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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료

《만주원류고》는 삼한사(三韓史)의 비망록(備忘錄)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5.11.02|조회수400 목록 댓글 0

《만주원류고》는 삼한사(三韓史)의 비망록(備忘錄)이다



삼한(三韓)과 삼조선(三朝鮮)의 기원과 변천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으로 나누어 관경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를 봉하여 마한

(馬韓)이라고 하였다. 달지국(達支國)에 도읍하였으니 역시 백아강(白牙江)이라고도 불렀다.

웅백다가 재위 55년에 죽으니 아들 노덕리가 즉위하였다.

이말은 《환단고기》<마한세가>1세 마한 웅백다(熊伯多)조에 나오는 대목이다.

달지국.백아강등 낯설은 단어들이 등장한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강역 또는 역사적인 지명의 위치를 확실하게 비정하는것이 생명이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건국이래 계속하여 위치가 이동된 관계로 한자리에 고정시키기는 어렵다.

더구나 정치적인 이유로 위정자들로부터 고의적으로 사실을 은폐하기도 하고 왜곡시켰던 관계로 숨겨진

위치를 찾기란 더욱 어려운것이 현실이다.

지금 밝히려고 하는 중기 삼한과 삼국의 발흥지인 장산군도는 명나라 이후 수백년동안 접근이 금지된

금단의 땅이었다.


요동반도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섬주민들도 모두 쫓겨나 육지로 이동되고 섬은 완전한

공도로 비워두었다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의 조차지로 부분 재개된것이다.

그 후로 조선인들에겐 사실상 완전이 기억에서 조차 사라진 땅이었지만 다행이 당시를 기록했던 사료들이

남아있어 어렵게 다시 복원하게 되었다.

설마 하는 의심으로 믿기가 어렵다면 사서의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하시기를 권한다.



민족사서 《규원사화》<태시기>는 삼한에 대한 기원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시씨 역시 대대로 곡식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았으며, 후세에 치우씨․고시씨․신지씨의 후예들이 가장

번창하여 융성하였다.

치우씨의 부족은 서남의 땅에 자리를 잡았고, 신지씨의 부족은 북동의 땅에 많이 정착하였는데, 오로지

고시씨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더 이동하여 변진(辰弁)의 뭇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삼한(三韓)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삼씨(三氏)의 후예들은 또한 아홉 갈래로 자세하게 나누어지는데, 곧 견이(畎夷)․우이(嵎夷)․방이(方夷)․

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暘夷)의 무리들이 모두 같은 조상의 다른

가지일 뿐, 서로 그리 멀지는 않다.

‘이(夷)’자는 큰 활을 지칭하는 것이다. 치우씨가 칼과 창이며 큰 쇠뇌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로 사냥하고

전쟁함에 있어서 이러한 것을 병장기로 삼으니 중토의 뭇 부족들이 큰 활의 쓰임을 매우 두려워하였으며,

그 위풍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곤 한 지가 오래되었기에 우리 민족을 일컬어 ‘이(夷)’라고 한 것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르기를 「이(夷)는 ‘크다(大)’는 것과 ‘활(弓)’에서 유래하였으며, 동방의 사람

을 말한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중니가《춘추》를 짓기에 이르러 이(夷)의 이름을 마침내

융(戎)이나 적(狄) 등과 아울러 비속한 명칭으로 삼아 버리니, 분할 따름이다.

뒷날 견이와 풍이는 따로 서남으로 옮겨가서 항시 중토의 여러 부족들과 서로 엎치락 뒷치락 세력을 다투

었는데, 풍이는 바로 치우씨의 일족이다.


《환단고기》<마한세가>에는 19세 마한 여원흥(黎元興) - 53년간 재위-  단군 색불루(索弗婁)가 아버지

께서 이루어 놓으신 힘을 계승하여 병권을 장악하니, 진한(辰韓)은 스스로 무너졌고 나머지 두 한도 역시

이길 수 없어서 패해 버렸다. 새임금이 백악산(白岳山)에 도읍을 골라 세우니 여러 욕살들이 아무도 승복

하지 않았으나. 여원흥(黎元興)과 개천령(蓋天齡)등이 명을 받아 저들을 설득했다.

이에 모든 욕살들이 빠짐없이 따르게 되었다.

병신(5917-BC1285)년 정월 마침내 녹산(鹿山)에서 즉위하니 이곳을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한다.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을 삼조선이라 하다. 조선이란 관경을 말한다. 진조선은 천왕이 몸소 다스리고

땅은 곧 옛날의 진한대로 하고 저이는 천왕이 친히 다스리도록 하니, 삼한이 모두 하나같이 명령에 복종

하였다. 여원흥에게 명하여 마한이 되어 막조선을 통치케하고 서우여로 하여금 번한을 삼아 번조선을

통치케 하였다. 여원흥이 이미 대명을 받아 대동강(大洞江)을 장악하니 역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무자년 마한은 명을 받고 도읍에 들어와 간하기를 도읍을 영고탑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가하다고 하시며 이에 따르지 않았다. 여원흥이 죽으니 기축년에 아들 아실이 즉위하였다.


《단군세기》(1)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조에는 삼한에서 삼조선으로 바꾸는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병진 원년(BC 425) 3월 큰 물이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단제께서는 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들을 정벌하니 적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절로 괴멸하니 마침내 우화충을 죽여

버렸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들의 추앙을 받는바 되어, 마침내 3월 16일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이름을 대부여라고 고치고 삼한은 삼조선이라고 바꿔불렀다.

이 때부터 삼조선은 단군을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했지만 전쟁의 권한에 있어서는 애오라지 한 분

에게만 맡겨 두지는 않게 되었다.

7월에는 해성을 개축하도록 하여 평양이라고 부르도록 하시고, 이궁을 짓도록 하였다....하략


※여기서 주시해야 할 대목은 해성(바다에 성)을 개축하여 평양이라고 부르게 하였다는 대목이다.

   따라서 평양성은 바다에 새운 성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삼한사(三韓史)의 비밀은 의외로 《만주원류고》에서 터져 나왔다. 

이 책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학자들만도 문무겸비한 전문학자 35명이 동원되었고 17세기 청나라는 고증학

(考證學)을 도입하여 이 책의 곳곳에 지명·인명·관명 등에 그 연원을 고증하려고 노력하였다,

우리의 역사와 관련해서는 삼한(三韓)과 삼국의 위치를 만주 지역으로 보았고, 당나라 때 신라의 경주(慶州)

를 일컬었던 계림(鷄林)을 음운이나 지리적 연혁으로 보아 오늘날의 중국 동북지방인 길림(吉林)으로 보았다,


뿐만 아니라 금나라의 시조 아골타(阿骨打)의 선대가 신라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 삼한이 그들의 주장처럼 만주지역에 있었다면 삼한을 모태로 탄생한 삼국 또한 만주지역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이처럼 확실한 기록을 왜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부정하고싶어하는가.요서와 요동의 전삼한설(前三韓說)을

심층 해부한다.



<중국역사지도집>은 통일신라의 강역을 평양의 대동강 계선에서 함경도 원산만 이남으로 그었다.

이는 《만주원류고》(2)의 기록을 완전히 왜곡한것이다.

