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역사 사료

규원사화 (원문번역) 1 / 조판기.태시기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3.03.29|조회수224 목록 댓글 0

서문

차례

일러두기

제 1 장 : 규 원 사 화

1. 서(序)

2. 조판기(肇判記)

3. 태시기(太始紀)

4. 단군기(檀君紀)

4. 만설(漫說)

제 2 장 : 단군 관련 기사

Ⅰ. 檀君 關聯 記史

1.《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檀君紀

2.《삼국유사(三國遺事)》- 古朝鮮 王儉朝鮮

3.《동국통감(東國通鑑)》- 檀君朝鮮

4.《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平安道 平壤條

5.《응제시주(應制詩註)》- 命題十首 註釋

6.《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平壤府

7.《동국사략(東國史略)》- 檀君朝鮮 朴祥編

8.《동국사략(東國史略)》- 前朝鮮 柳希齡編

9.《동사찬요(東史纂要)》- 檀君朝鮮

10.《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歷代紀年

11.《해동역사(海東繹史)》- 檀君朝鮮

12.《동사집략(東史輯略)》- 檀君朝鮮紀

13.《신단실기(神檀實記)》- 檀君世紀

14.《조선역사(朝鮮歷史)》- 古朝鮮

15.《후한서(後漢書)》- 東夷列傳 序文

Ⅱ. 校勘記

Ⅲ. 校勘表

참고 서적

찾아보기

옮긴이 말

 

 

【 일러두기 】

 

▶본서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원본《규원사화》(도서열람번호: 貴629, 古2105-1)를 저본으로 하고, 동 도서관 소장의

   필사본《규원사화》(도서열람번호: 2121.3)를 참고하여 원문을 교감한 뒤, 번역과 주석을 한 것이다.

▶원문에는 구두점과 기타 표점을 사용하였으며, 그 용례는 일반적인 용법에 준하였다.

▶원문의 인명과 지명 및 고유명사에는 밑줄을 사용하였으며, 서적명에는 꺾음 겹괄호를 사용하였다.

▶원문의 교감에 사용된 특별 부호와 그 용도는 다음과 같다.

󰇴 원괄호와 격자괄호([原](筆)): 교감에 이용된 판본의 종류를 나타낸다. 즉, 교감 대상의 두 판본간 異字를 표시하며 원본

《규원사화》의 글자나 문장은 격자괄호를 사용하고, 필사본《규원사화》의 내용은 원괄호를 사용하였다.

󰇵 윗첨자의 사용((棄)[取]): 교감의 내용을 나타내는 부호로 사용되었다. 즉, 교감의 결과 버리는 문장이나 단어는 윗첨자로

표시하고, 취하는 문장이나 단어는 정상 글씨체를 사용하되, 각각의 판본 종류를 표시하였다. 두 판본의 내용이 함께 잘못된

경우에는 모두 윗첨자로 처리하고, 정정된 새로운 내용은 정상 글씨체를 사용하여 표기하였다.

󰇶 정상 글씨체의 원괄호나 격자괄호가 단독으로 사용되어진 경우는 상대편 판본에 없는 글자 또는 문장임을 말한다.

 

 

揆園史話序

 

北崖子旣應擧而不第, 乃喟然投筆, 放浪[於]江湖, 凡數三歲, 足跡殆遍於鯷域, 而深有蹈海之悲. 時經兩亂之後, 州里蕭然, 國論沸鬱, 朝士旰食, 野氓懷慍. 於是北崖子, 南自金州月城, 歷泗沘熊川, 復自漢山入峽而踏濊貊舊都之地; 北登金剛毘盧峰, 俯看萬二千峯簇擁峭列. 乃望東海出日而泣下, 眺萬丈瀉瀑而心悲, 慨然有出塵之想. 更西遊至九月山, 低徊於唐莊坪, 感淚於三聖祠. 及自平壤龍灣, 登統軍亭, 北望野, 雲, 點綴徘徊於指顧之間, 若越一葦鴨江之水, 則已更非我土矣. 噫! 我先祖舊疆, 入于敵國者已千年, 而今害毒日甚, 乃懷古悲今, 咨(差)[嗟]不已. 後還至, 適自 朝家有建乙支文德祠之擧, 卽高句麗大臣, 殲 軍百餘萬於薩水者也. 經月餘, 至松京, 始聞荊妻之訃, 急遽還歸居家, 益復寂寞. 於是, 搆揆園書屋於舊居之南‧負兒岳之陽, 聚諸家書, 廣采其說, 意欲以此終餘生焉.

 

북애자는 이미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니, 이에 탄식하며 붓을 던지고 강호를 방랑한지 무릇 삼년에, 발길

은 이 나라 구석까지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때로는 바다에 이 발길을 내어 맡길까하는 비탄에 젖기도 하였다. 때는

두 난리를 겪은 뒤라 온 나라가 어수선하고, 국론은 들끓어 올라 조정과 선비들은 끼니를 거를 만큼 경황이 없었으며,

뭇 백성들은 가슴에 그저 분노만을 품고 있었다. 이에 북애자는 남쪽의 금주(金州)와 월성(月城)으로부터 사비(泗沘)와 웅천(熊川)을 거치고, 다시 한산(漢山)에서 골짜기로 접어들어 예맥의 옛 도읍을 밟았으며, 북쪽으로 금강산의 비로봉

에 올라서서 빽빽이 들어차 가파르게 늘어서 있는 일만 이천의 봉우리를 굽어보았다. 이에 동해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

보니 눈물이 절로 흐르고, 만길 높이로 떨어지는 폭포를 쳐다보니 마음은 슬픔에 잠기는데, 그 복받친 마음에 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다시 서쪽으로 노닐며 구월산에 이르러 고개를 늘이고 당장평(唐莊坪)을 배회하자니 삼성

사(三聖祠)에선 눈시울이 붉어졌다. 평양으로부터 용만(龍灣)에 이르고 통군정(統軍亭)에 올라 북녘으로 요동의 들판

을 바라보니, 요동(遼東) 벌판의 나무와 계주(薊州) 하늘의 구름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드문드문 흩어져 노닐고 있는데, 작은 거룻배로 압록의 물길을 건너고자 하나 이미 갈마들어 우리의 땅이 아니구나. 슬프다! 우리 선조들의

옛 강역이 적국의 손에 들어간지 이미 천여 년에 이제 그 해독이 날로 심해져 가니, 옛날을 그리워하며 지금을 슬퍼함에

그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구나. 그 후 돌아오는 길에 평양에 이르니 마침 조정에서 을지문덕의 사당을 세우는 행사가 있다 하는데, 곧 고구려의 대신으로서 살수(薩水)에서 수(隋)나라 군사 백여 만 명을 무찌른 분이다. 한달 남짓 지나 송

경(松京)에 이르러 비로소 아내의 부음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 왔으나 더욱 적막할 따름이라, 이에 옛집의 남쪽이며

부아악(負兒岳)의 양지 바른 곳에 규원서옥(揆園書屋)을 짓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책을 모아 그 학설을 널리 연구

하는 것으로 여생을 마치고자 하는 마음이다.

 

夫以力服人者, 力窮而人叛; 以財用人者, 財竭而人去. 力與財, 余旣不能有焉, 而亦不曾冀求. 觀乎! 荒凉北邙坂下, 曾何力與財之有乎! 且名者(宲)[實]之賓也, 余將慕名而爲賓乎! 名亦不足願. 昔者勿稽子有言, 曰: 「天識人心, 地知人行, 日月照人意, 神鬼鑑人爲.」 夫! 人之善惡正邪, 必爲天地神鬼之所照臨監識, 則斯已矣. 寧向髑髏人世, 汲汲然競寸銖之名利哉! 余決不爲. 惟存性養志, 修道立功, 以遺效於來世後孫, 則雖終世無知者, 亦可無慍, 或萬世之後而一遇知其解者, 是旦暮遇之也. 觀夫閃忽千年往事, 曾復何向髑髏人世, 爭寵辱於石火光中耶!

 

무릇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고자 하는 자는 그 힘이 다하면 사람들로부터 배반을 당할 것이며, 재물로써 남을 이용하고자 하는 자는 그 재물이 다하면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다. 권력과 재물은 이미 내가 가지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일찍이 바라거나 구한 적도 없다. 보라! 황량한 북망의 산비탈 아래에 어찌 권력이나 재물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명예란 것은 참된 것의 손님과도 같은데, 내가 명예를 그리다가 도리어 손님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인가! 명예란 것 역시 내가 족히 바랄 것이 되지 못한다.

예전에 물계자(勿稽子)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 땅은 사람의 행실을 알며, 해와 달은 사람의 뜻을 내려 비춰보고, 귀신은 사람의 행위를 내어다 본다」 하였으니, 무릇 사람의 선하고 악함과 바르고 사악함의 그 모

든 것은 반드시 천지신귀(天地神鬼)가 내려 비춰보고 살펴 아는 것이 곧 그와 같을 따름이다. 어차피 백골로 향하는 인생에서 어찌 그리도 조급하게 한푼어치의 명리를 가지고 다툴 것인가! 나는 결단코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타고난

성품을 간직하여 뜻을 기르고, 올바른 수행의 길을 닦아 공을 세움으로서 다음 세대의 후손들에게 본보기로 남고자 하는 것이니, 비록 세상이 다하도록 알아주는 자가 없다 할지라도 성냄이 없을 것이나, 혹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이 변명을 이해하는 이를 마주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절박하게 접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무릇 섬광과도 같은 천년의 지난 일들을 바라보며, 한낱 백골로 향하는 부싯돌의 불빛과도 같은 인생에서 어찌 또 다시 명예와 치욕을 다투겠는가!

 

余嘗論之, 朝鮮之患, 莫大於無國史. 夫《春秋》作而名分正,《綱(耳)[目]》成而正閏別,《春秋》·《綱目》者, 士之賴以立者也. 我邦經史, 屢經兵火, 散亡殆盡. 後世孤陋者, 流溺於籍, 徒以事大尊爲義, 而不知先立其本, 以光我國, 是猶藤葛之性, 不謀其直而便求纏絡也, 豈不鄙哉! 自勝朝, 以降貢使北行累百年而不爲之恨, 猝以滿洲之讎爲不俱戴天, 則獨何故耶. 噫! 雖然, 若天加寧廟十年之壽, 則卽可陳兵於., 馳艦於., 縱敗衄旋至而亦不失爲近世之快事也. 乃天不假聖壽而終無其事, 幸耶? 不幸耶? 余則悽切而已矣.

 

내가 일찍이 항상 거론하던 바와 같이, 조선의 근심 가운데 나라의 역사가 없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다. 무릇《춘추(春秋)》가 저작되자 명분이 바로 서게 되고,《강목(綱目)》이 이뤄지니 바른 계통과 가외의 계통이 나누어지게 되었으나,《춘추》나《강목》같은 것은 한(漢)나라 선비들이 자기들의 사상에 의거하여 정리한 생각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경전과 사서는 누차의 병화를 거치며 흩어져 거의 없어졌다.

후세에 고루한 자들이 한나라 서적에 탐닉하여 헛되이 사대(事大)와 존화(尊華)만을 옳다고 여길 뿐, 먼저 근본을 세우고 이로서 우리나라를 빛낼 줄은 알지 못하니, 마치 칡이나 등나무의 성질이 곧바르게 나아가고자 하지는 않고 도리어 얽히고 비틀어지는 것과도 같음에 어찌 천하다 하지 않겠는가!

고려조(高麗朝)부터 스스로를 낮추어 조공하는 사신이 북쪽을 드나든지 이미 수백년인데도 한(恨)으로 여기지 않다가, 졸지에 만주의 동류(同類)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김은 유독 어찌된 까닭인가? 오호라! 비록 그러할지라도 만약 하늘이 효종에게 십년의 천수(天壽)만 더하여 주었더라면, 곧 병사를 요동의 심양으로 진군케하고 병선을 등주(登州)와 래주(萊州)로 내달리게 하였을 것인데, 설령 패하고 꺾여 되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또한 근세의 통쾌한 일이 됨은 잃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이 임금의 천수를 빌려주지 않아서 마침내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않았으니, 이것이 다행인가 불행인가? 나로서는 그저 처절하게 여길 따름이다.

 

余嘗有志於述史, 而固無其材, 且名山石室, 渺無珍藏, 以余淸貧匹夫, 亦竟奈何哉! 然何幸, 峽中得淸平所著《震域遺記》

中有三國以前故史, 雖約而不詳, 比於巷間所傳區區之說, 尙可吐氣萬丈, 於是復采史諸傳之文, 以爲史話, 頗有食肉忘味之槪矣. 雖然, 凡今之人, 孰能有志於斯而同其感者哉!《經》曰: 「朝聞道, 夕死可矣.」 亦惟此而已矣. 若天假我以長壽,

則卽可完成一史, 此不過爲其先驅而已也. 噫! 後世若有, 執此書而歌哭者, 是乃余幽魂無限之喜也.

上之二年乙卯三月上澣, 北崖老人, 序于揆園草堂.

내가 일찍이 나라의 역사를 써보고자 하는 뜻은 있었으나 본디 그 재료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으며, 또한 이름 있는 산의 석실에 조차 귀하게 비장된 것 하나 없음에, 나와 같이 씻은 듯이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서 이 또한 어쩔 도리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이 저술한《진역유기(震域遺記)》를 얻으니, 그 가운데 삼국 이전의 옛 역사가 있음에 비록 간략하여 상세하지는 않으나 항간에 떠도는 구구한 말들에 비하면 자못 내비치는 기상이 견줄 바가 아니라, 여기에 다시 중국의 사서에 전하는 모든 글들을 가려 뽑아 사화(史話)를 지으니, 그 재미로움은 밥 먹는 것도 자주 잊을 지경이었다. 비록 그렇지만 지금의 사람 가운데 과연 누가 이러한 것에 뜻이 있어 이 감흥을 같이 할 수 있으리오! 경전에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듣게 되면 저녁에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 하였으니, 오직 이를 두고 한 말 같구나. 만약 하늘이 나에게 오랜 수명을 누리게 한다면 하나의 역사를 완성하게 될 것이지만, 이는 단지 그 선구(先驅)가 될 뿐이리다.

