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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5) - 甲午 正月 ~ 六月 - 선조 27년 : 서기 1594년(50세)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6.11.14|조회수81 목록 댓글 0


甲午 正月 - 선조 27년 : 서기 1594년(50세)


初一日庚辰。雨下如注。侍天只同添一年。此亂中之幸也。○晩。操鍊戰備事還營。雨勢不止。
初二日辛巳。雨止而陰。以國忌不坐。
初三日壬午。晴。出東軒公事。日暮入衙。與諸姪話。
初四日癸未。晴。出東軒公事。
初五日甲申。雨雨。
初六日乙酉。雨。出東軒。南平都兵房行刑。
初七日丙戌。雨。坐東軒公事。○夕。南宜吉入。對話夜深而罷。
初八日丁亥。晴。坐東軒公事。南原都兵房行刑。
初九日戊子。晴。
初十日己丑。晴。朝。邀南宜吉話及避亂時事。備道艱苦之事。不勝慨歎也。
十一日庚寅。陰而不雨。朝。以覲乘舟。從風直抵古音川。南宜吉,尹士行,芬姪同往。謁天只前。氣息奄奄。言語則不錯。討賊事急。不能久留。
十二日辛卯。晴。朝食後。告辭天只前。則敎以好赴。大雪國辱。再三論諭。少無以別意爲歎也。還到船滄。氣似不平。直入北房。
十三日壬辰。晴而大風。氣甚不平。卧席發汗。
十四日癸巳。陰而大風。晩出東軒。啓聞成貼。義能免賤公文封上。
十五日甲午。晴。
十六日乙未。睛。晩出東軒。黃得中入來。聞文學柳夢寅以暗行入興陽縣云。
十七日丙申。曉雪晩雨。早朝登船。汝弼及諸姪與豚等別送。只率芬,蔚放舟。是日。啓本出送。申時。到瓦頭。逆風退潮。不能運行。下碇少憇。酉時。擧碇渡到露梁。呂島萬戶,順天李瑊及虞候亦到宿。
十八日丁酉。晴。曉發行。逆風大起。到昌信則風便順吹。擧帆到蛇梁。風旋逆而大作。萬戶及水使,軍官田允來見。
十九日戊戌。陰而晩晴。大風。朝。發到唐浦外洋。從風半帆。瞬息已至閑山島上。坐射亭。與諸將對話。○夕。元水使來。○因所非浦。聞嶺南諸船射,格。幾盡饑死。慘不忍聞。
二十日己亥。晴而大風極寒。各船無衣之人。龜縮吟寒。不忍聞也。軍粮不到。是亦悶也。○樂安右虞候來見。晩所非浦,熊川,鎭海倅亦來。○病死人收瘞差使貟。鹿島萬戶定送。
二十一日庚子。晴。朝。營格軍七百四十二名饋酒。○光陽入來○夕。鹿島萬戶來告病屍二百十四名收埋。○被擄逃還二名。自元水使處來。備說賊情。然不可信矣。
二十二日辛丑。晴。日氣溫且無風。上坐射亭。令鎭海行肅拜禮于敎書。射帿終日。
二十三日壬寅。晴。樂安,古阜出去。○興陽戰船二隻入來。崔天寶,柳滉,柳忠信,丁良等入來。晩。順天亦來。
二十四日癸卯。晴且暖。朝。山役事耳匠四十一名。宋德馹領去。○嶺南元水使送軍官來報。左道之賊三百餘斬殺云。多喜多喜。平義智。時在熊川云。未詳也。
二十五日甲辰。陰晩晴。宋斗男,李祥祿等以新造船回泊。射,格一百三十二名率往。○朝。右虞候來。晩射帿。右虞候與呂島爭射。呂島勝七分。余則射十廵。餘皆廿廵。
二十六日乙巳。晴。朝上射亭。射帿十廵。論順天後期之罪。
二十七日丙午。晴。曉。船材曳來事。虞候出去。○天只簡及汝弼簡來。則天只平安云。多幸。但東門外海雲臺傍及未坪明火作賊云。可愕可愕。○夕。鹿島伏兵處。倭賊五名。橫行放砲之際。射斬一倭。其餘逢箭逃去。○虞候船材木領來。
二十八日丁未。晴。朝。虞候來見。○慶尙虞候馳報。劉提督旋師。今月二十五六日間上去云。又慰撫使弘文校理權名缺道內廵慰後。舟師入來云。又作賊李謙等捉囚。牙溫等官。橫行大賊九十餘捕斬云。又翼虎將近當入來云。○戰船始役。
二十九日戊申。雨雨終日達夜。曉報各船無事。○氣不平。竟夕卧吟。大風波濤。舟不能定。心懷極煩。○彌助項僉使。以粧船事告歸。
三十日己酉。陰而大風。晩晴。風亦小息。順天及右虞候,康津來告出歸。○余則氣甚不平。終日流汗。軍官及諸將射帿。

 

1월1일[경진/2월20일]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한 살을 더하게 되니, 난리중이지만 다행한 일이다. 저녁 나절에 군사훈련과 전쟁 준비하는 일로 본영으로 돌아오는데, 비가 그치지 않았다.
 
1월2일[신사/2월21일]  비는 그쳤으나 흐렸다. 나라 제사날(명종 인순왕후 심씨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1월3일[임오/2월22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해질무렵에 관사로 돌아와서 조카들과 이야기했다.
 
1월4일[계미/2월23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1월5일[갑신/2월24일]  비오다.
 
1월6일[을유/2월25일]  비오다. 동헌에 나가 남평(南平)의 도병방(都兵房)을 처형했다.
 
1월7일[병신/2월26일]  비오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저녁에 남의길이 들어와서 마주 앉아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고서 헤어졌다.
 
1월8일[정해/2월27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남원의 도병방을 처형했다.
 
1월9일[무자/2월28일]  맑다.
 
1월10일[기축/3월1일]  맑다. 아침에 남의길을 맞이하여 이갸기하는데, 피난하던 일과 그때 길바닥에서 고생하던 일을 들으니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장계」에서
순천의 돌산도와 흥양의 도양장, 해남의 화원곶, 강진의 화이도(완도군 고금면) 등지에 둔전을 경작하여 군량을 보충함이 좋겠다는 사유는 전에 이미 장계하였다.1)
돌산도에는 나의 군관인 훈련주부 송성을, 도양장에는 훈련정 이기남을 모두 농감관으로 임명하여 보냈으며, 농군은 흑 백성들에게 내주어 병작케 하든지, 혹은 유민(피난민)들에게 짓게 하든지 하여 관에서는 절반을 수확하도록 했다. 또 순천·흥양의 유방군과 노약한 군사들을 제대를 시켜 병작케 하되, 보습·영자·쟁기 등을 각각 그 본 고을에서 준비해 보내라고 이미 공문으로 통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도의 화이도와 화원곶에도 종사관 정경달을 "둔전의 형편을 순시·검칙하여 제 시기에 시행하도록 하라"고 이미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 도착한 호조판서의 공문에 따른 순찰사 이정암의 공문 내용에, "돌산도 등 감목관에게 이미 둔전관을 겸직시켰다"고 하거니와, 순천 감목관 조정은 벌써 전출되었고 정식 후임이 아직 내려오지 않았으며, 흥양 감목관 차덕령은 도임한지 벌써 오래되었는데 멋대로 처리하며 목장에서 "말먹이는 사람들을 몹시 학대하여 안정되게 살 수 없게 하기 때문에 경내의 모든 백성들이 꾸짖고 걱정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며, 나도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 벌써 그런 소문을 들었으므로 이번에 경작에 관한 모든 일을 이 사람에게 맡기게 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작폐하고 백성들의 원성은 더욱 더 이어갈 것이니, 차덕령을 빨리 전출시키고 다른 사람을 임명하여 빠른 시일 안으로 보내어 농사 감독에 같이 힘쓰고,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삼가 갖추어 장계하였다.2)
그리고 본도에서 더 만들고 있는 전선을 직접 보살피고 조처해야 하겠다는 사유를 들어 장계한 뒤에 지난 12월12일에 본도로 돌아와서 검칙하였던 바, 본영에 소속된 다섯 고을로서 순천은 원래의 책임 수량과 더 만드는 수량을 아울러 전선 열 척, 흥양이 열 척, 보성이 여덟 척, 광양이 네 척, 낙안의 세 척 등은 벌써 다 만들었으나, 허다한 사부와 격군들을 일시에 보충할 수가 없어서 이들을 일제히 돌아오게 할 수 없으므로, 순천 다섯 척, 광양 두척, 흥양 다섯 척, 보성 네 척, 낙안 두척만을 먼저 검색하고 독려하여 거느리고, 이 달 1월 17일 거제땅 한산도 진중으로 출항할 것이고, 정비되지 못한 전선들은 "뒤따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아오라"고 전령하였다.
우도는 전선의 수효가 좌도보다 배나 되므로 반드시 허다한 사부와 격군을 제 기한에 보충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의 종사관 정경달을 시켜 "순검하여 조처하라"고 우수사 이억기와 약속한 곳으로 독촉해 보내면서 신칙하였다.
그러니 겸순찰사 이정암에게 아울러 각별히 독려하여 돌려 보내게3) 하도록 해당 관원을 시켜 분부해 주도록 갖추어 장계하였다.
 
1월11일[경인/3월2일]  흐리되 비는 아니오다. 아침에 어머니를 뵈려고 배를 타고 바람 따라 바로 곰내(古音川 : 熊川)에 대었다. 남의길·윤사행, 조카 분이 같이 가서 어머니를 앞에서 뵈니, 기력은 약하시지만 말씀하시는데는 착오가 없으셨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물지 못했다.
 
1월12일[신묘/3월3일]  맑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고 두번 세번 타이르시며, 조금이라도 떠난다는 뜻에 탄식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오니 몸이 좀 불편한 것같다.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1월13일[임진/3월4일]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너무 불편하여 자리에 누어서 땀을 내었다.
 
1월14일[계사/3월5일]  흐리며 바람이 세게 불었다. 저녁 나절에 동헌에 나가 장계를 봉함하고, 또 승장 의능에게 천민의 신분을 면해준다는 공문을 봉하여 올렸다.4)
 
1월15일[갑오/3월6일]  맑다.


「장계」에서
이 달 초이레 성첩한 겸사서(조유한)의 서장에, "이번에 경상감사(한효순)의 서장을 보니 '좌도의 적들이 모두 거제로 모였다'고 하는데, 적들의 움직임은 반드시 먼저 호남의 관사 곡식을 먹고 올라갈 것이니, 본도의 형세는 영남에 비해서 만 배나 위급하게 되었으니 경은 수군을 독려하여 거느리고 나가 길을 막고 무찌르라"고 동궁께서 명령했다는 서장을 받았다고 장계하였다.5)
 
1월16일[을미/3월7일]  맑다. 늦게야 동헌에 나갔다. 황득중이 들어왔다. 소문에 "문학 유몽인이 암행어사로 흥양현에 들어왔다"고 한다. 
 
1월17일[병신/3월8일] 새벽에 눈이 오고 저녁 나절에 비가 왔다. 이른 아침에 배에 올라 아우 여필과 여러 조카와 아들 등을 배웅했다. 다만 조카 분과 아들 울을 배로 데리고 떠났다. 오늘 장계를 띄워보냈다. 오후 네 시쯤에 와우(노량땅)에 이르니 맞바람이 불고 물이 빠져 배를 운행할 수가 없었다. 닻을 내리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여섯 시쯤에 다시 닻을 오려 노량에 이르렀다.


「장계」에서
수군도 각 고을의 수령들이 태만함이 버릇되어 점검하여 보내는 데는 성의가 없을 뿐 아니라, 이제와서는 "친족이나 이웃에게 대충 징발하지 말라"는 순찰사 이정암의 공문을 돌린다. 이치를 논한 첩보가 있어도 하나도 정비되지 않은 채 잡아 보내지도 않는 형편이며, 심한 관리들은 잡아 보내라는 전령을 보냈어도 그저 핑계만 대고 꿈쩍하지 않는다. 전선을 이미 더 만들어 놓았지만 격군을 보충할 길이 없으니 참으로 통분하다. 전라우도는 내 종사관 정경달을 시켜 순검ㆍ정비하도록 우수사 이억기와 약속한 곳으로 달려 보냈으며, 내게 소속된 각 고을과 포구의 전선을 간신히 정비하고서 진중으로 돌아왔다고 장계하였다.6)
 
1월18일[정유/3월9일]  맑다. 새벽에 떠날 때는 맞바람(셋바람)이 세게 일었다. 창신도(남해군 창선도)에 이르니 바람이 순하게(하늬바람) 불어 돛을 올려 사량에 이르니까 바람이 도로 거슬러(샛바람)세게 불었다. 다만 사량만호 이여념과 수사의 군관 전윤이 와서 봤다.
 
