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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중국 정사 - 1.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5.03.18|조회수115 목록 댓글 0

 

중국 정사에 있는 조선전, 동이전

 

 

25사 중에서, 진서(陳書)와 북제서(北齊書)에는 외국전(外國傳)이 없으므로 동이전 등이 없습니다.

따라서 나머지 23사 등에 있는 조선전, 동이전 등을 올립니다.

 

 

1.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

2.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3.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4.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5. 진서[晋書] 동이열전(東夷列傳)

6. 송서[宋書] 이만열전(夷蠻列傳)

7.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열전(東南夷列傳)

8.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列傳)

9. 위서[魏書] 열전(列傳)

10. 주서[周書] 이역열전(異域列傳)

11. 남사[南史] 동이열전(東夷列傳)

12. 북사[北史] 열전(列傳)

13. 수서[隋書] 동이열전(東夷列傳)

14.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15.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16. 구오대사[舊五代史] 외국열전(外國列傳)

17. 신오대사[新五代史] 사이부록(四夷附錄)

18. 송사[宋史] 외국열전(外國列傳)

19. 요사[遼史] 이국외기(二國外記)

20. 금사[金史] 외국열전(外國列傳)

21. 원사[元史] 외이열전(外夷列傳)

22. 신원사[新元史] 외국열전(外國列傳)

23. 명사[明史] 조선열전(朝鮮列傳)

24. 청사고[淸史稿] 조선열전(朝鮮列傳)

 

 

 

 

1.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

 

 

 

○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

조선(朝鮮)

 

1)

조선왕(朝鮮王) 만(滿)은 옛날 연(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燕)나라의 전성기(全盛期)로부터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遼東) 외요(外徼)에 소속시켰는데,

한(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燕)에 복속시켰다

 

2)

○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漢을]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만(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인(千餘人)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遼東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秦)의 옛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鄣)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의 만이(蠻夷) 및 옛 연(燕)·제(齊)의 망명자(亡命者)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王)이 되었으며,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하였다.

 

3)

○ 이때는 마침 효혜(孝惠)·고후(高后)의 시대로서 천하(天下)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遼東太守)는 곧 만(滿)을 외신(外臣)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만이(蠻夷)의 군장(君長)이 [중국(中國)에] 들어와 천자(天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天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만(滿)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小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眞番)과 임둔(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4)

○ 아들을 거쳐 손자(孫子) 우거(右渠)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漢)나라 망명자(亡命者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천자(天子)에게 입현(入見)치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眞番)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에게 알현(謁見)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5)

○ 원봉(元封) 2년(B.C.109)에 한(漢)나라는 사신(使臣) 섭하(涉何)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꾸짖고 회유하였

으나, [우거(右渠)는] 끝내 [한(漢)나라] 천자(天子)의 명(命)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涉河)가 돌아가면서 국경인 패수(浿水)에 이르러서 마부를 시켜 전송나온 조선(朝鮮)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바로 [패수를] 건너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드디어 천자(天子)에게 ‘조선(朝鮮)의 장수(將帥)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천자(天子)가 그 공(功)을 기려 꾸짖지 않고 [섭(涉)]하(何)에게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의 벼슬을 내렸다.

이에 조선(朝鮮)은 하(何)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습공격해 하(何)를 죽이니,

천자(天子)는 죄인을 모집하여 조선(朝鮮)을 치게 하였다.

 

6)

○ 그 해 가을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㒒)을 파견하여 제(齊)로부터 배를 타고 발해(渤海)를 건너게

하고 군사 5만으로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에서 출격하여 우거(右渠)를 토벌하게 하였다.

우거(右渠)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좌장군(左將軍)의 졸정(卒正)인 다(多)가 요동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진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다(多)도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법(法)에 따라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누선(樓船)[장군(將軍)]은 제(齊)나라 병사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험(王險)에 이르렀는데,

우거(右渠)가 성을 지키고 있으면서, 누선(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엿보아 알고,

곧 성(城)을 나와 누선(樓船)[군(軍)]을 치니 누선군(樓船軍)은 패해 흩어져 도망갔다.

장군(將軍) 양복(楊㒒)은 그의 군사(軍士)를 잃고 10여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아들였다.

좌장군(左將軍)도 조선(朝鮮)의 패수(浿水) 서군(西軍)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가 없었다.

 

7)

○ 천자(天子)는 양장군(兩將軍)의 전세(戰勢)가 유리하지 않다고 여기고,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右渠)를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사자(使者)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였으나 양(兩)장군이 신을 속여서

죽일까 두려워했는데, 이제 신절(信節)을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청합니다.”하고, 태자를 보내 들어가 사죄

하게 하고, 말 5천필을 바침과 아울러 군량미(軍糧米)를 내주었다.

무리 만여인(萬餘人)이 무기를 지니고 막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그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에게 말하기를,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버리라고 명(命)하시오.”라고

하였다.

태자도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속이고 죽일까 의심하여 끝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버렸다.

[위(衛)]산(山)이 돌아와 천자께 보고하니 천자는 산(山)을 주살(誅殺)하였다.

