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조선초 1402년(태종 2)에 권근(權近)·김사형(金士衡)·이무(李茂)·이회(李薈) 등이 만들었다고 하는 지도,
물론 일본과 다른 곳의 지도를 베낀 것이라는 정도의 평가절하에서부터 여러가지 의미에서 뜻깊다는
이론까지 많은데요, 어쨌든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조선시대의 세계관이 뒤떨어진 것은 아니었고
그 당시 이미 세계관이 어느 정도 정립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듯 합니다.
현존 세계 최고의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 (세계일보)
현존하는 동양 최고(最古)의 지도가 일본 류우고쿠(龍谷)대학의 9년여 작업 끝에 복원됐다고 아사히
신문이 23일 보도했다. 이 지도는 조선 초기 한반도에서 만들어졌으며 이번에 처음 원본이 발견돼
일본 첨단의 광학 기술로 본래의 모습을 찾게됐다고 신문은 전했다.
‘혼일강리역대국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라는
이름의 이 지도는 가로 1.6m 세로 1.5m의 크기로,
1402년 한반도에서 만들어졌으며 현존하는 세계지도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고 신문은 풀이
했다.
교토에 있는
류우고쿠대학의 오카다 요시히로(岡田至弘)교수팀은 이 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지도를
발견한뒤 3억 5000만 화소 이상의 디지털 카메라와 x선 처리 기법 등을 이용해 제작 당시의 색채를
복원해냈다.

그 아래 조그맣게 표시돼있다. 황하와 아무르강 만리장성 및 당시 도시
이름 등도 선명히 복원됐다.
대학측은 건학 창립 370주년 기념사업으로 지난 2000년부터 복원작업을 시작했다.
학계에 따르면 이 지도의 사본은 전해지고 있으나 원본이 공개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류고쿠 대학측은 이 지도의 원본을 복원해냈으며 아사히 신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지도에 따르면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로가 지금보다 훨씬 윗쪽에 표시돼있으며, 서해안과 동해안의
해안선이 지금과 별다른 차이가 없고, 하천과 산맥 표시 등도 현재와
비슷하게 표시돼있다.
학계에서는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세계지도이고 당시로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훌륭한 세계
지도로 평가되고 있다. 이 지도는 임진왜란 또는 일제 강점기 전후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 학계에서는 대학측으로부터 이 지도에 관련된 자료를 넘겨받아 정밀 분석
작업에 나설
예정이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 @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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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http://blog.daum.net/sue438/12413677
고지도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여기저기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 관한 글들을 찾아 보았습니다.
'과학문화'(2008-04, vol. 127.) 오상학 교수(제주대 사범대학 지리교육학과)
1992년 미국에서는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는 지도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된 지도 가운데 서양의 많은 지도사학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한장의 세계지도가 있었다. 바로 1402년 조선에서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이 지도는 2년 뒤 1994년 간행된 <The History of Cartography> 시리즈의 아시아편 표지에 수록되어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지도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하늘과 땅, 세계가 어우러지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란 말 그대로 하나로 어우러진 땅(혼일강리) 곧 세계를 그린 것으로 각국의 역대 도읍지를 같이 그린 지도이다. 지도에는 중앙에 중국이 포진하고 있고 동쪽으로 조선, 남쪽 바다에는 일본이 위치해 있으며 서쪽에는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유럽 대륙이 그려져 있다. 지금의 세계지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매우 실망할 것이다. 그려진 모습이 객관적 실재와는 매우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 세계지도는 종교적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는 중세유럽의 세계지도(Mappa Mundi)와 근세의 해도(Portolano)가 결합된 형식의 지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다소 왜곡된 형상을 띠고는 있으나 당시의 세계지도로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뛰어난 지도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지도 하단에 수록된 권근의 지문(誌文)을 보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두 장의 지도 즉, 이택민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청준의 '혼일강리도'를 기초로 하고, 최신의 조선지도와 일본지도를 결합, 편집하여 만든 세계지도이다. 이 가운데 '성교광피도'에는 중국 이외의 지역이 자세히 그려져 있고, '혼일강리도'는 중국 역대 왕조의 강역과 도읍이 상세히 수록된 지도이다. 따라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그려진 유럽, 아프리카 부분은 '성교광피도'의 것을 바탕으로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이택민의 '성교광피도'는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중국 원나라 때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지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넓은 사라센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고 성지순례, 교역 등의 필요에서 지리학과 지도학이 발달했다. 