오호라! 후세에 만약 이 책을 붙잡고 곡 소리를 내는 자가 있다면, 이는 곧 나의 유혼(幽魂)이 무한히 기뻐할 바로다.

                                                      

                                                                             숙종 2년 을묘년 3월 상순 규원초당에서 북애노인이 서문을 쓰다.

 

-------------------

 

*【濊貊】: 濊의 종족적 계통과 濊․貊․濊貊의 상호관계에 관해서는 다수의 논고가 있다. 이를 크게 대별해 보면 濊․貊同

種說과 濊․貊異種說로 나뉘어진다. 前者로는 일찍이 丁若鏞이 貊은 종족명이고 濊는 지명 또는 水名이라고 보아, 濊貊

은 九貊 중의 一種을 지칭한 것이라고 하였다. 凌純聲도 濊는 濊水地域에 거주하였던 貊族이라고 하여 동일한 이해를

하였다. 三品彰英은 先秦文獻上의 貊은 북방족에 대한 범칭이며, 濊는 秦代의 문헌에서 처음 보이는데, 漢代의 범칭적인 濊는 고구려․부여․東濊를 포괄하는 민족명이고, 濊貊이라는 熟語的인 호칭은 현실적인 민족명인 濊와 고전적인 북방족에 대한 범칭인 貊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보고, 고구려를 지칭한 貊은 민족명인 凡濊族內의 특정 부족명으로 보았다.

尹武炳은 예맥의 명칭은《史記》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濊족과 貊족을 합친 범칭이 아니라 貊족인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漢代 이후의 濊와 (濊)貊을 동일계통 내에서 각각 구분되는 실체로 보았다. 한편 臺灣의 芮逸夫는 韓민족을

濊貊과 韓의 두 계열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예맥족 중 濊족은 한반도 중북부와 송화강․길림․嫩江 등에 살았고, 貊족은 산동․요동․渤海岸 등에 거주하여, 그 거주분포에 따라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金貞培도 濊․貊․韓은 동일계열 족속으로서, 그 분포지역에 차이를 따라 각각으로 구분되어졌다고 보았다. 異種說의 대표로서 三上次男은 濊族은 有文토기문화를

영위하였고 생활방식에 있어서 수렵․어로의 비율이 컸던 古아시아族 계통이고, 貊족은 無文토기문화를 남긴 퉁구스계통으로 파악하였다. 三上次男說은 빗살문토기문화와 무문토기문화가 동시대의 것이 아니라 시대를 先後하는 문화였다는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시된다. 그런데 고구려족과 예맥과의 관계에 대해 李玉은 독특한 입론을 제기하였다.

즉, 그는 貊족과 濊족은 중국의 산서성․하북성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동쪽으로 이동해 왔는데, B.C.3세기 무렵

장춘․농안 방면에 먼저 정착해 있던 濊족은 이미 貊족에게 밀려 남쪽으로 왔다가 고조선에게 쫓겨 요동군에 예속된 것이 濊君 南閭의 집단이고, 이 濊의 일부가 貊족에 흡수되어 B.C.2세기 무렵 새로운 종족인 濊貊이 성립되었으니, 이것이

高句麗族이라 하였다. ⇦《중국정사조선전역주》盧泰敦 注.

 

* 금주(金州)는 김해, 월성(月城)은 경주, 사비(泗沘)는 부여, 웅천(熊川)은 공주, 한산(漢山)은 서울을 가리킨다.

 

*《신단실기》에 인용된《춘관통고(春官通考)》의 ‘삼성사’ 관련 내용.

 

* 朝鮮端宗壬申, 慶昌府尹李光齊䟽曰: 「臣修史, 至戊申, 有右議政致仕柳觀上書, 曰: 󰡔文化縣, 臣之本鄕, 九月山, 是縣之主山, 在檀君時, 名阿斯達山. 山之東嶺, 高大逶迤, 山之腰, 有神堂, 不知刱於何代. 北壁有檀因天帝, 東壁有檀雄天王, 西

壁有檀君父王. 縣人, 稱之曰三聖堂, 其山下, 亦稱聖堂里. 檀君入阿斯達山爲神, 此山之下, 三聖堂至今猶存, 其跡可見. 縣之東, 有地名唐莊京, 父老傳以爲檀君之都, 或者以爲, 檀君初都王儉城, 今宜合在箕子廟.󰡕 蓋檀君, 與堯並立, 至箕子千

有餘載, 豈宜合於箕子之廟歟? 臣光齊, 夷考《三國遺事》, 有曰: 󰡔檀君王儉, 以唐堯卽位後, 五十年庚寅, 都平壤始稱朝鮮, 又移都唐莊京, 還隱於阿斯達山, 爲神󰡕云. 然則檀君, 爲君於斯, 爲神於斯, 不厭於此地, 明矣. 箕子, 傳四十代; 然人衛滿, 都王儉城, 傳二世; 高句麗, 傳七百五歲; 新羅, 並二百餘歲; 高麗王氏, 傳四百餘年. 則檀君之去平壤, 遐哉邈矣, 其肯顧戀於平壤乎! 且爲神, 致土人之尊祀, 豈有樂遷於平壤, 與東明王同廟哉?《遺事》註云, 桓因天帝, 卽柳觀所謂檀因也; 桓雄天王, 卽所謂檀雄也. 邃初之人, 不忘其本, 刱立祠宇, 改桓爲檀, 號稱三聖, 果不知刱於何時也. 向者, 移檀君於平壤, 寘二聖於何地. 臣以爲, 修葺舊堂, 新作神像, 分坐左右, 尊敬如舊, 命遣朝臣, 致告聖堂, 以祈陰佑, 則豈無昭格降福耶? 或者以爲, 天帝降于檀樹下, 事涉怪誕. 然, 神人之生, 異於常. 簡狄, 呑玄鳥卵而生契, 姜嫄, 履帝敏而生后稷. 此, 中國上世之事, 豈易議爲也. 伏願殿下, 聿遵世宗之念, 延訪大臣, 究論天帝降於檀樹之源, 與夫遷主作怪之事, 廣問耆老之人, 改建聖堂之主, 幸甚.」

 

조선 단종 임신년에 경창부윤 이광제가 소(䟽)에서 말하였다. 「신이 역사를 엮음에 무신년 부분에 이르러 우의정으로

벼슬을 물러난 유관이 올린 글이 있었는데, 이르기를 󰡔문화현은 신(臣)의 본향이 온데 구월산은 그 현의 중심 되는 산으로 단군 때는 아사달산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산의 동쪽 마루는 높고도 크며 굴곡이 져 있는데 산의 허리에는 신당이 있

으니 어느 시대에 창건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북쪽의 벽에는 환인천제가 있고 동쪽의 벽에는 환웅천왕이 있으며

서쪽의 벽에는 단군부왕이 있습니다. 그 현의 사람들은 그것을 일러 삼성당이라 하며 그 산 아래 역시 성당리라 일컫습

니다. 단군께서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는데 그 산 아래 삼성당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그 족적을 가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현의 동쪽에는 당장경이라는 이름의 땅이 있는데 노인네들이 전하기를 단군의 도읍지라 여긴다 하며 혹은

단군이 처음 도읍한 왕검성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제 마땅히 기자묘에 함께 합쳐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무릇 단군께서는 요임금과 더불어 함께 일어났기에 기자에 이르기까지는 천여 년의 세월이 있는데 어찌

기자의 묘에 합쳐야만 하겠습니까? 신 광제가《삼국유사》를 자세히 살펴보니 󰡔단군왕검은 요임금 즉위 후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에 도읍하며 비로소 조선이라 칭하였으며, 또 당장경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도로 아사달산에 은거하여 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즉, 단군께서 여기에서 임금이 되셨고 여기에서 신이 되셨으니 이 땅을 싫어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기자는 40대를 전하였고, 연나라 사람인 위만은 왕검성에 도읍하여 2대를 전하였으며, 고구려는 705년을 전하였고, 신라는 거기에다 200여 년을 전하였으며, 고려의 왕씨는 400여 년을 전하였습니다. 곧 단군께서 평양을 떠난지 아득히도 먼데 평양을 돌아보아 그리워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신이 되어 지방 사람들의 존경과 제사를 받기에 이르렀는데 어찌 평양으로 옮김을 좋아할 것이며 동명왕과 사당을 같이함을 즐겨 하겠습니까?《삼국유사》의 주석에 이르기를 환인은 천제라 하였으니, 즉 유관이 말하던 단인(檀因)을 말하며 환웅천왕은 단웅(檀雄)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 태초의 사람들이 그 근본을 잊지 않아 이 사당을 세우고 ‘환(桓)’을 ‘단(檀)’으로 고쳐 ‘삼성(三聖)’이라 이름하였을 것인데 어느시대에 창건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오나 평양으로 단군을 옮긴다면 두 분의 성인은 어디에 두어야 하겠

습니까. 신이 생각키로 옛 사당을 새로 보수하고 새로이 신의 형상을 만들어 좌우에 나누어 모신 다음에 예전처럼 존경

하며, 명을 내려 조정의 신하를 보내 성인의 사당에 고함으로서 음덕의 도움을 바란다면 어찌 밝게 도와서 복을 내리지 않겠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천제께서 단수 아래로 내려왔다는 것은 그 일이 괴이하고 거짓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인의 탄생은 보통과 다르니, 간적은 제비의 알을 먹고 설을 낳았고, 강원은 상제의 발자국을 밝고는 후직을 낳았습니다.

이는 중국의 오랜 옛적 일로서 어찌 손쉽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세종의 유념을 좇으시고 대신들에게 문의하시어 천제께서 단수에 내려온 근원을 깊이 논하시며, 무릇 신주(神主)를 옮기는 괴이한 일 또한 함께 노인네들에게 널리 문의하시어 삼성당의 신주를 고쳐 세우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朝鮮成宗三年壬辰, 三聖堂, 改號三聖祠, 奉桓因桓雄檀君位版, 依平壤檀君廟例, 歲送香祝以祭.

 

조선 성종 3년 임진년에 삼성당을 고쳐 삼성사라 하였으며, 환인․환웅․단군의 위판을 받들어 모시고 평양 단군묘의 예에 의하여 향과 축문을 보내 제사지냈다.

 

* 朝鮮英祖四十一年乙酉, 命設櫝於三聖廟, 仍致祭. 先是, 成宗朝建三聖廟, 位版以土造成, 年久毁傷, 遂遣禮官, 以木爲櫝.

 

조선 영조 41년 을유년에 명하여 신주(神主)의 독[신주를 넣어 모시는 나무로 만든 궤]을 설치하고 계속하여 제사지내게 했다. 이보다 먼저 성종조 때 삼성묘를 세울 적에 위판을 흙으로 만들었더니 해가 오래 되자 헐어지고 상하였다.

이에 예관을 보내 독을 만들었다.

 

*【龍灣】: 압록강 하구에 있는 만(灣)의 옛 이름.

 

*【勿稽子】: 신라 나해 니사금 때의 사람이다. 신라가 인접국인 아라국(阿羅國)을 돕는 전쟁과 갈화성(竭火城)에 쳐

들어온 골포(骨浦)․칠포(柒浦)․고사포(古史浦) 등 세 나라를 물리치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왕손(王孫)의 시기

등으로 인해 포상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를 애석히 여기지 않고 결국에는 거문고를 가지고 사체산(師彘山)으로

들어가 버렸다. ⇦《삼국사기》권 제48, 열전 제8, 물계자條.

 

*  단군의 고사와 경전이 부여와 고구려에 전해져 번역되고 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신라가 당 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멸하고 그 서고(書庫)를 불태웠으며 민간에 흩어져 있던 것까지도 남김없이 가져다 태워 버렸다. 이 때 부여에 간직되어 있던 것이 발해에 전해졌으나 금나라가 신라와 당나라가 한 짓을 되풀이하여 다 태워 없앴다. 혹 남모르게

은밀히 감추어 둔 것이 있어 불에 타지 않고 전해진 것이 없지 않았으나 조선의 세조와 예종 및 성종 때에 이르러 팔도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거두어 올렸다가 병화로 인해 타 없어졌다. ⇦《신단실기》(각 유시 내용은 ‘구서의 유시’ 주석 참조.)

 

*【乙卯年】: 북애노인은 孝宗(1650~1659)의 北伐 실패를 애석하다 하였으니, 여기서 말하는 乙卯年은 곧 효종 이후

어느 임금의 즉위 2년 乙卯年임을 말한다. 이에 해당하는 것은 肅宗 즉위 2년 乙卯年, 즉 肅宗 원년인 서기 1675년 뿐이

므로, 이로 미루어《규원사화》의 저작 연대는 서기 1675년이 된다.

 

 

 

揆園史話卷之(上)

肇判記

 

太古, 陰陽未分, 洪濛久閉, 天地混沌, 神鬼愁慘, 日月星辰堆雜無倫, 壤海渾瀜, 羣生無跡, 宇宙只是黑暗大塊, 水火相盪不

留刹那; 如是者, 已數百萬年矣. 上界却有一大主神, 曰桓因, 有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 而不現其形體, 坐於最上之天,

其所居數萬里, 恒時大放光明, 麾下更有無數小神. 者, 卽光明也, 象其體也; 者, 本源也, 萬物之藉以生者也.

 

태고에 음과 양이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채 아주 흐릿하게 오랫동안 닫혀 있으니, 하늘과 땅은 혼돈하였고, 신과 도깨비들은 근심하고 슬퍼하였으며, 해와 달과 별들은 난잡하게 쌓여 질서가 없었고, 흙과 바다는 뒤섞여 있어 뭇 생명의 자취는 아직 존재하지 않음에, 우주는 단지 커다란 암흑 덩어리일 뿐이며, 물과 불은 잠시도 쉬지 않고 서로 움쩍이는지라,

이와 같은지가 벌써 수백만년이나 되었다.

