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역사 사료

명도전 1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5.10.13|조회수651 목록 댓글 0

 

명도전(明刀錢)은 고조선시대 화폐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조(B.C.323~222)된 것으로 보는 손칼모양의 명도전(明刀錢)이 "고조선시대 우리

나라 화폐였을 것이다"하는 한·중 학자들의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명도전은 이제까지 중국고대 연나라 평명(平明)지방에서 출토되었고, 칼날 안쪽에 '明'자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일제 강점기 명도전이란 이름이 붙었다.
중국은 명자도(明字刀) 또는 원수도 원절식도전이라고 불렀다.

명도전은 우리나라 평남북지방과 전남 당진 등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유입량이 많아 고화폐 중에는 값이 싼 편이고 최근에는 위조품이 많아졌다.
교과서에도 고대 중국 것으로 실려 있는 돈이다.
 
그런데 성삼제(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대책반 팀장)저, '사라진 역사'책에서는 22쪽에 달해 "명도전이

고조선화폐"라는 주장을 폈다.
필자도 공감하며 연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주고 싶다.

고화폐 수집연구를 먼저 해온 사람으로 뒤늦게 이글을 발견한 데 부끄럽게도 생각했으나 한편으로 한국

화폐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긋는 문제 제기에 놀라움과 고마움을 느낀다.
 
그의 주장은
첫째, 명도전이 주로 발굴된 지역은 만주일대와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 고조선 영토이다.
그 옛날 우리나라 땅인 것이다.

일부 옛 지도에 연나라 국경을 압록강까지로 표시된 것은 일제 강점기 잘못 작성된 것이다.

둘째, 고조선의 청동기 문화는 다른 국가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발전되어 그 시대 동경이나 청동검에서

보듯이 고도의 기술과 난이도가 높은 제품으로 청동화폐를 만들고도 남을 만큼 기술수준이 뛰어났다.

셋째, 연나라의 존속기간은 불과 100년인데 비해 출토되는 화폐량(명도전등)이 나라 수명에 비해 너무 많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고조선 유적지에는 몇 자루씩 많은 양이 대량으로 출토되어 2000년 전의 고화폐에서 묻어오는 그 시대

부국의 흔적을 가늠할 수 있다.

넷째, 연나라와 고조선은 서로 침공과 침략을 당하는 적대국가로 고조선에서 연나라 화폐를 널리 통용할리

없고, 자체 제조한 것이다.
 
또한 박미선 서울시립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은 그의 논문에서
"명도전이 출토되는 유적 중 요하동쪽은 연나라 유적이 아니라 고조선 유적이고 명도전은 고조선 고유의

유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을 내렸다.

박 연구원은 B.C.3~2세기 명도전 출토 유적지의 분포도를 처음으로 작성했다.
출토지점에 선을 그어 놓고 보면 우리나라 고조선지도를 가장 객관적으로 제작했다는 러시아 학자 부찐의

고조선 영토와 두 그림이 일치한다.

공교롭게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라면 연의 중심 강역인 북경을 중심으로 출토되어야 하는데 연의 중심지에는 명도전이

출토되지 않았고 부찐이 기원전 3세기까지 고조선 영역이었다고 보는 정봉과 조양에서 명도전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더구나 중국 흑룡강성이 발행하는 학술지 북방문물 2004년 논문집중 장보촨(張塼泉<길림대>) 역사학 교수

가 쓴 명도폐(明刀弊) 연구에는 명도전(二원절식도전)은 고조선의 화폐이며 방절식도전은 연나라화폐라고

명확히 밝혔다.
 
그는 기원전 7세기 전부터 기원전 3세기 무렵까지 만주지역에는 3종류의 화폐가 있었는데
'첨수도' '원절식도전' '방절식도전'이라 했다.

첨수도는 끝이 뽀족한 것, 원절식은 화폐를 묶기 위해 손잡이에 구멍을 원으로 낸 것,
방절식은 구멍이 사각형을 말하는데 첨수도는 고죽 또는 기자고 관련족의 화폐였고 원절식도전 즉 명도전은

고조선, 방절식은 연나라화폐라고 했다.

장 교수는 만주사 연구에 기초를 닦은 학자로 유명한데 지난 2000년 논문 발표전에 안타깝게도 작고했다.
 
"명도전이 고조선의 청동화폐일 것이다"라는 또 다른 논문은 2003년 2월,
송호정 교수가 쓴 "한국고대사 속의 고조선사"에도 있다.

옛 화폐 중에는 화폐사에 기록되지 않은 실물화폐(고려해동원보)도 발견되고 있으며 역사기록에는 있으나

실물이 나타나지 않는 화폐(고려은화, 저화)들도 있다.
 
우리나라 삼한시대 제조 유통되었던 무문철전, 철정전(鐵鋌錢·강원도민일보 2000년 6월 10일 보도)도
최근에 와서 우리 고화폐로 인정되는 단계에 와 있다.

화폐학은 역사, 고고학, 지리학, 민속학, 서예, 금속공학(주물, 야금, 성분분석), 회화, 디자인, 민화 등의

종합연구이자 어느 분야는 전문성이 따라야 된다.
춘추전국시대 명도전이 고조선화폐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까지는 화폐학 측면에서 앞으로 더욱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 인식을 높여야 하며 실물을 다루는 수집가들로부터도 공감이 형성되어야 한다.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에서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역사를 왜곡, 침탈까지 해가며 자기네 역사에 예속시키려

하고 있으나 잊혀졌던 옛 영토 문화에 오히려 관심을 기울여 명도전이 우리의 화폐였다는 주장은 참으로

가슴 뿌듯한 일이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자주 벌어질 때 동북공정을 뛰어넘게 될 것이다.



(한영달 언론인·한국고전연구감정위원회장)




“ 원절식 명도전 고조선때 제작된 한국화폐”


교과서에서 이제까지 중국화폐로 표시된 접는 칼모양의 명도전(明刀錢)을 남북한 고고학자들이 고조선

시대 우리 화폐라고 주장, 중국측은 반대입장이며 일본은 우리 주장을 긍정 , 동양3국의 쟁점으로 떠오

르고 있다 .

