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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료

치우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4.02.17|조회수179 목록 댓글 0

'치우'에 대한 이상한 기록들

사마천은 사기 오제본기에서 황제 헌원이 지남거를 이용, 치우를 탁록전투에서 사로잡아 죽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후대 중화사학은 황제 헌원의 승리를 통해 화하족이 비로서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고 기술합니다.

하지만 중국의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치우에 관해 이상한 기록들을 발견할 수있습니다.

먼저 치우에 관해 등장하는 가장 초기 기록은 산해경 '대황북경'편입니다.

'신의 기원'의 저자 '하신'의 인용을 재인용합니다.

" 대황에 계곤산이 있는데 그곳에 '황제여발'(黃帝女魃)이라는 자가 있었다.
치우가 갖가지 병기로 황제여발을 공격하니 황제는 응룡(鷹龍:날개 달린 용)을  보내 '기주'(冀州)의 들에서

치우를 막게 하였다. .....  
  
치우가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에게 청해서 폭풍우를 일으키게 하니 황제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황제가 발(魃:가물귀신)을 보내 폭풍우를 잠재우고 치우를 죽였다.

그러나 '발'또한 신력을 다함으로 승천하지 못하고 발이 머무는 곳에는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이 들었다. "

[신의 기원 -하신/ '90, 동문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산해경은 중국의 고대 지리인문서입니다.

그 제작의 시기는 夏나라로 추정되고 가장 이른 기록은 주(周)대로 올라가며 특히 사마천의 사기가 '산해경'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대에 이미 산해경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사마천이 지은 '사기' 이전에 '산해경'이 존재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자 그러면 치우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이 이야기를 보면 어떻습니까?

우선 산해경 저자의 태도를 봅시다. 황제와 치우의 싸움은 다분히 신화적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산해경의 저자는 황제를 '여발'(女魃)이라고 합니다. 여발의 뜻은 '가뭄이 들게 하는 여신'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한발이 심하다 할 때 그 '발'입니다.

우리 옥편에는 이 발(魃)을 '가물귀신'이라고 훈을 새깁니다.
산해경이 처음부터 이런 흉악한 이름을 황제에게 갖다 붙히는 것이 어째 예사롭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헌원이니 염제니 하는 말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산해경저자의 눈에 치우와 싸웠던 '황제'는 가뭄을 초래하는 재앙신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치우가 이 가물귀신 '황제여발'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 산해경은 그 배경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황제여발이 가물귀신이었다는 점에서 치우는 백성들을 가뭄의 고초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황제여발과 투쟁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치우는 풍백과 우사를 거느리고 이 가물귀신, 재앙신 황제와 싸웠던 것이죠.
이 배경은 왜 치우가 귀신과 역병을 물리치는 축사(逐邪)의 상징인지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말해 치우는 처음부터 군신이 아니라 풍요와 농경의 神이 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황제 '여발'이  '발'을 전투에 보냈다는 이야기는 황제가 신공을 발휘해 직접 나서 치우와 싸웠음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싸움에서 황제여발이 이겼으나 가뭄이 극성해져 황제 자신도 망하고 재앙이 초래했다는 것이 산해경의

입장인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 산해경은 전혀 중화족이 영웅으로 여기는 황제에 대해 자부심이나 숭상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황제(黃帝)란 그야 말로 "누런 먼지를 일으키는 가물귀신"에 불과하다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산해경의 저자는 지금의 중화족과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는 암시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목축을 기반으로 했던 황제족이 그 이전에 농경을 기반으로 했던 신농 염제족의 지역을 침범

하면서 일어났던 대격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황제족에 대해 "일정한 거처가 없이 여기 저기를 떠돌았고 군대가 있었다" 라고 말합니다.

반면 염제족 신농에 대해서는 "오곡을 심어 양식을 삼았고 백초를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목축이 중심이었던 초기 황제족은 건조한 기후를 기반으로 성장해 왔고 농경이 기반이었던 '신농'은

풍부한 강수량을 기반으로 성장해 왔던 것이었지요.

이 양대 제족은 종교와 경제생활면에서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는데 신화학자 하신에 의하면 실제로 '발'(魃)은

중국인들이 비가 그치게 해달라고 빌었던 신이었다고 합니다.

