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차 위원회
1933년 8월 14일 총독부 제3회의실에서 제7차 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마이다(今井田)회장, 권중현·구로이타 고문, 우시마·시노다·오다·어윤적·이능화·이병소·윤영구·정교원·마쓰모토 위원이 출석하고, 이마이다 회장의 개회사에 이어서
구로이타 고문
“본회의 사업은 모든 분야에 걸쳐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서, 시정상(施政上)으로나, 학계를 위해서도 공헌하는
바가 매우 클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점에 대해서 매우 흔쾌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본회는 1922년 아리요시 정무총감 재직 시에 발족되어 이제 12년에 이르고 있습니다.
1922년에 개최된 제1차 위원회에서 사업기간을 10개년으로 하여 본 사업을 완료시킬 예정이었습니다만 지난번의 뜻하지 않은 관동대지진 때문에 부득이 하여진 일반예산 축소방침에 따라서 2개년을 연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가급적 그
기간 내에 완성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에 이르렀는데, 마침 앞으로 1년 전후면 그 추가예정기간의 기한이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편찬작업 같은 것만 해도 이제는 벌써 그 과정의 절반 이상이 완료된 셈인데, 본회의 이번과 같은 어려운 사업
치고는 결코 바라기 어려운 빠른 진전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에 보고했던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출판계획도 이미 확정되고 하여 앞으로 1936년 3월까지 본 사업이 완료될 수 있게 된다면 연도는 부득이 조금 넘긴다 해도 대단히 좋은 성과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이와 같은 사업은 아무래도 좀 지연되기 쉬운사업이긴 합니다만, 어떻게 해서라도 예정기한인 1935년도까지는 본 사업이 완료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료총간' 출판의 건은 제1차 위원회에서 논의한 대로 기존의 확인된 사료를 중심으로 편찬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사료채방 작업 과정에서 채집한 것 중에서 편수작업상 특히 중요한 것이라 생각되는 것만을 출판하여 일반에 알리
는 일은 이번의 편찬사업이 얼마나 신중하고 공평하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일이 될 뿐 아니라, 시정방침상으로나 학계에 대해서도 신용과 권위를 인식시켜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료총간'의 출판을 계획하였던 것이며, 재정형편이 곤란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각국(各局)에서 예산을 지원받아서 '고려사절요'와 같은 매우 좋은 자료를 편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료총간'의 출판에 소요될 금년도 예산안은 정무총감 이하 관계관들의 노력에 의해 제출되었습니다만, 대장성의
일반경비 삭감방침 때문에 통과되지 않은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금년에는 작년처럼 훌륭한 것은 만들 수 없지만 어떻게 하든 한 번 변통을 해보려고 생각합니다.”
라는 희망의 뜻을 피력하였다.
마쓰모토 간사가 '사료총간'의 출판계획 목록을 각 위원에게 배부한 후
구로이타 고문
“이 출판목록은 주로 채방사료와 구규장각(旧奎章閣) 등의 소장본 중에서 아직 일반적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뽑아서 만든 것입니다.
금년에는 이 중 특히 '해동제국기', '당장서화첩(唐将書画帖)', '군문등록(軍門謄録)'만을 출판하고 나머지는 34·35년도에 전부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 목록 중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 있다거나 이 이외에 더 필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되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다 위원
“이 목록에 실려있는 것은 물론 모두 출판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잠시 살펴보면 대체로 ‘분로쿠노 에키’와 병자호란에 관한 것이 많으므로, 조금 다른 분야의 것을 집어넣으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구로이타 고문
“이 목록에서 분로쿠임진난(文禄壬辰亂)에 관한 것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조선과 일본 양쪽에 관해 의문 나는 점이 여러 가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명확하게 이해시킬 필요가 있어서 이와 같이 계획한 것입니다.
'사료총간' 외에 '사료사진집(史料寫眞集)'의 출판계획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사료총간'의 일부가 될 것 같습니다만, 사료총간은 책으로 되어 있는 것을 출판하는 것이고 사진집은 책의 형태로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조선사'의 도판으로 삽입할 수 없는, 따로따로 낱개로 되어 있는 귀중한 것을
모아서 사진집으로 만들어 본문기사와의 대조에 편의를 제공하려는 것입니다.
이 계획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찬성을 얻어 출판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매우 의미 있는 기획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오다 위원 등의 찬성이 있었고 곧 폐회하였다.
제8차 위원회
1934년 7월 30일 중추원에서 제8차 위원회를 개최, 이마이다 회장, 구로이타·이윤용 고문, 기타 위원·간사 등이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회장의 인사말, 간사의 업무보고, 고문·위원들의 의견개진이 있었다.
이마이다 회장
“본회의 사업도 여러분들의 노력에 의해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을 경하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이제 본회의 산업도 점점 막바지 단계에 가까워지고 있으므로 더 한층 분발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내등·권중현 양 고문께서 서거하신 것은 본회로서는 참으로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나바 간사
“'조선사'의 발간예정 총 책수는 1929년 12월 23일의 제3차 위원회에서 1책당 500페이지 정도로 하여 총 책수 30권으로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만, 편찬업무의 진행과정에서 고려시대·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사료가 예상 외로 대단히 많아져서 도저히 예정책수에다 집어넣기가 곤란하므로 발간예정 총 책수를 35책으로 늘리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구로이타 고문
“본회의 사업은 처음에 10개년의 계획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만 관동대지진 때문에 2개년을 연장하고 그 후 인쇄형편을 고려하여 다시 1개년을 연장하여 1936년 3월까지 완료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본회의 사업은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예정 기한 내에 전부 끝내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사무진행상 혹시라도 그 기한을 넘기는 경우에는 잔무를 정리한다는 형식을 취해서 나머지를 전부 완성하려고 합니다.
다음 문제는 사료총간(史料叢刊)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작업은 제1차 위원회의 결의에 따라서 조선사의 편찬작업에
인용된 사료 중 매우 중요하거나 또는 대단히 희귀한 것, 즉 세간에 널리 유포되고 있지 않은 것을 출판함으로써 본회의 편찬방침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지난 1932년도부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매우 중요하고 또 한두 부밖에 없는
사료는 '승정원일기', '일성록'과 종가 문서, 기타 조선에 산재하고 있는 귀중한 문집류, 예를들면 '삼봉집(三峰集)', '보한재집(保閑齋集)', '모재집(慕齋集)' 등 대단히 많습니다.
이러한 자료들을 인쇄함으로써 본회의 편찬방침이 공평무사함을 널리 인식시키고 또 그럼으로써 귀중사료의 인멸을
방지하고 널리 소개하는 일은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료 자체를 출판하는 일은 그 일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커다란 사업이 되는 것입니다만, 그것도 잔무처리 작업의 하나로 하여 되도록 많은 것을 출판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출판하는 데는 다년간의 경험이 있어 업무에 숙련되어 있는 본회의 직원을 모두 그대로 참여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선사'의 마지막 부분을 1894년 갑오년까지로 하고 그 이후의 사실은 편찬하지 않기로 되어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1차 위원회 때에도 논의가 있었습니다만 갑오 이후의 시대는 병합 직후 국내외의 사건이 대단히 많고, 또 10개년의 기간을 가지고 그것까지 끝내려 하는 것은 무리가 된다는 이유로 뒤로 미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가능하면 본회의 잔여업무로서 편찬함으로써 수미 일관된 조선사를 편찬하고자 합니다.
요컨대 저의 생각으로는 관제에 의한 조선사편수회 업무는 예정대로 1936년 3월까지로 일단 마감하고 다음에는 잔여업무로 하든가, 어쨌든 다른 형식으로라도 사료총간을 많이 출판하고 갑오 이후의 역사도 편찬했으면 합니다.”
최남선 위원
“저 구로이타 고문의 의견대로 실행되었으면 합니다. 이와 같은 국가적 사업은 여러 번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진도로 보면 예정기간 내에 남은 부분을 전부 완성할 수 있을른지 대단히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기한에 쫓겨서 일을 급하게 하여 불완전한 것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됩니다.
잔무처리라는 방법이 있다면, 사료를 충분히 음미하여 완전한 것을 편찬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동시에 사료총간의 충실성을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다음으로 단군과 기자 항목은 조선사의 매우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본회 편찬의 '조선사'에서는 그것을 수록하게 되어 있는 제1편에 할주(割註)나 두주(頭註)로밖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잔무를 정리하는 경우에 정편(正篇)이나 보편으로 단군과 기자에 관한 사항을 편찬했으면 합니다.
다음으로 본회에서 편찬한 '조선사'는 그 부수와 책수가 매우 방대해서 그것을 제대로 이용하기가 대단히 곤란합니다. 그래서 색인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색인도 역시 잔무의 한 작업으로 작성했으면 합니다.”
이나바 간사
“지금 최 위원으로부터 본회와 같은 사업은 두 번 다시 착수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충분히 음미하여
완전한 것을 만들었으면 하는 말씀이 계셨는데, 참으로 좋은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단군과 기자에 관한 사항은 제1차 위원회에서도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저희들도 결코 소홀히 취급하지는 않았습니다.
항상 유념하고 있습니다만, 본회의 편찬방침으로 채택된 편년체 형식으로는 그것을 집어넣을 적당한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즉 무슨 왕 몇년 몇월 며칠자에 그것을 집어넣을까, 그 확실한 연대가 없으므로 저희들도 고심하던 나머지 결국 수록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미 본편에는 수록하지 못했으므로 어떠한 방법으로 그것을 집어넣을 것인가, 별편의 형식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보편의 형식으로 할 것인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최남선 위원
“저는 제1차 위원회 때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단군과 기자에 관한 문제를 소홀히 취급하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그 사항을 집어넣을 장소에 대해서는 결국 기술적인 문제입니다만, 단군과 기자에 관한 사항은 그 사실에만 집착하지
말고, 그것이 사상적·신앙적 측면으로 발전해 온 것을 한데 묶어서 별편으로 편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구로이타 고문
“단군과 기자는 역사적 실재인물이 아니라 신화 속의 인물인 것으로, 사상적·신앙적인 측면에서 발전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사상적·신앙적 측면에서 따로 연구하여야 할 사항이며 편년사로서는 취급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상적·신앙적인 요소가 정치적으로 어떠한 의미와 영향력을 수반하고 있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만, 만약 그것을 별편으로 편찬하려고 한다면 이와 비슷한 세로 사상적·신앙적 측면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쳐온 유교·
불교 쪽도 역시 별도로 취급하여 편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가 없더라도 본회의 사업은 자꾸만 지연되고 있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 최 위원의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최남선 위원
“단군과 기자가 역사적 실재인물인가 신화적 인물인가, 그것은 하나의 연구과제입니다만 적어도 조선인 사이에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로 인식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회 편찬의 '조선사'에 그것을 집어넣지 않은 것은 우리들 조선인으로서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본회 편찬의 '조선사'는 조선인 사이에서는 잘 읽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나바 간사
“단군과 기자에 대한 저희들 편찬자 측 입장에서의 편찬경과에 대해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1편의 ‘조선사료’ 항목에 단군기사를 수록하지 않았던 것은 단군에 관한 기사가 편찬작업의 기본 사료로 결정·채택된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기자에 관한 기사는 이미 중국 측 사료 속에서 충분히 다루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군에 관해서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전후의 인물인 백문보(白文宝)가 단군의 연대에 관해서 상소한 것이 있고, 또 이조 세종 때에 단군을 제사 모시는 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의한 것이 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백문보의 항목이나 세종의 항목에 그것을 집어 넣으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요컨대 저희들은 단군에 관해서 가능한 한 그것을 집어넣으려고 했습니다만, 편년사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별편으로서 편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 상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다 위원
“저는 구로이타 고문의 희망대로 '조선사'의 본편은 1935년도로 일단 끝내고, 뒤에는 잔여업무라는 형식으로 '사료총간'을 많이 출판하고, 편찬 연차를 연장해서 갑오 이후의 것을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서 크게 찬성합니다.
다만 이것은 첫째로 예산과 관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회장각하의 진력이 있으시길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단군에 관한 문제는 편찬담당 간사로부터 그것을 집어넣으려고 노력했던 고심담도 있었습니다만, 과거의 조선사에서는 그것을 외사로서 따로 취급했던 예도 있으므로 별편으로 편찬하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이능화 위원
“단군과 기자에 관한 사항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그 연대가 불명하기 때문에 본편에 수록되지 않았으므로 이제 별편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습니다만, 그것에 관한 사료가 매우 적기 때문에 저는 별편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삼국유사', '동국통감'과 기타 중국인의 학설 등을 모아서 좀 전에 이나바 간사가 말씀하셨던 고려 백문보의 항이나 이조 세종의 항에 수록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마이다 회장
“조선사의 편찬연차를 연장해서 갑오 이후도 다루거나, 사료총간을 증간한다거나, 색인을 만든다거나, 이런 일들은 모두 충실성을 기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또 당초에는 조선사를 30책으로 완성할 예정이었습니다만, 앞서 간사의 보고대로 제3편에 3책, 제5편에 2책을 늘려
총 35책으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단군과 기자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분의 주장을 충분히 고려하고 다시 타당한 방법을 강구하여, 가능한 한 완벽한 것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본 사업은 대체로 예정기한을 어기지 않고 1935년도까지 마무리하고자 합니다만, 만약 기한에 쫓겨서 불완전한 상태로 끝마쳐서는 안 되기 때문에 미진한 부분은 잔여업무로 취급하여 정리하는 방법을 취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 사상과 신앙과 기타 문화 분야에 관한 것에 대해서는 후일 다시 고려해 보겠습니다.”
라고 결론짓고 폐회하였다.
제9차 위원회
1935년 7월 5일 중추원에서 제9차 위원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마이다 회장, 구로이타·야마다·이윤용 고문, 우시마·시노다·오다·이능화·이병소·정교원·오타니·후지다·와타나베 위원이 참석하고 이마이다 회장의 개회 인사에 이어 다음과 같은 토의에 들어갔다.
이나바 간사
“단군 기사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 것인가는 본회 발족 이전의 위원회 시절부터 논의된 사항으로 여러 가지 희망사항도 있었으므로 편찬과정에서는 각별히 주의했던 것입니다만, 공민왕 24년과 폐왕3) 원년조에서 합당한 기사(일문보 사망)를 검출하여 단군에 관한 고래의 문헌을 채록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이미 배본되었으므로 여러분도 살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이미 간행된 '조선사' 중, 본문의 하단에 주를 붙였던 사료건명의 기록방식에 대해서 세간에서는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의 문집에는 존칭을 붙이고('우암선생년보(尤庵先生年譜)'), 어떤 사람에게는 붙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명재유고(明齋遺稿)'). 이와 같은 일은 어느 한쪽을 편드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본회에서는 서명은 모두 원래의 제목 그대로를 채록한 것뿐이며, 편찬자 측에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사실은 없으므로 이 점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구로이타 고문
“지금 노세타니(野世溪) 간사로부터 서무보고가 있었고, 또 이나바 간사로부터 편수업무에 관한 보고가 있었으므로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겠습니다만, 이 사업은 금년도로 완결짓기로 되어 있는 것이지만, 최초의 예정대로 순조로이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 간사로부터 보고가 있었던 대로 예정된 35책 중 현재까지 간행된 것은 21책 뿐이고 그 외에 또 2책이 현재 인쇄
중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간행된 것을 제하면 결국 14책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35책이라 하는 것은, 처음에는 30책의
분량으로 간행할 예정이었으나 편찬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중에 규장각 도서뿐만 아니라, 본회에서 수집한 것 중에서도 여러 가지 새로운 사료가 계속해서 발견되고, 또 지방의 구가의 소장본 중에서도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진귀한 사료가 많이 나와서 그것도 편찬내용에 집어넣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도중에 35책으로 변경할 것을 위원회에서 결정하
고 이 사실을 정무총감께도 상신하였던바 모처럼 여기까지 일을 진행시켜 왔으므로 35책으로 증간해서라도 조선사로서 보다 완전한 것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업은 기필코 금년 안에 완결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데, 지금의 진행상태로 보아서는 아무리 해도 금년도 안으로는 완결을 보지 못할 것 같고 적어도 내년(1936년) 1년은 꼬박 걸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3) 고려 32대 우왕.
이 점에 대해서 총감각하께 전에도 여러번 기간연장을 상신한 바 있고, 특히 1935년도까지는 꼭 완결짓도록 하겠다고 말씀드렸던 만큼 참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업이 완성되는 날이면 고대문화·민족문화의 발전을 생각해서도 그 일이 매우 필요한 일이 되는 것임은
물론이요, 사회적으로 또 학계에 대해서도 크게 공헌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므로 아무쪼록 금년 1년 작업을 계속해서 완벽한 것을 세상에 내놓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35책 발간 예정에 비추어 현재까지 간행된 것은 21책에 불과하지만 책 1권의 분량이 처음 예정했던 바로는 500페이지 정도이었던 것이 실제로 간행된 것을 보면 약 700페이지나 되고 있으므로 이미 간행된 21책만 해도 1책의 분량이 700페이지라고 하는 것은 처음의 500페이지 3책의 예정 페이지 수에 비하면 훨씬 그것을 상회하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이 사업의 작업진도는 결코 완만한 것이라 할 수 없고 오히려 그동안 작업을 맡아주신 여러분의 노고가 얼마나 컸었던가 하는 점을 입증해 주는 것이 되며, 이 점 여러분의 노고에 대하여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제5편부에서는 이 사업에 많은 경험을 쌓아오신 홍희 수사관이 사망하시고, 또 본 사업에 처음부터 관계해 오신 세노 촉탁도 잇따라 사망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잃은 것은 본회로서도 매우 통절한 일이지만, 본년도의 예정편찬을 진행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관점에서는 매우 큰 손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금년 남은 사업에 대해서는 가능한 노력을 편수를 담당하고 있는 분들에게 부탁해서 충분하게 긴장하고 일을
진행할 것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길었던 본 사업에 관계하면서 편찬하는 일에 더욱 숙달하신 분들을 한번에 두 사람을 잃었다고 하는 것은 금후
사업을 예정대로 진행해 가는 대에 있어서 각 위에 대해서도 매우 곤란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정한 6책을 본년도 내에 진행한다고 하는 것도 과연 예정대로 할 수 있을까 어떨까라고 말하는 것까지도
망설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가능한한 노력을 부탁드려서 반드시 10년도 내에 이 6책을 완료한다고 하더라도 그 후 8책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됐든 지금까지 한 일을 그 진행 중에 중지한다고 하는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심히 유감인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이 일을 반드시 속행해서 처음 목적인 조선사의 완벽을 기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내년도 중 이 사업이 속행되게 해서 그 마지막 1년 더욱더 힘을 써서 긴장하고 이것을 완성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원회 각 위 및 편수를 담당하고 계신 여러분에게 이 결심으로 진행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11년도에도 이 사업의 진행이 계속 되기를 총독각하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조선사가 완결되는 것을 이 사업에 관계하고 있는 한사람으로 절실하게 희망하고 있는 바입니다.
만일 11년도에 할 수 없는 부분은 12년도에 잔무정리 형식으로 환성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조선사'의 마지막 부분을 어느 시점까지로 한정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이나바 간사로부터 1894년 갑오까지로 한정할 예정이라는 대답이 있었던바, 구로이타 고문이 거듭 그 점에 관해서는 일한병합까지를 편찬내용에 집어넣는 것으로 하자는 논의가 제1차 위원회 석상에서는 상당히 많이 개진되었지만, 이제 와서 그것을 한데 묶어서 병합까지의 것을 편찬하려 한다면 당초의 편수목적을 확장하는 일이 되고, 일종의 사업목적 변경이라는 형태가 되므로 지금까지 진행해 온 것을 일단 완결한 후에 다시 고려해보기로 하는 것이 본회 설치의 취지로 보아서도 좋을 것이며, 어쨌든
당초의 예정대로 갑오년까지의 역사를 일단 완성시키는 것이 당면 문제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또 회장·위원·간사들 사이에서 사업완료 연도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었지만 대체로 36·37년도까지 예정된 35책을
완성하기로 결정하였다.
고문·위원 간담회
1936년 9월 27일 정무총감 관저에서 개최되어, 구로이타·이윤용·하야미(速水) 고문, 오다케(大竹)·시노다·오다·이(능화)·윤·최·후지다·오타니 등의 위원과 간사가 출석하여, 회장의 인사말에 이어 구로이다 고문의 의견·희망 등을 듣고 폐회하였다.
<출전 : 第三項 委員會の經過及び其の重要決議, '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朝鮮總督府 朝鮮史編修會, 1938년, 32~75쪽>
9) 조선사편수회 편찬사무의 분담과 예산, 출판
(전략)
제7항 편찬사무의 분담
1922년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설치되자 먼저 사료수집에 중점을 두고 위원 3명이 중심이 되어 조선 내의 사료 채방에 주력하였다.
그런데 1925년 6월 조선사편수회 관제가 공포되고 보다 많은 직원을 충원하게 되었으므로 1927년 6월 사무분장내규를 정하고 편수 사무를 분담시켜 마침내 편찬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조선사편수회사무분담표(1927년 6월 1일 현재)
1. 편수사무
(1) 사료의 수집
채방부 수사관 홍희
정비부 촉탁 나카무라 히데타카
(2) 사료의 편찬
사적정본(史籍定本) 촉탁 이마니시 류
사적해제(史籍解題) 수사관보 다카키쓰 타쿠지
직관표(職官表) 수사관 홍희
(3) 조선사의 편찬
제1편부(신라통일 이전) 촉탁 이마니시 류
수사관보 이병도
제2편부(신라통일 시대) 촉탁 이마니시 류
수사관보 이병도
제3편부(고려시대) 촉탁 이마니시 류
수사관보 이병도
제4편부(조선시대 전기: 태조에서 선조까지)
촉탁 나카무라 히데타카
수사관보 쓰루미 류기치
제5편부(조선시대 중기: 광해군부터 경종까지)
수사관 이나바 이와키치
수사관보 다카키쓰 다쿠지
제6편부(조선시대 후기: 영조부터 갑오개혁까지)
촉탁 세노 마구마
2. 부 속
(1) 도서부 촉탁 나카무라 히데타카
(2) 정비부 촉탁 나카무라 히데타카
촉탁 시부에 게이조
그런데 이상의 직원들에 의해 편찬업무가 진행되던 중 1927년 12월에 시오다 수사관보가, 1928년 4월에는 쓰루미(鶴見) 수사관보가 각각 퇴직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업의 진행에 따라 증원의 필요가 있어 1929년에는 신석호·오기하라·조한직, 1931년에는 소노다 등을
채용하여 편찬업무를 계속해 왔는데 1932년 5월에는 제 1·2·3편부의 주임인 이마니시 류 촉탁의 사망을 비롯하여 많은 직원의 사망 또는 퇴직이 있었다.
또 1931년 부터는 마침내 조선사의 인쇄에 착수하게 되었으므로 직원을 보충하는 일이 급박하여져 1933년 3월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구찬서, 동년 4월 다가와 고조(田川孝三, 동년 9월 슈도 요시유키(周藤吉之·마루가메 긴사쿠(丸龜金作, 1934년 4월 구로다·이시하라, 동년 6월 마쓰오카 등을 보충하고, 또 현 직원들로 하여금 겸무하도록 하여 편찬과 인쇄업무에 종사하게 하였다.