또 북한 학자들은 이제까지 중국 전국시대~한대 화폐로 보아온 일화전(一化錢) 및 명화전(明化錢)이

고조선시대 또는 고구려초기 우리화폐일 것이라는 주장을 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작년 12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강사 박선미 박사가 학위취득논문 ‘화폐유적을

통해본 고조선의 교역’에서 밝힌 것으로, 이를 토대로 고대화폐의 국적을 소고 (小考)해본다.

고조선 강역 50곳서 출토… 표면 문양 ‘明’서 기원
한·일 ‘고조선 화폐’ 인정… 중 ‘전면 부정’ 쟁점화


중국의 고대화폐 유적을 내몽고 자치구 등 5개 원역으로 나누어볼 때 압록강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부에

이르는 권역은 그 옛날 고조선 강역으로 그곳에서 명도전(明刀錢)이 50개소에서 출토되는 등 다른 권역에

비해 가장 많았다.

다음은 포전(布錢) 8곳,일화전(一化錢) 8곳, 반량전( 半兩錢) 8곳으로 같았으며 오수전(五銖錢) 6곳의

순위였다.

명화전(明化錢) 한곳도 출토되었다. 일화전은 대부분 포전 명도전과 함께 매장된 상태에서 나왔다.

포전 명도전은 전국시대(B.C 475~B.C 221년)것이 30곳, 일화전은 전국시대 말기 4곳, 반량전은 진

(秦·B.C 221~207년), 한(漢)초기 6곳, 오수전서한 (西漢·B.C 206~A.D8년)중기 6곳이었다.

시대적으로 우리나라 고조선과 고구려 초기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또한 요동반도에서는 일화전 출토량이 가장 많았다.

1960년 북한 학계와 중국 고고학계는 요동반도 일대의 유적에서 공동발굴작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중국 요령성과 한반도 서북부에서 출토된 화폐중 일화전과 명화전은 고조선의 고유화폐로 파악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북공정을 거치면서 이런 견해들은 중국의 부정으로 깨지고 말았다.

평양 토성동 성안에서 고조선 유민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반량(半兩)거푸집(용범·鎔范)이 발견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 명도전

1990년 ‘북한고고민속론집’에서 손량구씨는 요동과 서북 조선에서 출토된 명도전은 고조선주민들이 남긴

화폐라는 주장을 폈다.

‘한국사’에서 윤무명위원은 청천강을 경계로 그 이북에는 명도전을 대표하는 연의 문화가,

그 이남에는 세형동검을 대표하는 고조선의 명도전 등 청동문화가 발달한 것으로 보았다.

장박천 전 길림대교수(2002년 별세)는 칼이 약간 굽은 형태의 원절식 명도전은 고조선에서 제조 사용된

것이라고 밝혔다.

연나라가 요동을 상실하기 전 조선후국(朝鮮侯國)이 제작 사용한 것이며 모양이 직선인 방절식 명도전은

연나라가 고조선을 치고 요동에 진출한 후 제작 사용한 것이라고 했다.

(명도폐 연구 속설) = 화동뉴스 3월호 게재

원절식 명도전 표면에는 “ ”자 문양이 방절식에는 “ ”자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 ”문양은 갑골문 “明”자에서

기원한 것이라 했다.

▨ 제명도폐

장교수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제명도폐(齊明刀幣)도 조선후국(고조선)이 제나라와 상거래를 하면서 남긴

화폐라는 주장을 했다.

제명도의 옛이름은 박산도(博山刀). 칼모양의 전면에 “ ”부호가 새겨졌다.

중국은 연나라가 제나라의 수도 임치를 점령했던 기원전 284~기원전 279년에 만들어졌다는 엇갈린 주장

이다.

▨ 반량전 용범

평양 동성동 토성에서 서한초의 4수반량전과 함께 나온 활석제인 반량전거푸집 3점의 출토는 고고학팀에

의한 발굴이 아니고 농부가 발견한 것을 일본인이 수집한 것이다.

한매는 전문(錢文)이 조각된 것이고 2매는 전배면 합형편(合型片)인데 테두리가 손상된 것으로 두께는

1.17㎝~1.93㎝였다.

주화의 거푸집이 발견되면 그런 주화를 그 지역에서 제조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고고학계의 상례였다.

그러나 그 시대는 화폐제조가 문란했던 시기였고 동이나 연이 아닌 석이라는 점을 미루어볼 때 사주(私鑄)

제작용 거푸집일 가능성이 있다.

또 고조선이 교역을 강화했던 점을 미루어 타지역으로부터 유입되었을 것으로도 보고 있다.

그러나 출토품을 놓고 연구해 볼만한 과제이다.

▨ 일화전·명화전

중국은 명사전(明四錢), 명화전(明化錢),일화전(一化錢)을 연나라말 제조된 3대 원전(圓錢)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화폐의 출토분포는 중국 중원지역보다 오히려 고조선 강역이었던 동북부와 압록강북안에

많았다.

독자적으로 나타나기보다 명도전 또는 후대의 반량 오수전과 함께 동반 출토되어 함께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크기가 작은 일화전은 모양이 큰 명도전의 보조화폐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북한 학계는 이 돈이 고조선에서 주조유통된 화폐로 보고 있다.

중국은 내몽고 자치구에서 거푸집이 발견됨에 따라 이 지역에서 주조된 것이라고 반대 견해다.

▨ 중국반응

명도전이나 반량전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명도전은 연의 강역 출토라는 도식이 굳어져 있다.

또 동북공정을 거치면서 고조선의 화폐제작 주장을 전면 부정하는 견해를 학술지에 발표, 정설화하고 있다.

이는 화폐가 갖는 특성을 전연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중화(中華)중심, 자국중심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다.

▨ 일본

1994년 다무라고이치(고고학자)는 종전까지 명도전 유적을한족(漢族)문화로 본 일본 고고학계의 학설을

뒤집고 요하 이동의 명도전 유적은 세죽리-연화 보유형과 선(先)고구려족이 남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 지역을 화이잡거(華夷雜居)지역으로 불렀다.