1월19일[무술/3월10일]  흐리다가 저녁 나절에 개이고 바람이 세게 불다. 아침에 출항하여 당포 바깥바다에 이르러 바람을 따라 반돛으로도 순식간에 한산도에 도착하였다. 활터 정자에 올라 앉아 여러 장수와 더불어 이야기했다. 저녁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왔다. 소비포권관 이영남에게서 영남의 여러 배의 사부 및 격군이 거의 다 굶어 죽겠다는 말을 들으니,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1월20일[기해/3월11일]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고 몹시 춥다. 여러 배에서 옷없는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는 차마 듣지를 못하겠다. 군량미조차 오지를 않으니 더욱 민망스럽다. 낙안군수(신호), 우수사 우후(이정충)가 와서 봤다. 저녁 나절에 소비포권관(이영남)ㆍ웅천현감(이운룡)ㆍ진해현감(정항)도 왔다. 병들어 죽은 자들을 거두어 장사지낼 차사원으로 녹도만호(송여종)를 정하여 보냈다.
 
1월21일[경자/3월12일]  맑다. 아침에 본영의 격군 칠백 마흔 두 명에게 술을 먹였다. 광양현감(어영담)이 들어왔다. 저녁에 녹도만호(송여종)가 와서 보고하는데, "병들어 죽은 시체 이백 열 네 명을 거두어서 묻었다"고 한다.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두 명이 경상우수사 원균의 진영에서 와서 여러가지 적정을 상세히 말하긴 했으나 믿을 수가 없다.
 
1월22일[신축/3월13일]  맑다. 날씨가 따뜻하고 바람도 없다. 활터 정자에 올라 앉아 진해현감(정항)으로 하여금 교서에 숙배례를 행하게 했다. 활을 종일 쏘았다.
 
1월23일[임인/3월14일]  맑다. 낙안군수와 고부군수가 나갔다. 전선 두 척이 들어왔다. 최천보ㆍ유황ㆍ유충신ㆍ정량 등이 들어왔다. 저녁 나절에 순천부사도 왔다.
 
1월24일[계묘/3월15일]  맑고 따뜻하다. 아침에 산역(山役)하는 일로 귀장이(耳匠:木手)마흔 한 명을 송덕일이 거느리고 갔다. 영남우수사 원균이 군관을 보내어 보고하기를, "경상좌도에 있는 왜적삼백 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고 한다. 정말 기쁜 일이다.평의지(平義智:대마도주 宗義智)가 지금 웅천에 있다고 하는 데 밝혀지지는 않는다.
 
1월25일[갑진/3얼16일]  흐리다가 저녁 나절에 개었다. 송두남ㆍ이상록 등이 새로 만든 배를 돌아오게 하려고 사부와 격군 백서른 두명을 거느리고 갔다. 우수사 우후가 여도만호(김인영)와 활쏘기 시합을 했는데, 여도만호가 일곱 푼을 이겼다. 나는 활을 열 순을 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스무 순을 쏘았다.
 
1월26일[을사/3월17일]  맑다.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활열 순을 쏘았다. 순천부사(권준)의 기일을 어긴 죄를 논했다.
 
1월27일[병오/3월18일]  맑다. 새벽에 배 만들 목재를 끌어 올일로 우후(이몽구)가 나갔다. 어머니 편지와 아우 여필의 편지가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다행이다. 다만 동문 밖 해운대(여수시 동북쪽에 있음)옆과 미평에 횃불 든 강도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놀랄 일이다. 저녁에 녹도의 복병한 곳에 왜적 다섯 명이 함부로 다니면서 포를 쏠 적에 한놈을 쏘아 목을 베고, 나머지는 화살을 맞고는 도망을 가벼렸다. 우후의 배가 재목을 싣고 왔다.
 
1월28일[정미/3월19일]  맑다. 아침에 우후가 와서 봤다. 경상우후(이의득)가 보고하기를, "명나라 제독 유정이 군사를 돌려 이 달 25ㆍ26일 사이에 올라간다"고 하며, 또 "위무사(장병을 위로하러 파견된 관리) 홍문교리 권협이 도내를 순시한 뒤에 수군영으로 온다"고 하며, 또 "화적 이겸 등을 잡아다 가두고, 아산ㆍ온양 등지에서 함부로 다니는 도적떼 90여 명을 잡아서 목을 베었다"고 하며, 또 익호장(김덕령)은 근일중에 들어올 것이다"고 했다. 전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1월29일[무신/3월20일]  비가 종일 오고 밤새도록 왔다. 새벽에 각 배들이 아무 탈 없다고 한다. 몸이 불편하여 저녁에 누워서 신음했다. 바람이 세게 불고 파도가 거세어 배를 안전하게 매어 둘 수가 없으니 마음이 몹시도 괴롭다. 미조항청사(김승룡)가 배를 꾸밀 일로 돌아갔다.
 
1월30일[기유/3월21일]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다가 저녁 나절에는 개이고 바람도 조금 잠잠했다. 순천부사, 우수사 우후, 강진현감(유해)이 와서 알려주고 돌아갔다. 나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땀을 흘렸다. 군관과 여러 장수들은 활을 쏘았다. 
 
1)『이충무공전서』권3,「장계」39∼40쪽,「請設屯田狀」.
2)「장계」10∼11쪽,「請改差興陽牧官狀」.
3)「장계」8∼9쪽,「還陣狀(一)」.
4)『이충무공전서』권4,「장계」1쪽, 「封進僧將僞帖狀」에, "도총섭 승 유정은‥ 공문을 체찰사(윤두수)의 공문처럼 만들어 보냈는데, 그 양식이 규격에 맞지 않으며 서명도 달라 위조한 것이 분명하다. 부역을 면제해 주거나 신분을 면제해 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인연이 있다하여 제멋대로 공문을 위조하는 바, 극히 무례하다. 이런 일을 징계하지 않으면 반드시 막기 어려운 폐단이 생길 것이다(憁攝僧惟晶‥ 體察使貼文榛成送而規違格着暑亦異僞造明白免後不輕免賤事과也 因綠時勢任意僞作極僞無狀此而不懲必有難防之幣)"라 하여 위조공문임을 밝혔다.
5) 조성도, 앞의 책, 203쪽 및 408쪽,「적을 무찌르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을 아뢰는 장달」.
6)『이충무공전서』권4,「장계」9쪽, 「環陣狀(二)」.



甲午 二月


初一日庚戌。晴。晩上射亭公事。○淸州居兼司僕李祥持有旨內。慶尙監司韓孝純馳啓左道之賊。合入巨濟。將犯全羅之界。卿其合三道舟師勦滅事。○午後。招右虞候。射帿。○初更。蛇渡僉使率戰船三隻。到陣。
初二日辛亥。晴。晩上射亭。射帿十廵。風亂不溫。○蛇渡僉使。以未及限論勘。
初三日壬子。晴。大風。食後。上射亭射帿。○右助防將到。因聞反賊之奇。不勝慮且痛憤也。○元埴,元㙉來告上京。○日暮。下幕。
初四日癸丑。晴。大風。朝食後。順天右助防將來話。○晩。營戰船,龜船入來。因菶姪來。聞天只平安。喜幸喜幸。
初五日甲寅。晴。夢乘良馬。直上層巖大嶺。則峯巒秀麗。逶迤選。又有峯上平衍之處。欲爲擇卜而覺。未詳厥應也。有一美人。獨坐指示。余拂袖不應。可笑。○朝。軍器寺受來黑角一百張及樺皮八十九張。計數着署。○鉢浦萬戶,右虞候來見。○晩上射亭。右助防將及右虞候,呂島等射帿。○元帥答送到。則沈遊擊已定和解云。然奸謀巧計。不可測。而前陷其術。又陷如是。可歎。
初六日乙卯。雨雨。午後晴。順天助防將及熊川,蛇渡來見。
初七日丙辰。晴。西風大吹。天只前問安書。付芬姪之行。菶與芬出去。菶則往羅州。芬則往溫陽。懷思不平。○固城縣令馳報賊船五十餘隻。到春院浦云。○是日。改分軍格軍。移載各船。○寶城戰船二隻入來。所非浦來見。
初八日丁巳。晴。東風大吹。日氣甚冷。朝。順天來言固城,所非浦。賊船五十餘出入云。卽招諸萬春。問地形便否。○晩上射亭公事。夕還。海月淸爽。寢不能寐。順天及右助防將來話。二更罷。
初九日戊午。晴。曉。虞候領二三船。往所非浦後面刈茅。○朝。固城來。因問唐項浦賊船來往。又問民生饑餓。相殺食。將何保活。○晩上射亭。射帿十餘廵。○李惟緘又來告歸。問其字則汝實云。順天及右助防將,虞候,蛇渡,呂島,鹿島,康津,泗川,河東,寶城,所非浦等官亦來。
初十日己未。細雨不霽。大風。午後。助防將及順天來。竟夕相話。討賊論議。
十一日庚申。晴。朝。彌助項僉使來。食後。上射亭。則慶尙水使,右助防將亦到同醉。射帿三廵。
十二日辛酉。晴。早朝。營探船入來。○巳時。移陣赤島。○未時。宣傳官宋慶苓到陣。有旨二度。密旨一度並三度內。一度。天兵十萬及銀三百萬兩出來。一度。兇賊意在湖南。盡心把截。相勢勦擊事。內出秘旨。經年海上。爲國勤勞。予常不忘。有功將士。未蒙重賞者馳啓等事。因聞京中雜奇。又聞逆賊之事。自上憂勤宵旰事。聞來慨戀何極。領台簡持來。
十三日壬戌。晴且溫。朝。答簡于領台。食後。與宣傳官更話相別。終日駐船。○申時。所非浦,蛇梁,永登萬戶來。○酉時。發船還向閑山島。時慶尙軍官諸名缺自三峯來言。賊船八隻。入泊春院浦。可以入擊云。故卽令羅大用送于元水使曰。見小利而入勦。大利不成。姑用停之。乘機勦滅事傳之。○彌助項及順天助防將來。夜深還歸。
十四日癸亥。晴且溫而風亦和。慶尙南海,河東,泗川,固城等。則宋希立,卞存緖,柳滉,盧潤發。右道則卞有憲,羅大用等。點考出送。○營軍粮二十石載來。○防踏僉使及裵僉知來。○張彦春免賤公文成給。
十五日甲子。晴。曉。龜船兩隻及寶城一隻等。送于駕木斫伐處。初更載來。○食後。上射亭。推左助防將後來之罪。○興陽船摘奸。則多有虛踈之事。○順天右助防將及右虞候,鉢浦,呂島萬戶,康津縣監。並至射帿。○日暮。廵使送關。調度御史朴弘老啓本。順天,光陽,豆峙伏兵把守事入啓。而舟師,守令並移不合事回啓。達下公事來到。
十六日乙丑。晴。見暗行御史柳夢寅啓草。則任實李夢祥,茂長李忠吉,靈巖金聲憲,樂安申浩罷黜。而順天則貪汚首論。潭陽,珍原,羅州,昌平等守令。則掩惡褒啓。欺罔天聽。至於此極。國事如是。萬無平定之理。仰屋而已。又論水軍一族及四丁內二丁赴戰事。甚言非之。不念國家之急難。徒務目前之姑息。爲國之痛愈甚。○晩上射亭。與順天,興陽,右助防將,右虞候,蛇渡,鉢浦,呂島,鹿島,康津,光陽等官。射帿十二廵
十七日丙寅。晴。暖如初夏。朝。上射亭公事。○李弘明,任希璡來。竹銃筒造來試放。則似有出聲。而別無所用。可笑。○右水使入來。而所領戰船。只二十隻。可恨也。○順天右助防將亦來。射帿五廵。
十八日丁卯。晴。食後。上射亭。决海南縣監魏大器傳令拒逆之罪。右道諸將來現後。射帿數廵。
十九日戊辰。細雨終日。上射亭。獨坐移時。右助防將及順天來。孫忠甲亦來。招入。問其討賊。則不勝慨然。終日論話。
二十日己巳。煙雨不收。氣不平。終日不出。右助防將裵僉知來話。
二十一日庚午。晴。順天及右助防將來告見乃梁伏兵處往審。○淸州義兵將李名缺至自廵邊處。備說陸地事。日暮告歸。○酉時。碧方望將來告。仇化驛前倭船八隻列泊云。故傳令進擊。而以待諸弘祿之來告。
二十二日辛未。諸弘祿來告。倭船十隻到仇化驛。六隻到春院云。而日已曙矣。未及追勦。更令候察而送之。自二十三日至二十七日缺
二十八日丁丑。晴。朝上射亭。與從事官終日話。○長興府使入來。
二十九日戊寅。碧方望將諸漢國馳報。賊船十六隻入召所浦云。故傳令知委。

 

2월1일[경술/3월22일]  맑다. 늦게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았다. 청주의 겸사복 이상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경상감사 한효순의 장계에 " 좌도의 적들이 모여서 거제로 들어가서 앞으로 전라도로 침범하려하니, 경은 삼도의 수군을 합하여 적을 섬멸하라"는 것이다. 오후에 우수사의 우후(이정충)를 불러 활을 쏘았다. 초저녁에 사도첨사(김완)가 전선 세 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2월2일[신해/3월23일]  맑다. 늦게 활터 정자로 올라가 활 열순을 쏘았다. 바람이 어지럽게 불고 따뜻하지 않다. 사도첨사가 기한에 미치지 않았으므로 처벌했다. 
 
