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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료

동국여지승람 (충청도)권17.18.19.20. (한글 번역본)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3.10.28|조회수229 목록 댓글 0

권 17 공주목 公州牧

 

동쪽으로는 회덕현계(懷德縣界)까지 69리, 진잠현계(鎭岑縣界)까지 64리이며, 남쪽으로는 부여현계(扶餘縣界)

까지 49리, 이산현계(尼山縣界)까지 43리, 연산현계(連山縣界)까지 53리, 전라도 진산군계(珍山郡界)까지 80리

이며, 서쪽으로는 대흥현계(大興縣界)까지 69리이며, 북쪽으로는 천안군계(天安郡界)까지 57리, 연기현계(燕岐

縣界)까지 27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百濟)의 웅천(熊川)으로 문주왕(文周王)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서 이곳으로 옮겨 도읍하였

다가 성왕(聖王)에 이르러 남부여(南扶餘)로 옮겼다. 당(唐) 나라 고종(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신라

(新羅) 김유신(金庾信)과 백제를 공격하여 멸하고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어 군병을 주둔시켰는데,

당 나라 군사가 철수하자 신라가 그 땅을 모두 점유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이 웅천주(熊川州)로 고쳐 도독(都督)

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웅주(熊州)로 고쳤고, 고려(高麗) 태조(太祖)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목(牧)을 두었으며, 14년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안절군(安節軍)이라 하고 하남도(河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현종(顯宗) 3년에 절도사를 폐하였고, 9년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고, 충혜왕(忠惠王)의 후

(後) 2년에 원(元) 나라의 평장(平章) 활활치(闊闊赤)의 아내가 된 경화옹주(敬和翁主)의 외향이라 하여 목(牧)

으로 승격시켰고, 본조(本朝)에서는 그대로 따르다가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속현 유성현(儒城縣) : 주(州) 동쪽 54리에 있다. 본래 백제(百濟)의 노사지현(奴斯只縣)으로, 노사지의 사(斯)는

어떤 데는 질(叱) 자로 쓰기도 한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인 비풍군(比豐郡 회덕(懷德)) 영현

(領縣)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때에 와서 본주에 속하게 되었으며, 본조에서는 그대로 따랐다.

진관 군(郡)이 2 : 임천(林川)ㆍ한산(韓山). 현(縣)이 10 : 전의(全義)ㆍ정산(定山)ㆍ은진(恩津)ㆍ회덕(懷德)ㆍ

진잠(鎭岑)ㆍ연산(連山)ㆍ이산(尼山)ㆍ부여(扶餘)ㆍ석성(石城)ㆍ연기(燕岐).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인.

 

군명 웅천(熊川)ㆍ웅진(熊津)ㆍ웅주(熊州)ㆍ회도(懷道)ㆍ안절군(安節軍).

 

성씨 본주(本州) 이(李)ㆍ정(鄭)ㆍ송(宋)ㆍ박(朴)ㆍ황(黃)ㆍ고(高)ㆍ임(任)이 있으며, 황(黃)ㆍ백(白)ㆍ

하(河) : 모두 촌(村)에 있다.

김(金) : 당(唐) 나라에서 투화(投化)한 자이다. 현(玄)ㆍ최(崔) : 모두 역(驛)에 있다.

유성(儒城) 이(李)ㆍ임(任)ㆍ전(田)ㆍ주(朱)ㆍ유(兪)ㆍ미(米). 덕진(德津) 고(高)ㆍ현(玄)ㆍ서(徐)ㆍ진(陳)ㆍ

오(吳). 신풍(新豐) 최(崔)ㆍ백(白)ㆍ박(朴)ㆍ신(申)이 있으며, 현(玄) : 촌에 있다.

양화(良化) 지(池)ㆍ송(宋). 완부(薍釜) 유(兪) : 귀지동(貴知同)에 있다.

갑촌(甲村) 주(朱) : 복수촌(福水村)의 개동(介同)에 있다. 박산(撲山) 황(黃) : 금생동(金生同)에 있다.

 

풍속 남자는 쟁(爭)과 피리[笛]를 좋아하고, 여자는 가무(歌舞)를 좋아한다 :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에 당 나라

유인궤(劉仁軌)가 백제를 격파하고 웅진부성(熊津府城)에 주둔하자 당 나라 악공(樂工)들도 따라 왔다.

왕이 성천(星川)ㆍ구일(丘日) 등 38명에게 명하여 가서 당악(唐樂)을 배우게 한 뒤로는 고을 사람들이 음악을

잘하게 되었다.

 

형승 웅천(熊川)은 바다에 접해 있고, 계룡산(鷄龍山)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하네 : 이익박(李益朴)의 시(詩).

계룡산은 진산(鎭山)이요, 웅진(熊津)이 금대(襟帶)를 이루었다 : 서거정(徐居正)의 취원루기(聚遠樓記).

 

산천 계룡산 : 주 동쪽 40리에 있다. 또 연산현(連山縣) 조에도 나와 있다.

공산(公山) : 주 북쪽 2리에 있는 진산으로, 산의 모습이 공(公) 자 같기 때문에, 공산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무성산(茂城山) : 주 서쪽 32리에 있다. 월성산(月城山) : 주 동쪽 5리에 있다.

주미산(舟尾山) : 주 남쪽 5리에 있다.

정지산(艇止山) : 주 서북쪽 5리에 있다. 봉황산(鳳凰山) : 주 서쪽 3리에 았다.

여미산(余美山) : 주 서쪽 3리에 있다. 무악산(毋岳山) : 주 북쪽 10리에 있다.

유점산(油岾山) : 주 서쪽 30리에 있다. 탄현(炭峴) : 주 남쪽 30리에 있다. 고화점(古火岾) : 주 서쪽 45리에 있다.

자을매산(慈乙每山) : 주 서쪽 20리에 있다. 차유현(車踰峴) : 주 서쪽 35리에 있다.

어을온현(於乙溫峴) : 주 서쪽 35리에 있다. 적유현(狄踰峴) : 주 동쪽 27리에 있다.

판현(板峴) : 주 동남쪽 31리에 있다. 차현(車峴) : 주 서북쪽 57리에 있다.

○ 고려 태조(太祖)의 훈요(訓要)에 이르기를,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거꾸로 등을 지고 뻗어

있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마현(馬峴)ㆍ화현(火峴) : 모두 주 동쪽 25리에 있다. 가문현(加文峴) : 주 북쪽 84리에 있다. 온양(溫陽)과 경계이다.

능현(陵峴) : 주 동쪽 5리에 있다. 옛 능터가 있기 때문에 이름 붙인 것인데, 속설에 백제의 왕릉(王陵)이라 전해

온다.

사공암(沙工巖) : 주 남쪽 3리에 있다. 세간에서 이르기를, "고을의 형세가 물 위에 가는 배와 같기 때문에

주미(舟尾)ㆍ정지(艇止)ㆍ사공(沙工)으로 이름 붙인 것이다." 한다.

 

동월명대(東月明臺) : 주 북쪽 1리에 있다. 서월명대(西月明臺) : 주 서쪽 2리에 있다.

잠연(潛淵) : 계룡산 아래 있다. 두 봉우리가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 가운데 큰 돌이 구멍을 이루어 마치 거북

모양으로 되어 있다. 그 넓이는 30여 척 가량 되고 그 가운데에 물이 있는데, 깊이가 한이 없어 사람들이 나무와

돌로 메우면, 다음날 모두 못 아래로 나온다. 세간에서 이르기를, "항상 용이 구름기운을 타고 출입하며, 가물 때

비를 빌면 매양 영험이

있다." 한다.

 

금강(錦江) : 주 동쪽 5리, 즉 적등진(赤登津) 하류에 있다. 옥천군(沃川郡) 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 고려 정지(鄭地)의 시에, "수(隋) 나라의 하약필(賀若弼)과 진(晉) 나라의 조 장군(祖將軍)은 칼을 짚고 강물을

건너면서 해를 가린 구름을 쓸고서야 돌아오리라 맹세했네." 하였다.

 

웅진도(熊津渡) : 주 서쪽 7리에 있으니, 적등진의 하류이다. 고려 현종(顯宗)이 거란(契丹)을 피하여 남쪽으로

달아나니, 절도사(節度使) 김은보(金殷甫) 등이 이 나루에서 맞았다.

현종이 시를 짓기를, "일찍이 남쪽 땅에 공주(公州)가 있다고 들었더니, 선경(仙境)이 영룡(玲瓏)하여 길이 있었

구나. 이러한 마음 즐거운 곳에 이르러, 군신(群臣)과 함께 모여 일천 시름 놓아본다." 하였다.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거란이 강조(康兆)를 잡아 죽이니, 왕순(王詢)이 평주(平州)로 달아났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 강호문(康好文)의 시에, "강물은 아득히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푸른 산 그림자 속에 한 조각배로세.

백년 동안 남북으로 오가는 사람은 일도 많건만, 모래밭 갈매기만이 자유롭구나." 하였다.

○ 정추(鄭樞)의 시에, "완산(完山)은 멀고 멀어 길 막혔는데, 웅천(雄川) 강물 출렁출렁 구름도 아득하다.

물 얕은 데를 건너자니 돌이 발을 깨물겠고, 깊은 곳을 건너자니 물이 치마를 적시겠다.

어옹(漁翁)이 나에게 사당주(沙棠舟)를 빌려주니, 계수나무 도(櫂)를 삿대로 삼고 목란(木蘭)으로 노를 삼았네.

돋는 해 돌아보며 중류에 띄웠더니, 잠시 사이에 이미 서쪽 언덕에 대었네.

나는 언덕에 올라 말[馬]을 울리고 떠나는데, 어옹은 노를 두드리며 창랑가(滄浪歌)를 부르네 어옹이여,

나의 도(道)는 그대의 돛대에 비유하노니, 쓰면 행하고 버리면 간직하네." 하였다.

 

음암진(陰巖津) : 북쪽 4리에 있으니, 곧 금강(錦江)의 하류이다. 지동진(紙洞津) : 주 동쪽 31리에 있으니,

적등진(赤登津)의 하류이다. 금상진(今尙津) : 남쪽 15리에 있으니, 금강의 하류이다.

삼기강(三岐江) : 독락정(獨樂亭) 기문(記文)에 자세히 나와 있다. 동천(銅川) : 주 서쪽 20리에 있다.

가문현(加文峴)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웅진(熊津)의 하류로 들어간다.

 

일신북천(日新北川) : 주 북쪽 10리에 있다. 쌍령(雙嶺)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웅진의 상류로 들어간다.

유포천(柳浦川) : 유성현(儒城縣) 동쪽 20리에 있다. 전라도 진산현(珍山縣) 경계에서 발원한다.

성천(省川) : 유성현 동쪽 7리에 있다. 연산(連山)과 진산(珍山) 두 고을 경계에서 발원하여 진잠현(鎭岭縣)

에서 합류하여 지나, 유성현 동쪽에 이르러 성천이 된다.

 

대전천(大田川) : 유성현 동쪽 25리에 있다. 전라도 금산군(錦山郡) 경계에서 발원한다.

○ 이상의 세 냇물이 합류하여 회덕현(懷德縣)의 갑천(甲川)이 된다.

 

온천(溫泉) : 유성현 동쪽 3리에 있다. 우리 태조(太祖)가 계룡산에 대궐터를 잡으려고 할 때와 태종(太宗)이

임실현(任實縣)에 가서 강무(講武 사냥하는 군사 연습)할 때, 여기에서 목욕하였다.

 

토산 수철(水鐵)ㆍ동철(銅鐵) : 모두 마현(馬峴)에서 생산된다. 잣[海松子]ㆍ눌치[訥魚]ㆍ게[蟹].

 

성곽 공산성(公山城) : 주 북쪽 2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그 주위가 4천 8백 50척, 높이가 10척이며,

안에 우물 셋과 못[池] 하나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 속설에 전하기를, 이는 곧 백제 시대의 옛성으로 신라 김헌창(金憲昌)이 점거했던 곳이라 한다.

○ 신라 최치원(崔致遠)의 시에, "금대(襟帶)의 강산에 그려 만든 것 같은데, 기쁘도다.

오늘에는 고요히 병진(兵塵) 사라졌네. 음풍(陰風)이 홀연히 놀란 파도 일으키니, 그 당시의 전고(戰鼓) 소리

아직도 회상된다. " 하였다.

 

봉수 월성산 봉수(月城山烽燧) : 남쪽은 이산현(尼山縣) 성산(城山)에 응하고, 북쪽은 고등산(高燈山)에 응한다.

고등산 봉수(高燈山烽燧) : 주 북쪽 30리에 있다. 남쪽은 월성산에 응하고, 북쪽은 쌍령(雙嶺)에 응한다.

쌍령 봉수(雙嶺烽燧) : 북쪽 50리에 있다. 남쪽은 고등산에 응하고, 북쪽은 천안군(天安郡) 대학산(大鶴山)에

응한다.

누정 취원루(聚遠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으니, 옛날의 관정정(觀政亭)이다. 정자가 연못 가운데 있었는데,

목사(牧使) 권체(權體)가 정자를 헐고 누(樓)로 만든 것을 뒤에 목사 홍석(洪錫)이 동헌(東軒) 동쪽에 옮겨

세웠다.

○ 정이오(鄭以吾)의 관정정기(觀政亭記)에, "공산(公山)의 공관(公館) 동쪽에 옛날부터 연못이 있었으니,

거의 1, 2묘(畝)나 되었다. 지금의 부유후(副留後) 영가(永嘉 안동) 권씨(權氏) 담(湛)이 일찍이 이 고을에 목사로

와서 그 못에 초정(草亭)을 지었다. 그 뒤 을미년 봄에 목사(牧使) 이공(李公)과 통판(通判) 유군(柳君)이 옛것에

인하여 증수(增修)하되 옛못을 개발 확장하고, 그 가운데 돌을 쌓아 터를 돋우고 넓혀,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단청

을 하였으니, 바라보기에 날아갈 듯하였다. 또 조그마한 시냇물을 끌어 못으로 흘려보내니, 깊고 맑게 물이 고여

깊이가 4척이나 되었다. 버들에 부는 바람ㆍ연꽃에 비치는 달ㆍ무성한 대[竹]ㆍ아름다운 화초가 맑고 상쾌하며,

무성하고 향기롭게 좌우로 서리고 얽혀 있어 성곽과 산천을 궤석(几席)에 앉아 대해 보면, 실로 한 고을의 아름

다운 경치라고 이를 만하다. 이 사군(李使君)이 그 기이한 승경(勝景)을 갖추어 기록하여 정자의 이름과 기(記)를

지어 주기를 청해 왔다. 내가 그 글을 읽어 이 정자가 절승한 줄을 알고는 한번 그 가운데 종유(從遊)하여 못물울

굽어보며 마음을 씻어 보고 싶었으나 얻어서 이룰 수 없는지라, 사사로이 노두(老杜 두보(杜甫))의 '못물에서

정사하는 것을 본다.

[池水觀爲政]'는 시구(詩句)를 취하여 이름 붙이기를, '관정정'이라 하였다. 군자는 물(物)을 보면 도(道)가 있지

않는 데가 없음을 아는 것이니, 정사를 하는 데도 보고 본받을 만한 것이 이 못물보다 나을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못물이 고인 것은 맑아서 요동하지 않고 평평하여 넘치지 않으며, 더러움을 용납하여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으며,

나쁜 것을 흘려 버려서 머물러 두지 않고 만물을 이롭게 하기를 무궁히 하는 것을 보면 정사하는 도리도 또한 이

에 있을 것이니, 정자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이를 정사하는 데 비유한 것은 못물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자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수령(守令)의 직임이란 백성을 친애(親愛)하는 것이니, 반드시 백성에게 혜택을 베푸는 것을

마음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백성에게 혜택을 베푸는 정사가 한 가지가 아니나 요체는 왕인(王人)을 예로 접대하고, 조정의 전장(典章)을 삼가

지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 정자에 오르는 부절(符節)을 가지고 온 사신(使臣)으로 하여금 특히 그 직무의 노고

를 잊게 할 뿐 아니라 또한 이 못물을 보고 정교(政敎)를 베풀게 한다면, 이 정자를 지음이 또 그 백성에게 관계

되지 않겠는가. 이공의 이름은 정간(貞幹)이요, 유군의 이름은 지례(之禮)이니, 이 일을 보면 그가 정사하는 것을

따라서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취원루기(聚遠樓記)에, "차현(車峴) 이남에서 산천의 맑은 기운이 충만하고 쌓여서 큰 고을

을 이룬 것에는 오직 공주(公州)가 제일이 된다.

장백산(長白山) 한 갈래가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 달려 계림(鷄林)에 이르러서는 원적산(圓寂山)이 되고,

서쪽으로 꺾여서 웅진(熊津)을 만나 움츠려 큰 산악을 이룬 것을 계룡산(鷄龍山)이라 한다.

물이 용담(龍潭)ㆍ무주(茂朱) 두 고을에서 발원하는데 금산(錦山)에서 합류하여 영동(永同)ㆍ옥천(沃川)ㆍ청주

(淸州) 세 고을을 지나 공주에 이르러서는 금강(錦江)이 되고, 꺾여 사비강(泗沘江)이 되어서는 더욱 큰 물을

이루어 길게 구불구불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웅진이라 한다.

그래서 공주는 계룡산이 진산(鎭山)이 되고 웅진이 금대(襟帶)가 되니, 그 산천의 아름다움을 알겠도다.

거정(居正)이 젊었을 때 공주에 와 놀면서 금강루(錦江樓)에 올라보니, 그 조망(眺望)의 풍부함이 과연 전에

듣던 바와 같았다. 그러나 주(州)와의 거리가 멀어서 잠깐 동안에 갈 수 있는 데가 아니었고,

주의 객관은 누추하고 좁고 또 올라가 볼 만한 누각(樓閣)도 없어, 사람들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끼게 하였다.

객관 동쪽에 연정(蓮亭) 두어 칸이 있어 조금 머뭇거릴만하나, 규모가 너무 좁아서 마음을 상쾌히 하기에는

부족하였다. 나는 이것을 이 한 주의 큰 흠점이라 여기었다.

전일에 나의 친척 조카 안동 권공(安東權公) 체(體)가 이 주에 목사로 되어 나갔는데, 누가 내게 말하기를,

'권 목사가 연정을 헐고 그 동쪽에 누각을 세우다가 역사를 거의 마칠 무렵에 마침 흉년이 들어 낙성을 보지 못

하였다.' 하였는데 계사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남양(南陽) 홍석(洪錫)이 판목(判牧)으로 와서 정사를 잘 다스

려 폐단을 털어내자 다시 동헌(東軒) 동쪽에 자리를 택하여 그 누각을 옮기고 몇 칸을 고쳐 지어서 사신과 손님

들이 오면 매양 이 누에 올라 술 마시고 시를 읊으니, 이 주의 풍경의 정채(精彩)가 전보다 백배나 되었다.

목사가 이제 예빈시 정(禮賓寺正) 김수손(金首孫)공을 통하여 나에게 정자의 이름과 기문(記文)을 청해 왔다.

나는 말하기를, '이 정자의 좋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먼데 것을 모은 것[聚遠]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하였는데, 이는 멀리 있는 모든 좋은 경치를 이 한 누(樓)로 모아 들였다는 것이다. 누에 올라 바라보면 좌우와

전후에 강과 산이 두루 비치니, 아래 위 수백 리 사이에 저 들판의 광활함이며, 여염집의 즐비함이며, 나루터와

다리에의 다니기 고생하는 모습과, 역원(驛院)에 드나드는 나그네의 힘든 형편과, 밭가는 자ㆍ누에 치는 자ㆍ

나무하는 자ㆍ 소 말 먹이는 자ㆍ고기잡는 어부ㆍ물건파는 장수들ㆍ사람들이 생활하며 오가는 것들이 한이

없다.

아침에 해뜨고 저녁에 그늘지며 사철이 서로 바뀌는 것과, 우로(雨露) 상설(霜雪)의 변천이며 초목(草木) 화훼

(花卉)가 피고 지는 것이며, 스스로 날고 스스로 울며, 스스로 모양을 이루고 스스로 빛을 내는 것 등 형기(形氣)

속에 담겨 있는 것과 같은 데 이르러서는 그 기상(氣象)이 각기 일정치 않음을 이 누에서 한번 눈을 들어보면

모두 알 수 있다.

아, 어쩌면 멀리서 이 누에 모여드는 것이 이와도 같은가. 올라 구경하는 좋은 경치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누각을 세운 것은 다만 놀고 구경하자는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 오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들판을 바라볼 때에는 농사의 어려움을 생각하게 하고, 여염을 바라볼 때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알게 하며, 나루터

와 다리를 바라볼 때에는 어찌하면 내를 잘 건너게 할 수 있을까 하며, 나그네를 바라볼 때에는 어찌하면 우리의

길에 나오기를 원하게 할까 하며, 곤궁한 백성들의 생업이 한 가지가 아님을 볼 때에는 죽는 이를 살려 주고,

추운 자를 따뜻하게 할 것을 생각하게 하며, 산천 초목과 조수(鳥獸) 어별(魚鼈)에게 이르기까지 화락하게 하기

를 생각하지 아니함이 없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멀리는 물(物)에서 취하여 이 누에 모으고 이 누에 모은 것을 다시 마음에 모아서, 이 마음이 항상 주(主)가

되어 내 눈과 귀에 부딪치는 것이 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면 이 누에 이름 붙인 의의(意義)에 거의 가까울 것이

며,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의 책임에도 또한 멀지 않을 것이다.

내가 홍후(洪侯)와 평소에 두터운 친분이 있고, 또 내가 앞서 알고 있었던 공주의 흠절을 후가 크게 이루었으니

내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후가 일찍이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어서 혜정(惠政)을 베푼 적이 있어 지금

까지도 백성들이 부모같이 사모하니, 후가 광주에서 다스리던 것을 공주에 옮긴다면 공주가 어찌 잘 다스려지지

않겠는가. 후는 곧 임기(任期)가 차서 돌아갈 것이나 후는 비록 가더라도 가지 않을 것은 이 누이다.

그러한즉 공주 백성들이 이 누를 생각하기를 옛날 주(周) 나라 백성들이 소공(召公)이 자주 쉬던 감당(甘棠)나무

를 보고 소공을 생각할 것을 또 어찌 의심하겠는가. 이것이 기록할 만한 것이다." 하였다.

금강루(錦江樓) : 금강 남쪽 언덕에 있다.

○ 정도전(鄭道傳)의 시(詩)에, "가 태부(賈太傅)가 상수(湘水)에 글을 던지고,

이 한림(李翰林)이 술 취하여 황학루(黃鶴樓)에서 시를 읊은 것을 그대는 보지 못했나. 생전의 불우(不遇)를 걱정

하여 무엇하랴. 늠름한 그 기개가 천추에 비꼈도다. 병든 몸이 3년 동안 남방에 체류하다가, 돌아와 또 다시 금강

(錦江) 가에 이른 것을 보지 못하는가.

다만 강물이 유유히 가는 것만 보았지, 세월 또한 머물지 않는 것을 어찌 알랴. 이미 가을 구름같이 떠 있는 이 몸,

부귀 공명을 다시 어찌 구하리. 옛적을 생각하고 오늘을 느끼며 긴 한숨 쉬니, 노래소리 격렬(激烈)하여 바람이

우수수 부네. 문득 한쌍의 백구(白鷗) 훨훨 날아 오는구나." 하였다.

○ 박팽년(朴彭年)의 시에, "동정호(洞庭湖)만 어찌 홀로 강남(江南)에서 제일이랴. 금강의 기이한 풍경 세상에서

일러오네. 강머리에 손[客]을 보내는데 배는 뜨고, 청삼 물가에 갓끈[纓] 씻노라고 푸른 옷 벗어 거네. 물결은

만고의 외로운 달을 머금었고, 산은 천추의 한 조각 푸르름을 띠었고나. 이곳은 아름답고 화려한 해동의 땅, 지나

는 손이 구경하노라고 몇 번이나 말을 멈추었나."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금강의 봄물이 이끼보다 푸른데, 두 언덕 푸른 산은 그림을 펼쳤도다. 물가에 가득한

잔디풀 한 가닥 푸르고, 길에 쌓인 버들가지 천 무더기 희구나. 석양 나루터엔 사람들 다투어 건너고,

가랑비 내리는 빈 해자[空壕]에 기러기 홀로 오네. 역마(驛馬) 탄 총총 걸음 돌아가기 바쁘니,

물결 위의 흰 갈매기 응당 조롱하리." 하였다. 망북루(望北樓) : 성 북문루. 원수대(元帥臺) : 주 서쪽 7리에 있다.

 

신증 응벽당(凝碧堂) : 취원루(聚遠樓) 곁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주 서쪽 3리에 있다. 서편에 옛능(陵)이 있는데, 속설에 전하기는 백제의 왕릉이라 하나,

어느 왕인지 알 수 없다.

 

역원 일신역(日新驛) : 주 북쪽 10리에 있다. 광정역(廣程驛) : 주 북쪽 45리에 있다.

○ 설장수(偰長壽)의 시에, "아침해 둥그렇게 뜨자 광정역을 떠나니, 흰구름이 일만 산 푸른 것을 깊이 감추었네.

들꽃 난만(爛熳)히 주인 없이 피어서, 봄빛을 단장하여 그림 병풍 이루었네." 하였다.

 

경천역(敬天驛) : 주 남쪽 40리에 있다. 이인역(利仁驛) : 옛이름은 이도(利途)인데, 주 남쪽 25리에 있다.

○ 승(丞)이 있는 본도에 예속된 역이 아홉이 있으니, 용전(龍田)ㆍ은산(恩山)ㆍ유양(楡楊)ㆍ숙홍(宿鴻)ㆍ남전

(藍田)ㆍ청화(靑化)ㆍ두곡(豆谷)ㆍ신곡(新谷)ㆍ영유(靈楡)이다.

○ 승(丞) 1명이 있다. 단평역(丹平驛) : 주 서쪽 17리에 있다. 유구역(維鳩驛) : 신풍(新豐) 서쪽 8리에 있다.

○ 《보한집(補閑集)》에, "고려 의왕(毅王)이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 하고 놀이를 좋아하므로, 문극겸(文克謙)이

정언(正言)이 되어 소(疏)를 올려 간절히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극겸이 드디어 집에 돌아와 시를 짓기를, '주운(朱雲)이 난간을 꺾은 것이 이름을 구함이 아니며, 원앙(袁盎)이

수레를 막은 것이 어찌 제 몸을 위함이랴. 한 조각 붉은 정성 하늘이 몰라주니, 파리한 말[馬] 억지로 몰아 머뭇

거리며 물러왔네.' 하였는데, 경인년 가을에 무신(武臣)들이 난을 일으켜 왕이 남쪽으로 옮기게 되었다.

계사년 겨울에 새로 이 역을 수리할 때에, 공장(工匠)을 불러서 벽에 단청을 하였는데, 공장은 당시의 묘수(妙手)

로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잊었는데, 침실 서쪽 벽에 흰 옷에 갓 쓰고 말탄 사람이 시름없이 말 가는 대로 산길을

따라 서서히 가는 것을 그렸으니 행색이 처량하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를 보아도 무슨 그림인 줄을 몰랐는데,

뒤에 송광사(松廣社)의 무의자(無衣子)가 승려 천여 명을 인솔하고 서원(西原 청주)으로 가는 길에 이 역에 투숙

하였다가 이 그림을 보고 탄식하더니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이것은 바로 간신(諫臣)이 서울을 떠나가는 그림

이다.' 하고 드디어 시를 짓기를, '벽 위에 이 그림을 뉘 그렸는고. 간하던 신하 서울 떠나니, 일이 위태하네.

산승(山僧)이 그림 보고 오히려 서러워하거늘, 하물며 벼슬하는 사대부(士大夫)랴.' 하였다. 뒤에 지나가던 행인

이 또 그 시를 보고 차운(次韻)하여 벽에 쓰니, 그 한 시에는, '곡돌(曲堗)로 하라는 앞말을 일찍 도모하지 못하고,

머리 데고 나서 후회한들 쓸데 있나. 그 누가 이 간신(諫臣)의 가는 모습을 그렸는고.

벽 위에 가득찬 맑은 바람이 나부(懦夫)를 격동시키네.' 하였고, 또 한 시에는, '흰옷에 누른 띠 간신(諫臣)의 그림,

이가 바로 굴원(屈原)인가, 미자(微子)인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헛되이 나라 떠나니,

붓 끝에 그림 솜씨 허비하여 무엇하리.' 하였다." 하였다.

 

보통원(普通院) : 주 동쪽 3리에 있으니, 이는 곧 옛날의 영춘정(迎春亭)이다.

○ 중 연감(淵鑑)의 기문(記文). 큰 주(州)나 부(府)에는 반드시 영춘정이 있다.

동지(冬至)를 지난 지 95일이 되면 양기(陽氣)가 비로소 열리고, 만물이 맹동(萌動)하는 것을 입춘(立春)이라

이른다. 옛날에 큰 고을에서는 토우(土牛) 및 쇠붙이와 나무로 만든 농기구 약간과, 채소ㆍ과일ㆍ술ㆍ찬(饌) 등

제물 약간을 갖추게 한 다음 주관하는 관리가 문서를 가지고 이를 감독하여 갖추지 않는 것이 없도록 한 뒤에

목사나 판관(判官)이 여러 아전과 장졸(將卒)을 거느리고 동교(東郊)에 나가 각기 관복을 갖추고서 제사를 지내

는 것은 사직을 받들고 농사를 익히기 위함이요, 그 밖에 1년의 수입을 회계하고,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며

경축을 행하는 등, 1년 중 행사를 하려면 이 영춘정이 아니면 마땅치 않은 것이다.

큰 고을에는 또 반드시 영빈정(迎賓亭)이 있었으니, 상사(上司)가 순시하거나 왕명으로 민정을 살피는 대소(大小)

의 사신들이 오갈 때, 반드시 여러 장졸과 아전들에게 명하여 기(旗)를 들고 관대(冠帶)를 갖추어 먼저 멀리 그

고을 경계(境界)까지 가서 맞게 하고, 목사나 판관들은 속관을 통솔하되, 또한 군복(軍服)을 입고서 알장(謁狀)을

받든 채 근교(近郊)에서 기다리는데, 위의(威儀)와 예절을 엄숙히 하여 주객(主客)의 예를 도탑게 하며,

존비(尊卑)의 위차(位次)를 차리면서 맞고 보내는 것은 오직 이 영빈정에서 하였다.

지금 이 공주는 옛날 절도부(節度府)로서 계룡산이 동남쪽에 우뚝 솟아 있고, 웅진 물이 서남쪽으로 감돌아 지리적

으로 영수(靈秀)한 기운이 배태(胚胎)되어 역대로 크게 떨쳐왔다. 주 동쪽 2백 보에 폐허(廢墟)가 있는데, 전래하는

말에 의하면, 이것이 옛날 영춘정이라는 것이다. 주춧돌과 섬돌이 무너져 뒹굴고, 무성한 풀섶에 덮여 수백 명의

태수(太守)를 겪었건만 아무도 이 정자를 세우지 못했던 것이다.

사설서 영(司設署令) 여흥(驪興) 민상백(閔祥伯)이 이 주에 부임한 지 1년이 못 되어서 직책을 닦고 치적을 이루어

모든 정사에 여가가 있었다. 공이 드디어 소속 관내(管內)에 공문을 보내어 공장(工匠)을 모집하고 역군을 징발

하여 주(州)의 치소(治所)의 관사(館舍)ㆍ창고ㆍ학교ㆍ사원(寺院)ㆍ누각 등, 누추하거나 없어진 것들을 중수하고

복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이 말하기를, "생각건대 직위가 백성을 다스리는 장(長)으로서 권농(勸農)하는 직책

을 띠고 있으므로 농사의 지도를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또 이 주의 치소는 전라ㆍ충청 두 도의 요충(要衝)에 처해

있어 실로 한 방면의 번화한 도회지이니, 빈객을 맞이하고 공로를 전별하는 예절도 소중한 것이다.

영춘정[東亭]은 이 두 가지의 일을 행하는 곳인지라 이보다 급한 것이 없으니, 빨리 이 정자부터 세우자." 하였다.

이에 아전들은 마음을 다하고 공장 역군들은 힘을 다하여, 북을 울려 소집하기 전에 모이고 먹줄[繩]과 막대기로

독촉을 가하지 않아도 부지런히 노력하여, 강 상류에서 재목을 흘려 내려오고 동쪽 언덕에서 벽돌과 기와를 굽게

하고는, 목사가 아침저녁으로 친히 현장에 임하여 전후로 지시 설계하여 길이와 넓이를 혹은 줄이고 혹은 늘렸

으며, 지형에 따라 동쪽에 객청(客廳)을 만들고, 남향으로 원채를 높이며, 서쪽과 남쪽에 행랑채가 모두 14칸으로

옷 갈아 입는 방이 있는가 하면 음식 차릴 장소가 있으며, 겨울에는 따뜻한 방, 여름에는 서늘한 대청이었다.

터 닦고 지으며 흙 바르고 단청을 칠하니, 그 제도는 넓지도 좁지도 않으며 그 꾸밈은 추하지도 않고, 펀펀한 뜰

다듬어진 층계(層階)와 행랑ㆍ보도 등이 있어, 위로는 예(禮)를 행할 수 있고, 아래로는 일을 볼 수 있도록 되었다.

정자가 이미 낙성되자 정자 아래를 지나가던 어느 사람이 머뭇거리며 칭찬하고 노래하며 돌아가니,

그 노래에 이르기를, "공이 공주에서 다스려 공주가 비로소 번성해지니, 공주 백성은 공의 덕을 칭송하여 다투어

노래하도다. 공이 백성에게 농사를 권장하니 백성들은 생업(生業)을 이루게 되었고, 공이 사신을 맞으니 왕의

명령에 공손하였다. 공이 지은 정자를 보고 공의 행정을 알 수 있으니, 공이 베푼 정치는 이 정자로 거울이 된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남북으로 오가며 보내고 맞는 땅에, 한덩이 높은 정자 갈래길을 굽어보네.

맑은 호수빛은 벽옥(碧玉)자리 펼친 듯, 가벼운 버들가지 황금실 나부낀다. 마을 배 돛대소리에 닭 오리 놀라

일어나고, 들 연기 낮은 곳에 갈매기 길 잃는다. 아, 이몸 구구하게 세공(歲貢)에 쫓겨, 꾀꼬리 울고 꽃피는 좋은

시절 보지 못하누나." 하였다.

 

금강원(錦江院) : 금강 북쪽 기슭에 있다. 환희원(歡喜院) : 주 남쪽 35리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 주 남쪽 30리에 있다. 모로원(毛老院) : 주 북쪽 26리에 있다. 궁원(弓院) : 주 북쪽 40리에 있다.

인제원(仁濟院) : 주 북쪽 52리에 있다. 웅진원(熊津院) : 웅진 언덕에 있다. 공서원(公西院) : 주 서쪽 31리에 있다.

반야원(般若院) : 주 서쪽 49리에 있다. 고관원(古館院) : 주 서쪽 67리에 있다.

공제원(公濟院) : 주 북쪽 28리에 있다. 내창원(內倉院) : 주 서쪽 25리에 있다.

광도원(廣道院) : 주 동쪽 57리에 있다. 불현원(佛峴院) : 주 동쪽 82리에 있다.

효가리원(孝家里院) : 주 동쪽 10리에 있다.

○ 정추(鄭樞)의 시에, "단풍잎 몰아치고 원(院) 마을 비었는데, 산 앞에 선 옛 빗돌[碣]에 석양이 붉었네.

넓적다리 살 베인 효자 지금 어디 있느냐. 밤마다 저 달빛이 거울 속에 떨어지네." 하였다.

○ "한 줄기 맑은 강물 푸른 하늘 담겼는데, 양쪽 기슭 붉은 나무 서풍과 싸움하네.

효가원이 어디메인가, 희멀건 가을빛 속으로 새 날아 없어지네." 하였다.

 

불우 계룡갑사(鷄龍岬寺)ㆍ등라사(藤蘿寺)가 있으며, 가섭암(迦葉菴) : 서거정(徐居正) 기문(記文)의 대략에,

"산마루에서 샘물이 솟는데 항상 금(金)이 뛰는 것 같은 빛을 볼 수 있으며, 그 아래에 용담(龍潭)이 있으니 검

푸른 빛은 사람을 놀라게 한다. 산 뒤에는 육왕탑(育王塔)이 있고 그 남쪽에는 아름다운 기운이 가득히 차 있어

제왕(帝王)의 도읍터가 될 만하며, 그 밖에 유명한 암자와 큰 사찰들이 모두 이 산의 승경(勝境)을 차지하고 있

는데, 정 남쪽 고개 옛 암자 밑에 암자가 있으니 이를 가섭암이라 이른다." 하였다.

율사(栗寺)ㆍ중심사(中心寺)ㆍ동학사(東學寺)ㆍ상원사(上院寺) : 모두 계룡산에 있다.

반룡사(盤龍寺)ㆍ마곡사(麻谷寺) : 모두 무성산(茂城山)에 있다.

수원사(水原寺) : 월성산(月城山)에 있다. 동혈사(東穴寺) : 동혈산(東穴山)에 있다.

서혈사(西穴寺) : 망월산(望月山)에 있다. 주미사(舟尾寺) : 주미산(舟尾山)에 있다.

정지사(艇止寺) : 정지산(艇止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공산(公山)에 있다.

계룡산사(鷄龍山祠) : 계룡산 남쪽에 있다.

신라 때에 오악(五岳)에 견주어 중사(中祀)로 기록되어 있는데, 본조(本朝)에서는 명산이라 하여 소사(小祀)로

정하여 매년 봄 가을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서 제사하게 한다. 웅진사(熊津祠) : 웅진 남쪽 기슭에 있다.

신라 때에는 서독(西瀆)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본조에서는 남독(南瀆)으로 삼고, 중사(中祀)로 정하여 봄 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려서 제사하게 한다. 여단(厲壇) : 주 북쪽에 있다.

 

고적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웅진은 옛날 백제국의 바다 어구에 있는데,

당(唐) 나라에서 이곳에 도독부(都督府)를 두었다." 하였다.

 

○ 당 나라 고종(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백제를 쳐서 평정하고, 좌위 낭장(左衛郞將) 왕문도(王文度)

를 웅진 도독에 임명하여 남아 있는 백성들을 진무(鎭撫)하게 하였는데, 문도가 바다를 건너오다가 죽으니,

유인궤(劉仁軌)로 하여금 대신 그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당시 백제의 땅은 전란을 겪은 나머지 집집마다 쇠잔 퇴폐하고, 시체가 수풀과 같이 널려 있었는데, 유인궤가

비로소 해골들을 거두어 묻고, 호구(戶口)를 적(籍)에 올리고, 부락을 정리하고, 관장(官長)을 임명하며, 길을

통하고, 교량(橋梁)을 가설하며, 제방을 보수하고, 저수지를 복원하며,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 독려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고아와 노인을 거두어 기르며, 당 나라의 사직(社稷)을 설치하고, 책력과 묘휘(廟諱)를

반포하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각기 그 생업(生業)에 안정하게 되었다.

 

덕진폐현(德津廢縣) : 주 동쪽 5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소비포현(所比浦縣)이었는데, 신라 때 적오(赤烏)라

고쳐 비풍군(比豐郡)의 속현(屬縣)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공주의 속현으로 삼았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신풍폐현(新豐廢縣) : 주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벌음지현(伐音支縣)으로 혹은

무부현(武夫縣)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청음(淸音)이라 고쳐 웅주(熊州)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공주 속현으로 삼은 것을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고유성(古儒城) : 유성현 동쪽 4리 광도원(廣道院) 옆에 있다. 객사(客舍)ㆍ향교ㆍ창고 등의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취리산(就利山) : 주 북쪽 6리에 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당(唐) 나라 칙사 유인원(劉仁願), 웅진 도독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웅진 취리산에서 같이 맹세하였다. 그 맹세한 글에 이르기를, "지난날 백제의 선왕(先王)

이 거역하고 순종하는 도리에 어두워 이웃 나라와의 우호(友好)를 돈독히 하지 않으며, 친척들과 화목하려 하지

않고,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인과 포악을 일삼고, 신라를 침략하여 고을을 치고 백성을

도륙하는 등 조금도 평온한 해가 없었다.

천자께서 한 백성이 제 삶을 잃는 것도 민망히 여기고, 죄 없는 백성을 불쌍히 여겨 누차 사신을 보내어 강화하라

타일렀으나 지리가 험하고 거리가 먼 것만을 믿고, 업신여기고 거만하므로 천자가 크게 노하여, 고생하는 백성을

조상(弔喪)하고 죄 있는 이를 치니 깃발이 가리키는 곳에 한 번 군사 행동으로 크게 평정하였다.

진실로 그 궁궐과 제택(第宅)을 헐고 터를 파서 웅덩이로 만들어 앞으로 오는 사람들에게 경계를 삼아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아 후대의 자손들에게 교훈을 내려야 할 것이나, 먼 나라 사람들을 포섭하여 귀순하게 하고 반역

하는 자만 치는 것은 옛 제왕들의 아름다운 법이요, 망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긴 나라를 잇게 하는 것은 지난

날 철왕(哲王)들의 공통된 법칙이다. 모든 일에 반드시 옛것을 본뜨라는 것이 옛 책에 전해오기 때문에 전 백제의

대사가 정경(大司稼正卿) 부여융(扶餘隆)을 웅진 도독(熊津都督)에 임명하여 그 제사를 받들어 지키며 그 강토를

보존하고,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서로 친선한 나라가 되어 각각 지난 감정은 버리고 화친을 맺을 것이며,

각기 천자의 명을 받들어 영원히 번국(藩國)이 되게 하고 인하여 사신 우위 위장군(右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

公) 유인원(劉仁願)을 보내와서 친히 권유하고 칙지(勅旨)를 선포하여 서로 혼인을 약속하고, 거듭 맹세하여 희생

을 잡아 피를 마시고, 함께 시종(始終)을 도탑게 하며, 재앙을 나누고 환란을 서로 구휼하여, 그 정의를 마치 형제

같이 할 것을 공경히 조서(詔書)를 받들어 감히 어김이 없게 할 것이며, 이미 맹세한 뒤에는 다같이 끝까지 변함

없을 것이다. 만일 맹세한 바를 배반하고 마음을 두 가지 세 가지로 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변방을 침범하면,

밝은 신(神)이 감림(監臨)하시어 백 가지 재앙을 내려 자손을 기르지 못하고 사직을 지키지 못하여 제사도 없어

질 것이며 씨가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권(金書鐵券)을 만들어 종묘에 간직하여 자손만대까지 감히

어김이 없게 할 것이다. 신은 이를 들으시고 복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이것은 유인궤가 지은 글이다.

피를 마시고 나서 희생과 폐백을 맹세한 단(壇)의 북방에 묻고, 그 글은 신라 종묘에 간직하였다.

 

효가리(孝家里) : 주 동쪽 10리에 있다. 향덕(向德)은 신라 때의 사람이었다. 친성이 효성스러워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주리는 중에 거기다가 여역(癘疫 전염병)마저 유행하였는데,

부모가 주리고 또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 향덕이 밤낮으로 옷을 풀고 잘 겨를도 없이 정성을 다하여 위안하였

으나, 봉양할 도리가 없어 마침내는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공궤하였고, 또 모친이 종기가 나자 향덕이 이것

을 빨아서 낫게 하였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왕이 명령을 내려 벼 3백 곡(斛)과 집 한 채와 구분전(口分田) 약간을

하사하고, 관원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워서 그 사실을 기록하게 하였다. 그 뒤에 사람들이 그곳을 효가리(孝家里)

라 일컬었다.

 

독락정(獨樂亭) : 주 동쪽 30리 삼기촌(三岐村)에 있다.

○ 남수문(南秀文)의 기문에, "전 양양 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임후(林侯)는 일찍이 정사로써 안팎에 이름을

날렸다. 전일에 선군(先君)이 함주 목사(咸州牧使)로 계실 적에 임후가 통판(通判)으로 있어 두 분의 정의가 매우

친밀하였다. 나는 이런 연유로 임후를 아버지같이 섬긴 것이 이미 여러 해 되었다. 하루는 나에게 말씀하기를,

'내 집이 여러 대를 두고 공주 금강 상류에서 살아왔는데, 경상ㆍ전라ㆍ충청의 강물이 이곳에서 합류하기 때문

에 이곳을 삼기(三岐)라 이른다. 내가 살고 있는 남쪽 5리에 산이 끊어진 곳이 있다.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나간 것이 2리쯤 가서 솟아 작은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긴 대와 무성한 솔이 우거져서

사랑스럽고, 세 강물이 꿈틀거리며 동쪽으로부터 그 아래를 감싸 흐른다. 내가 일찍이 그곳을 지나다가 기이하

게 여겨 한 번 올라가 본즉 북쪽으로 원수산(元帥山)을 쳐다보니 성곽같이 둘러 있고, 남쪽으로 계룡산을 바라

보니 하늘에 드높이 솟아 있는데,

동서의 여러 산들이 혹은 조회하는 듯 혹은 읍(揖)하는 듯 기이한 형상을 바치는 것이 한두 가지만이 아니며,

마을과 논밭의 이랑들이 멀고 가까이 바둑판처럼 펼쳐 있었다. 나는 이 기이한 경치를 즐거워하고, 앞 사람들이

내버려둔 것이 애석하여 드디어 그 봉우리 왼편에 별장을 짓고 그 위쪽에 정자를 세웠다.

강은 질펀한 모래밭에 넓게 흐르니, 하늘과 물은 한 빛이요, 바람불면 푸른 주름살 같고, 달 비치면 은빛 물결이

었다.

저 돛과 노, 물고기와 새들이 가고 오고 떴다가 잠겼다 하는 것들이 다 내 발 밑에 있고, 산의 층층이 솟은 봉우리,

겹겹이 둘러싼 석벽, 큰 산기슭, 긴 숲이 가까이는 들판의 푸른 데에 접하고, 멀리는 하늘이 푸른 데에 혼연해

있다. 또 구름 연기가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것들도 다 궤석(几席) 위에서 대하게 되며, 심지어 밭가는 자, 소치는

자, 고기잡이, 나무꾼들의 노래하고 화답하는 것들과 놀이하는 사람 길가는 나그네들이 사방 들판에서 꾸불거리

며 연달아 끊이지 않는 것도 또한 앉아서 볼 수 있다. 나는 지금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서 복건(幅巾)과 명아주

지팡이로 날마다 이 정자에 오르니, 마음이 한가로워 자신과 세상을 모두 잊고, 혼자 강 위에서 낚시질하고 혼자

산에서 나물 캐면서 봄날 아침의 꽃과 가을밤의 달을 내 혼자 읊어 즐기고, 구름 낀 봉우리의 기이한 것과 눈 덮

인 소나무의 맑음을 내 혼자 보고 즐겨, 무릇 경치의 즐길 수 있는 것을 나 혼자만이 점유하고 있는 듯, 그 상쾌한

기분이란 마치 매미가 더러운 데에서 벗어난 것같이 높은 세상 밖에서 논다.

사철의 경치는 같지 않으나 나의 즐거움은 홀로 무궁한 것이다. 이에 감히 송(宋) 나라 속수(涑水 사마광(司馬光))

선생의 원명(園名)인 독락(獨樂) 두 글자를 취하여 내 정자에 편액(扁額)하고 보니 참람한 것도 같다. 그러나 그가

즐긴 것은 이(理)요, 내가 즐기는 것은 물(物)이니, 그 이름이 같다고 혐의쩍을 것은 없다.

자네에게 기문을 지어 주기를 청한다.' 하니, 나는 임후에게 글이 졸렬하다고 사양할 수 없었다.

옛날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물을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 하였고, 또 안자(顔子)를

칭찬하여, '누추한 마을에서 한 그릇 밥과 한 바가지 물을 마시고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다.' 하였다.

그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지 않았으며, 송(宋) 나라 정명도(程明道) 형제도 학자로 하여금, '공자와 안자가

즐거워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으라.'고 발단만 하고 설명은 하지 않았는데, 이제 임후가 홀로 그 정자를 즐기면서

나의 말을 구한다. 이미 혼자서 즐긴다고 하였으니 더욱이 남이 알 바 아니거든 하물며 내 비록 성현의 글을 읽

었다 하나, 이른바 즐거움이란 것에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알지 못하니, 감히 임후의 정자의 기문(記文)을 짓겠

는가. 그러나 임후의 말씀이. '저 속수 선생의 즐거워한 바는 이(理)요, 내가 즐거워하는 것은 물(物)이다.' 하였

는데, 내가 기로는 이 밖에 물이 없고 물 밖에 이가 없는 것이니, 하늘이 높고 땅이 깊은 것이나, 산이 높고 물이

흐르는 것이며, 물고기가 뛰고 솔개가 나는 것이며, 풀과 나무가 무성하였다가 시들고 떨어지는 등, 이 눈과 귀

에 들어오는 모든 만물이 그 어느 하나도 지극한 이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이러한즉, 후가 즐거워하는 것

으로 말미암아 성현의 즐거워하는 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니, 어찌 한갓 그 경치만을 완상할 뿐이겠는가.

가만히 요새 세상의 사대부(士大夫)들을 보건대 비록 스스로 편히 할 만한 전원(田園)이 있는 자도 모두 명리

(名利)의 고삐에 얽매여서 동서로 분주하여 쉴 때가 없고, 심지어는 종신토록 그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자도

있으며, 간혹 고향에 돌아오는 자가 있다 해도 또한 산대[籌]를 잡고 전곡(錢穀)이나 계산하는 데 불과하니,

이는 그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후는 작위(爵位)가 그 덕에 차지 못하였고, 나이도 아직 그리 늙지도 않은 터에 영화로운 벼슬을 사양하고

세속에서 벗어나 스스로 산수 사이에 한가롭게 소요하기를 이같이 하니, '독락'이란 편액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 정자가 속수(涑水)의 독락원과 함께 아름다움을 짝하여 길이 전할 것은 의심이 없다.

사마공(司馬公)이 천하의 명망을 짊어지고 있었으므로 끝내 낙양(洛陽)에서 한가롭게 살지 못하였던 것인데,

지금 후도 일시의 명망을 지고 있으니, 오래도록 이 즐거움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나 같은 사람은 조정의 벼슬만을 헛되게 차지하였을 뿐 세상에 보익이 없는데도 오히려 밤낮으로 분주하며 그칠

줄을 모르니, 부끄럽지 않겠는가. 어찌하면 관을 걸고[掛冠] 이 정자에서 후를 따라 속수(涑水)의 독락원기(獨樂

園記)를 외고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읊으면서 한 번 그 즐기는 바의 고상한 지취(志趣)를 엿볼 수 있을까."

하였다.

신증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소년의 성가(聲價)를 누가 그대에 비기리. 그 다리[脚] 아래 만리의 청운(靑雲)

길이 평평히 보였네. 잠깐 조정에 나왔다가 옛 고장 다시 찾고, 또다시 영화로운 벼슬에 높은 공훈 이루었다.

공명(功名)이란 참으로 조물주의 작희(作戲)런가. 남아의 출처(出處)를 어찌 쉽사리 논하리오.

말방울 울리며[鳴騶] 길을 재촉하니, 북산(北山)의 원학(猿鶴)이 다시 이문(移文)할까 두렵도다." 하였다.

○ 이름난 동산[園]이 저 금강을 눌러 나직하게 있는데, 옛날에 내가 찾으려다 길을 몰랐네. 하씨(何氏)의 임정

(林亭)이 가장 좋은 줄 알았어도, 두릉(杜陵)이 오동잎에 시를 쓰지 못하였네. 수레에 기름칠해 반곡(盤谷)에 따

르지 못하니, 눈 속에 배를 저어 마침내 섬계(剡溪)를 찾으리. 여울 물 감추고 안개 걷지 말라.

도리(桃李) 나무 밑에 이미 길이 났다고 들었노라.

 

안무정(按舞亭) : 금강 아래쪽에 있는데 주에서 2리쯤 된다. 옛날 어느 안렴사(按廉使)가 이 정자에 올라와 멀리

앞을 바라보고 술이 취하여 저도 모르게 춤을 추었다 하여 안무정이라 이름 붙였다. 정자가 폐하여진 지 이미 오

래되었는데, 뒤에 어느 목사가 중수하려 하다가 감사(監司)에게 견책을 받아 이루지 못하니, 사람들이 조롱하여

말하기를, "전에는 취해서 춤추는 안렴사가 있는가 했더니, 뒤에는 술깨서 읊조리는 감사도 있구나."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안무정 앞에는 강산도 좋은데, 안무정 속에는 풍월(風月)이 늙었구나. 그 당시의 안렴사는

진정 호걸이로다. 술이 취해 일어나 춤추니 옥산(玉山)이 스스로 거꾸러졌네.

그 풍류가 질탕(跌宕)하기 천하 제일이라, 아름다운 그 이름 정자와 함께 전하네. 뒤에 오는 사신(使臣)들은 어이

그리 삭막(索寞)하던고. 강산과 풍월이 오랫동안 한가했네. 들으니 금강의 어진 주인, 정자를 고쳐 지어 경물도

새로울 뻔했는데, 이것을 살풍경(殺風景) 만든 자 그 누구이던고. 백두(白頭) 감사가 참으로 악한 손[賓]일세.

