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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료

동국여지승람 (강원도)권44.45.46.47. (한글 번역본)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3.10.28|조회수420 목록 댓글 0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4권 강원도 江原道 [1]

 

본래 예맥(濊貊)의 지역이었는데, 후에 고구려와 신라의 소유로 되었다. 고려 성종(成宗) 14년에는 화주(和州)ㆍ

명주(溟州) 등 고을로써 삭방도(朔方道)로 만들었고, 춘주(春州) 등의 고을을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8년에 삭방도는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 고쳐 부르고 춘주 등 고을은 처음으로 춘주도라 하였는데,

혹 동주도(東州道)라 부르기도 하였다. 원종(元宗) 4년에 명주도는 강릉도(江陵道)로, 동주도는 교주도(交州道)

라 고쳐 불렀고, 충숙왕 원년(忠肅王元年)에는 교주도를 회양도(淮陽道)라 고쳐 불렀다.

공민왕(恭愍王) 5년에 강릉도를 강릉삭방도라 고쳐 부르다가 6년에는 다시 강릉도라 불렀다. 9년에 강릉삭방도

라 부르고 15년에 다시 강릉도라 불렀다. 신우(辛禑) 14년에는 강릉도에서 처음으로 삭방도를 가르고, 교주도와

합쳐서 드디어 교주강릉도라 부르고, 충주(忠州) 관할이었던 평창군(平昌郡)을 예속시켰다.

공양왕(恭讓王) 3년에는 철원(鐵原)ㆍ영평(永平) 등 고을을 분할하여서 경기도로 옮겨 부쳤는데,

본조 태조(太祖) 4년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공정왕(恭靖王) 원년에는 원주 속현(原州屬縣)인 영춘(永春)과

충주 관할인 영월(寧越)이 개 이빨처럼 들쑥날쑥하다 하여 서로 바꿨다.

태종(太宗) 13년에 가평(加平)과 조종(朝宗)을 분할하여 경기에 예속시키고 경기도 이천현(伊川縣)을 본도에

예속시켰으며, 세종(世宗) 16년에는 철원을 본도에 도로 예속시켰다.

 

속령(屬領)으로는 부(府) 1, 목(牧) 1, 도호부(都護府) 5, 군(郡) 7, 현(縣) 12이다.

관원 관찰사 : 1명. 병마절도사 : 1명. 관찰사가 겸임한다. 수군절도사 : 1명. 관찰사가 겸임한다.

도사(都事) 심약(審藥)ㆍ검율(檢律) : 각 1명.

 

 

강릉대도호부 江陵大都護府

 

동쪽으로 바닷가까지 10리, 서쪽은 평창(平昌)군 경계까지 1백 59리, 횡성(橫城)현 경계까지 1백 90리, 서남쪽

으로 정선(旌善)군 경계까지 90리, 남쪽으로 삼척부(三陟府) 경계까지 94리, 북쪽으로 양양부(襄陽府) 경계까지

60리인데, 서울과 거리는 6백 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예국(濊國)인데, 철국(鐵國) 또는 예국(蕊國)이라고도 한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討伐)하고 사군(四郡)을 정할 때에, 이 지역을 임둔(臨屯)이라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하서량(河西良)이라 하였다 : 하슬라주(何瑟羅州)라고도 하였다.

신라 선덕왕(善德王)은 작은 서울을 설치하여, 사신(仕臣)을 두었다. 무열왕(武烈王) 5년에 이 지역이 말갈(靺鞨)

과 연접하였다 하여 작은 서울이라는 명칭을 고쳐 주(州)로 만들고, 도독(都督)을 두어서 진무하고 지키도록

하였는데,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명주(溟洲)라 고쳤다.

고려 태조 19년에는 동원경(東原京)이라 불렀고, 성종 2년에 하서부(河西府)라 불렀다. 5년에는 명주도독부라

고쳤으며, 11년에 목(牧)으로 고쳤다. 14년에 단련사(團練使)라 하였다가, 그 후에 또 방어사(防禦使)라 개칭하

였다. 원종(元宗) 원년에는 공신(功臣) 김홍취(金洪就)의 고향이라 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하였고,

충렬왕 34년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부로 만들었다. 공양왕 원년에 대도호부로 승격하였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으며, 세조(世祖) 때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연곡현(連谷縣) : 부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 지산현(支山縣)이며 양곡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 때에 명주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현종(顯宗)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그대로 예속시켰다.

 

우계현(羽溪縣) : 부 남쪽 60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 우곡현(羽谷縣)이며 옥당(玉堂)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삼척군 속현으로 만들었는데, 고려 현종 9년에 본부로 이속시켰다.

 

진관 도호부 2 : 삼척ㆍ양양. 군 4 : 평해(平海)ㆍ간성(杆城)ㆍ고성(高城)ㆍ통천(通川). 현 2 : 울진(蔚珍)ㆍ

흡곡(歙谷).

 

관원 부사(府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명

 

군명 예국(濊國)ㆍ임둔(臨屯)ㆍ하슬라(何瑟羅)ㆍ하서량(河西良)ㆍ명주(溟州)ㆍ동원(東原)ㆍ임영(臨瀛)ㆍ

동온(東溫)ㆍ경흥(慶興)ㆍ명원(溟源)ㆍ예국(蘂國) : 이하는 이곡(李穀)의 염양사(艶陽寺) 기문(記文)에 있다.

철국(鐵國)ㆍ도원경(桃源京)ㆍ북빈경(北濱京).

 

성씨본부 김ㆍ최ㆍ함(咸)ㆍ박ㆍ곽ㆍ왕 : 임금이 하사(下賜)한 성인데, 그 후에 옥(玉)으로 고쳤다.

이 : 평창(平昌). 원(元) : 원주(原州).

연곡(連谷)ㆍ명(明)ㆍ이ㆍ진(陳)ㆍ신(申)ㆍ장(蔣). 우계(羽溪) 이ㆍ변(邊)ㆍ노(盧)ㆍ심(沈)ㆍ유(劉) : 속(續).

 

풍속 욕심이 적다 : 《후한서(後漢書)》에, " 그 지역 사람은 성품이 어리석고 성실하며 욕심이 적어서,

청하거나 구걸하지 않는다." 하였다.

 

같은 성씨끼리 혼인하지 않는다 : 《후한서》에 있다. 질병을 싫어한다 : 《후한서》에, "질병을 아주 싫어하여,

사람이 죽으며 살던 집을 홀연히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짓는다." 하였다.

 

삼[麻]을 심고 누에를 치며 면포를 만든다 : 《후한서》에 있다. 별을 살핀다 : 《후한서》에 있다. "별을 살펴서

그해의 풍ㆍ흉을 미리 안다." 하였다.

 

벌할 때에는 우마를 받는다 : 《후한서》에, "촌락에 서로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서로 벌하며 우마(牛馬)를

받는데 책화(責禍)라 부르며, 살인한 자는 죽음으로써 보상하게 한다.

 

도둑이 적고 보병으로 하는 싸움을 잘한다." 하였다. 학문을 숭상한다 : 다박 머리 때부터 책을 끼고 스승을 따른

다. 글 읽는 소리가 마을에 가득히 들리며,

 

게으름 부리는 자는 여럿이 함께 나무라고 꾸짖는다. 놀이를 좋아한다 : 그 지역 풍속에 명철을 만나면 서로 맞

이하여 함께 마시며, 보내고 맞이하는 일이 끊임없다. 그러나 농사에 힘쓰지 않아서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

다.

 

진흙이 섞인 물결을 같이하고, 불을 놓아서 구름 속에 개간한다 : 이제현(李齊賢)이 박안집(朴安集)에게 준 시

에, "진흙이 섞인 물결을 같이하고, 불을 놓아서 푸른 구름 속에 개간한다." 하였다.

 

예의(禮義)를 서로 먼저한다 : 황희(黃喜)의 시에, "예의로 오래된 지역인데, 어찌 괴이쩍게 신선을 말하리."

하였다.

 

청춘경로회(靑春敬老會) : 고을 풍속이 늙은이를 공경하여, 매양 좋은 절후를 만나면 나이 70 이상 된 자를 청

하여 경치 좋은 곳에 모셔놓고 위로한다. 판부사 조치(趙菑)가 의롭게 여겨서 관가의 재용에서 남은 쌀과 포목

(布木)을 내어 밑천을 만들고, 자제들 중에서 부지런하며 조심성 있는 자를 가려서 그 재물의 출납을 맡아 회비

(會費)로 하도록 하고, '경춘경로회'라 명명하였다.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으며, 비록 노부의 천한 사람이라도

나이 70된 자는 모두 모임에 오도록 하고 있다.

 

형승 산맥은 북쪽에서 왔고, 바다가 동쪽 끝이 된다 : 이곡(李穀)의 시에, "산맥이 북쪽에서 왔는데 푸름이 끝나

지 않았고, 바다가 동쪽 끝이어서 아득하게 가이 없어라." 하였다.

 

산수가 천하에 첫째이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강릉의 산수 경치가 천하에 첫째이다." 하였다. 창해가 넓고

크며, 골짝이 천 겹이다 : 안축(安軸)의 기문에, "먼 데 있는 물을 창해가 넓고 크며, 먼 데 있는 산은 골짝이 천

겹이다." 하였다.

 

일도(一道)에서 큰 부(府)이니, 부상(扶桑)을 당기고 양곡(陽谷)을 잡는다 : 서거정(徐居正)의 운금루(雲錦樓)

기문에 있다.

 

산천 오대산(五臺山) : 부 서쪽 1백 40리에 있다. 동쪽이 만월(滿月), 남쪽이 기린(麒麟), 서쪽이 장령(長嶺),

북쪽이 상왕(象王), 복판이 지로(智爐)인데, 다섯 봉우리가 고리처럼 벌려 섰고, 크기와 작기가 고른 까닭에

오대라 이름하였다. 우리 세조대왕께서 12년에 관동(關東)에 행차하다가 이 동구에 보연(寶輦)을 머물고, 과거

를 베풀어 진지(陳祉) 등 18명을 뽑았다.

 

○ 진화(陳澕)의 시에, "당년에는 그림 속 오대산을 보았는데, 구름 속에 높고 낮은 푸른 산이 있더니,

지금 만 골짝 물이 다투어 흐르는 곳에 와서 보니, 구름 속에서도 길은 어지럽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노라." 하였

다.

 

대관령(大關嶺) : 부 서쪽 45리에 있으며, 이 주(州)의 진산이다.

여진(女眞) 지역인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구불구불 비틀비틀, 남쪽으로 뻗어내리면서 동해가를 차지한 것

이 몇 곳인지 모르나, 이 영(嶺)이 가장 높다. 산허리에 옆으로 뻗은 길이 99구비인데, 서쪽으로 서울과 통하는

큰 길이 있다. 부의 치소에서 50리 거리이며 대령(大嶺)이라 부르기도 한다.

 

○ 김극기(金克己)가 권적(權迪)의 시를 차운(次韻)한 시에, "대관산(大關山)이 푸른 바다 동쪽에 높은데, 만 골

짜기 물이 흘러나와 물이 천 봉우리를 둘렀네. 험한 길 한 가닥이 높은 나무에 걸렸는데, 긴 뱀처럼 구불구불 모

두 몇 겹인지. 가을 서리는 기러기 가기 전에 내리고, 새벽 해는 닭이 처음 우는 곳에 돋는도다. 높은 절벽에 붉

은 노을은 낮부터 밤까지 잇닿고, 깊숙한 벼랑엔 검은 안개가 음천(陰天)에서 갠 날까지 잇닿았네.

손을 들면 북두칠성 자루를 부여잡을 듯, 발을 드리우면 은하수(銀河水)에 씻을 듯하다. 어떤 사람이 촉도난

(蜀道難)을 지을 줄 아는고, 이태백(李太白)이 죽은 뒤에는 권부자(權夫子)로세." 하였다.

 

보현산(普賢山) : 부 서쪽 35리에 있다.

원읍현(員泣峴) : 부 서쪽 41리에 있으며 대관령 중턱이다. 세간에 전해지기로는, "어떤 원이 강릉 부사로 있다

가 갈려서 돌아가는데, 여기에 와서는 되돌아보며 슬프게 눈물을 흘렸으므로 인하여 원읍현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길이 구산역(丘山驛)으로 접어들자 양의 창자처럼 꾸불꾸불하여 말이 가지 않는다.

앞에 선 말 몰이꾼은 나무끝으로 가고, 잔도(棧道)는 구름 끝에 걸리었네. 북쪽을 바라보니 산이 창 같고, 동쪽

을 임하니 바다가 하늘에 닿았네. 부여잡고 가는 길 다한 곳에 우주가 다시금 아득하여라." 하였다.

 

모로현(毛老峴) : 부 서쪽 1백 25리에 있다. 독현(禿峴) : 부 서쪽 1백 89리에 있다.

화비현(火飛峴) : 부 남쪽 35리에 있다. 영의 흙이 검어서, 불에 탄 것 같은 까닭에 화비(火飛)라 이름한 것이다.

삽현(鈒峴) : 부 서남쪽 60리에 있으며, 정선(旌善)으로 가는 길이다.

 

월정산(月正山) : 부 동쪽 6리에 있다. 화부산(花浮山) : 부 북쪽 3리에 있다.

소은백이산(所隱柏伊山) : 부 서쪽 65리에 있다. 전해오는 얘기에, "신선이 사는 곳이다. 옛적에 사냥꾼이 짐승

을 쫓다가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 골 안을 바라보니, 늙은 나무와 띳집과 길들이 죽 늘어섰고, 시냇가에는 베를

마전하고 옷을 빨아 널어서, 의연히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산에서 내려가, 찾아보았으나 구름

과 아지랑이가 골짜기에 가득하고 어지러워 그곳을 몰랐다." 한다.

 

소우음산(所亏音山) : 부 서쪽 80리에 있다. 산속에 샘이 있고 날씨가 가물어서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

해령산(海靈山) : 부 동쪽 27리에 있다. 담정산(淡定山) : 부 남쪽 32리에 있다.

사화산(沙火山) : 부 북쪽 30리에 있다.

주문산(注文山) : 연곡현(連谷縣) 북쪽 12리에 있으며, 부와는 42리 거리다.

 

바다 : 부 동쪽 10리에 있다. 견조도(堅造島) : 부 동쪽 10리에 있으며,

남천(南川) 물이 바다에 들어가는 어구이다.

성남천(城南川) : 부성(府城) 남쪽 1백 보에 있으며, 물 근원이 대관령에서 나온다. 여러 골짜기 물과 합류하여

송악연(松嶽淵)ㆍ광제연(廣濟淵)이 되고,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금강연(金剛淵) :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곁에 있으며, 부에서 서쪽으로 1백 10리이다. 4면이 모두 반석이고

폭포는 높이가 열 자이다. 물이 휘돌아 모여서 못이 되었는데, 용이 숨어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 봄이면 여항어

(餘項魚)가 천 마리, 백 마리씩 무리지어서 물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이 못에 와서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맥

질한다. 힘을 내어 낭떠러지에 뛰어오르는데, 혹 오르는 것도 있으나 어떤 것은 반쯤 오르다가 도로 떨어지기도

한다.

 

○ 정추(鄭樞)의 시에, "금강연 물이 푸르게 일렁거려, 갓 위에 묵은 먼지를 씻어낸다.

월정사에 가 옛 탑을 보려 하는데, 석양에 꽃과 대[竹]가 사람을 매우 근심스럽게 한다." 하였다.

 

우통수(于筒水) : 부 서쪽 1백 50리에 있다. 오대산 서대(西臺) 밑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는데,

곧 한수(漢水 한강)의 근원이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서대의 밑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으니, 물 빛깔과 맛이 딴 물보다 훌륭하고 물을 삼감도

또한 그러하니 우통수라 한다.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 한강이 되어 바다에 들어간다. 한강은 비록 여러 곳에서

흐르는 물이 모인 것이나, 우통 물이 복판 줄기가 되어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않는 것이 중국에 양자강(楊子江)이

있는 것과 같으니 한강이라는 명칭도 이 때문이다." 하였다.

 

방림천(芳林川) : 부 서쪽 1백 58리에 있다. 연곡포(連谷浦) : 연곡현 동쪽 5리에 있으며, 북에서는 35리다.

오진(梧津) : 우계현 남쪽 30리에 있다.

주문진(注文津) : 연곡현 북쪽 10리에 있으며 부에서 40리다.

 

○ 이상 세 곳 포구에는 모두 척후가 있다.

 

안인포(安仁浦) : 부 동남쪽 25리에 있다. 예전에는 만호영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토산 모시ㆍ활 만드는 뽕나무 : 우계현에서 산출한다. 댓살[竹箭] : 부 북쪽 증산(甑山) 및, 부 동북쪽 강문도

(江門島)에서 산출한다. 잣ㆍ오미자ㆍ자단향(紫檀香)ㆍ황양(黃楊)ㆍ자초(紫草)ㆍ송이버섯ㆍ인삼ㆍ지황ㆍ

복령(茯苓)ㆍ벌꿀ㆍ백화사(白花蛇)ㆍ물개[海獺]ㆍ소금ㆍ미역ㆍ참가사리ㆍ김ㆍ해삼ㆍ전복ㆍ홍합ㆍ문어ㆍ

삼치ㆍ방어ㆍ광어ㆍ적어(赤魚)ㆍ고등어ㆍ대구어ㆍ황어ㆍ연어ㆍ송어ㆍ도루묵ㆍ누치ㆍ여항어(餘項魚)ㆍ

순채ㆍ세조개.

 

성곽 읍성 : 흙으로 쌓은 것은 둘레가 2천 1백 8자이고, 높이는 40자이다.

돌로 쌓은 것은 둘레가 1백 39자이고, 높이는 두 자이다. 성안에는 우물 14곳, 못 둘이 있다.

신증 정덕(正德) 임신년에 석성(石城)으로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1천 7백 82자이고 높이는 9자이다.

 

봉수 주문산 봉수(注文山烽燧) : 북쪽으로 양양부(襄陽府) 양야산(陽野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사화산(沙火山)

에 응한다.

 

사화산 봉수 : 남쪽으로 소동산(所同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주문산에 응한다.

소동산 봉수 : 부 동쪽 7리에 있다. 남쪽으로 해령산(海靈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사화산에 응한다.

해령산 봉수 : 남쪽으로 오근산(吾斤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소동산에 응한다.

오근산 봉수 : 우계현 북쪽 20리에 있다. 남쪽으로 어달산(於達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해령산에 응한다.

달산 봉수 : 우계현 남쪽 30리에 있다. 남쪽으로 삼척부 광진산(三陟府廣津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오근산에

응한다.

 

선종궁설 동헌(東軒) : 성현(成俔)의 시에, "바다와 산 아름다운 경치 새해가 되어서, 봄빛이 봉호(蓬壺) 동리

(洞裏)의 하늘에 가득하네. 오도(鰲島)에는 나는 새 위에 아지랑이 날고, 주루(珠樓)에는 저녁 볕 가에 노래와

피리로다. 한 줄기 시냇물은 천 집을 감싸 담을 이루고, 나무에 가득한 꽃은 십리 연기를 머금었네.

경포(鏡浦)에 개인 물결이 파랗게 일렁이는데, 목란(木蘭)배에 술을 실어 신선을 끼고 노네"

 

○ "홍진(紅塵)에 분주하기 몇 해였던가, 부절을 잡고 와서 속세 밖에 노니노라. 흰 고개마루는 우뚝하게 북극과

잇닿았고, 은빛 물결은 넓고 넓어 동쪽 끝이 아득하네. 푸른 소나무는 눈을 머금고 햇볕에 빛나고, 푸른 대숲에

바람이 잔잔한데 저물녘 연기가 감돈다. 추위가 두려워 술 한잔 기울이니, 이 몸이 도리어 주중선(酒中仙)이

되었나." 하였다.

 

○ 홍귀달(洪貴達)의 시에, "대관령 밖에 봄이 돌아와 또 한 해가 오니. 화창한 햇볕이 하늘에 걸렸네.

성에 가득한 복숭아ㆍ오얏은 봄바람에 피고, 들에 가득한 뽕나무와 삼은 곡우(穀雨) 무렵에 자란다. 푸른 풀 못

에는 오리가 처음 놀고, 채색구름 누각에는 다시 연기가 섞였네. 성남(城南)에는 놀이꾼이 나날이 많아지는데,

검은 머리 불그레한 낯이 낱낱이 신선인 듯하여라." 하였다.

 

○ 이우(李堣)의 시에, "동쪽으로 와서 나이 더했음을 탄식하지 마라. 아름다운 절후는 한식날이 가까웠네.

일천 집 누각 위에는 노래와 피리소리요. 꾀꼬리와 꽃은 10리까지 취하고 깨는 동안이라. 황정(黃精) 이삭이 새

로 비에 젖었는데, 벽해에 곡괭이 가지고 연기를 파헤침 직하다. 일찍이 신선의 약방문을 공부 못한 것 후회로

워라, 반생 동안 연화(煙火) 속에서 신선되기를 바랐노라." 하였다.

 

○ 정수강(丁壽崗)의 시에, "임영(臨瀛) 옛 마을이 몇 천 년이던가, 지역이 동남으로 열리어 바다를 당기었네.

산천은 예전 그대로 눈앞에 들고, 누각은 중수되어 구름 곁에 솟았네. 집집마다 선비는 삼동(三冬)에 공부를

하고, 곳곳마다 풍년이 드니 만집에 연기로세. 이것은 임금의 교화를 펴는 사또의 힘이라, 나는 이제 도리어

주중선(酒中仙)이 되었노라." 하였다.

 

○ 민수천(閔壽千)의 시에, "기쁜 일 많은 임영에는 세월이 절로 가니, 화려한 경치는 봄철에 가장 좋다네.

향긋한 묵은 술맛은 금항아리 안에 있고, 채색오리 봄 소리는 옥경(玉鏡)가에 있노라. 한 길의 꽃은 붉기가 비단

보다 더하고, 천집 버들은 푸르러 연기와 같구나. 도원(桃源)은 다만 진(秦) 나라를 피한 무리일 뿐이요,

동쪽 바람에 경포대의 신선놀이보다 못하다." 하였다.

 

누정 운금루(雲錦樓) :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강릉부는 본래 예국(濊國)의 터이다. 한(漢) 나라에서 4군을

설치하면서 임둔(臨屯)이라 하였고, 고구려에서는 하서량(河西良)이라 하였으며, 신라에서는 명주(溟州)라 일

컬었다. 고려 초기에는 동경(東京)을 설치하였다가 그 후에는 하서 또는 경흥이라 불렀고, 충렬왕 때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던 바, 강원 일도에서 큰 부(府)다.

지역이 바닷가라 기이하고 훌륭한 경치가 많으며, 가끔 신선들이 남긴 자취가 있다. 임영이라 부르는 것은 대개

봉영(蓬瀛)과 겨누는 것이리라. 습속이 맑고 간이(簡易)하며, 인심이 순박하여 예스러운 기풍이 있다.

성화(成化) 정유년에 부상(府相) 이공(李公)이 이 고을에 와서 다스리게 되었는데, 두어 달도 못 되어 정사가 크

게 다스려졌다. 예전에 객관 남쪽에 운금루가 있었는데 황폐하여 수리하지 않은 지가 십오륙 년이나 되었다.

공이 개연히 중건할 뜻이 있어서 조금 동북쪽으로 옮겨 고쳐 지었는데, 여러 집 위에 우뚝하게 솟아났다.

누 남쪽에는 못이 있어 연(蓮)을 심었으며, 못 가운데는 섬이 있고 섬 위에는 대[竹]를 심었다. 그 훌륭한 경개

는 기이하고 특별하다고 할 만하였다.

하루는 후의 아들 부정(副正) 덕숭(德崇)이 후의 명을 전하고, 나에게 기문을 요구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우리나라 산수의 훌륭한 경치는 관동이 첫째이고, 관동에서도 강릉이 제일이다.

그런데 일찍이 가정(稼亭) 이(李) 선생의 〈동유기(東遊記)〉와 근재(謹齋) 안상국(安相國)의 〈관동와주(關東

瓦注)〉를 읽어보니, 강릉에서 가장 좋은 명승지는 경포대ㆍ한송정(寒松亭)ㆍ석조(石竈)ㆍ석지(石池)ㆍ문수대

(文殊臺)라는 것을 알았으며, 따라서 선배의 풍류 또한 상고할 수 있었다. 한송정 거문고 곡조는 중국까지 전해

졌고, 박혜숙(朴惠肅)ㆍ조석간(趙石磵)의 경포대 놀이는 지금까지 좋은 이야깃거리로 되었으며, 호종단(胡宗旦)

이 물에 비석(碑石)을 빠뜨린 것도 또한 기이하다. 나는 직무에 얽매여서 한 차례 탐방할 여가를 얻지 못하고서,

동쪽으로 임영을 멀리 바라보고 와유강산(臥遊江山)하는 흥취만 허비한 지가 오래였다. 이번에 기문지으라는

명을 받고 기꺼이 말한다.

내 들이니, 누의 높이가 공중에 높이 솟아 풍우도 아랑곳 없고, 누의 크기는 수백 사람이 앉을 만하다 한다.

누에 올라 바라보면 부상(扶桑)을 휘어잡고, 양곡(暘谷)을 당길 듯하다. 풍악(楓岳)이 등에 있고,

오대산이 겨드랑에 있다. 바다 위 여러 봉우리는 푸르르게 뾰족뾰족 옹기종기 노을 아득한 사이에 들락날락하는

것이 털이나 실같이 보인다. 아침 볕과 저녁노을이 사시로 바뀌는 것과, 온갖 경물이 변하는 천 가지 만 가지 형

상은 한두 가지로써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오직 운금(雲錦)이란 이름으로써 현판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일찍이 소자첨(蘇子瞻)의 하화시(荷花詩 연꽃)를 보니, 하늘 베틀에 구름 같은 비단이라는 말이 있으니, 내 상상

하건대 아마 여기에서 취한 것이리라. 그 못에 파란 물이 넘실거리고 연꽃이 한창 피어서, 붉은 향기와 푸른

그림자가 서로 비치고 둘리어, 바람ㆍ비ㆍ달ㆍ이슬에 깨끗하게 서 있는 것과, 맑아서 멀리서만 바라볼 수 있는

기이한 모습과 특이한 태도가 기상이 한결같지 아니하다. 그 덕을 논한다면 줄기 속은 통하고 밖은 곧아서,

군자의 기상인데 주자(周子)의 〈애련설(愛蓮說)〉에다 설파하였다. 그러하니 이 누에 놀고 휴식하며 오르내리

는 자는 특히 술잔으로써 이렁저렁 세월을 허비하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티끌에서 벗어난 깨끗한 벗이어서 또

한 물(物)을 보고서 자신을 돌아보게 할 만한 것이라. 이미 물을 보고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다면, 어찌 깨끗한

벗으로만 그칠 뿐이겠는가.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한다.

그러하니 위에 말한, 경포대ㆍ한송정ㆍ사선정(四仙定)ㆍ풍악산ㆍ오대산 등 모든 눈에 와닿고 마음에 느껴지는

어느 것이, 인자ㆍ지자의 쓰는 바이며, 나의 심성을 수양하는 데에 모두 도움이 되는 것이다. 후가 이 누를 중건

하는 것이 어찌 뜻이 없었으리요. 그러나 내가 보지도 않고 억지로 말하는 것은 또한 거짓에 가깝지 않을까.

후일에 만약 몸이 한가하게 되어서 관동지방에 유람하고 싶은 나의 소원을 이루게 된다면, 마땅히 황학(黃鶴)을

부르고 백운(白雲)을 부여잡아서 이 누에 올라 글을 읊어서 나의 할 말을 마치리라.

이후의 이름은 신효(愼孝)이고, 자는 자경(自敬)이며, 전성(全城)에 명망 있는 씨족이다. 여러 번 주(州)와 군(郡)

을 맡아서 명관으로써 이름이 났다." 하였다.

 

○ 조운흘(趙云仡)의 시에, "운금루 앞 운금대에서 취해서보니, 구름 같은 비단이 못에 가득 피었네.

세상에 어찌 천년토록 사는 방법이 있으랴, 날마다 피리와 노래에 휩싸여 술잔을 기울이게나." 하였다.

 

○ 성석인(成石因)의 시에, "붉은 다락이 높게 솟아 지대(池臺)를 눌렀는데, 만 송이 연꽃이 차례로 피네.

날 저물녘에 솔솔 바람이 한번 스치니, 맑은 향기가 은은하게 금잔에 든다." 하였다.

 

신증 박시형(朴始亨)의 기문에, "임영은 예국(濊國)의 터이다. 예전 명도(溟都)이며, 삼한(三韓) 때에는 북빈경

(北濱京)이었다. 고려 동원경(東原京)이라 불렀는데, 이는 신라 태종(太宗)의 5대손 주원공(周元公)이 도읍하

여서 여러 대로 살았던 까닭에 이름한 것이다. 그 후에는 혹 명주목이라 혹은 도독부라 불렀으며, 지금은 도호

(都護)에다 대(大)자를 붙여서 구별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름난 구역의 훌륭한 경치가 사방에 알려져서, 고관으로 풍류를 좋아하는 사대부 누구나 그 지역에

한번 가서 평소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였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으로 말미암고, 물화(物華)는 하늘이 내린

보배인 것으로서 그 절묘하고 장함이 대관령 동쪽에서는 집대성(集大成)하여, 유독 으뜸이 되게 한 것이로다.

그 호수와 산의 훌륭함이 유람하기에 좋은 것은 이곳의 어디를 가든 그러하나, 그중에서도 한두 가지를 든다면,

관도에 있는 누각은 의운(倚雲)이라 현판하였고, 연당(蓮塘)에 있는 누각은 이름이 운금(雲錦)이다. 동쪽으로

바닷가에 있는 정자는 한송(寒松)이며, 북쪽으로 호수에 가까운 누대는 경포(鏡浦)다.

이것이 모두 명승의 으뜸이다. 손님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술 마시며 시가를 읊고, 강산에 취미를 붙이고 우주에

눈을 들어 회포를 헤치고 기상을 펴는 곳이다. 운금의 높은 누(樓)는 예전에는 객관 동쪽에 있었는데, 계미년에

관사를 개축하면서 옛 제도가 좁고 작다 하여 동쪽으로 터를 넓혀, 추녀를 크게 하므로써 누는 드디어 없어졌다.

그 후로 중건하지 않은 지가 15년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운금이라는 이름만은 있고 누는 없어졌다. 매양 누렇게

매실이 익을 무렵의 무더위나, 연꽃이 향기로울 때나, 봄바람 가을달에 대숲 그림자가 너훌거리는 때에 누대와

정자에 유람하여 회포를 펼 만한 곳이 없었다.

심지어는 선배들의 제영(題詠)조차 높은 다락에 묶어 두어서 부르고 화답하는 자가 없으니, 시인 재자(詩人才子)

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성화(成化) 을미년 겨울에 전성 이후 신효(全城李侯愼孝)가 이 고을 원으로 왔고,

통판 월성 최군 연(通判月城崔君演)이 보좌하게 되었다. 일으킬 것과 없앨 것이 있으면 모두 시행하니, 다스림의

덕화가 흡족하여 뭇사람이 칭송하였다. 부임한 지 한 해가 되자 온갖 퇴폐하였던 것이 아울러 일어났다. 시들고

병들었던 민생이 모두 밭 갈고 우물 파서 촌락이 편안하니, 관리는 할 일이 없었다. 후가 드디어 옛 누를 중건할

뜻이 있어서 방백(邦伯 감사) 김상 양경(金相良敬)에게 사유를 갖추어 말하여 허가를 맡았고,

안상 관후(安相寬厚)가 김상(金相)의 후임으로 와서 비용을 도와 주었다. 이에 객관 북쪽에 터를 잡아 가시덤불

을 불태우고, 높낮음을 측량하며 물러서서 보니, 기이한 형상이 완연히 하늘이 낸 것이었다. 이에 놀고 있는 자

들을 모집하고 아전들을 부리며 관에서 공급하였다. 이해 7월에 일을 시작하였는데, 겨우 일곱 달이 되자 아로

새긴 기와와 채색한 서까래가 갑자기 우뚝솟았다. 깊이는 여섯 발쯤이고, 옆은 네 발이 조금 넘는데,

아마 하늘이 그 지역을 숨겨 두었다가 그 사람에게 주었던 것 같다.

아, 물(物)의 흥함과 폐함은 때가 있는 것이니, 이 누가 헐리고 객관이 되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관사의 굉

장 화려함이 예전 규모보다 훨씬 나음을 알았을 뿐이요, 풍류의 아름다운 흥치는 이 누가 없어지므로써 좌절된

것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그 후 15년이라는 오랜 시일을 지나, 이(李)후가 옴으로써 비로소 복구되었는데 지세의 웅장함과 규모의 거룩

함이 전일의 누각보다 몇 배가 되니, 이것이야 말로 어찌 흥하고 폐함이 때가 있으며,

또 그 사람을 기다려서 흥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후는 대대로 벼슬한 집의 자손으로서 일찍부터 시와 예로써 가르침을 받았고, 맑은 덕과 행정의 솜씨로 장한 명

망이 있음이 오래였다. 그리고 본래부터 기이한 경치를 좋아하여 마음은 속세 밖에 놀아서 시원하게 공중의 바

람을 타고 노니는 신선의 기상을 숨길 수 없었으니, 바로 옛사람의 이른바 좋아하는 것이, 산수 사이에 있어서

마음속에 자득한 것이니, 그의 풍류와 고상한 뜻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나는 이 고을 사람이니, 즐거운 마음을 뽐내어서 송사를 꾸며, 거리에서 노래하기를 원한다. 송(頌)에 이르기를,

'악양(岳陽)에 누(樓) 있으니 동정호(洞庭湖)가 눈앞에 있고, 등왕(滕王)이 각(閣)을 지으니 형려(荊廬)가 안개

처럼 벌여 섰다. 높은 데에서 낮은 곳에 임하였고 공중에 솟아 바람을 탄 듯한데, 누각이 아니면, 이런 경치 있을

것인가. 대관령 밖 형승은 임영부(臨瀛府)가 독차지하였다. 운금(雲錦)의 높은 누각이 뛰어나게 깨끗하여 사랑

스러웠는데, 그것을 없애고 객관을 지으면서 터마저 뭉개버렸다. 그리하여 여러 해가 그럭저럭 지나갔다.

호수와 산이 조롱하고 꽃과 대도 부끄러워하였다. 우리 이후는 하늘이 낳은 영재였다. 깨끗한 충성과 아름다운

절조(節操)를 지닌 대대로 벼슬한 집안이었다. 그의 풍류와 문장은 옛사람과 겨루어도 양보할 데가 없다.

금당(琴堂)에 일이 한가하니, 호기로운 마음이 났다. 이에 기이한 터를 잡으니, 없어졌던 누각이 다시 통창하였다.

웅장하고 아름다움이 예전 규모보다 곱절이었다. 귀신이 가만히 와서 도와주는 듯하다. 아전들은 자식이 아비

일 돕듯 몰려왔고 한푼 돈도 거두지 않았다. 겨우 일곱 달이 지나자 벌써 일손을 떼었다. 좌우로 보니 산천의

기상이 천 가지 만 가지였다. 하늘이 만든 것을 땅이 숨겨서 기다림이 있었던 것이다.

공사를 마치니 절후는 중양(重陽)이었다. 이에 고을 늙은이들을 불러서 술잔을 권했다. 이어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니 활과 살이 베풀어졌다. 술잔과 상이 낭자하고, 퉁소와 북소리가 뚱땅거렸다. 이에 낙성하니 즐거움이

다함 없다. 빈객이 취하고 배부른 것은 오직 덕으로써 함이었다. 모두 말하되 우리 후를 생각하여 잊지 못하겠다.

우리 후가 정사하여 우리를 구휼하고 우리를 애무하였다. 무릇 혈기가 있는 자가 오직 이후를 믿고 산다.

누가 소신신(召信臣 한 나라 공경(公卿)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소부(召父)의 칭을 받음) 아비라 하던가,

우리 후가 아비이고, 누가 두시(杜詩)를 어미라 하던가, 우리 후가 어미이다.

우리 후가 지은 누는 감당(甘棠)나무 짝하리. 질병 없이 천수를 누리기를 바라노니, 수하시어 우리 향토를 보호

하소서. 우리의 말은 아첨하는 말이 아니라, 바지가 다섯이라[五袴 선정을 베풀어 살기 좋다는 뜻]는 노래로다.'

하였다." 하였다.

 

○ 성현(成俔)의 시에, "능파선자(凌波仙子)가 요대(瑤臺)에 기댔는데, 취한 듯 붉으레한 얼굴에 보조개 방싯,

비록 이것이 정이 없고 말도 못하나, 경성(傾城)할 풍골(風骨)이 술잔을 권하네."

 

○ "우거진 나무들이 양대(涼臺)를 감쌌는데, 땅에 가득한 짙은 그늘 빽빽하여라. 관청의 문서가 나날이 적어지

고 동헌 뜰이 고요한데, 때때로 상비(象鼻)를 당겨 경배(瓊杯)를 만든다." 하였다.

 

의운루(倚雲樓) : 객관 남쪽에 있다. 여절당(勵節堂) : 객관 서북쪽에 있다. 부중(府中) 사람이 여기에서 조운흘

(趙云仡)을 위하여 제사하니, 속칭 생사당(生祠堂)이라 한다. 한송정(寒松亭) : 부 동쪽 15리에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했고 소나무가 울창하다. 정자 곁에 차샘[茶泉]ㆍ돌아궁이[石竈]ㆍ돌절구[石臼]가 있는데,

곧 술랑선인(述郞仙人)들이 놀던 곳이다.

 

○ 악부(樂府)에 한송정곡(寒松亭曲)이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이 곡조를 비파(琵琶) 바닥에 써 둔 것이

물결을 타고 강남지방으로 떠밀려 갔으나, 강남 사람은 그 글의 뜻을 몰랐다. 고려 광종(光宗) 때에 우리나라

사람 장진산(張晉山)이 강남에 사신으로 갔더니 강남 사람이 그 글 뜻을 묻는 것이었다. 진산은 시를 지어서

풀이하기를, "달 밝은 한송정 밤이요, 물결 고요한 경포의 가을이라, 슬피 울며 오고가니, 모래 위에 갈매기는

신의가 있도다." 하였다 한다.

 

○ 안축(安軸)의 시에, "네 선인이 일찍이 여기에 모였을 때, 객은 맹상군(孟嘗君)의 문전 같았더니라.

구슬 신발은 지금엔 구름처럼 자취도 없고, 푸른 소나무는 불타고 남지 않았네. 신선을 찾아 빽빽하던 푸른 숲

생각하고 옛일을 추억하며 황혼에 섰노라. 오직 차 다리던 샘물만이 남아, 예전 그대로 돌밑에 있다." 하였다.

 

○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먼 옛날 신선놀이 까마득한데, 창창(蒼蒼)한 소나무 홀로 서 있다.

다만 샘 밑에 달이 남아 비슷하게 형용을 상상한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외로운 정자가 바다를 임해 봉래산 같으니, 지경이 깨끗하여 먼지 하나 용납않네.

길에 가득한 흰모래는 자욱마다 눈[雪]인데, 솔바람 소리는 구슬 패물을 흔드는 듯하다. 여기가 네 신선이

유람하던 곳, 지금에도 남은 자취 참으로 기이하여라. 주대(酒臺)는 기울어 풀속에 잠겼고, 다조(茶竈)는 내딩

굴어 이끼 끼었다. 양쪽 언덕 해당화는 헛되이 누굴 위해 지며 누굴 위해 피는가.

내가 지금 경치를 찾아 그윽한 흥취대로 종일토록 술잔을 기울이네, 앉아서 심기가 고요하여 물(物)을 모두

잊었으니, 갈매기들이 사람 곁에 날아내리네." 하였다.

 

○ 권한공(權漢功)의 시에, "옛 땅에 인가는 멀고, 차가운 조수만이 해문(海門)을 두드린다.

천 그루 소나무는 이미 넘어졌어도, 눈알 같은 두 우물이 아직도 남았다. 새 날아가니 모래톱 고요하고,

갈가마귀 빙빙 도는데 산에 해가 저문다. 돌아가려다가 다시 머물러, 잠깐 흰 구름 밑에 섰노라."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오로지 좋은 경치만을 찾을 양으로, 옛 성문을 일찍 나섰다. 선인은 가도 송정(松亭)은

있고, 산에는 석조(石竈)가 묻혀 남아 있네. 인정은 예와 지금이 달라도, 경치는 아침이요 저녁이로다.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말만 듣고 근거없다 했을 것이다." 하였다.

 

○ 고려 이무방(李茂芳)의 시에, "정자가 소나무 산기슭에 의지했는데, 동쪽으로 바라보니 바다는 끝없다.

지경이 고요하니 신선 자취있고, 모래 밝은데 새 발자국 남았네. 비석에는 이끼 무늬 푸르고,

돌에는 비 맞은 자국이 어둡네. 한 웅큼 되는 샘이 마르지 않으니, 천지의 뿌리에서 솟아나오네." 하였다.

 

○ 유계문(柳季聞)의 시에, "옛 선인이 유랑하던 곳에, 다투어 사모하여 객이 문간을 메우네. 약을 만들던 사람은

어디로 갔나, 차 달이던 아궁이만 홀로 남았네. 항아리 속에 일월(日月)이 한가한데, 세상일은 아침저녁 동안이

어라. 머리를 돌려서 유적을 찾으니, 오직 소나무만이 절로 뿌리 박았네." 하였다.

 

경포대(鏡浦臺) : 부 동북쪽 15리에 있다. 포의 둘레가 20리이고, 물이 깨끗하여 거울같다. 깊지도 얕지도 않아,

겨우 사람의 어깨가 잠길 만하며, 사방과 복판이 꼭 같다. 서쪽 언덕에는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 위에는 누대가

있으며, 누대가에 선약을 만들던 돌절구가 있다. 포 동쪽 입구에 판교(板橋)가 있는데 강문교(江門橋)라 한다.

다리 밖은 죽도(竹島)이며, 섬 북쪽에는 5리나 되는 백사장이 있다. 백사장 밖은 창해 만리인데,

해돋이를 바로 바라볼 수 있어, 가장 기이한 경치다. 또한 경호(鏡湖)라 하기도 하며, 정자가 있다.

일찍이 우리 태조(太祖)와 세조(世祖)께서 순행하다가 여기에 어가를 멈추었다.

 

○ 안축의 기문에, "천하의 물건이 형체가 있는 것은 모두 이치가 있으니, 크게는 산과 물, 작게는 주먹만한 돌,

한 치만한 나무라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유람하는 사람은 이런 물건을 보고 흥을 느끼며, 따라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누대와 정자를 짓게 되는 이유이다. 형체가 기이한 것은 외면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눈으로 구경하게 되는 바이며, 이치를 찾자면 미묘한 데에 숨겨져 있어 마음으로 얻는 바이다.

눈으로 기이한 형체를 구경하는 데에는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가 모두 같이 그 한쪽만을 보게 되며,

마음으로 미묘한 이치를 깨치는 것은 군자만이 그러하여 그 전체를 즐거워한다. 공자(孔子)께서,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한다.' 하셨다. 이것은 그 기이한 형체를 구경하면서 한쪽만 보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고, 대개 미묘한 이치를 깨쳐서 그 전체를 즐김을 말한 것이다.

내가 관동지방을 유람하기 전에 관동의 형승을 평논하는 자는, 무두 국도(國島)와 총석(叢石)을 말하고 경포대

는 그렇게 아름답게 여기지 않았다. 다음 태정(泰定) 병인년에 지금 지추부학사 박공 숙(知秋部學朴公淑)이

관동에서 절월(節鉞)을 잡았다가 돌아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임영 경포대는 신라 시대에 영랑 선인(永郞仙人)

들이 놀던 곳이다. 내가 이 대에 올라 산수의 아름다움을 보고 마음에 참으로 즐거워하였고, 지금에도 생각에

남아 잊을 수 없다. 누대에 정자가 없어서 풍우를 만나면 유람하는 자가 괴로워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고을 사람에게 명하여 대 위에다 작은 정자를 지으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기문을 지으라.'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박공의 본 바가 여러 사람의 평론하는 바와 같지 않음을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감히

망령되게 평론하지 못하고, 한번 유람한 뒤에 기문짓기로 생각하였다. 이번에 내가 다행히 왕명을 받들고 이

지방을 진수하게 되어, 기이하고 훌륭한 경치를 두루 보았다. 저 국도와 총석의 기이한 바위와 괴상한 돌이 진실

로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나, 이것은 기이한 형상의 물체일 뿐이었다. 그 후 이 대에 오르니, 담담하게 한가롭고

넓게 트이어 기괴한 형상으로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는 것이 없고, 다만 멀고 가까운 산과 물뿐이었다. 앉아서

사방을 돌아보니, 먼 데의 물은 푸른 바다가 넓고 질펀한데 아득한 물결이 출렁거리고, 가까운 데의 물은 경포

가 깨끗하고 맑아서 바람 따라 넘실거린다. 먼 데의 산은 골짝이 천겹인데 구름과 노을이 아련하며,

가까운 데의 산은 봉우리가 십리인데 초목이 무성하다. 항상 물새와 갈매기가 있어 떳다 잠겼다 하며, 대 앞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다. 그 봄ㆍ가을 연기와 달이며, 아침저녁으로 그늘졌다 개었다 하여 때에 따라 변화하는 기상

이 일정하지 않은 바, 이것이 이 경포대 경치의 대략이다.

내 오랫동안 앉아서 가만히 보다가 막연히 정신이 집중됨을 깨닫지 못하였다. 지극한 멋은 한가하고 담담한 중

에 있고, 속세를 떠난 생각이 기이한 형상 밖에 뛰어나서,

마음에 홀로 알면서 입으로는 형용할 수 없음이 있었다.

그러한 뒤에 박공(朴公)의 좋아한 바가 기괴한 물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말하는 이치의 미묘한 것임을 깨

달았다. 옛적에 영랑(永郞)이 이 대에 놀았으니, 반드시 좋아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박공이 좋아한 것도 영랑의 마음과 같은 것인가. 박공이 고을 사람에게 이 정자를 짓도록 명하니,

고을 사람이 다, '영랑이 이 대에 놀았으니 정자가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는데, 지금 천 년이나 지난 뒤에

정자는 지어서 무슨 소용이랴.' 하고, 마침내 풍수가의 꺼리는 말로써 고하였다. 그러나 공은 듣지 아니하고

역군을 독촉하여 흙을 깎다가 정자 옛터를 발견하였다. 주추와 섬돌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고을 사람이 이상

하게 여겨서 감히 딴 말이 없었다. 정자 터가 이미 오래되어 까마득하고 묻혀지기까지 하여 고을 사람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우연히 발견되었으니, 이 일을 보면 영랑이 오늘날에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는가. 전일에 내가 박공의 말을 듣고 그 단서를 알았으나 이번에 이 대에 올라서 그 자세한 것을 상고하고,

인해서 정자 위에 쓰노라." 하였다.

 

○ 앞사람 안축(安軸)의 시에, "비 개이니 가을 기운 강성(江城)에 가득하여 조각배 띄워 흥취를 푸노라. 지역은

항아리 속에 들어오는데 티끌은 못 오고, 사람이 거울속에 노는데 그림으로 표현하기 어려워라. 연파(煙波)에

백조가 때때로 지나가고, 모랫길엔 나귀가 천천히 간다. 뱃사공아 노를 빠르게 젓지 마라. 깊은 밤에 외로운 달

밝은 것 보기를 기다려라."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대를 쌓아 벽포(碧浦)에 임했으니, 유람하는데 시간 오래됨을 어찌 사양하리. 부서지는 물결

은 노래하는 부채를 움직이고, 상서로운 바람은 춤추는 소매에 불어오네. 옥진(玉塵) 들고 하는 이야기는 은하수

(銀河水)를 기울인 듯, 은잔에 술은 바다물결처럼 넘실거리네. 아지 못하겠네 선인의 마음이, 지금과 옛적 서로

통할는지." 하였다.

 

○ 이곡의 시에, "붉은 깃발에 옹위되어 화성(火城)에 돌아오니, 사신의 놀이가 인정에 알맞았다. 야복(野服)을

입으니 수수하여 좋고, 시편(詩篇)은 선배를 따름이 기쁘구나, 긴 여름해에 바람 쏘이려 난간을 부여잡았고,

깊은 밤에 달빛을 따라 배 가는대로 맡겨둔다. 호수 가운데 어찌하면 경치를 독차지하여, 미친 객 미친 이름이

사명(四明)을 이을고." 하였다.

 

○ 백문보(白文寶)의 시에, "어떤 사람의 시가 사선성(謝宣城)만 하리, 고상한 놀이가 속된 정이 아님을 스스로

 깨닫노라. 좋은 술이 비었는가 병이 아주 눕고, 맑은 강은 비단 같으니 시구가 이루어지네, 강락(康樂)이 산에

오르던 흥취를 겸할 수 있고, 지장(知章)이 말 타고 가던 것은 반드시 하지 못한다. 달 밝은 거울 같은 호수에

한 구비 남았으니, 내일은 벼슬을 그만두고 배를 타리라." 하였다.

 

○《동인시화(東人詩話)》에, "박혜숙 신(朴惠肅信)이 젊어서부터 명망이 있었다. 강원도 안렴사(按廉使)로 있으

면서 강릉 기생 홍장(紅粧)을 사랑하여 애정이 매우 깊었다. 임기가 차서 돌아갈 참인데,

부윤 조석간 운흘(府尹趙石磵云仡)이 홍장이 벌써 죽었다고 거짓으로 고하였다. 박은 슬피 생각하며 스스로

견디지 못하였다. 부(府)에 경포대가 있는데 형승이 관동에서 첫째이다. 부윤이 안렴사를 맞이하여 뱃놀이하면서,

몰래 홍장에게 화장을 곱게 하고 고운 옷을 입게 하였다. 별도로 배 한 척을 준비하고, 늙은 관인(官人)으로서

수염과 눈썹이 희고, 모습이 처용(處容)과 같은 자를 골라 의관을 정중하게 하여, 홍장과 함께 배에 실었다.

또 채색 액자(額子)에다, '신라 적 늙은 안상(安詳)이 천 년 전 풍류를 아직 못 잊어, 사신이 경포에 놀이한다는

말 듣고, 꽃다운 배에 다시 홍장을 태웠노라.'라는, 시를 적어 걸었다. 노를 천천히 저으며 포구에 들어와서 물가

를 배회하는데, 거문고 소리와 피리소리가 맑고 또렷하여 공중에서 나는 듯하였다. 부윤이 안렴사에게,

'이 지역에는 옛 선인의 유적이 있고, 산꼭대기에는 차 달이던 아궁이가 있고, 또 여기에서 수십 리 거리에

한송정이 있고, 정자에 또 사선(四仙)의 비석이 있으며, 지금도 신선의 무리가 그 사이에 오가는데,

꽃피는 아침과 달 밝은 저녁에 간혹 본 사람도 있소. 그러나 다만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 갈 수는 없는 것이

오.' 하니, 박이 말하기를, '산천이 이와 같이 아름답고 풍경이 기이하나, 마침 정황이 없소.' 하면서 눈에 눈물이

가득하였다.

조금 뒤에 배가 순풍을 타고 눈깜박할 동안에 바로 앞으로 왔다. 노인이 배를 대는데 얼굴 모습이 기괴하고 배

안에는 홍기(紅妓)가 노래하며 춤추는데 가냘프게 너울거렸다. 박이 놀라서 말하기를, '필연코 신선 가운데

사람이다.' 하였다. 그러나 눈여겨 보니 홍장이었다. 온 좌석이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고 한껏 즐긴 다음 놀이를

마쳤다. 그 후에 박이 시를 보냈는데, '소년 적에 절(節)을 잡고 관동을 안찰할 때, 경포대 놀이하던 일 꿈속에도

그리워라. 대 밑에 다시 배 띄우고 놀 생각 있으나, 붉은 단장과 늙은이가 비웃을까 염려된다." 하였다.

 

○ 유사눌(柳思訥)의 시에, "기이한 경치 이야기를 듣고 내 말[馬]이 동쪽을 갔더니, 당년의 즐기던 놀이 그림

속일세. 지금 바로 배 타고 가고 싶으나, 대 위엔 석간옹(石磵翁)이 없으리." 하였다.

신증 성현(成俔)의 시에, "대관령이 공중에 솟아 여러 산의 아비인데, 새끼 산이 동쪽으로 줄기줄기 뻗었네.

줄기가 갈라져서 호수를 감쌌는데, 푸른 멧부리 흰 물결이 서로 머금고 뱉는다. 평평한 호수 십리인데 물결 고요

하니, 거울 빛이 경대에서 나온 듯 갈매기 날아와 눈을 차니, 봄바람에 흰 날개가 펄럭인다. 대는 푸르러 오도

(鰲島)를 덮었는데, 지는 해 홍교(虹橋)엔 사람 그림자가 거꾸러졌다. 긴 길 바다에 임했는데, 들 해당화는 찬란

하게 푸른 풀에 비친다. 물결은 아득하게 큰 바다에 잇닿았는데, 구름 돛은 만리에 부상(扶桑) 끝이네. 부상은

어디인가 갈 수 없고, 용퇴(龍堆)와 신각(蜃閣)은 멀리 서로 마주했네. 기이한 구경 훌륭한 경치 어디에 짝 있으

리. 이 세상 안에서 제일이 되리라. 동정호(洞庭湖)와 운몽택(雲夢澤)은 공연한 이름일 것을, 제인(齊人)이 자랑

하고 초인(楚人)이 풍치지만 우열을 가리기는 어려우리. 선인의 놀이는 이미 먼 세월 구름만이 아득한데,

바람 맑고 달이 밝아 빈 강에 가을이네. 시인과 묵객이 몇이나 오갔나, 해마다 술 싣고 봄놀이가 많았네.

내 걸음은 바로 늦은 봄 3월이라, 산꽃이 어즈러이 떨어져 붉은 비 쏟아지네. 시를 지어 옛일을 생각하고 긴

휘파람 부니, 맑은 바람이 슬슬 불어 푸른 나무 흔드네." 하였다. 해송정(海松亭) : 경포대 남쪽에 있으며,

동쪽으로 푸른 바다가 바라보인다.

 

○ 이구(李玖)의 시에, "풍진 속에 모자를 재켜썼으니, 동서로 헤매는 동안 머리 희었네. 누에 올라 더위를 피하

였더니, 경치를 보니 문득 가을이던가. 물고기는 뛰다가 숨기도 하고, 제집 찾는 새는 느리게 난다. 신세를 생각

하고 홀로 섰는데, 산 기운이 한창 피어오른다." 하였다.

 

쾌재정(快裁亭) : 부 동쪽 9리에 있으며, 곁에 이끼낀 비석이 있다. 예전에 병사를 주둔시키던 곳이다.

취원대(聚遠臺) : 부 동쪽에 있다.

 

○ 조운흘의 시에, "성 동쪽 취원대에 걸어 오르니, 들 복숭아 산 살구가 성에 가득 피었다.

세상이 시끄러워 한창일이 많은데, 묻노니 봄빛이 어데서 왔나." 하였다.

 

어풍루(馭風樓) : 곧 부성(府城) 동쪽 문루(門樓)이다.

신증 척번대(滌煩臺)ㆍ청백당(淸百堂) : 모두 객관 서쪽에 있다.

 

허리대(許李臺) : 부 남쪽 25리에 있다. 바닷가에 평평하고 넓은 바위가 있는데, 백여 사람이 앉을 만하다.

허종(許琮)과 이육(李陸)이 함께 사명을 띠고 여기에 와서 놀았으므로 이름하였다.

 

○ 이육의 시에, "완악한 모습이 몇 겁 티끌을 겪었는고, 물 위에 하늘로 솟아 홀로 바닷가에 섰다. 상서(尙書)의

붓 아래엔 강물을 쏟는 듯, 대장 깃발 곁엔 일월이 열렸네. 당시 난정(蘭亭)에는 성한 일이라 전해오고,

천년 적벽(赤壁)은 기이한 재사(才士) 힘입었다. 어찌 알랴 길가에 평범한 돌이, 이제부터 허리대(許李臺)라

이름 높아질 것을." 하였다.

 

학교 향교 : 부 북쪽 3리에 있다. 동쪽 모퉁이에 항아리 같은 바위가 있으며, 항간에서 연적암(硯適巖)이라 부른다.

 

○ 고려 김승인(金承印)이 존무사(存撫使)가 되어, 화부산(花浮山) 밑에다가 처음으로 학사(學舍)를 창설하였다.

신증 홍귀달(洪貴達)의 중수기에, "내가 젊었을 때, '강릉의 풍습이 문학을 숭상하여 그들 자제가 겨우 부모의 품

을 벗어나게 되면, 곧 향교에 들어가 배우고, 시골 구석구석 마을에까지 선비들의 위의가 엄숙하고 조용함은 모두

글을 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란 말을 듣고 아름답게 여겼다.

성화(成化) 임진년 봄에 내가 시어사(侍御史)로서 시원(試院)에 참여하였는데, 유생 3, 4명이 있었다.

얼굴에 고기(古氣)가 있고 의관은 남루하나, 그들의 강설은 매우 정미하고 익숙하였다. 물으니 모두 강릉 사람

이었다.

그 후 14년이 지나서 절월(節鉞)을 잡고 관동에 오게 되었다. 처음 임영관(臨瀛館)에 가서 부 이졸의 예를 받은

다음, 여러 학생을 불러서 경서의 뜻을 물으니 마음속에 성현의 뜻을 통한 자가 거의 수십여 명이었다.

또 제목을 내어 문예를 시험하도록 명하였더니, 시부(詩賦)와 의의(疑義)에 합격한 자가 또 50여 명이었다.

이에 또 지난 임진년 시원에서 강하던 자의 학업이 그 유래가 있음을 알았다. 이튿날은 향교에 나아가서 선성

(先聖)께 배알한 다음, 물러나서 부사 이인충(李仁忠)ㆍ전승지(前承旨) 박시형(朴始亨)ㆍ도사(都事) 류양춘

(柳楊春)ㆍ교수(敎授) 최자점(崔自霑) 등과 의논하고, 역말을 달려보내 조정에 아뢰기를, '강릉은 대관령과 바

다 사이에 멀리 있으나, 이곳 사람은 예의를 익히고 시서를 외우니, 실상 우리 동방의 추로(鄒魯)입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이 고을 향교에는 대성전(大聖殿)과 동무(東廡)ㆍ서무(西廡)가 있사온데 오랜 세월에 허물

어지고 위태하며, 재사(齋舍)도 비좁아 학생을 수용하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중수하고 넓히지 않으면 장차 무너

져서 지탱하기 어려울까 염려되오며, 강독하는 자들 또한 편안히 거처하지 못할까 합니다.

다행히 지금은 사방에 걱정이 없어, 본부(本府)와 삼척(三陟) 두 진의 병졸이 아무 하는 일 없이 날을 보냅니다.

이 두 진의 병졸을 이용하여 봄ㆍ여름으로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구웠다가, 가을ㆍ겨울이 되거든 집을 짓게

하여 옛것을 새롭게 하며, 좁은 것을 넓혀서 학도들을 장려하기를 청합니다. ' 하였다. 윤허를 받은 다음, 곧 군

졸을 나누어서 재목과 기와를 모으게 하였다. 일이 되어갈 무렵에 마침 날씨가 가물어서 중지하였다가 그의 완

성은 다음 사람에게 미룬 채, 나는 교체되었던 것이다.

그 후 9년 만에 서울에서 최교수(崔敎授)를 만났는데, 최도 역시 벼슬이 갈려서 사간원 정언이 되었었다.

최의 말이, '강릉은 나의 고을입니다. 우리 향교가 중수된 것은 공의 힘입니다.' 하기에, 나는, '아니요, 내가 완성

하지 못하고 갈렸으니, 내게 무슨 공이 있겠소.' 하니, 최는 말하기를, '무릇 천하의 일은 완성하는 그날에 되는

것이 아니고, 계획하는 그날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공이 비록 완성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으나,

그 자재는 이미 공이 있을 때에 이루어 놓았던 것입니다. 을사년 겨울 공이 갈려 간 다음 해에 대성전과 동무ㆍ

서무를 지었고, 또 다음 해에 동재(東齋)ㆍ서재(西齋)ㆍ강청(講廳)을 지었고, 전사청(典祀廳)ㆍ제기고(祭器庫)ㆍ

교수아(敎授衙)ㆍ유사방(有司房)까지도 모두 일신하게 하였습니다.

또 다음 해에 남루(南樓)와 앞 행낭, 총 70여 칸을 지었는데 향교로서 크고 화려한 것이 비할 곳이 없습니다.

이어서 완성한 관원은 부사 이평(李枰) 판관 신승복(愼承福)이요, 기와 굽는 것을 감독한 자는 함영창(咸永昌),

집 짓는 것을 감독한 자는 김보연(金普淵)이며, 목수는 안해심(安海深)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이 당초에 시작하지 않았다면 다음 사람인들 어떻게 이 일을 완성하였겠습니까.

여기에서 배우고 여기에서 먹는 자는 모두 감격하고 분발하여, 문학을 숭상하는 풍습이 이에서 더욱 진작하리니,

이것은 그 사적(事蹟)을 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찌 한 말씀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내 말하기를, '아, 내가 무슨 공이 있어 감히 말하리오마는, 대저 인재가 많고 학교가 성하게 된 것은 사문(斯文)

이 아니면 오는 세대를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했다." 하였다.

 

역원 대창역(大昌驛) : 부 동쪽 5리에 있다. 안인역(安仁驛) : 부 남쪽 20리에 있다.

목계역(木界驛) : 부 서남쪽 50리에 있다. 고단역(高端驛) : 부 서쪽 60리에 있다.

횡계역(橫溪驛) : 대관령 위에 있으며, 부치(府治)에서 60리이다. 지대가 매우 높고 서늘하여, 매년 겨울이면 눈

이 두어 길이나 쌓였다가 다음 해 3월이라야 비로소 녹는다. 8월이면 서리가 내리므로 주인은 오직 구맥(瞿麥

귀리)을 심는다.

 

○ 정추(鄭樞)의 시에, "한낮인데도 계정(溪亭)엔 음기가 엉기고, 사시로 서리가 위세를 부리네. 봄인데도 나무

에 잎 없음이 괴이하더니, 사람들이, '가지 끝엔 밤마다 얼음 언다.' 말하네." 하였다.

 

진부역(珍富驛) : 영 서쪽에 있으며, 부의 치소에서 백 리다.

○ 권적(權迪)의 시에, "옛 역 이름이 진부인데, 진부라는 명칭은 무슨 뜻일까. 눈이 무더기 지니 산에 옥(玉)이

가득하고, 버들이 스치니 길에 금이 많아라, 시내에 잉어는 붉은 비단이 뛰는 듯, 마을 연기는 푸른 비단을 흩는

듯하다. 눈앞에 두 호장(戶長)은 귀밑머리가 은실처럼 빛나네." 하였다.

 

대화역(大和驛) : 영 서쪽에 있다. 부치에서 백 50리다.

방림역(芳林驛) : 영 서쪽에 있다. 부치에서 백 70리다. 동덕역(冬德驛) : 부 북쪽 42리다.

낙풍역(樂豐驛) : 우계현(羽溪縣) 동쪽 5리에 있다.

○ 정추의 시에, "명사(鳴沙)에 말가는 대로 천천히 돌아오는데, 시냇 바람이 비를 몰아 옷을 적시네.

정자 앞 흐르는 물은 바다와 가까운데, 산 밑에 있는 콩밭엔 모종이 드물다." 하였다.

 

임계역(臨溪驛) : 우계 현 서쪽 40리에 있다.

신증 성현의 시에, "평평한 모래톱이 바다에 닿았는데, 돌아갈 길은 아득히 멀기도 해라. 푸른 대는 뒷집을 막았

고, 푸른 숲은 판교(板橋)를 가리웠네. 연기 끼인 언덕에는 송아지 몰아가고, 풀 우거진 들판엔 샘물을 멀리 끌

어왔네. 뻐꾸기는 절기를 알고, 은근하게 곡식 심기 권하네." 하였다.

 

○ 이우(李堣)의 시에, "눈(雪) 빛이 창틈에 드니 촛불이 무색해지고, 달은 솔 그림자에 채[篩]쳐서 서쪽 처마에

일렁인다. 밤이 깊어 산바람이 부는 줄 알겠으니, 담 밖의 대나무에 우수수 소리 나누나." 하였다.

 

운교역(雲橋驛) : 영 서쪽에 있으며, 부치에서 1백 90리다. 구산역(丘山驛) : 부 서쪽 20리에 있다. 정자가 있는

데 사람을 서쪽으로 전송하는 곳이다.

○ 조운흘의 시에, "구슬 같은 두 줄기 눈물이 옥잔에 떨어진다. 양관(陽關) 세 가락에 전송할 때여라.

태산이 평지되고 바닷물이 말라야, 이별하는 눈물이 구산에서 없어지리." 하였다.

 

홍제원(洪濟院) : 부 서쪽 5리에 있으며 사화루(使華樓)가 있다. 제민원(濟民院) : 부 서쪽 28리에 있다.

대령원(大嶺院) : 대관령 위에 있다. 독산원(禿山院) : 부 서쪽 90리에 있다.

인락원(人樂院) : 부 서쪽 1백 20리에 있다. 인부원(人富院) : 부 서쪽 1백 39리에 있다.

자인원(慈仁院) : 부 서쪽 1백 40리에 있다. 장연원(長淵院) : 부 서쪽 1백 40리에 있다.

무응구리원(無應仇里院) : 부 남쪽 75리에 있다. 장수원(長壽院) : 우계현 서쪽 28리에 있다.

대제원(大濟院) : 우계현 서쪽 43리에 있다. 송현원(松峴院) : 우계현 서쪽 70리에 있다.

 

신증교량 누교(樓橋) : 부 남쪽 10리에 있다. 강문교(江門橋) : 부 북쪽 12리, 경포 입구에 있다.

 

불우 상원사(上院寺) : 오대산에 있다. 사자암(獅子菴) : 오대산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건문(建文) 3년 봄 정월 신미일에 계운 신무 태상왕전하(啓運神武太上王殿下)께서 내

신 판내시부사(內臣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을 시켜 참찬 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신 권근(權近)을 불러 전

지하시기를, '내가 일찍이 강릉부 오대산이 기이하고 빼어났다는 것이 옛적부터 드날렸음을 듣고, 원찰(願刹)을

세워서 착한 인과(因果)를 심고자 생각한 지 오래였다. 지난해 여름에 운설악(雲雪岳)이라는 늙은 중이 이 산에

서 와서 고하기를, 「산 중에 사자암이 있었는데, 국가의 비보사찰(裨補寺刹)입니다. 대(臺) 남쪽에 위치하였는

데, 대에 오르내리는 자가 모두 거쳐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창건한 지 오래되어서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으니, 보는 자가 마음 아파합니다. 진실로 이 암자를

중건한다면 여러 사람의 흔쾌함이 딴 곳보다 반드시 곱절일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곧

공인을 보내 중건하였다. 세 칸은 부처를 봉안하고 중이 우거하는 곳이며, 그 아랫쪽의 두 칸은 문과 목욕간으로

만들었다. 규모는 비록 작으나 지세가 적당하므로 거기에 알맞게 하고자 하여, 사치하거나 크게 하지 아니한 것

이다. 공사를 마친 다음, 그해 겨울 11월에 친림하여 낙성하였는 바, 대개 세상을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추념

(追念)하고 후세에까지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부처의 은덕에 젖고 유명(幽明)이 함께 의지하

기 위함이니, 경은 기문을 써서 오랜 후세까지 알게 하라.' 하시었다.

신 근이 적이 생각하건대 불씨(佛氏)의 도는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것인데, 그 설법은 매우 광대하다. 그러

므로 한(漢) 나라 이래로 군주로서 존숭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우리 태상왕전하께서 신무(神武)하신 자질로써

천운에 응해 개국하시어 동방을 보유하고 유신(維新)하는 정사를 베푸시니, 어진 은택이 깊고 두터우며 자손을

위해 남긴 법과 드리우신 복이 지극하다 하겠다. 번거로운 정무를 싫어하시어 사왕(嗣王)에게 전하시고,

불법에 전심하시어 부지런하게 받들고 믿으시어 깊고 높은 산꼭대기의 옛터까지 찾아서 이름 있는 절을 건립하

시되 천리 길도 멀다 않으시고 옥지(玉趾)를 수고롭게 하여 친히 임어(臨御)하시니,

숲과 골짜기는 빛이 더 나고 칡덩굴도 광채가 나니 이 산이 생긴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옛적에 신라

왕자 두 분이 이 산에 들어온 것이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 오는데,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창업하신 임금이시

고 태상왕의 존귀한 몸인데 멀리 승여(乘輿)를 움직여 친히 임어하셨으니, 지금으로부터 산골 늙은이들은 이 일

을 한없이 일컫고 이 산의 소중함을 더할 것이다. 마땅이 헌원씨(軒轅氏)가 구자산(具茨山)에 놀던 것과,

주목왕(周穆王)이 요지(瑤池)에 갔던 일과 아울러 아름다움을 무궁토록 칭송하리라." 하였다.

 

관음암(觀音菴) : 오대산에 있다.

문수사(文殊寺) : 부 동쪽 해안(海岸)에 있다.

○ 이곡의 〈동유기(東遊記)〉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수(文殊)와 보현(普賢) 두 석상(石像)은 땅에서 솟아나

온 것이라 한다. 동쪽에 사선비(四仙碑)가 있었는데, 호종단조(胡宗旦朝)가 물에 빠뜨려 오직 귀부(龜趺)만이

남았다 한다." 하였다.

 

○ 정추의 시에, "고요한 밤에 풍경소리 반공에 울리는데, 단청한 불전에 등불이 붉다. 노승이 우통(于筒) 물을

즐겨 말하는데, 지수(智水)와 어느 것이 묽고 진한고."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절을 두른 구슬 같은 시내와 옥 같은 봉우리, 청량한 경계가 지금도 예 같다. 공중을 향해 바

로 솟음은 솔의 성질을 알겠고, 물(物)에 응해도 항상 공(空)함은 대[竹]의 마음을 보겠다.

바람소리는 자연의 풍악을 울리고, 외로운 구름은 가서 세상 장마가 된다. 사신이 해마다 경치를 찾으니,

연하(煙霞)는 특별히 깊어라." 하였다.

 

○ "유인(幽人)이 보산(寶山) 속에 편히 쉬며, 한 줄기 향연으로 임금을 축수한다. 천녀(天女)가 꽃을 흩어 향기

가 땅에 덮였고, 야신(夜神)이 나무를 쪼개니 그림자가 공중에 어른거린다. 처마끝 달빛은 붉은 기둥에 흐르고,

베갯가 구름은 푸른 헌함을 스쳐간다. 한밤중 동창에 객이 놀라 잠 깨니, 해가 바다에서 솟구치어 붉은 빛을

쏜다." 하였다.

 

염양사(艶陽寺) : 화부산(花浮山)에 있다. 이곡의 중수기가 있다.

금옹사(金甕寺) : 오대산에 있다. 이첨(李詹)의 중수기가 있다. 흥원사(興原寺) : 담정산(淡定山)에 있다.

월정사(月精寺) : 오대산에 있다.

○ 정추의 시에, "자장(慈藏)이 지은 옛 절에 문수보살이 있으니, 탑 위에 천년 동안 새가 날지 못한다.

금전은 문 닫았고 향연이 싸늘한데, 늙은 중은 동냥하러 어디로 갔나." 하였다.

 

수정암(水精菴) : 오대산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우통물 근원에 수정암이 있다. 옛적에 신라 왕자 두 사람이 여기에 숨어서 참선하여

도를 깨쳤다. 그리하여 지금도 중으로서 수도하고자 하는 자는 모두 여기에 머물기를 즐겨 한다." 하였다.

 

등명사(燈明寺) : 부 동쪽 30리에 있다.

○ 이곡의 〈동유기〉에, "등명사에 와서 해돋이를 보았다."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쇠줄친 길이 벽련봉(碧蓮峯)을 둘렀는데, 겹 누각 층층 대가 공중에 솟았다. 그윽한 나무는

그늘져서 여름을 맞이하고, 늦은 꽃은 고움을 남겨서 봄의 조화를 돕는다. 봉간(鳳竿) 그림자는 천 봉우리 달에

걸렸고, 어고(魚鼓) 소리는 만 구렁 바람에 전한다. 고상한 사람이 눈오는 밤에, 화로 재 헤쳐 불 피우던 것이

생각난다." 하였다.

 

○ 김돈시(金敦時)의 시에, "절이 창파를 눌러 멀리 아득한데, 올라 보니 바다 복판에 있는 듯하다. 발을 걷으니

대 그림자가 성기면서도 빽빽하고, 베개에 기대니 여울 소리가 낮았다가 높다. 경루(經樓)에 밤 고요한데 향불

이 싸늘하고, 객탑(客榻)에 달 밝은데 갈건(葛巾)이 서늘하다. 좋은 경치에 머물 인연 없음이 못내 서글퍼,

종일토록 정신없이 구복(口腹) 위해 바쁘다." 하였다.

 

지장사(地藏寺) : 보현산(普賢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부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부 서쪽 백보(百步) 지점에 있다.

여단 : 부 북쪽에 있다. 김유신사(金庾信祠) : 화부산에 있다.

 

신증 지금은 성황사에 합쳤다. 대관산신사(大關山神祠) : 부 서쪽 40리 지점에 있다.

 

고적 창해군(滄海郡) : 한(漢) 나라 무제(武帝) 원삭(元朔) 5년에 예국(濊國) 임금 남려(南閭)가 조선(朝鮮)을 배

반하고 요동(遼東)에 가서 붙었으므로, 그 지역을 창해군으로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폐지하였다.

 

동루(東樓) : 용지사(龍池寺)에 있다.

 

○ 정추의 시에, "대관령 동쪽은 천하에 드문 경치이니, 명주(溟州) 고목에 꾀꼬리 어지러이 나네. 새벽에 말 타

고 절 찾아갔다가, 빈관(賓館)에 돌아오니 해가 기우네. 누에 오르니 달빛이 눈 같고, 쇠피리 한 소리에 산이 찢

어지는 듯하네. 난간에 기대니 시름에 겨워, 묻노니 천년 동안에 달은 몇 번이나 둥글었나, 밤 깊어서 사방에 인

적이 드문데, 가마귀 까악까악 티끌도 고요하다. 별빛은 반짝반짝 달과 겨루고, 은하는 천고에 빛이 환하다.

환한 빛이 사방에 임했는데, 뜬구름이 덮으려니 마음 아파라. 어찌하면 긴 칼로 창공에 기대볼까. 고래 같은 물

결이 한없이 아득하네. 화부산은 꾸불꾸불 무성한 빛이어라. 김유신 장군은 참 영웅일세, 천년토록 우뚝하고

기이한 공이여." 하였다.

 

○ 고려 김태현(金台鉉)의 시에, "절월(節鉞)을 잡고 난간에 기대 한 해를 보내는데, 바라보이는 것은 온통 흰갈

매기 가득한 하늘이네. 서쪽으로 돌은 멧부리 구름 밖에 솟았고, 동쪽으로 일어나는 물결은 햇가에 부서진다.

새벽 모습은 버들잎에 이슬이 깨끗하고, 저문 자취는 댓가지에 연기가 짙다. 다만 몸이 임영관(臨瀛館)에 있는

까닭으로, 약은 짓지 않아도 뼈는 벌써 신선되었다." 하였다.

 

○ 윤혁(尹奕)의 시에, "신령이 승지를 숨겨, 몇 천 년 만에 백 척 높은 누가 반공에 솟았다. 붉은 기둥은 멀리 창

해 속에 떠 있는 듯, 푸른 처마는 높게 흰 구름가를 스친다. 가을은 성곽 무성한 나무에 깊고, 해는 들판 담담한

연기에 진다. 아전이 가고 뜰이 비어 아주 깨끗한데, 낮은 소리로 월중 항아(月中嫦娥)를 부르고 싶다." 하였다.

 

예국고성(濊國古城) : 읍성(邑城) 동쪽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4백 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우계산성(羽溪山城) : 현 북쪽 5리에 있으며, 부에서는 61리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4백 51척이었는데 지

금은 없어졌다.

 

보현산성(普賢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1천 7백 7척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석조(石竈)ㆍ석지(石池)ㆍ

석정(石井) : 모두 한송정 곁에 있으며, 네 선인(仙人)이 놀이할 때 차를 달이던 도구였다.

 

양어지(養魚池) : 세상에 전해오기로, "한 서생이 유학(遊學)하면서 명주(溟州)에 왔다가, 자태가 아름다운 양가

(良家) 여자를 보았는데 제법 글을 아는 것이었다. 서생이 매양 시를 지어 부추기니, 그 여자가, '부인네는 함부

로 남을 따르지 않습니다. 학생이 과거에 뽑히기를 기다려서 부모의 말씀이 계시면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서생은 곧 서울에 돌아가서 과거 공부를 하였다. 그 여자는 못에 고기를 길렀는데, 고기들이 그 여자의 기침소리

를 들으면 반드시 몰려 와서 먹이를 먹었다. 그 후에 여자의 집에서 신랑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여자는 고기에

게 먹이를 주면서, "내가 너희들을 기른 지가 오래이니, 나의 뜻을 알 것이다." 하며, 비단에 적은 편지를 던졌다.

큰 고기 한 마리가 펄쩍 뛰면서 그 편지를 삼키고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서생이 서울에 있으면서, 하루는 부모

에게 드릴 찬을 장만하기 위하여 고기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고기뼈를 가르다가 비단에 적은 편지를

발견하여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다. 곧 비단 편지와 자기 아버지의 편지를 가지고 바로 그 여자의 집에 가니,

신랑이 벌써 그 집 문에 와 있었다. 서생이 편지를 그 여자의 집에 보이니, 그 부모도 이상하게 여기며,

'이것은 정성이 고기를 감동하게 한 것이고, 사람의 힘으로써는 될 것이 아니다.' 하고 그 신랑을 보내고 서생을

맞이하였다." 한다.

 

개운루(開雲樓) : 객관 동쪽에 있다. 연못 복판에다 대를 쌓았고 대 위에 다락을 세웠던 것이나, 지금은 없어졌다.

○ 조운흘(趙云仡)의 시에, "뜰 위에 풀빛이 파릇파릇한데, 버들 그늘진 관도가 깨끗도 하다. 누구네 집 남은 꽃

이 떨어지는가, 조각조각 바람따라 말굽에 든다." 하였다.

 

사동 부곡(史冬部曲) : 부 남쪽 20리에 있다. 오홀 부곡(烏忽部曲)ㆍ조대산 부곡(助大山部曲)ㆍ

소점 부곡(蘇漸部曲)ㆍ반곡소(般谷所) : 부 동쪽 6리에 있다. 죽원소(竹原所)ㆍ영평수(寧平戍)ㆍ

해령수(海令戍) : 부 동쪽 10리에 있다. 화성수(化城戍)ㆍ사화수(沙火戍) : 부 북쪽 20리에 있다.

철옹수(鐵甕戍).

 

명환신라 이사부(異斯夫) : 내물왕(奈勿王)의 4대 손(孫)이다. 지도로왕(智度路王) 때에 하슬라(何瑟羅) 군주

(軍主)로 되어 우산국(于山國)을 합병하기로 꾀하였다. 그 나라 사람이 어리석으나 사나워서 위세로 항복받기

는 어려우니, 계략으로써 항복받는 것이 옳다 하여, 나무로 가짜 사자를 많이 만들어서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가서 속이기를,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

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진주(眞珠) : 선덕왕(善德王) 8년에 사창(沙滄) 진주에게 이 지역

을 진수하게 하였다.

 

고려 임민비(林民庇) : 명주 원으로 와서, 도랑을 파서 전답에 물을 대었으며, 청렴하고 근면하다는 칭송을 받았

다. 조정에 들어가서 태상부 녹사(太常府錄事)가 되었다. 안종원(安宗源) : 공민왕(恭愍王) 때에 신돈(辛旽)에게

미움을 받아서 부사가 되어 나왔다.

 

박원계(朴元桂) : 존무사(存撫使)로 있었다. 임기가 차서 돌아갈려는데, 재상이, "강릉 사람은 원계가 존무사로

있는 것을 편하게 여긴다." 하여 그대로 눌러 있게 되었다. 백성이 지금까지 사모하여 마지 않는다.

 

본조 조운흘(趙云仡) : 호는 석간(石磵)이다. 건국 초기에 부사가 되었다. 빈객 접대하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청백하다고 칭송한다. 그러나 괴이한 짓을 하기를 좋아하여 경포액자시

(鏡浦額字詩) 같은 등류가 많았다. 하루는 부 기생들이 석상에서 서로 희롱하여 웃는 것이었다. 석간이 그 까닭

을 물으니 한 기생이 답하기를, "첩의 꿈에 사또를 모시고 잤는데 지금 여러 동무와 해몽하는 중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석간이 곧 붓을 찾아 들고, "마음이 영서(靈犀)같이 뜻이 서로 통했으니, 비단 금침을 함께 할 것까지

도 없다. 태수의 풍정이 박하다 말아라. 먼저 가인(佳人)의 꿈속에 들었도다." 하였다.