이는 명도전이 연과 고조선의 화폐라는 주장이나 다름없다.

러시아 고고학자 부찐이 최근에 작성한 명도전 출토지역의 지도도 거의 같은 내용으로 같은 견해이다.

중국이 특정화폐를 다각적인 검토없이 한정치체제의 전유물로 보는 것은 잘못 평가된 것이다.

과거의 역사, 지난날 강역의 경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현재 영토안의 유물을 모두 자기나라 제작품으로 보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화폐는 하나의 국가 단위를 초월하여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특히 명도전이 만들어진 전국시대는 고조선과 연의 잦은 전쟁, 동호의 퇴각 등으로 혼란한 시대상황을 감안

할 때 화폐의 출토를 곧바로 특정한 정치체제 내지 연과 같은 국가에만 연결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국제적인 학술세미나 등을 자주 개최하여 반대 의견을 잠재우고 설득 이해시킬 수 있는 단계로

발전시켜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자를 잘 몰라 외면하고 있는 젊은층들에게 고화폐 수집연구를 장려하고 몇 안되는

고고학 화폐연구층을 적극 육성, 그 층이 두터워져야 한다.

또 글로벌시대에 맞는 그 분야의 학술연구가 활발해져 고화폐에 대한 실제와 연구결과가 타국을 능가하는

선진수준의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것이다.

고조선 초~중기 동아족인 한족(韓)의 야금술과 주조기술 등은 중국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수백년이 앞서고

있었다.

주화 제조에서도 엽전의 동그라미에 네모구멍(形圓孔方)을 가장 먼저 낸 선조들의 혁신적인 선진기술

(B.C642년) 등은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자신감의 역사적 배경이 될 것이다.

글 / 한영달 언론인·한국 고전연구감정위원회장

  
  
  
  
▲ 고대의 화폐 ‘도전(刀錢)’ 사진 위쪽부터 첨수도(尖首刀), 북한 학자들이 고조선 화폐로 주장하는 원절식 명도전, 원수도(圓首刀), 반수도(反首刀)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 전제훈



명도전에 대한 중국학계 연구 논문


“명도”폐 연구 續說


내용요점: 箕侯, 朝鮮侯, 樂浪朝鮮는 殷이 중국 동북 역사 발전과정에  남긴 중요한 구성 부분이다.

본 논문은 당대 고고학계 연구의 새로운 성과를 근거해서 볼 때 동한말에 사가들이 주석을 달았던 箕侯,

朝鮮侯가 모두 樂浪이 있었다는 견해에 관해 잘못된 주석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생각은 당시는 箕子가 東遷하여 요서에 있고, 朝鮮侯國이 아직 亡하지 않고 入海(樂浪)하기 전 활동

중심은 요동에 있었다고 제기한다.

동시에 이 논문의 중점은 역사적 사실의 연구와 출토된 刀幣 연구와 결합하여 두 式 刀幣와 관련된 문제를

짚어본 결과, 圓折式刀는 朝鮮侯貨幣이고, 方折式刀는 燕國화폐라는 새로운 견해를 내놓는다.

   “明刀”幣 面文에 囗인 圓折式刀幣와 面文이 囗인 方折式刀幣 두 式이 있는데, 이들에 대한 연구는 일찍

부터 있어왔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유적들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의 증가로 많은 도폐가 출토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연구도 전에 없는 성과를 얻었다.
이들 연구 성과들은 분포지점의 확인부터, 刀型변천, 개혁과정 및 刀幣 面文에 대한 연구에서 기뻐할 만한

발전을 거두었고, 금후의 연구를 위한 기초도 다지게 되었다.

이런 문제의 연구는 문물출토는 있는데 문헌기록이 없는 과제에 속하는 것으로, 실물과 문헌기록도 있는

것이나 문헌기재만 있는 연구보다 어려운 과정이다.

뿐만 아니라 연구방법에서 이 문제만의 특수성이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문제의 연구를 대충대충 일을 끝마칠 수는 없다.

오히려 선학들의 연구를 세심하게 분석하여 긍정적인 면을 찾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연구를 위해 사고할 만한 실마리를 제공하거나 또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결코 이들을 무시하면

안된다. 이것은 필자가 “명도”폐를 연구하면서 얻은 기본적인 견해이다. 그래서 “續說”이라고 제목을 지었다.

一, 현재 있는 연구 성과에 대한 긍정과 미해결로 남겨둔 것


   현재 折式刀幣와 方折式刀幣에 대한 연구로 얻어낸 성과는 주요하게 아래와 같은 세 가지이다. 
첫째, 고고학계는 오랫동안 꾸준한 노력으로 刀幣形制의 기원과 변화에 대해 기본적으로 일치된 견해를

얻었다.


1) 도폐의 발전과정은 尖首刀, 圓折式刀와 方折式刀이다.
2) 尖首刀가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圓折式刀는 尖首刀에서 기원하고, 尖首刀 기초 위에서 발전하기 시작

    하였다.
3) 方折式刀는 圓折式刀를 이은 후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의 연구들을 이렇게 정리할 수가 있다.  
尖首刀, 圓折式刀, 方折式刀의 발전과정에 대하여 이미 기본적으로 일치된 결과를 얻었지만, 이 도폐들이

만들어진 시대에 대해서는 학계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1) 尖首刀는 春秋시대보다 이르거나 春秋시대에 상당한다고 생각하는 견해.
2) 圓折式刀는 춘추시대 또는 戰國초에 속하고 方折式刀은 전국중기에서 연 멸망 때까지라고 생각하는

    견해.


이 중에서 尖首刀와 圓折式刀의 시간에 대해선 논하는 바가 약간 다르지만 모두 연구하는데 참고할 만하다.
위에서 볼 때 발전하는 시간을 보면 3자가 연속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춘추전, 춘추, 戰國의 燕멸망이다.

이 중에서 刀幣는 직접적으로 尖首刀에서 기원하는데, 이 도폐는 圓折과 方折 두 式의 다른 과정을 거친다. 