그 후 1935년 1월에는 홍희 수사관, 5월에는 세노 촉탁의 사망으로 편찬업무에 상당한 영향이 있었지만, 직원들이 일치하여 노력한 결과 그런대로 예정대로 사업을 진행시킬 수 있어서 1937년 초에는 거의 원고작성을 끝내고 연도 말에는
인쇄를 완료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직원의 각 편별 분담사항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각 편별 분담자 성명 일람
간사 수사관 이나바 이와키치
제1편 촉탁 이마니시 류
수사관 스에마쓰 야스카즈
제2편 촉탁 이마니시 류
수사관 스에마쓰 야스카즈
제3편 촉탁 이마니시 류
수사관 이나바 이와키치, 스에마쓰 야스카즈
수사관보 오기와라 히데오
촉탁 시부에 게이조, 윤용균
제4편 수사관 나카무라 히데타카, 신석호
수사관보 시오다 후키조, 쓰루미 류기치
촉탁 가와구치 우키츠, 권중익, 슈도 요시유키, 마루가메 긴사쿠, 구로다 세이조, 후지이 세이이치
제5편 수사관 이나바 이와키치, 홍희, 스에마쓰 야스카즈
수사관보 다카키쓰 다쿠지
촉탁 세노 마구마, 구찬서, 조한직, 이시하라 토시오, 이능화, 다나카 한지로
제6편 수사관 다보하시 기요시
수사관보 다카키쓰 다쿠지, 타가와
촉탁 세노 마구마, 소노다 이능화, 조한직
조사부 수사관 홍희
촉탁 박용구, 육종윤, 조중관
도서부 수사관 나카무라 히데타카
서기 현양섭
촉탁 시부에 게이조
정비부 수사관 나카무라 히데타카
서기 현양섭
촉탁 시부에 게이조, 마츠오카
심의부 수사관 이나바 이와키치, 나카무라 히데타카, 홍희
촉탁 이마니시 류, 다보하시 기요시
인쇄부 수사관 스에마쓰 야스카즈
수사관보 이종명
촉탁 마츠오카, 구로다, 시부에 게이조
* 비고 : 본 표에는 편수 도중 사망 전·퇴직한 사람을 포함한다. 앞의 관직명은 반드시 편찬종사 중에 종사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제3절 사업의 계획 및 완성
제1항 기간과 예산
조선사편찬위원회 제1차 위원회에서는 조선사의 완성예정 연한을 10개년으로 정했었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 한 재정형편 때문에 기간을 2개년 연장하여 1933년도에 완료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본회의 사업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하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게 되어 1925년 6월 6일 새로운 조직의 관제를 공포하고 예정연한 내에 사업을 완료하기로 했다. 그러나 전 조선에 걸쳐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새로 이 발견되는 중요한 사료의 분량이 더 많아져 편찬사업을 예정대로 진행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1개년을 더 연장했다. 하지만 본회 제1차 위원회의 희망에 따라서 중요사료를 출판하기로 결정했으므로 다시 1개년을 연장하여 1935년도로서 완료할 예정을 세웠다.
그 후 편찬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사료의 분량이 계속 불어나서 당초에 계획했던 발간 예정 책수를 다시 5책 5권 증가시켰기 때문에 예정연한인 1935년도까지도 완성시킬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또 2개년을 더 연장해서 1937년도에 겨우 완성을 보게 되었다.
즉 최초의 예정으로는 10년에 걸쳐 조선사 30권(1권당 약 500페이지, 합계 15,000페이지)을 완성할 계획이었던 것이 상기한 이유로 인하여 16년에 걸쳐 '조선사' 35권(24,000페이지)과 '조선사료총간' 20종, '조선사료집진' 3질을 편찬하고 1938년 3월로서 사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
본사업의 소요예산은 초년도에는 17,640엔으로 하되 1923년에는 증액할 예정이었지만, 관동대지진 때문에 전년도에 비하여 겨우 5천 엔을 증액하는 데 그쳤다.
이 정도의 예산으로는 도저히 본 사업의 목적을 원활하게 달성할 수 없으므로 제3차 위원회에서 여러가지로 연구한
결과 1924년도부터는 해마다 6만 엔씩을 앞으로 10개년간에 걸쳐 배정함으로써 사업을 완료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24년도에도 진재의 여파가 계속되어 예정된 만큼의 예산을 증액받지 못하고 겨우 35,990엔의 예산을 배정받게 되었다.
1925년도에는 관제 제정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겨우 42,628엔의 예산을 배정받았고, 1926년도에는 구 대마도주 종백작가의 소장 문서 구입비를 포함하여 67,628엔을 배정받음으로써 동년 5월 대마도주의 조선관계 문서를 25,000엔에
구입했다.
1927년도에는 예산긴축방침 때문에 5,000엔이 감액된 62,628엔을 배정받았다.
1928년도는 전년과 같았지만, 1929년도에는 전년도에 비해 7,352엔이 증액된 69,980엔을 배정받아 수사관보 2명,
촉탁 1명을 증원함으로써 편찬사업이 조금씩 진척되기 시작했고, 또 앞서 구입한 종가 문서의 정리작업 등을 처리할 수 있었다.
1930년도에는 다시 전반적인 재정긴축방침 때문에 5,500엔이 삭감되어 실행예산으로서 64,480엔을 배정받았으므로 사무비를 절약하여 사료를 등사하였다. 1931년도에는 조선사의 인쇄비조로 3,600엔을 요구했지만 예산긴축 때문에
오히려 전년도보다 3,312엔이 삭감된 61,168엔을 배정받았기 때문에 여비 등을 절약하여 조선사 3책을 인쇄 간행했다.
1932년도에도 역시 총독부의 일반방침에 따른 예산긴축의 결과, 서기 1명을 감원시키고 55,453엔의 예산을 배정받아 조선사 5책을 인쇄, 간행하였다. 1933년도에는 전년과 같이 55,453엔의 예산을 배정받아 조선사 6책을 인쇄, 간행했다. 그리고 조선사료총간 제1편 '고려사절요' 24책은 본회의 예산으로 간행할 예정이었지만 예산사정으로 본부 예산
에서 직접 지출하여 간행했다.
1934년도에는 종래의 기준 예산인 55,003엔과 더불어 '조선사료총간' 및 '조선사료집진'의 인쇄비로서 32,567엔의
증액을 요구했는데, 25,525엔이 증액되어 합계 80,528엔을 배정받았다.
그리하여 이 해에는 '조선사' 6책과 '조선사료총간' 3종, '조선사료집진'(상) 1질을 인쇄 간행하였다.
1935년도에는 전년보다 285엔이 삭감된 80,243엔의 예산을 배정받아 '조선사' 6책과 '조선사료총간' 6종, '조선사료집진'(하) 1질을 간행하였다. 1936년도에는 80,243엔의 예산을 배정받았으므로 '조선사' 6책과 '조선사료총간' 5종, '조선사료집진'(속편) 1질을 간행했다.
1937년도에는 81,003엔의 예산을 배정받아 '조선사' 3책과 '조선사료총간' 5종을 간행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본 사업은 16년의 기간과 90여만 엔의 경비를 사용하여 드디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부록 1 참조).
또 1938년도에는 35,000엔의 예산으로 '조선사'의 색인·연표 작성작업과 갑오 이후의 사료수집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각 연도별 소요경비 내역을 다음 표와 같다.
연도별 소요경비 일람표
연도 주임 봉급 판임 봉급 사무비 합 계
1922년도 ― ― 17,640 17,640 (결산)
1923년도 ― ― 22,640 22,640 〃
1924년도 ― ― 35,991 35,991 〃
1925년도 8,892 4,380 29,356 42,628 〃
1926년도 8,857 6,802 51,969 67,628 〃
1927년도 8,849 6,752 47,127 62,728 〃
1928년도 10,599 7,568 44,561 62,728 〃
1929년도 9,299 4,705 55,976 69,980 〃
1930년도 11,231 7,170 46,079 64,480 〃
1931년도 9,967 6,778 44,423 61,168 〃
1932년도 10,268 6,841 38,344 55,453 〃
1933년도 10,297 6,604 38,552 55,453 〃
1934년도 10,827 6,299 63,402 80,528 〃
1935년도 9,925 6,138 64,180 80,243 〃
1936년도 12,071 3,181 64,991 80,243 〃
1937년도 15,978 1,918 63,107 81,003 〃
1938년도 6,838 4,164 23,998 35,000 (예산)
계 143,898 79,300 752,336 975,534
제2항 인쇄 및 배포
조선사는 1931년부터 인쇄에 착수하기로 하고, 그 인쇄지를 어디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 1931년 4월의 고문·
위원 간담회에서는 동경에서 인쇄하기로 하고 그 인쇄소 등의 교섭은 구로이타 고문에게 의뢰했는데, 그 후 검토해 본 결과 동경에서 인쇄하는 것은 교정작업에 불편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교정자를 동경에까지 출장 보내야 하기 때문에 편수 사무에 지장을 초래할 염려가 있으며 원본 대조상의 곤란한 점 같은 문제도 있고 기타 불편한 점이 많았다.
따라서 다시 협의한 결과 경성에서 인쇄하기로 결정하고 근택상점 인쇄부·조선인쇄주식회사·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의 관계자들을 불러 인쇄의 체재 등을 설명하였던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는 지정한 활자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경쟁입찰 과정에서 사퇴하고, 나머지 2개사가 경쟁입찰에 응한 결과, 조선인쇄주식회사로 하여금 1931년도부터 1937년도까지 계속해서 '조선사' 전 35책을 인쇄케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조선사료총간'과 '조선사료집진'도 근택상점 인쇄부·조선인쇄주식회사로 하여금 경쟁입찰에 붙여 인쇄·
간행케 하였으나 그중 일부분은 원본의 차입곤란 또는 설비 불충분 등의 이유로 경도의 편리당(便利堂)에서 인쇄·간행케 했다.
'조선사' 간행의 주된 목적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이를 널리 세상에 유포시켜, 조선사에 대한 종래의 잘못된 관념을 바로잡고 조선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게 하는데 있으므로, 본서의 배포에는 특별히 신경을 써서 인쇄회사로 하여금 염가로 판매케 하고 또 본회에서 직접 배포하는 것은 주로 도서관·학교·조선사연구자 등에 한정함으로써 널리 일반인들로 하여금 이용케 할 수 있는 방도를 강구했다.
제4절 조선사료총간
1925년 12월의 제1차 편수회 위원회에서의 결정에 따라서 본회에서 수집한 사료 중 가장 중요한 것을 골라, '사료총간'이라는 제목으로 번각(飜刻)출판하기로 했다.
즉 '조선사'에 인용·수록된 사료는 다만 그 사료의 명칭만을 기재하고 구체적인 내용문은 모두 생략하므로 특별한 사람 이외에는 그것을 볼 수 없는 실정을 감안하여 이 중요 사료의 일부를 출판해서 '조선사'와의 대조에 편리를 제공하기
위하여 본회에서 수집한 사료 중 가장 귀중한 것 20종만을 뽑아 원본의 형태에 따라서 프로세스판(寫眞製版)·콜로타이프판 또는 활판으로 인쇄했다.
그리고 방대하여 전 권을 인쇄하기 곤란한 사료·문서·화상·필적 등 225매를 콜로타이프판으로 인쇄하여 '조선사료집진'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해제를 붙여 상편·하편·속편의 3질로 묶어 간행하였다.
<출전 : '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 朝鮮總督府 朝鮮史編修會, 1938년, 106~122쪽>
10) 조선사편수회의 의의(사설)
(1)
이번에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가 공포되었다. 동 회는 총독부의 관리에 속하고 조선사료의 수집, 편찬 및 편수를 관장하는 것으로 정무총감이 회장이 되며, 고문과 위원으로 총독의 주청에 의해 내각에서 이를 임명하고, 기타 간사 및 편수관, 서기 등의 직원을 두게 되었다.
동 사업은 물론 지금부터 새로 착수하는 사업은 아니오, 이미 1922년에 조직된 조선사편찬위원회에서 한참 진행된 것이다.
그러나 관제의 공포는 이를 국가적 문화사업으로 삼는 까닭이라. 나는 이렇게 진전되는 조선사의 완전을 확실히 기대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혹자는 조선사의 편찬이라 함을 통치상 하나의 정책으로 고찰할지 모르나, 본 사업은 결코 목전의 정치적 의의를 가진 것이 아니오, 조선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많은 실례를 들어 논증하여 오직 과학적 진실을 구함에 그 문화적 의의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난번에 사이토 총독이 학술적으로 가치 있는 조선사의 편찬방침을 성명한 바 있지만 본 사업에 관계하고 있는 전문사가의 인선을 볼지라도 그 학자적 양심과 과학자적 태도에 신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2)
나는 권위 있는 조선사의 편찬에 의하여 조선 자체의 진실을 구한다.
그 진실이야말로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하여금 완전한 이해와 배합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전대의 통치자 중에는 이 진실이 엄폐되어 진위의 결합을 강제하고자 한 것 같으나, 사이토 총독이 단연히 구방침을
버리고 국가적 수사의 대사업을 시작한 것은 그 문화정치의 완벽을 기함에 불과하다.
설령 조선 사실에는 일본과의 관계상 의미 없는 일이 포함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추호도 은폐할 필요가 없으며, 또 그와 반대로 일선 관계의 근거가 될 사실이 존재할지라도 그것을 과장할 것도 아니다.
진실에 입각한 것보다 이상의 호사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금일의 조선인은 완전한 조선사를 얻어 전통 문화의 가치와 민족적 심리의 진상을 깊이 알게 될 것이요, 또 일본의 위대한 면목과 사명은 조선사의 광휘에 의하여 일층 선명하게 될 줄로 믿는다.
<출전 : 朝鮮史編修會의 意義, '每日申報', 1925년 6월 13일>
11) 조선사편찬계획에 대하여,
80만 엔을 유해(有害)하게 소비치마라(사설)
(1)
사이토 마코토 씨가 조선통치의 임무를 맡은 이후 각종의 소위 문화정책은 그 본류가 일선융화에 있다.
일선융화에 노력하겠다는 자이면 어떠한 협잡배라도 이에게 금전과 관력을 제공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 없이 하여왔다. 이번에는 80만 엔의 예산으로 10년 계획을 세우고 조선 역사를 편찬할 터이라는데, 머지않은 시기에 구체적으로 관제가 발포되리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 역사 편집에 가장 중요한 지위에 있는 이나바 씨의 의견이라고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근래 조선인 사이에는 조선인의 희망하에 기록된 역사를 작성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으나, 금번 이 사업으로 이러한 결점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라” 하고 다시 말하기를, “일한병합은 일본의 정복욕으로 인하여 된 것이라고 해석하는자도 있으나, 이것은 대단한 착각이니 한국은 동양화란의 원천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양의 평화, 인민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병합된 것이니, 이 병합의 목적을 진실하게 편찬할 생각이라.”고 하였다.
(2)
조선총독부 계획으로 편찬하는 사업이라고 하여서 반드시 불완전, 혹은 유해무익한 역사가 되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재래 조선인의 독립 국가가 있던 시대에도 완전한 역사가 되어 온 적이 없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니, 치자의 지위에 있어서 그 역사를 기록하는 자로서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과거에 있어서 공정하고 충실한 역사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
예가 하나도 없었으니, 어찌 조선총독부 계획만 힐책할 수가 있으랴.
그러나 우리 조선인의 경제력으로는 80만 엔이라는 돈도 적지 않은 부담이요, 이것이 위에 서술한 현하의 정책과 또는 이나바 씨의 의견 등을 종합하여 보면 오히려 허위와 기망을 일삼는 재료를 작성하기에 소비될 염려가 적지 않으니,
총독부 당국자와 또는 실제 역사 편집에 참여할 인사들의 그 학자적 품격과 인간으로의 양심을 향하여 일언하지 아
니할 수 없다.
(3)
이나바 씨가 말한 바와 같이 “일한병합을 일본의 정복욕에 인하여 된 것이라”고 보는 역사안의 소유자와 “동양의 평화와 조선민족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한 것이라”고 하는 자간에 학자 자격상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이에 다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후자를 고집하는 자로써 그네가 선전하는 표어를 진리화하기 위하여 10년간을 두고 거대한 경비로 계통적
서물을 작성할 터이니, 이것의 사학적 가치나 사회학적 의의는 의문이라고 할지라도 정략상으로는 매우 유력한 변호자의 지위를 점할 것이다.
10년간에 80만 엔의 경비로 수집하고 통일한 기록을 부인하려고 하면 그에 대등한 노력의 결정이 아니고는 타인을
수긍시키기 어려우리니, 과연 만일 금번 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사의 사실과 이론이 정곡을 잃은 것을 발견할 때에 사실은 흑백이 명백하지만 제삼자를 수긍시키기에 충분한 반박론을 조직할 수 있을지는 다소 염려하는 바이며, 따라서 일반과 같이 그 결과에 주목하고자 한다.
<출전 : 朝鮮史編纂計劃에 對하야, '東亞日報', 1925년 6월 13일>
12) 아사인수(我史人修)의 슬픔, 최후의 정신적 파산(상, 하)(사설)
(1)
정당하여야 할 물건이 너무 부당하게 쓰이기 잘하는 것 중에 역사라는 우심(尤甚)한 일물(一物)이 있다.
똑같은 기술과 해명으로써 우리 사회 생활의 보감이 되어야 할 그 본래의 사명은 흔히 뒷줄로 서버리고 도리어 강자,
권력자의 이용물이 되어서 그 비의 부도의 엄폐물이 되고 그 횡역(横逆) 포악의 변호자료가 됨은 실로 기막히는 억울함(寃抑)이라 할 것이다. 훌륭한 지분(脂粉)이 가장 많이 추악한 얼굴의 화장꺼리가 되는 것처럼 이렇게 역사가 많이 비행패덕자(非行敗徳者)의 얼굴가리개로 쓰임은 필시 역사 자신의 위대한 실제적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니, 가장 잘 취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술의 증거는 되지만 좋은 술이 독한 약같이 악용됨은 술 자신의 큰 망신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역사가 인심농락(人心籠絡)과 언이식비(言以飾非)상에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한 효력을 가진 것을 진작부터 간취한 자는 강자, 권력자, 승리자들이었으니, 이를테면 어떠한 정치적 환국(換局)에 있어서 약자가 대개 비자(非者)가 되고 마는 것과 같음이 그것인데, 이것이 국가적 대혁(代革)의 경우에는 더욱 그 정도를 높이고 다시 민족적 흥패의 사태에는 가장
몰염치하게 악용되어 온 것이 지금까지의 상례이다.
가까운 일로 말할지라도 고려 왕씨의 말운에 관한 이조의 기록 같은 것이 어떻게 승자의 강소(強笑)에 대한 패자의 철원(徹寃)을 상징하는 것이랴.
명계(明季)의 실사(實事)에 대한 만청(滿清)의 기전이 어떻게 정복자의 증상적(增上的) 횡포를 표시한 것이냐.
(2)
조선과 일본의 민족적 갈등은 실로 일조일석의 옛일이 아니요, 또 일기일궐(一起一蹶)이 시득시실(時得時失)하여 어느 한편이 늘 우뚝하거나, 늘 납작하지 않았던 것이 대개 그 실정이겠지만, 최근까지의 단락에 있어서 불행히도 조선은 패자도자(敗者倒者)의 쓴맛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온갖 권력의 자류를 일본에게 빼앗길 때 기록과 변증의 권능도 그 속에 들게 되매, 이것을 호기로 하여 그네의 몰염치한 위탁가식(僞托仮飾)이 자유분방한 날개를 시공의 양간에 벌리게 되어 허다한 교묘한 둔사(遁辞)는 자기를 속이고, 우리를 속이고 나아가서는 세계의 이목을 현란하게 되었음이 기막히다.
그런데 그네의 이러한 노력이 있는 한편에 그 대수자(對手者)인 조선인은 등한과 태만이 정확히 그 반비례를 지어 양자 관계의 사실은 더욱 그 전도반착(顚倒反錯)을 고정하게 되었다.
양민족 일역일순(一逆一順)의 최고조를 보이게 된 최근의 교제 같은 것은 그 진실을 바라는 것이 도리어 어림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연대가 올라갈수록 조선이 우강(優強)한 처지를 가지는 상세(上世)의 사천(事綪)까지 이통에 너무 심한 억제로써 변환되며, 아무도 뭐라 하는 이 없이 그것이 사실인양 하게 된 것은 얼마나 큰 억울함(寃屈)이냐.
(3)
알기 쉬운 일례를 말하면 그네의 이른바 신공후(神功后)의 삼한정벌이란 것은 이미 그네 자신의 진보한 역사가의 손에 위조반설(僞造反説)임이 분석논파된 것인데, 이것이 그네들의 국민성 배육(培育)의 자료가 됨은 오히려 참을 만하다
하고 그네만의 손에 선전된 이 자료가 아직 자식이 없는 외국인의 몰비판적인 승인을 얻어 마치 조선이 옛날에도 일본에게 굴욕을 받은 일이 있는 것처럼 통설됨은 얼마나 기막히게 원통한 일이냐.
또 이것이 최근 조선의 국가적 귀무(帰無)에 대한 포원막신(抱寃莫伸)할 일대숙업(一大宿業)처럼 선전됨은 과연 어떠한 비한(悲恨)이냐.
이것이 그대로 우리 자제의 과서(課書)에 들어서 없는 종문서를 억지로 있는 것처럼 믿으라 하는 노력을 내어야 할 수밖에 없는 희비극이야 말은 하여 무엇하랴.
그런데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지금까지 양민족 관계의 기술이란 것이 대개 이 정도의 허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음과, 그것이 어느 정도 그대로 세인에게 신용되어 있음과, 이러니저러니 해도 당자인 조선인은 도무지 무관심, 불용의로만 지냄을 볼 때마다 역사가 바르게나 비뚤게나 똑같이 큰 능률의 임자임을 아는 우리의 눈에는 남모르는 뜨거운
눈물이 마를 수 없다.
<이상 (상)>
자래로 일본인처럼 역사로써 위정의 보조물을 삼기 좋아하는 국민이 없다 할 만하며, 또 일본인만큼 역사 환롱(幻弄)4)으로 말미암아 분에 넘치는 성공을 얻은 국민이 없다할 만한 것은 지금 일본인의 역사란 것을 본질적으로 살펴본 이는 환하게 아는 바이다.
어느 서양사람 중에 만일 일본인이 역사제조에 발휘한 정도의 천재를 다른 예술이나 문학상에도 드러낸다면, 가장 경탄해 마지않는 작품은 오직 일본에서만 보게 되리라 말한이도 있다.
그렇다. 그네처럼 예술기교와 문학적 의장이 다분하게 가미된 역사는 진실로 세계에 적다 할지니, 그것은 사실의 심명(審明)이나, 재료의 배치나, 표현의 방식이나, 문구의 정확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가구(仮構)와 전설을 그대로 실유(實有)와 진경으로 환화(幻化)5)케 하는 데 비범한 기량과 용기가 있다는 찬탄일 뿐이다.
