.
사포서(司圃署) : 북부 준수방(俊秀坊)에 있으며, 원포(園圃)와 소채를 관장한다.
○ 사포(司圃)가 1명인데 정6품이고, 별좌ㆍ별검이 7명이다.
양현고(養賢庫) : 성균관 북쪽에 있으며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미두(米豆) 등의 물품을 진공하는 일을 관장한다.
○ 주부ㆍ직장ㆍ봉사가 각 1명인데, 모두 성균관 관원이 겸임한다.
전생서(典牲署) : 목멱산(木覓山 남산) 남쪽에 있으며 희생(犧牲)을 기르는 일을 관장한다.
○ 주부ㆍ직장ㆍ봉사ㆍ참봉이 각 1명이다.
사축서(司畜署) : 무악(毋岳) 남쪽에 있으며, 잡축(雜畜) 사육(飼育)을 관장한다.
○ 사축이 1명인데 종6품이고, 별제가 2명이다.
조지서(造紙署) :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으며, 표전지(表箋紙)ㆍ자문지(咨文紙)와 여러 가지 지지(紙地) 제조
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 사지(司紙)가 1명인데 종6품이고, 별제가 4명이다. 신증 연산군 병인년에 사지를 없애고 별제 1명을 더 두었
다가, 금상 초기에 모두 복구하였다.
혜민서(惠民署) : 남부 태평방(太平坊)에 있으며, 서민의 질병을 치료하고 의녀(醫女)를 교습하는 일을 관장한다.
○ 주부가 1명, 의학교수가 2명, 직장ㆍ봉사ㆍ의학 훈도가 각 1명, 참봉이 4명이다.
도화서(圖?署) : 중부 견평방에 있으며, 회화(繪?)의 일을 관장한다. ○ 별제가 2명이다.
전옥서(典獄署) : 중부 서린방(瑞麟坊)에 있으며, 옥수(獄囚)를 관장한다. ○ 주부ㆍ봉사ㆍ참봉이 각 1명이다.
활인서(活人署) : 사람들의 질병을 구원하는 일을 관장한다. 하나는 동부 연희방(燕喜坊)에 있고,
하나는 용산에 있는데, 도성 안의 역병(疫病)에 걸린 자는 모두 치료해 준다. 별제가 4명, 참봉이 2명이다.
와서(瓦署) : 용산 동쪽에 있으며, 벽돌과 기와의 제조를 관장한다.
○ 별제가 3명이고, 또 별서(別署)가 있는데, 기와를 구워 파는 일을 관장한다. ○ 별제 2명이 있다.
귀후서(歸厚署) : 용산강(龍山江)에 있으며, 관곽(棺槨) 제조를 관장한다. 분서(分署)가 남부 호현방에 있는데,
장례에 관한 여러 가지 일을 관장한다.
○ 별제가 6명이다.
○ 정이오(鄭以吾)가 지은 기문에, "영락(永樂) 4년 7월에, 경기 관찰사 우희열(禹希烈) 공이 좌정승 호정(浩亭)
하공(河公)에게 고하기를, '옛날에는 사람이 늙어 가면 죽은 뒤에 마지막으로 보낼 준비를 반드시 미리 해두는
것이니, 상사(喪事)에 당해서 쉽게 준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미리 준비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갑자기 상(喪)을 당했을 때에는 어찌하리까? 청컨대, 관청을 세
우고 목수들을 독촉하여 관을 만들어 그 값을 싸게 해서 여러 사람에게 파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좌정승이 좋게 여겨서 마침내 도당(都堂)에서 의논하고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매우 아름답게 여기시고, 유사에
게 명하여 쌀 30섬과 오종포(五綜布) 백 필을 내주어 관곽소(棺槨所)를 용산강 가에 설치하고서, 자은종 도승통
(慈恩宗都僧統) 신 종림(宗林)에게 그 일을 주관하게 하니, 여러 신하들도 각기 쌀과 베를 내어 이 일에 협조하는
이가 매우 많았으니, 양심의 발로는 막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종림이 명에 따라 일하기를 즐거워하여 재목을
사서 널을 만들고, 싼 값으로 팔아서 죽은 자를 전송하는 자들에게 유감이 없게 하였다.
뒤에 종림이 죽고, 그의 제자 해선(海宣)이 그 뜻을 이어받아 그 사업에 더욱 힘쓰자, 전하께서 또 노비 60명과
토지 50결을 내려 주었으니, 거기에 노역하는 사령(使令)을 넉넉히 하고 공급하는 곡식과 재정을 풍부하게 하려
는 것이었다. 귀후(歸厚)라고 이름지은 이유는 백성의 덕이 후덕하게 된다는 민덕귀후(民德歸厚)의 뜻을 취한
것이다. 아, 관곽(棺槨)을 처음 만들기는 황제(黃帝)때부터 시작된 것인데, 《예기(禮記)》에 기록된 것을 보면
세제(歲制)ㆍ월제(月制)ㆍ시제(時制)ㆍ일수(日修) 등의 시급히 준비하는 제도가 있다.
맹자는 말하기를, '자기 부모의 시체가 흙에 직접 닿지 않게 하면, 자식된 사람의 마음에 만족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런즉 왕도(王道)를 일으키고 백성의 덕을 후덕하게 하려는 자는 이것을 준비하는 것을 소홀히 하여
늦추어서야 되겠는가? 우리 전하께서 백성을 근심하시는 마음이 지극하시고, 보좌하는 대신들이 마음과 덕을
같이하여 인을 하는 방법을 확장시켜 사람마다 마지막으로 가는 길을 전송하는 장사에 유감이 없게 하였으니,
풍속이 어찌 후덕한 데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하였다.
중학(中學) : 북부 관광방에 있으며 소학(小學)의 선비를 가르치는 일을 관장한다.
○교수ㆍ훈도가 각 2명인데 모두 성균관 관원이 겸직하며, 항상 유생(儒生) 백 명씩 양성한다. 다른 학(學)에
서도 같다.
남학(南學) : 남부 성명방(誠明坊)에 있다.
서학(西學) : 서부 여경방에 있다.
동학(東學) : 동부 창선방(彰善坊)에 있다.
중부(中部) : 징청방에 있으며, 관내의 불법(不法)의 일과 교량ㆍ도로ㆍ반화(頒火)ㆍ금화(禁火ㆍ이문(里門)의
경수(警守)ㆍ집터의 측량ㆍ시체검시 등의 일을 관장한다. ○ 주부가 1명, 참봉이 2명으로, 다른 부도 같다.
○ 관할하는 것이 8방(坊)으로, 징청방ㆍ서린방ㆍ수진방ㆍ견평방ㆍ관인방(寬仁坊)ㆍ경행방(慶幸坊)ㆍ정선방
(貞善坊)ㆍ장통방(長通坊)이다.
동부(東部) :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관할하는 것이 12방으로, 숭신방(崇信坊)ㆍ연화방ㆍ서운방(瑞雲坊)ㆍ
덕성방(德成坊)ㆍ숭교방ㆍ연희방ㆍ관덕방(觀德坊)ㆍ천달방(泉達坊)ㆍ흥성방(興盛坊)ㆍ창선방ㆍ달덕방(達德坊)ㆍ
인창방(仁昌坊)이다.
남부(南部) : 명례방(明禮坊)에 있다. 관할하는 것이 11방으로, 광통방(廣通坊)ㆍ호현방(好賢坊)ㆍ명례방(明禮坊)ㆍ
태평방(太平坊)ㆍ훈도방(薰陶坊)ㆍ성명방ㆍ낙선방(樂善坊)ㆍ정심방(貞心坊)ㆍ명철방(明哲坊)ㆍ성신방(誠身坊)ㆍ
예성방(禮成坊)이다.
서부(西部) : 중부 서린방에 있다. 관할하는 것이 8방으로, 인달방(仁達坊)ㆍ적선방ㆍ여경방ㆍ황화방(皇華坊)ㆍ
양생방(養生坊)ㆍ신화방(神化坊)ㆍ반송방(盤松坊)ㆍ반석방(盤石坊)이다.
북부(北部) : 중부 징청방에 있다. 관할하는 것이 10방으로, 광화방(廣化坊)ㆍ양덕방(陽德坊)ㆍ가회방(嘉會坊)ㆍ
안국방(安國坊)ㆍ관광방ㆍ진장방(鎭長坊)ㆍ명통방ㆍ준수방(俊秀坊)ㆍ순화방(順化坊)ㆍ의통방(義通坊)이다.
내시부(內侍府) : 북부 준수방에 있으며, 환시(宦寺)의 부(府)이다. 대내(大內)의 감선(監膳)과 전명(傳命)ㆍ
수문(守門)ㆍ소제(掃除)의 일을 관장하는데, 모두 1백 40명이다.
신증 내반원(內班院) : 경회(慶會) 남문(南門) 서쪽에 있고, 하나는 창덕궁 선정문(宣政門) 안 동쪽에 있다.
○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기문에, "궁신(宮臣)의 부서를 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대개 천문(天文)의 상
(象)을 본떠서 임금 곁에서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궁문에서의 출입을 금하고, 내외의 말을 통하게 하며, 수라
에 오르는 음식을 요리하며, 궁궐 안의 뜰을 청소하는 일을 맡는다. 그 소임은 비록 하찮은 일이지만, 그 관계됨
이 매우 중대하지 않은가? 궁정(宮正)ㆍ궁백(宮伯)이란 칭호는 주 나라에서 시작되었고,
황문(黃門)ㆍ상시(常侍)는 한 나라에 있었으며,
내시(內侍)ㆍ급사(給事)는 당 나라 제도이고, 내반(內班)ㆍ전두(殿頭)는 송 나라에서 부르던 칭호이다.
비록 관호(官號)가 시대마다 변경되어 일정하지는 않지만, 그 거처하는 곳이 지극히 엄밀하고 직분의 전일(專一)
함은 역대에 모두 같은 것이다.
《서경》에 이르기를, '복신(僕臣)이 바르면 다른 신하는 감히 바르지 않을 수 없다.' 하였으니, 버릇없이 친압하
는 신하도 그러한데, 하물며 중관(中官 내시(內侍))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옛날부터 충성하고 삼가서 마음을
바르게 가진 자는 모두 복을 받고, 교만하고 은총만 믿는 자는 모두 화(禍)를 입었으며, 그 나라가 흥하고 쇠해지
는 것도 여기에 따르던 사례가 많았으니, 매우 두려워할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도읍을 정한 이후로 내시부
(內侍府)를 영추문(迎秋門) 밖에 설치하고, 또 액정(掖庭)과 영항(永巷) 옆에 내소방(內小房)을 만들어서 받들어
모시고 심부름하는 자들이 항상 거처하는 곳으로 하였더니, 우리 성상께서 비로소 그것을 내반원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니, 송 나라의 옛 제도에 따른 것이고, 또 외정반(外庭班)과 구별하려는 것이었다.
외정반은 삼공 육경(三公六卿)으로부터 백집사(百執事)에 이르기까지 모두 처소가 따로 있는데, 그들은 대궐 뜰
에 모여서 알현하는 것에도 때가 있고, 일을 아뢰는 것에도 정해진 날이 있어, 특별히 면대하라는 명을 내리시어
정책을 논의하는 기회가 아니면 청규(靑規)에 엎드려서 임금의 안색을 바라보는 것이 그다지 기회가 많지 못하
므로, 내반원에서 모시고 있는 중관들이 아침저녁으로 임금의 전후ㆍ좌우에서 모시고 둘러 있으면서, 임금의
모든 행동을 친히 익숙히 받들 수 있는 것과는 아주 처지가 다른 것이다. 이같이 미천한 자격으로 대궐 안의 깊고
엄숙한 곳에 있으니, 마음과 몸가짐이 어떠하여야 되겠는가? 충성하고 정직한 이와 아첨하고 간사한 자가 시대
마다 각각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 중에 착한 사람을 가려서 본받고, 착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 경계하는 것
이 가할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 내시로서 부지런히 충성을 바쳐서 도움이 많았던 이는 한 나라 사유(史遊)이고, 청렴하고 검소하
며 겸손하고 후덕하여 용맹한 이를 추천하라는 명을 받고서 사양한 이는 후한(後漢)의 양하(良賀)이며, 한 지방
의 봉작(封爵)을 고사(固辭)하면서 강개(慷慨)하게 곧은 말로 간한 이는 여강(呂强)이다.
성품이 강하고 충성하여 간사한 무리를 몰아낸 이는 구문진(具文珍)이고, 품성이 단정하고 조심하여 자기의 큰
공로를 주장하지 않은 자는 마존량(馬存亮)이다. 물러가 은퇴하기를 여러 번 청하고, 삼사(三司)의 권(券)을 없
애기를 청한 자는 장무칙(張茂則)이며, 궁중에 60년이나 출입하면서 항상 이치를 따르고 삼가서 허물이 없었던
이는 풍세령(馮世寧)이다.
이 사람들은 몸소 은총과 녹을 보전하여 꽃다운 공적이 후세에 전해졌으니, 아, 본받을 표본이 이들에게 있지
않은가? 만약 참소하고 아첨하여 임금을 유혹하고, 아첨하고 간사함으로 은총을 받아서 당파(黨派)를 끌어들
이고,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시기하고 해치며, 음악ㆍ여색과 기교(技巧)로 임금을 위하여 재리(財利)를 긁어
들이는 등, 임금의 모든 욕심을 맞추어 주는 데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임금이 불행히도 한번이라도 그의 마수
(魔手)에 빠지게 되면 곧 초당(貂?)의 위세를 빌려서 추기(樞機)의 중요한 직책을 잡고서 방자하고 거만하여
감히 누구도 금하고 막을 이가 없게 되어, 눈 한 번 흘긴 혐의도 반드시 갚으려 하고, 명령(螟?)의 족속까지도
호화롭고 귀한 자리를 도모한다. 이리하여 출척(黜陟)과 형상(刑賞)의 권세가 가만히 그들에게 옮겨져서 마침
내는 나라가 위태롭고 혼란하게 되며, 자신의 몸이 칼날에 잘리게 되는 것이니, 제 나라의 수초(?貂)로부터
한(漢)ㆍ당(唐)ㆍ송(宋)의 여러 환관(宦官)들이 일률적으로 다 같은 것이다.
아, 전인(前人)의 실패의 귀감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지금 임금의 덕이 해와 달처럼 그 빛이 하늘 가운데 있어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도 비추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중앙이나 지방의 신하들의 선악을 반드시 아는데, 하물며
내반(內班)의 친근한 자이랴? 처소가 비록 대궐 안의 은밀한 곳이라 할지라도 실로 모든 사람들이 지적하고 볼
수 있는 곳이니, 진실로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고, 소홀히 하는 마음이 있다면 화(禍)가 미치지 않음이 적을 것
이다. 비와 이슬같이 적셔 주는 임금의 은택을 어찌 구차히 혼자만 바랄 것이며, 우레와 천둥같은 임금의 위엄
을 어찌 자기만 구차히 면할 수 있겠는가? 이러하니, 지금 이 내반원에 있는 자 누가 옛날 어진 내시들을 본받
아 복받을 것을 버리고, 옛날 악한 내시를 본받아 재앙 받는 것을 원하겠는가?
그러나 옛날 사람들의 좌우명(座右銘)은 참으로 헛되게 꾸며 놓은 것이 아니므로 삼가 윤지(綸旨 임금의 전지
(傳旨))를 받들어서 이렇게 기문을 쓰노라." 하였다.
기로소(耆老所) : 중부 징청방에 있으며, 2품 이상으로 나이 70세가 된 이들이 서로 모이는 곳이다.
문직공서 중추부(中樞府) : 예조(禮曹) 남쪽에 있으며 문무(文武) 당상관으로서 실직(實職)이 없는 자를 대우하
는 부서이다. 그 속사(屬司)로 경력소(經歷所)가 부속되어 있다.
○ 영사 1명, 판사 2명, 지사 6명, 동지사 7명이다. 첨지사가 8명인데 정3품이고, 경력과 도사가 각각 1명이다.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 광화문 안 동쪽에 있는데, 하나는 창덕궁 인정전 서쪽에 있으며,
하나는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안 남쪽에 있으며, 5위(五衛)의 군무(軍務)를 관장한다. 속사로는 경력소가 부속
되어 있다.
○ 도총관(都摠管)이 정2품이고, 부총관(副摠管)이 종2품인데, 모두 10명으로 다른 관원으로 겸하게 한다.
경력과 도사가 각 4명이다.
○ 서거정이 지은 제명기에, "우리나라 초기에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설치하여 병정(兵政)을 총괄하게 하다
가, 뒤에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로 고치고서 병조(兵曹)에 예속하게 하였다.
도진무(都鎭撫) 5명을 두고, 요좌(僚佐)에 진무(鎭撫) 10명, 혹 15명, 혹 30명을 두어 때에 따라서 더 두기도 하
고 감원하기도 하였는데, 모두 다른 관원으로 겸임시켜 궁궐을 호위하는 군사의 통솔을 관장하여 윤번으로 숙위
(宿衛)하게 하였으니, 모두 당시에 명망이 높은 이를 가려서 그 직을 주었던 것이다. 또 그 뒤에 3군을 5위(衛)로
고쳤으니 용양위(龍?衛)ㆍ호분위(虎賁衛)ㆍ의흥위(義興衛)ㆍ충좌위(忠佐衛)ㆍ충무위(忠武衛)이다.
세조대왕께서 군정에 유의하여 더욱 이 직임을 중히 여겨서 진무소를 오위도총부로 고쳐서 병조에 예속시키지
않고, 전적으로 군무를 위임시켰다. 도총관이 10명인데, 정2품이나 혹 종2품으로 겸대(兼帶)한 자는 부총관이라
고 하였다. 요좌에 12명이 있었는데, 진무 2명은 종3품이고, 경력 3명은 종4품이며, 도사 7명은 종5품이다.
도총관은 비록 종친ㆍ외척이나 삼공(三公)의 중요한 자리에 있는 자라도 겸임하게 하였으니, 그 자리를 높게 여
기고 직임을 영광스럽게 한 것이다. 이에 병조에서는 병정(兵政)을 총괄하고 도총부에서는 군무를 총괄하여 서로
체통이 유지되면서 군정이 더욱 분명하게 되었다.
아, 임무가 중할수록 책임이 더욱 크고, 책임이 클수록 근심이 더욱 깊어지는 것이니, 모든 군사를 통솔하여 궁궐
을 호위하는 소임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진무소에는 옛날부터 제명기가 있었는데, 무술년에 시작되어 을유년
에서 마쳤으므로, 병술년 뒤의 일은 속집으로 따로 써서 후세에 전하게 한다. 이 책임을 맡은 자는 성상께서 위임
하신 일이 중대한 것과 은총과 대우가 융숭한 것을 생각하여, 충의를 발휘하여 성은에 보답하여 후세에까지 그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해야 될 것이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당상관 5명과 낭청 4명을 혁파하였다가,
금상 초기에 다시 설치하였다.
의흥부(義興府) : 중위(中衛)로 갑사보충대(甲士補充隊)가 부속되어 있다.
용양위(龍?衛) : 좌위(左衛)로 별시위대졸(別侍衛隊卒)이 부속되어 있다.
호분위(虎賁衛) : 우위(右衛)로 족친위(族親衛)ㆍ친군위(親軍衛)ㆍ팽배(彭排)가 부속되어 있다.
충좌위(忠佐衛) : 전위(前衛)로 충의위(忠義衛)ㆍ충찬위(忠贊衛)ㆍ파적위(破敵衛)가 부속되어 있다.
충무위(忠武衛) : 후위(後衛)로, 충순위(忠順衛)ㆍ정병(正兵)ㆍ장용위(壯勇衛)가 부속되어 있다.
○ 위장(衛將)이 12명인데, 종2품으로 다른 관직에 있는 자가 겸임한다. 부장(部將) 25명은 종6품이다.
선전관(宣傳官) : 모두 8명으로, 윤번으로 대궐 안에 입직한다.
내금위(內禁衛) : 모두 1백 90명으로, 정전(正殿) 남쪽 행랑에서 숙위(宿衛)한다. 장(將) 3명은 다른 관원이 겸임
하고, 겸 사복장(兼司僕將)도 같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이름을 충철위(衝鐵衛)로 고치고, 예차(預差 예비군)
는 소적위(掃狄衛)라 하였는데, 금상 초기에 옛이름으로 회복하고, 예차는 2백 50명으로 정하였다.
훈련원(訓鍊院) : 남부 명철방에 있으며, 무재(武才)를 과거(科擧)로 시험하고, 무경(武經)을 읽고 익히는 일을
관장한다.
○ 지사가 1명인데, 다른 관직에 있는 자로 겸임하게 하고, 도정(都正)이 2명인데 그 중 1명은 다른 관직에 있는
자로 겸임하게 한다. 정(正) 1명, 부정ㆍ첨정ㆍ판관ㆍ주부가 각 2명이다. 참군(參軍)이 2명인데 정7품이고,
봉사가 2명이다.
○ 성간(成侃)이 지은 사청(射廳) 기문에, "청(廳)을 사청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무재(武才)를 익히기 위해서 설
치하였기 때문이다. 무재를 익히는 도구가 활쏘기뿐만이 아닌데, 어째서 활쏘는 것으로 이름지었는가 하면 활
쏘는 것이 오병(五兵)에서 우두머리가 되기 때문이니, 그 이름을 지은 의의가 매우 크다 하겠다. 이러한 기술을
나라에 일이 없을 때에 익혀 두면 백성을 진정시켜 태평을 유지하여, 뒷날 일이 있을 때에 쓸 수 있을 것이고,
나라에 일이 있을 때 쓰게 되면 포악과 혼란을 제거하고 천하에 위력을 보일 것이니, 이것은 군사 훈련을 평소
에 하였기 때문이다.
훈련원에 사청(射廳)을 설치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공손히 생각건대, 성상께서 조종(祖宗)의 뜻과 기업을 이
어받아 거룩한 사업을 더욱 넓히고 키워서 문교의 풍화를 높이 선양하여 한 시대의 정치를 장식하였고, 편안한
시대이면서도 오히려 위태함을 잊지 않고, 무비(武備)에 마음을 써서 이르기를, '이 사청은 조종조에서 설치한
것이다.' 하고,
드디어 신에게 명하여 그 시말을 기술하여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신은 생각건대, 천하의 형세는 한창 혼란할
때에 대응하기는 쉬우나, 아직 혼란하기 전에 대응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대개 천하가 소란함이 계속되어 여러
영웅이 서로 싸울 때에는 임금의 마음이 앞을 염려하고 뒤를 돌아보아 마치 곁에 적국이 있는 것처럼 하지 않는
이가 적을 것이나, 천하가 다 평정되어 모두들 편안하게 되면 모두 태평한 생활에 길들어서 태만하고 방종하게
되어, 전쟁을 말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무뢰한이나 시정잡배들이 직책을 맡아 궁궐을 지키기도 하고,
더 심한 경우는 칼날과 화살촉을 다 녹여서 다시는 쓸데없음을 표시하기도 한다.
하루아침에 이같이 소홀히 하는 데에서 변이 일어나 필부들이 초야에서 팔을 휘두르며 나서게 되면 산이 무너
지고 물이 끓듯이 사방에서 함께 허물어져서 수습할 수 없게 되어 전쟁이 4ㆍ50년 동안이나 계속되다가 겨우 그
치게 될 것이니, 이것은 그 이치가 또한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가 비록 편하다 할지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다.'고 한 것이다.
선왕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비록 인의(仁義)와 예악을 높여서 천하를 교화시키고서도, 활과 화살로 무비
를 세우는 것도 감히 폐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주관(周官)〉에서 대사마(大司馬)란 관직을 설치한 이유이고,
대사례(大射禮)와 향사례(鄕射禮)도 이 때문에 설치하여 무예를 익힌 이유이다.
주 나라가 망하자, 육예(六藝)가 모두 허물어져 없어졌다.
한 나라에서는 진 나라에서 불태운 나머지의 서적을 주워모았으나, 큰 강령(綱領)을 세상에서 강구하지 않아 날
마다 없어지고 망해 가기만 해서, 세상이 모두 구차하고 간략한 것을 일삼게 되었으니,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태조께서는 고건(??)에서 몸을 일으켜 나라를 경영하고 창업하여, 큰 공업이 완성되자 천명이 돌아왔는데
도, '비록 군사를 쓸데가 없지만, 무비는 잊어서는 안 된다.' 하고 맨 먼저 훈련의 일을 더욱 발휘하도록 하였다.
태종대왕은 선대의 공렬을 크게 받고 선왕의 뜻을 따라서 서울 동쪽에 집을 세우고 그 남쪽에 굉장히 통창한 대
청을 마련하였으니, 이것이 사청(射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서 병조에 명하여 진무소와 훈련원의 관원을 통솔
하여 군사들을 크게 모아 놓고 여기에서 활쏘기를 겨루게 하였다.
그 법에는 대략 네 가지가 있으니, 무선(武選)과 도시(都試), 취재(取才), 연재(鍊才)라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모두 그 잘하고 못하는 것을 상고하여 권장하고 경계하는 것이고, 그들의 노고와 안일을 심사하여
상벌을 시행하는 것이고, 그들의 용감함과 비겁함을 가려서 지도하고 힘쓰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호피(虎皮)
의 과녁을 세우고 활쏘는 기구들을 서로 벌여 놓아서 격려하기도 하고 즐겁게하기도 하며 창ㆍ기ㆍ북ㆍ징 같은
기구들도 모두 설비하였으니, 무예를 익히는 도구가 활쏘기 한가지에 한정한 것이 아니다.
이같이 정치하는 실적과 미리 대비하는 뜻으로 주도면밀하게 생각하고 곡진히 방비함이 지극히 깊고 원대하였
다. 지금 전하께서도 그 법에 따르고, 잃지 않으시어 조심스럽게 마음을 다잡아 안락한 궁궐에 계시면서도 조종
(祖宗)께서 이 나라를 세울 때에 비바람을 무릅쓰고 고생했던 일을 항상 생각하시어 옛 기업을 잃지 않아 백성
을 편히 살게 할 것을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군사에 대해서도 날로 훈련시키고 달로 가르치며, 해마다 익히게 하고 철마다 강론하므로,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기술을 다 발휘하고 용감한 자는 자신의 힘을 다 써서 군사들이 노련하고 강해져서 절로 천지에 오
르고 바다와 산이라도 뽑아낼 수 있게 되었다.
옛날 한(漢)ㆍ당(唐)의 임금들이 무비를 강구한다고 하면서 각저희(角?? 씨름)를 하게 하고서 구경이나 한 따위
의 일과는 그 규모가 진실로 아주 다른 것이다. 그러니, 이 사청(射廳)의 설치에 대해서 기문을 쓰지 않을 수 없
는 것이다.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 동궁(東宮)을 모시는 일을 관장한다.
○ 좌우 익위(左右翊衛)가 각 1명인데 정5품이고, 좌우 사어(司禦)가 각 1명인데 종5품이며,
좌우 익찬(翊贊)이 각 1명인데 정6품이고, 좌우 위졸(衛率)이 각 1명인데 종6품이며, 좌우 부졸(副率)이 각 1명
인데 정7품이고, 좌우 시직(侍直)이 각 1명인데 정8품이고, 좌우 세마(洗馬)가 각 1명인데 정9품이다.
신증 정로위(定虜衛) : 금상 7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겸 사복장(兼司僕將) 1천 5백 명이 소속되어 있다.
비고 1 경도
고조선(古朝鮮) 마한(馬韓) 지역이다.
북쪽 진산(鎭山)인 화산(華山 삼각산)은 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형세이고, 남쪽은 한강으로 금대(襟帶)를
삼았으며, 왼쪽은 대관령(大關嶺)을 제어하고 오른쪽은 발해(渤海)를 둘렸다.
그 지형이 좋기로 우리나라에서 으뜸으로 진실로 산하 백이(山河百二)의 땅이다.
백제 중기에 한산(漢山 남한산)으로부터 이곳에 도읍을 옮겼다가 얼마 안 되어 남쪽 지방으로 파천(播遷)하였
으며, 고려의 숙종(肅宗)이 남경(南京)을 설치하였지만 때로 동쪽을 순행하였을 뿐이니 모두 이곳 지세의 뛰어
남을 감당하기에 부족하였다.
우리 태조에 이르러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여 사방에서 조정에 와서 귀순하는 거리를 균
등하게 하고, 이것으로 만대에 바꿀 수 없는 큰 기초를 세웠으니, 동경(東京 경주)ㆍ서경(西京 평양)ㆍ개경(開
京 개성) 세 서울의 형세가 그 만에 하나도 방불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아름답고 성대한 일이다.
국호 우리 태조 원년(1392)에 한상질(韓尙質)을 보내 명(明) 나라에 조회하여 조선(朝鮮)ㆍ화령(和寧) 등의 국
호로 재가(裁可)를 청하였는데, 황제가 조서를 내리기를, "동이(東夷)의 국호는 조선이란 칭호만이 아름답고,
또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그 이름을 근본하여 본받아서 하늘의 명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려[體天牧民] 길이
후손을 창성하게 하라." 하였다.
국도 성현(成俔)의 《용재총화(?齋叢話)》에 이르기를, "우리 태조가 개국하자 도읍을 옮기자는 의논이 있었다.
먼저, 계룡산(鷄龍山) 남쪽에서 도읍할 만한 땅을 보았는데, 얼마 안 가서 공사를 중지하고 다시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였다. 삼각산(三角山) 서쪽 연서역(延曙驛) 들은 땅이 아름답기는 하나 후에 다시 보니 모든 산이
밖으로 등지고 달아나는 형세라, 백악산(白岳山 북악) 남쪽과 목멱산(木覓山 남산) 북쪽이 제왕(帝王)의 만 년
터가 되어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는 것만 못하였다. 항간에서 전하는 말에, "송경(松京)은 산곡(山谷)이 둘러
싸서 포장(包藏)하는 형세이므로 세상에 권신(權臣)의 발호(跋扈)가 많았으며, 한양은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으므로 장자(長子)가 가볍고 지자(支子)가 중하게 된다고 한다." 하였다.
○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신지비설(神誌?說)》에 저울로 세 서울[三京]을 비유하였는데,
삼각산 남쪽으로 오덕구(五德丘)를 삼아서 저울추에 비유하였다.
오덕(五德) 가운데 면악(面岳)이 있어 원형(圓形)이니 토덕(土德)이요, 북쪽에 감악(紺岳)이 있어 곡형(曲形)이
니 수덕(水德)이요, 남쪽에 관악(冠岳)이 있어 첨형(尖形)이니 화덕(火德)이요, 동쪽에 양주(楊州) 남행산(南行
山)이 있어 직형(直形)이니 목덕(木德)이요, 서쪽에 수주(樹州) 북악(北岳)이 있어 방형(方形)이니 금덕(金德)
이다." 하였다.
○ 권문해(權文海)의 《운옥(韻玉)》에 이르기를, "도선(道詵)의 비기(?記)에, '서쪽에 공암(孔巖)이 있고 또 단
서 석벽(丹書石壁)이 있다.' 하였는데, 공암으로 말하면 <백악산 남쪽이나 연서역> 두 곳이 모두 서쪽에 있으니,
모름지기 단서(丹書)를 찾아야 결정할 수 있었다. 이에 단서를 인왕동(仁王洞) 돌 위에서 얻고 드디어 <백악산
남쪽에> 도읍하기로 결정했다." 하였다.
○ 도선의 도참(圖讖)에, "왕(王)을 대신할 이(李)가 있어 한양에 도읍할 것이다."는 말이 있어. 고려 때 오얏나무
[李]를 한양에 심어 오얏나무가 무성해지면 번번이 베어버려서 <지기를> 눌렀었는데, 이때 와서 과연 징험하였
다.
○ 도읍을 정할 때, 중 무학(無學)이 인왕산으로 진산(鎭山)을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
(右白虎)를 삼으려고 하였는데, 정도전(鄭道傳)이 어렵게 여기며 아뢰기를 "예부터 제왕(帝王)은 모두 남쪽을
향하여 다스렸으니 동향(東向)으로 도읍을 창설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무학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극도(極度)는 한양의 북극(北極) 높이가 37도(度) 39분 15초(秒)이다. : 아조 숙종 계사년(1713)에 청(淸) 나라
사람 목극등(穆克登)이 오관 사력(五官司曆)을 데리고 와서 땅의 도수를 측정하였다.
대개 역법(曆法)은 해가 궤도를 돌아서 적도(赤道)를 출입하는 도수로 모든 절기를 정하는데, 북극(北極)이 땅
에 나오는 도수는 곧 적도에서 하늘 꼭대기에 가는 도수이며, 땅의 남북쪽에 따라서 고하의 차이가 있다.
《원사(元史)》를 보면 수시력(授時曆 원 나라의 역서)에서 고려의 북극 고도를 38도 4분도의 1로 정하였는데,
지금 서양 천문학의 도수 3백 60으로 요약하면 37도 41분 하고 남으니, 새로 측정한 것과 차이가 많지 않다.
또 한양에서 남쪽으로 해남현(海南縣)까지가 거의 천 리인데, 조도(鳥道)를 가지고 미루어보면, 해남현의 북극
은 한양에 비하여 2, 3도가 낮아야 하며, 한양을 경유하여 북쪽으로 삼수부(三水府)까지가 거의 2천리인데 조도
를 가지고 미루어보면, 삼수부의 북극은 한양에 비하여 4, 5도가 높아야 하니, 밤낮의 시간은 한양으로 표준[正]
을 삼고 북극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가감하여야 할 것이다. 예전 세종조에서 역관(歷官) 윤사웅(尹士雄)ㆍ최천구
(崔天衢)ㆍ이무림(李茂林)을 나누어 보내어 북극의 고도(高度)를 강화부(江華府) 마니산(摩尼山)ㆍ갑산부(甲山
府) 백두산(白頭山)ㆍ제주(濟州) 한라산(漢拏山)에서 측정하였는데, 그때 측정한 북극의 고도 수는 전하지 않는
다.
동지(冬至)ㆍ하지(夏至)와 춘분(春分)ㆍ추분(秋分)의 일출과 일몰, 낮과 밤의 각수(刻數) : 동지에는 일출이
진시(辰時) 초(初) 1각(刻) 3분, 일몰이 신시(申時) 정(正) 2각 12분이니, 낮이 37각 9분, 밤이 58각 6분이다.
하지에는 일출이 인시(寅時) 정 2각 12분, 일몰이 술시(戌時) 초 1각 3분이니, 낮이 58각 6분이고, 밤이 37각 9
분이다. 춘분과 추분에는 일출이 묘시(卯時) 정초각(正初刻)이고, 일몰이 유시(酉時) 정초각이니, 낮이 48각,
밤이 48각이다.
연경(燕京 북경)에서 동쪽으로 10도 30분 치우쳤다. : 연경의 자오선(子午線)을 중앙으로 삼고 각 성(省)의 동ㆍ
서쪽으로 치우친 도수를 보아서 절기의 시간을 가감하는데, 1도를 치우칠 때마다 시간은 4분이 틀려진다.
동쪽으로 치우치면 시간을 더하고 서쪽으로 치우치면 감하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10도 30분은 42분을 더
하면 된다. 분야(分野)는 천문의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의 분야이다. : 《한서(漢書)》에 "미성 4도에서 두성
(斗星) 6도까지가 석목(析木)의 차례로 연(燕)의 분야가 되는데, 요동(遼東)ㆍ발해(渤海)ㆍ낙랑(樂浪)ㆍ현도(玄
?)ㆍ조선ㆍ예맥(穢貊)ㆍ고구려의 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하였다.
○ 《진서(晉書)》에, "미성 11도에서 남쪽으로 두성 11도까지가 석목이니 연의 분야가 되는데,
요서ㆍ요동은 미성 10도에 들고 발해는 기성 1도에 들며 낙랑은 기성 3도에 들고 현도는 기성 6도에 든다."
하였다.
○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처음은 미성 7도 남짓 2천 7백 50비(?) 21이 적으며, 중간은 기성 5도요, 끝은
남쪽 두성 8도로 석목의 차례가 되니, 발해 구하(九河)의 북쪽에서 요서ㆍ요동ㆍ낙랑ㆍ현도ㆍ고북(古北)ㆍ연
(燕)ㆍ고죽(孤竹)ㆍ무종(無終)ㆍ구이(九夷)의 나라들이 속하며, 은하수의 끝 갈래에 해당하니 모두 북기(北紀)
이다.
기성과 남쪽 두성은 서로 가까우며 모두 조선 삼한(三韓)의 지역인데 오월(吳越) 동쪽에 있다." 하였다.
○ 《황명분야서(皇明分野書)》에는, "미성 3도에서 두성 2도까지가 석목의 차례인데, 영평부(永平府)는 미성
분야요, 난주(?州)는 미성과 기성 분야이며, 요동 도지휘사(遼東都指揮司)도 미성과 기성 분야요, 조선은 기성
분야다." 하였다.
○ 생각건대, 주천(周天)은 3백 60도인데 동서가 경(經)이 되고 남북이 위(緯)가 되며, 남극과 북극의 중간을
평균하여 나누어 하늘 허리를 가로 두른 것이 적도(赤道)이다.
○ 《경위선분야도(經緯線分野圖)》에는 "만국전도(萬國全圖) 경위선에 의하여 우리나라 전도를 그리면, 적도
이북 37도를 떠나서 시작하여 복도(福島) 이동 63도 1백 50리를 떨어지면 경도(京都) 한성부의 본자리를 얻게
되며, 경도에서부터 서쪽으로 가서 황해도 풍천부(?川府)에서 시작하여, 복도를 1백 61도 89리를 떨어지면 북
쪽으로 여진 백도눌(女眞白都訥) 동쪽 경계를 범하고 동쪽으로 경상도 영해부(寧海府)에 이르며, 1백 65도 1백
90리를 떨어지면 북쪽으로 여진 흑룡강(黑龍江) 동쪽 경계를 범하는데, 모두 4도 1도가 2백 50리가 된다.
1백 2리가 된다.
남쪽으로 전라도 해남현(海南縣)에서 시작하면 북극성이 나온 곳에서 31도 3백 44리에 서쪽으로 중국 절강성
(浙江省) 북쪽 경계를 범하며, 또 해남현에서 바다를 지나 제주 남쪽 경계에 닿고, 북극성이 나온 곳에서 37도 1
백 97리에서 서쪽으로 중국 복건성(福建省) 남쪽 경계를 범하며, 북쪽으로 함경도 온성부(穩城府)에 이르면
북극성이 나온 곳에서 44도 91리에 서쪽으로 여진 길림(吉林) 북쪽 경계를 범하는데 모두 16도 1백 58리가 된다.