 

8)

○ 좌장군이 패수(浿水) 위의 군사를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험(王險)]성(城) 아래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樓船)[군(軍)]도 또한 가서 합세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끝내 성을 굳게 지키므로 몇 달이 되어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좌장군은 본시 시중(侍中)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고 있는 데다가 연(燕)과 대(代)지방의 군사를 거느렸으므로

굳세었는데, 싸움에 이긴 기세를 타고 군사들이 더욱 교만해졌다.

누선[장군]은 제(齊)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로 출병하였으나, 이미 여러번 싸움에 패하고 군사를 잃었

으며, 앞서 우거와의 싸움에서 곤욕을 치른 패잔한 군사들이라 군사들은 모두 두려워 하고 장군은 부끄럽게

여겨 우거를 포위하고도 항상 화평을 유지했다.

 

9)

○ 좌장군이 맹렬히 성을 공격하니, 조선대신(朝鮮大臣)들은 몰래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누선[장군]에게

항복을 약속했으나, 말만 오고 갈 뿐 아직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좌장군은 여러 차례 누선과 싸울 시기를 정하였으나 누선은 [조선(朝鮮)과의] 약속을 급히 이루려고 싸움에

나가지 않았다.

좌장군 또한 사람을 보내 조선이 항복해 올 때를 탐문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반기지 않고 누선쪽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로 인해 양(兩)장군은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

좌장군은 마음속으로 ‘누선은 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는 데다가 지금은 조선과 사사로이 잘 지내고 있으며,

[조선] 또한 항복하지 않으니 반계(叛計)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 하였으나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였다.

 

10)

○ 천자는, “장수들이 [일을] 이룰 수 없으므로 전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우거를 달래 항복하도록 하여

우거가 태자까지 보냈는데도 산(山)이 이를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좌장군과 서로 계교가 틀려 마침내

약속이 깨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양(兩)장군이 성을 포위하고도 역시 [의견이] 어긋나고 달라서 오래도록 결판이 나지 못하고 있다.”

고 말하고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이를 바로잡고 상황에 맞게 처하도록 하였다

 

11)

○ [공손]수가 도착하니 좌장군이 말했다.

“조선이 항복할 형편에 이른 지 오래되었는데도 항복하지 않는 것은 사정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누선이 여러 차례 싸우러 나오지 않은 것과 평소의 뜻하는 바를 [공손]수에게, 낱낱이 고하였다.

이어 “지금 이와 같으니 [누선장군(樓船將軍)을] 체포하지 않으면 크게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누선 혼자만이 아니고 조선과 함께 우리 군사를 멸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공손]수도 이를 옳게 여기고

부절(符節)로 일을 의논하자고 누선을 불러 좌장군 진영에 오게 하고는, 좌장군 휘하에 명하여 곧 누선장군을

체포하고 군사를 합친 뒤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공손]수를 죽였다.

 

12)

○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여 맹렬히 조선을 치니, 조선의 상(相) 로인(路人)과 상(相) 한음(韓陰)과

니계상(尼谿相) 참(參)· 장군(將軍) 왕겹(王唊)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 누선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누선은

지금 잡혀 있고 좌장군 단독으로 장졸(將卒)을 합하여 전투가 더욱 맹렬하여 맞아서 싸우기 두려운데도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 하고 [한(韓)]음(陰)· [왕(王)]겹(唊) ·로인(路人)이 모두 도망하여 한(漢)나라에

항복하였다. 로인(路人)은 도중에서 죽었다.

 

13)

○ 원봉(元封) 3년(B.C.108) 여름, 니계상(尼谿相) 참(參)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右渠)를 죽이고

항복하여 왔으나, 왕험성(王險城)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의 대신(大臣) 성이(成已)가 또 [한(漢)에] 반(反)하여 다시 군리(軍吏)들을 공격하였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䧄)과 상(相) 로인(路人)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성이(成已)를 죽이도록 하였다.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참(參)을 봉하여 홰청후(澅淸候)로, 음(陰)은 추저후(荻苴候), 겹(唊)은 평주후(平州候),

장(長)은 기후(幾候) 로 삼았으며, 최(最)는 아버지가 죽은데다 자못 공이 있었으므로 온양후(溫陽候)로

삼았다.

 

14)

○ 좌장군을 불러 들여 [그가] 오자, 공(功)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긋나게 한 죄로 기시(棄市)

하였다. 누선장군도 병사를 거느리고 열구(洌口)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도 제멋

대로 먼저 군사를 풀어 많은 병사들을 잃어버렸으므로 주살함이 마땅하나 속전(贖錢)을 받고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찬자평(撰者評)

○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우거는 험고(險固-험한 요새와 견고한 지세)함을 믿다가 나라의 사직을 잃었다.

섭하(涉何)는 공(功)을 속이다가 전쟁의 발단을 만들었다.

누선은 장수의 그릇이 좁아서 난(難)을 당하고 죄에 걸렸으며,

[앞서] 번우(番禹)에서의 실패를 후회하다가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주살되었다.

결국 양군(兩軍)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列侯)된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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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조선열전을 볼 수 있는 곳: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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