    둘째, 尖首刀, 圓折式刀과 方折式刀 산지에서 진행한 연구 성과가 상당히 풍부하다.

이미 출토한 刀幣분포지점과 범위를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주로 지금의 하북성, 요녕성과 길림성의 부분

지역에 있다.  

이런 점에 대하여 朱活은 尖首刀는 “전국초기로, 燕국경 내의 소수민족활동지역에서 주조한 화폐”라고 생각

하였다.

후에 《산동 치고성에서 출토한 첨수화를 논함-겸해서 첨수화의 몇 가지 문제를 논함(談山東淄故城出土的

尖首化(貨)―兼談尖首化的幾個問題》논문에서 Ⅰ형이 요녕에서 출토된 것을 근거로,Ⅱ형은 과거 요동에서

출토되고, 혹은 張家口, 承德등지에서 출토되었다고 말하면서, 尖首刀 문자 중에 囗(竹), 囗(■), 囗(魚) 등의

글자가 있는데, 이 지역들은 모두 고죽국과  접근해있거나 尖首刀는 당시 고죽족이 활동한 범위 내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陳鐵卿은 《흔히 보이는 고대화폐―명도(一種常見的古代貨幣―明刀)》논문에서도 “尖首刀는 하북성境內

에서는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尖首刀이후 도폐에 관하여는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刀幣에 두 가지 式이 있다는 것과, 그 산지는 燕國境內에 있고, 燕易下都를 중심으로 밖으로 발전

했다고 생각하는 견해이다. 


    셋째, 尖首刀, 圓折式刀과 方折式刀의 연구는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모두 결합하여 진행하였다.

일반적으로 尖首刀는 연국경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모두 연국이 관할하는 경내를 연구로 삼아, 동북의

孤竹, ■가 안에 들어가 있는데, 모두 燕에 속하는 지역이라고 본다.

동시에 기타 두 식의 도폐도 燕幣로 많이 본다. 


   이상의 3가지 면의 연구 성과에 대해 나는 매우 큰 발전과 진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들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1)“명도”라고 불리는 것은 일종의 도폐에 두 가지 式인지, 아니면, 두 종류의 다른 나라의 화폐인지,
2) 그 산지는 연국경에서 같이 나온 것인지 아닌지,
3) 燕중기 조선을 아직 정벌하지 않고 또 진번, 조선의 땅을 점령하기 전에 동북의 ■,

    조선은 연국에 속했는지 아닌지,
4) 囗,囗는 同一字의 변화인지 아닌지, 아니면 두 가지 다른 글자인지 아닌지 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이 바로 본문에서 논하려는 문제와 원인이다.

二,  圓折式囗刀가 朝鮮侯國貨幣라는 설


   3종 刀幣에 대한 연구 중, 尖首刀에서 圓折式刀까지를 일종의 幣制의 개혁과 화폐제도, 그리고 도폐상의

글자를 통일하였다고 보는 것에 대하여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圓折式刀가 燕幣인지, 아니면 동북(만주)의 箕子후대의 朝鮮侯國의 화폐인지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고 풀어내야 할 문제이다.

필자는 아래 세가지면의 논증을 통해 尖首刀는 孤竹侯, 기侯 때에 이미 있던 화폐이고, 圓折式刀는 朝鮮侯國의

幣制일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역사의 발전변천과정으로 보면, 尖首刀와 원절식도가 만들어진 지역은 모두 동북지역에 있다.

殷이 孤竹國을 지금의 하북성 盧龍縣地에 封하였는데, 출토한 孤竹器로 보면, 그 관할 범위는 지금의 遼河

이서지역을 포함한다.

그 땅은 옛날 嵎夷라고 불렀다. 孤竹은 姓이 墨台氏이고, 또 目夷氏라 불렀는데, 땅을 성씨로 부른 것이다.

墨台, 目夷는 同音異寫로 ‘明夷’라고도 부른다.

《史記․殷本紀》에 殷人의 후예에 目夷氏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殷末 箕子가 東遷하였는데 그 땅은 고죽과 가깝고, 실제로 孤竹의 屬地에 있다.

《易․明夷》에 “箕子之明夷.”라고 기재하고 있다.

사서기재는 “箕子適朝鮮”이다. “之明夷”의 “之”와 “適”은 뜻이 같은데 같은 사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잇다.


明夷와 朝鮮은 같은 땅에 대한 다른 기록이다.

예를 보면《後周文紀․周隴右總管長史贈太子少保豆盧公神道碑》에 “朝鮮微子之封, 孤竹伯夷之國.”

(《庾開府集》기록과 같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神道碑銘 역시 “朝鮮建國, 孤竹爲君.”라고 말한다.

이 조선은 바로 目夷, 明夷의 地이다.

遼寧 喀左에서 箕侯銘 청동기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고죽과 가까운 지역이다.

箕侯銘 청동기가 발견된 객좌지역은 고죽지역과 매우 가까운 지역이다.

朱活은 尖首刀 위에 囗, 囗, 囗등의 쓰여져 있는 글씨를 國族으로 불렀다.


요서에서 출토한 孤竹, 箕, 魚 등 청동기는 시간은 殷末에서 西周에 속하고, 첨수도의 시간은 연구에

따르면 春秋前 또는 춘추까지 연장될 것이다.

陳鐵卿 분석에 따르면, 원절식도의 “明”자는 본래 첨수도에서 따른 것으로, 첨수도 위에서 이 “明”자는

각종 行用標記雜字(雜字를 標記해 통행에 사용한)이므로, 燕國의 都邑명칭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朱活의 연구와 결합하면 첨수도가 사용되었을 때는 설명하면 “明”은 당시의 지역명칭으로

孤竹, 箕, 魚등 國族은 明夷지역에서 이미 첨수도를 사용하였고, 그 후에 동북에서 사용된 도폐는 이곳

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다.


箕子의 國稱은 箕侯로 불리는데 대략 서주부터 춘추사이에 있었고, 기후라고 불리우던 것이 춘추부터

朝鮮侯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원절식도는 춘추에서 전국초까지 있었는데 朝鮮侯國이 출현한 이후로, 지명 明夷(朝鮮)를 국명으로 고치

면서 동시에 화폐제도도 개혁하였을 것인데, 이때 弊面 위에 통일적으로 “明”자를 사용했을 것이다.


