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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료

동국여지승람 (경기도)권11.12.13. (한글 번역본)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3.10.28|조회수85 목록 댓글 0

11권 경기 6 양주목 楊州牧

 

동쪽으로 포천현(抱川縣) 경계까지 25리이고, 또 같은 현 경계까지 22리가 되기도 하며,

가평현(加平縣) 경계까지는 29리이고, 광주부(廣州府) 경계까지 75리이다.

남쪽으로는 광주 경계까지 67리이고, 또는 82리가 되기도 한다.

서쪽으로는 고양군(高陽郡) 경계까지 40리이고,

파주(坡州) 경계까지는 33리이다. 북으로는 적성현(積城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마전군(麻田郡) 경계까지 58리이며, 연천현(漣川縣) 경계까지 74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5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매성군(買省郡)인데, 창화군(昌化郡)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내소(來蘇)라 고쳤다.

고려 초에는 승격하여서 견주(見州)라 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는 양주에 예속하였다.

본조 태조 3년에 도읍을 한양부(漢陽府)-곧 옛 양주-에 정한 다음, 부의 관아를 동촌(東村) 대동리(大洞里)에

옮기고, 강등하여 양주지사(楊州知事)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승격하여 부(府)로 만들었다.

6년에 또 부치를 견주 옛터에 옮기고, 그대로 양주라 불렀다.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다.

세조 12년에 승격하여서, 목으로 만들고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풍양현(?壤縣) : 주(州)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 골의노현(骨衣奴縣)이다. 신라에서 황양(荒壤)이라 고쳐서 한양군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에서

풍덕(?德)이라 고쳤다. 현종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포천에 예속시켰는데,

본조 세종 원년에 다시 본현에 내속하였다.

 

진관 주(州) 하나 : 파주. 군(郡) 하나 : 고양. 현 다섯 : 영평(永平)ㆍ포천ㆍ적성ㆍ교하(交河)ㆍ가평.

관원 목사ㆍ교수(敎授) : 각 1명이다. 신증 연산 갑자년에 이 지역을 비워서 놀이하는 장소로 만들고,

나머지 지역은 분할하여서 이웃 고을에 예속시켰는데, 지금 임금 초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군명 매성(買省)ㆍ창화(昌化)ㆍ내소(來蘇)ㆍ견주(見州).

 

성씨 견주 : 이ㆍ김ㆍ송ㆍ신(申)ㆍ백ㆍ윤ㆍ피(皮). 한양 : 한ㆍ조(趙)ㆍ민ㆍ신(申)ㆍ함(咸)ㆍ박ㆍ홍(洪)ㆍ부ㆍ

최ㆍ정(鄭) : 아울러 내성이다.

예(艾)촌. 풍양 : 조(趙)ㆍ이ㆍ강(姜)ㆍ윤ㆍ유(劉). 사천 : 이ㆍ경(耿)ㆍ임(任)ㆍ송ㆍ허.

 

형승 세 영(嶺)이 하늘에 꽂힌 듯하다[三嶺揷天] : 이색의 시에, "깍아지른 듯한 세 영이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한데, 가파른 길이 얼어붙어 말이 못 가네." 하였다.

 

산천 불곡산(佛谷山) : 주 북쪽 3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삼각산 : 주 남쪽 39리 지점에 있다.

한성부 조에 자세히 적었다.

 

도봉산(道峯山) :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불암산(佛巖山) : 주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아차산(?嵯山) :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수락산(水落山) : 불암산 서북쪽에 있다.

주섭산(注葉山) : 주 동쪽 35리 지점에 있다. 또 포천현 조에도 적었다.

천마산(天馬山) : 주 동쪽 60리 지점에 있다.

천보산(天寶山) : 주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 포천현 조에도 적었다. 소요산(逍遙山) 주 북쪽 45리 지점에 있다.

묘적산(妙寂山) :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다. 왕방산(王方山) : 북쪽 60리 지점에 있다. 또 포천현 조에 적었다.

고령산(高嶺山) : 주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갈립산(葛立山) : 주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금대산(金臺山) : 주 남쪽 75리 지점에 있다. 검암산(儉巖山) :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홍복산(弘福山) : 주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소라산(所羅山) :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차유령(車踰嶺) : 주 동쪽 65리 지점에 있다. 벽석령(碧石嶺) : 주 동쪽 22리 지점에 있다.

석문령(石門嶺) : 주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효성현(曉星縣) : 주 동쪽 30리 지점에 있는데,

 

고려 고종 때에 김산(金山) 군사가 풍양 효성현을 침범하자, 관군(官軍)이 산 바깥쪽에서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노원역(盧原驛)까지 추격하였는데, 참수(斬首)한 것이 매우 많으니, 우마(牛馬)와 의량(衣糧)을 다 버리고 가버

렸다.

 

전두령(田頭嶺) : 주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추현(槌峴) :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다.

주을동(住乙洞) : 주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녹양평(綠楊坪) : 주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양진(楊津) :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광진도(廣津渡)라 하기도 하는데 미진(迷津) 하류이다. 강원도 춘천부 소양강(昭陽江)과 충청도 충주 금탄(金灘)

이 합쳐져서 이 나루로 되었다.

 

대탄(大灘) : 주 북쪽 74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영평현 백운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강원도

철원부(鐵原府) 체천(?川)에서 나와서 합류한다. 연천ㆍ영평을 지나 서남쪽 임진으로 들어간다.

풍양천(?壤川) : 풍양현 남쪽에 있다. 물 근원이 천마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광진에 흘러든다.

백달천(白達川) : 주 동쪽 85리 지점에 있다.

일곡천(一谷川) ; 주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홍복산에서 나오는데, 남으로 흘러 삼기강(三岐江)에 들어간다.

 

독포(禿浦) : 주 동쪽 67리 지점에 있다. 노지(蘆池) : 주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토산 실ㆍ삼ㆍ옥돌 : 옥돌은 갈립산에서 산출한다. 잣ㆍ송이ㆍ은어.

신증 녹반(綠礬) : 주 서쪽 청송리(靑松里)에서 난다.

 

봉수 아차산 봉수(峨嵯山烽燧) : 북쪽으로 대이산(大伊山)을 응하고, 서쪽으로 서울 목멱산(木覓山 서울 남산)

첫째 봉을 응한다. 대이산 봉수 : 주 동쪽 50리에 있다. 북쪽으로 포천현 잉읍재(仍邑岾)를 응하고, 남쪽으로

아차산을 응한다.

 

궁전 풍양군(?壤宮) : 풍양현 동쪽에 있다. 연희궁(衍禧宮) : 주 서쪽 59리 지점에 있다.

봉선전(奉先殿) : 봉선사(奉先寺) 동쪽에 있다. 우리 세조의 초상을 봉안하였다.

학교 항교(鄕校) : 주 동쪽 2리 지점에 있다.

 

역원 영서역(迎曙驛) : 주 서쪽 60리 지점에 있다. 찰방(察訪)의 본도인데, 속역이 여섯이다.

벽제(碧蹄)ㆍ마산(馬山)ㆍ동파(東坡)ㆍ청교(靑郊)ㆍ준예(?猊)ㆍ중련(中連)이다.

○ 찰방은 한 사람이다. 평구역(平丘驛) :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어, 본도의 속역 열 한곳을 찰방하는데,

 

녹양(綠揚)ㆍ안기(安奇)ㆍ양문(梁文)ㆍ봉안(奉安)ㆍ오빈(娛賓)ㆍ쌍수(雙樹)ㆍ전곡(田谷)ㆍ백동(白冬)ㆍ

구곡(仇谷)ㆍ감천(甘泉)ㆍ연동(連洞) 등이다.

 

녹양역 :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 오세문(吳世文)의 시에, "꽃이 있어 마을 값이 중하고 버들 없어 역 이름 외롭다. 높은 나무엔 해 먼저 비치고,

마른 잎엔 바람 먼저 분다." 하였다.

 

쌍수역 : 풍양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 주 남쪽 35리 지점에 있다.

광인원(廣仁院) :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상지원(相知院) : 주 서쪽 45리 지점에 있다.

도공원(陶孔院) : 주 동쪽 75리 지점에 있다. 덕해원(德海院) : 도봉산 밑에 해촌(海村)이라는 언덕이 있고,

덕해(德海)라는 원이 있는데, 서울에서 30리 거리이다.

○ 서거정의 시에, "누구네 집 울타리에 가시 삽짝 닫혔네. 버들은 우거지고 꽃 폈는데, 빛나게 또 마을 하나,

날 저물어 절룩 나귀 갈 곳 몰라 하는데, 작은 다리 밑에 물 흐르고 달빛이 밝혀 주네." 하였다.

 

○ "잔 들고 누(樓)에 올라 한번 웃으니, 수없는 푸른 산이 뾰족하게 무더기 이루었네. 돌아오고자 부질없이

십 년을 귀래시(歸來詩)만 지으니, 백발(白髮)은 다정하게 짐짓 재촉하는구나." 하였다.

 

도제원(道濟院) : 풍양현 남쪽 15리쯤에 있는데, 토원(兎院)이라 하기도 한다.

불우 회암사(檜巖寺) : 천보산에 있다. 고려 때 서역(西域) 중 지공(指空)이 여기에 와서 말하기를, "산수 형세가

완연히 천축국(天竺國) 아란타(阿蘭陀) 절과 같다." 하였다. 그 뒤에 중 나옹(懶翁)이 절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었고, 그 제자 각전(覺田) 등이 공역을 마쳤다. 집이 무릇 2백 62칸인데, 집과 상설(象設)이

굉장ㆍ미려하여 동방(東方)에서 첫째였고, 비록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목은(牧隱)이 기문을

지었다.

 

○ 고려 왕자 중 원경(圓鏡)의 글씨가 남루(南樓) 동서 벽과 객실(客室) 서편 다락에 남아 있다.

필중이 이르기를, "대정(大定 금국(金國) 세종의 연호) 갑오년에 서도(西都)가 반역하여 서북 방면 길이 막혔다.

그 때 금국 사신이 오니, 춘천(春川)길을 따라서 인도하여 맞아 들였다.

금국 사신이 절에 들자 상설에 예배하고, 모여서 글씨를 보았다.

한 사람은, '귀한 분의 글씨이다.' 하고, 한 사람은, '이것은 산인(山人)의 글씨이니, 나물과 죽순을 먹은 기운이

자못 남아 있다.' 하였다. 중이 옆에 있다가 사실을 알리니, 두 사람이 모두 제 말이 맞았음을 기뻐하고 이에

시를 썼다. '왕자는 고량(膏粱) 기운이 반쯤 남았고, 중은 소윤의 흔적이 오히려 남았네.

미친 장지(張芝)와 취한 회소(懷素)는 온전한 골기가 없었다. 이 글씨는 당년에 중된 것이 문득 한이로구나.'

하였다." 한다.

 

○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중창기(重創記)에, "우리 나라 산수 경치가 천하에 이름이 났으며, 불사로서 그 사이

에 있는 것이 또 몇 십 개인지 모르지만, 인사(仁祠) 제도의 극진한 것과 법왕(法王)ㆍ행화(行化)의 체제를 갖춘

것은 회암(檜巖)같은 것이 없다. 옛적 천력(天曆 원 나라 문종의 연호) 연간에 서천박가납제존자(西天博伽納提

尊者)가 이 절터를 보고, '서천 아란타사 터와 꼭 같다.' 하고, 또 '가섭불(迦葉佛) 때에 벌써 큰 도장이 되었다.'

하였다.

이에 먹줄을 잡아 측량하여 그 자리를 정할 때에 오래 된 주추와 섬돌을 발견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임시로

집을 덮어서 그 대개를 표시했을 뿐이었다. 얼마 뒤에 현릉왕사보제존자(玄陵王師普濟尊者)가 지공에게 삼산

(三山)과 양수(兩水)에 대한 기(記)를 받고, 드디어 여기에 와서 살았다. 이에 크게 창건하고자 하여, 책임을

나누어 맡기고 바쁘게 불연(佛緣)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공역이 반도 못되어서 왕사도 또한 서거(逝去)하였다.

그의 제자 윤절간(倫絶澗) 등이 왕사의 이루지 못한 뜻을 생각하여, 그가 남긴 규모를 계승하여 공역을 마쳤다."

하였다.

 

○ 목은 문정공이 기를 쓰기를, "보광전(普光殿) 5칸이 남으로 향했고, 전 뒤에는 설법전(說法殿)이 5칸이다.

또 그 뒤에는 사리전(舍利殿)이 1칸이고, 또 그 뒤에는 정청(正廳)이 3칸이다.

정청 동쪽과 서쪽에 방장(方丈)이 두 곳인데 각 3칸이다. 동쪽 방장 동편쪽에는 나한전(羅漢殿)이 3칸이고,

서쪽 방장 서편에는 대장정(大藏殿)이 3칸이다. 보광전 동쪽과 서쪽에서 좌우로 나뉘어, 여러 전이 우뚝하게

섰고, 여러 요사들이 높고 낮게 되었으며, 종루(鐘樓)ㆍ사문(沙門)과 부엌의 장소와 빈객(賓客)의 자리가 질서

정연하다. 지붕이 연달아 뻗쳤고, 골마루가 덩굴처럼 돌아서 높고 낮고 아득한 것이 동서를 모르겠다.

무릇 집 지은 것이 2백 62칸이었다." 하였다.

 

○ 이로부터 재간(才幹) 좋은 사람이 대마다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혹 불전을 시작했으나 승료(僧寮)까지는

미처 못했고, 혹 종루는 보수했으나 객실에는 미치지 못하여, 동쪽을 수리하자 서쪽이 벌써 기울고, 남쪽을 고

치면 북쪽이 또 상했다. 이는 절이 큰 까닭에 일이 거창했고, 일이 거창한 까닭에 사람이 능히 두루 짓고 다 잇

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나라의 큰 총림이 거의 빈 집이 되었다.

 

○ 성화(成化 명(明)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임진년 봄에 대왕대비 전하께서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

(鄭顯祖)에게 의지(懿旨)를 전해서 말씀하시기를, "내 한 부인으로서 조부의 여음(餘蔭)을 받들어 우리 세조

대왕을 돕고, 성자 신손(聖子神孫)을 낳아 길렀다. 이것은 비록 황천(皇天)이 동방(東方)을 돌보신 것이나,

또한 오랜 세대로 덕을 닦은 것이 불법에 근본하였던 것이다. 예부터 자애로운 어미가 그 자손을 보호하고자 하

고, 충신이 그 임금의 장수를 빌고자 하면, 오직 삼보(三寶 부처)에 귀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회암은 동국에서 큰 가람(伽藍 절)이다. 세 화상(和尙)이 서로 이어서 개산(開山)하였는데, 세 개의 산과 두 가닥

물 사이라는 말이 지공(指空)에서 비롯하였으니, 실상 임금의 장수를 빌고 나라를 복되게 하는 곳이다.

내 들으니, 터 쌓은 것이 견고하지 못하고, 전사(殿舍)의 섬돌을 잡석(雜石)으로 쌓았기 때문에, 창건한 지 오래

되지 않아서 집이 벌써 퇴락하였다 한다.

지금 간각(間閣)의 제도는 옛날대로 하여 고치지 않고, 뜰에 박힌 것은 모두 다듬은 돌로써 바꾸고자 하는데, 공

역(工役)을 계산하니 초창하는 것보다 두 배나 된다. 경(卿)도 또한 덕을 심은 인과(因果)가 있었으므로, 공주

(公主)와 짝할 수 있었으니, 경은 힘을 다해서 나의 넓은 원심(願心)을 이루게 하라." 하였다.

현조(顯祖)가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모두 중수(重修)하는 일이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합니다. 재물

과 곡식 저축이 많다 하더라도, 진실로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정양사(正陽寺) 주지

(住持) 처안(處安)은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일을 감당할 만한 재질로서, 그를 따를 자가 적습니다." 하니, 의지

(懿旨)로써 허락하였다. 드디어 처안(處安)을 회암사에로 이주(移住)시키고, 재물과 곡식 따위 비용은 내수사

(內需司)에서 전적으로 맡아서 모자라는 대로 보급하여 쓰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부원군도 또한 개인의 재산을 내어서 모자라는 것을 제공하였다. 처안이 승도(僧徒)와 속인(俗人)으로서 자원

(自願)하는 자를 모집하고, 일한 것을 계산하여 품값을 주도록 아뢰었다. 날마다 만 여명을 사역 시켰으나 감독

하지 않아도 저절로 힘껏 하였다.

그 해 월 일에 시작해서 거의 열 석 달을 지나 마쳤다. 전사(殿舍) 칸살은 다시 고친 것이 없고, 난간과 담의 넓

고 좁음도 보태거나 줄인 것이 없어도 방문과 문 차면이 더욱 넓어졌고, 단청을 칠하여 더욱 현란하였다.

백여 년 퇴락한 옛 절이 일조에 새로운 보찰(寶刹)로 변하게 되었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노송나무 푸르고 돌 기세 완악 한데, 잎 사이 풍우로 공중 기후가 차다. 늙은 중 출정(出

定)하여 성색(聲色)을 잊으니, 머리 위에 구슬 같이 세월이 달리는 구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손에 익은 여장(藜杖) 짚고 절 찾아가니, 장송(長松)이 바위에 기대어 나지막하네.

산 이름을 중에게 묻지 않고, 문에 걸린 현판에서 큰 글자 본다. 만학(萬壑)에 구름 피니 숲이 더 깊고, 천년 일

아득한데 새 자주 운다. 삼사탑(三師塔)이 칡덩굴 넘어 있어 꼭대기에 오르려니, 마음 더욱 아득하다." 하였다.

 

봉선사(奉先寺) : 주섭산(注葉山) 광릉(光陵) 남쪽 둔덕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기문에, "봉선사(奉先寺)란 것은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 세조대왕을 위해서 창건한

것이다. 성화(成化) 기원(紀元) 4년에 우리 세조대왕께서 승하하시니, 여러 신하가 양주(楊州) 땅에서 동쪽으로

30리 지점에 터를 가렸는데, 산은 주섭(注葉)이고 둔덕은 운악(雲岳)이다.

그 해 12월에 세조대왕의 현궁(玄宮)을 받들어 장사하니, 예(禮)대로 한 것이다." 하였다.

대왕대비께서 의지(懿旨)를 내리기를, "우리 대행대왕께서 몸소 큰 변란을 만나, 백성이 크게 원망하는 것을 바

로잡았으니, 성스러운 덕과 높은 공은 동방이 생긴 이래로 비교할 데가 없다.

국가가 불행하여 갑자기 뭇 신민을 버리시니, 아, 애통하다. 옛 제도를 상고하니, 선왕의 능침(陵寢)에는 반드시

정사(精舍)를 설치하였다.

지금 큰일을 마쳤으니, 경들은 절 지을 터를 살펴서 아뢰어라."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신 정현조(鄭顯祖),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신 한명회(韓明澮), 능성부원군(陵城府院君) 신 구치관(具致寬)

등을 제조(提調)로 삼았다.

능실(陵室) 남쪽에 깊숙한 구역 하나가 있는데, 산이 감돌았고 물이 차서 절 터로서 알맞으므로, 신 현조 등이

아뢰어서 허락을 받았다.

 

○ 기축년 6월에 짓기 시작하여, 가을 9월에 마쳤다. 칸살을 계산하면 총 89칸이고, 검고 붉은 것을 발라서, 극히

선명하였다. 불전과 승료(僧寮)가 빛나고 넓으며, 방울과 목탁이 바람만 불면 절로 울렸다.

천석(薦席)과 상탑(床榻)이 곱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으며, 빗장과 방망이 따위 도구와, 집기 따위도 넉넉하게

구비하여, 여러 사찰 중에 비교될 곳이 없었다. 전지(田地)와 노비ㆍ전곡(錢穀) 등 상주하기 위해 밑천으로 하는

숫자는, 영구히 부처와 중의 공양을 위한 것으로서 별도로 문부(文簿)가 있으므로, 여기에 언급(言及)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해 9월 7일에 세조를 위한 천도(薦度)를 크게 베풀어서 낙성(落成)하였다.

또 의지(懿旨)에 이르기를, "절을 지었으나 능침과는 둔덕이 서로 격했으니, 절 곁에다가 진전(眞殿)을 지어서

하늘에 계신 대행대왕의 혼령도 불법(佛法)에 귀의하게 하여, 저승에서 노니는 데에 이롭게 하라." 하였다. 이에

절 동쪽에다가 영전(影殿)을 건립하고 숭은전(崇恩殿)이라 이름하였다.

참봉(參奉) 두 사람을 두어서 새벽과 저녁에 배알하게 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헌관을 보내서 능실(陵

室)과 같이 예배하였다. 이에 제조 신 정현조 등이 돌아와서 일이 완성됨을 아뢰니, 예종대왕(睿宗大王)께서

'봉선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 들으니, 예부터 왕자(王者)의 일어남이 후(后)의 덕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夏) 나라의 도산

(塗山)과 주(周) 나라의 태사(太?)의 사적은 경전에 나타났고, 그 일도 빛남이 있다.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는

우리 세조를 보좌하였다. 잠저에서부터 보위에 오르기까지, 영특한 지략과 과단함으로써 성덕(聖德)에 이바지

하였다. 집을 변화시키고, 국가로 만들어서, 큰 명(命)이 붙는 데가 있게 하였다. 사적(史籍)을 살펴도 성덕의

높음과 내조(內助)한 공이 백왕(百王)에서 우뚝하였다. 비록 도산이 하(夏) 나라를, 태사가 주(周) 나라를 도왔

다 하더라도, 우리 대비 전하보다 낫지는 못하리라.

 

○ 들으니, 산 사람을 섬기는 데에 공경을 다한 자는 반드시 죽은 이를 섬기는 예를 다하고, 처세(處世)하는 가

르침을 높이는 자는 반드시 출세(出世)하는 법을 온전히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충신과 효자가 임금과 어버이

를 섬기는 데에, 능히 그 덕을 온전히 하는 도이다.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 선왕(先王)을 위해 애통해하는 정성

과, 추모하고 기도하는 뜻에 이미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큰 가람을 묘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창건했고,

삼보(三寶)의 가르침을 펼쳐서, 초승(超昇)하는 편제(便梯)를 일으켰다.

이것은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그 덕을 더욱 온전히 한 것이며, 여러 어진 덕을 겸비한 후비들과

나란히 할 수 있다. 또한 전대 제왕에도 드물게 있는 훌륭한 일이다.

 

○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종명(鐘銘)>에, "삼가 생각하건대, 세조 승천 체도 열문 영무 대왕 전하(世祖承天體

道烈文英武大王殿下)께서는 구오(九五)에 오르시고 금륜(金輪)에 임어(臨御)하시니, 신화(神化)가 미치는 곳에

가까운 데는 편히 여기고 먼 데서는 두려워하였으며, 백성과 만물이 모두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14년이 되어 불행히도 숙연(宿緣)은 다하였고 명수(命數)는 피하기 어려우며, 뭇 신하들은 복이 없어

문득 승하하심을 당하였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효성이 신명(神命)과 통하여, 우러러 호곡하심이 다함

없었다.

깊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여, 세상이 끝나도록 영원히 사모하였다. 이에 광릉(光陵) 곁에다가 큰 절을 영건

(營建)하여 '봉선사'라 이름하고, 유사에게 큰 종을 주조(鑄造)하도록 명하였다.

해당 관원이 왕의 뜻을 받들고 이에 부씨(鳧氏)를 상고하고, 금과 주석을 헤아려, 여섯 가지 재료를 형성하였다.

본[模範]이 이루어질 무렵에 신에게 명(銘)을 짓도록 명하시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니, 종이라는 기물이 쇠

로 된 것 중에서는 가장 크다. 그 소리가 용용(?容)하여 먼 데는 놀라게 하고 가까운 데는 두렵게 하며,

그 묘함이 위로는 삼천(三天)까지 통하고 아래로는 육도(六塗)를 겸한다. 타왕(?王)이 윤회(輪回)를 받고 꿈에도

종치기를 원했고, 제파(提姿)가 두번 울려서 크게 진교(眞敎)를 일으켰다. 인연 공덕(因緣功德)을 어찌 모두 말

하랴.

지금 이 종으로써 육부(六府)를 깨우치니, 어찌 특히 도려(道侶)가 깊은 각성(覺醒)을 말하며, 아득한 무리가 고

뇌(苦惱)를 그칠 뿐이리요. 반드시 아득한 현궁(玄宮)에도 통하여, 좌우에 들리면, 돈연(頓然)히 불지(佛智)를

더하여, 피안(彼岸)에 속히 오를 것이다. 하물며, 우리 세조대왕은 성한 덕과 높은 공이 만고에 빛나고, 우리 사

왕 전하(嗣王殿下)의 근본에 보답하고 영원히 추모하는 정성이 천지와 함께 다함이 없음에랴.

이러한 바를 종정(鐘鼎)에 붙여서 영원히 전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삼가 절하며 머리 조아리고 명(銘)하기를,

"능침 곁에다 보찰(寶刹) 지으니, 금벽(金碧)이 우뚝하게 솟아났구나. 법악(法樂)이 인간의 세계와 하늘에 울리

니, 묘한 소리 유명(幽明)을 화하게 한다. 그 중에 커다란 방망이 있어, 고래가 투그리듯 소리가 높다. 연모로써

두드려서 울리기만 하면, 귀 있는 자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법은 제진(諸塵)을 떠나지 않고, 삼기(三紀)가 합친

다음 이루어진다. 듣는 것이 있어도 들림이 없고, 마땅히 실(實)을 듣는 본성이 있다.

능히 듣는 자, 어찌 옳으랴. 본래는 실상, 청정(淸淨)뿐이다. 청정하면 때와 더러움 없이 이것을 이름하여 대원

경(大圓經)이라 한다. 사람마다 이 이치 갖추어져서, 한 번만 들어도 깨치게 된다. 위로 통함은 아가니(阿伽尼)

에게, 옆으로 둘리는 건 항하사(恒河沙)까지 법이 다하면 끝없는 삶의 복리가 이루어진다.

열성(列聖)이 올라서 바로 보니, 모든 형체 있는 것이 삼매에 든다. 삼광(三光)의 돗수가 순리로 되고, 만 백성

이 요사(夭死)와 역질이 없다. 진묵검(塵墨劍)이 지나도록 요도(瑤圖)와 함께 나라는 반석 같아 견고하리라.

산이 평지 되고 바다는 말라도, 공덕은 마침내 닳지 않으리라." 하였다.

 

개경사(開慶寺) : 옛날에는 현릉(顯陵) 동쪽에 있었는데, 능침과 가깝다하여 지금은 남곡(南谷)에 옮겼다.

중대암(中臺菴)ㆍ백운암(白雲庵)ㆍ소요사(逍遙寺), 소운암(小雲菴) : 아울러 소요산에 있다 :

고령사(高嶺寺) : 고령산에 있다.

청룡사(靑龍寺)ㆍ망월사(望月寺)ㆍ회룡사(回龍寺)ㆍ원통사(圓通寺)ㆍ영국사(寧國寺) : 아울러 도봉산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어느 해에 산 밑 절을 지었나. 객이 와서 종일토록 맴돌고 있다.

창문 여니 구름이 처마를 헤쳐 들고, 베개 비기니 시냇소리 땅을 울려 들린다. 옛 탑은 층이 있어 공중에 부옇게

섰고, 동강난 비는 글자 없이 반쯤 퍼렇게 묻혔다. 늙어서 인간 일, 죄다 버리고 돌아가지 않기로 중과 의논한다."

하였다. 은석사(恩石寺)ㆍ

 

범굴사(梵窟寺) : 아울러 기슭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한 줄기 긴 강이 맑디맑구나. 강 위에 푸른 산은 백층이로세. 절은 허공에 있어 놀과 연했고,

깊은 바위틈을 가느라 덩굴 잡는다. 불전에 향 사르며 예배 드리고, 밝은 창 햇살 쬐는데 중과 말한다.

화겁(火劫)이 망망하매 진계(塵界)는 작다. 한낮에 승화(昇化)할 인연이 없구나." 하였다.

 

묘적사(妙寂寺) : 묘적산에 있다. 김수온(金守溫)의 기문이 있다.

○ 신종호(申從護)의 시에, "한가히 생대(生臺) 밑에 앉아 있으니, 임궁(琳宮)에 밤들어 적적하구나. 매화(梅花)

보고 시 지으니 격(格)이 여위고, 차 달이며 술 마시니 취기 가신다. 깊은 원(院)에 바둑 소리 급하고,

주렴(珠簾)에 촛불이 일렁거린다. 밤이 새면 서울로 떠나야 할 터, 돌아가야 할 길이 아득도하다." 하였다.

 

불곡사(佛谷寺) : 불곡산에 있다. 수락사(水落寺) : 수락산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수락산 속 수락사에 물 마르고, 돌 나와 이해 저문다. 황학(黃鶴)이 나는 옆에 하늘이 낮고,

검은 구름 끄는 데 빗발이 난다. 거년에 중 찾아 여기 왔더니, 구렁에 눈 쌓였고 달이 밝았다. 금년에도 중 찾아

여기에 오니, 바윗가에 봄 꽃이 피었다 진다.

거년에도 금년에도 내왕하던 길, 산천은 역역하게 예와 같아라. 이끼 낀 길 미끄러워 청려장 짚고, 샘물이 흐르

는데 바람이 분다. 식후(食後)에 들리는 종소리 예전대로다. 벽 위에 시기(詩記) 있는데 먼지 덮였다.

홍수(紅袖) 고금(古今)이란 것, 어찌 구래공(寇萊公)뿐일까. 왕공(王公)의 호기(豪氣) 적음을 내 한번 웃노라.

스무 해 만에 처음으로 얻은 벽사롱(碧沙籠)." 하였다.

 

○ 앞사람의 서문에, "젊었을 때 여러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었다. 수락산에 왕래한 것도 또한 두 번이며, 이 시

를 우연히 벽 위에다가 적은 지도 지금 30여 년 전이다. 그저께 일암전상인(一菴專上人)이 이 시를 베껴 와서 나

에게 보이며, '장단 백태수(長湍白太守)가 외우는 것을 적었다.' 하면서, 나에게 그릇된 글자를 바로 잡아 주기를

요청하였다. 나는 시를 지어도 갑자기 짓고 문득 버려서 한두 마디의 말로 상자에 남겨 둔 것이 없다.

하물며 광망한 소년 적에 지은 것으로 유전(流傳)시킬 뜻이 없었으니 어찌 기록하였겠으며, 32년 전 일이 아득

하게 꿈속 같아서 그때 지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또 어찌 그릇된 글자를 알 수 있으랴.

그러나 한번 읽어보니, 운자(韻字) 단 것과 글자 놓은 것에 불만스러운 곳이 있다. 반드시 나의 유치한 시절의 잘

못이거나, 혹 외우는 자의 잘못이 아닐까.

우선 그냥 두었으나, 옛일을 생각하니 능히 느낌이 없을 수 없다. 드디어 근체시(近體詩) 여섯 수를 지어,

일암 법좌하(法座下)에 드렸다. 일암은 그 때 불암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수락사와는 겨우 10여 리이다.

후일 일암과 함께 한번 놀게 된다면 나의 말을 마치겠다." 하였다.

그 시(詩)에, "산중(山中) 옛절에 유람하던 일, 손꼽으니 지금 벌써 30년이다. 객과 함께 거닐면서 많은 시간을

중을 위해 머물렀다. 한가한 긴 날, 꽃이 짙고 대나무 빽빽하여 지역이 깊고, 나무 늙고 바위 돌아 작은 누(樓)를

안았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소년 적 지난 일이 유유하여라." 하였다.

 

○ "유유한 지난 일은 소년 적일세. 취한 중에 필세(筆勢)가 용솟음쳤다. 판벽(板壁)에 내 쓴 것은 무심하였고,

화등(花藤)에 중 베낌은 다사(多事)도 하다. 붉은 소매 푸른 비단은 본분 아닌 것이 부끄럽고, 흰머리 누른 티끌

속에 늙음이 밉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높은 봉에 또 오르면 쾌함 있으리." 하였다.

 

○ "다시 최고봉(最高峯)에 오르고 싶다. 정(井 별 이름)을 지나 참(參 별 이름) 만지면 가슴 시원하리.

한낮에 새 한 마리 머리로 날아 지나고, 푸른 산은 여러 용이 눈아래 노는 듯, 금은(金銀) 불찰(佛刹)은 3천 계

(界)이고, 금수(錦繡) 강산은 백 두 겹이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해질 무렵 앉아서 차를 끓이며."

하였다.

 

○ "저녁 해 떨어지고 차 끓는 소리, 청산은 거만한 듯 아랑곳없다. 굽어보니 구름은 평지에 일고, 쳐다보니 폭

포는 반공(半空)에 난다. 꽃비는 누(樓)에 가득 옷이 다 젖고, 베갯머리 송도(松濤)는 뼈에 사무친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청련(靑蓮)과 결연(結緣)하여 여생 보내리." 하였다.

 

○ "여생에 결연하기 첨 마음일세. 서글퍼라 연래에 눈 같은 머리. 원(願) 맺기가 옅지 않음 누가 알리. 산에 들

면 안 깊을까 항상 염려라. 스님과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총림(叢林)과 가깝구나 불암 촌서(村墅)가." 하였다.

 

○ "총림이 불암산 가까이 있고, 산 밑에는 내 집이 두어 칸 있다. 도잠(陶潛)의 세 가닥 길, 적막하여도 양로(楊

老)의 한 구역 집 반환(盤桓)하노라. 나물 캐고 죽순 구워, 예삿일이고 국화 보내고 매화 맞았다 하여라.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저문 나이 내 신세가 함께 따르리." 하였다.

 

불암사(佛巖寺) : 불암산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우리 집 서쪽 영(嶺)에 절이 있는데, 여러 벗들과 손잡고 함께 놀았다. 달 숲에 송뢰(松瀨) 소

리, 두릉(杜陵)이 묵었고[宿], 늙은 나무 굽은 바위 이백(李白)이 썼다. 객자(客子)가 안 오니 원숭이 서럽고,

노승(老僧)이 잠들려니 산새가 운다. 아득한 띠끌 세상 어느 곳인가. 흰 구름 땅에 가득, 길을 몰라라." 하였다.

 

석천사(石泉寺) : 수락산에 있다.

○ 앞 사람의 시에, "천불산(千佛山) 높푸르러 겹쳐졌는데, 발자국 미끄러워 칡을 잡는다. 구름이 노목을 덮어 매

집이 높고, 물이 샘에 흘러와 용이 숨었다. 손님은 시를 쓰려 석탑(石塔)을 쓸고, 스님은 예불(禮佛)하며 종을 울

린다. 올라가 임해 보니 동남쪽이 죄다 보인다. 건곤(乾坤)을 굽어보니 가슴 시원해." 하였다.

 

홍복사(弘福寺) : 홍복산에 있다.

정토사(淨土寺) : 주 서쪽 59리 지점 백련산(白蓮山)에 있으며, 의숙공주(懿淑公主)의 묘가 있다.

 

사묘 사직단 : 주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주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여단 : 주 북쪽에 있다.

양진사(楊津祠) : 광나루[廣津] 아래쪽에 있다. 용에게 제사하는 단이 있는데, 봄ㆍ가을에 나라에서 향축(香祝)

을 내린다. 신라 때는 북독(北瀆)이라 하여 중사(中社)에 올렸는데, 지금은 소사(小社)에 기재되어 있다.

 

능묘 건원릉(健元陵) : 본조 태조의 능이다. 주 남쪽 57리 지점인 검암산(儉巖山) 기슭에 있는데,

서울과는 20리쯤 되는 거리이다.

 

○ 권근(權近)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에,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보아서 치운(治運)을 열어 주는 데에는,

반드시 상서(祥瑞)가 먼저 있어서, 천명(天命)에 부합(符合)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우(夏禹)가 일어날 때에 하

늘에서 현규(玄圭)를 주었고,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왕으로 될 적에는 꿈과 점괘가 합치하는 상서가 있었다.

한당(漢唐) 이래로도 역대(歷代)로 일어날 때에 각각 부합하는 상서가 있었다. 이것은 지혜로써 구할 수 없고,

힘으로써 되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성철(聖哲)한 자질과 신무한 덕을 소유하고서 큰 운수에 응하여 탄생하고,

요도(瑤圖)를 잡아서 발흥한 다음이라야 쇠퇴한 세상을 변화시켜 다스려지는 태평한 세상으로 돌리고,

큰 기업(基業)을 창건하여 통서(統緖)를 후세에 남기는 것이니, 모두 하늘에서 주는 것이고, 사람의 꾀에서 나오

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 우리 태조 강헌 지인 계운성문 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 용잠(龍潛)에 있을 때에, 나가면 장수

이고, 들어오면 정승이 되었다. 수십 년 동안에 천명에 부합한 상서가 전후로 아울러 이르렀다. 정승이 되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잡고 하늘에서 주면서,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은 청백하지만 늙었고,

도통(都統) 최영(崔瑩)은 강직하지만 조금 어리석다.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룰 자는 공이 아니면 누구인가."

하였으니, 하우(夏禹)의 현규(玄圭)와 주무(周武)의 점괘와 합치하는 꿈을 꾼 것과 거의 되좇아 짝할 만하다.

장수로 되어서는 경술년에 올라(兀羅)를 공격하면서 군사가 압록강을 넘자, 자기(紫氣)가 공중에 가득했고, 경

사년 운봉 전첩(雲峯戰捷)에는 군사가 장단을 나서자,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한 고조(漢高祖) 망탕(芒?)의 운기(雲氣)와, 송(宋) 태조 진교(陳橋)의 일광(日光)과 또한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

다.

무진년에 요(遼)를 공격하라는 최영의 핍박을 당했다. 밖으로는 감히 상국(上國) 경계를 침범하지 못할 형편이

고, 안으로는 감히 폭군(暴君)의 영을 어길 수 없었다. 나아가기도 물러나기도 오직 딱하기만 하여 군사를 위화

도(威化島)에 주둔하였다. 여러 날 장마가 졌으나, 물이 매우 붇지 않았는데, 의기로써 군사를 돌이켜 언덕에 오

르니, 큰물이 때맞추어 와서 온 섬이 빠져 버렸다.

한 광무(漢光武)의 호타하(??河) 얼음과 원 세조(元世祖)의 전당(錢塘) 조수가, 모두 그 미담(美談)을 독차지하

지 못할 것이다. 구변도(九變圖)라는 국판[局]과 십팔자(十八子)라는 설(說)이 단군 때부터 벌써 있었던 것인데,

수천 년을 지난 지금에 징험된다.

또 이상한 중이 지리산(智異山) 바위 속에서 이상한 글을 얻어 바쳤는데, 그 말이 위에 말한 단군 때에 나왔다는

것과 서로 합치하였다.

이것은 또한 광무(光武)의 적복부(赤伏符)라는 것과 유사하다. 비기(?記)가 비록 떳떳하지 못하다 하나, 또한 이

치가 혹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여러 번 징험되었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봄이 참으로 증거 있는 것이다.

 

○ 신이 삼가 선원(璿源 임금의 족보)을 상고하니, 이씨는 전주(全州)에서 이름난 씨족이었다.

신라 적에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휘한(諱翰)으로부터, 그 후 23대 황렬고 환왕(皇烈考桓王)까지 여러 대로 승

적(承籍)한 아름다움을, 우리 태조께서 용잠하실 때에 선정(先正) 신 이색(李穡)이 지은 환왕 묘비에 갖추어 기

재하였다. 그 뒤에 태조께서 대업을 창건하시고 대통을 드리우신 신기한 공과 거룩한 업적으로써 4대를 추존 할

때에, 문신 정총(鄭摠)이 지은 환왕 정릉(定陵)의 비에 모두 적었다.

신이 지금 명을 받들었으나 감히 작은 것을 아뢰지 못하고, 우선 큰 것만을 모아서 말한다.

 

○ 사공(司空)이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6대를 지나 긍휴(競休)에게 와서 비로소 고려에 벼슬하

였다. 13대를 지나 황고조 목왕(皇高祖穆王)에 이르러, 처음으로 원 나라에 벼슬하여 천부(千夫)의 장이 되었고,

4대로 거듭 벼슬을 이어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원나라 운수가 쇠하여지므로, 황고 환왕이 들어와서 고려에 벼슬

하였다.

 

○ 공민왕(恭愍王) 때에 홍건적(紅巾賊)이 일어나서 중국의 도성(都城)을 침범하고,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을

유린(蹂?)하였으나, 천하에서 그 칼날을 감히 대적하지 못하였다. 지정(至正 원 순제의 연호) 신축년에 적이 왕

경(王京)을 함락하므로, 공민이 서울을 버리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시켰다.

우리 태조께서 앞장서서 싸움을 이기니, 위엄이 비로소 떨쳤다. 다음 해 임인년에 호인(胡人) 나하추[納哈出]

를 쫓아버렸고, 또 다음 해 계묘년에는 거짓 임금 탑첩목(塔帖木)을 축출하였다. 날카로운 기세를 꺾고 적군을

물리쳐서, 향하는 곳마다 반드시 이기니, 이 때문에 공민왕의 믿고 의지함이 더욱 중하였다.

여러 번 장상(將相)이 되어 중외(中外)로 나들면서 도적을 제압해서 민생을 편하게 하여, 여러 번 특별한 공을

세웠다. 호령(號令)이 명백하고 신실하여, 추호도 백성에게 범하지 않았다.

세상을 구제하려는 활달한 도량과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후한 덕이 천성에서 나왔다.

묘당(廟堂)에서 계획하는 여가와 전진(戰陣)에서 창을 던져 두는 여가에, 명유(名儒)를 맞이하여 경사(經史)를

토론하여 열심하여 게으름이 없었다. 혹 밤중까지 자지 않고 더욱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즐겨 보아서, 개연히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할 뜻이 있었다.

용맹스런 계략은 세상을 뒤덮고, 영걸찬 예기는 무리에서 뛰어났으므로, 일시의 물망(物望)이 또한 주목(注目)

하지 않는 자 없었다.

 

○ 공민왕이 갑자기 죽자, 명령(螟?)이 왕위를 도절하고 권세 잡은 간신이 국정을 멋대로 하여, 정사를 어지럽히

어 탐탁하고 살륙함이 끝이 없었다.

시중 최영은 이를 분하게 여겨, 주륙(誅戮)하면서 지나치게 참혹하게 하는데, 우리 태조의 힘을 입어 온전하게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최영은 태조가 청충용렬(淸忠勇烈)하다 하여, 특히 천거하여 우시중(右侍中)으로 삼

고, 이어 우군도통(右軍都統)의 절월(節越)을 주면서, 망령되이 군사를 움직여서 요(遼)를 공격하도록 핍박해서

보냈다.

이에 위화도(威化島) 행차가 있었는데,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대의(大義)를 가지고 군사를 돌렸다.

그리하여 홍무(洪武 명 태조 연호) 21년 무진 6월에 최영을 잡아 물리치고 명유 이색을 좌시중으로 삼아서, 서정

(庶政)을 고쳐 새롭게 하여 일국을 편하게 하였다. 이때에 먼저는 탐포한 무리의 탁하고 어지러운 정사를 만났고,

다음에는 광패한 신하가 틈을 만들어 잡게 됨을 당하여, 나라가 아주 위태하고 화란을 측량할 수 없었다.

우리 태조의 전화위복하는 힘이 아니었더라면, 온 나라 민생이 거의 혼란되었을 것이다.

 

○ 이색이 우리 태조에게 아뢰기를, "공이 지금 의거하여 군사를 돌리고 죄인을 쳐서 중국을 높였다.

노부(老夫 이색 자신)가 윗자리에 있어 이 국정(國政)을 같이 맡았으니, 공의 충성을 황제에게 모두 아뢰는 것이

나의 책임이다." 하고, 기일을 정하여 중국 서울에 갔다.

우리 태조는 여러 아들 중에서 가려, 지금 우리 주상 전하를 서장관(書狀官)에 충수하여, 이색을 따라 함께 조회

하게 하였다.

고황제(高皇帝)께서는 충성을 깊이 아름답게 여겨서 후하게 예하여 보냈었다." 하였다. 기사년 가을에 황제의

교지(敎旨)를 받으니, 딴 성씨를 왕씨(王氏)의 뒤로 삼은 것을 책망한 것이었다.

태조는 여러 장수와 함께 왕씨의 종친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뽑아 세웠다. 마음껏 보좌하고 정사와 형벌을 명

백히 하되,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억지로 빼앗은 것을 징계하고, 벼슬을 중히 하여 용렬하고 외람한 자를 도태

하니, 인정이 서로 기뻐하여 잘 다스림을 바라는 마음이 흡족하였다 그러나, 공명이 높으니 시기함을 받아 참소

가 서로 얽히는데, 정창은 일에 어두워, 도리어 참소에 의혹되었다.

우리 태조는 지위와 공명이 너무 가득한 것으로써 전문(箋文)을 올려 노퇴(老退)하기를 청했으나 해임되지 않았

다. 마침 서쪽으로 갔다가 병에 걸려서 돌아왔는데, 모해하려는 자가 틈을 타서 화가 신변에 절박하였다.

우리 전하는 시기에 따라 변을 제어하여 뿌리를 잘라버리니, 지당(支黨)이 와해되고 정창은 정사에 어두워서 국

세가 불안하였다. 그러므로 마침내 홍무 25년 임신 가을 7월 16일에 하늘이 전하를 도와서,

좌시중(左侍中) 배극렴(裵克廉), 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 등 52명과 함께 의기를 주창하여 추대하게 하니, 신

료와 부로가 모의하지 않아도 마음이 모두 같았다.

우리 태조께서 변을 듣고 놀라서 일어나 두세 번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나 민심이 절박하여 할수 없이 왕위에 올

랐다. 당(堂)에 내리지 않고 나라를 변화시켰고, 나라를 바꾸어[易姓] 명을 받기가 구슬을 굴리는 것같이 쉬웠다.

하늘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덕 있는 이를 돕는 것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으리요.

곧 지중추(知中樞) 조반(趙?)을 보내어 천자에게 아뢰니, 황제께서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삼한(三韓) 백성이

이미 이씨를 높여서 백성에게 병화(兵火)가 없고 각자 천명에 따르니, 상제(上帝)의 명이다." 하였다.

또 계속하여 칙서로서, "나라 이름을 무엇이라 고쳤느냐." 하여, 유성(流星)같이 급히 달려와서 보고하므로, 곧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나라 이름을 주청(奏請)하였다. 또 조서하기를, "조선(朝鮮)

이라는 명칭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으로써 근본하여 계승하고, 하늘을 본떠서 백성을 기르며, 영원히 후사(後嗣)

가 창성하게 하라." 하였다.

대개 우리 태조의 위정(威靜)이 본래 나타났으므로 천하에서 그 용맹에 복종하고, 충의가 이미 드러났으므로 천

하에서 그 슬기를 높이고, 공덕이 높이 들리었으므로 간택함이 황제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황명(皇命)을 청할 때를 당하여, 문득 유음(兪音)을 받았음이니, 어찌 우연한 일인가. 3년이 지난 갑술

년 여름에 황제가 친아들을 조정에 보내도록 명하였다. 우리 태조께서는 우리 전하가 경서(經書)에 통하고 이치

에도 밝으며, 일찍이 중국 조정에 조회하였다는 것으로써 곧 보내어 황명에 응하였다.

중국 서울에 가서 아룀이 성지(聖旨)에 합당하니, 후한 예로써 위로하여 보낸 것이었다. 그 해 겨울 10월에 도읍

을 한양에 정해서, 궁실을 건축하고 종묘를 건립하였다. 추존하여 황고조 목왕(穆王)과 황고조 비(?) 효비 이씨

(孝妃李氏)를 제1실에, 황증조 익왕(翼王)과 황증조 비 정비 최씨(貞妃崔氏)를 제2실에, 황조 도왕(度王)과 황조

비 경비 박씨(敬妃朴氏)를 제3실에, 황고 환왕과 황비 의비 최씨(懿妃崔氏)를 제4실에 봉사(奉祀)하였다.

또 각 산릉(山陵)에는 능을 수호하는 민호(民戶)를 두고 때에 따라 제사하였다. 예악(禮樂)을 닦아 제사ㆍ절차를

삼가고, 장복(章服)을 제정하여 위의(威儀)를 분변하였다. 학자(學資)를 넉넉히 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녹봉을

증가하여 사대부를 권장하였다.

분쟁하는 소송을 분변하고, 수령(守令)의 출척(黜陟)을 신중히 하니, 폐단이 죄다 없어지고 모든 정사가 화창하

였다. 제후(諸侯)의 법도는 삼가 사대(事大)하는 데에 정성스러웠고, 전함(戰艦)을 갖추어서 도적 막는 것을 엄

하게 하였다. 황제가 하사하는 것이 해마다 오고, 왜국(倭國)에서 보배를 바쳤다.

해적(海賊)이 위엄을 두려워하여 잇따라 와서 항복하니, 사방이 안정하여 백성이 편하고 불자가 성하였다. 우리

태조의 높고 넓으신 성덕은 참으로 이른바 하늘이 주신 용맹과 지혜이며, 또 총명하시어 뛰어난 무위(武威)로써

적을 죽이지 아니하고, 헌걸차고 거룩하여 범상하지 아니하니 호걸스러운 임금이라 하겠다.

간신 정도전(鄭道傳)의 표문(表文)으로 인해 꾸지람을 당하고, 황제가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하여 가지 않고 가만히 군사를 움직여서, 요(遼)를 공격하여 항명(抗命)하기를 꾀하였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조께서 편하지 못한 틈을 타서 여러 적자(嫡子)를 제거하고, 어린 서얼(庶?)을 끼고서 자신

의 뜻대로 하기를 도모하였다. 밤에 사제(私第)에 모였는데 화기(禍機)가 급박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기미를 밝

혀 죽여 없애고, 상왕(上王)이 적장(嫡長)이므로, 세자(世子)로 봉하기를 청하여, 이륜(?倫)을 바로잡으니, 종사

(宗社)가 이에 안정되었다. 9월 정축일에 우리 태조께서는 병환이 낫지 않으시어 상왕(정종(定宗))에게 선위(禪

位)하셨다.

상왕은 뒤를 이을 사자(嗣子)가 없고, 또 국가를 창건하고 사직을 안정시킨 것도 다 우리 전하의 공이라 하여, 우

리 전하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경진년 가을 7월 기사일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우리 태조에게 계운 신무 태상왕

(啓運神武太上王)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 겨울 11월 계유일에 상왕께서도 또한 병환이 계시어, 우리 전하

에게 선위하시고 사신을 보내어 황명을 청하니, 지금 황제께서 즉위하고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하사하셨다.

영락(永樂 명 성조의 연호) 원년 여름 4월에 도지휘(都指揮) 고득(高得)과 좌통정(左通政) 조거임(趙居任)을 보

내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으로 봉하고 잇따라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과 행인(行人) 최영(崔榮)을

보내 와서, 전하에게는 용포(龍袍)와 면류관(冕旒冠) 따위 구장복(九章服)과 비단ㆍ김ㆍ사적 등속을, 왕비에게

는 관(冠)ㆍ포(袍)와 비단ㆍ깁 따위를, 우리 태조에게는 비단과 깁을 각각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약재(藥材)ㆍ실ㆍ김과 보배로운 물품을 하사하는 것이 해마다 아울러 와서, 중한 총권(寵眷)이 옛날에

는 없었다.

영락 6년 무자 5월 24일 임신에 우리 태조께서 세상을 떠났으니 춘추가 74세였다. 왕위에 있은 것이 7년이고, 노

년(老年)이어서 정사를 보지 않은 것이 11년이었다.

신민이 다 어버이처럼 임어(臨御)하여서 영원히 영양(榮養)을 누리도록 축원하였는데, 일조에 신선이 되어 활과

칼만 남기시니 애통하여라. 우리 전하께서 애모하심이 다함 없었다. 양암(諒闇)에서 예대로 다하며, 군신을 거느

리고 책보를 받들어서 태조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이 해 9월 9일 갑인에 도성 동쪽 양주 검암산에 장사하였는데, 능 이름을 건원이라 하였다. 능 곁에다가 절을 설

치하여 이름을 개경(開慶)이라 하고, 명복(冥福)을 빌었다. 초상 장사에 예를 성심껏 하여, 옛 예전(禮典)을 꼭

따랐다.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부고하니, 황제가 놀라 슬퍼하여 조회를 파하였다. 특히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

을 보내어 대뢰(大牢)를 내리고, 글을 지어서 제사하였다. 그 대략에, "생각하건대, 임금이 명달하고 착함을 좋

아함은 천성에서 나왔다.

천도(天道)를 공경히 따랐고 의를 힘쓰며, 충성을 드리어 사대하는 데에 공손히 삼갔다. 한 지역 백성을 보호하

고 부(富)하게 하였다. 우리 황고(皇考)께서 그의 충성을 깊이 아름답게 여겨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國號)를

특히 하사하였다. 임금의 현저한 공덕은 비록 옛 조선의 어진 임금이라도 이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하고,

또 고명을 하사하여 시호를 '강헌(康獻)'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칙서하고 보물(寶物) 주는 것이 특히 후하고, 총권(寵眷)하는 예가 구비하여 유감이 없었다.

오직 우리 태조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으로 앞에서 터를 닦았고, 우리 전하의 부모의 뜻을 계승하는 효도는,

뒤에서 받들어서 성군(聖君)과 성군이 서로 이어 능히 천심(天心)에 화합하였다. 그러므로 정성이 신명에 통하

고 복과 경사가 종사(宗社)에 이어지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서 끝까지 크게 하늘과 사람, 상하(上下)의

도움을 얻은 것이 이와 같이 지극하니, 아, 성대(盛大)하시었다. 첫째 비(妃) 한씨(韓氏)는 안변(安邊)에서 여러

대를 살던 집안에서 나셨다. 증직(贈職) 영문하부사 안천부원군(領門下府事安川府院君) 휘 경(卿)의 딸인데 먼

저 승하 하였다.