이 지도대로라면 신라는 평안북도와 함경북도로는 진출한 사실이 없는것이다.

따라서 당나라로 부터 인정을 받았던 신라의 국경선은 개주의 패강(압록수)을 경계로 하는 국경이었다.

지도에서 신라의 제1차 국경선은 광령에서 계림까지었고,제2차 국경선은 개주에서 청하의 발원지까지다.


 


<지리도>《무경총요》는 압록수를 고려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3)

지도에서 압록수는 장백산 말갈지에서 발원한다. 그 압록수의 경로는 서쪽으로 해주와 은주 사이를 지나

요동만으로 흐른다.이곳이 신라와 발해(거란)와의 국경선이었다.

이곳이 즉 당나라때 마자수인것이다. 지도를 그린 요나라 당시의 고려국은 왕건의 고려를 말한다.


 

삼한 이동설은 처음 신채호가 《전후삼한고》 및 《조선상고사》에서 제시한 논거로써 그후 정인보의

《조선사연구》와 안재홍의 《조선상고사감》에서 이해를 같이 하고 최동과 문정창등 일부 재야사학자에

의해 지지를 받아왔다.

러나 학계에서는 신채호와 정인보 이후에 이렇다할 논문이 나오지 않다가 이병도가 《삼한문제의 신고찰》

에서 삼한에 관한 연구를 한 이후 삼한 이동설은 무시되어졌다.

삼한 이동 또는 삼조선 분립에 관련된 이론은 문헌에 간간히 보이는 발조선(發朝鮮), 발식신(發息愼), 번한

(番汗),진번조선(眞番朝鮮) ,막조선(莫朝鮮) , 번조선(番朝鮮)등을 파악하여 조선이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

으로 정치상 분립되어 다스려 졌다는 논거다.

이에 따르면 진조선은 고조선 통치체제의 중심으로 단군이 있는 곳이며 막조선과 번조선은 부왕(副王)이

있는 곳으로 진조선의 간접적인 통치를 받았다는 것이다.

진조선은 대략 요하 동쪽의 남만주와 요동, 압록강 이북의 만주에 이르며 막조선은 한반도 ,번조선은

중국의 동북지방에 위치하였다고 하였다.

특히 신채호는 고조선이 B.C4세기에 이르러서 번조선의 기후왕이 왕을 칭하고 나서는데 이때부터 본격

적인 삼조선 분립시대가 도래하였다고 하였던것이다.


*특히 번조선이 망한 후 그 유이민의 일부가 한반도에 있는 막조선(마한)으로 이주해 변한부와 진한부를 

 이룸으로써 후삼한이 세워졌다고 하였는데 이 대목에서 마한을 한반도로 비정한 추론이 아주 잘못된 

 인식이었던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 마한은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의 남쪽해안인 장산군도에 있었기 때문이다.(필자 주)


전삼한을 인정한 대표적인 학자는 신채호, 정인보, 안재홍, 최동,문정창 등이었다.

그중 최초로 이 논거를 주장한 신채호는 <전후삼한고>에서 삼한 이동설을 중심으로 하여 삼조선 분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미지


첫째, 단군왕검은 삼신오제의 개념으로 국가이념을 삼아 신한, 불한, 말한의 삼한을 세우고 삼경을 두었

으며 그 아래에 돗가, 개가, 소가, 말가, 신가등의 5부제도를 두었다.

둘째, 삼조선의 위치에 관하여서는 신한은 '아스라' 즉, 지금의 하얼삔에 수도를 삼아 지금의 길림, 흑룡,

등 만주를 영역으로 하고 불한은 '아리티' , 지금의 개평을 수도로 하여 요서일대를 영역으로 했으며

말한은 지금의 평양을 수도로 하고 한반도를 그영역으로 했다.


*둘째 삼조선의 위치에 대하여 신한 즉 진번조선을 지금의 하얼빈으로 하고 번한 즉 예맥조선을 개평지역을

중심으로 요서일대를 점유했다는 사실과 말한 즉 낙랑조선을 한반도의 평양으로 비정한 사실은 후학들에게

크나큰 혼동을 이르키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게된다.


셋째, 삼조선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분립되어 독립국가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한 시기는 BC4세기 경부터이다.


넷째, 그 성(姓)에 관해서는 신조선은 해씨(解氏)로 단군왕검의 자손이며 불조선은 기씨(箕氏)로 기자의

자손이며 말조선은 한씨(韓氏)이다.


*이대목에서 기씨와 한씨는 같은 성씨로서 한씨다.


다섯째, 삼한 이동설을 강조하여 신,불 양조선이 망한 후에 한반도의 말조선에 그 유이민이 흘러들어와 각각

진한과 번한을 세워 마한과 더불어 삼한이 형성되었다.


*이대목에 난민들이 한반도의 말조선으로 흘러들어와 각각 진한과 번한을 세워 삼한이 성립되었다는 주장은

요동영토를 포기하게하는 크나큰 실수였다.


정인보는 삼조선 분립에 관해 따로 논문을 내지는 않았지만 《조선사 연구》에서 신채호의 주장에 동의 하였

으며 안재홍도 조선이 세 개로 분립되어 다스려진 것으로 파악하여 신채호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신채호 이후 삼조선 분립에 관하여 심도있게 연구한 사람은 문학박사이자 의학박사인 최동이다.

그는 《조선상고민족사》라는 연구 논문집을 내어 고조선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연구를 하였다.

그는 삼조선의 본격적인 분립시대를 신채호와는 달리 기자(奇子)조선시대(BC1200 - BC194)로 파악하였다.

특히 은나라에서 3천명을 이끌고 온 기자(箕子)에 관하여는 단지 번조선에 머문 것 뿐이며 후세에 번조선

왕인 기자(奇子)와 혼동하여 기자(箕子)가 조선을 다스린 것처럼 오도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후에 밝혀진 바로는 잘못된 해석이었다.

문정창도 이에 동의하였는데 진,번,막 삼조선 이외에 예맥조선이 더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고조선의 통치국이라고 할수 있는 진조선을 진국(辰國-총통치국)이라고도 표현을 하였던 것이다.

삼국지》에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라는 기록과 《후한서》에 "삼한은 모두 옛날의 진국이었다."라는

내용은 진조선(진한)이 곳 진국이었으며 진국(진조선)이 삼한을 다스린 총통치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 번조선의 '번'은 한국어의 '뻘"에 해당하는 것으로 음으로는 발(發), 맥(貊), 변(辯), 변(弁), 변(卞),번(番)

으로 표기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번조선은 《관자》에 발조선(發朝鮮), 《사기》에 발식신(發息愼), 발숙신(發肅申),예맥조선(濊貊

朝鮮), 맥(貊) 등으로 표현이 되고 후에는 변한(變韓),변한(卞韓),번한(番汗) 등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또 막조선의 막은 한국어의 '마"에 해당하는 것으로 남(南)을 뜻하며 남풍을 '마파람' 남산을 '마뫼'라고

하는데서 알 수 있다.'마'는 한자로 목(木), 마(麻), 매(梅), 마(馬) 등으로 표기할 수 있어 후에는 막조선이

마한으로 표기되었다.