어떠한 나라의 역사든지 그 고대에 속하는 부분이 어느 정도의 전설적 취미(臭味)를 가지지 않은 것이 없지만은 일본처럼 엉터리 후대적 설화만으로 뭉뚱그린 것이 없으며, 고대뿐 아니라 근대까지도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라는 다시 없다.
문학적 작품인지, 전실적 기록인지의 식별이 일본의 역사에서처럼 현란하고 어지러울 수가 없음은 일본사가 스스로도 왕왕 큰 탄식을 금하지 못하는 바이지만은 이것이 대개 국민성 도야의 꿀단지요, 위정자 더욱 사상지도자의 화수분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일본에서는 거기에 대하여 섣부른 무슨 소리를 하다가는 의외의 봉변이나 보고 마는 상례가 된다.
과연 이러한 기초 위에 이미 일종의 견고한 국민성을 축조하고 또 이 축조로써 최근에 이르러 꽤 큰 국민적 성공을 거두게까지 되었으니, 이만큼 맛들인 역사 환롱의 재미를 그네들이 얼른 잊어버리지 못함은 용혹무괴(容或無怪)라고도 할 듯하다.
(2)
그러나 자기네 집안만의 일일 것 같으면 있는 일을 덮는다거니, 없는 일을 있다거니, 화기청마(和氣清磨)가 있었거니
없었거니, 아도고덕(兒島高徳)의 이야기가 정말이거니 만든 것이거니, 교과서에는 노하여 찢어버렸다고 대서특필한
풍신수길(豊臣秀吉)에 대한 명국(明國)의 책봉문(冊封文)이 곱게 실물이 남았거니 아니거니, 자기네의 필요대로 마음껏 재미를 보게 두겠지만 자기네의 존영(尊栄)을 위하여 구태여 남을 모함하거나 모욕하는 일이 있다면 이 창피를 당하는 이에게 있어 이런 기가 막히는 일이 어디에 있을 것이냐. 그런데 지금까지 그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피아 관섭(関渉)의 역사란 것은 다분히 이런 따위의 것이요, 다시 여기에다 국수발 늘이듯 잡아 뽑은 턱없는 갈개발을 기다랗게 붙인 것들이다. 그것도 고의로, 특별한 용심으로 그렇게 한 것들이다. 자기에게 중요하면 조그만 사실이라도 최고도의 현미경으로 하듯 확대를 하고 그 반대로 아쉬우면 중천한 날이라도 손가락 하나로 가리려 하기를 예사로 하였다. 최근 일시의 패도는 조선인에게 영원한 과거와 주전(周全)한 범위에 있어서 열악자(劣弱者)일 운명을 짊어지게 한 억울함이야 무슨 푸념을 하여야 시원할지 모를 지경이다.
4) 교묘하고 못된 꾀로 남을 속여 마음대로 놀리거나 이용함을 뜻함.
5) 우주 만물이 환상과 같이 변화하는 일을 뜻함.
그러나 어떠한 의미로 말하면 남을 떠밀고라도 우뚝한 자리에 올라앉은 이가 실상 약은 사람이란 것일 터이요, 약자의 어리석은 말은 할수록 부끄러운 일이라고도 하겠으니, 남을 원망하고 허물하기에는 우리 스스로 적극적으로 자기의
진상을 천명하는 어떠한 노력과 함께 소극적으로 타인의 무언(誣言)을 절파(折破)6)하는 어떠한 항쟁이 없는 수오(羞惡)를 자감(自感)하여 역사진(歷史眞)의 파지상(把持上)으로 심성절책(深省切責)7)과 발분진력(發憤戮力)8)을 가짐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일이라 할 것이다.
(3)
조선역사의 진실이 엄폐되고 또 매몰된 것은 다만 외교 방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종 없는 악선전 때문에 턱없는 오인을 받는 일도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보다 중대한 의미와 가치를 가진 여러 가지에서 드러나야 할 많은 것이 깊이깊이 파묻혀 있음을 본다.
그러나 그 관계가 어떻게 소중하든지, 그 영향이 어떻게 커다랗든지 조선인은 모르는 체 위주요, 남에게 내맡기기 위주임은 어찌함인가.
그러다 부족하여 바로 그까짓 것이 무엇에 쓰는 것이냐고 스스로 제 역사를 능멸하며 타매(唾罵)9)하는 경향조차 생김에는 아연하여 이를 바를 모르겠다.
조선사람이 내버리는 조선의 역사는 다시 한 번 일본인의 손에 넘겨주는 바 되어 이번에 새로 조선사편찬에 관한 관서가 생기고 관리원(吏員)이 나고 어렵다는 재정에서 80만 엔이란 적지 않은 돈이 이리로 찢기고 조급한 성미에 십년 가까운 세월을 이 일에 허비하겠다 하고 그 일을 맡은 사람은 연이어 성명을 발표하여 이번에야말로 무슨 목적을 위한 고의의 곡필을 하지 않겠음을 세간에 서약하는 것이 마치 지금까지는 그런 일을 곧잘 한 것을 자참(自懺)하는 것 같은 등 서두르는 품이 적지 아니하다.
아닌게 아니라 이번 일이 전에 비하면 어느 정도는 정직한 동기에서 나온 듯하지 않은 것도 아니나, 아무리 그네가 최선을 다한다 하여도 남의 손에 되는 일이 내게 따뜻하기를 바람은 바라는 이가 도리어 억지일 것이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네가 또한 일본인임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저 그런대로 굿이나 본다 할밖에 다른 말을 할 것은 없다.
다만 우리 역사를 가지고 남이 무슨 북새를 놓든지 임자 되시는 조선인은 한편으로 □연분연(□然憤然)하시며 흐리멍텅하기만 하사 요만한 자극과 감분이 없으신 꼴을 보고는 조선인이 이미 최후의 정신적 파산까지 하려는 것 아니신가를
염려스럽게 생각할 뿐이다.
6) 세력 따위를 꺾어서 부순다는 뜻.
7) 깊이 성찰하고 심하게 책망함.
8) 마음과 힘을 다하여 떨쳐 일어나 있는 힘을 다함.
9) 아주 더럽게 생각하고 경멸히 여겨 욕함.
<이상 (하)>
<출전 : 我史人修의 哀(上, 下), '東亞日報', 1925년 10월 21~22일>
13) 조선사 문제(사설)
(1)
“조선인에게는 우선 조선역사를 알릴 필요가 있다. 이 역사에 정통함으로써 병합(倂合)의 의의가 명료해질 것이다.
한갓 조선역사를 봉(封)하여 두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조선사의 권위에 대하여 한 일본인의 말이다. 조선인에게 조선사를 잘 알려야 할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니까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인즉 내가 생각하는바 필요론과 매우 다르다. 그를 해설하는 자는 이렇게 말한다.
“건국 이래 적나라한 조선사에 정통한 자이면 병합을 도저히 안 할 수 없었던 실정을 충분히 양해하였으려니와, 이것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무엇 때문에 병합을 해야 했는지 그 의의를 알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이는 일부 일본인의 말이지만 이러한 견해를 가진 일본인은 제법 많이 있을 줄 믿는다.
이 생각이 바로 되었는지 비뚜로 되었는지는 좀 사려가 있는 자이면 직관으로 판단할 것이다.
(2)
조선사를 깎아 내려 말하는 자는 소위 사대사상이 조선인에게 뼛속 깊이 내려온 것을 들추어낸다.
근세 누세기의 사적(史蹟)으로 보아서 그럼직도 할 것이요, 극동 반도에 있어서 북으로 대황(大荒)을 연(連)하고 서로
한족(漢族)의 대방(大邦)에 이웃하며 동남으로 경도악랑(鯨濤鰐浪)이 헤아릴 수 없는 천참(天塹)10)을 이루고 있는 해국 일본을 끌어 당겨 매양 걸출한 자와 교악한 자들이 일어남이 있을 적마다 심대한 상처를 받음도 사실이었다.
나는 소위 ‘국위국광(國威國光)’류의 문구를 떠벌여 자기임취(自己痳酔)의 존대성(尊大性)을 끄집어내거나 ‘선민선철(先民先哲)’을 들먹여서 감상적 명분론을 펼치는 것이 우리의 앞길을 개척함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자기들의 생활의 과거를 살피는 것이 그 미래를 해석함에 매우 필요하지 않음은 온갖 지배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아는
이상에 저들이 생각하는 바가 매우 허망한 부유(腐儒)11)의 소론(所論)인 것을 단언한다.
10) 천연으로 이루어진 요새지를 뜻함.
(3)
형평(衡平)운동이 조선에 있고 수평(水平)운동이 일본에 있다.
서양에는 백인의 틈에 끼인 유색인종의 운동이 있다.
이 운동에 임하는 자들은 모두 수천 년 동안 거듭거듭 쌓여오던 억압, 주구 등 피맺히고 눈물어린 과거를 돌아볼수록
더욱더욱 치열한 해방의 충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과거 참담하던 역사를 알면 알수록 무한한 반항의 의욕이 돋아지는 것이다.
누가 가로되 그들에게 자기들의 역사를 알면 영원히 드러나지 않는 멍에를 메고 억압의 자물쇠 속에서 웃고 있게 되리라고 할 것인가?
조선사를 운위하는 저들 논자의 소견은 허망하다 할 것이다. 그들은 본래 제국주의국가의 주구를 짓는 자들이니 구태여 티낸들 무슨 쓸데 있으랴?
(4)
근일 조선의 위정당로(爲政當路)는 짧지 않은 시일에 적지 않은 공력을 들여서 조선사의 편수를 일단락지었다.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거질을 이루었다.
우리들은 아직 전편을 통독하는 노파심을 발휘하지 않았지만 적지 않은 두찬12)이 있다 한다.
더구나 단군을 말살하거나, 혹은 그 사실을 뒤섞는 짓도 웬만치 않게 하였다 한다.
그들은 소위 심모원려(深謀遠慮)가 미치지 않은 바가 없다고 스스로 자랑할지 모르나, 대개 매우 무용한 짓이다.
무릇 구속을 해놓고 압박을 미워하며, 주구(誅求)에 진저리 치고, 해방을 열망하기를 거꾸로 달린 자가 풀리기를 원하는 것처럼 하는 자이면, 어찌 반드시 과거사로써 구구히 좌우되는 바 있으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대부분에 있어 백인을 보기를 초인으로써 하고 그에게 항거하려는 생각조차 못할 것 같던 사람들도 근일 자못 벌떼같이 일어나 그 해방을 외치게 되니, 무릇 인성이 있는 곳에 반드시 억압에 반항하는 해방의 투쟁이 있을 것이라. 어찌 반드시 역사론을 운위하리오. 그들이 논하는바 대개는 무용의 무용한 것일진저.
<출전 : 朝鮮史問題, '朝鮮日報', 1926년 8월 8일>
11) 생각이 낡고 완고하여 쓸모없는 선비라는 뜻.
12) 전거나 출처가 확실하지 못한 저술. 틀린 곳이 많은 작품을 일컫는다.
14) 나카무라 히데타카, 신간 조선사에 대해서
나카무라 히데타카(中村榮孝)
(1)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사업은 시작 이래 10년이 지나고 있다. 즉 1922년 12월, 총독부훈령 제64호로 공포된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에 기초하여 중추원(中樞院)에 설치된 ‘조선사편찬위원회’는 처음에는 10개년 만에 완성할 예정이었지만, 1923년의 관동대지진에 따른 재정상의 문제 때문에 2개년의 연한을 연장하여, 1933년에 완료하도록 되었다.
또한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 권위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이 인정되어, 1925년 6월6일 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의 관제(官制)가 공포됨으로써, 중추원과 분리하여, 소속관서로서 독립하며 이후의 사업은 착착 진척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더구나 예상 이상의 성적을 올려, 규모의 부족을 느끼고, 다시 한 번 연한을 1개년 연장하여, 1935년 봄에 편수를 완성하고 출판을 종료할 예정에 있다.
예전부터 조선에서 역사라고 하면, 우선 중국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조선인은 자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별로 언급하지도 않았다.
오랜 전통을 가진 사대사상 때문인지 아니면 500년간의 주자학이 거의 국교로서 채용되어, 강목류를 가까이 한 탓인지, 가례가 규범으로서 고성(固成)된 대가족제도의 사회에는 족보의 중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인지, 국가조직이 국민 결성에까지 강력한 억제를 주지못하기 때문에 국가의 과거를 아는 것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당론에 사로잡힌 사회에서는 4색당파의 원류로서만 과거의 여러 사상을 기억하거나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결과인지 어찌 되었건,
조정에는 사관이 있고 역대 왕들에게는 실록이 있고 또 편성된 정사까지 갖고 있던 시대도 있었지만 이들의 정확한 자료에 의해 편찬된 일반적인 사승도 적었고, 야사도 볼 만한 것이 없었다. 패사(稗史), 소설, 전기류 라든가, 당론사(黨論史) 같은 것만이 자국의 과거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될 뿐이었다.
따라서 근세에는 간간이 탁월한 역사가, 사학자 등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있다고 해도 극히 드물고, 대체로는 사물의 기원과 유래를 설명하고 지리를 설명하며 견강부회의 설을 주장하거나 사적을 편찬하더라도 무비판적인 자료를 잡다하게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아서, 끊임없이 중국문명의 침윤을 받아 온 국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정도였다.
따라서 오늘날, 반도문화의 유래를 알고, 민족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자가 읽어야 할 사승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게다가 고기록, 고문서의 종류로서 사료가 될 만한 귀중한 문헌도 멸실되어 왔다.
결국 조선총독부가 반도사를 편찬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도 이러한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인의 작은 힘만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실에 정통하고, 충분히 고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조선의 학자와 새롭게 진보한 연구법을 체득한 역사가의 협력에 의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학술적 견지에 서서 공평불편(公平不偏)한 태도로 편수되는 역사를 대성하여 반도의 구폐를 혁파하고, 완전한 통치에
도움이 되는 것이야말로 조선사편수사업이 시작된 이유라고 할 것이다.
* * *
일본의 조선 연구는 생각 외로 오랜 연원을 갖고 있다. 쇄국시대였던 근세를 살펴봐도, 이토 도가이(伊藤東涯)의 동한사략(東韓史略) 아라히 하쿠세키(新井白石),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등의 저서를 비롯하여 일한교통의 요충이었던 쓰시마(對馬)의 학자들의 업적도 있고, 또 각종 조선 도서의 복각이나 조선 신사(信使) 내빙(來聘)을 기회로 출판된 일반서적 중에서도 조선 사정의 소개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않다.
그리고 메이지 이후로 국제관계의 중심문제가 항상 조선을 둘러싸고 움직이게 되자 조선에 대한 연구는 점점 더 왕성해졌다.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도 학술적으로 매우 상세해지고, 일한병합을 전후하여 적지 않은 역작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 고대사의 연구와도 병행하여, 일선관계의 연원을 찾아 가고자 하는 시도를 한층 왕성하게 하고,
나카 미치요(那珂通世)·하야시 다이호(林泰輔)·가니지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郞)·시라토니 구라키치(白鳥庫吉)·요시다
도고(吉田東伍)·가와이 히로타미(河合弘民)·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쓰다 사유키치(津田左右吉)·이마니시 류 등 여러 박사들의 노작을 비롯하여 속속 그 결과가 발표되어 완전히 한 시기를 이룬다.
그러나 이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연구가 언어학, 역사지리, 고대사 등 각각의 방면에서 특색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개중에 심한 것은 일견 내선융화론을 위한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도 있고, 조선사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는 것은 결코 많지 않았다.
단지 두세 명 학자의 연구 중에 다소 이채로운 것을 볼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고고학 방면의 개척이 간노(關野)·도리이(鳥居) 두 박사 등에 의해 시작되어, 하마다(濱田) 박사에 의해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총독부의 조선사편수사업은 때마침 이러한 때에 시작된 것이다.
그 후 10년, 이은 낙랑 고분의 발굴, 경이적인 미술공예품의 출토, 경주 금관의 발굴등에 세간의 시선이 현혹되어 있는 사이, 문헌에 의한 조선 문화의 연구, 역사에 대한 탐구는 거의 그 모습을 감춘 듯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조선사편수회에 의해 이루어진 업적은 결코 작지 않았다.
전반기는 사료 채방기였다.
당초, 사료의 채방과 수집은 가장 어려운 일로 여겨졌다.
그것은 우선 일본인 사이에 감정적으로 거리가 있고, 또 한편으로 당색에 의한 감정적 간격이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으나 실제로 사료의 채방에 착수한 결과, 예상 외로 호조를 띠었다. 물론 수백 년 동안 상호간에 장벽을 세워 왔고, 족보처
럼 지켜온 조상 전래의 기록이나 고문서가 어려움 없이 제시될 리도 없지만, 일본인의 사업이기 때문에 당색의 감정은 누그러지고, 조선과 일본에 걸쳐 각색에 미친 편찬위원의 공평한 선발로 일본의 사이는 근접되어, 두 가지 어려움은 자연스럽게 중화되었다.
또한 수차례 시도된 각 파의 중심 종가에 대한 용의주도한 채방은 마침내 사료 채방을 성공시켰다.
* * *
1929년에 각 도 및 만주에 걸쳐서 일반 채방을 완료하였다. 빌려서 조사한 것은 기록·고문서·사적·문집·영정, 기타
1,240여 종에 이르며, 나중에도 점차 특별 채방을 실행하고 또 자진하여 제공받은 것도 적지 않았다.
특히 명가에서 비장하여 기존에 집안 바깥으로는 전혀 나오지 않던 것이 처음으로 수사의 자료로서 일반에게 공개되어 잘못되었던 사필을 정정하고, 불명한 사실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사료로서 새롭게 발견된것이 매우 많다.
이들은 모두 사본이나 사진으로 만들어 축적, 수장(蒐藏)되었다.
그밖에 1926년 7월에는 쓰시마 구번주 소우백작 집안의 비고에 전해지던 조선관계사료 전부를 구입하고, 또 구규장각(현재는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소관이다)을 비롯하여 각 곳의 소장사료에 대한 조사도 차례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여 주요 사료의 조사서(調査書), 조사요록(調査要錄) 등의 편찬도 이루어지고, 때에 맞추어 전람회도 개최하여 일반에게 그 성과를 알리고, 취지를 이해시키는 데 힘을 쏟은 것은 모두가 아는 바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널리 조선사의 연구에 일대 기여를 해 온 것 또한 세인이 잘 아는 바이다.
이렇게 하여 사료를 수집하는 한편, 1927년 9월부터는 시대별로 분담하여 '조선사'의 편수에 착수하고, 해마다 책 수백 권의 원고를 만들고 있다. 즉 '조선사'는 상대부터 이태왕 갑오년에 이르기까지의 조선통사이며, 편수의 편의상 이것을
6편으로 나누어, 신라통일 이전(신라 문무왕 8년까지)을 제1편, 신라통일시대를 제2편, 고려시대를 제3편, 조선시대 전기(태조~선조)를 제4편, 중기(광해군~정조)를 제5편, 후기(순조 이후)를 제6편으로 하여 제1, 2편은 이마니시 박사에게 촉탁하여 담당하고, 현재 수사관보 스에마쓰문학사가 이것을 담당하며, 제3편은 수사관 이나바 박사, 제4편은 나카무라 수사관, 제5편은 수사관 홍희, 제6편은 다시 이나바 수사관이 분담하여 각각 아키우라 촉탁, 신 수사관보, 두 문학사와 세노 촉탁·다카키쓰 수사관보, 두 명이 주로 그 보조를 담당하고 있다.
* * *
'조선사'의 서술은 편년체를 원칙으로 하여, 날짜순으로 간명하게 사실을 들고, 이것을 본문으로 하여 근거로 한 사료를 모아서 수록하고, 참고자료도 함께 게재한 것이다.
단 제1편만은 상대로서 연대를 명확하게 할 수 없는 부분도 있고, 조선·일본·중국에 있는 사료에 따라서 전해지는 연도가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조선사료는 삼국사기, 일본사료는 일본서기, 중국 사료는 각 정사의 연도를 따라서 각각 사적 및 금석문의 원문을 연도순으로 수록하고, 여러 가지로 다른 전승을 가진 동일한 사료에 대해서는 정밀하게 대조·교정하여 요강을 각 조의 앞머리에 들어 본문을 대신하고, 쓸데없는 억측을하지 않았다.
어느 시대에나 충실하게 사료에 의거하여 사실을 기재하는 것을 주안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편수된 '조선사'는 원고가 완성되는 대로 출판할 계획인데, 제1편은 전문을 모두 생략하지 않고 인쇄하고, 제2편 이하는 내용이 매우 많으므로 본문만을 취하고 여기에 사료의 명칭 조목을 상세하게 주기하여 인쇄하는 것으로 한다.
그리고 중요사료에 대해서는 각 편마다 코로타잎 도판을 삽입하여 참조의 편의를 도모한다.
1931년부터 출판에 착수하여 올봄 3월에 제1편 제1권(조선 사료), 동 제2권(일본 사료) 및 제2 편을 합하여 3권이 발간되게 되었다.
1932년 이후 또 순차로 인쇄·출판을 계속할 것인데, 모두 완성이 되면 전 30권 즉 제1편은 3권, 제2편은 1권, 제3편은 4권, 제4편은 10권,제5편은 8권, 제6편은 4권으로 이루어질 예정이다. 이제 이미 간행된 3권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2)
'조선사' 제1편은 신라통일 이전, 즉 편의상 상대부터 무진(戊辰) 신라 문무왕 8년까지를 사료 그대로 수록하고, 이것을 제1권 조선사료, 제2권 일본사료, 제3권 중국사료의 3권으로 나눈 것인데, 이번에 출판된 것은 제1권과 제2권이고, 제3권은 1932년에 간행 된다.
제1편 제1권 조선사료의 내용은 말할 것도 없이 조선에서 찬록된 사적과 금석문에 대해서 사료가 될 만한 것을 선택하여, 삼국사기의 연도에 따라 수록하고, 그 앞머리에 요강을 들어 나타낸 것이다. 또 사료를 배열하는 순서는, 우선 사적을 들고, 다음에 금석문을 수록하되 또 그 각각에서는 찬록 연도순의 선후에 따르고 있다.
이렇게 배열된 각각의 사료에 대해서 각각 가장 우수한 것을 저본으로 하여 가능한 한 원본의 체재를 유지하여 인쇄하고, 여기에 반드시 이본(異本)을 대교하여 그 차이를 참고 서명과 함께 주기하고, 문장 중의 주요 명사를 두주로 기재하여 연결참조의 편의를 위해 주기를 삽입한 것이 대체로 본서의 체재이다.
지금 본권에 수록된 사료의 명목 및 저본, 대교본을 일람하면, 삼국사기는 정덕(正德) 경주 참본(慶州槧本, 이것은 현재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소장인 구규장각도서본 및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소장본 두 가지에서 결본을 합하여
완본으로 한 것이다.