처음 시호는 절비(節妃)였는데, 뒤에 승인 순성 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라는 시호를 더하였다.

6남 2녀를 탄생하였는데 상왕(上王)이 둘째이며, 우리 전하께서 다섯째이다. 맏이는 방우(芳雨)로서 진안군(鎭

安君)인데 먼저 죽었다. 다음 셋째는 방의(芳毅)인데 익안대군(益安大君)이며 또한 먼저 죽었다.

다음 넷째는 방간(芳幹)인데 회안대군(懷安大君)이고, 다음 여섯째는 방연(芳衍)인데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하

지 않았다. 딸로서 맏이 경신궁주(慶愼宮主)는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에게 출가하였으니,

같은 이씨는 아니며, 다음 경선궁주(慶善宮主)는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출가하였다.

다음 비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윤성(允成)의 딸이다. 현비(顯妃)로 책봉되었으며, 먼저 승하하여 시

호를 신덕왕후(神德王后)라 하였다. 2남 1녀를 탄생하였다. 아들로서 맏이 방번(芳蕃)은 공순군(恭順君)으로 추

증되었다.

다음 방석(芳碩)은 소도군(昭悼君)으로 추증되었다. 딸 경순궁주(慶順宮主)는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출가하였는데, 또한 같은 이씨는 아니며 모두 먼저 죽었다. 상왕의 배위(配位)는 김씨인데, 지금은 왕대비(王大

妃)로 책봉되었고, 증직 문하시중(門下侍中) 천서(天瑞)의 딸이고 후사가 없다. 우리 중궁(中宮) 정비민씨(靜妃

閔氏)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시호 문도공(文度公)인 휘제(諱霽)의 딸이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세

자 제(?)이고, 다음 우(祐)는 효령군(孝寧君)이며, 지금 임금 휘 충녕군(忠寧君) 다음은 어리다. 맏딸 정순궁주

(貞順宮主)는 청평군 이백강(李伯剛)에 출가하였다. 또한 같은 이씨는 아니다. 다음 경정궁주(慶貞宮主)는 평양

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경안궁주(慶安宮主)는 길천군(吉川君) 권규(權?)에게 출가하

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연(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2남을 낳았는데, 맏이는 복근(福根)인데 봉

녕군(奉寧君)이고, 다음은 덕근(德根)인데 원윤(元尹)이다.

익안군(益安君)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석근(石根)을 낳았는데 익평군

(益平君)이다. 회안군(懷安君)은 문하찬성사 벼슬을 추증받은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맹중(孟衆)을 낳

았는데 의령군(義寧君)이다. 신이 역대로 천명(天命)받은 임금을 보니, 신령한 상서의 경사는 당시 사필(史筆)을

잡은 사람이 반드시 자세히 기록하고 특별히 쓴 것은 밝은 덕이 부합함을 밝히어 분에 넘게 나라를 얕보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간책에 빛나서 무궁하게 빛을 흘렸다. 지금 우리 조선이 일어날 때에는 천명을 받은 부험이 사방

으로 모여들어 옛보다 빛났다.

이것은 비록 덕(德)에 인한 것이고, 경사할 것이 아니나, 하늘의 돌봄이 이 때문에 더욱 드러났다.

그리하여 마땅히 큰 덕이 천명을 받아, 이미 그 지위를 얻고 또 장수함이 마땅하다. 큰 기업이 우뚝하여 뽑히지

않으며, 큰 복이 내려서 다함이 없어 천지와 함께 장구하였던 것이다. 신은 못 쓸 재질(材質)로서 외람되이 사필

을 잡았으니, 진실로 갖추어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는 것이다. 하물며 이번에 외람되이 비명(碑銘)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으니, 감히 뜻을 다하고 생각을 다해서, 성덕을 포장(鋪張)하여 밝은 빛을 드리우지 않으랴.

그러나 신 근(近)은 필력이 비졸하여 성대한 공덕을 발양하여 밝으신 성지(聖旨)에 보답하기가 부족하오나,

이것은 소라 껍질로써 강과 바다의 물을 측량하고, 붓끝으로 천지를 모사하려는 것과 같다. 어찌 능히 그 물가에

나마 이를 것이며, 방불하게나마 엿볼 수 있겠는가.

삼가 보고 들은 공덕을 뽑아서 감히 손모아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명(銘)을 바친다. 명에 이르기를, 멀고 아득한

옛날에 양의(兩儀 천지)가 비로소 열렸다. 사람이 참여하여 셋으로 되었는데,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이에 길게 하고 다스리게 하여 이에 덕 있는 이를 돌보았으니, 하늘이 직접 말한 것은 아니나 명수(命數)가 있었

다.

우(禹)에게 현규(玄圭)를 주었고, 주(周)의 꿈은 점과 합치하였으니, 역대의 증거는 사책(史策)에서 볼 수 있다.

우리 조선은 처음부터 왕적(王跡)에 기초(基礎)가 있었다.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주었다. 자기(紫氣)

가 공중에 가득했으며, 무지개가 햇빛에 엉겼었다. 상서가 잇달았으니, 하늘의 마음이 분명하였다.

고려 운수가 마치게 되어 전복(顚覆)을 스스로 취하였다. 임금은 어둡고 정승은 참혹하였다. 농삿달에 군사를

일으켜 대국과 틈을 얽었다. 나라가 이미 미약하여 위태하였다. 우리 군사가 의(義)로 돌리어 죄인을 이에 잡았

다. 충성이 위에 알려지니, 황제 마음이 즐거웠었다. 윤음(綸音)을 잇달아 받아, 왕씨 종사를 다시 잇게 하였다.

도리어 혼약(昏弱)하여 천록(天祿)이 다 되었다. 역수(曆數)가 돌아가게 되므로, 여정(輿情)이 이에 박절하였다.

대업(大業)을 이루었으나, 저자 가게도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고황(高皇)이 찬탄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나라

를 두면서 백성에게 병화(兵禍)도 없이 천명을 순종했다." 하였다. 잇달아 국호를 내렸는데, 조선으로 복구(復舊)

하게 하였다. 터를 살펴 도읍을 정하니, 한수(漢水) 북쪽이었다. 백범이 걸터앉고 용이 서린 듯, 왕기(王氣)가 쌓

인 곳이었다. 궁실이 높직하고, 종묘가 날 듯하다.

공경히 조종(祖宗)에게 제사하고, 왕작(王爵)으로 높이었다. 인(仁)이 두터워 살리기를 좋아하니, 다스림이 성

하며 화하기를 생각하였다. 온갖 제도가 갖추어지니, 만 가지 교화(敎化)가 흡족하였다.

신민(臣民)과 부로(父老)가 춤추고 노래하였다. "접때 우리가 전제(顚?)할 때는 어육(魚肉)될 뻔하였는데, 지금

우리 다 소생하여, 은택에 젖었다. 밭갈고 우물 파서 부모 섬기고 처자(妻子) 기른다.

만년토록 수(壽)하시어 많은 복을 누리소서." 하였다. 이에 정사에 싫증이나서 맏이에게 전하였다. 맏이는 또

공 있는 분에게 양위(讓位)하였다. 그때 그때 미쳐 하였다. 밝고 밝은 우리 임금 기미를 밝히는 것이 촛불 같았

다. 싸락눈이 엉기다가 햇볕만 보면 풀려지는 듯하였다. 화란(禍亂)을 두 번이나 평정하니, 그 경사가 더욱 도타

왔다. 새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단정한 것은 모두 우리 님의 공이었다. 대명을 사퇴하기 어렵고, 신기(神器)는

돌아가는 데가 있었다. 양궁(兩宮)을 받들어 공손함이 더욱 정성스러웠다.

효제(孝悌)가 신에 통하니, 황제의 돌보심이 더구나 우악(優渥)하였다. 총애하여 주는 것이 해마다 와서 산 같

고 뫼 같았다. 사방이 편하고 먼 데나 가까운 데나 정숙(靜肅)하였다. 상(喪)을 만나 조심하며 애모(哀慕)하고

뛰며 굴렀다. 황제 듣고 놀라며 슬퍼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조곡(吊哭)하고, 대뢰(大牢)로 제사지냈다.

후한 부의(賻儀)와 칙서(剌書)로서 아름다운 시호를 포창(褒彰)하고, 휼전(恤典)을 갖추어 신칙하였다.

하늘에서 보우(保佑)하여 종시(終始) 변하지 않았다. 큰 복이 면면(綿綿)하여 자손이 천(千)이고 억(億)이어서

만년이 되도록 종사를 보전하리라. 높은 산이 날아가고 바닷 물은 말라도 종사는 길이길이 하늘과 함께 다함이

없다." 하였다.

 

○ 변계량이 지은 비음기(碑陰記)에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는 지극한 덕과 많은 공으로써 대업을 처음

이룩하였다. 다스림에 날마다 부지런히 생각하다가, 이에 편하지 못함이 오래이므로, 선위(禪位)하고 오래 영

양(榮養)을 누리기를 도모하였는데, 영락(永樂) 무자년 봄 정월에 또 편하지 못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지성으로

하늘에 빌고 수명(壽命)을 청하여 조금 나았다. 다섯 달을 지나 또 병이 발작하여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였다.

양주 검암산(儉巖山)에다가 예장(禮葬)하였는데, 서울과는 20리쯤 되는 거리이다.

산 내맥(來脈)은 장백산(長白山)을 뿌리로 하여 2천여 리를 뻗쳐 내렸다. 철령(鐵嶺)에 와서 꺾어져 서쪽으로 다

시 수백 리를 와서 우뚝한 것이 백운산(白雲山)이다. 또 남쪽으로 백여 리를 뻗어 와서, 북으로 모이면서 남으로

향하였으니 곧 검암산이다. 능(陵)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이며, 능에서 바로 병방(丙方)인 4백 21척 지점에 비(碑)

를 세워서, 우리 태조 공덕을 기록하였는데, 훌륭한 것을 기록하여 이미 상세하였다.

전하께서는 또 개국공신(開國功臣)의 성명을 비 뒷면에 새기고, 정사 좌명 공신(定社佐命功臣)의 또한 시기에

응해, 계책을 정해서 우리 태조의 창업 수통(創業垂統)하신 사업을 널린 자들도 아울러 새겨서, 민멸(泯滅)하지

않게 함이 마땅하다 하고, 신 계량에게 기문하도록 명하였다. 신이 그윽히 생각하니, 하늘이 큰 덕 있는 이를 낳

아서, 이 백성을 주장하는 데에는 반드시 팔다리같은 보필하는 신하가 전후(前後)에서 분주하여서, 앞에 개발

하고 뒤에는 지킨, 다음이라야 큰 공업이 성취하고, 큰 사업이 영구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일어날 때에도 문무 대신이 천명을 밝게 알고 능히 좌우에서 계적(啓適)하였다.

무인년에 정사(定社)한 것과 경진년에 좌명(佐命)함 같은 것은, 또한 훌륭한 친척과 좋은 보필이 서로 더불어 보

익(輔翼)하여, 그 공을 성취시켰고 큰 복을 영구하게 하였다. 이것은 마땅히 비석에다가 명을 새겨서 장래에 빛

나게 할 것이며, 우리 전하께서 조상의 공업(功業)을 드날리고, 공신을 표창한 아름다움도 또한 아울러 전하여서,

영원토록 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현릉(顯陵) : 본조 문종(文宗)의 능인데, 건원릉 동쪽 언덕에 있다. 신증 지금 임금 8년에 현덕왕후(顯德王后)를

부장(?葬)하였다. 광릉(光陵) 본조 세조(世祖)의 능이다. 정희왕후(貞熹王后)를 부장하였다.

고을 동쪽 41리 지점인 주섭산(注葉山) 직동(直洞)의 남쪽이다. 서울과는 60리쯤 되는 거리이다.

 

회묘(懷墓) : 주 남쪽 57리 지점에 있다. 서울에서 10리 되는 거리이다. 유량묘(柳亮墓) : 주 동쪽 80리 지점이다.

조운흘묘(趙云?墓) : 아차산에 있다. 남재묘(南在墓) : 주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정갑손묘(鄭甲孫墓) : 주 동쪽 44리 지점에 있다. 윤형묘(尹炯墓) : 주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신숙주묘(申叔舟墓) : 송산리(松山里)에 있다. 이직묘(李稷墓) : 주 서쪽 40리 지점에 있다.

윤자운묘(尹子雲墓) : 주 서쪽 내죽리(乃竹里)에 있다. 조말생묘(趙末生墓) 주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영응대군묘(永膺大君墓) : 주 동쪽 47리 지점에 있다. 홍응묘(洪應墓) : 주 동쪽 63리 지점에 있다.

신증 연산군묘(燕山君墓) :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박원종묘(朴元宗墓) : 주 동쪽 60리 지점에 있다.

성희안묘(成希顔墓) : 주 서쪽 35리 지점에 있다. 송질묘(宋?墓) :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신용개묘(申用漑墓) : 주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유순묘(柳洵墓) : 주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남곤묘(南袞墓) :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고적 사천폐현(沙川廢縣) :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 내을매현(內乙買縣)인데, 내이미(內?米)라 하기도 한다. 신라에서 사천(沙川)이라 고쳐서 견성군

(堅城郡) 속현으로 만들었는데,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대모산성(大母山城) : 주 서쪽 5리 지점에 있는데 석축이다. 둘레는 9백 6척이고, 높이는 5척이다.

수철성(水鐵城) : 주 북쪽 51리 지점에 있다. 둘레는 3백 57척이고, 높이는 14척이며 적성(積城)과 서로 마주

있다.

 

해촌처(海村處) : 주 서쪽 35리 지점에 있다. 송산처(松山處) : 주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명환 본조 권맹손(權孟孫) : 부사(府使)가 되었다.

 

인물

고려 송저(宋?) : 견주(見州) 사람이며 젊어서부터 총명하였다. 과거에 올라 명종조(明宗朝)에 어사 중승이 되었

다. 정중부(鄭仲夫)의 집 종이 법을 범했으므로 잡아다 다스렸는데, 그 때문에 파직되었으나 곧 우간의대부로

제수받았다. 서북 병마사(西北兵馬使)가 되어서는 무신(武臣)에게 미움을 받아, 거제현령(巨濟縣令)으로 좌천되

었다. 식견있는 자가 모두 말하기를, "저가 외방으로 나간 뒤에는 백성을 구제하고, 폐단을 개혁하자는 말이 들림

이 없었다." 하였다. 뒤에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조운흘(趙云?) : 풍양현(?壤縣) 사람으로 공민왕 때에 과거에 올랐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져서 전법총랑(典法摠

郞)으로서 사직하고, 상주(尙州) 노음산(露陰山) 밑에 살았다. 신우(辛禑) 때에 기용되어 좌간의대부로 제수되었

고,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전보(轉補)되었다가, 또 물러나서 광주(廣州) 고원(古垣) 강마을에 살았다.

판교(板橋)ㆍ사평(沙平) 두 원(院)을 중수하고 원 주인이라 자칭하였다. 해어진 옷과 짚신으로 심부름꾼과 함께

노역(勞役)하니, 길가는 자들이 그가 지난날에 높은 관직에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공양왕(恭讓王) 때에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가 되

었으나, 곧 병으로써 사직하고 광주 별장에 돌아갔다. 또 검교 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배명(拜命)되었다.

검교는 예에 따라 녹을 받는 것이나, 운흘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사람됨이 뜻 세우기를 기고(奇古)히 하여,

기이하고 높아서 뇌락하고 거룩하였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 행동하며, 시세에 따르기를 즐기지 않았다.

죽을 무렵에 자신의 묘지(墓誌)를 지었는데, "조운흘은 본래 풍양 사람이다. 고려 태조의 신하였던 평장사(平章

事) 조맹(趙孟)의 30대 손이고, 공민왕 때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하에 과거하여 서울과 지방 관직

을 역임하였다. 다섯 주의 원을 겪었고, 다섯 도 관찰사를 지냈다. 비록 큰 성적(成績)은 없었으나, 또한 비루한

짓도 없었다. 나이 73세가 되어 광주 고원성(古垣城)에서 병들어 죽었고 후사(後嗣)는 없다.

일월(日月)을 주기(珠璣 폐역)으로 삼고, 맑은 바람 밝은 달을 제물로 삼아서, 옛 양주 아차산 남쪽 마가야(摩訶

耶)에 장사하였다. 공자(孔子)의 행단(杏壇) 위에나, 석가(釋迦)의 쌍수(雙樹) 밑에인들 고금으로 성현이라고

어찌 홀로 있는 자가 있으리요. 아, 인생사(人生事) 이것으로 마쳤다." 하였다.

 

본조 조익정(趙益貞) : 과거에 올랐고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참여하였다.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고, 한평군

(漢平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효자 본조 최효손(崔孝孫) : 부모가 함께 죽자, 죽을 때까지 무덤을 지켰다. 성종(成宗) 21년에 이 일이 알려져서

정려(旌閭)하였다.

 

신증 윤금(閏今) : 아버지가 밤에 범에게 물려 갔다. 윤금은 용기를 내어 범을 치고 아버지의 영장을 빼앗았다.

지금 임금 7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교원우족맥장추(郊原雨足麥將秋)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서울 산하(山河) 중에서 몇째 주인가.

들녘에 비 흡족하니 보리 익으려 한다. 못을 보면 능히 정사하는 것을 알 수 있고, 들에 가서 머리 식히며 다시

계획한다. 부임(赴任)하는 누가 백학(白鶴)을 탔나. 다정한 객 청루(靑樓)를 꿈꾼다.

지명은 같아도 풍류는 다른데, 시름 속에 공연히 꾀꼬리만 운다." 하였다.

 

운간계견무릉원(雲間鷄犬武陵源) : 이인로(李仁老)의 풍양현 시에, "봉우리 밑 인가(人家)는 양삭(陽朔) 경계와

같고, 구름 속에 개ㆍ닭 소리는 무릉도원인가. 사군(使君)이 노란 소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보리 이삭 일렁

이는 것을 보기 좋아한다." 하였다.

 

산연화악중(山連華岳衆) : 권우(權遇)의 시에, "나귀를 타니 야취(野趣)가 많아, 천천히 저녁 빛 속에 걷는다.

역로(驛路)에는 모래와 먼지가 어둡고, 고을 성에는 수목이 울창(鬱蒼)하다. 산은 화악과 연이어서 많고,

물은 한수에 들어가서 길다. 이곳이 뽕나무 뿌리에 알맞아서, 칠경 초당(草堂) 짓기로 기약한다." 하였다.

 

운외종성욕석양(雲外鐘聲欲夕陽) : 이원(李原)의 사천현(沙川縣) 시에, "시냇가 풀 빛 아침비와 연했고,

구름 밖 종소리는 해질 무렵이다. 길손이 여가 없음을 스스로 웃는다. 내 말만 공연히 병들게 한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영아 수어중영(守禦中營) : 인조조(仁祖朝)에 두었다. ○ 중영장(中營將)은 본목사(本牧使)가 겸하였다.

○ 속읍(屬邑)으로는 양주(楊州)ㆍ양근(楊根)ㆍ가평(加平)ㆍ포천(抱川)ㆍ영평(永平)ㆍ저평(砥平)등이다.

 

성지 양진성(楊津城) : 아차산(?嵯山)의 동쪽 언덕 광진(廣津)의 위에 있으며 한강수에 접 해 있는데 광주(廣州)

평고성(坪古城)과 더불어 한강을 건너서 마주 있다.

○ 백제 시조(始祖) 14년에 위례성(慰禮城)에서 천도하여 한산(漢山)에 성을 쌓고 한강 서북을 한성민(漢城民)

으로 나누었다. 《여지승람고적(輿地勝覽古蹟)》에 이르기를, "장한성(長漢城)은 한강의 윗쪽에 있는데 신라가

중진(重鎭)을 두었으나 후에 고구려가 점령하게 되었으니 신라 사람들이 군대를 일으켜 다시 찾았다 한다."

 

대모성(大母城) : 서쪽으로 50리에 있으며 둘레는 9백 6척이다.

수철성(水鐵城) : 북쪽으로 50리에 있으며 둘레는 3백 5십 7척이고 적성(積城)과 수철성은 서로 맞은편에 있다.

중흥동고성(重興洞古城) : 북한산성 안에 있으며 산영루(山映樓)의 좌우편에 유지(遺址)가 있다.

백제 개루왕(盖婁王) 5년에 북한산성을 쌓았다는 말은 옳지 않은 것이다. 고려 우왕(禑王) 14년에 최영(崔瑩)에

게 명하여 한양의 중흥산성을 수리하게 한 것은 장차 왜적(倭敵)을 피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성의 둘레는 9천 5백 17척인데 지금은 북한산성 안에 들어간다.

○ 이 성은 백제 때에 시작하였으나 백제의 도성(都城)은 아니다.

 

아차산고성(?嵯山古城) : 산의 정상(頂上)에 유지(遺址)가 남아 있다.

풍양고성(?壤古城) 고현(古縣)이 서쪽으로 1리이다.

검암산고루(儉巖山古壘) : 산의 서쪽 봉우리 두 곳에 있으며, 선조(宣朝) 임진(壬辰)년에 의병장(義兵將)

고언백(高彦伯)이 쌓은 것이다.

 

궁실 풍양행궁(?壤行宮) : 풍양의 옛현 동쪽에 있으며 우리 태조(太祖)ㆍ태종(太宗)이 이곳에서 주필(駐?)하셨

다. 지금도 유지가 있다. 영종(英宗) 31년 2월에 풍양 구기(舊基)에 각(閣)을 건축하고 태조대왕이 친히 글을

써서 비(碑)를 세웠으니 상왕(上王) 때의 구궐(舊闕)에 유지가 12자 남아 있다.

진전 봉선전(奉先殿) : 광능(光陵) 국내(局內)에 있으며 세조(世祖)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는데 임진란 때에

강화로 옮겨 봉안하였다. 또다시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영변(寧邊)으로 옮겨 봉안하였다가 또다시 개성(開城)

에 봉안하였다가 다시 경도(京都)의 영희전(永禧殿) 때문에 봉전을 폐했다.

 

역참 구곡역(仇谷驛) : 동남쪽으로 90리에 있다.

 

방면 고주내(古州內)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25리이다. 주내(州內) : 곧 읍내(邑內)이다.

 

어등산(於等山)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30리이다.

별비곡(別非谷) :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진대(榛代) : 동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70리이다.

진관(眞官) :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미곡(尾谷) : 동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상도(上道) : 동남쪽으로 처음이 70리, 마지막이 백 리이다.

하도(下道) : 동남쪽으로 처음이 80리, 마지막이 백 리이다.

둔야(屯夜) : 처음이 15,리 마지막이 30리이다.

귀지(龜旨) :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망우리(忘憂里) :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해등(海等)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50리

이다. 광석(廣石) : 처음이 25리, 마지막이 50리이다.

천천(泉川)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20리이다.

현내(縣內) :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45리이다.

산내(山內) : 동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영근(嶺斤) : 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회암(檜巖)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30리이다.

접동(接洞) :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건천(乾川) :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금촌(金村) : 동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70리이다.

시북곡(柴北谷) :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30리이다.

미음(美音) : 동남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70리이다.

고양주(古陽州) : 동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노원(蘆原) : 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백석(白石)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40리이다.

석적(石積) :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40리이다.

신혈(神穴) :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진답(陳畓)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40리이다.

이담(伊淡)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청송(靑松) :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진도 미음진(美音津) : 동남쪽으로 70리에 있으며 광주(廣州)와 통한다.

광진(廣津) : 동남쪽으로 75리에 있다.

광주(廣州)에 보라. 대탄진(大灘津) : 대탄강에 있으며 연천(漣川)과 통하는데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목장 전곶장(箭串場) 아사찬의 서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경도(京都)까지의 거리가 15리이다. 국초(國初)에 설치

했는데 명종(明宗) 10년에 사복제조(司僕提調) 상진건(尙震建)이 청설(請設)하여 석책(石柵)의 둘레가 30리이

며 감목관(監牧官)이 있다. 수능(綏陵)을 옮겨 봉안하게 되니 목장을 철폐(撤廢)하였다.

 

능침 정능 남쪽 50리의 사아리(沙阿里)이니 경도(京都) 혜화문(惠化門) 밖이다.

태조(太祖)의 비(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인데 기진(忌辰)은 8월 13일이다. 처음에는 능이 도성

안의 황화방(皇華坊)에 있었으나 태종 9년에 이곳으로 옮기고 묘(墓)로 강등시켰는데 현종 10년에 다시 능으로

복귀하였다.

 

○ 영(令)ㆍ참봉(參奉)이 각 한 사람이다. 사능(思陵) : 군장리(群場里)에 있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45리이다.

단종(端宗)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宋)씨의 능인데 기일은 6월 4일 이다.

 

숙종 24년에 다시 능으로 회복하였다.

○ 영(令)ㆍ참봉 각 한 사람이다.

 

온능(溫陵) : 장흥면(長興面) 서쪽에 있으며 산수가 동(洞)을 둘렀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50리이다.

중종비(中宗妃) 단경왕후(端敬王后) 신(愼)씨의 능인데 기일은 12월 7일이다. 영종 16년에 다시 능으로 회복

하였다. ○ 영ㆍ참봉이 각 한 사람이다.

 

태능(泰陵) : 노원면(蘆原面)에 있는데 중종비(中宗妃) 문정왕후(文定王后) 윤(尹)씨의 능으로

기일은 4월 7일이다. ○ 직장ㆍ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강릉(康陵) : 태릉(泰陵) 동쪽 언덕에 있는데 명종(明宗) 대왕의 능이다. 기일은 6월 28일이다.

왕후 심(沈)씨도 합장하였으며 기일은 정월 2일이다. ○ 별검(別檢)ㆍ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목릉(穆陵) : 건원릉(健元陵) 두 번째 언덕에 있는데 선조대왕 능이며, 기일은 2월 1일이다.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도 좌측 언덕에 합장하였으며 기일은 6월 27일이다. 인무왕후 김씨도 좌측 언덕에 합장

하였는데 기일(忌日)은 6월 28일이다. ○ 별첨ㆍ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휘릉(徽陵) : 건원릉 서쪽 언덕에 있으며 인조비 장열왕후(莊烈王后) 조(趙)씨의 능인데 기일은 8월 26일이다.

○ 별검ㆍ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숭릉(崇陵) 건원 능 서남쪽 다른 언덕에 있는데 현종대왕의 능이며 기일은 8월 16일이다.

명성(明聖) 왕후 김씨도 합장했는데 기일은 12월 5일이다. ○ 별검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의릉(懿陵) : 천장산(天藏山)에 있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15리이다.

경종(景宗) 대왕 능이며 기일은 8월 25일이다. 선의(宣懿) 왕후 어(魚)씨도 합장했는데 기일은 9월 29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혜릉(惠陵) : 숭릉의 좌측 언덕에 있으며 경종비(景宗妃)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의 능으로

기일은 2월 7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원릉(元陵) : 건원릉의 우측 언덕에 있는데 영종 대왕 능이며 기일은 3월 5일이다. 정순(貞純) 왕후 김씨도 합장

했는데 기일은 정월 12일이다. ○ 별검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수릉(綏陵) : 건원릉 좌측 언덕에 있으며 익종(翼宗)대왕 능인데 처음에는 천장산(天藏山)에 장례했는데

헌종 병오년에 용마봉(龍馬峯)으로 옮겼다가 철종 을묘년에 이곳으로 옮겼으며, 기일은 5월 6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경릉(景陵) : 건원릉의 서쪽 언덕에 있으며 헌종대왕 능이니 기일은 6월 6일이다.

효현(孝顯) 왕후 김씨도 합장하였는데 기일은 8월 25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순강원(順康園) : 풍양(?壤)에 있으며 인빈(仁嬪) 김씨의 원이니 기일은 10월 29일이다.

○ 수봉관(守奉官)이 두 사람이다.

 

소녕원(昭寧園) : 고령산(高嶺山)에 있으며 숙빈(淑嬪)의 원이니 기일은 3월 9일이다. ○ 수봉관이 두 사람이다.

수길원(嫂吉園) : 소녕원 국내(局內)에 있으며 정빈(靖嬪) 이씨의 원이니 기일은 11월 16일이다.

○ 소녕원 관이 겸해서 보살핀다.

 

휘경원(徽慶園) : 달마동(達馬洞)에 있는데 처음에는 배봉(拜峯)에 장례했었으나 철종 계해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수빈(綏嬪) 박씨의 원이니 기일은 12월 26일이다. ○ 영과 참봉이 한 사람씩이다.

 

덕흥대원군묘(德興大院君墓) : 수락산(水落山)에 있으며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鄭)씨도 합장했으니

곧 선조대왕 황고(皇考)ㆍ황비(皇妃)의 묘이다.

 

회묘(懷墓) : 천장산(天藏山) 남쪽 지맥에 있으며 성종폐비(成宗廢妃) 윤(尹)씨의 묘이니 연산주의 어머니이다.

연산주가 즉위 때에 회릉(懷陵)으로 올려 불렀으나 중종 원년에 묘로 강등했다.

 

연산주묘(燕山主墓) : 해등면(海等面)에 있는데 처음에는 강화에 장례했으나 중종 7년에 왕자의 예로써 해등촌

(海等村)으로 옮겼다.

 

신씨묘(愼氏墓) : 회묘(懷墓)의 국내(局內)에 있으니 곧 연산주 폐비의 묘이다.

성묘(成墓) : 군장리(群場里)에 있으며 선조 후궁 공빈(恭嬪) 김씨의 묘이니 광해주의 어머니이다.

광해 계축년에 성릉(成陵)이라 추호했으나 인조 원년에 묘로 강등하였다.

 

광해주묘(光海主墓) : 군장리에 있으니 인조 21년 제주(濟州)에서 옮겼다. 사원 도봉서원(道峯書院)

선조 계유년에 건축하여 같은 해에 사액을 내렸다. 영종 을미년에 어필로 액을 달았다.

 

조광조(趙光祖)ㆍ송시열(宋時烈) : 모두 경도(京都) 문묘(文廟)에 보인다.

석실서원(石室書院) : 효종 병신년에 건축하여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김상용(金尙容) : 강화에 보인다. 김상헌(金尙憲) : 경도 종묘에 보라.

김수항(金壽恒) : 자는 구지(久之)이고 호는 문곡(文谷)이니 상헌(尙憲)의 손자이다.

숙종 기사년에 화를 당했는데 벼슬은 영의정 전문형,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민정중(閔鼎重) :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며 여흥(驪興) 사람이니, 숙종 임신년에 귀양가서 죽었다.

벼슬은 좌의정이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단상(李端相) :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요 연안(延安) 사람이다.

벼슬은 부제학에 이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청절사(淸節祠) : 숙종 병인년에 건축해서 신사년에 사액하였다.

 

김시습(金時習) :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니 강릉(江陵) 사람이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 정절사(旌節祠) : 숙종 임진년 건축하고 정종 갑진년에 사액하였다.

 

남을진(南乙珍) : 의령(宜寧)사람이며 벼슬은 고려 때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使)였고, 본조가 개국하자 감악

산(紺岳山) 석굴에 들어가 숨어서 나오지 아니하니, 태조가 그의 거소를 찾아서 사천백(沙川伯)을 봉하였다.

조견(趙?) : 처음 이름은 윤(胤)이고 자는 거경(巨卿)인데, 평양 사람이다. 본조에서 여러 번 부르니 도망가서 이

름을 견(?)으로 바꾸었다. 호는 송산(松山)인데 본조에서 그의 공훈을 기록하여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했

으나 굴하지 아니하였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고읍 현주(見州) : 동쪽으로 15리에 있는데 본래는 백제 매성군(買省郡)인데 마홀(馬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내소군(來蘇郡)으로 고쳐서 두 개의 현을 관할하였다. 중성(重城), 파평(坡平)은

한주(漢州)에 예속되었다. 고려 정종(定宗) 2년에 다시 현주군(縣州郡)으로 하였는데 창화현(昌化縣)이라고도

한다. 현종(顯宗) 9년에 양주에 예속시키고 후에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 태조 6년에 양주에서 치소(治所)를 이곳

현주로 옮겼다가 뒤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 고려 문종(文宗) 13년에 상서호부(尙書戶部)에서 아뢰기를 양주 경계안의 현주에 읍을 둔 지 백년이 되었으

니 사(使)를 파견하여 민전(民田)을 균정(均定)해 줄 것을 다섯 번이나 조정에 요청하였다.

○ 지금 고주내(古州內)이다.

 

풍양(?壤) : 동남쪽으로 4십 5리에 있는데 본래 백제 골의노(骨衣奴)이다. 노(奴)는 내(內)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으로 하여 현(縣)을 관할하였다. 고려 태조 23년

에 풍양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해서 후에 포주(抱州)로 하였다가 본조 세종 원년에 다시 풍양

에 속하였다.

 

 

파주목 坡州牧

 

동쪽으로 양주쪽으로 경계까지 23리이고 고양 경계까지 35리이며 서쪽으로 교하현 경계까지 17리이고,

북쪽으로 장단 경계까지 20리이며, 적성현 경계까지는 33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82리이다.

 

건치연혁 파평현(坡平縣) : 파(坡)를 파(波)라 한 곳도 있다. 본래 고구려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인데, 액봉

(額蓬)이라 한 곳도 있다.

신라 경덕왕이 파평(坡平)이라 고쳐서, 내소군(來蘇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현종 9년에 장단현에 예속시켰고, 문종(文宗) 17년에는 개성부에 예속시켰으며, 예종이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하였다.

서원군(瑞原郡)은 본래 고구려 술이홀현(述爾忽縣) : 이(爾)를 미(彌)라 한 곳도 있는데, 신라에서 봉성(峯城)이

라 고쳐서 교하현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고, 명종(明宗)이 비로소 감무를 설치하였다.

뒤에 서원현령(瑞原縣令)으로 만들었다.

본조 태조 2년에 그 고을 아전과 백성이 호소함으로써 승격하여 군으로 만들었고, 7년에는 서원ㆍ파평을 합쳐서

원평군(原平郡)으로 만들었다. 태종조에는 교하현을 없애고 이 고을에 내속하였다.

15년에 1000호가 넘었기 때문에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18년에 다시 교하현을 설치하였는데,

부는 천호 미만이므로, 당연히 강등하여 군으로 될 터이나, 아전과 백성이 다시 호소하여서 그대로 두었다.

세조 6년에는 왕비의 고장이라는 것으로 승격하여, 목으로 만들고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목사ㆍ교수 : 각 한 사람씩. 신증 연산 갑자년 본주(本州)를 혁파하고, 그 지역을 비워서 놀이터로 만들고,

나머지 지역은 이웃 고을에 나누어 붙였는데, 지금 임금 초기에 다시 설치하였다.

군명 파해평사(坡害平史)ㆍ액봉(額蓬)ㆍ파평(坡平)ㆍ영평(鈴平)ㆍ술이홀(述爾忽)ㆍ봉성(峯城)ㆍ서원(瑞原)ㆍ

원평(原平)ㆍ곡성(曲城).

 

성씨 본주 : 지(智)ㆍ윤ㆍ방(邦)ㆍ백ㆍ피. 봉성(峯城) : 서(徐)ㆍ염(廉)ㆍ야(夜)ㆍ차(車) : 촌.

 

산천 성산(城山) : 주 서쪽 2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혜음령(惠陰嶺) : 주 남쪽 35리 지점, 고양군 경계에 있다 : 반룡산(蟠龍山) : 북동쪽 7리 지점에 있다.

월롱산(月籠山) : 주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백운산(白雲山) : 주 북쪽 17리 지점에 있다.

미라산(彌羅山) :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파평산이라 하기도 한다. 표산(瓢山) : 주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동산(童山) : 주 서쪽 8리 지점에 있다. 그곳에 나무가 없으므로, 이렇게 이름하였다.

장산(獐山) : 주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깎아지른 봉우리가 우뚝 일어나서 서쪽으로 저포(猪浦)를 임했다.

용발산(龍發山) : 주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발산(鉢山) : 주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보신천(寶信川) :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양주 홍복산에서 나와서 교하현 학당포(學堂浦)에 들어

간다.

 

마담(馬潭) : 미라산 밑에 있다. 가연(嘉淵)이라 하기도 한다.

임진도(臨津渡) : 주 북쪽 17리 지점에 있다. 장단부 조에 자세히 적었다.

 

신증 : 당고(唐皐)의 시에, "양쪽 언덕은 석벽이고, 물은 복판에 흐른다. 뱃놀이는 다만 임진에만 알맞다. 명월은

뱃전에 비쳐 교교하고, 미풍(微風)은 귀밑에 불어 우수수하다. 가정년(嘉靖年)에 현도(玄?) 사신으로 되었더라

면, 동파(東坡)는 적벽(赤壁)놀이를 못했으리라. 같이 온 텁석부리 이 정승에 묻노니, 시를 지어 내가 아직 신선

못되었음을 비웃는가." 하였다.

 

저포(猪浦) : 주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곧 임진도 하류이다. 또 서쪽으로 흘러서 압포(鴨浦)로 되는데, 그 아래

쪽은 곧 낙하도(洛河渡)이다. 장단부 조에도 적었다. 장포(長浦) : 주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주 북쪽 가을두동(加乙頭洞)에서 나와서 임진도에 흘러든다.

 

우포(牛浦) : 파평산 밑에 있다. 물 근원이 적성현 경계에서 나와서 임진에 흘러든다.

서편 언덕 위에 궁궐 유지(遺地)가 있는데 주춧돌과 섬돌이 아직도 남았다.

 

장보포(長甫浦) : 주 서쪽 10리 지점인 광탄(廣灘) 하류에 있다. 또 서쪽으로 낙하도에 흘러든다.

이천(梨川) : 주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주 북쪽 목령동(木嶺洞)에서 나와서 장보포에 들어간다 :

광탄(廣灘) : 주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양주 고령산(高嶺山)에서 나와서 주 서쪽 10리 지점을 경유

하여 장보포로 된다.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말위에서 든 잠이 방금 깊어, 기틀을 잊게 함이 한음(漢陰) 같다. 구름은 먼 멧부리와

연했고, 마을 달 아래에는 다듬잇 소리 나네. 물새는 갔다가 오고, 물고기는 떠 올랐다가 잠긴다. 여울 소리 공연

히 목메이네. 남북으로 나의 마음 부끄러워라." 하였다.

 

토산 은구어ㆍ게ㆍ웅어ㆍ숭어ㆍ석창포.

봉수 대산 봉수(大山烽燧) : 주 서쪽 6리 지점에 있다. 북쪽으로 장단부 도라산(都羅山)에 응했고,

남쪽으로 고양군 소질달산(所叱達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 주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누정 임진정(臨津亭) : 임진도 남쪽 언덕에 있다.

○ 이첨(李詹)의 시에, "여러 번 임진도를 건너다가, 우리 집을 물가로 옮겼다. 모래는 멀리 언덕까지 연했고,

단풍 잎은 맑은 물결에 내린다. 사람은 동서 길을 가고 조수는 12시에 난다. 달 밝자 뭇 동물이 쉬는데,

사공[亭長]만이 홀로 시를 읊는다." 하였다.

 

역원 마산역(馬山驛) : 주 남쪽 4리 지점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냇물과 둑이 둘렸는데, 길은 멀리

이어졌다. 홀로 말 채찍 쳐서 뜻이 호연(浩然)하다. 떨어진 꽃은 땅에 가득한데, 붉은 것이 덧없고, 방초(芳草)는

하늘에 연했는 듯, 푸른 것이 더부룩하다. 나무 끝 저녁 볕에 까마귀 깃들이고, 하늘 반쯤 노을에 기러기 지나간

다. 장안(長安)은 몇 리일까. 보이지 않고, 청산은 백 굽이, 물은 천 돌림이어라." 하였다.

 

분수원(焚脩院) : 주 남쪽 24리 지점에 있다.

○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을 피해서 분수원에 이르렀는데, 안렴사(按廉使) 안숭원(安崇源), 충주 목사(忠州牧使)

박희(朴曦)가 와서 뵈었다는 곳이 곧 여기이다.

 

○ 채련(蔡璉)의 시에, "빗 줄기가 삼대같이 어지러워서, 갈지 말지 결단하지 못하였다. 뒤에는 푸른 재가 높다랗

고, 앞에는 시냇물이 목메인다. 지경이 궁벽지니 중이 궁벽지고, 하늘이 까마득하니 나는 새 안 보인다.

난간에 기대서 꿈을 꾸니, 꿈속에서 금궐(金闕)에 조회하였다." 하였다.

 

광탄원(廣灘院) : 광탄 언덕에 있다.

○ 권근이 지은 기문에, "광탄원은 두 곳 서울 사이에 있다. 양쪽으로 거리가 비슷하므로, 나그네가 여기에 많이

유숙한다. 그런데 원은 담이 무너지고 주추가 깨어져서, 우접할 곳이 없었다.

판화엄 오공(判華嚴悟公)이 자신의 재물을 희사하여, 다시 지으면서 그 앞쪽에다가 다락집을 건립하였다. 아래

로 큰 길에 임하여 들판을 굽어 보는데 올라서 바라보면, 마음이 시원하여 속세의 번잡함을 씻을 만하다.

나에게 기문 짓기를 청하므로, 내가 승낙하고 그 시말(始末)을 물었다. 오공이 말하기를, '산야에 묻힌 몸이 임금

의 오랜 지우를 받아서 은택이 두터웠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라도 하여, 임금을 위해 장수를 기원하고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다.' 하였다. 그 뒤에 또 이르기를, '기문하는 것은 남이 알아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내 공덕이 어찌 남이 알고 모르는 데에 관계 있으리요. 이것은 기문이 없는 것만 못하다.' 하므로, 내 또 응낙하

고 짓지 않았다.

기묘년 여름에 내가 옛 서울에 가다가 여기에서 아침밥을 먹고 이것을 원의 처마에다 기록하여, 전일에 응낙했

던 것에 막음하고 또 나의 걸음을 기록한다.

그때에 오공은 왕명을 받들고 석왕사에 갔으므로, 서로 거리가 천리나 된다. 오공이 이미 남에게 알리고 싶어하

지 않았고, 나도 또한 오공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 하였다. 혜음원(惠陰院) : 주 남쪽 26리 지점에 있다.

 

○ 정포(鄭?)의 시에, "말 몰아 작은 시내 건너서 가니, 지는 해 옛 빗돌에 풀어 성하다. 산 마을 4월에 길손이 적

어 깊은 숲에 꾀꼬리 제대로 운다." 하였다.

 

○ 이규보의 시에, "옛 동산의 세 가닥 길을 차마 묵게 할 수 있겠는가? 필마(匹馬)로 어디 가나 또 석양이구나.

버들 빛은 바람이 푸름을 당기고, 송화(松花)는 빗물에 누렇게 붙는다.

나물 곁들인 오리다리, 시골 국이 좋고, 고깃 발에 술 걸러서 야미(野味) 향긋하다. 자모(慈母)를 영접하여 서울

에 돌아오니, 이번 놀이는 풍경 좋은 것만이 아니었다." 하였다.

 

회원(檜院) : 주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이천원(梨川院) : 이천 언덕에 있다. 도솔원(兜率院) : 임진도 남쪽 언덕

에 있다.

○ 고려 공민왕 10년에 홍건적 선봉이 흥의역(興義驛)에 이르렀다. 왕과 공주는 남쪽으로 가면서 임진을 넘어서

도솔원에 막차하였다. 왕이 강 언덕에 대가(大駕)를 멈추고 산하를 돌아보면서 원송수(元松壽)ㆍ이색에게 이르

기를, "이와 같은 풍경에 경들이 연구(聯句)하기 꼭 알맞다." 하였다.

대가가 출발하면서 공주는 연을 버리고 말을 탔는데, 차비 이씨(次妃李氏)가 탄 말이 여위고 약하여서, 보는 자

가 모두 눈물 흘렸다.

 

○ 김부식(金富軾)의 시에, "말로(末路)가 구구하게 한가하지 못하다. 중선루(仲宣樓) 위에서 홀로 한번 웃노라.

길은 지세를 따라 높았다가 낮았다가, 사람은 관교(官橋)를 향해 갔다가 돌아왔다가, 비 뒤에 봄빛은 나무를 단

장하고, 아침에 서늘한 기운은 강산을 뒤덮는다. 시골 능첨지야 피하지 마소. 나도 화한 빛으로 그 사이에 섞이

고 싶소." 하였다.

 

불우 금강사(金剛寺) : 미라산에 있다. 상양사(上陽寺) : 백운산에 있다. 호명사(虎鳴寺) : 반룡산에 있다.

용상사(龍床寺) : 월농산에 있다. 항간에 전하기로는, 고려 왕이 일찍이 피란하여 여기에 주필(駐?) 하였으므로,

드디어 이 이름이 되었다 한다.

 

영은사(靈隱寺) : 용발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주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주 서쪽 2리 지점에 있다. 여단 : 주 북쪽에 있다.

 

능묘 공릉(恭陵) :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장순왕후(章順王后)의 능이다.

순릉(順陵) : 공혜왕후(恭惠王后)의 능이다. 곧 공능 남쪽 둔덕에 있다.

윤관묘(尹瓘墓)ㆍ송거신묘(宋居信墓) : 분수원 북쪽에 있다. 허조묘(許稠墓) : 주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조연묘(趙涓墓) : 주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심회묘(沈澮墓) : 주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성임묘 : 주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적 고파평현(古坡平縣) : 주 동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자운사(慈雲寺) : 임진 서쪽 언덕에 있다.

고혜음사(古惠陰寺) : 혜음령에 있다.

 

○ 김부식의 기문에, "봉성현(峯城縣) 남쪽 20리 지점에 작은 절 하나가 있었다. 황폐한 지가 벌써 오래이나,

고을 사람은 그 지역을 아직도 석사동(石寺洞)이라 한다. 동남쪽 여러 고을에서 서울로 오는 자와 위에서 아래

로 내려가는 자는 이곳으로 길을 잡지 않은 이 없다. 때문에 사람은 어깨가 맞부닥치고 말 발자취가 잇달아서

일찍이 끊일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산이 깊고 초목이 무성하니, 범이 제대로 몰려들어 편한 집, 편리한 곳으로 알

고 가만히 숨어서 엿보다가, 시시로 나와서 사람을 해친다. 이것뿐만이 아니고, 간혹 도둑과 짠지패가 그 지역이

깊어서 숨기 쉽고, 사람이 두려워해서 겁탈하기 쉬운 것을 편리하게 여겨서, 여기에 와서 살며,

간악한 짓을 이룬다.

그러므로, 양쪽 길을 가는 자는 주저하여 감히 앞서지 못하고, 서로 경계하여 많은 무리로 짝짓고, 병기를 가진

다음이라야 지나간다. 그렇게 하여도 오히려 화(禍)를 못 면하고 죽는 자가 해마다 수백 명이었다. 임금이 이소

천(李少千)에게 명하여 중 백여 명을 모집하여, 그곳에 가서 초막을 지어 머물게 하였다.

또 비구 응제(比久應濟)에게 명하여, 그 일을 주관하도록 하고, 제자 민청(敏淸)을 부책임으로 하였다.

기계를 편리하게 하고 재목과 기와를 모아서, 경자년 봄 2월에 시작하여, 임인년 봄 2월에 공사를 마쳤는데, 재

사(齋舍)와 부엌ㆍ광까지 모두 구비되었다. 또 승여(乘輿)가 남쪽으로 가는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한

번이라도 불행하게 여기에 주필하게 된다면, 준비가 있어야 한다 하여, 드디어 별원(別院) 하나를 지었는데,

또한 경치가 아름다워 볼 만하였다. 지금 임금이 즉위하자, '혜음(惠陰)' 이라고 사액하였다.

 

화석정(花石亭) : 주 북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지돈령 이명신이 살던 곳이다.

 

○ 서거정의 시에, "화석정 위에 구름 천년이고, 화석정 밑엔 강이 제대로 흐른다. 주인은 적선(謫仙)의 후손이

풍류와 시주(詩酒)를 계승했구나, 어느 해에 주인이 여기에다가 살 터를 잡았던가. 청전(靑氈) 옛 별업(別業)이

아니었던가, 이것은 이원(李原)의 반곡(盤谷)이 아니었고, 덕유(德裕)의 평천장(平泉莊)이 여기로구나.

주인이 일찍이 벼슬에 올랐으나, 용감히 물러나 시골에 돌아갔다.

강산 풍월(風月)과 지기(知己)가 되고, 지나간 잠발(簪?)은 뜬 구름 같았다. 정자엔 사시로 꽃 가득 피어 붉고,

흰 것이 비단 무더기일세. 정자 앞엔 흐르는 물 유유하여라. 물이 불을 때엔 포도주 되듯 한다.

가끔 흥나면 작은 배 띄워 상앗대로 물결을 가로지른다. 중류에 배 띄워 가는 대로 가며, 호탕한 얘기 소리 우레

같아 용을 놀라게 한다. 잔 잡고 달을 보니, 빛이 더 밝다. 달은 지지 않고 물결이 잔다.

왼편엔 황학(黃鶴)을, 오른편엔 백구(白鷗)인데, 하루살이[??] 인생이 무슨 상관이리. 그대여 이 즐거움을 아는

이 없소. 그대 같은 명철한 사람 고금에 드무오. 내 또한 별장이 장단에 있어, 십년을 가고파도 아직도 못 가니,

어찌하면 돛배가 물결 가르며, 많은 술 싣고 한 번 찾아가서 고래가 삼키 듯 흠뻑 취해서 노래 부르며, 두 다리

로 뱃전을 칠까." 하였다. 신증 : 이숙함(李淑?)의 기문에, "나의 문생(門生)으로서 전일 홍주(洪州) 원이었던 덕

수(德水) 이후(李侯) 의석(宜碩)이 그의 아우이다. 나의 동료인 의무(宜茂)씨를 보내 와서 말하기를, '파주 관아

북쪽 10리쯤에 율곡(栗谷)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나의 조부 강평공(康平公)의 옛 별장이고, 별장 북쪽 깎고 지른

듯한 봉우리에다가 정자를 지었다.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 진기한 소나무와 괴이한 돌을 많이 심어 놓고 관상하

였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되어 퇴폐(頹廢)해 버렸고, 다만 옛터만 남았다. 의석은 오직 조부의 기업이 황폐하게

될까봐 두려워하여, 옛터에다가 중건하였다. 정자는 장단 쪽을 향했는데, 석벽이 병풍처럼 되었고, 임진강 상류

를 임하여 지세가 매우 험하다.

난간에 기대서 바라보면, 한양 삼각산과 송도(松都) 오관산(五冠山)이 저 하늘 아득한 중에 머리카락만큼 약간

드러나는 바, 이것이 정자의 경치이다. 그러므로 자네가 정자 이름을 짓고 기문하여 아름답게 하기를 바라네.'

하였다. 나는 찬황공(贊皇公) 이덕유(李德裕)의 <평천장기(平泉莊記)> 가운데의 말에서 화석(花石)이란 것을

따서 이름 지었다. 그 기문이란 것을 상고하니, '평천을 파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며, 꽃 하나 돌 한 개라도

남에게 주는 자도 아름다운 자제가 아니다.' 하였다. 그 훈계한 것이 지극하다.

강평공의 별장과 정자에도 찬황공이 자손에게 훈계한 것과 같이 훈계한 것이 있었던가. 이것은 모르거니와,

후(侯)는 오랫동안 퇴폐한 옛터에다가 화석정을 잇달아 지었다. 옛 떨기에서 꽃이 피고, 옛 자리에 돌이 앉은 것

을 주인이 보면, 선조께서 북돋우고 심어서 애완하던 공력을 생각하여, 상재(桑梓)보다 공경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팔기를 즐겨하겠으며, 주기를 즐겨하겠나. 그 즐기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 찬황공이 비록 간절하게

훈계하였으나, 가씨(賈氏)가 기록하기를, '평천장의 꽃과 돌이 많이 유력(有力)한 자의 차지하는 바 되었다.' 하

였으니 후사가 있다 하겠는가.

강평공은 비록 훈계가 없으나, 후(侯)가 능히 지켜서 팔지도 주지도 않고, 선조의 마음에 맞게 하였으니, 뒤를

능히 이었다 하겠다. 그 사람의 어질고 불초한 거리가 이와 같이 멀다. 누가 옛사람과 지금 사람이 같은가 같지

않은가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가. 정자가 황폐하여지니 꽃과 들도 함께 황폐해지고, 정자가 새로워지니 꽃과 돌

도 함께 새로워졌다. 물(物)은 비록 앎이 없으나 만남은 각자 때가 있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리요.

이것도 적을 만하다. 그리고 외로운 배에 명월을 싣고 청평에 낚싯줄 드리움 같은 것은 후의 세상 밖 그윽한 정

취이다. 만약 후를 따라 정자 위에 놀게 되면, 다시 후를 위해서 글을 지으리라. 이것으로 기문한다." 하였다.

 

○ 이의무의 부(賦)와 서(序)에, "나의 중백씨(仲伯氏) 홍주통판(洪州通判)이었던 의석이 벼슬을 그만둔 그 해에

파주 율곡 별장에다가 정자를 지었는데, 실상 우리 왕부 강평공의 옛터이다. 양원공(楊原公) 이숙함(李淑?)이

화석으로써 이름을 짓고, 아울러 기문하여 아름답게 하였다. 아, 꽃과 돌은 무심한 물건이다.