2월3일[임자/3월24일]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에 올라서 활을 쏘았다. 우조방장(어영담)이 왔는데, 역적들의 소식을 들으니 걱정되며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원식ㆍ원전이 와서 상경한다고 했다. 날이 저물어 막사로 내려왔다. 
 
2월4일[계축/3월25일]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순천 부사ㆍ우조방장이 와서 이야기 했다. 저녁 나절에 본영의 전선ㆍ거북배가 들어왔다. 조카 봉이 오는 편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도 다행이다.
 
2월5일[갑인/3월26일]  맑다. 꿈에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첩첩인 산마루로 올라가니 아름다운 산봉우리가 동서로 뻗쳐 있고, 산마루 위에는 평평한 곳이 있기로 거기에 자리잡으려다가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미인이 홀로 앉아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으니 우스웠다. 아침에 군기시에서 흑각궁 백 개와 화피 여든 아홉 장을 낱낱이 셈하여 수결(서명)했다. 발포만호(황정록), 우수사의 우후가 와서 봤다. 저녁 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우조방장, 우수사의 우후, 여도만호 등과 활을 쏘았다. 원수(권율)의 회답 공문이 왔는데, 유격 심유경이 벌써 화친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사한 꾀와 교묘한 계책을 헤아릴 수 없다. 전에도 놈들의 괴에 빠졌었는데, 또 이처럼 빠지려드니 한탄스럽다.
 
2월6일[을묘/3월27일]  비오다. 오후에 개었다. 순천부사ㆍ조방장ㆍ웅천현감ㆍ사도첨사가 와서 봤다.
 
2월7일[병진/3월28일]  맑은데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어머니께 문안편지를 조카 분이 가는 편에 부쳤다. 조카 봉은 분과 같이 떠나는데, 봉은 나주로 가고 분은 온양으로 갔다. 마음이 섭섭하다. 고성현령(조응도)의 보고에, "적선50여 척이 춘원포(고성군 광도면 예승)에 이르렀다"고 했다. 오늘 군대를 개편하고, 격군을 각 배에 옮겨 태웠다. 보성의 전선 두 척이 들어왔다. 소비포권관(이영남)이 와서 봤다.
 
2월8일[정사/3월29일]  맑은데, 샛바람이 세게 불고 날씨는 몹시 추웠다. 이침에 순천부사가 와서 말하기를, "고성땅 소비포에 적선 50여 척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곧 제만춘을 불러 지형이 편리한지를 물었다. 저녁 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고 저녁에 돌아왔다. 바다에 달이 밝아 잠이 오지 않는다. 순천부사와 우조방장이 와서 아야기하다가 밤 열 시쯤에 헤어졌다.
 
2월9일[무오/3월30일]  맑다. 새벽에 우후가 배 두 세 척을 거느리고 소비포 뒤쪽에 띠풀을 베러 나갔다. 아침에 고성현령이 왔으므로 당황포에 적선이 드나들었는지를 물었다. 또 백성드이 굶어서 서로 잡아 먹는다고 하니, 앞으로 어찌하면 살 수 있을 것인지도 물었다. 저녁 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활 열 순을 쏘았다. 이유함이 왔다가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그의 자(字)를 물으니 여실(汝實)이라 했다. 순천부사ㆍ우조방장ㆍ우후ㆍ사도첨사ㆍ여도만호ㆍ녹도만호ㆍ강진현감ㆍ사천현감ㆍ하동현감ㆍ보성군수ㆍ소비포권관도 왔다.
 
2월10일[기미/3월31일]  가랑비가 걷히지 않고 바람이 세게 불다. 오후에 조방장과 순천부사가 와서 저녁 때까지 이야기하며 적을 토벌할 일을 논의 했다.
 
2월11일[경신/4월1일]  맑다. 아침에 미조항첨사(김승룡)가 왔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니, 경상우수사(원균)와 우조방장이 왔다. 같이 취했다. 활 세 순을 쏘았다.
 
2월12일[신유/4월2일]  맑다. 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오전 열 시쯤에 적도(거제군 둔덕면)로 진을 옮겼다. 오후 두 시쯤에 선전관 송경령이 임금의 분부 두 통과 비밀문서 한 통, 모두 세 통을 가지고 왔는데, 한 통에는 "명나라 군사 십만 명과 은 삼백냥이 온다"고 하였고 한통에는 "흉적들의 뜻이 호남지방에 있으니, 힘을 다하여 파수를 보내 형세를 보아 무찌르라"고 하였으며, 밀서에는 "일년이 지나도록 해상에서 근로하는 것을 임금님께서 잊지 못하니, 공로를 세운 장병들이 아직도 상을 받지 못한 자가 있거든 적어 올리라" 는 것이 적혀 있었다. 또 그에게서 서울에서 여러가지 소식과 역적들의 일로 임금님께서 밤낮으로 근심하며 분주하시다니 감개무량하다. 영의정(유성룡)의 편지가 왔다.
 
2월13일[임술/4월3일]  맑고 따뜻하다. 아침에 영의정에게 회답편지를 썼다. 식사를 한 뒤에 선전관(송경령)과 작별을 하고서는 종일 배에 머물렀다. 오후 네 시쯤에 소비포만호(이영남)ㆍ사량만호(이여념)ㆍ영등포만호(우치적)가 왔다. 오후 여섯 시쯤에 출항하여 한산도로 돌아올 때, 경사우수사의 군관 제홍록이 삼봉(고성군 삼산면 삼봉리)에서 와서 말하기를, "적선 여덟 척이 들어와 춘원포에 정박하였으므로 들이칠 만하다"고 했다. 그래서 곧 나대용을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보내어,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치다가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우려가 있으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기회를 엿보아서 무찔러야 한다"는 말을 전하게 했다. 미조항첨사ㆍ순천부사ㆍ조방장이 왔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2월14일[계헤/4월4일]  맑고 따뜻하며 바람도 잔잔했다.경상도의 남해ㆍ하동ㆍ사천ㆍ고성 등지에는 송희립ㆍ변존서ㆍ유황ㆍ노윤발 등을, 우도에는 변유헌ㆍ나대용 등을 점검하여 내어 보냈다. 존영 군량미 스무 섬을 실어 왔다. 방답첨사와 첨지 배경남이 왔다. 장언춘을 천민에서 면하게 하는 공문을 만들어 주었다.
 
2월15일[갑자/4월5일]  맑다. 새벽에 거북배 두 척과 보성의 배한 척을 멍에나무(駕木)치는 곳으로 보내어 초저녁에 실어 오게 했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좌조방장의 늦게 온 죄를 심문했다. 흥양 배의 부정을 조사해 보니 허술한 일이 많았다. 순천부사, 우조방장, 우수사의 우후, 발포만호, 여도만호, 강진현감 등이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날이 저물어 순찰사(이정암)가 공문을 보냈는데, "조도어사 박홍로가 순천ㆍ광양ㆍ두치 등지에 복병을 두고 파수보게 해달라고 장계를 올렸던 바, 수군과 수령을 아울러 이동시키는 일이 합당하지 않다는 대답이 내려왔다" 는 것이다.
 
2월16일[을축/4월6일]  맑다. 암행어사 유몽인의 장계 초본을 보니, 임실현감 이몽상, 무장현감 이충길, 영암군수 김성헌, 낙안군수 신호를 파면하고, 순천부사는 탐관오리의 우두머리로 논란하고, 담양부사(이경로), 진원현감(조공근), 나주목사(이용순), 창평현령(백유항) 등 수령의 악행은 덮어주고 포상하도록 상신한다.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니. 나라일이 이러고서야 매사가 잘 될 수가 없다.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또 그 가운데에는 수군 가족에 대한 징발과 네 장정 속에서 두 장정에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일을 심히 비난하였으니, 나라의 위급함은 생각하지도 않고 쓸데없이 눈앞의 임시방편의 일에만 힘쓰고 있다. 나라의 위하여 심히 통탄할 일이다. 저녁 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순천 부사, 흥양현감, 우조방자,우수사의 우후, 사도첨사, 발포만호, 여도만호, 녹도만호, 강진현감, 광양현감 등오가 활 열 두 순을 쏘았다.
 
2월17일[병인/4월7일]  맑다 따뜻하기가 초여름같다.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았다. 이홍명ㆍ임희진이 왔다. 대로 총통을 만들어 왔기에 시럼으로 쏘아 보니, 소리는 비슷한데 별로 쓰일 데가 없다. 우습다. 우수사가 들어왔는데, 거느린 전선이 다만 스무 척이니 한심스럽다. 순천부사ㆍ우조방장도 와서 활 다섯 순을 쏘았다.
 
2월18일[정묘/4월8일]  맑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해남현감 위대기의 명령을 거역한 죄를 벌주었다. 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와서 알현한 뒤에 활 두어 순을 쏘았다.
 
2월19일[무진/4월9일]  가랑비가 종일 오다. 활터 정자에 올라가 혼자 앉아 있는데 , 우조방장과 순천부사가 오고, 손충갑도 왔다. 불러들여 그 적을 토벌하던 일을 물었더니, 강개함을 이길 길이 없다. 종일 이야기했다.
 
2월20일[기사/4월10일]  안개같은 이슬비가 걷히지 않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우조방장과 첨지 배경남이 와서 이야기했다.
 
2월21일[경오/4월11일]  맑다. 순천부사와 우조방장이 와서 "견내량에 복병한 곳을 가보고 왔다"고 보고했다. 청주 의병장 이봉(李逢:원본에 이름이 빠져 있음)이 순변사에게 가서 육지의 사정을 자세히 일러 주고서 해질녘에 돌아갔다. 오후 여서 시쯤에 벽방의 척후장(제한국)이 와서 구화역(통영시 광도면 노산리)앞바다에 왜선 여덟척이 줄지어 대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가 치라!"고 전령하고서, 원균의 군관 제홍록의 보고가 오기를 기다렸다.
 
2월22일[신미/4월12일]  제홍록이 와서 보고하는데, "왜선 열척은 구화역에 이르렀고, 여섯 척은 춘원포에 이르렀다"고 했다. 또 이미 날이 새어 미처 따라 잡지 못했다고 하므로 다시 와서 정찰이나 하라고 일러 보냈다.
 
