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권 숙종조 4
7년(신유, 1681)
○ 1월. 하교하기를,
"민생들 잘 살고 못 살고가 수령들 현부(賢否)에 달려 있기 때문에 수령 선택을 신중히 하는 일이야말로 사실 나라 다스리는 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그리고 방백(方伯)이라면 그 임무가 안에서 조정 명령을 받아 왕화(王化)를 밖에 선양하고 1개 도(道)를 요리하면서 각 군읍(郡邑)을 총괄적으로 지도 감독하는 것인데, 아무리 좋은 법이 있어도 방백이 그것을 받들어 행할 줄을 모르면 그 법은 있으나 마나인 것이고, 또 아무리 정치를 잘하는 순리(循吏)가 있고 반대로 백성에 군림하는 오관(汚官)이 있어도 방백이 출척(黜陟)할 줄을 모르면 수령들 성적 평가가 엉망이 되므로 방백 임무는 그 중하기가 또 수령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현재 각 도의 방백 간발에 있어 신중을 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맡은 바 직책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재주와 덕망과 무게를 갖춘 자가 너무 적어 내 매우 개연히 여기는 것이다. 연초면 6조(曹)에서 관찰사촹절도사 등을 추천하는 제도가 비록 있기는 해도 착실하지 못한 경우가 많으니 비변사가 나서서 그 사람의 직책촹품계촹이력 그리고 죄에 걸린 사실이 있고 없고 따지지 말고 별도로 인재 비축을 함으로써 방백들에게 위임정치를 하는 데 미진한 점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했는데, 이단하(李端夏)가 말하기를,
"식년(式年) 시험 규정에 있어 글의 뜻은 묻지 않고 음석(音釋)만 잘하면 그것을 취택해서 점수 배정을 과다하게 하기 때문에 비록 제술(製述)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전자에 살려둔 득점수를 합산한 정도로는 합격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험에는 응시하지 않으려 하고 또 그 때문에 시골 선비들은 문장의 구두에만 신경을 쓰지 글 뜻에 대해서는 깜깜한 실정이고, 서울의 유자들은 또 표(表)나 책(策)만 일삼지 경학(經學)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 제도로 인재 선발을 하는 것이 초두부터 이렇게 엉성하고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만약 《대전(大典)》의 규정대로 비록 강론(講論)은 달달 못해도 그 한 문장 전체의 뜻만 파악하고 있으면 그에게는 조(粗)를 주고, 또 전체의 뜻을 잘 알기는 해도 융회관통 정도가 못 된 자는 약(略)을 주고, 아주 융회관통해서 그것을 설명하는 데 막힘이 없는 자에게는 통(通)을 준다면 과거 규정도 발라지고 인재 발굴도 가능할 것입니다."
하여, 상이 응시자들에게 미리 그 사실을 알려 그 방면으로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하고, 또 그것을 과거 보이는 사목(事目)에다 끼워 넣도록 명했다.
조사석(趙師錫)은 말하기를,
"예조가 비치하고 있는 국상 때의 등록(謄錄)이 이미 유실된 것이 많아 《오례의(五禮儀)》만을 준용할 수밖에 없는데 그 역시도 소략한 곳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국조(國朝)에서 이미 행했던 예법에 있어서는 더욱 고증할 길이 없으니 국(局) 하나를 따로 두고 대신이 그것을 맡도록 하며 또 낭관을 차출해서 《오례의》의 소략한 부분을 옛 예문을 참작해 가면서 적당히 증보를 하도록 하고, 또 열성조에서 그대로 따랐던 것 또는 고쳤던 것들을 참고하여 한 권의 예서(禮書)로 만들도록 하소서."
하여, 상이 졸곡(卒哭) 후에 《실록》을 참고해서 거기에서 뽑아내 만들도록 명했다. 단하가 또 말하기를,
"고 상신 이경여(李敬輿)가 효종 때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이어 편찬할 것을 건백(建白)하여 지금 영상인 김수항(金壽恒)이 도청(都廳)이 되었었는데 그 일이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실록청(實錄廳)에다가 당상관 한 명을 더 두고 그 일만 맡아 하도록 하면 조사석이 아뢴 그 일까지도 성사가 가능할 것입니다."
"선조(宣祖) 30년 간의 실록은 신의 아비 식(植)이 수정을 하였고 그 뒷부분 10년 치는 채유후(蔡裕後)가 계속해서 수정했던 것이나 엉성하고 잘못된 곳이 더러 있습니다. 문학에 능한 신하를 시켜 주자(朱子)가 창려집(昌黎集)에 대한 고이(考異)를 썼던 것처럼 해서 한 책자를 만들어 내게 하면 유감이 없을 것 같습니다."
했는데, 이에 대해 이민서(李敏?)촹조사석이 말하기를,
"《실록》이라면 이만저만 중대한 기록이 아닌데 지금 한 개인의 소견으로 붓을 댄다면 뒤폐단이 있을 염려가 있습니다."
하여, 상이 다음 총재관(總裁官)이 입시했을 때 다시 논의하도록 하라고 명했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상께서 강석을 문닫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지금 비록 연석(筵席)에 나오실 수는 없더라도 무엇인가 보고 계시는 책은 틀림없이 있을 것인데 현재 무슨 책을 보고 계십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심경(心經)》과 《성학집요(聖學輯要)》를 때때로 보고 있다."
하였다.
○ 그때 여러 가지 금기로 하여 오랜 기간 신료들 접견을 않고 있었는데, 영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차하여 무사안일 속에서 즐기는 일에 물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깊이 경계하고, 이어 말하기를,
"유신(儒臣)으로서 금중에 입직한 자이면 그도 바로 재숙(齋宿)하는 사람이므로 그로 하여금 나와 강을 하게 하여도 안 될 것 없습니다. 그리고 또 대신 이하 누구도 일정한 신분 확인의 절차를 마친 다음 대궐 안에 들어와 있게 하고 수시로 접견도 하시고, 또 신하들로 말하더라도 엄숙하고 경건한 자리에 오래 있으면서 용잡한 가정사를 잊어버릴 수 있으면 옛분들이 말했던, 잘 다스려지는 조정에 들어오면 덕이 날로 진보된다고 했던 그 효과를 오늘에도 거둘 수 있어 공사(公私) 상하(上下)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하자, 상이 마음에 두고 깊이 생각하리라는 뜻으로 답하고, 이어 명하기를,
"대신 또는 담당관이 만약 재가를 받아 결정할 일이 있으면 재숙하고 입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 암행어사 안후태(安後泰)촹김두명(金斗明)촹이사영(李思永)촹오도일(吳道一)촹이언강(李彦綱)촹목림일(睦林一) 등을 나누어 보내 각 고을을 염탐하도록 했는데, 비변사에서는 으레 주는 절목 이외에 절목 몇을 더 추가하도록 아뢰었다. 즉 감사로서 몸단속이 지저분하거나 출척(黜陟)을 불공정하게 하는 자, 곤수(?帥)로서 군졸들을 괴롭히고 제 몸만 살찌우면서 상납 잘하는 자, 문무(文武)를 막론하고 인재가 침체부진하여 여론이 애석하게 여기는 자가 있는지를 염탐 수소문하는 일, 그 도내에 인륜을 멸시하고 상도에 벗어난 짓을 하여 풍속을 파괴하는 자, 근거없는 말을 날조하여 듣는 사람을 현혹시키는 자, 위협과 완력으로 상대를 몰아세우고 제멋대로 백성을 부려먹는 자가 있으면 모두 찾아내어 그 사실을 적발하고 가둔 다음 결과를 아뢰는 일, 수령으로서 인륜 대죄인을 숨겨두고 옥사를 성립시키지 않은 자, 억울한 옥사를 풀어 다스리지 않은 자가 있을 시는 오래된 일이거나 근자의 일이거나 또는 당사자가 죽었거나 살았거나 간에 모두 찾아내도록 하고, 여러 해 체류된 옥사를 관리들이 서로 핑계만 대면서 오래도록 처리를 않고 있는 자, 그 지방 호족으로서 많은 농장을 점유하고 전결(田結)을 은닉하거나 선량한 여인을 겁탈하고 종으로 삼거나 사람들을 불러들여 자기 울밑에 살리면서 그들 힘을 착취하는 자를 적발하는 일, 양호(養戶)의 폐단은 삼남(三南)이 유독 더한데 백성들 전결을 호수(戶首) 단독으로 많이 차지하고 있으면서 요역(?役)에 따라 곱이나 더 징수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견뎌내지 못하면서도 그의 위세에 눌려 감히 관에 고발을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자이거나 또는 완악한 향리(鄕吏)로서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며 공(公)을 속이고 백성을 해치는 자, 영리(營吏)나 읍리(邑吏)로서 진상품을 대신 바치고 그 대가를 받으면서 폭리를 취하는 자, 그 고을 장관(將官)이나 색리(色吏)로서 군병을 등쳐먹는 자가 있으면 모두 엄하게 다스리는 일, 그 밖에 효렴(孝廉)이 특이한 자, 천민으로서 남다른 행실이 있는 자는 찾아서 표창도 하고 상도 주며 그 사람이 비록 이미 죽고 없더라도 그가 한 실적을 들어 아뢰게 하는 일, 환과고독(鰥寡孤獨) 기타 호소할 곳 없는 외로운 자 또는 사민(士民)으로서 나이 1백 세 이상인 자도 별도로 방
○ 옥당관을 소대했는데 영부사 송시열도 함께 입시했다. 시열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에서 기자(箕子) 이후로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도학(道學)을 밝혀 사문(斯文)에 공로를 남긴 이로 정몽주(鄭夢周) 같은 이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군신(君臣) 부자(父子)의 윤리와 중국을 섬기고 오랑캐는 배척해야 하는 의리를 알게 만든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에 열성조에서도 모두 숭보(崇報)의 은전을 가했고 그의 제사를 받드는 자손들 역시 대대로 벼슬과 녹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지금 그의 봉사손(奉祀孫)인 도사(都事) 찬광(纘光)이 죽고 나자 그의 아들은 시골에서 떠돌이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의 나이 겨우 13세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비록 무슨 직을 제수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가 서울로 다시 돌아와서 사당을 지킬 수 있도록 특별 급료를 내리셔야 할 것입니다."
하고, 시독관(侍讀官) 조지겸(趙持謙) 역시 그렇게 말하여 상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 대신과 비변사 당상관을 인견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지난번 송 영부사가, 환과고독에 대해서는 대동법에 의한 전세(田稅)를 특별 견감해야 한다고 아뢴 일이 있었는데 그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여,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이 의지할 곳 없는 네 종류의 백성들을 뽑아내어 호역(戶役)을 감면해 주고 늙은이들에게는 특별히 먹을 것을 대줄 것을 청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 2월. 옥당관을 소대했을 때 시강관 조지겸(趙持謙)이, 이핵(李?)촹정시한(丁時翰)이 지극한 행실이 있다고 말하고 윤이건(尹以健) 역시 효행으로 칭해지는 사람인데 이건은 지금 직책을 띠고 있으나 이핵과 시한은 현재 직명이 없으므로 그들을 수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조에 분부해서 그 두 사람을 특별 수용함으로써 격려와 권장의 뜻을 보이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 5월. 지진이 있었다. 비망기를 내리기를,
"이 못난 소자가 나라 형세가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하늘이 부탁한 큰 기업을 이어받고는 백성 사랑하는 혜택이 직접 백성들에겐 닿지 않고 천재 이변만 층으로 첩으로 나타나고 있어 밤낮없이 두려웁기 마치 썩은 끈으로 말을 모는 기분인 것이다. 금년 여름의 이 지독한 흉재는 태고에도 없었던 일로 망종(芒種)이 이미 지나고 신께 제례까지 올렸는데도 계속 쌀쌀한 바람만 불고 비 내릴 생각은 더욱 막막하기만 한 것이다. 비록 가랑비가 잠시잠시 내리기는 해도 그것은 홍로(洪爐) 속에 눈 한 점에 불과한 것이다. 비가 5일만 내리지 않아도 보리는 없다고 하는 것인데, 더구나 거의 해마다 흉년이어서 백성들이 극도로 곤궁한 이때 심한 가뭄까지 이렇게 참혹할 정도이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 죽을 날이 곧 닥치는 것만 같아 이 말을 하자니 그야말로 심장이 싸늘하고 숨통이 막히는 것이다.
그런데 지진의 이변까지 며칠 사이에 거듭 일어나고 있으니 그 무슨 재화가 깜깜한 속에 잠복해 있기에 인자하신 하늘이 그렇게도 자상하고 또록또록하게 경고를 내리시는 것이란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어서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편치 않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승지는 나 대신 교서를 초안해서 바른 말을 다방면으로 구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아 주도록 하고 그 밖의 감선(減膳)촹철악(撤樂)촹금주(禁酒) 등등도 해조로 하여금 지금 당장 거행하도록 하라.
아, 지금 이 재앙들은 오로지 과인의 부덕 소치이지만 그렇다고 뭇 신하들도 서로서로 격려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지 않겠는가. 그대 모든 대소 신료들은 나의 이 뜻을 십분 이해하고 서로 조심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일개인의 사견은 깨끗이 없애고 넓고 공평한 길을 택해 걸을 것이며 국가에 보탬은 없고 백성들에게 피해만 주는 모든 폐정(弊政)들도 모두 재량해서 바꾸어 나감으로써 이 어려운 시기를 타개해 갈 수 있도록 하라."
했는데, 정원이 그 성교(聖敎) 그대로 바로 포고할 것을 청하여 두 번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 대신 이하 제신들을 인견하고 재이를 멎게 할 방법을 묻자, 이조 판서 김석주(金錫?)가 기인공물(其人貢物)의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에 관해 아뢰기를,
"영소전(永昭殿)과 익릉(翼陵)에 올리는 물건이 가장 많은데 대체로 한 온돌에 들어가는 것이 기인 한 명 몫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궁전에 들어가는 기인의 수를 써서 들여오고, 두 자전(慈殿)에서 각 도의 토산물 수를 좀 감했으면 한다는 하교가 있었으니 같이 써서 들여오도록 하라."
했다. 석주가 또 삼남(三南) 각 고을의 전선(戰船)에서 낭비하고 있는 물력이 결국은 쓸모없이 소모만 되고 있는 것임을 극력 주장하면서 아뢰기를,
"민유중(閔維重)이 늘, 연해 여러 도서에 있는 각 아문이 둔전을 설치한 곳에는 지형이 적당한 곳을 골라 진장(鎭將)을 두고 전선을 건조하도록 하고 각 읍에는 바닷가 요해처에만 전선을 배치하고 그 나머지 곳은 모두 없앴으면 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전선 수는 줄지 않으면서도 모든 비용은 절감이 될 것입니다."
하자, 민정중(閔鼎重)도 아뢰기를,
"원균(元均)이 많은 전선을 모아두었다가 바다에 처넣고 도망친 뒤에 이순신(李舜臣)이 배 여남은 척을 가지고 적을 처부쉈고 그나마 거기 쓰인 배들은 모두가 급한 상황에서 그럭저럭 만든 것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장수가 장수라야지 그렇지 못하면 배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것을 어디에다 쓸 것입니까."
하여, 상이 서로 논의하여 변통의 방법을 취하라고 명했다.
○ 경상도 암행어사 이언강(李彦綱)촹이사영(李思永)의 서계(書啓)에 의하여 현풍(玄風) 사는 양민으로 나이 1백 세가 되어 치아와 머리털이 다시 돋아난 방준문(方準文)에게 특별히 자품을 올려주도록 명하고, 나이 1백 1세가 된 여경(呂●)의 어머니에게도 본도로 하여금 옷감과 먹을 것을 제급(題給)하도록 하였다.
○ 함경도 명천사(明川寺)에 딸린 종 산봉(山奉)의 아내 막금(莫今)이 자기가 낳은 자식을 죽이려다가 곁에서 말려서 못 죽였는데, 사연인즉 구걸하고 다니다가 자식을 낳아 도저히 기를 가망이 없어서 부득이 그랬다는 것이었다. 감사 윤해(尹?)의 보고에 의하여 해조가 복주(覆奏)하기를,
"수교(受敎)에 의하면 부모로서 자기 자녀를 죽인 자는 극형으로 다스리게 되어 있으나 그것은 이미 살인을 한 상태를 두고 한 말이므로 일반 법조문에 의해 장 육십 도 일년(杖六十徒一年)으로 처리하면 어떻겠습니까?"
한 조회 공문에 대해, 재가를 내리기를,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마음은 인지상정인 것이다. 함경도 풍속이 원래는 순후하다고 했는데 요 몇 해 동안 습속이 무무하여 결국은 어미가 자식을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비록 곁에서 말렸기 때문에 그 흉계가 미수에 그치기는 하였으나 그가 마음먹었던 것으로 따지자면 죽인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 풍교(風敎)를 바로잡는 의미에서라도 그를 극형으로 처단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대신들과 논의하여 다시 재가를 받도록 하라."
하여,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의논드리기를,
"북녘땅 백성들이 제 아무리 완악하고 미련하다고는 해도 제 손으로 제가 낳은 갓난이를 죽인다는 것이 그 어찌 본심이기야 하겠습니까. 원인은 살아가기가 어렵고 게다가 부역은 다른 도에 비해 더욱 무겁기 때문에 아비와 자식 사이에도 서로 보전을 못하는 것이니 참으로 불쌍한 일이지 미워할 일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살인과 미수를 그의 마음으로 보아서는 같다고 하여 법 집행에 있어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것도 옳지 않은 일 같습니다. 그에게 차율(次律)을 적용하는 것이 형량 재량에 있어 아마 옳을 것 같습니다."
하고, 다른 대신들도 똑같은 의논을 드렸으므로 상이 그 논의대로 시행하도록 명하고, 이어 도신으로 하여금 그곳 폐정을 개혁하고 풍속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잘 생각해서 결과를 아뢰고 재가를 받도록 하였다.
○ 주강에 나아갔을 때 지경연(知經筵) 이민서(李敏?)가 아뢰기를,
"신축년부터 그 이후로 한재가 늘 되풀이되다가 신해년에 와서 극에 달했었고 신해년 이후 10여 년 동안은 한번도 풍년이라곤 없었는데 금년에 와서 또 이 모양입니다. 조정에서 백성들 딱한 사정을 생각하지 않는 것
하고, 교리 오도일(吳道一)도 아뢰기를,
"가혹한 징수를 못하게 하고 체류된 옥사를 소결하는 일도 당연히 강구해야 하겠지만 제일 근본 문제는 임금이 학문에 힘쓰는 일인데 근래에는 다사해서 서연에 자주 납시지를 못하므로 수성(修省)하는 데 잘 안 되는 점이 있지 않을까 그것이 염려인 것입니다."
하여, 상이 모두 가상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민서가 또 아뢰기를,
"관리들이 뇌물로 비단 한 필 이상만 받으면 사형을 당해야 했던 것이 당(唐) 나라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관리들에게 무언가 부탁을 전제로 한 물품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있으니 그 간사하고 교활한 것들이 무엇을 기탄하겠습니까. 그 폐단을 고치지 않고서는 아무리 백성 돌보는 정책을 쓴다고 해도 모두 실효가 없는 일입니다."
하자, 승지 이인환(李仁煥)이 아뢰기를,
"신이 그 전 양양(襄陽)에 있으면서 본 일인데 진상품 한 짐이면 교제비로 쓸 물품이 대여섯 짐 딸려야 할 정도로 서리(胥吏)들의 폐단이 되고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듣자니 너무나 놀랄 일이다. 각별히 엄하게 단속하도록 하라."
했다. 부제학 남이성(南二星)이 아뢰기를,
"지금 위에서나 아래서나 하는 일들이 모두 형식으로 끝나고 맙니다. 대신들이 하는 말은 조세와 환상곡을 약간씩만 감해 주자는 것이지만 실무자들은 그것마저도 경비를 아낀답시고 하여 실지 혜택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선 상공(上供)부터 비록 고기 한 점 나물 한 줌이라도 줄일 수 있는 데까지 줄이고 조사(朝士)들 녹봉도 똑같이 감하여 일단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돌보기에 전력해야지만 유지해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믿음으로 대하고 녹봉을 후히 주는 것이 사기를 앙양하는 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신해년에 이미 감봉한 일이 있는데 지금 또 어떻게 감할 것인가. 각 전에 올리는 것들은 써서 들여오면 다소 줄일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 그 전에 관서지방이 해마다 흉년이고 육읍(六邑)은 그 중에서도 더했는데 굶주린 백성들을, 겨레붙이는 있으나 전지가 없는 자, 겨레붙이는 없고 전지만 있는 자, 이것도 저것도 없이 걸식하는 자, 이렇게 3등분을 하여 혹자에게는 식량을 급여하고 혹자에게는 환곡을 대여했다가 그 후 걸식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모두 탕감을 해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 와서 또 도신의 장계에 의해 전지 없는 자를 다시 조사해서 그들에게는 일체를 견면하도록 했는바 그 곡식이 1천 6백 30여 석에 달한다고 하였다.
○ 초복(初伏)부터 처서(處暑)까지는 일을 보지 않는 것이 관례였는데, 부교리 오도일이 상소하기를,
"공부란 하루가 급한 것이므로 일반 관례를 깨고 수시로 법강(法講)을 열더라도 안 될 것 없을 것이고 또 수많은 일을 처리하시는 틈을 이용해서 자주 소대를 하고 계시지만 혹은 편복(便服) 차림으로 인대도 하시고 혹은 와내(臥內)로 들어와서 보게도 하시면 마음의 우울을 풀고 몸을 보양하는 데 있어서도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답하기를,
"그 전부터도 한더위 정강(停講) 때 대좌 자리를 마련했던 전례가 있어 왔다. 지금도 나의 기력을 헤아려 가며 수시로 소대할 생각이다."
○ 6월. 선혜청(宣惠廳)이 호남촹영남에서 사전(四殿)에 올리는 각종 삭선(朔膳)의 값 및 감영촹병영촹수영 그리고 각 읍의 관청 필수품 값, 사객(使客) 접대비, 전선촹병선의 값 등에 소요되는 쌀의 수량을 필요 한만큼 줄이고 그것을 따로따로 적어 올려 그렇게 규정을 확정했는데 이유는 국용(國用)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호남은 원 수량 총 6만 2백여 석에서 줄어든 것이 1만 5천 6백여 석이었고, 영남은 원수량 총 4만 석에서 줄어든 것이 9천 5백 80여 석에 이르렀다.
○ 홍문관이 아뢰기를,
"영소전(永昭殿) 연제(練祭)를 설행해야 할 것인지의 여부에 관해 예경(禮經)들을 상고해 보았더니 《의례(儀禮)》 상복 장기(喪服杖朞) 조항의 처를 위해 입는 복 주소에는 이르기를 '처를 위한 복은 복 입는 기간이나 지팡이를 짚는 것이나 담제[?]를 모시는 것이나 모두가 어머니 복과 같다.' 하였고, 《예기(禮記)》 잡기(雜記)에는 '기년상에는 11월 만에 연제[練], 13월 만에 상제[祥], 15월 만에 담제를 올린다.' 하였고, 상복소기(喪服小記)에서는 '종자(宗子)면 어머니가 있어도 처를 위해 담제를 올린다.' 하고서 그 주에서는 '아버지가 계시면 적자가 처를 위해 지팡이가 없는데 지팡이가 없으면 담제도 없고,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만 계시면 지팡이도 짚고 담제도 차린다.' 하였고, 또 《예기》 복문(服問)편에는 '임금이 주상이 되는 상은 부인(夫人)인 처와 태자(太子)와 적부(適婦)이다.' 하였고, 《통전(通典)》에는 황후(皇后)의 상 대상(大祥) 기일(忌日)에 곡하고 제사에 임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를 두고 논의 하면서 이르기를, '두원개(杜元凱)가 말하기를 「천자(天子)촹제후(諸侯)는 비록 졸곡(卒哭) 후에 복은 벗어도 연제일촹상제일에는 반드시 자리를 만들어 제를 올린다.」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또 상복소기(喪服小記)에는 '재기상(再朞喪)은 3년이 걸리고, 기상(朞喪)은 2년이 걸린다. 일주년이 되어 제를 올리는 것은 예이고, 일주년이 되어 복을 벗는 것은 천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복을 벗기 위해 제를 올리는 것은 아니다.' 하고서 그 주에 이르기를, '제(祭)와 연(練)을 비록 동시에 거행하지만 그 제가 연을 하기 위해 올리는 제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했고, 《오례의(五禮儀)》 연제의(練祭儀)에는 '만약 내상(內喪)을 먼저 당했으면 11월 만에 연제를 올리는데 여러 날을 앞두고 좋은 날을 골라 제를 행하며 왕세자가 최복(衰服)을 입고 들어가서 곡하고는 나와서 연복(練服)으로 갈아입고 제를 올린다.' 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예경을 놓고 볼 때 왕비의 상에 연제촹담제가 있는 것만은 변통할 수 없는 당연한 전례인 것 같습니다.
지금 상께서 비록 하루를 한 달로 치는 권제(權制)를 써서 이미 복을 벗기는 했어도 당초에 복제는 장기(杖朞)로 마련을 했던 것인데 그것은 옛 예도를 따르자는 뜻 아니었습니까. 지팡이가 있으면 담제도 있다고 했으니 담제가 있고서야 연제는 당연히 있어야 할 것으로 이번에도 연제촹담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전하가 입으셨던 복제에서 연제촹담제를 모두 폐지해 버린다면 예의 본의로 보아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또 두원개의 '졸곡 후에 복은 벗어도 연제촹담제에는 자리를 만든다.'고 한 말이나, 상복소기의 '그 제는 복을 벗기 위해 올리는 제는 아니다.'고 한 말로 보더라도 연제와 복 벗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근거를 제시해 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오례의》에, 내상을 먼저 당했으면 연제촹상제를 모두 왕세자가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그 말대로라면 왕세자가 꼭 있어야지만 비로소 연제를 올릴 수 있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임금이 주상이 되는 상은 부인인 처라고 하는 문구가 이상과 같이 예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렇다면 주상이 바로 전하이신데 어찌 세자가 없다 하여 당연히 거행해야 할 예를 폐지할 것입니까. 지금 만약 당연히 행해야 할 연제를 행하지 않는다면 연주(練主)는 어느 때 개조할 것이며, 수릉관(守陵官)촹시릉관(侍陵官)은 언제 바꾸고 없애고 하며, 초기(初忌)의 축문도 연사(練事)라고 쓸 것입니까, 상사(祥事)라고 쓸 것입니까? 이상 여러 가지 일들이 이리저리 막히는 게 많기 때문에 충분한 검토를 거쳐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신들이 다방면으로 상고해 보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참고가 될 만한 예경의 글들을 간추려서 삼가 이렇게 조목별로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내용 중에 예경을 인용하고 그 뜻풀이를 한 부분은 매우 명쾌했다. 더구나 당초 장기로 마련을 했었는데 복을 이미 벗었다 하여 연제촹담제를 행하지 않는다면 인정으로 보거나 예문으로 보아서나 사실 서운하기
하였다.
○ 7월. 영소전 연제촹담제에 관해 밖에 있는 유신들에게 문의했던바 전 집의(執義) 박세채(朴世采)촹윤증(尹拯)은 다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고, 집의 이상(李翔)이 의논드리기를,
"전하께서 이미 행하신 예는 왕조(王朝)의 예로서 복을 이미 다 벗어 버렸으므로 다시 연(練)해야 할 복이 없는데 그렇다면 연이라는 그 제사야말로 참으로 내용은 없고 이름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는 옛날 성인이 만들어 놓은 만고를 두고 누구나 행해야 할 경례(經禮)로서 감히 폐할 수가 없는 일이고 보면 그렇게 한다는 것이 어쩌면 그 예 자체를 아끼는 의미에서 비록 실은 없을지라도 형식이라도 갖추자는 뜻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일주년 내에 제사를 두 번 올린다고 했는데 만약 연제가 없으면 하나는 궐하는 것이 되고 또 신주를 바꾸는 일도 연제가 아니면 바꿀 기회가 없게 되어 그 점으로 볼 때 더욱 폐할 수는 없는 일 같습니다.
그 밖의 상제[祥] 후에도 일제(日祭 상식(上食)) 올리는 일은 개인집의 예로 말하면 올리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제왕의 예는 개인집 예와는 다르므로 만약 조종조에서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면 그대로 하더라도 안 될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예경에 이른바, 군자(君子)가 행하는 예는 모두 그 나라에서 옛날에 하던 것과 똑같이 그 법을 잘 지키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한 말이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했고, 영중추 송시열은 의논드리기를,
"당초에 대신들이 청했던 대로 11월 만에 연제, 13월 만에 상제, 15월 만에 담제, 이렇게 했더라면 오늘 와서 의심될 일이 하나도 없을 것인데 그렇게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주자(朱子)가 변례(變禮)를 논하면서 이르기를, '근본이 바르지 못하기에 백 가지 모두가 걸리는 것이다.' 했던 그 말입니다. 그리고 또 연(練)이니 상(祥)이니 담(?)이니 하는 것들이 살아 있는 상주가 점차 바꾸어가는 과정을 주안점으로 하여 만든 제도라면 지금으로서는 사실 연을 쓸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죽은 자에게 제사 모시는 것을 위주로 하여 만든 제도라면 그것을 폐하거나 궐한다는 것은 참으로 흠결이 있는 일일뿐더러 예를 아끼고 형식이라도 챙기자는 뜻도 없는 것이 됩니다."
하여, 상이 하교하기를,
"지난날 홍문관이 아뢴 내용에, 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충분히 밝혔었는데 지금 또 송 영부사와 집의 이상의, 예를 아끼고 형식이라도 챙기자고 한 말이 내 뜻과 꼭 맞다. 대체로 11개월 만에 연제, 13개월 만에 상제, 15개월 만에 담제, 이것은 사실 고금을 통해 바꿀 수 없는 제도인 것이다. 지금 만약 복을 점점 바꿔나갈 절차가 없어졌다는 핑계로 연제를 행하지 않는다면 인정으로나 예제로 보아 그보다 더 서운할 일이 없는 것으로 사리로 따져보더라도 숫제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3년상을 치르는 셈으로 연제촹담제 절차를 해조에서 마련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옥당관을 소대했는데, 시독관 오도일(吳道一)이 아뢰기를,
"《강목(綱目)》에는 치란(治亂)에 관한 것들이 소상히 실려 있어 중요한 거울이 되므로 그것을 강독하시는 것도 물론 좋지만 마음을 함양하고 성찰하는 공부로는 선유(先儒)들이 학문에 관해 논해 놓은 문자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지난번 영부사 송시열이 아뢰었던 말에 따라 《심경(心經)》을 강하고 있는데 이 《심경》이야말로 본원(本源)을 다스리는 서적입니다. 바라건대 《강목》은 때때로 열람하여 그를 거울삼아 미래를 경계하는 자료로나 하시고 《심경》을 계속 강독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도 그게 좋겠다고 하였다.
○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在崙)이 공주도 죽고 자식도 요사했던 관계로 상소하여 다시 장가들게 해주기를 빌면서 반성위(班城尉) 강자순(姜子順),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에게 있었던 전례를 들고, 또 선왕조에서도 맹만택(孟萬澤)에게 위(尉)의 칭호는 그대로 두고 다시 아내를 맞게 해주려고 했던 일을 인용하면서 의빈(儀賓)도 재취가 가능하다는 증거로 제시하자 상이 답하기를,
했는데, 조금 후에 대신(臺臣)들이, 안 될 일이라고 말하여 먼저 있었던 명령을 취소해 버리고 이어 의빈은 재취할 수 없는 법을 확정했다.
○ 서울 백성으로 이제 아홉 살 난 애가 아주 준걸했는데 이웃에 사는 열한 살 난 아이 호량(虎良)과 싸우다가 호량이 그에게 맞아 3일 만에 죽었다. 형조가, 그를 형신하여 승복을 받을 것을 청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사람을 죽인 자는 저도 죽는다는 법이 비록 지엄하기는 해도 이제 나이 겨우 9세라면 아무 물정도 모르는 일개 깜깜한 어린애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만약 그의 범죄 정상을 캐서 알더라도 불쌍히 여길지언정 좋아하지는 말라.' 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인 것이다. 그를 극형으로 처단한다는 것은 사실 불쌍한 점이 있으니 대신들과 논의해 보라."
하여, 좌의정 민정중, 판중추부사 정지화가,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다고 하여 드디어 사형에서 감하여 정배(定配)하도록 명했다.
○ 주강에 나아갔을 때 동지사(同知事) 이민서(李敏?)가, 송시열촹박세채촹윤증을 부를 것을 청하고 시독관 오도일도 같은 말을 하자, 상이 받아들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비(正妃)가 낳은 사람이면 모두 대군(大君)이요 공주(公主)라고 칭하는데 그렇다면 노산군(魯山君)도 당연히 대군이라고 해야 할 것 아닌가. 대신들과 논의해 보라."
하여, 대신들 모두가 지당하다고 했기 때문에 드디어 대군으로 칭하도록 명하고 승지를 보내 그의 묘에 가서 치제하게 했다.
○ 함경도 관찰사 윤지선(尹趾善)이 장계를 올려, 선정신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경민편(警民編)과 고 상신 정철(鄭澈)이 지은 권민가(勸民歌)를 다량 인쇄해서 각 고을로 나누어 보내 아낙이나 어린애들까지도 늘 그것을 외면서 그대로 모방하게 하고, 또 조금이라도 행실이 남다른 자가 있으면 특별 방문을 하여 혹 먹을 것을 대 주기도 하고 혹은 부역을 면제해 주기도 할 것을 청하여, 그것을 비변사에 내렸다가 비변사의 복주(覆奏)에 의하여 허락했다. 그 전에 명천(明川) 사는 여인이 자식을 낳아 죽이려고 했다가 이웃에서 말려 못 죽인 일이 있었는데, 그 사실이 알려지자 상이 처음에는 그를 패륜(敗倫)이라 하여 사형을 적용하려고 했다가 대신들 헌의에 의해 그녀를 먼 곳으로 정배하고는 뒤이어 도신들에게, 풍속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서 여쭙도록 하라고 명했었기 때문에 지선이 이렇게 청한 것이었다.
○ 8월. 교정청(校正廳)이 아뢰기를,
"본청의 교정 사무가 이제서야 끝이 났습니다. 어첩(御牒) 1권은 열성조의 이어오신 서차를 기록한 책이고, 선원록(璿源錄) 51권은 내외 자손들을 엮어 놓은 책입니다. 그리고 원(園)과 능(陵)에 새겨진 문자 및 죽책(竹冊)촹옥책(玉冊)의 문자들을 수집하여 지장통기(誌狀通紀) 7권을 만들었고, 본조 소설(小說) 중에 한언(韓堰)촹민반(閔泮) 등이 명을 받들어 왕비세보(王妃世譜)를 만들어 올린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 어첩을 만들면서도 옛날에 했던 대로 왕비세보 3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창빈(昌嬪 중종의 후궁 안씨(安氏))촹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촹인빈(仁嬪 원종의 사친(私親) 김씨(金氏))의 지장(誌狀)도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들이지만 그렇다고 열성의 지장 속에다 함께 넣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따로 한 질(秩)을 만들고 이어 명행(名行)이 있는 종반(宗班)들 행적도 대충 적어 합해서 2권을 만듦으로써 성조(聖朝)의 가문이 벌열함을 나타냈으며 또 지손 서손들까지도 모두 수록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선원 보책이 두서가 다 잡혀서 구본에 잘못되었던 것도 바로잡아지고 빠졌던 것도 모두 보충이 되어 이제 다시 소루하거나 천착된 곳이 없습니다.
다만 인조(仁祖)촹효종(孝宗)촹현종(顯宗) 이 3대의 지장은 당초에 빗돌에 새길 때부터 인출해서 전하지 말도록 했던 것으로서 그렇게 한 것은 무언가 뜻이 있어서 그리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 비록 싣기는 다 실어서 올려도 그것만은 인출을 않고 따로 네 건을 정서하기만 하였으니 똑같이 간수하도록 하소서. 지금 교정청을 차려두고 선원록을 수정한 일은 사실 몇 백 년을 두고 못해 왔던 일인데 이제 마무리가 되었으니 당연히 그 전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 밤에 옥당관을 소대했는데 참찬관(參贊官) 이인환(李寅煥)이 말하기를,
"요즘 풍재가 너무 심해 금년 역시 흉년이겠습니다. 더 깊이깊이 생각하시고 진구책에 대해서도 다방면으로 의견 수렴을 하소서."
하니, 상이 옳은 말이라고 했고, 시독관 박태손(朴泰遜)은 송시열촹박세채 등 밖에 있는 유신들을 다시 부르라고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더 많은 정성을 쌓고 예를 갖추어 맞아와야겠다."
했다. 제신들이 물러가려고 하자 상이 더 있게 하고 술과 안주를 내리면서 내시(內侍)를 명해 술잔을 돌리게 하고는, 상이 이르기를,
"밤에 강론을 하면 조용할 것 같아서 특별히 야대를 하기로 한 것이다. 서로 가까이 있으면서 술잔을 돌리니 집식구들끼리 만난 것처럼 포근하지 않은가. 효종께서 자주 야대를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혹 술로 해서 실수가 있더라도 내 너그럽게 이해할 것이니 그대들은 각자 주량에 맞추어 다 차도록 마시라."
했는데, 여덟 순배가 돌아가자 혹 실수하는 신하도 있었고 박태손은 자기 개인 사정을 아뢰면서 외직으로 나가 나이 80이 된 자기 외조모를 봉양하게 해줄 것을 빌었다. 이에 인환이 말하기를,
"법 조례에 부모 이외에는 봉양을 위해 걸군(乞郡)을 할 수 없게 되어 있고 또 탑전에서 자기 개인 사정을 아뢰는 것도 격에 어긋난 일이니 그를 추고하도록 하소서."
했다. 그러자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평상시와 달리 술 마신 뒤이니 추고할 것 없고 그의 사정이 딱하니 특별히 그렇게 하도록 하라."
하고, 밤이 깊어서야 파했다.
○ 주강에 나아갔을 때 예조 판서 여성제(呂聖齊)가 말하기를,
"국상 3년 내에는 제사에 포해(脯?)를 쓰는 규례가 비록 없지마는 이번 영소전 제사는 친히 모시는 제사로서 일반 규례와는 다르므로 예문에 있는 대로 포해를 써야 옳을 것 같습니다."
하자, 좌의정 민정중과 동지경연사 이단하도 말하기를,
"국조에서 3년 내에는 제사에 소찬을 올리는 것이 고례(古禮)가 아닙니다. 포해를 올려 안 될 것 없을 것입니다."
하여, 상이 그리하기로 하였다. 성제가 말하기를,
"순회세자(順懷世子) 묘소가 경릉(敬陵)과 새 능소 사이에 있어 능 참배 때는 관원을 보내 치제해야 할 것입니다."
하여, 상이 민정중에게 묻고 나서 그대로 하기로 하였다. 단하가 아뢰기를,
"근일 가뭄 끝에 바람까지 곡식을 망쳐 백성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일입니다. 신이 국사(國史)를 찬수하면서 고 판서 민응형(閔應亨)이 기해 연간에 아뢰었던 말들을 보았는데, 그 사람은 바로 국가 원로로서 나라 걱정하고 임금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신하였기에 그가 한 말도 꼭 지금 그대로 했으면 맞을 말들이어서 감히 한 통을 올리기 위해 적어 왔습니다."
하고, 그것을 옷소매 속에서 꺼내 상의 앞에다 놓고 읽으면서 아뢰었는데 내용은 응형이 선왕조가 재해를 당했을 때, 모든 것을 절약하고 군대 수를 줄여야 한다는 등의 일을 아뢴 것들이었다. 단하가 아뢰기를,
"군사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신이 진작부터 누차 아뢰어 왔던 일이지만 국가 세입(歲入)이 겨우 12만 석뿐인데 그 중 8만 석이 몽땅 군대 양성에 쓰여지고 있어 국가 경용은 늘 동이 나고 쓸모없는 군졸들이 가만히 앉아서 늠료(?料)만 축내고 있으니 천하에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하자, 정중이 아뢰기를,
"응형이 효종 때, 군대 수를 줄여야 한다고 누차 아뢰어 왔었으나 그때 상께서는 무엇보다도 병력을 중히 여
했다. 단하가 또 응형이 아뢰었던 주사(舟師) 및 지방 병정(兵政)의 누적된 폐단을 지적한 대목을 읽으면서 아뢰기를,
"속오군(束伍軍) 수가 전국적으로 통계 20여만 명이나 되어 정하게 훈련된 상태가 아닐 뿐더러 군장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허다히 전답을 팔고 하여 살아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만약 그 중의 장정들만을 골라 실병(實兵)으로 만들고 그 나머지는 태거하여 보인(保人)을 삼는다면 모두가 정예병으로 변화하여 비록 외구(外寇)가 칩입하더라도 그 병력이면 막아낼 수가 있을 것이고, 일단 유사시가 되면 경기 근처 각 진의 병력이 아침에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저녁에 발동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상시 연하의 숙위 병력은 친신(親臣) 영도하에 3천 명 안팎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지금 잡동사니 군병들로서 호위군에 소속되어 있는 자가 거의 1만에 가까운데 국가에서 그 쓸모없는 병졸을 양성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국력만 소모해 가면서 변통을 않고 있어 신은 밤중만 되면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말에, 나라에 3년 비축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 꼴이 될 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 국가 비축이 늘 동이 나 흉년만 만났다 하면 백성을 구제할 대책이 없이 백성들을 더욱 곤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1년 조세의 절반 이상이 병사들 먹이는 데 소모되고 있으니 그것을 변통하고 싶은 생각이야 왜 없을까마는 갑자기 바꾸기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에 얼른 손을 못 댔던 것인데 지금 경들이 그렇게 누누이 말들 하니 이 기회에 깊이 생각해 보고 난상 숙의를 거쳐 처리해야겠다."
하고는, 또 제신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부부(夫婦) 사이란 사랑과 정의가 지중한 사이인 것인데 나는 불행하게도 여러 가지 거리낌 때문에 처음 병이 위독했을 때나 급기야 상사가 났을 때까지도 끝내 직접 가보지 못해 자못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슬픔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사체로 말하면 장릉(長陵)도 당연히 전알(展謁)해야 하지만 영릉(寧陵)은 더구나 이제 겨우 옮겨 모셨으니 더더욱 전알해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은 인정이나 예제로 해서 뿐만이 아니라 두 능 다 하루 정도면 갔다 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흉년에 폐단이 있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 경릉(敬陵)을 전알하고 그 길로 새 능소에까지 가려고 하는 것도 이유는 그래서인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능소 전알 때 종관(從官)들 군복 차림에 깃을 꽂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그것은 장식을 위해 꽂는 것이기 때문에 꽂지 않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여, 상이 깃은 꽂지 말도록 명했다.
○ 대신과 비변사 재신(宰臣)들을 인견했는데, 이조 판서 김석주(金錫?)가 아뢰기를,
"해주(海州) 진흙이 나는 곳을 명례궁(明禮宮)이 새로 떼어받은 일은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해주가 근래 너무 메말라 이익을 남길 일이라고는 없는 상황인데 이렇게 민생이 곤궁할 때 새 장(莊)을 첩으로 둔다면 앞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민정중 역시 그 전에 떼어받은 것 외에 또 새로 떼어줘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상은 그 문제를 일체 취소하도록 명했다.
○ 전라도 관찰사 조세환(趙世煥)이 장계를 올려, 위도(蝟島)에다 진(鎭)을 설치하는 것이 편리하겠다고 청한 데 대해 비변사가 복주하기를,
"병조로 하여금 만호(萬戶)를 차출하여 부안(扶安)의 전선(戰船)을 그에게로 이관시켰다가 그곳 진이 완전히 자리가 잡히고 토졸(土卒)들이 많아지면 그때 가서 첨사(僉使)로 승격시켜 안제(按制)의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하게 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 대신과 비변사 재신들을 인견했는데 예조 판서 여성제(呂聖齊)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는 왕비 상에 연제 후에는 아침 저녁 상식(上食) 때 곡(哭)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인선왕후(仁宣王后) 국상 때 했던 전례대로 해야겠습니다."
하여, 상이 그리하라고 했고, 우의정 이상진(李尙眞)은 8로(路)에 우역(牛疫)이 날로 번지고 있다 하여 서울과 지방의 도살장을 문닫게 할 것을 청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으며, 호조 판서 정재숭(鄭載嵩)은 상의원(尙衣院)과 내의원(內醫院)의 꼭 필요하지 아니한 물품 무역과 약품 무역을 억제할 것을 청하여, 상이 물러가서 상의원촹내의원의 제조(提調)들과 상의해서 줄일 것은 줄이도록 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그후로 대내에서 특명으로 줄인 것들도 많았다.
상진이 또 말하기를,
"능소 행차 때 차일과 휘장 만드는 데 들어가는 무명베촹삼베가 적어도 10동(同)이 소요되고, 거기에 필요한 끈값 역시 3백 냥이 듭니다. 다소라도 폐단을 줄인다는 뜻에서 옛날 있는 것을 그대로 쓰게 하소서."
하여, 상이 있는 것을 그대로 쓰도록 명했다.
○ 9월. 그 전부터 각 도에서 폐단되는 일에 관한 장계를 올리면서 모두가 각 군문의 아병(牙兵)에 대한 폐단들을 말해 왔는데, 좌의정 민정중이 연중(筵中)에서 주장하기를,
"수어사(守禦使)는 남한산성의 수첩(守堞)을 계산해서 필요한 정원을 정했기 때문에 지금 와서 정원을 줄이거나 그만두게 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총융청(總戎廳)은 아병을 줄일 수가 있으므로 그 감원당한 아병을 군보(軍保)로 삼는 것입니다. 본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잘 헤아려 보고 재가를 받아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 때문에 이때 와서 총융청이 각 고을에 있는 아병 16개 초(哨)를 날짜를 각기 배정해서 경청(京廳)으로 소집하여 그 중에서 건장한 자만 골라 뽑아 6개 초를 만들고 그 나머지는 군보로 정하여 원군(元軍)이 번들 때 구량(口粮)을 대는 사람으로 할 것이며 정원 이외의 남는 수는 영원히 혁파할 것을 청하여, 상이 허락했다.
○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이단하(李端夏)가 상차하여, 묘당으로 하여금 모든 면의 절약 규모를 재가를 받아 정하되 정축년 난리 이후의 규모와 똑같이 하게 하여 지성으로 백성을 돌보았던 선왕조의 뜻을 그대로 따르도록 청하였으므로 상이 그 차자를 비변사에 내렸는데, 비변사가 복주하기를,
"신축년 절약 규모가 모두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해당 청으로 하여금 그 당시의 사례를 참고하고 또 현실도 감안해서 보태고 뺄 것을 참작한 다음 재가를 받아 결정하도록 하시고 성명께서도 절용애민(節用愛民)의 방법을 늘 몸으로 생각하시어 크고 작은 씀씀이에 있어 되도록 비용을 아끼는 쪽으로 노력하심으로써 모든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느낌을 받아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 그 전에 이조 판서 김석주(金錫?)가 공정 대왕(恭靖大王) 묘호를 추상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상이 대신촹유신들과 논의하도록 명했는데, 이에 영부사 송시열이 대답하기를,
"국가 창업 당시 불행하게도 간신 정도전(鄭道傳)의 변이 있었기에 태조 대왕이 한(漢) 나라 상황(上皇)이 풍패(?沛)를 그리워했듯이 역시 고향 생각을 못 잊고 잠시 북쪽에 가 계시면서 보위(寶位)를 공정 대왕에게로 넘겼던 것이고, 공정 대왕은 또 태조와 멀리 떨어져 있어 혼정신성의 예를 갖출 길이 없고 또 공로가 대단하고 덕도 훌륭한 태종 대왕에게로 민심이 쏠리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즉위 초기에 이미 자리를 사양할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태종 대왕이 겸양의 덕으로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20여 개월
그리고 급기야 승하했을 때도 태종 대왕으로서는 그의 평소 겸양하던 마음을 받드는 뜻에서 이미 승하했다 하여 차마 존영(尊榮)의 묘호를 억지로 올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공정 대왕의 그 진실하고 공순하고 겸양할 줄 아는 덕과 때와 형세를 판단할 줄 아는 슬기는 천고에 드물만큼 특출했기에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죽고 살고를 떠나서 그의 마음을 감히 조금도 어기려고 하지 않았던 태종 대왕 역시 서로 마음으로 통하는 우애에서 하신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리고 세종 이하 열성조에서도 역시 태종 대왕과 똑같은 마음에서 감히 뒤쫓아 욕의(縟儀)를 거행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의 지극한 덕을 추모하는 신민들 마음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인 것입니다. 다행히 오늘에 와서 행하지 못했던 욕의를 거행함으로써 중외의 소망이 풀어지게 한다면 그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한편 그 당시는 태종도 그의 평상시 마음을 받들기 위해서 한 일이었지만 막상 함께 종묘에 있으면서 휘호는 당신 혼자만 누리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틀림없이 불안을 느끼실 것입니다. 옛날 송조(宋朝)에서 희조(僖祖)와 태조(太祖) 협제[?] 때 어느 신위를 동으로 향하게 할 것인가를 두고 여러 사람 의견 차이가 있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부질없이 두 분 영령이 마치 서로 힘의 강약을 겨루면서 대접을 받기 위해 좌불안석이나 하는 것처럼 만들고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아파 어쩔 줄을 모르게 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지금 존호를 어느 분에게는 올리고 어느 분에게는 안 올리고 하는 것이야 그것이 어디 협제 때 잠시 신위를 동으로 향하게 하는 그 정도뿐이겠습니까. 그 문제야말로 지금 깊이 생각해서 처리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신하들 논의에 혹, 존호를 올리려고 해도 올릴 곳이 없지 않느냐고 의심을 한다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령 영녕전(永寧殿)으로 신주를 옮겨 모시고서도 능침(陵寢)에서 한식(寒食) 때면 언제나 축사(祝辭)가 있으니 그 축사에다 올리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하여, 상이 하교하기를,
"우리나라 열성조가 다 묘호가 있는데 더구나 공정 대왕 같은 대단한 공로와 훌륭한 덕을 갖춘 분으로서 아름다운 칭호가 아직까지 없다는 것은 그 어찌 국가로 보아서도 하나의 큰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묘호를 뒤늦게 올린다고 해서 조금도 불가할 것이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즉시 실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 공정 대왕 묘호를 정종(定宗)으로 정했는데 뜻은 시법(諡法)에 있는, 안민대려(安民大慮)라고 하는 글귀 뜻을 택한 것이고, 더 올리는 시호는 의문장무(懿文莊武)로 하였다.
영의정 김수항, 우의정 이상진, 행 판중추부사 김수흥, 정지화 등이 빈청에 모여 아뢰기를,
"공정 대왕 묘호를 신들이 2품 이상의 관각(館閣) 당상관들과 모여앉아 삼가 그렇게 정해서 올렸으나 다만 생각하기에 다른 성조들 시호는 모두 여덟 글자로 되어 있는 데 비해 유독 공정 대왕에게만 온인순효(溫仁順孝) 이 네 글자를 올려 어딘가 모자라고 빠져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묘호를 추상하는 지금 시호를 더 올리는 것이 전례(典禮)에 맞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하자, 상이 답하기를,
"네 글자를 더 올려야 할 것이다."
하여, 드디어 네 글자를 더 정해 올렸던 것이다.
○ 관학(館學)의 팔도 유생 이연보(李延普) 등이 재차 소를 올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촹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청하고, 아울러 송조(宋朝)의 삼현(三賢)도 배향하도록 할 것을 청했다. - 삼현은 바로 귀산(龜山) 양시(楊時)촹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촹연평(延平) 이동(李?)이다 .-
상이 답하기를,
"두 현인의 도덕과 학문이야말로 사실 한 시대의 경앙(景仰)의 대상이요 사림들 본보기가 되고 있는데 그들을 문묘에 배향한다 하여 그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여러 조정을 거치는 동안 윤허한 일이 없었기
하여, 대신 김수항촹김수흥촹정지화촹민정중촹이상진 등이 모두 배향하는 것이 옳다고 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대신들 의견이 다 그렇다면 종전 상소에 대한 비답 내용대로 문묘에 올려 배향하게 하라."
하였다.
○ 비변사가, 함경 감사 윤지선(尹趾善)의 장계에 재해 입은 각 읍에 대해 조세 견감 등 변통의 조치가 있어 줄 것을 청한 데 대해 복주하기를,
"피해가 아주 심한 6진(鎭)의 각 읍에는 모든 신역(身役)과 꼭 바쳐야 할 전세(田稅)촹공물(貢物) 및 삼색노비(三色奴婢)의 신공(身貢)을 전액 견감하도록 하고, 그 다음으로 안변(安邊) 등 9개 읍은 그 절반을 견감하며, 조금 나은 남도(南道) 각 읍에 있는 곡식을 옮겨다 북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본도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관서(關西) 각 읍에 있는 관향곡(管餉穀)을 남도로 옮겨다가 기민 먹이는 데 이용하도록 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 주강에 나아갔을 때 영의정 김수항이 아뢰기를,
"이이촹성혼 두 현신을 배향하는 일에 관해 다사들 청을 쾌히 따르시고 송조의 삼현 역시 그들이 바로 정주(程朱)의 도통(道統)을 이은 분들인데 아울러 다 그리하도록 하셨으니 그야말로 세상에 드문 훌륭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어진이를 존경하면 의혹된 일이 없다.' 하였듯이 제왕이 비록 어진이를 존경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의 도학(道學)까지를 완전히 믿고 더없이 좋아해야지만 비로소 그 어진이를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성상께서도 이미 그 두 현신을 존경하고 있는 이상 당연히 그들 도(道)도 존숭하고 그들의 학문도 세상에 더 밝혀야 할 것입니다."
하여, 상이 답하기를,
"그렇게 절실하고 지당한 경계에 대해 내 마땅히 더 깊이 생각하리라."
했다. 수항이 이어 아뢰기를,
"이이가 쓴 장차(章箚) 이외에도 《동호문답(東湖問答)》 같은 것은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심도있게 논하였고, 《성학집요(聖學輯要)》는 마치 《대학연의(大學衍義)》와도 같아서 더욱더 내용이 절실합니다. 마음을 두시고 잘 읽어 보시면 틀림없이 많은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여, 상도 그럴 것이라고 하였다.
우의정 이상진이 아뢰기를,
"이미 죽고 없는 현사들만 존경하고 숭배할 것이 아니라 현재 초야에 있는 원로와 현사들도 정성을 다해 불러들여 나라를 함께 다스려 나가면 국가로 보아 매우 다행스런 일일 것입니다."
하고, 수항은 아뢰기를,
."오늘의 국사로 말하면 야윌 대로 야윈 셈입니다.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자기가 지켜야 할 의리 때문에 비록 감히 물러가겠다고 말은 못하지만 옛말에도, 앞뒤 재보고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밖에 있는 유신들이 쉽게 나오려고 않는 것도 아마 틀림없이 그래서일 것이고 또 한편 성상의 성례(誠禮)가 미진한 점이 있어 그렇기도 할 것입니다. 성상께서 그들이 오지 않는다 하여 성례를 갖추는 데 무관심하시지만 않는다면 그들 모두가 세록(世祿)의 신하들인데 어떻게 감히 끝까지 불응이야 하겠습니까."
하여, 상이 이르기를,
"여러 유신들이 누차 불러도 오지 않고 있는데 시기나 사세가 그래서 그렇다고도 하겠으나 내 성의가 너무 부족한가 해서 매우 부끄럽기도 한 것이다."
하였다. 검토관 오도일 역시 강석에서 《성학집요》를 강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예부터 유자(儒者)들이 어찌 시대가 걱정스러운 시대라 하여 나오지 않기야 했었습니까. 박세채촹윤증으로
하여, 상이 이르기를,
"별도 유지를 내린 지가 얼마 안 되었으니, 꼭 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내가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했다. 수항이 수령들이 하직을 고할 때 유지를 내려 경계해서 보낼 것을 청하자 상이 그대로 허락했고, 상진이 백관들 녹봉을 감하고 반료(頒料) 제도를 채택하여 기민 먹이는 데 보탬이 되도록 할 것을 청하자, 수항이 그 뒤를 이어 아뢰기를,
"지금 형편이 난리 때와 같아 주상의 공봉도 감하고 있는데 신료들이 어찌 감히 정상적 녹봉을 그대로 받을 것입니까."
하니, 상이 처음에는 난색을 보이다가 여러 신하들이 계속 청하자 결국 오는 시월 초하루부터 그렇게 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동지경연사 이민서(李敏?)가, 이이촹성혼 두 신하가 저술한 글을 소대(召對)나 야대(夜對) 때 강하도록 할 것을 청하자, 상이 그도 좋겠다고 하였다.
○ 10월. 각 도의 삭선(朔膳) 종류를 임시 감하도록 명했다. 연신(筵臣) 홍만종(洪萬鍾)촹임영(林泳) 등이 늘 진달하기를,
"각 도 어공(御供) 중에서 그리 필요치 않은 종류들이 너무 많은데 이렇게 재해와 흉년이 계속되는 이때 성상께서 직접 단안을 내려 대량 줄이고 없앨 것은 없애고 하여 민폐를 덜도록 하소서."
하고, 또 두 자전에 올리는 삭선도 매우 긴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역시 여쭙고 승락을 받아 줄일 것을 말해 왔으므로 상이 그를 허락하고, 각 도에서 올려오는 삭선 종류를 전부 써서 들여오도록 명했던 것인데, 이때 와서 사전(四殿)이 모두 자체로 그 중 긴요하지 않은 것 또는 백성에게 피해를 주는 것들을 골라 많은 물종을 줄였던 것이다.
○ 예조가, 오현(五賢) 배향 때 취할 절차에 관해 대신들에게 문의했는데, 영의정 김수항이 의논드리기를,
"지난 경술년(광해군 2, 1610) 오현(五賢 김굉필(金宏弼)촹정여창(鄭汝昌)촹조광조(趙光祖)촹이언적(李彦迪)촹이황(李滉)) 배향 때 행했던 예를 일기(日記)에서 찾아보면 다소 소루한 점이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래도 그 당시 예관 및 의논드렸던 대신들이 대부분 명신이요 석학들이었기 때문에 그들 논의나 식견이 틀림없이 근거가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가령 성전(聖殿) 및 동무(東?)촹서무(西?) 각 신위 앞에 모두 고유제를 올리는 일, 새로 배향될 분의 위판을 만들어 동무촹서무에 나누어 배향하고 봉안제를 올리는 일, 봉안하기 이전에 별도 교문(敎文)을 만들어 그의 가묘(家廟)에 제 올리게 하는 일 등등은 지금도 그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송조(宋朝)의 삼현(三賢)에 있어서는 입장이 근본적으로 달라 가묘에 제 올리는 일이야 애당초 논할 것도 없으려니와 교문 역시 있을 까닭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별도로 제문을 만들어 고유하는 일은 아마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위판 만드는 일도 당연히 명륜당(明倫堂)에서 해야 할 것이고, 또 위판에다 쓴 후 임시 봉안해 두는 자리에서도 따로 고유하는 절차가 있기는 있어야 할 것이나 다만 그때 바로 제를 차리고 축문을 써서 앞으로 승무(陞?)하기 위한 것임을 알린다면 그 밖에 또 따로 고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했고, 행 판중추부사 김수흥, 정지화는 의논드리기를,
"송조의 삼현에 있어서는 제문을 별도로 만들어 위판이 다 만들어진 뒤에 승무를 하기 위한 것이라는 고유를 하고, 동무촹서무로 나누어 배향되는 날은 술잔 올릴 때 함께 술잔만 올리더라도 상황 따라서 맞추어 나가는 도리에 어긋날 것은 없을 듯합니다. 다만 고유제 문제는 평상시에는 설사 동무촹서무에 일이 있어도 고유는 성전에만 해왔으므로 지금도 동무촹서무에까지 다 고할 것은 없겠으나 단 한 가지, 각 신위가 차례대로 차근차근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평상시 수리하고 고치고 할 때와는 다르므로 꼭 고유를 해야 할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했고, 좌의정 민정중은 의논드리기를,
"우리나라 양현(兩賢)에 대해서는 종묘(宗廟)에 배향할 때 의식 비슷하게 우선 그의 집에다 제물을 내리고 교서를 반포하여 장차 승무하겠다는 뜻을 알리고, 위판 만들고, 위판 쓰고, 임시 봉안하고 하는 일들은 모두 성
하여, 상이 송시열에게 가 묻도록 명하고 또 홍문관에서도 널리 상고하여 재가를 받아 처리하게 하였다.