경도는 산동성(山東省)과 위도(緯度)가 같은데 조금 북쪽이며, 길림 땅과 경도(經度)가 같다.
대개 위도의 넓이는 여진의 경계와 같은데 뚫고 들어갔으며, 경도의 길이는 중국과 대략 같은데 움츠러들었다.
《천관서(天官書)》로 상고해 보면, 함경ㆍ평안 두 도의 남쪽 경계와 황해ㆍ강원 두 도의 북쪽 경계는 중국
순천부(順天府)와 위도가 같으며, 기성과 미성 분야에 속하여야 하며, 경기 및 황해ㆍ강원 두 도의 남쪽 경계와
충청ㆍ경상 두 도의 북쪽 경계는 중국 산동성과 위도가 같으며, 허성(虛星)과 위성(危星) 분야에 속하여야 하며,
전라도 및 경상ㆍ충청 두 도의 남쪽 경계는 중국 강소성(江蘇省)과 위도가 같으며, 두성(斗星) 분야에 속하여야
하고, 제주는 중국 복건성과 위도가 같으며, 두성과 여성(女星) 분야에 속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그림을 살펴
보면 알 수 있다. ○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말하기를, "세상에서 전하기를, '우리나라가 비록 기성과 미성
분야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 남쪽은 또 오월(吳越)과 분야가 같다.'고 하는데, 대개 두성의 8도는 이미 미성ㆍ
기성과 함께 석목의 차례에 들어가는 것이다. 지금 충청 이상의 여러 도는 미성과 기성의 분야가 되니,
호남ㆍ영남은 마땅히 기성과 두성 분야가 되야 한다." 하였다.
○ 세상에서 전하기를, "우리나라는 연(燕)과 분야가 같기 때문에 운기(運氣)도 서로 많이 같다." 한다.
요(堯) 임금이 교화를 펼 때에 단군(檀君)이 나라의 기초를 열었으며, 무왕(武王)이 상(商 은 나라) 나라를 대신
할 때에 부사(父師 기자)가 동쪽으로 왔고,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나누어 다툴 때에 위만(衛滿)이 패수(浿水)를 건넜다.
선덕여왕(善德女王)과 진덕여왕(眞德女王)은 <당(唐) 나라의> 무조(武● 측천무후(則天武后))와 <연대가> 대략
서로 오르내리며, 홍무(洪武) 연간에 참 임금(명 나라 태조를 말한다)이 해내를 평정할 때에 우리 태조가 천명을
받고 왕위에 올랐다. 대개 당요(唐堯) 원년 갑진(B.C. 2357, 요 임금의 즉위한 해)에서 홍무 원년 무신년(1368)에
이르기까지가 3천 7백 25년이 되고, 단군 무진년(B.C. 2333)에서 태조 원년 임신년(1392)에 이르기까지가 역시
3천 7백 25년이 되니, 아, 또한 이상하다.
강역 조신(曺伸)의 《쇄록(?錄)》에, "고려 때 사용하던 은병(銀甁 화폐)을 활구(闊口)라고 이름하며 우리나라
지형을 형상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제도를 보지 못한다. 대개 우리나라 지세는 좁고 길어서, <서울에서> 남쪽
으로 전라도 장흥부(長興府)까지가 9백 75리, 북쪽으로 평안도 강계부(江界府)까지가 1천 3백 30리, 동북쪽으로
함경도 경흥부(慶興府)까지가 2천 3백 59리, 서남쪽으로 전라도 진도부(珍島府)까지가 9백 리, 서북쪽으로 평안
도 의주부(義州府)까지가 1천 1백 40리, 동남쪽으로 경상도 울산부(蔚山府)까지가 9백 2리, 동쪽으로 경상도
영해부(寧海府)까지가 5백 40리, 서쪽으로 경기도 고양군(高陽郡)까지가 40리이니, 활구(闊口)의 타원형임을 알
수 있다." 하였다.
○ 생각건대, 우리나라 지형은 해좌 사향(亥坐巳向)인데, 정북인 함경도 온성부(穩城府)는 서울과의 거리가 2천
1백 2리, 정남인 전라도 해남현은 서울과의 거리가 8백 96리, 정동인 경상도 영해부는 서울과의 거리가 7백 45리,
정서인 황해도 풍천부는 서울과의 거리가 5백 55리이니, 남북간이 2천 9백 98리이며, 동서간은 2천 3백 리이다.
○ 10리마다 작은 돈대[?]를 세우고 30리마다 큰 돈대를 세워서 이수(里數) 지명을 새기고 역(驛)을 두었다.
성곽 경성(京城): 우리 태조 5년에 돌로 쌓았는데 평양 감사(平壤監司) 조준(趙浚)이 공사를 감독하였다.
세종 4년에 고쳤는데, 주위가 1만 4천 9백 35보로 주척(周尺)으로 재어서 8만 9천 6백 10자요, 높이가 40자 2치
이다. 문 8개를 세웠다. 정남쪽 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하는데, 겹처마요 양녕대군(讓寧大君)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남대문이라 부른다. 정북쪽 문을 숙정문(肅靖門)이라 하는데, 위에 집 지은 것[架屋]이 없으며
닫아둔 채 다니지 않는다. 정동쪽 문을 흥인문(興人門)이라 하는데 겹처마요 밖을 곡성(曲城)으로 둘렀으며 민
간에서 동대문이라 부른다. 정서쪽 문을 돈의문(敦義門)이라 하는데, 조일회(曺一會)가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
간에서 신문(新門)이라 부른다. 동북쪽 문을 혜화문(惠化門)이라 하는데 처음엔 홍화(弘化)라고 이름하였다.
중종 6년(1511)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조이(趙履)가 현판 글씨를 썼다.
민간에서 동소문(東小門)이라 부른다. 서북쪽 문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고, 동남쪽 문을 광희문(光熙門)이라
하는데 민간에서 수구문(水口門)이라 부른다. 서남쪽 문을 소의문(昭義門)이라고 하는데 처음 이름은 소덕(昭
德)이다. 장경왕후(章敬王后)께 시호(諡號)를 올린 다음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민간에서 서소문(西小門)이라
부른다. 대개 숭례문ㆍ홍인문ㆍ돈의문ㆍ혜화문이 정문이고 나머지 네 문은 사잇문이다.
예전에는 남소문(南小門)이 있어서 광희문 남쪽, 목멱산 봉대(木覓山烽臺) 동쪽에 있었는데, 김안로(金安老)가
제멋대로 닫았다고 하니, 근거할 바가 없다. 숙종 5년(1679)에 다시 설치하자고 의논하다가 곧바로 중단되었다.
또 수문(水門) 2개가 있는데, 홍인문 남쪽에 있는 것이 오간수문(五間水門)이고, 또 그 남쪽 곧 광희문 북쪽이다.
에 있는 것이 이간수문이다.
○ <성의> 동서남북을 <그 지세의> 험하고 평탄함을 헤아려 삼군문(三軍門)에 나누어 맡겨서 훼손되는 대로 수
축하게 하였는데, 숙정문 동쪽 가 무사석(舞砂石)에서 돈의문 북쪽 가에 이르기까지 4천 8백 50보는 훈련도감에,
돈의문 북쪽 가 무사석에서 광희문 남쪽 가 남촌(南村) 집 뒤에 이르기까지 5천 42보 반은 금위영에, 광희문 남쪽
가 남촌 집 뒤에서 숙정문 동쪽 가에 이르기까지 5천 42보 반은 어영청에 맡겨서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보살펴 지키게 하고, 인가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은 사산(四山)의 감역(監役) 지금의 참군(參軍) 이 그 산지
기를 시켜서 나누어 맡아 살펴보게 하였다.
○ 오래도록 비가 오면 숭례문ㆍ흥인문ㆍ돈의문ㆍ숙정문 네 문에 나가서 영제(?祭 개기를 비는 제사)를 거행하
였다.
○ 영제는 당하(堂下) 3품관이 연 3일간 설행하는데, 그래도 오래도록 개지 않으면 3차에 한하여 또 설행한다.
○ 성문 안에는 월도(月刀)를 꽂는데 영종조(英宗朝)에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시작한 것이다.
○ 영종 무신년(1728)에 이인좌의 여러 역적들을 쳐서 평정하고, 왕이 숭례문에 나가 헌괵례(獻?禮 적장의 머리
를 드리는 예)를 받았다.
계해년(1743)에는 왕이 북교(北郊)에서 비를 빌고 돌아오다가 창의문루에 임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들의 성명
을 새겨서 걸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후의 임금으로 하여금 여기를 지나면서 성조(聖祖)의 힘들고 어려웠던 일을
생각하게 하라." 하였다.
○ 영종 47년(1771)에 성을 나누어 세 군영에 속하게 하였다. 훈국도감의 관내[宇內]는 돈의문에서 동쪽으로
숙정문까지 1천 5백 14타(?)로 모두 4천 8백 50보이다. 성랑(城廊)이 24개 소(所)이며, 무릇 성랑 근처에는 모두
돌을 높이 쌓았는데, 인왕산(仁王山)은 몹시 험하여 5개 처(處) 80보를 쌓지 않았다. 금위영 관내는 돈의문 북변
무사석에서 광희문 남변까지 1천 5백 42타로 모두 4천 9백 35보인데, 성랑이 24개 소이다.
어영청 관내는 숙정문에서 동쪽으로 광희문 남쪽 표석(標石)까지 1천 5백 98타로 모두 3천 7백 95보이며,
치첩(雉堞)이 6개 처, 성랑이 27개 소이다.
○ 매해 봄ㆍ가을에 병조 판서와 낭청이 공조ㆍ한성부의 당상과 낭청과 함께 두루 다니면서 성첩을 조사하여
무너진 곳은 고쳐 쌓으며, 번갈아 맡은 영문에서 장교를 정하여 군사 20명을 거느리고 파수하기를 궁성(宮城)
같이 한다.
○ 도성 7개 문의 자물쇠는 문마다 각각 2개씩인데, 상하면 바꿔서 쓴다.
설성(雪成) : 《택리지(擇里誌)》에 이르기를, "한양에 외성(外城)을 쌓으려고 하나 아직 주위의 원근(遠近)을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하룻밤에 눈이 와서 밖은 쌓이고 안은 녹았다. 우리 태조가 크게 이상히 여겨, 명하여 눈
을 따라 성 터를 정하였으므로 설성이라고 이름하였다." 하였다.
경복궁성(景福宮城) : 경성 안에 있는데, 주위가 1천 8백 13보, 높이 21척 1촌이다. 문 넷을 세웠는데, 남쪽 문
은 광화문(光化門) 옛날 이름은 정문이다. 이고, 북쪽 문은 신무문(神武門)이요, 동쪽 문은 건춘문(建春門),
서쪽 문은 영추문(迎秋門)이라 한다.
○ 정도전(鄭道傳)이 정문 이름을 짓고, 그 이름한 뜻을 아울러 써서 올렸다.
또 변계량(卞季良)의 광화문 종명문(鍾銘文)과 병서(竝序)가 있다.
○ 임진년 왜란 후에 궁성을 그대로 둔 채 수리하지 않았고 단지 남쪽과 북쪽 두 문만을 세우고서, 남문의 현판
에 옛 광화문이라고 썼는데, 조윤량(曺允亮)이 썼다.
○ 금상 2년 을축년에 고쳐 지으니 네 문이 모두 무지개같이 반원형이며, 광화문만은 겹처마이고 문루 위에 종
을 달았다. 창덕궁(昌德宮)ㆍ창경궁성(昌慶宮城) : 경성 동북쪽에 있는데, 두 궁과 종묘(宗廟)를 둘러쌌으며
주위가 □천 □백 □□보요, 높이 □□척 □촌이다.
창덕궁의 남문은 돈화문(敦化門)이라 하며 겹처마인데 곧 정문이다. 문루에 큰 북을 달아, 매일 정오 및 인정
(人定) 때에는 종이 울리고, 파루(破漏) 때에는 북을 친다.
동쪽은 건양문(建陽門)이라고 하는데, 그 동쪽이 창경궁이다. 서쪽은 경추문(景秋門)이라 하는데, 장수를 명하
여 군사를 출동할 때에 비로소 열기 때문에 항상 닫아 둔다.
돈화문의 동쪽은 단봉문(丹鳳門)이요, 서쪽은 금호문(金虎門)이라 하는데, 성임(成任)이 현판 글씨를 썼다.
조정 신하들은 모두 여기를 거쳐서 출입하는데 대관(臺官)은 반드시 정문으로 출입한다.
경추문의 북쪽은 요금문(曜金門)이라 하는데, 신자건(愼自建)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또 그 북쪽은 공북문(拱北
門)이라 하는데, 바로 대보단(大報壇)이 남문이다.
○ 창경궁의 동쪽 문은 홍화문(弘化門)이라 하며 겹처마인데 바로 정문으로, 성임이 현판 글씨를 썼다.
북쪽의 곁문을 청양문(靑陽門)이라 하는데, 그 안이 춘당대(春塘臺)로 후원(後苑)이다.
홍화문의 남쪽을 선인문(宣仁門)이라 하는데, 옛날 이름은 서린문(瑞?門)이며 곧 동궁(東宮)의 정문으로 조정
신하들이 모두 여기로 출입하고, 대관은 반드시 정문을 경유한다.
북쪽을 통화문(通化門)이라 하는데, 서쪽이 바로 창덕궁의 건양문(建陽門)이다.
통화문의 동북쪽을 월근문(月覲門)이라 하는데, 곧 청양문의 내동문(內東門)이다. 정종(正宗) 3년에 세웠는데
함춘원(含春苑)의 유근문(?覲門)과 마주 서 있다. 매달 초하루에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할 때에 반드시
이 문을 경유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또 그 북쪽을 집춘문(集春門)이라 하는데, 곧 춘당대 후원의
동문으로서 태학(太學) 서쪽 반교(泮橋)와 제일 가깝다. 역대 임금들이 태학으로 거등할 때에 매양 보련(步輦)
을 타고 이 문을 경유하여 나갔다.
○ 성 밖을 빙 둘러 군포(軍鋪 순라군이 머물러 있는 곳)를 배치하니 둔처(屯處)가 20개 소로, 훈국(訓局) 관내에
6개 소, 금위영 관내에 8개 소, 어영청 관내에 6개 소이다.
경희궁성(慶熙宮城) : 경성 서쪽에 있는데, 주위가 □천 □백 □□보요, 높이가 □□척 □촌이며,
문 다섯 개를 세웠다.
동쪽 문읅 흥화문(興化門)이라 하는데 곧 정문이요, 왼쪽을 흥원문(興元門)이라 하고, 오른쪽을 개양문(開陽門)
이라 하는데, 조정 신하들이 모두 여기를 경유하여 출입하며, 대관은 반드시 정문을 경유한다.
서쪽 문을 숭의문(崇義門)이라 하는데, 장수를 명하여 군사를 출동할 때에만 비로소 열기 때문에 항상 닫아 둔다.
북쪽 문을 무덕문(武德門)이라 한다.
○ 각각 빈 궁궐에는 위장(衛將)을 두어 맡아 수직하게 하다가, 금상 2년 을축년(1865)에 헐어서, 그 재목을 옮
겨다 경복궁을 지었다.
궁궐 경복궁(景福宮) : 백악산 남쪽에 있으며 북부 관광방(北部觀光坊)이다.
태조 3년(1394)에 짓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이름을 지었으며 기문이 있는데,
대개 《시경(詩經)》 주아(周雅)의 개이경복(介爾景福)의 뜻을 취한 것이다.
○ 명종 8년(1553)에 사정전(思政殿) 이남이 모두 불타 이듬해에 중수하고, 이황(李滉)이 기문을 지었다.
○ 선조 25년(1592) 왜란 때 불타고 그대로 폐지되었다.
○ 위장을 두어 맡아 수직하게 하였다가, 금상 2년 을축에 다시 중건하였다.
근정전(勤政殿) :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이다. 남쪽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홍례문(弘禮門)
이라 하며, 동쪽을 일화문(日華門), 서쪽을 월화문(月華門)이라 한다. 홍례문 안에 어구(御溝)가 있는데, 다리를
금천(錦川)이라 하며, 영제(永濟)라고도 한다. 동서쪽에는 수각(水閣)이 있다.
사정전(思政殿) : 근정전 북쪽에 있는데, 아침마다 공사를 보는 곳이다.
○ 세종이 문신 40여 명을 집현전(集賢殿)에 모아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편찬하고 친히 교정을
보고서 《사정전훈의자치통감강목》이라 이름하였다.
○ 명종 8년에 불이 나서 전의 이남이 연달아 타 역대 법전이 재가 되고 말았다.
강녕전(康寧殿) : 사정전 북쪽에 있는데, 곧 연침(燕寢 임금이 한가로이 거처하는 전각)이다.
연생전(延生殿) : 동쪽의 작은 침실이다. 경성전(慶成殿) : 서쪽의 작은 침실이다.
○ 이상 다섯 전에는 모두 정도전(鄭道傳)의 글이 있다. 교태전(交泰殿) : 강녕전 북쪽에 있다.
만춘전(萬春殿) : 전 동쪽에 일성 정시의(日星定時儀)를 두었다. 함원전(含元殿) : 강녕전 서북쪽에 있다.
천추전(千秋殿) : 문종이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전 서쪽에 소간의(小簡儀)를 두었다.
○ 흠경각(欽敬閣)이 있다.
은정전(恩政殿) : 세조 11년(1465)에 등준시(登俊試 별과(別科)의 한 이름)를 설행하여 김수온(金守溫) 등을 뽑
았는데,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謝恩)하니, 내전에 불러들여서 보고 이르기를 "옛날에는 좌주(座主)와 문생(門
生)의 칭호가 있었다. 이 과거의 참여가 은문(恩門)이 될 것이니, 이 전을 은정(恩政)이라 이름해야겠다." 하였다.
며칠이 지나서 두 전하께서 이 전에 거둥하자 여러 사람들이 잔을 드리기를, 한결같이 문생이 좌주에게 하는 예
와 같이 하니, 은총과 영광이 함께 갖추었다.
○ 이상의 세 전은 소재가 자세하지 않다.
선원전(璿源殿) : 문소전(文昭殿) 동북쪽에 있으며, 선왕과 왕후의 화상을 봉안한 곳이다.
양심당(養心堂) : 강녕전 서북쪽에 있다.
○ 명종이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비현각(丕顯閣) : 사정전 동편에 있다.
인지당(麟趾堂)ㆍ자미당(紫薇堂): 예종이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청연루(淸?樓) : 모두 교태전(交泰殿) 동쪽에
있으며, 인종이 아래 소침실에서 승하하였다.
계조당(繼照堂) : 건춘문 안에 있다. 세종 27년(1445)에 세자의 조당(朝堂)을 지었다.
자선당(資善堂) : 융문루(隆文樓) 남쪽에 있는데, 동궁이 서연(書筵)하던 곳이다.
단종이 이 전에서 태어났고 현덕왕후(顯德王后)가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융문루(隆文樓) : 근정전 동각(東閣)의 누대이다. 무릇 책을 박아 내면 따로 융문루ㆍ융무루(隆武樓) 및 의정부ㆍ
홍문관ㆍ성균관ㆍ춘추관에 각각 한 벌씩 간직한다.
융무루 : 근정전 서각(西閣)의 누대이다. 무릇 책을 박아 내면 따로 두 누각에 간직한다.
모두 정도전(鄭道傳)의 글이 있다.
경회루(慶會樓) : 사정전 서쪽에 있는데, 태종 임진년(1412)에 지었다. 누대를 둘러 못을 만들었는데, 못이 깊고
넓으며 연을 심었으며, 가운데 두 섬이 있다. 하륜(河崙)의 기문이 있다.
○ 세종이 일찍이 누 동쪽에 흩어진 재목으로 별실을 지었는데, 주춧돌과 섬돌을 쓰지 않았으며,
띠풀로 지붕을 덮어서 되도록 검소하게 하였다. 항상 이 집에 거둥하였다.
○ 못가에 도마뱀[??]과 동자의 모습을 만들어 기우제를 지내기를 10차례를 하였는데,
<제관은> 무관 종2품으로 하였다. 도마뱀을 만드는 행사는 지금은 폐지되었다.
○ 성종 정유년(1477)에 유구국(琉球國) 사신이 서울에 들어와서 역관에게 말하기를, "이번 길에 세 가지의 장관
(壯觀)이 있으니, 경회루 돌기둥에 나는 용을 새겼는데, 그 그림자가 푸른 물결과 붉은 연꽃 사이에 거꾸로 비치
니 첫 번째 장관이요, 정승 정창손(鄭昌孫)의 풍채와 옥 같은 얼굴이 조정 반열에서 빛나니 두 번째 장관이요,
예빈시 정(禮賓寺正)인 관반(館伴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사람) 이숙성(李淑珹)이 술자리를 잘 마련하여 장쾌하게
큰 그릇의 술을 마시게 하니 세 번째 장관이다." 하였다.
○ 연산군 때에, 채붕(彩棚 채색으로 홍예문처럼 만든 것)을 못 위에 매어 놓았는데, 첫째가 만세(萬歲)요,
둘째가 영춘(迎春)이요, 셋째가 진방(鎭邦)이다. 세 채붕이 산같이 높이 솟아서 매우 장려하였다.
흠경각(欽敬閣) : 강녕전 서쪽에 있다. 세종 20년(1438)에 창건하고 천문 의기(儀器)를 두었는데,
후에 불타 명종 9년(1554)에 중건하였다. 김돈(金墩)의 기문이 있다.
○ 혼의(渾儀 천체 관측기)가 있는데 원 나라 선비 오징(吳澄)의 《서찬언(書纂言)》에 실린 내용에 의하여
나무에 칠하여 만들었다.
○ 혼상(渾象)은 옻칠한 베로 몸체를 만들었는데 둥글기가 탄환 같으며, 둘레가 10척 8촌 6분이다.
가로 세로에 하늘 둘레의 도(度)ㆍ분(分)을 그리되, 적도(赤道)가 중앙에 있고 황도(黃道)가 적도 안팎을 출입
하는데 각각 24도 약(弱)이며, 한편에는 중외 궁성(中外宮星)을 배열하였다.
하루에 한 바퀴를 돌고, 1도를 지나서 해가 황도에 매이게 되는데, 매일 한 도를 뒤로 가게 하여 하늘의 운행과
합치한다. 물을 막아 수세를 세게 하여 돌리는 기계 바퀴는 안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다.
○ 일구(日晷)의 제도는 네 가지가 있으니, 현주(懸珠)ㆍ천평(天平)ㆍ정남(定南)ㆍ앙부(仰釜)이다.
현주는 네모난 받침돌[方趺]의 길이가 6촌 3분이며 기둥을 받침돌 북쪽에 세우고 못을 받침돌 남쪽에 팠으며,
십자(十字)를 받침돌 북쪽에 긋고 추(錘)를 기둥 머리에 매달아 십자와 서로 맞서게 하여 수준(水準)이 없어도
자연히 평평하고 바르게 된다.
1백 각(刻)을 작은 바퀴에 그렸는데, 바퀴의 직경이 3촌 2분이며 자루가 있어 기둥에 비스듬히 걸치고, 바퀴
한 가운데에 구멍이 있다. 한 올의 가는 실을 꿰어 위로 기둥 끝에 매고 아래로 받침돌 남쪽에 매어서 실의 그림
자가 가는 데 따라 곧 시각을 알게 한다.
천평의 제도는 현주와 대략 같은데, 오직 못을 파는 것, 남북쪽에 기둥을 세우는 것, 받침돌 가운데 노끈을 꿰는
것, 기둥 머리가 들려서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다르다. 정남은 받침돌의 길이가 1척 2촌 5분이요, 양쪽 머리의
넓이가 4촌, 길이가 2촌, 허리의 넓이가 1촌, 길이가 8촌 5분이다.
가운데 둥근 못이 있고 직경이 2촌 6분인데, 도랑이 있어 양쪽 머리에 통하며 기둥 곁을 돈다.
북쪽 기둥의 길이가 1척 1촌이요, 남쪽 기둥의 길이가 5촌 9분이다. 북쪽 기둥이 1촌 1분이요, 아래 남쪽 기둥이
3촌 □분인데, 아래에 각각 굴대[軸]가 있어 사유(四游)의 고리(環)를 진정하며, 동ㆍ서로 돌아 운전하여 각(刻)
이 반 주천도(周天度)가 되면 도수는 4분이 된다.
북쪽 16도에서 1백 67도에 이르는 사이에 중간이 비어서 마치 쌍 고리 모양 같고 나머지는 온 고리가 된다.
안에 한 획을 중심에 새기고 밑에는 모난 구멍이 있어 가로로 곧은 칸막이를 설치하는데, 칸막이 가운데가 6촌
7분이다. 비워서 규형(窺衡)을 유지하며 저울대 위에 두 고리를 꿰어서 아래로 온 고리[全環]에 임하여 남쪽과
북쪽을 높고 낮게 하며 평평하게 지평(地坪)을 만들었는데, 고리가 남쪽 기둥 머리와 가지런하여 하지 때 해가
출입하는 시각에 맞춘다.
가로로 반 고리를 지평 아래 설치하고 안에는 1백 각(刻)을 나누어서 모난 구멍에 당하게 하며, 받침돌 북쪽에는
십자(十字)를 그리고 주춧돌 북쪽 굴대 끝에 달아 십자와 서로 맞먹게 하니, 역시 규형을 평평하게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매일 태양이 극도(極度) 분에서 떠날 때마다 해의 그림자를 정원(正圓)에 비쳐서 들게 하고,
곧 모난 구멍을 통하여 반 고리[半環]의 각을 굽어 보면 정남침(定南針)을 사용하지 않아도 남쪽을 정하여 시간
을 알 수 있다.
앙부(仰釜)는 《원사(元史)》에 실린 곽수경(郭守敬)의 법으로 동(銅)을 주조하여 그릇을 만든 것인데,
형상이 가마솥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혜정교(惠政橋) 가에 두고 하나는 종묘
남쪽 거리에 두었다. 보루각(報漏閣) : 경회루 남쪽에 있는데, 세종 16년(1434)에 창설하였다.
예전의 누기(漏器)가 정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쳐 만들어서 두었다.
김돈(金墩)의 기문과 김빈(金?)의 명문과 서문이 있으며, 김돈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의 명문과 서문이 있다.
간의대(簡儀臺) : 궁성 서북쪽 모퉁이에 있는데, 세종 16년에 창설하였다. 돌을 쌓아 대를 만들었는데, 높이가
31척, 길이 47척, 넓이 32척이며, 돌 난간으로 두르고 관천의기(觀天儀器)를 만들어 두었다.
○ 대간의와 소간의가 있다. 대간의(大簡儀)는 《원사(元史)》에 실린 곽수경의 법에 의하여 정방형의 받침을
남쪽에 설치하고 대 서쪽에는 구리 표본을 꽂으니, 높이가 8척의 문지방에 5배가 된다. 푸른 돌을 깎아 규(圭)
를 만들고 규의 앞면에는 장(丈)ㆍ척ㆍ촌ㆍ분을 새겼는데, 그림자 부호를 써서 정오의 그림자를 취하여 <음양>
두 기운이 가득 차고 줄어드는 것을 추측한다. 소간의(小簡儀)는 밑받침을 정밀한 동(銅)으로 만들고 도랑을
둘렀으며 자오선(子午線)을 표준으로 하여 지평(地平)을 정하고, 적도 주위에서 주천(周天) 3백 65도 4분도의
1을 나누며, 동ㆍ서로 운전하여 칠정(七政)과 중외 관직 8수(宿)를 측정한다.
도수는 1백 각(刻)을 나누는데 고리가 적도에 있으며, 고리 안에는 12시와 1백 각으로 나누어 그어서 해 그림자
를 알게 한다. 밤에 중성(中星)을 정함으로써 사유(四游)의 고리로 규형을 유지하면서 동ㆍ서로 운전하고 남북
으로 낮아졌다 높아졌다 하면서 관측하기를 기다린다.
여기서 기둥을 세워서 관통하되, 고리를 비스듬히 기대면 사유는 북극을 기준하고 적도는 천복(天腹)을 기준
하며 고리를 곧게 세우면 사유가 입운(立運)이 되고 백 각이 음위(陰緯)가 되는데, 대 위에 설치한다.
○ 김돈(金墩)의 기문과 정초(鄭招)의 소간의 명문(銘文) 및 서문이 있다.
동궁(東宮) : 일화문(日華門) 밖에 있다.
친잠단(親蠶壇) : 영종(英宗) 43년 왕비가 친히 누에를 쳐 채상례(採桑禮)를 행하였다.
○ 어필로 비를 세우고 각을 건립하였다.
창덕궁(昌德宮) : 응봉(鷹峯 매봉) 아래 있으며 북부 광화방(廣化坊)이다. 개국 초기에 지었다.
성종 6년(1475)에 서거정(徐居正)을 명하여 궁의 여러 문을 이름지었다.
선조 25년 왜란 때 불타고 광해군 기유년(1609)에 중건하였다.
○ 무릇 궐내의 연로(輦路) 수리와 청소및 궁성 안에 탈이 있는지 없는지를 각기 그 자내(字內)의 위장(衛將)과
부장(部將)이 순찰 검사하며, 병조의 입직 낭청(入直郞廳)은 중일(中日)마다 검사하여 신칙하고 수리 청소시키
는데, 창경궁과 경희궁 두 궁궐도 같다.
○ 만일 경희궁에 이어(移御)하는 때를 만나면, 창경궁과 함께 위장을 두어 수직을 맡게 한다.
인정전(仁政殿) : 궁중[大內] 서쪽에 있는데, 조정 하례를 받는 정전이다. 순조 4년(1804)에 화재로 타서 중건
하였다. 서영보(徐榮輔)가 현판 글씨를 썼다. 겹처마에 넓이가 5칸, 세로가 4칸이며, 앞 계단이 3층이고, 동족과
서쪽 뜰에는 문반과 무반의 품계석(品階石)을 벌여 세웠다.
남쪽을 인정문(仁政門)이라 하는데 이해룡(李海龍)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또 그 서남쪽을 진선문(進善門)이라
하는데 문 곁에 신문고(申聞鼓)를 달았다. 어구(御溝)가 한 곳 있는데, 다리를 금천교(錦川橋)라 한다.
동쪽을 숙장문(肅章門)이라 하는데 두 문은 모두 정난종(鄭蘭宗)이 현판을 썼다. 또 그 동쪽이 바로 건양문(建陽
門)이고, 또 그 동쪽이 동룡문(銅龍門)ㆍ선화문(宣化門)ㆍ숭지문(崇智門)인데, 한려(漢旅 중국인으로서 우리
나라에 와 사는 사람)가 입직(入直)한다. 영숙문(永肅門)의 처음 이름은 담연문(淡煙門)이었는데, 중종 무자년
(1528)에 정원에서 아뢰기를, "대내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다." 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국별장(局別將)이 입직한다. 전(殿) 뜰의 동편 문을 광범문(光範門)이라 하는데 승정원과 서로 통하며, 서편 문을
숭범문(崇範門)이라 하는데 내의원과 서로 통한다. 선정전(宣政殿) : 인정전 동쪽, 연영문(延英門) 안에 있는데,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푸른 기와로 덮었으며, 남쪽에 선정문(宣政門)이 있다.
대조전(大造殿) : 희정당(熙政堂) 북쪽에 있는데 곤전(坤殿)의 궁전이다. 들보[樑]와 기와 마루를 평평하게 덮었
다.
성종ㆍ인조ㆍ효종ㆍ효현왕후(孝顯王后)가 승하하였으며, 익종(翼宗)이 이 전에서 태어났다. 순조 33년(1833)에
불이 나 중건하였다. 구현전(求賢殿) : 바로 내전(內殿)이다.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승하한 곳이다.
경복전(景福殿) : 인정전 서쪽 태추문(泰秋門) 안에 있는데, 바로 만수전(萬壽殿)의 옛터요, 옛날 경복당(景福堂)
이다. 경종(景宗)이 일찍이 인원대비(仁元大妃)를 여기에 모시고 편액을 고쳐서 전으로 하였다.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이 전에서 승하하였으며, 효의대비(孝懿大妃)도 일찍이 오래 거처하였다.
만수전(萬壽殿) : 효종 6년(1655)에 흠경각(欽敬閣) 옛터에 짓고 자의대비(慈懿大妃)를 모셨으며,
또 춘휘전(春暉殿)을 지었는데 모두 금호문(金虎門)과 요금문(曜金門) 두 문 안에 있다. 숙종 13년(1687)에 화재
를 당한 뒤로 폐지되었다. 집상전(集祥殿) : 현종 8년(1667)에 만수전 동쪽에 지어서 <부모> 봉양하는 정성을 갖
추었다.
승휘전(承暉殿) : 숙종 24년(1698)에 화재를 입어 선왕조의 유물과 두 전하의 입고 쓰던 물건이 모두 불타버렸다.
선원전(璿源殿) : 인정전 서쪽에 있다. 숙종의 어용(御容) 2폭, 영종의 어용 4폭, 정종(正宗)의 어용 4폭, 순조의
어용 1폭, 익종의 어용 2폭, 헌종의 어용 1폭을 봉안하였다.
○ 초하루와 보름마다 <왕이> 친히 분향 전배(展拜)하며 탄신일(誕辰日)에는 다례(茶禮)를 지낸다.
○ 문 두 개가 있는데, 동쪽을 만안문(萬安門)이라 하고, 서쪽을 만녕문(萬寧門)이라고 한다.
○ 중관(中官)을 두어 수직한다. 희정당(熙政堂) : 협양문(協陽門) 안 선정전(宣政殿) 동쪽에 있는데, 여러 신하
들을 한가로이 접견하는 곳이다.
○ 순조 33년(1833)에 화재를 당하여 중건하였다. 보경당(寶慶堂) : 인정전 서쪽에 있는데, 후에 폐지되었다.
징광루(澄光樓) : 대조전 곁에 있었는데, 순조 33년(1833)에 불이 나 역대 왕의 복식과 기구가 모두 불타버렸다.
소덕당(昭德堂) :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승하한 곳이다. 제정각(齊政閣) : 희정전 남쪽에 있다.
○ 숙종 13년(1687)에 지었다.
○ 통제문(通濟門) 안에 풍기죽(風旗竹)을 세웠다.
경봉각(敬奉閣) : 황단사유(皇壇四?)의 바깥쪽에 있는데, 계단에서 국조 이래로 반포하는 조칙(詔勅)을 받들었다.
전에는 창경궁 동룡문(銅龍門) 안에 있었는데, 영종 경인년(1770)에 짓고 어필 현판을 달았다. 정종 23년(1799)
에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 광연루(廣延樓) : 태종 8년(1408)에 태조가 누 아래 별전(別殿)에서 승하하였다.
영모전(永慕殿) : 경복전 서쪽에 있다. 인원왕후(仁元王后)가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장춘헌(長春軒) : □□□에 있다. 단의왕후(端懿王后)가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관리각(觀理閣) : 융경헌(隆慶軒)
서남에 있다.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양심각(養心閣) : 희정당(熙政堂) 동북쪽에 있으니, 곧 제전(齊殿)이다. 현종이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의두각(倚斗閣) : 영화당(暎和堂) 북쪽에 있다. 순조 □□년 익종(翼宗)이 세자궁[春邸]에 있을 때에 지은 "매양
북두성을 의지하여 서울[京華]을 바란다."는 뜻을 딴 것이다.
향실(香室) : 인정전 서쪽에 있는데, 제향(祭享)과 축문(祝文)을 쓰고 향을 봉(封)하는 등의 일을 한다.
○ 충의위(忠義衛)와 향관(香官)과 교서관(校書館) 참외(參外)가 날을 바꾸어 가며 직숙(直宿)한다.
비궁당(匪躬堂) : 곧 빈청(賓廳)으로 연영문(延英門) 밖에 있는데, 공경(公卿)들이 모여서 조정 일을 의논하는
곳이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이 있다. 대청(臺廳) : 승정원 동쪽에 있는데,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신(臺臣)들이
논계(論啓)할 일이 있을 때에 와서 거처하는 곳이다.
정청(政廳) : 연영문 곁에 있는데, 곧 동전(東銓 이조)의 정사를 여는 곳이다.
○ 빈청 곁에 우물이 있는데, 서전(西銓 병조) 정청이 예전에는 우물 서쪽에 있었으나 후에 헐려, 서전에서 정사
를 열 때마다 반드시 빈청의 서헌(西軒)을 빌려 행한다.
규장각(奎章閣) : 금원(禁苑) 북쪽에 있다.
○ 숙종 20년(1694)에 종부시(宗簿寺) <구내>에 세우고 어필 현판을 달았는데, 정종 초기에 비로소 대궐 안으로
옮겨 지었다.
○ 팔경(八景)이 있는데,
봉모 운한(奉謨雲漢)ㆍ서향 하월(書香荷月)ㆍ규장 시사(奎章試士)ㆍ불운 관덕(拂雲觀德)ㆍ개유 매설(皆有梅雪)ㆍ
농훈 풍국(弄薰楓菊)ㆍ희우 소광(喜雨韶光)ㆍ관풍 추사(觀?秋事)이다. 각지(閣志)가 있다.
주합루(宙合樓) : 곧 규장각의 정실(正室)로 정종이 어필로 현판을 써서 달았다. 위는 다락이요,
아래는 툇마루인데, 정종의 어진(御眞)ㆍ어제(御製)ㆍ어필(御筆)ㆍ보책(寶冊)ㆍ인장(印章)을 봉안하였다.
서향각(書香閣) : 주합루 서쪽에 있는데, 조윤형(曺允亨)이 현판을 썼다. 어진 및 어제ㆍ어필을 옮겨다 볕을 쪼이
는 곳으로서, 이안각(移安閣)이라고도 한다. 또 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으며, 해마다 사계절 첫 번째 달 보름에
규장각 신하들이 계품(啓稟)하여 전봉 포쇄(展奉曝灑)를 행한 후에 봉모당(奉謨堂)을 봉심(奉審)한다.
○ 각의 남쪽 누대는 향명루(嚮明樓)라 현판을 달았는데, 강세황(姜世晃)이 편액을 썼다.