삼조선은 시대에 따라 중국문헌상에 여러가지로 표기되었다.하나라때의 기사로 《사기에는 "북으로는

산융과 발식신(發息愼), 동으로는 장이(長夷)와 도이(島夷)를 무마시켰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산융은

번조선의 관할국이며 발식신은 번조선,장이는 진조선,도이는 바다건너 막조선을 일컫는 것이다.


*이대목에서 발조선(發朝鮮), <사기>에 발식신(發息愼), 발숙신(發肅申),등은 모두가 '뻘'을 앞에 둠으로

해상에 있었던 장이.도이등과 같은 바다안에 있었던 나라였다는 점에 주의를 해야 한다.

바다건너 막조선을 한반도로 착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대체로 진조선은 중국문헌에 동호(東胡), 장이, 장인국, 대인지국(大人之國) 등으로 나타났고

막조선은 마한, 도이로 표기되었다.

번조선은 중국과 붙어있는 관계로 발조선,발식신, 번한, 예맥, 맥숙신, 맥, 예맥조선 등 다양하게 표기되

었고 그 관할국인 고죽국, 산융, 영지(令支)등으로 대치되어 나타나기도 하였다.

요수가 어디냐에 따라 요동, 요서의 위치는 물론 조선의 영역이 한반도 밖이냐 안이냐의 관점을 달리하기

때문에 요수의 고증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요하를 중심으로 그 동쪽은 요동, 서쪽은 요서라고 하였기 때문에 요동이나, 요서의 지명을 알면 요하가

어느강 이었는가를 알 수 가 있다.

서경》에 " 영주(營州)는 요동이다."라고 하였는데 《요사지리지》에 "영주(營州)는 본래 은나라때에는

고죽국이었고 진(秦)나라때에는 요서군에 속했으며 한나라때에는 창려군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요수를 기준으로 하여 요서와 요동을 구분하므로 즉 진개의 동정 전에는 오늘날의 난하가 요수였다는

이다.

한나라때 요동은 오늘날의 요동이며 당시의 요서는 오늘날의 하북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수의 경계는 진개의 동정 이후 난하에서 대요하로 변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창려현도 요동에서 요서군으로 바뀌었는데 원인은 요동만의 윤몰때문이었다.

그런데 《사기》에는 "요동에는 험독현이 있는데 조선왕의 옛 도읍지이다."라고 하였으니  험독이 창려

라면 당시의 요동은 오늘날의 요동이므로 험독현은 요동에 있었으며 요서에는 번조선이 위치하고 있으

므로 험독은 진번조선왕의 도읍이었다. 따라서 난하 서쪽에 있던 번조선은 예맥조선으로 불리었다.

이때부터 삼조선의 이름은 진번조선(진한).예맥조선(번한).낙랑조선(마한)으로 구분하게된다.


즉 《사기》에서 말하는 요동은 오늘날의 요동이며 험독현도 요동에 있다는 말이 된다.

한나라때의 기록을 살펴보면 《한서지리지》에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때의 낙랑군 패수의 동쪽은 준왕이 요동의 험독에 있던 왕검성에서 남쪽으로 후퇴하여 자리를 잡은 낙랑

조선의 왕험성을 말한다.(상세한 설명은 후술)


따라서 《삼국유사》가 말하드시 원래 마한의 수도가 평양이라고 한다면 낙랑조선의 왕험성이 고조선을

대표하는 수도가 되는것이다.

"마한은 평양의 마읍산을 따서 이름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한반도의 평양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위에서 말했드시 바다건너 막조선 즉 낙랑조선은 험독을 해자로 삼은 해중에 있었다.


 

신채호는 새롭게 등장하는 삼조선의 이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제 역사를 읽는 이들이 귀에 서투른 신조선( `진번조선' ), 번조선(`예맥조선') `막조선(낙랑조선')

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이미 놀랄 것인데 , 하물며 전사 ( 前史 ) 에 아무 구별없이 쓴 `조선 ( 朝鮮 ) '

이란 명사들을 가져다 구별하여 , 갑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진번조선이라 하고 , 을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예맥조선이라 하고 , 병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낙랑조선이라 하면 믿을 사람이 누구랴 ?


그러나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고구려 본기 ( 本紀 ) 에 동·북 두 부여를 구별치 않고 다만 부여라 씌었고 ,

신라 본기에는 크고 작은 등 다섯 가야 ( 加耶 ) 를 구별치 않고 다만 가야라 씌어 있으니 , 만일 전사

 ( 前史 ) 에 구별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구별치 아니하면 두 부여사나 다섯 가야사

( 加耶史 ) 의 본 면목을 회복할 날이 없을 것이 아닌가 ?


하물며 삼조선의 분립은 조선 고사에 있어서 유일한 큰 일이니 , 이를 구별치 못하면 곧 그 이전에

대단군 왕검의 건국의 결론을 찾지 못할 것이요 , 그 이후에 동북 부여와 고구려·신라·백제 등의 문화적

발전 서론 ( 緖論 ) 을 얻지 못할 것이니 ,

어찌 습견 ( 習見 ) 에 젖은 이의 두뇌에 맞추기 위해 삼조선의 사적 ( 事蹟 ) 을 구별하지 않으랴 ?


그러면 무엇에 의거하여 저들의 기록에 보인 조선들을 가지고 이것 이 진번조선이니 , 예맥조선이니 ,

낙랑조선이니 하는 구별을 내릴 것인가 ? 사기 조선에는 위만이 차지한 낙랑조선만을 조선 ( 朝鮮 )

이라 쓰는 대신에 예맥조선은 동호 ( 東胡 ) 라 일컬어서 흉노전에 넣었다 .


그러니 이제 사기, 흉노전에서 진번조선의 유사 ( 遺事 ) 를 , 조선전에서 예맥조선의 유사를 초출

 ( 抄出 ) 하고 , 위략이나 삼국지의 동이열전 ( 東夷列傳 ) 의 기록을 교정하여 이를 보충하고 낙랑

조선은 지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지나사의 필두에 오른 일은 적으나 , 마한 ( 馬韓 ) ·백제 ( 百濟 ) 의

선대는 곧 낙랑조선 말엽의 왕조이니 , 이로써 삼조선이 갈라진 역사의 대강을 알 것이다 .



잠부론(潛夫論) 의 한서(韓西)는 준왕이 떠나온 위만조선이다.


 

이병도박사는 그의 저서《한국사대관》에서 《잠부론》의 한서(韓西)문제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씨왕조의 최성기는 중국의 전국시대에 당하고 당시 조선은 지금의 대동강유역을 근거로하여 그 영토가

서으로 요동지방에 까지 뻗었었다.(즉 요하유역까지)...나의 주요한 논거는 첫째 후한 왕부의 잠부론(권9)

중에(상략)그후, 한서(韓西)(한동의 오기?)역성한(亦姓韓),위 위만소벌(爲 衛滿所伐),천거해중(遷居海中)

(남한지방)이란 것에 있다.이는 후일 위만에게 쫓겨 남천한 준왕의 성이 한씨(韓氏)였음을 말하여 주는것

이니,이 왕실이 어느때로 부터 한씨로 창시하였는가는 자세치 아니하나, 여하튼 준왕이전에 이미 그렇게

창시 하였던것은 위의 문면에서 알 수 있다.