 

신유정(辛有定) : 우리 태종(太宗) 때에 왜놈이 강원도에 침입하므로 유정에게 금군(禁軍)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

하게 하고, 그대로 강릉 부사로 삼았다. 청렴하고 어질며 민폐를 없애고 생계를 일으키니,

백성이 그 혜택을 사모하였다. 유량(柳亮) : 영부사(領府使)로 있었다. 부의 백성들이 그의 어진 정사에 감격하여,

조운흘ㆍ안종원ㆍ신유정과 함께 생사당(生祠堂)을 짓고 제사하였다.

 

금유(琴柔) : 세종 때에 부사가 되었다. 순리(循吏)라는 칭송을 받았고 백성이 모두 두려워하면서 사모하였다.

신증 이신효(李愼孝) : 부사가 되어 청렴하고 간편한 정사를 숭상하였다.

 

인물

신라 김주원(金周元) : 태종왕(太宗王)의 손자이다. 당초에 선덕왕(宣德王)이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

가 정의태후(貞懿太后)의 교지를 받들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하였다. 그러나 왕족 상대장등(上大長等) 경신

(敬信)이 뭇사람을 위협하고, 먼저 궁에 들어가서 왕이 되었다. 주원은 화를 두려워하여 명주로 물러가고 서울

에 가지 않았다. 2년 후에 주원을 명주군 왕으로 봉하고 명주 속현인 삼척ㆍ근을어(斤乙於)ㆍ울진(蔚珍) 등 고

을을 떼어서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자손이 인하여 부(府)를 관향(貫鄕)으로 하였다.

 

김종기(金宗基) : 주원의 아들인데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김정여(金貞茹) : 종기의 아들이다. 비로소 조정에

벼슬하여 상대등(上大等)에 이르렀고, 명원공(溟源公)으로 봉함을 받았다.

 

김양(金陽) : 정여의 아들이다. 김명(金明)의 반란 때에 신무왕(神武王)을 도와서 사직을 안정시켰다. 벼슬이

시중겸 병부령(兵部令)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명원군 왕으로 봉하게 되었다.

 

고려 김상기(金上琦) : 주원의 후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시랑 평장사(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선종(宣宗)

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김인존(金仁存) : 상기의 아들이며 처음 이름은 연(緣)이다. 성품이 명철하고 민첩하여

젊었을 때 과거에 올라서, 직한림원으로 있다가, 벼슬이 여러 번 옮겨져서 기거사인 지제고 병부원외랑이 되었

다. 요(遼) 나라 사신 맹초(孟初)가 왔을 때에 인존이 접반하게 되었다. 하루는 함께 말을 타고 교외로 나가게

되었다. 눈[雪]이 비로소 개었고 말발굽이 땅에 부딪칠 적마다 소리가 났다. 맹초가 창(唱)하기를, "말굽이 눈

을 밟으니 마른 우레가 동한다." 하였다. 인존이 그 소리에 따라 곧,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니 열화(烈火)가 난

다." 하였더니, 초가 깜짝 놀라면서, "진실로 천재로다." 하였다. 벼슬은 수태부 문하시중까지 하였다.

 

김고(金沽) : 인존의 아우이다. 풍채가 깨끗하고 고우며 문학으로써 세상에 저명하였다. 벼슬은 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최수황(崔守璜) : 과거에 올라 벼슬이 첨의 찬성사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의식이 모자라도 개의하지 않았다. 김진(金縝) : 학업에 힘을 써서 과거에 올라 인종 때에 동지

추밀원사로 있었다. 이자겸(李資謙)의 난리에 궁궐이 연소되는 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적의 손에 죽기보다는

스스로 죽는 것이 낫다." 하고, 문을 닫고 불속에 들어가 죽었다. 난리가 평정되자 그 절의를 가상하게 여겨서

시호를 열직(烈直)이라 하였다.

 

왕순식(王順式) : 본주의 장군이 되어서 태조(太祖)가 신검(神劍)을 토벌할 때에 순식은 명주에서 그 고을 군사

를 거느리고 싸워서 격파하였다. 태조가 순식에게 이르기를, "짐의 꿈에 이상한 중이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았더니, 그 이튿날에 경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도우니 이것이 꿈의 감응이다." 하니 순식이 아뢰기

를, "신이 명주에서 출발하여 대현(大峴)에 오는데 이상한 절이 있으므로 제사를 베풀어 기도하였더니, 임금께

서 꿈꾸신 것은 반드시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태조는 기이하게 여겼다. 최유(崔濡) : 본부 아전으로서 사람됨

이 거룩하고 풍채가 있었다. 19세 때 과거에 올라 교서 교감에 보임되었고, 인종 때에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시

랑에 이르렀다.

 

김천(金遷) : 본부 아전이다. 고종 말년에 몽고 군사가 침입하여서 어미와 아우 덕린(德麟)이 포로가 되었다.

그때 천은 15살이었는데, 밤낮으로 울부짖었다. 포로된 사람이 도중에 많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는 최복(衰服)

을 입고 예제(禮制)를 마쳤다. 그후 14년 만에 백호 습성(百戶習成)이 원(元) 나라에서 와서, 천의 어머니 편지

를 전하는 것이었다. 천은 어미가 북주 천로채(北州天老寨)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가 보았다.

백금(白金) 55냥으로써 속(贖)을 바쳐서 돌아오게 하였고, 그 후 6년 만에 덕린 또한 돌아왔다. 형제가 종신토

록 효도를 다하니, 고을 사람이 돌을 세우고 효자리(孝子里)라 새겨서 정표하였다.

 

왕백(王伯) : 본래 성은 김(金)이며 신라 무열왕의 후손이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올랐고 규정(糾正)을 거쳐

우사보(右司補)로 전직되었으나, 임금에게 귀염받는 사람의 첩이 고신(告身)주D-001을 서경(署經 고을 원이

부임할 때 상신(相臣)ㆍ장신(將臣)ㆍ육경(六卿)들에게 고별(告別)하는 일)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참소를 만나

장류(杖流)되었다. 충혜왕 때,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여 전주로 돌아갔다.

 

김광을(金光乙) : 주원(周元)의 후손이다. 공민왕 때에 찬화공신(贊化功臣)이란 호(號)를 받았다. 명원부원군(溟源府院君)으로 봉하게 되었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최안소(崔安沼) : 공민왕 때 순성 보리 공신 강릉군(純誠

輔理功臣江陵君)으로 봉하게 되었다.

 

본조 김추(金錘) : 광을(光乙)의 아들이며 벼슬은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함부림림fl림a(咸傅霖) : 과거에 두 번 올랐으며, 개국공신으로서 동원군(東原君)으로 봉하게 되었다. 국조(國朝)

에 8도감사(八道監司)를 지낸 사람은 부림뿐이며, 간 곳마다 치적이 있었다. 시호는 정평(定平)이다.

 

유창(劉敞) : 개국 공신이며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이다. 최이(崔迤) : 벼슬이 의정부 찬성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희경(僖景)이다.

 

최치운(崔致雲) : 세종조(世宗朝)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함우치(咸禹治) : 부림의 아들이다. 여러 도의 관찰사를 지냈고 그 아버지의 기풍이 있었다. 벼슬이 의정부 참찬

에 이르렀으며 동원군(東原君)에 습봉(襲封)주D-002되었다.

 

김자견(金子鏲) : 과거에 올라,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신증 최응현(崔應賢) : 치운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효자본조 이성무(李成茂) : 어머니가 병들어서 한겨울에 생선을 생각하므로, 성무는 아우 춘무(春茂)ㆍ선무

(善茂)ㆍ양무(良茂)와 함께 냇물을 따라 내려가면서 생선을 구하였다. 그런데 얼음이 갑자기 풀리면서 고기가

뛰어 나왔다. 가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병이 나았다.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서 그의 자손을 복호

(復戶)하였다. 양무의 아들 중원(仲元)은 과거에 올랐다.

 

신증 박수량(朴遂良) : 연산(燕山)이 상기를 짧게 하는 제도를 시행할 때에 수량이 어머니의 상을 만났다.

그러나 수량은 3년 동안 최복(衰服)을 입고 여묘(廬墓)하였으니, 지금 임금 3년에 정려(旌閭)하였다.

 

최응록(崔應祿) : 아버지가 미친병에 걸렸다.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서 먹게 하였더니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려하였다.

 

신증열녀본조 김씨 : 생원 최세창(崔世昌)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자 곡하고 울부짖으며 지극히 슬퍼하였고,

복을 마치고도 오히려 조석 전(奠)을 폐하지 않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려하였다.

 

이씨 : 진사(進士) 신명화(申命和)의 아내이다. 남편이 병이 위독하자, 이씨는 은밀히 선조의 무덤에 가서 분향

하고 기도한 다음 칼을 뽑아 손가락을 끊고 함께 죽기를 맹세하였다. 이씨에게 작은 딸이 있었는데 하늘에서

크기가 대추만한 약을 내려 주는 꿈을 꾸었더니, 남편의 병이 과연 나았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닭 울기 전 새벽 날이 밝다 : 김극기의 시에, "모래 위로 몇 리를 가서, 곡구(谷口)의 외로운 성(城)에 이르렀

네. 기러기 나는 밖으로 변성(邊城) 구름이 어둡고, 닭 울기 전에 새벽 날이 밝다. 물에는 차가운 거울빛이 깔렸

고, 솔에는 성낸 물결 소리가 부서진다. 사제(沙提)의 시구를 바치고자 하나, 재주가 이영(李嶸)을 압도할 수 없네."

하였다.

 

물을 따라 모래톱을 뚫는다. : 앞사람의 시에, "손에 천상(天上)의 조칙(詔勅)을 받들고, 사신 수레를 명주(溟州)

에 쉬었다. 일이 끝나 유막(柳幕)을 하직하고, 말을 몰아 문득 수레를 돌린다. 얼핏 들으니 바닷가는,

경치가 놀이하기에 족하다지. 놀기 좋아하는 마음 아직도 다하지 않아서, 흥을 따라 깊이 찾고자 한다. 북쪽으

로 돌아갈 길을 잊고서, 남으로 가니 참으로 유유하구나. 언덕을 따라 돌층계를 지나고, 물을 따라 모래톱을 뚫

는다. 나무마다 검은 원숭이가 매달렸고, 물결마다 흰갈매기가 펄럭인다. 이리저리 돌면서 마음대로 찾고 구경

하니, 만 가지 형상(形象)이 눈을 흔들리게 한다. 네 선인이 지금은 어디에 있나. 다만 묵은 자취만 남았구나.

정자는 시내 어귀에 있고, 절은 고개 위에 솟았다. 걸음마다 속된 경계는 멀어지고, 구름과 노을만 사방에 둘렸

네. 상쾌하게 해 그림자를 넘어서서, 난새를 타고 봉산(蓬山)을 방문함 같구나. 문득 바라보니 나는 새 너머에

먼 멧부리가 푸르렀다. 오대산인 줄 물어서 알았는데, 공중에 푸른 용이 서린 듯하다. 문수봉(文殊峯)은 깨끗한

거울이 둥글하고, 백월봉(白月峯)은 맑은 물이 쏟아진다. 신심이 경건할 것 같으면, 소원은 낱낱이 이루어진다.

신령스런 지경에 가서, 성군(聖君)의 천만세(千萬歲)를 축원함을 어찌 사양하리." 하였다.

 

땅이 부상(扶桑)과 가까우니 날이 새기 쉽고 : 이색의 시에, "땅이 부상과 가까우니 날이 새기 쉽고, 산은 장백산

(長白山)과 닿아서 여름인데 오히려 춥다." 하였다.

 

신기루 공중에 떠서 멀리서 바라보니 연기와 같네 : 고려 송인(宋因)의 시에, "물결소리가 땅을 움직여 베개에

와서 시끄럽고, 신기루가 공중에 떠서 멀리서 바라보니 연기와 같다." 하였다.

 

길은 흰새 앉은 물가로 돌았고 : 정추의 시에, "길은 흰새 앉은 물가로 돌았고, 집은 가마귀 돌아가는 낙조가에

있다." 하였다.

 

큰 물결 땅을 말아오는데 봉래ㆍ영주 가깝고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큰 물결 땅을 말아오는데 봉래ㆍ영주

가깝고, 높은 영(嶺)은 하늘을 만질 듯 태산(泰山)인가 화산(華山)인가." 하였다.

 

흰모래 푸른 대나무 물가의 섬은 : 앞사람의 시에, "깃발도 선명하게 물결에 비치니, 자고(鷓鴣)새가 놀라 날아

서 해당화 떨어진다. 흰모래 푸른 대 물가 섬은, 송교(松喬)주D-003 제자의 집인가 의심된다." 하였다.

 

고기 잡는 배 푸른 물결에는 만고의 연기 : 이인복(李仁復)의 시에, "호해(湖海)에 벼슬살이하며 흐르는 세월을

느낀다. 은혜가 박(薄)하니 두 하늘 있다고 누가 말하나. 가을 원(院)은 제비 돌아간 뒤에 비었고, 저문 산은 날

아간 갈가마귀 가에 멀다 베 짜는 깊은 골목에는 3경의 등잔이요, 고기잡는 배 푸른 물결에는 만고의 연기로다,

경포(鏡浦)와 송정(松亭)이 나를 머물게 한다면, 봉래(蓬萊)섬에 다시 신선을 찾지 않으리." 하였다.

 

강릉에 날이 따뜻하여 꽃이 먼저 피었네 : 권적(權迪)의 시에, "강릉에 날이 따뜻하여 꽃이 먼저 피고, 풍악(楓

岳)에 기후가 추워서 눈이 녹지 않았다." 하였다.

 

살구꽃 울타리 떨어지니 일천 집에 비가 오고 : 고려 송천봉(宋天逢)의 시에, "살구꽃 핀 울타리 일천 집에 비가

오고, 풀빛 냇가에는 십리에 연기가 끼었다." 하였다.

 

임영은 물에 떠 있고 물은 하늘에 떠 있다 : 박진록(朴晉祿)의 시에, "절월(節鉞)을 안고 풍속을 살핀 지 벌써 2

년, 임영은 물에 떴고 물은 하늘에 떠 있다. 벼슬살이는 금오(金鰲 신선 있는 산)꼭대기에 있는 듯하고, 시안

(詩眼) 백조 나는 곳에 더욱 밝구나. 헌함과 문은 동해의 해를 일찍 맞이하고, 발과 깃발은 북산(北山) 연기에

반쯤 젖었네. 곁에 사람은 썩은 선비인 줄 알지 못하고, 서원(西垣)에서 세상을 즐기는 신선이라 이르리라."

하였다.

 

수루(戍樓)에 해가 저물어 화각을 재촉하네 :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수루(戍樓)에 해가 저물어 화각을 재촉

하고, 봉화(烽火)가 전하여 바다산에는 낭연(狼煙)을 진압한다. 난간에 기대서 멀리 바라매 삼신산이 아득하니,

도리어 세상 밖에 노니는 신선에게 부끄럽다." 하였다.

 

낙락한 한송은 푸른 연기에 잠기었다 : 황희(黃喜)의 시에 "맑고 맑은 경포 물엔 새 달이 잠겼고, 낙락한 한송은

푸른 연기에 잠겼다. 구름비단 연꽃은 못에 가득하고 경포대엔 대나무가 가득하니 티끌 세상에도 해중(海中)

신선이 있다." 하였다.

 

큰 영에는 구름이 기러기 나는 변방에 연하고 : 유효통(兪孝通)의 시에, "부상(扶桑)의 해는 바다물결 속에서 돋

고, 큰 영에는 구름이 변방에 연했다." 하였다.

 

아득한 성은 말과 같고 : 하연(河演)의 시에, "까마득하게 성은 말[斗] 만하고 아득한 물은 하늘에 닿았다."

하였다.

 

바다산이 모두 도화원 속일세 : 안성(安省)의 시에, "나라가 주(州)로 변한 햇수도 아지 못하겠는데, 예성 누관

(蕊城樓館)에 또 가을 절후이다. 바다와 산이 모두 도원(桃源)주D-004인데, 무엇하러 구구하게 신선을 배우려

하리." 하였다.

 

팔영 : 김극기의 시. 녹균루(綠筠樓) : 나는 녹균루를 사랑하노니, 찬 소리가 항상 가을을 흔드네. 삐죽삐죽 칼날

이 섰고, 사각사각 구슬이 운다. 아래에서 숙야(叔夜)주D-005가 취하기에 좋고, 사이에는 군유(君猷)가 지나가

기에 알맞다. 부러워라 그대가 비바람 치는 밤에 베개에 기대서, 우수수하는 소리 듣는 것이.

 

(작자 자신의 주(註) : 소동파(蘇東坡)가 서군유(徐君猷)의 만장(輓章) 시(詩)에 "눈 온 뒤에 버들 심은 곳에 홀로

오고, 대 사이에 다니며 다시 차를 캐더니," 하였다.)

 

한송정(寒松亭) : 나는 한송정을 사랑하노니, 높은 풍치가 은하에 닿아 푸르다. 옥깃대를 세운 듯, 구슬비파를

울리는 듯하다. 푸른 꽃순은 빗속에 더 빼어나고, 누른 꽃은 바람따라 다시 향기롭다. 네 선인이 놀이하던 곳,

절경을 찾아 늙음을 위로한다.

 

경포대(鏡浦臺) : 서늘한 경포대에 물과 돌이 다투어 둘렀네. 버들 언덕엔 푸른 연기 합쳤고, 모래 언덕에 흰눈

이 무더기졌다. 고기는 상점(象簟)을 불며 가고, 새는 교반(鮫盤)을 떨어트려 온다.주D-06 선인은 아득하게

어디로 갔나, 땅에는 푸른 이끼만 가득하다.

 

굴산종(崛山鐘) : 용용(舂容)한 굴산동은, 범일선사(梵日禪師)가 만든 것이다. 보고 놀라서 마음이 당황하고,

진중하게 경례하며 눈물 흩뿌린다. 귀신은 다만 도(道)를 행하고, 새들은 발붙이기 어렵다. 그대는 행여 치지

말라, 동해에 어룡이 놀랄까 한다.

 

안신계(安神溪) : 한 줄기 안신계, 깨끗하기 은하와 같다. 오직 비둘기가 물을 머금고, 다시 메기가 진흙을 토함

은 없다. 달빛이 비치니 보탑(寶塔)이 빛나고, 연기가 덮이니 향휴(香畦)에 몽롱하다. 아련한 신선의 지경에,

가도가도 길은 아득하여라.

 

불화루(佛華樓) : 한 무더기 불화루에, 여가를 만들어 유람하였더니, 침향(沈香) 화로엔 구름이 아련하고, 차(茶)

잔에는 눈[雪]이 부글거린다. 헌함에 엎드려 황곡(黃鵠)을 엿보고, 멀에 임해서 백구(白鷗)와 친한다. 고요하게

진세와 떨어졌으니, 무엇하러 신선을 다시 찾으리.

 

문수당(文殊堂) : 고개 위 문수당은, 채색 들보가 공중에 솟았네. 조수는 묘한 소리를 울리고, 산 달은 자애 어린

빛이 흐른다. 구름은 돌다락가에 불어 나오고, 물은 소나무 길가를 씻는다. 앉아서 보니 숲 너머 새가, 꽃을 머금

고 날아오네.

 

견조도(堅造島) : 바다 속 견조도는, 높고 험해서 풀 한 포기 없다. 훌륭한 경계는 신선과 가깝고, 남은 자취는

부로에게 전해 온다. 멀리 귀양 와서 종을 치게 되고, 숨어 살며 도를 깨쳤다. 팔을 펴면 천 보(千步)가 넘는다는

데, 이 말을 진정 누가 보증하리.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관찰부를 두었다가 33년에 없애고 군으로 하였다.《文獻備考》

효종(孝宗) 조에 현(縣)으로 강등시켰다가 다시 승격시켰다.

정종(正宗) 6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5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남일리면(南一里面) : 끝이 10리. 남이리(南二里) : 끝이 15리. 북일리(北一里) : 끝이 10리.

북이리(北二里) : 끝이 10리. 덕방(德方) : 남으로 끝이 10리. 구경(邱耕) : 남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80리.

가자곡(可資谷) : 위와 같다. 우계(羽溪) : 남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90리.

임계(臨溪) : 서남으로 처음은 70리, 끝은 1백 20리. 성산(城山) : 북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

하동(下洞) : 북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가남(嘉南) : 북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사화(沙火) : 북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25리. 연곡(連谷) : 북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신리(新里) : 북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60리. 도암(道巖) : 북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70리.

내면(內面) : 서북으로 처음은 1백 60리, 끝은 2백 리. 대화(大和) : 서쪽으로 처음은 1백 40리, 끝은 2백 리.

진부(珍富) : 서쪽으로 처음은 80리, 끝은 1백 20리. 사각 부곡(史各部曲) :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선명소(船名所) : 동으로 6리에 있다.

 

성지 청학산고성(靑鶴山古城) : 산 동쪽에 있는데 둘레는 1천 2백 척이다.

고려 덕종(德宗) 3년에 명주성(溟州城)을 수리하였다.

 

안인포진(安仁浦鎭) : 동남으로 20리에 있고 수군만호를 두었는데, 성종(成宗) 21년에 양양대포(襄陽大浦)로

옮겼다.

연곡포(連谷浦)ㆍ주문진(注文津)ㆍ오진(梧津) : 남으로 90리에 있으며 이상 세 곳에는 척후(斥候)를 두었다.

 

창고 동창(東倉) : 임계면(臨溪面)에 있다. 서창(西倉) : 진부면(珍富面)에 있다. 우계창(羽溪倉)ㆍ

연곡창(連谷倉)ㆍ대화창(大和倉)ㆍ내면창(內面倉) : 1백 30리에 있다.

 

토산 석이버섯ㆍ탱자ㆍ석종유(石鍾乳)ㆍ하수오(何首烏 감자의 일종)ㆍ참가사리ㆍ김.

 

궁실 선원각(璿源閣)ㆍ실록각(實錄閣)ㆍ사고(史庫) : 모두 오대산(五臺山) 상원암(上元庵)에 있는데,

선조(宣祖) 39년에 새로 인쇄한 사조실록(思朝實錄)을 이곳에 두었다. ○ 참봉 두 사람을 두었다.

 

묘전 집경전(集慶殿) : 경주로부터 이곳으로 옮기고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으며 참봉 두 사람을

두었다. 인조 6년에 불에 타 없어졌다.

 

[주 D-001] 고신(告身) : 고신(告身)이라 함은 현대의 관리 자격증과 같은 것인데, 그때의 경우에는 이 사람은

문서관리의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간원(諫院)에서 증명하여야 임용하게 되었다.

[주 D-002] 습봉(襲封) : 국가에 어떤 공로가 있는 사람은 공신(功臣)이라 하여 군(君)을 봉하게 되었는데,

그 공신의 장손으로 벼슬이 종2품(從二品) 이상에 승관되면 그 조상의 군(君)을 습봉(襲封)하는 법이다.

[주 D-003] 송교(松喬) : 적송자(赤松子)와 왕자교(王子喬) 두 사람을 가리킨다. 모두 옛날의 신선이다.

[주 D-004] 도원(桃源) : 진(晉) 나라 말년에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있는 유토피아

이다. 깊은 산속에 있서 세상과 아무런 접촉이 없는 곳이요, 산과 들이 모두 복사꽃으로 덮여있다 하여서 도화원

이라고 이름지었다.

[주 D-005] 숙야(叔夜) : 진 나라의 해강(稽康)의 자이다.

그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그들은 대밭에서 술을 마시며 청담을 즐겼다.

[주 D-06] 상점(象簟)을 불며 가고, 새는 교반(鮫盤)을 떨어트려 온다. : 상점의 점(簟)은 돗자리인데,

상아(象牙)를 가늘게 쪼개서 만든 돗자리라는 말이요, 교반의 교(鮫)는 원래가 상어인데, 예전에는 진주를 교주

(鮫珠)라 하였다. 교반이라 함은 진주소반이란 말이다.

 

 

삼척도호부 三陟都護府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9리이고, 남쪽으로는 울진현(蔚珍縣) 경계까지 1백 9리다.

서쪽으로 경상도 봉화현(奉化縣) 경계까지 1백 50리고, 같은 도 안동부 소천현(少川縣) 경계까지는 1백 37리며,

정선군(旌善郡) 경계까지는 95리다.

북쪽으로 강릉부 경계까지 37리인데, 서울까지는 6백 32리다.

 

건치연혁 본래 실직국(悉直國)이었는데, 신라 파사왕(婆娑王) 때에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지증왕(智證王) 6년

실직 군주(軍主)를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만들었다. 고려 성종(成宗)이

척주 단련사(陟州團練使)로 고쳤고, 현종(顯宗)이 현령으로 강등시켰으며, 신우(辛禑) 때에는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 본조 태조 2년에는 목조(穆祖)의 외가 고을이라는 것으로써 부(府)로 승격하였고,

태종 13년에 관례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다.

관원 부사ㆍ교수 : 각 1명.

군명 실직ㆍ척주ㆍ진주(眞珠)

 

성씨본부 진(陳)ㆍ김ㆍ심ㆍ박ㆍ진(秦) : 사(賜).

 

풍속 무당과 귀신을 믿는다. 사람의 성품이 대체로 교활하다.

 

오금잠(烏金簪)에 제(祭)한다 : 고을 사람이 잠(簪)을 작은 함에 담아, 관아(官衙) 동쪽 모퉁이 나무 밑에 감추었

다가 단오날이면 끄집어내고, 제물을 갖추어 제사한 다음 이튿날 도로 감춘다.

전해오는 말에는, 고려 태조 때 물건이라 하나 제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예전부터 전해오는 일이므로 관에서도

금지하지 않는다.

 

형승 천길 푸른 석벽, 오십천 맑은 냇물 : 류사눌(柳思訥)의 시에, "천길 푸른 석벽이 겹겹으로 둘러 있고,

오십천 맑은 냇물이 졸졸 흐른다." 하였다. 북쪽으로 큰 영(嶺)을 의지했고, 서쪽으로 큰 냇물을 임했다 :

김수온(金守溫)의 죽서루기(竹西樓記).

 

신천 갈야산(葛夜山) : 부 북쪽 1리에 있으며 진산이다.

태백산(太白山) : 부 서쪽 백 20리에 있다. 신라 때는 북악(北岳)이라 하여 중사(中祀)에 기재되어 있다.

또 경상도 안동부 및 봉화현에서도 보인다.

 

○ 안축의 시에, "길다란 하늘 지나 자색 안개 속으로 들어가니, 비로소 높은 꼭대기에 오른 줄 알았노라. 둥근

해는 머리 위에 낮아진 듯, 사방 여러 산은 눈앞에 떨어졌네. 몸이 나는 구름을 따르니 학을 탔는가 의심되고,

길은 높은 비탈에 달려 하늘에 오르는 듯하구나. 비온 뒤 일만 구렁에 물이 넘쳐 흐르는데,

구불구불한 오십천(五十川) 건널 일이 근심된다. " 하였다.

 

두타산(頭陀山) : 부 서쪽 45리에 있다. 산중턱에 돌 우물 50곳이 있으므로 그대로 오십정(五十井)이라 부른다.

그 곁에 신사(神祠)가 있는데 고을 사람이 봄 가을에 제사하며, 날씨가 가물면 비를 빈다.

 

○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에 이승휴(李承休)가 전중시어로서 정사를 말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파직

당했다. 승휴는 이 산 밑에 터를 잡아 살면서 스스로 동안거사(動安居士)라 호하였다. 70살 때에 심왕(瀋王)의

명을 받고 산에서 나와, 서울에 왔다. 그리하여 이런 시가 있다. "외로운 종적이 몇 해나 강산에 의지했더니,

다시 서울 땅 밟으니 한바탕 꿈속이어라." 하고, 곧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양야산(陽野山) : 부 남쪽 2리에 있다. 광진산(廣津山) : 부 동쪽 6리에 있다.

우보산(牛甫山) : 부 서쪽 1백 5리에 있다. 희복현(希福峴) : 부 서북쪽 60리에 있다. 정선(旌善)을 지향하는

길이며, 가장 높고 험하다.

와현(瓦峴) : 부 남쪽 85리에 있다. 가을현(加乙峴) : 부 남쪽 1백 17리에 있다.

 

바다 : 부 동쪽 8리에 있다. 장오리포(藏吾里浦) : 부 남쪽 62리에 있다. 내(內)ㆍ외(外) 장오리(藏吾里)가 있으며,

모두 동해의 배를 대는 곳이다. 척후(斥候)가 있다.

 

황지(黃池) : 부 서쪽 1백 10리에 있다. 그 물이 남쪽으로 30여 리를 흘러, 작은 산을 뚫고 남쪽으로 나가는데

천천(穿川)이라 한다. 곧 경상도 낙동강(洛東江)의 원류이다.

관에서 제전(祭田)을 두어서 날씨가 가물면 비를 빈다.

 

오십천(五十川) : 부 성(城) 남쪽 1백 5리에 있다. 물 근원이 우보현(牛甫峴)에서 나오며, 죽서루(竹西樓) 밑에

와서는 휘돌면서 못이 되었다. 또 동쪽으로 흘러 삼척포(三陟浦)로 되어, 바다에 들어간다. 부에서 물 근원까지

마흔 일곱 번을 건너야 하므로 대충 헤아려서 5십천이라 일컫는다.

 

○ 정구(鄭矩)의 시에, "겹으로 된 벼랑은 층층 누각을 버티었고, 붉은 기와는 맑은 흐름을 굽어 본다.

여러 구렁은 서쪽을 따라, 구불구불 백 굽이나 내려왔다. 흰돌 하얀 모래 깨끗하기에, 홍진(紅塵)의 발을 씻고

싶구나. 나는 여울은 돌다리에 뿌리고, 급한 물결은 주옥(珠玉)을 뒤짚는 듯하다. 샘물이 달고 땅이 또 기름져,

반곡(盤谷)주D-001에 왔는가 의심된다. 산이 둘리고 초목이 우거졌고, 길이 돌아서 간다는 것이 돌아오는 듯

여기에 오니, 세상 뜻 적어져서 가려고 하다가 도로 묵는다. 흥이 나서 높이 읊조리며, 술항아리 잡고서 긴

대나무를 대했네." 하였다.

 

○ 안축의 시에, "작은 배를 강에 띄웠더니, 비온 뒤 물결이 깨끗하여라. 삿대 짚어 흐름을 거슬러가니,

그늘진 벼랑이 깊숙하구나. 뱃줄을 등덩굴에 매어두고, 자리에 앉아서 발을 씻노라. 돌틈에 찬 샘이 솟아나와서,

얼음 구슬을 쏟는 듯하여라. 객이 있어 고요하게 거문고 타니, 솔바람이 산골에 가득하여라. 늦게야 중류(中流)

에 돛을 올리고, 노래하고 웃으며 갔다 왔다 한다. 이런 즐거움 인간엔 없으니, 잠이 오면 갈매기와 함께 자노라.

배 타고 남쪽 여울로 내려오니, 맑은 이슬이 성긴 대[竹]를 적신다." 하였다.

 

덕산도(德山島) : 부 남쪽 23리인 교가역(交柯驛) 동쪽 바다 위에 있다.

 

토산 모시ㆍ철 : 부 서쪽 직점(稷岾)에서 산출된다. 마노(瑪瑙) : 부 서쪽 견두리(堅頭里)에서 산출된다.

궁간상(弓幹桑 활재료 뽕나무) : 부 남쪽 노곡산(蘆谷山)에서 산출된다.

대 살[竹箭] : 부 남쪽 덕산도(德山島)에서 산출된다. 자단향(紫檀香)ㆍ안식향(安息香)ㆍ오미자(五味子)ㆍ

황양(黃楊)ㆍ인삼ㆍ송이버섯ㆍ복령ㆍ지황(地黃)ㆍ벌꿀ㆍ백화사(白花蛇)ㆍ김ㆍ미역ㆍ전복ㆍ홍합ㆍ문어ㆍ

방어ㆍ연어ㆍ송어ㆍ대구어ㆍ숭어ㆍ황어ㆍ고등어ㆍ도루묵ㆍ넙치ㆍ적어(赤魚)ㆍ해삼.

 

성곽 읍성(邑城) : 3면이 석축인데, 둘레는 2천 54척이고 높이는 4척이며 서쪽은 절벽이고, 둘레가 4백 31척이다.

옥원성(沃原城) : 옥원역 곁에 있다. 토축이며 둘레는 5백 7척, 높이는 8척이다. 군창(軍倉)이 있다.

관방 삼척포진(三陟浦鎭) : 부 동쪽 8리에 있으며, 수군첨절제사영(水軍僉節制使營)이 있다.

○ 첨절제사 1명.

 

신증 정덕(正德) 경진년에 석성(石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9백 척이고 높이는 8척이다.

봉수 가곡산 봉수(可谷山熢燧) : 부 남쪽 백 6리에 있다. 남쪽으로 울진항출도산(蔚珍恒出道山)에 응하고, 북쪽

으로 임원산(臨院山)과 응한다.

임원산 봉수 : 부 남쪽 8리에 있다. 북쪽으로 초곡산(草谷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가곡산과 응한다.

초곡산 봉수 : 부 남쪽 54리에 있다. 북쪽으로 양야산(陽野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임원산과 응한다.

양야산 봉수 : 북으로는 광진산(廣津山)과 응하고, 남으로는 초곡산과 응한다.

광진산 봉수 : 북쪽으로 강릉 우계현(羽溪縣) 오달산(於達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양야산과 응한다.

 

누정 죽서루(竹西樓) : 객관 서쪽에 있다. 절벽이 천길이고 기이한 바위가 총총 섰다. 그 위에 나는 듯한 누를

지었는데 죽서루라 한다. 아래로 오십천에 임했고, 냇물이 휘돌아서 못을 이루었다.

물이 맑아서 햇빛이 밑바닥까지 통하여, 헤엄치는 물고기도 낱낱이 헤아릴 수 있으니, 영동의 절경이다.

○ 정추의 시에, "죽서루 그림자가 맑은 흐름에 일렁이며, 못 위에 산 빛이 작은 누에 가득하다.

가절(佳節)에 멀리 와 노니 느낌이 많아, 석양에 가려다 다시 머뭇거린다. 일찍이 황학루(黃鶴樓)를 때려부순

사람 있음을 들었더니,주D-002 지금에 백구와 친한 사람 없음이 한스러워라.

언덕을 끼고 붉은 도화(桃花) 봄도 늙어가니, 나팔 부는 소리는 진주(眞州)를 찢으려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다락을 지어 높은 나무를 굽어보게 했나, 황혼에 한바탕 웃으며 홀로 섰노라. 처마 앞엔 긴 대가

수천 줄기이고, 헌함 너머엔 맑은 강물이 50굽이로다. 두타산(頭陀山)이 높아 어렴풋하고, 관음사(觀音寺) 오래

되어 초목이 성하다. 긴 하늘이 담담한데 새가 오가고, 잔물결이 일렁이며 고기가 떴따 잠긴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도기(道氣)를 장관(長官)이 온전히 차지하였으니 공무보는 여가에 흥취가 그윽하여

라. 유루(庾樓) 저녁 달은 상(床) 밑에 들고,주D-003 등왕각(滕王閣) 아침 구름은 기둥 사이에 인다.

먼 섬은 빙글빙글 학 형세로 되었고, 층층 멧부리는 오똑오똑 자라머리 같다. 새로운 시가 뼈까지 서늘하게 함을

괴이하다 말라, 시냇물 소리를 굽어 듣고 산을 쳐다 본다." 하였다.

 

○ 안성(安省)의 시에, "푸른 벼랑에 백 척 누각이 우뚝한데, 꽃이 피고지고 몇 해이던가. 3천 무리는 풍운과 함

께 흩어졌고, 오십천 물은 세월과 함께 흐른다. 화각(畫角) 한 소리는 아침저녁 한이고, 안개 낀 만리의 물결은

예나 지금의 시름일세. 어찌하면 막중한 임금의 은혜를 갚고, 티끌 낀 갓을 벗고 갈매기와 짝하리." 하였다.

 

신증 홍귀달(洪貴達)의 시에, "죽서루 서쪽에 푸른 강이 흘러, 유월에도 누각엔 찬 기운이 난다.

당일에 응당 황학(黃鶴)이 가지 않았겠지,주D-004 지금도 흰 구름은 머물러 있다. 강산에서 다만 병속의 술을

기울일 뿐, 신세는 도리어 바다 위 갈매기 같다. 달이 밝고 하늘도 물빛 같은 때를 기다려,

긴 피리 한 소리로 양주곡(涼州曲)주D-05을 아뢰리." 하였다.

 

○ 이육(李陸)의 시에, "서산에 발 걷고 홀로 누에 기대 섰으니, 강의 비바람이 가을같이 서늘하다.

웅대한 고을은 만리의 동해가에 있고, 승지는 천년토록 상류에 위치했다. 부귀는 스스로 몸 밖의 일인 줄

아노니, 한가로이 객중의 시름을 녹이네. 누가 다시 한 승상(韓丞相)주D-006같이, 공명을 이룬 다음 백구와

친하리." 하였다.

 

○ 정수강(丁壽崗)의 시에, "열두 굽이 난간에, 객이 누에 기대니, 발틈에 드는 천기는 초가을에 가깝네,

돌이 썩을 만큼 산천이 늙은 것만 보고, 탄환같이 빠른 세월의 흐름은 깨닫지 못했네. 한 밤 베개에 우연히 객의

꿈을 이루었고, 석 잔 술에 애오라지 나그네 시름을 녹인다. 온종일 한가한 뜻을, 모두 창파에 떠도는 갈매기에

게 부친 줄을 누가 알리." 하였다.

 

능파대(凌波臺) : 부 동쪽 10리인 해안에 있으며, 예전에는 추암(秋巖)이라 하였다. 돌 두어 가지[條]가 물 복판

에 섰고, 높이는 5, 6길쯤이다. 그 벼랑 위에는 수십 인이 앉을 만한데,

상당 한명회(上黨韓明澮)가 이름을 능파대라 고쳤다.

○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올라보니 완연히 울람천(蔚藍天)주D-007에 있는 듯, 굽어보니 인간세상은 저쯤에

있다. 청도(淸都)주D-08를 바로 지척에 임했는가 싶고, 단조(丹竈)에 의지하여 신선을 찾지 않는다.

금빛은 항해(沆瀣)주D-09에 떠서 세 섬에 닿았고, 해는 유리 빛을 쏘아 일백 냇물을 묶었다. 오래 앉아서 정신

이 맑고 착잡한데, 바람이 학의 등에 불어 다시 시원하여라." 하였다.

 

소공대(召公臺) : 와현(瓦峴) 위에 있다. 예전에 감사 한 사람이 이 대에서 쉰 까닭으로 이름하였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비로소 구름 끝에 나와 멀리 보니, 소공(召公)은 어디 가고 대만 남았나.

위에는 하늘 아래는 물 한없이 아득하니, 하늘과 땅이 밤낮 떠 있다는 것 믿게 되었다.주D-010" 하였다.

 

신증 정덕(正德) 병자년에 관찰사 황맹헌(黃孟獻)이 비를 세우고 남곤(南袞)이 명(銘)하기를, "삼척부 치소의

남쪽 70리 지점에 와현이 있고, 현에 돌로 쌓은 것이 있는데, 소공대라 하니, 대개 예전에 황익성공(黃翼成公

황희(黃喜))이 절월을 머물렀던 곳이다.

영락(永樂) 계미년에 관동지방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익공이 특별히 관찰사로 뽑히게 되었다.

백성을 구휼하고 어루만지며 마음을 다해 구원하니 죽는 백성이 없었다. 임금께서 아름답게 여기시고 일품조복

(一品朝服)을 하사하시어,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로 제수하시었다. 공이 이미 조정에 돌아왔으나 백성들은 공

의 덕을 사모하여 잊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서로 더불어 공이 쉬던 곳에 돌을 쌓고 대를 만들어서, 감당(甘棠)

나무를 사모하듯 하였다.주D-011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덩굴 풀과 차가운 연기에 대는 뭉개어져 평지가

되었다.

을해년에 지금 감사 장원공(長原公)이 절월을 잡고 왔으니, 곧 익성공의 4대손이다.

모든 정사를 하고 백성을 무휼하는 데에 한결같이 가법(家法)을 지켰다. 하루는 관내를 순찰하다가 와현이라는

언덕에 올라, 대 아래에 배회하면서, 한편으로 사모하고 한편으로는 슬퍼하였는데, 완전히 익성공의 기침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이에 다시 돌을 모아, 무너진 것을 수축하고서 떠나갔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탄식하였다. 익성공은 세종대왕을 보좌하여 태평세월이 되게 하였으니,

그 한 도에 인애(仁愛)를 끼친 것은 여사로 한 일이니, 이 대가 완전하고 무너짐이 공에게 무슨 상관이리요.

그러나 공이 가신 지 이미 백 년이건마는 공의 덕이 사람의 마음에 간직된 것은 바로 그날과 같다.

대개 지금 백성은 모두 옛날에 공께서 부지런히 살려낸 그 백성들의 자손인 것이다. 그들 조상이 쌓은 대가 아직

도 길가에 우뚝하고 공의 후예)가 또 와서 그들의 자손을 무휼하며 예전 대를 수축하게 하였으니,

이것을 익성공이 어찌 일찍이 생각했겠으며, 또 백성으로서 감히 바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하늘이 익성공의

인덕에 후하게 보답한 바이며, 그 백성들의 추모하여 마지않는 심정에 보답한 것이니, 이 일에 대한 기록이 없을

수 없다.

익성공의 휘(諱)는 희(喜)이며, 사업과 명성은 모두 국승(國乘 역사)에 기재되었다.

장원공의 이름은 맹헌(孟獻)이며 자는 노경(魯卿)이다. 명(銘)하기를, "명주(溟州) 남쪽 실직국(悉直國)의 옛

지역에 대가 길에 임했는데, 처음 지은 것은 아득한 옛날이다. 들으니, 옛날에 익성공은 덕이 소공과 같아서,

주린 자는 배부르게, 추워하는 자는 따뜻하게, 관동에 은택을 남겼다 한다. 고개 위에 대를 쌓고, 공이 쉬었던

곳이라 하며, 사모하는 눈물을 대 밑에 흘렸다. 세월이 바뀌어서 공은 가도 대는 남았다. 누가 와서 뒤를 이었나.

공에게 자손이 있었다. 백성들이 기뻐하여 서로 말하기를, '우리 익성공이라.' 하였다.

우뚝한 새대는 독촉한 것이 아니었다. 덕이 사람에게 남아서, 대와 더불어 새롭다. 이 글을 좋은 돌에 새겨서

천년토록 알리리라." 하였다.

 

연근당(燕謹堂) : 죽서루 곁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의 기문에, "연근당은 삼척부 죽서루의 별관이며, 계해년에 전 부사 민소생(閔紹生)이 창건한

것인데 집이 일곱 칸이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하였다. 여러 사신이나 나그네들이 편히 쉬는 곳

이다. 신묘년 윤 구월에 화재를 당하였다. 다음 해 봄에 개축하는데, 여덟 칸으로 증축하였다.

10월에 낙성하였는데 고을 사람이 다 모여 왔다. 일어나서 태수에게 술잔을 올린 자는 창사(倉使) 김자균

(金子鈞)이고, 취해서 춤춘 자는 장군 함익겸(咸益謙)이며, 술이 깨어 읊조린 자는 교수 오경량(於敬良)이다.

좌우에 모시고 연석을 관장한 자는 먼저 승(丞)을 지낸 박중명(朴仲明)이다.

당초에 감독한 자는 호장 김생려(金生麗) ㆍ김득강(金得江)이고, 또 김규(金珪) 등 수십 명이다.

태수는 누구인가. 성은 양(梁), 이름은 찬(瓚)이다. 그 얘기를 듣고 사실을 기록한 자는 괴애자(乖崖子) 김문량

(金文良)이다. 장차 단청을 해서 영구히 빛나게 하려는 이는 새 태수 황선생(黃先生)이다. 황선생의 이름은 윤원

(允元)이다. 이는 성화(成化) 8년 동지 뒤, 7일이다." 하였다.

 

학교 향교 : 부 동쪽 3리에 있다.

 

역원 평릉역(平陵驛) : 부 북쪽 40리에 있다. 본도를 잇는데 소속된 역은 15인데, 동덕(冬德)ㆍ대창(大昌)ㆍ

구산(丘山)ㆍ목계(木界)ㆍ안인(安仁)ㆍ낙풍(樂豐)ㆍ신흥(新興)ㆍ사직(史直)ㆍ교가(交柯)ㆍ용화(龍化)ㆍ옥원

(沃原)ㆍ흥부(興富)ㆍ수산(守山)ㆍ덕신(德神)ㆍ달효(達孝)이다.

○ 승(丞) 1명이다.

 

사직역(史直驛) : 부 남쪽 3리에 있다.

○ 지금 살피건대, 부는 옛 실직국인데 사직은 곧 실직이 방언으로 변한 것이다.

 

교가역(交柯驛) : 부 남쪽 25리에 있다.

○ 정추(鄭樞)의 시에, "쑥대 머리에 사모를 눌러 쓰고 정자 앞 푸른 물에 비춰보니, 물빛은 푸르러 산에 비오려

하고 들빛은 보리 가을이 먼저 온다. 성난 말은 나이가 아직도 장성하고, 가는 기러기는 저물어도 쉬지 않는다.

자유롭게 물결에 일렁이는, 모래 갈매기를 누가 길들이나." 하였다.

 

용화역(龍化驛) : 부 남쪽 60리에 있다.

○ 정추의 시에, "누런 먼지 가득한 모자와 바람 가득한 소매는, 말안장을 잠깐 나무 그늘 속에 풀었네.

역사람[郵人]이 말을 재촉해 사람을 부르는데, 한 줄기 저녁노을에 산이 붉게 물든다." 하였다.

 

옥원역(沃原驛) : 부 남쪽 1백 리에 있다. 만년원(萬年院) : 부 남쪽 7 리에 있다.

제궁원(濟窮院) : 부 남쪽 50리에 있다. 죽현원(竹峴院) : 부 서쪽 80리에 있다.

신증 신흥역(新興驛) : 부 서북쪽 40리에 있다.

불우 중대사(中臺寺) : 두타산에 있다. 삼화사(三和寺) : 두타산에 있다.

 

○ 석식영암(釋息影菴)의 기문에, "산은 고을 서북쪽 30리에 있다. 웅장하게 먼 데까지 걸쳐 있고 큰 바다에 임

하여, 산세가 대굴산(臺崛山)과 함께 이어진다. 산 동쪽 큰 구렁은 깊숙한 것이 긴 언덕 같으며, 뻗은 것은 큰

시냇물 같아, 청명한 모습으로 바다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한 가닥 산이 높았다 낮았다 하면서 동쪽으로 가다가 50보가 못 되어서 또 남쪽으로 굽어지며 가파

르게 솟아, 한 봉우리가 되었다. 봉우리 밑 시내 북쪽에는 40묘(畝)쯤 되는 지경이 불룩하면서 평평하다.

신라 말에, 세 선인이 있었는데, 각자가 거느린 무리가 매우 많았다. 여기에 모여서 서로 더불어 의논하였는데,

옛날 제후가 회맹하던 예와 같았다. 오랜 뒤에 헤어져 갔으므로, 지방 사람이 그 봉우리를 삼공(三公)이라 이

름하였다. 지난번 도굴산 품일조사(品日祖師)가 그곳에 가서 절을 세우고 또한 삼공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후 태조께서 임금이 되자 이 절에 조칙을 내려 절 이름을 문안(文案)에 기록하고 후사(後嗣)에게 전하게

하시니, 이상한 일이었다. 대개

신인(神人)이 그 자리를 알려 주었다. 조사(祖師)가 그 터에다 절을 지어 상서(祥瑞)를 기록하였으며,

신성왕(神聖王)께서 3국(三國)을 통일하였으니,

그 영험이 현저하였으므로 이 사실을 이용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라고 고쳤다." 하였다.

 

간장암(看藏菴) : 두타산에 있다.

○ 안축의 기문에, "지치(至治) 3년 가을에 이군(李君) 덕유(德孺)가 나에게 와서, 선동 안선생(先動安先生)이

지원년간(至元年間)에 충렬왕(忠烈王)을 섬겨 간관이 되었으나, 정사를 말하여도 받아 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써 관직을 버렸다. 평소부터 외가 고을인 삼척현의 풍토를 좋아하여, 드디어 두타산 밑에다 터를 잡고 생을

마쳤다. 선생이 당초에는 유학을 공부하였으니, 연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천성이 불도를 좋아하였고, 늙어서는 부처 섬김이 더욱 근엄하였다. 이에 별장을 설치하여 거처하면서,

용안당(容安堂)이라 명명하였다. 이 산에 있는 삼화사(三和寺)에 가서 불경을 빌려 날마다 열람하였고, 십년

만에 필독하였다. 그 후에 그 별장을 절에 희사하고 현판을 간장암이라 하였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 : 부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태백산사(太白山祠) : 산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천왕당(天王堂)이라 한다. 이 산 곁의 본도 및 경상도 고을

사람이 봄가을에 제사하는데, 신좌(神座) 앞에 소를 매어 두고는 갑자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다.

만약에 돌아볼 것 같으면 불공한 것을 신이 알고 죄준다 한다. 사흘이 지난 다음 부에서 그 소를 거두어 이용

하는데, 퇴우(退牛)라 한다.

 

성황사 : 부 동쪽 1리에 있다. 여단 : 부 북쪽에 있다.

두타산사(頭陀山祠) : 고을 사람이 봄가을에 제사하며 날씨가 가물면 비를 빈다.

 

신증 근산사(近山祠) : 부 남쪽 10리에 있다. 세간에서 대천왕사(大天王祠)라 부르며, 고을 사람이 봄가을에

제사한다.

 

능묘 목조 황고릉(穆祖皇考陵) : 부 서쪽 노동(蘆洞)에 있다. 황비릉(皇妣陵) : 부 서쪽 동산(東山)에 있다.

 

고적 고죽령현(古竹嶺縣) : 부 남쪽 1백 9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 죽현현(竹峴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죽령(竹嶺)이라 고쳐서 삼척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전해오는 얘기에는, 옥원(沃原)역이

이 현의 옛터라 한다.

 

만경현(滿卿縣) : 경(卿)이 어떤 데는 향(鄕)으로 되어 있다.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본래 고구려 만약현

(滿若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쳐서 삼척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하나,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해리현(海利縣) : 김부식이 말하기를, "본래 고구려 파리현(波利縣)인데 경덕왕이 명칭을 고쳐, 삼척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하나,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두타산성(頭陀山城) : 석축이다. 둘레는 8천 6백 7척이고 높이는 5척이다.

옛 읍성[古邑城] : 3면이 흙으로 쌓였으며 둘레가 1천 4백 44척이고 높이는 7척이다.

서쪽은 절벽이 4백 8척이다.

 

신증 오화리산성(吾火里山城) : 부 남쪽 9리에 있으며 토축이다. 둘레가 1천 8백 70척이고 성안에 샘 하나가

있다.

 

명환신라 이사부(異斯夫) : 지증왕(智證王) 6년에 이 고을 군주(軍主)가 되었다.

 

고려 남은(南誾) : 신우(辛禑) 때에 왜구가 크게 성하여 삼척군이 위급하였다. 나라에서 알맞은 인재가 없어

곤란해하므로 남은이 지군(知郡)되기를 자천하였다. 고을에 도착하자마자 왜적이 왔다. 남은은 10여 기를 거느

리고 성문을 열어 돌격하니 왜적이 패주하였다. 조정에 소환되어 사복정(司僕正)에 제수되었다.

 

인물고려 심동로(沈東老) : 과거에 뽑혀서 시문(詩文)으로 이름났다. 벼슬이 내서사인 지제교(內書舍人知制敎)

에 이르렀다.

 

제영 하늘이 물과 돌 사이에서 맑은 노님을 주었다 : 김극기의 시에, "나그네 길 기구하여 웃을 때가 적었는데,

다락에 올라 잠시나마 한가함을 얻은 것을 기뻐한다. 땅은 티끌 모래 밖에 고요한 경지를 이루었고,

하늘은 물과 돌 사이에서 맑은 노님을 주었다. 일렁거리는 물결은 아침에 해를 토하고, 음음한 들 기운에 저녁

산이 잠긴다.

시절이 평화로워 조두(刁斗)주D-012 소리 들리지 않고, 목동의 피리와 나무꾼 노래만이 오고가네." 하였다.

 

인가가 푸른 산 기슭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물과 구름이 한 고을을 감춰서, 진세 사람의 왕래가 드물다.

객관은 붉은 석벽을 임했고, 인가는 푸른 산기슭에 있다. 마름에 솨솨 바람이 불고, 대숲엔 소록소록 이슬이

뿌린다. 한가한 중에 한 가지 한되는 것은, 지는 해를 잡아맬 끈이 없음일세." 하였다.

 

깨끗한 강산은 나와 같이 맑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깨끗한 강과 산 나와 함께 맑은데, 누대 가는 곳마다

관현(管絃) 소리 들리네. 좋은 말에 고운 계집을 태운 것이 아니면, 삼한(三韓)이 태평하다 누가 말하리.

푸른 대 붉은 단풍 일천 봉우리가 합쳤고 : 성석인(成石因)의 시에, "푸른 대와 붉은 단풍은 일천 멧부리가

합쳤고, 높은 봉우리와 한 냇물이 둘렀다." 하였다.

 

팔경 대숲이 옛 절을 감추었다 :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삼엄하고 총총한 것이 몇 겹이나 에웠나, 먼 데서 보니

푸른 구름인 듯 가깝게 오니 아니로구나. 문득 종소리 듣고 절 있는 줄 알아, 산책하여 중 찾고 돌아감도 해롭지

않으리." 하였다.

 

○ 안축의 시에, "긴 대가 여러 해 되니 아름이 되었는데, 손수 심던 중들 지금은 아니로세.

선탑(禪榻)과 다헌(茶軒)은 깊숙해 보이지 않고, 숲을 뚫는 새만이 돌아갈 줄 아는구나."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대를 좋아하는데 얼마나 굵은 것을 물어 무삼하리.

차군(此君)이라는 칭호 잘못은 아니겠지. 절은 푸름 속에 숨겨져 찾지 못하고, 지는 볕에 중 홀로 돌아감을 볼

뿐일세." 하였다.

 

바위가 맑은 못을 임하여 있다 : 이달충의 시에, "높고 험한 바위돌이 달리는 시냇물을 막아,

내가 못이 되어 더욱 넓혀졌네. 고기는 바람과 우레를 만나 가만히 변화했고, 사람은 세월을 따라 몇 번이나

바뀌었나." 하였다.

○ 안축의 시에, "냇물이 육지가 되고 육지가 내 되어도, 맑은 이 못은 그렇지 않았네. 보아라 급한 여울물이

모여 고이는 곳에, 깎아지른 바위는 무거워서 옮겨지지 않았네." 하였다.

 

○ 이곡의 시에, "바위 밑에 못이 된 것은 바로 큰 냇물, 바위 위에서 내려와서 보기에 아득하여라.

고을 사람이 못 속 달을 취하려고 하니, 순박한 풍속이 변하지 않은 줄 알겠네." 하였다.

 

산에 의지한 촌집 : 이달충의 시에, "마을은 산을 의지했고 산은 마을을 둘러, 산 앞 작은 길이 싸리문에 닿았네.

물결이 돌에 부딪쳐 강물이 희고, 바람이 뽕나무 위를 지나니 비오려나 어둡다." 하였다.

○ 안축의 시에, "산 옆 연기 속에 외로운 마을이 있고, 대숲 밑엔 삽살개 누워 문을 지키네. 농부는 농삿일 하며

해를 아껴서, 별을 보며 나갔다가 저물녘에 돌아오네." 하였다.

 

○ 이곡의 시에, "강 위엔 푸른 산 산 밑엔 마을, 평화로운 시절이라 문도 닫지 않는다.

백성이야 어찌 강산 좋은 줄 알랴, 일찍 일어나 일하고 저물게 돌아오네." 하였다.

 

물 위에 걸쳐 누운 나무다리 : 이달충의 시에, "이 물이 참으로 황공탄(惶恐灘)주D-013이 되었으니,

다리를 밟는 발걸음마다 물결이 일 것이네. 그대로 무심하게 지날 것인가, 두려워하며 유의해 보지를 마소."

하였다.

○ 안축의 시에, "통나무 하나 흔들흔들 여울 위에 걸쳤는데, 바라보기만 해도 물살에 빠질 듯 겁이 나네.

 

이곳 백성은 발과 마음이 익숙하여서, 평지를 지나가듯 자세히 보지 않네." 하였다.

○ 이곡의 시에, "십리 사이 인가가 여울 하나를 끼고 오가는데, 나무 걸치고 급한 여울 건너네.

벼슬살이에 실각(失脚)하는 건 이보다 더 위태하건만, 발은 있으나 언제 한 번 물러서서 보았던가." 하였다.

 

○ 신천(辛蕆)의 시에, "긴 가지를 찍어내어 여울에 걸쳤는데, 서리를 튀기고 눈을 뿜는 놀라운 물결일세.

잠깐이라도 자국마다 조심하는 뜻을, 공명 바라는 벼슬길에다 옮겨놓고 보소." 하였다.

 

○ 김윤(金贇)의 시에, "나무 하나 다리 되어 여울에 누웠는데, 오가는 그림자가 물속에 거꾸로 비치네.

그의 마음은 건너기 어려움만 겁내지만, 누에서 그림으로 여겨볼 줄 어찌 알았으리." 하였다.

 

○ 김수령(金壽寧)의 시에, "엇비슷한 고목을 앞 여울에 가로질러서, 자국마다 서늘한 마음 몇 번이나 놀랐던가.

평지에 이는 풍파 아무도 모르면서, 다리에 와서는 두렵게 보누나." 하였다.

 

소 등에 앉은 목동 : 이달충의 시에, "아홉 언덕에 나귀타면서 매양 눈썹을 찡그림은, 항상 지저분한 먼지가 흰옷

더럽힘을 한함이네. 강 언덕에서 편한 소 등을 타고, 시골길 찾아 물가로 돌아옴을 어떻다 하리." 하였다.

○ 안축의 시에, "공중을 우러러 피리 부는 쾌활한 모습, 소 등에 탄 몸은 종아리 덮을 옷도 없네.

집이 앞산에 있어 언덕이 격했는데, 비오는 날엔 저문 까마귀 따라 돌아갔네." 하였다.

 

○ 이곡의 시에, "저 도랑집 자매 고운 눈썹, 밤 길삼도 부지런히 시집갈 옷 만드네. 나면서부터 걱정 없는 네가

사랑스러운데, 도롱이 걸치고 피리 불며 소 가는 대로 가누나." 하였다.

 

언덕 위에서 점심 먹이는 여자 : 이달충의 시에, "부부 모두 부지런하여 놀고 먹지 않고, 밭가는 남편 점심 가져

와 풀밭에 둘러앉았네. 가을 수확에 맘 쓰여 서로 말하기를, 모자란 작년 구실[稅租] 갚게 되려나." 하였다.

○ 안축의 시에, "들 점심 만드느라 여인은 굶으며, 새벽부터 마음은 밭고랑에 있네. 한낮이라 서둘러서 밭머리

에 갔다가, 농사짓는 남편 먹고나면 아양 걸음으로 돌아간다." 하였다.

 

○ 이곡의 시에, "서로서로 생각하여 더 먹으라 권하며, 아내는 밥 짓고 남편은 밭 갈아서 세상 보내네.

얼굴로만 섬기다가 버림받은 이 많다네. 안색은 한 번 변하면 다시 곱지 못하리." 하였다.

 

물에 임하여 고기를 센다 : 이달충의 시에, "누 아래 맑은 곳에 푸른 하늘이 잠겼는데, 고기 노는 것 보며 석양 된

줄도 몰랐네. 앞섰다 뒤섰다 하여 세기 어려워, 둘인가 셋인가 말이 같지 않네." 하였다.

○ 안축의 시에, "누 아래 맑은 못에 뚫린 굴이 비었는데, 고기 알을 슬어서 붉은 좁쌀 펼친 듯하다.

한들한들하는 여러 꼬리 다소를 알겠다. 앞에서부터 세어도 한없고 뒤에서부터도 한가지일세." 하였다.

 

○ 이곡의 시에, "깁[練] 같은 긴 강 가을 하늘이 쏟아진 듯한데, 굽어보며 시 읊으니 해가 벌써 저무네.

노는 고기를 헤아릴 수 있다 말하고, 구구하게 손꼽으니 백치와 같아진다." 하였다.

 

담 너머로 중을 부른다 : 이달충의 시에, "면벽한 승은 측백나무에 참례하였고,주D-014 누에 오른 객은 꽃포기

와 대했다. 서로 불러 서강(西江) 달 아래에 함께 취하자, 바람에 털이개 떨치는 것만이 대단한 것 아니다."

하였다.

○ 안축의 시에, "구렁에 솟은 누각이 수부(水府)에 임했고, 담을 격한 선당(禪堂)은 바위를 기댔다.

중을 좋아하는 참뜻을 아는 사람 없고, 십리에 뻗친 차 끓이는 연기가 대숲 바람에 나부낀다." 하였다.

 

○ 이곡의 시에, "관사(官舍)와 승방(僧房)이 겨우 담을 격했고, 뜰에 있는 꽃과 대도 함께 떨기를 이루었다.

누에 올라도 짝 없어 심심해 부른 것이요, 전사(顚師)가 도풍(道風)이 있어서는 아니었네.주D-015"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진보 삼척포진(三陟浦鎭) : 동으로 8리에 있으며 중종(中宗) 15년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9백 척이다.

○ 수군첨절제사 한 사람이 우영장(右營將)을 겸하였다.

 

방수(防守) 동진수(桐津戍)ㆍ임원수(臨遠戍) : 모두 자세하지 못함.

장오리포(藏吾里浦) : 남으로 6백 리에 있는데 전에는 척후를 두었다.

창고 성창(城倉) : 옥원(沃原)의 오른쪽 성에 있다. 사미창(四美倉) : 서로 70리에 있다.

단유 비례산(非禮山) : 신라 사전(祀典)에 이르기를, "실직군(悉直郡)에 있으며 북해(北海)이므로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하였는데,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영선 목조황조고묘(穆祖皇祖考墓) : 노동(蘆洞)에 있다. 목조황고묘(穆祖皇考墓) : 노동(蘆洞)에 있다.

목조황비묘(穆祖皇妣墓) : 부의 서동쪽 산지리(山地里)에 있다.

단유 비례산(非禮山).

 

[주 D-001] 반곡(盤谷) : 중국 태항산(太行山) 남쪽에 있는 땅이름인데, 한퇴지(韓退之)의 친구 이원(李愿)을

반곡으로 보내는 서(序)에, “반곡땅은 샘물이 달고 땅이 기름지다.”라고 한 바 있다.

[주 D-002] 일찍이 황학루(黃鶴樓)를 때려부순 사람 있음을 들었더니, : 이태백의 시에 황학루(黃鶴樓)를 때려

부수었다는 말이 있으나, 실제로 때려부순 것은 아니다.

[주 D-003] 유루(庾樓) 저녁 달은 상(床) 밑에 들고, : 진(晉) 나라의 유량(庾亮)이란 사람이 무창(武昌)의 총독

으로 가서 매양 달 밝은 밤에는 그곳 남루(南樓)에 올라서 놀았다 한다.

[주 D-004] 당일에 응당 황학(黃鶴)이 가지 않았겠지, : 최호(崔頤)라는 시인의 시에, “황학은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는데,[黃鶴一去不得返]”라는 시가 있다.

[주 D-05] 양주곡(涼州曲) : 당 나라 때에 세상이 태평함으로 사람들이 보통 악곡에 싫증나서 이상한 악곡,

특히 외국의 악곡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서량(西涼)에서 중앙아시아지방 민족의 악곡을 들여왔으므로 그 곡조를 양주곡이라 하였다.

[주 D-006] 한 승상(韓丞相) : 한명회(韓明澮)를 말함이다.

그는 한강가에 압구정(狎驅亭)이라는 정자를 지었었고, 삼척땅을 왔던 일이 있었다.

[주 D-007] 울람천(蔚藍天) : 예전에는 하늘이 33층계가 있다 하는데, 울남천도 그 중의 한 층계이다.

[주 D-08] 청도(淸都) : 청도는 신선이 모이는 곳이다.

[주 D-09] 항해(沆瀣) : 신선이 먹고 산다는 이슬.

[주 D-010] 하늘과 땅이 밤낮 떠 있다는 것 믿게 되었다. : 중국땅은 남쪽에는 물이 많아서 세상이 모두 물에

뜬 것 같은 기분이라 하여, 두보의 시에, “하늘과 땅은 밤낮 물에 떠있다.[乾坤日夜浮]”라고 한 것이 있다.

[주 D-011] 감당(甘棠)나무를 사모하듯 하였다. : 소공(召公)은 주(周) 나라 시대의 한 지방의 제후로, 백성에게

매우 관대하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사모하여, 그가 나무그늘에서 쉬던 아가위나무[甘棠]까지도 아끼고

위했다 한다. 그러므로 그 후에는 지방관으로 백성에게 잘하는 사람은 소공에 비유한다.

[주 D-012] 조두(刁斗) : 행군(行軍)할 때 야순하거나 초계 보는 사람들이 치고 다니는 딱딱이와 같은 것이다.

[주 D-013] 황공탄(惶恐灘) : 중국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여울 이름인데 그 이름을 이용하여 여기에도 쓴 것

이다.

[주 D-014] 면벽한 승은 측백나무에 참례하였고, : 불교의 한 종파인 선교(禪敎)를 중국에 처음으로 전파한

달마대사가 원래 인도 사람이었는데, 무슨 까닭으로 중국에 왔는가 하고, 당나라의 선사(禪師)인 조주(趙州)

대사에게 물으니 그는, “뜰 앞에 측백나무라” 대답하였다. 그 의사는 측백나무까지 제도하려고 하는 것이다 라

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그 승도 달마대사가 제도하라는 측백에 참례하기 위하여 승이 되었다는 뜻이다.

[주 D-015] 전사(顚師)가 도풍(道風)이 있어서는 아니었네. : 당 나라 때에 한퇴지가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임금에게 올리고, 좌천되어 조주(潮州)의 자사(刺史)로 갔을 적에 그곳에 있는 승 태전(太顚)이라는 자와 친하

게 지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의심스럽게 여겼더니, 한퇴지의 말이, “그 태전이 불교의 중이라서 친한 것이

아니요, 그가 도기(道氣)가 있으므로 친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양양도호부 襄陽都護府

 

동쪽으로 해안까지 12리, 남쪽으로 강릉부 경계까지 65리, 서쪽으로 인제현(麟蹄縣) 경계까지 55리,

북쪽으로 간성군(杆城郡) 경계까지 45리다. 서울과 거리는 5백 11리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익현현(翼峴縣) : 이문현(伊文縣)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에서 익령(翼嶺)이라 고쳐서

수성군(守城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顯宗)이 현령을 두었고, 고종(高宗) 8년에는 거란 군사를 방어

한 공이 있다는 것으로써 양주 방어사(襄州防禦使)로 승격하였으나, 44년에 적에게 항복하였다는 것으로써

덕령 감무(德寧監務)로 강등하였고, 원종(元宗) 원년에는 지양주사(知襄州事)로 회복하였다.

본조 태조 6년에는 임금의 외가 고을이라 하여 승격하여 부로 만들었다. 태종 13년에는 예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고 16년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속현 동산현(洞山縣) : 부 남쪽 45리에 있으며, 본래 고구려 혈산현(穴山縣)이었다. 신라에서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명주 속현으로 만들었던 것인데, 고려 현종(顯宗) 때, 본부에 예속시켰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관원 부사ㆍ교수 : 각 1명.

군명 익현(翼峴)ㆍ이문(伊文)ㆍ익령(翼嶺)ㆍ덕녕(德寧)ㆍ양주(襄州)ㆍ양산(襄山).

 

성씨본부 김ㆍ이ㆍ손ㆍ박ㆍ하(河)ㆍ정(鄭)ㆍ장(張)ㆍ임(林)ㆍ윤 : 모두 속(續). 동산(洞山) 박ㆍ김ㆍ최ㆍ이ㆍ

진(陳)ㆍ임(林) : 속.

 

산천 설악(雪岳) : 부 서북쪽 50리에 있는 진산이며 매우 높고 가파르다. 8월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여름이

되어야 녹는 까닭으로 이렇게 이름 지었다.

소동라령(所冬羅嶺) : 부 서쪽 60리에 있으며 겹쳐지고 포개진 산맥에 지세가 험하고 궁벽지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성황산 : 부 북쪽 25리에 있다. 오봉산(五峯山) : 부 동북쪽 15리에 있으며, 낙산(洛山)이라고도 한다.

수산(水山) : 부 동쪽 10리에 있다. 덕산(德山) : 부 북쪽 36리에 있다. 초진산(草津山) : 부 남쪽 29리에 있다.

이산(離山) : 부 북쪽 63리 쌍성호(雙成湖) 서쪽에 있는데, 곧 대관령 동쪽 가닥이다.

기이한 봉우리가 꾸불꾸불하여 울타리를 설치한 것과 같으므로 이름하였다. 울산(蔚山)이라 하기도 한다.

 

양야산(陽野山) : 동산현 남쪽 10리에 있다. 정족산(鼎足山) : 부 서남쪽 40리에 있다. 세 봉우리가 높게 솟아

나서 모양이 솥발 같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바다 : 부 동쪽 13리에 있다. 사전(祀典)에 동해신(東海神)을 여기에서 제사한다고 하였고, 중사(中祀)에도 기재

(記載)되었다.

쌍성호(雙成湖) : 부 북쪽 40리 간성군(杆城郡) 경계에 있으며 둘레가 수십 리다. 호수 경치가 영랑호(永郞湖)

보다 훌륭하다. 예전에는 만호영(萬戶營)을 설치하여 병선(兵船)을 정박하였으나 지금은 폐하였다.

 

남대천(南大川) : 부 남쪽 2리에 있다. 강릉부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오며 소동라령(所冬羅嶺) 물과 합치고 부

남쪽을 지나 바다에 들어간다.

 

죽도(竹島) : 부 남쪽 45리 관란정(觀瀾亭) 앞에 있으며, 푸른 대나무가 온 섬에 가득하다. 섬 밑 바닷가에 구유

같이 오목한 돌이 있는데 닳고 갈려서 교묘하게 되었고, 오목한 속에 자그마한 둥근 돌이 있다.

전설에는, "둥근 돌이 그 속에서 이리저리 구르므로 닳아서 오목하게 된 것이며, 다 닳으면 세상이 바꿔진다."

한다.

 

토산 모시ㆍ철(鐵) : 서선사(西禪寺) 동쪽 봉우리 밑에서 산출된다. 대살[竹葥] : 죽도에서 산출된다. 잣ㆍ오미자ㆍ

지치[紫草]ㆍ인삼ㆍ지황ㆍ복령ㆍ벌꿀ㆍ백화사ㆍ김ㆍ미역ㆍ전복ㆍ홍합ㆍ문어ㆍ대구어ㆍ송어ㆍ연어ㆍ도루묵ㆍ

황어ㆍ방어ㆍ고등어ㆍ광어ㆍ농어ㆍ숭어ㆍ쌍족어(雙足魚)ㆍ해삼ㆍ송이버섯.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은 것은 둘레가 4백 3척, 높이 5척이며, 흙으로 쌓은 것은 둘레가 2천 8백 25척이고,

성안에 우물 둘이 있다. 지금은 반쯤 퇴락하였다.

 

관방 대포영(大浦營) : 부 동쪽 12리에 있다. 성종(成宗) 21년에 강릉 안인포(安仁浦)에서 여기로 옮겨 왔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

 

신증 정덕(正德) 경진년에 돌로 성을 쌓았는데 둘레 1천 4백 69척, 높이 12척이다.

 

봉수 수산 봉수(水山烽燧) : 북쪽으로 덕산(德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초진산(草津山)과 응한다.

덕산 봉수 : 북쪽으로 간성 죽도에 응하고, 남쪽으로 수산과 응한다.

초진산 봉수 : 남쪽으로 양야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수산과 응한다.

양야산 봉수 : 남쪽으로 강릉 연곡현(連谷縣) 주문산(注文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초진산과 응한다.

 

신증궁실 동헌(東軒) : 강혼(姜渾)의 시에, "양양에 와서 고인(故人)의 어짐을 추억하니, 잔설의 개인 봉우리가

처마에 비친다. 맹호연(孟浩然)은 공연히 나귀 등에서 시구를 읊조렸고, 산공(山公)은 오히려 습지(習池)의

자리를 비웠다.주D-001 마침 밝은 달을 만나 누대가 고요하니, 젊은 여자의 고운 태도가 필요 없노라.

이 번 걸음에 정과 흥이 박했다고 이르지 말라. 마땅히 훗날에 다시 신선을 찾을 것이라." 하였다.

 

누정 태평루(太平樓) : 객관 남쪽에 있다.

○ 정추의 시에, "더위를 식히는 누각은 연우(延祐)년 전에 완성됐고, 누 이름 지은 사람은 갑진년에 왔노라.

처마에 벌려선 늙은 나무엔 외로운 달이 걸렸고, 언덕을 이웃한 수양버들 반쯤 연기에 늘어졌네.

홀(笏)로 턱을 고이고 높게 읊조려 서늘한 기운을 맞이하고, 술잔을 들고 흰 눈자위로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거문고 줄을 섬섬옥수로 칠 것 없고, 비온 뒤 숲 속의 시냇물 소리가 목메인 듯 들려온다." 하였다.

 

○ 안축의 시에, "벼슬길에 오른 걸음 앞서 가기를 꾀하지 않고, 이 누에 내왕한 지도 벌써 두 해다.

헌함 덮은 대나무 숲은 서늘한 기운 나눠 오고, 문을 가리운 용(榕)나무는 푸른 연기에 흔들리네.

백성의 생업을 관찰하여 우리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니 저 하늘이 부끄럽다.

꾀가 졸렬하여 능히 이익를 일으키지 못하니, 어떻게 하면 시내 구렁에 금샘[金泉]이 솟아나게 할까." 하였다.

 

○ 조준(趙浚)의 시에, "옛 고을이 경영된 것은 나라 있기 전이어서, 태평한 바람과 달 반 천년이었다.

새는 나무에 해그림자 세 발 남은 때에 돌아오고, 사람은 어촌에 낀 한 줄기 연기 속에서 말한다. 강한(江漢)이

달려 흐르니 세상일이 마음 아프고, 산하에 장한 공적은 하늘에 맹서한다. 근래의 가혹한 부세에 백성이 고달퍼

하니, 동해의 물 기울여 재물을 만들고 싶다." 하였다.

 

○ 이곡의 시에, "이군(李君)이 폐함을 일으킨 것은 전에 없던 일, 부서진 기와에 천경년(天慶年)이 적혀 있다.

동우(棟宇)는 벌써 전성할 때와 같고, 민가에는 다시 태평한 연월(煙月)이 있다. 처마에 가득한 가을 기운은

산이 좌석을 둘렀고, 언덕을 격한 물결 소리는 파도가 하늘에 닿은 듯하네. 새로 온 어진 태수에게 말하노니,

은지(隱之)야, 탐천(貪泉)을 마신들 무엇이 해로우리.주D-002" 하였다.

 

○ "이 다락 풍경이 눈앞에 넉넉한데, 오가며 등림한 지도 또 일 년이다. 주렴에는 차갑게 은하 이슬이 젖고,

거문고 복판엔 따뜻하게 옥전(玉田) 연기가 난다.주D-003한가하니 병 속 세월을 즐길 만하고,

막힘은 독 속 천지가 싫다.주D-04 여러분의 빙설(氷雪) 같은 시구에 화답하고파도, 짧은 두레박줄로 깊은 샘물

길음 부끄럽다.주D-05" 하였다.

 

○ 김예몽(金禮蒙)의 시에, "조촐함이야 감히 범공(范公)주D-006 앞에 바랄 건가, 유람함도 젊은 때라야 가능

하리라. 그림자는 현산관도(峴山官道)주D-07에 달을 따르고, 꿈에는 화악어로(華岳御爐)주D-08의 연기를

찾는다. 은택이 깊어 보답하고파도 갚을 땅 없음이 슬프고, 책임이 중하니 감당하기 어려워 하늘에 부끄럽다.

좋은 지경에 와서 흥취가 넘쳐나니, 미친 흥취가 광천(狂泉) 물을 마신 듯하다." 하였다.

 

관란정(觀瀾亭) : 동산현(洞山縣) 동쪽 2리에 있다.

○ 이곡의 시에, "금포화극(金鋪畫戟)주D-009 문을 밟기에는 게으르고 한가롭게, 푸른 대 흰모래의 마을을 찾네.

동해에 물결 자서 하늘이 더욱 푸르고, 서새(西塞)에 산이 높아서 날이 빨리 어둡는다. 우연히 좋은 유람을 하면

매우 기쁘니, 시사(時事)를 말하려다가 도로 삼켜버린다.

옛부터 바다를 보면 물 얘기하기 어려운데, 우물 밑 어느 사람이 망령되게 스스로 높은 체하나.주D-010

 

○ 정자 너머 산봉우리는 현의 문을 옹위했고, 헌함 앞 물가와 모래톱은 어촌을 감쌌다. 푸른 물결은 흰 수염이

라도 물들일 만하고, 맑은 풍경은 병든 눈을 능히 낫게 하네. 세 섬이 망망한데 하늘이 함께 멀고,

백 냇물이 호탕하나 바다가 아울러 삼킨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대해, 세상일 잊고 인간에 달존(達尊)주D-011

있음을 계교하지 않을까." 하였다.

 

○ 안축의 시에, "인간 사이의 온갖 물건이 공후(公侯)의 집에 들어와도, 산과 물은 천년토록 한 마을에 딸렸다.

외딴 섬은 구름을 격해 어렴풋이 비쳤고, 조각 돛은 달빛과 합쳐 황혼에 진다. 기러기 아득하게 나는데 주살[弋]

주D-012은 무엇을 바라며, 고래는 푸른 물결을 빨아들이니 배도 삼킬 듯하다. 비가 새 정자에 그쳐 수레 밀어도

가지 못하니, 아전이 절해 맞이하는 것 거짓 존대함일세." 하였다.

 

○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정자 앞 모옥에 가시문을 닫았는데, 나무마다 매화 피니 눈 속의 마을 같다.

사면의 푸른 뜰엔 연기가 어둡고, 두어 가락 노젓는 소리에 달이 어스름하다. 호수 빛은 거울처럼 원래 더러움

없고, 바다물결 구름까지 날리어 도리어 삼킬 듯하다. 오직 청산이 우뚝하게 보이며, 예나 이제나 푸르게 홀로

높다." 하였다.

 

신증 이륙(李陸)의 시에, "명사십리에 주문(朱門)을 열었는데, 버들 그늘지고 꽃이 밝아 한 마을이 되었다.

달이 동해에 돋으니 물결 망망하고, 바람이 서새(西塞)에 부니 비가 침침하다. 봉래ㆍ영주[蓬瀛]는 반드시 3천

리나 격하지 않았고, 운몽(雲夢)주D-013을 오히려 8, 9개나 삼킬 듯하다. 머리를 돌리니 장안(長安)이 어디멘

고. 응당 단정하게 팔짱 끼고, 엄연히 높은 자리에 계시리라." 하였다.

 

비선대(祕仙臺) : 부 북쪽 50리 쌍성호 동쪽에 있다. 돌봉우리가 가파르게 빼어났고, 위에 노송 두어 그루가

있어서 바라보면 그림 같다. 그 위에는 앉을 만하며 실 같은 길이 육지와 통하는데,

바다 물결이 사나워지면 건널 수 없다.

 

강선정(降仙亭) : 부 북쪽 29리에 있다. 상운정(祥雲亭) : 부 남쪽 25리에 있다. 바다 곁엔 긴 소나무가 10리를

연달아 푸르게 그늘져서, 쳐다보아도 해가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 사이에 잡풀이 없고, 오직 산 철쭉이 있어서

봄에 꽃이 피면 붉은 비단같이 화려하다.

 

학교 향교 : 부 동쪽 2리에 있다.

 

○ 안축의 기문에, "대관령 동쪽에는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났는데, 양양이 그 중간에 있다. 그 신령한 정기와 또

맑은 기운이 반드시 공연히 쌓이지 않았을 터이건마는,

백여 년 동안에 기이한 재주와 덕을 품은 사람이 이 고을에서 나와, 인륜을 빛나게 한 자가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산수의 정기가 영험 없음과 고을 사람의 성품이 착하지 않음이 아니다. 대개 이 고을

은 옛부터 오랑캐 지경에 이웃하여 변란이 여러 번 일어났으므로 학교를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온 나라가 통일이 되어 백성이 변란을 모른다. 성학(聖學)이 거듭 일어나고, 자제가 나날이 많아지니

학교를 설치하여 인재를 양육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이 고을 다스리는 자는 오직 문서 따위만을 급무로 하였을

뿐, 이런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던 까닭에, 산수의 정기가 서리고 맺혀서 말할 곳이 없고,

자제의 천성이 파묻혀서 발양될 수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고을 사람의 불행이 아니리요.