하늘에 무릇 한 분의 큰 주신(主神)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환인(桓因)이라 하는데, 전세계를 통치하는 가 없는 지혜와 능력을 지니고서, 그 모습은 나투지 않은채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거처하는 곳은 수만 리나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밝은 빛을 크게 내뿜고, 그 아래로는 또한 수많은 작은 신들이 있었다. ‘환(桓)’이라 함은 밝은 빛을 말하는 것이니 곧 근본 바탕을 모양으로 나타낸 것이며, ‘인(因)’이라 함은 말미암은 바를 말하는 것이니 곧 만물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음을 나타낸 것이다.

 

爾時, 一大主神, 乃拱手黙想曰: 「如今, 宇宙大塊, 冥閉已久, 混元之氣, 包蘊停稸, 正要啓生化育. 若不儘時開判, 何以成無

量功德乎!」 乃召桓雄天王, 授命行剖判之業. 天王奉命辭出, 乃督諸神, 令各自大顯神通, 只看風雲晦冥黝深‧電光閃焂馳繞‧雷霆砰訇震擊諕得, 玉女失色, 百鬼遁竄. 於是, 洪濛肇判, 天地始分, 虛曠浩茫, 不可端倪. 乃命日月, 輪流相轉, 光麗於天, 照臨於地, 日行爲晝, 月行爲夜, 又命星辰周匝蒼穹, 以定四時, 以紀年日.

 

이때 한 분의 큰 주신이 손을 마주잡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 이르기를 「지금과 같이 우주의 큰 덩어리가 어둠으로 닫힌지 이미 오래되어, 천지개벽의 기운이 감싸인 채 머물러 오다가 바야흐로 낳아 길러지기를 바라니, 만약 때가 다하였음에도 세상을 열어서 구분하여 주지 않는다면 어찌 가없는 공덕을 이룰 수가 있으리오」 하고는, 환웅천왕(桓雄天王)을 불러 세상을 가르고 나누는 작업을 명하였다. 천왕은 명을 받들고 물러나와서 여러 신들을 독려하여 각자에게 스스로의 신통력을 크게 발휘하게 하니, 단지 바람과 구름이 어둑어둑한 가운데 검푸른 빛이 깊어지고, 번개불이 일어나며 번쩍이는

섬광은 쏜살 같이 치달아 얽혀 드는 것만이 보일 뿐, 우뢰와 천둥소리는 맹호가 울부짖는 소리와 같은지라, 옥녀는 놀라서 낯색을 잃어버렸고, 모든 도깨비들은 도망쳐 숨어 버렸다.

그리하여 아주 흐릿하게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하니, 그 나누어진 처음에는 텅하니 비어 있고 휑하니

넓은 것이 아무런 구별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해와 달에게 명하여 바퀴가 굴러가듯이 서로 돌아가며 하늘에서 고운 빛을 발하여 땅에 내려 비추게 하여, 해가 가는 것을 낮으로 삼고 달이 가는 것을 밤으로 삼았으며, 또한 별들로 하여금 창공을 두루 돌게 하여, 이로서 사시(四時)를 정하고 햇수와 날수를 기록하게 하였다.

 

雖然天地旣分, 日月輪轉, 而地界, 水火未定, 壤海混淪, 停稸之氣, 未卽啓發化成矣. 一大主神, 再命桓雄天王大顯法力,

只看大地, 水(涯)[滙]陸現而壤海始定, 火藏水動而萬物滋生. 於是, 草木托柢, 昆蟲․鱗介․飛禽․走獸之屬, 振振生育․

繁衍充牣於地上三界. 盖自天地始分以來, 又十萬年矣.

 

그러나 비록 하늘과 땅을 나누고 해와 달을 운행하게 하였으나, 땅에는 물과 불이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하였고, 흙과

바다는 그 원기가 아직 나뉘지 않은 채 하나로 엉켜 있었으니, 멈추어 쌓여온 기운은 아직 열려 변화하지 못하였다.

한 분의 큰 주신이 다시 환웅천왕에게 명하여 법력을 크게 드러내게 하니, 단지 큰 땅덩이만 보이던 것에서, 물이 휘돌아 나가며 뭍이 드러남에 흙과 바다가 비로소 나뉘어져 자리를 잡게 되니, 불의 기운은 잠들고 물의 기운이 움직여 만물이 무성하게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초목은 뿌리를 내리고, 곤충과 물고기 및 날짐승과 들짐승 등의 무리들은 무수히 자라나 땅 위의 삼계에 번성하여 가득하였다. 무릇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나누어진 이래 또 십만년이 지났다.

 

一大主神, 更聚衆神曰: 「今乘宇宙自然之運會, 已煩汝等出力, 剖判天地, 化生萬物, 功德自固無量. 但天地之間, 宜置萬物之長, 其名曰人, 可與天地叅爲三才, 而作萬物之主. 元來天地停稸之氣, 散爲萬物, 而靈秀之性‧貞明之氣, 則尙鍾毓而不發; 今可啓導靈秀, 發放貞明, 而別作人衆, 俾於羣生之中, 自作主宰. 但此事須先有備, 不可造次.」 乃三命桓雄天王. 天王奉令, 依計頒行. 於是, 桓雄天王大召滿天(皇)[星]宿, 令分管上天諸事, 却令主神麾下無數小神, 一幷降落下界, 主治山岳‧河川‧

洋海‧沼澤‧丘陵‧原野‧里社之基, 務要謹嚴平正, 不可有誤. 然後, 采天地靈秀之性‧貞明之氣, 造成無數人生.

 

한 분의 큰 주신이 다시 뭇 신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지금 우주의 자연스러운 기운을 타고 이미 너희들이 번거롭게

힘을 내어 하늘과 땅을 가르고 나누며 만물이 드러나게 하였으니, 그 공덕이 자고로 한량이 없구나. 그렇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마땅히 만물의 어른을 두어야 하기에 그 이름을 ‘사람’이라 할 것이니, 하늘 그리고 땅과 더불어 삼재(三才)로 삼아 만물의 주인이 되게 하리라. 원래 하늘과 땅의 멈춰 쌓였던 기운을 흩어지게 하여 만물이 되게 하였는데, 신령하고 빼어난 성질과 곧고 밝은 기운은 자못 모아 받았지만 이것을 밖으로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이제 신령하고 빼어남을 이끌어 내고 곧고 밝음을 드러내게 할 수 있게끔 따로 사람의 무리를 만들어서 이들로 하여금 뭇 생명 가운데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마땅히 먼저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며, 절대 미루어서도 안된다」 하며

환웅천왕에게 세번째로 명을 내리니, 천왕은 명을 받들어 계획대로 널리 펴서 행하였다.

이에 환웅천왕은 하늘에 가득찬 별자리를 모두 불러 하늘 위의 모든 일을 나누어 맡게 하고, 주신(主神) 휘하의 무수한

작은 신들에 명령하여 하나같이 모두 하계에 내려가 산악과 하천, 해양과 소택, 구릉과 들판 및 마을들의 바탕되는 일들을 다스리게 하며, 근엄하고 공평하게 하여 잘못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한 후에 하늘과 땅의 신령하고 빼어난 성질과

곧고 밝은 기운을 가려 모아 무수한 사람들을 만들었다.

 

一大主神, 乃四命桓雄天王曰: 「如今, 人物業已造完矣. 君可勿惜厥勞, 率衆人, 躳自降落下界, 繼天立敎, 爲萬世後生之範.」 乃授之以天符三印曰: 「可持此, 敷化於天下.」 桓雄天王, 欣然領命, 持天符三印, 率風伯‧雨師‧雲師等三千之徒, 下降太白之山‧檀木之下. 太白山者, 卽白頭山也. 衆徒推爲君長, 是爲神市氏. 自草木托柢‧禽獸滋生以來, 又十萬年也.

 

한 분의 큰 주신이 이에 네번째로 환웅천왕에게 명하기를 「이와 같이 사람과 만물을 일으키는 공적을 이미 이루어 완전하게 하였다. 그대는 그 노고를 너무 애석히 생각말고 뭇 사람들을 이끌어 몸소 하계에 내려가서, 하늘을 이어서 가르침을 세움으로서 만세토록 후생의 모범이 되도록 하라」 하고, 천부(天符)의 세가지 인(印)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널리 천하에 교화를 베풀어라」 하였다. 환웅천왕은 흔연히 명을 받들어 천부의 세 가지 인을 지니고서 풍백(風伯)․

우사(雨師)․운사(雲師) 등 삼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의 밝달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태백산’이라 함은 곧 백두산을 말한다. 뭇 무리들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니, 그가 곧 신시씨(神市氏)이다. 초목이 뿌리를 내리고 금수가 무수히 생겨난 이래 또 십만 년이 되었다.

 

-------------

 

*【卷之上】: 손진태는 손필본의 筆寫後記에서 「此書據無涯梁柱東君所藏本而轉寫. 無涯所藏, 亦非《揆園》原本則明白. 只存上卷一冊. 朝鮮思想史上, 可足謂一奇書, 故使人寫之

(이 책은 무애 양주동군이 소장한 것에 의거하여 옮겨 적은 것이다. 무애가 소장한 것 역시 원본이 아님은 명백하다.

단지 윗 권 한 책이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조선의 사상사에 있어 가히 하나의 기서라 할 만하기에 사람을 시켜 옮겨

적었다)」라고 하였듯이, 본《규원사화》를 상권으로 보고 하권은 따로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영본에서는

‘卷之’로 기록하였으니, 이는 揆園史話卷之一肇判記, 揆園史話卷之二太始紀, 揆園史話卷之三檀君紀라는 식으로 생각

하여 앞의 중복되는 부분을 생략하였을 뿐일 것이다. 그렇게 여기는 이유로는 첫째, 만약 현재의《규원사화》전체에서 서문과 만설을 제외한 부분을 ‘한 권의 윗단(卷之上)’으로 보는 것은 당시 일반적인 권의 분량에 비해 그 양이 지나치게 방대하다. 둘째, 내용의 나눔에 있어서 ‘卷’을 최소 단위로 보는게 보통이며, 하나의 卷 안에서 내용을 다시 세분할 때는 주로 上․中․下의 형식을 사용할 뿐 一․二․三 등으로 세분하지 않음을 볼 때, 이미 나누어진 권(卷之上) 안에서라면 다시

그 아랫 나눔에서 一․二․三의 형식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셋째, 손필본에서 ‘卷之上’으로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조판기․태시기․단군기’를 上卷으로 보고 下卷인 ‘열국기(列國紀)’가 따로 있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군기의 말미에서 만설(漫說)로 넘어가는 문맥에 무리가 없어 보이며, 특히 맺음말의 역할을 하는 만설에서 그 앞에 언급된 내용들을 벗어나는 새로운 내용, 이를테면 열국기와 관련된 내용(소위 ‘列國紀’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漫說’에서 「列國之時箕氏蒙東胡之侵」이라는 문구가 유일하다)이 전혀 없이 완전한 끝맺음을 하고 있기 때문에 따로 열국기가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단군기와 만설에는 권 가름의 숫자가 없으며, 조판기에는 ‘記’를, 태시기와 단군기에는 ‘紀’를 사용하고 있는 등, 권을 표기하는 방식에 있어서 체계를 잃고 있음은 사실이다.

 

*【천지창조 신화】: 각 민족 역사의 머리에 나타나는 천지창조의 신화는《규원사화》에서와 같이 거의 대부분이 한 분의 주재자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반해 자연의 상태에서 처음의 신이 태어나는 것으로 기술된《일본서기》는 특이하다 하겠다. 여기서는 몽골과 일본,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창조신화인《성경》의 창세기 부분을 인용

한다.

 

1)《몽골민속》7. 神話

 

아주 오랜 옛날 우주에 하늘과 땅 그리고 산과 물 등 아무 것도 없었던 시절에 옥황상제는 오백살이었다. 옥황상제가

일천살이 되어서야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시작했는데, 옥황상제가 하늘의 왕(天王)에게 하늘을 만들게 하고, 땅의

왕(地王)에게 땅을 만들게 하고, 물의 왕(水王)에게 물을 만들게 하고, 산의 왕(山王)에게 산을 만들게 하고서야 하늘과 땅 그리고 산과 물이 있기 시작했다. 하늘은 구름을 만들고 비를 내리는 것을 관장했고, 땅은 만물의 생장을 관장했고,

산은 산림수목을 관장했고, 물은 생명체에 수분을 공급했으나, 이 때도 하늘에 해와 달이 없어 옥황상제는 그의 아홉째 딸인 목단청모(牧丹靑姆)를 보냈다.

그녀는 금거울을 가지고 내려와 금거울로 해면(海面) 위를 일천육백번 갈자 바다가 밝아지기 시작했고, 이천육백번 갈자 동쪽에서 밝은 빛 둘레가 나타났고, 삼천육백번 갈았더니 태양이 나타났다. 후에 목단청모는 또 은거울을 가지고 바다

위를 삼천육백번 갈자 달이 나타났다. 태양이 앞에 가고 달이 그 뒤를 쫓아가는데, 태양이 곤륜산의 남쪽에 이르렀을 때 날이 밝았다. 이 때 달은 곤륜산의 북쪽에 있었으며, 달이 곤륜산의 남쪽에 이르렀을 때 날이 어두워졌다. 태양이 다시

곤륜산의 북쪽에 있었고, 해와 달은 곤륜산을 경계로 반복해서 좇아다녔다. 해와 달의 밤낮은 이렇게 해서 형성된 것

이다.

 

2)《일본서기(日本書紀)》권 제1, 神代 上

 

그 옛날 하늘과 땅이 아직 갈리지 아니하여 음양이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 계란과 같이 혼돈하였고 흐릿한 가운데 형상의 싹이 포함되어 있었다. 맑고 양(陽)의 기운을 지닌 것은 엷게 나부껴서 하늘이 되고 무겁고 탁한 것은 당기고 엉키어 땅이 되었을 때, 정교하고 미묘한 것은 상승하기 쉬웠으나 무겁고 둔탁한 것은 엉키고 굳어지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하늘이 먼저 이루어지고 땅이 그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한 후에 신이 그 가운데에서 생겨났다. 개벽의 초에 나라의 땅이 떠 움직이는 것이, 말하자면 노니는 고기가 물 위에 떠다니는 것과 같았다. 이 때 하늘과 땅 가운데 하나의 사물이 생겨났다. 갈대싹과 같았다. 문득 변하여 신이 되었다.

