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의 국민총력운동사'(1945)
<목차>
서론
제1장 국민운동의 선구, 한국병합과 일진회 활동
제2장 민중운동의 전성(全盛)
제3장 준국민운동으로서의 농산어촌진흥운동
제4장 국민정신총동원운동
1. 태동
2.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결성
3. 조직의 확충
제5장 국민총력운동
1. 조선의 신체제-국민총력조선연맹의 발족
2. 총력운동의 진전
3. 민의를 살린 발랄(潑剌)한 체제
4. 새로운 단계
결론
<부록>
Ⅰ. 규약의 변천
Ⅱ. 운동방침, 목표, 요목의 변천
Ⅲ. 예산의 변천
Ⅳ. 사무국 기구, 인사의 변천
Ⅴ. 연표
Ⅵ. 자료
서론
국민운동을 논하는 자 모두는 “19세기는 의회제도의 시대이고, 20세기는 국민조직의 시대이다”라고 말한다.
실로 오늘날의 세계전쟁이야말로 국민조직과 국민조직 사이의 싸움이다.
러시아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의 위기선(危機線)을 만회하고 오늘날처럼 우세할 수 있었던 것도, 독일이 모든 동원을 감행하여 오늘날 사방의 대적(大敵)과 난고를 무릅쓰고 결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국민조직을 통한 동원의 성과이다.
또 일본이 대결전을 수행하면서 국내에서 국민조직에 중대한 검토를 행하는 것도 사실은 전력(戰力)의 근원이 국민조직의 강약 여부에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민조직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일군만민(一君萬民)의 국체를 기저로 한 독자적인 조직이자 운동이다.
더구나 조선은 일본적 국민운동의 한 분야를 차지하면서 내선일체의 민족통합의 성업(聖業)을 완수하려는 점에서 또한 세계국민운동사에서 귀중한 부분을 차지한다.
대동아전쟁의 진검 단계와 정치적인 처우를 계기로 조선의 총력운동은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과거의 역사를 정리해두는 것 또한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본서의 집필은 작년 가을 대정익찬회(大正翼贊會)로부터 '대정익찬회사' 편찬에 즈음하여 그 외지편(外地編)으로서 조선의 총력운동사 집필을 위촉받은 것을 계기로 이를 보충하고 부록으로 규약, 예산,운동 목표 등의 변천도 가필한 것이다. 이 책의 집필은 주로 별항 참고자료에 의거했지만, 그밖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과 총독부 정보과에 있는 서류자료 이외에 당시 신문기사 등도 참고하였다.
역사가 새로운 만큼 이 운동의 중추에서 열심히 운동을 추진한 사람들이 도쿄와 선내(鮮內)각지에 거주하고 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반영하면 살아있는 역사를 들을 수 있겠지만, 그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문헌을 위주로 집필할 수밖에 없었던 점이 실로 유감이다.
만약 이 책의 개정 재판이 허용된다면 그들의 고심담을 반영하여 그들의 비사(秘史)를 담은 역사로만들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집필에 다대한 후정(厚情)을 베풀어준 총독부 정보과와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 여러분께 감사 말씀을 드린다.
1945년 3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 전무참사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제1장 국민운동의 선구, 한국병합과 일진회 활동
국민운동이 본령으로 삼는 바는 완전한 상의하달(上意下達), 하정상통(下情上通)에 있다.
일본의 국민운동에서 상의는 백성을 적자로 생각하는 천황의 마음이고, 하정은 천업(天業)을 익찬하는 신민의 적성(赤誠)에 있다.
국민운동의 조직과 실천도 이 점을 근본으로 삼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의 국민운동의 역사를 뒤돌아볼 때, 먼저 1910년 한국병합의 시기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조선은 오랜 역사동안 정치와 문화가 대륙세력의 지배하에 있었다. 지나의 왕을 유일한 황제로 받들어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조공을 바치고 그 연호를 사용하였다. 사람의 이름과 토지의 명칭도 지나식이었다.
지나의 현인 기자(箕子)의 후예임을 자랑으로 삼았고, 지나의 윤리 유교 주자학을 얼마나 충실히 생활원리로 받아들이는가가 인격수양의 근본이 되었다.
1894, 1895년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압도적 승리를 차지한 것은 조선이 지나 세력을 벗어나 새롭게 자기의지를 지닌 발족을 의미한다.
조선 국왕은 처음으로 황제라 칭했고, 조선에서 정한 연호를 사용하였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배우려는 젊은 청년은 새로운 정치혁신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그때까지 계속하여 아시아 요지를 탈취하던 백인 세력은 청일전쟁 종료와 동시에 조선에 밀려들어왔다.
그들은 조선에 대해 ‘은자의 나라’라는 호칭을 부여했지만, 단순한 호의적인 탐구에 만족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러시아 세력은 남하하여 조선정부를 친러파로 채우고, 조선국왕을 러시아 공사관에 기거시켜 그곳에서 발령(發令)한다는 상황이 1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러시아 세력은 더욱이 남하하여 조선해협의 요지에까지 손을 뻗치자, 일본은 분연히 들고일어나 그 세력을 저지시키고 조선은 일본의 보호 아래 놓였던 것이다.
조선이 지나 세력에서 벗어나고 러시아 세력의 먹이가 되지 않고 일본과 하나가 된 것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의 진로를 대륙에서 찾은 귀결이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왜곡된 조선 역사를 근본적으로 시정한 것이다.
야마토 민족과 조선 민족의 쌍방 언어를 비교할 때, 민속을 연구하거나 인류학적으로 비교할 때, 또는 고고학적 유물을 비교 연구할 때, 기타 모든 학문의 결론은 전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의 민족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더구나 지나 세력 아래 있기 이전, 다른 말로 한다면 1200년 이전은 신화시대부터 신들이 왕래하면서 황국의 역사권 안에 들어있었다.
더욱이 오래된 지질학자의 연구는 반도와 황국이 붙어있던 시대를 증명하고 있다.
섬나라와 반도가 어떻게 분리되어 나아갈 수 있을까?
러일전쟁 이후 보호국이었던 조선은 1910년 메이지 천황의 성단(聖斷)에 따라 일본에 병합되었다.
“직접 짐(朕)이 완무(緩撫) 아래 서서 그 강복을 증진하고자 한다.……동양의 평화는 이에 따라 유유히 그 기초가 안고(安固)해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는 역사 본연의 모습으로의 복귀임과 동시에 대동아 유신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만주 건국의 창업기에는 만주사변을 새로운 세계사의 서막이라고 말하는 논자가 많았는데, 이 말은 러일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유럽에서부터 시작된 백인의 세계사 지배는 수 백 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드디어 그 최후의 완성을 본 것이 러일전쟁이었다. 그 최강세력인 러시아의 남하 침략을 필사적으로 물리친 일본의 승리는 최초의 아시아 해방의 가장 강력한 선언이었다.