내가 이 고을에 와서 옛일을 아는 늙은이에게 들으니, '고을 북쪽에 문선왕동(文宣王洞)이라 하는 고을이 있는

데, 여기가 반드시 예전에 학교 터이며 없어진 지 오래였으리라.' 하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윽히 탄식하고 고을 사람에게 그 지역에다 학교를 짓도록 명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다 기뻐

하며, '자식들의 뜻이었다.' 하여, 즐거움으로써 수고로움을 잊는 것이었다.

이에 동년(同年) 벗 통주수 정랑 진군(通州守正郞陳君)에게 병부(兵符)를 내려,

그 공역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공역을 시작하자 이 고을 태수 정랑 박군(正郞朴君)이 임소(任所)에 왔다.

박군도 또한 글하는 선비로서 정승집 자제였다. 실상 그 힘을 이용하여 나의 뜻을 이루게 되니,

이것이 어찌 고을 사람의 다행이 아니리요. 땅의 정기는 그 쇠한 지가 오래면 그 왕성해지는 것이 급속하고,

그 쌓인 날짜가 멀면 그 발하는 것이 왕성하다. 이제부터는 집마다 재주와 학문이 있는 자손이 있고, 마을마다

인후한 풍속이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이라야 산수의 부끄럼을 씻고 나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러나 제도가 거칠고 소략하며 일의 공효도 모자람이 있으니, 후임으로 오는 군자는 한 번 살피기를 바란다."

하였다.

 

역원 상운역(祥雲驛) : 부 남쪽 25리에 있다. 본도를 잇는 속역이 열 다섯인데, 연창(連倉)ㆍ오색(五色)ㆍ

강선(降仙)ㆍ인구(麟丘)ㆍ죽포(竹苞)ㆍ청간(淸澗)ㆍ운근(雲根)ㆍ명파(明波)ㆍ대강(大康)ㆍ고잠(高岑)ㆍ

양진(養珍)ㆍ조진(朝珍)ㆍ등로(登路)ㆍ거풍(巨豐)ㆍ정덕(貞德)이다.

○ 승(丞) 1명.

 

○ 김극기의 시에, "변방에 전쟁이 없음이 여러 해라, 꽃피고 새 우는 것도 모두 즐거워한다.

천 수레 흰 눈 같은 실을 켜는 땅이요, 만 이랑에 누런 구름 같은 보리를 베는 시절이라, 어부의 낚시터엔 이끼

가 뒤섞였고, 초동이 앉은 두렁 위엔 풀이 우거졌네. 오가며 훌륭한 경개 더욱 구경할 만한데,

일찍이 시인을 시켜 몇 편이나 지었나." 하였다.

 

인구역(麟丘驛) : 동산현(洞山縣) 2리에 있다. 연창역(連倉驛) : 부내(府內) 5리에 있다.

강선역(降仙驛) : 부 북쪽 30리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제비는 비 머금은 버들을 스치고, 매미는 바람 띤 느티나무에 숨었다.

사방을 바라보니 참으로 넓직하여, 나그네 회포가 절로 트인다." 하였다.

 

○ 정추의 시에, "말 머리 깃발이 연하(煙霞)를 스치는데, 물가 집 산 마을에 붉은꽃 흰꽃이 피었다.

우정(郵亭)의 좋은 풍경이 유달리 사랑스러워, 천 그루 소나무 밑에 물결이 모래를 씻는다." 하였다.

 

불우 낙산사(洛山寺) : 오봉산에 있다.

○ 신라 중 의상(義相)이 지은 것이다. 대웅전 위에 전단 관음상(栴檀觀音像) 하나를 봉안하고 대를 이어 높이

받들었는데, 영험이 있었다. 우리 세조(世祖)가 이 절에 행차하였다가, 전사(殿舍)가 비좁고 누추하다 하여

신축하도록 명하여, 매우 굉장하여졌다.

 

○ 고려 중 익장(益莊)의 기문에, "양주(襄州) 동북쪽 강선역 남쪽 동리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두어 마장쯤 되는 큰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1백 자 가량이고 크기는 곡식 1만 섬을 싣는 배라도

용납할 만하다. 그 밑에는 바닷물이 항상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렁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관음대사

(觀音大士)가 머물던 곳이라 한다. 굴 앞에서 오십 보쯤 되는 바다 복판에 돌이 있고, 돌 위에는 자리 한 닢을 펼

만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 신라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친히 불성(佛聖)의 모습을 보고자 하여 돌

위에서 전좌 배례(展坐拜禮)하였다. 27일이나 정성스럽게 하였으나 그래도 볼 수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

졌더니, 동해 용왕이 돌 위로 붙들고 나왔다. 대성(大聖)이 곧 바로 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水精念珠)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 다만 굴 위에서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가면, 그곳이 나의 머리 꼭지 위다.

거기에다 불전(佛殿)을 짓고 상설(像設)을 안배하라.' 하였으며 용(龍)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치는 것이었다.

대사는 구슬을 받고 그 말대로 가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다 불전을 창건하고 용이 바친 옥으

로써 불상을 만들어서 봉안하였는 바, 곧 이절이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봄가을에 사자(使者)를 보내 사흘 동안 재를 실시하여 치성하였고, 그 후에는

갑령(甲令 항상 하는 일)에 적어서 항규(恒規)로 하였다. 그리고 수정염주와 여의주는 이 절에 보관해 두어 보

물로써 전하게 하였다. 계축년에, 원(元) 나라 군사가 우리 강토에 마구 들어왔으므로 이 주(州)는 설악산에다

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절 종[奴]이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땅에 묻고 도망하여 조정에 고하였다.

침입군이 물러간 후에 사람을 보내 가져다가 내전(內殿)에 간수하였다. 세상에 전해 오기로는, '사람이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배례하면 청조(靑鳥)가 나타난다.' 하였다. 명종(明宗) 정사년에, 유자량(庾資諒)이 병마사가

되어 시월에 굴 앞에 와서 분향 배례하였더니, 청조가 꽃을 물고 날아와서 복두(幞頭) 위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

는데, 세상에서는 드물게 있는 일이라 한다." 하였다.

 

○ 고려 유자량의 시에, "바다 벼랑 지극히 높은 곳, 그 가운데 낙가봉(洛迦峯)이 있다. 큰 성인은 머물러도 머문

것이 아니고, 넓은 문은 봉해도 봉한 것이 아니다. 명주(明珠)는 내가 욕심내는 것 아니며,

청조는 이 사람이 만나는 것일세. 다만 원하노니 큰 물결 위에서, 친히 만월 같은 모습 뵈옵는 것을." 하였다.

 

○ 안축의 시에, "대성의 원통(圓通)한 지경은, 일찍이 바다 위 봉우리라 들었네. 불은(佛恩)은 감로와 같이 젖고,

향은 자니(紫泥)로 봉한 것이 있다.주D-014 유(類)에 따라서 몸은 항상 나타났으나, 미혹에 잠겨서 눈으로 만나

지 못한 것일세. 참인가 거짓인가는 말할 것 없고, 다만 자애스런 모습에 배례할 뿐일세." 하였다.

 

○ 김부의(金富儀)의 시에, "한번 해안 높은 곳에 등림하고서는, 머리를 돌리니 티끌 근심 없어졌노라.

대성의 원통한 이치를 알고자 하면, 성낸 물결이 산 밑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것일세."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다행히 묘경(妙境)을 찾아 떠돌던 몸을 머무르니, 생각이 맑아지고 보는 것이 그윽하여 만

가지 상념(想念)이 없어진다. 물결 밑의 달은 누가 위아래를 분간하리, 봉우리 끝 구름은 저절로 서동(西東)을

차지한다. 금당(金堂) 속 가짜 상을 잠깐 보았을 제, 석굴(石窟) 속 참몸을 벌써 보았노라. 대사를 도와 7일재함

을 기다리지 않아도, 그의 마음은 원에 응해 먼저 통했으리라." 하였다.

 

관음굴(觀音窟) : 오봉산 밑에 있다.

○ 우리 익조(翼祖)께서 정숙왕후(貞淑王后)와 함께 여기에 와서 후사를 점지하도록 기원하였다.

어느 날 밤 꿈에, 가사(袈裟)를 걸친 중이 와서 알리기를,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며 이름은 선래(善來)다."

하였다. 얼마를 지나서 도조(度祖)를 낳으므로 드디어 선래라 이름하였다.

 

영혈사(靈穴寺)ㆍ사옹사(四擁寺) : 모두 설악산에 있다. 도적사(道寂寺) : 정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부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성 안에 있다.

동해신사(東海神祠) : 부 동쪽에 있다. 봄가을 나라에서 향축을 보내 치제한다. 여단 : 부 북쪽에 있다.

 

고적 권금성(權金城) : 설악산 꼭대기에 있으며 석축이다. 둘레는 1천 1백 12척이고 높이는 4척이었는데,

지금은 반쯤 무너졌다. 세상에 전해 오기로는, "예전에 권씨 김씨 두 집이 여기에 피란한 까닭으로 이름하였다."

한다. 낙산사 기문에, "원 나라 군사가 우리 강토에 마구 들어왔는데 이 고을에서는 설악산에다 성을 쌓아서

방어하였다." 한 곳이 이곳인 듯하다. 냉천(冷泉) : 오봉산 밑에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관음보살이 계집으로 화해서 벼를 베고 있었는데,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냉천 물을 마시면서 함께 장난을 하였다." 한다.

 

○ 정추의 시에, 바닷가 산이 밝은 세상 되기 전부터 왔는데, 금년까지 몇 번이나 흥망을 보았나. 가을빛이 온

들에 젖어 붉은 벼가 수북하고, 해가 오봉산에 비쳐서 붉은 연기 오른다. 덕녀(德女)의 옛터엔 잔디가 섬돌을

덮었고, 원효의 남긴 자리에는 나무가 하늘에 닿았다. 누에 올라 상사(相思) 꿈을 맺고자 한다면, 꿈속에도

응당 냉천을 잔질하리라." 하였다.

 

오색역(五色驛) : 부 서쪽 45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명환고려 최재(崔宰) : 지주(知州)로 있을 때에 강향사(降香使)주D-015가 와서 존무사를 능욕하니,

최재가 말하기를, "장차 나에게도 미치겠다." 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갔다.

 

김훤(金晅) : 노경륜(盧景綸)에게 미움받아 양주부사(襄州副使)로 좌천되었다.

본조 이사원(李師元) : 부사가 되었다.

 

제영 붕새의 길 아득하게 북쪽 바다에 연했다 : 김극기의 시에, "일찍이 말고삐를 멈추고 잠깐 머뭇거렸는데,

말을 달려서 다시 찾으니 경치가 더욱 새롭구나. 붕새의 길은 아득하게 북쪽 바다에 연했고, 가자미 지경[鰈墟

우리나라]은 멀리 동쪽 바닷가와 접해 있다. 물결 사이의 그럴듯한 것은 냉천을 엿보는 나그네요,

물 밑의 희미한 것은 바다를 보는 사람이네. 내 돛을 올려서 큰 구렁을 넘고자 하나,

물 귀신[天吳]이 성내니 어떻게 하리." 하였다.

 

산성의 달은 단풍나무 위에 가리웠다 : 앞사람의 시에, "변방을 사열하노라 수레가 몇 번이나 돌았던가.

만 가지 풍경이 시를 따라 새롭다. 산성의 달은 단풍나무 위에 가리웠고, 물가 정자는 구름이 마름가에 드리웠다.

축대 밑에는 비록 무협선녀(巫峽仙女)주D-016가 없으나, 골 안에는 응당 무릉(武陵) 사람이 있으리라.

길이 바빠서 선경(仙境)을 찾지 못하고,주D-17 걸음마다 머리 돌리며 마음 슬퍼한다." 하였다.

 

산에 의지한 누관은 병 속의 세상일세 : 정추의 시에, "산에 의지한 누관은 병 속의 세상이요,

물을 이웃한 여염은 그림 속 연기로다." 하였다.

 

옥피리 소리 멀리 삼신산 달 아래에 들려오다 : 채련(蔡璉)의 시에, "옥피리 소리 멀리 삼신산 달 아래에서 들려

오고, 나는 수레는 학등의 하늘에 오를 만하다." 하였다.

 

큰 들녘 동쪽 끝에 바다 해를 보고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큰 들녘 동쪽 끝에 바다 해를 보고,

긴 숲 일면에 강 하늘이 보인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정종(正宗) 7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6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부남면(府南面) : 끝이 8리. 부내(府內) : 끝이 20리. 위산(位山) : 서쪽으로 끝이 13리.

서면(西面) : 서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70리. 동면(東面) : 끝은 15리. 남면(南面) :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사현(沙峴)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강선(降仙) :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5리.

도문(道門) :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소천(所川) : 서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35리.

현북(縣北) : 남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50리. 현남(縣南) : 남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70리이다.

 

성지 설악산고성(雪岳山古城) : 산 정상에 있으며 권금성(權金城)이라고 하며 토토성(土土城)이라고도 하는데

둘레는 2천 1백 12척이다.

오봉산고성(五峯山古城) : 흙으로 쌓았는데, 홍예석(虹霓石) 문(門)이 있다. 낙산사(洛山寺)는 그 중간에 있다.

 

진보혁폐 대포진(大浦鎭) : 동쪽으로 12리에 있다. 성종(成宗) 21년에 강릉(江陵) 안인포(安仁浦)로 옮기고 만

호(萬戶)를 두었다. 중종(中宗) 15년에 성을 쌓았으며, 둘레가 1천 4백 69척이었는데 후에 고쳤다.

 

청초호(靑草湖) : 고려 때 만호를 두어 정박하는 병선을 관리하였다.

창고 동창(東倉) : 동쪽 해변(海邊)에 있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동산창(洞山倉) : 동산(洞山)에 있으며 옛 현이다.

진도 남강진(南江津) : 남쪽으로 2리에 있다.

토산 삼[麻]ㆍ전죽(箭竹).

 

○ 황장봉산(黃腸封山) : 두 곳이 있다.

누정 태평루(太平樓) : 읍내에 있다. 취산루(醉山樓).

단유 동해신단(東海神檀) : 동쪽으로 13리에 있는데, 고려 때는 동해(東海)이므로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주 D-001] 맹호연(孟浩然)은 공연히 나귀 등에서 시구를 읊조렸고,

산공(山公)은 오히려 습지(習池)의 자리를 비웠다. : 중국 진(晉) 나라 때 산간(山簡)이라는 사람이 양양에 살았

는데, 매일 습가지(習家池)라는 연못가에서 술을 마셔서 크게 취해 있었다 한다.

여기에 먼저 말탄 맹호연과 산간은 모두 중국 호북성 양양 사람이므로 이곳 양양의 이름이 같은 것을 이용하여

그런 고사를 쓴 것이다.

[주 D-002] 은지(隱之)야, 탐천(貪泉)을 마신들 무엇이 해로우리. : 중국 진(晉) 나라 사람 오은지(吳隱之)라는

사람이다. 그는 광주(廣州)에 자사로 갔을 적에 그곳에 탐천이라는 샘이 있는데, 그 샘물을 마시면 누구나 재물

욕심을 일으키게 된다 하므로 오은지는 그 물을 일부러 마시고 청렴한 지조가 더하였으므로, 뒷사람들이 그 샘

이름을 염천(廉泉)이라고 고쳤다 한다.

[주 D-003] 거문고 복판엔 따뜻하게 옥전(玉田) 연기가 난다. : 중국에 남전(藍田)이란 지방이 있는데,

예전에 옹백(雍佰)이란 사람이 그 땅에다 옥을 심어서 가을에 많이 수확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당 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비파(琵琶)시에, “남전에 날이 따뜻하니 옥에서 연기가 나고.”란 구가

있다.

[주 D-04] 한가하니 병 속 세월을 즐길 만하고, 막힘은 독 속 천지가 싫다. : 술은 병에 담는 것이므로 병 속에

세월이라 함은 술마시는 것을 말하며, 독 속의 천지[瓮裏天]도 역시 술을 말하는 것이다.

[주 D-05] 짧은 두레박줄로 깊은 샘물 길음 부끄럽다. : 짧은 두레박줄로 깊은 우물을 긷는다는 말은 작은 재주

로 큰일을 하려는 데 대해 조롱하는 말이다.

[주 D-006] 범공(范公) : 한 나라 때의 범방(范滂)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암행어사로 떠나갈 때에 개연히 온 세상을 맑고 깨끗하게 할 뜻이 있었다 한다.

[주 D-07] 현산관도(峴山官道) : 앞서 삼척(三陟) 조에 보이는 와현(瓦峴) 위에 있는 소공대(召公臺)을 말함

이다.

[주 D-08] 화악어로(華岳御爐) : 화악(華岳)은 삼각산(三角山)을 말한다.

그러므로 화악의 연기라 함은 삼각산 밑 서울의 임금있는 대궐 연기라는 말이다.

[주 D-009] 금포화극(金鋪畫戟) : 금을 펴고 그림 그린 창 세운 문[金鋪畫戟門]이라 함은 관찰사의 관청을

말하는 것이다.

[주 D-010] 우물 밑 어느 사람이 망령되게 스스로 높은 체하나. : 우울 안 개구리란 말이다.

[주 D-011] 달존(達尊) : 맹자가 한 말에, “세상에 세 가지 높은 지위[達尊]가 있으니, 동리에서는 나이 만한

것이 없고, 조정에서는 벼슬 같은 것이 없고, 세상을 돕고 백성을 교화하는 데에는 덕(德) 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주 D-012] 주살[弋] : 익(弋)이라 함은 화살을 가는 줄로 매어서 쏘는 것이니,

가는 살을 찾기 쉽게 하려고 줄을 맨 것이다.

[주 D-013] 운몽(雲夢) : 중국 양자강 남북에 있는 호수라 하는데, 그 호수가 모두 8, 9개가 된다 한다.

그러나 실상 있는 것은 아니다.

[주 D-014] 향은 자니(紫泥)로 봉한 것이 있다. : 예전에는 서신을 보내거나 물건을 보낼 때 중간에 떼어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 봉한 데에다 진흙을 붙이고 그 위에다 인을 찍었다. 그것을 봉니라 한다.

[주 D-015] 강향사(降香使) : 양양 낙산사는 왕실의 신앙이 컸으므로 매년 향을 보내서 치성드리는데,

그 향을 가지고 가는 사람을 강향사라 한다.

[주 D-016] 무협선녀(巫峽仙女) : 중국 호북성 양자강 가에 있는 무산(巫山)에 신녀(神女)가 있어,

옛날 초양왕(楚襄王)의 꿈에 와서 통정하였다 한다.

[주 D-17] 길이 바빠서 선경(仙境)을 찾지 못하고, : 도화원이 이 무릉 고을 안에 있다 한다.

 

 

45권 평해군 平海郡

 

동쪽은 바닷가까지 7리, 남쪽은 경상도 영해부(寧海府) 경계까지 24리, 서쪽도 같은 부의 수비부곡(首比部曲)

경계까지 51리, 북쪽은 울진현(蔚珍縣) 경계까지 38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백 71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근을어(斤乙於)인데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을 삼았다.

현종(顯宗) 때에 예주(禮州)에 소속시키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 때 고을 사람 황서

(黃瑞)가 왕을 따라 원(元) 나라에 들어가서, 왕을 호위하여 받든 공이 있었으므로 승격하여 군(郡)으로 하였는

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한 사람.

군명 근을어ㆍ기성(箕城).

 

성씨본군 황ㆍ손ㆍ방(房)ㆍ영(永)ㆍ구(丘)ㆍ섭(葉)ㆍ하(河)ㆍ신(申)ㆍ김 : 모두 촌성(村姓).

김ㆍ이ㆍ박ㆍ정(鄭) : 모두 속(續).

 

형승 동남쪽은 바다에 의지하고, 서북쪽은 산을 등졌다 : 유의손(柳義孫)의 풍월루(風月樓) 기문에, "동남쪽은

바다에 의지하고, 서북쪽은 산을 등졌다." 하였다.

 

산천 부곡산(釜谷山) : 고을 서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금장산(金莊山) : 고을 서쪽 32리에 있다.

백암산(白岩山) : 고을 서쪽 29리에 있다. 후리산(厚里山) : 고을 남쪽 11리에 있다.

표산(表山) : 고을 북쪽 18리에 있다. 사동산(沙銅山) : 고을 북쪽 34리에 있다.

신래봉(辛來峯) : 고을 서쪽 6리에 있다. 구질리현(仇叱里峴) : 고을 서쪽 41리에 있다.

대현(大峴) : 고을 서쪽 18리에 있다. 바다 : 고을 동쪽 7리에 있다.

선연(仙淵) : 고을 서쪽 35리에 있는데 가물면 이곳에서 비를 빈다. 온천 : 고을 서쪽 26리,

백암산(白岩山) 아래 소태곡(所台谷)에 있다. 구며포(仇㫆浦) : 고을 북쪽 13리에 있다.

정명포(正明浦) : 고을 북쪽 24리에 있다. 후리포(厚里浦)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 이상 세 포구에는 척후소(斥候所)가 있다.

 

남대천(南大川) :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근원이 백암산 남쪽 기슭에서 나와, 고을 동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

간다.

 

토산 죽전(竹箭) : 고을 동남쪽 산에서 나온다. 방어ㆍ광어ㆍ문어ㆍ대구ㆍ송어ㆍ적어(赤魚)ㆍ고등어[古刀魚]ㆍ

연어(鰱魚)ㆍ황어(黃魚)ㆍ도루묵[銀口魚]ㆍ삼치[麻魚]ㆍ복어ㆍ홍합ㆍ회세합(回細蛤)ㆍ자해(紫蟹)ㆍ해삼ㆍ

미역ㆍ김[海衣]ㆍ물개[海獺]ㆍ꿀ㆍ송이ㆍ석이ㆍ자초(紫草)ㆍ인삼ㆍ지황ㆍ복령ㆍ백화사(白花蛇).

 

성곽 읍성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천 3백 25척이고, 높이 9척이다. 성 안에 우물 여섯 곳이 있고, 군량 창고가

있다.

관방 월송포영(越松浦營) : 고을 동쪽 7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이 있다.

 

봉수 후리산 봉수(厚里山烽燧) : 남쪽은 경상도 영해부(寧海府) 대소산(大所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표산(表山)

에 응한다. 표산 봉수 : 북쪽은 사동산(沙銅山)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후리산에 응한다.

 

사동산 봉수 : 북쪽은 울진현(蔚珍縣) 전반인산(全反仁山)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표산에 응한다.

 

누정 풍월루(風月樓) : 객사 북쪽에 있다. 유의손(柳義孫)의 기문이 있다. 봉서루(鳳栖樓) : 객사 동쪽에 있다.

월송정(越松亭) : 고을 동쪽 7리에 있다. 푸른 소나무가 만 그루이고, 흰 모래는 눈같다. 소나무 사이에는 개미

도 다니지 않으며, 새들도 집을 짓지 않는다. 민간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신라 때 신선 술랑(述郞) 등이 여기

서 놀고 쉬었다." 한다.

 

○ 안축(安軸)의 시에, "일은 지나가고 사람은 옛사람 아닌데 물만 스스로 동쪽으로 흐르고 천년전 남긴 자취

정자 소나무에 있네. 겨우사리[女蘿] 다정한 듯 서로 엉켰으니 아교풀로 붙인 듯 풀기 어렵고, 형제죽(兄弟竹)

이 마음으로 친하니 좁쌀 방아찧을 것이, 어느 선랑(仙郞)이 있어 함께 학을 구울까, 초부(樵夫)의 도끼로 용

잡는 것 배우게 하지 말라. 머리털 절반이나 희어, 예전 놀던 곳 찾으니, 푸르른 옛날 모습 불현듯 부럽구나."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가을 바람에 옛 자취 찾아 말머리 동쪽으로 돌리니, 울창한 정자 소나무 좋기도 하구나.

몇 해 동안이나 이 마음은 신선 지경 찾으려 했나, 천리 먼 길에 길 떠나려 양식을 방아찧었네. 도끼의 액운이

없었으니 한위(漢魏)를 지났고, 재목은 큰 집[廓廟] 지을 수 있으니 기룡(蘷龍 기ㆍ용은 순임금의 어진 신하)에

도 비기겠네. 난간을 의지하여 침음(沈吟)하기 절로 오래인데, 졸렬한 붓으로 만분의 일도 형용하기 어렵다."

하였다.

신증 예전에는 집이 없었는데 관찰사 박원종(朴元宗)이 처음으로 지었다. 망사정(望槎亭) : 고을 남쪽에 있다.

 

○ 안축(安軸)의 시에, "단청 빛 공중에 떠서 물 속에 비치는데, 올라와 구경하며 한 번 바라보니,

속정(俗情) 씻어지네. 비 개인 푸른 수림엔 꾀꼬리 소리 나고, 바람 잔잔한 푸른 물결엔 흰 갈매기들 즐기네.

8월의 신선 배는 은하수를 가는 듯주D-001, 백 년의 오랜 생선 가게는 앞 수풀 건너 있네. 이 강산을 만고에

알아볼 이 없어서 하늘이 깊이 감추어 오늘을 기다렸다네." 하였다.

 

망양정(望洋亭) : 고을 북쪽 40리에 있는데 동쪽은 큰 바다에 임하였다.

○ 정추(鄭樞)의 시에, "망양정 위에 한참동안 서 있으니, 늦은 봄이 가을 같아서 마음 더욱 아득해지네.

아무래도 바다 가운데 바람과 안개 나쁜 모양이지, 전나무ㆍ소나무 동쪽 향한 가지는 자라지 못했네.

 

○ 일만 골짜기 일천 바위가 잇따라 놓였는데, 산을 따라 돌아가고 산을 따라 왔다네. 구름이 큰 물결에서 나니

하늘을 다 감쌌고, 바람은 놀란 물결을 보내어 언덕을 치고 돌아오네." 하였다.

 

○ 채수(蔡壽)의 기문에, "이 정자는 여덟 기둥으로 둘렀는데 기와는 옛 것을 쓰고, 재목도 새로운 것을 쓰지

않았다. 웅장하고 화려하지는 못하지만, 풍경 물색의 기이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정자의 조금 북쪽을 둘러 8칸

을 지으니 이름을 영휘원(迎暉院)이라 한다. 벼랑을 따라 내려가면 또, 한 돌이 우뚝 솟아 그 위에 7, 8명은 앉을

만하며 그 아래는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 이름을 임의대(臨漪臺)라 한다.

북쪽을 바라보면 백 보쯤 밖에 위험한 사다리가 구름을 의지하여 그 위로 사람이 가는 것이 공중에 있는 것같으

니 이름을 조도잔(鳥道棧)이라 하는데, 지나는 모든 사람들의 유람 관광하는 즐거움이 이 이상 없다.

바람 자고 물결 고요하며 구름 걷고 비 갤 때에, 눈을 들어 한 번 바라보면 동쪽이 동쪽이 아니요, 남쪽이 남쪽이

아닌데 신기루(蜃氣樓)는 보이다 말다 하고, 섬들은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 가다가 큰 물결이 거세게 부딪치고,

고래가 물을 내뿜으면 은은하고도 시끄러운 소리에 하늘이 부딪치고 땅이 터지는 것같으며, 흰 수레가 바람 속

을 달리고 은산(銀山)이 언덕에 부서지는 것같다. 가까이 가서 보면 고운 모래가 희게 펼쳐지고 해당화는 붉게

번득이는데, 고기들은 떼지어 물결 사이에서 희롱하고 향백(香柏)은 덩굴 뻗어 돌 틈에 났다. 옷깃을 헤치고 한

번 오르면 유유히 드넓은 기운과 짝하여 놀아도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며, 널리 조물주와 함께 하여 그 끝을 알

지 못하는 것같다. 여기서 비로소 이 정자가 기이하고, 하늘과 땅이 크고 또 넓은 줄을 알게 된다.

아, 우리나라에서 봉래(蓬萊)ㆍ영주(瀛洲)를 산수의 고장이라 하지만 그중에도 관동(關東) 지방이 제일이 되며,

관동지방의 누대(樓臺)가 수 없이 많지만 이 정자가 제일 으뜸이 된다. 이는 하늘도 감추지 못하고 땅도 숨기지

못하니, 모습을 드러내어 바쳐서 사람에게 기쁨을 줌이 많다. 어찌 이 고을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이를 적어서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학교 향교 :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달효역(達孝驛) : 고을 동쪽 5리에 있다. 평등원(平等院) : 고을 남쪽 13리에 있다.

다시원(多施院) : 고을 서쪽 45리에 있다. 망양원(望洋院) : 고을 북쪽 42리에 있다.

불우 백암사(白岩寺)ㆍ선암사(禪菴寺) : 모두 백암산에 있다.

수진사(修眞寺) : 동팔리산(動八里山)에 있다. 심수사(深水寺) : 다호천산(多乎川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寺) : 성 안 동쪽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백암산 고성(白岩山古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5백 60척이요, 높이 3척이며 안에 우물 세 곳이 있다.

 

명환고려 김을권(金乙權) : 군수가 되었는데, 고을이 왜구로 인하여 인물(人物)이 흩어져 없어진 것을 을권이

남은 백성들은 안주시키고 토성을 쌓아서 도적을 대비하였다. 이에 힙입어 읍 사람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

는데 지금껏 어질다고 칭송한다.

 

인물고려 황서(黃瑞) : 충렬왕 때에 왕을 보호하여 받든 공으로 여러 번 벼슬이 승진하여 첨의평리(僉議評理)

까지 되었다.

본조 황희석(黃希碩) : 태조조의 개국공신이며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황현(黃鉉) : 경서에 밝고 행동이 법도 있어, 세상의 사표가 되었다. 벼슬이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손순효(孫舜孝) : 두 번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이 의정부 찬성에 이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성질이 소탕

하고 세상일을 멀리 하였으며 칠휴거사(七休居士)라고 자호하였다.

 

효자본조 이윤(李閏) : 부친 상사를 만나 3년 동안 시묘 살았으며 효성이 남달리 뛰어났다. 사실이 알려지니

정문을 세웠다.

 

제영 성곽을 두른 긴 시내는 고향 마을 같네 : 신천(辛蕆)의 시에, "어지럽게 붉은 것과, 진하게 푸른 것이 마을

마다 덮었는데, 평평한 풀밭 비온 뒤의 들판을 말가는 대로 지나네. 성곽을 두른 긴 시내는 고향 마을 같은데,

산을 의지한 대숲은 누구의 동산인가. 벼슬길 나보다 먼저 채찍을 대는 것 몇 번이나 보았는고, 객지에 다니는

몸 자리가 따스할 겨를 없는 것 부끄럽네. 다행히도 한가한 여가를 얻어 대낮에 베개를 베었는데, 수풀을 격하

여 수없는 자고(鷓鴣)새 울어 떠드네." 하였다.

 

하늘 나직하니 수면(水面)이 평평하구나 : 안축(安軸)의 시에, "공관(公舘)이 하도 답답하여, 옷을 걷고 뒷 정자

로 올라갔네. 성긴 발엔 바람 따라 제비가 춤을 추고, 높은 나무엔 이슬 먹은 매미의 소리 나네. 땅이 오래되어

마을 모습이 늙었고, 하늘이 나직하니 수면이 평평하구나. 시내와 산이 모두 예전 보던 모습이라, 내가 지난해

지나던 일 생각나누나." 하였다.

 

바다의 뗏목을 멀리 바라보니 은하수에 통하고 :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소나무 그늘 다 지나서야 마을이 보이

는데, 푸르고 푸른 보리 평원에 가득했네. 바다의 뗏목을 멀리 바라보니 은하수에 통하고, 산의 나무 해가 오래

니 칠원(漆園)주D-002에게 물으려네. 서쪽 산기슭에서 구름을 보니 붙은 데 없고, 동쪽창에서 해를 마시니 남은

온기가 있네. 매년 이 고을에서는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우나, 강릉 울진의 비틀며 다투고 송사하는 것 괴롭고

싫었노라." 하였다.

 

기이한 풍경 좌우쪽에 보는 것마다 평원이로세 : 이곡(李穀)의 시에, "강 위의 인가 대숲 밖 마을에, 기이한 풍경

좌우쪽에 보는 곳마다 평원이로세. 거듭 찾아오니 백발 친한 친구 놀라게 하고, 두어 점 청산은 옛 동산을 격해

있네. 성이 넓은 바다를 꼈으니 바람 자못 사납고, 땅이 해뜨는 곳에 접하였으니 기운이 항상 따스하구나.

우연히 쓴 시구를 지워버림이 마땅하니 어찌 여러 사람의 입에 흘러 전하기를 바랄 것이랴." 하였다.

 

먼 멧부리는 비가 씻어 푸르네 : 정추(鄭樞)의 시에, "발을 걷으니 들빛이 들어오고, 책상에 의지하니 솔바람 소리

들리네. 늙은 나무는 연기가 엉겨 붉고, 먼 멧부리 비에 씻겨 푸르네." 하였다.

 

팔영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해당안(海棠岸) : 금 자라 이고 있는 산 겹겹하여, 두 언덕을 끼고 달리니 푸른 용

서렸는 듯, 하룻밤 사이 좋은 바람 솔솔 부니, 해당화 여기저기 피어 붉게도 얽혔네. 뉘 집의 멋진 놀이인고,

준마(駿馬)가 울음 우는데, 떨어진 꽃 흩어져 거센 말발굽에 번득이네. 자고(鷓鴣)새 날아오다가 놀라지도 않고

날 저문데 다시 나뭇가지에 올라 우누나.

 

신증 성현의 시에, "긴 뚝이 은은하여 바닷가에 임했는데, 밝은 모래 흰 물결 서로 삼키고 뱉네. 해당화 수없이

땅을 덮어 피었는데, 말발굽이 차고 밟아 붉은 비 뿌리누나. 붉게 나부끼는 일만 점 끝이 없이 날아가니,

맑은 향기 은은하여 돌아가는 길손을 의심하게 하네. 어찌하면 옮겨다 집 처마 아래 두고, 오래오래 서로 대하여

함께 취하여 줄꼬." 하였다.

 

○ 민수천(閔壽千)의 시에, "남쪽으로 달리는 산곡이 검푸르기도 한데, 높은 난간 바로 아래서는 고기와 용이

떠드누나. 언덕에 가득 밝은 모래는 한 눈이 넘치는데, 붉은 아지랑이 눈을 가리워 어른어른거리누나.

좋은 바람 불어오는데 말은 자주 울더니, 10리 되는 비단 병풍에 옥발굽 자국났다. 연지 언덕[臙肢坡]으로 잘못

알까 염려함인지, 산새들 종일토록 나뭇가지에서 우네." 하였다.

 

월송정(越松亭) : 평사(平沙) 10리나 흰 담요 깔았는데, 장송(長松)이 하늘에 닿아 옥창끝[甁]도 가늘구나.

쳐다보니 밝은 달은 황금 떡과도 같은데, 푸른 하늘 물같아 넓기도 하구나. 객이 와서 1년마다 퉁소를 부니,

풍류는 모두 신선(神仙) 무리이네. 내가 따라가 요지(瑤池)에 장치 하려하니, 날아오는 푸른 새가 입에 벽도

(碧桃)주D-003를 물었네.

신증 성현의 시에, "백사장 주변 길에 푸른 솔 둘렀으니, 신령한 바람소리 10리에 찬 바람이 나네. 용의 수염,

무쇠 가지가 울창하게 가리웠으니 검은 기운 하늘을 막아 그늘도 넓고 넓네. 달빛이 그 그늘 뚫어 절반쯤 어둡

고 밝은데, 일만 가지 황금이 부서진다. 가다가 신선들 퉁소 불면, 안개 옷깃 펄렁 펄렁, 옥패 소리 들린다네."

하였다.

 

조도잔(鳥道棧) : "푸른 벼랑 일만 길이 바다 언덕에 임했는데, 새도 날아 지나지 못하고, 푸른 하늘 나직하네.

얽힌 외나무 사다리가 가늘기 실같은데, 붉은 사다리 열두 층계를 부여잡고 오른다네. 지나는 사람 발을 헛딛

고 말은 자주 엎어지니, 위태롭기 염여(灩澦)보다 위태롭고 높기는 태항산(太行山)보다 높네주D-04.

벼슬길에도 엎어지는 수레 많은 것이, 인간 가는 곳마다 양장(羊腸)같이 굽은 길 아닌 곳 없다네."

 

신증 성현의 시에, "푸른 산 바다에 꺼꾸러져 높은 멧부리 되었는데, 벼랑에 두른 구름사다리 양장(羊腸)처럼

서렸네. 새도 날아 지나지 못하고 원숭이조차 걱정하니, 맹문과 왕옥[孟門王屋]이 태항산에 잇따랐네.주D-05

이끼 낀 돌층계 기어올라 두 다리를 걷고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술잔 만하구나. 삼성(參星)을 만져보고 정성

(井星)을 지난다는 적선옹(謫仙翁 이태백)은 일생에 아는 것주D-06, 금성락(錦城樂)뿐이었네주D-07" 하였다.

 

○민수천(閔壽千)의 시에, "누가 저 위험한 나무사다리로 바다 언덕을 둘렀나, 한 번 오르니 땅은 보이지 않고

하늘만 나직하구나. 다리뼈가 시고 저린데 눈은 아찔한 것이, 온종일 울퉁불퉁한 돌 위에서 개미 기어오르듯

하네. 내 평생 어느 곳에서 자빠지고 엎어지는 것 알았으랴. 큰 거리에 마음껏 말을 나란히 달렸었네.

본래는 성질을 참는 것이 답답한데, 험한 길 지나보니 마음이 참아지는 것 기쁘구나." 하였다.

 

경파해(鯨波海) : "천지간 큰 것 중에 바다가 제일 되니, 그 둘레가 가없고 또 그 바깥도 없다네. 그래서 바다를

한 번 보면 다른 물은 물도 아니니 사해(四海)가 이다지도 크니, 내 눈도 커졌네.

내 한 번 시험삼아 단구(丹丘 신선 사는 곳)까지 가서, 삼도(三島 삼신산)를 내려다 보고 십주(十洲)를 희롱하

려네. 만일에 뽕나무 밭에 선수 한번 들어오면, 그대 나를 위하여 산가지 하나 더 놓아주소."주D-08신증 성현의

시에, "동쪽 바다 까마득 끝간 데가 없는데, 위의 구름 아래 물 한 빛 되었네. 큰 고래 갈기를 흔들며 솟아 올라

춤추니, 공중에 가득한 물결 눈꽃인 양 희구나. 구슬 누대 층층한 집에 신광(蜃光)이 퍼지니, 세 봉우리 삼신산

이 나왔다 없어졌다 털끝같기도 하네. 긴 바람 따라 큰 물결 헤치고, 가벼운 돛 일만 리에 부상(扶桑)까지 가

볼거나주D-09." 하였다.

 

임의대(臨漪臺) : "대 높게도 섰는데, 교룡은 깊이 잠들고 고래는 물결 일으키지 않네. 부상이 바로 지척,

아침해 붉게 떠오르는데, 금물결 뛰놀아 맑은 안개 자욱하네. 구름 사이에 어른어른 신선 사는 섬이 보이는데,

구슬나무 구슬꽃에 구슬 풀이 자랐네. 일찍이 들으니 대추가 참외만 하다는데, 안기생(安期生 신선의 이름)을

찾아가 놀아보기나 할거나."

신증 성현(成俔)의 시에, "망양정 앞 일천 척 되는 대(臺)에, 용이 당기고 호랑이 움키는 듯 푸르게 솟았네.

나고 들고 어지러운 돌들 바닷가에 꽂혔으니, 물결이 일만 길은 솟으매 눈 무더기 날리네.

안기생 연문자(羨門子)가 어데쯤 있나, 자라 멧부리가 단구(丹丘) 섬에 어른거리네. 아마도 구슬풀 향기 자욱하

리니, 맑은 바람 타고서 돌아가려 하노라." 하였다.

 

○ 민수천(閔壽千)의 시에, "하늘 도끼로 무쇠를 깎아낸 듯 높기도 한데, 천 년 동안 일없이 경파해(鯨波海)에

임했네. 아침엔 흰수레 꺽어지고, 저녁엔 은산이 부서지는 것이, 선관(仙官)을 불러다 연하(煙霞) 음식 준비했

다네. 나를 맞아 구경하며 구슬섬 바라보니, 저 아래 부상 꺾기를 풀 줍는 것같이 하네. 십주(十洲)의 좋은 광경

오랫동안 아껴 오던 것을 반 돛의 맑은 바람 따라 내가 모두 찾으려네." 하였다.

 

망사정(望槎亭) : 망사정 위는 신선의 집인데, 망사정 아래는 어룡(魚龍)의 물결이네. 은하수 한 줄기 넓은 바다

에 닿아 있는데, 저 멀리 가을바람 따라 견우성까지 간다네. 한 번 박망후(博望候 장건(張騫))가 신령한 근원

찾은 후로, 지금까지 내왕하는 이들 모두가 신선이라네. 돌아올 때 나에게 베틀 괴는 돌[支機石]을 빌려주소,

주D-10내가 그 돌 갈아서 푸른 하늘 수리하려 하네.주D-11"

신증 성현(成俔)의 시에, "박망후의 신선 뗏목, 하늘 위의 나그네라, 그 손에 베틀 괴는 돌 가지고 왔다네.

그 당시 객성(客星)이 자미성(紫微星)을 침범하였는데,주D-12 그 후엔 은하수 멀리 떨어져 있었다네.

정자가 동해에 임하여 까마득하게 가이없는데, 큰 물결 번쩍번쩍, 공중에 꽃이 번득이네. 신령한 근원 찾아

은하물가에 이르면, 아름다운 손으로 비단 빨고 있으리.주D-13" 하였다.

 

통제암(通濟菴) : 매달린 절벽 일백 길, 무쇠를 깎은 것 같은데, 그 위에 황금 빛 보찰(寶刹)이 있네.

10홀(笏 열채) 선방(禪房)이 깊고 또 깊은데, 소나무 바람 일만 골짜기에 갠 날도 눈이 뿌리는 듯, 한 점의 세상

티끌도 여기는 날아오지 못하는 것이, 속객(俗客)은 자취를 볼 수 없었다네. 짚신과 대지팡이로 들어가려 하니,

흰구름 땅에 가득, 바다와 산이 아득하네. 신증 성현의 시에, "층층한 멧부리 높이 솟고 푸른 아지랑이 떠도는데,

절로 가는 외길이 소나무 전나무 수풀을 뚫고 들어가네. 광채 영롱한 절간이 공중에 서있는데, 금부처는 말없이

깊은 감실[龕]을 의지했네. 번망한 세상일은 파초잎 언덕 속의 사슴이니,주D-14 홍진(紅塵)을 헤치고 백족

(白足) 중발(中鉢)을 찾으려네. 짚신과 대지팡이로 먼 곳을 마다하리, 세 사람 웃으며 서로 따라 호계(虎溪)

굽이를 지나리.주D-15" 하였다.

 

탕목정(湯沐井) : "여섯 자라 힘도 세어 산을 높이 들었는데, 아홉 용이 우물을 보호하며 신령한 수원 통해서라.

더운 샘물 따스하여 훈훈하기 봄같은데, 귀신이 호위하는 듯, 띠끌 기운 없구나. 듣는 말엔 한 줌으로 오랜 병이

낫고, 두 겨드랑으로 풍기면 뼈도 신선이 된다네. 이내 몸 지금 시와 술이 고질 되었으니, 한 번 가서 쾌히 씻으

려네."

신증 성현의 시에, "옥 구멍의 음화(陰火)가 불 때는 것 같은데, 아홉 용이 엄하게 지키며 신령한 수원 열어 놓

았네. 뭉게뭉게 연기ㆍ안개가 바위 굽이에 퍼지는데, 한 줄기 샘물 푸른 산 밑에서 끓어 오르네.

훈훈한 더운 기운, 술에 취하는 것 같은데, 가마솥에 섶으로 불땔 필요 없네. 몸을 씻는데 기이한 공 있으니,

탕반(湯盤)에서만 티끌 때를 벗는 것이 아니라네." 하였다.

 

[비고]

 

방면 상리면(上里面) : 끝이 7리. 하리(下里) : 끝이 10리. 남서(南西) :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근서(近西) : 처음은 15리, 끝은 25리. 원서(遠西) : 처음은 25리, 끝은 50리.

근북(近北) : 처음은 10리, 끝은 30리.

원북(遠北) : 처음은 20리, 끝은 40리.

성지 읍성(邑城) : 둘레가 2천 3백 25척이고 우물이 여섯이다.

○ 고려 때 서울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사람들이 산산이 흩어졌으나 지군사(知郡事) 김을권(金乙權)과 안집

(安集)이 남아 있는 백성들과 토성을 쌓아 왜구의 침입을 막았다.

 

백암산고성(白岩山古城) : 둘레가 2천 5백 60척 우물은 3개. 고성(姑城)ㆍ오태봉성(吾台峯城).

창고 서창(西倉) : 근서면(近西面)에 있다.

 

누정 망학루(望鶴樓)ㆍ오월루(梧月樓)ㆍ환월루(喚月樓). 월송정(越松亭) : 월송진(越松鎭)에 있으며 푸른 솔이

만 그루나 있으며 모래가 10리나 깔렸다.

 

망양정(望洋亭) : 북쪽으로 40리인 울진(蔚珍)과 경계인 해안에 있는데 기이한 돌들이 우쭉우쭉하다.

 

[주 D-001] 신선 배는 은하수를 가는 듯 : 한 나라의 장건(張騫)이 뗏목을 타고 은하수로 올라가서 직녀성을

만났다는 전설이 있다.

[주 D-002] 칠원(漆園) : 중국 전국 시대의 초 나라 사람 장주(莊周)라는 사람이 칠원(漆園)을 지키는 아전

노릇을 하였으므로 그렇게 부른다.

그 칠원에게 《남화경(南華經)》이라는 저술이 있는데 거기에 ‘산목자구(山木自寇)’라는 말이 있으니 산의 나무

가 잘 커서 재목으로 이용할 수 있으므로 도끼나 톱으로 베이게 되는 것이니 재목으로 소용되게 큰 것이 그 자

신을 해롭게 한 연유이다 라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재간이 있으므로 이 세상에 나와서 갖은 수고를

다하게 되고 심지어는 생명도 제대로 가져 보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주 D-003] 벽도(碧桃) : 한 나라 무제(武帝)의 창(窓) 앞에 파랑새가 와서 울었다.

그것을 보고 동방삭(東方朔)이, “그 파랑새는 서왕모(西王母)의 사신인데 오늘밤에 서왕모가 올 것입니다.”

하였다. 서왕모는 옥황상제의 첩이었다. 그날밤 과연 서왕모가 자기의 동산에 열린, 3천 년에 한 번씩 열린다는

반도(蟠桃)라는 복사를 가지고 내려와서 잘 높였다 한다. 여기서도 그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 D-04] 위태롭기 염여(灩澦)보다 위태롭고 높기는 태항산(太行山)보다 높네 : 염여당(灩澦塘)은 양자강

수로에 제일 험한 곳이요, 태항상(太行山)은 산서성과 하북성 사이의 큰 산으로 도로가 험하기로 유명하다.

[주 D-05] 맹문과 왕옥[孟門王屋]이 태항산에 잇따랐네. : 맹문(孟門)은 황하 산지에서 평지로 흐르는 첫

곳인데 맹진(孟津)이라는 곳의 별칭으로 수로가 험하다. 왕옥(王屋)은 산 이름으로 태항산과 연해 있는 큰

산이다.

[주 D-06] 삼성(參星)을 만져보고 정성(井星)을 지난다는 적선옹(謫仙翁 이태백)은 일생에 아는 것 : 삼(參)과

정(井)은 모두 하늘의 별 이름이다. 이 삼성(參星)을 만져보고 정성을 지낸다는 말은 이태백의 〈촉도난(蜀道

難)〉이라는 시에 있는 말이니, 중국 섬서성에서 촉[四川省]으로 가는 길은 검각(劒閣)의 지극히 험한 길을 넘

어가는데 그 검각의 높은 것을 형용하려고 그런 말을 썼다.

[주 D-07] 금성락(錦城樂)뿐이었네 : 〈촉도난〉에 그런 험한 길을 넘어서야 가는 촉(蜀) 땅의 수부(首府)인

성도(成都)를 비록 금성(錦城)이라 하여 살기 좋은 곳[錦城雖云樂]이라 하나 일찍이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不如早還家]이라고 하였다.

[주 D-08] 만일에 뽕나무 밭에 선수 한번 들어오면, 그대 나를 위하여 산가지 하나 더 놓아주소." :

《동파지림(東坡志林)》에 세 신선이 각기 나이 자랑을 하는데 한 신선이 말하기를, “저 바닷가에 있는 뽕나무

밭이 변해서 바다가 되고 바다가 다시 변하여 뽕나무밭이 되면 저 바다속에 있는 집에다가 산가지 하나를 던져

놓기로 하여서 지금 열 개가 들어 있다.” 하였다 한다.

[주 D-09] 긴 바람 따라 큰 물결 헤치고, 가벼운 돛 일만 리에 부상(扶桑)까지 가 볼거나 : 진(晉) 나라 사람

종각(宗慤)이라는 사람이 평생 소원은, “큰 배를 바다에 띄워놓고 바람을 따라 만리 되는 물결을 헤치며 무한정

가보고 싶다는 것[乘風破萬里浪]이라.” 하였다 한다.

[주 D-10] 돌아올 때 나에게 베틀 괴는 돌[支機石]을 빌려주소, : 먼저 주석에 있는 말과 같이 장건이 은하수로

뗏목을 타고 올라가서 직녀(織女)를 만나 누구냐 물으니, 그 여자는 조그만 돌을 하나 주면서 돌아가서 성도

(成都)에 사는 엄군평(嚴君平)에게 물어보라 하여 돌아와서 그 말대로 엄군평을 찾아서 물으니, 엄군평이, “이것

은 직녀의 베를 고이던 돌이라.” 하여서 그 여자가 직녀인 줄을 알았다 한다.

[주 D-11] 내가 그 돌 갈아서 푸른 하늘 수리하려 하네. : 예전 황제(黃帝)가 공공씨(共公氏)를 정벌하는데 그

공공씨라는 사람이 매우 억세어서 억지로 부주산(不周山)을 받았다. 그 부주산은 하늘을 고이는 기둥이었다.

그것을 받아서 그 산이 무너졌으므로 하늘도 무너져 내려서 큰 구멍이 생겼다. 그래서 황제(黃帝)의 누나인

여와씨(女媧氏)가 오색돌을 구어내서 그 하늘 뚫어진 곳을 기웠다 한다. 후에 그 말은 국가에 잘못이 있는 것을

시정한 것에 비유한다.

[주 D-12] 그 당시 객성(客星)이 자미성(紫微星)을 침범하였는데, : 먼저 주에 있는 말과 같이 엄군평이 장건

에게 한 말이다. “어느 날 저녁에 천문을 보니 당치 않은 별[客星]이 자미성(紫微星 옥황상제 있는 곳)에 범하

였었는데 그 당치않은 별이 바로 당신이었구려.” 하고 말하였다 한다.

[주 D-13] 아름다운 손으로 비단 빨고 있으리. : 복시 직녀(織女)를 말함이다.

[주 D-14] 번망한 세상일은 파초잎 언덕 속의 사슴이니, : 정(鄭) 나라 사람이 사슴을 잡아서 파초잎으로 덮어

놓고 돌아왔다가 다시 가지러 가보니 어떤 사람이 가져가고 없으므로 먼저 사슴 잡았던 일을 꿈이었거니 하고

말았다. 그 사슴을 가져간 사람은 자기 아내에게, “그 자는 꿈에 사슴을 잡았지만 나는 참으로 생시에 사슴을

얻었다.”고 자랑하니, 그 아내가 “잃은 사람이 꿈인지 얻은 사람이 꿈인지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라 하였다는

고사로, 세상일 모두가 한 꿈이라는 말로 씌어오는 초려몽(蕉麗夢)이라는 고사이다.

[주 D-15] 세 사람 웃으며 서로 따라 호계(虎溪) 굽이를 지나리. : 여산(廬山)에 있는 혜원(惠遠) 대사는 손님

을 전송하는 데 절 문 밖에 있는 시내[虎溪]을 지나지 않는 불문율(不文律)을 엄수하였는데,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 두 사람을 전송하는데 얘기에 정신을 잃고서 그 호계를 지나서 얼마를 더 갔었다.

그제서야 깨닫고 세 사람이 다 같이 크게 웃었다 한다.

 

 

간성군 杆城郡

 

동쪽은 바닷가까지 7리, 남쪽은 양양부(襄陽府) 경계까지 56리, 서쪽은 인제현(麟蹄縣) 경계까지 80리,

북쪽은 고성군(高城郡) 경계까지 67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7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수성군(䢘城郡)이다 : 가라홀(加羅忽)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에서는 수성군(䢘城郡)으로

고쳤으며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강등하여 현(縣)으로 하고 영(令)을 두었다. 후에 승격하여 군으로

하고 고성(高城)을 겸임하게 하였다. 공양왕(恭讓王) 원년에 다시 갈라서 둘로 하였으며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 한 명씩.

군명 수성(䢘城)ㆍ가라홀ㆍ수성(守城)ㆍ수성(水城).

 

성씨본군 송ㆍ유(柳)ㆍ이ㆍ장(張)ㆍ문(文)ㆍ김ㆍ이 : 모두 평창(平昌). 함(咸) : 양근(楊根). 윤 : 영춘(永春).

남 : 영양(英陽). 김 : 음죽(陰竹). 전(全) : 정선(旌善). 장(張) : 단양(丹陽). 안 : 제천(堤川). 손 : 평해(平海).

박 : 영덕(盈德). 정(鄭) : 내성(來性). 열산(烈山) 최ㆍ마(麻)ㆍ황보(黃甫). 김ㆍ전(全) : 모두 정선(旌善).

손 : 평해. 박 : 보성(甫城). 임(林) : 울진(蔚珍).

 

형승 서쪽으로 철령(鐵嶺)에 잇따랐다 : 채련(蔡璉)의 시에, "서쪽으로 철령에 잇따르고, 남쪽으로 기성(箕城)

에 이른다." 하였다.

 

산천 마기라산(麻耆羅山) : 고을 서쪽 3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남산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금강산 : 고을 서쪽 20리에 있는데 회양부(淮陽府) 조에 자세하다. 천후산(天吼山) : 고을 남쪽 70리에 있다.

오음산(五音山)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산마루에 못이 있는데 비를 빌면 응한다.

고성산(古城山) : 열산현(烈山縣) 북쪽 1리에 있는데 곧 현의 남산이다. 군과의 거리는 35리이다.

오구산(於丘山) : 열산현 서쪽 4리에 있다. 비적지산(鼻的只山)이라고도 한다.

소파령(所坡嶺) : 고을 서쪽 59리에 있다. 석파령(石破嶺)이라고도 한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웅장하고 기이한 모습 조금은 석파령과 닮았고, 공중에 높은 바위 붉고 푸른 빛 가

로 질렀네. 휘어 도는 나그네 길이 몇 번이나 굽었다 곧았나, 한 줄기 뱀이 3백 리를 달려 왔네. 여러 번 나뭇가

지에 원숭이 매달린 것 보았고 멀리서도 수풀 사이에 호랑이 숨은 줄 알겠네. 무어라 다시 촉(蜀) 나라 길이 험

하다 말을 하리, 여기와 비교해서 어디가 어렵고 쉬운지." 하였다.

 

미시파령(彌時坡嶺) : 고을 서남쪽 80리 쯤에 있다. 길이 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成宗)

24년에, 양양부 소동라령(所冬羅嶺)이 험하고 좁다 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

 

바다 : 고을 동쪽 7리에 있다. 선유담(仙遊潭) : 고을 남쪽 11리쯤에 있는데, 산록이 둘러 골짜기를 이루었으며

골짜기 안에 못이 있어 선유(仙遊)라 한다. 작은 봉우리가 불쑥 일어나서 절반쯤 호수 가운데로 들어갔으며 그

위에 장송(長松)이 두어 그루 있다. 예전에는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봄에는 척촉화(躑躅花)가 바위를 끼고 많이 피며, 순채(蓴菜)가 못에 가득하다.

 

○ 안축(安軸)의 시에, "못 위의 풍연(風煙)이 그림처럼 엷었다 짙었다 하는데 흐뭇한 마음 옛 친구와 만난 것

같으네. 아마도 내가 총총히 지난다 노하리니, 다음 와서 객 다시 못볼까 두려우네." 하였다.

 

영랑호(永郞湖) : 고을 남쪽 55리에 있다. 주위가 30여 리인데, 물가가 굽이쳐 돌아오고 암석이 기괴하다.

호수 동쪽 작은 봉우리가 절반쯤 호수 가운데로 들어갔는데 옛 정자 터가 있으니 이것이 영랑(永郞) 신선 무리

의 놀며 구경하던 곳이다." 하였다.

○ 안축(安𨋀)의 시에, "평평한 호수 거울인 양 맑은데, 푸른 물결 엉기어 흐르지 않네. 놀잇배를 가는 대로 놓아

두니, 둥실둥실 떠서 나는 갈매기 따라가네. 호연(浩然)하게 맑은 흥 발동하니, 물결 거슬러 깊고 그윽한 데로

들어가네. 붉은 벼랑은 푸른 돌을 안았고, 옥동(玉洞)은 경주(瓊洲)를 감추었네. 산을 따라 소나무 아래 배 대니,

하늘은 푸르고 서늘한 기운 이제 가을이네. 연잎은 맑아서 씻은 것 같고, 순채 실은 미끄럽고도 부드럽네.

저물녘에 배를 돌리려 하니, 풍연(風煙)이 천고의 수심일세. 옛 신선 다시 올 수 있다면, 여기서 그를 따라

놀리라." 하였다.

 

○ "저문 구름 반쯤 걷으니 산은 그림같고, 가을 비가 새로 개니 물결 절로 생기네. 이곳에 거듭 올 것을 기필할

수 없으니, 배 위의 노래 한 곡조 다시 듣노라."

 

○ 이곡(李穀)의 시에, "안 정승[安相 안축을 말함]의 정회는 황학(黃鶴)의 달이요,주D-001 이생

(李生 이곡 자신을 말함)의 행지(行止)는 흰 갈매기 물결이네. 이곳에 다시 올 일 기필하기 어려운데,

부질없이 관동(關東)의 한 곡조 노래만 듣네." 하였다.

 

광호(廣湖) : 고을 남쪽 45리에 있다.

영랑호 북쪽 10리에 큰 호수가 있어 어지러운 소나무 사이에 어른거리는데 광호라고 한다. 항간에서는 여은포

(汝隱浦)라 이름한다. 열산호(烈山湖) : 열산현(烈山縣) 동쪽 2리에 있다. 큰 호수가 있어, 둘레가 수십 리인데,

언덕과 골짜기를 감싸고 걸쳐 있으니 여러 호수에 비하여 제일 크다. 민간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옛날 큰 물이

나서 열산(烈山) 골짜기를 휩쓰니 새 고을을 옮겨 산기슭에 설치하였으며 전의 고을은 물 속에 잠겨 있는데,

갠 날 파도가 조용하면 담장과 집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다. 죽도(竹島) : 고을 남쪽 20리에 있는데 둘레가 2리쯤

된다. 섬 위에 군영 막사 옛터가 있으며 오동 나무와 전죽(箭竹)이 그 위에 가득 나 있다.

 

초도(草島) : 열산현 동쪽 6리에 있다.

무로도(無路島) : 청간역(淸澗驛) 동쪽에 있다. 명사(鳴沙) : 고을 남쪽 18리에 있다. 모래 색이 눈같고, 인마가

지날 때면 부딪쳐서 소리가 나는데 쟁쟁(錚錚)하여 쇠소리 같다.

대개 영동(嶺東)지방이 모두 그러하지만 그 중에서도 간성(奸城)ㆍ고성(高城) 간에 제일 많다.

 

북천(北川) : 고을 북쪽 1리에 있다. 근원이 마기라산(麻耆羅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신증 저도(猪島) : 열산현 북쪽 30리에 있는데 전죽(箭竹)이 난다. 황포(黃浦) : 고을 남쪽 25리에 있다.

남천(南川)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인각천(仁角川) : 고을 남쪽 50리에 있다. 거탄천(巨呑川) : 고을 북쪽 18리에 있다.

명파천(明波川) : 열산현 북쪽 20리에 있다.

 

토산 죽전(竹箭) : 죽도(竹島) 및 무로도(無路島)에서 난다.

칠(漆)ㆍ오미자ㆍ인삼ㆍ지황ㆍ복령(茯苓)ㆍ송이ㆍ벌꿀ㆍ백화사(白花蛇)ㆍ해의(海衣)ㆍ미역ㆍ복어ㆍ홍합ㆍ

문어ㆍ대구ㆍ연어(鰱魚)ㆍ송어(松魚)ㆍ방어ㆍ도루묵(銀口魚)ㆍ은어ㆍ황어(黃魚)ㆍ광어ㆍ고등어[古刀魚]ㆍ

뱅어ㆍ해삼 신증 하수오(何首烏).

 

성곽 읍성 : 돌로 쌓았으며 주위 2천 5백 65척, 높이 13척이다. 안에 우물 한 곳이 있다.

봉수 죽도 봉수(竹島烽燧) : 남쪽으로 양양덕산(襄陽德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정양산(正陽山)에 응한다.

정양산 봉수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북쪽으로 술산(戌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죽도에 응한다.

술산봉수 : 열산현(烈山縣) 북쪽 15리에 있으니 고을과의 거리 50리이다. 남쪽으로 정양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고성 구장천(高城仇莊遷)에 응한다.

 

누정 영월루(詠月樓) : 객사 동쪽에 있다.

만경루(萬景樓) : 청간역(淸澗驛) 동쪽 수리에 있다. 돌로 된 봉우리가 우뚝 일어서고 층층이 쌓여 대(臺) 같은데,

높이가 수십 길은 되며 위에 구부러진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대의 동쪽에 작은 다락을 지었으며 대 아래

는 모두 어지러운 돌인데, 뾰족뾰족 바닷가에 꽂혔다. 물이 맑아 밑까지 보이는데 바람이 불면 놀란 물결이 어지

럽게 돌 위를 쳐서 눈인 양 날아 사면으로 흩어지니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다.

 

○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바다를 구경하러 와서 만경대에 오르니, 구름 안개에 쌓인 물결이 하늘에 닿아

들어오네. 만일 이 물이 술로 변한다면, 어찌 하루에 3백 잔을 기울일 뿐이랴." 하였다.

 

○ 정추(鄭樞)의 시에, "한 줄기 하늘을 가로질러 검은데, 푸른 바다가 눈 아래에 들어오네. 처음에는 산이 구름에

감추었는가 의심했는데, 점점 알고보니 물결이 공중에 떠 있네. 새는 저 아득한 속으로 사라지고, 용은 깊고 넓은

가운데서 읊조리네.

긴 돛을 누가 빌려 주려나, 만리에 한 번 바람을 타 보았으면." 하였다.

 

○ 안축(安軸)의 시에, "바닷가의 푸른 돌 첩첩이 쌓여 대를 이뤘는데, 일만 경치 구름처럼 달려 눈에 들어오네.

한 조각 고깃배는 어디로 가는 건가, 바람을 등지고 가볍게 나부끼는 모습 잔이 뜬 것 같구나." 하였다.

 

○ 오식(吳軾)의 시에, "바람에 임하여 한 번 휘파람 불고 높은 대에 오르니, 푸른 물결 출렁거리며 들어오네.

어찌하면 붕새 날개치듯 9만 리 장천 올라가서, 동해를 내려다볼 제 잔[杯]과 같이 보이게 될꼬." 하였다.

 

○ 허백(許伯)의 시에, "산과 물이 돌고 둘러 지경이 고요하고 그윽한데, 앉아 있으니 마음과 몸이 문득 맑아지

누나. 오경(五更)지나 새벽빛은 빈 누각에서 나고, 한 잎의 가을 소리는 작은 다락에 가득하네. 물결을 쫓아가는

저 갈매기는 저 갈 데를 아는데, 수풀 찾는 저녁 새는 쉴 곳을 얻었네. 내 지금 분주하여 무슨 일을 이루었나.

동ㆍ서로 오가며 두어 고을을 거쳤네." 하였다.

 

무송대(茂松臺) : 열산현 북쪽 명파역(明波驛) 남쪽에 있다. 봉우리가 바닷가에 높이 솟았는데,

예전 이름은 송도(松島)이다. 그 위에 소나무가 많으며 모랫길이 육지에 잇따랐는데 바닷물이 넘치면 들어갈 수

없으며, 땅에는 가득한 우는 모래[鳴沙]다.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 윤자운(尹子雲)이 사절(使節)을 받들어

관동지방에 왔다가 일찍이 이 섬에 올라왔으므로 그렇게 이름을 고친 것이다.

학교 향교 : 고을 북쪽 6리에 있다.

 

역원 청간역(淸澗驛) : 고을 남쪽 44리 바닷가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높은 다락이 푸른 연기낀 나무 끝에 있는데, 난간에 엎드려 나는 새를 엿보네.

가을도 되기 전에 서늘한 기운 많고, 여름철에도 더위는 적다네. 매미 소리는 늦은 바람에 부서지고,

갈가마귀 그림자는 저녁 햇빛에 번득이네. 술잔 들며 멍하니 바라보니, 만리에 푸른 하늘이 작구나.

 

○ 관동(關東)은 산수의 고장인데, 지나는 나그네 어조(魚鳥)와 함께 섞이네. 돌아가는 길 사람 마음과도 같아

험한 가운데 평지가 적구나. 석양은 말머리에 떨어지는데, 서쪽 변방엔 달이 처음으로 비치네.

곤하여 침상 위에 꺼꾸러지니, 태산이 가을철의 털과 같이 작게 보이네.

 

○ 구름 끝으로 해는 떨어지고 수레를 멈췄는데, 바다에는 놀란 파도가 은색 물결을 뒤집네. 한가로이 흰

귀밑털 긁으며 붉은 난간을 의지해 서니, 백조 날아가는 저 가에 천리나 바라보이네." 하였다.

 

운근역(雲根驛) : 고을 북쪽 37리에 있다. 명파역(明波驛) : 열산현 북쪽 20리에 있다.

○ 정추(鄭樞)의 시에, "두 소나무 처마 옆에 물이 공중에 닿았는데, 봉래도(蓬萊島)의 구름 연기가 눈앞에

들어오네, 남ㆍ북으로 오가는 나그네 얼마인고, 산꽃이 수없이 봄바람에 피었네." 하였다.

 

○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난간을 의지하여 동쪽을 바라보니 물이 공중에 떴는데, 한 번 휘파람 부니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네. 바다를 건너는데 누가 배를 저을꼬, 돛을 다니 벌써 대왕(大王)의 바람이 불어오네."

하였다.

 

죽포역(竹苞驛)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원암역(元岩驛) : 옛 터가 있는데, 고을 서남쪽 63리에 있었다. 미시파령(彌時坡嶺)의 길이 열리면서

오색역(五色驛)을 철거하여 여기로 옮겼다.

사자원(獅子院) : 고을 서쪽 40리에 있다.

 

불우 건봉사(乾鳳寺) : 금강산 남쪽에 있다. 보현사(普賢寺) : 천후산(天吼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성 안 서쪽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열산폐현(烈山廢縣) : 고을 북쪽 35리에 있다. 원래 고구려의 승산현(僧山縣)인데 소물달(所勿達)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의 경덕왕(景德王)이 동산(童山)으로 고쳐서 수성군(守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으며,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그대로 속하게 하였다. 별호는 봉산(鳳山)이다.

 

남산성(南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5백 28척이며 안에는 우물 하나가 있었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고성산성(古城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4백 3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제영 내려다보니 해시(海市 신기루)는 중첩한 누각을 이뤘네 : 채련(蔡璉)의 시에, "멀리 보니 촌장(村莊)은 푸른

병풍이 둘렀고, 내려다보니 신기루(蜃氣樓)는 중첩한 누각을 이뤘네." 하였다. 해를 비추며 나는 노을은 바다의

섬을 밝히네 :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해를 비추며 나는 노을은 바다의 섬을 밝히네, 겨울 지나 쌓인 눈은 산에

가득하네." 하였다.

 

세월이 오래니 소나무 비늘은 백 자나 길구나 : 안축(安軸)의 시에, "중첩한 멧부리 사면으로 둘러싸여 지경이

그윽한데, 세월이 오래니 소나무 비늘 백 자나 길구나. 큰 길에 나무가 깊으니 바람은 원집에 가득하고,

바닷문에 안개가 개니 물은 다락에 밝구나. 비오는 날 도롱이 삿갓 쓰고 고깃배 타기 평생의 기약인데, 티끌 묻은

옷으로 길 가는 행장은 조만간 그만두려네. 만일 성 남쪽 경호(鏡湖)의 달을 준다면, 예전 살던 곳이라고 하필 이

고을을 그리워할 것이랴." 하였다.

 

외로운 연기 일어나는 곳에 물결이 집을 떠들석하게 하누나 : 정추(鄭樞)의 시에, "외로운 연기 일어나는 곳에

물결이 집을 떠들썩하게 하고 가는 비 갤 때에 산은 누대에 가까워지네." 하였다.

 

[비고]

 

연혁 인조(仁祖) 7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 종이 주인을 죽였기 때문이다. 16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군내면(郡內面) : 끝이 10리. 왕곡(旺谷) : 남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죽도(竹島) : 남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5리. 토성(土城) : 남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55리.

해상(海上) : 서로 처음은 5리, 끝은 30리. 대대(大垈) : 북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오현(梧峴) : 북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5리. 현내(縣內) : 북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65리.

낙현(洛峴) : 서북쪽이다.

성지 열산고현성(烈山古縣城) : 둘레가 4백 3척. 남산고성(南山古城) : 둘레가 1천 5백 28척, 우물이 하나.

마기라산고성(麻耆羅山古城)ㆍ초도고성(草島古城)ㆍ영파수(寧波戍) : 열산(烈山)에 있는데 북으로 15리이다.

지금은 수산(戍山)이라 부른다. 고려 덕종(德宗) 2년에 간성현(杆城縣)에 성을 쌓았다.

창고 열산창(烈山倉) : 열산(烈山)에 있다. 청간창(淸澗倉) : 청간역 북쪽에 있다.

단유 설악(雪岳) : 신라 사전(祀典)에, "우성군(䢓城郡)에 달려있는데 명산이므로 소사(小祀)에 실려 있다."

하였다.

 

[주 D-001] 안 정승[安相 안축을 말함]의 정회는 황학(黃鶴)의 달이요, : 예전 사람의 시(詩)에, “황학은 한 번

가고 다시 오지 않았다.[黃鶴一去不得返]”라는 말이 있으므로 안 정승이 한 번 가고 다시 못 온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고성군 高城郡

 

동쪽으로 바닷가까지 8리, 서쪽으로 회양부(淮陽府) 경계까지 72리, 남쪽으로 간성군(杆城郡) 경계까지 33리,

북쪽으로 통천군(通川郡) 경계까지 36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9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달홀(達忽)이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29년에 달홀주(達忽州)를 삼고 군주(軍主)를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군으로 하였다. 고려 때에 현령(縣令)으로 하고 본조에서

그대로 하였으며 세종조에 예(例)에 따라 군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ㆍ훈도 : 한 사람씩.

군명 달홀ㆍ풍암(豐巖).

 

성씨본군 류(柳)ㆍ박ㆍ맹(孟)ㆍ유(兪)ㆍ오(吳)ㆍ유(劉)ㆍ오(吾) : 모두 내성(來姓). 최 : 강릉(江陵).

정(鄭) : 구고(九皐). 김 : 양양(襄陽). 안창(安昌) 이 : 가은(加恩)ㆍ천녕(川寧). 고(高) : 이안(利安). 환가(豢假)

최ㆍ황보(皇甫)ㆍ박.

 

풍속 고기를 잡아 생업을 삼는다 : 삼을 심어서 길쌈하지 않고 노를 꼬아 그물을 만들어서,

고기 잡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다.

 

산천 전성산(全城山) : 고을 서쪽 9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금강산(金剛山) : 고을 서쪽 58리에 있는데 자세한 것은 회양부(淮陽府)편에 보인다.

 

○ 이곡(李穀)의 기문에, "통천(通川)에서 고성까지 1백 50리 길은 풍악(楓岳)의 뒷면으로서 그 위가 높고 험한데

사람들이 모두 외산(外山)이라고 한다. 대개 내산(內山)과 더불어 기괴한 것을 다툰다." 하였다.

 

구령(狗嶺) : 고을 서쪽 38리에 있는데, 곧 금강산의 동쪽 기슭으로서 형세가 매우 험준하다.

우리 세조대왕이 이 고개를 넘어, 유점사(楡岾寺)에 거동하였다.

○ 정추(鄭樞)의 시에, "구령(狗嶺)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이대(尼臺)엔 수목이 총총 들어섰네. 위태로운 곳 오르

니 산이 다시 둘러 있고 탐승(探勝)하는데 길이 몹시 험하고 수풀을 지나니 꽃이 모자를 스치네,

벼랑을 걸어가니 돌이 안장을 할퀴누나. 사랑스러웁다, 저 노준(盧雋)의 우물은, 일천 년 그 동안에도 마른 적이

없었다네." 하였다. 앵령(櫻嶺) : 고을 서쪽 77리에 있다.

 

이령(梨嶺) : 고을 서쪽 72리에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이령에서 앵령까지는 멀고도 길이 험하네. 행인은 비 맞을까 걱정하는데 여윈 말은 산

오르기에 익숙하네. 시냇가에서 중이 밥을 짓고, 수풀 가운데선 객이 안장을 푸누나. 오르고 부여잡으며 한 달을

다 보내니 어데나 한가로이 쉴 곳 없구나." 하였다.

 

불정암(佛頂岩) : 고을 서쪽 67리에 있다. 민간에서 전하여 오는 말에, "옛날에 불정화상(佛頂和尙)이라는 이가

불경을 강설하였는데 용녀(龍女)가 바위 틈에서 나와 설법을 들었다." 한다.

지금도 구멍이 바위 위에 있으며 그 깊이가 끝이 없다. 그 아래에는 또, 불정암(佛頂菴)이 있다.

 

응암(鷹巖) : 고을 북쪽 23리에 있다. 산세가 많이 기이하고 험준한데 한 바위가 있어, 멀리서 보면 범이 걸터

앉은 것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매가 나는 것같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괘종암(掛鐘巖) : 고을 남쪽 13리에 있다. 외로운 봉우리가 천 길은 되는 것이 동해를 베개 삼았는데, 봉 머리

에는 바위가 집같이 된 것이 있으며, 그 안은 움푹하여 벌레가 과일을 먹은 것같고 가운데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고려조 민지(閔漬)의 기문에, "53불(佛)이 월저국(月氐國)에서 바닷길로 와서 이 봉우리 아래 대고 일시

에 모두 바위 밑에 앉았다." 하였다. 그 바위 북쪽에 또 바위가 기둥 같은 것이 있는데 반석을 이고 있다.

민간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종을 달았던 곳이라." 한다.

 

포구산(浦口山) : 고을 동쪽 9리 고성포(高城浦)에 있다. 바위가 우뚝 일어서고 층층 첩첩하기 계단같으며 그 위

에는 백여 명이 앉을 만하고 바위 북쪽에 또 한 봉우리가 있는데 모두 돌이다. 동쪽으로 바다 가운데를 바라보면

5리쯤 되는 곳에 돌 봉우리가 병풍 두른 것같고, 봉 아래에 돌이 있는데, 용이 끌어 당기고, 범이 움켜 잡는 것같

아서 기괴하고 이상하다. 또 돌 두 개가 서로 마주 서서, 사람이 함게 말하는 것같은데 돌은 모두 흰빛이며,

푸른 바다에 광채가 비쳐서 바라보면 그림같다.

 

단혈(丹穴) : 고을 남쪽 11리에 있다. 민간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네 신선이 놀던 곳이라." 한다.

 

○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자연(紫淵)이 깊고 깊은데 붉은 해가 목욕하니, 만길은 되는 광염(光熖)이 양곡(暘谷

해돋는 곳)에 떠 있네. 새벽 노을이 돌을 녹일 듯 무지개가 바위를 꿰뚫을 듯, 쪄[蒸]서 만든 단사(丹砂)가 몇

말이나 되나.

곱디고운 가을 물에 부용(芙蓉)나오고 교교(皎皎)한 옥 평상엔 화살촉 드리웠네. 푸른 물결 다한 곳에 동문

(洞門)이 열리니, 길 하나가 돌고돌아 삼모(三茅)주D-001를 감싸네. 하늘은 멀고 육지는 끊겼으니 난새와 학이

먼데, 유유(悠悠)한 선악(仙樂)은 거문고 비파소리 들려오네. 그 옛날 유안(劉安)은 옥골(玉骨)이 하늘에서 울

제 구름 사이에 닭ㆍ개들 서로 따랐다네.주D-02 신선 자취를 세상 사람들 알까 두려워서, 베개 가운데에 보록

(寶籙)을 감췄다네.

내가 일찍이 자하편(紫霞篇)을 읽었는데, 백병(白柄)을 가지고 황독(黃獨 새박 덩굴의 뿌리로 강장제로 쓰인다.)

캐기 부끄럽네. 화로 가운데서 벌써 약 다리는 불을 시험하니, 솥 안에 바로 용호(龍虎)가 항복하네.

총총하게 말을 타고 가지 말 것을, 산중에서 우연히 만나는 이들 몇 사람이나 되리." 하였다.

 

바다 : 고을 동쪽 8리에 있다.

삼일포(三日浦) : 안축(安軸)의 기문에, "삼일포가 고성 북쪽 7ㆍ8리에 있는데 밖으로는 중첩한 봉우리들이 둘러

쌌으며 그 안에 36봉이 있다. 동학(洞壑)이 맑고 그윽하며 소나무와 돌이 기이하고 옛되다. 물 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푸른 돌이 평평하니 옛날 네 신선이 여기서 놀며 3일간이나 돌아가지 않았다고 하여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물 남쪽에 또 작은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 위에 돌 감실[龕]이 있으며, 봉우리의 북쪽 벼랑 벽에 단서(丹書) 여섯

자가 있으니, '영랑도 남석행(永朗徒南石行)'이라 하였다. 작은 섬에 옛날에는 정자가 없었는데 존무사(存撫使)

박공(朴公)이 그 위에 지으니 곧 사선정이다." 하였다.

 

○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모랫길 길고길어 멀리 영주(瀛洲)에 닿았는데 구름산이 막막(漠漠)한데 가까이 병풍

을 펼쳤네. 사선정 옆에 신선 글씨를 찾아보고, 삼일포 머리에서 해오라기 노는 물가로 나려가네." 하였다.

 

○ 정추(鄭樞)의 시에, "한 호수의 좋은 경치 하늘이 만든 것이니, 36봉우리 가을에 다시 맑구나.

중류에서 배 띄워 가지 않으면, 남석(南石)의 분명한 글자 어떻게 볼 수 있겠나. 정자 앞에 비가 지나니 우는

모래[鳴沙] 메아리치고, 포구에 가을이 깊으니 낙엽 소리 들리네. 안상(安詳 신선의 이름)의 그날 일 자세히

물으니, 신선이 역시 풍정(風情)이 많았네." 하였다.

 

○ 채련(蔡璉)의 시에, "사선정 아래 물도 넓은데, 한 조각 작은 배가 늦은 바람을 희롱하네. 36봉우리 여인의

머리쪽인 양 아름답기도 하니, 반드시 미인을 배에 실어야 풍류이냐."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좋은 경치를 어찌 능히 집대성(集大成)하였나, 이 호수는 저 백이(伯夷)의 맑음주D-03과

같구나. 물은 하늘을 적시니 마음 마저 맑게 하여 푸르고, 산은 가을 공중에 기대었으니 괄목할 만큼 밝구나.

구름 사이에서 붉은 절(節)의 그림자 보이는 듯, 때로 달 아래서 옥퉁소 소리 들린다네.

저 단서(丹書) 깎은 것이 아직도 전과 같으니, 신선 자취 대해서 세상 물정 말하는 것이 부끄럽네." 하였다.

 

○ 안축(安軸)의 시에, "선경(仙境)이 동중(洞中)에 감추었는데, 유리같은 물 출렁이네.

단란(團欒)한 작은 봉래(蓬萊) 섬들 물 위에 솟아, 부용화 같구나. 높은 정자는 새가 날아갈 듯, 단청은 영롱하기

만 하구나. 난간에 의지하여 사면으로 눈을 돌리니, 36기이한 봉우리일세. 돌부처 돌 감실에 있는데,

먼 옛날부터 푸른 이끼 봉해있는 것이. 신선이 황학을 타고 다니는데 산과 물 천만 겹이네. 동강난 비석은 모래톱

에 묻혔고, 단서(丹書)는 붓 자취 남겨있네. 배를 타고서 맑은 풍채만 사모하나 그 모습은 만날 길이 없네.

곱대고운 물 속의 달이요, 낙락(落落)한 돌 위의 소나무이네. 슬프구나, 나의 몸 늦게 나서, 눈에 가득 수심 구름

만 짙구나.