지도학은 로마시대의 선진적인 톨레미 지도학을 계승하고 있었는데, 칼리프의 후원에 의해 톨레미의 저서들이 번역되었다. 알 이드리시(al-Idrish) 같은 학자는 지구가 둥글다는 지구설(地球設)을 기초로 세계지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러한 선진적인 이슬람 지도학은 동서 문화 교류에 의해 중국사회로 전파되엇고, 중국에서 다시 이택민과 같은 학자에 의해 중국식 지도로 편집, 제작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수록된 유럽과 아프리카의 모습은 중국을 거쳐 들어온 이슬람 지도학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도의 아프리카 부분에 그려진 나일강의 모습과 지명들은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에 대한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바탕에 깔려 있는 세계관은 서로 다르다. 이슬람 지도학은 고대 그리이스, 로마의 지도학을 계승한 것으로 땅은 둥글다는 지구설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전통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천지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일부의 이술람 지도에서 보이는 경위선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지도의 형태도 원형이 아닌 사각형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아울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표현하고 있는 세계는 여전히 중화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다. 세계의 중심은 여전히 중국이고 조선은 중국문화를 계승한 소중화로 표상된다. 다만 16세기 이후 나타나는 경직된 대외 인식과는 달리 중화적 세계관에 기초하면서도 개방적으로 세계를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고, 그것이 지도에 반영되어 문화적으로 다른 세계까지 자세히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그 속에는 열리 세계를 지향하며 미지의 세계까지 품어 안았던 조선의 문화적 자부심이 한껏 녹아 있다. 또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폐쇄적인 나라에서 탈피해 대륙과 해양으로 향한 정보망을 구축하여 한 조선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지극히 넓은 천하를 한 폭의 지도로 감상하며 국정을 설계하고자 했던 위정자의 포부와 여부가 스며 있기도 하다. 21세기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새삼스레 떠오르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1. 왜 만들었나?
조선 초기 수도 이전과 행정 구역의 개편, 그리고 압록강ㆍ두만강 유역 일대의 영토 회복과 주민 이주 등 일련의 국가적 사업을 추진하면서 조선 왕조는 각 지역에 대한 정확한 지리 정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부터 지도와 지리지의 편찬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불안정한 북방 영토 및 고려 말 이후 잦은 왜구의 침입 등에 대비하기 위해 세계 지도의 제작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지도 제작은 행정ㆍ국방상의 필요성 이 외에 조선 왕조의 국가적 권위와 왕권을 확립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즉, 중국 중심의 세계에 조선 왕조가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세계 지도를 통하여 보여줄 수 있었다.
조선은 세계 지도를 만들기 위해 우선 사신을 통하여 다른 나라의 지도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지도 제작에 조정의 중신들(좌정승과 우정승)이 직접 참여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에서 세계 지도의 제작이 국가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사업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2. 어떻게 만들었나?
조선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전통적인 중국의 세계 지도에는 중국과 주변 지역만 그려져 있을 뿐 유럽과 아프리카는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런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당시 알려진 세계가 모두 그려져 있다. 이 중 동남 아시아, 인도, 이슬람은 교류가 있었고, 또 그 곳에 다녀온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럽과 아프리카는 교류도 없었고 가 본 사람도 없었는데 어떻게 100여 개의 유럽 지명과 35개의 아프리카 지명을 지도에 기재할 수 있었을까? 이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 때 참조한 지도들을 통하여 추리할 수 있다.
지도를 만드는 데 참여한 권근의 발문에 의하면, 이 지도는 중국에서 들여온 『혼일강리도』와『성교광피도』를 좌정승 김사형과 우정승 이무, 검상 이회가 검토한 후 합쳐 하나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교광피도에는 요수(遼水, 중국의 랴오허) 동쪽과 우리나라가 자세하게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일본에 대한 지도를 첨부하여 새로운 지도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에서 아랍 지역을, 청준의 혼일강리도에서 중국을, 이회의 팔도지도와 동서가 남북으로 된 행기도(行基圖)에서 각각 우리나라와 일본을 참조한 것이다. 따라서 이 지도는 아랍ㆍ중국ㆍ한국ㆍ일본 지도가 합쳐져서 편집된 세계 지도이며, 유럽과 아프리카의 지명은 성교광피도에서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신대륙이 빠져 있는데, 이는 이 지도가 신대륙 발견(1492)보다 무려 9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3. 얼마만큼 뛰어난가?