봉모당(奉謨堂) : 주합루 서남쪽에 있으니, 곧 예전 열무정(閱武亭)이다. 옛 제도 그대로 고치지 않고 열성조의
어제ㆍ어필ㆍ어화(御?)ㆍ고명(顧命)ㆍ유고(遺誥)ㆍ밀교(密敎) 및 선보(璿譜)ㆍ세보(世譜)ㆍ보록(寶錄)ㆍ장지
(狀誌)ㆍ인보(印譜)를 봉안하였다. 운한문(雲漢門)이 있다. 열고관(閱古觀) : 주합루 남쪽에 있다. 상하 2층으로
되었으며, 또 북쪽으로 꺾어지면 개유와(皆有窩)가 되고, 또 서북쪽은 서고(西庫)이다.
○ 열고관ㆍ개유와에는 모두 중국본 도서를 보관하였는데, 정종조 정유년(1777)에 도서집성(圖書集成) 5천 권
등 무릇 32전(典)을 사 와서 이곳 개유와에 간직하였으며, 우리나라 본 도서는 서고에 간직하였다.
희우정(喜雨亭) : 주합루 서북쪽에 있다. 현종 16년 여름에 오래도록 가무니 대신을 보내어 비를 빌었는데,
이날 비가 오니 왕이 매우 기뻐하여 드디어 금원(禁苑) 안에 있는 취향전(醉香亭)을 이름을 고쳐 희우(喜雨)라
하고, 친히 명문(銘文)을 지어 <그 뜻을> 기록하였다.
○ 천석정(千石亭)이 그 동쪽에 있으며, 작은 누각이 있는데 제월광풍루(霽月光風樓)라고 현판을 걸었다.
부용정(芙蓉亭) : 주합루 남쪽 못가에 있으며, 못 가운데는 채색 배에 비단 돛이 있는데, 정종조 때 꽃을 감상하
고 고기를 낚던 곳이다.
불운정(拂雲亭) : 정종 원년(1776)에 지었는데, 주합루 동북쪽 작은 언덕에 있다.
대나무로 지었으며, 활 쏘던[觀德] 곳이다. 이에 앞서 현판이 아직 없어 출입하는 자가 어리둥절하였는데, 성종
이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에게 명하여 이름을 지어 달게 하였다. 궁 밖의 동쪽 담 문을 선인문(宣仁門)이라 하고,
가운데 동쪽 담 문을 경양문(景陽門), 새 대문을 장춘문(長春門), 가운데 대문을 선명문(宣明門), 남쪽 협문(夾門)
을 춘흥문(春興門), 안의 동쪽 담장 문을 건양문(建陽門), 동북쪽 담장 문을 기화문(綺華門), 광연정(廣延亭) 서쪽
고개 문을 평창문(平昌門), 남쪽 행랑 문을 영화문(永和門), 북쪽 행랑 문을 영평문(永平門), 내사복(內司僕) 남쪽
문을 운금문(雲錦門), 외동산(外東山) 문을 연양문(延陽門), 왼쪽 협문을 광범문(光範門), 오른쪽 협문을 숭범문
(崇範門), 남쪽 담장 문을 단봉문(丹鳳門), 안의 서쪽 담장 문을 의추문(宜秋門), 왼쪽 궁 문[門]을 숙장문(肅章門),
겸사복청(兼司僕廳)의 새 대문을 영복문(迎福門), 내사옹(內司甕)의 위쪽 동문을 소춘문(小春門), 북문을
소동문(小東門), 중궁 차비문(中宮差備門)을 연도문(延禱門), 승정원 남문을 연영문(延英門), 서쪽 행랑 문을
금호문(金虎門), 밖의 서쪽 담장 문을 진금문(鎭金門), 서쪽 담장 문을 요금문(曜金門), 후원의 북쪽 담장 문을
공신문(拱辰門), 새로 난 북쪽 담장 문을 창합문(?闔門), 동쪽 담장 문을 청양문(靑陽門), 밖의 북쪽 담장 문을
광지문(廣智門)이라 하였다. 창경궁(昌慶宮) : 창덕궁 동쪽에 있으며, 예전 수강궁(壽康宮) 터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貞熹王后)ㆍ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ㆍ안순왕후(安順王后) 세 궁(宮)을 위하여 지었
다. 선조 25년(1592) 왜란 때 불타 광해군 8년(1616)에 중건하였다.
명정전(明政殿) : 성종이 매양 정월ㆍ동지 때가 되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세 궁에 하례드리고, 이 전에 나와서
조회를 받았다. 넓이가 5칸, 세로가 4칸이며, 동향이다. 동쪽을 명정문(明政門)이라 하며,
문 밖의 어구(御溝 다리)를 옥천교(玉川橋)라 한다. 전 뜰의 남쪽 문을 광정(光政)이라 편액하고 북쪽 문을 원범
(元範)이라 편액하였다. 문정전(文政殿) : 명정전 남쪽에 있으며, 숭화문(崇化門)을 □□라 한다.
인양전(仁陽殿) : 명정전 서쪽에 있다. 경춘전(景春殿) : 수강전(壽康殿) 북쪽, 환경전(歡慶殿) 서쪽에 있다.
소혜왕후(昭惠王后)ㆍ인현왕후(仁顯王后)가 승하하였으며, 혜빈(惠嬪)이 이 전에서 승하하셨다.
정종ㆍ헌종의 태어난 곳인데, 어필로 탄생전(誕生殿)이란 현판을 써서 달았다. 동쪽 벽에는 장헌세자(莊獻世子)
가 그린 묵룡도(墨龍圖)가 있는데, 정조가 기문을 지었다.
○ 서쪽에 가효당(嘉孝堂)이 있고, 남쪽에 희강당(喜康堂)이 있다. 통명전(通明殿) : 경춘전 북쪽에 있는데,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푸른 기와를 이었는데, 정종조에 불탔다. 고려 때 세운 것이다.
환경전(歡慶殿) : 경춘전 동쪽에 있는데, 중종이 승하하였다. 순조 30년에 불타 중건하였다.
수령전(壽寧殿) : 인양전(仁陽殿) 북쪽에 있다. 자경전(慈慶殿) : 명정전 북쪽에 있는데,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승하하였다. 정종이 자전(慈殿)을 이 전에 모셨다. 통화전(通和殿) : 요화당(瑤華堂) 동남에 있다.
양화당(養和堂) : 환경전 북쪽에 있다. 여휘당(麗暉堂) : 통명전 서쪽에 있는데,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승하하였
다.
숭문당(崇文堂) : 명정전 서쪽에 있다. 함인정(涵仁亭) : 명정전 서북쪽 빈양문(賓陽門) 안에 있다.
환취정(環翠亭) : 통명전 북쪽에 있는데, 경종이 승하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의 기문이 있다.
영춘헌(迎春軒) : 집복헌(集福軒) 동쪽에 있는데, 정종이 자궁(慈宮)을 모시던 곳이다. 정종이 <여기서> 승하하
였다.
공묵각(恭?閣) : 환경전 남쪽에 있다. 동궁(東宮) : 건양문(建陽門) 밖에 있는데, 예전 구현전(求賢殿)의 광연정
(廣延亭) 터이며, 앞에 연못이 있다.
성종 22년(1491)에 짓고 춘궁(春宮)이라 고쳐 불렀다. 동남쪽에 동룡문(銅龍門)이 있다.
중희당(重熙堂) : 동궁(東宮)의 서연(書筵)이며, 신료(臣僚)들을 불러서 보는 곳이다. 헌종이 여기서 승하하였다.
곁에 소주합루(小宙合樓)가 있는데, 정종조 때 팔분(八分)으로 정구팔황 호월일가(庭衢八荒胡越一家) 여덟 자를
써서 당의 문 위에 걸었다. 남문을 중화문(重華門)이라 하며, 또 그 남쪽을 이극문(貳極門)이라 하는데 곧 동궁의
정문이다.
성정각(誠正閣) : 중희당 오른쪽에 있는데, 여러 신하들을 한가로이 만나보는 곳이다.
숙종의 어필 현판이 있다. 정종 5년(1781)에 조윤형(曺允亨)을 명하여 경계 십잠도(儆戒十箴圖)를 그려서 걸었다.
수강재(壽康齋) : 중희당 동쪽에 있다. 시민당(時敏堂) : 수강재(壽康齋) 동쪽에 있는데, 동궁의 외당(外堂)이다.
청정(聽政)과 조참(朝?) 등의 일을 이곳에서 행한다.
건극당(建極堂) : 신독재(愼獨齋) 북쪽에 있다. 의춘헌(宜春軒) : 바로 건극당 동쪽 방이다.
○ 효순왕후(孝純王后)가 여기서 승하하였다. 저승전(儲承殿) : 건양문(建陽門) 밖에 있다.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승하하였다.
취선당(就善堂) : 저승전 서쪽에 있는데, 경종이 태어났다.
진수당(進修堂) : 시민당 북쪽에 있는데, 진종(眞宗)이 승하하였다.
집복헌(集福軒) : 영춘헌 서쪽에 있으며, 장헌세자(莊獻世子)와 순조가 태어났다.
양심각(養心閣) : □□□□□에 있는데,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승하하였다.
보루각(報漏閣) : 동룡문 옆, 시강원 동쪽에 있다. 광해군 갑인년(1614)에 지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일영대(日影臺)가 있다.
○ 대궐 안에는 전루소(傳漏所)가 모두 12곳이니, 동룡문ㆍ동수구(東水口)ㆍ어정(御井)ㆍ경화문(景化門)ㆍ
광정문(光政門)ㆍ진선문ㆍ마군영(馬軍營)ㆍ돈화문ㆍ경추문(景秋門)ㆍ북수각(北水閣)ㆍ영숙문(永肅門)이다.
대궐 밖에는 6곳이니, 소(所)마다 군사 2 명이 있다.
사정(射亭) : 내사복시에 있다. 효종조에 세웠는데, 바로 옛날 철장 목마(鐵杖木馬)의 뜻이다.
후에 정자가 폐지되었는데 영종 18년(1742)에 고쳐 지었다. 춘당대(春塘臺) : 바로 궁궐 안 후원(後苑)인데,
선비를 시험보이고 무사(武士)를 사열하는 곳이다.
성종조에 파가 창경궁 후원에서 났는데, 한 줄기에 9개의 가지가 자라니 당시에 서총(瑞?)이라고 하였다. 그 후
연산군 을축년(1505)에 이곳에 대를 짓고 서총대(瑞?臺)라 이름하여 방탕하게 놀이하는 장소로 삼았다.
대를 쌓을 때에 하삼도(下三道)의 군민(軍民)을 징발하여 고역(雇役)시키며 포목을 많이 받아들이니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여 옷 속의 솜을 뜯어서 다시 포목을 짜기에 이르렀는데, 그 색깔이 연기에 그을린 듯 검고 치수
가 짧았다. 이 때문에 지금도 거친 면포 옷을 서총대포(瑞?臺布)라 한다.
○ 성종이 하루는 춘당대에 나가서 집춘문(集春門)으로 성균관 유생(儒生)들을 불러 경서를 강(講)받고 과거
급제를 주었는데, 지금도 미담(美談)으로 여긴다.
○ 선조 5년(1572)에 선비를 춘당대에서 시험보고 다음날 방방(放榜)하니, 선비를 춘당대에서 시험보이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 임금이 거둥할 때마다 배설방(排設房)에서 큰 베 장막을 펼쳐 차일(遮日)을 영화당(暎花堂) 처마 앞 동쪽에
치는데, 큰 대나무 가지로 기둥을 삼아서 대(臺) 곁에 열 길이나 되게 세우니, 높은 나무들이 모두 그 아래로 들
어간다. 또 당(堂) 섬돌에 잇따라 붉은 널마루[朱板軒], 곧 보계판(步階板)을 설치하고 용수석(龍鬚席)으로 덮
으니, 그 위에 수삼백 명이 앉을 만하며 마루 밑으로는 사람이 서서 다닐 만한데, 9층 나무 층계를 만들어서 밖
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못이 있는데, <가물 때> 못가에 도마뱀과 동자(童子)를 만들어서 비를 11차례나 빌되,
무신 종 2품관이 제관이 되며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며 시장을 옮겼다.
도마뱀을 사용하는 일은 지금은 폐지되었다.
12차의 오방 토룡제(五方土龍祭)에는, 당하(堂下) 3품관이 제관이 된다.
어수당(魚水堂) : 불로문(不老門) 안에 있는데, 돌을 깎아 문을 만들었다. 효종조에 창건하였다.
영화당(暎花堂) : 춘당대 위쪽에 있는데, 앞에 연못이 있다. 당 뒤에도 못이 있는데, 바로 주합루(宙合樓) 앞 못
이다. ○ 무릇 과거를 설행하여 선비를 시험할 때에 임금이 여기에 나온다.
진장각(珍藏閣) : 어수당 후록(後麓) 아래에 있는데, 천한각명(天翰閣銘)이 있다.
곧 숙종 갑술년(1694)에 규장각을 종부시(宗簿寺) 경내에 짓고서 세운 것이다.
연경당(演慶堂) : 어수당 서북쪽에 있다. 순조 27년(1827) 익종(翼宗)이 동궁에 있을 때에 진장각 옛터에 창건
하였는데, 그때 대조(大朝 순조를 말함)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경사스런 예(禮)를 만났고 마침 연경당을
낙성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석거각(石渠閣) : □□□에 있는데, 석거문(石渠門)이 있다.
관풍각(觀?閣) : 춘당대 남쪽에 있다. 앞에 논이 있어 임금이 친히 나와서 농사짓는 것을 구경하고 매해 농사지
은 것을 수확하면 근신(近臣)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춘당도(春塘稻)라고 한다.
관덕정(觀德亭) : 춘당대 동북쪽에 있으며, 곧 사정(射亭)이다.
단풍정(丹楓亭) : 춘당대 곁에 있는데, 단풍나무를 많이 심어서 가을이 되면 난만하게 붉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
요, 정자는 없다.
장원봉(狀元峯) : 곧 춘당대 맞은편 언덕이다. 과거 볼 때에 지방에서 뽑혀온 선비[擧人]들이 여기에 모여 앉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성종이 정희(貞熹)ㆍ인수(仁粹)ㆍ안순(安順)의 세 대비를 위하여 창덕궁 동쪽 수강
궁(壽康宮) 터에 창경궁을 짓고, 15년 갑진(1484)에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을 명하여 전각 이름을 지었는데,
전을 명정ㆍ문정ㆍ수령ㆍ환경ㆍ경춘ㆍ인양ㆍ통명, 당을 양화ㆍ여휘, 각을 사성(思誠), 정자를 환취(環翠)라
하였다.
경희궁(慶熙宮) : 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는데, 곧 원종의 옛 저택이다. 광해군 병진년(1616)에 지었다.
처음 이름은 경덕(慶德)인데, 영종 36년(1760)에 장릉(章陵)의 시호(諡號)와 음이 같아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숭정전(崇政殿) : 대내(大內) 서쪽에 있는데,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이다. 넓이 5칸, 세로 4칸이고 남향이다.
남쪽을 숭정문(崇政門), 동쪽을 여춘문(麗春門), 서쪽을 의추문(宜秋門), 북쪽을 자정문(資政門)이라 한다.
숭정문의 남동쪽을 건명문(建明門)이라 하는데, 신문고(申聞鼓)를 그 곁에 달았다.
자정전(資政殿) : 숭정전 북서쪽에 있는데, 우문각(右文閣)이 있다. 북문을 명덕(明德), 동문을 함화(咸和),
서문을 숙성(肅成)이라 하며, 관덕대(觀德臺)가 있다.
융복전(隆福殿) : 흥정당(興政堂) 북쪽에 있는데, 대내의 정침(正寢)이다.
○ 숙종이 여기서 승하하였다. 회상전(會祥殿) : 흥정당 동쪽에 있으며, 시어내전(時御內殿)이다.
인헌왕후(仁獻王后)ㆍ인선왕후(仁宣王后)ㆍ인경왕후(仁敬王后)와 순조가 승하하였다.
집상전(集祥殿) : 궁지(宮志)에는 이 전의 이름이 없으니, 이름을 고친 것인지 알 수 없다. 현종 정미년(1667)에
지어서 인선대비의 시어소(時御所)를 삼았으며, 자의대비(慈懿大妃)는 그때 만수전(萬壽殿) 동쪽에 거처하였으
니, 한(漢) 나라의 장락궁(長樂宮)과 장신궁(長信宮) 두 궁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장락전(長樂殿) : 융복전 동쪽에 있는데 좌ㆍ우에 용비루(龍飛樓)와 봉상루(鳳翔樓) 두 누가 있다.
광명전(光明殿) : 내전에서 하례 잔치를 받는 곳이다.
태령전(泰寧殿) : 자정전 서쪽에 있다. 원래 당(堂)으로 불렀는데, 영종 21년에 어용(御容) 2폭을 봉안하고,
지금 이름을 명하고 전으로 승격하였다. 전 뒤에는 바위와 샘물의 승경(勝景)이 있다. 5개의 문이 있는데,
동쪽을 집화문(集和門)이라 하고, 또 그 동쪽을 건경문(建慶門), 남쪽을 태령문(泰寧門), 서쪽을 제광문(霽光門),
북쪽을 현무문(顯武門)이라 한다.
어조당(魚藻堂) : 선의왕후(宣懿王后)가 여기서 승하하였다.
흥정당(興政堂) : 광달문(廣達門) 안, 회상전 남쪽에 있는데, 신료들을 불러서 만나는 곳이다.
동쪽에 석음각(惜陰閣)ㆍ존현각(尊賢閣)의 두 각이 있고, 각 위에는 주합루(宙合樓)ㆍ관문루(觀文樓) 두 누가
있다. 곁에는 동이루(東二樓)ㆍ홍월루(虹月樓)가 있으며, 또 그 곁에는 정이당(貞?堂)이 있고,
서쪽에는 정시각(正始閣)이 있으며, 북쪽에는 사현각(思賢閣)이 있다.
집경당(集慶堂) : 흥정당 서쪽에 있는데, 처음 이름은 예연당(蘂淵堂)이다. 숙종 25년(1699)에 세자의 천연두가
나았으므로 명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영종이 여기서 승하하였다.
위선당(爲善堂) : 영선문(寧善門) 안 태령전(泰寧殿) 서쪽에 있는데, 온천 세 곳과 영렬정(靈冽井)이 있다.
집희당(緝熙堂) : 장락전 동쪽에 있는데, 남쪽에 중서헌(重書軒)이 있고 동쪽에 경선당(慶善堂)이 있다.
융무당(隆武堂) : 회상전 동쪽에 있으니 곧 내원(內苑)의 별당인데, 관사대(觀射臺)가 있다.
북쪽에 봉황정(鳳凰亭)이 있고, 정자 아래에 소성(小星)ㆍ계성(啓星)ㆍ상란(祥鸞)ㆍ어관(魚貫)ㆍ계명(鷄鳴)ㆍ
자란(紫蘭)ㆍ봉생(鳳笙)ㆍ이지(?祉)ㆍ복유(福綏)ㆍ첨선(添線) 등의 정자가 있다.
덕유당(德游堂) : 회상전 서쪽에 있다. 서쪽에는 사물헌(四勿軒)이 있고, 북쪽에 서암(瑞巖)이 있다.
경현당(景賢堂) : 경현문 안에 있는데, 동궁에서 예를 받던 정당(正堂)이다. 네 문이 있는데,
동쪽을 협화문(協和門)이라고 하고, 또 그 동쪽을 만상문(萬祥門)이라 하며,
서쪽을 청화문(淸華門)ㆍ통현문(通賢門)이라 하고, 남쪽을 숭현문(崇賢門)이라 하며,
북쪽을 숭덕문(崇德門)이라 하고, 또 그 서북쪽을 일중문(日中門)이라 한다.
양덕당(養德堂) : 경현당 북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동쪽에 함춘헌(含春軒)이 있고,
서쪽에 안희각(安喜閣)이 있으며, 또 그 동쪽은 영선창(永善廠), 또 그 서쪽은 지효각(至孝閣),
또 그 서쪽은 청한정(淸閒亭)이라 한다.
규정각(揆政閣) : 흥정당 동쪽에 있다. 영종 8년(1732)에 짓고 혼천의(渾天儀)를 설치하였으며,
또 서화문(西華門) 안에는 돌을 벌여놓고 풍기죽(風旗竹)을 세웠다.
○ 어제(御製) 기문이 있다. 경봉각(敬奉閣) : 영조 46년(1770)에 지었다. 어필로 현판을 써 달았으며,
국조(國朝) 이래로 반포한 조칙(詔勅)을 간직하였다.
규장각(奎掌閣) : 금상문(金商門) 안에 있다. 취규루(聚奎樓)가 있으니 곧 서적을 간직한 곳이다. 곁에 연려실
(燃藜室)이 있는데 검서관(檢書官)의 직소(直所)이다.
빈청(賓廳) : 건명문(建明門) 안에 있다.
대청(臺廳) : 건명문 안에 있다.
정청(政廳) : □□에 있다. 서암(瑞巖) : 덕유당(德游堂) 북쪽에 있다.
옛날에는 왕암(王巖)이라 칭하였기 때문에 광해군이 이곳에 궁궐을 지었는데, 인조가 반정(反正)하자 인목대비
(仁穆大妃)를 받들어 이 대궐에 들어가 계시게 하니, 왕암의 칭호가 증험되었다. 숙종이 친히 서암(瑞巖)의 두
큰 글자를 써서 새겼으며, 채제공(蔡濟恭)의 송(頌)이 있다.
계마수조(繫馬樹棗) : 두 그루가 있으니, 하나는 흥정당(興政堂) 서쪽 통양문(通陽門) 안에 있고, 하나는 흥정당
동쪽 흥태문(興泰門) 안에 있다.
○ 원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손수 한 그루의 대추나무를 심고 아침 저녁으로 사랑하여 구경하며 때로는 말
을 매고 이름하기를 계마수(繫馬樹)라 하였다. 그 후에 나무가 문득 말라 죽어 몇 해가 되었는지 모르는데,
현종 신축년(1661)에 나무가 다시 거듭 피어나더니 이해에 숙종이 태어났다. 경종 신축년(1721)에 또 다시 거듭
피어났는데 영묘(英廟)가 세자가 되었으며, 정종 임인년(1782)에 또 다시 거듭 피어나더니 문효세자(文孝世子)
가 여기서 탄생하였으니, 이상한 일이다.
정종 어제 경희궁지(正宗御製慶熙宮志)에 이르기를, "대내의 정침(正寢)은 융복전(隆福殿)이요,
융복전 서쪽에 회상전(會祥殿)이 있는데 시어(時御)의 내전이다. 동쪽을 회장각(會藏閣)이라 하고,
서쪽을 무일각(無逸閣)이라 하니 모두 별실이다.
아래 지당(池塘)이 있는데 못 이름을 벽파담(碧波潭)이라 하며, 못 가에 한 칸의 대 정자[竹亭]가 있다.
또 그 서쪽을 집경당(集慶堂)이라 하니 곧 인원성후(仁元聖后)가 천연두를 앓을 때 계시던 곳이며, 성상께서
병술년(1766)부터 한가로이 거처하셨다. 모두 5칸이니 동쪽은 금명(金明)이라 하고, 서쪽은 연경(延慶)이라
하며, 또 그 서쪽은 청상(淸商)이라 하고, 남쪽은 일영(日永), 북쪽은 개경(開慶)이라 한다.
융복전 동쪽에 장락전(長樂殿)이 있으니 대비를 모시던 곳이다. 두 누대가 있는데, 왼쪽은 용비(龍飛)라 하며,
아래에 경의헌(敬儀軒)이 있고, 오른쪽은 봉상(鳳翔)이라 하며, 아래에 백상헌(百祥軒)이 있다.
북쪽에 자리잡은 당(堂)을 어조당(魚藻堂)이라 하며, 앞에 큰 못이 있으니 별당이다.
또 광명전이 있으니 내전에서 하례를 받던 곳이며, 서북쪽의 당을 상휘당(祥暉堂)이라 하는데 협실은 잔치하는
곳이다.
서쪽의 두 정자는 영취당(映翠堂)ㆍ춘화당(春和堂)이라 하는데 꽃 구경하는 정자이며, 영취정의 승경(勝景)은
기문에 자세히 있다.
융무당은 내원(內苑)의 별실인데 회상전 동쪽에 있으며, 그 남쪽의 대를 관사대(觀射臺)라 하고, 그 북쪽의 정자
를 봉황정(鳳凰亭)이라 하는데, 모두 활쏘기를 익히고 무예를 연습하는 곳이다.
덕유당(德游堂)도 궁내의 별실인데 회상전 서쪽에 있다. 그 서쪽에 난간이 있으니 사물헌(四勿軒)이라 하며,
그 북쪽에 작은 바위가 있으니 바로 이른바 서암이라는 것이다. 또 12당이 있으니, 대내 북쪽에 있는 것이 소성ㆍ
계성ㆍ상란ㆍ어관ㆍ계명ㆍ자란ㆍ봉생ㆍ순지(順祉)ㆍ복유ㆍ첨선인데 모두 봉황정(鳳凰亭) 아래,
광명전 서쪽에 늘어서 있다.
위선당(爲善堂)은 태령전(泰寧殿) 서쪽에 있는데 온천 세 곳이 있으며, 우물은 영렬(靈冽)이라 한다.
집희당은 장락전 동쪽에 있는데, 바로 성상의 춘저(春邸) 때의 내당(內堂)으로, 후에도 그대로 사용하였다.
남쪽이 중서헌(重西軒)으로 동궁이 궁의 관원들을 접견하던 작은 방이며,
동쪽이 경선당(慶善堂)인데 역시 별실이다.
양덕당(養德堂)은 경현당(景賢堂) 북쪽에 있으니, 곧 영휘전이 불타기 전 동궁의 내실인데 지금은 페지되었다.
그 동쪽을 함춘헌이라 하고, 서쪽을 안희각(安喜閣)이라 하며, 또 그 동쪽을 영선전, 또 그 서북쪽을 지효각,
또 그 서쪽을 청한정(淸閑亭)이라 하는데, 무릇 이곳은 모두 임금이 휴식하는 전각[燕朝之殿宇]이다.
대내의 정전을 숭정전(崇政殿)이라 하니 곧 조회와 하례를 받는 곳이며, 대내 서쪽에 있다. 네 문이 있으니,
동쪽을 여춘문(麗春門), 서쪽을 의추문(宜秋門), 남쪽을 숭정문(崇政門), 북쪽을 자정문(資政門)이라 하는데,
자정문 안에 전(殿)이 있으니 곧 숭정전의 후전(後殿)이며, 역시 이름은 자정전이라 한다.
그리고 우문각이라 하는 것은 협실(夾室)이다. 전의 북문을 명덕문(明德門), 동쪽 문을 성화문(成和門),
서쪽 문을 숙성문(肅成門)이라 하는데, 문 서쪽에 대가 있으니 관덕대(觀德臺)라 한다.
태령전은 자정전 서쪽에 있는데 당저(當? 현재의 임금)의 어진을 봉안하는 곳이며, 전 뒤에는 바위와 샘물의
승경(勝景)이 있다. 다섯 문이 있는데, 동쪽을 집화문(集和門)이라 하고, 또 그 동쪽을 건경문, 남쪽을 태영문,
서쪽을 제광문, 북쪽을 현무문이라 한다.
흥정당(興政堂)은 신료들을 접견하고 강연(講筵)을 여는 곳인데, 회상전 남쪽에 있다.
동쪽을 석음각(惜陰閣)이라 하고, 또 그 동쪽을 존현각(尊賢閣)이라 하는데,
역대 왕이 동위(銅? 세자로 있을 때)에 있을 때 강독(講讀)하는 각이며, 후에 폐지되었다. 금상 경진년(1760)에
<이 궁으로> 이어하시고 명하여 이 각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각 위에 누가 있으니 주합루(宙合樓)ㆍ관문루(觀文樓)라 하며, 곁에 두 집이 있으니 동이루(東二樓)ㆍ홍월루
(虹月樓)라 한다.
또 그 곁에 당(堂)이 있으니 정이당(貞?堂)이라 하는데 예전 이름은 석음당(惜陰堂)이며, 이곳은 모두 내가 장서
(藏書)한 곳이다. 서쪽은 정시각(正始閣)이라 하는데 내시들의 사후(伺候)하는 곳이요, 북쪽을 사현각(思賢閣)
이라 하는데 신료들을 접견하는 거실이다. 경현당은 동궁이 예를 받는 정당인데 양덕당 남쪽에 있다.
문이 네 개가 있는데 동쪽은 협화문이라 하고, 또 그 동쪽은 만상문이라 하며, 서쪽은 청화문ㆍ통현문이라 하고,
남쪽은 숭현, 북쪽은 숭덕이라 하며, 또 그 서북쪽은 일중문이라 한다. 동쪽에 있는 각은 문헌각(文獻閣)이라 하
는데 장서하는 곳이다.
무릇 이것은 모두 조정을 다스리는 전우(殿宇)이다. 각의 정문은 모두 다섯 개가 있는데, 동쪽을 홍화문이라 하
는데 어가가 출입하는 정문이요, 문의 왼쪽이 흥원문(興元門)이고, 오른쪽이 개양문(開陽門)이며, 서쪽을 숭의
라 하고, 북쪽을 무덕이라 한다. 승정원은 숭정문 남쪽에 있고, 홍문관은 금상문(金商門)의 서남쪽에 있으며,
예문관은 숭정전의 서쪽에 있고, 시강원ㆍ익위사는 모두 숭현문의 남쪽, 승정원의 동쪽에 있다.
그밖에 여러 관청의 건물은 모두 원지(原志)에 있으므로 다시 자세히 적지 않는다. 궁궐은 광해군 때에 세워졌
는데, 인조 반정 후에 무릇 광해군 때의 모든 궁궐과 누대를 모두 파하였지만, 이 궁궐만은 원묘(元廟)의 잠저이
므로 파하지 않았다.
궁중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으니 계마(繫馬)라 하는데, 하나는 흥정당 서쪽의 통양문(通陽門) 안에 있고,
하나는 흥정당 동쪽의 흥태문(興泰門) 안에 있는데 모두 고적(古蹟)이다.
대개 궁궐이란 인군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 우러러 보고 신민들이 둘러싸 향하는 것인 만
큼,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이고,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붙이는 것이요,
그 거처를 사치하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개국 초기에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
으로 경복궁을 짓고 또 창덕궁을 지어서 이로써 때로 이어(移御)하는 데에 대비하였다. 성종조에 와서 또 창경궁
을 짓고 세 분 대비를 모셨으니 사실 한량 없는 효심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경복궁이 비록 불탔으나 세 궁이 있으니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는 만큼, 어찌 건축하겠는가.
내가 경희궁의 전각에 현판이 참고할 문헌이 없고 연조에 깊이 감추어 두면 궁내의 사신(史臣)이라도 그 순위의
차례를 자세히 알지 못하게 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지(志)를 지어서 상고할 바가 있게 하는 것이다.
덕수궁(德壽宮) : 정종 2년(1400)에 태상왕(太上王)을 봉하여 높이고 궁의 칭호를 세웠다.
인수궁(仁壽宮) :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 거처하던 곳이다.
계운궁(啓運宮) : 인조 원년(1623)에 인헌왕후를 봉하여 높여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으로 하고 궁의 칭호를
세웠다.
혜경궁(惠慶宮) : 정종 원년(1776)에 혜빈(惠嬪) 홍씨를 위하여 궁의 칭호를 세웠다.
인덕궁(仁德宮) : 정종(定宗)이 선위(禪位)한 후에 거처하던 곳이다. 혹은 개국 초의 이궁(離宮)이었다고도
하는데, 소재가 자세하지 않다. 정종과 정안왕후(定安王后)가 여기서 승하하였다.
신궁(新宮) : 서부 천달방(泉達坊)에 있다. ○ 태종이 승하한 곳이다.
수강궁(壽康宮) : 창경궁의 별전이다. 단종 을해년(1455)에 손위(遜位)한 곳이며, 원경왕후(元敬王后)와 세조가
여기서 승하하였다.
자수궁(慈壽宮) : 성종 8년(1477)에 폐비(廢妃) 윤씨를 빈(嬪)으로 강봉(降封)하여 이 궁에 따로 거처하게 하였다.
○ 연산군 때에 회록각(會祿閣)을 만들고 흥청(興淸 기생의 한 명칭)으로서 일찍이 임금의 사랑을 받았던 자들이
거처하였다.
정청궁(貞淸宮) : 중종 원년(1506)에 연산군이 왕비 신씨(愼氏)를 강봉한 후에 이 궁에 나와 거처하게 하였다.
별궁(別宮) : 곧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인데,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여기서 즉위하였다.
별궁 : 곧 세조의 잠저(潛邸)이다.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여기서 승하하였다.
○ 이상의 두 궁은 소재가 자세하지 않다.
인수궁(仁壽宮) : 명종 4년(1549)에 새로 예전 정업원(淨業院) 터에 지으니, 이것이 곧 인수원(仁壽院)이다.
경운궁(慶運宮) : 서부 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선조조의 이궁이다. 선조와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하였다.
인경궁(仁慶宮) : 서부 인왕산(仁王山) 아래 있는데, 원래 원종의 사삿집이다.
광해군 병진년(1616)에 술사(術士)가 "새문동(塞門洞)에 왕기(王氣)가 있다."고 하여, <이 궁을> 창건하여 <지기
(地氣)를> 눌렀다.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이 궁의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하였다. 인조조에 철거하였다.
가순궁(嘉順宮) :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는데, 유빈(綏嬪) 박씨의 옛 궁이다.
이현궁(梨峴宮) : 동부 연화방(蓮花坊)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광해군의 옛 궁이라 한다. 인조가,
능원대군(綾原大君)이 난리를 겪고 집이 없자 이 궁에 거처하게 하였다.
효종이 가례(嘉禮)를 여기서 거행하였다. 정종조에 장용영(壯勇營)을 여기 설치하였는데, 후에 폐지하고 나누
어서 훈국(訓局)ㆍ동별영(東別營)ㆍ선혜청(宣惠廳)ㆍ동창(東倉)을 만들었다.
운현궁(雲峴宮) :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는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궁이다. 경근문(敬覲門)ㆍ공근문
(恭覲門)이 있어 어가(御駕)가 와서 뵙는 길이 되었다.
어의궁(於義宮) : 중부 경행방에 있는데, 속칭 상어의궁(上於義宮)이라 한다. 인조의 잠저(潛邸)인데, 잠룡지
(潛龍池)가 있다.
용흥궁(龍興宮) : 동부 숭경방(崇敬坊)에 있는데 속칭 하어의궁(下於義宮) 이라 한다. 효종의 잠저인데,
조양루(朝陽樓)가 있으며, 지금은 본궁(本宮)이라고 칭한다. 열성조의 가례가 이 궁에서 거행되었다.
창의궁(彰義宮) :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있는데, 효종의 잠저이며, 진종(眞宗)이 탄생하였다. 장보각(藏寶閣)이
있어 영종의 화상 두 폭과 어필 유서(諭書)를 봉안하였다.
수진궁(壽進宮) : 중부 수진방(壽進坊)에 있는데, 원래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집이다.
지금은 봉작(封爵)하기 전이나 출가하기 전에 죽은 대군ㆍ왕자ㆍ공주ㆍ옹주를 제사지낸다.
명례궁(明禮宮) : 서부 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원래 경운궁(慶運宮)이다. 혹은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옛 집
이라고도 한다. 선조 계사년(1593)에 환도한 후에 오랫동안 이 궁에 계셨는데, 양천도정(陽川都正) 성(誠)과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집으로 대내(大內)를 삼고, 청양(靑陽) 심의겸(沈義謙)의 집으로 동궁을 삼고, 영상
심연원(沈連源)의 집으로 종묘를 삼았다.
또 부근의 크고 작은 인가로 궁궐 안의 각 관청을 삼아 문을 세우며 울타리를 설치하고 이름하여
시어소(時御所)라 하였는데, 정유년(1597)에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이 비로소 담을 쌓았다.
○ 광해군 때에 인목대비가 이곳에 물러가 거처하였는데, 또한 서궁(西宮)이라고 불렀다.
인조가 계해년에 이 궁에서 즉위하였으므로 즉조당(卽祚堂)이 있다.
용동궁(龍銅宮) : 서부 황화방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옛 궁이라고 하는데, 자세하지
않다. ○ 명례ㆍ어의ㆍ용동ㆍ수진을 사궁(四宮)이라고 한다.
단묘 대보단(大報壇) : 창덕궁 북쪽 담 밖에 있는데, 숙종 갑신년(1704)에 창건하였다.
명 나라 신종 현황제(神宗顯皇帝)를 제사드리는데 매년 3월에 크게 향사한다.
영종 기사년(1749)에 증축하고, 명 나라의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ㆍ의종 열황제(毅宗烈皇帝)를 추향(追享)
하였다. 단 남쪽에 조종문(朝宗門)ㆍ열천문(冽泉門) 등의 문이 있다.
○ 수직관 3원(員)을 두었다. 원단(圓壇) : 한강 서쪽 골에 있는데, 개국 초기에 하늘에 제사드리던 곳이다.
세종조에 파하고 후에 잠시 다시 설치하였다. 세조가 친히 거둥하여 제사드렸다.
사직단(社稷壇) :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있는데, 사단(社壇)이 동쪽에 있고, 직단(稷壇)이 서쪽에 있다.
두 단은 각각 사방 2길[丈] 5자[尺]이고, 높이는 3자 4치[寸]이며, 섬돌은 세 계단이다.
단에는 방위의 색을 따라서 장식하고 황토(黃土)를 덮었다. 사(社)에 돌 신주가 있으니 길이가 2자 5치이고,
사방 1자인데, 그 위를 깎고 그 아래를 돋우어 반이 단에 당하게 하였다. 동쪽 섬돌위로 단에 네 문이 있는데,
같은 토담 안에 사방 22보를 주위의 담으로 둘렀다.
국사(國社)ㆍ국직(國稷)의 신좌(神座)는 모두 남쪽에 있어 북향이며, 후토신(后土神)은 국사에 배향하고,
후직신은 국직에 배향하였는데, 각각 정위(正位) 왼쪽에 있어 가까이 북동쪽을 향하였으며, 단 서남쪽 모퉁이에
신실(神室)이 있다. 매해 중춘ㆍ중추 상무일(上戊日)과 납일에 큰 향사를 지내며, 맹춘(孟春) 상신일(上辛日)에
기곡제(祈穀祭)를 거행한다.
○ 사전(祀奠)은 대사(大祀)에 실려 있으며, 태조 3년(1394)에 창설하였다.
○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 삼영문의 패장(牌將)이 군사 3명을 거느리고 날을 나누어 돌아가면서 단 밖을
야순(夜巡)한다.
○ 기우제는 4차례 드리는데, 정2품관이 제주(祭主)가 되며 북교(北郊)에서 아울러 행한다. 10차 때에는 의정
(議政)이 제주가 된다.