“일본처럼 강해져라” 인도, 아라비아, 이집트, 남양에서는 백인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민족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지나에서는 청나라 정권을 전복하려는 중국혁명운동이 발전하였다. 그러한 동아 각성의 기운 속에서 조선은 천황 귀일(歸一)로 성업을 단행한 것이다.
은자의 나라로서의 생기를 상실한 조선에 소생의 숨결이 깃들었다.
일군만민(一君萬民)의 일본의 이상은 이때 처음으로 아시아 일각에 힘찬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하였다.
아시아의 수리고성(修理固成)을 통한 새로운 세계사의 척 페이지는 여기에서부터 그려졌다.
병합이 되었다. 그것은 민중의 행복과 동양 평화 확립을 희구하겠다는 신념 아래 이루어진 성단이었다.
더구나 이를 받들려는 국민운동으로서 일진회 운동이 당시 한반도에 활발히 전개된 것은 현재 국민운동의 역사의 씨를 뿌린 최대의 환희라고 말할 수 있다.
일진회가 생겨난 것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8월이었다. 윤시병(尹始炳)이 회장이 되어 ‘왕실의 존중, 인민 생명 재산의 보호, 시정의 개선, 군정 재정의 정리’를 4대 강령으로 내걸었다.
이 운동에 호응하여 이용구(李容九)를 회장으로 한 진보회(進步會)가 결성되었는데, 4대 강령 이외에 동맹국 일본의 군사 원조라는 기치를 선명히 내걸었다.
일진회는 중앙에 진보회라는 지방에 세력을 두었으나 1904년 말에 두 조직은 하나가 되어 이용구를 회장으로 지휘하기에 이르렀다.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조선 내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관망하는 자가 많았는데, 일진회만은 재빨리 일본군 절대 지지를 표명하였다.
특히 일본군이 북선에서 전투할 때, 의용대를 모집하고 북진수송대(北進輸送隊)를 조직하여 후원하였다.
또 일본군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와 길림까지 적의 정보 수집에 활약하였고, 경의선 철도공사 시에도 회원은 철도공부대(鐵道工夫隊)를 편성하여 그 조속 완성에 협조하였다.
특히 일진회는 정치 활동만이 아니라 회원은 단발하고 색복의 장려, 미신 타파, 조혼 금지, 관혼상제의례의 개선 등 생활운동을 펼쳤다. 국민신보사라는 보도기관을 소유하고 지방유세, 연설회 등을 개최하여 철저히 주장을 펼치는데 노력하는 국민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이용구가 있었고, 그를 도와 가장 큰 공적을 남인 자는 송병준(宋秉畯)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지사 우치다료헤이(內田良平),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등과 간담상조(肝膽相照)하여 순수 민간의 혈맹운동으로 진전하였다.
러일전쟁이 끝나자 역사 흐름의 본질을 자각한 사람에게 이조 정부와 일본 통감부의 이원적 존재는 도저히 인정받지 못하였다.
더욱이 백인 세력에 대해 강력한 아시아의 방위를 구축하기 위한 강력한 일체화가 통감되었다.
그러한 움직임 속에서 1909년 12월 이용구는 일진회 회원 백만의 이름으로 한국황제, 일본 통감, 조선정부의 총리대신에게 한일병합의 상주문과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일본천황폐하께서는 지극히 어지시와, 우리 2천만 동포를 화육(化育)하시어 동등한 백성으로하옵실 것은 필연이옵니다. 때문에 신들은 합방을 맺어 이룩함이야말로 단군 기자 4천년의 불멸의 대전을 일으키고, 신라 고구려 3천리의 강토를 불변의 토대 위에 세우는 바이라고 말하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직 폐하께옵서는 2천만 백성의 목숨을 위해 속히 대사를 결행하시도록 청할 뿐입니다.
신 이용구 등 간절히 소망하는바 지성을 견디지 못하여, 진실로 황공하옵게도 열 번 죽을죄임을 알면서 머리 조아려 피눈물로써 삼가 상문(上聞)을 청하나이다.(한국 황제에게 올리는 상주문)
합방상주문은 그대로 당당히 국민신보에 게재되어 당시 조선의 관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일진회는 그 명칭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하나로 나아가는 일본 천황을 신뢰하고 받드는 입장에서 출발한 운동이었다.
이에 찬동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국가 정권의 이양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고, 일본 측의 태도 또한 즉시 일진회의 희망을 신장하는 정치행동을 취할 수 없었던 관계상, 일진회자체의 활동은 고난에 찬 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민의는 결국 받아들여져 1910년 8월 29일 병합의 성단이 내려졌다.
하지만 병합 이후 일본이 내건 첫 번째 정치 목표는 ‘치안의 유지, 생명 재산의 안고(安固)’였다.
원래 조선에는 정사(政社)라 칭하며 회합하여 정치를 논하고 공론(空論)을 일삼는 모임이 적지않다.
병합 이후 정치의 통솔상 불필요한 것으로 인정됨으로 각각 해산을 명한다.
(1910년 10월 5일데라우치 총독이 각 도장관에게 내린 훈시)
일진회는 1910년 9월 26일 해산되었다.
이는 병합이라는 정치혁신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조치이었지만, 일진회와 같이 올바른 국민운동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실로 애석한 일이었다.
만주국 설립과 동시에 협화회가 발전하고, 지나사변 직후에는 신민회가 발족하였다.
또 남방 여러지역이 백인 세력으로부터 벗어나자 곧바로 국민조직이 정비된 것을 바라보면서, 당시 정치가가 일진회를 활용하여 올바른 국민운동을 육성하였다면 그것이 얼마나 조선 자체의 행복이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제2장 민중운동의 전성(全盛)
조선총독통치의 근본방침은 “직접 짐(朕)이 완무(緩撫) 아래 서서 그 강복을 증진하고자 한다”는 병합성지를 어떻게 떠받들 수 있는가라는 한 점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근본이념은 그 대상인 민중의 소리를 들어보면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무단적인 헌병 통치는 병합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치안확립의 치적을 올렸지만, 그 사상 공작을 동반하지 않은 것은 사상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접했을때, 무방비라고 할 수 있다.
유럽대전 말기에 세계에 팽배한 민주주의 사상과 함께 ‘일민족 일국가 형성’의 주창은 반도전체를 뒤 흔들 대단한 폭등이 되어 전조선에 파급되었다. 1919년 3월의 사건은 이것이었다.
당국의 엄중한 태도에 의해 점차 평온을 되찾았는데 이 때 내지에서도 민주주의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조선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서도 말하는 자도 많았다.
다이쇼(大正)천황은 당시 조(詔)를 내렸다.