그러나 선조의 수택이 남아 있다는 것으로 나를 감개하게 하므로 이에 글을 지어 이를 자랑함이 어찌 무심하리

요.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 중백씨의 뜻을 또한 알 것이다." 한다.

그 글에 이르기를, "계묘년 3월 기망(旣望)에 율곡장을 관람하는 객이 있어, 거닐면서 읊조리고 조망(眺望)하였

다.

주인이 기쁘게 맞이하여 서로 더불어 화석정에 오르니, 비스듬한 석벽이 강물을 임하였다. 앞으로는 관도(官道)

가 보이고, 뒤로는 우정(郵亭)을 굽어본다. 뭇 산이 몰려드는 듯하고, 들이 넓으며 호수가 질펀하다.

이것이 실상 높이 올라 바라보기에 훌륭한 경지로서, 천지가 빚어 만든 것이다. 그때에 봄볕이 한창 성하여서,

온갖 화초가 다투어 피었다. 새빨갛고 허연 것이 바람에 춤추어서, 모습이 가냘프다. 상긋한 것은 웃는 듯하고

비틀거리는 듯 낮은 것도 걸터앉은 듯하다. 간간이 괴상한 돌과 뾰족한 바위 돌이 기이하게 벌려져 있다.

객이 이에 눈썹을 쫑긋하고 눈을 들며 자리에서 물러나, 주인에게 말하기를, '이 정자는 장쾌하다.

내가 능히 주인의 즐거움을 알았다. 대개 성질이 굳은 것도 돌이고 물성(物性)이 고요한 것은 꽃이다.

아름다움을 군자와 견주면 향기로운 덕을 들 수 있고, 흥(興)을 시인(詩人)에게 붙이면 갈고 닦는 공부에 더함

이 있다. 이러므로 고인 달사(高人達士)가 여기에 많이 의탁하여 자연의 본성을 수양한다.

이렇다면 주인이 화석에 의탁하여 물을 완상함으로써, 자신의 심정을 쾌하게 하는 것이 어찌 공연한 일이겠나.'

하였다. 주인이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라, 옛날 나의 왕부께서 이 정자를 지을 때에 만족함을 알 나이로서 나

라가 태평한 기회를 만났으나 공명 버리기를 신짝 버리듯 하고, 마음은 세상 밖에 두어서 집을 짓고 고반(考槃)

하여 화석의 주인이 되었으니, 어찌 하여 부귀로써 마음을 옮기리요. 그러나 일조에 영원히 하직하니, 누가 능히

이 터를 지킬까. 내 어떤 사람인데 편히 주심을 받았던가. 애석하게도 벼슬에 얽매어서 골몰하다가 10년 만에 돌

아오니, 풀이 무성하고 이끼가 끼었다. 다행히도 전원이 그냥 남았으므로, 이에 다시 짓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내가 이 정자에 있으면서, 꽃피는 것을 보면 선조께서 북돋우고 심느라 근로하심을 생각하고, 기이한 돌을

보면 신조께서 어루만지고 쓰다듬던 사랑을 생각하여, 숙연하게 지시를 받드는 듯하고 완연히 갱장(羹墻)을 보

는 듯하다. 남긴 사랑을 잡고 공경을 일으킴은 상재(桑梓)보다 백 배나 더하다. 거의 조상의 유풍을 떨어뜨리지

않으니, 여가를 틈타 두루 놀리라. 술잔을 기울이며 스스로 위로하고, 가끔 높은 둔덕에 올라 강산과 풍월을 보

아도 평생에 못다한 회포를 풀기에 족하리다.

또한 천지 사이에 만 가지 물이 있고, 물을 보는 마음도 사람에 따라 갈래가 많다. 지나간 옛날이나 닥쳐오는 지

금이나, 누가 능히 돌리어 보는가. 가령 이춘(移春)이 헌함(軒檻)에 있음으로써 사치하는 마음이 점점 방자했고,

반한당(半閑堂)이 이루었으니, 국세(國勢)는 어디에 의지하리. 육랑(六郞)의 모습은 깊이 풍부한 형태를 짓고,

사녀(士女)가 서로 주는 것은 오직 희롱하는 것으로 본다. 혹 도사(道士)에게 꾸지람 당해도 그 술법(術法)은 상

고할 수 없고, 중에게 머리 끄떡여도 말이 또한 진실이 아니다.

무창(武昌) 언덕 위엔 망부정녀(望夫貞女)라는 낭설(浪說)이 전해 오고, 곡성(谷城) 산 밑에는 글 주었다는 노인

이 누구일까. 이것은 꽃과 돌이 바로 병통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꽃과 돌에게 혹됨이 고기 눈알을 보배와

혼동함과 같은 것이 있음이다. 그러나 방초(芳草)를 자리삼고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기이한 돌을 만지고 그윽

한 향기를 거둬들인다.

굽어 봐도 쳐다보아도 양심에 부끄럼 없이 거닐며 돌아다닌다. 연붉은 장소[軟紅]를 단념하고 허백(虛白)한 곳

에 흥겨워하여, 걱정도 즐거움도 다 잊고 총애도 욕스러움도 모른다. 이것은 선조께서 생각하시던 바이고,

내 여기에 욕되게 함이 없음을 안다.

비록 그러나 내 일찍이 들으니 흥하기도 폐하기도 하는 것은 물의 예사이고, 착하기도 악하기도 하는 것은 마음

의 기미라 한다. 선조께서 능히 열어놓으셨으나, 자손이 능히 지키지 못한다.

자손 중에 혹 지키더라도 황음(荒淫)한 지경이 됨을 면하지 못한다. 마침내 마음의 즐거운 대로 하여서,

고황(膏?)된 지경으로 몰아간다면, 이 정자에 다시 풀이 성하고 이끼가 깊어서 길이 선조의 뜻을 저버리게 될지

어찌 알리요.

이 점은 내가 두려워서 마음 편하지 못하는 것이며, 거의 후대에도 이 정자를 버리지 말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였다. 격이 유연히 웃으며 일어나 노래하기를, '아득한 외로운 정자, 강위에 높이 지었다. 석인(碩人)이 즐거

워하여 세월 보내며 마음 편하다. 산에 황정(黃精 약 이름)을 심고, 물가에서 백구와 친한다. 잡패(雜佩)를 가져

다 주고자 하나, 그대는 오지 않고 주저하네.' 한다."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이후(李侯)는 자손으로서 어질기도 하다. 당(堂)이 지금도 황폐하지 않았다.

어느 물, 어느 둔덕 소윤(少尹)이 슬퍼했고, 꽃 하나 돌 하나도 평천(平泉)보다 낫다. 현주(玄洲) 바람 비는 서해

에서 오고, 적현(赤縣) 멧부리는 반공에 솟아났다. 강평공 남긴 뜻이 영원함을 알고자 하면, 마을 가득한 풍경이

세전(世傳)이다." 하였다. 성산 고성(城山古城) : 석축이며 둘레가 2천 9백 5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명환 본조 유규(柳規)ㆍ남륜(南倫)ㆍ안상진(安尙縝) : 모두 부사가 되었다.

유효진(柳孝眞) : 목사가 되어 다스림이 제일이여서,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신증 여윤철(呂允哲) : 정사를 함이 청렴하고 공평하였다.

 

인물 고려 윤신달(尹莘達) : 태조조에 공신이었다.

윤금강(尹金剛) : 신달의 손자인데, 벼슬이 복야(僕射)에 이르

렀다. 윤집형(尹執衡) : 금강의 아들인데, 벼슬이 우복야에 이르렀다.

윤관(尹瓘) : 집형의 아들이고, 신달의 4대 손이다. 문종조(文宗朝) 과거에 올라, 여러 번 벼슬이 옮겨져서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당시에 여진이 정주(定州)에 마구 들어와서 약탈하였다. 왕이 관을 동북면 행영 도

통(東北面行營都統)으로 삼아 공격하여 쫓았다. 선춘령(先春嶺)에 이르러 경계로 하고, 구성(九城)을 설치하고,

개선(凱旋)하였으며, 벼슬이 대보 문하시중(大保門下侍中)에 이르러 죽었는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젊어서

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장상(將相)이 되어 비록 군중(軍中)에 있을 때라도 항상 오경

(五經)을 가지고 다녔다.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을 즐겨함이 당시의 첫째였다. 뒤에 예종의 묘정(廟庭)에 배향

되었다.

 

윤언이(尹彦?) : 윤관의 아들이다. 인종조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문장을 잘 하여

일찍이 《역해(易解)》를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 온다. 늙은 뒤에도 불법을 아주 좋아하였다. 늙으므로 벼슬에

서 물러나기를 청하여, 파평에 살면서 중 관승(貫乘)과 불가의 도우(道友)가 되었다. 관승이 부들로 암자 하나를

만들었는데 간신히 한 사람 정도 들어가 앉을 만하였다. 먼저 죽은 자가 여기에 앉아서 죽기로 약속하였다.

하루는 언이가 소를 타고 관승에게 가서 관승에게 이별을 고하고 바로 들어왔다. 관승이 사람을 시켜 암자로 보

냈으므로 언이는 웃으면서, "선사(禪師)가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구나." 하였다. 드디어 붓으로 벽에다가 쓰기를,

"봄이 다시 가을 되니, 꽃이 피었다가 잎이 진다. 동에 가나 서에 가나, 마음을 잘 기른다. 오늘 도중에서 이 몸을

돌이켜보니, 긴 하늘 만리에 한 조각 구름이다." 하고, 쓰기를 마치자 죽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윤린첨(尹鱗瞻) : 언이의 아들이며, 자는 태조(胎兆)이다. 의종조(毅宗朝)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여러 번 옮겨

져서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윤돈신(尹惇信) : 언이의 아들인데, 벼슬이 병부 시랑(兵部侍郞)에 이르렀다.

윤상계(尹商季) : 돈신의 아들이며, 벼슬이 위위소경(衛尉少卿)에 이르렀다.

염신약(廉信若) : 봉성(峯城) 사람이다. 인종조 과거에 올라, 광주 장서기(廣州掌書記)로 조용(調用)되었고,

여러 번 옮겨져서 정당문학 예부상서(政堂文學禮部尙書)에 이르렀다. 사람이 키는 작아도 담은 크다. 부(符)를

나누고 월(鉞)을 맡아서 가는 곳마다 치적(治績)이 있었다.

 

윤선좌(尹宣佐) : 관의 7대 손이다. 충렬왕 때 과거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다.

평생에 살림을 돌보지 않고, 오직 경사(經史)를 즐기었고, 문장이 깨끗하고 숙달하였다.

 

윤안숙(尹安淑) : 벼슬이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간(良簡)이다.

염제신(廉悌臣) : 곡성(曲城) 사람이다. 젊어서 아버지가 죽고, 고모부(姑母夫)였던 원 나라 평장사(平章事), 말

길(末吉)의 집에서 자랐다. 태정제(泰定帝)가 한 번 보고 기특하게 여겨서, 금중(禁中)에 숙위(宿衛)하도록 명하

였다. 오랫동안 어머니를 보살피지 못했다는 것으로써 휴가를 청하거늘, 황제가 명하여 금강산에 향(香)을 내리

게 하였고, 원에 돌아가서는 강소(江蘇)ㆍ절강(浙江)에 사신으로 가서 청백(淸白)하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어 돌려보내기를 청하니, 황제가 휘정원(徽政院)에서 전별연을 하사하여 보냈다.

왕이 친히 그의 얼굴을 그려서 하사하면서 말하기를, "시중은 중국에서 배웠고 성품이 고결하니, 조정 딴 신하

와 견줄 바 아니라." 하였다. 벼슬이 영문하부사 곡성백(領門下府事曲城伯)에 이르렀다. 총재(?宰) 지위에 있은

지 무릇 39년이었다.

 

윤세유(尹世儒) : 관의 손자이다. 희종조(熙宗朝)에 우어사가 되었고, 문학으로써 세상에 이름났다. 조정의 정사

가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문득 시(詩)에 의탁하여 비방하니 그때에는 광인(狂人)이라 불렀다.

 

윤척(尹陟) : 안숙의 아들인데, 벼슬이 영평군(鈴平君)에 이르렀다. 윤승례(尹承禮) : 척의 아들이다. 벼슬이 판

도 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본조 윤곤(尹坤) : 개국공신이며, 벼슬이 파평군(坡平君)에 이르고, 시호는 소정(昭靖)이다.

윤번(尹?) : 승례의 아들이고, 관의 후손이다. 벼슬은 영의정 부사(領議政府事)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정

(貞靖)인데, 우리 정희왕후(貞憙王后)의 생부(生父)이다.

 

윤형(尹炯) : 벼슬이 좌참찬이었고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윤자(尹慈) : 과거에 올라 벼슬이 경기도관찰사에 이

르렀다

 

윤암(尹巖) : 숙경옹주(淑慶翁主)에게 장가들었으며 좌익 공신(佐翼功臣)으로서 파평군으로 봉함을 받았다.

윤사분(尹士昐) : 윤번의 아들이다. 벼슬은 우의정이었으며, 시호는 이정(夷靖)이다.

 

윤사균(尹士●) : 사분의 아우이다. 정통 원년(正統元年)에 장원(狀元)하여 벼슬이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성안(成安)이다.

 

윤사흔(尹士昕) : 사균의 아우이다. 좌리공신에 참여하여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고, 파천 부원군(坡川府院君)

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아들 계겸(繼謙)은 익재 좌리공사에 참여하여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

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윤호(尹壕) : 과거에 올라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고, 국구(國舅) 초기 영원 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신증 윤필상(尹弼商) : 과거에 올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몸이 작으나, 담략(膽略)이 있었다. 성화(成化)

15년에 황제가 건주 야인(建州野人)을 토벌하고자, 우리나라에 군사를 불렀다. 성종(成宗)이 필상에게 군사를

거느려 도와 치게 하니, 크케 전첩(戰捷)하고 포로를 바치니, 황제가 조서로써 포창하고 상 내린 것이 매우 많

았다. 연산 갑자년 죽음을 당했다.

 

김인후(金麟厚) :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우거 본조 이첨(李詹) : 동산(童山) 밑에 살았다.

 

제영 여헌풍심견인수(旅軒風?牽人睡) : 이규보의 봉산현 시에, "산허리 기우는 해 처마에서 더딘데, 깨끗한 시

구는 오직 두자미(杜紫薇)만 읊조리네. 시냇가 대나무 짙은 그늘에 죽순이 뭇 자라고, 뜰 앞 매화나무 비 넉넉하

니 열매가 굵다. 여란 마루 대자리는 사람의 잠을 끌어 들이고 야점(野店 시골에 있는 상점)의 봄나물은 객의 시

장기를 달래는구나. 먼 곳에 유람하는것 누가 위문하리. 석루(石樓)의 중의 집은 연기와 노을에 잠기네." 하였다.

 

신경서반구경동(新京西畔舊京東) : 남재(南在)의 시에, "작은 고을 관아를 요긴한 골목에다 지었는데, "새 서울

의 서쪽이고, 옛 서울의 동쪽이라고 하네." 하였다.

 

삼도회래도(三道會來途) : 권근의 시에, "두 서울 중간에 유숙하는 곳, 3도에서 모여 오는 길이라."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진보 임진보(臨津堡) : 임진(臨津)의 남안(南岸)에 있으며 영종 41년에 별장(別將) 연강(緣江)을 설치하고 관성

(關城)을 쌓았는데 좌우의 길이가 백 3십 3보이며 진서문(鎭西門)이라고 불렀다. ○ 별장은 한 사람이다.

 

장산보(長山堡) : 임진도(臨津渡)의 아래로 2리에 있으며 영종 41년에 보를 설치하고 성을 쌓았는데 길이가 백

여 보이다. 또 돈대(墩臺)를 여덟 곳에 쌓았다. ○ 별장은 한 사람이고 이상 이보(二堡)는 총융청이다.

 

영아 방영(坊營) : 영종 40년에 장단(長端)으로부터 방영(坊營)을 본주로 이사했다.

○ 병마방어사 한 사람이고 본주의 목사가 겸한다.

 

총융중영(摠戎中營) : 인조조에 설치 총융우영(摠戎右營)이었는데 후에 중영(中營)으로 고쳤다.

○ 속읍으로는 파주ㆍ고양ㆍ교하(交河)ㆍ적성ㆍ속보(屬堡)ㆍ임진ㆍ장산(長山) 등이다.

○ 영장(營將)은 본 주의 목사가 겸한다.

 

토산 석회(石灰)가 난다.

 

성지 마산고성(馬山古城) : 서쪽으로 2리이며, 백제 때에 쌓았는데 본조 선조조에 중수하였고,

둘레는 2천 9백 5척이다. ○ 대로의 요충지에 홀로 우뚝 솟아 그에 상대할 만한 봉우리가 없다.

파평고성(坡平古城)ㆍ월룡산고성(月龍山古城) : 모두 남은 터가 있다.

누정 풍락정(?樂亭) : 읍내에 있다.

 

방면 주내(州內) : 마지막이 10리이다.

광탄(廣灘) : 동남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자곡(紫谷) : 서남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17리이다.

천점(泉岾) : 동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조리동(助里洞) : 남쪽으로 처음이 13리, 끝이 30리이다.

백석(白石) :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오리곡(烏里谷) : 서쪽으로 20리이다.

파평(坡平) : 동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칠정(七井) :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마정(馬井) : 서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신속(新屬) :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진도 임진도(臨津渡) :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저포진(猪浦津) : 서쪽으로 15리에 있다.

돌거리진(突巨里津) : 동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사원 파산서원(坡山書院) : 선조 무진년에 건축하여, 효종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성수침(成守琛) : 자는 중옥(仲玉)이고, 호는 청송당(聽松堂)이며, 창녕(昌寧) 사람으로

벼슬은 적성 현감(積城縣監)에 이르렀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성수종(成守琮) : 자는 숙옥(叔玉)이며, 수침의 아우이고, 세칭(世稱) 절효선생(節孝先生)이니,

직제학에 추증되었다.

 

성혼(成渾) : 수심의 아들이니, 경도문묘(京都文廟)에 보인다.

백인걸(白仁傑) : 자는 사위(士偉)이고, 호는 휴암(休庵)이며, 수원(水原) 사람이니 벼슬은 부참찬이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 자운서원(紫雲書院) : 광해주(光海主) 을묘년에 건축해서 효종(孝宗) 경인년에 사액하였다.

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박세채(朴世采) : 모두 경도문묘(京都文廟)에 보인다.

 

풍계사(?溪祠) : 숙종 갑술년에 건축해서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오두인(吳斗寅) : 자는 원미(元微) 호는 양곡(陽谷)이니, 해주(海州) 사람이다. 숙종 기사년에 항소(抗疏)하여

절개를 지키어 죽었다. 벼슬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세화(李世華) : 자는 군실(君實), 호는 쌍백당(雙柏堂)이고, 부평(富平) 사람이다. 숙종 기사년에 항소(抗疏)

하였으며, 벼슬은 행 이조 판서(行吏曹判書)이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박태보(朴泰輔) :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제(定齊)이고, 나주(羅州) 사람이다. 숙종 기사년에 항소하여 절개

를 지키어 죽었다. 벼슬은 응교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능묘 장능구기(長陵舊基) : 주(州)의 북쪽 운천리(雲川里)에서 영종 7년 교하(交河)로 옮겨 봉안했다.

 

 

고양군 高陽郡

 

동쪽으로 양주 경계까지 14리이고, 서쪽으로 교하현까지 21리이며, 남쪽으로 양천현 경계까지 26리이고,

북쪽으로 파주 경계까지 19리인데, 서울과는 37리 거리이다.

 

건치연혁 고봉현(高峯縣)은 본래, 고구려 달을성현(達乙省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고봉이라 개칭하여 교하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행주(幸州)는 본래 고구려 개백현(皆伯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우왕(遇王) -일명 왕봉(王逢)이라고 한다.- 이라

고쳐서 한양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기에는 행주(幸州)라고 개칭하였고, -일명 덕양(德陽)이라 하기도

한다.- 현종 9년에는 고봉ㆍ행주 두 현을 모두 양주에 예속시켰다.

 

부원현(富原縣)은 본래 과주 용산처(果州龍山處)인데, 고려 충렬왕 11년에 부원 황조향(富原荒調鄕)이라 고쳤

으니, 본래 부평부(富平府) 속현이었는데, 본조 태조 3년에 비로소 고봉 감무(高峯監務)를 설치하고,

행주ㆍ부원ㆍ황조향을 고봉에 예속시켰다.

태종 13년에 고봉ㆍ덕양 두 현의 이름에 가리어 지금 이름인 고봉으로 고치고, 현감으로 만들었다.

성종 2년에는 경릉(敬陵)ㆍ창릉(昌陵) 두 능이 있다는 것으로써 군으로 승격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한 사람씩. 신증 연산 갑자년에 본군을 혁파하고 그 지역을 비워서 놀이터로 만들었으며,

나머지 땅은 분할하여 이웃 고을에 갈라 붙였고, 지금 임금 초년에 다시 군을 설치하였다.

 

군명 달을성(達乙省)ㆍ고봉ㆍ행주ㆍ개백ㆍ우왕ㆍ왕봉ㆍ덕양.

 

성씨 고봉 : 고ㆍ진(秦)ㆍ강(康)ㆍ송ㆍ전(田). 행주 : 최ㆍ김ㆍ강(康)ㆍ부(夫)ㆍ은(殷)ㆍ기ㆍ고ㆍ전(田)ㆍ

칙(則)ㆍ나(那)ㆍ차(車)ㆍ이(李) : 다른 곳에서 온 성이다. 용산 : 변(邊)ㆍ이ㆍ강(康) : 모두 다른 곳에서 온

성이다.

 

건자산(巾子山) : 황보(皇甫).

 

산천 장령산(長嶺山) : 군 북쪽 18리 지점에 있다 : 대자산(大慈山) :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령산(高嶺山) :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성지산(星知山) :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건자산(巾子山) :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견달산(見達山) : 군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건지산(巾之山) :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혜음령(惠陰嶺) :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압도(鴨島) :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는 22리이다. 갈대가 생산되는데,

선공감(繕工監)에서 해마다 베어가서, 나라의 쓰임에 충당한다.

 

박만도(朴萬島) :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가 10리이다.

가둔천(街頓川) : 군 동쪽 5리 지점에 있는데, 물 근원이 양주 홍복산에서 나와서,

교하현 학당포(學堂浦)에 들어간다.

 

북포(北浦) :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양화도(楊花渡) 하류이다.

덕수천(德水川) :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물근원이 청당동에서 나와서 북포에 들어간다.

 

토산 웅어ㆍ게ㆍ은구어.

 

봉수 소질달산 봉수(所叱達山烽燧) : 군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북쪽으로 파주 대산(大山)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서울 모악(母岳)에 응한다.

 

고봉성산 봉수(高峯城山烽燧) :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서쪽으로 교하현 금단산(黔丹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봉현(蜂峴)에 응한다.

 

봉현 봉수(蜂峴烽燧) :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서쪽으로 고봉 성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서울 모악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 정이오의 기(記)에, "태조께서 천명을 맡은 지 3년 만인 갑술년에 도성은 한양에다가 정하고,

고봉을 갈라서 현으로 승격시켰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지 15년 갑오 가을 8월에 고봉ㆍ덕양을 합치고, 왕지를

받들어 고양이라 이름을 바꿨으니, 대개 덕양은 곧 형주를 겸한 명칭이었다.

홍희(洪熙) 기원 갑진년 8월에 현감 하군(河君)이 처음 와서, 공관(公館)이 무너지고 더러워도 수리하지 않는

것을 돌아보고, 군은, '이렇게 되어서는 왕인(王人 왕의 사신)을 예대(禮待)할 수 없다.' 하였다.

다음 병오년 봄에는 거의 다 무너졌으므로, 감사 심도원(沈道源)에게 고하여, 조정에 전문(轉聞)하게 하여 윤허

하는 교지를 받들었다.

재목을 모으고 장인을 불러서 그해 가을 8월에 역사를 시작하였다.

집이 높고 아름다우며, 제도가 크고 넓으니, 질서가 있게 단단하여 한 가지도 빠진 것이 없다.

담장을 두르고 꽃나무를 섞어 심어서 무성하였다. 동헌(東軒) 앞에는 못을 파서 연(蓮)을 심었고, 서헌(西軒) 앞

에는 돌을 빼고 우물을 팠다. 여름과 봄 사이에는 햇볕이 명랑하고, 연꽃이 향기로우며, 샘물이 차고 맑으니, 이

것은 또 다른 현에는 없는 것이다. 문묘(文廟)와 학교를 건립하고, 남별관(南別館)과 옛 관청도 옛 제도에 보태

기도 하고 새 집을 창건하기도 하여, 차례로 이루니 웅장한 모습이 서로 바라보인다.

무신년 11월에 공사를 마치고, 하군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청하였다. 대저 하군이 고양을 다스림과 고

양이 하군을 만남이 다른 때가 아니고, 오늘이 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리요. 지금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백성은 수송하는 수고로움이 없으며, 오직 밭 갈고 우물 파는 것을 일삼았으니, 원된 자는 정령이 번거롭지 않아

도 공이 쉽게 이루어졌음을 알겠다.

더구나 하군은 인(仁)으로써 어루만져 사랑하고 의(義)로써 시행하고 있다. 그 역사에 무리 지어 달려와서 공역

을 도운 것이 반드시 분명하다. 수령은 백성과 가까운 관직이니 백성이 편하면 이것으로 족하다.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은 감사를 공경하는 데에 있고, 감사를 공경하는 것은 성심으로 법을 준행하는 것 뿐이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지금 감사는 주ㆍ현과 한 마음으로 하지 않는 자가 많다. 감사는 오로지 주ㆍ현을 사찰

하고자 하고, 주ㆍ현은 오로지 가려서 덮어두려 한다. 그러지 말고 성심으로 함께 하며, 주ㆍ현이 다스림을 이루

지 못하는 바가 있거든, 가르칠 만한 것은 가르치고, 독촉할 만한 것은 독촉할 것이다.

그래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중에서 심한 자를 가려서 한 둘을 쫓아 버리어, 여러 사람을 경계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심공과 하군은 한 마음으로 함께 다스린 자라 할 수 있다.

하군의 이름은 부(傅)이며, 전조의 재상이었던 원정공(元正公) 집(執)의 후손이다. 관직에 있어서나 일을 처리

하는 데에 모두 가법(家法)이 있으니, 이번 일만 보아도 사람됨을 알 수 있다.

내 하군과 같은 고을 진주 사람이므로 문사(文辭)가 졸렬하지만, 사양하지 아니하고 그를 위해서 기쁘게 쓰는

바이다." 하였다.

 

학교 향교 : 군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벽제역(碧蹄驛) :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기 하루 전에, 이 역에서 반드시

유숙하게 된다.

 

○ 예겸(倪謙)의 시에, "길은 왕경(王京)으로 들어가는데, 이 밤 기온이 차다. 두 행렬의 횃불이 말안장에 번지

는구나. 청산을 지나온 것이 얼마나 될까. 분명히 눈을 들어 보지 못하였네." 하였다.

 

○ 기순(祈順)의 시에, "초가에 우는 닭이 4경을 알렸는데, 가라말이 객을 재촉해 왕경에 가자 한다. 많은 역부

(驛夫)는 분주해 구름 모으는 것 같고, 여러 횃불은 얼기설기 불성[火城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줄지어

늘어세운 횃불]이런가 의심한다. 좋은 산은 길을 껴서 경치를 분변하기 어렵고, 다리를 지나 흐르는 물은 소리

만 들리네. 날이 환하게 밝자 가랑비 내리는데, 황은(皇恩)을 선포하는 것이 이번 걸음에 있다."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사신이 전번에 산을 바쁘게 지나는데, 가려는 맘 급해 바라보는 눈이 아찔하다.

초목은 무정(無情)하다고 나를 웃을 것이다. 풍랑은 곳곳마다 제영을 남기지 않았네. 돌아가는 행장엔 청유막

(靑油幕)을 가졌고, 가는 말은 그대로 벽옥 발굽 뒤집는다. 기러기가 물가를 따른다는 것을 비로소 믿겠다.

진흙 눈의 자취가 동서를 함부로 가네." 하였다. 신증 왕창(王敞)의 시에, "사성(使星)이 어젯밤에 요서(遼西)에

비치더니, 동쪽으로 돌아와서 벽제역을 지난다. 준마 뼈에 채찍질 해 천리마를 재촉하고, 향기로운 혼이 땅에

가득하니, 당리(棠梨) 꽃이 떨어졌네. 수목은 여름에 들어 겹 그늘에 합쳤고, 새는 사람을 멈추기 위해 뜻이 있

게 운다. 청쇄(靑鎖 궁문)를 떠나온 뒤에 꿈에도 그리웠는데, 문득 사적(仕籍)을 통해 금규(金閨)에 올린 것을

보았네." 하였다.

 

덕수원(德水院) : 덕수천 남쪽 언덕에 있다.

○ 이색이 덕수에서 비를 만나 지은 시에, "성문을 나기 전부터 비가 동이로 쏟더니, 성문을 나서니 경위(涇渭

경수는 흐리고 위수는 맑음. 즉 사물의 청탁을 이른다)를 분간하기 어렵다. 예전에는 흥이 나면 우중(雨中)에도

중의 집을 보았는데, 오늘은 시름 깊어 여관에서 빗소리만 듣는다. 벽을 사이한 빠른 우레는, 샘에 돌이 떨어지

고 처마에 가득한 찬 기운 남에 구름이 핀다. 남북으로 잦은 나그네 길 꺼리지 않는 건, 반쯤은 나의 어버이,

반은 임금을 위해서." 하였다.

 

인후원(仁厚院) : 군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이태원(梨泰院) : 군 동남쪽 50리 지점에 있다.

중방원(重房院) : 군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신증 흥복원(興福院) : 군 북쪽 6리 지점에 있다.

 

불우 대자암(大慈菴) : 대자산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산속에서 여윈 말 채찍질하고, 절 안에서 고승(高僧)과 이별한다.

빽빽한 수목엔 구름도 어둡고, 명랑한 모래엔 물이 절로 맑다. 거친 둔덕에 예전 빗돌을 찾고, 기우는 날에 전조

의 능(前陵)을 조상한다. 가을을 슬퍼하는 객이라 마소. 다락집 오르니 한이 많네." 하였다.

 

정인사(正因寺) : 경릉 동쪽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의 <중창기(重創記)>에, "능침(陵寢)에 절이 있음은 무슨 일일까. 대개 사왕(嗣王)이 선왕을

추모하여 능침 측근에 절을 세워 인사(仁祠)로 삼아서 삼보(三寶)를 높이고, 명혼(冥魂)을 천도(薦度)하기 위한

것이다.

한ㆍ당 이래로 영명(英明)하고 의로운 임금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은 제왕이 근본에 보답하고

영구하게 추모하는 데에 극진함을 다하는 도리였다. 천순(天順) 기원 가을 8월에, 우리 의경대왕(懿敬大王)이

승하하시었으므로 고양군 동쪽 봉현(蜂峴)에 장사하였다. 장사한 다음 해에 세조 대왕께서 내수사에 전지(傳旨)

하기를, '내 아들 의경이 불행하게 수명이 짧아서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다.

초상 장사에 일이 거창하였으니, 거듭 국가를 번폐스럽게 하지 않고자 한다. 너의 내수사는 현실(玄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절 한 구역을 만들어라. 혹시라도 폐단을 끼치지 말고 완성하게 하라.' 하였다.

드디어 그 해 모월 모일에 능 동쪽에다 절의 터를 잡고 터를 넓혀서 역사를 시작하였는데, 열두 달을 지나서 마쳤

다.

신묘년 봄에 우리 인수 왕비(仁粹王妃) 전하께서, '절을 당시에 급속하게 지었으므로 재목이 매우 좋지 못하고 지

음새가 정밀하지 못하였다. 가령 오래 되지 않아서 썩고 허물어지면 무엇으로써 후세에 보일 것인가.' 하고,

이에 판내시부(判內寺府) 신(臣) 이효지(李孝智)에게 명하여 그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였다. 그리고 궁중에서

물품 중에 일찍이 절약한 것을 쌀과 베로 계산한 약간을 내수사에 주었다. 장차 날을 가려서 예전 집을 철거하고

새로 창건하려는 데, 대왕대비 전하께서, '의경 대왕과 예종 대왕 두 능의 현실(玄室)이 아주 가까와서 한 절의

종소리가 서로 들릴 만한 곳이다.

만약 인수 왕비의 개축하려는 원심(願心)을 인해서, 힘을 합치고 재물을 함께 하여 정인(正因)의 일을 도우면

공이 쉽게 이루어지고, 내가 의경ㆍ예종을 위해 천복(薦福)하는 정성도 또한 거의 이루어질 것이다.'

하였다. 이에 내수사에 특별히 신칙하여 돈과 곡식을 더 내도록 하고, 이어 진실로 모자라는 것이 있으면, 수시

로 알리어서 그 쓰임에 보태게 하였다. 그 해 2월에 시작했는데, 백성들을 부역시키지 말고 백성을 뽑아 노역에

싻을 주도록 명하였다. 마침 서울 가까운 지역에 흉년이 들어서 늙은이 젊은이를 막론하고 앞을 다투어 품팔아

먹었다.

삽을 멘 자가 구름같이 모이고 동아줄 당기는 데에 개미처럼 붙어 두드리거나 치는 것을 보지 않아도 사람들이

기꺼이 일에 나아가므로, 겨울 10월 일에 이르러 일이 이루어졌으니, 총 1백 19칸이었다.

방앗간과 변소도 각각 제자리에 있고, 바르고 칠한 단청을 휘황 현란하게 하였다. 전당(殿堂)과 골마루가 통활

장려하고, 방과 헌함과 문이 선명 정밀하였다. 집이 높다랗고 상설(象設)이 빛나서 사찰로서 아름다움이 봉선

사(奉先寺)와 서로 첫째 둘째로 될 만하다.

전당 제도와 칸살의 넓고 좁음은 모두 전일에 판화엄 대선사 설준(判華嚴大禪師雪峻)이 아뢰어서 윤허를 받은

대로였다. 인수왕비 전하께서, '절은 있으나 곡식이 없으므로 중이 의지할 곳이 없다.' 하여 특히 미곡 백 섬을

시주하여, 본곡(本穀)은 남겨 두고 이자만 이용하여서, 식륜(食輪)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무릇 집기 등속도 죄다 여유 있게 구비하였다. 계사년 4월 초파일에 낙성 법회를 크게 실시하고, 대승(大乘) 여

러 경(經)을 인출하였다. 이날 오색 구름이 있고, 이상한 향기가 골에 가득하며, 서기(瑞氣)가 하늘에 뻗쳤다.

원근에 있던 중 수 만여 명이 쳐다보고 절하며 일찍이 없었던 일임을 감탄하였다. 신은 엎드려 생각하건대,

모자간 은혜와 부부간의 윤기(倫氣)는 천지간 떳떳한 의리에 근본한 것으로 천자로부터 서인에까지 통한 것이

다. 우리 의경대왕과 예종대왕은 한창 시절이었고 성덕이 새로워지는 중이었는데, 문득 여러 신하들을 버렸다.

이 때문에 대왕대비 전하와 인수왕비 전하께서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한 정에서 나오는 것이니, 비록

천지를 다하고 만고에 이르도록 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그러나 온 나라 신민이 한갓 두 대비가 선왕의 명

복을 위해서 삼보를 독실히 믿고, 사찰을 장엄하게 한 것이 이 같음을 알 뿐이고, 두 대비가 모자간의 은혜를 돈

독히 하고 항려(伉儷)간의 예의를 삼가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히는 것이 억조 군생이 보고 감동하는

기회가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큰 역사를 마쳤으나 한 가지 일이라도 백성을 수고롭게 함이 있을까 걱정하고, 큰 공덕은 완성했으나 한 자만큼

의 베라도 나라 것을 소비했을까 염려하여, 그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신 전전긍긍한 심회는 또 신민들

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 두 대비 전하의 지극하신 뜻을 받들고, 선왕의 지극하신 은택

을 생각하여 시절 따라 친히 거둥하여 몸소 희생과 폐백을 능에 드리며, 신정(宸情)이 생생하여 서리와 이슬에

출척(??)하는 감회를 견디지 못하신다. 그리하여 절이 능침 곁에 있으므로 이에 왕지(王旨)를 내려, '우리 인수

왕비께서 시주하신 전지(田地)와 노비 외에 여러 가지 요역(?役)을 다 면제하고, 승도(僧徒)들을 편히 살게 하여

번뇌가 없게 하라.' 하시었고, 은사(恩賜)가 여러 번이나 많았다.

이것은 대개 사왕(嗣王)이 선왕을 추념하여,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을 생각하는 지극하신 덕으로서 진실로 천재

(千載)에 없었던 성스러움이었다. 이것은 대개 효도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극치(極致)로서 신명에 통하고, 불승

(佛乘)을 감동시켜서 하늘의 온갖 복을 받음이 억만 년일 것이며, 자손 만대에 한없는 경사를 누릴 것이다. 아,

성한지고." 하였다.

 

○ 정인지의 시에, "원릉은 채색 구름 가에 엄숙하고, 사찰은 빼어난 메 앞에 높다랗다. 금벽 채색 빛나서 아침

햇볕이 쬐고, 달랑거리는 풍경 소리는 바람이 멀리 전한다. 불등(佛燈)은 넓게 삼천계(三千界)를 미치고 국운

(國運)은 응당 억만 년에 뻗치리라. 정맹(精猛)한 두타(頭?)는 법좌(法座)에 올라 묘법을 말하고, 진전(眞詮)을

부연한다." 하였다.

 

○ 최항(崔恒)의 시에, "달은 주림 삼계(珠林三界)의 그림자를 흩고, 비는 금지 시방(金地十方)의 추위를 나눈

다. 후산(?山)에 학이 가니 공연히 구슬프고, 정수(鼎水)에 용이 옮기니 다시 아득하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목어(木魚)가 소리나니 아침 멧부리 고요하고, 돌말[石馬]이 소리 없는데 새벽 능침이 춥

다. 주수(珠樹)에 두견이 우니 봄이 적적하고, 정호(鼎湖)에 용이 가니 달이 망망하다." 하였다.

 

○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교산(橋山)에 아름다운 기운이 성한데, 탑묘(塔廟)는 원침(園寢) 앞에 높다랗다.

바다도 안 보이는 구름 탄 신선이 멀고, 공덕이 성취하니 각월(覺月)이 불등(佛燈)을 전한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서쪽으로 능원을 바라보니 어디쯤인가, 송추(松楸)에서 보일락말락 절문 앞일세. 산 중에는

구름이 아침마다 변하고, 달 아래 종소리가 밤마다 들려온다." 하였다. 나암사(羅巖寺) :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소화사(小華寺) : 군 남쪽 15리 지점, 호숫가에 있다.

○ 고려 인분(印?)의 시에, "파초 잎이 발 밖에서 우니, 산에 비 오는 줄 알겠고, 돛대가 봉우리 위에 나오니,

바다에 바람 있는 줄 알겠다." 하였다.

 

어침사(魚沈寺) : 고령산에 있다.

흥복사(興福寺) : 무을고리(無乙古里)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하나는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고, 하나는 행주에 있다.

여단(?壇) : 군 북쪽에 있다.

 

능묘 경릉(敬陵) : 분조 덕종(德宗)의 능이다.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서울과의 거리는 30리쯤이다.

 

○ 강희맹의 시에, "노반(露盤)이 구름가에 솟았으니, 멀리 원릉이 절 앞에 있는 줄 알겠다.

만 구렁 송추에는 아름다운 기운이 감쌌고, 상방(上方) 종 소리는 묘한 여운(餘韻)을 전한다. 조정에 나아가던

금학(禁鶴)을 일찍이 어느 날이던가. 교산(橋山)에 장사한 것도 이미 옛날이었다. 큰 경사는 마침내 보력(寶曆)

을 빛나게 했다. 하찮은 신하는 머리 조아리며 말을 마친다." 하였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생학(笙鶴)으로 하늘에 조회하며 돌아오지 않는다. 성 서쪽 10리쯤이 곧 후산이구

나. 연기와 노을은 송(松)ㆍ삼(杉)이 서 있는 길을 어둡게 잠갔고, 구름과 안개는 범과 표범 굴을 깊게 감추었다.

이날 빈번(??)은 깨끗하여 제물로 올릴만하고, 당년 궁검(弓劍)은 아득하여 부여잡기 어렵다.

두견새 소리 괴로워라 마음 상한다. 봄 바람에 눈물 뿌리니 점점이 아롱진다." 하였다.

 

신증 : 연산군 10년에 소혜왕후(昭惠王后)를 부장하였다. 창릉(昌陵) : 본조 예종의 능이며, 안순왕후(安順王后)

를 부장하였다. 경릉 북쪽에 있다.

 

고려 공양왕릉(恭讓王陵) : 견달산(見達山)에 있다.

최영 묘(崔瑩墓) : 대자산에 있는데, 무덤 위에 지금도 풀이 나지 않는다.

 

○ 변계량의 시에, "위엄을 떨쳐 나라를 구하노라 살쩍이 하얗고, 말 배우는 거리 아이도 그 이름을 다 안다.

한 조각 장한 마음만은 응당 죽지 않았으리. 천추(千秋)에 길이 대자산과 함께 우뚝하다." 하였다.

 

성령대군 묘(誠寧大君墓) : 다자산에 있다. 월산대군 묘(月山大君墓) : 군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신증 황치신 묘(黃致身墓) : 군 북쪽 16리 지점, 덕수촌(德水村)에 있다.

김전 묘(金詮墓) :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고적 고 고봉현(古高峯縣) : 지금 관아(官衙)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봉(峯)을 봉(烽)이라 한 곳도 있다.

○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한씨(漢氏) 미녀(美女)가 달을성현 높은 산 위에 봉화를 올려서 안장왕을 맞이

하였던 까닭으로, 뒤에는 고봉(高烽)으로 이름하였다." 하였다.

 

왕봉 폐현(王逢廢縣) : 곧 행주이다.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 김부식이 이르기를, "한씨 미녀가 개백현(皆伯縣)에서 안장왕을 맞이하였던 까닭으로, 왕봉이라는 명칭으로

고쳤다." 하였다. 부원 폐현(富原廢縣) : 군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과천현(果川縣)에 내속하였는데, 곧 용산처(龍山處)이다. 지금 성 밑 10리 지역은 한성부(漢城府)에 속하였다.

황조향(荒調鄕) :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주섭리(注葉里)라는 속칭이 있다.

율악 부곡(栗岳部曲) : 고봉현에 있다. 군 서쪽 12리 거리이다.

장사향(長史鄕) : 군 동쪽 10리 지점 건지산 밑에 있다. 파을곶소(巴乙串所) : 행주에 있다.

건자산소(巾子山所) : 건자산 밑에 있다.

 

인물

고려 기홍수(奇洪壽) : 행주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글씨를 잘썼고, 문장에 능하였다. 장성하여서는 무반(武班)을

좇아서, 벼슬이 특진벽상 삼한삼중대광 문하시랑(特進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郞)에 이르렀고, 시호는 경의(景

懿)이다.

 

기수전(奇守全)ㆍ기자오(奇子敖) : 정중부(鄭仲夫)가 난을 꾸민 이후로 권신(權臣)이 잇달았으나, 자오는 조용하

게 도리로써 끝까지 왕실(王室)을 보좌하여, 옛 왕업을 잃지 않게 하였다. 막내딸이 원(元) 나라 순제(順帝)의 제

2왕후가 되어, 태자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을 낳았으므로 원 나라에서 자오에게 병덕승화육경공신(秉德承

和毓慶功臣)으로 추증하고 영안왕(榮安王)으로 봉하였다.

 

본조 기건(奇虔) : 청렴하고 조촐하여 현달(顯達)하였다. 벼슬이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우거 본조 신효(申曉) :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고, 사간원 정언으로서 파직되었다. 시골에 돌아가서 벼슬하지 아

니하고 스스로 서호산인(西湖散人)이라 하였다.

 

효자 본조 배철중(裵鐵重) : 호군 형효(護軍亨孝)의 아들이다. 어미 이씨가 악질(惡疾)에 걸렸는데, 철중이

손가락을 끊어서 약에 타서 먹였더니, 어머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전하 3년에 정려하고 복호(復戶)하였다.

 

열녀 본조 석금(石金) : 고을 아전 식배(植倍)의 아내이다. 노산군(魯山君) 때에 식배는 역당(逆黨)에 연좌되어

서 사형되었다. 석금이 6일 동안이나 먹지 않고, 밤낮으로 울부짖으면서, "나는 예(例)에 의하여 먼 지방에 유배

될 것이며, 반드시 데리고 가는 자에게 몸을 더럽히게 될 것이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하고는,

드디어 목매어 죽었다 신씨(申氏) : 참판 송영(宋瑛)의 아내다. 영이 죽자 3년 동안 여묘하고 친히 제사를 지냈

다. 복을 마치고도 조석 전(奠)을 생시와 똑 같이 하였다. 전하 3년에 정려하고 복호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고읍 행주(幸州) : 서남쪽으로 30리 강변에 있는데 본래는 백제의 개백(皆伯)이다.

문주왕(文主王) 원년에 고구려가 취하여 왕봉(王逢)으로 고치고,

뒤에 신라로 돌아가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우왕(遇王)으로 고쳐 한양군(漢陽郡)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에 행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양주(楊州)에 속했다가 본조 초에 이에 속하게 되었다.

○ 읍호는 덕양(德陽)이며 고려 성종(成宗)이 정하였다.

 

부원(富原) : 남쪽으로 50리에 있으며, 한성부조에 자세하다.

성지 고봉고성(高峯古城) : 옛 현 북쪽에 있다.

행주고성(幸州古城) : 옛 현 남쪽에 있다. 고토성(古土城) : 사포면(蛇浦面) 들판 가운데에 남은 터가 있다.

봉수 해포(?浦) : 서남쪽으로 25리에 있다.

역참 혁폐ㆍ행주역(幸州驛)ㆍ벽제참(碧蹄站).

 

방면 원당(元堂)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5리이다.

구이동(九耳洞)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사리대(沙里垈)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하도(下道) :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구지도(求知道)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0리이다.

중면(中面) :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사포(蛇浦)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송산(松山) :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오른쪽으로 5면이 모두 국변을 연해서 들이 있다.

혁폐 황조향(荒調鄕) : 서쪽으로 35리에 있는데, 지금 주엽리(注葉里)이다. 본래는 원평(元平)에 속했었으나,

본조 태조 3년에 여기에 속하게 된 것이다. 장사향(長史鄕) : 남쪽으로 25리에 있다.

율악(栗岳) 부곡(部曲) : 서쪽으로 22리, 고봉(高峯) 근처의 땅이다. 건자산소(巾子山所) : 서남쪽으로 20리인데,

별아산(別阿山)이라 부른다.

진도 행주진(幸州津) : 양천(陽川) 공암진(孔巖津)과 마주 있다.

임의진(壬意津) : 서쪽으로 35리이며, 김포(金浦) 간로(簡路)와 통한다.

 

사원 문봉서원(文峯書院) : 숙종 무진년에 건립하여 기축년에 사액하였다.

민순(閔純) : 개성편에 보인다.

남효온(南孝溫) : 자는 백공(伯恭)이고, 호는 추강(秋江)이며, 의령(宜寧)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 추증되

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정국(金正國) : 장단(長端)편에 보인다.

기준(奇遵) :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인데 행주(幸州) 사람이다.

중종 신사년에 화를 입었으며, 벼슬은 전항에 이르렀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정지운(鄭之雲) : 자는 정이(靜而), 호는 추만(秋巒)이며, 경주 사람인데, 청렴한 명성과 곧은 절개의 소유자였다.

홍이상(洪履祥) : 자는 원례(元禮), 호는 모당(慕堂)이며, 풍산(?山)사람이다. 벼슬은 대사헌 증 영의정(大司憲

贈領議政)이었다.

 

이신의(李愼儀) : 자는 경측(景則), 호는 석탄(石灘)이며, 금의(金義)사람이다. 벼슬은 □조 참판에 이르렀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이다.

 

이유겸(李有謙) : 자는 수익(受益), 호는 만회(晩懷)이며, 우봉(牛峯) 사람이다. 벼슬은 호조 참의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기공사(紀功祠) : 순조(純祖) 신축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권율(權慄) : 자는 언신(彦愼)이며 안동 사람이다. 벼슬은 호조 판서 도원수 영가부원군(戶曹判書都元帥永嘉府

院君)이었으며 시호는 장렬(莊烈)이다.

 

능침 희릉(禧陵) : 원당리에 있으며, 중종비(中宗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의 능으로 기신은 3월 2일

이다. 초장(初葬)은 헌릉(獻陵)의 오른쪽 언덕에 했었는데, 중종 무자년에 이 곳으로 천장(遷葬)하였다.

 

○ 직장(直長)과 참봉이 각 10명이다. 효릉(孝陵) : 희릉의 서쪽 언덕에 있으며, 인종 대왕의 능이다.

기신은 7월 1일이고,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를 합장하였는데, 기신은 7월 29일이다.

○ 별첨(別添) : 참봉이 1명이다.

 

명릉(明陵) : 경릉(敬陵)의 동쪽 언덕에 있는데, 숙종대왕의 능이다. 기신은 6월 8일이고,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도 합장하였다. 기신은 8월 4일이다. ○ 별첨 : 참봉이 1명이다.

 

익릉(翼陵) : 경릉 동쪽 언덕에 있는데,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의 능이다. 기신은 10월 26일이다.

○ 영(令)ㆍ참봉이 1명씩이다.

 

홍릉(弘陵) : 창릉(昌陵) 왼쪽 언덕에 있으며, 영조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의 능인데,

기신은 2월 15일이다. ○ 영ㆍ참봉이 1명씩이다.

 

순회묘(順懷墓) : 경릉의 왼쪽 언덕에 있는데, 명종조(明宗朝) 순회세자의 묘이다. 기신은 9월 26일이고

공회빈(恭懷嬪) 윤씨의 기신은 2월 3일이다. ○ 수위관(守衛官)이 2명 있다.

소현묘(昭顯墓) : 효릉(孝陵)의 오른쪽 언덕에 있으며, 인조 조의 소현세자의 묘이다. 기신은 4월 26일이다.

○ 수위관이 2명 있다.

 

 

영평현 永平縣

 

동쪽으로 포천현 경계까지 32리이고, 서쪽으로 연천현 경계까지 34리이며,

남쪽으로 포천현 경계까지 16리이고, 같은 현 경계까지 20리이다.

북쪽으로 강원도 철원부(鐵原府) 경계까지 39리인데, 서울과는 1백 40리 거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양골현(梁骨縣)인데, 신라에서 동음(洞陰)이라 고쳐서 견성군(堅城郡) 속현으로 만들었

다. 고려 현종 9년에 동주(東州)에 예속시켰고, 예종(睿宗)이 비로소 감무를 설치하였다.

뒤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강윤소(康允紹)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승격하여, 영흥현령(永興縣令)으로 만들었고,

본조 태조 3년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관원 현령(縣令)ㆍ훈도(訓導) : 각 한 사람씩.

군명 동음ㆍ양골ㆍ영흥.

 

성씨 본현 : 신(申)ㆍ영(英)ㆍ전(田)ㆍ강(康)ㆍ연(燕)ㆍ마(麻)ㆍ박ㆍ윤. : 모두 속(續)이다.

유석(乳石) : 서ㆍ임(任)ㆍ하(何)ㆍ윤.

 

형승 천층 산은 북쪽에 우뚝하고, 한 줄기 물은 남으로 흐른다. 성임(成任)의 시에, "천층 산은 북쪽에 우뚝하고,

한 줄기 물은 남쪽에서 흐른다." 하였다.

 

산천 백운산(白雲山) : 현 동쪽 60리 지점에 있다. 혜재산(惠才山) : 현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

수일산(水日山) :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금동산(金銅山) :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보장산(寶藏山) : 현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금장산(金藏山) :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관음산(觀音山) :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청계산(靑溪山) :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자등산(慈燈山) : 현 동북쪽 50리 지점에 있다. 풍류암(風流巖) : 현 동쪽 7리 지점에 있다.

살여울[箭灘] : 물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백운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포천 경계에서 나와 고을 남쪽에서

합류한다.

 

곧은 여울[直灘] :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곧 철원 체천(?川) 하류이다.

마흘천(磨訖川) : 현 서쪽 35리 지점인 연천 경계에 있다. 물 근원이 백운산에서 나와서,

두기진(頭耆津)에 들어간다.

 

유리연(流里淵) :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토산 동철(銅鐵) : 수일산에서 생산된다. 수철(水鐵) : 현 북쪽 금동(金洞)에서 난다. 자기(磁器)ㆍ

안식향(安息香)ㆍ송이[松?]ㆍ석담(石膽)ㆍ인삼ㆍ오미자ㆍ산 겨자ㆍ신감채(辛甘菜)ㆍ벌꿀.

 

봉수 며로곡 봉수(?老谷烽燧) :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북쪽으로 강원도 철원부 적골산(適骨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포천현 독산(禿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 : 현 서쪽 3리 지점에 있다.

역원 양문역(梁文驛) : 현 동쪽 9리 지점에 있다. 항간(巷間)에서 독흘(獨訖)이라 부르는데,

양골(梁骨)이 와전된 것인 듯하다.

 

불우 백운사(白雲寺) : 백운산에 있다. 원통사(圓通寺) : 청계산에 있다. 보장사(寶藏寺) : 보장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동쪽 12리 지점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총묘 이정녕 묘(李正寧墓) : 현 남쪽 10리 지점 추동(楸洞)에 있다.