또 최근에는 경주의 아무개가 소장한 완본을 기초로 하여 조선인쇄회사가 발행한 고전간행회 영인본이 있다)을 저본으로 하고 조선 중기의 고(古)활자본으로 대교하였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은 '유방전총서본(遊方傳叢書本)'에 의거하였다.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은 해인사 소장의 고려참본을,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은 조선시대참본(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소관 구 규장각도서)을, '삼국유사'는 정덕경주참본(이마니시 류 박사 소장본을 영인한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총서본)을, '고려사'는 조선시대
고 활자본(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소관 규장각본)을,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는 조선 고활자본(위와 같음)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조선고참본(조선사편수회 소장본)에 의거하고 있다.
* * *
사료 수록의 내용에 대해서 한두 가지 예를 제시하면, 개권(開卷) 제1조로서, 갑자 신라시조 혁거세 거서간 원년(1~5페이지)이 있다.
‘4월, 신라 박혁거세 세움. 호를 거서간, 국을 서라벌이라고 함’이라는 요강 아래에 삼국사기의 권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 권12 신라본기의 논찬, 권34 지(志)의 지리 및 삼국유사의 왕력(王曆), 권1 신라 시조혁거세왕, 권5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 등의 조들을 수록하고 있다.
또 갑신 신라시조 혁거세 거서간 21년,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원년의 조(8~19페이지)에는 ‘이해, 신라, 금성(金城)을
쌓음. 고구려, 시조 고주몽 세움’이라고 요강을 들고, 전자에 대한 것으로서는 삼국사기의 권1 신라본기, 권34 지리지, 삼국유사의 왕력을, 후자에 대한 것으로서는 삼국사기의 권13 고구려 본기 시조 동명성왕의 첫 조 및 삼국유사의 왕력, 권1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와 동국이상국집 권3 고율시(古律詩) 동명왕편 및 서, 고구려 호태왕비 등을 수록하고 또
고구려 시조에 관련하여 삼국유사 권1 고조선(왕검조선)의 조 즉 단군에 관한 사료도 수록하고, 단군에 대해서는 상세한 두주까지 실어서 전설의 유래를 제시하고 있다.
본서는 사료의 취급에 있어서 저본을 확실하게 하고, 이체(異體)문자, 기타 특수 체재(體裁)까지 수록하고 이본의 대교를 엄밀히 하여 피휘궐화(避諱闕畫)류부터 기사의 원거(原據)의 유래(특히 많은 삼국사기 기사 중의 중국사료에서 인용한 부분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까지도 명기하여 오류를 수정하고, 의문점을 제시하여 후고에 대비하는 등 형식적으로도 매우 정밀한 검토를 한 것은 물론이고, 단순히 삼국사기의 연도를 따른다고하는 기계적인 사료 배열 이상으로 그 가운데에 편수자의 노고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적지 않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위에 든 단군기사의 취급도 그 일례일 것이다.
특히 각 조에 적당히 나누어 인용하는 것 이상으로 적당한 개별 조에 전문이 수록되지 않으면 안 되는 열전체(列傳體)나 금석문 같은 것의 안배에는 편수자의 고심도 보인다.
예를 들어 고구려 호태왕비와 같은 것이 그 일례일 것이다.
또 금석문을 보면, 하나하나 원탁(原拓)에 의거하여 독해한 것을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고탁(古拓)인 것은 하나하나 이를 대교하여 현재 잔궐(殘闕)하고 있는 부분도 보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무신 신라 법흥왕 15년, 고구려 안장왕 10년, 백제 성왕 6년, ‘이 해 신라, 처음으로 불법(不法)을 시행하다’의 조에 수록된 ‘경주 백률사석동기’는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씨가 소장한 '원화첩(元和帖)'에 의해서 보충되고
(426페이지), 무자 신라 진흥왕 29년, 고구려 평원왕 10년, 백제 위덕왕 15년, ‘신라, 대창(大昌)으로 개원(改元)함. …… 8월, 신란, 왕 순변(巡邊) 함……’의 조 이하에 수록된 ‘초황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보통 황초령비라고 하며, 함남 함주군에 있는 것)는 총독부 박물관 소장 및 이마니시 박사 소장의 고금석첩(古金石帖) 등에 의해 보충되고(488페이지) 있고 또 새로나온 마운령비도 이 후자의 조에 수록되어, 초황령비와 대교(對校)·상보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도판을 한번 보자면, 삼국사기 정덕경주참본 3가지, 삼국유사 정덕경주참본(이마니시 박사 소장본) 2가지, 고구려호태왕비·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 고탁본(박물관 소장본)·석가문상광배명탁본 각 1가지를 합쳐서 9가지의 코로타입 사진판이 삽입되어 있다. 그리하여 국판 본문 732페이지, 목차 45페이지의 큰 책이 되었다.
(3)
제1편 제2권은 일본사료인데, 무신 신라 문무왕 8년 즉 일본 덴지(天智) 천황 7년 이전에 대해서 일본에서 찬록된 사적·금석문 등으로부터 사료를 검색하고 '일본서기'의 연도에 따라서 수록한 것인데, 그 배열체재는 모두 제1권의 예를 따르고 있다.
각 조의 모두에 요강을 들고 있는 것 등은 물론이다.
우선 사료의 저본 및 대교본을 보면, '고사기(古事記)'는 구(舊)집국사대계본(輯國史大系本)에 의거했다.
'일본서기'는 국사대계(國史大系) 육국사(六國史)본에 의거하였으며, 마찬가지로 국사대계구집본을 참고하였다.
또한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가 발간한 비적대관(秘籍大觀)에 수록된 모든 영인 고사본을 대교하고 '속일본기(續日本紀)', '일본후기(日本後紀)',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는 모두 국사대계육국사본에 의거하였다.
'하리마(播磨) 풍토기(風土記)ꡕ는 고전보존회가 영인한 삼조서가본(三條西家本)에 의거하였고, 이노우에 미치야스(井上通泰) 교정본(일본고전전집본)을 참고하였으며, '이즈모(出雲) 풍토기'는 니시오 노부아키(西野宣明) 교정본(일본고전전집 영인본)을, '히젠(肥前) 풍토기'는 아라키다 히사오유(荒木田久老) 교정본(위와 같음)을, '고어습유(古語拾遺)'·'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德法王帝說)'·'가전(家傳)'은 군서류(群書類)로 경제잡지사본(經濟雜誌社本)에 의거했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은 군서류로 원 판본에 의거하여 같은 경제잡지사본 및 신찬성씨록고증을 참고하였고, '부상략기(扶桑略記)'·'석일본기(釋日本紀)'·'원형석서(元亨釋書)'는 구집국사대계본, '일본국현보선악영이기(日本國現報善惡靈異記)'는 군서류로 경제잡지사본, '원흥사연기(元興寺緣起)' 및 '유기자재장(流記資財帳)'은 다이고지본(醍醐寺本, 고전보전회 영인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동사본(東寺本, 동양문고 영인본), '선린국보기'는 명력참본
(明曆槧本, 조선사편수회 소장)에 의거하고 있다.
저본 선택은 아직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지만, 일본사료 수집(蒐集)에 대해서는 매우 불편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이만큼을 갖출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사대계본은 보통본과는 다르지만, 그 교정은 이미 구로이타 박사가 손을 대어 완성한 것이고,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그대로 채록해도 지장이 없었다. 또 다른 것들도 그 원본의 표주(標註)를 체제를 따라 그대로 수록한 후에 영인본류를 볼 수 있는 한 대교하여 보정했으므로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이다.
특히 삽입된 도판은 '고사기'는 신후쿠지본(眞福寺本)을 취하고, '일본서기'는 교토 다나카(田中)본·도쿄 궁내성도서료본(宮內省圖書寮本)·도쿄 마에다(前田)본·도쿄 이와자키(岩崎)문고본에서 각각 백제기(百濟記)·백제신찬(百濟新撰)·백제본기(百濟本紀)를 인용한 부분 및 스이코기(推古紀)의 중요 각조를 취하고, 원흥사연기·법왕제설·입당구법순례행기의 사진을 추가하는 등 그 채택에 많은 노력을 기했다.
본권의 내용은 본문 352페이지 및 이에 해당하는 연대에 관한 일본사료의 전부를 망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서기'를 하나의 예로 보자면, 단순히 조선에 관련이 있는 일본의 기사로서뿐만 아니라, 전기한 백제기·백제신찬·백제본기처럼 조선 자체에 관한 사적의 일문(逸文)까지도 수록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시대의 일본사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본서는 이 모든 것들을 채록하고 또한 인쇄상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고훈(古訓)·고자(古字) 등도 가능한 한 고 사본의
의미를 전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음은 물론이다.
수록된 사료의 찬록 연차는 대체로 가마쿠라 시대까지 이르며, 무로마치 초기의 것도 수록되어 있다.
내용을 한 가지 예로 들어보면, 개권(開卷) 제1페이지는 신대에서 시작하여 “스사노 오노미고토(素戔鳴尊)가 신라국에 이르러 소시모리(曾尸茂梨)에 거주하다 동으로 바다를 건너 이즈모국(山雲國)에 이르렀다”라고 요강(要綱)을 들고, 일본서기 권1 신대의 모든 조, 이즈모 풍토기 의우군(意宇郡)의 조에서 석일본기의 술의(述義)도 수록(1~4페이지)했다.
또한 스이닌(垂仁) 천황 3년 갑오년에는 “3월, 신라의 왕자 아마노누보코(天日槍)가 오다”라고 하는 고사기 권 중(中)의 아마노누보코(天之日矛) 도래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일본서기' 권6 스이닌 천황 3년 봄 3월 조, 동(同) 88년 가을 7월 무오(戊午) 조, '고어습유', '신찬성씨록', '하리마 풍토기', '석일본기' 권10 술의에 인용된 '지쿠젠(筑前) 풍토기', '선각만엽집초(先覺万葉集抄)' 권2에 인용된 '셋쓰(攝津)풍토기' 등에 보이는 관련 기사는 모두 수록하였다(10~17페이지).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유명한 긴메이(欽明) 천황 13년 임신년에는 “……○10월, 백제의 성명왕, 서부희씨(西部姬氏),
달솔(達率), 노리사치게(怒唎斯致契)를 파견하여 석가불의 금동상,번개(幡蓋), 경론(經論)을 헌상했다”라는 부분에 해당하는 '일본서기' 권19 긴메이 천황 13년 조를 들고, 상궁성덕법왕제설·원흥사가람연기(元興寺伽藍緣起) 및 유기자재장(流記資財帳)·현계론(顯戒論) 등의 무오년 전래설을 싣고 있는 것을 함께 수록하고, 부상략기·삼국불법전통연기의 기사도 함께 싣고 있다(157~165페이지).
원흥사연기(元興寺緣起) 등은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본서에서 비로소 처음 구두(句讀)를 표시하여, 활판화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그리고 서에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 곳곳에 수록되어 있는 신찬성씨록의 교정은 지금까지 본서만큼 심혈을 기울인 것이 없으며, 비록 한정된 번들에 관한 것이지만 본서의 특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4)
다음으로는 제2편인데 이것은 위에서도 서술한 바와 같이 제1편과는 다소 성질을 달리하며 체재도 다르다.
소위 신라통일시대로서 기사 문무왕 9년부터 을미 신라 경순왕 9년 즉 고려 태조 18년까지로, 대체로 267년간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가 주요한 사료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금석문·문집 기타 사적에서 일본·중국의 모든 사료까지도 첨가하여 이에 의해 본문을 찬술하였다. 연도는 간지로 들고, 삼국사기에 따라 여기에 왕 재위의 연차를 병기하고, 또한 일본과 중국의 기년을 주기하여 참조하도록 하였다.
월차에 따라서는 편의상 삼정종람(三正綜覽)의 중국 부분에 따라 달의 대소, 월삭의 간지가 주기되고, 일차 및 그 간지의 대비는 모두 삼정종람을 따랐다.
일본사료에 나온 것은 해당하는 일차 아래에 본문을 배열하고 있다.
이러한 역의 대조와 월의 삭(朔)·진(盡)에 대해서는 당시의 역법이 어떠했는지와 많은 관련이 있을 것이므로 일차를 명기하고, 조선·일본·중국 삼국의 사료에서 나온 것을 한 가지로 정리하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다.
오히려 신라의 역법이 확증할 수 없는 것이라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편찬에서는 어느 정도 편의를 위해 한가지로 통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본서에서 삼정종람을 하나의 기준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도 편의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또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본문의 각 조에는 하나하나 상세하게 사료명을 주기하고, 목차에까지도 논거하는 바를 명시하여 참조하기가 매우 편리하다. 명칭을 보면, 조선의 사료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고려사는 물론이고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나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그리고 고려사절요·조당집(祖堂集)·신고려사(新高麗史) 등의 신사료도 수록하였다.
일본의 사료로는 일본서기·속일본기·일본후기·속일본후기·문덕실록(文德實錄)·삼대실록(三代實錄)의 육국사(六國史)를 비롯하여 유취삼대격(類聚三代格)·일본일사(日本逸史)·일본기략(日本紀略)·부상략기(扶桑略記)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회풍조(懷風藻)·만엽집(萬葉集)·도씨문집(都氏文集)·본조문수(本朝文粹)에서 화엄회권(華嚴繪卷)까지를 수록하였다.
중국의 사료로는 당서(唐書)·구당서(舊唐書)·오대사(五代史)·구오대사(舊五代史)·요사(遼史)·자치통감(資治痛鑑)·당회요(唐繪要)·오대회요(五代繪要)·책부원귀(冊府元龜)·문원영화(文苑英華)·송고승전(宋高僧傳)·신승전(神僧傳)·불조통기(佛祖統紀)·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등이 있다.
또한 조선·중국의 금석에 대해서는 그 원비명을 인용하고 있다.(금석명의 주기는 충분히 신뢰할 만한 기존의 금석집(金石集)을 들었다. 고본 사료 자체는 원탁에 의해 교정한다는 방침을 따르지만, 본서처럼 사료명만을 부기하는 경우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이점이 많다고 생각된다).
내용 하나하나에 대해서 여기에 소개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일반적으로 간결하게 기술된 점은 훌륭하다.
단 같은 기사에 대하여 전후를 대조하여 보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도 적지 않다.
대체적인 선후의 통일에 대해서는 앞으로 한층 더 주의를 해야 할 점도 있다.
제1편과는 달리 사료의 요강이라고 하는 것 이상의 의의가 있으므로 이러한 주의는 당연히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거의 사료의 전역과도 같은 장문 등에서 편수자가 고심한 흔적이 보이고, 금후 연구자의
지침이 될 만한 것이 적지 않다는 점은 오히려 하나의 특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신미(辛未) 신라 문무왕 11년 7월 26일 경신(庚申) 조에 보이는 당의 계림도총관(鷄林道總管) 설인귀(薛仁貴)가 군중(軍中)에 있던 신라승 임윤(琳潤)을 파견하여 국왕에게 보내온 서(書)와 왕의 보서(報書, 11~24페이지), 정해(丁亥) 신라 경애왕 4년(경순왕 원년, 고려 태조 10년) 및 다음해에 보이는 견훤(甄萱, 414페이지)과 고려 태조(416~419페이지)의 왕복서면(書面)과 같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신라통일시대는 270년에 이르는 긴 시대이고 그 문화도 활짝 꽃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료는 매우 빈약하여 '삼국사기'만으로는 도저히 시대를 그려내는 데 불충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본서의 출간에 의해 비로소 현재 모을 수 있는 모든 사료를 널리 망라한 신라편년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무엇보다도 본서의 의의를 중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권은 456페이지, 목차는 19페이지에 이르며, 도판은 삼국사기문무왕기·고구려천남생묘지탁본·백제부여융묘지탁본·삼국유사·무진사종기탁본(동경제실(帝室)박물관 소장)·
창림사무구정탑원기(아유가이 후사노신 씨 소장)·조당집(해인사장판 고려대장경 소수)·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탁본의 코로타입판 8점이 실려 있다.
(5)
이상으로 '조선사' 기간(旣刊) 3책을 대체적으로 소개했다.
제1편 제3권 중국사료는 1932년에 간행하여 제1편을 완성할 예정이고, 이것으로 조선고대사의 자료는 빠짐없이 수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제3편 고려시대는 이미 제1권의 인쇄를 완료하고, 제2권에 착수하고 있으며 제3권도 원고를 끝냈다.
제4편 조선시대 전기도 그 제1권이 인쇄 진행 중에 있으며, 이것들은 제6편 즉 조선시대 말기의 제1권과 합쳐서 6권이 올해 중에 간행될 예정이다.
내년도에는 제3편 이하 각 편에 걸쳐 10권, 다음 연도에는 11권을 간행하여, 1935년 봄에는 이것을 완결할 예정으로
현재 그 원고의 작성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또 이 '조선사' 제2편 이하는 귀중한 사료, 특히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진기한 사료가 다수 수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 명칭만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유감이며 또 편수된 본서의 평가에도 관계가 있을 것이므로 조선사편수회의 사업으로 아직 미간(未刊)의 기록·문서·사적류 중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을 골라 다음에 본서의 발행과 함께 사료총간 및 사료사진집으로서 간행하여 열독자가 편리하게 참조하도록 하고, 또한 성과가 의의 있다고 할 만한 계획도 착착 진척되고 있다.
어쨌든 '조선사'는 겨우 십수 년의 계획에 의해 편수를 속행한 것으로 또 그 경비면에서 볼 때도 연 평균 4, 5만 원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료의 수집은 물론, 편수 상의 준비에 있어서도 종종 불충분한 점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종래 조선에서는 전혀 유례가 없고 또 비교할 것이 없는, 매우 정비되고 상세하며 정확한 조선의 통사로서 완성될 것이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따라서 본서가 앞으로 순차적으로 발행되면, 조선의 과거에 대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방면에 걸쳐서 확실한 지식을 얻어, 현재와 장래의 지침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과 현재 여러 학교에서 조선 역사를 정확하게 가르치려고 하는 초등교육가들, 그리고 이미 누차 논란이 되고 있는 중등학교에서의 조선역사수업에 대하여 고려하고 있는 뜻있는 분들에게 아주 좋은 반려가 될 것이다.
또 전문적인 조선역사 연구자에게도 모든 것을 섭렵할 수 있는 안내서가 될 것이다. 그리고 편년으로 한 번에 개념을
얻기 위해서도 편리한 참고서가 될 것이다.
특히 이것이 총독부 사업의 하나로 이루어졌으므로 조선통치상으로 보아도 하나의 광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덧붙여 본서는 조선인쇄주식회사에서 증쇄·발매되고, 특히 보급을 위하여 매1권 정가 2원 50전, 1부 30권 70원으로
배포하게 되어 있다).
1932년 8월 10일
<출전 : 中村榮孝, 「新刊朝鮮史に就いて」, '朝鮮' 208號, 1932년, 39~54쪽>
15) 나카무라 히데타카, 조선사의 편수와 조선사료의 수집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사업
나카무라 히데타카(中村榮孝)
40년 가까운 일본의 조선통치 기간 동안 조선총독부가 실행한 문화사업 중에서 고적의 조사·보존과 조선사편수 두 가지는 그 취지와 성과 면에서 모두 영원히 기억될 것이 틀림없다.
구로이타 가쓰미 박사는 양쪽에 모두 관계하였다.
박사는 뛰어난 식견과 깊은 학식에 기초하여 창의적인 기획과 왕성한 실천력으로 사업 수행을 추진하여 두드러진 인상을 주고 있다.
조선사편수는 1922년 12월에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설치되었던 것이 그 발단이며, 마침내 1925년 6월에 조선사편수회의 관제가 공표되어 사업 규모가 갖추어지고, 1938년 3월에 이르러 당초에 계획되었던 '조선사'는 간행을 끝마쳤다.
이어서 이 '조선사'에 이어지는 사료의 수집이 이루어졌는데, 1945년, 조선해방 후 사업은 신정부의 손으로 넘어가고, 조선총독부의 폐지와 함께 관제가 소멸한 것이다.
이 사업은 일본 및 조선의 학계와 온갖 관민의 권위를 망라한 대규모 조직으로 이루어져, 당초 계획한 '조선사'를 간행하기까지 15년 남짓한 세월과 100만에 가까운 국비가 들어가고 35권 2만 4천여 페이지의 '조선사'(활판) 및 20종 100책에 이르는 '조선사료총간'(사진판·활판), 3질 9집 225장의 '조선사료집진'(사진판)이 출판되었다.
3,538책의 '조선사고본'(기간) '조선사'는 그 본문만을 인쇄한 것)과 3천 책에 달하는 사료복본류, 5천 매를 넘는 사료사진이 만들어지고, 구쓰시마 번주의 종가에 전해 내려오는 6만 점을 넘는 고문서·기록·고지도류를 비롯하여 조선의 여러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다수의 고문서·기록·전적류가 집적된 것이다.
그 후에도 조선 내외에서 귀중한 사료가 수집되어, 그 조사연구의 성과가 관계자의 저서와 논문으로, 또한 '연구휘찬(硏究彙纂)'(논문집)으로 간행되었다. 한편 '조선사'의 총목록·총색인 각 1책도 출판되었으며 '조선사료총간'도 속간되었다.
구로이타 박사는 이 사업의 초기에 나이토 도라지로(內藤虎次郞) 박사와 함께 사업의 산파역을 맡았으며, 제도가 정비된 후부터는 고문에 취임하여 이의 충실과 발전을 도모하며 시종일관 중심이 되어 '조선사'를 완성했고, '조선사'가 완성된 이후에는 병상에 있으면서도 계속하여 이 사업을 위하여 변함없이 관심을 기울였다.
1940년 4월 천장절(天長節)에 이 편수사업에 대하여 천황의 특명에 의해 논공행상이 이루어졌는데, 구로이타 박사에게는 은배(銀杯) 2개가 하사되었고, 그때까지 편수사무를 주재한 이나바 이와키치는 서훈되었으며, 홍희·나카무라 히데타카·스에마쓰 야스카즈·이능화·다보하시기요시에게도 은배 1개가 하사되었다.
(1)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성립까지
초대 조선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선 통치를 시작할 때, 구(舊)한국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전문 학자를 초대하여 실시해 온 사업을 이어받아, 구관(慣)제도의 조사와 고적 및 유물의 보존에 특별히 힘을 쏟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관심은 조선의 역사로 향하게 되었다.
1915년 5월에 구관제도를 조사하는 일은 중추원에서 행해지게 되었는데 이와 함께 7월에는 조선반도사를 편찬한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마침 고적유물조사의 성과가 처음으로 '조선고적도보'13)로 출판되어 널리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중추원은 총독의 정치자문기관으로서 찬의와 부찬의에는 조선 귀족과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조선의 명사가 선발되었는데, 1916년 1월에는 그중에서 15명이 반도사를 편찬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중추원 서기관이었고, 조선의 구관제도를 비롯하여 금석문이나 전적 조사에 경험이 풍부한 오다 간지로가 그 기획을 맡고, 3개년 동안 완성한다는 예정이 세워졌다.
드디어 3월에는 교토제국대학 교수인 미우라 히로유키, 같은 대학 강사인 이마니시 류, 도쿄제국대학 조교수였던 구로이타 박사가 촉탁되어 여기에 참가하고, 「조선반도사」의 편찬 및 「조선인명사서」(1939년에 간행되었다)의 작성에 대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결정했다.