○ 평안도 관찰사 유상운(柳尙運)이 장계를 올려 각 고을 피해 상황을 아뢰고 이어 백성들 부역을 면제해 줄 것을 빌었는데, 이에 대해 비변사가 복주하기를,
"가장 심한 5개 읍은 전세로 받는 쌀과 각종 신역(身役)촹신공(身貢) 등을 전액 면제하고 새 환상곡은 3분의 1을 받아들이며, 비교적 심한 8개 읍에 대해서는 전세 쌀은 2말, 신역촹신공은 절반 그리고 새 환상곡은 3분의 2를 각각 받아들이고, 그 다음 23개 읍에 대해서는 전세 쌀 1말, 신역촹신공은 3분의 2를 받아들이고 새 환상곡은 전액 다 받아들이며, 또 피해의 경중에 관계없이 신역으로 베 한 필 반을 바쳐야 할 자는 그 중 반 필을 감해 주고 한 필만 바치는 자에게는 전례대로 다 받도록 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 강원도 관찰사 정시성(鄭始成)이 장계를 올려 각 고을 피해 상황을 아뢰고 이어 부역 면제와 기민 구제사업에 관해 논했는데, 이에 대해 비변사가 복주하기를,
"피해가 비교적 심한 영동(嶺東)의 7개 읍은 각종 신역을 전액 면제하고 영서(嶺西) 6개 읍에 대해서는 각종 신역 절반을 감하며, 당년치 환상곡에 한해서 역시 절반을 받아들이고, 신역으로 베 한 필 반을 바쳐야 할 자는 그 중 반 필을 감해 주고 한 필만 바치는 자는 그대로 받습니다. 그리고 대동미는 10말에서 5말을 감해 주고, 영동의 비교적 심한 읍 세폐목(歲幣木)과 대동포(大同布)는 전액 면제하며, 고기잡이촹소금장이들에 대한 조세도 각기 담당 아문으로 하여금 특별히 감면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영서촹영동과 인접해 있는 조금 나은 각 읍에서 받아들인 환상곡을 본도에서 필요한 만큼 일정한 수량을 정하여 영동으로 옮겨 기민 구제에 쓰도록 하고, 원주(原州) 등 3개 읍에 대해 금년에 준 진청미(賑廳米) 5백 석에 관해서는 그것을 상납하지 말고 거기에서 받아들인 대로 유치해 두고 기민 구제에 쓰도록 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 상이 경전만으로 문신들에게 시강(試講)을 직접 실시했는데 제대로 외지 못하거나 혹은 음(音)과 구두가 틀린 자가 많았고, 교서 정자(校書正字) 위수징(韋壽徵)과 형조 정랑(刑曹正郞) 정유징(鄭有徵)만이 《서경》과 《주역》을 외었다. 이에 김수항이 진언하기를,
"나이 젊은 문신들에게 경전만으로 시강을 실시해 온 조종조의 뜻이 이유없이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강관(講官)들이 비록 그를 전업으로 한 선비들만은 못하고 게다가 또 직무가 많아 시간이 없는 점은 있지마는 그렇다고 시강에 친히 임하시는 날에 제대로 외지도 못한다는 것은 사실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옛날 효종께서 전강(殿講)에 친히 임하셨을 때 강관들이 제대로 잘못 외자 성상께서 한심하다는 하교를 하시고 이어 그들이 경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단속을 잘하라는 명을 내리신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령(敎令)은 조금 오래 가면 해이해져서 제대로 준행을 않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강관들이 혹 애당초 강경에 응하지 않거나, 또는 자불(自不)을 쓰고 물러가 버린 일은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그들은 모두 추고하고 다시 경계를 내려 강독에 전념하도록 해야겠습니다."
하여, 상이 이르기를,
"먼저 자불을 쓴 자는 중한 쪽으로 추고하고 그리고 외고 익히기에 전념하도록 각별 경계하라."
○ 홍문관이 아뢰기를,
예조 계사(啓辭)로 인해 오현 배향 때의 절차에 관해 널리 상고해 보라는 명령이 계셨기에 신들이 《통전(通典)》촹《문헌통고(文獻通考)》촹《대명회전(大明會典)》등 서적을 다 뒤져도 참고될 만한 것이 나와 있는 데가 없었습니다. 이어 생각건대 본조 유신들 배향 의식에 있어서는 경술년에 있었던 전례가 충분한 전거가 되고 있어 더 이상 상고할 것이 없을 것 같고, 전대 선유(先儒)들 배향 의식에 관해서는 본조 유신들과는 당연히 달라야 하겠지만 전거가 될 만한 전례를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배향되고 있는 선유들 중에 호안국(胡安國)촹채침(蔡?)촹진덕수(眞德秀)촹오징(吳澄) 등이 배향된 연대가 명조(明朝) 정통(正統 명 나라 영종(英宗) 연호 1436~1449) 연간이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히 그후에 배향이 되었을 것인데도 《고사촬요(攷事撮要)》의 종향조(從享條)에 이 네 사람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과연 어느 왕조 때 있었던 일인지 비록 확실히는 모르더라도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으니 예관에게 다시 물어 《실록(實錄)》을 찾아보게 하면 혹시 당시 있었던 자세한 절차를 찾아낼 수도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또 하나 전대에 배향되었던 선유들은 모두 후(侯)촹백(伯) 등의 봉작(封爵)이 있는데 지금 배향하려고 하는 송조의 삼현은 그 중 양씨(楊氏)만은 명조에서 배향하면서 장락백(將樂伯)을 봉했었으나 나(羅)와 이(李) 두 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배향하는 분들이기 때문에 위판에다 쓸 만한 봉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송(宋) 나라 말기에 추증했던 시호를 위판에다 쓰면 맞을 것 같은데, 그 문제도 예관에게 물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여, 상이 그 문제를 대신들과 논의하도록 했는데, 대신 김수항촹김수흥촹정지화 등의 의견이 모두, 양씨는 장락백으로 쓰고 나촹이 두 분은 송 나라 말기에 추증한 시호를 위판에 쓰는 것이 옳다고 하여, 상이 그대로 시행하라고 명했다.
○ 예조가 아뢰기를,
"공정 대왕께 올린 시호를 당연히 옥보(玉寶)에다 새겨 넣어야 할 것인데 종전 종묘 각 실(室)의 시보(諡寶)를 보면 명조(明朝)에서 추증한 시호는 새겨 넣은 데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시보는 산릉(山陵) 이전에 만들기 때문에 주청사(奏請使)가 중국을 갔다 오자면 한 해가 다 걸려 그 시기를 댈 수가 없으므로 본조의 시호만 새기는 것이 전례가 되었던 모양이나 공정 대왕의 시호 두 글자는 기왕 명조에서 추증한 것이고 또 산릉 때문에 구애받을 일도 없으니 시보에다 새겨 넣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여, 상이 그리하라고 했다.
○ 주강에 나아갔을 때 지경연사 김석주(金錫?)가 재감(裁減) 문제를 두고 아뢰기를,
"신이 현재 민유중(閔維重)과 논의하면서 구체적인 방법을 강구 중이나 경신년 재해 때 재감되었던 것이 그후 복구되지 않은 것들이 많아 지금 다시 크게 재감할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금년에는 영동이 피해가 심하여 바닷가에 사는 고기잡이들은 생업을 버리고 떠난 자가 많다는데 그 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져주셔야 하겠습니다. 선왕조 병오년 등록(謄錄)을 보면 그때 상께서 영동의 삭선(朔膳)을 특별 견감하시고 두 자전의 삭선도 경청(京廳)에서 사서 올리도록 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감히 아래서 청할 수는 없는 문제이므로 상께서 대내에 있는 그 당시 기록을 직접 보시고 참작해서 처분을 내리시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바닷가 백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질 모양이라고 하니 매우 마음 아픈 일이다. 영동에 배정된 각 전의 삭선 물품들을 병오년 전례대로 1년간 정지하도록 하고, 두 대비전 삭선은 선혜청(宣惠廳)에서 값을 주어 구입해 올리도록 하라."
했는데, 그후로 선혜청이 마련한 값이 쌀로 1천 5백여 석에 달했던 것이다. 석주가 또 아뢰기를,
"인경왕후(仁敬王后) 소상(小祥) 때 예조가 마련한 제복의(除服儀) 주석에 보면, '제를 마치고 바로 길복을 입는다.' 하는 구절이 있는데, 일반 사대부 집에서도 휘일(諱日)에는 반드시 흰옷 흰띠 차림으로 그날을 마칩니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조의 제복의 주석은 아마 《오례의(五禮儀)》를 그대로 따르다가 그리된 모양이다. 소상 날 바로 길복을 입는다는 것은 과연 미안한 일이니 그날은 옅은 옥색을 입고 이튿날 가서 길복으로 갈아 입도록 그 주소를 고쳐 들여오게 하라."
하여, 예조가 주소를 고쳐가지고 들여왔는데 소상 날짜가 임박했기 때문에 지방에는 파발마를 놓아 알렸다.
○ 주강에 나아갔을 때 영의정 김수항도 함께 들어와 있었는데 상이 막 《시경》의 빈풍(?風)을 강하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아뢰기를,
"당 현종(唐玄宗)의 무일도(無逸圖)촹산수도(山水圖)가 앞뒤가 다른 것은 다만 생각이 경건하냐 태만하냐 그 차이라는 것입니다. 병조 판서 이숙(李?)의 집에 농가사시도(農家四時圖) 병풍이 있는데 두고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홍문관으로 하여금 가져다가 본떠서 병풍으로 만들어 올려오게 하소서."
하니, 상이 좋다고 하였다. 수항이 또 아뢰기를,
"학문을 하는 데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늘 그 속에 젖어 있으면서 이치를 캐고 또 캐고 하는 것이지 덮어놓고 욕심껏 많이만 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니, 그 말도 받아들였다. 수항이 또 아뢰기를,
"강원 감사 정시성(鄭始成)이, 내의원에 바치는 인삼 봄철 배정량의 수를 절감해 줄 것을 장계로 청해 왔는데 백성을 돌보는 뜻에서 여러 가지를 참작하여 다소 감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여, 상이 30근에서 절반을 감해 주도록 명했다.
시강관(侍講官) 송광연(宋光淵)이 아뢰기를,
"공정 대왕 묘호(廟號)를 뒤늦게나마 올리게 된 것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아주 잘한 일입니다. 그런데 위판을 긁어버리고 다시 쓰는 것이 미안한 일이라고 혹자는 말하고 있지만 어차피 묘호와 시호를 추후에 올리자면 천상 위판을 다시 쓸 수밖에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듣기에 효종 때 인열왕후를 부묘(?廟)하면서도 휘호(徽號)를 추가로 올리면서 위판을 다시 썼던 전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긁어버리는 것이 미안한 일이라 하여 고쳐 쓰지 않는다면 위판에 쓰여 있는 것과 축문 내용과 차이가 나게 되어 미안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또 인열왕후 위판을 고쳐 쓴 전례도 있다면 이번에도 그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했다. 수항이 아뢰기를,
"시호는 당연히 책보(冊寶)에다 올려야 할 것이고, 묘호는 축문 쓰는 데말고는 달리 쓸 곳은 없는데, 그래도 위판은 고쳐 쓰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종묘의 열성들 위판에 쓰여 있는 것이 축문에 칭한 내용과는 서로 틀린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도 그것을 고쳐 쓴 일이 없었는데 지금 와서 공정 대왕 위판만을 고쳐 쓴다고 하면 일정한 기준이 없는 것 같은 혐의가 없지 않으니 여러 대신들 그리고 밖에 있는 유신들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여, 상도 그게 좋겠다고 하였다.
○ 겨울에 천둥이 있다 하여 상이 중외에 하교하기를,
"아! 하잘것없는 나 소자(小子) 이 한 몸으로 뭇 백성들 위에 앉아 있은 지 지금으로 7년이 되었다. 그런데 재주가 모자라고 덕이 부족해서 정령(政令) 시행 과정에 위로는 하늘의 맘에 맞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들 기대에 어긋나게 했기 때문에 하늘은 거의 달마다 경계의 뜻을 보이시고 백성들 원성은 가면 갈수록 깊어만 가고 있어 밤낮 걱정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했는데, 승지 등이 바로 이 하교를 그대로 중외에 선포할 것을 청했다. 이에 상은 불허했다가 거듭 청하자 윤허를 내렸다.
○ 예조가, 묘호 추가로 올리는 일과 위판 고쳐 쓰는 문제를 두고 그 당부를 대신촹유신들에게 물었다. 행 판중추부사 김수흥(金壽興)이 의논드리기를,
"그동안 거행 못했던 일을 뒤쫓아 거행하면서 바로 고쳐 쓰는 일을 하는 것과, 열성들 위판 서로 다른 곳을 바로잡는 일과는 일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게다가 또 인열왕후 휘호를 추가로 올리면서 고쳐 쓴 전례도 있으니 시호 올리는 날 곧바로 고쳐 쓰는 것이 전례(典禮)에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했는데, 행 판중추부사 정지화도 같은 의견이었고, 좌의정 민정중은 의논드리기를,
"적이 우리나라 예제를 상고해 보면 초상 졸곡(卒哭) 후에 영시(迎諡)촹분황(焚黃) 절차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명조(明朝)에서 내리는 것을 받는 것으로서 의식절차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면서 고쳐 쓰는 절차만은 언급이 없으니 그것이 혹 연제(練祭) 때로 미루는 뜻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잘못 빠뜨려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열성의 위판이 축문 내용과 서로 틀린 데가 많은 문제에 있어서는 그것이 매우 중하고 어려운 일이라 하여 감히 고쳐 쓸 수가 없다면 의리로 보아 미안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은 지식이 부족하여 원래 모르는 전례(典禮)를 두고 함부로 논의할 수는 없으나 다만, 적당한 예가 없을 때는 천자(賤者)의 예를 이용한다고 하는 논리대로라면 주자(朱子)가 정해 놓은 사대부의 예를 원용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듣기에 열성 위판 중에는 글자 획이 흐려져서 분명치 않은 곳이 있다는데 그건 더더욱 미안한 일로서 당연히 무슨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했으며, 우의정 이상진은 의논드리기를,
"종묘에는 다만 위판에 쓰여 있는 것이 축문 내용과 약간 서로 틀린 데가 있다는 것으로 묘호가 송두리째 빠졌거나 시호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일이므로 고쳐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긁어 버리기가 미안하다는 것은 고쳐 쓰지 않는 일에 비하면 훨씬 작은 문제입니다. 따라서 시호 올리고 고쳐 쓰고를 한날 함께하는 것이 아마 변례(變禮)를 행하는 데 있어 가장 적당한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여, 상이 하교하기를,
"휘호를 올리기만 하고 고쳐 쓰지는 않는다면 그것은 흠전(欠典)치고도 큰 흠전이니 시호 올리는 날 그 자리에서 고쳐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11월.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인경왕후 담제 이후의 제례(祭禮)는 당연히 을해년에 있었던 인열왕후 상의 담제 이후에 했던 예대로 거행해야 할 것인데, 본조에는 참고할 만한 문서가 없고 《실록》에도 나와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악(樂)을 쓰는 문제에 있어서는 거론이 안 돼 있는데, 《오례의》에 있는, 사시(四時)촹납일(臘日) 및 속절(俗節) 그리고 초하루 보름으로 혼전(魂殿)에 대신 행사하는 의식 소주(小註)에 나와 있기는, 만약 내상(內喪)이 먼저이면 15개월이 지나 담제 후에 제복(祭服)을 입는데 제복을 입고는 악을 쓰고, 삭제(朔祭)에는 악은 없고 음복(飮福)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영소전(永昭殿) 담제 후의 제례는 당연히 현재 종묘의 제례 의식대로 거
하여, 상이 그게 좋겠다고 하였다.
○ 예조가 아뢰기를,
"공정 대왕의 묘호와 시호를 뒤쫓아 올리는 일 그리고 위판 고쳐 쓰는 일은 이미 재가를 내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영녕전(永寧殿) 각 실(室)과 공정 대왕 그 실에 같은 날 대신을 보내 제를 올려야 할 것인데 등록(謄錄)을 참고해 보았더니 숙녕전(肅寧殿)에 휘호 올릴 때 먼저 그 사유를 고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그 전례대로 해야 할 것인즉 영녕전 각 실 그리고 공정 대왕 그 실 그리고 또 종묘의 각 실에 하루 전에 대신을 보내 고유제를 올리도록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 공조 참판 최관(崔寬)이 상소하기를,
"신이 어제 영소전 삭제(朔祭) 헌관으로 차출되었는데 밤이 깊어서 수복(守僕)이 와 말하기를, '상제(祥祭) 이전의 초하루 보름 제향 때는 국가에서 1품(品) 헌관을 차출하여 보내고 술도 석 잔을 올리는데 지금의 삭제는 국가에서 그 제도를 고쳐 단헌관(單獻官)을 보내게 되었으므로 상제 전의 술 세 번 올리는 의식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지금의 삭제는 당연히 종묘 삭제 때 단헌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했습니다. 그래서 신이 예조가 정한 규정에 대해 물었더니, 별로 결정된 사항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막중한 일을 감히 독단으로 할 수 없어 영의정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사세가 너무 다급해서 미처 재가를 받아 결정하지는 못했으나 그러나 아마 종묘의 삭제 때처럼 단헌하는 것이 옳을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니 헌관이 참작해서 하는 것이 좋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 본 결과 종묘의 초하루 보름 제향 때는 언제나 단헌관을 차출하여 단작(單酌)을 올려왔으므로 지금 영소전에도 이미 단헌관을 차출했다면 당연히 종묘에서의 단헌과 다를 것이 없지 않겠는가 싶기 때문에 감히 단작을 올렸던 것입니다. 이번 일이 비록 시일이 촉박했던 소치이기는 하지마는 임시변통의 절차에 있어 혹 맞지 않은 점이 있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뿐만 아니라 오늘의 삭제(朔祭)는 상제(祥祭) 후 처음 모시는 제례여서 만약에 혹시라도 예에 맞잖게 모셔졌다면 앞으로 초하루 보름 때마다 계속 그렇게 될 것이니 그렇게 억측으로 판단하여 망녕된 짓을 한 신의 죄를 다스려주소서."
하여, 상이 답하기를,
"사세가 너무 촉박해서 미처 분부를 받아 결정하지 못했던 것인데 경이 사죄(俟罪)할 게 뭐 있겠는가. 그리고 생각해 보건대 상제 후의 단헌과 상제 이전의 삼헌(三獻)과는 차이가 있어야 할 것이므로 이후로 초하루 보름 때의 전(奠)은 종묘에서 하는 것처럼 단작만 올리는 것이 옳을 것 같으니 그렇게 거행하도록 하라."
했다. 예조가 아뢰기를,
"상제가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초하루 보름에 헌관 1명만을 차출하여 보내는데 그렇다면 종묘에서 하는 것처럼 단헌만 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서 별로 다시 분부를 받아야 할 일이 없는데도 헌관은 그 일로 소까지 올리고 성상께서는 또, 단작만 올리는 것이 옳겠다고 비답을 내리셨으니 이제 당연히 그렇게 거행할 것이지만 듣기에 지금도 상식(上食) 때는 상제 이전과 같이 계속 삼헌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초하루 보름 때 단작만 올리기로 한 것은 상제 이후라고 해서 그렇게 줄인 것인데 유독 상식 때는 그대로 삼헌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예에 맞는 일이 아닐 듯합니다. 상제 이후에 상식을 하는 것이 바로 권도로 행하는 예인데 그렇게 경중의 차이를 둔다면 그것이 걸림돌이 될 요인이 될 수 있으니 그 역시 당연히 줄여야 할 것입니다. 대신들로 하여금 논의해 보게 하소서."
하여,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행 판부사 김수흥(金壽興)촹정지화(鄭知和), 우의정 이상진(李尙眞) 등이 의논드리기를,
하니, 상이 조석 상식 때도 단작만 올리도록 명했다.
○ 비변사가 경기 관찰사 장계에 대하여 복주하기를,
"피해가 심한 고을은 제반 신역(身役)은 절반을 견감하고, 새 환상곡은 3분의 2만 받으며, 그 다음 가는 고을은 신역 3분의 1만 견감하도록 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 예조가 아뢰기를,
"영소전 담제 이후는 악(樂)을 쓰도록 이미 재가를 내리신 바 있습니다. 그리하여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상고해 보았더니, 쓰자면 소경전(昭敬殿) 제향 때 쓰는 악을 모방해 써야 할 것 같아서 악기(樂器)와 악공들 복색은 지금 거기에 쓰인 그대로 마련을 해야겠으나
《악학궤범》에 실려 있는 소경전에 쓰는 악장(樂章)까지 오늘 그대로 쓸 수는 없는 일이니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악장을 새로 짓게 하여 지금부터 익히고 외도록 하소서."
하여, 상이 그게 좋겠다고 했고, 그 후 예조가 또 아뢰기를,
"종묘 제향 때 폐백을 올리고, 찬수를 올리고 할 때면 거기 쓰이는 악장이 따로 있습니다. 지금 영소전에도 폐백과 찬수를 올리는 절차가 있으므로 그에 쓰일 악장이 없어서는 안 되겠으니 그 악장까지 새로 짓도록 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 이조 판서 김석주(金錫?)가 상차하여 문묘(文廟)의 제사 법식을 바로잡을 것을 청했는데 내용이 대략 이러했다.
"지금 전국의 같은 목소리와 다사(多士)들의 거듭된 청에 의해 윤허 명령이 이미 내려졌으므로 머잖아 배향 절차가 실현이 될 것인데 우리나라 유현들만 받들어 모시는 것이 아니라 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촹연평(延平 이동(李?)) 등 중국에서 미처 사전(祀典)에 못 올렸던 이들까지 다 받들어 모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초 배향이 안 됐어야 했고 지금 중국에서는 이미 파퇴(罷退)해 버린 한(漢) 나라촹진(晉) 나라 때의 훈고(訓?)와 장구(章句)나 겨우 아는 자들 역시 이번 기회에 정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대명회전(大明會典)》촹《명사기사(明史記事)》 등을 보면 한 단계 내려 향(鄕)에서 제사하는 자가 7명, 아예 파퇴당한 자가 13명이나 됩니다. 우리나라로서는 제사할 만한 향이 없으므로 그것은 그만두고 또 그 13명 중에도 한두 명쯤 애석한 자도 있어 그들을 몽땅 파퇴할 수는 없다 치더라도 가령 순황(荀況) 같은 자는, 성(性)은 악한 것이라고 했고, 예(禮)는 거짓이라고 했으며, 자사(子思)촹맹자(孟子)는 천하를 어지럽힌 자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옛날에 그를 들먹인 자들은 반드시 양웅(揚雄)까지 싸잡아서 순양(荀揚)이라고 해왔습니다. 그런데 양웅은 양지(楊砥)의 말 한 마디로 해서 이미 파출을 당했는데 왜 순황만 남겨둘 것입니까.
또 마융(馬融)은 양기(梁冀)를 위해 주소를 초안하여 충신 이고(李固)를 죽이고 그 후 남군태수(南郡太守)가 되었다가 탐탁죄(貪濁罪)로 면직당한 자이니 파출해야 할 것이고, 왕필(王弼)은 노장(老莊)을 떠받들고 하안(何晏)과 소위 청담(淸談)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어 결국 진(晉)이 망한 원인이 되게 하였으니 그도 파출해야 하며, 왕숙(王肅)은 위(魏) 나라에서 벼슬하여 관작이 철후(徹後)에까지 이르렀고 딸을 사마소(司馬昭)에게 시집보냈으며 또 사마사(司馬師)를 위해 책략을 주며 문흠(文欽)촹모구검(母丘儉)을 토벌하게 했으니 파출해야 옳고, 두예(杜預)는 사마염(司馬炎)의 모주(謀主)가 되어 양양(襄陽)을 지키면서 궤유(饋遺)를 행했고 또 강릉(江陵)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으니 신하로서는 불순한 신하이고 장군으로서는 불의의 장군으로서 파출해야 할 자이며, 하휴(何休)는 《춘추(春秋)》를 주석하면서 주(周)를 무시하고 노(魯)를 왕으로 했고, 또 풍각(風角)에 관한 서적들을 주해하면서 그것을 《효경(孝經)》촹《논어(論語)》 등과 같은 수준으로 취급했으니 그 역시 이단의 무
그리고 칠십자(七十子) 내에서는 《논어》에서는 신장(申?)이라고 했고, 《사기(史記)》에서는 신당(申黨)으로 기록했는데 사실은 동일인인 것을 신장은 동에, 신당은 서에다 배향했으니 그 둘 중 하나는 제거해야 할 것이고, 공백료(公伯寮)는 《가어(家語)》에 실려 있지도 않을뿐더러 또 자로(子路)를 헐뜯은 자로서 바로 자복경백(子服景伯)이 이른바, 내 힘으로 그의 시체를 시조(市朝)에다 내걸 수 있다고 했던 그 자이니 그도 제거해야만 합니다.
대체로 이상의 자들을 파출해야 한다는 논의가 맨처음 일어난 것은 송렴(宋濂)의 논의가 발단이었고, 정민정(程敏政)의 상소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다가 결국 가정(嘉靖) 때 사전(祀典)을 대폭 이정하면서 그대로 실시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있은 줄을 처음에는 몰랐다가 선조(宣祖) 때 와서 선정신 조헌(趙憲)이 질정관(質正官)으로 명조에 갔다가 처음 듣고 역시 그를 옳게 여겨 귀국하자마자 즉시 봉장(封章)을 올려 우리도 명조가 한 그대로 따를 것을 청했었고, 고 상신 이정귀(李廷龜)가 예조 판서로 있을 때 마침 오현(五賢)을 배향하게 되어 그때 또 우리도 명조 제도와 똑같이 묘향(廟享)을 이정할 것을 청했었는데 때마침 세상이 시끌시끌해서 미처 실시를 못했던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이 차자를 예관에게 내려 많은 의견을 널리 수렴하여 조치를 취하도록 하소서"
하여, 상이 답하기를,
"막중한 문묘 배향에 있어 혹 배향되어서는 안 될 자가 억지로 배향이 됐다거나 혹은 동일인이 동서로 나뉘어 배향이 되었다면 그 얼마나 국가로서는 잘못된 일이며 후세에 얼마나 많은 핀잔을 받을 일인가. 지금 오현을 배향하는 이 시기에 명조 제도와 똑같이 이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해조로 하여금 대신들 의견을 널리 수렴한 후 분부를 받아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이에 영의정 김수항이 의논드리기를,
"명조에서 파출한 사람이 20명인데 그 중 임방(林放)촹거원(遽瑗)촹정중(鄭衆)촹노식(盧植)촹정현(鄭玄)촹복건(服虔)촹범녕(范寗) 이상 7명은 바로 이 차자 내에서 말한바, 한 단계 내려 향에서 제사하고 있는 자라고 한 그들로서 이들 모두는 칭송이 있을지언정 하자는 없는 이들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제사할 만한 향도 없는 실정이므로 논의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공백료(公伯寮)촹진염(秦?)촹안하(顔何)촹순황(荀況)촹대성(戴聖)촹유향(劉向)촹하휴(何休)촹가규(賈逵)촹마융(馬融)촹왕숙(王肅)촹왕필(王弼)촹두예(杜預)촹오징(吳澄) 이 13명이 바로 이 차자 내에서 말한바, 곧바로 파출했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 중 진염촹안하 두 사람은 《가어》의 칠십자 반열에 실려 있지 않은데, 정민정 역시도 그들 이름자가 잘못 유전된 것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미 확실한 근거가 없는 이상 꼭 파출해야 할 것인지 단안을 내리기 어려운 일이고, 대성은 너무 재리를 탐하다가 비방을 샀다고 하지만 사씨(史氏) 말에 의하면, 그와 원한이 있는 자가 모함한 말이라고 하고 있어 역시 허실을 밝히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대대례(大戴禮)》라면 예문을 하는 사람들에겐 훌륭한 참고서가 되고 있어 그의 공로 또한 적지 않으니 경솔하게 파출할 수 없는 일이며, 유향으로 말하면 그가 황금을 만들 수 있다고 한 선제(漢宣帝)에게 말했던 것은 그의 소년 시절에 있었던 일일 뿐 막상 조정에 나와 임금을 섬길 때는 충직하고 바른말 잘하여 신하된 자들에게는 교훈을 남겼고 세교(世敎)에도 도움을 주었으며 또 경술(經術)에 해박하여 한 나라 유자들 중에 그와 겨룰 만한 자가 별로 없었으니 그야말로 가석한 존재입니다.
그 밖의 공백료촹순황촹하휴 그리고 두 왕씨와 마융촹두예 등 성경(聖經)을 위패하고 명교(名敎)에 죄를 얻은 무리들이야 당연히 누구보다 먼저 파출해야 할 자들이고, 가규촹오징에 관해서는 이번 차자 내에, 함께 파출해야 한다는 언급이 없는데 그가 무슨 뜻으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나 가규가 경전 해고(解?)를 하여 비록 그 때문에 일반 유자들 칭송을 받기는 했어도 소절(小節)을 훼손했던 관계로 비난을 당했으며, 심지어 경전의 뜻을 설명하면서도 오로지 도참(圖讖)을 위주로 하여 글 뜻을 억지로 맞추어 대가지고 귀족 현관(顯官)들 비위만 맞추었기 때문에 사가(史家)로부터 극심한 배척을 받았으니, 하휴가 풍각 문서 주해한 것과 뭐가 그리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오징은 송조(宋朝)의 진사(進士)로서 호원(胡元)에 절개를 굽히고 그의 학문 역시 출가만 안 했지 승려와 다름없는 쪽으로 흐르고 있어 그 두 사람은 철식(?食) 반열에다 그대로 둬서는
그런데 지금 논하는 이들 중에는 혹 주장하기를, '승출(陞黜)을 대대적으로 단행하여 명조의 제도 꼭 그대로 따른다면 모르거니와 지금 그렇지 않고 파출한 쪽만 따르기로 하면 그게 벌써 명조와는 다른 점인데 게다가 또 파출하는 중에서 취사선택을 또 하기로 하면 그것은 더욱 옳지 못한 일이다.' 한다지만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은 바가 있는 것입니다. 신은, 따르고 안 따르고를 꼭 명조 제도를 기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육구연(陸九淵)촹왕수인(王守仁)처럼 이단의 학문으로 혹세무민한 자들을 명조에서 사전에 두었다 하여 우리도 똑같이 맹종할 수야 있는 일입니까."
했고, 행 판중추부사 김수흥은 의논드리기를,
"임방(林放)이 비록 공자의 제자 줄에 들어 있지 않고, 거원(遽瑗) 역시 바로 문인은 아니었으나 임방이 예(禮)를 좋아하고, 거원이 허물이 적도록 노력한 점에 대해 선유(先儒)들이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했고, 정중촹노식촹정현촹복건촹범녕의 경전을 보충 해설한 공로들도 다 후세에 남길 만한 공로들인데 우리나라는 따로 제사할 만한 향당이 없는 실정이고 보면 그들 모두는 꼭 파출해야 할 분들이 아니며, 그 밖의 진염촹안하 같은 이는 비록 이름자가 서로 비슷하다고 해도 이미 상고할 길이 없는 한 경솔하게 거론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신장과 신당은 그것이 분명 동일인이라는 것이 정민정의 상소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어 그 때문에 가정 연간에 형병(邢昺)의 주소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신당 한 위를 제거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공백료촹순황촹대성촹유향촹하휴촹가규촹마융촹왕숙촹왕필촹두예촹오징 등은 사향(祀享)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들로 정평이 이미 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신이 감히 이중으로 말할 것이 없습니다."
했으며, 정지화는 의논드리기를,
"그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지금까지 끌고 있는 점에 대해 선배 장로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장주(章奏)로 논해 왔던 일이므로 그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야 할 때가 바로 이때라고 생각합니다."
했고, 우의정 이상진은 의논드리기를,
"중신(重臣)의 차자 내용은 바로 주(周)의 제도를 따르자는 것과 잘못된 것을 바로잡자는 뜻 아니겠습니까. 다만 그것을 바로잡는 방법에 있어 고치는 것, 올려 모시는 것, 파출하는 것, 이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세 가지 중에서 단 한 가지만을 실시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전혀 손을 안 대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명조에서도 그것을 바로잡을 때 문선왕(文宣王)이라는 칭호를 고쳐 지성선사 공자지위(至聖先師孔子之位)라고 쓰고 안자(顔子) 이하도 모두 관작 명칭을 없앴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묘액(廟額)도 대성전(大成殿)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선성묘(先聖廟)라고 했으며 또 말하기를, '당(唐)의 현종(玄宗)이 처음으로 시호를 문선왕으로 하고, 안자 이하도 질(秩)을 정해 공(公)촹후(侯)촹백(伯)으로 칭했는데 그렇게 공(公)을 봉하고 왕(王)을 봉한다면 이른바 군군신신(君君臣臣)이라는 공부자의 도가 패란(悖亂)이 되고 마는 것이다. 병이 위독했을떠 문인을 가신(家臣)으로 정했다 하여 속였다고 꾸짖었던 공자나, 대부(大夫)의 자리에서 죽을 수 없다고 그 자리를 바꾸었던 증자(曾子)가 그 칭호를 받고서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더구나 자신은 황제라고 칭하면서 신자(臣子)들을 봉하는 방법으로 억지 왕호를 그에게 붙인다는 것은 그것이 성인을 존경하는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 태학사 장부경(張孚敬)의 말에 따라 1천 년 잘못되어 왔던 것 전부 고치는 것이다.' 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오랫동안 인습되어온 그 비루한 습속을 당연히 고쳐야만 할 것입니다. 그 문제야말로 의리와 내용이 아주 엄정한 일이어서 만약 바로잡으려고 들면 우선 그것부터 고쳐야 할 것이며 그렇게만 된다면 주의 제도를 따르고 명분을 바로잡는 일치고 그보다 더 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후창(后蒼)촹왕통(王通)촹구양수(歐陽脩)촹호원(胡瑗)촹설선(薛瑄) 같은 여러 현인들을 명조에서는 이미 다 올려 모셨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그렇게 못하고 있으니 그 또한 사문(斯文)으로 보아 하나의 큰 흠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하지 않고 유독 파출 그 문제만을 두고서 주의 제도를 따른다 하여 결행을 한다면 그것은 의리로 보아서도 온당치 못하고 일 자체로서도 미비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했으며, 사업(司業) 박세채(朴世采)는 의논드리기를,
했고, 전 집의(執義) 이상(李翔)은 의논드리기를,
"배향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전인들이 주장해 온 문제이니 명조에서 한 그대로 이정하여 천년을 두고 잘못되어 온 습속을 타파하도록 하소서."
하여, 상이 하교하기를,
"문묘 배향이란 지극히 중차대한 일인데 어떻게 구차하게 세월만 끌면서 부정한 제사를 모신다는 비난만 받을 것인가. 문묘 배항에 적합하지 아니한 공백료 등 여러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선유들 정론이 있어 왔고, 또 결국 명조에서는 그대로 다 이정을 한 것들이니 이렇게 올려 모시는 이 기회에 그간 미처 못했던 일을 하려면서 조금도 늦잡아서는 안 될 일이다. 유사(有司)로 하여금 공백료촹순황촹마융촹왕필촹왕숙촹두예촹하휴촹가규촹오징 등 9명을 공부자 묘정(廟庭)에서 빨리 파출하여 그간의 잘못을 바로잡도록 하고, 동일인이 두 곳에 나뉘어 배향되고 있다는 것은 더더욱 멋없는 일이니 신당을 제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후에 이상진이, 신장과 신당이 과연 동일인인지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상께 아뢰었고, 김석주(金錫?)는 홍문관으로 하여금 찾아보도록 하라고 청했었는데, 그후 홍문관이 찾아보고 아뢴 내용에 따라 종전 하교대로 신당을 제거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 그 전에 상이 대신들 진달(陳達)에 따라 모든 용도를 진휼청(賑恤廳)에서 상의하여 재감하도록 했던 것인데, 이때 와서 민유중촹김석주 등이 경술년과 신해년에 실시했던 기록을 참고하여 각 아문 소요 물량을 종류별로 꼭 필요한 것, 덜 필요한 것, 많이 필요한 것, 적게 필요한 것 등을 참작해서 재감할 것은 재감한 후 별단(別單)을 작성하여 아뢰어 왔다. 금년 12월부터 명년 11월까지 1년간 감량된 값이 쌀로 쳐서 총계 9천 3백여 석이었고, 각처의 숯촹종이 등도 역시 신해년 전례에 따라 금년 12월부터 명년 11월까지 감량한 값이 쌀로 7백 70여 석 그리고 대동목(大同木)으로 28동(同)하고 몇 필이었다.
○ 며칠 전에 여성제(呂聖齊)가 연석에서 아뢰기를,
"영소전 담제 후로 산릉(山陵)에서는 아직도 곡읍(哭泣)을 그대로 하면서 혼전(魂殿)에서는 풍악을 울린다면 그는 길흉(吉凶)이 서로 뒤섞인 일이니 대신촹유신에게 문의하도록 하소서."
하여, 상이 허락했다. 예조가 대신촹유신의 논의를 구하자 영의정 김수항, 행 판중추부사 김수흥촹정지화가 의논드리기를,
"《오례의》에 의하면 내상(內喪)인 경우 11개월 만에 연제, 13개월 만에 상제, 15개월 만에 담제를 올리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예제는 고례(古禮)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서 15개월이 지나고 나면 3년상을 다 마친 폭이 되므로 제향에 풍악을 울리는 것이야 예가 당연히 그런 것으로 의심할 것이 없는 일입니다. 다만 지금도 상식을 그대로 올리는 것은 일시적 권도로 근례(近例)를 따르고 있는 일이고, 산릉에서는 곡읍을 하는 것은 또, 3년이 지나고도 무덤 앞에서는 역시 곡을 한다고 하는 선현(先賢)들이 만든 예문을 따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아직 3년상이 끝나지 않았다 하여 담제 후면 당연히 행할 수 있는 예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했고, 좌의정 민정중은 의논드리기를,
"《오례의》에, 담제 후에는 풍악을 쓴다고 한 것은 바로 정상적인 예이고, 지금 상식도 그대로 하고 산릉에서는 곡읍하고 하는 것은 임시 권도로 하는 일인데 정상적인 예는 그 예대로 따르고 권도는 권도대로 쓰는 경우가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권도 때문에 도리어 정상적인 예를 의심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더구나 산릉과 혼전과는 사체로 보아서나 인정과 예제로 보아서나 같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했으며, 이상진 역시 의논드리기를,
"상식 자체가 이미 권도로 하는 일이고, 곡하는 것 역시 근거가 있는 일이라면 그것 때문에 정상적인 예를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했다. 그리고 박세채는 의논드리기를,
"담제가 지난 뒤에 산릉에서 곡읍하고, 혼전에다 상식하고 하는 것은 모두 일시적 권도로 하는 일들로서 바로 옛날에 이른바, 예에는 없는 예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기타 대제(大祭)에 풍악을 쓰는 것은 원래 《오례의》에 나와 있는 예문이 그렇습니다. 지금 풍악을 쓰는 것이 꼭 예에 적중한 일인지 그것은 비록 모르겠으나 그러나 폐지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했고, 사업 이상은 의논드리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전일에 헌의했던 바와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 비록 조종조에서 이미 행했던 일을 근거로 하여 궤연(凡筵)을 걷지 않고 있으나 곡읍까지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한 것 같습니다."
했으며, 윤증(尹拯)은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상이 하교하기를,
"15개월 만에 담제 올리고 담제 후에는 풍악을 쓰는 것은 바로 정상적인 예인 것이고, 3년 동안 상식하고 산릉에서 곡읍하고 하는 것은 혹은 권도로, 혹은 옛 예문에 의거하여 하는 것이지만 일시적인 권도로 하여 정상적으로 행해야 할 예를 폐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예문대로 풍악을 쓰도록 하라."
하였다.
○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세화(李世華)가 본도의 지형과 여러 가지 상황을 두루 살펴보고 그것을 조목별로 나누어 아뢰어 왔다.
"1. 가산(嘉山)에 있는 군병 전체로 하여금 만약 그 읍만 맡으라고 하면 그것은 효성(曉星) 고개만 지키는 것일 뿐 그 고개 좌우의 안주(安州)나 박천(博川)으로 통하는 곳은 그냥 비어 있게 되어 적이 만약 그 사실을 미리 알고 그 길로 오지 않고 곧바로 안주나 박천 길을 택해 쳐들어오면 효성 고개는 결국 지키나마나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가산 한 고을 군병만 그 읍에다 전속시킬 것이 아니라 왼편으로 박천, 바른편으로 안주까지 모두 가산에다 소속시켜 가산을 주진(主鎭)으로 삼고 안주촹박천을 좌우 공액(拱扼)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정주(定州)가 앞가리개가 되고 신의 영(營)에서는 일정한 군병을 차출해서 거리의 유병(遊兵)으로서 여기저기 요해처를 지키기도 하고 또 혹 서로 응원도 하게 해야지만 비로소 실효가 있겠습니다.
2. 귀성(龜城)은 바로 길이 여러 곳으로 통하는 교통 요지여서 그 전에 순변(巡邊)을 설치했던 것도 뜻이 있어서 한 일이었습니다. 거기에 독립된 진(鎭)을 두고 형편 보아가며 변통을 취하는 것도 매우 좋은 방법일 것인데, 귀성이 현재는 곽산 영장(郭山營將)의 소속으로 되어 있어 만일 사변이 있을 경우 귀성 그 읍의 병력도 당연히 곽산 관할하이기 때문에 영장으로서야 자기가 맡은 곳을 두고 병력을 옮겨 귀성을 지킬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기왕에 귀성을 독립된 진으로 만들 바에는 그곳 지방관(地方官)이 영장까지 겸임하게 하고, 안으로는 태천(泰川)과 밖으로는 안의(安義)촹식송(息訟) 등 그 부근에 있는 진들도 모두 귀성에 소속시켜 서로 합세해서 단속에 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 도내의 변장(邊將)이 무려 61곳이나 되는데 강가로 있는 여러 진들은 주진(主鎭)에 소속된 것들도 있고 혹 영장(營將)에 소속되기도 하여 모두 관할하는 곳이 있지만 지금 새로 둔 시채(恃寨) 등의 변장들은 주진에도 영장에게도 소속되지 않고 어정쩡하게 중간 위치에서 병영 파총(兵營把摠)이라는 직함을 띠고 영문(營門)과는 아주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척후 소식도 늘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진과는 마음과 힘을 같이하는 사이가 못 되고 서로 격리되다시피한 사이입니다. 그 한 고을의 토지(土地)와 인민(人民)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것이 수령(守令)의 임무일 바에는 병사(兵使)촹수사(水使)촹영장을 제외한 그 관내의 진보(鎭堡)는 모두 그의 관할하에 두어 다같이 동등한 취급을 하게 해야지만 무슨 상황이 닥치든지 해결해 나갈 수가 있겠습
4. 수령들은 일단 유사시가 되면 그동안 자기 관할의 군병들을 모두 조발하여 영장에게로 넘기기 때문에 그 고을 주수로서는 거느릴 군대도 없고 또 의지할 곳마저 없게 되는데 그것은 종전부터 약속(約束)이 제대로 정해져 있지 못한 소치인 것입니다. 각 고을에는 조직적으로 부대 편성을 이룬 무리가 있어 그를 이른바 정군(正軍)이라고 하고, 또 갖가지 한잡(閑雜)한 무리가 있어 그는 이른바 민병(民兵)이라고 하는데, 정군은 영장에게 소속되어 국란이 있으면 영장이 거느리고 난리에 임하고, 민병은 수령에게 소속되어 그 지방을 지키도록 원래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를 특별 사목(事目)으로 정하여 한편으로는 정군의 기율을 정돈하고 늘 훈련을 시켜 장령들이 거느리고 적을 막는 데 쓰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민병들의 명부를 작성해 두고 성심껏 길러내어 수령들 자위(自衛)에 이용하도록 각 읍에다 거듭 유지를 내리시고 또 일단 지방군으로서 변진(邊鎭)에서 복무하고 있는 자들도 한 사람 한 사람 참작해서 각종 부역 면제 등의 혜택을 주소서."
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문제를 비변사에 내리자 비변사가 복주하기를,
"박천은 가산 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또 영변과도 거리가 가까우므로 그곳을 가산에다 소속시켜 대정(大定) 상류의 좁은 목을 지키게 하는 것이 편리한 방법이겠으나 안주는 지금 병사(兵使)가 주차(駐箚)하고 있는 곳이어서 그 지방 군병 모두가 대체로 병사에게 소속되어 있을 것이고 또 각기 주성(州城)을 지키거나 청천강 비어(備禦)를 맡고 있을 것이어서 그를 떼내어 가산에다 소속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 같습니다. 새로 설치한 고성진(古城鎭)은 바로 효성령(曉星嶺)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박천과 협력해서 좌우 갓길을 분담 수비하면서 가산의 보호막 역할을 하게 하는 것도 좋을 일이고, 귀성을 독립진으로 하여 태천촹안의 등을 모두 소속시키고 서로 합세해서 적군 방어에 임하게 하자는 것도 좋은 의견입니다. 그리고 본도에 전후 새로 설치한 변장 18곳에 대하여 그것을 각 읍으로 분속시키자는 의견도 대단히 좋은 의견입니다.
다만 진읍(鎭邑)에 관한 일과 병민(兵民)에 관한 정책과는 피차 맡은 직종이 원래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닌데다 이제 신설된 처지이고 보면 모든 것이 초창기여서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대뜸 고을에다 소속시키고 보면 평상시에는 예절을 갖추라고 귀찮게 할 것이고 또 무슨 일이라도 있을 때는 많은 간섭을 할 것이어서 자칫하면 서로 혐원(嫌怨)이 생겨 결국에는 난처한 일이 벌어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이 있는 곳 모두가 좁은 산골 요해처여서 자기가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자기 땅을 자기가 지키는 도리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독립된 진을 많이 두면 그를 통솔할 길이 없는 것이 걱정이라면 각 곳을 총괄할 수 있는 지역에 위치한 진 한두 개를 선정하여 그를 천총(千摠)으로 삼고 또 그 진과 가까운 곳에 있는 영장에게 소속시키면 될 것입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 12월. 시호도감(諡號都監)이 아뢰기를,
"종묘의 열성(列聖) 위판에 중국 조정의 증시(贈諡) 두 자를 먼저 쓰고, 그 다음으로 묘호(廟號)촹시호(諡號)를 쓰는 것이 정해진 식례(式例)이기 때문에 이번 고쳐 쓸 때의 식례도 해조가 그렇게 재가를 받았던 것인데, 오늘 마침 열성 위판을 쓸 때의 그에 관한 기록문서를 보았더니 모두 중국에서 내린 증시 위에 유명증시(有明贈諡)라는 네 글자가 붙어 있었습니다. 옛 식례가 그러했다면 지금이라고 달리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중대한 문제를 일개 개인 소장의 문서에만 의존하여 그대로 따를 수는 없는 일이므로 신들이 영녕전에 가서 봉심을 하고 나서 여쭙고 분부를 받겠습니다."
하여, 상이 그리하라고 했는데, 봉심을 하고 다시 아뢰기를,
"원종 대왕(元宗大王) 이상으로 열성 위판에 과연 모두 유명증시라는 네 글자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대로 따라 해야겠습니다."
하여, 상도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 비변사가, 도하(都下)의 기근으로 하여 방민(坊民)들에게 으레 받아 오던 장빙미(藏氷米)를 면제해 주고 대신 진휼청(賑恤廳)에서 끊어 주도록 할 것을 청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로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묘호를 정종(定宗)으로 추상하고 가상시호(加上諡號)를 의문장무(懿文莊武)로 했으며, 정안왕후(定安王后) 휘호는 온명 장의(溫明莊懿)라고 하고 개제주례(改題主禮)를 행하였다.
○ 개성부(開城府)에 있는 여러 고려 왕릉에 투장(偸葬)하는 백성들이 많아 투장자에게는 죄를 내리고 단시일 내로 파내도록 명하고, 수직관(守直官) 왕이성(王以誠)이 너무 늙어 직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 하여 그를 파면하고 다시 왕씨(王氏) 자손 중에서 골라 간호하게 하였다.
45권 숙종조 5
8년(임술, 1682)
○ 1월. 우의정 이상진(李尙眞)이 차자를 올리고 잠언(箴言)을 헌상하여 새해를 맞이하여 정사를 신칙해야 된다는 의의로 권면하고, 판중추 김수흥(金壽興)이 차자를 올려 일신(日新)에 대한 조목을 하나하나 진달하니, 모두 우악하게 답하였다.
○ 상이 5일에 조참을 행하려 하자, 신하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이른 아침에 나와야 된다는 이유로 정지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새해 첫머리에는 모든 관료들이 다 조참하는 법이다. 어찌 정지할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 상이 정명공주(貞明公主)가 나이 만 80세이므로 특별히 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특별히 잔치에 쓸
○ 산산(蒜山)촹흑교(黑橋)에 신설한 두 진(鎭)을 하나로 합병하여 극성(棘城)으로 옮겨 첨사(僉使)로 승격하고 황주(黃州)촹봉산(鳳山)으로 하여금 밭 2백 결을 출연하여 자본으로 쓸 수 있게 하였다. 이는 도신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 평안도 고성진 첨사(古城鎭僉使)를 신설하였다. 이는 도신의 말에 따른 것이다.
○ 병조가, 돈을 유통시킨 뒤에 시가가 일정하지 않다는 이유로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에 대한 수포(收布)를 돈 1냥으로 맞추어 정하고, 그 나머지 유청 군포(有廳軍布)와 같은 종류는 9전으로 맞추어 정하여 유통시켜 쓴 뒤에 귀하거나 헐할 때에 따라 경중을 맞추자고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 제주에 기근이 들자, 목사 신경윤(愼景尹)이 연해의 곡식 1만여 석을 확보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땅은 좁은데 말은 많아서 잘 기르지 못하니, 노둔한 말을 뽑아내어 연해의 각읍에 나누어 팔아서 기근을 구제할 자금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비변사가 이에 대하여 복계하기를,
"진휼청으로 하여금 가장 바람직한 계책으로 요리하여 속히 선곡(船穀)을 날라다가 급박한 사람들을 구제하게 하소서. 열등한 말을 뽑아 파는 일이 비록 마지못한 상황에서 생각하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을 고르는 일은 정밀하게 하기 어려우니 손실이 염려됩니다.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따랐다.
○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사 김석주(金錫?)가 선조(先朝)의 구례에 따라 무사는 반드시 금군(禁軍)을 지낸 뒤에 선발하여 내삼청(內三廳)에 승보(陞補)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을 설치하고, 공조 당상 1인과 장악원 제조 1인이 감독하여 영녕전과 종묘의 제향 때에 쓸 방향(方響)을 만들게 하였다.
○ 영월(寧越)에 있는 노산대군(魯山大君)의 분묘를 수축하고 표석(標石)을 세우고 위판을 고쳐 썼다.
○ 행 판중추부사 김수흥이 차자를 올려 시폐를 논하고, 청하기를,
"감원하는 군사들의 숫자를 반드시 군량의 수량과 상당하게 하여 군정(軍政)과 경비 지출이 서로 방해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훈국 별대(別隊)는 지금 갑자기 폐지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장정을 선발하여 하나의 군대를 편성하고 그 나머지 인원과 보인(保人)들에게서 미포(米布)를 징수해야 되겠습니다. 또 양민으로서 헐한 신역에 들어간 자를 도태시키고, 공신의 후손으로서 충의(忠義)에 함부로 속한 자를 철저히 조사해 내야 되겠습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각 아문에서 둔전을 신설하여 광범?하게 점유하는 폐단을 금지하소서. 각 군문의 장관(將官)은 특별히 자질을 시험하여 차서에 따라 차임하되, 관리로서의 능력이 뛰어난 자나 무사로서 연소하면서 재능이 있는 자는 마땅히 차례에 구애하지 말고 발탁하도록 하소서. 도신들에게 거듭 당부하여 전최(殿最)의 법을 엄격하게 시행하게 하고, 조정의 경재(卿宰)를 삼남(三南)과 서북 지방에 나누어 파견하여 전하의 덕음(德音)을 선포하고 백성들의 실정을 알아오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송시열(宋時烈)에게 단지 형식적인 예만을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조정에 만일 정대한 논의가 있다면 사자를 보내어 그의 집에 가서 존문하게 하소서. 윤증(尹拯)과 박세채(朴世采)도 다시 성의를 다하여 불러오게 하소서."
하니,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그의 건의를 다 묘당으로 하여금 자세히 논의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 흉년 때문에 제도와 각읍에 명하여 기미년 이전의 각색(各色)의 군포(軍布)촹보미(保米)와 내수사와 각사의 노비 신공(奴婢身貢)을 가을까지 물려서 봉납하게 하였다.
○ 양서(兩西)에 계속 기근이 들자, 관향곡(管餉穀)의 모미(耗米)를 평안도에 2천 석, 황해도에 1천 석을 출
○ 주강에 나아갔다. 지사 김석주가 아뢰기를,
"근래에 군역에 충정된 자들이 함부로 선현(先賢)의 자손이라 칭탁하는 자가 많으니, 안씨 성을 가진 자는 다 안유(安裕)의 자손이라 하고 한씨(韓氏) 성을 가진 자는 다 기자(箕子)의 자손이라 하여, 제멋대로 속인 자취를 감출 수가 없는 점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기자의 후예에 대해서는 선우씨(鮮于氏)에게 군역에 충정하지 말도록 한 것만을 허가하고, 안유의 후예 중에서는 제사를 받들고 묘소를 지키고 있는 자 외에는 절대로 면역(免役)을 허가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고 상신 홍명하(洪命夏)촹이행원(李行遠)의 처에게 명주촹베촹쌀촹콩촹고기 등을 하사하였다. 이때에 대신이 경연에서 건의하여, 두 신하가 모두 청백하여 죽은 뒤에 집안 살림이 매우 영락하여 처자가 기한(飢寒)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고 아뢰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내렸다.
○ 3월. 평양부 성중에 불이 나서 민가 3백 44호가 소실되었다. 이에 휼전(恤典)을 시행하여 관향미(管餉米) 4백 석을 분급하여 구제하고 1년에 한하여 신역을 감면하도록 명하였다.
○ 겸병조판서 김석주가 군제(軍制)를 변통하는 데 대한 절목(節目)을 조목조목 작성하여 올렸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
훈국의 군병 5천 7백 7명 안에서 마땅히 감할 자가 7백 7명인데, 그 감한 인원을 별대(別隊)로 이송한다. 영(營)과 부(部) 표하(標下)의 별대군(別隊軍) 1만 3천 9백 49명 안에서 나누어 4부 16사(司) 80초(哨)로 만들고, 나머지 3천 2백 1명과 그 자보(資保)를 아울러 보인(保人)으로 낮출 자는 6천 4백 2명이다. 정초군(精抄軍) 3천 7백 73명 중에서 1부 25초를 만들고 나머지 4백 23명과 그 자보를 아울러 보인으로 낮출 자는 8백 46명인데, 정초군의 보인 1만 1천 6백 28명과 원군(元軍)촹자보로서 보인으로 낮추어진 자를 합하여 1만 2천 4백 74명 중에서 6천 5백 95명은 쌀을 바치게 하여 그대로 소속시키고, 5천 8백 79명은 병조로 도로 소속시킨다. 별대와 정초 두 명색의 군병을 합하여 한 영(營)의 제도를 만들고, 본영은 금위영(禁衛營)이라 칭하고 군병은 금위별대(禁衛別隊)라 칭한다. 그들로 하여금 7번 금군의 기병촹보병과 서로 번을 배정하여 10번으로 나누어 20개월을 돌아가면서 번을 들게 한다.
○ 4월. 대신과 비국의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군제를 변통하는 일은 해조에서 아뢰어 이미 계하하였습니다만, 정초(精抄)와 별대를 합하여 하나로 만드는 일은, 사안이 크게 변통하는 데에 관계되므로 상세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좌상이 사신으로 나갔다가 이제 막 돌아왔으니 그와 상의한 뒤에 계품하여 정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의 절목이 매우 상세히 갖추어진 듯하다. 그러나 좌상과 상의하여 결정하더라도 늦지 않겠다."
하였다. 우의정 이상진(李尙眞)이 아뢰기를,
"만약 금위영이라 일컬으면서 수어청촹총융청 두 청의 규례와 같이 둔전(屯田)을 설치할 경우, 그 폐단이 반드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병조 판서 김석주가 아뢰기를,
"수어청촹총융청 두 청은 국가에서 획급하는 물자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둔전을 설치하였으나, 정초군과 별대군은 이미 원군보(元軍保)가 있으므로 굳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였다. 형조 판서 이익(李翊)이 아뢰기를,
"전 참봉 신면(申勉)이 애봉(愛奉)이라는 자를 몽둥이로 쳐서 죽이자, 애봉의 처 옥례(玉禮)가 분함을 참지 못하여 신면의 이마를 때렸는데, 상해를 당한 지 16일 만에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 광정(光井)이 관가에 와서 송사를 하였습니다. 이에 옥례와 애봉의 아우 애선(愛先)촹애남(愛男)을 구속하여 형신을 가하였는데, 옥례는 응당 죽어야 할 자를 함부로 죽인 것이므로 본래 사죄(死罪)가 아니고, 남편의 원수를 갚은 것은 또한 용서할 만한 도리가 있습니다."
"옥례가 이미 복수를 한 것이니 참으로 사형에 처할 이치는 없습니다. 그러나 관아에 고하지 않고 제멋대로 죽인 행위에 대하여는 해당되는 법이 있으니, 완전히 용서하여 석방할 수는 없습니다."
하자, 상이 김석주의 말에 따라, 제멋대로 죽인 죄에 대한 법으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 홍문관이 <농가십이월도(農家十二月圖)>를 올리고, 이어서 차자를 올려 경계하는 말을 진달하니, 상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
○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항이 아뢰기를,
"군제를 변통하는 일을 지금 품정(稟定)해야 되는데, 신의 견해는 앞서 이미 대략 진달하였으니 좌상에게 하문하소서."
하니,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훈국의 군병들은 늠료(?料)를 허비할 뿐 시정배들과 다름이 없어 비상시의 쓰임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선왕이 이것을 염려하시어 훈국의 별대를 설립하고 점차 숫자를 늘려서 돌아가며 상하번을 들게 하기를 어영군의 제도와 같이 하고 원군(元軍)은 폐지하여 군량이 부족한 폐단을 덜려고 하였으나 미처 변통하지 못하고 있던 것입니다. 만약 정초군과 별대군을 합하여 하나의 군대로 만들게 되면 훈국의 군제를 끝내 변통할 가망이 없게 됩니다. 어찌 선조의 본의에 크게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첫 번째로 온당하지 않은 점입니다.
우리나라는 군문이 너무 많아 호령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여 식자들이 전부터 우려하고 있었는데, 지금 또다시 하나의 큰 군문을 설치한다면 폐단을 끼치는 점이 틀림없이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로 온당하지 않은 점입니다. 군사를 통솔하는 자리는 합당한 인물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금위영이라고 일컬은 뒤에는 응당 병조로 하여금 주관하게 해야 될 터인데, 병조의 장관은 단지 문지(門地)와 명망을 가지고 선택할 뿐이어서, 꼭 군무(軍務)를 밝게 알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주 체직되는 문제가 있어서 더욱이 장수를 임명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이것이 세 번째로 온당하지 않은 점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크게 변통하여 선조의 본의를 준수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한 도에 호포법(戶布法)을 시행하는 것은 아직도 사람들의 논의에 막혀 있습니다. 오늘날 나라의 기강과 인심으로 볼 때 그 제도를 대대적으로 변통하기는 어려울 듯한데, 크게 변통시키지 못할 바에는 우선 해조의 절목에 의거하여 군량미를 절약하는 방편으로 삼는 것이, 비록 가장 좋은 것은 아닐지라도 눈앞의 급한 것은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군문이 너무 많고 장수에 합당한 인재를 얻기 어렵다고 한 말에 대하여는 민정중이 진달한 바에 동의합니다."
하고, 김석주가 아뢰기를,
"선조에서 별대를 설치한 본의는 신도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장정(長征)으로 나가는 것을 다 하여 번을 드는 것으로 하여 스스로 보미(保米)를 먹고 국가의 경비를 소비하지 않을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은 계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훈국의 형편으로 논하면 이미 갑자기 변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조정의 논의로 말하면 또한 빨리 효과를 보려 하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조금 변통하는 계책을 쓸 수 밖에 없겠습니다.
훈국의 원군(元軍)에서 감축할 인원이 7백 명 남짓이면 해마다 요미(料米) 6천 7백 80여 석을 줄일 수 있으니, 이것을 호조로 되돌려 보내면 삼수량(三手糧)이 부족한 문제를 없앨 수 있습니다. 또 해마다 의포(衣布) 1백 27동이 절약되어 지금 본국의 여유분의 포가 되어 호조에서 중순(中旬)에 상으로 내릴 물자로 대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초군의 보인(保人)으로서 병조에 환속한 자 5천 8백 70여 명에게 받아들일 포 2백 35동도 경비에 보태 쓰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은 효과를 즉시 볼 수 있으니, 실로 전혀 변통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어떤 이는 '훈국의 군사를 어째서 또한 1천 명 정도 감축하지 않는가?' 하였습니다만, 신이 전후의 상대(廂隊)와 내외의 숙직에 쓸 인원을 따져보니 만약 5천 명에서 다시 감축한다면 실로 그 모양을 갖출 수 없었습니
포수(砲手)의 부류는 서울에서 자라 인물이 영리하고 매무새가 선명하기 때문에 평상시에 쓰기에는 외방의 군사보다 낫습니다. 신은 훈국의 원군을 끝내 죄다 감축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신하들에게 두루 물었다. 이에 예조 판서 남용익(南龍翼), 좌참찬 여성제(呂聖齊)는 편리한지의 여부에 대하여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고, 판윤 정재숭(鄭載嵩), 이조 판서 이숙(李?), 도승지 이사명(李師命)은 김석주의 의견에 찬동하였고, 형조 판서 이익(李翊)은 안 된다고 하였다. 상이 해조의 절목에 의거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전에 정초청(精抄廳)을 따로 설치할 때에 도제조 1원을 두었고, 훈국을 설립하던 초기에도 도제조와 군색제조(軍色提調)를 두었습니다. 지금 금위영의 군사를 거느릴 책임을 병조 판서에게 맡긴다 하더라도, 따로 제조를 두어 업무를 관장하게 해야 되겠습니다."