“짐이 조선의 강령을 위하여 그 민중을 애무(愛撫)하는 것은 일시동안으로써 짐이 신민과 아무런 차이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라는 확고한 심정을 말하였다.
“세계의 진운(進運)을 따른 총독부 관제개혁”의 성지를 명확히 밝혔다. 이러한 성지 아래 조선 통치는 문제없이 계속되었고 총독부관제는 개정되었다. 이후 총독은 육해군 대장이 부임하였고 위임 범위안에서 육해군을 통솔하였는데, 총독은 친임(親任)이 되었고 헌병제도는 경찰제도로 변경되었다.
사이토 총독은 경성 착임에 즈음하여 역전에서 폭탄세례를 받았지만 문화정치를 엄시(嚴示)하였다.
문화적 제도의 시설을 통해 조선인을 점차 유도하여 그 행복 이익의 증진을 도모하고, 장래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 아래 정치사회상의 대우에서도 내지인과 동일하게 취급할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언론·출판·집회 등에 대해서는 질서 및 공안의 유지에 방해가 없을 때에 한해 이를 고려하여 민의의 창달을 도모해야 한다.(1919년 9월 4일 사이토 총독 착임시의 훈시)
하지만 이에 응하는 민의로서 순진한 국민적 자각에 선 자는 정말로 미약하였다. 만연된 자유주의적 민의 창달이나 그에 상당한 여전히 강열한 반(反)국가적 민족자결주의의 움직임이었다.
민족자결주의운동은 다이쇼(大正) 말기부터 공산주의 운동으로 변하였다.
당시는 활발하던 일본공산주의운동에 호응하여 조선에서도 또한 몇몇 파벌과 과감한 반항(反抗) 투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관헌의 탄압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공동전선으로 신간회가 결성되었고, 부인 측에서도 근우회가 조직되어 조선적으로 활약하였다.
이러한 민중운동에 가장 커다란 전기를 제공한 것이 1931년 가을에 발발한 만주사변이다.
일본은 만주를 생명선으로 삼아 그 권익 확보를 요구하는 입장에서 한걸음 나아가 이 지역에 민족협화의 낙토로 삼아 맥인 세력으로부터 방위된 아시아의 신천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아시아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미영 세력은 모두 반대하였다. 세계전쟁 위기 속에서 일본은 그 반대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갔다. 일본 내지의 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는 새롭게 민족의 결의를 다짐하고 새로운 역사의 전개에 종래의 낡은 사상을 버리고 속속 전향하였다. 혁신적 일본주의는 국내의 사상계를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민중은 일본을 다시 바라보았다. 세계전쟁 속에서 과감히 들고일어난 일본, 그리고 만주에서 백 만의 조선인 이민을 가혹한 장(張) 군벌로부터 해방시키려고 노력하는 일본, 강한 일본의 본원인 국체 정신이 아시아 최신의 원리임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사상에도 일본을 다시 보려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감정적 병합 반대로부터 민족자결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로, 그리고 다음의 일본정신으로의 귀착을 요구하기 이전의 권요(勸搖) 모색기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사상의 동요에 호응하는 형태로 처음으로 국민운동적 색채를 지닌 농산어촌진흥운동이 총독부의 노력으로 발전하였다. 병합으로부터 1936년까지 25년간은 조선 민의 신장을 위한 민중운동은 있었지만 국가의 민으로서 국민운동은 충분히 보이지 않은 시대였다.
제3장 준(準)국민운동으로서의 농산어촌진흥운동
조선 민중을 강하게 자극한 민족자결주의와 공산주의운동이 태풍처럼 반도에 몰아닥쳤다.
이들 사상은 여러 가지 지적 논리를 나열하여 감정적 흥분과 순교적 행위의 자기 위안만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는 진정으로 민족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시정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자기 생활을 근저로부터 고칠수 있는 길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사상가와 지도자로 자인하는 자들은 형이상학적 이념으로부터 구구한 것을 논했지만, 한걸음 깊이 반도 민중들의 생활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제국주의와 공산주의로만 설명하려는 것은 민족사회의 슬픈 현실이었다.
총인구의 8할은 농민이다. 그 8할의 농가는 모두 생활이 몹시 어려운 소세농이다.
조선에는 ‘춘궁’이나 ‘보리 고개’라는 말이 있다. 가을에 수확한 식량은 봄이 되면 벌써 없어진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힘겹게 생활을 보내는 자가 수백만에 이른다고 한다.
이조시대의 가렴주구는 아주 길었다. 일하면서 생활해나간다는 사고방식이 뿌리내리지 못하였다.
무자각적인 영농이 지속되었고, 더군다나 비생산적인 주자학의 가르침인 관혼상제로 인하여 극도의 낭비가 이루어져 무지에 편승한 고리대가 발호하였다.
재계의 불황과 곡가의 폭락으로 인해 농촌의 경제적 타격은 더욱 커졌다. 지주로부터 자작농으로,자작농으로부터 소작농으로 전락한 수는 해가 갈수록 많아졌다.
이러한 농가의 갱생이 조선 통치에서 제일보라는 사실을 강하게 지적한 사람이 우가키(宇垣) 총독이다.
우가키 총독이 제창한 농촌진흥운동의 대상은 전농가 290만호 가운데 8할을 점하는 소세농 230만호이다. 그 목표는 다음과 같다.
1. 각 호의 부족식량 충실
2. 현금수지의 균형 유지
3. 부채상환
즉 춘궁 퇴치, 차입금 예방, 차입금 퇴치의 3가지로, 이를 이끌기 위해 관의 형식적 지도를 배제하고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힘을 통해 해결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민중의 지도를 위해 총독이 말한 것은 조선의 농민은 하루살이의 악습에 빠져있지만, 아직까지 순박하고 순종적이다.
그 특징을 살린 갱생운동을 추진해야 한다. 농민들에게 “잘 보여주고 들려주고 생각하고 이끌어 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다스려서 고치고 일하기”까지 나야가야 한다.
“만약 한번 조선의 농가가 그 본래의 사명과 농도(農道)의 본의를 눈뜨게 만들고, 그 영농조직을 복식화(複式化)로 이끌어 영농을 합리화시키고, 더욱이 공동화 시설을 확충시킴과 동시에 농민의 심리를 자급자족의 궤도에 올리고, 나아가 수지의 타산 즉 수입을 도모하고 지출을 억제하도록 이끈다면, 또 한편으로는 교화운동을 통해 철저한 발분건투(發奮健鬪)의 의욕을 도모한다면 조선 농촌의 현상을 타개하여 앞날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1932년 10월농산어촌진흥 관계 군수회의에서의 총독 구술강연 요지)
1932년 가을,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각 관계 국과장을 위원으로 한 조선총독부 농촌진흥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또 각 도, 각 군도(郡島), 각 읍면에 진흥위원회가 설치되어 각각의 방침을 정하였다.