○ 기설제(祈雪祭)는 첫 번째는 정2품관이 제관이 되고, 북교에서도 거행한다.
풍운 뇌우 산천 성황단(風雲雷雨山川城隍壇) : 남교 청파역동(南郊靑坡驛洞) 송림 사이에 있는데, 지금은 남단
(南壇)이라고 부른다. 사방 2길 3치요, 높이가 2자 7치인데 사면으로 섬돌이 있으며, 두 토담 사이는 사방 25보
이다. 풍운ㆍ뇌우의 신좌는 가운데 있고 산천은 왼쪽에 있으며 성황은 오른쪽에 있는데,
모두 북쪽에 있어 남향하였다. 매해 중춘과 중추 상순 중에 날을 잡아 제사드린다.
○ 기우제 3차는 종2품관이 제관이 되며, 8차는 정2품관이 제관이 된다.
○ 기설제 2차는 정2품관이 제관이 된다. 악 해 독단(嶽海瀆壇) : 남교(南郊)에 있는데, 남단과 제도가 같다.
오직 한 토담에 단이 없으며 사당 3칸이 있다.
악(嶽)은 남쪽이 지리산(智異山), 중앙이 삼각산, 서쪽이 송악산(松嶽山), 북쪽이 비백산(鼻白山)ㆍ백두산이며,
해(海)는 동해ㆍ남해ㆍ서해요, 독(瀆)은 남쪽이 웅진(熊津)ㆍ가야진(伽倻津), 중앙이 한강, 서쪽이 덕진(德津)ㆍ
평양강(平壤江)ㆍ압록강(鴨錄江), 북쪽이 두만강(豆滿江)이다.
○ 제사드리는 날은 위와 같다. 선농단(先農壇) : 동교 보원동동(東郊普院東洞)에 있는데, 제도가 남단과 같으
며,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제사드린다. 신농씨의 신좌(神座)는 북쪽에 있어 남향하며, 후직씨의
신좌는 동쪽에 있어 서향한다. 매해 경칩(驚蟄) 후에 길한 해일(亥日)에 제사를 거행한다.
○ 성종 7년(1476)에 관경대(觀耕臺)를 단의 남쪽 10보에 쌓고, 정월에 왕이 친히 선농단에 제사드리며 적전
(籍田)에서 밭가는 예를 행하였다. 숙종 30년(1704)에 친히 가서 비를 빌었으며, 영종 23년(1747)에 비로소
관찰례(觀刹禮)를 거행하였다.
선잠단(先蠶壇) : 동교 혜화문(惠化門) 밖에 있는데, 제도가 남단과 같다. 서릉씨(西陵氏)를 향사드리는데,
신좌는 북쪽에 있어 남향한다. 매해 계춘(季春) 길한 사일(巳日)에 제사를 거행한다.
우사단(雩祀壇) : 동교에 있는데, 제도가 남단과 같되, 오직 사방이 4길이다. 구망씨(句芒氏)ㆍ축융씨(祝融氏)ㆍ
후토씨(后土氏)ㆍ욕수씨(?收氏)ㆍ현명씨(玄冥氏)ㆍ후직씨를 향사드리는데,
신좌는 모두 북쪽에 있어 남향하며 서쪽이 위이다.
매해 맹춘(孟春) 상순에 날을 잡아 제사드린다. 영종 15년(1739)에 친히 기우제를 드렸다.
기우제는 3차는 종2품관이, 8차는 정2품관이, 기설제는 2차는 정2품관이 제관이 된다.
○ 이상은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영성단(靈星壇) : 남교(南郊)에 있는데, 사방이 2길 1자요, 높이는 2자 5치이며, 사면으로 섬돌이 있고 담장
안은 사방 25보이다. 신좌는 북쪽에 있어 남향하는데, 매해 입추 후 진일(辰日)에 제사를 드린다.
영성단(靈星壇) : 금상 2년(1865)에 또 동교 혜화문 밖에 설치하였다.
노인성단(老人星壇) : 남교에 있는데, 매해 추분 날에 제사를 드린다.
마조단(馬祖壇) : 말의 조상 천사(天駟)에게 제사드린다. 방성(房星)이 용마(龍馬)가 되는데,
매해 중추 중기(中氣 한 달의 가운데 절기) 후 강일(剛日)에 제사를 드린다.
선목단(先牧壇) : 처음 말을 기른 사람을 향사한다. 영종 25년(1749)에 우역(牛疫)이 퍼지므로 단을 쌓고
위판(位板)을 만들어 제사드렸다. 매해 중하(仲夏) 중기 후 강일에 제사를 거행한다.
마사단(馬社壇) : 처음 말을 탄 사람을 향사한다. 매해 중추 중기 후 강일에 제사를 거행한다.
마보단(馬步壇) : 말을 해치는 신을 향사한다. 매해 중동(仲冬) 중기 후 강일에 제사를 거행한다.
○ 이상의 네 단은 모두 동교 살곶이[箭串] 목장 안에 있다.
마제단(?祭壇) : 동북교(東北郊)에 있는데, 치우신(蚩尤神)을 향사한다.
무예를 훈련하기 하루 전에 제사를 드리는데 폐한 지 오래다. 정종 병진년(1796) 정사년이라고도 한다.
에 또다시 설치하고 제사를 드렸다.
사한단(司寒壇) : 동빙고(東氷庫) 빙실(氷室) 북쪽에 있는데, 현명씨(玄冥氏)를 향사드리며, 제도는 영성단과
같다. 매해 춘분(春分)에 얼음을 낼 때와 계동(季冬) 상순에 날을 잡아 얼음을 간직할 때에 제사를 드린다.
포단(?壇) : 마보(馬步)와 단이 같은데, 포신(?神)을 향사한다. <포신은> 사람이나 물건에 피해를 끼치는 신인데,
명충(螟?)ㆍ황충(蝗?)이 있으면 제사드린다.
명산대천단(名山大川壇) : 제도는 영성단과 같은데, 단이 없고 묘(廟) 3칸이 있으며, 신좌(神座)는 북쪽에 있어
남향한다. 명산은 동쪽은 치악산(雉嶽山), 남쪽은 계룡산(鷄龍山)ㆍ죽령(竹嶺)ㆍ우불산(?佛山)ㆍ주흘산(主屹山)ㆍ
금성산(錦城山), 중앙은 목멱산(木覓山), 서쪽은 오관산(五冠山)ㆍ우이산(牛耳山), 북쪽은 감악산(紺岳山)ㆍ
의관산(義館山)이며,
대천은 남쪽은 양진 명소(楊津溟所), 중앙은 양진(陽津), 서쪽은 장산곶(長山串)ㆍ아사진(阿斯津)ㆍ송곶(松串)ㆍ
청천강(淸川江)ㆍ구진(九津)ㆍ익수(弱水), 북쪽은 덕진 명소(德津溟所)ㆍ불류수(沸流水)인데, 매해 중춘과 중추
에 날을 잡아 제사드린다.
○ 만일 가물어서 비오기를 빌려면 북교에 나가 악(嶽)ㆍ해(海)ㆍ독(瀆) 및 여러 산천의 신위를 설치하되,
각각 그 방위에서 모두 안으로 향한다.
여단(?壇) : 북부 창의문(彰義門) 밖 장의사동(藏義寺洞)에 있는데, 제도는 영성단과 같다. 문종 2년(1452)에
신좌를 설치했는데, 성황신(城隍神)은 단 위 북쪽에 있어 남향하며, 무사귀신(無祀鬼神) 15위는 단 아래에 있는
데 좌우로 서로 향한다.
매해 청명(淸明)과 7월 보름, 10월 초하루에 제사를 드리는데, 기일 3일 전에 발고제(發告祭)를 남교 성황단에서
거행한다. 이상은 소사(小祀)에 실려 있다.
민충단(愍忠壇) : 서교 홍제원(弘濟院) 남쪽에 있는데, 명 나라에서 임진왜란 때 출정했다가 전사한 군사들을
제사드리는 곳이다. 선조 26년(1593)에 황제의 뜻을 받들어서 단을 쌓고 제사드렸으며, 위판은 선무사(宣武祠)
동무(東?)에 봉안하였다. 영종 36년(1760)에 명하여 선무사 뜰에 집을 짓고 옮겨 제사드리더니,
단이 마침내 폐지되었다.
종묘(宗廟) : 동부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태조 3년에 처음으로 7칸을 짓고 계성전(啓聖殿)이라고 하였는데,
후에 이름을 고쳤다. 명종 병오년에 3칸을 더 짓고, 광해군 초에 중건할 때 1칸을 늘렸다. 영종 병오년에 4칸을
더 짓고 헌종 병신년에 2칸을 더 지었는데, 지금 10□를 모셨다.
실(室)은 태실(太室)이 중앙에 있어 남향이며, 같은 당(堂)에 실을 달리하여 여러 신위를 모셨다.
앞에는 3개의 계단이 있고 동ㆍ서쪽에 각각 협실(夾室) 4칸이 있으며, 협실 남쪽에는 각각 행랑 5칸이 있다.
뜰의 동ㆍ서쪽에는 또 각각 묘(廟) 3칸이 있는데,
서쪽에는 칠사신주(七祀神主)를 간직하고, 동쪽에는 배향 공신(配享功臣) 신주를 간직하였다.
태실의 신좌는 각기 실내에서 남향 서상(西上)이며, 칠사 신좌는 뜰의 서쪽에 있어 동향하고, 공신 신좌는 뜰의
동쪽에 있어 서향한다. 정전 북쪽 계단은 열성조의 우주(虞主 우제 시의 신주)를 매안(埋安)하는 곳이다.
○ 선조조에 서쪽으로 사냥갔다가 돌아오자마자 궁궐이 불탔으므로 여러 실의 신위를 정릉동(貞陵洞) 척신(戚
臣) 심연원(沈連源)의 집에 임시로 봉안하고, 묘(廟)를 짓도록 명하였는데, 광해군 초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 매해 사맹삭(四孟朔)의 상순 및 납일(臘日)에 큰 향사를 지내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 및 오속절일(五俗節日)
인 정조(正朝)ㆍ한식ㆍ단오ㆍ추석ㆍ동지에 작은 제사를 지낸다.
○ 영종조에 한 개의 문을 종묘 북쪽 담과 궁성 남쪽 담이 서로 교대로 쌓은 곳에 내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작은 수레로 나가서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다. 선조 임진년에 왜적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 그 장수 평수가
(平秀家)가 종묘에 머물렀는데, 밤에 괴이한 일이 많고 그 안에 거처하던 왜졸들이 이따금 갑자기 죽으니, 수가
가 크게 두려워하여 소공주택(小公住宅), 즉 지금의 남별궁(南別宮)으로 임시 거처를 옮기고 종묘에 불을 질렀
다.
○ 기우제 때에는 5차는 정2품관이 11차는 의정(議政)이 제관이 되며, 기설제(祈雪祭)의 1차는 2품관이 제관이
된다.
영녕전(永寧殿) : 종묘 문 안 정서(正西)에 있는데, 세종 3년(1421)에 지었다. 정전(正殿) 4실의 좌향(坐向)은
모두 4칸이다. 당(堂)은 같고 실은 다르며, 앞에 세 계단이 있다. 동ㆍ서 협실은 각각 4칸이다. 태실에는 4대조
의 위패를 봉안하였는데 서쪽이 위이다. 서쪽 협실 4실에는 정종ㆍ문종ㆍ단종ㆍ덕종의 위패를 모셨고,
동쪽 협실 4실에는 예종ㆍ인종ㆍ명종ㆍ원종의 위패를 모셨다. 매해 맹춘ㆍ맹추의 상순에 큰 향사를 거행한다.
친히 향사드릴 때는 여름ㆍ겨울ㆍ납일에 모두 제사지낸다.
○ 이상은 대사(大祀)에 실려 있다.
문소전(文昭殿) : 경복궁 성 안 동쪽 건춘문(建春門) 안에 있는데, 세종 15년(1433)에 지었다.
후침(後寢)ㆍ전전(前殿)이 있는데 각각 감실(龕室)이 있으며, 삭망 제사는 후침에서, 사계절 큰 향사는 신주를
전전에 내다가 합하여 제사드린다. 임진년(1592) 병화(兵火)에 위판(位板)을 매안(埋安)하고 그대로 폐지
했다가 영종 임진년(1772)에 각(閣)을 짓고 비(碑)를 세웠다.
○ 도제조(都提調) 2원은 높은 종친(宗親)으로 하며, 제조와 참봉이 각각 2명씩이다.
계성전(啓聖殿) : 환조(桓祖)의 진전(眞殿)이다. 태조 4년(1395)에 지었다가 후에 폐지되었는데,
소재지가 자세하지 않다.
연은전(延恩殿) : 경복궁 성 안 서북쪽 모퉁이 신무문(神武門) 안에 있는데, 성종 7년에 짓고,
덕종의 화상[神御]을 봉안하였다. 명종 때에 인종을 합사(合祀)하였는데, 제사 절차는 문소전과 같다.
제조와 참봉이 각각 2명씩 있었는데, 임진년 후에 폐지되었다.
의경묘(懿敬廟) : 성종 4년(1473)에 덕종의 별묘(別廟)를 연경궁(延敬宮)에 세우고 화상을 후전(後殿)에 봉
하였는데, 후에 폐지되었다. 소재지가 자세하지 않다.
효사묘(孝思廟) :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는데, 연산군 폐모비(廢母妃) 윤씨의 사당이다. 병진년(1496) 봄에
추복(追復)하여 후(后)로 삼았다. 후에 폐지하여 종부시(宗簿寺)로 만들었다.
영경전(永慶殿) : 창의문 남쪽에 있는데, 선조 34년(1601)에 지었으며, 순회세자(順懷世子)를 향사(享祀)한다.
인조 25년(1647)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함께 향사하였는데, 후에 두 신주를 합사하여 매안(埋安)한 후에 빈
전만이 남았다.
숭은전(崇恩殿) : 인조조에 원종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병자년(1636)에는 남한산성 개원사(開元寺)로 옮겨
봉안하였다. 정축년(1637)에 난리가 지난 다음 본전으로 환안(還安)하였다가 곧바로 남별전(南別殿)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 소재지가 자세하지 않다.
영희전(永禧殿) : 남부 훈도방(熏陶坊)에 있다. 원래 의숙공주(懿淑公主)의 집이었는데, 중종 병인년(1506)에
단경왕후(端敬王后)가 손위(遜位) 때의 궁이 되었다. 광해군 2년(1610)에 공빈(恭嬪) 김씨의 묘(廟)를 삼고
봉자전(奉慈殿)이라 이름하였으며, 기미년에 태조와 세조의 영정을 봉안하고 남별전(南別殿)이라 이름을 고쳤
다. 인조 15년(1637)에 중수하고 세조와 원종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숙종 3년(1677)에 증축하였으며 14년에
태조의 어용(御容 화상)을 봉안하고 16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영종 11년(1735)에 세조의 영정을 거듭
모사하여 봉안하였으며, 24년에는 숙종의
영정을 함께 봉안하였다. 정종 초년에 또 영종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철종 □년에 증축하고서 또 순조의 영정
을 봉안하였다.
○ 매해 다섯 명절 및 납월에 제사를 거행한다.
천한전(天漢殿) : 종친부(宗親府) 안에 있는데, 금상 을축년(1865)에 철종의 어용을 봉안하였다.
신비사(愼妃祀) : 숙종 24년(1698)에 사당을 연경궁(延慶宮) 경(慶) 자는 경(敬) 자를 잘못 적은 듯하다.
옛터에 짓고 내관(內官)으로 수직하게 하였다.
○ 영종 기미년에 태묘(太廟)로 올려 배향하였다.
저경궁(儲慶宮) : 남부 회현방(會賢坊) 송현(松峴)에 있다. 원래 원종의 잠저(潛邸)였으며,
예전 이름은 송현궁(松峴宮)이었다. 영종 31년(1755)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인빈(仁嬪) 김씨를 향사하였다.
어필로 신주를 써 춘분ㆍ추분ㆍ하지ㆍ동지와 절일마다 제사를 거행한다.
육상궁(毓祥宮) : 백악산(白嶽山) 아래에 있는데, 영종 원년(1724)에 세우고 숙빈(淑嬪) 최씨를 향사하였다.
20년에 묘호(廟號)를 정하고, 29년에 궁으로 승격하였다. 49년에 영종의 화상 두 폭을 봉안하고, 또 초본(草本)
한 폭을 모셨는데, 제삿날은 저경궁과 같다.
장보각(藏譜閣) : 창의궁(彰義宮) 안에 있다. 영종의 어용 두 폭과 어필 유서(諭書)를 봉안하였다.
경모궁(景慕宮) : 동부 숭교방(崇敎坊)에 있다. 영종 40년에 처음으로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세웠으며,
처음 이름은 사도묘(思悼廟)였는데 곧바로 수은전(垂恩殿)으로 고쳤다. 정종 초년에 이곳으로 옮겨 세우고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궁으로 승격하고 어필로 현판을 썼다. 장헌세자(莊獻世子)를 향사하는데, 영종이 어필로 신주
를 썼다. 정종ㆍ순조ㆍ익종의 어용을 망묘루(望廟樓)에 봉안하였다.
궁 서쪽의 일첨문(日瞻門)과 월근문(月覲門) 두 문이 유첨문(?瞻門)과 유근문(?覲門) 두 문과 서로 통한다.
○ 매해 사중삭(四仲朔) 상순에 큰 향사를 거행하며, 매달 삭망 및 다섯 명절에 작은 제사를 거행한다.
대빈궁(大嬪宮) :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다. 경종 2년(1722)에 세웠으며,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 장씨(張氏)
를 향사한다. ○ 제삿날□.
연우궁(延祐宮) :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있다. 정종 2년(1778)에 지었으며 정빈(靖嬪) 이씨를 향사한다.
○ 제삿날□.
선희궁(宣禧宮) : 순화방에 있는데, 영빈(暎嬪) 이씨를 향사한다. 영종의 어용을 냉천정(冷川亭)에 봉안하였다.
○ 제삿날□.
경우궁(景祐宮) : 북부 양방(陽坊)에 있다. 순조 23년(1823)에 창경궁의 도총부(都總府) 안에 세우고 유빈(綏嬪)
박씨의 혼궁(魂宮)을 삼았다. 처음 이름은 현사(顯思)였는데, 이듬해에 예전 용호영(龍虎營)으로 옮겨 세우고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순조ㆍ익종의 어용을 성일헌(誠一軒)에 봉안하였다.
○ 제삿날은 육상궁과 같다.
순회묘(順懷廟) : 도성 안 북쪽, 예전 영경전(永慶殿)에 있다. 선조 34년(1601)에 세우고, 순회세자(順懷世子)와
공회빈(恭懷嬪) 윤씨를 향사하였다. 숙종 4년(1678)에 신주를 매안하였고, 후에 소현묘(昭顯廟)가 되었다.
소현묘(昭顯廟) : 인조 25년(1647)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를 향사하였다.
순회묘와 묘(廟)가 같으며 죽 벌여놓고 향사하였다가, 숙종 4년에 이르러 비로소 단독으로 향사하였다.
○ 제삿날은 저경궁과 같다.
의소묘(懿昭廟) : 창의궁 안에 있는데 영종 30년(1754)에 세우고, 의소세손(懿昭世孫)을 향사하였다.
○ 제삿날은 소현묘와 같다. 문희묘(文禧廟) : 북부 안국방(安國坊)에 있는데, 정종 12년(1788)에 세우고,
문효세자(文孝世子)를 향사하였다. 의빈(宜嬪) 성씨(成氏)의 묘가 그 곁에 있다.
○ 제삿날□.
문우묘(文祐廟) : 창의궁 안에 있는데 순조조에 세웠다. 효명세자(孝明世子)를 향사하다가 헌종 정유년(1837)
에 태묘로 올려 배향하였다.
덕흥대원군묘(德興大院君廟) :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있는데, 적손(嫡孫)이 대대로 작위(爵位)를 이어받고
봉사(奉祀)한다.
전계대원군묘(全溪大院君廟) : 북부 안국방(安國坊)에 있다.
연산군묘(燕山君廟) : 중부 장통방(長通坊)의 외손 이안눌(李安訥)의 집에 있다.
광해군묘(光海君廟) : 남부 회현방(會賢坊)의 외손 박징원(朴?遠)의 집에 있는데, 속칭 박궁(朴宮)이라고 한다.
문소전(文昭殿) : 성 안에 있는데, 태조ㆍ신의왕후(神懿王后)의 혼전이며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
처음 이름은 인소(仁昭)였는데 후에 문소(文昭)로 고치고 인하여 원묘(原廟)로 삼았다.
경복궁의 문소전이 아니다. 세종조에 새 문소전을 궁성 안에 세우고, 태조ㆍ태종의 위판을 합하여 모시니,
예전 문소전은 그대로 폐지되었다.
인안전(仁安殿) : 경복궁 안에 있다. ○ 신덕왕후(神德王后)의 혼전이다.
인덕전(仁德殿) : 인덕궁에 있다.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혹은 경복궁 안에 있었다 하고,
혹은 인덕궁(仁德宮)으로 개국 초의 이궁(離宮)이었다 하는데, 자세하지 않다. 정종(定宗)ㆍ정안왕후(定安王后)
의 혼전이다.
광효전(廣孝殿) : 성 안에 있는데 태종ㆍ원경왕후(元敬王后)의 혼전이며 그대로 원전(原殿)이 되었다.
세종조에 문소전에 옮겨 봉안하니, 폐지되었다.
휘덕전(輝德殿) : 장소가 자세하지 않은데 혹은 별궁에 있었다 하고, 혹은 경복궁 안에 있었다 한다.
세종ㆍ소헌왕후(昭憲王后)의 혼전이다.
경희전(景禧殿) : 소재지가 자세하지 않은데, 혹은 동궁의 자선당(資善堂)을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후에 또 영창전(永昌殿)ㆍ태경전(泰慶殿) 두 전이 되었다. 현덕왕후(顯德王后)의 혼전이다.
영창전(永昌殿) : 수강궁(壽康宮), 지금 창경궁에 있는데, 세조의 혼전이다.
태경전(泰慶殿) : 장소가 자세하지 않다. 정희왕후(貞熹王后)의 혼전이다.
경안전(景安殿) : 경복궁 안에 있다. 예종ㆍ장순왕후(章順王后)의 혼전이다.
소경전(昭敬殿) : 경복궁 안에 있다. 성종ㆍ공혜왕후(恭惠王后)의 혼전이다.
효경전(孝敬殿) : 경복궁 안에 있다. ○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혼전이다.
문덕전(文德殿) : 경복궁 안에 있다.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혼전이다.
영모전(永慕殿) : 경복궁 안에 있다. ○ 인종의 혼전이다.
효경전(孝敬殿) : 경복궁 안에 있다. 인성왕후(仁聖王后)의 혼전이다.
경모전(敬慕殿) : 창경궁 안에 있다. ○ 인순왕후(仁順王后)의 혼전이다.
영모전(永慕殿) : 경운궁(慶運宮)에 있는데, 곧 당시의 이궁(離宮)이며 선조의 혼전이다.
효경전(孝敬殿) : 남별전(南別殿)에 있는데, 곧 지금 영희전(永禧殿)이며 의인왕후(懿仁王后)의 혼전이다.
효사전(孝思殿) : 경덕궁(慶德宮)에 있는데, 인목왕후(仁穆王后)의 혼전이다.
숭은전(崇恩殿) : 남별궁에 있는데, 인헌왕후(仁獻王后)의 혼전이다.
영사전(永思殿) : 창덕궁 안에 있는데, 인조의 혼전이다.
숙녕전(肅寧殿) : 창경궁 안에 있다. ○ 인렬왕후(仁烈王后)의 혼전이다.
효사전(孝思殿) : 창경궁 안에 있다. ○ 장렬왕후(莊烈王后)의 혼전이다.
경모전(敬慕殿) : 창덕궁 안에 있다. ○ 효종의 혼전이다.
경사전(敬思殿) : 경덕궁 안에 있다. ○ 인선왕후(仁宣王后)의 혼전이다.
효경전(孝敬殿) : 창덕궁 안에 있다. ○ 현종의 혼전이다.
영모전(永慕殿) : 창경궁 안에 있다. ○ 명성왕후(明聖王后)의 혼전이다.
효령전(孝寧殿) : 경덕궁 안에 있다. ○ 숙종의 혼전이다.
영소전(永昭殿) : 경덕궁 안에 있다. ○ 인경왕후(仁敬王后)의 혼전이다.
경녕전(敬寧殿) : 창경궁 안에 있다. ○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혼전이다.
효소전(孝昭殿) : 창덕궁 안에 있다. ○ 인원왕후(仁元王后)의 혼전이다.
경소전(敬昭殿) : 창경궁 안에 있다. ○ 경종의 혼전이다.
영휘전(永徽殿) : 창덕궁 안에 있다. ○ 단의왕후(端懿王后)의 혼전이다.
경휘전(敬徽殿) : 경희궁(慶熙宮) 안에 있다. ○ 선의왕후(宣懿王后)의 혼전이다.
효명전(孝明殿) : 경희궁 안에 있다. ○ 영종의 혼전이다.
휘령전(徽寧殿) : 창덕궁 안에 있다. ○ 정성왕후(貞聖王后)의 혼전이다.
효안전(孝安殿) : 창경궁 안에 있다. ○ 정순왕후(貞純王后)의 혼전이다.
□□전 : □□궁 안에 있다. ○ 진종의 혼전이다.
연복전(延福殿) : □□궁 안에 있다. ○ 효순왕후(孝純王后)의 혼전이다.
효원전(孝元殿) : 창덕궁 안에 있다. 정종의 혼전이다.
효희전(孝僖殿) : 창경궁 안에 있다. ○ 효의왕후(孝懿王后)의 혼전이다.
□□전 : 창경궁 안에 있다. ○순조의 혼전이다.
효정전(孝定殿) : 창덕궁 안에 있다. ○ 순원왕후(純元王后)의 혼전이다.
□□전 : 창경궁 안에 있다. ○ 효명세자(孝明世子)의 혼전이다.
휘정전(徽定殿) : 창경궁 안에 있다. ○ 효현왕후(孝顯王后)의 혼전이다.
효문전(孝文殿) : 창경궁 안에 있다. ○ 철종의 혼전이다. □□궁 : 창경궁 안에 있다.
○ 혜빈(惠嬪)의 혼전이다. 현사궁(顯思宮) : 창경궁 안에 있는데, 유빈(綏嬪)의 혼전이다.
○ 이상의 혼전과 궁은 모두 부묘(?廟), 입묘(入廟)한 후에 폐지되었다.
문묘(文廟) : 성균관(成均館) 명륜당(明倫堂) 남쪽에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북쪽에 있어 남향인데 모두 5칸이
며, 앞에 두 층계가 있고 뜰 동ㆍ서쪽에 각각 무(?)가 있다. 전 남쪽과 전 동쪽에 각각 정문이 있으며,
동무와 서무 남쪽에 각각 작은 문이 있다. 신주(神廚)는 서무(西?) 서북쪽에 있고, 전사청(典祀廳)은 또 그 서쪽
에 있다. 하련대(下輦臺)가 전 동문 밖에 있는데, 열성조가 알성(謁聖)할 때는 반드시 여기서 연(輦)에서 내린다.
향관청(享官廳)은 명륜당 동북쪽에 있다.
○ 신좌(神座)는 문선왕(文宣王)이 중앙에 있어 남향하며, 배향(配享)은 안자(顔子)ㆍ자사(子思)가 정위(正位)
동남쪽에 있어서 서향하고, 증자(曾子)ㆍ맹자(孟子)가 정위 서남쪽에 있어서 동향하는데 모두 북쪽이 위이다.
전 안의 종향(從享)은 민손(閔損)ㆍ염옹(?雍)ㆍ단목사(端木賜)ㆍ중유(仲由)ㆍ복상(卜商)ㆍ주돈이(周惇?)ㆍ
정이(程?)ㆍ장재(張載)가 동벽(東壁)에 있어 모두 서향하며, 염경(?耕)ㆍ재여(宰予)ㆍ염구(?求)ㆍ언언(言偃)ㆍ
전손사(?孫師)ㆍ정호(程顥)ㆍ소옹(邵雍)ㆍ주희(朱熹)가 서벽(西壁)에 있어 모두 동향인데 모두 북쪽이 위이다.
동무의 종향은 담대멸명(澹臺滅明)ㆍ원헌(原憲)ㆍ남궁괄(南宮适)ㆍ상구(商瞿)ㆍ칠조개(漆雕開)ㆍ번수(樊須)ㆍ
공서적(公西赤)ㆍ양전(梁?)ㆍ염유(?孺)ㆍ백건(伯虔)ㆍ염계(?季)ㆍ칠조치(漆雕?)ㆍ칠조도보(漆雕徒父)ㆍ
상택(商澤)ㆍ임부제(任不齊)ㆍ공량유(公良孺)ㆍ진염(秦?)ㆍ공견정(公肩定)ㆍ교단(?單)ㆍ한문묵(罕文墨)ㆍ
공조구자(公祖句玆)ㆍ현성(縣成)ㆍ연급(燕伋)ㆍ안지복(顔之僕)ㆍ낙흔(樂欣)ㆍ안하(顔何)ㆍ적묵(狄墨)ㆍ
공충(孔忠)ㆍ공서장(公西藏)ㆍ시지상(施之商)ㆍ진비(秦非)ㆍ신장(申?)ㆍ안쾌(顔?) ㆍ좌구명(左邱明) ㆍ
곡량적(穀梁赤)ㆍ고당생(高堂生)ㆍ모장(毛?)ㆍ유향(劉向)ㆍ정중(鄭衆)ㆍ노식(盧植)ㆍ복건(服虔)ㆍ한유(韓愈)ㆍ
양시(楊時)ㆍ호안국(胡安國)ㆍ장식(張?)ㆍ황간(黃?)ㆍ진덕수(眞德秀)ㆍ설총(薛聰)ㆍ안유(安裕)ㆍ
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김인후(金麟厚)ㆍ성혼(成渾)ㆍ송시열(宋時烈)ㆍ
박세채(朴世采)는 모두 동쪽에 있어서 서향인데 모두 북쪽이 위이다.
서무의 종향은 복불제
(宓不齊)ㆍ공야장(公冶長)ㆍ공절애(公?哀)ㆍ고시(高柴)ㆍ사마려(司馬黎)ㆍ유약(有若)ㆍ무마시(巫馬施)ㆍ
안신(顔辛)ㆍ조휼(曹?)ㆍ공손룡(公孫龍)ㆍ진상(秦商)ㆍ안고(顔高)ㆍ양사적(壤駟赤)ㆍ석작촉(石作蜀)ㆍ
공하수(公夏首)ㆍ후처(后處)ㆍ해용장(奚用藏)ㆍ안조(顔祖)ㆍ구정강(句井疆)ㆍ진조(秦祖)ㆍ영기(榮?)ㆍ
좌인영(左人?)ㆍ설방(薛邦)ㆍ원항(原亢)ㆍ염결(廉潔)ㆍ숙중회(叔仲會)ㆍ규손(?巽)ㆍ공서여여(公西輿如)ㆍ
거원(?瑗)ㆍ임방(林放)ㆍ진항(陳亢)ㆍ금장(琴張)ㆍ보숙승(步叔乘)ㆍ공양고(公羊高)ㆍ복승(伏勝)ㆍ대성(戴聖)ㆍ
동중서(董仲舒)ㆍ공안국(孔安國)ㆍ두자춘(杜子春)ㆍ정현(鄭玄)ㆍ범영(范?)ㆍ사마광(司馬光)ㆍ옹언(雍彦)ㆍ
이동(李?)ㆍ여조겸(呂祖謙)ㆍ채침(蔡沈)ㆍ허형(許衡)ㆍ최치원(崔致遠)ㆍ정몽주(鄭夢周)ㆍ정여창(鄭汝昌)ㆍ
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송준길(宋浚吉)은 모두 서쪽에 있어서 동향인데 모두 북쪽이 위이다.
○ 중사(中祀)에 실려 있는데, 매해 중춘과 중추의 상정일(上丁日)에 태뢰(太牢)로 석채례(釋菜禮)를 행한다.
삭망일 제사는 임진란 후로 폐지하고 분향(焚香)을 행한다.
○ 태조 7년(1398)에 세웠는데 정종(定宗) 2년(1400)에 불타고, 태종 7년(1407)에 중건하였다.
변계량(卞季良)의 묘정비명(廟庭碑銘)이 있다. 성종 3년(1472)에 전사청(典祀廳)을 세워서 향사 때, 음식 만드는
곳을 삼았다. 이숙감(李淑?)의 기문이 있다.
○ 향관청(享官廳)에는 홍귀달(洪貴達)의 기문과 영종의 어제 소지(小識)가 있다.
○ 연산군 때 문묘의 위판을 철거하여 고암리(高巖裏)에 두었다가 또 대평관(大平館)으로 옮기고 또 장악원
(掌樂院)으로 옮겨서 차서(次序)에 질서가 없었으며 향화(香火)가 오래도록 끊기고, 성균관으로 흥청(興淸)들의
놀이하는 곳을 삼았는데, 중종 원년에 문묘를 중수하고 위판을 도로 모셨다. 선조 25년(1592)에 병화(兵火)에
헐리고, 이듬해 환도하여 단을 설치하고서 제사드리고, 문선왕(文宣王)의 위판을 받들어 전사청에 임시로 모셨
다가 34년에 중건하였다. 인조조에 변계량이 지은 비문을 다시 새겨 묘정(廟庭)에 세웠는데, 이정귀(李廷龜)가
음기(陰記 비갈 뒤에 새기는 글)를 지었다. 15년(1637) 봄에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위판을 대성전에 모셨으며,
효종 4년(1653)에 향실(香室)을 지었다.
○ 대성전 현판은 한호(韓濩)의 글씨다. 계성사(啓聖祠) : 문묘 서북쪽에 있는데, 숙종 25년(1699)에 세웠다.
제국공(齊國公) 공씨(孔氏)가 주향(主享)이며, 동쪽 배향(配享)은 곡부후(曲阜侯) 안씨(顔氏)와 사수후(泗水侯)
공씨요, 서쪽 배향은 채무후(菜蕪侯) 증씨(曾氏)와 주국공(?國公) 맹씨(孟氏)이다.
매번 석채일(釋菜日) 자정마다 소뢰(小牢)를 사용하여 고제(告祭)를 드린다. 영종 35년(1759)에 어필로 현판을
써서 걸도록 명하였다.
숭절사(崇節祠) : 문묘 동쪽에 있다.
○ 숙종 9년(1683)에 세웠다. 숙종조에 명하여 세우게 하고 영종 원년(1724)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고도 한다.
진(晉) 나라 태학생(太學生) 동양(董養)과 당 나라 태학생 하번(何蕃), 송 나라 태학생 진동(陳東)ㆍ
구양철(歐陽徹)을 제사드린다. 영종이 지나다 들러서 어필로 유방아동(流芳我東) 네 글자를 써서 걸었으며,
36년에는 어필로 사현사(四賢祠) 세 글자를 써서 내려 현판을 걸도록 명하였다. 순조조에 진사 윤지술(尹志述)
을 추사(追祀)하였다.
독신묘(纛神廟) : 옛날에는 경성 안 동남쪽에 있었는데, 후에 예조 서쪽으로 옮겼다. 개국 초에 세웠는데,
네 독신(纛神)을 제사드린다. 신좌는 북쪽에 있어서 남향한다. 매년 경칩일과 상강일에 제사를 거행한다.
남관왕묘(南關王廟) : 숭례문 밖 도저동(桃楮洞) 산기슭에 있다. 선조 31년(1598)에 명 나라 장수 진인(陳寅)이
창건하였는데, 정전은 푸른 기와로 덮었다. 관왕(關王)을 향사하는데, 동쪽 배위는 왕보(王甫)ㆍ조루(趙累)요,
서쪽 배위는 주창(周倉)ㆍ관평(關平)이다.
○ 임진년과 정유년의 난리에 신령이 나타나 싸움을 도운 이적이 있으므로 창건하였다. 흙을 빚어 형상을 만들
고 또 한 작은 금상(金像)을 봉안하였는데 바로 중국에서 받들고 온 상(像)이라 한다.
○ 혹 말하기를, 좌우쪽에 관평ㆍ주창의 소상을 모셨다고도 한다. 묘 앞에 두 기를 세웠는데, 하나는 협천대제
(協天大帝)라 쓰고, 하나는 위진화하(威鎭華夏)라고 썼다. 영종이 친히 현령소덕왕묘(顯靈昭德王廟)라고 써서
현판을 달라고 명하고, 친히 묘기(廟記)를 지었다.
○ 명 나라 조정의 통판(通判) 도량성(陶良性)이 비기(碑記)를 지었으며, 허균(許筠)이 비문을 지었다.
동관왕묘 :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다. 만력(萬曆 명 나라 연호) 임인년, 곧 선조 35년에 명 나라 조정에서 순무
하는 신하[撫臣] 만세덕(萬歲德)을 명하여 창립하였다. 소상은 흙을 빚고 금을 칠하여 그림을 그렸으며,
전무(殿?)와 문창(門廠)이 모두 중국 제도를 모방하였다. 혹은 동상(銅像)이라고도 한다.
명 나라 조정에서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칙건 현령소덕 관공지묘(勅建顯靈昭德關公之廟)라고 하였다.
○ 매해 경칩일과 상강일에 제사드리는 것은 남묘(南廟)와 같다.
선무사(宣武祠) : 태평관(太平館) 서쪽에 있는데, 선조 31년(1598)에 세웠다. 속칭 생사당(生祠堂)이라고 하는데,
어필로 재조번방(再造藩邦) 네 글자를 써서 걸었다. 명 나라의 병부 상서(兵部尙書) 형개(邢?)를 제사드리며,
어필로 사당 현판을 써서 걸었다. 37년에 명 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배향하였다.
광해군 2년(1610)에 양경리의 화상을 봉안하고, 이정귀(李廷龜)가 큰 비문을 지었다. 또 작은 비가 사현(沙峴)에
있는데, 거사(去思)라고 기록하였다.
숙종조에 와서 옮겨다 사현비(沙峴碑)라 새겨서 사당 뜰에 세웠으며, 민암(閔?)이 음기(陰記)를 지었다.