 

○ 정자 위에 기이한 풍경 그림 황홀히 속객이 삼청(三淸 신선있는곳)에 들어간 것 같구나. 쌍쌍이 나는 흰새는

안개에 섞여 고요하고, 서른 여섯 개의 기이한 봉우리는 물에 비쳐 밝네. 너도 나도 비석의 전서 글씨 알기는

힘든데, 궁상(宮尙)의 옛 음률은 뱃노래로 변해졌네. 돌 벽에 단서(丹書)만이 남아있으니, 선랑(仙郞)의 만고정

(萬古情)이야 누가 있어 알겠나." 하였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물 가운데 정자는 고요하매 세상 생각 엷어지니, 구름 사이에서 신선 부를 듯.

다행히도 사군(使君 원님)의 마음이 저 달 같으니, 난간을 의지하여 종일토록 돌아갈 줄 모르네.

 

○ 36봉에 가을비 개이니, 한 구역의 선경(仙境)이 맑기도 하구나. 날이 기운다고 쉽사리 배 돌리지 말 것이,

단풍나무 언덕, 소나무 물가에서 달 밝기를 기다리자꾸나." 하였다.

 

○ 한상경(韓尙敬)의 시에, "한 구역의 좋은 경치 그림으로도 그리기 어려운 것이, 점점(點點)이 기이한 봉우리

가 물에 비쳐 맑구나. 여섯 글자의 단서는 부서져 떨어졌지만, 네 신선의 놀던 자취는 지금도 분명하네.

화려한 정자에는 풍악치는 모임이 상상(想像)되고, 절간에서는 아직도 범패 소리 들리누나. 더구나 신선 고장

에서 모골(毛骨)이 상쾌하니, 세간의 무슨 일을 다시 마음에 두리." 하였다. 신증 홍귀달(洪貴達)의 시에, "옛날

에 삼일포 좋단 말 들었는데, 지금 사선정에 올라왔네. 물은 흰 은소반을 치고, 산은 푸른 옥병풍을 둘렀네.

하늘이 비었으니 채색 구름 일어나고, 돌이 늙었으니 가을 빛 맑구나.

신선은 간지 벌써 오랜데, 옛 정자엔 지금 기둥도 없구나. 그 당시 노닐던 곳, 구름 밖으로 풍악소리 들리네.

천 년 지난 지금 우리들에게도 여섯 글자는 보기에 분명하네. 바람은 영랑호(永郞湖)에 불고,

달은 안상정(安詳汀)에 떴네. 외로운 술항아리로 배 댄 곳, 여기가 원래 봉래(蓬萊) 영주(瀛洲)라 한다네."

하였다.

 

십이폭포(十二爆布) : 고을 서쪽 65리에 있다. 불정대(佛頂臺)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푸른 언덕과 벽이 둘러

서서 그림 병풍 같은 곳에, 나는 샘물이 내리 쏟아져서 형상이 흰 무지개 같은 것이 무릇 열두 곳이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남강(南江) : 고을 남쪽 3리에 있다. 금강산 수점(水岾)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서 구룡연(九龍淵)이 된다.

민간에서 전하여 오는 말에, "옛날 9룡이 숨어 있는 못을 메우고, 유점사(楡岾寺)를 지으니 용이 여기로 옮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한다. 동남쪽으로 흘러서는 주연(舟淵)이 되고, 또 남쪽으로 흘러서 흑연(黑淵)이

되며 돌아서 북쪽으로 흘러 전탄(箭灘)이 되고, 고을 성 남쪽에 이르러서 남강이 된다. 그리고 또 동쪽으로

흘러 고성포(高城浦)가 되고 바다로 들어간다.

 

영진곶(靈津串) : 고을 북쪽 22리에 있다. 금강산에 동쪽 지맥(支脈)이 바다로 건너질러서 옷소매의 주름이

겹친 모양같다.

 

명사(鳴沙) : 고을 남쪽 24리에 있는데, 자세한 것은 간성군(杆城郡) 조에 보인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말을 버리고 한가롭게 바다 위 물가로 걸어가니, 찬 모래가 바삭바삭 사람 따라 소리

나누나. 느끼고 설어하는 것이 감정없는 한 물건에게도 있는가, 네 무슨 이유로 역시 불평하는가." 하였다.

 

오천 : 고을 서북쪽 32리에 있다. 세조 12년에, 관동지방을 순행하다가 이곳에 수레를 멈추었다.

 

송도(松島) : 고을 남쪽 23리에 있는데 모래 길이 육지에 잇따랐다.

 

○ 고려조 고종(高宗) 45년에 동진국(東眞國)이 수군으로 와서 이 섬을 포위하고, 전함을 불태웠다.

 

토산 자석(磁石) : 금강산 유점(楡岾) 물 속에서 난다. 고석(膏石) : 고을 서쪽 박장동(朴莊洞)에서 난다.

수정석(水精石) : 고을 서쪽 온정동에서 난다. 수란석(水爛石) : 고을 북쪽 안상구며(安詳仇㫆)에서 난다.

백석영(白石英) : 고을 서쪽 온정동(溫井洞)에서 난다.

오미자ㆍ인삼ㆍ지황ㆍ복령ㆍ송이ㆍ벌꿀ㆍ백화사(白花蛇)ㆍ미역ㆍ우뭇가사리ㆍ참가사리ㆍ복어ㆍ해삼ㆍ

홍합ㆍ문어ㆍ대구ㆍ연어(鰱魚)ㆍ송어(松魚)ㆍ방어ㆍ은어ㆍ고등어ㆍ황어(黃魚)ㆍ숭어ㆍ삼치[麻魚]ㆍ넙치ㆍ

순채[蓴菜].

 

성곽 읍성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1백 26척, 높이 5척이다. 우물 네 곳이 있고 또 군량창고가 있다.

관방 고성포영(高城浦營) : 고을 동쪽 7리에 있다.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이 있다.

 

봉수 포구산 봉수(浦口山烽燧) : 남쪽으로 구장천(仇莊遷)에 응하고 북쪽으로 영진산(靈津山)에 응한다.

영진산 봉수 : 북쪽으로 통천군 수곶(通川郡戍串)에 응하고, 남쪽으로 포구산에 응한다.

구장천 봉수 : 고을의 남쪽 28리에 있다.

남쪽으로 간성군 열산현 수산(杆城郡烈山縣戍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포구산에 응한다.

 

누정 사선정(四仙亭) : 삼일포 편에 자세히 보인다.

신증 망선루(望仙樓) : 객사 동쪽에 있는데 군수 김진석(金晉錫)이 지었다.

학교 향교 : 고을 서쪽 10리에 있다.

 

역원 고잠역(高岑驛) :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양진역(養珍驛) : 옛 환가현(豢徦縣)에 있다.

대강역(大康驛) : 옛 안창현(安昌縣)에 있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우정(郵亭)은 눈 속에 좋은데, 서로 보니 봄빛이 푸르네. 모래가 평평한데 푸른

소나무 총총히 들어섰고, 언덕이 넓으니 기이한 돌도 많네. 동쪽에는 만 리의 물결이 뒤엎고, 서쪽에는 천 층

벽이 깎아섰네. 내가 와서 손님이 상종하기 잦으니, 정장역(鄭莊驛)주D-004이 이 아닌가 하노라." 하였다.

 

탄탐원(炭呑院) : 고을 남쪽 60리에 있다. 이령원(梨嶺院) : 고을 서쪽 50리에 있다.

불우 유점사(楡岾寺) : 금강산의 동쪽에 있는데 고을과의 거리는 60여 리이다.

절의 대전(大殿)을 능인(能仁 석가)이라 한다.

 

○ 민지(閔漬)의 기문에, "53불(佛)이 월저국(月氐國)으로부터 무쇠 종을 타고 바다에 떠와서 안창현 포구에

대었다. 고을의 수령 노춘(盧偆)이 관속을 거느리고 가보니 다만 여러 작은 발자국이 진흙 위에 있는 것이

보이며, 나뭇가지가 모두 산 서쪽으로 쓰러지고 또 종을 달고 쉰 곳이 있었다.

산 아래 와서 부처가 쉰 곳을 게방(憩房)이라 하고 또 소방(消房)이라 하기도 하는데 곧 지금의 경고(京庫)이며,

문수(文殊)보살이 비구니(比丘尼)의 몸으로 나타나니 그곳이 지금의 문수촌(文殊村)이다. 몇 리를 안가서 보니,

한 여승이 돌에 걸터앉아 있으므로 부처가 있는 곳을 물었는데 지금의 이유암(尼遊岩) 혹은 이대(尼臺)라고

하는 곳이다. 다시 앞으로 가니 흰 개가 꼬리를 흔들며 앞을 인도하는데, 지금 구령(狗嶺)이 그곳이다.

고개를 지나가면 목이 말라서 땅을 파서 샘물을 얻었는데 지금의 노춘정(盧椿井)이 그 자리이다. 거기서 수백

보를 가니 개는 없어지고 노루가 나왔으며 또 수십 보를 가서는 노루도 보이지 않고, 문득 종소리가 들리므로

기뻐서 나갔기 때문에 노루를 본 곳을 장항(獐項)이라 하고, 종소리를 들은 곳을 환희령(歡喜嶺)이라고 한다.

종소리를 듣고는 그 소리를 따라 동문(洞門)으로 들어가니 큰 못이 있고, 못 위에 느릅나무가 있는데 종을

나뭇가지에 걸고 여러 부처들이 못 언덕에 늘어서 있으며 이상한 향기가 풍겼다.

춘이 관속들과 함께 나아가서 예를 갖추고 돌아와서 왕께 아뢴 다음, 절을 창건하여 모시고 그 이름을 유점사

라 하였다." 한다. 지금 민지의 기문을 보면 극히 괴이하고 망녕되어서 전하여 믿을 것이 못 되지만,

그 지명들이 모두 있으므로 그대로 여기에 붙여둔다.

 

○ 성화(成化) 병술년에 세조가 이 절에 거둥하였는데, 중 학렬(學悅)에게 명하여 개수하도록 하여 드디어

산중의 거찰(巨刹)이 되었다. 절 앞에 시내를 걸터 다락을 지으니 산영루(山映樓)라 한다. 자석(磁石)이 여기서

많이 난다.

 

○ 이색(李穡)의 시에, "유점사 안에 유수(楡樹)가 자랐는데, 종(鍾)이 서해에서 떠오르니 하늘이 아득하구나.

불상(佛像) 50과 또 세 구가, 바로 나무 아래를 정하여 천당(天堂)을 열었네. 시대와 문적을 상고하여 정말

믿기 어려우니, 일이 기괴하고 황당하네. 축건(竺乾)주D-005의 신통한 변화는 절로 뛰어난 것이며,

먼 바닷길에도 더구나 배가 통함에랴. 이나라 사람들 젖먹이도 범패(梵唄)를 외우니, 늙은이야 누가 서쪽

나라를 찾지 않을 건가. 세 번 이 산에 오르면 삼도(三塗 지옥ㆍ아귀ㆍ축생(畜生)의 세 길)를 면한다는 이 말

이 확실하여 금강과 같다네. 금강으로 파괴되지 않는 것은 내 본성 있는 것이요, 세계가 무너져도 산은 공중

을 향하여 감추어지리."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보배의 땅이 청정(淸淨)하기도 하며, 이름난 절은 보통을 넘네. 가을 서리는 옥 섬돌에

엉기고, 아침 해는 금 차양에 비치누나. 임금님 친히 거둥하시니, 신기한 공로가 있어 많은 시설 갖췄네. 부엌

이 한가하니 중은 차를 끓이고 누대가 높으니 객은 시를 읊누나. 풍경은 아침 마다 변하는데, 수풀 멧부리는

가는 곳마다 기이하네. 속세에야 어찌 이것이 있으랴. 좋은 경치를 깊이 알아야 할 것이라." 하였다.

 

성불암(成佛菴) : 금강산에 있다. 동해를 내려다보며 해뜨는 곳을 바라볼 수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고개에 오르니 하늘에 오른 것 같더니, 고개에서 내려오니 땅으로 들어가는 것 같구나.

허위단심 종일토록 가니, 숲이 깊고 깊다. 층층한 구름은 가슴을 시원케하고, 흉흉(洶洶)한 물은 귀에 시끄러

우네. 단풍은 가을을 다 붉게 물들였고, 소나무는 만고의 푸른빛 떠오르네. 다람쥐는 아차, 뛰어오르고,

바윗돌은 제각기 울퉁불퉁하네. 바다에 임한 성불암에, 구름 물결 눈앞에 모여드네. 개고 해뜰 때엔,

붉은 빛이 새벽 하늘에 불타네. 넘실넘실 일만 황금인데, 역력(歷歷)한 희화(羲和 해의 말꾼)의 고삐이네.

금바퀴가 처음 날아오르니, 일만 눈이 다 함께 보는 것이. 나도 기이한 구경 다 보려 하여, 여관 베개에서 때로

한 번 눈을 돌리네. 까무락 까무락 자지 않고 시를 지어 스스로 기록하네." 하였다.

 

몽천사(夢泉寺) : 삼일포 북쪽 언덕에 있다.

 

○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창해(滄海)의 서쪽 가 호수 앞이라, 절 문까지 큰 물결 형세가 서로 이었네.

상방(上方)의 종소리ㆍ범패 소리 삼계(三界)에 흩어지고, 별동(別洞)의 퉁소ㆍ피리는 구천(九天)에서 내려오

누나. 돌 위의 붉은 글은 어제 같은데, 바위 머리의 백족(白足)은 흐르는 세월에 맡기네. 난간을 의지하여

동쪽에서 떠오르는 달에게 묻노니, 일찍이 물결 속을 비치며 몇 번이나 돌았나." 하였다.

 

○ 조용(趙庸)의 시에, "금강산 아래서 빗속에서 노는데, 흰돌이 구름 속에 들어가니 산이 머리가 없네.

다시 산 동쪽 몽천사에서 자는데, 솔바람 한밤중에 우수수 불어오네." 하였다.

 

발연사(鉢淵寺)ㆍ백전암(柏田菴)ㆍ보문암(寶門菴)ㆍ도솔암(兜率菴) : 모두 금강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안창 폐현(安昌廢縣) : 고을 남쪽 27리에 있다. 원래 막이현(莫伊縣)이었는데, 고려조 현종(縣宗) 9년에

지금 이름으로 부르고 이 고을에 속하게 하였다. 환가 폐현(豢猳廢縣) : 고을 북쪽 27리에 있다. 원래 고구려의

저수혈현(猪䢘穴縣)이었는데, 오사압(烏斯押)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고성군에 속하는 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문종(文宗) 조에 고을 치소를 양촌(

陽村)으로 옮겨서 해적의 길목을 막게 하였다. 매향비(埋香碑) : 삼일포의 남쪽에 있다. 원 나라 지대(至大) 2년

기유(충선왕 원년)에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 김천호(金天皓) 등이 중 지여(志如)와 함께 향나무를 해변

각 고을에 묻고서, 그 묻은 곳과 가지 수효를 적어서 단서(丹書) 곁에 세웠다.

 

전성산성(全城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9백 9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성관장성(聲串長城) : 고을 북쪽 36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길이가 9백 82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성직소성(城直小城) : 고을 북쪽 36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3백 72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양진역 북석성(養珍驛北石城) : 고을 북쪽 27리에 있다. 둘레 1천 7백 96척, 높이 7척이며, 안에 우물이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반쯤 무너져있다.

 

대강역 서토성(大康驛西土城) : 고을 남쪽 23리에 있다. 주위가 2천 8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효자본조 황신정(黃信正) : 남포 외리(南浦外里)에 살았는데 효행으로 알려졌으며 조정에서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제영 모자(茅茨)가 별처럼 들에 흩어졌네 : 정추(鄭樞)의 시에, "빈 여관에 이 생각 저 생각 잠 못 드는데, 호수

빛 밤새도록 밝구나. 새벽 안개는 먼 물에서 생기고, 밝은 해는 동쪽 난간에 올라오네. 처마 밖에는 산이 가로

질렀고, 하늘 가엔 물이 평평하게 잇따랐네. 모자가 별처럼 들에 흩어졌으니 두 번 탄식하네, 너의 생애를."

하였다.

 

바닷가에 어둔 그늘이 걷히네 : 안축(安軸)의 시에, "바닷가에 어둔 그늘이 걷히고, 마을 터엔 갠 경치 밝구나.

저녁 서늘한 기운은 자리 사이에 떠오르고, 공중 푸른빛 처마에 떨어지네. 눈속엔 이끼 낀 바위가 여위고,

바람 앞에 보리밭 이랑이 평평하네. 여러 번 피폐함을 겪은 고을이라, 민생을 건질 방법 없구나." 하였다.

 

마을 나무에 늙은 까마귀는 앉았고 가을 연기가 엷구나 : 앞 사람의 시에, "한가롭게 남북으로 노니는 길은

멀고 먼데, 오가기를 북[梭]질하듯 무엇이 그리 바쁜고. 푸른 산기슭 끊인 곳에 불탑(佛搭)이 보이고,

가로지른 봉우리의 높은 곳에서 호상(胡床)에 앉았네. 마을 나무엔 늙은 까마귀가 앉았고 가을 연기는 엷고나,

여윈 말은 물가 언덕에 있는데 늦은 풀이 누르네. 피폐한 고을 쇠잔한 백성 정녕 민망스럽네. 1년간의 생업 농사ㆍ

누에고치 모두 흉년일세." 하였다.

 

대숲에 비내리고 소나무 바람불며 고개 중턱 누대일세 : 앞 사람의 시에, "대숲에 비내리고 소나무에 바람불며

고개 중턱 누대일세, 올라가 임해보니 모두가 맑고 그윽하네. 습하고 무더우며 붉은 구름의 여름을,

처량한 백로(白露)의 가을로 뒤집어 만드네."

 

[비고]

 

방면 동면(東面) : 끝이 10리. 일북(一北) : 처음은 5리, 끝은 30리. 이북(二北) : 처음은 3리, 끝은 33리.

삼북(三北) : 처음은 7리, 끝은 25리. 남면(南面) : 처음은 10리, 끝은 90리.

수동(水洞) :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70리. 안창(安昌) :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3리.

서면(西面) : 처음은 7리, 끝은 65리이다.

 

성지 금성(金城) : 서쪽으로 8리에 있는데 금성산이라 부르며 둘레는 2백 62보다.

 

태가현성(泰猳縣城) : 양진역(養珍驛) 북쪽에 있는데, 둘레는 1천 7백 96척이고 우물이 하나다.

○고려 정종(靖宗) 7년에 태가현에 성을 쌓았는데 1백 68간이었다.

 

안창현성(安昌縣城) : 대강역(大康驛) 서쪽에 있는데 군과의 거리가 23리다. 둘레는 28척이며 우물이 하나다.

성관장성(城串長城) : 북쪽으로 36리인 통천(通川)과 경계에 있는데 길이가 9백 82척이다.

○ 신라 성덕왕 3년에 하슬라도(何瑟羅道) 장정들을 징발하여 이 북경에 장성을 쌓았다.

 

진보혁폐 고성포진(高城浦鎭) : 동쪽으로 10리에 있는데 본조에서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다.

창고 읍창(邑倉)ㆍ외창(外倉) : 남쪽에 있다.

진도 남강진(南江津) : 남쪽으로 3리에 있다.

교량 백천교(百川橋) : 남강(南江) 상류에 있다.

누정 망선루(望仙樓) : 읍내에 있다. 해산정(海山亭) : 읍내에 있는데 서쪽으로는 금강(金剛)과 마주하고 동쪽

으로는 창해(滄海)가 보이고 남쪽으로는 장강(長江)이 빙 둘러있어 크고 작고 그윽하고 밝기가 장관이다.

○ 정자의 동쪽에 칠성암(七星岩)이 있는데 옥을 다듬어 세워 놓은 듯하다. 또 남쪽에는 고산대(高山臺)가 있

는데 남강(南江)이 그 아래로 흐른다.

 

대호정(帶湖亭) : 고산대(高山臺)에 있는데 추녀 아래로 푸른 강이 흐르는데 강 밖은 적벽(赤壁)이다.

사선정(四仙亭) : 서쪽으로 무선석(舞仙石)이 있는데, 암석이 기이하고 수려하다. 위에는 조그마한 비(碑)가

있는데 바로 삼일포의 단서비(丹書碑) 옆이다.

 

단유 상악(霜岳) : 신라 사전(祀典)에, "고성군(高城郡)에 붙여 있는데 명산으로 소사(小祀)에 붙여 있다."

하였다.

 

[주 D-001] 삼모(三茅) : 중국 하북성 구곡산(句曲山)에 모영(茅盈)·모충(茅衷)·모고(茅固) 3형제가 와 있었는데

세상에서 그들을 신선 삼모군(三茅君)이라 하였다 한다.

[주 D-02] 그 옛날 유안(劉安)은 옥골(玉骨)이 하늘에서 울 제 구름 사이에 닭ㆍ개들 서로 따랐다네. :

[주 D-03] 백이(伯夷)의 맑음 :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백이(伯夷)는 성인(聖人) 중에 맑은 사람이다.

[伯夷聖之淸]” 하였다.

[주 D-004] 정장역(鄭莊驛) : 한 나라의 정당시(鄭當時)라는 사람이 자기 집으로 오는 큰 길 몇 백리 안쪽에는

모두 마차를 대기시켰다가 찾아오는 손님을 태워왔다 한다. 그래서 그 마차가 대기한 곳을 정장역이라 하였다.

[주 D-005] 축건(竺乾) : 축(竺)은 서역(西域) 지금의 인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축건(竺乾)이라 함은 서역 하늘이라는 말인데, 즉 서역의 술법의 신이한 것이란 말이 된다.

 

 

통천군 通川郡

 

동쪽은 바닷가까지 9리, 남쪽은 고성군 경계까지 87리, 서쪽은 회양부(淮陽府) 경계까지 41리,

북쪽으로 흡곡현(翕谷縣) 경계까지 14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4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휴양군(休壤郡)이다 : 금뇌(金惱)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금양군(金壤郡)으로 고치고,

고려조 초기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충렬왕(忠烈王) 11년에 통주 방어사(通州防禦使)로 승격하였으며 본조

태종 13년에 준례에 의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으로 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 한 사람씩.

군명 휴양(休壤)ㆍ금뇌ㆍ금양(金壤)ㆍ통주(通州)ㆍ금란(金蘭) : 김극기집(金克己集)에 보인다.

 

성씨본군 김ㆍ이ㆍ정(鄭)ㆍ유(兪)ㆍ장(張)ㆍ조(趙)ㆍ임(林)ㆍ윤 : 모두 속(續). 최ㆍ맹(孟) : 모두 내(來).

이 : 경주(慶州). 임도(臨道) 최 : 자인(慈仁). 태(太) : 투화(投化)한 성이다. 임(林) : 속(續).

벽산(碧山) 임(林)ㆍ최ㆍ손. 운암(雲巖) 임(林). 채(蔡) : 금화(金化). 송(宋) : 낭천(狼川). 이 : 조종(朝宗).

 

풍속 어렴(漁鹽)에서 나는 이익으로 무역하여 먹는다 : 이첨(李詹)의 《상평보기(常平寶記)》에, "통주는 염분

이 많은 땅이므로 농사를 지어도 굶주림을 면치 못한다. 때문에 백성들은 오직 어렴의 이익으로써 무역하여

먹고 산다." 하였다.

 

산천 등화산(登禾山) : 고을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금란산(金幱山) : 고을 동쪽 12리에 있다.

벽산(碧山) : 고을 남쪽 16리에 있다. 추지령(楸池嶺) : 고을 서쪽 41리에 있으며 회양부(淮陽府) 경계이다.

찰파현(察破峴) : 고을 서쪽 40리에 있다. 바다 : 고을 동쪽 9리에 있다.

난도(卵島) : 고을 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물길이 50리이다. 사면으로 석벽이 깎아 서고 서쪽의 한 길 만이

바닷가로 통하며 그 물가에 겨우 고깃배 하나를 댈 수 있다. 해마다 3, 4월이 되면 바다의 새들이 무리로 모여

들어 알을 부화하고 기르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저도(猪島) : 고을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물길이 5리이다. 황도(荒島) : 고을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물길이

2리이다. 사도(沙島) : 고을 남쪽 바다 가운데 있으며 물길이 3리이다.

송도(松島) : 고을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물길이 4리이다.

옹천(甕遷) : 고을 남쪽 65리에 있다. 돌산이 바다로 들어갔는데 오솔길이 산 중턱을 둘렀으며, 말이 쌍으로 서

서 다니지 못한다. 아래에는 바다의 파도가 솟구쳐서 물을 뿜으니 그 곳에 서 있으면 몸이 어찔하고 떨리며 발

바닥이 시고 움직이지 않는다. 민간에서들 전하여 오는 말이, "옛날 왜구(倭寇)가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관군

(官軍)이 쳐서 모두 바다로 빠뜨려 넣으니 그래서 왜륜천(倭淪遷)이라 하였다." 한다.

 

○ 안축(安軸)의 시에, "높은 바위 바다에 임하여 절벽이 되니, 잔도(棧道)가 공중에 걸려서 바라보매 아득해지네.

내려다 보니 거센 물결 깊이를 알 수 없고, 쳐다보며 올라가니 위태로운 돌층계 미끄러워 발붙일 곳이 없네.

행인은 엉금엉금 두 손으로 기어오르고 여윈 말은 더듬더듬 네 발굽을 쭈구리네.

마부를 꾸짖는 왕공(王公)주D-001도 오히려 두려워하고 조심하겠고, 날 줄 아는 한(漢) 장사주D-02도 또한 엎

어지고 자빠지리. 험한 길 어찌 정형구(井陘口)주D-03에 비교하랴. 요해지(要害地)로는 함곡관(函谷關)주D-04

과 같은 것이리라. 들으니 도적의 군사들이 일찍이 이곳을 지났다는데, 용감한 장수의 탄환,

한 알이 없는 것 괴이하도다." 하였다.

 

금란굴(金幱窟) : 고을 동쪽 12리에 있다.

○ 안축(安軸)의 서문에, "통주 남쪽 교외에 꼭대기 벗어진 봉우리가 둥그스럼한 것이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했

는데, 그 봉우리의 깎아지른 벼랑에 굴이 있으니 넓이가 7, 8척은 되고 깊이 10여 보(步)는 된다.

쳐다보면 양쪽 벽이 나직하게 합하였고, 내려다보면 물 깊이를 알 수 없는데, 굴이 원래 깊고, 물기ā 젖어 있기

때문에 언제나 으슥하고 축축하며 바람이 일면 놀란 물결이 들이쳐서 갈 수가 없다.

서로들 전하여 오는 말이, '이 굴은 원래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이 항상 거처하는 곳이므로 사람이 지성으로

귀의(歸依)하면 보살이 바윗돌에 나타나고 푸른 새가 날아오니 이래서 신령하게 여긴다.' 한다.

내가 작은 배를 타고 굴에 도착했는데, 이 날은 다행히도 풍랑이 고요하게 멎었다.

굴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자세하게 그 형상을 보니 굴 구석에 석벽이 석 자쯤은 높고, 돌 무늬가 누렇고 아롱

다롱하여 중들의 이른바 가사(袈娑)의 금란(金幱)과 같고 면목견비(面目肩臂)의 몸체 형상은 없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돌 아래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다.

또 돌이 높고 그 빛이 좀 푸른 것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연대(蓮臺)라고 한다.

아, 이것이 과연 관음보살의 진신인가.

돌 무늬가 부처의 의복같다고 하여 존경한다고 하면 옳겠지만 이것을 가지고 관음보살의 진신이라고 한다면

나는 믿지 못하겠다. 내가 굴에 가는 날, 푸른 새가 있어 굴 안으로 날아 들었는데 뱃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닷새라.' 한다. 이것이 과연 관음보살의 영험인가. 내가 이 굴을 구경하고서 벌써 이런 마음이 있었는데,

어찌 푸른 새가 나타나는 영험이 있겠는가. 만일 이 새가 과연 관음보살의 영험을 보이는 것이라면 나의 이

마음이 진정 관음보살에 합치하는 것이요, 세상 사람들이 돌 무늬를 관음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미혹된 것이다.

그래서 시를 짓기를, '바다 위 푸른 벼랑에 굴구멍이 깊은데, 사람들 전하는 말이 여기 항상 관음보살 머문다고,

날아드는 새 날개의 푸른 깃이 비단같고, 나왔다 숨었다 하는 바위 무늬는 빛이 금같구나.

이것을 보고 모두들 참 성인 나타났다 하여 지금껏 헛되게 여러 어리석은 사람들 찾아오게 했네.

저 수월[水月觀音]의 장엄한 모습 뵈오려 한다면, 돌이켜서, 밝고 밝은 자기 본심에 비춰보소.' 하였다." 한다.

 

○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보살이 무엇 하러 돌 사이에 머물러서 우리 세속 사람들 고생스리 찾게 하는고.

구름ㆍ파도ㆍ연기ㆍ물결이 서로 방아찧듯 부딪치니, 소복(素服)과 화관(華冠)이 어찌 늙으리.

그는 적멸(寂滅)하여 형체의 나타남이 없음을 알겠으니, 어렴풋이 스스로 마음으로 볼 뿐이네.

소리로 구하고 빛으로 본다는 것이 벌써 허망된 것이요, 눈이 부딪치면 도(道)가 있다니, 더욱 어려운 것이네."

하였다.

 

○ 정추(鄭樞)의 시에, "금란굴 찾으려고 배를 바다 어구에 띄웠네. 넓은 물결 지축(地軸)을 감싸는데 신물(神物)

이 바윗돌을 보호한다네. 안개가 단청한 빛깔에 젖었고, 새기고 깎은 자리 천연으로 되었네. 연기 구름 속에

해오라기 내려오는 것 보니, 백의 관음(白衣觀音)을 상상할 수 있겠네." 하였다.

 

토산 오미자ㆍ인삼ㆍ지황ㆍ복령ㆍ석이ㆍ벌꿀ㆍ수포석(水泡石)ㆍ미역ㆍ복어ㆍ홍합ㆍ방어ㆍ문어ㆍ송어ㆍ광어ㆍ

황어(黃魚)ㆍ연어ㆍ대구어ㆍ고등어[古刀魚]ㆍ숭어ㆍ도루묵[銀口魚]ㆍ은어ㆍ해삼.

 

성곽 읍성 :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7백 66척이다. 안에는 우물 두 곳이 있으며 또 군량 창고가 있었는데,

지금은 절반이나 퇴락하였다. 신증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9백 40척이고, 높이 11척이다.

 

북산성(北山城) : 고을 북쪽 2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 5백 49척, 높이 3척이며, 안에 우물 한 곳이 있다.

지금은 절반이나 퇴락하였다.

 

봉수 금란성 봉수(金幱城烽燧) : 서쪽으로 회양부 추지령(淮陽府楸池嶺)에 응하고 북쪽으로 흡곡현 치공산

(歙谷縣致空山)에 응하며 남쪽으로 두백산(荳白山)에 응한다.

 

두백산 봉수 : 고을 남쪽 38리에 있다. 남쪽으로 술곶(戌串)에 응하고 북쪽으로 금란성에 응한다.

술곶 봉수 : 고을 남쪽 53리에 있다. 남쪽으로 고성군 영진산(高城郡靈津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두백산에

응한다.

 

누정 총석정(叢石亭) : 고을 북쪽 18리에 있다. 수십 개의 돌기둥이 바다 가운데 모여 섰는데 모두가 육면(六面)

이며 형상이 옥을 깎은 것 같은 것이 무릇 네 곳이다. 정자가 바닷가에 있어 총석(叢石)에 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민간에서들 전하기를, "신라 때의 술랑(述郞)ㆍ남랑(南郞)ㆍ영랑(永郞)ㆍ안상(安祥)의

네 신선이 이곳에서 놀며 구경하였기 때문에 이름하여 사선봉(四仙峯)이라 한다." 하였다.

 

○ 안축(安軸)의 기문에, "정자가 통주(通州)의 북쪽 20리쯤에 있는데 가로지른 봉우리가 뾰족하게 바다에 나온

것이 이것이다. 봉우리에 달린 벼랑에 있는 돌들이 즐비하게 서서 모난 기둥 같은데 돌의 둘레가 사방 각각 한

자쯤은 되며 높이는 5, 6길은 된다. 방정하고 곧고 평탄한 것이 먹줄 쳐서 깎아 세운 것같으며 대소의 차이가

없다.

또 언덕에서 10여 척은 떨어진 곳에 돌 네 덩이가 물 가운데 떨어져 서 있는데 사선봉(四仙峯)이라 한다.

모두 긴 돌로 몸체를 삼았고, 수십 가지를 합하여 한 봉우리가 되었다. 봉우리 위에는 난쟁이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뿌리와 가지가 늙고 쭈그러져서 몇 해나 묵었는지 알지 못한다.

사선봉에서부터 좀 북쪽으로 가면 돌의 형상이 또 변하는데, 혹은 길고 혹은 짧으며 혹은 기울고 혹은 가로 놓

이며 혹은 쌓이고 혹은 흩어져서, 실로 모든 것이 기괴하고 이상하다. 이것은 사실 재주 있는 공인(工人)이 정

으로 쪼아서 만든 것이 아니다. 대개 천지가 생긴 시초에 원기(元氣)가 모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 타고난 형상

에 공교한 것이 이렇게도 이상하니 괴이하다고 할 만한 일이며, 총석으로 이름한 것도 알맞은 것이다.

옛날 신라 시대에, 네 신선이 항상 이 정자에서 놀았고 그 무리가 비석을 세워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돌은 아직

있지만 글자가 떨어져나가 알지 못한다. 내가 작은 배를 타고 봉우리를 돌며 두루 구경하고서 말하기를, '이 돌

의 기괴한 것은 실로 천하에 없는 일이요, 이 정자만이 가진 물건이라.' 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그대가 일찍

이 천하를 두루 구경한 일이 없이 어찌 천하에 이런 돌이 없을 줄을 아는가.'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무릇 사방의 산경(山經) 지지(地志)를 기록하는 이가 천하의 물건을 다 찾아서 적었지만,

아직 이런 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며, 무릇 옛날의 기이한 병풍, 보배로운 장자(障子 옛날 방을 막기 위

하여 세운 것의 총칭)를 그리는 이가 천하의 물건을 다 그대로 옮겼지만 아직 이런 돌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

였다. 여기에 의하면 내가 비록 아직 천하를 두루 구경하지는 못하였지만 역시 앉아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하니, 혹자도 그렇게 여겼다. 대개 이 정자에는 비록 만물이 모두 갖추어져 있지만 산수의 아름다움으로 바람ㆍ

안개ㆍ물고기ㆍ새 등의 경치는 동해 가에는 한 곳도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어찌 이 정자만이 갖춘 것이겠는가.

오직 돌의 기괴한 것만은 이 정자가 독차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정자의 글을 기록한 이가 아직도 특별히 이 돌

을 말함이 없고, 산수간의 여러 가지 경치와 함께 같이 말하니 내가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긴다.

때문에 특별히 평가하여 이렇게 말하며 시를 짓기를, '일천 줄기의 괴상한 돌이 기이한 봉우리 이루었는데,

푸른 벼랑의 구름 안개는 수묵(水墨)이 짙구나. 물결이 바다에서 일어나니 눈ㆍ서리인 양 희게 넘치고,

신기(蜃氣)가 공중에 뜨니 누각이 중첩하네. 모호하게 글자 닮았으니 먼 옛날 비석인데, 굽고 구부리고 여윈 뿌

리 서렸으니 어느 시절의 소나무인가. 낚시터 가의 도롱이 삿갓 쓴 첨지는 앉아 서로 읍하고, 달 아래 신선은 불

러서 만날 것같구나. 시름없이 바라보니 신선 무리들 벌써 비 흩어지듯 했는데, 속인들 구름처럼 따라다니는 것

보기싫네. 어떻게 하면 정자 앞에서 갈매기 벗삼아 인간의 티끌 자취를 깨끗이 쓸어버릴꼬.' 하였다." 한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구구하게 봉생(鳳笙)에 비길 것 없이, 기괴한 그 형상 정말 이름하기 어렵네.

처음엔 한(漢) 나라 기둥주D-005이 공중을 버티고 선 것인가 했더니, 다시 진(秦) 나라 다리주D-06가 바다에

걸친가 하네. 새기고 깎아낸 귀신의 공이 너무도 재주를 부린 것이, 보호 유지하는 신의 힘이 가만히 정기를

모았네. 물결소리 어지럽게 부서져 북소리인 양 시끄러우니, 못 속의 용이 꿈에 몇 번이나 놀랐나.

 

○ 동쪽으로 바다에 노닐며 홍몽(鴻濛)한 곳 찾으니, 일만 물상이 눈앞에 다가드네. 돌은 난새의 저[笙]를 묶어

푸른 바다에 임하였고, 소나무는 공작의 일산을 날리며 창공을 향하네. 큰 소리가 귀를 스치니 고래 입의 물결

이요, 찬 기운이 살을 에듯하니 학 날개의 바람이네.

아마도 나의 전신은 속사(俗士)가 아닌가봐, 맑은 이 놀이가 사선(四仙)과 같은 것이.

 

○ 기이한 바위 바다에서 문득 떨기가 났으니, 여기서 정자가 돌로 하여 이름 얻은 것을 알겠네.

은하수 가에서 끌고 올 제면 박망(博望)을 따랐고, 산 위로 몰고 가면 초평(初平)주D-07을 좇으리.

신기한 공이 동남쪽 하늘의 빈 곳을 보충하나니, 속세의 의논이 갑(甲)이다 을(乙)이다 할 수 있으랴.

신선 무리들 그 옛날 찾아 놀았다고 괴이히 여기지 말라, 그윽하고 기이한 곳 찾는 것은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

라네.

 

○ 바다 위에 바람이 없으니 푸른 천을 깐 것 같은데, 기이한 바위 물에 걸터 서서 형세 더욱 기이하구나.

동쪽으로 해뜨는 것 보려고 몰아온 것인지, 북쪽 하늘 기울어진 것 보충할 때에 갈아 가지고 가지는 않았을까.

여산(廬山)의 삼량(三粱)을 무어라 기문지었나, 촉(蜀) 나라 냇가의 팔진(八陣)은 부질없이 그림 그렸네.

주D-08 어찌 여기에 깊은 바다 위에 묶음으로 서서 거마(車馬)로 탐승하여 날마다 잔치하며 즐기기만 하랴.

 

○ 금란(金蘭) 옛 고을이 바다에 걸쳤는데, 웅장한 구경거리 이 세상 어디 다시 있으리.

칠성대(七星臺) 위에 큰 집을 지었는데, 난간 마루 구름을 의지하여 단청이 떴네. 정자 앞의 무리진 몇 그루 돌

은 기이한 형세로 우뚝 서서 공중을 버티었네. 누가 신령한 뿌리가 깊은 땅을 찢어 아래로 일만 길 물결 속에

박힌 줄 알랴. 머리와 머리는 나란히 서서 자연히 묶여 있고, 하나하나 깍아 만들었으니 누가 쪼고 갈았나.

층층한 벼랑을 끼고 서서 우뚝한 모습 자랑하고, 자라 머리에 울퉁불퉁 방장(方丈) 봉래(蓬萊) 능가했네.

놀란 물결 타고 서서 공중으로 나는 듯, 붕새 날개 엇비슷 저 하늘에 가로질렀네.

아마도 진(秦) 나라 황제 바다에 다리 놓아 가서, 새벽 해 처음 동쪽에 돋는 것을 보았던가.

아니라면 직녀(織女 옥황상제의 손녀딸)의 베틀 아래 돌이 멀리 한(漢) 나라 사신 따라 성궁(星宮)에서 떨어졌

으리. 처음에는 하느님이 주재한 것 없다 하였는데, 어쩌면 새기고 그리기를 저렇게도 기이하게 하였는고.

재주 자랑했다 들여놓은 뒤에 깊이 해보(亥步) 밖에 감추었는데, 일만 형상의 괴이하고 특별함은 다함이 없네.

괵(虢) 나라 사람 도끼를 휘두른 것도 장자(張子)의 붓솜씨도 용하다 할 것 없으니, 여기서 하늘의 조화가 다

뛰어난 것 알겠건만, 인력으로는 형용하지 못하겠네. 몇 번이나 조정에서 법가(法駕 임금의 수레)를 명하여,

대악(岱嶽 태산)을 찾아 동쪽으로 태산에 올라 봉선(封禪)하였나. 금니(金泥) 옥검(玉檢)으로 공덕을 기록하며,

보배 석함을 깎아 만들기 두 번 세 번이었다. 가련하구나, 기이한 재주는 소용되지 못하고,

부질없게도 양후(陽侯 해신(海神))의 소리 지르고 성내며 아침저녁 와서 공격함만 받게 되누나." 하였다.

 

○ 신천(辛蕆)의 시에, "포기포기 푸르게 선 사선봉(四仙峯)은 개서 좋고 비 와도 기이하며, 담담하고 짙은 것

모두 좋아 삼면장천(三面長天)에 흰 물결이 닿았고, 일변낙조(一邊落照)엔 푸른 산이 중첩하구나.

백로들 강가의 여귀꽃에 서성거리고, 원숭이와 학은 바위 한 쪽에서 푸른 소나무 어루만지네.

가을달 봄바람 예전대로 무지개 깃발, 새깃 일산(신선의 행차)은 지금 만나기 어렵네. 몇 해동안이나 황폐하여

행객들 탄식했나, 몇 날 안가서 다시 지으니 사람들 기뻐 따랐네. 이끼 낀 비석 쓸고 지난일 물으려 하니,

수묵(水墨)의 희미한 자국 그 위에 보이네." 하였다.

 

○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어둠을 더듬어 새벽에 군옥봉(群玉峯 신선 있는 산)에 오르니, 바다의 태양이 오르

려 하여 구름 비단 짙구나. 산호 늙은 나무에 가지잎 떨어지고, 지주(砥柱)주D-09 놀란 물결에 연기 이슬 겹겹

이네. 세월은 현산(峴山) 머리 빗돌주D-10에 모호하고, 풍상은 아미산(蛾嵋山) 소나무주D-11에 뚜렷하구나.

창랑수(滄浪水) 맑으면 갓끈 씻는단주D-12 말을 말며, 찬란한 데 나서 때를 만나지 못하였다 노래하지 말게나.

늙은 중 일찍 와 혼자서 크게 부르짖고, 신선은 이미 갔는데 나는 누구 따라 놀거나. 봉우리 머리에 좀 섰다가

문득 말에 오르니, 속세 인간이라 높은 자취 어이 따르리."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바닷가 어느 곳에 푸른 봉이 없으랴만, 여기 와서야 짙은 티끌 인연 모두 다 씻는다.

기이한 바위 높게 섰는데 옥을 묶은 듯 나란히 서 있고, 옛 비(碑)가 부서져 떨어졌는데 이끼 봉(封)한 것이

겹겹이네. 꿇어서 신 받드는 일이야 어찌 황석공(黃石公)주D-13을 섬김같이 하랴, 비결을 잡아야만 정말

적송자(赤松子)를 오게 한다네. 노동(盧仝)주D-14은 부질없이 봉래산으로 가려한 것이, 이태백(李太白)은

잘못 요대(瑤臺)에서 만나려 하네.주D-15 문득 놀라니 선경에 이미 왔는데, 더구나 좋은 선비 있어 서로

함께 함이랴. 다른날 서울 길에서 괴롭게 머리 돌리면, 바람 먼지 막막하여 인간 자취 희미하리요." 하였다.

 

○ 정준(鄭悛)의 시에, "하늘과 땅이 만들어질 때에 돌이 봉우리 되니, 어둡고 희미하며 멀고 가까운 곳에 연기

안개 짙으네. 하늘이 천척(千尺)으로 나직하니 붉은 벼랑이 섰고, 바람이 일어나니 일만 이랑 푸른 물결이

겹겹하구나. 이끼 낀 용[莓龍]이 깎여 떨어지니 풀속의 비속이요, 생학(笙鶴)이 바윗가의 소나무에 나부끼네.

몸을 기울이고 오래 서서 세속을 벗어나려 생각하는데, 손꼽아 보면 장한 구경 몇 번이나 만났나.

중이 있어 그윽하고 오랜 일 좋아하여, 고적을 찾으며 서로 추궁하네.

우의(羽衣 신선의 옷) 하늘하늘 어디로 갔나, 흰구름 천년에 찾을 길이 없구나." 하였다. 신증 성현(成俔)의 시에,

"부용을 옥으로 깎아, 기이한 봉우리 만들어 만 길이나 높이 선 곳에 구름 아지랑이 짙네, 긴 바람이 물결을 몰아

눈꽃이 치솟는데, 하늘을 흔드는 은집이 겹겹이 밀려오네. 푸른 벼랑 뚝 끊겼으니 그 아래 한량없이 깊고,

외로운 정자 얼른얼른 높은 소나무 의지했네. 봉래와 약수(弱水)가 까마득 멀기도 한데,

안기(安期)와 연문(羨門 옛날 선인)을 만날 것도 같네.

어찌하면 풍이(馮夷 물귀신)가 북을 치고 복비(宓妃 물의 신)가 춤을 추어, 구름 깃발 깃 일산이 와서 서로

따르나. 천년 돌비에 거친 이끼 덮었으니, 사선이 왕래하던 그 자취 찾을 길 없네." 하였다.

 

○ 채수(蔡壽)의 시에, "금자라 머리에 부용봉(芙蓉峯)을 이었는데, 괴이한 돌 깎아내고 안개구름 짙으네.

망망(茫茫)한 네 신선은 물을 곳이 없고, 묘묘(渺渺)한 약수(弱水)는 2천 겹이나 되네. 다만 보이는 것, 천년이나

글자 닳은 동강난 비석이 있고, 또한 만년이나 되어도 자라지 않는 외로운 소나무 있네. 지초 수레바퀴와 깃일산

(신선이 행차)은 다시 보지 못하는데, 교인(鮫人 인어)과 만자(蠻子)주D-16 때로 만나네.

세상 티끌에는 어떤 자들이냐, 이내 몸 흰 갈매기와 서로 좇아 논다네. 기이한 구경 눈에 가득 저버릴 수 없으니,

호탕한 노래 부르며 옛사람의 놀이 계승하려네." 하였다.

 

신증 청허루(淸虛樓) : 동헌(東軒) 북쪽에 있다.

○ 손순효(孫舜孝)의 시에, "칠휴거사(七休居士 손순효의 호)가 시 읊기 좋아함이 아니네. 시는 칠휴거사 관물

(觀物)할 때에 지어지는 것이라네. 푸른 멧부리 영롱(玲瓏)하여 지축(地軸)에 서렸는데, 푸른 바다는 넓고 멀어

하늘가에 닿았네. 풍운의 변화하는 모습을 그 누가 믿으리, 날고 뛰는 묘리(妙理)는 나만이 안다네.

청허한 내 마음을 기름이요, 칠휴거사가 시 읊기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하였다.

 

학교 향교 :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거풍역(巨豐驛) :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조진역(朝珍驛) : 운암현(雲岩縣)에 있다.

등로역(藤路驛) : 임도현(臨道縣)에 있다. 중대원(中臺院) : 추지령(楸池嶺) 아래에 있다.

통자원(通慈院) : 고을 남쪽 25리에 있다. 장정원(長正院) : 고을 남쪽 89리에 있다.

 

불우 용공사(龍貢寺) : 추지령 동쪽 산록(山麓)에 있다. 묘길상사(妙吉祥寺) : 벽산(碧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등화산(登禾山)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임도폐현(臨道廢縣) :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원래 고구려의 도림현(道臨縣)인데 조을포(助乙浦)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금양군(金壤郡)에 속한 현으로 삼았으며 고려조 및 본조에서도 그대

로 하였다.

 

벽산폐현(碧山廢縣)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원래 고구려의 토상현(吐上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제상(隄上)

으로 고쳐서 금양군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속하게 하였다.

 

운암폐현(雲岩廢縣) : 고을 남쪽 50리에 있다.

원래 고구려의 평진현(平珍縣)이며, 천현(遷縣)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편험(偏險)으로 고쳐서 고성군

(高城郡)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조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와서 속하게 하였다.

 

벽산성(碧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천 1백 25척이며 높이 6척인데 지금은 절반이나 퇴락하였다.

금란산성(金幱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3백 72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황고개산성(黃古介山城) : 고을 북쪽 2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 1백 75척, 높이 4척인데,

지금은 절반이나 퇴락하였다.

 

명환고려 김수자(金守雌) : 과거에 합격하고, 금양현위(金壤縣尉)가 되었다.

본조 이첨(李詹) : 홍무(洪武) 4년(공민왕 20년)에 지주사(知州事)가 되었는데 상평보(常平寶)를 설치하여

흉년에 대비하였다.

 

이작(李作) : 영락(永樂) 무자년(태종 8년)에 지군사가 되었는데, 학교를 중수하고, 농사를 권장하며 부역을

가볍게 하였다.

 

인물본조 최운해(崔雲海) : 개국 초기의 명장이다. 직위가 승추부사(承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장(襄莊)

이다.

 

최윤덕(崔潤德) : 운해의 아들이며 세종조의 명장이다.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을 정벌하고,

군사를 상함이 없이 돌아왔으며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며 세조 묘정(廟庭)에 배향

하였다.

 

제영 외로운 성엔 초목만 깊구나 : 김극기의 시에, "먼 변방 요새에 풍진이 조용하니, 외로운 성엔 초목만 깊구나.

놀란 물결은 북쪽 바다에 뛰놀고, 지는 해는 서산에 걸렸네." 하였다.

 

소나무 돌층계 비늘처럼 덮였는데 높았다 낮았다 하네 : 정준(鄭悛)의 시에, "소나무 돌층계 비늘처럼 배열하여

높았다 낮았다 하는데, 푸른 물결 만고에 저 멀리 아득하네.

해당화 여기저기에 돌아가는 말을 멈추니 번화한 꽃송이 말발굽에 달려붙는 것 아껴야 할 일일세." 하였다.

 

고래 물결[鯨波] 조대(釣臺) 앞에 넓고 넓으며 : 안축(安軸)의 시에, "난간을 의지하여 동쪽을 바라보니 바다가

하늘에 닿았는데, 둥구나무 마을 모습 몇 해나 되었는지. 학의 길은 선도(仙島) 밖에 멀고 멀며,

고래 물결은 조대 앞에 넓고 넓구나." 하였다.

 

만 이랑의 유리는 바닷빛이 밝구나 : 이색(李穡)의 시에, "천층의 산색은 구름 모습 섞였고,

만이랑의 유리는 바닷빛이 밝구나." 하였다.

 

푸른 물결 흰새 해당화 길이네 : 정구(鄭矩)의 시에, "푸른 물결 흰새 해당화 길이네.

얼굴에 스치는 화신풍(花信風)이 차지 않구나." 하였다.

 

산구름은 굽은 난간을 지나네 :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바닷달은 빈 누각에 떠오르고,

산구름은 굽은 난간을 지나네." 하였다.

 

꿈은 저 하늘 한쪽에 끊겼네 : 고조기(高兆基)의 금양(金壤)에서 묵은 시에, "새는 서리 수풀 새벽에 지저귀고

바람은 나그네 자리 졸음을 깨우네. 처마에는 반쪽 달이 지려하는데 꿈은 저 하늘 한쪽에 끊겼네." 하였다.

 

자던 구름 다 돌아가니 변방 하늘이 높구나 : 앞의 사람 운암현(雲岩縣) 시에, "바람이 호산(湖山)에 드니 일만

구멍에 바람부는데, 자던 구름 다 돌아가니 변방 하늘이 높았구나. 푸른 매 바로 백천 척이나 높이 나니 어느

작은 티끌인들 그 우모(羽毛)를 더럽히리." 하였다.

 

[비고]

 

연혁 영종(英宗) 38년 현으로 강등시켰다 : 지아비를 죽인 죄인 때문이다. 47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군내(郡內) : 끝이 10리. 순달(順達) :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

용연(龍淵) :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수념(守念) :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

벽산(碧山) :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40리. 양원(養院)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산남(山南) :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 임도(臨道) : 남쪽으로 처음은 35리, 끝은 85리.

 

성지 벽산현성(碧山縣城) : 둘레가 2천 1백 25척. 황현성(黃峴城) : 북쪽으로 2리에 있는데 길이가 1백 45척.

금란성(金蘭城) : 동쪽으로 10리에 있는데 둘레가 1천 3백 72척.

천정수(泉井戍) : 남쪽으로 53리에 있는데 지금 수곶(戍串)이다.

창고 읍창(邑倉). 외창(外倉) : 남쪽으로 50리인 운암현(雲岩縣)에 있으며 동창(東倉)이라 칭한다.

토산 소금.

 

[주 D-001] 왕공(王公) : 한 나라의 왕양(王陽)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벼슬하여 익주자사(益州刺史)가 되어

사천(四川)으로 가는 길에 앙래현(卬崍縣) 구절판(九折坂)이라는 험한 길에서, “부모의 유체를 가지고 그까짓

녹(祿)을 위하여 이런 험한 길을 갈 수 있으냐.” 하고, 돌아와서 벼슬을 사면하였다 한다.

[주 D-02] 한(漢) 장사 : 한 나라 문제(文帝) 때 이광(李廣)이라는 사람이 우북평태수(右北平太守)로

흉노족(匈奴族)과 싸우는데 매우 날래고 용감하였으므로 흉노는 그를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별명지었다.

[주 D-03] 정형구(井陘口) : 태항산에 있는 고개이니, 산서성(山西省)과 하북성(河北省) 교통의 중요한 길인데

험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주 D-04] 함곡관(函谷關) : 하남성(河南省)에서 섬서성(陝西省)으로 통한 요새이다.

[주 D-005] 한(漢) 나라 기둥 : 한 나라 광무제(光武帝) 때에 월남지방을 정복하고 그곳에 구리로 기둥을

만들어 세워서 기념하였다 한다.

[주 D-06] 진(秦) 나라 다리 : 섬서성과 사천성 사이를 통하는 검각산이 너무 험하여 진 나라에서 사닥다리를

놓아 길을 내었다 한다.

[주 D-07] 초평(初平) : 황초평(黃初平)이라는 사람이 산중에서 양을 기르는데 뒤에 그 형이 가서 양을 찾으매

양이 없었다. 초평이 채찍으로 돌을 때리니 돌이 모두 양으로 변하였다.

[주 D-08] 촉(蜀) 나라 냇가의 팔진(八陣)은 부질없이 그림 그렸네. : 호북성(湖北省)에서 양자강 물길을

따라서 사천으로 가면 어복포(魚復浦)라는 곳에 돌무더기가 여덟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제갈량(諸葛亮)이

쌓은 팔진도(八陣圖)라 한다.

[주 D-09] 지주(砥柱) : 황하(黃河) 물이 산간지대에서 평지로 나오는 곳에 용문(龍門)이란 곳이 있고 그곳

강중에 돌이 서 있는데 세상에서 그것을 지주(砥柱)라 한다.

[주 D-10] 현산(峴山) 머리 빗돌 : 현산(峴山)은 호북성 양양(襄陽)에 있는 산인데, 예전 삼국 시대 양호(羊祜)

라는 사람이 그곳 총독으로 있을 적에 그 현산에서 놀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그가 죽은 뒤에 그 현산 꼭대기에 그의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의 유덕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비를 보고

눈물을 흘렸으므로 그 비 이름을 눈물짓는 비[墮淚碑]라고 부른다.

[주 D-11] 아미산(蛾嵋山) 소나무 : 아미산(蛾嵋山)은 사천(四川)에 있는 명산이다. 그러므로 명산의 소나무

라고 말한 것이다.

[주 D-12] 창랑수(滄浪水) 맑으면 갓끈 씻는단 : 옛사람의 노래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는다.” 하였는데, 그 창랑이라는 말은 세상에 비유한 것이니, 세상 형편 따라서

나의 처신을 가진다는 말이다.

[주 D-13] 황석공(黃石公) : 예전 신선으로서 한 나라 장량(張良)의 스승이다.

[주 D-14] 노동(盧仝) : 진(秦) 나라 사람으로 진시황에 건의하여 삼신산에서 불사약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구하지 못하고 도망갔다.

[주 D-15] 이태백(李太白)은 잘못 요대(瑤臺)에서 만나려 하네. : 이태백의 시에, “양귀비 같은 미인은 마땅히

선녀들이 있는 요대에서 만나지.[會向瑤臺月下逢]”라는 시구가 있다.

[주 D-16] 교인(鮫人 인어)과 만자(蠻子) : 상어사람[鮫人]이나 만자(蠻子)는 모두 남방의 열대에 있는 사람을

형용한 것이다.

 

 

울진현 蔚珍縣

 

동쪽은 해안까지 9리, 서쪽은 경상도 안동부(安東府) 경계까지 81리, 남쪽은 평해군(平海郡) 경계까지 48리,

북쪽은 삼척부(三陟府) 경계까지 44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5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우진야현(于珍也縣)이다 : 고우이군(古亏爾郡)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을 삼았으며 고려조에서는 강등하여 현으로 하고 영(令)을 두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1명.

군명 선사(仙槎)ㆍ우진야ㆍ고우이.

 

성씨본현 임(林)ㆍ장(張)ㆍ정(鄭)ㆍ방(方)ㆍ유(劉). 민(閔) : 영천(榮川).

 

신증풍속 농상(農桑)을 힘쓴다.

 

산천 안일왕산(安逸王山) : 고을 서쪽 4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반이산(潘伊山) : 고을 서쪽 58리에 있다.

잠산(蠶山) : 고을 남쪽 41리에 있다. 백암산(白岩山) : 고을 서쪽 46리에 있다.

숙을비산(宿乙庇山) : 고을 북쪽 40리에 있다. 전반인산(全反仁山) : 고을 남쪽 22리에 있다.

죽진산(竹津山) : 고을 동쪽 8리에 있다. 항출도산(恒出道山) : 고을 북쪽 39리에 있다.

가을현(加乙峴) : 고을 북쪽 44리에 있다. 바다 : 고을 동쪽 8리에 있다.

죽변곶(竹邊串) : 고을 북쪽 20리에 있다. 약사진(藥師津) : 고을 동쪽 8리에 있다.

 

전천(前川) : 고을 남쪽 1리에 있다. 근원이 안일왕산에서 나와 수산천(守山川)에 합친다.

수산천 : 고을 남쪽 11리에 있다. 울진포(蔚津浦)라고도 한다. 골장진(骨長津) : 고을 북쪽 11리에 있다.

 

우산도(于山島)ㆍ울릉도(鬱陵島) : 무릉(武陵)이라고도 하고, 우릉(羽陵)이라고도 한다. 두 섬이 고을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바람과 날씨가 청명하면

봉우리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 일설에는 우산ㆍ울릉

이 원래 한 섬으로서 지방이 백 리라고 한다.

신라 때에 험함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는데 지증왕(智證王) 12년에 이사부(異斯夫)가 아슬라주(阿瑟羅州) 군주

(軍主)가 되어, 우산국(于山國) 사람들은 미욱하고 사나우니 위엄으로 항복하기 어렵고, 계교로 복종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나무로 만든 사자를 많이 전함(戰艦)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猛獸)들을 놓아서 밟아 죽이리라." 하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 13년에 그 섬의 사람이 백길토두(白吉土豆)로 와서 토산물을 헌납하였다.

의종(毅宗) 13년에 왕이 울릉도가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백성이 살 만하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 감창

(溟州道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였는데 유립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섬 중에 큰 산이 있는데,

산마루에서 동쪽으로 바다까지는 1만여 보(步)요, 서쪽으로는 1만 3천여 보, 남쪽으로는 1만 5천여 보, 북쪽으

로는 8천여 보이며 촌락터 일곱 곳이 있고, 혹 돌부처ㆍ무쇠종ㆍ돌탑이 있으며

시호(柴胡)ㆍ고본(藁本)ㆍ석남초(石南草)가 많이 납니다." 하였다.

후에 최충헌(崔忠獻)이 헌의(獻議)하여 무릉도에 토지가 비옥하고, 진기한 나무, 해산물이 많이 난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였는데, 집터, 깨어진 주춧돌이 완연하여, 어느 시대에 사람이 살 던 것인지 몰랐다.

여기서 동쪽 고을 백성들을 옮겨다가 채웠다. 사신이 돌아오면서, 진기한 나무와 해산물을 많이 가져다 헌납

하였다.

그 후 자주 풍파로 인하여 배가 엎어지고, 사람이 많이 상하니 그만 거기서 살던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였다.

본조 태종 때에, 유리하는 백성이 그 섬으로 도망한 자가 매우 많다는 말을 듣고,

다시 삼척(三陟) 사람 김인우(金麟雨)를 명하여 안무사(按撫使)를 삼아서 돌아오게 하고 그 땅을 비워두었다.

인우의 말이, "토지가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다릿목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같고 복사의 크기는 됫박

만한데, 모두 물건이 다 이렇다." 하였다. 세종 20년에 울진현 사람 만호(萬戶) 남호(南顥)를 보내어서 수백

사람을 데리고 가서 도망해 가 있는 백성들을 수색하여 김환(金丸) 등 70여 명을 잡아가지고 돌아오니 그 곳

땅이 그만 비었다. 성종 2년에, 따로 삼봉도(三峯島)가 있다고 알리는 자가 있어, 박종원(朴宗元)을 보내어 가서

찾아보게 하였는데, 풍랑으로 인하여 배를 대지 못하고 돌아왔다. 같이 갔던 배 한 척이 울릉도에 정박하였다가,

큰 대나무와 큰 복어를 가지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섬 중에 사는 사람이 없다." 하였다.

 

온천 : 고을 북쪽 주인리(周仁里)에 있는데 물이 미지근하다. 신증 삼방산(三方山) : 고을 서쪽 40리에 있다.

용담(龍潭)이 있는데 비를 빌면 들어준다.

 

토산 궁간상(弓幹桑) : 삼척(三陟) 땅 경계에서 난다. 칠(漆)ㆍ잣ㆍ오미자ㆍ자초(紫草)ㆍ벌꿀ㆍ송이ㆍ석이ㆍ

인삼ㆍ지황ㆍ복령ㆍ백화사(白花蛇). 대화살[竹箭] : 죽변곶(竹邊串)에서 난다. 황어(黃魚)ㆍ문어ㆍ연어ㆍ

대구ㆍ도루묵[銀口魚]ㆍ방어ㆍ넙치ㆍ고등어ㆍ적어(赤魚)ㆍ송어(松魚)ㆍ은어ㆍ복어ㆍ꽃게ㆍ홍합ㆍ미역ㆍ

김[海衣]. 신증 해삼ㆍ당귀(當歸).

 

성곽 읍성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천 5백 66척, 높이 9척이며, 성 안에 우물 네 곳이 있다.

관방 울진포영(蔚珍浦營) : 수군 만호 한 명이 있다. 신증 정덕(正德) 임신년(중종 7년)에 성을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백 50척, 높이 11척이다.

 

봉수 전우인산 봉수(全友仁山烽燧) : 남쪽은 평해군(平海郡) 사동산(沙銅山)에 응하고,

북쪽은 죽진산(竹津山)에 응한다.

죽진산 봉수 : 북쪽은 죽변곶에 응하고, 남쪽은 전우인산에 응한다. 죽

변곶 봉수 : 북쪽은 항출도산(恒出道山)에 응하고, 남쪽은 죽진산에 응한다.

항출도산 봉수 : 북쪽은 삼척부 가곡산(可谷山)에 응하고, 남쪽은 죽변곶에 응한다.

 

신증누정 능허루(凌虛樓) : 객사 동쪽에 있다.

○허종(許琮)의 시에, "소년 시절에 서검(書劒)으로 변방에서 늙었는데, 이 날에 동쪽에서 노니 또한 기이한 일

이구나. 해에 닿은 신기루(蜃氣樓)는 바다를 가로질러 섰는데, 바람을 치는 붕새 날개가 구름이 드리운 것 같구

나.

한 잔 술 가져오라 해서 긴 날을 보내고, 봄빛을 가져다 작은 시를 쓰네. 우역(郵驛)의 아전이 와서 거마(車馬)가

왔다 하니, 난간을 내려오려다가 다시 지체하네." 하였다.

 

○성현(成俔)의 시에, "한 조각 외로운 성이 바다 모퉁이 베개 삼았는데, 한 구역 풍경 물색 정말로 맑고 기이하네.

누대가 높으니 주위의 멧부리는 천 겹이나 푸르고, 구름이 걷히니 긴 하늘은 사면에 푸르게 드리웠네. 바람 평상

에 건(巾)을 젖혀서 쓰니 짧은 터럭 날리는데, 돌 난간에 창을 비껴 놓고 새 시를 짓네. 술항아리 열고 또 다시

얼큰하게 취하는데, 동쪽 하늘 돌아보니 달이 더디 떠오누나." 하였다.

 

○권륜(權綸)의 시에, "한 조각 외로운 성이 바닷가에 눌렸는데, 눈 앞의 풍경 맑고 기이도 하구나.

강을 따라 초가집에 밥 짓는 연기 일어나고, 난간에 마주한 푸른산에 구름발이 드리웠네. 술잔 들며 때때로 달

에게 묻기도 하고, 회포를 풀며 날마다 시 안 읊을 때가 없구나, 늘그막에 절월(節鉞) 가지고 와서 무슨 일을

하였나. 홀(笏)을 버리고 전원(田園)으로 돌아가는 일 내 어이 이리도 더디나." 하였다.

 

학교 향교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흥부역(興富驛) : 고을 북쪽 32리에 있다. 청심당(淸心堂)이 있다.

덕신역(德神驛) : 고을 남쪽 45리에 있다. 영희정(迎曦亭)이 있다.

 

○이곡(李穀)의 시에, "해가 부상에서 떠서 두 장대[竿]나 올라왔는데, 한쪽에는 북두칠성이 아직도 비꼈네.

바람에 갈리고 비에 씻겼으니 털끝도 깨끗하고, 안개 흩어지고 구름 걷혔으니 안계(眼界)도 넓구나. 혼자 생각

해도 우스운 일, 세상 물정은 바닷속처럼 알 길 없는데, 학술을 가르침은 물결 볼 줄 알겠네.

분분하게 남쪽 북쪽에 오가는 사신 많은데, 이곳을 보통 역사(驛舍)로 보지 말게나." 하였다.

 

수산역(守山驛) : 고을 남쪽 12리에 있다. 가을원(加乙院) : 고을 북쪽 40리에 있다.

두천원(斗川院) : 고을 서쪽 25리에 있다. 소조원(召造院) : 고을 서쪽 65리에 있다.

광비원(廣庇院) : 고을 서쪽 90리에 있다.

 

불우 불귀사(佛歸寺) : 백암산(白岩山)에 있는데 신라 중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천량암(天糧菴) : 백련산(白蓮山)에 있다. 민간에서 전하여오는 말이, "원효(元曉)가 이절에 거주할 때, 바윗돌

사이에 구멍이 있고 쌀이 나왔기 때문에 이름하였다." 한다.

 

진관사(眞觀寺) : 백암산에 있다. 검산사(劒山寺) : 백련산에 있다. 정림사(淨林寺) :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성류사(聖留寺) : 백련산에 있다. 고을과의 거리는 남쪽으로 17리이니 곧 성류굴(聖留窟)이며 옛날 이름은

탱천굴(撑天窟)이다.

○이곡(李穀)의 기에, "절이 돌벼랑 아래 긴 시내 위에 있는데, 벼랑 돌이 벽처럼 천 자는 섰으며 벽에 작은 굴이

있는데 성류굴이라 한다. 굴의 깊이를 알 수 없으며 또 으슥하고 깊어서 촛불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절의 중으로 하여금 횃불을 들고 인도하게 한다. 또 뱃사람 중 출입하기에 익숙한 이로 앞서고 뒤서게 하고 들어

간다. 구멍 아구리가 좁아서 무릎으로 4, 5보(步)를 가야 좀 넓고, 일어서서 또 두어 보를 가면 끊어진 벼랑이 세

길은 된다. 사다리를 놓고 내려가면 점점 평탄하고, 높고 넓어지는데 수십 보를 가면 평지가 있어 두어 묘(畝)는

되고, 좌우쪽으로 돌 형상이 기이하다. 또 열 보쯤 가면 구멍이 있는데 북쪽 구멍 아구리가 더욱 좁아서,

 엎드려 나가는데 아래는 진흙물이므로 자리를 깔아서 젖는 것을 방지한다. 7, 8보를 가면 좀 트이고 넓어지는데

좌우쪽이 더욱 기이하여 혹은 깃발 같기도 하고 혹은 부처 같기도 하다.

또 십수 보를 가면 돌들이 더욱 기괴하고 그 형상을 무엇인지 모를 것이 더욱 많으며, 그 깃발 같고, 부처같은

것이 더욱 길고 넓고, 높고 크다. 또 4, 5보를 가면 불상 같은 자도 있고, 고승(高僧) 같은 자도 있으며 또 못물이

있는데 매우 맑고 넓이가 두어 묘(畝)는 될 만하며, 그 가운데 돌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수레바퀴 같고,

하나는 물병 같은데 그 위와 곁에 드리운 깃발이나 일산같은 것이 모두 오색이 영롱하다.

처음에는 돌젖[鍾乳]이 엉긴 것으로 그렇게 굳지 않았는가 생각되어 지팡이로 두드리니 모두 소리가 나며 그

모양이 길고 짧은데 따라서 맑고 흐린 것이 편경(編磬)같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못을 따라 들어가면 더욱 기괴

하다.' 하는데, 나는, '이것이 세속 사람으로서 함부로 구경할 것이 아니라.' 하며, 재촉하여 나왔다.

그 양쪽에는 또 구멍이 많은데 사람들이 잘못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고 한다. 그 사람에게, '굴의 깊이가 얼마나

되느냐.' 물으니, 대답이, '아무도 그 끝에까지 가본 사람이 없다.' 하며, 혹은, '평해군(平海郡) 바닷가에 이를 수

있다.' 하니, 대개 여기서 20여 리이다. 처음에는 연기 묻고 더러워질까 해서 하인들의 의복과 수건을 빌려가지고

들어갔는데 나와서 옷을 갈아 입고, 세수 양치질 하고 보니 꿈에 화서국(華胥國)에 가서 놀다가 문득 깨달은 것

같았다.주D-001 일찍이 생각해보니 조물(造物)의 묘함을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이 많은데 내가 국도(國島) 및 이

섬에서 더욱 많이 보았다. 그것이 정말 자연히 이루어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짐짓 만든 것인가. 그것을 자연히

된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도 그 형체 변화의 교묘함이 이렇게까지 되는 것인가. 그것이 또 짐짓 만든 것이라면

귀신의 공력으로 천만세를 두고 두고 할지라도 또한 어찌 이렇게까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였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성 안 북쪽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해곡현(海曲縣) :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원래 고구려의 파조현(波朝縣)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쳐 울진(蔚珍)의 관할 현으로 삼았다." 하였는데, 지금 자세하지 않다.

 

취운루(翠雲樓) : 고을 남쪽 8리에 있다.

○안축(安軸)의 기문에, "내가 황경(皇慶) 임자년(충성왕 4년) 봄에, 한 필 말에 몸을 의지하여 선사군(仙槎郡)

에서 놀았다. 고을 남쪽 흰모래 평평한 둑에 어린 소나무 수천 그루가 있는데 다북다북 사랑스럽다.

내가 함께 노는 읍 사람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 '저 소나무들이 자라기를 기다려서 정자를 여기에 지으면 그

운치가 한송(寒松)ㆍ월송(越松)의 두 정자와 서로 대등할 것이다.' 하였다. 그 후 읍 사람이 나를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나는 반드시 그 소나무들이 잘 자라는지를 물었다. 태정(泰定) 병인년(충숙왕 13년)간에, 존무사(存撫使)

박공(朴公)이 선사군에 새 누대를 짓는데 풍치가 아주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그 장소를 물으니 곧 내가 옛날 본

그 어린 소나무들이 있던 곳이다.

항상 한 번 이 누대에 올라서 나의 옛날의 뜻을 풀어볼 것을 생각하였지만 어찌 할 수가 없던 터였다.

그런데 지금 다행히도 이 지역을 맡게 되어, 다시 이 누대에 오르니 그 맑고 그윽한 경치야말로 번잡하고 시끄러

운 세속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하던것들이었다. 대저 누정(樓亭)을 짓는 것이 높고 넓은 데 있지 않으면 그윽하고

깊은 데 있는것으로서, 저것이 싫으면 이것을 생각하고, 이것이 싫으면 저것을 생각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의

마음이다. 무릇 광동지방의 누대나 정자가 모두 높고 환한 곳에 있기 때문에 유람하는 사람들이 눈은 거친 파도

에 실증이 나고, 몸은 짙은 안개에 지치게 된다. 그런데 이 다락에 올라서 그 맑고 그윽한 운치를 얻게 되면,

들판을 달리던 피곤한 짐승이 밀림 골짜기에 들어간 것 같고, 공중에 나는 지친 새가 무성한 숲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지극한 즐거움이 있다. 이것이 아마도 박공이 이 다락을 지은 뜻일 것이다. 박공으로 말하면,

그 높은 정취(情趣)와 투철한 견식이 나같이 용렬하고 비루한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닌데, 이 다락의 지은 것이

우연히도 나의 지난날의 옅은 소견과 서로 합하였으니 내가 기이한 경치 신비한 지경에 대하여 안목이 있다 하여

도 괴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예전 놀던 일을 다시금 생각해 보면 지금 10여 년이나 되었으니,

소나무의 어리던 것이 모두 벌써 자랐을 것이다. 대저 사람으로서, 소나무가 어린 것을 보고 또 그 성장해진 것을

보면 생각이 없을 것이랴 하고 차마 그대로 말없이 지나칠 수가 없어, 이것을 써서 기(記)로 한다." 하였다.

그 시에, "성 남쪽에 새로 한 층루(層樓)를 지었는데, 나무 심어 그늘 이루니 지경이 더욱 그윽하구나.

정오의 해가 공중을 불태워도 붉은빛 새어들지 않고, 여름 그늘이 난간을 둘러싸니 푸른빛 흐르는 것같다.

친구가 멀리 있으니 누구와 함께 구경하나, 역마가 가기를 재촉하는데 잠깐 머무네.

예전 보던 어린 소나무들 지금 이미 성장해졌는데, 올라와 구경하니 옛날 놀던 일 감회 깊구나." 하였다.

 

능허루(凌虛樓) : 옛날에는 객사 안에 있었다.

안일왕 산성(安逸王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 7백 53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고읍성(古邑城) : 고을 동쪽 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주위가 1천 2백 10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명환고려 김중권(金仲權) : 후에 이름을 시정(施政)으로 고쳤다. 과거에 뽑히고, 현위(縣尉)가 되었다.

서침(徐忱) : 소를 타고 다니며, 농사를 권장하였다.

본조 어세린(於世麟) : 고려조 말기에, 해마다 왜구(倭寇)의 피해가 있으니 백성들이 흩어져서 촌락이 빈터가

되었다. 홍무(洪武) 신미년(공양왕 3년)간에 세린이 현령이 되어, 성보(城堡)를 수리하고, 남은 백성들을 안무

(安撫)하니 흩어졌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신증 권임(權任)ㆍ강응겸(康應謙).

 

인물고려 장천익(張天翼) : 벼슬이 영록대부 밀직학사(榮祿大夫密直學士)까지 되었다.

본조 장순열(張巡烈) : 고읍성(古邑城)이 평지에 있었는데, 홍무(洪武) 병자년(태조 5년)에 왜구에게 피해를

당했다. 때문에 순열이 주장하여 읍을 산성으로 옮겨 지금까지 거처한다. 벼슬이 가선검 한성윤(嘉善檢漢城尹)

까지 되었다.

 

제영 황연(怳然)히 기수(淇水)주D-002에 노는 것 같네 : 김극기(金克己)의 대[竹]를 읊은 시에, "좋은 대 서너

이랑에, 조만(早晩)에 뿌리를 옮겨 심었네. 두사(杜舍)에 처음으로 벽을 뚫었고, 한정(韓亭)이 점점 담 밖에

보이네. 물건의 생장이 원래 자연히 되는 것이니, 하늘의 뜻을 무어라 말하오리. 황연히 기수에 노는 것 같은데,

우거져 푸르러 동산에 가득하네." 하였다.

 

일백 번 변한 흥망의 자취는 고목(古木)만이 남았네 :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다락에 올라 글귀를 생각하니

흥이 끝없는데, 부끄러운 일, 나의 시낭(詩囊) 오래도록 비어 있었네. 일백 번 변한 흥망의 자취는 고목만이

남았는데, 다시 와서 잠깐사이 또 봄바람이네. 성류굴(聖留窟)은 으슥하고 어두운 중에 찾지말고,

신선 떼[槎]를 까마득히 멀리 띄우지도 말게나. 여기에 높고 밝은 형승지(形勝地) 있으니,

이내 마음 들의 꿩이 새장 속을 벗어난 것 같구나." 하였다.

 

수풀 저 건너 옛 성첩 바다에 뜨는 해요 : 정추(鄭樞)의 시에, "선사군(仙槎郡)에 들어온 후 흥이 무궁한데,

발을 걷으니 봄 생각이 엷은 구름 공중에 닿았네. 수풀 저 건너 옛 성첩으로 바다에 해가 지고, 언덕 밑 성긴

울타리에 양류(楊柳) 바람이네. 적적(寂寂)한 저 새는 꽃 그림자 속으로 돌아오고, 소소(蕭蕭)하게 사람은 대

그늘 가운데서 말하네. 만일 밝은 달 아래에 돛을 달고 간다면, 그 마음이 늦가을에 학이 장을 벗어난 것 같을

뿐이랴". 하였다.

 

9월달 황량한 성에 낙엽 지는 바람이네 : 이곡(李穀)의 시에, "관동(關東)으로 출발하여 길이 다하려 하는데,

기이한 경치 눈을 스치고는 이어 없어지네. 옛 여관에는 등(燈) 하나 걸려있고 강의 비는 연이어 내리는데,

9월달 황량한 성에 낙엽지는 바람이네. 적막한 옛 친구 피리소리 듣고주D-03 어긋나는 세상일 누대에 의지

해 섰네. 몇 사람이 속세에서 맑은 놀이 그리워 할건가, 고기는 깊은 못에 있고 학은 새장에 있다네." 하였다.

 

시내와 산의 눈이 달빛에 맑기도 하구나 : 최부(崔府)의 시에, "나그네 베개에 날이 차니 꿈 못 이루는데,

시내와 산의 눈 달빛에 맑기도 하구나. 공문서가 희소하니 먼지가 벼루를 덮었는데, 늦게 일어나니 동창에

바다해가 올라왔네." 하였다. 바로 넓은 바다 눌러 형세도 기이하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높은 성 멀리

떨어져 변방지역을 지키는데 바로 넓은 바다 눌러 형세도 기이하네. 물결을 뒤쫓는 거센 바람은 바다 위를

불어 넘어뜨리고 하늘에 닿은 늙은 나무는 구름을 의지해 드리웠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하현내(下縣內) : 동쪽으로 끝이 7리. 상현내(上縣內) : 서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7리.

근남(近南) : 남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 원남(遠南) :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40리,

근북(近北) : 북쪽으로 처음은 17리, 끝은 23리. 원북(遠北) : 북쪽으로 처음은 23리, 끝은 45리.

근서(近西)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은 40리. 원서(遠西) : 서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80리.

진보 혁폐 울진포진(蔚珍浦鎭) : 고현포(古縣浦)라고도 하며 동남쪽으로 10리에 있다. 중종(中宗) 7년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7백 50척이다. 옛날에는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었다.

단유 발악(髮岳) : 신라 사전에, "우진야군(于珍也郡)에 있는데 명산이므로 소사(小祀)에 실려 있다." 하였다.

 

[주 D-001] 꿈에 화서국(華胥國)에 가서 놀다가 문득 깨달은 것 같았다. : 옛날 황제(黃帝)가 꿈에 화서국(華胥

國)에서 놀아 보고 그 태평하고 안락하게 지내는 것에 놀랐다는 고사가 있다.

[주 D-002] 기수(淇水) : 기(淇)는 중국 하북성에 있는 내 이름이다. 그 기 가에는 푸른 대가 많다고 시전에

쓰여 있다.

[주 D-03] 적막한 옛 친구 피리소리 듣고 : 진(晉) 나라 왕융(王戎)이 친하던 친구 완적(阮籍)이 죽은 후에 전에

놀던 산양(山陽)땅에 다시 갔다가 저녁 때에 어디서인가 들려오는 피리소리에 눈물을 흘렸다 한다. 여기에 친구

소식이 피리소리 속에 들린다는 말은 죽은 친구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흡곡현 歙谷縣

 

동쪽은 해안까지 3리, 남쪽은 통천군(通川郡) 경계까지 18리, 서쪽은 함경도 안변부(安邊府) 경계까지 30리,

북쪽은 그 부 경계까지 10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0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습비곡현(習比谷縣)이다 : 곡(谷)은 탄(呑)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습계(習磎)로 고쳐서 금양군(金壤郡)의 관할 현으로 삼았으며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그대로 속하게

하였다. 고종(高宗) 35년에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관원 현령ㆍ훈도 : 한 사람씩이다.

군명 습비곡ㆍ습계ㆍ학림(鶴林).