전체적인 지도의 모습을 보면 지도 가운데에 중국이 있고, 중국 오른편에는 조선과 일본이, 외편에는 아프리카와 유럽이 자리납고 있다. 중국과 조선은 매우 정확하며, 하천과 도서를 자세히 기입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강은 매우 자세히 표현되어 있어, 중국 남부 지방은 마치 수많은 섬처럼 보인다. 그 중에서도 중국의 황하(黃河)는 다른 강들과 달리 노란색으로 표현되었으며, 만리 장성도 뚜렷이 나타나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산줄기가 비교적 자세히 표현되어 있어 두 나라의 지형적 특징을 비교할 수 있다. 일본은 비록 방위는 틀리지만 혼슈(本州)와 큐슈(九州)의 형태가 비교적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의 가장 큰 특징은 한반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크게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한편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는 실제보다 훨씬 작게 그려져 있지만 모양은 비슷하다. 특히 아프리카의 가운데에는 사하라 사막(黃沙)이 그려져 있고, 북쪽으로 흐르는 나일 강도 나타나 있다. 그러나 지중해는 바다가 아닌 강으로 표현되었다. 이에 비해 인도와 인도차이나 지역은 오류가 심하다. 인도는 반도가 아니라 단순한 해안선으로 연결된 육지처럼 표현 되었고, 인도차이나의 여러 나라들은 남쪽 바다 위의 섬들로 표현되어 있다. 이렇듯 일부 지역들은 너무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도는 동ㆍ서양을 막론하고 당시에 그려진 세계 지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지도임에 틀림없다.
지도에 숨겨진 것들, 개방적이고 과학적인 조선 창업기의 문화적 배경 아래에서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이 지도는 동ㆍ서양 간의 문화 교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지도는 인도가 반도로 표현되지 않은 점과 나일 강의 수로 형태로 보다 톨레미(Ptolemy)식 지도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 톨레미식 지도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 지도가 원나라에 전해지고, 한역(漢譯)된 원나라의 전도가 조선으로 전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지도에 나타난 유럽, 아프리카, 서아시아 지역은 지명은 중세 이슬람의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만든 세계 지도에 나오는 지명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다.
또 이 지도는 당시 사람들의 지리적 사고를 보여 준다. 이 지도에는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4배정도 크게 그려져 있으며, 심지어 아프리카 대륙보다도 더 크게 그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이 지도의 가운데에 놓여 세계 육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것으로 보아 중화적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우리 나라와 중국과의 거리는 매우 가깝게 그린 반면, 일본과의 거리는 매우 멀게 표현했고, 도서 방향의 일본을 남북 방향으로 나타내었다. 즉, 우리나라에 중요하고 우리가 지향하는 중국은 크고 가깝게 그린 것이고, 중요하지 않고 관심도 적은 일본은 멀고 작게 나타낸 것이다. 현대인들도 이와 같은 지리적 사고를 종종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적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여 만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당시에는 가장 뛰어난 세계 지도였으며, 현재에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 유산이다.그러나 이러한 세계 지도 제작의 전통이 이후 계승되지 못하여 참으로 안타깝다.
<지리교사 모임 '지평', "지리로 보는 세상"에서>
'충주 전통문화회'의 다음 카페에서 퍼 왔습니다.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
지도 하단에 권근(權近이 쓴 발문과 ≪양촌집 陽村集≫(권22, 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에 의하면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 聲敎廣被圖〉와 천태승(天台僧)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 混一疆理圖〉를 중국에서 들여와 이 지도에 우리 나라와 일본을 추가하여 새로 편집한 지도이다.
발문에 〈성교광피도〉는 지도로서 매우 상세하고, 〈혼일강리도〉는 국도연혁이 상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이 세계지도의 윤곽은 〈성교광피도〉를 따랐고, 지도 상단의 역대제왕국도(歷代帝王國都)와 성도(省都)는 〈혼일강리도〉에 의한 것이 분명하다.