같은해 가을 11월 10일 국민정신작흥조서환발기념일을 계기로 총독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이 운동을 발족시켰다.
'자력갱생휘보'는 기관지로 3만부가 각 방면에 배포되었다.
이 운동은 농가 각 1호가 모두 지도의 대상인 점이 커다란 특징이다. 경제적이고 면밀한 조사와 노력으로 대체적으로 5개년 계획을 기준으로 어떻게 하면 그 부채를 갚고 자급자족할 수 있을 것인가를 지도하였다. 조사 계획은 각 읍면 직원을 중심으로 도, 군, 학교, 금융조합, 경찰관이 일체가 되어 지도의 최전선에 나섰다.
계획에 관해서는 도군읍면의 농촌진흥위원회가 항상 지도하였지만, 갱생계획의 작성은 읍면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군수의 승인을 받았다. 각 농가는 그 갱생계획안에 따라 전가(全家) 근로지도를 실시하고 가계부를 통해 현금수지를 명확히 하였다. 연중 행사표를 작성하여 1년 계획을 세우고 노력의 분배를 원활하게 하였다. 부락에는 중견인물을 수장으로 한 진흥회를 만들어 자력공려, 상호부조를 도모하는 등 실로 면밀한 지도를 실시하였다.
이 계획은 1933, 34년도에 시험적으로 5천 수백 부락 12만호를 대상으로 계획되었고, 더욱이 1935년 부터 10개년 계획으로 추진되어 7만 부락 220만호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
어촌에 대해서도 어업조합을 지도 주체로 삼아 전선 2,500부락 10만호에 대한 갱생계획의 확충을 향후 10개년간 실시하게 되었다.
총독은 전 조선을 빠트리지 않고 순방하여 농촌을 격려하고 농민을 편달하는 등 열정으로 지도하였다.
관헌 측에서 이 정도로 민중의 생활에 직접 다가간 것은 통치 개시 이후 처음이었다.
공산주의 운동이 농민의 생활을 파고들었지만, 이에 수 백 배의 조직과 정열로 지도를 실시하였다.
이 업무는 명실 공히 전선의 총동원 즉 모든 공사(公私) 기관, 모든 계급, 모든 민중이 협력 일치하여 조선의 갱생, 제국의 흥륭(興隆)을 위해 최대 능률을 발휘하여 매진하고 있는 바, 반도 최고이자 가장 중요한 사업입니다.
이것이 완성되었을 때에는 내선의 융화, 악사상의 시정, 노자(勞資)의 협조, 악습의 타파, 경제의 갱생, 생활의 안정 내지는 향상, 지방자치의 발달 등 모든 것이 이 분위기에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단언합니다. 즉 이러한 대사업에 대한 일반의 태도가 당국의 교질(交迭)과 세월의 경과로 인해 뜨거워지거나 식고, 생기거나 없어지고, 때로는 정돈(停頓)되지는 않을까라는 의심을 품는다면 조선은 영구히 맑아지지 않는다. 영원히 다시 일어서는 것이 어려워져 동아의 천지는 이로 인해 명랑쾌활하지 못하고 영원히 악기류에 빠져들지 않을지 염려됩니다.
(1934년 1월 각 도농촌진흥지도 주임자 회합에서의 구술강연 요지)
우가키 총독의 이러한 기염(氣焰)에는 커다란 포부가 있었다.
조선의 산업개발에 대한 총독의 열의는 내지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 대규모 공업을 일으켰다.
산금(産金)의 열기를 불태우고 북선개척사업을 추진하고 남면북양계획을 수립하여 경제적으로 발달한 조선으로 만들려 하였다.
농촌진흥에 열중한 반도는 언젠가 농공병진으로 급속히 변모되었다.
조선이 오늘날 대동아 결전에 전력(戰力) 기지로서 경제력으로 위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실로 이 시대의 진흥운동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운동이 끝날 무렵에는 도시의 교화갱생의 필요성도 역설되었다.
이 운동은 관민 모두가 추진한 것이기 때문에 민중운동으로부터 국민운동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의 운동으로서 조선에서는 ‘준국민운동’의 역할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4장 국민정신총동원운동
1. 태동
농산어촌진흥운동에는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하나의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개인 생활의 개선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부채를 갚고 부유한 집이 되는가가 목표이다.
강습회에서 설파된 인생의 이상은 ‘건강’, ‘활동’, ‘평화’ 세 가지였다.
농산어촌진흥운동 시대에 항상 제시된 모범은덴마크의 자작농 98%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개인이 잘 살더라도 덴마크와 같은 약한 민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생 생활의 이상(理想)에서는 ‘건강’, ‘활동’, ‘평화’ 세 가지를 넘은 순국의 정신이 강조되어야 한다.
조선과 같이 개인 생활의 건설적 애정을 상실한 곳에 이러한 진흥운동은 과정으로서 필요하다고 말할수 있다.
하지만 시대와 환경은 그 사상적 기반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압록강 너머에는 자본주의를 강렬히 배제하여 왕도낙토 건설을 외치는 신흥 만주국이 착착 그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그곳에는 정예(精銳)한 일본의 청장년의 열의를 호흡하여 아시아 유신 달성을 서둘러 신세계사의 정열을 넓혀가고 있다. 만주국은 사상적, 국방적, 경제적으로도 일본의 국책을 지도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조선이 추진한 건설은 사상적으로 너무나도 보잘 것 없었다.
국제적 위기 속에서 일본은 과감히 고도국방국가로 개편을 서둘렀다. 조선인들의 생활이 점차 나아지고 일본과의 일체성이 가까워지면서 덴마크적 민생보다는 더욱이 강력한 일본적 국민감정과 국가적 훈련이 희구될 수밖에 없었다.
1937년 7월, 지나사변이 일어났다. 반도를 종단하여 많은 일본의 정예는 폭악한 지나를 응징하는 성전에 나섰다.
조선인들은 만주사변에서 지나사변을 거치면서 일본이 외치는 아시아 유신의 구상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아시아는 지금 미영의 침략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미영의 괴뢰인 장(莊) 정권은 타도되어야한다.
반도인들의 애국열은 높아져 철도 연변의 전답에서 황군 장병을 보내는 농민들은 호미와 가래를 높이들고 만세를 외친다.
각 역에서는 히노마루를 흔들며 “하늘을 대신하여 불의를 없애자”는 군가를 부르고 있다. 또한 전선에서의 외침은 여러 곳에서 들려온다.
미나미 총독은 당시 다음과 같은 3항목의 민심 지도방침을 내걸었다.