 

성씨 본현 신(申)ㆍ김ㆍ나(羅) : 모두 속(續)이다. 손(孫) : 벽산(碧山). 유(劉) : 금성(金城). 宋(송) : 교주(交州).

 

산천 박산(朴山) : 고을 북쪽 80보(步)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황룡산(黃龍山) : 고을 서쪽 21리에 있다.

남산(南山) : 고을 남쪽 14리에 있다. 치공산(致空山) : 고을 남쪽 13리에 있다.

 

바다 : 고을 동쪽 3리에 있다. 천도(穿島) : 고을 남쪽 16리에 있는데 둘레가 3백여 보이다.

○이곡(李穀)의 기문에, "9월 초하루에 흡곡현 동쪽 고개를 넘어, 천도(穿島)로 들어가고자 하여 섬의 형상을

물었다. 섬에 구멍이 있어 남북으로 통하는데 풍랑이 서로 쫓아 왕래할 따름이다.

그러나 천도에서 바다로 나와 남쪽으로 나가면 총석정(叢石亭)에 갈 수 있는데 그 사이가 8, 9리이며,

또 총석정에서 바다로 나가 남쪽으로 가면 금란굴(金幱窟)에 갈 수 있는데 그 사이가 역시 10여 리이다.

배 가운데서 보는 좋은 경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이날은 좀 바람이 있으므로 배질을 못하여 천도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하였다.

○ 안축(安軸)의 시에, "작은 섬이 큰 물결 위에 나왔는데, 가로 뚫려 통한 구멍이 되었네. 남북으로 물이 서로

잇따랐는데, 서로 부딪쳐 부서져 눈이 날리네. 섬 안에 돌 형상도 기이한 것이 가득, 가닥가닥 일정하게도 깎고

끊겼네. 가로 누운 것은 산가지를 쌓은 것 같고, 거꾸로 선 것은 무쇠를 구부린 것 같구나.

긴 놈은 묶여 섰고, 짧은 놈은 흩어져 벌렸네. 그늘진 벼랑에 움푹 파이기도 하였는데, 놀란 물결이 항상 방아

찧고 씹어대네. 구멍 안이 약간 넓고 평평하지만, 앉을 자리는 펼 곳이 없네. 이끼낀 돌이 미끄럽고 비탈진데

냄새 나고 물기 있어 청결하지 못하네. 바닷바람이 문득 머리를 때리니, 잠시간에 마음이 기쁘지 않네.

벼랑을 바라보며 배를 빨리 저으니, 뱃사람 힘들여 삿대를 두르리네. 흰 모래 물가까지 와서야 물에 빠져 고기ㆍ

자라될 위험을 면했네. 이 섬으로 총석정에 비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못하기 10배 만이 아니네.

저것을 구경하면 이것은 버려도 좋은 것이, 내가 남의 말만 믿은 것 뉘우치네.

손님들 멀리서도 이름 듣고, 내왕하기 때 없이 한다네. 이 어찌 뱃사람의 수고만이랴.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기도 한다네. 벼락이라도 있어 쳐부수지 않으면 이 폐허가 언제 없어지나."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천길 바다 위에 신선산이 솟았는데, 동구 문이 첩첩한 벽 사이를 가로 뚫었네.

누가 달을 향해 한 개의 문[戶]을 요청하여 옥도끼로 갈라내어 푸른 산을 쪼개었나." 하였다.

 

토산 연어(鰱魚)ㆍ대구ㆍ문어ㆍ황어(黃魚)ㆍ은어ㆍ방어ㆍ송어(松魚)ㆍ고등어[古刀魚]ㆍ삼치[麻魚]ㆍ넙치ㆍ

도루묵[銀口魚]ㆍ복어ㆍ홍합ㆍ해삼ㆍ벌꿀ㆍ석이ㆍ인삼ㆍ보골지(補骨脂)ㆍ지황ㆍ복령ㆍ칠(漆).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다. 둘레가 2백 93척, 높이 5척이며 기지(基地)가 6천 5백 31척이다.

성 안에 우물 일곱이 있고, 군량과 창고가 있다.

 

봉수 치공산 봉수(致空山烽燧) : 남쪽으로 통천군 금란성(金幱城)에 응한다.

누정 시중정(侍中亭) : 고을 북쪽 7리쯤에 긴 멧부리가 뻗어나가다가 동쪽으로 서렸는데 3면이 모두 큰 호수

이다. 호수 물이 넘치고, 물가가 돌고 굽으며 밖으로는 큰 바다가 빙 둘러있다. 바다에는 빽빽하게 늘어선 작은

섬이 일곱 개가 있으니,

천도(穿島)ㆍ묘도(卯島)ㆍ우도(芋島)ㆍ승도(僧島)ㆍ석도(石島)ㆍ송도(松島)ㆍ백도(白島)이다. 호수와 바다

사이에 푸른 소나무들이 길을 끼고 있다. 대(臺)의 옛 이름은 칠보(七寶)이다.

우리 세조왕조에 순찰사 한명회(韓明澮)가 여기에 올라 구경할 때에 마침 우의정(右議政)으로 임명한다는

왕명이 이르렀기 때문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기쁜 뜻을 표시하였다. 경치가 경포대(鏡浦臺)와 필적할 만

하다.

신증 빈락정(賓樂亭) : 객사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고을 남쪽에 있다. 신증 지금은 고을 동쪽 2리로 옮겼다.

역원 정덕역(貞德驛) : 고을 남쪽 3리에 있다.

불우 화장사(華藏寺) : 황룡산(黃龍山)에 있다. 운봉암(雲峯菴) : 발산(鉢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박산(朴山)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산성(山城) :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5척, 높이가 5척이다.

남산성(南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9백 61척, 높이 2척이며 성 안에 우물 한 곳이 있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선조(宣祖) 29년에 없애버리고 통천(通川)에 예속시켰다가 31년에 다시 복귀시켰다.

방면 현내(縣內) : 끝이 6리.

답전(踏錢) : 남쪽으로 처음은 3리, 끝은 15리. 영외(嶺外) : 서쪽으로 처음은 12리, 끝은 30리.

 

 

46권 원주목 原州牧

 

동쪽은 평창군(平昌郡) 경계까지 1백 12리, 충정도 제천현(提川縣) 경계까지 52리, 남쪽은 충청도 충주(忠州)

경계까지 43리, 서쪽은 경기도 지평현(砥平縣) 경계까지 74리, 서남쪽은 경기도 여주(驪州) 경계까지 63리,

북쪽은 횡성현(橫城縣) 경계까지 3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이다.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은 북원소경(北原小京)을 두었다.

고려 태조 2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는 지주사(知州事)로 하였고, 고종(高宗) 46년

에는 이 주(州)의 사람이 왕명을 어겼기 때문에 낮추어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다.

원종(元宗) 원년에 다시 지주사로 하였다. 10년에는 임유뮤(林惟茂)의 외가(外家) 고을이라 하여 승격시켜

정원도호부(靖原都護府)로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17년에는 거란의 군사를 방어하는 데 공(功)이 있었으므로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로 고쳤고,

34년에는 승격시켜 원주목(原州牧)으로 하였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는 낮추어 성안부(成安府)로 하고,

공민왕(恭愍王) 2년에는 주(州)의 치악산(雉岳山)에 태(胎)를 안치하고 다시 원주목으로 하였다.

본조(本朝)에서는 그대로 두었으며 세조조(世祖朝)에 진(鎭)을 두었다.

 

속현 주천현(酒泉縣) : 일명 학성(鶴城)이라 한다. 주(州)의 동쪽 90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의 주연현(酒淵縣)

이다. 신라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내성군(奈城郡)의 관할현으로 하였다가 현종(顯宗) 9년에 본주(本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본조에서는 그대로 하였다.

진관 도호부(都護府) 1 : 춘천(春川). 군(郡) 3 : 정선(旌善)ㆍ영월(寧越)ㆍ평창(平昌). 현(縣) 3 : 인제(麟蹄)ㆍ

횡성(橫城)ㆍ홍천(洪川).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명이다.

군명 평원(平原)ㆍ북원경(北原京)ㆍ일신(一新)ㆍ정원(靖原)ㆍ익흥(益興)ㆍ성안(成安)ㆍ평량경(平涼京).

 

성씨본주 원(元)ㆍ이(李)ㆍ안(安)ㆍ신(申)ㆍ김(金)ㆍ석(石). 변(邊) : 본관을 심양(瀋陽)으로 하사하였다.

최(崔) : 다른 곳에서 왔다. 조(趙) : 횡성(橫城). 주천(酒泉) 조(趙)ㆍ윤(尹)ㆍ노(盧)ㆍ왕(王)ㆍ동(童)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강(康) : 진주(晉州). 도곡(刀谷) 채(蔡)ㆍ윤(尹). 소탄(所呑) 지(池).

 

풍속 축적(蓄積)하는 일을 숭상한다. : 지지(地志)에 있다.

 

형승 동쪽에는 치악(雉岳)이 서리고, 서쪽에는 섬강(蟾江)이 달린다.

천년고국(千年古國)이다 : 윤자운(尹子雲)의 시에, "천년 옛 나라에는 교목(喬木)이 남아 있고, 십 리 긴 강은

고을의 성(城)을 둘렀다." 하였다.

산천 치악산(雉岳山) : 주의 동쪽 2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 고려 때에 진보궐(陳補闕)이라는 사람이 치악산의 서쪽을 지나가는데 소나무와 전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고

수석(水石)이 그윽하고 기이하였다. 마음으로 기뻐하여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니 초가가 서너 집 수풀 사이로

어렴풋이 있는데 한 늙은 중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시냇가 돌에 앉아 있었다. 진보궐이 말에서 내려 함께 이야기

하였는데, 중은 기상과 운치가 범상(凡常)하지 않았다. 보니 한 종이 부채를 가졌는데 다북한 소나무가 그려

있었다.

진(陳)이 부채를 가져다가 그 뒤에 글을 쓰기를, "노승(老僧)이 날마다 푸른 수염의 늙은이(소나무를 말한 것)

를 벗하는데, 어찌 다시 참모습을 옮기어 둥근 부채 속에 넣었는가." 하니, 중이 즉시 화답하기를, "봄바람이

아미령(蛾眉嶺)에 이르지 아니하건만, 땅 가득히 교룡(蛟龍)처럼 서리어 푸르른 무리를 이루었네." 하였다.

 

거슬갑산(琚瑟岬山) : 주천현(酒泉縣) 북쪽 30리에 있다. 백운산(白雲山) :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식악산(食岳山) : 주의 서쪽 15리에 있다. 백덕산(白德山) : 주의 동쪽 30리에 있다.

구릉산(仇陵山) : 주천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서곡산(瑞谷山) : 주의 남쪽 20리에 있다.

현계산(玄溪山) : 주의 남쪽 60리에 있다. 명봉산(鳴鳳山) :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도야니현(都也尼峴) :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유현(杻峴) : 주의 동쪽 60리에 있는데 썩 높고 험하다.

 

월뢰탄(月瀨灘) :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근원이 횡성현(橫城縣) 봉복산(奉福山)에서 나와서 섬강(蟾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섬강 : 주의 서남쪽 50리에 있다. 즉 충청도 충주(忠州) 금천(金遷) 하류이다.

사천(沙川) : 주천현의 동쪽 22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江陵府)의 월정산(月正山) 서쪽에서 나온다.

공룡탄(公龍灘) : 주천현 남쪽 20리에 있는데 사천 하류이다. 배건너는 나루터가 있다.

동천(東川) : 주의 동쪽 1백 50보에 있다.

근원이 치악산(雉岳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서 횡성현의 서천(西川)에 합류한다.

 

토산 옥석(玉石) : 주의 서쪽 탑전곡(塔前谷)에서 난다. 영양(羚羊)ㆍ잣ㆍ오미자ㆍ자초(紫草)ㆍ석이버섯ㆍ

인삼(人蔘)ㆍ꿀ㆍ누치[訥魚]ㆍ여항어(餘項魚)ㆍ쏘가리[錦鱗魚].

 

신증궁실 객관(客館) : 서거정(徐居正)의 〈중신기(重新記)〉에, "원주(原州)는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

이다. 신라에서 북원소경(北原小京)을 두었으며 고려초에 주(州)를 두었다가 뒤에 낮추어 지주(知州)로 하였고,

또 낮추어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다. 중간에 승격시켜 정원도호부(靖原都護府)로 하였다가 고쳐서 익흥

(益興)으로 하였고,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다시 목(牧)으로 하였다.

예전에는 양광도(楊廣道)에 속하였으나 지금은 강원도의 계수관(界首官)주D-001이다.

땅이 넓고 백성이 많으며, 산천이 아름답고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物産)이 풍부하여 여러 고을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그 풍속은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쓰는 것을 절약하여 재물을 저축하고 물화(物貨)를 늘이니 홍수와 가뭄이 재해

가 되지 못하니, 실로 동쪽 지방의 아름다운 고을이다. 거정(居正)이 젊었을 때에 치악(雉岳)ㆍ법천(法泉) 등

여러 산사에서 글 읽느라고 원주를 왕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매번 보면 중류 이상의 집들이 힘써 집을 경영하여 마루와 넓은 집과 높은 누(樓)와 아름다운 정자가 가는 곳

마다 수두룩하였다. 그런데 홀로 어찌하여 이와 같이 크고 부유한 고을로서 관아의 건물은 누추하고 좁아서

초라함이 이와 같은가. 그것을 창건한 연대를 물으니, 원(元) 나라 연우(延祐) 연간에 지은 것이라고 하니,

지금으로부터 계산하면 백 수십 년이 된다.

그 동안 주의 수령 된 자들이 그럭저럭 편히 지내기를 좋아하여 수리하는 데 겨를을 내지 않았으니,

이것이 주(州)의 큰 결점이었다. 성화(成化) 경자년에 철성(鐵城) 이후(李侯)가 뽑혀 이 주의 목사로 왔다.

정사는 잘 다스려지고 폐단은 없어졌다. 통판(通判) 전성(全城) 이후(李侯)와 모의하고 다시 중수하는 것이 마땅

하다는 뜻을 조정에 보고하여 허가를 얻었다.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구어 장차 경영을 시작하려 하니,

감사 권윤(權綸) 공도 또한 그 비용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때마침 시절이 좋지 않아 착수하지 못하였는데 계묘년

봄에 다소 풍년이 들었으므로 일찍 공사를 일으켰다. 놀고 있는 자들을 고용하여 농민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곧 옛터에 그 제도를 더하고 넓혀서 먼저 대청 3칸을 세우고, 앞뒤에 익실을 붙였고 동헌(東軒)도 또한 같게

하였다.

크고 트이고 넓고 시원하여 높고 빛난다. 옛날의 좁던 곳이 지금은 넉넉하고 옛날의 누추하던 것이 지금은 시원

하여서 보는 자가 모두 아름답게 여겼다. 이해 여름 6월에 철성이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전근하고 상락(上洛)

김후(金侯)가 대신 부임하였으며, 이 통판(李通判)이 임기가 차서 소환되고 허 통판(許通判)이 후임으로 왔다.

공사를 마치지 못한 것은 양후(兩侯)가 더 잘 처리하였다. 어느 날에 철성(鐵城)이 나에게 기(記)를 부탁하였다.

내 들으니, 세상의 논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관아 건물이 수리되고 안된 것은 수령의 어질고

어질지 않은 데에 달린 것은 아니다.' 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상고(上古) 시대에는 궁실(宮室)이 없었는데 성인(聖人)이 대장괘(大壯卦)주D-02에서 생각하여 처음으로 궁실

을 경영하였다. 더군다나 객관은 빈객(賓客)을 접대하여 관부(官府)를 위엄있게 하는 것이니 어찌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의 수령들을 보니, 그 중에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과 작은 일에 자질구레한 사람

들은 비록 공문서의 처리에도 땀을 흘리면서 소매에 손을 넣은 채 가(可)타 부(否)타 하지도 못하니 다시 그 밖

에 무슨 할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간혹 현능(賢能)하다는 이름이 있는 자는 시세를 곁눈질해 보면서 가만히

명성(名聲)만을 도둑질한다. 관서(官署)를 왜 수리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곧 핑계하여 말하기를,

'나라의 금령(禁令)을 위반할 수 없으며, 백성의 힘을 고갈시킬 수 없다.' 한다.

비록 겉으로 평온한 듯 하지만 속으로는 실로 이럭저럭 세월만 허송하고 있는 것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백성을 부린다면 백성들은 비록 수고롭더라도 원망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진실로 도(道)에 합당하다면 무엇이 법에 두렵고 백성들에게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들의 하는 말이

이와 같으니 백성의 장관(長官)된 책임을 어찌할 것인가. 이제 이 목사와 이 통판이 다 자애롭고 착한 덕으로써

백성을 어루만지는 직책을 다하여 온 고을이 편안하니, 그 남은 은덕은 황폐하고 떨어진 것을 수리하고 거행하

기에 넉넉하다. 또 김 목사와 허 통판이 또 능히 앞사람의 정사를 계승하여 확대하고 아름답게 꾸몄으니,

관부(官府)가 온통 새로워져서 보는 것을 고치고 듣는 것을 바꾸어 놓았다. 거정(居正)이 전일에 이 주(州)의 흠

으로 생각하던 것은 어찌 네 분 군자(君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네 분 군자의 재능과 덕과 정사

가 예전의 수령들보다 훨씬 어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 성인이 《춘추(春秋)》에서 토목사업을 일으킨 것을

반드시 기재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백성의 일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때는 흉년인데 공사가 과대하여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여러 사람들을 동원한 것은 곧 폄하하고, 재물을 손상시

키지도 않고 백성을 해치지 않은 것은 곧 포창(褒彰)해서 칭찬하였다. 이제 네 분의 일은 《춘추》의 예(例)에서

본다면 마땅히 대서특필하여 찬미해야 하겠다. 거정은 벼슬이 사국(史局)의 장(長)의 자리를 더럽히고 있으니

한마디 없을 수 있겠는가. 철성(鐵城)의 휘는 지(墀)요, 자(字)는 승경(升卿)이다. 이 통판의 휘는 녹숭(祿崇)이요,

상락(上洛)의 휘는 적(磧)이며, 허 통판의 휘는 달(達)이니, 다 한 때의 명현(名賢)들이다." 하였다.

 

누정 봉명루(奉命樓)ㆍ빙허루(憑虛樓) : 모두 객관의 동쪽에 있다.

 

신증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높은 누에 홀로 오르니 이번 걸음 유쾌한데, 소나무 산 헌함에 가득히 그늘 지우네.

인정은 엎치락뒤치락 구름이 산으로 들어감 같고, 옛뜻은 처량한데 눈[雪]이 성을 눌렀네.

강개한 마음 하루아침에 계책을 결정하더니, 존망이 백년을 넘었건만 이름 아직도 남았네.

농사 짓고 누에치고 가는 곳마다 백성의 생업(生業)이 안정되었는데,

포곡새[布穀鳥]는 무슨 일로 밭갈기를 재촉하는가." 하였다.

 

○ 우승범(禹承範)의 시에, "말 들으니 원공(元公 원충갑(元沖甲))이 칼을 짚고 떠날 때, 장한 마음 기유생(棄襦生)

보다도 뛰어났네.주D-003 한 번 휘둘러서 천년 외구(外寇)를 소탕하니, 우뚝이 선 것이 백치(百雉 성의 크기)의

성처럼 든든하다. 옛부터 고원(高遠)한 지세는 유적을 수호하고, 이제까지 물고기와 새들도 위명(威名)을 두려워

하네. 남아(男兒)의 사업은 이미 이같이 성대한데, 나는 항상 몸소 밭가는 한사(寒士)임을 웃네." 하였다.

 

○ 허종(許琮)의 시에, "백리를 피리와 노래 속에서 취하여 가다가, 또 높은 누에 올라 일어나는 구름을 본다.

호중천지(壺中天地)에 만약 삼도(三島)가 열리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어찌 일찍 오성(五城)주D-04을 볼 수 있었

으랴. 돌아오니 꽃과 새는 모두 아는 것 같은데, 연기 어린 봉우리를 손가락질하여 산이름 묻노라.

혹시나 언덕 위에 몇 경(頃)의 땅을 얻는다면, 한 늙은이 봄비 속에 몸소 밭갈이 하리라." 하였다.

 

○ 성현(成俔)의 시에, "어려서 시서(詩書)를 배워 장성하여 행하고자 하였더니, 임금의 은혜 바다 같아 취생

(鯫生)주D-05을 목욕하게 하였네. 외람되게 아기(牙旗)와 절(節)을 갖고 하합(河陜)을 순찰하였고, 무성(武城)에

자주 와서 현가(絃歌)를 들어보네. 당음(棠陰)주D-06에 선화(宣化)했으나 실지 혜택 없었으며, 현판(懸板)에 시

를 쓰니 헛된 이름 부끄럽다. 밭에서 고생하는 늙은이께 묻거니와, 밭을 가는 그대, 나의 설경(舌耕)주D-07 어떠

한가.

 

○ 햇볕을 무릅쓰고 산 넘고 물 건널 일 항상 근심했는데, 누(樓)에 오르니 지나치게 서늘바람 반가워라.

두어 포기 작약은 붉은빛 섬돌에 번득이고, 일만 줄 늘어진 버들은 푸른 성(城)에 가득하구나.

젖먹이 제비는 처마 곁에서 처음으로 말을 배우고, 꾀꼴새는 나무를 뚫으면서 제 이름 제가 부르네.

발[簾] 가득한 성긴 비에 남은 꿈 놀라 깨어 일어나 보니, 검정소[烏犍] 농경(農耕)에 달려가네." 하였다.

 

○ 홍귀달(洪貴達)의 시에, "따뜻하고 경치 고운 국도(國道)에 사람들은 어지러이 오가고, 눈 녹은 마을마다

봄물이 생겼네. 산 기운[山氣]은 노을을 찌는 듯 그림병풍 둘렀고, 경치는 물에 닿아 강가의 성을 옹호하네.

가볍고 날씬한 처마의 제비는 때로 능히 말을 하고, 아름다운 담 위의 꽃은 이름조차 알지 못하겠네.

가장 기쁜 일은 농가에서 살아가는 일이 풍족하여, 한 늙은이가 다시 비를 맞으며 밭을 가네.

 

○ 이글이글 타는 듯한 여름 해에 괴로워 천천이 가는 길에, 짙은 나무 그늘이 물 밑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너무도 반가워라. 한 점 검은 구름이 먼 봉우리에 둘리니 잠깐동안 서늘한 비 외로운 성을 지나가네.

한가로워지니 잔 가운데의 술맛이 나고, 취한 뒤에는 종이에 기록될 이름 같은 것 마음에 없네.

남훈곡(南薰曲)주D-08 타서 마치니 재물은 이미 넉넉하나, 다시 농관(農官)을 불러 백성의 농경(農耕)을 권장

한다." 하였다.

 

청허루(淸虛樓) : 주천현(酒泉縣)의 객관 서쪽에 있다. 석벽(石壁)이 깎아지른 듯한데 그 아래에 맑은 못이 있다.

판관 조명(趙銘)이 세운 것이다.

○ 김예몽(金禮蒙)이 시에, "달은 맑은 그림자를 나누어서 누(樓)의 모서리에 걸렸고, 바람은 저녁 때의 서늘함

을 도와서 물 위에서 온다." 하였다.

 

쌍수대(雙樹臺) : 객관 서쪽에 있다. 청음정(淸陰亭) : 객관 남쪽에 있다.

○ 이선제(李先齊)의 시에, "묶은 안개 처음 걷히고 해가 뜨려 하는구나. 장미꽃 피어 두루 섬돌에 비춰 눈부시네.

난간에 의지하여 홀로 앉으니 다른 할 일 없는데, 어디선가 두세 번 꾀꼬리 소리 들려오네." 하였다.

 

숭화정(崇化亭) : 주(州)의 서쪽 2리쯤에 있다.

○ 이숙함(李淑瑊)의 기(記)에, "나의 벗 자간(子幹) 민정(閔貞) 군이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나간 지 해포가 되었

는데,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원주는 관동지방의 계수(界首 도의 수부)이다. 치악(雉岳)의 한 자락이

서쪽으로 잇달아 백여 리를 달려와서 주(州)의 진산이 되었다. 모든 읍의 공관(公館)과 관고(筦庫 창고)와 영각

(鈴閣 군청)이 다 여기에 자리잡았다. 진각(鎭閣)의 남쪽에 우뚝 솟은 땅이 있으니 평평하기는 바둑판 같고 매우

시원하다. 두 면은 산을 등지고 있어 소나무와 전나무가 빽빽하게 서있고 한 면은 앞에 강물을 굽어보며 초원과

평야가 넓고 펀펀하게 펼쳐져 있다. 산뜻하게 세속과 단절되어 노닐고 휴식하는 곳으로 할 만하다.

이에 그 위에 정자를 짓고 항상 관아의 근무시간이 끝난 뒤에 지팡이 짚고 가서 정자 위에 단정히 앉아 있는다.

그러면 때로는 도포를 입은 무리들이 책을 끼고 오는 자가 있어 곧 계발(啓發)하여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으로

써 가르친다.

그리고 소장(訴狀)을 제출한 백성으로서 윤리에 어그러진 자가 있으면 곧 사리를 밝혀 타일러,

효도하고 우애하고 충신하는 길로 인도하니, 이것은 다 정자가 주는 도움이다. 그런 까닭에 편액(扁額)을 숭화

(崇化)라고 하였으니 그대는 거기에 기(記)를 쓰라.' 하였다.

나는 그 편지를 다 읽고 나서 탄식하기를, '임금과 하늘과 땅 사이에 자리잡으시니 백성들이 지극히 많아서 홀로

다스릴 수가 없으므로 반드시 지방장관의 어진 이를 얻어서 그 어루만지는 일을 맡기는 것이다.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면 포부가 지극히 큰 것이다. 재상이 되지 못한다면 반드시 백 리 되는 큰 고을의 수령이 되어 그의 정교

(政敎)를 시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정사하는 일은 교화(敎化)가 근본이고, 형벌과 법률은 말단의 일이다.

능히 근본과 말단을 구분할 줄 알아서 교화를 숭상하는 일로써 우선하는 것도 어렵다. 옛날 자유(子游)는 성인

문하의 뛰어난 제자로서 무성(武城)의 수령이 되어 음악과 노래로써 다스려서 군자와 소인으로 하여금 다 도

(道)를 배우게 하였으니, 그것은 교화를 숭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유는 때를 만나지 못하여 능히 큰 포부를 베풀지 못하고 교화가 아주 조그마한 고을에 그쳤을 뿐이었

다. 그런 까닭에 우리 공 부자(孔夫子)는 '닭 잡는 데 무슨 소 잡는 칼을 쓴단 말인가.' 하고, 희롱하였던 것이다.

주D-09 이제 자간(子幹)은 성명(聖明)한 세상을 만나, 장원급제하여 옥당(玉堂)을 거쳐 대각(臺閣)에 출입하였

고, 성균 사성(成均司成)을 역임하여 국자제(國子弟)들을 가르쳤다.

조정에서 바야흐로 지방의 수령을 중하게 여기게 되었는데, 자간(子幹)이 유학(儒學)으로 행정하고 지방을 잘

다스리며 백성을 구제할 재능이 있음을 알고 특별히 뽑아서 본주(本州)의 목사로 삼았다. 자간이 수레에서 채

내리기도 전에 먼저 유교를 들고 나왔다. 먼저 벼 몇 섬을 내어서 학름(學廩 고을의 학교인 향교에 유숙하는

학생들을 먹이는 재단)을 만들고 또 그 관내의 여러 사람들에게 권유하여 등차가 있게 벼를 내놓게 하여 그

원본(元本)과 이식(利殖)을 저축하여 결핍되지 않게 하였다.

문서의 처리와 수렴(收斂)하는 일 이외에 깊이 주의하는 것은 교화(敎化)이다. 또 곧 높은 정자를 세우고 시서

예악의 가르침과 효제충신의 도(道)를 펴는 데 이용하니, 곧 온 고을 안에 화기가 가득하게 되었다.

이것은 곧 교화를 숭상하기 위함이며, 형(刑)이 없게 하기 위한 것이니,주D-10 풍광(風光)과 경치에 빠져 놀러

다니기 위한 시설은 아니다.

다른 날 성상(聖上)의 포상(褒賞)을 받아 조정에 들어가 큰 벼슬에 제수되면 크게 헌의(獻議)하여 도를 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장차 교화는 한 나라에 미치고 혜택은 만민에게 입혀 질 것이니 어찌 다만 백리 되는 고을에 그

칠 뿐이겠는가. 무성(武城)과 같은 조그마한 고을은 정말 어린애 장난 같을 뿐이다. 사관(史官)이 크게 특별히

써서 한(漢) 나라의 순리(循吏 법을 잘 지키고 도리에 잘 맞게 다스리는 관리)인 공수(龔遂)ㆍ황패(黃霸)의 전기

(傳記)를 잇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것으로 기(記)를 써서 돌려보내노라."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주의 서쪽 3리에 있으며, 청풍루(淸風樓)가 있다. 건문(建文) 4년에 목사 신호(申浩)가 세우고

유사눌(柳思訥)이 기(記)를 지었다.

 

역원 단구역(丹丘驛) : 주의 동쪽 7리에 있다. 신림역(神林驛) : 주의 동쪽 45리에 있다.

안창역(安昌驛) : 주의 서쪽 45리에 있다. 유원역(由原驛) : 주의 북쪽 7리에 있다.

신흥역(神興驛) : 주의 동쪽 1백 리에 있다. 아야니원(阿也尼院) : 주의 서쪽 38리에 있다.

송현원(松現院) : 주의 서쪽 60리에 있다. 둔탄원(屯呑院) : 주의 북쪽 38리에 있다.

요제원(要濟院) : 주의 북쪽 80리에 있다.

창고 흥훤창(興原倉) : 섬강(蟾江)의 북쪽 언덕에 있으니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본주(本州)와 평창(平昌)ㆍ

영월(寧越)ㆍ정선(旌善)ㆍ횡성(橫城) 등 고을 전세(田稅)와 세곡(稅穀)을 여기에 수납(收納)하여 조운(漕運)

으로 서울에 가져간다.

불우 각림사(覺林寺) : 치악산의 동쪽에 있다. 우리 태조(太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여기서 글을 읽었다.

뒤에 횡성에서 강무(講武)할 때, 임금의 수레를 이 절에 멈추고 고로(古老)들을 불러다 위로하였다.

절에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고을의 관원에게 명령하여 조세ㆍ부역 따위를 면제하여 구휼하게 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치악산이 동해 지방에 이름이 높고, 이 산의 사찰(寺刹) 중에는 각림사가 가장

좋다네. 구름ㆍ연기ㆍ바위ㆍ동학(洞壑)이 몇천 년이 되었던가.

땅의 신령한 기운이 천룡(天龍 제천(諸天)과 용신(龍神))의 모임을 옹위하였네." 하였다.

 

법천사(法泉寺) : 봉명산(鳳鳴山)에 있다. 고려 때의 중 지광(智光)의 탑비가 있다.

○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이 일찍이 이 절에서 학문을 강의하였는데, 배우러 오는 자가 먼 곳에서 모여들

었다. 권람(權擥)ㆍ한명회(韓明澮)ㆍ강효문(康孝文)ㆍ서거정(徐居正) 같은 이들은 뒤에 다 큰 이름이 있었다.

그들이 여기에서 배울 때 탑 위에 시를 써 놓은 것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 강효문의 시에, "서울에서 일찍이 서로 약속하였더니 타향에서 다시 만났네. 찬바람은 옥각(屋角)에서 울고

쌓인 눈은 산허리에 가득하구나. 급(笈)을 지고 배우러 오는 길주D-011은 비록 멀지만, 벼슬길에 오르는 길은

멀지 않으리. 나는 서유자(徐孺子)의 호기(豪氣)주D-12가 아이들 무리에 으뜸인 것을 사랑한다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지난해에 글 읽던 곳, 광산(匡山)주D-13에 또 불리어 가네. 행장을 말등에 높이

실었고, 서적은 소 허리에 가득 실었네. 건곤은 넓고 넓은데 도로는 멀고 멀다. 영웅으로 시대를 만나게 될 자는,

필경 우리들의 무리 중에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유윤겸(柳允謙)의 시에, "안탑(雁塔)주D-14에 이름을 쓰는 것은 옛날부터 전하는데 제군(諸君)에게 붙이기

에는 어질지 못한 것이 부끄럽구나. 지금에 두려워하는 것은 비로 인하여 이끼가 올라서, 그것을 손으로 어루

만져도 당년(當年)의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지나 않을런지." 하였다.

 

동화사(桐華寺) : 도야니현(都也尼峴)에 있다.

흥법사(興法寺) : 건등산(建登山)에 있다. 절에 비(碑)가 있는데 고려 태조(太祖)가 친히 그 글을 짓고 최광윤

(崔光胤)에게 명령하여 당 태종(唐太宗)의 글씨를 모아서 모사(模寫)하여 새겼다. 이제현(李齊賢)이 일찍이

말하기를, "말 뜻이 웅장하고 깊고 위대하고 고와서 마치 검은 홀과 붉은 신으로 낭묘(廊廟)에서 읍양(揖讓)하는

것 같다. 글자는 큰 글자와 작은 글자, 해서와 행서가 서로 섞여있다.

마치 난봉(鸞鳳)이 일렁이듯 기운이 우주를 삼켰으니 진실로 천하의 보물이다." 하였다.

 

거돈사(居頓寺) : 현계산(玄溪山)에 있다. 고려 최충(崔冲)이 찬술한 중 승묘(勝妙)의 비가 있다.

문수사(文殊寺) : 치악산의 서쪽 골에 있다.

○ 서거정이 임지로 가는 민정(閔貞)을 보내는 시에, "치악산 속의 글 읽던 절, 젊을 때 노닐던 지난 때의 일

역력히 기억나네. 법천사(法泉寺)의 뜰아래에서는 탑에 시를 써 놓았고, 흥법사의 대(臺) 앞에는 먹으로 비를

탁본하였지. 그때의 행장은 나귀 한 마리에 실을 만한 것도 못되더니, 지금은 돌아가는 길을 꿈이 먼저 아는

구나. 머리가 희어지도록 다시 놀러가려는 흥(興)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대를 보내는 마당에 멀리 나의 생각

을 흔들어 놓는구려." 하였다.

 

사묘 사직단 : 주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주의 남쪽 2리에 있다. 치악산사(雉岳山祠) : 산정(山頂)에 있다. 세상에서는 보문당(普門堂)

이라고 일컫는다. 봄가을로 향과 축문을 내리어 치제(致祭)한다.

거슬갑사(琚瑟岬祠) : 산 북쪽 사자동(師子洞)에 있다. 여단 : 주의 북쪽에 있다.

 

고적 주천석(酒泉石) : 주천현(酒泉縣)의 남쪽 길가에 둘이 있으니 형상이 반 깨어진 돌 술통 같다. 세상에서

전해 오는 말에, "이 돌 술통은 예전에는 서천(西川) 가에 있었는데 가서 마시는 자에게는 넉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읍(邑)의 아전이 술 마시려고 거기까지 왕래하는 것을 싫어하여 현(縣) 안에 옮겨다 놓으려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옮기니, 갑자기 크게 우레치고 돌에 벼락이 쳐서 부서져 세 개로 되어 한 개는 못[淵]에 잠기고,

한 개는 있는 데를 알 수 없고, 한 개는 곧 이 돌이다." 한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별은 술로써 하늘에 이름이 있고, 땅의 신령은 액체(液體)를 빚어서 샘물에 흘려

보낸다. 몽매한 풍속이 어찌 다 헛말임을 알겠는가, 기괴한 이야기가 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네.

원성 부곡(原城部曲) 옛 고을 서쪽에, 깎아 세운 듯한 높은 봉우리 우뚝 솟아 창연(蒼然)히 섰네.

벼랑 아래에는 물이 깊고 맑아 굽어보면 검푸른데, 돌 술통이 부숴져 강가에 가로놓였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술통이 높은 벼랑 위에 있을 때에는 맑은 술도 탁주도 저절로 솟아오르고 술값은 말하지 않았다네.

천 종(鍾)을 마시면 요(堯)가 되고 백 괵(斛)을 마시면 공자(孔子)가 된다.' 하더니, 옥산(玉山)이 봄바람 앞에

스스로 무너졌네. 하늘이 만든 뜻은 자연에 맞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인데, 어찌 사람이 억지로 마을 가운데로

옮기고자 하였던가. 여러 신령들 성내어 신물(神物)에게 시켜서 술통 돌을 부수어 깊은 못에 돌리었다네.

신령한 물결은 비록 고갈되었으나 돌은 오히려 완강하여 이제까지 남기 흔적이 큰 내 물가에 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믿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나 못에 가보면 혹시라도 이무기가 침을 흘릴까 두렵다. 나는 물결을 고동시켜

맑고 서늘한 원천(源泉)에 거슬러 올라가, 옛날 그때처럼 벽력(霹靂)을 두드려 일으키고, 도중에 있는 한 조각

돌을 합해 가져다가 모두다 물나라에 던져서 이 적선(李謫仙)에게 바치고자 하노라."주D-015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이것이 무회씨(無懷氏)주D-16가 아니면 갈천씨(葛天氏)주D-17일 것이다. 술이 있다,

술이 있어 샘물처럼 흘렀다네. 똑똑 물방울처럼 떨어져 바윗돌 사이로 흘러 떨어지는가 하였더니 어느 사이에

철철 넘쳐서 이미 통술을 향하여 전해졌네. 술 빚는 것이 누룩의 힘을 의지한 것이 아니고,

지극한 맛을 탄 것도 없이 자연 그대로라네. 한 번 마시면 정신이 혈요(泬寥)주D-18한 위에 노니는 것 같고,

두 번 마시면 꿈이 봉래산(蓬萊山)의 빈 터에 이르게 된다. 줄줄 흘러 써도 써도 마르지 않으니,

다만 마시고 취하는데 수응(隨應)할 뿐, 어찌 값을 말하였으랴. 당시에 고을 이름 붙인 것은 뜻이 있는 것이었다.

그 혁혁한 신령은 진정 전에는 없던 일이다. 마침내 산 속의 귀신들이 아껴서 갑자기 우레와 폭우로 한밤중에

옮겨 버렸네. 옥검(玉檢)을 위하여 깊은 동학(洞壑)에 폐쇄한 것이 아니면, 반드시 금 단지에 저축하여 깊디깊은

못에 감춘 것이리라. 감감하고 비어서 남긴 자취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오직 끊어진 돌조각이 길가에 가로놓

였네. 내 하늘을 되돌려 옛날 샘의 맥(脈)을 돌려놓고자 하거니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군침 흘리지 말게 하라.

내가 원하는 것은 반도(蟠桃)주D-19를 안주 삼아 밝으신 임금께 바치고 한 잔을 올리면 천년의 수(壽)를 누릴

것이다. 일만 잔 올린다면 다시 만만세(萬萬歲)를 기약하리니, 길이 법궁(法宮)에 납시어 뭇 신선과 만나소서."

하였다.

 

영원성(鴒原城) : 치악산의 남쪽 등성마루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7백 49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

샘물 다섯이 있으나 지금은 폐쇄하였다.

○ 《삼국사(三國史)》에, "궁예(弓裔)가 북원(北原)의 적(賊) 양길(梁吉)에게 가 붙으니 양길이 일을 맡기고,

동쪽으로 땅을 침략하게 하였다. 이에 궁예가 치악산의 석남사(石南寺)에 나와 유숙하고 다니면서 주천(酒泉)ㆍ

내성 울도(奈城鬱島)ㆍ어진(御珍)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다 항복시켰다."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이 성(城)은

양길이 의거하던 곳으로서 뒤에 원충갑(元冲甲)이 여기에 웅거하여 거란의 군사를 깨뜨렸다." 한다.

 

천왕사(天王寺) : 주의 동쪽 2리쯤에 있다. 지금은 폐쇄하였는데, 사청(射廳)이 되었다.

금대성(金臺城) : 주의 동쪽 30리 치악산 중턱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6천 60척이다.

안에 우물 3개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하였다. 고을의 사람 송필이 이 성에 의거하여 배반하였기 때문에

주를 낮추어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다.

 

소탄소(所呑所) : 주의 동쪽 13리에 있다.

금마곡소(金亇谷所) : 주천현(酒泉縣)의 남쪽 15리에 있다. 사림소(射林所) : 주의 동쪽 45리에 있다.

도곡 부곡(刀谷部曲) : 주천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도내 부곡(刀乃部曲) : 주천형의 서쪽 5리에 있다.

 

명환고려 김부일(金富佾) : 숙종조(肅宗朝)에 이 고을 수령으로 있었는데 명성과 치적(治績)이 있었다.

 

홍간(洪侃) : 주의 수령이 되었었다.

조신(曹愼) : 판흥원창(判興原倉)으로 있을 때 거란의 적병이 침입하였으므로 원충갑과 더불어 힘을 합하여 방

어하였다. 신(愼)이 북채를 잡고 북을 치고 있었는데 화살이 그의 오른쪽 어깨를 뚫었다. 그러나 북소리는 조금

도 약(弱)해지지 않았다. 적의 앞줄이 조금 패하여 달아나니 뒤에 있는 자들이 놀라고 요동하여 저희들끼리 서

로 짓밟고 부딪치고 하였다. 주의 군사가 이 틈을 타서 높은 곳에서 쳐서 무너뜨리니 소리가 산악을 진동시켰으

며 쓰러져 죽은 시체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다고 하다.

 

설장수(偰長壽) : 목사가 되었다.

하윤원(河允源) : 임기가 만료되어 소환되니, 치악산의 중 운감(云鑑)이 시를 지어 주기를, "어린애가 즐거워하

며 어머니의 곁에 있을 때에는, 어머니의 은혜와 사랑을 미처 알지 못한다네. 어머니가 떠나고 어린애는 울부짖

나니, 추위와 굶주림이 몸에 다가옴을 어찌하리오. 북원(北原)의 지난날 정치는, 어질고 덕 있음이 곧 이와 같았

네. 빛나도다. 천 년이 지난 뒤에, 다시 소남(召南)의 시(詩)주D-020 같은 송가(頌歌)를 부르네." 하였다.

진신(縉紳 선비와 벼슬아치)들이 운자(韻字)를 나누어 시를 짓는데 이구(李玖)는 하(下) 자를 운자로 얻었다.

그의 시에 이르기를, "여산(廬山)의 혜원(惠遠)주D-21이 도연명(陶淵明)을 사랑하여, 한가하게 동림(東林)을 향

하여 일찍이 결사(結社)하였었네. 사귀는 도리가 도리어 세상의 도의를 따라 쇠퇴하니, 그 뒤로는 선비와 중의

서로 추종함이 적어졌다. 운감 스님이 옛것을 좋아하나 지기지우(知己之友) 적어, 원성(原城)의 외로운 절에 홀

로 누웠었네. 글 잘하는 태수가 왔다는 것 기뻐하고, 석장(錫杖)을 날리며 문을 두드리니 달이 밝도다.

함께 강루(江樓)에도 오르고 절의 누에도 오르면서, 넉넉히 시와 술을 갖고 한가하고 맑은 정취에 배불렀다.

태수의 임기는 차고 정사는 흡족하여 조정으로 떠나가니, 원숭이와 학(鶴) 있는 산언덕에서 스님은 누구와 더불

어 밤을 보낼까. 바람편에 시를 부쳐 고을에 남긴 사랑을 칭송하니, 맑은 시사(詩詞)와 아름다운 정사가 뛰어남

을 다투네. 내 이 시를 보고 머리 돌려 이 사람 생각하노니, 치악산 그윽하여 거마와는 멀구나.

벼슬을 그만두고 내 가서 그와 추종하려 하니, 갈포(葛布) 두건(頭巾)과 들사람의 옷을 누구에게서 빌릴 수 있을

까." 하였다.

 

본조 전흥(田興) : 판주목(判州牧)을 지냈다. 성품이 남을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기를 좋아하였다. 사람에 때리는

형벌을 집행할 때마다 스스로 감시하는 자리를 만들고 태(笞) 한 개도 함부로 치지 못하게 하였다.

 

민정(閔貞) : 목사가 되었다.

 

인물고려 김거공(金巨公) : 성품이 청렴하고 근신(謹愼)하였다. 서리(胥吏)로부터 시작하여 벼슬이 지문하성사

호부상서(知門下省事戶部尙書)에 이르렀다. 원충갑(元冲甲) : 몸이 왜소하고 키가 작으며 민첩하고 사나왔으며

눈에 번개 같은 광채가 있었다. 능히 어려운 일을 당하면 몸을 아끼지 않을 사람이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서

본주의 별초(別抄) 부대에 예속하여 있었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원나라의 반적(叛賊) 합단(哈丹)이 와서 성

(城) 아래에 주둔하여 온갖 계책을 써서 침공하니 성이 거의 함락될 지경이었다. 충갑이 주의 사람들과 함께 이

를 막아 적의 거의 반이나 쏘아 죽였다.

이로부터 적은 예기가 꺾여서 감히 여러 성들을 공략하지 못하였다.

 

○ 정필(鄭弼)의 시에, "성안 범이 우레같이 으르렁거려 땅을 진동시키며 가는 것을, 북원(北原)에서 막아 끊으

니 만민이 살았네. 으뜸되는 전공(戰功)은 홀로 삼분(三分)된 나라의 으뜸이고, 장한 기운은 아직도 오히려 백번

싸우던 옛 성에 서려있네. 사신(史臣)에게 보고하여 뒷세상에 하게 하고, 이미 도호부(都護府)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었네. 밭과 들을 둘러보고 도리어 탄식을 일으키노니 다만 무예만 힘쓰고 농경은 일삼지 않았네." 하였다.

 

○ 설장수(偰長壽)의 시에, "우레가 소리치고 바람이 날리듯 호령이 행하여지니, 고을의 백성들이 힘입어 여생을

보전할 수 있었네. 영웅스런 위엄은 홀로 천 사람의 군진(軍陣)을 쓸어버렸고, 뛰어난 계책은 능히 백치(百雉)

되는 성을 보전하게 하였네. 세 길[丈] 누른빛 깃발로 기묘한 전략을 베풀어서, 만년 청사(靑史)에 홀로 아름다운

이름이 전하네. 지금에 이르기까지 은택(恩澤)이 향리에 남아서, 언덕과 구렁의 빈 밭도 다 개간하여 경작한다네."

하였다.

 

○ 김도(金濤)의 시에, "한 칼로 공을 이루고 의(義)로써 일을 행하니, 고을의 백성들이 이에 좇아 살아갈 수 있

었네. 평안한 저녁 불빛은 높은 언덕에 밝고, 난만한 봄꽃은 작은 성에 가득하구나. 무지개가 동남에 뻗치니 장한

기운이 남아있는 듯, 강물은 고금(古今)에 흐르는데 끼친 이름이 있네. 높고 먼 인물을 누가 능히 따르려나, 들으

니 변방에서는 땅을 갈지 못한다는데." 하였다.

 

○ 조준(趙浚)의 시에, "철관(鐵關)에 오랑캐의 말이 바람처럼 달리더니, 백면(白面)의 젊은이가 한 칼로 전공을

높이 세웠네. 나라에 바친 의로운 충성은 마땅히 해를 꿰뚫을 만하고, 몸을 버린 대의(大義)는 문득 만리장성

같구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로(父老)들은 남기신 은택을 입고, 뒷세상의 영웅들은 그의 큰 이름에 고개 숙인

다네. 나도 또한 난리 평정하여 임금께 아뢴 뒤에는, 살구꽃 피는 봄비에 같이 밭갈까 하노라." 하였다.

 

원부(元傅) : 벼슬이 중찬(中贊)에 이르렀다. 일찍이 퇴직하여 집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문생(門生) 4, 5명이

와서 뵈었다. 앉으라 하고 같이 말하기를, "내가 외람되게 균형(鈞衡)의 수반(首班)이 되어서 재주가 뜻에 미치지

못한다. 세상의 여론이 어떠하냐." 하니 방우선(方于宣)이라는 자가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公)께서

다스리는 것이 그 성(姓)과 같다고 합니다." 하였다. 원부가 크게 웃고 말하기를, "나는 내 성을 본받아서 돌아서

여기에 이르렀다마는, 너는 네 성을 본받는다면 장차 어느 곳에서 그치겠느냐." 하였다.

 

원충(元忠) : 원부의 손자이다. 충선왕(忠宣王) 때 사람이다. 벼슬이 응양상호군(鷹揚上護軍)에 이르렀다.

원선지(元善之) : 원부의 손자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그때에 충선왕은 토번(吐番)으로 귀양가고, 충숙왕(忠肅王)은 원(元) 나라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나라 사람들

중에 유언비어에 영합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원선지는 바른 것을 지키고 동요하지 않았다.

 

원송수(元松壽) : 원선지의 아들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으며 재상다운 국량이

있었다. 인재를 선발하는 직무에 참여한 것이 8년이나 되었는데, 삼가 사람의 명망과 기국(器局)을 존중하여,

조금도 사적으로 행하지 않았다. 신돈(辛旽)의 뜻에 거슬러 파면되니 근심하고 분하게 여겨 병이 나서 죽었다.

 

본조 원효연(元孝然) : 급제하여 세조조(世祖朝)에 좌익공신(佐翼功臣)이 되었다.

벼슬이 예조 판서에 이르고 원성군(原城君)에 봉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다.

 

효자고려 원종량(元宗亮) : 충갑(冲甲)의 증손이다. 본도의 안렴사(按廉使)를 지냈다. 아버지의 상사를 만나

3년을 여묘(廬墓)살이하니,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하였다.

열녀본조 조씨(趙氏) : 생원 조중량(曹仲良)의 아내이다. 남편이 병으로 죽자 끌어안고 울며 굶어죽으니,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제영 치악(雉岳)의 구름 낀 봉우리가 비를 오게 하니 : 한수(韓脩)의 시에, "치악의 구름 낀 봉우리가 비를 오게

하니, 처마에서 떨어지는 소리 쓸쓸한데 저녁 바람이 인다. 이미 맑은 경치가 현포(玄圃 신선이 산다는 곳)로

옮겨가는 것 같음을 즐겨하거니와 다시 아름다운 사람이 부르는 위성곡(渭城曲)주D-022을 듣는다.

노는 사람이 머뭇거림은 옛일을 생각함이 많기 때문인가, 영웅은 이제 적막하지만 높은 이름은 남았구나.

말굽이 이르렀던 곳, 가는 곳마다 거칠어 잡초만 우거짐을 슬퍼했더니, 이 고을 안은 홀로 개천 언덕이 골고루

경작되었네."

 

꽃은 방탕한 손[客]을 어여쁘게 여겨 오히려 웃음을 머금고 : 최수(崔修)의 시에, "늦은 봄에 북원(北原)을 가는

것은 그럴 듯하구나. 무뢰한 동풍(東風)의 일백 가지 느낌이 생기노라. 술을 사랑한다고 하여 도정절(陶靖節)

주D-23을 싫어하지 마라. 시를 읊노라니 도리어 사선성(謝宣城)주D-24이 부끄럽구나.

꽃은 방탕한 손[客]을 어여쁘게 여겨 오히려 웃음을 머금고, 새는 노니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이름을 부를 줄

안다. 태종(太宗)이 순수(巡狩)하던 그 옛날을 추앙하노니 이제까지 그 기름진 은택에 온 고을이 농경하고 있네."

하였다.

 

산중의 늙은 나무 그 나이를 알까 : 강효문(康孝文)의 시에, "산 중의 늙은 나무 누가 그 나이를 알까.

언덕 위의 한가로운 꽃들은 이름을 모르더라." 하였다.

 

치악산(雉岳山)은 푸른 봉우리를 모아서 조령(鳥嶺)에 이었고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치악산은 푸른 봉우리

를 모아서 조령에 이었고, 섬강(蟾江)은 흰빛을 끌어서 여성(驪城)에 닿았네." 하였다.

 

[비고]

 

연혁 숙종(肅宗) 9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 지아비를 죽인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18년에 다시 승격시켰다가

영종 4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 역적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13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본부면(本部面) : 처음은 1리, 끝은 10리이다. 호매곡(好梅谷) :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40리이다.

소초(素草) : 동북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80리이다. 고모곡(古毛谷) : 서북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80리이다.

정지안(正之安) :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이다. 지향곡(地向谷) :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50리이다.

지내(池內) : 서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80리이다. 강천(江川) : 서남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70리이다.

부론(富論) : 서남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80리이다. 굴파(屈坡) : 처음은 30리, 끝은 60리이다.

미내(彌乃) : 서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5리이다. 사제촌(沙堤村)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50리이다.

저전동(楮田洞) : 북으로 처음은 1리, 끝은 15리이다.

 

금물산(今勿山) : 남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5리이다. 가리파(加里坡) : 동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60리이다.

우변(右邊) : 동으로 처음은 70리, 끝은 1백리이다. 좌변(左邊) : 동으로 처음은 1백리, 끝은 1백 40리이다.

사근사(沙斤寺) : 동으로 처음은 1리, 끝은 30리이다. 원의동(遠矣洞) : 동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1백 리이다.

판제(板梯) : 남으로 처음은 1리, 끝은 1백 15리이다.

 

창고 흥원창(興原倉) : 서남쪽으로 70리에 있는데 섬강(蟾江) 북쪽 언덕이다.

예전에는 원주(原州)ㆍ영월(寧越)ㆍ평창(平昌)ㆍ정선(旌善)ㆍ횡선(橫善)의 전세(田稅)를 모아 서울로 옮겼다.

지금은 없어지고 단지 원주의 전세만 모은다.

○ 고려 때 12조창(漕倉)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였다. 평저선(平底船)이 21척인데, 1척에 2백 석을 싣는다.

 

주천창(酒泉倉) : 옛 현에 있다. 별창(別倉) :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사창(司倉)ㆍ영창(營倉)ㆍ둔창(屯倉)ㆍ

군기고(軍器庫)ㆍ영고(營庫)ㆍ보영고(補營庫)ㆍ군수고(軍需庫)는 모두 읍내에 있다.

평원군(平原郡)의 은섬포(銀蟾浦) 앞을 섬구포(蟾口浦)라 부르는데 고려 때 포창(浦倉)을 두었다.

 

진도 안창진(安昌津) : 겨울에는 다리를 놓고, 여름에는 배를 둔다. 흥원진(興原津) : 여주(驪州)로 통한다.

주천진(酒泉津)ㆍ사천진(沙川津) : 동쪽으로 1백 5리에 있다. 모두 평창(平昌)으로 통한다.

 

토산 삼[麻]ㆍ복령(茯笭)ㆍ송이.

 

누정 청음정(淸陰亭) : 읍내에 있다. 청허루(淸虛樓) : 주천(酒泉)에 있다. 귀석정(龜石亭) : 동쪽으로 2리에 있다.

 

[주 D-001] 계수관(界首官) : 서울에서 큰길로 각 도에 이르는 첫 고을을 말하며 관(官)은 고을이라는 뜻이다.

[주 D-02] 대장괘(大壯卦) : 대장(大壯)은 《주역(周易)》의 64괘(卦) 중의 한 괘의 이름이니, 크고 웅장하다는

뜻이다. 《주역》계사하전(繫辭下傳)에, "상고 시대에 사람은 바위틈이나 들에서 살았는데, 후세에 성인(聖人)이

훌륭한 궁실(宮室)을 지어 생활 방식을 바꾸게 되니, 위에는 마룻대를 세우고 아래는 처마 기슭이 있어서 바람과

비에 대비하였다. 이것은 대체로 대장괘(大壯卦)에서 착상해온 것이다." 하였다.

[주 D-003] 장한 마음 기유생(棄襦生)보다도 뛰어났네. : 한(漢) 나라의 종군(終軍)이란 사람이 큰 뜻을 품고 길

을 떠나 관문(關門)을 지나가려 하니 관(關)의 아전이 종군에게 찢은 명주 조각[繻]을 주니, "이것은 무엇하는

것이오." 하고 물으니, 아전이, "돌아올 때에 그 조각을 맞춰보아 부신(符信)을 삼는 것이오." 하였다. 군이 말하

기를, "대장부가 뜻이 있어 서쪽으로 가는 길이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하고, 명주 조각을 버리고 갔다.

후에 종군이 알자(謁者)가 되어 사신으로서 기(旗)를 앞세우고 관문을 지나가니, 관의 아전이 그를 기억하여

말하기를, "이 사자(使者)가 전일에 명주 조각을 버리던 사람이다." 하였다.

[주 D-04] 오성(五城) : 하늘 위의 백옥경에는 5성(城) 12루(樓)가 있다 한다.[天上白玉京 五城十二樓]

[주 D-05] 취생(鯫生) : 취(鯫)는 조그마한 고기이다. 보통 자기를 낮추어 말한다.

[주 D-06] 당음(棠陰) : 《시경(詩經)》 소남(召南)의 감당(甘棠) 편에, "주(周) 나라 소백(召伯)이 감당(甘棠)

나무 아래에서 쉬면서 어진 정사를 하였기 때문에 그가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 감당나무를 차마

베지 못하고 아꼈다." 하였는데 관찰사 등의 관원이 선화(宣化)하는 곳을 말한다.

[주 D-07] 설경(舌耕) : 설경(舌耕)은 입, 즉 혀를 놀려서 먹고 산다는 말이다.

[주 D-08] 남훈곡(南薰曲) : 옛날 순(舜) 임금의 오현금(五弦琴)을 만들어 남풍(南風)을 노래하였다고 한다.

[주 D-09] 그런 까닭에 우리 공 부자(孔夫子)는 '닭 잡는 데 무슨 소 잡는 칼을 쓴단 말인가.' 하고, 희롱하였던

것이다. : 《논어(論語)》양화(陽貨) 편에, "자유(子游)가 수령으로 있는 무성(武城)에서 거문고와 노래 소리를

듣고 공자(孔子)가 조그만 고을의 정치에 무슨 천하를 다스리는 예악(禮樂)의 도(道)를 쓸 필요가 있느냐는

뜻으로, '닭 잡는 데 무슨 소 잡는 칼을 쓴단 말이냐.' 하고 농담을 하였다." 한다.

[주 D-10] 형(刑)이 없게 하기 위한 것이니, : 형조(刑措)라는 말은 형조이불용(刑措而不用)이라는 말로써 즉

형법(刑法)은 갖추어 놓았으나 민중이 잘 교화되어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주 D-011] 급(笈)을 지고 배우러 오는 길 : 급을 지고[負笈]라는 말은 공부할 곳을 찾아다닐 적에

그 행구(行具)를 대로 만든 농[笈]에 넣고 다닌다는 말이 한 나라 이고(李固)에게서 시작되었다.

[주 D-12] 서유자(徐孺子)의 호기(豪氣) : 곧 서치(徐穉)니 유자(孺子)는 그의 자(字)이다. 동한(東漢) 남창

(南昌) 사람이며, 학문이 깊고 지조(志操)가 높은 사람으로서, 세상에서 남주고사(南州高士)라고 일컬었다.

[주 D-13] 광산(匡山) : 사천성(四川省) 강유현(江油縣)에 있는 산 이름이며, 이백(李白)이 일찍이 글 읽던

곳이다. 두보(杜甫)의 시(詩)에, "광산(匡山) 글 읽던 곳에 머리가 희게 되어 좋게 다시 돌아왔네." 라는 글귀가

있다.

[주 D-14] 안탑(雁塔) : 탑의 이름이다. 당(唐) 나라의 고사에 새로 진사(進士)한 사람은 곡강(曲江)에 잔치를

연 뒤에 안탑(雁塔)에 이름을 쓰는 관례가 있었다.

[주 D-015] 물나라에 던져서 이 적선(李謫仙)에게 바치고자 하노라." : 이태백(李太白)을 귀양온 신선이라고

하지장(賀知章)이라는 사람이 칭찬하였다. 그가 물에 빠져 죽었으므로 수부(水府)로 보낸다고 하였다.

[주 D-16] 무회씨(無懷氏) : 태고(太古) 때의 황제(皇帝)의 이름이다.

《노사(路史) 선통기(禪通記)》에, "무회씨는 태호씨(太昊氏)보다 먼저 황제가 되었다는데 세상을 다스림에

도(道)로써 살게 하고 덕으로써 편안하게 하였다." 하였다.

[주 D-17] 갈천씨(葛天氏) : 태고 때 황제의 이름이다. 《노사선통기(路史禪通記)》에, "그 천하를 다스림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믿고, 선화(宣化)하지 않아도 절로 행하여, 넓고 넓어서 형언할 수 없었다." 하였다.

[주 D-18] 혈요(泬寥) : 휑하게 비고 고요한 하늘이라는 뜻이니, 곧 높고 맑은 가을 하늘을 말한다.

[주 D-19] 반도(蟠桃) : 신선의 복숭아이다. 무제내전(武帝內傳)에, "7월7일에 서왕모(西王母)가 내려와서

신선의 복숭아(仙桃) 4개를 무제에게 주어 무제가 먹고 문득 그 씨를 거두어 심고자 하니, 서왕모가 말하기

를, '이 복숭아는 3천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 것인데 중하(中夏)가 땅이 척박하니 심어도 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므로, 무제가 심기를 중지하였다." 하였다.

[주 D-020] 소남(召南)의 시(詩) : 《시경(詩經)》 소남(召南) 편에 실린 시(詩)이다.

소남은 옛날 소공(召公)이라는 어진이가 다스려 교화(敎化)가 깊었으므로 그곳 백성들이 그의 덕을 사모하고

청송하며 또 그 교화되어 부른 노래들이 이 소남의 시편들이라고 한다.

[주 D-21] 여산(廬山)의 혜원(惠遠) : 중국 동진(東晉) 때의 고승(高僧)이다. 여산 백련사(白蓮社)의 개조(開祖)

이니 불경뿐 아니라 유학·노자(老子)·장자(莊子)의 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가 여산의 호계(虎溪)

동림사(東林寺)에 있을 때에 고승들과 명유(名儒)들이 모여들어서, 백련사를 결사(結社)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 D-022] 위성곡(渭城曲) : 악곡명(樂曲名)이니 양관곡(陽關曲)이라고도 한다. 본래 왕유(王維)가 친구를

안서(安西)로 보내면서 지은 증별시(贈別詩)였다. 뒤에 송별(送別)의 정을 노래하는 악곡으로 되었다고 한다.

[주 D-23] 도정절(陶靖節) : 중국 진(晉) 나라의 도잠(陶潛) 즉 도연명(陶淵明)을 세상 사람들이 높여서 일컬은

칭호다.

[주 D-24] 사선성(謝宣城) : 남제(南齊)의 사조(謝眺)이다. 일찍이 선성 태수(宣城太守)를 지냈으므로 세상에서

사 선성(謝宣城)이라고 부른다. 문장(文章)이 맑고 곱기로 유명하였으며 특히 오언시(五言詩)에 뛰어났다고

한다.

 

 

춘천도호부 春川都護府

 

동쪽은 양구현(楊口縣) 경계까지 89리, 남쪽은 홍천현(洪川縣) 경계까지 65리, 서쪽은 경기(京畿)의

가평현(加平縣) 경계까지 59리, 북쪽은 낭천현(狼川縣) 경계까지 64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맥국(貊國)인데, 신라의 선덕왕(善德王) 6년에 우수주(牛首州) : 수(首)는 두(頭)라고도 쓴다. 로

하여 군주(軍主)를 두었다. 문무왕(文武王) 13년에는 수약주(首若州) : 오근내(烏斤乃)라고도 하고

수차약(首次若)이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이 삭주(朔州)로 고쳤다가 뒤에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23년에 춘주(春州)로 하였고 성종(成宗) 14년에는 단련사(團練使)라 하여 안변부(安邊府)

에 예속시켰다. 신종(神宗) 6년에 고을 사람이 길이 험난하여 왕래하기에 곤란하였으므로 최충헌(崔忠獻)에게

뇌물을 주고 높여서 안양도호부(安陽都護府)로 하게 하였다. 뒤에 지춘주사(知春州事)로 강등하였다.

본조(本朝)에서는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하였다가 15년에 준례에 따라 도호부(都護府)

로 승격시켰다.

속현 기린현(基麟縣) : 부의 동쪽 1백 40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의 기지군(基知郡)이었다.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본부(本府)의 속현으로 하였다.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 각 1명이다.

군명 우수(牛首)ㆍ수약(首若)ㆍ오근내(烏斤乃)ㆍ삭주(朔州)ㆍ광해(光海)ㆍ춘주ㆍ안양(安陽)ㆍ수춘(壽春)ㆍ

봉산(鳳山).

 

성씨본부(本部) 최(崔)ㆍ박(朴)ㆍ신(辛)ㆍ허(許). 김(金) : 함창(咸昌). 임(林)ㆍ윤(尹) : 모두 주천(酒泉).

진(陳) : 충주(忠州). 석(石) : 제천(堤川). 안(安)ㆍ원(元) : 모두 원주(原州). 전(全) : 정선(旌善). 함(咸)ㆍ

한(韓) : 모두 다른 곳에서 왔다.

기린(基麟) 박(朴). 사탄(史呑) 송(宋)ㆍ한(韓)ㆍ정(程)ㆍ박(朴)ㆍ양(楊)ㆍ서(徐)ㆍ길(吉)ㆍ이(李)ㆍ전(全).

 

풍속 풍속이 순후하고 아름답다 : 이선제(李先齊)의 시에 있다.

산천 봉산(鳳山) : 부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청평산(淸平山) : 다른 이름은 경운산(慶雲山)이다. 부의 동쪽 44리에 있다.

 

○ 고려의 이자현(李資玄)이 이 산에 들어가 문수원(文殊院)을 짓고 살았다. 더욱 선설(禪說)을 좋아하여,

골짜기 안의 그윽하며 따로 떨어진 곳에 쉬는 암자를 지었다. 둥그렇기가 고니알 같고 겨우 두 무릎을 세울 만

하였다. 묵묵히 그 가운데 앉아서 두어 달이 되어도 나오지 않았다. 그와 같은 해에 급제한 곽여(郭璵)가 부절

(符節)을 지니고 관동(關東)에 왔다가 찾아가서 시를 지어주기를, "청평(淸平)의 산과 물은 상수(湘水)의 물가

처럼 아름다운데, 우연히 서로 만나 고인(故人)을 반기노라. 30년 전에 우리는 같이 급제하였으나, 천리 밖에

떨어져 각각 사는 몸이로구나. 뜬구름처럼 동학(洞壑)에 들어오더니 이로부터 세상일이 없었고,

밝은 달이 냇물에 비치니 티끌에 물들지 않네. 그대 말없이 오래 앉아 있는 곳을 보니, 담담하게 옛 정신이 서로

비치는구나." 하였다. 자현(資玄)이 화답하기를, "따뜻한 기운이 시내와 산에 가득하면서 가만히 봄으로 바뀌는

데, 홀연히 신선의 의장(儀仗)이 굽혀 그윽히 사는 사람을 찾아주셨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세상을 피한

것은 오직 성품(性稟)을 보전하고자 함이요, 직(稷)과 설(契)이 나라 일에 부지런함은 제 몸을 위해서가 아니었

네. 왕명을 받들고 온 이때에 옥패물(玉佩物)이 쟁그랑거리는구나. 어느 날 벼슬을 그만두고 옷의 티끌을 떨쳐

버리려는가. 어찌 이 땅에 함께 살아야 하랴. 종래에 지니고 있는 불사(不死)의 정신을 기르면 그만인 것을."

하였다.

 

용화산(龍華山) : 부의 북쪽 1백 11리에 있다.

화악산(華岳山) : 부의 서쪽 90리에 있다. 영평(永平) 사람들은 백운산(白雲山)이라고 일컫는다.

대룡산(大龍山) :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다른 이름은 여매압산(汝每押山)이다.

석파현(席破峴) : 부의 서쪽 28리에 있다. 우두산(牛頭山) : 부의 북쪽 13리에 있다.

모진(母津) : 부의 북쪽 42리에 있다. 회양(淮陽)의 덕진(德津), 금성(金城)의 보리진(菩提津), 낭천(狼川)의

대리진(大利津)은 곧 그 상류이다.

신연진(新淵津) : 부의 서쪽 15리에 있으며, 소양강(昭陽江)의 하류이다.

 

소양강 : 부의 북쪽 6리에 있다. 근원이 인제(麟蹄)의 서화현(瑞和縣)에서 나와서 본부(本府)의 기린현(基麟縣)

의 물과 합류하여 양구현(楊口縣)의 남쪽에 이르러서 초사리탄(草沙里灘)이 된다. 또 부의 동북쪽에 이르러

청연(靑淵)이 되고 주연(舟淵)이 되며, 적암탄(狄巖灘)이 되고 소양강이 된다.

○ 유숙(柳淑)의 시에, "강가의 봄 아지랑이 연기 같으나 연기는 아닌데, 강머리에는 꽃이 비온 뒤의 하늘 아래

에서 피는구나. 목란(木蘭)으로 만든 아름다운 배는 밝은 거울 같은 강물을 오가고, 소나무 속의 정자는 병풍

같은 절벽 사이로 가렸다 비쳤다 하네. 이곳의 경치와 풍물이 사람의 뜻에 맞기에, 천천히 말 가는 대로 맡겨

두고 채찍을 쓰지 않는다. 좋은 때에 즐거운 뜻을 저버리지 말자, 머리 위에서는 세월이 달려가는 냇물 같으니.

정자 앞의 넓은 들은 하늘과 함께 멀어서, 난간에 의지하여 눈을 드니 마음이 시원하구나.

떨어진 꽃은 분분하게 춤추는 자리에 나부끼고, 봄의 새는 지저귀어 거문고와 피리소리에 화답하네.

내가 경치 좋은 곳을 노닐며 구경하는 날에, 백성의 집들이 부유하고 풍성하게 사는 해를 만났네. 세상의 공명

(功名)이란 살구와 매실 같아서, 어리석은 아이들 속히 갖고자 가슴을 태우는 것. 나는 이제 늙고 병들어서 백에

하나도 쓸모가 없나니. 우물을 파놓고도 먹지 않아서 짙은 이끼만 끼는구나.주D-001 옛날의 현인(賢人)과 달사

(達士)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큰 강물처럼 동쪽으로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구나.

술단지 앞에서 한번 웃는 일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니, 꽃을 상대하여 서너 잔술을 억지로 마시노라.

인생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말한들 무엇하랴. 세상사(世上事)는 눈앞에 날리는 티끌 같구나.

머뭇머뭇 서성거리며 옛일이 슬퍼서 공연히 탄식하노니, 천년 묵은 잘려진 비석이 뺑대쑥에 묻히었네.

매번 시와 술을 가지고 봄빛에 수작하노니, 꽃 없는 때를 기다려 공연히 적막해 하지 말라.

누구의 집에 단샘[泉甘]과 수풀 대밭이 있는고, 이 집 없이 멀리 놀러 다니는 길손을 초대해 주려는가." 하였다.

 

○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소양강 풀은 연기처럼 푸르고, 소양강 물은 하늘보다 더 푸르다. 정(情)이 일어나면

이 우주 안에서는 다 포용하기 어렵고, 시 읊조리면 이미 복희씨(伏羲氏) 이전 시대로 들어가 있네. 큰 들을 바로

내다보니 바둑판 같은데, 멀리 청산을 바라보며 자주 채찍을 휘두른다. 중니(仲尼)가 흐르는 물을 보고 탄식한

뜻주D-02을 누가 알랴. 다투어 최호(崔灝)가 화창한 시내 읊은 것주D-03을 본받는다. 지난해 이곳을 지날 때에

는 가을 바람이 소삽(蕭颯)하더니, 금년에 이곳을 지나가려니 봄빛이 멀고 아득하구나.

명주와 비단에 향기 훈훈한 호박(琥珀)베개, 원앙(鴛鴦)의 노래를 뜯는 거문고의 줄에 이별의 가락이 괴롭다.

다정하게 스스로 아직 젊고 건장한 날이라고 말하였더니, 이제 손가락을 꼽아보고 도리어 늙어진 나이에 놀랐

노라. 강이 맑으니 어찌 매실로 갈증 풀겠는가,주D-04 강물이 흘러가니 나의 회포를 실어 보낼 수 있겠구나.

강 언덕을 빙 둘러 향기 나는 풀을 뜯고, 강의 돌을 사랑하여 푸른 이끼에 앉노라.

육룡(六龍)을 이끌어 잡고 날로 몰아 달려서 백년의 풍광(風光)을 처음대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까.

술 사는 것 어찌 십천두(十千斗)만으로 논하랴, 사람을 만나면 문득 3백 잔씩 마시리라. 이제부터 산과 물 사이

를 어정거리면서, 복잡한 거리의 티끌을 씻은 듯 벗어버리려 한다. 가기가 험난하니 모름지기 세상 길의 악한

것을 알겠구나, 거침[荒]이 많으니 마음 밭(心田)의 잡초를 제거해야 되겠네.

동산(東山)에는 성색(聲色)이 있음을 싫어하지 않았었고,주D-05 수양산(首陽山)에서 어찌하여 괴롭게 적막함

을 굳이 지켰던고. 주인이 이 소양강(昭陽江)의 노래를 듣고, 힘써 소양의 손님을 위로하는구나." 하였다.

 

○ 최여(崔洳)의 시에, "상원(上元) 아름다운 계절의 좋은 경치이고, 천고에 이름 높은 소양강 위 하늘일세.

산빛은 푸르고 푸르게 거울 같은 물 속에 거꾸로 비치고, 띠처럼 늘어진 버들개지는 하늘하늘 바람 앞에 흔들리

네. 강가를 가는 길손이 춘흥(春興)을 일으켜, 말 가는 대로 맡겨두고 한가롭게 시 읊으며 채찍을 늘어뜨렸네.

성 안에 들어서니 경치는 더욱 기절하여라, 들은 넓은데 흰모래가 강물을 두개로 가르네. 수레를 멈추고 오래도

록 물가 모래톱에 섰노라니, 흰 갈매기 날고 해는 떨어져 내 마음은 아득하구나. 당년(當年)의 전성(全盛)하던

때를 상상하여 보니, 붉게 채색한 누각(樓閣)에서는 피리와 거문고 소리 가득하였으리라. 번화는 물을 따라 동

으로 한 번 흘러가 버리고, 강가의 풀과 꽃은 해를 거듭하는구나.

누구의 집 옥피리가 낙매곡(落梅曲)을 부는가, 사람으로 하여금 괜시리 나그네의 회포를 느끼게 하네.

옛날 붉은 단장을 물에 비추던 곳, 비단 씻던 돌은 낡아 공연히 이끼만 끼었구나.

나는 젊던 시절에 놀며 즐기는 것을 좋아하여, 훌륭한 경치를 만날 때마다 번번이 돌아가기를 잊었었다.

앵무주(鸚鵡洲)주D-06 강가에서는 목란(木蘭)의 노를 젖고, 봉황대(鳳凰臺)주D-07 위에서는 황금의 술잔을

기울였더니, 몸이 이끝과 이름을 좇는 속루(俗累)에 얽매인 뒤로부터 10년을 꿈틀거리며 먼지와 티끌 속에 다녔

네. 이제 물과 구름이 지경에서 말고삐를 당기고 서니, 그 자리에서 초일(超逸)한 생각으로 하여금 봉래(蓬萊)를

능가하게 하는구나. 이 강에는 많고 많은 참된 성색(聲色 소리와 빛)이 있으니, 관동(關東)에 적막함이 많다고

말하지 말라. 취한 먹을 갖고 강바람에 말하는 자 누구인가, 자미(紫薇)의 꽃 아래서 륜음(綸音)을 기초하든 객

이로세." 하였다.

 

토산 칠(漆)ㆍ잣ㆍ오미자ㆍ영양(羚羊)ㆍ꿀ㆍ자초(紫草)ㆍ석이버섯ㆍ인삼ㆍ지황(地黃)ㆍ복령(茯苓)ㆍ

누치[訥魚]ㆍ여항어(餘項魚)ㆍ소가리[錦鱗魚]ㆍ송이버섯.

 

누정 이락루(二樂樓) : 소양강 언덕에 있다. 예전에는 소양정(昭陽亭)이라고 일컬었다.

봉의루(鳳儀樓) : 객관(客館)의 북쪽에 있다. 신증 성현(成俔)의 시에, "펀펀한 들이 아득히 먼데 푸른 연기

가로질렀고, 어지러운 산이 이지러진 곳에 푸른 하늘이 열렸다.

봉악산 봉우리는 높이 고개를 쳐들어 천 길이나 일어섰는데, 긴 강물은 한 필 비단처럼 그 앞을 흐른다.

내 오늘 와서 강 위에 이르러, 일만 가지 경치를 거두어 모아서 시 읊는 데 돌리노라. 무창(武昌) 버드나무는

서쪽 물가에 그늘지고, 한양(漢陽)의 구름나무(雲樹)들은 맑은 내를 갈라놓는다. 석양빛 난간에 의지해 서니

보이는 곳이 가이없어라. 바람을 탄 몸이 훨훨 나는 것 같구나. 고금의 영웅이 몇 사람이나 여기에 올라 조망

(眺望)하였던가, 떠나는 자리에는 급한 피리 소리가 거문고의 잦은 가락을 재촉하누나. 시내와 산의 안개와

달은 절로 변함이 없건만, 사람은 옛사람이 아니고 해[年]도 그 해는 아니로구나.

긴 둑 위에 계집아이는 낙매곡(落梅曲)을 노래하여, 길가는 나그네의 많은 회포를 일으키도다. 봄바람 맑고

시원하게 비를 불어 날리니, 점점(點點)이 떨어지는 꽃 짙은 이끼를 덮는다. 꽃은 지고 이끼는 이지러지고 울던

새도 흩어지면, 봄경치 한번 가서 어느 때에 돌아올까. 수심(愁心)을 덜어내는 데 옥해주(玉虀酒)주D-008를 쓸

필요는 없으며, 술이 있으면 그만이니 반드시 유하배(流霞杯)주D-09 아니라도 좋으리. 강물은 출렁거리고 돌

은 깨끗하니, 소양(昭陽) 어디에 조그마한 티끌인들 묻어 올 수 있으랴.

인간에서 경치 좋은 곳은 진정 만나기 어려운 것인데, 어찌 바다를 건너 봉래산(蓬萊山)을 찾을건가.

일천 마을의 복숭아와 오얏꽃 얼굴빛을 곱게하니, 벼슬할 심정도 나그네의 회포도 둘 다 적막할 뿐이네.

엉덩이 살은 반이나 빠지고 수염은 반이나 희어졌구나, 그대에게 권하노니 부디 멀리 노니는 손읁 되지 말지

어다."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역원 보안역(保安驛) :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찰방(察訪)이 있다.

 

본도(本道)의 속역(屬驛)은 29개소이니, 안보(安保)ㆍ천감(泉甘)ㆍ인람(仁嵐)ㆍ원창(原昌)ㆍ부창(富昌)ㆍ연봉

(連峯)ㆍ창봉(蒼峯)ㆍ갈풍(葛豐)ㆍ오원(烏原)ㆍ안흥(安興)ㆍ단구(丹丘)ㆍ유원(由原)ㆍ안창(安昌)ㆍ신림(神林)ㆍ

신흥(新興)ㆍ양연(楊淵)ㆍ연평(延平)ㆍ약수(藥水)ㆍ평안(平安)ㆍ벽탄(碧呑)ㆍ호선(好善)ㆍ여량(餘粮)ㆍ임계

(臨溪)ㆍ고단(高丹)ㆍ횡계(橫溪)ㆍ진부(珍富)ㆍ대화(大和)ㆍ방림(方林)ㆍ운교(雲交) 등이다.

○ 찰방 한 사람 있다. 원창역(原昌驛)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안보역(安保驛) : 부의 서쪽 42리에 있다.

 

인람역(仁嵐驛) : 부의 북쪽 45리에 있다. 부창역(富昌驛) : 부의 동쪽 50리에 있다.

약사원(藥師院) :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율장원(栗長院) :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청평원(淸平院) :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덕두원(德頭院) :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창고 소양강창(昭陽江倉) :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본부(本府)와 홍천(洪川)ㆍ인제(麟蹄)ㆍ양구(楊口)ㆍ

낭천(狼川) 등 고을의 전세(田稅)를 세곡(稅穀)으로 수납(收納)하여 조운(漕運)하여 서울에 가져간다.

불우 문수사(文殊寺) : 청평산(淸平山) 아래에 있다. 즉 이자현(李資玄)이 살던 곳이다.

 

○ 고려 김부철(金富轍)의 기(記)에, "춘주(春州)의 청평산은 옛날의 경운산(慶雲山)이며, 문수원(文殊院)은

옛날의 보현원(普賢院)이다. 처음에 선사(禪師) 승현(承賢)이 당(唐) 나라로부터 신라에 왔다가 고려 광종

(光宗) 24년에 처음으로 경운산에 절을 창건하고 백엄선원(白嚴禪院)이라 하였다.

그때는 송(宋) 나라의 개보(開寶) 6년이었다. 문종 23년 무신년에 좌산기상시 지추밀원사 이두(李頭)가 춘주

도(春州道)의 감창사(監倉使)가 되었을 때, 경운산의 좋은 경치를 사랑하여 백엄(白嚴)의 옛터에 절을 짓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다. 그때는 송(宋) 나라의 희령(熙寧) 원년이었다.