하고, 김석주가 아뢰기를,
"병조의 예로부터 내려오는 규례로는, 모든 군사 업무와 호령에 관계되는 일은 모두 판서에게 권한이 있고 그 이하 차관들은 간여하지 못하는데, 이 일까지 겸하게 되면 권한이 너무 무겁게 되므로 그 권한을 분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제조와 제조를 아울러 차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5월.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갈 인원 6인을 뽑았다. 조지겸(趙持謙)촹임영(林泳)촹오도일(吳道一)촹박태보(朴泰輔)촹이여(李?)촹서종태(徐宗泰) 등이 뽑혔는데, 이는 대제학 이민서(李敏敍)가 선발한 것이다.
○ 송 나라의 유현(儒賢) 양시(楊時)촹나종언(羅從言)촹이동(李?)촹황간(黃?)과 조선조의 유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촹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공자의 사당에 종사(從祀)하고, 선유(先儒) 공백료(公伯寮)촹순황(荀況)촹마융(馬融)촹왕필(王弼)촹왕숙(王肅)촹두예(杜預)촹하휴(何休)촹가규(賈逵)촹오징(吳澄) 등을 종사에서 폐지하였다. 한 사람에 대하여 잘못하여 중첩으로 종사한 신당(申黨)을 제거하였다. 이는 연전에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명한 것인데, 지금 비로소 예가 이루어졌다.
○ 상이 가뭄이 든 것을 이유로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을 줄이고 음악 연주를 중지하였다. 이어서 비망기로 이르기를,
"소자가 보잘것없는 몸으로 외람되게 어렵고 중대한 왕통을 이어받아 백성들의 위에 앉아 있으나, 밤낮으로 오싹한 마음에 편안히 있을 겨를이 없으며 조종조로부터 내려오는 왕업을 실추시킬까 두려워하고 있다. 단지 자질이 엉성하고 덕이 적기에 미미한 정성은 천심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실질적인 은택은 모든 백성들에게 골고루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에 홍수와 가뭄, 바람과 서리와 같은 재해와 사람과 사물에 대한 요사스러운 변고가 달마다 발생하다가 오늘날에 이르러 극에 달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가뭄은 전에 없었던 바로서, 계절이 여름에 이르러 한 달이 지나도록 폭염이 계속되어 추수에 대한 기대가 다 끊어지고 죽음이 장차 이르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근심스러움은 속이 타는 듯하고 그 아픔은 마치 내 몸에 있는 듯하니, 차라리 갑자기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게 되고 싶다. 아, 지금에 재해를 불러온 이유는 모두 부덕한 나에게 있으나, 또한 어찌 백관들을 책려하여 서로 경계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아, 모든 대소 신료들은 나의 밤낮으로 쉬지 않고 걱정하는 것을 본받아 사심을 다 버리고 서로 화합하고 서로 돕는 도리를 다하도록 힘써서, 조금이라도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여 현재의 난국을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정원이 대신 초안하도록 명하였는데, 정원이 비망기를 곧바로 반포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 대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항이 아뢰기를
"금위영에 대한 절목과 규제(規制)를 이미 강론하여 정하였으니, 대장(大將)을 지금 차출해야 됩니다. 그런데 제수할 만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따로 대장(大將)을 설치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우선 병조 판서에게 겸임하도록 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좌의정 민정중이 김수항의 말이 옳다고 하자, 상이 따랐다. 이후에 그대로 규례로 삼았다.
○ 6월. 상이 대제학을 불러오도록 명하여 배율(排律)로 호당에 피선된 사람들을 시험하게 하였다. 그리고 차등을 두어 상을 하사하고, 이튿날 내정에서 선온(宣?)하였다. 이어 은잔을 하사하고 호당에 두도록 명하였다.
○ 7월. 전교하기를,
"두 분 자성(慈聖)께서 '지금 하늘이 진노하고 백성들이 원망하는 때를 당하여 잔치를 받아서 즐기는 것은 마음에 편치 못하다. 모든 낭비에 관계되는 것을 일체 절감하라.'고 분부하셨다. 해청에 분부하여 각별히 경비를 절약하여 자성의 뜻을 본받도록 하라."
하였다.
○ 8월. 상이 하교하여 구언(求言)하기를,
"아, 부덕한 내가 왕위에 오른 6, 7년 사이에 홍수촹가뭄촹바람촹서리 등의 재해가 달마다 계속되기는 하였으나, 어찌 오늘날처럼 거듭되고 혹독한 적이 있었겠는가. 아, 해마다 기근이 들어 고통스러움이 다급하고, 게다가 지난달 바람과 폭우로 인한 재해는 실로 근고에 없던 큰 변괴였다. 어찌 벼가 손상을 입고 백성들의 일이 망극할 뿐이겠는가. 더구나 별이 경계를 보이는 것이 몇 년 사이에 거듭 이르렀으니, 어떠한 화기(禍機)가 보이지 않는 속에 숨어 있어서 인자한 하늘이 이토록 정녕하게 견책하는지 모르겠다.
옛말에 이르기를 '일이 아래에서 이루어지면 조짐이 위에서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가만히 그 연유를 생각하니 그 잘못이 실로 내 몸에 있기에 한층 더 두려움이 일어 차라리 꼼짝도 안 하고 싶다. 이에 널리 직언을 구하여 내가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바로잡으려 하니, 너희 대소 신료들은 나의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본받아, 오로지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각자의 직분을 잘 수행하고 사심을 다 버리고 공도(公道)를 신장시켜 조금이라도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승지에게 명하여 대신 초안을 잡게 하였다. 정원이 재차 아뢰어 곧바로 반포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 상이 함경도 관찰사가 바람과 홍수의 재해와 농사 작황에 대하여 보고한 장계를 보고 놀라서 하교하기를,
"이번 바람과 홍수의 재해는 전에 볼 수 없었던 바이므로 장계를 보고 참담한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 아, 북도에 거듭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지금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판국에, 또 다시 참혹한 수재가 이 정도에 이르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장차 다 죽게 되겠다. 각별히 구제하여 굶주리다가 구렁텅이에 빠져 죽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라."
하였다.
○ 주강에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 바람과 홍수 두 재해는 전에 볼수 없었던 것이다. ≪정원일기≫를 상고하니, 올해년(인조 13, 1635) 7월 13일에 큰 바람이 불고 난 뒤에 병자년에 난리가 일어났었다. 그때에 연신(筵臣) 홍서봉(洪瑞鳳)과 조위한(趙緯韓)이 아뢰기를 '지난 신묘년(선조 24, 1591) 7월에 큰 바람이 불고 나서 10개월 안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신묘년과 을해년의 일은 지난날의 분명한 징험이다. 하늘의 감응이 반드시 전날과 같을지는 비록 알지 못하겠으나, 지금 변경의 걱정거리가 누그러지지 않고 있으니 혹시라도 사변이 일어나는 날엔 군량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 문제이다. 그런데 강도(江都)와 남한산성의 곡식을 열읍에 이전하여 내주었다가 아직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 이 일이 매우 걱정된다. 혹시 호조에 비축하고 있는 면포(綿布)가 있으면 방출하여 쌀로 바꾸어 사들이고, 혹은 다른 도에 특별한 방법으로 조치하여 군량을 확보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대신에게 말하여 속히 강구하여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 상이 함경도가 참혹하게 바람과 홍수의 재해를 입었다 하여 두 자전을 제외하고 대전과 중궁전의 삭선(朔膳)을 금년에 한하여 특별히 봉납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 함경도에 큰물이 져서 인가가 물에 잠긴 것이 9백 6호에 이르고 사람과 가축이 깔리거나 물에 빠졌는데, 죽은 자가 4백 명에 가깝다고 도신이 장계로 보고하였다. 상이 그것을 보고 놀라고 슬퍼하면서 묘당에 하교하여 특별히 구제할 대책을 강구하라고 하였다.
○ 주강에 나아갔다. 정언 유명일(兪命一)이 청하기를,
"간간이 문신(文臣)으로서 명성과 인망이 있는 자를 평안도 변경 고을에 차견하여 민정을 진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잘 다스려지는 것과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오직 맡은 사람이 훌륭한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하고, 이어서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뒤에 묘당이 복계하여, 간간이 차견하는 것으로 정식을 삼았다.
○ 9월. 병조의 기병촹보병의 보포를 거둠에 있어서 아이촹도망자촹사망자에게 포를 징수하는 것을 탕척하도록 명하였다. 이전에 병조가 경비를 전적으로 기병과 보병의 보포를 거두는 데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촹도망자촹사망자에게도 다 포를 징수하여 이웃이나 친족에게까지 침범하여 징수하여 백성들의 고질이 되고 있었다. 경신년 초에 국가가 전부 탕척해 주어 백성들을 위무하는 조치를 취하려고 각읍으로 하여금 실상을 조사하게 하였더니, 그 수가 매우 많아 한꺼번에 다른 명목으로 대신 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또 조사를 마친 뒤에 전과 다름없이 징수할 수가 없어서 서울에 비축하고 있던 물자를 다 내어 병조로 귀속시켜 1년 동안 받아들일 수량을 대신 충당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국가의 비축물이 점차 고갈되어 매년 충당할 수 없게 되자 다시 전과 같이 침범하여 징수하니, 원망과 탄식이 더욱 심해졌다.
지금 병조 판서 남구만(南九萬)이 경아문과 외방의 영문(營門)과 주현에서 헐한 역에 들어간 자들을 찾아내어 모두 빠진 수에 채워넣자고 청하니, 상이 묘당과 절목을 강구하여 정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얻은 군보(軍保) 총계가 금위영 9천 60명, 어영청 4천 2백 명, 수어청 아병(牙兵) 2백여 명, 총융청 아병 9백여 명이었다. 이것으로 빠진 수 9만 명을 거의 다 충당하여 넣었다. 또 충의위에 함부로 들어간 자들을 조사하여 추려내기를 청하니, 상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묘당이 청을 설치하여 사정(査正)하였다.
○ 평안도 관찰사 이세화(李世華)가 광량 첨사(廣梁僉使)에게 방어사를 겸임시킬 것을 청하고, 이어 광량 해로(海路)의 형편을 지도로 그려 올렸다. 청하기를,
"본도의 안주(安州)촹숙천(肅川)촹순안(順安)촹영유(永柔)촹증산(甑山)촹평양(平壤)촹용강(龍岡)촹강서(江西)촹삼화(三和)촹함종(咸從)촹노강진(老江鎭)과 황해도의 장련(長連)촹은율(殷栗)촹풍천(豊川)촹허사(許沙)촹안악(安岳) 등의 전선(戰船)을 모두 광량에 소속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영의정 김수항과 우의정 김석주가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김석주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경연에 자주 거둥하시어 종용하게 강론하시고 한가한 때에는 승지를 인접하여 정무를 물으신다면, 이는 정사를 부지런히 하시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도 됩니다. 이와 같이 하시면 환관(宦官)과 궁첩(宮妾)과 접하시는 시간은 적어지고 어진 사대부를 접견하시는 시간이 많아질 것이니, 환관이 어찌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있겠습니까. 옛 사람의 말에 '환관과 궁첩이 모르는 사람으로 재상을 삼아야 된다.' 하였는데, 신하들의 현부(賢否)를 성명이 이미 밝게 살피신다면 쓰거나 쓰지 않는 권한은 저절로 전하께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태종조(太宗朝)의 김여지(金汝知)가 도승지가 된 지 3년 만에 병조 판서로 발탁되어 제수된 사실과 선왕조의 김수흥(金壽興)촹김시진(金始振)촹서필원(徐必遠) 등이 임금을 보필하여 국사를 잘 처리한 사실을 인용하면서 특별히 승지를 가려 뽑아 오랫동안 맡기기를 청하니, 상이 마음에 두고 생각하겠다고 답하였다. 그 후에 때때로 승지로 하여금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하니, 상이 똑같이 증직하라고 명하였다.
○ 호군 박세채(朴世采)가 대궐에 나와 군직(軍職)을 띠고 있어서 감히 들어와 숙배하지 못하겠다고 아뢰니, 상이 숙배를 생략하라고 명하고 인견하여 간곡하게 위유하였다. 이에 박세채가 소매에서 차자 한 통을 꺼내어 읽었다. 그 차자 첫머리에 '하늘이 진노하고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부지런히 공부를 해도 위로 하늘의 덕에 합하지 못하고 열심히 정치를 해도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니, 뜻을 세우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가정을 바르게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신중하고 엄격한 것으로 편벽을 경계하는 도리로 삼고, 나라를 경영하는 자는 분명하게 살피는 것으로 훌륭한 인물을 등용하는 방법을 삼습니다.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欲)을 억제하며 군자를 친애하고 소인을 멀리 하소서."
하고, 끝에 가서 또 질병에 관한 말로 비유를 하면서, 유부(兪?)와 편작(扁鵲)과 같은 사람들을 널리 구하여 강한 처방의 약을 쓰라고 청하니, 상이 마음에 새기겠다고 하였다. 박세채가 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돌보는 도리에 대하여 계속해서 자상하게 진달하니, 상이 더욱 가상하게 여기고 이어 경저(京邸)에 머물면서 경연에 출입하라고 권면하였으나 박세채가 사양하였다. 이튿날 진소하여 돌아가겠다고 고하고, 또 정주(程朱)의 주소(奏疏)를 뽑아서 강의한 내용을 덧붙여 올리니,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재차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고 다시 수찰(手札)로 신신 당부하였으나, 박세채가 끝내 명에 응하지 않았다.
○ 10월. 하교하기를,
"잔치를 올리는 일을 중지하라고 명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가을 절후가 이미 다 지나갔으니 거행하라고 분부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어찌 하늘의 진노를 업신여기거나 경계하는 마음이 해이해져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이는 실로 어버이를 향하여 세월을 아끼는 심정을 어찌할 수 없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하고, 인하여 진연청(進宴廳)을 다시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 옥당이 청대(請對)하여 당분간 잔치를 올리는 일을 정지하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잔치를 올리는 일을 이미 요사스러운 혜성(彗星)이 경계의 뜻을 보였을 때에 정지하였다가 별의 변고가 사라지자마자 다시 거행하려고 하는 것은 하늘에 진실한 마음으로 응하는 도리가 아니고 또한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봉양하는 효성이 아닙니다."
하였다. 재삼 요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입대하기를 마친 뒤에 상이 비망기로 이르기를,
"헌수(獻壽)의 예는 실로 부모가 장수하시는 것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마침 농사가 흉년이 들고 변괴가 계속해서 일어나 비록 폐단을 줄이고 경비를 절약하는 조치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송구하고 불안한 마음은 조금도 누그러진 적이 없었다. 유신(儒臣)이 누누이 진달한 말이 사실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아끼는 말인 줄은 알지만, 베풀려다가 금방 그만두기로 하니 마음에 몹시 서운하여 지금까지 끌어왔던 것이다. 이러한 뜻을 두 자전께 아뢰었더니 '지금 하늘의 진노가 매우 혹심하고 백성들의 삶이 고통스러운 때를 당하여, 한편으로 기근을 구제하면서 한편으로 잔치를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에 편치 못하다. 결국 속히 정지하는 것만 못하다'고 분부하셨다. 이제 잔치를 올리는 일을 명년 가을로 미루어, 두 자전께서 재앙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구제하시는 지극한 뜻을 보이겠다."
하였다.
○ 전라도에서 재해를 가장 심하게 입은 열 고을에 대하여 신역(身役)을 전부 감면하고 대동미(大同米) 5두를 감면하였다. 그 다음의 여러 고을도 모두 적당량씩 감면하였다.
○ 상이 영부사 송시열이 도성 근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수찰(手札)을 내려 승지를 보내 전유하게 하였다. 이에 송시열이 명을 받들고 도성으로 들어와 대궐로 나아갔다. 상이 숙배를 생략하라고 특명을 내리고 인견하
○ 영부사 송시열이 승지 이현석(李玄錫)이 상소한 것과 관련하여 상소하고 치사(致仕)를 청하니, 답하기를,
"간사한 말에 대해서는 대응하여 말할 것이 못 되며, 치사를 요청한 것은 더욱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옛날에 방현령(房玄齡)이 병을 핑계하고 귀향을 요청하였을 때에 당 태종이 치사를 허락하지 않았었다. 더구나 지금 온 세상의 신망을 받고 있고 나라 사람들의 모범이 되고 있는 경을 어찌 방현령과 같이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한갓 예법가(禮法家)의 말만 고수하고 국가의 위란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경의 입장에서 매우 애석하게 여길 일이다. 안심하고 들어오라."
하였다.
○ 상이 10월에 우레가 친 이변과 관련하여, 비망기를 내려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보이고 정원으로 하여금 대신 초안을 잡게 하였다. 정원이 그대로 반포하기를 계청하고 이튿날 도로 봉입하니, 고쳐서 내렸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이 점점 잘 종결되지 못해서인가?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아 올바른 말이 다 나에게 돌아오지 못해서인가? 실질적인 은혜가 끝까지 다 파급되지 못하여 백성들이 곤궁해서인가? 사치하는 풍습이 번져 낭비가 많아서인가? 인물을 등용하는 것이 공평하지 못하고 사사로운 뜻이 마구 횡행해서인가? 기강이 무너져서 온갖 관리들이 직무를 태만히 해서인가? 옥송(獄訟)이 많이 적체되어 원망과 억울한 일이 해소되지 못해서인가? 몸을 되돌아보고 허물을 살펴보니 한층 더 두려움이 일어, 차라리 꼼짝도 안 하고 싶다. 대신촹육경촹삼사의 장관은 인재를 천거하여 각별히 기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또 비망기를 내려, 호남의 삭선(朔膳)에서 두 자전의 몫을 제외하고 내년 봄까지 봉납을 정지하게 하였다. 이는 대개 호남이 더욱 심하게 재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 11월. 상이 수찰(手札)을 내려 승지를 보내 영중추부사 송시열에게 유시하기를,
"경은 나이가 높아질수록 덕이 높아지니, 비유하건대 높은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없지만 공덕과 이로움이 사물에 미치는 것과 같다. 비록 간사한 사람의 계략으로 인하여 황급하게 돌아갈 작정을 하였지만, 이것이 어찌 경의 본심이겠는가. 일전에 유시를 내려 나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았는데, 끝내 흔쾌히 뜻을 바꾸기를 주저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였다. 또 특별히 박세채(朴世采)촹윤증(尹拯)촹이상(李翔)에게 유시하여 속히 올라오라고 하였다.
○ 상이 비망기로 이르기를,
"백성들의 잘사느냐 못사느냐는 오직 수령의 현부(賢否)에 달려 있다. 더구나 기근과 흉년이 매우 혹독한 때를 당하여 어찌 적임자가 아닌 자에게 맡겨 백성들로 하여금 온통 그 재앙을 받게 하면서도 불쌍히 여겨 돌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적임자를 가려 의망하게 하라. 아 너희 제도의 감사들은 내가 전후로 내린 뜻을 본받아서 청렴한 자를 올려주고 탐욕한 자를 파출하는 일에 있어서 한곁같이 지공 무사한 마음을 유지하여 목백(牧伯)을 위임한 뜻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외방의 옥송(獄訟)이 적체되어 있는 일에 대해서도 죄인을 신중하게 심리하는 도리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이 또한 감사로 하여금 직접 죄안을 살펴보고 계문하여 너그럽게 처결하여 석방하는 방편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 승지 이수언(李秀彦)이 돌아와서 송시열이 응답한 말을 아뢰었다. 그 말에,
"선조의 망극한 은혜를 어찌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삼가 예경(禮經)을 지켜서 남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지 않아, 당시에 남다른 대우를 해 주신 지극한 뜻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 혹 만에 하나라도 보답이 될까 합니다. 이 고충어린 말씀과 간절한 뜻이 아직 전하의 밝게 살펴주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고 여겨서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또다시 수찰을 내려 이르기를,
"70세에 치사하는 것이 비록 분명한 예법이기는 하나, 예로부터 신하로서 한몸에 국가의 안위를 감당하고 있고 국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자는 나이가 찼다고 하여 치사하게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훌륭한 덕과 높은 신망으로 사림(士林)이 존중하는 대상으로서 경보다 앞서는 이가 없는 경우에 있어서이겠는가."
하였다. 다시 이수언을 보내 유시하였으나, 송시열이 끝내 명에 응하지 않았다.
○ 승지 윤경교(尹敬敎)를 보내 3번이나 송시열에게 유시를 전하였으나, 송시열은 부득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수찰을 내려 거듭 유시하였으나, 끝내 명에 응하지 않았다.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이 이 일로 입시하여 더욱 권면하여 기필코 만류하도록 청하니. 상이 경연에 임하여 교지를 초안하여 다시 윤경교를 보내 유시를 전하게 하였다. 이어서 송시열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의(御醫)에게 약물을 가지고 가서 간호하라고 명하였다.
○ 상이 고 참의 송국택(宋國澤)의 처는 바로 자전의 외조모로서 나이 80이 넘었으므로 특별히 대우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다고 하고, 본도에게 옷감과 음식물과 땔감을 넉넉히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 상이 여염집을 빼앗아 들어가는 것이 빈곤한 백성들이 삶을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다고 하고, 한성부에 신칙하도록 명하였다.
○ 모든 승지들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들어와서 결재를 받도록 명하였다. 승지 서문중(徐文重)이 아뢰기를,
"외방의 군읍에 율서(律書)가 갖추어 있지 않고 수교(受敎)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캄캄하여 수령이 법조문을 들어 증거하지 못하고 대다수 억측으로 결단하고 있습니다. ≪대전속록(大典續錄)≫과 열성조의 수교를 모아서 인쇄하여 널리 배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비국 당상 이익(李翊)으로 하여금 그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 대사헌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기를,
"≪예기(禮記)≫에 '3년을 농사지으면 반드시 1년분의 비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올해부터 시작하여 반드시 1년의 세입을 4등분으로 나누고 국가의 경비를 계산하여 4분의 3 가운데에서 절약하여 쓰고, 부족할 경우 위에서 제향(祭享)과 어공(御供)부터 먼저 절약하여 줄이고 대내(大內)의 시어(侍御)와 액정(掖庭)의 하인과 백관의 녹봉과 각사의 하례와 숙위하는 군병에 이르기까지 혹은 늠료를 삭감하고 혹은 정원을 줄여야 됩니다. 모든 관사의 공용 경비를 일체 억제하며, 각 능의 기신제(忌辰祭)의 유과(油果)와 과품(果品)에 첨가하는 염저(染苧)와 채화(彩花)는 비용도 적지 않고 또 올바른 예법도 아니니 어찌 알맞게 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른바 어공(御供)이란 반찬 종류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의복 등의 물품에 관계되는 것은 다 어공이라고 합니다. 만약 위 문공(衛文公)이 거친 베로 옷을 지어 입고 한 문제(漢文帝)가 검은 비단옷에 가죽신을 신고 상서(上書)한 포대로 궁전의 휘장으로 썼던 사례를 본받아서 전하께서 먼저 절검(節儉)을 행하시고 이어서 이것으로 조정을 신칙하고 권면하여 중외가 그 기풍을 본받아 모든 사람들이 검소한 생활을 하게 되면, 백성들은 고생을 덜하고 국가의 비축은 여유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사간에 저축이 있어 비록 흉년을 만나더라도 국가의 재용은 고갈되지 않고 백성들도 삶을 지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이 전에 부유한 이들에게 널리 사창(社倉)을 세우도록 권장해야 된다고 건의한 까닭도 바로 이러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국가를 위하여 충정을 진달하였으니 참으로 감탄스럽다. 연달은 흉년으로 백성들이 기근에 허덕이고 있는데 비축하였던 곡식이 다하여 구제할 대책이 없으니, 지금이야말로 참으로 군신 상하가 마치 수렁에 빠진 것과 같이 생각하고 일심 단결하여 백성들을 구제할 때이다. 그러한 뜻에서 군병은 이미 그 제도를 조금 변화시켰고 시위(侍衛)도 불요 불급한 인원을 많이 감하였다. 다만 백관의 녹봉을 감하는 일은 역시 충신한 이들에게
하였다. 그 뒤에 묘당이 세입(稅入)에 대한 일로 복주하니, 호조와 선혜청으로 하여금 논의하여 절목을 정하게 하였다.
○ 주강에 나아갔다. 지경연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외람되게 시관(試官)으로 있으면서 과거에 응시한 자들의 글을 보니, 문체가 전에 비하여 크게 변하였습니다. 으레 쓰는 문자도 기필코 신기하게 쓰려고 애를 쓰는데, 예를 들면 '천연(天淵)'이라는 말은 '성연(星淵)'으로 바꾸어 쓰는데 이는 별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고, '말세(末世)'라는 말은 '해세(亥世)'로 바꾸어 쓰는데 이는 해(亥)가 십이지의 끝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계차이후(繼此以後)'는 '윤자이예(胤玆以裔)'로 바꾸어 쓰고 '공유(恭惟)'는 '장유(莊惟)'로 바꾸어 씁니다. 게다가 어렵고 기괴한 글자와 말로 문장을 엮어 반드시 보는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또 그 사이에 어록체(語錄體)의 문자를 다수 집어넣어 평범한 투에서 벗어나 기괴한 쪽으로 하려는 풍습이 있으니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전에 강필주(姜弼周)가 대책문(對策文)에 어록 문자를 넣어 지어 급제하였고, 근자에는 조종저(趙宗著)가 또한 과거의 제술에서 기괴한 말을 써서 여러 차례 높은 등급에 올랐습니다. 폐습을 멋모르고 본뜨는 자들이 점차 많아져서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문체의 변화는 실로 세도(世道)의 성쇠와 관계되니 이러한 체재는 엄격하게 금지해야 됩니다. 이러한 뜻으로 서울과 지방에 지시하여 일체 금단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과거의 사목(事目)을 추가하여 중외에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 12월. 상이 일찍이 인정전을 내년 봄에 가서 수리하도록 하교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르기를,
"옛것을 그대로 두고 수리하는 것이 비록 새로 창건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많은 시일이 걸린 뒤에야 완공하게 될 것이다. 백성들이 가난에 허덕이는 춘궁기를 당하여 거대한 역사를 시작하는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휴식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다. 가을이 되면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주강에 나아갔다. 특진관(特進官) 민유중(閔維重)과 지경연 이단하가 청하기를,
"올해에 재해를 입은 전지에 대하여 세금 감면하는 것을 모두 경술년의 사례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하고, 이어서 인원 감축과 경비 절감에 관한 몇 가지 사항을 품정하였다. 또 청하기를,
"양서의 대소미(大小米)로서 전일에 계청하여 운반해 온 2만 8천 5백여석 외에 추가로 1만석을 더 마련하여 진휼 비용으로 보충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전에 이단하가 각 능의 기신제에 쓰는 유과(油果)와 과품(果品)에 첨가하는 채화(綵花)를 없애자는 일로 진소하였었는데, 지금 또다시 요청하자 대신과 의논하여 마침내 따른 것이다.
○ 옥당의 관원을 소대(召對)하였다. 승지 서문중(徐文重)이 근세에 사치하는 폐습에 대하여 진달하고, 이어 아뢰기를,
"신의 조모 정신옹주(貞愼翁主)는 바로 선조대왕의 맏옹주입니다. 임종 때에 선조께서 물려주신 의대(衣?)를 가지고 엄습하는 데에 사용하였는데, 이는 바로 푸른색 물감을 들인 석새 삼베로 지은 짧은 적삼과 석새 삼베로 지은 바지였습니다. 생각건대 평상시에 입으셨던 옷도 다 이와 같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꼭 본받을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매우 절실하니 마땅히 마음에 새기도록 하겠다. 공자가 말하기를 '절약하여 쓰고 백성을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절약해서 쓴 뒤라야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게 되니 절용의 효과가 참으로 크다."
하였다.
○ 상이 은 1천 냥과 명주 50필을 호조에 내리고, 또 은 1천 냥을 진휼청에 내려 진휼하는 자본에 보태 쓰도록 하였다.
○ 상이 비방기를 내려, 승지를 보내 영부사 송시열에게 전유하고 이어 함께 올라오도록 하였다. 그 유시에
"지금이 어떤 때인가. 천심(天心)이 기뻐하지 않아서 재앙의 징조가 계속해서 이르고 있다. 기강이 해이해지고 예의 염치가 신장되지 않아 해마다 흉년이 들고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하여 굶어 죽는 사람들이 산적할 때가 눈앞에 닥쳐왔다. 이에 나는 밤낮으로 두려움에 떨면서 잠시도 편안하게 있지 못하고 있으며, 오직 잊지 못하는 일념은 훌륭한 이를 구하여 곁에 두어야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이러한 책임을 경과 같이 높은 덕과 인망을 가져 사보(師保)의 책임을 맡은 자가 아니면 그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지금과 같이 망하느냐 생존하느냐 하는 위급한 때에 하찮은 혐의로 인하여 궁벽한 시골에 물러가 있으면서 아직까지 마음을 흔쾌히 바꾸려 하지 않고 있으니, 선왕을 추념하고 현재의 임금에게 보답하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서 속히 길을 떠나라고 명하였다.
○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 팔도가 다 기근과 흉년이 들었으니 모든 구제할 방도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각 아문의 경비 지출도 전날의 규례에 의거하여 알맞게 요량하여 쓰고 있으나, 내수사가 연달은 흉년으로 인하여 세입이 크게 줄어 실로 전용하여 낼 길이 없다. 비록 상황이 마침 그럴 수밖에 없는 연유는 있지만, 실로 궁중(宮中)과 정부가 똑같이 하는 의리에 어긋난다. 그 중에 비축이 조금 여유가 있는 것으로서 호초(胡椒) 1백 두(斗), 단목(丹木) 1천 근, 백반(白磻) 3백 근, 호피(虎皮) 10령을 특별히 해청에 내려 조금이라도 진휼 비용에 보탬이 되게 하라."
하였다.
46권 숙종조 6
9년(계해, 1683)
○ 1월.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윤계(尹?)의 말로 인하여, 여러 군문(軍門)에서 월과군기(月課軍器)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상방(尙方)의 초피(貂皮)를 무역하는 일과 내주방(內酒房)의 양주에 쓸 쌀을 공급하는 일을 모두 신해년(현종 12, 1671)의 전례에 의거하여 반으로 감하고, 또 추가로 차출하는 대전 별감(大殿別監) 8명을 감원하고, 추가로 배정하는 내포(內圃)의 복마(卜馬) 8필을 줄이고, 여러 공신의 적장자가 맡는 자리를 15명 줄이고, 훈부(勳府)의 관리에게 주는 급료 규정을 1년 동안 제외하고, 성균관의 시탄가(柴炭價)와 내의원의 청대죽(靑大竹)도 모두 적당량씩 감하였다. 이는 대개 흉년이 들어 경비를 절약하기 위한 것이었다.
○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진휼청 제조 민유중(閔維重), 호조 판서 윤계(尹?)가 경비를 절약하는 방도를 품정하기 위하여 청대하고 별단(別單) 4건을 올렸다. 그 결과 액정(掖庭)의 하례에서 각사의 요포(料布)와 물품에 이르기까지 많이 감축하였다. 민유중 등이 또 다섯 군문의 군관과 군사가 없는 장관(將官)으로서 불필요하게 넘치는 자들을 삭감하도록 청하였다. 이 뒤에 장신(將臣)이 아뢰기를,
"만과(萬科)를 시행한 뒤에 중외의 무사들은 관작에 한계가 있어 다 수용하지 못하고 단지 각 군문에서 수용하기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혁파한다면 그 바람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감원하지 말도록 명하고 본군문으로 하여금 급료를 반으로 감하게 하였다. 민유중 등이 또 아뢰기를,
"호남의 속오군(束伍軍)으로서 스스로 조총(鳥銃)을 구비한 자에게는 복호(復戶) 1결을 주고 조총이 없는 자에게는 50부(負)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술년에 감축할 때에 스스로 조총을 구비한 자에게 50부를 주는 것으로 감하였고 조총이 없는 자는 완전히 삭감하였습니다. 대개 애당초 조총이 희귀했기 때문에 백성을 모집하여 복호를 주어서 스스로 조총을 구비하게 하였던 것인데, 지금은 경외에서 제조하여 숫자가 넉넉하여 나누어 줄 수 있으니 복호를 주는 규례를 일체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새로 출신한 자들을 나눠서 서북방으로 방수를 보내던 것은, 지금 기근과 흉년을 당하여 주객이 다 피폐하니 모두 전례에 의거하여 쌀 5석을 강도로 실어 보내게 하소서. 그리고 제용감 제조는 으레 호조 참판이 겸임하고 있는데 자주 체직되기 때문에 사무를 잘 살피지 못하여 하리들이 많은 농간을 부리고 있습니다. 따로 제조를 차출하소서."
하니, 모두 상이 따랐다. 민유중이 아뢰기를,
"호남의 전결이 작년에 비하여 줄어든 것이 5만여 결에 이릅니다. 그런데 세두(稅豆)를 이미 전면 감면하여 세미(稅米)로서 마땅히 납부할 것이 2만 1천여 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량을 감면하여 진휼청의 쌀로서 본도에 있는 것으로 이 수량에 맞추어 상납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윤계가 아뢰기를,
"정공(正供)은 전부 감면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윤계의 말에 따라 반수를 감면하고 진휼청의 쌀로 이전하여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 영부사 송시열이 대궐로 나아와서 차자를 올리고 다시 치사를 요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얼굴을 대하여 직접 유시할 터이니 안심하고 들어오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숙배를 면제하고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또 사관으로 하여금 이끌고 들어오고 환관이 부축하여 전에 오르도록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간절한 뜻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다. 다만 예경(禮經)에도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는 사람은 치사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경은 선조의 원로로서 사림의 높은 존경과 신망을 받고 있는데 어찌 가볍게 허락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상이 애통해 하는 뜻의 교서를 팔도에 내렸다. 그 내용에,
"내가 부덕한 몸으로 조종(祖宗)이 물려준 백성을 받았으나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정령(政令)이 번거롭고 까다로워서 끝없이 근심과 원망이 일어나게 하였다. 민심이 이와 같기 때문에 하늘이 밝게 내려다보면서 거듭 흉년을 내렸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백성들이 장차 서로 이끌고서 구렁텅이에 빠져 죽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젊고 힘이 있는 자들은 도적이 되어 형벌에 빠지니, 이와 같고서 나라가 어떻게 나라 노릇을 하겠는가.
아, 장차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오직 크고 작은 관직에 있는 관료들은 제각기 마음과 힘을 다하여 오직 백성들을 보살피는 일에 힘써서 마치 불 속에서 살려내고 물 속에서 건져내는 것과 같이 하여 울부짖는 우리 백성들을 살려낸다면 하늘에 계신 조종들의 영혼이 어찌 강림하여 권면하고 위로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한다면 그 복록이 장차 자손들에게 미칠 것이다. 근래에 녹봉이 매우 박하여 관직에 있는 자들이 그 처자들을 보살피기에도 부족한 형편이니, 또한 어느 겨를에 백성들에게 미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음식을 줄이고 의복을 검소하게 입는 등 일체를 절약하기로 결심한다면 또한 남을 도울 여유가 없지 않을 것이다.
모든 관직에 있는 신료들이 다만 우리 백성들을 보기를 자신의 자녀를 보는 듯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어린아이를 돌보듯이 하라. 진실한 마음으로 구한다면 비록 목적에 적중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리 멀지는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대개 말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말을 할 줄 아는 우리 백성들이겠는가. 당 태종(唐太宗)은 인의(仁義)에 가탁하고 속임수와 힘으로 정치를 한 임금이다. 그런데도 연이은 흉년을 만나자 직접 백성들을 돌보고 위무하여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도록 하였다. 더구나 조종들이 정치를 하시면서 한결 같이 인의를 주로 하였고 여러 신하들이 배운 것도 또한 속임수와 힘을 수치로 여겼던 우리나라의 경우이겠는가. 오늘날에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진실한 마음으로 차마 못할 몹쓸 일을 하지 않는 정사를 행하는 것뿐이다. 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러운 백성들이 또한 어찌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하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열읍을 두루 돌아다닐 즈음에 음식과 역말을 제공하는 일이 도리어 소요를 끼치는 폐단이 될 것이니, 반드시 한 필의 말로 수행원 한두 명만 거느리고 군관(軍官)을 대동하지 않는다면 폐단의 단서가 없을 수 있다. 내가 근자에 고금의 흉년에 대처한 정사에 관한 책을 열독하였다. 주자(朱子)자 절동(浙東) 지방의 흉년을 안찰하는 사신이 되었을 적의 사실을 문인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 '공이 백성들의 고통을 빠짐없이 캐묻기를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아 침식을 폐할 정도까지 하였고, 궁벽한 산골짜기에도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매번 나갈 때에는 반드시 가벼운 수레를 타고 시종을 떼놓고 일신에 필요한 물품은 직접 싸가지고 갔으며 털끝만치라도 주현에 힘을 빌린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지나간 곳은 매우 많았으나 부내(部內)에서 알지 못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관리들이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신칙하기를 늦추지 않고 항상 사자가 경계에 들이닥친 것처럼 여겼고, 심지어는 스스로 인책하고 떠나가는 자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살려낸 백성들의 숫자가 몇만 명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 뒤에 주자가 효종(孝宗)을 뵈었는데, 효종이 이르기를 '절동에서의 근로는 짐이 익히 아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어찌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야 될 것이 아니겠는가.
병사(兵使)촹수사(水使)촹수령촹첨사(僉使)촹만호(萬戶)촹찰방(察訪)촹권관(權官)촹별장(別將)에 이르러서도 각기 소속된 백성과 군사와 부하들이 있을 것이니 각기 그 고생을 같이하고 항상 백성들이 굶주리면 같이 굶주리고 백성들이 죽으면 같이 죽기로 작정한다면 어찌 서로 구제할 도리가 없겠는가.
나는 생각건대, 오늘날 이런 망극한 상황에 처한 것은 오로지 나의 부덕의 소치이다. 한밤중에 일어나 탄식하고 밥상을 대하여 밥먹기를 잊어버리곤 한다. 믿는 것은 오직 관직에 있는 여러 신료들이 제각기 마음과 힘을 다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속마음을 다 토로하여 고하노니, 부디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혹시라도 태만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모든 도의 감사촹병사촹수사촹유수촹수령촹첨사촹만호촹찰방촹권관촹별장에게 유시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부덕한 몸으로 시행한 일이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이 많아서 하늘이 재앙을 내리게 만들어, 홍수와 가뭄과 바람과 서리가 너희들의 곡식을 해쳐서 아무 잘못도 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굶주림과 곤궁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하고 혹은 구렁텅이에 빠져 죽게 하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나의 마음이 칼로 벤 듯하고, 또 너희들의 위에 군림할 면목이 없다. 그러나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오직 너희들이 기한을 참고 너희들의 가정을 보존하여 혹시라도 흩어져 떠도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내가 지금 막 궁중의 음식과 의복의 비용을 절감하여 너희들을 구제할 방도를 세우고 있으니, 너희들은 반드시 나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말라.
아, 너희들은 나의 적자(赤子)가 아닌가. 부모가 비록 가난하여 그 자식을 잘 먹여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찌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떠날 수 있겠는가. 또한 생각건대, 너희들은 나의 적자가 아니라 조종의 적자이니, 내가 비록 부덕하지만 너희들이 어찌 차마 조종이 끼친 은혜를 잊고서 나를 버리고 도망갈 수 있겠는가. 더구나 도망하여 흩어진 자는 한 사람도 살지 못하니 이 또한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생각건대, 그 사이에 간혹 마지못해 도적이 된 자도 있겠지만 또한 어찌 너희들의 본심이었겠는가. 모두 실로 내가 너희들의 경제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항심(恒心)이 없게 하였고, 또 평소 잘 가르쳐서 너희들로 하여금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차마 죄를 짓지 않게 한 일이 없었던 것에서 연유하였다. 그리하여 죽음이 절박하여 예의를 돌아보지 못하고 이러한 지극히 선량하지 않고 지극히 위험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속을 썩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이다.
내가 바야흐로 조정의 신하들과 감사와 수령들과 밤낮으로 도모하여 진휼할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너희들은 부디 조금이라도 선량하지 않은 마음을 먹거나 지극히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하지 말라. 아, 내가 너희들이 아니면 어떻게 임금 노릇을 하며 너희들은 내가 없으면 어디에 추대할 사람이 있겠는가. 더구나 너희들은 너희
또 너희 고을에 사는 사대부들에게 이른다. 너희들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충의로운 마음을 갖는 것이 일반 백성들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지금 사망이 임박한 때에 당하여 그대 사대부들 또한 어찌 백성들을 걱정하고 구휼할 마음이 없겠는가. 모름지기 제각기 향리의 백성들을 권유하여 혹시라도 이산하는 일이 없고 혹시라도 도둑질을 하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들이 생활하고 남는 것은 조금이라도 상부상조하고 혹시라도 혼자만 살려는 계책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내가 일찍이 횡거(橫渠)의 서명(西銘)을 보니 '백성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은 나와 같이 사는 부류이네.'라고 하였다. 어진 사람의 마음은 만물에 대해서도 오히려 서로 사랑하는 도리를 다하는데, 하물며 동포인 백성들에 대해서이겠는가. 아, 하늘이 나에게 명을 내려 임금이 되게 한 것과 조종이 나에게 자리를 물려주신 것은 다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내가 나의 백성들을 보존하지 못하여 이와 같이 애통한 말을 하니, 응당 나를 애닯게 여겨 마음을 달리 먹어야 될 것이다.
아, 그대 방백과 유수들은 모름지기 이 특별 유시를 사대부와 군민(軍民)들에게 포고하여 과덕하고 혼매한 나의 애상(哀傷)하고 측은히 여기는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판부사 김수흥이 어사(御史)를 나누어 보내 여러 도에 유시하게 하도록 요청하였다. 또 경연관이 진달한 바에 따라 감사와 병사 이하에게 유시하는 것은 다만 감영에 전하여 각처에 나누어 포고하게 하고, 군민(軍民)들에게 유시하는 것은 어사로 하여금 도회관(都會官)에 머무르면서 각 고을의 수령들을 모아 유시하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좌의정 민정중이 함경도촹평안도촹강원도 세 도의 도회(都會)에 소속된 고을은 너무 멀고, 충청도는 고을과 백성들이 잔폐하니, 다만 전라도촹경상도촹황해도 세 도만 도회관에 모아서 유시하자고 하였다. 이어서 어사에게 명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채집하여 보고하게 하고, 경기는 어사를 내보내지 않고 개성부는 해서의 어사로 하여금 두루 유시하게 하였다. 이상진(李尙眞)이 또 호서에도 양남의 예에 따라 도회관에 모아서 유시하기를 청하였다. 결국 시종신을 어사로 차출하였는데, 이동욱(李東郁)을 전라도에, 김재현(金載顯)을 경상도에, 안식(安?)을 충청도에, 유명일(兪命一)을 황해도에, 권지(權持)를 평안도에, 이여(李?)를 강원도에 나누어 보냈다.
○ 상이 하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한유(韓愈)의 글 가운데 불골표(佛骨表)를 재미있게 읽었고, 인하여 하번(何蕃)의 전기를 보았다. 또 송 나라의 진동(陳東)과 구양철(歐陽澈)의 사적을 보았다. 이들은 천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존경심이 일게 한다. 국가가 선비들을 양성하는 이유가 어찌 한갓 글이나 짓고 녹을 구하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나는 이 세 사람을 특별히 성균관 근처에 사당을 세워 향사하여 오늘날 제생들이 보고서 감동하는 바가 있게 하려고 한다. 모든 고금의 인물로서 향사할 만한 자를 함께 향사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대신들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유신 영부사 송시열이 의논하기를,
"삼가 한문공(韓文公)의 불골표를 재미있게 읽으셨다는 하교를 받드니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큰 성인의 덕을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또 하번 등의 사당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하문하신 것으로 보면, 더욱 성인의 작위가 평범한 사람과 천양지차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어찌 성인이 쇠망해 가는 세상에 대한 뜻이 아니겠습니까. 주자(朱?)가 반란을 했을 때에 태학(太學)의 제생들이 대다수 반란에 따르려 하였으나, 하번은 하찮은 일개 유생으로서 정색을 하고 질타하여 육관(六館)의 선비들로 하여금 모두 반란에 휩쓸리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 의리는 매우 장하고 그 공은 매우 커서 도리어 이성(李晟)의 수십 만 군사보다 더 나은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번은 몸을 수양한 것이 효행에 탁월하였기 때문에 이런 큰 의리를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니, 이른바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는 말이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진동과 구양철은 송나라가 적의 침입을 받아 국운의 망극한 때를 당하여 여러 간신들이 국사를 그르치는 것에 대하여 통분하게 여기고 충신들이 배척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비분 강개한 마음으로 상소하여 6명의
구양철이 죽임을 당하던 날 때아닌 큰눈이 내려 길을 막아 사람들의 통행을 단절시켰던 사실에서 필부의 신분으로서 천지의 기운을 감동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전하의 하교에 의하여 따로 작은 사당을 세워 제생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게 한다면, 어찌 세상의 도의를 진작시키는 데에 큰 보탬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민정중(閔鼎重)촹김수흥(金壽興)촹정지화(鄭知和)촹이상진(李尙眞)이 다같이 송시열의 의논에 찬동하였다. 영상 김수항은 병이 나서 의견을 수렴하지 못하였다. 상이 다시 묻게 하고, 또 함께 향사할 인물에 대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세 사람의 향사할 만한 실질에 대해서는 여러 제신들이 다 진달하였으니 신이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함께 향사할 인물은 마땅히 유신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를 상고하여 충분히 상의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김수홍은 아뢰기를,
"하번 등이 모두 태학생(太學生)이었으니, 함께 향사할 인물도 마땅히 태학생 중에서 성취한 행실이 세 사람과 같이 현저한 자로 해야만 한 사당에 함께 향사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진 혜제(晉惠帝) 때에 가후(賈后)가 양준(楊駿)을 죽이고 태후를 폐위하였는데, 동양(董養)이 태학에서 공부하면서 명륜당에 올라가 한탄하면서 말하기를 '조정에서 이 명륜당을 세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늘 사면 교서를 보면 모반 대역은 다 사면하면서도 조부와 부모를 죽인 자에 대해서는 사면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왕법(王法)에 용납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공경들이 의리에 대처하는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하늘과 사람의 이치가 다 민멸되어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다.' 하고, 처와 함께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촉(蜀) 지방으로 들어가 행적을 감추었습니다. 동양의 풍도와 절개 또한 세 사람에 뒤지지 않으니 함께 향사할 인물로 논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자, 송시열과 이상진도 동양을 함께 향사하는 것이 합당한 점에 있어서 김수흥의 의견에 이의가 없다고 하였다. 상이 송시열과 김수흥의 의견에 다라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 예조 판서 남용익이 상에게 건의하기를,
"계성사(啓聖祠)를 창립하는 일은 이미 선조(先朝)에서 명을 내렸던 것인데, 하번 등의 사당을 세우는 일을 이보다 앞서 거행하는 것은 미안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여러 대신들에게 묻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사당을 세우라는 명이 내려 사림이 크게 흥기하고 있으니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사당의 규모를 검소하게 하여 계성사와 함께 동시에 창건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고, 김수항 등이 아뢰기를,
"그 규모를 검소하게 한다 하더라도 마침내는 시절이 궁한데 행사가 너무 지나친 문제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당분간 가을이 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주강에 나아갔다. 어영대장 윤지완(尹趾完)이 청대하여 함께 입시하였다. 진휼 당상 민유중이 아뢰기를,
"호남의 세미를 이미 반으로 감면하였으니 영남도 똑같이 감면하도록 허락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의하면 매번 정공(正供)의 봉납을 감축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수미(收米)에서 적당량 감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송시열이 아뢰기를,
"수미를 감면하는 것은 전세(田稅)에서 감하여 백성들에게 더욱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것만 못합니다."
하자, 상이 전세에서 매결마다 3두와 삼수미(三手米)에서 1두 2승을 감하고 호남의 사례에 의거하여 진휼미
판부사 김수흥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각 군문의 장관(將官)을 취재(取才)하여 기용하는 일로 차자를 올렸고, 이에 대하여 묘당이 그대로 시행하기를 청하였는데, 군문이 아직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내삼청의 예에 따라 취재하여 기용한다면 일이 매우 공정하겠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남구만이 각 군문의 대장이 한 장소에 회합하여 취재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주자가 기근을 구제하는 것이 관개 시설을 강구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전에 선조에서 특별히 제언사(堤堰司)를 설치하여 제언을 전담하여 관장하게 하였는데, 근래에 이러한 법이 해이해져 단지 호조 판서가 겸임하여 직무를 처리하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비국 당상 1원을 제언사 당상으로 차임하여 수리에 관한 일을 전담하게 한다면 반드시 이익되는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윤지완이 아뢰기를,
"본청의 상번(上番) 군사는 1천 명뿐인데, 작년에 이미 5백 명을 감축하였다가 지금 또 전인원을 감축하니, 숙위(宿衛)가 매우 엉성하게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번 전부를 감축해서는 안 된다. 감축하지 말라."
하였다.
○ 군문(軍門)촹각사와 이서(吏胥)들이 행하는 면신례(免新禮) - 면신이란 새로 차임된 자가 선배들에게 음식물을 대접하고 선물을 주는 일이다. - 규례를 폐지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병조 판서 남구만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대개 면신례는 옛날부터 답습되어 온 잘못된 관례였는데, 간혹 면신례를 치르다 파산하는 사례도 있었다. 남구만이 상에게 건의하여 일체 금지하도록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액정(掖庭)에도 이러한 폐단이 있습니다. 법령이 행해지려면 반드시 궁중에서 잘 지켜서 밖으로 파급되도록 해야 하는 법이니, 마땅히 액정에서부터 해야 됩니다."
하니, 비로소 모두 금지하도록 명하였다.
○ 수찰을 내려 사관을 보내 박세채에게 전유하기를,
"강연이 이미 열렸고 대로(大老)가 조정에 나와 있으니, 이러한 때에는 평소보다 더 간절하게 생각이 난다. 속히 길을 떠나 경연에 참석하여 과인에게 많은 질정과 충언을 해 주길 바란다."
하니,박세채가 사관 편에 아뢰는 말을 보내기를,
"삼가 응당 병세를 보아 부축을 받고서 길을 떠나 조금이라도 엄명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 판부사 김수흥이 상차하기를,
"월령(月令)에 보면, 천자가 맹춘 초하룻날에 풍년이 들게 해 주기를 상제에게 기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좌씨전(左氏傳)≫에도 '후직(后稷)에게 교외의 제단에서 제사를 올려 농사가 잘되게 해 주기를 빈다.'고 하였습니다. 교외에서 제사를 지내는 예는 비록 우리나라가 감히 논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곡식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행사만은 충분히 행할 수 있습니다. 정월이 다 가기 전에 나라의 사직단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예의 본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의 제사에 관한 법전에 규정이 없으니, 대신들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논의하게 하였다. 영부사 송시열이 아뢰기를,
"월령과 ≪좌전≫의 설은 다 천자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례(周禮)≫에 '모든 나라는 전조(田祖)에게 풍년이 들게 해 주기를 기원한다.'고 하였으니, 비록 천자가 아니더라도 행하지 못할 법은 없습니다. 그 구체적인 절목을 강구하여 행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대신들도 이의가 없었다. 이에 그 의견에 따라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이 달 28일에 대신을 보내 비로
○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항도 출사하여 입시하였다. 상이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게 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묻자, 김수항 등이 청하기를,
"체납된 지 오래된 세금을 탕감하고 죄수를 관대하게 심리하여 석방하며 절효(節孝)의 행실이 있는 인물을 등용하소서."
하니, 상이 효행이 현저하게 드러난 자는 정려문(旌閭門)을 세우고 체납된 세금과 친족에게 추징하던 부역은 햇수를 제한하여 탕감하고 죄수는 역옥(逆獄)과 강상죄(綱常罪)를 제외하고 모두 사면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수항과 민정중 등이 아뢰기를,
"역옥과 강상 죄인 외에도 중대한 범법자가 있는데, 모두 곧바로 석방한다면 죄악을 징계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알맞게 참작하여 소결(疏決)하라고 명하였다.
○ 주강에 나아갔다. ≪시전≫억편(抑篇)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숨겨진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다.'라는 말과 '열 손이 지적하고 열 눈이 보고 있다.'는 등의 말은 모두 혼자 있을 때에 삼가는 공부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이나 사사로이 있을 때에는 방자해지기가 쉽기 때문에 이 장에서 말한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하니, 송시열이 아뢰기를,
"옛날에 송 나라 신하 장구성(張九成)이 효종(孝宗)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 궁중에 계실 때의 처신이 과연 신료들을 대할 때와 같습니까?' 하니, 효종이 속으로 고민을 하면서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하자, 장구성이 말하기를 '이것이 폐하께서 성실하지 못한 부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후세에 장구성의 말을 두고 지론(至論)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강독을 마치고 상이 전날의 일을 가지고 송시열에게 묻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혜택을 고르게 입히는 방법은 신역을 견감하는 데에 있습니다. 한 집안 내의 부자 형제에게 사람마다 부과된 신역과 몇 년 동안 납부하지 못하고 있는 세금은 마땅히 탕감해야 됩니다. 그리고 죄수에 대해서는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죄가 없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고 소결하여 석방한다면, 이는 공심(公心)이고 천리(天理)입니다. 만약 후일의 화복(禍福)을 염려하여 법을 굽혀서 봐준다면 이는 사의(私意)이고 인욕(人欲)입니다. 이 천리와 인욕의 한계를 분명하게 살펴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이상진이 아뢰기를,
"중죄를 범한 자는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수레에서 내려 죄인을 보고 운 것은 옛날 성왕의 성대한 덕이다. 덕이 부족한 내가 백성들을 잘 교화하지 못하여 죄인이 이토록 많게 만들었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이런 뜻으로 특별히 비망기를 내려 중외에 포고할 것을 청하였다. 이날 저녁에 비망기로 이르기를,
"어제 팔도에 유시를 선포하라고 한 비답은 백성들을 애처롭게 여기는 뜻을 조금 보인 것이다. 다만 조가(朝家)에서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의 기대를 위로하는 조치가 없어 한갓 종이 위의 빈말로 돌아가게 한다면, 이는 결단코 나의 본심이 아니며, 또한 어찌 우리 백성들에게 믿음을 잃지 않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절효가 있는 이를 포장하고 신역을 견감하고 체납된 세금을 탕척하는 등의 일과 극진하지 못한 조건들을 속히 강구하여 품지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여러 도에 유배된 죄인이 많게는 1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비록 세도가 내려가고 풍속이 퇴폐해져 인심이 선량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 또한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덕과 교화를 펴지 못하여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중 자애하지 않고 경솔하게 법을 범하게 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기에, 내가 밤낮으로 통탄하는 것이다. 지금 하늘의 진노가 더욱 심해져서 굶주린 시체가 계속 쌓이고 있는 때를 당하여 특별히 비상한 은전을 베풀어 팔도의 백성들이 다 함께 새롭게 되는 조치를 취하
아, 지금 내리는 무한한 은전은 실로 백성들이 스스로 새롭게 되는 길을 열어 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저 우매한 백성들이 조가의 덕택을 본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죄악을 고치지 않고 고의로 국가의 법을 범한다면 경중을 논하지 않고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이 사실을 꼭 알아야 할 것이다. 또 금부에 분부하여 역옥(逆獄)에 연좌된 자를 제외하고 현재 수감되었거나 유배된 자들을 모두 내일 시임촹원임 대신과 삼사의 장관이 등대(登對)하여 직접 계품하게 하라. 또 양전(兩銓)의 세초(歲抄)에 과오가 올라 있는 자나 현재 추고받고 있는 자들을 모두 탕척하라. 포흠된 조세와 신역을 탕감하는 일은 묘당이 조사하여 요청한 각도 각년의 해당분을 모두 탕감하도록 허락한다. 오직 군향(軍餉)만은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영상 김수항이 다시 인재를 수소문하여 유생으로서 학술과 재능과 행실이 뛰어난 자를 감사로 하여금 방문하게 하고, 무사로서 지혜와 용기와 힘이 있는 자를 병사로 하여금 방문하게 하여 자질에 따라 기용하는 방편으로 삼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 주강에 나아갔다. 일전에 송시열이 수어사(守禦使)를 혁파하는 일로 상에게 건의하기를, "신이 올라올 때에 광주(廣州) 지역에 유숙하였는데, 백성들이 간절하게 호소하기를 '수어사와 부윤이 각각 군병의 재부(財賦)를 관장하여 서로 침탈하므로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혁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민정중과 김수흥 등도 모두 말하기를,
"이미 수어사를 두고 또 부윤을 두어 사무와 권한이 서로 나눠졌으니 수어사를 혁파해야 될 듯합니다."
하고, 병조 판서 남구만은 말하기를,
"반드시 지위와 인망이 수어사가 될 만한 자를 유수로 삼는다면 사무와 권한이 하나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다시 다른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라고 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영상 김수항이 건의하기를,
"수어청은 인조조(仁祖朝)에 설치하여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러한 이유로 곤란하게 여겨 혁파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지금에 이르렀지만, 본청은 초창기와는 상황이 매우 달라져서 그런 의의를 고식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의견은 전부 혁파하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경청(京廳)을 혁파하고 광주를 유수로 삼으려는 것일 뿐입니다. 또 비국 당상 1원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기를 강도(江都)의 예와 같이 한다면 수어사는 그대로 있으면서 일은 더욱 착실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지중추부사 이상진도 혁파해야 된다고 말하니, 상이 따랐다. 김수항이 강도의 예에 의거하여 경력 1원을 두기를 청하고, 송시열이 또 수어사 여성제(呂聖齊)를 유수로 삼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 하교하기를,
"내가 생각건대, 나라를 망치고 몸을 망치는 재앙이 하나의 길로 오는 것은 아니지만 고금의 사실에서 찾아보면 술에 탐닉함으로 말미암아 그 덕을 전복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우리 조종께서 우려한 것이 깊고 생각한 것이 원대하여 지성스럽게 깨우쳐서 술로 인한 재앙에 대비하도록 한 것이 매우 깊고 간절하였다. 그런데 근일에 여러 신료들이 열성들이 남긴 뜻을 본받지 아니하고, 모여서 오로지 흠뻑 취하게 마시는 것만을 일삼아서 술독에 빠져서 날을 보내고 있다. 이에 위로는 국사를 도외시하고 아래로는 부형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으며, 심지어는 패가 망신에 이르면서도 태연히 경계할 줄을 모르고 있다. 습속의 폐단이 고질화되어 이런 지경에 이르니 어찌 크게 한심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더구나 지금 하늘은 위에서 진노하여 변괴가 여러 가지로 나오고 백성들은 아래에서 원망하여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고통이 다급하니. 비록 군신 상하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일하고 오직 한마음으로 다스리기를 도모하더라도 오히려 일을 이루지 못할까 걱정스러운데, 어찌 감히 덕과 예절을 생각하지 않고 술에 빠져서 일을 돌보지 않으면서 이토록 방자하고 무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사관을 보내어 전 참의 박세채에게 권유하고 함께 오도록 하였다.
○ 2월. 전 참의 박세채가 성 밖에 와서 사양하는 소를 올리니, 상이 사관을 보내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긴다는 뜻을 전하고, 속히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 전라도 어사 이동욱(李東郁)이 강도의 쌀 1만 석을 전라도로 옮기도록 청하고, 또 아뢰기를,
"전주(全州)의 어의궁(於義宮)의 둔장(屯庄)이 백성들의 토지를 많이 차지하고 있으니 혁파하소서."
하니, 모두 그의 말대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였다. 상이 해에 변고가 생긴 것을 인하여 하교하여 구언(求言)하기를,
"보잘것없는 내가 국가가 위란에 처한 때에 조종들이 이어온 어렵고 중대한 왕업을 계승하여 억조 창생들의 윗자리에 앉은 지가 어느덧 9년이나 되었다. 자질은 엉성하고 덕은 부족하여 정령(政令)이 온당함을 잃어, 하늘은 위에서 진노하여 재앙이 계속해서 이르고 백성들은 아래에서 원망하여 거꾸로 매달린 듯한 고통이 바야흐로 다급한 상황이니, 백성의 부모가 된 자로서 마땅히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평상시에도 두려움에 휩싸여 편안하지 못하다. 음흉한 무지개가 해를 관통한 변괴가 어제 또다시 나타났고 겹으로 된 햇무리가 해를 둘러서 그 형상이 심히 흉하기에, 한층 더 걱정스럽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마땅히 널리 직언을 구하여 내가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보충하려 하는데, 또한 어찌 여러 관료들을 책려하여 서로 경계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아, 너희들 대소 신료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서 맡은 바 일을 경건하게 부지런히 수행하고 사실을 다 버려, 조금이라도 하늘의 견책에 답하여 어려운 시국을 잘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수찰을 내려 사관을 보내 행 호군 윤증에게 전유하기를,
"지난번에 사관을 보내 전유한 비답에서 나의 간절한 뜻을 대략 피력하고서 선뜻 뜻을 돌려 올라오리라고 밤낮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정성과 예우가 두텁지 못하여 길이 초야에서 살려는 뜻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며 실망을 하고 이어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아, 자리에서 비켜 앉아 끝없이 생각하는 마음과 국가와 고락을 함께 해야 되는 의리에 대해서는 전번의 비답에서 다 말하였기에, 지금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전후로 부를 때마다 사정(私情)이 절박하다는 것을 나아오기 어렵게 여기는 첫번째 명분으로 내세웠는데, 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 아. 지금이 어떤 때인가. 국가의 형세가 위험에 빠지고 재앙과 이변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어 상하가 걱정에 휩싸여 잠시도 편안하지 못하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영부사와 같이 출처가 공명 정대한 이도 선뜻 뜻을 돌려 조정에 나와서 심력을 다 기울이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대 또한 대대로 벼슬을 한 신하로서 어떻게 유독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 없이 한갓 하나의 절개만 고수하여 궁벽한 시골에 눌러앉아 있으면서 국사를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사관을 보내 나의 지극한 뜻을 알리니, 속히 나의 목타는 듯한 뜻을 본받아서 빨리 함께 올라와 나의 바람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는데, 윤증이 석고 대죄하며 감히 다시 글로 번독하지 못하겠다고 답하였다.