중국의 옛 세계지도는 대부분의 지도가 우리 나라와 일본은 자세하게 그리지 않거나 빠뜨리고 있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와 일본 부분을 이회가 보완하여 새로 편집한 것이다.
우리 나라 지도는 1402년에 의정부에서 본국 지도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1482년(성종 13) 2월에 양성지(梁誠之)의 상주문에 조선 국초에 이회의 〈팔도지도 八道地圖〉가 있다. 그러므로 이 지도의 조선도는 이회의 〈팔도지도〉라고 추정할 수 있다.
≪세종실록≫ 권80 세종 20년(1438) 2월조에 보면 박돈지(朴敦之)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1401년에 일본 지도를 가지고 돌아온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일본 지도는 박돈지가 일본에서 직접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의 일본도는 일본의 북동부 지방이 돌기(突起)로 표현된 행기도(行基圖)의 일종으로 판명되며 방위는 서쪽이 북쪽으로 잘못 그려져 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지도는 압록강의 상류와 두만강의 유로가 부정확하지만 서해안과 동해안의 해안선이 현재의 지도와 별다른 차이가 없고, 하계망과 산계(山系)가 동북부 지방을 제외하면 매우 정확하다. 그러나 우리 나라 지도는 전체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몇 배나 크게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전하는 동양 최고의 세계지도이고 당시로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훌륭한 세계지도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는 이회의 〈팔도지도〉도 이 지도의 우리 나라 부분을 통해서 그 면모를 알 수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은 전하여지는 것이 없고, 사본이 일본 경도에 있는 류코쿠대학(龍谷大學) 도서관에 전하여지고 있다.
지도에 표시된 우리 나라 지명을 보면 고무창(古茂昌)·고여연(古閭延)·고우예(古虞芮)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폐군(廢郡)이 된 1455년(세조 1) 이후의 지도임을 알 수 있고, 또 같은 폐4군(廢四郡)이면서도 1459년에 폐군된 자성(慈城)이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1459년 이전에 모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988년에 류코쿠대학 지도와 거의 같은 지도가 또 일본 구주(九州)의 혼코사(本光寺)에서 발견되었다. 이 지도의 크기는 류코쿠대학본보다 약간 크며 세로 147㎝, 가로 163㎝이고 류코쿠대학본이 견지(絹地)인데 혼코사본은 한지(漢紙)에 그려져 있다.
이 밖에도 유사본이 일본에 있는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이 지도들이 우리 나라에는 하나도 없고 일본에 모두 있는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또는 일제 강점기에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문헌≫ 韓國古地圖(韓國圖書館學硏究會, 1977)≪참고문헌≫ 東漸せる中世イステム世界圖(高橋正, 龍谷大學論集 374, 1963)
(다음 백과사전에서)
조선초 1402년(태종 2)에 권근(權近)·김사형(金士衡)·이무(李茂)·이회(李薈) 등이 제작한 세계지도.
세로 158.5㎝, 가로 168.0㎝. 비단 바탕에 그린 채색 필사본. 원본은 일본 교토[京都]의 류고쿠대학[龍谷大學]에 있으며, 규슈[九州] 시마바라 시[島原市] 혼코지[本光寺]에도 유사한 본이 있다.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일본, 서쪽으로는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당시 알고 있던 세계인 구대륙 전체를 그린 사실적이고 정확한 지도이다. 지도 하단에 있는 양촌(陽村) 권근이 쓴 발문에 의하면, 중국에서 만든 〈성교광피도 聲敎廣被圖〉·〈혼일강리도 混一疆理圖〉, 우리나라·일본의 지도를 합하여 새로 제작했다고 기록했다. 이 지도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의 고지도임은 물론, 신대륙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이전의 지도로서 세계적으로 훌륭한 세계지도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조선 초기의 지도제작술의 수준과 국가의 지도에 대한 지대한 관심,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과 공간 인식을 알려주는 자료로도 의의가 크다. 규장각에는 류고쿠대학 소장본의 모사본이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약칭
강리도)
(왜 한반도는 대충 그리고,대륙은 자세히 그렸을까?)
현존
最古 세계지도
당시의
조선의 중심은 대륙이 아니었을까?)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로 평가받는다.