  (2월23일부터 2월27일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2월25일[갑술/4월15일] 「장계」에서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1월25일에 , 충청수사 구사직은 2월5일에 모두 내 관할에 소속한 여러 장수들을 일제히 거느리고 오라고 기한을 정하여 전령하였는데, 이억기의 첩보에 "나주ㆍ무안ㆍ영광 등의 고을이 입방수군의 도목조차 전혀 보내지 않아 허다한 전선에 격군을 보충할 길이 없는데, 기한이 벌써 박두하였으니 매우 민망하고 걱정이 된다"고 재삼 보고해 왔다.
그래서 나는 각 고을로 공문을 보냈는데, 이 달 2월17일 전선 스물 두 척을 거느리고 진중에 왔는바, 먼저 온 전선과 합하면 마흔 여섯척이다. 우도에 배정한 전선이 원래 책임진 수량과 더 만드는 수량을 합한 아흔 척 안에서 나주 이상의 아홉 고을에 배정된 전선 스물 일곱척은 전혀 정비되지 않아서 일이 매우 괴상하게 되었다는 사유는 이미 장계했으나, 이번에 다시금 장계하거니와 그 나머지 스물 한 척은 전선을 모두 새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격군이 없어서 기한이 다 되어도 진작 거느리고 오지 못하였으므로, 수군을 징발하여 보내지 않은 각 고을에 다시 전령을 보내어 독촉하였다.
대개 우수사 이억기도 이같이 흉적들이 꾀를 부려내는 때를 당하여 일정한 기한에 대지 못하였으니 기한 어긴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되, 다만 격군이 없어서 일정한 기한 안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그런 고민을 계속해서 보고 했으나, 각 고을에서 수군을 전혀 징발하여 보내지 않은 것이 근일에는 더욱 더 심하여 각 진포의 전선을 쉽게 조정할 수 없는 것이 도내가 똑같이 그러하므로 먼저 행수군관과 도훈도는 군령에 의하여 처벌하였다.
충청수사 구사직은 벌써 기한이 지난지 한 달이 되어도 아직 진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중대한 약속을 태만함이 이와 같으므로 조정에서 각별히 재촉함이 좋을 것같아 망녕되이 생각한 바를 장계하였다.1)


「장계」에서

그리고 이번에 도착한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첩보에 따르면, "이번에 우도에 소속된 각 고을과 포구의 원래 책임진 전선 및 더 만드는 전선등을 1월20일 안에 '상도에서는 우수영 앞바다로, 하도에서는 가리포(완도군 완도읍 군내리)앞바다로 모이게 하라'고 군관까지 보내어 재촉하였는데. 각 고을에서 입방수군을 전혀 보내지 않아서 격군을 정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진작 모이지 못하고, 벌써 기한을 넘겨기로 매우 민망스럽고 걱정되어 먼저 도착한 전선 스물 두 척을 거느리고 이 달 17일 진에 이르렀다.
그런데 나주ㆍ무안ㆍ함평ㆍ영광ㆍ무장ㆍ장흥ㆍ흥덕ㆍ고부ㆍ부안ㆍ옥구 등 고을에는 더 만들라고 배정한 전선을 보내는 것은 고사하고 원래 책임진 전선까지도 정비해서 보내지 않을 뿐 아니라. 각 진포에서 달아난 수군의 도목장조차 보내지 않아 선부와 격군을 정비하지 못하므로 민망하고 걱정스럽다. 각 포구에서는 보고가 잇달고는 있지만. 군산 포만호 이세환과 범성포만호 조대지와 다경포만호 이식은 아직 관하의 변방 장수로 있으면서 격군이 없다는 것을 핑계하고 지금까지 오지 않으니 더욱 놀라운 일이므로, 위에 적은 각 고을과 포구의 수령 및 변방 장수들을 군령에 따라 엄중히 처벌하여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도록 해야 하겠다" 고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일곱 도(팔도중 전라도는 빼고)에 가득찼던 적들이 모두 한 곳으로 모여 흉모와 교모한 게책을 안 꾸미는 것이 없으므로, 전라도를 침범할 걱정이 순식간에 박두하였는데, 수군 소속의 나주 이상 아홉 고을의 수령들이 더 만들라고 배정한 전선은 고사하고 원래 책임진 전선까지도 정비해서 보낼 뜻이 없을 뿐 아니라, 각 진포의 입방수군 중에서 달아난 수군마저 한명도 잡아 보내지 않아서 각 진포의 전선을 역시 정비할 수 없게 되었는 바, 군령이 중대한 일인데 이렇게까지 느슨해 있으니 공격하거나 수비하는 방도가 전혀 없을 것이므로 참으로 놀랄 일이다.
대개 임진년에 적세가 매우 날카롭던 무렵에 영남의 여러 성들이 연달아 무너지고 연해안 일대에 사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아주 끊어졌을때, 고성ㆍ사천ㆍ하동ㆍ남해는 호남에 연접한 지방으로써 무려 이백 여척의 적선이 연속해서 들어왔는데, 우리 수군은 서른 척 미만의 전선을 가지고서도 용감하게 돌진하여 쳐서 무찌르고 하나도 빠져 돌아가지 못하게 하여 그 날카롭고 민첩한 기세를 꺽었다.
그 뒤로 전선이 조금씩 더 준비되어 전라좌ㆍ우도는 모두80척으로써 매양 삼도의 수사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적을 섬멸할 계획을 세우고 죽음으로서 맹세하고, 물길을 가로 막아 전라도로 침범하지 못하게 한지 3년이 되었다.
호남이 보존된 것은 수군에 힘입은 것이며, 요즘에 와서는 의논이 분분하여 수군에 소속된 좌ㆍ우도를 아울러 열 아홉 고을 중에서 아홉고을이나 육군에 소속시키었을 뿐 아니라, 원래 배정된 입방수군마저도 전혀 보내지 않으므로 수군의 고약함이 전일보다 훨씬 더 심하여 참으로 민망스럽고 걱정이 된다.
나주 이상 아홉 고을 중에서 더욱 심한 곳은 나주 및 무안 등으로서 배정된 전선을 기일이 넘도록 보내지 않고 또 입방수군도 전혀 보내지 않은바, 그 죄상과 군산포만호 이세환, 법성포만호 조대지, 다경포(무안군 망운면 성내리)만호 이식 등도 아직 수군에 소속된 변방 장수들로서 재삼 독촉해도 끝내 나오지 않았으니, 크게 군율을 범하였으므로 모두 조정에서 처치하여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게 하되, 순찰사 이정암으로 하여금 이들에게 전선들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보내 오도록 각별히 분부하여 장계하였다.2)
 
2월28일[정축/4월18일]  맑다.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종사관(정경달)과 종일 이야기했다.
 
2월29일[무인/4월19일]  벽방의 척후장 제한국의 보고에, "적선 열 여섯 척이 소소포(고성군 마암면 두호리)로 들어왔다"고 하므로 전령하여 알리게 했다. 
 
1)『이충무공전서』권4,「장계」12~13쪽,「請忠淸水軍節度使催促到陣狀」.
2)『이충무공전서』권4,「장계」13~15쪽,「請罪遲留諸將狀」.



甲午 三月


初一日己卯。晴。行望闕禮。上射亭。黔毛浦萬戶决杖。都訓導行刑。○從事官還歸。○
初昏發船之際。諸漢國馳報。倭船已盡逃奔云。故停行。○初更。長興二船。失火盡燒。
初二日庚辰。晴。晩上射亭。與左右助防將,順天,防踏射帿。○初更。康津屯柴處。失火盡燒。
初三日辛巳。晴。朝拜箋後。因坐射亭。慶尙虞候李義得來言。以水軍不能多捉來事。被杖于其水使。而又欲杖足掌云。可愕可愕。與順天左右助防將,防踏,加里浦左右虞候等射帿。○酉時。碧方望將馳報。倭船六隻入五里,梁唐項等處分泊云。故卽傳令聚舟。大軍則結陣于胷島前洋。精銳船三十隻。則右助防將魚泳潭。領率勦滅事。初昏。行船到紙島。四更。發船。
初四日壬午。晴。到鎭海前洋。倭船六隻。追捕焚滅。楮島。二隻焚滅。○召所江。十四隻入泊云。故助防將與元水使進討事傳令。固城境阿自音浦。結陣經夜。
初五日癸未。晴。兼司僕送于唐項浦。探賊船撞焚。則右助防將魚泳潭馳報。賊徒畏我兵威。乘夜逃遁。空船十七隻。無遺焚滅。慶尙水使馳報同然。○是朝。廵邊使處。亦移文督討。○元水使到船。諸將各還。○是夕。光陽新船入來。
初六日甲申。晴。晩向巨濟。爲風所逆。艱到胷島。則南海縣監馳報。唐兵二人,倭奴八名。持牌文入來。故牌文及唐兵上使云。取來看審。則唐譚都司禁討牌文。余氣甚不平。坐卧不便。暮與右水伯。同見唐兵。
初七日乙酉。晴。氣極不平。轉側難便。牌文使下人成送。則不成體貌。元水使令孫義甲製送。而亦甚不合。余强病起坐作文。令鄭思立書之而送。○未時。發船到閑山陣中。
初八日丙戌。晴。病勢別無加减。氣且憊。終日苦痛。
初九日丁亥。晴。氣似暫歇。移卧于溫房。痛無他症。
初十日戊子。晴。病勢漸歇。然熱氣上衝。思飮冷物而已。
十一日己丑。大雨終日。病勢大减。熱氣亦消。多幸多幸。
十二日庚寅。晴而大風。氣甚不平。○啓聞畢正書。
十三日辛卯。晴。朝。啓本封進。○病似向差。而氣力甚困。薈及宋斗男出送。
十四日壬辰。雨雨。氣似歇。而頭重不快。○夕。光陽,康津倅,裵僉使同往。○聞忠淸水使已到薪塲云。
十五日癸巳。雨勢雖收。而風勢大起。終日呻吟。○彌助項僉使告歸。
十六日甲午。晴。氣甚不平。○右水伯來見。○忠淸水使領戰船九隻。到陣。
十七日乙未。晴。氣不快平。○海南以新倅交代事出去。黃得中等以伏兵事。入巨濟島。○探船入來。
十八日丙申。晴。氣甚不快。○南海奇孝謹,寶城,所非浦,赤梁來見。奇則以播種事還縣。○樂安留衛將,鄕所等捉來囚禁。○寶城告歸。
十九日丁酉。晴。氣不平。終日呻吟。
二十日戊戌。晴。氣不平。
二十一日己亥。晴。氣不平。錄名官呂島南桃萬戶,所非浦權管。差定。
二十二日庚子。晴。氣似少平。○元帥公事還來。則譚指揮移咨及倭將書契。曹把揔持去云。
二十三日辛丑。晴。氣如前不快。○防踏,興陽助防將,鉢浦來見。
二十四日壬寅。晴。氣似少平。○鄭思立斬倭而來。
二十五日癸卯。晴。興陽,寶城出去。○被擄兒人自倭中持天將牌文來者。送于興陽。○汝弼及薈。與卞存緖,申景潢來。細聞天只平安。但墳山盡爲野火延燒。無人可禁。痛極痛極。
二十六日甲辰。晴。暖如夏日。助防將及防踏來見。慶尙虞候,永登萬戶亦來。告歸于昌信島。
二十七日乙巳。陰而不雨。右水伯來見。○菶夕不平云。
二十八日丙午。雨雨終日。菶姪病勢甚重。悶極悶極。
二十九日丁未。晴。探船入來。則天只平安。○熊川,河東,長興,防踏,所非浦等官來見。
三十日戊申。晴。食後。上射亭。忠淸軍官,都訓導及樂安留衛將,都兵房等决罪。○三嘉倅高尙顔來見。

 

3월1일[기묘/4월20일]  맑다. 망궐례를 드렸다. 활터 정자로 올라가 검모포만호를 곤장치고, 도훈도를 처형했다. 종사관(정경달)이 돌아왔다. 막 어두울녘에 출항하려는데, 벽방 척후장 제한국이 보고하기를, "왜선이 이미 도망가 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초저녁에 장흥의 2호선이 실수로 불을 내어 다 타버렸다. 
 
3월2일[경진/4월21일]  맑다. 저녁 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좌조방장ㆍ우조방장ㆍ순천부사ㆍ방답첨사와 활을 쏘았다. 초저녁에 강진의 장작 쌓아 둔 곳에 실수로 불을 내어 장작이 모두 다 타버렸다. 
 
3월3일[신사/4월22일]  맑다. 아침에 전문을 절하여 보내고, 곧 활터 정자에 앉았다. 경상우후 이의득이 와서 말하기를, "수군을 많이 잡아오지 못했다'하여 그의 수사(원균)에게서 매을 맞고, 또 발바닥까지 맞을 뻔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순천부사ㆍ좌조방장ㆍ우조방장ㆍ방답첨사ㆍ가리포첨사ㆍ좌수사 우후, 우수사 우후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오후 여섯 시쯤에 벽방 적후장(제한국)이 보고하되, "왜선 여섯 척이 오리량(마산시 합포구 구산면 고리량)ㆍ당항포 등지에 정박해 있다" 한다. 그래서 곧 배를 소집시키라고 전령하고, 대군을 흉도 앞바다에 진치고, 정예선 서른 척을 우조방장(어영담)이 거느리고 적을 무찌르도록 했다. 그리고 초저녁에 배를 움직여 지도에 이르렀다가 새벽 두 시쯤에 출항했다.