옛날에 어떤 이가 황학루(黃鶴樓)를 부수려 할 때, 황학은 노기 띠고 하늘도 부끄러워했네. 다락은 부술지언정

강산 풍월이야 어찌하리. 천년 지난 지금까지 웃음만 사는고야. 그대는 못 보았나, 그 옛날 안무정(按舞亭)에서,

황금빛 아름다운 술을 백옥병에 가득 담고, 미인이 흰 이빨 드러내고 노래하고 가는 허리 춤을 추니,

손님도 덩실덩실 두 소매 나부낀 것을. 또 보지 못하였나, 오늘의 안무정엔, 앙상한 떨기 병든 잎새에 조수(潮水)

만이 가득하니, 새들 노래하고 이무기[蛟龍]가 춤을 추니, 저 먼 산이 미인의 푸른 눈썹 흉내 내는 것을.

옛사람 지금 사람이 때가 같지 않으니, 술 취해 춤춘 이와 깨어서 읊은 이 그 누가 잘한 것인가. 인생이란 행락

(行樂)하고 볼 것이니, 이 밖의 남은 일은 도무지 모를레라." 하였다.

정지방(亭止房) : 금강 가에 있다. 주와의 거리는 3리이다.

○ 고려 권적(權適)의 시에, "반년 티끌 속에 청산과 등졌더니, 고요한 절간에 하루의 한가로움 얻었네.

처음 국화 보고 가절(佳節)인 줄 알았고, 붉은 단풍잎에 쇠(衰)한 얼굴 비친 것 놀랐네. 저 하늘은 끝없는 들판

밖을 둘러쌌고, 배는 맑은 강 위 적막한 사이에 떠 있고나. 상방(上房)에 고주인(沽酒引) 있으니, 비낀 해 저녁

연기 올라도 돌아갈 줄 모르네." 하였다.

 

명학소(鳴鶴所) : 유성현(儒城縣) 동쪽 10리에 있다. 고려 명종(明宗) 6년에 명학소 사람 망이(亡伊)가 그 도당들

을 모아서 본주(本州)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조정에서 이 명학소를 승격시켜 충순현(忠順縣)으로 만들고,

영(令)ㆍ위(尉)를 두어 안무(安撫)하게 하였더니, 그 뒤에 항복하였다가 다시 배반하므로 곧 폐해 버렸다.

 

청류부곡(淸流部曲) : 주 동쪽 40리에 있다. 지금은 구을촌(仇乙村)이라 칭한다.

양화부곡(良化部曲) : 주 동쪽 40리에 있다. 완부부곡(薍釜部曲) : 주 서쪽 40리에 있다.

완동(薍洞)이란 곳이 있는데, 아마 그곳인 듯하다.

 

이인부곡(里仁部曲) : 바로 이인역(利仁驛)이다. 미화부곡(美化部曲) : 유성현 동남쪽 28리에 있다.

귀지부곡(貴智部曲) : 주 남쪽 29리에 있다. 금단소(今丹所) : 주 남쪽 20리에 있다.

갑촌소(甲村所) : 유성현 북쪽 10리에 있다. 촌개소(村介所)ㆍ복수소(福水所) : 모두 유성현 동쪽 23리에 있다.

박산소(撲山所) : 덕진현(德津縣) 동쪽 5리에 있다. 금생소(金生所) : 덕진현 동쪽 7리에 있다.

고조산(古曹山) : 주 동쪽 50리에 있다. 속설에 옛날 현(縣)의 터라 하나, 어느 현인지 알 길이 없다.

이인산성(里仁山城) : 주 남쪽 2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50척이며, 그 안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양화산성(良化山城) : 주 남쪽 4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3척이며, 그 안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신풍산성(新豐山城) : 신풍현 남쪽 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백 1척이다.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유성산성(儒城山城) : 유성현 동쪽 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백 80척이며,

그 안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덕진산성(德津山城) : 덕진현 남쪽 1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백 67척이며, 그 안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명환 신라 한서의(韓恕意) : 당 나라 천보(天寶) 연간에 웅천 조교(熊川助敎)가 되어 고을 사람 번길(番吉)의 묘비

를 지었는데, 지금도 효가리(孝家里)에 있다. 고려 김은부(金殷傅) : 고려 현종 때에 본주 절도사가 되었는데,

왕이 거란(契丹)의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오자, 은부가 예를 갖추고 교외로 나와서 맞으며 아뢰기를, "성상(聖上)

께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시며, 서리와 눈을 무릅쓰고 이런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찌 뜻하였겠습니까." 하고,

의대(衣帶)와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파산역(巴山驛)에 도착하니 아전들이 다 도망하여 수라를 거르게 되었다.

은부가 또 음식을 올려 아침저녁에 나누어 공궤하였다. 거란병이 물러가자 왕이 돌아오는 길에 공주에 머물렀다.

은부가 맏딸을 시켜 어의(御衣)를 지어 바치니, 왕이 곧 총애하였는데 이가 원성왕후(元成王后)이다.

 

송자호(宋子浩) : 판관(判官)이 되어 왜적과 싸우다가 죽었다. ○ 권근(權近)의 시에, "견견(狷狷)하게 강직한 뜻

품었고, 명관(名官)으로 높은 치적(治績) 있었네. 위태함에 당하여 어찌 환란을 피하랴. 적진으로 달려가 곧 목숨

버렸네. 주었다가 앗아가니저 하늘 멀구나. 지극한 그 충성 태양처럼 밝도다. 그대 죽음 듣고 내 간장 뜨거워,

답답하여 편안하지 못하네." 하였다.

 

이백겸(李伯謙) : 충렬왕(忠烈王) 때에 부사(副使)가 되었는데, 백성에게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여 백성들이

풍족하게 되었다. 심양(沈●) : 충렬왕 때 부사(副使)가 되었는데 장성현(長城縣)에 사는 여자가 말하기를, "금성

대왕(錦城大王 신(神)의 칭호)이 나에게 내려서 하는 말이, '내가 금성당(錦城堂)의 무당이 안 되면 반드시 네

부모를 죽이리라.' 하기에, 내가 두려워서 복종했다." 하고, 또 그 고을 사람 공윤구(孔允丘)와 간통하고는 신의

말이라고 지어서 말하기를, "내가 장차 중국에 가려고 하는데, 반드시 공윤구와 동행할 것이니, 나주(羅州) 관원

은 역마(驛馬)를 주라." 한다고 했다. 하루는 역리(驛吏)가 도병마사(都兵馬使)에게 급히 보고하기를, "금성대왕

이 온다." 하니, 도병마사도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또 나주 사람으로 조정에 벼슬하는 자가 있어서 그 신이

(神異)한 사실을 갖추어 왕에게 귀띔하니 왕이 의논하여 맞이하려고 하자 그들이 지나가는 고을의 수령들은

모두 공복(公服)을 입고 교외에 나와 맞아서 음식 대접을 극진히 했다. 무당이 본주에 왔을 때 심양(沈●)이 접대

하지 않으니, 무당이 노하여 신의 말이라고 전하기를, "내가 반드시 심양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하고는 일신역

(日新驛)으로 물러가서 투숙했다. 밤에 심양이 사람을 보내어 엿본즉 계집무당이 공윤구와 동침하고 있었다.

드디어 잡아다가 국문하니 모두 자백하였다. 진화(陳澕) : 우사간(右司諫)으로 지공주사(知公州事)로 나왔다가

임기 중에 죽었다.

 

최재(崔宰) : 공민왕(恭愍王) 때 목사로 왔다. 전유(田濡) : 판관(判官)이 되었다.

본조 맹사성(孟思誠) : 치적이 도내에서 최고였다. 황자후(黃自厚)ㆍ이정간(李貞幹)ㆍ권담(權湛)ㆍ

이석형(李石亨)ㆍ이명신(李明晨)ㆍ이영구(李英耈)ㆍ함우치(咸禹治).

 

인물 본조 이명덕(李明德) : 과거에 올라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효자 신라 향덕(向德) : 고적조(古蹟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고려 이복(李福) : 본주 아전이다. 이장생(李長生)ㆍ강성(姜成) : 낭장(郞將)이다.

모두 효자로 정문(旌門)을 세웠다.

 

열녀 고려 고씨(高氏) : 현감 정자구(鄭自求)의 아내이다. 정문을 세웠다.

신증 본조 고씨(高氏) : 양한필(梁漢弼)의 아내이다. 남편이 죄로 죽고, 고씨가 연좌되어 관비(官婢)가 되었는데,

관노(官奴)가 강탈하려 하자 마침내 목을 매어 죽었다. 금상(今上) 18년에 정문을 세웠다.

김씨(金氏) : 장증문(張曾文)의 아내이다. 남편이 외출하고 혼자 있는데, 이웃 사람이 밤에 그 방에 들어와서

강탈하려고 칼을 빼들고 위협하며, 온몸에 자상(刺傷)을 내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금상 23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설청강로마지지(雪晴江路馬遲遲) : 고려 전유(田濡)의 시에, "공사(公事)는 구름같이 쌓여 귀밑털 세려는데,

누 갠 강변길 말걸음 더디구나. 백성 걱정하는 이내 마음, 아전들은 제 모르고 강산(江山) 보고 시구(詩句) 생각

한다고 잘못 이르리." 하였다.

 

이락황휴일경미(籬落荒畦一逕微) : 정추(鄭樞)의 시에, "누런 구름 자욱하고 눈송이 퍼붓는데, 울타리 밑 거친

밭둑 사이 한 가닥 길이 가늘다. 소나무 언덕 밑 말에게 물을 먹이고, 채찍 흔들면서 천천히 백사장 돌아가누나."

하였다. 취헌대운연분첩(翠巘帶雲連粉堞) : 김휴(金休)의 시에, "푸른 산은 구름 띠어 성첩에 연해 있고,

붉은 노을 따오기와 함께 푸른 섬에 떨어진다." 하였다.

 

강류청사사군심(江流淸似使君心) : 이첨(李詹)의 시에, "산빛은 기생의 눈썹보다 푸르고, 강물은 원님의 마음

같이 밝았네." 하였다.

일말웅강청요지(一抹熊江靑繞地) : 남수문(南秀文)의 시에, "한 가닥 웅진 강물 새파랗게 땅을 두르고, 일천 겹의

계룡산 파랗게 허공에 떴다. 고목에 연기 엉긴 데 관도(官道)를 나누고, 풀에 덮인 긴 둑은 논밭을 싸고 있네."

하였다.

 

십경(十景) 서거정(徐居正)의 시. 금강의 봄놀이[錦江春遊] : "탁금강(濯錦江) 가에 천지가 봄이로다.

2ㆍ3월 접어드니 천기(天氣)가 새로워라. 옥병에 술 사들고 꽃다운 봄 찾아가니, 긴긴 해 따스한 바람이 사람을

못 견디게 하네. 날씨 갠 강물 새로 불어 누른 포도주가 넘치는 듯, 가는 목란 멋대로 저어 그림배 옮겨지네.

살구꽃 엉긴 그림자에 만취해 돌아가니, 옥저(玉笛) 한 소리에 산 달이 높았구나." 하였다.

 

월성의 가을 흥취[月城秋興] : "가을 바람 한들한들 강 물결 이는데, 앞산 뒷산에 단풍잎도 많구나.

등산임수(登山臨水) 솟는 흥취 타락[酥]보다 더 진한데, 십천(十千)의 아름다운 술 금잔으로 따르며,

국화를 가득 꽂으니 사모[帽]가 기울어지네. 술을 고래같이 마시고 시를 무지개같이 토하기를 어찌 사양하리오.

송옥(宋玉)이 신산(辛酸)하게 한 평생 헛되이 비추사(悲秋詞)만 짓는 것 배우지 말게." 하였다.

 

웅진의 밝은 달[熊津明月] : "웅진 강물은 맑고도 잔잔한데, 웅진에 달이 언제 오려나. 백제의 옛일은 새 날아

지나간 듯, 내 저 달에게 묻노니 달은 응당 알리라. 당 나라 군함인 한 누선(樓船)이 한 번 건너온 뒤로, 사직(社稷)

이 폐허되고 도독부(都督府) 된단 말인가. 낙화암(落花巖) 앞에는 봄 시름도 깊은데, 조룡대(釣龍臺) 아래에 조수

[灣水]는 돌아오네." 하였다.

 

계룡산의 한가로운 구름[鷄嶽閑雲] : "계룡산 높고 높아 푸른 층층 솟았는데, 맑은 기운 굼실굼실 장백(長白)에서

달려왔네. 산에 못이 있으매 용이 서렸고, 산에 구름 있으매 만물에 혜택 주리. 전날에 시험삼아 산 속에 놀아보니,

신령함이 다른 산과 판이하더라. 마침내 비를 내려 천하에 혜택 줄 제, 용은 구름 몰고 구름은 용 따르리." 하였다.

 

동루에서 손을 보냄[東樓送客] : "금강 강가의 금강루, 황학이 한 번 간 뒤 구름만이 유유(悠悠)하네. 남북으로

환유(宦遊)하는 자 그 몇이더냐. 방초(芳草)에 이별하는 서러움 어느 해나 멎을고. 옛날에 작별할 땐 칠(漆)빛 같던

그 머리가, 올해 이별에는 눈보다 희단 말인가. 흐르는 저 강물과 이별의 이 한 어느 것이 얕고 깊으랴.

양관(陽關) 한 곡조가 끊어지니 시름일세." 하였다.

 

서사에 중을 찾음[西寺尋僧] : "조각배 매어놓고 옛절을 찾아드니, 강 언덕 가는 길이 높았다 낮았다 하네. 10년

동안 중을 찾아 한가로이 오가니, 청등(靑藤) 지팡이, 흰 버선, 한 켤레 짚신,

나도 역시 평생에 지허(支許)의 무리라.결사(結社)할 그 약속을 왜 저버리랴. 마침내 용면 노거사(龍眠老居士)의

손을 빌려서, 호계(虎溪)의 삼소도(三笑圖)를 그려 내리라." 하였다.

 

삼강에 불은 녹수[三江漲綠] : "세 강의 근원 은하(銀河)에서 흘러나와, 합세하여 금강되니 이끼보다 푸르도다.

어젯밤 작은 비에 반 상앗대[半篙] 물 불으니, 포도주가 처음 괴는 듯. 저문 날에 누구 집 두세 척 배가, 복사꽃

뜬 물결 속을 목란(木蘭)삿대로 헤쳐가나. 도롱이 입고 부들 삿갓 쓴 현진자(玄眞子)를 물어서,

 

창랑곡(滄浪曲) 노래하며 찾으려네." 하였다. 오현에 쌓인 푸르름[五峴積翠] : 오현은 차현(車峴)ㆍ판현(板峴)ㆍ

마현(馬峴)ㆍ화현(火峴)ㆍ적여현(狄餘峴)이다.

○ "공주성의 이 승경(勝景)이 천하 제일 아니런가. 다섯 봉 높이 솟아 사각(四角) 진산(鎭山) 이루었네.

멀리 푸르름이 아득히 연했는데, 삼삼(森森)한 전나무 솔나무 구렁에서 하늘로 솟아 있다.

몇 번이나 이 인간 세상에 추위와 더위 바뀌었던고. 사시(四時)에 늙지 않고 푸른 빛을 지녔어라.

산중에 황정(黃精)을 캐어 먹고, 학(鶴) 타고 저[筌] 불면서 오락가락 하고저." 하였다.

 

금지의 연꽃[金池菡萏] : "직녀성[天孫] 고운 손으로 비단틀에 짜아내어, 푸른 빛 치마하고 붉은 빛 적삼했나.

바람에 좋고 비에 좋고 달에 또한 좋으니, 가벼운 연기 가는 안개 향기가 부슬부슬.

어느 해 태화 봉두(泰華峯頭)에서 옮겨 왔던가. 꿀맛, 눈[雪]맛 입에 넣으매 오랜 병도 낫는다오.

재목이 너무 크면 쓰기 어렵나니, 연밥의 그 크기가 배[船]보다 커서 무엇하리." 하였다.

 

석옹의 창포[石甕菖蒲] : "백제의 고물(古物)이란 다만 이 돌항아리, 배만 크고 펀펀하니 무엇에 쓰랴.

창양(菖陽)은 천지의 정기라 구름 헤치고 돌 쪼개어 여기에 옮겼는 줄 누가 알랴.

구절(九節)의 뿌리에는 교룡(蛟龍)이 늙은 듯, 신령스런 그 악성(樂性) 천하에 드물리라.

이를 먹으면 긴 수명 살 것이니, 구구히 요초(瑤草) 찾아 무엇하리." 하였다.

 

[비고]

 

연혁 인조(仁祖) 24년에 공산현(公山縣)으로 강등시켰다 : 유탁(柳濯)의 변란 때문이었다. 이어 다시 승격시켰다.

현종(顯宗) 11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숙종 5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영종(英宗) 4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3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정종(正宗) 2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다시 승격시켰다. 고종(高宗)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산내(山內) : 동남쪽으로 처음은 80리, 나중은 120리. 유등포(柳登浦) : 동남쪽으로 처음은 70리, 나중은 80리.

천내(川內) : 동남쪽으로 처음은 60리, 나중은 70리. 탄동(炭洞) : 동쪽으로 처음은 60리, 나중은 70리.

진두(辰頭) :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나중은 40리. 반탄(半灘) : 서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나중은 50리.

목동(木洞)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나중은 30리. 남부(南部) : 남쪽으로 나중은 10리.

동부(東部) : 동쪽으로 나중은 20리. 사곡(寺谷) : 서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나중은 60리.

신상(新上) : 서북쪽으로 처음은 50리, 나중은 80리. 신하(新下) : 서북쪽으로 처음은 40리, 나중은 70리.

구칙(九則) : 동쪽으로 처음은 50리, 나중은 60리. 명탄(鳴灘) : 동쪽으로 처음은 40리, 나중은 60리.

양야리(陽也里) : 고량화부곡(古良化部曲)의 동쪽. 처음은 40리, 나중은 50리.

정안(正安) : 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나중은 60리. 율당(栗堂) :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나중은 30리.

성북(成北) :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나중은 40리. 반포(反浦) : 처음은 20리, 나중은 50리.

곡화천(曲火川) : 처음은 30리, 나중은 50리. 현내(縣內) : 동쪽으로 처음과 나중이 60리.

우정(牛井) : 서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나중은 30리.

성지 쌍수산성(雙樹山城) : 북쪽 2리에 있고 백제(百濟) 성왕(聖王) 1년에 웅진성(熊津城)으로 수리한 것이 이것

이다. 《승람(勝覽)》에 이르는 경치는 공산성(公山城)은 석축(石築)으로 한 우물[井]과 세 개의 못[池]이 있고,

신라 때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다. 본조 선조(宣祖) 계묘년(癸卯年)에 수축하였는데,

인조(仁祖) 2년 이괄(李适)의 난 때 임금께서 남쪽으로 거둥하실 제, 이곳에서 주필(駐驆 임금의 행차가 잠시

머무르는 것)하였다가 쌍수석축(雙樹石築)이라 이름하고 갔다.

둘레가 2천 4백 4보이고, 남북으로 두 개의 문이 있고, 동북쪽으로 수구문(水口門)이 있으며, 밖에는 하나의 못

[池]이 있다. 바깥 성의 길이는 3백 50장(丈)인데, 좌측 익성(翼城)은 길이가 25장이고, 우측 익성의 길이는 좌측

익성과 같은데 암문(暗門)이 있다. 한 성의 북쪽에는 북루(北樓)를 끼고 있으며 주위가 절벽이고 강물과 연해

있다. 유성고성(儒城古城) : 우측 현(縣) 동쪽 5리에 있다. 둘레가 6백 80척이고, 우물[井]이 하나 있다.

 

덕진고성(德津古城) : 좌측 현 남쪽 1리에 있는데, 1백 67척이고, 우물이 하나다.

신풍고성(新豐古城) : 우측 남쪽 3리에 있는데, 둘레가 7백 1척이다.

양화고성(良化古城) : 우측 현 남쪽 1리에 있는데, 둘레가 7백 67척이고, 우물이 하나다.

이인고성(里仁古城) : 서남쪽 20리에 있는데, 둘레가 1천 5백 척이고, 우물이 하나다.

독연고성(禿峴古城) : 북쪽 20리에 있고, 둘레가 1천 5백 척이다.

무성(武城) : 옛날에는 무성산(武城山) 위에 있었다. 고성(古城) : 월성산(月城山)에 옛날 성터가 있다.

영아 순영(巡營) : 본조 태조 4년에, 충주(忠州)에 이 영을 세웠는데, 선조(宣祖) 35년 관찰사 유근(柳根)이 본주

로 옮겼다.

 

관원 관찰사(觀察使) :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ㆍ공주 목사(公州牧使)를 겸한다.

도사(都事) : 옛날에는 해운판관령(海運判官領)을 겸하여 아산현(牙山縣)의 공진창(貢津倉) 세곡(稅穀)을 바쳤다.

영종(英宗) 임오년(壬午年)에 없어졌다.

심약(審藥)ㆍ검률(檢律) : 각각 한 사람. 우영(右營) : 인조(仁祖) 조에 세웠다. 우영장(右營將) 한 사람이다.

 

속읍에는 공주(公州)ㆍ옥천(沃川)ㆍ연기(燕岐)ㆍ석성(石城)ㆍ부여(扶餘)ㆍ은진(恩津)ㆍ연산(連山)ㆍ노성(魯城)ㆍ

진잠(鎭岑)ㆍ회덕(懷德)ㆍ전의(全義)이다.

진도 금강진(錦江津) : 동북 5리에 있다. 웅진(熊津) : 서쪽 7리에 있다. 지동진(紙同津) : 동쪽 30리에 있다.

잠상진(岑尙津) : 서쪽 15리에 있다.

 

산물 종이ㆍ먹ㆍ감ㆍ대추ㆍ소가리[錦鱗魚]ㆍ웅어[葦魚]ㆍ숭어[秀魚]

 

사원 충현서원(忠賢書院) : 선조(宣祖) 14년에 세웠다가 인조(仁祖) 을축년(乙丑年)에 사액(賜額)하였다.

주자(朱子)ㆍ이존오(李存吾) : 현주(縣州)에 보인다.

 

이목(李穆) : 자는 중옹(仲甕), 본관은 전주(全州)인데, 연산군 때 무오사옥(戊午史獄)의 화를 입어

문과관(文科官)으로 영안도(永安道) 평사(評事)가 되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받았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성제원(成悌元) : 자는 자경(子敬), 호는 동주(東州)이며, 본관은 창녕(昌寧),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지냈다.

조헌(趙憲) : 금포(金浦)에 보임. 김장생(金長生)ㆍ송준길(宋浚佶)ㆍ송시열(宋時烈) : 모두 문묘(文廟)에 보임.

서기(徐起) : 자는 대가(大可), 호는 고청(孤靑), 본관은 이천(利川)인데, 지평(持平)을 추증받았으며,

별사(別祠)에 배향한다. 창강서원(滄江書院) : 인조(仁祖) 기사년에 세웠다가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황신(黃愼) :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본관은 창원(昌原)인데, 광해주 정사년에 귀양가서 죽었다.

벼슬은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냈으며,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는데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임천군 林川郡

 

동쪽으로는 석성현(石城縣) 경계까지 29, 은진현(恩津縣) 경계까지 31리, 전라도 용안현(龍安縣) 경계까지 22리

이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함열현(咸悅縣) 경계까지 16, 한산군(韓山郡) 경계까지 27리이고, 서쪽으로는 홍산현

(鴻山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북쪽으로는 부여현(扶餘縣)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가림군(加林郡)이었는데, 신라 때에 가(加) 자를 가(嘉) 자로 고쳤으며, 고려 성종(成宗)

때에 임주 자사(林州刺史)를 두었고, 현종(顯宗) 때에 가림현(嘉林縣)으로 고쳐 현령(縣令)을 두었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원(元) 나라 평장사(平章事) 아패해(阿孛海)의 아내 조씨(趙氏)의 고향이라 하여 지림주사

(知林州事)로 승격되었으며, 본조 태조(太祖) 3년에 명 나라 조정으로 들어간 환자(宦者) 진한룡(陳漢龍)의 청

으로 부(府)로 승격되었다. 태종(太宗) 원년에 환원되었다가, 3년에 또 명 나라 조정으로 들어간 환자 주윤단

(朱允端)의 청으로 부(府)로 승격하였으나, 다음 해에 환원되었으며,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만들었다. 관원 군수ㆍ훈도(訓導) : 각 1인.

군명 가림(加林)ㆍ가림(嘉林)ㆍ임주(林州).

 

성씨 본군(本郡) 조(趙)ㆍ임(林)ㆍ방(方)ㆍ백(白)ㆍ적(翟)ㆍ신(辛)이 있으며, 전(田) : 촌(村)에 있다. 진(陳)ㆍ

이(李) : 모두 들어온 성이다. 이(李) : 고려 때 외오아국(畏吾兒國) 사람 이현(李玄)이 귀화하여 통역(通譯)의

공로가 있어 곧 본군에 적(籍)을 내렸다. 고다지(古多只) 조(趙) : 본읍의 아전.

 

풍속 모시[苧]를 심어 이익을 보니 기내(畿內)의 남은 풍속이 있다 : 하륜(河崙)이 지은 악산루기(樂山樓記)에

있다.

형승 수륙의 요충지이다 : 당(唐) 나라 유인원(劉仁願)이 손인사(孫仁師)와 함께 부여풍(扶餘豐)을 공격할 때

여러 장수들과 공격할 방향을 의논하매, 어느 장수가 말하기를, "가림성(加林城)은 수륙의 요충이므로 마땅히

먼저 이를 공격하여야 한다." 하니, 유인궤(劉仁軌)가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실(實)한 곳을 피하고,

허(虛)한 곳을 치라고 하였다. 가림성(加林城)은 험준하고 견고하니, 이를 치려면 군사의 손상을 볼 것이요,

대치하고 있으려면 오랜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주류성(周留城)으로 달려갔다.

땅이 남해(南海)의 가이다 : 하륜(河崙)의 기문에 있다.

 

산천 성흥산(聖興山) : 군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건지산(乾止山) : 군 서쪽 2리에 있다.

성주산(聖住山) : 군 서쪽 12리에 있다. 보광산(普光山) : 군 서쪽 10리에 있다.

주성산(周城山) : 군 북쪽 10리에 있다.

칠성산(七星山) : 군 남쪽 10리에 있다. 널찍한 평야에 일곱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형상이 칠성(七星)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봉황산(鳳凰山) : 군 남쪽 10리에 있다. 구랑산(仇郞山) : 군 동쪽 25리에 있다. 화산(花山) : 군 남쪽 5리에 있다.

승달령(升達嶺) : 군 서쪽 10리에 있다. 유현(楡峴) : 군 북쪽 10리에 있다. 발현(發峴) : 군 서쪽 10리에 있다.

백암(白巖) : 군 동쪽 20리에 있다. 가림수(嘉林藪) : 군 동쪽 1리에 있다. 구랑포(仇郞浦) : 군 북쪽 15리에 있다.

홍산현(鴻山縣)에서 발원하여 장암강(場巖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장암강(場巖江) : 군 북쪽 15리에 있다.

고다진(古多津) : 군 동쪽 29리에 있는데, 수세(水勢)가 험악하다. 강경진(江景津) : 군 동쪽 30리에 있는데,

은진현(恩津縣) 경계이다. 청포진(菁浦津) : 군 남쪽 22리에 있다.

남당진(南堂津) : 일명 용연포(龍淵浦)라고도 한다. 군 남쪽 14리에 있으니, 고다진(古多津)의 하류이다.

언덕 북쪽에 사인암(舍人巖)이 있다. 상지포진(上之浦津) : 군 남쪽 30리에 있다.

○ 이상 여섯 나루는 모두 공주 웅진(熊津)의 하류로서 한산군(韓山郡)으로 들어가서는 진포(鎭浦)가 된다.

 

토산 모시ㆍ질그릇[陶器]ㆍ백어(白魚)ㆍ웅어[葦魚]ㆍ어표(魚鰾)ㆍ조기[石首魚]ㆍ청어(靑魚)ㆍ게[蟹]ㆍ

새우[蝦]ㆍ백화사(白花蛇)ㆍ안식향(安息香)ㆍ지황(地黃).

 

성곽 성흥산성(聖興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2천 7백 5척, 높이가 13척으로 험준하게 막혀 있으며,

성안에는 3개의 우물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누정 요산루(樂山樓) : 하륜(河崙)의 기문이 있다.

학교 향교 : 군 동쪽 5리에 있다.

 

역원 영유역(靈楡驛) : 군 북쪽 15리에 있다. 남원(南院) : 군 남쪽 3리에 있다.

고다진원(古多津院) : 군 동쪽 25리에 있다.

신증 교량 대교(大橋) : 군 남쪽 7리에 있다. 석교(石橋) : 구랑포(仇郞浦)에 있다.

 

불우 서부도암(西浮圖菴) : 성주산(聖住山)에 있다.

서자복사(西資福寺) : 건지산(乾止山)에 있으며, 절 남쪽에 석장(石檣)이 있다.

동자복사(東資福寺) : 성흥산에 있다. 절 남쪽에 석장이 있다.

용연사(龍淵寺) : 남당진(南堂津) 북쪽 기슭 위에 있다.

향림사(香林寺)ㆍ향덕사(香德寺) : 모두 천등산(天燈山)에 있다.

보광사(普光寺) : 성주산(聖住山)에 있는데, 차군루(此君樓)가 있다.

○ 원(元) 나라 위소(危素)가 지은 중창비(重創碑)에 옛날 삼한(三韓)의 대부도(大浮圖)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세상의 영화를 사절하고 돌아가서 그 뜻을 추구하니, 고려 국왕이 재상 장항(張沆)을 보내어 임주(林州)까지

좇아갔는데, 이 고을에는 예부터 보광사가 있어 산수가 그윽하고 경개가 좋았다.

기숙(耆宿)ㆍ혜잠(惠湛)ㆍ달한(達閑) 등이 상서(尙書) 전충용(田沖用)과 더불어 국사(國師)를 이곳에서 붙들어

머무르게 하니, 그 문인이 3천 명이나 되어 그 집으로는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 최현우(崔玄祐)가 그 관속을 거느리고 증축을 도모하니, 원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시주(施主)가 구름같이 모여들어 승료(僧寮)ㆍ빈관(賓館)ㆍ창고(倉庫)ㆍ포주(庖廚)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 집이 무릇 1백 여 칸에 달하였다.

또 국사의 백씨(伯氏)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로 치사(致仕)한 김영인(金永仁)과 중씨(仲氏) 중대광 평양군(重大

匡平陽君) 김영순(金永純)이 감격 발원(發願)하여 가동(家童) 1백 명과 전답 1백 경(頃)을 절로 돌려주니,

성대한 한 도량(道場)을 이루었다.

그 뒤에 국사가 시적(示寂)함에 임하여 그의 문도 소주(紹珠) 등에게 말하기를, "절을 이미 거듭 새롭게 하였으니,

너희들은 법석(法席)을 흩어지게 하지 말고 갑(甲) 을(乙)의 차례로 이를 주관하라." 하였다.

이에 그 문도들이 스승의 뜻을 받아 무궁하게 서로 이어 나가기로 하였다.

도성선원 보은선사 주지(都城禪源報恩禪寺住持) 굉연(宏演)이 와서 그 사실을 써 주기를 요구하는데, 굉연이 말

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이 절에서 불경을 배웠으니, 이 사실을 기록하는 글의 부탁은 실로 맡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굉연으로부터 국사의 시종(始終)을 모두 듣게 되어 아울러 이를 쓰는 바이다.

국사는 휘(諱)는 충감(沖鑑)이요, 자(字)는 절조(絶照)이며, 호는 설봉(雪峯)이다. 어려서부터 이미 소식(素食)하

였으며, 뭇 아이들과 유희를 하는데도 포백으로 가사(袈裟)를 만들어 불사(佛事)의 놀이를 하였고, 점차 자라서는

부모에게 명을 받고 선원사(禪源寺)에서 머리를 깎고는 자오국사(慈悟國師)에게 예를 드리고 스승으로 삼았다.

나이 19세에 승과(僧科)를 보아 상상과(上上科)에 올랐으나 어느 날 크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비록 다시 저 시방

(十方)에 있는 모든 부처님의 청정교리(淸靜敎理)를 항하사(恒河沙)같이 읽고 외운다 하더라도 다만 스스로 노고

만을 더할 것이다. 어찌 무편과(無偏果) 닦는 것만 하랴." 하고, 드디어 종사하던 바를 버리고는 즉시 옷을 털고

일어나 사방에 노닐 제, 오초(吳楚)에 머물다가 철산(鐵山) 경선사(瓊禪師)의 도행(道行)이 매우 높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맞아 동국으로 돌아와서 3년 동안 제자의 예로 모시니, 경선사가 심히 그에게 기대하였다.

경선사가 하직하고 돌아가게 되자 국사는 용천사(龍泉寺)의 주관이 되어 처음으로 백장해 선사(百丈海禪師)의

선문청규(禪門淸規)를 취하여 이를 행하였고, 뒤에 선원사(禪源寺)의 주지(住持)로 15년 동안 있으면서 크게

종지(宗旨)를 선양하여, 온 나라의 모범이 되었다. 그가 보광사로 올 때는 다시 지원(至元)을 기원(紀元)으로

하던 해였는데, 그 뒤 4년을 지나 8월 24일에 장차 입멸(入滅)하려 할 때에 문인들에게 경계하여 고하기를, "비

(碑)를 세우거나 탑(塔)을 만들지 말라." 하고 문득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가부좌(跏趺坐)로 단정히 앉았다.

소주(紹珠)가 앞으로 나아가서 여쭙기를, "청하건대 화상(和尙)께서는 중생(衆生)을 위하여 불법을 말씀해

주소서." 하니, 국사가 말하기를, "말후(末後)의 일착(一著)을 너희들은 분(分)이 있거든 취하라." 하고,

말을 마치자 아무 계념(係念) 없이 조용히 가니, 이 세상에서 누린 수가 65세요, 승랍(僧臘)이 58년이었으며,

탄생한 것은 지원(至元) 12년 을해(乙亥) 을유삭(乙酉朔) 신유일(辛酉日)이었다.

나는 일찍이 논하기를, "불씨의 학(學)이 서역 천축(天竺)에서 나왔는데 수만 리를 멀다 하지 않고 동해의 밖까지

입혀졌으니, 어찌 그리 성한고. 그러나 우뚝하게 공을 세운 것이 원명국사 같은 이는 베푼 것이 더욱 창성하고

더욱 밝아지리라.

보광사는 대대로 국사를 모범으로 삼는다면 어찌 타락하고 폐해질 때가 있으랴." 하고, 공경히 이를 기록하고,

또 이어 명(銘)하기를, "삼한(三韓) 옛땅에 고려에서 나라 세우니, 아득한 바다 저편으로 동오(東吳)와 연하였다.

서쪽으로 신독(身毒 인도) 바라보매 하늘 모퉁이에 각기 있는데, 어느 해 패다(貝多)에 쓴 불경을 전했던고.

배우는 이 마음자리 처음을 깨달아 밝혔네. 경선사(瓊禪師) 석장(錫杖) 날려 이 나라에 왔으며 원명국사(圓明國

師)가 기거(起居)를 모시었네. 조계(曹溪) 정종(正宗)을 힘써 붙들었고, 한 마디에 미묘하게 알아들어 온갖 생각

을 쓸었네. 있다 하자니 있는 것 아니요, 없다 하자니 없는 것 아니로다. 죽고 사는 것이란 일치한 것, 변하지 않

는 것이네. 보광 큰 사찰 종어(鐘魚)가 울리니, 금벽(金碧)이 화려한데 운하(雲霞)가 깔렸도다.

편편(翩翩)한 학자들이 소문 듣고 달려오네. 조용히 먹고 숨쉬면서 진여(眞如) 밝혔도다.

절 융성한데 국사 이미 갔도다. 기록하여 새겨서 공덕 모범을 밝히노라. 건곤(乾坤) 태평하여 덕화가 빛나리.

천자(天子)의 만년장수 상서[禎符]에 합하리라." 하였다.

 

○ 강호문(康好文)의 시에, "수석(水石) 천 년 땅에 향등(香燈) 일묘(一畝)의 불이도다. 늙은 중 적멸(寂滅)을

강론하고, 어린 동자는 관음(觀音)에게 예드린다. 산마루 위엔 흰 구름도 많은데, 창문 사이에 해가 이미 붉었

구나. 거사(居士) 숨은 굴속을 찾으려 하니 나는 듯한 높은 길이 공중에 서려 있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詞) : 산성(山城) 안에 있다.

여단(厲壇) : 군 북쪽에 있다. 남당진사(南堂津祠) : 군 남쪽 14리에 있으니, 곧 진포(鎭浦)이다.

물이 깊고 출렁거려 무서우므로 장삿배들이 왕래할 때에는 반드시 노래하고 북 울리며 제사 지낸다.

 

고적 안량부곡(安良部曲) : 군 서쪽 18리에 있다. 고다지소(古多只所) : 군 북쪽 25리에 있다.

소라소(召羅所) : 군 남쪽 15리에 있다. 금암소(今巖所) : 군 남쪽 3리에 있다.

금물촌처(今勿村處) : 군 동쪽 20리에 있는데, 현재 두모곡리(豆毛谷里)가 되어 있다.

명환 본조 유현(兪顯)ㆍ안상진(安尙縝) 신증 이영손(李永孫)

 

신증 인물 본조 조지서(趙之瑞) : 문과에 오르고 또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천성이 곧고 남의 허물을 잘 말하

였는데, 연산군(燕山君)이 동궁(東宮)이었을 때에 보덕(輔德)으로 있으면서 그의 뜻에 거슬린 바 있어 갑자년에

이르러 피살되었다.

 

제영 용연현관미연월(龍淵絃管迷煙月) : 이색(李穡)의 시에, "용연의 관현은 연월에 아득하고, 압야(鴨野)의

호미ㆍ따비[鋤犂] 비바람을 따르네." 하였다.

마읍군봉접지음(馬邑群峯接地陰)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들으니 당 나라 군사 일찍이 이곳에 주둔했을 때,

어찌하여 신라 장수 침범해 괴롭혔나. 웅진강 한 줄기는 하늘과 함께 맑은데, 마을의 못 봉우리 땅에 연해 그늘

졌네." 하였다.

 

[비고]

 

방면 동변(東邊) :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서변(西邊) :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두모곡(豆毛谷)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초동(草洞)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이다.

남산(南山) :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5리이다. 내동(內洞) : 동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이다.

북조지(北調只)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박곡(朴谷)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팔충(八忠)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저곡(低谷) : 남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3리이다.

세도(世道)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인의(仁義)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25리이다.

백암(白巖)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25리이다. 갈화(葛花) :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홍화(紅花) : 남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30리이다. 상지포(上之浦) : 서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15리이다.

적량토(赤良土) : 서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대동(大洞) : 위와 같다.

성북(城北) : 북쪽으로 끝이 15리이다. 신리(新里) : 남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군내(郡內) : 끝이 5리이다. 진도 장암진(場巖津) : 동북쪽 16리에 있는데, 부여(扶餘)로 통한다.

고다진(古多津) : 동쪽 29리에 있는데, 조수가 빠르다. 서안(西岸)에 고암(鼓巖)이 있고 석성(石城)으로 통한다.

낭청진(浪淸津) : 동남쪽 30리에 있는데, 은진(恩津)ㆍ강경(江景) □리로 통한다.

청포진(菁浦津) : 동남쪽 22리에 있는데, 용안(龍安)으로 통한다.

남당진(南塘津) : 남쪽 15리에 있는데, 북안에는 사인암(舍人巖)과 용연사(龍淵寺)가 있다.

조수가 빠르며 함열(咸悅)로 통한다. 상지포진(上之浦津) : 서남쪽 30리에 있는데, 한산(韓山)으로 통한다.

 

토산 숭어[秀魚]ㆍ붕어[鯽魚]ㆍ감[柹]

사원 칠산서원(七山書院) : 숙종(肅宗) 정묘년(丁卯年)에 세웠고 정축년(丁丑年)에 사액하였다.

유계(兪棨) :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벼슬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이었고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한산군 韓山郡

 

동쪽으로는 임천군(林川郡) 경계까지 15리이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임파현(臨陂縣) 경계까지 14리, 같은 도의

함열현(咸悅縣)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쪽으로는 서천군(舒川郡)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쪽으로는 홍산현(鴻山縣)

경계까지 29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5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마산현(馬山縣)이었는데, 신라에서는 그대로 이름하여 가림군(嘉林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때에 감무(監務)를 두어 홍산(鴻山)을 겸임하게

하였다가, 뒤에 이를 지한주사(知韓州事)로 승격시켰다. 본조 태종 13년에 예(例)에 따라 한산군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인이다.

군명 마산(馬山)ㆍ마읍(馬邑)ㆍ한주(韓州)ㆍ아주(鵝州)

 

성씨 본군 이(李)ㆍ김(金)이 있으며, 단(端)ㆍ유(柳) : 모두 촌(村)에 있다. 전(田) : 다른 곳에서 들어왔다.

최(崔) : 속(續)이다.

 

형승 산이 기이하고 물이 곱다 : 이파(李坡)의 취읍정(翠挹亭) 기문에, "산이 기이하고 물이 고와 기린봉(麒鱗峯)

은 북쪽에 진산(鎭山)이 되어 있고, 웅포(熊浦)는 그 남쪽을 감싸고 흐른다." 하였다.

 

산천 건지산(乾至山) : 군 서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취봉산(鷲峯山) : 군 남쪽 5리에 있다.

기린산(麒麟山) : 군 서쪽 5리에 있다. 월명산(月明山) : 군 북쪽 11리에 있다.

원산(圓山) : 와포(瓦浦)와 아포(芽浦) 사이에 있다. 계점산(鷄岾山) : 군 남쪽 5리에 있다.

기현(箕峴) : 군 서쪽 5리에 있다. 적현(赤峴) : 군 서쪽 6리에 있다. 곡현(曲峴) : 군 북쪽 25리에 있다.

상지포(上之浦) : 군 동쪽 18리에 있으니, 곧 임천군(林川郡) 남당진(南堂津)의 하류이다.

우포(杇浦) : 군 동쪽 11리에 있다. 월명산(月明山)에서 발원하여 진포(鎭浦)로 들어간다.

기포(岐浦) : 군 동쪽 12리에 있다. 와포(瓦浦) : 군 남쪽 14리에 있으니, 곧 바다의 별포(別浦)이다.

아포(芽浦) : 군 남쪽 20리에 있는데 서천군(舒川郡)과의 경계이며, 진포(鎭浦)의 하류이다.

또 곡현(曲峴)에서 나오는 물과 서천군 금부현(金富峴)과 비인현(庇仁縣) 모동(茅洞)의 물이 이곳에서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진포(鎭浦) : 군 서쪽 21리에 있다. 임천군(林川郡) 조에 자세히 나와 있고,

또 서천군과 임피현(臨陂縣) 조에도 나와 있다.

 

토산 모시[苧]ㆍ옻칠[漆]ㆍ뱅어[白魚]ㆍ홍어(洪魚)ㆍ모래무지[鯊魚]ㆍ감[柹]ㆍ백화사[白花蛇]ㆍ대[竹]ㆍ

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웅어[葦魚]ㆍ농어[鱸魚].

 

성곽 건지산성(乾至山城) : 흙으로 쌓았으며 주위가 3천 61척이다. 그 안에 일곱 개의 우물과 한 개의 못이 있으며

군창(軍倉)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신증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4천 70척에 높이가 11척이며, 안에 도랑 하나와 우물 넷이 있다.

궁실 객관(客館) : 이곡(李穀)의 기문에, “지정(至正) 기축년 가을에 비가 몹시 와서 마산(馬山) 객관(客館)의 남쪽

낭사(廊舍)가 무너졌다. 비가 이미 개고 농사 또한 틈이 나니, 고을 사람들이 이를 수리하려고 하였다.

군수 박군(朴君)이 말하기를, '남쪽 낭사뿐 아니라 본 청사도 거의 무너졌으니, 어찌 한꺼번에 새로 짓지 않으랴.'

하니,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지방에는 재목이 나지 않아서 한 길 정도의 목재도 백리 밖의 다른 산에서

취해 오며, 또 우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권세 있는 자들에게 매어 있으니, 누가 즐겨 우리 역사를 하여

주겠는가.' 하였다.

박군이 말하기를, '다만 해보자. 무슨 어려울 것이 있으랴.' 하고, 또 말하기를, '묵은 집을 헐지 않으면 사람들이

힘쓰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하고는, 하루아침에 다 철거해 버렸다. 고을 사람들이 처음에 의심도 하고 걱정도

하자, 군이 이에 아전들의 재능을 헤아려 익숙한 자에게는 큰 집을 맡기고 인부를 많이 주고,

미숙한 자에게는 적게 하여 이미 일을 나누어 맡게 하였다. 또 명령하기를, '옛사람[孟子]이 이르기를, 「백성을

편케 하기 위하는 도리로 백성을 부리면, 비록 수고롭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하였다.

이제 너희들이 이 고장에서 옷 입고 밥 먹으면서 못살겠다는 한탄이 없는 것은 모두가 임금의 은혜인 것이다.

여기에 오는 빈객(賓客)은 크게는 천자(天子)의 은혜로운 윤음(綸音)을 펴고, 작게는 국가의 명령을 반포하여

백성을 보살피는 것인즉, 이 객관을 짓는 것도 필경은 백성을 위한 일이다. 그러니 이번 역사가 너희들을 편하게

하기 위하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객관의 옛 제도가 거칠고 소박한데다가 또 장차 무너지게 되어, 사신을

맞이하여 조서(詔書)와 명령[令]을 받들 수가 없으므로 군수는 오직 공경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데 어찌 감히

태만하랴.

감히 어기는 자는 벌하리라.' 하였다. 이에 호적에 의하여 인부를 내게 하고 늙은이와 어린이만을 면제하였다.

바닷길로 재목을 가져와서 멀고 험한 것을 꺼리지 않으니, 돈을 거두어 돕는 자와 밥을 싸다가 먹이는 자가 잇

따라 끊이지 않았다. 그해 윤달에 역사를 시작하여 겨우 두어 달만에 청방(廳房)과 낭무(廊廡)가 다 얽어졌으나,

때가 바야흐로 추워 얼어붙는 시기인지라 흙을 바를 수 없어 잠시 공사를 멈추었었다. 다음해 2월에 이르러 준공

을 하게 되었는데,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아서 면세(面勢)에 맞고, 사치스럽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서 시의

(時宜)에 적합하였다.

처음에 의심하고 걱정하던 자들도 마침내 기뻐하여 감복하고, 전일에 세력을 믿고 대항하던 자들도 이제는 시키

는 대로 복종하였다. 또 주관(州官)이 사무를 보는 청사와 서적을 두는 시렁,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도 짓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그 계획을 이미 정하여 놓았는데, 군이 마침 갈려 가게 되자 고을 사람들이 부모를 잃은 것같이

여기니, 군은 역시 유능한 관원이로다. 내가 젊었을 적에 시골에서 자라 백성의 화복(禍福)이 실로 수령에게 달려

있음을 알았고, 우리 고을에서 더욱 그러함을 보았는데, 중간에 서울에 있으면서 우리 고장의 아전과 백성들이

가끔 도망해 숨곤 하여 읍(邑)의 길이 가시밭을 이루어 빈객들이 들어갈 곳이 없으매, 군수가 어찌할 바를 몰라

인(印)을 품고 가버린다는 말을 듣고는 내가 한숨 짓고 말하기를, '이것은 아전과 백성들의 죄만이 아니라,

고을을 다스리는 자도 또한 그 책임을 회피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병술년 봄에 원 나라에서 조서를 받들고

돌아오니, 이자(李資)가 이 고을에서 정사를 시작하자 아전을 통솔하고 백성에게 임하는 것이 모두 법도가 있어

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치적을 눈을 닦고 대하였다. 반년이 못 되어 내직(內職)으로 불려가자,

이자장(李自長)이 그의 정사를 이어 더욱 부지런히 하여 아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말하기를,

'국가 제도에 수령이 거처하는 곳을 공아(公衙)라 하는데, 이 고을 수령은 몸 붙일 곳이 없어서 백성의 집에

우거하고 있으니, 어떻게 고을을 다스려 가겠는가.' 하고는 고을 아전에게 명하여 부서를 나누어 역사를 담당

시켰더니, 기일도 안 되어서 이루어졌다.

또 객관을 차례로 수리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상사(喪事)를 당하여 고을을 떠났다.

박군이 이르자, 두 이군(李君)의 재능을 겸하여 수년 사이에 이익되는 일은 일어나고 해독을 제거되어, 일이 잘

되고 백성들이 화평하여 실로 전일의 한산(韓山)이 아니었다. 또 사람을 성의로 대하고, 빈객을 접대하는 데에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공급하는 물건인 상(床)ㆍ요[褥]ㆍ집기(什器) 등의 미세한 데 이르기까지 모두 깨끗이

완비하여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청 창고의 재물로 충당한 것이요, 털끝만큼이라도 백성에게서

거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명성이 대단하여 한 도(道)에 으뜸이 되었다. 나는 이 고을 사람이다.

어머니를 모시는 여가에 다행히 듣고 본 바가 있었는데, 이제 관사(館舍)의 이루어짐으로 인하여 그 사실의

대략을 쓰는 바이다.

아, 이 뒤에 군의 후임으로 오는 자가 한결같이 군을 본받아서 공적의 완성하지 못한 것과 일을 마치지 못한 것

을 마침내 성취한다면, 훌륭한 관리가 되지 못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군의 이름은 시용(時庸) 이요, 자(字)는 도부(道夫)이며, 밀성(密城)은 그의 본관이다.

과거에 올라 문한(文翰)의 직을 맡았고,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임명되었다가 예에(例) 따라 수령으로 나왔던

것이다." 하였다.

누정 취읍정(翠挹亭) : 군 남쪽에 있다. 이파(李坡)의 기문이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군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신곡역(新谷驛) : 군 서쪽 11리에 있다. 간법암원(看法巖院) : 군 동쪽 14리에 있다.

숭정원(崇井院) : 군 서쪽 7리에 있다. 곡화원(曲火院) : 군 북쪽 25리에 있다.

길산원(吉山院) : 군 서쪽 13리에 있다.

신증 교량 길산포 석교(吉山浦石橋) : 군 서쪽 22리에 있다.

불우 일광사(日光寺) : 취봉산(鷲峯山)에 있다. 숭정사(崇井寺) : 기린산(麒麟山)에 있다.

고석사(孤石寺) : 월명산(月明山)에 있다. 회사(回寺) : 건지산(乾至山) 북쪽에 있다.

영모암(永慕庵) : 건지산 북쪽에 있는데, 이색(李穡)의 화상(畫像)이 있다.

○ 권근(權近)이 지은 화상 찬(贊)에 이르기를, "천품은 순수한 아름다움을 타고났고, 성학(聖學)의 정미(精微)

한 것을 궁구(窮究)하였네. 흉금(胸襟)이 맑고 빛나도다. 실천은 극히 독실하였고, 문장을 묘하게 발휘하였다.

증점(曾點)의 광(狂)은 아니면서도 '읊으며 돌아가리라'는 흥취가 있으며, 유하혜(柳下惠)의 화(和) 같으면서도

불공(不恭)하다는 기롱은 없었다.

학자들은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우러러 보았고, 국가에서는 시구(蓍龜)처럼 믿고 의지하였다.

대신에 임명되어서도 그 현달하지 않을 때의 지조를 변하지 않았고, 큰 환란을 당하여서도 위엄에 겁내지

않았다.

붉은 마음이 더욱 정성되고 본래의 절조를 옮기지 않았다 함은 참으로 공이 스스로 자신을 이른 말이다.

그 강수[江漢]는 도도(滔滔)히 흐르고 구름 연기 부슬부슬 내린다. 구양수(歐陽脩)ㆍ한유(韓愈)를 뒤따라

나란히 몰고 가지런히 달렸다. 뒤에 보는 자는 내 말의 속임이 없는 것을 알지어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 서쪽에 있다.

여단(厲壇) : 군 북쪽에 있다.

총묘 이곡(李穀)의 묘 : 군 남쪽 4리 기현(箕峴)에 있다. 이색(李穡)의 묘 : 군 서쪽 5리 가지현(加知峴)에 있으며,

하륜(河崙)이 지은 비문이 있다.

고적 안보향(安保鄕) : 군 남쪽 15리에 있다. 안곡소(鷃谷所) : 군 북쪽 13리에 있다.

 

명환 본조 이심(李審) : 온량(溫良)하고 청렴 근신하였다. 권옹(權雍) : 청백 근신하고 지조가 있었다.

인물 고려 이지명(李知命) : 널리 많은 서적을 보았으며, 사부(詞賦)에 능하고,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다.

과거에 급제하여 황주 서기(黃州書記)로 나갔는데 청렴 정직하였고, 흉년을 당하여 심력을 기울여 백성을 구제

하였다. 뒤에 충주 판관(忠州判官)이 되어서도 그 정사가 황주와 같으니, 사람들이 은혜로운 행정에 감동하였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을 면하고 벼슬이 정당문학 태자소부(政堂文學太子少傅)에 이르고, 시호는 문평(文平)이며,

정승이 되어서는 옛 대신의 풍도가 있었다.

 

이당모(李唐髦) : 이지명(李知命)의 아들로서 문장에 아버지의 기풍이 있었으며,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국자 사업(國子司業)에 이르렀다.

 

이곡(李穀) : 충숙왕(忠肅王)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 검열(藝文檢閱)을 지내고, 충숙왕 후원년(後元年)에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드디어 제과(制科)에 올랐다.