아프리카
해안·희망봉 정확히 묘사...유럽인들의 발견보다 86년 앞서
《中國歷史地理》(중국역사지리:
石璋呂, 臺灣: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3)의
"섬서(陝西)편에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은 장안(長安)을 도읍으로 욕심을 내었으나, 국세(國勢)가 부진(不盡)하여
실현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명나라의 강역의 한계가 동쪽으로 사천성 동쪽을 결코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고려의 서쪽에 명나라가 붙어있었다.
명나라 강역은 촉지방인 사천성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뻗쳐있었으므로,
고려의 중심 장안에서 서쪽과 남쪽에 위치해있었다.
역사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大陸의 主人은 朝鮮이었으며, 朝鮮은 大陸,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최초 천자국가(동이국가)의 都城 이름이 순수한 우리말로 '장안(보통명사)'이었다
周가
商을 멸하고 도읍한 호경이란 곳도 푸라상강 유역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평양조에 평양은 조선
(朝鮮), 왕검성(王儉城), 기성(箕城), 낙랑(樂浪), 장안(長安), 서경(西京), 서도(石), 호경(鎬京), 유경(柳京)
이라고 했다.(장안은 '墻內(=담의 안쪽)(담안)'정도 였을 것이다.
다시말하면 '墻(장)'자는 순수 우리말이 한자화한 것)
『원사(元史)』
지리지(地理志)에 말하기를, “동녕로(東寧路)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으로 또한 장안성(長安城)
이라고도 한다.
자치통감
기록에도 高句麗 平 壤 城은 장안성(長安城)이며, 왕검성이며, 한의 낙랑군의 땅이라고 했다.
<平 壤 城, 高 麗 國 都 也, 亦 曰 長 安 城, 東 西 六 里, 隨 山 屈 曲, 南臨 浿 水。 杜 佑 曰:
高 麗 王 自 東 晉 以
後 居 平 壤 城, 即 漢 樂 浪 郡 王 險 城
괄지지에
따르면,동북쪽에 조선국이 있다.“고려(高驪)는 평양성에서 다스렸으며,
본시 한의 낙랑군 왕검성이다. 즉 옛 고조선이다”
<東
北 朝 鮮 國 。 括 地 志 云 : 「 高 驪 治 平 壤 城 , 本 漢 樂 浪 郡 王 險 城 , 即 古 朝 鮮 也>
隋書
高句麗傳에는, 都邑은 平壤城이며 곧 長 安 城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삼국을 통일한 후위(사마씨의 진)의 영토는 고구려 왕검성이다,
이곳은 조선의 왕험성이고 평양이니 곧 장안성이다
후위(진)사람은
조선인으로 곧 조선현사람이다.이곳은 조선왕만의 성이자 험독현으로 곧 서안이다
수서에
이르길,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성이다,곧 장안성이다
북사
고구려전에 이르길,고구려 평양성은 곧 장안성이다.
원사에
이르길 고려 평양성은 곧 장안성이다,오대시대의 주인이며,송악으로 천도한 자는 왕건이다
水經注疏와
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나타난 浿水는 古朝鮮 때 왕검성(王儉城)인 平壤城 서쪽 마자수
(馬訾水)에서 시작된 것으로 되어있다. 즉 마자수가 압록강(鴨綠江)이며 高句麗가 都邑한 玄菟郡에서
浿水가 시작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 高句麗가 있던 玄菟郡에 平壤城이 있고 平壤城 동쪽
으로 흐르는 것이 浿水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현 섬서성(陜西省)의 서경(西京)은 본래 우리 가우리(고구려) 및 근세 조선의 평안도(平安道)의
평양이며, 평양은 본래 왕험성(王險城)이요, 왕검성(王儉城)이라고 했습니다.
여러 사서를 통들어 우리 근세 조선의 백두산(白頭山)은 곤륜산(崑崙山) 또는 천산(天山)에 갈려져 나온
산이라고
하였습니다..
곤륜산(崑崙山)과
천산(天山)은 현 신강성(新疆省 : 신강 위구르 자치구) 내에 실존하며,
그 곳은 현 감숙성(甘肅省)의 서쪽에 접하고 있으며, 따로 갈라져 내린 산맥이 현 감숙성(甘肅省)의
동남쪽까지 관통하는데, 그 주변에 태백산(太白山)이 실존합니다.