○ 부안(扶安)의 선비 신종제(申宗濟)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얼음을 깨고 물에 빠져 죽은 일에 대하여 도신이 계문하니, 전교하기를,
"너무나 참담하다. 본도에서 각별히 휼전을 거행하여 족속들에게 곡물을 분급하여 목전의 다급함을 구제하여 진휼에 마음을 쓰는 뜻을 보이라. 지방관으로서 백성들을 굶어 죽게 하면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지
하였다.
○ 옥당의 관원을 소대하니, 박세채(朴世采)와 이상(李翔)도 함께 들어왔다. 강관이 '억제하기 어려운 것으로 성내는 것이 가장 심하다.'라는 부분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갑자기 성을 내는 병통이 있었는데, 지금 이 글을 보고서 따끔하게 깨달은 바가 있다."
하니, 박세채가 아뢰기를,
"늘 성냄과 욕심이 발동할 때에 이를 생각하여 경계한다면 정령을 시행하는 데에 온당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학문의 공은 ≪중용≫과 ≪대학≫보다 더 잘 갖추어진 것이 없으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요체가 되고 두루 통행할 수 있는 것은 경(敬)과 의(義) 두 글자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대학≫은 ≪성학집요(聖學輯要)≫에 독서법이 있으니 살펴보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진달한 바가 명백하고 절실하니 마땅히 마음에 새기겠다."
하였다. 소대를 마치면서 상이 박세채와 이상에게 각각 옥권(玉圈) 1쌍을 하사하고 상방에 명하여 초모(貂帽)를 만들어 주라고 명하였다. 또 송시열에게 옥권 1쌍을 내렸다.
○ 하교하기를,
"나라의 급선무는 사심을 버리고 서로 돕고 화합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반드시 경각심을 가지고 병통의 근원을 제거한 뒤라야 온갖 일을 제대로 처리하여 국가가 다스려지고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세상 풍속이 갈수록 야박해지고 기강이 해이되어 공도(公道)는 없어지고 사의(私意)가 횡행하고 있다. 조정에 있어서도 서로 화합하는 것을 귀하에 여기며, 우리 열성께서 신신 당부하여 신료들을 경계하고 격려한 것도 여기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아랫사람의 도리에 있어서도 마땅히 아름다운 뜻을 계승하여 공도를 넓혀 나가야 된다. 그런데 수년 이래로 논의가 일치되지 않아 서로 화합하는 기풍이 있다는 소식은 들을 수 없고, 갈수록 배척하고 알력하는 습속만 이루어져서 한번 작은 과실이라도 들으면 마치 기화(奇貨)를 얻은 것처럼 여겨 야단 법석을 떨고 잠시도 편안할 날이 없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코 평화의 복이 아니고 도리어 사람의 운기(運氣)와 천지의 화기(和氣)가 감응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게 된다. 아, 대소 신료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현재 당면한 어려움에 대하여 전과 같이 소홀하게 보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봉행하여 왕실을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 주강에 나아갔다. 박세채가 아뢰기를,
"주자(朱子)의 봉사(封事)는 임금의 귀감이고, 정백자(程伯子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상소문에서는 치도(治道)의 본말을 다 갖추어 말하였습니다. 또한 그 당시의 국사가 우리나라와 서로 비슷하니, 경연 이외에서도 더욱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마음에 새기겠다."
하였다. 박세채가 또 청하기를,
"송 인종(仁宗)이 한기(韓琦)촹부필(富弼)촹범중엄(范仲淹)을 천장각(天章閣)에 두고 붓과 종이를 내려주고서 잘 다스리는 일에 대하여 진달하게 한 고사를 본받아서, 대신들에게 한기와 부필이 한 일로써 권면하소서."
하니, 김수항이 아뢰기를,
"박세채의 말은 시국의 병폐에 매우 적중하였습니다. 많은 신하들 중에 공도(公道)를 받들어 직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그 책임이 전적으로 대신에게 있습니다. 옛사람의 말에도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모으고 충직한 말이 많이 들어오게 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유신(儒臣)과 조정에 있는 모든 신하들이 마음
하자, 상이 박세채에게 방법을 강구하여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이상이 청하기를,
"한 나라 조정에서 효렴(孝廉)을 천거한 사례에 의거하여, 주현(州縣)에서 조정에 천거하게 하여 가장 뛰어난 자를 기용하소서."
하였다. 박세채가 또 청하기를,
"대신으로 하여금 그에 관한 절목을 상의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김수항에게 다른 대신들과 의논하여 정하게 하였다. 김수항이 윤증을 초치하기를 청하고, 또 청하기를,
"이단하(李端夏)를 대사헌에서 체직시키고 속히 오도록 특별히 하유하여 전적으로 진휼에 대한 일을 위임하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상이 여러 관사의 회계공사(回啓公事)를 3일 안에 하게 하였는데 두려운 마음으로 봉행하지 않고 지체하는 일이 많자 정원으로 하여금 다시 신칙하게 하였다.
○ 3월.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항이, 전날 박세채와 이상이 진달한 인재를 널리 찾도록 하는 일에 대하여 널리 의견을 물어 처치할 것을 청하였다. 좌의정 민정중과 이조 판서 이숙(李?)이 아뢰기를,
"종전의 별천(別薦)은 단지 조정의 관료들에게 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견문이 넓지 못하고 천거를 받은 사람이 많지 않았으며, 그나마도 전조에서 착실하게 기용하지 않아 한갓 형식적인 문서를 작성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드시 절목을 상세히 만들고 방백과 주군에 특별히 신칙하여 인재를 찾아내어 천거하게 한다면 인재를 얻는 길이 넓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전조로 하여금 절목을 논의하여 정한 뒤에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이 뒤에 박세채가 상에게 또 건의하기를,
"이번에 인재를 찾는 일은 평상시의 별천(別薦)과는 차이가 있으니, 평상시의 관례대로 반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특별히 비망기를 내려 다 사심을 버리고 마음을 다하여 봉행하라고 하였다. 이상진(李尙眞)이 또 청하기를,
"묘당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수령이 될 만한 자를 널리 추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과 전조로 하여금 상의하여 품처하라고 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김수항 등이 상에게 아뢰기를,
"근래 수령에 대한 천거가 매우 잡다한데, 특별히 의논하여 천거하게 하면 반드시 이익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천주(薦主)를 가리고, 또 잘못 천거한 데 대한 법을 밝히소서."
하자. 이숙이 청하기를,
"당상관은 일찍이 승지와 참의를 지낸 사람으로, 당하관은 삼사(三司)를 천주로 삼으소서. 무반은 이미 곤수(?帥)를 지낸 자 외에 합당한 자를 가려서 천주로 삼으소서."
하자, 윤허하였다. 이때에 대간이 패초에 나아오지 않는 폐단이 매우 많았는데, 이는 추고를 받은 뒤에는 체직을 피할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진이 양사의 관원에게 추고를 당한 채로 행공하게 하라고 청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이이(李珥)도 전에 이러한 폐단에 대하여 상소하여 논한 적이 있습니다. 양사로 하여금 서로 조사하여 추고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민정중과 여러 신하들이 함께 옳다고 하자, 상이 따랐다.
○ 주강에 나아갔다. 박세채가 임금과 신하가 지성으로 서로 돕는 의리에 대하여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우리나라에 내수사(內需司)를 설치한 것은 이미 제왕은 사사로움이 없다는 의리에 맞지 않습니다. 또 궁가(宮家)와 훈척(勳戚)과 좌우의 근신(近臣)들에 대하여 치우치게 보호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궁가
하고, 또 말하기를,
"정관(政官)이 인물을 기용하는 것이 사람이 훌륭한지의 여부에 있지 않고 다만 청탁의 유무에 달려 있습니다. 대간(臺諫)이나 연신(筵臣)이 어떤 사람의 시비에 대하여 논하면 그의 친척이나 친구가 벌떼처럼 일어나 두둔하고 나서서 공의(公議)가 신장되지 않는 것이 더욱 큰 걱정입니다."
하니, 상이 좋은 말이라고 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마땅히 마음에 새기겠다. 조정의 신하들도 이것으로 경각심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이때에 효종대왕(孝宗大王)의 세실(世室)에 대한 일로 장차 종묘에 고하는 예를 행하게 되었다. 형조 판서 김덕원(金德遠)이 상소하기를,
"효종대왕의 세실은 이미 종묘에 고하는 날을 잡았습니다. 또 생각건대, 우리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 난리를 바로잡아 평정한 것은 그 공이 창업(創業)과 같으니, 응당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야 하는 것은 조묘(?廟)할 때가 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앞으로 응당 행할 것이라고만 하고 오늘날에 아울러 행하지 않는다면, 선후의 차례를 잃었다는 비난이 있게 될 것이고, 또한 대신이 인용한 한(漢) 나라 조정에서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을 일시에 추존한 의리에도 위배됩니다."
하니, 상이 대신과 유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김수항(金壽恒)촹민정중(閔鼎重)촹송시열(宋時烈)촹김수흥(金壽興)촹정지화(鄭知和)촹이상진(李尙眞) 및 박세채(朴世采)촹이상(李翔) 등이 다 말하기를,
"인조대왕께서 난리를 바로잡아 평정한 공렬이 매우 우뚝하니, 마땅히 불천위로 삼아야 됩니다. 한 나라 조정에서 태조와 태종을 추존한 사례로 논하면 효종대왕을 높여서 세실로 삼는 날에 아울러 종묘에 고하는 것이 또한 근거가 있는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인조대왕께서 난리를 바로잡아 평정하신 공이 응당 불천위가 되어야 한다면 조묘할 날을 기다릴 것이 없이 아울러 종묘에 고하는 예를 거행하는 것이 참으로 합당하다."
하고, 인하여 아울러 종묘에 고하라고 명하였다.
○ 영중추부사 송시열이 치사하여 봉조하(奉朝賀)로 삼았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영중추부사 본 품계에 대한 상록(常祿)과 주육(酒肉) 이외에 매달 늠속(?粟)을 보내 주어 예우하고 길러 주는 뜻을 보여야 되고, 평상적인 예를 따라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튿날 송시열이 전(箋)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다. 상이 또다시 승지를 보내 유시하기를,
"경의 심사(心事)는 내가 상세히 아는 바이다. 지금 비록 치사하기는 하였으나 경은 무후(武侯)와 같은 충정으로 결코 나를 버리고 영영 가버리지 못할 것이다. 이에 근시를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고한다."
하였다.
○ 옥당의 관원을 소대하였다. 박세채가 아뢰기를,
"뜻을 세우고 정성을 극진히 하는 것이 학문의 근본입니다."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박세채가 또 정주(程朱)의 봉사(封事)를 정초(精抄)하여 예람(睿覽)에 대비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 사은사 김석주(金錫?)촹유상운(柳尙運) 등이 돌아오자 상이 인견하였다. 김석주가 연로의 백성들의 고통에 대하여 진달하고, 관서의 의주 등 다섯 고을의 경신년조(庚申年條)와 용강(龍岡) 등 여섯 고을의 병진년조(丙辰年條)와 해서 각읍의 무자년조(戊子年條)의 관향곡(管餉穀)으로서 체납이 된 것을 다 탕감하기를 청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대개 이때에 묘당에서 포흠된 조세를 탕척하도록 한 명령이 연조(年條)로써 제한하였기 때문에 포흠이 가장 많은 해가 더러 제한한 해 속에 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곤궁한 백성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말하는 자들이 옳지 않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 김석주가 양서 백성들의 실정을 가지고
이전에 해서 어사가 본도의 별수미(別收米)를 - 대개 해서에서 애당초에 명 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대접하기 위하여 매 1결당 5두의 쌀을 따로 거두어들여 보냈는데, 지금까지 답습하고 있었다. - 감면해야 된다는 일로 계문하였다. 묘당에서 아뢰기를,
"이는 공물가(貢物價)이고 원래부터 과외로 더 거둔 것이 아닙니다. 본도에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폐지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 봉조하 송시열이 상차하여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존호(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였다. 그 차자에 아뢰기를,
"존호를 올리는 일은 옛 제도가 아니기는 합니다만, 본조에서 세조에서부터 창시하여 선조(宣祖)에 이르러서는 또다시 대호(大號)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태조대왕께서 창업하여 왕통을 드리운 공렬(功烈)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런데도 높여 받드는 도리가 도리어 두 선왕보다 부족합니다. 이미 올린 것을 추개(追改)하지 못한다면, 어찌 태조대왕께 추가하여 두 선조의 효심을 편안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시임촹원임 대신과 2품 이상과 삼사와 유신을 불러 빈청에서 회의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아뢰기를,
"가장 높여 받드는 도리는 글자 수가 많은 데에 있지 않은 듯합니다. 존호를 추상(追上)하는 일은 일의 체모가 중대합니다."
하고, 영의정 김수항과 좌의정 민정중은 아뢰기를,
"역대의 고사를 가지고 보건대, 휘호(徽號)의 글자수가 많고 적음이 공덕의 고하와 조손간(祖孫間)의 존굴(尊屈)과는 무관한 듯합니다. 더구나 태조가 상왕(上王)이 되었던 날에 이미 '계운신무(啓運神武)'라는 존호를 받았고, 승하하시자 또다시 '지인성문(至仁聖文)'이라는 시호를 올렸습니다. 따라서 지금 다시 올린다 하더라도 성대한 공렬을 선양하는 데에 더 보탬이 될 것은 없습니다. 한편으로 생각건대, 원로 대신이 차자에서 두 선조가 불안할 것이라는 뜻을 진달한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닙니다. 중국 조정의 전례(典禮)를 상고하더라도 태조에게 휘호를 추가한 일이 있었으니, 이것을 인용하여 전례로 삼으면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의 체모가 매우 중대하니, 오직 성상께서 재량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태조대왕의 성대한 공렬에 대한 아름다운 칭호가 도리어 두 선조보다도 부족하여 유신이 차자를 올려 청하게 된 것이다. 이는 옛날의 일에서 찾아 보아도 근거할 것이 없지 않으니, 마땅히 존호를 추가하는 전례가 있어야 되겠다. 다만 올린 의견 중에서 대신과 한두 명의 유신의 의견이 나의 뜻에 꼭 맞는데, 경솔하게 논의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 한두 명의 유신이란 남치훈(南致熏) 등을 가리킨 것이다. - 송시열이 또 차자를 올려 논하기를,
"신이 망녕되게 왕가의 예를 논하고서 밤낮으로 두려운 마음에 휩싸이니, 마땅히 죄과를 뉘우쳐야 될 뿐입니다. 그러나 또 생각해 보건대, 애당초 진달한 말이 두서가 없어 조정의 논의가 분분하게 하였으니 이 또한 신의 죄입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예는 적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고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으니, 많고 적음은 제각기 마땅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명 나라와 본조의 휘호(徽號)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분명히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데, 두 선조의 호가 도리어 태조보다 더 많으니, 주자(朱子)가 '손자가 할아버지를 굴복시키는 점이 있다.'라고 한 의의에 있어서 어떻겠습니까. 옥당이 올린 말은 명백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판(位版)에 쓴 것으로 보면, 존호와 시호를 서로 어긋나게 배치하여 가지런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위판에 쓴 8자 내에서 4자가 존호이면 시호는 4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열성의 시호가 모두 8자인데 태조만 4자인 셈입니다. 이와 같이 열성들의 판위가 도리어 더 융숭한 점이 있으니 이것이 불안한 점입니다. 또 성인이 '주(周) 나라를 따르겠노라.'고 한 뜻으로 본다면, 명 나라 조정에서 행한 것이 이미 추가하여 올리는 것으로 전례를 삼았으니 오늘날 그것을 버리고 채용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상심하고 통탄할 일입니다. 또 정자가 시호를 논하면서 그 실질에 합당하지 않게 하는 것을 부정하게 여겼는데, 우리 태조대왕께서 나라를 세워 대통을 전하여 지금까지 3백 년이 되도록 공고히 유지하여 온 것은 실로 위
하였다. 상이 여러 대신들을 인견하고 존호를 올리는 일을 묻자, 영의정 김수항과 판부사 김수흥이 아뢰기를,
"송시열의 차자에서 이미 대의를 내세워 회군한 뜻으로 볼 때 추가하여 올리는 일이 없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전의 차자에서 감히 분명하게 지적하여 말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영부사의 식견으로 이런 요청을 하였으니 마땅히 그 말에 따라 행해야 되겠으나, 일의 체모가 매우 중대하니 다시 조정의 신하들을 모아 물은 뒤에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민정중도 말하기를,
"전번의 차자에서는 단지 글자 수의 많고 적은 것만 가지고 말하였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귀일되지 못하였고 신들도 어렵다고 여겼습니다. 지금 대의를 내세워 회군한 뜻으로 말하였으니, 마땅히 널리 물어서 처리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이에 다시 대신과 2품 이상과 삼사와 유신 등이 회의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이주(李주?)촹이상(李翔)촹김만길(金萬吉) 등은 의논 전과 같았고, 목내선(睦來善)촹박신규(朴信圭)촹정약(鄭?)촹경최(慶最)촹윤이제(尹以濟)촹남치훈(南致熏)은 오히려 일의 체모가 중대하다 하였고, 남용익(南龍翼)촹신정(申晸)촹윤계(尹?)촹남구만(南九萬)촹최일(崔逸)은 원로가 올린 차자의 내용에 이미 은미한 뜻이 있어 달리 의논이 없다고 하였고, 이익상(李翊相)촹홍만용(洪萬容)촹윤지완(尹趾完)촹남이성(南二星)과 옥당의 오도일(吳道一)촹서종태(徐宗泰)도 모두 추가하여 올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 중 서종태가 아뢰기를,
"반드시 '소의정륜(昭義正倫)' 등의 글자를 추가하여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신은 그것이 어떠한지 잘 모르겠으나, 그 나머지는 특별히 올릴 의견이 없습니다."
하고, 김수항 등 여러 대신들이 논의하기를,
"전날에 논의할 때에는 단지 글자 수의 다소만을 가지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원로가 다시 차자를 올려서, 또 태조의 시호는 4자일 뿐인데 열성이 도리어 많은 것은 미안하다고 하고, 또 위화도에서 회군한 대의(大義)를 시호에 넣지 않은 것이 미안하다고 하면서 명 나라 조정에서 추가하여 올린 전례(典禮)에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신들은 다른 의논이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정종(定宗)의 위판은 단지 시호 4자로만 되어 있고, 태종의 위판도 존호와 시호를 지금 합하여 8자로 되어 있어 태조의 위판에 쓴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정종의 시호는 묘호를 추가하여 올릴 때에 이미 4자를 더하여 올렸고, 태조의 시호를 지금 추가로 올린다면 오직 태종의 시호만 전과 다름없이 추가됨이 없게 되니, 높여 받드는 도리상 마땅히 일체로 올려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전교하기를,
"태조에게 휘호를 추가하여 올리는 일과 태종의 시호를 일시에 추가하여 올리는 것이 실로 예에 합당하겠다. 응당 행할 절목에 대하여는 가을이 되어 거행하라."
하였다. 예조가 시호를 논의하는 사안과 전에 의논한 왕후의 위판에서 태(太) 자를 삭제하는 일과 휘호를 추가하여 쓰는 일도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거행할 것인지의 여부를 계품하니, 전교하기를,
"시호를 논의하는 일은 굳이 가을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택일하여 거행하라. 위판에서 글자를 삭제하고 추가하여 쓰는 일은 양묘(兩廟)의 휘호를 추가하여 올릴 때에 아울러 거행하라."
하였다.
○ 4월.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전에 병조 판서 남구만이 폐지했던 네 군(郡)에 - 여연(閭延)촹무창(茂昌)촹자성(慈城)촹우예(虞芮)가 바로 강변의 폐지이다. - 네 진을 설치하기를 청하였고, 대신 김수항도 편리하다고 하여, 이미 네 진의 변장을 차출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 대사간 유상
"이 지역은 가로로 수백 리에 걸쳐 있는데 수목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도로가 끊겨 있습니다. 지금 만약 진을 설치한다면 마땅히 나무를 베고 도로를 뚫고 토지를 개간해야 하는데, 신설한 피폐한 진이 이미 적을 막기에 부족하여 도리어 적이 들어올 길만 열어 주게 됩니다. 또 토지를 개간하면 초피(貂皮)와 산삼의 이익은 없어지게 되고, 그 폐단으로서 국경을 침범하는 문제가 많이 생길 텐데, 겹겹의 고산 준령이 사방을 가로막아 길이 통하지 않으니 비록 봉수(烽燧)를 설치하려고 하더라도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불편한 단서입니다."
하니, 남구만이 아뢰기를,
"북로의 초피와 산삼은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에서 산출되는데 삼수와 갑산에 고을을 설치한 지가 이미 수백 년이 되었는데도 그 이익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에 비록 네 군을 설치한다 하더라도 어찌 하루아침에 단절될 리가 있겠습니까. 강변에 왕래하는 통로가 한두 곳이 아닌데, 적이 올 때에 어찌 반드시 네 군만을 경유하겠습니까. 도리어 적이 들어올 길만 열어 준다는 말은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수목이 방폐가 된다고는 하나. 어찌 백성들을 모집하여 들여보내는 것만 하겠습니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유상운의 의견이 편리하다고 하였다. 김수항이 다시 남구만으로 하여금 여러 대신들에게 가서 논의할 것을 청하였다. 이 뒤에 남구만이 여러 대신에게 가서 물으니, 우의정 김석주는 유상운의 의논에 찬동하여 말하기를,
"궁벽한 지역에 보낼 백성을 모집하기가 실제로 어렵고, 또 관원을 접대하기도 어렵습니다. 먼저 두 곳에 첨사(僉使)를 두어 형세를 보아가며 다시 가설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좌의정 민정중은 말하기를,
"계획대로 네 진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김수항과 김수흥은 김석주의 의견에 찬동하여 먼저 두 진을 설치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였다. 상이 이를 따라서 무창(茂昌)과 자성(慈城)에 두 진을 설치하였다.
○ 석강에 나아갔다. 박세채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보니, 몇 명의 여인이 차비문(差備門)에서 나와 딴 곳으로 향하였습니다. 궁금(宮禁)은 중대한 지역인데 여인이 어떻게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엄격하게 신칙하여 금지시켜야 되고, 마지못해 출입할 경우에는 표신을 확인하여 문란하게 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영부사 김수흥이 아뢰기를,
"송시열이 주해(註解)한 ≪주자봉사(朱子封事)≫에 대하여 박세채가 진달하였으므로 써서 들이게 하였습니다만, 지금 들으니 송시열이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주해하였는데 아직 탈고하지 못한 상태라고 합니다. 붓과 종이와 서사할 인원을 보내 주어 베껴 올리게 하소서."
하고, 박세채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 상이 형조의 죄수가 많게는 1백여 명에 이르는 것을 보고 해조로 하여금 속히 소결(疏決)하라고 명하였다.
○ 전 참의 윤증이 있는 곳에 유시를 전한 사관이, 윤증이 병이 심하여 부름에 응하기 어렵다고 보고하니, 상이 다시 따뜻한 유시를 내리고 꼭 함께 올라오라고 하였다. 윤증이 병이 조금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 교외로 나아가겠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상이 양도의 감사에게 윤증이 올라올 때에 말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 황해 감사 송광연(宋光淵)이 수령의 치적에 대하여 등급을 나누어 계문하였다. 송광연이 숙배하고 임지로 떠날 때에 고과(考課)를 기다리지 말고 엄격하고 분명하게 출척하라는 상의 하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계문을 올린 것이다. 이에 평산 부사(平山府使) 박신(朴紳), 신천 군수(信川郡守) 한광(韓洸), 안악 현감(安岳縣監) 유이정(柳以井)에게 표리(表裏)를 하사하였다.
○ 이조 참의 박세채가 상소하고 ≪심학지결(心學旨訣)≫을 올렸다. - 박세채가 정구(鄭逑)가 편찬한 ≪심결발휘(心經發揮)≫와 조익(趙翼)이 지은 ≪지경도설(持敬圖說)≫을 가지고 가감을 하여 이책을 만들었다. -상이 이 즈음에 ≪심경(心經)≫을 읽고 있었는데, 박세채가 아뢰기를,
하고, 또 상소문 가운데에 선유(先儒)들이 거경(居敬) 공부에 관하여 논한 말을 인용하여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항상 좌우에 놓고 조석으로 성찰하겠다."
하였다.
○ 5월. 전 참의 윤증이 부름을 받들어 과천(果川)에 도착하여, 재앙을 만나고 통한을 품고 있어 감히 소명에 응하지 못할 상황이라는 내용으로 상소하였다. 이에 상이 승지를 보내어 들어오라고 간곡히 면려하였으나, 윤증이 다시 진소하여 굳이 사양하였다. 연달아 사관을 보내 불렀으나, 윤증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아오지 않고 돌아갔다.
○ 하교하기를,
"요즘에 형조에 갇힌 죄수로서 형을 받은 자 중에 비록 죄명은 중하지만 3차가 지나지 않아 연달아 사망한 자가 8, 9명에 이르니, 이것이 어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형벌을 시행하는 도리이겠는가. 당해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라."
하였다.
○ 봉조하 송시열이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감히 서울을 떠나 멀리 가지는 못하겠고 다만 가까운 경기 지방을 배회하겠습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승지를 보내 함께 오도록 하였다.
○ 이조 참의 박세채가 청대(請對)하여, 가뭄이 매우 심하니 특별히 대신을 보내어 기우제를 지내고 또 좋은 말을 구하고 죄인을 심리하여 하늘의 뜻에 응하여 재앙을 누그러뜨리는 실질을 극진히 할 것을 청하였다. 또 성실한 마음으로 학문을 하여 사심을 버릴 것을 청하였다. 또 지극한 정성으로 송시열과 윤증을 불러올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단하(李端夏)는 경학(經學)에 마음을 쏟고 있고 이민서(李敏敍)는 볼 만한 절개가 있으며 박세당(朴世堂)촹윤진(尹搢)촹유담후(柳譚厚)는 모두 조용히 물러난 선비입니다. 그 중에서도 유담후는 경학에 밝고 익숙합니다. 모두 조정에 초치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옳게 여겼다. 이튿날 대신에게 날을 잡지 말고 북교(北郊)에서 기우제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 이조 참의 박세채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장단부(長湍府)의 백성으로서 굶어죽은 자가 4명에 이릅니다. 삼가 감사에게 하유하여 그 사실을 상세하게 탐방하게 하고, 이런 사람들을 특별히 구휼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원통한 옥사를 심리하는 일을 또한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면령을 자주 내린 것이 근래와 같은 적이 없었으니, 소결(疏決)할 때에 더욱 신중하게 처리하여 옛사람이 이른바 '간사한 이에게 은혜를 끼치고 양민에게 원수처럼 해를 끼쳤다.'는 비난을 받는 일을 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이어서 본도에 명하여 부안(扶安) 사인(士人)의 사례에 의거하여 굶어죽은 이들에 대하여 다 휼전을 베풀도록 하였다.
○ 봉조하 송시열이 금화(金化)로 가서 누이를 만나고 영동에서 곧장 호서로 돌아가려 하였다. 이 사실을 유시를 전한 승지 김진귀(金鎭龜)가 계문하니, 상이 이조 판서 이상을 보내 전유하기를,
"경이 큰 덕과 중한 명망을 가진 자로서 조정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사직하는 글을 올렸는데, 내가 더욱 성의와 예우를 더하여 시종 만류해야 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경이 연석(筵席)에서 진달한 바가 매우 친절하여 절대로 당초의 마음을 저버리고 거취를 결정할 리가 없었기에 마지못하여 따랐던 것이며, 오늘의 행동이 나의 바람을 크게 어기게 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에 총재(?宰)를 보내 나의 지극한 뜻
하고, 이어서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 이때에 금위영에서 건물을 짓는 역사가 있었다. 하교하기를,
"근일에 궁성 근처에서 영차영차하는 소리가 대내까지 들려오고 있다. 만약 긴급한 역사가 아니라면 비가 내릴 때까지 당분간 정지하라."
하였다.
○ 기우제의 제문을 대제학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내용을 오로지 상이 자신을 죄책하는 것으로 요지를 삼게 하였다.
○ 자신을 죄책하는 내용으로 하교하고, 이어서 친히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낼 것을 명하였다. 또 기우제에 배종(陪從)할 여러 신하들에게 목욕 재계하고 각별히 재숙(齋宿)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수항이 상의 체후가 현재 조섭 중이고 민간에 꺼려야 할 질병이 많이 돌고 있다는 이유로 중지하기를 청하였다.
○ 6월. 주강에 나아갔다. 이때에 오랜 가뭄으로 정전(正殿)을 피하였기 때문에 상이 남무(南?)에 거둥해 있었다. 공조 참판 박세채가 친히 종묘에서 기우제를 행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고 8일로 날을 정하여 행하라고 명하였다.
○ 상이 종묘에 나아가 기우제를 지냈다. 막차에 들어갔을 때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고, 제례를 시작할 때부터 또 비가 내리다가 제사를 끝마치자 그쳤다.
○ 이때에 신의(神懿)촹원경(元敬) 두 왕후의 위판 가운데에서 태(太) 자를 삭제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송시열이 건의하고 나자 박세채가 또 상소하기를,
"태후(太后)의 태 자는 비록 태상궁(太上宮)에 있을 때에 붙여진 것이라고는 하지만, 또 전조(前朝)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점이 있어 명의(名義)와 도리상 결코 구차하게 그대로 쓰면서 끝내 고쳐 쓰지 않는 것은 곤란합니다. 어찌 한갓 일의 체모가 중대하다고 하여 거행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5월 24일에 비로소 하교하기를,
"태 자를 전과 같이 그대로 쓰면서 고치지 않는 것은 끝내 불안한 점이 있다. 지금 태묘(太廟)에 행사가 있는 때를 기회로 삼아 한번 바르게 고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예관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니, 예조 판서 남용익(南龍翼)이 품하기를,
"왕후의 위판에 휘호(徽號)를 쓰지 않은 것은 추서(追書)하지 말라는 하명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경왕후의 위판에 태 자가 있는 것을 지금 삭제하려 하니, 이때에 겸하여 휘호를 써넣는 것이 예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옳게 여겼다. 지금에 이르러 행사를 거행하게 되어 예조가 의주(儀註)를 올렸다.
의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에 먼저 사유를 고하고 시책보(諡冊寶)를 채여(彩輿)에 안치한다. 도감의 여러 집사들이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궐 아래로 모시고 가면 승지도 조복을 입고 나와서 전하여 받들고 들어간다. 어람(御覽)을 마치면 이어 별전(別殿)에 봉안한다. 책보를 올리기 하루 전날 여러 집사들이 다시 조복을 입고 종묘 남문 밖으로 받들고 가서 임시로 악차(幄次)에 안치하였다가 제사가 끝나면 비로소 봉안한다. 악(幄)촹상안(牀案)촹함보(函洑)촹욕석(褥席)을 진설한다. 독책관(讀冊官) 2명과 독보관(讀寶官) 2명은 모두 3품 문관으로 삼는다. 봉책관(奉冊官) 4명과 봉보관(奉寶官) 4명은 모두 5품 관원으로 삼는다. 거책안자(擧冊案者) 4명, 거보안자(擧寶案者) 4명, 거독책공안자(擧讀冊空案者) 4명, 거독보공안자(擧讀寶空案者) 4명이다. 당일에 대신을 보내 종묘에 제사를 올리는데, 4품 이상은 조복을, 5품 이상은 흑단령(黑團領)을, 헌관과 여러 집사들은 제복을 입는다. 묘주(廟主)를 고쳐 쓸 때에 제주관(題主官)은 각각 1명이고, 위판을 출납할 때 대축(大祝)과 궁위령(宮?令)은 각각 2명이고, 욕주(浴主)할 때 대축과 궁위령은 각각 1명이다. 두 신위의 신악(神幄)을 월랑(月廊)에 설치하고 신악 안에 상(牀)과 욕석을 설치한다. 또 각 위의 동쪽 서쪽 남쪽에 탁자 3개를 설치하고, 붓촹벼루촹먹촹칠촹대야촹향탕(香湯)촹수건 등을 구비한다.
○ 봉조하 송시열이 향리에 있으면서 상소하고,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올렸다. 이에 답하기를,
"반복하여 진달한 말이 명백하고 간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니, 유념하여 가슴에 새기지 않겠는가."
하였다.
○ 윤6월. 위도(蝟島)와 가리포(加里浦)에 수군진관(水軍鎭管)을 설치하여 임치(臨淄)촹고군산(古群山)촹목포(木浦)촹다경포(多慶浦)촹법성포(法聖浦)촹검모포(黔毛浦)촹군산포(群山浦)촹지도(智島)의 여덟 보(堡)를 위도에 소속시키고, 고금도(古今島)촹남도포(南桃浦)촹금갑도(金甲島)촹어란포(於蘭浦)촹이진(梨津)촹신지도(薪智島)촹마도(馬島)촹회령포(會寧浦)의 여덟 보를 가리포에 소속시켰다. 이 두 진이 양남 수로(水路)의 관문이기 때문에 본도 감사와 수사에게 물어서 진관(鎭管)을 설치한 것이다.
○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석주가 아뢰기를,
"해서(海西)의 영애처(嶺隘處)에 여러 진을 신설하고 그 부사(部司)를 나누어 통제하게 하는 뜻을 이미 정탈(定奪)하였습니다. 지금 새로 신설한 진은 산산(蒜山)에서 시작하여 문성(文城)에서 끝나는데, 산산은 황주(黃州)의 해변에 있고 문성은 곡산(谷山)과 양덕(陽德)의 경계에 있습니다. 선적(善積)이 또한 황주와 상원(祥原) 경계에 있어 여러 통로가 모이는 곳으로서 통괄하는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 진은 마땅히 삼부(三部)의 천총(千摠)이 되어야 하는데, 문성과 선적이 다 만호(萬戶)이니, 마땅히 첨사(僉使)로 승격해야 됩니다.
동리(東里)는 다만 소모별장(召募別將)이라고 부르기만 하니 마땅히 만호로 승격해야 되겠습니다. 각진에 있는 군량과 수비하는 영애처와 부로 나눈 사초(司哨)를 마땅히 별단으로 써서 들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 7월.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정재숭(鄭載嵩)이 아뢰기를,
"각 아문과 여러 궁가에서 임자년 뒤에 절수(折受)한 전토(田土)촹시장(柴場)촹어전(魚箭)촹염분(鹽盆)을 혁파하라는 명을 이미 내렸습니다. 임자년 뒤에 절수한 것은 비록 내수사에서 계하한 일이 있다 하더라고 시행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자년 전에 유고하여 혁파하였다가 추후에 대신 받은 것과 명안공주방(明安公主房)과 임자년 후에 처음으로 절수한 것을 제외하고 모두 혁파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김덕원(金德遠)이 아뢰기를,
"호남에 이성 종형매(異姓從兄妹)를 간음한 자가 있었는데 이미 죄를 승복 하였습니다. 본도의 계문을 인하여 본조가 마땅히 복계해야 됩니다만, 법조문에는 그 죄가 '장(杖) 1백, 도(徒) 3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지난해에 예형(禮亨)의 옥사에서 대신의 논의를 인하여 ≪대전속록(大典續錄)≫의 '사족(士族)이 간음하여 풍교를 독란한 자는 간부와 아울러 교수형에 처한다.'라고 한 법에 의거하는 것으로 정탈하였습니다. 또 곧이어 당시 대신의 계품으로 인하여 때를 기다리지 말고 처단하라는 전교를 받았습니다. 지금 이 죄인도 그 수교에 의거하여 처단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의 수교는 바로 한때에 죄악을 징계하는 뜻이 있었던 것이니 반드시 길이 정식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대전속록≫에 의거하여 처단하라."
하였다. 어영대장 윤지완(尹趾完)이 아뢰기를,
"본영의 마군(馬軍) 7백여 명은 그 숫자가 많지 않아 1천 기(騎)를 갖추려 하는데, 한정(閑丁)과 보인(保人)을 확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듣건대 해서에 한정을 많이 모았다고 하니, 먼저 본영에 획급하여 주소서."
○ 주강에 나아갔다. 교리 김창협(金昌協)이 문의(文義)를 설명함을 인하여 정심(正心)의 도리에 대하여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이남(二南)의 덕화(德化)를 논하여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공효가 훈증(薰蒸)이 두루 통하고 융액(融液) 이 두루 미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성의 정심의 공효를 발명한 것이 매우 좋습니다. 한가하게 계시는 중에 착실하게 공부하지 못하고, 다만 경연에 임하여 강독하는 것으로 일삼는다면, 주자가 이른바 '정심에 대하여 잠깐 읊조리고 성의에 대하여 잠깐 읊조리고…'라고 한 것과 거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끝에 가서 또다시 입지(立志)에 관한 말로 군도(君道)의 요체를 삼아 말하니, 상이 모두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우의정 김석주가 아뢰기를,
"영변(寧邊)의 철옹산성(鐵甕山城)은 -바로 영변의 고을 소재지이다.- 둘레가 27리이고, 산맥이 묘향산(妙香山)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성의 동쪽 면은 형세가 급박하여 절벽을 이루었고, 남쪽은 큰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어서 형세가 매우 광활합니다. 그 중에 약산 동대(藥山東臺)에 성을 축조하였던 옛터가 있는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성은 길이와 폭이 이미 매우 커서 다시 자성(子城)을 쌓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옛날에 3겹의 성이 있었으니, 다시 내성(內城)을 쌓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이세화(李世華)촹민유중(閔維重)과 -모두 본도를 안찰한 인물이다.- 지금의 방백 신익상(申翼相)이 다 성을 쌓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 이광한(李光漢)으로 하여금 성을 쌓고 대포(大砲)를 만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력(物力)이 넉넉하지 않으니, 묘당에서 수철(水鐵) 1만 근을 주고 한편 본도에서 관장하는 나무와 승(僧)촹가선(嘉善)촹통정(通政)의 직첩을 주어 비용을 보충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주강에 나아갔다. 부교리 김창협이 아뢰기를,
"오늘 강독한 부분이나 혹은 전날 이미 강독한 것 중에서 뽑아내어 반복하여 하문하소서."
하니, 상이 전날에 강독한 부분을 펴 보면서 묻기를,
"정자가 '예로부터 성현이 학문을 하는 것으로 인하여 병이 생겼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라고 한 말은 무슨 뜻인가? 선유(先儒)가 이미 해석하였으나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여 묻는 것이다."
하자, 김창협이 아뢰기를,
"이 말은 성인도 질병을 면할 수는 없지만 학문으로 인하여 질병에 걸리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잊어버리지도 말고 조장(助長)하지도 말라.'고 하였는데, 학자들의 병은 대다수 조장하는 데에서 생깁니다. 이른바 조장한다는 것은 학문을 하는 방법을 모르면서 너무 급하게 구하여 지나치게 고민하고 너무 깊이 사색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학문에 병통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몸의 기혈(氣血)을 소모하여 질병이 생기게 됩니다. 성현에 이르러서는 학문하는 공부에 있어서 나름대로 절도가 있으니 어찌 이러한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이것이 정자가 이른바 학문을 인하여 병이 생겼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밖의 질병과 같은 것이야 비록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치를 밝힌 것이 분명하지 못하면 두려운 마음이 있게 되겠지만. 지금 간혹 이치가 밝아졌는데도 두려운 마음이 없을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김창협이 아뢰기를,
"정자가 이른바 '어떤 사람이 이것을 안다 하더라도 운운'한 말이 바로 이 일을 논한 것입니다. 대개 이치가 비록 밝아졌다 하더라도 기가 충실하지 못하면 또한 두려운 마음이 있게 됨을 면치 못합니다. 이것은 맹자가 부동심(不動心)을 논하면서 지언(知言)과 양기(養氣)로 말한 것과 서로 흡사합니다. 지언은 바로 이치가 밝아진 것이고 양기는 기가 충실한 것입니다. 한갓 지언만 하고 양기를 하지 못하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데에 당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두 가지를 아울러 언급한 것입니다. 피차의 논한 바가 진실로 같지 않은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은 정심(正心)과 성의(誠意)로써 학문하였는데 후세의 학문은 다만 훈고(訓誥)와 사장(詞章)으로 일삼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니, 김창협이 아뢰기를,
"공자가 말하기를 '옛날의 학자는 자기 몸을 닦기 위해서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는 남에게 알려지기 위하여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후세의 학문이 이와 같이 된 것은 다만 남에게 알려지기 위하여 하고 자신을 닦기 위하여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참으로 학자들의 죄입니다만, 그 근본을 찾아보면 사실 윗사람의 인도가 선하지 못하고 교화가 밝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개 옛날에 나라를 다스린 자는 오로지 덕행(德行)을 가지고 사람을 취하였는데, 후세에 과거를 설치하여 사람을 취하는 것은 훈고와 사장을 가지고 할 뿐입니다. 따라서 위에서 그런 방법으로 구하여 아래에서 그런 방법으로 응하는 것은 이치상 당연하며 조금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돈녕 민유중이 아뢰기를,
"양호(兩湖)의 대동미(大同米)를 모두 12두로 정하였는데 유독 영남만은 13두로 정하였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씀씀이를 절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데에 지나지 않으니, 지금 비록 1두를 감면할 것을 허락한다 하더라도 국가의 경비를 지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8월. 봉조하 송시열이 유시를 전한 사관이 돌아오는 편을 통하여 부주(附奏)하기를,
"성지(聖旨)가 신으로 하여금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찬수하여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주자대전≫에 대하여 정력을 들여 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견문이 고루하여 심오한 부분까지 깊이 들어가 알지 못하였습니다. ≪주자대전차의≫가 신에게서 발단된 것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김수항(金壽恒) 형제와 박세채(朴世采)촹윤증(尹拯) 등 여러 사람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겨우 편질을 완성한 것입니다. 시험삼아 소대(召對)나 혹은 야대(夜對)에서 ≪주자대전≫ 속에서 성학(聖學)에 가장 긴요한 부분을 택하여 연신으로 하여금 강독하게 한다면, 반드시 속으로 성심(聖心)에 계합하는 것을 보아 도움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가지고 있는 ≪차의≫는 아직 초고 상태이기에, 삼가 마땅히 향리의 사우들과 더욱 수정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주자대전≫ 가운데에서 긴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소대나 야대에서 진강할 일을 옥당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고, 의원이 약을 가지고 가서 송시열의 병을 살펴보라고 명하였다.
○ 9월. 주강에 나아갔다.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호씨(胡氏)의 해설에 '술을 마심에 양을 제한하지는 않았으나 난잡한 데 이르지는 않았다는 것에서, 난잡하다는 것은 안으로 심지(心志)가 혼미하고 밖으로 위의(威儀)를 잃는 부분이다.'라고 한 곳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고금에 패가망신하는 것이 다 이것에서 말미암았으니, 가장 귀감을 삼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 승지에게 유시하기를,
"전에 술을 경계하는 뜻으로 백관을 신칙한 적이 있는데, 세월이 오래 흘렀으니 반드시 해이된 점이 있을 것이다. 직접 백성들을 접하는 지방관이 더욱이 경계할 일이니 중외에 각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 이전에 판중추부사 이상진(李尙眞)이 상차하여, 고 판서 박장원(朴長遠)과 고 참의 이척연(李?然)을 포상하기를 청하였다. 이는 대개 박장원과 이척연이 모두 효행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니, 대신 민정중(閔鼎重) 등이 박장원을 정려(旌閭)하고 이척연을 증직하기를 청하자, 상이 따랐다.
○ 이전에 예조 판서 조사석(趙師錫)이 상에게 아뢰기를,
하니, 좌의정이 아뢰기를,
"비록 대제학이 없기는 하나, 양관(兩館)의 제학만 있으면 또한 거행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양관의 제학을 차출하라고 명하고, 이어서 민정중에게 묻기를,
"전에는 으레 구일제는 전시(殿試)에 나가게 하고 삼일제(三日製)는 회시에 나가게 하였는데, 서로 다름이 있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듯하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일의 체모가 다름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 당시에 대제학 남구만이 질병을 칭탁하고 출사하지 않았는데, 상이 특별히 불러서 승지와 함께 가서 시취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구례에 의하면, 승지가 시권을 거두어 대궐로 가면 대제학은 개인적인 처소로 돌아갔다가 과차(科次)에 대한 명이 내린 뒤에야 비로소 제학과 함께 패초의 명을 받들고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 승지가 아뢰기를,
"절제(節製)는 바로 급제를 하사하는 과거 시험이니 고시관이 밖에서 들어오는 것은 일의 체모를 엄숙하게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대제학과 더불어 시권을 거두어 함께 들어오고 양관 제학은 시권을 거두기 전에 공해(公?)에서 기다리다가 대궐로 들어온 뒤에 함께 과차를 할 일로 마땅히 정식으로 삼아 준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 뒤에 삼일제도 전시에 직부하게 하는 일로 정식을 삼도록 명하였다.
○ 옥당 관원을 소대하였다. 교리 김창협(金昌協)이 아뢰기를,
"≪사기(史記)≫는 경전과 같지 않고 한 차례 강독하는 것이 몇 장에 불과하니, 거의 글을 대하여 숫자를 갖추는 데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꼭 구절마다 하나하나 해석할 필요 없이 한두 편만 이해하게 하더라도 됩니다."
하니, 상이 앞으로는 아뢴 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 10월. 하교하기를,
"비국으로 하여금 양서의 방백과 수신(帥臣)을 신칙하여 정체 불명의 선박이 출몰하고 왕래하는 것을 각별히 관망하여 기찰(譏察)하게 하라."
하였다.
○ 11월. 상이, 금년에 열읍에서 납세하는 콩의 절반을 면제하고 도성의 민호(民戶)에 부과되는 장빙미(藏氷米)를 감하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47권 숙종조 7
10년(갑자, 1684)
○ 1월. 봉조하 송시열이 차자를 남기고 돌아갈 것을 고하였다. 이에 승지 이세백(李世白)을 보내 속히 달려가서 전유하도록 하였다. 뒤에 이세백이 서계하니, 상이 하유하기를,
"그대의 지극한 뜻을 빠짐없이 다 알았다. 부디 나를 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나의 예우와 정성이 천박하여 초야로 돌아가려는 그대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니, 부끄러움을 무어라 말할 수 없다. 이어서 기억나는 일은, 지난 경신년 교외(郊外)에 나갔을 때에 자성 전하께서 특별히 하유하여 부르셨는데 그 뜻이 정녕하고 간절하
하고, 이어서 이세백으로 하여금 다시 가서 전유하게 하였다.
○ 하교하기를,
"대저 사면(赦免)이란 소인의 요행이기에, 옛사람으로서 삼가 사면하지 말라는 말로 그 임금에게 경계한 자도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말세가 되어 인심이 야박해졌으니 더욱이 경솔하게 전에 없었던 대폭적인 사면령을 내려 간사한 자들에게 요행심을 열어 주어서는 안 되겠다. 내가 지난번 큰 병이 조금 나아진 끝에, 위로하고 기쁘게 해 주는 것이 급하다는 것만 알고 뒷날의 폐단이 무궁한 것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뒤섞어 석방하는 조치를 거행하였다. 지금에 생각해 보지만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다만 이미 사면하여 한 해가 지난 뒤이니 비록 다시 구속하여 추핵(推?)할 수는 없지만, 혹 한때의 비상한 하교를 가지고 훗날 계속 행하는 규례로 삼는다면 그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해당 관사의 신하로 하여금 절대로 관례로 인용하지 말도록 하는 것으로 길이 정식을 삼아 죄악을 징계하는 법을 엄하게 하라."
하였다.
○ 재능이 있는 자를 엄선하여 방백을 삼으라고 명하였다. 영중추부사 김수흥(金壽興)이 상에게 아뢰기를,
"감사는 한 도의 주인이어서 그 책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조(仁祖) 때에 재능이 감사를 전임할 수 있다고 일컬어진 자는 5명에 불과하였는데, 비록 남보다 유독 더 고생한다는 탄식이 있기는 하지만 국가에는 인재를 얻는 효과가 있습니다. 근래에는 관리를 등용하는 도리가 크게 무너져서, 문관 당상의 경우 재능과 기국의 유무는 논하지 않고 마치 돌아가면서 하는 듯합니다. 사람을 기용하는 도리는 이와 같아서는 안 되니, 더욱 신칙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기고 이 명을 내렸다.
○ 3월. 상이 친히 대행대왕비의 빈전에 제사를 올렸다. 그 제문에,
"애자(哀子) 사왕(嗣王) 신(臣) 모(某)는 감히 대행현열왕대비(大行顯烈王大妃)의 영좌 앞에 밝게 고합니다. 아, 보잘것없는 소자는 일찍이 재앙을 입었고, 나이가 약관이 못 되어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밤낮으로 우러르며 길러 주신 큰 은혜를 갚을 대상은 오직 자성(慈聖)뿐이었으니, 끊임없이 모시고 무궁한 수명과 복록을 받아 뜻과 물질 모두 흠없이 봉양을 다하여 무구한 장수를 축원하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작은 탈로 인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어 소자에게 망극하고 세상이 다 끝나는 듯한 슬픔을 끼치셨습니까. 망망한 천지간에 울부짖음도 미치지 않고 슬픔은 독을 삼킨 듯하여 오장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소자가 어렵고 중대한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 어린 시절 이어서 선조(先朝)의 훈계와 뜻을 미처 알지 못한 것이 있었으나 성모(聖母)께서 가르치고 면려하심에 힘입었고, 모든 정사의 온당하거나 부당한 것에 대하여 내가 다 살피지 못하는 것이 있었으나 우리 성모께서 명하고 경계하심에 힘입었습니다. 걱정이 있을 때나 질병이 있을 때에도 오직 우리 성모께서 좌우에서 이끌어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셔서 소자로 하여금 위험과 고통과 전복의 지경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지난 무오년에 우연히 감기가 들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고 오래갈수록 더욱 고통스러웠는데, 오직 우리 성모께서 문득 재계하시고 노천에서 기도하시면서 아무개를 대신하게 해 주기를 청하셨으니, 오직 종묘 사직의 중요함만 생각하고 옥체(玉體)의 존귀함은 아예 잊으셨습니다.
아, 누구인들 어머니가 없겠으며 어느 어머니인들 모정이 없겠습니까만, 지극한 모자의 정과 사랑이 그 누가 우리 모자간만한 이가 있겠습니까. 소자가 지난 겨울에 앓았던 병은 성모께서 오래 전부터 미리 염려하시던 것입니다. 부스럼이 많이 돋아나고 증세가 때없이 변하여 밤낮으로 놀라고 걱정하신 것이 다른 때보다 갑절이나 더하여 하늘에 사무친 정성은 신명(神明)의 가호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편찮으신 징후가 도리어 순월(旬月) 사이에 위독해지셨습니다. 병상에 있던 나머지 마침내 밤낮으로 곁에서 간호하는 일을 다하지 못하게 된 것은, 실로 소자의 가없는 슬픔입니다. 아, 슬픕니다.
정사년에 잔치를 베풀어 드린 뒤로 세월이 이미 7번이나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사고가 연달아서 지금까지 한번도 다시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올해 갑자년은 바로 자의전(慈懿殿 인조의 계비 조씨(趙氏))의 회갑이 든 해입니다. 술잔을 올려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가 예의상 마땅히 있어야 하므로, 신하들이 진언하고 예관이 일을 추진하여 풍정(?呈)을 베푸는 일을 올봄에 거행하기로 이미 정하였습니다. 한 잔치 자리에서 양궁(兩宮)에 만년의 축수를 올리는 것이 소자가 날마다 늘 고대하여 온 것인데, 갑자기 이런 해독에 걸려 평소 맛있는 음식으로 받들던 것이 오늘날 영전에 올리는 제물이 되고 말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 안에서 내린 유교(遺敎) 수백 마디의 말씀은 바로 우리 성모께서 미리 써서 갈무리해 온 것이었습니다. 승하하시던 나라 대신에게 전하였고, 이어서 장례를 담당한 관원에게 명하여 모두 유교에 따라 일을 집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선릉(先陵) 왼쪽을 비워 두는 제도도 일찍이 자전의 가르침을 따라서 하였고, 복토(復土)의 역사도 크게 줄였으니, 백성들의 고생을 줄여주고 검약을 숭상하신 혜택이 더욱 중외에 미쳤습니다. 이에 대하여 어리석고 먼 지방에 사는 백성들도 삼가 그 덕음을 흠송하여 구슬프게 사모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더구나 소자와 같이 보살펴 주신 사랑을 늘 생각하면서 제대로 봉양하지 못한 한이 길이 가슴에 맺힌 자야 장차 어떻게 마음을 먹어야 되겠습니까. 아, 슬픕니다.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 산릉에 모셔야 할 시기가 다가와 발인할 날이 수십 일 안으로 임박하였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부여잡고 통곡하는 것도 점차 미칠 수 없게 되어 간략한 제사로 가없는 슬픔을 풀 뿐입니다. 우러러 바라건대, 존령(尊靈)께서 이곳에 강림하시어 소자의 정성을 한번 살펴 주소서. 아, 슬픕니다. 삼가 맑은 술과 제물을 차려서 올립니다."
하였다. 이날이 절일(節日)이었기 때문에 상이 직접 제문을 짓고 향을 살랐다. 제문의 내용이 매우 애절하였으므로 중외에서 보고 듣는 자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예조가 청하기를,
"인선왕후(仁宣王后) 상례의 예에 따라, 발인할 때에 배종하는 백관이 산릉에 가서 성빈전(成殯奠)에 참석한 뒤에 천담복(淺淡服)과 오사모(烏紗帽)와 오각대(烏角帶)로 개복(改服)하고 숭릉(崇陵)의 홍살문 밖에서 전알례(展謁禮)를 행하고, 산릉의 입주(立主)를 행할 때에 총호사촹본조 당상촹빈전 제조 각 1원과 승지촹사관이 모두 흑단령 차림으로 조금 멀리 떨어져서 입시하여 봉심을 전례와 같이 거행하고, 입주전(立主奠)이 끝난 뒤에 때맞춰 반우(返虞)하고 초우제(初虞祭)는 반우한 뒤에 혼전(魂殿)에서 거행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윤허하였다.
○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산릉의 일이 끝난 뒤에 안릉전(安陵奠)과 선릉에 고유(告由)를 거행해야 됩니다.≪오례의(五禮儀)≫에 내상(內喪)이 앞에 있고 외상(外喪)이 뒤에 있으면 신좌(神座)의 전물(奠物)을 아울러 진설하는 예가 있으나, 내상이 뒤에 있고 외상이 앞에 있을 경우에는 아울러 진설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는 대개 낮은 이가 높은 이를 이끌어오지 않는 의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졸곡 전에는 대중소의 모든 제사를 다 폐지하고 지내지 않으니, 선릉에 고유할 때에는 마땅히 전물이 없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새 능에 지금 막 안릉전을 올리게 되어 동시에 선릉에 고유하면서 유독 전물을 진설하지 않는 것은 실로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또 능의 역사를 마친 뒤에 고유하는 것도 이미 행한 규례가 없으니, 제문은 마땅히 산릉의 일을 다 마친 것을 고유하는 것으로 지칭해야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졸곡 전에는 모든 제사를 폐지한다는 글이 있다 하더라도, 안릉전과 선릉에 대한 고유를 동시에 거행한다면 똑같이 제전을 베풀지 않을 수 없다. 제문도 아뢴 대로 의거하여 지어 올리게 하라."
하였다. 어영대장 윤지완(尹趾完)이 아뢰기를,
"강화 유수 이민서(李敏敍)가, 백마(白馬)촹문수(文殊)촹진강(鎭江) 세 곳에 성을 쌓고 장봉(長峯)촹주문(注文) 두 섬에 진을 설치하여 강도(江都)의 문호(門戶)로 삼기를 청하였습니다. 대개 백마는 승천진(昇天津)에 있어서 요해지가 아닌 듯하나, 문수는 갑진(甲津)에 높이 솟아 강도를 내려다 보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성이 있어야 강도를 공고하게 할 수 있습니다. 또 떠내려가는 얼음이 강에 가득할 때에 적이 갑자기 이르면 앞에는 갑진이 있고 뒤에는 추격하는 기마병이 있게 되는데, 이런 때에 문수에 성이 있게 되면 그곳으로 나아가 굳게 지키다가 편리한 때에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장봉과 주문이 실로 문호인 듯하지만 문수가 가장 급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강도의 군향(軍餉)은 7만 석에 불과한데 만약 전쟁이 일어나는 날이면 며칠이나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연안(延安)촹배천(白川) 등지에 해창(海倉)을 설치하고 이어서 창성(倉城)을 쌓고 조적(??)을 유치하여 강도의 위급한 상황을 구제할 수 있게 한다면, 만전의 방책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 무산부(茂山府)를 신설하였다. 무산은 옛날 병마첨사진(兵馬僉使鎭)이었는데, 함경 감사 이세화(李世華)가 지역이 요해처이니 마땅히 부를 설치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에 비로소 읍을 설치하고 관아를 두었다.
○ 4월. 상이 형조 수안(囚案)을 보았는데, 죄수의 숫자가 80명에 이르렀으므로 적체된 이들을 소결하여 죄수를 불쌍히 여기는 은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 6월.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가 청대하여 아뢰기를,
"산산(蒜山) 새 진은 해서에서 가장 좁은 어귀로서 비상시에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긴 제방을 진에서부터 대야도(大也島)까지 쌓으면 그 둘레가 상당히 넓어서, 그 속의 갈대밭과 하천을 개간하여 경작하면 3백 석 수확할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명혜(明惠)촹정숙(貞淑) 두 옹주의 궁방에 속하였다고 하는데, 마땅히 두 궁방으로 하여금 각각 1백 석 땅을 점유하게 하고 나머지는 본진에 소속시켜야 되겠습니다.
금위영이 새로 매입한 영암(靈巖) 지역의 소안(所安)촹비미(飛迷) 두 작은 섬은 전지와 대지가 합쳐서 70결이니, 다른 영의 사례에 의거하여 면세하고 보살펴서 대나무를 쓸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윤허하였다. 이어서 김석주에게 이르기를,
"전에 형조의 문안을 보니, 백년(百年)의 살인 옥사가 있었다. 경도 그것을 들었는가? 그 사연은, 어미에게 간부(奸夫)가 있어 그 아비가 통분해하다가 병을 얻었고, 죽을 때에 그 아들에게 꼭 원수를 갚아달라고 유언하였다. 어느 날 간부가 어미의 방에 있는 것을 보고 백년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또 차마 아비의 유언을 저버릴 수 없어서 드디어 칼로 찔러 죽였는데, 일이 발각되자 스스로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하니, 김석주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한서(漢書)≫를 보니, 경제(景帝) 때에 처가 남편을 죽이자 그 아들이 그 어미를 죽인 일이 일어났을 때에 경제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는데, 마침 어린 무제(武帝)가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그 어미가 남편을 죽인 즉시 어미의 자격이 없게 됩니다. 어찌 죽이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경제가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 옥사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상도 마음속으로 가련하게 여겼다. 뒤에 가뭄으로 인하여 소결할 때에 특별히 석방하였는데, 해조가 불가하다고 주장하여 드디어 유배하였다.
○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형조 판서 박신규(朴信圭)가 아뢰기를,
"내수사의 수본(手本)을 가지고 조사(朝士)에 대한 추고를 늘 형조로 곧장 내리고 있는 것은 일의 체모가 매우 미안합니다."
"이는 예로부터 내려온 관례이다."
하였다. 영의정 김수항 등이 다 아뢰기를,
"정원은 임금의 명령을 발표하는 관사입니다. 모든 명령에 대하여 어찌 참여하여 알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다른 경로를 말미암는다면 정도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는 마땅히 정원으로 하여금 다 알게 하리라."
하였다.
○ 7월. 영의정 김수항이 청대하여 말하기를,
"지금 백성들의 힘은 다 소진되고 국가의 회계는 다 고갈되었습니다.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달리 구제할 방법이 없고, 오직 씀씀이를 아끼고 불요 불급한 지출을 절약하는 것이 제일의 급선무입니다. 모든 그다지 긴요하지 않은 일에 있어서는 비용의 다소를 논할 것 없이 모두 다 정지해야 되겠습니다.