앞서 본국 사람은 비록 제과(制科)에 합격하여도 거의가 하열(下列)에 참여했는데, 이곡의 대책(對策)이 크게

독권관(讀券官)의 칭찬을 받아 제이갑(第二甲)에 발탁되고,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되어

중국의 문사들과 교유하게 되었다. 학교를 일으키라는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본국으로 돌아왔다가 얼마

후에 다시 원(元) 나라로 가서 중서성 좌우사 원외랑(中書省左右司員外郞)에 제수되었다.

원 나라에서 자주 본국에 동녀(童女)를 요구해 왔었는데, 이곡이 글을 올려 이를 혁파하게 하였다.

충혜왕(忠惠王) 후 2년에 표문[表]을 받들고 원 나라로 가서 이내 머물러 있다가, 충목왕(忠穆王) 때에 본국

으로 돌아와서 누차 벼슬을 옮겨 정당문학 한산군 도첨의찬성사(政堂文學衛山君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자, 이곡이 일찍이 공민왕(恭愍王)을 세울 것을 청한 적이 있었던 관계롤 스스로 불안

을 느껴 나가서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였는데, 원 나라에서 또 봉의대부 정동행 중서성 좌우사랑중(奉議大夫

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에 임명하였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저술로는 《가정집(稼亭集)》이 있다.

 

이순효(李純孝) : 사람됨이 청백하였고, 일 처결하기를 민첩하게 하였다.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몽고(蒙古)로

가서 한 가지의 물건도 안 가지고 돌아오니 행탁(行橐)이 모두 비었는지라, 여염의 부녀자와 역졸(驛卒)들이

모두 그 청백한 절조에 탄복하여 말하기를, "참 관인(官人)이다." 하였다.

 

이색(李穡) : 이곡(李穀)의 아들로서 타고난 자품이 총명 민첩하고 널리 많은 서적을 보았으며, 시문(詩文)을

지을 때에는 붓을 잡고 곧 내려썼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또 정동행성 향시(征東行省

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원 나라에 가서 정시(廷試)에 응시하였는데,

구양현(歐陽玄)이 이색의 대책문(對策文)을 보고 크게 칭찬하여 드디어 제이갑 제이명(第二甲第二名)에 발탁

되었다.

본국으로 돌아와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국가의 문한(文翰)을 수십 년 동안

맡아 보았는데, 여러 차례 중국 사람들에게 격찬을 받았다. 후학(後學)을 끌어 등용하기에 힘썼으며, 유학(儒學)

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학자들이 모두 우러러 사모하였다. 본조에 들어와서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목은집(牧隱集)》 50여 권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이종덕(李種德) : 이색(李穡)의 아들이며, 벼슬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이종학(李種學) : 이종덕(李種德)의 아우이며, 벼슬이 첨서 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본조 이종선(李種善) : 이종학(李種學)의 아우이며,

나이 15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이계린(李季疄) : 이종선(李種善)의 아들로서, 세조(世祖) 때에 좌익공신(佐翼功臣)으로 벼슬이 좌찬성(左贊成)

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무(恭武)이다.

 

이계전(李季甸) : 이계린(李季疄)의 아우로서, 세조(世祖) 때에 정난 좌익공신(靖難佐翼功臣)에 봉해졌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성부원군(韓城府院君)에 이르고,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맹균(李孟畇) : 나이 1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이숙치(李叔畤) : 청백하고 정직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세종(世宗) 때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이르렀다.

 

이숙묘(李叔畝) : 벼슬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이축(李蓄) : 벼슬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이훈(李塤) : 이축(李蓄)의 아들이며, 성종(成宗) 때에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어 벼슬이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이르렀고, 한성군(韓城君)에 봉해졌다.

이우(李堣) : 이계전(李季甸)의 아들이며, 두 번 문과에 올랐고 벼슬이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

는데 일찍 죽었다.

 

이파(李坡) : 이우(李堣)의 아우이며, 나이 18세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集賢殿)에 뽑혀 들어갔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명헌(明憲)이다. 사람됨이 총명하였으며,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다.

이봉(李封) : 이파(李坡)의 아우이며, 을유년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고,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고,

문장에 명성이 있었다.

 

신증 이언호(李彦浩) :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효자 본조 이하(李夏)ㆍ이렴(李廉)ㆍ박지(朴地) : 모두 효행이 있어 정문(旌門)되었다.

효자 본조 윤씨(尹氏) : 사성(司成) 윤기(尹耆)의 누이로서 자못 글을 잘하였다. 그 남편 나계문(羅繼門)이 재상

홍윤성(洪允成)의 집 종에게 피살되었는데, 세조(世祖)가 온양(溫陽)에 거둥하였을 때, 윤씨가 스스로 소장을

지어 원통한 정상을 호소하니, 그 사연이 애절하고 이치가 발랐다. 임금이 이를 민망하게 여겨, 명하여 홍윤성의

종을 저자에서 찢어 죽이고, 해마다 미곡(米穀)을 내리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제영 산천잉수금유고(山川孕秀今猶古) : 고려 김자수(金子粹)의 시에, "동국의 문장을 집대성(集大成)하였으니,

가정(稼亭)의 그 부자가 모든 문인에 으뜸이었네. 산천의 품은 정기 지금도 예같으리니, 묻노니 어느 사람 그

이름을 이을꼬." 하였다.

 

산방웅진첩장성(山傍熊津疊障成) : 조계생(趙啓生)의 시에, "산은 웅진강 끼고 첩첩 병장 이루어, 마침내 이씨

일문 그 영기(英氣) 타고 났다. 저 멀리 원 나라서 부자가 과거에 합격한 후, 온 천하가 이 고을을 알게 되었네."

하였다.

 

진강연우심유적(鎭江煙雨尋遺跡) : 이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목은 노야(牧隱老爺) 높은 명성 이 고을에서 비롯

하여, 청년에 북경 유학[北學]하여 과거에 올랐네. 대대로 잠영(簪纓)인데 시서(詩書)가 있고, 역사에 빛나는

사업은 상세하다. 두자미(杜子美) 웅(雄)한 시(詩)는 우주에 훤전(喧傳)되고, 사씨(謝氏) 집 꽃다운 풀 지당(池塘)

에 가득하다. 진강(鎭江) 연우(煙雨) 속에 남긴 자취 찾으니, 다만 저 고깃배가 나루 곁에 떠있구나." 하였다.

 

팔경(八景) : 이색(李穡)의 시. 숭정암송(崇井巖松) : "봉우리 위엔 푸른 돌 솟아났고, 소나무 이마 언저리엔 흰구름

연하였네. 나한당(羅漢堂) 적적도 한데, 거주하는 중들은 교와 선이 섞였네." 하였다.

 

일광석벽(日光石壁) : "우뚝히 평야에 서서, 저 까마득히 긴 하늘 굽어보네. 푸른 석벽 작은 승방(僧房)에, 불등

(佛燈)이 반공(半空)에 걸렸네." 하였다. 고석심동(孤石深洞) : "평평한 들판이 장차 다하려는데, 회봉(回峯) 바라

보니 다시금 높구나. 한 구역 궁벽한 곳에, 절간이란 본래 외롭네." 하였다.

 

회사고봉(回寺高峯) : "뒷고개는 삼각을 이루었고, 앞 봉우리 반공에 치솟았다. 가는 배 쇠 닻줄 내리니,

혹시 광풍(狂風)이나 있을런가." 하였다. 원산수고(圓山戍鼓) : "바다 위 높은 산에 봉화(烽火) 전하고, 여염(閭閻)

은 바다를 눌렀네. 백년 간 난리 없는 이 땅에, 수자리 북소리 석양이 짙다." 하였다.

 

진포귀범(鎭浦歸帆) : "가는 비 복사꽃 물결과, 찬 서리 갈대잎 가을, 돌아가는 저 돛대는 어느 곳에 떨어지려나.

아득한 한 조각배." 하였다. 압야권농(鴨野勸農) : 압야는 군 북쪽 3리에 있다.

○ "냇가의 들판은 반반하기 숫돌 같고, 가득히 심은 벼 질펀하기 구름 같네. 권농하는 원님은 행차를 재촉하고,

들판을 돌아다보니 땅거미 지려 한다." 하였다. 웅진관조(熊津觀釣) : "마음(馬邑) 산봉우리 병풍 비껴 쳤고,

웅진 강물은 이끼빛으로 물들었다. 물에 드리운 낚시 실바람 받아 간들간들, 때마침 달밤에야 돌아오네."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 백제의 우두성(牛頭城)이었는데, 신라 신문왕(神文王) 6년에 마산현(馬山縣)으로 되었다.

방면 동상(東上) :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동하(東下) : 위와 같다. 남하(南下) : 위와 같다.

남상(南上) :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서상(西上) : 위와 같다. 서하(西下) : 처음은 5리, 끝은 29리이다.

상북(上北) :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하북(下北) : 처음은 5리, 끝은 30리이다. 북부(北部) : 끝이 5리이다.

진도 죽산진(竹山津) : 남쪽 15리에 있는데, 임파(臨坡)로 통한다. 길산포 소진(吉山浦小津) : 서쪽으로 20리이며,

서천(舒川)과 경계인 석교(石橋) 아래에 있다.

사원 문헌서원(文獻書院) : 선조(宣祖) 갑술년(甲戌年)에 세웠고, 광해주(光海主) 신해년(辛亥年)에 사액하였다.

 

이곡(李穀) : 자는 중문(仲文)이고, 초명은 예백(藝伯)이며, 호는 가정(稼亭)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충숙왕

계유년에 원(元)에 들어가 제과(制科 임금이 친히 문제를 내어 시험보이던 중국 과거제도의 하나)에 응시하였고,

벼슬은 첨의찬성 우문관 대제학(僉議贊成右文館大提學)이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고,

본조에서 한산군(韓山君)으로 추증되었다.

이색(李穡) : 장단(長湍) 조에 있다. 이종학(李種學) : 개성(開城) 조에 있다.

이개(李塏) : 과천(果川) 조에 있다. 이자(李耔) : 충주(忠州) 조에 있다.

 

 

권 18 전의현 全義縣

 

동쪽으로는 청주(淸州) 경계까지 18리이고, 남쪽으로는 연기현(燕岐縣) 경계까지 18리이고, 서쪽으로는 천안군

(天安郡) 경계까지 11리이고, 북쪽으로는 목천현(木川縣) 경계까지 1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구지현(仇知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금지(金池) : 지(池) 자는 지(地) 자로 쓴 데도 있다. 로

고쳐서 대록군(大麓郡)의 속현으로 만들었던 것을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청주에 예속시켰다.

본조(本朝)에서는 태조(太祖) 4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태종(太宗) 13년에 예(例)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하였으며, 다음 해에 연기현을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으로 하였다가 16년에 각각 환원하였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인.

군명 구지(仇知)ㆍ금지(金池)ㆍ전기(全岐)

 

성씨 본현 이(李)ㆍ유(兪)ㆍ하(河)ㆍ전(全)

 

형승 세 봉이 들을 에워싸고, 두 강이 성(城)을 둘러 흐른다 : 김휴(金休)의 시에, "세 봉이 높이 솟아 평야를

에웠고, 두 강이 흘러서 옛성을 둘렀네." 하였다.

산천 증산(甑山) : 현 서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율현(栗峴) : 현 동쪽 14리에 있다.

고산(高山) : 현 동쪽 8리에 있다. 용자산(龍子山) : 현 동쪽 16리에 있다.

운주산(雲住山) : 현 남쪽 7리에 있는데 증산(甑山), 고산(高山)과 더불어 솥발 모양으로 솟아 있다.

금성산(金城山) : 현 남쪽 8리에 있다. 돌로 쌓은 옛성이 있다.

고라원천(高羅院川) : 현 동쪽 13리에 있는데, 율현에서 발원한다.

생졸천(生拙川) : 현 서남쪽 5리에 있다. 공주 경계인 망현(芒峴)에서 발원하여 현 남쪽에 이르러서는

옛 이성(李城)의 조그만 시냇물과 합류하고, 호암(狐巖)을 지나 또 대부천(大部川)과 합류하는데,

현은 두 냇물 사이에 있다.

 

대부천(大部川) : 대부향(大部鄕)에 있다. 구리옹 고개(仇里瓮古介)에서 발원하여 고산의 작은 냇물과 합류하고,

또 호암을 지나서 생졸천으로 들어간다.

 

토산 쇠[鐵] : 현 동쪽 서방리(西房里)에서 난다. 자기(磁器)ㆍ지치[紫草]ㆍ복령(茯苓)ㆍ안식향(安息香)

 

누정 풍화루(風化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고라원(高羅院) : 현 동쪽 16리에 있는데, 경원(鯨院)이라고도 부른다. 송현원(松峴院) : 현 남쪽 8리에 있다.

불우 원적사(元寂寺) : 용자산(龍子山)에 있다. 고정암(高正菴) : 고산에 있다.

연수암(延壽菴) : 현 남쪽에 있다. 운점사(雲岾寺) : 운주산(雲住山)에 있다.

○ 최유종(崔有悰)의 시에, "절이 연하(煙霞) 속에 있는데, 층층한 봉우리 몇 겹이더냐. 산이 깊으니 낙락장송 빼어

나고, 강 넓으매 물이 출렁거린다. 설법하는 강당은 높은 데서 내려다보고, 승방의 창은 반공중에 의지했네.

머리 돌려 보니 진세가 아득하고, 늙은 중이 스스로 조용하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동북쪽 1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이성(李城) : 운주산 북쪽 봉우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 이도(李棹)가 살던 곳

이라 한다. 성안이 넓어 주위가 1천 1백 84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대부향(大部鄕) : 현 북쪽 6리에 있다.

 

고산산성(高山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5천 1백 32척이다. 안에 세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

었다.

금이성(金伊城) : 운주산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1천 5백 28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증산산성(甑山山城) : 현 서북쪽 5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9백 32척이다.

안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가을정처(加乙井處) : 현 북쪽 5리에 있다. 포곡역(蒲谷驛) : 옛터가 현 동쪽 18리에 있다.

 

인물 고려 이도(李棹) : 태조(太祖)가 남으로 정벌하러 금강(錦江)에 이르렀을 때 물이 범람하였는데,

이도가 태조를 보호해 건너는 데 공이 있어 도(棹)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벼슬은 태사 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

에 이르렀다.

 

이혼(李混) : 도(棹)의 7대 손이다. 원종(元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충선왕(忠宣王)까지 계속 섬기면서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첨의정승으로(僉議政丞) 치사하였으며, 호는 몽암(蒙菴)이다. 일찍이 영해부(寧海府)로 좌천

되어 바다 가운데 뜬 나무등걸을 가지고 무고(舞鼓)를 제작하였는데, 지금까지 악부(樂府)에 전해지고 있다.

 

이언충(李彦沖) : 이혼(李混)의 형의 아들이며, 과거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본조 이정간(李貞幹) : 이혼(李混)의 아우 이자화(李子華)의 증손이다. 어머니 김씨(金氏)의 나이 1백 2세 때에

정간은 당시 80세였는데, 어머니 앞에서 새 새끼를 가지고 희롱하여 노래자(老萊子)와 같은 어리광을 부리니,

세종(世宗)이 글을 내려 표창하였다. 벼슬은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이사관(李士寬) : 이정간(李貞幹)의 아들로 벼슬이 부윤(府尹)에 이르렀으며, 그 아들 지장(智長)ㆍ예장(禮長)ㆍ

함장(諴長)ㆍ효장(孝長)ㆍ서장(恕長)은 문과에 오르고, 의장(義長)은 무과에 오르니 이는 세상에 드물게 있는

일로서 선비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이예장(李禮長) : 세조(世祖) 때의 정난 좌익공신(靖難佐翼功臣)이고, 벼슬이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이르렀다.

이함장(李諴長) : 벼슬이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이효장(李孝長) : 벼슬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이서장(李恕長) : 세조 때의 적개공신(敵愾功臣)이며, 벼슬이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이르고, 전성군(全城君)

에 봉해졌다.

이수남(李壽男) : 이함장(李諴長)의 아들로 문과에 등과하였다. 성종(成宗) 때의 좌리공신(佐理功臣)이며, 전산군

(全山君)에 봉해졌다.

이의흡(李宜洽) : 문과에 올라 벼슬이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이르렀다. 아들 신효(愼孝)는 형조 참의를 역임

하였고, 원효(元孝)는 과거에 올라서 첨지중추(僉知中樞)에 이르렀다.

신증 이계맹(李繼孟) : 성격이 호방하고 기개가 있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고, 시호는 문평

(文平)이다.

우거 본조 김익정(金益精) : 안동(安東) 편 인물조에 자세히 발원하여 있다.

김익렴(金益濂) : 김익정(金益精)의 아우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이르렀다.

두 사람 모두 3년 간 여묘(廬墓)를 살았다.

 

제영 현고징교목(縣古徵喬木) : 김수령(金壽寧)의 시에, "고을이 오래됨을 교목이 말해 주고, 연기 차가우니 폐성

(廢城)임을 알겠도다." 하였다. 지분차현자동서(地分車峴自東西)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땅은 차현으로 나뉘

어서 스스로 동과 서로 되었는데, 길이 전성(全城)으로 들어서며 높았다가 낮았다가 하네.

산줄기 빙빙 돌아 성곽을 에워쌌고, 숲그늘 얽히고 둘리어 긴 언덕 보호하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방면 동서(東西) : 끝이 20리이다. 남서(南西) : 끝이 15리이다. 대서(大西) : 끝이 10리이다.

소서(小西) : 끝이 20리이다. 북면(北面) : 끝이 13리이다.

성지 증산고성(甑山古城) : 서북쪽 5리에 있는데 둘레가 32척이고 우물이 하나 있다.

고산고성(高山古城) : 동쪽 8리에 있는데 둘레가 5천 1백 32척이고 우물이 하나 있다.

운주산고성(雲住山古城) : 동남쪽 8리에 있는데 둘레가 1천 5백 28척이고, 우물이 하나 있다.

○ 속칭 금성산성(金城山城)이라고 한다.

 

 

정산현 定山縣

 

동쪽으로는 공주(公州) 경계까지 21리이고, 북쪽으로는 같은 주 경계까지 15리이고, 남쪽으로는 부여현(扶餘縣)

경계까지 31리이고, 서쪽으로는 청양현(靑陽縣)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열기현(悅己縣)이었는데 일명(一名) 두릉윤성(豆陵尹城)이라고 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열성(悅城)이라 고쳐 부여군(扶餘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공주에 예속시켰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본조 태종 13년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열기(悅己)ㆍ두릉윤성(豆陵尹城)ㆍ열성(悅城)

 

성씨 본현 이(李)ㆍ전(田)ㆍ송(宋)ㆍ임(林)이 있으며, 방(方)ㆍ장(張) : 모두 촌(村)에 있다.

 

산천 대박곡산(大朴谷山) : 현 북쪽 7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계봉산(鷄鳳山) : 일명(一名) 백곡산(白谷山)이

라고도 한다. 현 동쪽 9리에 있다.

 

칠갑산(七甲山) : 현 서쪽 16리에 있으며, 옛성의 터가 있는데 자비성(慈悲城)이라 부른다. 또 청양현(靑陽縣)

편에 나와 있다.

광생산(光生山) : 현 남쪽 3리에 있다. 송현(松峴) : 현 북쪽 10리에 있다.

호고개현(狐古介峴) : 현 동쪽 3리에있다. 장항현(獐項峴): 현 서쪽 5리에 있다.

직현(直峴) : 현 남쪽 10리에 있다. 대현(大峴) : 현 서쪽 10리에 있다.

 

금강천(金剛川) : 현 서쪽 32리에 있다.

청양현 어을항천(於乙項川)에서 발원하여 백마강(白馬江)으로 들어간다. 또 부여현(夫餘峴) 편에도 나와 있다.

왕지진(王之津) : 현 남쪽 26리에 있으니 곧 금강의 하류이다.

 

토산 모시ㆍ옻칠ㆍ쇠 : 현 남쪽 5리 지점 수한리(水閑里)에 대장간이 있다. 자기(磁器)ㆍ벌꿀ㆍ복령(茯苓)ㆍ

지황(地黃)ㆍ백화사(白花蛇)

 

학교 향교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유양역(楡楊驛) : 현 동쪽 5리에 있다. 미륵원(彌勒院) : 현 서쪽 12리에 있다.

장수원(長壽院) : 현 서쪽 27리에 있다. 수덕원(修德院) : 현 북쪽 7리에 있다.

 

불우 정혜사(淨慧寺) : 칠갑산(七甲山)에 있다.

계봉사(鷄鳳寺) : 계봉산(鷄鳳山)에 있다. 산의 이름은 계봉사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남포사(藍浦寺)ㆍ서련사(瑞蓮寺) : 모두 계봉산에 있다. 도림사(道林寺)ㆍ묘봉사(妙峯寺) : 모두 칠갑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산성(山城) 안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백곡리(白谷里) : 백곡산(白谷山) 아래에 있다. 늙은이들이 서로 전해오는 말에 본현의 옛터라고 한다.

계봉산성(鷄鳳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1천 2백 척이다. 그 안에 한 우물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신증 열녀 본조 옥배(玉杯) : 정병(正兵) 이윤(李允)의 아내이다. 그 남편이 범에게 물려가는데 옥배가 남편의

옷자락을 잡고, 몽둥이로 치며 크게 소리지르니, 범이 곧 버리고 달아났다. 금상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

 

제영 천인동봉유고성(千仞東峯有古城) : 권극화(權克和)의 시에, "천길 동쪽 봉에 옛성이 있으니, 쳐다보니

산야정(山野情)의 그리움이 절로 난다. 3년을 오고가도 마침내 혜정(惠政) 없었으니, 주민들의 내 이름 아는 것이

몹시 부끄럽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현종(顯宗) 5년에 청양(靑陽)을 합쳤다가 다시 나누었다 : 윤성(尹城) 때의 옛터가 난봉산(難鳳山) 아래

백곡리(白谷里)에 있다.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목동(木洞) :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청소(靑所) : 동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적곡(赤谷)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피현(皮峴) :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백곡(白谷) : 남쪽으로 끝이 10리이다. 대박곡(大朴谷) : 북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장촌(場村) :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잉화달(仍火達) :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 칠갑산(七甲山)에 있는데 본래는 도솔성(兜率城)ㆍ자비성(慈悲城)이었다.

진도 왕지진(王之津) : 남쪽 26리에 있는데 부여(扶餘)로 통한다.

 

토산 누치[訥魚]ㆍ쏘가리[錦鱗魚]ㆍ게[蟹]

 

 

은진현 恩津縣

 

동쪽으로는 연산현(連山縣) 경계까지 8리이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여산군(礪山郡)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쪽으로

는 석성현(石城縣) 경계까지 13리, 임천군(林川郡) 경계까지 25리이고,

북쪽으로는 이산현(尼山縣) 겅계까지 2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2리이다.

건치연혁 덕은군(德恩郡)은 본래 백제의 덕근군(德近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덕은(德殷)이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다시 덕은군(德恩郡)으로 고쳤다. 시진현(市津縣)은

본래 백제의 가지내현(加知奈縣)이었는데 : 혹은 가을내(加乙乃)라 했고, 혹은 신포(薪浦)라고도 했다.

신라 경덕왕이 시진(市津)이라 고쳐 덕은군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는 덕은ㆍ시진을 모두

공주의 속현으로 만들었다. 본조에 와서 태조 6년에 두 고을을 합하여 덕은감무(德恩監務)를 두었고,

세종 원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덕근(德近)ㆍ덕은(德殷)ㆍ덕은(德恩)ㆍ가지내(加知奈)ㆍ가을내(加乙乃)ㆍ신포(薪浦)ㆍ시진(市津)

 

성씨 덕은 유(兪)ㆍ배(裵)ㆍ이(李)ㆍ김(金)ㆍ조(趙)가 있으며, 장(張)ㆍ정(鄭) : 모두 속(續)이다. 시진 배(裵)ㆍ

임(林)ㆍ송(宋)ㆍ양(梁)ㆍ전(全)이 있으며, 박(朴)ㆍ이(李) : 모두 속이다. 채운(彩雲) 임(林)ㆍ배(裵)ㆍ송(宋)ㆍ

양(梁)ㆍ양(良)

 

산천 건지산(乾止山) : 현 북쪽 2리에 있으며, 옛 시진(市津)이 그 서쪽에 있다.

마야산(摩耶山) : 현 남쪽 24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황화산(皇華山) : 시진(市津)에 있는데, 지금 현의 치소(治所)와는 서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산에 큰 돌이 펀펀하고 널찍하여 시진의 물을 굽어보고 있으니 이를 황화대[皇華臺]라 부른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백제 의자왕(義慈王)이 그 위에서 잔치하고 놀았다 한다.

 

강경산(江景山) : 현 서쪽 26리에 있다. 반야산(般若山) : 현 북쪽 7리에 있다.

불명산(佛明山) : 현 동쪽 33리에 있다. 산이 청산현(靑山縣) 도솔산(兜率山)으로부터 꾸불꾸불 서쪽으로 뻗어

본현에 와서는 세 산으로 나뉘었으니, 동쪽으로는 불명산, 남쪽으로는 마야산, 북쪽으로는 반야산이 있다.

 

채운산(彩雲山) : 채운향(彩雲鄕)에 있다. 현에서 25리 떨어져 있다. 증산포(甑山浦) : 현의 서쪽 21리에 있다.

전라도 여산군(礪山郡)에서 발원하여 강경포(江景浦)로 들어간다.

 

강경포(江景浦) : 강경산(江景山) 아래에 있는 해포(海浦)이다. 시진포(市津浦) : 시진현에 있는데 장삿배가

모이는 곳으로서 돛대가 연접하고 사람들이 잡답하게 왕래하며 물화를 매매하기 때문에 시진포라 이름하였다.

윤회(尹淮)가 말하기를, "옛날에 이루진(移樓津)이 있었다고 하는데, 혹시 이곳이 아닌가 한다." 하였다.

 

사진(私津) : 현의 북쪽 12리에 있으니, 곧 연산현(連山縣)의 포천(布川)과 초포(草浦)가 합류하는 곳이다.

율령천(栗嶺川) : 전라도 고산현(高山縣) 용계산(龍溪山)에서 발원하여 시진포로 들어간다.

 

토산 백옥석(白玉石) : 현의 남쪽 구좌곡(仇佐谷)에서 난다. 쇠 : 현 남쪽 작지(鵲旨)ㆍ웅전(熊田)ㆍ토관(吐串)

등지에서 난다.

대살[竹箭] : 채운산(彩雲山)에서 난다. 도루묵[銀口魚]ㆍ지황(地黃)ㆍ안식향(安息香)ㆍ백화사(白花蛇)ㆍ

뱅어[白魚]ㆍ웅어[葦魚]ㆍ숭어[秀魚]ㆍ붕어[鯽魚]ㆍ게[蟹]

 

신증 감 : 일찍 익는다. 속칭 조홍(早紅)이라 이른다.

 

성곽 황화산성(皇華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6백 50척, 높이가 6척이며, 그 안에 우물 두 개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강경산 봉수(江景山烽燧) : 남쪽으로는 전라도 용안현(龍安縣) 광두원산(廣頭院山)에 응하며, 북쪽으로는

황화산에 응한다.

황화산 봉수(皇華山烽燧) : 남쪽으로는 강경산(江景山)과 서로 응하고,

북쪽으로는 이산현(尼山縣)의 성산(城山)과 응한다.

 

정사 인풍정(引風亭) : 객관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 동쪽 2리에 있다.

원우 남항원(娚項院) : 현 남쪽 5리에 있다.

교량 조암교(潮巖橋) : 증산포(甑山浦)에 있다. 옛날에 돌다리가 있었는데 그곳 거주민들이 풍수[術者]의 말을

믿고 그 돌을 다 물에 던져버려서, 지금은 나무로 다리를 놓고 다닌다. 아래에 바위가 있는데 조수(潮水)가 물러

가면 보이기 때문에 이름하기를 조암(潮巖)이라 하였다.

신증 시진교(市津橋) : 시진포에 있다.

 

불우 관촉사(灌燭寺) : 반야산(般若山)에 있다. 돌미륵[石彌勒]이 있는데, 높이가 54척이나 된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고려 광종(光宗) 때에 반야산 기슭에 큰 돌이 솟아 오른 것을 중 혜명(慧明)이 쪼아서 불상을 이루

었다 한다.

○ 이색(李穡)의 시에, "마읍(馬邑) 동쪽 백여 리, 시진 고을 관촉사네. 큰 석상 미륵불은 '내 온다. 내 나온다.'

하고 땅에서 솟아났단다. 눈같이 흰 빛으로 우뚝히 큰 들에 임(臨)하니, 농부 벼를 베어 능히 보시(布施)하네.

석상이 때때로 땀 흘려 군신(君臣)을 놀라게 했다 함이, 어찌 구전(口傳)만이랴 국사에 실려 있다오." 하였다.

 

쌍계사(雙溪寺) : 불명산에 있다.

금지사(金地寺)ㆍ보문사(普門寺)ㆍ염불사(念佛寺)ㆍ정토사(淨土寺) ; 모두 마야산(摩耶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덕은 고읍(古邑)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총묘 견훤(甄萱)의 묘 : 현 남쪽 12리 풍계촌(風界村)에 있다. 속칭 왕묘(王墓)라 한다.

 

고적 고덕은(古德恩) : 지금의 고을 아문으로부터 동남쪽 12리에 있다.

채운향(彩雲鄕) : 현 서쪽 25리에 있다. 고시진(古市津) : 황화산 서남쪽에 있다.

대정(大井) : 마야산 고성(古城) 아래 2리에 있는데, 세속에선 옛 백제의 어정(御井)이었다 한다.

그 땅 서쪽에는 쇠호산(衰虎山)이 있고, 동쪽에는 쇠룡관(衰龍串)이 있다.

 

마야산 고성(摩耶山古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5천 7백 10척이다. 그 안에 두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신증 효자 본조 강응정(姜應貞) : 중추부사(中樞府事) 강의(姜毅)의 아들이다. 나이 17세에 부모가 병에 걸리매,

항상 모시고 간호하면서 밤이 새도록 자지 않고 그 똥을 취하여 맛을 보며, 향불을 피워 놓고 하늘에 기도하여

자기 몸으로 대신하기를 청하였고, 부모가 죽자 여묘(廬墓)를 살면서 예절을 다하였으며, 소금과 소채를 먹지

않았다. 성종 즉위 초에 정문을 세웠다.

 

열녀 고려 이(李)씨 : 문성기(文成己)의 아내이다. 그 남편이 왜란(倭亂)에 죽으니, 이씨가 그 형상을 그려 놓고

조석으로 전(奠)을 드리면서 평생을 마쳤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정문을 세웠다.

민씨(閔氏) : 김계전(金繼佃)의 처로서 계전이 일찍 죽자 비록 비ㆍ눈이 와도 반드시 친히 제묘를 지내고야 식사

를 하였다. 임금이 듣고 정려하였다.

 

제영 신명독게은(新名獨揭恩) : 권극화(權克和)의 시에, "옛 칭호에는 아울러 덕(德) 자까지 일컫더니, 새 명칭엔

유독 은(恩) 자만을 붙였구나." 하였다.

 

당호청산개공북(當戶靑山皆拱北)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창 앞의 푸른 산은 모두 북으로 쳐다보고,

발[簾] 걷어보니 붉은 해가 벌써 동쪽에 뜨는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인조(仁祖) 24년에 은진(恩津)ㆍ이산(尼山)ㆍ연산(連山)을 합하여 한 현으로 만들고 은진이라 불렀다 :

연산(連山)에 자세하다. 효종(孝宗) 7년에 다시 각각 그 전대로 하였다 : 옛 소재지[古治]는 동남쪽 12리에

있다.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두상(豆上) : 동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두하(豆下) :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죽본(竹本) :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대조곡(大鳥谷) : 동쪽으로 처음은 3리, 끝은 7리이다.

도곡(道谷)ㆍ화산(花山) : 모두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구자곡(九子谷)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성본(城本) : 서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금포(金浦)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갈마동(渴馬洞)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가야곡(可也谷) :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화지산(花之山) :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송산(松山) : 동쪽으로 끝이 5리이다.

채운(彩雲) : 서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인데, 본래 채운향(彩雲鄕)이다.

 

 

회덕현 懷德縣

 

동쪽으로는 옥천군(沃川郡)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진산군(珍山郡)경계까지 30리이고,

서쪽으로는 공주(公州) 경계까지 9리이고, 북쪽으로는 문의현(文義縣) 경계까지 29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2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우술군(雨述郡) : 일명 후천(杇淺)이라고도 한다. 인데, 신라 때에 비풍군(比豐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때에 공주에 예속시켰으며,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

훈도 : 각 1인.

군명 우술(雨述)ㆍ후천(杇淺)ㆍ비풍(比豐).

 

성씨 본현 이(李)ㆍ임(任)ㆍ황(黃)ㆍ방(方)ㆍ곽(郭)이 있으며, 배(裵)ㆍ김(金) : 모두 역(驛)이다.

 

산천 계족산(鷄足山) : 현 동쪽 3리에 있는 진산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날이 가물 때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

다고 한다.

식장산(食藏山) : 현 남쪽 23리에 있다. 질현(迭峴) : 현 동쪽 12리에 있다.

동자암현(童子菴峴) : 현 동쪽 8리에 있다.

이원진(利遠津) : 현 북쪽 29리에 있는데, 속칭 형각진(荊角津)이라 한다. 전라도 무주현(茂朱縣)에서 발원하는

데 공주에 이르러 금강(錦江)이 되고, 서천군(舒川郡)을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갑천(甲川) : 현 서쪽 5리에 있다. 전라도 진산군(珍山郡) 신현(新峴)에서 발원하는데 본현 서쪽 3리에 이르러

선암천(船巖川)이 되고, 하류에서 형각진(荊角津)과 합류한다.

 

토산 지치[紫草]ㆍ누치[訥魚]ㆍ지황(地黃)ㆍ복령(茯苓)ㆍ석철(石鐵) : 현 북쪽 직동(稷洞)에서 난다.

안식향(安息香).

 

봉수 계족산 봉수(鷄足山烽燧) : 동쪽으로는 옥천군(沃川郡) 환산(環山)과 응하고, 북쪽으로는 문의현(文義縣)

소이산(所伊山)과 응한다.

 

누정 쌍청당(雙淸堂) : 현 동쪽 6리에 있는데, 본현 사람 송유(宋愉)의 별장이다.

○ 박팽년(朴彭年)이 지은 기문에, "천지 사이에 바람과 달이 가장 맑은데, 사람의 마음의 신묘함도 또한 이와

다름이 없다. 다만 형기(形氣)에 구애되고, 물욕에 더럽혀져서 능히 그 본체를 온전히 보전하는 자가 드물다.

대개 연기와 구름이 사면에서 모여들어 천지가 침침하게 가려졌다가도, 맑은 바람이 이를 쓸어내고 밝은 달이

공중에 떠오르면, 위와 아래가 통투(通透)하게 밝아져서 털끝만한 점철(點綴)도 없게 된다.

그 기상은 진실로 용이하게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사람으로서 그 마음을 온전히 지켜 더럽힘이 없는

자라야 족히 이에 당할 만하여 스스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황노직(黃魯直)이 일찍이 이로써 용릉

(舂陵)에 견주었으며, 소강절(邵康節)도 또한 청야음(淸夜吟)이란 시를 지어 그 맛을 아는 자가 적은 것을 탄식

한 것이다. 혹 요즈음 세상에도 또한 이 낙(樂)을 아는 자가 있는가.

시진(市津) 송유(宋愉) 공은 본래 대대로 벼슬하던 구가(舊家)이었다. 그러나 공명(功名)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촌야(村野)에 물러나와 산 지가 이제 30여 년이 되니, 그 고을은 충청도의 회덕이요, 마을은 백달촌(白達村)이

라 이른다. 사당(祠堂)을 거실 동쪽에 세워 선대의 제사를 받들고, 전답 두어 이랑을 설치하여 제사의 수용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드디어 사당 동쪽에 따로 당(堂)을 세운 것이 무릇 7칸이다. 그 중간을 온돌로 만들어 겨울에 쓰기에 맞도록

하였고, 바른편으로는 3칸인데 대청을 넓게 하여 여름에 쓰기에 적당하게 하였으며, 왼편으로도 3칸인데 포주

(庖廚)와 욕실[湢浴], 그리고 제기(祭器)의 저장소 등이 각기 정한 곳이 있으며, 단청으로 담을 두르니 화려하면

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매양 시사(時祀)나 기제사 날을 당하면, 공이 반드시 심의(深衣)를 입고 별당에 들어

가서 재계(齋戒)하여 공경과 정성을 다하였다. 무릇 제사하는 법이 모두 예경(禮經)을 좇았으며, 또 가절(佳節)

을 당하면 반드시 술자리를 마련하고 손을 맞이하여 혹은 시를 읊고 혹은 노래하여 향당(鄕堂)과의 즐거움을

흡족히 하였고, 만년에는 선학(禪學)을 좋아하여 그 마음을 담박(淡泊)하고 고요하게 가지고 사물에 얽매이지

않으니, 대개 그 천성이 높고 또 밝아서 명리(名利)를 벗어난 사람이었다.

중추부사 박연(朴堧)공이 그 별당에 '쌍청(雙淸)'이라 편액을 지어 주고 또 시를 지었다. 나는 이를 듣고 옷깃을

여미고 말하기를, '참으로 쌍청이란 뜻이 이러하구나.' 하였다. 백이(伯夷)는 성(聖)의 청(淸)한 분이었는데,

공은 그 백이의 풍(風)을 듣고 흥기(興起)된 이인가. 대개 바람이란 귀로 얻어 듣고 달은 눈에 보이는 것인데,

사람들이 모두 이 두 가지 물건의 맑은 것은 알면서도, 내 한 마음속에 저것을 부러워하지 않을 만한 것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즉 그것을 아는 자가 알지 못하는 자와 견줄 수 없는 것을 어찌 알리오.

이제 공의 선조를 받드는 공경심과 손과 즐기는 흥취를 보건대 그 스스로 즐거워하는 지취를 가히 알 수 있다.

그러나 호량(濠梁) 위에서 물고기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장자(莊子)도 물고기가 무엇을 즐거워하는지를 몰랐

으며, 혜자(惠子)도 또한 몰랐던 것이니, 내 어찌 감히 공의 즐거움을 조금인들 엿볼 수 있으리오.

공의 아들 주부(注簿) 계사(繼祀)가 내가 그 말속(末屬)에 있다 하여, 나로 하여금 기문을 쓰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학교 향교 : 현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정민역(貞民驛) : 현 서쪽 10리에 있다.

미륵원(彌勒院) : 일명 굴파원(屈坡院)이라고도 하는데, 현 동쪽 24리에 있으며, 남쪽에 누(樓)가 있다.

○ 하륜(河崙)의 서문[序]에, "내 일찍이 시골로 귀성(歸省)할 제, 회덕현(懷德縣) 동쪽 지경을 지나는데, 산천이

굽이굽이 돌고 초목이 울창한데, 중간에 길이 좁고 또 험하였으며, 길 곁에 우뚝하게 숲 밖으로 솟아 나온 원우

(院宇)가 있었다. 내가 이를 바라보고 기뻐하여 말에서 내려 누각으로 올라가 한참 동안 납량(納涼)하면서 계산

(溪山)의 승경을 관람하고 시를 써서 남기려 하였으나, 겨를이 없어 그대로 가버렸고 원우의 이름조차도 이미

잊었더니, 이제 전 공주 목사 황자후(黃自厚) 군이 우리 목은 선생이 지으신 미륵원 남루기(彌勒院南樓記)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그 뒤 끝에 발문(跋文) 쓸 것을 청한다.

그 산천의 형세를 들으니, 곧 내가 일찍이 올라 본 바이요, 원우를 세운 경위와 황씨의 부자ㆍ형제간의 자애(慈愛)

와 우애, 또 남에게 은혜 베풀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선생의 기문 가운데 이미 다한 바이다.

이제 그 손자가 또 그 할아버지의 뜻을 본받아서, 그 수리함을 게을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동서 양쪽에 집을

지어 남녀가 머무르는 곳을 따로 하고는, 다시 진신(搢紳)들 사이에 시를 구하여, 더욱 그 할아버지의 덕의 아름

다움을 현양(顯揚)하고자 하니, 그의 뜻이 또한 가상하다." 하였다.

 

○ 성석린(成石璘)의 시에, "누(樓)가 폐한 것 도로 일으켜 환연(煥然)히 새롭게 하였나.

회덕(懷德) 사는 황군(黃君)은 길인(吉人)이라 이른다. 본래 자상(慈祥)한 마음 품어 여러 사람 구제할 길 생각했

고, 항상 측은한 마음 간직하여 인(仁)을 베풀기를 즐겼네. 자손들의 근검함은 가풍에 힘씀이요, 원우(院宇)의 높

고 낮음은 땅 형세 따랐던 것. 그 남루(南樓) 가장 소쇄(蕭灑)하다 들었는데, 어찌하면 이 정자 배회하며 정신을

상쾌히 해볼까."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객실의 다락 높아 경개도 새롭도다. 황공의 이 집 지음 그의 선대부터라. 은혜 베풀고

도 보답 바라지 않으매 음덕을 남겼고, 행인들 자기 집 돌아가듯 하여 지극한 은혜에 만족한다.

천년 장래까지 그 성명 없어지지 않을 것이로다. 한 가문의 자애와 효성이 어찌 어질지 않으랴. 감사(監司)가 다시

일으켜 여경(餘慶)을 받았으니, 만년에 아름다운 아들 산악(山嶽) 정기 타고 났네.

 

덕창원(德昌院) : 현 서쪽 2리에 있다. 총술원(寵述院) : 현 북쪽 11리에 있다.

형지원(荊止院) : 현 북쪽 27리에 있다. 여아원(餘兒院) : 현 남쪽 21리에 있다.

불우 법천사(法泉寺) : 계족산(鷄足山) 남쪽에 있다. 봉주사(鳳住寺) : 계족산 동북쪽에 있다.

선랑사(禪朗寺)ㆍ고산사(高山寺)ㆍ봉서사(鳳栖寺) : 모두 식장산(食藏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북쪽 5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서봉부곡(西峯部曲) : 현 동쪽 21리에 있다.

흥인부곡(興仁部曲) : 현 동쪽 18리에 있다. 침이소(針伊所) : 현 북쪽 18리에 있다.

계족산성(鷄足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9백 69척이고, 높이는 16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제영 속후견민풍(俗厚見民風) : 남지(南智)의 시에, "관청 뜰 비어 있으니 송사(訟事)가 적음을 알겠고, 습속이

후하니 민풍(民風)을 보겠도다." 하였다.

수로석완지현고(樹老石頑知縣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높은 고개 넘어서니 큰 들판 시원한데, 한 촌락

뽕나무 숲이 시내 굽이 굽어보내. 수목은 늙고 돌은 단단하니 고을이 예된 줄 알겠고, 관 뜰이 비고 인기척 고요

하니 관아(官衙)는 한적하구나. 푸른 그늘 땅에 가득 천척(千尺)의 소나무요, 푸른 뜰을 물들임은 두어 줄기 대

[竹]로다. 홀로 난간에 의지하여 일이 없으니, 때때로 싸우는 참새 처마 끝에 떨어짐 보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끝이 10리이다. 동면: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서면 :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북면 :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내남(內南) : 끝이 10리이다. 외남(外南) :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일도(一道)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진도 형각진(荊角津) : 이원진(利遠津)이라고도 하는데, 북쪽 25리에 있다.

토산 소가리[錦鱗魚]ㆍ감

 

사원 숭현서원(崇賢書院) : 광해주 기유년에 중건하였고, 그해에 사액하였다.

 

정광필(鄭光弼) : 태묘(太廟) 편을 보라. 김정(金淨)ㆍ송인수(宋麟壽) : 모두 청주(淸州) 편을 보라.

김장생(金長生)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 : 모두 문묘(文廟) 편을 보라.

별사(別祠) : 현종 정미년에 세웠다. 이시직(李時稷)ㆍ송시영(宋時榮) : 모두 강화(江華) 편을 보라.

 

 

진잠현 鎭岑縣

 

동쪽으로는 공주(公州) 경계까지 11리이요, 북쪽으로는 같은 주 경계까지 10리이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진산군

(珍山郡)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쪽으로는 연산현(連山縣)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진현현(眞峴縣) : 진(眞)은 정(貞)으로 쓴 데도 있다. 신라에서 진령(鎭嶺)이라 고쳐 황산군

(黃山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공주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진현(真峴)ㆍ진령(鎭嶺)ㆍ기성(杞城)ㆍ정현(貞峴)

 

성씨 본현 김(金)ㆍ이(李)ㆍ심(沈)ㆍ전(田)ㆍ임(任)ㆍ유(劉)

 

산천 산장산(産長山) : 현 서쪽 5리에 있는 진산이다. 산허리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세간에 전하기를,

계룡(鷄龍)이 이 바위에서 나왔다 하여 산장산이라고 이름붙였다 한다. 소족산(所足山) : 현 남쪽 5리에 있다.

 

압점산(押岾山) : 현 남쪽 22리에 있는데, 일명 안평산(安平山)이라고도 한다. 산 남쪽은 바로 전라도 진산군

(珍山郡)과의 경계이다.

계룡산(鷄龍山) : 현 서쪽 15리에 있다. 삼기산(三岐山) : 현 남쪽 2리에 있다.

 

용두천(龍頭川) : 현 북쪽 3리에 있다.

증산천(甑山川) : 현 남쪽 15리에 있다. 전라도 진산군 대둔산(大芚山)에서 발원하여 차탄(車灘)으로 들어간다.

차탄(車灘) : 현 남쪽 9리에 있다.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공주 계룡산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안평산(安平山)에서 나와 현 남쪽 5리에서 합류하여, 다시 북쪽으로 흘러 회덕현(懷德縣)의 갑천(甲川)

으로 들어간다.

 

토산 벌꿀ㆍ복령(茯苓)ㆍ안식향(安息香)ㆍ백옥(白玉) : 삼기산에서 난다.

 

신증 녹반(綠礬) : 현 남쪽 16리 울어동(蔚於洞)에서 나온다.

학교 향교 : 현 남쪽 2리에 있다.

원우 오산원(吾山院) : 현 동쪽 9리에 있다. 지석원(支石院) : 현 서쪽 15리에 있다.

불우 정각사(正覺寺) : 압점산(押岾山)에 있다. 회현사(晦見寺)ㆍ현수암(懸壽菴) : 모두 계룡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 5리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남쪽 5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제영 독유산천여구식(獨有山川如舊識) : 김자지(金自知)의 시에, "기성(杞城)은 천고에 아득한 하늘 가, 민가는

쓸쓸하고 전지(田地)는 반 묵었다. 홀로 산천만이 옛 친구 같으니, 나루터 길 잃어도 전부(田夫)에게 묻지

않으리." 하였다. 야활수여제(野闊樹如薺)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들이 넓으니 수목들은 냉이같이 보이고,

산이 비었으니 시냇물소리 우레같이 울린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동면(東面) :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서면(西面) : 끝이 20리이다. 상면(上面) : 끝이 30리이다.

하면(下面) : 처음이 5리, 끝이 25리이다. 북면(北面) :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성지 밀암산고성(密巖山古城) : 옛터가 있으며 속칭 미림고성(美林古城)이라 한다.

토산 닥[楮]ㆍ칠(漆)

 

 

연산현 連山縣

 

동쪽으로는 진잠현(鎭岑縣) 경계까지 22리, 전라도 진산군(珍山郡) 경계까지 35리이고,

남쪽으로는 같은 도 고산현(高山縣) 경계까지 19리, 은진현(恩津縣) 경계까지 26리이고,

서쪽으로는 이산현(尼山縣) 경계까지 17리이고, 북쪽으로는 공주 경계까지 3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었는데, 신라 때에 황산군(黃山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 공주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황등야산(黃等也山)ㆍ황산(黃山)

 

성씨 본현 송(宋)ㆍ서(徐)ㆍ황(黃)ㆍ손(孫)ㆍ고(高)ㆍ임(任). 광소(廣炤) 임(任)과 황(黃) : 역(驛)이다.

유(兪) : 외지에서 온 것이다.

 

형승 산천이 웅장 수려하다 : 정이오(鄭以吾)의 향교 기문이다. 땅이 편평하며 넓은 지대가 적다 : 이첨(李詹)의

의창(義倉) 기문이다.

 

산천 계룡산(鷄龍山) : 현 북쪽 27리에 있다. 우리 태조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 이 계룡산 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친히 와서 순시하고 길지(吉地)를 택하여 대략 그 기지를 정하고는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가, 결국 조운(漕運)

의 길이 멀다 하여 이를 그만두었는데, 지금까지도 그곳을 신도(新都)라 부르고 있으며, 당시 구획하였던 개울과

주춧돌 등이 아직 남아 있다. 황산(黃山) : 일명(一名) 천호산(天護山)이라고도 하는데, 현 동쪽 5리에 있다.

 

○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군사를 거느리고 당(唐) 나라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니,

백제의 장군 계백(階伯)이 황산 벌판에서 신라의 군사를 방어할 적에, 3개의 병영을 설치하고 네 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끝내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죽었다.

 

○ 견훤(甄萱)이 고려 태조를 따라 그의 아들 신검(神劍)을 토벌하니, 신검이 싸움에 패하여 항복하였다.

견훤이 번민하고 근심하다가 등창이 발생하여 수일 만에 황산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도솔산(兜率山) : 현 동쪽 15리에 있다. 옛 성터가 남아있다.

마고평(馬皐坪) : 현 서쪽 19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이산(尼山)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은진(恩津)에 이른다.

포천(布川) : 현 서쪽 26리에 있다. 은진현 동쪽에서 발원하여 다시 은진현 사진(私津)으로 들어간다.

 

초포(草浦) : 현 서쪽 20리에 있다. 계룡산에서 발원하여 사진으로 들어간다.

거사리천(居士里川) : 현 남쪽 10리에 있다. 전라도 고산현(高山縣) 용계천(龍溪川)에서 발원하여 사진으로

들어간다.

잠연(潛淵) : 현 북쪽 15리에 있다. 공주 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토산 모시ㆍ도루묵[銀口魚]ㆍ자연동(自然銅)ㆍ벌꿀ㆍ게ㆍ지황(地黃)

신증 녹반(綠礬) : 현 동쪽 20리 대야동(大也洞)에서 난다.

 

성곽 북산성(北山城) : 현 북쪽 3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7백 10척에 높이가 12척이다.

그 안에 우물 하나와 군창(軍倉)이 있는데, 지세가 험준하고 막혀 있다.

 

학교 향교 : 본현 북쪽 1리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기문에, "연산 명부(連山明府 : 연산 현감) 박후(朴侯)가 고을에 부임한 이듬해에, 고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학교는 왕정(王政)의 근본이다. 옛날에는 그 정치의 성쇠를 학교의 흥폐로서 관찰하였던

것이니, 이른바 나라에는 학이 있고, 향(鄕)에는 서(序)가 있으며, 당(黨)에는 상(庠)이 있고, 집에는 숙(塾)이

있었다고 한 것은, 삼대(三代)의 융성하던 시대의 제도였다.

이제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어, 유학이 쓰여서 안으로는 성균관과 밖으로는 주군(州郡)에 학교가 없는 곳이

없다. 이 고을로 말하자면 전조(前朝)의 태조와 우리 태상왕(太上王 태조)께서 모두 도읍을 정하시려던 곳이다.

산천의 웅장ㆍ수려함을 보건대, 인재가 일어날 것을 알 수 있거늘, 유독 학교가 없다면 되겠는가.' 하고, 옛터를

찾으니, 군(郡) 북쪽에 구름 위 우뚝 솟은 산이 있고, 그 땅은 형국이 높직해 시원하였다.

바로 그 옛터에다가 새로 지을 것을 계획하니, 고을 사람들이 기뻐하고 다행하게 여겨 분주히 명령에 따라 혹시

라도 남에게 뒤지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이리하여 산에서 재목을 취하고 폐사(廢寺)에서 기와를 가져다가

모년 모월에 연산의 향교가 이루어졌는데, 그 뒤를 개척하여 문묘를 짓고, 그 가운데를 넓게 틔워 당(堂)과 연

(筵)의 처소로 삼았다.

석전(釋奠)을 거행하면서 오르고 내린 이곳은 곧 전날에 푸른 연기 흰 이슬이 엉기던 가시밭이요, 학문을 토론

하고 예법을 익히는 이곳은 곧 전날에 무너진 담과 끊어진 구덩이로 황폐했던 터였다. 이에 노비 몇 호(戶)를

요역을 면제해 주어 유생(儒生)들의 심부름을 전담하게 하고, 경서(經書)를 모아서 간직하여 유생들의 익히고

읽는 데 편리하도록 하고는, 고을의 사무를 다스리고 백성들의 송사를 결단하고 나서, 남는 시간이 있으면 매양

학교로 와서 자제들을 데리고 강론(講論)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박후(朴侯)는 근본되는 바를 안다고

하겠다.