구름이 몰려오니 단비를 내려달라고 기원하는 신농족옆에서 비가 오지 말라고 빌었던 황제족이 있었다면

서로가 어떤 양상이었을까요?

'蚩禹'는 풍요와 평화 신 '神農'의 전투모드였을 수 있다

중국 기록에는 치우와 신농간에 혼돈스런 양상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한서에는 "치우가 아비(신농)를 배반했다"라는 기록이 나오고 옛 귀장(歸藏)이라는 책에서는 "황제와 염제(신농)가

탁록의 들에서 싸웠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신의 기원/ p210/하신)
또 신농은 소의 머리를 하고 있었고 치우도 쇠뿔을 달고 소의 발굽을 가졌다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중국학자들은 이것이 치우가 염제 신농을 몰아내고 그 땅에서 자신이 새로운 염제를 칭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2편에서 논하기로 하고 중요한 것은 사마천은 이미 황제와 치우의 전쟁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결코 초기의 기록에 헌원이니 뭐니 하는 이름은 등장하지도 않았거니와 탁록이니 뭐니 하는 지명조차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황제와 치우의 전투는 아주 오랜 시절, 두 문화의 충돌에 대한 기억과 전승이며 이 당시 황제란 중화족이

떠 받드는 그런 존재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치우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에는 치우가 악마라든지 포악하다라는 기록은 단 한 줄도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물귀신, 누런 황토먼지 신인 황제가 왜 폭풍우의 신 치우를 이겼으며 그 자신 황제여발도 승천하지 못하고

이땅에 재앙을 남긴채 쓰러져야 했을까요? 그리고 이 오랜 전승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중화족 사마천은 이 신화적 전승을 왜 역사에 편입시켜 왜곡하려 들었던 걸까요?

산해경의 치우는 사마천이 이야기하는 그런 흉폭한 존재도 아니며 헌원이니 탁록전쟁이니 하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습니다.

치우는 구름과 비의 신 , 즉 픙백과 우사를 거느린 농경과 풍요의 신이었으며 그러한 이유로 종종 염제 신농과

동일시 되었던 존재였습니다.

산해경에서 치우는 황제 헌원이 아니라 가물귀신 '황제여발'과 싸웠고 그 기록의 전승에는 유목문화의 황제족과

농경문화의 치우-신농족간에 문화적,경제적 충돌의 오랜 기억과 상징이 자리하고 있음도 추론해 보았습니다.

치우가 한 역사적 인물인지 아니면 신화적 존재인지는 중국측 사서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전 세계에는 치우와 유사한 고대 신들의 존재와 그 희생에 관한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치우와 그리스 신화

蚩禹라는 이름은 고대 중국음가로는 현재와 같은 '취우'가 아닙니다. 고대 한어발음에 'ㅊ'(ch)/'ㅉ'(ts)는 'ㅌ'(t)로

발음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지요.
그래서 이 蚩(치)의 고대 발음은 '티'/테/터'의 어느 하나인 't@'였던 것으로학자들은 재구합니다.

그래서 '치우'(蚩禹)는 고대 중국어발음으로는 '타우'/'티우'/테우'에 가까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

(우리 한국어의 고대음가도 같습니다.)

이 '타우'/티우/테우/가 그리스어로 황소 '타우르'(Taur)와 닮았으며 특히 켈트신화에서 전쟁신 티우(Tiw )의

음가를 닮았다는 것은 일단 우연의 일치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다음의 그리스 신화 이야기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반인반우)半人半牛 미노타우르 (Mino Taur)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간략하게 한국 브리타니카의 해석을 보도록합시다.

 

영)Minotaur.

(그리스어로 '미노스의 황소'라는 뜻)

그리스 신화의 반은 사람이고 반은 소인 크레타의 전설적인 괴물.

해신(海神) 포세이돈이 제물로 쓰라고 눈처럼 흰 황소를 보내왔으나 미노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황소를 살려

두자, 포세이돈은 그 벌로 왕비 파시파이를 이 황소와 사랑에 빠지게 했고, 그결과 괴물 미노타우르가 태어났다.