이것이 구로이타 박사가 조선의 역사를 편수하는 일에 관계한 최초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을 전후로 박사가 조선에서 활약한 것은 오히려 고적유물조사 분야이고, 각지를 돌면서 크게 견문을 넓혀, 실지의 조사에 힘썼다.
1916년 7월에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이 발포되어, 고적조사위원회가 조직되고, 국가의 고문화재 보존에 관한 제도가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여기 조선에 설치되는 데에도 박사는 크게 기여했다.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은 1918년 1월이 되어, 중추원의 조직개편과 함께 구관제도 조사를 시행하는 조사과와 함께 설치된 편찬과에 속하여 사업촉진이 이루어졌다.
총독부학무국 편집과장 오다 쇼고(후의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편찬과장을 겸하고, 이마니시 류(후의 경성제국대학교수)·하기야마 히데오(후의 총독부 도서관장)·세노 마구마(후에 조선사편수회에 촉탁)·스기모토 쇼스케(사업 도중에 사망) 등의 전문학자가 각각 고대에서 최근세까지 시대별로 조사·집필을 분담했다.
그러나 자료의 수집에 예상 외의 어려움을 느끼고, 한창 조사가 진행되던 중에 예정한 연한을 경과했기 때문에 다시 계획을 연장하여 사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마침 조선에서는 1919년 3월에 만세사건(3·1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일본의 조선지배에 대한 대대적인 저항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생겨난 민족자결주의를 기초로 하는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조선통치의 방침은 일대전환을 이루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반도사의 편찬이 그 후 잠시 동안은 속행되었지만, 결국 끝까지 완수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있어서 구로이타 박사는 총독부 당국으로부터 조선사의 편수에 대해서 새로운 계획을 세우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학자적 견지에서 볼 때 역사학 연구를 위하여 영원히 가치가 있을 만한 계획을 세우는 동시에 조선에서 문화사업으로서 정말로 의의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 되기를 염원하며 그 기획에 임했다.
13)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시종일관 담당하여 1935년까지 15책을 완성하였다.
고대(古代)부터 이씨조선시대에 걸쳐 고고학적 유물·유적에서부터 건축·회화·도자기 등의 미술공예품에 이르는 광범위한 고적유물의 호화로운 도보(圖譜)가 되었다.
조선사편찬위원 회야말로 이것이 열매를 맺은 것이며, 발전하여 ‘조선사편수회’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1916년 7월에 발표된 다음의 조선반도사편찬요지를 통해 이 편찬사업이 기획된 취지를 돌아보고, 그 성격을 명확히 한 후에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성립하게 된 사정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백반(百般)의 제도를 쇄신하여 혼란스러운 구태를 개혁하고 각종의 산업을 진흥하여 빈약한 민중을 구제하는 일은 조선의 시정상 당면한 급무이긴 하지만, 이들 물질적인 경영에 노력함과 동시에 교화·풍기·자선·의료 등에 관해 적절한 조치를 집행하며, 조선백성의 지능과 덕성을 계발함으로써 이들을 충량(忠良)한 제국신민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번에 중추원에 명하여 조선반도사를 편찬하게 한 것 또한 민심훈육(民心薫育)을 위한 목적을 달성코자 하는 데 그
취지가 있다 할 것이다.
무릇 식민지의 통치를 개론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식민지 인민을 교육하고 그들의 식견을 향상시켜 주는 일은 모국에
대한 그들의 충성된 사상을 함양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불평반항(不平反抗)의 기풍을 조장하는 결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상례라고 한다.
지금 그들이 조선 고래의 역사를 읽는 데 편의를 제공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를 이러한 사업은 자칫하면 그로 인하여 그 구태를 회상하고 그 일에 연연케 할 자료를 제공해 주는 것에 불과할 것이라고.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과거에 구미의 여러 식민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례를 들어 조선의 경우를 논하려는 편견일 뿐이다. 저들의 경우, 모국과 식민지와는 지세가 아주 상이하고 인종 또한 근본적으로 상이하며 도저히 동화융합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국은 식민지의 이익을 거둬들이는 일에만 급급하고 그들의 행복을 도모하는 일에는 등한한 것이다.
식민지 또한 모국에 대해 경조화복(慶弔禍福)을 함께하려는 정의(情誼)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임은 자연의 형세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제국일본과 조선과의 관계는 강역이 인접하여 있고 인종이 서로 같고 그 제도 또한 쌍방이 비슷하여, 혼연(渾然)한 일대영토를 구성하고 상호간에 이해휴척(利害休戚)을 함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인을 방치하여 그들이 일진월보(日進月歩)의 대열에서 낙오케 됨을 돌보지 않는 일은 처음부터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려는 바가 못 되는 것이다.
하물며 그들을 무지몽매한 지경에 묶어 놓으려 함은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있어서는 전연 불가능한 일에 속한다.
오히려 끝까지 그들을 교화하여 인문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하고 일치합동의 단합된 힘으로 제국일본의 앞날의 융성을 도모케 함은 만세의 양책(良策)으로서, 병합의 큰 뜻이 실로 여기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조선의 인민을 교화함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은 처음부터 그들의 이목을 가리는 계책으로 나와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교화의 본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하게 밝혀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의 야만미개한 민족과 달라서, 독서와 문장에 있어 조금도 문명인에 뒤떨어질 바 없는 민족이다. 고래로 사서가 많고, 또 새로이 저작에 착수된 것도 적지 않다.
그리하여 전자는 독립시대(独立時代: 合邦以前)의 저술로서 현대와의 관계를 결여하고 있어 헛되이 독립국 시절의 옛 꿈에 연연케 하는 폐단이 있다. 후자는 근대조선에 있어서의 러일·청일간의 세력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의 나아갈 바를
설파하고, 혹은 ‘한국통사’라고 일컫는, 한 재외조선인의 저서 같은 것의 진상을 규명하지는 않고 함부로 망설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적들이 인심을 현혹시키는 해독, 또한 참으로 큰 것임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절멸시킬 방책만을 강구한다는 것은 헛수고에 그치는 일이 될 뿐 아니라, 혹은 그 전파를 장려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구사(旧史)의 금압 대신 공명 적확한 사서로써 대처하는 것이 첩경이고, 또한 효과가 더욱 클 것이다.
이 점을 조선반도사 편찬의 주된 이유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서적의 편찬이 없다면 조선인은 무심코 병합과 관련 없는 고사, 또는 병합을 저주하는 서적만을 읽는 일에 그칠 것이다. 그리하여 점점 세월이 흐르다 보면 눈앞에다가 오는 당면사에만 익숙해져 오늘의 밝은 세상이 오로지 병합의 은혜에서 연유한 것임을 망각하고 부질없이 구태만을 회상하여 도리어 진보에의 기력을 상실하게 될 우려가 없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된다면 어떻게 조선인동화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을 것인가.
조선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서는 많지만, 현대와는 관련이 없어서 독립국 시대를 생각나게 한다. 또한 새롭게 만들어진 역사서도 적지 않지만, 청일·러일의 세력다툼과 연결지어 조선의 향배를 설명하거나, 한국의 멸망을 슬퍼하거나 하여 병합을 저주하는 듯한 것이 있다.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여, 적극적으로 공명하고 적확한 사서를 제공하여 민심을 훈육하고, 조선인을 동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일관된 조선반도사를 만들어서 병합의 취지를 명확히 하고, 오해를 불식시켜 일선협력의 의욕을 일으키려고 계획한 것이다.
일본의 조선통치는 처음부터 동화주의를 근본정책으로 하고 있었다. 메이지 이래, 일본이 대륙에 진출한 것은 부국강병이라는 국책에 기초하여 자본주의의 성장에 수반하는 상품시장의 확장을 목표로 한 것이며, 결국 세계적인 대립 속에서 경제적·군사적으로 승리하여 국제적으로 지위를 확립하고, 그 결과로 조선을 지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본의 대외정책에는 유교로부터 배운 중화사상에 근거한 개화주의의 전통이 흐르고 있고, 지리적으로 가깝고 역사적으로 밀접하며 인종이라는 측면에서도 인연이 깊고 같은 중국문화의 흐름을 공유하는 조선에 대한 친근감은 자연스럽게 동화주의라는 지배방침을 낳았다.
그러나 이것이 제국주의적 식민정책과 통하는 점이 있고, 오늘날의 세계주의와도 연결되는 점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역사를 편찬하는 의도는 동화주의라는 조선통치의 본뜻을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통치방침을 이렇게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무력에 의한 치안의 유지나 조선인이 정치적 지위를 잃어버리고, 사회적·경제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는 눈앞의 현실은 동화주의가 오히려 미명을 내세워 민족을 탄압하는 정책이라고 여겨지기도 했으며, 나아가 그러한 불만이 저항운동을 격화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무단정치의 폐해를 제거하고, 통치의 실적을 올리기 위하여 제도를 개혁하려고 기획하고 있던 상황에서 앞에 서술한 만세사건이 일어났으며, 통치 방침은 일대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른바 문화정치의 실시가 그것이다.
1919년 8월에는 관제 개혁이 실행되었다. 총독은 문관이 맡게 되었으며, 헌병은 폐지되고, 제복·대검(帶劍)이 금지되고, 조선인의 임용이 확대되고 언론이나 집회의 제한이 느슨해졌으며, 또한 지방자치제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조서(詔書)에 일시동인을 통치정신으로 한다는 것이 선언되었는데, 이것은 현실 정치에 일본 본토와 조선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동화주의의 이상을 제시한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환의 시기에 사이토 마코토는 문화정치라는 사명을 짊어지고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조선총독으로서 유일한 해군 출신 무장이었으며, 정치적인 경험이 풍부하면서 문화적인 교양도 깊었다.
우선 관리를 징계하여 형식정치를 타파하고, 민중의 편익을 도모하는 데 전념을 다하도록 하였으며 민족 문화에 대한
태도를 지시하여 문화와 옛 관습을 존중하고,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분별하였다.
시대의 추세에 순응하면서 취할 것은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것에 잘못된 점에 없도록 주도면밀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광범위한 독립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흥분한 인심을 진정시키는 일에 주력하면서, 자신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로(古老)를 가까이 하고 식자에게 의견을 구하며 조선을 이해하기 위한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즈음 조선인의 정치의식을 보면, 두 가지 동향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한 가지는 국가의 흥망은 대세가 이미 그러하므로 병합이라는 사실을 시인하지만 단, 민도(民度)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워 조선에만 특수한 제도를 설치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지적하면서 국민으로서 온전한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참정권을 요구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병합이라는 이름 아래 한국이 멸망했다는 사실을 유감으로 여기며 민족독립의 회복을 요망하는 것이다. 일본의 대륙 진출에 따른 국제 정국의 동향과 관련되어 성립한 조선의 정당에 계보를 잇고, 일본의 조선통치에 대응하여 전개한 정치적 입장의 양극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원식(閔元植)은 그 당시 일본의 중앙 정계에서 보통선거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고조된 것에 호응하여, 스스로 중심이 되어 국민협회를 만들고 시사신문을 발간하여 참정권 요구 운동을 전개하고 동지들과 함께 국회에 청원하였다.
한편 만세사건 당시 이미 국외에 나가 상해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하여 이승만(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또한 간도 지방에도 유력한 독립운동의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경성 등 다른 지방에서 은밀히 이들과 호응하여 활동하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조선의 현실에 대하여 어떤 이는 불만을 품고, 어떤 이는 불안을 느끼며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여 민족의
앞날에 광명을 비추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이와 함께 조선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화정치의 요체 중 하나는 충실한 교육 보급을 통해 민도(民度)를 향상시키는 것에 있다. 1919년 12월, 1920년 11월, 1922년 2월, 세 번에 걸쳐 조선교육령이 개정된 결과, 초등·중등학교에서 전문학교 및 대학까지 내·선인(內·鮮人: 당시 조선에 주재하는 일본인, 나아가 일본인 일반을 내지인(內地人)이라고 통칭하고 있었다) 모두 같은 방침 아래 교육을
받게 되었다.
중등학교 이하는 일본어를 상용하는 곳과 상용하지 않는 곳이 학교의 명칭계통 등에 차이가 있었지만 전문학교 이상은 모두 공학이 되어 교육내용도 점차 차별을 없애는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화무차별주의 제도가 대다수 조선인에게는 오히려 언어와 문화까지도 종속시키는 이민족 탄압 정책을 강화한 것으로 이해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주로 조선인의 자제를 교육하는 초등 및 중등학교의 학과목 중에 국사의 내용으로 조선의 변천에 관한 사적(事蹟)의 대요(大要) 또는 조선에 관한 사항을 교육하는 것이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초등·중등 교육에서는 언어·풍속·습관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여 제도를 다르게 운영하고 있으므로 특별히
추가된 것이지만 당시 널리 고조된 조선역사 교육에 대한 사회적 요망에 응답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총독부는 초등학교의 보충교재로서 조선사력(朝鮮事歷)을 편찬하여 교과서를 보충하고, 교사용 참고서를 간행하여 수업의 편의를 도모했다.
그러나 조선역사를 독립 과목으로서 교육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등학교 학생이 이것을 요구하여 동맹휴교를 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특히 일본역사를 교육함으로써 청년 자제의 민족의식이 높아짐에 따라서 조선민족 자체의 역사에 대한 동경이 점점 깊어지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세 아래에서 1922년 말에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성립한 것이다.
이에 앞서 전년 6월에는 구관 및 제도조사회가 설치되고, 같은 해 11월에는 학무국에 고적조사과가 창설되었는데, 모두 지금까지의 실적을 기초로 하여 면목을 새롭게 한 것으로 총독부의고 문화 조사연구에 관한 사업은 점차 충실한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해 6월에는 사이토 총독이 취임한 이래 정무총감으로서 이 사업을 지원하던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郞)가 내무대신으로 자리를 옮기고 후임으로 아리요시 주이치가 임명되었다.
신임 총감은 마침 구로이타 박사와 동창인 친구이며 그가 미야자키(宮崎)현 지사 시절에 사이토바루(西都原) 고분 조사가 이루어져 박사도 이 사업에 참여했으며, 서로의 인품에 깊은 신뢰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총독부가 직면하고 있던 조선역사에 관한 대책에 대하여 박사의 협력을 구하고, 서로 협력하여 새로운 구상에
기초한 수사사업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물론 세상의 정세를 참작하고 조선의 고문화 및 역사에 대한 대책이 통치의 근본과 연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전부터 깊은 이해와 관심을 갖고 있던 총독이 스스로 요청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때까지 5년여에 걸쳐 계속되어 온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은 그 취지에서 볼 때 신속하게 성과가 공간되어 당면한 시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되었지만, 자료 수집의 곤란 등을 극복하지 못하여 시기를 지나치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우선 사료를 수집·보존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민중의 교화에 앞서 학술적인 조사·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따라서 구로이타 박사는 별도로 새로운 사업을 계획하고 학술적인 견지에 서서 권위 있는 조직을 만들어서 사료의 수집에 만전을 기하고, 공평하고 신뢰받을 수 있는 역사를 편찬하여 신속하게 이것을 공간함으로써 현재의 요구에 부응하며, 앞으로도 보존할 수 있도록 할 것을 헌책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계획 입안과 사업을 담당할 전문학자의 인선에 대해서는 당시 중국사의 권위자인 교토제국대학 교수 나 이토 도라지로에게 자문을 구하여 신중을 기했다.
그 결과 일찍이 남만주철도주식회사 학술조사부에서 만주의 역사·지리 조사연구에 참가하고 만주사(史) 연구자로서 명성이 높은 이나바 이와키치가 추천을 받아 편찬 주임으로 예정되어, 도쿄제국대학 사료편찬과에서 대일본사료 및 고문서 편찬에 종사하고 대외관계사에도 조예가 깊은 가시하라소조와 함께 새로운 사업의 중심이 되는 것이 예정되었다.
이처럼 준비가 갖춰지고, 1922년 12월 4일에는 총독부훈령으로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이 공포되어 조선사 편찬과 조선사료의 수집을 내용으로 하는 수사사업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아리요시 정무총감이 위원장이 되고, 12월 28일에는 고문 및 위원이
임명되었으며, 다음해 1월에는 제1회 위원회가 개최되어 운영에 대하여 구체적인 방침
이 결정되었다. 이 시기의 고문에는 조선 귀족으로서 중추원 고문직을 맡고 있던 이완
용·박영효·권중현, 위원에는 중추원 서기관장인 나가노 간(중추원 참의인 유맹(劉猛,
무관 출신이지만 공정한 식견을 갖고 있어 신망이 높았다)·어윤적(노론계의 학자, '동
사연표'의 저자)·이능화(李能和, '조선불교통사')·정만조(소론계의 학자. 후의 경학원
대제학)·이마니시 류·이나바 이와키치·마쓰이 히토시(처음에 이나바 이와키치 등과
함께 만철조사부에서 만주사 연구에 종사했으며 위원에 취임 후 바로 사임했다)·가시
하라 소조 등의 역사가가 위촉되었다. 이것으로 총독부의 고문화 조사·보존 사업에 하
나의 중요한 요소가 추가된 것이다.
(2) 조선사편수회 설치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성립에 의해 면목을 일신하고, 규모를 새롭게 한 총독부의 수사
사업이 어떠한 성격을 갖고 있었는지는 1923년 1월 8일에 개최된 제1회의 회의 석상에
서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한 훈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즉,
“우리 조선의 문화는 그 연원이 매우 오래되며, 문예·생산 등 각기 특색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수사사업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온 나라에 산재
한 수많은 자료를 집대성하여 학술적 견지에서 매우 공평하게 편찬한 것이 없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바입니다. 게다가 자료는 점점 소실되고, 하루라도 늦어지면 그만큼 귀
중한 것을 잃게 되어 문화의 자취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현상입니다.
우리 총독부는 지금까지도 문화방면의 시설에 주의를 기울여왔으며, 구관조사를 비롯
하여 고적조사 등 갖가지 사업에 진출해 있으며 이미 역사에 관한 편찬 등에도 힘을 쏟고
있습니다만, 이번에 또 위원회를 조직하여 새롭게 계획을 세우고 수사사업을 개시하기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여러 학자들을 비롯하여 사정에 정통한 분들의 도움을 바랍
니다. 또 일본의 역사전문가 여러분들에게 의뢰하여 현대에 알맞은 조선사 편찬이 이루
어지기를 바랍니다. 두 방면 모두 고문위원 여러분들을 촉탁하게 되었습니다. 어찌되었
건 모두들 협력일치하여 이 사업이 예정기간에 완성되도록 노력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기의 사업은 조선 전체에 산재한 수많은 자료를 집대성하고 학
술적인 견지에 서서 공평하게 편찬함으로써 귀중한 자료가 소실되기 전에 고문화를 보
존하는 조치를 강구함과 동시에 현대에 어울리는 조선사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던 것
이다. 또한 학술적 견지에 서서 사업을 진행시킨다는 것은 이 새로운 계획의 근본을 이
루는 특색이며 이 사업에 대해서 시종일관 변하지 않은 점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현
대에 어울이는 조선사라는 것은 앞에서도 서술한 바와 같이 당시의 정정을 생각해 볼
때, 일견 특수한 정치적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마저도 이른바 학술적
견지와 연관된다는 것은 구로이타 박사가 같은 회의 석상에서 편찬 요강을 설명할 때
학문적 역사연구의 동향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예전에는 정치가 역사연구의 주요 부분
을 이루었습니다만, 오늘날에는 문화 방면에 중점이 두어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총독의 훈시에 이어 아리요시 위원장이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처음 총독
은 5개년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구로이타·나이토 두 박사의 전문적 의견을 존중하
여 10개년으로 고치고 첫 3년을 사료의 수집, 다음 5년을 사료의 수집과 편찬·기고, 나
머지 2년을 고본의 정리에 할당하는 예정을 명확히 하였다. 사업의 출발점으로 사료수
집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편찬 강령을 보면, 형식은 편년사로 하여 삼국 이전부터 조선시대
후기(갑오개혁까지)에 걸쳐 시대별로 7편으로 구분하고, 연·월·일에 맞춰 일본문 강문
(綱文)을 달고, 그 후에 사료를 원문 그대로 수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풍속·종교·문학·예술·가요 등에 대해서 분류사 편찬도 수행하는 것이 추
가되었다. 편년사의 결점을 보완하고 문화사를 중히 여기는 방침과 호응하는 것이다. 또
구로이타 박사는 사료 수집의 범위는 현대까지 이르고, 이것을 보존하여 후세에 전하지
만 국가사업이므로 학술적으로 정확하고 명세하도록 할 필요에서 편찬은 우선 갑오(메
이지 27년, 1894)의 개혁까지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원고의 출판, 사료의 임시
간행, 사료·사적 해제의 공간 등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역사서 편찬 사업의 초기에 사료의 수집에 힘을 집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본
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그 제국주의적인 지배 아래에서 급격한 근대화를 강요당한 결과,
조선 사회의 변혁은 갑작스럽게 추진되고 일본 경제에 종속되는 산업의 식민지 체제가
성립되었으며, 구사회가 해체되고 새로운 계층의 분화가 나타났다. 이러한 정치적·사
회적인 변동은 조선의 관청이나 서원 등의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민간의 구가(舊家)·명
족(名族) 등이 전해온 고문서·고기록이나 전적류가 소실되도록 만들었고, 시간이 지날
수록 그 가치와 존재 의의가 상실되도록 했다. 따라서 이들 문헌의 소재를 폭넓게 확인
하고 조사·연구함과 동시에 수집·보존할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매우 서둘러야 할 급
선무인 것이다.
1923년 5월에는 도지사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특히 조선사료의 보존에 관한 협의가 이
루어져 정무총감(편찬위원회의 위원장)이 각 도의 지사들에게 사업의 취지를 설명하고
고문서나 고기록 등의 종목을 열거하며 관·공청 등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민
간에 산재하는 것에 대해서도 보존하도록 할 것을 요망했다. 이어서 6월 12일에는 제2회
위원회를 개최하고, 조선사편찬의 취지를 관민 일반에게 주지시켜 사료의 수집을 용이
하도록 하는 방책을 의논함과 동시에 민간 사료를 차입하는 방법을 검토했다. 1924년 4
월 2일의 제3회 위원회에서도 사료 채방에 관하여 협의하고 그때까지 수집한 사료를 전
관했다. 같은 해 8월 5일 및 12월 23일의 제4회·5회 위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료의
전관이 이루어졌는데, 점차로 사업의 성격이 명확해지고 일반에게도 그 의의가 이해됨
에 따라 매우 우수한 성과를 올렸다. 특히 사이토 총독은 이 사업에 대하여 각별한 열의
를 보이면서 귀중한 사료를 빌리는 경우에는 직접 붓을 들어 감사장을 썼고, 또한 휘호
를 증정하여 호의에 보답할 정도였다.