(1) 반도 주민에게 널리 중대성을 철저히 주지시킬 것
(2) 오늘날 진정으로 동아의 안정 세력으로서 전국(全局)의 안위를 짊어진 일본제국의 지도적 지위를 내선일체인 반도의 민중에게 확인시킬 것
(3) 지나의 전모를 올바르게 일반에게 이해시킬 것
여기에서 ‘내선일체’의 표어가 확실히 주창되었다. 사상적으로 동요모색기였던 조선은 이때부터 분명일본정신 탐구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철은 뜨거울 때 때려라” 조선에서 달아오르는 애국정신의 풍파 속에서 그 민심을 올바르게 추진시킬궤도와 지도가 무엇보다 필요하였다.
미나미 총독은 사변 발발 직후, 신문관계자, 재계 실업계 유력자, 중추원 참의, 종교가, 사회단체 대표자, 민간학자, 교육자, 사상가 등을 초대하여 솔직히 소신을 피력하면서 시국의 중대성을 주지시키고 협력을 요청하였다.
이들 민간인들은 적극적으로 움직여 조선 각지에 강연회를 개최하고 선전인쇄물을 연이어 발행하였다.
무더위 속에서 90명의 조선 측 민중지도자가 각 도에 파견되어 이러한 시국에 일본과 생사를 함께 해야 할 조선인의 사명의 중대성을 외쳤다. 그중에는 최근 몇 년 전까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로 민중의 열광적 지도자였던 사람들도 이름을 내걸었다. 이들 강연회는 항상 만 원이었다.
시국은 민중의 지도자를 국민의 지도자로 바꾸었다. 민중운동으로부터 국민운동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7월 말에는 총독부 안에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중앙정보위원회가 결성되어 정보 선전과 관련된 중요사항이 심의되었다. 이는 내지의 내각정보부의 전신인 정보위원회를 모방한 것인데, 관보 부록의 '통보'를 발행하여 시국 뉴스를 각 지방에 배포하고 선전에 힘을 쏟았다. ‘국민정신총동원강조주간’이나 ‘총후보국강조운동’ 등 당시의 주간 행사에 관민일체가 되어 성전(聖戰) 총후를 강조하였다.
1937년 10월에는 황국신민의 서사가 제정되어 조선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의식, 행사, 기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항상 낭독하게 되었다.
11월에는 종래 제각각 실시되던 것을 관공서, 회사 은행, 공장, 각종 단체, 정동리, 부락을 단위로 전면적으로 1일 혹은 15일 기타 적당한 날을 애국일로 정하여 황성요배, 신궁참배, 국기계양, 황국신민의 서사를 낭독하고 적당한 강화를 하는 행사를 장려하였다. 국민적 행사의 모습이 정해진 것이다.
1938년 1월에는 도지사회의에서 3월부터 지원병제도 실시, 4월부터 교학쇄신과 그 확충이 결의되었다.
징병제와 의무교육의 전주(前奏)이다. 내선일체의 궤도가 확실히 깔려졌다.
모든 시책에 달아오르는 반도의 고동이 감지되었다.
지나사변이 장기전으로 접어들자 국민들은 궁극적으로 다음 전쟁으로의 건설전이어야 한다는 것을자각하기 시작하였다.
준전시체제로부터 순전시체제로, 국가총동원의 계획시대로부터 그 실시의 단계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적 물적 자원의 총동원 실시계획이 추진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의 총동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내지에서는 지나사변 발발 직후, 8월 말에는 ‘거국일치’, ‘진충보국’, ‘견인지구’ 등 세 가지 목표로 국민정신총동원실시요강이 결정되었다.
9월에는 고노에(近衛) 총리대신이 정신총동원운동의 연설회에서 몸소 첫 목소리를 냈고, 각 대신 또한 각지의 연설회에서 그 급무를 역설하였다. 10월에는 내각의 외곽단체로 국민정신총동원중앙연맹이 결성되었다.
이 운동은 지방에 대해서는 지방장관을 중심으로 관민합동의 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지시되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에 즉시 반응해 총독부를
중심으로 조직 결성 준비가 이루어졌다.
내지의 운동과 조선의 운동은 요청되는 시국의 움직임으로 인해 같은 방법과 조직이 구상되었지만,거기에는 세 가지의 근본적 차이가 있었다.
첫째, 내지에서는 정당, 군부, 재계, 국가주의 단체 등이 각각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고 복잡한 세력 분포로 인해 그 지도자의 일체화가 아주 어려웠지만, 조선에서는 총독부의 정치력 앞에 종래의 민간단체 등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통일적인 지도체의 결성이 내지보다 훨씬 용이하였다.
둘째, 내지에서는 하나의 환경 속에 오랜 역사를 지속해온 민족이기 때문에 많은 외래사상이 들어오더라도 국체 관념 아래 이들을 부식시켜 일치단결하는 것이 용이하지만, 조선에서는 2천 수백만의 백성에 국체 관념을 침투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더욱이 어떻게 하면 내지인과 조선 재래인(在來人)이 일체가 될 것인가가 선결문제이었다.
셋째, 참정권을 갖고 상당한 훈련의 세월을 거친 내지와 달리 반도에서는 정치운동과 혼동되지 않도록 어디까지나 행정과 일체의 관계에 있는 정신적 실천단체일 필요가 있었다.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결성으로부터 신체제운동, 대정익찬회의 발족까지 내지의 국민운동이 많은어려움을 겪은 것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훨씬 용이하게 그 조직의 결성이 추진된 것은 첫 번째 이유 때문이었지만, 이와 동시에 두 번째, 세 번째 과제를 내포하면서 출발하였다.
‘국민운동’이라는 말을 총독이 공공연하게 발언한 것은 1938년 4월 도지사회의 석상이었다.
여기에서미나미 총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국 대처의 시정에 개절(凱切)을 도모할 때, 이의 실행 운용에 필수적인 것은 실로 관민이 하나가 되는 유기적 조직이다. 환언한다면 국가 비상사태의 계속 또는 발전에 처하여 일사불란한 통제아래 유효한 국민적 활동을 실시할 조직과 훈련입니다.
생각건대 시정 이후 관민협조의 미풍을 지켜온 우리 조선은 국민운동의 통제강화 또한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 때문에 반도의 관민은 중앙과 지방이 서로 호응하여 먼저 모범을 일본 전국에 보여준다는 기개와 포부로 일정발안(一定發案) 아래 적절한 실행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이처럼 국민운동의 발족이 일본에 자랑할 수 있다고 명시되었다. 총독은 동시에 훈시 중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하 최대의 시무는 도의(道義)의 근원을 명확히 하여 국민적 신념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이의 구체화로서 내선일체의 실적으로 숭고한 사명, 완성한 경륜을 동아에 수행하여 세계의 모범이 되는 것이다.