미노스 왕은 미노타우르를 가두기 위해 다이달로스에게 라비린토스(迷宮)를 짓게 했다. 그뒤 미노스의 아들

안드로게오스가 아테네인들에게 죽음을 당하자, 미노스는 그에 대한 복수로 9년마다(또는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해마다) 아테네의 소년 7명과 소녀 7명을 공물로 바치게 하여 미노타우르가 잡아먹도록 했다.

3번째 제물이 바쳐질 때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스스로 나서서 미노스와 파시파이 사이에서 난 딸 아리아드네

의 도움을 얻어 이 괴물을 죽였다.

- 한국 브리타니카-

===========================================================================================

미노타우르는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와 뿔을 가진 반인반수이자 신적존재입니다.
미노타우르는 포세이돈이 희생물로 쓰라고 준 황소와 인간 왕비의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신이기도합니다.

그리고 전유물은 바로 도끼죠.

치우는 인신우제(人身牛蹄) 즉 사람의 몸에 소의 발굽을 가졌으며 머리에 뿔이 있으며 창과 도끼를 만들었다고

중국 사서는 이야기합니다.

치우는 안개를 일으켜 적을 혼돈으로 몰아넣고 미노타우르는 미로(迷路) 라브린스를 이용해 적을 살해합니다.
황제가 치우와 아홉번싸워 이기지 못하고 탄식하자 천녀(혹은 서왕모라고도 함)가 황제에게 지남거와 병법을

알려줍니다.

마찬가지로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르와 싸워 이기지 못할것을 걱정하자 미노스의 공주 아리아드네는

미로에 빠지지 않도록 마법의 실타래와 보검을 테세우스에게줍니다.




미노타우르를 죽이는 테세우스

이 미노타우르와 치우의 이야기는 황소의 희생이라는 제의적 성격을 가진 신화라는 점에서 어떤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는데 이 테마는 후에 미트라교의 저 유명한 '황소살해'의식으로 전승되는 것이죠.

황소는 고대세계에서 풍요를 상징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러한 신은 자신을 희생해서 인간세계에 복을 내려 주는

것입니다.

마치 반고가 죽어 그 신체가 우주 삼라만상을 이루듯 풍요의 신 소, 타우르는 그 피를 흘려 대지를 적심으로써

인간세계에 풍요를 약속하는 것이죠.

황제와 치우,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르 이야기는 우연이라기 보기에는 너무 흡사한 모티브를 내재하고 있습니다.

황소신의 희생을 통한 풍요와 번영의 이야기는 사실 그리스에서 우리에게 건너온 것이 아닙니다.

'블랙 아테나'의 저자 버넬은 19세기 유럽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인의 인종적 기원을 논함에 있어 그리스 원주민을

'황인종'이라고 고백하며 번민하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버넬은 19세기 유럽학자들이 그리스의 헬레네스인들을 셈족과 동양인의 혼혈로서 인식하고 또 그 원주민을

동양인이라고 한 것은 백인 우월성을 이야기하려 했다고 해석하지만 현대 유전학이 밝히는 사실은 좀 더

복잡합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치우의 이야기가 아주 오랜 고대적 전승을 기반

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고 소를 가축화하면서 싹튼 구복신앙의 바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치우가 황제에게 살해되었다는 고대전승은 황소희생제의 (Bull Sacreficing)라는 신화적 이야기일 뿐 그것이

역사적 사실을 의미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후대에 실제로 '치우-신농'을 받드는 부족과 다른 부족간의 역사적 갈등과 전쟁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전쟁의 결과가 '황소희생제의'라는 오랜 고대전승과 혼합되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죠.
다시말해 인간세계의 풍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황소신 치우-신농의 이야기가 역사적 공간으로 넘어오면서

치우-신농을 숭배한 집단의 패배로 왜곡되어 질 수 있었다는 것이죠.

'술이기'라는 지나의 책에서는  '옛 부터 치우신이 있어 지금 기주冀州에서는 사람들이 소의 뿔(角)을 머리에

쓰고 서로 들이받는(抵) '치우희'蚩禹戱라는 놀이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각저角抵(머리 뿔로 들이받음)라는 고대 씨름의 원형이 설명되고 있고 漢대에 이르러 아주 번성하게

되는 것이죠.