사료를 수집하려는 노력은 우선 소실될 운명에 처해 있는 민간 사료를 채방·조사하
는 일에 집중되었다. 조선에서는 고문헌이 조금밖에 보존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상식처
럼 되어 있었다. 그러나 병합 때 정부의 사고에 비장되어 있던 고기록·전적류는 물론이
고 관청의 기록류, 궁정의 장서 등이 총독부에 넘겨지면서 그 양과 질 모두 풍부하다는
것이 알려졌고, 또 민간에서 시장으로 유출된 문헌·전적도 다수에 이르기 때문에 채방
에 큰 기대를 하게 되었다. 특히 수백 년 동안 조선의 정치·사회 정세에서 기인하는 것
으로, 사찬의 저록(著錄)은 물론이고 관찬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파벌과 당쟁을 반영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료를 널리 수집하여 편견을 바로잡고 사실을 구명하지 않고서는 도
저히 공평한 역사 편수를 기대할 수 없다. 사료 수집의 초기에 당론의 원류를 찾고, 각
파의 중심이 되는 명가의 문헌을 채방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 일은 경쟁
적으로 문외불출(門外不出)의 비보를 제공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큰 성과를 거뒀다. 이
나바 위원의 조사를 기초로 하여 노론의 대종(大宗)인 우암 송시열의 후손가에 전해진
문헌류 전부를 전람(展覽)했던 것과 같은 일은 조선사회에서 일대 경이였다. 반향은 커
서, 수사사업에 대한 인식은 깊어졌다. 식자들은 예로부터 내려온 파벌을 뛰어넘은 엄정
한 사필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이 사업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일반인들은 접할 수 없었
던 사각의 비적을 공개하여 주밀(周密)한 자료를 전시하고, 단간영묵(斷簡零墨)이라도
중시하고 고증하며 고문서나 기록에서 전거(典據)를 구하여 비사를 구명하고 사의(史疑)
를 해결해 가는 학문적인 연구방법에 기초한 편수 준비는 주목과 신뢰를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료의 수집은 단지 조선 안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외의 문헌
에까지 이르는 것이었다. 이나바 위원이 내각문고를 비롯하여 일본 내지의 공사 수장(蒐
藏)된 일본 및 중국의 전적을 조사하고 가와하라 위원이 조선 외교·무역 기록·문서를
쓰시마 섬에서 채방한 일 등도 관심을 크게 증가시켰다.
이처럼 사료의 수집이 진행됨에 따라 사업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깊어졌다고 했는데,
일부에서는 사업의 의도를 일부러 곡해하는 자도 있고 또 경시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사업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규모를 확대하여 신뢰할 만한 인재를 모으고 조사를 철저
히 하며, 담당 직원을 우대하여 사업이 진척되도록 도모할 필요가 있었다. 1924년 말에
는 2년간에 걸친 실적을 되돌아보고 국가사업으로서의 규모를 정비하며 권위 있는 조직
을 확립하기 위하여 관제 공포가 기획되었으며, 다음해의 예산에 경비를 요구하기에 이
르렀다.
당시 일본의 재정은 1923년의 관동대지진 이후 계속해서 긴축방침이 취해지고 있었으
며, 이 사업도 이미 연차 예산이 감축되어 완성 연한을 2개년 연장하고 예정된 계획을
변경할 여유가 없었다. 특히 총독부에서는 행정정리의 실시와 함께 고문화보존에 관한
사업에 있어서도 고적조사과가 폐지되고, 구관 및 제도 조사회가 해산되던 때였다. 이러
한 정세 속에서 관제로써 정원을 확보하고 예산을 증가시켜 규모를 확장하려는 계획이
세워진 것이었다. 총독부에서 수사사업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1924년 7월에는 최초의 계획자였던 아리요시 정무총감이 관직을 사임하고, 위원장은 신
임 정무총감인 시모오카 추지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에 이 사업에 대한 사이토 총독의
열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조직의 확립에 대한 구상은 이미 아리요시
정무총감 시절에 뿌리를 두고 있고 맹우(盟友)인 구로이타 박사가 일관되게 실현을 계획
했기 때문에 신임 총감도 사업의 성격과 의의를 잘 이해하고, 남다른 결의를 갖고 이 사
업이 완성되기를 바랐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구로이타 박사는 취임 직후에 정무가 많
은 신임 총감과 어떤 때는 상경하는 기회를 잡아, 어떤 때는 왕복하는 차 안에서 회담을
하고 몸소 그 취지를 받아 중앙정부와 절충에 임했으며 오직 계획의 실현을 위해 노력
했다. 특히 박사에 의해 조선사를 조사·연구하는 것이 오로지 조선사의 해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시야에서 볼 때 중국과 만주는 물론이고 일본사 연구에도 필요불가결
한 기본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이 설파되어 이 사업은 더 높이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시
모오카 정무총감의 정계(政界)에서의 신용에 힘입어서 예산은 정부와 국회에서 인정되
고 관제 공포가 결정되었다.
1925년 6월 6일에 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관제가 공포되고, 조선총독의 관리에
속하는 독립된 관청이 설치되었다. 여기에서 조선사료의 수집 및 편찬과 조선사의 편수
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사업을 이어받아 총독부의 수사사업은 그
기초를 확립하고, 중요한 한 시기의 획을 그었던 것이다.
관제의 대요는 다음과 같았다.
제1조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총독의 관리에 속하며, 조선사료의 수집 및 편찬 그리고
조선사의 편수를 담당한다.
제2조 조선사편수회는 회장 1인, 고문 및 위원 약간 명으로 조직한다.
제3조 회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맡는다.
고문 및 위원은 조선총독의 주청에 의해 내각에서 임명한다.
제4조 생략
제5조 조선사편수회에 간사 약간 명을 두고, 조선총독의 주청에 의해 조선총독부 부
내 고등관 중에서 내각이 임명한다.
제6조 조선사편수회의 사무에 종사하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의 직원을 둔다.
수사관 전임 3인 주임
수사관보 전임 4인 판임
서기 전임 2인 판임
제7조 생략
이 관제의 규정에 따라 우선 시모오카 정무총감이 초대 회장에 취임하고, 이어서 이나
바 이와키치·후지타 료사쿠(이때까지 총독부 고적조사관을 거쳐 편수관. 후의 경성제
국대학 교수. 도쿄예술대학 교수·나라 국립문화재연구소장) 및 홍희가 수사관, 다카키
쓰 다쿠지가 수사관보에 임명되고, 이완용·박영효·권중현은 고문에, 이왕직 차관 시노
다 지사쿠(후의 경성제국대학 총장)·총독부 편집과장 오다 쇼고(小田省吾)·교토제국
대학 조교수 이마니시 류·총독부 편수관 이능화·이병소·윤영구 등 조선사에 학식과
경험이 있는 자들과 중추원 서기관 등이 위원으로 뽑혔다. 그 후 같은 해 9월에 구로이
타 박사가 도쿄제국대학 교수 핫토리 우노키치(후에 경성제국대학 총장을 겸임했다) 및
교토제국대학 교수 나이토 도라지로와 함께 고문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조선사편수회의
조직은 일단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때까지 기획에 있어서 구로이타 박사를 비롯하여
편수에 종사하는 직원은 모두 편의상 중추원 촉탁의 명의(名義)였으므로 사무 진행상 지
장도 적지 않았지만, 이때에 이르러 이름과 실질을 모두 갖춘 운영을 할 수 있게 된 것
이다. 그 후 고문에는 중추원 고문 이윤용 및 경성제국대학 총장에 취임한 자가 계속 임
명되어 야마다 사부로·하야미 히로시·시노다 지사쿠 이어지고 위원에는 역사학의 전
문가가 추가되어 최남선(조선사의 권위자. 단군에 대한 연구로 알려졌으며 민족운동의
지도자. 후의 만주건국대학 교수)·경성제국대학 교수 오타니 쇼신·경성제국대학 교수
후지타 료사쿠가 임명되고, 총독부 내무·학무·재무 각 국장과 중추원 서기관의 직책
에 있는 자가 순차적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사편수회가 설치된 1925년 10월에는 8·9일 이틀에 걸쳐 제1회 고문·위원회의를
개최하고, 관제공포를 기회로 하여 사업완성의 기한을 확인하고 지금까지의 성적을 검
토함과 동시에 경비예산의 증액을 심의했다. 그 후 연차계획에 대해서는 조사의 진행에
따라 중요 사료의 발견도 많고, 사업은 예정대로 진척되지 않아 부득이 1년을 연장하고
다시 중요 사료의 출판 계획 실시에 따라 1년을 추가하여 총 14년간, 1935년까지 완결하
게 되었다. 또한 '조선사'는 편찬이 완성된 부분부터 인쇄에 착수하여 첫 30권(1권에 약
500페이지, 통계 1만 5천 페이지)을 예정으로 1931년에 최초의 3권을 간행했는데, 후에
연도별 경비 일람표
엔
1922년 17,640
1923년 22,640
1924년 35,991
1925년 42,628
1926년 67,628
1927년 62,728
1928년 62,728
1929년 69,980
1930년 64,480
1931년 61,168
1932년 55,453
1933년 55,453
1934년 80,528
1935년 80,243
1936년 80,243
1937년 81,003
1938년 35,000
계 975,534 엔
5권을 추가하여 통계 2만 4천 페이지에 이르게 되고, 이 때문에 2개년을 연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경비에 대해서는 1938년까지 연도별로 표시하면 다음의 표에서 보는 바
와 같이 변천하였으며 항상 증액이 이루어져 왔다.(그 후의 예산에 대해서는 현재 자료
가 없으므로 생략)
이와 같은 경비의 증액은 앞에 연한의 연장에 대하여 서술한 것처럼 복잡한 사업의 진척정황과 상관관계가 있으며 매년의 예산편성기마다 재무 당국과 미묘한 절충이 반복되었던 궤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다이쇼 말년부터 쇼와 초년에 걸쳐 조선이 일본 경제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일대 전환을 이루고, 대자본의 진출에 의한 공업생산 발전은 만주사변을 거쳐 군수 자원의 개발로 이어져 약진하는 길로 가던 중에, 이처럼 경제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은 사업에 연한의 연장과 경비의 증액이 계속 인정을 받은 것은 구로이타 박사가 사무담당자를 독려하고 스스로 진두에 서서 지휘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예산절충에 책임을 지고 온 힘을 다해 쏟은 결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업의 창시자인 사이토 총독이 임기를 마치고, 야마나시 한조를 맞이하고 계속하여 다시 사이토 총독을 거쳐 우가키 가즈시게의 시대가 되고, 회장에도 유아사 구라헤이(湯淺倉平)·이케가미 시로·고다마 히데오·이마이다 세이토쿠·오노 로쿠이치로 등 몇대의 총감을 보내고 맞이하면서도 모두가 이 사업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
다.
(3) '조선사'의 완성
1925년 6월에 조선사편수회가 설치되고 수사사업의 규모와 조직이 확립되어 총독부의 태도가 명확해졌기 때문에 조선 사회의 이해와 신뢰는 깊어졌고 사료의 수집에 대해서도 폭넓게 협력을 구할 수 있게 되어 급속히 성과를 올려 내용도 충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1927년부터는 사료의 수집과 함께 처음부터 이 사업이 목적으로 해온 '조선사'의 편수에도 착수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같은 해 7월 12일 조선사편수회의 제2회 고문·위원회의에서는 편수의 구체적인 방법이 심의·결정되었다.
마침 고문인 구로이타 박사가 제2회 외유길에 오르기에 앞서 조선을 방문하고 있던 때였다.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조선사편수회 제1회 위원회에서 조선사편찬의 강령을 결정했지만 그 후의 경험에 비춰 수정해야 할 점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구로이타 박사의 지시를 기초로 하여 이나바 수사관 및 필자는 지금까지의 위원회에서 토의된 문제를 고려하고 홍 수사관의 의견을 들어 신중한 검토를 거듭한 결과 「조선사편수강령」 및 「조선사편수범례」를 연구, 고안하여 이 회의에 상정하여 최종적으로 결정을 본 것이다. 이 강령 및 범례에 대해서는 그 후의 고문·위원회에서 다소 수정이 있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중요한 변경 없이 '조선사' 편수의 기본적인 방침이 되었다.
우선 ‘조선사편수강령’을 보면, 제1회 위원회의 결정을 기초로 하여 사료의 수집이 이루어지고, 준비조사가 진행되면서 문제가 된 점을 고려에 넣고 사업의 취지에 비추어 한층 적절한 수정이 가해졌다. 그 한 가지는 편(編)의 구분에 대한 것이다.
편수의 범위를 상고(上古)부터 갑오개혁까지로 하여 7편으로 나누고 있던 것을 6편으로 하여 제1편 삼국 이전·제2편 삼국시대·제3편 신라시대를 고쳐서, 제1편 신라통일 이전·제2편 신라통일시대로 하여 제4편 고려시대는 제3편이 되고, 제5편 조선시대 전기(태조부터 선조까지)·제6편 조선 중기(광해군부터 영조까지)·제7편 조선 후기(정조부터 갑오개혁까지)는 각각 제4·5·6편이 되었다(제5편과 제6편의 시작과 끝은 나중에 바뀌어 정조까지 제 5편, 순조부터 제6편이 되었다).
이 개편과 함께 제1편 신라통일 이전의 편수에 대해서 특례가 설정된 것은 주요한 수정사항의 하나이다.
물론 ‘편수의 체제는 편년으로 한다’고 하는 사체(史體)의 원칙은 처음부터 변하지 않았지만, 제1편에 대해서만큼은 ‘특히 예전부터 전해오는 편찬·찬록된 기록·사적, 기타 사료를 원문 그대로 유취(類聚) 수록하여 편년체를 취하지 않는다’고
하는 예외를 만든 것이다.
신라통일 이전에 대해서는 조선·중국·일본에 각각 특색이 있는 문헌이 남아 있지만, 서로 기년이 다르고 통일적인 편년체 편수를 하려고 하면 비정(比定)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고, 신속히 결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학술적인 견지에서 볼 때, 오히려 수집한 사료를 유형별로 수록하여 후일의 고구(考究)에 대비하는 것이 훨씬 적절하다는 견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출판을 할 때에도 조선·중국·일본으로 나누어 사료의 전문을 간행한다는 방침을 취하게 되었다.
편수의 범위를 갑오개혁까지로 한정하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사료를 수집·보존하여 앞으로의 조치에 대비하는 것도
이 수사사업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체재에 대해서는 편년체의 연서를 표기할 때 간지 및 왕의 재위 연차(왕명은 묘호(廟號)로 부르고, 묘호가 없는 경우에는 통칭에 따른다)에 따른다.
일본과 중국의 기년을 주기하여 참조하는 것은 그때의 강령으로, 처음 결정한 방침 중의 하나이다.
중국의 전통을 이어받은 일본과 조선의 수사는 기년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시된다.
그 선택방법에 따라 수사의 근본정신에까지 비판이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간지 및 조선 역대의 국왕 재위 연차를 기준으로 한 것은 조선에 내려오는 기년법(紀年法) 중에서도 중국의
정삭(正朔)을 피한 것을 답습한 형식이며 조선에 관하여 무엇보다도 일관되게 체재를 정리하는 방법이다.
일본 통치하의 수사라는 입장에서 명분론도 나왔지만, 사실에 입각하여 가장 타당한 방식을 취한 것 또한 본 수사사업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및 중국의 기년을 주기할 때에도 결코 명분론에 휘둘리지 않고, 사실에 따라 참조하도록 하였다. 그 밖에 기년에 관하여, 고려에 대해서는 이나바 수사관이 열심히 주장한 것을 기초로 하여, 이씨조선시대에 편수된 정사인 '고려사'에서 사용된 유년(踰年) 칭원(稱元)의 구례를 따르지 않고 당시의 사실을 쫓아 즉위 칭원(卽位 稱元)을 사용하였다.
폐왕 신우(辛禑)·신창(辛昌)은 위원의 제안에 의해 심의를 진행한 결과 왕씨로 인정하는 의견이 채택되어 전·후 폐왕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특례로서 제1편은 사료를 있는 그대로 유집(類集)하는 것이므로 조선·중국·일본의 사료별로, 편의에 따라 각각의 주요한 사적의 기년에 의해서 순서를 나열하였다.
다음으로 조선사편수범례는 강령에 제시된 방침을 기초로 하여 구체적으로 사건을 선택하고, 강문으로서의 본문을 게기(揭記)한다. 이에 대하여 사료를 유수(類收)하고, 「잡록(雜錄)」을 정리하며, 「참고」를 부재(附載)하고 또한 「주기」나
「안문」의 체재에서부터「두주」의 제시방법, 「도화류(圖畵類)」의 삽입 등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그 방법을 결정한 것으로, 주로 '대일본사료'·'대일본고문서'의 예를 본떠, '대일본유신사료(大日本維新史料)'의 강령·범례를 참고로 하여 입안한 것이다.
본문으로 채택하는 역사 사상의 선택에 대하여, 범위를 매우 넓게 잡아 고찰하여 정치·외교·경제·문화의 각 방면은 물론이고 사회조직·풍속에도 주의를 기울인 것이나 특별히 전기 항목을 제시하여 정치·경제·문화·사회 각 분야에 관한 사람들의 전기의 수록을 방침으로 하여 죽었을 때까지의 중요 사적(史籍)·직관·저작·계통 등을 주로 기술하였다.
사료에 대해서는 간사본·고문서·일기류에 걸쳐 사료 가치에 알맞은 서열을 정하는 방법부터 수재(收載) 시의 체재 처리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기준이 제시되어 속서(俗書)·잡저(雜著) 등의 종류에서 「잡록」을 골라내고 후인의 논술 중 정확·탁발(拓拔)한 것을 사료의 보조로서 「참고」로 게재하는 것 등 문헌을 망라하여 유감없이 모든 준비가 이루어졌다.
「도화」의 삽인은, 문서·기록·사적은 말할 것도 없고 화상·회도·회화·조각류, 그리고 유물·유적의 사진으로부터 금석문의 탁본 등은 서로 관계가 깊은 조 아래에 우선은 반드시 고본 속에 삽입하여 참조할 수 있도록 한 것도 특색 있는 방법이었다.
이처럼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구로이타 박사의 경험과 식견을 기초로한 세심한 준비에 힘입은 바 크다.
편수의 강령 및 범례가 결정되자 바로 이에 따라 '조선사' 고본의 작성이 개시되었다.
당시 이미 편수회의 사무 분담에 대한 내규가 정해져 있었고, 부를 나누어 주임을 두고, 직원은 나누어 소속되어 있었지만, 사료의 수집에 대해서는 채방부(採訪部)에서 지방 사료의 소재를 조사하고 채방의 계획을 세우며, 정비부에서는
차입 사료를 조사하고 복본·사진류의 제작을 실행하기로 하였다. 전자는 수사관(修史官) 홍희, 후자는 필자가 촉탁하여 각각 주임이 되고 '조선사'의 편수에 대해서는 제1편부에서 제3편부까지는 촉탁 이마니시 류, 제4편부는 필자, 제5편부는 수사관 이나바 이와키치, 제6편부는 촉탁 세노 마구마가 각각 주임이었다. 창설시에 수사관이 된 후지타 료사쿠는
이 전 해 여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 고고학 연구 및 박물관 시찰을 위해 재외 연구중이며, 비슷한 시기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로서 내임한 이마니시 류는 촉탁으로 영입되어 전공하는 고대부터 고려시대의 편수를 담당하게 되고 그 밑에
수사관보 이병도(후에 한국 서울대학교 총장·문교부장관 역임. 현 학술원 회장. 진단학회 회장)가 소속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건강상의 이유로 직책을 사임하여 후임으로 촉탁인 하기야마 히데오, 이어서 윤용균(경성제국대학 졸업. 요절하였으며 '윤문학사유고(尹文學士遺稿)'가 있다)을 영입하였다.
필자도 새롭게 촉탁으로 영입(1927년 말에 수사관 취임)되어 전공하는 고려 말기(공민왕)부터 착수하여 조선시대 전기에 걸친 편수를 담당하고 밑에 수사관보 쓰루미 류기치(이전에 함경북도사 조사에 종사한 적이 있다)가 소속되었고
이어서 수사관보 시오다 후키조(현 오사카대학 교수)로 바뀌었다가 바로 수사관보 신석호(후에 수사관이 되고 한국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이 된다. 현 고려대학교 교수)·촉탁 가와구치 우키치가 속해 있었다.
또한 조선반도사 편찬에 있어서는 근세(이씨조선)를 집필하여 이를 완성하고 자리를 옮겨 촉탁으로 있던 세노 마구마가 조선시대 후기의 편수를 담당하고 촉탁 조한직이 여기에 속하였다.
이 사업개시부터 홍 수사관의 협력 아래 '이조실록'의 태백산본 '광해군일기'의 연구에 몰두하여 학위논문 '광해군 시대의 만선관계'를 완성한 이나바 수사관이 전공인 조선시대 중기를 담당하고 수사관보 다카키쓰 다쿠지(현 게이오의숙대학사무국 근무)가 여기에 소속되었다.
그 후 1929년 12월 23일 제3회 고문·위원회의에서는 사료의 수집에 대하여 각 지방에 걸쳐 일반적인 채방이 완료되었다고 보고되어 특별 채방만 남게 되었으므로 '조선사' 편수를 집중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게 되어 편수 및 인쇄에 대한
예정·계획이 심의·결정되었다.
이즈음 조선시대의 편수에 대해서는 수집된 신 사료도 많고, 당론에 관련된 문헌류의 처리가 지난(至難)한 일이었기
때문에 「조사부」를 설치하여 홍 수사관이 주임이 되어 중요 사건에 대하여 특별조사연구를 실행하고, 사료를 각 편부(編部)에 회부하여 공평하고 타당한 기술이 되도록 함과 동시에 편수의 촉진을 도모하였다.
또한 인쇄에 대해서는 편수의 진행과 함께 1932년에 착수하여 5권·10권·15권, 그리고 계속 간행하여 1934년에는 전
30권을 완성할 계획이었지만 다음해 8월 22일의 제4회 회의에서 착수시기를 앞당겨 1931년에 제1편 일본사료·조선사료 및 제2편 3권을 인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8월 29일에 제5회 고문·위원회의가 개최되고 ① '조선사' 인쇄 장소, ②인쇄 원고의 심의 수속, ③ 간행 '조선사'의 명칭이 검토되어 예정대로 인쇄가 개시된 것이다.
인쇄 장소에 대해서는 이에 앞서 구로이타 박사가 기술상의 이점과 발매·보급상의 편의를 고려할 때, 도쿄에 있는 설비가 완전한 인쇄소와 규모가 큰 출판회사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강력한 의견을 피력한 바 있는데, 편수와 병행하여 인쇄가 이루어지고 교정상의 불편과 경비가 추가로 들어간다는 결점이 있으며 조선에서 인쇄할 경우 인쇄기술이 좋지 않다는 불리한 점도 도저히 넘어갈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며 오히려 이것이 인쇄기술을 육성하는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경성의 조선인쇄주식회사로 결정하고 판매도 여기에 맡기기로 하였다.
인쇄 원고의 결정에 대해서는 새롭게 「심의부」를 설치하여 이나바·홍·나카무라 3명의 수사관 및 이마니시 촉탁을 부원으로 하여 심의를 거쳐 인쇄에 회부하는 것으로 결정났다. 간행본의 명칭은 「고본조선사」·「조선사강」 등의 안도 있었지만 토의 결과 '조선사'는 명칭이 선정되었다.