「장계」에서
오후 두 시에 고성땅 벽방(통영시 광도면) 척후장 제한국이 급히 보고해 왔다. "당일 날이 밝을 무렵 왜의 대선 열 척, 중선 열 네 척, 소선 일곱 척(모두 서른 한 척)이 영등포에서 나오다가, 스물 한 척은 고성땅 당항포로, 일곱척은 진해땅 오리량에, 세 척은 저도로 모두 향하여 갔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즉시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에게 전령하여 다시금 엄하게 약속했다. 한편으로는 순찰사 이빈에게도 전날의 악속대로 "보벼와 기병을 거느리고 빨리 진격하여 상륙한 왜적들을 모조리 쳐서 사로 잡도록" 통고한 뒤에, 그 날 밤 여덟 시에 삼도의 여러 장수들을 남김없이 거느리고 한산 바다 가운데서 출항하여 어둠을 타고 몰래 향해하여 밤 열 시쯤 거제도 내면 지도(통영시 용남면)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1) 
 
3월4일[임오/4월23일] 맑다. 진해 아바다에 이르러 왜선 여석척을 뒤쫓아 잡아 불태워 버렸고, 저도(마산시 함포구 구산면)에서 두척을 불태워 버렸다. 또 소소강에 열 네 척이 들어왔다고 하므로 조방자와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나가 토벌하도록 전령했다. 고성땅 아잠포(阿自音浦 : 고성군 동해면)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장계」에서

새벽에 전선 20여 척을 견내량에 머물게 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고, 또 삼도의 가볍고 빠른 배(輕銳船)를 가려내어 전라좌도에서는 좌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일령장 노천기, 이령장 조장우, 좌별도장 전첨사 배경남, 판관 이설, 좌위좌부장 녹도만호 송여종, 보주통장 최도전, 우척후장 여도만호 김인영, 일령장 윤봉, 귀선돌격장 주부 이언량,
전라우도에서는 응양별도장 우후 이정충, 좌응양장 어란포만호 정담수, 우응양장 남도포만호 강응표, 조전통장 배윤, 전부장 해남현감 위대기, 중부자 진도군수 김만수, 좌부장 금갑도만호 이전표, 통장 곽호신, 우위중부장 강진현감 유해, 좌부장 목포만호 전희광, 우부장 주부 김남준.
경상우도에서는 미보항첨사 김승룡, 좌유격장 남해현령 기효근, 우돌격장 사량만호 이여념, 좌척후장 고성현령 조의도, 선봉장 사천현감 기직남, 우척후장 웅천현감 이운룡, 좌돌격장 평산포만호 김축, 유격장하동현감 성천유, 좌선봉장 소비포권관 이영남, 중위우부장 당포만호 하종해 등 서른 한 명의 장수들을 선발하고, 수군 조방장 어영담을 장수로 삼아 당항포와 오리량 등지의 적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몰래 급히 보냈다.
그리고 나는 이억기 및 원균과 함께 대군을 거느리고 영등포와 장문포의 적진 앞바다의 시루섬(甑島:마산시 합포구 구산면)해상에서 학익진을 형성하여 한바다를 가로 끊어서 앞으로는 군사의 위세를 보이고 뒤로는 적의 퇴로를 막았다.
그러자 왜선 열 척이 진해 선창(마산시 합포구 진동면 진동리)에서 나와 기스락을 끼고 항해하므로 조방장 어영담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이 한꺼번에 돌진하여 좌우로 협공하자, 여섯 척은 진해땅 읍전포(마산시 합포구 진동면 고현리)에서, 두 척은 고성땅 어선포(통영시 용남면)에서, 두 척은 진해땅 시굿포(마산시 합포구 구산면)에서 모두 배를 버린채 뭍으로 올라가므로 모두 남김없이 쳐부수고 불태워 버렸다. 녹도만호 송여종은 왜선에 사로잡혀 있던 고성 정병 심거원과 진해 관비 예금과 함안 양가집 딸 남월등을 빼앗았다. 그리고 사로잡혔던 두 사람은 왜적들이 머리를 베어 버리고 가벼렸다.
당항포에 들어와 정박한 왜선은 대ㆍ중ㆍ소선을 아울러 스물 한 척인데, 불타는 연기를 바라보고는 모두들 기운이 꺾이어서 스스로 세력이 궁함을 알고 상륙하여 결진하는 것이었으므로, 순변사 이빈에게 다시금 육군의 지원을 독촉하는 공문을 보내고, 어영담에게 명령하여 인솔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바로 그곳으로 향하게 하였으나, 마침 저녁 조수가 이미 나가고 날조차 어두워서 진격하지 못한 채 당포 포구를 가로막고 밤을 지냈다.2) 
 
3월5일[계미/4월24일] 겸사복(윤봉)을 당항포로 보내어 적선을 쳐부수고 불태웠는지를 탐문케 하였더니, 우조방장 어영담이 보고하되 "적들이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겁내어 밤을 틈타서 도망했으므로 빈 배 열 일곱 척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했다. 경상우수사(원균)의 보고도 같은 내용이었다. 이 날 아침 순변사에게서도 토벌을 독려하는 공문이 왔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배에 이르자 여러 장수들은 각각 돌아갔다. 저녁에 광양의 새 배가 들어왔다.


「장계」에서

이른 새벽에 나와 이억기는 한바다에 진을 치고 밖에서 들어오는 적에 대비하고, 어영담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포구 안으로 바로 들어 갔는데, 오후 두 시에 도착한 어영담 등의 급보에 "왜적들은 모두 도망해 버렸고, 왜선 스물 한 척에는 기와와 왕대를 가득 실은 채 줄지어 정박해 있었으므로, 모두 쳐부수어 불태워 버렸다"고 하였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도 여거 장수들의 보고하는 바에 따라 역시 같은 내용으로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기운을 뽐내던 남은 왜적들이 감히 항전을 못하고 배를 버린 채 밤중에 도망친 것인 바, 이러한 때를 당하여 수륙이 상응하여 일시에 합공했더라면 거의 섬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수륙군의 주둔한 곳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쉽게 빨리 통고하지를 못하여 새장 속에 들어 있는 적을 다 잡지 못한 것이 참으로 통분하거니와, 고성 및 진해로 쏘다니던 적들도 이뒤로는 스스로 뒤돌아다 보게 되어 제 멋대로 드나들지는 못할 것이다.
이 날 수군 총원이 합세하여 한바다에 그득한 채 포성은 하늘을 진동케 하며, 동서로 진을 바꾸면서 엄격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영등포ㆍ장문포ㆍ제포ㆍ웅천ㆍ안골포ㆍ가덕 및 천성 등지에 웅거했던 적들이 바로 공격할까 겁내어 복병하고 있던 막집을 모두 제손으로 불지르고 , 무서워서 굴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밖에는 그림자조차 없어지고 말았다.3)
 
3월6일[갑신/4월25일]  맑다. 거제로 향하는데 맞바람이 거슬러 불어 간신히 흉도에 도착하니,4) 남해현감이 보고하되 "명나라 군사 두명과 왜놈 여덟 명이 패문을 가지고 왔기에, 그 패문과 명나라 군사 두 명을 보낸다"고 했다. 그 패문을 가져다 보니, 명나라 도사 담종인이 "적을 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몸이 몹시 괴로워서 앉고 눕기조차 불편했다. 저녁에 우수가 (이억기)와 함께 명나라 군사를 만나 보았다.
 
3월7일[을유/4월26일] 맑다.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꼼짝하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아랫 사람으로 하여금 패문을 지어오라고 하였더니, 지어 놓은 글이 꼴이 아니다. 또, 경사우수사 원균이 손의갑으로 하여금 작성했는 데도 그것마저 못마땅하다. 나는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 앉아 초를 잡고, 정사립에게 이를 다시 써 보냈다.5) 오후 두 씨쯤에 출항하여 한산도 진중에 이르렀다.


「장계」에서

대체로 말하면, 모든 장수와 군사들이 승첩한 기세로 기뻐 뛰며 다들 사생결단으로 바로 돌진하려고 할 뿐 아니라, 주리고 파리하여 숨이 가빠하던 군졸들도 모두 즐거이 출전하여 왜선 30여 척을 모두 쳐부수고 불태웠으며, 한 척도 빠져 나간 것이 없다. 그리고 그대로 장문포와 영등포의 적들을 차차 무찌르려고 계획하되, 수군에 소속된 나주 이상 아홉 고을은 더 만드는 전선은 고사하고 원래 책임진 전선 등이 모두 오늘까지 돌아오지 않고, 그 도의 각 포구에서도 역시 각 고을의 수군을 징집해 보내지 않으므로 정비되지 않고 있으며, 충청수사 구사직도 아직까지 진에 도착하지 않아 병력의 위엄이 고약할 것같으므로, 형세를 보아서 진결하기로 하고 , 한산 진중으로 돌아왔다.
 
3월8일[병술/4월27일]  맑다. 병세는 별로 차도가 없다. 기운이 더욱 축이 나서 종일 앓았다.
 
3월9일[정해/4월28일]  맑다. 기운이 좀 나은 듯 하므로 따뜻한 방으로 옮겨 누웠다. 아프긴 해도 다른 증세는 없다.
 
3월10일[무자/4월29일] 맑다. 병세는 차츰 나아지는 것 같은데 열기는 치올라 그저 찬 것만 미시고 싶은 생각뿐이다.


「장계」에서
삼도의 여러 장수들이 적선을 분멸한 수는 이억기와 어영담의 보고에 따라 상세히 정리하여 적었거니와, 왜적의 물건들은 약탈하면서 돌아다니던 적들이라 별로 중요한 것이 없고, 다만 의복ㆍ양식ㆍ솥ㆍ나무그릇 등의 잡물 뿐이므로, 수색해온 장병들에게 고루고루 나누어 주었다.
오직 경상우수사 원균은 적선 서른 한 척을 그 도의 여러 장수들만이 모두 불태운 것처럼 공문을 만들어 보냈으니, 온 진중의 장수와 군사들이 괘씸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으니 조정에서 참고하여 시행하여 주도록 장계하였다.
 
3월11일[기축/4월30일]  종일 큰비가 오다. 병세가 아주 많이 나아졌고 열도 또한 내리니 참으로 다행이다.
 
3월12일[경인/5월1일]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몹시도 불편하다. 장계 정서하는 일을 마쳤다고 들었다.
 
3월13일[신묘/5월2일]  맑다. 아침에 장계를 봉해 올렸다. 병은 차츰 차도가 나아진 것같으나, 기력이 매우 고달프다. 그대로 회와 송두남을 내어 보냈다.
 
3월14일[임진/5월3일]  비오다. 병은 나은 듯하지만, 머리가 무겁고 기분이 좋지 않다. 저녁에 광양현감(송전), 강진현감(유해). 첨치 배경남이 같이 갔다. 소문에 "충청수사(구사직)가 이미 신장(薪場)에 왔다"고 한다.
 
3월15일[계사/5월4일]  비는 그쳤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종일 끙끙 앓았다. 미조항첨사가 돌아갔다.
 
3월16일[갑오/5월5일]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충청수사가 전선 아홉 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3월17일[을미/5월6일]  맑다. 몸이 회복되지 않는다. 해남현감(위대기)은 새 현감과 교대하는 일로 나가고, 황득중 등 복병에 관한 일로 거제도로 갔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3월18일[병신/5월7일]  맑다. 몸이 몹시 불쾌하다. 남해현감 기효근, 보성군수(김득광), 소비포권관 이영남, 적량첨사 고여우가 와서 봤다. 기효근은 파종 때문에 돌아갔다. 낙안 유위장과 향소 등을 잡아 가두었다. 보성군수가 아뢰고 돌아갔다.6)
 
3월19일[정유/5월8일]  맑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끙끙 앓았다. 
 
3월20일[무술/5월9일]  맑다. 몸이 불편하다.
 
3월21일[기해/5월10일]  맑다. 몸이 불편하다. 명단을 작성하는 관리도 여도만호(김인영), 남도포만호(강응표), 소비포권관 이영남을 뽑아 담당시키었다.
 
3월22일[경자/5월11일]  맑다. 몸이 약간 나아진 것같다. 원수의 공문이 왔는데, "명나라 지휘 담종인의 자문(중국과 왕래하던 문서)과 왜장의 서계(일본과 왕래하던 문서)를 조파총이 가지고 간다"고 하였다.
 