이 '각저희'는 머리의 예리한 뿔로 서로를 들이받다 보니 사상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대에 들어서는 머리에 뿔을 쓰지 않고 각저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고구려 각저총의 씨름도를 보면서 왜 씨름을 각저(角抵)라고 했는지 의아해 하셨을 겁니다.

바로 치우를 기념하는 민속놀이가 그 기원인 것이죠.
이 저(抵)라는 한자의 고대 상고음은 '타우'(taw)입니다. 蚩禹의 상고음 't@u'와 사실 근본적으로 같은 셈이죠.

문제는 치우의 蚩자가 설문의 해석을 보면 '蟲자를 따름으로써 어리석다', '미련하다','뱃속의 벌레'등등을 의미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蚩자에는 '웃는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별개로 嗤라고 쓰기도 합니다.

도대체 종잡히지 않는 것이죠..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뜻에 '웃는다'는 또 왜 붙는지..

어쩻든 지나의 여러 문헌에서는 이 '蚩'자 하나가 바로 치우를 뜻하는 것으로 종종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蚩자에 대해 지나학자들은 갑골문이나 금문에서 아직 발견된 바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빤한 거짓말입니다.

저는 북경대 역사학과에서 펴낸 古文字類編이라는 책에서 은주시대에 쓰여진 휘장문자가운데 이 蚩자의 상형문

이 될만한 도식을 발견했습니다. 이 기호는 대개 부족의 정체성이나 부작을 나타내는 기호입니다.

 

이 휘장문자에 대한 해석은 아직 이뤄지고 있지 않습니다. 蚩자가 바로 치우를 의미한다면 위의 심볼만큼 유사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이 蚩라는 글자에 그 어떤 욕설과 비방을 심더라도 웃는다라는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 휘장문호만큼이나

적절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한고조 유방이 전장에 나서며 황제와 치우에게 제사를 드렸다는 사기의 기록이나 술이기가 말하듯 '치우신'이

존재했고 각저희가 성대하게 펼쳐졌던 마당에 결코 치우의 蚩는 기생충이나 어리석거나 하는 의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지나인들은 치우에 그런 뜻을 매겼던것일까요?

사실 蚩禹의 중국어 발음 'chyu'와 소를 의미하는 丑 즉 'chou'의 발음은 같다해도 좋을 정도이며 지나족은 같은

발음의 한자는 오랜 옛날부터 서로 차용해서 기록해온 전통이 있습니다.

소를 뜻하는 이 丑의 고대중국어 음가는 터우'tow'였고  蚩禹는 '테우't@w였으며 황소의 고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는 '타우'/taw'였습니다.

아울러 약 4천년전 히타이트의 전쟁과 폭풍의 신 '시우'Siu는 소로 상징되는 뿔이 있었고 바빌론의 국제어

아카드어와 가나안의 아람어로 소는  '쇼''shaw'였다는 것은 이미 밝혀져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전 고대 동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간에 이러한 유사 커넥션의 원인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는

저 솔본의 글들을 살펴보시면 짐작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치우에 관한 가장 오랜 전승의 텍스트는 산해경이며 이 산해경에 등장하는 치우는 구름과 비의

농경신이었고 황제 여발은 가물신이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즉 풍요를 기원하고 재앙을 쫒아내는 수호신으로서의 '치우'는 결코 추악하거나 흉폭한 존재가 아니었으며

반신반우의 모습으로 인류를 위해 풍백과 우사를 이끌고 가물신,재앙신 황제여발과의 싸움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원불사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는 이야기 구조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치우의 죽음과 재생은 곧 태양의 일몰과 일출, 달의 삭망, 그리고 계절순환의 알레고리를 통해 풍요와 희망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치우는 농경신 염제 신농이 벽사진경, 재앙과 투쟁하는 수호신의 성격을 띤 또 다른 모습일 가능성도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은 종종 치우가 염제와 동일시 되고 신농과 혼동기술되었던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따라서 치우의 벽사진경이라는 상징성으로 부터 후대에 군신,전쟁신의 이미지가 투사되었을 것이라는 점도

유추가 가능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치우와 황제의 투쟁 이야기는 사마천의 오제본기에 들어서면서 교묘하게 위장되기 시작합니다.