고적 유석향(乳石鄕) : 현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 용곡소(龍谷所) :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고석성(古石城) : 둘이 있다. 하나는 현 동쪽 12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가 1리이고, 하나는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가 2리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무너져 없어졌다.

 

제연 찬봉돌올의도삭(?峯突兀疑刀削) : 정흠지(鄭欽之)의 시에, "모인 봉우리 우뚝하여 칼로 깎은 듯 의심되고,

떨어지는 잎사귀 어지러워 가위로 마름질하는 듯하다. 호구는 해마다 증가하고 전야도 넓어지니, 성조(聖朝)는

원래 어진 인재를 등용했음이다." 하였다.

 

현소민무송(縣小民無訟) : 성임의 시에, "고을이 작아서 송사하는 백성이 없고, 전지가 비옥하여 해마다 풍년

든다." 하였다.

 

[비고]

 

연혁 광해주 10년에 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 포천현(抱川縣)을 여기에 옮겨 함께 설치하였다.

경기 감영을 본부(本府)에서는 신영(新營)이라 불렀다.

 

인조 원년에 파했다 : 포천에 다시 현령(縣令)을 두기를 원하였다. 헌종조에 다시 군으로 승격시켰다.

 

관원 군수 : 양주진의 관병과 동 첨제절사를 겸하였다. 1명이다.

성지 고성(古城) : 서쪽으로 12리에 있으며, 둘레는 1리가 넘는다.

고성(古城) : 서쪽으로 15리에 있으며, 둘레는 2리가 넘는다.

봉수 적골산(適骨山) : 북쪽으로 40리에 있다.

 

방면 읍내면 : 끝이 10리이다. 일동(一東)면 :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이동면 : 처음이 20리, 끝이 70리이다. 남면 : 처음이 70리, 끝이 15리이다. 서면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북면 :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 한편으로 본래 조량면(助良面)ㆍ주지면(注之面)ㆍ상리면(上里面)ㆍ하리면(下里面)ㆍ서남면(西南面)ㆍ

당효면(當孝面)이 있다.

 

부석향(浮石鄕)면 : 북쪽으로 40리에 있다.

용곡소(龍谷所)면 : 동쪽으로 30리에 있으며, 오른쪽으로 두 곳을 폐하였다.

사원 옥병서원(玉屛書院) : 효종 무술년에 세웠으며, 숙종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박순(朴淳) : 개성 편에 보인다. 이의건(李義健) : 광주(廣州)편에 보인다. 김수항(金守恒) : 양주 편에 보인다.

 

 

포천현 抱川縣

 

동쪽으로 가평현 경계까지 18리이고, 서쪽으로 양주 경계가지 30리이며, 남쪽으로 같은 주 경계까지 36리이며,

북쪽으로 영평현 경계까지 26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9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마홀현(馬忽縣)인데 : 일명 명지(命旨)라 하기도 한다.

신라에서 견성군(堅城郡)이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포천(抱川)이라 고쳤다. 성종 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에 파하였다.

현종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고, 명종이 감무를 설치하였다. 본조 태종 13년에 현감으로 고쳐 만들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한 사람씩.

군명 마홀(馬忽)ㆍ명지(命旨)ㆍ견성ㆍ포천ㆍ청화(淸化).

 

성씨 본현 : 노ㆍ유(兪)ㆍ현ㆍ백(柏)ㆍ박ㆍ방(房)ㆍ전(田)ㆍ김ㆍ윤 : 다른 고을에서 온 성씨이다.

 

산천 성산(城山) :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운악산(雲岳山) ;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해룡산(海龍山) :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산 위에 감지(鑑池)가 있는데,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

속설에 전해 오기로는, "군마(軍馬)가 산 위를 짓밟으면, 비가 오지 않으면 구름이라도 낀다." 하였다.

 

왕방산(王方山) : 해룡산 남쪽에 있다. 수원산(水源山) :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현등산(縣燈山) :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항적산(香積山) :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무둔산(無芚山) :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계류산(界流山) : 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불정산(佛頂山) :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천보산(天寶山) : 현 서쪽 21리 지점에 있다.

심곡산(深谷山) :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주섭산(注葉山) : 현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재벽동(滓?洞) :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우리 태조 잠저(潛邸) 때에 전장(田莊)이 여기에 있었다.

고교천(高橋川) :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현 남쪽 축석현(祝石峴)에서 나오고,

하나는 수원산에서 나온다. 합류하여서 이 냇물이 되고, 영평현 경계로 흘러든다.

 

토산 사기(沙器)ㆍ벌꿀ㆍ산겨자ㆍ신감채ㆍ송이. 신증 녹반(綠礬) : 현 남쪽 안양사에서 난다.

 

봉수 독산봉수(禿山烽燧) :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북쪽으로 영평현 미로곡을 응하고,

남쪽으로 잉읍점(仍邑岾)을 응한다.

 

잉읍점 봉수 : 현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북쪽으로 독산을 응하고, 남쪽으로 양주 대이산을 응한다.

 

학교 향교 : 현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안기역(安奇驛) : 현 북쪽 4리 지점에 있다.

신증 : 성현(成俔)의 중수기에, "삼가 상고하니, 선철이 말하기를, '신하로서 일을 가리지 않고 그 직책을 편하게

여기는 것은 큰 충성이다.' 하였는데, 훌륭한 말이다. 신하 된 자가 몸을 국가에 맡겼으면, 각자 그 직책을 책임

져서 상황에 따라 그 힘을 다해야 한다. 혹 벼슬이 작다하여, '족히 직책으로 삼을 만하지 못하다.' 하거나, 미관

(微官)이라 하여, '깊이 염려할 것 없다.' 하여, 편하게 놀면서 세월을 보내며, 구차하게 임기까지만 그렁저렁 지

내어, 꾀하는 바가 자신을 위한 꾀이고 국가를 위한 계책이 아니라면, 비록 이름은 사판(仕版)에 올라도 실상 나

라의 죄인이다.

지금 외방에 있는 관원으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정사를 시행하는 자를 수령이라 하고, 역우(驛郵)를 설치하여 순

검(巡檢)하는 자를 찰방이라 한다. 목민자(牧民者)는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통할하지 않는 것이 없는 까닭에 그

세력이 중하고, 역우를 관장하는 자는 다만 말만 맡은 까닭으로 그 세력이 가볍다.

비록 현감과 품계는 같다 하더라도 내리어 9품 승(丞)과 임무가 같은 까닭에 사람이 업신여기게 된다.

그러므로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게 된다. 그러니 깊이 염려할 것이 없다 하는 것은, 그 형세가 반드시 그러한 것

이다. 안기(安奇)는 포천현에 속한 역으로서 고을 안에 있으며, 서울과 거리는 백 리쯤이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오는 자는 양주를 지나서 반드시 여기에 유숙한다. 그러나 사신들의 큰 행차는 모두 고을에

들어가고, 여기에 우접하는 자는 모두 사사롭게 여행하는 자들이고 잡스런 빈객들이므로, 관장하는 자는 오직

눈앞에 닥쳐온 급무에만 힘쓴다. 까닭에 이 역이 여러 번 황폐하여도 수리하지 않았다.

신축년 봄에 내가 채기지(蔡耆之)화 함께 지달산에 가면서 저물녘에 이 역에 와서 냇가에서 저녁밥을 먹고, 밤

에 여관에 드니, 집이 기울어져서 사람을 용접할 수 없고, 마판도 무너져서 말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전에게 물으니, '아, 읍과 가깝기 때문입니다. 읍에 가는 자는 귀한 신분이고, 역에 모여 오는 자는 낮은 신분

입니다. 오직 귀한 분의 꾸지람을 면하고자 할 뿐이지, 낮은 자의 폐를 돌아보겠습니까. 그러하기를 신축년에서

신유년까지 무릇 20년입니다.

그러면 신축년 이전이 도 몇 10년인지 모르거니와, 고쳐 지어서 새롭게 했다는 것을 듣지 못했고, 이번에 비로

소 윤후(尹侯)를 얻었습니다. 윤지(尹漬) 후는 군자이며, 대대로 선비 집안이다.

그 관직을 더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그 힘을 다해서 이미 평구역(平丘驛)을 새롭게 했으며, 또 양문(梁文)

을 새롭게 하고, 지금에 또 나머지 힘을 빌려서 이 역을 새롭게 하기를 경영하니, 그 공이 보통보다 뛰어남은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에도 없습니다.' 한다. 이에 후의 덕을 찬미하기를, '우(郵)의 관사(館舍)에 있어서 물가

에 임했다.

예전에는 비오면 빠졌는데, 지금은 집이 날 듯하네. 깎고 새긴 것이 합당하여 장대하고 아름답다.

한갓 보기만 아름다울 뿐 아니라, 오는 손님이 돌아가기 잊었네. 우에 역 있는 것은 왕명을 전하려는 것이다.

만약에 말이 병들면, 그 정사에 알맞지 못한다. 후가 능히 길러서 모두 생명을 이루게 하였네. 이 마판에 말이

많아서 구름같이 성하도다." 하고, 찬을 마치고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 후에게 아첨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의 실덕을 읊은 것이다. 이제 현양(顯揚)하여서 빛나게 하지 않으면, 후의 덕이 민멸하여서 전해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때문에 말을 기록하여 벽에 달아서 후일 찰방되어 와서 이 직을 계승하는 자에게 후의 덕을 본받게 하노라."

하였다.

 

벽탄석원(碧呑石院) : 현 남쪽 32리 지점에 있다. 공덕원(功德院) :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불우 수원사(水源寺) : 수원산에 있다. 안양사(安養寺)ㆍ향적사(香積寺) : 아울러 향적산에 있다.

해룡사(海龍寺) : 해룡산 감지 곁에 있다. 성불사(成佛寺) ; 주섭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성산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총묘 김질 묘(金?墓) :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성석린묘(成石?墓) : 현 서쪽에 있다.

고적 쌍곡역 : 옛터는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수암소(垂巖所) :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성산 고성(城山古城) : 석축이다. 둘레 1천 9백 37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열녀 본조 김씨 : 상낙백(上洛伯) 김사형(金士衡)의 손녀로서, 사성(司成) 홍의달(洪義達)에게 시집갔다.

홍이 죽고 자식이 없었으나, 상사(喪事)에 조금도 결함이 없었다. 복을 마친 뒤에도 아침저녁의 전(奠)을 생시

와 꼭 같이 하였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하고 복호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연혁 광해주 10년에 영평과 합하였다가 인조 원년에 다시 갈랐다.

연혁 청화(淸化)읍 : 고려 성종(成宗)이 정하였다.

관원 현감 : 양주진의 관병마 절제도위(管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1명이다.

성지 고성 : 북쪽으로 1리에 성산(城山) 사방이 험악한 데에 고성이 있는데, 둘레가 1천 9백 37척, 우물이 두 개

있다. 광해주 10년 영평에 감영을 설치하여 이 성을 수축하고, 중군(中軍)을 두었다가 인조 원년에 혁파하였다.

 

방면 읍내면 : 끝이 10리이다. 가산(加山)면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내동(內洞)면 : 동남쪽으로 처음 15리, 끝이 30리이다.

동촌(東村)면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청량(淸?)면 :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소흘산(所吃山) : 서남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서면 :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내북(內北)면 : 동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외북면 : 서북쪽으로 끝이 20리이다.

○ 수암소(垂岩所)면 : 북쪽으로 끝이 20리이다.

 

사원 화산서원(花山書院) : 인조 을해년에 세웠으며,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이항복(李恒福) :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인데 경주 사람이다. 광해주 무오년에 항소하여 대의를 밝혔

으나, 북청(北靑)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벼슬은 영의정 오성부원군 전문형(領議政鰲城府院君典文衡)이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영연서원(龍淵書院) : 숙종 신미년에 세웠으며,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이덕형(李德馨) : 자는 명숙(明肅), 호는 한음(漢陰)인데, 광주(廣州)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 전문형이었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조경(趙絅) :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州)인데, 한양(漢陽) 사람이다. 벼슬은 판중추 전문형에 이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적성현 積城縣

 

동쪽으로 마전군(麻田郡) 경계까지 17리이고, 남쪽으로 양주 경계까지 31리이며,

서쪽으로 장단부 경계까지 8리이고, 파주 경계까지는 8리이다.

북쪽으로는 장단부 경계까지 8리이고, 파주 경계까지는 8리이다. 북쪽으로는 장단부 경계까지 20리인데,

서울과는 1백 8리의 거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칠중현(七重縣)이다. 신라 경덕왕이 중성(重城)이라 고쳐서 내소군(來蘇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 9년에 장단현에 예속시켰다.

문종 17년에는 개성부(開城府)에 예속시켰고,

예종(睿宗)이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따라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한 사람씩이다.

군명 칠중성ㆍ중성ㆍ내별.

 

성씨 본현 유(劉)ㆍ신(申)ㆍ김ㆍ노ㆍ최ㆍ현(玄)ㆍ조(趙)ㆍ서ㆍ양(梁)은 : 모두 속(續)이다.

 

형승 동쪽으로 감악산을 기댔고, 서쪽으로 장단을 눌렀다 : 김반(金泮)이 지은 <혜민당기(惠民堂記)>에, "서울

에서 동북쪽으로 설마현(雪馬峴)을 넘어 수십 리 지점에 적성현이 있는데, 동쪽으로 감악 높은 산을 기댔고,

서쪽으로 장단부 큰 강을 눌렀다. 지역이 가장 궁벽하고 좁아서 백성의 삶이 가난하였다." 하였다.

 

산천 감악산(紺岳山) :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 고려 임춘(林椿)의 시에, "조물은 어린아이라, 참으로 희롱하기를 좋아하네. 모래를 모아 많은 봉우리를 만들

었구나. 이 산이 머리에서 끝까지 여러 고을을 걸터앉아, 하늘 밖에 날 듯한 것이 춤추는 봉새 같구나.

내 일찍이 산하와 연분 없음의 한탄이여, 지팡이를 버티고 유람하는 것 오래 못하였다. 그윽함을 찾고 기이함을

골라냄은 지금부터 하리라.

한가한 사람과 함께 빠른 말 달리어 딸깍딸깍 길을 걸으며, 원숭이와 앞 다투고 당기고 붙들매, 비로소 옷 무거

운 줄 알겠다. 옥실(玉室)과 금당(金堂)은 한사(漢士) 같구나. 가만히 오악(五岳)과 통해서 그윽한 골이 있네.

도인(道人)의 안력(眼力)이 하늘 교묘함을 엿보고, 바위에 걸쳐 집 지어서 다락이 솟아난 듯.

내가 와서 나이를 물으니, 웃으며 대답 않고, 여상(藜床)에 오뚝 앉아 맞이하거나 전송하지 않는다.

집 밑에 흐르는 샘물 맑아서 마실 만한데, 처음 맛보니 차가 와서 이가 어는 듯하다. 영지(靈芝)는 흰 구름 피는

둔덕에 나고, 늙은 잣나무는 돌 틈에 자란다. 새벽 바람이 눈을 몰아 나무 가지에 지네. 아찔한 두 눈동자는 구

르는 수은 같다. 헌함에 임해서 한 번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바라보니, 가슴 속에 운몽택(雲夢澤)이 아홉이로구

나. 이 사이에 내 시(詩)가 없어서야 될쏜가. 하물며 연하풍경(煙霞風景)이 나의 읊조림을 돕는 데에랴.

인생 만사는 머리 한 번 돌리는 동안에 바뀌는 것, 숨을 터 잡아 고고하게 삶 누가 함께하리.

집이 없어도 처노(妻?) 나무람 겁날 것은 없지만, 즐거움을 행하는 데에 어찌 반드시 기생 따르랴. 만약 돌아와

서 한구렁을 오로지 하겠다면, 다른 해 이 지역에 뗏집을 지으리라." 하였다.

 

용두산(龍頭山) : 현 서쪽 8리 지점에 있다. 4면으로 돌이 깎아 지른 듯하고, 둘레는 1리이다.

높이는 50보(步)이며, 위에 40여 인이 앉을만하다. 날씨가 가물어서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

 

설마령(雪馬嶺) :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소마동(所磨洞) : 현 남쪽 5리쯤에 있다.

 

청학동(靑鶴洞) : 설마령 밑에 있다. 두지진(頭只津) : 현 서쪽 7리 지점에 있다.

이포진(梨浦津) : 현 동쪽 8리 지점에 있다. 장단부 임진도(長湍府臨津渡)에 자세하다.

구연강(仇淵江) : 현 동쪽 9리 지점에 있다. 신증 권우(權遇)의 시에, "몇 번이나 서로 생각했던가, 지금에야

돌아옴 기꺼워라. 맑은 강 한 굽이 둘러 있고, 여러 멧부리 4방으로 에워쌌다. 언덕을 격해 배불러 건너고, 마을

찾아 길 물으니 희미하구나. 아이들 나오는 줄 알고 서로 끌며 사립문에 나서더라."

 

○ "옛날에 한 차례 놀던 이 지역, 산은 깊고 초목은 무성하구나. 깨끗한 시냇물 가면서 찾고, 시원한 나무 그늘

에 앉아서 쉰다. 멀리 봐도 인적은 보이지 않더니, 곁을 보니 모두가 사슴들 놀이터이네.

지금 와서 치우치게 기뻐하는 건, 채(寨) 안에서 농사하기에 족하구나."

 

○ "서늘한 강가에 초정(草亭)이 하나, 눈앞 경치는 형용하기 어렵다. 바람이 살짝 부니 물결이 일고, 안개가 날

아가니 비가 오려나. 푸른 산은 겹겹으로 돌벽을 임했고, 백조(白鳥)는 쌍으로 모래에 내린다.

아버지께서 만년에 와서 봉양을 편히 하매, 내 지금 문안함을 다행히 여기시네."

 

○ "앞에는 맑은 강 뒤에는 산, 한 구역 형승(形勝)을 하늘이 숨겨뒀던 곳, 꼬불꼬불 작은 길 밭고랑 복판, 보일

락말락 빈다락 수목 사이네. 동산에 가득한 토란ㆍ밤 맛이 멋지고, 곳마다 풍경은 볼만도 하다.

진세(塵世)에 끌렸던 일 한스러워라. 어찌하면 이 지역에서 한가히 놀까." 하였다.

 

용지(龍池) : 감악산 서쪽 꼭대기에 있는데, 가물어도 장마가 져도 물이 불거나 줄지 않고, 비를 빌면 감응이 있

다.

 

휴근도(朽斤渡) : 현 동쪽 17리 지점에 있다.

신증 차력산(?礫山) :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토산 도기(陶器)ㆍ적토(赤土)ㆍ벌꿀ㆍ눌어(訥魚 누치)ㆍ금린어(錦鱗魚 쏘가리)ㆍ게ㆍ백화사(白花蛇).

 

궁실 객관 : 서거정의 기(記)에, "적성도 작은 고을이니, 예전 명칭은 내소(來蘇)이고, 고려 적에 여러 번이나

개성ㆍ양주 양부의 속읍으로 되었다가 뒤에 다시 현으로 되었는데, 관아는 본래 산성 남쪽에 있었다.

토지가 편벽되고 민물(民物)이 잔약하여 요역(?役)을 능히 바치지 못하니, 수령된 자가 죄다 걱정하였다.

고려 말에 죄신(罪臣) 임치(林緻)의 집을 몰수하여, 고을로 만들어 옮겼다. 태수(太守) 한옹(韓雍)이 관청 집을

짓기 시작하였고, 사군(使君) 이명성(李明誠)ㆍ박흥군(朴興君)ㆍ박하신(朴河信)이 잇달아 지어서 완성하였다.

그러나 규모가 비좁았고 세월이 오래 됨으로 말미암아 거의 무너졌다. 뒤에 원으로 오는 자가 그대로 했을 뿐이

고 수리하지 않았다.

정통(正統) 기원 10년 을축년에 견성(甄城) 이후(李侯)가 이 고을에 와서 정사에 임하면서, 1년이 채 못 되어 정

사가 정리되고 폐단이 없어졌다. 이에 민중을 모아서 의논하기를, '대저 관사라는 것은 빈객을 받들고 관부(官

府)의 위의를 엄하게 하는 곳이거늘, 이제 황폐하여도 수리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다.

내가 수령이 되어서 그 직책에 마당하지 못할까 크게 두려워 엎어지고 넘어진 것을 그냥 보기만 하고, 걱정을

뒤에 오는 원에게 남기는 것은 차마 못하겠다. 철거하여 일신하게 하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니, 뭇사람이,

'모두 명에 따르겠다.' 하였다. 후가 이에 감사에게 보고하여 나라에 알려서 윤허를 얻었다.

후가 녹봉을 내어서 쓰임새에 밑천으로 하고 또 백성으로서 품 팔려는 자를 허락하였다.

드디어 공인(工人)과 재목을 모아서 옛터에다가 제도를 보태기도 줄이기도 하였다. 남북으로 대청 세 칸을 각

각 세웠는데, 크고 넓으며 모두 앞뒤로 달아내어서 동쪽 곁에는 온돌방이 있고, 또 넓혀서 마루를 만들었다.

남쪽으로 긴 골마루를 만들었고, 복판은 마루이다. 창고와 행랑이 총 약간 칸이라, 모두 단청을 칠했는데, 옛날

에 빠졌던 것이 지금은 완전하다. 썩은 것을 갈아서 견고하게 하고, 기울어진 것을 바꿔서 바로 세우며,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낮은 것을 높게 하였다. 보는 자가 장하게 여기고, 사신과 빈객으로서 이 고을을 지나는 자도 또

한 후의 훌륭한 치적을 알았다. 금년 가을에 임기가 차서 임금이 불러 가려 하니, 그 고을 부로(父老)가 만류하

고자 하여도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때문에 글을 지어서 그 사람이 간 뒤에 사모하는 듯을 표시하기를 원하고, 드디어 나에게 기문하기를 청하였다.

거정은 후의 친속이다.

평소부터 후의 백성을 다스리는 재주에 탄복하였거니와, 지금 또 고을 사람에게 물었다. 후가 적성에 정사한 지

가 6년이 되었으나, 백성의 애모하는 마음이 하루 같고 또 수십 년이나 황폐했던 관사를 수리하였으니, 백성에

게 폐단이 미쳤을까 의심되나, 일 전이라도 백성들에게 징수한 것이 없었고, 노역이 농군(農軍)에게 미치지 않

았다 하니, 또한 어렵지 않은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백성을 편하게 하는 방도로써 백성을 시키면 백성이

비록 수고하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 하였다. 하물며, 수고시키지도 않은 것이랴.

후의 다스리는 재주 있음을 내가 더욱 알게 되었다. 아, 짓는 어려움보다 중수하는 것이 더 어렵다. 지금 후의

이번 거조는 또한 그 어려운 것을 겸했다 할 수 있다. 대저 앞사람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것은 뒷사람의 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후를 이어 오는 자도 능히 후의 애쓴 것을 저버리지 않으면, 적성의 관사는 전일과 같이 염려하지 않을 것이며,

적성 백성도 또한 그 덕을 입을 것이다.

후의 이름은 숙희(?喜)인데, 세족(世族)의 주손(?孫)이다." 하였다. 신증 안침(安琛)의 시에, "그림같은 산 끝이

없고, 물빛은 똑같이 푸르기도 하다. 천석(泉石)을 좋아하는 병 고칠 수 없어, 오가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하였다.

 

○ "마음은 화악(華岳) 밖에 머물렀고, 집은 죽계(竹溪) 가에 있노라. 시름하느라 살쩍이 희어졌는데,

전원에 가고파도 벌서 틀렸다." 하였다.

 

혜민당(惠民黨) : 현 서헌(西軒)이다.

학교 향교 : 현 서쪽에 있다.

역원 상수역(湘水驛) : 현 남쪽 27리 지점에 있다.

○ 김수온의 시에, "싫증나는 벼슬살이 남북(南北) 길 멀다. 옛 역에 사람 없고 국화만 폈다. 헌함에 기대 누우니

가을 저문데, 회암산(檜巖山) 빛이 울창도 하다." 하였다.

 

단조역(丹棗驛) : 현 서쪽 4리 지점에 있다.

 

불우 감악사(紺岳寺) : 감악산에 있다.

○ 고려 황빈연(黃彬然)이 과거하기 전에 여기에서 글을 읽었다. 동각(東閣) 김신윤(金莘尹)이 술에 취해서 미친

말을 하다가, 권신에게 미움을 받고 도보로 감악에 들어와서 스스로 늙은 병졸이라 하며 기숙하기를 청하였다.

빈연이 그가 늙었고 또 곤궁함을 민망하게 여겨서 허락하였다. 종일토록 형상 아래에 있으면서 말 한 마디 없다

가, 우연히 부젓가락을 잡고 재를 모아서 글자 모양을 만들었다.

좌중(座中)에서 모두, "저 늙은이가 문자를 제법 안다."고 지목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신윤의 아들 온기(蘊琦)가

이미 과거에 올라 아비를 찾아와서 뜰 아래에서 절하니, 빈연이 땅에 엎드려서 사과하였다.

신윤은 웃으면서, "범수(苑雎)가 이미 진(秦) 나라 정승이 된 줄을 궁한 늙은이가 어찌 알리요." 하고, 서로 더불

어 북쪽 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밑 돌에 앉아서 함께 술 마시며 한껏 즐거워하였다.

송풍(松風)을 제목으로 하여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빈연은, "원숭이 휘파람 소리 끊어졌다 다시 들리고, 학의

충천하는 기운 우뚝하게 날개치는구나. 깜장 원숭이 휘파람 불어 보내고, 흰 학 충천하는 기운 드날린다." 하였

고, 동각은, "날 추우니 학이 잠들기 어렵고, 중이 선정(禪定)에 드니, 귀머거리 같다." 하였다. 빈연이 머리 두드

리며 수업(授業)하기를 원하였다. 두어달 머물러서 《전한서(前漢書)》를 다 읽고 돌아왔다. 운계사(雲溪寺)ㆍ

 

신암사(神巖寺) : 둘 다 감악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감악사(紺岳祠) : 항간에 전해 오기는, "신라에서 당 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산신(山神)으로 삼았다." 한다.

본조에서도 명산으로 중사(中祀)에 기재하고, 봄 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서 제사한다.

 

○ 고려 현종 5년에 거란 군사가 장단(長湍)에 이르니, 감악사에서 정기(旌旗)와 군사가 없는 듯하므로,

거란 군사가 크게 두려워하여, 감히 앞으로 가지 못하였다 한다. 또 충렬왕이 장차 원 나라에 가서 황제를 도와

내안(乃顔)을 토벌할 참인데, 신(神)을 제2로 봉해서 도만호(都萬戶)로 삼았으니, 대개 신이 가만히 돕는 공을

바란 것이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총묘 이견기 묘(李堅基墓) : 현 남쪽 27리 지점에 있다. 권홍 묘(權弘墓) :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고적 토탄 고성(吐呑古城) : 일명 성산(城山)이다. 현 서쪽 3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1천 9백 37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아미성(阿未城) : 현 동쪽 18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고, 둘레는 1천 9백 37 척이다.

수철성(水鐵城) :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적암향(赤巖鄕) :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명환 신라 필부(匹夫) : 무열왕 때 현령이었는데, 고구려 군사가 와서 포위하였으나 필부는 20여 일을 버티면서

싸웠다. 마침내 고구려 군사가 물러가려 하였는데, 대나마(大奈麻) 북삽(北?)이란 자가 가만히 사람을 보내서

성안에는 식량이 떨어지고 전력이 궁하다는 것을 알렸다. 그리하여 고구려 군사가 다시 공격하였는데, 필부는

북삽의 머리를 베어서 성밖에 던졌다. 주먹을 불끈 쥐고 한 번 호통하니 앓던 자도 모두 일어났다.

본숙(本宿)ㆍ모지(謨支)ㆍ미제(美濟) 등과 함께 적을 막아 싸웠다. 화살이 필부에게 집중하여서 피가 발뒤꿈치

까지 흘러서 죽었다. 왕이 통곡하고 급창(級滄) 벼슬을 추증하였다.

 

신증 본조 김세우(金世愚) : 아전과 백성이 두려워하고 사랑하였다.

 

효자 고려 정빈(鄭贇) : 효행이 있어 정려하였다.

제영 야단수성미(野斷水成湄) : 권제의 시에, "산이 높으니 구름이 멧부리에서 나오고 들이 끝난 곳이 물가로 되

었다." 하였다.

 

감악부천반(紺岳浮天半) : 함부림의 시에, "감악이 반공에 떴고, 암성(巖城)은 물가에 임했다." 하였다.

중산환소읍(衆山環小邑) : 권람(權擥)의 시에, "여러 산은 작은 읍을 둘렀고, 구부러진 길은 강가를 굽었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 마전(麻田)에 속했다가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토산 자초(紫草)ㆍ봉밀(蜂蜜)이 생산된다.

 

방면 현내면 : 끝이 5리이다. 동면(東面) :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서면 : 서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남면 :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북면 :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적암향(赤巖鄕) :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교하현 交河縣

 

동쪽으로 파주 경계까지 16리이고, 고양군 경계까지는 26리이다. 남쪽으로 같은 군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쪽으로 풍덕군 경계까지는 9리이다. 북쪽으로 장단부 경계까지 25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9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천정구현(泉井口縣)이다 : 일명 굴화군(屈火郡)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군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고, 본조 태조 3년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으며,

한양 속현이었던 심악(深岳)과 부평의 속향(屬鄕)이었던 석천을 내속시켰다.

태종 14년에 석천은 원평부(原平府)에 예속시키고, 심악은 고양현에 예속시켰는데,

뒤에 다시 예속시켜서 전례에 따라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한 사람씩.

 

군명 선성(宣城)ㆍ천정구(泉井口)ㆍ굴화(屈火)ㆍ원정(原井).

 

성씨 본현 : 노ㆍ김ㆍ이ㆍ옥(玉)ㆍ박ㆍ윤ㆍ전(田) : 딴 곳에서 온 성씨이다. 심악 : 이ㆍ박ㆍ전(全).

석천 : 야(夜)ㆍ염(廉)ㆍ차ㆍ호(扈).

 

산천 금단산(黔丹山) :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심악산(深岳山) : 현 남쪽 21리 지점에 있고 심악현이다.

와동산(瓦洞山) : 현 동남쪽 15리이다. 오도성산(烏島城山) : 현 서쪽 7리 지점에 있다.

한록산(漢麓山) : 현 서쪽 7리 지점에 있다. 옛 석성(石城) 터가 있는데, 둘레가 1리쯤이다.

약산(藥山) :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탄포(炭浦) :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낙하(洛河) 하류이다.

금척진(金尺津) :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물 근원이 양주 도봉산에서 나와서 장관포에 들어간다.

일미도(一眉島) :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물이 불으면 잠긴다. 심악강(深岳江) : 심악산 서쪽에 있다.

낙하도(洛河渡) : 현 북쪽 26리 지점에 있는데, 임진 하류이다.

○ 권람의 시에, "가을 바람에 외로운 객이 서쪽으로 가니, 장마 비 처음 개고 길바닥 물도 맑다. 말 한 마리,

동자(童子) 하 나라고 관리(關吏)가 웃으나, 다른 해에는 집버린 사람이라고 응당 말하리라." 하였다.

 

장관진(長串津) : 현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금척진 하류이다. 율포지(栗浦池) : 현 동쪽 8리 지점에 있다.

 

토산 숭어ㆍ웅어ㆍ붕어ㆍ게.

 

봉수 검단산 봉수(黔丹山烽燧) : 서쪽으로 풍덕군 덕적산을 응하고, 남쪽으로 고양군 고봉성산을 응한다.

학교 향교 : 현 동쪽 2리 지점에 있다.

역원 냉정원(冷井院) :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낙하원(洛河院) : 낙하도 언덕에 있다.

불우 검단사(黔丹寺) : 검단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오도성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총묘 윤번 묘(尹?墓) :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황희 묘(黃喜墓)ㆍ황수신 묘(黃守身墓) : 둘 다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박중손 묘(朴仲孫墓) : 탄포 오고미리(炭浦烏古美里)에 있다.

윤사흔 묘(尹士昕墓) : 현 남쪽 15리 와동(瓦洞)에 있다.

조온 묘(趙溫墓) : 현 남쪽 7리 남촌(南村)에 있다.

 

고적 심악 폐현(深岳廢縣) : 현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예전 보신향(寶薪鄕)이다. 고려 현종 때에 지금 명칭으

로 고쳐서 현으로 만들었고, 한양에 예속시켰으며, 본조 태조 3년에 본현에 내속시켰다.

석천향(石淺鄕) :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오도성 산성(烏島城山城) : 석축이고 둘레는 2천 71척이다. 한강과 임진강 하류가 여기에서 합류된다.

 

인물

본조 노한(盧?) :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노사신(盧思愼) : 노한의 손자이다. 과거에 올랐고, 익대 좌리 공신(翊戴佐理功臣)에 참여하였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선성 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학식이 넓고,

글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다.

 

신증 노공필(盧公弼) : 사신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고,

교성군(交成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제영 창해여파접현문(滄海餘波接縣門) : 박연(朴堧)의 시에, "푸른 바다의 남은 물결은 고을 문에 닿았고, 화사

한 봉우리의 푸르름은 붉은 구름에 비친다. 온 마을이 뽕밭이라, 다른 일이 없어 우리 님께 푸른 비단 드리고자

하네." 하였다.

 

화악삼봉대현문(華岳三峯對縣門) : 이적(李迹)의 시에, "화악 세 봉우리는 고을 문과 마주대하고, 무심히 하얗게

구름이 머무르네. 3년 동안 나그네 신세 크고 작은 한은 어버이 생각 아니면 님 생각이었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 파주(坡州)로 넣었다가 다시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연혁 영조 7년에 장릉(長陵)으로 읍치(邑治)를 옮겼다 : 치소를 지금의 치소인 동쪽으로 5리 금성리(金星里)로

옮겼다. 후에 치소를 또 장명산(長命山) 동쪽으로 옮겼다.

 

승군(陞郡) 읍호 : 선성(宣城)ㆍ원정(原井). 관원 군수(郡守) : 양주진(楊州鎭)의 관병마 동 첨절제사

(管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하였다. 1명이다.

 

방면 현내(縣內)면 : 서북쪽으로 10리에 있다. 아동(衙東)면 : 동북쪽으로 10리에 있다.

탄포(炭浦)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신오리(新五里) : 위와 같다.

와동(瓦洞)면 :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지석(支石)면 : 본래 석천향(石淺鄕) 동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청암(靑巖)면 :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2리이다.

석관(石串)면 : 서남쪽으로 처음이 8리, 끝이 13리이다.

 

사원 신곡서원(新谷書院) : 숙종 계해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윤선거(尹宣擧) : 자는 길보(吉甫), 호는 노서(魯西)인데, 파평 사람으로 윤황(尹煌)의 아들이다.

벼슬은 집의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능침 장릉(長陵) : 서북쪽으로 10리, 약산(藥山)의 동쪽에 있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80리이다.

인조대왕(仁祖大王)의 능이며, 기일은 5월 8일이다.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를 합장하였는데,

기일은 12월 9일 이다. 능이 처음에는 파주(坡州)에 있었는데, 영종 7년에 이곳으로 옮기었다.

○ 영ㆍ참봉이 각 1명이다.

 

 

가평현 加平縣

 

동쪽으로 강원도 춘천부 경계까지 13리이고, 남쪽으로 양근군(楊根郡) 경계까지 43리이며,

서쪽으로 포천현 경계까지 79리이고, 북쪽으로 영평현 경계까지 54리인데, 서울과는 1백 3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근평군(斤平郡)이다 : 일명 병평(竝平)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 가(加)를 가(嘉)라 한 데도 있다. 고려 현종 9년에 춘주(春州)에

예속시켰고, 본조 태조 5년에 감무를 두었다.

태종 13년에 전례에 따라 현감으로 만들고 강원도에서 옮겨 본도에 이속시켰다.

 

속현 조종현(朝宗縣) : 현 서쪽 45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 심천현(深川縣)인데 일명 복사매(伏斯買)라 하기

도 한다. 신라에서 준천(浚川)이라 고쳐서 가평군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에서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현종조에 가평과 함께 춘주에 예속시켰다. 본조 태조 때에 가평 감무를 설치 하면서 이 현을 다시 예속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한 사람씩이다. 신증 정덕(正德) 정묘년에 현의 구역 안에 지금 임금의 어태(御胎)를 안치

하였다는 것으로써 군으로 승격하였다.

 

관원 군수 : 한 사람.

군명 근평(斤平)ㆍ가평(嘉平)ㆍ병평.

 

성씨 본현 : 장(張)ㆍ탁(卓)ㆍ간(簡)ㆍ박 : 속. 조종 : 현(玄)ㆍ호(胡)ㆍ이ㆍ형(刑) : 일명 형(邢)이라 하기도 한다.

박ㆍ김ㆍ한 : 딴 곳에서 온 성씨이다.

 

산천 화악산(花岳山) : 현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운악산(雲岳山) : 현 서쪽 60리 지점에 있다.

청평산(淸平山) : 현 동쪽 춘천 경계에 있다. 가주지산(加注之山) : 현 서쪽 59리 지점에 있다.

소의산(所衣山) : 현 서쪽 59리 지점에 있다. 비랑산(非郞山) : 현 서쪽 43리 지점에 있다.

은두정산(銀頭頂山) : 현 서쪽 35리 지점에 있다. 청송산(靑松山) : 현 서쪽 25리 지점에 있다.

어리내산(於里內山) : 현 남쪽 62리 지점에 있다.

안판탄(按板灘) : 현 동쪽 7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소양강(昭陽江)에서 나온다.

문이연(汶伊淵) :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입석천(立石川) : 현 남쪽 43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춘천부 경계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양근군

용진도(龍津渡)에 들어간다.

 

토산 숭어ㆍ잣ㆍ황옥 : 황옥은 현 남쪽 적촌리(赤村里)에서 산출된다. 산겨자ㆍ벌꿀ㆍ버섯ㆍ싱검초[辛甘草].

신증 녹반(綠攀) : 군 서쪽 두모곡(豆毛谷)에서 산출한다.

학교 향교 : 현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감천역(甘泉驛) :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연동역(連洞驛) : 현 서쪽 45리 지점에 있다.

적율원(狄栗院) : 현 서쪽 22리 지점에 있다. 임초원(林草院) : 현 서쪽 34리 지점에 있다.

불우 용천사(龍泉寺)ㆍ영통사(靈通寺)ㆍ현등사(懸燈寺)ㆍ영취암(靈聚菴)ㆍ영제암(永濟庵)ㆍ혜수암(惠壽庵) :

모두 화악산에 있다.

 

미라암(彌羅庵)ㆍ지장암(地藏庵) : 둘 다 운악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하나는 현 동쪽 3리 지점에 있고, 하나는 조종현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화악산사(花岳山祠) : 봄 가을에 본읍에서 제사한다.

고적 개탄소(皆呑所)ㆍ지양소(紙壤所) : 둘 다 조종현에 있다.

명환 본조 성순조(成順祖).

 

제영 쟁영화악진기북(?嶸華岳鎭其北) : 이맹균(李孟均)의 시에, "일찍이 포천(抱川)에 가는 길에 굴파(屈坡)를

넘어서 안장(鞍裝)을 내리고 잠깐 조종(朝宗)에서 쉬었다. 어지러운 산 깊은 골을 뚫고 가는데, 한 가락 길이 꼬

불꼬불 굽이고 많다. 비록 말을 꾸짖으며 걷고 건너기 어려워도, 이 고을에 이르니 마음이 이미 시원하다.

높다란 화악산이 북쪽을 누르고, 구멍에는 태고적 눈이 아직도 쌓였다. 가닥진 여러 봉우리 온 고을을 감쌌는

데, 천 가지 모습 만 가지 형상이 다 기절(奇絶)하다. 시냇물이 일렁거려 햇볕도 푸르고, 그 속에는 교룡의 굴

있는가 의심된다. 사시로 아침저녁 훌륭한 경치, 그리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다. 나의 걸음은 이틀을 묵어

돌아갈 줄 몰라, 추환(??)을 즐기는 것 보다 더 즐긴다. 여기 사는 백성도 순박한 줄 알겠다.

관아의 뜰에는 송사 없어 고요하여라. 바로 명리장(名利場)을 벗어나 여기에다 살 터 잡고, 평생토록 거닐며

풍월을 즐기고 싶다.

위에 성군(聖君)이 있어 들에 남긴 어진 이 없으니, 어찌 장저(長沮)ㆍ걸익(桀溺) 같이 길이 하직하리.

내일 아침 발길을 돌려 홍진(紅塵)에 들어가면, 꿈속에서 옛길 찾느라 수고하겠지."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20년에 춘천(春川)으로 넣었으나, 32년에 다시 본 도로 환원하여 군으로 하였다가 그 해에 포천(抱川)

에 속하게 하더니 잠시 후 다시 들였다.

 

연혁 숙종 23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 역적 영창(榮昌)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33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관원 군수 1명이다. 양주진(楊州鎭)의 관병마 동 첨절제사를 겸하였다.

 

토산 인삼ㆍ오미자(五味子)가 난다.

 

방면 군내(郡內)면 : 끝이 20리이다. 남면 :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50리이다.

조종(朝宗)면 : 처음이 30리, 끝이 80리이다. 북면 : 처음이 15리, 끝이 50리이다.

서면 : 처음이 10리, 끝이 70리이다. 탄소(呑所)와 지양소(紙壤所)가 모두 조종현에 갖추어져 있다.

 

사원 잠곡서원(潛谷書院) : 숙종 때 세웠으며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고읍 조종(朝宗)읍 : 서북쪽으로 45리에 있는데, 본래는 백제의 복사매(伏斯買)이며, 심천(深川)이라고도 한다.

가평군(加平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에 조종이라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춙주(春州)에 소속되었다가 본조 태조 5년에 이에 속하게 되었다.

 

김육(金堉) : 개성 편에 보인다.

 

 

권 12. 경기 7. 장단도호부 長湍都護府

 

동으로 삭녕군계(朔寧郡界)까지 50리, 마전군계(麻田郡界)까지 36리, 적성현계(積城縣界)까지 51리,

남으로 파주계(坡州界)까지 45리, 서로 풍덕군계(?德郡界)까지 26리, 개성부계(開城府界)까지 37리,

북으로 황해도 우봉현계(牛峯縣界)까지 13리, 서울과의 거리는 4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高句麗) 장천성현(長淺城縣)으로 : 야아(耶牙)라고도 하고, 야아(夜牙)라고도 하였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우봉군(牛峯郡)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高麗) 목종(穆宗) 4년(1001)에 시중(侍中) 한언공(韓彦恭)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단주(湍州)로 승격시켰다.

현종(顯宗) 9년(1018)에 다시 장단현으로 만들고, 현령(縣令)을 두어서 상서 도독(尙書都督)의 소관으로 하다

가, 문종(文宗) 16년(1062)에 직접 개성부에 예속시켰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4년(1414)에 임강현(臨江縣)

과 합하여 장임현(長臨縣)이라 이름하였다가 뒤에 다시 장단으로 임진(臨津)과 합하여 임단현(臨湍縣)이라

이름하였다.

세종(世宗) 원년(1418)에 다시 장단 현령(長湍縣令)으로 만들었다.

세조(世祖) 2년(1456)에 장단과 임강을 없애고 임진에 예속시켰다. 4년에 다시 임강과 임진을 장단에 붙였다.

5년에 중궁(中宮)의 증조ㆍ고조ㆍ현조의 세 무덤이 그 지방에 있어서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군청(郡廳)을 도원역(桃源驛)이 있던 곳으로 옮겼다.

예종(睿宗) 원년(1468)에 진(鎭)을 설치하고,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진관 도호부 1 : 강화(江華) 군(郡) 3 : 풍덕(?德)ㆍ삭녕(朔寧)ㆍ마전(麻田)ㆍ현(縣) 2 : 연천(漣川)ㆍ교동(喬桐).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 각각 1명씩이다.

 

군명 습천(?川)ㆍ장천성(長淺城)ㆍ야야(耶耶)ㆍ야아(夜牙)ㆍ단주(湍州)ㆍ장임(長臨)ㆍ임단(臨湍).

 

성씨

본부(本府) 한(韓)ㆍ전(田)ㆍ풍(馮)ㆍ허(許)ㆍ선(宣)ㆍ김(金)ㆍ금주(金州)ㆍ이(李) : 염주(鹽州).

임진(臨津) 송(宋)ㆍ김(金)ㆍ함(咸)ㆍ형(邢)ㆍ표(標)ㆍ선(宣)ㆍ종(宗) : 속(續)ㆍ임강(臨江) 이(李)ㆍ정(鄭)ㆍ

노(盧)ㆍ경(卿)ㆍ사(史) 송림(松林) 김(金)ㆍ문(文)ㆍ전(田)ㆍ송(宋)ㆍ차(車)ㆍ미(米).

 

산천 망해산(望海山) : 부(府)에서 북쪽으로 4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용호산(龍虎山) : 부에서 동쪽으로 10리인 임강현 남쪽에 있다.

화장산(華藏山) : 임강현에 있다. 우리 태조가 이 산에서 사냥하다가 사슴을 쫓아가는 중, 절벽의 높이가 수십

척이라 사람은 갈 수가 없는데 사슴이 미끄러져 내려가니 태조의 말도 미끄러져 내려가 밑에까지 이르자 말이

엎어져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즉시 사슴을 쏘아 죽였다.

 

백악(白岳) : 임진현 북쪽에 있다. 고려에서 풍덕(?德) 백마산(白馬山)을 우소(右蘇)로 삼고, 백악을 좌소(左蘇)

로 삼았다.

 

○ 공민왕(恭愍王) 9년(1360)에 도읍을 남경(南京 한양)으로 옮기려고 태묘(太廟)에서 점쳐보니, 불길하여 결국

옮기지 않있다. 이에 친히 이 산에 거둥하여 땅을 살펴보고 산의 남쪽에 대궐을 지었는데, 주위가 7백 20보(步)

였다. 당시 사람들이 신궁(新宮)이라 하였다.

 

도라산(都羅山) : 임진 남쪽 25리에 있다. 구룡산(九龍山) : 부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바로 성거산(聖居山)이다.

우봉현(牛峯縣) 편에 자세히 나온다.

오관산(五冠山) : 부의 서쪽 30리에 있는데, 산꼭대기에 다섯 개의 작은 봉우리가 관(冠)처럼 둥그렇게 생겼으

므로 오관산이라 이름하였다.

 

○ 고려사람 문충(文忠)은, 세계(世系)가 상세하지 않은데,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오관산 영통사동(靈通寺洞)에 살았는데 서울과 30리 떨어진 곳이다.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녹사(祿仕)를 하되,

아침에 나갈 때는 반드시 아뢰고 저녁에 돌아올 때 반드시 뵙고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피고 새벽에는 문안하

는 것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어머니가 늙은 것을 탄식하여 목계가(木鷄歌)를 지었는데, 오관산곡(五冠山曲)이라 이름하였고 악보(樂譜)에

전한다. 이제현(李齊賢)의 사(詞)에, "나무 깎아 작은 당 닭[唐鷄] 한 마리 만들어, 젓가락으로 찍어다가 벽 위

에 올려 앉혔네. 이 닭이 꼬끼오 꼬끼오 시간을 알리니, 우리 어머니 얼굴이 비로소 해가 서쪽에 편평한 것과

같아라." 하였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詩)에, "높고 높은 오관산이 신령스런 봉우리 푸른 공중에 솟았네. 높은 자세는 일관(日

觀)에 짝하여, 만고에 웅장하게 서리고 앉았구나. 큰 소나무는 층층으로 봉우리를 가렸고, 기이한 풀은 암벽을

덮었네. 골이 깊으니 아침 노을이 쏟아지고, 절벽이 높으니 나는 학이 둥우리에 깃드네. 다섯 봉우리 차례대로

높고 낮으니, 관 쓴 형제 늘어선 듯하네. 그 가운데 옛 신단(神壇)이 있으니, 사질(祀秩)은 오악(五岳)과 같네.

산 아래 있던 사람 생각하니, 아름다운 소문 천억 년에 빛나는구나. 평생에 충효한 마음, 오래도록 퇴폐해 가는

풍속을 격려시키네. 생각만 하고 볼 수는 없으니, 부질없이 목계곡(木鷄曲)만 부르네." 하였다.

 

보봉산(寶鳳山) : 부의 서쪽 20리인 회령(檜嶺) 동쪽에 있는데, 산세가 봉이 춤추는 것 같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

다.

 

용암산(湧巖山) : 오관산 동북쪽에 있으며, 오관산ㆍ천마산(天磨山)의 여러 산과 서로 이어져 있되, 다만 봉우리

에 다름이 있을 뿐이다.

 

면주동(綿紬洞) : 오관산 아래 있으며 골 안이 넓고 깊숙한데 절이 하나도 없다. 전하는 말에, "만약 여기에 절을

지으면 나라의 운수가 길지 못한다." 하였는데, 대개 고려의 비보(裨補)의 뜻이다.

 

영통동(靈通洞) : 오관산 아래에 있는데, 화담(花潭)에서부터 올라가면 산을 돌아 길이 꼬불꼬불한데, 시내를 여

러 번 건너면 그 골에 이른다. 골 안은 편평하게 퍼져서 인가 수십 채가 있는데, 대대로 빨래하는 것을 업으로 삼

고 있다.

 

차일암(遮日巖) : 면주동 어귀에 있다. 바위가 편평하고 넓어서 앉아서 놀 만한데, 바위를 뚫어 구멍을 만들어 놓

았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날 사람이 장막을 칠 때 기둥을 세웠던 곳이다." 하기도 하고, 혹은 "신선이 놀던

곳이다." 하기도 하며, 혹은 "임금이 거둥했던 곳이다." 하기도 한다. 샘 있어 빙빙 돌아 나오는데, 그 빠르기가

화살 같고 그 아래가 웅덩이가 되었으니, 웅덩이 밑은 모두 돌이어서 고기들이 노는 것을 하나하나 셀 수가 있다.

 

화암(花巖) : 영통동 어귀에 있는데 화담(花潭)이라고도 한다. 화담 왼쪽에는 푸른 절벽이 가파르게 서서 마치

그림 병풍을 펴놓은 것 같고, 바위 틈에 철쭉꽃이 있어 봄이 되면 만발하여 물 밑에 붉게 비친다. 화담 오른쪽

에는 작은 바위가 있어 사면이 깎아지른 듯한데, 그 위 네 귀퉁이에도 장막을 치던 구멍이 있다.

 

산대암(山臺巖) : 송경(松京) 숭인문(崇仁門) 밖에 있는데, 절벽이 1백 길이나 되고, 그 모양이 채붕(彩棚)을 펼

쳐놓은 것 같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 이색(李穡)의 시에, "군왕이 당일에 풍류 잡고 놀았으니, 한 시대가 번창하고 화려하여 전쟁이 없었음을 상상

하겠네. 대(臺)는 절벽에 서서 푸른 물을 굽어보고, 정자는 옛터에 남아, 찬 잔디가 자라는구나.

삼한(三韓)의 기개(氣槪)는 뭇 용(龍)이 모여들었고, 만고의 영웅들은 한 마리 새 지나간 것 같도다.

모르겠네 태평 시대가 다시 돌아올 것인가. 신(臣)은 지금 늙었으니 어이하리." 하였다.

 

탁타암(?駝巖) : 산대암 서쪽에 있다. 고암(鼓巖) : 용암산 오룡봉(五龍峯) 위에 있는데, 그 모양이 북[鼓]과 같

으므로 고암이라 하였다.

 

추암(皺巖) : 송경 도성(都城)의 동북쪽 2, 3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바위가 시냇가에 서 있어 병풍 같고, 모두 가로

결이 있기 때문에 추암이라 이름하였다. 아래에 큰 돌이 많아서 앉아서 술 마실 만하다.

고려 최당(崔? 최영(崔瀅))이 항상 소를 타고 와서 여러 노인들과 여기서 놀았다.

 

○ 이인로(李仁老) 시에, "두루 구경하니 모두 선경(仙境)인데, 더욱 기이한 것은 추암뿐일세. 층층 구름은 길게

땅에 깔렸고, 쌓인 옥(玉)은 처음으로 함(函)을 열어 보는 듯하네. 우뚝 솟았으나 천주(天柱)는 아니요, 옆으로

퍼진 것은 석범(石帆) 같구나. 물이 맑으니 쪽[藍]이 절로 물들고, 길이 좁은데 풀은 누가 벨 것인가.

하늘은 삼태(三台)가 귀한 것을 벌여 놓았는데, 사람은 한결같은 덕(德)이 다 있음을 칭하네. 노년에 벼슬을 내

놓았으니, 세상과 시고 짠것을 달리했네. 사는 곳이 마침 대문과 골목이 서로 닿았고, 나갈 때에도 반드시 말고

삐를 나란히 하네. 흥이 나면 큰 소리로 읊조리고 이야기하고, 웃을 제는 말이 소근소근하네. 짧은 해가 참으로

아깝구나.

높은 회포를 스스로 입 다물지 마소. 금 안장은 깊숙한 곳에 들어가 길을 재촉하는데, 구슬 신으로 높은 바위에

올랐네. 산새는 가판(歌板 노래 부르며 치는 판대기) 소리에 놀라고, 갠 아지랑이는 춤추는 소매를 따르누나.

서리 같은 흰 머리는 백로를 속이는데, 옥처럼 맑은 뼈는 소나무 전나무와 겨루리. 저물려는 붉은 해에 향기로

운 항아리는 다 비었고, 취중에 쓴 글씨는 푸른 절벽에 새기네. 아름다운 이름 만고에 전하니, 응당 망하지 않은

범[不亡凡]을 짝하리로다." 하였다.