삼가 듣건대, 근자에 내전에서 내린 서법(書法)을 운각(芸閣)으로 하여금 개간(開刊)하게 하여 지금 막 충주(忠州) 지역에서 석재를 모으고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을 마땅히 먼저 정지해야 됩니다. 성상께서 매양 무익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어 경비를 절약하는 쪽으로 노력하시고, 이어서 유사들에게 대소사의 불요 불급한 지출을 정지하도록 신칙하신다면, 어느 정도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씀씀이를 절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은 국가를 소유한 자가 가장 먼저 힘써야 될 일이다. 비록 평상시라 하더라도 마땅히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인데, 하물며 올해 농사 작황이 이런 상황에서이겠는가. 운각에서 책을 간행하는 일을 정지하게 하라. 그리고 모든 불요 불급한 지출에 관계되는 일은 일체 정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상이 가뭄을 민망하게 여겨 하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심한 가뭄의 재해가 없었던 해가 없지만 어찌 오늘날과 같이 심한 적이 있었겠는가. 바로 지금 온갖 곡식이 여무는 때를 당하여 한 달이 지나도록 햇볕이 작열하여 사나운 더위가 더욱 혹독해지고 있다. 여러 명산 대천에 두루 빌어서 규벽(圭璧)이 이미 다하였고, 경외의 죄수들도 많이 소결하여 석방하였다. 그리하여 하루 이틀 기다리며 단비가 내리기를 바랐는데, 가을이 이미 이르러서 다시 바랄 것이 없게 되었으니,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타고 민망스럽다. 가만히 따져 보면 그 잘못이 모두 내 한 몸에 있기에, 밤낮으로 두려움에 떨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생각건대, 예로부터 재앙을 부르는 길이 실로 단서가 하나가 아니지만, 또한 원통하고 억울한 기운이 위로 하늘의 화기(和氣)를 범한 것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한 사나이와 한 여인이 원통함을 호소한 것이 오히려 3년의 가뭄을 불러왔었는데, 하물며 지금 감옥에 적체된 허다한 죄수들 중에 어찌 한 사람도 원통함을 품고 있는 자가 없을 수 있겠는가. 지난번에 심한 가뭄을 인하여 조금 소결을 한 적이 있었으나, 이는 유배자와 경범자들에 한하여 간략하게 용서하는 은전을 시행한 것에 불과하였으니, 하늘의 진노에 실질로써 대응하고 화기를 맞아들이는 도리가 전혀 아니었다. 나의 생각으로는, 형조에 현재 구속 중인 죄수들을 죄를 다 심리하였거나 하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특별히 전체적으로 탕감하는 은전을 베풀어 다 사면하여 극진한 도리를 쓰지 않음이 없다는 뜻을 보이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대신들은 반드시 나의 뜻이 지나치다고 하지 말라. 지금의 혹독한 가뭄은 예전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니, 이는 바로 한갓 평상적인 법조문이나 고수하면서 고식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해조로 하여금 이러한 뜻을 가지고 즉시 대신에게 물어서 계품하게 하라."
하였다.
○ 이전에 호조 참판 서문중(徐文重)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하고, 또 말하기를,
"누적(漏籍)과 범도(犯屠)의 죄인들은 다 강제로 변방으로 이주시키고 도망하여 돌아온 자는 사형에 처합니다. 강제로 이주된 백성은 예로부터 석방되어 돌아올 길이 없기 때문에 특별히 그 법을 중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에는 모두 사면에 들어가 유배와 별 차이가 없고, 다만 도망의 경우만 그 도수(度數)가 피차 같지 않습니다. 또한 그 제도를 개정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의논을 내렸다. 이에 영부사 김수흥이 논의하기를,
"부모로서 자식을 죽인 자는 짐승만도 못합니다. 따라서 단지 유배하는 처벌만 가하는 것은 참으로 의심스럽습니다. 옛사람이 형벌을 제정한 뜻이 반드시 천륜(天倫)에 근본하였기 때문에 비천하거나 어린 자가 존귀한 자에 대해서 범행하였을 경우와 존귀한 자가 비천하거나 어린 자에 대해서 범행하였을 경우에 처벌의 경중이 아주 달랐습니다. 선조에서 사죄(死罪)로 결단한 것은 비록 악을 징계하는 뜻이 있기는 하지만, 존비의 엄격한 의리를 어김이 있을 듯합니다. 변방에 이주한 백성이 도망했을 때 일률(一律)로 결단한 것은, 바로 조종조에서 변방을 채우는 것을 중하게 여긴 뜻이 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누적과 범도에 해당된 죄인들이 한때의 제도에 의하여 온 가족이 변방으로 들어가 살게 된 자가 전후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법전에 실린 경우 외에도 혹시 사목(事目)을 인하여 징려(懲勵)된 자를 다시 추가로 참작하여 정한다 해도 지나치게 많은 데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니, 절대로 사면령이 있을 때에 심리하지 말도록 한다면, 비록 일죄(一罪)의 법률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법을 혼란시키지는 않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였고, 여러 대신들의 의견도 대략 같았다. 상이 남구만에게 묻기를,
"사변(徙邊)된 자가 한 번 도망간 죄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너무 무거운 듯하다. 3차례 도망가야 비로소 일죄로 결단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남구만이 아뢰기를,
"사변에 대한 법은 일죄보다 한 등급 아래이므로 한 번 도망갔을 때 본죄에 한 등급을 추가하여 일률로 논하는 것입니다. 만약 3번 도망간 뒤에 비로소 일률을 가한다면 사변의 법이 너무 헐한 데로 돌아가게 됩니다. 다시 사변에 대한 법을 다듬어서 사면에 관련시키지 말도록 하고, 한 번 도망하면 바로 사죄로 논해야 되겠습니다. 호적에서 빠지거나 소를 도살한 자들은 다시 그 형벌을 감하여 법망이 너무 조밀하여 걸핏하면 범법하게 되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부모로서 그 자식을 죽인 자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법조문에 의거하여 시행하되, 만약 정상이 극악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처단하지 않을 수 없는 자에 대해서는 수시로 계품하여 결정하도록 하라. 사변(徙邊)된 자들은 절대로 사면에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 대신 2품 이상과 삼사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가뭄이 심한 것을 이유로 재앙을 완화시킬 방책에 대하여 물었다. 인하여 조용히 이르기를,
"오늘 제신들이 입시하였으므로 내가 마땅히 진심을 토로하여 말할 것이니 제각기 분명하게 들으라. 지금 계속되고 있는 극심한 가뭄은 실로 일찍이 없었던 것인데, 그 연유를 따져보면 모두 과인이 부덕한 소치이다. 따라서 자신에게 돌이켜 살피지 않고 신하를 책망하는 것도 또한 심히 부끄럽다. 다만 조정의 논의가 점점 괴리되고 마음과 의지가 떠나가고 막혀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수습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조정이란 사방의 근본인데 기상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한 가지 일이라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는가. 옛말에 이르기를 '화기(和氣)는 상서(祥瑞)를 불러오고 괴기(乖氣)는 재앙을 불러온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재앙이 여기에서 말미암지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는 전국 시대의 선비였는데, 그들 또한 국가의 급선무를 먼저 생각하고 사적인 원수를 뒤로 하였으니, 오늘날 조정의 관료들이야말로 어찌 염파와 인상여의 죄인이 아니겠는가. 마땅히 각각 마음을 고쳐먹고 구습을 혁신하여 오로지 멸사 봉공의 일념으로 국가의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는 의리를 생각하도록 하라. 이것이 내가 제신들에게 크게 소망하는 바이다."
하니, 신하들이 일시에 일어나서 절을 하며 아뢰기를,
"성교가 정녕하시니 누군들 두려운 마음으로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금년에 삼남(三南)에서 진상하는 물건은 특별히 봉납을 정지시키라. 모든 절감할 일들에 대하여 미리 충분히 계획하여 처리하라. 종묘의 제향은 절감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영소전(永昭殿)의 제향은 특별히 반으로 줄여 절약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8월. 예조가 말하기를,
"국휼(國恤)이 나서 졸곡(卒哭)이 지난 뒤에 사자(士子)가 학교에 들어갈 때 백의(白衣)와 흑두건(黑頭巾)을 착용한다는 말은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선묘(宣廟) 임신년의 국휼 때에는 백관의 의복 색깔을 바꾸어 백모(白帽)와 백대(白帶)를 착용하기만 하였고 사자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또 기해년의 국휼 때에 본조가 태학(太學)에 공문을 보내 말하기를 '졸곡 뒤에는 선인(選人)이 조건(?巾)과 청대(靑帶)를 착용하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주자의 설이 있고, 생원촹진사가 학교에 들어갈 때 흑두건을 착용하는 것 또한 현재의 제도이니, 이것에 의거하여 거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면, 지금 사자가 학교에 출입할 때에 흑두건을 쓰는 것은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다만 과장(科場)에 출입할 때에도 흑두건을 쓰는 것이 과연 도리에 합당한지는 알지 못합니다. 만약 선묘조에서 개정한 것을 따라 논한다면 조관(朝官)이나 사자가 다름이 있어서는 안 되고, 주자가 '선인은 조건과 청대를 착용해야 된다.'고 한 말을 따른다면 학궁(學宮)이나 과장을 논할 것 없이 마땅히 흑건과 흑대를 착용해야 될 듯합니다. 신의 조에서 감히 억측으로 단정할 바가 아니니, 대신에게 수의하소서."
하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판부사 이상진(李尙眞)이 말하기를,
"선인의 경우 부사(?祀)를 지내고 최복을 벗고 난 뒤에 조건과 청량삼(靑?衫) 차림으로 상을 마치는 것이 비록 주자의 정론(定論)이기는 하지만, 지금 유생은 이미 졸곡이 지난 뒤에 상복을 제하는 절차가 없어 항상 백립(白笠)과 백대(白帶)를 착용하고서 상을 마치고 있습니다. 유독 과장에서 착용하는 건(巾)과 대(帶)만 특별히 흑색으로 갖추는 것이 참으로 주자의 뜻에 합당한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주자가 정한 군신(君臣)의 복장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도 아직 준행하지 않고 있는데, 굳이 고금의 타당성의 기준이 다른 유복(儒服)을 취하여 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례의≫ 가운데 조신(朝臣)이 오모(烏帽)를 쓰는 제도가 이미 변하여 백모(白帽)를 쓰도록 하였으니, 유생의 흑건도 마땅히 백건으로 변경하여야 될 것입니다. 선묘조에서도 이미 조사의 모자를 변경한 적이 있으니, 지금에 성상께서 또다시 유생의 두건을 변경한다면 실로 선왕의 뜻을 준수하고 법도를 동일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참으로 결단하여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다만 지금의 사정이 군색하고 급박하니, 차라리 정시(庭試)와 회시(會試)를 기다렸다가 미리 알려서 백건으로 변경하도록 하는 것이 사리에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백관의 복색(服色)은 이미 변경하였는데, 유독 사자들만이 흑건을 착용하고 학교와 시험 장소에 출입하게 하는 것은 실로 미안한 점이 있다. 앞으로는 백의와 백건을 착용하는 것으로 똑같이 제도를 정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 상이 과장이 엄격하지 못하여 과거를 치른 뒤에 많은 사람들의 말이 있다 하여 정원으로 하여금 시관을 신칙하게 하고, 또 시험지의 품질이 너무 좋은 것을 쓰는 것을 금지하게 하였다.
○ 9월. 상이 영모전(永慕殿)의 삭제(朔祭)를 친히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혼전의 준여(?餘)를 직접 살피지 못하였으니 잘못한 것이 있다 한들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앞으로는 오향(五享)과 속절(俗節)의 예에 따라 제사를 지낸 뒤에 각종 제물을 내전으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백성들의 안락과 고통은 수령의 현부(賢否)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혹 하직할 때에 직접 경계하고 신칙하였으니 그 뜻이 우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임지에 도착한 뒤에 관청의 사무를 내던져놓고 있고, 한 사람도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직무에 진력하는 이가 없으니, 특별한 방법의 징계가 없을 수 없다. 앞으로는 직접 전교를 받든 수령으로서 전최(殿最)가 하위에 매겨진 자에 대하여는, 해조로 하여금 영영 서용하지 않게 하고 연례의 세초(歲抄)에서도 절대로 거론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주강에 나아갔다. 상이 강관과 더불어 허씨(許氏)가 '마음을 담박한 곳에 깃들이게 한다 [棲心淡泊]'라고 한 말이 우리 유가(儒家)와 배치된다는 것에 대하여 논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것만 알고 감응하여 통하는 것은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병통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또 '관문(關門)을 닫고 상려(商旅)의 통행을 중지시켜 미약한 양기(陽氣)를 기르게 한다.'라는 말에 대하여 논하고서, 상이 이르기를,
"범범하게 정좌(靜坐)할 뿐이면 좌선(坐禪)이나 참선(參禪)과 무엇이 다르 겠는가. 반드시 경(敬)을 주로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였다.
○ 하교하기를,
"우리나라는 인재를 취하는 길을 오직 과거에 두고 있다. 따라서 이 과거는 선비들이 출신(出身)하는 데 첫 관문이고, 인재의 득실 또한 고시관의 선함과 선하지 않음에 달려 있으니, 신중하게 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앞으로는 십분 신중하게 가려서 의망하도록 하라."
하였다.
○ 10월. 승지를 보내 봉조하 송시열에게 유시하여 부르기를,
"경이 황급히 도성을 떠나고부터 세월이 빨리 흘러 어느덧 1년이 지났으나 마음 한구석에 서운한 점은 조금도 풀어진 적이 없었다. 지금 전라 감사의 장계를 보니, 경이 슬하의 병환을 보기 위하여 경기 지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와 있다고 하였는데, 나 소자가 기다리고 사림이 기뻐함이 어떠하겠는가. 그 밖의 이야기는 가까운 시일 안에 직접 대면하여 할 것이므로 지금은 번거롭게 이르지 않겠다. 부디 목이 타는 것처럼 바라는 나의 뜻을 본받아서 근시(近侍)와 함께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대신이 올라올 때 으레 해조에서 사람과 말을 차정하는데, 송 봉조하는 늘 그것을 불안하게 여겨 사적인 행차로 왕래하니 추운 계절에는 반드시 감기에 들겠기에 내가 염려하였다. 수레와 가마를 타고 올라오게 할 일로 하유하라."
하였다.
○ 예조가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연제일(練祭日)에 변제(變除)하는 절목(節目)에 대하여 대신들에게 수의하기를 청하였다. 김수항과 정지화가 말하기를,
"연제 뒤에 대전(大殿)과 중전(中殿)의 내시 이하 액정(掖庭)의 여러 사람들이 이미 상의 복을 따라 그대로 백의(白衣)촹백모(白帽)촹포과대(布?帶)를 착용한다면, 산릉(山陵)촹혼전(魂殿)의 내시 이하는 대비전 내시 이하가 압존(壓尊)으로 길복(吉服)을 입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갑인년에 천담복(淺淡服)촹오모(烏帽)촹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하는 것으로 절목을 의논하여 정한 것은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에 꼭 잘못된 관례를 구차하게 따를 필요는 없겠습니다. 대전 내시 이하의 복색에 의거하여 똑같이 마련하도록 하소
하자, 김수흥촹이상진촹남구만 등도 김수항 등의 말과 뜻을 같이 하였으므로 그 말에 따라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 11월.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 대왕대비전의 주갑 탄신일(周甲誕辰日)이 마침 이때에 당하였으므로, 경하하는 예는 베풀지 못하고 다만 반사(頒赦)만 하게 하였다. 옛말에 '우리 집의 늙은이를 늙은이로 잘 모신 뒤에 남의 집 늙은이에게까지 미치게 한다.'고 하였으니, 특별한 방법으로 은택을 미루어서 상하가 다같이 경축하는 뜻을 보이지 않을 수 없겠다. 조신(朝臣)과 서민, 공사천(公私賤)을 논하지 말고 나이 80세 이상인 자를 특별히 가자하고, 인조조에서 일찍이 시종의 관직을 지낸 인원에게 모두 음식물을 하사하라."
하였다. 뒤에 또 인조조의 상신 이행원(李行遠)촹이시백(李時白)촹이후원(李厚源)의 처가 아직 생존해 있는데, 그들이 대왕대비전에게 외명부(外命婦)가 된다는 이유로 모두 음식물을 하사하였다. 그 밖에 고 대신이나 재신(宰臣)의 처로서 나이 70세 이상인 자를 모두 존문하고 구휼하게 하였다.
○ 12월. 상이 뜸질을 받았다. 약방 도제조 김수흥이 아뢰기를,
"각 군문의 장관에 대한 삭시사(朔試射)를 시행할 때 유엽전(柳葉箭)을 25개 이상 명중시킨 자와 연이어 3차 거수(居首)한 자는 별도로 시상하도록 하는 일을, 마땅히 병조로 하여금 다시 품지(稟旨)하여 정식으로 삼게 하여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사가 없는 장관으로서 시사(試射)에서 거수한 자에 대하여 전에는 상을 내린 적이 없었다가 기미년간에 처음으로 결정하여 시상하도록 하였다. 앞으로는 유엽전을 25개를 명중시킨 자는 전례에 따라 말을 하사하고, 26개 이상을 명중시킨 자는 변장(邊將)을 제수하고, 연이어 3차례 거수한 자는 단자(單子)에 별도로 사실을 기록했다가 별도로 논상(論賞)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어서 이르기를,
"무신(武臣)은 마땅히 사예(射藝)를 급선무로 여겨야 하는데, 근자에 품계가 높은 무신이 사예를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 익히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매번 삭시사(朔試射) 때마다 적중하는 숫자가 장관(將官)들보다 떨어지니 일이 참으로 잘못되었다. 무변(武弁)들을 신칙하여 전날의 습관을 답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신이 효묘(孝廟) 때에도 전교를 받든 적이 있는데, 품계가 높은 무인이 무예를 다 포기하고 오직 주색을 일삼고 있어 심히 개탄스럽다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경계시키고 신칙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조총(鳥銃)도 병가(兵家)의 장기(長技)이다. 그런데 무인들이 포수의 업이라고 하여 학습하려고 하지 않고 있다. 인묘(仁廟)가 일찍이 양국의 대장으로 하여금 어전에서 방포(放砲)하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무인들에게 권과(勸課)하는 뜻이 있었다. 효묘도 일찍이 유혁연(柳赫然)에게 하교하기를 '조대수(祖大壽)는 항상 손가락에 깍지를 끼고 있어 나중에는 깍지와 손가락이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그 사람은 대장이면서도 이와 같이 하였는데, 우리나라의 무인들은 품계가 조금 높기만 하면 사예를 게을리하니 참으로 통탄스럽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러한 폐단이 더욱 심하니, 특별히 당부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한 뒤에도 당상 무인이 전과 다름없이 적중률이 저조하면, 이는 조정의 명령을 안중에 두지 않아 사예를 익히지 않은 것이니, 마땅히 별도의 경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11년(을축, 1685)
○ 1월. 한성부가 아뢰기를,
"요행을 바라는 백성들이 더욱 많아지고 쇠잔한 백성들은 더욱 곤궁해지고 있습니다. 경성의 수만 호가 곡식 한 말이라도 납입하여 국가의 예산을 도운 것이 없고, 또 방역(坊役)에 이르러서도 모두 모면하여 빠지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대군(大君)촹왕자촹공주촹옹주촹대신의 집을 제외하고, 사부(士夫)로서 역이 있건 없건을 막론하고 제각기 장정 1명을 내도록 하는 것으로 정식을 삼으소서."
하였는데, 묘당의 의견도 그와 같았으므로 상이 따랐다. 이로부터 도성의 백성들이 크게 힘입은 바가 있었다. 한성부가 또 아뢰기를,
"지패(紙牌)는 쉽게 마모되니, 마땅히 목각(木角)으로 바꿔야 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흉년으로 소요가 있었기 때문에 단지 서울에서만 먼저 시행하였다.
○ 2월. 궁녀 25인을 내보냈다. 이는 가뭄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 3월. 하교하기를,
"어진이를 등용하는 데에 지역의 차별이 없는 것은 옛날의 인재를 쓰는 도리였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여, 서북 지방에 대해서는 먼저 업신여겨 청선(淸選)에 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방 바다 안의 땅에 사는 사람들이 나라의 신하 아닌 이가 없는데, 인재를 등용하는 일에 있어서 어찌 이와 같이 현격한 차별을 할 수 있겠는가. 이조로 하여금 뽑아서 서계(書啓)하여 청직에 통할 수 있도록 하라. 무사를 올려서 발탁하는 일도 병조로 하여금 착실하게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 7월. 가뭄이 심하여 상이 친히 사직에 빌었으나 비가 올 기미가 전혀 없었다. 비망기를 내리기를,
"나의 성의가 천박하여 천심(天心)을 돌리지 못하고 있으니, 잠깐 직접 기도하고서 비가 오기를 기다려서는 안 되겠다. 남교(南郊)에 대신을 보내고 용산(龍山)과 저자도(楮子島)에 중신을 보내어 따로 날을 가리지 말고 연달아 기우제를 지내되, 제문 가운데에 나 자신을 책망하는 뜻을 특별히 말을 만들어 첨입하라."
하였다. 또 비망기를 내리기를,
"도움을 구하는 하교를 선포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몸을 기울여 들은 지가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아름다운 말이 들리지 않고 있다. 옥당은 논사(論思)를 맡고 있는 처지에 있으니 내가 빠뜨리고 잘못하는 것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앞서 말해야 되는데도 아직까지 감감 무소식이고, 양사도 진언하는 일이 없다. 이는 모두 나라는 존재가 함께 일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참으로 부끄럽게 여기고 탄식하는 바이다."
하였다.
○ 전교하기를,
"모든 관사가 묘시(卯時)에 출근하여 유시(酉時)에 퇴근한다는 것은 법조문에 실려 있고, 계하한 공사에 대하여 3일 안에 복주해야 된다는 것도 또한 전교를 받은 것이 있다. 그런데 온 관료들이 다 직무에 태만한 문제가 갈수록 더 심해지니 매우 온당하지 않다. 앞으로 법전에 의거하여 틀림없이 묘시에 출근하여 유시에 퇴근하도록 하라. 이렇게 신신 당부했는데도 다시 전날의 습관을 답습하면서 봉행하지 않을 경우 엄중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뜻을 각사에 분부하라."
하였다.
○ 8월.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참찬 신정(申晸)이 상에게 아뢰기를,
"대신이 체직되면 으레 중추부에 부직하는데, 차례를 따라서 내려오므로 지금 원임 대신 민정중과 이상진의 경우 모두 지사(知事)에 부직되었습니다. 지사는 2품직으로서 의관촹역관 등 잡직도 다 얻게 되는 자리이니 참으로 대신을 대우할 자리가 아닙니다. 녹봉도 그것에 따라서 내려가므로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이와 같아서는 안 되니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좌의정 남구만에게 묻기를,
하자, 남구만이 아뢰기를,
"영돈녕은 본래 자리가 하나인데, 국구(國舅)가 둘이 있을 때에는 역시 가설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말한다면 영중추를 마땅히 가설하여 대신을 처우해야 되겠습니다만, 대신이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않고 영중추를 4, 5자리 더 만드는 것은 또한 너무 많을 듯합니다. 중추부로 보내는 인원의 다소에 따라서 판중추를 가설하여 정1품의 봉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8권 숙종조 8
12년(병인, 1686)
○ 1월. 영부사 김수홍이 상에게 아뢰기를,
"봉조하 송시열이 금년에 나이가 만 80세가 되었습니다. 조정의 신하에 대해서는 간혹 가자(加資)하는 규례가 있지만, 이에게는 더 가자할 것이 없으니 특별한 은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옷감과 음식물을 특별히 제급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봉조하가 만 80세라니, 지금 비로소 듣고 알게 되었는데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옷감과 음식물을 특별히 넉넉하게 제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호조가 미두(米豆) 각 15석, 돼지 2마리, 민어(民魚) 20마리, 석어(石魚) 30속(束), 면주(綿紬) 10필, 면포(綿布) 20필을 보내 줄 것을 계청하였다.
○ 2월. 예조가 예고제(預告祭)의 축문 머리말에 '효자(孝子)'나 또는 '애자(哀子)'라고 일컫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대신에게 수의하기를 청하였다. 이전에 향실관(香室官)이 담제(?祭)의 축문 가운데 '애자'라고 썼으므로 예고제의 축문에 이르러서도 '애자'라고 쓴 것에 대하여, 승정원이 '효자'라고 써야 될 것을 잘못 '애자'라고 썼다고 하여 해당 관리를 추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특별히 잡아다가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향실로 하여금 의궤(儀軌)를 내어 상고하게 하니, 신축년 효종대왕의 상을 마친 뒤에 담제와 고동가제(告動駕祭)의 축문에 다 '효자'라고 썼다고 하였다. 다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논의에 '담제 축문에 '효자'라고 쓰는 것은 예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듯하니, 의궤가 비록 이러하다 하더라도 정식을 삼기는 어려울 듯하다. ≪의례(儀禮)≫와 ≪가례(家禮)≫에서는 축문의 말에 '애자'를 바꾸어 '효자'로 쓰는 경우는 부제(?祭)를 지낼 때이니 지금 비록 담사(?祀)를 지내기는 하였으나 부묘(?廟)하기 전이니 곧장 효자라고 쓰는 것은 역시 의례 절차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는 신축년의 의궤 외에 근거할 전례(典禮)가 없었으므로 대신에게 수의하기를 요청한 것이다. 영의정 김수항과 영부사 김수흥이 말하기를,
"≪의례≫와 ≪가례≫를 상고하니, 모두 부제 때에 '효자'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는 바로 졸곡 뒤에 행하는 부제입니다. 졸곡을 마치고 부제를 거행하고 대상(大祥)을 마치고 새 신주(神主)를 옮겨 사당으로 들이는 것은 본래 고금에 통행해 온 예입니다. 그런데 ≪국조오례의≫에는 졸곡 뒤에 부묘(?廟)하는 예절이 없고 부묘하는 예식을 담제를 지낸 뒤에 거행하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부제의 절차가 비록 고례(古禮)와 같지 않으나, 부묘하기 전의 축문의 말에서 '애자'를 바꾸어 '효자'로 쓰는 것은 ≪의례≫와 ≪가례≫의 조문에 위배됩니다. 여러 사람들의 논의에서 말한 것도 반드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다만 그와 배치되는 전거가 있으니, 잡기(雜記)에서 '제례에서는 효자 효손이라고 일컫고, 상례에서는 애자 애손이라고 일컫는다.'고 하였고, 그 주석에서 '제사는 길제(吉祭)이다. 졸곡 이후는 길제이므로 축사(祝辭)에서 효자라 일컫고, 우제(虞祭) 이전은 흉제(凶祭)이므로 애자라 일컫는다.'고 하였습니다. 의절(儀節)에서는 우제에서부터 담제에 이르기까지는 선조(先祖)에게는
하였다. 남구만은 우선 담제에 의거하여 '애자'라고 일컫기를 청하였다. 상이 김수항 등의 의견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 예조 판서 여성제(呂聖齊)가 청대하여 말하기를,
"계해년 가을에 이듬해 봄에 양궁(兩宮)에 잔치를 올릴 일을 품정하였는데, 국가가 불행하여 자성(慈聖)께서 승하하셔서 마침내 설행하지 못하였으니, 여러 신하들의 통한을 어떻게 다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국가의 예산이 고갈되었으므로 평소에도 양궁에 잔치를 베풀어 드리지 못하였고, 또 자의전(慈懿殿)의 회갑날 한꺼번에 잔치를 베풀어 올리려던 계획도 이루지 못하고 마니, 마음속의 지극한 통한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다."
하자, 여성제가 아뢰기를,
"지금은 이미 부묘(?廟)의 예식도 지나갔으니, 마땅히 좋은 날을 잡아서 설행해야 되겠습니다. 지난 갑자년에 봉조하 송시열이 수의 속에서 또한 부묘가 지난 뒤로 물려서 행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하였습니다. 풍정(?呈)과 진연(進宴) 중에서 다시 아뢰어 정한 뒤에야 거행할 수 있겠으나, 풍정으로 호칭한다 하더라도 번잡한 형식을 줄이고 절약하는 쪽으로 힘쓰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풍정으로 정하여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 3월.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할 때에 하교하기를,
"지존(至尊)의 회갑을 맞는 것은 고금에 드문 일이다. 지금 풍정을 설행하려 하는데, 자전의 하교에서 매번 거듭된 가뭄에 마음을 쓰시어 기필코 쓸데없는 경비를 줄이려 하시니, 이 뜻을 도감에게 신칙하라."
하였다. 이에 예조 판서 여성제가, 외명부(外命婦) 중에서 조정의 문무관 정2품 이상과 공신촹삼사촹장관촹육승지의 처로서 응당 들어와 참예할 자를 제외한 나머지를 감하여 번다한 형식을 줄이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 4월. 주강에 나아갔다. 집의 서종태(徐宗泰)가 말하기를,
"능에 행행하였다가 환궁할 때에 교장(敎場)에서 수레를 머물렀습니다. 태복 정(太僕正)이 채찍을 올리기 위하여 수레 뒤편에 서 있었는데, 젊은 환관 하나가 마치 종에게 하듯 꾸짖고 떠밀어서 하마터면 땅에 고꾸라질 뻔하였습니다. 환관의 패만한 버릇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조사하여 처벌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처음에는 추고하게 하였는데, 서종태가 다시 간쟁하자 상이 그제서야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서종태가 또 말하기를,
"황창 부위(黃昌副尉)의 집에 상사(喪事)를 돌보러 간 중사(中使)가 사건을 인하여 서계(書啓)하고서 양주 목사(楊州牧使)를 추고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전에 볼 수 없었던 일입니다. 어찌 감히 법도를 넘어 이토록 무엄하게 조사(朝士)를 경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가의 법에 오직 환관이 법도를 넘지 못하게 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제도로서 종묘 사직이 편안하게 계승되는 데에 기여한 바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이것과 더불어 다 무너지게 되었으니 그 우려됨을 이루 다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국가에 화란을 끼치는 것은 어느 것이나 작은 시초를 미리 방비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저 교만하고 방자한 버릇을 엄중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고 다시는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곤란하게 여기면서 이르기를,
"다른 고을에서는 다 일을 담당할 장정을 보냈는데 유독 양주 사람만 오지 않았으므로 서계하여 이 일에 대
하자, 서종태가 아뢰기를,
"중사의 처지로서는 다만 사실에 의거하여 진계(陳啓)하여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더구나 양주 목사는 품계가 낮지 않은데, 그자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에 대하여 매번 옹호하는 표정을 보이시니 신은 실로 민망하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다만 그 일의 상황을 말하였을 뿐이다. 옹호하였다는 말은 나의 본의를 모른 것이다."
하고, 이에 따랐다.
○ 주강에 나아갔다. 지경연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시종신의 아비로서 나이 70세가 된 자에 대하여 초계(抄啓)하여 가자하는 일은 법전에 해당 조문이 실려 있지 않은데, 해마다 당연히 하는 것처럼 하니 실로 의의가 없습니다."
하니, 판부사 민정중은 이제부터 정식으로 하자고 청하였다. 이에 상이 금년에 한하여 초계하라고 명하였다. 이민서가 또 아뢰기를,
"높은 반열에 있는 자에게 자식이 시종신이 된 것으로 인하여 다같이 가자하는 것은 또한 매우 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은전을 미루어 주는 전례는 마땅히 통정의 품계에 그쳐야 하니, 가선 이상은 논하면 안 된다."
하였다.
○ 4월. 비망기로 이르기를,
"근래에 국가에 사고가 많음으로 인하여 풍정(?呈)의 성대한 예식을 설행하지 못하여 나의 마음이 항상 서운하였다. 어제 삼가 대왕대비전에 상수(上壽)의 예식을 거행하여, 자손들이 다 모여 밤이 이슥하도록 모시고서 잔치를 열고 술잔을 들고 장수를 경하하여 화목한 분위기가 흐뭇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다. 어찌 이 기쁜 마음을 이루 다 이기겠는가. 옛날을 더듬어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슬픈 마음이 치밀어 오른다.
이어서 생각건대, 지존이 회갑을 맞은 것은 경사스러움이 더없이 크니, 휘호(徽號)를 올리는 예가 비록 ≪실록≫ 가운데 나타난 것은 없지만 인정과 예절로 따져볼 때 그만둘 수 없겠다. 예관으로 하여금 즉시 여러 대신들에게 수의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영의정 김수항과 판부사 민정중은 예부터 내려온 전례(典禮)가 없다는 뜻으로 답하였고, 영부사 김수흥과 판부사 정지화촹이상진과 좌의정 남구만과 우의정 정재숭은 효성을 표현하려는 한 방법이 되겠다고 답하였다. 이에 전교하기를,
"지존의 주갑은 바로 자주 볼 수 없는 경사이다. 특별히 휘호를 올리는 일은 인정과 예문에 합당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식으로서 어버이의 장수에 대하여 한편으로 기뻐하고 한편으로 두려워하면서 최상의 방법을 쓰지 않음이 없으려는 지극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는 것이다. 해조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 주강에 나아갔다. 시독관 김창협(金昌協)이 문의(文義)를 자세히 풀이하고 경계를 빠짐없이 진달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 임진왜란 때에 진주성(晉州城)에서 의롭게 죽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그 중에서 김천일(金千鎰)촹황진(黃進)촹최경회(崔慶會)는 더욱 걸출한 자들입니다. 왜적이 전에 진주성에서 크게 패하였기 때문에 기필코 성을 함락하여 분풀이를 하려고 하였는데, 이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도모하여 굳게 지키고 힘껏 싸웠습니다. 그런데 황진이 먼저 적의 탄환에 맞아서 죽었고 김천일촹최경회와 여타 장사들은 모두 성이 함락되던 날 순절하였으니, 그 충렬(忠烈)은 참으로 늠름하며, 한 지방을 방어한 공적도 장(張)촹허(許)가 수양(?陽)을 지킨 것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고을 사람들이 그들의 절의를 사모하여 사당을 세웠고, 조정에서도 사당의 편액을 하사하여 포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영남에 사신으로 나갔을 때 진주를 들러 본 바로는, 사우(祠宇)가 퇴락하였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우에 이미 편액을 하사하였는데 향사하는 일이 폐지되고 거행되지 않는다고 하니, 소식을 들음에 한심하기 그지없다. 본도로 하여금 춘추의 향사를 각별히 거행하고 폐지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하였다.
○ 7월.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항이 아뢰기를,
"일전에 상방(尙方)의 서리를 차비문(差備門)에서 죄를 다스렸는데, 이는 비록 전례라고는 하나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에 똑같이 법을 적용하는 뜻이 아닙니다. 유사에게 회부하여 법에 따라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체모로 볼 때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전례가 있기 때문에 나도 그대로 따라서 쓴 것이다. 지금 유사에게 회부하여 다스리는 것이 또한 무엇이 어렵겠는가.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 8월.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비망기로 이르기를,
"아, 재해의 발생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만, 어찌 오늘날처럼 혹독한 적이 있었겠는가. 내가 즉위한 10여 년 사이에 두렵고 놀라운 사변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해마다 팔도에 똑같이 기근이 들었는데도 저축이 고갈되어 진휼할 길이 없으니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오직 농사가 잘 결실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바람과 서리와 우박과 눈의 이변이 장마가 계속된 나머지에 겹쳐 이르러 결실에 대한 희망이 끊겨 온 전야(田野)의 백성들이 어쩔 줄 모르고 헤매니, 백성의 부모가 된 처지에 안타까움이 어떠하겠는가. 밤낮으로 떨쳐버리지 못하는 근심과 두려움은 마치 내 몸에 아픔이 있는 듯하다. 또 음흉한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변괴가 이런 때에 또다시 나타날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다.
어떠한 화기(禍機)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기에 인자한 하늘이 재앙을 내려 나를 경계함이 이토록 지성스럽단 말인가. 하늘의 형상은 심원하여 쉽게 헤아리지 못하지만, 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잘못되면 하늘의 변괴가 위에서 응하는 법이니, 오늘날의 재앙은 과인의 재능과 덕이 부족하고 백성들에게 정사를 시행하면서 하늘의 마음에 크게 화합하지 못하여 불러오지 않은 것이 없다. 자신에게 탓을 돌리고 반성하면서 더욱 조심하고 두려워하느라 밥을 먹거나 쉴 때에도 마음이 편안하지가 않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하였다.
○ 경상도 김해군(金海郡)의 민전(民田)으로서 마구잡이로 궁둔전(宮屯田)에 들어간 것을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라는 특명을 내렸다.
○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항이 재해와 이변이 일어난 것을 이유로 면직을 요청하니, 상이 위로하고 타일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오늘날 백성들의 원망은 마구잡이로 수포(收布)의 대상에 소속시킨 데 지나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을 풀어 주고 화기(和氣)를 이끌어 내려면 이 일을 변통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진달한 바가 바로 나의 뜻과 일치한다. 속전(贖錢)을 거두는 한 가지 일을 속히 탕척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특별히 상의 하교를 중외에 반포하기를 청하니, 상이 드디어 또다시 비망기를 내리기를,
"애당초 이정청(釐正廳)을 설립할 때에 특별히 사목(事目)을 세워, 함부로 소속시키는 자는 사변(徙邊)의 법으
하였다. 상이 이어서 하교하여, 흉년이 든 것을 이유로 호남에서 삼명일(三名日)에 진상하는 물품을 명년 가을까지 한하여 특별히 탕감하게 하였다.
○ 12월. 옥당의 관원을 야대(夜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관이 임금이 법을 쓰는 도리에 대하여 조금 논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옳았다. 법을 쓰는 도리는 오직 공평하게 하는 것뿐이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여 흔히 형세에 따라 굽히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번 정제선(鄭濟先)의 일도 그가 살인을 한 것이 분명한데도 그가 형세를 가졌기 때문에 이선부(李善溥)가 이두진(李斗鎭)의 계사를 정지시켜 구해(救解)하기에 급급하였으니, 그 행동과 처사가 매우 해괴하다. 군자가 법을 씀에 있어서는 참으로 가깝거나 멀다고 하여 달리 조종해서는 안 되며 신하가 법을 지킴에 있어서도 형세의 강약에 따라 처우를 다르게 해서는 안 된다."
하니, 모든 신하들이 다 일어나서 사례하며 말하기를,
"면려하고 경계하심이 여기에 이르니 감히 경건하게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13년(정묘, 1687)
○ 2월. 명하여, 강도(江都)의 대두(大豆) 9천 석을 호남에 획급하여 진휼에 보태 쓰고, 영남의 세두(稅豆) 1천 3백 석도 획급하여 종자를 준비하게 하였다.
○ 3월. 비국을 인견할 때에 승지 신계화(申啓華)가 청하기를,
"구례에 의거하여 무녀(巫女)들을 활인서(活人署) 근처로 내쫓아 다시는 성 안으로 발길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5월. 상이 명안공주(明安公主)의 상을 당하여 10일 동안 소선(素膳)을 행할 것을 명하였는데, 약방이 누차 당치 않다고 진청(陳請)하니 비로소 4일 동안만 소선을 올리라고 명하였다. 또 친히 상차(喪次)에 거둥하는 절차를 ≪오례의(五禮儀)≫에 정해진 대로 할 것을 명하자, 약방촹정원촹대신 이하가 무더운 날씨에 빈소를 마련하기 전에 임곡(臨哭)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누누이 진청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드디어 명안공주의 집에 거둥하여 상차에 나아가 슬프게 곡하였다.
○ 경상도 사비(私婢) 춘옥(春玉)이 그 남편을 위하여 복수하였는데, 장차 사형에 처해지게 되자 해조가 대신들에게 수의하니, 대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자식이 아비에 대해서와 처가 남편에 대해서는 그 의리가 한가지입니다. 따라서 복수한 일에 대하여 다르게 봐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의 남편이 탄환을 맞고 죽었을 때에 글로 관아에 고발하였으니, 제멋대로 죽인 죄도 시행해서는 안 됩니다. 이 여인의 의열(義烈)은 세상의 풍속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니, 포상을 해야 되고 처벌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춘옥이 그 남편이 비명에 죽은 것을 통한하여 슬픔을 머금고 누차 작정을 한 끝에 마침내 원수에게 칼을 꽂았다. 이는 실로 장부도 하기 어려운 일인데 시골의 비천한 여인한테서 나왔으니 매우 가상하며, 응당 포장하는 은전을 내려야 되겠다. 법률에 이미 부모를 위하여 원수를 갚은 일에 대한 조문이 있으니 남편을 위하여 원수를 갚은 것에 대한 뜻도 그 가운데에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함부로 죽인 죄나 상명(償命)의 법은 거
하였다.
○ 9월.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내가 즉위한 이래로 하늘과 땅에 재해와 이변이 속출하여 국가의 계책과 백성의 걱정에 대하여 믿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기에, 밤낮으로 우려하고 두려워하면서 편안히 쉬지 못하고 있다. 지금 전혀 뜻밖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이는 지난 역사에 드문 변고이다. 어떤 화기(禍機)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기에 인자한 하늘이 재앙을 내려 나를 경계하는 것이 이토록 정녕한지 알 수가 없다. 조용히 그 잘못을 생각하니, 실로 과인의 재능과 덕이 부족하고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이 하늘의 뜻에 부합되지 못한 것으로 말미암아 이런 비상한 재앙을 불러온 것이었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불안하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마땅히 정부에서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여 내가 미치지 못한 것을 바로잡아야 되겠으나, 또한 모든 관료들을 신칙하고 면려하여 서로 경계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대소 신료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깊이 생각하여 사심을 다 버리고, 서로 화합하기에 힘써서 각자의 직무를 부지런히 수행하여, 하늘의 견책에 답하여 현재의 난국을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 10월. 주강에 나아갔다. 상이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효원(李孝源)이 지나치게 곤장을 쳐서 사람을 죽인 일에 대하여 하교하기를,
"외방의 수령으로서 지나치게 곤장을 쳐서 사람을 죽인 일이 이효원 한 사람에 그치지 않을 것이니, 중외에 엄하게 신칙하여 그러한 일을 금단하도록 거듭 밝히라."
하였다.
○ 12월. 함경 감사 박태상(朴泰尙)이 계문하기를,
"단천(端川)에 네 보(堡)를 설치한 것은 본래 백산(白山) 부락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하는 것에 대비하고 길주(吉州)의 덕만(德萬)촹사하(斜下) 두 보와 더불어 서로 표리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풍한(風寒)의 걱정이 없고 또 길주의 두 보도 이미 혁파되어서, 단천의 네 보는 전혀 쓸데없이 설치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숭의보(崇義堡)가 있는 곳은 사람이 살기 어려워 토졸(土卒)이 날로 줄어들고 있으니, 증산(甑山)으로 옮겨 설치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영의정 남구만이 복계(覆啓)하기를,
"단천의 네 보는 바로 갑산(甲山)에서 나오는 길이고 네 보로부터 길주의 두 보로 들어가니, 그 형세가 마치 구슬을 꿰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만약 한 곳이라도 빠지면 곧바로 외딴 참(站)이 되고 마니, 참으로 중간을 폐지할 수 없습니다. 갑인년간에 길주에서 서북쪽을 경유하여 설령(雪嶺)을 넘어 갑산으로 통하는 길을 낸 뒤에 길주의 두 보는 설령의 연로로 이설하였고 단천의 네 보는 내지(內地)가 되었는데, 특별히 다시 진보(鎭堡)를 설치한 일이 없었고 설령으로 통하는 연로의 진보가 완성되는 것을 기다려 변통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다시 새로 낸 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세 보를 옮겨 서북에 합하여 설치하고 새 길을 도로 폐지하였습니다. 제각기 한때의 의견을 듣고서 설치하기도 하고 폐지하기도 하여 결국 단천(端川)의 옛 길과 두 보 사이에 길이 끊어지고 새로 길을 낸 설령도 길이 폐지되어 막히고 말았습니다. 조만간에 단천과 길주의 산길을 다시 개통하자는 논의가 있게 되면, 반드시 덕만(德萬)과 숭의(崇義)에 예전의 진을 도로 설치하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숭의보를 지금 증산으로 이설하게 되면 또다시 옮기는 데 장애가 되는 폐단이 있게 될 것이니, 도신과 남북 병사로 하여금 상세히 살펴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옥당의 관원을 야대하고 선온(宣?)하였다. 어제(御製) 절구 한 수를 짓고 입시한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그 시에,
많이 내린 이슬도 볕 없이 마르니/ 湛然零露匪陽晞
싫도록 마시고 취해서 돌아가게나/厭厭含杯宜醉歸
시로써 훈계하여 나의 어김 없게 하라/作詩勸戒莫予違
하였다. 교리 남치훈(南致熏)이 아뢰기를,
"열성의 어제를 전에 이미 간행하였으나 아직도 누락된 것이 많으니, 수집하여 간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친히 도목 정사를 행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예부터 국가의 치란은 등용한 인물이 훌륭한가 훌륭하지 못한가에 달려 있고, 인물을 취하고 버리는 권한은 실로 전형을 담당한 관리에게 있다. 세상이 잘 다스려져 일이 없을 때에도 감히 혹시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지금과 같이 다사다난한 때이겠는가. 상례(常例)에 따라 주의(注擬)할 때에도 오히려 면려하였는데, 하물며 지금 직접 임하여 행하는 때이겠는가.
아, 임금과 신하가 한 마루에 있으니 뜻이 서로 통할 터인데,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고 공도(公道)를 넓히며 절의(節義)를 드러내고 덕행을 높이며 청렴한 관리를 기용하고 적체되었던 자리를 소통시켜 관리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자리에 따라서 의망하여 들이고 낙점하여 내릴 뿐이라면, 한 명의 정관(政官)만 있어도 충분할 것이다. 어찌 친히 정사할 필요가 있겠는가. 근래에 처음 벼슬길에 오른 자들은 대다수 서울의 자제들이고 먼 지방의 인물들은 끼지 못하였으니, 먼 지방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미천한 자도 등용하는 도리가 전혀 아니다. 영남에 이르러서는 본디 인재의 창고라고 일컬어졌고, 조종조 때부터 석학과 명현들이 찬란하게 배출되었다. 세상이 내려올수록 풍속이 퇴보하여 비록 전날의 성대했던 것과는 같지 않다고 하더라고 그 가운데 어찌 한 가지 재능을 가진 선비가 없겠는가. 그런데 거두어서 등용하라는 명을 여러 번 내렸는데도 이행한 결과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데, 지금 내가 직접 임하여 경계하고 신칙하는 때를 당해서는 끝내 서로 나 몰라라 내팽개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어서 생각하건대, 봄은 생장시키고 가을은 숙살(肅殺)하며 양기는 펴주고 음기는 손상시키니, 임금이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 아닌 것이 없다. 지난번에 권간(權奸)에게 붙어서 조정을 혼탁하게 한 자들을 이미 죄의 경중을 참작하여 혹은 변방으로 유배하는 법을 가하고 혹은 평생 출세하지 못하게 하는 처벌을 하는 등 처분이 이미 정해졌다. 이 밖에도 스스로 퇴폐한 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니, 만약 사소한 죄과를 지어 끝내 버려서 안 될 자는 또한 그 과오를 불문에 부치고 벼슬에 나갈 수 있게 하여 공평 무사한 뜻을 보여야 될 것이다.
아, 오늘날의 이 조치는 참으로 드문 일이니, 이 몇 가지 사항은 반드시 조정의 정사에 조금의 보탬이 없지 않을 것이다. 부디 전관(銓官)들은 나의 뜻을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하라."
하였다.
○ 사대부가 여염집을 탈취하여 들어가는 일을 금하라고 거듭 명하였다.
○ 고성(高城)의 진사 신무(愼懋)가 구언 하교에 응하여 상소하였는데, 요지는 어진 정치를 펴라는 뜻이었다. 이어 책자 하나를 올렸는데 명칭이 ≪보민편(保民篇)≫이었다. 그 체재는 강령(綱領)이 3개이고 조목이 35개였다. 또 도표를 만들어 아래에 첨부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덕을 닦는 것은 인재를 얻는 근본이고 인재를 얻는 것은 백성을 보존하는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임금의 덕을 말하였고 다음에 인재를 얻는 것을 말하였고 다음에 백성을 보존하는 것을 말하여 하나의 도표에 합하였습니다. 요컨대 그 귀일점은 다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게 한 뒤에는 큰 것을 하고 싶으면 큰 것을 하고 작은 것을 하고 싶으면 작은 것을 한다 해도 무엇 하나 안 될 것이 없게 됩니다."
하였다. 그가 낱낱이 진술한 말이 처음부터 끝가지 매우 상세하고 시무(時務)에 절실한 것이었다. 이에 상이 가상하게 여겨 장려하는 비답을 내리고 그 책자를 묘당에 내렸다. 영의정 남구만이 아뢰기를,
"신무의 말은 임금의 덕과 이 시대의 폐단에 관하여 매우 절실합니다. 전하께서 도로 들여서 살펴보도록 하소서."
14년(무진, 1688)
○ 1월. 부제학 최석정(崔錫鼎)이 상소하여 경계하는 말을 진술하였다. 이어 짧은 잠(箴) 6편을 올리고 말하기를,
"임금의 마음은 만화(萬化)의 근원이므로 근본을 바르게 하는 것을 첫머리로 하였고, 치도(治道)는 공평한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므로 표준을 세우는 것을 그 다음으로 하였고, 임금의 덕은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므로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을 그 다음으로 하였고, 덕업(德業)의 진보는 반드시 강학(講學)에 의뢰하기 때문에 항상 학문에 힘쓰는 것을 그 다음으로 하였고, 안일(安逸)이란 임금이 가장 경계해야 되는 것이므로 정치에 부지런한 것을 그 다음으로 하였고, 백성은 국가의 근본으로서 흥망이 달려 있기 때문에 백성을 보살피는 것을 마지막으로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고 호피(虎皮)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 2월. 예조가 각 능을 전알(展謁)하는 일로 계품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삼가 영릉(寧陵)을 전알하는 것은 예의상 마땅히 먼저 해야 될 일이다. 더구나 나는 경사전(敬思殿)에서 복(服)을 받은 처지이다. 상제(喪制)가 끝나기 전에 직접 참배하고 슬픈 마음을 펴려 하였으나, 사고가 연달아 방해하여 아직까지 실행하지 못하였으니, 인정으로나 예법으로나 미흡함을 이미 말로 할 수 없다. 그리고 추모하면서 비통한 마음이 갑절 더 가슴에 맺혀 침식이 다 편안하지 못하니, 올봄에 전알하는 일을 결단코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달 그믐 전 20일 이후로 택일하여 들이라."
하였다. 경사전은 인선왕후(仁宣王后)의 혼궁(魂宮)이다.
○ 우의정 이숙(李?)이 상차하여 아뢰기를,
"경기 지방에 흉년이 들었으니 능에 행행하시는 일은 중지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에 가득히 써서 올린 내용이 다 백성을 걱정하는 것이고, 말이 모두 간절하고 지극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한다. 백성들을 노역시키는 폐단이 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옛날 동한(東漢) 명제(明帝)는 원릉(原陵)을 전알하게 되어 밤에 선제(先帝)와 태후(太后)가 생전과 같이 환락하는 모습을 꿈꾸고는 슬퍼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즉시 신하들을 거느리고 능에 올라갔다고 한다. 오늘의 일은 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대단히 두렵고 슬픈 마음이 이는 것을 군신간에 어찌 숨기겠는가. 내가 일찍이 효묘(孝廟)를 꿈속에서 뵈었는데, 효묘께서 손을 잡으며 기뻐하셨고 옥음(玉音)이 또렷하기가 마치 생전과 같았다. 이 일이 있고 난 이후로 추모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더 가슴에 맺혀 스스로 억제하기가 어려웠다. 가을철에 거둥하는 것이 농사에 방해가 된다고 한 것은 또한 그 다음이니 굳이 거론할 것은 없다.
아, 신(神)의 도리에서 구해도 인정(人情)에 멀지 않으니 지극한 마음이 있는 곳에는 하늘도 반드시 불쌍히 여겨 용서할 것이다. 저들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지만 신의 백성이니 어찌 이 행차가 도저히 그만둘 수 없는 것임을 알지 못하겠는가. 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경은 생각하여 헤아리도록 하라."
하였다.
○ 영릉에 거둥하였다. 광주 산성(廣州山城)에 머물면서 대신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이곳은 바로 인묘(仁廟)께서 연(輦)을 머물렸던 장소인데, 50년이 지난 지금에 내가 다시 이곳에 오게 되니 감개 무량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하고, 이어서 양주(楊州)촹광주(廣州)촹여주(驪州)촹이천(利川) 네 고을의 봄 세금을 견감하게 하였다. 또 여주의 백성으로서 나의 70세 이상인 자들에게 음식물을 내리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대개 능침(陵寢)이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상이, 산성은 바로 온조왕(溫祚王)이 개창(開創)한 곳인데 완풍부원군(完?府院君) 이서(李曙)가 성지(城池)를
○ 영부사 김수홍 등이 상에게 아뢰기를,
"병자년의 난리에 여러 도의 군사로서 근왕(勤王)하다가 쌍령(雙嶺)에서 전사한 자가 매우 많습니다. 이들 또한 제사를 지내야 됩니다."
하고, 정언 김홍복(金洪福)이 아뢰기를,
"험천(險川)의 전투에서 죽은 사졸이 쌍령의 전투보다 적지 않고, 북문(北門)의 전투에서도 날랜 장졸들 태반이 돌아오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늙은이들의 입으로 전해지면서 비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도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은전을 의당 똑같이 베풀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다 따랐다.
○ 능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쌍령을 지나면서 말을 머물렸다. 상이 묻기를,
"이곳이 병자년에 군사들이 전몰한 곳인가?"
하니, 김수홍이 답하기를,
"경상 병사 민영(閔?)과 허완(許完)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근왕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적의 습격을 받았으며 1명도 살아남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사람의 계략이 훌륭하지 못하여 결국 패망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그 충절은 높이 살 만합니다."
하자, 상이 자손들을 관직에 기용하라고 명하였다.
○ 3월. 대신과 비국의 재신(宰臣)을 인견하고, 변방 고을의 산삼 채취에 대한 금법을 새로이 정하였다. 이전에는 법을 어기고 산삼을 캔 자에 대한 정해진 법이 없었으므로 상이 대신에게 물으니, 김수홍과 남구만 등이 답하기를,
"변방의 수령이나 장수로서 관하의 산삼을 채취한 자는 극형에 처하고, 여러 명이 무리를 지어 채취한 자들은 선도한 자는 목을 베고, 추종한 자와 한두 명이 범법한 자는 그 다음의 벌을 가하소서."
하니, 상이 그 의논을 따랐다.
의롭게 죽은 인물인 고종후(高從厚)에게 추가로 증직하고 그의 형 고인후(高因厚)에게 시호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고인후와 고종후는 고경명(高敬命)의 두 아들이다. 고인후가 그 아버지와 함께 죽자 고종후가 그 아비를 위하여 복수를 하고서 죽었는데, 호남 유생들의 소청을 인하여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 11월. 우레가 쳤다. 비망기를 내리기를,
"아, 미약한 소자가 외람되게 중차대한 자리를 계승하여 백성들의 윗자리에 앉은 지가 지금에 14년이 되었다. 다만 나의 덕이 선하지 못하여 이 왕업을 혹시라도 실추시킬까 두려워 위태위태하기가 마치 썩은 새끼줄로 6마리의 말을 모는 것과 같다. 게다가 홍수촹가뭄과 기근이 겹쳐서 재앙이 연달으니 하늘을 우러르고 아래를 굽어살펴도 무엇 하나 믿을 것이 없다. 그 원인을 따져볼 때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하겠는가. 아, 조정은 사방의 근본인데, 내가 대공 지정(大公至正)의 도로 중도(中道)에 표준을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서로 의기가 어그러짐이 날로 심해져서 화합할 기약이 없으며, 온 백성들은 한 핏줄을 가진 적자(赤子)인데, 내가 자신의 아픔과 어린 자식을 돌보는 것과 같은 은택을 아래까지 미루지 못하여 근심과 원망이 길에 가득하고 생활의 곤궁함이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이 급박하다. 본원에 더욱 뜻을 가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함양한 공력이 따르지 못하고, 언로(言路)를 툭 트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포용할 도량이 넓지 못하여, 날마다 기강이 흐트러지고 진작하지 못하는 지경으로 차츰차츰 전락하고 있다. 비록 재앙의 징조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경계하고 두려워할 단서는 이미 많다.
얼마 전에 음기(陰氣)가 다 속으로 들어간 달에 때아닌 비와 천둥이 계속 이르렀으니, 시인(詩人)이 이른바 '편하지 않고 좋지 않도다.'라고 한 상황에 불행하게도 가깝게 되었다. 어떤 화기(禍機)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서 인자한 하늘이 재앙을 내려 나를 이토록 곡진하게 경계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에게 돌려 잘못을 살펴봄에 갑절이나 더 두려움이 일어, 밥을 먹고 쉬는 사이에도 편치 못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다. 전날의 일에
아, 너희 대소 신료들은 밤낮으로 쉴새없이 걱정하는 나의 뜻을 본받아 한쪽으로 치우친 사심을 버리고 서로 화합하기에 힘써, 각자 맡은 직무에 부지런히 하여 하늘의 꾸지람에 조금이라도 답하고 당면한 난국을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15년(기사, 1689)
○ 10월. 속전(續田)을 경작하는 대로 세금을 거두는 법을 새롭게 정하였다.
○ 12월.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미약한 내가 외람되게 중차대한 왕위를 계승하여 백성들의 윗자리에 앉은지가 지금 15년이 되었다. 그런데 나의 재능과 덕이 천박하고 정치가 온당함을 잃어 하늘은 위에서 진노하고 백성들은 아래에서 원망하는데, 안팎을 둘러보아도 털끝만큼도 믿을 만한 것은 없고 온통 염려스러운 형국만 있을 뿐이다. 썩은 새끼줄로 말을 몰고 호랑이 꼬리를 밟으며 봄날의 얼음을 건넌다는 속담으로 어찌 그 급박함을 비유할 수 있겠는가.
얼마 전에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고 음산한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등 두렵고 놀라운 변고가 몇 달 사이에 겹겹이 발생하니, 어떤 화기(禍機)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기에 인자한 하늘이 재앙을 내려 나를 경계함이 이토록 곡진하고 정녕한지 모르겠다. 이뿐만 아니라 절기가 상도를 어그러뜨리고 요상한 기운이 항상 하늘에 가득 차, 지금 한창 추워야 될 날씨가 거의 봄날과 같다. 아, 주(周) 나라 말기에 추운 해가 없었고 진(秦) 나라 말기에 더운 해가 없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본래 옛사람들이 논한 것으로서, 왕의 기강이 짓밟히고 국가의 형세가 나약해져서 초래되지 않은 것이 없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누가 그 책임을 지겠는가. 갑절이나 더 조심스럽고 두려워 밥 먹고 쉬는 것도 편안하지 못하고 차라리 꼼짝하지 않고 죽어버리고 싶지만 그것도 되지 않는다.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서를 쓰도록 하라. 마땅히 정부에서 널리 직언을 구하되, 무릇 임금의 덕으로서 빠진 것이나 시정(時政)의 득실에 관계되는 것을 숨김없이 다 진술하여 내가 미치지 못한 것을 바로잡도록 하라. 말이 비록 온당하지 않다 하더라도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이어서 생각하건대, 일이 아래에서 일어나면 징후가 위에서 움직이는 법인데, 지금의 재앙을 부른 까닭은 오로지 나의 부덕에 있으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수성(修省)하는 일에 내가 마땅히 더욱 유의하리라. 또한 모든 관료들을 신칙하고 면려하여 서로 경계하는 도리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아, 대소 신료들은 모두 과인이 밤낮으로 걱정하는 뜻을 본받고 국가의 위태위태한 형세를 생각하여, 사심을 다 버리고 화합하기에 힘쓰며 한마음 충정으로 법을 지키고 직무를 잘 수행하여, 하늘의 견책에 조금이라도 답하고 당면한 난국을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상이 내린 분부대로 백성들에게 포고하기를 청하였는데, 재차 아뢰자 허락하였다.
16년(경오, 1690)
○ 1월.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계절이 봄이 되어 삼라 만상이 다 새로워지니, 사람의 일도 마땅히 이것을 본받아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쫓아야 된다. 임금의 마음은 온갖 화육의 근원이니 윗자리에 있는 자가 마땅히 위에 표준을 세워 아랫사람들을 인솔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마땅히 두려운 마음을 가지겠지만, 상하가 서로 행실을 닦는 도리는 또한
조정은 사방의 표준이므로 조정이 바르게 되어야 백관이 바르게 되고 백관이 바르게 되어야 사방이 바르게 된다. 지난날에 조정의 논의가 삼분 오열되어 사당(私黨) 세우기에 힘을 써서 국사가 날로 그릇되게 되었는데, 이것은 참으로 경계할 일이다. 또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편안해진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여름에 덥거나 비가 심해도 백성들은 원망하고 한탄하며, 겨울에 추위가 심해도 백성들은 원망하고 한탄한다.' 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어찌 백성들을 보살피는 일에서 벗어나겠는가. 지금 양기(陽氣)를 발양하는 계절에 초목과 모든 동물들이 다 기뻐하는 뜻을 보이고 있는데, 불쌍한 백성들만 유독 혜택을 입지 못하고 있으니, 백성들을 보살피는 계책이 오늘날의 급선무로서 마땅히 강구해야 될 일이다."