그 뒤에 희이자(希夷子)가 벼슬을 버리고 와서 여기에 숨어 사니 도적이 그치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

었다. 이에 산의 이름을 고쳐 청평(淸平)이라 하고, 원명(院名)을 문수(文殊)라 하였다.

이어서 다시 경영하고 수리하였다. 희이자는 이공(李公)의 장남이니 이름은 자현(資玄)이고 자(字)는 진정

(眞精)이다. 산에 머문 지가 37년이나 되었다." 하였다.

 

○ 원(元) 나라의 태정황제(泰定皇帝)의 황후가 중 성징(性澄)과 윤견(允堅) 등이 바친 불경을 보내서 이 절에

수장(收藏)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왕명으로 비문을 지었다. 비문에 말하기를, "태정(泰定) 4년 3월 경자일

(庚子日)에 첨의정승(僉議政丞) 신(臣) 흡(恰) 등이 중알자(中謁者)로 하여금 임금에게 보고하기를, '천자(天子)

의 근신 사도(司徒) 강탑리(剛塔里)와 중정원사(中政院使) 홀독첩목아(忽篤帖木兒)가 천자의 황후에게서 명령

을 받고 사자로 와서 중 성징과 시인(寺人 내시) 윤견 등이 바친 불서(佛書) 한 질을 청평산 문수사에 귀속시키

고, 돈 만 꾸러미를 시주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이식(利息)을 취하여 황태자(皇太子)ㆍ황자(皇子)를 위하여 복을 빌며, 각각 그들의 탄신을 기하여

중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경(經)을 열람하게 하는 것을 연중행사로 삼도록 했습니다. 또 비를 세워 영구히 뒷

세상에 보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신등은 가만히 생각하니 불법이 중국에 들어와서 세대(世代)를 따라 흥왕

하기도 하고 쇠미하기도 한 것이 거의 천여 년입니다. 원 나라 조정에서는 그 도(道)가 무위(無爲)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 성인(聖人)의 정치에 부합되며 널리 제도(濟度)함을 마음으로 하는 것이 어진 정치에 도움됨이

있다고 하여, 존숭(尊崇)하고 신앙함이 더욱 돈독합니다.

이제 이미 역참(驛站)의 전거(傳車)주D-010로써 그 불서(佛書)를 수천 리 밖에 있는 깊은 산중까지 수송하고,

또 절을 유지할 재물을 세워서 그 무리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였습니다. 이 일은 곧 불도들의 행복입니다.

이름난 산과 복된 땅이 온 천하에 적지 않게 있건만 우리나라를 비루(鄙陋)하게 여기지 않고 여기에 황실(皇室)

의 복을 비는 곳을 설치하였습니다. 이것은 오직 불도(佛徒)들만의 다행이 아니고, 또한 우리나라의 다행한 일

입니다. 장차 대서특필하여 영원무궁하게 자랑하며 빛나게 해야 될 일입니다. 하물며 중궁(中宮)의 전지(傳旨)

가 있으니 감히 공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집필자에게 부탁하여 기를 쓰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신 아무개에게 명(銘)을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신 아무개는 명을 짓기를, '크도다, 이미 원(元) 나라의 어진

정치 대대로 내려왔네. 따뜻한 봄날 같고, 때에 알맞은 단비 같아서, 천하의 만물은 생성한다.

이에 금선(金仙)주D-11 무위(無爲)를 교화(敎化)로 한 것을 흠모하여 그 흙 부스러기와 지푸라기를 써서 중생

을 이롭게 하고 사나움을 금지할 제 이것을 존숭하고 공경하네. 그 무리들을 후하게 복호(復戶)주D-12하여

부역(賦役)도 시키지 않고 세금도 부과하지 않으면서 그 불서(佛書)만을 오로지 공부하게 하네.

그 불서가 천 상자도 넘어서 방대하기가 안개 낀 바다 같도다. 그 글이 정미(精微)하기는 터럭 끝을 쪼듯 하고,

광대하기는 천지를 포함할 만하다. 율(律)은 계(戒)를 좇아 서고, 논(論)은 정(定)으로부터 일어난다. 불경을

연수(演修)함은 지혜의 밝아짐이로다. 크도다, 저 규헌(犪軒)주D-13이여. 높도다, 양거(羊車)ㆍ녹거(鹿車)에

훈훈한 그 향기, 담복화(薝蔔花 치자꽃) 가득한 숲 같구나. 처음 천축(天竺) 땅에서 모은 이는 섭(葉 가섭(迦葉))

과 난(難 아난타(阿難陀))이었고,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전파한 이는 등(騰)과 난(蘭)이었다. 양(梁) 나라에서는

그 쭉정이를 취하였고, 우리는 곡식을 맛보았네. 당(唐) 나라에서는 그것을 돌이라고 짐작하였으나, 우리는

그것을 옥으로 쪼개었네. 저 중 성징(性澄)과 시인(寺人) 윤견(允堅)은 입은 옷은 다르지만 마음은 서로 같아서

이미 불경(佛經)의 서사(書寫)를 성취하여 그 성공을 아뢰었다. 천자의 황후가 가상(嘉尙)하게 여기시고 그것을

간직할 땅을 계책하여 말하기를, '삼한(三韓)은 선(善)을 좋아하고 의(義)를 돈독하게 지킨다. 고려의 지금 임금

은 우리가 낳게 한 우리의 생질이다. 복(福)을 빌어 황실(皇室)에 보답할 그의 정성을 믿는다. 그 나라의 동쪽에

청평산이 있고 문수사가 있다. 길이 막히고 먼 것을 꺼리지 말고 역전(驛傳)을 통하여 가서 베풀지어다.

내탕고(內帑庫)의 돈꿰미를 끌어내어 그 무리들을 먹여 살리고, 이어서 지키도록 왕(王)과 신하들에게 부탁하

라.' 하였다. 임금이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천자의 만세수(萬歲壽)를 송축했네. 천자와 황후가 함께 하고,

근본과 자손이 백대(百代)를 누리면서 제잠(鯷岑 우리나라의 별칭)에 기초가 뭉그러지고 접해(鰈海 우리나라

의 별칭)에 물이 말라 티끌이 날릴지언정 이 공덕의 쌓임은 이지러지지 않고 떨어지지 않으리라.' 하였다."

한다.

 

우두수(牛頭寺) : 우두산(牛頭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봉산(鳳山)에 있다.

여단(厲壇) : 부의 북쪽에 있다.

총묘 신숭겸(申崇謙) : 의 묘(墓) : 부의 서쪽 10리에 있다.

 

고적 옛 난산현(蘭山縣) : 본래 고구려의 석달현(昔達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난산현으로 고쳐 우두주

(牛頭州)의 관할현으로 하였다. 지금은 있던 곳이 어딘지 자세히 알 수 없다.

○ 고증하건대, 김부식(金富軾)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말하기를, "애장왕(哀莊王) 5년에 우두주의 난산현

에 엎드렸던 돌이 일어섰다." 하였고, 《지리지(地理志)》에서는 난산을 삭정군(朔廷郡)의 관할현이라 하였다.

대개 경덕왕이 비렬홀(比列忽)을 삭정으로 고쳤으며, 우수주를 삭주(朔州)라고 고쳤는데,

부식(富軾)이 잘못 고증하여 삭주를 삭정(朔庭)이라 한 것이다.

 

유곡 부곡(楡谷部曲) :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사탄향(史呑鄕) : 화악산(華岳山)의 북쪽에 있다.

지내촌소(枝內村所) :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봉산고성(鳳山古城) : 돌로 쌓았다. 둘레가 2천 4백 63척, 높이가 10척이다.

 

명환신라 수승(守勝) : 진덕왕(眞德王) 원년에 대아찬(大阿湌) 수승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체원(體元) : 효소왕(孝昭王) 7년에 아찬(阿湌) 체원을 총관(摠管)으로 삼았다.

고려 견권(堅權) : 태조조(太祖朝)에 이 고을에 와서 진수(鎭守)하였다.

최약(崔瀹) : 예종조(睿宗朝)에 국가가 한가하니 임금이 시 짓는 것을 숭상하며 놀고 연회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서경(西京)의 대동강(大洞江)에서 잔치를 열고 시신(侍臣)들과 더불어 시를 지은 일이 있었다.

최약도 또한 지제고(知制誥)로서 따라갔다가 글을 올려 간하기를, "제왕은 마땅히 경술(經術)을 좋하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어린아이들이 하는 자잘한 장난을 일삼으십니까." 하였다. 사신(詞臣)이 틈을 타서 말하기를,

"최약이 시를 잘 지을 줄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성내어 최약을 좌천시켜 춘주

부사(春州府使)로 삼았다. 남이 지어준 증별시(贈別詩)에 화답하기를, "우리 집이 대대로 성덕(盛德)한 조정의

은혜를 입었기에, 충성과 청렴을 이어서 가문을 떨어뜨리지 않고자 하였네. 다만 반딧불 같은 작은 빛을 가지고,

성상(聖上)의 태양 같은 밝음에 보태고자 하였을 뿐, 감히 어찌 좁은 식견을 가지고 시문의 근원을 논할 수 있

으랴. 바람과 달을 음영(吟詠)하는 일에 공부함이 없음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다.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구름

덮힌 하늘은 이미 꿈에나 꾸며질 뿐일세. 놀란 땀이 마르기도 전에 도리어 감사의 눈물을 흘리노니, 귀양살이

오면서도 오히려 붉은 덮게[朱轓] 씌운 수레를 탈 수 있었네." 하였다. 임금이 듣고 다시 불러들였다.

 

강창서(姜彰瑞) : 희종(熙宗) 때에 합문지후(閤門祗侯)를 통해 나와서 춘주의 수령이 되었다.

수령을 그만둔 뒤에 고향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조효립(曹孝立) : 고종(高宗) 40년에 문학(文學)벼슬로서

춘주(春州)에 있었다.

몽고군이 침공하여 성(城)을 두어 겹으로 포위하고 여러 날을 계속하여 공격하니 샘과 우물이 다 마르고,

사졸(士卒)들이 몹시 피곤하였다. 효립은 성이 지켜지지 않을 것을 알고 아내와 더불어 불에 뛰어 들어 타죽

었다.

 

본조 이첨(李詹) :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전백영(全伯英)과 더불어 상소하여 이인임(李仁任)ㆍ지윤(池奫)

을 베라고 청하다가 벼슬이 지춘주사(知春州事)로 강등되었다.

 

민제(閔霽) : 고려 신우(辛禑) 때에 지방으로 나가서 지춘주사가 되었다.

조주(趙注) : 세종조(世宗朝)에 부사(府使)가 되었다.

 

인물고려 왕유(王儒) : 본성(本姓)은 박(朴)이다. 성품이 곧고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통달하였다. 처음에는

궁예(弓裔)에게 벼슬하여 관직이 동궁기실(東宮記室)에 이르렀다. 궁예의 정치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화(禍)를

두려워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산골에 숨어 살더니, 태조가 왕위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와서 알현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이제 경(卿)이 오니 부암(傅巖)주D-014과 위수 가[渭濱]주D-15의 선비를 얻은 것과 같다."

하였다. 갓과 띠를 내려주고 긴요한 직무를 처리하게 하였으며, 드디어 성(姓)을 왕(王)으로 내려 주었다.

 

전원균(田元均) : 벼슬이 안렴(按廉)에 이르렀다. 박항(朴恒) : 처음 이름은 동보(東甫)이다. 향공(鄕貢)으로

급제하였다. 고종(高宗) 때 몽고군이 고을을 함락시키자, 박항은 전란에 죽은 부모의 시체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얼굴이 비슷한 자는 모두 거두어 매장하니 그 수가 무려 3백여 인에 이르렀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원 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전함ㆍ군량ㆍ무기ㆍ기계 등을 준비하게 하였다.

그때 우리나라는 몹시 피폐하여 있었는데, 원 나라 장수 흔도(忻都) 등이 감독하는 것을 매우 급하게 하여 우리의

힘이 견딜 수가 없었다. 박항이 임금께 고하여 원 나라 황제에게 아뢰어서 김방경(金方慶)으로써 원수(元帥)를

삼게 하였다. 그리하여 권한이 외국 사람의 손에 돌아가지 않게 하였다. 당시 사회에서 그의 처사가 능숙하다고

칭찬하였다.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우거고려 신숭겸(申崇謙) :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다. 장성하여 무용(武勇)이 있었다. 배현경(裵玄慶) 등과

더불어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더불어

공산(公山)의 동수(桐數)에서 싸워서 불리하게 되니 견훤의 군사가 태조를 포위하여 매우 위급하였다.

숭겸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니 태조가 슬퍼하였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뒤에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또 평산부(平山府) 편에도 신숭겸의 이야기가 나온다.

 

효자고려 조금(趙錦) : 부창 역리(富昌驛吏)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어비이에게 효도함이 지성(至誠)에서

나왔다. 그의 어머니가 겨울에 병이 들어 물고기를 먹고 싶어할 때 금(錦)이 얼음을 쪼개니 한 쌍의 물고기가

뛰어나왔다. 또 어머니의 환갑날에 산의 사슴이 저절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금의 효성에 감응된 까닭이라고

말하였다.

 

제영 고적(古迹)은 우두사(牛頭寺)에 있고 : 이첨(李詹)의 시에, "말 들으니 춘천은 산과 물의 동굴, 백성들의

집은 조밀하고 바람 소리 많다네. 고적은 우두사에 있고 좋은 경치는 소양정(昭陽亭)에 많다." 하였다.

 

강 위의 하늘은 멀고 먼데 누각(樓閣)에 의지해 서니 :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강 위의 하늘은 멀고 먼데

누각에 의지해 서니, 떨어진 꽃과 날아드는 버들개지 봄바람 앞이로구나." 하였다.

 

이곳의 좋은 경치 그림으론 못 그리겠네 : 이변(李弁)의 시에, "이곳의 좋은 경치 그림으론 못 그리겠네.

사면(四面)의 산들이 병풍처럼 옹립하여 두 시내에 임해 있네." 하였다.

 

[비고]

 

연혁 영종 31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 역적 정연(鼎衍)이 태어난 읍이기 때문이다. 40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리 부남면(府南面) : 처음은 1리, 끝은 10리이다. 남부내(南府內)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이다.

동내(東內)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이다. 남내(南內) : 서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북내(北內)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40리이다. 동산외(東山外) :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60리이다.

남산외(南山外) : 서남쪽으로 처음은 35리, 끝은 90리이다. 서상(西上) : 서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50리

이다.

서하(西下)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50리이다. 북중(北中) :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5리이다.

북산외(北山外) : 동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80리이다.

사탄(史呑) : 서북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100리이다. 내면(內面) : 서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80리이다.

기린(基麟) : 동쪽으로 처음은 1백 30리, 끝은 2백 50리이다. 동서로 120여 리, 남북으로 2, 30리인데, 동쪽으로

는 양양(襄陽)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강릉(江陵)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홍천(洪川)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인제

(麟蹄)와 접하였다. 유곡 부곡(楡谷部曲) :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지내촌소(枝內村所) : 동쪽으로 15리에 있다.

 

성지 봉의산고성(鳳儀山古城) : 둘레가 2천 4백 63척이다. 삼악산고성(三岳山古城) : 돌로 쌓은 옛터가 있다.

우두평고성(斗頭坪古城) : 북쪽으로 13리에 있는데, 맥국(貊國) 때에는 성(城)이라 지칭하였다.

신라 문무왕 13년에 수약주(首若州)에 주양성(走壤城)을 쌓았다 : 질암성(迭巖城)이라고도 하였다.

 

창고 소양강창(昭陽江倉) : 강의 북쪽 언덕에 있다. 춘천(春川)ㆍ홍천(洪川)ㆍ인제(麟蹄)ㆍ양구(楊口)ㆍ낭천

(狼川)의 전세를 모아 서울로 옮겼다. 지금은 없어지고 춘천(春川)의 조세만 거두어들인다.

 

남사창(南社倉) : 서쪽으로 35리에 있다. 북사창(北社倉) : 동북쪽으로 40리에 있다.

외창(外倉) : 사탄면(史呑面)에 있다. 내창(內倉) : 내면(內面)에 있다.

기린창(基麟倉) : 기린 옛 현[古縣]에 있다.

 

진도 무진(毋津) : 서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소양강진(昭陽江津) 북쪽으로 3리에 있다.

우두진(牛頭津) : 북쪽으로 5리에 있다. 오무진(五舞津) :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토산 삼[麻]ㆍ목화ㆍ승검초[辛甘菜]ㆍ산겨자[山芥].

누정 소양정(昭陽亭) : 이락루(二樂樓)라고도 한다. 소양강의 남쪽에 있다.

비선정(飛仙亭) : 소양정의 위에 있다.

 

[주 D-001] 우물을 파놓고도 먹지 않아서 짙은 이끼만 끼는구나. : 수풍정괘(水風井卦)의 괘사(卦辭)에, "

우물을 파놓고도 먹지 않으니 내 마음 슬프다.[井穿不食 爲我心惻]" 한 말이 있다.

모처럼 나라에 인재가 있건만 등용하지 않으면 쓸데없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역(周易)》

[주 D-02] 중니(仲尼)가 흐르는 물을 보고 탄식한 뜻 : 《논어(論語)》 자한(子旱) 편에, "공자(孔子)가

냇가에 서서 말하기를, '가는 것이 저렇구나,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라고, 탄식하였다." 한 말이 있다.

[주 D-03] 최호(崔灝)가 화창한 시내 읊은 것 : 당 나라 시인 최호(崔灝)가 황학루(黃鶴樓)에서 지은 시구에,

"갠 냇물에는 한양의 나무가 역력히 보이네.[晴川歷歷漢陽樹]" 한 말이 있다.

[주 D-04] 매실로 갈증 풀겠는가, : 위(魏) 나라의 조조(曹操)가 행군(行軍)할 때, 물이 없어서 군사들이 목이

말라 괴로워하였다. 조조가 영을 내리기를, "앞에 큰 매실나무의 숲이 있다. 열매가 많이 달렸으며 달고 시어서

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사졸들이 듣고 침이 생겨서 목마름을 참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주 D-05] 동산(東山)에는 성색(聲色)이 있음을 싫어하지 않았었고, : 사안(謝安)은 진(晉) 나라 양하(陽夏)

사람이니, 젊어서부터 높은 명성이 있었다. 아직 벼슬하지 않고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숨어 살 때에 성색

(聲色)으로써 스스로 즐겨하였다고 한다.

[주 D-06] 앵무주(鸚鵡洲) : 중국 호북성(湖北省) 한양현(漢陽縣)의 서남쪽 장강(長江) 가운데에 있는

정주(汀洲) 경치 좋은 곳으로 이름이 있다.

[주 D-07] 봉황대(鳳凰臺) : 중국 남경시(南京市)의 동남쪽에 있다.

이백(李白)의 《봉황대시(鳳凰臺詩)》로 유명하다.

[주 D-008] 옥해주(玉虀酒) : 술 이름이다. 수(隋) 나라 양제(煬帝)가 옥해주를 만들었는데 10년이 지나도 부패

하지 않았다.

[주 D-09] 유하배(流霞杯) : 유하(流霞)는 신선(神仙)의 술 이름이다. 유하배는 유하주(流霞酒)를 부은 술잔이다.

항만도(項曼都)라는 사람이 산중에 들어가서 신선을 배우고 있더니 10년 만에야 돌아왔다. 집안 사람들이 까닭

을 물으니, "선인(仙人)이 있어서 다만 유하주 한 잔을 나에게 주는 것을 마셨더니 문득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았다." 하였다.

[주 D-010] 전거(傳車) : 전(傳)은 역(驛)과 같으니, 옛날은 역에 수레를 두었기 때문에 전거라고 한 것이다.

역마(驛馬)와 같은 것이다.

[주 D-11] 금선(金仙) :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한 나라 명제(明帝)의 꿈에 한 길 여섯 자 되는 온몸이

금빛인 사람이 와서 자기는 서방의 성인이라고 하였다 하여 사람을 중앙아시아로 보내어서 불교를 맞아들였다

한다. 그러므로 금빛 몸[金身] 가진 신선이라고 한 것이다.

[주 D-12] 복호(復戶) : 특수한 사람에게 세공(稅貢)·부역(賦役) 등을 면제하는 은전(恩典)이다.

[주 D-13] 규헌(犪軒) : 소가 끄는 초헌(軺軒), 즉 우거(牛車)를 말한다.

불가(佛家)에서는 삼거(三車)라고 하여 우거·녹거(鹿車)·양거(羊車)로써 보살승(菩薩乘), 즉 대승(大乘)과 연각승

(緣覺乘), 즉 중승(中乘)과 성문승(聲聞乘), 즉 소승(小乘)에 비유하고 있다.

[주 D-014] 부암(傅巖) : 고대 중국 은(殷) 나라의 어진 임금 고종(高宗)이 그 어진 재상(宰相)인 부역(傅說)을

만난 곳이다.

[주 D-15] 위수 가[渭濱] : 중국 고대 주(周) 나라의 문왕이 여상(呂尙) 즉 강태공(姜太公)을 만난 곳이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위하(渭河)의 가라는 말이다.

 

 

정선군 旌善郡

 

동쪽은 삼척부(三陟府) 경계까지 74리, 서쪽은 평창군(平昌郡) 경계까지 33리, 남쪽도 평창군 경계까지 43리,

북쪽은 강릉부(江陵府) 경계까지 44리,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잉매현(仍買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명주(溟州)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그대로 명주의 속현으로 하였다가 뒤에 승격시켜 군으로 하였다.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 1명이다.

군명 잉매(仍買)ㆍ삼봉(三鳳)ㆍ주진(朱陳)ㆍ도원(桃源)ㆍ침봉(沈鳳).

 

성씨본군(本郡) 이(李)ㆍ전(全)ㆍ고(高). 문(文) : 사성(賜姓). 안(安) : 흥녕(興寧).

 

풍속 풍속이 순박하다 : 고려 곽충룡(郭翀龍)의 시에, "풍속은 순박하고 백성들은 송사(訟事)함이 없네." 하였다.

 

산 마을에서 돼지고기에 배가 부르고, 이웃집 계사(鷄舍)에는 닭이 살찌다 : 안축(安軸)의 시에, "산 마을에 돼지

배부름은 반드시 새벽에 물먹인 것이 아니요, 이웃집 닭이 살쪄도 날마다 훔쳐가는 자 없다." 하였다.

 

효제향(孝弟鄕) : 고려 함승경(咸承慶)의 시에, "옛부터 사람들이 효제향이라고 하였다." 한다.

형승 일백 번 굽이쳐 흐르는 냇물이요, 천층(千層)으로 층계가 된 절벽이로다 : 곽충룡의 시에, "일백 번 굽이진

흐르는 냇물은 멀리 바다로 향하고 천층으로 층계진 절벽은 하늘에 의지해 가로질렀네." 하였다.

 

산천 비봉산(飛鳳山) : 군(郡)의 북쪽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대음산(大陰山) : 군의 남쪽 2리에 있다.

웅전산(熊前山) : 군의 남쪽 59리에 있다. 벽파산(碧破山) : 군의 서쪽 26리에 있다.

성마령(星磨嶺) : 군의 서쪽 33리에 있다. 재[嶺]가 매우 높고 험준하매 자초(紫草)를 많이 생산한다.

또 평창군(平昌郡)에서도 난다. 정암산(淨巖山) : 군의 동남쪽 80리에 있다.

 

괘현산(掛縣山) : 군의 북쪽 29리에 있다. 대지산(大枝山) : 군의 동쪽 87리에 있다.

풍혈(風穴) : 대음산(大陰山)의 바위 사이에 있다. 그 아래에 얼음을 두면 여름이 지나도 녹지 않는다.

또 수혈(水穴)이 있으니, 남강(南江)의 물이 여기에 이르러 나누어져 땅 속으로 들어갔다가 모마오촌(毛麻於村)

에 이르러 땅 위로 나온다.

 

○ 정추(鄭樞)의 시에, "물구멍, 바람 바위 누가 너를 만들었던가. 더위를 당하여도 맑은 기운 넉넉함이 가장 사랑

스럽구나." 하였다.

 

석혈(石穴) : 군의 남쪽 36리의 산촌(山村)을 향한 석벽 위에 있다. 평지에서 2백 보 남짓한 거리이나 길이 몹시

험하고 좁다. 예전에 마을 백성들이 여기에 들어가서 왜병을 피하였으며, 각 관청의 문서와 장부도 또한 여기에

감춰두어서 병화(兵火)를 면하였다고 한다.

 

대음강(大陰江) : 군의 남쪽 2리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강릉(江陵)의 금강연(金剛淵)이 대음산(大陰山)

아래에 흘러와서 이 강이 되었으며 또 다른 한 원류(源流)는 삼척부(三陟府) 죽현(竹峴)에서 나와서 여기에 와서

합류한다." 한다. 용암연(龍巖淵) : 군의 서쪽 16리에 있다. 대음강의 하류이다.

 

광탄진(廣灘津) : 군의 북쪽 13리에 있다. 대음강의 상류이다.

고천(蠱川) : 군의 동쪽 6리에 있다. 근원이 대지산(大枝山)에서 나와서 혹은 땅 속으로 스며들기도 하고 혹은

흐르기도 하여 대음강으로 들어간다.

 

토산 석철(石鐵) : 웅전산(熊前山)에서 난다. 청석(靑石) : 벽파산(碧波山)에서 난다.

돌고드름[石鍾亂]ㆍ칠(漆)ㆍ잣ㆍ오미자ㆍ자단향(紫檀香)ㆍ황양(黃楊)ㆍ궁간상(弓幹桑) : 강릉 지경에서 난다.

자초(紫草)ㆍ송이버섯ㆍ인삼ㆍ지황(地黃)ㆍ복령(茯岺)ㆍ꿀ㆍ영양(羚羊)ㆍ백화사(白花蛇)ㆍ누치[訥魚]ㆍ

여항어(餘項魚)ㆍ소가리[錦鱗魚].

 

누정 봉서루(鳳棲樓) : 객관의 북쪽에 있다. 정종본(鄭宗本)의 기(記)가 있다.

 

○ 안축(安軸)의 시에, "험준한 언덕을 돌며 말을 급히 몰아 가노라면, 황폐한 옛 성터에 뽕나무와 삼[麻]이 10리

를 이었네. 불모(不毛)의 돌너덜엔 규전(圭田 경대부들의 제전(祭田))이 적고, 발을 옆으로 디디고 다니는 산허리

에는 가는 길이 가로 걸려 있구나. 빗소리 들으니 나그네 된 한(恨) 다시 더하고, 구름을 바라보니 어버이 그리운

마음 참기 어렵다. 바람 바위, 물구멍이 사람 세상 아니로다. 티끌 흔적 씻어 다하니 뼈도 이미 맑아진 듯." 하였다.

 

○ 허소유(許少由)의 시에, "누(樓) 위에는 기이한 경치가 많아서, 바로 눈 앞에 빽빽하게 벌려있다. 물이 맑으니

어찌 발을 씻으랴, 발[簾]이 시원하게 트였으니 낯을 돌릴 만하다. 바람 앞의 대 숲은 큰 깃발처럼 어지럽고, 비

뒤의 산들은 푸른 소라같이 벌려있다 당시에 누가 이곳을 개척하였던가, 천지가 일찍이 내놓기를 인색해 하던

곳인데." 하였다.

 

○ 앞사람의 시에, "땅이 궁벽하니 누구인들 쉽사리 갈 수 있으랴, 온종일 몰아 달려서 강성(江城)을 찾았네.

개 어금니처럼 울퉁불퉁하여 고르지 않은 험한 길에 당했으니 고단(高丹 땅 이름)이 멀고, 계집의 눈썹처럼 공중

에 떴으니 태백산(太白山)이 가로질렸네. 냉담한 것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세속의 취미 어긋나고, 평안하고 한가

함으로 스스로 즐기는 이것이 나의 진정이다. 토지는 메마르고 세금은 무거워서 유리(流離)해 도망한 백성들이

많으니 집집마다 석청(石淸 돌 사이에 모은 벌꿀)을 뽑아 바치는 것을 차마 보랴." 하였다.

 

○ 조준(趙浚)의 시에, "내와 산에 첫눈이 내리니 다니는 사람이 적은데, 흥겨운 마음으로 높이 시를 읊으며 봉성

(鳳城)에 이르렀네. 거듭거듭 겹쳐있는 물은 우레 같은 큰 소리를 내며 달려가 땅 속으로 들어가고, 층층이 늘어선

산봉우리들은 병풍처럼 묶여서 하늘의 반쪽에 가로놓였다. 술잔을 잡고 칼을 보며 나의 뜻을 너그럽게 하고,

말고삐를 잡아채며 풍속을 보아 세속의 민정(民情)을 살핀다. 동쪽 바다를 시원히 씻어버릴 날이 반드시 있으리라,

백성들은 눈을 씻고 맑아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네." 하였다. 신증 성현(成俔)의 시에, "피곤한 말이 실처럼 가는 길

을 뚫고 가기를 근심하니 어지러운 산봉우리들이 높고 깎아지른 듯하여 겹으로 된 성(城)과 같구나.

바람이 바위틈에서 나오니 대포(大砲)의 수레가 구르는 것 같고, 물이 마을을 안고 흘러, 한 필 흰비단 가로놓은

것 같다. 몸은 이 세상 백년에 두 귀밑이 희어졌고, 물과 산 천리 길에는 벼슬살이하러 다니는 심정이 서럽구나.

난간에 의지해 앉아 등산의 달을 기다리노니, 밤이 고요하여 시 생각이 오랠수록 더욱 맑아진다." 하였다.

 

의풍정(倚風亭) : 풍혈(風穴)의 곁에 있다.

○ 송인(宋因)의 시에, "산중의 옛 고을 이것이 주진촌(朱陳村)주D-001인가, 뽕나무와 잣나무에 싸인 집들이 물

가 가까이 있다. 태수(太守)가 정사에 밝아 관(官)에 일도 없으니 남편은 밭 갈고 아내는 점심을 가져갈 때,

살구꽃은 봄이 한창일러라."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군(郡)의 동쪽 8리에 있다. 신증 지금은 옮겨서 군의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호선역(好善驛) : 군(郡)의 동쪽 1리에 있다. 여량역(餘粮驛) : 군의 동쪽 42리에 있다.

벽탄역(碧呑驛) :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행매원(行邁院) : 군의 서쪽 29리에 있다.

 

불우 정암사(淨巖寺) : 정암산(淨巖山)에 있다. 관음사(觀音寺) : 비봉산(飛鳳山) 절벽 위에 있다. 신라의 중

의상(義相)이 살던 곳이다. 절 앞에는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돌길이 개 어금니처럼 엇갈려서 사람이 통행할 수

없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돌을 쌓아 길을 만드니 겨우 사람과 말이 통행할 수 있다.

비록 급한 일이 있더라도 고삐를 놓고 가지 못한다. 이름하여 관음천(觀音遷)이라고 한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의 동쪽 6리에 있다.

여단(厲壇) :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별오곡 부곡(別於谷部曲) : 군의 남쪽 45리에 있다. 개야항소(皆也項所) : 군의 남쪽 60리에 있다.

입탄소(立呑所) : 군의 남쪽 20리에 있다. 북평소(北坪所) : 군의 북쪽 15리에 있다.

고성(古城) :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7백 82척 높이가 8척이다. 안에

성황사(城隍祠)가 있는데, 지금은 반 정도 퇴락하였다.

 

인물고려 문간(文幹) : 본성(本姓)은 전(全)이다. 중국 조정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문씨(文氏)로

사성(賜姓)하였으며,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문관(文冠) : 청렴하고 정직하며 관후(寬厚)하였다. 생을 일삼지 않았으며, 관(官)에 있어서는 절조를 지켜 흔들

리는 일이 없었다. 벼슬이 참지정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을 때에 도부서

(都府署) 한충(韓冲)이 와서 알현하니 문관이 선채로 절을 받고 한 마디도 말을 주고받지 아니하니 한충이 칭찬

하여 말하기를, "진정 원수(元帥)다운 기상이 있다." 하였다.

 

전우화(全遇和) :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전오륜(全五倫) :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본조 전빈(全賓) : 태종조(太宗朝)에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다.

 

제영 물구멍[水穴]은 응당 바다에 통했으리라 : 이색(李穡)의 시에, "일천 산엔 겹친 푸르름이 가로놓였으니,

한 가닥 길은 푸른 공중으로 들어간다. 물구멍은 응당 바다에 통하였으리라. 바람 바위에는 정자를 지을 만하구

나. 땔나무는 험한 곳에서 왔는데, 부엌에 불 땔 때에는 향기가 난다. 관가에 일이 적으니, 오두(遨頭)주D-002가

술에 취하여 한낮에야 비로소 깨는구나." 하였다.

 

나무가 빽빽하니 반(半)은 겨울에도 푸르구나 : 이색의 시에, "봉우리가 높으니 섣달 눈이 남아 있고, 나무가 빽빽

하니 반은 겨울에도 푸르구나. 물을 곁[傍]하여 백성들의 집이 있고, 바위의 모퉁이에 손을 전송하는 정자가 있다.

송사(訟事)가 드무니 관청 뜰에는 풀이 자랐고, 고요히 앉았으니 섬돌의 꽃이 향기롭구나. 가장 술이 순하여 힘이

없으니 산바람이 불면 취기가 저절로 깬다." 하였다.

 

풍속이 검박하여 오히려 태고의 인정이 있다 : 허백(許伯)의 시에, "물을 곁하여 초가집들이 서로 가리기도 하고

비추기도 하며, 벼랑을 따라 밭이랑들은 저절로 가로 되기도 하고 세로 되기도 하였네. 백성들이 편안하여 다만

그윽히 사는 맛이나 이야기하고, 풍속은 검박하여 지금도 오히려 태고(太古) 때의 인정이 있다." 하였다.

 

은사(隱士)가 나란히 밭을 가니 걸익(桀溺)인가 의심하고 : 안축(安軸)의 시에, "은사가 나란히 밭을 가니 걸익인

가 의심하고,주D-03산선(散仙)주D-04이 와서 지나가니 이 이가 경상초(庚桑楚)주D-05로구나. 땅이 높으니 서리

가 빨라서 가을 벼가 짧고, 동학(洞壑)이 그윽이 그늘 깊은데 여름 나무들이 무성하다." 하였다.

 

마을을 안은 흰 비단 같은 찬 강물은 굽이져 흐르고 : 앞사람의 시에, "구렁은 끊어지고 벼랑은 무너져서 가기가

쉽지 않은데, 구름 속으로 들어간 위태로운 돌계단의 길이 외로운 성(城)에 닿았네. 마을을 안은 흰 비단 같은

언덕 저편에는 층층한 사다리같이 비꼈구나. 금각(琴閣)주D-06에 정사가 너그러우니 백성 사랑함이 있음을

알겠고, 송정(訟庭)에서 말을 더듬거리는 것은 실상없는 자를 굴복시킬 때문이네. 내 와서 급히 서정(西亭)을

향해 달려가노니, 잔잔한 물결이 거울처럼 맑은 것 보기 좋구나." 하였다.

 

시냇물 소리는 졸졸 정(情)을 하소연하는 듯 :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산 얼굴은 묵묵하여 뜻을 품고 있는 것

같고, 시냇물 소리는 졸졸 정을 하소연하는 듯." 하였다.

 

하늘 모양은 작기가 우물 속에 비쳐 보이는 것 같고 : 정추(鄭樞)의 시에, "하늘 모양은 작기가 우물 속에 비쳐서

보이는 것 같고, 산의 푸르름은 멀리 구름 위에 가로놓였다. 다섯 동혈(洞穴)은 차고 서늘하여 능히 사람의 뼛속

까지 시리게 하고, 한 시냇물은 목메어 울어 순정(純情)을 하소연하는 것 같다." 하였다.

 

돌무더기 자갈밭에 눈은 빨리 내리고 : 고려 한철충(韓哲沖)의 시에, "벼랑을 따라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길이

있구나, 옛 읍이 산을 의지하였는데, 산은 성(城)을 이루었네. 돌무더기 자갈밭에 눈은 일찍 내리고, 소나무 사이

의 험악한 돌계단 길은 구름 속에 들어가 가로놓였네. 산중에 숨어 살고자 하나 참으로 방도가 없구나,

비록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나 진정이 아닌 것만 같다. 수일(數日) 사이 군재(郡齋)에 공사(公事)가 적어서,

발[簾]을 내리고 높이 누웠으니 맑은 기운 넉넉하다." 하였다.

 

봄에 심고 여름에 김매는 데는 평평한 땅이 적고 : 유관(柳觀)의 시에, "봄에 심고 여름에 김매는 데는 평평한

땅이 적고, 동쪽에서 와서 서쪽으로 흘러가는 큰 내는 길다." 하였다. 꽃이 피니 골짜기의 벌들이 처음으로 꿀을

채집하고 : 박송생(朴松生)의 시에, "꽃이 피니 골짜기의 벌들이 처음으로 꿀을 채집하고, 잎이 무성하니 시냇가

의 여자들이 비로소 가지를 쳐서 뽕잎을 따네." 하였다.

 

[비고]

 

방면 군내면(郡內面) : 끝이 15리이다. 북면(北面) : 처음은 15리, 끝은 40리이다.

서면(西面) :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은 20리, 끝은 40리이다.

동면(東面) : 처음은 10리, 끝은 1백 리이다.

창고 동창(東倉) :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남창(南倉) : 서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진도 여량진(餘粮津) : 역의 서쪽에 있다. 광탄진(廣灘津) : 북쪽으로 13리에 있는데, 북진(北津)이라고도 한다.

동강진(桐江津) : 남쪽으로 2리에 있다.

 

토산 ○ 황장봉산(黃腸封山) :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 고려 현종 13년에 명주(溟州) 위 정선현에서 은광석이 난다고 아뢰었다.

누정 풍암정(楓巖亭) : 동쪽으로 5리에 있다. 영귀정(詠歸亭) : 서쪽에 있다.

 

[주 D-001] 주진촌(朱陳村) : 중국 서주(徐州)의 옛날 풍현(豐縣)에 주진촌이 있었으니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었

으므로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주씨(朱氏)와 진씨(陳氏)가 대대로 서로 혼인하였다. 그리하여 그 마을을 주진촌이

라 하였다 한다.

[주 D-002] 오두(遨頭) : 중국 성도(成都)의 옛 풍속에 4월 19일을 완화절(浣花節)이라고 하여 태수(太守)가

연회를 열고 백성들과 즐기는 일이 있다. 〈성도기(成都記)〉에, "태수가 나와 놀면 사녀(士女)들은 나무 평상

에서 보기 때문에 그것을 오상(遨狀)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태수를 오두(遨頭)라고 한다." 하였다.

[주 D-03] 은사가 나란히 밭을 가니 걸익인가 의심하고, : 《논어(論語)》 미자편(微子篇)에, "공자가 지나가다

가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이라는 두 은사(隱士)가 짝을 지어 밭을 가는 것을 보고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터를

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주 D-04] 산선(散仙) : 도가(道家)에서 말하기를, "신선의 세계에도 또한 관직이 있는데 아직 관직을 받지 않은

자를 산선(散仙)이라 한다." 하였는데, 신선 중에서도 얽매임이 없는 호방한 것을 말한 것이다.

[주 D-05] 경상초(庚桑楚) : 《장자(莊子)》 경상초편(庚桑楚篇)에, "경상초는 노자(老子)의 무위(無爲)의 사상

을 배워 도통하여 무위자연으로써 생(生)을 보호하고 몸을 숨기는 근본으로 하였다." 한다.

[주 D-06] 금각(琴閣) : 수령이 정사하는 곳을 말하는데 금당(琴堂)이라고도 한다.

옛날 복자천(宓子賤)이라는 어진 수령이 단보(單父)라는 고을을 다스릴 때 거문고를 타면서 마루 아래에 내려온

일이 없었으나 단보현은 잘 다스려졌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영월군 寧越郡

 

동쪽은 충청도 영춘현(永春縣) 경계까지 58리, 남쪽은 충청도 영춘현 경계까지 24리, 서쪽은 충청도 제천현

(堤川縣) 경계까지 49리이며, 원주(原州) 경계까지 53리, 북쪽은 평창군(平昌郡) 경계까지 44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내생군(奈生郡)이다. 신라가 내성군(奈城郡)으로 고쳤고, 고려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원주(原州)의 속현으로 하였다. 공민왕 21년에는 이 고을 사람인 환자(宦者) 연달마실리(延達麻實里)가

명(明) 나라에 있으면서 국가에 공(功)이 있다고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본조(本朝)에서는 그대로 하였다.

공정왕(恭靖王) 원년에 충청도에서 떼내어 본도에 예속시켰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 1명이다.

군명 내생(奈生)ㆍ내성(奈城).

 

성씨본군(本郡) 엄(嚴)ㆍ신(辛)ㆍ연(延)ㆍ용(龍). 변(邊) : 촌(村). 진(秦) : 풍기(豐基). 김(金) : 영천(榮川).

윤(尹) : 주천(酒泉). 송(宋) : 다른 곳에서 왔다.

 

형승 칼 같은 산들이 얽히고 설키고 비단결 같은 냇물은 맑고 잔잔하다 : 정추(鄭樞)의 시에, "칼 같은 산들은

얽히고 설키었는데 소나무와 전나무에 달이 비추고, 비단결 같은 냇물은 맑고 잔잔한데 풀과 나무에는 연기가

잠겼다. 주인이 학창의(鶴氅衣)를 헤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풍류(風流)가 그림으로 그려서 전할 만하다."

하였다.

 

산천 발산(鉢山) : 군의 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석선산(石船山) : 군의 서쪽 35리에 있다.

대화산(大華山) : 군의 남쪽 16리에 있다. 양산(梁山) : 군의 북쪽 21리에 있다.

정양산(正陽山) : 군의 동쪽 12리에 있다. 완탙산(莞澤山) : 군의 동쪽 19리에 있는데, 산꼭대기에 못이 있다.

가근동현(加斤洞峴) : 군의 서쪽 14리에 있다. 고덕현(古德峴) : 군의 북쪽 43리에 있다.

도현(刀峴) :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금장강(錦障江) : 군의 동쪽 1리에 있는데, 평창군(平昌郡) 연촌진(淵村津)의 하류이다.

후진(後津) : 군의 서쪽 9리에 있는데, 강릉부(江陵府)의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온다.

 

음곡천(陰谷泉) : 군의 북쪽 24리에 있는데, 근원이 음곡(陰谷)의 바위틈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후진에

들어간다. 밀적포(密積浦) :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금봉연(金鳳淵) : 군의 남쪽 4리에 있다. 금장강과 후진이 여기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가다가 영춘현

(永春縣)에 이르러 눌어탄(訥魚灘)이 된다.

 

토산 석철(石鐵) : 군의 북쪽 가을현(加乙峴)에서 난다. 석종유(石鐘乳)ㆍ자단향(紫檀香)ㆍ백단향(白檀香)ㆍ

기장[黃楊]ㆍ오미자ㆍ자초(紫草)ㆍ송이버섯ㆍ돌버섯ㆍ잣ㆍ인삼ㆍ지황(地黃)ㆍ복령(茯笭)ㆍ꿀ㆍ영양(羚羊)ㆍ

백화사(白花蛇)ㆍ누치[訥魚]ㆍ여항어(餘項魚)ㆍ쏘가리[錦鱗魚].

 

누정 관풍루(觀風樓) : 객관의 동쪽에 있다. 금강정(錦江亭) : 금장강의 언덕 절벽 위에 있다. 선덕(宣德) 무신년

에 군수 김부항(金復恒)이 세운 것이다. 동쪽으로는 금장강에 임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금봉연을 바라본다.

강 밖에 상덕촌(尙德村)이라는 마을이 있어 초가집들과 성긴 울타리들이 뽕나무들 사이로 숨었다 보였다 한다.

남쪽에는 밀적포가 있으니 나무들이 울창하고, 마을 연기와 물기운이 은은히 가리우고 어른거려서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 황희(黃喜)의 시에, "헌함이 높으니 능히 더위를 물리치고, 처마가 트여서 바람이 불어오기

쉽다. 늙은 나무는 그늘이 땅에 드리우고, 먼 봉우리는 푸르름이 공중을 덮었다." 하였다.

 

매죽루(梅竹樓) : 객관의 북쪽에 있다. ○ 군수 신숙근(申叔根)이 세운 것이다.

 

학교 향교(鄕校) : 군의 동쪽 1리에 있다. 풍화루(風化樓)가 있다.

역원 연평역(延平驛) : 군의 북쪽 35리에 있다. 양연역(楊淵驛) : 군의 서쪽 16리에 있는데, 예전 양등소(楊等所)

의 터에 있다. 제덕원(濟德院) : 군의 북쪽 40리에 있다. 용정원(龍井院) : 군의 서쪽 4리에 있다.

 

불우 창령사(蒼嶺寺) : 석선산(石船山)에 있다. 흥교사(興敎寺) : 대화산(大華山)의 서쪽에 있다. 고려의 중 충희

(沖曦)의 비(碑)가 있다. 희(曦)는 인종(仁宗)의 아들이다. 비의 글자가 벗겨지고 떨어졌기 때문에 한 구절도 읽

을 수가 없다. 오직 비음(碑陰)에 스님의 문인(門人)을 기록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비음에는,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최선(崔詵)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글을 쓴다. 그 글에 옛날 태사공(太史公)

이 이미 공자(孔子)를 위하여 세가(世家)를 짓고 또 70제자의 사적을 기술하여 열전(列傳)에 편찬한 뒤에 이름난

산에 감춰두었으며, 당(唐) 나라의 유자후(柳子厚)는 자기 아버지를 위한 신도비의 표문(表文)을 짓고 또 선인

(先人)의 벗 66명을 기록하여 비석의 뒷면에 새겼으니, 비음에 기(記)를 쓰는 것은 지금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국사(國師)의 문인 2백 21명의 이름을 모두 왼편에 쓴다." 하였다.

 

보현사(普賢寺) : 양산(梁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의 북쪽 3리에 있다.

여단(厲壇) : 군의 북쪽에 있다.

 

신증총묘 노산군묘(魯山君墓) :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지금 임금 12년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지키는 사람을 두었다.

 

고적 육말연(陸末淵) : 군의 동쪽 직곡 부곡(直谷部曲)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고을의 부호 엄비(嚴庇)

가 그 곁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암말을 못 가에 두었더니 용이 나와서 교접하여 망아지 한 마리를 낳았다.

그 망아지는 걸음이 빨라서 무리에서 아주 뛰어났다." 한다. 못은 뒤에 홍수 때문에 없어졌다.

 

오라사연(於羅寺淵) : 군의 동쪽 거산리(巨山里)에 있다. 본조 세종(䨆宗) 13년에 큰 뱀이 있었는데, 어떤 때는

못에서 뛰어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물가를 꿈틀거리며 기어다니기도 하였다. 하루는 물가의 돌무더기 위에

허물을 벗어 놓았는데, 길이가 수십 척(尺)이고, 비늘은 돈 같으며 두 귀가 있었다. 고을 사람들이 비늘을 주

어서 조정에 보고하였으므로 권극화(權克和)를 보내어 증험(證驗)하게 하였다.

극화가 못 한 가운데 배를 띄우니 폭풍이 갑자기 일어나서 끝내 그 자취를 알 수 없었다. 뒤에 뱀도 또한 다시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직곡 부곡(直谷部曲)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매내향(買乃鄕) : 군의 북쪽 25리에 있다. 마이탄향(亇伊呑鄕) : 군의 서쪽 50리에 있다.

양등소(楊等所) :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이목소(梨木所) : 군의 동쪽 50리에 있다.

이달소(耳達所) : 군의 서쪽 40리에 있다. 성며탄소(省旀呑所)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주문이소(注文伊所) : 군의 동쪽 40리에 있다. 거탄소(居呑所)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정양산성(正陽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3백 14척, 높이가 19척이다.

완택산고성(莞澤山古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4백 77척이다. 3면이 석벽(石壁)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합단(合丹)이 침입하였을 때 고을 사람들이 여기에서 피난하였다." 한다.

 

명환본조 허주(許稠) : 고을의 풍속에 부모를 위하여 다만 백 일 동안만 상복을 입었는데, 허주가 예(禮)로써

백성들을 타일러 3년상을 실행하도록 권하고, 초상과 제사에 소용되는 재료 등은 거의 도와주는 일이 많았다.

드디어 후한 풍속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김익정(金益精) : 성품이 청렴하고 근엄하여 한 터럭만한 일도 백성을 요동시키지 않았다. 향교를 창설하여

백성의 마음을 진작시키고 학교를 일으키니 백성들이 다 감화하여, 지금까지도 강송(講誦)을 그치지 아니

한다.

 

강진덕(姜進德) : 정치함이 청렴하고 공정하였으며 송사나 죄수를 판결하는 일을 지체하는 일이 없었다.

지금까지 백성들은 그의 은혜를 생각한다. 신증 최응현(崔應賢).

 

인물고려 신염(辛廉) : 공민왕(恭愍王) 때 한양 윤(漢陽尹)이 되었다.

엄수안(嚴守安) : 군의 아전으로서 급제하였다. 사람됨이 담기(膽氣)가 있어 이르는 곳마다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며, 벼슬이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본조 신영손(辛永孫) : 염(廉)의 증손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아들 중거(仲琚)ㆍ계거(季琚)도 모두 급제하였다.

 

효자고려 신영숙(辛永叔) : 어머니의 상사를 당하여 3년을 마치도록 죽을 먹었다.

신증열녀본조 잉질지(芿叱之) : 일수(日守) 임막산(林莫山)의 아내다. 남편이 죽으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도 또한 따라 죽을 것이니 광중(壙中)을 넓게 파도록 하세요." 하더니, 남편을 장사하는 날 목욕하고 머리

빗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빈소의 곁에서 목매어 죽었다. 지금 임금 14년에 정려(旌閭)하였다.

 

제영 관가에 일이 없으니 아침의 衙參을 폐지하였네 : 이첨의 시에, "성곽이 쓸쓸하고 돌길은 비꼈는데, 민가와

아전의 집이 반반씩 여남은 집 살고 있네. 물방아 찧는 소리 밤 도와 급한데 날이 장차 새려 하고, 벼랑 위의

벌꿀에 가을이 깊어지니 국화가 한창이라네. 풍속은 때때로 옛 늙은이에게 묻고, 관가에 일이 없으니 아침의

아참을 폐지하였네. 작은 고을을 누어서 다스리고, 그대는 박(薄)하다고 말하지 말라. 어린이들이 죽마 타고

와서 맞이함을 또한 자랑할 만하네." 하였다.

 

산봉우리들이 비스듬히 물과 구름 속으로 뻗치니 : 송지(宋贄)의 시에, "산봉우리들이 비스듬히 물과 구름 속

으로 뻗치니, 푸른 나귀를 거꾸로 타고 저녁 바람에 선다." 하였다.

 

화락하여 옛풍속이 있네 : 정구(鄭矩)의 시에, "하나하나 시속(時俗)을 물으니, 화락하여 옛풍속이 있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숙종 25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방면 부내면(府內面) : 동쪽으로 15리에 있다. 하동(下東) : 처음은 20리, 끝은 60리이다.

상동(上東) : 처음은 60리, 끝은 1백 20리이다. 천상(川上) : 동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은 5리, 끝은 25리이다. 서면(西面) : 처음은 10리, 끝은 45리이다.

북면(北面) : 처음은 10리, 끝은 50리이다.

창고 동창(東倉) : 40리에 있다. 서창(西倉) : 25리에 있다. 사창(社倉) :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진도 서강진(西江津) : 서쪽으로 8리에 있는데, 옛이름은 후진(後津)이었다.

금강진(錦江津) : 남쪽으로 1리에 있다.

누정 금강정(錦江亭) : 강안(江岸) 절벽 위에 있다. 자규루(子規樓).

능침 장릉(莊陵) : 북쪽으로 5리인 동을지(冬乙旨)에 있다. 본래 노산군(魯山君) 묘인데, 중종 12년에 승지

(承旨)를 보내 치제(致祭)하고 수호하는 사람을 두었으며, 숙종 24년에 장릉이라 추봉(追封)하였다.

단종(端宗) 공의대왕(恭懿大王)의 기일은 10월 24일이다. ○ 별검(別檢)ㆍ참봉(參奉) 한 사람씩이다.

 

 

평창군 平昌郡

 

동쪽은 정선군(旌善郡) 경계까지 45리, 남쪽은 영월군(寧越郡) 경계까지 28리, 서쪽은 원주(原州) 경계까지

24리, 북쪽은 강릉부(江陵府) 경계까지 17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욱오현(郁烏縣)이다 : 우오(于烏)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백오(白烏)로 고쳐서 내성군

(奈城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에서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원주(原州)의 속현(屬縣)으로 하였다

가 충렬왕(忠烈王) 25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신우(辛禑) 때에 총애하는 환자(宦者) 이신(李信)의 고향이라

고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으나 뒤에 도로 현령으로 하였다.

본조(本朝)에서는 태조(太祖) 원년에 목조효비(穆祖孝妃)의 고향이라고 하여 다시 높여 군(郡)으로 하였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 1명이다.

군명 욱오(郁烏)ㆍ백오(白烏)ㆍ노산(魯山).

 

성씨 본군(本郡) 이(李)ㆍ윤(尹)ㆍ김(金)ㆍ추(秋)ㆍ별(別). 김(金) : 개경(開京).

 

산천 노산(魯山) : 군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수정산(水精山) : 군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가물면 여기에서 비를 빈다.

거슬갑산(琚瑟岬山) : 군의 서남쪽 20리, 원주(原州)의 주천현(酒泉縣) 경계에 있다.

성마령(星磨嶺) : 군의 동쪽 44리에 있다. 미탄현(味呑峴) : 군의 동쪽 17리에 있다.

평안천(平安泉) : 평안역(平安驛)의 남쪽 1리에 있다. 군과의 거리는 30리이다. 산기슭의 절벽 밑에 창문 같은

구멍이 있어 장마철마다 물이 구멍으로부터 솟아나온다. 또 그 남쪽에 샘이 있으니 솟아오르고 내뿜어서

드디어 큰 냇물을 이루었다. 용연진(龍淵津) : 군의 북쪽 9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영서(嶺西) 와공산

(瓦孔山)에서 나온다. 남진(南津) : 군의 남쪽 1리에 있는데 바로 용연진의 하류이다.

 

마지진(麻池津) : 군의 서쪽 17리에 있다. 즉 남진의 하류이다.

연화진(淵火津) : 군의 동쪽 50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온다.

○ 용연(龍淵) 이하는 모두 나루터이다.

 

토산 옥석(玉石) : 군의 서쪽 적암리(赤巖里)와 군의 동쪽 성마령(星磨嶺)에서 난다. 동철(銅鐵) : 군의 서쪽

양탄리(梁呑里)에서 난다. 자연석(紫硯石) : 미탄현(味呑峴)에서 나는데 그 품질이 가장 좋다. 칠(漆)ㆍ잣ㆍ

오미자ㆍ자단향(紫檀香)ㆍ안식향(安息香)ㆍ자초(紫草)ㆍ돌버섯ㆍ인삼ㆍ지황(地黃)ㆍ복령(茯笭)ㆍ꿀ㆍ영양

(羚羊)ㆍ백화사(白花蛇)ㆍ누치[訥魚]ㆍ여항어(餘項魚)ㆍ쏘가리[錦鱗魚]ㆍ송이버섯.

 

학교 향교 : 군의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약수역(藥水驛) : 군 서쪽 10리에 있다. 평안역(平安驛)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지상원(祉祥院) :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천천원(泉川院) : 군의 동쪽 25리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ㆍ

여단(厲壇) : 모두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사서량 부곡(沙西良部曲) : 군의 북쪽 10리에 있다. 답곡소(沓谷所) : 군의 동쪽 45리에 있다.

고림소(古林所) : 군의 동쪽 59리에 있다. 신림소(新林所) : 군의 동쪽 65리에 있다.

석을항소(石乙項所) : 군의 동쪽 63리에 있다. 양탄소(梁呑所)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내화석소(乃火石所) : 군의 동쪽 50리에 있다. 노산성(魯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3백 64척, 높이가 4

척이다. 안에 한 우물이 있다. 지금은 반정도 퇴락하였다.

 

인물고려 이천기(李天驥) :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신증본조 이계남(李季男) :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이계동(李季仝) : 계남의 아우로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중추(領中樞)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헌무(憲武)이다.

그때 세상에서 명장(名將)이라고 일컬었다.

 

열녀고려 안씨(安氏) : 전의정(典醫正) 경덕의(景德宜)의 아내이다. 신우왕(辛禑王) 때에 왜적(倭賊)이 난입하여

안씨가 후원(後園)의 움집속에 숨었는데, 왜적이 찾아내 욕보이려 하였으나 안씨는 듣지 않아 살해되었다.

 

제영 산을 베개하고 골짜기에 깃들인 백성의 집들이 있는데 : 정탁(鄭擢)의 시에, "산을 베개하고 골짜기에 깃들

인 백성들의 집들이 있는데, 옛 고을은 몇 리에 걸쳐 쓸쓸한 모습이로구나. 세월이 오래니 이미 자취는 기와집을

봉(封)하였고, 비가 개니 아지랑이의 푸르름은 뜰에 가득하게 서린다." 하였다.

 

구름을 거두니 푸른 산이 지붕 모서리에 당하였네 : 윤홍(尹弘)의 시에, "비 온 뒤의 무성한 풀은 마을길에 가득

하고, 구름을 거두니 푸른 산은 지붕의 모서리에 당했네." 하였다.

 

흰 구름이 일만 그루의 소나무를 깊이 잠궜네[鎖] : 정귀진(鄭龜晉)의 시에, "우연히 흐르는 물을 따라 근원의

막다른 곳까지 와서, 공연히 복숭아꽃 비단 물결 겹치는 것을 볼뿐. 동학(洞壑) 속의 신선의 집은 어디에 있는고.

흰구름이 일만 그루의 소나무를 깊이 잠궜네." 하였다.

 

하늘이 낮아 재[嶺] 위는 겨우 석 자 높이로구나 :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중원(中原)의 서기(書記)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옛 고을 쓸쓸한 옛 산의 모퉁이로다. 문 앞에 땅은 좁아서 수레 두 채를 용납할 만하고, 하늘이 낮아

재 위는 겨우 석 자의 높이로구나. 가을이 깊어가니 벼이삭은 모래밭에 흩어지고, 세월이 오래 된 솔뿌리는 석벽

에 얽혔네. 이곳의 길이 험난하기는 촉(蜀) 나라 길보다도 어려우니, 집에 돌아가는 기쁨이 금성(錦城)의 즐거움

보다 났겠네." 하였다.

 

구름은 위태한 봉우리를 호위하여 푸른 벽(壁)을 뚫는다 : 남긍(南兢)의 시에, "노을은 경치 좋은 곳을 표시하여

돌벼랑을 덮었고, 구름은 위태한 봉우리를 호위하여 푸른 벽을 뚫는다. 말을 타고도 오히려 가는 길이 험난한

것을 노래하며, 사람을 만나면 시험삼아 돌아가 농사짓는 즐거움을 물어본다." 하였다.

 

바른 산 그늘의 넓고 먼 곳에 이르니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빨리 달리는 역마(驛馬)를 타고 머물 겨를 없어,

바로 산 그늘의 넓고 먼 곳에 이르렀다. 사마천같이 멀리 유람함은 아직 그치지 않았고, 진등(陳登)주D-001 같

은 호기는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노라. 시름을 씻는 데 병에 술이 없을 수 있으랴. 기이한 것을 구하는데 도리어

상자에 글이 있구나. 이번 유람의 기절(奇絶)함이 평생에 으뜸되니, 좀 먹은 책 속의 좀벌레 같은 생활이 우습

기만 하여라." 하였다.

 

일백 가지 근심을 노성(魯城)의 봄에 흩어버리니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어제 일찍이 큰 재[大嶺]로부터 왔

더니, 회오리바람에 의지하여 만리를 양각(羊角) 속에 돌아서 온 것 같구나. 매단 것 같은 벼랑에 끊어진 돌계단

은 돌기가 겁이 나고, 고목과 창등(蒼藤)은 지척이 아득하네. 다리밑에 이젠 이미 평탄한 길을 찾은 것을 알건만,

꿈속에는 아직도 파란 절벽을 기어오르는 꿈을 꾼다. 백 가지 시름을 노성의 봄에 흩어버리니, 술 마시며 높은

소리로 담소하여 즐겨하노라." 하였다.

 

[비고]

 

방면 군내면(郡內面) : 끝이 17리이다. 북면(北面) : 처음은 2리, 끝은 17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은 7리, 끝은

28리이다. 미탄(味呑) : 동남쪽으로 처음은 17리, 끝은 45리이다. 동면(東面) : 동남쪽으로 처음은 70리,

끝은 1백리이다. 사서량 부곡(沙西良部曲)은 북쪽으로 10리, 고림소(古林所)는 동남쪽으로 59리,

답각소(沓各所)는 동쪽으로 45리, 돌항소(乭項所)는 동남쪽으로 63리, 신림소(新林所)는 동남쪽으로 65리이다.

성지 노산고성(魯山古城) : 둘레가 1천 3백 64척, 우물이 하나, 양탄소(梁呑所)는 남쪽으로 15리,

내화석소(乃火石所)는 동남쪽으로 50리이다.

창고 동창(東倉) : 동남쪽으로 70리에 있다.

진도 주진(周津) :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용연진(龍淵津) : 동쪽으로 9리에 있는데, 주진의 아래이다.

남진(南津) : 남쪽으로 1리에 있는데 용연의 아래이다. 마지진(麻池津) : 서쪽으로 17리에 있는데 남진의 아래

이다. 연촌진(淵村津) : 바로 주촌강(淍村江)이다.

 

[주 D-001] 진등(陳登) : 동한(東漢) 때의 사람이니 자는 원룡(元龍)이다. 허범(許氾)이라는 사람이 유비(劉備)

에게 그의 인물평(人物評)을 하여 말하기를, "원룡은 호해(湖海)의 선비로서 호기(豪氣)가 일찍이 떨어진 일이

없다." 하였다.

 

 

인제군 麟蹄郡

 

동쪽은 양양부(襄陽府) 경계까지 72리, 남쪽은 홍천현(洪川縣) 경계까지 53리, 서쪽은 양구현(楊口縣) 경계까지

40리, 북쪽은 간성군(杆城郡) 경계까지 80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저족현(猪足縣)이다 : 오사회(烏斯回)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희제(狶蹄)로 고쳐서

양록군(楊麓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에서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춘천(春川)의 속현으로 하였다가

뒤에 회양(淮陽)의 속현으로 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 원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에서는 태종(太宗) 13년에 통례에 따라 현감으로 고쳤다

속현 서화현(瑞和縣) : 화(和)는 화(禾)로 쓰기도 하고 서성(瑞城)이라고도 한다. 현의 북쪽 60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의 옥기현(玉歧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치도(馳道)로 고치고 양록군(楊麓郡)의 속현으로

하였다. 고려에서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춘천의 속현으로 하였다가 뒤에 회양의 속현으로 하였다.

본조에서는 세종조(世宗朝)에 본현의 속현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이다.

군명 저족ㆍ오사회ㆍ희제.

 

성씨본현(本縣) 박(朴)ㆍ허(許)ㆍ조(曹)ㆍ손(孫). 서화(瑞和) 최(崔)ㆍ현(玄)ㆍ이(李)ㆍ곡(谷)ㆍ소(邵).

 

산천 복룡산(伏龍山) : 현의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한계산(寒溪山) : 현의 동쪽 50리에 있다.

○ 산 위에 성(城)이 있다. 냇물이 성 안으로부터 흘러 나와서 곧 폭포를 이루어 내려가니 흐름이 수백 척의

높이에 달려 있으므로 바라보면 흰 무지개가 하늘에 드리워 진 것 같다.

원통역(圓通驛)으로부터 동쪽은 좌우쪽이 다 큰 산이어서 동부(洞府)는 깊숙하고, 산골 물은 가로 세로 흘러

건널목이 무려 36곳이나 된다. 나무들은 갈대 자리를 맡아 세운 듯한 것이 위로는 하늘에 솟고 곁에는 가로 뻗은

가지가 없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욱 높아서 그 꼭대기를 볼 수 없다. 또 그 남쪽에는 봉우리가 절벽을 이루었

는데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어서 기괴하기가 형언 할 수 없다. 너무 높아서 새도 날아 지나가지 못하며,

행인(行人)들은 절벽이 떨어져 누르지나 않을까 의심한다. 그 아래에는 맑은 샘물이 바위에 부딪쳐 못을 이루었

는데 반석(盤石)이 앉을 만하다. 또 동쪽의 몇 리는 동구(洞口)가 매우 좁고, 가느다란 작은 길이 벼랑에 걸려

있다. 빈 구멍은 입을 벌리고, 높은 봉우리들은 높이 빼어나서 용이 마주 당기고 범이 웅켜잡을 것 같으며 층대

(層臺)를 여러 층 겹쳐 놓은 것 같은 것이 수없이 많아서 그 좋은 경치는 영서(嶺西)에 으뜸이 된다.

 

소동라령(所冬羅嶺) : 현의 동쪽 72리에 있다. 소파령(所波嶺) : 현의 북쪽 82리, 간성군(杆城郡) 경계에 있다.

미시파령(彌時坡嶺) : 현의 북쪽 80리에 있다. 미륵천(彌勒川)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그 원류가 넷이 있으니

하나는 소동라령(所冬羅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소파령(所波嶺)에서 나오며, 하나는 서화현(瑞和縣)에서 나오고,

하나는 춘천부(春川府) 기린현(基麟縣)에서 나온다.

주연진(舟淵津) : 현의 서쪽 9리에 있는데 미륵천(彌勒川)의 하류이다. 여름에는 배를 사용한다

 

토산 잣ㆍ오미자ㆍ자초(紫草)ㆍ인삼ㆍ복령(茯笭)ㆍ꿀ㆍ영양(羚羊)ㆍ백화사(白花蛇)ㆍ누치[訥魚]ㆍ

여항어(餘項魚)ㆍ쏘가리[錦鱗魚]ㆍ칠(漆).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원통역(圓通驛)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마노역(馬奴驛)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남교역(嵐校驛) : 현의 북쪽 50리에 있다. 임천역(臨川驛) : 서화현(瑞和縣)의 남쪽 2리에 있다.

신원(新院) : 원통역(圓通驛)의 동쪽에 있다. 신증 가력원(加歷院) : 현의 동쪽 72리 양양부(襄陽府) 경계에 있다.

건이원(巾伊院) : 현의 남쪽 53리, 홍천현(洪川縣) 경계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남쪽 4리에 있다.

여단(厲壇)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이포소(伊布所) : 현의 북쪽 1백 44리에 있다. 예전에는 춘천부(春川府)에 소속하였으나, 세종(世宗) 6년에

본현(本縣)의 소속으로 되었다.

한계산고성(寒溪山古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천 2백 78척, 높이가 4척이다 안에 우물 1개소가 있으나,

지금은 반이나 퇴락하였다.

 

제영 인가가 팔구 집이네 : 우승범(禹承範)의 시에, "옛 고을에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가, 인가가 8, 9집이네."

하였다.

여러 산들이 깊고 멀어서 수레와 말탄 손님 오는 일 없는데 : 하연(河演)의 시에, "여러 산들이 깊고 멀어 수레와

말탄 손님 오는 일 없는데, 한 가닥 길이 돌개천을 곁하여 높기도 낮기도 하구나." 하였다.

신증 땅이 서늘하니 항상 눈[雪]이 남아있고 : 성현(成俔)의 시에, "다리를 지나 관도(官道)가 먼데 숲은 두어 채

의 민가를 가리고 있네, 땅이 서늘하니 항상 눈이 남아있고, 산이 깊으니 아직 꽃이 없다. 가시 처마에 추운 참새

들이 싸우고, 소나무에는 저녁바람이 많다. 나그네의 정상(情狀)은 시름과 병을 더하여, 턱을 고이고 앉았노라니

해가 이미 비꼈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면(縣內面) : 끝이 40리이다. 북면(北面) : 처음은 20리, 끝은 80리이다.

동면(東面) : 처음은 40리, 끝은 70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은 10리, 끝은 40리이다.

서화(瑞和) : 북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1백 40리이다.

이포소(伊布所) : 북쪽으로 1백 40리인데, 전에는 춘천(春川)에 속하였다가 세종 6년에 내속시켰다.

창고 북창 : 북쪽으로 80리이다. 서화창 : 북쪽으로 60리이다.

진도 마노진(馬奴津) : 서쪽으로 3리이다. 가노진(加奴津) : 서쪽으로 10리이다.

주연진 : 서비진(西庇津)이라고도 하는데, 동쪽으로 15리이다.

 

토산 붕어[鯽魚]ㆍ삼[麻]ㆍ황장봉산(黃腸封山) : 두 곳이다.

 

누정 합강정(合江亭) : 동쪽으로 5리인데, 서화(瑞和)ㆍ기린(基麟) 두 내[川]가 합류하는 곳이다.

 

 

횡성현 橫城縣

 

동쪽은 강릉부(江陵府) 경계까지 68리, 남쪽은 원주(原州) 경계까지 13리, 서쪽도 원주의 경계까지 42리, 북쪽

은 홍천현(洪川縣) 경계까지 42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횡천현(橫川縣)이다 : 오사매(於斯買)라고도 한다. 신라에서는 황천(黃川)으로 고쳐서

삭주(朔州)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에서는 다시 횡천(橫川)이라고 일컫고 전대로 삭주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원주(原州)의 속현(屬縣)으로 하였으며, 공양왕(恭讓王) 원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에서도 태종 13년

에 통례에 따라 고쳐서 현감(縣監)으로 하였으며, 14년에는 횡천(橫川)과 홍천(洪川)의 발음이 서로 비슷하다고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이다.

군명 횡천(橫川)ㆍ오사매(於斯買)ㆍ황천(黃川)ㆍ화전(花田).

 

성씨본현(本縣) 추(秋)ㆍ고(高)ㆍ조(趙)ㆍ윤(尹)ㆍ황(黃). 김(金) : 원주(原州). 박(朴) : 밀양(密陽).

 

산천 마산(馬山) : 현의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남산(南山) :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독현(禿峴) : 현의 동쪽 68리, 강릉부(江陵府) 경계에 있다. 회현(檜峴) : 현의 동쪽 36리에 있다.

덕고산(德高山) : 현의 동쪽 82리, 강릉부 경계에 있다. 정금산(鼎金山) : 현의 동쪽 28리에 있다.

서천(西川) :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토산 철(鐵) : 현의 서쪽 금굴이(金掘伊)에서 난다. 칠(漆)ㆍ자단향(紫檀香)ㆍ오미자ㆍ자초(紫草)ㆍ인삼ㆍ

복령(茯苓)ㆍ돌버섯ㆍ꿀ㆍ영양(羚羊)ㆍ백화사(白花蛇)ㆍ누치[訥魚]ㆍ여항어(餘項魚).

 

성곽 덕고산성(德高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6백 53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지금은 반이나 퇴락하였다.

 

신증궁실 동헌(東軒) : 홍귀달(洪貴達)의 시에, "말머리를 동쪽으로 돌려 산과 들에 봄일을 순시(巡視)하고

권농관(勸農官) 재촉해 불러 농사일 권장한다. 금년엔 남쪽 들에 농작물이 많을 것을 알겠구나,

어젯밤 우리의 공전(公田)에 비가 흠뻑 왔으니."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오원역(烏原驛) : 현의 동쪽 35리에 있다. 안흥역(安興驛) : 현의 동쪽 67리에 있다.

갈풍역(葛豐驛) : 현의 서쪽 6리에 있다. 창봉역(蒼峯驛) : 현의 북쪽 40리에 있다.

대비원(大悲院) :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실미원(實美院) : 현의 동쪽 50에 있다.

홍안원(弘安院) :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불우 법흥사(法興寺)ㆍ석천사(石泉寺) : 모두 남산(南山)에 있다. 개원사(開元寺) : 정금산(鼎金山)에 있다.

봉복사(奉福寺) : 덕고산(德高山)에 있다. 회진사(懷眞寺) : 소장산(昭將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북쪽에 있다.

여단(厲壇)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저촌소(猪村所) :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양등촌처(楊等村處) : 현의 동남쪽 30리에 있다.

협촌처(脇村處) :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인물고려 조영인(趙永仁) : 어려서부터 무리 중에 뛰어나 재상의 기국이 있었다. 의종(毅宗) 때에 급제하였고,

명종(明宗) 때에는 벼슬이 차차 올라 승선(承宣)이 되었다. 임금을 도와 바로잡음이 많으니 여론이 그를 존중

하였다. 벼슬이 수태위상주국(守太尉上柱國)에 이르렀다.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정책(定策)의 공(功)이 있다고

하여 개부의 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郞平章事)의 벼슬을 더하였다.

눈이 어둡다는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고 나와서 5년 후에 졸(卒)하니 나이 70세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고,

신종이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조충(趙冲) : 자(字)는 담약(湛若)이니 영인(永仁)의 아들이다. 명종 때 급제하였으며, 학문이 박식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므로 전고(典故)에 정통하였다. 당시의 전장(典章)과 서적(書籍)이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고종조(高宗朝)에 재주가 문무(文武)를 겸비하였다고 하여 특별히 한림학사승지 상장군(翰林學士承旨上將軍)에

임명되었다. 그때에 금산(金山)의 군사가 북쪽의 국경에 침입하거늘, 충(冲)이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출정하였

으나 패하여 면관(免官)되었다. 시를 짓기를, "만리를 달리던 준마의 말굽이 어쩌다가 한 번 미끄러지니 슬피 우

는 사이에 시절이 바뀐 것을 미쳐 깨닫지 못하였다. 만약 조보(造父 말을 잘 부리던 중국 주목왕 때 사람)로 하여

금 다시 채찍을 더하게 한다면, 사장(沙場)을 밟아 고월(古月)을 꺾어버릴 것이라." 하였다. 뒤에 여진(女眞) 황기

(黃旗)의 군(軍)을 압록강에서 크게 쳐부수고 복직되어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가 되었다. 호령이 엄하고 밝아

조금도 어기지 않으니 여러 장수들이 그를 서생(書生) 출신이라고 하여 감히 쉽게 여기지 못하였다.

졸(卒)하니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증직(贈職)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사람됨이 풍채와 자세가 크고 훌륭

하며 겉모양은 엄숙하고 속마음은 너그러워 모든 선비를 만나면 즐겨하는 빛을 하며 대우하는 데 층하를 두지

않았다.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宰相)이 되니 조정과 민간에서 그를 중히 여겼다. 일찍이 동고

(東皐)에 독락원(獨樂園)을 만들어 놓고 공무의 여가에 항상 어진 사대부들을 맞아들여 거문고와 술로써 스스로

즐겨하였다. 뒤에 고종(高宗)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조계순(趙季珣) : 조충의 아들이다.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광정이다.

조변(趙抃) : 계순의 아들이다. 김방경(金方慶)을 좇아 일본을 정벌하여 공(功)이 있었다. 얼굴과 몸가짐이 크고

의젓하고 세련되었으며 자못 전고(典故)에 능통하였다. 성품이 관후(寬厚)하여 그를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본조 조어(趙峿) : 과거급제 하였고, 청렴결백하다고 일컬어졌다. 벼슬이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에 이르렀다.

 

신증 고형산(高荊山) : 급제하여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

였다. 오랫동안 군(軍)의 병사(兵事)와 금전과 양곡을 관리하는 직임(職任)을 맡아 처리가 매우 정밀하였으며,

일을 정비한 것이 많았다.

 

[비고]

 

방면 현내면(縣內面) : 끝이 7리이다. 청룡(靑龍) : 서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우천(隅川)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정곡(井谷) :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5리이다.

둔내(屯內) : 동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40리이다. 갑천(甲川)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50리이다.

송음(松陰) : 북쪽으로 끝이 15리이다. 청일(晴日) : 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5리이다.

수남(水南) : 동쪽으로 25리이다. 공근(公根) : 처음은 5리, 끝은 35리이다.

백모촌처(栢茅村處) : 동남쪽으로 20리이다. 협촌처(脇村處) : 동쪽으로 20리이다.

저촌소(猪村所) : 동쪽으로 20리이다.

창고 동창(東倉) : 동쪽으로 60리, 유곡(楡谷)에 있다. 북창(北倉) : 동북쪽으로 30리이다.

혁폐 횡천역(橫川驛)ㆍ함춘역(含春驛).

진도 북천진(北川津) : 북쪽으로 2리인데 겨울에는 다리로 건너고 여름에는 배로 건넌다.

토산 영양(羚羊).

 

 

홍천현 洪川縣

 

동쪽은 인제현(麟蹄縣) 경계까지 72리, 남쪽은 횡성현(橫成縣) 경계까지 34리, 서쪽은 경기(京畿)의 지평현

(砥平縣) 경계까지 37리, 북쪽은 춘천부(春川府) 경계까지 22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벌력천현(伐力川縣)이다. 신라에서 녹효(綠驍)로 고쳐 삭주(朔州)의 속현으로 하였다.

고려에서는 현종(顯宗) 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이전대로 삭주에 예속시켰다. 인종(仁宗) 21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에서는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통례(通例)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이다.

군명 벌럭천(伐力川)ㆍ녹효(綠驍)ㆍ화산(花山).

 

성씨본현(本縣) 피(皮)ㆍ변(邊)ㆍ용(龍)ㆍ석(石)ㆍ신(辛). 원(元) : 다른 곳에서 왔다. 허(許) : 속(續).

최(崔) : 천녕(川寧). 사이암(寺伊巖) 석)石) : 속(續)

 

풍속 백성의 풍속이 순박하고 소송(訴訟)이 맑고 간단하다 : 서거정(徐居正)의 〈학명루기(鶴鳴樓記)〉에 있다.

 

형승 읍의 인가들이 그윽하고 깨끗하며, 산과 물은 맑고 기이하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있다.

 

산천 석화산(石花山) : 현의 북쪽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대미산(大彌山)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공작산(孔雀山) : 현의 동쪽 25리에 있는데, 정희왕후(貞熹王后)의 태를 봉안하였다.

마점(麻岾)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팔봉산(八峯山) : 다른 이름은 감물악(甘勿岳)인데 현의 서쪽 60리에 있다.

우령(羽嶺) :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세간에서 전하는 말에, "학(鶴)들이 객관의 남쪽 다리에 와서 모였다가 이

재[嶺]를 날아 지나가는데 날개깃이 떨어졌으므로 그렇게 이름 지었다." 한다.

 

가리산(加里山) : 현의 동쪽 70리에 있다. 용연(龍淵)이 있는데, 날이 가물 때에 범의 뼈를 이 용연에 잠그면

응보(應報)가 있다고 한다. 필룡산(匹龍山)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남천(南川) : 현의 남쪽 2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춘천부(春川府)의 소양강(昭陽江)에 들어간다.

 

토산 석철(石鐵) : 현의 동쪽 말흘동(末訖洞)에서 난다. 칠(添)ㆍ오미자ㆍ자초(紫草)ㆍ복령(茯苓)ㆍ꿀ㆍ

영양(羚羊)ㆍ백화사(白花蛇)ㆍ누치[訥魚]ㆍ여항어(餘項魚)ㆍ쏘가리[錦鱗魚]ㆍ돌버섯ㆍ잣.

 

학교 향교(鄕校)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연봉역(連峯驛) :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천감역(泉甘驛) : 현의 동쪽 60리에 있다.

승도원(勝道院) : 현의 남쪽 42리에 있다. 장생원(長生院)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양덕원(陽德院) :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신증 오배원(於背院) : 현의 남쪽 32리에 있다.

교량 학교(鶴橋) : 우령(羽嶺)에 보라.

 

불우 수타사(水墮寺) : 공작산(孔雀山)에 있다. 관음사(觀音寺) : 석화산(石花山)에 있다. 장락사(長樂寺)ㆍ

성방사(城方寺) : 모두 팔봉산(八峯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여단(厲壇) : 현의 북쪽에 있다. 팔봉산사(八峯山祠) : 봄 가을에 본현(本縣)에서 치제(致祭)한다.

 

고적 학명루(鶴鳴樓) :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원주(原州)의 곁에 있는 고을을 홍천(洪川)이라고 한다.

홍천은 산과 물이 둘러있고, 깊고 궁벽한 곳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졌다. 백성들의 풍속은 순박하고 소송(訴訟)

은 적어서 수령 노릇하는 즐거움이 있다. 내가 젊었을 때에 영서(嶺西)에 유학(遊學)한 일이 있었다.

원주(原州)에서 춘천(春川)으로 갈 때에 거듭 홍천으로 길을 잡아 지나갔었다. 그 읍내의 인가(人家)들이 그윽

하고 깨끗하며 산과 물이 맑고 기이하며, 백성들의 재물이 부요(富饒)하고, 수목이 울창한 것을 기뻐하면서 올

라가 한 번 조망할 만한 누대 없음을 한탄하였었다.

정통(正統) 무진년 봄에 윤후(尹侯) 지(志)가 뽑혀 수령으로 왔다. 한 달이 채 못 되어서 정사가 크게 시행되었다.