나의 벗인 전 부여 감무(扶餘監務) 권가균(權可均) 군은 연산 사람인데, 나에게 그 사실을 기록해 줄 것을 청해

왔다. 아, 내 어찌 말할 줄 아는 사람이랴. 그러나 내가 들으니 천하에 인재가 적은 것이 아니며, 그 자질의 아름

다운 자도 또한 어찌 한이 있겠는가. 다만 학문에 힘쓸 줄을 몰라서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물며 궁벽한 시골의 후진들은 비록 학문에 뜻을 두었다 하더라도, 수령된 자가 인도하고 열어 주어 성취하게

하지 않으면, 그대로 파묻혀서 나타나지 못하고 마는 자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정사를 하는 요건은 반드시 학문

에 근본을 두어야 하며, 가르치고 배우는 법은 반드시 사람되게 하는 데 근본을 두어야 할 것이다. 진실로 둔한

자를 연마하여 변화시켜서 착한 길로 달려가게 하여, 사람들에게 권면하기를 부지런히 하고,

사람 마음속에 파고 들어간 것이 깊고 간절하여 점점 쌓이게 되면, 예양(禮讓)이 행하여 풍속이 순박하고 아름다

워질 것이요, 인재의 배출도 또한 점차 이루어질 것이다. 공자는 말하기를, '열 집[十室] 되는 조그만한 고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럽고 신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고, 맹자는 말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요순(堯舜)이 될 수

있다.' 하였으니, 대개 자기를 보고 이를 안 것이다.

다만 알지 못할 것은 박후 뒤에 오는 자가 박후의 뜻을 계승할런지의 여부이다.

박후의 이름은 곤(坤)으로 일찍이 호령하던 기절을 꺾어 학문을 좋아하고, 일을 만드는 데 민첩히 한 분이다.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이 거조가 정사의 기본을 얻었다.' 하니, 어찌 그 근본을 얻고서 끝을 빠뜨리는 일이 있

으리오. 마땅히 이를 써서 장차 오는 사람들에게 보여야 할 것이며, 또 그 해와 달도 기록하여 두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역원 평천역(平川驛) : 현 서쪽 10리에 있다.

○ 정추(鄭樞)의 평천역(平川驛) 치설시(値雪詩)에, "가고 가서 질펀한 들을 지나니, 등륙(滕六 눈을 맡은 신의

이름)이 하늘 꽃을 뿌려 준다. 말[馬] 앞뒤에서 성기다가는 다시 빽빽하고, 사람을 맞이하면 바로 내리다가도

다시 비껴서 내리네. 아득한 구름가의 절이요, 출렁거리는 물가의 집이로다. 내일의 먼 이별을 애석해하는

기러기는, 추위 무릅쓰고 날 저문 모래 위에 자는구나." 하였다.

 

반야원(般若院) : 현 서쪽 2리에 있다.

초포원(草浦院) : 초포(草浦) 남쪽 언덕에 있다.

포천원(布川院) : 포천(布川) 동쪽 언덕에 있다. 일명(一名) 사제원(沙梯院)이라고도 한다.

 

불우 개태사(開泰寺) : 천호산(天護山)에 있는데, 고려 태조(太祖)의 진전(眞殿)이 있다.

○ 고려 태조 19년에 백제를 정벌하여 큰 승리를 거두어, 하내(河內)의 30여 군(郡)과 발해국(渤海國) 사람들이

모두 귀순하였다. 드디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개태사를 창건하고, 친히 원문(願文)을 지어 손수 이를 썼는데

그 대략에, "생민(生民)들이 백 가지 근심을 만나니, 많은 고통을 이겨 낼 수 없었습니다.

군사는 경내(境內)에 얽히어서 재난이 진한(辰韓)을 시끄럽게 하니, 사람들은 의탁해 살 길이 없고, 가옥들은

온전한 담이 없었습니다. 운운.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큰 간악한 무리를 섬멸 평정하여 생민(生民)을 도탄

에서 건져, 농사와 길쌈을 제 고장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하겠나이다.' 하였습니다.

위로 부처님의 힘에 의탁하고, 다음에 하늘과 신령의 위엄에 의지하여, 20여 년간의 수전(水戰)과 화공(火攻)으

로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천리 길 남(南)으로 치고 동으로 쳐서 친히 간과(干戈)를 베개로 삼았더니,

병신년 가을 9월에 숭선성(崇善城) 가에서 백제의 군사와 대진(對陣)할 제, 한 번 부르짖으니 흉광(兇狂)의 무리

가 와해(瓦解)하였고, 두 번째 북을 울리니 역당(逆黨)이 얼음 녹듯 소멸되어 개선의 노래가 하늘에 떠 있고,

환호의 소리는 땅을 뒤흔들었습니다. 운운. 들판의 도적과 산골의 흉도들이 저희들의 죄과를 뉘우쳐 새사람이

되겠다고 곧 귀순해 왔습니다. 모(某 왕건(王建))는 그 뜻이, 간사한 자를 누르고 악한 자를 제거하며, 약한 자를

구제하고 기울어진 것을 붙들어 일으키는 데 있으므로, 털끝만큼도 침범하지 않고 풀 한 잎새도 다치지 않았습

니다. 운운. 부처님의 붙들어 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님의 도와 주심을 갚으려고 특별히 맡은 관사(官司)에 명

하여 불당을 창건하고는, 이에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개태(開泰)라고 하나이다. 운운.

원하옵건대 부처님의 위엄으로 덮어 주고 보호하시며, 하느님의 힘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하였다.

 

불암사(佛菴寺)ㆍ상암사(上菴寺)ㆍ만운사(萬雲寺) : 모두 계룡산에 있다. 고운사(孤雲寺) : 천호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북쪽에 있디.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광조부곡(廣炤部曲) : 현 북쪽 13리에 있다. 지금은 두마촌(豆磨村)이라 부른다.

고의창(古義倉) : 현 서쪽 성내리(城內里)에 있다.

 

열녀 본조 허씨(許氏) : 대사헌(大司憲) 허응(許應)의 딸이다. 사인(士人) 김문(金問)에게 시집가서 나이 17세에

남편이 죽었다. 부모가 불쌍하게 여겨 다시 시집 보내려고 약속을 이미 정했는데, 허씨가 이를 알고는 어린 아이

를 업고 급히 시아버지의 집으로 달려가서 평생을 마쳤는데, 이 사실이 보고되자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웠다.

 

제영 전다자고칭다가(田多自古稱多稼) : 이색(李穡)의 시에, "연주(連州) 연산(連山)이 평야를 꼈으니, 밭 많아

예로부터 곡식 많다 일러 왔다. 봄바람엔 보리의 푸른 물결 가득히 넘치고, 가을날엔 누른 구름이 파아(●● 벼)

의 무더기네. 뽕나무 숲 멀리 뻗쳐 여름 그늘 서늘하고, 잠박(蠶箔)은 층층이 집 안에 가득하다.

부부가 근고(勤苦)하여 생계를 꾸려 가니, 촉직(促織 베짱이)이 또 달 밝은 밤에 우는구나. 어린 아이 소 이끌어

우리 밖에 나오고, 큰 아이 말 먹일 제 고삐를 놓아 둔다.

마을 안 늙은이들 번갈아 청해 가니, 취하고 배부름 언제 사양하였던가.

풍속의 순박함을 절로 알겠으니, 용모 의절(儀節)이 깔끔하지 못하다 한하지 않노라. 복사꽃 흐르는 물이 어디에

있다던가. 이 마을 옛 주진(朱陳)과 다를 것이 없도다. 머리 흰 목은옹(牧隱翁)이 기어이 한번 가서, 격양가(擊壤

歌) 부르면서 풍화(風化)를 찬미하련다." 하였다.

 

황파적설유인적(荒陂積雪留人跡) : 정추(鄭樞)의 시에, "오사모(烏紗帽) 숲 뚫고 나가니, 보일락말락 헤진 낡은

안장은 길 삐그덕 소리가 높고 낮네. 거친 언덕 쌓인 눈에 사람 자취 남겼는데, 얕은 물 밝은 놀 속에 말굽 소리

요란하다." 하였다.

 

[비고]

 

연혁 인조 24년에 은진(恩津)ㆍ이산(尼山)ㆍ연산(連山)을 합하여 한 현으로 만들고 은산(恩山)이라 불렀다 :

토적(土賊) 유탁(柳濯) 등의 모반 때문이었다.

○ 평천역(平川驛)의 서쪽에 소재지를 세웠으며, 효종 7년에 다시 복귀시켰다.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고읍 거사물(居斯勿) 본래 백제의 고사물인데 당이 고쳐 강등시켜서 지심(支潯)으로 만들어 주(州)의 영현으로

삼았다. 신라가 거사물을 쭉 세우다가 후에 내병하였다. ○ 지금 외성면(外城面)이다.

 

방면 현내(縣內) : 끝이 10리이다. 대곡(代谷)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두마(豆磨) :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외성(外城)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부인처(夫人處) :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식한(食漢) : 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백석(白石) : 서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적사곡(赤寺谷) :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모촌(茅村) : 동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토산 철(鐵)ㆍ닥[楮]ㆍ칠(漆)ㆍ감ㆍ밤ㆍ소가리ㆍ붕어[鯽魚]

사원

둔암서원(遯巖書院) : 인조 갑술년에 세워졌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김장생(金長生) : 문묘(文廟) 편을 보라. 김집(金集) : 태묘(太廟) 편을 보라. 송준길ㆍ송시열 : 모두 문묘 편을

보라.

 

 

이산현 尼山縣

 

동쪽으로는 연산현(連山縣) 경계까지 11리이고, 남쪽으로는 같은 현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쪽으로는 석성현

(石城縣) 경계까지 25리이고, 북쪽으로는 공주 경계까지 1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열야산현(熱也山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웅주(熊州)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 공주(公州)에 예속시켰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 14년에 석성(石城)과 합쳐서 이성현(尼城縣)이라 일컬었다가, 16년에 다시 쪼개어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열야산(熱也山)ㆍ이성(尼城)ㆍ노산(魯山)

 

성씨 본현 유(兪)ㆍ유(柳)ㆍ방(方)ㆍ문(文)ㆍ하(河). 저정(猪井) 조(趙).

 

산천 노산(魯山) : 현 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으로, 일명(一名) 성산(城山)이라고도 한다.

접지산(接枝山) : 현 북쪽 3리에 있다. 고해랑(高海浪) : 현 남쪽 3리에 있다. 큰 언덕이 돌출해 나오고 길이 그

위로 났다.

장자지(長者池) : 현 남쪽 15리에 있다. 길이가 7백 60척이나 되며, 관개하는 면적이 매우 넓다.

 

대천(大川) : 현 동쪽 5리에 있다. 계룡산에서 발원하여 은진현 사진(私津)으로 들어간다.

석교천(石橋川) : 현 북쪽 6리에 있다. 현 북쪽 금굴이(金堀伊)에서 발원하여 석성현(石城縣) 수탕포(水湯浦)로

들어간다.

병정(竝井) : 현 남쪽 8리에 있으며, 두 우물이 서로 끼고 나오므로 병정이라 이름한 것이다.

 

토산 쇠 : 현 남쪽 천동(泉洞)에서 난다. 모시ㆍ게ㆍ붕어

 

성곽 노산성(魯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9백 50척이고, 높이가 8척이며, 그 안에 네 우물이 있다.

봉수 성산 봉수(城山烽燧) : 남쪽으로는 은진현 황화산(皇華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공주의 월성산(月城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 : 현 북쪽 2리에 있다.

원우 오덕원(吾德院) : 현 남쪽 10리에 있다. 궁정원(弓井院) : 현 북쪽 9리에 있다.

불우 탑사(塔寺) : 성산(城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성산(城山)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저정소(猪井所) : 현 남쪽 14리에 있는데, 지금은 마본촌(馬本村)이라 부른다.

등수소(登水所) : 현 남쪽 13리에 있는데, 지금은 득윤촌(得尹村)이라 부른다.

명환 본조 예승석(芮承錫)ㆍ경연(慶延)

 

 

부여현 扶餘縣

 

동쪽으로는 공주 경계까지 24리, 석성현(石城縣) 경계까지 15리이고, 남으로는 임천군(林川郡) 경계까지 20리

이고, 서쪽으로는 청양현(靑陽縣) 경계까지 37리,

홍산현(鴻山縣)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으로는 정산현(定山縣)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6리

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소부리군(所夫里郡) : 사자(泗泚)라고도 한다. 백제의 성왕(聖王)이 웅천(熊川)으로부터

여기에 와서 도읍하고, 남부여(南扶餘)라 이름하였다.

의자왕(義慈王) 때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당(唐) 나라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당 나라 군사가 돌아가고 나서는 신라에서 그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문무왕(文武王) 12년에 총관(摠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만들었으며,

고려 현종(顯宗) 9년에 공주에 예속시켰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소부리(所夫里)ㆍ남부여(南扶餘)ㆍ반월(半月)ㆍ사자(泗泚) : 자(泚)는 혹 비(沘)로도 쓴다. 여주(餘州)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와 있다.

 

성씨 본현 심(沈)ㆍ이(李)ㆍ서(徐)ㆍ전(全)ㆍ형(邢)ㆍ조(曹)ㆍ고(高)ㆍ표(表)가 있으며 백(白) : 속(續)이다.

 

형승 탄현(炭峴)ㆍ백강(白江) : 성충(成忠)이 의자왕을 간(諫)한 글에 있으며, 인물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산천 부소산(扶蘇山) : 현 북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동쪽 작은 봉에 비스듬히 올라간 곳을 영월대(迎月臺)

라 부르고, 서쪽 봉을 송월대(送月臺)라 이른다.

 

탄현(炭峴) : 현 동쪽 14리에 있는데 공주와의 경계이다. 부산(浮山) : 고성진(古省津)의 북쪽 언덕에 있다.

망월산(望月山) : 현 동쪽 15리에 있으며, 또 석성현(石城縣) 편에도 나와 있다.

취령산(鷲靈山) : 현 서쪽 20리에 있다. 오산(烏山) : 현 남쪽 7리에 있다.

나소현(羅所峴) : 현 서쪽 30리에 있다. 백마강(白馬江) : 현 서쪽 5리에 있다.

양단포(良丹浦) 및 금강천(金剛川)이 공주의 금강(錦江)과 합류하여 이 강이 된 것인데, 임천군(林川郡) 경계로

들어가서는 고다진(古多津)이 된다.

 

고성진(古省津) : 바로 사자하(泗泚河)인데, 부소산 아래에 있다.

○ 백제의 의자왕 때 물고기가 죽어 물 위에 떴는데, 그 길이가 3장(丈)이나 되었다. 이를 먹은 자는 죽었고,

또 물빛이 붉게 변하여 핏빛과 같았다.

 

대왕포(大王浦) : 현 남쪽 7리에 있는데, 오산(烏山) 서쪽에서 발원하여 백마강(白馬江)으로 들어간다.

○ 백제의 무왕(武王)이 매양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자하(泗泚河) 북쪽 물가에서 놀면서, 술마시며 즐기고

술이 취해서는 반드시 거문고를 뜯으면서 스스로 노래하고, 시종하는 자들을 일어나 춤추게 하여,

당시 사람들이 이로 말미암아 '대왕포(大王浦)'라 일컬었다 한다.

 

광지포(光之浦) : 현 동북쪽 7리에 있다. 양단포(良丹浦) : 현 서쪽 7리에 있다. 나소현(羅所峴)에서 발원한다.

금강천(金剛川) : 현 북쪽 23리에 있다.

석탄(石灘) : 현 동쪽 12리에 있으며, 백마강의 상류이다.

○ 고려의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글을 올려 신돈(辛旽)을 탄핵하였다가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

었다. 그 뒤에 이곳에 살면서 여울 위에 정자를 짓고 한가로이 시를 읊으면 서 그 몸을 마쳤는데, 일찍이 시를

짓기를, "백제 옛 나라 장강(長江) 굽이에, 석탄(石灘)의 풍월이 주인 없는 지 몇 해이런가.

들불이 언덕을 사르니 평탄하기 손바닥 같은데, 때때로 소가 묵은 밭을 가네. 내가 와 정자 짓고 승경(勝景)을

더듬으니, 온갖 경치 아름답게 앞으로 몰려드네. 구름과 연기는 교사(蛟蛇)의 굴에 끼었다간 사라지고,

산 아지랑이 아물거리며 먼 하늘에 떠 있다. 흰 모래 언덕 뚝 끊기매 갯물이 들어오고, 큰 암석이 연달아 물가

에 비꼈구나. 조각배 저어 남으로 올효조(兀梟窕)로 돌면, 돌 난간 계수나무 기둥이 맑은 물을 굽어본다.

돌부처여, 그대는 의자왕 시대의 일을 목격하였으리라. 오직 들 두루미 와서 참선(參禪)하고 있구나.

상상해 보니 옛날 당 나라 장수가 바다를 건너왔을 때, 웅병(雄兵) 10만에 북소리 둥둥 울렸으리.

도문(都門) 밖 한 번 싸움에 나라 힘을 다했으나, 임금이 두 손 모아 결박을 당하였다. 신물(神物 용(龍))도 빛을

잃고 제자리 못 지켰나. 돌 위에 남긴 자취 아직도 완연하다. 낙화암(落花巖) 아래에는 물결만 출렁대고,

흰 구름 천년 동안 속절없이 유연(悠然)하다." 하였다.

 

○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석벽은 쇠를 깎아 세운 듯, 여울 흐름은 긴 무지개가 달아나는 듯. 여울 머리에 고기

잡이배 비꼈고, 여울 위에는 초가집을 세웠다. 고상한 사람이 깨끗한 병(病)을 안고서, 벼슬 버리고 돌아와 그

가운데 누워 있다. 아침나절 놀이에는 호탕(浩蕩)한 물결 즐기고, 저녁 조망(眺望)에는 밝았다 어두웠다 하는 데

놀란다. 날씨가 더울 때엔 시원함을 끌어 당기고, 장마가 다 지나면 흰 달이 흐른다.

봄 강물이 쪽[藍]보다 푸르거니, 북풍에 나부끼는 백설과 어떠하랴. 조용히 앉아 기이하게 변해 가는 사시를

구경하니, 저 흘러가는 것은 멈출 때가 없구나. 홀로 한 쌍의 저 흰 갈매기, 날아와서 이곳에 길이 있구나.

슬프다, 나는 저 새보다도 못하여, 가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서로 생각만 한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봄 바람에 마음 아프게 이 장사(李長沙 이때 이존오(李存吾)가 장사 감무(長沙監務)

로 좌천되어 있었다)를 생각하고, 남쪽 누각에 방황하니 해가 비끼려 한다. 선실(宣室)의 은명(恩命) 받을 날이

응당 멀지 않을 것이니, 석탄(石灘 이존오의 호) 위의 밝은 달을 자랑하지 말라." 하였다.

 

○ 이직(李稷)의 시에, "이씨(李氏)는 신라 대성(大姓)의 후예(後裔)로, 선생의 절의(節義)가 또 남다르네.

간신(奸臣)을 때린 수실(秀實)이 필경 시대와 맞지 않고, 세상 도피한 엄자릉(嚴子陵)은 곧 낚싯대 드리웠다.

일은 지났어도 그 높은 이름 해ㆍ별과 함께 빛을 다투고, 성탄(星灘)은 비었는데 양쪽 언덕에는 쑥ㆍ명홧대뿐

이로다. 충효(忠孝)로 집을 이은 계성군(鷄城君 이존오의 아들)이 있으니, 남은 경사 무궁함을 어찌 헤아리랴."

하였다.

 

○ 안노생(安魯生)의 석탄정기(石灘亭記)에, "내가 이미 관례(冠禮)를 하고 서울 가서 배울 때에, 살던 곳이 선생

의 집과 수리(數里)도 못 되었다. 당시 선생은 아직 총각으로 유희(遊戲)를 일삼지 않고 성품이 독서를 좋아하였

는데, 한 번 나를 보고는 곧 흔연히 옛 친구같이 대하였다. 나도 또한 그가 장차 영특한 인물이 될 것을 알고서

서로 벗이 되어 좋아하였더니, 다음해 봄에 똑같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선생이 나에게 말하기를,

'석탄(石灘)은 나의 선자(先子 돌아가신 아버지)의 별장[別業]이다. 공산(公山 공주)금강(錦江)의 서쪽이자,

부여(扶餘) 반월성(半月城)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계룡산에서 발원하여 공산의 남쪽을 경유하여,

다시 서쪽으로 꺾여서 드디어 금강과 합류하여 역류(逆流)로 돌아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옛날 내 선자께서 간관(諫官)으로 계시다가, 물러나와 이곳에 사시면서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날마다 올라가서

푸른 산을 대하고 흐르는 물을 굽어보시면서, 그윽한 심정을 마음껏 푸셨던 곳이다.

미약한 나 소자(小子)는 아무 재능도 없는 사람으로 또한 간대부(諫大夫)가 되었다가, 일을 논한 것이 잘못 되어

드디어 이곳에 돌아와서 선자의 뜻을 이어 장차 이 몸을 마치려고 했더니, 성명(聖明)하신 임금을 만나 신(臣)을

석탄 가운데서 끌어올려, 정부에 두시고 훈신(勳臣)의 반열에 참여하게 하시어 계림군의 봉작(封爵)을 내리시고,

능연각(陵煙閣) 위에 형모를 그렸으니, 아름다운 벼슬과 후한 녹봉의 영광이 조상에게 빛나는지라 어찌 마음속

에 부끄럽지 않으리오. 한 석탄인데 선자의 어짊으로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끝내 폐하셨거늘, 어리석고 졸

한 내가 특별히 그 사이에서 기용되어 이에 이르렀으니, 나 혼자서 은근히 이를 괴상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그대는 나를 위하여 그 사실을 쓰라.'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일찌기 조정의 공의(公議)를 들으니,

모(某 이존오(李存吾))는 동국의 간신(諫臣)이다.

전조(前朝)를 섬기던 날에 현릉(玄陵 공민왕)이 역적 신돈(辛旽)에게 미혹하여, 나라 일이 날로 그릇되어 가서

만일 배척해 말하는 자가 있으면, 매양 그를 중상(中傷)하기 때문에 비록 의사(義士)라고 불리는 사람도 모두 화

(禍)를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모(某)가 정언(正言)으로서 분연히 대의(大義)를 창(倡)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고 분연히 글을 올려 그를 탄핵하니, 간하는 말이 간절하고 정직하였는데 과연 거슬림을 당하여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얼마 안 되어 석탄으로 놓여 돌아와서 한가로이 세월을 보내다가,

그 종말에 이르러 분함으로 인하여 병이 되어 누웠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큰 소리로 외치기를,

「돈이 멸망하였는냐.」 하므로, 모시고 있던 사람이 말하기를, 「아직도 기세가 치열합니다.」하니, 도로 누우며

말하기를, 「돈이 멸망해야 내가 죽으리라.」하였는데, 처음 병이 시작할 때부터 돌아갈 때까지 이와 같이 한 것

이 여러 번이었다 하니, 그렇다면 그의 충성과 의기(義氣)는 죽을 때까지도 변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요 억지로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신돈이 죽음을 받으매, 현릉도 뉘우치고 깨달아 즉시 간의

대부(諫議大夫)의 증직(贈職)을 내리고, 또 어필(御筆)로 특별히 쓰기를, 「간신(諫臣)의 아들 아무를 장복 직장

(掌服直長)으로 삼는다.」하였다.

현릉이 비록 즉시 간하는 말을 좇지는 못했으나 악의 괴수를 베어 없애고, 뒤에 뉘우치고 깨달아서 그의 죽음을

영광스럽게 하고 그 아들에게 은총을 베풀었으니, 또한 현명한 임금일진저. 사람들의 말에, '박옥(璞玉)의 아름

다움을 비록 보지 못한 자라도 모두 그 온윤(溫潤)의 미(美)를 알며, 성현(聖賢)의 높은 것을 말하면 비록 미혹하

고 어리석은 자라도 또한 도덕의 귀함이 있는 것을 안다.」한다.

그러기 때문에 백이(伯夷)ㆍ숙제(叔齊)는 서산(西山)에서 주려서 죽은 한 필부(匹夫)이지만, 사람들이 지금까지

도 그를 칭송하고 있는 것인데, 공의 선자가 비록 석탄 위에서 세상을 마쳤으나, 당시에 직접 보고 아는 자와

지금 이를 듣고 아는 자가 모두 그 의기에 탄복하면서 칭송을 마지 않는 것은, 그 백이(伯夷)의 풍(風)이 있기

때문이다.

또 굽혔다간 피고, 갔다간 오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가지 않으면 어찌 오며, 굽히지 않으면 어찌 펴겠는가.

더욱이 아버지와 아들은 한 기운이 나뉜 것이지만, 어찌 부자 사이의 굽히고 펴진 것을 둘로 볼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보아 선자가 전일 억울하였던 것은, 오늘의 펴짐을 가져 오려는 것이었음을 알 것이니, 선생은 무엇을

괴상하게 여기리요. 선생의 충의는 안으로는 가업(家業)을 이어나갈 것이오, 위로는 임금의 명을 저버리지 않고

영원히 왕좌(王佐)의 인재가 되어 유풍(流風)과 여경(餘慶)이 반드시 저 석탄과 함께 흘러서 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선생에게 어찌 구차스럽게 환심을 사려 함이겠는가. 이미 그 사실을 쓰고 또 바라는 바가 있어 쓰는 바이다.'

하였다." 하였다.

 

토산 모시ㆍ웅어[葦魚]ㆍ농어[鱸魚]ㆍ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뱅어[白魚]ㆍ복령[茯苓]ㆍ붕어[鯽魚].

 

학교 향교ː현 서쪽 1 리에 있다.

 

역원 은산역(恩山驛) : 현 서쪽 15리에 있다. 용전역(龍田驛) : 현 동쪽 8리에 있다.

고성원(古省院) : 고성진(古省津) 언덕에 있다. 복천원(福泉院) : 현 북쪽 30리에 있다.

금강원(金剛院) : 금강천(金剛川) 언덕에 있다.

교량 양단진교(良丹津橋)ㆍ금강천교(金剛川橋)

 

불우 숭각사(崇角寺)ㆍ도천사(道泉寺) : 모두 취령산(鷲靈山)에 있다.

경룡사(驚龍寺)ㆍ보각사(普覺寺)ㆍ망월사(望月寺) : 모두 망월산(望月山)에 있다.

호암사(虎巖寺) : 호암산(虎巖山) 천정대(天政臺) 아래에 있는데, 바위가 하나 있고, 그 위에 호랑이의 자취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했다 한다. 고란사(高蘭寺) : 부소산(扶蘇山)에 있다. 망심사(望心寺) : 취령산에 있다.

 

사묘 사직당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부소산 마루턱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반월성(半月城) : 돌로 쌓았다. 주위가 1만 3천 6척이니 이것이 곧 옛 백제의 도성(都城)이다. 부소산을

쌓아 안고 두 머리가 백마강(白馬江)에 닿았는데, 그 형상이 반달같기 때문에 반월성이라 이름한 것이다. 지금의

아문(衙門)이 그 안에 있다.

 

증산성(甑山城) : 현 서쪽 4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2백 69척에 높이가 10척이다. 그 안에 한 우물

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청산성(靑山城) : 현 동쪽 1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8백 척에, 높이가 5척이며, 그 안에 세 개의 우물

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천정대(天政臺) : 현 북쪽 10리쯤에 있다. 강 북쪽에 절벽으로 된 봉우리에 큰 암석이 대(臺)같이 되어 강물을 굽

어 보고 있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백제 때에 재상(宰相)을 임명하려 한면, 뽑힐 만한 자의 이름을 써서 함(函)

속에 넣고 봉한 다음, 바위 위에 놓았다가 조금 뒤에 이를 취하여 보고, 이름 위에 도장 흔적이 있는 것으로 재상

을 삼았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했다 한다. 혹은 정사암(政事巖)이라고도 일컫는다.

 

조룡대(釣龍臺) : 호암(虎巖)으로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부소산(扶蘇山) 아래에 이르러,

한 괴석(怪石)이 강가에 걸터앉은 듯이 있는데 돌 위에는 용(龍)이 발톱으로 할퀸 흔적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

면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공격할 때, 강에 임하여 물을 건너려고 하는데 홀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므로 흰

말로 미끼를 만들어 용 한 마리를 낚으니, 잠깐 사이에 날이 개어 드디어 군사가 강을 건너 공격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강을 백마강이라 이르고, 바위는 조룡대라고 일렀다." 한다.

 

낙화암(落花巖) : 현 북쪽 1리에 있다. 조룡대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의자왕(義慈王)이 당 나라

군사에게 패하게 되자 궁녀(宮女)들이 달아나 나와 이 바위 위에 올라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으므로 낙화암이

라 이름했다." 한다.

 

자온대(自溫臺) : 현 서쪽 5리에 있다. 낙화암에서 물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괴상한 바위가 물가에 걸터앉은

듯이 있는데, 10여 명이 앉을 만하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백제의 왕이 이 바위에서 놀면 그 바위가 자연히

따뜻해졌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했다." 한다.

 

의염참고기(義鹽倉古基) : 현 동쪽 10리에 있다. 옛날에 연해에 있는 각 고을의 소금을 수납하여 적곡(糴穀 양곡

매입(糧穀買入))과 대납하였다." 한다. 석전부곡(石田部曲) : 현 서쪽 10리에 있다.

지금은 내복지촌(乃卜只村)이라 부른다.

풍지소(楓枝所) : 현 남쪽 10 리에 있다.

 

신증 소정방 비(蘇定方碑) : 현 서쪽 2리에 있다. 당 나라 고종(高宗)이 소정방을 보내어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과 더불어 백제를 쳐서 이를 멸망시키고, 이곳에 돌을 세워 그 공적을 기록하였다.

 

인물 백제 성충(成忠) : 의자왕(義慈王)이 궁녀들과 더불어 음란하게 연락(宴樂)에 빠져 술마시기를 그치지 않으

므로, 좌평(佐平) 성충(成忠)이 극력 간하였더니, 왕이 노하여 옥(獄)에 가두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병이 나서 죽

을 때에 글을 올려 간하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오니 원하건대 한 말씀 드리고 죽겠나이다.

신이 시변(時變)을 관찰하오니, 반드시 병란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쓰려면 그 땅을 살펴 선택하여 상류

(上流)에 처하여 적군을 맞이한 뒤에야 보전할 것이니, 만약 다른 나라의 군병이 공격해 올 경우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 침현(沈峴)이라고도 한다)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며, 수군(水軍)은 백강(白江 기벌포(伎伐浦)라고도

이른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그 험준하고 막힌 지리(地利)를 점거하여 방어한 뒤에야 가할 것입니다." 하였

다. 왕이 그 말에 유의하지 아니하였다가 당 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탄현과 백강을 통과한 승세(勝勢)를 타고

도성에 임박하니 왕이 패배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한탄하여 말하기를,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았더니 이 지경이

되었음을 후회하노라." 하였다.

 

계백(階伯) : 계백이 백제에 벼슬하여 달솔(達率)이 되었는데, 당 나라 소정방이 신라의 군사와 합세해 와서 치므

로 계백이 장군이 되어 황산(黃山)의 벌판에 이르러 세 영(營)을 배설하고는 신라 군사를 만나 싸우려 할 즈음에,

군중에 맹세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월(越) 나라 구천(句踐)이 5천 명의 적은 병력으로 능히 오 (吳)나라의 70만

대병을 격파한 바 있다. 오늘 마땅히 각기 분발하여 기필코 승리하여 국은(國恩)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무찔러 싸우는데 하나가 천 명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어 신라의 군사가 이에 퇴각하였다.

이와 같이 진퇴(進退)를 거듭하기를 네 번이나 하고 힘이 다 되어 죽었다.

 

흥수(興首) : 의자왕 때에 좌평(佐平)이 되었는데 죄로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으로 유배되었었다. 당 나라 군사

가 덕물도(德物島)에 이르자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전수(戰守)의 방책을 물으니, 흥수가 말하기를,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한 군사가 단창(單槍)으로 지키고 있으면 만 명도 이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용맹있는 군사

를 가려서 가서 지키도록 하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신라 병사로 하여금 탄현을

지나오지 못하게 하고, 대왕께서는 성문을 단단히 닫고 굳게 지키시면서 그들의 군량이 다하고 병졸이 피로함을

기다린 뒤에 분발하여 치면 필연코 적을 멸할 것입니다." 하니, 대신들이 말하기를, "흥수가 오랫동안 옥중에 있

어 대왕을 원망하였을 것이니 그 말을 쓸 수 없습니다." 하자, 왕이 그렇게 여겨 흥수의 말을 쓰지 않았다가 드디

어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복신(福信) : 무왕(武王)의 조카이다. 의자왕이 이미 항복하니, 복신이 승려 도침(道琛)과 더불어 주류성(周留城)

에 웅거하여 왕자 부여풍(扶餘豐)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웠다. 병졸을 이끌고 당 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을 도성

에 포위하였는데, 유인궤(劉仁軌)와 신라가 합력 공격하여 그 포위를 풀자 복신이 임존성(任存城)으로 물러가

지키면서 자칭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하였는데, 뒤에 부여풍에게 피살되었다.

 

흑치상지(黑齒常之) : 서부(西部) 사람으로 신장이 7척이 넘었으며, 용력과 지략이 있었다. 의자왕 때에 달솔 겸

풍달군장(達率兼風達郡將)이 되었는데, 소정방이 의자왕을 잡고는 이내 군병을 놓아 크게 노략하니, 상지가 10

여 명과 더불어 빠져 나가서 도망한 자를 불러모아 임존성산(任存城山)에 의거하여 굳게 지키니 10일이 못 되어

귀의(歸依)하는 자가 3만 명이나 되었다. 소정방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마침내 2백여 개의 성(城)을

회복하고,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吒相如)와 더불어 복신(福信)과 호응하였는데, 용삭(龍朔) 연간에 당 나라

고종이 사신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드디어 유인궤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지수신(遲受信) : 유인궤가 백강(白江)에 이르러 부여풍(伕餘豐)을 구원하는 왜병(倭兵)과 만나 네 번 싸움에 모두

이기니, 부여풍은 몸을 빼 달아나고, 왕자 부여충승(伕餘忠勝)ㆍ충지(忠志) 등은 왜인과 모두 항복하였는데,

유독 지수신만이 임존성에 웅거하였다. 지대가 험하고 성곽이 견고한데다가 저축한 군량이 많아서 30일을 공격

하여도 항복하지 않다가 성이 함락하게 되자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高句麗)로 망명하였다.

 

우거 고려 이존오(李存吾) : 석탄(石灘) 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효자 고려 서공(徐恭) : 아버지가 광질(狂疾)을 앓으매, 공이 손가락을 베어 약에 타서 바쳤더니 병이 나았다.

정문을 세웠다.

 

신증 열녀 본조 이씨(李氏) : 갑사(甲士) 박원형(朴元亨)의 아내이다. 남편이 악질(惡疾)을 앓으니,

손가락을 끊어서 약에 타서 먹여 병이 나았다. 금상(今上)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대왕포월공추야(大王浦月空秋夜) : 민사평(閔思平)의 시에, "대왕포의 달은 속절 없이 가을 밤이요, 정사암

(政事巖)의 꽃은 몇 봄인고. 오늘은 두서너 집 삭막(索寞)하지만, 당시에 10만 호가 태평을 즐겼네." 하였다.

 

조룡대하강자파(釣龍臺下江自波) : 이곡(李穀)의 시에, "청구(靑丘) 정기모여 황하(黃河)에 응하니, 온왕(溫王)이

동명(東明)의 집에 태어났네. 부소산(扶蘇山) 아래로 옮겨 나라 세우니, 기이한 상서 이적(異跡)이 어찌 그리 많

았는고. 문무의 인물 문물(文物)도 성해, 틈 보아 신라 삼키려고 도모했다. 후대의 미약한 자손들이 덕을 계승 못

하고, 화려한 궁궐에 사치만 일삼았네. 견고한 성곽이 하루아침에 와해(瓦解)되니, 천척 높은 바위 낙화(落花)로

이름짓다. 공후(公侯)들의 동산에 농부 씨뿌려 밭갈고, 쓰러져 가는 비(碑) 곁에 동타(銅駝)가 묻혀 있네.

내가 와서 고적 찾고 문득 눈물 닦노라. 옛일이 모두 어부(漁父) 초동(樵童)의 노래 속에 붙였구나.

천년의 아름다운 왕기(王氣) 쓸어간 듯 없어지고, 조룡대 아래에 강물만이 출렁대네." 하였다.

 

가루무전수연비(歌樓舞殿隨煙飛)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해동(海東)의 안팎 산하(山河) 웅장도 하여, 삼방

(三方)으로 할거해 나라 세웠네. 보거(輔車) 서로 의지하는 것을 생각지 않고, 군사 몰아 나날이 싸움도 많았다.

금성탕지(金城湯池) 하루아침에 소용없으니, 성벽(城壁) 위에 꽂힌 기치(旗幟) 모두가 신라와 당 나라.

노래하던 누각 춤추던 궁전이 연기 따라 사라지니, 주옥(珠玉)이며 비취가 다시 화려함을 자랑하지 못하네.

가련하다 물고기 뱃속에 묻힌 향기로운 그 넋, 화하여 봄바람 강위에 꽃이 되었겠지. 그 당시 성충(成忠)의 계책

을 쓰지 않았으니, 아마도 한을 품고 동타(銅駝) 어루만졌으리. 만고흥망(萬古興亡)에 외로운 성만이 있는데,

태평세상 오늘날에 현가(絃歌)를 듣누나. 백마강 위에 달이 비단 같은데, 고기잡이배 점점(點點)이 연파(煙波)

따라 뜨는구나." 하였다.

 

신증 흥망이공여동타(興亡已空餘銅駝) : 최숙생(崔淑生)의 시에, "부소산 아래에 큰 강하(江河), 형승(形勝)이

모두 농부들 집에 속했네. 당시 화려한 갑제(甲第) 구름에 연했던 곳에, 해마다 밭갈이에 주옥(珠玉)들 많이

나온다네. 용호(龍虎)가 서로 싸워 삼키지를 못했는데, 지금도 풍경(風景)만은 아직도 삼라(森羅)하다. 여산궁

(驪山宮) 속의 양태진(楊太眞)이요, 임춘각(臨春閣) 위의 장려화(張麗華)라. 미색(美色)이 필경 망국의 씨가

되어. 향기로운 그 넋마저 광풍(狂風) 앞의 꽃 되었네. 한덩이 바윗돌이 또한 은감(殷鑑)이라.

흥망은 이미 사라지고 동타(銅駝)만 남았구나. 느지막이 배를 놓아 옛시를 가득 싣고, 강 건너 상녀(商女)의

노래 끝내 듣는구나. 영월대(迎月臺) 앞에 뜬 둥근 달은, 밤이 오면 예와 같이 금물결 펼치누나."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 (縣內) : 끝이 15리이다. 몽도(蒙道) :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초촌(草村) :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대방(大方) :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공동(公洞)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이다. 가좌동(加佐洞)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방초(方草)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도성 (道城) : 서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천을(淺乙) : 서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송원당(松元堂) : 서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인데,

우측으로 6개 면(面)이 모두 백마강(白馬江)의 서쪽에 있다.

 

진도 고자진(古者津) : 서쪽 5리에 있는데, 서쪽 6면으로 통한다

왕진(王津) : 북쪽 15리에 있는데, 정산(定山)으로 통한다.

 

토산 감[柹].

 

사원 부산서원(浮山書院) : 숙종(肅宗) 을해년에 세웠고, 같은 해 사액되었다.

김집(金集) : 태묘(太廟)에 보임.

이경여(李敬輿) : 자는 진부(眞夫), 호는 백강(白江)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벼슬은 영의정(領議政)이었

으며, 시호는 문정(文貞).

○ 의열사(義烈祠) : 동쪽으로 10리에 있는데, 선조(宣祖) 병자년에 세웠고, 무인(戊寅)년에 사액되었다.

 

성충(成忠) : 백제(百濟) 때 벼슬은 좌평(佐平)이었는데, 의자왕 16년에 극간(極諫)하다 하옥(下獄)되어 죽었다.

흥수(興首) : 백제 때 벼슬은 좌평(佐平)이었으며 의자왕 20년에 직간하였다.

계백(階伯) : 이름은 승(升). 백제와 동성(同姓)이었으며, 벼슬은 달솔(達率), 의자왕 20년에 전사하였다.

이존오(李存吾) : 여주(驪州)에 보임.

정택뢰(鄭澤雷) : 자는 휴길(休吉), 호는 화강(花剛),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광해주 5년에 상소하여 대의(大義)

를 밝히려다 남해(南海)로 귀양가 11년에 죽었다. 지평(持平)으로 추증되었다.

 

황일호(黃一皓) : 강화(江華)에 보임.

 

 

석성현 石城縣

 

동쪽으로는 이산현(尼山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남쪽으로는 은진현(恩津縣) 경계까지 24리이고,

서쪽으로는 임천군(林川郡) 경계까지 12리이고, 북쪽으로는 부여현(扶餘縣)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2리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진악산현(珍惡山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석산(石山)이라 고쳐 부여군의 속현으로 만들

었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하였으며, 현종(顯宗) 9년에 공주에 예속시켰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

(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이를 파하였다. 공민왕(恭愍王) 20년에 부여 감무로 이를 겸임하게 하였다가 공양왕

(恭讓王) 2년에 다시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4년에 이산(尼山)과 병합하여 이성(尼城)으로 하였다가 15년에

고다진(古多津)이 왕래하는 요충지 (要衝地)라 해서 다시 이를 나누어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진악산(珍惡山)ㆍ석산(石山)

 

성씨 본현 이(李)ㆍ노(盧)ㆍ정(鄭)ㆍ백(白)ㆍ석(石)에 있으며, 박(朴)ㆍ이(李) : 모두 속(續)이다.

 

산천 망월산(望月山) : 현 북쪽 13리에 있다. 파진산(波鎭山) : 현 서쪽 4리에 있다.

불암산(佛巖山) : 현 남쪽 8리에 있다. 백야현(白也峴) : 현 서쪽 6리에 있다. 태조봉

(太祖峯) : 현 북쪽 9리에 있다. 봉황암(鳳凰巖) : 현 동쪽 5리에 있다.

장군동(藏軍洞) : 현 북쪽 9리에 있다. 태조봉과 서로 마주 대하고 있으며, 가운데에 큰 길이 있다. 골 어귀가

곡절이 많고 좁아서 행인들이 볼 적에는 골이 없지 않은가 의심하나, 들어갈수록 그 안이 극히 광활하여 만여

명의 군병을 감출 만하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당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칠 때에, 군병을 이곳에

감추었기 때문에 장군동이라 하였다." 한다.

 

관음포(觀音浦) : 현 남문(南門) 밖에 있다. 현 북쪽 정각동(正覺洞)에서 발원하여 저포(猪浦)로 들어간다.

창포(倉浦) : 현 서쪽 10리에 있다. 웅진(熊津)의 하류다.

수탕포(水湯浦) : 현 동쪽 7리에 있다. 이산현(尼山縣) 석교천(石橋川) 물이 증산천(甑山川)과 합류하여 이

수탕포가 되었다. 저포(猪浦) : 현 남쪽 2리에 있다. 수탕포와 관음포가 합류하여 이 저포가 되어 고다진(古多津)

으로 들어간다.

 

증산천(甑山川) : 현 동쪽 6리에 있다.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부여현 원식동(元息洞)에서 나오고, 하나는

같은 고을의 북화동(北禾洞)에서 나와 수탕포로 들어간다. 고다진(古多津) : 현 서쪽 12리에 있다.

 

임천(林川) 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연지(蓮池) : 객관(客館) 앞에 있다.

 

토산 모시ㆍ쇠 : 현 남쪽에 있는 삼산리(三山里)에서 난다. 웅어[葦魚]ㆍ조기[石首魚]ㆍ뱅어[白魚]ㆍ게[蟹]ㆍ

숭어[秀魚]ㆍ붕어[鯽魚]ㆍ지황(地黃)ㆍ안식향(安息香).

 

신증 궁실 객관(客館) : 최숙생(崔淑生)의 시에, "비온 뒤 마루와 창에 찬기운 생겨나니, 나그네 회포 고적해서

홀로 난간에 의지했다. 숲을 뚫으며 희롱하는 까치 날아다니며 서로 쫓고, 섬돌에 눌린 떨기대[叢篁]는 젖어서

마르지 않았구나. 세상일 분분한 것은 원래 정해진 분수 있고, 봄 시름한 것은 까닭도 없어라.

내일 아침 예와 같이 동풍 길에는, 좋은 청산 안계(眼界)가 트이겠지." 하였다.

 

○ "황혼에 날리는 비 다시 하늘에 자욱한데, 뚝뚝 떨어지는 처마 물소리 나그네 베개 가에 들려오네.

반짝거리는 파란 등불 때로 어두우려 하고, 짙고 얕은 나그네 시름이 꼬리 물고 찾아든다. 동풍 방초(芳草) 천리

에 아득한데, 흰 머리 타향에서 한 해를 보냈네. 만번 죽을 몸 돌아와서 성군(聖君)을 만났으니, 이몸

어찌 편안히 구름연기 속에 늙으랴." 하였다.

 

학교 향교 : 현 북쪽 1리에 있다.

원우 수탕원(水湯院) : 현 동쪽 13리에 있다. 임강원(臨江院) : 현 서쪽 12리에 있다.

교량 관음포 석교(觀音浦石橋)ㆍ수탕천 석교(水湯川石橋) : 현 동쪽 13리에 있다.

저포천 석교(猪浦川石橋) : 현 남쪽 5리에 있다.

 

불우 정각사(正覺寺)ㆍ군각사(郡覺寺)ㆍ도솔암(兜率菴) : 모두 망월산(望月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북쪽 7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효자 본조 전한로(田漢老) : 나이 9세 때에 아버지가 이증(痢症)을 얻으니, 한로는 그 똥을 맛보았고, 상을 당해

서는 소금과 소채를 먹지 않고 3년 동안 여묘(廬墓)를 살았고, 13세 때에 어머니가 죽어서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특별히 사용(司勇)에 임명하였다.

 

제영 상자연심작일촌(桑柘煙深作一村) : 이맹상(李孟常)의 시에, "남자는 밭 갈고 여자는 베를 짜며 아침 저녁을

보내니, 뽕나무 숲 연기 깊은 속에 한 마을 이루었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끝이 5리이다. 증산(甑山) : 북쪽으로 처음은 4리, 끝은 7리이다.

원북(院北) :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정지(定之) : 동남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삼산(三山) :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병촌(幷村) : 위와 같다.

북면(北面) :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비당(碑堂) : 동쪽으로 끝이 5리이다.

우곤(牛昆) : 남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 현 북쪽 5리에 있으며, 산 위에는 옛터가 있다.

진도 고다진(古多津) : 서쪽 10리에 있는데, 임천(林川)으로 통한다.

 

 

연기현 燕歧縣

 

동쪽으로는 청주(淸州) 경계까지 15리, 문의현(文義縣) 경계까지 15리이고, 남쪽으로는 공주 경계까지 13리

이고, 서쪽으로는 같은 주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는 전의현(全義縣) 경계까지 2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7리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연산군(燕山郡)의 속현

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 때에 청주에 예속시켰으며, 명종(明宗)이 감무를 두었다가 뒤에 다시 목주 감무

(木州監務)로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종 6년에 다시 나누어 감무를 두었다가 14년에 전의와 합쳐서 전기

(全歧)라 고쳐 불렀고, 16년에 다시 나누어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두잉지(豆仍只)ㆍ전기 (全歧)

 

성씨 본현 전(全)ㆍ경(耿)ㆍ장(萇)ㆍ하(河)ㆍ위(魏)가 있으며, 김(金)ㆍ강(康) : 모두 속(續)이다.

왕(王) : 본관은 개경(開京)이다.

 

풍속 백성들이 농사에 부지런히 힘쓰고, 남을 고자질하는 풍습이 없다.

 

산천 성산(城山) : 현 동쪽 1리에 있는 진산이다. 원수산(元帥山) : 현 남쪽 5리에 있다.

○ 고려 충렬왕(忠烈王) 17년에 합단(哈丹)이 침범해 왔다. 왕이 구원병을 원(元) 나라에 청하니, 세조(世祖)가

평장사(平章事) 설도간(薛闍干)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돕게 하고, 왕이 한희유(韓希愈)ㆍ김흔(金忻)

등으로 하여금 3군(軍)을 거느리고 원 나라 군사와 함께 합단의 군병과 더불어 본현 북쪽 청주 경계에 위치한

정좌상(正左山)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공주 웅진까지 추격하니, 땅에 깔린 시체가 30여 리까지 연하였으며,

벤 머리와 노획한 병기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래서 세속에서 지금까지도 그 군사가 주둔하였던 곳을 원수산이라 부른다

 

○ 윤기(尹頎)의 시에, "말 멈추고 서쪽으로 연기산(燕歧山) 바라보니, 뜬 구름 아지랑이 빛이 어이 그리 푸르른고.

길 가는 나그네 탄식하면서 가다 다시 멈추되, 이곳은 지난 날 큰 싸움터라네. 적의 기병(騎兵) 올 때에 몇 만이나

되었던고, 공중을 덮은 깃발 구름이 휘날리듯. 처음에 강동(江東)으로부터 사방을 노략하니, 한번만 지나가면

폐허(廢墟)로 변하였다. 영웅임을 자랑하고 힘을 믿고 이 땅에 주둔할 제, 기세도 혁혁(赫赫)하다.

누가 감히 당하랴. 장막 안의 미인(美人)은 절세의 일색(一色)이요, 수레 안의 금과 비단 사방 것을 탈취했네.

마음대로 탐락(耽樂)해도 오히려 부족하여, 만 마리 소를 삶고 천 마리 양을 잡았네.

황금 병 백옥잔으로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노는 흥도 길었다. 천병(天兵)이 한 번 오매 모두 무너져 흩어졌

나니, 큰 수레바퀴가 버마재비[蟷螂] 누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우습도다, 구구(區區)한 무리 제 힘 요량 못했다가, 계책 이미 다하여 하루아침에 멸망하고 말았다네.

우리 임금님의 은덕과 공업(功業) 천지와 짝하여, 앉아서 온 사해(四海)에 농상(農桑)을 부성(富盛)하게 하니,

민간인은 화평하여 함께 생업(生業) 즐기고, 장사꾼과 나그네도 다시는 양식 싸 가지고 갈 필요 없네.

어리석은 선비 다행하게도 성대(聖代)를 만나서, 중천의 일월 빛을 다시 보게 되었다.

다니면서 성군(聖君)의 덕을 노래하고 성군의 수(壽)를 비노니, 원하건대 우리 임금 만세(萬歲)에 수하시고 창성

하소서." 하였다.

 

용수산(龍帥山) : 현 남쪽 3리에 있다. 정좌산(正左山) : 현 북쪽 15리에 있다.

오봉산(五峯山) : 현 북쪽 13리에 있다. 둔지산(屯智山) : 현 남쪽 5리에 있다.

동진(東津) : 현 동쪽 5리에 있다. 그 근원이 셋이 있으니, 하나는 진천현(鎭川縣) 두타산(頭陀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청주 적현(赤峴)에서 나오며, 하나는 전의현(全義縣)에서 나오는데, 남쪽으로 흘러서 공주의 금강으로

들어간다.

 

토산 자기(磁器)ㆍ질그릇[陶器]ㆍ게[蟹]

 

누정 연희루(燕喜樓) : 객관 동쪽에 있다.

○ 신개(申槩)의 시에, "10년 만에 또 다시 백척 누각에 오르니, 세정(世情)과 인사(人事)는 물처럼 급히 흐르는

구나. 홀로 어여뻐라, 원수(元帥)피 푸른 산빛만이, 만고(萬古)의 흥망에도 이렇게 남았구나." 하였다.

 

○ "술잔 입에 대자 홀연히 이 마음 너그러워짐을 깨달았더니, 거울 잡아 비쳐보니 오랫동안 객지에 산 얼굴이

도리어 부끄럽다. 다시 누각에 올라서 조망할 필요 없으니, 북으로 오매 구름과 산이 한 없으리." 하였다.

 

학교 향교 : 현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금사역 (金沙驛) : 현 남쪽 5리에 있다. 송현원(根峴院) : 현 북쪽 21리에 있다.

신원(新院) : 현 동쪽 14리에 있다. 동

지원(東津院) : 현 동쪽 5리에 있다.

불우 안선사(安禪寺)ㆍ흥천사(興泉寺) : 모두 오봉산(五峯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토흥부곡(土興部曲) : 현 북쪽 13리에 있다. 연천소(鷰川所) : 현 남쪽 10리에 있다.

성산성(城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2천 6백 71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명환 본조 허만석(許晩石) : 정사는 근검(勤儉)을 위주로 하였다. 현 북쪽 15리에 냇물을 막아 큰 방죽[堤]을

만들어 천 경(千頃) 남짓한 논에 관개하였는데, 그 방죽이 청주 지경에 있다. 처음 방죽을 쌓을 적에 만석이 몸소

이를 감독하니, 청주 사람 천명 백명이 떼를 지어 와서 불손(不遜)한 말을 하고, 만석이 걸터앉는 호상(胡床)을

꺾어 버리므로 만석이 활을 당겨 쫓으니, 청주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방죽이 이루어지자,

백성들이 그 몽리(蒙利)에 힘입어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다.

 

신증 인물 본조 김준손(金俊孫) : 과거에 오르고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연성군(燕城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제영 수입금강명(水入錦江明)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귀령(龜嶺) 넘어갈 땐 험하기도 하더니, 연기(燕岐) 땅

들어서니 길도 평탄하구나. 산은 멀리 계룡산을 연해 푸르고, 물은 금강에 들어와 밝구나. 오가는 손들이 저다지

빈번하니, 보내고 맞는 일 어느 때 끝이 나랴. 처량한 외로운 객관의 밤에, 멀리 다니는 손의 심정이 산란하다."