하였다. 병조 참판 이집(李鏶)이 아뢰기를,
"한번 만과(萬科)를 치른 뒤로 사대부의 자손들이 다 무업(武業)을 일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이 때문에 무사가 부족합니다. 전에 사대부의 자제에 대하여 청(廳)을 설치하여 무업을 권장하였는데, 근래에 무사 중에서 이름이 난 자는 다 이것을 통하여 배출되었습니다. 지금에 다시 청을 설치하여 각별히 무업을 권장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하로서 충성을 다 바치는 데에는 문무가 차이가 없다. 그런데 근래에 무과 방목 속에 사대부의 자손으로서 낀 자가 없으니 사족(士族)이 무업을 일삼지 않는다는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다. 청을 설치하여 무업을 권장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 비국이 아뢰기를,
"광주부(廣州府)는 본래 좌도(左道)의 진관(鎭管)이고 또 전 영장(營將)인데, 부윤이 혁파된 이후로 진관과 전 영장을 여주목(驪州牧)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유수가 혁파되고 부윤이 다시 설치되었으니 진관과 영장을 다시 광주로 옮겨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홍문관이 아뢰기를,
"전번에 대사성 이봉징(李鳳徵)이 상소하여 대성전(大聖殿)에 제향을 올릴 때에 악장(樂章)이 미비한 것을 논한 것에 대하여, 비국이 복계하여 유신들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게 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신 등이 ≪공자통기(孔子通紀)≫촹≪대명회전≫ 촹≪오례의≫ 등의 책을 갖다가 상고하니, ≪공자통기≫와 ≪대명회전≫에는 신(神)을 영송(迎送)하고 폐백을 올리고 삼헌(三獻)을 하고 제기를 거둘 때에 다 악장이 있었고, ≪오례의≫에는 다만 폐백을 올리고 초헌을 하고 제기를 거둘 때에 세 악장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례의≫는 본래 내용이 많이 소략한데, 우리나라에서 행하는 것은 바로 이 ≪오례의≫이므로 지금까지 답습하고 있습니다. 예법을 잘 아는 이에게 다시 물어서 자세하고 극진하게 하여 흠이 없게 하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 2월. 황해도 서흥현(瑞興縣)에 독질(毒疾)이 돌았는데 의원도 병명을 알지 못하였다. 백성들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도신이 장계를 올려 사단(社壇)과 근처의 명산에 기도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직접 제문을 짓고 예관을 보내 본도의 명산과 본현의 사단에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명산 제문에 이르기를,
"미약한 이 몸이 백성들의 윗자리에 앉았으나 덕이 선하지 않아 재앙이 계속 일어나고 있기에, 맛있는 음식도 편안하지 않고 밤낮으로 두려움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지금 몹쓸 질병이 매우 혹독하여 전염된 사람들이 연달아 사망에 이르고 있는데, 허물이 나 한 사람에게 있는데도 바뀌어 백성들에게 해독이 가해지니 백성의 부모된 자로서 어떻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저 산을 바라보건대 일찍이 특이한 영기가 깃들였고 아름다운 기운이 성대하여 우리 서울을 감싸 주면서 하나의 이치가 간격이 없어 서로 감응하여 통하였습니다. 이제 희생
하였다. 사단 제문에 이르기를,
"아, 내 선하지 못한 몸이 잘못 사목(司牧)의 자리에 올라 상하에 죄를 지어 해마다 흉년과 재해가 연달았습니다. 지금 과오를 견책하는 이 징조는 옛날 역사에도 보기 드문 것으로서, 추워야 할 때에 따뜻하고 음기가 폐장(閉藏)돼야 할 때에 새어나와 음양이 조화를 잃고 여기(?氣)가 모인 것입니다. 아,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갑자기 이 화란을 입었습니다. 백성들의 일이 잘못되는 것은 그 죄가 오직 임금에게 있으니, 차라리 내 몸으로 당할지언정 어찌 차마 백성들이 요사하는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밤낮으로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고 마음은 도려내는 듯 아픕니다. 지금 때를 놓치고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저 백성들이 다 멸망하고 말 터인데, 굽어살피시는 신명이 어찌 상심하지 않않겠습니까. 이에 예관을 보내 멀리 제물을 바치니, 부디 신명께서 나의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속히 도움을 내려 우리 백성들을 살려 주소서."
하였다.
○ 4월. 오랫동안 가뭄이 계속되었다. 상이 하교하기를,
"보잘것없는 나 소자가 외람되게 중차대한 왕업을 계승하여 백성들의 윗자리에 임한 지가 어느덧 16년이 되었다. 그러나 덕이 부족하여 하늘의 진노를 만나 홍수와 가뭄, 바람과 서리의 재앙과 사람과 사물의 변괴가 거의 거르는 날이 없이 거듭 나타나니, 마음이 두렵고 걱정스러운 것이 마치 범의 꼬리를 밟고 봄에 얼음을 건너는 듯하다. 전날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재앙과 이변이 일어나는 것이 모두 두렵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근심이 절박한 것으로서 가뭄만한 것이 없었다. 참으로 임금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지하므로, 백성들의 하늘인 식량이 떨어지면 나라는 따라서 망하고 마는 것이다.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는가.
아, 이번 가뭄은 또한 매우 혹독하다. 닷새나 열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도 보리와 벼가 없게 된다고 하였다. 봄의 농사철을 당하여 가뭄의 재해가 심하여 간절하게 비를 바란 지가 거의 수십 일이나 되었으니, 보리싹이 말라 비틀어지고 벼를 낼 때는 이미 지나가고 말았다.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장차 죽음에 가깝게 되었으니, 백성의 부모가 된 처지에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밤낮으로 어쩔 줄 몰라 허둥대면서 온갖 신에게 기우제를 지냈는데도 하늘은 무심하여 비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말이 여기에 미침에 속이 타는 듯하여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죽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정부에서 직언(直言)을 널리 구하되, 위로는 임금의 덕이 미치지 못한 점과 아래로는 시정(時政)의 득실을 숨김없이 다 진술하게 하라. 그 말이 비록 광망(狂妄)하더라도 처벌하지 않겠다.
이어서 생각하건대, 지금에 재앙을 초래한 원인은 실로 나의 부덕에 있으니 내가 마땅히 더욱 유의하겠으나, 또한 어찌 모든 관료들을 경계시키고 면려하여 서로 같이 수성하는 도리가 없겠는가. 아, 너희 대소 신료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서 사심을 버리고 공도(公道)를 넓히며, 서로 열심히 화합하여 오직 한마음의 충정을 가지고 하늘의 견책에 조금이라도 답하여 당면한 난국을 구제하도록 하라. 반찬을 감하고 음주를 금지하며 음악 연주를 금지하는 등의 일도 또한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처음에 정원에 명하여 교지를 대신 짓게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10행의 왕명이 내용이 매우 슬픕니다. 신 등의 거칠고 졸렬한 글로는 성의(聖意)의 만분에 일도 형용하지 못하겠습니다. 전하의 교지를 그대로 중외에 반포하소서."
하였는데, 재차 아뢰자 상이 윤허하였다.
○ 이때 오랫동안 가물어서 대신을 보내어 기우제를 지내기에 이르렀는데, 이날 비로소 비가 내렸다. 이에 임금이 매우 기뻐하고, 드디어 금원(禁苑)의 취향정(醉香亭)의 이름을 고쳐 희우정(喜雨亭)이라 하고 친히 정명(亭銘)을 지어 기록하였다.
○ 7월. 판윤 유하익(兪夏益)이 아뢰기를,
"중인(中人)과 상놈에게 증직한 사례에 간혹 공조촹한성부촹장례원 등의 관직으로 한 것이 상당히 많습니다. 귀천의 명분은 생사에 구별이 없습니다. 어찌 생전에 상당하지 않은 관직을 갑자기 사후에 가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일일이 추개(追改)하지는 못하더라도 앞으로는 다만 중추부의 관직으로만 증직하도록 하는 뜻으로
하니, 상이 해조에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 11월. 밤에 옥당의 관원을 소대하고 선온(宣?)하였다. 상이 친히 사운(四韻) 시 한 장을 지었는데, 그 시에,
천지는 아득하여 끝이 없는데/天地茫無垠
작은 이 한 몸이 그 속에 있네/?然有一身
사람의 이성은 본래 착한데/秉彛本自善
사물에 이끌려 진실을 잃네/物誘乃亡眞
마음을 잡고 방종함은 털끝 차이에서 갈라지고/操舍毫釐判
성인과 광인은 잠깐 사이에 이르네/聖狂俄頃臻
사악함을 막는 데는 경건이 제일이니/閑邪莫若敬
사심을 이기고 나면 날로 새로워지리/克己日維新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화답시를 지었다.
○ 12월. 하교하기를,
"호당(湖堂)에 뽑힌 인원을 내일 아침에 모두 승정원에 와서 모이도록 하였다. 이어서 생각건대, 조종조에서 문학에 뛰어난 선비들을 뽑아서 특별히 휴가를 주어 날마다 글을 짓도록 하였으니, 그 착실하게 권장한 뜻이 어떠한가. 그러므로 작년에 호당에서 응당 시행할 절목(節目)을 마련할 때에 대략 조종조의 고사를 모방하여 뽑힌 자들이 읽을 책을 매달 말에 서계하게 하고 때때로 특별히 불러 읽은 책의 수미(首尾)를 강론하게 하며, 5일에 과제를 하나 내어 등차를 매겨 매달 말에 입계하여 등수에 따라 시상하도록 하는 일을 명백하게 정식을 하여 계하하였는데, 하나도 거행하지 않았다. 올 가을쯤에 좌상의 차자를 인하여 다시 신칙하였으나 또한 아직 봉행하지 않고 있어 조정의 성대한 뜻이 폐기되어 시행되지 않는 데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미안한 일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앞으로 하나같이 절목에 의거하여 착실하게 거행할 일을 특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 상이 하교하기를,
"내년 봄 강도(江都)에서 경영할 일은 참으로 미리 대비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토록 큰 역사가 마침 재해와 흉년이 눈에 가득하고 기아자들이 연이은 때에 당하였으니, 비록 '편리한 대로 요량하여 처리하여 백성들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하며, 한편으로 진휼을 실시하고 한편으로 역사를 시작하겠다.'고는 하지만, 나의 마음에는 내내 미안한 점이 있다. 각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당분간 정지하였다가 가을이 되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49권 숙종조 9
17년(신미, 1691)
○ 1월. 상이 특별히 삼남(三南)의 도신에게 유시하기를,
"덕이 없는 몸이 외람되게 임금 자리에 있어 재난을 당했으니 밤낮으로 걱정하여 감히 조금도 겨를이 없었다. 좋은 음식을 대하면 농사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방적의 괴로움을 생각하는데, 잊지 못하는 한 가지 생각이 어찌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보전하는 데에 있지 않은 적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사랑은 만물에 은택을 입히기에 부족하고 명철(明哲)은 사리를 밝히기에 부족하여 정령(政令)을 내고 일을 꾀하면 문득 어그러지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을 뿐 백성을 사랑한 실지는 없었으며 스스로 하늘의
아, 바로 봄날이 따뜻하기 시작할 때에 만물이 우로(雨露)를 받아 생육하는데, 불쌍한 우리 백성들은 또한 유독 무슨 죄가 있기에 이 좋지 못한 시절에 태어나 집에서 편안히 사는 즐거움은 누리지 못하고 골짜기에서 이별하는 한탄만 있단 말인가. 씨가 다 말라버릴 참혹한 형국을 장차 오늘날에 다시 보게 되었기에 마음이 마치 에는 듯하여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채 깊은 잠에라도 빠지고 싶다.
아, 하늘이 임금을 만들고 스승을 만든 것은 바로 백성을 위한 것인데, 나는 이미 백성들의 산업을 잘 다스리지 못하여 변함없이 올바른 마음을 갖게 하지 못하였고, 또 세입을 헤아려 지출하지 못하여 저축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비록 창고를 열어 구제하고자 하나 밀가루 없이 수제비를 만드는 것과 같다. 비록 이미 신역을 감면하였지만 실질적인 혜택이 아래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나의 잘못이 아닌 것이 없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백성들과 임금의 관계는 자식이 부모에 대한 것과 같다. 부모가 비록 가난하여 잘 양육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식된 자로서 어찌 부모를 버리고 갈 자가 있겠는가. 내가 바야흐로 묘당의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밤낮으로 도모하여 구제할 방책을 강구하고 있다. 또 삼남에 재해를 입은 곳 중에서 가장 심한 고을의 전세(田稅)와 대동(大同)을 특별히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였고, 그 밖에 백성들의 생활을 불안정하게 하는 일을 일체 정지하게 하여 적자(赤子)를 돌보듯이 하는 뜻을 보였다. 아, 너희 백성들은 조종(祖宗)의 깊은 사랑과 두터운 은혜를 생각하고 나의 지극한 정성으로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본받아서 기한을 참아내어 각기 가정을 보존하도록 하며 혹시라도 이산하여 떠돌아다니거나 도둑질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또한 이웃들을 권유하여 조금이라도 저축이 있는 자는 한 되 한 홉의 양식이라도 나누어 주어 혼자만 먹고 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것이 너희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아, 종이에 가득히 나의 속마음을 써서 정녕하게 고하였는데, 입으로만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실로 가슴속에서 나온 것이다. 너희 방백들은 나의 이러한 마음을 헤아려서 명백하게 깨우치고 타이르라. 앞으로 진휼을 실시할 날이 멀지 않았으니, 지금 열읍의 수령으로 있는 자가 백성들의 굶주림을 자신의 굶주림과 같이 여기고 백성들이 죽는 것을 자신이 죽는 것과 같이 여겨서 지성으로 구제한다면, 어느 정도는 사망에 이르지 않게 되고 진휼 정사가 실질적인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다 잘 알고 특별히 신칙하라. 호남에서 봉진하는 삭선(朔膳)도 해조로 하여금 영남의 사례에 의거하여 올 가을에 한하여 품지를 받아 적당량 감면하도록 하라."
하였다.
○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이 도하(都下)의 기근이 특별히 심한 것을 이유로 호조의 무치곡(貿置穀) 1만여 석을 내어 싼 값으로 발매하기를 청하고, 이어서 상이 특별히 비망기를 내려 시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드디어 하교하여 도성의 백성들에 대하여 염려하는 뜻을 곡진하게 말하고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였다. 권대운이 아뢰기를,
"새로이 절수(折受)한 곳을 환급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이천(伊川)에 훈련도감의 둔전(屯田) 한 곳과 황장목(黃腸木) 생산지로 봉해진 곳이 세 군데가 있었는데 모두 절수에 편입되어 어의궁(於義宮)으로 이속되었고, 양근(楊根) 읍내도 또한 그 속에 편입되었으니, 모두 환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권대운이 아뢰기를.
"경외의 백성들이 이 흉년을 만나 모두 구렁에 넘어져 죽게 되었는데, 관료들의 녹봉만은 감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미안합니다. 경연의 신하도 이에 대하여 많이 언급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녹봉은 원래 박하니 실로 충신한 이에게 녹을 후하게 지급하는 도리가 아니었다. 나의 뜻은 감하지 않으려 했으나, 여러 신하가 진달한 바가 이러하므로 마지못해 따르겠다."
○ 2월. 비망기로 이르기를,
"각사의 개좌(開坐)는 날이 길어지면 묘시에 사진하여 유시에 파하고, 날이 짧아지면 진시에 사진하여 신시에 파하는 것이 본래 법전에 있다. 그런데 근래에 모든 관료들이 다 태만이 습관이 되어 집에서 빈둥빈둥 누워 있다가 늦게서야 사진하여 비록 범범한 공사(公事)일지라도 반드시 한밤중이 된 뒤에 입계하게 하니, 일이 한심하게 된 지가 오래 되었다. 작년 가을에 금부(禁府)에 계하한 상언(上言)을 지금에야 비로소 복주하니, 이미 매우 지체한 것인데 또 일찍 개좌하지 않아서 심야에 입계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니, 마땅히 경책(警責)하는 조치가 있어야겠다. 금부의 해당 당랑을 모두 엄중하게 추고하라. 앞으로는 전에 내린 하교에 의거하여 일이 대단히 변통해야 될 것을 제외하고 관례에 따라 행하는 공사는 반드시 3일 내에 복계하라. 또 일체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개좌할 일을 다시 한번 더 신칙하라."
하였다.
○ 상이 정릉(貞陵)에 가서 전알(展謁)한 뒤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돌아올 때에 사하리(沙河里)에 이르러 단에 올라가 무예를 사열하였다. 이어서 태복마(太僕馬) 3필을 끌어오도록 명하여 세 대장에게 나누어 하사하였다. 상이 송 태조(宋太祖)가 무성왕(武成王)의 사당에 들러 참배한 고사를 인용하여 장차 돌아가는 길에 무안왕(武安王)의 사당에 들러 유상(遺像)을 볼 계획으로 대신들에게 절목(節目)을 정하게 하였다.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이 아뢰기를,
"마땅히 주 무왕(周武王)이 상용(商容)의 여문(閭門)에 허리를 굽혀 절한 사실을 본떠서 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우의정 민암(閔?)이 아뢰기를,
"절을 해서도 안 되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해서도 안 됩니다. 마땅히 손을 들어 읍을 해야 됩니다."
하자, 상이 민암의 의견을 따랐다. 삼사가 청대하여 국조에 전례가 없다고 하여 지나다가 들르는 일을 중지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안왕의 만고에 빛나는 충의(忠義)는 평소에 감탄하고 있었다. 이미 그 사당의 문앞을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감흥이 있었는데, 들어가 유상을 보는 것이 무슨 해가 있겠는가."
하고, 따르지 않았다.
○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아, 무안왕의 충의는 실로 천고에 드문 바이다. 내가 일찍이 관왕도(關王圖)에 절구 한 수를 -시는 아래에 보임- 써서 항상 감탄하고 흠모하는 뜻을 표하였고, 매번 동쪽으로 능에 거둥하는 길에 한번 들어가 엄숙한 유상을 바라보고자 했다. 지금 지나치면서 들른 것은 실로 시공을 초월하여 서로 감동한 뜻에서 나왔고 또 무사들을 격려하려는 것이었지, 본래 한때의 관람을 유쾌하게 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아, 여러 장수들은 나의 이런 뜻을 본받아서 더욱 충의에 분발하여 왕실을 보위하도록 하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또 동쪽과 남쪽의 관왕묘 건물의 파손된 부분은 해조로 하여금 속히 날짜를 잡아 착실하게 보수하게 하고,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되 제문 속에 내가 멀리서 추모하고 매우 감탄한다는 뜻을 다 표현하라."
하였다.
○ 3월.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어제 무안왕(武安王)의 유상(遺像)을 보았는데, 아름다운 수염이 잘린 흔적이 분명하게 있었으니 일이 매우 미안하다. 이런 부분을 새로 보수하라. 이어서 생각건대, 조종조에서 사당을 세워 숭봉(崇奉)한 것은 실로 충절을 크게 추앙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왔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잡인들의 출입을 금하지 않아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였고 그 밖의 손상된 곳도 많으니, 엄숙하고 깨끗해야 할 묘우(廟宇)가 행인들이 장난치는 장소가 되었다. 만약 특별한 방법으로 금단(禁斷)하지 않는다면 오늘 고치고 나면 내일 다시 파손할 터이니 이는 절대로 경건하게 하는 본의가 아니다. 앞으로 또다시 이런 문제가 발생하여 적간(摘奸)할 때에 적발된다면 당해 수직관을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뜻을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라."
하였다.
○ 상이 친히 모화관(慕華館)에 임하여 무예를 사열하였다. 비망기를 내리기를,
"기사(騎射)는 바로 무사의 장기이다. 효묘조(孝廟朝) 때부터 혁사(革射)를 폐지하고 기사에 대한 법을 세웠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근래에 무사들이 조가(朝家)에서 장려하는 뜻을 본받지 않고 나이가 그다지 노년이 아닌데도 품계가 조금 높으면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 스스로 늙었다고 말하면서 공공연하게 포기하고 있다. 어제 초시(初試)를 면제한 시험의 거안(擧案)을 살펴보았는데, 기추(騎?)에 불참한 자가 1백 30이란 많은 수에 달하였으니 놀랍기 그지없다. 비록 모조리 군법으로 다스리기는 어려우나, 다 뒤늦게라도 쏘게 할 일로 시소(試所)에 분부하라."
하였다.
○ 6월. 대신과 비국의 재신(宰臣)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권대운이 강도(江都)에 성을 쌓는 일을 가지고 아뢰기를,
"훈련도감의 군사는 바로 도성에 있는 전하의 친병이므로 멀리 역사에 파견할 수 없습니다. 어영청의 군사 5백 명을 당번을 면제하여 역사에 가게 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다만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대부분 외지의 군사를 모으는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지나친 염려다 지난해 돈대(墩臺)의 역사에서 비록 뜻밖의 일이 발생하기는 하였지만, 어찌 모두 매번 이와 같이 의심할 수 있겠는가."
하자, 우의정 민암이 아뢰기를,
"혹자는 군사를 모집하는 것을 편리하게 여겼는데, 응모자가 1만에 가까운 수이므로 만약 통솔자가 없을 경우 일을 반드시 성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로지 절제(節制)하는 군사를 쓰는 것만 못합니다. 해변(海邊)의 군졸들은 흙을 쌓는 일에 상당히 익숙하니, 황해도 금위군으로서 당번에 해당한 자들을 당번을 면제하여 가서 일하게 하고 군장(軍裝)을 제거하게 한다면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이 각기 견해가 있으나, 대신의 말대로 어영청의 군사를 역사에 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우참찬 유명천(柳命天)이 뜻밖의 사변에 대하여 염려하니, 민암이 말하기를,
"지난해에 흉악한 말이 승군(僧軍)에게 나왔는데, 승군은 바로 모집한 군사들입니다. 만약 이것으로 염려한다면 모집한 군사를 역사에 가게 할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임금의 마음은 활달한 것을 귀하게 여기고 대중을 거느리는 도리는 관대하기를 힘써야 한다. 옛날에 송 태조(宋太祖)가 말하기를 '천명(天命)을 받은 자는 자신의 뜻에 따라 해야 된다.'라고 하였다. 만약 사사 건건 염려하고 의심한다면 인군의 만물을 포용하는 넓고 큰 도량이 아니다. 이 역사에는 다만 마땅히 절제가 있는 군사들을 쓸 뿐인데, 어찌 의심하지 않을 상황에서 미리 의심하겠는가. 설령 뜻밖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미리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 7월. 경상도 관찰사 민창도(閔昌道)가 하직하니, 상이 인견하고 유시하기를,
"제도의 방백이 어느 곳인들 막중한 자리가 아니겠는가만, 영남이 가장 중요한 곳이다. 그런데 작년의 흉년은 전례가 없는 정도로 심한 것이었으니, 사방으로 흩어지는 백성들을 안집(安集)시키는 것이 급선무다. 부임하여 힘쓰도록 하라."
하니, 민창도가 아뢰기를,
"문관으로서 양사에 출입한 자가 수령으로 나가는 예는 적고 대다수 무관과 음관이 나가고 있어 폐단이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전최(殿最)에 마음을 다해야 하겠으나, 조정에서도 잘 선택하여 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은 모름지기 잘 살펴서 관리로 등용하기에 합당한 자를 가려서 계문하라."
하였다.
○ 윤7월. 상이 직접 율시 한 수를 지어 정원에 내렸다. 그 시에,
예부터 나라에 화를 끼친 것으로/從古禍人國
당쟁보다 더 혹독한 것이 없었지/莫如黨比酷
동인 서인 서로 주의를 표방하고/東西?標榜
노론 소론 돌아가며 마구 훼방하였네/老少轉橫坼
공도는 시시로 다 없어지고/公道時淪喪
날마다 사심에 얽매여 있네/私心日係着
모름지기 본보기가 가까이 있는 것을 알아/須知殷鑑邇
끝까지 변치 말고 충성을 다하라/終始竭忠力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아, 붕당(朋黨)의 화를 어찌 차마 말로 하겠는가. 전날 여러 간신들이 권세를 잡고 노소가 분열되어 공도(公道)는 날로 없어지고 사의(私意)가 날로 기승을 부렸으며, 그 말기의 폐해는 마침내 의리가 암흑처럼 어두워지고 마는 데에 이르렀으니, 붕당의 재앙을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지금에 정치가 새로워지고 조정이 청명하니, 마음과 힘을 한결같이 써서 왕실을 보좌하도록 하라. 이는 참으로 좋은 정치를 해볼 수 있는 기회이다. 비록 그러하지만 혹은 부지런하고 혹은 나태하여 애당초 먹은 마음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은 실로 사람의 정리상 면하기 어려운 바이니, 곡진하고 간절하게 경계하고 장려하는 것이 더욱 힘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글솜씨가 부족한 것을 헤아리지 않고 직접 율시 한 수를 지어 나의 뜻을 표현하였다.
아, 너희 대소 신료들은 혹시라도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사심을 과감히 제거하고 시종 화합하기를 힘쓴다면, 이것이 어찌 나라의 무궁한 복이 아니겠는가. 나의 말은 마음 깊은 곳에서 나왔으니, 부디 제각기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 대신과 비국의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대신의 말을 인하여 삼남(三南)의 진곡(賑穀)과 조세를 특별히 견감하라고 명하고, 즉시 승지에게 탑전으로 나와 쓰라고 명하였다. 비망기를 내리기를,
"가엾은 우리 백성이 겨우 큰 흉년을 겪고 구사 일생으로 헤어났는데, 비유하면 중병에 걸린 사람이 혈기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와 같다. 지금은 그들을 보살필 대책을 세우는 것이 가장 급선무인데, 만약 조금 결실이 되었다는 이유로 허다한 진곡을 일시에 환수한다면 이는 바로 옛사람이 이른바 '풍년이 든 해에도 종신토록 고생스럽고 흉년이 드는 해에는 사망을 면하지 못한다.'고 한 것에 해당된다. 이것이 왕도 정치에서 차마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해조와 해청으로 하여금 경중을 나누어 품지하여 변통하게 하되, 작년 봉납을 정지한 전세(田稅)는 전량 감면하고 대동미는 적당량 감하여 조정에서 혜택을 보이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친히 ≪천자문≫ 의 서문을 지어 춘방(春坊)에 내리니, 춘방이 책을 간행하면서 첫 권을 올리면서 동궁의 서연(書筵)을 열 때가 되면 이 글로 진강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천자문≫은 바로 양(梁) 나라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것이다. 옛날에 무제(武帝)가 제왕(諸王)에게 가르칠 글을 은철석(殷鐵石)으로 하여금 종요(種繇)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 가운데에서 중복되지 않게 1천 자를 베껴 내게 하였는데, 글자마다 쪽지가 다르고 번잡하여 차서가 없으므로, 주흥사로 하여금 운문으로 만들어 내게 하였더니, 주흥사가 하루 안에 엮어 내고는 머리가 다 하얗게 쇠었다고 하였다. 이
또 생각건대, 동궁이 바야흐로 이 책을 강습하는데, 천성이 총명하고 지혜가 날로 자라나서 머지않아 더욱 학문에 뜻을 두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매번 글을 읽을 때에는 글자의 새김을 알 뿐만 아니라 반드시 반복하여 뜻을 궁구하고 유추하여 키워나가야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효도에는 있는 힘을 다 해야 한다[孝當竭力]'라는 구절을 읽으면 문왕(文王)이 하루에 세 번 문안한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부드러운 얼굴빛과 성실한 자세를 가지게 되고, 또 '한 자 되는 옥을 보배로 여길 것이 아니라 잠깐의 시간을 아껴야 한다[尺璧非寶 寸陰是競]' 라고 한 구절을 읽으면 순(舜)이 옥을 버리고 우(禹)가 짧은 시간도 아껴 쓴 고사를 생각하여 반드시 보배를 천하게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기며 학문은 언제나 미치지 못한 듯이 하게 되고, 또 '사람이 사사로운 마음을 이겨나가면 성스러워질 수 있다[剋念作聖]'라고 한 구절을 읽게 되면 성인과 미치광이가 서로 갈라지는 것이 이치에 따르느냐 욕망에 따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욕망을 금하고 천리(天理)를 보존하게 되고, 또 '허물을 알면 반드시 고쳐야 된다[知過必改]'라고 한 구절을 읽게 되면 ≪주역≫의 풍뢰 익괘(風雷益卦)를 본받아서 반드시 바람처럼 빠르게 선으로 옮겨가고 천둥처럼 과감하게 허물을 고치게 되고, 또 '농사를 힘쓴다[務玆稼穡]'라고 한 구절을 읽게 되면 밥상의 쌀 한톨도 다 백성들이 고생하여 지은 것임을 알게 되어 반드시 검소한 생활로 씀씀이를 절약하고 국가를 위하여 복을 끝까지 다 누리려고 하면서 밤낮으로 열심히 직접 행실로 옮길 것이니, 개발하고 성취하는 데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주강에 나아갔다. 지경연 심재(沈梓)가 아뢰기를,
"시종신으로서 늙은 어미가 있어서 은사를 받은 자에 대하여 장차 그 노모를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어 성상의 은혜를 빛내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성대한 일입니다. 선조(宣祖) 때에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 고 참판 홍이상(洪履祥) 등과 인조(仁祖) 때에 신풍부원군(新?府院君) 장유(張維), 고 판서 이식(李植) 등이 노모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자 술과 음악과 물품을 하사하였고, 고 상신 노수신(盧守愼)이 어미의 나이가 80세를 넘어 수연을 베풀자 선조가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잔치에 참석하도록 하고 또 음악과 물품을 하사하였습니다. 신이 이에 고사를 열거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은 참으로 희귀하다. 선묘조의 고사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맹자(孟子)≫에 '어진 정사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에서 시작된다.' 하였으니, 경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 바로 왕도 정치의 급선무이다. 우리나라는 경계가 바르지 않기 때문에 부역이 균등하지 못한데, 모든 도의 토지 측량을 일시에 다 시행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점차 이 법을 정비해 가면 균등하지 않은 채로 내맡겨 두고 아예 나 몰라라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자세히 요량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뒤에 대신의 건의로 인하여, 내년에 가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 8월. 상이 특별히 강화도에 중관(中官)을 보내 성을 쌓는 장교와 병사들을 위로하면서 향온(香?) 60병을 내렸고, 그 밖의 물품도 매우 후하게 내렸다. 이어서 강화 유수에게 선유하기를,
"아, 믿을 수 있고 돌보아야 할 자는 사졸이 아니겠는가. 평상시 아무런 일이 없을 때에는 왕실을 보위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창을 잡고 일선에서 싸워 나라와 더불어 동고 동락하니, 참으로 믿을 수 있고 돌보아야 할 자는 사졸이 아니겠는가.
지금 강화도에 성을 쌓는 일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실로 평상시 아무 일이 없을 때에 미리 튼튼히 방비하려는 계책이다. 공사가 매우 크고 일이 많아 군문의 건장한 사졸이 아니고서는, 있는 힘을 다하여 일을 하여 그 큰 역사를 빠른 기일 안에 끝마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내가 너희들을 의지하고 믿어서 이렇게 부른 이유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직접 판자와 삽을 잡고 일을 하느라 노고가 매우 많다는 것을 잘 알기에 염려하고 가긍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그 마음이 어찌 송 나라 임금이 서쪽에 정벌 나간 군사들을 걱정한 정도일 뿐이겠는
하였다.
○ 상이 태학에 나아가서 문묘를 배알하고, 이어서 선비를 시취하였다. 이날 새벽에 상이 하련대(下輦臺)에 거둥하여 먼저 비망기를 내려 게시하게 하여 선비들을 계유(戒諭)하기를,
"아, 학교를 설치하여 사방의 선비들을 양성하는 것은, 바른 학문을 강명하고 선을 택하여 몸을 닦아 인륜에 근본하고 사물의 이치에 밝게 하기 위한 것이다. 어찌 한갓 글을 지어 녹을 구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옛날에 전손사(?孫師) 가 녹을 구하는 방법에 대하여 질문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많이 듣고 의심스러운 것은 제외하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신중하게 말하면 허물이 적을 것이며, 많이 보고 위태한 것은 제외하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신중하게 행하면 후회가 적을 것이다.' 하였다. 실로 넓게 배우고 정밀하게 가리고 요체를 지키면 녹은 나서서 구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올 것이다. 이것이 어찌 만세의 격언이 아니겠는가.
나름대로 보건대, 요즈음에 세상이 날이 갈수록 속되어져서 선비들의 풍습이 옛날같지 않다. 그리하여 경서에 밝고 행실이 닦여지고 정치의 체모에 통달한 자는 적고, 문사(文辭)만을 숭상하여 경서 공부는 내던지고 이록(利祿)를 쫓는 사람들만이 어디에나 많으니, 이것이 어찌 조종조에서 학교를 일으켜서 인재를 양성하던 본뜻이겠는가. 나는 이에 대하여 세상의 도의를 위하여 한탄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생각나는 일로, 전에 안정 호원(安定胡瑗 송 나라 때의 학자)이 소호 교수(蘇湖敎授)가 되어 부지런히 바른 길로 신칙하여 제자들의 말과 기풍이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고 한다. 하물며 많은 선비들이 왕과 가까이 있어 상하의 뜻이 성대하게 유통하니, 인도하고 권장하는 것이 어찌 이런 때에 있지 않겠는가. 너희 선비들은 나의 훈계를 경청하여 가슴에 새겨 잊지 말라. 차츰차츰 학문을 연마하여 성취하게 되면 국가와 사문(斯文)의 다행이 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이 말은 나의 충심에서 나왔으니, 모두들 철저히 살펴야 될 것이다."
하였다.
○ 9월. 상이 노량진(露梁津)을 건너면서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의 묘소가 길 옆에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의 절의(節義)에 감동하여 특별히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 시종신을 노산대군(魯山大君)의 묘에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판부사 김덕원(金德遠)이 아뢰기를,
"사육신의 묘에 대해서는 전부터 전해 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명백한 증거가 없습니다. 박팽년의 후손 고 군수 박숭고(朴崇古)가 전에 표석을 세웠으나 감히 선조의 무덤이라고 확정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드디어 그 사당에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또 예관의 말을 통하여 그들의 관직을 회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고, 하교하기를,
"사육신이 명 나라의 방효유(方孝孺)와 비교하여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고는, 즉시 관직을 회복하라고 명하고 또 사당의 편액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여러 신하들의 반대로 인하여 방금 내린 명은 중지하고 단지 노산대군의 묘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 하교하기를,
"내가 선량하지 못한 자질로 외람되게 왕업을 이어받았는데, 나에게 부탁한 하늘의 밝은 명을 실추시키게 될까 두려워 밤낮으로 경외하였고 잠시도 나태하거나 소홀하지 않았다. 다만 자질과 덕이 부족하여 정사가 올바로 시행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나라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쇠퇴하고 백성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곤궁해지고 있다.
비록 자잘한 기미이기는 하나 이미 걱정스러운 단서가 많은데, 뜻밖에 양기가 다 폐장(閉藏)하는 달에 우레
승지는 내 대신 교서를 초하라. 그리고 정부에서 널리 올바른 말을 구하여 내가 미치지 못한 부분을 바로잡게 하라.
아, 너희 대소 신료들은 내가 일전에 내린 경계를 본받아서 사사로운 생각을 말끔히 끊어 버리고 공도(公道)를 넓게 신장하라. 또 옛사람이 집의 크기를 겨우 말을 돌릴 수 있을 정도로 하였던 뜻을 생각하여 속히 토목공사를 다 중지하고 모든 물자를 절약하기에 힘쓰라. 오직 임금을 아버지와 같이 사랑하고 나라를 자기 집과 같이 걱정할 것을 소임으로 여기고,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왕실을 보위하여 조금이라도 하늘의 견책에 답하고 이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 11월.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내가 국조의 고사를 보니, 태종(太宗) 2년에 전대의 본받을 만한 일을 벽 위에 그리게 하였고, 성종(成宗) 원년에는 본받고 경계할 만한 일을 택하여 그림으로 그려 병풍을 만들게 하고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시로 읊게 하였다. 이것이 어찌 그림을 가지고 구경거리로 삼은 것이겠는가. 지금에 전대의 일로서 본보기가 될 만한 선행과 경계가 될 만한 악행 각각 8가지 고사를 가지고 그림으로 그려 종류별로 8폭 병풍 2개를 만들어 자리 구석에 펼쳐 놓고 성찰하는 자료로 삼으려 한다. 이는 옥당으로 하여금 감독하여 완성하게 하라. 그리고 문임관(文任官)은 제각기 그 고사를 가지고 율시를 지어 병풍 각 폭의 머리에 화제로 써서 올리라."
하였다. 이 병풍의 소재로서 선행에 관한 것은 요(堯)가 현인을 등용하여 아름다운 정치를 도모한 일과, 순(舜)이 노래를 지어 경계하는 명을 내린 것과, 하(夏) 나라의 우(禹)가 그릇을 들어 좋은 말을 구한 것과, 은 나라의 탕(湯)이 상림(桑林)에서 기우제를 지낸 것과, 중종(中宗)의 덕이 상상(祥桑)을 멸한 것과, 주 나라 문왕(文王)의 은택이 썩은 뼈에까지 미친 것과, 무왕(武王)이 단서(丹書)로 경계를 받은 것과, 선왕(宣王)이 충간한 말에 감동하여 정사를 부지런히 한 것이었다. 또 악행에 관한 것은 하 나라 태강(太康)이 사냥에 탐닉하다가 왕위를 잃은 것과, 한 나라 성제(成帝)가 시장과 마을을 미행한 것과, 애제(哀帝)가 간사한 자를 사랑하고 어진 자를 죽인 일과, 영제(靈帝)가 서저(西邸)에서 관작을 판 것과, 진(晉) 나라 무제(武帝)가 양차(羊車)에서 놀이를 한 것과,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재물을 거두어들여 사치스럽게 쓴 것과, 의종(懿宗)이 노하여 간언한 신하를 유배한 것과, 송(宋) 나라 휘종(徽宗)이 간신과 역적을 기용한 것으로서, 합쳐서 모두 16가지 고사였다.
○ 상이 특별히 비망기를 내려 중외에 포고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에,
"하우(夏禹) 시대에는 공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어 백성들이 태평스럽게 살았는데도 오히려 당우(唐虞) 시대만 못하다고 통렬하게 자책하여, 심지어 수레에서 내려 죄인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으니 지성으로 측은하게 여긴 뜻이 말 밖에 성대하게 나타나므로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을 감동시키는 점이 있다.
아, 오늘날 나라의 형세가 극도로 어려운 상황이고 백성들의 풍속도 극도로 퇴폐해지고 있다.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님을 공경하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른에게 공손하는 도의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윤리를 어그러뜨리고 혼란시키는 일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도 마음속으로 놀라지 않고 있다. 실제로 너무나 뜻밖에 호서(湖西)에서 또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변이 발생하였다.
아, 부자간의 사랑은 하늘로부터 받은 떳떳한 본성으로서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의 구별이 없이 똑같이 받았는데, 저들이 비록 어리석다고는 하지만 심지어 이런 차마 못할 일을 잔인하게 하였으니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논어≫에 이르기를 '행정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똑같이 복종하게 하면 백성들이 법망을 면하기만 하고 수치스럽게 여길 줄 모르며,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복종하게 하면 수치스럽게 여길 줄도 알고 나아가 바르게
보잘것없는 소자가 재능도 덕도 없이 백성들 위에 군림한 지가 어언 17년이 지났다. 그러나 덕과 예로 앞장서서 인도하여 하나같이 복종하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날마다 선으로 옮겨 가게 할 줄은 알지 못하였고, 다만 법제와 형벌로 구차히 겁을 먹고 죄에서 멀리 도망가게 하려고만 할 뿐이었으니, 이는 말단만을 믿어 근본을 탐색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보면, 우리 백성들이 자중 자애하지 않고 쉽게 법을 범하는 것은 실로 통솔하는 자가 법도를 잃은 데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하니 부덕하고 혼매한 과인이 마음아파하는 것이 어찌 우(禹)가 죄인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정도에 그칠 뿐이겠는가.
아, 너희 대소 신민들은 내가 반복하여 고하고 유시하는 지극한 뜻을 새겨듣고 사람이 가진 본연의 착한 마음을 감발시켜 직분상 당연히 해야 될 일에 진력하라. 하루 이틀 각기 스스로 격려하다 보면, 세상 풍속이 크게 변하는 효과를 얻는 것이 어찌 당우 시대의 전유물이 될 뿐이겠는가."
하였다.
○ 밤에 상이 옥당에 술을 하사하고, 칠언시 한 수를 지어 내렸다. 그 시에,
북풍 한설은 솜을 도려내듯 추운데/雪風如劍折綿寒
구중 궁궐은 어느새 밤이 깊었네/金闕沈沈夜已?
불현듯 옥당이 생각나서 술과 안주 내리니/忽憶登瀛傳御饌
흠뻑 취하도록 마시고 은사의 기쁨을 노래하라./厭厭醉飽侈恩歡
하였다. 또 소서(小序)를 쓰기를,
"경악(經幄)의 신하는 직책이 임금 가까이에서 계설향(鷄舌香)을 물고서 진강하고 하문에 응하는 것이다. 옛사람이 영주(瀛洲)에 오른 것에 비하기까지 하였으니, 한 시대의 최고의 인재 선발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조종조에서부터 친애하고 신임하여 은혜와 예우의 특별함이 가정의 부자 사이와 같을 뿐이 아니었는데 이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경들이 모두 훌륭한 문학과 행실을 가지고 경연에 나와 시강하면서 지성으로 나를 인도하여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나는 매우 가상하게 여겨 잊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지금 추위가 점점 심해지고 밤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는데, 어전에 올린 진수 성찬을 대하자 입직한 옥당의 관원이 무료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반찬과 술을 내리고 겸하여 시 한 수를 지어 나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하였는데, 이는 옥당의 관원을 총애한 것이다. 이에 옥당에 입직한 관원이 사전(謝箋)을 올려 사례하고, 그 운에 따라 시를 지어 올렸다.
○ 12월. 특별히 해조에 명하여 성삼문 등 6인의 관작을 회복하고 제사를 올리게 하고 사당의 편액을 '민절(愍節)'로 하사하였다. 이어서 비망기로 이르기를,
"나라의 임금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은 절의(節義)를 높이고 장려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신하로서 가장 행하기 어려운 것은 절의를 지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앞서는 것이 없다. 이것이 옛날 제왕들이 반드시 절의 있는 선비를 중하게 여겨 번번이 포상한 이유이다.
지금에 저 육신(六臣)을 생각하면, 그들이 어찌 당시 상황이 천명과 인심의 향배를 어길 수 없다는 것을 몰랐겠는가마는, 자신들이 섬기던 이에 대하여 목숨을 바치고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사람으로서 행하기 어려운 바이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늠름한 그들의 충절이야말로 명 나라 충신 방효유(方孝孺)와 경청(景淸)에 비견할 만하다. 하물며 선왕의 능에 일이 있어 묘 옆을 지나가게 되니, 내 마음에 더욱 느껴오는 바가 있다.
아, 어버이를 위하여 기휘(忌諱)하는 도리를 어찌 내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내가 포양(褒揚)하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절의를 사주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당시에 세조대왕께서 '당세의 난신이고 후세의 충신이다.'라는 하교를 내리신 것이 특별한 의의가 있다고 여겨서이다. 따라서 오늘의 이 조치는 실로 세조대왕의 유지(遺志)를 계승하고 세조대왕의 성대한 덕을 빛내는 것이다. 어찌 미안할 일이 있겠는가. 성삼문 등 6인을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관직을 회복하고 제사를 올려 백세토록 그들의 풍성(風聲)이 들리게 하라."
하였다.
18년(임신, 1692)
○ 1월. 상이 특별히 백관의 기거반(起居班)에 비망기로 이르기를,
"북쪽 땅에는 음기(陰氣)가 다하고 동쪽 교외에는 봄을 맞이하여 천지 어디나 다 화기가 넘쳐 삼라 만상이 소생하게 되었다. 하늘의 지극한 인(仁)을 체득하여 한 시대의 모든 정사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지성으로 쉼없이 강건하게 일할 중요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아, 여러 대소 신료들은 나의 이 유시를 새겨듣고 옛날의 나쁜 습성을 말끔히 없애고 해와 더불어 새롭게 되라. 이것이 내가 너희들에게 소망하는 바이다. 그리고 덕을 펴고 명을 내려 농사를 독려하는 것이 왕도 정치에서 급선무로 여기는 일이니, 마땅히 모든 도의 방백으로 하여금 각 고을에 신칙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널리 채집하여 조목별로 보고하게 하라. 또 맡은 도를 잘 다스리고 경술(經術)을 자세히 밝히며, 다 스스로 농사에 힘을 기울이고 각기 사람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여, 조정에서 백성들을 염려하고 근본을 힘쓰는 뜻을 보여 주도록 하라."
하였다.
○ 부제학 권해(權?)가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상에게 아뢰기를,
"외국의 진귀한 물건은 본래 임금이 가지고서 감상할 것이 아닙니다. 항간에 '은서피(銀鼠皮)로 갖옷을 지었다.'는 소문이 있으니, 신은 나름대로 통탄하는 바입니다. 옛날에 진 무제(晉武帝)와 당 현종(唐玄宗)은 평범한 임금에 불과했으나 치두구(雉頭?)와 금수장(錦繡帳)을 불살라 사관이 찬미하였는데, 지금에 밝고 성스러운 전하께서 어찌 저 두 임금이 한 것보다 못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이에 즉시 은서구 2장을 정원에 내려 불사르게 하였다. 인하여 비망기를 내리기를,
"대저 오(獒)라는 개는 일개 짐승에 불과한데, 옛날 주 나라 때에 서려(西旅)가 공물로 바치자 군석(君奭)이 글을 지어 지성스럽게 무왕(武王)을 경계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이상한 물건을 애완하다가 바른 뜻을 잃어 마침내 제왕의 큰 덕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 한 것이다. 오늘 경연 중에 부제학 권해가 이상한 물건을 물리치고 검소한 덕을 밝히라는 뜻으로 누누이 진달하였는데, 그 말뜻이 격앙되고 간절하였다. 지성스러운 충성과 사랑이 고금에 다름이 없기에, 내가 이미 그 성의를 가납하고 그 말을 옳게 여겼다. 따라서 즉시 지은 갖옷과 아직 만들지 않은 가죽을 모두 본원에 내려 상의원으로 하여금 불사르게 하여, 크건 작건 간언을 다 합하여 받아들여 시행하는 실상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하직하는 감사와 병사를 인견하여 직접 유시하여 보냈다. 이어서 입시한 승지에게 비망기를 쓰도록 하여 내리기를,
"나라의 풍속이 야박해지고 백성들의 의지가 굳지 못하여 한번 유언비어를 들으면 곧장 온 세상이 술렁거리는 데에 이른다. 서울의 사대부 중에서 유언비어에 현혹되어 가족을 데리고 향리로 내려가는 자들이 길에 연이어져 모든 촌락의 백성들까지 소요를 일으키게 하였다는데, 어리석은 촌백성들이야 깊이 죄책할 것이 못 되나, 분수와 의리를 조금 아는 사대부의 신분을 가진 자들은 응당 발벗고 나서서 그들을 깨우치고 진정시키기에 겨를이 없어야 될 터인데도, 동요해서는 안 될 말에 동요하여 먼저 제각기 자신만을 보존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 이래서야 혹시라도 외적의 침략이 있게 되면 어떻게 임금을 위하여 앞장서서 싸우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한성부로 하여금 각부에 신칙하여 알 만한 사대부로서 동요하여 향리로 내려간 자들을 정밀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뒤에 대신의 건의로 인하여, 조사하는 일을 당분간 중지시키고 더욱 경계하고 신칙하게 하였다.
○ 상이 친히 ≪대명집례(大明集禮)≫ 서문을 지어 정원에 내려 모두 책에 넣어 인쇄하게 하였다. 그 서문에 이르기를,
"대저 천하의 지극한 이치는 다 예(禮)에 표현되어 있다. 예란 사람의 일상 생활이나 모든 사물의 타당한 것
아, 애석하다. 궁중의 서고에 소장된 본은 탈락된 부분이 많아 완전한 권질을 이루지 못했으니, 이에 홍문관에 명하여 예부(禮部)에서 수집하여 결락된 것을 보충하게 하였다. 그리고 유신(儒臣) 이윤수(李允修)의 주청을 받아들여, 한 부를 정사하여 자상하게 교정을 가하고 이어 이남(二南 《시경》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첨부하여 간행한 뒤에 신하들에게 널리 배포하여 오래 전해지도록 하여 내가 늘 오례(五禮)를 쓰는 뜻을 펴려 한다. 이것으로 만에 하나라도 정치와 교화에 보탬이 있기를 기대한다."
하였다.
○ 3월. 고 부총관 성승(成勝)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성승은 성삼문의 아버지인데 육신이 죽임을 당하였을 때 그도 끼여 있었다. 상이 육신의 관작을 회복시키자 홍주(洪州)의 유생들이 상소하기를,
"성승의 묘가 본 고을 노은동(魯隱洞)에 있는데, 그가 살던 집과 몇 리 안의 가까운 거리에 있고, 성삼문의 처도 그 곁에 묻혀 있습니다. 성승 부자의 가산은 다 관에 몰수되었습니다. 본도 연산현(連山縣)에 성씨들이 살고 있는데, 지금 충훈부에 소속되어 있다고 하며, 그의 노비가 일 년에 한 차례씩 초혼제를 올린다고 합니다. 육신에 대하여 이미 관작을 회복시켰으니, 성승에게도 대우가 달라서는 안 됩니다. 또 성씨들의 토지를 도로 내주어 묘소를 관리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부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복주하기를,
"성씨들의 토지는 지금 내주어야 되겠습니다만, 노비는 증거할 만한 문서가 없습니다. 본부의 노비로서 연산현에 있는 자를 특별히 획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5월. 가뭄이 심하여 대신을 보내 빌었으나 효과가 없었다. 이에 비망기로 이르기를,
"재차 비가 내리도록 빈 뒤에도 하늘을 보니 감감 무소식이므로 아직도 한줄기 시원한 빗줄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백성들의 농사를 생각할 때 내 몸이 아픈 듯하다. 돌아보건대 나의 성의가 천박하여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농사일이 이토록 갈급하고 민망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직접 남쪽 교외에 나가서 희생을 대신하여 기도할 일을 잠시도 늦출 수가 없다. 이에 대하여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날짜를 따로 잡지 말고 거행하도록 조치하게 하고, 또 대제학으로 하여금 친제의 제문을 지어 올리게 하되 내가 자신을 죄책하는 뜻을 다 진술하게 하라. 또 유사에게 명하여 여러 관사와 시위하는 장수와 사졸들을 신칙하여 기우제의 제단에 거둥할 때에 곡식을 짓밟아서 백성을 위하여 기우제를 올리는 뜻을 손상시키지 않게 하라."
하였다.
○ 8월. 야대하였다. 승지 심벌(沈?)이 전라 감사로 있다가 체직되어 돌아와 연해 지역의 수해에 대하여 자세하게 진달하니, 상이 안타깝게 여겨 하교하기를,
"금년의 수해는 팔도가 다 똑같다. 경기촹호서촹해서 등 세 도는 이미 재해가 난 토지에 대하여 세금을 면제하였고, 또 익사한 자에 대해서는 신포를 감하게 하였다. 한편으로 생각하건대, 여러 도의 백성들 중에 혹시라도 가옥이 무너지거나 침수되고 토지가 침몰하여 맨몸으로 도망나와 가산을 탕진한 사람이 있다면, 비록 다행스럽게 죽음을 면하기는 하였지만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떠돌아다니느라 삶을 보존할 수 없을 터이니, 그 불쌍한 형상이 죽은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제도의 도신으로 하여금 특별히 뽑아내어 보고하게 하여, 일체 부역
하였다.
○ 9월. 상이 시 2수를 지어 직접 써서 판목에 새겨서 내리고, 이르기를,
"그 중 한 편은 관왕(關王)의 그림에 쓴 것이고, 한 편은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렀다가 느낀 바가 있어서 지은 것이다. 이것을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나누어 걸어 경모(敬慕)하는 뜻을 표하라."
하였다. 그 시에,
내 평소 수정공을 사모하니/生平我愛壽亭公
절의와 정충이 만고에 우뚝하네/節義精忠萬古崇
광복에 노심 초사하다 몸이 먼저 떠났기에/志勞匡復身先逝
천년을 두고 열사들 가슴에 눈물 고이네/烈士千秋涕滿胸
동쪽 교외 일이 있어 옛 사당을 지나치게 되어/有事東郊歷古廟
들어가 유상 보니 정신이 숙연해지네/入瞻遺像肅然淸
오늘에 공경하는 마음 더욱 절실한데/今辰致敬思逾切
부디 우리나라 만세토록 편안하게 하소서/ 願佑吾東萬世寧
하였다.
○ 10월. 상이 후원에 심었던 종려나무를 뽑아서 민가의 본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상이 일찍이 종려나무를 구하였는데, 전 안악군수(安岳郡守) 홍만회(洪萬恢)의 집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액정서의 하례를 시켜 구해 오게 하였다. 이는 홍만회가 바로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둘째 아들로서 외척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에 홍만회가 뜰에 내려와 엎드려 말하기를,
"이마에서 발끝까지 국가의 은덕을 입은 처지에 머리털과 피부라 할지라도 감히 아끼지 못할 터인데 하물며 꽃나무이겠습니까. 다만 나라의 외척이라고는 해도 소원한 외방의 신하이기에 꽃나무를 드리는 것은 죄스러워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집에도 또한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고는 즉시 뽑아 버렸다. 액정서의 하례가 그 상황을 아뢰니, 상이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드디어 이와 같은 명을 내렸다.
○ 11월. 상이 경기촹호서촹해서가 재해를 입은 것이 특히 심하다고 하여 특별히 비망기를 내려 세 도의 감사에게 유시하기를,
"임금은 백성이 없으면 부릴 사람도 없고 백성은 임금이 없으면 섬길 대상이 없으니, 사랑하고 돌봐야 할 것은 백성이 아니겠는가. 내가 덕이 부족한 사람으로서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감히 잠시도 편안하게 있을 수 없었으니, 한 사람이 굶주려도 마치 내가 굶주린 것처럼 여겼고 한 사람이 추위에 떨어도 마치 내가 추운 것처럼 여겨 왔다. 조정의 신하들과 함께 넓은 궁중에서 도모하는 것은 첫째도 백성의 일이고 둘째도 백성의 일이었는데도, 혜택이 고루 다 미치지 못하여 곤궁이 날로 심해지고 있으니 그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는 바로 성실한 마음으로 성실한 정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사와 명령이 이와 같으니, 우리 백성을 통하여 듣는 하늘이 어찌 버럭 진노하여 기근을 내리지 않겠는가. 올해는 재해가 특히 심하여 홍수와 가뭄, 바람과 서리가 농사를 다 망쳐 버려 겨울이 다 가기도 전에 집안에는 먹을 것이 바닥나 버렸다. 이에 늙은이는 부축하고 어린이는 이끌고서 사방으로 유랑의 길을 떠나서 촌락은 거의 비어 풍경이 쓸쓸하게 되었으며, 내년 봄에는 굶주려 길바닥에 쓰러져 죽게 될 상황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다.
아, ≪서경≫에서도 '폭우나 혹한에도 백성들은 오직 윗사람을 원망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 고생을 생각하고 그들의 삶을 도모해야 할 책임은 오로지 내 한 몸에 있는데, 내가 임금답지 못하여 우리 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대신 이 혹독한 재앙을 받게 하였다. 여기에 말이 미치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 모든 부역을 견감하고 구제하는 정사로서 이미 거행한 것이나 현재 강구하고 있는 것을 막론하고 다 최선을 다하도록 하
아, 너희 방백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새겨듣고 열읍에 신신당부하여 백성들을 위로하고 오게 하며 어루만지는 일을 급선무로 삼도록 하라. 참으로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에 관련된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꺼리지 말고 낱낱이 아뢰라. 또 앞으로 식량을 배급할 때에, 반드시 수령들로 하여금 자신의 가정을 다스리는 것과 같이 하여, 감색(監色)에게 맡기지 말고 직접 담당하며 지성으로 구제하여 백성들이 영양 실조에 걸리지 않게 하도록 신칙하라.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바라는 바이다. 부디 나의 이런 뜻을 잘 알아 착실히 받들어 거행하라."
하였다.
○ 밤에 바람과 눈이 심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따뚱한 방안에서 이불을 덮고 있어도 추위를 느끼는데, 빈궁하고 잔약한 군졸들이 어떻게 견디는지 염려스럽다. 대궐 안에 입직한 사졸들에게는 대내에서 술과 음식을 내려 주고, 궁성 밖을 수비하는 군졸들에게는 내자시에서 술을 주고 사재감에서 안주를 주어, 내가 걱정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12월. 상이 특별히 분부를 내려 팔도의 감사들에게 유시하기를,
"중하기로는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한 것이 없으니, 죽음이란 한번 집행하면 다시 살릴 수 없기에, 우레와 같은 위엄과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임금도 사람에게 사소한 벌을 내리거나 극형에 처할 때에는 감히 자신의 사사로운 기쁨과 노여움에 따르지 않고 살리고 죽이는 것을 모두 공의(公議)에 맡겨 놓는 것이다.
지금 사람을 죽였거나 인장(印章)을 위조한 범죄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고 용서하기 어려운 죄악이지만, 그래도 대신들을 모아 놓고 두세 번 상세히 심리하고 법률을 적용하여 죄를 가늠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살려 주려고 해도 반드시 죽여야 될 것으로서 정황이나 죄의 정도가 모두 용서할 수 없고 여러 대부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한 뒤에야 죽였다. 이것이 어찌 사람의 목숨이 지극히 중하여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혹시라도 원통함을 안고 억울하게 죽는 자가 나와 천지의 화기를 손상시킬까 염려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국가가 사람의 목숨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어느 정도라 하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크고 작은 고을의 관리들이 법을 신중하게 집행하고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도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형벌의 판결을 법에 따라 하지 않은 경우가 많단 말인가. 실제로 혹은 사소한 혐의로 인하거나 혹은 일시의 분노에 의하여 특별히 큰 곤장으로 마음대로 쳐서 죽여 인명을 지푸라기만도 못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으니, 한심한 일로서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어제 세초(歲抄)를 보았는데, 여러 도의 수령으로서 이 점을 범하여 견책을 받은 자가 비일 비재하였다. 따라서 이런 자들은 일체 관직에 복귀시키지 말도록 하여 징계할 바를 알게 하라. 그리고 별도로 신칙하는 조치도 없을 수 없겠다.
아, 너희 방백들은 반드시 이러한 뜻으로 모든 고을에 효유하여 제각기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지난날의 잘못된 습성을 혁신할 것을 기약하게 하라.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는 지방관으로서 이 하교를 새겨듣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법을 어기고 지나친 형벌을 가하면, 적발되는 즉시 엄중한 법으로 처벌하고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을 경들은 착실히 거행하라."
하였다.
○ 상이 호남에서 일어난 살인 옥사에 대하여 심문한 것이 매우 엉성한 것을 살펴보고서, 하교하기를,
"살인 옥사에 있어서 복검(覆檢 살인 사건에서 두번째로 시체를 검안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한 번이라도 분명하지 않게 하면 그 결과로 생사가 결판나니 자상하고 신중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간혹 외방의 수령이 직접 심문하는 것을 기피하여 하리들에게 맡겨두는 경우가 있는데, 연줄을 인하여 농간을 부리고 마음대로 죄를 증감하여 옥사가 이리저리 옮겨지면서 수십 년이 되도록 판결이 나지 않아 옥중에서 말라 죽는 지경에 이르니, 이것이 바로 원망과 억울함이 생기는 이유이다. 내가 이에 대하여 심히 측은하게 여기니, 해조로 하여금 여러 도에 지시하여 이제부터는 해당 지방관이 직접 복검하기를 한결같이 ≪무원록(無?
하였다.
19년(계유, 1693)
○ 2월. 상이 목릉(穆陵)을 전알하고 이어서 건원릉(健元陵)촹휘릉(徽陵)촹숭릉(崇陵)촹현릉(顯陵)을 두루 전배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인장리(茵匠里) 고개에 이르러 백성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상이 행차를 멈춰 그들을 불러 모아놓고 위유하려 하니, 대신들이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서 행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상이 그대로 행차하여 주정소에 이르러 장전(帳殿)에 거둥하여 부로(父老)들을 불러들여 수찰(手札)을 내려 위유하기를,
"아, 내가 부덕한 몸으로 왕위에 앉은 이래로 홍수촹가뭄촹바람촹서리 등의 재해가 해마다 계속되어 마침내 농사를 망쳐,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하루도 편안하게 살 수 없게 하였다. 그 중에서도 작년의 재해는 팔도가 다 똑같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근고에 드물었던 것이다. 경기는 나라의 근본이 되는 지역인데 다른 지역보다 특히 더 심하였다.
계절이 따뜻한 봄이 되어 만물이 다 하늘의 은택을 입고 있는데, 오직 불쌍한 우리 백성들만 기근과 곤궁에 허덕이고 있다. 그 원인을 살펴보건대, 다 내가 임금과 스승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생긴 것이었다. 이에 내 몸이 아픈 것과 같은데, 맛있는 음식인들 어찌 편하겠는가. 여러 가지 부역을 견감하고 구제하는 정사를 이미 강구하고 있는데, 어느 것이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다.