우선 편수된 '조선사고본'에 대하여 제1편은 전문을, 제2편 이하는 본문만을 수록하고, 수록된 사료의 명칭을 주기한 것을 간행하는데, 이 사업이 목적으로 한 편수의 성과로서는 「조선사」로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고본이 모두 정리된 후 도서관 등에 비치하여 공개하고 간본(刊本)과 대조이용하기 편리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인쇄는 1931년에 제1편부터 착수되어 당시 제1편 및 제2편의 편수에 종사하고 있던 수사관보 스에마쓰 야스카즈(후에 수사관·경성제국대학 교수가 된다.
현 가쿠슈인(學習院)대학 교수)는 인쇄부 주임이 되고 기획과 사무를 담당했다.
이와 같이 편수 및 인쇄는 궤도에 올라 진척되었지만 고본의 책수가 예상 밖으로 많아져서 인쇄할 권수도 1934년에
다섯 권이 증가하여 총 35권으로 완성하는 것으로 개정 되었다.
따라서 당연히 편수에 필요한 연수도 연장되었는데 사무에 종사하는 직원의 부담도 매우 과중해져 밤을 새워 정진해도 부족한 상황이어서 건강에 무리가 오는 사람이 속출했다.
사업의 성격상 처음부터 편수의 보조나 기록·문서류를 해독하여 등사할 사람을 뽑았는데 학식과 경험을 갖춘 고령자가 많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일본면서 퇴직하거나 사망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특히 편수 사무의 중심 책임자에게 예상치 못한 사고가 일어난 것은 사업의 진행을 크게 방해하였다.
1932년 5월에는 이마니시 촉탁이 교토에서 객사하여 제1·2·3편부의 주임은 이나바 수사관이 겸임하게 되고 1935년 1월에는 홍 수사관, 5월에는 세노 촉탁이 사망하였으며, 편수·인쇄 또는 사료 정비의 사무에 종사하고 있던 수사관보·
촉탁 등을 맡은 사람들에게 사고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수사관보인 다카키쓰 다쿠지·하기야마 히데오가 병에 걸려 사직했고, 촉탁인 윤용균·가와구치 우키치·박용구·시부에
게이조·구찬서 등이 잇달아 사망했다.
그러나 구로이타 박사는 항상 그 빈자리를 보충하여 적당한 인재를 추천하고 알맞은 조치를 강구하여 대책을 세워 1933년에는 메이지 외교사 전공의 경성제국대학 교수 다보하시 기요시를 제6편부의 주임으로 하고 그 전후에는 촉탁으로
다가와 고우미(후의 수사관보, 수사관,현재 도쿄대학 강사)·소노다 요시로(경성대학 조수, 후의 수사관보, 현재 다이훈 대학교수) 등의 신예를 영입하고 각 부의 소속을 조정하여 제 1·2편의 편수를 완료한 스에 마쓰 수사관보로 하여금 제5편을 지원하도록 하고 위원 이능화를 촉탁으로 하여 오로지 사무의 진척을 도모하였다. 한편 직원의 부담을 고려하여
연한의 연장도 제안하였다.
드디어 1937년에 '조선사' 35권의 간행을 종료하고 사업을 완성하는 최종적인 계획에까지도달했다.
1935년 7월의 제9회 고문·위원회 때의 일이다.
그리고 다음해인 1936년 9월 27일, 신임 정무총감 오노 로쿠이치로가 회장으로 취임한 것을 계기로 하여 개최된
고문·위원의 간담회에서 사업의 완성에 대한 조치가 논의되고, 다음 해, 예정대로 '조선사'는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구로이타 박사는 1936년 11월에 다카사키의 여관에서 병상에 눕고, 그 후 두 번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 직접
회의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조선사'는 여기에서 서술한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 1938년 3월에 제6편 제4권이 간행됨으로써 완성되었는데, 그 후 「수권(首卷)=총목록」 및 「총색인」 각 1권이 간행되어 완벽해졌다. 편수에 착수한 이후 11년의 세월이 지났으며 수사사업이 기획되고 사료의 수집이 시작된 후 16년이 경과했다.
고본은 3,500책을 넘고, 간본은 제1편이 3권, 제2편이 1권, 제3편이 7권, 제4편이 10권, 제5편이 10권, 제6편이 4권,
모두 35권으로 총 24,000페이지를 넘는다.
고금을 일관한 조선사는 이미 그 양에 있어서 유례가 없는 것이다.
물론 조선에는 중국의 예를 따라 국가에 사관이 있었고, 역대의 기록을 갖추어 실록을 편수하였으며 왕조의 흥망과 함께 정사의 찬록이 이루어졌고, 사가(史家)의 저술도 적지는 않았다.
'삼국사기'·'고려사'는 기전체를 취하고, '삼국사절요'·'고려사절요'·'동국통감' 등은 편년체를 취하며 모두 관찬서인데,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과 같은 명저도 있었다.
이씨조선시대는 역대의 '실록'을 사고에 전하여 보관하고 '국조보감'은 공간되었다.
사저로는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처럼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를 취한 대저술도 있으며 안정복의 '열조통기(列朝通紀)'가 있고,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 오경원의 '소화외사(小華外史)'처럼 조선 이외의 문헌을 집대성한 양서도 있으며, '대동기년(大東紀年)'도 새로운 특색이 있고 비슷한 것으로 관찬인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증보문헌비고'와 같은 것이 간행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라고 하면 중국사를 떠올리거나 보감류를 들고, 혹은 당쟁사나 족보·가승(家乘)이 있다고 알고 있을 뿐이어서 기록이나 문서는 관청의 필요를 위해 준비해 두거나 사문의 비망에 그치고 실록은 사고에 비장되어 전해질 뿐이었다. 따라서 정사 및 실록을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기록·고문서를 추가하며 널리 내외의 전적을 참조하고 사료를 망라하여 가장 공정한 입장에서 정리·기술한 통사라는 점에서 이 '조선사'에 견줄 만한 것은 없다.
또한 고대사는 널리 조선·일본·중국의 사료를 수집함과 동시에 '사기'에서부터 '당서'에까지 이르러 중국 정사의 동이전을 전문 수록하여 동방 제족(諸族) 관계사료를 망라하고 있는 점에서 조선의 민족 및 문화의 연원을 구명하는 기초적인 문헌이라고 할수 있다.
특히 사료의 수집이나 본문의 편수에서 학술적인 입장에 서서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실은 다음에 서술할 사료의 수집 및 출판의 경과에 의해 더 명확해질 것이다.
(4) 사료의 수집과 출판
조선사편수회의 사업은 처음부터 조선사의 편수를 최후의 목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물론 이를 위해서는 사료를 수집하고 정리·보존하는 일이 기초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사료수집에서 성과를 올린 것은 조선사의 내용을 풍부하게하고 정확하게 하여 그 가치를 크게
높였을 뿐만 아니라 고문화 보존이라는 시각에서 보아도 이 수사사업의 의의를 크게 만들었다.
처음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설립되자 우선 이나바 이와키치·가시하라 소조·홍희 3명의 위원이 중심이 되어 사료의 수집에 착수하고, 한편으론 총독부 학무국 소관인 이른바 구 규장각도서 및 이 왕가 장서각 도서 등 이미 소재가 알려져 있던 수집사료의 조사를 진행하면서 이와 함께 경비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각지에 출장을 나가 명가·구족을 방문하여 소장한 고문서·기록 및 전적을 조사하고, 민간에 산재한 미지의 사료를 채택하는 일에 노력했다.
특히 지방 사료의 채방은 의의가 크며, 그 성과가 수사사업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서술한 바와 같다.
조선사편수회가 설립된 이후에도 사료 수집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고 1926년 12월에는 이를 조직적·계획적으로 더
강화하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사료의 수집에 대해서 채방·‘정비’ 두 부가 설치되고 채방부는 수사관인 홍희가 주임이
되어 실시·계획의 입안과 조사의 지도를 맡았으며, 정비부는 필자가 주임이 되어 차입 사료의 조사 및 복본·사진 제작을 담당했다.
그리고 「사료채방내규」를 만들어 일반 및 부분(部分)으로 구별하고 각 연도가 시작될 때 계획을 의정하기로 하여 사료 차입을 위한 수속을 확립하고 채방보고서 양식을 만들어 반드시 사료목록을 갖출 것 등을 규정했다.
지금까지의 조사대상이 부분적으로 저명한 소장가들에게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던 폐단을 고치고 일반 채방에 무게를
두어 차입된 사료의 증가에 따라 정확하게 처리하도록 하여 소장자의 불안을 제거하고 조사의 결과를 유효하게 하여
수집·보존의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특히 차입사료의 취급은 전용금고 및 특설 방화창고에 보관하여 출납을 엄중히 하였고, 당연한 일이지만 열람을 할 때에도 흡연을 금지하고 퇴청할 때에는 반드시 반납하도록 하였다.
다행히 20여 년간 한 점의 사료도 잃어버린 적이 없고, 오손(汚損) 등의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장자의 신용을 얻게 되어 마음에서 우러나는 협력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이 사업의 자랑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료의 수집에 대하여 조직이 확립되자 전 조선의 각 도에 걸쳐 일반채방계획을 세우고, 지금까지의 실적과 상보(相補)하여 철저함을 기하고 부분적으로는 수차례의 특별채방에 의해 면밀한 조사를 실행하여 일본 및 만주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유루(遺漏)가 없도록 하였다.
1938년 3월에 '조선사'가 완성될 때까지 출장 연일수는 2,800일에 이르고 차입 조사한 사료는 4,950건(별표 참조)에
이르며 조사 결과는 수차례 '조선사고본'에 수록되고 주요한 것은 경비가 허락하는 한 복본을 만들어 그 수가 2,000책에 이르며 그밖에 건판(乾板)도 4,500매를 넘는다. 또한 소장자의 호의에 의해 기증된 문서·기록 및 전적과 상인의 손을
통해 구입한 문헌류도 다수(유감이지만 현재 수량을 제시할 수 있는 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에 이른다.
차입사료 지방별 건수(1923~1937년)
도별 건수
경기 1,427
충북 235
충남 331
전북 441
전남 690
경북 615
경남 197
황해 22
평남 4
평북 69
강원 83
함남 534
함북 20
(쓰시마) 155
(기타) 127
계 4,950
* 비고: 숫자는 건수이고, 고문서는 일괄한 것을 포함하며, 서적은 부수를 나타내며 책 수가 아님.
지방사료의 수집에서 이와 같은 성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시간과 경비가 투입되고 편의가 제공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채방계획의 입안을 맡아 조사의 지도에 힘을 쏟은 수사관 홍희의 풍부한 지견과 탁월한 학식과 부단한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홍희는 호가 겸산(兼山)이고 전라도 출신으로 구 한국 말의 석유(碩儒) 전우(田愚, 호는 간재(艮齋))의 문하에서 배워,
그의 고족(高足)으로 불렸다.
널리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특히 식견이 높다고 알려져 있었다. 전우는 전라도 담양 사람으로 신응조(申應朝, 호는
구암(苟菴), 관직은 좌의정)의 인정을 받았으며 신응조의 권유로 유학 연구에 뜻을 두고 임헌회(任憲晦, 호는 전재(全齋)) 문하의 제일인자가 되었다.
이태왕이 관을 주어 불렀으나 결국 취임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문도(門徒)를 사절하고 자손을 버리고 바다의 고도(孤島)로 들어갔다.
후에 부안의 계화도(界火島)로 옮겼는데, 이후 10년 동안 명성을 듣고 배우고자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으며 82세에 계화도에서 사망하였고 문인이 1,500에 이르렀다. 1922년의 일이다.
그리고 이 해에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성립되고 홍희는 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이나바·가시하라 두 위원과 함께
사료의 수집에 착수하여 '이조실록'의 태백산본 '광해군일기'의 조사를 시작했다.
'광해군일기'는 내용면에서나 찬수 시기면에서 동·서로 분당하여 논쟁이 점차로 격화하고 남·북의 분화가 일어나며
결정적으로 파벌의 형성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며 특히 태백산 사고에 전해진 것은 중초(中草)의 원본으로 사관의 첨삭·수정이 이루어진 후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당론의 기미(機微)가 지면에 나타나 있고 사필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실증하고 있다.
이 조사는 그의 조선 정치 및 사회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여 사학연구의 기초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이나바 위원은 그의 학식에 깊이 감복하여 모든 일에 그의 의견을 물었으며 후에 조선사편수회가 설치되자 그를 수사관으로 추천했다.
전우는 병합을 달갑지 않게 여겼으므로 그의 문하에서는 관도(官途)로 나아가는 일이 없었는데, 홍희는 수사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과감히 단발, 출사하였으므로 자연히 선배동문은 홍희와 절교하였지만 홍희는 끝까지 그의 뜻을 바꾸지 않고 종신토록 이 사업에 전념하여 그가 기여한 바는 매우 컸다.
특히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한 견지에서 사업에 임하였으며 사료 수집을 기획할 때는 마치 물건을 봉지에 넣듯이
적확하여 항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수사사업이 조선 식자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많은 부분 그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그의 냉정한 태도에 대하여 파벌이라는 인습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탐탁치 않게 여기기도 하였으므로 그의 입장은 매우 괴로운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앞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동서·노소의 당론이 섞여 있던 조선 시대 중기 이후의 편수에서 그 논쟁의 핵심을 해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조사부의 주임으로서 사료를 제시하고 내용을 분석하여 지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가끔 수사사업을 완성한 후 잠시 여론을 피하여 조선을 떠나고 싶다고 술회한 것은 전문(田門)의 뜻을 거역하고
관직에서 일했다는 비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공정성에 대한 4색(동서·노소의 파벌) 모두의 불만이 풀리기를 기다리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홍희 저 '동유일초(東遊日艸)'는 1929년, 사료 채방을 위해 일본을 순유(巡遊)했을 때의 기행이다).
그런데 수사사업의 사료수집은 지방사료의 채방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구 규장각도서 및 이왕가 장서각의 도서를 중심으로도 조사가 속행된 것은 물론이다.
수사관보 다카키쓰 다쿠지가 편집주임이 되어 간행한 '갑종조선사료조사요록(甲種朝鮮史料調査要錄)' 제1편 상책은
그러한 성과의 하나이다.
두 곳의 장서는 각각 '조선총독부 고도서목록' 및 '이왕가 장서각 고도서목록'이 공간되어 있으므로 이를 통해 그 내용을
알 수 있으며, 전자에 대해서는 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도서해제'를 통해 중요 문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사편수회의 장기간에 걸친 정밀한 조사에 의해 새롭게 가치가 밝혀진 것도 적지 않다.
'고려사절요'나 '사대문궤(事大文軌)'와 같이 간본 중에도 그런 예가 많지만 등록·의궤·일기 등의 기록류와 같은 것들은 이 사업에 의해 비로소 그 성격과 가치가 해명되고 공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조선 인조 이후 3,000책을 넘는 현존 '승정원일기'의 복본 작성에 착수하고 17세기 이후의 현존 '사고폭쇄형지안(史庫曝晒形止案)'(각 사고의 폭쇄 등에 대해 이루어진 현상조사보고서)의 복본을 완성하여 전적조사의 기준으로 하고, '비변사등록'에 의해 17~19세기에 걸친 '조선직관표(朝鮮職官表)'를 제작하는 등 보존과 이용에 대해서도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본래 이 장서는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지 않았는데, 총독부는 본 사업을 위해 자유롭게 조사·이용하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1927년에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된 후에도 특별대출이라는 편의를 제공해 주어서 마음껏 활용할 수 있었다.
또한 이씨 왕가의 장서에 대해서는 장서각 이외에 대보단(大報壇)에 비장(秘藏)되어 있던 '황명실록'(명의 곡응태구장초본(谷應泰舊藏抄本))을 빌려 복본을 완성한 것도 기억해야 할 사업일 것이다.
또한 두 곳의 장서를 비롯하여 지방에서 차입한 사료에 대해서 문집류를 중심으로 검색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목록을 수집하고 차례대로 '군서요목(群書要目)'을 제작하여 수백 책에 이르고 있다. 이 사업들은 모두 이나바·가시하라·홍 3명의 위원이 처음부터 기획한 것이다.
다음으로 사료의 수집에 대해서 잊을 수 없는 것은 쓰시마섬의 구 한슈(藩主) 소우(宗)가의 기록이나 고문서류를 구입하여 이용하고, 또한 정리·보존 대책을 강구한 것이다.
1923년 여름, 가시하라 위원이 쓰시마섬 안의 사료채방을 시도했을 때 이즈하라에 있는 창고에 습장(襲藏)된 것에 대해서 보고하였는데, 때마침 이즈음 도쿄의 보리사에 보관되어 있는 가보와 같은 중요 고문서류의 처치에 대하여 구로이타 박사는 이 집안의 후견인이던 오키 엔키치(大木遠吉)로부터 상담을 받았다.
이 집안은 조선과 밀접한 불가분의 역사적인 연고가 있으므로 고문서류에는 조선외교문서를 비롯하여 부산무역에 관한 통상기록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조선과 관계 있는 것을 일괄하여 조선총독부에 양도하는 것에 대한 교섭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사의 편의상 계보나 기록류 등 모든 것을 총독부에서 빌리는 것으로 결정이 이루어졌다.
1926년 5월에는 도쿄에서, 같은해 7월에는 쓰시마에서 경성으로 보내져, 비로소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소우가의 사료는 이전에 보다이지(菩提寺)로 이전할 때 흘러나온 것이 게이오의숙대학 도서관 및 난키문고(南葵文庫, 현재는 도쿄대학 도서관을 거쳐 사료편찬소 소관이다)로 들어갔는데, 주부(主部)인 고문서류 61,469통, 고기록류 3,576책, 고지도류 36매, 고화(古畵)류 18권 및 53매에 이르는 자료들이 조선사편수회 소장으로 귀속된 것이다.
조선에서는 이에 대응하여 구 정부에서 물려받은 등록류를 비롯하여 풍부한 문헌류가 남겨져 있고 주로 17세기 이후의 일선 외교·무역에 관한 사료가 여기에 정비되어 있어, 대조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 후 소우가가 소장해오던 사료는 필자가 담당하여 정리에 착수했고, 이후에는 수사관보인 구로타가 주로 이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처럼 사료의 수집과 함께 정리와 보존이 강구되었고, 또 차례로 '조선사' 본문의 사료로서 수록되었다.
채방 결과, 차입한 사료에 대해서는 정비부에서 조사하고, 1927년 7 월 12일의 고문·위원회의에서 결정된 「복본류작성범례(複本類作成凡例)」를 기초로 하여 직접 조선사편수의 자료로 사용할 만한 것을 위주로 등사·영사·촬영·모사 등 각
사료의 성질에 따라 그에 맞는 처리가 이루어졌다. 복본류에 대해서는 정밀한 오서(奧書)14)를 붙이고, 원본의 체재·
유래·소재 등의 중요사항을 비롯하여 제작시기·제작자·교합(校合) 책임자 등을 기재하고 완성된 후에는 등록하여 보존하도록 하였다.
특히 당시에 사진을 폭넓게 이용한 것은 사료의 수집을 매우 능률적으로 만들었고, 조사와 보존을 정확하게 할 수 있도록 하여 이 사업의 특색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출장조사에는 사진기사를 동반하여 문외불출(門外不出)인 귀중한 사료는 직접 촬영하여 차입하는 번거로움을 줄인 일도 적지 않다.
1928년 1월, 필자가 충청남도 온양군 아산면에 있는 이순신의 종손가를 방문하여 지금까지 대출 요구를 들어준 적이 없었던 이순신의 자필 '난중일기'를 비롯하여 모든 중요 문헌을 촬영했던 일은 그러한 최초의 시도였으며, 선조의 귀중한 유물을 존중하는 자손들도 만족하였다. 복본의 교합에는 촉탁 시부에 게이조, 사진촬영에는 서기 마에다 고조·사진사
다노 시지노스케 등의 공헌이 컸다.
복본의 제작에는 노령이고 학식 있는 많은 노인들이, 전사원, 사료 등사에 종사하는 사람을 위해 특별히 만든 직책)으로서 어려운 초서체 및 문장을 해독하고 필사한 업적은 영구히 기억될 만하다.
특히 사료등사의 수량이 많았기 때문에 전사원은 근무시간을 초과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의 진척을 위해 눈물겹게 노력하였다.
지방 채방에 의해 수집된 사료를 시대별로 살펴보면, 14세기 이전, 즉 고려시대까지는 매우 희소하고 조선시대로 들어오면 연대가 내려올수록 고문서나 기록의 수효도 늘어나고, 16세기 전후, 즉 중종 무렵부터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예상 이상의 사료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중종시대의 명신인 권발(權撥) 자필의 '충제일기초(冲齌日記草)'(경상북도 봉화군 내성의 권씨 소장)와 같은 것은 가장 두드러지는 예이다.
이어서 선조에서 인조에 걸쳐 일본 및 만주로부터의 외환이나 내란 때문에 관부의 기록을 비롯한 수많은 문헌이 소실되거나 산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일기의 원본이나 고문서 등이 다수 발견되었다.
선조 초기 전란 이전의 것으로는 유희춘(柳希春) 자필의 '미암일기초(眉巖日記草)'(전라남도 담양의 유씨 소장)나 율곡 이이 자필의 '경연일기(經筵日記)'(충청북도 제천군 권씨 소장)가 있고, 전시 중의 것으로는 이순신 자필 '난중일기초(亂中日記草)'·수군전황보고의 원본인 '임진상초(壬辰狀草)'(충청남도 온양군 아산의 이씨 소장)
와 김용(金涌) 자필의 '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경상북도 안동군 김씨 소장)·'용사일기(龍蛇日記)'의 초본(草本, 경상북도 예천군 정씨 소장), '임진록'·'정만록(征蠻錄)'(경상북도 의성군 이씨 소장)이 있으며, 전후에는 영의정 유성룡
자필의 '징비록'·'난후잡록(亂後雜錄)' 등의 초본과 '군문등록(軍門謄錄)'(경상북도 안동군 유씨 소장)이있다.
광해군에서 인조 초기에는 정홍명(鄭弘溟) 자필의 '한원초기(翰苑草記)ꡕ(충청북도 진천군 정씨 소장)이 있다.
그리고 인조 이후 즉 17세기 중엽부터는 관부의 일기·등록·의궤 등이 전해 내려오면서 갑작스럽게 그 수가 증가하여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이다.
14) 기재사항이 틀림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서류의 끝에 쓰는 글.
이즈음부터는 정치상으로 당론·파벌의 대립·항쟁이 격해지므로 공정한 사료의 수집에 성공하지 못하면 수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
중앙관부의 기록만으로는 오히려 진실을 놓칠 우려가 있다.
실록마저도 이미 편수자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고, 선조 이후 수정하거나 개수한 실록이 만들어진 예가 적지 않다.
당론분파는 사회에 깊숙이 침투하였고 수많은 비전·비록이 민간에 유포되어 사색의 이채를 각각 띠고 있다.
각지에서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는 각 파 명문의 후손을 방문하여 사장하고 있는 사료의 조사를 위해 시간을 보낸 것은 결코 실증의 가짓수를 늘리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문헌은 일문일파의 비장으로서, 공개되지 않은 것이며 사업의 초기에 채방에 매우 많은 고민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일반에게는 문집·유고 종류가 다수 간행되어 중요한 사료가 담긴 것도 적지 않지만, 세간에 유포한 이러한 것들은 대개 원본의 모습이 손상되고 내용이 변질되어 있다.