국상입존(國常立尊)이라 일렀다. 다음을 국협퇴존(國狹槌尊), 그 다음을 풍짐순존(豊斟淳尊)이라 하였다. 모두 세 신이다. 건도(乾道)가 홀로 변화하여 이 순수한 사내로 이루어진 것이다.

 

3)《성경(聖經)》구약(舊約) 창세기 천지창조

 

한 처음에 여호와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여호와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그 빛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여호와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첫날이 밤 낮 하루가 지났다.

여호와께서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창공을

만들어 창공 아래 있는 물과 창공 위에 있는 물을 갈라 놓으셨다. 여호와께서 그 창공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이튿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여호와께서 “하늘 아래 있는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마른 땅이 드러나거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마른 땅을 뭍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여호와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여호와께서 “땅에서 푸른 옴이 돋아나거라! 땅 위에 낟알을 내는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나무가 돋아나거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리하여 땅에는 푸른 움이 돋아났다. 낟알을 내는 온갖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나무가 돋아났다. 여호와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이렇게 사흗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여호와께서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이 생겨 밤과 낮을 갈라 놓고 절기와 나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 또 하늘

창공에서 땅을 환히 비추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만드신 두 큰 빛 가운데서 더 큰 빛은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은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또 별들도 만드셨다. 여호와께서는 이 빛나는 것들을 하늘 창공에 걸어 놓고 땅에 비추게 하셨다. 이리하여 밝음과 어둠을 갈라 놓으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이렇게 나흗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여호와께서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땅 위 하늘 창공 아래에는 새들이 생겨 날아 다녀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리하여 여호와께서는 큰 물고기와 물 속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고기와 날아 다니는 온갖 새들을 지어 내셨다. 여호와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여호와께서 이것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새끼를 많이 낳아 바닷물 속에 가득히 번성하여라. 새도 땅 위에 번성하여라!” 이렇게 닷샛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여호와께서 “땅은 온갖 동물을 내어라! 온갖 집짐승과 길짐승과 들짐승을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온갖 들짐승과 집짐승과 땅 위에 기어 다니는 길짐승을 만드셨다. 여호와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여호와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 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여호와께서 다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온 땅 위에서 낟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나무를 준다. 너희는 이것을 양식으로 삼아라. 모든 들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도 온갖 푸른 풀을 먹이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여호와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엿샛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이리하여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여호와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렇게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 하늘과 땅을 지어 내신 순서는 위와 같았다.

 

 

 

太始紀

 

神市氏旣爲君長, 以神設敎, 存其彛性, 周護飽養, 聽其繁衍, 天下民物, 於是漸盛. 但此時, 開闢不遠, 隨處草木荒茂‧鳥獸

雜處, 人民艱困殊甚, 且猛獸‧毒蟲不時衝動, 人民被害不少. 神市氏, 卽命蚩尤氏治之. 蚩尤氏, 實爲萬古强勇之(租)[祖],

有旋乾轉坤之力, 驅使風‧雷‧雲‧霧之能, 又造刀‧戟‧大弩‧巨斧‧長槍, 以之而治草木‧禽獸‧蟲魚之屬. 於是草木開除, 禽獸蟲

魚, 僻處深山大澤, 不復爲民生之害矣. 是以, 蚩尤氏世掌兵戎制作之職, 時常鎭國討敵, 未嘗少懈.

 

신시씨가 임금이 되어 신(神)으로서 가르침을 베풀며, 타고난 떳떳한 성품을 보존케하고 두루 보살펴 배불리 먹이고

양육하며 무성하게 불어남을 모두 받아들이니, 천하의 백성과 사물은 이로서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개벽한

지 아직 멀지 않은 때인지라, 곳곳에 초목이 무성하고 날짐승이며 들짐승이 어지러이 섞여 있어 사람들의 괴로움이

매우 심하였고, 더욱이 사나운 짐승과 독충들도 때를 가리지 않고 다투었기에 사람들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신시씨는 곧 치우씨(蚩尤氏)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치우씨는 진실로 만고에 있어 강인하고 용맹함의 조상이 되니, 천지를 움직여 휘두르는 힘과 바람․번개․구름․안개를 부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칼․창․큰도끼․긴창 등을 만들어 이로서 초목과 금수며 벌레와 물고기의 무리를 다스렸다. 이에 초목이 차츰 걷히고 금수와 벌레며 물고기들이

깊은 산 속이나 큰 못 속으로 피하여 달아나 숨어 버려서 다시는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해악이 되지 않았다.

이로서 치우씨는 대대로 병기 만드는 일을 맡았으며, 항시 나라 안을 편안하게 안정시키고 적을 토벌하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神市氏, 見人居已完‧蠢物各得其所, 乃使高矢氏, 專掌餽養之務, 是爲主穀. 而時, 稼穡之道不備, 又無火種, 民皆就食草蔬

木實, 啜鮮血, 茹生肉, 殆不堪其苦. 高矢[乃氏](氏, 乃)漸敎稼穡之方, 猶以無火爲憂. 一日, 偶入深山, 只看喬林荒落, 但遺骨骸老幹枯枝, 交織亂叉. 立住多時, 沈吟無語, 忽然大風吹林, 萬竅怒號, 老幹相逼, (揆)[擦]起火光, 閃閃爍爍, 乍起旋消

乃猛然, 省悟曰: 「是哉! 是哉! 是乃取火之法也.」 歸取老槐枝, (揆)[擦]而爲火, 功猶不完. 明日, 復至喬林處, 徘徊尋思,

忽然一個條紋大虎, 咆哮躍來, 高矢氏大叱一聲, 飛石猛打, 誤中巖角, 炳然生火. 乃大喜而歸, 復擊石取火. 從此, 民得火食, 鑄冶之術始興, 而制作之功, 亦漸進矣.

 

신시씨는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비되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사물들 또한 각기 그 마땅한 처소를 얻었음을 보고, 이에 고시씨(高矢氏)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일을 맡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곡식을 주관하는 일이다. 이때는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불씨 또한 없던 때라, 백성들은 모두 풀의 푸성귀나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신선한 피를 마시며 날고기를 먹었으니, 그 고초는 참아내기 어려웠다.

고시씨가 이에 점차 곡식을 심고 거두는 방법은 가르쳤으나, 여전히 불이 없는 것이 근심이 되었다. 하루는 우연히 깊은 산 속에 들어가니 높이 우뚝 솟은 나무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는 것이 온 사방으로 보였는데, 앙상하고 말라버린 체로 메마른 가지들만이 남아서 서로 어지럽게 얽혀져 있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으려니, 갑자기 숲으로 큰 바람이 불어와 모든 구멍들이 성난 목소리를 내뱉고 앙상한 가지들은 서로 밀치며 비벼대었는데, 마찰되어 일어나는 불길이 번쩍번쩍 빛나는 듯 언뜻 일어나다가는 도리어 사글어드는듯 하더니 이내 맹렬하게 타오르는지라, 깨달음이 있어 이르기를 「이것이로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바로 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로구나」 하였다. 돌아와서 마른 홰나무 가지를 비벼 불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아직까지는 완전하지 못하였다. 다음 날 다시 숲속으로 가서 생각에 잠겨 배회하고 있으려니, 홀연히 한 마리의 줄무늬 범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기에, 고시씨가 벽력과 같은 소리로 꾸짖으며 돌을 날려 호되게 내려치니 바위 모서리에 빗맞으며 번쩍이면서 불길이 일어났다. 이에 크게 기뻐하고 돌아와 다시 돌을 부딪쳐서 불을 얻게 되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주조하는 기술이 비로소 흥성하게 되었으며, 제작의 능률 또한 점차 나아지게 되었다.

 

又使神誌氏作書契. 盖神誌氏, 世掌主命之職, 專管出納獻替之務, 而只憑唯舌, 曾無文字記存之法. 一日, 出行狩獵,

忽驚起一隻牝鹿, 彎弓欲射, 旋失其(跡)[踪]. 乃四處搜探, 遍過山野, 至平沙處, 始見足印亂鑽, 向方自明, 乃俯首沈吟,

旋復猛省曰: 「記存之法, 惟如斯而已夫! 如斯而已夫!」 是日, 罷獵卽歸, 反復審思, 廣察萬象, 不多日, 悟得刱成文字,

是爲太古文字之始矣. 但後世年代邈遠, 而太古文字泯沒不存, 抑亦其組成也, 猶有不完而然歟. 嘗聞, 六鎭之地及先春

以外岩石之間, 時或發見雕刻文字, 非梵非篆, 人莫能曉, 豈神誌氏所作古字歟?

 

또한 신지씨(神誌氏)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였다. 무릇 신지씨는 대대로 임금의 명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으며 명령의

출납과 임금을 보좌하는 임무를 관리하였는데, 단지 한낱 혀에만 의지할 뿐, 일찍이 글로서 기록하여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놀라 달아나는 암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쏘려 하였으나 순식간에 그 종적을

놓쳐 버렸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며 산과 들을 두루 지나 넓은 모랫벌에 이르러 비로소 어지럽게 찍혀있는 발자국을

보니 달아난 방향이 명확하게 드러나는지라, 머리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간에 불현듯 깨달아 말하기를 「기록

하여 두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을 따름이구나! 이와 같을 따름이야!」 하였다. 그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연거푸 깊이

생각하며 널리 만물의 모습을 관찰하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글을 만들어 내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그러나 후세에 세월이 까마득히 오래되어서 태고 문자는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으니, 생각건대 그 꾸밈새가 아직은 완전하지 못해서가 아닌가 한다. 듣건대, 육진(六鎭)의 땅이나 선춘(先春) 등지의 암벽 사이에 때때로 문자를 조각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범자(梵字)도 아니요 전자(篆字)도 아닌 것으로 사람들이 능히 알아먹지 못한다고 하니, 어쩌면 그것이 신지씨가 지은 옛문자가 아닌가 한다.

 

高矢氏, 亦世掌主穀之職, 而後世蚩尤高矢神誌之苗裔, 繁衍最盛. 蚩尤氏之族, 則占居西南之地; 神誌氏之族, 則繁殖於北東之地; 獨高矢氏後裔, 廣處東南, 轉流爲辰弁諸族, 後之所謂三韓者, 皆其孫也. 三氏苗裔, 又細分九派, 卽畎夷嵎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暘夷之屬, 皆異支同祖, 不甚相遠. 之爲言, 大弓之稱也. 盖自蚩尤氏作刀‧戟‧大弩以後, 狩獵征戰, 賴以爲武, 中土諸族, 甚畏大弓之用, 聞風膽寒者久矣. 故謂我族曰.《說文》所謂: 「, [大]弓, 東方之人」者, 是也. 乃至《春秋》之作, 而之名, 遂與戎狄幷爲腥臊之稱, 憤哉! 後世畎夷風夷, 分遷西南, 恒與中土諸族, 互相頡頏, 風夷則卽蚩尤(氏)之一族也.

 

고시씨 역시 대대로 곡식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았으며, 후세에 치우씨․고시씨․신지씨의 후예들이 가장 번창하여 융성

하였다. 치우씨의 부족은 서남의 땅에 자리를 잡았고, 신지씨의 부족은 북동의 땅에 많이 정착하였는데, 오로지 고시씨

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더 이동하여 변진(辰弁)의 뭇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삼한(三韓)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삼씨(三氏)의 후예들은 또한 아홉 갈래로 자세하게 나누어지는데, 곧 견이(畎夷)․우이(嵎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暘夷)의 무리들이 모두 같은 조상의 다른 가지일 뿐, 서로 그리 멀지는

않다. ‘이(夷)’자는 큰 활을 지칭하는 것이다. 치우씨가 칼과 창이며 큰 쇠뇌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로 사냥하고 전쟁함에 있어서 이러한 것을 병장기로 삼으니 중토의 뭇 부족들이 큰 활의 쓰임을 매우 두려워하였으며, 그 위풍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곤 한 지가 오래되었기에 우리 민족을 일컬어 ‘이(夷)’라고 한 것이다.《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르기를 「이(夷)는 ‘크다(大)’는 것과 ‘활(弓)’에서 유래하였으며, 동방의 사람을 말한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중니가

《춘추》를 짓기에 이르러 이(夷)의 이름을 마침내 융(戎)이나 적(狄) 등과 아울러 비속한 명칭으로 삼아 버리니, 분할

따름이다. 뒷날 견이와 풍이는 따로 서남으로 옮겨가서 항시 중토의 여러 부족들과 서로 엎치락 뒷치락 세력을 다투었는데, 풍이는 바로 치우씨의 일족이다.

 

先是, 蚩尤氏, 雖然驅除鳥獸虫魚之屬, 而人民猶在土穴之中, 下濕之氣逼人成疾. 且禽獸一經窘逐, 漸自退避藏匿, 不便於屠食. 神市氏, 乃使蚩尤氏, 營造人居; 高矢[氏], 生致牛‧馬‧狗‧豚‧雕‧虎之獸而牧畜; 又得朱因氏, 使定男女婚娶之法焉. 盖今之人謂匠師智爲者, 蚩尤氏之訛也; 耕農樵牧者, 臨飯而祝高矢者, 高矢氏之稱

也; 婚娶之主媒者曰朱因者, 亦朱因氏之遺稱也.

 

이 보다 앞서, 치우씨가 비록 그렇게 날짐승과 들짐승 및 벌레와 물고기 등의 무리를 몰아내긴 하였지만, 사람들은 아직까지 흙굴에서 사는 까닭에 아래로부터의 습한 기운이 사람에게 해를 끼쳐 질병을 일으켰다. 게다가 짐승들을 한차례

휘몰아 내쫓으니, 점차 스스로 물러나 피하고 숨어 버린 까닭에 잡아먹기에 불편하였다. 신시씨가 이에 치우씨로 하여금 사람이 거처할 만한 것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씨에게는 소․말․개․돼지․수리․범 등의 짐승을 사로잡아 데려와서 가두어

기르게 하였으며, 또 주인씨(朱因氏)를 신임하여 그에게 남녀간에 장가들고 시집가는 법을 정하게 하였다. 무릇 지금의 사람들이 힘센 장사를 두고 ‘지위’라 함은 치우씨의 이름이 잘못 전하여 진 것이며, 밭갈고 농사짓거나 나무를 하고 짐승을 기르는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고시례’ 하며 축원하는 것은 고시씨를 일컫는 것이며, 혼인에서 중매를 서는 것을 ‘주인 선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주인씨의 이름에서 남겨진 명칭이다.