영종 30년(1754)에 친히 거둥하여 전작례(奠爵禮)를 행하고, 어필로 수은해동(垂恩海東) 네 큰 글자를 써서 걸었
으며, 홍계희(洪啓禧)가 비문을 추기(追記)하였다. 36년에 1칸 집을 뜰 동쪽에 짓고 동정(東征) 때 군중에서 전사
한 군관들을 향사하였다. 40년에 사현 거사비 음기를 어제(御製)하여 사당 뜰에 옮겨 세웠다.
○ 매해 계춘과 계추 중정일(中正日)에 제사지낸다. 이상은 소사(小祀)에 적혀 있다.
기제소(旗祭所) : 삼청동(三淸洞) 전(殿) 터에 있다. 매양 각 영문에서 큰 기치(旗幟)를 새로 만든 후에 날을
잡아서 제사드린다.
원유 경복궁 후원(後苑) : 서현정(序賢亭)ㆍ취로정(翠露亭)ㆍ관저전(關雎殿)ㆍ충순당(忠順堂)이 있었는데,
모두 임진난에 불탔다.
○ 정종(定宗)이 상왕(上王)으로 있을 때에 한 내시가 2월 말에 우연히 후원에 들어갔다가, 복숭아가 쌓인 풀더
미 속에 있는데, 붉고 윤이 나는 것이 새것 같았으니 참으로 9, 10월의 상도(霜桃)였다. 수백 알을 얻어서 상왕
께 드리니 상왕이 곧 문소전(文昭殿)에 천신하고 또 태종에게도 보냈다. 태종이 기뻐서 어의(御衣)를 벗어 내시
에게 하사하고, 곧장 상왕의 방으로 가서 함께 구경하며 극히 즐기다가 파하였다.
세종은 모든 진기한 구경거리를 하나도 좋아하는 것이 없어, 상림원(上林苑 어원)의 꽃과 비둘기도 모두 명하여
민간에 흩어주게 하였다.
○ 연산군이 응준방(鷹?坊)을 후원에 설치하였는데, 무릇 팔도의 매ㆍ사냥개 및 진기한 날짐승과 길짐승을 거두
어 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 중종이 일찍이 명하여 세 문을 동산 안에 세우게 하고 첫 번째 문을 청문(淸門), 두 번째 문을 열문(冽門), 세
번째 문을 탁문(濁門)이라 하였다. 조정의 선비들을 모아놓고 스스로 재량하여 아무 문으로나 들어가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열문으로 들어가는데 이조 좌랑 조사수(趙士秀)만이 바로 청문으로 들어갔으나 사람들이
괴이히 여기는 이가 없었다.
창덕궁ㆍ창경궁 후원 : 두 후원이 서로 통한다. 열무정(閱武亭)이 있고, 정자 곁에 네 개의 우물이 있으니,
마니(摩尼)ㆍ파려(??)ㆍ유리(琉璃)ㆍ옥정(玉井)이라 하는데, 세조 때에 판 것이며, 최항(崔恒)의 서문이 있다.
○ 또 어수당(魚水堂)ㆍ낙민정(樂民亭)ㆍ관풍각(觀?閣)과 경성(慶成)ㆍ청심(淸心)ㆍ척뇌(滌惱)ㆍ취규(聚奎)ㆍ
관덕(觀德)ㆍ양심(養心)ㆍ낙선(樂善)ㆍ월지(月志)ㆍ애련(愛蓮) 등의 정자가 있다.
○ 세조가 명하여 무일전(無逸殿)을 지으니, 왕위를 <세자에게> 전하고 여기에 나와서 수양하려는 것이었다.
○ 성종 9년(1478)에 채상단(採桑壇)을 후원 가운데 쌓고 왕비가 명부(命婦)들을 거느리고 친잠례(親蠶禮)를
행하였다.
○ 옥류천(玉流泉)은 춘당대(春塘臺) 북쪽에 있는데, 곁에 농산정(籠山亭)이 있다.
○ 일찍이 담연문(淡煙門)이 있었는데, 중종이 명하여 영숙(永肅)으로 고쳤다.
○ 영종 22년(1746) 봄에 임금이 친히 관풍각에 나아가 어제시(御製詩) 한 수를 지었으며 동궁은 삼자시(三字詩)
두 구절을 지어 올렸다.
상림 10경(上林十景) : 관풍 춘경(觀?春耕)ㆍ망춘 문앵(望春聞鶯)ㆍ천향 춘만(天香春晩)ㆍ어수 범주(魚水泛舟)ㆍ
소요 유상(逍遙流觴)ㆍ희우 상련(喜雨賞蓮)ㆍ청심 제월(淸心霽月)ㆍ관덕 풍림(觀德楓林)ㆍ영화 시사(暎花試士)ㆍ
능허 모설(凌虛暮雪)이다.
○ 정종(正宗)의 어제시가 있다. 효종 기해년(1659) 5월에 상림에서 한밤중에 홀연 크게 탄식하는 소리가 있더니,
며칠 뒤에 효묘가 승하하였다. 이완(李浣)이 밤에 북영(北營)에서 숙직하다가 들었다.
경희궁 후원ㆍ함춘원(含春苑) : 하나는 창덕궁에 있는데, 요금문(曜金門) 서쪽 건너 산기슭이며, 경복궁 동쪽 담
과 서로 연접했다.
하나는 창경궁에 있는데, 홍화문(弘化門) 동쪽 건너 산기슭이며, 경모궁(景慕宮)의 서쪽 담장과 서로 연접했다.
후원의 동쪽은 곧 경모궁의 일첨문(日瞻門)이며, 후원의 서쪽은 유첨문(?瞻門)이라 하고, 북쪽은 유근문(?覲門)
이라 한다. 동북쪽에 좌액문(左掖門)이 있고, 동남쪽엔 우액문이 있는데, 모두 정종(正宗) 경자년(1780)에 지은
것이다. 매해 봄ㆍ가을에 병조ㆍ공조ㆍ한성부의 당상과 낭관들이 본궁의 제조와 함께 두루 다니며 간심(看審)
한다.
○ 하나는 경희궁에 있는데, 개양문(開陽門) 남쪽 건너 산기슭이며, 담장을 두르고 수목을 보호하며 기른다.
문직 공서(文職公署) 종친부(宗親府) : 북부 관광방(觀光坊)에 있는데,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를 따라 창설하
였다. 열성조 어보(御譜)를 받들어 모시고 왕과 왕후의 의대(衣? 어의)를 받들어 올리며 선원(璿源 왕성)의 여러
파 및 종실의 여러 군(君)을 통솔하는 부(府)이다.
대군ㆍ왕자군 때에는 계급이 없으며 아문(衙門)의 종친은 일정한 수가 없으며,
양첩(良妾)의 소생은 1등을 낮추고 천첩(賤妾)의 소생은 또 1등을 낮춘다.
○ 이어받는 직은 아버지가 죽은 뒤에 제수하며, 친연(親緣)이 다 되면 문무 관원의 자손의 규례에 의하여
<조정에> 들어가 벼슬한다.
○ 종정경(宗正卿)은 여러 군(君) 및 종성(宗姓)의 조정 관원 중 2품 이상으로 일정한 수 없이 아뢰어 임명하며,
도정(都正) 1원을 더 두었는데 종성의 문관으로 임명한다. 유사(有司)는 으레 전첨(典籤)을 겸하는데 대군 때에
자벽(自? 자의로 추천하는 것)하며, 전부(典簿)는 대군이나 왕자군 때에 자벽한다. 주부(主簿)는 언제나 자벽하
고, 직장(直長)은 생원 진사가 아니면 임명하지 않으며, 참봉ㆍ충의 낭청(忠義郞廳) 각각 1원씩은 역시 종성인
(宗姓人)으로 언제나 자벽하게 한다. 또 겸낭청 1원이 있다.
○ 대군 왕자ㆍ적실(嫡室)아들 ㆍ군 왕자 서자 ㆍ영종정경(領宗正卿) 대군ㆍ왕자 군을 으레 겸한다. 군 정1품 ㆍ
판종정경(判宗正卿) 정1품 군 종1품 대군이 이어 받으며 적장자에게 처음 제수된다. ㆍ지종정경(知宗正卿) 정2
품에서 종1품까지. 군 종2품 세자 중자(衆子)와 대군 중자가 이어 받으며 적장 증손ㆍ왕자군이 이어 받으며,
적장손이 처음 제수된다. ㆍ종정경 종2품 ㆍ도정 정3품 ㆍ정(正) 정3품 세자 중증손(衆曾孫), 대군의 중손(衆孫),
왕자군의 중자가 이어 받으며, 적장 증손에게 처음 제수된다. ㆍ정1원 조정 관원인데 원래 종부시(宗簿寺)에 속
한다. ㆍ부정(副正) 종3품관인데, 대군의 중증손, 왕자군의 중손에게 처음 제수된다. ㆍ수(守) 정4품 증손의 관
인데 왕자 군의 중증손에게 처음 제수된다. ㆍ전첨1원 조정관원 ㆍ부종(副宗) 종4품 ㆍ영(令) 정5품 ㆍ전부 1원
조정 관원 ㆍ부령(副令) 종5품 ㆍ감(監) 정6품 ㆍ주부 1원 조정 관원인데, 원래 종부시에 속하였다. ㆍ직장(直長)
1원 조정 관원인데 원래 종부시에 속한다. ㆍ참봉 1원이 있다.
○ 신익성(申翊聖)의 제명기(題名記)가 있다.
의정부(議政府) : 경북궁 광화문 남쪽의 왼편에 있으니, 곧 북부 관광방이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도평의사(都評議司)를 설치하고, 또 문하부(門下府)를 설치하였는데,
정종(定宗) 2년(1400)에 도평의사를 파하고 의정부로 만들었으며, 태종 원년(1400)에 또 문하부를 파하고 본부
에 병합하여 백관을 총할하고 모든 정사를 공평히 하며 음양(陰陽)을 다스리고 국가를 경영하는 일들을 맡도록
하였다.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 각 1원씩 정1품, 좌찬성ㆍ우찬성 각1원 종1품, 좌참찬ㆍ우참찬 각 1원 정2품, 사인(舍
人) 2원, 검상(檢詳) 1원, 사록(司錄) 1원, 공사관(公事官) 11원 원래는 비변사 낭청에 속하였다., 문관 2원, 무관
참상(?上 종3품 이하 6품 이상) 5원, 참외(?外 참상 이하) 4원을 두었다.
○ 그 관속 중 사인ㆍ검상은 양사(兩司)에 부속되었다.
○ 도상(都相)은 원임 의정 겸 당상(原任議政兼堂上)인데, 정한 수효 없이 아뢰어 임명하며, 이조ㆍ호조ㆍ예조ㆍ
병조ㆍ형조의 판서와 삼영(三營)의 대장, 좌포장ㆍ우포장이 으레 겸한다. 그 중 4원은 유사당상(有司堂上)이라
칭하며, 8원은 팔도 구관당상(八道句管堂上)을 겸임하는데, 원임 장신(將臣)이 당상관으로 계하(啓下)된다.
○ 의정의 아문 청사가 불타서 찬성의 아문 청사로 대신들의 아문 자리를 삼았는데, 금상 을축년(1865)에 중건
하였다. 서남쪽에 행랑[月廊]수십 칸이 있는데, 남쪽 행랑은 백관들이 서계(誓戒)를 받는 곳이다.
○ 사인사(舍人司)가 북쪽에 있는데 청풍각(淸風閣)이라 현판하였으며, 연못이 있다.
이극감(李克堪)의 양사제명기(兩司題名記)가 있다.
○ 제언사(堤堰司)에는 제조 1원 본부의 유사 당상이다. 과 겸낭청 <본부의> 공사관이 겸한다. 이 있다.
충훈부(忠勳府) : 예전에는 북부 광화방(廣化坊)에 있었으며, 중종 초에 중부 관인방(寬仁坊)으로 옮겨 지었는
데 여러 공신들의 관부이다. 태조조에 공신도감(功臣都監)을 설치하였는데, 태종조에 충훈사(忠勳司)로 고쳤
으며 세조조에 부로 승격하였다. 개국 초기에는 장생전(長生殿)을 짓고 모양을 그렸다.
○ 군(君) 정1품 은 친공신(親功臣)이고 왕비의 부친은 부원(府院) 두 자를 더하며 군 종1품 ㆍ군 정2품 ㆍ군 종
2품 은 모두 정한 수가 없다. 경력(經歷) 1원, 감도사(減都事) 1원, 겸도사 1원은 적장 충의(嫡長忠義) 6품 이상
이 전의 직함으로 자벽(自?)한다.
○ 당상관 3원은 아뢰어 임명하며, 유사는 친공신이 없으면 승습(承襲)한 군으로 차출한다.
○ 따로 기공각(記功閣)을 짓고, 태조ㆍ세조ㆍ원종ㆍ효종의 훈첩(勳帖)을 받들었다.
○ 권람(權擥)의 기문과 장유(張維)의 어제판기(御題板記), 19공신 제명판기(題名板記),
이이명(李?命)의 기공각기(紀功閣記)가 있다.
의빈부(儀賓府) : 예전엔 중부 정선방(貞善坊)에 있었는데, 연산군 11년(1505)에 다른 곳으로 철거하여 옮겼
으며, 중종 11년(1516)에 북부 광화방(廣化坊)으로 옮겨 지었다. 개국 초기에 창설하였는데,
공주와 옹주(翁主 후궁 소생의 왕녀)에게 장가든 이들의 관부이다. 위(尉) 정1품 ㆍ위 종1품 는 공주에게 장가
든 이에게 처음 제수하며, 위 정2품 ㆍ위 종2품 는 옹주에게 장가든 이에게 처음 제수하며, 부위(副尉) 정3품
는 군주(郡主 왕세자의 적실녀)에게 장가든 이에게 처음 제수하며, 첨위(僉尉) 정3품ㆍ종3품 는 현주(縣主 대군ㆍ
군의 딸)에게 장가든 이에게 처음 제수하는데, 모두 일정한 수효가 없다.
경력(經歷) 1원, 감도사(減都事) 1원을 두었다. 돈녕부(敦寧府) : 중부 정선방에 있다.
○ 왕의 친족과 외척의 관부이다. 태종 14년(1414)에 창설하고 선보(璿譜 왕실의 계보)를 봉안하였다.
영사(領事) 1원 정1품 은 왕비의 부친으로 처음 제수되는 자도 제수한다. 혹 관직이 낮거나 아직 벼슬하지 않았
으면 먼저 도정(都正)을 제수한 후에야 비로소 제수한다. 판사 1원 종1품, 지사 1원 정2품, 동지사(同知事) 1원
종2품, 도정 1원 정3품 이며, 가설 도정 1원은 대원군의 봉사손(奉祀孫)으로 대대로 이어받게 하며, 만일 자급이
올라가면 품계에 따라 더 설치한다.
정(正)ㆍ부정(副正)ㆍ첨정(僉正) 각 1원씩이며, 감판관(減判官) 2원에 1원은 감하고, 주부(主簿) 2원에 1원은
감하고, 직장(直長) 2원에 1원은 감하고, 봉사(奉事) 2원이며 감참봉(減?奉) 2원에 1원은 감한다.
의금부(義禁府) : 중부 견평방(堅平坊)에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를
두었는데, 태종 2년(1402)에 순위부(巡衛府)로 고치고 3년에 또 고쳐서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로 하였다가
14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추국(推鞫)하는 일을 맡았다. 세상에 전하기를, "세조조에 감찰 정보(鄭保)가
가산이 몰수된 후에 그 집으로 관부의 정아(正衙) 대청을 삼았다."고 한다. 남쪽에 호두각(虎頭閣)이 있고,
서쪽에 연정(蓮亭)이 있다.
서쪽의 1칸, 2칸, 3칸은 모두 조정 관원 중의 경범 죄인을 가두는 곳이요, 동쪽의 13칸과 남쪽의 15칸은 모두
역옥(逆獄) 및 삼성 죄인(三省罪人)의 중죄수를 가두는 곳이다.
○ 속한 건물로는 경력소(經歷所)가 있고 또 당직청(當直廳)이 있는데, 연산군 때에 밀위청(密威廳)으로 고쳤
다가 중종 초에 예전대로 하였다. 사서인(士庶人)들의 하소와 소장 등에 대한 일을 맡았다.
신문고(申聞鼓)를 진선문(進善門)에 두어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는 이들에게 치게 하였는데,
오래도록 원통함을 호소하는 이가 없었다.
쇠를 차비문(差備門 왕이 거처하는 편전의 앞문) 밖에서 치도록 허락했는데, 격쟁(擊錚)이라 한다. 지금 다시
북을 두었는데, 하나는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밖에 있다.
○ 유성원(柳誠源)의 제명기(題名記)가 있다.
○ 본부에는 옛날 옥패(玉牌)가 있었는데, 무릇 삼사(三司)에서 금부에 나오면 본부에서는 또 옥패로써 금부
이속들을 출동하여 삼사의 금리를 규찰하였다. 임진란 후에 옥패를 분실하여 마침내 폐하였다.
○ 판사 1원에 지사와 동지사(同知事)는 혹은 1원이고, 혹은 2원으로 4원을 충당하였다. 그 관속은 경력 감도사
5원이요, 참상도사 5원, 참외 □□이다. 이조(吏曹) : 의정부 남쪽,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으며, 태조 원년에
설치한 것은 다른 조(曹)와 같다.
문관을 선임하고[文選], 훈봉(勳封)과 고과(考課 고시)의 정사를 맡는데, 그 아래에 문선사(文選司)가 있어 종친ㆍ
문관ㆍ잡직의 증직(贈職)ㆍ제수(除授)ㆍ고신(告身 임명장)ㆍ녹패(祿牌)와 문과 생원 진사의 사패 차정(賜牌差定)
과 취재(取才)ㆍ개명(改名) 및 장오 패상인(贓汚敗常人)의 녹안(錄案) 등의 일을 맡으며, 고훈사(考勳司)에서는
종재(宗宰)ㆍ공신의 봉증 보호(封贈譜號)ㆍ향관 노직(享官老職)ㆍ명부 작첩(命婦爵帖)ㆍ향리 급첩(鄕吏給牒) 등
의 일을 맡으며, 고공사(考功司)에서는 문관의 공과(功過)ㆍ근만(勤慢)ㆍ휴가와 여러 관청 아전(衙前)의 출사일
(出仕日)의 변리(辨理)와 향리 자손 등에 관한 일을 맡았다.
○ 판서 1원 종2품, 참판 1원 종2품 은 경연(經筵)에서 추천한 후보자에서 낙점하며, 참의(參議) 1원 정3품 은
국자감(國子監 국학)에서 추천한 후보자에서 낙점한다. 정랑(正郞) 3원 정5품 중 1원은 친히 정사할 때에 임명하
되 임시 감하기도 하며, 좌랑(佐郞) 정6품 3원 중 1원은 친히 정사할 때에 임명하되 임시로 감하기도 한다.
호조(戶曹) : 한성부 남쪽 옛날 예조동(禮曹洞)에 있으니, 곧 중부 징청방이다. 호구ㆍ공부(貢賦)ㆍ전량(田粮)ㆍ
식화(食貨) 등의 정사를 맡았는데, 그 관하의 판적사(版籍司)는 호구ㆍ전토ㆍ조세ㆍ부역ㆍ공헌(貢獻)ㆍ권과 농
상(勸課農桑)ㆍ고험 풍흉(考驗?凶) 및 진대(賑貸)ㆍ염산(?散) 등의 일을 맡았고, 회계사(會計司)는 경외(京外)의
저장[儲積]과 1년 회계의 인계[解由]ㆍ휴흠(虧欠) 등의 일을 맡았으며,
경비사(經費司)는 경중(京中)의 조달[支調] 및 왜인(倭人)의 양료(粮料) 등의 일을 맡았다.
산원(算員)이 56명인데, 교수(敎授)ㆍ별제(別提)ㆍ훈도는 본업인(本業人)을 선택하여 임명한다.
경비사는 지금 별례방(別例房)이라고 한다. 또 전례방(前例房)이 있어서 제향(祭享)ㆍ공상(供上)ㆍ사행 방물(使
行方物)ㆍ예장(禮葬)을 맡고, 판별방(版別房)은, 무시 별무(無時別貿)를 맡으며, 별영색(別營色)은 훈국(訓局)
군병의 요미[料] 주는 것을 맡고, 별고색(別庫色)은 공물 차하를 맡으며, 세폐색(歲幣色)은 절사(節使)의 세폐
(歲幣)를 맡고, 응판색(應辦色)은 사객(使客)에 대한 공급을 맡으며, 은색(銀色)은 금은을 맡는다.
○ 판서ㆍ참판ㆍ참의가 각 1원씩이며, 정랑이 3원인데 2원은 자벽하고, 좌랑이 3원이다.
산학 교수(算學敎授)ㆍ겸교수ㆍ별제ㆍ산사(算士)ㆍ계사(計士)ㆍ산학 훈도ㆍ회사(會士)가 각 1원씩이다.
○ 분조(分曹)는 남부 회현방(會賢坊), 예빈시(禮賓寺) 서쪽에 있다. 광해군 원년(1608)에 세웠으며 조사(詔使)
의 공급에 대비하였다.
○ 별령(別營)ㆍ별고(別庫)에도 모두 창고를 설치하였다. 예조(禮曹) : 경복궁 광화문 남쪽의 오른편에 있으니,
곧 서부 적선방(積善坊)이다. 예악(禮樂)ㆍ제사ㆍ연향(宴享)ㆍ조빙(朝聘)ㆍ학교ㆍ과거의 정사를 맡았다.
○ 관하에 계제사(稽制司)가 있어서 의식ㆍ제도ㆍ조회ㆍ경연ㆍ사관(史官)ㆍ학교ㆍ과거ㆍ인신(印信)ㆍ표전
(表箋)ㆍ책명(冊命)ㆍ천문ㆍ누각(漏刻)ㆍ국기(國忌)ㆍ묘휘(廟諱)ㆍ상장(喪葬) 등의 일을 맡았으며,
전향사(典享司)는 연향ㆍ제사ㆍ생두(牲豆)ㆍ음선(飮饍)ㆍ의약 등의 일을 맡으며, 전객사(典客司)는 사신ㆍ
왜(倭)ㆍ야인(野人)의 영접과 외방의 조공과 연설(宴設)ㆍ시여(賜與) 등의 일을 맡았다.
○ 판서ㆍ참판ㆍ참의 각 1원씩과 정랑ㆍ좌랑 각 3원씩이 있다.
○ 세상에서 전하기를, 정도전(鄭道傳)이 일찍이 정부와 군부(軍府)가 일체(一體)라고 하면서 제도에 의하여
정아(正衙)를 세워서 동ㆍ서에서 대치하게 하였는데, 그가 쫓겨난 후에 삼군부(三軍府)를 취하여 조(曹)로 삼았
기 때문에 제도가 극히 장려(壯麗)하다. 지금 과거를 보아 선비를 뽑는 장소가 되었는데, 일소(一所)라고 칭한다.
병조(兵曹) : 사헌부 남쪽에 있으니 곧 서부 적선방이다. 내조(內曹)가 둘 있는데, 하나는 창덕궁 진선문(進善門)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안에 있다.
무선(武選)ㆍ군무(軍務)ㆍ의위(儀衛)ㆍ우역(郵驛)ㆍ병갑(兵甲)ㆍ기장(器仗)ㆍ문호 관약(門戶管?)의 정사를 맡
았다. 그 안에 무선사(武選司)가 있으니 무관ㆍ군사ㆍ잡직의 제수ㆍ고신(告身)ㆍ녹패(祿牌)ㆍ부과 급가(附過給
暇) 및 무과(武科) 등의 일을 맡는데 지금은 정색(政色)이라고 칭한다.
승여사(乘輿司)는 노부(鹵簿)ㆍ연여(輦輿)ㆍ구목(廐牧)ㆍ정역(程驛)ㆍ보충대(補充隊)ㆍ조예(?隷)ㆍ나장(羅將)ㆍ
반상(伴?) 등의 일을 맡는데 지금은 마색(馬色)이라 칭하고, 겸하여 입마(立馬)ㆍ노문(路文)ㆍ장과(章科)도 맡
는다.
무비사(武備司)는 군적(軍籍)ㆍ마적(馬籍)ㆍ병기ㆍ전함ㆍ점열군사(點閱軍士)ㆍ훈련 무예ㆍ숙위ㆍ순작보(巡綽
堡)ㆍ진수(鎭守)ㆍ비어(備禦)ㆍ정토(征討)ㆍ군관 군인의 차송(差送)ㆍ번휴(番休)ㆍ급보(給保)ㆍ급가(給暇)ㆍ
시정(侍丁)ㆍ복호(復戶)ㆍ화포(火?)ㆍ봉수(烽燧)의 개화(改火)ㆍ분화(焚火)ㆍ부신(符信)ㆍ경첨(更籤) 등의 일
을 맡는다.
일군색(一軍色)은 용호영(龍虎營)ㆍ호련대(扈輦隊)ㆍ내취 제보(內吹諸保)의 포목을 맡고, 이군색(二軍色)은,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의 보포(保布 군보(軍保)가 바치던 포목)의 궐흠과 내외 각사의 고립(雇立)을 맡으며,
유청색(有廳色)은 충순위(忠順衛)ㆍ충찬위(忠贊衛)ㆍ충장위(忠壯衛) 소관 첨병(簽兵)ㆍ여정(餘丁)의 번포
(番布 군정에게 입번 대신 받는 포목)를 맡으며 도안색(都案色)은 별기병(別騎兵)의 보포를 맡으며
결속색(結束色)은 궐내 및 어가 출동 때에 금훤(禁喧)한다.
○ 판서ㆍ참판ㆍ참의ㆍ참지 정3품 각 1원, 정랑 4원 중 2원은 자벽하며, 좌랑 4원이다.
형조(刑曹) : 병조 남쪽에 있으며 서부 적선방이다. 병률(兵律)ㆍ헌사송(?詞訟)ㆍ노예의 정사를 맡는다.
그 안에 상복사(詳覆司)가 있으니, 큰 범죄를 자세히 복심하는 일을 맡으며, 고율사(考律司)는 법률 안핵(按?)
하는 일을 맡고, 장금사(掌禁司)는 형옥(刑獄) 금령(禁令)의 일을 맡으며, 장예사(掌隷司)는 노예의 부적(簿籍)
및 부수(?囚 포로) 등의 일을 맡는다.
○ 판사ㆍ참판ㆍ참의 각 1원, 정랑ㆍ좌랑 각 3원이며, 율학 교수(律學敎授)ㆍ겸교수 각 1원, 별제 2원, 명률
(明律)ㆍ심률(審律)ㆍ율학(律學)ㆍ훈도ㆍ검률(檢律) 각 1원이다.
○ 정아(正衙) 청사 벽 좌우에 영종의 어필로, 태공 흠재 면수법문(太公欽哉勉守法文)의 여덟 큰 글자와 태공
지정 근수 법문(太公至正謹守法文)의 여덟 큰 글자를 나누어 걸었다. 계단 아래에 왼쪽으로 아름다운 돌이
있는데, 위는 깎고 아래는 넓으며 길이가 3척 8촌이요, 오른쪽으로 돌이 있는데,
아래는 둥글고 위는 날카로우며 길이가 5척 4촌이고 사방에 여덟 모가 졌다.
○ 예전 정부 검상 겸 정랑은 어느 때부터 폐지되었는지 모르는데, 지금 조(曹) 안에 검상청이 있으며,
또 정랑 1원이 금화사 별좌(禁火司別座)를 겸하였는데, 금화사를 파한 후에 폐지되었다.
○ 선조 임진란 때 거가(車駕)가 성을 나간 후에, 난민(亂民)들이 먼저 장예원 및 형조를 불지르니,
대개 두 관청에 공사 노비(公私奴婢)의 문서가 있기 때문이었다.
공조(工曹) : 형조 남쪽에 있으며 서부 적선방이다. 산택(山澤)ㆍ공장(工匠)ㆍ영선(營繕)ㆍ도야(陶冶)의 정사를
맡는다. 그 안에 영조사(營造司)가 있으니 궁실ㆍ성지(城池)ㆍ공해(公?)ㆍ옥우(屋宇)ㆍ토목 공역(土木工役)ㆍ
피혁(皮革)ㆍ전담(氈?) 등의 일을 맡으며, 공야사(攻冶司)는 백공(百工)의 제작, 금ㆍ은ㆍ주옥ㆍ동(銅)ㆍ납(?)ㆍ
철(鐵)의 야주(冶鑄), 도와(陶瓦)ㆍ권형(權衡) 등의 일을 맡으며, 산택사(山澤司)는 산택ㆍ진량(津梁)ㆍ
원유(園?)ㆍ종식(種植)ㆍ탄(炭)ㆍ목(木)ㆍ석(石)ㆍ주거(舟車)ㆍ필묵(筆墨)ㆍ수철(水鐵)ㆍ칠기(漆器) 등의 일을
맡는다.
○ 판서ㆍ참판ㆍ참의 각 1원, 정랑ㆍ좌랑 각 3원이다. ○ 서거정(徐居正)의 낭관제명기(郞官題名記)가 있다.
한성부(漢城府) : 자세한 것은 아래 보인다. 사헌부(司憲府) : 중추부(中樞府) 남쪽에 있으며 서부 적선방이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관청을 설치하였는데, 시정(時政) 을 논집(論執)하고 백관을 규찰(糾察)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원통한 일을 펴 주고 외람하고 거짓됨을 금하는 일들을 맡는다.
○ 대사헌 종2품 ㆍ집의 종3품 각1원, 장령 정4품 ㆍ지평 정5품 각 3원, 감찰 정6품 13원 중 문관 3원, 무관 5원,
음관(蔭官) 5원이다.
○ 다시청(茶時廳)ㆍ제좌청(齊坐廳)ㆍ성상소(城上所)가 있다.
○ 서거정의 제명기와 제좌청기, 성현(成俔)의 감찰청벽기(監察廳壁記)가 있다.
○ 권근(權近)이 상대별곡(霜臺別曲)을 지었는데, 본부 소미연(燒尾宴)에서 부른다.
승정원(承政院) : 하나는 경복궁 월화문(月華門) 밖에 있는데 후에 불탔으며, 하나는 창덕궁 인정전 동쪽 연영문
(延英門) 안에 있다. 정청(正廳)에 계자판(啓字板)을 모셨는데, 누(樓)가 있어 육선(六仙)이라 현판하였다.
북쪽은 당후 주서 직소(堂后注書直所)라 하는데 누가 있어 사선(四仙)이라 현판하였다.
당 뒤 북쪽 방에 또 1칸의 작은 방이 있으니 속칭이 곽방(槨房)인데, 곧 기주서(記注書)가 사초(史草)를 간직하는
장소로서 다른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며, 당 뒤 동쪽 방은 곧 한림 익춘추(翰林益春秋)가 거처하는 곳이다.
하나는 창경궁 금마문(金馬門) 남쪽에 있는데, 후에 불타고 그대로 폐지되었으며, 하나는 경희궁 건명문(建明門)
안에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중추원을 설치하였는데, 세조조에 고쳐 설치하고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왕명의 출납을 맡도록 하였다.
○ 도승지ㆍ좌승지ㆍ우승지ㆍ좌부승지ㆍ우부승지ㆍ동부승지 정3품 각 1원씩이며, 주서 정7품 2원인데 사고가
있으면 가주서를 선임하며, 사변가주서는 1원이다.
○ 숙종조에 왕이 은잔 1벌을 하사하였다.
○ 유의손(柳義孫)의 제명기(題名記)와 조서강(趙瑞康)의 신당기(新堂記)가 있다.
○ 영종 20년(1744)에 창경궁의 승정원에 불이 나서 선조 신축년(1601) 이후 1백여 년 간의 시정기(時政記)가
모두 불타 버렸다.
○ 대루원(待漏院)은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는데, 곧 승지가 새벽에 나가서 문 열기를 기다리는 곳이다.
사간원(司諫院) : 북부 관광방(觀光坊)에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문하부 낭사(郞舍)로 헌납
(獻納)ㆍ간쟁(諫諍)ㆍ박정(?正)의 일을 맡게 하였는데, 태종 2년(1402)에 비로소 따로 <관청을> 설치하고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연산조에 혁파하였으며 중종조에 복구하여 간쟁과 논박의 일을 맡게 하였다.
대사간 정3품 ㆍ사간 종3품 ㆍ헌납 정5품 각 1원이며, 정언 정6품 2원이다.
○ 서거정의 제명기가 있다. 경연청(經筵廳) : 관직은 있지만 관청이 없는데, <경전을> 강독하고 <정사를> 의논
하며 생각하는 책임을 맡는다.
세조 2년(1456)에 영사(領事)ㆍ지사(知事)ㆍ동지사 각 3원과 참찬관(?贊官) 정3품 ㆍ승지ㆍ부제학ㆍ겸시강관
(兼侍講官) 정4품 ㆍ시독관(侍讀官) 정5품 ㆍ검토관(檢討官) 정6품 ㆍ사경(司經) 정7품 ㆍ설경(說經) 정8품 ㆍ
전경(典經) 정9품 을 두었는데, 시강관 이하는 홍문관의 직제학 이하가 품계에 따라 겸임한다.
홍문관(弘文館) : 예전에는 경복궁 승정원 서쪽에 있었는데 곧 옛날의 집현전(集賢殿)이다.
장서각이 있었는데 후에 불타고 그대로 폐지되었다. 하나는 창덕궁의 내의원 서쪽, 규장각 동쪽에 있으니 곧
옛날의 사인사(舍人司)이며, 하나는 창경궁 승정원 동쪽에 있었는데 후에 불탔다. 하나는 경희궁 금상문(金商門)
안에 있는데, 또 옥당이라고 한다.
내부(內府)의 경적(經籍)을 맡고 문한(文翰)을 다스려서 <임금의> 고문(顧問)에 대비하였다. 세종 2년에 처음으
로 집현전을 궁중에 설치하고 고금 경적을 모으며, 재덕(才德)과 문학이 있는 이들을 뽑아서 전고(典故)를 토론
하여 고문과 진강(進講)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세조 원년에 파하였다.
8년에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의하여 장서 내각(藏書內閣)을 이름하여 홍문관이라 하고 비서(?書)의 출납을
맡게 하였다. 성종 10년에 관직의 호칭을 고쳐 정하고 내부의 경적을 맡으며 문한을 다스려서 고문에 대비하게
하였으며, 연산군 10년에 진독청(進讀廳)으로 고쳤다가 중종 초에 복구하였다.
○ 영사(領事) 1원, 대제학 정2품 ㆍ제학 종2품 ㆍ부제학 정3품 ㆍ직제학 정3품 ㆍ도승지 겸 전한 종3품 ㆍ
응교 정4품 ㆍ부응교 종4품 각 1원, 교리 정5품 ㆍ부교리 종5품 ㆍ수찬 정6품ㆍ 부수찬 종6품 각 2원, 박사 정7품 ㆍ
저작(著作) 정8품 각 1원이며, 정자(正字) 정8품 2원은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의 전직자 중 2원을 본관에서 겸검
서관으로 자벽한다.
○ 직려(直廬)에는 영종의 어필로 학사관(學士館)이라는 액자 글씨가 있고, 들보에 옥등잔 4쌍을 달았으며,
또 어사한 은잔이 있다.
예문관(藝文館) : 예전에 경복궁 승정원 서쪽에 있었는데, 후에 불타 창덕궁의 인정전 서쪽으로 옮겨 설치하여
향실(香室)과 서로 연하였다. 하나는 경희궁 숭의문(崇義門) 안에 있었으며 사명(辭命 임금의 말과 명령)의 제찬
(制撰)을 맡았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예문춘추관을 설치하였는데, 후에 나누어 예문관을 설치하
였다. 연산군 병인년(1506)에 혁파하였으며, 중종 반정 초에 곧 회복하였다. 영사ㆍ대제학ㆍ제학ㆍ직제학ㆍ
응교 각 1원이며, 봉교(奉敎) 정7품 ㆍ대교(待敎) 정8품 각 2원, 검열(檢閱) 정8품 4원인데, 속칭 한림(翰林)이라
한다.
○ 영종 14년(1738)에 친히 사각(史閣)에 나와서 대공사필(大公史筆) 네 자를 써서 벽 위에 걸었으며,
32년에 또 친히 근수고풍(勤守古風) 네 자를 써서 걸었다.
○ 민진원(閔鎭遠)의 한원제명록지(翰苑題名錄識)가 있다.
성균관(成均館) : 동부 숭교방(崇敎坊)에 있는데,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설치하였다.
유학을 가르치는 소임을 맡았다. 중국 사신 김식(金湜)이 풍수학(風水學)에 능하였는데, 성균관 터를 크게 칭찬
하면서 인재를 배출할 땅이라고 하였다 한다.
○ 지사 1원, 동지사 2원, 대사성 정3품 1원, 좨주(祭酒) 정3품 1원인데, 학행(學行)으로 사림간에 명망 있는 이
를 공천하여 임명하며 1, 2품 관원이 또한 겸한다. 사성 종3품 1원, 사예(司藝) 정4품 2원, 사업(司業) 정4품 1원,
동좨주(同祭酒)ㆍ직강 정5품 4원 중 1원은 자벽하고, 전적 정6품 13원 중 1원은 자벽하며 4원 종8품 은 승문원
의 참외관(參外官)으로 한다. 박사 3원, 학정(學正) 정8품 3원, 학록(學錄) 정9품 3원, 학유(學諭) 종9품 3원이다.
○ 그 아래에 정록청(正錄廳)이 부속되었다.
○ 명륜당은 문묘 북쪽에 있으며, 스승과 생도가 모여서 권학 강독하는 장소로 삼는다.
당 남쪽에 좌우로 협랑(夾廊)이 있어 많은 선비들이 거접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라 칭한
다. 항상 생원 진사 1백 명을 양성하고 있다.
동쪽 제1랑(廊)에 북을 달았는데 이것이 흔고(?鼓)이며, 매일 아침 저녁 식사 때에 쳐서 선비들을 모으니 또한
식고(食鼓)라고 칭한다. 좌협랑 동쪽에 정록청(正錄廳)이 있으니, 곧 낭관들이 당직하는 곳이다.
청 남쪽에는 부엌이 있고, 또 그 남쪽에 식당이 있다. 모두 태조 7년(1398)에 이루어졌다.
존경각(尊經閣)은 당 동쪽에 있는데, 경사(經史)와 백가(百家)의 여러 서적을 간직하였으며, 성종 6년에 짓고
왜란 때 불탔는데 선조 30년에 중건하였다. 육일각(六一閣)은 존경각 동쪽, 향관청(享官廳) 서쪽에 있는데,
대사례(大射禮) 때에 사용하는 활ㆍ화살ㆍ의복ㆍ기구를 간직한다. 당의 북쪽 일만 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선
곳을 벽송정(碧松亭)이라 부르며, 정자 서쪽에 비천당(丕闡堂)이 있으니, 대개 주자(朱子)의 이른바 성상을 도
와 큰 계교를 크게 빛내고[丕闡] 사특한 것을 억제하고 더불어 바른 데로 나간다는 뜻을 딴 것이다.