또 《삼국지》<위지>한전에 의하면 준왕이 남천하여 자호 한왕이라 하고 《위략》에는 위만에게 억류된

준왕자및 그 친족이 한씨와 잉성(仍姓)하였다 한다.이는 준왕의 일족이 남북으로 갈려있었으나 전대로

한씨를 칭하였다는 것이니,자호 한왕은 그가 한씨였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것이다....하략


*이상에서 보는봐와 같이 마한땅에 도착한 준왕은 한왕이라 자칭하였는데 그의 성씨가 한씨었다는것이다.

그런데 '한'이라는 성씨는 그가 떠나온 조선땅에 남아있던 준왕의 왕자나 그 친척들도 모두 한씨라고 불렀

으니 한씨라는 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불러오던 성씨로 인정한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위만조선이 마한의 서쪽(韓西)에 있다는 대목을 두고 이병도박사가 문제를 제기한것이 아닌가.


삼한땅이 남한에 있다고 가정 한다면 위만조선은 북쪽에 있어야 하는데 서쪽에 있다고 하니 이게 틀린 주장

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위만조선이 마한의 서쪽에 있다는 말은 옳은 말이었다.

이문제는 당시 마한및 삼한땅 모두가 남한이 아니고 해도상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였다.문제중의 한서(韓西)의 주무대는 모두가 바다이기 때문에 내륙을 등장시킬 필요가 없었다.


천거해중(遷居海中)을 (남한지방)이라고 주(註)를 단 근거는 어디에서 온것일까.

남한지방이란 근거는 본문 이메지에도 없다.

따라서 한서(韓西)란 방향이 성립할려면 마한은 남천이 아니라 동천해야 맞다.


《삼국지》<위서>한전에는 다음과 같은 《위략》의 주석(4)이 있다.

한초(韓初),우거를 파하기 전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언을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동쪽의 진국으로

떠났는데 따르는 자가 2천여호(약 1만여명)였다.그 역시 조선과 서로 왕래를 끊었다.


*그렇다면 위만조선에서 동쪽 진국으로 떠났다는 얘기는 한은 고진국 (古辰國)《후한서 한전》이라고

하였으니 준왕이 계시는 한(韓)으로 갔다는 말이다.

렇다면 위만조선과 한(韓)은 동서(東西)관계가 성립되는것이다.

뿐만 아니라 위만조선이 대동강 평양에 있었다면 그 동쪽은 함경도가 되기 때문에 동지진국(東之辰國)이란

말이 성립하지않는다.


다음은 삼한의 땅이 바다의 섬에 있다고 주장한 《통고》(5)의 기록이다. 

 


/통전/변방전--/동이상/서략

 

진나라가 천하를 병합하자 회이와 사이는 집과 사람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천년의 역사를 가졌던 조선은 한 고제시 멸하였는데 무제 원수중(기원전 108) 그 땅을 열어 낙랑등 군을

설치하였다. 한말에 이르러 공손강이 소유하였고, 위,진이 다시 그 땅을 얻었다.

그 삼한의 땅은 바다의 섬에 있다.

조선의 동남쪽으로 있던 백제와 신라는 위.진 이후 삼한으로 분활되었다.

(주)[二0]朝鮮之東南百濟新羅魏晉以後分王(三)韓地 ***王을 三으로 교정


   


《조선지》... 서쪽은 황해인데 그 서쪽으로 대해 끝까지 고조선과 마한의 옛 땅이라는 대목이 있다.

따라서 고조선과 마한 땅이 황해바다 영역안에 있었다는 말이다.그 이후 고구려가 소유하였다고 하였으니

마한은 당시 한반도의 남한이 될 수 없다는 말이고, 당 고종이 고구려를 멸한 후 지킬 수 없게되자 신라가

그땅을 합병하였다고 하였으니 요동에 있던 고구려의 영토를 신라가 진출하여 당나라와 싸워서 찾았다는

말이다.

이후 신라 말에 요동을 궁예가 한때 점거하였고,이어 고려시조 왕건이 그땅을 계승 합병하였다고 한것이다..

따라서 신라와 고려의 요동진출설을 부정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역사왜곡이다.


청주한씨의 족보를 통해서 밝혀진 사실 하나는 기자 준왕의 이동 경로다. 

바다를 통하여 마한으로 옮긴 준왕은 당년(기원전 194년)에 마한도(馬韓島)로 도읍을 옮겨놓고  훙(서거)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준왕(準王)이 서거한후  다시 새로운 평양으로 옮겨서 도읍을 세웠다는 기록이다.

통설대로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떠나온 자리가 현재의 대동강 평양 이라면 강왕이 이미 떠나온 평양으로는

돌아갈수는 없는일이다. 그자리에는 위만이 조선의 왕으로 있을때이니까.

이때 강왕은 부왕이 왕가도(마한도)에서 서거하시자 계획된대로 근거리에 있던 대동강 평양으로 옮긴것

으로 보인다. 이곳 평양에서 장산군도 내역에 있던 삼한을 8대에 걸쳐 지배했다고 보는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동강 평양도 마한이었다는 근거를 얻을수 있다. 그리고 평양에서 발굴되는 낙랑유물들은

낙랑조선의 준왕의 세력에서 옮겨진 유물이라는 설명도 된다. 이 유물들은 낙랑왕 최숭이 마한도까지

옮겼다는 기록은 *《환단고기》<북부여기 상>에서 찾을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동강 동남쪽에 있던 낙랑토성은 북부여의 상장 연타발에 의해서 축성되었다는 사실도

《환단고기》 <북부여기>를 통해서 밝혀진것이다.

여기에서 연타발에 대한 기년의 의구심이 있긴 하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졸본국왕 연타발은 기원전 37년에 죽기 때문이다.



*《환단고기》<북부여기 상>


3세 단군 고해사 재위 49년 임신 원년 정월 낙랑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보물을 산처람 가득히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의 겨울이었다.

계축 42년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경신 49년 일군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 이해 9월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가 즉위했다.

 

준왕세력의 이동도    고평양(故平壤=사문도)→마한도(馬韓島=대왕가도)→신평양(대동강 평양=낙랑토성)


지도자료:향고도



최숭의 낙랑국은 위만에게 추방당한 준왕으로 부터 시작된다.

당시 준왕을 보좌하던 최숭은 낙랑국의 제후였다. 그는 준왕이 축출되기 1년전에 이미 보물들을 한배 가득

반출하였다고 《환단고기》(6)는 기록하고 있다.

그 보물들은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는 마한도로 옮겼다고 하였다.

여기가 익산 금마군이 아니라 해중에 있던 금주 마한도다.

그리고 그들은 주변에 있던 섬을 장악하여 삼한을 경영한것이다. 이때는 새로운 평양으로 옮겨가기 전이

었다. 새로운 한반도의 평양시대는 준왕이 서거함으로서 낙랑조선(번조선)시대는 종지부를 찍고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새로운 한(韓)시대가 열린것이다.


《환단고기》 <북부여기 상> 2세 단군 모 수리 재위 35년조에는 삼한의 출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다. 
정미원년(B,C 194) 번조선 왕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

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 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 마한이라 한다. 이에 이르러 변, 진한의 두 한도 역시 각각

자기들의 받았던 땅 백리를 가지고 수도도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무신 2년 단 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는 침범치 않았다.