東漢末 역사서에 주석을 많이 달았던 應劭, 高誘는 사서에 주석을 달기를 “당시 낙랑은 조선후국이 소재한

지역이었고, 그곳은 箕子가 東遷한 땅이라”고 注를 달았다.

사서를 살펴보면 이것은 틀린 주석이다.  

《사기․조선열전》에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이 내용은

《한서․조선열전》도 같은 내용이다.

全燕은 戰國 燕 全盛시기를 가리키는데 “略屬眞番,朝鮮”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즉 眞番, 朝鮮의 토지를

점령하여 “자기에 속하게 하였다(以屬己)”라는 뜻이다.

《博物志․雜說》에는 “箕子居朝鮮, 其後燕伐之, 朝鮮亡入海爲鮮國師(君).”라고 기재하였다.

여기서 朝鮮은 國稱이고 즉 箕侯를 朝鮮侯의 朝鮮으로 고치고, 연에게 정벌당한 후, 진번, 조선 역시 연에

귀속하게 되어, 조선은 나라를 잃고 바다로 도망쳤는데, 이 바다는 반도를 가리키고 있다.

즉《한서․지리지》의 “낙랑조선”이다.

燕에게 토벌되지 않은 朝鮮侯國은 요동에 있어야함을 볼 수 있다.

연이 조선을 伐한 후, 原朝鮮地에 요동군을 설치하고, 眞番은 遼東郡外의 鄣塞地로, 서쪽은 요동군과

접하고, 낙랑은 요동동남쪽에 있으므로, 연국은 朝鮮후가 도망쳐 도달한 낙랑지역은 “연에 속하지 않았다.

(以屬己)”

그래서 나는 “원절식도 후에 나타난 방절식도폐가 燕幣이고, 燕國경내에서 생산하고, 연국이 진번, 조선를

점유한 후에 비로소 거기에 전해 들어온 것이다”라고 본다.

방절식도폐 시간은 전국중기에 연이 망할 때까지로 시간으로 분석하면 서로 일치한다.


    둘째, 문자의 계승관계로 보면, 원절식도는 동북에서 생산된다.

첨수도 위의 문자는 古拙한데, 어떤 것은 갑골문에 유사하고 그중 國族, 地名을 뜻하는 글자인데 갑골문

에서도 보인다.

“明”자는 囗으로 쓴다. 그 글자는 갑골문에서 원류한다.

周의 銘文에는 “燕”자는 “匽”로 되고, 즉 “囗”와 “匽”자는 유사하지가 않는데 역시 아마도 燕國名이 아닐

것이다.

“囗”자는 오늘날 “明”으로 많이 해석한다. 그러나 갑골문의 明字는 “囗”으로 한다.

金文에서는 “囗”으로 한다. 이 “明”字는 “囗”이나 “囗”에서 직접 원류하지 않고, 갑골문중의 “囗”에서

원류한다.

  郭沫若《殷契粹編》에서는 “萌”으로 해석하였다; 《周禮․占夢》에서 杜子春은 萌을 明으로 말하였다.

또 그 字는 “明”이 된다고 말하고 明字는 萌에 근거하는데 후에 明으로 썼다.

이 字로 보면 “匽”자와 무관한 것 같지만 반대로 오히려 “箕子之明夷”의 “明夷”와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箕子之明夷”의 “明夷”는 즉 “箕子適朝鮮”의 조선이다.

鮮은 또 讀音이 私의 同聲字로, 私, 斯音은 尸(夷)의 字가 通한다.

그러므로 明夷 두 자의 本音은 마땅히 “明尸”로 읽어야하는 것과 같다.

明夷가 殷人의 原書라는 것이 의심스러운데, 朝와 囗는 모양이 닮았다.

조선은 中原史書의 寫法이다. 또 “明”자는 또 “昌”으로 한다.

예로 《詩》에 “東方明矣”라고 하고 《說文》에서는 “東方昌矣”로 여겼다.

“昌”字의 古文은 “囗”이고, 籒文은 “囗”으로 하고, 篆書는 “囗”가 되고, “囗”와 形이 비슷하다.

“東方明矣”, “東方昌矣”의 “明”, “昌” 두 자는 모두 하늘이 장차 밝는 것(天將明)으로 역시 즉 朝이다.

이에 근거해서, “朝”자는 여기에서 마땅히 “昭”라고 읽고, “明”자와 통한다.


지금의 朝鮮語는  朝鮮 두 자는 여전히 “昭鮮”으로 읽는다.

마땅히 그 本音일 것으로, 舊 注音의 “潮鮮”으로 읽은 것은, 誤讀이라고 생각한다.

연이 昭王때, 조선을 정벌하여 진번, 조선 두 나라의 땅을 점유하여 조선은 나라를 잃고 도망가서(亡)

入海(樂浪)하였다.

연은 원래 진번, 조선지에 요동군과 鄣塞를 설치하였는데 遼東郡治址는 襄平(지금의 遼陽市)에 있다.

한서․지리지》襄平縣下 注로 “莽曰昌平”하였다.

昌平은 襄平前의 舊名으로, 平義는 “夷”가 되고, 昌平城名 역시 明夷(朝鮮)에서 원류한다고 볼 수 있는데

마땅히 箕子之後 에 箕侯를 조선후로 고친 國名과 城名이다.

殷人과 조선은 그 地를 明夷로 부르고 또 昌平이라 異寫(다르게 쓰고)하고, 明夷, 昌平을 中原史書에는

朝鮮이라고 썼다.

東漢末 이전에는 箕子나, 箕子이후의 朝鮮땅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지가 않다.

역시 당시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기재가 없다.

箕子, 朝鮮侯의  일에 관해서 아마도 西晉 武帝 太康2年 汲郡사람인 魏 安厘王塚에서 얻으진 수십차의

竹書와 다른 版本의《逸周書》를 얻었다.