3년 경오년 가을에 비로소 객관의 동쪽에 누(樓)를 세웠다. 그 누 앞에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매번 공무의 여가가 있을 때마다 누에 올라가 조망하여 막히고 답답한 가슴을 통창하게 하였다. 하루는 고을 안

의 부로들을 누에 초대하여 낙성연(落成宴)을 벌였다. 그 자리에서 누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문의하니,

고을의 늙은이가 말하기를, '객관의 앞 수십 보(步)의 거리에 옛날에 학교(鶴橋)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이루어졌을 때에 학(鶴)이 와서 울었으므로 다리 이름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학은 우리 고을의 상서(祥瑞)

입니다. 청컨대, 이것으로써 누(樓)의 이름을 지으십시오.' 하였다. 후(侯)가 그 의견에 좇았다.

이해 겨울에 후가 서울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춘추(春秋)》에는 공사를 일으켜 경영한 것은 반드시 기록하

였으니, 백성의 역사(役事)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 우리 수령된 자芐 거의 다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며 흉년인데도 거사(擧事)를 지나치게 하여 누(樓)한 채를 세우고 정자 한 채를 짓고

는 반드시 크게 과장하여 써서 그 공적과 유능(有能)을 자랑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나는 이러한 이름을 싫어한다. 다만 그대는 과분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한마디를 얻어 누(樓)를 지은 해와

달이나 기록하고자 하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아름답게 여겨, 청탁에 좇아 기(記)를 쓴다.

그가 누관(樓觀)을 지은 것은 바로 아름다운 경치를 관람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임금의 사자(使者)를 존중하고

빈객을 접대하기 위함이며, 때와 기후를 점치고, 농작(農作)을 살펴서 백성과 더불어 같이 즐겨할 뜻을 가졌으니,

누를 세운 의의가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더군다나 누대의 수리와 퇴폐는 한 고을의 흥왕과 쇠퇴에 달려 있다.

한 고을의 흥왕과 쇠퇴는 수령의 현부(賢否)에 관계되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이것을 필요치 않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공사를 일으키고 경영하는 일에 어떠하였는가

를 살펴보아야 할 뿐이다. 지금 윤후(尹侯)의 이 거사는 백성의 재물을 손상시키지 않고, 시기를 어기지도 않았

으니, 깊이 《춘추》의 알맞은 시기를 살펴서 백성을 사역(使役)하는 뜻을 이해한 것이다.

성인의 포창(褒彰)하고 폄(貶)하는 예(例)에서 본다면 마땅히 크게 쓰고 특별히 써서 찬미해야 할 것이다.

그대가 사양하고자 하나 될 수 있겠는가. 이제 윤후의 말 한 마디를 들으니 더욱 후(侯)의 사람됨을 믿게 되었다.

나는 또 들으니,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학이 구고(九皐)주D-001에 우니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 하였다.

구고는 지극히 깊숙한 곳이고, 구천(九天)은 지극히 비고 넓은 곳이다. 정성이 진실로 지극하다면 멀리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 능히 한없이 비고 넓은 곳까지에도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홍천(洪川)이 비록 작은 고을이기는 하나, 후의 명성의 밝고 빛남이 이와 같으니, 마침내는 반드시 온 나라

안이 떠들석하게 되어 임금의 귀에도 들리게 될 것이며 임금의 조서(詔書)를 받고 벼슬길에 훨훨 날아올라서 한

시대를 울릴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렇게 되면 후가 누(樓)의 이름을 학명루(鶴鳴樓)라고 한 것이 어찌 더

욱 징험이 있지 않겠는가. 후는 시서(詩書)에 통하여 문아(文雅)한 것을 좋아하고 활달한 인물이다.

그런 까닭에 《시경(詩經)》과 《춘추(春秋)》의 말한 바를 아울러 적어서 기(記)로 하노라." 하였다.

 

사이암장(寺伊巖莊) : 현의 동쪽 1백 10리에 있다.

대미산고성(大彌山古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1백 97척이고, 높이가 7척이다. 지금은 반 정도 퇴락하였다.

명환본조 윤번(尹璠) : 현감(縣監)이 되었다.

유거본조 김효성(金孝誠) : 세종조(世宗朝)에 여러 번 장군(將軍)의 임무를 받았다. 뒤에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고 연산군(延山君)에 봉작되었다.

 

제영 산과 물은 한쌍의 족자(簇子)를 이루고 : 이맹상(李孟常)의 시에, "산과 물은 한 쌍의 족자를 이루었는데,

연기와 산안개는 옛 이웃이라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면(縣內面) : 끝이 5리이다. 화촌(花村) : 동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50리이다. 말촌(末村) : 동북쪽

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80리이다. 내촌(奈村) : 동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90리이다. 서석(瑞石) : 동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1백 리이다. 영귀미(詠歸美) : 동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50리이다.

일의산(鎰倚山) : 남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40리이다. 감물악(甘物岳) : 서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80리이다.

북방(北方) : 서북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50리이다. 사이암장(寺伊巖莊) : 동쪽으로 1백 10리이다.

창고 동창(東倉) : 동쪽으로 75리이다. 남창(南倉) : 남쪽으로 20리이다. 서창(西倉) : 65리이다.

북창(北倉) : 동북쪽으로 30리이다.

진도 화양강진(華陽江津) : 남천(南川)에 있는데, 가물면 다리를 놓고 장마에는 배를 놓는다.

관천강진(冠川江津) : 서쪽으로 70리이다.

토산 배ㆍ삼[麻]ㆍ목화. ○ 황장봉산(黃腸封山) : 두 곳이다.

누정 학명루(鶴鳴樓) : 읍내에 있다. 범파정(泛波亭) : 동남쪽으로 2리인 남천에 있다.

 

[주 D-001] 구고(九皐) : 구(九)는 가장 큰 수(數)를 의미하고, 고(皐)는 못 가운데 물이 넘쳐나와 웅덩이가 된

것을 말한다. 매우 멀고 깊숙한 곳을 의미한다.

 

 

47권 회양도호부(淮陽都護府)

 

동쪽으로는 통천군(通川郡) 경계까지 69리, 고성군(高城郡) 경계까지 51리, 남쪽으로는 양구현(楊口縣) 경계

까지 64리, 금성현(金城縣) 경계까지 50리, 서쪽으로는 평강현(平康縣) 경계까지 91리,

북쪽으로는 함경도 안변부(安邊府) 경계까지 39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구려의 각련성군(各連城郡)이다. 각(各)은 객(客)으로 쓰기도 하고, 가혜아(加兮牙)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연성군(連城郡)으로 고쳤다. 고려초에는 이물성(伊勿城)이라 일컬었으며, 성종(成宗)

14년에는 교주단련사(交州團鍊使)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는 방어사(防禦使)로 고쳤다가,

충렬왕(忠烈王) 34년에는 철령(鐵嶺)이 적병을 파수(把守)하여 끊는 데에 공이 있다고 하여 회주목(淮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는 모든 목(牧)이 없어져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낮추어 부(府)로 하였다.

본조(本朝)에서는 태종(太宗) 13년에 통례에 따라 도호부(都護府)로 하였고,

세조조(世祖朝)에는 진(鎭)을 두었다.

 

속현 화천현(和川縣) :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본래는 고구려의 수성천현(藪狌川縣)이다. 신라 때에 수천(藪川)

으로 고치고 대양군(大陽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본부(本府)의 속현

(屬縣)으로 하였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남곡현(嵐谷縣) :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는 고구려의 적목진(赤木鎭)으로, 사비근을(沙非斤乙)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단송(丹松)으로 고치고 연성군(連城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때에는 현종이 지금의 이름

으로 고치고 그대로 본부에 예속시켰으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수입현(水入縣) :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본래는 통구현(通溝縣)의 땅이었는데, 떼내어 본부의 속현으로 하였다.

장양현(長楊縣) :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본래는 고구려의 대양관군(大楊管郡)으로, 마근압(馬斤押)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대양군(大楊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본부의 속현으로 하였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진관 도호부(都護府) 하나 : 철원(鐵原). 현(縣) 7 : 양구(楊口)ㆍ낭천(狼川)ㆍ금성(金城)ㆍ이천(伊川)ㆍ평강(平康)ㆍ

금화(金化)ㆍ안협(安峽)이다.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 각각 1명.

 

군명 각련성(各連城)ㆍ연성(連城)ㆍ이물성(伊勿城)ㆍ회주(淮州)ㆍ교주(交州)

 

성씨본부 송(宋)ㆍ방(房)ㆍ고(高)ㆍ이(李)ㆍ현(玄)ㆍ김(金) : 청도(淸道)ㆍ 채(蔡) : 평강(平康)ㆍ 전(全) :

정선(旌善)ㆍ정(鄭) : 무안(務安). 화천(和川) 김(金)ㆍ은(殷). 수입(水入) 김(金) : 삼척(三陟)ㆍ윤(尹) :

내(來). 남곡(嵐谷) 박(朴)ㆍ전(田)ㆍ노(盧). 현(玄)ㆍ장양(長楊) 맹(孟)ㆍ경(敬)ㆍ화(華). 문등(文登) 신(辛)ㆍ

양(楊)ㆍ수(壽)ㆍ형(邢)ㆍ신(信). 웅림(熊林) 방(房). 북척(北尺) 전(田).

 

형승 중첩된 산과 그윽이 깊으며, 매우 험하다. :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에 있다.

 

산천 의관령(義舘嶺) : 부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천보산(天寶山) : 부의 남쪽 11리에 있다. 금강산(金剛山) : 장양현(長楊縣)의 동쪽 30리에 있다. 부(府)와의 거리

는 1백 67리이다. 산의 이름이 다섯 가지이니, 금강(金剛), 개골(皆骨), 열반(涅槃), 풍악(楓嶽), 지달(只怛)로,

백두산의 남쪽 줄기이다. 회령부(會寧府)의 우라한현(羅漢峴)으로부터 갑산(甲山)에 이르러 동쪽은 두리산(頭里

山)이 되고, 영흥(永興)의 서북쪽은 검산(劒山)이 되었으며, 부의 서남쪽은 분수령(分水嶺)이 된다. 서북쪽으로는

철령(鐵嶺)이 되며, 통천(通川)의 서남쪽은 추지령(楸池嶺)이 되고, 장양(長楊)의 동쪽과 고성(高城)의 서쪽까지

가 이 산이 되었다. 분수령(分水嶺)에서 여기까지는 8백 30여 리이다. 산은 모두 1만 2천 봉으로, 바위가 우뚝이

뼈처럼 서서 동쪽으로 푸른 바다를 굽어보며, 삼나무와 전나무가 들어서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그림과 같다.

일출봉(日出峯)ㆍ월출봉(月出峯)의 두 봉우리가 있어서 해와 달이 뜨는 것을 볼 수 있다.

산 안팎에 모두 1백 여덟 개의 절이 있는데, 표훈사(表訓寺)ㆍ정양사(正陽寺)ㆍ장안사(長安寺)ㆍ마하연(摩訶衍)ㆍ

보덕굴(普德窟)ㆍ유점사(楡岾寺)가 가장 이름난 사찰이라고 한다.

 

○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나라가 약하고 형세가 고립되었다고 하여 국토(國土)를 가지고 고려에 항복하기를

모의하니, 왕자(王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存亡)은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忠臣)ㆍ

의사(義士)와 백성의 마음을 수습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 그칠 일이지, 어찌 천 년의 사직

(社稷)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넘겨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고립되고 위태함이 이와

같으니 사세로 볼 때 보전할 수 없는데, 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싸우다 죽어서 간(肝)과 뇌수(腦髓)를 땅에 칠

하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사자(使者)를 보내어 고려에 항복하기를 청하니, 왕자가

울부짖으며 임금을 하직하고, 곧 이 산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만들고 삼베옷 입고 푸성귀를 먹으며

여생을 마쳤다.

 

○ 최해(崔瀣)의 중을 전송하는 서문(序文)에, "깊은 산 골짜기 사람의 자취가 드물게 이르는 곳에는 마땅히 이물

(異物)이 있어서 여기에 모이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장도릉(張道陵)주D-001의 학문을 하는 자는 어느

산을 몇 번째 통천(洞天)이라고 하고, 아무개 진군(眞君)이 다스리는 곳이라고 한다. 이에 도(道)를 사모하고 세상

을 싫어하며 수련(修鍊)하여 곡식을 먹지 않는 자가 이따금 그 가운데 깃들어 살면서 돌아오기를 잊는다.

나는 비록 그것이 사람의 정(情)에 가깝지 않음을 미워하나, 나와 상대는 다름이 있는 것이므로 또한 그들과 심

하게 따지려고 하지 않는다. 하늘의 동쪽 끝 바다 가까이에 산이 있어서 세속에서는 풍악(楓嶽)이라고 부르는데,

중들은 금강산(金剛山)이라고 하니, 그 설(說)은 《화엄경(華嚴經)》에서 근본한 것이다.

《화엄경》에, '바다 동쪽 보살(菩薩)이 머물던 곳의 이름을 금강산이라 한다.'는 글이 있다고 한다. 나는 이 글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 과연 이 산인지는 모르겠다. 요사이 보덕암(普德菴)의 중이 찬술한 《금강산기(金剛山記)》

라는 것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는 자가 있었다. 읽어 보니 모두 상도(常道)에 어그러지는 허탄한 이야기로

하나도 믿을 것이 없었다. 그 가운데에서, '황금불상(黃金佛像) 53구(軀)가 서역으로부터 바다에 떠서 한(漢) 나라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에 이 산에 이르렀으므로 절을 세웠다.' 하였는데, 불법(佛法)이 동쪽으로 흘러온

것은 한 나라의 명제(明帝) 영평(永平) 8년 을축년이고, 우리나라에서 불법이 행해진 것은 또 양(梁) 나라 무제

(武帝) 대통(大通) 원년 정미년부터이니, 이 해는 한 나라 명제 영평 을축년보다 4백 1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뒤떨

어졌다. 만약 저 《금강산기》의 설대로라면 이것은 중국에서 전혀 부처가 있음을 알지 못하던 62년 전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미 부처를 위하여 법당을 세웠다는 것이 되니, 그것이 가장 우스운 것이다. 다른 것도 이와 같다.

비록 그렇지만 들으니, '옛날에는 불도(佛道)를 배우는 사람들이 이 산 속으로 들어가서 부지런히 뜻과 행실에

힘써 그 도(道)를 실증(實證)한 자가 자주 있었다.' 한다. 이것은 처음 이 산은 사람 사는 곳에서 수백 리가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바위로 된 봉우리가 벽처럼 서 있어 이르는 곳마다 모두 천길 만길이어서 낭떠러지와

험준한 골짜기에 몸을 의지할 만한 암자나 움집도 없었으며, 채소나 과일을 심어서 먹을 만한 자투리땅도 없었

으니, 여기에 산다는 것은 구멍에 숨거나 나무 위에 둥지를 만들어서 새나 짐승과 섞여 살거나 풀 뿌리나 나무

껍질로 주린 배를 채우는 자가 아니라면 하루도 머무를 수 없었을 것이다. 부처의 법은 도를 닦는 데에 반드시

수고로움을 참고 괴로움을 견디는 일을 시험한 뒤에야 깨달음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 스승인 석가모니는 설산

(雪山)주D-02에서의 6년 동안의 고행(苦行)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법을 참고 배워 부지런히 닦는 데 뜻

을 둔 자는 산에 들어가지 않으면 또한 불법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근래에는 그렇지 않아서 산중에 암자가 해

마다 늘어나서 거의 백 개나 된다.

그 중에 큰 절로는 보덕사(報德寺)ㆍ표훈사(表訓寺)ㆍ장안사(長安寺) 등이 있는데, 그 절들은 모두 관청에서 짓고

수리하여 전각(殿閣)은 하늘처럼 높이 산골짜기에 가득하며, 금빛과 푸른빛의 단청(丹靑)은 빛나고 밝아서 사람

의 눈을 부시게 한다. 상주(常住)하는 경비(經費)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재물을 맡은 고(庫)가 있고, 보(寶)를 맡은

관원이 있다. 성곽을 등지고 있는 좋은 밭은 주군(州郡)에 가득하고, 또 강릉(江陵)ㆍ회양(淮陽) 두 도(道)에서는

해마다 조곡(租穀)을 곧장 관(官)에 들여서 다 엄중히 산으로 수송한다. 비록 흉년을 만나더라도 감면(減免)되는

일이 없다. 매번 사자를 보내서 해마다 옷과 양식과 기름과 소금 등의 물품을 지급하는데, 반드시 빠짐이 없게

한다.

그 중들은 대체로 관(官)에 예속되지 않는다. 백성이 도피하여 부역을 면하는 자가 항상 수천 수만 명이 있어 편안

히 앉아 먹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한 사람도 설산(雪山)에서 고행한 석가모니처럼 부지런히 닦아 도(道)를 얻은

자가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그 위에 더욱 심한 자가 있으니, 사람을 속여 유혹하기를, '한번 이 산을 보면

죽어서 악도(惡道)주D-03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니, 위로는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는 사(士)ㆍ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다투어 가서 예배(禮拜)한다.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과 장마가 내려서 길이 막

힐 때를 빼고는 산을 유람하는 무리들이 길에 늘어서 있다. 또한 과부와 처녀들이 따라가서 산 속에 며칠씩 머무

르면서 추한 소문이 때때로 들리건만 사람들은 괴이쩍게 여길 줄을 모른다.

혹은 근시(近侍)가 왕명을 받들고 역마(驛馬)로 달려 향(香)을 내려주는 일이 1년 4계절에 끊이지 않는데, 관리들

은 그들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급히 달려가 명(命)을 기다리니, 그 수요(需要)를 공급하는 비용이 자칫하면 만금

(萬金)으로 계산된다. 산 옆에 사는 백성들은 응접(應接)하는 일에 피곤하여 성내며 꾸짖어 말하기를, '산은 어째

서 다른 고을에 있지 않았던가.' 하는 자도 있다.

아, 사람들이 이 산을 사랑하는 것은 보살이 여기에 머무르기 때문이고, 보살을 존경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속

에서 사람에게 복을 주기 때문이다. 그 보이지 않는데에 복을 주는 일은 알 수가 없는데, 중들이 이 산을 속여

팔아서 스스로 따뜻하고 배부르기를 도모하여 백성들이 그 해를 입으니,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러므로 나는 사대부(士大夫)로서 산으로 놀러 다니는 자를 보고서 비록 이것을 중지시킬 힘은 없으나 마음속

으로는 가만히 비루하게 여겼는데, 이제 불도(佛徒) 선지사(禪智師)가 이 산에 가게 되었기에, 나의 평소에 가슴

속에 쌓아 두고 토로하지 않았던 것을 적어서 준다. 선지사는 벌써 중이 되었으면서 왜 이 산에 들어가는 것이

이렇게 늦었는가? 산중에 만약 사람이 있거든 나를 위해서 말을 전해 주시오. 마땅히 나의 말을 옳게 여기는 자가

있을 것이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중을 전송하는 서문에, "금강산은 우리나라 동해(東海) 가에 있는데 그 지형의 아름다움이 천하

에서 제일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이 천하에 알려진 것이다. 내가 어릴 때에 일찍이 들으니, '천하 사람들이 와서

보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없으나, 그렇게 되지 못함을 한탄하여 그 그림을 걸어 놓고 예배(禮拜)하는 자가 있었

다.'고 하니, 그 사모함의 간절함이 이러하였다. 나는 다행히도 이 나라에 나서 이 산과의 거리가 수백 리도 안되

건만, 벼슬에 얽매이고 세속의 명리(名利)에 분주하여, 일찍이 한 번도 가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표연히 떠나

멀리 가고 싶은 마음은 일찍이 가슴속에서 오락가락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병자년 가을에 내가 중국에 가서

천자(天子)를 알현하니, 황제(皇帝)가 친히 글제를 내고서 시(詩) 20여 수를 짓게 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금강산(金剛山)이라는 제목이었다. 이에 이 산의 이름이 과연 온 천하에 높아서 내가 어릴 때에

들은 것이 거의 빈말이 아님을 알았다. 평소에 한번도 가 보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하늘 같은 복으로 본국에

돌아간다면 반드시 먼저 이 산에 가서 평소의 뜻을 이루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제 이미 돌아왔으나,

전일처럼 얽매여서 나의 뜻을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하루는 중 나암(懶菴)이 소매 속에 시를 넣어 가지고

왔기에, 열람(閱覽)하니, 금강산 유람길 떠나는 데에 전송하는 작품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책을

어루만지며 스스로 탄식하기를, '내 어찌하면 속세를 털어버리고 구름처럼 험한 곳을 지나 높은 정상에 올라 다리

로는 천길의 높은 곳을 밟고 눈으로는 천리 먼 곳까지 바라보며, 언덕이나 개밋둑을 작게 여기고 속세를 좁게 여

기며, 창해(滄海)에 목욕하는 해를 굽어보고, 천지의 넓고 큰 기운을 받아서, 동해(東海)에 뛰어들어 죽은 노련

(魯連)주D-004을 생각하며,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기던 공자(孔子)주D-05를 희망하면서,

넓고 큰 마음으로 스스로 만족하며 유유하게 돌아가기를 잊어 나의 평생의 가슴속에 쌓인 답답함을 시원하게

씻어 버릴 수 있을까.' 하였다. 아, 이 산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고, 내가 보고 싶어한 지도 또한 오래되었다.

몇백 리 되지도 않는 가까운 거리에서 수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내면서 아직 한 번도 눈으로 보지 못하였으니,

천하에서 보고 싶으면서 보지 못한 사람이 몇 사람이겠는가. 그 보지 못한 사람들은 다만 한가하거나 바쁘거나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서로 같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운수(運數)가 있어서 속물(俗物)

은 선경(仙境)을 밟을 수 없어서일까. 또 이미 본 자의 얻은 바가 다 같은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알지 못하

겠다. 스님이 얻는 바도 여러 사람들과 같을 뿐일까. 만일 훗날에 내가 혹 한 번 올라가 볼 수 있게 된다면 내가

얻는 바는 또 어떠할는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지금 보고 싶으나 볼 수 없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런 까닭에 이 시책을 보고 더욱 감상이 이는 것이다. 나암(懶菴)은 대대로 벼슬한 집안으로 비단옷을 버리고

누더기를 입었으나, 얼굴이 청초(淸楚)하고 행실이 깨끗하니, 나는 장차 그와 더불어 속세 밖의 벗으로 하려

한다." 하였다.

 

○ 하륜(河崙)의 중을 전송하는 시(詩)의 발문(跋文)에, "풍악은 진실로 기이하고 뛰어나서 사랑할 만하다.

납의(衲衣)를 입은 중들이 그 사이에 살고 있는데, 돌계단이 천길이나 되어서 사람의 자취가 드물게 이르기 때문

에 마음이 경계와 더불어 고요하여 간혹 그 도(道)를 깨닫는 자도 있다.

그러나 그 산을 금강산(金剛山)이라고 일컫는 것은 장경(藏經)의 설에서 따온 것이다. 장경(藏經)에서 금강산을

말하기를, '동해(東海) 안 8만 유순(由旬)주D-006이 되는 곳에 1만 2천의 담무갈(曇無竭 보살의 이름)이 항상 그

가운데에 머무른다.' 하였으니, 이는 풍악(楓嶽)을 말한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가 서방(西方)에서 나서 등정각

(等正覺)주D-07과 열반(涅槃)주D-08을 이룬 것은 중국의 주 나라와 시대가 같다.

주 나라 이전부터 반고씨(盤古氏)주D-09 이후로 하 나라ㆍ 상 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성현(聖賢)의 많음과 교화

(敎化)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우씨(夏禹氏)가 도산(塗山)주D-10에 모이자,

옥과 비단을 가지고 온 나라가 만국(萬國)이나 되었으며, 무왕(武王)이 상 나라를 치자 기약하지도 않고 모인 자가

8백 나라나 되었다. 무왕이 이미 상 나라를 쳐서 이기고는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였는데,

조선은 동해(東海) 가에 있으면서 국토가 크고 사물(事物)의 번성함을 칭송할 만한 것이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

었다. 석가모니가 말한 바는 만축(萬軸)이나 되는데, 어찌 한마디도 중국의 일에는 언급한 것이 없고, 유독 동해

가운데에 있는 금강산의 거리와 담무갈(曇無竭)의 숫자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자세히 언급하였단 말인가.

그 밖에 과거와 미래,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에 대한 설도 모두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였는가.

그러나 현재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생략하였다. 어째서 그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자세히 말하고, 사람들

이 누구나 아는 것은 언급하지 않았는가. 이는 모두 가설(假說)을 이야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사모

할 줄을 알아서 선(善)으로 향하는 생각을 자라나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풍악(楓嶽)을 일컬어 금강산(金剛

山)이라고 한 것은 가설 중의 가설인 것이다. 지금 스님이 가는 것은 그 풍악의 기이하고 뛰어난 경치를 사랑해

서인가 그 금강(金剛)이라는 가설(假說)을 사모해서인가. 거짓된 설이 한번 나오자, 온 세상 사람들이 그치기

않고 분주히 달려가기에 내가 변론하려 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스님이 시(詩)를 청하는 것을 인하여 이미 그

옛날 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었던 뜻을 제영(題詠)하고, 이어서 이 설을 쓴 것이니, 스님은 참작할지어다.

만약 '모든 상(相)은 상(相)이 아니니, 진(眞)도 가(假)도 다 공(空)이다.'라고 말한다면, 내가 감히 변론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하늘을 찌르는 구름 빛이 신령스런 광채를 내뿜으니, 천자(天子)가 해마다 향(香)을 내리네,

한번 바라보고 싶어하던 평생의 마음을 이미 마쳤으니, 굳이 깊은 곳에서 새끼로 만든 평상에 앉아야 할 것은

없다." 하였다.

 

○ 권근(權近)의 명 나라 황제에게 바친 응제시(應制詩)에, "높고 높은 천만봉(千萬峯)이 눈처럼 희게 서 있으니,

바다의 구름이 옥부용(玉芙蓉)을 열어 내놓았네, 신령한 빛이 출렁거리니 창해(滄海)가 가깝고, 맑은 기운이 일

어나니 조화(造化)가 모임이로다. 우뚝이 높게 솟은 언덕과 봉우리는 조도(鳥道)에 임하고, 맑고도 그윽한 골짜

기는 신선의 자취를 숨기고 있네. 동쪽으로 노닐어 문득 그 높은 정상에 올라 홍몽(鴻濛)주D-011을 굽어보며

한번 시원히 가슴을 씻었으면." 하였다.

 

○ 고려 전치유(田致儒)의 시에, "풀과 나무 조금 나서 벗겨진 머리의 터럭같고, 연기와 노을이 반만 걷혔으니

어깨 드러낸 가사(袈裟)와 같구나. 우뚝 높은 봉우리 뼈뿐이어서 홀로 외롭고 깨끗하니, 응당 육산(肉山)의

살찌고 크기만 한 것을 웃으리라." 하였다.

 

○ 안축(安軸)의 시에, "뼈처럼 선 봉우리들 칼과 창이 번쩍이네. 여기 사는 중들 재를 지낸 뒤 앉은 채 영위함이

없구나. 어찌하여 산 아래의 생민(生民)들은 귀인의 행차 접대에 시달려서 바라보곤 때때로 이마를 찡그리며

지나가는고." 하였다. 천마산(天磨山) : 장양현(長楊縣)의 서쪽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1백 34리이다.

 

개탄산(介呑山) : 부의 동쪽 26리에 있다.

단발령(斷髮嶺) : 천마산(天磨山)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1백 54리이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속인이 이 고개에

올라 금강산을 본 자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자 한다. 그런 까닭에 단발령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하였다.

 

철령(鐵嶺) : 부의 북쪽 39리에 있다. 돌성[石城]의 남은 터가 있다.

○ 이곡(李穀)의 기(記)에, "철령은 우리나라 동쪽에 있는 요해지(要害地)로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에서 막으면

일만 사람이 덤벼도 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령 이동(以東)의 강릉(江陵)의 여러 고을을 관동(關東)

이라 한다. 지원(至元) 경인년에 반왕(叛王) 내안(乃顔)의 무리인 하지[哈丹] 등의 적이 북쪽으로 달아나서

동쪽으로 나와 개원(開元)의 여러 고을로부터 관동으로 뛰어 들어오니, 국가에서 만호(萬戶) 나유(羅裕) 등에게

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철관(鐵關)을 막아 수호하게 하였다.

적이 화주(和州)ㆍ등주(登州)의 서쪽 여러 고을 인민을 겁탈하고 노략질하고, 등주에 이르러 등주 사람으로

하여금 엿보게 하니, 나공(羅公)은 적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관(關)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런 까닭에 적은 아무

도 없는 땅을 가듯 하니, 온 나라가 흉흉(洶洶)해지고 사람들은 그 해를 입게 되어 산성(山城)에 올라가거나 바다

속의 섬에 들어가서 그 칼날을 피하였다. 중국에 구원병을 요청하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섬멸되었다.

이제 내가 본 철관(鐵關)의 험난함은 진실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지키게 한다면 비록 천만 사람이 쳐다보고 공격

하더라도 몇 해 몇 달로써는 들어올 수 없겠다. 나공은 참으로 담이 작도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끝없이 높고 높아서 거대한 형세가 관동(關東)을 진압하네. 산정은 하늘끝까지 치솟고,

뿌리의 깊이는 땅의 마지막까지 통했네. 겨울의 위세는 봄까지 춥고, 어두운 빛은 낮에도 어슴푸레하네.

학(鶴)은 산허리의 이슬에 소리치고, 원숭이는 동구의 바람에 부르짖네. 무너진 벼랑에 날리는 비가 거무스름하고,

빼어난 고개에는 저녁놀이 붉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속세가 멀고, 앞길을 찾으니 돌계단이 뚫렸네.

빽빽이 모여 선 봉우리는 수자리하는 보루(堡壘)를 떠받들고, 중첩한 산들은 신령의 궁전을 안고 있다.

붉은 기운은 높고 푸른 곳에 둘렀고, 붉은 아지랑이는 푸른 하늘에 내뿜는다. 말굽은 나뭇가지 끝에 달려가고,

사람의 그림자는 구름 속에서 번득인다. 떨어지는 물은 은하수의 물결에 이어졌고, 수풀은 달 속의 계수나무 떨기

에서 나뉘어 왔구나. 연주(兗州)ㆍ대종(垈宗)을 여우 사는 언덕처럼 보고, 화산(華山)ㆍ숭산(嵩山)을 황새 우는

언덕에 견주어 본다. 봉관(鳳管)은 이처럼 교묘하게 읊기 어렵고, 교초(鮫綃)에 그려도 이처럼 공교할 수는 없으리.

촉도(蜀道)를 뚫어 엶은 다섯 명의 역사를 번거롭게 하였고, 태항산(太行山)ㆍ왕옥산(王屋山)을 옮겨 놓으려고

한 것은 우공(愚公)주D-012을 웃노라. 바라보고 듣는 것이 다 특이하니, 조화(造化)의 공을 누가 알랴." 하였다.

 

○ 안축(安軸)의 시에, "큰 재가 공중의 절반을 가로지르니, 동쪽과 서쪽의 길이 여기에서 나뉘어진다. 높은 곳에

올라서 관 버리고 달아난 옛날의 장수를 비웃노니, 험난한 관을 등지고 있으면서 얼마 안되는 군대를 겁내었네.

깎아지른 계곡에는 얼음과 눈이 섞여 있고, 아스라한 봉우리에는 바위에 구름이 얹혀 있다. 옛 보루를 수리하는

사람 없이 천하는 문(文)만을 숭상하네." 하였다.

 

○ 길이 관문으로 들어가매 잠깐 눈앞이 열이니, 붉은 깃발과 검은 창이 함께 오락가락하는구나. 홀연히 백성을

근심할 직책에 놀라면서, 도리어 세상을 구제할 재주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노라. 연기와 불이 보이는 마을

거리는 매우 쓸쓸하고, 풀과 쑥대 우거진 성참(城塹)은 부러지고 무너진 지 오래구나. 모이고 흩어지는 변방의

아전들이 오히려 의관을 갖추고 왕래하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이 가련하구나." 하였다.

 

동파령(東坡嶺) : 수입현(水入縣)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88리이다. 고개 밑에서 물이 나와 남쪽으로 흘러가 현

북쪽 10리에 이르러서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갔다가 현 남쪽에서 다시 나온다.

그런 까닭으로 이름을 수입현(水入縣 물이 들어 가는 마을)이라고 하였다. 본부와의 거리는 90리이다.

 

추지령(楸池嶺) : 화천현(和川縣) 동쪽 19리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69리인데, 아주 높고 험하다.

쌍령(雙嶺) : 남곡현(嵐谷縣) 30리에 있다. 부와 거리는 55리이다.

쇄령(洒嶺) : 장양현(長陽縣) 북쪽 30리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2백 3리이다.

회령(灰嶺) : 부의 북쪽 57리에 있다.

배재(拜岾) : 금강산 서쪽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1백 64리이다.

 

○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에, "지정(至正) 기축년 가을에 금강산을 유람하려고 천마령(天磨嶺)을 넘어

서 산 아래 장양현에서 자고, 아침 일찍 잠자리 위에서 식사를 한 뒤에 산에 오르니, 구름과 안개가 덮여 어두컴

컴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풍악(楓嶽)을 유람하는 이가 구름과 안개 때문에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일이 허다

하다.' 하니, 같이 유람하는 자들이 다 근심스런 빛으로 묵묵히 기도를 하였다. 산에서 5리쯤 되는 곳에 이르자,

검은 구름이 차츰 엷어지면서 햇빛이 새어 나오더니, 배재에 올랐을 때에는 하늘도 밝고 기운도 맑아서 산이 밝

기가 닦아 놓은 것 같았다. 이른바 1만 2천 봉을 낱낱이 셀 수 있을 듯하였다. 이 산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은 반드

시 이 재를 지나게 되는데, 재에 오르면 산이 보이고, 산이 보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마를 조아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배재(拜岾 절하는 고개)라고 한 것이다. 예전에는 집이 없어서 돌을 포개에 대(臺)처럼 만들어서

휴식하는 곳으로 썼는데, 지정(至正) 정해년에 지금의 자정원사(資正院使) 강공(姜公) 금강(金剛)이 천자의 명을

받들고 와서 큰 종을 주조하여 재 위에 종각(鐘閣)을 지어 걸어 놓고서 그 곁에 절을 지어 주고 종 치는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우뚝 솟아 아름답게 채색한 집의 광채가 설산(雪山)에까지 반사되니 또한 산문(山門)의 일대

장관이었다." 하였다.

 

금강대(金剛臺) : 표훈사(表訓寺) 북쪽에 있다. 석벽(石壁)이 천길이나 되어서 사람은 오를 수가 없고 두 마리

검은 새가 그 위에 집을 짓고 산다. 그 곳에 사는 중이 그것을 현학(玄鶴)이라고 하였다.

 

만폭동(萬瀑洞) : 금강산 가운데에 있다. 일백 군데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 골짜기 속으로 쏟아지니, 그 형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만폭동(萬瀑洞)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골짜기 어귀에 봉우리가 있으니,

오인봉(五人峯)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푸른 학이 그 모퉁이에 살고 있다.' 한다. 깊고 큰 물 하나가 있으니,

관음담(觀音潭)이라고 한다. 관은담 가의 돌벼랑은 푸른 이끼가 끼어 발이 미끄러워서 사람들은 다 칡덩굴을

잡고서야 지나갈 수 있으므로 그 이름을 수건애(手巾崖)라고 한다. 돌 중심에 방아 절구처럼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손수건을 빤 곳이라.' 한다. 보덕굴(普德窟) 앞에 이르자,

급한 여울이 돌을 휘감아 와서 벼랑의 허공에 부딪치니, 눈처럼 희게 날리는 물방울이 심하게 내뿜어져서 대낮

인데도 어두워지려 한다. 돌바닥은 물이 깊어서 푸른 쪽빛과 같다. 또 두어 걸음 가면 성난 폭포가 깎아지른 듯

한 언덕으로 쏟아지는데, 작은 것은 구슬을 내뿜고, 큰 것은 눈을 흩날려 섞여 내리는 것이 이루 다 셀 수 없으니,

주연(珠淵 구슬 못)이라고 한다. 또 한 개의 돌이 있어서 형상이 거북이가 못 가운데에 엎드려 있는 것 같으니,

구담(龜潭)이라고 한다. 또 한 개의 못이 있어서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니, 화룡담(火龍潭)이라 하고,

그 위에 봉우리가 있으니, 사자암(獅子巖)이라고 한다.

 

수재(水岾) : 금강산 동쪽에 있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사람이 소리쳐 부르면 반드시 흐리고 비가 오는 까닭에

수재(물고개)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한다. 골짜기가 매우 깊숙하다. 돌아가는 길은 점점 평탄해져서 바위는

적고 흙이 많다. 수십 리를 가면 유점사(楡岾寺)에 도착한다.

 

망고봉(望高峯) : 즉 금강산의 동쪽 봉우리이다. 송라암(松蘿庵)에서 막혀 있는 벼랑을 지나가려면 벼랑이 돌

난간과 같아서 쇠줄을 수직으로 드리우고 사람들이 그것을 붙잡고 올라간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만약 떠들썩

하게 지껄이면 갠 날에도 반드시 비가 온다." 한다.

 

○ 성임(成任)의 시에, "바위 사이로 사람의 말소리가 산골에 요란하더니, 구름 끼고 비가 내려 잠깐 사이에 지척

도 분간할 수 없구나. 아래로 두어 봉우리를 내려오자 하늘이 이미 개었으니, 어두워지고 밝아지는 것을 누가

다시 그 시작과 끝을 추측할 수 있으랴." 하였다.

 

만경봉(萬景峯) : 즉 금강산의 서쪽 봉우리이다. 또 백운대(白雲臺)ㆍ국망재(國望岾)가 있으니 모두 금강산의 큰

봉우리이다.

비로봉(毘盧峯) : 즉 금강산의 주봉(主峯)이다. 바위 무늬가 오랫동안 산기운과 안개로 인하여 알록달록한 것이

마치 눈빛 같다. 산 이름을 개골(皆骨)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말휘령(末暉嶺) : 장양현(長楊縣) 서북쪽 35리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1백 60리이다.

이현(梨峴) : 장양현 동쪽 55리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1백 76리이다.

한사리평(寒沙里坪) : 부의 서쪽 45리에 있다.

용연(龍淵) : 부의 북쪽 29리에 있으니, 즉 양근군(楊根郡) 대연(大淵)의 하류이다.

덕진(德津) : 부의 서쪽 1리에 있다. 화천현(和川縣)에서 흘러나와서 소양강(昭陽江)으로 들어간다.

명담(鳴潭) : 금강산에 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이무기가 때때로 나와서 생물을 해친다." 한다.

 

토산 연철(鉛鐵) : 부의 서쪽 수비산(愁非山)에서 난다. 자석(磁石)ㆍ칠(漆)ㆍ

궁간상(弓軒桑) : 부의 동쪽 동파령(東坡嶺)에서 난다. 잣[海松子]ㆍ오미자[五味子)ㆍ지초(紫草)ㆍ인삼(人蔘)ㆍ

복령(茯苓)ㆍ송이버섯[松蕈]ㆍ석이버섯[石蕈]ㆍ벌꿀[蜂蜜]ㆍ영양(羚羊)ㆍ백화사(白花蛇)ㆍ누치[訥魚]ㆍ

여항허(餘項魚)ㆍ금린어(錦鱗魚).

 

봉수 개탄산 봉수(介呑山峯燧) : 남쪽으로 금성현(金城縣)의 기성북산(歧城北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화천현

(和川縣) 여이파산(餘伊破山)에 응한다.

여이파산 봉수(餘伊破山峯燧) : 부의 동쪽 45리에 있다. 동쪽으로 추지령(楸池嶺)에 응하고, 남쪽으로 개탄산

(介呑山)에 응한다. 추지령 봉수(楸池嶺烽燧) : 동쪽으로 통천군(通川郡) 금란성(金幱城)에 응하고, 서쪽으로

여이파산(餘伊破山)에 응한다.

소산 봉수(所山烽燧) :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북쪽으로 함경도 안변부(安邊府)의 철령(鐵嶺)에 응하고, 서쪽

으로 남곡현(嵐谷縣) 북산(北山)에 응한다.

남곡북산 봉수(嵐谷北山烽燧) : 부의 서쪽 33리에 있다. 남쪽으로 쌍령(雙嶺)에 응하고 북쪽으로 소산에 응한다.

쌍령 봉수(雙嶺烽燧) : 남쪽으로 평강현(平康縣) 송현(松峴)에 응하고, 북쪽으로 남곡현(嵐谷縣)의 북산(北山)

에 응한다. 신증 장미산 봉수(獐尾山烽燧) : 동쪽으로 추지령에 응하고, 서쪽으로 소산에 응한다.

학교 향교 : 부의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은계역(銀溪驛) :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찰방(察訪)을 둔다. 본도에 소속된 역은 19개이니, 풍전(豐田)ㆍ

생창(生昌)ㆍ직목(直木)ㆍ창도(昌道)ㆍ신안(新安)ㆍ용담(龍潭)ㆍ임단(林丹)ㆍ옥동(玉洞)ㆍ건천(乾川)ㆍ

서운(瑞雲)ㆍ산양(山陽)ㆍ원천(原川)ㆍ방천(方川)ㆍ함춘(含春)ㆍ수인(水仁)ㆍ마노(馬奴)ㆍ부림(富林)ㆍ

남교(嵐校)ㆍ임천(林川)이다. ○ 찰방 1명을 둔다.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험난한 산길을 걸어 철령(鐵嶺)을 내려와서 아늑하고 조용한 은계를 찾네. 맑은

물 동구로 흘러나와, 한 가닥 푸른 수정을 둘렀네. 흘러가다가 돌을 만나면 혹은 미친 듯 노호(怒號)하여, 큰

소리가 북을 울리는 것 같구나. 끼고 있는 봉우리에는 꽃이 눈부시고, 물가를 따라 풀이 우거졌다. 갠 산 아지랑

이는 사람을 좇아 가니, 10리에 말굽 소리 끊어졌네. 홀연히 보니 버드나무 저쪽에 역사가 있어서,

아스라한 집이 꽃다운 풀 언덕에 잇닿았네. 수풀이 깊으니 새들이 지저귀고, 나무가 빽빽하니 매미가 운다.

한가로이 바위에 앉아서 수건을 벗으니, 5월에 바람이 서늘하구나. 고요한 곳이라 문득 자고 싶어 소나무 난간

서쪽을 베개삼고 의지하고 있노라니, 잠깐 동안에 몸에 날개가 돋았네. 천계(天鷄)주D-013에 옛 보금자리를

찾으니, 허름한 베치마 입은 딸과 쑥대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한 아내가 문에 나와서 함께 소매를 당기며 처음

에는 웃더니 도리어 슬피 우네. 각각 ◇ 오래도록 못 보았소, 말고삐를 돌리기가 어찌 그리 늦으셨소.

내 한때 잘못을 저질렀소 하며 놀라 기뻐하며 앞에 와서 서로 이끄네. 이날 비가 처음으로 흡족하게 오고, 창문

가까이에서 죽계(竹鷄)주D-14가 울었다. 놀라 일어나니 아무도 없어 가슴을 어루만지며 공연히 슬퍼하네.

알겠노라. 인간의 모든 일은 깨어 있거나 꿈속에서나 한가지라는 것을. 얻는 것과 잃는 것의 거리가 하늘과 땅같

다고 말하지 말라. 모두 다같이 여옹(呂翁)의 한단몽(邯鄲夢)주D-15일세. 근심도 기쁨도 모두 미(迷)일 뿐인데

어찌하여 자랑하는 자들은 콧김이 하늘을 찌를 듯하는가. 머리를 돌려 공자(孔子)나 묵자(墨子)가 한평생 바삐

서둘렀음을 웃노라." 하였다.

 

신안역(新安驛)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교생원(校生院) : 부의 서쪽 11리에 있다.

차산원(遮山院) :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불우 보현암(普賢庵) : 금강산에 있다. 도산사(都山寺) : 금강산에 있다.

○ 이곡(李穀)의 기(記)에, "우리나라의 산수가 천하에 이름이 높은데, 금강산의 기묘함은 더욱 으뜸이 된다.

또 불경에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이 산에 머물렀다는 설이 있어서 세상에서는 드디어 인간세계의 정토

(淨土)라고 일컫는다. 향과 폐백을 내리는 천자의 사자(使者)가 길에 잇달았으며, 사방의 남녀들이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소나 말에 싣거나 지거나 이고서 부처와 중을 공양하는 자가 서로 잇달았다. 산 서북쪽에 재가 있어서

가로로 끊어져 험하고 높아서 하늘에 올라가는 듯하다.

사람이 여기에 이르면 반드시 머물러 쉬는데, 지대가 너무도 궁벽하여 사는 백성이 아주 적어 혹 풍우를 만나면

노숙(露宿)하다가 병이 들곤 한다. 지원(至元) 기묘년에 쌍성 총관(雙城摠管) 조후(趙侯)가 산의 중 계청(戒淸)

과 의논하여 그 요충지인 임도현(臨道縣)에 땅 몇 이랑을 사서 절을 짓고, 임금의 수(壽)를 비는 도량(道場)으로

삼았다. 봄가을에 곡식을 배로 실어다가 그 곳에 출입하는 자에게 밥을 제공하고, 그 나머지를 산속의 여러 절에

나누어 주어서 겨울과 여름의 식량에 충당하게 하여 해마다 전례로 삼았다. 그런 까닭에 도산(都山)이라고 이름

을 붙인 것이다. 조후가 이 절을 처음 지을 때에 그 곳 안에 있는 중들에게 명령하기를. '중이 되는 것을 나는 알

고 있다. 위로는 사은(四恩)주D-016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삼도(三途)주D-17를 구제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며, 학문을 끊고 하는 일 없이 마음만 닦는 자는 최상이고, 부지런히 강설(講說)하고

열심히 교화하여 인도하는 자는 그 다음이고, 머리를 깎고서도 집에서 살며 부역(賦役)을 피하고서 산업을 영위

하는 자는 하등(下等)이다. 중으로서 하등이 되면 부처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국가의 놀고 먹는 백성인 것

이다. 너희들이 이미 관(官)에 부역하지도 않고, 나의 일을 돕지도 않는 자들은 처벌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여러 중들은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면서 다투어 자기가 할 수 있는 기술의 도구는 가지고 와

서는 도끼를 가진 자는 도끼질하고, 톱을 가진 자는 톱질을 하며, 나무를 자르거나 흙을 바르거나 하였다.

조후가 자기 집의 곡식을 실어다가 그들을 먹이고, 자기 집의 기와를 벗겨다가 얹었다. 그래서 백성의 힘을 빌리

지 않고도 며칠이 못되어서 완공하였다. 공사를 마치고는 사람을 보내어 그 일의 기문을 청하여 왔기에,

'나는 비록 조후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들은 지는 오래되었다. 대개 일을 하는 데에는 남에게

이롭고 편리하게 해야 할 것이니, 자기 자신을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하등이다. 저 임도현(臨道縣)은 온 산의

요충지이다. 그런 까닭에 이 절을 지어서 출입하는 자를 편리하게 한 것이다. 쌍성(雙城)도 한 쪽의 요충지이니,

이런 마음을 확장시켜 그 정사를 시행한다면 반드시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점이 많을 것이다.

요사이 동남쪽 변방 백성들이 그 경내로 흘러 들어가는 자가 있었는데, 조후는 즉시 까닭을 지적하여 꾸짖고,

거절하여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항산(恒産)이 없으므로 항심(恒心)이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사람이 항심이 없다면 어디 간들 용납될 수 있겠느냐.' 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조후의 사람됨을 더욱 알게 되었으니, 감히 기문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보덕굴(普德窟) : 만폭동(萬瀑洞) 안에 있다. 관음각(觀音閣)이 있다는데, 절벽을 파서 판자를 걸치고, 구리

기둥을 밖에 세워서 작은 방 세 칸을 그 위에 짓고, 쇠사슬로 묶어서 바윗돌에 못을 박아 놓아 공중에 떠 있으

므로 사람이 올라가면 흔들린다. 그 안에 부처를 모신 함(函)을 안치하고 구슬과 옥으로 장식하였으며, 겉에

철망을 둘러서 손으로 만지지 못하게 하였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고려 안원왕(安原王) 떄에 중 보덕(普德)이

창건(創建)하였다." 한다.

 

○ 이제현(李齊賢)의 시에, "음산한 바람은 바위 구비에서 나오고, 냇물은 깊어 더욱 푸르구나. 지팡이에 의지하여

층암(層岩) 꼭대기를 바라보니, 나는 듯한 처마가 구름 낀 나무 위에 얹혀 있구나." 하였다.

 

마하연(摩訶衍) : 만폭동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 이제현의 시에, "산중에 해가 한낮인데도, 풀에 맺힌 이슬이 짚신을 적시네. 오래된 절에는 살고 있는 중도

없이 흰 구름만 뜰에 가득하구나." 하였다.

 

불지암(佛地菴) : 만폭동(萬瀑洞)에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손님이 와서 숙박하건만, 나와서 맞이하는 사람 없구나. 산은 최상의 땅을 둘렀고 중은

대승(大乘)의 경을 외운다. 산골의 시냇물이 어느 때인들 마르랴. 등잔불은 밤새도록 밝구나.

속세의 물거품 같은 꿈을 도리어 이 속에서 향하니 술이 깨는구나." 하였다.

 

송라암(松蘿庵) : 만폭동에 있다. 두 개의 암자가 마주 보고 있으니, 큰 송라암ㆍ작은 송라람이라고 한다. 암자

아래에 고성(古城)이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양(長楊)의 수령이 난을 피하여 여기로 들어왔다." 하고

어떤 이는, "그 수령이 반란을 꾀하여 여기에 의거하였다." 한다. 어느 것이 옳은 지는 알 수 없다. 암자 동쪽에

큰 골짜기가 있으니, 백 갈래의 나는 듯한 샘물이 쏟아져 내려와서는 가지처럼 나뉘고 팔다리처럼 갈라지는데,

아득히 멀어서 흰 무지개같이 보인다. 봉우리들은 높고 험하여 바윗돌들이 우뚝우뚝 솟았으니, 우뚝한 것은 칼과

같고 예리한 것은 송곳 같다. 솟아오른 것은 손과 같고, 나란히 된 것은 치아와 같다. 굽은 것은 팔꿈치 같고 가로

지른 것은 팔과 같은데, 푸르름이 여기저기 퍼져서 군데군데 나타나고 첩첩이 드러난다.

 

○ 성임의 시에, "큰 송라암이 작은 송라암과 마주 보고 있는데, 동쪽 우물과 서쪽 대(臺)가 이렇게 좋은 곳은

세상에 많지 않다. 두 명의 선승(禪僧)이 서로 마주 앉아서, 푸른 산빛이 가사에 떨어지는 것도 모르네." 하였다.

장안사(長安寺) : 표훈사 아래에 있다. 법당(法堂)과 불전(佛殿)과 불상(佛像)을 모두 중국의 기술자가 제작하였다.

 

○ 이곡(李穀)의 비문에, "성스러운 천자가 즉위한 7년에 황후 기씨(奇氏)가 원비(元妃)로서 황자(皇子)를 낳았다.

이윽고 황후가 되어 흥성궁(興聖宮)에 거처하게 되자, 내시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전생의 인연으로 황제의

은혜를 입음이 이에 이르렀다. 이제 황제와 태자를 위하여 수명을 하늘에 빌고자 한다. 부처의 힘을 의탁하지

않으면 어찌 하리요.' 하고, 모든 복리(福利)라는 것을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금강산 장안사가 가장 뛰어나

게 좋다는 소문을 듣고, '복을 빌어 성상께 보답하는 데에는 이만한 곳은 없겠다.' 하고, 지정(至正) 3년에 내탕

(內帑)의 저폐(楮幣) 1천 정(錠)을 내어 절을 중수하는 자금으로 쓰게하여, 영구히 중의 공양에 사용하게 하였다.

다음해에 또 이와 같이 하고, 또 다음해에도 그와 같이 하였다. 중 5백 명을 모아서 옷과 발우를 주고 법회(法會)

를 열러 낙성식을 올리게 하였다. 이에 궁관(宮官) 자정원사(資政院使) 신 용봉(龍鳳)에게 명하여 전말을 돌에

새겨서 후세에 전하라 하고 드디어 신 이곡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금강산은 고려의 동쪽에 있어서 서울과의 거리는 5백 리이다. 이 산의 뛰어남은 천하에 이름이 났을 뿐만 아니라,

실로 불경에도 실려 있다.

《화엄경》에 말하기를, '동북쪽의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으니, 담무갈보살이 1만 2천 명의 보살들과 항상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설법하는 곳이다.' 하였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신선(神仙)

의 산이라 지칭(指稱)하였다. 이에 신라 때부터 탑과 절을 증축(增築)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사찰이 벼랑과

골짜기에 가득하다. 그 중에 장안사가 그 산기슭에 있어서 온 산의 도회처(都會處)가 된다.

이것은 신라 법흥왕(法興王) 때에 처음으로 세웠으며, 고려 성왕(成王) 때에 중수한 것이다.

아, 법흥왕 때에서 4백여 년 뒤에 성왕이 중수하였는데, 성왕으로부터 지금까지가 또한 거의 4백 년이 된다.

그런데도 아직 중수할 자가 없었다. 비구(比丘) 굉변(宏卞)이 그 쇠락함을 보고 동지들과 더불어 이른바 담무갈

보살에게 맹세하기를, '이 절을 새롭게 하지 못한다면 이 산을 두고 맹세할 것입니다.' 하고, 즉시 그 일을 나누어

맡아서 널리 많은 사람을 모집하여 산에 가서 재목을 채취하며, 사람들에게서 식량을 모으고, 임금을 주고 인부

를 고용하여 돌을 다듬고 기와를 구워서 먼저 불당을 새롭게 하였으며, 빈관(賓館)과 승방(僧房)도 차례로 대강

완성하였다. 그런데 비용이 여전히 부족하므로 또 탄식하기를, '석가세존께서 기원(祇園)주D-018을 만드실 때

에는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가 금을 땅에 폈으니, 지금이라고 어찌 그러할 사람이 없겠는가.

다만 만나지 못함이다.' 하고, 드디어 서쪽으로 중국의 서울로 유세(游說)를 떠났다. 일이 중국의 중궁(中宮)에

알려지고, 또 고자정(高資政)이 주장하며 힘을 썼다. 그런 까닭에 그 성취가 이와 같이 된 것이다.

그윽이 생각건대, 불교가 때를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쇠미하기도 하였다. 예전에 우리 세조황제가 이것을 숭상

하고 믿었으며, 역대의 황제도 서로 이어 받들어 빛나고 크게 하였다. 지금 황제께서 선왕의 뜻과 일을 계승하여

더욱 유의하시었다. 대체로 성인(聖人)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과 부처의 살생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동일한

인애(仁愛)이며, 동일한 자비인 것이니, 중궁의 보고 느낀 것이 까닭이 있다. 또 옛날 덕을 천하에 베푼 자로는

오제(五帝)와 삼왕(三王)만한 이가 없고, 가르침을 후세에 전한 자로 공자만한 이가 없으나,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제삼왕(五帝三王)으로서 사당에서 향사를 받는 이는 거의 드물고, 공자는 비록 사당이 있다고는 하나,

 예제(禮制)에 제한되어 제물을 바치는 것에 모두 일정한 수량이 있어서 그 무리가 먹는 것이 겨우 충당될 뿐이

다. 오직 부처만은 그를 위한 궁전이 오랑캐의 나라에서나 중국에서나 바둑돌처럼 퍼져 있고 별처럼 벌여 있어

서, 불전과 섬돌의 장엄함과 단청의 장식이 천자의 거처에 비교할 만하며, 향불과 옷과 음식의 봉공(奉供)은

봉읍(封邑)에서의 수입과 비교할 만하다. 이것은 그가 사람을 감동시킴이 실로 깊고도 넓기 때문이니, 이 절이

흥성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집을 칸수로써 계산하면 1백 20칸이 넘는다.

불전(佛殿)ㆍ경장(經藏)ㆍ종루(鐘樓)와 삼문(三門)ㆍ승료(僧寮)ㆍ객실에서부터 주방과 욕실의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구조의 장대하고 아름다움을 지극히 하였다. 불상(佛像)으로는 비로자나(毗盧遮那)가 있고,

좌우에는 노사나(盧舍那)가 있고, 석가모니 불상은 높게 중앙에 자리잡았다. 1만 5천의 부처가 두루 둘러 옹위

하여 정전(正殿)에 있고, 관음대사(觀音大士)ㆍ천수(千手)ㆍ천안(天眼)과 문수(文殊)ㆍ보현(普賢)ㆍ미륵(彌勒)ㆍ

지장(地藏) 등은 선실(禪室)에 있다.

아미타(阿彌陀)ㆍ오십삼불(五十三佛)ㆍ법기보살(法起菩薩)은 노사나(盧舍那)를 옹위하여 해장궁(海藏宮)에

있는데 모두 지극히 장엄하게 꾸몄다.

장경(藏經)은 모두 사부(四部)인데 그 중 은으로 쓴 한 가지는 바로 황후가 하사한 것이다.

《화엄경》 세 책과 《법화경(法華經)》 8권은 모두 금자(金字)로 써서 또한 지극히 아름답게 꾸몄다. 옛날부터

소유하고 있던 토지는 국법에 의거하여 결(結)로써 계산하면 1천 50결이나 된다. 함열(咸悅)ㆍ인의현(仁義縣)에

있는 것이 각각 2백 결, 부령(扶寧)ㆍ행주(幸州)ㆍ백주(白州)에 각각 1백 50결, 평주(平州)ㆍ안산(安山)에 각각 1

백 결씩이 있으니, 곧 성왕(成王)이 희사한 것이다. 염분(鹽盆)은 통주(通州) 임도현(林道縣)에 있는 것이 1개소,

경저(京邸)에 있는 것으로는 개성부(開城府)에 있는 것이 1구(區), 시장의 점포로써 남에게 세준 것이 30칸이다.

모든 돈과 곡식과 집기의 수량은 맡은 자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쓰지 않는다. 태정(泰定) 연간으로부터 이 절을

중수한 시주는 중정사(中政寺) 이홀독첩목아(李忽篤帖木兒) 등 제씨로 그 성명을 비석의 뒤쪽에 열기하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산이 뼈를 드러내니 뾰족하고 날카로우며, 높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름이 금강이라네.

불경에 나타나는 바이며, 보살이 머물던 곳으로 청량산(淸涼山)의 다음이라네. 연기와 구름을 불어 내뿜으니,

천지의 기운이 서려서 신령스런 광채를 내네. 새와 짐승도 길이 들고, 벌레와 뱀도 어질고, 풀과 나무도 향기나네.

승려의 높은 암자 공중에 가로질러 바위에 걸쳐 있어서 멀리 서로 바라보이네. 장안정사(長安精舍)는 산 아래에

있는 큰 도량이네. 일찍이 신라 때에 창건하여 여러 번 만들고 무너져서 항상 일정하지 않았다네.

하늘이 성신(聖神)을 내시어 세조의 손자가 만방(萬方)에 군림하셨네. 덕(德)은 살리기를 좋아하는 데에 흡족하여

모든 영성(靈性)을 품은 자를 포근히 적셔 주는 부처를 사모하시네. 아, 현명하신 황후는 땅의 후덕함을 본받아

황제의 강함을 받드시네. 불교에 귀의하여 신묘한 복을 취하여 우리 황제를 봉축(奉祝)하네. 오직 이 복된 땅은

신선과 부처가 깊숙이 숨어 있던 곳으로 어지러이 상서(祥瑞)를 낳았다네. 천자께 경사 있음이여, 하늘이 그 명

(命)을 거듭하니 수를 누림이 끝이 없겠네. 황태자가 탄생함이여, 길이 큰 기반을 굳혀 하늘과 더불어 장구하겠네.

황후가 내신(內臣)에게 이르기를, '저 법신(法身)의 교화가 드러나셨다.' 하셨네. 이미 그 궁전을 새롭게 하였으니,

마땅히 그 공을 기록하여 잊지 않도록 하라 하셨네. 저 산의 언덕 위에 높다란 비석이 있어 명문(銘文)을 새기었네."

하였다.

 

○ 이곡의 시에, "새벽 안개로 반 걸음 앞도 분간할 수 없더니, 해가 높이 떠서 맑고 밝으니 용과 하늘에 감사하네,

구름이 이어진 산은 서ㆍ남ㆍ북에 멀리 둘렀고, 눈처럼 희게 선 봉우리는 뾰족한 것이 1만 2천이라네.

한 번 보니 문득 참 면목(面目)을 알겠구나. 다생(多生)에서 아마 좋은 인연을 맺었으리. 밤에 다시 연대(蓮臺)

에서 자노라니, 시냇물과 솔바람이 모두 선(禪)을 말하네." 하였다.

 

표훈사(表訓寺) : 만폭동 어귀에 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신라의 중 능인(能仁)ㆍ신림(神林)ㆍ표훈(表訓) 등이

이 절을 창건하였다." 한다. 오래된 비석에, 원 나라 황제가 태황태후(太皇太后)와 함께 돈과 명주를 시주하였

다는 글이 있다. 절 문의 오른쪽에, 원 나라 양재(梁載)가 찬술한 〈

상주분량기(常住分糧記)〉가 돌에 새겨져 있는데, 고려의 시중(侍中) 권한공(權漢功)의 글씨이다.

 

○ 성임의 시에, "일천 바위 일만 구렁에 연기와 안개가 많으니, 굽게 꺾여진 한 구역에 이름난 가람(伽藍)이

감추어져 있구나. 높고 낮은 전당(殿堂)들은 소나무와 삼나무 속에 숨겨져 있는데,

구름 사이로 한 가닥 길이 시내 남쪽으로 뚫렸네. 옛날부터 나의 천성은 기이한 경치를 즐겨 보았는데,

하물며 이제 내 몸에는 관복(官服)도 없음이랴. 향나무 수풀 아래에 말을 멈추고, 기이한 장관을 하나하나 마음

대로 찾노라. 밤이 깊어 등잔불 그림자 선실(禪室)에 비추는데, 죽창(竹窓)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중의 이야기를

듣네. 깨끗이 나의 헛된 꿈에 취한 것을 일깨워 주고, 깡그리 나의 평생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네. 최고의 맛은

본래 평범하지 않음을 귀히 여기는 것이니, 시세에 따라 쓰고 단 맛을 다투지 않는다네. 이 속세의 때가 사람을

움켜잡아 움직일 때마다 붙어 있는 것처럼 되어서 머리 가에 서리와 눈만이 공연히 더해졌구나.

명산(名山)에 만약 와서 참배하지 않았다면 어디에서 마음속의 번뇌를 끊을 수 있었으랴. 배회하면서 두 번 세 번

깊이 탄식하노라니, 산새가 나를 도와 지저귀네." 하였다.

 

정양사(正陽寺) : 표훈사의 북쪽에 있으니, 즉 이 산의 정맥(正脈)이다. 그런 까닭에 정양사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지대가 높고 트여서 산 안팎의 여러 봉우리들이 하나하나 모두 보인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고려 태조(太祖)가

이 산에 오르니, 담무갈(曇無竭)이 돌 위에 몸을 나타내어 광채를 발산하였다. 태조가 신료(臣僚)들을 거느리고

정례(頂禮)한 뒤에 이어 이 절을 창건하였다." 한다. 그런 까닭에 절 뒤의 언덕을 방광대(放光臺)라 하고, 앞의

고개를 배재(拜岾)라고 한다. 또 진헐대(眞歇臺)가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정양사는 지대가 트였고,

진헐대에는 가을이 개었구나. 구름과 산이 모두 눈 앞에 있으니, 속세가 어찌 마음에 관계됨이 있으랴.

해가 비추니 병풍같은 봉우리가 천 겹이로다. 공중에 벌여 선 옥(玉)은 몇 무더기인가. 보기를 탐내어 갈 길을

잊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다시 배회하노라." 하였다.

 

지불암(知佛菴)ㆍ금장암(金莊菴)ㆍ선주암(善住菴)ㆍ신림사(神琳寺)ㆍ천친암(天親菴)ㆍ수선암(修善菴)ㆍ개심암

(開心菴)ㆍ묘덕암(妙德菴)ㆍ천덕암(天德菴)ㆍ원통사(圓通寺)ㆍ진불암(眞佛菴)ㆍ사자암(獅子菴) : 곁에 사자

모양의 돌이 있기 때문에 사자암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묘봉암(妙峯菴)ㆍ삼장사(三藏寺) : 모두 금강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의관령사(義舘嶺祠) : 고성 안에 있다. 《사전(祀典)》에 소사(小祀)로 기재되어 있다.

봄가을에 향과 축문(祝文)을 내려주어 제사지내게 한다.

성황사(城隍祠) : 의관령(義舘嶺)에 있다.

덕진명소사(德津溟所祠) : 덕진의 언덕 동쪽 봉우리에 있다.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주어 제사를 지내도록

한다. 《사전》에 소사로 실려 있다. 여단(厲壇)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문등폐현(文登廢縣) :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본래는 고구려 문견현(文見縣)이다. 근시파혜(斤尸派兮)라고

도 하였다. 신라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대양군(大楊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顯宗)이 춘주(春州)에

이속(移屬)시켰다가 뒤에 본부에 예속시켰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남산성(南山城) :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6백 67척이다. 예전에는 군창(軍倉)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남곡현 북산성(嵐谷縣北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8백 84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화천현 고산성(和川縣古山城)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84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장양현 고산성(長楊縣古山城) : 현의 동쪽 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백 52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의관령 고성(義舘嶺古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9백 4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고질운현(古軼雲縣) :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는 고구려 관술현(管述縣)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치고 연성군(連城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한다. 지금은 어디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고희령현(古稀嶺縣) : 김부식이 말하기를, "본래는 고구려 저수현현(猪守峴縣)이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치고,

연성군의 영현으로 하였다." 한다. 지금은 어디인지 자세하지 않다.

웅림소(熊林所) :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북척소(北尺所) : 장양현에 있다. 천보산 고성(天寶山古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천 6백 36척이고, 높이가

3척이다.

 

명환고려 이유백(李惟伯) : 문종(文宗) 2년 동북로감창사(東北路監倉使)가 아뢰기를, "교주방어판관(交州防禦

判官) 이유백은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기구와 기계를 정비하여 여러 고을 중에 제일입니다." 하였다. 거느리고

있는 연성(連城)ㆍ장양(長楊) 등의 아전과 백성들이 말하기를, "유백은 농사를 권장하고 백성을 구휼하니,

비록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더 빌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임금이 가상히 여겨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삼았다.

 

이암(李嵒) : 부사(府使)로 있었다. 백성들의 사모함을 받았다.

이혼(李混) : 충선조(忠宣朝)에 좌천되어 목사(牧使)로 있었다.

신증본조 박삼길(朴三吉) : 면천(沔川) 사람이다. 성종조(成宗朝)에 부사로 있었다.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났다.

 

열녀고려 권금(權金)의 아내 : 역사책에는 그의 성명이 나오지 않는다. 권금이 밤에 범에게 잡히니 장정 7, 8명도

모두 감히 구제하지 못하였는데, 아내가 그의 허리를 안고 문지방에 기대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니, 범이 버리고

갔다. 권금은 곧 죽었으나,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하였다.

 

제영 산이 좋으니 사는 사람은 많은 것이 도리어 싫겠구나 : 이곡의 시에, "지대가 궁벽하니 지나는 손이 응당

오는 일이 적겠고, 산이 좋으니 사는 사람은 도리어 많은 것이 싫겠구나. 북쪽 재에 겹친 관문(關門)은 쇠자물쇠

가 굳고, 남쪽 강물 한 가닥에는 푸른 비단이 출렁이네." 하였다.

 

눈이 관산(關山)에 가득하니 나는 새도 끊어졌는데 :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몇 해나 백구(白鷗)와의 맹세를

저버렸던고. 이 몸이 환해(宦海) 물결 위의 부평초같구나. 눈이 관산에 가득하니 나는 새도 끊어졌는데,

황혼의 화각(畫角) 소리에 황성(荒城)을 닫는구나." 하였다.

 

철령(鐵嶺)의 관문이 높으니 가을 기운이 많구나 :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은계(銀溪)에 길이 머니 그늘이 빠르고, 철령의 관문이 높으니 가을 기운이 많구나." 하였다. 신증 깊은 수풀에 판자집을 열었네 : 성현의 시에, "높은 산길을

다 지나 어지러운 나무 사이를 비스듬히 뚫노라니, 깊은 수풀에 판자집을 열었으니 지나가는 나그네가 말안장

을 내리네. 골짜기가 깊숙하니 구름은 항상 어둡고, 산이 높으니 기온이 아직도 차구나. 서울이 여기서 몇 리

인가. 돌아가는 꿈만이 날마다 멀고 아득하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부내면(府內面) : 처음은 1리, 끝은 25리다. 부북(府北) : 처음은 2리, 끝은 45리다.

남곡(嵐谷)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95리다. 이동(二東) :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45리다.

사동(四東) : 동남쪽으로 처음은 35리, 끝은 80리다. 장양(長楊) : 동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1백 60리다.

수입(水入) : 동남쪽으로 처음은 1백 20리, 끝은 2백 리다.

○ 본래 금성현(金城縣)의 통구현(通溝縣) 남쪽 경계다. 초북(初北) : 처음은 2리, 끝은 45리.

 

성지 금강고성(金剛古城) : 만폭동(萬瀑洞) 송라암(松蘿庵)의 아래에 있는데 성은 무너지고 문(門)의 터만 남아

있다. 산의 이름은 금강(金剛)으로 성의 이름이다.

 

철령관(鐵嶺關) : 고려 고종 9년 철령(鐵嶺)에 성을 쌓고 관문을 만들었는데, 좌우로 산등성이를 따를 성을

쌓아 동북의 웅관(雄關)이 되었는데 옛터가 남아 있다.

○ 본조 광해주(光海州) 11년에 심하(深河)에서 전패하자 북우(北虞)를 염려하여 영상(嶺上)에 관을 설치하는데

시작하다 그만두었다.

 

○ 철령은 나제(羅濟) 때부터 북쪽 말갈족들이 모두 이곳을 지나왔었다. 고려에 이르러 비록 관성(關城)을 세워

거란 여진의 충돌이 동북로(東北路)에는 거의 없어 편안하였다. 본조에 이르러 성화(聖化)가 멀리 미쳤고,

봉강(封疆)을 크게 물리쳤으나 혹 급한 사건이 나는데 적은 마천(摩天)ㆍ후치(厚致)ㆍ황초(黃草) 등지의 영로

(嶺路)로 통하므로 함흥에서만 싸우게 된다. 그래서 함흥을 지키지 못하면 하루아침에 석권(席捲)의 세(勢)로

곧 영하(嶺下)에 이르게 된다. 만약 철령을 지키지 못하면, 이는 마치 촉(蜀)이 검각(釰閣)을 잃은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옛 터를 따라 관을 세우고 또한 산을 따라 봄에는 동쪽으로 바다에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삼방(三

防)에까지 이른다. 수목을 길러 놓으면 남ㆍ북이 서로 차단된 듯한 형세로 적은 감히 덤벼들지 못한다.

 

창고 장양창(長楊倉)ㆍ남곡창(嵐谷倉)ㆍ화천창(和川倉)ㆍ문등창(文登倉) : 모두 그 옛 현에 있다.

신안창(新安倉) : 역(驛)의 곁에 있다. 신읍창(新邑倉) : 동으로 60리에 있다. 수입창(水入倉)ㆍ

사동창(四東倉) : 모두 그 면(面)에 있다.

진도 서강진(西江津) : 옛 이름은 덕진(德津)인데 서로 1리에 있다.

연송포진(連松浦津) : 바로 맥판동(麥阪冬)인데 다리를 세웠으며 금성(金城)과 경계다.

누정 읍한정(挹漢亭) : 읍의 남쪽에 있다. 칠송정(七松亭) : 남으로 5리에 있는데 강의 북쪽 언덕이다.

단유 의관산단(義舘山壇) : 고성(古城) 안에 있는데, 고려 때 명산으로 소사(小祀 산천에 제사 지내는 의식)를

지냈으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덕진명소단(德津溟所壇) : 덕진안(德津岸) 동봉(東峯)에 있으며 고려의 대천(大川)으로 소사(小祀)를 지냈는데

본조에서도 따랐다.

 

[주 D-001] 장도릉(張道陵) : 동한(東漢) 사람으로, 부수금주(符水禁呪)의 술법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였

는데, 제자가 되는 사람은 쌀 다섯 되를 냈기 때문에 그의 술법을 오두미도(五斗米道)라 하였다.

[주 D-02] 설산(雪山) : 인도의 북쪽에 뻗어 있는 큰 산으로, 항상 산꼭대기에 눈[雪]이 있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과거세(過去世)에 설산대사(雪山大士)로 여기에서 불도를 수행하였다고 한다.

[주 D-03] 악도(惡道) : 불경에 나쁜 죄를 지은 일로 장차 태어나 고통을 받을 곳으로.

3악도(三惡道)·4악도·5악도 등이 있다고 한다.

[주 D-004] 노련(魯連) : 노중련(魯仲連)으로,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제(齊) 나라 사람이다.

조(趙)·위(魏) 두 나라 왕에게 진(秦)을 높여 제(帝)라고 하는 것을 반대하도록 하였다. “진(秦) 나라가 함부로

제(帝)라고 일컫는다. 나는 동해(東海)에 뛰어 들어 죽을 뿐이다.” 한 유명한 말을 한 사람이다.

[주 D-05]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기던 공자(孔子) : 《맹자(孟子)》 진심(盡心)편에, “공자(孔子)가

동산(東山)에 올라서는 노(魯) 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天下)를 작게 여겼다.” 하는

말이 있다.

[주 D-006] 유순(由旬) : 인도(印度)의 이수(里數)의 단위로, 대유순(大由旬)은 80리, 중유순은 60리,

소유순은 40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주 D-07] 등정각(等正覺) : 부처의 10칭호 중의 하나로, 평등(平等)한 정리(正理)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주 D-08] 열반(涅槃) :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하고 진리를 궁구(窮究)하여 혼미한 생사(生死)를

초월해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법을 체득한 경지 즉 불교의 최고 이상이다.

[주 D-09] 반고씨(盤古氏) :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제왕으로, 인류 최초의 제왕이라고 한다.

[주 D-10] 도산(塗山) : 중국의 산 이름으로, 《좌전(左傳)》에, “우(禹)가 제후(諸侯)를 도산(塗山)에 모으니,

옥(玉)과 명주를 갖고 온 자가 만국(萬國)이나 되었다.” 하였다.

[주 D-011] 홍몽(鴻濛) : 천지 자연의 원기(元氣)이다.

[주 D-012] 태항산(太行山)ㆍ왕옥산(王屋山)을 옮겨 놓으려고 한 것은 우공(愚公) : 옛날 우공이 자기 집 앞의

산을 불편하게 생각하여, 오랜 세월을 두고 다른 곳에 옮기려고 노력한 데서 나온 말.《열자 탕문(湯問)》

[주 D-013] 천계(天鷄) : 《술이기(述異記)》에, “동남쪽에 도도산(桃都山)이 있는데,

그 위에 큰 나무가 있어서 이름을 도도(桃都)라고 한다. 가지와 가지 사이가 8천 리나 되는데,

그 위에 천계(天鷄)가 있다. 해가 처음 뜨면 먼저 이 나무를 비추어 천계가 울면 천하의 닭이 다 운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주 D-14] 죽계(竹鷄) : 새의 일종으로, 모양이 작은 닭 같은데 꼬리가 없다고 한다.

[주 D-15] 여옹(呂翁)의 한단몽(邯鄲夢) : 여옹은 여동빈(呂洞賓)을 말한다. 당(唐) 나라의 소설에, “노생(盧生)

이라는 사람이 한단(邯鄲)의 여관에서 도사 여옹(呂翁)을 만나 자신의 곤궁함을 한탄하니,

여옹이 베개를 주면서 베고 자게 하였다. 노생이 꿈에서 크게 부귀영화를 누리고 80세까지 살았다.

깨어보니, 노생이 처음 잠들기 시작할 때에 여관 주인이 기장을 찌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직 다 쪄지지 않았다.”

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의 세상사는 이 꿈처럼 허무한 것임을 풍자한 것이다.

[주 D-016] 사은(四恩) : 네 가지의 은혜, 즉 부모·국왕(國王) ·중생(衆生) 삼보(三寶)의 은혜를 말한다.

[주 D-17] 삼도(三途) : 자기가 한 악업(惡業) 때문에 죽은 후에 간다는

지옥도(地獄道)·아귀도(餓鬼道)·축생(畜生道)를 말한다.

[주 D-018] 기원(祇園) : 인도 마갈타국의 기타태자(祇陀太子)가 소유한 동산인데,

수달장자(須達長者)가 이 동산을 사서 이곳에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세웠다.

 

 

철원도호부 (鐵原都護府)

 

동쪽으로는 금화현(金化縣) 경계까지 32리, 남쪽으로는 경기(京畿) 영평현(永平縣) 경계까지 43리,

서쪽으로는 같은 도(道)의 연천현(漣川縣) 경계까지 43리, 같은 도의 삭녕군(朔寧郡) 경계까지 29리,

북쪽으로는 평강현(平康縣) 경계까지 32리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구려 철원군(鐵圓郡)이다. : 모을동비(毛乙冬非)라고도 한다. 신라의 경덕왕(景德王)이

철성군(鐵城郡)이라고 고쳤다. 뒤에 궁예(弓裔)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옛땅을 침략해 차지하고 송악군

(松嶽郡)에서 여기로 와서 도읍을 정하고, 궁실을 지어 더할 수 없이 사치스럽게 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가 즉위하게 되어서는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철원을 동주

(東州)로 고쳤다. 성종 14년에는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에 혁파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는 지주사(知州事)로 고쳤으며, 고종(高宗) 41년에는 현령으로 낮추었다가 뒤에 목으로 승격

시켰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모든 목(牧)을 없앨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부(府)로 낮추었다.

본조에서는 태종(太宗) 13년에 통례에 따라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세종(世宗) 16년에는 경기에서 본도에

예속시켰다.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 각 1명.

군명 철원(鐵圓)ㆍ철성(鐵城)ㆍ동주(東州)ㆍ육창(陸昌)ㆍ창원(昌原).

 

성씨본부(本府) 최(崔)ㆍ송(宋)ㆍ장(張)ㆍ김(金)ㆍ류(柳)ㆍ정(鄭)ㆍ형(邢)ㆍ신(辛)ㆍ고(高)ㆍ한(韓)ㆍ조(曹)ㆍ

노(盧)ㆍ안(安)ㆍ이(李)ㆍ채(蔡)ㆍ허(許)ㆍ박(朴)ㆍ방(芳), 방(邦) : 속(續).

 

산천 고암산(高岩山) :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궁예 때에 진산(鎭山)으로 하였다.

백악산(白嶽山) : 부의 동북쪽 35리에 있다. 수정산(水精山) :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남산(南山)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효성산(曉星山) : 부의 서북쪽 30리에 있다.

보개산(寶盖山) : 부의 남쪽 17리에 있다. 불견산(佛見山) :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가을마현(加乙磨峴) :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재송평(裁松坪) : 부의 북쪽 45리에 있다.

대야잔평(大也盞坪) :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옛날에는 고동주평(古東州坪)이라고 일컬었다. 누른 띠풀이

시야 끝까지 깔려 있다. 재송평(裁松坪)과 함께 강무장(講武場)이 된다.

우리 세종이 일찍이 여기에서 사냥을 하였다.

 

체천(砌川) :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근원이 회양부(淮陽府) 철령에서 나온다. 또 남쪽으로 흘러가서 경기

양주(楊州) 북쪽으로 들어가 대탄(大灘)이 된다. 양쪽 언덕에 모두 섬돌 같은 석벽(石壁)이 있으므로 체천이

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토산 자석(磁石)ㆍ칠(漆)ㆍ오미자(五味子)ㆍ인삼(人蔘)ㆍ송이버섯[松蕈]ㆍ벌꿀[蜂蜜]ㆍ복령(茯苓)ㆍ

지황(地黃)ㆍ백화사(白花蛇)ㆍ금린어(錦鱗魚)ㆍ누치[訥魚].

 

봉수 소이산봉수(所伊山烽燧) : 부의 서쪽으로 8리에 있다. 동쪽으로 평강현(平康縣)의 토빙산(吐氷山)과

진촌산(珍村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적골산(適骨山)에 응한다.

 

적골산봉수(適骨山烽燧) : 부의 서쪽으로 46리에 있다. 북쪽으로 소이산(所伊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경기

영평현(永平縣) 미로곡(彌老谷)에 응한다.

 

누정 고석정(孤石亭) : 부의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바윗돌이 우뚝이 서서 동쪽으로 못물을 굽어본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眞平王)과 고려 충숙왕(忠肅王)이 일찍이 이 정자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 고려의 중 무외(無畏)의 기문에, "철원군의 남쪽으로 만여 보를 가면 고석정(孤石亭)이 있는데, 큰 바위가

우뚝 솟았으니 거의 3백 척이나 되고 둘레가 십여 길이나 된다. 바위를 타고서 올라가면 하나의 구멍이 있는데

기어 들어가면 방과 같다. 층대(層臺)에는 여남은 명이 앉을 만하다. 그 곁에 신라 진평왕이 남긴 비석이 있다.