 

此時, 神市氏之降世, 已數千載, 而民物益衆, 地域愈博. 於是, 復置主刑‧主病‧主善惡及監董人民之職, 以獸畜名官, 有虎加‧牛加‧馬加‧鷹加‧鷺加之稱. 盖牛‧馬‧狗‧豚之屬, 皆當時民衆養生之料, 而賴以爲業者也; 虎與鷹‧鷺者, 境內棲息之鳥獸, 而以表官職之[性也. 後世夫餘國, 猶傳此俗, 亦以獸畜名官, 此不可殫述焉.

 

이때는 신시씨가 세상에 내려온지 이미 수천 년이 되었으니, 백성과 사물들은 더욱 많아졌고 땅의 경계는 더욱 넓어졌다. 이에 다시 형벌과 질병 및 선악을 주관하고 백성들을 보살펴 이끌 수 있는 직책을 설치하고,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이름하였으니, 호가(虎加)․우가(牛加)․마가(馬加)․응가(鷹加)․노가(鷺加) 등의 명칭이 있게 되었다. 무릇 소와 말 그리고 개와 돼지 등의 무리는 모두 당시에 백성들이 기르는 것으로서, 이에 의지하여 생업을 삼았던 것이며, 범과 매 및 해오라기 등은 나라안에 서식하는 새와 짐승들이니, 이로서 관직의 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후세 부여국(夫餘國)에도 여전히 이러한 풍속이 전해져 역시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일컬었다 하는데, 이를 모두 빠짐없이 적을 수는 없다.

 

神市氏, 旣立敎御民, 民皆協洽. 乃登太白之巓, 臨大荒之野, 觀天地寂然而氣機無息, 日月奔馳而貞明不易, 春秋代序而萬物循回, 乃推天地玄妙之理, 倚數觀變而創成人民依從之則, 是乃易理之原也. 當是之時, 遼瀋.幽燕之地, 已爲我族耕農游牧之所. 伏犧氏, 適以是時, 生於風族之間, 熟知倚數觀變之道, 乃西進中土, 代燧人之世而爲帝, 又得史皇之輔‧河圖之瑞, 畵成八卦, 爲中土易理之元祖. 盖陰陽消長之理, 發源於我而卒爲彼國之用, 近世禹倬, 以傳《易》之故, 反爲偉功, 造翁難測之意, 盖亦怪哉! 伏犧氏, 自能馴伏犧牲, 威降豺豹, 伏犧之名, 因於是也, 生於風族, 以爲故姓也. 以龍紀官者, 亦原於虎加‧馬加之類也.

 

신시씨가 이미 가르침을 세워 백성을 거느리니 백성들은 모두 서로 도우며 흡족히 여겼다. 이에 태백(太白)의 꼭대기에 오르고 대황(大荒)의 들녘에 이르러 천지를 바라보니 쓸쓸하고 고요할지언정 그 기운의 틀은 쉼이 없었다. 해와 달은 정신없이 달음박질치면서도 곧고 밝음은 변하지 않았으며, 봄과 가을은 차례대로 잇대어 가고 만물은 쉬지 않고 자꾸만 쫓아 돌아갔다. 이에 천지의 깊고도 묘한 이치는 숫자에 의지하여 그 변화를 살펴볼 수 있음을 미루어 깨닫고, 사람들이 의지하여 따를 만한 법칙을 새로 만드니, 이것이 곧 역리(易理)의 근원이다.

당시에는 요동의 심양 및 유연(幽燕)의 땅이 이미 우리 민족들이 농사짓고 유목하던 곳이었다. 복희씨(伏犧氏)가마침 이때에 풍족(風族)에서 태어나서 숫자에 의지하여 변화를 바라보는 이치에 대하여 자세히 익힌 뒤, 서쪽으로 중토로 나아가 수인씨(燧人氏)의 세상을 이어 황제가 되어 사황(史皇)의 도움과 하도(河圖)의 상서러움을 얻어서 팔괘(八卦)를 그리니, 중토 역리(易理)의 원조가 되었다. 무릇 음과 양이 줄고 늚에 대한 이치는 우리로부터 발원하였으나 마침내 저들 나라의 쓰임이 되었는데, 근세에 와서 우탁(禹倬)이《역(易)》을 전한 까닭으로 도리어 위대한 공로자가 되었다.

하니, 조물주의 헤아리기 어려운 뜻은 또한 괴이하다 할 것이다. 복희씨는 스스로 능히 희생(犧牲)을 잘 길들이고 복종케 하여 그 위엄이 승냥이와 표범에까지 이르렀기에 ‘복희(伏犧)’라는 이름이 그로 연유한 것이며, 풍족에서 태어난 까닭으로 ‘풍’을 성씨로 삼았다. 용(龍)으로 벼슬을 기록한 것 또한 호가(虎加)나 마가(馬加)라고 일컬음과 같은 유형에서 근원한 것이다.

 

神市氏御世愈遠, 而蚩尤高矢神誌朱因諸氏, 幷治人間三百六十六事, 男女‧父子‧君臣‧衣服‧飮食‧宮室‧編髮‧盖首之制, 次第成俗, 普天之下, 悉化其沾. 制治漸敷, 而政敎禮儀逐漸稍備, 初之于于睢睢草衣木食者, 始入人道之倫矣. 嗚呼偉哉!]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린지 더욱 오래되니, 치우․고시․신지․주인씨 등이 모두 같이 사람간의 삼백 예순 여섯 가지 일을

다스려, 남녀와 부자 및 군신간의 일이며, 의복과 음식 및 궁실의 일은 물론, 머리카락을 땋고 머리를 덮는 일에 관한

법도를 차례차례 풍속으로 이뤄가게하였기에 하늘이 덮고 있는 곳이면 모두 그 교화에 물들어 갔다. 제도로서 다스림이 점차 두루 미치고 다스림과 가르침이며 예절과 의례 등도 점차 따라서 조금씩 갖추어져 가니, 처음에는 아는 바가 없이 제 멋대로 날뛰며 풀로서 몸을 가리고 나무 열매를 먹던 사람들이 비로소 사람된 도리로서의 윤리에 접어들게 되었다.

오호라 그 위대함이여!

 

夫六合之外, 聖人存而不論, 六合之內, 聖人論而不議;《春秋․經世》, 先王之志, 聖人議而不辯. 鴻濛肇判而萬物滋生, 則余聞諸耆老, 神人降世而民物漸繁, 制治漸敷[政而](而政)敎始成, 則余徵諸斷簡破編. 夫六合之外, 洪荒之世, 聖人曾不詳辨區區, 後生安得以窺其一斑哉! 至如唐虞三代‧者, 中國歷代之謂也; 獫狁獯鬻荊蠻越裳之屬, 則上古戎狄之稱也. 漢武之世, 始通西域, 月氏安息奄蔡焉嗜于闐罽賓諸國, 始現於載籍中; 多民, 隨畜牧, 逐水草往來者, 及被髮裸身之類. 及若大秦之國, 遠在西海之西, 地方數千里, 領四百餘城, 小國役屬者數十, 以石爲城郭, 列置郵亭, 人皆髡頸而衣(文)[紋]繡, 乘輜軿出入所居, 城邑周(圍)[圜]百餘里, 宮室皆以水精爲柱, 以至殊俗珍風‧奇寶異貨之産, 不可殫述, 盖想見其殷富盛(疆)[彊]之風矣. .章和中, 班超甘英, 由條支欲通大秦而不果, 及至桓帝.延熹中, 其主安敦遣使始通. 降至代, 又有党項吐蕃波斯大食之國, 或交侵 洛, 或航通商舶, 而赤髮綠睛‧巨幹長軀之徒, 罕至出入宮庭. 代, 有提擧市舶司之職, 專

西域買遷之業. 近代, .萬曆中, 有利瑪竇者, 自廣東轉入北京, 有數理曆法之書, 使行之從還者, 或傳其說. 盖其國, 與古之大秦同在西域之西, 與古來諸國逈殊云. 噫! 天下廣矣, 生民之來久矣. 未知, 後世果有巨人一目之國, 復自東南來, 通於此世否.

 

무릇 우주의 밖은 성인이 그대로 간직해 둘 뿐 의론하진 않고, 우주의 안은 성인이 대체의 강령만 의론할 뿐 그 근원까지는 논의하지 않는다 하였다.《춘추》의 <경세편>에, 앞선 성군의 뜻은 성인이 명분품절만 의론할 뿐 그에 대한 자세한

시비를 논변하진 않았다 하였다. 천지자연의 원기가 처음으로 나눠지고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난 것은, 곧 내가 뭇 노인네들에게 듣기로 신시씨가 세상에 내려옴에 백성과 사물이 점차 번성하고 제도로서 다스림이 점차 두루 미쳐서 사물을

다스리는 일과 가르쳐 육성하는 일이 비로소 이루어졌다 하였으니, 이것을 내가 어찌 쪼개고 나누어 밝힐 수 있을 것인가. 무릇 우주 밖의 아주 오랫적 세상에 대해서는 성인들도 아직 하나하나 상세히 나누어 놓지 않았는데, 후손이 어찌

그 일부분일지언정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및 하(夏)․은(殷)․주(周)의 삼대 및 진(秦)․한(漢)․수(隋)․당(唐)과 같은 것은 중토의 역대를 말하는 것이며, 험윤(獫狁)과 훈육(獯鬻) 및 형만(荊蠻)과 월상(越裳) 등의 무리는 상고 시대의 중국 변방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나라 무제 때 처음으로 서역과 통하여 월지(月氏)․안식(安息)․엄채(奄蔡)․언기(焉嗜)․우전(于闐)․계빈(罽賓) 등의 나라들이 비로소 서적 가운데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많은 민족들은 목축을 하며 물과 풀을 좇아 오가고 머리를 풀어 늘어트리거나 벌거숭이 몸을 한 부류들이다. 대진(大秦)과 같은 나라는 멀리 서해의 서쪽에 있으면서 영토는 사방 수천 리에 사백여 성을 거느리고 있으니, 작은 나라로서 지배를 당하는 것이 수십 개나 된다고 한다. 돌로 성곽을 쌓고 역말의 객사를 열지어 설치하였으며, 사람들은 모두 목덜미까지만 머리를 기르고, 수놓은 옷을 입으며, 덮개가 있는 수레를 타고 거처하는 곳을 출입하며, 성읍은 그 주위가 백여 리로 궁실은 모두 수정으로 기둥을 하는 등, 별스럽고 진귀한 풍속과 기이한 보물과 재화의 산출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세히 말할 수가 없다고 하니, 그 번성하고 부강한 기풍은 그저 미루어 볼뿐이다.

한나라 장화(章和) 연간에 반초(班超)가 감영(甘英)을 보내어 조지(條支)를 경유하여 대진과 통교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환제(桓帝) 연희(延熹) 연간에 이르러 그 나라의 주인인 안돈(安敦)이 사신을 파견하자 비로소 통교

하게 되었다. 후세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또한 당항(黨項)․토번(吐蕃)․파사(波斯)․대식(大食) 등의 나라가 있어 혹은 번갈아 앙락을 침범하거나 상선을 보내와 통상을 하였는데, 붉은 머리칼에 푸른 눈을 가진 큰 몸뚱이와 큰 키의 무리들로서 드물게는 궁정에까지 출입하였다. 송나라 시대에는 제거시박사(提擧市舶司)라는 벼슬이 있었는데 오로지 서역과의 교역 업무만을 전담하였다. 근대의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이마두(利瑪竇)라는 자가 있어 광동으로부터 북경으로 옮겨왔는데 수리(數理)와 역법(曆法)에 관한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사신으로 갔던 무리 가운데 북경에서 돌아온 어떤 사람이

간혹 그 예기를 전하였다. 대저 그 나라는 옛날의 대진과 같이 서역의 서쪽에 있으나 예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하니, 오호라! 천하는 넓고도 넓으며 사람이 생겨난 지는 오래고도 오래구나. 후세에 과연 외눈박이 거인의 나라가 있어, 다시 동남쪽으로부터 와서 이 세상과 통교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盖異風殊道之國, 星羅碁布於普天之下, 時移物換而逐漸交通. 想於神市氏之世, 坐而論之, 則安知世間有奄蔡安息天竺大秦之國耶. 然則, 高辛氏之世, 所謂「執中而遍天下, 日月所照, 風雨所至, 莫不[服]從」者, 盖亦自好之(說)[言]也. 余窃(蚩)[嗤]之可惜, 近世學者, 拘於籍, 溺於儒術, 惛惛然以外夷自甘, 動稱華夷之說.

 

무릇 풍속이 다르고 법도가 틀린 나라가 하늘 아래 별처럼 늘어서 있고 바둑돌처럼 퍼져 있다가 시대가 흐르고 사물이

교환되면서 점차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생각건대 신시씨의 시대에 앉아서 세상을 얘기하면서 이 세상에 엄채나 안식이며 천축이나 대식과 같은 나라가 있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한 즉 고시씨 세대에 이른바 ‘한가운데를 잡아 그

교화가 천하에 두루 미치니, 해와 달이 내려 비치는 곳과 비와 바람이 닿는 곳마다 복종치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스스로를 훌륭하게 여긴 말일 것이다. 내가 남몰래 냉소하면서도 애석해 하는 것은, 근세의 학자들이 한나라의

서적에 얽매여 유교의 술수에 빠지고 흐리멍덩해져 ‘바깥 오랑캐(外夷)’라는 말을 스스로 달갑게 받아들여서 걸핏하면 ‘화이(華夷)’의 논리를 입에 올리는 일이다.