淸나라 李錯은 《尙史․軒轅五帝夏商列傳》권1에서《汲塚書》를 인용하여 기록하길 “胤子(祿父)在比阝

(邶), 父師(箕子)在夷,奄, 孤竹而君之, 以夾煽王燼, 商可復也.”하였다.

邶은 王國維의 고증으로 燕이고, 奄은 산동에 있다. 그러므로 箕子는 夷에 있는데 明夷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세 땅은 고죽과 가깝다고 말했다.

張華는《博物志》에도 朝鮮왕은 이곳에서 낙랑으로 도망친 지역이라고 하였다.

北周, 唐때, 기자는 孤竹屬境에 있고, 조선은 요동에 있다고 기재한 것은 결코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니다.

刀幣面文의 변화 및 역사진행을 결합하여 분석하면 첨수도의 “竹”, “箕”와 “明”자에 竹, 箕가 明夷地에

있다는 역사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후에 기자가 강대해져 原地名(明夷, 朝鮮)을

국명으로 바꾼 이후에 舊幣制도 개혁하여 國名으로 面文을 통일한 것은 즉 箕子 후에 朝鮮侯國시기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원절식도이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가 과거에는 주의를 끌지 못했는데, 주로 동한말 이래 기자와 箕子之後의 조선이

낙랑에 있다고 계속된 생각의 영향을 받아, 燕昭王 全盛이전에 대해, 요서, 요동귀속 및 그 변화의 역사가

분명하지 않아, 기자와 箕子이후에 朝鮮이 모두 낙랑에 있었다고 잘못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기자의 明夷(朝鮮)는 遼西 箕후명기가 출토된 지방에 있는데, 李白《東夷雜考》에서도 이 說을 주장하였다.

箕子이후의 朝鮮侯國의 활동중심은 어디에 있는지에 관해서 사서에는 기재된 것이 없다.

그렇지만 사서에 나오는 것을 참고할 수는 있다.

예로《사기․조선열전》戰國燕全盛時, “嘗略屬眞番,朝鮮”이라고 기재하고,《索隱》에서는“略二國以屬己”

라고 하였다.

《한서․조선열전》顔師古 注에 “戰國時燕國略得此地”라고 했는데 모두 原眞番, 朝鮮地가 이미 연국이

침략하여 빼앗은 지역임을 말한다.

또《박물지》기재에 조선이 연에 정벌당해 조선은 토지를 잃고 亡入海(樂浪)하였기 때문에 箕子후의 朝鮮의

변화에 대한 기재는 매우 정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재에서 보면 연은 원래의 眞番이나 朝鮮땅을 점령하였지 결코 조선왕이 도망친 낙랑지역을 점유하지

않았다.

만약 朝鮮侯가 일찍이 낙랑에 있었다면 “亡入海”라는 표현보다는 “退居海”하였을 것이다.

燕國은 眞番, 朝鮮 두 나라 땅을 점유한 후, 조선에 요동군을 설치하고 진번에 鄣塞를 설치하였는데, 朝鮮

侯國의 舊地가 요동인데, 지금의 요하이서의 부분지역을 포함하는 곳에 있었음을 추측해 알 수 있다.

만약 첨수도의 産地가 竹과 箕의 지역에 있다고 말한다면 직접 첨수도와 계승관계가 있는 원절식도는

朝鮮侯國이 明夷(朝鮮)地를 國稱으로 바꾼 후에 明(囗)을 面文이 된 화폐였을 것이다.


    셋째, 箕子후의 朝鮮國이 존재한 시간과 그 경제무역의 발전으로 보면, 나는 원절식도 역시 朝鮮侯國에

속하는 화폐라고 생각한다.

원절식도는 燕나라 경내에서 나오지(出産) 않는 견해에 나는 동의한다.

원절식도폐가 사용된 시기에 대한 분석은 춘추에서 전국초까지라고 하는데 나는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箕子後의 朝鮮이 箕侯를 朝鮮侯로 바꾼 시간은 西周, 春秋間으로 推論하는데, 朝鮮侯가 강대해져 遼西以

西地를 점유한 후로 그 활동중심은 이미 요서에서 요동, 즉 지금의 요양으로 옮겨왔다.

이 때문에 원절식도가 요서에서 첨수도로 대체된 시간은 춘추에서 연이 조선을 정벌한 이 시간 내일 것이다.

연이 조선을 정벌한 것부터 연이 멸망할 때까지 지금의 동북 요하 동서쪽은 방절식도폐가 전해지고 분포

하는 지역이다.


《사기》,《박물지》등 기재에 따르면, 연이 조선을 정벌하기 전, 요동은 연에 속하지 않았다.

또 연과 조선 두 곳이 관계하지 않는 지역이 아니고, 箕子의 朝鮮侯가 점유한 지역이다.


   경제와 무역의 발전상황으로 보면, 箕子이후의 朝鮮은 지금의 遼河 동서쪽에 있고,

이때는 바로 그 朝鮮의 전성시기이다.

기후는 요서에 있는데, 기본적으로 은을 계승한 청동제조 기술은 지방과 민족의 특색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는데 비하여, 춘추에서 전국 초까지 발전하였던  朝鮮侯國 물질문명의 발전에 이미 뚜렷한 지방과

민족의 특색이 생겼다.

이것은 문헌과 고고학 두 방면에서 모두 증명할 수 있다.


《한서․지리지》에 箕子 “敎其民以禮義, 田蠶織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나라의 聚落은 山川을 部界로 하고, 都城, 邑落, 家室이 있다.

그 청동기문화는 이미 매우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시기 요하 동서쪽에서 출토한

東北系靑銅短劍을 보면 그 기술은 상당히 높은 발전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과 민족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사서에 기재된 箕, 朝鮮, 眞番지역은 그 북쪽은 지금의 길림성 경내에 도달한다. 箕子의 “八條之敎”는 箕子

이후의 朝鮮侯國과 낙랑조선이 東北에서 행한 가장 오래된 법령이다.

그 나라는 衣冠帶劍하고 文皮가 특산이고, 그리고 해상으로 齊나라와 상업무역을 하였다.