 다시 구멍에서 나와 꼭대기에 오르면 펀펀하여 둥근 단(壇)과 같다.

거친 이끼가 입혀져서 돗자리를 편 것 같고, 푸른 솔이 둘러서 일산을 펴 놓은 것 같다. 또 큰 내가 있는데 동남

쪽으로부터 흘러온다. 벼랑에 부딪치고 돌을 굴리는 소리가 마치 여러 가지 악기(樂器)가 한꺼번에 연주되는

것 같다. 바위 아래에 이르러서는 움푹 패여서 못이 되었는데 굽어보면 두려워 다리가 떨려서 마치 그 속에

신물(神物)이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물이 서쪽으로 30리쯤 가서는 남쪽으로 흐른다.

앞뒤에는 다 바위산이 벽처럼 서 있고, 단풍나무와 남나무와 소나무와 싸리나무가 그 위에 섞여 나 있다.

맑고 서늘하고 기이하니 비록 문장을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리는 자라도 비슷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무자년 가을에 산인(山人) 만행(萬行) 등과 함께 가서 보고는 멍하니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 해가 지는

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늦게서야 놀러 온 것을 한탄하였다. 이미 그 형상을 기술하고, 또 시로 기록하

노라니, '푸른 바위가 물 옆에 높다랗게 솟았는데, 양쪽 언덕에는 가을 산이 비단 병풍을 펼쳤네.

저녁 때의 솔바람 소리 맑아서 신선이 《황정경(黃庭經 도교(道敎) 경문의 이름)》 읽는 소리를 듣는 듯하네."

하였다.

 

○ 김양경(金良鏡)의 시에, "태초에 누가 이 정자를 지었던가? 산등성 일만 길이 허공에 걸쳐있네. 몸이 가벼워

지니 홀연히 바람이 옷에서 나는 것을 깨닫고, 걸음이 편안하니 바야흐로 이끼가 신을 받쳐 주는 것을 알겠구나.

학 곁의 소나무는 늙어서 용의 수염같이 푸르고, 따오기 밖에 노을이 날리니 물고기 꼬리가 붉게 보인다.

철원(鐵原)은 기름지고 아름다운 좋은 땅인데, 옥루(玉樓)와 금전(金殿)이 다 가시밭이 되었구나.

고기 잡고 풀 베는 것을 가리키면서 옛과 지금에 느낌이 있어, 글귀를 찾아 읊조릴 제 오사모(烏紗帽)가 비스듬

하네." 하였다.

 

○ 이곡이 충숙왕의 시 뒤에 차운(次韻)한 시에, "누가 능히 전인의 잘못을 보고 후일을 경계하겠는가.

이곳은 태봉(泰封)의 유적인 옛 산천이라네. 임금께 권하여 멀리 거둥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건만,

다만 간신들이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네." 하였다.

 

북관정(北寬亭) : 부의 북쪽에 있다.

○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그때 도탄에 빠져서 몇 고을이 곤란하였던고. 올라서 바라보노라니 옛일이 생각나

새로운 수심이 갑절이나 되네. 아로새긴 담장과 높은 집들의 번화함이 다 사라지니, 깨어진 주춧돌과 무너진

담에 가을이 쓸쓸하구나.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매 감개가 무량하고, 산과 물을 돌아보노라니 맑고 그윽

하여라. 흑금원(黑金原 철원(鐵原))의 천년 땅에 벼와 기장 이삭이 늘어져, 멀리 노니는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 :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본래 고려 태조가 궁예에게 벼슬하고 있을 때에 살던 옛집이다.

담장의 남은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역원 용담역(龍潭驛) : 부의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 안축의 시에, "초가집에 유숙하노라니, 서리가 짙게 내려 기온이 차갑구나. 힘들게 왔기에 아픈 다리를 펴고,

단정히 앉아서 성근 수염을 비빈다. 집이 오래되어 먼지가 벽에 깃들었고, 창 밖의 밝은 달은 처마에 걸렸네.

마음이 바쁘니 잠이 편치 않아, 홀연히 밤이 너무 긺을 깨닫노라." 하였다.

 

풍전역(豐田驛) : 부의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통화원(通化院) : 부의 동쪽으로 39리에 있다. 권화원(權化院) : 부의 서쪽으로 35리에 있다.

불우 석대사(石臺寺) : 보개산(寶盖山)에 있다. 당 나라 정원(貞元) 8년에 사냥꾼 이순석(李順石)이라는 자가

여기에서 돌부처를 보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고려 민지(閔漬)의 기(記)가 있다. 지장사(地藏寺) : 보개산에

있다. 이색(李穡)의 중수기(重修記)가 있다.

 

○ 이색의 시에, "산에 노니는 맛이 사탕수수를 씹는 것 같아서, 점점 가경(佳境)으로 들어가는 것을 사랑한다.

구름을 바라보노라니 함께 무심해지고, 냇가를 거닐면서 홀로 그림자만을 짝한다.

종과 목어 소리에 숲과 골짜기는 비었는데, 전각(殿閣)에는 소나무와 삼나무가 차가워라.

매우 청전(靑纏)을 변별(辨別)하려고 바람 앞에 서서 다시 많이 반성하노라." 하였다.

심원사(深原寺)ㆍ성주암(聖住菴)ㆍ지족암(知足菴)ㆍ용화사(龍華寺)ㆍ운은사(雲隱寺) : 모두 보개산에 있다.

 

적석암(積石菴) : 고암산(高岩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寺) : 부의 서쪽으로 2리에 있다.

여단(厲壇)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풍천원(楓川原) : 궁예의 도읍지로 부의 북쪽 27리에 있다. 외성(外城)의 둘레는 1만 4천 4백 21척이고,

내성(內城)의 둘레는 1천 9백 5척으로, 모두 흙으로 쌓았다. 지금은 절반이 퇴락하였다. 궁전의 옛터가 뚜렷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고석정(孤石城) : 고석정(孤石亭) 옆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가 2천 8백 92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신제처(新堤處) : 부의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인물고려 최준옹(崔俊邕) : 태조(太祖)를 도와 공신(功臣)이 되었다.

최석(崔奭) : 준옹의 5대손으로, 처음 이름은 석(錫)이다.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영광스럽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

하고, 태보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감수국사 상주국 판상서이례부사(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監修國

史上柱國判尙書吏禮部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예숙(譽肅)이다.

 

최유청(崔惟淸) : 최석의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예종조(睿宗朝)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여러 번 옮기어 좌사간(左司諫)에 이르렀을 때에 상주(尙州)의 수령으로 나갔으며, 지주사(知奏事)를

지내고 중서문하평장사에 임명되었다. 뒤에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로서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어서

치사하였자. 시호는 문숙(文淑)이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문신(文臣)들은 모두 해를 입었으나, 여러 장수들이

평소에 유청(惟淸)의 덕망에 감복하였으므로 군사들을 경계시켜 그의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기복(期服)ㆍ대공(大功)ㆍ소공(小功)의 복제(服制)가 있는 친척까지도 모두 화를 면하였다.

아들이 여덟 명이었는데, 네명이 급제하여 해마다 관청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양곡을 주었다.

 

최당(崔讜) : 유청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글을 잘 지었다. 명종(明宗) 초에 정언(正言)이 되어

벼슬이 중서문하평장사에 이르렀다.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살면서 그의 집에 현판을 걸기를, '쌍명(雙明)'

이라고 하였다. 그의 아우 최선(崔詵)과 태복경(太僕卿) 장자목(張自牧), 동궁시독학사(東宮侍讀學士) 고영중

(高塋中), 비서성(秘書省) 백광신(白光臣), 사공(司空) 이준창(李俊昌), 상서(尙書) 현덕수(玄德秀), 수사공

(守司空) 이세장(李世長), 대사성(大司成) 조통(趙通) 등과 함께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어 이리저리 놀러 다니

면서 스스로 즐기니, 당시 사람들이 지상의 신선이라 하고, 그의 모습을 그려 돌에 새겨서 후세에 전하였다.

시호는 정안(靖安)이다.

 

최선(崔詵) : 최당의 아우이다. 문장과 학술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마음이 담박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가문이

좋다고 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았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서 참지정사(叅知政事)에 이르렀다.

신종조(神宗朝)에 나이가 많고 덕이 높다고 하여 태부문하시랑 동중서평장사 판이부사(太傅門下侍郞同中書平

章事判吏部事)에 임용되었다가, 얼마 뒤에 나이를 이유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희종(熙宗)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최린(崔璘) : 최당의 손자이고, 유청(惟淸)의 증손이다. 국량이 크고 깊어서 젊어서부터 작은 행실에는 구애받지

않고서 호협(豪俠)한 사람들과 술자리에 모여 놀더니, 나이 거의 3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분발하여 글을 읽었다.

강종조(康宗朝)에 급제하여 대간(臺諫)을 역임하고,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최종준(崔宗峻) : 최선의 아들이다. 신종조(神宗朝)에 장원 급제하였고, 고종조(高宗朝)에 벼슬이 문하시중(門下

侍中)에 이르렀다.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최시중(崔侍中)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절조로 청렴하게 나라에 봉사하였는데, 어찌 상례(常例)에 따라 갑자기 벼슬을 그만두게 하겠

는가." 하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최온(崔昷) : 최선의 손자이다. 고종조(高宗朝)에 급제하여 벼슬이 태부중서시랑평장사(太傅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치사하고 졸하였다. 최문본(崔文本) : 최온의 아들이다. 충렬왕(忠烈王) 초기에 승선(承宣)에 임명되

어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졸하였다. 모습이 거대하며, 침착하고 무게가 있어서 대신(大臣)의 면목이 있

었다. 일찍이 중국의 사신이 사람들에게 묻기를, "너희 나라에 이 사람 같은 자가 몇 사람이냐?" 하Ѐ다.

 

최평(崔坪) : 최선의 손자이다. 고종조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서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

으나, 백부 종준(宗峻)의 친혐(親嫌)으로 인하여 입성(入省)하지 못하였다.

 

최옹(崔雍) : 유청의 증손이다. 고종조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서 전리좌랑(典理佐郞)이 되었다.

충렬왕이 태손(太孫)으로 있을 때부터 맞아다가 스승을 삼더니, 즉위하게 되어서는 부지밀직사사 한림학사(副

知密直司事翰林學士)에 승진시켰는데 치사하고 졸하였다.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더니 그

문인으로서 공경(公卿)이 된 자가 매우 많았다.

 

최영(崔瑩) : 최옹의 손자이다. 풍모가 걸출하며 힘이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는 양광도 도순문사(楊廣道都巡

問使)의 휘하에 예속되어 여러 번 왜적을 사로잡았으므로 무용(武勇)으로써 알려졌다. 홍건적의 난리 때에는

안우(安祐)ㆍ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경도(京都)를 수복하여 공훈이 일등에 책록(冊錄)되었다.

김용(金鏞)을 죽이고, 덕흥군(德興君)을 내쳤으며, 하치(哈赤)를 토벌하고 왜적을 격파하였으며,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을 죽인 것이 모두 최영의 힘이었다.

최영은 천성이 깨끗하여 상으로 내리는 전지와 노비를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大體)에는

어두워서 여러 사람의 의론을 돌아보지 않고 계책을 결단하여 요(遼)를 치다가 천자(天子)에게 죄를 지으니,

문하부 낭사(門下部郞舍) 허응(許應) 등이 소를 올려 논죄를 청하여 드디어 최영을 참형하였다.

간대부(諫大夫) 윤소종(尹紹宗)이 논하기를, "최영의 공은 온 나라를 덮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 하니,

세상에서는 명언이라고 하였다. 본조에 이르러서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효자고려 태성길(太成吉) :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에, 성길은 74세의 어머니를 업고 가서 그 난을 면할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효도로 봉양하였다.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정려하였다.

 

제영 산은 옛나라 천년의 한을 머금고 : 강회백의 시에, "산은 옛나라 천년의 한을 머금고, 구름은 긴 공중 만리

의 마음을 안았네. 옛부터 흥하고 망하는 것이 다 까닭이 있으니, 원컨대 전인의 잘못을 보고 미래와 현재를

경계할지어다." 하였다.

 

지세가 험준한 나라가 몰락된 뒤에 : 조준(趙浚)의 시에, "지세가 험준한 나라가 몰락한 뒤에, 반천년의 문물(文物)

이 발흥하는 때로구나." 하였다. 푸른 산은 그림같이 평야를 둘렀고 : 이맹균(李孟畇)의 시에, "푸른 산은 그림같이

평야를 둘렀고, 푸른 나무는 바람을 머금어 가을을 웁직이네." 하였다.

 

매미가 교목(喬木)에서 울어 초가을이 움직인다. : 이원(李原)의 시에, "풀에 묻힌 옛 수도(首都)에 석양이 밝은데,

매미가 교목에서 울어 초가을이 움직인다." 하였다.

 

예와 같이 어룡(魚龍)들은 적막한 가을일러라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나라가 무너져 산하가 한 고을이 되었

구나. 태봉(泰封)의 남은 자취, 사람으로 하여금 수심하게 하네. 지금은 사슴들이 와서 노니는 곳, 예와같이 어룡

들은 적막한 가을일러라. 지는 해 엷은 연기는 하늘과 함께 멀고, 떨어진 꽃 나는 버들개지는 물과 같이 유유하네.

당시의 거울의 참언(讖言)은 참 임금께 돌아갔는데, 가소롭다 궁예왕은 제멋대로 놀기만 일삼았으니." 하였다.

 

신증 관심각(觀心閣) 위에는 풀만 속절없이 우거지고 : 종실(宗室) 심원(深遠)의 시에, "한 마리 용이 철원에서

날아 나오더니, 해하(垓下)의 미인(美人)이 가만히 시름이 맺혔네. 흥하고 망함은 몇 번이나 은 나라의 갑자(甲子)

를 지났던가, 옳고 그른 것은 모두 진(晉) 나라의 춘추(春秋)에 붙이노라. 관심각 위에는 풀만 공연히 우거지고,

붓을 떨어뜨린 뜰주D-001 앞에는 구름이 절로 유유하구나. 사슴들은 궁예의 한을 모른 채 석양의 강가에서 한가

로이 노니는구나." 하였다.

 

가을이 깊으니 낙엽이 우물을 메우고 : 권건(權建)의 시에, "동주(東州) 성 아래에 풀이 우거졌구나, 한번 바라

보니 쓸쓸한 광경 흥망성쇠를 느끼게 하네. 끝내 신광(神光)은 찾을 곳이 없는데, 당시의 기이한 참언을 누가 알았

겠는가. 가을이 깊으니 낙엽은 우물을 메우고, 달빛이 검으니 놀란 고라니가 옛 옥지(玉墀)에 올라오네.

끝없이 이어지는 흥망에 하늘도 늙었으리. 강산이 이러하니 새 시나 읊으리라." 하였다.

 

천년의 성루(城壘)에 잡초만 우거졌구나 : 성현(成俔)의 시에, "웅번(雄藩) 철원은 옛날 도읍이라, 나그네 와서

말없이 수심만 머금네. 패상(沛上)에 풍운(風雲)이 드날리던 날, 함양(函陽)에는 연기와 불꽃이 참담하던 때였다.

두 나라의 흥망이 이제 모두 적막한데, 천년의 성루에 잡초만 우거졌구나. 궁예왕이 전인의 잘못을 거울삼지

않고, 왕도(王都)의 땅을 미록(麋鹿)에게 주어 노닐게 하였네." 하였다.

 

[비고]

 

연역 정종(正宗) 조에 회양진(淮陽鎭)을 이곳으로 옮겼다.

방면 동변면(東邊面) : 처음은 5리, 끝은 10리다. 서변(西邊) : 끝이 10리다. 송내(松內)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다.

관인(寬仁)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50리다. 오은동(於隱洞) : 동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다.

북면(北面) : 처음은 15리, 끝은 45리다. 묘장(畝長) :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다.

갈미(乫未) : 처음은 20리, 끝은 50리다. 골파(坡) : 서쪽으로 처음과 끝이 20리다.

만종(萬宗) : 동쪽에 있다. 외서(外西) : 서쪽에 있다. 백산(白山) : 서쪽에 있다.

이상 세 면(面)은 지도에 실려 있다.

 

성지 태봉시도성(泰封時都城) : 풍천(楓川)에 있는데 원래 내성(內城)의 둘레는 1천 9백 5척이고, 외성(外城)의

둘레는 2만 4천 4백 21척이며 가운데에 궁전의 옛터가 있다. 고석성(孤石城) :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는데,

둘레가 2천 8백 92척이다. 옆에는 고석정(孤石亭)이 있는데 진평왕(眞平王)과 충숙왕(忠肅王)이 일찍이 이 정

에서 놀았으며 바위가 거의 3백 척이나 우뚝 솟았다. 둘레는 10여 장(丈)으로 위에는 한 개의 구멍[穴]이 있는데,

기어서 들어가면 마치 집과 같아 10여 명이 앉을 수 있다. 옆에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비가 있고, 전후에는

바윗돌이 벽처럼 서 있고, 정자에 못의 물은 바위 아래에 이르러 못이 되는데 가까이 가 보면 무섭다.

 

창고 동창(東倉) :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서창(西倉) : 서남쪽으로 25리에 있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진도 체천진(砌川津) : 남쪽으로 40리에 있으며 영평(永平)과 통하는데, 겨울에는 다리를 놓고 여름에는 배로

건넌다.

누정 북관정(北寬亭)ㆍ진동루(鎭東樓)ㆍ가학루(駕鶴樓) : 모두 읍내에 있다.

 

[주 D-001] 붓을 떨어뜨린 뜰 : 처음에 최응(崔凝)과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함께 궁예에게 벼슬하였다.

하루는 궁예가 왕건에게, “경이 어젯밤에 사람을 모아 놓고 반역을 꾀한 것은 웬 일인가?” 하니, 왕건이 웃으며

부인하였다. 궁예는 “경은 나를 속이지 마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안다." 하였다.

그때 최응이 장주(掌奏)로서 옆에 있다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집으러 가는 체하면서, 뜰에 내려가

왕건에게 시인하라고 귀띔하여 왕건으로 하여금 화를 면케 한 고사(故事)가 있다.

 

 

금성현 (金城縣)

 

동쪽으로는 회양부(淮陽府) 장양현(長楊縣) 경계까지 1백 5리, 남쪽으로는 낭천현(狼川縣) 경계까지 52리,

금화현(金化縣) 경계까지 17리, 서쪽으로는 평강현(平康縣) 경계까지 37리,

북쪽으로는 회양부 경계까지 5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3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구려의 모성군(母城郡)이다 : 야차홀(也次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익성군(益城郡)으로

고쳤다가,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현종(顯宗)이 현으로 낮추어 교주(交州)의 속현으로 하였고,

예종(睿宗) 원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현령으로 승격시켰는데, 고종(高宗)은 다시 감무로 하고,

또 도령(道寧)이라고 일컬었다. 본조에서는 다시 금성 현령(金城縣令)으로 하였다.

속현 통구현(通溝縣) : 구(溝)는 구(口)로 쓰기도 한다. 본래는 고구려의 수입현(水入縣)이다. 매이(買伊)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기성군(岐城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때에 현종이 교주의 속현

으로 하였다가, 뒤에 본현의 속현으로 하였다. 현의 북쪽 6리에 있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각 1명.

 

군명 모성(母城)ㆍ야자홀(也恣忽)ㆍ익성(益城)ㆍ금양(金壤)ㆍ도령(道寧).

 

성씨본현 소(蘇)ㆍ손(孫)ㆍ신(申)ㆍ노(盧)ㆍ유(劉)ㆍ최(崔) : 원주(原州). 송(宋) : 경주(慶州). 이(李) : 영주

(寧州). 황(黃) : 평해(平海). 정(鄭) : 양양(襄陽). 통구(通溝) 전(田)ㆍ이(李)ㆍ박(朴)ㆍ임(林). 김(金)ㆍ서(徐) :

모두 속(續). 기성(歧城) 박(朴)ㆍ고(高)ㆍ문(文). 김(金) : 속(續). 박(朴) : 통구(通溝). 허(許) : 평강(平康).

소수이(小水伊) 윤(尹)ㆍ박(朴).

 

산천 경파산(慶把山) : 현 북쪽으로 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적산(赤山) : 현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백역산(白亦山) : 현 북쪽으로 45리에 있다.

차유산(車踰山) : 기성현 남쪽으로 5리에 있으며 현과의 거리는 45리이다.

양수산(良水山) : 통구현의 동북쪽으로 10리에 있다. 현과의 거리는 75리이다.

운봉산(雲峯山) : 현 남쪽으로 25리에 있다. 보리진(菩提津) : 기성현의 북쪽에 있다. 현과의 거리는 50리이니,

즉 회양부 용연(龍淵)의 하류이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흘러가는 푸른 강물, 그 이름 보리진이라네. 유리빛 자연스럽고 맑고 깨끗하여 티끌

에 물들지 않았네. 내 3월 저물녘에 오니, 양쪽 언덕에 꽃과 버들 새롭구나. 뗏목을 띄워서 맑은 물을 흩으리니,

거울 같은 수면에 가느다란 비늘 같은 무늬가 이네. 굽어 비쳐 보고 내 낯이 괴이하여, 문득 배 위의 몸을 만져

보노라. 분명 두 개의 나, 나와 나, 그 어느 것이 진짜인가. 진짜를 찾으면 곧 헛 것을 이루나니, 허상과 허상이

번다하게 서로 따르네. 필경에는 마땅히 허상을 멀리 떠나고 떠난다는 생각까지 떠나야 본래의 참사람을 보리라.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토끼의 뿔처럼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이 말이 깨닫지 못한 사람을 놀라게 하리라.

길게 휘파람 불며 뱃전을 두드리노니, 눈 가득히 천지의 봄이로구나." 하였다.

 

다경진(多慶津) : 통구현 서쪽 7리에 있다. 현과의 거리는 60리다.

상리천(上里川) : 현 남쪽으로 2리에 있다. 근원(根源)이 회양부(淮陽府)의 남곡현(嵐谷縣)에서 나와 보리진으로

들어 간다.

 

토산 칠ㆍ인삼ㆍ동철(銅鐵) : 현 남쪽 풍동리(楓洞里)에서 난다.

석철(石鐵) : 기성리(歧城里) 야포평(也浦坪)에서 난다. 벌꿀ㆍ잣ㆍ노감석(爐鉗石)ㆍ연철(鉛鐵) : 모두 현 북쪽

금야동(金也洞)에서 난다. 복령ㆍ백화사ㆍ석이버섯ㆍ오미자ㆍ누치ㆍ여항어ㆍ쏘가리.

 

봉수 아현봉수(阿峴烽燧) : 현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남쪽으로 금화(金化) 소이산(所伊山) 봉수에 응하고, 북쪽

으로 구을파산(仇乙破山)에 응한다. 구을파산봉수(仇乙破山烽燧) : 현 북쪽으로 23리에 있다. 남으로 아현(阿峴)

에 응하고, 북으로 기성북산(歧城北山)에 응한다. 기성북산봉수(歧城北山烽燧) : 현 북쪽으로 48리에 있다.

남으로 구을파산에 응하고, 북으로 회양부(淮陽府)의 개탄산(介呑山)에 응한다.

누정 영벽루(映碧樓) : 보리진의 북쪽 언덕에 있다. 유사눌(柳思訥)의 기(記)가 있다.

 

학교 향교(鄕校) : 현 서쪽 3리에 있다.

 

역원 직목역(直木驛) : 현 북쪽으로 8리에 있다. 서운역(瑞雲驛) : 현 남쪽으로 29리에 있다.

창도역(昌道驛) : 예전에는 웅양역(熊壤驛)이라고 일컬었다. 현 북쪽으로 31리에 있다.

○ 성임의 시에, "깨끗한 난간과 창이 고요한데, 가을이 오니 눈앞이 훤히 트인다. 냇물의 흐름은 비[雨]를 따라

급하고, 단풍잎은 서리를 만나 곱다. 연기는 마을 밖을 둘렀고, 산은 책상 앞에 가로놓였다. 읊조리며 한가함을

붙이노니, 일만 가지 근심을 정히 흩을 만하네." 하였다. 영풍원(永豐院) : 현 남쪽으로 6리에 있다.

 

웅시원(熊施院) : 현 북쪽으로 13리에 있다. 보리진원(菩提津院) : 현 북쪽으로 50리에 있다.

도솔원(兜率院) : 현 동쪽으로 75리에 있다.

불우 월봉사(月峯寺) : 적산(赤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북산(北山)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기성폐현(歧城廢縣) : 현 북쪽으로 48리에 있다. 본래는 고구려의 동사홀군(冬斯忽郡)이다.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현으로 낮추고, 본현의 속현으로 하였다.

 

소수이소(小水伊所) : 통구(通溝)에 있다.

통사동고성(桶寺洞古城) : 현 남쪽으로 8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가 7백 25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제영 금성(金城)에 가을이 드니 비단도 이만 못하리라 : 이곡의 시에, " 금성에 가을이 드니 비단도 이만 못하니,

일천 벼랑의 일만 나무들 서리 맞기 처음이네. 숲 사이의 낡은 집은 유망(流亡)한 나머지요, 산 위의 메마른

밭은 세(稅)를 부과한 나머지로다. 사신의 행차 빈번히 지나는 것 싫어하지 않고, 오직 아전의 폐단이 교묘하게

침탈하는 것을 미워한다. 한가로이 노니는 나 같은 사람도 오히려 백성의 폐가 되니, 도연명(陶淵明)의 홀로

자기 거처를 사랑한 것에 부끄럽구나." 하였다.

 

돌과 모래의 척박한 땅 벼가 있는 밭두둑이 없고 : 강회백의 시에, "돌과 모래의 척박한 땅 벼가 있는 밭두둑이

없고, 쓸쓸한 집 두어 칸 있네. 가을이 깊으니 바람은 모자를 떨어뜨리고, 산이 가까우니 이슬이 난간을 침범

하누나. 뜰 앞 나무들은 서리를 맞아 붉고, 시내 위의 구름은 물을 건너서 차갑다. 지대가 외져서 숨어 살기

알맞구나. 굳이 녹문산(鹿門山) 찾으랴."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文獻備考》

방면 남면(南面) : 처음은 1리, 끝은 50리다. 동면(東面) : 처음은 15리, 끝은 40리.

서면(西面) : 처음은 10리, 끝은 40리. 북면(北面) : 서북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50리.

임남(任南) : 동남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50리. 기성(岐城) : 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5리.

통구(通溝) : 동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90리. 소수이소(小水伊所) : 통구(通溝) 에 있다.

창고 동창(東倉) : 합관(合串)ㆍ강변(江邊) 통구창(通溝倉) : 고현(古賢)에 있다. 기성창(岐城倉) : 고현에 있다.

진도 통구진(通溝津): 다경진(多慶津)이라고 하며 동쪽으로 55리에 있다.

남강진(南江津) : 합관강(合串江)에 있다.

맥판진(麥阪津) : 바로 회양(淮陽)의 송포진(松浦津)으로 회양의 용연(龍淵) 아래로 흐른다.

황장봉산(黃腸封山) 북쪽으로 35리다.

누정 경양루(慶陽樓) : 읍내에 있다. 피금정(披妗亭) : 남대천(南大川) 위에 있다.

 

 

양구현(楊口縣)

 

동쪽으로는 인제현(麟蹄縣) 경계까지 34리, 남쪽으로는 춘천부(春川府) 경계까지 32리, 서쪽으로는 낭천현

(狼川縣) 경계까지 31리, 북쪽으로는 회양부(淮陽府) 경계까지 73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3백 3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구려의 양구군(楊口郡)이다 : 요은홀차(要隱忽次)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양록군(楊麓郡)

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양구현(楊溝縣)으로 고치고 춘주(春州)의 속현으로 하였다가,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예종 원년에는 감무(監務)를 두고 낭천 감무(狼川監務)로 와서 겸임케 하였다.

본조에서는 태조 2년에 도로 분리시켰고, 태종(太宗) 13년에는 통례에 따라 현감으로 하였다.

 

속현 방산현(方山縣) : 현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본래는 고구려의 삼현현(三峴縣)이다. 밀파혜(密波兮)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삼령(三嶺)으로 고치고 양록군(楊麓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때에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회양부(淮陽府)의 속현으로 하였다. 본조에서는 세종(世宗) 6년에 다시 본현의 속현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각 1명.

군명 요은홀차(要隱忽次)ㆍ양록(楊麓)ㆍ양구(楊溝).

 

성씨본현 류(柳)ㆍ장(張)ㆍ김(金). 이(李)ㆍ양(梁) : 모두 속(續) 방산(方山) 최(崔)ㆍ미(米)ㆍ유(兪)ㆍ전(田)

 

산천 비봉산(飛鳳山) : 현 북쪽으로 2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두타산(頭陁山) : 현 북쪽으로 51리에 있다. 사명산(四明山) : 현 서쪽으로 36리에 있다. 산꼭대기에 못이 있다.

날씨가 가물면 여기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도솔산(兜率山) : 현 동쪽으로 40리에 있다. 도리관현(都里串縣) : 현 동쪽으로 15리에 있다.

사리관현(沙里串峴) : 현 동쪽으로 32리에 있다.

포천현(鋪遷峴) : 현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길이 매우 험하고 막혀서 잔도(棧道)를 만들어 놓았다.

곡계(曲溪) : 현 동쪽으로 40리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동북쪽에서부터 현(縣)을 안고 빙 둘러서 흐르다가, 도로 비봉산 서북쪽으로 나와서 낭천(狼川)

에 이르러 마탄(馬灘)으로 들어간다.

 

토산 자기(磁器)ㆍ오미자ㆍ지치ㆍ인삼ㆍ복령ㆍ벌꿀ㆍ석이버섯ㆍ잣ㆍ영양ㆍ백화사ㆍ누치ㆍ여항어ㆍ쏘가리.

 

학교 향교 : 현 남쪽으로 1리에 있다.

역원 수인역(水仁驛) : 현 남쪽으로 35리에 있다. 함춘역(含春驛) : 현 북쪽으로 5리에 있다.

도리관원(都里串院) : 도리관현 아래에 있다.

불우 두타산(頭陀寺) : 두타산에 있다. 심곡사(深谷寺) : 도솔산에 있다. 관음사(觀音寺)ㆍ

청량사(淸涼寺) : 모두 사명산(四明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비봉산에 있다. 여단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해안소(亥安所) : 예전에는 춘천부(春川府)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영락(永樂) 갑진년에 본현에 이속(移屬)

하였다. 현 북쪽으로 60리에 있다. 비봉산성(飛鳳山城) : 돌로 쌓았다. 둘레가 8백 92척, 높이가 6척이다.

 

신증효자본조 고숭효(高崇孝) : 연산조(燕山朝)에 어머니상을 당하였는데 그때는 상기를 단축하라는 법이 엄하

였는데도, 숭효는 여전히 상복을 입고 아침저녁으로 슬피 울면서 3년을 마쳤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제영 멧부리와 봉우리가 반(半)이나 둘러섰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붉은 해가 아직 바다에 뜨기도 전에,

흰 안개가 오히려 산에 잠겼네. 새벽밥 지어 먹고 문득 동쪽으로 달리노니, 길이 매우 험난하도다. 재의 잔도

(棧道)는 높고 가파른 데를 뚫었고, 시내의 징검다리는 졸졸 흐르는 시내를 통과한다.

험한 산길을 애써 지나 푸른 기슭에 오니, 동구가 점점 넑고 조용해지네. 호각 소리와 깃발 그림자가 멀리 교목

숲 사이로 나타난다. 비로소 알겠다. 읍내의 아전들이 나를 맞으러 막 관(關)을 지나는 것을.

갑자기 운수현(雲水縣)이 보이니, 멧부리와 봉우리가 반이나 둘러섰네. 뽕밭과 삼밭 3ㆍ4리요, 가옥은 교목이

있는 물굽이에 닿아 있네. 허공에 높이 객관이 솟았는데, 단청의 광채가 빛나고 아롱지네. 아름다운 수풀은 북쪽

동산에 빽빽하고, 아득히 푸른 연기는 쪽을 찐 듯하네, 고운 꽃들은 남쪽 섬돌에 의지하여 피었고, 가벼이 날리는

꽃잎이 가득하네. 솔바람은 시원하여 더위를 씻어 주고, 대숲에 비친 해는 그윽한 데까지 비추네. 문득 이곳이

신선의 동부(洞府)인가 하니, 티끌 세상이 아님을 누가 알랴. 사군(使君)은 청운(靑雲)의 어진 선비로, 아직 검은

머리인데, 오히려 유벽(柳壁)의 손의 마른 왕골같은 흰 귀밑털이 애달프구나. 맑은 눈동자들은 서로 나를 보며

못났다 하지 않네. 동쪽 바위에서 기녀(妓女)를 부르니, 좌중에 어여쁘고 아리따운 여인들이 둘러 앉았네.

좋은 노래 간드러지게 울려 퍼지고, 묘한 춤 돌고돌며 추네. 잔치 처음부터 내가 수레 타고 떠날까 염려하는구나.

잔을 들고 갑자기 보도(報導)하기를 , 말례(末禮)는 생략함이 좋겠다고 하네. 아녀자가 공연히 이별로 눈물 줄줄

흘리는 것을 어찌 배울까보냐." 하였다.

 

경계가 고요하니 마음도 고요하고 : 송구빈(宋九)의 시에, "경계가 고요하니 마음도 고요하고, 사람이 드무니

일도 드물구나." 하였다.

 

신증 마을에 이어진 보리 물결은 바람따라 일어난다 : 성현의 시에, "골짜기를 지나고 구름을 뚫으며 말고삐를

늦추어 가면서, 나무 수풀 깊은 곳에서 냇물 소리를 듣노라. 하늘은 비옥한 들을 열어서 양록(楊麓)을 안았고,

산은 기이한 봉우리를 만들어 사명산을 떠받쳤네. 밭이랑에 가득한 바늘같은 벼모는 물을 나누어 심고, 마을에

이어진 보리 물결은 바람 따라 일어나네. 여기에는 도독(刀牘)을 찬 사람 없는데, 뻐꾸기는 어이하여 괴롭게

밭 갈기를 재촉하는가." 하였다.

 

[비고]

 

방면 현내면(縣內面) : 끝이 10리. 서면(西面) : 처음은 5리, 끝은 30리. 남면(南面) : 처음은 10리, 끝은 30리.

북면(北面) : 처음은 10리, 끝은 30리. 상동(上東) : 처음은 25리, 끝은 70리.

하동(下東) : 처음은 10리, 끝은 30리. 방산(方山) : 서북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80리.

해안(亥安) : 동북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80리. ○ 옛날에는 춘천(春川)에 속했다가 세종 6년에 내속(來屬)

하였다. 해안소(亥安所).

창고 북창(北倉) : 서북으로 30리인데, 방산면(方山面)이다. 해안창(亥安倉) : 해안면에 있다.

 

 

낭천현 (狼川縣)

 

동쪽으로는 양구현(楊口縣) 경계까지 45리, 남쪽으로는 춘천부(春川府) 경계까지 23리, 서쪽으로는

금화현(金化縣) 경계까지 64리, 북쪽으로는 금성현(金城縣) 경계까지 5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구려의 성천군(狌川郡)이다 : 야시매(也尸買)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그대로 군(郡)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는 춘주(春州)에 예속시켰다가, 예종 원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어

양구(楊口)를 겸임케 하였는데, 본조에서는 태조가 도로 분할하였고, 태종 13년에는 통례에 따라 현간(縣監)

으로 삼았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성천(狌川)ㆍ야시매(也尸買).

 

성씨본현 장(張)ㆍ정(程)ㆍ송(宋)ㆍ길(吉)ㆍ고(高)ㆍ최(崔)ㆍ백(白)ㆍ김(金)ㆍ박(朴) : 모두 들어왔다.

 

산천 성산(狌山) : 현 서쪽 1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용화산(龍華山) : 현 남쪽 22리에 있다. 〈춘천(春川)〉편에서도 나온다. 계성산(啓星山) : 현 서쪽 28리에 있다.

마현(馬峴) : 두 개의 재가 있으니, 하나는 현 남쪽 29리에 있고, 하나는 현 북쪽 64리 금화(金化)의 경계에 있다.

일산(日山) : 현 동쪽 31리에 있다.

 

남진(南津) : 마현에서 나와 현 남쪽으로 1리를 지나서, 또 동쪽으로 흘러 대리진(大利津)으로 들어간다.

대리진(大利津) : 현 동쪽 12리에 있으니, 즉 마탄(馬灘)의 하류이다. 풍천(楓川) : 현 동쪽 27리에 있다.

마탄(馬灘) : 현 동쪽 46리에 있다. 금성현(金城縣) 보리진(菩提津)의 하류이다.

 

토산 칠ㆍ잣ㆍ오미자ㆍ지치ㆍ인삼ㆍ복령ㆍ벌꿀ㆍ영양ㆍ누치ㆍ여항어ㆍ쏘가리ㆍ석이버섯.

 

누정 남진정(南津亭) : 남진(南津)의 북쪽 언덕에 있다. 여지당(勵志堂) : 객관 서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 서쪽 3리에 있다.

역원 방천역(方川驛) : 현 동쪽 42리에 있다. 원천역(原川驛) : 현 남쪽 15리에 있다.

산양역(山陽驛) : 현 북쪽 45리에 있다. 대리원(大利院) : 대리진(大利津)의 언덕에 있다.

불우 성불사(成佛寺) : 용화산(龍華山)에 있다. 계성사(啓星寺) : 계성산(啓星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세상에서는 자모당(子母堂)이라고 전한다.

모당(母堂)은 현 북쪽 4리에 있고, 자당(子堂)은 현 서쪽 7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용화산성(龍華山城) : 돌로 쌓았다. 둘레가 9백 56척, 높이가 2척이다. 안에 우물 세 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반이 퇴락하였다. 성산성(狌山城) : 돌로 쌓았다. 둘레가 3천 14척, 높이가 4척이다. 지금은 반이 퇴락하

였다.

 

제영 푸른 산이 사방의 이웃이로다 : 김극기의 시에, " 옛 고을이 푸른 시냇가에 있는데, 푸른 산이 사방의 이웃이

로다. 한 가닥 동쪽으로 향한 길이요, 천리 북으로 가는 사람이로구나." 하였다. 산은 용(龍)이 서린 듯하며 지축

(地軸)이 깊다 : 최부(崔府)의 시에, "갠 냇물은 뚜렷하고 나무들은 어두침침한데, 산은 용(龍)이 서린 듯하며

지축(地軸)이 깊도다." 하였다.

 

지대가 낮으니 봄물이 넘친다 : 유관(柳觀)의 시에, "산이 가까워 구름이 골짜기에 솟아오르니, 잠깐 그늘졌다간

도로 맑아지곤 하네. 지대가 낮으니 봄물이 넘치고, 나무가 빽빽하니 여름 바람이 맑구나. 밤이 어두운데 등잔불

에 무리[暈]지고, 처마가 비었으니 빗소리가 잘 들린다. 읊으면서 그대로 잠들지 못하노라니, 외곬으로 고향

생각이 나네." 하였다.

 

구름이 가까우니 옷이 젖고 : 이지직(李之直)의 시에, "구름이 가까우니 옷이 젖고, 바람이 부니 여름 대자리가

맑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인조 22년에 금화(金化)에 예속시켰다가 효종 4년에 다시 세웠다.

방면 현매면(縣內面) : 끝이 10리. 동면(東面) : 처음은 15리, 끝은 40리. 남면(南面) :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북면(北面) : 처음은 40리, 끝은 60리. 상면(上面) : 처음은 5리, 끝은 25리. 하서(下西) : 서남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간척(看尺) : 동남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5리.

혁폐 원정역(原貞驛)

진도 남강진(南江津)ㆍ대리진(大利津) : 동으로 12리.

토산 배ㆍ삼[麻]ㆍ목화. 황장봉산(黃腸封山) : 하나는 서로 30리에 있고, 또 하나는 동북으로 40리에 있다.

 

 

이천현(伊川縣)

 

동쪽으로는 평강현(平康縣) 경계까지 38리, 남쪽으로는 안협현(安峽縣) 경계까지 14리, 서쪽으로는 황해도

신계현(新溪縣) 경계까지 35리, 북쪽으로는 함경도 안변부(安邊府) 경계까지 1백 5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구려의 이진매현(伊珍買縣)이다.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토산군(兎山郡)의 영현

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에 동주(東州)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 본조에서는 태종 13년에 통례에

따라 현감이라고 일컫고, 경기로부터 떼어 와서 본도에 예속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명 이진매(伊珍買)ㆍ화산(花山)

 

성씨본현 사마(司馬)ㆍ이(李)ㆍ손(孫)ㆍ고(高)ㆍ주(朱)ㆍ방(芳)ㆍ박(朴)ㆍ변(邊)ㆍ성(成)ㆍ오(吳)ㆍ최(崔)ㆍ

이(李) : 평창ㆍ함안ㆍ합천. 고(高) : 해주. 임(林) : 울진. 엄(嚴) : 영월. 정(鄭) : 현풍. 한(韓)ㆍ김(金)ㆍ최(崔)ㆍ

박(朴) : 모두 들어왔다.

 

풍속 풍속이 귀신을 숭상한다 :《지지(地志)》

 

산천 성산(城山) : 현 북쪽 2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갈산(葛山) : 현 동북쪽 1백 29리에 있다.

옥곡산(玉谷山) : 현 동쪽 37리에 있다. 소이산(所伊山) : 현 남쪽 10리에 있다.

고성산(古城山) : 현 북쪽 9리에 있다.

광복산(廣福山) : 현 북쪽 60리에 있는데 산이 높고 험하다. 또 바위와 돌이 성(城)처럼 되어 있어서 둘레가 15

리나 되는데, 안에는 민가(民家)가 있다. 회며산(檜㫆山) : 현 북쪽 10리에 있다.

두니산(豆尼山) : 현 북쪽 31리에 있다. 개련산(開蓮山) : 현 북쪽 68리에 있다.

달마산(達摩山) : 현 동쪽 15리에 있다.

사동온천(寺洞溫泉) : 현 북쪽 99리에 있다. 정통(正統) 6년에 우리 세종이 행궁(行宮)을 지으라 명하고,

7년 봄에 임금이 거둥하였다. 그 뒤에 불에 타 버렸다.

 

구리항온천(仇里項溫泉) : 현 북쪽 80리에 있다.

고성진(古城津) : 고성산(古城山) 아래에 있으니, 곧 덕진(德津)의 하류이다. 또 서쪽으로 흘러가서 안협현

(安峽縣)의 제당연(祭堂淵)이 된다.

 

남천(南川) : 옥곡산(玉谷山)에서 나와 객관(客館)의 남쪽을 지나 또 동쪽으로 흘러 고성진(古城津)으로 들어

간다.

 

토산 칠ㆍ잣ㆍ오미자ㆍ인삼ㆍ복령ㆍ지황(地黃)ㆍ송이버섯ㆍ석이버섯ㆍ벌꿀ㆍ영양ㆍ백화사ㆍ지치ㆍ누치ㆍ

여항어ㆍ쏘가리.

 

누정 열운정(悅雲亭) : 객관 동쪽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의 기에, "정자가 어디 있는가, 이천(伊川)에 있다. 정자에 어떤 경치가 있는가, 흰 구름이

있다. 괴애자(乖涯子 괴애(乖崖)는 김수온의 호)가 이천현에 말을 멈춘 지가 15일이나 된다. 몹시 구름을 사랑

하게 되어 아침이면 새벽부터, 저녁에는 어두워질 때까지 항상 이 정자 위에 있었다.

구름이 비록 마음이 없으나 사람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과 같다. 밤이면 계곡과 골짜기 사이에 자욱하고, 동쪽이

밝기 시작하면 구름도 열려서 흩어진다. 서로 떨어지기도 하고 합하기도 하며, 혹은 동쪽으로 가기도 하고 혹은

서쪽으로 흐르기도 한다. 끌어서 길게 뻗치면 흰 비단 한 필을 산허리에 널어 놓은 것 같고, 쌓아서 높아지면

산꼭대기에 높은 갓을 씌워 놓은 듯하다. 조금 뒤에 해가 동쪽 봉우리에 올라오면 상서로운 빛이 그윽이 환히

밝았다가 컴컴하게 어두워지곤 한다. 잠깐 사이에 기상이 만 가지 천 가지로 변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자욱하여

잡아당길 수 있을 듯하지만 가까이 가면 아득하여 더듬어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을 산과 못의 호흡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사람의 호흡과 같은 것이다. 어찌 내뿜는 숨과 들이마시는 숨이

있겠는가. 이것을 귀신의 변화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사람의 운용(運用)과 같은 것이다. 어찌 형체나 그림자의

자취가 있을 수 있겠는가.

괴애자(乖崖子)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옛시에서 한 글자를 바꿔 고치기를, '정자 가운데 무엇이 있는가.

재 위에 흰 구름이 많다. 다만 스스로 즐겨할 뿐, 가져다 그대에게 줄 수는 없다네,' 하였다.

조금 뒤에 현감 이군(李君)에게 말하여 열운(悅雲 구름을 즐김) 두 글자를 정자의 편액(扁額)으로 삼았다.

고을이 높은 산과 큰 물 사이에 있으니, 구름이 이 정자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진실로 그러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갠 날에도 그렇고, 비가 와도 그렇다. 아침에는 가로지르고 저녁에는 자욱이 덮여서 하루도 구름이 없

을 때가 없다. 산에 모두 구름이 있다면 온 고을에 다 구름인 것이다. 윈로들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정자의

남쪽 산에, 예전에 용(龍)이 잠겨 있던 못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지금 그 못은 나무꾼과 목동의 길

이 되어 평탄하니, 용(龍)의 구름은 아닌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관사(官舍) 북쪽에 높은 봉우리가

특별히 빼어났으니, 즉 현(縣)에서 바라다보이는 산이다.' 하는데, '산이 신령하기 때문에 항상 구름을 머금

는다고 하면 산의 사방에 반드시 다 구름이 있어야 할 것인데, 유독 정자에만 항상 일어나는 것은 무슨 까닭

인가.' 이 말도 맞지 않는 것이다.

뜬구름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큰 산의 구름은 돌에 부딪쳐 생기고, 한두 치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 일어남은 어디로부터 오는 곳이 없고, 그 흩어짐도 돌아가는 데가 없고, 큰 허공 중에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것이다. 어찌 그 일어남과 흩어짐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곁에서 동자가 묻기를, '구름은 과연

생기는 곳이 없습니까?'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생기는 곳에서 생긴다.' 하니,

동자가 말하기를, '무슨 말씀입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즉 정이천(程伊川)이 말한 바와 같이, 일어나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정자(亭子)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였다. 인하여 써서 열운정(悅雲亭)의 기(記)로

한다." 하였다.

 

학교 향교 : 현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건천역(乾川驛) : 현 남쪽 4리에 있다. 광덕원(廣德院) : 현 북쪽 50리에 있다.

불우 갈산사(葛山寺) : 갈산(葛山)에 있다. 소림사(小林寺)ㆍ양음사(陽陰寺) : 모두 달마산(達摩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성산(城山)에 있다.

여단(厲壇) : 현 북쪽에 있다.

덕진사(德津祠) : 현 북쪽 30리에 있다. 매년 봄가을에 본현에서 제사를 지낸다.

○ 김수온의 시에, "이천(伊川)의 물은 일만 구렁을 씻고, 두 강물이 와서 합류하는 곳! 산은 높고 가파르다.

사람들 말에 그 밑에는 용(龍)의 집이 있는데, 그윽하고 고요한 용궁!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네. 뗏목 탄 사람이

덩굴을 이어서 엿보아 살피고자 하나, 다만 기와집 같은 큰 돌이 보일 뿐이라네. 출렁출렁이는 맑은 물결로

덮였으니, 그 아래에 큰 성곽(城郭)이 있는지 어찌 알겠는가? 유리로 궁궐을 만들고 수정으로 전각을 세워

산호(珊瑚)나무 높은 데 별원(別院)을 열어 빙이(馮夷 수신(水神)의 이름)와 하백(河伯 수신(水神)의 이름)이

다투어 와서 조회하여, 용왕(龍王)의 화려한 곤룡포에는 환패(環佩)가 흔들리리. 구름으로 붉은 깃발을 삼고

비로 깃대를 삼으니 잠깐 사이에 단비의 혜택이 대지(大地)에 골고루 내리네. 국가의 제전(祭典)을 삼가 봄

가을에 제사하노니, 희생과 폐백은 향기롭고 깨끗하며 여러 가지 제물도 곁들였네. 바람과 흙비가 거세게

일어나는 곳에 용이 와서 흠향하리로다.

사당이 웅장하게 강가에 서 있네. 우리 임금 천년 수하시고 자손들은 억만년을 이으면서,

비와 볕은 떄에 알맞고 백곡은 풍년이 들기를." 하였다.

 

고적 동성(東城) : 현 동쪽 21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는 8백 17척이고, 높이는 9척이다.

주음동방장(周音洞防墻) : 현 북쪽 1백 10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안변(安邊)의 영풍현(永豐縣)과 통하고,

서쪽으로는 큰 내에 닿았다. 동쪽으로는 큰 산을 진압하고 있어서, 한 장부가 관문을 지키고 있으면 일만 명의

군사도 방어할 수 있다. 옛사람이 담을 쌓아서 오랑캐의 침입을 막았다 한다. 유적(遺跡)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성산고성(城山古城) : 돌로 쌓았다. 둘레가 7백 40척이고, 높이가 11척이다.

고성산고성(古城山古城) : 돌로 쌓았다. 둘레가 3백 60척, 높이가 5척이다.

 

열녀고려 손씨(孫氏) : 한림 승지(翰林承旨) 기전룡(奇田龍)의 아내이다. 나이 21세 때에 전룡(田龍)이 중국에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으나, 손씨는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데에만 오직 부지런히 할 뿐, 마음을 달리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그의 절의를 아름답게 여겨 비(碑)를 세워 정려하였다.

 

제영 땅이 메말라서 흉년이 들기 쉽다 : 김수온의 시에, "냇물이 깊으니 비에 창일(漲溢)하는 일이 잦고, 땅이

메마르니 흉년이 들기 쉽다." 하였다.

 

벼랑이 기울어서 나는 듯한 샘물이 하늘 한복판에 달렸다 : 이색의 이천가(伊川歌)에, "전객낭군(典客郞君)이

산으로 향한 뒤에, 초가와 돌밭이 몇 이랑이던가. 벼랑이 기울어서 나는 듯한 샘물이 하늘 한복판에 달렸고,

길이 아스라한 산꼭대기로 들어가니 북두칠성을 만지겠네. 석벽에는 구름이 이끼를 덮었고, 우물에는 달이

배만한 연밥을 비추네. 오가는 곳곳에서 중을 만나고, 때때로 시골 늙은이를 만나 담소한다. 백성들은 순박하여

닭과 기장밥을 제공하고, 현령은 한적하여 술과 쇠고기를 갖추었네. 비록 풍속은 촌스럽지만, 다행히 민심은

오히려 순박하다. 내 이제 병들어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노니, 취하여 노래부를 떄마다 애오라지 장구를 친다.

문앞에 누가 다시 생꼴[生蒭]주D-001을 가져 오겠는가. 붓 아래에 스스로 해구(薤臼) 없음을 안다. 눈앞에

어른어른하는 것은 우물에 떨어지는 하비서(賀秘書)주D-02요, 이가 흔들려 자꾸 빠지는 한이부(韓吏部)주D-03

로다. 주자(周子)와 정자(程子)를 좇아 참된 근원을 찾으려 하나, 곧 건곤이 풍부(豐部)와 같음을 두려워한다.

다만 남은 생애를 다시 정리하여, 도덕과 문장이 길이 남도록 힘쓰리라."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文獻備考》

광해주가 무신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 선조 임진년 5월에 세자로써 묘사에 봉하고 이천(伊川)에 머물렀었다.

인조 원년에 현으로 강등되었고 숙종 13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동읍면(東邑面) : 처음은 1리, 끝은 37리. 와방(瓦方) : 동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7리.

청포(廳浦) : 동북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70리. 판교(板橋) : 북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70리,

방장(防墻) : 동북으로 처음은 70리, 끝은 1백 10리. 고미탄(古未呑) : 동북으로 처음은 1백 20리, 끝은 2백 리다.

이상 두 면은 평강(平康)과 안변(安邊)의 경계로 뻗었다. 산내(山內) : 북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50리.

 

산외(山外) : 북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70리. 천하(遷下) : 서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

초위(草位) : 서남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40리. 하읍(下邑) : 남으로 처음은 1리, 끝은 10리.

창고 전창(前倉) : 동으로 20리. 북창(北倉) : 북으로 70리. 강창(江倉) :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진도 고성진(古城津) : 고성산(古城山) 아래 있다.

○ 또 사진(私津) 두 곳이 있다.

 

[주 D-001] 생꼴[生蒭] :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생추(生芻) 한 묶음이여, 그 사람 옥과 같다.[生芻一朿

其人如玉]"라는 시구(詩句)가 있다. 동한(東漢) 때에 곽임종(郭林宗)이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는데,

서치(徐穉)가 조문하러 가서 생꼴 한 묶음을 그의 여막 앞에 놓고 왔다는 고사가 있다.

[주 D-02] 하비서(賀秘書) : 하지장(賀知章)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장은 당(唐) 나라 산음(山陰) 사람으로,

자(字)는 계진(季眞)이다. 문사(文辭)에 능하고 초서(草書)·예서(隷書)를 잘 썼다. 비서감(秘書監) 벼슬을 하였

으므로 하비서라고 일컫는다. 만년에 호(號)를 사명광객(四明狂客)이라 하고, 도사(道士)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주 D-03] 한이부(韓吏部) : 당 나라 때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 즉 한퇴지(韓退之)이다. 벼슬이 이부시랑

(吏部侍郞)에 이르렀으므로 한 이부(韓吏部)라고 일컬은 것이다.

 

 

평강현(平康縣)

 

동쪽으로는 금화현(金化縣) 경계까지 24리, 회양부(淮陽府) 경계까지 27리, 남쪽으로는 철원부(鐵原付) 경계

까지 15리, 서쪽으로는 이천현(伊川縣) 경계까지 60리, 안협현(安峽縣) 경계까지 63리,

북쪽으로는 함경도 안변부(安邊付) 경계까지 81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2백 6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구려의 부양현(斧壤縣)이다 : 오사내(於斯內)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광평(廣平)으로

고치고 부평군(富平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 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동주(東州)에 예속시켰

다가, 명종(明宗) 2년에 감무를 두었으며, 뒤에 금화 감무(金化監務)로 겸임하게 하였다.

공양왕(恭讓王) 원년에는 도로 분할하였다. 본조에서는 태종 13년에 통례에 따라 현감이라고 일컬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1명.

군명 평강(平江)ㆍ오사내(於斯內)ㆍ광평(廣平)ㆍ부양(斧壤).

 

성씨본현(本縣) 허(許)ㆍ채(蔡)ㆍ전(全)ㆍ송(宋)ㆍ박(朴)ㆍ과(瓜)ㆍ정(鄭)ㆍ석(石). 사정(史丁) 이(李)ㆍ송(宋)ㆍ

최(崔)ㆍ박(朴)ㆍ전(全) : 신촌(新村)도 같다.

 

풍속 풍속이 귀신을 숭상한다 : 《지지(地志)》에 나온다.

 

산천 중봉산(重峯山) : 현 남쪽 25리에 있다. 장고산(長鼓山) : 현 북쪽 14리에 있다.

미륵산(彌勒山) : 현 동쪽 15리에 있다. 죽림산(竹林山) : 현 북쪽 39리에 있다.

희령산(戲靈山) : 현 북쪽 88리에 있다. 청룡산(靑龍山) : 현 북쪽 59리에 있다.

신성산(新城山) : 현 북쪽 13리에 있다. 율지산(栗枝山) : 현 서쪽 25리에 있다.

설탄령(雪呑嶺) : 현 북쪽 90리에 있다. 안변(安邊)으로 향하는 작은 길이 있다. 산세가 험하고 막혀서 옛사람

들이 담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다고 한다. 남은 터가 아직 있는데 세상에서는 방장(防墻)이라고 부른다.

 

분수령(分水嶺) : 현 북쪽 49리에 있다. 백두산(白頭山) 산맥이 여기에 이르러 동서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 고려 김구(金坵)의 시에, "두견새 소리 속에 보이는 것은 청산(靑山)뿐이로구나, 온종일 푸르고 빽빽한 산

속을 뚫고 간다. 한 시내를 몇 굽이나 건넜던고. 잔잔한 물소리를 보내고 나면 또 졸졸졸 들려 오네." 하였다.

 

재송평(裁松坪) : 현 남쭉 15리에 있다. 적암천(狄巖川) : 현 서쪽 34리에 있다.

유진수(楡津水) : 현 북쪽 80리에 있다. 원류(源流)가 설탄령(雪呑嶺)에서 나와 이천현(伊川縣)의 못으로 들어

간다.

 

토산 칠ㆍ잣ㆍ오미자ㆍ인삼ㆍ복령ㆍ석이버섯ㆍ벌꿀ㆍ영양ㆍ백화사ㆍ누치ㆍ여항어.

 

봉수 송현봉수(松峴烽燧) : 현 동쪽 9리에 있다. 남으로 토빙산(吐氷山)의 봉수에 응하고, 북으로 회양부(淮陽府)

의 쌍령(雙嶺)에 응한다.

토빙산봉수(吐氷山烽燧) : 현 남쪽 15리에 있다. 서쪽으로 철원부(鐵原府)의 소이산(所伊山)에 응하고, 북으로

송현(松峴)에 응한다.

진촌산봉수(珍村山烽燧) : 현 남쪽 59리에 있다. 동으로 금화현(金化縣)의 소이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철원부의

소이산에 응한다.

 

역원 단림역(丹林驛) : 현 북쪽 15리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가을 소리 시원하고 상쾌하여 고향 생각 일어나, 말머리에서 먼 나그네 쓸쓸히 시를 읊는다.

한바탕 저녁바람이 부는 시냇가의 길에는 누런 잎 나부끼며 성긴 숲에서 춤을 추네." 하였다.

○ "구렁을 지나고 다시 급류(急流)를 지나노라니, 가을해가 나무 끝으로 올라오네. 갈대꽃은 바람이 흰 것을

희롱하고, 단풍나무 잎에는 이슬이 붉게 어리었네. 고을에는 도적 잡으려는 부고(桴鼓)주D-001를 울리는 일이

적고, 들에는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사람 많네. 저 멀리 외로운 새가 날고 있는 저편을 바라보니

천리 고향길 멀기도 하구나." 하였다. 옥동역(玉洞驛) : 현 서쪽 40리에 있다.

신증 석교원(石橋院) : 현 북쪽 5리에 있다.

불우 유적사(幽寂寺) : 중봉산(重峯山)에 있다. 원적사(圓寂寺) : 만운산(萬雲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북쪽 2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게현(憩峴) : 현 서쪽에 있다. 궁예가 사냥을 하다가 일찍이 여기에서 쉬었기 때문에 게현(憩峴)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갑천(甲川) : 현 서쪽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궁예가 변란을 듣고 도망하여 이 냇가에 와서

갑옷을 버리고 달아났기 때문에 갑천(甲川)이라고이름하였다 한다. 궁예가 여기에서 바위골짜기로 도망하여

이틀 동안을 지냈는데, 굶주림이 심하여 보리이삭을 손으로 비벼서 먹다가 부양(斧壤) 백성들에게 살해 되었

다고 한다. 신촌소(新村所) : 현 북쪽에 59리에 있다. 사정소(史丁所) : 현 북쪽 60리에 있다.

 

묵곡소(墨谷所) : 현 동북쪽 30리에 있다. 유림소(楡林所) : 현 북쪽 90리에 있다.

청룡산성(靑龍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4백 60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성황당산성(城隍堂山城) : 현 북쪽 1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백 22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인물고려 채송년(蔡松年) : 고종(高宗) 때 사람이다.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평(景平)이다. 자태가 단아하고 수려하며 성품이 화평하여 능히 처음부터 끝까지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

채정(蔡楨) : 송년의 아들이다. 지조가 곧고 발랐다. 원종(元宗)이 몽고로 갔을 때에 호종(扈從)하여 도와줌이

많았다.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원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채홍철(蔡洪哲) :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급제하였다.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로부터 여덟 번 옮겨 정승이 되니,

사림(士林)에서 영광으로 여겼다. 뒤에 순천군(順天君)으로 봉하였다. 사람됨이 정교하여 문장과 기예(技藝)에

그 능력을 다하였다. 스스로 중암거사(中菴居士)라고 하였다. 그가 저술한 《자하동곡(紫霞洞曲)》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채한로(蔡漢老) : 공민왕 때에 정승이 되었다.

 

신증본조 채침(蔡忱) : 두 번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제영 구름과 비는 강성(江城)을 닫았다 : 강회백의 시에, "별과 서리에 세월의 덧없음에 놀라고, 구름과 비는

강성(江城)을 닫았다." 하였다. "늦은 가을 평강(平康)의 밤에 : 최수(崔脩)의 시에, "늦은 가을 평강의 밤에,

무단히 일백 가지 느낌이 생긴다. 그늘진 곳의 귀뚜라미는 차가운 섬돌에서 울고, 바람 앞의 나뭇잎은 차가운

성(城)에서 떤다." 하였다.

 

쑥을 엮고 나뭇가지로 얽은 문에 잔약한 민호(民戶)가 남았고 : 김예몽(金禮蒙)의 시에, "말을 급히 달려 황야를

지나는데, 숲 사이에서 흰 연기가 난다. 쑥을 엮고 나뭇가지로 얽은 문에 잔약한 민호가 남았고, 띠와 납가새풀

사이에 작은 성이 있구나." 하였다.

 

신증 흑원(黑原)이 고을 땅과 잇닿아서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역력히 끼친 자취를 더듬노라니, 유유한 세상

살이 고단하구나. 흑원이 이 고을과 잇닿아서, 궁예의 왕성이 있네. 금수(錦獸)가 문수(文藪)에서 놀더니,

동타(銅駝)주D-002가 진(晉) 나라의 가시덤불 속에 섰다네. 흥망에 느껴 슬퍼하는 뜻은 옛일을 우러러보고 굽어

보는 고금(古今)의 정이라네." 하였다. 구름은 궁예의 성에 낮게 드리웠네 : 성현(成俔)의 시에, "뭇산이 갑자기

가로 끊어진 곳, 광막한 들에 쓸쓸한 바람이 이네. 눈은 동주(東州)의 길에 가득하고, 구름은 궁예의 성에 낮게

드리웠네. 갑계(甲溪)에는 고라니와 사슴이 물을 마시고, 게령(憩嶺)에는 잡목으로 황폐해졌구나.

옛일을 생각하는 마음 끝이 없어라. 감개한 회포에 남은 정(情)이 많구나." 하였다.

 

산이 위태하게 물가에서 끊어지고 : 성현의 시에 "골짜기가 둘러서 굽었는데, 초가집들이 냇가 언덕을 끼고 있네.

산은 위태하게 물가에서 끊어지고, 바위는 험준하여 솔[松]을 안고 높았네. 어느덧 석양은 저무는데, 어렵고

험한 갈 길은 멀어라. 매양 임금의 명을 받은 일에 바빠서 일신의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네." 하였다.

 

구불구불 푸른 물이 돌고 : 민수천(閔壽千)의 시에, "구불구불 푸른 물을 돌아, 높고 가파르게 황고(黃皐)를 띠었네.

긴 여로에 몸의 고달픔을 알고, 기이한 경치를 유람하니 눈이 높아짐을 깨닫겠네. 아침에 해를 맞이하니 맑은 빛이

가깝고, 우러러 바라보니 상서로운 구름이 멀구나. 힘써 임금의 은혜 갚고자 하노니, 나의 인생 또한 너무 수고

롭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文獻備考》

방편 현내면(縣內面) : 처음은 10리, 끝은 40리. 남면(南面) : 동남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40리,

초서(初西) : 서남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 목전(木田) : 북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70리.

고삽(高揷) : 북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1백 50리. 유진(楡津) : 동북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1백 80리.

수일(水日) : 서북으로 처음이다. 서면(西面) : 처음 신촌소(新村所)는 북으로 59리,

유림소(楡林所)는 북으로 90리, 사정소(史丁所)는 북으로 60리, 묵곡소(墨谷所)는 동북으로 30리다.

 

성지 청룡산고성(靑龍山古城) : 둘레가 1천 4백 60척, 우물이 하나. 고성(古城) : 북으로 1리에 성황당(城隍堂)이

있는데, 둘레가 9백 12척이었고 우물이 하나다.

 

유진고성(楡津古城) : 북으로 60리인데, 둘레가 1천 3백 30척이고 우물이 하나다.

신성(新城) : 북으로 15리인데 둘레는 1천 5백 20척이었다.

고성(姑城) : 서쪽으로 25리인데 둘레는 1천 1백 20척이며 우물이 하나

삼방(三防) : 분수령(分水嶺)에 있는데 동북으로 안변(安邊)으로부터 서울로 다다르는 첩로(捷路)였기 때문에

세 곳 모두 방(防)을 세워 준비하였다. 산은 완만하고 물이 깊어 영세(嶺勢)가 깍아 세운 듯하며 언덕을 통해

겨우 통할 수 있다. 철령(鐵嶺)보다 더욱 긴요하여 누(壘)를 여러 곳 세우고 관(關)을 세워 지키니,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라도 그 세력을 뚫지 못한다.

 

창고 북창(北倉) : 북으로 1백 리다. 서창(西倉) : 서쪽으로 45리다. 사창(社倉) : 서북으로 55리다.

조술창(助述倉) : 동북으로 1백 리인 유진면(楡津面)에 있다.

진도 장림진(長林津) : 북으로 60리인데 바로 유진(楡津)으로,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주 D-001] 부고(桴鼓) : 전쟁 때 또는 도적을 잡거나 쫓을 때에 북을 쳐서 신호하는 것을 말한다.

[주 D-002] 동타(銅駝) : 구리로 만든 낙타로, 진(晉) 나라 색정(索靖)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낙양궁문(洛陽宮門)에 있는 동타(銅駝)를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마침내 네가 형극(刑棘) 속에 있는 것을 보게

되겠구나.” 하였다 한다.

 

 

금화현 (金化縣)

 

동쪽으로는 금성현(金城縣) 경계까지 36리, 남쪽으로는 낭천현(狼川縣) 경계까지 31리, 서쪽으로는

철원부(鐵原府) 경계까지 30리, 북쪽으로는 평강현(平康縣) 경계까지 26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구려 부여군(夫如郡)이다. 신라 때에 부평군(富平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현종 9년에는 지금

의 이름으로 고치고 동주(東州)의 속현으로 하였으며 인종(仁宗) 21년에는 감무를 두었다. 본조에서는

태종 13년에 통례에 따라 현감이라고 일컬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명 부여(夫如)ㆍ부평(富平)ㆍ화산(花山).

 

성씨본현 이(李)ㆍ백(白)ㆍ성(成)ㆍ정(鄭)ㆍ한(韓)ㆍ송(宋)ㆍ양(楊)ㆍ양(陽)ㆍ경(京)ㆍ박(朴)ㆍ진(陳)ㆍ시(柴)ㆍ

양(梁)ㆍ오(吳)ㆍ안(安)ㆍ노(盧).

 

형승 산협(山峽)이 큰 강을 얽었다 : 강회백의 시에, "산협이 큰 강을 얽어서 험하고 막힌 곳을 이루었고,

백성은 메마른 땅에 의지하여 어려움을 참는다." 하였다.

 

산천 오신산(五申山) : 현 북쪽 13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장지산(將之山) : 현 서쪽 27리에 있다.

삼신산(三申山) : 현 서쪽 10리에 있다. 등산(燈山) : 현 북쪽 21리에 있다. 아오현(阿吾峴) : 현 북쪽 4리에 있다.

만심산(萬深山) : 현 동쪽 3리에 있다. 불정산(佛頂山) : 현 동쪽 31리에 있다.

충현산(忠峴山) : 현 동쪽 36리에 있다. 여파산(餘波山) : 현 북쪽 44리에 있다.

수우산(水于山) : 현 북쪽 37리에 있다. 말흘천평(末訖川坪) : 현 북쪽 25리에 있다.

 

마현(馬峴) : 현 동쪽 29리에 있다. 대성산(大聖山) : 현 남쪽 24리에 있다.

단암(丹巖) : 낭천(狼川)과 금성(金城)의 경계에 있으니, 현과의 거리는 13리이다. 길가에 봉우리가 있는데,

절벽을 이루어 그 높이가 천길이나 되어서 새도 날아 오를 수 없다. 돌빛이 조금 붉기 때문에 단암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남대천(南大川) : 현 남쪽 5리에 있다. 방동천(方洞川) : 현 동쪽 26리에 있는데, 남대천과 합류한다.

 

토산 석철(石鐵) : 방동천(方洞川)에서 난다. 칠(漆)ㆍ잣ㆍ오미자ㆍ인삼ㆍ복령ㆍ안식향(安息香)ㆍ영양ㆍ백화사ㆍ

쏘가리ㆍ여항어ㆍ벌꿀ㆍ석이버섯. 신증 녹반(綠礬) : 현 북쪽에서 난다.

 

봉수 소이산봉수(所伊山烽燧) : 현 북쪽 10리에 있다. 동쪽으로 금성현(金城縣) 아현(阿峴)에 응하고, 서쪽으로

평강현(平康縣) 진촌산(珍村山)에 응한다.

 

궁실 객관 : 이석형(李石亨)의 기에, 금화(金化)가 현으로 된 것은 고구려 부여군(夫如郡)이 될 때부터이다.

뒤에 신라에 예속되어서는 부평(富平)이라고 이름하였고, 고려 현종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금화라고 일컬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니, 현의 유래가 오래되었다. 옛 객관은 어느 시대에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으며, 또 땅도 누추하고 좁아서 수령들이 번번이 새것을 짓고 옛것을 버리고자 하였으나 힘이

모자랐다. 갑자년에 황영(黃永)이 이 고을 수령으로 와서 정사가 잘 다스려지고 폐해는 제거되어 치화(治化)가

크게 이루어졌다. 곧 원로들과 여러 아전들을 모아 놓고 의논하기를, '그대들의 고을은 영동(嶺東)과 영북(嶺北)

으로 가는 자들이 모두 여기를 경유하므로 손님과 나그네가 매우 많은데도, 공관(公館)은 누추하고 좁으니,

실로 그대들의 수치이다. 내가 새로 짓고자 하나 백성의 힘을 번거롭게 할까 두렵다. 만일 능히 나의 뜻을 본받

아 자기의 힘을 내어서 성취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영원히 그 자손의 요역(徭役)을 면해 주겠다.' 하였다.

전 현령(縣令) 장렴(張廉)이라는 이가 기뻐하며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이 고을에 살고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 강릉 부사(江陵府使) 사준(思俊)은 일찍이 노비를 관에 바쳐 지금까지 국가에 사역을 시켰고,

나의 아버지도 국가를 위한 마음이 지극하였습니다. 내 밤낮으로 선인의 뜻을 잇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하물며 사또의 명이 계시니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고 곧 스스로 나무를 베고, 기와를 굽고, 장인들을 모

아서 일을 돕게 하였다. 옛 객관 북쪽에 터를 정하고, 무진년 7월부터 시작하여 금년 10월에 마쳤다. 그 지세는

양지쪽으로 향하였으며, 그 제도는 알맞게 되어 대청마루와 행랑채가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다.

단청(丹靑)의 장식이 이미 끝나매, 화려하나 사치하지는 않았으며, 검소하나 누추함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매우

찬미할 만하다. 옛날 백성을 잘 부리는 자는 그 부리기 쉬움을 말하여, '자식처럼 온다' 하였으며,

그 공사를 쉽게 이룸을 말하여, '하루도 못되어 이루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관청에서 그 백성을 부렸

으나, 백성들이 도리어 즐겨서 그 일을 이룬 것을 말한 것이다. 지금 황후(黃侯)는 백성의 힘을 쓰지 않고,

백성이 스스로 그 힘을 다하게 하여 관청에서는 일의 성취됨을 얻고, 백성들도 그 이로움을 얻었으니 더욱 칭찬

할 만한 것이다. 아, 고구려로부터 지금까지 그 고을에 수령된 자가 얼마나 많았으련만, 황후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고, 이 고을에 백성된 자가 얼마나 많으련만, 장군(張君)의 힘으로 성취하였으니, 아마도 물건의 흥폐(興廢)

가 절로 그 운수(運數)가 있고, 사람이 뜻이 서로 맞는 자와 만나는 것도 절로 시기가 있는 것인가.

내가 무진년 겨울에 휴가를 청하여 학성(鶴城)으로 돌아가다가 이곳에 와서 일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제 황후(黃侯)가 또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記)를 요구하였다.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몇 마디 그

대강을 기록한다." 하였다.

 

학교 향교 : 현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생창역(生昌驛) : 현 남쪽 4리에 있다. 신증 보덕원(寶德院) : 현 남쪽 6리에 있다.

불우 보현사(普賢寺) : 대성산(大聖山)에 있다. 수태사(水泰寺) : 오신산(五申山)에 있다.

삼신사(三申寺) : 삼신산(三申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산성(山城) 안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성산성(城山城) : 현 북쪽 4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4백 89척, 높이가 4척이다.

신화역(新化驛) : 옛터가 현 남쪽 25리에 있다. 탄항소(炭項所) : 현 동쪽 20리에 있다.

마현소(馬峴所) : 마현(馬峴) 아래에 있다.

 

제영 옛고을이 깊은 골짜기에 의지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옛고을이 깊은 골짜기에 의지 하였는데,

관아(官衙)가 한가로우니 해가 길다. 산매미는 적막하게 울고, 들제비는 너울너울 춤추네. 난간 기까이에는

붉은 과일이 드리워졌고, 대청에는 푸른 사초가 자라네. 담 사이로 어렴풋이 보일락말락 하는 연기 이는 곳이

인가(人家)로다." 하였다.

"산이 옛고을을 애워싸서 가을 기운을 보태고 : 이곡(李穀)의 시에, "산이 옛고을을 애워싸서 가을 기운을 보태고,

바람은 성긴 숲을 두드려 빗소리를 돕는구나. 밤중에 꿈에서 깨어 그대로 잠들지 못하며 노정을 계산해 보니

이제 겨우 철원(鐵原)을 지났구나." 하였다.

 

뽕나무ㆍ산뽕나무 쓸쓸히 있는 사이에 몇 집이 있는고 : 성석인(成石因)의 시에, "산천(山川)이 막혀서 평탄한

땅이 없구나. 뽕나무ㆍ산뽕나무 쓸쓸히 있는 사이에 몇 집이 있는고.

태수(太守)는 스스로 수령된 기쁨을 말하기를, 아전과 백성은 비록 적지만 오는 손은 많다하는구나." 하였다.

 

달 밝은 한밤중에 학(鶴) 소리 들리네 : 우승범(禹承範)의 시에, "잎이 떨어진 작은 뜰에 사람의 발자취 없고,

달 밝은 한밤중에 학 소리 들리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文獻備考》

방면 현내면(縣內面) :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초동(初東) : 동남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이동(二東) : 동북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5리. 남면(南面) : 처음은 10리, 끝은 40리.

서면(西面) : 처음은 10리, 끝은 35리. 초북(初北) : 처음은 10리, 끝은 35리.

원북(遠北) : 서북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5리. 탄항소(炭項所)는 동으로 20리이고,

마현소(馬峴所)는 마현(馬峴)의 아래다.

성지 고성(古城) : 북으로 4리인데 성산(城山)이라고 칭하며 둘레는 1천 4백 89척이다.

역참 단암역(丹嵒驛) : 단암(丹嵒)의 옆에 있다. 신화역(新化驛) : 옛 이름은 남역(南驛)인데 남으로 25리이다.

 

안협현(安峽縣)

 

동쪽으로는 평강현(平康縣) 경계까지 34리, 남쪽으로는 경기 삭녕군(朔寧郡) 경계까지 15리, 서쪽으로는

황해도 토산현(兎山縣) 경계까지 14리, 북쪽으로는 이천현(伊川縣) 경계까지 45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2백

6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구려 아진압현(阿珍押縣)이다 : 궁악(窮岳)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토산군(兎山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에서는 현종 9년에 동주(東州)에 예속시켰으며, 예종 9년에는 감무를 두었다. 본조에서는 태종 14년에 경기

삭녕군(朔寧郡)과 합하여 안삭군(安朔郡)으로 부르더니, 16년에 도로 분할하여 현감으로 하였다.

세종 16년에는 본조에 예속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

군명 아진압(阿珍押)ㆍ궁악(窮岳)ㆍ안삭(安朔).

 

성씨본현 허(許)ㆍ손(孫)ㆍ윤(尹)ㆍ방(芳)ㆍ경(耿)ㆍ오(吳) : 신주(信州). 유(劉) : 공주(公州). 배(裵)ㆍ유(柳)ㆍ

서(徐) : 모두 들어왔다.

 

풍속 거리와 시전(市井)이 서로 보호한다. : 이양(李揚)의 시에, "가지런하지 않은 거리와 시정은 항상 서로 보호

하니, 묻노니 주씨(朱氏)ㆍ진씨(陳氏)의 몇 대 손들인가." 하였다.

갈천씨(葛天氏) 때의 백성의 풍속이다 : 허성(許誠)의 시에, "갈천씨 때의 민속이 홀로 남아 있어서, 밭갈아 밥먹

고 우물파서 물마시는 살림살이를 능히 아들ㆍ손자에게 전해가네." 하였다.

 

산천 만경산(萬景山) : 현 북쪽 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팔봉산(八峯山) : 현 북쪽 16리에 있다.

고암산(古巖山) : 현 동쪽 20리에 있다. 교곡산(橋谷山) : 현 북쪽 39리에 있다.

유달령(鍮達嶺) : 현 북쪽 20리에 있으니, 즉 팔봉산의 서쪽 재이다.

등갈동(藤葛洞) : 현 북쪽 15리에 있다. 저구리탄(猪仇里灘) : 현 서쪽 12리에 있다.

 

평강현(平康縣) 분수령(分水嶺)에서 나와 또 서쪽으로 흘러서 포리진(浦里津)으로 들어간다.

제당연(祭堂淵) : 현 서쪽 12리에 있다. 함경도 안변부(安邊府) 영풍현(永豐縣) 노이현(老伊峴)에서 나오니,

즉 임진(臨津)의 원류(源流)이다. 바위 위에 제당(祭堂)의 남은 터가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때에 몽고

군사가 침입하여 여기에 이르러서 바라보니, 기병(騎兵) 만여 명이 벌여 있어 감히 진격하지 못하였다.

이 일로 사당(祠堂)을 짓고 제사하였다."고 한다. 날이 가물 때 여기에서 비를 빌면 감응(感應)이 있다고 한다.

 

포리진(浦里津) : 현 서쪽 9리에 있으니, 즉 제당연(祭堂淵)의 하류이다. 또 남쪽으로 흘러서 황해도 토산현

(兎山縣)으로 들어가서 동대천(東大川)이 된다.

 

토산 청서(靑石) : 저구리탄의 석벽에서 난다. 옥등석(玉燈石) : 등갈동에서 난다.

석철(石鐵) : 현 동쪽 노은동(奴隱洞)에서 난다. 질이 강해서 부러지기 쉽다. 칠ㆍ잣ㆍ오미자ㆍ인삼ㆍ복령ㆍ

석이버섯ㆍ벌꿀ㆍ영양ㆍ백화사ㆍ누치ㆍ여항어.

 

학교 향교 : 현 서쪽 1리에 있다.

불우 암천사(岩泉寺) : 만경산(萬景山) 서쪽에 있다. 산꼭대기 바위 사이에 샘이 솟아 나와,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암천사(岩泉寺)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심곡사(深谷寺) : 만경산 동쪽에 있다.

수도사(修道寺) : 팔봉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남쪽 2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만경산성(萬景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4백 34척, 높이가 8척이다. 지금은 반이 퇴락하였다.

남산성(南山城) : 현 남쪽 5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9백 65척이다. 안에 한 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인물고려 손관(孫冠) : 문종 때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우복야 참지정사(右僕射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맑고 순수하며 질박하고 고아하였으며,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다.

 

제영 산 옆과 물가에 두어 집의 마을이 있다 : 허조(許操)의 시에, "산 옆과 물가에 두어 집의 마을이 있는데,

서로 볼 때 의관(衣冠)에 옛 예절이 있다. 일년 내내 힘써 농사지어도 어버이 섬기고 처자 기르기 어려우니,

무슨 방법으로 어린 손자 기를지 모르겠네." 하였다.

 

달 밝은 금각(琴閣)에서 거문고를 어루만진다 : 배환(裵桓)의 시에, "송사(訟事) 받는 뜰에 사람이 고요하니 할

일이 없어, 달 밝은 금각(琴閣)에서 거문고를 어루만지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文獻備考》

방면 현내면(縣內面) : 끝이 10리. 동면(東面) : 동북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5리.

서면(西面) : 서북으로 처음은 12리, 끝은 40리. 수회(水回) : 동으로 끝이 20리인데 상ㆍ하 수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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