 

○ 고려 민사평(閔思平)의 시에, "천 척이나 되는 구름 뿌리에서 북산(北山)에 솟았으니, 옛 현인이 끼친 자취

그림도 그리기 어려워라. 상국(相國)이 시를 써 놓은 뒤로부터 얼마나 많은 행인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보

았나."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눈 속에 시내와 산은 특별히 기이하여, 소 타고 구경하며 가는 대로 맡겨 두네.

추암(皺巖)은 아마도 인간 세계가 아닌가보다. 언제든지 유선(儒仙)들로 하여금 시를 짓고 가게 하네." 하였다.

 

달령(獺嶺) : 낙산사동(洛山寺洞)에 있다.

○ 의종(毅宗)이 일찍이 중 각예(覺倪)와 함께 달령에서 시를 짓고 놀면서 돌아갈 줄을 모르니, 호위하는 장사들

이 피곤하였으므로 정중부(鄭仲夫) 등이 비로소 반역할 마음이 생겼다. 임금이 한 번은 말을 달려 홀로 달령에

이르렀는데, 모시고 간 신하들은 미처 따라오지 못했다. 임금이 기둥에 기대어 이르기를, "만약 정습명(鄭襲明)

이 있었다면 내가 어찌 이 지경이 되었겠느냐." 하였다.

 

회령(檜嶺) : 곧 화장사(華藏寺) 서령(西嶺)이다.

 

○ 이색의 시에, "험한 길로 회령에 오르니, 하늘 가에 봉우리가 펀펀하구나. 한 번 웃고 잠깐 발길을 멈추니,

나의 마음 시원하여라." 하였다.

 

유현(柳峴) : 진현(榛峴)에서 서쪽으로 2리 되는 곳에 있다.

진현(榛峴) : 동파역(東坡驛) 서쪽 3리에 있다.

○ 김식(金湜)의 시에, '개암나무 헤치면서 버드나무 휘어잡고 높은 언덕 지나서 뭇 산을 굽어보니, 물결이 둔덕

을 이룬 듯. 조각조각 구름은 발 밑에서 일어나고, 드문드문 사람들은 공중으로 돌아오네. 동쪽에서 부르면 서쪽

에서 메아리치니 소리를 가름할 수 없고, 높은 데 올라갔다 낮은 데로 내려오니, 힘이 쉽게 지치네. 집이 서울에

있으니 어느 날이나 돌아갈까나. 3천 리 밖에서 한 번 머뭇거리네." 하였다.

 

중광현(重光峴) : 용호산(龍虎山) 서쪽에 있다. 봉황암(鳳凰巖) : 강련포(江連浦) 서안(西岸)에 있다.

용둔교(龍遁郊) : 부의 서쪽 15리 대사현동(大蛇峴洞)에 있는데,

이제현(李齊賢)의 팔영(八詠)에 용야심춘(龍野尋春)이 바로 여기이다.

 

호곶교(壺串郊)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목장이 있는데 둘레가 42리이다.

 

○ 신우(辛禑)가 여기에 누(樓)를 짓고 또 누선(樓船)을 만들었는데, 지극히 사치스럽고 커서 이름을 봉천선

(奉天船)이라 하였다. 물놀이[水?]를 베풀어 흥청거리며 노는 것이 법도가 없었다. 한 번은 술에 취해서 의관

도 벗지 않은 채 말을 타고 물로 들어갔었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종신(從臣)들의 장막이 구름같이 떴으니, 가랑비 비낀 바람 6월이 가을 같네.

취화(翠華 임금의 일산)가 너무 오래 젖을까 걱정하여 새로 누를 짓고 큰 강 머리를 눌렀네." 하였다.

 

백안교(伯顔郊) : 낙하(洛河) 북쪽에 있는데, 지금은 목장이 되었다.

판적천(板積川) : 근원이 속현(屬縣) 송림(松林)에서 나와 백악(白岳) 이남의 여러 물과 합류하여 사천(沙川)으로

들어가 바다에 이른다.

 

삼미천(三彌川) : 부의 북쪽 20리에 있는데, 근원이 우봉현(牛峯縣) 성개산(性蓋山)에서 나와 적성(積城) 대탄

(大灘)을 지나 임진으로 들어간다.

 

장단도(長湍渡) : 부의 동쪽 33리에 있는데, 두기진(頭耆津)이라고도 한다. 양편 언덕에 푸른 석벽이 수십 리를

서 있어 바라보면 그림 같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거둥해 놀던 곳이다." 하며, 민간에서는 아직도

그 가곡(歌曲)이 전해지고 있다.

 

○ 공민왕 20년(1371) 3월 경오일에 장단에 거둥하여 정릉(靖陵)에 배알(拜謁)하고,

대장군 이화(李和)에게 명령하여 공인(工人)을 거느리고 중류에서 기악(伎樂)을 연주하게 하여 임금이 보며 즐

기니, 상장군 김흥경(金興慶)이 옆에서 모시고 있다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친히 배를 타소서." 하자, 임금은 이

르기를, "내가 비록 이것을 즐겨도 그런 일은 못한다." 하였다.

임신일에 임금이 배에 올라 여자와 음악(女樂)을 벌여놓고 흥겹게 놀았다.

 

○ 신우 때에 왜적(倭賊)이 침입하여 여러 고을을 불지르고 노략질하니, 우리 태조에게 명하여 양광 전라 경상

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都巡察使)로 삼았다. 군사가 이 곳을 지나는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점치는 사람

이 싸움에 이길 징조라 하였다.

 

○ 임춘(林椿)의 시에, "장단에 바람이 급하여 물결이 산더미 같은데, 배 한 척 빌려 타려 하나 여울에 오르기 어

려워라. 12시 아침과 다시 저녁에 돌아오는데, 인간 어느 날에 파란이 적겠는가." 하였다.

 

○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가을 물은 맑고 맑아 푸르기 하늘 같은데, 군왕은 한가한 날에 누선(樓船)에 올랐네.

사공들아, 장단곡(長湍曲)을 부르지 말라. 지금은 바로 조선 제2년일세." 하였다.

 

○ 이색의 시에, "장단의 석벽은 푸른 병풍이 비꼈는데, 철쭉꽃이 피니 비단이 밝구나. 상선(商船)을 잠깐 빌려

흐름을 따라 내려오니, 일시의 정경(情景)이 참으로 이름할 수 없구나."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강은 멀어 비단 한 필이요, 바위는 높아 쇠[鐵]가 열 길일세. 깃발 의장이 엄숙하고,

노래와 풍류는 즐거움이 깊구나. 여름 해는 골 안이 환한데, 그윽한 꽃은 우거진 숲에 가렸구나. 옛날부터 검덕

(儉德)을 숭상하여 썩은 새끼[朽索]가 백성 다룸을 경계했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뾰죽뾰죽 절벽이 강을 따라 돌았는데, 양쪽 언덕 봄바람에 꽃이 한창 피었구나. 들 밖에

단산(湍山)은 지형을 따라 다 되었고, 모래 가운데 작은 길은 시골을 통해 나왔네. 뱃사람은 물을 가로질러 그물

을 치는데, 농부들은 병을 들고 술을 권하네. 지난 일은 아득하여 물을 곳이 없구나. 비문(碑文)은 닳고 이끼뿐

일세."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푸른 절벽은 강을 따라 철을 깎아 세운 듯한데, 바위 앞 옛 비석은 맑은 물에 거꾸로

비쳤구나. 어찌하면 연기 속 마을 길을 차지하여 멋대로 물에서 고기나 낚고 앉았을꼬." 하였다.

 

동강(東江) : 임진현 서쪽 15리에 있다.

강련포(江連浦) : 임진현 서쪽 10리에 있는데, 고기잡이배를 대는 곳이다.

임진도(臨津渡) : 부의 남쪽 37리에 있는데, 그 근원은 함경도(咸鏡道) 안변(安邊) 속현(屬縣) 영풍방장동

(永?防墻洞)에서 나와 이천(伊川)ㆍ안협(安峽)ㆍ삭녕(朔寧)을 거쳐 연천현(漣川縣) 서쪽에 이르러 증파도

(澄波渡)가 되고,

마전군(麻田郡) 남쪽에 이르러 대탄(大灘)과 합쳐져, 적성현(積城縣) 북쪽에 이르러서는 이진(梨津)이 되고,

부의 동쪽에 이르러서는 두기진(頭耆津)이 되며, 임진현 동쪽에 이르러서 이 나루가 되고 동남쪽으로 덕진

(德津)이 되며, 교하현(交河縣) 북쪽에 이르러 낙하도(洛河渡)가 되고,

봉황암(鳳凰巖)을 지나 오도성(烏島城)에 이르러서 한수(漢水)와 모인다. ○ 도승(渡丞) 1명이 있다.

 

○ 이규보의 시에, "조각배 물결 타고 나는 것보다 빠른데, 물 기운 써늘하게 객의 옷에 스며드네. 초록색 언덕

엔 이따금 쌍 해오리 서 있는데, 푸른 하늘 어느 곳으로 한 돛대 돌아가는고. 산은 붉은 해를 머금어 마을 나무

에 나직하고, 바람은 은빛 파도를 굴려 낚시터에 부서지네. 처음 동문(東門)을 나설 때도 오히려 슬픈 생각 있

더니, 강을 건너니 쓸쓸한 심정 더욱 어쩔 수 없어라." 하였다.

 

○ 김부식(金富軾)의 시에, "가을 바람은 산들산들하고 물은 출렁이는데, 머리 돌려 먼 하는 바라보니 생각이

아득하구나. 아, 임은 천리에 떨어졌는데, 강가에 난지(蘭芷)는 누구를 위해 향기로운고." 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갈대꽃 단풍잎 저무는 강가에, 두 척 작은 배 물 건너길 자주하네.

모래 위 흰 갈매기 누구와 친하기에, 해마다 오가는 사람의 시름을 돕는가." 하였다.

 

○ 강호문(康好文)의 시에, "일 년에 세 번이나 임진을 건너니, 물새도 서로 친해서 사람을 피하지 않네.

나루지기야 어지 군사(軍事)의 급함을 알소냐. 응당 내가 자주 왕래하는 걸 비웃을 테지."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모래는 밝은데 강물은 푸르고, 나무는 어두운데 물가에 연기 뜨네.

관방(官舫)은 연달아 떠나라고 재촉하는데, 낚싯줄은 아직 거두지 않았네. 버들 바람은 술취한 정신을 맑게 해

주고, 꽃 기운은 차 그릇[茶?]에 스며드네. 스스로 우습구나, 사신(使臣)으로 나가는 손이니, 행차를 잠시도

머무를 수 없네." 하였다.

 

○ 장영(張寧)의 시에, "3월의 봄빛은 경치 가장 새로운데, 뱃노래 소리 가운데 임진을 건너는구나. 들판에 눈이

녹으니 푸른 풀 많고, 비 지난 물가에 초록 마름 자라네. 그림 배에 맑은 놀이 천상의 손님이요, 푸른 구름 성긴

그림자 물 가운데 사람일세. 복사꽃 물결[桃花浪] 따뜻하니 어룡(魚龍)이 놀고, 버들 바람 화창하니 새들이 지

저귀네. 돌아갈 생각은 남포(南浦)의 나무에 아득한데, 강물은 고원(故園)의 봄에 이르지 못하리.

구중(九重) 높은 하늘엔 쌍으로 나는 새요, 천리 은하수에 홀로 노는 물고기일세.

물길 따라 올라가며 멋대로 논다고 비웃지 마소. 응당 가는 곳마다 인정 풍속을 물음일세.

이번 걸음은 모두 임금의 은명(恩命)을 선포하기 위해서요, 뗏목 탄 한 한(漢) 나라 사신은 아닐세."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연기 끌고 비 맞으며 강을 건너니, 양쪽 언덕에 농부들은 좋아라고 날뛰네. 모두 말하기

를, '옥룡(玉龍)이 비 주는 심부름꾼으로서 짐짓 동토(東土)에 와 풍년을 내렸다.' 하네." 하였다.

 

○ 장성(張珹)의 도임진(渡臨津) 시에, "임진에 조수는 정히 급한데, 비는 부들[蒲] 싹에 뿌려 새롭구나.

강가의 꽃은 십 리에 붉은 장막이요, 언덕 풀은 일대(一帶)에 자리를 깔았네. 그림 배에 술 싣고 생선회 치니,

풍미(風味)는 서호(西湖)와 방불하네. 우러러보고 굽어보매 연어(鳶魚)들이 한가하니, 천지가 나의 인(仁)과

한 가지로세. 조선은 본래 예의를 숭상하니, 어진 사신을 멀리 마중하네. 중류(中流)에 와서 나에게 술을 권하

니, 예의가 퍽 은근하구나. 내가 술마심이 어찌 편안하랴. 임금 하직한 지 벌써 50일이네.

어찌하면 이 강을 울금(鬱金) 빛으로 변하게 만들어서, 우리 천자 만수배(萬壽杯) 가운데 봄을 보태 드릴거나."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임진강에 봄이 일찍 들어 얼음은 벌써 풀렸는데, 그림 배는 노를 저어 중류에 비꼈구나.

동군(東君 봄을 맡은 신)이 손을 사랑하여 다정하니, 청산을 함께 대하여 술잔에 떴네."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새벽에 사절(使節)을 가지고 강 머리에 당도하니, 동도(東道)에서 손을 맞아 채색 배에

앉히네. 때맞춰 오는 비는 정이 있게 나를 보내듯, 청산은 어느 곳이고 눈에 들지 않는 데가 없네.

술은 좋은 경치를 만났으니 취하지 않을 수 없고, 시는 지음(知音)을 향해 읊조림을 멈출 줄 모르네. 다행이구나,

황명(皇明)의 문화는 멀리 퍼져서, 다른 나라에서 서로 만난 이가 모두 선비들일세." 하였다.

 

○ 고윤(高閏)의 시에, "가랑비 내리는 임진 나루에, 연기 물결 형세가 뜨려고 하네. 많은 배는 꼬리를 물고 지나

가고, 두어 기(騎 말탄 사람) 강에 닿아 쉬네. 좋은 안주는 생선회가 나오고, 향기로운 술은 큰 잔으로 부었구나.

앞길에 나라 일이 급하니,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말길 부탁하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양편 언덕은 지척 사이에서 바라보는데, 한 강의 흐르는 물은 옥 여울이 둘렀네. 돛대에

놀란 해오리는 날다가 이내 앉고, 그물 치는 고깃배는 갔다가 또 돌아오네. 노래하는 부채[歌扇]의 그림자 가운

데는 푸른 물결 흔들리고, 술잔 깊은 속엔 청산이 비쳤네. 시를 쓰고 보니 나의 시재(詩才)가 졸렬함을 웃을 테니,

부질없이 그윽한 회포 반나절 한가함을 저버렸네." 하였다.

 "사신 행차 총총히 바다 나라 지나는데, 돌아가는 길이 또 임진강을 건너네. 청산은 거꾸로 몇 천 길이나 잠겼는

가. 흰 새가 일제히 나니 세, 다섯 쌍일세. 바람은 쇠잔한 구름을 뿌려 객의 소매에 점을 찍고 물고기는 미세한

물결을 불여 뜸창[?窓]을 적시네. 취해서 웃음을 머금고 환백(歡伯 술의 별명)에게 묻노니,

얼마나 많은 나그네 근심이 너로 하여 가라앉았는가." 하였다.

 

○ "만 곡(斛)을 실은 용양선(龍?船)이 상류에 떴으니, 느릿느릿 젖는 돛대 가벼운 거품 헤치는구나.

술이 끝나자 다시 강의 동쪽 길을 밟으니, 무수한 청산이 말 머리를 옹위하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큰 배로 맑은 나루를 건너니, 언덕에 꽃은 늦은 봄이 되려 하네. 조수가 돌아오니

모래에 흔적 있고, 바람이 사르르 부니 물에 무늬 생기네. 땅이 궁벽하니 다니는 배 적고, 인적이 드무니 물새가

길들었네. 여기 지난 지가 언제던가. 귀밑 털이 허연 줄도 깨닫지 못했네." 하였다.

 

○ 왕창(王敞)의 시에 "배 대는 자리엔 모래 언덕에 다다랐는데, 강물은 석문(石門)으로 달려가네. 은실[銀絲]

이 회치는 것을 보겠고, 옥유(玉乳)는 돼지 찜이 맛있도다. 들꿩은 구워 먹기에 알맞은데, 산꽃은 술항아리에

비쳤네." 배 타고 맘놓고 마시자꾸나, 지는 해가 앞마을에 비쳤네."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가랑비 내리는 임진강 나루터에 비낀 바람이 낚시질하는 돌무더기 흔드네. 물새는 가볍

게 동동 뜨는데, 물가 나무는 멀리 아물아물하네. 반찬엔 아름다운 강 고기가 올랐고, 소반엔 들 고사리가 살쪘

네. 주인이 객을 머무르게 하는 뜻은, 다만 얼른 돌아갈까 걱정함이네." 하였다.

 

덕진(德津) : 곧 임진강 하류이다.

낙하도(洛河渡) : 덕진 하류이다. ○ 도승(渡丞) 1명이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송이[松?]ㆍ웅어(葦魚)ㆍ눌치[訥魚]ㆍ쏘가리[錦鱗魚]ㆍ숭어[秀魚]ㆍ은어[銀口魚]ㆍ

게[蟹]ㆍ석창포[石菖蒲].

신증 녹반(綠礬) : 부의 동쪽 독자동(獨子洞)에서 난다.

 

봉수 천수산(天壽山) 봉수 : 곧 천수원(天壽院) 북봉(北峯)이다. 송림(松林) 서쪽에 있는데,

남으로 도라산(都羅山)에 응하고, 서로 개성부(開城府) 송악산(松岳山) 국사당(國師堂)에 응한다.

 

도라산(都羅山) 봉수 : 북으로 천수산에 응하고, 동으로 파주(坡州) 대산(大山)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 서거정(徐居正)의 신영기(新營記)에, "고기(古記)를 상고해 보면,

삼한(三韓) 때에 습천군(?川郡)이었는데, 뒤에 주(州)로 승격했다가 다시 장단현(長端縣)으로 강등했다.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일하고 송경(松京)에 도읍하여 장단을 동익(東翼)으로 삼고 개성을 서익(西翼)으로 삼았

다. 성종조(成宗朝) 때에 단주(湍州)라 고쳤다.

신축년(1361)에 홍건적(紅巾賊)의 난리를 만나서 관우(館宇)는 불에 타고 현관(縣官)은 영평현(永平縣)에 임시

로 있었다. 무진년(1388)에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이 명하여 안집 별감(安集別監)을 설치하고 흩어

져 있는 백성을 불러서 어루만져 고향으로 돌아오게 했다. 3년이 지난 경오년에 현령(縣令)으로 고쳤다.

태종(太宗) 갑오년(1414)에 임강현(臨江縣)을 없애고 장단에 예속시켜 이름을 장림(長臨)이라 고쳤다.

세종(世宗) 기해년(1419)에 각각 옛날대로 임진ㆍ장단이라 하였다.

세조(世祖) 병자년(1456)에 장단과 임강 두 고을을 없애고, 합쳐서 임진현으로 만들었다.

현감인 하여덕(河汝德)이 비로소 읍(邑)을 도원역(桃源驛) 옛터로 정하였는데, 사군(使君 지방관의 경칭) 송숙

기(宋叔琪)가 후임으로 와서 비로소 역사를 시작했는데, 무인년에 이름을 장단현이라 고쳤다.

이 해에 본 고을에 왕후의 조상의 산소가 있다는 이유로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이듬해 기묘년에 비로소 읍을

옮겼는데, 공아(公衙)ㆍ객관(客館)ㆍ고무(庫?)가 처음 지어지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 뒤를 이어 사군 조지주

(趙之周)가 완전히 지으려 하다가 상(喪)을 당해 돌아가고,

그 뒤를 이어 사군 김한생(金漢生)이 와서 정사가 화(和)하고 백성이 기뻐했다. 노는 사람을 부리며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고 재목을 모아들이고 기와를 구워서 대청(大廳) 3칸을 짓고, 앞뒤로 툇마루를 달았으며, 동서로

협실(夾室) 3칸이 있고 그 앞 남쪽에 또 대청과 협실 몇 칸이 있는데, 낭무(廊?)와 문상(門廂)이 각기 차서가

있었다.

너무 빨리도 하지 말고 너무 수고롭게도 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두어 달이 못 되어 공사가 끝이 났다.

을유년에 김 사군은 온양(溫陽)으로 옮겨가고, 사군 이신효(李愼孝)가 또 다시 손을 보았다.

무자년에 지금 사군 백사수(白思粹)가 군수로 왔고, 이듬해 기축년에 도호부로 승격되어 수진(首鎭)으로 만들

었으니, 지역이 넓고 사무가 복잡한데 백군은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드러내어, 온 지경이 크게 다스려지고 저축

이 가득 차 수년 동안에 동서로 곡식 창고 24칸과 관청의 동서 창고 몇 칸을 짓고 마구(馬廐)도 붙여 지었으며

담을 둘러쌓으니, 관해(官?)가 크게 갖추어져 우뚝하게 한 고을의 장관을 이루었다.

아, 한 고을의 흥폐도 스스로 운수가 있나 보다. 장단ㆍ임진ㆍ임강 세 고을이 송도(松都)와 한양(漢陽) 두 서울

틈에 끼어 있어서 한 번 합쳐졌다 한 번 나뉘고, 혹은 동으로 혹은 서로 붙여서 그 고을이 일정하지 못한 것이

무려 5, 6차나 되었다가 오늘에 와서 정해져 합쳐져 하나가 되고, 또 여러분 같은 어진 군수를 만나서 고을이 더

욱 웅장하고 백성이 더욱 번성하게 되었으니, 어찌 시기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향중(鄕中)의 부로

(父老)들이 백 부사(白府使)의 덕을 말하여 그치지 않아서 나더러 기문(記文)을 지으라고 하는데,

나도 또한 변변치 못한 집과 조상의 산소가 마을 서쪽에 있어서, 조상이 심은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공경하는 마

음으로 직접 백 부사의 훌륭한 업적을 보았으니, 기문 짓는 것이야 어찌 사양하랴."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부의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도원역(桃源驛) :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본도(本道)의 속역(屬驛)이 다섯이 있는데, 구화(仇和)ㆍ

백령(白嶺)ㆍ옥계(玉溪)ㆍ단조(丹棗)ㆍ상수(湘水)이다. ○ 역승(驛丞) 1명이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옛 역 횡당(橫塘) 위에 숲과 물이 호정(戶庭)을 둘렀네. 꾀꼬리 우는 가지엔 꽃이 총

총하고, 제비 깃들인 지붕 옆엔 버드나무 우뚝우뚝하네. 들빛은 문을 스쳐 푸르고, 산빛은 난간에 떨어져 푸르

구나. 머리 돌려 대궐을 바라보니, 눈물 콧물이 문득 번갈아 떨어지네." 하였다.

 

○ 고려 안축(安軸)의 시에, "작은 정자 큰길 옆에 있으니, 멀리 바라보니 여기가 도원일세. 바람 눈은 깊은 골목

에 가득하고, 풀은 무너진 담을 묻었네. 누가 이 산중에 있는 역을 가지고 경솔히 옛 신선 마을에 비교했던가.

백세 동안 흥망 속에 살던 백성이 반도 남지 않았네."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역 이름 도원이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구나. 부서진 집 거친 숲이 문(門)조차 기억하기

어렵네. 지나는 손은 풍악(楓岳 금강산(金剛山))에 치성을 드리러 가는 길이니, 복을 나누어 백성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배중부(裵仲孚)의 시에, "맑은 물은 비단을 깔았고 돌은 병풍 친 것 같은데, 흰 새가 쌍으로

날아 갠 빛이 밝구나. 일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술을 많이 싣고 오려나, 봄바람 철쭉꽃이 강성(江城)에 비치네."

하였다.

 

○ 최유(崔裕)의 시에, "진(秦) 나라 피해 온 서넛 집이 곧 도원역을 이루었네. 스스로 말하기를,

역에서 맞고 보내는 수고로움이 장성(長城)의 역사보다는 낫다 하네." 하였다.

 

동파역(東坡驛)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 왕창(王敞)의 시에, "돌아갈 마음은 북극(北極)에 달렸는데, 역마 타고 동파역에 들렀네. 대나무 사이에 복사

꽃은 적은데, 공중에 자욱하게 버들개지 많구나. 세 순배(巡杯)에 주성(酒聖)이 맞았고, 백 번 싸워 시마(詩魔)

를 평정했네. 내일 개성(開城) 길에, 솔 그늘 한 필의 말 타고 가겠구나." 하였다.

 

신증 동월(董越)의 시에, "현도(玄?) 지방이 민아(岷峨)에 멀리 떨어져, 대소(大蘇)가 이 당에 온 일이 없었네.

높은 문에 큰 현판이 우연히 같아서, 초목과 산천이 문득 활기를 띠어, 언덕은 구불구불 푸른 솔은 그늘졌는

데, 이 이름 붙인 것이 어찌 지금부터랴. 양매(楊梅)는 본래 수가(修家)의 물건이 아니요, 공작(孔雀)은 원래

선성(宣聖 공부자(孔夫子))의 새가 아닐세. 산이 높아 구름을 자아내고 산 안개 축축하니,

올 때 벌써 동파(東坡)의 삿갓을 썼었네. 밤이 깊어 동파시를 외지 못하니, 지경이 고요해서 산 귀신 놀랄까

염려함일세.

멀고 먼 돌아가는 길 부상(扶桑)에 해뜨는 곳인데, 깊은 밤 배꽃 아래 문을 겹겹이 닫았네. 새로 짓는 시에 길에

서 만난 것을 기록할 뿐이다. 어찌 왕안석(王安石)이 공연히 돈(墩)을 뺏으려는 것 같을쏘냐." 하였다.

 

○ 당고(唐?)의 시에," 중국과 조선은 울타리 터놓고 지내는 터인데, 우연히 조명(詔命)을 받들고 기러기 자국

[?迹]을 붙었네. 개성(開城)선 밤중에 가는 눈발 날리더니, 아침에 길 떠나니 깨끗이 개었네. 동으로 오자 객관

(客館)에 산 그림자 걸렸는데, '동파'라 붙인 이름 지금까지 전하네. 어찌 산문(山門)에 옥대(玉帶)를 남겼으랴.

또한 적벽(赤壁)에 선금(仙禽)이 온 것도 아닐세. 규봉(圭峯)에 왔을 때 비가 축축히 내리니, 말 위에서 남에게

우장 삿갓 빌려 썼네. 저물게 관(館)에 드니, 감개한 생각 많구나. 한 곡조 긴 노래가 우는 듯하구나.

산 머리에 아침 해 떠오르니, 길에서 우는 말이 문을 나서라고 재촉하네. 머리 돌려 동파역을 거듭 돌아보니,

어찌 다른 산 흙더미와 같을쏘냐." 하였다.

 

구화역(仇和驛) : 부의 북동쪽 30리에 있다. 백령역(白嶺驛) :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 안축(安軸)의 시에, "돌아가는 길에 하늘빛은 쌀쌀한데, 얼어붙은 구름은 저녁 추위 더하누나.

역사(驛舍)를 보니 눈이 빤히 뜨이고, 몸이 피로하여 말 안장 풀었네. 고목나무는 연기 낀 언덕을 가렸고, 푸른

솔은 눈 쌓인 산에 우뚝 섰네. 창문에 기댄 채 곡령(鵠嶺 송악산(松岳山))을 바라보니, 푸르름이 구름 끝에 나와

있네." 하였다.

 

통제원(通濟院)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냉정원(冷井院)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오목원(五目院)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약사원(藥師院) :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연화원(蓮花院) : 부의 동쪽 33리에 있다.

석주원(石柱院) :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숙천원(淑川院) :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선구원(禪具院) :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천수원(天壽院) :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개성부(開城府)편에 자세히 나왔다.

 

불우 화장사(華藏寺) : 보봉산(寶鳳山)에 있는데, 처음 이름은 계조암(繼祖庵)이다. 지공(指空)이 처음에 터를

보고 크게 절을 지어 마침내 큰 총림(叢林)이 되었다. 불전(佛殿)과 승당(僧堂)의 제도가 매우 굉장하여 매년

여름이면 중들이 모여들어 참선하는 것이 양주(楊洲) 회암사(檜巖寺)와 어금버금하다.

이 절에 지공이 가져 온 서축 패엽경(西竺貝葉經)이 있어서 지금까지 전해진다.

 

○ 고려 충렬왕(忠烈王) 14년에 김이(金怡)의 나이 24세로 우연히 화장사에서 자다가 꿈을 꾸기를 임금이 정전

(正殿)에 거둥하니 여러 신하들이 옹위하고 상서로운 구름이 둘러싸였는데, 임금이 시를 한 구절을 외우기를

"푸른 구름 붉은 기운이 신선 사는 곳인줄 알겠다." 하니, 김이가 회답하기를, "초록 머리털 맑은 말씀은 바로 귀

인이로다." 하자, 임금이 기특하게 여겨 감탄하고 옷을 벗어 입혔다. 이로써 귀하게 될 징조임을 알았다.

 

극락사(極樂寺) : 오관산에 있다. 창화사(昌化寺) : 도라산(都羅山)에 있다.

영통사(靈通寺) : 오관산 아래에 있는데, 골 안이 깊숙하고 산이 첩첩이 둘러싸여 있으며 물이 이리저리 굽이쳐

흐르고 나무가 우거졌다. 그 서루(西樓)의 뛰어난 경치는 송도(松都)의 제일이다.

절에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승통의천탑명(僧統義天塔銘)이 있고, 또 고려 문종(文宗)의 화상과 홍자번(洪自藩)

의 화상이 있다.

 

○ 이규보의 시에, "산길은 구불구불 돌아 산기슭에 닿는데, 절을 물을 것 없이 중만 따라왔네.

산에 들어서자마자 맑은 시냇물 소리 들으니, 인간의 온갖 시비 쿵쿵 찧어 깨뜨려 주네." 하였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더위 피해 산중에 자니, 서늘하여 흥이 더욱 새롭구나.

솔 난간은 깨끗한 물 굽어보고, 이끼 낀 길엔 티끌 한 점 없네. 돌에 앉아 새 소리 듣고, 막대기에 의지하니 이 몸

이 부끄럽구나. 흰 구름 깊고 먼 골엔 아마 신선이 있을 테지." 하였다.

 

○ 변계량의 시에, "땅이 궁벽하니 띠끌 생각 없어지고, 다락이 높으니 더운 기운 적구나. 새는 풍경 소리 따라

내려오고, 중은 저녁 종 칠 때 돌아오네. 돌을 옮기니 구름은 소매에서 생기고, 소나무 쳐다보니 이슬이 옷에

떨어지네. 가을 서리에 산의 과실 익거든, 다시 와 사립문 두드림세." 하였다.

 

○ 석월창(釋月窓)의 시에, "바위에서 나온 샘 한 줄기 굽이쳐 숲을 뚫었는데, 늙은 나무가 난간에 당해 푸른

그늘 쌓였구나. 가을에 오니 골 안은 더욱 말쑥하고, 구름이 돌아오니 솔 고개[松嶺]는 더욱 깊숙하구나.

이끼 낀 비석에 훌륭한 사적 옛부터 전하는데, 흰 벽에 새로 쓴 시 지금부터 기록하네. 앉은 지 오래매 정신

다시 맑아 오니, 풍경 소리 달을 흔들고 밤은 침침하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오관산 아래의 옛 총림(叢林)에 바람은 다락에 가득한데, 푸른 나무 그늘졌네.

지경은 세상의 시끄러움 끊었으니 항상 한적하고, 시내는 비로 인해 더욱 맑고 깊구나. 서봉(西峯)의 서늘한 기

운 아침저녁 연달았고, 북령(北嶺)에 한가한 구름 예와 이제 겼었네. 아, 옛 일 물을 길이 없는데,

흙다리만 그대로 없어지지 않았구나." 하였다.

 

○ 이원(李原)의 시에, "한가롭게 절을 향해 도림(道林)을 찾으니, 시내를 따라 작은 길 솔 그늘 속으로 났네.

오관산은 바람 연기 옛 모습 끼고 있는데, 대각비(大覺碑)는 세월이 오래되었구나. 보자(寶字)들 마음에 생각함

은 경(經) 계율 교화인데, 늙은 중의 설법은 과거ㆍ미래ㆍ현재로구나.

만약 결사(結社)하여 여기 와 누웠으면, 벼슬길 부침(浮沈)이 아랑곳없겠네."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청량(淸?)한 취미 운림(雲林)에 있기에, 티끌 세상 더위 피해 나무 그늘 찾았네.

가랑비 그친 때엔 산이 다시 좋고, 폭포수 떨어지는 곳엔 물이 특히 깊구나. 매양 그윽한 흥이 나면 자주 여길

오는데, 새삼스레 기이한 경치 모두 오늘에 있는 줄 알았네. 옛 일을 조상(弔喪)하느라 머뭇거리며 시를 이루지

못했는데, 봉우리는 그림자 거두고 해는 막 지려 하네."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숲 뚫고 물 건너 깊은 산에 들어서니, 산 중턱 중의 집이 푸른 물굽이에 안겨 있네.

누른 잎 산에 널렸으니 멀고 가까운 곳 희미하고, 푸른 이끼 길에 가득하니 오르기가 힘드는구나. 적선(謫仙)

의 시흥(詩興)은 연하(煙霞) 밖에 있고, 사부(謝傅)의 높은 회포 물과 돌 사이로세. 밤늦게 서루(西樓)에 기대어

그대로 자지 않고, 창에 가득한 달빛 아래에서 물소리 듣고 있네." 하였다.

 

흥성사(興聖寺) : 영통사 북쪽에 있다.

 

○ 이색의 기(記)에, "경성(京城)의 간방(艮方 동북쪽), 천마산(天磨山)의 손방(巽方 동남쪽) 고암(鼓巖)의 태방

(兌方 동서쪽)에 봉우리 다섯 개가 있는데, 둥그렇게 모여 있어 멀리 바라보면 하나처럼 보이기 때문에 오관이

라 이름한 것은 그 모양을 취한 것이고, 또 기묘하고 뛰어난 경치 족히 삼한(三韓) 여러 산 중 으뜸이 될 만하기

때문이다. 정화 공주(貞和公主)의 아버지인 보육(寶育)이 실로 여기 살았는데,

우리 태조의 증조인 작제건(作帝建)의 외할아버지이다. 태조가 임금이 된 뒤에 그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이름을 숭복사(崇福寺)라 했는데, 그 현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뒤에 절은 난리에 불타 없어지고 미쳐 고쳐 짓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경효대왕(敬孝大王)은 조상을 추모

하는 뜻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조종(祖宗)이 세워 놓은 법도는 모두 다 닦아 밝히는데, 사원(寺院)에 이르러서도

옛 것을 완전히 하고 더 새롭게 하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이르기를, '정화 공주가 살던 곳을 후

비(后妃)들이 의당 정성껏 받들어야 한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노국 공주(魯國公主)가 스스로 공덕주(功德主 시주)가 되어서, 건물과 돈과 양식을 다 새롭게 하

고 다 넉넉하게 하며, 또 대장경(大藏經)의 화주(化主)가 되어 책궤와 표지(標識)가 질서 정연하고 찬란하였다.

얼마 안 되어 노국 공주가 돌아가시니, 또 공주의 아버지와 어머니 화상을 모시고 절기마다 제사지냈다.

현릉(玄陵 공민왕의 능호(陵號)) 말년에 가서는 더욱 성대해져 뚜렷이 대총림(大叢林)이 되었다.

지금의 주지(住持)인 대선사(大禪師) 내명(乃明)은 조계종(曹溪宗)의 장로(長老)인데, 시자(侍者) 불혜(佛惠)를

보내어 나에게 기문을 지어 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본사(本寺)는 노국 공주를 위하여 장경(藏經)을 독송한

지가 벌써 3년이라, 그 공덕의 뛰어남은 겁(劫)이 다하도록 입으로 말하기 어려우니, 현판을 만들어서 걸어 후

세 사람들에게 보이려 한다.

자네는 붓을 잡은 이로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중과 더불어 글을 짓는 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더구나 선왕의 은혜를 받은 것이 적지 않으니, 반드시 이에 대해 기문 짓기를 좋아할 것이므로 내가 직접 가지

않는 것이니, 예의는 박하면서 요구는 큰 것이다. 또한 선왕의 위령(威靈)을 의지하고 자네가 선왕을 추모하는

마음이 독실하여 반드시 사양하지 않을 줄 알기 때문이다.' 하니,

내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내명 스님은 나이 지금 67세인데, 이 절에 주지로 있은 지가 11년이 되었다고 하

니, 선왕의 알아주심이 또한 얕지 않다. 아침저녁으로 향을 피워, 선왕과 노국 공주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추모

하여 지나간 허물을 씻고 오는 복을 많이 받게 발원한 것,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 이것은 선왕을 저버리지

않는 마음이다. 아침저녁으로 모시고 있던 신하들로 하여금 모두 내명 스님처럼 선왕을 저버리지 않게 한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러기를 밤낮으로 바라기 때문에 기꺼이 기문(記文)을 짓겠다.' 하였다.

 

○ 이규보의 시에, "벗을 찾아 세 늙은이 어울려서, 위태로운 산마루의 나무 끝을 지나가네. 세찬 바람은 모자

스쳐 지나가고, 가랑 눈은 옷에 떨어져 녹는구나. 길이 머니 발이 얼어 터져도 참고, 사람은 멀리 있으니 몇 번

이나 머릴 들어 바라보았나. 흥이 오매 애오라지 대안도(戴安道)를 찾는 것이니, 반드시 불러서 맞이할 것은

없네." 하였다.

 

○ "눈은 하얗게 기와 틈에 쌓였는데, 찬 기운은 나무 끝에 맺혔구나. 도(道)는 이미 때를 가지고 늙었고, 근심

은 마땅히 술에 의지해 녹네. 천문(天門 대궐문)에는 수레 소리 요란하게 울리고, 궁궐에는 금교(金翹 벼슬아치

의 머리 장식)가 가득하네. 홀로 쓸쓸한 산을 향해 가니, 단지 원숭이와 학만이 맞아 주겠지." 하였다.

 

○ "푸른 기와 비늘처럼 어긋어긋 나무 끝에 나왔는데, 동굴 입구엔 인적이 고요하고 소나무만 섰구나.

숲에 가득한 흰 눈은 원숭이가 밟아 부수고, 벽에 반쯤 비친 붉은 해는 새 지저귀는 속에 넘어가네. 향불 탄 재

싸늘하게 쌓이니 산 집이 고요하고, 풍경 소리 흔들리다 끊어지니, 석창(石窓)이 차구나. 나의 미친 것은 점점

쉬어져 선(禪)에 집착할 만하니, 전일에 사냥하던 장군으로 보지 마소." 하였다.

 

○ "만사는 모두 한 웃음 끝에 비었는데, 오수(?? 당(唐) 나라 원결(元結)의 호)가 부질없이 벼슬한 걸 오히려

비웃네. 바위는 우물 난간에 이어져 구름이 항상 축축하고, 땅은 차[茶] 달이는 창문에 가까워 눈이 쉽게 녹네.

한가하게 걸린 철군(鐵君 쇠로 만든 주장자(?杖子)) 하안거를 지냈고, 미쳐서 목불(木佛)을 불태워 겨울 추위

막았네. 청산은 다른 날 다시 오면 구면이 되겠기에, 그윽한 시내 자세히 보기 싫지 않네." 하였다.

 

○ "향성(香城 절)을 단정히 지을 적에 이 땅에 거둥할 때 천 명의 관원이 옹호한 것 기억하겠네.

전자(篆字)에 이끼 끼어 비문(碑文)이 보이지 않고, 비[雨]는 단청을 물들여 벽화(壁?)가 쇠잔했네.

보육전(寶育殿)은 외로운 달 머금어 싸늘하고, 마가비(摩訶碑)는 끊어진 구름에 닿아 차갑구나. 산 중은 익숙히

보았는지라, 머리 돌리기 싫어하고 한가한 사람 멋대로 보게 맡겨두네." 하였다.

 

성등암(聖燈庵) : 권근(權近)의 기문에, "건문(建文) 원년 기묘년(1399) 겨울 11월 신미일에 도승지 문화(文和)

가 왕명으로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권근을 불러 전지(傳旨)하기를, '오관산 성등암은 전조 태조 왕씨(王

氏)가 처음 지은 것이다.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고쳐 지으려 하다가 지금 와서야 완성하고 토지와 노비를 주었으니, 너는 마땅

히 글을 지어서 영구히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신 권근은 엎드려 왕명을 받고 물러나와 삼가 성등암의 옛 문적

을 상고해 보니, 오관산 서봉(西峯)에 돌이 높이 서 있는데, 창날같이 뾰족하여 사람들이 극암(戟巖)이라 하였다.

그 위에 산등성이가 빙빙 돌아 서쪽으로 꺾여서 남쪽으로 송악산(松岳山)과 연접했다.

왕씨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처음으로 송악산 남쪽에 도읍을 세우니, 술사(術士)가 진언하기를, '극암이

갑자기 일어나서 지맥(地脈) 제2순룡(順龍)의 폐와 간의 위치에 당하여 하늘을 뚫을 듯이 일어섰으니, 이것은

삼재(三災)가 일어날 곳입니다. 만약 이것을 물리치려면 마땅히 돌 기둥을 세워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그 남쪽 벼랑의 큰 돌 위에다 돌기둥을 사방으로 늘어 세워 집과 같이 하고, 장명등(長明燈)을 설치하여

극암의 삼재를 진압하고, 또 밝은 임금이 대대로 계승하며 충신이 끊어지지 않기를 빌었다.

때문에 왕씨는 태부시(太府寺)로 하여금 장명등의 기름을 공급하게 하였다. 치화(致和) 무진년(1328)에 시중

(侍中) 윤석(尹碩)이 충숙왕(忠肅王)의 정승이 되고,

지순(至順) 경오년(1330)에 시중 한악(韓?)이 충혜왕(忠惠王)의 정승이 되어 모두 양부(兩府)의 제공(諸公)들과

함께 그 기름값을 보태주고 이름을 현판에 새겼으며, 홍무(洪武) 계해년(1383)에 시중 조민수(曺敏修) 등이 또

양부와 더불어 쌀과 포목을 내주어 그 용도를 계속하게 했다.

한산(韓山) 이색(李穡)이 기문을 지었으며, 첨서(簽書) 유순(柳珣) 등은 또 집을 지어 주었으니, 성등(聖燈)을

대대로 소중히 여긴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는 태자(太子)의 덕(德)과 지혜와 용기 있는 자

질로 충성하고 효도하며, 태상왕(太上王)을 도와 많은 어려운 일의 고비를 널리 건져 크게 천명(天命)을 받아서

조선의 억만 년의 기업을 열어 놓았다.

일찍이 잠저에 있을 때에 현(賢)과 장(長)으로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으며, 따라오는데 겸손한 덕을 더욱 높이

고 분수를 넘지 않았으며, 오직 국가에 유익한 일이면 도모하고 힘썼다.

그리하여 무인년 초봄에 비로소 이 성등암을 고쳐 짓기 시작하고, 가을 8월에 미쳐서 드디어 태상왕의 명령을

받들어 곧 보위(寶位)를 전해 받았으니, 밝은 임금과 어진 정승이 서로 만나 정치와 교화를 다시 새롭게 하여

모든 업적이 다 빛나고 사방에 근심이 없으니, 성인의 교화의 효과는 대개 속일 수 없는 것이 다시 지은 불전

(佛殿) 3칸에 새로 그린 석가 삼존(釋迦三尊)과 16나한 제자(羅漢弟子), 오백성중(五百聖衆)이 모두 모인 화상

을 걸어놓았으며,

동쪽 아래채 3칸은 중들이 거처하는 방이요, 서쪽 아래채 3칸은 밥짓는 부엌이다. 밭 1백 결(結)과 노비 16명

을 주어서 이로써 성등(聖燈)을 계속해서 밝히고 금륜(金輪)을 오래 보존하려는 것이다.

아, 왕씨가 처음으로 이 성등을 설치하여, 자손이 서로 전해서 5백 년을 지냈다. 지금 새로운 조정을 만나서 무

엇이든지 불사(佛事)를 빛낼 만한 일은 더욱 원만히 하고 구비했으니, 그 나라에 이익되게 함이 더욱 크고도 영

구할 것이니, 성수(聖壽)가 길어지고 나라 운수가 영구해짐은 마땅히 이 산(山), 이 등(燈)과 더불어 함께 드리

워져 끝이 없고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낙산사(洛山寺) : 용암산(湧巖山) 아래에 있다.

절벽이 높이 서서 삼면이 깎아놓은 듯한데, 절은 바위 사이에 있다. 오직 남쪽만 터져서 황홀하기가 마치 하늘

이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절 동쪽에 한 개의 독봉(獨峯)이 있는데 높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위에 너럭바위를 이

고 있으니, 정병대(正甁臺)라 한다. 절 남쪽에 또 한 봉우리가 있으니, 향로봉(香爐峯)이라 한다.

절에 관음 소상(觀音塑像)이 있는데, 사람들이 "의상(義湘)이 만든 것이다." 말하고, 몹시 영험하여 나라의 기도

처로 도성(都城)의 남녀들의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는다.

 

○ 성화(成火) 을유년(1465) 봄밤에 벼락치는 소리가 나서 절의 중들이 모두 벌벌 떨고 있다가 이튿날 보니 절

뒤에 있는 돌산이 저절로 터져 동문 밖으로 옮겨져서 높이 정병대와 향로봉과 더불어 솥의 발처럼 셋이 서 있

었다.

 

○ 정추(鄭樞)의 시에, "돌길엔 구름이 소매에서 생기고, 솔 고개엔 달이 품속에 들어오네.

공계(空界)의 넓은 것을 보려면, 모름지기 보병대(寶甁臺)에 올라야 하네." 하였다.

 

○ 채련(蔡璉)의 호필(扈?)의 시에, "맑은 가을에 수레 타고 성의 동쪽에 나오니, 금선(金仙 불(佛))께 예배하러

절에 이르렀네. 취화(翠華)의 그림자는 천산(千山) 안개에 스치고, 청필(淸?)의 소리는 만학(萬壑) 바람에 전

하네." 하였다.

 

안적사(安積寺) : 금신사(金神寺)의 남쪽 기슭에 있다.

 

○ 변계량의 시에, "홀로 안적사에 오르니, 오솔길은 구름 낀 멧부리를 끼고 도네. 묵은 나무 농(籠)은 구름 피어

오르는 듯, 고요하게 저녁 그늘 아래 연이었네. 돌 샘은 손의 꿈을 깨우고 솔 달(松月)은 중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네. 한탄스러운 것은 밝은 아침 떠난 뒤에 다시 세속의 일에 침노받는 것일세." 하였다.

 

증각사(證覺寺) : 화장사(華藏寺) 위에 있다.

○ 이색의 시에, "돌봉우리는 깎아지른 듯이 속세에서 나왔는데,

운연(雲煙)이 아득한 사이에 앉아서 어루만지네. 범패(梵唄) 소리 끝나고, 중은 선정(禪定)에 들었는데,

한 바퀴 밝은 달이 온 산에 비치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부의 동쪽 2리에 있다.

여단(?壇) : 부의 북쪽에 있다.

덕진사(德津祠) : 덕진(德津)에 있으니, 사전(巳典)에 서독(西瀆)으로 되었고, 중사(中祀)로 기록되었다.

봄 가을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했다.

오관산사(五冠山祠) : 사전에 소사(小祀)로 기록되었으니, 매년 봄 가을로 향과 축을 내려서 제사했다.

사(祠)는 영통사(靈通寺) 북쪽 언덕에 있다.

용호산사(龍虎山祠) : 용호산에 있는데, 봄 가을로 본읍(本邑)에서 제사지낸다.

 

능묘 고려 숙종릉(肅宗陵) : 송림현(松林縣) 불정원(佛頂原)에 있으니, 이름은 영릉(英陵)이다.

 

고려 명종릉(明宗陵) : 부의 남쪽 7리에 있으니, 이름은 지릉(智陵)이다.

신라 경순왕릉(敬順王陵) : 부의 남쪽 8리에 있다. 허홍(許珙) 묘 : 조현역(調絃驛) 뒤에 있다.

염제신(廉悌臣) 묘 : 임강현(臨江縣) 대곡원(大谷原)에 있다. 안유(安裕) 묘 :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한악(韓?) 묘 : 송림현(松林縣) 서곡리(瑞谷里)에 있다. 안종원(安宗源) 묘 : 임진현(臨津縣) 서곡리에 있다.

윤안숙(尹安淑) 묘 : 부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원(元) 나라 말년에 학사(學士) 주당(周?)이

난리를 피해 중이 되어 윤안숙의 집에 와서 묵었는데, 안숙이 비상한 사람인 줄 알고 매우 후하게 대우했더니,

주당이 윤안숙을 위하여 명당 자리를 잡아주며 말하기를, '이곳은 비룡(飛龍)이 9번 꿈틀거린 형국이니,

9대째에 반드시 발복(發福)할 것이다.' 하였다. 윤안숙이 죽자 마침내 드디어 이 땅에 장사지냈다." 한다.

 

한수(韓脩) 묘 : 임진현 서곡리 남쪽 있다. 윤승례(尹承禮) 묘 : 부의 동쪽 8리에 있다.

이정간(李貞幹) 묘 : 임강현(臨江縣) 남촌(南村) 우근동(于勤洞)에 있다.

권중화(權仲和) 묘 : 서촌리(西村里)에 있다.

변계량(卞季良) 묘 : 임강현 서구화리(西九和里)에 있다. 홍길민(洪吉旼) 묘ㆍ

홍여방(洪汝方) 묘 : 모두 부의 동쪽

판부리(板浮里)에 있다. 조석문(曹錫文) 묘 :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허종(許琮) 묘 :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신증 허침(許琛) 묘 : 부 동쪽 15리에 있다.

 

고적 마가갑(摩訶岬) : 영통사동(靈通寺洞)에 있다.

 

○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성골 장군(聖骨將軍)의 아들 강충(康忠)이 마가갑에 살았는데,

강충의 아들 보육(寶育)이 거사(居士)가 되어 그 곳에 암자(庵子)를 짓고 살았다. 신라의 술사(術士)가 보고 말

하기를, '여기 살면 반드시 당(唐) 나라 천자가 와서 사위가 될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두 딸을 낳아 작은딸의 이름을 진의(辰義)라 하였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재주와 지혜가 많았다.

나이 겨우 15세 때에 그 언니의 꿈에, 오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니 오줌이 흘러서 천하에 넘쳤다. 꿈

을 깨고 진의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진의가 말하기를, '비단 치마를 줄 테니 꿈을 팔라.' 하였다.

그 언니가 승낙하니, 진의는 다시 꿈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서, 팔을 벌려 품안에 담아 넣기를 세 차례나 하였다.

이윽고 몸이 움직여 마치 얻은 것이 있는 듯하여 자못 자부하는 마음이 생겼다.

당 나라 숙종(肅宗)이 잠저(潛邸) 때에 산천을 두루 유람하려고, 천보(天寶) 12년 계사년(753) 봄에 바다를 건너

송악군(松岳郡)에 이르러 마가갑 양자동(養子洞)에 당도하여 보육(寶育)의 집에서 유숙하는데, 두 딸을 보고 좋

아하여 옷 터진 데를 꿰매 달라고 하였다. 보육은 이 사람이 중국(中國)의 귀인임을 알고 마음으로 과연 술사의

말이 맞는다 생각하고 즉시 큰딸로 하여금 옷을 꿰매라 하였더니, 큰딸은 겨우 문지방을 넘자마자 코피가 나서

진의로 대신하였다. 드디어 잠자리에 시중을 들어 한 달쯤 있다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떠날 적에, '나는 당 나라의 귀족이다.' 하며, 활과 화살을 주며 말하기를, '아들을 낳거든 주라.' 하였다.

과연 아들을 낳자 이름을 작제건(作帝建)이라 하였다. 뒤에 보육을 국조원덕대왕(國祖元德大王)으로 추존하고,

그 딸 진의는 정화왕후(貞和王后)가 되었다. 또 개성부 형승조(開城府形勝條) 아래에도 보인다.

 

임진 폐현(臨津廢縣) : 부의 남쪽 25리에 있으니, 본래 고구려 진임성현(津臨城縣)으로, 오아홀(烏阿忽)이라고

도 한다.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개성군(開城郡) 속현(屬縣)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顯宗) 9년(1018)에 장단현(長湍縣)에 예속하여 상서 도성(尙書都省)의 소관으로 하였다.

문종(文宗) 17년(1063)에 직접 개성부에 예속시켰다. 공양왕(恭讓王) 원년(1389)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설치

하였다. 본조 태종(太宗) 13년(1413)에 규례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쳐 만들었다.

14년에 장단에 합하여 이름을 임단(臨湍)이라 하였다. 세종(世宗) 원년(1418)에 다시 갈라서 임진 현감으로

만들었다. 세조(世祖) 4년(1458)에 다시 예속시켰다.

 

임강 폐현(臨江廢縣) : 부의 북쪽 30리에 있으니, 본래 고구려 장항현(獐項縣)으로,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라

고도 한다.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우봉군(牛峯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 9년에 장단에 붙여서 상서 도성 소관으로 만들었다. 문종 17년에 직접 개성부에 예속시켰다.

공양왕 원년에 비로소 감무를 설치했다.

본조 태종 14년에 장단에 합쳐서 이름을 장임현(長臨縣)이라 했다가 두어 달 뒤에 다시 현감을 두었다.

세조 4년에 다시 장단에 예속시켰다.