제나라지역에서 발견한 面文 囗도폐는 朝鮮侯國이 제나라와 상업왕래를 하면서 남겨놓은 實證이다.

사서에는 朝鮮侯國 鑄幣에 대한 직접적인 기재가 없다.


《한서․지리지》기재에 “相盜者,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하였다.

여기서 50만으로 계산한 것은 화폐일 것으로, 위에서 말하는 “相傷以谷償”으로, 곡식은 단독으로 계산할 수

없다.

그 時量谷器를 계산하는 단위로 계산한다.

원절식도 뒷면에는 숫자가 있는데 1에서 5000까지로, 아마도 幣面値를 대표할 지도 모른다.

만약 이렇다면 한 노예가 돈을 지불하고 자유를 얻는데 五千値의 刀幣 100매의 몸값을 내야한다.

이렇게 해야 노예주로 부터 일반평민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기자의“八條之敎”의 내용으로 보면, 朝鮮侯國은 당시 노예제국가였고 이런 규정은 분명히 노예주에게 유리

한 것이다.

조선후국에서 당시에 통행한 화폐는 明字를 面文으로 하는 刀幣였을 것이다.

따라서 50만 몸값은 아무래도 원절식도폐를 가르킬 것으로 생각된다.

三, “囗”은 “匽”으로, 연이 조선을 정벌한 후, 동북에 전해진 도폐이다. 


    고고학계 연구에 의거하면 囗도폐가 사용된 시기는 전국중기에서 연 멸망까지로, 方折式刀幣라고 불린다.

원절식도의 面文은 통일해서 “明”字를 사용했지만 도폐 뒷면 문자는 여전히 첨수도를 계승하였는데, 원절식

도가 첨수도에 대한 직접적인 상호 계승의 관계임을 설명한다.

그리고 囗도는 面文의 변화일 뿐만 아니라 뒤쪽문자(背文) 역시 많은 변화가 발생하였고 그 산지는 燕國

境內에 있는, 연이 새로이 주조한 도폐일 것이다. 
 

   현재, 두 식의 刀幣面文의 연구에 대해 아직 완전히 통일되지 않아 다수가 囗, 囗을 동일한 한 字로 보는

전후의 다른 변화는 “明”字로 해석하기도 하고 “匽”字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연구 중에 “匽”자로 보는 사람

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나는 囗을 “明”자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보고 “匽”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직은 협의검토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두 글자를 한 글자로 같이 해석하기의 전후 變形 역시 검토할 대상 내에 두어야할 것이다.

이 두 글자에 대한 비교와 사고를 거친 후, 나는 囗와 囗는 두 글자일거라고 생각한다.

글자의 결구가 다를 뿐 아니라 筆劃 역시 다르다.

囗자의 출처인 囗는 어떤 것은 囗라고 썼지만 構形에는 변화가 없다. 囗은 갑골문囗자의 출처인 “囗”에서

변화해 온 것이다.

그리고 囗의 출처인 “囗” 역시 囗가 없는 寫法이다. 囗자는 字書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필획으로 囗으로 예속되게 정할 수 있는데(隸定) 囗이 상형자라는 것이 매우 의심스럽다.

그 글자의 書寫, 象形과 音讀에서만이 그 글자가 “匽”자와의 관계를 찾을 수 있다. 


    첫째, 字의 象形體에서 音을 구한다. 囗은 분명히 眉目의 形을 모방하고 上部囗는 眉形이고, 下部는 囗는

眼形이 되는데 獨體의 象形字일 것이다.

마치 眉聲이 되는 글자를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眼은 이 글자의 音讀을 표시한다.

眼은《集韻》語限切, 又葉伊甸切, 음은 宴으로 예로 蘇轍의 雪詩: “終勝溪嶂長薰眼, 典衣共予成高讌.” 讌은

지금의 “宴”이 되는데 宴과 讌, 匽 讀音이 통한다. 囗은 眼(伊甸切)에서 소리를 얻은 것이다. 
 

   둘째, 字에서 定에서 音을 구한다. 오늘날 “日”字 역시 囗나 囗에서 지은 것이다.

囗자는 囗로 음을 정할 수 있고, 그 字 上部는 一이 되고, 下部는 囗이다.

“亘”자는 뜻을 二에서 취하고, 예를 들어 囗에서 囗를 짓고(되고), 음은 宣이나 桓이다.

日에서 亘을 만들고 隸書 囗에서 역시 亘으로 쓴다. 二字는 곧 混通하였다. 東北胡系에 속하는 민족 烏桓

역시 “烏延”이라고 했는데 “延”과 “宴”, “燕”, “匽”자와 音이 가깝다.

烏延은 그 族 本音일 것으로 字는 亘 (囗)을 따랐다. 생각건대, 북방에서 延, 沿으로 읽는 字音은 燕과 音이

같다. 그 字는 囗에서 소리를 얻은 것(得音)과 같다. 


    셋째, 囗의 別寫로 음을 구한다.《篇海類編》에는 囗字가 있는데 音은 宣으로 注讀했는데 즉 “亘”자이다.

그 필획은 囗類이고, 書寫의 편리를 위해 囗위의 一橫을 日字의 옆(側)에 두었다.

亘은 延으로 音을 읽을 수 있다. 이 字 역시 亘(囗)에서 소리를 얻었다. 囗은 囗字의 別寫라고 의심된다. 


    나는 이 囗자가 匽이 刀面 위에 있는 異寫라고 의심한다.

그 음독은 서로 같을 것으로 匽은 刀幣 위에서 美觀을 求하는(생각한) 특수한 寫法이다.

그 字는 “明” 이 아니고, “匽”일 것이다.

만약 이러한 추론이 잘못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동북의 조선후국과 연국은 모두 국명으로 幣를 이름 지었을

것이다.

이 囗字로 文을 한 방절식도폐는 시기로 보면 연소왕이 개혁하고, “燕國殷富”하며, 사회경제가 비속적으로

발전할 때, 주조를 시작한 도폐일 것이다.

춘추에서 전국초까지, 연국 영토는 넓지가 않았다. 중원제국과의 교류도 적었다.