기유 3년 해성을 평 양도에 속하게 하고는 황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매 그들에게 양곡을 풀어 주어 구제하였다.


*마한도로 옮겨갔던 준왕은 임시 정착지에서 일생을 마쳤으나 다음에 평양으로 상륙하기 위한 계획은 사전

에 상장 연타발을 시켜 성책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북부여기>를 통하여 밝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준왕의 천도를 어느정도 계획된 작전으로 보는것이다.

사전에 보물들을 옮겨간 사실이라던가 새로운 평양에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성책을 설치시켰던 사건들이

그렇다. 장군들을 포함하는 수천명의 백성들을 동시에 피란시켰다는 사실들은 계획된 작전이 아니고는

불가능한일이다. 위만과의 충돌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인명이 손실되었는가는 전연히 기록을 볼수 없다.





《삼국지》권 30  위지 동이전 한전의 원문에는 남천(南遷)이란 대목이 없다.

국내에서 발행된 사료에만 남한으로 남천했다는 대목이 추가된것이다.이것은 분명 후에 추가된 왜곡이다.



《삼국지》<위지> 동이전 원문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표한 번역문<준왕準王>은 그의 근신(近臣)과 궁인(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

를 경유하여 한(韓)의 지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로 되어있지만 국사편찬위원회의

윗부분 해석과 번역은 잘못된것이다.

바다를 경유한다는 말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바다를 경유하였다고 하였다. 원문은 '바다로 도망하여'다 이다.

그러니까 장수들과 좌우궁인들을 대리고 바다로 도망하여 마한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이라고 불렀다로

해야 맞는 해석인데 바다를 경유했다고 하였으니 다음에 나오는 해중(海中)까지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위략》(魏略)曰:에서 준왕(準王)의 자손과 친척으로서 <조선>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한씨(韓氏)라는 성(姓)을 사칭하였다.

준(準)은 해외(海外)[의 나라]에서 왕(王)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준(準)의 후손은 절멸(絕滅)되었으나, 지금 한인(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라고 하였다.


*위략에서 말하기를 조선에 남아있던 준왕의 자손과 친척들은 성씨를 한씨로 쓰고 있었지만 준왕은 해중

(海中)  바닷가운데 섬에 있으면서 서로 왕래를 끊었다.

그러나 준왕의 대가 절멸된 후에도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들이 한인중에 있었다.로 해야 옳을텐데 성씨를

사칭하였다고 하고 그리고 해외(海外)라는 말이 없는데도 해중(海中)을 해외로 왜곡한것이다.

한씨로 사칭하였기 때문에 왕래를 끊었다고 한 해석도 잘못된것이다.

그 원인은 위만이 한나라로 통하는 해로를 막고 통행을 방해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씨라는 성의 기원이 이미 시경 한혁편에 나오는 한성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기록도 밝혀져

있는 사실이다. 원문대로 해석을 했어야 한다. 아니면 그 대목에서는 주석을 달아 설명을 했어야 한다.

 

장산군도의 인공 위성지도다. 마한도가 있는 대왕가도



장산군도에서 본 대련의 비사성. 대흑산 아래로 보이는 도시는 새로운 공업 개발지역으로 굴뚝이 없는

산업체들만 입주가 가능한 곳이다. 세계적인 첨단 산업을 꿈꾸고 있는 경치가 뛰어난 고장이다.

이곳이 모두가 우리의 선조들이 개발하고 피를 뿌리며 지키던 낙원이었다는 사실을 후손들은 기억하여야

할것이다.


* 마한의 왕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馬韓九世王位諱號世系) (7)한씨족보


애왕, 휘는 준. 漢혜제 원년(B.C 194)정미년 도읍을 마한으로 옮긴후 그해 승하, 태조 문성대왕이 평양에

도읍을 정해 나라를 세운후 41세이고 마한 왕위는 8세를전하였다고 하였다.


*일세 <무강왕>일명 애왕,휘는 <준>은 정미(bc 194) 마한으로 이도하고 그해  훙(서거)하였는데 준왕은

일세 기자가 평양으로 들어가서 도읍을 세운후 41세 였고 도읍을 옮겨 <마한왕>8세까지 존속하였다..


조금은 애매한 구석이 있어 보충한다. 여기서 41세란 낙랑조선(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을 말한것이고

이 준왕이 조선의 왕으로서는 마지막이 되고 새롭게 한왕으로서 신평양시대가 열린후 8대까지 202년을

지속하였다는 말이다.

왜냐 하면 준왕이 고평양을 떠난후 마한도로 도읍을 옮기고 다시 그 후로 신평양에 상장 연타발을 시켜

성책을 조성하자 위만이 침범을 멈추었다고 하는 기록 때문이다.

그러나 신평양으로 옮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202년까지의 기록은 9세 계왕 기록에 나온다.


*준왕은 장도에서 위만에게 밀려 수천의 백성들을 대동하고 바다로 도주하여 마한을 공격하여 깨트리고

한왕이 되었다는 기록이다. 

그는 선인왕검께서 건국한 고조선의 평양에서 밀려나 장산군도의 마안도(마한도)에 들려 임시 도읍을

세웠다가 그곳에서 서거하자 후손들이 대동강 평양으로 상륙하여 삼한을 통치하였던 것이다.

 

《후한서》의 한전(8)에는 한은 삼종이 있는데 1 마한,2 진한,3 변진이라 한다.

마한은 삼한중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고,그 북쪽에는 낙랑,남쪽은 왜와 접한다.진한은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예맥이있고 변한과 접한다. 이들 나라중 큰나라는 만여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호인데 각나라

들은 산과 바다사이에 흩어져 있다.

삼한의 땅을 합하면 방4천여리이고 동서는 바다로 한계를 이룬다.이들 나라들은 옛 진국이다.라고 하였다.

통설과는 너무나 상이한 대목들이 많다.


마한의 북쪽으로 낙랑과 접한다는 표현이 맞는 얘기인가. 만약 익산군이 마한이라면 익산군의 북쪽 한계가

어디이기에 낙랑과 접한다는 말인가. 뿐만 아니라 마한의 땅이 서울까지라 하더라도 북쪽으로 대방을

거치지 않고는 낙랑에 접할 수 없다. 더구나 남쪽으로 왜와 접한다는 대목을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각 나라들은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있다고 한 대목은 무슨 말인가.삼한은 바다에 흩어져 있다는 말이

아닌가.이러한 기록들을 세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대충대충 끼어마친결과 삼한사는 완전히 왜곡되어 왔다.



*그런데 임나로 알려진 대마도라는 이름의 유래가 일본의 사료나 한국의 일부 통설에 대마도가 마한과

마주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하는것이다.

일본의 사문의당(沙門義堂)이 쓴 <일용공부약집(日用工夫略集)이나 왜훈간(倭訓간)이 쓴 <진도기사(津島

紀事)>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부산의 동쪽에 있는 대마도를 지칭한것이라면 참으로 당치 않는 괴변이 아니고 무엇인가.

마한은 삼한중에서 제일 서쪽에 산과 바다에 흩어져 산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동남쪽에 있는 대마도와 마주

할수있다는 말이 될까.