현
섬서성(陜西省)의 서경(西京)은 왕검성(王儉城)이라는 셈이며,
태백산(太白山)이나 천산도 역시 백두산(白頭山)이라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는 셈.
高麗史3卷-世家-穆宗
癸未改西京爲鎬京.
“호경”이
반도의 평양이라면 반도의 평양은 섬서성 장안이 되며 이 주위는 중원의 중심지였다는 말이며,
관내도였다는 말도 되는 것이며, 또한 이 지역이 “중국”이었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호경은 섬서성 장안현 서남에 있으며, 서도라고도 하며 周(주)의 왕도 였다. 이러한 호경은 후대의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에 “고구려의 평양성은 왕검성이며, 장안성이며, 호경이요, 유경이며, 낙랑군이다“라고 기록
하고 있다.
원사지리지(그
전의 역사서는 불문에 붙이더라도)를 보면 “동녕로 본고구려 평양성왈장안성,(중략)낙랑지”라 기록하고 있다. 원사는 원나라때 편찬된 것이 아니며,
분명히 원을 멸망시킨 “명”나라때 편찬되었을 것이다.

1402년(태종 2) 5월 김사형(金士衡) ·이무(李茂) ·이회 등이 작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
중국과 한국, 이슬람 세계 뿐 아니라 아프리카까지 그려져 있다, 이 지도의 중앙에 있는 대륙과
우측 한반도가 당시의 조선으로 보여진다. 조선의 지도인데, 한반도가 너무 엉성하게 표현되있다.
우리나라에는 원본이 없고, 규장각에 모사본이 있다. 필사본이 일본 교토의 류코쿠(龍谷)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나, 공개하지
않고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학술행사 협의를 위해 서울을 찾은 히라타 아쓰시(平田厚志) 류코쿠(龍谷)대 도서관장으로부터
고지도 발굴·연구의 권위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받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복제본~
류코쿠대가 꼬박 10년 동안 첨단 디지털 기술로
복원한것~

일본 류코쿠대가 첨단 디지털 기술로 복원해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에게 기증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디지털
복사본. 가운데 부분이 중국. 그 왼쪽으로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대륙, 유럽대륙이 표현돼 있다.
한반도는 실제 크기보다 크게 그려져 있다. [최선웅 제공]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약칭 강리도)는 세계 학계가
공인하는 현존 최고(最古)의 세계지도이며 15세기 지도로는 동서양을 통틀어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것이다. 제작 시점인 1402년 당시 인류가
알고 있던 세상의 전부가 들어 있다.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기 전이라 지도에는 아시아·유럽·아프리카 대륙이 그려져
있다. 비례는 맞지 않지만 해안선 모양은 오늘날 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서양의 고지도 관련 학술서적들도 강리도를 표지에
실을 정도다. 당시의 모든 지도가 그렇듯 이 지도 역시 100% 실측에 의해 만든 지도가 아니라 당시의
지리 지식과 정보를 모두 취합해 만든 합성지도다. 지도 아래 적혀 있는 조선 초기 관료 권근(權近)의 발문에 따르면 원나라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에 한반도 지도인 팔도지도(八道地圖)와 일본 지도인 행기도(行基圖)를 합성해 만든
것이다. 생생한 증거물이기도 하다. 한국지역지리학회장을 지낸
양보경 성신여대 교수는 “한국인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경쟁력 있는 문화재 하나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강리도를 들겠다”고
말한다. 임진왜란 때나 메이지 시대 초기에 건너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류코쿠대 측은
여태까지 보존 문제 때문에 원본 공개를 매우 꺼렸다. 한국인 연구자가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이찬(2003년 작고) 전 서울대 교수가 1982년
입수한 사진을 바탕으로 동양화가와 서예가에 의뢰해 모사해 서울대 규장각에 기증한 게 전부였다. 그러나 아무리 정밀히 모사했다 해도 원본과의
차이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지도제작업체 매핑코리아의 최선웅 사장은 “모사본도 정밀하게 그린 것이지만 지도 형태나 필체에서 이번에 온 디지털본과
비교해보니 원본과는 약간 차이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가미해 훼손된 부분까지 복원한 것이다. 류코쿠대 이공학부는 3억5000만 화소 이상의 초고정밀
디지털카메라와 형광엑스선분석기 등의 첨단 장비를 활용해 2000년부터 10년 동안 복원에 매달렸다. 그 결과 원본에서는 희미하게 보였던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아무르 강을 그린 선을 선명하게 되살려 냈다. 양보경 교수는 “모사본 제작 당시 판독이 힘들었던 중국 지명 등은 잘못 써 넣은 것도
있는데 디지털 복제본을 통해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디지털 강리도를 전달받은 최 원장은 실물 크기의 복제본을
만들어 학계와 관련 단체에 제공할 계획이다.