 

송림 폐현(松林廢縣) : 부의 서쪽 5리에 있는데, 본래 고구려 약지두치현(若只頭恥縣)으로, 지섬(之蟾)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여웅(如態)이라고 고쳐서 송악군(松岳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9년에 장단에 예속시켜서 상서 도성 소관으로 만들었다.

문종 17년에 직접 개성부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감무를 설치했다. 본조 태종 18년에 임강에 붙였다.

 

고장단(古長湍) : 지금 치소(治所)의 동쪽 25리에 있다. 조현역(調絃驛) : 지금 보현원(普賢院)이 바로 조현역의

옛터이다. 본조 세종 때에 역을 없애고, 그 관원들은 동파(東坡)와 청교(靑郊) 두 역으로 나누었다.

 

불일사(佛日寺) : 고려 광종(光宗)이 송림현 북쪽에 불일사를 짓고, 현의 치소를 동북쪽으로 옮겼다.

보현원(普賢院) : 부의 남쪽 25리에 있으니, 국조(國朝)에서 조현역을 설치했다가 지금은 또 없앴다.

물이 도원역(桃源驛) 상류에서부터 내려와 보현원 북쪽에 이르러 천천히 흘러 웅덩이가 되었는데, 의종(毅宗)이

뚝을 쌓아 못을 만들어 놀이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 뒤에 무신 정중부(鄭仲夫) 등이 문신들을 모두 죽여 못에 집어넣어서 메워지니, 사람들이 조정침(朝廷沈)이라

불렀다.

 

○ 고려의 중 혜문(惠文)의 시에, "향불 연기 속에 불경 외우니, 고요한 가운데 흰빛이 나고 방 안이 침침하도다.

문 밖엔 길이 긴데, 사람들은 남쪽 북쪽이요, 바위 옆에 솔이 늙었는데, 달은 예와 이제로다. 빈 원(院) 새벽 바람

엔 방울 혀[鐸舌]가 수다스럽고, 작은 뜰 가을 이슬엔 연밥이 상하네.

내가 와 고승(高僧)의 자리에 올라앉으니, 하룻밤 맑은 이야기 값이 만금이로세." 하였다.

 

동림사(東林寺) : 용암산(湧巖山) 오룡봉(五龍峯) 아래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깊숙이 골 가운데 절을 찾으니, 숲을 격하여 이상한 향내 들리네. 길이 깊숙하니 이

끼 잎 깨끗하고, 못이 고요한데 국화는 향기롭구나. 학의 그림자는 눈[雪]이 천 길이요, 샘 소리는 거문고 한

틀일세. 재[嶺] 구름은 장구히 가만히 호위하여, 아침저녁으로 용당(龍堂)에 둘려 있네." 하였다.

 

천화사(天和寺) : 옛터는 성 동쪽에 있다. ○ 이규보의 시에, "한 막대 돈 같은 이끼를 뚫어 깨뜨리니, 시냇가 채

색 오리 졸다 놀라 일어나네. 차 달이는 삼매(三昧) 솜씨 힘입어서, 얼음 찻잔[氷?] 설액(雪液)이 나의 번민으

로 끓는 속을 씻어주네." 하였다.

 

선흥사(禪興寺) : 옛터가 동교(東郊)에 있다.

○ 변계량의 시에, "허름한 선흥사에 중은 없고 제비만 나네. 뜰엔 서 있는 방씨탑(方氏塔)이요, 풀엔 비낀 늑옹

(?翁 이제현(李齊賢)의 별호(別號))의 비(碑)로네. 경옥(瓊玉) 같은 글만 부질없이 남아있건만, 거문고 타고

바둑 두던 일은 이미 틀렸구나. 돌아가려다 그대로 잠깐 머무니, 벌써 나무 끝에 해가 기울었네." 하였다.

 

자제사(慈濟寺) : 정종(靖宗)이 임진의 과세원[課橋院]을 하사하고, 이름을 자제사라 했다.

그 전에 임진에 배가 없어서 행인이 다투어 건너다가 빠져 죽는 사람이 많으므로 관청에서 부량(浮梁)을 만드

니, 이때부터 사람과 말이 평지처럼 다녔다.

 

앙암사(仰巖寺) :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앞으로 푸른 물 굽어보고, 뒤로 푸른 바위 등졌는데, 쓸쓸한 갈대밭

에 소나무 전나무가 반반이구나. 사공(謝公)이 노는 흥은 쌍 나막신뿐이요, 장한(張翰)의 고향 생각 한 돛대에

가득하네. 다만 구산(?山)에서 흰 학을 탈 것이고, 반드시 분포(?浦)에서 푸른 적삼에 울 것 없네.

십주(十洲) 삼도(三島 삼신산(三神山)) 두루 구경하고 나니, 스스로 가뿐하여 신선되었나 의심되네." 하였다.

 

총지사(摠持寺) : 옛터가 개성부 탄현문(炭峴門) 밖 10리에 있다.

 

○ 고려 윤진(尹珍)의 시에, "황혼에 손이 절에 당도하니, 반짝반짝 별이 누각에 가깝네. 절벽에는 층계가 높고,

옛 절엔 집들이 깊숙하네. 밥 짓는 부엌엔 솔가지를 때고, 나무에 흠을 파 샘물을 끌어오네. 지경이 고요하매

사람 또한 고요하니, 구태여 동강주(桐江洲) 생각할 게 무어랴." 하였다.

 

○ 박형(朴形)의 시에, "시내를 따라 옛 길을 찾아 절에 이르러 높은 누각에 올랐네. 한 번 보매 외롭고 답답함을

풀고, 두루 구경하매 다시 와 놀고 싶네. 골이 깊으니 어둔 빛이 먼저 들고, 산이 물드니 가을을 일찍 아네.

손꼽아 세어 봐도 좋은 계책 없으니, 나는 마땅히 귤주(橘洲)를 찾아가리." 하였다.

 

인물 고려 한언공(韓彦恭) : 여러 벼슬을 거쳐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개국후(開國侯)

로 특진하여 식읍(食邑) 천 호(戶)를 받았다. 시호는 정신(貞信)인데, 목종 묘정(穆宗廟庭)에 배향했다.

 

한규(韓圭) : 향공(鄕貢)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호부 시랑(戶部侍郞)에 이르렀다.

한안인(韓安仁) : 한규의 아들로 처음 이름은 교여(?如)이다. 과거에 급제하고 예종조(睿宗朝)에 여러 벼슬을

거쳐 우부승선(右副承宣),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총명하고 사리에 밝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또 주역 점도 잘 쳐서 일시(一時)에 명류(名流)가 되었다.

 

이자겸(李資謙)과 사이가 좋지 못하여 살해당했다가 자겸이 패하자 시호를 문열(文烈)로 추증(追贈)했다.

 

한충(韓沖) : 과거에 올라 예종조에 우보궐(右補闕)에 제수되었다가 이자겸이 한안인을 죽일 때에, 한충이

한안인의 종제(從弟)라는 이유로 외방에 귀양보냈다가 이자겸이 패하자 불러서 예부 시랑(禮部侍郞)에 제수

하였다. 국자좨주(國子祭酒)를 역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말을 기탄 없이 하였다. 학문에 독실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정치는 청렴과 은혜를 숭상하여 가는 곳마다 명성과 업적이 있었다.

 

유우(流寓) 이색(李穡) : 고려 공양왕 때에 귀양 와 있었다.

 

제영 허백연천강군효(虛白連天江郡曉)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훤한 빛이 하늘에 연했으니, 강 고을에 새벽

이요, 그윽한 향내 땅에 뜨니 버들 들[柳郊]에 봄이로세." 하였다.

 

금세수가부주향(今歲誰家不酒香) : 이규보의 시에, "노적더미 높이 쌓으니 새떼 모여들고, 베다가 빠뜨린 이삭

우양(牛羊) 먹게 버려두었네. 길에서 촌 늙은이 만나 좋은 말 들었으니, 올해엔 뉘 집엔들 술 향내 아니 나랴."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高宗) 23년(1886)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연혁 헌종(憲宗) 6년(1840)에 현(縣)으로 내렸다 :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15년에 다시 부로 올렸다.

관원 도호부사(都護府使) : 장단진 병사첨절제사(長湍鎭兵馬僉節制使)ㆍ총융 후영장(摠戎後營將)ㆍ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다. 1명.

 

영아 총융 후영(摠戎後營) : 현종(顯宗) 6년(1665)에 우영(右營)을 두었는데 뒤에 후영으로 고친 것이다.

○ 후영장은 본부사(本府使)가 겸하였다.

○ 속읍(屬邑)은 장단(長湍)ㆍ삭녕(朔寧)ㆍ마전(麻田)ㆍ연천(漣川)이 있다.

 

토산 잉어[鯉魚]ㆍ즉어(?魚).

 

성지 덕진 고성(德津古城) : 남족으로 15리. 강변에 있는데 광해군 때에 수축한 고성이다.

포로 고루(匏蘆古壘) : 동쪽으로 32리, 포로탄(匏蘆灘)의 위쪽 적성(積城) 경계에 두 개의 누(壘)가 있는데,

강을 격하여 상대해 있으며 석벽으로 되어 있으며 공고하게 되어 있다. 삼국 시대에 표로하변(瓢瀘河邊)에

쌓은 것이다.

 

방면 진현내(津縣內) : 끝이 15리이다. 진동(津東)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진북(津北)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장현내(長縣內) :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장동(長東) :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장북(長北) :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장서(長西)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강동(江東) : 동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90리이다.

강남(江南) :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강서(江西) :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강북(江北) : 동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송남(松南) :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송서(松西) :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0리이다. 상도(上道)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하도(下道)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중서(中西)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동도(東道) :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서도(西道)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고남(古南) :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대위(大位) :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진도 임진도(臨津渡) : 동남쪽으로 20리에 있다.

낙하진(洛河津) : 덕진(德津) 하류에서 교하(交河)로 통하는 길이다.

고려 때에는 큰길로서 도승지(渡丞旨)를 두었었다.

고량진(高浪津) : 동쪽으로 30리에 있으며, 고려 때에는 장단도

(長湍渡)라 불렀고 두기진(頭耆津)이라고도 한다. 덕진 : 임진강 하류에 있다.

저포진(猪浦津) : 덕진 하류에 있다.

돌거진(突巨津).

 

봉수 도라산(都羅山) : 서쪽으로 15리에 있다.

 

사원 임강서원 : 숙종 경신년(1680)에 세웠으며 갑술년(1694)에 사액(賜額)하였다.

안유(安裕) : 경도(京都) 문묘편에 보인다.

 

이색(李穡) : 자는 현숙(顯叔), 호는 목은(牧隱)인데 한산(韓山) 사람이다.

벼슬은 시중(侍中)이었으며, 본조에서 한산백(韓山伯)에 봉하였다. 시호는 문(文獻), 혹은 문정(文靖)이다.

 

김안국(金安國) : 경도 묘정(廟庭)편에 보인다. 김정국(金正國) : 자는 국경(國卿), 호는 사재(思齋)이며,

김일국의 동생이다. 벼슬은 예조 참의인데 좌찬성을 추증하였고,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능묘 숭릉 : 숙종비 명의 왕후(明懿王后) 윤씨의 능이다.

 

 

강화도호부 江華都護府

 

바다 섬 가운데 있는데, 동으로 갑곶나루[甲串津]까지 10리, 남으로 해안(海岸)까지 40리,

서쪽으로 인화석진(寅火石津)까지 26리, 북으로 승천부진(昇天府津)까지 15리,

서울과의 거리는 1백 3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혈구군(穴口郡)인데 :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해구(海口)라 고치고, 원성왕(元聖王)이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였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현(縣)으로 만들었다.

현종 9년(1018)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고종이 몽고병을 피해 들어가 도읍하고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이름을

강도(江都)라 했다. 원종(元宗) 원년(1259)에 다시 송도(松都)로 돌아왔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인주(仁州)에

합병하였다가 곧 복구시켰다. 신우(辛禑) 3년(1377)에 부(府)로 승격시켰다가 본조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

로 고쳤다.

 

관원 부사ㆍ교수 : 각각 1명씩이다.

군명 혈구(穴口)ㆍ갑비고차(甲比古次)ㆍ해구(海口)ㆍ강도(江都) 심주(沁州)

 

성씨 본부 최(崔)ㆍ위(韋)ㆍ황(黃)ㆍ고(高)ㆍ전(田)ㆍ노(魯)ㆍ한(韓)ㆍ김(金)ㆍ이(李) : 모두 외방에서 왔다.

진강(鎭江) 노(魯)ㆍ소(蘇)ㆍ고(高)ㆍ정(井)ㆍ만(萬). 하음(河陰) 이(李)ㆍ전(田)ㆍ진(秦) : 딴본에는 봉(奉)으로

되어 있다. 길(吉)ㆍ역(力) : 딴 본에는 만(萬)으로 되어 있다. 정(鄭) : 속(續).

 

형승

안으로 마리(摩利)ㆍ혈구(穴口)를 점거하고, 밖으로 동진(童津)ㆍ백마(白馬)를 경계로 했다 : 고려 최자(崔滋)

삼도부(三都賦)에, "서도(西都)의 변생(辨生 말 잘하는 사람)이 북경(北京)의 담수(談? 이야기 잘 하는 노인)와

함께 강도(江都)에 놀러 와서 한 정의대부(正義大夫 빠르게 말하는 대부)를 만났다.

대부가 말하기를, '내가 두 나라의 이름은 들었으되 그 제도를 못 봤는데, 다행히 이제 두 분을 만났으니, 옛것을

그리워하는 정이 트이도록 나에게 두 서울 이야기를 들려 주오.' 하니 변생이 말하기를, '그리하리다.

서도(西都)가 처음 이룩될 제 동명(東明)이란 임금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이 땅을 돌보아 거주를 정하시니,

터를 닦지 않고 돌을 쌓지 않았는데도 화성(化城)이 치솟았네. 오룡차(五龍車)를 타고 하늘을 오르락내리락하

니 온갖 신(神)이 인도하시고 뭇 신선이 뒤쫓고, 웅연(熊淵 금소)에서 여인 만나 펄펄 날며 오락가락 하였네.

강 가운데 돌이 있으니 그 이름이 조천대(朝天臺)라 얼핏 보면 너럭바위, 문득 솟아 절벽인데 황제께서 때로 올

라 신(神)의 행차 배회하네.

신영(神靈)이 계신 곳 평양 신사(神祠 동명왕사(東明王祠))가 아닌가. 풍백(風伯)을 부르시고 우사(雨師)를 지휘

하시니, 노하시면 대낮에도 번개와 우박, 나무ㆍ돌이 섞여 날리네. 또 목멱신사(木覓神社 평양 목멱산에 있다)는

농사를 관장하니, 애써 갈지 않아도 풍년 들어 노적가리가 산더미 같으며, 공사(公私)로 두호하여 큰 이불로 덮

어 주네. 대개 이 같으니 어떠한가?' 하자, 대부가 말하기를, '신비하고 괴이하며 어리둥절하고 거짓된 말을 어

째서 과장되게 하는가?' 하니, 변생이 말하기를, "장려(壯麗)한 구경거리는 용언궐(龍堰闕)과 구제궁(九梯宮)이

니, 넓고 트이고 드높아서 우주를 여닫는 듯, 동서를 못 가릴지니, 하늘도 그 나는 듯한 자세를 빼앗지 못하며

귀신도 그 공력을 다투지 못하리라.

유람할 장소로는 다경루(多景樓)는 푸른 바다에 걸쳐 있고 청원루(淸遠樓)는 허공에 반공 중에 버티고 있으며,

부벽루(浮碧樓)는 장강(長江)에 임하였고, 영명사(永明寺)는 드높이 걸쳐 있네.

뭇 물줄기 모였으니 강 이름이 대동(大同)이라, 해맑고 넘실넘실, 번쩍여 출렁출렁, 호경(鎬京 중국의 지명)을

안고 풍수(?水 중국의 강 이름)를 모아온 듯, 깨끗하기는 흰 비단을 깐 듯, 해맑기는 청동(靑銅 거울) 같은데 양

편 언덕 수양버들은 온 종일 바람 쐬며 춤을 추며, 질펀한 모래 넓은 들에 기러기들이 날아 우네.

푸른 산이 성(城)을 둘러 사면이 드높은데, 굽어보면 가랑비에 도롱이를 쓴 어옹(漁翁)들, 멀리 들으면 석양녘에

피리를 부는 목동(牧童)들, 그림으로도 그릴 수 없고 노래로도 다할 수 없네.

어사와 닻줄을 풀고 화선(?船)을 띄워 중류(中流)에서 머리를 돌려 볼 양이면, 황홀하기가 비단, 병풍 속에 놓여

있는 듯하니, 우리 도성의 경치가 진실로 천하 제일 아닌가?" 하자, 대부가 말하기를, "기이한 구경거리와 뛰어

난 경치는 사람의 맘과 눈을 흐리는 것일세." 하니, 변생이 말하기를, "물에 가 고기를 잡으면 긴 그물을 한 번 들

자 별별 고기 다 많다. 미꾸라지ㆍ암치ㆍ방어ㆍ가물치ㆍ날치ㆍ모래 무치ㆍ메기ㆍ오징어ㆍ장어ㆍ전어ㆍ상어

따위는 워낙 흔한 식품일세.

한창 추운 겨울날에 온 강이 얼었는데, 금린옥척(金鱗玉尺)이 그 아래 퍼덕퍼덕. 쇠 작살로 찔러 대니 백발백중

찍히는데, 소반에 하룻밤 담아두니 깨끗이 얼었거늘 요리꾼이 칼을 울리며 저며내니, 가는 살결 썩썩 싹싹, 빛도

절색(絶色), 맛도 절미(絶味), 대번에 이가 시리고 목이 써늘하네." : □□□ 담수가 말하기를 "천년이 부절을 합쳐

놓은 듯하네. 앞서 최고운(崔孤雲)이란 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기운이 산 남쪽에 서려 있으니,

곡령(鵠嶺)엔 솔이 푸르고, 계림(鷄林)엔 잎이 누르다.」하여 자줏빛 구름이 일기 전에 흥망을 미리 예언했네.

철원(鐵原)의 보배거울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 「닭이 먼저고, 오리가 뒤」라는 말이 분명하더니,

삼한(三韓)을 통합하자 명당 터를 선택함에, 북악(北岳)은 소 누운 듯하고 남산은 용이 나는 듯, 우로 품고 좌로

안아 안산(案山)ㆍ화형(花形)이 꼭 맞았다. 여덟 머리와 세 꼬리, 동녘 고개와 서편 언덕이 민 듯이 구불구불,

각(角 별 이름)은 팔로 들고, 상(商 별 이름)은 주먹으로 쥐어 정기(精氣)가 모여서 기운을 토하며 상서(祥瑞)를

낳았네.

다섯 내[川]의 신령스러운 줄기는 그 근원이 깊고 멀어 수많은 골[洞] 물이 모여 흐르고 넘쳐 쏜살같이 내닫고

바퀴처럼 달려 중앙에 모여드니, 영(靈)이 적시고 덕(德)이 주입되어 온갖 것이 기름져서 창성하네.

푸른 솔[松都]이 무성하기가 삼백여 년의 해이니, 중간에 쇠했다가 다시 성하여, '뽕나무 줄기에 맨 양 견고해

졌네.

예로부터 우리나라같이 도참(讖)에 응하여 나라를 세운 이가 몇몇 제왕이 있던가'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성조

(聖祖)가 임금이 됨은 천명(天命)에 응하고 인심(人心)에 순함이지, "풍수(風水)나 도참의 황당한 것 때문이 아

니다.' 하자 담수가 말하기를, 중원(中原 충주(忠州))ㆍ대령(大寧)은 철의 산지(産地)로, 강철ㆍ납ㆍ부드럽고

강한 철, 부드러운 철이 돌을 뚫지 않아도 산의 골수(骨髓)로 흘러나오니, 뿌리를 찍고 파서 무진장 끝이 없네.

홍로(洪爐)에 녹여 부으니 쇠가 녹아 화염에 달군 양문(陽紋)과 물에 담근 음문(陰紋)을 늙은 대장장이 망치 잡

아 백번 천번 단련하니, 큰 살촉이 되고 작은 살촉이 되며, 창도 되고 갑옷도 되며 칼도 되고 긴 창도 되며 화로

도 되고 작은 창도 되며 호미가 되고 괭이도 되며 솥도 되고 물통도 되니, 그릇으론 집안에서 쓰고 병기론 전쟁

에서 쓰네.

계림(鷄林 경주(慶州))ㆍ영가(永嘉 안동(安東))엔 뽕나무가 우거졌으니, 봄날 누에 칠 때 한 집에 만 반(箔)이요,

여름이라 실 뽑으면 한 손에 백 타래씩 뽑을 제 엉킨 실을 다듬어 짜내니, 철꺽철꺽 저 북[梭] 소리 우레인가 벼

락인가. 비단ㆍ깁[?]ㆍ능라(綾羅)ㆍ삼베ㆍ겹올ㆍ이올ㆍ가는 비단이 불면 날 듯 연기인가 안개인가, 희고 흰 빛

눈인가 서리인가. 파랑ㆍ노랑ㆍ주홍ㆍ녹색으로 물들여 무늬 있는 금수(錦繡)로 만들어서 귀인(貴人)들이 입고

사녀(士女)들이 입고 끌 제 바스락 바스락 떨치면 번쩍하네. 이는 진실로 하늘이 주신 고장, 나라의 보물이 가득

찼네.'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한 자 구슬도 보배가 아니라고 했거늘 하물며 쇠와 비단이랴.' 하자, 담수가 말하

기를, '시인(詩人)ㆍ묵객(墨客)들 어깨를 나란히하여 많고 많다. 붉은 정(情)에 푸른 뜻[意], 수놓은 입에 비단

마음, 얼음과 눈[雪]을 짓씹는 듯, 금과 옥을 새긴 듯, 붓 한 번 달릴 양이면 우레와 번개가 더 날랠 수 없고,

시(詩)가 워낙 뜻[態]이 많으매 맑은 강과 절벽도 그 높고 깊음을 비유하지 못하네. 케케묵은 말을 옛 것이라 그

대로 쓰지 않고 생신(生新)한 말을 이제 따로 창조하네.

무사와 맹사(猛士)들은 뒷자락 짧은 옷에 만호(?胡) 갓끈 잡아매고 사검(蛇劍) 차고 용도(龍刀) 쥐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눈 부릅뜨고 포효하다가 곰처럼 잡고 범처럼 할퀴며, 매처럼 나꿔채고 원숭이처럼 뛰며 눈 부릅뜨고

힐난하고 팔을 뽑으며 내닫는다. 말 타고 활 쏘매 연달아 맞추고, 지팡이 한 번 손에 놀리면 나는 공이 백 번 도

네. 이것이 이른바 나라의 보배가 아닌가.'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아니로다. 조충(調蟲)의 작은 재주와 폭력을

함부로 쓰는 것을 군자(君子)가 취하지 않나니, 하물며 공을 희롱하는 재주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자,

담수가 말하기를, "관직(官職)을 설치해 나누니 내관(內官)이 천이요 외직(外職)이 만이라.

나쁜 사람을 떼버리고 좋은 사람을 등용하여 천거에는 공평무사하며 해마다 춘관(春官)에 명하여 어진이를 뽑

아 등용하니 청의(靑衣)ㆍ자의(紫衣)가 조정에 가득하여 띠를 드리우고 홀(笏)을 꽂았다.

나가서는 염찰사(廉察使) 되고 혹은 고을의 수령이 되되 모두 청백(淸白)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으니 샘물과 등

불 같은 이(利)를 보지 않거든 하물며 뇌물 꾸러미를 받겠는가. 띠 풀어 등의 심지 삼고 돈 주고 샘물 마시니 문

에는 참새 그물이 고요하고 밥상에는 생선 없이 냉담하니, 사람들이 그 이름에 탄복하고 스스로 티끌 없다고 한

다. 백성에게 위엄을 부리려면 반드시 가혹해야 한다고 하여 털끝만한 일도 사찰(査察)하고 어두운 구석까지 빠

짐없이 비추며 불고 닦아 흠집을 찾으니 허물을 가릴 수 없네. 이에 포승으로 묶고 오라를 지워 때릴 때에는 곤

장을 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고, 목을 맬 때에는 밧줄을 겹으로 쓰고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겼네.

아전은 온 몸이 성한 데 없고 백성은 간담이 서늘하여, 쉬쉬 찌르렁 와들와들 부들부들. 별안간에 시비가 가려지

고 한 번 꾸짖으면 교활한 자들도 떠네.

해마다 세(稅)를 늘려도 중세(重稅)가 아니고, 달마다 선물을 바쳐도 아첨이 아니며, 급하게 독촉하여 집집이 거

둬다가 수로(水路)ㆍ육로(陸路)로 성화같이 운송해 와서 국고(國庫)를 채우니 공사(公事)에 부지런하고 나라를

이롭게 한 공을 말로 다 못한다.'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거짓 청렴으로 가혹하게 하는 것은 백성을 좀먹는 일이

니, 그 해독이 심하다.' 하자, 담수가 말하기를, "공경(公卿)들의 저택이 10리에 뻗쳐 있는데,

엄청난 큰 누각(樓閣)은 봉황이 춤추는 듯하고, 서늘한 마루 따스한 방이 즐비하게 갖춰 있어 금벽(金碧)이 휘황

하고 단청(丹靑)이 늘어섰네. 비단으로 기둥 싸고 채전(彩氈)으로 땅을 깔며 온갖 진기한 나무와 기이한 화초들,

봄의 꽃과 여름 열매, 푸른 숲에 붉은 송이 그윽한 향내, 서늘한 그늘이 한껏 곱고 아양을 떠네. 뒷방의 미인들은

구름 옷에 안개 치마, 갖은 자태와 더할 수 없는 요염함으로 열지어 둘러 있구나. 화문석 비단 요에 생가(笙歌)가

요란한데, 천 잔에 담긴 술은 구하주(九霞酒 신선이 마시는 술)가 아니던가. 《주역(周易)》의 수괘(需卦) 같고,

《시경(詩經)》의 기취(旣醉) 같도다. 낙타의 등허리와 곰의 발에 용의 간(肝)과 봉의 골수가 무더기로 쌓여도

입에 물려 내뱉네. 사대부와 평민, 절의 중도 화려한 집과 수육(水陸)의 진미(珍味)를 죄다 먹고, 귀와 눈의 온갖

오락과 사치한 옷을 자랑하며, 종과 천예(賤隸)조차 다투어 참람하여 높은 갓에 복두(?頭) 쓰고 각대(角帶)와 아

로새긴 신, 가벼운 옷 촘촘한 감을 다투어 서로 빛내고 자랑하니, 비록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의 성대한 화려함

으로도 우리와 감히 풍속을 나란히 서지 못하리다.'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아, 우리 옛 서울[松都]의 유리(流離)

된 것이 대개 그것 때문이 아닌가." 하였다. 이에 서도와 북경의 두 손님이 수염을 흩날리며 불쾌해하면서 한편으

로는 노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워하면서 말하기를, '저희들이 종일 말하되 대부께서 모두 꺾으니,

그러면 강도(江都)에 대한 말을 듣고 싶습니다."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두 분이 어찌 또한 일찍이 강도의 일을

들었겠는가. 한 끝을 대강 들어 토론하여 보리다. 동해 바다의 크기는 아홉 강과 여덟 하수(河水)를 겨자씨처럼

삼켜 구름과 해를 불락 삼키락 출렁 왈랑거리는데,

그 가운데 화산(花山 강화(江華)의 산 이름)이 있어 금오(金鼇)가 우뚝 치받쳤다.

물가와 언덕이 잎처럼 가지처럼 붙었는데, 그 가지와 잎에 붙어 올망졸망한 것들은 강상(江商) 해고(海賈)ㆍ어

옹(漁翁)ㆍ소금구이의 집들이요, 꽃송이 같은 신악(神岳)과 꽃받침 같은 영악(靈岳) 그 꽃송이와 꽃받침을 걸쳐

날아가는 듯 솟아 있는 것은 황실ㆍ궁궐과 공경(公卿)ㆍ사서(士庶)들의 저택일세. 안으로는 마니(摩尼)ㆍ혈구

(穴口 지금의 혈굴산(穴窟山))의 첩첩한 산이 웅거하고, 밖으로는 동진(童津 지금의 통진산(通津山))ㆍ백마(白

馬 산이름)의 사면 요새(要塞)에 출입을 단속함에는 동편의 갑화관(岬華關 갑곶나루 甲串津), 외빈(外賓)을 맞

고 보냄엔 북쪽의 풍포관(楓浦館)이니, 두 화(華 화산(花山)의 봉우리)가 문턱이 되고 두 효(?)가 지도리[樞]가

되니, 참으로 천하에 중심이네. 이에 안으로 자줏빛 성을 둘러쌓고 밖에는 분첩(粉堞)으로 싸니, 물은 도와 둘렀

고 산은 다투어 드높아서 굽어보면 오싹하게 연못이 깊고 우러르면 아찔한 절벽이라.

오리나 기러기도 다 날아들지 못하고 늑대와 범이 엿보지 못하는지라, 한 사람이 금지시키니 만 집이 편안히 잠

을 자네. 이는 금성탕지(金城湯池)로 만세토록 제왕의 도읍이로다.' 하자 두 손이 말하기를, '나라를 견고하게

하는 것은 산하(山河)로써가 아니니, 덕(德)에 있고 험난함에 있지 즉 않도다.'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성시(城

市)가 포구이니 문 밖이 바로 배라, 꼴 베러 가거나 나무해 돌아가도 조그만 배에 둥실 실어 육지보다 빠르니,

땔감 부족 없고 마소 먹이 넉넉하여 사람은 한가하고 씀씀이 넉넉하며 힘은 적게 들고 공은 뛰어나네.

장삿배와 조공(朝貢) 배가 만 리에 돛을 이어 묵직한 배 북쪽으로 가벼운 돛대 남쪽으로 돛대머리 서로 잇고 고

물[船尾]이 맞물어서 한 바람 따라 순식간에 팔방 사람 모여드니, 산해(山海)의 진미를 실어오지 않는 물건 없

네. 옥(玉) 같은 쌀을 찧어 만 섬을 쌓아 우뚝하고 주옥(珠玉)이며 모피(毛皮)를 싸고 꾸린 것을 사방에서 모아

가득하다. 뭇 배 와서 닻을 내리자 거리 가득 골목 붐벼 매매가 자못 손쉬우니 말짐 소짐 무엇하리.

손에 들고 어깨에 매고 몇 걸음 안 가서 관가(官家)에 쌓여지고 민가에 흘러 넘쳐서, 산보다 높직하고 샘물처럼

콸콸하니, 온갖 곡식이 묵어서 썩을 지경이네. 한대(漢代)의 풍족함과 어떠한가?' 하자, 두 손이 말하기를,

'지극한 부는 축적하는 것이 아니니 거교(鉅橋)를 거울 삼으라.'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불법(佛法)이 해동(海

東)에 온 지 오래되었으나 오늘에 이르러 더욱 신앙이 두터워져 상(像)을 만들어 귀의함엔 쇠를 녹이고 흙을 빚

고 돌을 쪼고 나무를 새기며, 혹은 실로써 수불(繡佛)을 만들어 그림으로 얼굴을 그려 단정하고 장엄하여 표정

이 엄연하네. 법보(法寶)를 드날림에는 경(經)ㆍ율(律)ㆍ논(論)의 장(章)들과 선가서(禪家書)ㆍ조사결(祖師訣)

의 판(板)에 찍고 필사(筆寫)함에는 이금(泥金)이나 피로 써서 누런 권(卷)과 붉은 축(軸)에 주옥 함(函)과 비단

싸개 천 권인가 만 권인가 더미더미 쌓여 있네. 선방(禪房)과 교찰(敎刹)이며 공사(公寺)와 사당(私堂)이 있어,

사(社)니 암(庵)이니 재(齋)니 방(房)이니 우뚝 솟아 몇 천만 방(坊)인지 알지 못하니, 향내가 만 리에 이어져 나

고 종소리가 사방에서 서로 들리네. 이에 긴 눈썹 오디빛 가사(袈裟), 푸른 눈동자 국화\빛 장삼들이 남북 총림

(叢林)에 대나무와 갈대처럼 줄을 지어 용과 코끼리가 맞서서 발로 차고 금털 사자가 다투어 으르렁거리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천 개 등불이 이어지고 입마다 뭇 바다의 물결이 용솟음치되, 아침에는 성수(聖壽)를 비는

향화(香火)를 태우고, 저녁에는 재앙을 소멸시키는 심지에 불을 붙이네. 그것도 오히려 부족해서 특별히 도성

안에 정사(精舍)를 짓고 세상 밖에서 도승(道僧)을 맞아 들이니, 푸른 산 흰 구름에서 몸을 떨치고 나와 도성의

시끄럽고 번화한 속에서 법을 설하네. 주장자를 치자 바람과 우레가 일고 몽둥이로 치며 큰 소리로 꾸짖자

우박이 흩어져서 죽고 살리기를 자유롭게 하며 머리와 머리 끊어지네. 몇 해 전 국난(國難) 때문에 군신이 지원

(至願)을 말하여 여러 종(宗)을 모아다가 하루 건너서 불사(佛事)를 하니 염불하고 창신(唱神)하는 소리가 간절

하여 산악이다 진동하고, 머리와 손가락 태우는 연기가 흩어져 해와 달이 빛을 잃네. 정성스럽고 부지런한 고행

이 이다지도 지극하니 그 보응(報應)과 섭호(攝護)가 끝없을 것이다.' 하자, 두 손이 말하기를 '고금에 부처를

신봉함이 양(梁) 나라가 으뜸이었는데 어찌 속히 망했는가?'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지금 주상께서 몸소 검박

하시고 아랫사람에게 후하시다.' 하자 두 손이 바로 깜짝 놀라 얼굴빛을 고치고 자리를 피해 꿇어앉아 말하기를,

'대부는 더 말씀 마오. 이 한 마디 말로 족히 태평성대의 지극한 정치를 아름다움을 알겠소.

무릇 정사의 밝고 공평함은 모두 검박한 데서 비롯하니, 검박하면 풍속이 후해지므로 어찌 하늘이 돕지 않으며,

어찌 국운(國運)이 길지 않으리오. 아까 저희들이 횡설수설 지껄여 스스로 나라의 누(累)만 드러냈을 뿐이오.'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두 분은 들으시오. 나는 옛일을 표준으로 삼네. 옛날에 주실(周室)은 충후(忠厚)하여 8

백 년을 누렸고, 한 무제(漢武帝)는 무명옷에 가죽신을 신었으며, 그 신하들은 돈후(敦厚)한 장자(長者)들이 많

아서 국조(國祚)가 끝이 없었고, 당 문황(唐文皇 태종)은 검박을 숭상하여 대궐 하나 지으려다가 진(秦) 나라를

거울 삼아 중지했고, 그때 방현령(房玄令)이 정치가 편안하다고 방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통(國統)을 3백여

년 동안 드리웠네.

거룩한 본조(本朝)는 옛날에 없던 풍화(風化)로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하늘의 도(道)를 즐겨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겨 이에 보전되니, 만물이 탈나지 않고 백성이 태평하네. 감탄해도 부족하여 그 뜻을 거듭하여 노

래를 지으리. 「멀리 요순(堯舜) 때부터 아래로 당송(唐宋)에 이르기까지, 문(文)과 질(質)의 연혁은 달랐으나,

모두 사치로 망하고 검박으로 흥했네. 서쪽 유경(柳京)은 음란함으로 뒤엎어지고, 북녘 송도(松都)는 사치해서

유이(流移)했네. 서도를 유경(柳京)이라 부른다. 빛나는 강도는 덕의 터전, 천명(天命)을 따라 큰 나라를 섬겨

풍속이 순후하네, 아아, 만 년에 태평한 가운데 위태로움을 잊지 않으리.」' 하였다.

 

사면이 바다로 둘려 있고, 토지가 기름지다 : 정이오(鄭以吾)의 아기(衙記).

산천 고려산(高麗山) : 부의 서쪽 15리에 있으니, 진산(鎭山)이다. 마니산(摩尼山)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 고려 고종 46년(1259)에 교서랑(校書郞) 경유(景瑜)의 말을 좇아서 이 산 남쪽에 이궁(離宮)을 지었다.

 

전등산(傳燈山) : 부의 남쪽 32리에 있다. 혈굴산(穴窟山) : 부의 서쪽 10리에 있다.

진강산(鎭江山) : 진강현(鎭江縣)에 있다. 길상산(吉祥山) : 부의 남쪽 30리에 있으니, 주위가 13리요, 목

장(牧場)이 있다.

 

망산(網山) : 부의 서쪽 2리에 있다. 송악산(松岳山) : 부의 북쪽 1리에 있다.

화산(花山) :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봉두산(鳳頭山) : 바로 하음성산(河陰城山)인데, 부의 북쪽 16리에 있다.

별립산(別立山) :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대모성산(大母城山)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바다 : 부의 남쪽에 있다.

갑곶나루〔甲串津〕: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인화석진(寅火石津) : 부의 서쪽 32리에 있으니, 교동(喬桐)으로

다니는 길목이다. 예전에 정자가 있었다.

 

○ 남익문(南益文)의 시에, "예전에 경치 좋기로는 악양루(岳陽樓)를 들었더니, 지금 이 정자에 이르니,

팔경(八景)이 더욱 좋구나. 인석나루에 조수는 옥으로 만든 구기[玉斗]를 깨뜨린 듯, 각산(角山)에 석수(汐水)

를 당해 오두(鰲頭)에서 춤추네. 은관(銀關)에 험한 것을 설치하니, 천연적인 참호(塹壕)가 되었고, 정포(井浦)

로 못을 삼으니 땅 귀퉁이를 막았네. 더위에 시달려 발걸음 멈추니, 구경거리 많구나. 어느 날 다시 와서 맑은 놀

이 해 볼거나." 하였다.

 

가릉포(嘉陵浦) : 부의 서쪽 32리에 있는데, 근원이 마니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큰 제방이

있는데, 길이가 20척이다. 하포(蝦浦) : 부의 북쪽 12리에 있는데, 근원이 고려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바다

로 들어간다.

 

대청포(大靑浦) : 부의 남쪽 13리에 있는데, 근원이 혈굴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염점포(鹽岾浦) : 부의 서쪽 22리에 있는데, 근원이 고려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조산포(造山浦) : 부의 남쪽 5리에 있는데, 근원이 고려산에서 나와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말오을포(末吾乙浦) : 부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그 근원이 둘이 있어 하나는 고려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혈굴산에서 나와 합쳐져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승천포(昇天浦) : 부의 북쪽 19리에 있다. 매도(煤島) : 부의 서쪽에 있는데, 예전 구음도(仇音島)로

주의가 60리요, 섬에 광박석(廣博石)이 있어 국용(國用)으로 삼는다. 목장이 있다.

 

저천(猪川) : 부의 남쪽 5리에 있는데, 근원이

혈굴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조산포로 들어간다.

두모천(豆毛川) : 부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근원이 고려산에서 나와 말을포로 들어간다.

동락천(東洛川) : 부의 남쪽 1리에 있는데 근원이 고려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조산포로 들어간다.

고려천(高麗川) : 부의 서쪽 15리에 있는데, 근원이 고려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염점포로 들어간다.

마당천(馬場川) : 부의 남쪽 13리에 있는데, 그 근원은 둘이 있어 하나는 혈굴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진강산에서 나와 합류하여 대춘포(大春浦)로 들어간다.

 

오리천(吾里川) : 부의 서쪽 10리에 있는데, 근원이 고려산에서 나와 북으로 흘러 하포로 들어간다.

주문도(注文島) : 매도 서쪽 7리에 있는데, 정포영전(井浦營田)이 있고 또 목장이 있다.

보음도(甫音島) : 주문도 서쪽에 있는데 주위가 17리다. 좌도수군 영전(左道水軍營田)이 있고 또 목장이 있다.

말도(末島) : 부의 서쪽 5리에 있는데, 주위가 43리다.

금음북도(今音北島) : 부의 동쪽 16리에 있는데, 염분(鹽盆)이 있다.

미법도(彌法島) : 금음북도 북쪽 2리에 있는데, 목장이 있다.

장봉도(長烽島) : 진강현(鎭江縣)에 있는데, 주위가 25리요, 목장이 있다.

신도(信島) : 부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목장이 있다. 거도(居島) : 신도 서쪽에 있다.

소도(少島) : 보음도 동쪽 3리에 있다. 오두두지(吾豆頭池) : 부의 남쪽 15리에 있으니, 깊이가 10척이다.

와초지(瓦草池) : 대모성(大母城) 아래에 있다.

 

토산 석탄ㆍ청란석(靑?石) : 모두 마니산에서 난다. 홍어ㆍ백하(白蝦)ㆍ조개ㆍ바지락[土花]ㆍ굴[石花]ㆍ낙지

[絡締]ㆍ소라ㆍ부레[魚?]ㆍ숭어ㆍ중새우[中鰕]ㆍ대합[竹蛤]ㆍ해양(海?)ㆍ조기[黃石首魚]ㆍ게ㆍ청게ㆍ

천초(川椒)ㆍ감[?]ㆍ사자족애(獅子足艾)ㆍ소금

 

관방 정포영(井浦營) :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 수군 만호(水軍萬戶) : 1명이다.

봉수 진강산(鎭江山) 봉수 : 서쪽으로 망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대모성산(大母城山)에 응한다.

망산(網山) 봉수 : 동쪽으로 진강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교동현(喬桐縣) 화개산(華蓋山)에 응한다.

 

송악산(松岳山) 봉수 : 동쪽으로 통진현(通津縣) 남산(南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하음성산(河陰城山)에 응한다.

하음성산(河陰城山) 봉수 : 동쪽으로 송악산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교동현 화개산에 응한다.

대모성산(大母城山) 봉수 : 동쪽으로 통진현 수안성산(守安城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진강산에 응한다.

 

궁실 공아(公衙) : 정이오(鄭以吾)의 기문에, "강화부는 기내(畿內)에 속하였는데,

사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있다. 토지는 기름지고 아름다워 언덕ㆍ산ㆍ갯벌ㆍ평지가 크게 있고, 그 식물은 풍부

해서 콩ㆍ보리ㆍ벼가 잘 된다. 옛날 선왕(先王)이 거란(契丹)의 난리를 피해 여기에 들어와 사직을 보존하였다.

산천은 전과 같은데, 성(城)과 대궐은 빈 터만 남았으니, 당시를 상상해 보면 천승(千乘) 만기(萬騎)가 그 속에

머물렀었다. 왜구가 침입한 이래로 강화 사람들이 땅을 지키고 공부(貢賦)를 바치지 못하여 혹은 포로가 되고

혹은 떠나가 판적(版籍)에 기록된 것 중에 재부(財賦)가 생산되는 땅도 혹은 초목이 무성하고 여우와 토끼가 구

멍을 파 버려두었으니, 누가 관청집을 수리할지의 여부에 대해 생각이나 했겠는가. 다행히 조정에서 계획을 세

워서 수군(水軍)을 소집하여 강화부에 주둔시키고 전선(戰船)을 바다에 띄워서 일이 있으면 돛을 달고 나가 적

을 격파하고, 일이 없으면 농구(農具)를 메고 나가 농사를 짓게 하니, 농사 지으면서 싸우는 방법이 좋은 것은

같은데 적임자를 얻기가 어려웠다.

기사년(1389) 봄에 지금 동지밀직사사 겸 도평의사사사(同知密直司事兼都評議使司事) 박자안(朴子安)이 경기

좌우도 연해 등처 수군도절제사 지처토영전사(京畿左右道沿海等處水軍都節制使知招討營田事)로서 실로 강화

부사(江華府使)를 겸하여 민사(民事)에 마음을 다하고 군무(軍務)에 힘을 다하여 그 정사를 통하게 하고 그 위

엄을 장하게 하였다.

한 번은 적선(賊船)을 만나 멀리 쫓아 나가 마침내 중류에서 격파하니, 이때부터 바닷길이 오래도록 맑아졌다.

전에 떠나갔던 백성들이 다시 강을 건너 돌아와서 그 밭을 갈고 그 집을 거처로 삼아 편안히 살면서 생업(生業)

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조세(租稅)도 내고 상공(商工)을 번창하게 하여 수입을 헤아려 적립된 것을 사용하여

출납에 남음이 있어 공사가 풍부하게 되었다.

이듬해 경오년에 진주(眞主 태조)가 일어나 위씨(僞氏 신우(辛禑))를 내쫓고 묵은 폐단을 혁신하여 정신을 가다

듬고 정치를 힘쓰는데, 잠저(潛邸) 때부터 박공(朴公)이 백성을 다스리고 군대를 잘 통솔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대로 그 직책을 제수하였으니, 대개 인망에 따른 것이다. 금년 봄에 와서 공이 장좌(將佐)들을 불러 말하기를,

'경기는 사방의 근본이요, 강화부는 경기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강화부는 경기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강화부의 공아는 좁고 누추한데다 땅이 낮고 습하여 날마다 무너져가고 있으므로 내가 장차 다시 지으려 하니,

너희들이 의당 그 일을 맡아야 한다.' 하고, 주사(舟師)에게 명하여 재목을 섬에서 가져오게 하고 승도(僧徒)를

부려서 부내(府內)에서 기와를 굽게 하며 터를 옛 공아 북쪽에 잡고서 열달 만에 완공하여 단청칠까지 하니 사

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으며, 담을 둘러싸니 엄숙하고도 치밀하여 군자의 거처라 할 만하였다.

재목이 남자 또 창고에 부사(府司)를 지어서 집이 서로 접하여 좌우로 공아와 서로 바라보니, 또한 기내에 있는

관부(官府)라고 이를 만하였다. 비록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정사의 한 말단일 뿐이다. 뒤에 이 부에 부사로 오는

사람이 이 마루에 올라가서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여 그 정사를 생각한다면 정사를 하는 근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강화 사람이 공으로부터 하사 받은 것이 끝이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이어 생각하건대, 공이 일찍이 누선(樓船)을 가지고 경상도 바다에 나가 일을 행하고 공

을 세워, 사람들의 마음과 눈에 새겨져 있는 것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또 들어와서는 묘당(廟堂)의 의론에 참여하고 나가서는 병권(兵權)을 쥐어 그가 한 번 나가고 한 번

들어오는 데 모두 사람의 주의를 끌고 있으니, 이룩한 사업과 공적이 빛나고 빛나며 우뚝하게 높아서 영원히 없

어지지 않을 것을 단연코 알 수 있다. 내가 사필(史筆)을 잡았으니, 마땅히 대서특서(大書特書)하여 한 번만 쓸

것이 아니다.' 하였다.

 

누정 이섭정(利涉亭) : 갑곶나루 언덕에 있다.

 

○ 이첨(李詹)의 기문에, "한강(漢江)과 임진(臨陣)이 합류하여 조강(祖江)이 되고, 서쪽으로 잇달아 바다로 들

어가는데, 따로 흘러 갑곶이 되었다. 전조(前朝)의 고왕(高王)이 여기 와서 피난하는데, 원(元) 나라 군사들이

쫓아와 말하기를, '갑옷만 쌓아 놓아도 건너갈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갑곶이라 이름하였다.

강화부는 거진(巨鎭)으로 해문(海門)에 있어서 육지와 연접하지 않았다. 부의 북저(北渚)는 물길이 다 통했으

나 다만 물이 너무 넓어서 어쩌다 풍랑을 만나 막히면 때때로 건널 수 없다. 만일 배로 조강을 건너거나 육지로

가면 30여 리 만에 갑곶에 이르는데, 건널목이 조금 좁아서 건너기 쉽기 때문에 부사와 감사(監司)가 순찰 할

때나 조정의 명령을 전달하는 신하도 모두 이 길을 거쳐 부로 가고, 그 밖에 왕래하는 나그네들도 이 길에 늘어

서니 진실로 의당 여기에 정자를 지어서 보내고 맞이하는 장소로 삼아야 한다.

홍무(洪武) 무인년 가을 9월에 나와 한 고을에 사는 부사 이성(李晟)이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이 부에 부사가

되어 병마 단련의 임무를 겸하였다. 부임해서는 군민(軍民)의 모든 정무가 이미 모두 잘 진행되었다.

이듬해 봄에 관리와 백성을 모아놓고 이르기를, '고을의 치소(治所)에 놀이 구경하는 장소를 두는 것은 진실로

논의할 일이 못 된다. 그러나 기운이 번거롭고 정신이 산란하며 보는 것이 막히고 뜻이 걸릴 때를 당하면 군자

는 반드시 놀고 쉴 만한 물건과 높고 상쾌한 도구가 있어서, 군자로 하여금 이리저리 바라보고 거닐며 정신을

맑히도록 한 뒤에야 번거로운 것이 간단해지고 산란한 것이 안정되며 막힌 것이 소통되고 걸린 것이 트이게 되

는 법이다.

또 더구나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고 하늘과 물이 아득한 데를 엿보아 만물의 처음과 기운의 시초에 마음을 노닐

어 나의 호연(浩然)한 기운을 기르고, 또 그것을 사람들과 같이 하면 즐겁지 않겠는가.' 하니, 관리와 백성이 모

두 함께 '그렇다.'고 하자, 곧 정자를 지을 계획을 세웠다. 마침 김영렬(金英烈)이 해도(海道)를 절제(節制)하게

되어서 섬에서 재목을 취해서 실어다 공사를 도와준 만큼 노는 사람을 부르니, 그 역사에 드는 물품은 공금(公

金)을 낭비하지 않고도 여유가 있었다.

이에 옛터를 이용해 거듭 새롭게 지어 난간 창문으로 사신(使臣)이 올라와 놀게 하고, 담을 돌려 쌓아서 나그네

가 유숙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서늘하면서도 따뜻하고 견고하면서도 치밀하며, 돌을 쌓아 높이고 낮은 담을 돌려

쳐서 기한을 정하여 완성하니, 관리와 백성들은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하

며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부사가 장차 갈리게 되자, 나에게 편지를 보내 정자 이름과 기문을 지

어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그 물은 건너기 쉬운데, 정자가 마침 나루터에 있기 때문에 현판을 이섭정(利涉亭)이

라 하고, 또 이 부사는 중후하고 기개가 있어서 그가 정사할 때에는 사람들과 더불어 소요(逍遙)하는 즐거움을

함께 하고, 그가 떠남에는 백성들이 두고두고 생각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 정자에 또한 기꺼이 기문을 짓는 것이

다." 하였다.

 

연미정(燕尾亭) : 갑곶나루 위에 있는데, 작은 산이 있고 그 아래에서 바닷물이 나누어져 흐르기 때문에 연미

(燕尾)라 이름하였다. 하도(下道)에서 조세를 나르는 배가 지나가다가 정박하는 곳이다.

 

○ 고려 고종 31년(1244)에 시랑(侍郞) 이종주(李宗?)에게 명하여 구재 생도(九齋生徒)를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 여름 공부)를 시켜 55명을 뽑았다.

 

학교 향교 : 부의 동쪽 1리에 있다.

 

원우 갑곶진원(甲串津院)ㆍ인석진원(寅石津院)ㆍ승천부진원(昇天府津院).

교량 대청포교(大靑浦橋)ㆍ토교(兎橋) : 부의 남쪽 4리에 있다. 하포교(蝦浦橋).

 

불우 전등사(傳燈寺) : 길상산(吉祥山)에 있는데, 원 나라 지원(至元) 19년(1282)에 충렬왕의 원비(元妃) 정화

궁주(貞和宮主) 왕씨(王氏)가 중 인기(印奇)에게 부탁하여 바다를 건너 송(宋) 나라에 들어가 대장경(大藏經)을

인쇄해와 이 절에 보관했다.

 

○ 이색의 시에, "납극(蠟?) 신고 산에 오르니 흥이 절로 맑은데, 전등사 늙은 중이 나의 행차를 인도하네.

창 밖에 먼 산은 하늘 끝에 벌여 있고, 누(樓) 밑에 부는 바람 물결 쳐 일어나네. 성력(星歷)은 오태사(伍太史)가

까마득한데, 구름과 연기는 삼랑성(三浪城)에 참담하여라. 정화궁주 원당(願幢)을 뉘라서 다시 세울 건가.

벽기(壁記)에 쌓인 먼지에 객의 마음 상하네." 하였다. 선수암(善首菴)ㆍ정수암(淨水菴) : 모두 마니산에 있다.

 

국정사(國淨寺)ㆍ적석사(積石寺)ㆍ월명사(月明寺) : 모두 고려산에 있다.

수월사(水月寺)ㆍ미륵사(彌勒寺) : 모두 하음성산에 있다. 사왕사(四王寺) : 송악산에 있다.

덕장사(德藏寺) : 진강산에 있다. 홍릉사(弘凌寺)ㆍ백련사(白蓮社) : 모두 고려산에 있다.

 

사단 참성단(塹城壇) : 마니산 꼭대기에 있다. 돌을 모아 쌓았는데, 단의 높이는 10척이며, 위는 모가 나고 아래

는 둥근데, 위는 사면이 각각 6척 6촌이요, 아래 둥근 것은 각각 15척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다." 하였다. 본조에서 전조(前朝)의 예전 방식대로 이 사단에서 별에 제사지냈는데,

아래에 재궁(齋宮)이 있다. 우리 태종(太宗)이 잠저 때 대언(代言)이 되어 여기서 재숙(齋宿)했다.

 

○ 이색의 시에, "향 피우고 맑게 앉아 시 읊으며 머리를 갸우뚱하니, 한 방이 비고 밝은데 작기가 배[舟] 같네.