그렇지만 사실 일본의 사료 기록은 틀린말이 아니었다. 진짜 대마도는 서쪽으로 마한과도 마주보고 있기도

하였고, 동쪽으로 진한과 마주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말을 닮은 두개의 섬이 마주보고 있기도 하였다.

일본이 지금 부르고 있는 쓰시마는 한국말 발음으로 두섬과 같은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의 대마도는 1900년대에 일본이 노일전쟁을 위해서 한개의 섬을 뚫어 운하를 만들므로서 두개가

된것이다. 그러기에 기록에 보이는 대마도의 위치가 장산군도의 마안도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대마도는 마한과 신라의 중간에 끼어 있었다.




《진서(晉書)》 卷三十六 列傳第六 張華傳에는 다음과 같은 마한에 대한 기록(9)이 있다. 

마한을 설명하는 대목에 유주로 부터 마한 까지의 거리가 4천여리라고 하고 역세로 내부하지 않던 20여국

이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고 하였다.

그리고 산에 의지하여 바다에 둘려있다고 하였다.

만약 이것이 한반도의 남한을 지칭한것이라면 거리가 전연히 맞지않고 뿐만 아니라 마한이 산에 의지하여

바다에 둘려있다는 설명이 맞지 않다. 
 


양촌집제1권 응제시에는 다음과 같은 마한의 위치에 대한 대목이 있다.

<구구하다 저 한 바다 물가로세 / 區區鯨海濱>

내주(萊州) 바다에 항해(航海)하다.


열 길이라 바람돛 만곡의 배로       / 十丈風帆萬斛船
푸른 바다 아득아득 가이없구려     / 雲開蒼海渺無邊
물결에 별 매달려 서로 비추고       / 星垂雪浪相涵映
물은 은하에 부딪쳐 함께 연대라    / 水拍銀河其接運


반양산(半洋山) 향해 가서 장사를 슬퍼할망정 반양산은 산 이름인데 내주(萊州)의 바다 가운데 있다.

일명 오호도(嗚呼島)라고도 한다. (田橫)의 부하 5백 명이 자살한 곳이다.     / 可向半洋悲壯士


삼도라 뭇신선 찾아가진 않으련다   / 不須三島問群仙
오르락내리락 이 몸 몹시 흥겨우니  / 舟中偃仰堪乘興
넌지시 뗏목 타고 하늘로 오를 걸세 / 自是浮槎便上天

이달 22일에 10수를 명제(命題)하다.


[주D-001]전횡(田橫) : 진(秦) 나라 사람으로 본래 제(齊)의 왕족이었다. 뒤에 한신(韓信)이 제왕(齊王)

전광(田廣)을 파멸시키자, 전횡은 자립하여 왕이 되고 항우(項羽)를 섬겼었는데 한 고조(漢高祖)가 항우를

멸망시키자 전횡은 그의 무리 5백 명을 데리고 해도(海島)로 도망하였다. 고조는 사람을 보내어 부르기를

“전횡아 오라. 높은 자에게는 왕을, 낮은 자에게는 후(侯)를 주겠으며, 만일 오지 않으면 군사를 보내어

전멸시키겠다.” 하였다. 전횡은 두 객(客)과 함께 낙양(洛陽) 30리 밖에까지 와서 자살하니, 그의 객도

따라 죽었으며 해도에 있던 5백 명도 이 소식을 듣고는 모두 자살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을 슬퍼하여 이 섬을 오호도(嗚呼島)라 불렀다 한다.


[주D-002]삼도(三島) : 바다 가운데 있으며 신선이 산다는 영주(瀛洲)ㆍ봉래(蓬萊)ㆍ방장(方丈)의

삼신산(三神山)을 가리킨다.


상고 시대 개벽(開闢)한 동이왕(東夷王)


*이곳은 삼신산이 있었던 낙랑조선이다.

  즉 전삼한시 마한땅이었고,최치원이 고구려를 마한으로 불렀던 곳이다.


옛날에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 하강하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우고 따라서
단군(檀君)이라 호하였다. 때는 당요(唐堯) 원년(무진)이었다.


전설을 듣자니 아득한 옛날         / 聞說鴻荒日
단군님이 나무밑에 내리었다네    / 檀君降樹邊
임금 되어 동쪽 나라 다스렸는데  / 位臨東國土
저 중국 요 임금과 때가 같다오    / 時在帝堯天
전한 세대 얼마인지 모르지만      / 傳世不知幾
해로 따져 천 년이 넘었답니다     / 歷年曾過千
그 뒷날 기자의 대에 와서도        / 後來箕子代
똑같은 조선이라 이름하였네       / 同是號朝鮮


마한(馬韓)


아득아득 마한 땅을 더듬어 보니    / 渺渺馬韓地
구구하다 저 한 바다 물가로세       / 區區鯨海濱
세 나라가 분할하여 점령하더니     / 三方初割據
통일로써 마침내 화친되었네         / 一統竟和親
봉적이라 천년이 지나간 뒤에        / 鋒鏑千年後
사방 들엔 상마가 우거졌네           / 桑麻四野春
더더구나 성명의 시대 만나니        / 況今逢聖代
먼곳도 동인을 입었답니다            / 遠俗被同仁


*경해빈(鯨海濱)과 상마사야(桑麻四野)는 모두가 삼신산 주변해역을 말한다.

양촌 권근은 고려말 조선초에 역사지리학자였다. 그는 이 시를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호출에 따라 명나라에

갔다 묘도열도를 통해 돌아오는 길에 지은것이다.

그는 왜 삼신산에 이르러 단군조선의 건국에대한 고사를 토설 했을까.

그는 이미 단군조선의 건국지를 알고있으면서도 직설로 표현하지 못하고 간접표현 한것을 보면 당시 명나라

와 어려웠던 상황을 짐작케 한다.

 

왜 삼한(三韓)땅을 장산군도(長山群島)에서 찾아야 하는가?


《통고》는 삼한을 대방군의 동쪽 대해중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동남해이도(東南海夷圖)는 부여와 삼한을 요동반도 남쪽의 바다에 그려놓았다.

일반상식을 벗어나는 송나라때의 이 기록을 이해하면그동안 터무니없이 왜곡되었던 역사의 장막이

벗겨질것이다.



  《통고》(10)에는 삼한은 모두 대방군의 동쪽 대해중에 도읍하였고,동서쪽은 바다로 경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지도에서 조선이라고 표시된곳은 요동반도다. 그 남쪽으로 바다에 부여와 삼한이 표시되어있다.


요동반도의 남쪽 장산군도중 장자도는 삼한중 마한땅이다. 그 동쪽으로 진한과 변한이 분포한다.



지도는 숲이 무성하고 해발이 낮아 저습지에 가깝다는 마한이 있던 장자도다.

섬의 전체 모양은 마치 우럭을 닮은 모양이다. 기록대로 동쪽으로 진한과 변한이 있고,임라.가라가 대마도

처럼 보이는섬에 마주보고 있다. 마한의 땅을 동서 450리 남북 900리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만약 남한에서

마한땅을 기록에 맞도록 구분하라고 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장자도는 구획이 분명하다.

실재로 동서남북을 측량을 한 일은 없으나 비례적으로 지도를 재보면 동서1남북2 비율이 맞다.