지금 능을 전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들녘을 바라보니, 백성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처럼 아파오는 것이 나도 모르게 가슴속에 더욱 절실하였다. 이 때문에 수레를 멈추고 너희들을 특별히 불러 나의 가슴속에 있는 말을 하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유사에게 명하기를,
"경기 각읍의 올 봄의 수미(收米)와 전세(田稅)로 거두는 쌀과 콩을 가을로 물려서 거두고, 그 중에서 전세를 이미 납부한 고을은 특별히 해청의 곡물을 이전하여 대신 지급하게 하라. 또 양주(楊州)에는 능침(陵寢)이 유독 많고 광주(廣州)에는 이번 행행 때 주선한 노고가 많으니, 사리로 볼때 넉넉히 돌보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양주는 정묘년에 대출한 환곡을 특별히 탕감하고, 광주는 전세로 바칠 쌀과 콩을 해청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변통해서 특별히 배려하고 돌보는 뜻을 보이라.
아, 너희 사민(士民)들은 내가 지성으로 구제하는 뜻을 본받아서 혹시라도 외지로 유랑하는 일이 없이 제각기 가정을 지키고 농사에 힘써서 어느 정도 추수를 기대할 수 있도록 하라. 이것이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 양주 유생 이제화(李齊華) 등이 상소하여, 본 고을의 전세와 수미(收米) 두 가지 역 중에 하나를 영원히 감면해 주어 백성들의 생활이 조금 펴지도록 해 줄 것을 청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이에 묘당이 아뢰기를,
"해마다 정상적으로 나라에 바치는 세금에 대하여, 백성들의 요청에 따라 경솔하게 영원히 감면하는 문제를 논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로 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판하하기를,
"나라의 정사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크다. 더구나 지금 능을 전알하고 돌아가는 길에 대가를 멈추고 부로들을 불러 놓고 수찰을 내려 위로하고 유시한 뒤에 한 고을 전체에 은택을 베풀었으니, 이는 실로 평범한 조치가 아니다. 여러 선왕들의 9개 능이 양주에 있어, 요역이 과중하고 백성들의 형편이 곤궁하니 참으로 난처한 점이 있다. 지금 모든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척에서 어전에 호소하였는데, 백성의 부모가 된 입장에 측은한 마음이 나도 모르게 우러나오니, 이는 깊은 궁궐에 조용히 앉아 있으면서 밤새도록 잊지 못할 일이다.
아, 내가 이미 그들의 실정과 소원을 물어보고는 옛날의 역사에서 찾아보니 시행한 사례가 있었다. 따라서
하였다.
○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상이 특별히 구언(求言)하는 조서를 내리기를,
"선하지 못한 내가 왕위에 오른 지가 어느덧 19년이 되었다. 그동안 하늘이 부여한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까봐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한 가지 정사나 한 가지 명령에 있어서도 매우 신중하게 처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다만 시행하고 조치하는 과정에서 걸핏하면 어긋나고 잘못되어 시의(時宜)에 적절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사람의 일이 이렇게 잘못되었기 때문에 자비로운 하늘이 발끈 진노하여 거듭 재앙을 내렸기에, 실로 이미 편안하게 살 겨를이 없었다.
음산한 무지개가 태양을 범한 변고가 백성들의 걱정이 극심한 시기에 또 다시 나타났는데, 어떤 재앙의 기틀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기에 저 하늘의 경계가 이토록 정녕한지 알 수 없다.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국가에 장차 도를 잃어 패망할 기미가 있으면 하늘이 먼저 천재 지변을 내어 견책한다. 그래도 스스로 반성할 줄을 알지 못하면 또다시 요상스러운 변괴를 내어 경종을 울린다.'고 하였다. 아, 두렵도다. 재앙이란 아무런 까닭 없이 이르지 않으며 반드시 불러오게 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지금 변괴를 불러온 것은 실로 나의 부덕의 소치이다. 자신을 반성하니 두려움이 갑절이나 더 일어난다. 승지는 내 대신 교서(敎書)를 초잡도록 하라. 그리고 응당 정원에서는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여 내가 미치지 못한 바를 바로잡도록 하라. 설령 말이 적중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찌 모든 관료들을 질책하고 면려하여 서로 경계하게 하는 조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아, 너희 대소 신료들은 나의 경외하는 뜻을 본받아서 한 몸의 사심을 다 없애고 합심 협력하여 법을 잘 지키고 직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조금이라도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 3월. 하교하기를,
"경덕궁(慶德宮) 승휘전(承暉殿)의 담장을 수리할 때에 사람의 뼈가 낭자하게 나왔다고 한다. 그곳은 필시 옛날에 사람을 매장했던 곳일 것인데,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매우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뼈는 비록 썩었지만 나는 백성의 주인이니 그 영혼을 보살피는 조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에 직접 제문을 지어 내리니, 해조로 하여금 모두 특별히 거두어서 묻고 제사를 지내 나의 뜻을 표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제문에 이르기를,
"궁전을 건축한 지 오래 되어 퇴락하였기에 좋은 날을 가려 수리하게 되었도다. 옛 제도에 따라 땅을 판 곳이 승휘전 북쪽이었는데, 역사가 한창 이루어지던 중에 인골이 나온 것을 보게 되었도다. 아, 너희 외로운 영혼들이여. 몇 년이나 이곳에서 지냈는가. 임금이 없어 의탁할 곳이 없었으니 얼마나 굶주렸겠는가. 나는 백성의 주인이니 얼마나 측은하겠는가.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거두어서 묻고 간략한 제물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여 나의 뜻을 표하니, 감응하는 것이 어긋나지 않아서 부디 흠향하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옛날 송 나라 신하 이항(李沆)이 진종(眞宗)의 질문에 답하기를 '재상은 공사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말해야 되니 어찌 밀계(密啓)를 쓰겠습니까. 신하로서 밀계를 하는 자가 있다면 그 내용은 참소가 아니면 아첨일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 말은 참으로 만고의 격언이다. 일전에 대신(臺臣)이 포도대장을 잡아다가 심문해야 된다는 일로 논계하였는데, 방금 내관(內官) 최상앙(崔尙仰)이 포도대장을 변호하는 일로 진달하되, 한원(翰苑)의 청지기를 체포하는 일을 가지고 마치 대단히 불측한 변고가 숨어 있다가 장차 발각되려는 것처럼 하였다. 이에 그 말뜻을 들으니 매우 의도적으로 감싸 주려는 점이 있어 말을 하게 된 유래가 있을 듯하여 최상앙을 엄하게 심문하니, 과연 '이덕흘(李德屹)이 포도대장의 말을 인하여 천청(天聽)에 진달하려고 해서 진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지금 청지기를 체포하는 곡절과 범죄의 허실에 대해서 전혀 들은 바가 없으나,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앞으
하였다.
○ 5월. 하교하기를,
"전에 조강(朝講)할 때에는 시각이 조금 일러 합문(閤門)에서 습강할 때에 으레 불을 밝혔었다. 그런데 오늘은 시각이 너무 늦었으니, 승지가 잘 알아서 신칙하라."
하였다.
○ 9월. 상이 후릉(厚陵)을 전알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송도(松都)에 도착하여 목청전(穆淸殿) 옛터에 들러 수레를 정지시켜 놓고 두루 관람하였다. 이어서 남문 누대에 올라 부로(父老)들을 불러 누대 아래에 세워 놓고 승지에게 위로하고 유시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본부의 옛날 환곡으로서 아직 봉납하지 않은 것과 각 아문에서 대출하여 칙사를 맞이하는 비용에 쓰고서 백성들에게 징수한 미두(米豆) 1천 2백여 석, 은 9천 냥, 대미(大米)와 소미(小米) 3천 석, 면포(綿布) 30동, 유철(鍮鐵) 1천 근을 탕감하라고 명하였다. 부로들이 본부에서 유독 칙사를 맞이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감당하고 있는 점과 중강 개시(中江開市)의 일도 또한 응접하기 어려운 점과 속오군(束伍軍)이 쌀을 바치는 폐단 등에 대하여 진달하였다. 또 장단(長湍)의 송서면(松西面), 풍덕(?德)의 덕풍면(德?面), 전 금천군(金川郡)을 본부로 소속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상이 상의하여 변통하라는 뜻으로 효유하였다.
○ 상이 어제시 3수를 정원에 내리고, 목판에 새겨 송도 남문 누각에 걸도록 명하였다. 그 한 수에,
작년에는 태조께서 왕이 되신 해를 다시 만났는데/去年重遇龍飛歲
오늘에 성조의 궁전을 기쁘게 우러르네/今日欣瞻聖祖宮
어찌 추모하는 마음 간절할 뿐이랴/奚但羹墻追慕倍
큰 공렬 생각하니 내 마음 한이 없네/緬懷洪烈意無窮
하였고, 또 한 수에,
번화했던 기상은 까마득히 멀어지고/繁華氣象漠然衰
후세에 부질없이 빈 터만 남았네/千載空餘麥秀基
고금의 흥망 성쇠 알려거든/欲識古今興喪處
반드시 이훈을 마음에 새겨야 하리/須將伊訓玩心思
하였고, 또 한 수에,
천천히 걸어서 백 척 누대에 올랐으나/緩步登臨百尺樓
내 마음은 유람을 즐기려는 게 아니라네/我心非是喜觀遊
오늘 저자 머리에서 백성의 고통을 묻는 자리/今辰??咨詢地
온 나라에 은택이 고루 퍼지기를 새삼스럽게 바라네/更願覃恩普八州
하였다.
○ 주강에 나아갔다. 영부사 김덕원(金德遠)이 아뢰기를,
"경기의 부역이 송도의 백성들에게 편중되어 있어 이미 견감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각읍은 유독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니, 참작하여 처리하는 조치가 있어야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에 대해서는 나의 뜻도 그러하다."
하고, 드디어 비망기를 내리기를,
"만월대(滿月臺)에 친히 임하던 날 경기 백성들에 대하여 특별히 배려하려고 불러 놓고 질문을 하였고, 이어
이번 행행은 길이 상당히 멀어 가까운 능을 전배하고서 하루 안에 돌아 오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한 도의 백성들이 분주히 접대하였는데 조정에서 베푼 것은 심히 적어서 두루 미치지 못하였으니, 내 마음에 끝내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다. 따라서 특별히 은택을 베풀지 않을 수 없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충분히 요량하여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 10월. 하교하기를,
"내가 듣건대, 선량한 백성들을 보호하려면 먼저 장오죄(贓汚罪)에 대하여 엄격하게 해야 된다고 하였다. 송 태조(宋太祖)와 같이 관대한 임금도 나라를 세우고서 장오죄를 범한 자에 대해서만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장오죄에 대한 법이 너무나 엄격하지 않아서 전후로 수령으로서 장오죄를 범하여 조사를 받은 자들이, 사면을 통하여 다 처벌을 받지 않았거나 또는 조사를 받고도 무죄로 팔결이 나는 등, 한 사람도 법에 따라 처벌받은 자가 없었다.
아, 아대부(阿大夫)를 삶았던 가마솥이 관아의 뜰에 설치되지 않아 탐관오리가 날마다 마구잡이로 세금을 거두고 있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앞으로는 반드시 엄격하게 장오죄에 대한 법을 세워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것이 백성을 보전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에 대하여 의금부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 때아닌 우레가 친 변고와 관련하여 직언(直言)을 구하는 교서를 내리기를,
"선량하지 못한 과인이 왕위에 오른 지 어느덧 19년이나 되었다. 재능은 부족하고 덕은 박하여 정사를 베푼 것이 법도에 어긋나서 스스로 하늘의 진노를 불러왔다. 그리하여 홍수촹가뭄촹바람촹서리 등의 재해와 두렵고 놀라운 변고가 달마다 일어나 거의 없는 해가 없었다.
이번에 음기(陰氣)가 폐장(閉藏)되는 계절에 갑자기 큰 우레와 번개가 치는 변고가 일어났는데, 번쩍번쩍하고 쿵쿵거리는 것이 한여름보다 더 심하였다. 이는 바로 시인(詩人)이 이른바 '편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 불행하게도 가깝게 다가온 것이다. 그 무슨 재앙의 기틀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길래 자비로운 하늘의 꾸지람이 이토록 정녕한지 알 수 없다. 겨울에 우레가 치는 것이야 전에도 간혹 있었지만, 어찌 오늘날과 같이 마음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겠는가. 이는 결코 예사로 돌아다니는 재앙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그 원인을 따져보니, 아래에서 사람의 일이 잘못된 데에서 기인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다면 누가 그 책임을 져야 되겠는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나의 부덕의 소치이다. 어떻게 해야 이 재앙을 수그러지게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이 곤경을 이겨 나갈 수 있겠는가. 갑절이나 더 심해지는 두려움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승지는 내 대신 교서를 초잡도록 하라. 그리고 정부에서는 널리 간절하고 올바른 말을 구하여, 위로 과인이 빠뜨린 부분과 아래로 생민들의 이해에 대하여 남김없이 다 말하고 조금이라도 숨기는 것이 없게 하라. 설사 말이 적중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아, 너희 대소 신료들은 너의 조부 때부터 대대로 국가에 충정(忠貞)을 바치고 왕실에 심력을 기울였으니, 지금과 같이 위태한 시기를 맞이하여 시국을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평상시보다 갑절이나 더 절실하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모름지기 각각 나의 지극한 마음을 본받아 사심을 다 끊어 버리고 공명 정대한 마음으로 법을 지키고 직무를 수행하여, 조금이라도 하늘의 진노에 답하고 현재의 난국을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가 상의 교서를 가지고 그대로 반포하기를 청하였는데, 재차 아뢰자, 윤허하였다.
20년(갑술, 1694)
○ 1월. 상이 친히 주문공(朱文公)의 ≪소학(小學)≫에 대한 서문(序文)을 지어 책머리에 붙이게 하였다. 그
"≪소학≫은 무엇 때문에 지었는가? 옛날 사람이 태어나서 8세가 되면 반드시 이 책을 가지고 배웠는데, 이는 바로 삼대 때에 사람을 교육시키던 방법이었다. 그런데 진시황이 유생(儒生)을 땅에 파묻고 서적을 불태운 이후로 경적(經籍)이 모조리 없어져서 남은 것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안(新安) 주 부자(朱夫子)가 세상의 교화가 쇠퇴함을 개탄하여 옛날에 들은 것을 수집하여 후학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 이 책은 규모와 절차가 찬란하게 갖추어졌고, 내외의 구분과 본말의 차례가 있다. 바로 입교편(立敎篇)촹명륜편(明倫篇)촹경신편(敬身篇) 세 편은 내와 본에 속하고, 계고편(稽古篇)은 바로 옛날의 좋은 행실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은 것이고, 가언편(嘉言篇)촹선행편(善行篇) 두 편은 외와 말에 속한다. 과연 앞의 세 편에 익숙하게 젖고 반복해서 익혀 자신에게 징험해 본다면 뒤의 두 편은 확충하여 채우는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는 비유하면 대강을 들면 조목이 다 펼쳐지고 뿌리를 배양하면 가지가 커나가는 것과 같다. 이는 바로 어린이가 도에 들어가는 첫길이고 어린이를 기르는 성스러운 일이다.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저 경신편에 있어서는 더욱 중요함을 느낄 수 있다. 대개 이에 대하여 논해 보건대, 경이란 성학(聖學)에서 시종을 완성하고 상하를 관통하는 데에 필수적인 마음가짐이다. 경건한가 나태한가에 길흉이 당장 결판난다. 그러므로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초기에 사상보(師尙父)가 끊임없이 경계를 한 것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학자로서 참으로 이것에 맛을 들여 움직일 때나 조용히 있을 때나 반드시 경건한 자세를 가지고 급작스러운 사이에도 경건한 자세를 가져, 때없이 출입하는 마음을 거두고 나의 정대(正大)한 근본을 세워서 오늘 하나의 공력을 들이고 내일 한 가지 일을 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태연하고 표리가 투명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고 나면 ≪대학(大學)≫의 이른바 수신(修身) 제가(齊家)와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도는 단지 한 번 들어서 시행하는 것일 뿐이니, 세상을 교화하는 데에 어찌 도움되는 바가 적겠는가."
하였다. 또 친히 시민당명(時敏堂銘)과 아울러 서문을 지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시민당은 저승전(儲承殿) 남쪽에 있는데, 이곳은 바로 세자가 공부하는 정당(正堂)이다. 이름을 시민이라고 한 것은, 대개 ≪서경≫ 열명편(說命篇)의 '학문에 늘 민첩하기를 힘쓰라[務時敏]'고 한 구절에서 뜻을 취하였다. 참으로 세자는 한 나라의 근본이다. 그가 학문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나라의 치란이 결판나니, 참으로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낮추고 학문에 민첩하게 하면서 늘 미치지 못한 것이 있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계속해서 빛나는 경지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 이에 명(銘)을 지어 반우(盤盂)에 좌우명을 새기던 일에 대신한다."
하였다. 그 명에 이르기를,
저 동궁의 문을 바라보니/?彼銅?
빛나는 높은 집/煥焉高堂
시민당이라 이름한 것은/曰時曰敏
교훈의 뜻이 매우 빛나도다/訓義孔彰
백성들의 장래가 걸린 것은/萬民攸繫
한 나라의 태자이니/一國元良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데 따라/學之勤否
나라의 흥망이 이에 결판나고/寔判興亡
우리 성스런 선조와/?惟聖祖
우리 선왕께서는/?我先王
동궁에 계시면서 덕을 닦아서/毓德春宮
조금도 나태하신 적이 없으셨고/罔有怠荒
낮에 강연하고 밤에 소대하며/晝筵夜對
편안히 진지 드실 겨를도 없으셨네/玉食未遑
서로 뜻을 얻은 것이 더욱 드러나고/相得益章
지극하고 지극하여/至矣盡矣
옛날 우나 탕보다 더 뛰어나셨네/邁古禹湯
아 너는 선왕을 본받아서/嗟汝體法
잘못함도 없고 잊지도 말고/不愆不忘
마음이 이목의 부림을 당하지 말고/不役耳目
환관을 가까이 하지 말라/不邇貂?
좌우에 바른 선비들이 있고/左右正士
전후에 강직하고 방정한 이들/前後剛方
날마다 부지런히 하고/惟日孜孜
잠시도 쉼 없이 강건하게 하면/無息自强
덕이 날로 닦여지고/厥德日修
하늘의 복록이 날로 창성하리라/天祿日昌
이는 내가 억측한 말이 아니고/匪我臆說
성인들의 말씀에 분명하게 나와 있으니/聖言煌煌
옛날 반명을 대신하여/替古盤銘
네 몸 검칙하는 바탕을 삼노라/以資檢防
하였다. 상이 또 친히 경계십잠(儆戒十箴)을 지어 세자에게 내렸다. 법삼조잠(法三朝箴)에 이르기를,
아 온갖 행실이/於乎百行
효도가 아니면 서지 못하네/非孝不立
천지의 떳떳한 법이고/天經地義
만고에 변함이 없네/萬古不易
오직 효도가 가장 큰 덕목이니/惟孝爲大
문왕이 이를 본받았도다/文王是則
매일 세 번 침실에 문안하고/日三問寢
몸가짐 신중하고 신실하도다/洞洞屬屬
하였고, 친현사잠(親賢士箴)에 이르기를,
분잡하고 어지러운 것/紛華波蕩
이 마음 하나 잘 유지하기가 어렵다네/此心難持
이 때문에 함양해야 되는 법/是以涵養
훌륭한 선비를 반드시 가까이 해야 한다네/賢士必資
전후의 동궁의 관료들과/前後宮僚
좌우의 스승을 통하여/左右賓師
아침 저녁으로 잘못을 바로잡고/規違朝夕
법에 어긋나는 것은 행하지 말라/非法不爲
하였고, 근강학잠(勤講學箴)에 이르기를,
아 학문이란/嗟哉爲學
이치를 밝히는 것이 귀하다네/貴乎明理
장구나 익히는 것은 말단적인 것이고/章句則末
기억하고 암송하는 것은 여사라네/記誦餘事
나는 네가 본받도록 훈계하니/予訓汝體
근면하냐 나태하냐에/勤怠之判
나라의 치란이 갈라지니라/治亂之分
하였고, 근유독잠(謹幽獨箴)에 이르기를,
혼자 있을 때엔 마음대로 할 수 있기에/幽獨得肆
이 마음이 쉽게 방종한다네/此心易放
아는 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莫謂無知
밝은 하늘이 위에 있다/明明在上
언제나 생각하고 경건한 자세를 가지고/克念克敬
반드시 널리 확충시킬 수 있게 하라/必擴充之
옥루가 가까이 있으니/屋漏在邇
모름지기 스승으로 삼으라/須以爲師
하였고, 계일예잠(戒逸豫箴)에 이르기를,
옛날부터 지금까지/今來古往
안일한 것이 독과 같았지/?毒宴安
원성은 간절하게 하여/元聖懇懇
일곱 번이나 그 단서를 바꾸었지/七更其端
언제나 이것을 생각하여/念玆在玆
안일함이 없어야 될 것이니/所其無逸
혹시라도 나태함이 없이/罔敢或懈
경계하고 두려워하라/兢兢業業
하였고, 납충언잠(納忠言箴)에 이르기를,
약이 쓰지 않으면/藥不瞑眩
그 병이 낫지 않는 법/厥疾奚?
마음에 거슬린다고 말하지 말고/勿謂逆心
반드시 돌이켜서 구해 보라/而必反求
어떻게 구할 것인가/求之如何
반드시 그 법이 있나니/必有其道
오직 태갑의 일로써/ 惟將太甲
반복하여 경계하고 충고하네/反覆戒告
하였고, 즉참설잠(?讒說箴)에 이르기를,
참소하는 사람이 재앙을 일으키는 것은/讒人爲禍
어찌 그렇지 않음이 있겠는가/何莫不然
임금과 신하가 잘 만남에/君臣際遇
더욱이 두려워할 일/則尤?焉
참소를 막고 아첨을 멀리하는 데/?讒遠?
어찌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有他途
언제나 뜻을 정성스럽게 가지고/終始誠意
군신간에 믿음이 돈독해지기를 힘써야 하리/務盡交孚
하였고, 신희노잠(愼喜怒箴)에 이르기를,
사람의 칠정 중에서/七情之中
성냄과기뻐함두가지/曰怒曰喜
쉽게 폭발하고 만다네/發之則易
이 병통을 없애지 않고서/此病不除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리/更做甚事
나타내지 않는 것은 어떻게 하는가/中之如何
반드시 이치에 합당하게 하는 것이라네/必也當理
하였고, 숭검약잠(崇儉約箴)에 이르기를,
나라가 망하거나 흥하는 것은/?邦興邦
사치와 검소에 달려 있는 법/由奢由儉
옛날 역사를 상고해 보면/夷考前牒
조금도 틀림없이 징험되니/符契若驗
크게 그 마음 경계하고/大驚厥心
검소의 미덕에 힘쓰라/懋乃儉德
나라를 위하여 복을 아끼고/爲國惜福
백성을 위하여 모범이 되어야 하리/爲民作式
하였고, 명상벌잠(明賞罰箴)에 이르기를,
권장하고 징계하는 데에는/以勸以懲
오직 상과 벌/惟賞惟罰
이 때문에 옛사람은/用是昔人
신중하게 살펴서 기필코 시행하였네/?愼?必
이 두 가지를 밝히려 하면/欲明二者
마땅히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할 일/宜戒偏着
지공 무사한 마음으로 처리해야/大公照臨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으리/人心可服
하였다.
○ 2월. 상이 헌릉(獻陵)을 전알하였다. 대가가 갈 길을 새로 닦는 부역꾼들이 적지 않다고 하여 상이 넉넉하게 보살피라고 명하였다. 이에 선혜청이 광주(廣州)의 금년 봄 대동미를 전 1결당 2말씩 감면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 상이 특별히 관원을 보내 동쪽 교외의 여러 무덤에 제사를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는 신해년에 굶어 죽은 사람들을 묻은 곳이다. 전에 영릉(寧陵)을 전알할 때에 유사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했었는데, 이번에도 그때의 관례에 따른 것이다.
○ 상이 광진(廣津)에 이르러 본주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모아 놓고 고통에 대하여 물으니, 답하기를,
"과거의 환곡으로서 포흠(逋欠)된 것이 매우 많은데, 납입을 독촉하는 대상이 친척과 이웃에까지 미치고 있는 점입니다."
하자, 상이 가장 오래 된 것을 적당량 감면하라고 명하였다.
○4월. 비망기를 내리기를,
"내 생각에,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아비와 자식의 관계와 같다. 그런데 무슨 말을 숨기겠는가. 내가 나의 생각을 다 말하고서 이어 임금과 신하가 다 함께 행실을 닦는 도리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아, 증자의 어머니와 같은 훌륭한 이도 자식을 의심하게 됨을 면치 못하였다. 이 때문에 예부터 말하기 어려운 관계로 부자간보다 더한 관계가 없었고 쉽게 동요될 수 있는 관계도 부자간보다 더한 관계가 없었다.
애당초 태자를 책봉할 때에 위한(緯漢)의 상소가 갑자기 나왔고, 또 질병이 있어야 비로소 책봉한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아, 내가 전대의 역사에서 대략 이미 보았는데, 틈을 살펴서 사람을 공동(恐動)시키는 수단이 번
전에 한가할 때에 마음을 공평하게 가지고 차분하게 살펴보고서 스스로 말하기를, 오늘날 태자를 세우는 것은 종묘 사직의 대계이고, 오늘날의 신하들은 대대로 벼슬하는 원로들이다. 어찌 종묘 사직의 대계를 시행할 때에 대대로 벼슬하는 신하로서 패륜아가 아니라면 감히 그 사이에서 털끝만큼이라도 딴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위한의 흉계는 이룬 것이 아니겠으며 여러 신하들의 마음은 드러나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으로 항상 회한을 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천지 신명이 알고 있을 것이다.
또 기사년 이후로 저 무리들의 소행을 가만히 살펴보니, 사심에 따라서 공도(公道)를 파괴하지 않으면 다 도리에 반하고 윤리를 어그러뜨린 것이었다. 내가 이에 그들과 함께 국사를 도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으나, 국가의 처사가 또한 어찌 쉽겠는가. 우선 참으면서 한밤중에도 개탄을 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 지금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진실을 유도하여 민암(閔?)과 성이완(成以完)이 함께 음모하여 군부(君父)를 기만하고 신하들을 몰살하려고 한 계략이 남김없이 다 드러났다. 이때를 당하여 만약 전도(顚倒)되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시원스럽게 결단할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는 허물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것이니, 그 득실이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겁겠는가.
아, 오늘날에 있어서 지난 일을 징계하고 후일을 경계하는 방법을 찾는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그 방법은 이러하다. 사심을 없애고 의심하고 저지하는 습속을 끊어야 된다. 마음을 열고 진실을 보여 예로 아랫 사람을 대우해야 된다. 숨기지 않는 문을 활짝 열고 충직한 말을 받아들이되, 쓸 만한 말이면 다 합하여 받아들여 시행하고 쓰지 못할 말이면 버릴 뿐이다. 혹시라도 지나쳐서 온당하지 않은 말을 했더라도 반드시 너그럽게 용납하여 조금이라도 직언하는 사람의 뜻을 꺾지 않는다. 실로 이것이 오늘날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바로 과인이 크게 스스로 마음속으로 경계하는 것이고, 또 여러 신하들을 책려하여 서로 행실을 닦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종이 한 장에 써서 고하는 것이 모두 나의 가슴속에서 나온 진실이니, 너희 신료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듣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중외에 포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 비망기를 내리기를,
"나라의 운세가 태평한 곳으로 돌아와 중전이 복위되었는데,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의 변함없는 의리이다. 장씨의 왕후 새수(王后璽綬)를 회수하고, 옛날의 작호 '희빈(禧嬪)'을 내려 주어 세자가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는 예를 폐하지 않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앞으로 책봉례를 거행할 때에 으레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절차가 있겠으나, 이번에 복위하고 폐위하는 일도 먼저 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바로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고하는 의리이다.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되, 종묘에 고하는 글 속에 충직한 말을 살피지 못하고 훌륭한 신하를 잘못 의심하였다는 뜻을 넣어 말을 만들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비망기를 내리기를,
"기사년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부끄럽다. 충직한 말을 살피지 못하고 말꼬리를 잡아 훌륭한 신하를 의심하여, 드디어 은혜와 예우는 사라지고 처벌을 가하여 억울함이 펴지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이에 대하여 내가 공평한 마음으로 천천히 따져보고서 대오 각성하고는 후회와 통한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어찌 오늘뿐이겠는가. 따라서 이번에 교서를 내려 중전의 자리를 바로잡는 일은 실로 천리(天理)를 회복하는 공도(公道)에서 나온 일로서 종묘 사직의 가호에 힘입은 것이다. 문임관(文任官)에게 명하여 앞으로 반포할 교서 속에 이 뜻을 분명하게 넣어 말을 만들도록 하라."
○ 5월. 이조 판서 유상운(柳尙雲)이 입시하여 말하기를,
"임금에게 과오가 있으면 신하로서 상소하여 강력하게 간쟁하는 것은 본연의 직분일 뿐이니, 그 때문에 굳이 포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 오두인(吳斗寅)과 박태보(朴泰輔)는 불행하게도 먼저 죽어 오늘날의 경사를 함께 볼 수 없으니, 만약 그들에게 가련하게 여기는 은전을 내린다면 성덕(聖德)에 더욱 빛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신하의 충절은 공도보(孔道輔 송 나라 사람으로 직언으로 유명함)에 비할 만하여 이미 관직을 회복하고 정려(旌閭)하였다.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오두인에게는 의정(議政)을 추증하고 박태보에게는 정경(正卿)을 추증하라."
하였다.
○ 윤5월. 전 군수 송기태(宋基泰)가 상소하면서 그 아비 송시열이 남긴 상소문과 효묘(孝廟)의 어찰 3폭을 함께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올린 3폭의 어찰을 양손에 받들고 읽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성조께서 빈틈없이 대비하신 원대한 규모가 천고에 우뚝 뛰어나기에, 잘 계승해야 하는 나의 마음은 공경히 받들고 엄숙히 읽음에 감동과 슬픔이 더욱 깊어진다. 사관으로 하여금 ≪실록≫에 기록하여 후세에 분명하게 보여 주도록 하라. 그리고 또 생략해야 할 부분이 있는 점에 대해서는 마땅히 대신과 더불어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독대(獨對)했을 때 대화한 내용을 책자에 은밀히 기록해 둔 것도 반드시 간직해 두었을 것으로 생각되니, 그것도 올리도록 하라. 첨부하여 올린 선경(先卿)의 3차례의 소장을 살펴보니, 성조의 지극한 덕을 천양하고 충의를 다하여 죽을 때까지 더욱 돈독했던 정성이 훤하게 드러나 천지 신명에게도 맹세할 수 있고, 직접 서명한 자취가 분명하여 마치 세상에 살아 있으면서 상소한 것처럼 느껴지기에, 내가 서찰을 잡고 슬퍼하면서 더욱 회한에 휩싸이게 된다.
아, 선경은 실로 나에 대해 저버린 것이 없었는데 나 홀로 선경을 저버렸다. 저 아득한 구천에서 이런 나의 슬픔을 알지 모르겠다. 또 생각건대, 소인이 올바르고 훌륭한 인물을 해치는 일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마는, 기사년과 같이 참혹한 적은 없었다. 간사함과 정직함이 여기에서 분명하게 갈라지니, ≪주역≫에서 이른바 '나라를 열고 집을 계승할 때 소인을 쓰지 말라.'고 한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이에 나의 마음을 다 말하여 지극한 뜻을 보인다."
하였다.
○ 주강에 나아갔다. 이언강(李彦綱)이 아뢰기를,
"근자에 대동미를 적당량 감면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이것은 전역(田役)입니다. 신역에 대해서도 이에 맞추어 적당량 감면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묘당에서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 남구만(南九萬)이 상에게 건의하기를,
"백성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신역에 있습니다. 사람마다 1필씩을 감면하되, 1필 반을 납부해야 되는 자는 반감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 6월. 다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향하였다. 이전에 그의 집에 제사를 내리고, 또 모든 도의 향교에 교서를 펴는 글을 내려, 순찰사로 하여금 위판을 만들어 나누어 주고 길일을 가려서 거행하게 하였다. 이는 대개 임술년에 올려 배향한 구례를 쓴 것이다. 이날에 백관이 하례하였고, 중외에 교서를 반포하였다.
○ 9월. 부사직 김세익(金世翊)이 영남에서 선비들을 시취하고 돌아와서 상소하여 본도에서 여러 궁가(宮家)가 규정 외에 절수한 사안과 하양(河陽)의 민전(民田)에 대한 문제를 논하니, 상이 답하기를,
"무진년에 수교(受敎)하여 직전(職田)으로 정한 것은 형세상 행하기 어렵지만, 규정 외에 절수한 것은 모두 금지하라. 하양의 토지는 백성들에게 되돌려 주도록 하라."
○ 10월. 주강에 나아갔다. 시독관 이건명(李健命)이 아뢰기를,
"경기의 백성들이 군현의 제역(除役)의 폐단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대개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 외에 나무촹꼴촹꿩촹닭촹얼음을 바치는 것이 규례인데, 기름촹꿀촹종이촹생선 등으로 대납하는 것을 제역이라 합니다. 제역이 조금 편리하기 때문에 하리나 백성들이 이롭게 여기는데, 제역을 못하는 자들이 가장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금지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여 드디어 혁파하였다.
○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미미한 소자가 외람되게 조종의 왕통을 이어받아 백성들의 위에 군림한 지가 어느덧 20년이 되었는데, 막중한 부탁을 실추시킬까 두려워 밤낮으로 조심하였고 감히 잠시도 소홀히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가 덕이 없는 것으로 말미암아 정사가 많이 잘못되었다.
조정의 상황에 대하여 언급하면, 충신과 간신을 구별하지 못하여 일을 번복하는 사례가 계속되었다. 지금 비록 후회하고서 정치를 새롭게 하려고 하지만, 기강이 흐트러지는 형세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어떻게 해야 이 난국을 만회할 수 있겠는가.
백성들의 실정에 대하여 언급하면, 구제하고 싶은 뜻은 매우 간절하지만 은택이 구석구석까지 고루 미치지 못하여 원성이 마구 일고 와해될 상황이 조석에 임박하였으니, 장차 어떻게 그들을 구제해야 되겠는가.
아, 국가에 대한 계책과 백성들에 대한 문제가 지금에 이르러서 마치 중병에 걸린 사람이 기혈(氣血)이 갈수록 소모되어 명의 유부(兪?)와 편작(扁鵲)의 기술로도 손을 쓸 수 없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근자에는 이상 기후가 나타나 음기(陰氣)가 폐장(閉藏)된 달에 우레와 번개가 치는 변고가 빈발하여 번쩍번쩍하고 쿵쿵거리니, 참으로 편안하지 못하고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아, 하늘이 재앙과 상서를 내리는 것은 각기 그 종류에 따르는 법이어서, 선을 행하면 온갖 상서를 다 내리고 악을 행하면 온갖 재앙을 다 내린다. 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잘못되어 꾸지람이 위에서 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재앙을 불러온 것이 어찌 그럴 만한 이유가 없겠는가. 혹시 하늘에 대한 성의가 지극하지 못하여 경건한 마음보다 나태함이 심해서인가? 아니면 이 한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사심이 공도(公道)를 이겨서인가? 아니면 기강이 해이해진 것이 세상의 풍조가 되어 강직한 언론을 들을 수 없어서인가? 아니면 현자가 초야에 버려져 있어 현자를 좋아하는 정성이 돈독하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풍속이 대부분 사치하여 재물을 손상시키는 경우가 많아서인가? 옥사(獄事)가 많이 적체되어 원통함을 품고 있는 사람이 많아서인가? 어찌하여 하늘이 미워하고 진노함이 이토록 심하단 말인가.
아, 임금이 하늘을 섬기는 것은 아들이 아비를 섬기는 것과 같다. 따라서 아비가 조금 기뻐하지 않는 얼굴빛을 보이면 아들은 다만 자신을 질책하기에 겨를이 없을 뿐이다. 예부터 임금이 재앙을 만나서 경계하고 조심하면 편안하고 경솔하고 소홀하면 위태로워진다. 경건하고 방자한 사이에 길흉이 바로 갈라지니, 내 마땅히 수성(修省)할 방도에 대하여 더욱 생각을 해야 한다. 어찌 도움을 구하고 신칙하고 격려할 방법이 없겠는가.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서를 초잡고, 정원에서는 널리 직언을 구하여 임금이 살피지 못하고 빠뜨린 것과 조정의 잘잘못과 백성들의 이해에 대하여 조금도 남김없이 다 진달하게 하라. 말이 설사 적중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가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아, 너희 대소 신료들은 너희 할아버지와 아버지 적부터 대대로 충성을 다하였으니, 지금 이토록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여 나를 두고 함께 무엇인가 할 만한 임금이 못 된다 하여 버리지 말고, 반드시 왕실에 마음을 다하여 법을 준수하고 직무를 잘 수행함으로써, 하늘의 진노에 조금이라도 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내린 비망기를 그대로 중외에 포고하기를 청하였는데, 재차 아뢴 뒤에야 비로소 따랐다.
○ 11월. 장령 김호(金灝)가 상소하여 경계의 뜻을 진달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구경에 탐닉하여 비답을 속히 내리지 않았다는 말은 나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지만, 충정과 사랑으로 경계한 것은 옛사람의 기풍에 뒤지지 않기에, 보고서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감탄하는 바이니 마음속에
하고, 호피(虎皮)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가상히 여기는 뜻을 표하는 바이다."
하였다.
○ 12월. 호조 판서 이세화(李世華)가 청대하여 아뢰기를,
"함경도에 기근이 특히 심하니, 인삼과 우황값으로 바치는 포(布)와 전세(田稅)로 바치는 미포(米布)와 군민(軍民)의 부역에 대한 보포 등을 견감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또 각도는 요역을 견감하는 혜택을 입었으나 도성의 백성들만 끼지 못하였으니, 금년 장빙(藏氷) 비용으로 내는 쌀을 감면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비망기를 내리기를,
"한 도 안에 방백과 곤수는 제각기 맡은 바 직무가 있으니, 관직을 설치한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오직 강원도 한 곳에만 곤수가 없으니, 군정(軍政)으로 따져볼 때 대단히 소홀하다. 병사(兵使)는 갑자기 창설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춘천 방어사(春川防禦使)를 문관과 무관으로 돌아가면서 차견하지 말고 항상 종2품 무신을 차견하되, 반드시 명망이 현저하여 곤수가 될 만한 인물을 가려 임명하도록 하라. 이와 같이 군정에 유의할 일을 병조에 내리라."
하였다.
50권 숙종조 10
21년(을해, 1695)
○ 3월. 비망기를 내리기를,
"내가 한가할 때 서적을 가까이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전에 ≪송사(宋史)≫를 읽다가 악 무목(岳武穆 송 나라 충신 악비(岳飛))의 기사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천년 세월을 뛰어넘어 감동하고 공경심을 가졌다. 아, 오랑캐가 창궐하고 임금이 북쪽으로 피난 갈 때를 당하여, 그가 비분 강개한 마음으로 나라의 수치를 씻고 왕업을 회복할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화의(和議)를 극력 반대하고 분기하여 적을 격파하였다. 그리하여 양궁(兩宮 송 나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환궁할 날을 조만간에 기약할 수 있었는데, 흉적이 나라를 그르치고 충신이 악인의 손에 쓰러지고 말아 오국성(五國城)에 쓸쓸히 달빛만 비치게 되고 말았다. 이는 바로 천추의 열사(烈士)들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비분 강개하게 되는 부분이다. 더구나 네 글자가 분명하게 등에 새겨지고 부인이 병을 안고 우물에 뛰어든 것은 다 사람의 천성에서 절로 우러나온 것이고 충효에 감발된 것이니, 참으로 늠름하기가 태양이나 추상(秋霜)과 같다. 내 생각에, 이 사람을 특별히 영유(永柔)의 제갈 무후(諸葛武侯) 사당에 함께 제향하여 길이 그의 충의 정신이 전해지게 했으면 한다. 예관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 4월. 상이 액정서의 하례들을 시켜 낙타 한 마리를 궁중으로 들여오게 하니, 승지 박세준(朴世)과 이서(李?) 등이 이상한 짐승을 길러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논하고 경계하니, 상이 답하기를,
하였다.
○ 7월. 대신과 비국의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유상운(柳尙運)이 궁가(宮家)의 절수(折受)에 대하여 진달하기를,
"매궁가당 2백 결을 절수하는 것이 바로 정식인데, 지금은 정해진 한계를 넘은 것이 매우 많습니다. 만약 2백 결로 정해진 수량 이외에 대해서는 모두 혁파하고 조정에서 미포(米布)와 은화를 지급하여 해궁에서 스스로 토지를 마련하도록 하여 일의 모양을 이루게 한다면 좋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토지가 갖추어지기 전까지 연한을 정하여 공공의 세금을 하사하면 공사(公私)가 다 편리하겠습니다. 수진(壽進)촹명례(明禮)촹어의(於義)촹용동(龍洞)은 일의 체모가 다른 궁방과는 달라 전에 특별히 판부하셨습니다만, 이 네 궁과 명선(明善)촹명혜(明惠) 두 방(房)에 대해서는 무진년을 한계로 하여, 무진년 이전에 절수한 곳은 그대로 두고 이후에 절수한 곳은 다 혁파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다 따르고 이르기를,
"앞으로는 영영 절수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하였다.
○ 9월. 상이 정원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큰 병을 앓은 뒤라 조금만 깊이 생각해도 바로 혈압이 오른다. 그러나 이는 백성들의 일에 관계되어 조금도 늦출 수 없는 것이기에 비망기를 내리는 것이니, 속히 하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아, 내가 자질이 부족하고 덕이 없는 몸으로 그대들의 윗자리에 군림한 지가 어언 21년이나 되었다. 이 미미한 몸으로 백성들의 부모가 되어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었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생각하는 것이란 첫째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이고 둘째는 백성을 보전하는 것에 대해서였다. 그러나 다만 명석함은 이치를 살피기에 부족하고 정치는 그 요령을 알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백성을 보살필 계책을 매일 강구하고 있는데도 혜택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있고, 민가에서는 시름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데도 절박한 상황을 구제하지 못하고 있다. 아, 너희들의 곤궁함이 이 정도니 백성을 통하여 듣고 보는 하늘이 어찌 발끈 진노하여 기근의 재앙을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십수 년 이래로 너희들로 하여금 하루도 편안한 삶을 누리게 하지 못하였고, 해마다 고통 속에 시달리게만 하였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모두 다 임금과 스승의 노릇을 다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하였으니, 바로 과인의 잘못이다. 그리하여 나는 항상 부끄러움이 일어 마치 연못이나 골짜기에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다.
아, 오늘날의 형국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하겠는가. 하늘이 벌을 내려 재해가 마구 이르러서 온 나라의 모든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않는 데 대해서 장계가 연달아 보고할 때마다 깜짝 놀라지 않은 적이 없다. 지금 가을철을 당하여 걸인들이 도로에 연이어져 그 광경이 참으로 급박하니, 내년 봄이 되기 전에 사람의 씨가 말라 버릴 참상을 곧 보게 될 판이다. 이는 실로 존망(存亡)에 관계되는 중대한 시기인데, 어찌 감히 한 번쯤 지나가는 재앙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 너희들은 아무런 죄가 없으면서 이 좋지 않은 때에 태어나 혹독한 재앙을 받고 있다. 아,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 이토록 잔인하단 말입니까. 밥을 대하여 오열하고 베개를 잡고서 긴 한숨을 쉬게 되니, 외로운 이 몸은 차라리 길이 잠들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아, 지난 경신년 재해와 흉년을 만났을 때, 우리 나라 수천 리에 사는 백성들이 다 굶어 죽는 참상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우리 선왕께서 지성으로 구제한 덕택이었다. 아, 사람들의 가슴속에 전해진 선왕의 지극하신 사랑과 두터운 덕은 참으로 깊었다고 할 수 있다. 아, 너희들은 바로 조종이 남겨 주신 적자(赤子)들이
아,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바야흐로 묘당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밤낮으로 계획하여, 한편으로는 어공(御供)을 줄이고 한편으로는 불요 불급한 비용을 절감하는 등 있는 힘을 다하여 구제할 계책을 도모하고 있다. 따라서 너희들은 굶주림과 추위를 참고 각기 처자들을 잘 보호하여 혹시라도 이산하거나 도둑질을 하지 말라. 내가 어찌 식언할 사람이겠는가.
아, 나는 너희들의 부모이고 너희들은 나의 적자가 아니겠느냐.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혹시라도 질병이 있을 경우 최선을 다하여 보살필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본래 지극한 정의 발로로서 그렇게 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지금 과인이 너희들에 대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살리려는 애정이 어찌 이와 다름이 있겠는가. 아, 한 장의 종이에 써서 내리는 글은 다 나의 가슴속에서 나온 진실이니, 너희들은 나를 애처롭게 여겨 귀를 기울여 듣도록 하라. 경은 이 비망기를 분명하게 민간에 반포하여 내가 슬퍼하고 측은히 여기는 뜻을 알게 하라.
또 생각건대, 해마다 흉년 구제를 하느라 중외에 저축된 곡식이 다 바닥난 상황에서, 또다시 이토록 전에 볼 수 없던 흉년을 만났으니 곡식을 이송하거나 사람을 옮겨서 구휼할 계책이 막막하다. 아, 어떻게 해야만 백성들을 잘 구휼하여 야위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밤낮으로 노심 초사하면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아, 방백들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걱정하고 있는 과인의 뜻을 본받고 선현(先賢)이 절동(浙東)에서 베푼 정사를 본받아서 밤낮으로 부지런히 구제할 일에 진력하라. 참으로 백성들에게 이로움이 있는 일이라면 번거로움을 꺼리지 말고 남김없이 조목조목 진달하여 훗날의 한탄을 남기지 말라. 또 반드시 각 고을을 신칙하여 부지런함과 나태함을 살펴 엄격하게 출척(黜陟)을 행하여, 흉년을 이기는 정사에 털끝만큼도 미진한 점이 없게 하고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한 사람도 죽어서 구렁텅이에 나뒹구는 일이 없게 한다면, 경들도 반드시 복록을 받게 될 것이다. 또 양식을 축적하고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내어서 서로 돕고 혹시라도 혼자만 살길을 도모하지 말도록 권유하라. 이 또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한 방법인 것이다. 여러 도의 곤수(?帥)와 각진의 변장들은 비록 직접 구제하는 정사를 집행하는 일은 없으나, 각자 관할 아래에 군졸들이 있는데 군졸도 같은 백성이다. 실로 마음을 다하여 무마하지 않는다면 기아에 시달리는 문제가 반드시 이르게 될 것이다. 어찌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불쌍하게 여겨 돌보지 않겠는가. 경들은 응당 모두 착실히 봉행하게 할 일을 팔도의 감사촹병사촹수사와 양도(兩都)의 유수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 예조가, 진하(陳賀)할 때에 각도의 방물과 물선(物膳)을 봉진하는 규례에 의거하여 하도록 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상이 흉년을 이유로 특별히 외방의 물선 봉진을 정지하고, 궁대(弓?)와 통개(筒箇) 등 외방에서 바치는 물품도 봉진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 상이 하교하기를,
"금년의 큰 흉년은 전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수확하는 계절에 이미 굶어 죽는 일이 있으니, 내년 봄에 굶어 죽은 시체가 구렁텅이에 나뒹굴 참상은 말을 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끊어지는 듯하다. 내 생각에, 흉년에 다급한 상황을 넘기는 데는 도토리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전에 이미 유의하여 궁궐 안의 여러 곳에 착실하게 수습하라고 분부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도 착실하게 하지 않아 소득이 고작 20말에 불과하였다. 뜻이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있으면 꼭 다소에 구애할 것이 아니기에 특별히 해청에 내렸다.
또 여러 궁방은 재해가 특별히 심한 곳을 제외하고, 내수사에서 쌀 1 백석과 목면 8동과 베 7동을 내고 수진(壽進)촹용동(龍洞) 두 궁에서 정조(正租) 각 1백 50석을 내어 모두 해청에 내려, 구제할 자본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태게 하였다. 그 중에서 수진궁은 제사를 받드는 궁가로서 축적되어 있는 것이 넉넉하지 않은데, 지금에 우선 조정하여 쓰고 나중에 더 내어 주도록 하겠다. 내탕고에 저장된 녹피(鹿皮) 15장과 호초(胡椒) 20말과 단목(丹木) 3백 근과 백반(白磻) 2백 근도 해청에 내리니, 잘 알아서 쓰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 거둥할 때의 고취(鼓吹)와 전정(殿庭)의 헌가(軒架)와 영소전(永昭殿)에서 대제를 올릴 때의 헌가를 모두 내년 가을까지 베풀어 놓기만 하고 연주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 10월. 상이 은 2천 냥을 진휼청에 내려 진휼 비용에 보태 쓰게 하였다.
○ 11월. 주강에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명화적(明火賊)으로서 포도청에서 자백하고 나서 형조에서 말을 변경한 자에 대하여 전에 포도청으로 되돌려 보냈다. 앞으로 말을 변경하는 자가 있으면, 형추를 3차 시행한 뒤에 다시 포도청으로 보내 자백하게 한 뒤에 또다시 형조로 보내고, 이와 같이 세 차례를 한 뒤에는 바로 결안하여 법에 따라 처리할 일을 분부하라. 그 중에서 실정과 과정이 불분명한 것에 대해서는 해조로 하여금 다시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궁가의 절수를 혁파한 뒤에 이른바 대수(代受)라는 것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각 군문(軍門)과 각 아문의 둔전(屯田)을 가지고 궁가에서 채워주고 궁가에서 대수한 민전은 모두 내어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꼭 채워 줄 필요는 없다. 곧장 혁파하고, 앞으로는 대수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비망기를 내리기를,
"내가 ≪예기(禮記)≫를 살펴보니 '맹춘(孟春) 초하루에 상제에게 곡식이 잘 되기를 빈다.' 하였다. 농사는 나라의 근본이고 맹춘은 한 해의 첫 달이니, 이달 상신(上辛)에 곡식이 잘 되기를 비는 것이 어찌 우연한 행사이겠는가.
아, 금년은 팔도가 큰 흉년이 들었는데, 이는 예전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구제할 곡식은 모으기 어렵고 굶어 죽는 사람은 속속 나오니,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새해의 농사가 흉년이 드느냐 풍년이 드느냐에 우리나라 많은 생령들의 목숨이 결판나게 되어 있는 점이다. 백성이 씨가 마르고서 국가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옛날의 제도를 모방하여 백성을 위하여 직접 사직단에 나아가 지성으로 풍년이 들기를 빌려는 것이다. 즉시 예관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수의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 영돈녕 윤지완(尹趾完)에게 시탄(柴炭)을 지급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사람을 보내 안 부를 물으니, 지위가 경대부에 이르렀으면서도 생활이 한미한 선비와 다름이 없다고 하니, 참으로 재상이라고 이를 만하다. 시탄을 실어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표한다."
하였다.
○ 상이 영돈녕 윤지완에게 어찰(御札)을 내려 조정에 나오라는 뜻으로 면려하였다. 그 서찰에서 이르기를,
"대신이 오랫동안 서울을 떠나 있는 것은 나라가 잘 다스려진 때라 하더라도 안 되는 것인데, 더구나 지금은 나라의 계책과 백성의 걱정이 이미 백척간두에 선 것과 같이 위태한 지경에 이른 상황임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경의 깊고 원대한 생각과 독실하고 확고한 지조는 필경 말세의 풍속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내가 오직 경을 조정으로 오게 하려는 이유이다. 이에 직접 서찰을 내려 신신 당부하는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함께 올라오라."
하였다.
○ 12월. 예관을 보내어 고 판서 오두인(吳斗寅)과 고 응교 박태보(朴泰輔)의 사당에 치제하게 하고 편액을 내렸다.
○ 상이 함흥(咸興)촹영흥(永興) 두 본궁에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추부(追?)하는 제례의 제문을 직접 지어서 보내고, 하교하기를,
"함흥과 영흥 두 본궁의 제사에는 전에는 따로 차지(次知)를 차견하였고 제문은 없었다. 이번에 거행하는 신덕왕후의 추부례(追?禮)는 이미 조정의 진달을 인한 것이고 또 본도 감사가 제주(題主)이니, 사체의 중대한 정
하였다.
22년(병자, 1696)
○ 1월. 상이 비망기를 내려 특별히 팔도 감사들에게 유시하기를,
"새해 새봄이 되어 초목이 다 기쁘게 생기를 띠고 있는데, 불쌍한 우리 무고한 창생들은 유독 이토록 망극한 기근에 시달려 유랑하다가 길에서 쓰러지는 참상이 지난 가을과 겨울보다 더 많아지고 있다. 더구나 오늘날의 분위기가 더 위급하니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오늘은 바로 병자일이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고 저 백성의 일을 생각해 보건대, 그때보다 지금이 더 심한 점이 있다. 아, 전쟁이 계속되어 더없이 위태한 형국이었지만 오히려 화를 피하여 몸을 보전할 여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팔도에 큰 흉년이 들어 곡식 이름을 가진 것은 몇 이랑도 결실을 맺은 것이 없다.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기고 있는 백성들이 한 해 동안 먹고살 양식이 없어 돌아다니며 빌어먹으려 해도 되지 않으니, 백성들이 위망에 처한 것이 오늘날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아, 임금이 백성들에 대한 것은 아비가 자식에 대한 것과 같다. 자식이 질병과 고통이 있으면 치료할 방법에 대하여 할 수 있는 방법을 끝까지 다 강구하는 법이다. 만약 혹시라도 베풀어야 하는데 베풀지 않아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한 것이 있게 되면, 그 회한이 응당 어떠하겠는가. 오늘날 국가의 예산이 다 고갈되어 애통하다고 할 정도이고 중외도 텅텅 비어 손쓸 곳이 없으니, 비록 크게 혜택을 베풀려 해도 할 길이 없다.
그러나 군신 상하가 밤낮으로 생각하고 도모하여 한결같이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주로 하여, 하나의 정사와 하나의 명령이라도 백성들에게 이로운 것은 즉시 주달하여 빠뜨리는 일이 없게 하고, 밖으로는 감사와 수령이 진휼을 개시할 때를 당하여 반드시 내가 전에 반포한 뜻을 본받아서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과 마음을 같이해야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반복하고 요량하여 특별히 구제하고, 절대 굶주린 백성들의 입에 넣을 한 홉의 쌀이라도 간사한 관리들의 사리 사욕을 채우는 거리가 되지 않게 하라. 한 도 백성들의 목숨을 경들의 손에 맡겼으니 그 책임의 중요함이 어떠하겠는가. 참으로 지극한 정성으로 하지 않으면 다급한 백성들을 구제하여 나의 뜻에 부응하지 못할 것이다. 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러운 백성들이 어찌 지극한 정성으로 하는 것과 불성실하게 하는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수령 중에서 인물이 못나서 재리(財利)를 빙자하여 백성들이 죽는 것을 서서 보기만 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즉시 처자까지 처형하는 벌을 가하고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 근래에 와서 도둑질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어 행려(行旅)가 거의 끊어졌다. 이것이 비록 인심이 선량하지 못한 것에서 말미암은 것이지만, 또한 굶주림과 추위가 너무 절박해서 짓게 되었을 것이 뻔하니, 이는 ≪논어≫에서 이른바 '죄인의 실정을 밝혔더라도 불쌍히 여겨야 된다.'고 한 말에 해당되는 것이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도덕과 교육으로 백성들을 감화시켜 백성들이 비록 곤궁하더라도 차마 죄악을 저지르는 데에는 이르지 않게 하였다면, 어찌 오늘날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였겠는가. 이것이 내가 한밤중에도 통탄하는 이유이다.
아, 너희 방백들은 나의 당부를 분명하게 듣고 조금이라도 소홀하게 대처하지 말라. 그리고 절도를 막을 방도에 대해서는 오로지 잡아들이는 것만을 일삼지 말고 먼저 위로하고 안집(安集)하는 정사를 펴서 조정의 명을 펴는 책임을 다하고 나의 걱정을 덜어 주도록 하라.
또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다. 비록 평상시라 하더라도 권장하기에 힘써야 되는데, 하물며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겠는가. 농사를 시작할 날이 멀지 않았으니, 이 또한 열읍을 신칙하여 백성들이 말업(末業)에 종사하는 것을 금하고 다 농촌으로 돌아가 열심히 농사를 지어 풍성한 가을을 맞을 수 있게 하라. 이것이 어찌 마땅히 행해야 될 것이 아니겠는가. 경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두려운 마음으로 거행하라."
하였다.
○ 흉년이 든 것을 이유로, 팔도에서 올해 바칠 세금 중에서 콩을 반을 감하도록 하였다.
○ 상이 종묘와 영녕전을 전알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태묘에 봉안한 책보(冊寶)가 누차 난리를 겪으면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지금에 뒤이어 올리는 것은 온편하지 않은 단서가 있으므로 참으로 경솔히 논의하기 어렵다. 악장(樂章)이 미비한 것에 이르러서는 하향(夏享) 때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이 뜻을 주문관(主文官)에게 말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동서의 색목(色目)은 이미 구제하기 어려운 고질이 되었는데 사류(士類)들이 또 한 조각을 만드니 그 불행한 점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일전에 초야의 상소에서 '노소(老少)의 숭상하는 바가 제각기 달라…….'라는 말을 멋대로 삽입하여 마치 아름다운 말처럼 하였는데, 임금에게 고하는 글은 결코 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하여 반드시 깊이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에 일러 두는 바이다."
하였다.
○ 전교하기를,
"설죽소(設粥所)에 얼마 전 별감(別監)을 보내 기민(飢民)에게 먹일 죽을 가져오게 하여 보니, 수량이 꽤나 넉넉하고 쌀알이 매우 빽빽하였다. 그런데 시종 한결같이 하는가를 보려고 다시 가져오게 해서 보았더니, 수량이 전보다 현저히 줄었을 뿐만 아니라 쌀알도 또한 매우 드물었다. 계속 이와 같이 한다면 죽을 쑤어 먹이는 본래의 취지에 어긋나고 기민들도 결코 이것을 힘입어 살아날 리가 없다. 동서 설죽소에 이런 뜻으로 각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 3월. 어떤 남자가 야금(夜禁)을 범하여 금위영의 나졸이 잡아들였는데, 귀인(貴人) 김씨의 종이 완력으로 빼앗아 모면하다가 나졸에게 상해를 입히기에 이르렀다. 금위영이 그 종을 잡아다가 치죄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 상이 주강에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세상의 일이란 너무 지나치게 호쾌하게 처리하면 반드시 뒤에 병통이 생기게 된다. 일전에 연중(筵中)에서 사사로이 화폐를 주조하거나 집에 둔 자에 대한 법을 정할 때에 여러 신하들의 의견이 각각 달랐는데, 대신이 사죄(死罪)에 처해야 한다고 강력히 말하였다. 대저 살인 사건을 가지고 논하더라도 반드시 방조한 죄가 있은 뒤라야 사죄로 논할 수 있는데, 화폐를 위조한 자를 사죄로 처하고 나서 집에 둔 자도 또한 사죄로 처한다면 너무 과중하지 않은가. 또 대신이 형조의 형장(刑杖)이 엄하지 않다는 이유로 날짜를 기휘하는 것을 없애려 하였다. 의금부와 형조의 형장을 가하는 법은 이미 국청과는 형벌의 정도가 다른데, 어찌 하루에 여러 번 형장을 가하는 것으로 경솔하게 옛법을 변경하여 훗날의 폐단을 열 수 있겠는가. 나는 그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 4월. 좌의정 유상운(柳尙運)이 상차하여 청하기를,
"대내(大內)를 개수하는 일을 십분 줄여서, 감히 풍요롭게 하지 않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정성에 대하여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작년 가을에 이미 수리한 곳은 마련하지 말도록 하여 절약하여 줄이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 8월. 상이 창릉(昌陵)을 전알하고 친히 제사를 올리고 나니 비가 내렸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의관이 젖더라도 백성의 일로 볼 때 도리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이어서 경릉(敬陵)을 전알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익릉(翼陵)에 나아가서 친히 제
"저것은 누구 묘인가?"
하니, 곁에 있던 자가 답하기를,
"예종대왕(睿宗大王)의 장자 인성대군(仁成大君)의 묘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햇수가 오래되어 묘소가 황폐하니 마음이 매우 아프다. 예관을 보내 치제하고 사초를 개수하라."
하였다.