앞 뜰이 극히 넓은데 담장을 둘러 쌓아서 과장(科場)으로 하여 선비를 시험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이소(二所)라
고 칭한다. 당 서남쪽에 일양재(一兩齋)가 있으니,
대개 주자가 일찍이 불사(佛寺)를 폐지하고 유궁(儒宮)을 세우고서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고 말한 뜻을 딴 것
이며, 벽입재(闢入齋)는 대개 정자(程子)가 이씨(二氏 불교와 도교를 말함)의 해를 논하기를, "물리친[闢]후에
야 도에 들어갈[入道]수 있다."고 말한 뜻을 딴 것이다. 문묘 남문 밖에 느티나무를 벌려 심었으니,
이것이 괴시(槐市)이다.
○ 성간(成侃)의 명륜당기, 서거정의 존경각기, 송시열(宋時烈)의 비천당기가 있다.
○ 성종 6년(1475)에 반수(泮水)를 파서 개통하고 돌을 쌓아 둘렀으며, 13년에는 친히 제사드리고 명륜당에 나
아가 선비들을 시험보였다. 연산군 갑자년(1504)에 다른 곳으로 철거하여 옮겼다가 중종 원년(1506)에 다시
설치하였다.
선조 임진년(1592) 병란에 불탔는데, 39년(1606)에 명륜당을 다시 완성하고, 인조 4년(1626)에 존경각ㆍ정록청ㆍ
양현고(養賢庫)를 다시 세웠다. 현종 5년(1664)에 여승 사원을 철거하고 그 재목과 기와를 옮겨다가 비천당을
짓고, 또 일양재ㆍ벽입재를 지었다. 영종 18년(1742)에 어필로 성균관 유생들에게 보이기를, "보편적이고 편당
하지 않는것은 군자의 공심(公心)이요, 편당하고 보편적이지 않는 것은 소인의 사의(私意)이다." 하고,
이어 명하여 비석에 새겨 반수교(泮水橋) 가에 세우게 하였다. 19년에는 친히 대사례(大射禮)를 반궁(泮宮 성균
관과 문묘의 통칭)에서 거행하고, 명하여 육일재(六一齋)를 지었다.
○ 효종 6년(1655)에 은잔 2벌을 하사하였으며, 정종 22년(1798)에 또 잔 1벌을 하사하였는데, 가운데에 아유
가빈(我有嘉賓) 네 자를 새겼다.
○ 성종이 편치 않으니 대비가 근심스러워 궁인을 명하여 벽송정에서 굿을 하였는데, 태학생 이목(李穆)이 여러
생도들을 선동하여 그 무당을 때려 쫓았다. 중종조에 동지관사 윤탁(尹倬)이 행단(杏壇) 제도를 모방하여 손수
문행(文杏 은행) 두 그루를 강당 앞 뜰에 심었는데, 해마다 열매가 맺어 땅에 떨어질 때마다 썩은 냄새가 매우
나쁘고, 또 수복들이 따라 다니며 줍느라고 문묘 뜰에서 떠들어, 성균관의 한 관원이 제사드리며 미안한 뜻을
고하니 이로부터 다시 열매를 맺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괴이하게 여겼다.
○ 새로 급제한 사람이 관에 들어가면 선생이 포목류를 나누어 받아들여서 마시며 노는 비용을 삼았는데, 여름
철에 성균관에서 이것을 거행하니 이름하여 벽송음(碧松飮)이라 하였다.
춘추관(春秋館) : 예전에 경복궁 상서원 서쪽에 있었는데 후에 불탔으며, 보록각(寶錄閣) 이 있는데 관직은 있지
만 관청은 없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예문춘추관을 설치하였으며, 후에 춘추관을 나누어 설치하
여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 영사 1원, 감사(監事) 정1품의 좌의정과 우의정 2원, 지사 2원, 동지사 2원이며, 수찬관(修撰官)ㆍ
편수관(編修官)ㆍ기주관(記注官)ㆍ기사관(記事官)이 있는데 모두 문관으로 하고 다른 관직으로 겸대하게 하였다.
규장각(奎章閣) : 위에 자세하게 나왔다. 열성조의 어제ㆍ어필과 선보(璿譜)ㆍ세보(世譜)ㆍ고명(顧命 왕의 유언)
과 정종(正宗)의 어진(御眞), 순조의 어제ㆍ어필을 받들어 모셨다.
○ 제학 종2품에서 종1품까지 2원, 직제학 정3품 당상관에서 종2품까지 2원, 직각(直閣) 종6품에서 정3품까지
1원, 대교(待敎) 종9품에서 7품까지 이다. 또 각감(閣監) 2원이 있어 어진을 봉안한 곳을 수직하며,
사권(司卷) 2원 지금은 폐지됨 은 전령(傳令)ㆍ품계(?啓) 등의 일을 맡고,
검서관(檢書官) 4원 5품 참외관(參外官)으로 품계에 따라 한 직함을 붙임 은 각신(閣臣)을 보좌하여 교서(校書)ㆍ
사서(寫書)의 일을 보며, 영첨(領籤) 2원 지금은 폐지됨 은 어제를 베껴 쓰고 교열하며 어제를 봉안하는 등의 일
을 맡으며, 감서(監書) 6원은 계하 문서(啓下文書)ㆍ응제 문자(應製文字)를 나누어 맡아 정리하고,
사자관(寫字官) 8원, 화원(?員) 10원이 차비대령(差備待令)으로서 본각에 속하고,
검율(檢律) 1원은 형조의 검율로 대령하게 한다.
교서관(校書館) : 예전에 경복궁 사옹원 남쪽에 있는 것을 내관(內館)이라 칭하였는데 후에 불탔으며,
남주 훈도방(薰陶坊)에 있는 것을 외관(外館)이라 칭하였는데, 후에 중부 정선방(貞善坊)으로 옮겼다.
정종(正宗) 6년에는 창덕궁 돈화문으로 옮겨서 규장각의 부속 관청을 삼았는데, 외각(外閣)이라고 하였다. 개국
초기에 교서감(校書監)을 설치하여 경적을 판각하고 반포하며 향축(香祝)ㆍ인전(印篆 인장의 조각)의 소임을
맡겼으며, 또 서적감(書籍監)을 설치하였다가 태종 원년(1400)에 합하여 교서관으로 만들었다.
세조조에 고쳐서 전교서(典校署)라 하고 성종 15년(1484)에 다시 옛 이름으로 하였다.
○ 제조 4원, 부제조 2원, 판교(判校) 정3품 1원, 교리 1원, 겸교리 1원, 직각ㆍ겸별제(兼別提)ㆍ별좌(別坐) 모두
감함 ㆍ박사ㆍ저작(著作)ㆍ정자(正字)ㆍ부정자 각 2원씩인데, 박사 이하 대교는 품계에 따라 겸한다.
또 사준(司準) 10원, 사감(司勘) 1원과 창준(唱準)ㆍ보자관(補字官)이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기문이 있다. 역서(曆書) 1천 권을 판박하여 여러 서적을 간행하는 자금을 보충하였다.
승문원(承文院) : 처음 북부 양덕방(陽德坊)에 있었는데, 세종 15년(1433)에 경복궁 홍례문(弘禮門) 밖에 옮겨
지었다. 장서각이 있는데 극히 높고 크며, 명 나라 조정의 고칙(誥勅) 관계 여러 문서를 간직하였는데 후에 불탔
으며, 정종 11년(1787)에 다시 중부 정선방(貞善坊)에 설치하였다.
하나는 경희궁의 숭의문 안에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를 두어서 사대
교린(事大交隣) 문서를 맡게 하였다.
○ 도제조가 3원이요, 제조ㆍ부제조는 정한 수효가 없으며, 판교(判校)는 1원이요, 참교감(參校勘)ㆍ교리는 모
두 감하였다. 교검(校檢) 정6품 1원, 박사ㆍ저작(著作)ㆍ정자(正字)ㆍ부정자 각 2원이며, 또 제술관(製述官) 2
원이 있는데 1명은 문관, 1명은 음관(蔭官)이다. 이문학관(吏文學館) 3원, 이문습독(吏文習讀) 20원, 사자관
(寫字官) 40원이다.
이문원(擒文院) :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안 홍문관 오른쪽에 있는데, 곧 예전 도총부(都摠府)이다.
정종(正宗) 5년에 내각의 여러 신하들이 여러 날 계속해서 당직하는[豹直]장소로 삼았다. 어필 현판을 달았는데
청사가 넓어서 여러 관부 중에서 으뜸이다.
앞 대들보에 안에서 하사한 특종(特鍾)과 특경종(特磬鍾)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명 나라 영락(永樂) 연간에 황제
가 하사한 것이다. 또 어사품인 투호(投壺)ㆍ금슬(琴瑟)ㆍ은잔ㆍ큰 벼루 각각 1개씩, 옥 등잔 6매(枚)가 있어 대
청 대들보에 나누어 걸려 있다. 뜰에는 구리 측우기(測雨器)를 설치하였고, 길들인 학 한 쌍이 있다.
○ 대유재(大酋齋)는 원 북쪽에 있는데, 동이루(東二樓)가 있어 그 안에 서적을 간직하였다.
소유재(小酋齋)는 원 왼쪽에 있는데 곧 어재실(御齋室)이었다가 마침내 검서관이 수직하는 곳이 되었다. 상서원
(尙瑞院) : 예전에는 경복궁 보루각(報漏閣) 남쪽에 있었는데 후에 불탔으며, 창덕궁 인정문 남쪽으로 옮겨 설치
하였다. 배설방(排設房)이 넷인데, 하나는 경희궁 건명문(建明門) 안에 있다.
○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상서사(尙瑞司)를 두고 쇄보(璽寶)ㆍ부패(符牌)ㆍ절월(節鉞)을 맡았다가
후에 원으로 고쳤다.
○ 정(正)은 1원이요, 판관은 감하였으며, 직장(直長)ㆍ부직장이 각각 1명씩이다.
통례원(通禮院) : 예전에는 서부 적선방에 있었는데 후에 중부 정선방으로 옮겼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합문(閤門)을 설치하고, 예의(禮儀)ㆍ조하(朝賀)ㆍ제사ㆍ찬알(贊謁) 등의 일을 맡게 하였는데,
후에 통례문으로 고쳤으며 태종 때에 다시 문을 고쳐 원으로 하였다.
○ 좌통례ㆍ우통례 정3품 각 1원, 상례(相禮) 종3품 ㆍ익례(翊禮) 종3품 각 1원이며, 봉례(奉禮)는 감하였다.
찬의(贊儀) 정5품 1원, 인의(引儀) 종6품 8원, 겸인의 종9품 6원, 가인의 종9품 6원이다.
봉상시(奉常寺) : 예전엔 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었는데 후에 인달방(仁達坊)으로 옮겼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설치하고, 제사 및 시호를 의논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태종 9년에 전사사
(典祀司)로 고쳤으며, 세종 3년에 다시 옛 이름으로 하였다.
○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사농시(司農寺)를 설치하였는데, 태종 원년에 고쳐 전농시(典農寺)라 칭
하고 자성(?盛 나라 제사에 쓰는 곡물)을 맡았으며, 후에 봉상시에 합병하고 분시(分寺)라 칭하였다.
동적전(東籍田)ㆍ서적전이 속한다.
○ 도제조ㆍ제조 각 1원, 정(正) 1원이며, 부정은 감하며, 첨정 종4품 ㆍ판관 각 1원인데 자벽하며, 주부 2원,
직장ㆍ봉사ㆍ부봉사ㆍ참봉 각 1원이다.
○ 신주(神主)의 재목인 밤나무 생산지에 경차관(敬差官)ㆍ범철관(泛鐵官)을 보내는데, 경상도에는 시년(式年)
마다 한번씩 채취하며, 충청도ㆍ전라도는 식년을 건너서 한 번씩 채취하고, 강원도는 국가 수요가 부족하면 간
혹 별도로 베어 취하기도 한다.
○ 서쪽 동산에 신실(神室) 6칸이 있어 단사(壇祠) 신위판 34위(位)를 봉안하였다.
○ 윤자영(尹子濚)의 제명기(題名記)와 최숙정(崔淑精)의 세심당기(洗心堂記)가 있다.
사옹원(司饔院) : 하나는 경복궁 승정원 남쪽에 있는데 후에 불탔으며, 하나는 창경궁 명정전(明政殿) 북쪽에 있
는데 후에 불타서 아울러 그대로 폐지하였다. 하나는 창덕궁 승정원 동쪽 단양문(端陽門)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광달문(廣達門) 서쪽에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사선서(司膳署)를 설치하였는데, 후에 고쳐서 사옹원을 설치하여 어선(御膳)
의 공급 및 궁궐 안 공궤(供饋) 등의 일을 맡겼으며, 구운 자기(磁器)는 1년에 2차씩, 봄 가을로 진상한다.
○ 도제조 1원, 제조 4원, 부제조 5원, 정 1원이며, 가례(嘉禮) 때에는 제거(提擧)ㆍ제검(提檢)을 모두 4원을 차출
하고, 사신을 잔치할 때에는 첨정(僉正) 1원을 차출한다. 판관은 감하고, 주부 3원, 직장 2원, 봉사 3원이요, 참봉
은 그대로 감하였다.
내의원(內醫院) : 예전엔 관상감(觀象監) 남쪽에 있었는데 후에 불타고, 창덕궁의 예문관 서쪽으로 옮겨 설치하
였다. 하나는 경희궁의 건명문(建明門) 안에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전의감(典醫監)을 두었는
데, 후에 나누어서 내의원을 두어 어약(御藥)의 조제를 맡게 하였다.
○ 도제조ㆍ제조ㆍ부제조ㆍ정ㆍ첨정ㆍ판관ㆍ주부ㆍ직장 각 1원, 봉사ㆍ부봉사 각 2원, 참봉 1원이다.
○ 영종 39년(1763)에 명하여 내국(內局)에서 제사드리는 신농씨(神農氏)의 위판의 궤[?]를 정청(正廳)에 설치
하고 공경하게 하였다.
○ 영종의 어필로 삼기성편 대소의심(蔘?性偏大小宜審)의 여덟 글자를 써서 현판으로 걸게 하였다.
○ 영종조에 태의 외원(太醫外院)을 창덕궁 궐문 밖에 설치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도로 파하였다. 약방이라고도
하고, 내국(內局)이라고도 한다.
상의원(尙衣院) : 예전에는 경복궁 영추문(迎秋門) 안 관상감 북쪽에 있었는데 후에 불타고,
창덕궁 단봉문(丹鳳門) 안으로 옮겼으며 불면각(?冕閣)이 있다.
하나는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안에 있으니 곧 옛날의 승문원이요, 후에는 종친 문안청(宗親問安廳)이 되었다.
숙종 신묘년(1711)에 상의원이 되었는데, 치미각(致美閣)이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에 의하여 공조서(供造署)를 설치하였는데, 후에 고쳐 상의원을 설치하여,
어의대(御衣?) 및 내부 재화(內府財貨)ㆍ금보(金寶) 등의 물건 공급을 맡았다.
○ 제조 2원, 부제조 1원, 정 1원이며, 관례(冠禮) 때에는 첨정 1원을 차출한다. 별좌(別坐)ㆍ판관 모두 감함 ㆍ
주부ㆍ별제(別提) 각 1원, 직장 1원이다.
○ 영종 어제의 봉안각기(奉安閣記) 및 김만기(金萬基)의 기문이 있다. 사복시(司僕寺) : 중부 수진방(壽進坊)
에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를 인하여 설치하였는데, 여마(輿馬)ㆍ구목(?牧) 등의 일을 맡는다.
○ 내시(內寺)는 예전에는 경복궁 영추문 안에 있었는데 후에 불탔다.
하나는 창경궁 선인문(宣仁門) 안 덕응방(德應坊)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개양문(開陽門) 안에 있는데,
내구(內廐)의 어승(御乘)을 맡는다.
○ 제조 2원ㆍ정 1원이요, 부정은 감하였으며, 첨정ㆍ판관 각 1원인데 모두 자벽하며, 주부 2원 중 1원은 자벽
하고, 내시(內寺)에는 내승(內乘)이 2원인데 1원은 당상관이며, 또 이마(理馬) 4원, 마의(馬醫) 3원이 있다.
○ 내구(內廐)에는 말 60필을 기르고 외구에는 말 □필을 기르는데 내시에서 매달 1, 11, 21일에 관조마(官調馬
말의 조련)를 행하고, 5, 10, 15, 20, 25, 30일에는 후원(後苑)에서 조마하며, 7, 17, 27일에는 사조마(私調馬)를
행하는데, 외시(外寺)의 관조마는 내시와 같고, 5, 15, 25일에 사조마를 행한다.
동가(動駕) 때 및 봉명(奉命) 때에는 각신 (閣臣 규장각의 관원)이 내구마를 타고 어가를 수행하도록 허락하며,
국구(國舅)ㆍ종친ㆍ의빈(儀賓)ㆍ승지와 사관ㆍ옥당ㆍ승전선전관(承傳宣傳官)ㆍ별군직(別軍職)은 모두
내구마를 타는 것을 허락한다.
운구(雲?) : 서부 정릉동(貞陵洞)에 있는데, 바로 말을 기르는 곳이다. 또 기구(麒?)는 본 사복시에 있으며,
인구(麟?)는 경복궁 안에 있고, 용구(龍?)는 창덕궁 금호문 밖에 있다.
○ 영종의 어제어마원기(御製御馬院記) 및 이숙감(李淑?)의 내승 제명기가 있다.
○ 시(寺) 곁 큰 내에 여름 장마철이면 말이 번번이 떠내려가 죽었는데 주부 이시현(李時顯)이 도랑을 파고 뚝
을 쌓은 뒤로는 그 우환이 없어졌다.
군기시(軍器寺) : 서부 황화방(皇華坊)에 있다. 개국 초기에 군기감을 설치하고 병기ㆍ기치(旗幟)ㆍ융장(戎仗)ㆍ
죽물(竹物)의 제조를 맡게 하였는데, 태종조에 승격하여 시(寺)로 삼았다.
○ 도제조 1원, 제조 2원이요, 정ㆍ부정ㆍ첨정은 각 1원씩 자벽한다. 별좌는 감하고, 판관은 자벽하며 주부와
함께 각 2원씩이다. 직장ㆍ봉사ㆍ부봉사ㆍ참봉 각 1원이다.
○ 화약고(火藥庫)는 소격서(昭格署)에 있고, 자문감(紫門監)은 궁궐 안에 있다.
○ 선조 13년(1580) 5월에 시(寺) 안의 못 물이 솟아올라 높이가 1길쯤이나 되었다.
○ 정이오(鄭以吾)의 화약고기가 있다.
내자시(內資寺) :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조 제도를 인하여 의성고(義成庫)를 설치하였
는데, 태종 3년(1403)에 고쳐서 내자시로 하였다. 내공미(內供米)ㆍ국수ㆍ술ㆍ장ㆍ기름ㆍ꿀ㆍ채소ㆍ과일ㆍ
내연직조(內宴織造) 등의 일을 맡았는데, 내연직조는 지금 폐지되었으며,
권초각(捲草閣 왕비의 산실)이 있다.
○ 제조 1원이요, 정ㆍ부정ㆍ첨정ㆍ판관 모두 감함 ㆍ주부ㆍ직장ㆍ봉사 각 1원이다.
내섬시(內贍寺) : 처음에는 북부 준수방(俊秀坊)에 있었는데 서부 인달방(仁達坊)으로 옮겼다. 개국 초에 고려의
관제에 따라 덕천고(德泉庫)를 두었는데, 태종 3년에 내섬시라고 고치고 각궁과 각전에 바치는 물건, 2품 이상에
게 주는 술과 왜인(倭人)ㆍ야인(野人)에게 주는 음식, <그리고> 직조(織造) 등의 일을 맡겼는데, 지금은 폐지하
고 기름ㆍ초(醋) 및 소선(素饍 채소)을 바친다.
○ 제조 1원이고, 정(正)ㆍ부정(副正)ㆍ첨정(僉正)ㆍ판관(判官)은 모두 감(減)하고, 주부(主簿)ㆍ직장(直長)ㆍ
봉사(奉事)는 각각 1원씩이다.
사도시(司?寺) : 예전에는 경복궁 내의원의 남쪽에 있었는데 지금 창덕궁 금호문 밖 북부 광화방(廣化坊)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고려의 제도에 따라 요물고(料物庫)를 두었는데, 태종 원년에 공정고(供正庫)라고 고쳤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어름(御? 임금의 미곡 창고)의 미곡과 궐내에 바치는 겨자와 장(醬) 등 물건을 맡
는다.
○ 제조 1원이고, 정ㆍ부정 모두 감하고, 첨정ㆍ주부 1원이고, 직장은 감하고, 봉사 1원이다.
예빈시(禮賓寺) : 예전에는 의정부 남쪽에 있었는데 뒤에 서부 양생방(養生坊)으로 옮겼으며, 정종(正宗) 2년에
남부 회현방(會賢坊) 남별궁(南別宮) 안에 옮겨 설치했다. 오로지 칙사(勅使 상국의 사신)에게 소용되는 물건을
바치는 일을 맡는다. 개국 초에 고려의 제도를 따라 설치하고 빈객(賓客)에게 술과 음식을 베푸는 일, 종친ㆍ
재신에게 음식을 내리는 일, 조신(朝臣)의 치제(致祭)를 맡겼다. 태종 3년에 의순고(義順庫)를 본시(本寺)에 합
쳤다. 정ㆍ부정ㆍ첨정ㆍ제검(提檢)ㆍ별좌(別座)ㆍ판관ㆍ별제(別提) 모두 감하고, 주부 2원, 직장 1원이고, 봉사
는 감하고, 참봉 2원이다.
군자감(軍資監) : 예전에는 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고 분감(分監)이 숭례문 안에 있었는데 지금은 모구 폐지
되고, 강감(江監)이 용산강(龍山江) 북쪽에 있다. 개국 초에 두어 군수 물자를 축적해 두는 일을 맡기고,
다만 제사(諸司)의 미두(米豆) 및 금려 위사(禁旅衛士)와 액정(掖庭 후궁(後宮)ㆍ 여관(女官)의 거처) 소속의 하
인과 공장(工匠)의 급료를 공급하는 일을 맡겼다. 지금은 급료를 나누어주는 곳이 되었다.
○ 도제조ㆍ제조 각 1원씩, 정 1원이고, 부정ㆍ첨정은 감하고, 판관ㆍ주부ㆍ직장ㆍ봉사 이상은 일에 따라 가설
(加設)하여 3원을 갖추고, 부봉사ㆍ참봉은 감하고, 판관 이하 4원이 창고를 나누어 맡았는데,
일소장(一所掌)ㆍ이소장ㆍ삼소장ㆍ사소장이라고 부른다.
○ 판관과 봉사의 자벽(自?) 및 봉사 이하의 승급 규정은 광흥창주(廣興倉註)에 상세히 보인다.
제용감(濟用監) : 중부 수진방(壽進坊)에 있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에 따라 제용고(濟用庫)를 두었다가 곧 감
(監)으로 고쳤다.
나라에 바치는 저마포(苧麻布)ㆍ피물(皮物)ㆍ인삼(人蔘)ㆍ사라(紗羅)ㆍ능단(綾段)ㆍ포화(布貨)ㆍ직조(織造)
를 맡았는데 지금은 폐지했다.
○ 제조가 1원이고, 정ㆍ부정ㆍ첨정 모두 감함, 판관 1원, 주부 2원이고, 직장ㆍ봉사ㆍ부봉사가 1원씩이고,
참봉은 감했다.
선공감(繕工監) : 처음에는 북부 의통방(義通坊)에 있었는데 뒤에 서부 여경방으로 옮겼다.
강감(江監)은 용산강(龍山江)에 있는데 개국 초에 두었으며, 토목(土木)과 영선(營繕)을 맡는다.
자문감(紫門監)은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고, 분감(分監)은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있는데,
대궐 안의 영선을 맡는다.
○ 제조가 2원이고, 정은 감하고, 부정이 1원이고, 첨정ㆍ판관 모두 감하고, 주부가 1원이고, 직장은 감하고,
봉사가 2원, 부봉사가 1원이고, 참봉은 감하고, 감역관(監役官)ㆍ가감역관(假監役官)이 3원씩이다.
장악원(掌樂院) : 처음에는 공서(公署)가 없어 태시(太寺)에 붙여 있다가 뒤에 봉상시 악학(奉常寺樂學)에 거처
하였고, 뒤에 서부 여경방 봉상시의 동쪽으로 수십 보 되는 곳에 세웠는데, 넓은 집과 뛰어난 구조가 여러 관청
청사 가운데에서 제일이라 백관(百官)이 의식(儀式)을 익히는 곳이 되고, 또 과장(科場)으로 선비를 시험보이는
곳이 되었다.
뒤에 다시 남부 명례방(明禮坊)으로 옮겼다. 개국 초에 전악서(典樂署)ㆍ아악서(雅樂署)를 두었는데, 세종조에
아악으로 태상시에 붙여 관습도감(慣習都監)을 설치하여 하나의 부서로 만들어 악학도감(樂學都監)이라 부르고,
아악서와 전악서를 합쳐서 한 부서로 만들어 장악서(掌樂署)라 부르며, 아악ㆍ향악(鄕樂)ㆍ당악(唐樂)을 합쳐서
좌우방(左右坊)을 설치하고 음률[聲律]을 가르치고 검열하는 일을 맡겼다.
뒤에 악학도감을 폐지하고, 장악서를 승격시켜 원으로 했다. 연산군 11년(1505)에 연방원(聯芳院)으로 개칭했다
가 중종 초에 옛 이름으로 환원하였다. 또 함방원(含芳院)ㆍ진향원(?香院)이 있었으나
모두 반정(反正) 뒤에 폐지했다.
○ 제조가 2원, 정ㆍ부정이 1원씩이고, 주부가 2원이고, 직장은 감하고, 또 전악(典樂) 2원, 부전악(副典樂) 1원,
전률(典律)ㆍ부전률(副典律)ㆍ전음(典音) 2원씩, 부전음(副典音) 4원, 전성(典聲) 10원, 부전성(副典聲) 23원이
있다.
악사(樂師)ㆍ악공(樂工)ㆍ악생(樂生)ㆍ관현(管絃)은 맹인(盲人)이다.
○ 아악(雅樂)은 좌방(左坊)에 속하는데 악사 2명, 악생 1백 95명이고, 속악(俗樂)은 우방(右坊)에 속하는데
악사 5명, 악공 4백 41명이다.
매월 2일과6일에 원중(院中)에서 좌기(坐起)하여 주악을 익히고, 전좌(殿坐 임금이 좌기하는 것)를 떠나는 날에
도 행하는데, 만약 그날 사고가 있으면 다음 날로 물려서 시행한다. 성현(成俔)의 기문[記]이 있다.
사재감(司宰監) : 처음에는 북부 의통방(義通坊)에 있었는데 뒤에 순화방(順化坊)으로 옮겼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에 따라 설치하였다. 물고기ㆍ고기ㆍ소금ㆍ땔나무ㆍ횃불 등의 일을 맡았는데, 횃불은 지금
폐지했다.
○ 제조가 1원이고, 정ㆍ부정은 감하고, 첨정ㆍ주부ㆍ직장ㆍ봉사가 1명씩이며, 참봉은 감했다.
관상감(觀象監) : 경복궁 상의원의 남쪽에 있었는데 뒤에 불타고, 하나는 북부 광화방(廣化坊)에 있는데 일영대
(日影臺 해시계의 한 가지)가 있다. 개국 초? 고려 제도를 따라 서운관(書雲觀)을 두고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
역수(曆數)ㆍ점주(占籌)ㆍ측후(測候)ㆍ각루(刻漏) 등의 일들을 맡겼는데, 세종 15년(1433)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연산군 때에 사력서(司曆署)라 개칭했다가, 중종 초기에 옛 이름으로 환원하였다.
○ 영사(領事) 1원, 제조 2원, 정 1원이고, 부정은 감하고, 첨정ㆍ판관ㆍ주부가 1원씩이고, 천문학 교수가 1원이
고, 지리학 교수는 폐지했고, 천문학 겸교수가 3원이고, 지리학 겸교수는 폐지했고,
명과학 겸교수(命課學兼敎授)가 원, 직장ㆍ봉사가 2원씩이고, 부봉사가 1원이고, 천문학 훈도ㆍ지리학 훈도가
1원씩, 명과학 훈도가 1원, 참봉이 2원, 천문학 습독관(天文學習讀官)이 10원, 금루관(禁漏官)이 30원이다.
일월식술자(日月食述者)ㆍ명과(命課)는 맹인이다.
○ 영종 46년(1770)에 본감에 흠경각(欽敬閣)을 세우게 하여 개국 초의 석각천문도(石刻天文圖)를 보관하였다.
○ 임금이 지은 기문과 임금이 쓴 편액이 있다. 매년 역서[曆日]4천 건을 간행하여 여러 중앙 관서와 각도 및
종친과 문신ㆍ무신의 당상관에게 배포한다. 전의감(典醫監) : 중부 견평방(堅平坊)에 있다. 개국 초에 설치했다.
대궐 안에서 쓰는 의약(醫藥)을 바치고 신하에게 <약을> 내려 주는 일을 맡는다. 선조 36년에 치종청(治腫廳)을
다시 설치하였다가 후에 본감(本監)에 합쳤다.
○ 제조 2원, 정 1원이고, 부정은 감하고, 첨정ㆍ판관ㆍ주부ㆍ의학교수 1원씩, 직장 2원, 봉사 1원, 부봉사 2원,
의학 훈도 1원, 참봉 2원, 습독관(習讀官) 30원이다.
사역원(司譯院) : 서부 적선방에 있고, 개국 초에 설치했다. 여러 나라의 말을 번역하는 일과 사대(事大) 교린
(交隣)하는 일을 맡았다. 한(漢)ㆍ청(淸)ㆍ몽(蒙)ㆍ왜(倭)의 사학(四學) 및 우어청(偶語廳)이 있다.
○ 도제조 1원, 제조 2원, 정 1원이고, 부정은 감하고, 첨정ㆍ판관ㆍ주부가 1원씩이고, 한학교수 4원 중에서 1원
은 문신(文臣)으로 차출하는 수도 있고, 직장 1원, 봉사ㆍ부봉사 2원씩, 한학 훈도 4원, 청학(淸學)ㆍ몽학(蒙學)ㆍ
왜학(倭學) 훈도 2원씩, 봉사 2원, 한학 습독관(漢學習讀官) 30원이다.
○ 원(院)에 열□루(冽□樓)가 있다.
○ 《통문관지(通文館志)》 4권이 있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 하나는 창경궁 집현문(集賢門) 밖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건명문(建明門) 안 남쪽에
있다. 개국 초에 세자궁(世子宮) 소속으로 두었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시강(侍講 임금ㆍ세자 등에게
강의하는 것)하고 도의(道義)를 바로잡아 간하는 일을 맡았다. 뒤에 시강원(侍講院)으로 고쳤다.
○ 사(師)ㆍ부(傅) 모두 정1품 ㆍ이사(貳師) 종1품 ㆍ좌빈객(左賓客)ㆍ우빈객(右賓客) 모두 정2품 ㆍ좌부비객
(左副賓客)ㆍ우부빈객(右副賓客) 모두 정2품 ㆍ찬선(贊善)은 학문과 행동이 선비들 사이에 명망이 있는 사람
으로 의망(擬望)하여 차출하고, 진선(進善)도 같고, 보덕(輔德)ㆍ겸보덕(兼輔德) 모두 정3품 ㆍ진선(進善) ㆍ
필선(弼善)ㆍ겸필선(兼弼善) 정4품ㆍ문학(文學)ㆍ겸문학(兼文學) 모두 정5품 ㆍ사서(司書)ㆍ겸사서(兼司書)
모두 정6품 ㆍ설서(說書)ㆍ겸설서(兼說書) 모두 정7품 ㆍ자의(諮議) 정7품 는 특별히 천거하여 쓰는데, 합당한
사람이 없으면 묘당(廟堂 비변사)에 물어서 유학(幼學)이라도 관계 없이 1원씩을 차출한다.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 : 세종 30년(1448)에 창설했다. 직무는 시강원과 같다. 인조 27년(1649)에 다시 두었고,
영종 27년(1751)에 다시 두었고, 35년에도 다시 두었고, 순조 29년(1829)에 다시 두었다.
○ 사ㆍ부 모두 종1품 ㆍ좌유서(左諭書)ㆍ우유서(右諭書) 3품당상부터 종2품까지 ㆍ좌익선(左翊善)ㆍ우익선
(右翊善) 종4품 ㆍ좌권독(左勸讀)ㆍ우권독(右勸讀 종5품 은 학문과 행동이 선비들 사이에 명망이 있는 사람으
로 의망하여 모두 단부(單付)하고, 좌찬독(左贊讀)ㆍ우찬독(右贊讀) 종6품 은 1명씩이다.
전설사(典設司) : 경복궁 홍례문(弘禮門) 밖에 있었는데, 뒤에 불타서 창덕궁 진선문(進善門) 왼쪽으로 옮겼다.
하나는 경희궁 건명문(建明門) 안에 있는데 창설한 햇수는 자세하지 않다. 어막(御幕)을 맡았고 대궐 안팎의
여러 상사(上司)에 소용되는 차일(遮日)ㆍ휘장을 진배(進拜)한다.
○ 수제검(守提檢) 정4품ㆍ종4품 ㆍ별좌(別坐) 모두 감하고, 별제(別提) 1원, 별검(別檢) 1원이다.
광흥창(廣興倉) : 서부 서강방(西江坊)의 와우산(臥牛山) 아래에 있다. 백관의 녹봉(祿俸)을 맡았다.
○ 수(守) 정4품 ㆍ영(令) 각 1원씩, 주부(主簿) 1원, 직장(直長)ㆍ봉사(奉事) 자벽(自?)하는 것이 모두 같다 는
가설(加設)하고, 영 이하는 일에 따라 옮겨서 2원을 갖추고, 부봉사(副奉事)는 감한다.
○ 제일루(第一樓)와 정종(正宗)의 어제시(御製詩)가 있다. 내수사(內需司) :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있다.
본조에서 창설했다. 대궐 안에서 쓰이는 미곡ㆍ포목 및 잡물(雜物)과 노비 등의 일을 맡는다.
○ 전수(典需)ㆍ별좌(別座)ㆍ부전수(副典需)ㆍ별제(別提)ㆍ전회(典會)ㆍ전곡(典穀) 1원씩, 전화(典貨) 2원,
서제(書題) 20원이다.
종묘서(宗廟署) : 종묘의 담 안 동쪽에 있으며, 사당[寢廟]을 지키는 일을 맡는다.
○ 도제조ㆍ제조 1원씩, 영(令) 2원, 직장(直長) 1원이며, 봉사(奉事)는 감하고, 부봉사(副奉事) 1원이다.
사직서(社稷署) : 사직단 밖 북쪽에 있다. 개국 초에 고려의 제도에 따라 단(壇)을 두었다가 바로 서(署)로 고쳤
다. 제사지내는 곳의 청소를 맡았다. ○ 도제조ㆍ제조 1원씩, 영 3원이고, 직장ㆍ참봉 모두 감함 이다.
○ 구리 시루[銅甑] 1좌(座)가 있는데, 풍년을 비는 큰 제사의 기장[粱] <밥>을 지을 때, 시루가 천둥치듯이
울면 풍년의 징조라고 한다.
경모궁(景慕宮) : 궁 담 안에 있다. 정종(正宗) 초년에 설치했는데, 궁묘(宮廟)를 수위하는 일을 맡는다.
○ 도제조ㆍ제조 1원씩, 영 3원, 직장ㆍ참봉 모두 감함 이다. ○ 《경모궁지(景慕宮志)》 □권이 있다.
영희전(永禧殿) : 전(殿)의 담 안에 있는데, 침전(寢殿)을 경비하는 일을 맡는다.
○ 도제조ㆍ제조 1원씩, 영 3원, 참봉 1원이다.
평시서(平市署) : 예전에 중부 견평방(堅平坊)에 있었는데 뒤에 중부 경행방(慶幸坊)으로 옮겼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경시서(京市署)를 두고, 시장을 단속하고 두량과 척도를 고르게 하고 물가를
올리고 내리는 등의 일을 맡는다. <평시서로> 이름을 고친 햇수는 자세하지 않다.
○ 제조ㆍ영ㆍ주부ㆍ직장이 1원씩이고, 봉사(奉事)는 감했다.
의영고(義盈庫) : 서부 적선방(積善坊)에 있다. 개국 초에 고려의 제도에 따라 설치하여, 유밀(油密 기름과
꿀로 만든 과자)ㆍ황랍(黃蠟)ㆍ소물(素物 소찬(素饌)으로 쓰는 나물 등속)ㆍ후추 등의 물건을 맡았는데,
계속해서 오로지 소선(素饍 소물로 만든 요리) 재료 및 대궐 안에서 밤에 켜는 초를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
태종 3년(1403)에 연복궁(延福宮)을 본고(本庫)에 합쳤다.
○ 영은 감하고, 주부ㆍ직장ㆍ봉사가 1원씩이다. 장흥고(長興庫) : 예전에는 남부 장흥방(長興坊)에 있었는데
뒤에 서부 인달방(仁達坊)으로 옮겼다. 개국 초에 고려의 제도를 따라 설치하여 자리ㆍ유둔(油芚 기름을 먹여
비를 막는 차일 같은 것)ㆍ종이 등의 물건을 맡겼다. 태종 3년에 흥신궁(興信宮)을 본고(本庫)에 합쳤다.
또 뒤에 풍저창(?儲倉)을 본고에 합쳤다. ○ 제조 1원이고, 영은 감하고, 주부ㆍ직장ㆍ봉사가 1원씩이다.
○ 대궐 안의 여러 상사(上司)에서 쓰는 종이를 매월 정해진 규식대로 진배(進排)한다.
빙고(氷庫) : 동고(東庫)와 서고(西庫) 두 고를 두어서 얼음의 저장과 발급을 맡는다.
동고는 두모포(豆毛浦)에 있어 제사 소용에 바치며, 얼음을 저장할 때에는 저자도(楮子島) 사이에서 개천의
하류를 피하는데, 얼음의 저장량은 1만 2백 44짝[丁]이다.