3월23일[신축/5월12일]  맑다. 기운이 여전히 불쾌하다. 방답첨사(이순신)ㆍ흥양현감(배흥립)ㆍ조방장(어영담)ㆍ발포만호(황정록)가 와서 봤다.
 
3월24일[임인/5월13일]  맑다. 몸이 조금 나아진 것같다. 정사립이 왜놈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왔다.
 
3월25일[계묘/5월14일]  맑다. 흥양현감과 보성군수가 나갔다. 사로잡혔던 아이(希順)7)는 왜의 진중에서 명나라 장수(담종인)가 가지고 왔던 자인데, 흥양으로 보냈다. 아우 여필, 아들 회, 변존서, 신경황이 와서 어머니 안부를 자세히 들었다. 다만 선산이 모두 산불에 탔는데, 아무도 끄지 못했다고 한다. 몹시 가슴 아프다.
 
3월26일[갑진/5월15일]  맑다. 따뜻하기가 여름 날씨같다. 조방장ㆍ방답참사가 와서 밨다. 경사우후(이의득)ㆍ영등포만호(우치적)도 왔다가 "창신도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3월27일[을사/5월16일]  흐리되 비는 아니오다. 조카 봉이 "저녁에 몸이 몹시 불편하다"고 했다.
 
3월28일[병오/5월17일]  종일 비오다. 조카 봉의 병세가 더 악화되었다. 몹시도 민망하다.
 
3월29일[정미/5월18일]  담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였다. 웅천현감ㆍ하동현감ㆍ장흥부사ㆍ방답첨사ㆍ소비포권관 등이 와서 봤다.
 
3월30일[무신/5월19일]  맑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충청군관과 도훈도, 낙안 유위장과 도병방 등을 처벌했다. 삼가현감 고상인이 와서 봤다. 
 
1)『이충무공전서』권4,「장계」21쪽,「唐項捕破倭兵狀」.
2) ①『이충무공전서』 권4, 「장계」21~22쪽.
    ② 조성도,『임진장초』, 216~20쪽, 419~22쪽,「당항포 승첩을 아뢰는 장계」.
3)『이충무공전서』권4,「장계」23쪽.
4) "고성땅 아잠포에서 출항하여 순풍에 돛을 앞뒤를 서로 이어 거제읍 흉도 앞바다로 향하려고 할 때 남해현령 기효근이 보고··· (固城境阿自音浦發船從風懸帆首尾相接而臣濟邑前胸島前洋指向時南海縣令奇孝謹)"라 하여 바람 방향이 '역풍'과 순풍으로 다름.
5)「잡저」15~16쪽,「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
"조선 신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삼가 명나라 선유도사 대인 앞에 답서를 올립니다.
왜적이 스스로 흔단을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죄없는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또 서울로 쳐들어가 흉악한 짓들을 저지를 것이 말할 수 없으며,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의 통분함이 뼈 속에 맺혀 이들 왜적과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 않기로 맹세하고 있습니다. 각 도의 배들을 정비하여 곳곳에 주둔하고 동서에서 호응하는 위에, 육지에 있는 장수들과도 의논하여 수륙으로 합동공격해서 남아 있는 왜적들을 한 척의 배도 못 돌아가게 함으로써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여, 이 달 초사흗날 선봉선 이백 여 척을 거느리고 바로 거제도로 들어가 그들의 소굴을 무찔러 씨를 없애고자 하였던 바, 왜선 30여 척이 고성·진해 지경으로 들어와서 여염집들을 불태우고 우리 백성들을 죽이며 또 사로 잡아가고, 기와를 나르며 대를 찍어 저희 배에 가득 일어가니 그 정상을 생각한다면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적들의 배를 쳐부수고 놈들의 뒤를 쫓아 도원수에게 보고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여 나서는 이때, 도사 대인의 타이르는 패문이 뜻밖에 진중에 이르므로 받들어 두번 세번 읽어보니, 순순히 타이르신 말씀이 간절하고 곡진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다만 패문의 말씀 가운데, '일본 장수들이 마음으로 돌려 귀화하기 않는 자가 없고, 모두 병기를 거두어 저희 나라로 돌아가려고 하니 너희들 모든 병선들은 속히 각각 제고장으로 돌아가고, 일본 진영에 가까이 하여 트집을 일으키지 말도록 하라고 왜인들이 거제, 웅천, 김해, 동래 등지에 진을 치고 있는바, 거기가 모두 다 우리 땅이거늘 우리더러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지 말라 하심은 무슨 말씀이며, 또 우리더러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제 고장이란 또한 어디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고, 또 트집을 일으킨 자는 우리가 아니요 왜적들입니다. 또한 왜인들이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흉악하고 교활한 적도들이 아직도 그 포악스러운 행동을 그만두지 아니하고, 바닷가에 진을 친 채 해가 지나도 물러가지 아니하고, 여러 곳으로 쳐들어와 살인하고 약탈하기를 전일 보다 갑절이나 더하오니, 병기를 거두어 바다를 건너 돌아가려는 뜻이 과연 어디 있다 하오리까. 이제 강화한다는 것은 실로 속임과 거짓밖에는 아닙니다. 그러나 대인의 뜻을 감히 어기기 어려워 잠깐 얼마쯤 두고 보려 하오며, 또 그대로 우리 임금께 아뢰려 하오니 대인은 이 뜻을 널리 타이르시어 놈들에게 역천과 순천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답서를 드립니다."
6) 초서본 『난중일기』 3월 18일자의 마지막 부분에는 "보성군수가 아뢰고 돌아갔다(寶城告歸)" 라는 말이 없음.
7)『이충무공전서』권4,「장계」19쪽.「陳倭情狀」에는 상주에 사사집 종이라 했음.



甲午 四月


初一日己酉。晴。日當食不食。○長興,珍島,鹿島癘祭事告歸。○忠淸水使來見。
初二日庚戌。晴。朝食後。上射亭。三嘉縣監及忠淸水使。共話終日。○荄姪入來。
初三日辛亥。晴。是日癘祭。三道戰軍饋酒一千八十盆。右水使,忠淸水使。同坐而餉軍。
初四日壬子。陰。元帥軍官宋弘得,卞弘達。持新及第紅牌來。○慶尙右兵使軍官朴義英。來傳其將問安。○食後。三嘉縣監來。○晩上射亭。長興進酒食。終日穩話。
初五日癸丑。陰。
初六日甲寅。晴。別試開塲。試官。吾與右水伯,忠淸水使。參試官。長興,固城,三嘉,熊川。監試取。
初七日乙卯。晴。早會捧試。
初八日丙辰。晴。氣不平。上試塲。
初九日丁巳。晴。畢試出榜。○魚助防將棄世。痛歎何言。
初十日戊午。陰。廵撫御史到陣先文來。
十一日己未。晴。廵撫入來云。故問船出送。
十二日庚申。晴。廵撫徐渻。來話于我船。右水使及慶尙,忠淸水使並到。酒三行。元水使佯醉發狂。亂發無理之言。廵撫不勝恠恠。○三嘉告歸。
十三日辛酉。晴。廵撫欲見習戰。故出于竹島洋中。較習。○宣傳官元士彪,金吾郞金悌男。以忠淸水使拿去事。到來。
十四日壬戌。晴。與金悌男細話。晩到廵撫船。細論兵機。有頃。右水使來。順天,防踏,蛇渡並來。告別還船。○夕到忠淸水使船。酌別盃。
十五日癸亥。晴。忠淸水使與宣傳官,金吾郞,右水使並至。別具虞卿。
十六日甲子。晴。朝食後。上射亭。慶尙水使軍官高景雲,都訓導及待變色營吏捉來。指麾不應。賊變亦不飛報。故决杖。○夕。宋斗男自京下來。一應啓本。一一回啓施行。
十七日乙丑。晴。晩上射亭公事。○右水伯來見。○巨濟縣令馳報。倭船百餘隻。自本土始出。絶影島指向云。○暮。巨濟被擄男女十六名逃還。
十八日丙寅。晴。曉。逃還人處。詳問賊情。則平義智在熊川境笠巖。平行長在熊浦云。○忠淸新水使,順天及右虞候,巨濟來。
十九日丁卯。雨雨。金僉知敬老。至自元帥府。論議討賊策應等事。因宿同船。
二十日戊辰。終日細雨。右水使及忠淸水使,長興,馬梁來見。手談且論兵。
二十一日己巳。或雨或晴。獨坐篷下。竟夕無人來到。○防踏除忠淸水使重記修正事告歸。○夕。金惺叔及昆陽李光岳來見。興陽亦來。
二十二日庚午。晴。風氣爽如秋天。金僉知告歸。○啓本及鳥銃封進。○夕。長興,興陽來。
二十三日辛未。晴。順天,興陽,長興,臨淄等官來。昆陽李光岳。持酒來。
二十四日壬申。晴。朝書京簡。○靈巖郡守,馬梁僉使來見。○順天告歸。○各項啓聞封進。○慶尙右水使處。廵察使從事官入來云。
二十五日癸酉。晴。曉頭。氣甚不平。終日苦痛。○寶城來見。
二十六日甲戌。晴。痛勢極重。幾不能省。○昆陽告歸。
二十七日乙亥。晴。痛勢漸歇。
二十八日丙子。晴。慶尙水使及李佐郞惟緘來見。○蔚入來。
二十九日丁丑。晴。氣似快平。是日。右道饋三道戰軍酒。

 

4월1일[기유/5월20일]  일식(日蝕)을 할 것인데 하지 않았다. 장흥부사(황세득)ㆍ진도군수(김만수)ㆍ녹도만호(송여종)가 여제를 지낸다고 아뢰고 돌아갔다. 충청수사가 와서 봤다. 
 
4월2일[경술/5월21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갔다. 삼가현감과 충청수사와 같이 종일 이야기했다. 조카 해가 들어왔다. 
 
4월3일[신해/5월22일]  맑다. 오늘 여제를 지냈다.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 천 여든 동이를 먹였다. 우수사와 충청수사도 같이 앉아 군사들에게 먹였다. 
 
4월4일[임자/5월23일]  흐리다. 원수의 군관 송홍득과 변홍달이 새로 급제한 홍패(과거 합격증)를 가지고 왔다. 경상우병사의 군관 박의영이 와서 그의 장수의 안부를 전했다. 식사를 한 뒤에 삼가현감이 왔다. 저녁 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니, 장흥부사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종을 오손도손 이야기하였다. 
 
4월5일[계축/5월24일]  흐리다.
 
4월6일[갑인/5월25일]  맑다. 별시를 보는 시험장소를 개설하였다. 시험관은 나와 우수사(이억기)ㆍ충청수사(구사직)요, 참시관(시험감독관)은 장흥부사(황세득)ㆍ고성현령(조응도)ㆍ삼가현감(고상안)ㆍ웅천현감(이운룡)으로 시험을 감독하게 하였다.
 
4월7일[을묘/5월26일]  맑다. 일찍 모여 시험을 받았다.
 
4월8일[병진/5월27일]  맑다. 몸이 불편한 채 시험장으로 올라 갔다.
 
4월9일[정사/5월28일]  맑다. 시험을 마치고 방을 내어 붙였다. 조방장 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통탄함을 무엇으로 말하랴!
 
4월10일[무오/5월29일]  흐리다. 순무어사(서성)가 진에 온다는 기별이 먼저 왔다.
 
4월11일[기미/5월30일]  맑다. 순무어사가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문안선을 내어 보냈다.
 
4월12일[경신/5월31일]  맑다. 순무어사 서성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 했다. 우수사(이억기)ㆍ경상수사(원균)ㆍ충청수사(구사직)가 함께 왔다. 술이 세 순배 돌자 경상수사 원균은 짐짓 술취한 척하고 미친듯이 날뛰며 억지소리를 해대니, 순무어사도 무척 괴이쩍어 했다. 삼가현감이 아뢰고 돌아갔다.
 
4월13일[신유/6월1일]  맑다. 순무어사가 전쟁 연습하는 것을 보고싶어 한다. 그래서 죽도(통영시 한산면) 바다 가운데로 나가서 연습했다. 선전관 원사표, 금오랑 김제남이 충청수사(구사직)를 잡아 갈 일로 왔다.
 
4월14일[임술/6월2일]  맑다. 김제남과 함께 자세한 말을 했다. 저녁 나절에 순무어사의 배로 가서 군사기밀을 자세히 의논했다. 잠시 후에 우수사가 오고, 순천부사ㆍ방답첨사ㆍ사도첨사도 아울러왔다 나는 하직하고 배로 돌아왔다.
 