 

余於盛筵, 賓朋齊會, 皆雄談峻論之輩, 余因醉揚臂而呼曰: 「君等皆云華夷, 焉知我非華而中原之爲夷耶! 且者, 從大從弓, 東人之稱, 太古我朝鮮, 以武强鳴於世, 故中原之士, 聞風懼之, 夷豈是戎狄之賤名耶! 國自上古, 人皆强勇質直, 雅好禮讓, 中土有‘東方君子之國’之稱焉, 我國豈本戎狄之類哉! 鴨水以外, 縱橫萬里之地, 是乃我往聖先民, 艱苦經營之地也, 豈本是家物耶! 孔子之世, 室旣衰, 外族交侵, 厲王敗死於犬戎, 其他北狄荊蠻山戎無終之屬, 侵偪不已, 我族亦以是時, 威振中土. 故孔子, 慨王政之不敷, 恨列國之交侵, 有志而作《春秋》, 尊華攘夷之說, 於是乎始立. 若使孔子, 生於我邦, 則寧不指中土而謂戎狄之地乎!」 滿座冷笑或驚怪, 不小縱有然之者, 竟不快應, 余蹴床而起, 人皆謂淸狂殊甚, 可(難)[歎]. 前者, 滿洲之有釁, 廟議紛紜斥和者, 亦以尊爲重, 余不知其可矣. 若余復出此言於儕輩, 則渠等應必, 大驚小怪, 殆將不齒, 豈怪彼輩言. 箕子之化則信, 漢武之討滅則信, 唐高之平定則

信, 而殊不知, 我先民却有赫赫武勳之有足誇耀者耶! 余悲, 世俗不察其變漫, 以仲尼尊攘之意, 自誤焉.

 

내가 어느 성대한 잔치 자리에서 손님이며 벗들과 함께 모였는데, 모두 뛰어난 말솜씨로 그럴싸한 말들을 하는 무리들이기에 내가 취기를 빌어 팔뚝을 걷어올리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그대들이 모두 ‘화이(華夷)’를 말하는데, 우리가 어찌 중화가 아닐 것이며 중원이 도리어 오랑캐가 됨을 그대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또한 ‘이(夷)’라 함은 ‘크다’는 것과 ‘활’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하여 동방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오랜 옛적 우리 조선이 무예가 강성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린 때문에 중원의 선비들이 그 풍문을 듣고 두려워하여 그렇게 이름한 것인데, 이(夷)가 어찌 융(戎)이나 적(狄)과 같은 천한 이름이겠는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굳세고 날래며 품성 또한 강직하고 올바르기에 평소에도 예의와 양보를 좋아하여 중원에는 ‘동방 군자의 나라’라는 말이 있게 되었는데, 우리나라가 어찌 그 근본이 융․적 등의 무리와 같다는 말인가! 압록강 바깥 사방 1만 리의 땅은 예전에 우리의 성인과 앞선 백성들이 어려움으로 일구어 온 땅인데, 어찌 본시 한나라 놈들의 물건이겠는가! 공자의 시대에 주(周) 왕실이 이미 쇠퇴하여 바깥 민족들이 번갈아 침범하니 여왕(厲王)이 견융(犬戎)에게 패하여 죽게 되었고, 그 밖에 북융(北戎)이며 형만(荊蠻)과 산융(山戎) 등 끊임없는 무리들이 침략하여 핍박하길 마지않았으며, 우리민족 또한 이때에 위엄을 중토에 떨쳤었다. 때문에 공자가 왕의 다스림이 널리 미치지 못함을 개탄하고 여러 나라가 번갈아 침범함을 한탄하며 뜻이 있어서《춘추》를 지었기에, 중화를 받들고 오랑캐를 내친다는 말이 이때 비로소 쓰여지게 되었다. 만약 공자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오히려 중토를 가리켜 오랑캐의 땅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았겠는가」 하니, 모든 사람들이 비웃기도 하고 혹은 놀랍게 생각하기도 하였으며 적지 않게는 사뭇 수긍하는자도 있었으나, 결국에는 모두 쾌히 응하지 않기에 내가 상을 박차고 일어나니, 사람들이 모두 광기가 매우 심하다고 말하였다. 탄식할 노릇이다.

예전에 만주에 허물이 있다 하여 조정에서 화친이니 배척이니 하며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이 또한 주나라 왕실을 높이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이기에 나는 그것이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만일 내가 또 다시 동년배들에게 이 말을 끄집어낸다면 그네들은 응당 크게 놀라긴 하여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아마도 장차 친구로 끼워 주지도 않을 것인데, 그렇다고 어찌 저들의 말만을 이상하다 하겠는가. 기자(箕子)가 교화를 베풀었다는 것은 믿으면서 한무제가

조선을 쳐서 멸망시켰다는 것은 믿으면서, 당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였다는 것은 믿으면서, 오히려 우리의 선조들에게 충분히 자부할 만한 빛나는 무훈이 있었음은 왜 알지 못하는가. 내가 슬퍼하는 것은, 세속의 인식이 제멋대로 변한 점은 살피지 않고, 중니가 높이고 깎아 내린 것 만을 가지고 스스로를 그르치고 있다는 점이다.

 

神市肇降之世, 山無蹊隧, 澤無舟梁, 禽獸成羣, 草木遂長. 民與禽獸居, 族與萬物幷, 禽獸可係覊而(遊)[游], 鳥鵲之巢可攀援而闚. 飢食渴飮, 時用其血肉, 織衣耕食, 隨便自在, 是謂至德之世也. 民居不知所爲, 行不知所之, 其行塡塡, 其視顚顚, 含哺而熙, 鼓腹而(遊)[游], 日出而起, 日入而息, 盖天澤洽化, 而不知窘乏者也. 降至後世, 民物益繁, 素樸漸離, 蹩躠踶跂, 勞勞孜孜, 始以生計爲慮. 於是焉, 耕者爭畝, 漁者爭區, 非爭而得之, 則將不免窘乏矣. 如是而後, 弓弩作而鳥獸遁, (綱)[網]罟設而魚鰕藏, 乃至刀‧戟‧甲‧兵, 爾我相攻, 磨牙流血, 肝腦塗地, 此亦天意之固然而不可怨者也. 余嘗觀, 夫小兒纔[出胎門, 便呌救我救我者, 盖求其哺也; 纔]至行走, 便會厮打厮打者, 欲其求强也. 余於是乎知, 爭戰之不可免也.

 

무릇 신시씨가 처음 내려온 세상은, 산에는 길이나 굴이 없었고 못에는 배나 다리가 없었으며, 날짐승과 들짐승은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풀과 나무는 무성히 자라났다. 백성들은 금수와 함께 거처하며 만물과 더불어 어울리니, 금수는 굴레를

매어 같이 노닐 수 있었고, 새나 까치의 보금자리는 기어올라가 엿볼 수 있었다.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심에 때에 따라 그 피와 고기로 하였으며, 옷감을 짜서 옷을 해 입고 밭을 갈아 음식을 먹으며 편함에 따라 있는 그대로 지내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덕이 가득한 세상이다. 백성들은 살아가면서도 그 행하는 바를 느끼지 못하였고, 나아가면서도 그 가는 곳을 의식하지 않았으니, 그 행위는 당당하고 그 시야는 한결 같았다. 배불리 먹고 기뻐하며 배를 두드리고 노닐며,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니, 대저 하늘의 은혜가 널리 미쳐 궁핍함을 알지 못한 것이리라.

후세에 내려와 백성과 사물이 더욱 번창해지며 소박함에서 점차 멀어지고, 아등바등 힘쓰며 쉬지 않고 노력하게 되니

비로소 생계를 근심거리로 삼게 되었다. 밭을 가는 자는 이랑을 놓고 다투고, 고기를 잡는 자는 구역을 놓고 다투는데,

다투어 얻지 못하면 장차 궁핍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된 후에 활이며 쇠뇌를 만드니 날짐승과 들짐승은

달아나 버렸고, 그물을 만들어 설치하니 물고기와 새우들은 숨어 버렸다. 이에 칼과 창이며 갑옷과 병사가 생기게 되고, 너와 내가 서로 공격하여 이를 갈고 피를 흘리며 간과 뇌를 꺼내어 땅에 바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하늘의 뜻이라면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일찍이 보건대, 어린아이가 막 태문(胎門)을 나서며 곧 ‘응애(救我), 응애(救我)’!라고 부르짖는

것은 대개 음식을 구하는 것이며, 막 걷게 되어 곧 서로 토닥거리며 ‘쎄다(厮打), 쎄다(厮打)’! 할 줄 아는 것은 강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내가 이로서 다투고 싸우는 것이 면하기 어려운 것인 줄 알게 되었다.

 

夫, 月氏大秦之屬, 余不知其詳, 至若中國, 接隣之國也, 翼在左右而我國介處其間, 從古交爭最繁, 是亦必然之勢也.

神市氏[御世之](之御世)已遠, 而民物之生愈往愈博. 民物之生愈博而, 所以彼服‧飮食‧奉生‧送死之具, 愈見其耗. 是以,

始之熙[熙]者, 漸至忙忙, 夫忙忙求索者, 豈非爭亂之(偕)[階]歟. 及夫有巢燧人者, 西方之君也, 神市蚩尤者, 東方之

君臣也. 御世之初, 各據一方, 地域逈殊, 人烟不通, 民知有我而不識有他, 故狩獵採伐之外, 曾無險役.

 

무릇 월지나 대진의 무리에 대해서 내가 그 상세한 바를 알지 못하나, 한(漢)나라와 왜(倭) 같은 것은 인접한 나라로서

날개와 같이 좌우에 있고 우리나라는 그 가운데에 끼여 있어서 예로부터 갈마들어 다툼이 가장 빈번하였으니, 이는

필연적인 형세이다.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린지 이미 오래되니 백성과 사물이 번성하여 가면 갈수록 넓게 퍼졌다. 백성과 사물이 번성하여

넓게 퍼질수록 덮고 입으며 마시고 먹는 일과 생전에 봉양하고 죽은 후에 장사지내는 일 등에서 모두 그 소비가 눈에

뛰게 늘었다. 이러한 까닭에 처음에는 화락하기만 하다가 점차 다급하게 되어 가니, 무릇 다급하게 무엇을 구하고 찾다 보면 다투고 싸우는 순서를 어찌 밟지 않겠는가. 대저 유소씨나 수인씨는 서방의 임금이요, 신시씨와 치우씨는 동방의

임금과 신하이다. 세상을 다스리던 초기에는 각각 한쪽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땅의 구역이 사뭇 다르고 인가(人家)는

서로 통하지 않았으니 백성들은 자기들만 있는 줄 알고 다른이들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던 까닭에 수렵하고 채벌하는 일 외에는 별다른 힘든 일이 없었다.

 

降至數千載之後, 而世局已變, 且中國者, 天下之寶庫也, 沃野千里, 風氣恢暢, 我族之分遷西南者, 垂涎而轉進, 中土之民, 亦湊集而萃會. 於是焉, 黨同讎異而干戈胥動, 此實萬古爭戰之始也. 初炎帝之世, 中土之漸民至盛阜, 穀‧麻‧藥‧石之術,

亦已稍備. 及累傳至於楡罔之世, 而爲政束急, 諸侯携貳, 民心離散, 世道多艱. 我蚩尤氏與其民衆, 虎踞朔, 內養兵勇,

外觀時變, 及觀楡罔之衰政, 乃興兵出征. 選兄弟宗黨可將者八十一人, 部領諸軍, 發葛盧山名之金, 大制劒‧鎧‧矛‧戟‧大弓‧楛矢, 一幷齊整, 乃發涿鹿而登九渾, 連戰連捷, 勢若風雨, 慴(仗)[伏]萬民, 威振天下. 一歲之中, 凡拔九諸侯之地. 更就雍狐之山, 發水金而制芮‧戈及雍狐之[戟, 再整兵而出洋水, 殺至空桑. 空桑者, 今之]陳留, 楡罔所都也. 一歲之中, 更兼十二諸侯之國, 殺得(仗)[㐲]伏尸滿野, 中土之民, 莫不喪膽奔竄. 時, 楡罔使少顥拒戰, 蚩尤氏雍狐之戟, 大戰少顥, 又作大霧, 使敵兵昏迷自亂, 少顥大敗, 落荒而走入空桑, 與楡罔出奔反入涿鹿. 蚩尤氏乃於空桑卽帝位, 回兵圍攻於涿鹿之野, 又大破之.

《管子》所謂「天下之君, 頓戟一怒, (仗)[㐲]伏尸滿野」者, 是也.

 

수천 년을 내려온 뒤 세상의 형세는 이미 변화하였으며, 게다가 중국은 천하의 보고(寶庫)로서 기름진 벌판이 천리에

뻗어 있고 화창한 바람 기운은 널리 퍼져 있으니, 우리 민족 가운데 서남쪽으로 나누어 옮겨간 자들은 대단히 탐을 내어 더욱더 나아갔으며, 중토의 백성들 역시 꾸역꾸역 모여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기편끼리는 도와서 무리를 이루고,

다른 편은 그저 원수로 삼아 창과 방패로 서로 충동질을 하니, 이것이 바로 만고에 있어서 전쟁의 시작이다.