가을빛을 가장 사랑하여 지게문 열어 들이고, 다시 산 그림자 맞아들여 온 뜰에 머물게 하네. 몸은 가뿐하여 때

[垢]가 없으니 봉황을 탈 생각하고 마음은 고요하여 기심(機心)을 잊었으니 갈매기를 가까이 하려 하네.

단(丹)을 만들어 신선 되기 구할 필요 없다. 육착(六鑿)만 제거하면 바로 14천유(天遊)일세."

 

○ "무릉(茂陵)은 무슨 일로 신선 찾기에 그다지 애썼는가. 다만 봉래(蓬萊)만은 또한 혹 그럴 듯도 하나, 산은

구름과 같이 떴으니 자연 끝이 없고, 바람은 배를 불어 가니 앞설 이 없네. 금인(金人)의 한 방울 이슬은 소반

가운데에 떨어지고, 청조(靑鳥)는 바다 위 하늘로 외로이 날아가네. 참호[塹城]에서 제사하여, 그대로 사람들

로 하여금 태평스러운 해를 누리게 하면 어떠하랴."

 

○ "산하는 험하기 이와 같으니, 장한 우리나라일세. 절정에 구름 기운 흐르고, 높은 벼랑에 고목나무를 굽어보

네. 바람을 향해 휘파람 길게 부니, 울리는 소리 암곡(巖谷)에 진동하네. 소문(蘇門) 놀이 계속하려 하니,

석수(石髓)는 지금 한창 푸르렀으리. 해와 달은 쌍 수레바퀴가 되고, 우주는 한 칸 집이 되었네. 이 단이 천연적

으로 된 것이 아니라면, 모르겠네, 정녕 누가 쌓은 것이냐. 향 냄새 올라가니 별은 낮아지고 축문이 들어가니,

기운이 비로소 엄숙해지네. 다만 신(神)이 내린 은혜에 보답할 뿐이지. 무엇 때문에 스스로 복을 구하겠는가."

 

○ "긴 바람 나에게 불어 요대(瑤臺신선이 사는 곳)에 오르니, 넓은 바다 먼 하늘이 만 리나 터졌네. 옷을 털고

이어 발 씻을 것없다. 신선의 피리와 학이 공중에서 내려오는 듯하네."

 

○ "만 장(丈)이나 되는 현단(玄壇 도관(道觀))에 밤 기운이 맑은데, 녹장(綠章)을 아뢰자마자 담담히 티끌

생각 잊었네. 돌아가는 말 안장에 장생(長生)할 복을 가득 실어다, 우리 님께 바쳐 태평 성대 이룩하려네."

 

○ 고려 이강(李岡)의 시에, "마음은 고요하고 몸은 한가하여 뼈가 신선이 되려 하니, 멀리 인간 일 생각하며

정히 망연하구나. 제사 지내는 신비한 자리는 중흥(中興)한 뒤이요, 돌로 쌓은 영단(靈壇)은 태고(太古) 전의

일일세. 이미 눈은 천리 밖 땅을 보게 되었고, 황홀히 몸은 구중(九重) 하늘에 있는 듯해라.

이번 걸음엔 짝도 없이 서로 속이는 것 같으나, 환도(還都)한 첫 해를 누가 만났는가." 하였다.

 

산천제단(山川祭壇) : 마니산 초성단(醮星壇) 아래에 있다.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갑곶나루에 있다.

여단(?壇) : 부의 북쪽에 있다.

진강신사(鎭江神祠) : 진강산에 있다. 하음신사(河陰神祠) : 성산(城山)에 있다.

 

능묘 고려 고종릉(高宗陵) : 부의 서쪽 6리에 있는데, 이름은 홍릉(弘陵)이다.

원덕태후릉(元德太后陵) : 부의 남쪽 23리에 있는데, 고려 고종의 비로 이름은 곤릉(坤陵)이다.

고려 희종릉(熙宗陵) : 부의 남쪽 21리에 있는데, 이름은 석릉(碩陵)이다.

순경태후릉(順敬太后陵) : 부의 남쪽 24리에 있는데, 고려 원종비(元宗妃)로 이름은 가릉(嘉陵)이다.

이규보(李奎報) 묘 : 진강산 동쪽 기슭에 있다.

고적 진강 폐현(鎭江廢縣) : 본섬 안에 부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곳에 있다. 본래 고구려 수지현(首智縣)이

었는데, 신라에서 수진(守鎭)으로 고쳐서 해구군(海口郡)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그대로 예속시켰다.

 

하음 폐현(河陰廢縣) : 본섬 안에 부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다.

본래 고구려 동음내현(冬音奈縣)이었는데, 아음(芽音)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호음(?陰)이라고 고치고 해구군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그대로 예속시켰다가 뒤에 개성현(開城縣)에 예속시켰고,

뒤에 다시 도로 강화에 예속시켰다.

 

해령향(海寧鄕) : 진강현 서쪽 5리에 있다. 삼랑성(三郞城) : 전등산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 한다.

 

고궁성(古宮城) : 송악리(松岳里)에 있는데, 부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고려 고종 때 쌓은 것으로 내외

의 성을 모두 흙으로 쌓았는데, 외성 주위는 3만 7천 76척이요, 내성 주위는 3천 8백 74척이다.

 

고려 산성(高麗山城) : 흙으로 쌓았는데, 주위가 1만 9천 3백 72척이다.

개골동(蓋骨洞) : 부의 남쪽 10리에 있으니, 고려 고종 13년(1226)에 골 안에 세조(世祖)와 태조(太祖)를 이장

했다.

 

용장사(龍藏寺) : 옛터는 부의 서쪽 4리에 있는데, 고려 공민왕이 선위(禪位) 받을 때에, 충정왕(忠定王)이 이

절에서 손위(遜位)했다. 선원사(禪源寺) : 옛터는 부의 남쪽 8리에 있는데, 지금은 장원서(掌苑署) 과원(果苑)이

되었다.

 

명환 신라 계홍(啓弘) : 원성왕(元聖王) 6년(790)에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고,

아손(阿飡)을 계홍을 진두(鎭頭)로 삼았다.

 

고려 민상정(閔祥正) : 유수(留守)가 되었다. 홍문계(洪文系) : 임유무(林惟茂)가 병권을 가지고 있을 때에

홍문계가 상장(上將) 송송례(宋松禮)와 함께 임유무를 공격할 것을 모의하였다. 임유무가 묻기를, "누가 이 일을

주관했느냐?" 하여, "홍 중승(洪中丞)이다." 하자, 임유무가 간담이 떨어져 패하였다.

 

심덕부(沈德符) : 부윤(府尹)이 되었다.

 

인물

고려 위수여(韋壽餘) : 현종(顯宗) 때 사람으로, 단정하고 성실하여 법을 지켰으며,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

에 이르렀다. 시호는 안공(安恭)이다.

 

본조 최용소(崔龍蘇) : 벼슬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고, 시호는 제정(齊貞)이다.

 

열녀 고려 삼여(三女) : 삼여는 부(府)의 아전의 딸이다. 신우(辛禑) 3년(1377)에 왜구가 강화에 침입하여 멋대

로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을 하는데, 삼여는 왜구를 만나자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끌어안고 강에 빠져 죽었다.

 

제영 해산심처일편주(海山深處一扁舟) : 이색의 시에, "바다산 깊은 곳에 한 조각 배로 화산(華山)에 당도하니

흥이 그지없네. 예전부터 금성탕지(金城湯池)는 덕(德)을 해치는 것인데, 이 땅에 도읍을 옮긴 것은 누구의 꾀

인가." 하였다.

 

어초유설구천경(魚樵猶說舊天京) : 고려 허금(許錦)의 시에, "옥연(玉輦)이 기구(崎嶇)하게 이 성(城)에 거둥했

더니, 어부와 초부들은 아직까지 옛 서울을 말하네. 골에 잠긴 구름 쓸쓸하게 찬 빛이 엉겼는데, 궁(宮)에서 흐

르는 물 쫄쫄거리며 옛 소리에 목메이네." 하였다.

 

수정통해도(脩程通海島) : 이원(李原)의 시에, "긴 길은 바다 섬으로 통하고, 옛 관(館)은 구름 봉우리에 의지했

네. 밤이 고요하니 시끄러움이 그치고, 처마가 비니 달빛이 들어오네. 상(床)에 부는 바람 맑게 산들거리고,

뜰에 선 나무 푸르러 그늘졌구나. 이곳 백성들 이야기 들어보니, 태평 시대는 바로 지금이라 하네." 하였다.

 

해근운유습(海近雲猶濕) : 함부림(咸傅霖)의 시에, "바다가 가까우니 구름이 아직 젖어 있고, 산이 둘렀으니 해

는 쉽게 그늘지네." 하였다.

 

연강부원취(連岡浮遠翠) :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연달은 멧부리엔 먼 아지랭이 뜨고, 끊어진 언덕엔 층층이

그늘지네." 하였다. 고국환창해(古國環滄海) : 권맹손(權孟孫)의 시에, "옛 나라는 푸른 바다가 둘렸고,

빈 성(城)엔 비취빛 멧부리만 늘어섰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1895) 군(郡)으로 고치고, 33년에 부(府)로 다시 고쳤다. 《文獻備考》

연혁 인조(仁朝) 5년(1627) 2월에 후금(後金)의 군사를 피하여 이곳에 거둥하여 4월에 환도하였으므로,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켰다.

관원 유수 : 진무사(鎭撫使)를 겸한다. 경력 : 장녕전 영(長寧殿令)과 진무영 종사관을 겸하였다.

분교관(分敎官)ㆍ검률(檢律)ㆍ의학(意學) 각각 한 사람씩이다.

영아 진무영(鎭撫營) : 본조 숙종(肅宗) 4년(1678)에 세웠다. 관원 사(使) : 유수(留守)가 겸한다.

중군(中軍) : 진무 중영장(鎭撫中營將)과 수성장(修城將)을 겸한다. 종사관(從事官) : 경력(經歷)이 겸한다.

오영(五營) : 전영(前營)은 부평(富平)에 있고, 좌영은 통진(通津)의 속읍인 금포(金浦)에 있고,

중영은 본래 중군(中軍)이고, 우영은 인천에 있고, 후영은 연안(延安)의 속읍인 배천(白川)에 있다.

 

진보 월곶진(月串鎭) : 동북 10리에 있는데, 인조(仁朝) 7년(1629)에 교동(喬洞)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효종(孝宗) 7년(1656)에 첨사로 승격시켰다.

○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한 사람이 있다.

 

초지진(草芝鎭) : 남쪽 35리에 있다. 북쪽으로 덕진(德津)과의 거리가 5리다. 효종 7년에 안산(安山)에서부터

이곳으로 옮겼다. 영종(英宗) 39년(1763)에 첨사로 승격시켰다.

○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겸 감목관(監牧官) 한 사람이 있다.

 

장곶진(長串鎭) : 서남 50리에 있는데, 동쪽으로 강두포(舡頭浦)와의 거리가 30리다.

숙종 2년(1676)에 별장(別將)을 세웠고, 철종(哲宗) 4년(1853)에 첨사로 승격시켰다.

○ 병마동첨절제사 한 사람 있다. 제물진(濟物鎭) : 동쪽 10리에 있는데, 북쪽으로 월곶(月串)과 10리다.

효종(孝宗) 7년에 인천(仁川)에서부터 이곳으로 옮겼다. ○ 병마 만호(兵馬萬戶) 한 사람이다.

 

용진진(龍津鎭) : 남쪽 15리에 있는데, 북쪽으로 제물(濟物)과 10리 거리다. 효종 7년에 병마 만호 한 사람을

두었다.

 

덕진진(德津鎭) : 남쪽 30리에 있는데, 북으로 광성(廣城)과는 5리다. 전에는 수군 첨사(水軍僉使)가 있었는

데, 현종 7년(1666)에 별장으로 내리고, 숙종 3년에는 만호로 승격시켰다. 병마 만호 한 사람이다.

 

인화석진(寅火石鎭) : 서쪽 30리에 있는데, 남으로 정포(井浦)와 30리 거리다. 효종 7년에 별장을 세우고,

영종 15년(1739)에 만호로 승격시켰다. ○ 병마 만호가 한 사람이다.

 

승천포진(昇天浦鎭) : 북쪽 18리에 있는데, 동으로 월곶과 20리 거리다. 효종 7년에 별장을 세우고 철종 4년에

만호로 승격시켰다. ○ 병마 만호 한 사람이 있다.

 

광성보(廣城堡) : 남쪽 25리에 있는데, 북으로 용진(龍津)과 15리 거리다. 효종 7년에 세웠다.

○ 별장 한 사람이 있다.

 

강두포보(舡頭浦堡) : 남쪽 35리에 있는데, 동남쪽으로 초지(草芝)와 20리 거리다. 숙종 32년(1706)에 세웠다.

○ 별장 한 사람이 있다.

 

정포보(井浦堡) : 서남 25리에 있는데, 남으로 장곶(長串)과 25리이다. 전에는 만호가 있었는데, 후에 별장으로

내렸다가 현종 10년에 다시 만호로 되었다. 숙종 4년에 별장으로 내렸다. ○ 별장 한 사람이 있다.

 

철곶보(鐵串堡) : 북쪽 20리에 있는데, 서남으로 인화석(寅火石)과 20리 거리다. 전에는 수군 첨사가 있었는데,

후에 별장으로 떨어졌다가 첨사로 승격되었다. 숙종 38년에 별장으로 떨어졌다. ○ 별장 한 사람이 있다.

 

방면 부(府) 안에 있다.

장령(長令) : 동북쪽 10리에 있다. 선원(仙源) : 남쪽 10리에 있다. 삼해(三海) : 서북쪽 15리에 있다.

하음(河音) : 서북쪽 20리에 있다. 간점(艮岾) : 서쪽 30리에 있다. 북사(北寺) : 서북쪽 20리에 있다.

서사(西寺) : 서북쪽 30리에 있다. 인정(仁政) : 남쪽 20리에 있다. 불은(佛恩) : 남쪽 30리에 있다.

내가(內可) : 서쪽 35리에 있다. 외가(外可) : 서쪽 35리에 있다. 위량(位良) : 서남쪽 30리에 있다.

외가(外可) : 서쪽 35리에 있다. 위량(位良) : 서남쪽 30리에 있다. 상도(上道) : 서남쪽 35리에 있다.

하도(下道) : 서남쪽 50리에 있다. 송정(松亭) : 북쪽 50리에 있다.

 

진도 갑곶진(甲串津) : 즉 갑비고차진(甲比古次津)인데, 후에 동진(童津)이라 하였으며, 서울과 진의 큰 길로

통한다.

 

승천포진(昇天浦津) : 북쪽 15리에 있는데, 개성(開城)의 큰 길로 통한다.

인화석진(寅火石津) : 서쪽 25리에 있는데, 교동(喬洞)과 통한다.

광성진(廣城津) : 금포(金浦)와 진(津)의 사잇길로 통한다.

정포진(井浦鎭) : 매도(煤島)와 석모노도(席毛老島)와 통한다.

목장 신도장(信島場)ㆍ거도장(居島場)ㆍ동검도장(東檢島長)이 있다.

매도(煤島)ㆍ모도(茅島)ㆍ길상(吉祥)ㆍ진강(鎭江)은 모두 없어졌다.

 

궁실 행궁(行宮) : 성 안에 있는데, 척천정(尺天亭)이 있다. 효종 3년(1652)에 비로소 세웠다.

 

선원각(璿源閣) :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있는데, 어제(御制)인 《선원보첩(璿源譜牒)》을 봉안(奉安)하고 있다.

사고(史庫) : 역조 실록(歷朝實錄)이 있다. 전에는 전주(全州)ㆍ충주(忠州)ㆍ성주(星主)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에 오직 전주에 <있는 것만이> 보존되었으므로 이곳으로 옮겼다. 계묘년(1603)에 새로 간행하여 영변(寧邊)ㆍ

강릉(江陵)ㆍ안동(安東)에 나누어 간직하였다가 후에 영변에 있던 실록을 무주(茂朱)로 옮겼다.

○ 참봉 두 사람이 있다.

 

규장각(奎章閣) : 정종조(正宗朝)에 세웠다.

진전 장녕전(長寧殿) : 성 안에 있는데, 광해주(光海主) 14년(1622)에 북쪽이 소란하므로 태조와 세조의 어진

(御眞)을 이곳에 봉안하였다. 인조 병자호란 후에 서울 영희전(永禧殿)으로 옮겼다. 숙종 21년(1695)에 이 전을

처음 시작하였다. 경종(景宗) 원년(1720)에 숙종의 어진을 봉안하였고, 정종 병신년(1796)에는 영종(英宗)의

어진을 만녕전(萬寧殿)에서부터 이곳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영(令)ㆍ별첨(別僉)이 각 한 사람씩이다.

 

만녕전(萬寧殿) : 숙종 39년(1713)에 세웠는데, 영종 21년(1745)에 영종의 어진을 봉안하였다가, 정종 병신년에

장녕전에 옮겨 봉안하였다.

 

사원 충렬사(忠烈祠) : 서남쪽 4리에 있는데, 인조 임오년(1642)에 세웠고, 효종 무술년(1658)에 사액(賜額)하

였다.

 

김상용(金尙容) : 자는 경택(景擇)이요, 호는 선원(仙源)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벼슬은 우의정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상길(李尙吉) : 자는 사우(士佑)요, 호는 동천(東川)인데,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벼슬은 공조 판서(工曹判書)이고,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홍명형(洪命亨) : 자는 계통(季通)이요, 호는 무적당(無適堂)인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벼슬은 우승지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의열(義烈)이다.

 

이시직(李時稷) : 자는 성유(聖兪)요, 호는 죽창(竹窓)인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벼슬은 장령이고 이조 판서

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 이상 네 분은 정축년(1637)에 본부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윤계(尹棨) : 자는 신백(信伯)이요,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정축년에 남양(南陽)을 지켜 도적에 항거하다가

죽었다. 이조 판서에 추증었되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윤집(尹集) : 자는 성백(誠伯)이요, 호는 임계(林溪)로, 계(棨)의 아우이다. 정축년에 화친을 배척하다가 심양

(潘陽)에서 순절하였다. 벼슬은 교리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황선신(黃善身) : 자는 사수(士修)요, 본관은 평해(平海)인데, 정축년에 본부의 중군(中軍)으로서 싸우다가

죽었다. 벼슬은 훈련원 정이고,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권순장(權順長) : 자는 효원(孝元)이요,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벼슬은 금부도사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김익겸(金益兼) : 자는 여남(汝南)이요,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진사로, 영의정과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 이상 두 분은 정축년에 본부에서 순절하였다.

 

황일호(黃一皓) : 자는 익취(翼就), 호는 지소(芝所), 본관은 창원(昌原)인데, 인조 신사년(1641)에 청병(淸兵)

에게 피살되었다. 벼슬은 의주 부윤(義州府尹)이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심현(沈●) : 자는 사화(士和)요,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정축년에 본부에서 순절하였다.

벼슬은 돈녕부 도정이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홍익한(洪翼漢) : 자는 백승(白升)이요,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정축년에 화친을 배척하다가

심양에서 순절하였다. 벼슬은 장령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윤전(尹?) : 자는 매숙(晦叔)이요, 호는 후촌(後村)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벼슬은 필선(弼善)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이돈오(李惇五) : 자는 우흥(于興)이요,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벼슬은 광흥수(廣興守)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현(忠顯)이다.

 

송시영(宋時榮) : 자는 무광(茂光)이요, 호는 야은(野隱)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벼슬은 사복시 주부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현(忠顯)이다.

○ 이상 세 분은 정축년에 본부에서 순절하였다.

 

구원일(具元一) : 자는 여선(汝先), 본관은 능성(綾城)이며, 본부의 십총관 훈련첨정(十摠官訓練僉正)이었으며,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강흥업(姜興業) : 자는 위수(渭?)이며, 본부의 천총관 훈련첨정(千摠官訓練僉正)이었

으며,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 이상 두 분은 정축년 전란에 전사했다.

 

○ 이총병사(李摠兵祠) 갑곶진(甲串津)에 있다. 총병 이여매(李如梅)이다. 자손이 만수산(萬壽山) 남쪽에 우거

하는데, 그 동(洞)을 보명(保明)이라 칭하였다. 영종 을해년(1755)에 특명으로 이 사당을 세웠다.

 

이성량(李成樑) : 자는 여계(汝契)로, 본래 조선 사람이다. 벼슬은 태부 영원백(太傅寧遠伯)이다.

이여매(李如梅) : 자는 자청(子淸)으로, 성량의 아들이며, 벼슬은 첨서 좌부(僉書左府)이다.

선조 임진난 때 우리나라에 와서 왜를 치는 데 공이 있었다.

 

 

13권 풍덕군 豐德郡

 

동으로 장단부계(長湍府界)까지 39리, 남으로 통진현계(通津縣界)까지 34리,

서로 개성부계(開城府界)까지 17리,

북으로 개성부계까지 15리, 서울과의 거리는 1백 7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정주(貞州)이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개성현에 예속시켜, 상서 도성(尙書都省)의 관할을 받았다.

문종(文宗) 17년(1063)에 직접 개성부에 예속시켰고, 예종(睿宗) 3년(1108)에 승천부(昇天府)로 고쳐서

지부사(知府事)를 두었으며,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지해풍군사(知海?郡事)로 강등시켰다.

본조 태종 13년(1413)에 군(郡)을 없애고,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에 붙였다가 18년에 군으로 복구시켰다.

세종 24년(1442)에 덕수현(德水縣)을 합병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각 1명씩이다.

군명 승천부(昇天府)ㆍ하원(河源)ㆍ정주(貞州)ㆍ해풍(海?)

 

성씨 본군(本郡) : 유(柳)ㆍ위(韋)ㆍ장(張)ㆍ단(段)ㆍ전(田)ㆍ종(鍾)ㆍ이(李)ㆍ두(杜)ㆍ포(包)ㆍ하(河) :

모두 촌(村)에 산다.

양(梁)ㆍ정(鄭)ㆍ김(金)ㆍ임(林)ㆍ박(朴) : 모두 외방에서 왔다. 덕수(德水) : 이(李)ㆍ김(金)ㆍ장(張)ㆍ진(秦)ㆍ

원(員)ㆍ차(車) : 촌에 산다.

 

산천

백마산(白馬山)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 고려에서 이 산을 우소(右蘇)로 삼았다. 고종 37년에 대장군 이세재(李世材)와 신집평(愼執平) 등을 보내

비로소 대궐을 이 산 남쪽 임해원(臨海院) 옛터에 지었다.

 

○ 고려 김영돈(金永暾)의 호종(扈從)시에, "비취빛 일산 푸른 바다 위에 거둥하니, 옥 퉁소 부는 소리 흰 구름

사이에 흘러가네. 여기는 티끌 한 점 날아오기 어렵구나. 수 많은 푸른 산, 비 온 뒤에 분명하네." 하였다.

 

말흘산(末訖山) : 군의 북쪽으로 1백 보(步) 되는 데 있다. 덕적산(德積山)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삼성당산(三聖堂山) : 덕수현(德水縣) 남쪽 5리에 있다. 여리산(如利山) : 덕수현 서쪽 5리에 있다.

마군산(馬群山) : 덕수현 서남쪽 10리에 있는데, 옛 이름은 마제산(馬蹄山)이다. 바다 :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승천포(昇天浦)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하원도(河源渡) : 군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일찍이 공주와 함께 여기서 조수를 구경

하였다.

 

인녕도(引寧渡) : 덕수현에 있는데, 세속에서는 인월곶(引月串)이라고 부른다. 군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졌

으니, 양화도(楊花渡) 하류이다.

 

조강도(祖江渡) : 덕수현에 있다.

 

○ 고려 백원항(白元恒)의 시에, "나룻배 떠날 무렵 늦은 조수 밀려 왔는데, 말을 멈추고 나루에 서서 홀로 쓴웃

음 짓네. 언덕 위 세상 사정은 어느 날에나 끝날건가. 앞 사람이 건너기도 전에 뒷사람이 왔네." 하였다.

 

○ 이규보(李奎報)가 우보궐(右補闕)로부터 탄핵을 받아 계양수(桂陽守)에 제수되어 이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강물이 본래 세찬 데다가 마침 폭풍을 만나서 고생을 하고 건넜으므로 부(賦)를 지어 슬퍼하였다. 부에 이르기

를, "넓고 넓은 강 흐림이 경수(涇水)처럼 흐리구나. 검은 물 너무 깊으니, 겁나서 굽어볼 수 없네. 여울이 사납

고 급함이여, 어찌 구당(瞿塘)과 비교할 수 있으랴. 여러 물이 한데 모여 급히 흐름이여, 솥 안에 끓는 물이 용솟

음치는 듯하구나. 교룡과 악어가 입 벌리고 침 흘림이여, 또 어찌 독룡(毒龍)이 숨어서 엿보는지 측량하겠는가.

여울을 거슬러 빨리 건너려 함이여, 배는 가는 것 같은데 아직 멈춰 있네. 저녁도 아닌데 캄캄하고, 바람은 불지

않는데 파도가 일어나네. 산 같은 파도가 서로 쳐 부서짐이여, 진진(秦晉)이 팽아(彭衙)에서 싸우는 것 같구나.

사공은 영서(靈胥)와 친했으련만, 그래도 빙빙 돌며 용솟음치는 건 무서워하네.

돌아보건대 구구히 눈 깜짝할 사이에 건너는 것이, 어찌 용솟음치고 성냈다 하여 그것을 멀다고 이를 것이냐.

나는 이미 귀양가게 되어 이 험한 흐름을 만났노라. 동동 왔다갔다하는 외로운 배여, 어디로 가기에 끝없이 가

느냐. 편평한 언덕 바라보니 풀만 어둑하고, 먼 포구 거슬러 올라가니 연기가 을씨년스럽다. 봉황새 소리 알알

(軋軋)하고 원숭이 울음 추추(??)하네. 지는 해 엄엄(掩掩)하고 누른 구름 둥둥 뜨네. 아무리 오마(五馬)가 영화

로워도, 참으로 내가 바란 것은 아니었네. 아, 멀리 떠나가는 길, 옛날엔들 어찌 없었으리. 맹자(孟子)는 세 밤

자고 주(晝) 땅으로 나갔고, 공구(孔丘)는 노(魯) 나라를 떠날 제 지지(遲遲)하다 탄식했네.

가의(賈誼)는 낙양의 재주 있는 사람으로서 장사(長沙)의 비습(卑濕)한 땅으로 귀양갔으니, 성현(聖賢)들도 오

히려 그러했거늘 내가 다시 슬퍼할 게 무엇이랴.

옛날 사람이 임금을 만나지 못한 데 비교하면, 나는 또 한 고을 차지하고 큰 인(印)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곡산(鵠山 송악산)은 점점 멀어 보이지 않으니, 장안(長安)을 바라보면 저절로 피해지기만 하는구나. 벌써 상도

(上都)를 떠났음이여, 계양(桂陽)이 차차 가까우니 기쁘구나. 그럭저럭 배 닿으니 저 바위 밑이로다.

그 누가 마중왔나. 무식한 몇몇 아전들일세. 가마 장식 굉장하고 깃대 차림 찬란하네. 행차가 고개 위에 쉴 적에

횃불이 숲에 비치니 새가 놀라 날아간다. 이렇게도 노닐며 산발(散髮)함이여, 바람이 옷을 당기며 불어오네.

강물이 급하고 빠르지만, 내가 이미 건넜으니 무엇을 걱정하리. 가자꾸나, 그만 해도 즐거우리. 구태여 안타깝게

돌아가려할 게 없네. 나가고 들어가는 것을 내 맘대로 할 수 없음이여, 하늘이 시키는 대로 운명에 있는 대로 옛

성현의 길을 따를 뿐일세." 하였다.

 

동강(東江) : 군의 동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는데, 남도(藍島)가 있다.

화장포(化莊浦) : 동강 남쪽 10리에 있다. 사천(沙川) : 덕수현 동쪽 9리에 있는데, 개성부 천마(天磨)ㆍ

성거(聖居)ㆍ송악(松岳)의 여러 산의 물이 여기서 합쳐 동강으로 들어간다.

 

마지(馬池) : 덕수현 북쪽 2리에 있다.

 

토산 정옥사(碇玉沙) : 군의 북쪽에 있는 흥왕사(興王寺)에서 나온다. 석회(石灰)ㆍ조기〔石首魚〕ㆍ숭어ㆍ

농어[?魚]ㆍ붕어ㆍ낙지ㆍ석굴ㆍ토굴ㆍ바지락ㆍ게ㆍ백하.

 

봉수 덕적산(德積山) 봉수 : 동으로 교하현(交河縣) 검단산(黔丹山)에 응하고, 북으로 개성부 송악산 성황당에

응한다.

 

누정 관호정(觀湖亭)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 윤자(尹慈)의 시에, "고기 뛰고 솔개 나니 위 아래가 하늘이라. 새 정자 좋은 경치 난간 앞에 다 모였네.

푸른 산은 외로운 구름 밖에 드문드문 솟았고, 흰 새는 가랑비 속에 쌍쌍으로 날아드네. 몇 곳이나 뱃사람은 언

덕 풀에 앉았으며, 뉘 집인가, 고기잡는 아이는 못가 연기에 자느냐. 시 읊고 나니 다시 임금 생각 나는구나.

물어보자, 언제 다시 어연(御筵)을 모시려나." 하였다.

 

학교 향교 : 군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중련역(中連驛) : 군 동쪽 15리에 있다. 승천포원(昇天浦院) : 승천부(昇天府) 옛 성(城) 밑에 있다.

냉정원(冷井院) : 군 남쪽 30리에 있다. 광대원(光大院) : 군 남쪽 30리에 있다.

임해원(臨海院) : 군 남쪽 15리에 있다.

불우 연경사(衍慶寺) : 부소산(扶蘇山)에 있다. 흥교사(興敎寺) : 백련산(白蓮山)에 있다.

 

○ 이숭인(李崇仁)이 중[僧]을 전송하는 시에, "서생(書生) 생활 담박하여, 시구(詩句)로 돌아가는 중을 전송하

네. 새벽 달은 가사(袈裟)에 싸늘하게 비치고, 가을 구름은 장석(杖錫)을 끼고 나는구나. 길이 돌아드니 천 산을

에워싸고, 정자가 작으니 다섯 그루의 소나무 주위에 둘러섰네. 내가 힘써 하는 일이 무엇이냐.

명리장(名利場) 속에 놀랄 기이를 밟았네." 하였다.

 

경천사(敬天寺) : 부소산에 있다. 이 절에 13층의 석탑(石塔)이 있는데, 12회상(會相)을 새겨 인물이 살아 있는

듯하고 형용이 또렷또렷하여 천하에 둘도 없이 정묘하게 만들었다. 세상에 전하는 말이, "원(元) 나라 탈탈 승

상(脫脫丞相)이 원찰(願刹)로 만들고, 진령군(晉寧君) 강융(姜融)이 원 나라에서 공장(工匠)을 뽑아다가 이 탑

을 만들었다." 하는데, 지금까지 탈탈 승상과 강융의 화상이 있다. 또 절 동쪽 산에서 이상한 돌이 나는데,

세상에서, '침향석(沈香石)'이라 한다.

 

보리암(普利菴) : 마군산(馬群山)에 있다. 백운사(白雲寺) : 여리산(如利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승천포성(昇天浦城)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에 있다.

덕적산사(德積山祠)ㆍ백마산사(白馬山祠)ㆍ삼성당사(三聖堂祠) : 고려 충숙왕(忠肅王) 6년에 덕수현에서 사냥

하다가 해동청(海東靑)과 내구(內廐)의 말이 죽으니, 성황과 신사를 불사르도록 명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주작신당(朱雀神堂) : 보통 당두산(堂頭山)이라 하는데, 옛 장원정(長源亭) 서남쪽 2리 바닷가에 있다.

 

능묘 제릉(齊陵) : 군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우리 태조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이다.

 

○ 권근(權近)의 비명(碑銘)에, "예로부터 제왕이 천명을 받아 일어날 적에는 반드시 어진 배필을 만나, 덕(德)

이 같고 경사가 모여서 그 계통이 오래 가게 하였다. 하(夏) 나라는 도산(塗山)이 있어 계(啓)가 계승할 수 있었

고, 주(周) 나라는 태사(太?)가 있어 무왕(武王)이 크게 계승하였다.

하우씨(夏禹氏)와 주문왕(周文王)이 배천(配天)하는 제사가 이로 말미암아 영구하게 되었으니, 아, 참으로 거

룩하구나. 우리 신의왕후는 타고난 자질이 정숙하고, 아름다우며 부인으로서의 덕행이 부드럽고 바른데, 일찍

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시집와서 왕업(王業)을 도와 이룩했고, 착실하게 성철(聖哲)을 낳아 왕통(王統)을 끝없

는 장래에까지 드리웠으니, 그 신묘한 공(功)과 아름다운 모범은 옛날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유독 애석한 것은 큰 공업을 이루게 되자, 너무 빨리 돌아가시어 태상왕(太上王)이 개국(開國)하였으면서도 그

곤의(?儀 여자의 지위)를 높일 수 없었고, 이성(二聖 정종(定宗)과 태종(太宗))이 계통을 이었으면서도 그 영화

로운 봉양을 바칠 수 없어 산릉(山陵)이 빛을 가리고 상로(霜露)가 슬픔만 더하니, 아, 기막힌 일이다.

처음 시호는 절비(節妃)이고, 능호는 제릉(齊陵)인데, 뒤에 시호를 신의왕후라 더 높이고, 인소전(仁昭殿)을 지

어서 화상을 모셨으니, 추숭(追崇)하는 전례가 이미 갖추어 거행되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어머니가 돌아

가신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고 효도를 바칠 데가 없으므로 유사(攸司)를 명하여 큰 비에 명(銘)을 새기게 하시면

서, 신(臣) 권근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만세토록 보이게 하셨으니, 신 권근이 명을 받고 황송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했다. 삼가 상고해 보건대, 왕후의 성은 한씨(韓氏)로, 안변(安邊)의 세가(世家)이다.

 

아버지의 휘(諱)는 경(卿)으로, 충성공근 적덕육경 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문하부사 안천부원군(忠誠恭

謹積德毓慶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門下府事安川府院君)에 추층되었고, 할아버지의 휘는 규인(珪仁)으로,

적선육경 동덕찬화 익조공신 특진보국 숭록대부 문하좌정승 판도평의사사사 겸 판이조사안천부원군(積善毓慶

同德贊化翊祚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左政丞判都評議使司事兼判吏曹事安川府院君)에 추층되었고,

증조할아버지의 휘는 유(裕)로 증 순성적덕 좌명보리공신 숭정대부 문하시랑 찬성사동판도평의사사사 겸 판호

조사 안원군(純誠積德佐命輔理功臣崇政大夫門下侍郞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兼判戶曹事安原君)에 추증되었

다.

어머니 신씨(申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封)해 졌고, 병의육덕 보조공신 숭정대부 문하시랑 찬

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형조사(秉義毓德輔祚功臣崇政大夫門下侍郞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兼判刑曹事)에

추층된 윤려(允麗)의 딸이다. 왕후는 나면서부터 현숙하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영리한 것이 보통과 달랐다.

성년(成年)이 되어 배우자를 택하여 우리 태상왕(太上王)에게 시집왔는데, 처음에 태상왕이 장상(將相)이 되어

수십 년 동안을 전장에 출입하여 편안히 지낸 해가 없었으나, 왕후는 능히 힘을 다하여 집안 일을 경영하고 태

상왕의 성공을 격려했다.

또 천성이 질투하는 마음이 없어서 첩들을 예우하여 아들을 많이 두게 하고, 의(義)로써 가르쳤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재주와 슬기가 뛰어나고 영특하고 용맹스러우며 학문이 날로 진취하여 나이 20세가

못 되어 춘관(春官)에 급제했고, 위신(僞辛) 무진년(1388)에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중국(명(明) 나라)을 치자

고 계획할 적에, 우리 태상왕이 위엄과 덕망이 평소 드러났다는 이유로 절월(節鉞)을 주어 가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태상왕은 의리를 주장하여 군사를 돌려 최영을 잡아 물리치고 명망이 높은 유학자 이색(李穡)으로 대신하니, 안

팎이 편안하여 나라가 영원히 의지하였다.

이색이 태상왕에게 고하기를, '지금은 중국과 틈이 생긴 뒤이므로 정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직접 제정(帝庭)에

조회하지 않으면 공(公)의 충성을 천하에 아뢸 수 없습니다.' 하여, 며칠 안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태상왕이 이색에게 이르기를, "나와 공이 한꺼번에 떠나면 나라 일은 누가 맡겠는가. 내가 아들 하나를 뽑아서

공을 따라가게 하면 내가 가는 것과 같다." 하였다.

이에 우리 전하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충원하여 특별히 황제의 융숭한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기사년(1389) 가을에 황제가 또 칙지(勅旨)를 내려 다른 성씨가 왕씨(王氏)의 뒤를 잇는 것을 책망하니, 태상왕

은 여러 장수들과 상의하여 왕씨의 후예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임금으로 세웠다. 이보다 앞서 권력을 잡은

간신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러 남의 재산을 함부로 약탈하였는데, 태상왕이 그때 좌상이 되어 사전(私田)을

없애고 없어진 법을 다시 시행하니, 폐단이 제거되고 이익이 일어나 온갖 제도가 모두 새로워지니, 공(功)이 높

아 상을 내릴수 없고 덕(德)이 커서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참소하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나오고 윤색되어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워졌는데, 정창군은 유약하고 어두워 양단간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왕후는 이에 과도하게 근심하고 근로하다가 병이 생겨 신미년(1391) 9월 23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享年) 55

세였다. 예를 갖추어 성(城)의 남쪽 해풍군(海?郡) 치속촌(治粟村) 언덕에 장사지냈다. 우리 전하께서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마치려 했는데, 이듬해 임신년 봄에 태상왕이 서쪽 지방에 갔다가 병이 나 돌아오니, 전하

가 와서 병 간호를 하였다. 뭇 간신들이 이 틈을 타서 더욱 급하게 모함하니, 우리 전하는 기회에 맞춰 계책을

결정하여 괴수를 제거하니, 흉도(兇徒)들은 무너지고 정창군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가을 7월 16일에 2,3명의 대신과 더불어 대의(大義)를 부르짖으니, 신료와 부로(父老)들이 계획하지도 않았는데

의사가 같아서 입을 모아 임금으로 추대했다. 태상왕은 여러 사람들의 뜻에 몰려 왕위에 나아가니, 저자의 가게

가 바뀌지 않고 하루아침에 맑고 밝아졌다. 즉시 사신을 보내 중국 조정에 아뢰고 연이어 칙보(勅報)를 받았는데,

이미 왕작(王爵)을 허락하고 또 국호를 고쳐 조선(朝鮮)이라는 아름다운 명칭을 회복했다. 3년이 지난 갑술년

(1394) 여름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 친아들이 와서 조회하라 명하니, 태상왕은 우리 전하가 경서(經書)에 통달하

고 예의에 밝아서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어질었기 때문에 온 사신을 따라서 가라고 명하였다.

중국에 당도해서는 황제가 전하와 함께 얘기해 보고 가상히 여겨 융숭히 상을 주어 돌려보냈다.

무인년(1398) 가을 8월에 태상왕이 병으로 누우니, 간신 정도전(鄭道傳) 등이 나라의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려

는 생각으로 여러 적자(嫡子)들을 제거하고 장차 어린 서자(庶子)를 세우려고 몇 사람의 당을 모아 화가 당장 일

어나게 되었다.

전하께서 기미를 알아차리고 일이 생기기 전에 먼저 손을 써서 깨끗이 죽여 버리고, 태상왕께 적자 중에서 장자

로 세워야 한다고 거듭 청하여 상왕(정종)을 맞이하여 세자로 책봉하니, 이륜(?倫)이 이미 바르게 되고, 종묘사

직이 안정되었다. 9월 정축일에 태상왕이 병에 차도가 없어서 상왕에게 전위(傳位)하였다.

경진년 정월에 역적 박포(朴苞) 등이 형제끼리 서로 죽이게 하려고 회안대군(懷安大君) 부자를 꾀어서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였는데, 역적의 형세가 몹시 성하였다. 우리 전하가 군사들을 격려하여 이끌고서 즉시 평정

하였는데, 박포만 죽이는데 그치고 나머지는 다 불문에 붙였으며, 회안대군은 폐하지 않아 형제간의 의리를 보

존하였다. 상왕은 아들이 없고 또 개국하고 사직을 정한 것이 모두 우리 전하의 공적이라 하여 세자로 책봉하여,

국본(國本)을 정하였다. 가을 7월 기사일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상왕에게 계운신무(啓運神武)란 호(號)를 가

상(加上)하였다.

겨울 11월 계유일에 상왕이 또한 병으로 우리 전하에게 손위(遜位)하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명을 내려 달라고

청하였다.

이듬해 신사년에 건문황제(建文皇帝)가 통정시승(通政寺丞) 장근(章謹)과 문연각 대조(文淵閣待詔) 단목례(端木

禮)를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임금으로 봉하였다.

겨울에 홍려시 행인(鴻?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어 면복(冕服)을 주었는데, 그 등급은 친왕(親王 황제의

아들)과 같이 하였다.

지금 황제가 즉위하여 널리 만방에 알리는데, 전하는 곧 좌정승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중국에 들어가서 등극

(登極 천자가 황제위(皇帝位)에 오른 것)을 하례하도록 하니, 황제는 대국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을 가상하게

여겨 고인(誥印)을 주고, 도지휘(都指揮) 고득(高得)과 좌통정(左通政) 조거임(趙居任)을 보내어,

금년 여름 4월에 와서 그대로 임금으로 봉하였다.

가을 9월에 또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과 행인(行人) 최영(崔榮)을 보내어 구장(九章) 곤면(袞冕)ㆍ

금단 사라(錦段紗羅)ㆍ서적, 왕비의 관포(冠袍)ㆍ금단 사라, 태상왕의 금단 사라를 주었으니, 세상에서 보기

드문 총전(寵典)이 전후로 몇 차례나 이르렀다. 대개 우리 전하의 공덕이 거룩함은 실로 하늘이 열어 준 것으로,

우리 대동(大東)을 전적으로 맡겨서 큰 복을 늘려 준 것이니, 마땅히 황제의 융숭한 총애를 받아서 오래오래 천

록(天祿)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나라의 터전을 마련한 것은 비록 조종(祖宗)에서부터 한 일이나, 이런 훌륭한 분을 낳은 경사는 실지로 신의왕

후였으니, 아, 거룩하다. 왕후는 아들 6형제를 두었는데, 상왕이 그 둘째요, 우리 주상전하는 다섯째다. 맏아들

의 이름은 방우(芳雨)로 진안군(鎭安君)에 봉했는데 먼저 죽었고, 셋째 방의(芳毅)는 익안대군(益安大君)에 봉

했고, 넷째 방간(芳幹)은 회안대군(懷安大君)에 봉했으며, 여섯째 방연(芳衍)은 과거에 급제하고 일찍 죽었다.

딸 형제를 두었는데, 큰딸 경신궁주(慶愼宮主)는 찬성사 이저(李佇)에게 시집갔고, 둘째 경선궁주(慶善宮主)는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시집갔다.

상왕비(上王妃) 김씨(金氏)는 지금 왕대비로 봉했는데, 증 좌시중(贈左侍中) 천서(天瑞)의 딸이다. 우리 전하의

배(配) 정비(靜妃)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민제(閔霽)의 딸로, 맏아들은

원자(元子) 제(?)요, 그 아래 세 아들은 모두 어리다.

맏딸 정순궁주(貞順宮主)는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 경정궁주(慶貞宮主)는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진안대군은 증 찬성사 지연(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복근(福根)은 봉녕군(奉寧君)이요, 딸은

소윤(少尹) 이숙묘(李叔畝)에게 시집갔다. 익안대군은 증 찬성사 최인두(崔仁?)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아들을

낳았으니, 석근(石根)은 원윤(元尹)이요, 딸은 첨총제(僉摠制) 김한(金閑)에게 시잡갔다.

회안대군은 증 찬성사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아들을 낳았으니, 맹종(孟宗)은 의령군(義寧君)이요,

딸은 종부 령(宗簿令) 조신언(趙愼言)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신 권근이 일찍이 삼대의 성왕 후비(聖王后妃)의 덕을 보니, 도사(塗?)보다 더 훌륭한 이 가 없어서 시서(詩書)

에 기재되어 천고에 빛났는데, 신의왕후의 덕은 참으로 그의 아름다움을 짝할 수 있다.

다만 신 권근의 얕은 학식과 비졸한 필력(筆力)으로써 비록 거룩한 덕을 형용하려고 애를 썼으나 마치 천지를

그리는 것 같으니, 어찌 능히 그 만분의 일이나마 방불할 수 있겠는가.

감히 주아(周雅)의 대명(大明)ㆍ사제(思齊)의 뜻을 상고하여 삼가 명(銘)을 지어 손을 맞잡고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며 바친다.

그 명에, "상제(上帝)가 혁혁하여 유덕(有德)한 이를 내리시고 도왔으니, 사정을 둔 것이 아니고 백성의 대마루

를 위함일세. 그를 낼 제 어떻게 했던가. 먼저 부드럽고 아름다운 이를 내고 유덕한 이의 배필되었으니, 훌륭한

가정 이루어서, 애기 배고 애기 길러 상제의 영(靈) 여기 나타났네. 독실하게 성철(聖哲)을 낳으니, 하늘과 사람

이 의지하는 바일세. 성부(聖父)를 도와 모시고 크게 백성의 우두머리 되었구나.

친히 제정(帝庭)에 조회하여 우리 강토 보호했네.

나쁜 싹이 트려 할 제 그 기미 먼저 알아채고 깨끗이 숙청하니, 종묘사직이 비로소 편케 되었네. 성공하고 능히

양보하여 적장(嫡長)을 높였으니, 이륜(?倫)은 바로잡히고 기초는 더욱 튼튼해졌네.

또 장혁(墻? 형제간의 분쟁)을 만나서는 차마 형벌을 시행하지 못하고 형제 의리 보존하니, 우애 더욱 돈독하네.

덕도 높고 공도 높아 으레 황제 총애 얽혀서 내린 명령 거듭하니, 밝고 밝은 황제의고명과 빛나고 빛나는 금보

(金寶)를 우리 전하가 모두 받아서 만세를 길이 보존하네. 이런 왕업(王業)의 기초는 조종(祖宗)이 쌓은 것이나,

우리 성신(聖神) 탄생하기는 모두 왕후의 덕일세. 신은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말을 올릴 적에 구차한 소리 하지

않았으니, 만세에 밝게 전하여 하늘과 땅이 영구히 보존하리라." 하였다. 후릉(厚陵) : 군 동쪽 10리에 있다.

공정대왕(恭靖大王)의 능은 정안왕후(定安王后)와 합장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지(誌)에, "영락(永樂) 17년 기해년(1419) 가을 9월 26일 무진일에, 온인공용 순효대왕(溫

仁恭勇順孝大王)의 궁거(宮車)가 편안히 떠나니, 우리 성덕신공 상왕전하(聖德神功上王殿下)와 우리 주상전하

는 애모하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여 복(服) 입는 데 예를 다하고, 전하는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존호를 받들어

올렸다. 이듬해 봄 정월 3일 임인일에 예를 갖추어 송경(松京) 해풍군(海?郡)에 있는 정안왕후(定安王后)의 후

릉에 합장(合葬)하니,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대왕(大王)은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의 둘째 아들로 타고난 자질이 온순하고 어질며 공손하고

삼가며 용기와 지략이 남보다 뛰어나 고려에서 벼슬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지위가 장상(將相)에까지 이르렀

는데, 항상 태조를 따라 나가 싸워 공을 세웠다. 경오년(1390)에 군사를 거느리고 예산(禮山)에서 왜적을 잡아

첩서(捷書)를 올렸다. 임신년(1392) 가을 7월에 태조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영안군(永安君)에 봉했다.

무인년(1398) 가을 8월에 태조가 병환이 생기니, 권신(權臣)으로 어린 아들을 끼고 난리를 꾸미려 하는 자가 있

었는데, 우리 상왕께서 기미를 알아차려 깨끗이 제거하고 태조에게 청하여 대왕을 세자로 책봉(冊封)하였다.

9월 정축일에 태조의 내선(內禪)을 받았다. 경진년(1400) 봄 2월에 아들이 없으므로 우리 상왕을 세자로 봉하였

다.

그 해 겨울에 병환이 생겨 우리 상왕에게 선위(禪位)하자, 상왕은 대왕의 존호를 올려 인문공예(仁文恭睿)라 하

였다. 상왕은 우애하고 공경하며 효도를 극진히 하여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해졌다. 대왕의 춘추(春秋)는 63세인

데, 왕위에 계신 지 3년, 한가히 있으면서 병을 요양한 것이 19년이니, 이것이 대왕의 처음부터 승하(昇遐)할 때

까지의 슬프고 영화로운 일의 대강이다.

비(妃) 김씨(金氏)는 증 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천서(天瑞)의 딸로, 성질이 투기하지 않고 여러 첩들을 잘 대

우하였다. 우리 상왕이 존호를 올려 순덕왕대비(順德王大妃)로 하고 정안왕후(定安王后)라고 추시(追諡)하였다.

아들이 없고 궁첩(宮妾)의 자식으로 아들 15명과 딸 10명이 있었는데,

아들 원생(元生)은 의평군(義平君)에 봉하고, 다음은 무생(茂生)이요, 그 다음은 어린데, 지씨(池氏)가 낳았다.

군생(群生)은 순평군(順平君)에 봉했고, 그 다음 둘은 모두 어린데, 기씨(奇氏)가 낳았다.

그 나머지는 남녀 모두 어리다. 의평(義平)은 금천 감무(衿川監務) 최치숭(崔致崇)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1남 1

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순평(順平)은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설존(薛存)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하였다.

 

김태현(金台鉉)묘 : 덕수현 북쪽에 있다. 유탁(柳濯) 묘ㆍ이공수(李公遂) 묘 : 모두 덕수현 남쪽에 있다.

민제(閔霽) 묘 : 덕수현 서쪽에 있다. 익안대군(益安大君) 묘 : 군의 동쪽 12리에 있다.

고적 중방제(重房堤) : 군 남쪽 4리에 있는데, 고려에서 중방비보(重房裨補)라 칭하여,

매양 봄가을에 반주(班主)가 부변(府兵)을 거느리고 수축(修築)하여 남북 수문(水門)을 열어놓고 논에 물을 대

도록 했는데, 길이는 8리요, 넓이는 3리다. 고정주(古貞州) : 승천부(昇天府)의 옛터인데, 지금 승천포(昇天浦)

고성(古城) 북쪽 2리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정주의 치소(治所)는 또 옛터 서편에 있었는데, 지금은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한다.

 

덕수 폐현(德水廢縣) : 군 동쪽 30리에 있는데, 본래 고구려 덕물현(德勿縣)으로, 인물(仁物)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에서 그 이름을 그대로 두고 현종 9년(1018)에 개성현(開城縣)에 예속시키

고 상서도성의 관할로 만들었다. 문종 10년(1056)에 흥왕사(興王寺)를 덕수현에 새로 짓고, 현치(縣治)를 양주

(楊州)로 옮겼다가 17년(1063)에 직접 개성부에 예속시켰다. 공양왕 원년(1389)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본조

태조 7년(1398)에 감무를 없애고 풍덕에 붙였다.

 

장원정(長源亭) : 군의 서쪽 25리에 있다.

○ 도선(道詵)의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에. "서강(西江) 가에 군자어마명당(君子御馬明堂) 터가 있는데,

태조가 통일하던 병신년부터 1백 20년이 되는 해에 이르러 여기에 집을 지으면 나라의 운수가 오랫동안 계속된

다." 하였다. 문종(文宗)이 태사령(太史令) 김종원(金宗元)에게 명하여 터를 보고 정자를 서강(西江) 병악(餠岳)

남쪽에 짓게 하였는데, 또 서문석(瑞文石)을 정자 아래에 있는 연못 속에서 얻었다.

 

○ 고려 예종(睿宗)이 장원정에서 놀다가 곽여(郭輿)의 시(詩)에 화답하기를. "별관(別館)에서 사람 만났는데,

적선(謫仙)인 양하구나.

다락에 올라 함께 저문 강 오가는 배 바라보네. 읊는 속에 좋은 경치 고루 찾아 시필(詩筆)을 괴롭히고, 웃음 끝

에 기쁜 생각을 얻어 취한 자리 누비도다.

단풍잎ㆍ국화꽃은 오늘이 한창인데, 푸른 버들 고운 풀은 지난해 생각나게 하는구나. 다만 친한 뜻을 가지고 시

태(時態)를 잊었는데, 차마 광음(狂吟)으로 좋은 시에 화답할쏘냐. 땅거미 진 물가에 게 잡는 불 비쳐 오고, 해

지는 마을 밖엔 저녁 연기 일어나누나. 자욱한 바다 기운 바람이 몰고 가니, 가을 밤에 뜬달 푸른 하늘에 비쳤다."

하였다.

 

○ 곽여(郭輿)의 시에, "거둥 길 봄 바람이 나 혼자 먼저 오니, 말 머리에 가득한 봄빛, 강천(江天)에 들어왔네.

들판에 새로 나온 풀엔 햇빛이 따뜻하고, 이궁(離宮)을 싸도는 물, 검은 연기 일어나네. 이슬비에 새 소리는 나

물 캔 밭에 지저귀고, 푸른 물가 사람들의 말소리는 낚싯배에 들려오네. 거둥 행차 이미 가까웠고 꽃다운 시절

재촉하니, 청명(淸明)에 반드시 노는 자리 주시기를 기다리지 않았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바다를 굽어보는 누대(樓臺) 반공중에 솟았으니, 분명히 수정궁(水精宮 용궁)을 그

려낸 듯하구나. 하늘은 해와 달을 보내 처마 끝에 닿았고, 연못은 산과 물을 모아 자리 가운데 들어오네.