이는 반도에 있는 국민이 일시동인의 성은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자 스스로 황국신민으로서의 복지를 구현하는 길이다.
내선 관민 누구를 불문하고 만약 이러한 대도의(大道義)로 나아갈 필연의 사명을 깨닫지 못하거나 내선일체 관계의 심화를 바라지 않는 다른 마음을 품는자가 있다면 나는 단호한 태도로 이들 무리에 대응할 것을 이 자리에서 확실히 밝혀둡니다.
바로 여기에 조선의 국민운동 출발기에 최고 지도자가 품은 근본적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조선에서 국민운동 구체안은 시국대책준비위원회에서 구상되었다. 이 기구는 1938년 2월 정무총감을위원장으로 조선총독부 안에 결성된 것으로 “시국의 항구화에 따라 내선일체의 취지 아래 반도에서 물심양면으로 체제 강화책을 확립하는 것과 조선이 일본의 대륙 진출의 버팀목으로서의 중요성이 가중되었다는 깊은 자각 아래 대외적으로 적극적으로 발전한다”는 두 가지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내선일체의 강화’ 방안으로 국민정신총동원운동 구상의 수립이 연구되었다.
2.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결성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내지는 내각 정보부, 내무성 및 문부성이 계획 주무청이었지만, 조선에서는 학무국을 중심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무국장은 시오하라 도키사부로(鹽原時三郞), 사회교육과장은 김대우(金大羽)였는데, 이 두 사람은 관의 입장에서 국민운동을 만든 산파 역할을 수행하였다. 국민운동은 사변 이후 강력한 조직 편성을 추진하던 민간인들의 애국열과 관의 지도가 결합된 것이었다.
6월 12일 야나베 에이사부로(矢鍋永三郞), 마에다 노보루(前田昇), 니와 세이지로(丹羽淸次郞), 하야시 시게키(林茂樹), 윤치호(尹致昊, 伊東致昊), 한상용(韓相龍), 가다 나오지(賀田直治), 조병상(曺秉相,夏山茂), 박영철(朴榮喆), 최린(崔麟, 佳山麟) 등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결성의 준비위원 10명이 총독부에 모여 협의하고, 14일 총독부에서 정식으로 발기인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조선연맹 규약안의 작성, 발기인의 인선, 연맹 사무소의 결정 등을 행한 다음, 6월 22일 경성부민회관에서 조선의 유력단체 65, 내선 유력자 57명으로 발기인회를 열고 조선연맹 설립의 취지 및 연맹 규약안을 심의 결정하였다.
또 오노(大野) 정무총감을 명예총재로 추대함과 동시에 본 연맹의 하부조직인 지방연맹의 결성을 독려하기 위해 지방장관 및 지방 각 방면(중추원 참의, 부윤, 도, 부회 의원, 상공회의소 회두, 금융조합 각 도 연합회 이사, 읍장, 군도청 소재지 면장 등)에 지방연맹을 결성하고 조선연맹에 가맹하는 의뢰장을 발송하였다.
이러한 발기인회의 결정에 따라 7월 1일 부민관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발기인 이하 500여 명이 참석하여 야나베 에시사부로를 좌장으로 추대하고 취지 및 연맨 규약을 결정한 다음, 이사장으로 시노하라 학무국장을 추대하고 이어서 각 역원을 결정한 다음 총회를 종료하였다.
당시 결정된 취지는 다음과 같다.
취지
생각건대 이번 지나사변은 동아의 화근 항일정권을 타도하고 광휘(光輝) 있는 황도정신을 발양하여 세계평화에 공헌하려는 성전으로서 우리 건국의 정신, 일본의 대사명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후 1년 황군은 연전연승하여 한토(漢土)의 절반을 석권하였고, 총후의 국민은 거국일치 진충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있다.
우리 반도에서는 총독이 반도의 방위를 분명히 하고 민중이 나아가야할 길을 제시하였다.
또한 반도의 민중은 국민적 자각을 환기하고 내선일체가 되어 총후의 적성을 다하고 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존엄한 위세를 보이고, 황국신민이 되었다는 감격에 겨워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국제정세는 복잡다단하고 점점 미묘한 사태의 추이를 보여 낙관할 수 없다.
나는 이러한 용이하지 않은 시국을 재인식하여 더욱 국민정신을 강화하고, 금후 어떠한 난국을 만나더라도 항상 견인지구하여 만난(萬難)을 극복함으로써 국민적 사명의 달성을 도모하고자 한다.
당국은 이러한 정세를 감안하여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철저히 시행하여 존엄한 우리 국체를 본받아 진충보국의 정신을 앙양하고, 이를 국민의 일상생활의 실천으로 구체화하고 항상화(恒常化)하여 소기의 목적을 관철시키고자 한다. 이는 또한 국민 전체의 의지이자 의무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결성하여 사회 각 방면에 걸쳐 동일한 지도정신 아래 운동을 통제 강화하고, 진정한 관민협력 내선일체 국체에 순응하여 총후를 간고히 지킴으로써 시국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한다.
1938년 6월 22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당시 정해진 규약은 제2조에서 “본 연맹은 내선일체 거국일치 국민정신총동원의 취지 달성의 도모를 목적으로 하고, 본 취지에 찬동한다”고 규정하였다. 또 제3조의 사업 중에는 “가맹단체 및 개인 상호간의 연락 조성과 가맹단체 이외의 여러 단체 및 본 운동 실시기관의 활동 원조”의 1항이 결의되었고, 제5조에는 “본 연맹 설립 이후 가맹하려는 자는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한다”고 규정되었다.
이를 보면 오늘날 조선연맹 규약에 “조선의 모든 국민 및 참가단체로 조직한다”는 것에 비해 참가가 자유의지에 따른 운동이고, 또 가맹단체 이외의 단체 시인에 그 목적을 두고 있음이 명백하다.
모든 것을 포괄 통제하는 단체로서 출발하지 않은 것이다.
임원에는 총재, 이사장, 이사, 평의원, 고문, 참여를 두었다. 명예총재에는 오노 정무총감, 이사장에는시노하라 학무국장, 기타 군부, 관청의 수뇌, 재계 유력자 및 학식 경험이 풍부한 안사가 각각 임원으로위촉받았다.
지나사변 1주년 기념일인 7월 7일 오전 10시부터 경성부연맹과 합동으로 발회식이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모임은 처음으로 경성부민을 총력체제에 동원할 의도로 기획되었다. 부내의 각 사무소 지붕 위 잘 보이는 곳에 ‘국민정신총동원연맹가맹’이라는 게시가 표어와 함께 걸렸다. 아침 일찍부터 내린 장대비를 뚫고 각종 단체는 국기, 표어 깃발을 선두로 부민 5만 명이 경성운동장에 입장하였다.