그 북쪽에는 동호가 있고, 동에는 “조선요동”이 있었다.

그래서《사기․조선열전》기재에 그 동쪽은 “眞番, 朝鮮”이라 하였다.

조선은 즉 箕子之後의 朝鮮侯國으로 그 활동중심은 요동에 있다.

진번은 이 조선의 동쪽에 있다. 燕中期 강대할 때, 비로소 북으로 동호를 치고, 동으로 조선을 토벌하여,

요서, 요동, 진번의 땅(地)을 점유하였다.

그러므로 연소왕 이전의 고죽, 기자 조선을 燕境內로 보는 것은 적합하지 않고, 단지 燕境外에서 연, 제와

服事, 臣服이 발생한 동북지방의 諸侯伯國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연소왕 개혁 전, 사서에는 燕國 鑄幣와 관계가 있거나 연에 도폐가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자료의

기재가 없다. 고고학적인 발견으로 증명하길 燕易下都에서 출토한 방절식의 囗刀는 이시기에 주조한 것일

것으로 이것은 이 종류의 刀幣시간이 전국중기에서 연이 멸망까지와 완전히 부합한다. 이것이 그 첫째이다. 
 

   방절식囗도 산지는 연국 그리고 易下都를 중심으로 대외로 발전하였는데 그 幣가 동북으로 전해진 것은

燕이 요동, 진번을 점령한 후이다. 연문화가 동북에 전해진 후, 점점 동북에서 발전하고 우세해졌지만 원래

朝鮮侯문화는 여전히 동북에 남아있거나 존재하여, 이 때문에 그 초기 囗도는 囗와 필연적으로 같이 존재

하는(사용되는)상황이 생겼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동북에서 두 종류의 도폐를 연구할 때, 근원을 밝혀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근원을 찾아내는 중에 당시 역사의 실제상황과 부합하고 인식 상에서 정확함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는 발전하고 변화한다. 동북도폐는 이런 발전변화의 특정역사단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동북도폐연구

에서 각종 기재의 진위에 대한 판별분석을 떠날 수가 없다.

漢末 사서에 주석을 달은 사람들은 箕子, 箕子이후의 朝鮮侯國에 주를 달아 모두 낙랑에 있다고 하였다.

나는 사서기재중의 실제상황과 서로 부합하지 않는 誤注라고 생각한다.

나는 연구 중 이 점을 주의하고 있지만 아직도 스스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연구가 더 필요하다. 이점이 두 번째이다. 


    연이 진번, 조선을 점령한 것은 연소왕이 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할 때로, 이 이전의 진번, 조선은 연에

속하지 않는다.

당시 요동의 개념은 遼水印이지만 또 遼水以西의 부분지역을 포함한다.

이를 따르면《戰國策․燕策》기재의 “燕東有朝鮮遼東”은 記事가 연소왕이 조선을 정벌한 전이기 때문에

조선과 요동은 두 개 지역명이라고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조선은 國稱, 즉 朝鮮侯國이다. 당시 遼東郡이 아직 건립되기 전이기 때문에 요동은 지역호칭이다.

후에 연이 진번, 조선을 정벌하고, 조선이 나라를 잃고 亡入海(樂浪)하여 진번국은 요동군 동쪽에 있고,

낙랑은 요동군 남쪽에 있고, 이 때문에 “조선요동”은 바로 조선은 요동을 가리킨다고 생각하고 亡人海

후의 낙랑조선을 가리키지 않을 것이다.

즉 朝鮮侯國의 요동은 똑같이 연의 요동이라고 이해할 수 없고, 연과 조선이 두 개의 돌보지 않는 지역이

라고 이해할 수 없다.

더욱 亡入海한 것과 이미 亡入海한 두 지역을 같은 것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箕子와 箕子이후의 朝鮮侯國의 연구에 대해 《사기》,《한서》,《위략》,《박물지》의 記事에 대한

상호 參校 후에 이론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동한말 역사서의 주석에 기자, 조선후를 모두 낙랑에 있다고 한 설을 선택하지 않고, 다른 연구의

길을 찾았다.

어떤 사람은 나의 연구가 “離奇古怪, 不足爲据”하다고 질책한다.

문제에 대한 연구의 정확여부는 반드시 고인의 說을 지키는 위에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또 반드시 근인

들의 다수 주장을 따르며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고인의 주석한 “奇”를 벗어났고, 그밖에 나 역시 고서 중에서 나의 연구할 길을 찾았다.

만약 이것이 바로 “離奇古怪”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감당하길 원한다.

“不足爲据”하다고 것에 관해서는 아마도 이 종류의 문제에 대한 연구가 시작 중에 있기 때문에 전면적이고

계통적인 견해를 아직 정리해 내지 못했다.

“不足爲据”라고 말하는 것에 나는 역시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어떠한 증거를 선택하여 연구하든 연문화가 동북에 전해져 동북지역에 원래 侯伯國에서 군현으로 발전시

켰고 동북의 남부에 봉건의 새로운 시대를 들어가게 하였다.

견해는 모두 서로 같은 것이다. 화폐제도를 말하면 첨수도는 앞에 있었고, 원절식도폐는 그것을 이었다.

마지막이 방절식도폐라는 것은 共認되었다.

어느 한 나라에 속하느냐가 아직 일치하지 않을 뿐이다.

문제는 방법을 열어놓고 연구하여 사서에 기재된 사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한다.

箕子이후의 朝鮮에 대한 연구도 그래야 한다. 이것이 세 번째이다.


    나는 화폐에 대해 이전에 연구한 것이 없다. 최근에 퇴직한 후 시간을 이용해 殷人과 殷이 동북에 남긴

흩어져있는 기재들을 정리하여 이 문제를 언급하고 이 문장을 썼는데 그야말로 異論이 있는 類에 속한다.


(장박천(張博泉))





 

 



 

 

 

 

 

 

 

 

 

 

 

 

 

 

 

 

 

2

 

 

 

 

 

 

 

 

 

 

 

 

 

 

 

 

 

 

 

 

 

 (사진:풍)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