하였다.

 

[비고]

 

연혁 숙종 6년에 문의(文義)에 합쳐졌다 : 읍인 만설(晩說)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복간(伏諫)하였기 때문이다.

11년에 다시 두었다.

방면 현내(縣內) : 끝이 5리이다. 동일(東一) : 처음은 6리, 끝은 10리이다.

동이(東二) :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남서(南西) :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북일(北一) :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북이(北二) :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북삼(北三) 처음은 10리, 끝은 25리이다.

 

진도 동진(東津) : 동쪽 5리에 있는데, 문의(文義)ㆍ회인(懷仁)으로 통한다.

나리진(羅里津) : 남쪽 20리에 있는데, 유성(儒城)ㆍ진잠(鎭岑)에 통한다.

토산 누치[訥魚]ㆍ소가리[錦麟魚].

사원 봉암서원(鳳巖書院) : 효종 신묘년에 세웠고, 현종 을사년에 사액되었다.

한충(韓忠) : 청주(淸州)에 보임. 김장생(金長生)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 : 모두 문묘에 보임.

 

 

권 19 홍주목 洪州牧

 

동쪽으로는 대흥현(大興縣) 경계까지 25리이고, 남쪽으로는 보령현(保寧縣) 경계까지 29리이고,

서쪽으로는 결성현(結城縣) 경계까지 9리이고, 북쪽으로는 덕산현(德山縣)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운주(運州)로 성종(成宗) 14년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고,

현종(顯宗) 3년에 지주사(知州事)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공민왕(恭愍王) 7년에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고향이라 하여 목(牧)으로 승격시켰다가 17년에 지주사로 강등

되고, 20년에 다시 목으로 하였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인습하였고,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속현 신평현 (新平縣) : 주 북쪽 90리에 있으며, 면천군(沔川郡) 동쪽 마을까지 넘어 들어가 있다. 본래 백제의

사평현(沙平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혜성군(槥城郡)의 속현으로 삼았던 것을

현종(顯宗) 9년에 주로 붙였다.

 

진관 군(郡)이 다섯 : 서천(舒川)ㆍ서산(瑞山)ㆍ태안(泰安)ㆍ면천(沔川)ㆍ온양(溫陽). 현(縣)이 열넷 : 평택(平澤)ㆍ

홍산(鴻山)ㆍ덕산(德山)ㆍ청양(靑陽)ㆍ대흥(大興)ㆍ비인(庇仁)ㆍ남포(藍浦)ㆍ결성(結城)ㆍ보령(保寧)ㆍ

아산(牙山)ㆍ신창(新昌)ㆍ예산(禮山)ㆍ해미(海美)ㆍ당진(唐津).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인.

군명 운주(運州)ㆍ안평(安平)ㆍ해풍(海豐)ㆍ해흥(海興)ㆍ홍양(洪陽).

 

성씨 본주 홍(洪)ㆍ이(李)ㆍ한(韓)ㆍ송(宋)ㆍ백(白)ㆍ조(趙)가 있으며, 윤(尹)ㆍ보(甫)ㆍ노(盧) : 모두 이속[吏]

이다. 장(張)ㆍ최(崔)ㆍ만(萬) : 모두 촌(村)에 있다. 신평(新平) 이(李)ㆍ송(宋)ㆍ방(方)ㆍ호(扈). 흥양(興陽)

표(表)ㆍ조(趙)ㆍ최(崔)ㆍ이(李)ㆍ나(羅)ㆍ김(金). 고구(高丘) 이(李)ㆍ전(全)ㆍ임(任)ㆍ신(申)ㆍ노(盧). 여양

(驪陽) 박(朴)ㆍ손(孫)ㆍ나(羅)ㆍ곽(郭)이 있으며, 진(陳) : 촌에 있다. 이(李) : 본적 홍주(洪州). 오(吳) : 본적

해주(海州). 강(康)ㆍ송(宋) : 모두 서울 사람. 박(朴) : 본적은 삭주(朔州). 합덕(合德) 문(文)ㆍ김(金)이 있으며,

이(李) : 들어온 사람[續]. 용화(用話) 최(崔). 정성(政聲) 최(崔)ㆍ이(李)ㆍ백(白). 운천(雲川) 김(金)ㆍ이(李).

태산(太山) 백(白). 용천(龍泉) 배(裵) : 궁경(躬耕)에도 있다.

 

산천 월산(月山) : 주 서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사성산(巳城山) : 주 동쪽 4리에 있다.

삼존산(三尊山) : 주 서쪽 17리에 있다. 팔봉산(八峯山) : 주 북쪽 8리에 있으니, 곧 덕산현(德山縣)이다.

봉수산(鳳首山) : 주 동쪽 21리인 대흥현(大興縣) 경계에 있다.

오서산(烏栖山) : 일명 오성산(烏聖山)이라고도 한다. 주 남쪽 18리에 있으며,

또 보령(保寧)ㆍ결성(結城) 두 고을 산천 조에도 나와 있다. 오리현(吾里峴) : 주 남쪽 47리인 청양현(靑陽縣)

경계에 있다.

 

바다[海] : 신평(新平)ㆍ고구(高丘)ㆍ흥양(興陽)은 모두 바다와 접하고 있다.

금마천(金馬川) : 주 동쪽 5리에 있으니, 오서산(烏栖山)에서 발원하여 덕산현(德山縣) 신교천(新橋川)으로

들어간다.

 

여양천(驪陽川) : 여양현(驪陽縣) 남쪽에 있다. 오서산에서 발원하며, 신창현(新昌縣) 정포도(井浦渡)로 들어

간다.

원산도(元山島) : 주위는 47리이며, 목장(牧場)이 있다.

동을비도(冬乙非島) : 원산도 곁에 있으며, 주위는 1백 13리이다.

잉분도(芿盆島) : 주위가 95리이다. 사읍시도(沙邑時島) : 주위가 59리이다.

흥아음도(興兒音島) : 주위가 73리이다. 고태도(古台島) : 주위가 29리이다.

○ 이상의 섬들은 모두 본주 남해(南海) 가운데에 있다. 흥양곶(興陽串) : 즉 옛 흥양현(興陽縣)이니, 주위는 49

리이며, 목장이 있다.

 

대산곶(大山串) : 대산부곡(大山部曲)에 있다. 서산군(瑞山郡) 경계와 연해 있으며, 주위는 90리이고, 목장이

있다.

대진(大津) : 신평현(新平縣) 북쪽 1백 14리에 있다. 신증 원당산(元堂山) : 주 북쪽 40리에 있다.

삼봉산(三峯山) : 주 동쪽 23리에 있는데, 그 가운데 봉우리에 최영(崔瑩)의 사당(祠堂)이 있다.

 

장고도(杖鼓島) : 고태도(古台島)와 대치(對峙)하고 있는데, 주위는 10리이다.

사아음도(沙兒音島) : 주위가 25리이다. 외야대도(外也代島) : 주위가 30리이며, 살대[箭竹]가 난다.

어을초대도(於乙草代島) : 주위는 25리이며, 살대가 난다.

횡건도(橫巾島) : 주위는 13리이다. 이상의 섬들도 모두 본주 남해 가운데에 있다.

 

토산 청어(靑魚)ㆍ덥치[廣魚]ㆍ모래무지[鯊魚]ㆍ홍어(洪魚)ㆍ오징어[烏賊魚]ㆍ전복[鰒]ㆍ낙지[絡締]ㆍ

조개[蛤]ㆍ석굴[石花]ㆍ토굴[土花]ㆍ대하(大蝦)ㆍ중하(中蝦)ㆍ자하(紫蝦)ㆍ황소어(黃小魚)ㆍ전어(錢魚)ㆍ

삼치[麻魚]ㆍ살조개[江瑤柱]ㆍ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김(海衣)ㆍ황각(黃角)ㆍ청각(靑角)ㆍ대나무[竹]ㆍ

왕골[莞草]ㆍ쇠[鐵] : 생천포(生天浦)에서 난다. 뱅어[白魚]ㆍ준치[眞魚]ㆍ밴댕이[蘇魚]ㆍ농어[鱸魚]ㆍ

게[蟹]. 신증 살대[竹箭].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4천 9백 15척에 높이 15척이며, 그 안에 세 개의 샘이 있다.

 

봉수 흥양곶 봉수(興陽串烽燧) : 동쪽으로 보령현(保寧縣) 조침산(助侵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 결성현(結城縣) 고산(高山)과 호응한다.

 

고구성산 봉수(高丘城山烽燧) : 남쪽으로 결성현 고산과 호응하고,

서쪽으로는 서산군 도비산(都飛山)과 호응한다.

 

신증 궁실 객관(客館) : 조위(曺偉)의 객관기문[記]에, "헙성(俠城)의 송후(宋侯) 요년(遙年)이 근후(謹厚) 독실

한 재질로 일찍부터 좋은 벼슬에 올라 당세에 영명(令名)을 날렸으며, 일찍이 서원(西原)의 부관ㆍ면양 군수

(沔陽郡守)ㆍ상주 목사(尙州牧使)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혜정(惠政)을 베푼 바가 있어 지금까지도 그를 칭송

사모함이 있다. 성화(成化) 병오년에 또 홍주 목사가 되어 나오니, 홍주는 호서(湖西)의 거읍(巨邑)이다.

그 땅이 기름지고 넓으며, 그 백성이 번성하고 많아서 난치(難治)의 고을로 일컬어 왔다. 그러나 송후는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고 친근하게 접하는 정책을 써서 권유나 지시 등의 조목을 간략히 하고, 번쇄(煩𤨏)한 정령(政令)

과 가세(苛細)한 것을 털어 없애니, 온 경내가 안온하여 백성들이 그의 임사(任使)를 즐거워하였다.

하루는 뒷 청사에 앉아 문부(文簿)를 고찰하고는 통판(通判) 조후(曺侯) 말손(末孫)에게 말하기를, '해우(廨宇)

는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며, 대청(大廳)은 곧 삭망(朔望)으로 조회 받는 정아(正衙)인데 지세가 낮아서 염찰의

위엄이 없고, 제도가 협소하여 예(禮)를 행할 곳이 없는데다가 세운 연대가 오래되어 장차 꺾이고 무너질 것이니

어찌 이를 고쳐 세워 오랫동안 퇴락한 것을 다시 일으키지 않겠는가.' 하니, 통판이 말하기를, '삼가 명에 따르겠

습니다.' 하여 합의를 본지라 이에 재목을 모으고 돌을 캐는 데 노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기유년 봄에 그 낙성을

고하게 되니, 지난날 낮았던 것이 높아지고, 좁았던 것이 넓어졌다.

그 모퉁이와 뜰을 높이고 규모와 제도를 확장하고는 흰 회로 바르고 단청(丹靑)으로 채색하니, 높고 크고 또 미려

하여 한 고을의 미관(美觀)을 이루었다.

송후가 서울로 편지를 띄워 내 말로 기문[記]을 삼고자 하므로 나는 답하기를, '송후의 빛나는 성문(聲聞)이 일찍

부터 조정 위에 전파되었고, 이어 금방(金榜)에 이름이 올랐으니, 마땅히 바로 요로(要路)에 올라서 대각(臺閣)에

출입할 것인데도, 늙으신 어버이가 있는 까닭으로 해서 그를 봉양코자 누차 지방관으로의 전보(轉補)를 청하여

여러 주군(州郡)으로 배회하면서 깨끗하고 기름진 봉양을 다하였으니, 이는 송후의 지극한 성효(誠孝)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요, 캐고 들추어 내지 아니하여도 백성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고, 치고 때리지 않아도 아전들이 두려

워하고 심복하여 촌간에서는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없으며, 온 고을의 경내가 함포고복(含哺鼓腹)의 낙이 있

었으니, 이는 송후의 행정의 공적이 열읍(列邑)과 다른 점이다.' 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 효성과 고을을 다스리는 재능은 진실로 사책(史策)에 기록하여 전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

으니 이제 이 한 토목(土木)의 공사와 한 청사(廳舍)의 영선(營繕)이 어찌 송후를 위하여 칭찬하기에 충분하겠는

가. 비록 그렇긴 하나 내 여기서 느낀 바 있으니, 요즈음 각 주군을 살펴보건대 근년 이래로 거의 모두 일신하게

중수하여 기울고 무너진 것들이 열에 두서넛도 없을 뿐더러 그 제작한 것이 모두 굉장하고 화려하여 옛것의 갑절

이나 되었으니, 어찌 옛날의 장인(匠人) 석공(石工)들은 모두 법도에 어두웠고,

지금의 목공[梓人]들은 모두 반영(般郢)의 교묘한 수법이 있어서 그러하겠는가.

이는 실로 조정이 청명(淸明)하고, 중외가 무사(無事)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고 물산(物産)이 은성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력(事力)에 여유가 있게 된 까닭이요, 또 옛날에 경영한 구조란 겨우 병란이 없는 틈을 타서 하였기 때문에,

그 초라한 창설(創設)이 저와 같았으나, 오늘날에 제작하는 자는 종용하고 한가하여 그 역량을 다할 수 있기 때문

에 그 굉장하고 화려함이 이와 같은 것이니,

이 어찌 세도(世道)의 홍체(興替)에 관계되어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한 관해(官廨)의 영선이 송후에게는 비록 증익(增益)도 손실도 없을 것이지만 이로써 위로는 국가의

승평(昇平)을 볼 수 있을 것이요, 그 다음으로는 또한 수령의 현능(賢能)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이를 어찌 적게

평가하랴. 뒤에 오는 사람들도 이 제작한 바를 목도(目覩)하고 송후의 어짊과 오늘의 융성을 상상할 것이니,

송후의 이 공적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나는 송후께는 자제(子弟)들과 같은 반열이다.

그런데 글을 내리심이 두 번에 이른지라, 의리로 보아 사양할 길이 없어 우선 이것을 써서 보내드리는 바이다."

하였다.

 

누정 계풍루(繫風樓) : 객관 동쪽에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구름은 가벼워지고 바람은 급히 불어 가을철 다가오는데, 먼 손 누정에 올라 보니

마음 갑절 어둡구나. 물 많은 고장에선 한창 농어회 맛나는 계절인데, 고향은 멀리 기러기 소식 전하여 주기 바

라네. 천 겹 푸른 숲은 높고 낮게 나누어졌고, 한 줄기 푸른 산이 앞뒤를 싸안았구나. 행장 꾸려 돌아가려 해도

가지 못하는 이 몸, 그러므로 장계응(張季鷹)의 현명한 데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였다.

신증 감사(監司) 조위(曺偉)가 영훈루(迎薰樓)로 이름을 고쳤다.

 

학교 향교 : 주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세천역(世川驛) : 주 동쪽 3리에 있다. 신증 지금은 주 남쪽 15리로 옮겼다.

용곡역(龍谷驛) : 주 남쪽 45리에 있다. 여양원(驪陽院) : 여양현에 있다. 인후원(仁厚院) : 주 동쪽 23리에 있다.

홍천원 (弘天院) : 주 북쪽 11리에 있다.

 

불우 청송사(靑松寺)ㆍ용봉사(龍鳳寺) : 모두 팔봉산(八鳳山)에 있다.

삼존사(三尊寺) : 삼존산(三尊山)에 있다.

영봉사(靈鳳寺) : 팔봉산(八峯山)에 있다. 청광사(靑光寺) : 청광산(靑光山)에 있다. 법화사(法華寺)ㆍ

서방사(西方寺) : 모두 월산(月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월산에 있다. 여단 : 주 북쪽에 있다.

 

고적 여양폐현(驪陽廢縣) : 주 남쪽 37리에 있다. 여(驪) 자는 여(黎) 자로도 쓴다.

본래 백제의 사시량현(沙尸良縣)인데 혹은 사라현(沙羅縣)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신량(新良)으로 고쳐

결성군(潔城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현종(顯宗) 9

년에 본주에 붙였다.

 

고구폐현(高丘廢縣) : 주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우견현(牛見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목우(目牛)로 고쳐

이산군(伊山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본주에 붙였다.

 

흥양폐현(興陽廢縣) : 주 남쪽 50리에 있으며, 옛 이름은 원군(遠軍)이었던 것을 고려 현종 9년에 지금의 이름

으로 고쳐 본주에 붙였다.

 

합덕폐현(合德廢縣) : 주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 덕풍현(德豐顯)에 붙여 부곡(部曲)으로 삼았던 것을, 고려

충렬왕(忠烈王) 24년에 이 고을 출신인 환자(宦者) 황석량(黃石良)이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 은총을 받은 바

있어 현(縣)으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본주에 붙었다.

 

용천부곡(龍泉部曲) : 주 남쪽 30리에 있다. 지금은 용천리(湧川里)라 일컫는다.

대산부곡(大山部曲) : 주 서쪽 90리에 있다. 서산군(瑞山郡)의 동북쪽 마을까지 넘어 들어갔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궁경부곡(躬耕部曲) : 주 남쪽 20리에 있다. 화성부곡(化城部曲) : 주 남쪽 50리에 있다.

 

운천향(雲川鄕) : 주 서쪽 40리에 있다. 해미현(海美縣) 북쪽 마을과 서산군의 동북쪽 마을까지 넘어 들어갔다.

정성향(政聲鄕) : 주 남쪽 32리에 있다. 용화향(用和鄕) : 주 남쪽 35리에 있다.

흥고향(興古鄕) : 주 남쪽 52리에 있다. 옥사금소(玉賜金所) : 주 남쪽 27리에 있다. 그 동쪽에 우물이 있는데,

옥사정 (玉賜井)이라 부른다. 상전소(上田所) : 주 남쪽 74리에 있다.

청양현(靑陽縣) 남쪽 마을까지 넘어 들어갔다. 고이산소(高伊山所) : 고구현(高丘縣) 서쪽 48리에 있다.

명해소(明海所) : 신평현(新平縣) 북쪽 1백 14리에 있다. 오사소(烏史所) : 주 남쪽 34리에 있다.

마여소(馬餘所) : 주 북쪽 15리에 있다. 미륵사(彌勒寺) : 구지(舊址)가 주 동쪽 1리에 있는데, 돌담이 남아 있다.

여양산성(驪陽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는 6천 40척이다.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월산성(月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는 9천 7백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명환 고려 이함(李涵) : 이규보(李奎報)의 아들이다. 이행검(李行儉) : 모두 지주사(知州事)이다.

 

본조 안등(安騰)ㆍ신유정(辛有定)ㆍ유사눌(柳思訥)ㆍ전흥(田興)ㆍ김예몽(金禮蒙)ㆍ정자제(鄭自濟) : 모두 본주

목사가 되었다.

조석문(曺錫文) : 안산군사(安山郡事)에서 본주의 목사가 되었다. 김구(金鉤) : 판관(判官)이 되었다.

이명신(李明晨) : 목사가 되었다. 신증 이의무(李宜茂) : 목사가 되어 치적이 본도의 최상으로 표리(表裏 옷감 한

벌)의 하사를 받았다. 안요경(安堯卿) : 목사가 되었다.

 

인물 고려 홍규(洪規) : 태조(太祖)를 섬겨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진준(陳俊) : 여양(驪陽) 사람으로 용력이 있어 군졸의 대열에서 발탁되어 공로를 쌓아서 위장군(衛將軍)이

되었다. 명종(明宗) 때에 여러 번 벼슬을 전전하여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이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승진되었다. 경계(庚癸)의 화란 때에 문신(文臣)들의 집이 진준에게 힘입어 온전히 살아난 자가 많아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음덕이 있어 그 뒤가 반드시 창성할 것이다." 하였다.

 

진식(陳湜) : 진준(陳俊)의 손자로 과거에 올라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벼슬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다.

진화(陳澕) : 진식(陳湜)의 아우로, 신종(神宗) 때에 과거에 올라 한림원(翰林院)에 뽑혀 들어갔고, 우사간(右司

諫) 지제고(知制誥)로 지공주사(知公州事)로 나왔다가 죽었다. 시사(詩詞)를 잘하여 그 말이 맑고 미려하였으며,

젊어서는 이규보(李奎報)와 같이 이름을 떨쳤다.

 

본조 이첨(李詹) :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장원으로 과거에 뽑혀 세 번 전전하여 정언(正言)이 되었다.

일찍이 아홉 가지 규간(規諫)의 말을 올리기를, "첫째 덕을 길러야 하며, 둘째 일을 멀리 생각하여야 하며, 셋째

허물을 고쳐야 하며, 넷째 근본에 힘써야 하며, 다섯째 자기 몸을 겸허(謙虛)하게 가져야 하며, 여섯째 은혜를

베풀어야 하며, 일곱째 같은 유(類)는 유대로 나란히 포열(布列)하여야 하며, 여덟째 정사를 밝게 하여야 하며,

아홉째 백성의 업(業)을 보호 육성하여야 한다." 하였다. 누차 승진하여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는데, 어떤 일로

말미암아 영산(靈山)의 계성(桂城)으로 귀양갔다가 얼마 안 되어 석방되었다. 본조(조선조)에 들어와서 전서(典

書), 집현전 직학사(集賢殿直學士),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등을 역임하고 죽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며 그의 저술인 《쌍매당집(雙梅堂集)》이 세상에 간포(刊布)되어 있다.

 

이서(李舒) :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효행이 있었다.

 

효자 본조 복한(卜●) : 효행으로 정문을 세웠으며,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한원발(韓元發) : 지방 아전이다.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웠다.

 

제영 파명해상성(波明海上城) : 이색(李穡)의 시에, "산중 길은 구름 깔려 어두운데, 바다 위에 임한 성은 물결도

맑다." 하였다. 비예연운유고성(睥睨連雲有古城)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높은 평원 바둑판처럼 그 형세 펀펀

한데, 비예가 구름과 연한 옛성이 있구나. 아득히 포열해 있는 바다 위 산에 날이 저물어 가고, 수북수북하게

올라온 벼 기장에는 비가 처음 개었다. 밭 사이로 들밥 이고 가는 촌아낙네 어린아이 데리고 가고, 언덕 위에

밭가는 어미소엔 송아지 따라다닌다. 동네 숲에서 모여 산신제는 끝나고 사람들은 모두 취했는데, 흔들거리고

돌아가는 길에는 더운 바람도 맑다." 하였다.

 

[비고]

 

연혁 현종조에 홍양현(洪陽縣)으로 강등시켰다가 고쳐 다시 승격시켰다. 순조(純祖) 조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주남(州南) : 끝이 10리. 주북(州北) : 끝이 10리. 성지(城枝) :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도사(島史) : 본래 오사(烏史)였는데 서남쪽에 있으며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번천(蕃川)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용천(湧川) : 본래는 용천부곡(龍泉部曲)으로, 서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

고남(高南)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

고북(高北) : 서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 위의 두 면(面)은 고구(高邱)의 옛 현(縣)이다.

운천(雲川) : 본래는 운천향(雲川鄕)으로, 북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60리인데 건너서 서산(瑞山) 동해 미북

(美北)에 있다.

 

합남(合南) : 동북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50리. 합북(合北) : 동북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60리. 위 두 면은

합덕(合德)의 옛 현(縣)이다.

현내(縣內) : 동북쪽으로 처음은 80리, 끝은 1백리. 신남(新南) : 동북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70리.

신북(新北) : 동북쪽으로 1백리, 끝은 1백 10리. 위 세 면은 신평(新平)의 옛 현(縣)이다.

송지곡(松枝谷) :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 홍안송(洪安松)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유곡(酉谷) :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5리.

궁경(躬耕) : 본래는 궁경부곡(躬耕部曲)인데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얼방(乻方) : 남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50리. 금동(金洞) : 동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홍천(弘天) :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치사(雉寺)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대감개(大甘介) : 위와 같음. 평리(坪里)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우파(右坡) : 남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65리.

화성(化城) : 본래는 화성(化城)의 부곡(部曲)인데 남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60리.

흥구향(興口香) : 본래 흥구(興口)의 옛 고을이었는데, 처음과 끝이 모두 위와 같다.

상전(上田) : 남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70리.

 

성지 읍성(邑城) : 옛 주류성(周留城)인데 둘레가 5천 8백 50척이고 샘이 셋, 문이 네 개, 곡성(曲城)이 여덟 개다.

월산고성(月山古城) : 고려 태조(太祖) 11년에 운주(運州)와 옥산(玉山)에 성을 쌓고 수졸(戍卒)을 두었는데 둘레

가 9천 7백척이요, 우물이 하나이다.

 

여양고성(驪陽古城) : 둘레가 6천 40척, 샘이 둘. 고구고성(高邱古城) : 지금 성산(城山)이라 하는데 옛터가 있다.

흥양고성(興陽古城) : 옛터가 있다. 합덕고성(合德古城) : 옛터가 있다.

 

영아 전영(前營) : 인조(仁祖) 조에 세웠다. ○ 전영장(前營長) 한 사람.

○ 속읍으로 홍주(洪州)ㆍ서천(舒川)ㆍ임천(林川)ㆍ보령(保寧)ㆍ한산(韓山)ㆍ청양(靑陽)ㆍ정산(定山)ㆍ

홍산(鴻山)ㆍ비인(庇仁)ㆍ남포(藍浦).

 

사원 노은서원(魯恩書院) : 숙종 병진년에 세워졌고, 임신년에 사액되었다.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 : 모두 과천

(果川)에 보임.

성승(成勝) : 성삼문의 아버지로 세조 병자년에 대신들과 같이 순직하였다. 벼슬은 도총관(都摠管)이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별사(別祠)에 배향하였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서천군 舒川郡

 

동쪽으로는 한산군(韓山郡) 경계까지 11리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옥구현(沃溝縣) 경계까지 25리이고,

서쪽으로는 비인현(庇仁縣) 경계까지 9리이며, 북쪽으로는 홍산현(鴻山縣) 경계까지 4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설림군(舌林郡) : 혹은 남양(南陽)이라고도 하였다. 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서림군(西林郡)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는 가림현(嘉林縣)에 붙였으며, 뒤에 다시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숙왕(忠肅王) 원년에 고을 사람인 이언충(李彦忠)이 충선왕(忠宣王)에게 공로가 있었다 하여

지서주사(知西州事)로 승격하였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군으로 만들었다.

관원 본군수ㆍ훈도 : 각 1인.

군명 설림(舌林)ㆍ서림(西林)ㆍ서주(西州)ㆍ남양(南陽).

 

성씨 본군 나(羅)ㆍ이(李)ㆍ윤(尹)이 있으며, 배(裵)ㆍ백(白) : 모두 촌(村)에 있다. 임술(林述) 하(何).

 

산천 오산(烏山) : 군(郡) 성안에 있으며, 군의 진산(鎭山)이다. 운은산(雲銀山) : 군 남쪽 7리에 있다.

영취산(靈鷲山) : 군 남쪽 6리에 있다. 천방산(千方山) : 군 동쪽 21리에 있다.

대수산(大藪山) : 군 동북쪽 20리에 있다. 금복현(金福峴) : 군 북쪽 20리에 있다.

저령(猪嶺) : 군 북쪽 40리에 있다. 바다 : 군 서쪽 15리에 있다. 아포(芽浦) : 군 남쪽 10리에 있다.

한산군(韓山郡) 산천 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길산포(吉山浦) : 군 동쪽 13리에 있다. 저령(猪嶺)에서 발원하여

진포(鎭浦)로 들어간다.

 

장교천(長橋川) : 군 남쪽 4리에 있다. 비인현의 부소현(扶蘇峴)에서 발원하여 같은 현의 장배곶(長背串)으로

들어간다.

용당진(龍堂津) : 군 남쪽 24리인 전라도 옥구현과의 경계에 있다. 개야소도(開也召島) : 주위가 13리이다.

연도(煙島) : 모두 군 서쪽 바다 가운데 있다. 신지(新池) : 성 남쪽 8리에 있다.

동지(東池)ㆍ서지(西池) : 모두 성 동쪽 5리에 있다.

진포(鎭浦) : 군 남쪽 26리에 있는 해포(海浦)로서 임천(林川) 고다진(古多津)으로부터 서천포(舒川浦)까지를

통칭 진포라 이르는데, 그 사이의 모든 진포(津浦)는 모두 진포(鎭浦)의 건너는 곳이다.

 

토산 대나무ㆍ대살[竹箭] : 개야소도(開也召島)에서 난다. 모시[苧]ㆍ감[柹]ㆍ조개[蛤]ㆍ석굴[石花]ㆍ

홍어(洪魚)ㆍ모래무지[鯊魚]ㆍ숭어[秀魚]ㆍ오징어[烏賊魚]ㆍ갈치[刀魚]ㆍ고기부레풀[魚鰾]ㆍ조기[石首魚]ㆍ

웅어[葦魚]ㆍ전어(錢魚)ㆍ민어(民魚)ㆍ준치[眞魚]ㆍ삼치[麻魚]ㆍ농어[鱸魚]ㆍ청어(靑魚)ㆍ전복[鰒]ㆍ

홍합(紅蛤)ㆍ토굴[土花]ㆍ김[海衣]ㆍ낙지[絡締]ㆍ황각[黃角]ㆍ안식향(安息香)ㆍ대하(大蝦).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5백 25척에 높이는 10척이며, 그 안에 다섯 개의 샘과 두 개의 못이

있다.

관방 서천포영(舒川浦營) : 군 남쪽 26리에 있다. ○ 수군 만호(水軍萬戶) 1인이 있다.

○ 고려 때에는 장암진(長巖鎭)이라 일컬었는데, 평장사(平章事) 두영철(杜英哲)이 일찍이 이 포에 유배(流配)

되어 어느 한 노인과 서로 좋아하였는데 소환됨에 미쳐서, 그 노인이 구차하게 진취하지 말 것을 당부하니 영철

이 이를 쾌락하였다. 뒤에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러서 과연 또 죄망에 빠져 좌천되었다.

노인이 노래를 지어 그를 기롱한 것이 있어 악부(樂府)에 장암곡(長巖曲)이 전해 오는데 이제현(李齊賢)이 시를

지어 그 뜻을 풀어 말하기를, "구속된 참새 네가 무엇을 하랴. 그물에 걸린 주둥이 누런 어린 새끼. 눈 구멍을

애당초에 어느 곳에 팔았던고. 가련하다, 그물에 걸려든 새끼의 어리석음이여." 하였다.

 

신증 정덕(正德) 갑술년에 비로소 돌로 성을 쌓았는데 주위는 1천 3백 11척이며, 높이는 9척이다.

봉수 운은산 봉수(雲銀山烽燧) : 남쪽으로는 전라도 옥구현(沃溝縣) 점방산(占方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비인현(庇仁縣) 칠지산(漆枝山)과 호응한다.

 

신증 궁실 동헌(東軒) : 신용개(申用漑)의 시에, "여초(麗譙)같이 화려한 누각 숲 끝으로 솟았는데, 깃발 바람에

나부끼니 바닷가 날씨 차구나. 북극의 하늘 높아서 멀리 있는 마음 간절하고, 남쪽 바다 파도 넓어 조망(眺望)도

장하여라. 그윽한 회포 속에 가득할 땐 시 읊어 소견(消遣)하고, 세상의 연고 사람을 괴롭히니 술 마시고 풀어

낸다. 홀(笏) 잡고 아침에 시원한 기운 맞으니, 다시는 의외의 일로 괴롭게 구는 것 없구나." 하였다.

 

누정 백사정(白沙亭) : 군 서남쪽 13리에 있다.

망해정(望海亭) : 객관(客館) 북쪽에 있는데 군수 최치(崔淄)가 세운 것이다.

 

학교 향교 : 군 남쪽 10리에 있다.

역원 두곡역(豆谷驛) : 군 남쪽 11리에 있다. 객망원(客望院) : 군 서쪽 8리에 있다.

길산원(吉山院) : 군 동쪽 9리에 있다.

신증 교량 장교(長橋) : 군 서쪽 5리에 있다.

 

불우 지원사(祗園寺) :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대둔사(大芚寺)ㆍ망덕사(望德寺)ㆍ천방사(千方寺) :

모두 천방산(千方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옛 읍성(邑城) 안에 있다.

여단 : 군 북쪽에 있다.

용당진사(龍堂津祠) : 군 남쪽 24리에 있다. 고려 때에는 웅진명소(熊津溟所)로 되어 향과 축문을 내렸는데,

지금은 주에서 치제(致祭)한다.

 

고적 고읍성(古邑城) : 영취산 산마루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5백 45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세종(世宗) 때에 그 지대가 외지고 막혔다 하여 지금의 읍터로 옮긴 것인데, 그 아래에는 또 고읍(古邑)의 터가

있다. 문조향(文照鄕) : 군 동쪽 21리에 있다.

 

임술소(林述所) : 군 북쪽 14리에 있는데, 지금은 장항촌(獐項村)이라 일컫는다.

 

신증 효자 본조 김처온(金處溫) : 어머니가 나쁜 병을 얻자 손가락을 끊어 약에 넣어 바치니 병이 즉시 나았다.

금상(今上)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서림석보입운단(西林石堡入雲端) : 이색(李穡)의 시에, "서쪽 숲 돌 성이 구름 속에 잠겼는데,

정자나무 바람을 머금으니 여름도 차구나. 반겨 맞아주는 주인의 우스운 이야기들 들으며,

머리 흰 외로운 나그네 마음가는 대로 유람한다. 높은 하늘 낮은 땅 사이에 붙은 이 형해(形骸)가 참 작구나.

바다는 넓고 산은 머니 그 기상 너그럽다. 가장 한스러운 것은 내 이미 쇠하고 필력 없어서, 한만스럽게 저 낙하

고목(落霞孤鶩)의 옛글만 읊으며 난간에 의지하고 있는 것일세." 하였다.

 

기란환각양의관(倚欄還覺兩儀寬)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책상에 의지해 있으니 삼복(三伏)의 더위를 모르

겠고, 난간에 의지해 바라보니 새삼 천지의 넓은 것을 깨닫겠다." 하였다.

 

저엽번풍취량제(苧葉飜風翠浪齊)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산 트이고 들 넓으니 푸른 하늘 나지막한데,

말 풀어 놓고 돌아오니 낮 닭의 우는 소리 들린다. 맑은 시냇물 흰 비단 펼쳐 놓은 듯 멀리 별포(別浦)로 통해

흐르고, 밭두둑 수놓은 듯 착잡하여 긴 방죽에 둘렀구나. 대나무 숲에 비내리니 푸른 연기 침침하고, 모시 잎새

바람에 뒤집히니 검푸른 물결 일어난다. 태평세월의 참된 기상을 여기서 보았노라. 저 촌 늙은이 산신제 지낸

뒤에 취하여 붙들고 가는 모습에서." 하였다.

 

[비고]

 

방면 관곡(關谷) : 동쪽으로 끝이 3리. 동부(東部) : 처음은 7리, 끝은 15리. 서부(西部) : 처음은 10리, 끝은 30리.

남부(南部) : 처음은 10리, 끝은 30리. 마길(馬吉) :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문장(文長) :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장항(獐項) : 서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

판산(板山)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초처(草處)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두산동(豆山洞) : 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진도 용당진(龍堂津) : 남쪽으로 25리에 있다. 옛날에는 장암진(長巖津)이라 칭하였는데, 옥구현(沃溝縣)으로

통한다. 진의 서남쪽으로 옛 군산진(群山鎭)까지는 1백 리, 남쪽으로 군산진까지는 10리, 서북쪽으로 마량진

(馬梁鎭)까지는 30리인데, 이상은 모두 수로(水路)이다.

앞에는 가야소도(加耶所島)와 전라도의 오죽도(烏竹島)가 있다.

사원 건암서원(建巖書院) : 현종 임인년에 세웠고, 숙종 계사년에 사액되었다.

이산보(李山甫) : 자는 중봉(仲峯) 호는 명곡(鳴谷)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이며, 영의정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조헌(趙憲) : 금포(金浦)에 보임. 조수륜(趙水倫) : 자는 경지(景止), 호는 풍옥헌(風玉軒)이며, 본관은 한양(漢陽)

이다. 광해주 임자년에 화를 입었는데, 벼슬은 호조 좌랑(戶曹佐郞)이었으며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서산군 瑞山郡

 

동쪽으로는 해미현(海美縣) 경계까지 17리이고, 남쪽으로는 요아량(要兒梁)까지 1백 42리이고,

서쪽으로는 태안군(泰安郡) 경계까지 24리이고, 북쪽으로는 대산포(大山浦)까지 57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기군(基郡)이었는데, 신라에서 부성(富城)으로 고쳤고, 고려 인종(仁宗) 때에는 현령(縣令)

을 두었으며, 명종(明宗) 12년에 고을 사람이 영위(令尉)를 협박하고 가두었으므로 유사(有司)가 아뢰어 관호(官

號)를 제거하였다가, 충렬왕(忠烈王) 10년에 읍 사람 정인경(鄭仁卿)이 공로가 있었던 까닭으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34년에는 다시 서주목(瑞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예(例)

에 의하여 서령부(瑞寧府)로 강등되고, 뒤에 또 지서주사(知瑞州事)로 강등한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한 것이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인.

군명 기군(基郡)ㆍ부성(富城)ㆍ서령(瑞寧)ㆍ서주(瑞州).

 

성씨 본군 유(柳)ㆍ송(宋)ㆍ전(全)ㆍ두(杜)ㆍ문(文)ㆍ정(鄭)이 있으며, 방(房) : 촌에 있다. 박(朴) : 속(續).

지곡(地谷) 안(安)ㆍ이(李)ㆍ문(文)이 있으며, 박(朴) : 촌에 있다. 인정(仁政)ㆍ이(李). 정소(井所) 나(羅).

광지(廣地) 염(廉). 안면(安眠) 유(柳). 화변(禾邊) 유(柳)ㆍ송(宋). 성연(聖淵) 김(金)ㆍ하(河).

 

형승 산세가 둘러 싸고 : 신숙주(申叔舟)의 시. 바다가 삼면을 둘러 있다. : 박원형(朴元亨)의 시.

산천 성왕산(聖旺山) : 군 북쪽 8리에 있다. 상왕산(象王山) : 군 동쪽 30리인 해미현(海美縣)과의 경계에 있다.

 

팔봉산(八峯山) : 군 북쪽 해안 15리에 있다. 도비산(都飛山) : 군 남쪽 18리에 있다.

 

바다 : 군 서ㆍ남ㆍ북 삼면이 모두 바다이다.

용유천(龍遊川) : 군 동쪽 18리에 있다.

판교천(板橋川) : 군 남쪽 6리에 있다. 성왕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흥인교천(興仁橋川) : 군 서쪽 24리에 있다. 팔봉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안면곶(安眠串) : 옛날의 안면소(安眠所)이다. 군 남쪽 1백 리에 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위포곶(葦浦串) : 옛날의 위포소(葦浦所)이다. 군 남쪽 15리에 있다.

율곶(栗串) : 군 남쪽 10리에 있다. 간월도(看月島) : 군 남쪽 35리에 있다.

신증 백사장(白沙場) : 군 북쪽 70리에 있다. 주위가 10여 리이며, 가운데에 못이 있다.

 

토산 모시[苧]ㆍ쇠[鐵] : 군 남쪽 마산리(馬山里)에서 난다. 석굴[石花]ㆍ청어(靑魚)ㆍ숭어[秀魚]ㆍ도루묵

[銀口魚]ㆍ농어[鱸魚]ㆍ오징어[烏賊魚]ㆍ전복[鰒]ㆍ조기[石首魚]ㆍ물고기부레[魚鰾]ㆍ모래무지[鯊魚]ㆍ

대하[大蝦]ㆍ자하[紫蝦]ㆍ조개[蛤]ㆍ낙지[絡締]ㆍ삼치[麻魚]ㆍ전어[錢魚]ㆍ해삼[海參]ㆍ조개살[江瑤柱]ㆍ

백화사(白花蛇)ㆍ준치[眞魚]ㆍ붕어[鯽魚]ㆍ게[蟹]ㆍ소금[鹽]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7백 10척에 높이가 12척이며, 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시냇물이

성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관방 파지도영(波知島營) : 군 북쪽 35리에 있다.

○ 수군 만호(水軍萬戶) 1인이 있다.

 

신증 정덕(正德) 병자년에 비로소 돌로 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1천 3백 37척에 높이는 11척이며, 안에 한 우물이

있다. 고파지도수(古波知島戍) : 군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파지도 만호가 군사를 나누어서 이를 지키고

있다. 요아량수(要兒梁戍) : 군 남쪽 1백 42리에 있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군사를 나누어서 이를 지킨다.

 

봉수 북산 봉수(北山烽燧) : 동쪽으로는 해미현(海美縣) 안국산(安國山)과 호응하고, 서쪽으로는 태안군(泰安郡)

백화산(白華山)과 호응한다.

도비산 봉수(都飛山烽燧) : 동쪽으로는 홍주(洪州) 고구현(高丘縣)의 성산(城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태안군

백화산과 호응한다.

 

신증 궁실 객관 : 조위(曺偉)의 시에, "훈훈한 바람 불어 깊숙한 궁실에 야당화(野棠花) 피었는데, 아전들 나가고

텅 비인 관아 뜰엔 돋아오른 풀빛이 이끼처럼 진하다. 위포(葦浦)의 조수 소리 바다로 다 돌아가서 고요하고,

상산(象山)의 구름기운 하늘과 맞닿아 오는구나. 사암(思菴 : 고려의 유숙(柳淑))이 살던 옛집은 어느 곳인지 찾

을 길 없고, 학사(學士) 신하 최치원도 신선되어 간 뒤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고적(古蹟) 찾아드니 사람의

감개만 더하게 할 뿐, 한 술잔에 취하여 우레같이 코나 골거나." 하였다.

 

누정 청심당(淸心堂) : 객관 동쪽에 있으며, 연못이 있다. 군수 예충년(芮忠年)이 세운 것이다.

 

학교 향교 : 군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풍전역(豐田驛) : 군 서쪽 6리에 있다. 옛날 왜구(倭寇)로 인하여 없어졌던 것을 공정왕(恭靖王) 경진년에

다시 설치하고 성여미현(省餘美縣)의 득웅역(得熊驛)에 붙였다.

 

냉정원(冷井院) : 군 남쪽 15리에 있다. 저지원(猪旨院) : 군 남쪽 5리에 있다.

망현원(芒峴院) : 군 서쪽 16리에 있다.

교량 판교(板橋)ㆍ금강교(金剛橋) : 모두 용유천(龍遊川)에 있다. 흥인교(興仁橋).

 

불우 개심사(開心寺)ㆍ문수사(文殊寺)ㆍ보현사(普賢寺) : 모두 상왕산에 있다.

운암사(雲巖寺) : 팔봉산에 있다. 보원사(普願寺) : 상왕산에 있다. 부석사(浮石寺) : 도비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북산성(北山城) 안에 있다. 여단 :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지곡폐현(地谷廢縣) : 본래 백제의 지육현(知六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지육(地育)이라 고쳐

부성군(富城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본군에 붙였던 것을,

본조에서 인습한 것이다. 군 북쪽 30리에 있는데 옛날의 돌로 쌓은 성이 있으며, 그 주위는 1천 27척이다.

 

인정부곡(仁政部曲) : 군 남쪽 13리에 있다. 정소부곡(井所部曲) : 군 북쪽 10리에 있다.

성연부곡(聖淵部曲) : 군 북쪽 15리에 있다. 광지향(廣地鄕) : 군 남쪽 93리에 있다.

안면소(安眠所) : 모두 태안군(泰安郡) 남쪽 마을까지 넘어 들어가 있다.

화변소(禾邊所) : 군 남쪽 30리에 있다. 위포소(葦浦所) : 군 남쪽 15리에 있다.

 

조립부곡(助立部曲) : 군 북쪽 53리에 있다. 지금은 대산곶(大山串)이라 일컫는다.

북산성(北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는 1천 6백 80척이며, 안에 세 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명환 신라 최치원(崔致遠) : 진성왕(眞聖王) 때에 태수(太守)가 되어 왕이 불러 당 나라에 가는 하정사(賀正使)로

삼았으나, 도적들이 한창 출몰하고 길이 막혀 가지 않았다.

 

고려 김주정(金周鼎) : 음관(蔭官)으로 등용되었다. 당시 몽고 군사가 많이 침범해 왔었는데 조치를 적당히 하여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나타나 온 고을에서 그를 칭송하였다.

 

인물 고려 정인경(鄭仁卿) : 고종(高宗) 말기에 몽고 군사가 직산(稷山)ㆍ신창(新昌) 두 고을에 와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인경이 밤에 이를 습격하여 공로가 있어 장교로 보충되었고, 충렬왈 때에는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

都指揮使)에 제수되어 벼슬이 중찬(中贊)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역관(譯官)으로 이름이 알려져서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유숙(柳淑) : 충혜왕(忠惠王) 때에 과거에 올랐다. 공민왕(恭愍王)을 따라 원 나라 조정으로 들어갔을 때 충목왕

(忠穆王)이 즉위하자, 공민왕의 요좌관(僚佐官)들이 대부분 그 절개를 지키지 않았으나 유숙만은 홀로 변하지

않았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대언(代言)에 임명되고, 북경에서의 시종한 공로를 기록하여 1등으로 뽑혀 판도 판서

(版圖判書)ㆍ추밀원 직학사(直學士) 등을 역임하고, 또 기철(奇轍)을 벤 공이 채록되어 안사공신(安社功臣)의

철권(鐵券)을 하사받았다. 홍건적(紅巾賊)의 난리에 유숙이 계획을 정하여 남쪽으로 가게 하여 추밀원에 승진

되고, 뒤에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신돈(辛旽)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고 서령군(瑞寧君)

에 봉해지니, 유숙이 은퇴를 청하자 이를 허락하니,

장상(將相)의 대신들과 문생(門生) 및 옛날 그 밑에 있던 이서(吏胥)들이 모두 교외까지 나와서 전송하였는데,

유숙이 시를 지었다.

그 끝 연구(聯句)를, "충성이 쇠퇴하고 성의가 얇아진 것이 아니로세.

큰 명성을 지니고 오래 있기란 어려운 것이니." 하였다. 유숙이 가고 나서 신돈의 기세가 날로 치성(熾盛)하였

는데, 신돈이 유숙을 다시 등용할까 염려하여 기어이 죽이려는 마음에서 유숙의 시를 가지고 왕에게 참소하기

를, "유숙이 범려(范蠡)로 자처하고 왕을 구천(句踐)에 비유한 것입니다." 하니, 왕이 더욱 의심하여 마침내 명

하여 그에게 형장(刑杖)을 가하고는 관작을 삭제하고 재산을 몰수함에, 신돈이 드디어 그의 적소(謫所)인 영광

(靈光)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게 하였다. 그 뒤에 신돈을 베어 죽임에 이르러 왕이 비로소 그 연유를 알고는

몹씨 애도하며, 그의 원왕(冤枉)을 씻어 주고, 시호를 문희(文僖)라 하였는데, 뒤에 공민왕 사당에 배향(配享)

되었다.

 

유실(柳實) : 유숙(柳淑)의 아들로 용맹이 있고 말 달리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는데 누차 천전하여 예의 총랑

(禮儀摠郞)을 역임하고 벼슬이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본조 유방선(柳方善) : 유숙(柳淑)의 증손으로 시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영락(永樂) 연간에 가화(家禍)를

만나 영천(永川)으로 귀양갔다가 뒤에 사명(赦命)을 만나 편의한 대로 좋도록 하니, 학자들이 많이 그를 따라

배웠으며 《태재집(泰齋集)》이 세상에 퍼져 있다.

 

유윤겸(柳允謙) : 유방선(柳方善)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며, 문장에 능하

다는 명성이 있었다.

 

제영 해우반변비백거(海雨半邊飛白去) : 이색(李穡)의 시에, "우연히 아름다운 곳 만나니 나그네 가슴 절로 열려,

시냇가에 말 세우고 푸른 이끼 위에 앉았노라. 바다 비 한쪽에 뿌리니 흰 줄기 지나가고, 구름 끼인 산 첩첩한 것

푸른 빛 보내오네. 기구한 세상길 이 몸은 두루 걸었으리. 선비의 관 영락(零落)하였어도 뜻은 돌이키지 않았노라.

우문(禹門) 세 층 물결에 용으로 화한다면, 다른 해에 반드시 우레 소리 타고 달리리라." 하였다.

 

해기조련장무부(海氣朝連瘴霧浮)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적요한 관사 옮긴 곳에 앉아보니, 바다 기운 아침에

장기와 연해 떠오른다. 눈에 가득히 들어오는 흥하고 망한 일을 어느 곳에 물으랴. 무너진 성 의구하게 산마루에

있구나." 하였다.

 

농변총죽노황연(隴邊叢竹老荒煙)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고을 성 옮긴 것이 어느 해에 있었던고. 적요한 객사

참으로 가련하다. 쑥대 밑 낮은 담에 깨진 벽돌 남아 있고, 언덕 뒤 한 포기 대는 거친 연기 속에 쇠해간다." 하였다.

 

[비고]

 

연혁 숙종 2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 노비가 주인을 죽였기 때문이다. 39년에 다시 복귀하였다.

영종 9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 읍인(邑人)이 반역을 음모하였기 때문이다. 18년에 다시 복귀시켰다.

정종(正宗) 병신(丙申)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9년에 다시 복귀시켰다.

 

방면 군내(郡內) : 끝이 5리. 대사동(大寺洞) :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

두치(豆峙)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오산(吾山)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화변(禾邊) : 본래 화변의 치소(治所)였는데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50리.

마산(馬山)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여지(蘆旨)ㆍ영풍(永豐) : 모두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대산(大山) : 본래 홍주(洪州)ㆍ대산(大山)의

부곡(部曲)이었는데 북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60리.

 

율곶(栗串) :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6리. 인정(仁政) : 본래 인정(仁政)의 부곡이었는데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문지현(文知峴) :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지곡(地谷) : 바로 고읍(古邑)인데 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성연(聖淵) : 본래 성연의 부곡(部曲)이었는데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5리.

동암(銅巖) : 동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진보 평신진(平薪鎭) : 옛날 조립((助立)의 부곡이었는데 지금은 대산곶(大山串)이다. 북쪽으로 60리에 있는데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90리도 못 되며 물결이 잔잔하다. 한 가닥은 바다 가운데로 세차게 흐르는데 둘레는 1백여

리나 된다. 이곳에 파지포 만호(波知浦萬戶)를 이속시켰다가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정종(正宗) 갑인년에

독립된 진(鎭)으로 만들었다.

○ 수군첨절제사 겸 총리영둔아병파총(水軍僉節制使兼摠理營屯牙兵把摠) 1명을 두었다.

 

○ 목장(牧場)이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갑인년에 없애고 이어 첨사(僉使)를 감(減)하여 감목관(監牧官)이 겸

하게 하였다.

 

혁폐(革廢) 파지포진(波知浦鎭) : 북쪽으로 38리에 있는데 중종(中宗) 11년에 축성(築城)하였는데 둘레가 1천

3백 37척이었다. 우물이 하나 있었고 만호(萬戶)가 있었다. 후에 평신진(平薪鎭)으로 합쳤다.

 

고파지도수(古波知島戍) : 파지도의 만호(萬戶) 분병(分兵)의 수자리하는 곳이다.

요아량수(要兒梁戍) : 안면곶(安眠串) 남쪽 지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인데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분병

(分兵)의 수자리하는 곳이다.

 

토산 감[柹]ㆍ대[竹].

 

사원 서암서원(書巖書院) : 숙종 을해년에 세워졌고 경종(景宗) 신축년에 사액되었다.

유숙(柳淑) : 자는 순부(純夫), 호는 사암(思庵), 본관은 서산(瑞山)인데, 공민왕 무신년에 신돈(辛旽)에게 살해

당하였다. 벼슬은 찬성 예문 제학 서령군(贊成藝文提學瑞寧君)이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다.

 

김홍욱(金弘郁) : 자는 문숙(文叔), 호는 학주(鶴州), 본관은 경주(慶州)인데, 효종 갑오년에 해를 당하였다.

벼슬은 황해 감사(黃海監司)였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태안군 泰安郡

 

동쪽으로는 서산군(瑞山郡) 경계까지 12리이고, 남쪽으로는 같은 군 경계까지 65리이고,

서쪽으로는 소근포(所斤浦)까지 33리이고, 북쪽으로는 서산군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성대혜현(省大兮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소태(蘇泰)로 고쳐 부성군

(富城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는 운주(運州)에 붙였으며, 충렬왕(忠烈王) 때에 본군

사람 환자(宦者) 이대순(李大順)이 원(元) 나라에 총애를 받았으므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한 것을 본조에서 그대로 인습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인.

군명 성대혜(省大兮)ㆍ소태(蘇泰) : 혹은 소주(蘇州)라고도 한다. 순성(蓴城).

 

성씨 본군 실(實)ㆍ이(李)ㆍ방(方)ㆍ염(廉)이 있으며, 황(黃)ㆍ고(高)ㆍ명(明)ㆍ박(朴) : 모두 촌에 있다. 가(賈)ㆍ

장(張)ㆍ김(金) : 모두 속(續)이다.

 

형승 해적[海寇]이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 남수문(南秀文)의 객관기(客館記)에 있다. 비옥한 지대로 호칭한다 :

신숙주(申叔舟)의 객관기에 있다.

 

산천 백화산(白華山) : 군 북쪽 3리에 있는데 사면이 모두 돌로 되어 있다. 군 북쪽 13리에 또 백화산이 있는데,

역시 사면이 모두 돌로 되어 있어 두 산이 서로 유사하다.

 

내산(柰山) : 군 서쪽 23리에 있다. 금굴산(金堀山) : 군 북쪽 13리에 있다.