 

또다른 대마도의 이름에 대한 참고기록이다.


< 현 대마도라고 불리는 섬은 남북 72km, 동서 15km, 넓이 714㎢의 조그만 섬이다.
이 섬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도 많은데 그 중에 특기할 만한 것은 일본인이라고 말해지는 사문의당(沙門義堂)

이 만들었다고 하는 일용공부략집(日用工夫略集)이라는 책에서는

대마도(對馬島)가 마한(馬韓)에 대(對)한 뜻이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마한과 마주 보고있어 대마라 한다는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분명히 현재의 대마도가 될수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마한을 한반도의 서쪽으로 비정한다면 동해에 있는 대마도와는 마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지도처럼 마한이 장자도라면 가능한 얘기다.그러나 이 문제는 위의 지도를 보면 두마리의 말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이것이 장산군도에 있는 대마도의 실상이다.


 

삼국의 위치를 설명한 25사의 <북사 열전과 구당서 열전. 통전 변방전.>에서는 통설과는 전연히 다른

기록을 하고 있다.


[25사]  북사/열전/고려중에서(11) 

*訪其方事,云:去遼東南一千餘里,東至柵城,南至小海,北至舊夫餘.


...방문했던 방사가 말하기를 고구려는 요동의 동남쪽으로 천여리인데, 동쪽으로는 책성(단동 봉황성)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소해에 이르며, 북으로는 구 부여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고구려의 영역밖이라는 말이다.


북사/열전/백제.모라(12)


백제는 동쪽 끝으로는 신라, 북쪽으로 고구려와 접하며, 서남쪽은 대해인데, 소해의 남쪽이다.

동서가 450리,남북이 900리다.


구당서/열전/동이/백제국(13)


백제는 그 본이 부여의 별종이다. 마한의 고지에 살며,경사(장안)에서 6200리다. 대해의 북쪽이며, 소해의

남쪽이다. 동북은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 바다를건너 월주,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르며,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통전/변방전/동이 상/백제(14)


진(晉)나라 이후 마한고지의 여러나라를 병합하였는데, 그 나라는 동서가 400리,남북이 900리다.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천여리 떨어져 있다. 서쪽은 대해이고, 소해의 남쪽에 있다.

나라 서남쪽으로 섬이 세개 있는데, 황칠수가 난다. 소하수 큰거와 유사하고  6월에 집을 짜며,칠기에

바르면 그 색갈이 황금색을 띤다. ***신라가 왜 남쪽이 되었는지는 알수 없음.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가 요동반도의 남쪽에 흩어져있는 장산열도의 내역을 말하는것이다.

 

주(1)四十四世 檀君 丘勿 在位二十九年

丙辰元年(紀元前425~397)三月大水浸都城賊大亂丘勿率兵一萬往討之賊不戰自潰遂斬于和沖於是丘勿爲諸

將所推乃於三月十六日築壇祭天遂卽位于藏唐京改國號爲大夫餘改三韓爲三朝鮮自是三朝鮮雖奉檀君爲一尊

臨理之制 而惟和戰之權不在一尊也七月命改築海城爲平壤作離宮


주(2) (今以契丹地形圖參校惟建安城不知處所其他地形逺近率同也東北至女真界約五百里西至遼河百五十里又八百八

十里至中京西六十里至鶴柱館又九十里至遼水館又七十里至閭山館在醫巫閭山中又九十里至獨山館又六十里至唐葉館

又五十里至乾州㣲北六十里至楊家砦又五十里至遼州北六十里至宜州又百里至牛心山館在牛心山北中又六十里至霸州

又七十里至建安館五十里至富水會安至中京三驛河各去七十里南至平州五十里自平州至幽州五百五十里北至瀋州百二

十里東南至鴨緑水九十里西南至錦州四百里北至黄龍府九百里西北至顯州三百里


주(3) ▶鴨綠水 高麗國西, 源出靺鞨白山, 水色似鴨頭, 去遼東五百里。高麗之中也, 此水最大, 波瀾清澈,

恃之以爲天塹, 水闊三百步,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水東南二十里分界, 至新羅國興化鎭; 自黄土岩二十

里西北至東京八百五十里, 南至海六十里。

《무경총요》전집 권 22

주(4)魏略曰:初,右渠未破時,朝鮮相曆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주(5)▶ 其三韓之地在海島之上,《통전》

 /選自【古籍十八種】/通典/邊防典凡十六卷/卷一百八十五 邊防一/東夷上/序略
秦并天下,其淮、泗夷皆散為人戶.其朝鮮歷千餘年,至漢高帝時滅.武帝元狩中,開其地,置樂浪等郡.至後漢末,

為公孫康所有.魏晉又得其地.其三韓之地在海島之上,朝鮮之東南百濟、新羅,魏晉以後分王韓地.


[二0]新羅又在百濟之東南,倭又在東南,倭,烏和反.隔越大海.夫餘在高麗之北,挹婁之南.其倭及夫

餘自後漢,百濟、新羅自魏,歷代並朝貢中國不絕.[二一]而百濟,大唐顯慶中,蘇定方滅之.

(주)[二0]朝鮮之東南百濟新羅魏晉以後分王(三)韓地 「南」下原有「也」,清人擅增,今據北宋本、明抄本、

明刻本、王本刪.「王」原訛「三」,據北宋本改正.
[二一]歷代並朝貢中國不絕 「中國」原脫,據北宋本、明抄本、明刻本、王本補.
其三韓之地在海島之上,朝鮮之東南 百濟、新羅,魏晉以後 分王(三)韓地.


주(6)《환단고기》<북부여기 상>

二世檀君 慕漱離 在位二十五年丁未元年番朝鮮王箕準久居須臾嘗多樹恩民皆富饒後爲流賊所敗亡入于海而

不還諸加之衆奉上將卓大擧登程直到月支立國月支卓之生鄕也是謂中馬韓於是弁辰二韓赤各以其衆受封百里

立都自號皆廳用馬韓政令世世不叛戊申二年帝遣上將 延타勃設城柵於平壤以備賊滿滿赤厭苦不復侵擾己酉

三年以海城屬平壤道使皇弟高辰守之中夫餘一城悉從糧餉冬十月立京鄕分守之法京則天王親總衛戌鄕則四出

分鎭恰如柶 觀戰龍圖知變也辛未二十五年帝崩太子高奚斯立

三世檀君 高奚斯 在位四十九年壬申元年正月樂浪王崔崇納穀三百石于海城先是崔崇自樂浪山載積珍寶而渡海

至馬韓都王儉城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癸丑四十二年帝躬率步騎一萬破衛賊於南閭城置吏庚申四十九年一群

國遣使獻方物是歲九月帝崩太子高于婁立


주(7)1世 <武康王> 一云<哀王>, 諱<準>, 丁未(BC 194년) 移都<馬韓>, 其年 薨<哀王>己入於都<平壤>. 四十

一世則 <馬韓>王爲八世...하략


주(8)《후한서》 韓傳에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 樂浪 南與倭接

辰韓吊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 ... 焉 大者萬餘戶 小者數千家 各在 山海間 地合方四千餘里 東西以海爲限 皆

古之辰國也 〉


주(9) 東夷馬韓新彌諸國 依山帶海 去州四千餘里。 曆世未附者二十余國,並遣使朝獻。


주(10) 三韓皆都帶方郡之東大海中東西以海為限’ 


주(11)/選自【二十五史】/新校本北史/列傳/卷九十四 列傳第八十二/高麗
太武時,釗曾孫璉始遣使者詣安東,奉表貢方物,并請國諱.太武嘉其誠,詔下帝系名諱於其國.使員外

散騎侍郎李敖拜璉為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東夷中郎將、遼東郡公、高句麗王.敖至其所,居平壤

城,訪其方事,云:去遼東南一千餘里,東至柵城,南至小海,北至舊夫餘.