집안에 내려오는 초고나 문서의 원본을 수집하여 비교·대조하지 않고서는 정확한 전거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편수의 연한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다고는 해도 사료의 수집은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충분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추기(追記)) 해방 후에 임진왜란에서 오희문(吳希文)의 피난일기인 '쇄미록(瑣尾錄)'.(경기도 용인군 오씨 소장)의 자필원본(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사료총서'제14로 간행되었다)이라든가 정유왜란의 포로 노인(魯認)의
일본탈출기록인 '금계일기(錦溪日記)'(전라남도 광주시 노씨 소장)와 같은 초본이 발견된 예를 보면 그 한계를 알수 있을 것이다.
지방사료 채방의 성적이 올라감에 따라 그 중요성도 이처럼 명확해지자 '조선사'의 간행과 함께 사료의 공개출판의 필요성도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물론 사료의 출판은 사업개시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므로 사정이 허락하는 한 이를 실행에 옮겨야 하는 것이다.
1932년 7월 21일의 제6회 고문·위원회의에서 '조선사료총간' 및 '조선사료집진'의 간행계획이 결정되었다.
마침 '조선사'의 간행에 착수하였던 시기였으므로 구로이타 박사는 그 편수와 인쇄의 진행에 지장을 줄 것을 염려하여 처음에는 이러한 기획에는 반대했지만 위원 중추원 서기관인 마쓰모토 이오리의 열성적인 주장과 필자의 간곡한 희망이 받아들여져 마침내 구체적인 계획이 결정되었다.
당시 경성제국대학에의해 이루어진 '이조실록'의 영인출판이 조선인쇄주식회사의 시설로 진행 중이었고, 거의 완성기에 있었으므로 실적을 생각하여 주로 사진판으로 간행하기로 결정하고 가능한한 편집이나 교정의 수고를 덜기로 하였다.
'조선사료총간'은 우선 '고려사절요를 간행하고 다음해인 1933년 8월 14일의 제7회 고문·위원회의에서 이후의 계획을 확립했는데, 그 결과 간행된 것은 다음에 열거하는 목록 그대로이다.
구 규장각 도서나 지방채방사료 중에서 세간에 유포되어 있지 않은 귀중한 것을 고른 것인데 특히 임진·정유란(분로쿠(文祿)·게이초(慶長)의 역(役))에 관한 것이 많은 이유는 본문과 대조하여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 공정한 편수 태도를 명확히 함과 동시에 왜곡된 속설을 바로잡는 데에도 도움이 되도록 하려고 한 것이다.
또한 '조선사료집진'은 사료사진집으로 주로 조선시대의 것(속에는 고려 이전을 포함한다)을 선택하고, 고문서를 비롯하여 일기·문집·사적의 원본·초고·간본에서부터 화상·그림 등의 사진을 수록하고, '조선사'의 각 권에 삽입한 모든 도판 377가지를 포함하여 조선의 사료를 대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총간' 및 '집진'의 편집에는 각 편부의 협력 아래 주로 필자가 담당하고, 모두 상세한 해설을 붙여 사료해제도 겸하도록 하였다.
그중에서도 활판으로 간행한 '난중일기'·'임진장초'는 구로다 수사관보, '미암일기초'는 신 수사관보가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교정하며 노력하여 완벽을 기할 수 있었다.
조선사료총간
제1 고려사절요 구규장각도서 옵셋판 24책 3질 1932년 간행
제2 해동제국기 소가 소장 위와 같음 1책 1질 1933년 간행
제3 군문등록 경북 유씨 소장 위와 같음 1책 1질 1933년 간행
제4 당장서화첩 위와 같음 코로타입판 4책 1질 1934년 간행
제5 정원전교 위와 같음 위와 같음 3책 1질 위와 같음
제6 난중일기초·임진장초 충남 이씨 가문소장 활판1책 (456페이지,도판있음) 1935년 간행
제7 사대문궤 구규장각 도서 옵셋판 35책 3질 위와 같음
제8 미암일기초전남 유씨 가문소장 활판5책 (2238페이지, 도판 24)1936~38년간행
제9 난후잡록 경북 유씨 가문소장 옵셋판 2책 1질 1936년 간행
제10 진관관병편오책잔권 위와 같음 위와 같음 2책 1질 위와 같음
제11 초본징비록 위와 같음 코로타입판 1책 1질 위와 같음
제12 제승방략 구 규장각 도서 옵셋판 1책 1질 위와 같음
제13 양촌집 위와 같음 위와 같음 7책 1질 1937년 간행
제14 보한제집이나바 수사관소장 위와 같음 7책 1질 위와 같음
제15 조선부경북 소수서원소장 위와 같음 부록-활판1책 1질부록 1책 위와 같음
제16 속무정보감조선사편수회소장 옵셋판 2책 1질 위와 같음
제17 소수서원등록경북 소수서원소장 위와 같음 활판 1책 1질 위와 같음
제18 고려사절요보간봉좌(蓬左)문고소장 옵셋판 5책 1질 1938년 간행
제19 종가조선진문서 종가 소장 위와 같음 1권 1937년 간행
제20 정덕 조선신사등성행렬도종가 소장 코로타입판 1권 1938년 간행
조선사료집진
조선사료집진 코로타입판
해설-활판 2질 6집(150매)
해설-6책 300페이지 1935~36년 간행
조선사료집진 속 위와 같음 1질 3집(75매)
해설-3책 150페이지 1937년 간행
(5) 사료수집의 계속
1938년 3월에 '조선사'는 완성되고, 동시에 '조선사료총간' 및 '조선사료집진'도 간행을 끝냈다.
이로써 수사사업은 당초의 계획을 거의 종료하게 되었는데, 이에 앞서 전년 가을부터 이 사업의 미래에 대하여 잔무처리의 형태로 계속하여 주로 고종(이태왕 31년 갑오(1894))의 개혁 이후의 사료수집을 실행한다는 계획이 진행되어 왔다.
'조선사'의 속편을 만들고, 갑오개혁부터 병합(1910)까지의 편수를 완성하여 수미일 관한 통사로 만드는 것은 일찍이
고문위원회의에서도 의견이 나온 바 있다.
구로이타 박사는 사안이 현대로 이어지자 학술적인 견지에서 국가사업으로서는 사료의 수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견해를 굳게 지키고 우선 '조선사' 완성을 위해 전념해 왔다.
그러나 사업에 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러한 요망도 절실해졌지만, '조선사' 완성 후의 잔무처리에 대해서 구상을
발표하기에 앞서 병상에 눕게 되었다. 생각건대 박사는 조선사의 고본 및 수집한 사료의 처리·보존 조치를 하는 것과
'조선사'의 색인을 편찬하는 것으로 우선 총독부의 수사사업에 종지부를 찍고, 그 후의 문제는 경성제국대학도 충실하고
완성도 있는 곳이므로 오히려 그런 연구조직에게 위임하여 학술적으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미 1937년 6월 26일, 십수 년에 걸쳐 조선사편찬위원회 편찬주임으로서 또한 조선사편수회 간사로서 수사 사무를
주재하던 이나바 수사관은 사임하여 조선을 떠났고, 만주국의 건국대학 교수가 되어 있었다.
필자도 또한 수사관을 사임하고 총독부 학무국으로 옮겨 편수관이 되었으며 조선사편수회에는 촉탁으로서 이름을 걸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은밀히 박사의 평소 뜻을 명심하여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이나바 수사관이 떠난 후 편수사무를 주재하게 된 촉탁 경성제국대학 교수 다보하시 기요시는 당시 위원이며 간사로서 서무를 담당하고 있던 중추원 서기관 노세타니 간료와 함께 사업계속의 기획을 담당했다.
노세타니 서기관은 조선의 제도와 역사에 깊은 흥미를 갖고 중추원 조사과의 침체된 분위기를 일소하여 조사의 성과를 간행하는 일을 맡아 하며 스스로 집필하며 편찬 업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새롭게 사업을 확장할 계획을 진척시켰는데, 조선사편수회의 사업에 대해서도 갑오개혁 이후의 사료수집에 착안하여 이것을 주체로 하여 잔무처리의 이름을 걸고 그 사업을 계속할 것을 도모하면서 고문·위원회에 '조선사'의 완성을
보고함과 동시에 이 건에 대한 승인을 요구하는 계획을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1938년 4월부터는 '조선사고본'의 정리 및 「총목록」·「총색인」의 편집 등 '조선사' 편수의 잔무처리를 계속하면서 새 계획에 따라 갑오개혁 이후, 병합에 이르는 16년간의 사료수집에 착수한 것이다. 갑오개혁은 ‘갑오경장’으로도 불리는데, 이태왕 31년 6월 22일(1894년 7월 24일)에 시작하여 다음해 윤5월 1일(1895년 6월 23일)에 걸친 조선내정의 개혁으로 일·청의 개전에 따른 국가적인 위기에 대응하여 혁신 관료가 일본 정부의 원조를 받아 근대국가체제를 정비하기 위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방면에 걸쳐 기구의 혁신을 도모한 것이었다.
이것이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조선의 근대화는 정체되었는데, 그 배후에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세력의 소장(消長), 조선 정국의 분열 등의 문제가 있었다.
마침내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에 돌입하여 전후의 조선 정국은 일본의 독점적 지배의 확립에서 병합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조선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 중요한 16년간이다.
'조선사' 제6편의 편수를 담당하여 이를 완성한 다보하시 촉탁은 일찍이 메이지 외교사의 연구에 뜻을 두고, '근대일본외국관계사'를 저술하고, 18세기부터 19세기 중엽의 개항에 이르는 역사를 연구하였으며, '근대 일·중·선 관계의 연구-
텐진조약에서 일·중전쟁까지'를 간행하였다.
1933년 3월부터는 편수에 종사하는 한편으로 조선근대사에 관한 문제들의 연구에 주력하여 이즈음 이미 학위청구논문
으로서 '근대일선관계의 연구'(상·하 2권, 1,100페이지에 이르는 대저작으로 중추원에서 간행되었다)도 거의 완성에
이르렀다.
제6편의 끝은 일·청 개전을 초래한 동학당의 난과 갑오개혁의 발단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내외 각지에 걸쳐 사료를
수집한 경험도 갖고 있어 이때의 사업을 주재하기에는 가장 적임이었다.
게다가 대단한 열의를 갖고 사료의 수집에 임하면서 주밀하고 정력적인 연구는 해를 거듭하여 축적되고 있었다.
물론 그 지도를 받아 제6편의 편수를 담당했던 수사관보 다가와 고우미는 수사관이 되고 촉탁 소노다 요시로는 수사관보가 되어 시종 그 사무를 도왔던 것도 좋은 상황이었다.
사료수집의 한편으로 잔무의 처리로는 '조선사고본'의 정리가 있고, 소우가에서 소장 해오던 고문서·기록류의 정리가
있었다.
또 사업의 연혁과 경과를 보고하기 위하여 1938년 6월에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를 간행하고 같은 해 10월에 '조선사권수총목록'을 출판하고 1940년에 '조선사총색인'을 간행했다.
다시 '조선사료총간'을 속간하여 제 21 '통문관지'(영인)·'조선통교대기'(활판)을 출판하였다.
이들 사업은 수사관 신·다가와, 수사관보 구로다·소노다 등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또한 이들 사업의 한편으로 각각 전문으로 하는 분야에 따라서 조선사와 관련한 과제를 설정하여 연구를 시도하고,
그 성과를 정리하여 '조선사편수회연구휘찬'을 간행하기로 하고 제1집은 '근대조선사연구'로 이름을 정하고 다보하시·
데라타니(신)·다가와의 논문을 수록하며, 제2집은 '조선통치사논고'로 제목을 정하여 다보하시의 논저를 1944년에 간행하고, 제3집은 다보하시의 '근대일선교섭사연구(갑오개혁에서 한국병합까지)'·구로다의 '중세일선무역의 본질'을 수록
하여 1945년에 교정을 진행 중인 상태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이러한 형식의 편수 또는 연구논문을 발표한 것은 계속 사업이 된 이후의 눈에 띄는 특색이며, 당초 '조선사' 편수의 시대에 비교하여 큰 차이가 있었다.
수사사업이 개시되었을 때, 구로이타 박사는 이것이 국가사업이라는 것을 엄격하게 고려하여 '조선사'의 편수에 대해서는 강령 및 범례를 정하여 형식과 내용 모두 이에 걸맞는 것을 선택하였으며 이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조선사'의 완성을 목표로 정력적으로 오로지 이 사업에 집중할 것을 요청하면서 편수에 동반되는 고증이나 연구과정을 발표하는 일에 대해서도 사견(私見)에 의해 공적인 입장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신중을기했다.
이러한 방식은 편수사업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었고 이때는 사료의 수집을 목적으로 한 사업이었기 때문에 목록의 공간(公刊)이나 사료의 출판 등이 이루어져야 했던 것인데, 대상이 되는 시대의 특수성 등의 이유 때문인지 그러한 방향으로 가지 않고 연구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갖추게 된 느낌이 있다.
물론 '조선사'의 편수에 있어서도 연구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고, 매일 사무담당자 회의를 열어 토론을 계속하면서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공동연구를 시도하기도 하며, 월례회를 만들어 정양회(貞陽會)(편수회가 정동에 있었던 데서 유래한 명칭)라고 이름을 붙여 순번에 따라 연구발표를 진행하기도하였고, 지금은 그 기록을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그 성과가 편수상에 반영되고 학술잡지에 공표된 일도 많았다. 특히 1930년에 스에마쓰와 필자가 경성제국대학·총독
부·중추원 등의 연구자와 기획하여 창립한 청구학회(靑丘學會)에서 연 4회 발행된 '청구학총'에는 편수관계자의 논저가 매 호 게재되었고 총독부의 기관지인 '조선'에도 종종 발표되었다.
이 일은 일반에게 사업의 취지를 이해시키고, 조선사 연구의 발달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믿는다.
이전에 '조선사'의 출판계획에 착수했을 무렵, 1931년 가을에는 만주사변이 일어나고,이어서 만주국이 만들어졌으며
이것을 계기로 하여 일본의 대외정책은 국제적 협조를 버리고 경화(硬化)하였으며, 이른바 국방국가의 건설로 이어졌다. 1936년에는 2·26사건이 일어나고 전시태세는 강화되었으며 만주에서는 군수산업의 개발이 촉진됨에 따라 조선에 대한 요구도 이러한 노선을 따라 바뀌게 되었다. 이른바 ‘내선일체’의 통제하에 대재벌의 독점자본이 진출하고 북선(北鮮)
중공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이어졌으며 다음해 7월에 시작된 이른바 중일전쟁에 의해 한층 더 촉진되었다.
결국 일본·조선·만주를 통하는 물자동원계획에 따라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전면적인 전시동원태세로 돌입했다.
여기에서 ‘내선일체’라는 이름 아래 ‘황민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병합 이래의 동화정책이 그 극단에 도달한 것이다.
마침내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조선인의 종군도 요청되어 그 정책은 관철되었다.
'조선사'의 완성에서부터 이때까지 이어지는 사료의 수집은 이러한 정세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조선사료총간' 중에 배포처를 역사학전문의 연구자로 한정된 것이 나오거나 앞에 든 중추원의 '근대일선관계의 연구'
(다보하시 저)나 편수회의 '조선통치사논고'(다보하시 저)가 비밀출판으로 다루어지고, 공간이 허락되지 않는 일 등이
일어났다.
그러나 수사사업의 내용에 대해서 이 이상으로 직접적인 정치적 간섭이 이루어진 적은 없으며 학술적 견지에서의 연구 업적도 출판사정의 악화로 순차 간행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총독부 당국자에 의해서 조선의 시국적인 지위가 중요해지고, 그 정치·문물이 내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때였으므로 기본적인 연구의 발표는 연구 보국의 취지에 어울리는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전시하의 어려운 조건을 극복하면서 수사사업의 속행을 도모하고 있던 다보하시 촉탁은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1945년 2월 26일에 사망하였다.
그즈음 이미 '일청전역외교사의 연구'(1951년) '동양문고논총'(32로 간행)의 원고를 완성해 두었고 또한 이것을 하나로 묶어서 '동아국제정치사연구'로 속간할 원대한 계획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고 한다.
전쟁 국면은 날마다 위급하게 돌아가는 때였고, 조선사편수회는 조금씩 그 중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총독부 학무국장 엄창섭은 회장대리(당시 총독은 아베 노부유키,정무총감은 엔도 류사쿠)로서 사무를 통할하고 있었는데, 선후조치를 고문·위원들에게 맡기고 같은 해 3월에는 촉탁으로서 명의만 갖고 있던 필자를 간사로 추천하여 편수사
무의 주재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즈음 전쟁 국면은 이미 마지막 단계에 있었고, 처음으로 도쿄대폭격이 단행된 직후였으므로, 신년도를 맞이함과 동시에 특히 필자에게 요청된 수사사업에 대한 대책으로는 주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총독부 기구의 개혁이 이루어졌고, 급하지 않은 사업을 정리통합하여 모든 것을 전쟁 수행에 집중함으로써 실시가 불가능 상태에 빠져 있던 지방사료의 채방을 우선 중지하였다.
하나는 전시라고는 해도 의미가 있는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수집한 사료를 소개·이장하여
안전을 기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모든 생활사정은 궁핍하고, 방공방화 훈련은 강화되어 종종 적기가 나타나면 경보가 발해지던 때였고, 모든 면에서
어려운 사업이었다.
전자에 대해서는 일선관계사를 비롯하여 조선국제정치사, 조선민족사상사, 조선동란사 등 중요한 과제를 채택하여
신·다가와 두 수사관 및 구로다·소노다 두 수사관보가 각각 분담하여 연구를 개시하기로 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각지에 수납할수 있는 창고시설을 요청하여 사료와 함께 전원 이주하여 사무를 속행할 수 있는 후보지를 고려하기로 하고 수송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전쟁 국면의 급속한 변화와 관계자의 태도 등에 따라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어느 것 하나 결정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이 종결되고 말았다.
전쟁의 진전과 함께 일본이 취한 아시아 지역에 대한 점령 정책은 민족 해방에서 독립의 원조를 기본방침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 및 대만의 통치에서 취해 온 동화주의 정책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이른바 조선인 및 대만인의 처우 개선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즉 참정권의 부여이다.
전쟁 국면이 위급해지자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는 내각수반이 되고, 정무총감 다나카 다케오는 내각서기관장이 된 것을 기회로 적극적으로 이 난문제의 처리를 담당했다.
지금까지 칙선의 귀족원 의원을 추천하여 우선적인 방향을 제시해 온 정책을 중의원 의원의 선출로 잇게 된 것이다.
고이소 내각은 의회에서 상당한 저항을 배제하여 제도의 개정을 결행했는데 실시는 전쟁 종료 후로 잡는 것일 뿐이었다. 조선 민심의 동요는 전쟁 국면의 위기와 함께 격화하고, 수습할 수 있는 방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동화정책이 몰아넣은 궁지이며 세계주의의 이민족 대책의 최종적이고 필연적인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때에 1945년 8월 패전일을 맞이하여 어느 정도 혼란을 초래하였지만 다행히도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집한 사료 및 '조선사고본'종류는 지장 없이 보존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해방과 함께 같은 해 9월에 조선 점령을 위해 진주한 미국 군사령관 핫지의 지시에 따라 다른 모든 관청과 마찬가지로 모든 시설은 수사관 신석호의 책임으로 이어지고 필자는 9월 30일을 기하여 책임해제의 지령을 받았던 것이다.
일본에서 조선총독부가 폐청되고 조선사편수회가 해소된 것은 다음해 5월 31일의 일이다.
24년에 걸친 수사사업을 회고하니 여러 가지 감정이 느껴진다.
부기
본고는 조선사편수회의 사업에 대하여 경과와 함께 그 배경을 이루었던 시대를 대조하여 기술하고자 하였다.
이 사업은 처음부터 구로이타 박사가 기획의 중심에 있었고 그 완성에 이르기까지 밀접하게 관계하였다.
박사의 업적 중에서도 가장 특색 있고 대규모인 것 중의 하나이다.
박사는 봄·여름 휴가는 물론, 연말연시 휴일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에 왕래하면서 예산을 절충하고 편수의 기획을 지도하며 사업의 진행을 독려하고, 때로는 왕래하는 차 안에서 총독·총감 등과 동행하면서 상세하게 경과를 보고하고
장래의 계획을 의논하는 등 10여 년에 걸쳐 머리에서 사업에 대한 생각이 떠난적이 없었다.
특히 그 기간은 박사의 학계에서의 활동이 본격화하는 시기였다. 중앙에서의 각종 조사나 위원회 관계는 물론이고 동산어문고(東山御文庫)의 정리가 있었고, 이어서 '국사대계'의 편집, 고문화연구소의 사업인 이와나미강좌 '일본역사'(구판)의 편집,'가고시마현사(縣史)'·'아이치현사'의 편수, 다이고(醍醐) 삼보원(三寶院)이나 나고야신후쿠지(眞福寺)의 조사 등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
특히 조선에서는 고적조사, 박물관건설계획, 이왕가현대미술관 운영 등으로 동분서주하면서 잠시도 자리에 앉아 있을
여유가 없던 시기에 객창감을 붓으로 담아내기까지 했던 일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조선사'의 편수는 가장 정열을 기울였던 일이다.
필자도 왜성대(倭城台) 및 천진루(天眞樓)의 한 방에서 편수의 기획에 대하여 지시를 받고 혹은 서류에 대하여 지도를 받고 사업의 지체에 대하여 질책을 받으면서 혹은 집필의 어려움을 위로받거나 격려를 받았던 일을 생각하면 새로운
감회가 솟아난다.
필자에게도 반생을 기울여 온 체험이며, 피가 배어날 듯한 추억이다. 동시에 책상을 나란히 하고 일에 정진한 동료의
노력은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기록해 두고 싶다는 생각에 펜을 든것이다.
다만 수중에 아무런 자료가 없고, 기억을 불러일으켜줄 사람도 없기 때문에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나 '조선사' 수권,
총목록의 서문·범례 등을 의지하여 아련한 기억의 끈을 쫓아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기한을 넘겨 급하게 정리했기 때문에 추고도 멋대로, 졸문을 쓰게 되어 처음 의도와는 많이 다르게 되어 버린 일은 무엇보다도 유감이다.
또한 기술할 때 선배와 친구들에게 혹은 실례를 범한 점도 많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여기에 너그러이 보아 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추기
본편은 구로이타 가쓰미 박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간행된 '고문화의 보존과 연구'(1953)에 기고한 것이다.
오늘날 보자면 이 사업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나 그 성과에 대한 평가 등 다시 고치고 싶은 점도 많지만 본편 성립의 성격을 고려하여 다른 기회로 미룬다. 다만 주기 등을 보정했으며 가능한 한 옛 원고 그대로 실었다.
(1964년 2월 1일)
<출전 : 中村榮孝, 「朝鮮史の編修と朝鮮史料の蒐集」, '鮮關係史の硏究' 下卷, 1969년, 653~7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