물금산(勿金山) : 군 동쪽 10리에 있다. 안흥량(安興梁) : 군 서쪽 34리에 있다. 옛날에는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러왔는데, 바닷물이 험하여 조운선(漕運船)이 이곳에 이르러 누차 치패(致敗)를 보았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

을 싫어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지령산곶(知靈山串) : 군 서쪽 25리에 있다. 대소산곶(大小山串) : 군 서쪽 25리에 있다.

이산곶(梨山串) : 군 북쪽 42리에 있다. 신곶(薪串) : 군 북쪽 29리에 있다.

○ 이상 네 개의 곶(串)에는 모두 목장이 있다.

 

바다 : 본군 삼면이 모두 바다이다. 방이라도(方伊羅島) : 군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형도(兄島)ㆍ갈도(葛島)ㆍ

죽도(竹島)ㆍ말응개도(末應介島)ㆍ가외도(加外島)ㆍ토도(免島)ㆍ상산도(上山島)ㆍ굴굴조도(屈屈鳥島)ㆍ

하초도(下草島)ㆍ옹부도(瓮浮島)ㆍ적점도(積岾島)ㆍ거아도(居兒島)ㆍ한음산도(閒音山島)ㆍ나치도(羅治島)ㆍ

군북파도(郡北波島) : 이상의 여러 섬들은 모두 서해 가운데에 있다.

 

하산도(下山島) : 군 남쪽에 있다. 굴포(堀浦) : 군 동쪽 13리에 있다.

○ 고려 인종(仁宗)이, 안흥정(安興亭) 아래의 물길이 여러 물과 충돌하게 되어 있고, 또 암석 때문에 위험한 곳

이 있으므로 가끔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으니, 소태현(蘇泰縣) 경계로부터 도랑을 파서 이를 통하게 하면 배

가 다니는 데에 장애가 없을 것이다 하여, 정습명(鄭襲明)을 보내어 인근 군읍 사람 수천 명을 징발하여 팠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는데, 그 뒤에 종실(宗室) 왕강(王康)이 건의하기를, "예전에 파던 도랑은 깊이 판 곳은

10여 리나 되고, 파지 않은 곳이 불과 7리인데, 만약 마저 다 파서 바닷물로 하여금 유통하게 한다면 매년 조운

(漕運)할 때에 안흥량 4백여 리의 위험한 물길을 경유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인부를 징발하여 다시

파니, 돌이 물 밑에 깔려 있었고, 또 조수가 왕래하여 파는 대로 이를 메워버리므로, 끝내 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본조 세조 때에 건의하는 자가 혹은 팔 만하다 하고, 혹은 팔 수 없다 하여 세조가 안철손(安哲孫)을

보내어 시험하였던 바, 공을 이룰 수 없다 하여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자세히 살피게 하였으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서 중지하고 말았다. 부포(釜浦) : 군 서쪽 30리에 있다.

신라 애장왕(哀莊王) 5년에 부포의 물이 피로 변하였다 한 것은 바로 이 땅이다.

 

토산 대나무ㆍ대살[竹箭] : 죽도(竹島)와 탄항(炭項)에서 난다. 쇠 : 다수산곶(多修山串)에서 난다.

백옥(白玉) : 안흥량 해변에서 난다. 김[海衣]ㆍ황각(黃角)ㆍ세모(細毛)ㆍ전어(錢魚)ㆍ전복[鰒]ㆍ숭어[秀魚]ㆍ

농어[鱸魚]ㆍ청어(靑魚)ㆍ갈치[刀魚]ㆍ모래무지[鯊魚]ㆍ조기[石首魚]ㆍ고기부레[魚鰾]ㆍ오징어[烏賊魚]ㆍ

석굴[石花]ㆍ새우[蝦]ㆍ조개[蛤]ㆍ죽합(竹蛤)ㆍ삼치[麻魚]ㆍ해삼(海參)ㆍ소라(小螺)ㆍ살조개[江瑤柱].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5백 61척에 높이는 12척이며, 그 안에 네 개의 우물이 있다.

 

관방 소근포진(所斤浦鎭) : 일명 우근이포(杇斤伊浦)라고도 하며, 군 서쪽 33리에 있는데,

좌도 수군첨절제사영(左道水軍僉節制使營)이 있고, 그 소관은 당진포(唐津浦)와 파지도(波知島)이다.

○ 첨절제사(僉節制使) 1인이 있다. 신증 정덕(正德) 갑술년에 비로소 돌로 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2천 1백 65척

에 높이는 11척이며, 그 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안흥량수(安興梁戍) : 소근포 첨절제사(所斤浦僉節制使)가 군병을 나누어서 지킨다.

 

봉수 백화산 봉수(白華山烽燧) : 동쪽으로는 서산군의 북산(北山)과 호응하고, 남쪽으로는 같은 군의 도비산

(都飛山)과 호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 남수문(南秀文)의 기문에, "태안군은 옛날 신라의 소태현(蘇泰縣)이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五穀)을 재배하기에 알맞고, 또 어물과 소금을 생산하는 이익이 있어 백성들이 모두 즐겨 이 땅에 살아왔다.

그러나 이 고을의 읍내가 멀리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니 이는 곧 해상의 구적(寇賊)들이 왕래 출몰하는 요충이다.

고려 말기에 무비(武備)가 허술하고 왜적이 강성하여, 홍무(洪武) 계축년에 군에서 입은 화란이란 몹씨 참혹한

것이어서 수령이 겨우 한두 명의 아전을 인솔하고, 임시로 서산군(瑞山郡)에 붙이고 있더니, 계해년에는 다시

예산현(禮山縣)으로 옮겼었다. 경오년에 이르러 도적들의 흉악한 노략질이 차츰 줄어들자 다시 서산에 성보[堡]

를 쌓고 순제(蓴堤)라 이름하고는 일면 해적의 방어에 대비하며 겸하여 군의 행정을 맡아 다스렸다.

그러나 사방으로 흩어져 나간 백성들이 빨리 돌아오지 않으므로 온 경내가 가시덤불 속에 황무(荒蕪)한 채 짐승

의 소굴로 화하여 버려 두었고, 국가에서는 여기에 강무장(講武場)을 설치하였다.

영락(永樂) 병신년에 우리 태종께서 춘렵(春獵 봄철에 행하는 수렵)에 임행하셨다가 그 일대의 황폐한 것을 애석

히 여기시고, 이에 본군의 옛 군을 복구하라 명하셨고, 다음해에는 또 성을 쌓았다. 그러나 바야흐로 인민을 불러

모아서 안집(安集)시키는 데 급급하고 관해(官廨)를 구축할 겨를이 없어 대충 별실(別室) 4칸을 얽어 사객(使客)

을 접대하게 하였는데, 낮고 협소하여 바람과 이슬을 가리기에 바빴으나 그대로 수축하지 않고 지난 것이 20여

년이었다.

정통(正統) 기미년 2월에 나의 동년(同年 한 해에 함께 급제한 사람)인 김혼지(金俒之) 후(侯)가 무재(武才) 있고

또 백성 다스리는 데 능하다는 것으로 선발되어 이 고을의 군수가 되니, 군사를 쓰는 기요(機要)와 백성을 다스리

는 선무(先務)를 여유 작작하게 조처하고, 개연히 다시 폐허한 것을 부흥하려는 뜻을 두고 드디어 여러 사람들과

상의하고 새 공관(公館)을 지으니, 읍 사람 이회(李懷)ㆍ이지(李地) 등 약간 명이 모집에 응하고 경비를 보조하여,

재목도 견고하고 기와도 좋았으며, 노는 사람들이 힘을 다하여 드디어 대청(大廳) 5가(架)를 세우니 무릇 3영(楹)

이며, 좌우의 중방(中房)은 5가에 각각 5영이며, 남녘 청[南廳]은 5가에 3영이며, 동서의 마루[軒]는 5가에 각각

4영이며, 좌우의 중방은 5가에 각각 3영이며, 주방(廚房)ㆍ곳간ㆍ욕실 등이 모두 그 자리를 갖추니 영으로 헤아

려서 83개가 되는 셈이다. 기미년 겨울 10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신유년 가을 8월에 일을 마쳤는데, 규모와 제도가

정대하고, 단청 또한 선명하여 울연히 한 고을의 장관(狀觀)을 이루었다.

김후가 나에게 글을 보내어 그 일의 시말을 기술해 달라고 청해 왔다. 내 지금 사관(史官)의 자리를 더럽히고 있

으니, 흥작(興作)이 있을 경우에 반드시 기록해 두는 것은 나의 직책이다. 하물며, 그 세도(世道)와 관계 있는

것이랴.

이 고을이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던 끝에 드디어 태평한 성대(聖代)를 만나고 어진 수령을 얻어서 가시밭을

다듬고 성곽과 군 모습을 복구하였으며, 조잡하고 협착한 것을 헐어버리고 높고 화려한 집을 지어 인습해 오던

누습(陋習)을 깨끗이 씻고 장엄한 담장을 꾸몄으니, 어찌 세도를 위하여 기뻐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기록할 만한 것이다. 증남풍(曾南豐 증공(曾鞏))의 말에, '무릇 고을에선 수령을 잘 만나기가 어렵고,

다행히 수령을 잘 만났다 하더라도 일을 일으켜 이루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며, 다행히 일을 일으켜 이루어 놓았

다 하더라도 뒷사람을 잘 얻어서 황폐에 이르지 않기란 또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지금 이 고을에서

다행히도 그 얻기 어려운 것을 얻었으나, 다만 뒷사람이 제대로 김후의 뜻을 잘 이어나갈 것인지는 알지 못할

일이다. 이 또한 이 말을 기록하여 뒤에 오는 자에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 신숙주(申叔舟)의 기문에, "태안군이 충청도에 있어 해변의 요충지가 되어 국가에서 순성진(蓴城鎭)을 설치

하고 지군사(知郡事)로 하여금 이를 지휘 관할하게 하고 있다. 군내의 토지가 비옥하여 화마(火麻)가 풍부하고,

어염(魚鹽)의 이익이 있어 옥구(沃區)로 일컬어 왔다. 전조(前朝) 말엽에 여러 차례 병란을 겪어서 모두 가시

덩굴의 숲이 되어 호토(狐免)와 시호(豺虎)의 터로 변했었는데, 우리 국가가 일어남으로부터 인정(仁政)과 위엄이

먼 변방까지 미쳐서 바다 도적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런 뒤에 사방으로 흩어졌던 군민들이 모두 돌아오고,

다른 고을의 백성으로 돌아갈 곳이 없는 자도 또한 즐겨 이곳으로 모여 왔다. 무진년에 조정에선 각 도에 영을

내려 지난날 유리하여 없어진 민호를 조사하여 본적지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이리하여 군민으로서 그 본 고장으

로 돌아가야 할 자가 1백 4호나 되었는데, 그 업에 안착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그 옮기기 어려운 것이란 새로 이사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지금의 지군사 동첨절제사(知郡事同僉節制使) 죽산후(竹山侯) 박홍문(朴弘文)이 이

땅에 부임하여 다스린 지가 마침 4년이었다. 개연히 탄식하고 말하기를, '이 고을에 사는 백성이 겨우 3백호인데,

부세(賦稅)를 내고 기약을 받들어 행하는 자의 거의 반수가 유리하여 들어와 우거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처음 올 때에는 그곳에서 편히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이미 이곳에서 의식을 해결하고 남혼

여가(男婚女嫁)하여 아들을 키우고 손자를 길러 사람마다 영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어찌 다시 소란하게 하랴.

하물며 군이란 백성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므로 백성이 없으면 군이 될 수 없고, 진(鎭)을 설치한 것은 도적을 막자

는 것인데, 백성이 없으면 그 누구와 더불어 지키잔 말인가. 이는 조정에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하고,

곧 고을 사람 전(前) 부사정(副司正) 이숙(李熟)과 호장(戶長) 가택(賈宅) 등을 보낼 제 친히 할 말을 지시하여

도당(都堂)에 아뢰어서 온 군내가 모두 옮기지 않고 전과 같이 편히 살게 되었다. 이리하여 어린아이들과 백발의

노인들까지 모두 환호성을 올리고 감격한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하기를, '내가 추위에 떨 때 원님이 덥게 해주었

고, 내가 뼈만 남았을 때, 원님이 살[肉]을 붙였으며, 내가 유리 분산하였을 때 원님이 완취(完聚)하게 해주었고,

내가 위태하였을 때 원님이 편안하게 해주었으니, 원님의 덕을 갚으려 할진대 나의 부모와 무엇이 다르랴. 아름

다운 덕 가려내어 영원히 전파하리로다.' 하고, 드디어 서로 박후에게로 나아가서 박후의 공적을 기록하여 후세

에 전해 보이도록 할 것을 요구하니, 박후는 이를 사절하고 돌려보냈다. 박후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도 알지만,

여러 사람들의 뜻도 또한 마침내 억누를 수 없음을 알고는 서울로 달려와서 나를 집현전(集賢殿)으로 찾아와 보

고, 그 사실의 전말(顚末)을 써서 영구히 전하게 할 것을 청하는데, 그들의 심정과 언사가 모두 간곡하였다.

내 비록 글을 잘하지는 못하나 사국(史局)의 한 자리를 더럽히고 있으니, 선악(善惡)을 기록하는 것은 나의 직책

이기도 한 것이다. 더욱이 일찍이 박후와는 잘 아는 사이인데다가 그 사적의 쓸 만한 것이 이와 같은 것이 있음

이랴. 박후는 화락(和樂)하고 평이(平易)한 사람이다.

무예(武藝)가 뛰어나고, 목민지재(牧民之才)도 겸하여 중외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일찍이 백성도 다스렸고, 또

군사(軍事)도 다스렸는데, 청렴하고 공평하며 위엄 있고 은혜로운 정사를 펴서 이르는 곳마다 이름이 있었거니와,

지금은 백성도 있고 군사도 있어 문ㆍ무의 정사가 그 한 몸에서 나오게 되었는지라. 의연(毅然)히 안집(安集)과

부강(富强)에 뜻을 두어, 조정에서 유리해 도망한 백성을 조사하여 돌려 보내라고, 기한을 정하고 엄중히 독책

하는 데 즈음하여 주군의 수령들이 그 견책을 두려워하여 바야흐로 명령을 받들어 행하기에 여념이 없었는 데도,

박후는 실정을 건의하여 마침내 그 뜻을 이루어서 군(郡)은 이로 말미암아 실하게 되고, 진(鎭)도 이로 말미암아

강하게 되었으며, 백성들은 이로 말미암아 그 자리에서 편하게 살게 되었으니, 박후 같은 사람은 국가에서 위임

한 뜻을 저버리지 아니했다고 이를 수 있을 것이며, 백성의 부모로서의 도리도 또한 거의 다했다 할 수 있을 것

이다. 내 일찍이 상고해보건대, 옛날에 백성에게 덕을 베푼 자는 그 백성들이 반드시 비(碑)를 세워 그 공적을 기

록하였고, 혹은 생사당(生祠堂)까지도 세웠으니, 이는 그 덕을 사모하여 마지않는 성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 그 군민의 청이 이와 같이 간곡한데,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마침내는 이를 써서 돌려보내는 바이다.

그 판에 새겨 벽에 걸어 군민으로 하여금 대대로 박후의 덕을 알게 하여 길이 잊지 않게 할 것은 그대들의 일이며,

이에 이르면 박후도 또한 거절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신증 정사 경이정(憬夷亭) : 군 남문(南門) 밖에 있다.

 

학교 향교 : 군 동쪽 1리에 있으며, 어세겸(魚世謙)의 기문이 있다.

역원 하천역(下川驛) : 군 동쪽 12리에 있다. 흥인원(興仁院) : 군 동쪽 12리에 있다.

교량 흥인교(興仁橋) : 굴포(堀浦)에 있다.

불우 안파사(安波寺) : 지령산(知靈山)에 있다. 고려 때에 수로가 험악하여 조운선(漕運船)이 여러 차례 난파

되어 이 절을 세운 것인데, 중간에 왜적의 침입을 당하여 거의 다 파괴되었고, 본조 세조 때에 중건하였다.

흥주사(興住寺) : 백화산에 있다.

 

사묘 태일전(太一殿) : 백화산 고성(古城) 안에 있다. 성종(成宗) 10년 기해에, 경상도 의성현(義城縣)으로부터

이곳에 옮겨 봉안(奉安)하였다.

 

사직단 : 군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 서북쪽 1리에 있다. 여단 : 군 북쪽에 있다.

 

고적 고태안성(古泰安城) : 굴포에 있다. 순성진(蓴城鎭) : 군 동쪽 14리에 있다. 돌로 쌓은 성이 있는데, 주위가

1천 3백 53척이다.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오산소(吳山所) : 군 남쪽 25리에 있다. 양골소(梁骨所) : 군 남쪽 13리에 있다.

복평향(福平鄕) : 군 서쪽 15리에 있다. 본래 서산군에 속해 있었는데, 우리 세종 27년에 이곳에 붙였다.

백화산성(白華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천 42척에 높이는 10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제영 풍회도서미경랑(風回島嶼迷驚浪)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고개 위에 외로운 성 낙조(落照) 가에 서 있는

데, 올라서 바라보니 다만 저 바다 하늘에 떠오르는 듯 보인다.

바람 불어 돌아가니 도서가 놀란 물결에 희미하고, 땅이 궁벽하니 민가에선 묽은 연기 오르네. 포(浦)를 판 지

몇 해에 공을 이루지 못했던고, 산에서 온 한 줄기 끊겼다가 다시 연했구나. 뉘 능히 나에게 조운(漕運) 통하는

계책을 말해 주려나. 다만 술통 앞에서 취하여 망연(惘然)히 잊고만 싶다." 하였다.

 

[비고]

 

방면 군내(郡內) : 처음은 5리, 끝은 20리. 동일도(東一導) :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동이도(東二導) : 동쪽으로 처음은 12리, 끝은 20리. 남면(南面) : 처음은 20리, 끝은 60리.

근서(近西) :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40리. 원일도(遠一導)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원이도(遠二導) :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 북일도(北一導) : 끝이 70리. 북이도(北二導) : 끝이 40리.

 

진보 소근포진(所斤浦鎭) : 후근이포(朽斤伊浦)라고도 하며 서쪽 30리에 있다. 중종 9년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

는 2천 1백 65척이고, 우물은 하나다. ○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1인이 있다.

안흥진(安興鎭) : 서쪽으로 40리에 있는데, 본래는 안흥량(安興梁)의 수자리하는 곳으로 근포첨사(斤浦僉使)의

분병이 수자리하는 곳이다. 효종 4년에 화정도(花亭島)에 옮겨 세웠다가 6년에 사인(士人) 김석견(金石堅)이

세우기를 청하여 진성(鎭城)을 세웠는데 둘레가 3천 6백 21척이다. ○ 수군첨절제사 1인이 있다.

토산 소금ㆍ감[柹].

 

 

면천군 沔川郡

 

동쪽으로는 홍주(洪州) 경계까지 17리고, 남쪽으로는 덕산현(德山縣) 경계까지 12리이고, 서쪽으로는 당진현

(唐津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는 같은 현 경계까지 1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혜군(槥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혜성군(槥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顯宗)이 운주(運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충렬왕(忠烈王) 16년에, 고을 사람

복규(卜奎)가 합단(哈丹)의 군병을 방어한 공로가 있어 지면주사(知沔州事)로 승격시킨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한 것이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인.

군명 혜군(槥郡)ㆍ혜성(槥城) : 혜(槥)를 우리나라 속자(俗字)로 추(橻)로 쓰기도 하고, 혹은 유(杻)로 쓰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마산(馬山)ㆍ해종(海宗)ㆍ면주(沔州).

 

성씨 본군 복(卜)ㆍ한(韓)ㆍ현(玄)ㆍ유(兪)ㆍ임(任)ㆍ박(朴)ㆍ정(井)ㆍ서(徐)가 있으며, 유(兪) : 촌에 있다.

구(具) : 본적은 능성(綾城). 왕(王) : 본적은 개성(開城). 한(韓)ㆍ김(金)ㆍ박(朴) : 모두 역(驛)에 있다.

한(韓) : 부곡(部曲)에 있다.

 

산천 신암산(申庵山) : 군 북쪽 12리에 있다. 다불산(多佛山) : 군 서쪽 10리에 있다.

몽산(蒙山) : 군 북쪽 4리에 있다. 봉서산(鳳棲山) : 군 동쪽 2리에 있다.

마산(馬山) : 군 남쪽 8리에 있다. 소이산(所伊山) : 군 북쪽 9리에 있다.

창택산(倉宅山) : 일명 고산(高山)이라고도 하는데, 창택곶(倉宅串)에 있다.

 

바다 : 군 북쪽 45리에 있다. 범근내포(犯斤乃浦) : 군 동쪽 27리에 있다. 이곳에 창고가 있어 공주ㆍ홍주에서

관할하는 군현의 세미(稅米)를 수납하였다가 서울로 조운(漕運)하여 갔었는데 성화(成化) 14년 봄에 물이

얕아져서 배가 바닥에 부딪히므로 아산(牙山)의 공세곶(貢稅串)으로 옮겼다.

창택곶(倉宅串) : 군 북쪽 35리에 있고, 목장(牧場)이 있다. 벽골지(碧骨池) : 군 동쪽에 있다.

 

토산 모시[苧]ㆍ지치[紫草]ㆍ숭어[秀魚]ㆍ뱅어[白魚]ㆍ석굴[石花]ㆍ조기[石首魚]ㆍ도루묵[銀口魚]ㆍ

오징어[烏賊魚]ㆍ전복[鰒]ㆍ조개[蛤]ㆍ새우[蝦]ㆍ부레풀[魚鰾]ㆍ김[海衣]ㆍ농어[鱸魚]ㆍ민어(民魚)ㆍ

준치[眞魚]ㆍ붕어[鯽魚]ㆍ전어(錢魚)ㆍ게[蟹]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2척에 높이는 15척이며,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다.

 

봉수 창택산 봉수(倉宅山烽燧) : 서쪽으로는 당진현(唐津縣) 고산(高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경기 양성현(陽城縣)의 괴대길곶(槐臺吉串)과 호응한다.

신증 누정 반월루(伴月褸) : 객헌(客軒)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군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순성역(順城驛) : 군 동쪽 4리에 있다. 동제원(東濟院) : 군 동쪽 5리에 있다.

불우 구룡사(具龍寺)ㆍ장안사(長安寺) : 모두 신암산에 있다. 보회사(保會寺) : 다불산에 있다.

석수암(石水庵) : 창택관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몽산에 있다. 여단 : 군 북쪽에 있다.

 

고적 군자지(君子池) : 객관 앞에 있다. 지군사(知郡事) 곽충룡(郭翀龍)이 창건한 바로서 못 가운데에 연(蓮)을

심고 염계(濂潔 송(宋) 나라 주돈이(周敦頣))의 애련설(愛蓮說)의 말을 취하여 군자지라 이름하니,

이제현(李齊賢)이 찬(讚)하여 말하기를, "꽃과 열매가 한때 피고 맺되, 진흙에 오염되지 않아서, 군자와 같은

지라, 염계에게 사랑 받았다." 하였다. 구준대(衢樽臺) : 군 남쪽 1리에 있으며, 역시 곽충룡이 축조한 것이다.

앞사람이 찬(讚)하기를 "만민이 모두 나의 동포라 함은, 횡거(橫渠 장재(張載))의 말이거니와, 혼자서 즐기는

것이 무엇이 즐거우랴. 구준(衢樽)이 여기 있도다." 하였다.

 

강구정(康衢亭) : 군 동쪽 1리에 있으니, 역시 곽충룡이 세운 것이다. 앞사람이 찬하기를, "담대멸명(澹臺滅明)

지름길로 가지 않았다는 것은, 노론(魯論)에 기록돼 있으며, 평탄한 대로(大路)를, 군자가 가도다." 하였다.

 

치의당(緇衣堂) : 군 서쪽 1리에 있으니, 역시 곽충룡이 세운 것이다. 앞사람이 찬하기를, "읍은 비록 10실(室)에

불과하나, 신(信)하고 충(忠)한 사람이 있다. 어진이의 감화란, 집집이 어진이를 낳게 한다." 하였다.

 

도촌소(桃村所) : 군 북쪽 20리에 있다. 온월부곡(溫月部曲) : 군 동쪽 23리에 있다.

가리저부곡(加里渚部曲) : 군 동쪽 25리에 있다.

몽산성(蒙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3백 14척이다.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명환 신라 김준(金峻) : 진성왕(眞聖王) 7년에 병부 시랑(兵部侍郞) 김처회(金處誨)가 당(唐) 나라로 가서 정절

(旌節)을 바치려다가 바다에 익사하여 혜성군 태수(槥城郡太守) 김준을 고주사(告奏使)에 임명하여 보냈다.

고려 서인(徐堙) : 본군이 처음에 면주(沔州)로 승격하였을 때에 서인이 당시 지주사(知州事)가 되어 선정을

베푼 바 있다. 곽충룡(郭翀龍) : 원외(員外)로 있다가 지군사(知郡事)로 나왔다. 본래 서생(書生)으로 군사(軍事)

를 익히지 않았는데 왜적이 돌연 습격해 오자, 온 고을 사람들이 달아나는 것을 충룡이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용기를 내어 군중을 격려하니, 한 사람이 적군 백 명을 당할 수 있게 되어 먼저 험요(險要)한 곳을 끊으니, 적이

형세가 불리하게 되어 물러갔다.

본조 맹사성(孟思誠)ㆍ박안신(朴安信)ㆍ이영견(李永肩) : 모두 지군사(知郡事)로 부임하여 그 은택이 백성에게

미친 바가 있어 지금까지도 그를 칭송한다. 홍윤성(洪允成) : 문과에 오르기 전에 본군의 교도(敎導)가 되었다.

 

인물 고려 복지겸(卜智謙) : 신라 말엽에 복학사(卜學士)라 일컫는 자가 당(唐) 나라로부터 본군으로 와서 살면서

바다 도적을 물리쳐 죽이고, 머물러 남은 백성들을 모아 보전한 바 있었는데, 지겸은 그의 후손이다. 처음 이름은

사괴(砂瑰)이며, 배현경(裵玄慶)과 더불어 태조(太祖)를 추대,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어 본주의 토지 3백 경

(頃)을 하사받아 자손이 대대로 이를 먹고 살았다. 시호는 무공(武恭)이다.

 

복지유(卜智柔)ㆍ박술희(朴述熙) : 나이 18세에 궁예(弓裔)의 위사(衛士)가 되었으며, 뒤에 태조를 섬겨 공이

있어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시호는 엄의(嚴毅)이며, 혜종 묘정(惠宗廟庭)에 배향되었다.

 

복규(卜奎)ㆍ복기(卜祺) : 모두 복지겸의 후손이다.

본조 복승정(卜承貞) : 문과에 올라 여러 주군(州郡)을 역임하였는데, 법을 지키고 치적이 있었다는 것으로서

명칭이 있다.

 

열녀 본조 치자(梔子) : 안지의(安止義)의 아내이다. 남편이 나병[癩病]을 얻은 지 10년 만에 죽으니, 원중(園中)

에 빈(殯)하여 놓고, 주야로 슬퍼하고 울더니, 3년 만에 비로소 장사를 지냈다. 시어니가 다시 시집보내려 하자,

치자가 말하기를, "어머님께서 만일 이를 강요하신다면 나는 반드시 강에 몸을 던지고 말 것입니다." 하니, 시어

머니가 두려워하여 그치고 말았다. 그 뒤에 치자도 또한 나병에 걸려 절개를 지킨 지 14년 만에 비애하던 끝에

몸이 파리하여 죽었다.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고, 부세(賦稅)를 면제해 주었다.

 

신증 곽씨(郭氏) : 박충간(朴忠幹)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자, 몹씨 비통하며 몸을 돌아보지 않았고, 초하루 보름

으로 반드시 친히 그 무덤에 가서 제사하였으며, 복을 마친 뒤에도 오히려 그만두지 않았다. 그의 아우 구세충

(具世忠)의 아내도 또한 절행(節行)이 있어 남편의 상복을 마친 뒤에도 그대로 소의(素衣)와 소식(素食)을 하고,

죽은 이를 섬기기를 생존시와 같이 하였다. 이 사실이 보고되니, 모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요검구안행(腰劍舊顔行) : 유원순(兪元淳)의 시에, "재차 지나며 밤길을 번거롭게 하니, 관솔 불 양쪽에

밝혀 길을 인도해 간다. 비창(●槍) 든 저들은 새로 생긴 익위(翼衛)인가. 요검 찬 병사들은 옛날의 안행들.

함께 추운 해의 솜을 얻은들, 누가 능히 흉년 곡식을 분양해 주리. 민심을 수습할 조그마한 은택도 없으니, 매양

농사 힘쓰라 권장한 내가 부끄럽다." 하였다. 왕명석산천(王命錫山川) : 복오(卜吾)의 시에, "삼한(三韓)을 통일

하던 그날, 지금 추사(追思)하건대 5백 년의 옛일. 무공공(武恭公)의 공도 적지 않아서, 왕명으로 산천을 하사

했다네." 하였다.

 

[비고]

 

방면 읍내(邑內) : 끝이 7리. 마산(馬山) :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죽림(竹林) : 동쪽으로 처음은 6리, 끝은 13리. 덕두(德頭)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가화(嘉火) :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범천(泛川) : 동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손동(孫洞) : 동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정계(淨界)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초천(草川) :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중흥(中興) :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

감천(甘泉) :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 송산(松山) :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승선(昇仙) :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송암(松巖) : 서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

성지 몽산고성(蒙山古城) : 둘레가 1천 3백 14척에 우물이 둘이 있다.

토산 감[柹].

 

 

온양군 溫陽郡

 

동쪽으로는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는 예산현(禮山縣) 경계까지 26리이고, 서쪽으로는

신창현(新昌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는 아산현(牙山縣)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이었는데,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에 주(州)로 승격시켜 총관(摠管)을

두었다가, 뒤에 주를 폐하고 군으로 하였고, 고려 초기에는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붙였고, 명종(明宗) 2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4년에 신창(新昌)과 병합

하여 온창(溫昌)이라 칭호를 고쳤더니, 16년에 이를 다시 나누어 온수현(溫水縣)을 설치하였는데, 세종 24년에

임금이 온천에 거둥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승격시켰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인.

군명 탕정(湯井)ㆍ온수(溫水)ㆍ온창(溫昌)ㆍ온천(溫泉).

 

성씨 본군 정(鄭)ㆍ이(李)ㆍ방(方)ㆍ강(康)이 있으며, 윤(尹) : 촌에 있다.

 

산천 연산(燕山) : 군 북쪽 2리에 있는 이 고을 진산(鎭山)이다.

배방산(排方山) : 군 동쪽 8리에 있는데, 산마루에 네 개의 봉우리가 똑같이 대치하고 있어 가장 기관(奇觀)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속칭 과안봉(過雁峯)이라 한다.

 

서달산(西達山) : 군 남쪽 3리에 있다. 송악산(松岳山) : 군 남쪽 23리에 있다.

화산(華山) : 군 남쪽 11리에 있다. 거차라산(巨次羅山)ㆍ월라산(月羅山) : 모두 군 서쪽 7리에 있다.

광덕산(廣德山) : 군 서남쪽 13리에 있다. 가문현(佳文峴) : 군 남쪽 30리에 있다.

포천(布川) : 군 동쪽 7리에 있다. 천안군 풍세동(豐世洞)에서 발원하여 신창현 견포(犬浦)로 들어간다.

가리천(加里川) : 군 동북쪽 1리에 있다. 그 근원이 셋이 있으니, 하나는 군 서쪽 전족령(全足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가문현에서 나오며, 다른 하나는 군 동쪽 잉읍현(仍邑縣)에서 나오는데, 신창현의 견포로 들어간다.

 

온천(溫泉) : 군 서쪽 7리에 있다.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 우리 태조ㆍ세종ㆍ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거동하여

머무르면서 목욕하였는데, 유숙한 어실(御室)이 있다.

 

신정(神井) : 임원준(任元濬)의 긴(記)에, "천순(天順) 8년 봄 2월에 우리 주상(主上) 승천체도 열문영무 전하

(承天體道烈文英武殿下)께서 남쪽으로 충청도를 순수(巡狩)하시면서 속리산(俗離山) 복천사(福泉寺)에 거둥

하사 혜각존자(慧覺尊者)를 만나 보시고, 그 뒤 3월 초 1일에 온양군의 온탕(溫湯)에 거가를 머무르셨다.

그러한 지 4일 만에 신천(神泉)이 홀연 솟아올라 뜰에 가득히 흘러 찼다. 성상께서 크게 기이하가 여기시고 명

하여, 그곳을 파니, 물이 철철 넘쳐 나오는데 그 차기는 눈과 같고, 맑기는 거울 같고, 맛은 달고도 짜릿하고,

성질은 부드럽고도 고왔다. 명하여 수종한 재상들에게 반포해 보이시니,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또 서로 이르기를, '옛날에 없던 것이 지금 새로 생기어 탕정(湯井)의 물은 따뜻하고 이 우물은

차니, 이는 실로 상서의 발로이다.' 하여, 8도에서 표문[表]을 올려 하례하고 칭송하니,

드디어 주필 신정(駐蹕神井)이란 이름을 내렸다." 하였다.

 

토산 옻칠[漆]ㆍ대추[棗]ㆍ감[柹]ㆍ복령(茯苓).

 

성곽 배방산성(排方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3백 13척에 높이는 13척이며, 안에 우물 두 개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누정 대청루(大淸樓) : 객관 동쪽에 있다. 군수 최린(崔潾)이 중건한 것이다.

이숙함(李淑瑊)이 빙설루(氷雪樓)라 이름을 고치고 지은 기문이 있다.

 

학교 향교 : 군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시흥역(時興驛) : 옛날에는 이흥역(理興驛)이라 호칭하였는데, 군 남쪽 8리에 있으며, 승(丞)이 있다. 본도

에 속역(屬驛)이 일곱 개가 있으니 창덕(昌德)ㆍ일흥(日興)ㆍ급천(汲泉)ㆍ순성(順城)ㆍ흥세(興世)ㆍ장시(長時)ㆍ

화천(花川)이다. ○ 승(丞) 1인이 있다.

 

애원(艾院) : 군 동쪽 18리에 있다. 신원(新院) : 군 동쪽 2리에 있다. 혹은 태산원(泰山院)이라고도 일컫는다.

망빈원(望賓院) : 군 동쪽 13리에 있다. 용두원(龍頭院) : 군 남쪽 24리에 있다.

송현원(松峴院) : 군 동쪽 7리에 있다. 오산원(烏山院) : 군 동쪽 10리에 있다.

임반원(任潘院) : 군 동쪽 20리에 있다.

 

불우 과안사(過雁寺)ㆍ기린사(麒麟寺)ㆍ남산사(南山寺) : 무두 서달산(西達山)에 있다.

목사(木寺) : 배방산(排方山)에 있다. 외암(隈菴)ㆍ현우사(玄雨寺). 중암(中菴) : 모두 화산(華山)에 있다.

석암사(石菴寺) : 송악산(松岳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연산(燕山)에 있다.

○ 고려 고종(高宗) 23년에 몽고(蒙古)의 군사가 와서 성읍을 포위하였는데, 어전 현려(玄呂)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워 크게 격파하고, 적의 머리 2급(級) 베었고, 화살과 돌에 맞아 죽은 자가 2백여 명이나 되었으며, 노획

한 군기도 매우 많았다. 왕이 성황신이 음으로 도운 공이 있었다 하여 신호(神號)를 더 봉하였다.

여단 : 읍 북쪽에 있다.

 

고적 남산(南山) : 고려 태조(太祖)가 유검필(庾黔弼)에게 명하여 양정군(陽井郡)에 성을 쌓았다. 이때 후백제의

장수 김훤(金萱)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청주(淸州)를 침공하였다. 하루는 검필이 본군의 남산에 올라 앉아

서 졸고 있었는데, 꿈에 한 거대한 사람이 말하기를, "내일 서원(西原)에 반드시 변란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속히 가서 구원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검필이 놀라 깨어 청주로 달려가서 후백제의 군사와 더불어 싸워

격퇴하고, 독기령(禿岐嶺)까지 추격하여 죽이고 잡은 자가 3백여 명이나 되었다.

 

개흥부곡(開興部曲) : 군 서쪽 14리에 있다. 상곡부곡(上谷部曲) : 군 남쪽 13리에 있다.

목촌부곡(木村部曲) : 군 동쪽 10리에 있다. 박산부곡(朴山部曲) : 군 남쪽 12리에 있다.

독촌부곡(禿村部曲) : 군 북쪽 10리에 있다. 묘산부곡(卯山部曲) : 읍 동쪽 20리에 있다.

 

명환 고려 이성(李晟) : 충렬왕(忠烈王) 때에 과거에 올라 감무(監務)에 임명되었다.

효자 본조 맹희도(孟希道) :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워 표창받았다. 신창현(新昌縣) 인물 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제영 필불영천용(觱沸靈泉湧) : 이승손(李承孫)의 시에, "콸콸 영천이 솟아나는 것은, 활활 타는 화덕(火德)이

통함이로다." 하였다. 교전상운합(郊殿祥雲合) : 이숙치(李叔畤)의 시에, "들 밖의 궁전엔 상서로운 구름이 모여

가득하고, 신령한 샘에는 따뜻한 옥류(玉溜)가 맑구나." 하였다.

 

행궁비수령(行宮非繡嶺) : 이맹상(李孟常)의 시에, "이 행궁이 수령궁이 아니거니, 대가(大駕) 임행하신 곳 어찌

저 곤명(昆明) 땅이랴." 하였다.

 

봉강토덕형(封疆土德亨)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읍호(邑號)를 올리니 천은(天恩)이 무겁고, 계역을 바로하니

토덕이 형통하는도다." 하였다.

 

팔영(八詠) : 이숙함(李叔瑊)의 시와 그 서문에, "내가 산수(山叟), 영숙(永叔)과 같이 온천행궁(溫泉行宮)의 직려

(直廬)에 입직하고 있으면서 때로 서하(西河)ㆍ고양(高陽)ㆍ언양(彦陽) 등 여러 상공(相公)과 더불어 왕복 수창

(酬唱)하며 스스로 그 회포를 풀고 지냈는데, 영숙이 그 사이에 팔경(八景)의 제목을 얻어, 나에게 먼저 고체시

(古體詩)를 지으라 요구하여, 장차 화교(和敎)의 장본으로 삼으려 하니, 그야말로 키질해 까부르면 쭉정이와 겨

가 먼저 나가는 법이다. 이를 보는 자 그 나의 광참(狂僭)함을 용서하라." 하였다.

 

행궁의 상서로운 구름[行殿祥雲] : "봄바람에 어가(御駕)가 호서(湖西)에 거둥하사, 온천 이곳에 깊숙히 어연

(御輦)을 머무르셨네. 궁전 위에 애애(靄靄)하게 떠오르는 구름송이, 상서의 광채가 흩어졌다가는 다시 모여든다.

북녘으로 아득하게 봉래궁(蓬萊宮)과 연하여, 성주(聖主)의 효성어린 생각 바라보는 가운데에 있네. 저 구름은

무정한 듯하면서도 도리어 유정한 것이런가. 하물며 다시 비를 주어 전공(田功)을 도움에랴." 하였다.

 

○ 임원준(任元濬)의 시에, "바위 위의 꽃과 시냇가의 버들이 연(輦) 길에 비치니, 온천 한 지역에 봄이 길이 머물

렀네. 봉가(鳳駕)가 때로 구천(九天)으로 좇아 내려오시니, 아름답고 이상스런 상서가 모두 함께 모여들었어라.

상서로운 구름 욱욱(郁郁)하게 행궁을 뒤덮으니, 현란(絢欄)한 오색 광채 공중에 떠 있어라. 저 구름 흩어졌다

다시 모여 천지와 사방에 은택 줌을 알았노니, 만물이 힘입어 사는 공을 우러러 바라노라." 하였다.

 

영천의 서액[靈泉瑞液] : 이숙함의 시에, "화룡(火龍)이 길이 땅밑에 굴을 파서, 샘 길을 열어 놓아 맑은 물 솟아

나니, 따뜻한 물 신령한 진액이 사람의 질병을 쾌히 다스려, 해묵은 난치(難治)의 병이 저절로 떠난단다.

세 전하[三殿] 욕탕에 하림하사 옥체의 피로 풀어 흩으실 제, 윤활하고 부드러운 약물 마음껏 끼얹으시니 떠오

르는 저 물김은 연기가 아니다. 한 번 씻고 나시면 성수(聖壽) 계산하는 수가지[籌] 더 첨가했노라고,

서왕모(西王母)가 보낸 글을 푸른 새[靑鳥]가 전해 온다네." 하였다.

 

○ 임원준(任元濬)의 시에, "따뜻하기 끓인 물 같고 맑기도 한없으니, 불덩이 땅속에 묻혀 때로 물이 솟는다네.

고질(痼疾) 낫게 하여 만백성을 구제할 뿐 아니라, 번뇌(煩惱)도 씻어버려 성체(聖體)도 조호(調護)하나니, 구름

같이 피어오르고 옥 같은 것 퍼부어서 풀고 흩어버리시니, 화기도 애애(靄靄)하여 상서 연기인 듯하였어라.

남기신 윤택 나누어서 전답에 물을 대면, 여러 해 풍년든 칭송을 서로 전해 들으리라." 하였다.

 

천주의 어선 반사[天廚分膳] : 이숙함의 시에, "행궁(行宮) 안에 우리 님 주포(廚庖)에는, 바다 진미 가득하고

들나물도 가지가지, 날마다 호종한 신료(臣僚)들에게 반포해 내리시니, 팔진(八珍) 낙역부절(絡繹不絶) 중사

(中使)의 발걸음도 수고롭다. 또다시 궁중 항아리의 우로향(雨露香)을 내리시며, 십분(十分) 취하라는 권교까지

있어 취광(醉狂)이 되어서는, 다 같이 이르기를 이 홍은(鴻恩) 갚을 길 없으니, 다만 축원하건대 저 능강(陵岡)

같이 오래오래 장수하소서."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타봉(駝峯 낙타 등에 산봉우리같이 솟은 살덩이. 진미로 일컫는다.) 웅장(熊掌)이 천주(天廚)

에 가득하니, 삼상한 고기와 소채 어찌 이에 비하랴. 은총 입어 나날이 팔진 진미 내리시니,

감격도 하지만은 도리어 분촌(分寸)의 공 없음이 부끄럽다. 하물며 궁에서 빚은 술 님의 향기 띠었는데, 금술잔

에 가득 부으니 이 기쁨 미칠 것만 같구나. 어가 호위하고 돌아갈 기일이 멀지 않건만, 쌍궐(雙闕)을 바라보고자

높은 봉에 올라 본다." 하였다.

 

신정에 새긴 빗돌[神井勒石] : 이숙함의 시에, "세조 당년에 이곳에 임행하니, 행전(行殿) 뜰 한가운데 신정(神井)

이 솟아났다. 호종했던 신하의 그 재예 진정 당대 제일이라, 성덕 칭송한 웅건(雄健)한 그 문사(文詞)를 한 붓으로

휘둘렀다네. 돌에 새긴 그 글자가 이제 벌써 깎이고 떨어져 나갔으니, 20년의 광음이 한 순간임에 놀랐노라.

자성(慈聖)께서 이를 측은히 생각하시고 중건하라 명하시니, 뒷날에 흘러 전하는 건 다시 태사(太史)의 붓대에

빙의(憑依)하리로다."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살아서 성조(聖祖)를 뵈온 것은 진실로 만행한 일, 호종했던 그 당시에 이 온정(溫井)에 왔었

노라. 찬 샘물 홀연히 두 온탕 사이에 솟아올라, 신에게 기록하라 명하시어 거친 문구 붓을 달렸었네. 20년이 채

안 되어 글자 이미 상하였고, 때 옮기고 세사도 변개되니 일순(一瞬) 인생에 함께 놀랐노라. 반짝반짝 한 치의

작은 마음, 다시 챙겨 눈물 뿌리면서 돌 다듬어 거듭 필적 실었노라." 하였다.

 

광덕산의 아침 아지랑이[廣德朝嵐] : 이숙함의 시에, "남녘을 바라보니 광덕산이 드높이 비꼈는데, 저멀리 새들

만이 중천으로 지나는구나. 아침마다 저 아지랑이 뜻이 있어 뜨는 건가. 가늘고 가는 흰 깁[紈] 같기도 하고 다

시 비단[綺羅] 같기도 하다. 저 아름다운 산속에 삼라(森羅)한 만상(萬象)을, 짚신 신고 가서 유상(遊賞)하지 못

하는 것이 부끄럽구나. 어찌하면 화공(畫工)의 손을 빌려 한 폭의 산수도를 그려서, 그대의 고당(高堂) 흰 벽위에

걸어 줄까."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첩첩이 반공(半空)에 가로질린 산봉우리 천길이나 높아서, 원숭이도 오르기 어렵고 기러기도

넘기 어려운데, 다만 가벼운 아지랑이 절정(絶頂)을 살짝 덮어, 아침이 오면 분연(紛然)한 풍경 만상이 삼라하다.

그 누가 무상(無像)한 것을 유상(有像)하게 하는고. 볼수록 그의 변태(變態) 그윽히 감상하기에 족하다.

어찌하면 저 연하(煙霞) 속에 사는 승려를 불러서, 함께 지팡이 이끌고 깊숙히 푸른 절벽 위를 탐색해 볼까."

하였다.

 

공곶의 봄 조수[貢串春潮] : 이숙함의 시에, "호서(湖西)의 큰 바다 물결 어찌 그리 도도(滔滔)한가, 해추(海鰌)가

봄 조수 보내오니 찬 물결이 일어난다. 남쪽 나라 조운(漕運) 배는 많기도 하다. 구름 돛대 만길이 하늘과 함께

높았어라. 해류(海流) 평온하게 하라고 풍백(風伯)을 단속하고, 밤낮을 계교 않고서 용산강(龍山江) 머리로 향해

간다. 만억(萬億) 자(秭)를 수송하여 국고를 높이니 우리의 세상 형편도 이미 서주(西周)와 같음을 깨달았노라."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긴 강물 밤낮으로 도도하게 흘러, 천리 길, 만리 길을 넓은 파도 속 달려간다. 뇌성을 울리며

눈더미를 몰아치는 듯 기세 어이 그리 장하냐. 평상시에도 놀란 파랑(波浪)이 하늘과 연하여 출렁댄다네.

호서의 이곳은 물결이 평온타고 불리는 곳, 남방의 부세를 이곳에서 서울로 조운해 간다. 그대는 듣지 못하였나,

하늘엔 바람 없고 바다에 물결이 일지 않는다는 것, 성덕(聖德)의 감화가 어찌 홀로 서주(西周)만이 장하리."

하였다.

 

송령의 찬 물결[松嶺寒濤] : 이숙함의 시에, "온정(溫井) 서쪽 머리에 자그마한 한 고개, 엉성하게 늘어선 소나무

들이 구름 위를 쓸고 있다. 큰 바람 세차게 불면 푸른 물결이 놀란 듯 일어나고, 그늘진 골짜기에서 음향이 생겨

나면 나뭇가지들이 맑은 소리 내어 운다. 선계(仙界)의 학(鶴)이 여기 와서 깃들고 있어,

냉랭한 그 울음소리 밤마다 낮은 가지서 난다네. 내 한번 그 소리 타고 가서 진인(眞人)을 찾으련다.

상계(上界 천계(天界))의 관부(官府) 길이 설지 않으리라."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사방에 산이 싸고 둘러 동문(洞門)은 작은데, 고개 위에 멀리 서 있는 소나무의 모습 정정(亭

亭)도 하다. 서늘한 밤 자연의 음향이란 싫지 않은 법, 10리 밖의 파도소리가 나뭇가지에 울린다.

가늘게 흔들리는 섬세한 잎새는 검푸른 구름이 깃들어 있는 듯, 가볍게 흔드는 버성긴 가지에는 차가운 달이

나지막이 걸려 있고, 이내 바람 자고 풍운(風韻)이 처음으로 고요해 질 양이면, 흉금도 쌀랑해져 시몽(詩夢)이

희미하다." 하였다.

 

보리 밭 두둑의 이삭 물결[麥隴秀波] : 이숙함의 시에, "꽃은 자고 버들도 졸아 봄이 한창인데, 일도 없는 저

포곡새[布穀 뻐꾹새]는 농사에 힘쓰라고 뻐꾹뻐꾹 울어댄다. 가을 보리 구름같이 연하여 이삭 물결 이니, 단비

내려 하룻밤에 푸른 꺼럭이 늘어졌다. 절기 흘러 자리 자리 가을이 또 왔는데, 농부들 먹을 일 생각하고 기쁨이

먼저 가슴에 뛸 것이리. 천만 개의 마을마다 조석 연기 일어나니, 태평스런 민간 풍경 춘대(春臺)에 올라 보는

듯하다."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밭보리 푸르고 푸르러 생의에 차 있는데, 평지와 산간에 부지런히 지은 것을 농부들은 함께

기뻐한다. 무성한 이삭들 한 대에 두 이삭씩 달렸으니, 높고 낮은 푸른 물결이 몇 겹이나 되던가.

일진(一陣) 화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만경(萬頃)의 누른 구름이 가을을 재촉하네. 우리에게 풍년 줌이 이로

부터 시작하리니, 햇무리만으로 어찌 노대(魯臺)를 점치랴." 하였다.

 

[비고]

 

방면 읍내(邑內) : 끝이 5리. 동면(東面) : 처음은 5리, 끝이 20리. 서면(西面) : 끝이 10리.

남군내(南郡內) : 처음은 5리, 끝은 10리. 남상(南上) :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남하(南下) : 처음은 5리, 끝은 15리. 일북(一北) : 동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이북(二北) :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성지 배방산성(排方山城) : 배방산에 있으며 3천 5백 13척이며, 우물이 둘이 있다.

궁실 온천행궁 : 온천에 있으며 여러 임금이 머물고 갔던 곳이다.

 

 

평택현 平澤縣

 

동쪽으로는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10리이고, 남쪽으로는 아산현(牙山縣) 경계까지 8리,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2리이고, 서쪽으로는 경기 수원부(水原府) 경계까지 20리이고,

북쪽으로는 같은 부 경계까지 1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백 24리이다.

건치연혁 옛날에는 하팔현(河八縣)이라 불렀던 것을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천안부(天安府)에

붙였으며, 뒤에 감목(監牧)을 두었는데,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신증 연산(燕山) 을축년에 경기로 이속(移屬)시킨 것을

금상(今上) 초년에 다시 예전대로 환원하였다.

군명 하팔(河八).

 

성씨 본현 이(李)ㆍ임(林)ㆍ박(朴)ㆍ전(田)ㆍ손(孫)ㆍ전(全)이 있으며, 박(朴) : 촌에 있다.

 

산천 성산(城山) : 현(縣) 북쪽 1리에 있다. 오을미곶포(吾乙未串浦) : 현 북쪽 10리에 있다.

시포(市浦) : 현 남쪽 11리인 아산현(牙山縣)과의 경계에 있다. 신덕포(新德浦) : 현 서쪽 5리에 있다.

 

토산 붕어[鯽魚]ㆍ숭어[秀魚]ㆍ지황(地黃).

 

누정 관가정(觀稼亭) : 객관 북쪽 언덕 위에 있다. 본현에는 사방에 산이 없고, 오직 이 언덕이 약간 높아서

조망할 만하다.

학교 향교 : 현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화천역(花川驛) : 현 동쪽 5리에 있다. 상원(上院) : 현 서쪽 5리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성산(城山)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백랑부곡(白浪部曲).

 

신증 효자 본조 박녕(朴寧) : 본현의 아전이다. 아버지를 섬기기를 매우 효성스럽게 하여 아침 문안과 저녁

잠자리를 잘 보살피며 봉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금상 6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수완산저옥야평(水緩山低沃野平) : 박서생(朴瑞生)의 시에, "물 천천히 흐르고 산 낮으며 옥야는 평평한데,

주민들은 곳곳마다 밭갈이를 일삼는다." 하였다.

 

춘풍원습화여해(春風原隰花如海) :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기름진 들 멀리 손바닥 모양 편편한데, 농부들 도롱

이 삿갓 쓴 채 구름 헤치며 밭을 간다. 봄바람 질펀한 들엔 꽃바다 이루었고, 밭머리선 꾀꼬리가 아래 위로 날며

운다." 하였다.

 

지증근해요어해(地曾近海饒魚蟹)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한 언덕 약간 높게 사면이 편편한데, 날 저물면 돌아

와서 외로운 정자에 올라본다. 이 지역 본래 바다와 가까워서 물고기ㆍ게가 풍부하고, 들엔 이미 가을 깊어 벼농

사로 가득 찼다. 구름 한 점 없는 긴 창공(蒼空)엔 기러기 그림자 머금었고, 조수 돌아온 옛 나루터선 용(龍) 비린

내 풍긴다. 내 집에 수경(數頃) 황무(荒蕪)한 밭이 있으니, 어느 날 찾아와서 백조(白鳥)와 맹약할꼬." 하였다.

 

[비고]

 

연혁 선조(宣祖) 29년에 개혁하여 직산(稷山)에 예속시켰으니, 왜구(倭寇)의 탕잔(蕩殘) 때문이었다.

광해군 2년에 다시 복귀시켰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처음은 1리, 동남쪽으로 끝은 25리. 동면(東面) : 끝이 8리. 서면(西面) : 끝이 7리.