4월15일[계해/6월3일]  맑다. 충청수사(구사직)가 선전관(원사표)ㆍ금오랑(김제남)ㆍ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왔다. 충처수사 우경 구사직과 작별했다.
 
4월16일[갑자/6월4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갔다. 경상수사(원균)의 군관 고경운과 도훈도와 변고에 대비하는 색리ㆍ영리를 잡아다가 지휘에 응하지 않고 적변을 빨리 보고하지 않은 죄로 곤장을 쳤다. 저녁에 송두남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장계에 따라 낱낱이 명령받은대로 시행했다.
 
4월17일[을축/6월5일]  맑다. 저녁 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공무를 봤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거제현령(안위)이 급히 와서 보고하는데, "왜선 백 여 척이 본토에서 처음 나와서 절영도로 향한다"고 했다. 저물 무렵에 거제에 살다가 사로 잡혔던 남녀 열 여섯명이 도망하여 돌아왔다.
 
4월18일[병인/6월6일]  맑다. 새벽에 도망쳐 돌아온 사람이 있는 곳에 가서 적정을 자세히 물으니, 대마도 평의지(종의지)는 웅천땅 입암(진해시 웅천동 제덕리)에 있고, 평행장(소서행장)은 웅포에 있다고 한다. 충청도 신임 수사(이순신), 순천부사, 우수사 우후(이정층), 거제현령(안위)이 왔다.
 
4월19일[정묘/6월7일]  비오다. 첨지 김경로가 원수부에서 와서 적을 토벌할 대책을 논의하고서 그대로 한 배에서 잤다.
 
4월20일[무진/6월8일]  종일 가랑비가 오다. 우수사ㆍ충처수사ㆍ장흥부사ㆍ마량첨사가 와서 바둑을 두고 군사 일도 의논했다.
 
4월21일[기사/6월9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혼자 봉창 아래 앉아 있어도 저녁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방답첨사(이순신)가 충청수사가 되었으므로, 중기(重記:교대할 때에 넘겨주는 인계인수서)를 수정하는 일로 돌아갔다. 저녁에 김성숙과 곤양군수 이광악이 와서 봤다. 흥양현감(배흥립)도 왔다.
 
4월22일[경오/6월10일]  맑다. 바람이 시원하여 가을 날씨같다. 첨지 김경로가 돌아갔다. 장계와 조총을 보해 올렸다. 저녁에 장흥부사와 흥양현감이 왔다.
 
4월23일[신미/6월11일]  맑다. 순천부사(권준)ㆍ흥양현감(배흥립)ㆍ장흥부사(황세득)ㆍ임치첨사(홍견) 등이 왔다. 곤양군수 이광악이 술을 가지고 왔다.
 
4월24일[임심/6월12일]  맑다. 아침에 서울 편지를 썼다. 영암군수(박흥장)ㆍ마량첨사(강응호)가 와서 봤다. 순천부사가 돌아갔다. 각 항목의 장계를 봉해 올렸다. 경사우수사가 있는 곳에 순찰사 종사관이 왔다고 한다.
 
4월25일[계유/6월13일]  맑다. 꼭두새벽부터 몸이 불편하여 종일 괴로워했다. 보성군수가 와서 봤다.
 
4월26일[갑술/6월14일]  맑다. 통증이 극히 심하여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 곤양군수가 돌아갔다.
 
4월27일[을해/6월15일]  통증이 차츰 덜하다
 
4월28일[병자/6월16일]  맑다. 경상수사(원균)와 좌랑 이유함이 와서 봤다. 아들 울이 들어왔다.
 
4월29일[정축/6월17일]  맑다. 기운이 상쾌하진 것 같다. 오늘 우도에서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을 먹였다.



甲午 五月


初一日戊寅。晴。終日汗流如注。氣似快平。○朝豚葂入來。
初二日己卯。晴。曉。薈以天只辰日進饌事還歸。○右水使及興陽,蛇渡,所斤僉使來見。○氣漸向差。
初三日庚辰。晴。興陽告由而歸。○長興,鉢浦來見。○軍粮計備。空名告身三百餘張及有旨兩度下來。
初四日辛巳。大風大雨。終日不息。達夜甚惡。慶尙右水使軍官來告。賊倭三名乘中船到楸島。相逢捉來云。使之押來。○夕。問于孔大元。則倭等從風放船。向本土。中洋値颶風。不能制船。漂到此島云。然詐黠之言。不可信矣。○李渫,李祥祿歸。○營探船入來。
初五日壬午。風雨大作。捲屋三重。高飛片片。雨脚如麻。不能庇身。風雨未時少止。○鉢浦作餠送來。
初六日癸未。陰而晩晴。元水使領擒倭三名來。捧招則變詐萬端。卽令元水使斬之。
初七日甲申。晴。氣似和平。受鍼十六處 。
初八日乙酉。晴。元帥軍官邊應慤。持來元帥關及啓草與有旨。欲進舟師于巨濟。使賊恇惑退遁事。慶尙右水使及全羅右水使招來議定。○忠淸水使入來。
初九日丙戌。雨雨終日。獨坐空亭。百念攻中。懷思煩亂。
初十日丁亥。雨雨。曉起。開窓遠望。則許多之船。擁滿一海。賊雖來犯。可以殲滅矣。○右虞候及忠淸水使來爭博。○豚薈出海。
十一日戊子。雨雨終夕。自三月積置公事。一一題决。○樂安來話○大雨如注。晝夜不止。
十二日己丑。大雨終日。到夕少止。右水使來見。
十三日庚寅。晴。因黔毛浦萬戶報。慶尙右水使所屬鮑作等。載格軍而逃。現捉而鮑作。則隱在於元水使所駐處云。故送司僕等。推捉之際。元水使大怒。司僕等結縛云。故送盧潤發解之。
十四日辛卯。雨雨終日。忠淸水使,樂安,臨淄,木浦等官來見。
十五日壬辰。雨雨終日。
十六日癸巳。陰而細雨。夕大雨終夜。屋漏無乾。多慮各船人冒處之苦也。○昆陽送簡。兼致惟政往來賊中問答草記。見之不勝憤痛也。
十七日甲午。雨下如注。海霧且暗。咫尺不辨。終夕不止。
十八日乙未。雨下終日。彌助項僉使,尙州浦權管來見。○夕。寶城告歸。
十九日丙申。霖雨乍收。薈,葂等還送。
二十日丁酉。雨且大風。熊川縣監及所非浦來見。○獨坐終日。百念攻中。多憾湖南方伯之辜負國家也。
二十一日戊戌。雨雨。熊川,所非浦來。擲從政圖。○巨濟,長門浦被擄人卞師顔逃還言。賊勢不至盛大云。
二十二日己亥。雨且大風。廵使及廵邊使處。裁簡出送。
二十三日庚子。雨。熊川,所非浦來。○晩。海南倅來進酒饌。忠淸水伯請來。
二十四日辛丑。暫晴。夕雨。右水伯與忠淸水使來。終日談話。○荄姪入來。
二十五日壬寅。雨雨。忠淸水使來話而還。雨勢不止。戰軍之懷悶可言。○荄姪還歸
二十六日癸卯。或雨或收。是日。李仁元及土兵二十三名。送于本營收牟。
二十七日甲辰。或晴或雨。與忠淸水使,蛇渡,鉢浦,呂島,鹿島射帿。
二十八日乙巳。暫晴。蛇渡,呂島來告射帿。故右水使,忠淸水使請來同射。醉話終日而罷。○光陽四船摘奸。
二十九日丙午。朝雨晩晴。珍島告歸。○熊川及巨濟,赤梁來見而歸。○昏。鄭思立告南海人持船隻。載出順天格軍云。故捉囚。
三十日丁未。陰而不雨。賊人等及逃還。誘引光陽一船軍。慶尙鮑作三名决罪。○忠淸水使,慶尙虞候來見。

 

5월1일[무인/6월18일]  맑다. 종일 땀이 비오듯이 흐르더니 좀나아진것 같다. 아침에 아들 면이 들어왔다. 
 
5월2일[기묘/6월19일]  맑다. 새벽에 아들 회가 어머니 생신에 상차려 드릴 일로 돌아갔다. 우수사(이억기)ㆍ흥양현감(배흥립)ㆍ사도첨사(김완)ㆍ소근첨사(박윤)가 와서 봤다. 몸이 차츰 나아져 갔다. 
 
5월3일[경진/6월20일]  맑다. 흥양현감이 휴가를 얻어 돌아갔다. 장흥부사와 발포만호가 와서 봤다. 군량명세서와 공명고신(이름이 안 적인 사령장) 삼백 여 장과 임금의 분부 두 통이 내려왔다. 
 
5월4일[신사/6월21일]  종일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오고, 밤새도록 그치지 않고 더 심하게 내렸다. 경상우수사의 군관이 와서 고하기를 "왜적 세 명이 중선(中船)을 타고 추도(통여시 산양면)에 온 것을 만나 잡아왔다"고 했다 이를 압송해 오도록 시켰다. 저녁에 공대원에게 물으니, 왜적들이 바람을 따라 배를 몰고 본토로 향하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외오리 바람을 만나 배를 조종할 수가 없어 떠다니다가 이 섬에 닿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간사한 사람의 말이니 믿을 수 없다. 이설ㆍ이상록이 돌아갔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5월5일[임오/6월22일]  비바람이 세게 불었다. 지붕이 세 겹이나 말리어 조각조각 높이 날려가고, 빗발은 삼대같이 내려 몸을 가리지 못했다. 오후 두 시쯤에야 비바람이 조금 멈추었다. 발포만호(황정록)가 떡을 만들어 보내 왔다.
 
5월6일[계미/6월23일] 흐렸다가 저녁 나절에 개이다. 경상수사 원균이 왜놈 세 명을 잡아왔기에 문초를 받아보니, 이랬다 저랬다 만번이나 속이므로 원균 수사로 하여금 목을 베게 했다.
 
5월7일[갑신/6월24일]  맑다. 기운이 편안한 것 같다. 침 열 여섯군데를 맞았다.
 
5월8일[을유/6월25일]  맑다. 원수의 군관 변응각이 원수의 공문과 장계 초본과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수군을 거제로 진격시켜 적이 무서워 도망가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경상수사와 전라우사를 불러 의논했다. 충청수사가 들어왔다.
 
5월9일[병술/6월26일]  종일 비오다.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5월10일[정해/6월27일]  비오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역고 멀리 바라보니 우리의 많은 배들이 바다에 가득차 있다. 적이 비록 쳐들어 온다 해도 섬멸할 만하다. 우후(이정충)와 충청수사(이순신)가 와서 장기를 두었다.
 
5월11일[무자/6월28일]  비가 저녁 때까지 내렸다. 3월부터는 밀려 쌓인 공문을 낱낱이 결재했다. 낙안군수(김준계)가 와서 이야기했다. 큰 비가 퍼붓듯이 내려 밤낮을 그치지 않았다.
 
5월12일[기축/6월29일]  큰비가 종일 내리다가 저녁에야 조금 그쳤다.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봤다.
 
5월13일[경인/6월30일]  맑다. 검모포만호의 보고에 "경상우수사 소속의 보자기들이 격군을 싣고 도망가다가 현장에서 붙들렸는데, 많은 보자기들이 원 수사가 있는 곳에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사복들을 보내어 잡아오게 하였더니 "원균 수사가 도리어 사복들을 묶어서 가두었다"고 했다 그래서 군관 노윤발을 보내어 이를 풀어 주게 했다.
 
5월14일[신묘/7월1일]  종일 비오다. 충청수사(이순신)ㆍ낙안군수(김준계)임치현감(홍견)ㆍ목포만호(전희광)등이 와서 봤다.
 
5월15일[임진/7월2일]  종일 비오다
 
5월16일[계사/7월3일]  흐리고 가랑비가 오다. 저녁에는 큰비가 밤새도록 내려 지붕이 새서 마른데가 없다. 각 배의 사람들이 거처가 매우 괴로울 것이 염려된다. 곤양군수(이광악)가 편지를 보내고, 겸하여 사명담 유정이 적진 안으로 왕래하면서 문답한 초기(草記)를 보내 왔기로 보니 분통함을 이길 길이 없다.
 
5월17일[갑오/7월4일]  비가 퍼붓듯이 오다 바다의 안개가 컴컴하여 눈앞을 분간할 수 없는데, 저녁내 그치지 않았다.
 