<이곳에> 옥호루(玉壺樓)가 있어 명승(名勝)이라 일컫는다. 서고는 한강 하류 둔지산(芚智山) 기슭에 있다.
어주(御廚 임금의 부엌)에 바치고 백관에게 나누어 주며, 얼음의 저장량은 13만 4천 9백 74짝이다.
내빙고(內氷庫)는 자문감(紫門監)에 붙여서 대궐 안에 두어 오로지 임금에게만 썼는데,
정종 13년(1789)에 양화진(楊花津)에 내다 설치했다.
○ 제조가 1원이고, 별좌(別座)는 감하고, 별제(別提)ㆍ별검(別檢)이 2원씩인데 동고와 서고로 각기 1원씩 나눈
다.
○ 종묘 사직 이하의 제향(祭享)에는 동고에서는 3월 1일부터 시작하여 상강일(霜降日)에 이르러 그치고, 대궐
안의 각전(各殿)에 바치는 것은 서고에서 2월 1일부터 시작하여 10월 그믐날에 이르러 그치므로, 2월부터 10월
사이에 얼음을 바치는 일은 아주 없다. 비변사ㆍ승정원ㆍ홍문관ㆍ시강원ㆍ익위사ㆍ춘추관ㆍ병조ㆍ내의원ㆍ
양현고는 5월 보름 이후로부터 7월 보름 이전까지 얼음을 나누어 주고, 종친(宗親)과 동반(東班)과 서반(西班)
의 정2품 이상, 육승지와 삼사(三司)의 장관, 육조(六曹)의 여러 상사(上司), 규장각의 시임 관원과 원임 관원
에게는 6월 1일부터 그믐까지 나누어 준다.
○ 매년 6월에 제사(諸司)ㆍ종친 및 문무 당상관과 내시부 당상관으로 70세 이상의 한산 당상관(閒散堂上官),
활인서(活人署)의 환자, 의금부와 전옥서의 죄수에게 얼음을 나누어 준다.
전생서(典牲署) : 목멱산(木覓山) 남쪽, 남부 둔지방(屯智坊)에 있는데, 희생(犧牲)을 기르는 일을 맡는다.
○ 판관 1원이고, 주부는 감하고, 직장 1원이고, 봉사는 감하고, 부봉사 1원이고, 참봉은 감한다.
○ 이병연(李秉淵)의 간촬헌기(看茁軒記)가 있다. 곁에 지정(池亭)이 있는데, 편액을 불구정(不垢亭)이라
했다.
장원서(掌苑署) :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는데, 바로 성삼문(成三問)의 옛 집으로 손수 심은 소나무가 있다.
이상의 <빙고ㆍ전생서ㆍ장원서> 세 서(署)는 혹은 개국 초에 창설했다고도 하나, 햇수는 모두 자세하지 않다.
원유(苑? 임금의 동산)의 꽃과 과일나무를 맡는다.
○ 제조 1원이고, 장원(掌苑) 정6품은 감함, 별제 2원, 봉사 1원이다. 또 별감(別監) 20원, 신화(愼花)ㆍ
신과(愼果)ㆍ신금(愼禽)ㆍ부신금(副愼禽) 1원씩, 신수(愼獸)ㆍ부신수(副愼獸) 3원씩이다.
○ 경원(京苑)은 용산ㆍ한강 등지에 있고, 외원(外苑)은 강화부(江華府)ㆍ남양(南陽)ㆍ개성부(開城府)ㆍ
과천(果川)ㆍ고양(高陽)ㆍ양주(楊州)ㆍ부평(富平) 등지에 있는데, 각각 원직(苑直)이 있다.
○ 매년 중양(重陽 9월 9일)에 대궐과 내각(內閣)에 국화 화분을 바친다.
사포서(司圃署) : 북부 준수방(俊秀坊)에 있는데 뒤에 북부 수진방(壽進坊)으로 옮겼다. 본조에서 창설했
는데, 원포(園圃)와 채소를 맡는다.
○ 제조 1원이고, 사포(司圃) 정6품은 감함, 별제 2원, 직장 1원이고, 별검(別檢)은 감한다.
양현고(養賢庫) : 성균관 북쪽에 있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설치했는데, 성균관의 유생에게 쌀과 콩
등의 물건을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 ○ 주부ㆍ직장ㆍ봉사가 1원씩이다.
조지서(造紙署) : 창의문(彰義門) 밖 탕춘대(蕩春臺)에 있고, 세종조에 창설했다. 표전(表箋)ㆍ자문지(咨文紙)
및 여러 가지 종이를 만드는 일을 맡는다. ○ 제조 1원이고, 사지(司紙)는 감하고, 별제가 3원이다.
혜민서(惠民署) : 남부 태평관(太平館)에 있다. 개국 초에는 혜민고국(惠民庫局)을 두었는데,
태종조에 혜민서로 고쳤다. 의약(醫藥), 백성의 질병을 고치는 일 및 의녀(醫女)를 교육하는 일을 맡는다.
인조 15년(1637)에 폐지하고 전의감(典醫監)에 합쳤다가 곧 다시 설치했다.
○ 제조 2원, 주부ㆍ의학교수(醫學敎授)ㆍ직장ㆍ봉사ㆍ의학훈도(醫學訓導) 1원씩, 참봉 4원이다.
도화서(圖?署) : 예전에는 중부 견평방(堅平坊)에 있었는데 뒤에 남부 태평방(太平坊)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도화원(圖?院)을 두어 그림 그리는 일을 맡았는데, 뒤에 서(署)로 고쳤다. 창설한 햇수는 자세하지
않은데, 혹은 개국 초에 세웠다고도 한다.
○ 제조 1원이고, 별제는 의논해서 감하고, 겸교수(兼敎授)ㆍ선화(善?)ㆍ선회(善繪)ㆍ화사(?史) 1원씩,
전자관(篆字官) 2원, 회¬(繪史) 2원, 화원(?員) 30원이다.
전옥서(典獄署) : 중부 서린방(瑞麟坊)에 있다. 개국 초에 고려의 제도에 따라 두었는데, 죄수를 맡았다.
○ 부제조 1원, 주부 1원이고, 봉사는 감하고, 참봉 2원이다.
○ 세상에 전하기를, 서의 터가 매우 길하기 때문에, 여기에 옥(獄)을 두어 죄수들로 하여금 여위고 죽는
우환을 없게 하고자 했다고 한다. 서의 문 밖에 홍전문(紅箭門)을 세웠다.
활인서(活人署) : 동서(東署)는 동부 연희방(燕喜坊)에 있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져 못 쓰게 되었고, 서서(西署)
는 용산강(龍山江)에 있는데 성안의 전염병 환자들이 모두 나아가 치료를 받는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동대비원(東大悲院)과 서대비원을 두었다가 뒤에 동활인서와 서활인서로 고쳤다.
도성의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맡는다.
○ 제조 1원, 별제 2원이고, 참봉은 감한다. 와서(瓦署) : 남부 둔지방(屯智坊)에 있다. 개국 초에 동서요(東西窯)
를 두었다가 곧바로 와서(瓦署)라고 고쳤다. 기와와 벽돌을 만드는 일을 맡는다. 또 별서(別署)가 있어서 기와를
구워서 흥정해 파는 일을 맡는다.
○ 제조 1원, 별제(別提) 2원이다. 중학(中學) : 북부 관광방(觀光坊)에 있다. 태종 11년(1411)에 처음으로 학당
(學堂)을 두었는데, 곧 고쳐서 중ㆍ동ㆍ서ㆍ남의 사부학당(四部學堂)을 두었다. 관할하는 유생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일을 맡았고, 유생 1백 명을 맡아 양성하는 것은 사학이 같다. 뒤에 북부학당을 더 두었으나 곧 폐지
했다. 선조 임진년 병화 뒤에 서울 안에 중학과 서학 두 학만을 세웠는데, 광해 기유년에 사학을 옛 제도와 같이
다시 세웠다. 현종 2년에 북학을 다시 두었다가 곧 폐지했다.
○ 교수(敎授)ㆍ훈도가 각각 1원씩이다. 유생 5명을 양성하는 것은 다른 학당도 모두 같다.
동학(東學) : 동부 창선방(彰善坊)에 있다. 남학(南學) : 남부 성명방(誠明坊)에 있다.
서학(西學) : 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다. 중부(中部)ㆍ동부(東部)ㆍ남부(南部)ㆍ서부(西部)ㆍ북부(北部) :
모두 아래 한성부(漢城府) 편에 상세히 있다.
기로소(耆老所) :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다. 태조 3년에 임금의 나이가 60을 넘자 기사(耆社)에 들어가, 문신ㆍ
재신으로 정2품 실직(實職)에 있으면서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을 선발하도록 명하여 비로소 입사하는 것을
허락하되, 음관(蔭官)ㆍ무관은 참여하지 못하였다. 서로 모이는 곳이 되었다.
○ 숙종대왕 45년에 임금의 나이 60세에 기사에 들어갔고, 영수각(靈壽閣)을 세워서 어첩(御牒 왕실의 보첩)을
봉안(奉安)했다. 영종대왕 19년에 임금 나이 50세에 기사에 들어갔다.
○ 정2품 실직에 있는 사람 가운데서 나이가 70세인 사람은 모두 종2품으로 1, 2명을 옛 규례에 따라 계품하여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 당상(堂上)은 정한 수가 없고, 수직관(守直官) 2원이다.
○ 태조가 서루(西樓) 벽 위에 친필로 어휘(御諱)를 썼는데, 뒤에 병란(兵亂)으로 불탔다.
○ 김육(金堉)의 제명기(題名記)가 있다. ○ 옛 풍속으로 해마다 3월 상사(上社)와 9월 9일에 기영회(耆英會)를
베풀어서 보제원루(普濟院樓)에서 잔치를 하며 투호(投壺)하고 낙양춘곡(洛陽春曲)을 연주하였다. 또 기영회를
훈련원이나 혹은 반송정(盤松亭)에서 베풀기도 했는데, 종친ㆍ재신으로 나이가 70세인 2품 이상 및 정1품 이상
의 경연 당상관이 참가하였다.
비변사(備邊司) : 중부 정선방(貞善坊)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밖에 있다. 명종 10년에 창설하여
중외(中外)의 국정(國政)과 군사(軍事)에 관한 중요한 사무를 총괄하여 거느리는 일을 맡았는데,
일명 주사(籌司)라고 한다 .○ 도제조ㆍ제조ㆍ부제조ㆍ낭청 12원이다. ○ 지금은 의정부에 속한다.
제언사(堤堰司) : 본조에서 창설했다. 각도의 제방을 보수하는 일과 수리(水利)를 맡았다. 관서의 이름은 있으나
청사는 없다. 중간에 폐지했다가 현종 3년(1662)에 다시 두었는데, 뒤에 또 폐지하여 비변사(備邊司)로 사무를
옮겼다.
○ 도제조 3원, 제조 2원, 낭청 1원이다.
장생전(長生殿) : 북부 관광방(觀光坊)에 있다. 세종 14년(1432)에 창설했다. 동원 비기(東園?器 궁궐에서 쓰는
관곽(棺槨)를 봉장(奉藏)했다.
○ 도제조 1원, 제조ㆍ낭청이 3원씩인데, 호조ㆍ예조ㆍ공조(工曹)의 판서와 낭관이 각각 겸직한다.
선혜청(宣惠廳) : 내청(內廳)은 서부 양생방(養生坊)에 있으니, 곧 인애궁(仁愛宮)의 옛터이다.
인조 갑자년(1624)에 지었는데, 별창(別倉)은 용강(龍江)에 있고 북창(北倉)은 삼청동(三淸洞)에 있으며, 동창
(東倉)은 옛 장용영(壯勇營)에 있다.
개국 초 성종 신축년이라고도 한다. 에 상평청(常平廳)을 창설하여 오로지 오참(五站)의 칙사 비용을 맡았는데,
광해 무신년에 처음으로 경기청(京畿廳)을 두었다가 상평청에 합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대동미(大同米)
와 포전(布錢)을 출납하는 일을 맡았다. 인조 2년(1608)에 강원청(江原廳)을 두어 호조에 붙였고,
효종 3년(1652)에 호서청(湖西廳)을 두어 강원청과 함께 모두 본청에 붙였고, 9년에 호남청(湖南廳)을 두고,
숙종 3년(1677)에 영남청(嶺南廳)을 두었으며, 12년에 진휼청(賑恤廳)을 본청에 이속(移屬)하였다.
34년에 해서청(海西廳)을 두고, 영종 29년(1753)에 균역청(均役廳)을 본청에 합쳤으며, 청의 소속에 또 공잉색
(公剩色 색은 지금의 계(係)와 같음)이 있는데 강원청에 붙였다.
○ 도제조 3원, 제조 3원이고, 낭청은 5원인데, 영남과 경기를 겸찰(兼察)하며, 호남ㆍ강원을 겸찰하며 호서와
해서를 겸찰하며, 진휼청과 상평청을 겸찰하며, 균역청과 상진청(常賑廳)을 겸찰하여, 오소(五所)로 나누어 정
하여 다섯 낭청이 각각 주관한다.
○ 선조 계사년(1593)에 환도(還都)하여, 임금이 용산창(龍山倉)에 가서 남아 있는 곡식을 창고에서 내어 방민
(坊民 도성 안의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다.
진휼청(賑恤廳) : 소의문(昭義門) 안에 있다. 인조 4년에 비변사에게 구황청(救荒廳)을 관할하게 하면서 상평청
(常平廳)에 합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비국에 붙였다.
현종 신축년(1661)에 새로 설치하고, 숙종 12년(1686)에 본청(本廳)으로 이속하였다.
균역청(均役廳) : 남부 훈도방(薰陶坊)에 있다. 지금은 남창(南倉)이라고 부른다. 영종 27년(1751)에 창설하여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며, 옛 수어청(守禦廳)에 창고를 설치했는데, 29년에 본청에 붙였다. 32년에 상평청ㆍ
진휼청과 합청(合廳)했다. 36년에 또 더 늘려서 이곳에 옮겨 세웠는데, 별하고(別下庫)가 있다.
준천사(濬川司) : 중부 장통방(長通坊)에 있다. 영종 36년에 창설하여 성 안의 개천과 도랑을 소통하도록 파는
일과 사산(四山)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 ○ 도제조 3원, 제조 6원, 도청(都廳) 1원, 낭청 3원이다.
주교사(舟橋司) : 정종 14년(1790)에 창설했다. 임금이 거둥할 때에 배다리와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의 조운
(漕運) 등의 일을 맡았는데, 준천사에 붙였다. 임금이 거둥하여 물을 건널 때의 주사대장(舟師大將)은 유도 장신
(留都將臣)으로 차출한다. ○ 도제조ㆍ제조ㆍ도청은 모두 준천사에서 예겸(例兼)한다.
주자소(鑄字所) : 선인문(宣仁門) 안에 있다. 태종 3년(1403)에 비로소 주자소를 두어 《고주시전(古註詩傳)》
과 《좌씨전(左氏傳)》의 자본(字本) 수십만 자를 주조하고, 정해자(丁亥字)라 이름하고,
권근(權近)이 발문(跋文)을 지었다. 세종 2년(1420)에 그 글자가 바르지 못하므로 다시 녹여서 새로 주조했는데,
글자 모양이 정밀하며 이름하여 경자자(庚子字)라 한다.
변계량(卞季良)이 발문을 지었다. 16년에 또 경연에 소장된 《효순사실(孝順事實)》ㆍ《위선음즐(僞善陰?)》ㆍ
《논어(論語)》 등의 책을 내다가 자본(字本)을 삼았는데, 경자자에 비하여 조금 크고 글자의 체가 매우 좋으며,
20여만 자를 주조하고, 이름하여 갑인자(甲寅字)라 한다. 또 세조를 명하여 《강목(網目)》의 큰 글자체를 납으
로 틀을 만들어 《강목》을 박으니, 즉 지금 이른바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이다. 김빈(金?)이 발문을 지었
다. 문종 2년(1452)에 경자자를 다시 녹여서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 명하여 쓰게 했는데,
이름하여 임신자(壬申字)라 하고, 강희안(姜希顔)에게 명하여 쓰게 하고 이름하여 을해자(乙亥字)라 한다.
10년에 원각경(圓覺經)을 박으려고 정난종(鄭蘭宗)에게 명하여 쓰게 했는데 글자체가 바르지 못하며, 이름하여
을유자(乙酉字)라 한다.
성종 2년(1471)에 왕형공 구양공 집자(王荊公歐陽公集字)를 사용하여 주조했는데, 글자체가 경인자보다 작고
더욱 정밀하며, 이름하여 신묘자(辛卯字)라 한다.
또 중국의 신판 강목자(新板綱目字)를 얻어서 주조했는데, 이름하여 계축자(癸丑字)라 한다.
영조 48년 정종이 춘저(春邸)에 있을 때 갑인자를 자본으로 하여 15만 자를 주조하게 하여 교서관에 저장하고,
정종 원년에 전의 자본을 사용하여 또 15만 자를 주조하여 규장각에 저장했는데, 이것을 정유자(丁酉字)라
한다.
18년에 모두 지금의 <주자>소, 즉 옛 홍문관에 옮겨 보관하고, 이름하여 전자소(鐫字所)라고 했다. 또 자전자
(字典字)를 사용하여 나무로 대소 32만여 자를 새겼는데, 생생자(生生字)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듬해에 또 생생자를 본으로 하여 본자(本字)와 같이 주조하여 정리의(整理儀)를 박았는데, 이름하여 정리자
(整理字)라 한다.
○ 정종조에 폐청으로 내각주자소(內閣鑄字所)를 삼고, 규영신부(奎瀛新府)라고 편액했다.
또 판당(板堂)이 있어서 책판(冊板)과 주자(鑄字)를 보관해 두고, 무릇 내각에서 서적을 박을 때에는 언제나 이
주자소를 개국(開局)한다.
장치(藏置)한 동주자(銅鑄字)는 이름이 생생자다. ○ 곁에 고문관(考文館)이 있는데, 어느 때 창설한 것인지 알
지 못한다. 혹은 바로 옛 홍문관이라고도 한다.
무직 공서(武職公署) 중추부(中樞府) : 서부 적선방(積善坊)에 있으니, 곧 예조의 남쪽이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
를 따라 중추원을 두었는데, 정종 2년(1400)에 삼군부(三軍府)로 고쳤고, 태종 9년(1409)에 삼군부를 폐지하여
다시 중추원을 두었으며, 세조조에 부(府)로 고쳤다. 맡아보는 일은 없고, 문신ㆍ무신 당상관으로 소임이 없는
사람들을 대우한다.
○ 영사(領事) 1원, 판사 2원, 지사 6원, 동지사 8원, 첨지사(僉知事) 8원이고, 경력(經歷) 1원과 도사 2원은 소속
경력소(經歷所)에 붙인다.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 예전에는 경복궁 광화문 동쪽에 있었는데 뒤에 불탔다.
하나는 창덕궁의 홍문관 서쪽에 있었는데, 정종 5년(1781)에 창경궁 연광문(延光門) 안, 동룡문(銅龍門) 북쪽에
옮겨 설치하니, 옛 연복전(延福殿)이다. 하나는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안 남쪽에 있었는데 뒤에 불탔다.
하나는 경희궁 개양문(開陽門) 안 서쪽에 있다. 태조 2년(1393)에 고려 제도를 따라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두었고, 태종 9년에 삼군부를 폐지하고 진무소(鎭撫所)를 만들어 병조에 예속시키고, 금려(禁旅)를 거느리고 윤
번(輪番)으로 숙위(宿衛)하는 일을 맡겼다.
정종 28년에 또 삼군진무소를 고쳐서 다시 의흥부라고 불렀다. 문종 원년에 삼군을 오위(五衛)라고 고쳤다.
세조조에 진무소를 고쳐서 오위도총부로 하여 오위를 맡아 다스리고 군무(軍務)를 전적으로 맡겨, 병조에 예속
시키지 않았다. 선조 임진년 뒤에 위제(衛制)를 아주 폐지하여 관명(官名)만 남아 있다.
○ 도총관(都摠管) 정2품 5원, 부총관(副摠管) 종2품 5원, 경력 6원, 도사 6원이다.
○ 서거정(徐居正)의 제명기(題名記)가 있다.
오위(五衛) : 지금은 오위 병제(五衛兵制)가 아주 폐지되어 관명만 남았다. 장(將)과 부장(部將)이 순번을 나누어
입직하여 순경(巡更 야간 순행)한다. 의흥위(義興衛) : 중위(中衛)이다.
○ 갑사보충대(甲士補充隊)가 속한다.
○ 서울의 중부(中部), 개성부(開城府), 경기의 양주(楊州)ㆍ광주(廣州)ㆍ수원(水原)ㆍ장단(長湍)의 진관 군사
(鎭管軍士)가 중부(中部)에 속하고, 강원도의 강릉(江陵)ㆍ원주(原州)ㆍ회양(淮陽)의 진관 군사가 좌부(左部)에
속하고, 충청도의 공주(公州)ㆍ홍주(洪州)의 진관 군사가 우부(右部)에 속하며, 충주(忠州)ㆍ청주(淸州)의 진관
군사가 전부(前部)에 속하고, 황해도의 황주(黃州)ㆍ해주(海州)의 진관 군사가 후부(後部)에 속한다.
용양위(龍?衛) : 좌위(左衛)이다.
○ 별시위대(別侍衛隊) 군사가 속한다.
○ 서울 동부(東部), 경상도 대구(大邱)의 진관 군사는 중부에 속하고, 경주(慶州)의 진관 군사는 좌부에 속하고,
진주(晉州)의 진관 군사는 우부에 속하고, 김해(金海)의 진관 군사는 전부에 속하고, 상주(尙州)ㆍ안동(安東)의
진관 군사는 후부에 속한다. 호분위(虎賁衛) : 우위(右衛)이다.
○ 족친위(族親衛)ㆍ친군위(親軍衛)ㆍ팽배(彭排 호분위에 딸린 군사)가 속한다.
○ 서울의 서부, 평안도의 안주(安州)의 진관 군사는 중부에 속하고, 의주(義州)ㆍ귀성(龜城)ㆍ삭주(朔州)의
진관 군사와 창성(昌城)ㆍ창주(昌洲)ㆍ방산(方山)ㆍ인산(麟山)의 진관 군사는 좌부에 속하고, 성천(成川)의
진관 군사는 우부에 속하며, 영변(寧邊)ㆍ강계(江界)ㆍ벽동(碧潼)의 진관 군사는 전부에 속하고, 평양(平壤)의
진관 군사는 후부에 속한다. 충좌위(忠佐衛) : 전위(前衛)이다.
○ 충의위(忠義衛)ㆍ충찬위(忠贊衛)ㆍ파적위(破敵衛)가 속한다.
○ 서울의 남부(南部), 전라도의 전주(全州)의 진관 군사는 중부에 속하고, 순천(順天)의 진관 군사는 좌부에 속
하고, 나주(羅州)의 진관 군사는 우부에 속하며, 장흥(長興)ㆍ제주(濟州)의 진관 군사는 전부에 속하고,
남원(南原)의 진관 군사는 후부에 속한다. 충무위(忠武衛) : 후위(後衛)이다.
○ 충순위(忠順衛)ㆍ정병(正兵)ㆍ장용위(壯勇衛)가 속한다.
○ 서울의 북부(北部), 영안도(永安道)의 북청(北靑)의 진관 군사는 중부에 속하고, 갑산(甲山)의 진관 군사,
삼수(三水)ㆍ혜산(惠山)의 진관 군사는 좌부에 속하고, 온성(穩城)ㆍ경원(慶源)ㆍ경흥(慶興)의 진관 군사, 유원
(柔遠)ㆍ미전(美錢)ㆍ훈융(訓戎)의 진관 군사는 우부에 속하고, 경성(鏡城)ㆍ부령(富寧)ㆍ회령(會寧)ㆍ
종성(鍾城)의 진관 군사와 고령(高嶺)ㆍ동관(潼關)의 진관 군사는 전부에 속하고, 영흥(永興)ㆍ안변(安邊)의
진관 군사는 후부에 속한다.
○ <위의 오위는> 개국 초에 고려 제도에 따라 의흥친군 십위(義興親軍十衛)를 두니, 좌위(左衛)ㆍ우위(右衛)ㆍ
응양위(鷹揚衛)ㆍ금오위(金吾衛)ㆍ좌우위(左右衛)ㆍ신호위(神虎衛)ㆍ흥위위(興威衛)ㆍ비순위(備巡衛)ㆍ
천우위(千牛衛)ㆍ감문위(監門衛)이다.
문종 원년에 오위라고 고쳐 부르고 군무(軍務)를 맡겼는데, 그 소속의 부장청(部將廳)ㆍ군직청(軍直廳)의
장(將)과 부장(部將)이 순번을 나누어 입직해서 순경한다.
○ 의흥위는 지금은 외소(外所)라고 부르고, 조사위장(曹司衛將)이 주관한다.
○ 외소ㆍ군직청(軍職廳)은 모두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밖에 있으니, 중부 정선방(貞善坊)이다.
남소(南所)는 하나는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개양문(開陽門) 안에 있다.
서소(西所)는 하나는 창덕궁 요금문(耀金門) 안에 있는데 반송(盤松)이 있고, 하나는 경희궁 숭의문(崇義門)
안에 있다.
동소(東所)는 하나는 창경궁 선인문(宣仁門)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안에 있다.
북소(北所)는 하나는 창경궁 경화(景化) 숭지(崇智) 문 안에 있는데 연못이 있고,
하나는 경희궁 무덕문(武德門) 안에 있다.
○ 장(將) 15원 정3품 내조사(內曹司) 2원, 부장(部將) 25원이다.
○ 따로 상호군(上護軍) 8원, 대호군(大護軍) 12원, 호군(護軍) 4원, 부호군(副護軍) 69원, 사직(司直) 11원,
부사직(副司直) 1백 2원, 사과(司果) 21원, 부사과(副司果) 1백 83원, 사정(司正) 20원, 부사정(副司正) 2백 50원,
사맹(司猛) 15원, 부사맹(副司猛) 2백 8원, 사용(司勇) 24원, 부사용(副司勇) 6백 60원이 있다.
○ 부장(部將) 25원 안에 참외(參外) 11원, 남행 참외(南行參外 과거를 보지 않고 임관한 벼슬아치) 1원이 있다.
○ 외위(外衛)는 폐지한 뒤에 내삼청(內三廳)에 붙였다. 내삼청(內三廳) : 개국 초에는 사복(司僕)을 두었고,
성화(成化) 연간에 또 내금위(內禁衛)를 두어 겸사복(兼司僕)에 소속시켰고, 효종 원년(1649)에 금군(禁軍)을
더 두었고,
현종 7년(1664)에 금군청(禁軍廳)을 설치하여, 7번으로 나누어 겸사복 2백 명, 내금위 3백 명, 우림위(羽林衛)
2백 명인 삼청(三廳)으로 만들었다.
영종 30년에 용호영 직소(龍虎營直所)를 고쳐서 두었는데, 하나는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 남랑(南廊)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숭정전(崇政殿) 남랑에 있다.
○ 겸사복장(兼司僕將) 정3품 이 3원인데 금군청에 속하고 정3품, 내금위장(內禁衛將) 3원, 우림위장(羽林衛將)
3원이다.
선전관청(宣傳官廳) : 하나는 창덕궁 승정원(承政院) 북쪽, 선정문(宣政門)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건명문
(建明門) 안에 있다. 처음에는 관원을 두어 대궐 안을 윤직(輪直)했는데, 뒤에 청(廳)을 설치하여 형명(刑名)ㆍ
계라(啓螺)ㆍ시위(侍衛)ㆍ전명(傳命)ㆍ부신(符信)을 출납하는 등의 일들을 맡았다.
○ 선전관 25원 안에 행수(行首) 정3품 1원, 당상(堂上) 3원, 참상(參上) 품계는 정하지 않음 이 7원이고,
참외(參外) 종9품 14원 안에 남행(南行) 2원, 문신(文臣) 종6품 2원인데, 무겸청(武兼廳)에 속한다.
부청(附廳)은 하나는 창덕궁 광범문(光範門)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금상문(金商門) 안 북쪽에 있다.
○ 무신겸직 50원 안에 참상(參上) 정한 품계가 없음 40원, 참외(參外) 종9품 10원이다.
○ 이식(李植)의 제명기(題名記)가 있다. 별군직청(別軍職廳) : 하나는 창경궁 회춘문(回春門) 안,
곧 시민당(時敏堂) 옛터에 있었고, 하나는 경희궁 건명문(建明門) 안에 있다. 효종(孝宗) 7년에 창설하여 잠저
군관(潛邸軍官)으로 심양(瀋陽)에 모시고 갔던 사람 8명을 구처(區處)하여 청(廳)을 설치했는데,
세상에서 팔장사(八壯士)라고 부르며, 그 뒤로 점차 늘었다.
○ 별군직(別軍職)은 정한 품계가 없고 정원이 -없다. 어전친막제명첩(御前親幕題名帖)이 있다.
훈련원(訓鍊院) :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있다. 개국 초에 훈련관(訓鍊觀)을 두어 군사의 재능을 시험하고 무예
를 닦고 무경(武經)을 익히고 공부하는 일을 맡는데, 뒤에 관을 원(院)으로 고쳤다. 또 무관(武官)의 과거 보는
곳이 되었으며, 무일소(武一所)라고 부른다.
○ 지사(知事) 1원, 도정(都正) 2원 안에서 1원은 겸직이고, 정(正) 1원, 부정(副正) 2원, 첨정(僉正) 12원, 판관
(判官) 18원, 주부(主簿) 38원, 참군(參軍) 2원, 봉사(奉事) 2원, 권지(權知) □□원, 습독관(習讀官) 30원, 권지
(權知) □□원이다.
○ 성간(成侃)의 사청기(射廳記)가 있고, 원의 동쪽에 연자루(燕子樓)가 있다.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 하나는 창경궁 시강원(侍講院) 북쪽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건명문(建明門) 안 남쪽
에 있다. 개국 초에 두었고, 또 하나의 이름은 계방(桂房)이다. 동궁(東宮)을 배위(陪衛)하는 일을 맡는다.
○ 좌익위(左翊衛)ㆍ우익위(右翊衛) 정5품 1원씩, 좌사어(左司禦)ㆍ우사어(右司禦) 종5품 1원씩,
좌익찬(左翊贊)ㆍ우익찬(右翊贊) 정6품 1원씩, 좌위솔(左衛率)ㆍ우위솔(右衛率) 종6품 1원씩, 좌부솔(左副率)ㆍ
우부솔(右副率) 정7품 1원씩, 좌시직(左侍直)ㆍ우시직(右侍直) 정8품 1원씩, 좌세마(左洗馬)ㆍ우세마(右洗馬)
정9품 1원씩이다.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 : 본조에서 창설했고, 맡아보는 일은 익위사와 같고, 설치는 강서원(講書院)과 같이
했다.
○ 좌장사(左長史)ㆍ우장사(右長史) 종6품 1원씩, 좌종사(左從司)ㆍ우종사(右從司) 종7품 1원씩이다.
수문장청(守門將廳) :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남쪽에 있다. 처음에는 장(將)을 두고 일정한 관서는 없었는데,
뒤에 청(廳)을 설치했고, 대궐문 지키는 일을 맡는다.
○ 장(將) 29원인데 그 중 참상(參上) 종6품 15원, 참외(參外) 종9품 14원이다.
충익위(忠翊衛) : 직소(直所). 하나는 창경궁 선인문(宣仁門)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문 안에 있다.
공신(功臣)의 자손이 속한다. ○ 장(將) 3원.
충장위(忠壯衛) : 직소. 하나는 창덕궁 인정문 안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금상문(金商門) 안에 있다.
전사자의 자손이 속한다. ○ 장 3원.
공궐위(空闕衛) : 경복궁ㆍ경희궁ㆍ창경궁의 수직(守直)을 맡는다. ○ 장 3원.
국출신청(局出身廳) :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안 영숙문(永肅門) 밖에 있다. 인조 정축년(1637)에 남한(南漢)에
따라갔던 군병 출신자 1천 3백 84명을 7국(局)으로 나누어 영숙문에 입직(入直)하게 하였는데, 무용청(武勇廳)
이라고도 한다.
효종조에 수를 줄여서 3국을 만들었다가 또 4국을 만들었다. 현종 4년(1663)에 비로소 3국의 국마다 50명으로
정했다. 숙종 을축년(1685)에 3국에서 각각 10자리씩을 빼고 무예청(武藝廳) 출신자로 보충하여 소속시켰다.
정종 계묘년(1783)에 무예과(武藝?) 30명을 제하여 장용영(壯勇營)을 옮겨 설치했다가 순조 임술년에 장용영을
폐지하고 무예과를 을축년 제도와 같이 3국에 다시 소속시켰다.
○ 별장(別將) 3원. 능마아청(能?兒廳) : 중부 정선방(貞善坊)에 있다. 인조조에 창설하여 여러 장관(將官)에게
병서(兵書)를 고강(考講)시키고 공부를 권장하는 일을 맡는다. 영종 을유년(1765)에 훈련원에 합쳤다.
○ 당상 3원, 낭청 4원이다.
한려청(漢旅廳) : 효종대왕이 심양(瀋陽)에서 돌아올 때 8성(姓)의 중국 사람이 따라서 동으로 왔는데 그 자손을
□□국(局)에 붙이고, 한인 아병(漢人牙兵 왕, 대장군, 천자가 친히 지휘하는 군사)이라고 이름하였다.
정종 경술년(1778)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명례문(明禮門)에 입직(入直)하는데, 숭지문(崇智門)이라고도
한다.
○ 군관(軍官) □□원이다. 사자관청(寫字官廳) : □부 □□방에 있으며, 사자관(寫字官) 40원이다.
의장고(儀仗庫) : 중부 정선방에 있다. 내고(內庫)는 □□궁 □□문 □□에 있는데, 곧 고려 제도의 위위시(衛尉寺)
이다. 각전(各殿)의 의장을 맡으며, 병조 승여사(乘輿司)에 속한다. ○ 낭청 2원 부장(部將) 겸직.
사산(四山) : 처음에는 감역관(監役官) 4원을 두어 서울 성 안의 동서남북의 소나무 베는 것을 금지시키는 등의
일을 나누어 맡았는데, 뒤에 참군(參軍)으로 고쳤다. 서도(西道)는 훈련도감에 붙이고, 동도는 어영청에 붙이고,
남도는 금위영에 붙이며, 북도는 총융청에 붙였다. ○ 각각 참군(參軍) 종9품 1원씩이다.
훈련도감(訓鍊都監) : 신영(新營)은 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는데, 선조 27년 갑자년(1594)에 1백 97칸 반을
창설했다.
○ 도제조 1원, 제조 2원, 대장(大將) 종2품ㆍ중군(中軍) 종2품 1원씩, 별장(別將)ㆍ천총(千摠) 2원씩, 국별장
(局別將) 모두 정3품ㆍ상국청 파총(詳局廳把摠) 종4품 6원이며, 종사관(從事官) 종6품 4원 중에서 1원은 문관
(文官)이다.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의 동초관(同哨官) 종9품 34원, 지구관(知?官) 10원,
기패관(旗牌官) 20원, 별무사(別武士) 68원, 군관(軍官) 17원, 별군관(別軍官) 10원, 권무관(勸武官) 50원,
국출신(局出身) 1백 50원이다. 상세한 것은 국청(局廳)에 있다.
북영(北營) : 창덕궁 서쪽 공북문(拱北門) 밖에 있고, 영사[?宇]는 2백 35칸이다. 영(營)의 남쪽에 또 군향색고
(軍餉色庫)가 있고, 또 군자정(君子亭)과 몽답정(夢踏亭)이 있다. 순조 24년(1824)에 용호영(龍虎營)을 이곳에
옮겼다.
북일영(北一營) : 북영 남쪽에 있는데, 15칸이다. 북사영(北四營) : 경희궁 단(壇) 밖에 있는데, 9칸이다.
남영(南營) : 창덕궁 돈화문 밖 동쪽에 있는데, 32칸이다. 서별영(西別營) : 마포(麻浦)에 있다.
동별영(東別營) : 옛 장용영(壯勇營)에 있다.
양향청(糧餉廳) : 남부 훈도방(薰陶坊)에 있는데, 선조 26년(1593)에 창설했고,
군수(軍需)를 대주는 일을 맡아서 훈련도감 군사들의 옷ㆍ기계(器械 병기)ㆍ정기(旌旗)ㆍ금고(金鼓)의 자료 및
여러 가지 원역(員役)의 공포(工包)ㆍ요포(料布 급료로 주는 포목)의 수요(需要)에 대비한다. 현종 7년(1666)에
훈련도감으로부터 옮겨서 호조에 붙였다.
○ 도제조 1원, 제조 3원, 종사관 1원이다. 하도감(下都監) : 남부 명철방(明哲坊)의 훈련원 남쪽에 있는데,
3백 90칸이다.
별영(別營) : 마포에 있는데, 현종 14년에 세웠다. 선조 병신년(1596)에 훈국 군사들에게 급료를 주는 곳으로
설치했다고도 한다. ○ 읍청루(?淸樓)가 있는데 강을 임해 있어 명승지라고 칭한다.
군향색고(軍餉色庫) : 남북영 남쪽에 있는데, 1백 12칸이다. 염초청(焰硝廳) : 마전교(馬廛橋) 개울의 남변에
있다.
○ 숙종 갑술년(1694) 봄에 갑자기 돈 자국이 기둥ㆍ들보ㆍ담ㆍ벽에 박혀 있어 둥글둥글 서로 이어져 모양이
매우 이상하고 글자 획도 뚜렷하며, 처마끝ㆍ대들보ㆍ서까래ㆍ중방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데가 없
었는데, 혹은 며칠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혹은 열흘동안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며, 또한 해가 지나도록 남아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 까닭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 1백 12칸이다. 광지영(廣智營) : 창경궁의 궁담 정북쪽 응봉(鷹峯) 아래에 있는데, 1백 15칸이다.
직방(直房) : 돈화문(敦化門) 밖에 16칸, 금호문(金虎門) 밖에 14칸 반, 흥화문(興化門) 밖에 8칸,
경모궁(景慕宮) 어귀에 8칸이 있다.
금위영(禁衛營) : 신영(新營)은 중부 정선방(貞善坊)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고, 영사(營舍)는 3백 62칸이다.