남면(南面) : 끝이 2리. 북면(北面) : 끝이 8리. 소북(小北) :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 백랑부곡(白浪部曲)이다.

 

성지 고성(古城) : 당산(堂山)에 있는데, 성산(城山)이라고도 하며 옛터가 있다.

진도 군물진(軍勿津) : 통양성(通陽城)과 진위(振威)와의 사잇길이다.

지진(池津) : 소북면(小北面)과 수원지(水原地)로 통한다.

토산 게.

사원 포의사(褒義祠) : 현종 신축년에 세워졌고 숙종 갑신년에 사액되었다.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 : 모두 강화(江華)에 보임. 오달제(吳達濟) : 광주(廣州)에 보임.

 

 

홍산현 鴻山縣

 

동쪽으로는 부여현(扶餘縣) 경계까지 21리, 임천군(林川郡) 경계까지 18리이고,

남쪽으로는 한산군(韓山郡) 경계까지가 9리, 서천군(舒川郡) 경계까지 8리이고,

서쪽으로는 남포현(藍浦縣) 경계까지 16리, 비인현(庇仁縣) 경계까지 15리이고,

북쪽으로는 홍주(洪州) 경계까지 44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대산현(大山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산(翰山)이라 고쳐서 가림군

(嘉林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그 속현으로 삼았으며,

명종(明宗) 5년에 한산 감무(韓山監務)로 하여금 이를 겸임하게 하였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대산(大山)ㆍ한산(翰山).

 

성씨 본현 한(韓)ㆍ임(林)ㆍ양(凉)ㆍ순(荀)이 있으며 김(金) : 본적은 개경(開京). 박(朴)ㆍ경(京)ㆍ이(李) :

모두 속(續)이다.

 

산천 비홍산(飛鴻山) : 현 서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아미산(阿彌山) : 현 북쪽 37리에 있다.

천보산(天寶山) : 현 북쪽 13리에 있다. 만수산(萬壽山) : 현 북쪽 47리에 있다.

거차산(居次山) : 현 북쪽 26리에 있다. 귀산(龜山) : 현 북쪽 2리에 있다.

월명산(月明山) : 현 북쪽 9리에 있다. 미조천(彌造川) : 현 동쪽 15리에 있다. 월명산에서 발원하여,

임천군(林川郡) 구랑포(仇郞浦)로 들어간다.

금천(金川) : 현 남쪽 3리에 있다. 목촌동(木村洞)에서 발원하여 구랑포로 들어간다.

 

토산 옻칠[漆]ㆍ모시[苧]ㆍ복령[茯苓]ㆍ안식향(安息香)ㆍ게[蟹].

 

누정 징청루(澄淸樓) 객관 동북쪽에 있다. 현감 이의석(李宜碩)이 세웠다.

향청정(香淸亭) : 객관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숙홍역(宿鴻驛) : 옛날의 이름은 비웅(非熊)이었는데 우리 태종 원년에 지관(地官)의 말이, 본현의 형국이

나는 기러기의 형세가 있다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 동쪽 5리에 있다.

 

녹한원(鹿閒院) : 현 북쪽 21리에 있다. 광명원(廣明院) : 현 서쪽 9리에 있다.

율현원(栗峴院) : 현 북쪽 43리에 있다.

교량 신교(薪橋) : 금천(金川)에 있다. 현과의 거리는 7리이다.

불우 적선사(積善寺) : 천보산에 있다. 무량사(無量寺)ㆍ도솔암(兜率菴)ㆍ보현사(普賢寺) : 모두 만수산에 있다.

서운사(棲雲寺) : 천보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비홍산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비도소(非刀所) : 옛날에는 구참(鳩站)이라 일컬었는데, 현 북쪽 41리에 있다.

오합소(吾合所) : 현 남쪽 6리에 있다.

옛 읍성[古邑城] : 현 남쪽 6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30척에 높이는 7척이며,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고 군창(軍倉)도 있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 : 끝이 5리. 상동(上東) : 처음은 5리, 끝은 15리. 하동(下東) : 처음은 15리, 끝은 25리.

남면(南面) : 처음은 8리, 끝은 20리. 상면(上面) : 처음은 7리, 끝은 20리. 하서(下西) : 처음이 5리, 끝은 15리.

내북(內北) :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외북(外北) : 처음은 30리, 끝은 50리.

 

해안(海岸) :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대야곡 : 북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

성지 아미산성(峩眉山城) : 산남에 있으며 석성의 옛터가 있다.

사원 청일서원(淸逸書院) : 광해주 신유년에 세웠고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김시습(金時習) : 양주(楊州)에 보임.

○ 장렬서원(彰烈書院) : 숙종 정유년에 세웠고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윤집(尹集)ㆍ홍익한(洪翼漢) : 강화(江華)에 보임. 오달제(吳達濟) : 광주(廣州)에 보임.

 

 

덕산현 德山縣

 

동쪽으로는 예산현(禮山縣) 경계까지 23리이고, 남쪽으로는 홍주(洪州)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쪽으로는

해미현(海美縣) 경계까지 18리이고, 북쪽으로는 면천군(沔川郡) 경계까지 2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1리이다.

건치연혁 덕풍현(德豐縣)은 본래 백제의 금물현(今勿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금무(今武)라고 고쳐 이산군(伊山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에 와서 덕풍으로 고쳐 현종(顯宗)

때에는 운주(運州)에 붙였고, 명종(明宗) 때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이산현(伊山縣)은 본래 마시산군(馬尸山郡)이었는데, 신라에 와서 이산으로 고쳐 그대로 군(郡)으로 하였더니,

고려 현종 때에 홍주(洪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5년에 이산현의 인민과 형세가

피폐하였다 하여 드디어 두 개의 현을 합병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금물(今勿)ㆍ금무(今武)ㆍ덕풍(德豐)ㆍ이산(伊山)ㆍ마시산(馬尸山)

 

성씨 덕풍 황(黃)ㆍ송(宋)ㆍ이(李)ㆍ윤(尹). 이산 고(高)ㆍ오(吳)ㆍ문(文)ㆍ송(宋). 신곡(薪谷) 장(蔣).

 

형승 동쪽으로 큰 들을 끼고, 북쪽에 앵산(鶯山)을 등지고 있다 : 최지(崔池)의 기문에 있음.

 

산천 가야산(伽倻山) : 현 서쪽 11리에 있다. 해미현(海美縣)에도 나와 있다.

팔봉산(八峯山) : 현 남쪽 5리에 있다. 상왕산(象王山) : 현 북쪽 13리에 있다. 또 해미현에도 나와 있다.

덕숭산(德崇山) : 현 남쪽 12리에 있다. 대덕산(大德山) : 현 남쪽 8리에 있다.

앵산(鶯山) : 현 북쪽 4리에 있다. 대현(大峴) : 현 서쪽 18리에 있다.

온천(溫泉) : 현 남쪽 5리에 있다.

용연(龍淵) : 현 서쪽 12리에 있다. 날이 가물 때에 비를 빌면 매양 감응이 있다고 한다.

화척탄(禾尺灘) : 현 동쪽 16리에 있으니, 곧 신교천(薪橋川)의 하류이다.

정포도(井浦渡) : 현 동쪽 30리에 있다. 또 신창현(新昌縣)에도 나와 있다.

신교천(薪橋川) : 현 동쪽 17리에 있다. 홍주(洪州) 금마천(金馬川)의 하류이며, 정포로 들어간다.

사읍교천(沙邑橋川) : 현 동쪽 17리에 있다.

 

토산 지치[紫草]ㆍ옻칠[漆]ㆍ붕어[鯽魚]ㆍ숭어[秀魚]ㆍ뱅어[白魚]ㆍ백화사(白花蛇).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천 6백 55척에 높이는 9척이며, 그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으니,

곧 이산영(伊山營)이다.

정사 관가정(觀稼亭) : 현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 서쪽 5리에 있다.

역원 급천역(級泉驛) : 현 동쪽 8리에 있다. 봉용원(峯聳院) : 현 남쪽 5리에 있다.

교량 신교(薪橋)ㆍ사읍교(沙邑橋).

불우 가야사(伽倻寺) : 가야산에 있다.

수덕사(修德寺) : 덕숭산(德崇山)에 있는데 이 절에 취적(翠積)ㆍ불운(拂雲) 두 누각이 있다.

서림사(西林寺) : 상왕산에 있다. 용연사(龍淵寺) : 가야산에 있다.

수암사(水菴寺) : 팔봉산에 있다. 운암사(雲菴寺) : 상왕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동쪽 3리에 있다.

가야갑사(伽倻岬祠) : 현 서쪽 3리에 있다. 신라 때에 이를 서진(西鎭)으로 삼아 중사(中祀)로 기록되어 있는데,

본조에서는 그 고을로 하여금 춘추로 제사하게 하였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이산진(伊山鎭) : 고려 최영(崔瑩)이 이산(伊山)에 도절제사(都節制使)의 병영을 두도록 건의한 것인데,

본조 태종 16년에, 태안군(泰安郡)에 거둥하여 명하여 이 진영을 해미현(海美縣)으로 옮기고, 이산의 구영(舊營)

은 본현의 청사로 쓰도록 하였다.

 

옛 덕산[古德山] : 지금의 관청 북쪽 13리에 있다. 내박소(乃朴所) : 주 남쪽 18리에 있다.

신곡소(薪谷所) : 덕풍현(德豐縣)에 있다. 지금의 관청과 북쪽으로 17리 떨어진 곳이다.

 

제영 일계류수사위산(一溪流水四圍山) :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한 시내 흐르는 물은 사면으로 산을 두르고

있는데, 나 홀로 맑게 갠 창 아래 누워 발[箔]을 걷고 내다본다."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 백제의 마시산(馬尸山)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에 이산군(伊山郡)으로 고쳤다.

영현(領縣)이 둘인데, 금무(今武)ㆍ목우(目牛)이다.

순조 28년에 군수(郡守)로 승격시켰다 : 고려 공민왕 때 최영(崔瑩)이 건의하여 이산현(伊山縣)에 도절제사

(都節制使)를 세웠다. 본조 태조 2년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으로 고쳤다가 16년에 태안군(泰安郡)으로

행차하셨을 때 해미현(海美縣)으로 영을 옮기도록 명하였는데, 이산의 옛 영이 본현의 치소(治所)이기 때문이

었다.

 

방면 현내(縣內) : 끝이 16리. 나박소(羅朴所) : 옛날 내박소(乃朴所)인데 남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대덕산(大德山) :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 내야(內也) :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

외야(外也)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고현내(古縣內)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대조지(大鳥旨) : 동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장촌(場村) :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도용(道用) : 동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20리. 고산(高山) : 동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거등(居等)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25리.

비방곶(非方串) :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인데 홍주(洪州)ㆍ합덕(合德)의 동쪽 건너에 있다.

진도 돈곶진(頓串津) : 동쪽으로 40리에 있는데, 신창(新昌)으로 통한다.

삽교(揷橋) : 동쪽으로 15리인 선화천(宣化川) 큰길에 있는데, 고려 때는 신교천(新橋川)이라 하였다.

토산 게ㆍ감ㆍ포초(浦草).

 

 

청양현 靑陽縣

 

동쪽으로는 정산현(定山縣) 경계까지 21리이고, 남쪽으로는 부여현(扶餘縣) 경계까지 31리이고,

서쪽으로는 홍주(洪州) 경계까지 11리이고, 북쪽으로는 대흥현(大興縣) 경계까지 2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청무(靑武)로 고쳐 임성군(任城郡)의 속현

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는 천안부(天安府)에 붙였다가 뒤에 다시

홍주(洪州)로 이속시켰던 것을, 본조에서는 태조 4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이다.

군명 고량부리(古良夫里)ㆍ청무(靑武).

 

성씨 본현 이(李)ㆍ황(黃)ㆍ방(方)ㆍ송(宋)ㆍ손(孫) : 모두 촌(村)에 있다. 김(金)ㆍ이(異) : 모두 속(續)이다.

 

산천 우산(牛山) : 혹은 기룡산(騎龍山)이라고도 하는데, 현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칠갑산(七甲山) : 현 동쪽 15리에 있다.

백월산(白月山) : 혹은 비봉산(飛鳳山)이라고도 하는데, 현 남쪽 19리에 있다. 또 대흥현(大興縣) 산천 조에도

나와 있다.

 

구봉산(九峯山) : 현 서쪽 5리에 있다. 두타산(頭陁山) : 현 남쪽 10리에 있다.

묘산(猫山) : 현 북쪽 13리에 있다. 관비산(官婢山) : 현 남쪽 1리에 있다.

여도현(餘道峴) : 현 남쪽 10리에 있다. 대현(大峴) : 현 동쪽 15리에 있다.

오리현(吾里峴) : 현 서쪽 10리에 있다.

사자산(獅子山) : 현 북쪽 21리에 있다. 또 대홍현 산천 조에도 나와 있다.

어을항천(於乙項川) : 객관 동남쪽 1리에 있다. 즉 서천(西川)과 정산현(定山縣) 금강천(金剛川)의 하류이다.

서천(西川) : 객관 서쪽 1리에 있다. 오리현에서 나와 어을항천으로 들어간다.

 

토산 모시[苧]ㆍ지치[紫草]ㆍ게[蟹]ㆍ잣[海松子]ㆍ지황(地黃)ㆍ안식향(安息香).

 

누정 쌍청루(雙淸樓) : 권진(權軫)의 시에, "낯 위에 스치는 바람은 멀리서 불어오고, 마루 앞에 마주 뜬 달이

한없이 맑구나. 두 가지 맑은 천고의 이 땅, 취하여 쓴들 그 누가 다투리오." 하였다.

 

학교 향교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금정역(金井驛) : 현 남쪽 10리에 있으며, 승(丞)이 있다.

본도(本道)의 속역이 8개소이니,

광시(光時)ㆍ해문(海門)ㆍ청연(靑淵)ㆍ세천(世川)ㆍ용곡(龍谷)ㆍ몽웅(夢熊)ㆍ하천(下川)ㆍ풍전(豐田) 등이다.

 

○ 승(丞) 1인이 있다. 마양원(馬養院) : 현 남쪽 3리에 있다.

 

인려원(仁旅院) : 현 동쪽 17리에 있다. 간천원(乾川院) : 현 서쪽 19리에 있다.

가정자원(加亭子院) : 현 북쪽 20리에 있다.

불우 정련사(淨蓮寺)ㆍ백월암(白月菴) : 모두 백월산에 있다. 화정사(和鼎寺) : 구봉산에 있다.

장곡사(長谷寺) : 칠갑산에 있다. 운곡사(雲谷寺) : 사자산에 있다. 남산사(南山寺) : 관비산에 있다.

월산사(月山寺) : 백월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우산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영수부곡(永壽部曲) : 수(壽) 자는 혹 신(新) 자로 쓰기도 하는데, 현 북쪽 25리에 있다.

횡천소(橫川所) : 현 동쪽 18리에 있다. 예본부곡(乂本部曲) : 현 북쪽 20리에 있다.

우산성 (牛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천 2백 36척이다.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인물 고려 이자송(李子松) : 덕흥군(德興君)의 변란 때에 자송이 원(元) 나라에 있었는데, 원 나라 황제가 고려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덕흥군을 따라 본국으로 가라고 하는 것을 자송이 숨어서 따라가지 않고 오랫동안 북경에

살고 있으면서 전량(錢糧)이 모두 떨어져도 시종 그 절개를 변하지 않았고, 이미 돌아와서는 왕이 그 절의를

가상하게 여겨서 공신(功臣)의 칭호를 내렸다.

그 뒤에 신우(辛禑)를 간할 때에, "수렵과 놀이를 경계하고 술과 여색(女色)을 삼가십시오." 하였더니, 신우가

좋아하지 않아서 관직을 파면하고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최영(崔瑩)이 신우에게 요동(遼東)을

공격할 것을 권고함을 듣고, 자송이 최영의 집으로 가서 그 불가한 바를 극력 말하였다.

최영이 이 사실을 신우에게 고하며 임견미(林堅味)에게 아부한다 칭탁하고 그를 죽였다.

 

[비고]

 

연혁 현종 9년에 고쳐 정산(定山)에 예속시켰다가 15년에 다시 없애 버렸다.

방면 현내 : 끝이 5리이다. 동상(東上) :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동하(東下) : 처음은 7리, 끝은 20리이다.

남상(南上) :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남하(南下) :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서상(西上) : 서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서하(西下) :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북상(北上) :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북하(北下) : 동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 영수부곡(永壽部曲)의 수(壽) 자는 신(新)이라고도 하는데, 북쪽으로 25리에 있다. 또 본부 부곡은 북쪽으로

20리에 있으며, 횡천소(橫川所)는 동쪽으로 18리에 있다.

 

 

권 20 대흥현 大興縣

 

동쪽으로는 공주(公州) 경계까지 30리이고, 남쪽으로는 청양현(靑陽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쪽으로는 홍주(洪州)까지 9리이고, 북쪽으로는 예산현(禮山縣) 경계까지 19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2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임존성(任存城) : 금주(今州)라고도 했다. 이었는데,

신라 때에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운주(運州)

에 붙였다가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임존성(任存城)ㆍ금주(今州)ㆍ임성(任城).

 

성씨 본현 : 이(李)ㆍ한(韓)ㆍ장(張)ㆍ오(吳)ㆍ백(白). 거변(居邊) : 홍(洪)ㆍ이(李).

 

산천 봉수산(鳳首山) : 현 서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사자산(獅子山) : 현 동쪽 21리에 있다.

백월산(白月山) : 현 남쪽 19리에 있다. 금롱산(金籠山) : 현 남쪽 16리에 있다.

당산(堂山) : 현 동쪽 21리에 있다. 박산(朴山) : 현 동쪽 12리에 있다.

가차산(加次山) : 현 동북쪽 11리에 있다. 송림산(松林山) : 현 동쪽 19리에 있다.

비도현(飛到峴) : 현 동쪽 14리에 있다.

내천(奈川) : 현 동쪽 1리에 있다. 물의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청양현(靑陽縣) 어호동(於乎洞)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홍주(洪州) 여양현(驪陽縣)에서 나와서 신창현(新昌縣) 정포(井浦)로 들어간다.

 

경결천(京結川) : 현 동북쪽 6리에 있다. 바로 내천(奈川)의 하류이다.

죽천천(竹遷川) : 거변소(居邊所)에 있다. 현에서 동쪽으로 17리 떨어져 있으며,

청양현 어사현(於士峴)에서 발원하여 경결천으로 들어간다. 달천(達川) : 현 동쪽 17리에 있다.

 

토산 붕어[鯽魚]ㆍ게[蟹]ㆍ지황(地黃).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는 1115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정사 포정정(布政亭) : 객관 동쪽에 있다.

신증 관찰사(觀察使) 안침(安琛)이 견사정(見思亭)이라 이름을 고쳤다.

 

학교 향교 : 현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광시역(光時驛) : 현 남쪽 19리에 있다. 가방원(加方院) : 현 남쪽 2리에 있다.

교량 내천교(奈川橋) : 현 동쪽 2리에 있다. 거변교(居邊橋) : 달천에 있다.

금막천교(金莫川橋) : 현 북쪽 19리에 있다.

 

불우 대련사(大連寺) : 봉수산에 있다. 용흥사(龍興寺) : 사자산에 있다. 보광사(普光寺) : 백월산에 있다.

은사(銀寺) : 금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봉수산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당(唐)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이 성황사에서 기도하고 제사

하였다 한다. 봄ㆍ가을로 본읍에서 치제(致祭)한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임존성(任存城) : 이곳이 바로 백제의 복신(福信), 지수신(遲受信),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당 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와 항거하던 곳이다. 지금의 본현 서쪽 13리에 옛 돌성이 있는데, 그 주위가 5194척이며,

안에 세 개의 우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심컨대 이 성이 아닌가 한다. 부여 인물 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 고려 태조가 후백제(後百濟)의 임존성을 공격하여 형적(刑積) 등 3000여 명을 죽이고 잡았다.

 

거변소(居邊所) : 옛날에는 거질물소(居叱勿所)로 불리웠으며, 현 동쪽 21리에 있다.

 

인물 고려 한문준(韓文俊) : 천성이 고아(高雅) 정직하고 작문(作文)에 능하였으며, 인종(仁宗)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외임[外重]을 중히 여기던 시대였는데 장주(長州)ㆍ장흥(長興)ㆍ남원(南原) 3개

군의 부사(副使)와 남경 부유수(南京副留守)를 역임하면서 모두 어진 정사를 베풀었다. 그의 제자 오세재(吳世

才)의 시에 이르기를, "남쪽으로는 세 군의 사람들을 소식(蘇息)하게 하고, 동쪽으로 한 주(州)의 백성을 무애

(撫愛)하였다." 하니, 세상에서 이르기를, "사실을 기록한 말이다." 하였다.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

章事)에 이르렀다. 한취(韓就) :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이 문하성사(門下省事)에 이르렀다.

 

효자 고려 이성만(李成萬) : 성만이 그 아우 순(淳)과 더불어 모두 지극한 효성이어서 부모가 죽자,

성만은 아버지의 분묘를 지키고, 순은 어머니의 분묘를 지키면서 각각 애통과 경근(敬謹)을 다하였으며, 3년의

복제를 마치고는 아침에는 아우가 형의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형이 아우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의 음식이

생겨도 서로 모여 만나지 않으면 서로 먹지 않았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보고 되자 되어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열녀 고려 곽씨(郭氏) : 나이 19세에 박근(朴根)의 집으로 시집갔는데, 23세에 근이 죽으니, 3년간 여묘(廬墓)를

살고는 상을 마치고도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부모를 효성껏 받들면서 평생을 마쳤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보고되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관어지북인한천(觀魚池北引寒泉) : 이맹상(李孟常)의 시에, "포정정(布政亭) 동쪽에선 흰 달을 맞이하고,

관어지 북쪽에는 찬 샘물 끌어왔다."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는 백제의 지분촌(只分材)이었는데, 당(唐)이 지심(支潯)으로 고치고 지심주의 영현(領縣)으로 만들

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쳤다 : 영현(領縣)이 둘인데, 청정(靑正)ㆍ고산(孤山)

이다. 숙종 7년에 현종의 어태(御胎)를 묻어 군으로 승격시켰다.

 

방면 읍내 : 끝이 7리. 일남(一南) : 처음은 7리, 끝은 20리. 이남(二南) : 처음은 6리, 끝은 20리.

거변(居邊) : 동쪽으로 처음은 17리, 끝은 30리. 근동(近東) : 처음은 7리, 끝은 20리.

원동(遠東) :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내북(內北) : 처음은 10리, 끝은 19리.

외북(外北) : 서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사원 소도독사(蘇都督祠) : 대잠도(大岑島)에 있으며 고려 때부터 춘추로 향축(香祝 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을

내려 치제(致祭)한다. 소정방(蘇定方) : 당(唐) 고종 때 백제를 평정하였다.

 

 

비인현 庇仁縣

 

동쪽으로는 홍산현(鴻山縣) 경계까지 34리이고, 서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5리이고,

남쪽으로는 서천군(舒川郡) 경계까지 20리이고, 북쪽으로는 남포현(藍浦縣) 경계까지 9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9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비중현(比衆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서림군(西林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 가림현(嘉林縣)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명 비중(比衆).

 

성씨 본현 : 한(韓)ㆍ오(吳)ㆍ용(龍)ㆍ전(田)ㆍ강(康)이 있으며, 방(方) : 속(續)이다. 옥전(沃田) : 나(羅).

 

산천 월명산(月明山) : 현 동쪽 18리에 있다. 양의산(兩儀山) : 현 동쪽 12리에 있다.

 

어운현(於運峴) : 현 남쪽 9리에 있다. 둔덕현(屯德峴) : 현 동쪽 7리에 있다.

부소현(扶蘇峴) : 현 동쪽 33리에 있다. 고석현 (膏石峴) : 현 남쪽 3리에 있다.

도둔곶(都屯串) : 현 서쪽 26리에 있다. 장배곶(長背串) : 현 남쪽 19리에 있다.

하미도(河尾島) : 현 남쪽 6리에 있다. 바다[海] : 현 서쪽 5리에 있다.

연도(煙島) : 주위가 23리이다.

모도(茅島)ㆍ병루도(竝累島) : 이상의 두 섬은 모두 서해 가운데에 있는데, 조수가 나가면 육지와 연한다.

종천(鍾川) : 현 남쪽 13리에 있다. 현 동북쪽 9리에 있는 심동동(深動洞)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토산 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전복[鰒]ㆍ청어[靑魚]ㆍ홍어[洪魚]ㆍ모래무지[鯊魚]ㆍ오징어[烏賊魚]ㆍ

삼치[麻魚]ㆍ전어(錢魚)ㆍ조개[蛤]ㆍ민어(民魚)ㆍ농어[鱸魚]ㆍ낙지[絡締]ㆍ살조개[江瑤柱]ㆍ세모(細毛)ㆍ

김[海衣]ㆍ백화사(白花蛇)ㆍ대나무[竹], 대살[竹箭] : 현 동쪽 성 밑에서 난다.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505척에 높이는 12척이며, 안에 세 개의 우물이 있고, 바다 어구

까지는 160보(步)이다. 세종 3년에 여러 고을의 군정(軍丁)으로 하여금 이를 지키도록 하였다.

 

관방 도두음곶수(都豆音串戍) :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으며, 우도첨절제사(右道僉節制使)가 군사를 나누어서

이를 지킨다.

○ 우리 세종 원년에 왜(倭)의 선적 50여 척이 습격해 와서 도두음곶의 병선을 포위하고 불태우니, 만호(萬戶)

김성길(金成吉)이 그의 아들 윤(倫)과 더불어 왜적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성길은 창에 맞아 물로 떨어졌으나

발헤엄을 쳐서 죽음을 면하였다. 아들 윤은 적을 쏘아 3명을 죽였는데 그 아버지가 이미 물에 떨어지는 것을

돌아보고는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드디어 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봉수 칠지산 봉수(漆枝山烽燧) : 현 서쪽 7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서천군(舒川郡) 운은산(雲銀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남포현(藍浦縣) 통달산(通達山)과 호응한다.

 

정사 관해정(觀海亭) : 객관 북쪽에 있다. 신증 동백정(冬柏亭) : 도둔곶(都屯串)에 있다.

학교 향교 : 현 북쪽 2리에 있다. 신증 지금은 현 동쪽 3리로 옮겼다.

역원 청화역(靑化驛) : 현 남쪽 2리에 있다. 종천원(鍾川院) : 현 남쪽 13리에 있다.

독두등원(禿豆等院) : 현 동쪽 30리에 있다. 탑원(塔院) : 현 북쪽 2리에 있다.

신증 교량 개복석교(開福石橋) : 현 동쪽 15리에 있다. 종천석교(鍾川石橋) : 현 남쪽 13리에 있다.

 

불우 훈일사(訓逸寺)ㆍ보현사(普賢寺)ㆍ현풍사(玄風寺)ㆍ성불사(成佛寺) : 모두 월명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동쪽 2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고읍성(古邑城) : 하나는 현재 읍 동쪽 26리에 있는데, 토성(土城)으로 주위가 537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또 하나는 현재 읍 서쪽 2리에 있는데, 토성으로 주위가 828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못쓰

게 되었다. 옥전향(沃田鄕).

 

제영 일출청홍신기련(日出靑紅蜃氣連)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한 조각 높은 성이 바닷가를 굽어보고 있는데,

푸른 하늘은 물과 같고 물은 하늘 같구나. 바람 불어오니 끌어 밀려오는 조수 소리 장하고, 해 뜨면 청홍빛 신기

와 연한다. 작은 섬에 뜬구름은 암담(暗淡)한 연기요, 큰 고래 물거품을 희롱하니 눈더미가 무너지는 듯.

금 자라 등 위에 신선의 반려들이, 홍진(紅塵)속에 세어 빠진 살쩍[鬢] 보고 웃으리라." 하였다. 팔경(八景) 미망

대해(微茫大海)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만리 고래 물결에 만리의 하늘, 남명(南溟)으로 옮겨가는 붕새[鵬]

몇 3천을 활개쳐 날았던고. 맑고 깊은 곳에 신룡(神龍)이 졸고 있으리니, 우저(牛渚)의 신령한 물소뿔이라도 불

붙여 비추어보련다."하였다.

 

○ 이숙함(李淑瑊)의 시에, "바다 기운 망망한데 물이 하늘을 치니, 뒤집히는 집채 같은 물결이 만 천, 또 천이나

된다. 평생에 운몽(雲夢)의 호수 동정호를 삼켜보려고 한 것도 여덟 아홉 번이었지만, 이 바다를 대하니 흉금이

갑절이나 넓어지는구나." 하였다. 은영소도(隱映小島) : 서거정의 시에, "큰 자라 등에 얹혀 있는 자그마한 섬들

이 신기하게 푸른 파도 가운데 솟아있는데, 바다 기운 혼몽하게 종일토록 싸고 있다. 이 사이에 가장 기화(奇畫)

같은 장면이란, 맑게 갠 날 넘쳐 출렁대고 가는 비에 은은히 떠오르는 모습일세." 하였다.

 

○ 이숙함의 시에, "탄환같이 작은 섬들이 안중에 벌려 있는데, 갠 날도 담담한 조각구름이 싸고 있구나. 그대의

손을 빌려 이를 그림으로 만들어 보자고, 곧장 안개 비 내리는 아득한 그때를 기다리노라." 하였다.

 

중중신루(重重蜃樓) : 서거정의 시에, "구름 같은 파도, 눈같이 부서지는 물거품 이미 높이 솟고 있는데, 신기루

에 뜬구름은 다시 몇 층이던가. 늙은 용의 오묘(奧妙)한 술법인줄 알긴 하지만, 어찌하여 부르고 불러도 끝내

대답이 없느냐." 하였다.

 

○ 이숙함의 시에, "처음엔 산악같이 험준한 형세를 이루더니, 홀연히 경루(瓊樓) 다섯 층으로 변하였네. 해상의

신선이 정녕 저 조각한 난간에 의지하고 있으련만, 아마도 시끄러운 진세(塵世)가 싫어서 대답하지 않는 거겠지."

하였다.

 

점점나계(點點螺髻) : 서거정의 시에, "먼 산 봉우리 흰 구름 사이로 출몰하니, 부녀자들의 구름 모양의 쪽[髻鬟]

과도 같아 그 검은 빛이 차기만하다. 아득한 저 창파(蒼波) 약수(弱水)와 연했으니, 이 사이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였다.

 

○ 이숙함의 시에, "푸른 옥비녀 저 멀리 아득한 곳에 비꼈는데, 쪽 모양의 봉우리가 은은히 공중을 끊고 서 있는

듯 시원해 보인다. 짙은 단장 서자(西子 서시(西施))와도 비하리니, 이는 곧 서호(西湖)의 비 갠 뒤의 산의 모습

이라네." 하였다.

 

둔영수고(芚營戍鼓) : 서거정의 시에, "동해 바다도 이제는 깨끗이 숙청되어 풍파를 모르는데, 비휴(貔貅)같이

용감한 군대 엄히 지켜 소요스런 소리 다시 없다. 장군님 베개 높이 베고 깊은 졸음 들었는데, 때로 원문(轅門)의

북소리 울려 온다." 하였다.

 

○ 이숙함의 시에, "옛날에 고래가 바다에 뛰어나와 물결이 크게 일어나고, 화살도 나르노라 분분(紛紛)하여 온

땅이 시끄러웠다. 이젠 오늘의 태평한 기상을 알겠도다. 짧고 길게 경각(更刻)을 알리는 수자리의 북소리 한가

롭게 치는구나." 하였다.

 

연포귀범(煙浦歸帆) : 서거정의 시에, "한평생 이 몸에 한 양구(羊裘)를 걸치고, 금자라[金鰲]를 낚으려고 낚시질

을 일찍이 쉬지 않았다네. 반폭 대자리[籧篨]에 바람을 가득 싣고, 석양에 돌아가는 저 한 조각배여." 하였다.

 

○ 이숙함의 시에, "고기잡이의 저 도롱이를 아예 초구(貂裘 귀인들의 옷)와도 바꿀 생각 없이, 가는 비가 오나

바람 불어도 쉬려 하지 않았다네. 해 늦게 돌아가는 저 돛대 처소 정한 곳 없어서, 창망(蒼茫)한 바다 위에서 평생

을 외로운 배에 보냈구나." 하였다.

 

송평추월(松坪秋月) : 서거정의 시에, "해마다 8월이면 저 달 중천에 뜨는데, 양쪽 강 기슭 단풍은 나무마다 붉게

물들었네. 어느 곳 선객들이 쇠피리[鐵笛]에 손가락 짚어 희롱하였나. 밤 깊어가니 사람의 말 소리가 작은 정자

에서 새어 나온다." 하였다. ○ 이숙함의 시에, "엉긋한 소나무에 시원한 저 달 그림자 공중에 흔들리는데, 흰 새

날고 파도 치는 강가에는 연홍(軟紅 세상의 홍진)이 격했구나. 어찌하면 신선으로 옥피리[玉笛] 불게 하여,

용의 울음소리를 다시 파도 거품 속에서 들을 수 있을까." 하였다.

 

관사모종(觀寺暮鍾) : 서거정의 시에, "그 절 연하(煙霞) 속 몇 째 봉우리에 있었던고, 맑은 종소리 저 달을 흔들

고 평림(平林)으로 떨어지네. 유연(悠然)히 나로 하여금 깊은 반성 일으켜, 홍진(紅塵)속 10년간의 이 마음을 다

씻어 주는구나." 하였다.

○ 이숙함의 시에, "날 저물고 연기 깊어 먼 봉우리는 잃었어도, 종소리 맑게 울려 다시 절이 있음을 알았노라.

지팡이 붙들고 곧장 중을 찾아가서 한 번 조계수(曹溪水) 빌려 얻어 이 마음을 씻고 싶다."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 백제의 비물(比勿)이다 : 비중(比衆)이라고도 한다. 당(唐)의 빈문(賓汶)이라 하고,

웅주도독부(熊州都督府)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 : 끝이 7리. 동면(東面) :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서면 (西面) : 처음은 8리, 끝은 30리.

북면(北面) : 처음은 10리, 끝은 13리. 일방(一方) : 남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20리.

이방(二方) : 동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 옥전향(沃田鄕).

 

진보 마량진(馬梁鎭) : 서쪽으로 30리인 내도둔곶(內都屯串)에 있다. 효종 6년에 남포(藍浦)ㆍ광암(廣巖)으로

부터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옛 진(鎭)은 배를 놓아두는 데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한 사람이 있다.

○ 본진은 서천포(舒川浦)를 관리 한다.

토산 황각(黃角)ㆍ감.

 

 

남포현 藍浦縣

 

동쪽으로는 홍산현(鴻山縣) 경계까지 49리이고, 남쪽으로는 비인현(庇仁縣) 경계까지 40리이고,

서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7리이고, 북쪽으로는 보령현(保寧縣) 경계까지 9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4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사포현(沙浦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서림군(西林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 가림현(嘉林縣)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신우(辛禑) 때에 왜구(倭寇)의 침입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으므로 공양왕(恭讓王) 2년에

진성(鎭城)을 설치하고, 유리해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안집(安集)시켰다.

본조 태조 6년에 병마사 겸 판현사(兵馬使兼判縣事)를 두었더니,

세조 12년에 진(鎭)은 혁파하고 다른 예와 같이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사포(寺浦)ㆍ마산(馬山).

 

성씨 본현 : 임(任)ㆍ백(白)ㆍ이(李)ㆍ유(庾)ㆍ현(玄)ㆍ문(門).

 

형승 청연포(靑淵浦)는 바다와 통하고, 옥마산(玉馬山)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 김환(金丸)의 시다.

 

지련창해(地連蒼海) : 고득종(高得宗)의 시에, "땅이 다함에 창망한 바다와 연하였고, 마루 창을 여니 푸른 산과

마주본다." 하였다.

 

산천 구룡산(九龍山) : 현 서쪽 1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아미산(峩嵋山) : 현 동쪽 26리에 있다.

옥마산(玉馬山) : 현 동쪽 8리에 있다. 양각산(羊角山) : 현 동쪽 24리에 있다.

통달산(通達山) : 현 서쪽 33리에 있다. 성주산(聖住山) : 현 북쪽 25리에 있다.

 

바다 : 현 서남쪽 9리에 있다.

율도(栗島)ㆍ죽도(竹島)ㆍ거차라도(巨次羅島)ㆍ황죽도(黃竹島)ㆍ입죽도(立竹島) : 모두 서해 가운데 있다.

미조포(彌造浦) : 현 남쪽 30리에 있다. 성주포(聖住浦) : 현 서쪽 15리에 있다.

 

대천(大川) : 현 남쪽 20리에 있다. 성주산에서 발원하여 청연포(靑淵浦)로 들어간다.

청연포(靑淵浦) : 현 남쪽 23리에 있으니 대천의 하류이다. 또 서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토산 도루묵[銀口魚]ㆍ홍합(紅蛤)ㆍ청어(靑魚)ㆍ모래무지[鯊魚]ㆍ숭어[秀魚]ㆍ홍어(洪魚)ㆍ조기[石首魚]ㆍ

전복[鰒]ㆍ부레풀[魚鰾]ㆍ김[海衣]ㆍ오징어[烏賊魚]ㆍ전어(錢魚)ㆍ삼진[麻魚]ㆍ민어(民魚)ㆍ농어[鱸魚]ㆍ

조개[蛤]ㆍ살조개[江瑤柱]ㆍ참가사리[細毛]ㆍ대살[竹箭] : 입죽도에서 난다. 대나무[竹]ㆍ사기(沙器)ㆍ

백화사(白花蛇).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476척이며 높이는 15척이고, 안에 세 개의 샘이 있다.

관방 마량진(馬梁鎭) : 현 서쪽 33리에 있는데, 우도 수군첨절제사(右道水軍僉節制使)의 영문(營門)이 있으며,

그의 소관(所管)은 서천포(舒川浦)이다.

○ 첨절제사 1인이 있다. 신증 정덕(正德) 경오년에 비로소 돌로 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1371척에 높이는 9척

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봉수 통달산 봉수(通達山烽燧) : 남쪽으로는 비인현(庇仁縣) 칠지산(漆枝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여도점

(餘道岾)과 호응한다.

여도점 봉수(餘道岾烽燧) : 현 북쪽 8리에 있다. 서쪽으로는 보령현(保寧縣) 조침산(助侵山)과 호응하고, 남쪽

으로는 통달산(通達山)과 호응한다.

 

신증 궁실 객관(客館) : 최숙생(崔淑生)의 시에, "우뚝한 새 관우(館宇)에 단청(丹靑)이 타오르는 듯, 안중에

가득한 기관(奇觀)이 저 멀리 접하였구나. 사면으로 싸안은 것이 모두 푸른 산봉우리인데,

반쪽으로 보이는 광대한 물결은 바로 창망(滄茫)한 바다. 봄빛 흐르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양쪽 살쩍이 세였고,

나그네 길 분분(紛紛)한 속에 몇 단정(短亭)을 지났던고. 홀로 마루 창가에 의지하여 저 멀리 바라보니,

이 몸이 진정 한 개의 부평(浮萍)이로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남전역(藍田驛) : 현 남쪽 27리에 있다. 남천원(藍川院) : 현 남쪽 20리에 있다.

횡천원(橫川院) : 현 동쪽 20리에 있다.

 

불우 숭엄사(崇嚴寺) : 성주산에 있다. 영흥사(永興寺) : 아미산에 있다. 옥계사(玉溪寺) : 양각산에 있다.

성주사(聖住寺) : 성주산 북쪽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대랑혜화상(大朗慧和尙)의 탑비(塔碑)가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김부대왕사(金傅大王祠) : 옥마산 산마루에 있다.

 

고적 옛 남포[古藍浦] : 지금의 관아 남쪽 15리에 고현(古縣)의 유지(遺趾)가 있다.

박평소(樸坪所) : 현 동쪽 35리에 있는데, 지금은 심전리(深田里)라 부른다.

횡천소(橫川所) : 현 동쪽 21리에 있다.

 

인물 신라 백중학(白仲鶴) : 간관(諫官)이다.

고려 백임지(白任至) : 명종(明宗) 때에 여러 관직을 거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이르렀다.

백문절(白文節) : 백중학(白仲鶴)의 후손이다. 고종(高宗) 때에 과거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국학 대사성

(國學大司成)에 이르렀는데, 문사(文詞)가 풍부하여 붓만 대면 문장을 이루어서 당대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백이정(白頤正) : 백문절(白文節)의 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순일(純一) 중후(重厚)하여 재상의 기국(器局)이

있었는데, 여러 관직을 거쳐 첨의평리 상의도감사(僉議評理商議都監事)에 이르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당시 정(程)ㆍ주(朱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문이 비로소 중국에 행해지고 아직 동방에는 미치지 않았

었는데, 이정이 원(元) 나라에 있으면서 이를 얻어 배우고 돌아오자, 이제현(李齊賢)과 박충좌(朴忠佐)가 맨

먼저 스승으로 섬겨 그의 학문을 받았다.

 

제영 북고운생학(北顧雲生壑) : 이안우(李安愚)의 시에, "북녘을 돌아보니 구름이 깊은 구렁에서 생겨나오고,

남쪽으로 굽어보니 바다 물결이 하늘과 접했구나. 좋은 바람 때마침 스스로 이르니, 마음도 쾌하여 변방의 일

을 주획(籌劃)하는 누각에 앉아 있네." 하였다.

 

해근고다풍(海近苦多風)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만고(萬古)의 외로운 옛성이 있는데, 바깥 바다와 안의 산이

웅장도하다. 산 아지랑이 깊어 항상 비를 지어내고, 바다가 가까우니 바람 많은 것이 괴롭다.

소금 굽는 가마에선 불 때는 연기 하얗게 오르고, 어부의 마을은 반조(返照)로 붉게 물들어 있다. 대나무 숲속을

뚫고 지나가니, 푸른 눈 조각이 분분히 길 가운데 흩어지네." 하였다.

 

하증함담홍(霞蒸菡萏紅)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옛 고을 남해 가에 자리 잡으니, 안팎의 산과 물이 웅장도

하다. 섬에서 떠오르는 연기는 능히 비를 짓게 하고, 강가에 선 나무에는 바람도 쉬 생긴다.

물은 포도로 물들어 푸르렀으며, 안개는 연꽃을 찌어 붉었나. 흰모래 위 누른 대나무 숲길에, 이 몸 완연히

한 폭 그림 가운데 있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심전 (深田) : 본래는 박평(樸坪)의 치소였다. 동쪽으로 처음은30리, 끝은40리.

습의 (習衣) : 동남쪽으로 처음은 35리, 끝은 40리. 웅천(熊川)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5리.

읍내(邑內) : 끝이 5리. 불은(佛恩) : 동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고읍(古邑) : 동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신안(新安) : 서남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

북면(北面) : 처음은 3리, 끝은 15리.

○ 횡천소(橫川所)는 동쪽으로 21리이다.

 

토산 연석(硯石) : 성주산(聖住山)의 서쪽에서 나는데, 검정색으로 품질이 좋다.

비석(碑石) : 검정색으로 상품이다. 감ㆍ소금.

 

 

결성현 結城縣

 

동쪽으로는 홍주(洪州)경계까지 27리이고, 남쪽으로도 같은 주 경계까지 14리이고,

북쪽으로는 같은 주 경계까지 18리이며, 서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18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8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결기현(結己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결성군(潔城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현종(顯宗) 9년에는 운주(運州)에 붙였고, 명종(明宗) 2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결기(結己)ㆍ결성(潔城).

 

성씨 본현 : 장(張)ㆍ한(韓)ㆍ조(趙)가 있으며, 문(文) : 다른 데서 들어 왔다. 방(方) : 촌(村)에 있다.

 

산천 평산(枰山) : 현 북쪽 7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청룡산(靑龍山) : 고산(高山)이라고도 하는데 현 서북쪽

5리에 있다. 월산(月山) : 현 동북쪽 23리에 있다. 또 홍주(洪州)의 산천 조에도 나와 있다.

 

벽지산(碧池山) : 현 동쪽 13리에 있다. 적지산(迪只山)이라고도 한다.

오서산(烏棲山) : 현 동쪽 28리에 있다. 또한 보령현(保寧縣) 산천 조에도 나와 있다.

개산(蓋山) : 현 동북쪽 21리에 있다. 녹간산(鹿看山) : 현 서쪽 15리에 있다.

수음곶산(愁音串山) : 현 서쪽 13리에 있다. 관노산(官奴山) : 현 서쪽 6리에 있다.

 

바다 : 현 서쪽 18리에 있다. 죽도(竹島) : 현 서쪽 30리에 있다. 풍류도(風流島) : 현 동쪽 4리에 있다.

주흘천(朱訖川) : 현 동쪽 5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그 하나는 벽지산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평산

에서 나오는데,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용골천(龍骨川) : 현 북쪽 15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홍주(洪州) 월산(月山)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덕산현(德山縣)과의 경계인 수덕현(修德峴)에서 나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동산포(東山浦) : 현 동쪽 3리에 있다. 광천(廣川) : 현 동쪽 25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그 하나는

홍주 오사리(烏史里)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오서산에서 나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모신당포(母山堂浦) : 현 서쪽 22리에 있다.

○ 영락(永樂) 6년에 왜놈의 배가 와서 정박하고 있는 것을 현감 김비(金沘)가 여기서 싸워 물리쳤다.

 

장포(長浦) : 현 서쪽 21리에 있다.

석곶포(石串浦) : 현 서쪽 5리에 있는데, 전라도의 이전선(移轉船)이 돌아와서 정박하는 곳이다.

 

토산 대나무[竹]ㆍ대살[竹箭] : 죽도(竹島)에서 난다. 지황(地黃)ㆍ청옥(靑玉) : 현 북쪽 용골리(龍骨里)에서

난다. 도루묵[銀口魚]ㆍ청어(靑魚)ㆍ전어(錢魚)ㆍ삼치[麻魚]ㆍ살조개[江瑤柱]ㆍ낙지[絡締]ㆍ게[蟹]ㆍ

민어(民魚)ㆍ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모래무지[鯊魚]ㆍ오징어[烏賊魚]ㆍ농어[鱸魚]ㆍ부레풀[魚鰾]ㆍ

석굴[石花]ㆍ김[海衣]ㆍ전복[鰒]ㆍ황각(黃角).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325척에 높이는 9척이며, 안에 여섯 개의 우물이 있다.

봉수 고산 봉수(高山烽燧) : 남쪽으로는 홍주 흥양곶(興陽串)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홍주 고구산성(高丘山城)과 호응한다.

 

학교 향교 : 현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해문역(海門驛) : 현 북쪽 5리에 있는데, 태종 15년에 처음 설치하였다.

광천원(廣川院) : 광천(廣川) 기슭에 있다.

불우 고산사(高山寺) : 청룡산에 있다. 정암사(正菴寺) : 오서산에 있다. 석령사(錫鈴寺) : 월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서쪽 1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모산당(母山堂) : 모산당포(母山堂浦)에 있다. 남당(南堂) : 현 동쪽 6리에 있다.

고적 안흥부곡(安興部曲) : 현 서쪽 18리에 있다.

신금성(神衿城) : 현 북쪽 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주위가 1350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명환 본조 이첨(李詹) : 고려 말기에 감무(監務)가 되었다.

인물 고려 장후(張厚).

 

제영 성보갱인연(城堡更人煙) : 이첨(李詹)의 시에, "풍진(風塵) 일어 일찍이 싸움하던 땅에, 성보 쌓아 다시

인가의 연기 오른다. 수자리의 저 피리는 성루(城樓) 위에서 부는데, 고기잡이 하던 배는 언덕 가에 버려 두었

구나." 하였다.

 

일침심군도외(日沈群島外) : 이안우(李安愚)의 시에, "나그네 길 어언 3월도 중순, 난립한 산봉우리 앞의 석보

(石堡)를 찾았다. 울타리 가의 복사꽃은 비 맞아 더욱 아름답고, 교외의 빈터엔 꽃다운 풀들이 연기처럼 덮혀

있네. 해는 수많은 섬 밖으로 잠기고, 새는 끊어진 구름 속으로 날아 없어진다.

백 년간 흥하고 망한 이 성에, 올라보고 개연(慨然)한 한숨을 절로 지었다." 하였다.

 

창해격운연(蒼海隔雲煙) : 김백영(金伯英)의 시에, “외로운 성에는 일월(日月)도 한가한데, 창망한 바다는 운연

으로 막혔구나." 하였다.

 

풍범궤안전(風帆几案前) : 안순(安純)의 시에, "바다 섬들이 마루 창 아래에 깔려 있고, 바람 돛대가 궤안(几案)

앞에 떠있구나. 외로운 성을 쌓인 눈이 안계를 미혹하게 하고, 큰 교목(喬木)들은 찬 연기를 띠고 있네. 백성들

을 다스려 구할 술책은 없건만, 어느 때나 임(임금) 계신 곁에 가게 될까. 삼봉(三峯)이 갈수록 점점 멀어지니,

서리 내린 살짝이 스스로 날린다." 하였다.

 

[비고]

 

연혁 영종 9년에 보령(保寧)에 예속시켰다 : 아비를 죽인 죄인 때문이었다. 12년에 다시 나누었다.

 

방면 현내(縣內) : 끝이 5리. 기곡(己谷) :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

가차산(加次山) : 남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

광천(廣川) : 동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두척(斗尺)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굴항(●項)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7리. 화산(花山) :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5리.

고등산(古等山)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합서(合西) : 서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

○ 상서(上西)ㆍ하서(下西) 두 면을 합쳤다.

○ 안흥부곡(安興部曲) 서쪽 18리에 있다.

 

 

보령현 保寧縣

 

동쪽으로는 청양현(靑陽縣) 경계까지 47리이고, 홍주(洪州) 경계까지 32리이고,

남쪽으로는 남포현(南浦縣) 경계까지 29리이고, 서쪽으로는 해안까지 19리이고,

북쪽으로는 결성현(結城縣) 경계까지 2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0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신촌현(新村縣) : 사촌(沙村)이라고도 하였다. 이었는데, 신라 때에 신읍(新邑)이라 고쳐

결성군(潔城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는 운주(運州)에 붙였고, 예종(睿宗) 원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신촌(新村)ㆍ신읍(新邑).

 

성씨 본현 : 장(張)ㆍ최(崔)ㆍ이(李)ㆍ임(任)이 있으며, 문(文)ㆍ진(陳)ㆍ나(那)ㆍ유(兪)ㆍ신(申)ㆍ김 (金) :

모두 촌에 있다.

 

형승 땅이 협소하고 서해[鰈海]가에 위치해 있다 : 정대(鄭帶)의 기문에 있다.

 

산천 당산(唐山) : 현 동북쪽 4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지을현(地乙峴) : 현 동쪽 5리에 있다.

오서산(烏棲山) : 현 북쪽 17리에 있다. 아현(我峴) : 현 서쪽 12리에 있다.

타고도산(打鼓島山) : 현 서쪽 43리에 있다. 사읍현(沙邑峴) : 현 남쪽 9리에 있다.

백월산(白月山) : 현 동쪽 25리에 있다. 바다 : 현의 서남쪽은 모두 바다이다.!

대천(大川) : 현 남쪽 24리에 있는데, 백월산에서 발원하여 해소포(蟹所浦)로 들어간다.

해소포(蟹所浦) : 현 남쪽 24리에 있으니, 대천의 하류이다. 죽도(竹島) : 현 서쪽 19리에 있다.

송도(松島) : 현 서쪽 22리에 있다. 주위가 12리이며, 조수가 물러가면 고만도(高巒島)와 연하게 된다.

고만도(高巒島) : 현 서해 22리 지점에 있는데, 옛날에 군사가 지키던 곳에 민간인의 집이 있다.

 

○ 고려 최해(崔瀣)가 일찍이 이 고을로 좌천되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외로운 도서(島嶼) 위를 오가면서,

타향에 기식(寄食) 하고 아침저녁을 보낸다. 아낙네들은 키가 작아서 다니는 것이 흡사 자라[鱉]와 같고,

백성들이 곤궁하고 보니 그 모습이 원숭이 방불하구나. 풍속은 비록 그 습상(習尙)의 잘못은 있어도, 예절만은

간혹 존비(尊卑)를 분간한다. 해 떨어지니 비린내 풍기는 바다 연기 모아들고, 가을 기운 이미 서늘한데도 해상

의 장기(瘴氣)는 훈훈하다. 바다 가운데 위태한 봉우리는 조심조심 서 있는 것 같고, 포구(浦口)의 맑은 물은

한층 더 꿈틀꿈틀 흐른다. 배 돛대의 모습이 물속에 박히니 하늘 그림자를 갈라 놓고, 모래 쌓여 있어 지나간 물

흔적을 알겠도다. 바다 지리는 옛것을 가지고 징험하겠고, 조숫물의 역수(曆數)는 지금 사람들에게 번거롭게

물어본다. 늙은 나무는 바람이 싫어서 구부리고 있나. 놀란 물결 암석을 만나 시끄럽게 소리낸다.

중과 이웃하여 지식(止息)을 같이하니, 세상과 더불어 시끄러운 잡음이 막혔도다. 낚싯대 잡고 때를 어찌 견디어

기다리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멀리 뜨는 것도 또 흥취 있으리라. 이 긴 노래를 누가 화답하리요. 긴 한숨 짓고 말

하지 않으련다. 다만 이 연파(煙波)를 즐기는 것도, 오히려 성주(聖主)의 은택임을 믿노라." 하였다.