산해경에 등장하는 가물귀신 '황제 여발'이 '황제 헌원'으로 둔갑합니다.
동시에 산해경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탁록'이라는 지명이 등장하고 '지남거'가 등장합니다.

사마천은 이 탁록전투의 이야기를 마치 역사적 사실이라도 되는 듯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려듭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로 '황제'의 위상을 드높이고자 했기 때문인 것이죠.

하지만 한족과 묘족이 탁록에서 진짜 전투를 벌였는지, 묘족이 이 전쟁에서 져서 양자강이남으로 쫒겨 났는지

그 어떤 역사적 기록도 고고학적 증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단고기는 치우가 탁록전에서 황제를 사로잡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러한 기록 역시 그 어떤 고고학적

증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당시 실제로 지나족과 동이족간에 전쟁이 있었다고 가정했을 때 여러가지 정황으로 봐서 황제부족이

치우부족을 이길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미 치우는 병력에서 우세했고 특히 금속을 무기로 쓰고 있는 정황이 보이기 때문인 것이죠.

이것은 중근동에서 철기로 무장한 히타이트가 그렇지 못했던 주변제국을 급속하게 복속시켰던 역사적 사실과

각궁과 기마전이라는 당시 첨단 무기로 무장한 몽골의 전투력이 세계를 지배했다는 사실로도 증명되는 것입

니다.

고대 역사에서 전투는 늘 우세한 무기와 전투력을 가진 집단이 승리했음이 일반적입니다.

만일 사마천의 사기 기록을 믿어야 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보편적인 역사전개의 사례들로부터 황제-치우전을

매우 예외적인 사례로 취급해야 하는 어색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소위 실증사학이 제일 싫어하는 문제를 사마천의 사기의 탁록전에서 만큼은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사마천의 사기에는 황제가 지남거를 통해 치우의 안개에서 길을 잃지 않아 치우를 사로잡고 전쟁에서이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지 방향을 지시하는 지남거 하나만으로 어떻게 우세한 무기와 병력을 가진 치우를 황제가 이길 수

있었는지 사기에는 설명이 없습니다.

단지 천녀가 황제에게 병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옛날 그리스의 연극에서 주인공들의 막다른 갈등을 신이 내려와 모두 해결하는'데우스 마키나' 방식과

같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설득력이 전혀 없는 것이죠.

오히려 마왕퇴에서 발굴된 기록에는 '황제가 치우를 피해 산속에서 3년을 지냈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다시말해 황제가 치우에게 쫒겨다닌 기록들은 치우와 황제의 전투력및 병력면에서 납득이 가는 반면 마지막에

황제가 天女의 도움으로 지남거를 이용해 치우를 이겼다는 내용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죠.

아울러 사마천의 사기는 스스로 한고조 유방이 전쟁에 나서며 치우에게 제사지냈다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전쟁에 패배한 신에게 이기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모습은 이해되지 않는것이죠.

결국 사마천의 사기는 과거 지나족이 동이족과 흉노에게 눌려지내다 한무제에 이르러 흉노를 차례로 격파했던

당시를 황제-치우 고대 전승에 알레고리로 사용했다는 혐의가 짙습니다.

한마디로 '사기'를 쳤다는 것이죠.

아득한 고대로부터 풍요와 평화를 기원하던 '치우'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소 희생제 전승을 사마천은 교묘하게

이용해서 지나족의 위대한 역사로 분탕질치려 했던 저의가 사기에 보입니다.

황제는 지나의 이야기구조에서만 발견되는 캐릭터이지만 치우는 유라시아 전역에 등장하는 최고신이며 천신인

동시에 강력한 파워를 가진 군신입니다.
이런 치우가 지나의 이야기에만 등장하는 일개 황제에게 패배하여 원한을 남기고 사라졌다는 스토리는 아주

깜찍하다 못해 유치한 것이죠.
마치 천하장사가 어린이와 씨름에서 엎어졌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사마천은 어쩌면 애국심이 지나쳐 자기 자신과 조상 그리고 동이겨레를 대상으로 양심불량의 역사왜곡을 자행한

중화사학의 1호였는 지도 모릅니다.

 

(솔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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