 주(12)/選自【二十五史】/新校本北史/列傳/卷九十四 列傳第八十二/百濟牟羅國
其國東極新羅,北接高句麗,西南俱限大海,處小海南,東西四百五十里,南北九百餘里.


주(13) 選自【二十五史】/新校本舊唐書/列傳/卷一百九十九上 列傳第一百四十九上/東夷/百濟國
百濟國,本亦扶餘之別種,嘗為馬韓故地,在京師東六千二百里,處大海之北,小海之南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南渡海至倭國,北渡海至高麗.


주(14)/選自【古籍十八種】/通典/邊防典凡十六卷/卷一百八十五 邊防一/東夷上/百濟
自晉以後,吞并諸國,據有馬韓故地.其國東西四百里,南北九百里,南接新羅,北拒高麗千餘里,西限

大海,處小海之南.國西南海中有三島,出黃漆樹,似小榎樹而大.六月取汁,漆器物若黃金,其光奪目

 

鴨綠江

《漢書·地理志》元莵郡,西蓋馬縣,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過郡二,行二千一百里。

《通典》馬訾水一名鴨綠江,源出靺鞨白山,水色似鴨頭,故名。
《通鑑》大業八年,伐高麗,分道並進,皆會於鴨綠水西。
《通鑑》貞觀十九年,程名振等,拔卑沙城,遣將耀兵於鴨綠水。又龍朔元年,契苾何力討高麗,高麗守鴨綠,

不得濟。何力乘堅冰渡水,大破之。乾封二年,李勣伐高麗,管記元萬(墳)〔頃〕檄文曰:「不知守鴨綠之險。」

高麗報曰:「謹聞命矣!」卽移兵拒守,唐兵不得渡。
《遼史》聖宗統和二十八年,自將伐高麗。大軍渡鴨綠江,康肇拒戰,敗之。
《通考》女眞世居長白山鴨綠水之源。
《元一統志》鴨綠江在遼陽路東五百六十里。按《唐書》馬訾水出靺 鞨白山,西與鹽難水合,又西南至安平

入於海。唐太宗征高麗,遣邱孝忠耀兵於鴨綠水,卽此。今考其源,出於長白山,西南流經故博索府見前疆

域門。東南入海。

《高麗圖經》鴨綠之水,源出靺鞨,其色如鴨頭,故以名之,去遼東五百里。又西與一水合,卽鹽難水也。

二水合流,西南至安平城入海。高麗之中,此水最大,波瀾淸徹,其國恃此,以爲天塹。水濶三百步,在平

壤城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南四百八十里。自遼水以東卽屬契丹,大金以其地不毛,不復城守,徒爲往來

之道而已。按:鴨綠水其色如鴨頭,乃史家傅會之論,詳見完顔部條。

《明統志》鴨綠江在遼東都司城東五百六十里。按:鴨綠江在吉林烏拉南九百 七十里,源出長白山西南流與

朝鮮分界,至鳳凰城東南入海,卽古馬訾水。亦名益州江,蓋渤海益州所治也。見前疆域門。

 


蓒芋泊
《元一統志》蓒芋泊,在定遼衛。《契丹地志》云,浿水卽古泥河也。
自東逆流數百里至遼陽瀦畜不流,有蓒芋草生於泊中,故名。

《明統志》泥河,一名浿水,又曰蓒芋濼,水多蓒芋之草。案:泥河,在海城西南六十五里,源出聖水山,

流至米眞山散漫爲遼時蓒芋濼,非朝鮮界內之浿江也。

謹案:馬訾載於《漢書》,速末詳於《魏史》。自唐以後,志遼東諸水者,亦繁博矣,而稱引紛淆,圖經舛錯,

或一水而誤以爲二,或異派而誤以爲同,臆揣訛傳,頗多失實。今皆溯其源流,審其分合,謹於各條下,加按

釐正之,俾考者得以徵信云。



만주와 요동반도가 삼한고지 내지 진한(단군조선:진국)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를 [만주원류고]를 통해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三韓故地、馬韓都督府、辰州、三韓縣 《舊唐書》百濟國爲馬韓故地, 顯慶五年, 以其地置熊津、
馬韓等五都

督府。
《遼史·地理志》辰州, 本高麗蓋牟城, 渤海蓋州, 又改辰州, 以辰韓得 名, 井邑駢列, 最爲衝會。
《遼史· 地理志》高州三韓縣。辰韓爲夫餘, 弁韓爲新羅, 馬韓爲高 麗。開泰中, 聖宗以三國之遺
人置縣。

戶五千。 案: 此以三國分屬三韓, 殊爲謬誤。
《金史·地理志》三韓縣屬大定府。 謹按: 三韓在夫餘、挹婁二國之南, 所統凡七十八國, 合方四
千里 。馬韓

在西, 辰韓吊, 弁韓在辰韓之南。馬韓北與樂浪接, 則所轄在今 蓋平、復州、寧海。辰韓北與濊接, 濊地卽夫

餘境也。馬韓、弁韓之南, 皆 與倭接, 東西以海爲限, 則幷今高麗全國, 亦隸封域。至所屬諸國, 多繫 以 “卑離”

二字, 當爲 “貝勒”之轉音。而以三汗統諸貝勒, 于體制亦適相 符合。

《晉書》又載有裨離國, 在肅愼西北。陴與卑, 音相近。

《遼史》 有陴離郡, 今爲撫順城, 是不獨東南廣, 而西北亦極袤亘矣。唐馬韓都督之 設, 未久輒廢, 其址無存。

辰州卽今之蓋州, 今爲蓋平縣。至三韓縣, 遼時 以遷戶置, 但取其名, 非故地也。

-----欽定滿洲源流考卷八-----


이상에서 보면

1)진주가 요녕성 개주라고 하였고 '진한'에서 이름을 얻었다고 하였다

2)삼한은 한강이남이 아니라, 부여 읍루의 남쪽, 즉 만주 전 지역이라 하였고, 78국 4천리라 하였다.

(그러므로 삼한은 만주 및 요동반도와 한반도를 포괄할 개념이 아닐 수 없다)

3)당연히 요녕성 개평 복주 영해 지역이 삼한 강역이라고 쓰여 있다

4)[진서]의 비리국과 [요사]의 비리군은 마한78국 중의 하나인데 이것이 지금의 요녕성 요양옆 무순이라고

하고 있다.

5)요하 건너에 있는 고주삼한현은 개태년간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포로들을 수용한 곳이라서 이름만 삼한현

이지 삼한이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만주원류고]가 분석한 바로는 진한과 삼한이 만주와 요동반도 그리고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九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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