이 자리에서 미나미 총독은 비를 맞으며 “동아 민족을 지도해야 할 사명을 지닌 황국신민은 지금 우리의 사상,정신을 연성하는 국민운동에 나서지 않으면 유기적 정체로서 힘을 적시에 발휘하기 어렵다”며 국민운동의 조직 및 훈련을 강조하였다. 또 미나미 총독은 “중요한 것은 커다란 권위, 형식적인 아름다움에 있지 않고, 그 정신의 강력 행동의 웅경(雄勁)에 있다”며 정신총동원의 강화를 역설하였다.
이어서 고이소(小磯) 군사령관의 축사가 이어졌다. 당일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
동양평화를 확보하여 팔굉일우의 커다란 정신을 세계에 앙양하는 것이 제국의 변하지 않는 국시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일치단결하여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의 모든 능력을 발양하여 국책의 준행에 협력함으로써 성전의 궁극적인 목적을 관철하고자 한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또 하늘에서는 신용욱(愼鏞頊, 眞原勝平) 비행사로부터 축하비행이 있었고, 선전 삐라 10만장을 부내에 살포하였다. 당시의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 삐라의 문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오 1분간 묵념 △ 식사는 반찬 하나
△ 1호 1품 폐물 헌납 △ 1인 10전 이상 저금
국민 감격의 7월 7일을 명기하라
7월 7일 오전 10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경성연맹 발회식
부민은 모두 경성운동장으로
이로써 국민운동의 중핵조직으로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탄생한 것이다.
3. 조직의 확충
연맹의 운동은 출발과 동시에 조직과 훈련이 무엇보다 요청되었다.
군대의 강함은 이 두 가지에 있다.
조선인들이 지금과 같은 무조직 상태로는 싸울 수 없다. 눈앞에 다가온 세계전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의 시급한 조직화가 필요하였다. 내지의 정신운동이 조직을 이루지 못하고 단순한 각종단체의 연락 기관이었기 때문에 목소리만의 운동으로 끝났다는 비판은 조선연맹의 새로운 출발에 커다란 시사점을 주었다.
조선연맹의 첫 번째 목표는 연맹 자체가 먼저 하부의 실천기구를 지닌 조직단체가되는 것이었다.
먼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직대강이 정해졌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직대강
1. 조선연맹 : 도연맹 및 전 조선을 구역으로 한 단체로 구성한다.
2. 도연맹 : 부군도연맹 및 도를 구역으로 한 단체로 구성한다.
3. (1) 부연맹 : 정동리(町洞里)연맹 및 부를 구역으로 한 단체, 기타 부내의 각종 연맹 및 개인으로 구성한다.
(2) 군도(郡島)연맹 : 읍면연맹 및 군도를 구역으로 한 단체로 구성한다.
(3) 읍면연맹 : 정동리부락 및 읍면 내의 각종 단체, 기타 각존 연맹 및 개인으로 구성한다.
4. (1) 정동리부락연맹 : 부에서는 정동리, 부락을 구역으로 하고 구역 내의 개인으로 구성한다.
읍은 토지의 정황에 따라 부연맹의 조직에 준할 수 있다.
(2) 각종 연맹 : 부읍면 내의 관공서, 학교, 회사, 은행, 공장, 대상점 등 일상적으로 다인수를 포용하는 것으로 각기 소속 인원으로 구성한다.
5. 애국반
(1) 정동리부락연맹 및 각종 연맹은 그 기저조직으로서 애국반을 조직한다.
(2) 정동리부락연맹의 애국반은 모두 10호로 조직한다.
(3) 각존 연맹의 애국반은 해당 연맹의 정황에 따라 적당히 구분하여 조직한다.
(4) 애국반은 인보 협력하여 본 연맹의 기저조직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
(5) 빌딩, 아파트 기타 일상적으로 다인수를 포용하는 사무소 등에서는 실정에 따라 앞의 각 항에
따라 연맹 또는 애국반을 조직할 수 있다.
(6) 연맹의 정황에 따라 애국반의 조직을 생략할 수 있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 조직도해
(생략)
‘먼저 조직으로’라는 구호 아래 다음과 같은 조선연맹의 조직대강과 규약 10만 2천매 및 애국반 서약서 41만매가 전 조선에 보내졌다.
국민정신총동원 ○○연맹 애국반 서약
우리가 이번 국민정신총동원 ○○연맹에 가맹하고 ○○애국반을 조직하는 것은 국민정신총동원의 취지에 따라 그 목적의 관철을 도모하고 각원 일치 협력하여 본 연맹 기저단체로서의 임무를 완수할것을 여기에 서약한다.
서약서에는 일자와 반원이 연명 서명하여 정동리 부락에서 정리되었고, 도, 부, 군, 읍, 면연맹의 결성과 동시에 상부에 보고되어 연맹의 조직은 급속히 정비되어갔다.
7월 7일 강원도가 가장 빨랐고, 9월 18일 함경북도가 가장 늦었지만, 2개월 만에 13도 모두에서 조직이 완료된 것이 무엇보다 성공적이었다. 애국반 조직도 10월 말에는 28만 135개의 반이 결성되었고, 반원 수는 409만 6440명으로 조선 전체의 호수에 필적하였다.
또 하급조직으로서 종래 농촌진흥운동을 위해 부락에 농촌진흥회가 있었고, 그 세포조직으로서 2인조 제도가 있었다. 이들 조직은 명칭을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조직 그대로 애국반의 실천사항을 준봉(遵奉)하였다.
9월 22일, 각 도연맹 대표자 및 연맹의 가맹자가 모여 연맹타합회를 개최하고, 연맹의 강령으로서“황국정신의 현양, 내선일체의 완성, 생활의 혁신, 전시경제정책에 대한 협력, 근로보국, 생업보국, 총후의 후원, 방공방첩, 실천망의 조직 및 지도의 철저”가 선정되었다. 또 실천요목 21개조가 정해졌는데,그중에서 특히 궁성요배에 중점을 두어 ‘매일 아침 황거(皇居)를 요배합시다’는 히노마루가 들어간 삐라600만장도 인쇄하여 모든 집과 직장에 뿌려졌고, 11월 3일 명치절(明治節)을 계기로 특히 강조 실천되었다.
또 종래 애국일이 제각각이었던 것을 매월 1일로 통일하였다. 이 날에는 집단적으로 국민의례를 행하고 황거요배를 철저히 실시하였다. 이것이 정동리부락회의 선구였다.
또 10월에는 내선 유력자, 생활문제의 전문가 남녀 100명을 위원으로 비상시국국민생활개선준비를의, 식, 주, 의례, 사회풍조의 항목에 걸쳐 논의하고 국민복 색복을 강조하였다. 또 경조(慶弔)의례의 기준을 정하고 연회는 오후 11시를 넘지 못하고 헌수(獻酬)를 전폐하는 등 생활혁신안이 결정되었다.