처음 염제(炎帝)의 세대에 중토는 점차 백성이 번성하여 많아졌으며, 곡식을 일구고 삼베를 자으며 약과 침을 쓰는 기술 또한 점차 갖추어져 갔다. 이로서 여러 세대를 전하여 유망(楡罔)에 이르니, 정치에 있어서는 단속하기 급급하고 제후들은 두 마음을 지녔으며 민심은 흩어져 세상의 도는 어렵기만 하였다. 우리 치우씨는 백성의 무리와 함께 황하의 이북 땅에 할거하고 앉아서 안으로 용맹스러운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유망의 정치가 쇠잔하였음을

보고 이내 병사를 일으켜 출정하였다. 형제와 종실의 무리 가운데 장군으로 삼을 만한 사람 81명을 선발하여 부장(部將)으로써 모든 군사를 통솔케하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내어 칼이며 갑옷과 중기창과 가닥창을 비롯하여 큰 활과

호목나무 화살 등을 많이 만들어 모두 가지런히 하고는 탁록(涿鹿)으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 올라 연전연승하니,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아서 세상의 만민은 두려워 엎드리고 그 위세는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한 해 만에 무릇

아홉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수금(水金)을 캐어 끈 달린 방패와 가지창 및 옹호창을 제작하여, 새로 병사를 정비하고 양수(洋水)를 떠나 파죽지세로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로서 유망이 도읍하던 곳이다. 한 해

만에 다시 열두 제후의 나라를 합치니, 죽어 엎어진 시체는 들녘에 가득하기에 중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달아나 숨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때 유망이 소호(少顥)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니, 치우씨는 옹호창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면서 또한 큰 안개를 일으켜 적병으로 하여금 혼미한 가운데 스스로 혼란케함에, 소호는 크게 패하고 황망히 물러나 공상으로 들어가더니 유망과 함께 도망 나와서 되돌아 탁록으로 들어갔다. 치우씨는 이에 공상에서 제위에 오르고 병사를 되돌려 탁록의 들판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또 크게 패퇴시켰다.《관자(管子)》에 이른바 「천하의 임금이 창을 들고

한번 크게 노하니 엎어진 시체는 들판에 가득하였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時有軒轅者, 聞知楡罔敗走而蚩尤氏爲帝, 欲代以爲君, 乃大興兵, 與蚩尤氏拒戰. 蚩尤氏, 大戰軒轅涿鹿, 縱兵四蹙,

斬殺無算, 復作大霧, 令敵軍心慌手亂, 奔竄逃生. 於是, 淮岱冀兗之地, 盡爲所據, 乃城於涿鹿, 宅於淮岱, (遷徙往來, 號令天下.) 盖是時, 中土之人, 徒憑矢石之力, 不解鎧甲之用又値, 蚩尤氏法力高强, 心驚膽寒, 每戰輒敗,《雲笈軒轅記》之所謂

蚩尤始作鎧甲‧兜鍪, 時人不知, 以爲銅頭鐵額」者, 亦可想見, 其狼狽之甚矣. 蚩尤氏益整軍容, 四面進擊, 十年之間,

軒轅戰七十餘回, 將無疲色, 兵不退. 後軒轅, 旣屢敗, 乃復大興士馬, 效蚩尤氏而廣造兵甲, 又制指南之車, 期日會戰.

蚩尤氏, 仰觀(天)[乾]象, 俯察人心, 深知中土旺氣漸盛, 且炎帝之民, 所在固結, 不可勝誅, 况各事其主, 不可漫殺無(事)[辜]. 乃決意退還, 使兄弟宗黨, 務要大戰而立威, 使敵不敢生意追襲, 復與軒轅大戰, 混殺一(陳)[陣], 然後方退. 此時, 部將, 不幸, 有急功陣沒者,《史記》所謂「遂禽殺蚩尤」者, 盖謂是也. 蚩尤氏, 乃東據淮岱之地, 以當軒轅東進之路, 及至其沒, 漸至退嬰矣. 今據《漢․地理誌》, 其墓在東平郡.壽張縣.闞鄕城中, 高五丈. .之際, 住民猶常以十月祭之, 必有赤氣,

出如疋絳, 民名謂蚩尤(氏), 豈其英魂雄魄, 自與凡人逈異, 歷千歲而猶不泯者歟.

 

이때에 헌원(軒轅)이란 자가 있었는데, 유망이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우씨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치우씨는 탁록에서 헌원과 크게 싸우며 병사를 풀어 사방에서 내려침에 참살시킨 자는 수도 없었으며, 다시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으로 하여금 마음이 흐려지고 손발이 떨리게 하니, (헌원은)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회대(淮岱)와 기연(冀兗)의 땅을 모두 점거하였으며,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잡아서 옮겨 왕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대개 이때의 중토 사람들은 단지 화살과 돌의 힘에 만 의지할 뿐 갑옷의 쓰임이나 가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치우씨의 법력이 높고도 강한 것에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져 매번의 싸움마다 번번이 참패하였다.《운급헌원기(雲笈軒轅記)》에 「치우씨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이때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구리 머리에 쇠로 된 이마로 여겼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낭패가 매우 심하였음을 상상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치우씨가 더욱 군대의 위용을 가다듬고 사방을 쳐나가며 십년 동안 헌원과의 싸움을 칠십여 차례나 하였으나, 장수는 피로한 기색이 없고 병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후에 헌원이 이미 여러 번 패하더니 이에 다시 병사와 군마를 크게 일으키고, 치우씨를 흉내내어 군사들의 갑옷을 널리 제작하였으며, 또한 지남(指南) 수레를 만들어 놓고 더불어 싸울 날을 기다렸다.

이때 치우씨가 우러러 천체의 형상을 관찰하고 굽어 민심을 살펴보니 중토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지고, 또한 염제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굳게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 버릴 수 없으며, 더욱이 각각의 백성들이 그들의 군주를 섬기는데 무고하게 함부로 죽일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물러나 돌아갈 것을 마음먹고 형제와 종실의 무리에게 힘써 크게 싸워 위세를 세움으로서 적이 감히 추격하여 습격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게 한 뒤, 다시 헌원과 크게 싸워 한

무리를 도륙한 후에 비로소 물러나왔다. 이때 부장 가운데 불행히도 서둘러 공을 세우려다 진중에서 전사한 자가 있었는데,《사기(史記)》에서 이른바 「마침내 치우씨를 사로잡아 죽였다」라고 한 것은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치우씨는 이에 동쪽으로 회대의 땅에 할거하고 있으면서 이로서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막고 있었으나, 그가 죽자 점차 물러서기에 이르렀다. 지금《한서․지리지》에 의하면, 그의 묘가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의 감향성(闞鄕城) 안에 있으며, 그 높이가 다섯 장(丈)이라 한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주민들이 한결같이 10월에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서 한 폭의 진홍빛 비단과도 같이 솟아오른다고 하니,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 이름하였다. 이 어찌 영웅의 혼백이 범상한 사람들과 사뭇 다르기에 천년이 지나고도 오히려 사라지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蚩尤氏, 雖然退歸, 中土以是蕭然, 楡罔亦不得復位, 炎帝之業, 以是永墜矣. 自是, 軒轅代爲中土之主, 是爲黃帝. 而蚩尤氏兄弟諸人, 乃永據幽靑, 聲威自是不减, 黃帝氏亦不得自安, 終其世, 未嘗

安枕高臥.《史記》所(云)[謂]「披山通道, 未嘗寧居, 邑于涿鹿(河)[河]阿, 遷(徒)[徙]往來無常處, 以師兵爲營衛」者,

盖其戰競之意, 歷歷可觀. 而《尙書․呂刑》亦云「若古有訓, 蚩尤惟始作亂」 彼之畏威, 而世傳其訓, 亦甚明矣.

 

치우씨가 비록 물러나 돌아왔지만 중토는 이로서 쓸쓸해지고, 유망 또한 다시 그 제위(帝位)를 회복하지 못하여 염제의 유업은 이로서 영원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헌원이 대신 중토의 주인이 되었으니, 곧 황제(黃帝)이다.

그러나 치우씨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황제는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사기》에 이른바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탁록에 도읍만 정하고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항상 거처하는 곳은 없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진영을 호위하게 하였다」고 한 것은 그 전전긍긍해 하는 마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상서(尙書)》의 <여형편(呂刑編)>에 또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교훈에 ‘치우씨가 오직 처음으로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으니……」라고 말한 것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대대로 그 교훈을 전하고자 함이 분명하다.

 

其後, 三百餘年無事, 只與少昊氏戰, 破之, 以至檀君元年前後, 凡闕千歲. 闕者, 萬之稱也, 今之稱久遠者, 必曰闕千歲. 闕千歲者, 盖神市氏之御世, 至萬千歲, 寔爲我國最長年代, 故也. 或曰神市氏之後, 高矢氏蚩尤氏, 相繼爲君, 前後合算, 爲闕百歲, 而檀君復立云, 此說亦近理. 大抵, 太古之事, 鴻荒(潤)[氵闊]遠, 不可得而詳矣.

 

그 후 삼백여 년은 아무일 없이 단지 소호씨(少昊氏)와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였을 뿐이니, 단군 원년에 이르기까지

전후하여 무릇 궐천년(闕千歲)이 된다. ‘궐(闕)’이란 ‘만(萬)’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즘 아주 오래 되었음을 말할 때는

반드시 ‘궐천년’이라 말한다. ‘궐천년’이란 아마도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한 이후로 1만 1천년이 흘렀다는 것이니, 진실로 우리나라가 가장 긴 연대를 지녔다 함이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혹은 신시씨의 뒤로 고시씨가 치우씨와 더불어 서로 계속하여 임금이 되었으니, 그 앞뒤를 합하여 보면 1만 1백년이 되며, 게다가 단군이 다시 나라를 일으킨 것이라

말하는데, 이러한 얘기 역시 이치에 가까울 것이다. 대저, 오랜 옛적의 일은 너무 오래고 멀어서 상세하게 알 수 없을

따름이다.

 

--------------

 

*【六鎭】: 조선 세종때 북쪽 변방을 지키기 위해 세운 여섯 개의 군 주둔지로서, 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

온성(穩城)․종성(鐘城)․회령(會寧)이다.

 

*【九夷】:《爾雅․釋地》에는 「동방의 종족인 아홉 夷族과 북방의 종족인 여덟 狄族과, 서방의 종족인 일곱 戎族과,

남방의 종족인 여섯 蠻族을 통틀어 四海라고 일컫는다」라하여, ‘九夷’에서 ‘아홉’이라는 숫자는 단지 다른 종족에 비해

종족의 갈래 등이 많음을 의미하였는데, 뒤에 이를 동이의 아홉종족으로 정형화 하기에 이르렀다.《논어․자한편》의

疏에는 「동방에 구이가 있는데, 玄菟, 樂浪, 高驪, 滿飾, 鳧臾, 索家, 東屠, 倭人, 天鄙 등이 그것이다」라 하였다.

 

*《설문해자》의 이(夷), 만(蠻), 융(戎), 적(狄).

 

1) 夷

 

[說文] 東方之人也從大從弓(동방의 사람을 말한다. ‘大’에서 유래하였으며, 또한 ‘弓’에서 유래하였다).

[注] (상략) 羊部에 이르기를 「남방의 종족을 지칭하는 ‘蠻’ 또는 ‘閩’은 곤충(虫)에서 유래된 글자이며, 북방의 종족을

지칭하는 ‘貉’은 벌레(豸)에서 유래된 글자이며, 서방의 종족을 지칭하는 ‘羌’은 양(羊)에서 유래된 글자이며, 서남의 종족을 가리키는 ‘僰人’과 ‘焦僥’는 평범한 사람(人)에서 유래된 글자들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그 땅에 순응하고 있는

것으로서 자못 그 땅의 이치에 따르는 품성을 지니고 있는데, 오직 동방의 夷만이 ‘크다(大)’는 것에서 유래되었으니

대인(大人)이라 할 만하다. 이인(夷人)의 풍속은 어질다고 하는데, ‘어질다’함은 곧 장수를 의미하므로 ‘군자의 나라’․

‘불사의 나라’라는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생각건대, 하늘은 크고도 존귀하며, 땅도 크고도 존귀하며, 사람 역시 크고도 존귀한 것이다. 크고도 존귀함을 나타내는 ‘大’자는 사람의 형상을 본 뜬 것인데, ‘夷’자의 전체(篆體)가 ‘大’자에서 유래된 것인 까닭에 ‘夷(동방)’가 ‘夏(중화)’와 더불어 다르지 않다. ‘夏’라 함은 중국사람을 말한다. ‘弓’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숙신씨가 호시 또는 석노와 같은 것을 헌납한 것을 말한다. (하략)

 

2) 蠻

 

[說文] 南蠻(남방의 종족을 말한다).

[注] <직방씨>에서는 ‘여덟 부류의 남방종족’이라 하였으며,《시경․이아》에서는 「아홉 부류의 이인(夷人) · 여덟 부류의 적인(狄人) · 일곱 부류의 융인(戎人) · 여섯 부류의 만인(蠻人)」이라 하고는 이들을 일컬어 ‘사해(四海)’라 하였다.

《왕제》에서 말하기를 「남방을 일컬어 ‘蠻’이라 한다」 하였으며,《시경․소아》의 각궁에서 「오랑캐 같은 행동을 하니」라 하고는, 그 모전에 가로되 「‘蠻’이란 남방의 만인(蠻人)을 말한다」 하였으며,《시경․소아》의 채사에서 「어리석게

준동하는 형땅의 오랑캐」라 하고는, 그 모전에 가로되 「형만이란 형주의 만인을 말한다」하였다.

[說文] 它穜從虫(뱀의 종류로서 ‘虫’에서 유래되었다).

[注] ‘蠻’자가 ‘벌레(虫)’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蠻’이 뱀의 한 종류임을 말하는 것이다. 뱀이란 벌레를 말하는 것이고 ‘蠻’이나 ‘閩’은 모두 사람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 글자가 ‘벌레’에서 유래한 까닭에 해당 부수의 끝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貉’이 豸부의 끝에 놓이고 ‘狄’이 犬부의 끝에 놓이고 ‘羌’이 羊부의 끝에 놓이는 등이 같은 것이다.

 

3) 戎

 

[說文] 兵也(병장기를 말한다).

[注] (상략)《시경․소아》에 「그럴 때는 우릴 돕지 않는다네(烝也無戎)」라 하였는데, 그 毛箋에 이르기를 「‘戎’이란 ‘相(돕다)’을 말하는 것인데, 그 파생된 뜻에서 변방민족을 뜻하는 서쪽 오랑캐가 되었다」고 하였다. (하략)

 

4) 狄

 

[說文] 北狄也(북방의 종족을 말한다).