○ 10월. 옥당관 이정명(李鼎命)이 오두인(吳斗寅)과 박태보(朴泰輔)의 처자에게 종신토록 급료(給料)를 줄 것을 청하였고, 이정겸(李廷謙)이 또 박태보의 아비 박세당(朴世堂)을 먼저 구휼할 것을 청하니, 상이 본도에서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 상과 중전촹세자촹빈궁이 종묘에 나아가서 전알례를 행하였는데, 그 의례 절차는 이러하였다. 전하가 서는 자리는 묘호(廟戶) 밖의 동쪽에 서향으로 하고, 왕세자가 서는 자리는 전하의 자리 서남쪽에 북향으로 하고, 중궁전이 절하는 자리는 묘호 밖 서쪽에 동향으로 하고, 빈궁이 절하는 자리는 중궁전이 절하는 자리 동남쪽에 북향으로 하였다. 전하와 왕세자가 모두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었다. 궁궐을 나가고 돌아올 때에 고취(鼓吹)를 진설하기만 하고 연주하지는 않았다. 전하와 왕세자가 면복(冕服)으로 바꿔 입고 묘정(廟庭)으로 들어가 나아가 네 번 절하였다. 중궁전과 왕세자빈이 수식(首飾)을 하고 적의(翟衣)를 갖추고 상궁(尙宮)이 앞에서 인도하여 서쪽 섬돌로 올라가 자리로 나아가고, 상궁이 또 전하와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쪽 섬돌로 올라가 자리로 나아갔다. 중궁전과 왕세자빈이 네 번 절하였다. 마치고서, 상궁이 전하와 왕세자를 인도하여 소차(小次)로 들어가고, 또 상궁이 중궁전과 왕세자빈을 인도하여 다시 재전(齋殿)으로 나아갔다. 좌우 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재실로 돌아왔다. 전하와 왕세자가 다시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궁궐로 돌아왔다.
○ 왕세자와 세자빈이 영소전(永昭殿)에 나아가서 전알례를 행하였는데, 그 의례 절차는 이러하였다. 왕세자가 서는 자리는 전호(殿戶) 밖의 동쪽에 북향으로 하고, 빈궁이 서는 자리는 전호 밖 서쪽에 북향으로 하였다. 왕세자가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궁궐을 나왔다. 경덕궁(慶德宮)에 나아가 재실로 들어갔다. 면복(冕服)으로 바꾸어 입고 자리로 나아가 네 번 절하였다. 빈궁이 수식(首飾)을 하고 예복을 갖추었고 수규(守閨)가 앞에서 인도하여 서쪽 섬돌로 올라가 전알하는 자리로 나아가고, 수규가 또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쪽 섬돌로 올라가 전호 밖의 서는 자리로 나아갔다. 전찬(典贊)이 '네 번 절하소서.' 하고 호창하니, 빈궁이 네 번 절하였다. 마치고서, 수규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소차(小次)로 들어가고, 또 수규가 빈궁을 인도하여 별전으로 되돌아갔다. 마치고서 상례(相禮)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재전으로 돌아왔다.
○ 12월. 상이 왕세창(王世昌)의 빈풍도(?風圖) 2폭을 얻자 이조 판서 최석정(崔錫鼎)에게 시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에 최석정이 시 2편을 짓고, 아울러 어진 정치를 행하는 것에 대한 의의를 진달하여 권면하고 경계하는 뜻을 표현하였다.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장려하는 뜻으로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녹피 1장을 하사하였다.
23년(정축, 1697)
○ 1월.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조 판서 최석정을 불러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여 순리(循吏)를 기용하라는 뜻으로 하교하니, 최석정이 인정(仁政)을 행하는 요체를 진술하였다. 이어서 잘 다스린 수령을 뽑아 승진시켜 군수로 보낼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상이 함경촹평안 두 도의 감사에게 비망기를 내려, 백성들을 구제하고 고질적인 문제를 보고하라고 하였다. 또 북도의 재해가 매우 심하다는 이유로 삼명일(三名日)의 물선(物膳)을 봉진하는 것을 내년 가을까지 정지시키라고 하였다. 또 비망기를 내려, 서북 어사에게 백성들을 구제하고 은덕을 베풀라고 유시하였다.
○ 2월. 강원 감사 유득일(兪得一)이 숙배하니, 상이 인견하고서 기민을 구제하는 정사에 마음을 다하고 농사를 권장하라는 뜻으로 유시하였다. 이어서 들이 잘 개간되었는지의 여부를 가지고 수령을 전최(殿最)하라고 명하였다.
○ 3월. 상이 숙휘공주(淑徽公主)의 집에 거둥하여 직접 조문하는 예를 행하였다. 상이 막차에서부터 걸어서 공주의 궤연(?筵) 앞으로 나아가 남쪽을 향하여 앉으니 상주 이하가 뜰 아래에 늘어서서 네 번 절하였다. 마치고서 예방 승지 김세익(金世翊)이 호창(號唱)하기를,
"상주를 이끌고 올라오라."
하니, 통례가 상주를 이끌고 동쪽 섬돌을 통하여 올라갔다. 이윽고 상이 서쪽을 향하여 꿇어앉으니, 통례가 호창하기를,
"곡하소서."
하자, 상이 궤(?)에 기대어 곡하였다. 근시 이하도 다 도와서 곡하였다. 통례가 호창하기를,
"곡을 그치소서."
하니, 근시 이하가 다 곡을 그쳤다. 도승지 김재현(金載顯)이 나아가 곡을 그칠 것을 청하니, 조금 지난 뒤에 상이 곡을 그쳤다. 백관이 봉위 단자(奉慰單子)로 문안한 뒤에, 상이 근시 이하에게 모두 나가도록 명하였다.
○ 윤3월. 주강에 나아갔다. 이날 ≪대학연의(大學衍義)≫ 강독을 다 마쳤다.
강관이 아뢰기를,
"이 책은 임금의 귀감이니, 비록 강독을 다 마친 이후라 하더라도 늘 열람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덕수(眞德秀)가 10년 동안 깊이 생각하고 많은 공력을 들인 책이다. 오늘에 이 책을 보니 마치 그 사람이 곁에 있는 듯하다. 정치의 법도에 매우 지당한 뜻을 담고 있으니 내 마땅히 각별히 관심을 가지겠다."
하였다.
○ 4월. 상이 친히 사직단에 나아가 기도하였다. 궁궐로 돌아오는 길에 대가가 의금부 앞길에 당도하자, 어가를 길가에 멈추고 승지촹사관촹대신촹삼사와 의금부촹형조의 당상관을 불러 입시하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뭄의 재해가 이토록 혹독하기에 친히 나서서 비가 내리기를 기도하였다. 그런데 나의 성의가 부족하여 비가 올 기미가 까마득하니, 농사를 생각할 때 실로 망극하기 그지없다. 하늘의 뜻에 응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도리에 마땅히 최선을 다하지 않는 바가 없어야 된다. 나의 생각에, 의금부와 전옥서에 현재 수감되어 있는 죄인 중에서 강상죄촹살인죄촹절도죄를 제외한 모든 죄수를 소결하여 석방하라."
하니, 영의정 유상운(柳尙運)과 좌의정 윤지선(尹趾善)이 아뢰기를,
"방금 친히 기도하는 일을 마치고 행차가 이 길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어가를 멈추고 하문하시어 죄인을 소결하여 석방하려 하시니 이는 백성을 위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찌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지평 조태로(趙泰老)가 외방의 죄수들도 아울러 석방하기를 청하였고, 유상운이 또 포도청의 죄수들도 아울러 석방하기를 청하니, 상이 모두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또 응당 세초(歲抄)에 실어야 할 자들도 다 탕척하라고 명하였다. 의금부와 형조의 당상관이 죄수안(罪囚案)을 가지고 죄목을 아뢰었다. 상이 의금부와 전옥서의 죄수 60여 명을 모두 어가 앞으로 나오게 하라고 명하고 유시하기를,
"지금 대가를 세워 놓고 사면을 행하는 것은, 실로 재해를 만나 백성을 걱정한 나머지 부득이한 조치이지 너희들이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너희들은 각자 경계하고 신칙하여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도록 하라. 혹시라도 재범을 하는 날엔 다시는 풀어 주지 않을 것이다."
하니, 죄인들 중에 감동하여 우는 자가 많았다. 상이 죄인들이 머리가 헝클어지고 귀신 같은 몰골에 걸음걸이가 비틀거리는 것을 보고 측은하게 여겨 이르기를,
"애당초 하늘이 사람을 낼 때야 어찌 별다른 사람이 있었겠는가. 이들이 죄를 짓고 오랫동안 갇혀 있다 보니 귀신과 같은 몰골이 된 것이다. 우(禹)가 죄인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가 참으로 실감나고, 또 이들이 유
하니, 부제학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가뭄을 안타깝게 여기고 백성을 걱정하시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렀는데 하늘의 뜻이 어찌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의를 쌓는 일에 힘쓰시어 조금도 중단하지 마소서. 송 고종(宋高宗)이 기우제를 지내고 나서 나서는 찰나에 큰비가 내려 당시 사람들이 '마음 하나가 비를 내리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하늘에 빌면 감응하는 이치가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 마땅히 마음에 새기리라."
하였다.
○ 궁궐로 돌아온 뒤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아, 하늘이 재앙을 내려 기근이 계속 이어져, 길에 굶어 죽은 시체들이 널려 있으니 눈으로 보기에 참혹하고 마음 아프기 그지없다. 아비로서 자식을 죽이고 사람으로서 사람을 잡아먹어, 사람이 용이나 뱀처럼 되어 곳곳에서 모여 난을 일으키고 있다. 이 백성으로 하여금 이런 너무나 차마 못할 일과 지극히 악한 일을 하기에 이르게 하였으니, 얼마나 통탄스러운가.
아, 내가 잘 보살피지 못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모두 다 나의 잘못이다. 밤낮으로 통탄만 하니 임금의 자리에 있는 낙이라곤 하나도 없다. 가뭄의 참혹함이 이런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처참한 바람과 독한 안개가 거의 한 달 동안 연이어져 대지가 불에 타는 듯하고 백성들이 울부짖고 있다. 지금 때를 놓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사람의 씨가 다 마를 상황이기에, 상림(桑林)에서 희생을 대신하고 스스로 몸을 태우려 한 것보다 더 간절하게 비를 빌었으나, 나의 성의가 미진하여 하늘을 쳐다보아도 비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국가의 창고는 텅 비고 백성들의 저축도 고갈되었으니, 장차 그들이 죽는 것을 서서 바라보기만 해야 된단 말인가. 아, 옛날 계사년과 갑오년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시체가 날마다 쌓이자, 선묘(宣廟)께서 먼저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나의 마음이 바로 성조께서 당일에 가지셨던 마음과 같다. 지금부터 정전(正殿)을 피하여 더욱 외경하고 반성하는 도리를 다해야 되겠다.
정부에서는 널리 직언을 구하여, 임금이 빠뜨린 부분과 조정의 득실에서 기민을 구제할 방도에 이르기까지 숨김없이 다 진술하라. 참으로 백성들에게 유리한 것이라면 내가 어찌 내 피부인들 아끼겠는가. 아, 24년의 세월 동안 백성들 위에 군림하였으나 선량하지 못한 몸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였다. 스스로를 반성함에 부끄럽기 그지없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다만 상하가 서로 행실을 닦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니, 어찌 한두 마디 할 말이 없겠는가. 오늘날의 조정은 기강이 대단히 해이해진 상태라고 할 만하다. 제각기 문호(門戶)를 내세우고 서로 알력을 일으키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남의 작은 허물이라도 듣게 되면 마치 기화(奇貨)를 얻은 것처럼 여긴다. 그리하여 사단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의심과 분노가 한이 없어, 하루 이틀 사이에 반복되면서 고질이 되고 한결같이 자포자기하여 망하는 나라의 대부가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고 있다. 이것이 과연 도리에 합당한 것인가.
아, 너희 대소 신료들은 나의 훈계를 분명하게 듣고 충정을 가지라. 그리고 가뭄의 재앙은 당연히 올 것이라거나 당쟁의 논의는 없앨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 말고, 공경스럽게 명령을 받들어 하늘의 견책에 조금이라도 응답하도록 하라. 죄인을 사면하여 억울한 마음을 소통시키고 인재를 선발하여 지방관을 신중하게 임명하는 일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급선무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그리고 반찬을 감하고 술을 금하며 북을 치지 않는 등의 일을 즉시 거행하라."
하였다.
○ 주강에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서연(書筵)을 개강할 때에 글의 뜻만을 강설하지 말고, 민간의 생활의 어려움도 반복하여 깨우쳐서 귀로 익숙히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5월. 가뭄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기 때문에 6일에 남교(南郊)에서 친히 기우제를 지내도록 마련하고, 자신을 죄책하는 뜻을 제문 속에 넣으라고 명하였다. 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가뭄을 몹시 걱정하여 걸어서 제단에 나아갔던 것으로 인하여, 여(輿)에서 내리는 장소를 기우단에서 조금 먼 곳에 마련하라고 하교하였다.
○ 제단을 설치하고 관서(關西)에서 굶어 죽은 자들을 제사지냈는데, 상이 직접 제문을 지어 내렸다. 그 제문에,
"아, 과인이 덕이 부족한 사람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은 지가 24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정치가 대부분 잘 되지 않아 은택이 아래까지 다 미치지 못하여, 스스로 하늘의 진노를 불러들여 해마다 큰 재앙이 내리게 하였다. 아, 불쌍한 팔도의 백성들은 거의 다 죽어서 골짜기를 메우고 촌락은 쓸쓸하기가 난리로 피난을 간 듯하며 황폐해진 논밭은 보이는 곳마다 기가 막힌다. 더구나 저 관서 지방은 유독 무슨 죄가 많아서 끔찍한 재앙을 유달리 많이 받게 되었는가. 하지만 전후로 6년에 걸친 다급한 고통이야 어찌 남북의 차이가 있겠는가.
아,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기근과 전염병은 너무나 심하도다. 저 무고한 백성들이 이처럼 좋지 못한 시절에 태어나서 부자가 서로 함께 살지 못하고 부부가 서로 구제하지 못하며 형제가 서로 돌보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는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변고가 일어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어찌 사람의 본성이겠는가. 나의 슬픔이 더욱 깊어지게 한다.
아, 참혹하도다. 길에 나자빠진 자는 다 유리 걸식하는 사람들이고 들에 나뒹구는 시체는 다 굶어 죽은 시신이다. 누가 너희 혼령을 불러오고 누가 너희 제사를 주관하겠는가. 의탁할 곳이 없으니, 제사를 받지 못하지 않겠는가. 아, 서쪽 관문이 텅 비고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아, 내가 너희들의 부모가 아니며, 너희들은 나의 적자(赤子)가 아닌가. 오직 내가 선량하지 못하여 평소에도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과 같은 은혜를 베풀지 못하였고, 창고가 다 고갈되어 이러한 때를 당해도 구제하는 방도를 극진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동포들로 하여금 망극한 재앙이 눈앞에 닥치게 하였으니, 내가 너희들을 죽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 부모의 심정이 응당 어떠하겠는가. 마음이 에이는 듯하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진다. 아, 반복하여 생각해 보건대, 첫째도 나의 죄이고 둘째도 나의 죄이다. 내가 그 벌을 달갑게 받아야 되는데 우리 백성들이 그 재앙을 대신 받고 있으니, 무심한 하늘이여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곧장 눈을 감고 죽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아, 하늘의 운세는 돌고 돌아 극도에 이르면 반드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곡식을 많이 거두게 되어 거꾸로 매달린 듯한 절박한 상황이 조금 펴질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발(旱魃)이 더욱 혹독해졌는데 한 달 동안 더욱 심해져서, 보리는 이미 큰 흉작이고 벼도 거의 다 시들었다. 이런 상황이 며칠만 더 계속되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게 될 형국이어서, 밤낮으로 애를 태우며 잠시도 편안히 있지 못하고 있다.
아, 한 여인이 한을 품어 3년 동안 혹독한 가뭄이 들었다는데, 하물며 무고한 백성들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계속해서 죽었다는 것을 다 아는 경우이겠는가. 아, 슬피 울부짖고 한스럽게 통곡해도 응어리진 것이 풀리지 않아 천지의 화기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한데, 관서 지방이 어느 도보다 더 심한 점이 있다. 내가 이에 측은하게 여겨 도신에게 명하여 자리를 가려 제단을 설치하고 너희 여러 혼령들을 불러 술잔을 올리게 하였다. 고한 말은 실로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이치로 볼 때 응당 감응하리라.
아, 너희들은 동료들과 함께 와서 제물과 나의 정성을 흠향하고 억울함을 풀고 화기를 이끌어 맞이하여, 재해와 질병이 영영 없어지게 하여 국가가 태평 성대에 이르게 하라. 이에 분부하여 알리니, 의당 모두 다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 7월. 비망기를 내리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기근이 거듭 닥쳐서 팔도의 백성들이 다 굶어 죽을 상황에 이르렀다. 더욱이 관서 지방과 관북 지방은 혹독한 피해를 입었는데, 그 중에서도 관서가 더 심각한 점이 있다. 전후의 장계에서 보고한 내용으로 볼 때에 죽은 사람들이 족히 1만 명을 넘고 있다. 이 밖에 누락된 숫자까지 어찌 다 계산할 수 있겠는가. 아, 기근의 불길이 닥치고 인륜이 다 없어져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참혹하다고 이를만하다. 전쟁의 재앙인들 어찌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옛날 역사에서 찾아보아도 드문 일이다. 이러한 때에 나는 실로 임금 노릇 하는 것이 조금도 즐겁지 않고 진수 성찬도 편안하지가 않다.
어제 감진어사(監賑御史)가 돌아왔을 적에 그가 올린 서계(書啓)를 보고 그가 직접 아뢴 말을 들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상하게 하여 자신도 모르게 목이 메였다. 현재 구제하는 정사를 일단락하였다고 하더라도 내년의 문제가 갑절 더할 것이라 생각된다. 하물며 아직 금년 농사에 다른 재해가 절대로 없으리란 보장을 할 수 없는 상황이겠는가. 그렇다면 어찌 한때에 진휼하는 일을 마쳤다고 갑자기 백성들을 돌보는 마음을 느슨하게 가질 수 있겠는가. 반드시 인자한 아비가 어린 자식을 돌보고 중한 질병에 걸려 몸을 잘 치료하는 것처럼 한 뒤라야, 만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백성들이 어느 정도 소생될 희망을 가지게 되고 조정에서 걱정하고 구제한 정사도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이다.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별단(別單) 중에서 채택하여 시행할 만한 것과 또 시행할 만한 것인데 누락되어 실리지 않은 것을 가지고 모두 요량하여 품지하여 거행하게 하라.
또 생각건대, 해마다 큰 흉년이 들어 길에 굶어 죽은 시신이 널려 있는데, 이는 모두 죄 없는 동포들이다. 안에서는 유사(有司)가 밖에서는 방백(方伯)이 이미 조정의 명령에 따라 발견되는 즉시 매장하였겠지만, 어찌 아직 매장하지 못하여 해골이 드러난 시신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문왕(文王)은 연못을 파다가 나온 주인 없는 썩은 유해를 묻어 주
도록 명하였고, 문황(文皇)은 명주를 나누어 주어 죽은 병사들의 유해를 거두도록 하였다. 아, 애처로운 수만 명의 굶어 죽은 혼령들은 썩은 유해에 비할 정도가 아니고 극심한 재해는 전쟁보다 더 심하니, 측은한 마음이 저절로 생겨난다. 응당 경외의 신하들에게 신칙하여 착실하게 매장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해야 할 일이니, 이런 사실을 다 잘 알고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기를 바란다."
하였다.
○ 8월. 상이 시강관(侍講官) 이인엽(李寅燁)이 휴가를 받아 호남과 호서를 왕래하다가 왔다고 하여 농사 작황에 대하여 물으니, 이인엽이 본 바를 가지고 아뢰었다. 상이 농사를 깊이 염려하여 사방에서 오는 자를 만날 때마다 곧장 인견하여 이와 같이 물었다.
○ 11월.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정원이 경계하라고 아뢰니,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이어서 비망기를 내리기를,
"아침에 서운관(書雲觀)이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은 변고를 아뢰기에 일어나서 하늘을 우러러보니, 관리(冠履)가 서로 대치하는 광경이 매우 험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므로 한참 동안 진정하지 못하였다.
아, 지금이 어떠한 때인가. 하늘이 진노하여 거듭 기근을 내려 굶어 죽는 자들이 길에 연이어져 인류가 장차 씨가 마를 판국이다. 나라의 존망이 터럭 하나도 용납할 틈이 없을 정도로 위급한 것은 홍안(鴻雁)의 시(詩)로도 다 비유하지 못할 정도여서, 밤낮으로 걱정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그런데 비상한 재변이 이즈음에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는데, 어떤 재앙의 기틀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속에 숨어 있길래 하늘이 분명하게 나를 경계하는 일이 두세 번 계속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여기에서 하늘의 마음이 인자하여 반드시 부지하여 온전하게 해 주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천심(天心)에 순응하여 백성들의 원통함을 풀어 줄 수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잠자리가 어떻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아, 변고는 아무 이유 없이 생기지 않고 반드시 부르게 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렇게 볼 때, 지금의 이변을 불러오게 된 것은 실로 나 한 사람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다. 덕은 부족한데 정사는 방대하니, 더욱 두려운 마
정원에서는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여 내가 미치지 못한 부분을 바로잡도록 하라. 말이 비록 적중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가 어찌 처벌하겠는가.
아, 조정은 사방의 근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논의가 갈기갈기 찢어지고 제각기 문호를 세워 서로 공격하여 거의 평온한 날이 없으니, 어느 겨를에 국사에 전심하여 다같이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런 습속을 통렬히 개혁하지 않는다면, 뒷날의 폐해는 반드시 나라를 망치는 데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 참으로 두렵지 않은가.
너희 대소 신료들은 내가 서로 행실을 닦으라고 면려한 지극한 뜻을 마음에 새기고 나라의 운명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것을 생각하여, 사사로운 당쟁을 없애며 법을 지키고 맡은 바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실효가 나오게 하고 나의 말이 헛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24년(무인, 1698)
○ 1월. 비망기로 이르기를,
"내가 덕이 부족한 사람으로서 중대한 왕업을 이어받아, 밤낮으로 두려워하면서 감히 잠시도 편안하게 있지 못하였고 정신을 가다듬어 잘 다스리기를 생각한 것이 간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사랑은 모든 백성들에게 고루 입혀지지 않았고 정사는 잘못된 것이 많았다.
우선 그 중에서 가장 큰 것만을 들어서 말하면, 세금이 균등하지 않은 것은 토지의 경계가 바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백골 징포(白骨徵布)가 나오는 것은 신역(身役)이 편중되었기 때문이고, 어린이가 군대에 편성된 것은 군제(軍制)가 점점 퇴폐해졌기 때문이다. 수령을 신중하게 선발해야 되는데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이 많아서 백성들에게 긁어 내는 것만을 일삼아서 고혈(膏血)이 다 고갈되게 하였다. 이런 폐단을 내가 알고 있으나 가장 바람직한 대책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탐관 오리를 내가 미워하나 한 사람도 법의 처벌을 받은 자가 없었으니, 백성들의 곤궁함이 이처럼 심각한 때는 없었다.
사람의 원성은 위로 들려오고 하늘의 재앙은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가뭄촹장마촹폭풍촹서리 등의 재해에다 기근이 거듭되며 여름에 폭염이 계속되고 7월에 서리가 내리는 등, 3년에 걸친 큰 흉년이 똑같은 양상으로 발생되고 있다. 이것을 어찌 가끔 유행하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실로 백성들의 존망이 달려 있다.
아, 더구나 경기와 호서(湖西)는 실상 우리나라의 근본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재해를 입은 것이 더욱 심하여 거두어들일 곡식이 전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경계가 매우 분명하여 깊이 나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높은 하늘을 우러르는데도 몸이 움츠러들고 넓은 땅을 밟는데도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으니, 걱정과 부끄러움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아, 오늘날의 국사를 생각하면 참으로 통곡해도 부족하다고 이를 만하다. 기근의 고통이 쌓인 나머지 사람의 양심을 상실하여 부모 형제끼리도 서로 버리고 사람의 살을 서로 뜯어먹고 있으며, 도로에는 걸인들의 시체가 쌓여 있고 집은 텅 비어 밥짓는 연기가 끊어진 지 오래이다.
지금 한창 화창한 봄날 만물이 무성해지는 계절을 맞이하였는데, 기근을 구제할 계책이 막막할 뿐만 아니라, 파종할 종자가 부족하여 농사를 시작하지 못할 형편이다. 참으로 봄에 파종할 시기를 놓쳐 버린다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아, 한 사내나 한 여인이 나라의 은택을 입지 못하더라도 마치 임금 자신이 구렁텅이로 떠밀어 넣은 것처럼 여긴다고 하였다. 그런데 하물며 만백성들이 다 굶주려 죽을 지경에 이른 것은 한 사내가 한 여인이 삶을 누리지 못하는 데에 비할 정도가 아니고, 과인이 뼈 속까지 책임을 절감하고 있는 것은 그저 구렁텅이로 떠밀어 넣은 정도로 생각하는 것에 비할 정도가 아닌 경우에 있어서이겠는가.
사랑하여 살기를 바라는 것은 부모의 지극한 심정이다. 팔도의 백성들이 구제를 바라는 것이 어린 아이가 젖을 찾아 우는 것과 같은데, 재물과 곡식이 다 고갈되어 널리 구제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기호 지방에 대하여
아, 재앙의 근본 원인은 다 나 한 사람에게 있으니, 상제가 내리는 벌은 차라리 내 한 몸에 닥쳐야지, 불쌍한 저 백성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을 구제하는 데에 어찌 풍성하기를 기다리겠는가. 내가 이미 묘당의 신하들과 반복하여 도모하여 대략 구획한 것이 있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나의 말을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지 말라. 아, 내가 비록 선량하지 못하지만, 너희들의 부모가 되었다. 오직 우리 조종(祖宗)의 지극한 사랑과 두터운 덕택이 너희들의 골수까지 적셨으니, 어찌 차마 조종이 끼친 은택을 잊어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떠나갈 수 있겠는가.
아, 해마다 진휼하느라 개인의 저축도 다 고갈되었다. 대부가 조정의 덕의(德義)를 본받아 혼자서만 살게 되는 것을 수치로 여겨 기민을 구제하여 많은 이를 살린다면, 포상의 은전을 내 어찌 아끼겠는가. 아, 만백성의 목숨을 도신(道臣)들에게 다 맡겼으니, 경들은 온 심력을 기울여 나와 더불어 같이 걱정하고 부로(父老)들을 불러 차근차근 포고하며 열읍에 신칙하여 구제하는 일을 부지런히 하게 하라. 혹은 편리한 대로 혹은 장계로 보고하되, 조금이라도 백성들에게 유리한 점이 있는 것이라면 번거롭다 하여 꺼리지 말라. 그리고 농사를 권면하는 일에 특별히 뜻을 기울이라. 결국에 가서 호구(戶口)가 감소하지 않고 토지가 황폐하지 않는 고을이 응당 1등이 되는 것이니, 특별히 갖추어 아뢰도록 하라.
아, 이 한 장의 종이에 쓴 말은 오직 진실이고 입으로만 하는 말이 아니다. 반드시 정밀하고 자세하게 하여 나의 뜻에 부응하도록 할 일을 경기 감사에게 하유하라.
또 생각건대, 이전의 흉년은 근년과 같지 않아 다같이 사랑하여 혜택을 베풀었는데, 유독 지금에 이르러서는 마치 남남처럼 보아 돌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한 동포들에게 마음을 다르게 써서 그런 것이겠는가. 대개 일과 힘이 미치지 못해서이다. 그러나 적자(赤子)를 돌보듯이 하는 도리를 잃어버린 점은 크니, 어느 것 하나 나의 잘못이 아닌 것이 없다.
관서 한 지방이 6년에 걸쳐 재해를 입은 것이 유독 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청북(淸北)의 5, 6개 고을은 보이는 것이 다 쑥대만 무성한 텅 빈 땅이 되어 전쟁의 재앙도 이 참상을 비유할 수 없을 정도이다.
지금 새해가 시작되어 기근을 구제하고 농사를 권장하는 일을 응당 먼저 해야 하니, 이 또한 모든 도의 방백과 유수들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 비망기로 이르기를,
"아, 국가가 불행하여 동인(東人)이다 서인(西人)이다 표방하면서 서로 알력을 한 것이 어느덧 1백 년이 되었으니, 얼마나 통탄스러운가. 그러나 윗자리에 있는 자는 다 똑같이 사랑해야 하는 도리로 보면 누구나 왕의 신하 아닌 이가 없으니, 이는 비유하면 부모가 여러 자식에 대하여 본래 애증(愛憎)의 차별이 없는 것과 같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크기가 작은데 문벌만을 숭상하여 인물을 등용하는 길이 이미 넓지 않은 것이 걱정이다. 그런데 조정에서 한쪽이 나아가면 한쪽은 물러가서 반쪽 나라의 인재가 또 대다수 적체되니, 이 폐단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라 꼴이 되겠는가. 그 근원을 추구해 보면, 실로 내가 대공 지정(大公至正)으로 위에서 표준을 세우지 못해서 야기한 문제이다. 내 스스로 내 몸을 질책하니 마음이 무척 부끄럽다. 그러나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어찌 아름답지 못한 부분이 없었겠는가. 전조(銓曹)가 공공의 논의를 채택하여 기용하였는데도 혹은 병을 핑계대고서 오지 않거나, 혹은 잠깐 나아왔다가 금방 물러가 전혀 성실한 뜻이 없다. 예를 들면 이식(李湜)과 목임중(睦林重)의 일과 같은 것이니, 아까 이른바 아름답지 못하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아, 현재 가장 절박한 걱정은 백성들에 대한 일이다. 조정은 사방의 표준이니, 진정시키고 화합하게 하는 것이 특히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아, 따뜻한 봄날이 돌아와서 화기(和氣)가 넘실거리니, 계절과 함께 새로워질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니겠는가. 전형하는 신하로 하여금 명의(名義)에 관계되는 자를 제외하고 누구든지 과오를 덮어 주고 기용하며 재능이 있으면 천거하여 공평하게 하는 도리를 다하게 하리라.
너희 여러 신하들도 마음을 새롭게 가지고, 전날과 같이 하는 일이 없이 다 함께 난국을 극복하는 일에 힘쓰
하였다.
○ 비망기로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제도는 정승과 대신을 접견하는 것이 한 달 안에 3차례밖에 되지 않는데, 이는 평상시라 하더라도 너무 드문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백성들에 대한 걱정과 나라의 계책이 지금처럼 위태한 지경에 이른 경우이겠는가. 지금부터 빈청(賓廳)의 회의에 대하여 법식을 개정하여 매월 5일, 10일, 15일, 20일, 25일, 30일로 날짜를 정하고, 6차례 중에서 3차례는 원임 대신도 참예하게 하여, 훌륭한 의견을 모아 다같이 국사를 성취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 비망기로 이르기를,
"임금은 백성들의 부모이니, 한 사람이 굶주려도 자신이 굶주리는 것처럼 여기고 한 사람이 추위에 떨어도 자신이 추위에 떠는 것처럼 여기는 법이다. 하물며 지금 굶어 죽는 시신이 날마다 거리에 쌓이고 있는데도 구제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아픈 심정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한성부가 계문(啓聞)한 것을 계속해서 보건대, 5일 안에 구렁텅이에 나뒹구는 시신이 4, 50구나 된다고 하니, 한 달 동안 죽은 자를 통계하면 얼마나 되겠는가.
아, 하늘이 내리는 우로의 혜택은 마른 나뭇잎까지도 고루 적시고 왕자의 은택은 금수에게도 미치는 법이다. 생각건대, 도로에서 유리 걸식하는 저 사람들이 비록 토착 농민은 아니지만 마른 나뭇잎과 금수에게도 혜택을 미치게 하는 의리로 미루어 볼 때 어찌 차마 서서 보고만 있겠는가.
진휼청으로 하여금 수시로 더 구제하게 하고, 또 모든 부(部)에 신칙하여 착실하게 매장해 주도록 하여, 내가 측은히 여기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영부사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여 나이를 이유로 물러가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예기≫에 사퇴할 수 없는 경우에 대한 말이 있는데,이는 바로 임금이 치사를 허락하지 않는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예경(禮經)의 뜻이 이미 이처럼 분명하고 내가 의지하는 것도 주석(柱石) 정도일 뿐만이 아니니, 사퇴를 허락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
하였다.
○ 2월.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근래의 사대부들이 풍수설(風水說)에 현혹되어 천장(遷葬)하는 일이 연이어지고 있어서 그 폐단이 적지 않다고 하고, 엄격하게 금지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호조 판서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비록 예장(禮葬)한 상이라고 하더라도 천장할 때마다 은전을 베푸는 것은 폐단을 바로잡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명하기를,
"이제부터는 천장할 때에 예장을 허가하지 말라."
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맹자가 말하기를 '국가가 한가한 때가 되면 정사와 형벌을 분명하게 가다듬는다.' 하였다. 지금 기근이 거듭 닥쳐서 국가가 어려움에 처해 있으나,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경보(警報)가 없으니, 마땅히 이런 때에 특별히 진작시키는 방도가 있어야겠다. 우리나라는 백성들의 부역이 너무 무겁고 군정(軍政)이 치밀하지 못하여 어린이가 군대에 편성되고 죽은 사람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사례가 있으니, 이는 더욱이 가긍한 일이다. 이러한 폐단은 반드시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차근차근 강구하여 알맞게 변통한 뒤라야 어느 정도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갑자기 의견을 말하여 정할 일이 아니고, 모름지기 서로 반복하여 생각하고 따져서 반드시 통렬하게 개혁할 마음을 갖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10월. 상이 친히 제문을 짓고 중신을 보내어 남교(南郊)에 여제(?祭)를 지냈다. 그 제문에 이르기를,
"아, 못난 내가 중대한 왕업을 이어받았으나, 덕은 적고 정사는 커서 신명에게 죄를 얻어 혹독한 기근이 4년에 걸쳐 계속 있도다.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은 또다시 독한 전염병에 걸렸는데, 봄부터 겨울까지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 치열하여 오염되지 않은 마을이 없어 옮겨 갈 곳조차 없도다. 그리하여 팔도와 도성에 시체가 널려 있어, 재앙과 이변의 참혹함이 옛날에도 드문 일이었도다.
나는 백성의 주인이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는 법인데, 한 사람에게 죄가 있어 만백성이 다 고난에 처하니, 밤낮으로 다급하게 대책을 찾고 있으나 발등에 떨어진 불도 끌 수가 없도다. 아, 외로운 이 몸은 차라리 잠들어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 우러러 생각건대, 신명이 우리 나라를 도와서 공리(功利)가 많아지고 백성들이 그것을 의지하여 살 수 있게 하리라. 이 환란을 구제할 마음 간절하나 신명이 아니고 누가 하겠는가. 이에 중신을 보내 성의를 다하여 하소연하게 되었네. 제사를 심히 밝게 올리니 분명 흠향할 것이고, 감응하면 반드시 통하는 법이니 신의 가호가 속히 내리게 되리라."
하였다.
○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를 인하여, 종친과 문무 백관들을 대정(大庭)에 모이도록 명하고, 노산군(魯山君)과 신비(愼妃)의 위호(位號)를 회복하는 일로 문의하였다. 상이 드디어 빈청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내가 알기로는 광묘(光廟)께서 선위(禪位)를 받은 초기에 노산군을 존봉(尊奉)하여 태상왕(太上王)으로 삼았고, 또 한 달에 3번씩 문안하는 예를 행하도록 명하셨다. 불행한 일이었지만 마지막의 처분은 광묘의 본뜻이 아닌 듯하며, 그 근원을 따져보면 육신(六臣)에게서 연유된 것이었다. 육신에 대하여 이미 그 충절을 포양하였는데, 그들이 섬긴 옛 임금의 위호를 추복(追復)하는 것이 무슨 혐의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명 나라 경태(景泰)의 일이 이와 똑같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모방하여 행할 만하다. 나는 이번에 추복하는 일이야말로 광묘의 성대한 덕을 더욱 빛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 일전에 신규의 상소를 받아 들고서 반도 채 읽기 전에 상심과 감회가 간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중대한 일을 경솔하게 논의하여 털끝만치라도 불평한 뜻이 있게 해서는 안 되겠기에, 이렇게 먼저 연석(筵席)에서 묻게 된 것이다. 아, 신도(神道)와 인정(人情)은 그리 멀지 않으니,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뻐하시어 이와 같이 서로 감응하는 이치가 있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소원한 신하가 이처럼 중대한 일을 거론하였으니, 참으로 천재 일우의 기회이다. 그런데 일이 마침내 행해지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아, 왕가(王家)의 처사는 본래 필부와 같지 않은 법이다. 그러므로 간혹 사소한 논의에 구애하지 않고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사례가 예로부터 있어 왔다. 일이 참으로 행할 만한 것이라면 어찌 머뭇거리겠는가. 예관으로 하여금 속히 의식을 거행하게 하라. 신비(愼妃)의 일에 이르러서는, 지금 논의한 자가 대다수 추복하는 것이 예법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옛말을 인용하여 비유를 하였는데, 이는 사실 맞는 것이다. 정릉(貞陵)과 소릉(昭陵)을 추복한 곡절이 이와 차이가 있음을 나도 알고 있다. 태묘(太廟)에 올려 위차가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종의 비 파평 윤씨)의 윗자리에 있게 되니 이것이 실로 곤란한 단서이다.
심온(沈溫)의 고사와 같은 것은 중묘(中廟)가 훤히 알지 못한 것이 아니 었으나 두번째 계청에 즉시 윤허하였고, 선정(先正)의 상소는 복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으나 그때 정원에 내린 하교에는 받아들일 뜻이 없었다. 아마도 특별히 복위하지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생각건대, 옛날 송 나라 곽 황후(郭皇后)가 폐위되어 정비(淨妃)가 되었는데, 이듬해에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상당히 후회하는 뜻을 보였고, 또 그 이듬해에 황후의 호를 추복(追復)하고 예장을 해 주었다. 그러나 폐위와 추복은 다 인종조(仁宗朝)에 관계된 일이었다. 상태후(向太后)는 철종(哲宗)이 평소 후회하고 있는 것
지난번에 신하들이 논의한 바를 보니, 혹은 노산군의 일이 더욱 난처한 것이라고 한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실로 난처한 것은 신비(愼妃)의 일에 있지 노산군의 일에 있지 않다고 여긴다.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결국 곤란하기만 한데, 어떻게 하면 예법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어지간히 존봉하는 도리에 합당하게 하여 억울한 인심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겠는가.
아, 너희 대신촹육경촹판윤촹삼사는 마땅히 제각기 생각하고 있는 바를 진달하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 나름대로의 견해를 올리니, 상이 이르기를,
"성조(聖祖)께서 가지신 당시의 뜻을 비록 감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갑자기 추복하는 것은 실로 곤란한 점이 있다. 따라서 다만 선조에서 이미 행한 일에 의거하여 시행한다면 추가로 존봉하는 뜻은 전혀 없는 것이니, 순회세자(順懷世子)와 소현세자(昭顯世子) 사당의 예에 의거하여 내관(內官)이 수직하고 태상시에서 제물을 보내 축문 없이 제사를 올린다면, 곤란한 데에도 이르지 않고 또 어느 정도 의례 절차를 가하는 방법이 되겠다."
하였다. 우의정 이세백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상이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뒤에 영의정 유상운이 또 아뢰기를,
"신씨(愼氏)의 집에서 모시고 있는 신주에는 '폐비 신씨(廢妃愼氏)'라고 쓰고 있는데, 폐 자는 이미 그대로 두면 안 되고 폐 자를 제거할 경우 비(妃) 자도 쓸 수 없습니다. 지금 백년이 지난 뒤에 고쳐 쓰는 것은 역시 어렵습니다. 또 절목(節目)에 관한 일도 순회세자의 사당과는 차이가 있으니, 수량을 감하는 방편을 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이세백이 아뢰기를,
"신주는 옛날 그대로 써서 사실대로 쓰는 뜻을 살리더라도 의기(義起)에 해로울 것이 없고, 의문(儀文)은 순회세자와 소현세자의 두 사당의 제도를 가지고 쓸 수 있는 것은 쓰고 제외할 것은 제외한다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판부사 최석정이 아뢰기를,
"신주는 잠저(潛邸)에 있을 때의 호칭인 '모군부부인(某郡府夫人)'으로 쓰고 의문은 두 세자의 사당에 비하여 조금 감하여 시행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우의정의 의견에 의거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뒤에 예조가 묘당의 수의로 수복(守僕)을 시켜 수직하게 하였다.
○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때는 노산대군(魯山大君)의 복위의 의례 절차를 거행하려는 때였다. 영의정 유상운이 계품하기를,
"서울에서는 복위하여 부묘(?廟)한다는 명칭으로, 외방에서는 봉릉(封陵)한다는 명칭으로 도감 제조를 차정하소서."
하였다. 예조 판서 최규서(崔奎瑞)가 또 각 능의 상설(象設)의 많고 적음이 동일하지 않은 상황에 대하여 진술하고 옛날의 관례를 준용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후릉(厚陵)의 석물(石物)이 가장 간소하다 하여 이 예에 의거하여 하라고 하고, 이 뒤에도 그대로 정식을 삼도록 하였다. 뒤에 최석정의 건의로 인하여, 또 정릉과 경릉(敬陵)의 예에 의거하여 무석(武石)은 설치하지 않기로 하였다. 최규서가 또 아뢰기를,
"앞으로는 마땅히 부묘(?廟)하는 절차가 있어야 되는데, 새로 부묘하는 신주는 바로 이미 천조(遷?)한 것이므로 곧장 영녕전(永寧殿)으로 들여야 됩니다. 그런데 이는 변례(變禮)이니, 의당 먼저 강정(講定)해야 되겠습니다."
하고, 유상운과 이세백도 다 같이 말하기를,
"마땅히 곧장 영녕전에 올려야 되겠습니다."
"노산대군과 부인의 신주를 지금 고 참판 정중휘(鄭重徽)의 집에 봉안하고 있고 중휘의 이름으로 방제(旁題)를 하였다고 합니다. 신덕왕후(神德王后)를 부묘할 때의 일로 보면, 신주를 쓸 곳을 의거할 데가 없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는데, 결국 악전(幄殿)에서 거행하였습니다. 상례(喪禮)에서 신주를 쓸 때는 반드시 혼백이 있는 곳에서 하는데, 그 뜻이 정밀하다고 할 만합니다. 이번의 신주는 비록 사가(私家)에서 받든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혼령이 백년 동안 의지한 곳이니, 앞으로 신주를 쓸 때에는 그 집에 가서 행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신주를 쓰는 일은 결코 사가에 가서 할 수 없으니, 옮겨 봉안하여서 신주를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유상운은 말하기를,
"선덕왕후를 부묘할 때에는 선정신 송준길(宋浚吉)의 의견에 따라, 경복당(景福堂)이 왕후가 평소 거처하던 곳이라 하여 악전을 설치하고 신주를 썼습니다. 지금 신주를 사가에 그대로 봉안해서는 안 되는 점은 예관의 말이 옳습니다. 정결한 장소로 옮겨 봉안하고 신주를 쓴 뒤에 그대로 묻는 것이 변례에 대처하는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과 유신에게 문의하라고 명하니, 모두 영상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영부사 남구만이 새로 부묘하는 신주에 대하여 아뢰기를,
"태묘에 봉안된 태조촹태종촹세종의 신위는 새로 부묘되는 신주에 대하여 다 조종(祖宗)입니다. 비록 조묘한 신주라고는 하나 조종을 봉안한 사당의 문앞을 지나가면서 조알(朝謁)하는 예를 행하지 않고 곧장 영녕전으로 올려 모신다면, 어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태묘에서 조알할 경우, 세조 이하 여덟 위를 다 섬돌 아래로 내려 모셔서 새로 부묘하는 신주 아래에 진열해야 되니, 이런 변례야말로 참으로 예의 본의에 깊이 밝은 이가 아니고서는 쉽게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영녕전에 이르러서도 새로 부묘되는 신주가 마땅히 면저 조알례를 행해야 되는데, 비록 다 똑같이 조묘된 신주라 하더라도 위차가 새로 부묘되는 신주 아래라면 응당 섬돌 아래로 내려 모셔야 되니, 이는 모두 예법에 없는 예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후일에 상이 또 노산군에 대하여 이미 명호(名號)을 회복하였는데 신주를 오랫동안 사가(私家)에 모셔 둘 수 없다는 뜻으로 하교하였다. 이에 대하여 연신(筵臣) 중에서 혹자가 아뢰기를,
"이미 신하의 이름으로 방제(旁題)를 하였으니, 전각(殿閣)으로 옮겨 모실 수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중한 바가 있는 곳에서는 자잘한 예절에 구애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하교하였다. 유상운이 또 아뢰기를,
"손위(遜位)하기 이전에는 경복궁에 계셨고 손위한 이후에는 창경궁에 계셨으니, 이 두 궁전 중에서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경복궁은 가사(家舍)가 없다 하여 창경궁 시민당(時敏堂)으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뒤에 또다시 남구만의 의견에서 거론한 부묘하면서 조알(朝謁)하는 문제로 하문하기를,
"신덕왕후를 부묘할 때에 송준길의 의견으로 인하여 부묘례를 거행하지 않았는데, 이 일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니, 유상운이 아뢰기를,
"영부사의 상소 중에서 받들어 내려야 된다는 말은 실로 예법의 뜻을 깊이 생각한 말입니다. 다만 장렬왕후(莊烈王后)를 부묘할 때에는 하위에 있는 신주를 받들어 내린 절차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다만 선조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종묘에 새로 부묘하는 신주는 묘문(廟門)을 들어가면서 조알하는 절차가 없고, 영녕전에서는 지금 신문(神門)을 지나가기 때문에 태묘에 조알례를 행합니다. 이는 막중한 예절에 관계되기 때문에 감히 짐작으로 판단하여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종묘에 이미 그 사유를 먼저 고하였으니 부묘하면서 조알하는 예를 거행하지 않더라도 무방할 듯하다. 그리고 신덕왕후를 부묘할 때에 송준길의 건의로 인하여 부묘례를 행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영녕전에서도 이 사례
하니, 유상운이 아뢰기를,
"그때에는 송준길이 신덕왕후가 태조대왕과 대등한 위치이기 때문에 부묘례를 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이나, 지금은 그와 다릅니다. 이미 조종의 신위가 있는 곳에서는 마땅히 부묘하면서 조알하는 예가 있어야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영녕전에서 부묘하면서 조알하는 예를 행하되 받들어 내리는 절차만은 거행하지 않도록 하라. 지나가면서 조알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다시 문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남구만이 또 아뢰기를,
"지금 단종대왕께서 처음으로 추복(追復)을 받게 되었는데, 신위는 비록 조묘(?廟)한 데에 해당하지만 신주는 사실 새로 부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輦)이 태묘의 신문(神門) 앞을 지나가면서 한 번 들어가 조알하지 않고 빙 둘러서 곧장 가서 바로 조묘(?廟)에 봉안한다면, 곰곰이 생각해볼 때 신(神)의 뜻에 뭔가 겸연쩍은 점이 없겠습니까. 깊이 생각해 보건대, 우리 조종의 뜻이 만약 후손이 억울하게 있다가 신원되는 것을 기뻐하신다면, 혹시 한 번 만나보지 못하고 지나간 것을 섭섭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또 들으니, 고례(古禮)에는 오묘(五廟)와 칠묘(七廟)에 각기 궁이 있었기 때문에, 태묘에 일이 있더라도 서로 압존(壓尊)되거나 방해되는 혐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세로 내려와서는 다 한 사당을 사용하여 서쪽을 높이는 제도를 취하여 새로 부묘하는 신주는 으레 먼저 부묘된 신주에 대하여 자손이 되었으니, 새로 부묘하면서 조알할 때 애당초 받들어 내리는 절차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간혹 새로 부묘하는 신주가 높고 이미 부묘한 신주가 낮은 경우에는 사당 제도의 존비에 따라 군신의 분수와 부자의 등급이 엄격하게 있어, 높은 신주는 기둥 밖의 섬돌에서 예를 행하고 낮은 신주는 탑(榻) 위의 신실에서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게 되는데, 그 사이에는 다만 발과 장막이 쳐져 있을 뿐이어서 태연히 있는 것은 실로 사람의 정리상 편안한 바 아닌 듯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전에 의견을 올려 감히 운운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지만 조정의 예는 대다수 이왕 행한 전례를 준거로 삼습니다. 널리 물어보신 뒤에 오직 성명께서 알맞게 참작하여 처리하시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최석정이 아뢰기를,
"부묘하는 예는 본래 선조의 사당을 조알하는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에 '적사(適士)에게는 이묘(二廟)가 있으니, 먼저 아비의 사당에 조알하고 나서 조부의 사당으로 간다.'고 한 것이 ≪의례(儀禮)≫의 경전에 보입니다. 지금 부묘할 때에 태묘와 조전(?殿)을 아울러 알현해야 됨을 이것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묘정(廟庭)에 올리고 내리는 예절에 있어서는 신의 도가 사람의 일과 다른데 어찌 일일이 살았을 때에 맞출 수 있겠습니까. 이 한 가지 일은 행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이는 전례가 있고 없고는 논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태묘에서 부알례(?謁禮)를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뒤에 최규서가 아뢰기를,
"묘정 아래에서 부알례를 행하게 되면 하위에 있는 열성들이 마침내 불안한 점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선정신 송준길이 기유년 부알할 때에 진소하였던 까닭입니다. 또 태묘에 부묘하지 않고서 부알한다고 일컫는 것도 안 될 일이니, 사정이 어떻게 하거나 결국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하고, 응교 김진규(金鎭圭)가 또 아뢰기를,
"영녕전에는 응당 추부(追?)해야 하니 마땅히 이 예를 행해야 하나, 이미 조묘한 신주는 원래 사당에 들어가는 예가 없습니다. 지나가면서 조알하는 것에 있어서도 이미 고례(古禮)가 아니고 더욱이 근거할 만한 예문이 없으니, 대신을 보내 고유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조주(?主)가 친진(親盡)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나, 태묘에 부묘하지 않고 곧바로 영녕전으로 올려 모시는 것은 이미 상례(常禮)가 아니고 마음에도 미흡한 점이 있다. 나는 기필코 행하려고 한다."
하니, 호조 판서 민진장(閔鎭長)이 아뢰기를,
하고, 유상운이 아뢰기를,
"만약 사당을 지나가면서 알현하지 않는 것을 미안하게 여기시어 기필코 행하려 하신다면, 세종대왕 이상의 감실(龕室)만 그 앞문을 열고 이하 여러 감실은 열지 말게 한 뒤에, 묘알한다고 호창(號唱)한다면, 온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자, 상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인하여 정원에 하교하기를,
"옛날에 조종조에서는 신주를 쓰거나 고쳐 쓸 때에 반드시 친히 임해서 쓰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이 어찌 유명간(幽明間)의 정리와 예법에 있어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미진함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번에 신주를 쓸 때에도 친히 임하여 쓰겠다."
하였다. 최규서가 또 아뢰기를,
"신덕왕후를 부묘할 때에는 전에 이미 시호가 있어서 휘호(徽號)를 올리기만 하였으므로 시책(諡冊)은 쓰지 않고 옥책(玉冊)만을 썼습니다. 이번에는 세조가 올린 존호(尊號)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니 뒤늦게 올리는 뜻으로 옥책문(玉冊文)을 지어 올리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시호를 지금 비로소 추상(追上)하게 되면, 시책이 가장 중하고 옥책은 그 다음이 되는데, 종묘의 여러 신위에는 옥책이 없는 곳이 많으니, 시책과 옥책을 꼭 함께 쓸 필요는 없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시책만 쓰라고 명하였다. 유상운이 또 말하기를,
"지석(誌石)은 으레 퇴광(退壙)과 장명등(長明燈) 사이에 묻어야 하는데, 능 가까운 땅에 이 일로 역사를 하는 것은 미안합니다."
하니, 상이 지석을 쓰지 말라고 명하였다.
○ 11월. 대신촹육경과 정부의 서벽(西壁)과 관각(館閣)의 당상관을 빈청으로 모이라고 명하였다. 노산대군의 시호를 '순정 안장 경순대왕(純定安莊景順大王)'이라 하였다. 중정(中正)하고 순수한 것을 '순(純)'이라 하고, 크게 인자(仁慈)를 생각하는 것을 '정(定)'이라 하고, 화합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 것을 '안(安)'이라 하고, 바른 것을 행하고 뜻이 화(和)한 것을 '장(莊)'이라 하고, 의를 말미암아 이루는 것을 '경(景)'이라 하고, 인자하고 온화하며 널리 밝은 것을 '순(順)'이라 한 것이다.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이라 하였는데,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잡는 것을 '단(端)'이라 한 것이다.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부인의 시호를 '정순(定順)'이라 하였는데, 순수한 행실이 어그러짐이 없는 것을 '정(定)'이라 하고, 이치에 화합하는 것을 '순(順)'이라 한 것이다. 휘호(徽號)를 '단량제경(端良齊敬)'이라 하였는데, 예를 지키고 의를 잡는 것을 '단(端)'이라 하고, 마음을 중도로 하여 일을 경건하게 처리하는 것을 '양(良)'이라 하고, 마음을 잡고서 장엄하게 있는 것을 '제(齊)'라 하고, 밤낮으로 경계하는 것을 '경(敬)'이라 한 것이다.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하였다.
당초에 영의정 유상운이 상에게 건의하기를,
"노산대군의 존호 '공의온문(恭懿溫文)'과 부인의 존호 '의덕(懿德)'은 바로 세조대왕께서 올린 것인데, 노산대군이 사양하고서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응당 시호를 올려야 하는데, 그대로 이것을 시호로 삼아야 합니까? 아니면 따로 새로이 시호를 올려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세조대왕께서 올린 존호를 쓰게 되면 세조대왕께서 높여 받드신 아름다운 뜻을 선양할 수 있으나, 시호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먼저 평일의 존호를 쓰고 바로 이번에 올린 시호를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뒤에 유상운이 또 말하기를,
"존호와 시호를 아울러 쓰라고 하신 것에서 실로 전하의 뜻이 있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존호는 평소에 올린 것이고 시호는 승하하신 뒤에 올린 것이므로, 신주에는 응당 아울러 써야 되겠으나 책보(冊寶)는 사체가 특별하니 꼭 아울러 쓰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여러 대신들에게 의견을 개진하라고 하였으나, 다른 의견이 없자, 상이 그대로 하도록 하였다.
○ 단종대왕과 정순왕후의 신위를 창경궁 시민당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도감 도제조 이하와 승지촹사관과 병조촹도총부 당상과 낭청 각 1원이 배종하였다.
○ 옥당이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임금이 빠뜨렸던 의전(儀典)을 새로이 거행하는 것이 혹은 명예를 좋아한 데에서 나오기도 하였고 혹은 성심(誠心)에서 나오기도 하였는데, 내가 단종대왕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한 것은 실로 성심에서 나온 것이고 한때의 명예를 취하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일찍이 당시의 사적을 상고해 보았는데, 마음에 차마 잊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전에 능에 행행하던 길에 육신(六臣)의 묘를 지나면서 신료들의 건의를 물리치고 관작을 회복시켰었는데, 이번에 신규(申奎)의 상소가 나의 뜻과 딱 들어맞아 전에 볼 수 없었던 의전을 단행하여 나의 지극한 정성을 펴게 되었다. 그러므로 해창위(海昌尉)에게 서찰을 내려 이르기를 '이제서야 거의 유한이 없게 되었다 운운.' 하였으니, 이것에서 나의 본심을 볼 수 있다. 능침의 중대한 역사를 결단코 물려서 행할 수는 없다."
하였다.
○ 비국을 인견하였을 때 상이 이르기를,
"임금이 신하에 대하여 참으로 지엄하다고 할 수 있으나, 설사 죄에 따라 처벌하였더라도 일이 지난 뒤에는 마음속에 쌓아두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하물며 한 조정에 있는 동료들에 있어서이겠는가. 최 판부사가 죄를 받고 나서 곧바로 관직에 제수된 것에서 내가 마음속에 쌓아 두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김덕기(金德基)가 또 너무 심한 말을 하였으니, 이는 실로 말세의 나쁜 풍습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인조조(仁祖朝)에 이귀(李貴)를 논죄한 서계에서, 효시할 것을 청하면서도 말은 매우 간략하였는데, 지금은 파직을 논계하는 글일지라도 장황하게 열거하여 말이 너무 과중하다. 심지어 감사에게 내리는 교서는 왕의 말을 대신 짓는 것인데도 오로지 들뜨고 장황한 것만을 일삼아 번잡하기 그지없으니,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봉릉 도제조(封陵都提調) 최석정(崔錫鼎)이 상에게 아뢰기를,
"사릉(思陵)의 능 안에 정씨 가문의 무덤으로 이미 수백 년이 지난 것이 있는데, 정릉(貞陵) 안에 있는 옛무덤을 파서 옮기지 않았던 관례에 따라 특별히 그대로 둘 것을 허락해도 해롭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문의하여 허락하였다. 이어 또 하교하기를,
"듣건대, 장릉 안에 육신의 사우(祠宇)가 있다고 하니, 이것도 함께 그대로 두고 옮기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니, 영의정 유상운이 아뢰기를,
"사우는 무덤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그대로 두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두보(杜甫)의 시에 이르기를 '한 몸과 같은 임금과 신하가 제사도 같이 받네[一體君臣祭祀同]' 하였는데, 이는 무후(武侯)의 사당이 소열묘(昭烈廟)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육신의 사우를 그대로 두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하니, 유상운이 아뢰기를,
"소열묘가 어느 시대에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한 나라 때에 반드시 백제성(白帝城)에 따로 건립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는 후세 사람이 창건한 것인 듯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날에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봄가을로 선비들이 정자각 근처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 것도 미안한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두보 시에 이르기를 '임금이 승하한 해에도 영안궁에 있었도다[崩年亦在永安宮]' 하였는데, 영안궁은 아마도 무후의 사당 근처에 있었던 듯하다."
하고, 이어서 여러 신하들에게 제각기 소견을 개진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최석정(崔錫鼎)촹서종태(徐宗泰)촹
"원릉(園陵)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한식(寒食) 한 차례밖에 없지만, 육신의 사당에는 봄가을로 향사를 올리니, 이 또한 대단히 방해되는 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릉의 엄숙하고 경건한 도리로 보면 실로 미안한 점이 있지만, 신의 이치와 사람의 정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 내가 장계를 보자마자 바로 두보의 시를 생각했는데, 꼭 옮기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하였다. 최석정이 또다시 명 나라 때에 공신을 배장(陪葬)한 사례를 들어 증명하였다. 나중에 우의정 이세백의 건의에 따라 용호(龍虎) 안의 한적하고 넓은 곳으로 옮겨 세웠다.
○ 12월. 예조가 단종대왕을 복위한 경사로 인하여 교서를 내리고 진하(陳賀)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서 신주를 쓰는 일에 친히 임할 것이라고 명하였다. 다음날 친히 고유제를 행하고 태묘로 모시고 가서 부묘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 단종대왕의 시책(諡冊) 초본(草本) 가운데 머리말에 도감이 '효증손 사왕 신(孝曾孫嗣王臣)'이라 썼다. 예조가 아뢰기를,
"4조 및 명종(明宗)의 감실에는 '효증손 사왕 신(孝曾孫嗣王臣)'이라 썼으나, 정종(定宗)촹문종(文宗)촹예종(睿宗)의 세 감실에는 다만 '사왕 신(嗣王臣)'이라고만 썼고 덕종(德宗)의 감실에는 '국왕 신(國王臣)'이라고만 썼으니 '효증손(孝曾孫)' 세 글자는 없습니다. 인종(仁宗)의 감실에는 '효증질손 사왕 신(孝曾姪孫嗣王臣)'이라고 썼습니다. 지금 시책에 의거하여 쓴다면 정종촹문종촹예종의 여러 감실과는 차이가 있게 되니, 일이 미안합니다. 대신들에게 문의하소서."
하니, 이세백이 아뢰기를,
"열 감실의 축사(祝辭)가 차이가 있는 것은 은미한 뜻이 있는 듯합니다. 응당 문종 감실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최석정이 아뢰기를,
"조천(?遷)한 삼종(三宗)의 감실에 단지 '사왕 신'이라 쓴 것은 실로 뜻이 있습니다. 인종의 감실에 '효증질손'이라 쓴 것은 인조조(仁祖朝)에서 일컬은 것을 인하여 그대로 쓰면서 고치지 않은 듯하니, 이것을 인용하여 전거로 삼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 듯합니다. 지금 이 머리말에서 일컬은 바는 깊이 상고하여 강정(講定)한 것이 아니니, 삼종(三宗)의 감실에 쓴 예에 의하여 '사왕 신'이라고 일컫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 논의에 의거하라고 명하였다.
○ 대사간 김우항(金宇杭)이 전염병이 성하게 번지고 잇다는 이유로 부묘하는 예식에 친히 임하는 것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상이 대답하기를,
"아, 지금의 의식은 2백 년 동안 빠뜨리고 있었던 전례(典禮)를 뒤늦게 거행하는 것이니, 이것이 얼마나 중차대한 예식인가.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 임금으로서 전염병에 구애하여 감히 대궐문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다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나는 천성이 전염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근자에 수령으로서 산골짜기로 도피한 자가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속으로 늘 비웃었다. 어찌 이것을 두려워하여 응당 행해야 할 예식을 행하지 않을 수 잇겠는가. 나의 뜻이 굳게 정해진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대신이 극력 간쟁한다 하더라도 어찌 나의 뜻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이는 도리로 볼 때 당연히 그러한 것이지,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