가로 168㎝, 세로 158.5㎝의 비단에 그려진
채색지도인 강리도는 태종 2년인 1402년에 제작됐다.
이
강리도는 조선 초기 한국인에게 ‘글로벌 코리아’의 유전자가 형성돼 있었음을 입증해 주는
한국인이 남긴
문화유산의 상당수가 그런 것처럼 강리도 또한 일본에만 남아있다.
하지만 이번에 건네받은 디지털 강리도는 실물을
그대로 복제한 것일 뿐 아니라 오히려 첨단 기술을
아프리카 해안·희망봉 정확히 묘사...유럽인들의 발견보다 86년 앞서
1482년 요하네 슈니처가 만든 세계지도. 아프리카와 남극이 연결돼 있고 인도양과 대서양은 분리돼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가 세계 지리학계에서 명품으로 극찬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시대의 다른 지도와 비교해보면 이해가 한결 쉬워진다. 강리도보다 80년 뒤인1482년 독일의 요하네
슈니처가 만든 세계지도를 보자. 이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지리학자 프톨레마이우스(톨레미)의 지도를
계승한 15세기 유럽 지도의 대표작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아프리카 대륙이다. 남쪽 부분이 남극과 곧바로 닿아 있고 바다는 아프리카 대륙에 가로막혀 쪼개져 있다. 그러니 이 지도를 보고서는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나가는 바닷길을 상상도
할 수 없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남단은 세상의 끝이며 따라서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리도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프리카
남단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형상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지리 상식과 일치한다. 비록 대륙의 크기가 실제보다 작게 그려져 있긴 하지만
해안선의 윤곽은 오늘날의 지도와 큰 차이가 없다.
1488년 유럽인이 아프리카 최남단에서 희망봉을 발견한 것보다 86년이나 앞서 희망봉의 존재를 정확
하게 그려낸 사실이 놀랍다.
강리도를 보면 전 세계가 바다로 연결돼 있어 이 세상에 배를 타고 가지 못할 곳은 없다.
아프리카 땅을
밟아 본 일이 없는 당시의 한국인들은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그것은 동서문화 교류의 결과였다. 고지도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유럽인들과 달리 아랍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지리적 인식을 갖고 있었고, 이는 몽골 제국에 의해 동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강리도를 제작하면서 참고한 이택민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가
원나라의 지도였다는 점이 그런 가설을 뒷받침한다.
강리도는 당시
한국인들의 진취적인 세계관이 투영된 지도다.
중세인들이 알고 있던 세계 즉 구대륙의 전부를 한 장의 지도에 정확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다.
권근은 발문에서 “정연하고 보기에 좋아 문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게 되었다”며
“도적(圖籍)을 보고 지역의 원근을 아는 것은 다스림에 도움이 된다”고 썼다.
강리도보다 150여 년 뒤에 그려진 비슷한 이름의 다른 지도(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인촌기념관 소장)
에서는 오히려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 부분이 사라지고 만다.
양보경 성신여대 교수는 “조선 초기의 군주나 관료들이 전 세계를 머릿속에 인식하고 있었지만
성리학 이념이 확고히 뿌리 내린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되었다”고 설명했다.
오상학 제주대
교수는 “이슬람 사회에서 전래된 지리 지식을 바탕으로 유럽·아프리카 등 조선과
전혀 교류가 없던 지역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직방세계, 즉 세계는 ‘중국과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들로만 구성됐다’는 인식을 뛰어넘었다”고 평가한다.
오 교수는 “강리도를 ‘중화적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한 국사 교과서의 기술을 고쳐야
한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