[注] 적적(赤狄)은 이전에 중국에서 섞여서 정착하여 살던 북방종족의 일종일 뿐이다.《설문해자》의 蟲부에서는 남방

의 종족을 ‘蠻’이라 하고 동남방을 ‘閩’․‘越’이라 하였으며, 大부에서는 동방을 ‘夷’라 하고, 羊부에서는 서방을 ‘羌’이라

하였고, 豸부에서는 북방을 ‘貉’이라 하였는데, 곧 북방의 ‘貉’이란 필시 북적(北狄)을 말한 것이다. ‘狄’과 ‘貉’은 모두 북쪽에 있으나 ‘貉’은 동북쪽에 있었고 ‘狄’은 정북쪽에 있었음을 말한다.《석지》에 가로되 「아홉 부류의 이인(夷人), 여덟

부류의 적인(狄人), 일곱 부류의 융인(戎人), 여섯 부류의 만인(蠻人)」이라 하였는데, 이들을 일컬어 사해(四海)라 하였다. 여덟 부류의 만인(蠻人)은 남방에 있었으며, 여섯 부류의 융인(戎人)은 서방에 있었으며, 다섯 부류의 적인(狄人)은 북방에 있었다. 이순이 가로되 「다섯 부류의 적인(狄人)이라 함은 그 첫 번째를 일컬어 월지(月支)라 하며, 두 번째가 예맥(穢貊)이며, 세 번째가 흉노(匈奴)이며, 네 번째가 비우(箄于)이며, 다섯 번째를 일컬어 백옥(白屋)이라 한다」고 하였다.《왕제》의 명당위에서는 모두 「동방의 이인 · 남방의 만인 · 서방의 융인 · 북방의 적인」이라 하였다.

[說文] 本犬穜(본래 개의 한 종류이다).

[注] 이것은 ‘蠻’․‘閩’이 본래 뱀의 한 종류이며, ‘貉’이 본래 벌레의 한 종류이며, ‘羌’이 본래 양의 한 종류인 것과 같은 예이다.

[說文] 狄之爲言淫辟也(‘狄’은 ‘음란하다 괴벽하다’라는 말이 된다).

[注] 이것은 「공자가 이르기를 󰡔‘貉’은 나쁘다는 것을 말한다󰡕 하였으니, ‘貉’이란 곧 악함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예이다. ‘惡’과 ‘貉’ 및 ‘辟’과 ‘狄’은 모두 첩운으로 글자의 뜻을 새겼다.《풍속통》에 말하기를 「적인(狄人)들은 에비와 자식간에, 또는 제수와 시숙간에 같은 동굴 속에서 생활하면서 따로이 구별하지 않으니 ‘狄’이라

함은 편벽됨을 말한다. 그 행위는 도리에 어긋나 편벽되며 그 종류에는 다섯 부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컨대 ‘辟’은 지금의 ‘僻’자이다.

 

*  현재 중국의 남부지방 귀주성(貴州省) 등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민족인 묘족(苗族)은 ‘치우씨(蚩尤氏)’를 종족의

시조로 여긴다.

 

*  묘족의 분류와 연원은 오랜 옛적의 ‘구려(九黎)’․‘삼묘(三苗)’․‘남만(南蠻)’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 나라(중국)의 장강 중하류와 황하 하류 일대에는 아주 오랜전부터 매우 많은 인류들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누대에 걸친 번식과 힘든 노동을 통하여 지금으로부터 약 5,000여 년 전에 점차 부락연맹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부락연맹을 ‘구려(九黎)’

라고 부르는데 치우(蚩尤)를 수령으로 하고 있었다.《국어(國語)》의 <초어(楚語)>에서 「구려는 치우의 무리이다」

하였다.《서(書)》의 <여형석문(呂刑釋文)>과《여씨춘추》의 <탕병(蕩兵)> 및《전국책》<진(秦)>에서 고유(高誘)의

주석 등에 모두 ‘치우’가 구려의 임금임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우월한 지리적인 조건에 의지하여 부단히 근면하며 개척

하여 생산력을 높임으로서 사회 경제가 발전하였으며, 조국 동방의 강대한 부락으로 일약 자리잡게 되었다. 그와 같은

시기에 황제(黃帝)가 수령으로 있는 또다른 하나의 부락연맹이 황하 상류의 희수(姬水)에서 일어나 황하의 하류를 향하여 발전하고 있었는데, 구려의 치우와 충돌이 발생하여 결국에는 탁록(涿鹿)에서 구려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구려는 전쟁에서 패한 후 그 세력이 크게 쇠약해졌으나 여전히 장강 중하류 일대의 광활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묘족간사(苗族簡史)》제1장 族源, 貴州民族出版社 1985년.

 

*  묘요계苗猺系 ― 이전의 역사학자들은 옛날의 삼묘三苗가 곧 지금의 묘족苗族이라 하였으나 현대 학자들은 많이들

그것을 부인한다. 지금의 묘요는 곧 춘추 이후의 남만南蠻인데, 한漢 때는 무릉만武陵蠻, 그리고 육조六朝 시기에는

형옹주만荊雍州蠻 등의 명칭이 있었으며 송 시기에 비로소 요猺라 불려지고, 원 시기에 또 묘苗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 청 대에 이르러 더우기 ‘묘족苗族’이라는 명칭으로 서남 지역 각 성의 토착민족들을 통괄하였었다. 현대 학자들은 많이들 서남의 민족을 셋으로 나누어 분석하는데, 오로지 명칭과 작은 갈래에 있어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묘苗와 요猺는 실제로 하나의 민족이기에 합쳐서 일컫는 것이다. 그들의 주거지가 예전에는 장강 유역이었으나 지금은 물러나와 호남湖南, 귀주貴州, 광서廣西, 광동廣東 등의 산지에 거처하고 있다. ⇦ 林惠祥 著《중국민족사》제1장 중국민족의 분류

 

* 묘족(苗族) 개괄.

 

[분포 지역] 귀주성(貴州省), 호남성(湖南省), 운남성(云南省),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사천성(四川省), 광동성(廣東省).

[인구] 5,021,175명. (1982년 통계자료에 의한 수치이며, 장족(藏族) 1,338만, 회족(回族) 722만, 위구르족(維吾爾族) 596만, 이족(彝族) 545만에 이은 다섯번째의 중국 소수민족이다.)

 

*【加】

 

* 夫餘의 官名 ‘加’를 ‘家’자의 잘못된 번역으로 보거나 남자의 존칭으로 보아 ‘커’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으나,

高句麗語의 皆 및 新羅語의 翰․干 등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본래는 部族長을 의미하였는데, 뒤에 王 또는 大官의 칭호로 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滿蒙系統의 汗(Han․Kan)․可汗(Gahan․Kagan)과 같은 말로 이해

된다. 夫餘傳의 ‘加’는 部族長이나 官名에 모두 쓰이고 있는데, 이는 원래 부족장을 의미하는 말인 ‘加’가 국가 형성의

초기과정에서 族的 紐帶感이 강한 單位政治體의 大小族長勢力이 연맹적 결속의 단계를 거쳐 집권적 국가의 지배신분층으로 결집되어 가면서, 점차 중앙의 官名으로 변천되어 감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馬加․牛加․豬加․狗加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윷 말판의 도․개․걸․윷에 대응되는 명칭으로 본 견해가 있어 왔는데, 이와는 달리 馬加의 馬는

‘마리․’의 表音으로 보아 新羅의 麻立干과 같은 계통의 官名으로 보고, 牛加의 牛는 ‘우․위’의 音譯으로 보아 고구려의

于臺(優臺)와 같은 官名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중국정사조선전역주》徐榮洙 注.

 

* 「按, 加字當爲家字之誤. 猶今蒙古謂, 典羊之官曰和尼齊, 典馬者曰麽哩齊, 典駝者曰特黙齊, 皆因所牧之物以名其職.

正如《周禮》羊人犬人及漢狗監之掌. 范蔚宗不解方言, 好奇逞妄, 殊爲踳謬(생각건대, 加자는 마땅히 家자의 오자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지금의 몽고에서 양을 관장하는 벼슬을 ‘화이제’라 하고, 말을 관장하는 자를 ‘마이제’라 하고, 낙타를

관장하는 자를 ‘특묵제’라 하는 것과 같이, 모두 맡은 사물에 기인하여 그 직위를 이름한 것이다. 바로《주례》의 ‘양인’과 ‘견인’ 및 한나라 때의 구감의 직위와 같다. 범엽이 방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욱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며 망령된 것에나 만족을 느끼는 까닭에 매우 그르친 것이라 할 것이다).」 ⇦《滿洲源流考》권18 국속3 注.

 

*【幽燕】: 유주(幽州)를 포함하는 옛 연(燕)나라의 땅을 말하는 것으로, 대략 요서와 하북지방을 가리킨다.

 

*【太昊 伏羲氏】: 상고 시대의 제왕. 복희를 또는 복희(伏戲), 복희(虙戲), 복희(宓犧), 포희(包犧), 포희(庖犧)라고도

한다. 풍(風)씨 성이다. 처음으로 팔괘(八卦)를 짓고 서계(書契)를 만들었으며, 사냥하고 고기 잡으며 목축하는 것을

백성에게 가르쳤다. 진(陳)에 도읍하여 재위 115년에, 뒤로 15대를 전하여 무릇 1,260년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禹倬】: 고려 26대 충선왕 때의 학자. 관직에서 물러나 역학을 연구하였다. 송나라에서 정주학(程朱學)에 관한

책이 들어왔을 때 한 달 동안 밖에 나가지 않고 연구하여 이를 해득했다고 한다.

 

*  손필본에는 ‘官職之’ 이후 ‘性也~偉哉’의 총 358자가 빠져 있다.

 

*【唐堯】: 옛 성인으로 제곡(帝嚳)의 둘째 아들이다. 이(伊)에서 태어나 기(耆)로 옮겼으므로 이기씨(伊耆氏)라고 하고, 처음에 도(陶)에 피봉되었다가 후에 당(唐)으로 옮겼으므로 도당씨(陶唐氏)라고도 일컬어지며, 호는 요(堯)이다. 역사가들은 당요(唐堯) 또는 방훈(放勳)이라 일컫는다. 그의 형 지(摯)를 이어 제위에 올라 덕스러운 정치를 베풂에, 백성들이 강구가(康衢歌)와 격양가(擊壤歌) 등을 지어 불렀다. 아들 단주(丹朱)가 어리석어 이인(夷人)인 순(舜)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었다. 재위 98년이었다고 한다.

 

*【虞舜】: 옛 성인으로 성씨는 요(姚)이다. 처음에는 견무(畎畝)에 머무르며 효도를 다하니 그 곳의 백성들이 많이

따랐다. 당요(唐堯)가 그를 발탁하여 섭정을 시켰더니 사흉(四凶)[환두(驩兜), 공공(共工), 곤(鯀), 삼묘(三苗)]을 제거

 

*【指南車】: 중국 고대에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도록 만든 수레. 수레의 바퀴와 수레 위의 신선상(神仙像) 사이에 톱니를 이용한 일정한 장치를 설치하여 수레가 비록 회전을 하더라도 신선상의 손은 항상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도록 되어 있다.

 

*【炎帝 神農氏】: 상고 시대의 제왕. 강수(姜水)에서 태어 났기에 강을 성씨로 한다. 처음으로 쟁기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농사일을 가르쳤다. 불의 덕(火德)으로 임금이 되었기에 염제(炎帝)라고도 하며, 열산(烈山)에서 일어났기에 열산씨라고도 한다. 재위시 온갖 약초를 맛보아 그로서 질병을 치료하였으며, 저자를 열어 재화의 유통을 처음하였다. 애초에는 진(陳)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노(魯)로 천도하였으며, 120년을 재위에 있었다고 한다.

 

*《사기》<오제본기(五帝本紀)> 제1

 

* 蚩尤作亂, 不用帝命. 於是黃帝乃徵師諸侯, 與蚩尤戰於涿鹿之野, 遂禽殺蚩尤. 而諸侯咸尊軒轅爲天子, 代神農氏, 是爲

黃帝. 天下有不順者, 黃帝從而征之, 平者去之, 披山通道, 未嘗寧居…

(치우가 난을 일으키니 황제의 명령이 시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가 군사와 제후를 모아 치우와 탁록의 벌판에서

싸움을 벌여 마침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그러자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받들어 천자로 삼아 신농씨를 대신하게 하니, 이로서 황제가 되었다. 천하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음에 황제가 그에 따라 그들을 정벌하여 평정시킨 자들은 제거하였으나,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 치우씨를 사로잡아 살해하였다고 한 뒤에 거듭 ‘천하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음에’라 하였으니 여전히 저항의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  ‘치우(蚩尤) 사당’에 대한《한서》와《후한서》의 <지리지(地理志)> 기록

 

*  東郡 … 壽良, 蚩尤祠在西北泲上. 有胊城(동군 … 수량현은 치우의 사당이 그 북서쪽 제(泲)의 위에 있다. 구성이 있다). ⇦《한서》권 28 상, <지리지> 제8 상. 동군(東郡) 條.

* 東平國 … 壽張 春秋曰良, 漢曰壽良, 光武改曰壽張. 有堂聚, 故聚屬東郡.〔《地道記》曰: 「有蚩尤祠, 狗城.」《皇覽》曰: 「蚩尤冢在縣闞鄕城中, 高七丈.」〕(동평국 … 수장현은 춘추 때는 량(良)이라 하였으며, 한나라 때는 수량이라 하였는데, 광무제 때 수장으로 이름을 고쳤다. 당취가 있는 까닭에 동군에 귀속되어 있다.〔《지도기》에 이르기를 「치우의 사당이 있으며 구성이 있다」 하였다.《황람》에 이르기를 「치우의 무덤이 현의 감향성 안에 있는데 높이가 일곱장이다」라고 하였다.]) ⇦《후한서》지(志) 제21, <군국(郡國)> 3. 동평국(東平國) 條.

 

*【河→阿】:《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 원문에 의거하여 河를 阿로 수정한다. 正義에서 阿자에 대해 주석하기를 「廣平曰阿. 涿鹿, 山名, 已見上. 涿鹿故城在山下, 卽黃帝所都之邑於山下平地(넓고 평탄한 것을 ‘아’라고 한다.

탁록은 산 이름으로 이미 윗글에 나타나 보인다. 탁록의 옛 성이 그 산 아래에 있으니 곧 황제가 산 아래의 평지에 도읍

을 정한 것이다)」라 하였다.

 

*【幽靑】: 유주(幽州)와 청주(靑州). 지금의 요서와 하북성 및 산동성 일대를 가리킨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