인조조에 정초청(精抄廳)을 설치했는데, 숙종 8년(1682)에 훈련군총(訓鍊軍摠)을 감해서 그 중부 별대(中部
別隊)와 병조의 정초군(精抄軍)으로써 금위영(禁衛營)을 설치하고, 병조에서 겸하여 관할하게 하였다.
영종 갑술년(1754)에 비로소 어영청의 예(例)와 같이 영(營)을 따로 설치했다.
○ 도제조ㆍ제조ㆍ대장(大將)ㆍ중군(中軍)ㆍ별장(別將) 1원씩, 천총(千摠) 4원, 기사장(騎士將) 정3품 3원,
파총 5원, 외방겸파총(外方兼把摠) 12원, 종사관(從事官) 2원, 초관(哨官) 41원, 교련관(敎鍊官) 12명,
기패관(旗牌官) 10명, 별무사(別武士) 30명, 군관(軍官) 5명, 별군관(別軍官) 10명, 권무군관(勸武軍官) 50명,
기사(騎士) 1백 50원, 별기위(別騎衛) 32명이다.
남영(南營) : 개양문(開陽門) 위에 있는데, 12칸이다. 남별영(南別營) : 남부 낙선방(樂善坊) 묵동(墨洞)에 있는
데, 1백 39칸이다. 영종 6년(1730)에 창설했다.
남창(南倉) : 남별영의 남쪽에 있는데, 1백 1칸이다.
하남창(下南倉) : 남별영의 북쪽에 있는데, 1백 4칸이다. 화약고(火藥庫) : □□남창(南倉)의 서쪽 건너 산기슭에
있는데, 17칸이다. 서영(西營) : 창덕궁 경추문(景秋門)의 서쪽 건너편에 있는데, 11칸 반이다.
직방(直房) : 경희궁(慶熙宮) 어귀에 있는데, 8칸이다. 어영청(御營廳) : 신영(新營)은 동부 연화방(蓮花坊)에
있고, 5백 5칸이다. 인조 2년(1624)에 창설하고, 6년에 국(局)을 설치했다.
효종 3년(1652)에 비로소 군영(軍營)을 두었고, 숙종 병술년(1706)에 1영(營) 5부(部)의 제도로 고쳤다.
○ 도제조ㆍ제조ㆍ대장ㆍ중군ㆍ별장 1원씩, 천총 5원, 별후부 천총(別後部千摠) 1원, 기사장(騎士將) 3원,
파총(把摠) 5원, 외방겸파총 1원, 종사관 2원, 초관 41원, 교련관 12명, 기패관 11명, 별무사 30명, 군관 38명,
별군관 10명, 권무군관 50명, 가전별초(駕前別抄) 52명, 기사 1백 50명이다.
남소영(南小營) : 남부 명철방(明哲坊) 남소문(南小門) 동쪽에 있는데, 1백 94칸이다.
남창(南倉) : 남소영의 북쪽에 있는데, 1백 37칸이다. 화약고(火藥庫) : 남소영 안에 있는데, 52칸이다.
동영(東營) : 선인문(宣仁門) 아래에 74칸이 있고, 또 개양문(開陽門) 아래에 10칸이 있다.
북이영(北二營) : 예전에는 삼청동(三淸洞)에 있었는데, 뒤에 사직동(社稷洞)으로 옮겼다.
현종 기유년에 세웠는데 68칸이다.
집춘영(集春營) : 창경궁 집춘문(集春門) 밖 남쪽에 있는데, 16칸이다. 직방(直房) : 하나는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는데, 23칸이요, 또 흥화문(興化門) 밖에 10칸이 있다.
수어청(守禦廳) :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다. 예전에는 경희궁 오른쪽에 있었는데, 곧 옛 용호영(龍虎營)의
본영(本營)이다. 인조 4년(1626)에 창설하여 광주(廣州) 등 진(鎭)의 군무(軍務)를 절제(節制)했다.
숙종 9년(1683)에 남한(南漢)으로 진을 옮겼고, 18년에 옛 제도로 환원했다. 영종 26년(1750)에 또 남한으로
진을 옮겼다가 35년에 다시 옛 제도로 환원했다. 정종 19년(1795)에 또 남한으로 출진(出鎭)했다.
○ 뒤에 호조에 이속(移屬)되어 본물(本物 주요한 물건)을 들여 쌓았다.
○ 사(使) 정2품 ㆍ중군(中軍) 1원씩, 진영장(鎭營將) 3원, 별장 2원, 파총 2원, 초관 26원, 교련관 17원,
기패관 19원, 별군관(別軍官) 9원, 수첩군관(守堞軍官) 61원이다.
조방(朝房) :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는데, 14칸이다. 총융청(摠戎廳) : 예전에는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었는
데, 영종 26년에 창의문(彰義門) 밖 연융대(鍊戎臺)에 옮겨 설치했으며, 신영(新營)의 영사(營舍)는 3백여 칸이
다. 인조 2년에 창설하여 수원(水原)ㆍ광주(廣州)ㆍ양주(楊州)ㆍ장단(長湍)ㆍ남양(南陽) 등의 진(鎭)과 오영
(五營)의 군무(軍務)를 절제(節制)한다.
영종 정묘년(1747)에 경리청(經理廳)을 폐지하고, 북한영성장(北漢營城將) 이하를 본청에 소속시켰고,
경오년에 또 경기병사(京圻兵使)를 겸하여 북한(北漢)에 출진(出鎭)했다가, 경진년에 출진을 폐지하고 병사
(兵使)를 감했다. 정종조에 수원에 영(營)을 설치한 뒤에 수원진(水原鎭)의 군무를 절제했다가 폐지했다.
헌종 병오년(1846)에 총영(摠營)이라고 개칭하였다가, 기유년에 복구하여 청(廳)을 설치했다.
○ 사ㆍ중군 1원씩, 천총 2원, 진관장(鎭管將) 3원, 파총 2원, 초관 10원, 교련관 15명, 기패관 2명, 군관 10명,
본청군관(本廳軍官) 3명, 별부료군관(別付料軍官) 2명, 감관(監官) 2명, 수문부장(水門部將) 1명,
한량군관(閒良軍官) 1백 50명이다. 또 관성장(管城將)ㆍ파총 1원씩, 초관 6원, 교련관ㆍ기패관 5명,
수첩군관(守堞軍官) 2명, 군기감관(軍器監官) 1명, 소임군관(所任軍官) 3명, 부료관(付料官) 20명,
성문부장(城門部將) 3명이 있는데, 이상은 경리청(經理廳)으로부터 옮겨왔다.
책응소(策應所) : 창경궁 선인문(宣仁門) 밖에 있다. 옛 장용영(壯勇營)의 직방(直房)이고, 곧 지금의 동영(東營)
으로, 군수물을 쌓아 두는 곳이다.
경리청(經理廳) : 중부 향교동(鄕校洞)에 있고, 북한청(北漢廳)은 - 이상은 쓸데없이 낀 문구이다. - 태고사
(太古寺) 곁에 있는데, 숙종 38년(1712)에 창설하여 북한산성의 사무를 관리한다.
○ 도제조ㆍ제조ㆍ낭청이 <있었다.> 영조 23년(1747)에 폐지하여 총융청에 붙였다.
평창(平倉) :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데, 상ㆍ하 두 창(倉)이 있고, 또 연융대(鍊戎臺)가 있다. 숙종 임진년에
창설했다.
○ 부평(富平)ㆍ인천(仁川)ㆍ안산(安山)ㆍ양천(陽川)ㆍ양주(楊州)ㆍ용인(龍仁)ㆍ고양(高陽)ㆍ파주(坡州)ㆍ
과천(果川)ㆍ시흥(始興)ㆍ교하(交河)의 11개 고을로부터 본청(本廳)에 대동미(大同米)를 들여왔다.
○ 지금은 총융청에 붙였다.
용호영(龍虎營) : 처음에는 북부 양덕방(陽德坊)에 있었는데 순조 24년(1824)에 훈국군향소(軍餉所) 자세한 것
은 북영(北營) 조에 있다. 로 옮겨 설치했다.
○ 영종 30년(1754)에 금군청(禁軍廳)을 용호영(龍虎營)으로 고치고, 7번의 금군(禁軍)을 총령(摠領)했다.
○ 겸사복(兼司僕)ㆍ내금위(內禁衛)ㆍ우림위(羽林衛)의 도합 7백 명으로 1청(廳)을 삼고 7번으로 나누었는데,
번마다 3정(丁) 9령(領)이다. 배종(陪從)하고 입직(入直)하는 일을 맡으며, 병조 판서가 통령(統領)한다.
○ 선전관 취재출신(宣傳官取才出身) 48원, 부장취재출신(部將取才出身) 15원을 뽑아서 붙인다.
○ 7번 안에서 가후금군(駕後禁軍) 50명을 뽑아 임금이 행차할 때에 시위(侍衛)한다. 순조 계사년(1833)에
내금위 1백 명을 감해서 지금은 6번이 되었다. 상세한 것은 내삼청(內三廳)에 있다.
○ 당상 군관(堂上軍官) 16명, 교련관(敎鍊官) 14명, 별부군관(別付軍官) 1백 20명이다.
조방(朝房) :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는데, 14칸이다. 마군영(馬軍營) : 금호문 밖에 있고, 청파(淸坡)ㆍ
노원(蘆原) 두 역(驛)의 역마(驛馬)가 병조에 입소(立所 말을 대기 시키는 것)한다.
호위청(扈衛廳) : 장임(將任)이 머무르는 데에 따라서 옮겨 설치한다. 인조 원년(1623)에 4청(廳)을 창설하여
호위(扈衛)를 맡았는데, 뒤에 3청으로 고쳤고, 숙종 3년(1677)에 4청으로 환원했다가 뒤에 또 3청이 되었고,
정종 원년(1776)에 또 합쳐서 1청을 만들었다.
○ 대장(大將) 1원, 별장(別將) 3원 군관(軍官) 3백 50원, 소임군관 3원, 당상별부료군관 1원이다.
직방(直房) : 하나는 창덕궁 상서원(尙瑞院) 서쪽에 있고, 하나는 경희궁 숭정문(崇政門) 밖에 있다.
포도청(捕盜廳) : 좌청(左廳)은 중부 정선방(貞善坊) 파자교(把子橋) 동북쪽에 있고, 우청(右廳)은 서부 서린방
(瑞麟坊) 혜정교(惠政橋) 남쪽에 있다. 본조에서 좌청과 우청을 창설하여 도둑과 사기치는 자를 잡고,
경(更)을 나누어 밤에 순찰하는 일을 맡겼다. 창설한 연조는 자세하지 않은데, 국조(國朝) 중기(中期)에 세웠다
고도 한다.
○ 대장 1원씩, 종사관 3원씩, 부장(部將) 4명씩, 무료부장(無料部將) 26명, 가설부장(加設部將) 12명이다.
○ 분직(分直)하는 부장은 8명씩인데, 군사 14명씩을 거느리고 도성 안팎을 순찰한다.
○ 삼강문외금군(三江門外禁軍)은 양청(兩廳)에 나누어 속하여 기찰(譏察)하게 한다.
순청(巡廳) : 좌청은 중부 정선방에 있고, 우청은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다. 본조에서 창설했고,
밤 순찰을 맡는다. 창설한 연조는 자세하지 않은데, 개국 초에 세웠다고도 한다.
○ 장ㆍ당상이 정한 품계도 없고 정한 수도 없다.
권설직(權設職) 보양청(輔養廳) : 개국 초에 세자ㆍ세손이 나이가 어릴 때에 설치했는데, 강학청(講學廳)이라
고도 부른다. 현종 때에 강학청을 창설했다.
○ 보양관(輔養官) □□품 □원이다. ○ 대군사부(大君師傅) 종9품 ㆍ왕자사부(王子師傅) ㆍ왕손교부(王孫敎傅)
종9품ㆍ내시교관(內侍敎官) 종9품 동몽교관(童蒙敎官) 4원이다.
봉조하(奉朝賀) : 15원이다. ○ 공신(功臣)은 무슨 군(君) 봉조하라 부르고, 나머지는 무슨 관(官), 무슨 직(職)
봉조하라고 부른다.
○ 실행 아래도 같음 정일품직자(實行正一品職者 실지로 정1품 관직에 있는 사람)ㆍ공신 정3품ㆍ공신 적장
(嫡長)과 범인(凡人) 종4품ㆍ실행 종1품ㆍ공신 종3품ㆍ공신 적장 종5품ㆍ범인 정7품ㆍ실행 정2품직자ㆍ공신
종4품ㆍ공신 적장 정6품 ㆍ범인 종7품ㆍ실행 종2품직자ㆍ공신 종4품ㆍ공신적장 종6품ㆍ범인 종8품ㆍ
실행 정3품 당상 관직자ㆍ공신 정5품 ㆍ공신 적장 정9품ㆍ범인 정9품이다.
○ 원래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으로 작산인(作散人 실무가 없는 직위에 전보된 사람)에게 녹(祿)을 붙여준
직(職)이었는데, 지금은 정년이 되어 물러난 다음에야 비로소 봉조하에 붙이며 정한 수는 없다.
부연사신(赴燕使臣 중국에 가는 사신) : 동지겸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 정2품 ㆍ부사(副使) 종2품 ㆍ서장관
(書狀官) 당하 정3품 1원씩, 당상 역관(堂上譯官) 2원, 당하 역관(堂下譯官) 21원이다. 그런데 의정(議政)이나
종반(宗班)이 정1품 겸사은(兼謝恩)ㆍ진주(陳奏) 등의 칭호로써 가게 되면 당상 역관 1원과 자벽(自?)한 당하
역관 1원을 더 정하며,
사은(謝恩)ㆍ주청(奏請)ㆍ변무(辨誣)ㆍ진하(進賀)ㆍ진향(進香)ㆍ진위(陳慰) 등의 사(使)는 당상 역관 2원, 당하
역관 17원이고, 고부사(告訃使)는 당상 역관 1원, 당하 역관 11원이고, 문안사(問安使)는 당상 역관 2원,
당하 역관 4원이며, 한번 행차할 때마다 사자관(寫字官)ㆍ화원(?員)ㆍ양의사(兩醫司)의 의원(醫員)ㆍ
운대관(雲臺官) 1원씩이다.
○ 칙사(勅使)를 맞을 때에는 원접사(遠接使) 정2품 ㆍ문례관(問禮官) □□품 1명씩이고, 관(館)에 머물러 있을
때는 관반사(館伴使) □□품 1원이며, 칙사를 보낼 때는 반송사(伴送使) 정2품 1원이다.
부왜사신(赴倭使臣 일본에 가는 사신) : 통신정사(通信正使) □□품 ㆍ부사 □품 ㆍ종사관(從事官) □□품 1원씩,
제술관(製述官) □원, 당상 역관 3원, 당하 역관 9원, 양의사의 의원ㆍ사자관 2원씩, 화원 1원이다.
○ 관백(關伯 일본의 최고의 신하, 실권자)이 새로 서면 그가 사신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를 기다려 3명의 사신
을 차출해서 보내되, 함께 가고 함께 오도록 하고 따로 다니지 못하게 한다.
○ 대마도주(對馬島主)가 강호(江戶 일본의 서울)로부터 돌아오면 문위역관(問慰譯官)을 차출해서 보낸다.
○ 대차왜(大差倭 일본에서 사신으로 오는 고관)가 나오면 경접위관(京接慰官)을 차출하여 보낸다.
산실청(産室廳) : 중궁전(中宮殿)과 세자빈궁(世子嬪宮)이 임신한 달에 청(廳)을 설치해서 기다려 거행한다.
○ 권초관(捲草官) □□품 은 복력(福力)이 있고 아들이 많은 사람으로 차출한다.
잡직 공서(雜職公署) 족친위(族親衛) : 종성(宗姓 임금의 일가)의 단문(袒免)과 이성(異姓)의 시마(?麻 석달복)
이상, 친왕(親王 임금의 아들 또는 형제)의 비(妃)의 시마 이상의 친족, 세자빈(世子嬪)의 기친(1년 복을 입는
친족)이 속한다. 선왕(先王)과 선왕후에 관해서도 같다.
내시부(內侍府) : 북부 준수방(俊秀坊)에 있다. 개국 초에 환시(宦寺) 삼부(三府)를 두어 대궐 안의 음식을 감독
하는 일, 명령을 전달하는 일, 소문(掃門)하고 소제하는 일을 맡겼다.
○ 상선(尙膳) 종2품ㆍ상온(尙?)ㆍ상전(尙傳)ㆍ상단(尙丹)ㆍ응방(鷹坊)ㆍ체아(遞兒)ㆍ대전 벽리(大殿薛里)ㆍ
주방(酒房)ㆍ대객당상(對客堂上)ㆍ왕비전 승전색(王妃殿承傳色)ㆍ벽리(薛里) 체아 상호(尙弧)ㆍ대전 응방ㆍ
궁방(弓房)ㆍ왕비전 주방(王妃殿酒房)ㆍ문소전 벽리(文昭殿薛里)ㆍ세자궁 장번(世子宮長番)ㆍ상노(尙帑)ㆍ
대전 상고(大殿廂庫)ㆍ등촉방(燈燭房)ㆍ다인벽리(多人薛里)ㆍ 감농(監農)ㆍ세자궁 벽리(世子宮薛里)ㆍ
상세(尙洗)ㆍ대전 장기(大殿掌器)ㆍ장무(掌務)ㆍ화약방(火藥方)ㆍ사약방(司?房)ㆍ장내원(掌內苑)ㆍ왕비전
등촉방(王妃殿燈燭房)ㆍ문소전 진지(文昭殿進止)ㆍ세자궁 주방(世子宮酒房)ㆍ빈궁 벽리(嬪宮薛里)ㆍ주방ㆍ
상촉(尙燭)ㆍ대전문 차비(大殿門差備)ㆍ왕비전문 차비(王妃殿門差備)ㆍ 장무(掌務)ㆍ왕세자궁문 차비ㆍ각궁
벽리문 차비ㆍ상설(尙設)ㆍ상제(尙除)ㆍ상문(尙門)ㆍ상경(尙更)ㆍ
상명(尙苑)에서 종9품에 이르기까지 도합 1백 40원이 있다. ○ 대전 장번(大殿長番)은 정한 수가 없고,
출입번(出入番) 42원, 왕비전 출입번 12원이요, 세자궁 장번은 정한 수가 없고 출입번 12원, 빈궁 출입번 8명
이다. ○ 각처에 상직(上直)하는 소환(小宦)은 90명이다.
내반원(內班院) : 경복궁 경회남문(慶會南門) 서쪽에 있었는데, 뒤에 불탔다. 하나는 창덕궁 선정문(宣政門) 안
동쪽에 있었는데, 연산군 때에 철거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뒤에 다시 두었다.
○ 장렬왕후(莊烈王后)가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 김종직(金宗直)의 기문(記文)이 있다. 액정서(掖庭署) : 각 궁궐 안에 있다. 개국 초에 두었는데,
전알(傳謁) 및 임금이 쓰는 붓과 벼루를 바치는 일, 대궐 문을 거는 일, 대궐 뜰에 포설(鋪設)하는 일을 맡는다.
○ 사알(司謁) 1명, 사약(司?) 1명, 부사약(副司?) 1명, 사안(司案) 1명, 부사안(副司案) 3명, 사포(司鋪) 2명,
부사포(副司鋪) 3명, 사소(司掃) 6명, 부사소(副司掃) 9명이다. 배설방(排設房) : 창덕궁 숙장문(肅章門) 밖에
있는데, 어막(御幕)을 포설하는 일을 맡은 곳이다.
무예청(武藝廳) : 각 궁궐 안에 있다. 인조 8년(1630)에 창설하여 30명을 두었는데, 뒤에 10명을 늘렸다.
숙종 을묘년(1675)에 20명을 늘렸고, 영종 무진년에 40명을 늘렸으며, 정종 을해년(1795)에 50명을 늘렸다가
을사년에 10명을 줄였고, 순조 임술년(1802)에 58명을 늘려서 도합 1백 98명인데, 좌번(左番)과 우번(右番)으
로 나누었으며 각각 통장(統長) 1원이 있어서 거느린다.
○훈국의 마군(馬軍)과 보군(步軍), 별감 족속(別監族屬) 중에서 기운이 있고 신수가 좋고 기예(技藝)에 능한
사람을 특별히 뽑아서 기예를 늘 익혀 별초군(別抄軍)이라 부르고, 또 별초군 중에서 후보를 뽑아 의망(擬望)
하면 낙점(落點)을 받아 그 청(廳)의 별감으로 삼는다.
궐내각차비(闕內各差備) : 대전 반감(飯監) 6명, 별사옹(別司饔) 14명, 탕수색(蕩水色) 14명,
상배색(狀排色) 10명, 적색(炙色) 6명, 반공(飯工) 12명, 포장(泡匠) 2명, 주색(酒色) 4명, 다색(茶色) 4명,
병공(餠工) 2명, 증색(蒸色) 10명, 등촉색(燈燭色) 4명, 성상(城上) 34명, 수병(水兵) 18명, 별감(別監) 46명이며,
왕비전 반감(飯監) 4명, 별사옹 6명, 탕수색 4명, 상배색 4명, 적색 4명, 반공 6명, 포장2명, 주색 2명, 다색 2명,
병공 2명, 증색 4명, 등촉색 4명, 성상 8명, 수공(水工) 6명, 별감 16명이요, 세자궁 반감 4명, 별사옹 4명,
탕수색 4명, 상배색 4명, 적색 4명, 반공 6명, 포장 2명, 주색 2명, 다색 2명, 병공 2명, 증색 4명, 등촉색 2명,
성상 10명, 수공 4명, 별감 18명이며, 세손궁에 반감 2명, 등촉색 2명, 주색 2명, 성상 2명, 별감 10명이다.
혁폐 공서(革廢公署) 승녕부(承寧府) : 정종 2년(1400)에 태조를 높여서 태상왕(太上王)으로 하고 관직을 두고
관부를 설치하였다.
○ 태종 3년(1403)에 내장고(內藏庫)를 소속시켰다.
공안부(恭安府) : 태종 경진년(1400)에 정종을 높여 상왕(上王)으로 하고 관부를 세웠다.
○ 3년에 보임고(保稔庫)를 소속시켰다.
인녕부(仁寧府) : 태종이 정종 순덕왕 대비(定宗順德王大妃) 김씨를 높여서 부(府)를 세웠다.
경흥부(敬興府) : 태조 원년에 중궁(中宮)을 위하여 부를 세우고 요속(僚屬)을 두었다.
경승부(敬承府) : 태종 2년에 세자를 위하여 부를 설치하였다.
인수부(仁壽府) :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 부를 설치하였다.
사평부(司平府) : 개국 초에 고려 제도에 따라 삼사(三司)를 두어 봉급을 주고 재정 지출을 계획하는 일을 맡겼
는데, 태종 원년에 사평부라고 고쳤다.
○ 폐지한 연조는 알 수 없다. 수령부(壽寧府) : 영락(永樂) 연간 초기에 있었다.
충익위(忠翊衛) : 북부 양덕방(陽德坊)에 있는데, 개국 초에 창설했다. 원종공신(原從功臣 개국공신)들의 관부
이다. 뒤에 폐지하여 충훈부(忠勳府)에 합쳤다. 광해군 때에 다시 설치했다가 곧 폐지하여 병조에 붙였고,
인조 때에 다시 충훈부에 합쳤으며, 숙종 2년(1676)에 다시 병조에 붙였고, 6년에 또 충훈부에 합쳤다가 15년
에 다시 병조에 붙였고, 27년에 다시 충훈부에 합쳤다.
○ 도사(都事) 2원.
장례원(掌隷院) : 공조 남쪽에 있는데, 개국 초에 고려 제도에 따라 형조 도사(刑曹都事)를 두어, 노예의 부적
(簿籍)과 판결(判決)에 관한 일을 맡았다. 세조 12년(1466)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선조 임진년에 난민(亂民)
들이 불태웠다. 영종 40년(1764)에 폐지하여 형조 본원에 도로 붙였다가 뒤에 보민사(保民司)로 만들고,
51년에 아주 폐지했다.
○ 판결사(判決事) 정3품 1원, 사의(司議) 정5품 3원, 사평(司評) 정6품 4원이 있었다.
종부시(宗簿寺) : 처음에는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었는데, 뒤에 북부 관광방(觀光坊)으로 옮겼다.
개국 초에 전중시(殿中寺)를 두었다가 뒤에 고쳐서 종부시를 두어 《선원보첩(璿源譜牒)》을 지어 기록하는 일
과 종실(宗室)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맡겼다. 중종 때에 효사전(孝思殿)을 폐지하여 본시(本寺)로 하였고,
지금 임금 2년(1865)에 종친부(宗親府)에 옮겨 붙였다.
○ 도제조ㆍ제조 2원씩, 정(正) 1원이고, 첨정은 감하며, 주부ㆍ직장 1원씩이다.
○ 윤자영(尹子濚)의 제명기(題名記)가 있다.
○ 소각(小閣)이 있어서 《선원 보략(璿源譜略)》과 《선원록(璿源錄)》을 봉안(奉安)한다.
제생원(濟生院) : 북부 양덕방(陽德坊)에 있다. 태조 6년(1397)에 창설하여, 약의 재료를 저장해 두고 가난한
백성의 병을 치료하고 또 각도(各道)ㆍ각리(各里)의 의학원(醫學院)에 교수(敎授)를 나누어 보내서 약을 주어
병을 고쳤다. 뒤에 모두 폐지했는데, 그 연조는 알 수 없다.
사섬시(司贍寺) : 예전에는 동부 숭교방(崇敎坊)에 있었는데, 현종 때에 그 옛터를 성균관(成均館)에 하사하여
반촌(泮村)을 보충하였다. 지금은 서부 사직동(社稷洞)에 있다. 태종 때에 사섬서(司贍署)를 두었는데 뒤에
시(寺)로 승격하였다.
돈을 만드는 일과 외거노비(外居奴婢 제 집에서 사는 노비)의 공포(貢布 베를 세금으로 바치는 세의 한 가지)
등의 일을 맡아 보았다. 인조 병자란 뒤에 폐지하여 제용감(濟用監)에 붙였다가 22년에 다시 두었다.
숙종 31년(1705)에 폐지하여 호조에 붙여서 사섬색(司贍色)이라 불렀으며, 상용[經用]하는 백휴지(白休紙)를
맡는다. ○ 정ㆍ부정ㆍ첨정ㆍ주부ㆍ직장 1원씩이 있었다.
내부시(內府寺) :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설치하여, 재화(財貨)를 창고에 저장하고 복식(服飾)을 내고 들
이며, 등촉(燈燭)을 벌려놓는 등의 일을 맡았다. 뒤에 폐지했는데, 그 연조는 자세하지 않다.
풍저창(?儲倉) : 북부 의통방(義通坊)에 있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서 설치했고, 쌀과 콩ㆍ초둔(草芚)ㆍ
지지(紙地) 등의 물건을 맡았다. 뒤에 폐지하여 장흥고(長興庫)에 붙였고, 지금은 내시(內侍)의 봉급, 노인의
세찬(歲饌 새해에 음식을 내리는 것), 사신(使臣)에게 내려주는 쌀을 맡는다.
○ 수(守)ㆍ주부ㆍ직장ㆍ봉사ㆍ부봉사 1원씩이 있었다.
의염창(義鹽倉) :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서 설치하여 염세(鹽稅)에 관한 일을 맡았다. 뒤에 폐지했는데,
그 연조는 알 수 없다.
전농사(典農司) : 성현(成俔)의 《용재총화(?齋叢話)》에 말하기를, "김자갱(金子?)이 판사가 되고
성간(成侃)이 직장이 되었는데, 뒤에 폐지하여 군자태창(君資太倉)이 되었다." 하였다.
가각고(架閣庫) :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설치하여 도서[圖籍]를 모아 저장하는 일을 맡았다.
뒤에 폐지했는데, 그 연조는 알 수 없다.
해전고(解典庫) :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설치하여 전당(典當)에 관한 일을 맡았다. 뒤에 폐지했는데,
연조는 알 수 없다.
사온서(司?署) :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설치하여 술과 단술 바치는 일을 맡았으며,
서부 적선방(積善坊)에 있었다. 뒤에 폐지했는데, 그 연조는 알 수 없다.
○ 영(令)ㆍ주부ㆍ직장ㆍ봉사가 1명씩이 있었다.
사축서(司畜署) : 무악(毋岳) 남쪽에 있고, 분서(分署)는 남부 회현방(會賢坊)에 있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전구서(典?署)를 두어 여러 가지 가축 먹이는 일을 맡았는데, 뒤에 사축서로 이름을 고쳤다.
인조 15년(1637)에 폐지하여 전생서(典牲暑)에 합쳤고, 영종 43년(1767)에 호조에 옮겨 합쳐서,
양ㆍ돼지ㆍ염소ㆍ거위[唐雁]ㆍ집오리 등을 진배(進排)하는 일을 나누어 맡았으며,
가두어 기르는 양과 염소는 40마리이다. ○ 제조ㆍ사축(司畜) 1원씩과, 별제 2원이 있었다.
귀후서(歸厚署) : 용산강(龍山江)에 있다. 분서(分署)는 남부 회현방에 있다. 태종 6년(1406)에 창설하여 관곽
(棺槨)을 만들어서 팔고, 나라의 예장(禮葬)에 공급하는 등의 일을 맡았는데,
정종 3년(1779)에 폐지하여 선공감(繕工監)에 합쳤다.
○ 제조 1원, 별제(別提) 6원이 있었다. ○ 정이오(鄭以吾)의 기문(記文)이 있다.
소격서(昭格署) :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었는데, 본조에서 창설했다. 삼청성신(三淸星辰)에게 초제(醮祭)
지내는 일을 맡았었다.
삼청전(三淸殿)이 있어 옥황상제(玉皇上帝)ㆍ태상노군(太上老君)ㆍ보화천존(普化天尊)ㆍ재당제군(梓撞諸君)
등 10여위(位)를 제사지내는데 모두 남자의 모습이다. 태일전(太一殿)에서는 칠성제수(七星諸宿)를 제사지내
는데, 모두 머리 깎은 여자의 모습이다. 또 안팎 여러 제단(祭壇)이 있어 사해용왕(四海龍王)ㆍ신장(神將)ㆍ
명부시왕(冥府十王)ㆍ수부제신(水府諸神)을 제사지내는데, 제명(題名)한 위판(位板)이 무려 수백이다.
중종 14년(1519)에 폐지했다가 25년에 다시 설치했고, 선조 임진란 뒤에 드디어 폐지했다.
○ 곁에 우물이 있는데, 옛적에 초제할 때 사용하던 것이므로 성제정(星祭井)이라고 한다. 또 아래에 보인다.
○ 제조ㆍ영 1원씩, 별제ㆍ참봉 2원씩이 있었다.
도염서(都染署) :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 설치하여 천에 물들이는 일을 맡았다. 뒤에 폐지하여 제용감에
합쳤는데, 연조는 알 수 없다.
열무서(閱巫署) : 무당과 박수를 맡았는데, 지금은 활인서(活人署)가 되었다. 창설하고 폐지한 연조는 알 수
없다.
전함서(典艦署) :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고, 외사(外司)는 서강(西江)에 있다. 개국 초에 사수감(司水監)을
두어
전함(戰艦)을 만들고 고치며 수송을 감독하는 등의 일을 맡았었다. 세조 을유년(1465)에 전선(典船)이라
고치고,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경기 좌우도수참(京圻左右道水站)에 붙였다가,
뒤에 폐지하여 공조에 붙였다.
○ 도제조ㆍ제조ㆍ제검(提檢)ㆍ별좌(別坐)ㆍ별제(別提) 1원씩, 수운판관(水運判官) 2원, 해운 판관 1원이
있었다. ○ 남곤(南袞)의 기문(記文)이 있다.
전연사(典涓司) : 경복궁 홍례문(弘禮門) 서쪽에 있는데, 본조에서 설치하여 궁궐의 물이 잘 흐르도록 하는
일을 맡았는데, 뒤에 폐지하여 선공감에 합쳤다.
○ 제조 1원, 제검ㆍ별좌 ㆍ 별제 모두 5명, 직장 2원, 봉사 2원, 참봉 6원이 있었다.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 : 종루(鍾樓)의 동쪽에 있는데, 본조에서 설치하였다. 도성(都城)과 궁성(宮城)을 고쳐
쌓는 일, 그리고 궁궐ㆍ관공서ㆍ방리(坊里)의 집집마다 불끄는 등의 일을 맡았고 야간 출순소(出巡所)를 주관
했다. 뒤에 폐지하여 불끄는 일은 한성부에 붙이고, 성을 고치는 일은 병조에 붙였다.
○ 도제조 1원, 제조 2원, 제검 4원, 별좌 6원, 별제 3원이 있었다.
보민사(保民司) : 호조의 서쪽 가에 있었으니, 곧 옛날 장례원이다. 영종 40년(1764)에 창설하여 형조와 한성부
의 속전(贖錢 죄값으로 내는 돈, 벌금과 비슷함)을 맡았는데, 51년에 다시 폐지하고,
지금은 호조의 주요한 물건을 들여 쌓는다.
예의상정사(禮儀詳定司) : 예의상정소라고도 부른다.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서 설치했다가 뒤에 폐지
했다.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 : 세종 26년(1444)에 창설했는데, 뒤에 폐지했다.
경복궁 제거사(景福宮提擧司) : 태조 3년(1394)에 창설하여 소제하는 일과 자물쇠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가
뒤에 폐지했다.
종학(宗學) : 세종 원년에 창설하여 종실(宗室)을 바로잡아 가르치는 일을 맡았는데, 연산군 때에 폐지했고,
중종 초에 다시 설치했다가 뒤에 또 폐지했다.
○ 도선(導善)ㆍ전훈(典訓) 1원씩이요, 사회(司誨) 2원이 있었다.
○ 경복궁 제거사부터는 모두 폐지한 연조를 알 수 없다.
북학(北學) : 태종 때에 증설(增設)했다가 곧 폐지했고, 뒤에 자수원(慈壽院)이 되었다.
현종 2년(1661)에 원(院)을 헐고 다시 세웠는데, 흉년때문에 준공하지 못하였다.
그때에 남구만(南九萬)이 북학교수(北學敎授)였다. 언문청(諺文廳) : 세종 때에 설치했다.
신숙주(申叔舟)ㆍ성삼문(成三問) 등에게 명하여 언문을 짓게 했다.
내경청(內經廳) : 세조 때에 대궐 안에 청을 설치하고,
조정의 선비 홍응(洪應)ㆍ강희안(姜希顔)ㆍ성임(成任)ㆍ정난종(鄭蘭宗)ㆍ조치규(趙稚圭)ㆍ이기수(李期?) 등
에게 명하여 불경(佛經)을 쓰게 했다.
대청관(大淸觀) : 개국 초에 고려 제도를 따라서 설치하여 독(纛 천자ㆍ대장군ㆍ왕을 표시하는 큰 기(旗))을
간직해 두는 일을 맡았다. 뒤에 폐지했는데, 연조는 알 수 없다.
비계사(備戒司) : 연산군 때 창설하여 철갑(鐵甲)을 맡았다. 뒤에 폐지했는데, 그 연조는 알 수 없다.
홍귀달(洪貴達)의 기문이 있다. 응방(鷹坊) : 개국 초에 좌우방(左右坊)을 두었다가, 숙종 41년(1715)에 폐지
했다.
장용영(壯勇營) : 동부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정종 을사년(1785)에 창설하고 11년에 이현 별궁(梨峴別宮)을 영(營)으로 삼았다. 순조 원년(1800)에 폐지하고,
지금은 훈국(訓局)의 동영(東營), 혜청(惠廳 선혜청)의 동창(東倉)이 되었다.
연방원(聯芳院) : 연산군 갑자년 이후로, 몸매가 좋고 예쁜 부녀자들을 대궐 안으로 뽑아 들였는데,
처음에는 백으로 헤아리다가 끝내는 만으로 세게 되기에 이르렀다.
기생의 이?을 고쳐서 운평(運平)이라 하고, 대궐에 들어간 기생을 흥청(興淸)이라 하며, 따라 들어간 사람을
계평(繼平)ㆍ속홍(續紅)이라 하고, 악공(樂工)을 고쳐서 광희(廣熙)라 하고, <이들이> 있는 곳을 연방원이라고
불렀다. 원각사(圓覺寺)를 국(局)으로 하고, 또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의 집을 함방원(含芳院)으로 하며,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집을 부양원(●陽院)으로 하고, 견성군(甄城君)의 집을 진향원(?香院)으로 하여,
흥청 및 현수(絃手)들을 열을 지어 거처하게 했다.
취홍원(聚紅院) : 창경궁 명정전(明政殿) 오른쪽에 있었는데, 흥청 가운데 뽑힌 사람이 살았고, 병을 앓는 사람
은 청흠각(淸欽閣)에 있었다. 자수궁(慈壽宮)을 회록각(會祿閣)으로 삼아서, 일찍이 임금의 사랑을 받은 일이
있는 사람을 살게 했다.
두탕호청사(杜蕩護淸司) : 나인(內人) 가운데에서 예쁨이 쇠퇴한 사람이 살았다.
호화고(護華庫) : 흥청들의 음식 재료를 저장했다.
전비사(典備司) : 흥청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추혜서(追惠署) : 나인을 호상(護喪)하던 곳이다.
광혜서(廣惠署) : 효사묘(孝思廟) 곁에 있는데, 나인을 제사지내는 곳이다.
포염사(布染司) : 아상복(?祥服) 만드는 것을 감독했다.
봉순사(奉順司) : 사냥하는 데 쓰는 그물의 도구를 실어 나른다. 이상은 모두 연산군 때에 설치한 것으로 곧
폐지했다.
충의위(忠義衛) : 공신(功臣)의 자손이 속했다.
충찬위(忠贊衛) : 원종공신(原從功臣)과 자손 지속 이상과 첩의
아들로서 종가(宗家)를 이은 사람이 속했다.
충순위(忠順衛) : 이성(異姓)으로 시마(?麻)복을 입는 외6촌 이상, 친왕비(親王妃)의 사마복을 입는 외5촌
이상의 친족이 속한다. 선왕 선후(先王先后)에 관해서도 같다.
또 동반(東班 문신) 6품 이상, 서반(西班 무신) 6품 이상으로 일찍이 실지 높은 벼슬을 지냈던 사람,
문과와 무과 출신 생원ㆍ진사,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의 자손과 사위ㆍ아우ㆍ조카가 속한다.
친군위(親軍衛) : 영안(永安), 지금의 함경도(咸鏡道) 사람에서 남도와 북도 각각 20명씩을 붙인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 사이트에 번역본을 다운 받아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