제비는 살구꽃 비에 나직이 날아들고, 꾀꼬리는 버들 바람에 고요히 울어 보내네. 임금의 수레 조만간 여기 와

머물 것이니, 어쩌면 앞마을 머리 허연 늙은이 소식 물을 듯하네." 하였다.

 

○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높고 높은 쌍 대궐 강가에 임했으니, 맑은 밤에 티끌 한 점 전혀 없구나.

바람이 손의 배를 보낼 제 구름 두어 조각이, 이슬은 대궐 기와에 엉겼는데 구슬 몇 방울이라. 푸른 버들 속 여덟

아홉 집은 문 닫았고, 밝은 달 아래 서너덧 사람은 발 걷고 앉았네. 까마득한 봉래(蓬萊 신선이 있다는 삼신산의

하나)는 어디에 있느냐. 꿈 길 깊었는데 꾀꼬리 청춘(靑春)을 노래하네."하였다.

 

○ "옥루(玉漏) 소리 뎅겅뎅겅하고,

달은 공중에 걸렸는데, 한 봄의 흥취는 모란꽃에 바람 불도다. 작은 마루에 발을 걷으니 봄 물이 푸르렀는데,

사람은 봉래의 까마득한 가운데 있구나." 하였다.

 

수강궁(壽康宮) : 충렬왕 4년(1278)에 수강궁을 덕수현 마제산(馬蹄山)에 지었는데, 이 때부터 항상 여기서

사냥을 구경했다.

 

○ 곽예(郭預)의 시에, "언덕 위에 비가 막 개니, 불탄 자리에 봄 빛이 새롭구나. 한 마리 매[鷹]는 빠르기 화살

같고, 만 마리 말은 구름처럼 모였네. 꿩은 곤경에 빠졌는데 또 개를 만났고, 노루는 어쩔 줄 몰라 사람을 피하지

않네. 장양부(長楊賦)를 짓지 못했으니, 간원(諫垣)의 신하로서 부끄러운 일일세."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교전(郊甸)에 가을이 일찍 드니, 임금의 행차 거둥하였네. 관어(觀魚)는 옛날에도

비루하게 여겼는데, 강무(講武 군사훈련)는 성스런 꾀 깊구나. 고각(鼓角)이 울려 오니 푸른 강 움직이고, 정기

(旌旗)가 나부끼니 대낮이 그늘지네. 글 잘하는 신하 많이 따랐으니, 반드시 우잠(虞箴) 바침을 보리라." 하였다.

 

임해궁(臨海宮) : 옛터는 승천포 서안(西岸)에 있다. 보법사(報法寺) : 말흘산(末訖山)에 있다.

 

○ 이색의 기에, "왕성(王城) 남쪽 백마산 북쪽에 큰 절이 있는데, 태조 비 유씨(柳氏)가 희사한 집으로서 그 시

주한 토지와 백성이 지금까지 있다. 중간에 없어진 지 오래 되었는데, 시중(侍中)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공

(尹公)이 선원법온화상(禪源法蘊和尙)과 더불어 함께 고쳐 짓기로 약속하고, 지정(至正) 계미년(1343)에 시작

하여 공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 또 상의하기를, '대장경(大藏經)은 비치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에 강절(江浙

중국 절강성)에 가서 가져 왔으니 무자년(1348) 일이요, 그 집 서당(西堂)을 치우고 대장경을 보관했으니 임진

년(1352) 일이요, 불당(佛堂)을 이미 짓고 범패(梵唄)의 도구와 날마다 사용하는 물건은 하나도 빠진 것이 없으

므로, 낙성 예회(落成禮會)를 차렸으니 계사년 일이다.

신축년(1361)에 낙성 중회(落成中會)를 차렸는데, 겨울에 사적(沙賊)에게 유린당하여 불당ㆍ기명ㆍ불경ㆍ불상

이 보존된 것이 거의 드물었다. 나라에서 경성(京城)을 수복한 뒤에 대강 보수하고,

조계선사(曹溪禪師)를 맞아 행재주석(行齋主席)을 시켰으니 갑진년(1364) 일이다.

 

흥왕사(興王寺) : 옛터는 덕적산(德積山) 남쪽에 있다.

 

○ 이곡(李穀)의 기에, "지금 천하에서 묘식(廟食 큰 당에서 제사지내는 것)하는 이로 가장 성대한 것은 석씨

(釋氏)ㆍ노씨(老氏 노자인데 신선의 시조)ㆍ공씨(孔氏)인데, 공씨 사당에 변두(?豆)하는 일은 유사(有司)가 있

어서 감히 사적으로는 간섭하지 못하고, 대개 보본(報本 옛 어른을 추모하는 것)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석씨와 노씨로 말하면 그 사당과 화상을 차려 놓는 것이 정한 제도와 일정한 장소가 없으며, 그를 숭봉

하는 사람도 공사(公私)ㆍ귀천(貴賤)할 것 없이 모두 섬길 수 있고, 또한 복을 비는 사람도 그러하다.

우리나라는 땅이 비록 극동(極東)에 있긴 하나 서방의 불교를 행한 것은 가장 앞선다.

왕성 남쪽 20리에 흥왕사란 절이 있고, 절 안에 흥교원(興敎院)이란 원이 있는데, 실로 문왕(文王)이 창건한 것

으로 동방의 거찰(巨刹)이다. 천도(遷都)할 무렵에 절이 불타서 여러 차례 고쳤으나 여러 번 헐려, 완전히 복구

하지 못하였다. 지순(至順) 경오년(1330)에 화엄 제사(華嚴諸師)들이 서로 말하기를, "문왕이 이 절을 처음 지

을 적엔 아주 굉장하고 화려했으며, 또 토지도 넓히고 재산도 넉넉히 대주어서 다른 절보다 낫도록 힘쓴 것은

대개 우리 불법(佛法)을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세상에서 하는 일이 없이 남에게 얹혀 먹고 입으며 그럭저럭 해를 넘기면서 원문(院門)이 쓰러

지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한 채 수리하지 않으니, 이것은 우리의 허물을 무겁게 하는 것이다." 하고, 인하여 각기

바랑에 모아둔 것을 내놓기로 약속하였다. 그 돈으로 재목을 사들이고 공사를 시작하여 본원(本院)을 새롭게하

고, 또 정조(晶照)와 달환(達幻) 두 스님을 서울에 달려 보내 낙성회(落成會)를 준비하게 하였다.

그 뒤 9년 만에 원(院)이 완성되니, 그 전당(殿堂)과 낭무(廊?)는 옛 것을 헐어 버리고 새로 지은 것이 칸수로 따

지면 1백 60칸이다. 그 해 여름에 달환스님이 법회(法會)에 쓸 옷이며 그릇 등 여러 가지 의식에 쓸 물품을 가지

고 서울에서 돌아오고, 또 전서사(典瑞使) 신당주(申當住) 등이 태황태후(太皇太后)의 명을 받들어 향폐(香弊)를

내려 불사(佛事)를 빛내니, 가을 8월 병술일에 비로소 광학회(廣學會 불경 강연하는 모임)를 열었는데, 날짜로는

15일이요, 사람 숫자로는 2백 명이며,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 모두 2백 명이요, 왕성(王城) 안팎의 남녀들로 몰려

와 공양(供養)하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향화(香華)의 공양하는 물품은 모두 그 정결함을 이루었고,

경문을 외며 강의하는 것은 반드시 극진한 데 이르러서 마치 직접 구회(九會)에 참여하여 구담(瞿曇 부처)의 설

법을 듣는 것같이 성대하였다.

회를 마친 뒤에 달환 스님은 그 전말을 기록하여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정조스님과 함께 서울

에 들어가 이 회를 준비하였는데, 정조는 불행하게도 먼저 죽고 내가 이 일을 치루었다. 또 여러 스님의 뜻을 후

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기를 지어달라.' 하였다.

나는 일찍이 석씨의 글을 읽지 않아서 이른바 운운하는 것을 못하니, 우선 유교의 말을 가지고 말하겠다.

무릇 사람은 추우면 옷 입고 배고프면 밥 먹으며, 이로운 일은 하고 해로운 일은 피하며, 또 삼강오상의 아름다

움과 예의의 바름을 알아서 금수(禽獸)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누가 가르치고 누가 전해서 그런 것이냐. 어찌 그

근본을 생각하여 갚으려하지 않느냐. 유교는 공씨(孔氏)를 배우는 것이다.

그 사당과 학교가 허물어져 가는 것을 보고 개연(慨然)히 마음과 눈이 움직이는 사람은 대개 적은데, 석씨의 무

리들은 교화시키고 달래서 그 집을 새로 짓고 그 사업을 넓히기를 달환 스님처럼 하는 이가 많으니, 그 스승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 무리가 된 사람들은 그 스승의 말에 힘써서 애당초

그 도(道)가 어떠한지 계산하지 않으니, 불교가 성행하고 복을 구하는 사람이 날마다 불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한 번 모임에 모인 중들과 아울러 시주한 사람의 성명을 모두 아래에 기록한다." 하였다.

 

○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한(漢) 나라의 이궁(離宮)이 36개인데, 철봉(鐵鳳)이 공중에 가로놓였고 이무기는

뿔을 내밀었네. 임금의 수레 소리 은은하니, 언제 돌아오려나. 고기 뛰는 것 침침한데 봄 풀은 푸르렀네.

고단(古壇)을 깨끗이 쓸고 별에 치성한 뒤에, 황금으로 청원찰(靑鴛刹)을 지었네. 난초 반찬ㆍ혜초 음식은 왕실

부엌을 기울이니, 세월이 아무리 오래되어도 근원이 마르지 않으리라. 새벽 종 우레처럼 울리니, 중의 걸음 느

릿느릿 오리처럼 모여드네. 강물을 거꾸로 쏟아낸 듯 산호(珊瑚)같은 혀로 설법할 제, 땅에 가득히 꽃 비가 쏟아

지네.

누가 주관했기에 이처럼 시기를 어기지 않는가. 육신대사(肉身大士 육신으로 대사가 됨)인 우리 막내 숙부로세."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봄 바람 행인 옷에 불어오니, 행인은 흥왕사 옛터에 말을 멈추었네. 불당과 대궐은 모두

없어지고, 무너진 담 남은 주춧돌이 사람의 한숨 자아내네. 밭 머리 들꿩 갑자기 날아오르고, 산 위에 뜬 구름

이따금 모였다 흩어진다. 옛날 문종(文宗)이 거둥할 때엔 행차 모신 채색 비계 산보다 더 높았네. 서울서 여기까

지 비단 깃발 뻗쳤으니, 바라보는 눈 있는 사람은 모두 둥그렇게 뜨고 보았네. 역적 놈 불 장난에 초토(焦土)가

되었느니, 붉은 기와 그림 기둥 남은 것 하나 없구나. 화려한 건 누가 만들었고 난리는 누가 꾸몄는가.

흥폐(興廢)한 자취 조목조목 청사(靑史)에 써있네. 가슴 헤치고 옛 일 생각하니, 너무 처참하구나.

가려다 가지 못한 채 공연히 머뭇거리네." 하였다.

 

명환 고려 주열(朱悅) : 고종조(高宗朝)에 승천부(昇天府)의 원으로 있었다.

본조 성봉조(成奉祖) : 군수가 되어 정사를 가장 잘했다.

 

인물

고려 유천궁(柳天弓) : 태조 신혜왕후(太祖神惠王后)의 아버지이다. 처음에 태조가 궁예(弓裔)의 장군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貞州)를 지나가다가 오래 된 버드나무 아래에서 쉬는데 개천 가에 매우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 것을 보고 뉘 집 딸이냐고 물으니, 이 마을 장자(長者) 천궁의 딸이라고 대답하였다.

태조가 그 집에 가니, 유천궁은 융숭하게 대접하고 딸에게 잠자리를 모시게 하였다. 태조가 떠난 뒤에 전혀 왕

래하지 않았는데, 여자는 수절하고 중이 되었다. 태조가 그 소문을 듣고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다.

뒤에 배현경(裵玄慶) 등이 태조를 추대하면서 왕후에게 옷을 억지로 입히고 즉위하고서 원비(元妃)로 책봉하였

다. 유천궁은 벼슬이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유홍(柳洪) : 선조조(宣祖朝)에 무략(武?)으로 출세했다.

《춘추좌전(春秋左傳)》과 《병가비결(兵家?訣)》에 통달하여 항상 나라에 어렵고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옛 일

을 인용하여 계책을 결정하니, 당시 사람들이 존중했다.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고, 시호는 광숙(匡肅)이다.

유인저(柳仁著) : 유홍의 아들로, 예종조(睿宗朝)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가문이 존귀하고 훌륭하였지만 부귀하다고 해서 남에게 교만하지 않았다. 시호는 정간(貞簡)이고, 예종의 묘정

에 배향했다. 이소(李?) : 본관은 덕수이다. 고종조에 집안을 일으켜 과거에 급제하여 합문지후 문림랑(閤門祗

候文林郞)을 역임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으며, 지삼사사(知三司事)를 지냈다.

 

이윤온(李允?) : 이소의 아들로 충렬왕조에서 태부 소윤(太府少尹)ㆍ민부 전서(民部典書)를 지냈고, 충혜왕조

에서 선충경절공신 수 첨의정승 덕수부원군(宣忠勁節功臣守僉議政丞德水府院君)에 추증했다.

 

이천선(李千善) : 이윤온의 아들이다. 공민왕조에서 기씨(奇氏) 일족을 목 베고 중국 조정에 아뢴 공으로 금자

광록대부 수사공주국 낙안백(金紫光祿大夫守司空柱國樂安伯))을 제수하였고, 시호는 양간(良簡)이다. 사람됨

이 풍채가 아름다워 공민왕이 화상을 그려서 하사하였다.

 

이인범(李仁範) : 이천선의 아들로, 젊어서부터 학문이 넓고 문장에 능했다. 공민왕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좌정

언 지제교(左正言知製敎)를 지냈다. 단성익조공신(端誠翊祚功臣)의 호를 하사하고,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政

堂文學藝文館大提學)을 제수하였다.

 

본조 이양(李揚) : 이인범의 아들로 여러 벼슬을 거쳐 공조 참의에 이르렀다. 죽은 뒤에 공조 판서에 증직했다.

이명신(李明晨) : 이양의 아들로, 벼슬은 지돈령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강평(康平)이다.

이변(李邊) : 나이 17세에 학문을 시작하여 과거 급제하고, 벼슬이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정직하여

안팎[城府]이 없고 남의 잘못을 보면 면전에서 책망하였다. 한어(漢語)와 이문(吏文)을 잘하여 여러 번 중국에

사신으로 갔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이름을 알았다.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신증 이의무(李宜茂) : 이명신의 손자로, 젊어서부터 문장에 능하여 한때에 이름이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는데, 연산조(燕山朝)에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관에서 죽었다. 지금 임금의 조정

에서 다섯 아들이 과거에 급제했기 때문에 벼슬을 추증하고 제사를 내렸다. 뒤에 또 의정(議政)에 추증했다.

 

이거(李?)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성품이 굳세고 곧았다.

이빈(李?) : 이명신의 증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우거 고려 이공수(李公遂) : 별장을 덕수현에 두고 스스로 남촌 선생(南村先生)이라 불렀다.

익산군(益山郡) 인물편에 자세히 나왔다.

 

[비고]

 

연혁 효종(孝宗) 기축년(1649)에 부로 승격시켰다가, 순조(純祖) 23년(1823)에 고쳐서 개성부(開城府)에 속하

게 하였는데, 고종 3년(1866)에 복구하고 32년(1895)에 개성을 넣었다가 잠시 후 다시 군을 두었다.

《文獻備考》

 

 

삭녕군 朔寧郡

 

동으로 연천현(漣川縣) 경계까지 22리, 강원도(江原道) 철원부(鐵原府) 경계까지 41리,

남쪽으로 장단부(長湍府) 경계까지 28리, 서쪽으로 황해도 토산현(兎山縣) 경계까지 11리,

북쪽으로 강원도 안협현(安峽縣) 경계까지 21리,

강원도 평강현(平康縣) 경계까지 61리, 서울과의 거리는 1백 9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소읍두현(所邑豆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삭읍(朔邑)으로 고쳐서

토산군(兎山郡)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승령현(僧嶺縣)은 본래 고구려 승량현(僧梁縣)인데 : 비물(非勿)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동량(?梁)이라 고치고

철성군(鐵城郡)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9년(1018)에 두 고을을 모두 동주(東州)에 붙였다. 예종(睿宗)이 비로소 승령감무(僧嶺監務)를 두고

삭녕과 합쳤다. 본조 태종 3년(1403)에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외가 고향이기 때문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

시키고 승령을 붙이게 하였다. 14년에 안협현(安峽縣)을 없애고 예속시켜서 안삭군(安朔郡)을 만들었다.

16년에 다시 안협현을 설치하고 드디어 옛 이름으로 환원했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각 1명씩이다.

군명 소읍두(小邑豆)ㆍ삭읍(朔邑)ㆍ안삭(安朔)ㆍ승령(僧嶺)ㆍ비물(非勿)ㆍ동량(?梁).

 

성씨 본군 : 송(宋)ㆍ조(曺)ㆍ오(吳)ㆍ김(金)ㆍ신(辛)ㆍ신(申). 박(朴) : 속(續). 승령 : 오(吳)ㆍ최(崔)ㆍ이(李)ㆍ

심(沈)ㆍ송(宋) : 인의(仁義).

 

풍속 풍속은 순후(淳厚)하다 : 박추(朴?)의 시에, "풍속은 순후하고 민물(民物)은 한가하네." 하였다.

 

산천

남산(南山) : 군과의 거리가 3리이다. 승령산 : 군의 동쪽 15리 승령현에 있다.

성산(城山) : 군 동쪽 5리에 있는데,

작은 성터가 있다. 영원산(寧原山) : 군 동쪽 7리에 있다. 영원산(靈原山) : 군 남쪽 16리에 있다.

흥성산(興盛山) : 군 동쪽 25리에 있다. 검질산(儉秩山) : 군 동쪽 15리에 있다.

수청산(水靑山) : 군 동쪽 55리에 있다.

말탄산(末呑山) : 군 동쪽 50리에 있는데, 그 산 동쪽이 곧 철원부(鐵原府)

효성산(曉星山)이다.

강화평(江華坪) : 군 동쪽 40리에 있다. 방축평(防築坪) : 군 동쪽 45리에 있다.

삭녕도(朔寧渡) : 군 남쪽 5리에 있다.

장단부(長湍府) : 임진도(臨津渡)에 자세히 나왔다.

손청탄(孫廳灘) : 군 동쪽 20리에 있는데, 근원은 강원도 철원부 고암산(高巖山)에서 나와서

군의 옛 승령현 서쪽을 지나 이 여울이 되었다.

 

북천(北川) : 군의 북쪽 7리에 있는데, 바로 손청탄 하류로서 군 남쪽에 이르러 삭녕도로 들어간다.

 

토산 실ㆍ삼ㆍ오미자ㆍ벌꿀ㆍ누치ㆍ쏘가리ㆍ파[蔥]: 고을 사람들이 파를 많이 심어 이익을 본다.

 

신증 녹반(綠礬) : 군의 북쪽 금동사(金洞寺)에서 난다.

 

신증 궁실 객관 : 홍귀달(洪貴達)의 시에, "산은 첩첩이 돌아들고 물은 구불구불 흐르는데, 난간에 의지해

앉으니 눈이 훤하네. 책상 머리에서 종일토록 처리할 문서(文書)는 적은데, 산 새 울음소리 정(情)이 있는 듯

하여라." 하였다.

 

학교 향교 : 군의 서쪽 2리에 있다.

불우 관음사(觀音寺) : 영원산(靈原山)에 있다. 장군사(將軍寺) : 홍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하나는 성산에 있고 하나는 승령산에 있다.

여단 : 군 북쪽에 있다.

고적 고승령(古僧嶺) : 현 동쪽 30리에 있다.

고삭녕(古朔寧) : 삭녕도 언덕 옆에 옛터가 있는데, 정통(正統) 신유년(1441)에 지금의 읍으로 옮겼다.

 

인물

본조 최항(崔恒) : 세종(世宗) 갑인년(1434)에 별시(別試)에 장원하고, 정난좌익좌리공신(靖難佐翼佐理功臣)에

참여하여 벼슬이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대제학을 맡았으며 사륙문(四六文)을 잘하여 한때의 표

문(表文)과 전문(箋文)은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신증 본조 열녀 효양비(孝養非) : 안석손(安碩孫)의 아내이다. 일찍이 남편을 따라 길을 가는데, 호랑이가 남편

을 물고 가자 돌을 던지며 소리를 지르고 쫓아가니, 호랑이가 마침내 버리고 달아났다.

연산(燕山) 2년(1496)에 정려문(旌閭門)을 세웠다.

 

제영 산세북래부단청(山勢北來不斷靑)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험한 곳 다 지나 삭녕에 이르니, 사다리 길에

얼음 미끄러워 말이 비틀거리네. 강물은 동으로 흐르는데 끝없이 희고, 산 줄기는 북쪽에서 왔는데 한없이 푸

르구나. 가만히 찬 솔이 고운 소리 보냄을 들었고, 편평하게 가로지른 산의 그림 병풍 쳐놓은 걸 보았네.

사또의 좋은 솜씨 얽힌 것은 풀어주니, 봄풀이 해마다 송사하는 뜰에 가득하여라." 하였다.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비고]

 

연혁 세종 23년(1441)에 치소(治所)를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 옛 치소는 동쪽으로 5리에 있다.

관원 군수 : 장단진 관병마 동 첨절제사를 겸하였다. 1명이다.

 

토산 인삼ㆍ녹용(鹿茸)ㆍ자초(紫草)ㆍ송이버섯[松?]ㆍ꿀ㆍ눌어(訥魚)ㆍ쏘가리[錦鱗魚] 등이 있다.

성지 고성(古城) : 동쪽으로 5리에 본읍의 옛 치소가 있다. 산 위의 작은 성에 남은 터가 있다.

역참 삭녕역ㆍ봉곡역(烽谷驛) : 승령(僧嶺)이다.

 

방면 읍내면 : 끝이 20리이다. 남면 :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동면 : 처음이 10리, 끝이 22리이다.

서면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마장면(馬場面) : 동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인목(寅目) : 동북쪽으로 처음이 20이, 끝이 30리이다. 내문(乃文) : 동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진도 우화정진(羽化亭津) : 남쪽으로 5리에 큰 길이 있다. 삭녕도(朔寧渡) : 고읍의 남쪽으로 5리에 있다.

사원 표절사(表節祠) : 정조(正祖) 신해년(1791)에 사액하였다.

 

심대(沈垈) : 자는 공망(公望), 호는 서돈(西墩)으로,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임진왜란 때에 전사하였다.

벼슬은 본군 군수이고 증 영의정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양지(梁誌) : 자는 언신(彦信)인데, 본군 군수로서 전사하였다.

벼슬은 증 이조 판서이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윤경원(尹敬元) : 전사했다. 벼슬은 증 이조 판서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강수남(姜壽男) : 자는 인수(仁?)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전사하였으며, 벼슬은 증 이조 판서이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마전군 麻田郡

 

동으로 연천현(漣川縣) 경계까지 19리, 남으로 적성현 경계까지 7리, 서로 장단부 경계까지 17리,

북으로 삭녕군 경계까지 21리, 서울과의 거리는 1백 7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마전천현(麻田淺縣)인데, 신라에서 임단(臨湍)으로 고치고 우봉군(牛峯郡)의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장단에 붙여서 상서도성의 소관으로 만들었다.

문종 17년(1063)에 직접 개성부에 예속시켰고, 뒤에 감무를 두었다가 곧 적성현(積城縣)에 합병했다.

공양왕이 다시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1413)에 규례에 따라 현감으로 고쳤다.

문종 2년(1452)에 그 땅에 숭의전(崇義殿)이 있기 때문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각 1명씩이다.

군명 마전천(麻田淺)ㆍ이사파홀(泥沙波忽)ㆍ임단.

 

성씨 본군 : 전(田)ㆍ송(宋)ㆍ유(柳)ㆍ차(車)ㆍ어(於)ㆍ서(徐) : 속(續).

 

산천 미두산(尾頭山) : 군 동쪽 5리에 있다. 분석산(分石山) : 군 북쪽 10리에 있다.

염창산(鹽倉山) : 군 서쪽 5리에 있다. 징파도(澄波渡) : 군 동쪽 20리에 있는데, 곧 삭녕군 삭녕도 하류이다.

또한 연천현 편에 나온다.

 

후근도(朽斤渡) : 군 남쪽 7리에 있는데, 징파도 및 양주(楊州)의 한탄[大灘] 물이 여기서 합류한다.

 

토산 실ㆍ삼ㆍ누치ㆍ쏘가리ㆍ게.

 

신증 궁실 객관 : 홍귀달(洪貴達)의 중수기(重修記)에, "마전은 본래 작은 현인데, 군으로 승격한 것은 무엇 때문

인가? 우리 태조가 하늘 뜻에 순응하여 혁명(革命)하고서 왕씨(王氏)의 제사가 아주 없어질까 염려하여 여기다

가 사당을 짓고 왕씨의 시조(始祖) 이하로 몇 대의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이다.

문종조(文宗朝)에 와서 왕씨의 후손을 찾아서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그 사당을 이름짓기를 숭의전(崇義殿)

이라 하고, 인하여 그 고을의 이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땅이 더 넓어지지 않고 백성이 더 많아지지 않아서 읍(邑)의 쇠잔함이 옛날과 같으니, 사명(使命)을 받들

고 오는 사람은 침식할 곳이 없고 이졸(吏卒)은 평상시에도 비바람조차 가리지 못하며, 학사(學舍)는 허물어져

선생과 제자가 있을 곳이 없다.

군수의 아문(衙門)에 이르러서도 초가집에 나무 울타리를 둘러서 자못 관가(官家) 같지 않으니, 매양 지붕을 일

때면 백성들이 매우 귀찮게 여겼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없애는 것이 편한데,

그래도 감히 없애지 못하는 것은 숭의전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홍치(弘治) 무오년(1498)에 진산(晉山) 강 상공(姜相公)이 나와서 경기 안찰사(京畿按察使) 가 되었을 적에 군

사(郡舍)가 그 꼴이 된 것을 보고 개연히 탄식하고, 이에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마전 고을은 너무 조잔(凋殘)

하여 어느 도에도 그런 데는 없으니, 급히 새로 지어야 하겠다.

다만 그 고을에 사는 백성이 너무 적으므로 만약 본 고을의 백성들의 힘을 쓴다면 공사를 빨리 마칠 수 없으니,

본도(本道)의 수군(水軍) 1백 명을 주어서 그 역사를 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얼마 되지 않아 지금 군수 정후(鄭侯)가 부임하여 관우(館宇)를 두루 돌아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감당하여 처리

할 수 없을 듯이 하다가, 강 상공이 아뢴 것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아, 내가 어떻게 감히 힘쓰지 않겠는가.

비록 조명(朝命)이 없어도 진실로 마땅히 나의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왕명이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내가 어찌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여기서 본군(本軍)을 부리고 본 고을의 이졸(吏卒)로 보충하되,

평민들은 부역에 참여하지 않았다.

먼저 객사(客舍)를 짓고 다음에 향교(鄕校)를 짓고 그 다음에 군수 아문을 지었는데,

모두 1백 50여 칸이다. 초가를 기와로 바꾸고 나무 울타리를 담으로 쌓았는데, 1년도 못 되어 모든 관우가 아주

새로워졌으니, 부지런히 마음을 쓴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얼마 있다가 또 나에게 편지를 보내 기문(記文)을 구하는 데, 글이야 내가 어찌 능하겠는가. 그러나 정후와는 같

은 마을 친구로서 정후의 마음 씀을 나만큼 깊이 아는 이가 없으니,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말하기를,

'마전에 고을이 생기기는 대개 고구려에서 시작하여 신라와 고려를 거쳐 성조(聖朝 이조)에까지 이르렀으니, 지

금까지 몇 년이나 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절월(節鉞)을 잡고 동장(銅章 각 지방의 감사가 가지는 구리로 만든

도장)을 찬 사람이 또 몇 사람이나 되었는지 알 수 없는데, 강상공 같이 마음을 쓰고 정후 같이 보람을 본 사람이

몇이나 있었던가.

그러나 짓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니, 잘 짓고 또 잘 지킨다면 어찌 전처럼 영락해지는 폐단이

있겟는가. 이 뒤에 지금을 계승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강상공과 정후와 같도록 한다면, 어찌 고을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강 상공의 휘(諱)는 귀손(龜孫)이요, 정후의 이름은 연경(延慶)이다.' 하였다." 하였다.

 

학교 향교 : 군의 동쪽 1리에 있다.

원우 동지원(東指院) : 징파도(澄波渡) 언덕에 있다.

사묘 숭의전(崇義殿) : 군 서쪽 5리에 있는데, 본조 태조 원년(1392)에 예조에 명하여 마전현에 사당을 짓고,

고려 태조(太祖)ㆍ혜종(惠宗)ㆍ성종(成宗)ㆍ현종(顯宗)ㆍ문종(文宗)ㆍ원종(元宗)ㆍ충렬왕(忠烈王)ㆍ공민왕

(恭愍王)을 제사하게 하고 제전(祭田)을 주었다.

세종(世宗) 7년(1425)에 유사(有司)들이 말하기를, "나라의 종묘(宗廟)에도 다만 오실(五室)을 제사하는데,

전조(前朝)의 사당은 팔위(八位)를 제사하니, 예에 맞지 않는다." 하였다.

이에 태조ㆍ현종ㆍ문종ㆍ원종만 남겨놓고, 봄ㆍ가을 이중삭(二仲朔)에 향과 축문을 보내 제사했다.

문종(文宗) 2년(1452)에 고려의 후손 왕순례(王循禮)를 찾아서 그 제사를 맡아 지내게 하고, 그 사당 이름을

숭의전이라 하여 왕순례를 부사(副使)로 삼았다.

 

복지겸(卜智謙)ㆍ홍유(洪儒)ㆍ신숭겸(申崇謙)ㆍ유금필(庾黔弼)ㆍ배현경(裵玄慶)ㆍ서희(徐熙)ㆍ강감천

(姜邯贊)ㆍ윤관(尹瓘)ㆍ김부식(金富軾)ㆍ김취려(金就礪)ㆍ조충(趙?)ㆍ김방경(金方慶)ㆍ안우(安祐)ㆍ이방실

(李芳實)ㆍ김득배(金得培)ㆍ정몽주(鄭夢周) 등을 배향했다.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 서쪽 3리에 있다.

여단 : 군 북쪽에 있다.

 

총묘 심덕부(沈德符) 묘 : 군 서쪽 장양촌(長楊村)에 있다. 윤호(尹壕) 묘 : 군 서쪽 10리에 있다.

 

열녀 본조 홍씨(洪氏) : 관찰사 이윤인(李尹仁)의 아내인데, 이윤인이 죽자 친히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

으로 상식(上食)을 하고 복(服)을 마치고 7년 동안을 처음과 같이 했다. 일찍이 두 차례나 화재를 만났는데,

재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급히 신주(神主)를 받들고 나오니, 조금 있다가 여막이 모두 타버

렸다. 무슨 음식이든지 맛이 있는 것이면 아무리 변변치 못한 것이라도 반드시 올렸으며, 죽을 때까지 향내나는

나물을 먹지 않고 무색 옷을 입지 않았으니, 온 고을이 탄복했다. 이 일을 조정에 아뢰어 정려문을 세웠다.

 

제영 관가(官家)는 쓸쓸하여 촌 집 같구나 : 이원(李原)의 시에, "문 밖에 뽕나무 심고 또 삼 심으니,

관가는 쓸쓸하여 촌 집 같구나. 객 중에 흥을 타고 시(詩) 생각하는 곳에, 비 뒤에 장미꽃 활짝 피었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1895)에 삭녕(朔寧)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연혁 현종(顯宗) 3년(1662)에 또 연천(漣川)으로 동왕(同王) 4년에 다시 나누었다.

 

방면 군내면(郡內面) : 끝이 15리이다. 동면 :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서면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북면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화진(禾津) :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진도 유연진(楡淵津) : 동쪽으로 7리에 있으며 연천과 통한다.

후연진(朽淵津) : 남쪽으로 7리에 있으며 양주(楊州))와 통하는데, 적성(積城)과 아울러 징파강(澄波江)에 있다.

묘전 숭의전(崇義殿) : 서쪽으로 10리 강변에 있으며, 본조 태조 임신년(1392)에 세웠는데, 처음에는 여덟 임금

을 배향했으나, 세종 7년(1425)에 네 임금으로 고쳐 배향했다. 문종(文宗) 2년(1452)에 이름을 숭의전이라 고치

고 여러 신하들을 배향하였다. 고려 태조ㆍ현종ㆍ문종ㆍ원종(元宗).

 

배향 복지겸(卜智謙) : 처음의 이름은 사현(沙現)이며, 본관은 면천(沔川)이다. 벼슬은 태사(太師)이며,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홍유(洪儒) : 처음의 이름은 술(術)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벼슬은 태사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신숭겸(申崇謙) : 처음의 이름은 능산(能山)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벼슬은 태사이며, 시호는 장절(壯節)

이다.

 

유금필(庾黔弼) : 평산 사람으로 벼슬은 대광(大匡),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배현경(裵玄慶) : 처음의 이름은 백옥(白玉)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벼슬은 대광이며,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서희(徐熙) : 본관은 이천(利川)으로, 호는 복천(福川)이다. 벼슬은 태보내사령 시장위 송검교 병부 상서

(太保內史令諡章威宋檢校兵部尙書)이다.

 

강감찬(姜邯贊) : 처음의 이름은 은천(殷川)이며, 본관은 금천(黔川)이다.

벼슬은 천수군 개국후(天水郡開國侯)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윤관(尹瓘) : 자는 동현(同玄)이며, 본관은 파평(坡坪)이다. 벼슬은 태보 시중(太保侍中),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김부식(金富軾) : 본관은 경주이며, 호는 뇌천(雷川)이다. 벼슬은 시중태자 집현전 대학사 낙랑군 개국후

(侍中太子集賢殿大學士樂浪郡開國後)로 치사 하였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김취려(金就礪) : 본관은 언양(彦陽)이고, 벼슬은 태위 시중(太尉侍中)이며,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조충(趙沖) : 자는 담약(湛若)이며, 본관은 횡성(橫城)이다. 벼슬은 태위평장사 증시중(太尉平章事贈侍中)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방경(金方慶) : 자는 본연(本然)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벼슬은 삼중 대광 첨의중찬 상락공

(三重大匡僉議中贊上洛公)으로 치사하였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안우(安祐) : 본관은 탐진(耽津)이며, 벼슬은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이다.

이방실(李芳實) :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벼슬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이다.

김득배(金得培) : 호는 난계(蘭溪)이며,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정몽주(鄭夢周) : 경도(京都) 문묘(文廟) 편에 있다.

 

영(令) : 왕씨(王氏)의 세습(世襲)이다.

 

미강서원(湄江書院) : 숙종(肅宗) 신미년(1691)에 건축하여 계유년(1693)에 사액(賜額)하였다.

허목(許穆) : 자는 문보(文甫), 호는 미수(眉?)이니,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벼슬은 우의정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연천현 漣川縣

 

동으로 영평현(永平縣) 경계까지 18리, 남으로 양주(楊州) 경계까지 13리, 서로 마전군 경계까지 15리,

북으로 삭녕군 경계까지 27리, 강원도 철원부 경계까지 16리, 서울과의 거리는 1백 4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공목달현(工木達縣)으로 웅섬산(熊閃山)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공성(功成)으로 고쳐서

철성군(鐵城郡)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에서 장주(漳州)로 고쳤는데, 장(漳)은 장(獐)으로도 쓴다.

성종(成宗) 14년(995)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고,

목종(穆宗) 8년(1005)에 없앴다가 현종 9년(1018)에 동주(東州)에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5년(1175)에 비로소 감무를 두어서 승령(僧嶺)을 겸임했고, 충선왕(忠宣王) 때에 왕의 이름을 피하

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본조 태종 13년(1413)에 규례에 따라 현감으로 만들었다.

14년에 마전현(麻田縣)에 합병하여 마련현(麻漣縣)으로 만들었다가 16년에 다시 갈라 현으로 만들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각 1명씩이다.

군명 공목달(工木達)ㆍ웅섬산(熊閃山)ㆍ공성(功成)ㆍ장주(漳州)ㆍ연주(漣州)ㆍ장포(獐浦)

 

성씨 본현 : 이(李)ㆍ전(全)ㆍ정(井)ㆍ정(鄭)ㆍ박(朴)ㆍ송(宋)ㆍ최(崔)ㆍ방(房)ㆍ형(邢)ㆍ김(金)ㆍ조(曺)ㆍ

전(田)ㆍ손(孫).

 

산천 보개산(寶蓋山) : 현 동북쪽 20리 철원(鐵原) 경계에 있다. 오봉산(五峯山) : 현 동쪽 15리에 있다.

견불산(見佛山) : 현 동쪽 15리에 있다. 가사평(袈裟坪) : 현 남쪽 10리에 있다.

차탄(車灘) : 현 남쪽 5리에 있는데, 근원은 강원도 철원부 서쪽 고을파(古乙坡)에서 나와

남으로 흘러 양주(楊州) 유탄(楡灘)으로 들어간다.

 

징파도(澄波渡) : 현 서쪽 45리에 있는데, 장단부 임진도 조에 자세하다.

 

○ 배중부(裵仲孚)의 시에, "징파 강물에 이끼 낀 바위 잠겼는데, 가랑비 비낀 바람 손의 배를 보내네.

맞은편 언덕 고기 잡는 마을에 술 있는 걸 알았으니, 흥이 나면 봄 옷[春衫] 맡기기 알맞겠네." 하였다.

 

○ 안축(安軸)의 시에, "옛 나루에 배는 잎새만한데, 날씨 추우니 물은 더욱 맑구나. 무너진 비탈엔 추한 돌 달렸

고, 끊어진 언덕엔 층층이 얼음 쌓였네. 낭조(狼鳥)는 가까워 쓸 만하고, 노는 고기는 깊어서 그물로 떠낼 수 없

구나. 사공을 감히 업신여길쏘냐. 그 손[手]은 사람 건너 주는 능력 있네." 하였다.

 

토산 실ㆍ삼ㆍ도기(陶器)ㆍ오미자ㆍ자초(紫草). 신증 순채(蓴菜)ㆍ쏘가리ㆍ누치.

 

학교 향교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옥계역(玉溪驛) : 현 북쪽 7리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말 머리는 앞 길을 찾는데, 새벽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네. 병든 눈엔 봄비가 컴컴

하고, 나그네 자취에 새벽 별이 흐르네. 홀로 마셔도 능히 취하고, 외로이 놀며 근심을 쏟네. 고향에 돌아온 지

겨우 며칠인데, 까마득하게 삼추(三秋)를 지낸 것 같네." 하였다.

 

송절원(松折院) : 현 동쪽 10리에 있다.

불우 오봉사(五峯寺) : 오봉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남쪽 2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총묘 강석덕(姜碩德) 묘 : 현 서쪽 17리에 있다.

 

제영 나무 빽빽하나 그래도 골짜기 감추고 :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나무 빽빽하나 그래도 골짜기 감추고,

처마가 훤하여 산을 가리지 않네. 시냇물 소리 베개 위에 들려오고, 구름 그림자 창 사에에 떨어지네." 하였다.

 

사면이 모두 푸른 산일세 : 최부(崔府)의 시에, "한 지방 형세 좋은 곳인데, 사면이 모두 푸른 산일세." 하였다.

새는 푸른 언덕으로 들어가고 : 성개(成槪)의 시에, "공사(公事) 끝내고 책상에 의지하여 우연히 남산(南山)

바라보니, 새는 푸른 언덕으로 들어가고, 구름은 푸른 바위 구명에서 나오네." 하였다.

 

양주(楊州)서 오는 길 높았다 낮았다 하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봄 진흙 미끄러워 말도 가기 어렵구나.

양주서 오는 길 높았다 낮았다 하네. 한탄[大灘]선 이미 얼음 얇을까 겁냈는데, 여러 영(嶺)을 바라보니 눈이

아직 그득하구나. 헌 모자 얇은 옷은 봄 추위 더하는데, 환정(宦情) 나그네 생각은 도리어 처량하구나.

연주(漣州)의 객관(客館)이 산에 의지해 조용하니, 베개에 기대어 조는 동안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연혁 현종 3년(1662)에 다시 마전(麻田)에 합하였다가 전패(殿牌)는 유실되어 없어졌다.

4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읍호 장포(獐浦) : 고려 성종(成宗)이 정한 것이다. 연천(漣川).

관원 현감(縣監) : 장단진 관병마 절제도위(長端鎭管兵馬節制都尉)를 겸한다. 한 사람이다.

성지 보개산 고성(寶蓋山古城) : 동북쪽으로 15리에 있으며, 둘레는 4리이고, 그 가운데에 우물이 3개 있다.

면(面)엔 험준한 석문(石門)이 마주 서 있다.

 

방면 현내면(縣內面) : 끝이 20리이다. 동면(東面) : 처음이 5리이고, 끝이 10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서면(西面) :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북면(北面) :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상수면(上水面) : 북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진도 시욱진(時郁津) : 북강(北江) 삭녕로(朔寧路)에 있으며, 옛날에는 징파도(澄波渡)라고 하였다. 서쪽으로는

장경석벽(長景石壁)이 보이고, 동남쪽은 석저협구(石渚峽口)로 되어 있고, 암벽 위에는 도영암(倒影菴)이 있고

그 아래에는 장군탄(將軍灘)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웅연석애(熊淵石崖)로 되어 있는데, 《석문이서(石文異書)》

를 보면 강(江)은 석린석묵(石鱗石墨)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다.

 

웅연진(熊淵津)ㆍ유연진(楡淵津) : 서쪽으로 마전(麻田)과 통한다.

사원 임장서원(臨章書院) : 숙종 경인년(1710)에 건축해서 계사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주자(朱子) : 자세한 것은 경도(京都) 문묘(文廟) 조에 있다.

전고 고려 고종(高宗) 4년(1217)에 금산병(金山兵)이 징파도를 지나며 싸울 때에 우리 군대가 싸워서 물리쳤다.

신우(辛禑) 3년(1377)에 진영세(陳永世)를 파견하여 연주(漣州)를 상택(相宅)하게 하니, 영세가 돌아와서 오역

(五逆)의 땅이라 도(都)를 건설할 수 없다고 상소하여 마침내 의논하여 중지하였다.

 

 

교동현 喬桐縣

 

바다 섬에 있는데, 동으로 인화석진(寅火石津)까지 10리, 서로 바다까지 27리, 남으로 바다까지 11리,

북으로 황해도 배천군(白川郡) 각산진(角山津)까지 12리,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고목근현(高木根縣)인데 대운도(戴雲島)라고도 하고, 고림(高林)이라고도 하며,

달을신(達乙新)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혈구군(穴口郡)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에서 그대로 두고 명종(明宗)이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조 4년에 만호(萬戶)를 두어 지현사(知縣事)를

겸했다가 뒤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각 1명씩이다.

군명 대운ㆍ고림ㆍ고목근.

 

성씨 본현 : 고(高)ㆍ인(印)ㆍ전(田)ㆍ합(合)ㆍ뇌(雷)ㆍ안(安) : 속(續).

 

산천 수정산(修井山) : 현 서쪽 25리에 있다.

화개산(華蓋山) : 현 남쪽 3리에 있다.

 

○ 이색의 시에, "바다 속 화개산은 푸른 하늘에 닿았는데, 산 위 옛 사당은 언제 지었는지 모르겠네. 제사한 후

한 잔 마시고 이따금 북쪽을 바라보니, 부소산(扶蘇山) 빛이 더욱 푸르구나." 하였다.

 

응암(鷹巖) : 월곶(月串) 바다 가운데 있다. 송가도(松家島) : 현 남쪽 10리에 있으며, 주위가 26리이다.

비석진(鼻石津) : 현 동쪽 10리에 있는데, 인화석진이라고도 한다. 또 강화부 조에도 나왔다.

각산진(角山津) : 현 북쪽 21리에 있으며, 인참진(仁站津)이라고도 하는데, 황해도로 왕래하는 곳이다.

 

○ 조준(趙浚)의 시에, "서리 내리고 강 맑은데 기러기 날으니, 수많은 돛에 한결같이 석양이 비쳤네. 높은 벼슬

로 나라 돕는 건 영욕(榮辱)이 많은데, 짧은 돛대로 고기 낚는 건 시비 없구나. 들에 깔린 도량(稻粱)은 황금 세

계 이루었고, 강에 반쯤 내려간 가을 물은 푸른 유리(琉璃) 깔았네. 갈대꽃 눈 같고 산 모양 그림 같은데,

저물어 돌아오니 옷은 비에 흠뻑 젖었네." 하였다.

 

토산 조기ㆍ숭어ㆍ굴ㆍ바지락ㆍ조개ㆍ낙지ㆍ백하ㆍ청게ㆍ부레ㆍ소금.

 

성곽 화개산성(華蓋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는 3천 5백 34척이고, 높이는 18척이다.

그 안에 못[池] 하나 샘 하나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푸른 산 높아 육오두(六鰲頭) 눌렀는데, 게으른 손 올라서니 먼 근심 없어지네.

물 나라 찬 조수에 고기잡이 마을 저물었고, 하늘 끝 지는 해에 바다 문에 가을 왔구나. 가슴은 활짝 트여 삼천

리요, 눈길에 멀리 보이는 건 수십 주(州)로다. 둘러앉은 풍류는 누가 가장 씩씩한가.

술잔 부어 서로 주며 더 놀고 가세." 하였다.

 

관방 월곶진(月串鎭) : 현 남쪽 16리에 있다. 우도수군 첨절제사영(右道水軍僉節制使營)이 있는데,

소관은 정포(井浦) 교동량(喬桐梁)이다.

○ 첨절제사(僉節制使) 1명이 있다.

 

교동량영(喬桐梁營) : 수군 만호(水軍萬戶) 1명이 있으며, 교동현감이 겸한다.

 

봉수 수정산(修井山) 봉수 : 북으로 황해도 연안부(延安府) 각산(角山)에 응한다.

화개산 봉수 : 남쪽으로 강화부 망산(網山)에 응하고, 동으로 강화부 하음성산(河陰城山)에 응한다.

 

신증 궁실 객관 : 황치신(黃致身)의 시에, "3월달에 바삐 돌아오니 해는 지려 하는데, 원림(園林) 곳곳에 푸르게

그늘이 생겼네. 어여쁠사 철쭉꽃은 너무도 멋지게 피어서, 봄빛을 독차지하고 손의 마음 위로하네." 하였다.

 

학교 향교 : 현 남쪽 4리에 있다.

원유 동진원(東津院) : 현 동쪽 11리에 있다.

불우 화엄사(華嚴寺)ㆍ안양사(安養寺) : 모두 화개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화개산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명환 고려 설공검(薛公儉) : 감무(監務)가 되었다.

열녀 고려 조씨(曺氏) : 왜적(倭賊)이 교동현에 침입했을 때 조씨가 수절(守節)하고 죽었다.

그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문을 세웠다.

 

신증 본조 말응금(末應今) : 오순경(吳順卿)의 아내이다. 젊었을 때 남편을 여의니, 부모가 불쌍히 여겨 다른 데

시집보내려 하자 손가락을 끊어 수절할 뜻을 보이고 끝내 따르지 않았다. 금상 13년에 정려문을 세우고 복호

(復戶)했다.

 

제영 산 아래 집집마다 흰 술 거르네 : 이색의 시에, "바다 문 끝없고 푸른 하늘 나직한데, 돛 그림자 나는 듯하

고 해는 서로 넘어가네. 산 아래 집집마다 흰 술 걸러내어, 파[蔥] 뜯고 회 치는데 닭은 홰에 오르려하네."

하였다.

 

거룻배 푸른 강물에 한 번 띄웠네 :옛사람의 시에, "한낮에 조수 밀고 얇은 그늘 헤쳤는데, 거릇배 푸른 강물에

한 번 띄웠네. 경원전(慶源殿) 아래 바람은 처음 순하게 부는데, 화개산(華蓋山) 앞에 해는 지려 하네.

이미 시승(詩僧)이 오래 같이 노는 걸 기뻐했는데, 하물며 어부(漁父) 만난 것이 지음(知音)인 듯함이랴.

지금 눈병 난 걸 자주 후회하는구나. 밤에 잔서(殘書)를 읽는데 달이 숲에 가득했네." 하였다.

 

집은 섬에 의지했는데 두루 밭을 이뤘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외로운 성 사면이 바다인데, 구름과 물이

서로 모여 까마득할 뿐일세. 길[路]이 못가로 나 버들을 많이 심었고, 집은 섬에 의지했는데 두루 밭을 이뤘네.

누른 소 누운 곳엔 맑은 연기 꽃다운 풀 자욱하고, 흰 새 나는 가엔 이슬비 비낀 바람 지나가네.

북으로 송도(松都)를 바라보니 이내 생각 하염없구나. 뭇 봉우리 높고높아 비취빛 하늘에 닿았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1895)에 강화로 들어갔다가 곧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연혁 인조 7년(1629)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여 11년에 치소(治所)를 월곶진(月串鎭)으로 옮겼다 : 월곶진을

강화(江華)로 옮겼다.

 

관원 도호부사(都護府使) : 경기 수군 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와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를 겸한다. 한 명이다.

진보 주문도진(注文島鎭) : 수군(水軍)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가 한 사람이다.

장봉도진(長峯島鎭)ㆍ수군 만호겸 감목관(水軍萬戶監牧官)이 한 사람이다.

 

요망(瞭望) : 장봉도(長峯島)ㆍ말도(末島)ㆍ폴음도(乶音島)에 있다.

영아 통어영(統禦營) : 곧 경기 수영(京畿水營)이며 읍성(邑城)에 있다. 국초(國初)에 영을 남양(南陽)의 화량

(花梁)에 개설하였는데, 뒤에 이곳으로 옮겼다. 인조(仁祖) 11년(1633)에 수사(水使)가

삼도 통어사(三道通禦使)를 겸하여 경기(京畿)ㆍ황해(黃海)ㆍ충청(忠淸) 3도의 주사(舟師 해군(海軍))를

거느렸다. 정종(正祖) 3년(1779)에 통어영을 강화로 옮기고, 본부사(本府使)가 수군 방어사 우해방장(水軍防禦

使右海防將)을 겸하고, 12년에 다시 통어영을 본부로 옮겨와 수사가 전과 같이 겸하고, 인하여 방어해방

(防禦海防)을 감하였다.

 

관원 경기 수군 절도사 겸 삼도 통어사(京畿水軍節度使兼三道通禦使) : 도호부사(都護府使)도 겸하였다.

중군(中軍)ㆍ수성(守城) : 모두 한 사람이다. 진속 : 영종(永宗)ㆍ덕포(德浦)ㆍ덕적(德積)ㆍ화양(花陽)ㆍ

주문(注文)ㆍ장봉(長峯) 본영(本營) 및 각 진(鎭)에 갖가지 전선(戰船) 60척씩이다. :

율선(律船) 1백 15척이 있다.

 

성지 읍성(邑城) : 둘레가 1천 6척(尺)인데, 옹성(瓮城)이 셋이고 치성(雉城)이 넷이며, 동남북(東南北) 3문과

소남문(小南門)이 있다.

방면 동면(東面) : 동쪽으로 10리에 바다가 있다. 남면(南面) : 읍내(邑內)가 해변이다.

서면(西面) : 서쪽으로 20리가 바다이다. 북면(北面) : 북쪽으로 20리가 바다이다.

 

진도 동진(東津) : 동북쪽으로 10리인데 강화(江華)ㆍ인화(寅火)ㆍ석진(石津)과 통한다.

북진(北津) : 북쪽으로 20리인데, 인점포(印帖浦)에서 연안(延安) 각산진(角山津)으로 통한다.

송가진(松家津) : 남문 밖에서 출항하여 송가로 들어간다.

 

목장 장봉도(長峯島)ㆍ말도(末島) : 양(羊)을 기른다. 폐장(廢場) : 폴음도(乶音島)ㆍ송가도(松家島)ㆍ

미법도(彌法島) 등이다.

 

도서 송가도(松家島) :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둘레는 25리이고 토지는 매우 비옥하다.

주문도(注文島) : 강화 매도(煤島) 서쪽 7리에 있는데 둘레가 30리이고,

동쪽으로 장봉도(長峯島)와의 거리가 수로(水路)로 25리인데 고기가 아주 많이 잡힌다.

 

폴음도(乶音島) : 《고려사》에는 팔음도(八音島)ㆍ파음도(巴音島)라고 했는데, 둘레는 15리이고 동쪽으로

서검도(西檢島)와 주문도(注文島)와 서로 떨어져 있다.

말도(末島) : 둘레가 10리이고, 북쪽으로 연안계(延安界)와 서쪽으로 연평도(延平島)와의 거리가 30리이며,

동쪽으로 폴음도가 5리이다. 미법도(彌法島) : 매도에 있는데, 북쪽으로 서검도(西檢島)가 7리이다.

 

장봉도(長峯島) : 둘레가 25리인데, 토지가 비옥하고 또한 포곡(浦曲)이 있어서 배를 댈 만하다.

칠도(桼島) : 서쪽 바다 가운데 있다. 응암(鷹岩) : 부(府)의 앞쪽 바다 가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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