 

모도(茅島) : 현 북쪽 12리에 있다. 용연(龍淵) : 현 북쪽 15리에 있다. 또 현 동쪽 15리에 역시 용연이 있는데,

모두가 날이 가물면 비를 비는 곳이다.

 

토산 지치[紫草]ㆍ모래무지[鯊魚]ㆍ홍어(洪魚)ㆍ청어(靑魚)ㆍ석굴[石花]ㆍ조기[石首魚]ㆍ삼치[麻魚]ㆍ

전어[錢魚]ㆍ준치[眞魚]ㆍ숭어[秀魚]ㆍ도루묵[銀口魚]ㆍ살조개[江瑤柱]ㆍ민어(民魚)ㆍ농어[鱸魚]ㆍ

오징어[烏賊魚]ㆍ전복[鰒]ㆍ조개[蛤]ㆍ낙지[絡締]ㆍ참가사리[細毛]ㆍ김[海衣]ㆍ안식향(安息香).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109척에 높이는 12척이며, 안에 세 개의 우물이 있다.

 

관방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병영(兵營) : 현 서쪽 20리에 있다.

○ 절도사(節度使)와 우후(虞侯) 각 1명이 있다.

 

신증 정덕(正德) 경오년에 비로소 돌로 성을 쌓았는데, 그 주위는 3174척에, 높이는 11척이고, 안에 네 개의

우물과 한 개의 못이 있다.

 

봉수 조침산 봉수(助侵山烽燧) :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남포현(藍浦縣) 여도점(餘道岾)과 호응하고, 서쪽으로는 홍주(洪州) 흥양곶(興陽串)과 호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 정대(鄭帶)의 <동헌기(東軒記)>에, "보령(保寧)이 경인년부터 바다 도적의 해를 입어 우리

태조 경진년에 봉당(鳳堂)에 성을 쌓고는 이를 방어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러나 성지(城池)가 얕고 좁은 데다

가 험준하고 조격(阻隔)한 공고(鞏固)함과 우물을 보유하는 편리한 점이 없더니, 세종 경술년 가을에 순찰사

(巡察使) 최윤덕(崔潤德)이 감사(監司) 박안신(朴安信), 원융(元戎) 이흥발(李興發)과 더불어 다시 성 동쪽 1

리 지점인 지내동(池內洞) 당산(唐山) 남쪽을 살펴보고는, 서산 군사(瑞山郡事) 박눌생(朴訥生)과 현수(縣守)

박효함(朴孝諴)으로 하여금 공역을 헤아려 기한을 명하였던 바, 수 개월이 못 되어 낙성(落成)을 고하게

되었다.

내가 신해년 겨울에 박현수를 대신하여 이 고을에 왔고, 다음 해에 비로소 객관과 동서름(東西廩)ㆍ제민당

(濟民堂)ㆍ공아(公衙)ㆍ현사(縣司)ㆍ어풍정(馭風亭)ㆍ병기고(兵器庫)ㆍ영어(囹圄 옥(獄)) 등을 지어 이루니,

모두 140여 칸에 달하였다." 하였다.

 

누정 어풍정(馭風亭) : 객관과 동헌(東軒) 북쪽에 있다.

박눌생(朴訥生)의 기문에, "신해년에 온천(溫泉 본관) 정공(鄭公) 대(帶)가 이 고을의 수령이 되어 왔는데,

그 정사가 청렴하고 송사를 잘 다스리니, 백성들이 즐겨 역사에 달려가서 관우(館宇)와 공청(公廳)을 한결같이

모두 신축하였고, 또 동쪽 봉우리 위에 정자를 짓고는 도식(塗飾)과 단청(丹靑)을 이미 마치고 나서 나에게 명명

(命名)해 주기를 청해 왔는지라, 내 그 경치를 보려고 처음 정자 위에 올라 보니, 북쪽으로 높은 산에 의거하고,

남쪽으로는 큰 들을 내려다 보고 있어 누정의 마루가 시원하고 처마도 나는 듯이 높이 솟아서 마치 구산(緱山)

산마루에 올라 낭풍(閬風 산이름)을 제어해 보는 것 같았으므로, 이름하기를 어풍(馭風)이라 하였다고 하였는데,

해가 오래되고 퇴락하여 현감 박적손(朴迪孫)이 이를 중수(重修)하니, 관찰사(觀察使) 정미수(鄭眉壽)가 이름을

무이정(撫夷亭)이라고 고쳤다." 하였다.

 

제민당(濟民堂) : 현 북쪽 성안에 있다.

환영루(環瀛樓) :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병영 안에 있다. 유제(柳睇)가 세웠다. 신증 이의무(李宜茂)의 시에,

"한가하여 높은 누정에 올라 먼 눈길 시원하게 바라보니, 고래 희롱하는 물결 호호(浩浩) 망망(茫茫)하게 하늘과

접해 떠 있구나. 현포(玄圃)로 신선 찾아 마냥 술 마시고서, 푸른 용[蒼虯] 잡아 타고 마음껏 멀리 놀고 싶다.

우연히 만난 옛벗 푸른빛이 눈에 가득 차 있는데, 탐승(探勝)에 지쳐버린 먼 길손 흰 것이 온통 머리를 덮었다네.

참 신선이 어디 있기에 돌아오는 것이 이다지 늦으랴. 부자유한 진세의 번롱(樊籠)을 그대는 응당 웃으리라."

하였다.

 

신증 영보정(永保亭)ㆍ빙허당(憑虛堂) : 모두 수사(水使)의 영(營)안에 있다.

○ 박은(朴誾)의 시에, "땅은 절박해 다하여도 천경(千頃)의 바다는 궁하지 않아서, 산을 열어 오히려 한 머리의

조수(潮水)를 받아 들이고 있구나. 빠른 바람이 안개를 쫓으니 물은 거울 같은데, 주저(洲渚)가에 사람 없이 새

들만이 스스로 노래 부른다. 나그네 길에 맑은 경치 만나면 매양 한탄을 일으키는 법, 해(임금) 있는 곳 바라보고 다시금 고향이 먼 것을 깨달았다. 고심(苦心)해 읊으며 떠나지 못해도 새로운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떨어지는 해 먼 하늘 가로 빠지는 것을 수심에 찬 채 바라보고 있노라." 하였다.

 

○ "늦 조수 오는 곳에 잠깐 베개에 기대고 있다가, 눈을 들고 홀연히 주저(洲渚)가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아침저녁으로 정녕 누가 호흡하도록 하는 것이겠지. 저 하늘과 땅도 마침내는 또한 찼다가는 기우는 일이 있으리라. 남녘 사람들 바다에 뜨면 육지에 말 걸어가듯 하고, 물 나라[澤國]에서도 봄을 만나더니 날이 조금은 개는구나. 날마다 누각에 의지하곤 내려갈 줄 모르니, 괴상한 음성 때로 백구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하였다.

 

○ "평생 병든 눈이 먼 조망(眺望)을 겁내어, 심장(尋丈 심은 8척이고 장은 10척을 말한다)의 사이조차 분별하지 못하였다. 새가 지나가면 오히려 한 점의 눈[雪]인가 의아했고, 산이 비껴 있는 것을 다시 구름더미로 착각도 했다. 서녘 하늘 가에 떨어지는 해는 빨리 서로 옮겨가고, 공허한 저 속에는 별들이 더욱 스스로 분분히 번쩍인다. 책상에 기대어 어두운 하늘 보고 있노라면 문득 졸음을 이루나니, 다만 낭연(琅然)한 쇠거문고 소리가 들을 만하구나." 하였다.

 

○ "땅의 형세는 탁탁 치며 곧 날려는 날개와 같고, 누정의 모양은 한들한들 매여 있지 않은 돛대와도 같다. 북녘

으로 구름에 쌓인 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디로 향하려는 것이냐. 남방으로 오면 둘러싸인 산천 예가 가장 웅장

하구나. 바다 기운은 안개를 빚어 비를 이루고, 파도의 기세는 하늘을 뒤집을 듯 스스로 바람을 일으킨다.

어두운 속에서도 새들이 서로 부르짖는 소리를 듣는 듯하여, 앉아 있는 사이에 지경이 함께 비어 있음을 완전히

깨달았노라." 하였다.

 

○ "아름답지 않은가. 내가 아침에 홀로 와서 글 읊는 곳에, 한 낚시대만큼 솟아오른 첫 아침해가 발을 비쳐주네.

바람 돛대는 언제나 조수와 함께 올라오고, 어민(漁民)의 집들이 모두 굽어보고 있으니 언덕이 기울려 한다.

비 온 뒤의 바다와 산은 모두 수려한 빛을 띄고 있고, 봄이 돌아오니 금조(禽鳥)들은 스스로 그 소리를 화답하네.

나그네 길에서도 기이한 승경(勝景) 만나면 오히려 좋은 구절 나오기를 기다리나니, 승평한 세월의 문장이라

하여 명성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니로세." 하였다.

 

학교 향교 : 본현 동쪽에 있다.

 

역원 청연역(靑淵驛) : 현 남쪽 6리에 있다. 우이현원(牛耳峴院) : 현 동쪽 27리에 있다.

보원(寶院) : 보원부곡(寶院部曲)에 있다. 가두원(加頭院) : 현 남쪽 20리에 있다.

 

불우 사나사(舍那寺) : 백월산에 있다. 성당사(聖堂寺) : 오서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지을현(地乙峴)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봉당성(鳳堂城) : 지금의 관아의 서쪽 2리에 있다. 현하부곡(懸河部曲) : 현 남쪽 28리에 있다.

보원부곡(寶院部曲) : 현 동쪽 17리에 있다.

금신부곡(金神部曲) : 현 서쪽 13리에 있다. 건자산소(巾子山所) : 현 북쪽 20리에 있는데, 지금은 청소리

(靑所里)라 부른다.

 

당산성(唐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8백 10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아현산성(我峴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7백 45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제영 죽오풍경침(竹嗚風警枕) : 유원순(兪元淳)의 시에, "낮에 해풍군(海豐郡)을 출발하여, 저물어서야 보령에

이르렀다. 대가 바람에 울며 베개 가를 흔들어 깨우더니, 구름이 비로 눈물을 뿌려 나의 길을 머물게 했다.

저녁 연하(煙霞) 깊이 끼어 머리가 다시 무거웠는데, 아침해 돋아 오르니 뼈가 잠시 가벼워 지는 듯하다.

이 몸이 늙고 병들고 보니, 비로소 음청(陰晴)만을 풀어 점치는 까닭을 알겠도다." 하였다.

 

[비고]

 

연혁 효종 3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서 부사(府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6년에

다시 전처럼 현으로 강등시켰다.

 

방면 장척(長尺) : 끝이 5리. 금신(金神) : 본래 금신부곡(金神部曲)이었다. 서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

주포(周浦) : 남쪽으로 끝이 10리. 목충(睦忠) : 동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

청라동(靑蘿洞) :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 오산외(烏山外)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명암(鳴巖) : 동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 현하부곡(縣河部曲)은 남쪽으로 28리, 보원부곡(寶院部曲)은 동쪽으로 17리이며,

중자산소(中子山所)는 북쪽으로 20리이다.

 

성지 당산고성(唐山古城) : 둘레가 1810척이고, 우물이 하나다. 아현고성(我峴古城) : 둘레가 745척이다.

영아 수영(水營) : 서쪽으로 20리인 해변에 있다. 본조 태조 5년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두어 보령

(保寧)을 관리하였다.

세종(世宗) 3년에 도안무처치사(都安撫處置使)로 고쳤다가 세조 12년에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고쳤다.

 

관원 충청도 수군절도사 중군(中軍) : 바로 수군의 우후(虞侯)다. 각 1인. 속읍 홍주(洪州)ㆍ태안(泰安)ㆍ

서산(瑞山)ㆍ당진(唐津)ㆍ면천(沔川)ㆍ서천(舒川)ㆍ임천(林川)ㆍ한산(韓山)ㆍ비인(庇仁)ㆍ남포(藍浦)ㆍ

보령(保寧)ㆍ결성(結城)ㆍ해미(海美).

속진 영보정(永保亭)ㆍ관덕루(觀德樓)ㆍ대변루(待變樓)ㆍ능허각(凌虛閣).

 

○ 고소대(姑蘇臺) ㆍ이오도(離鰲島)ㆍ한산사(寒山寺).

 

본 영(營)과 속읍(屬邑)ㆍ속진(屬鎭)은 가지가지 모양의 전선(戰船) 92척을 가지고 있다 : 진(津)의 배는 40척

이다.

토산 감ㆍ전죽(箭竹).

 

사원 화암서원(花巖書院) : 광해주 경술년에 세워졌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되었다.

이지함(李之菡) : 자는 향백(馨白), 호는 토정(土亭),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벼슬은 아산 현감(牙山縣監)이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이산보(李山甫) : 서천(舒川)에 보임.

이몽규(李夢奎) : 자는 창서(昌瑞), 호는 천휴당(天休堂), 본관은 경주이다.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다.

 

 

아산현 牙山縣

 

동쪽으로는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40리이고, 남쪽으로는 신창현(新昌縣) 경계까지 16리,

온양군(溫陽郡) 경계까지 18리이고, 서쪽으로는 면천군(沔川郡) 경계까지 32리이고,

북쪽으로는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4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아술현(牙述縣)이었는데, 신라 때에는 음봉(陰峯) : 음잠(陰岑)이라고도 했다.

이라 고쳐 탕정군(湯井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는 인주(仁州)로 고쳤으며,

성종(成宗) 14년에 자사(刺史)를 두었더니, 목종(穆宗) 8년에 다시 이를 폐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붙였다가 뒤에 아주(牙州)로 고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예에 따라 현감으로 하였는데,

세조 5년에 현을 줄여서 온양ㆍ평택ㆍ신창 등 세 고을에 나누어 붙였다가 11년에 복구하였다.

관원 현감과 훈도 : 각 1인.

신증 연산군(燕山君) 을축년에 경기로 이속시켰던 것을 금상 초년에 환원되었다.

군명 아술(牙述)ㆍ음봉(陰峯)ㆍ음잠(陰岑)ㆍ인주(仁州)ㆍ영인(寧仁)ㆍ아주(牙州).

 

성씨 본현 : 이(李)ㆍ강(康)ㆍ백(白)ㆍ전(全)ㆍ유(兪)ㆍ신(申)ㆍ현(玄) 씨가 있고, 장(蔣)ㆍ신(申)ㆍ이(李)ㆍ

강(康)ㆍ현(玄)ㆍ유(兪)ㆍ윤(尹) : 모두 촌에 있다. 임(林) : 본적은 개경(開京). 덕천(德泉) 유(兪)ㆍ이(李)ㆍ

안(安)ㆍ강(康).

 

형승 수많은 산봉우리가 교착(交錯)하여 대치해 섰고, 두 시냇물이 돌아 흐른다 :

정이오(鄭以吾)의 여민루(慮民樓) 기문에 있다.

 

산천 신성산(薪城山) : 현 서쪽 5리에 있다. 동림산(桐林山) : 현 남쪽 7리에 있다.

고용산(高勇山) : 현 북쪽 12리에 있다. 동심산(東深山) : 현 동쪽 5리에 있다.

연암산(鷰巖山) : 현 동쪽 29리에 있다. 입암산(笠巖山) : 현 서쪽 12리에 있다.

 

바다 : 현 서북쪽 15리에 있다. 창정지(倉正池) : 현 북쪽 11리에 있다.

장자지(長者池) : 현 남쪽 18리에 있다.

대내산진(大迺山津) : 현 서쪽 10리에 있다. 경기 안성군(安城郡)에서 발원하여 뭇 지류를 받아들여 이 나루가

되었다. 개포진(介浦津) : 현 서쪽 13리에 있다.

 

시진(市津) : 현 북쪽 26리에 있다.

당포(堂浦) : 현 북쪽 16리에 있다. 봉화천(烽火川) : 현 남쪽 15리에 있다. 전의현(全義縣)에서 발원하여 견포

(犬浦)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백옥(白玉) : 소암리(所巖里)에서 난다. 옥돌[玉石] : 고현(羔峴)에서 난다.

수정(水晶) : 불장원리(佛藏院里)에서 난다.

황소어(黃小魚)ㆍ세미어(細尾魚)ㆍ조기[石首魚]ㆍ웅어[葦魚]ㆍ뱅어[白魚]ㆍ새우[鰕]ㆍ백화사(白花蛇)ㆍ

숭어[秀魚].

 

봉수 연암산 봉수(鷰巖山烽燧) : 남쪽으로는 천안군(天安郡) 대학산(大鶴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직산현(稷山縣) 망해산(望海山)과 호응한다.

 

학교 향교 : 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장시역(長時驛) : 현 북쪽 2리에 있다. 불장원(佛藏院) : 현 남쪽 6리에 있다.

요로원(要路院) : 현 동쪽 22리에 있다. 흥인원(興仁院) : 현 북쪽 5리에 있다.

창고 공세곶창(貢稅串倉) : 현 서쪽 10리에 있다.

본현 및 서산(瑞山)ㆍ한산(韓山)ㆍ연산(連山)ㆍ임천(林川)ㆍ정산(定山)ㆍ공주(公州)ㆍ홍주(洪州)ㆍ신창(新昌)ㆍ

결성(結城)ㆍ보령(保寧)ㆍ전의(全義)ㆍ청양(靑陽)ㆍ이산(尼山)ㆍ대흥(大興)ㆍ석성(石城)ㆍ해미(海美)ㆍ

태안(泰安)ㆍ천안(天安)ㆍ비인(庇仁)ㆍ은진(恩津)ㆍ목천(木川)ㆍ면천(沔川)ㆍ연기(燕岐)ㆍ덕산(德山)ㆍ

서천(舒川)ㆍ직산(稷山)ㆍ홍산(鴻山)ㆍ부여(扶餘)ㆍ남포(藍浦)ㆍ예산(禮山)ㆍ당진(唐津)ㆍ평택(平澤)ㆍ

온양(溫陽)ㆍ청주(淸州)ㆍ문의(文義)ㆍ회덕(懷德)ㆍ진잠(鎭岑)ㆍ옥천(沃川)ㆍ회인(懷仁) 등 여러 고을의 세곡

을 이곳에 수납하였다가 조운(漕運)하여 서울로 가니, 수로의 거리가 무릇 500리이다.

신증 옛날에는 창고가 없었는데, 가정(嘉靖) 계미년에 비로소 집을 지으니 무릇 80칸이었다.

 

불우 동림사(桐林寺)ㆍ신심사(神心寺)ㆍ축봉사(縮鳳寺)ㆍ보림사(寶林寺)ㆍ현암사(懸巖寺) : 모두 동림산에 있다.

동심사(桐深寺)ㆍ연암사(燕巖寺)ㆍ개현사(開現寺)ㆍ용화사(龍華寺) : 모두 연암산에 있다.

관서사(觀西寺)ㆍ고정사(高井寺) : 모두 고용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동남쪽 5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황촌부곡(黃村部曲) : 현 북쪽 15리에 있다. 덕천향(德泉鄕) : 현 동쪽 20리에 있다.

불암(佛巖) : 동림산 동북쪽 기슭에 있으니, 본현과의 거리는 5리이다. 그 바위가 산봉우리 위에 널려 있는 것이

거의 수리(數里)나 되는데, 가장 큰 것의 형상이 부처와 유사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이름한 것이다.

속설에 이르기를, "이 바위로 인하여 수령은 어리석은 미치광이가 되고, 향리(鄕吏)들은 모두 흉악하고 간사하다."

는 것이다. 세조(世祖) 때에, 관찰사 황효원(黃孝源)이 대신(大臣)의 뜻을 받아 조정에 아뢰어 현(縣)을 감생(減省)

시키고 그 땅을 세 개로 구분하여 온양ㆍ평택ㆍ신창에 붙이고는 그 관사(館舍)와 관전(官田)을 황수신(黃守身)

에게 내려주었다. 본읍 사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구(金鉤), 전 청산 현감(淸山縣監) 조규(趙圭) 등의 상언

(上言)을 여러 해를 두고 윤허하지 않았는데, 성화(成化) 을유년에 세조가 온양에 거둥하매, 조규 등이 다시 거듭

호소하므로 거가를 따라갔던 종친과 재상 등에게 명하여 현지에 가서 상황을 살피고, 드디어 다시 현을 두었다.

어떤 사람이 일찍이 그 바위에 글을 쓰기를, "괴석(怪石)이 신기한 부처를 이루어, 3년 동안에 다섯 원을 갈려

보냈다네. 강 바람이 부끄럼이 있다면, 눈을 몰아쳐 산의 얼굴을 가리우리라." 하였다.

 

여민루(慮民樓) : 객관 북쪽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기문(記文)에 "영락(永樂) 을미년 여름에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유현(兪顯) 군이 아산

지도(牙山地圖)를 받들고 와서 호정공(浩亭公 하륜(河崙))을 뵙고 말하기를, '아산은 현(顯)의 외가 고장입니다.

지금의 현감 최후(崔侯) 안정(安正)이 계사년에 비로소 본관에 이르러 백성들에게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여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나타났으며, 그 다음해에는 인심이 화열하고 농사 또한 풍등(豐登)하였는지라,

노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재목을 취해 오고 기와를 구어, 객사(客舍)의 최절(催折) 부패한 부분은 이를 바꾸어서

견고 정치(精緻)하게 하고, 무너지고 떨어저 변별할 수 없는 부분은 이를 도식(塗飾)하여 선명하게 하였으며,

또 학당(學堂)을 증설하여 고을 자제들의 과독(課讀)을 권장하였다.' 하였다.

또 그 다음해에 드디어 부로(父老)들에게 말하기를, '객사가 지대가 낮고 제도가 협소하여 여름철을 당하면 찌고

더운 것이 더욱 심하여 빈객(賓客)이나 사신(使臣)이 이르면 그 숨막히고 답답한 정을 발설(發洩)케 할 도리가

없으니, 마땅히 서늘한 누정을 지어 그 마음을 받들어 즐겁게 하고, 그 화기를 인도 발양(發揚)하게 할 것이다.

사신의 화기가 흘러 퍼지는 것이 어찌 우리 현민(縣民)의 복이 되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실로 원하

는 바입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객사 동쪽으로 나아가서 약간 영(若干楹)의 누정을 기공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즐겨 이에 취역하여 달을

넘지 않아서 낙성을 고하게 되었는데, 바라보기만 하여도 날아가는 듯합니다. 청하건대, '이를 이름해 주시고

또 기(記)를 지어 주시어 이 누정을 빛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다. 공이 말하기를, '백성을 위하여 뜻을 취

하여 여민(慮民)이라 이름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유군이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최후(崔侯)의 본지

(本志)입니다.' 하였다.

당시 나는 그 객석에 끼어 있었더니, 공이 나에게 그 명명한 의의(意義)를 부연하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그 도면을 상고하여 보건대, 아산의 고을 된 것이 수많은 산봉우리가 교착(交錯) 대치하여 곁으로 둘러

싸고, 두 시냇물이 좌우로 둘러 흐르는데, 그 중간에 평야가 길게 뻗쳐 있고, 수목이 울창하게 들어섰으니,

정말 이러한 곳에 누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대개 수령의 직책이란 백성과 친근히 하는 것이다.

인(仁)으로써 위로하고 사랑하며, 의(義)로써 베풀고 다스려서 그 업에 안정하여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없게 한다면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을 편하게 하는 길은 윗사람의 명령을 공경히 받드는 데 있고, 윗사람의

명령을 공경히 받드는 자는 마땅히 나라의 법을 준수하고 왕인(王人 왕명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을 섬기는 데

삼갈 따름이다. 최후는 그 급히 할 바를 알고 있는가. 절(節)을 빌려 백성들의 풍속을 관찰하며, 부절(符節)을

나누어 가지고 임금의 덕화(德化)를 널리 펴는 자가 이 고을에 가서 이 누정에 올라 그 번다한 노고를 잊고 화락

하고 광활한 즐거움을 얻음으로써 강퍅한 정이 사라지고 화평한 기상에 도달하게 된다면,

이는 곧 그 지역을 지키는 자만의 기쁘고 다행한 일이 아니라, 아전과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는 것이 또한 어떠

하겠는가. 그렇다면 이 누정의 창건이 어찌 백성을 위하는 생각이 아니리요. 나는 생각건대 한 여름에 무섭게

뜨거운 해가 한없이 길 때, 산 빛과 물 기운이 아래위로 잠겨 있고, 맑게 갠 경치와 온화한 바람이 궤석(几席)

사이를 서늘하게 해 주면, 눈에 희열을 느끼고, 마음에 쾌감을 얻을 것이니,

이를 사방에 고루 베풀어서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번열(煩熱)을 씻고 서로 정신이 통하게 하여 성주(聖主)의

덕화 속에서 고무(鼓舞)하도록 한다면 거의 이 누정을 이름한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슬프다.

이 정자에 오르고 내리는 자 그 또한 백성을 생각지 않겠는가. 인하여 유군이 고한 말을 쓰고, 또 최후의 백성을

위하는 심려를 부연하여 그 기를 삼고자 한다." 하였다.

 

어라정산성(於羅頂山城) : 현 동쪽 21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364척에 높이는 10척인데, 지금은 못

쓰게 되었다.

수한산성(水漢山城) : 현 동쪽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1420척에, 높이는 10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앵리산성(鶯里山城) : 현 동쪽 2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655척에 높이는 7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신성산성(薪城山城) : 그 산마루에 옛성 두 개를 연해서 쌓은 것이 있는데, 그 북쪽 성은 돌로 쌓은 것으로 주위

가 480척에 높이는 10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날이 가물면 이곳에 비를 빈다. 그 남쪽 성은 흙으로 쌓

은 것이 주위가 480척에 높이가 4척인데, 옛날에 평택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우거한 사실이 있어 평택성(平澤城)

이라 이름했다.

 

명환 고려 김행도(金行濤) : 태조(太祖) 때에 지아주제군사(知牙州諸軍事)가 되었다. 본조 김시주(金時霔).

우거 본조 김구(金鉤)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는데, 사람됨이 순후(醇厚)ㆍ

근각(謹慤)하여 마음이 한결같았고, 경학(經學)에 정밀하고 널리 통하여 성균관에 있으면서 교훈을 게을리 하지

않은 자는 윤상(尹祥) 이후에는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시호는 문장(文長)이다.

 

제영 읍거흥잠갱수우(邑居興替更誰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아산(牙山)은 역시 예로부터 이름 있는 지역

으로, 땅이 기름지고 백성 많아 한쪽 지방에서 으뜸 갔던 곳. 풍속의 후박(厚薄)을 어찌 깊이 걱정하며, 시읍의

흥폐를 다시 누구를 원망하랴. 한스럽다 공수(龔遂)ㆍ탁무(卓茂 모두 한 나라 시대의 유명한 지방관)와 같은

태수(太守) 없고 노(魯 공자의 출생국) 나라 추(鄒 맹자의 출생국) 나라에 견줄 만한 문풍(文風)을 보지 못

하겠네. 저 객관 수십 영(楹)만이 부질없이 날아들어, 뜬구름같이 지나간 일들이 나의 시름 자아낸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끝이 10리. 일동(一東) : 처음은 15리, 끝은 35리. 이동(二東) :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근남(近南) : 처음은 15리, 끝은 25리. 원남(遠南) : 동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일서(一西) :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이서(二西) :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삼서(三西) :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일북(一北) :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이북(二北) : 동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삼북(三北) : 동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5리.

사원 현충사(顯忠祠) : 숙종 병술년에 세워졌고, 정해년에 사액되었다.

 

이순신(李舜臣) :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德水). 선조 무술년에 남해(南海) 노량(露梁)에서 전사하였다.

벼슬은 통제사(統制使) 좌의정(左議政)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이완(李莞) : 자는 열보(悅甫). 이순신의 조카인데 인조 정묘년에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순절하였다.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강민(剛愍)이다.

 

이봉상(李鳳祥) : 이순신(李舜臣)의 5대손으로 청주(淸州)에 보임.

 

 

신창현 新昌縣

 

동쪽으로는 온양군(溫陽郡) 경계까지 10리이고, 북쪽으로는 아산현(牙山縣) 경계까지 14리이고,

서쪽으로는 면천군(沔川郡) 경계까지 26리이고, 남쪽으로는 예산현(禮山縣)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5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굴직현(屈直縣) 이었는데, 신라 때에 기량(祁梁)으로 고쳐 탕정군(湯井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다시 천안부(天安府)로 이속시켰다.

공양왕(恭讓王) 3년에 본현 서쪽 장포(獐浦)에 성을 쌓고서 당성(溏城)이라 이름하고, 부근 주현(州縣)의 조세

(租稅)를 여기에 수납해 두고는 이를 해상으로 조운(漕運)하여 서울로 수송하였으므로 비로소 만호 겸 감무

(萬戶兼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조 원년에 만호는 감생(減省)하고, 태종 14년에 온수(溫水)와 병합하고

읍호를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16년에 다시 나누어 다른 예와 같이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굴직(屈直)ㆍ기량(祁梁)ㆍ온창(溫昌).

 

성씨 본현 : 표(表)ㆍ맹(孟)ㆍ방(方)ㆍ조(趙)가 있으며, 노(盧) : 촌에 있다. 이(李) : 역(驛)에 살고 있다.

 

산천 성산(城山) : 현 서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금성당산(禁城堂山) : 현 동남쪽 11리에 있다.

마산(馬山) : 현 동쪽 3리에 있다. 도고산(道高山) : 현 남쪽 16리에 있다. 또 예산현(禮山縣) 산천에도 나와

있다.

정포도(井浦渡) : 현 서쪽 20리에 있으니 즉 장포(獐浦)의 하류이다. 또 예산현 무한천(無限川)이 여기서 합류

하여 면천군(沔川郡) 범근내포(犯斤乃浦)로 들어간다.

 

장포(獐浦) : 현 서쪽 15리에 있다. 도고산에서 발원하여 정포도로 들어간다.

차륜탄(車輪灘) : 현 동쪽 12리에 있는데, 온양군 가리천(加里川)과 천안군 포천(浦川)이 이곳에서 합류하여

견포(犬浦)로 들어간다.

 

견포(犬浦) : 현 북쪽 15리에 있으니 즉 차륜탄의 하류이다. 범근내포로 들어간다.

 

토산 숭어[秀魚]ㆍ웅어[葦魚]ㆍ뱅어[白魚]ㆍ조기[石首魚]ㆍ복령(茯苓).

 

누정 공북정(拱北亭) : 객관의 북쪽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문[記]에, "무송(茂松) 윤 상국(尹相國 윤자운(尹子雲))이 거정(居正)에게 말하기를,

'신창 태수(新昌太守)의 조침(趙琛) 후가 새 정자를 짓고 공북(拱北)이라 편액(扁額)하고는 그 기문을 요구해

왔으니 그대의 말이 있기를 바란다.' 하였다. 내 추억하건대 병자년 여름에 서원(西原)의 공성(公城)으로부터

이른바 신창이란 땅으로 길을 들어 지나는데, 나의 동년(同年)인 태수 김율(金慄)이 길로 나와서 나를 맞아

주었다. 때는 바야흐로 혹열(酷熱)이었는지라 잠깐 나무 그늘에 앉아 술잔을 나누면서 이내 그 고을의 대략

형편을 물었더니, 김이 말하기를, '이 고을이 지역이 좁고 백성도 적으며 토질이 박하고 산물이 적은데다가

아전들은 교활ㆍ완만하고, 백성 역시 시끄럽고 또 송사를 좋아하는데 반하여 나는 서리고 얼킨 것을 다스리어

부석(副析) 변별할 만한 재간이 없어, 다만 요동하지 않도록 할 따름이요, 너그럽게 대할 따름이다.' 한다.

나는 말하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작은 고을을 다스리려면 생선을 삶을 때와 같이 하라.」 하였으니, 군의

고을 다스리는 방법이 거의 그 대체(大體)를 얻은 것이다. 군의 뒤를 이어 오는 자로 하여금 군의 마음을 마음

으로 하고, 군의 정사를 그대로 실행하게 한다면, 어찌 다스려지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하고, 나의 노정

(路程)의 급박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거기서 고별하고 가버렸던 것이다. 그 후 몇 해 만에 다시 호남 지방으로

가는데 또 이 길을 지났더니, 태수 윤호(尹壕) 공이 길에 나와서 나를 맞아주고 술잔을 들었는데, 내가 그 고을

다스리는 법을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나의 동년 김군과 같았다. 또 나의 갈 길이 바쁘고 역방(歷訪)할 겨를을

얻지 못하여, 마음속으로 그윽이 괴이하게 여기기를, 거정이 이 읍과는 본래의 인연이 없어 그런 것인가 했다.

그런데 지난번에 들으니, 조후(趙侯)가 고을을 다스리는 데 부지런하고도 민첩하며, 간소하게 하면서 요령이

있어 그 명령을 번다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업(業)에 충실하고, 백성들에게 빨리 하지 말라

하여도 그들은 즐겨 그 일에 달려와서 관청과 정자가 환연(煥然)하게 일신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정사를 사모하나, 친히 그 읍의 상황을 보지 못한 즉, 김 동년(金同年)ㆍ윤 사문(尹斯文 윤호)과

더불어 일찍이 서로 토론한 말들이 나의 흉중을 왕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조후가 정자를 짓고 무송 윤공의 기문의 부탁이 홀로 나에게 지워지니, 이는 전일 나에게 두 차례 걸친

기망(期望)이 오늘을 기다린 것이다. 그러니 감히 즐겨 말하지 않으리요. 나는 생각하기를,

누대나 정자를 세우는 것이란 완상(玩賞)하며 놀기를 일삼으려는 것이 아니요, 곧 왕명을 받들고 온 이를 존경

하고 빈객을 잘 접대하며, 울적한 것을 이끌어 풀어버리기 위한 것인데, '공북(拱北)'이라 이름한다면 다만 이

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서 조망(眺望)해 내다보고, 여기서 술 마시며 글 읊는 사람들로 하여금 멀리

궁궐문을 바라보고, 하늘 아래의 장안(長安 서울)을 가리키며, 일찍이 한 그릇의 밥이라 할지라도 임금의 은혜

임을 잊지 않게 한다면, 춘추(春秋)의 왕실(王室)을 존중한 큰 의리를 깊이 얻은 것이 될 것이다.

대개 춘추는 선(善)을 높이 선양해 권장하고 악(惡)을 깎아내려 징계한 책으로, 왕실을 존중한자 있으면 이를

썼고, 백성의 일을 소중히 한 자 있으면 이를 썼던 것이다.

조후의 이번 일은 공역에 있어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며, 시세(時勢)로 보아서도 과잉한 거조가 아니

었고, 왕실을 존중함이 이와 같으니, 춘추의 전례에 있어서도 오히려 대서특서(大書特書)하여 이를 찬미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요, 나 같은 사람은 사국(史局)의 문한(文翰)의 직임을 맡고 있는 터이니, 비록 쓰려고 하지 않

은들 어찌 면하겠는가. 그 산천과 읍터의 형승(形勝)에 있어서는 내 일찍이 한 번도 목격한 일이 없으니, 어찌

장황하게 늘어놓으랴. 나의 박전(薄田) 1경(頃 백마지기)이 평택(平澤)에 있는데, 다른 날 혹 은퇴를 원하여 그

곳에 돌아가서 휴양한다면, 마땅히 한 번 그 정자위에 가서 보고 그 말을 다하겠노라." 하였다.

 

학교 향교 : 현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창덕역(昌德驛) : 현 동쪽 3리에 있다. 명암원(鳴巖院) : 현 동쪽 11리에 있다.

마장원(馬場院) : 현 동쪽 15리에 있다. 용정원(龍頂院) : 현 남쪽 15리에 있다.

신례원(新禮院) : 현 서쪽 20리에 있다.

교량 미륵탄교(彌勒灘橋) : 마장원 동쪽에 있다.

 

불우 한량사(閑良寺)ㆍ천일암(千日庵)ㆍ도명사(道明寺)ㆍ원암(元庵)ㆍ석천사(石泉寺)ㆍ불암(佛庵)ㆍ

안심사(安心寺) : 모두 도고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서쪽 2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성산성(城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213척에 높이는 15척이다.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인물 본조 맹희도(孟希道) :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본조에 들어와서 벼슬이 검교한

성윤(檢校漢城尹)에 이르렀고, 우의정(右議政)에 증직되었다. 맹사성(孟思誠) :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인데,

고려 신우(辛禑) 때에 과거에 장원하고, 우리 세종 13년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는데, 평생에 재물과 전택(田宅)을

일삼지 않고, 청백으로 한결같이 절조를 지켰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영규(趙英珪) : 태조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며, 벼슬이 전서(典書)에 이르렀다.

신증 표연말(表沿沫) : 과거에 올라 벼슬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는데, 무오사화(戊午士禍)에

걸려 멀리 귀양가던 도중에 죽었다. 아들 빙(憑)도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올라, 벼슬이 홍문관 직제학

(弘文館 直提學)에 이르렀다. 부자가 모두 문명(文名)이 있었다.

 

[비고]

 

방면 현내(縣內) : 끝이 5리이다. 대동(大東) :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소동(小東) : 처음이 5리, 끝이 8리이다. 대서(大西) :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소서(小西) :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북면(北面) : 처음이 5리, 끝이 13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성지 당성(溏城) : 장포(獐浦)에 있는데, 이웃 현의 조세(租稅)를 받아 배로 서울로 실어온다.

교량 곡교(曲橋) : 미륵천(彌勒川)에 있는데 가물면 다리를 놓고, 물이 불면 배로 건너는데 내포 10여 읍에서

서울로 통하는 대로이다.

토산 감ㆍ붕어[鯽魚]ㆍ게ㆍ황석어(黃石魚)ㆍ세미어(細尾魚).

 

예산현 禮山縣

 

동쪽으로는 온양군(溫陽郡) 경계까지 28리이고, 남쪽으로는 대흥현(大興縣) 경계까지 9리이고,

서쪽으로는 덕산현(德山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북쪽으로는 신창현(新昌縣)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9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오산현(烏山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고산(孤山)으로 고쳐 임성군(任城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태조(太祖) 2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오산(烏山)ㆍ호산(狐山).

 

성씨 본현 : 신(申)ㆍ손(孫)ㆍ심(沈)ㆍ장(張)이 있으며, 심(沈) : 속(續)이다.

화물(化物) : 방(方) : 문석(文石)에 있다.

 

산천 금오산(金烏山) : 현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남산(南山) : 현 남쪽 6리에 있다.

도고산(道高山) : 현 북쪽 11리에 있다. 또한 신창현(新昌縣) 산천에도 나와 있다.

무한산(無限山) : 현 서쪽 9리에 있다. 소기현(蘇機峴) : 현 동북쪽 28리에 있다.

무한천(無限川) : 무한산 서쪽에 있는데, 홍주(洪州) 여양천(驪陽川)의 하류이다.

매양 여름철에 물이 벌창하면 큰 뱀이 산에서 나와 냇물에 잠복하여 사람과 가축에 우환을 준다.

호두포(狐頭浦) : 현 북쪽 19리에 있는데, 곧 무한천의 하류이다.

 

토산 자기(磁器)ㆍ숭어[秀魚]ㆍ게[蟹]ㆍ웅어[葦魚]ㆍ복령(茯苓).

 

학교 향교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일흥역(日興驛) : 현 서쪽 13리에 있다. 무한성원(無限城院) : 무한천 냇가에 있다.

고사원(古沙院) : 현 동쪽 13리에 있다.

불우 향천사(香泉寺)ㆍ안락사(安樂寺)ㆍ관정사(觀正寺) : 모두 도고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입석소(立石所) : 구명은 문석(文石)이며, 현 동쪽 16리에 있는데, 지금은 대지동촌(大枝洞村)으로 되어

있다. 화물장(化物莊) : 현 서쪽 22리에 있는데 지금은 입암촌(立巖村)으로 되어 있다.

 

무한산성(無限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002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명환 본조 유문통(柳文通) : 현감이 되었었다.

 

효자 본조 김근(金勤)ㆍ이개우(李開右) : 모두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

열녀 본조 매읍덕(每邑德) : 호장(戶長) 장중연(張仲淵)의 딸이다. 나이 23세에 남편이 죽었는데, 무덤 곁에

여막[廬]을 세우고 3년간을 친히 제사하며 소금ㆍ장 등을 먹지 않았다. 뒤에 부모가 그 뜻을 꺾고 다시 시집

보내려 하자, 죽음으로 스스로 맹세하고 드디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비고]

 

연혁 본래 백제의 고산(孤山)이다 : 오산(烏山)이라고도 한다. 당(唐)이 마진(馬津)이라 고치고 지심주(支潯州)

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끝이 5리. 술곡(述谷) : 동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은 20리.

대지동(大枝洞) : 본래는 입석소(立石所)인데,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이 20리이다.

금평(金坪) : 북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20리이다. 두촌(豆村)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이다.

입암(立巖) : 본래는 화물장(化物莊)인데, 서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거구화(巨仇火) :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자가산(子加山) : 서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20리이다.

오원(吾元) : 북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0리이다.

 

성지 오산성(烏山城) : 바로 옛읍의 터인데 지금 치소(治所)에서 서쪽으로 6리에 있다. 평평한 들에서 외롭게

서 있기 때문에 고산(孤山)이라 하며, 오산산성(烏山山城)이라고도 한다. 둘레가 2002척인데 우물 하나가 있다.

역참 북쪽으로 10리에 있는데, 내포(內浦) 11읍에서 서울로 통하는 큰길에 있다.

 

토산 감ㆍ붕어[鯽魚].

 

사원 덕잠서원(德岑書院) : 숙종 을유년에 세워졌고, 갑오년에 사액되었다.

김구(金絿) :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이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해미현 海美縣

 

동쪽으로는 덕산현(德山縣) 경계까지 17리이고, 남쪽으로는 홍주(洪州) 경계까지 6리이고,

서쪽으로는 서산군(瑞山郡) 경계까지 9리이고, 북쪽으로는 당진현(唐津縣) 경계까지 4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6리이다.

건치연혁 정해현(貞海縣)은, 전해 오는 속설에 의하면 고려 태조(太祖) 때에 몽웅역(夢熊驛)의 아전 한(韓) 가가

큰 공로가 있어 대광(大匡)의 작호를 내리고,

 

고구현(高丘縣) : 지금의 홍주 속현(洪州屬縣)이다. 땅을 분할하여 정해현으로 만들어서, 그의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한다. 현종(顯宗) 9년에 운주(運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

여미현(餘美縣)은 본래 백제의 여촌현(餘村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여읍(餘邑)으로 고쳐 해성군(槥城郡)의 속현

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다시 여미(餘美)라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는 운주(運州)에 붙였고, 예종(睿宗)

원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7년에 두 현을 병합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서,

정해를 그 다스리는 곳으로 삼았는데, 13년에 예에 따라 현감으로 삼았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정해(貞海)ㆍ여미(餘美)ㆍ여촌(餘村)ㆍ여읍(餘邑).

 

성씨 정해(貞海) : 백(白)ㆍ한(韓)ㆍ구(仇)ㆍ윤(尹). 여미(餘美) : 곽(郭)ㆍ박(朴)ㆍ명(明)ㆍ여(余).

사곡(寺谷) : 염(廉)ㆍ한(韓). 염솔(鹽率) : 박ㆍ명ㆍ여(余). 소당(炤堂) : 박 : 염정(鹽貞)에도 있다.

 

형승 땅이 큰 바닷가에 임해 있다 : 정충기(鄭忠基)의 <동헌기(東軒記)>에 있다.

산천 상왕산(象王山) : 여미현 동쪽 4리에 있다. 가야산(伽倻山) : 현 동쪽 11리에 있는데, 상왕산과 서로 연해

있다. 안국산(安國山) : 현 북쪽 38리에 있다. 견성산(犬城山) : 현 동쪽 9리에 있다.

 

문수산(文殊山) : 현 북쪽 33리에 있다. 양릉포(陽陵浦) : 현 서쪽 10리에 있는데, 즉 바다의 포구(浦口)이다.

대모천(大母川) : 현 북쪽 52리에 있다. 마도(馬島) : 현 서쪽 양릉포 기슭에 있다.

○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이르기를, "나라 중간에 있는 목장지로서 옛날에 객관이 있었는데,

안흥정(安興亭)이라 일컬었다." 하였다.

 

토산 쇠[鐵] : 생천포(生天浦)에서 난다. 석굴[石花]ㆍ넙치[廣魚]ㆍ칼치[刀魚]ㆍ조기[石首魚]ㆍ홍어(洪魚)ㆍ

숭어[秀魚]ㆍ도루묵[銀口魚]ㆍ오징어[烏賊魚]ㆍ김[海衣]ㆍ안식향[安息香].

 

관방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병영(兵營) : 현 동쪽 3리에 있다. 돌로 쌓은 성이 있는데, 주위가 3천 백 72척

에, 높이가 15척이며, 안에 세 개의 우물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안국산 봉수(安國山烽燧) : 서쪽으로는 서산군(瑞山郡) 북산(北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당진현(唐津縣)

고산(高山)과 호응한다.

누정 청허정(淸虛亭) : 병마절도사의 병영 안에 있는데, 조숙기(曹淑沂)가 세웠다.

 

학교 향교 : 현 동쪽 3리에 있다.

역원 몽웅역(夢熊驛) : 현 북쪽 5리에 있다. 신당원(神堂院) : 현 동쪽 6리에 있다.

 

불우 문수사(文殊寺) : 문수산에 있다. 안국사(安國寺) : 안국산에 있다.

안흥사(安興寺)ㆍ일악사(日岳寺)ㆍ수도사(修道寺) : 모두 가야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북쪽 1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안흥정(安興亭) : 현 동쪽 11리에 있다.

고려 문종(文宗) 31년에 나주도 제고사 태부소경(羅州道祭告使大府少卿) 이당감(李唐鑑)이 아뢰기를, "중국

조정의 사신이 왕래하는 고만도(高蠻島)의 정자는, 수로가 약간 막혀 있어 배의 정박(碇泊)이 불편하오니,

청하건대 홍주(洪州) 관할하의 정해현 땅에 한 정자를 창건하여 맞이하고 보내는 장소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제서[制]를 내려 그 말을 따랐다. 옛여미현[古餘美縣] : 현 관아의 북쪽 30리에 있다.

돌로 쌓은 성이 있어 주위가 881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염솔부곡(廉率部曲) : 염(廉) 자는 혹 염(鹽) 자

로도 쓰는데, 현 북쪽 36리에 있다. 소당부곡(炤堂部曲) : 여미현에 있다. 몽웅향(夢熊鄕) : 몽웅역에 있는 땅을

말하는 것이다. 사곡소(寺谷所)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염정부곡(鹽貞部曲) : 정(貞) 자는 정(亭) 자로도 쓰는데, 현 북쪽 32리에 있다.

성산성(城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1433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견성산성(犬城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9960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제영 경파부동해징청(鯨波不動海澄淸) : 서거정의 시에, "백마(白馬)가 힘차게 세류영(細柳營)에서 우는데,

웅장한 번진(藩鎭)의 저 절도사(節度使)가 장성(長城)을 이루었네. 늦은 가을 하늘 높이 세워진 큰 기의 그림자

가 한가롭게 보이고, 진종일 투호(投壺)하는 소리마저 자세히 들려온다. 아낙네 소라 같은 쪽[螺䯻]이 떠오르는

듯 산이 둘러싸 있고, 고래 물결 동하지 아니하고 바다는 맑고 깨끗하다. 서녘 바람이 얇은 솜옷을 한없이 불어

헤치니, 먼 길손 만리 타향의 외로운 정을 견디기 어렵도다." 하였다.

 

[비고]

 

연혁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文獻備考》

 

방면동면(東面) : 끝이 15리이다. 남면(南面) : 끝이 11리이다. 서면(西面) : 끝이 30리이다.

일도(一道) : 북쪽으로 끝이 40리이다.

염솔(鹽率) : 본래 염솔부곡(鹽率部曲)인데 북쪽으로 끝이 50리에 있다.

위 두 면은 서산(瑞山) 동쪽, 당진(唐津)서쪽이다.

 

○ 소당부곡은 여미(餘美)에 있으며, 염정부곡은 북쪽으로 32리이다.

 

성곽읍성(邑城) : 둘레는 2630척이다. 옹성(甕城 큰 성문 밖의 작은 성문)이 둘, 우물이 여섯 개 있으며 성 밖은

탱자나무 숲[枳林]으로 둘러있다. 대성(大成) : 동쪽으로 9리에 있으며, 둘레는 9960척이다.

 

고성(古城) : 성산(城山)이라고도 칭하며, 둘레는 1432척이다.

 

영아좌영(左營) : 인조조에 온양(溫陽)에 세웠다가 숙종 38년에 본현으로 옮겼다.

○ 좌영장(左營將)은 본 현감(縣監)이 겸한다.

 

○ 속읍은 해미(海美)ㆍ대흥(大興)ㆍ온양(溫陽)ㆍ면천(沔川)ㆍ서산(瑞山)ㆍ태안(泰安)ㆍ결성(結成)ㆍ

 

예산(禮山)ㆍ평택(平澤)ㆍ아산(牙山)ㆍ신창(新昌)ㆍ덕산(德山)ㆍ당진(唐津)이다.

역참 득웅역(得熊驛) : 본래는 여미(餘美)에 속했는데, 본조 문종(文宗) 2년에 서산(瑞山)으로 옮기고

풍전(豐田)으로 되었다.

토산 소금ㆍ감.

 

 

당진현 唐津縣

 

동쪽으로는 면천군(沔川郡) 경계까지 10리이고, 남쪽으로는 해미현(海美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10리이고, 서쪽으로는 맹곶(孟串)까지 44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벌수지현(伐首只縣)이었는데 : 혹은 부지군(夫只郡)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혜성군(槥城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운주(運州)에

붙였다가, 예종(睿宗) 원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현감으로 만들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벌수지(伐首只)ㆍ부지(夫只).

 

성씨 본현 : 장(張)ㆍ한(韓)ㆍ황보(皇甫)ㆍ임(任)ㆍ고(高). 신법(新法) : 땅 이름으로 《주관육익(周官六翼)》에

나와 있으나, 그 지역은 상세하지 않다. 박(朴)ㆍ서(徐)ㆍ현(玄) : 본적은 혜성(槥城)이다.

 

산천 고산(高山) : 현 서북쪽 22리에 있다. 이배산(利背山) : 현 남쪽 15리에 있다.

적현(赤峴) : 현 남쪽 10리에 있다. 바다 : 현 북쪽 10리에 있다.

채원포(菜元浦) : 현 서쪽 5리에 있다. 산도(蒜島) : 현 북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주위가 9리이다.

맹곶(孟串) : 현 서쪽에 있는데, 주위가 32리이며, 옛날에는 목장이 있었다.

 

토산 백복령(白茯苓)ㆍ청옥석(靑玉石) : 현 남쪽 5리인 관음동(觀音洞)에서 난다. 석굴[石花]ㆍ숭어[秀魚]ㆍ

홍어(洪魚)ㆍ자하(紫鰕)ㆍ조기[石首漁]ㆍ조개[蛤] : 맹곶에서 난다. 부레풀[魚鰾]ㆍ농어[鱸魚]ㆍ민어(民魚)ㆍ

살조개[江瑤柱]ㆍ게[蟹]ㆍ붕어[鯽魚].

 

성곽 읍성(邑城) : 정통(正統) 경신년에 쌓은 돌 성으로서, 주위가 1천 9백 54척에 높이는 8척이며,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다.

 

관방 당진포영(唐津浦營) : 현 서쪽 34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이 있다.

신증 정덕(正德) 갑술년에 비로소 돌로 성을 쌓았는데, 주위는 1340척이며, 높이는 9척이다.

난지도수(難知島戍) : 현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주위는 34리이며, 당진포의 만호(萬戶)가 군병을 나누

어서 지킨다.

 

봉수고산봉수(高山烽燧) : 동쪽으로는 면천군(沔川郡) 창택산(倉宅山)과 호응하고,

남쪽으로는 해미현(海美懸) 안국산(安國山)과 호응한다.

신증 누정 권가정(勸稼亭) : 객관 동쪽에 있다. 해망정(海望亭) : 당진포에 있다.

 

학교 향교 : 현 동쪽 3리에 있다.

역원 홍세역(興世驛) : 현 남쪽 9리에 있다.

교량 채원포교(菜元浦橋).

불우 고산사(高山寺) : 고산에 있다. 능암사(能庵寺) : 태산(泰山)에 있다.

성당사(聖堂寺)ㆍ사근사(沙斤寺) : 모두 이배산에 있다. 영랑사(影浪寺) : 영파산(影波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북쪽 5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제영 건렴운출수(褰簾雲出岫) :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발을 걷으니 구름이 산봉우리에서 나오고,

휘장을 열어 젖히니 물이 하늘과 연했구나." 하였다.

 

평강단롱노고저(平岡斷隴路高低)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편평한 산등성 끊어진 언덕엔 길도 높고 낮은데,

미끄러운 푸른 진흙 속으로 말굽이 푹푹 빠진다. 그늘졌던 골짜기에 눈이 녹으니 시냇물이 붓고, 양지쪽 언덕에

햇볕이 따뜻하게 쬐니 보리싹 가지런하다." 하였다.

 

[비고]

 

연혁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끝이 10리이다. 고산(高山) : 서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동면(東面) : 처음은 4리, 끝은 10리이다. 남면 :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대진(大眞) :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내맹(內孟) : 서북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50리이다.

외맹(外孟) :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35리이다.

토산 소금ㆍ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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