5월18일[을미/7월5일]  종일 비오다 미조항첨사ㆍ사주포권관이 와서 봤다. 저녁에 보성현감이 돌아갔다.
 
5월19일[병신/7월6일]  장마비가 잠깐 걷혔다. 아들 회와 면을 돌려 보냈다.
 
5월20일[정유/7월7일]  비가 오고 바람이 세게 불다. 웅천현감(이운룡)과 소비포권관(이영남)이 와서 봤다. 온종일 홀로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민다. 호남의 방백(관찰사)들이 나라를 저버리는 것에 유감이 더 많다.
 
5월21일[무술/7월8일]  비오다. 웅천현감ㆍ소비포권관이 와서 종정도(從政圖)를 했다. 거제 장문포에서 적에게 사로잡혔던 변사안이 도망쳐 와서 하는 말이 "적의 형세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했다.
 
5월22일[기해/7월9일]  비오고 바람이 세게 불다. 순찰사와 순변사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5월23일[경자/7월10일]  비오다. 웅천현감ㆍ소비포권관이 왔다. 저녁 나절에 해남현감(위대기)이 와서 술과 안주를 바치므로 충청수사(이순신)를 청하여 왔다.
 
5월24일[신축/7월11일]  잠시 맑다가 저녁에 바오다. 우수사와 충처수사가 와서 종일 이야기했다. 조카 해가 들어왔다.
 
5월25일[임인/7월12일]  비오다.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하고서 돌아갔다. 비가 그치지 않으니 전쟁하는 군사들의 마음이야 오죽 답답하랴, 조카 해가 돌아갔다.
 
5월26일[계묘/7월13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오늘 이인원과 토병 스물 세명을 본영으로 보내어 보리를 거두었다.
 
5월27일[갑진/7월14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충청수사ㆍ사도첨사ㆍ발포만호ㆍ 여도만호와 함께 활을 쏘았다.
 
5월28일[을사/7월15일]  잠깐 개이다 사도첨사ㆍ여도만호가 와서 활을 쏘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수사ㆍ충청수사를 청해 와서 같이 활쏘고, 취하여 종일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광양 4호선의 부정사실을 조사했다.
 
5월29일[병오/7월16일]  아침에 비오다가 저녁 나절에 개이다. 진도군수(김만수)가 아뢰고 돌아갔다. 웅천현감(이운룡)ㆍ거제현령(안위)ㆍ적량첨사(고여우)가 와서보고 돌아갔다. 저물녁에 정사립이 보고하는데 "남해 사람이 배를 가지고 와서 순천 격군을 싣고 간다"고 했다. 그래서 잡아서 가두었다.
 
5월30일[정미/7월17일]  흐리되 비는 아니오다. 왜놈들과 도망가자고 꾄 광양 1호선 군사와 경상도 보자기 세 명을 처벌했다. 충청수사, 경상 우후가 와서 봤다. 



甲午 六月


初一日戊申。晴。晩射帿。
初二日己酉。晴。晩往右水使陣。康津呈酒。射帿數廵。元水使亦到。余則氣不平。早還。卧看忠淸水伯與裵門吉爭博賭勝負。
初三日庚戌。朝晴。午後驟雨大作。海水亦變濁。近古所罕。○忠淸水使及裵僉使來爭奕。
初四日辛亥。晴。兼司僕賫有旨來。舟師諸將不能相協。今後盡革前習云。悚歎何極。此乃元均醉妄之故也。
初五日壬子。晴。忠淸水使,蛇渡,呂島,鹿島並來射帿。○夜二更。及唱金山及妻子並三名。癘疫死。三年眼前信使者一夕死去。可愕。○是日。耕菁。○宋希立以樂安,興陽,寶城軍粮督促事。出去。
初六日癸丑。晴。與忠淸水使,呂島萬戶。射帿十五廵。
初七日甲寅。晴。忠淸水使及裵僉使來話。○决南海軍官及色吏等罪。○宋德馹還來言。有旨入來云。○是日。種菁。
初八日乙卯。晴。暑氣如蒸。與忠淸水使,右虞候。共射帿二十廵。○夕。奴漢京入來。天只平安。喜幸喜幸。○會寧浦萬戶到陣。軍功賞職官敎亦來。
初九日丙辰。晴。忠淸水使,右虞候來射。右水使來共話。
初十日丁巳。晴。暑熱如蒸。射帿五廵。
十一日戊午。晴。暑如鑠金。朝。蔚往營。別懷悠悠。○晩。忠淸水使來射。因仁夕飯。月下共話。玉笛寥亮。
十二日己未。大風而不雨。旱氣太甚。
十三日庚申。風勢極惡。暑熱如蒸。
十四日辛酉。炎旱太甚。海島如蒸。爲農事極可慮也。○與忠淸令公,蛇渡,呂島,鹿島。射帿二十廵。
十五日壬戌。晴。午後灑雨。申景潢持領台簡入來。憂國無踰於此。聞尹知事又新喪。懷悼不已。○順天,寶城馳報。唐揔兵官張鴻儒乘號船。領百餘名。由海路已到珍島碧波亭云。
十六日癸亥。朝雨雨。夕晴。與忠淸水使射帿。
十七日甲子。晴。右水使忠淸水使來話。
十八日乙丑。晴。元帥軍官趙秋年。持傳令入來。元帥到豆峙。聞光陽倅移水定伏之時。因私用情云。故送軍官問由。可愕。
十九日丙寅。晴。元帥軍官及裵應祿。歸于元帥處。
二十日丁卯。晴。忠淸水使來見。射帿。○探船李仁元入來。
二十一日戊辰。晴。唐將由水路已到碧波亭者。誤傳云。
二十二日己巳。晴。以祖母忌日不坐。是日。庚炎倍前。大島如蒸。人不堪其苦。
二十三日庚午。晴。虞候以軍粮督促事出去。見乃梁生擒倭奴而來。推問賊情形止。且問所能。則焰硝煑取及放銃俱善云。
二十四日辛未。晴。順天,忠淸水使來。射二十廵。
二十五日壬申。晴。扇子封進。與忠淸水使。射帿十廵。
二十六日癸酉。晴。忠淸水使,順天,蛇渡,呂島,固城等官。射帿。
二十七日甲戌。晴。射帿十五廵。
二十八日乙亥。晴。國忌不坐。終日獨坐。○陳武晟。碧方望摘奸來。告無賊船。
二十九日丙子。晴。順天呈酒食。與右水使,忠淸水伯。同射帿。○蔚入來。天只平安云。

 

6월1일[무신/7월18일] 맑다. 저녁 나절에 활을 쏘았다. 
 
6월2일[기유/7월19일]  맑다. 저녁 나절에 우수사(이억기)의 진에 갔더니 강진현감(유해)이 술을 바쳤다. 활 두어 순을 쏘았다. 경상수사 원균도 왔다. 나는 곧 몸이 불편하여 돌아가 누어서 충청수사와 첨사 문길 배경남이 내기 장기 두는 것을 구경했다. 
 
6월3일[경술/7월20일]  아침에 맑더니 오후에 소나기가 퍼부어 바닷물 빛조차 흐리니 근래에 드문 일이다. 충청수사, 첨사 배경남이 와서 바둑을 두었다. 
 
6월4일[신해/7월21일]  맑다. 겸사복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수군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니 다음부터는 전날의 버릇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죄송하기 그지없다. 이는 원균이 술을 취하여 망발을 부린 것 때문이다. 
 
6월5일[임자/7월22일]  맑다. 충청수사ㆍ사도첨사ㆍ여도만호ㆍ녹도만호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밤 열 시쯤에 급창(관청의 심부름하는 종) 김산과 그 처자 등 세 명이 유행병으로 죽었다. 세 해나 눈앞에 두고 미덥게 부리던 사람인데 하루 저녁에 죽어 가다니 놀랍다. 오늘 무우밭을 갈았다. 송희립이 낙안ㆍ흥양ㆍ보성으로 군량을 독촉할 일로 나갔다.
 
6월6일[계축/7월23일]  맑다. 충청수사ㆍ여도만호와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6월7일[갑인/7월24일]  맑다. 충청수사 첨사 배경남이 와서 이야기했다. 남해군관과 색리 등의 죄를 처벌했다. 송덕일이 돌아와서 "임금의 분부가 들어온다"고 한다 오늘 무우를 부침했다.
 
6월8일[을묘/7월25일]  맑으며 더워서 찌는 듯하다. 충청수사, 우우후와 같이 활 수무 순을 쏘았다. 저녁에 종 한경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기쁘고 다행이다. 회령포만호(민정붕)가 진에 왔다. 전공에 따라 포상하는 관교(官敎:敎旨)도 왔다.
 
6월9일[병진/7월26일]  맑다. 충청수사, 우우후가 와서 활을 쏘았다. 우수가사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6월10일[정사/7월27일]  맑으며 더워서 찌는 듯하다 활 다섯 순을 쏘았다.
 
6월11일[무오/7월28일]  맑으며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같다. 아침에 아들 울이 본영으로 갔다. 작별하는 회포가 씁쓸하다. 저녁 나철에 충청수사가 와서 활을 쏘고 그대로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달빛 아래 같이 이야기할 때 옥피리 소리가 처량했다.
 
6월12일[기미/7월29일]  바람이 세게 불었으나 비는 안왔다. 가뭄이 너무 심하다.
 
6월13일[경신/7월30일]  바람이 몹시 불고 더위는 찌는 듯하다. 
 
6월14일[신유/7월31일]  더위와 가뭄이 너무 심하여 바다의 섬도 찌는 듯하다. 농사일이 아주 걱정된다. 충청수사ㆍ사도첨사ㆍ여도만호ㆍ녹도만호와 함께 활 스무 순을 쏘았다.
 
6월15일[임술/8월1일]  맑더니 오후에 비가 내렸다 신경황이 영의정(유성룡)의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라의 근심함이 이보다 더한 이가 없을 것이다. 지사 윤우신이 죽었다니 애석할 따름이다. 순천부사ㆍ보성군수가 달려와 보고하는데 "명나라 총병관 장홍유가 호선(號船)을 타고 백 여 명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거쳐 벌써 진도벽파정(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이르렀다" 고 했다.
 
6월16일[계해/8월2일]  아침에 비오다가 저녁에 개었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6월17일[갑자/8월3일]  맑다. 우수사ㆍ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 했다.
 
6월18일[을축/8월4일]  맑다. 원수의 군관 조추년이 전령을 가지고 왔다. "원수가 두치(하동읍 두곡리)에 이르러 광양현감(송전)이 수군 중에 복병을 뽑을 적에 사사로운 정을 썼다" 고 했다. 그래서 군관을 보내어 그 까닭을 물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6월19일[병인/8월5일]  맑다. 원수의 군관과 배응록이 원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6월20일[정묘/8월6일]  맑다. 충청수사가 오고 활을 쏘았다. 탐후선 이인원이 들어왔다.
 
6월21일[무진/8월7일]  맑다. 명나라 장수(장흥유)가 바닷길로 벌써 벽파정에 이르렀다고 한 것은 잘못 전한 것이라고 한다.
 
6월22일[기사/8월8일]  맑다. 할머님의 제사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오늘 불꽃과 같은 삼복 더위가 전보다 더하여 큰 섬이 찌는 듯하여 사람이 견디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6월23일[경오/8월9일]  맑다. 우후(이몽구)가 군량 독촉하는 일로 나갔다가 견내량에서 왜놈을 사로잡아 왔다. 왜적의 동태를 묻고 또 무엇을 잘하는지 물었더니 "염초를 굽는 일과 총쏘기를 다 잘한다"고 했다.
 
6월24일[신미/8월10일]  맑다. 순천부사ㆍ충청수사가 와서 활 스무 순을 쏘았다.
 
6월25일[임신/8월11일]  맑다. 부채를 봉하여 보냈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6월26일[계유/8월12일]  맑다. 충청수사ㆍ순천부사ㆍ사도첨사ㆍ여도만호ㆍ고성현령 등이 활을 쏘았다.
 
6월27일[갑술/8월13일]  맑다. 활 열 다섯 순을 쏘았다.
 
6월28일[을해/8월14일]  맑다. 나라 제사날(명종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진무성이 벽방의 망보는 곳의 부정사실을 조사하고 와서 적선이 없더라고 보고했다.
 
6월29일[병자/8월15일]  맑다. 순천부사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왔다. 우수사ㆍ충청수사와 같이 활을 쏘았다. 아들 울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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