11월에는 위원들이 순회강연대를 조직하여 운동의 철저를 도모하기 위해 전도에 파견되었다.
11월 초, 종래의 명예총재를 폐지하고 전임(專任) 연맹총재로 가와시마(川島) 대장이 취임하였다.
총재 추대식의 종료 후, 총독 관저의 연회 석상에서 미나마 총독은 “조선연맹은 만주국의 협화회, 독일과 이탈리아의 소위 1국 1당은 물론, 내지에서 강조하는 국민총동원과도 그 취지가 다른 순수한 정신총동원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는 뜻을 강조하였다.
1939년 2월에는 연맹 조직으로서 애국반을 빠짐없이 결성하라는 통첩을 내렸다. 연맹은 이제 가맹자유의지 규정을 넘어 강제력을 지닌 국민조직으로 육성되었다. 2월 말의 조선의 모든 지역 연맹의 애국반 수는 31만 8,924개, 반원 수 425만 9,755명이었다. 이는 1호가 단위이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조선인구를 망라한 것이다.
이밖에도 각종 연맹 애국반은 1만 4,961개, 반원 53만 8,534명에 달하였다.
미나미 총독은 1939년 춘계 임원총회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직무는 총재이지만, 조선에 거주하는 주민으로서 애국반의 한 사람입니다.
나의 애국반은 나의 부인과 운전수, 정원사 등의 부인 및 경무국장과 비서관의 부인으로 반장은 경무국장입니다.
매일 아침 항상 먼저 황거를 요배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운 다음, 매월 1일에는 신사를 참배합니다. 첫째, 셋째 일요일에는 근로봉사를 합니다.……오늘날 조선연맹은 애국반 31만 3천여 개, 그반원 수 425만여 명입니다. 이들은 우리 반과 동일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연맹의 목표는 너무 많아 곤란할 정도인데, 궁극적인 목표는 내선일체의 구현화입니다 이는 당시의 연맹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3월에는 종래 서린정(瑞麟町)에 있던 임시사무소가 남미창정(南米倉町)으로 이전되어 사무국의 본거지가 되었다. 사무국에는 총재실 및 사무실이 준비되었고 총재실에는 이사장, 전무이사 기타 임원이 출근하여 본 연맹의 운영 및 하급 연맹의 지도감독과 조장에 관한 모든 사무를 기획하였다.
사무실에는 주임에 전무이사가 이사장의 지도 감독을 받으며 사무를 수행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간소한 조직
이었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조직을 지녔다. 조직은 움직이면 분명 커다란 힘이 된다. 그 힘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내지에서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정치적 무기력은 통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고노에 내각을 중심으로 한 거국적 정치조직의 문제가 국민 재조직 운동으로 낙착되었기 때문에 국민정신총동원운동 중앙연맹을 관민일치의 국가총동원 협력기관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하고, 정부와 중앙연맹 사이에 관민일체의 위원회가 생겨 그 개조 확충에 고민하였다.
조선에도 당연히 정치와 관련해 비판을 받았다.
규약 제4조에 “본 운동에 관해 당국의 자문에 응하거나 당국에 건의해야 한다”는 추상적 표현으로는해결되지 않았다. 더구나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종래 학무국 사회교육과의 소관사항으로 다른 국과(局課)와는 관계가 없었다. 하지마나 이 정도의 조직이 갖추어지자 더 이상 종래의 방식만으로는 이루어질수 없었다.
1939년 4월 15일, 이러한 이유로 규약과 기구는 개정되었다. 규약 개정의 요점은 앞에서 말한 제4조를 “본 연맹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밝힌 점과 임원에 참여, 참사, 감사를 새로이 추대하였다는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총독부 내에 종래의 주무 과를 사회교육과에서 문서과로 바꿨다.
학무국의 업무라기보다 총독부 전반의 업무라는 명분으로 총독부 내에 국장과 부장을 중심으로 한 총동원위원회 및
과장급을 중심으로 한 간사회를 설치하였다. 총독부의 위원과 간사는 동시에 이사와 참사 자격으로 양자 조직의 밀접한 연락을 담당하고, 조선군 및 조선헌병대 관계 무관이 고문 또는 참여로서 참가하게되었다.
사무국의 전무이사에는 유카미 치사부로(由上治三郞), 정교원(鄭僑源, 烏川僑源) 두 명이 취임하였다.
4월 18일, 도지사회의에서 미나미 총독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강화’에 대해 특별히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연맹은 통치의 보익(輔翼) 기관으로 어디까지나 정신운동으로서의 본질적 사명에 따라 문무 각관아와 긴밀히 연락 협조하고 관의 힘이 미치는 부면(部面)을 개척하여 상의하달, 하의상달을 통해 통치의 제미(濟美), 군국의 시무에 기여하는 것을 본의로 합니다.
또 미나미 총독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본의를 강조하면서 5월 30일 임원 총회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연맹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를 말한다면, 2300만 민중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
충량한 황국신민, 이는 진정한 일본인이 되는 것이다.
일본인이란 천황중심주의의 만민부익의 황도를 철저히 하는 것에 있다. 따라서 연맹의 궁극적인 목표는 내선일체의 완전한 구체화에 있다.”
종래 사무국의 업무는 개인의 기부금에 의존하였지만, 1939년도부터 총독부 보조금 24만 6천원을 받아 총액 28만여 원(이후 증액되어 33만 4천여 원)으로 사업을 계획하였다. 또 연맹의 휘장도 진무(神武)천황의 성업을 상징하는 일윤(日輪)을 배경으로 한 금치(金鵄)가 결정되었다.
4월에는 연맹기자회가 결성되어 총력운동에 관한 신문기사도 활발히 게재되었다. 6월부터 연맹의 기관지로 월간 '총동원'이 발행되었다.
또 금치의 표식을 넣은 연맹기도 제정되었고, 7월에는 전국으로부터 모집한 연맹가가 결정 발표되었다. 8월에는 추진대원 규정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제대한 육군특별지원자 가운데 조선연맹의 강습을 받은 자, 총독부 중견청년수련소를 수료한 자, 흥아근로보국대 조선부대원, 기타 솔선 정신(挺身)하여 연맹의 추진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청년들이었다.
9월에는 가와시마 총재가 연합청년단 총재로 추대되었고, 연맹운동의 중견으로서 청년이 활발히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체제가 정비되었다.
추진대원은 1941년 4월에 개정되어 다음과 같은 임무지령서가 총재 명의로 배포되었다.
- 국민총력연맹의 숭고하고 중대한 사명을 자각하고 솔선 정신하여 그 목적의 수행에 매진함으로써국민총력운동의 강대한 추진력이 되어야 한다.\1. 항상 국민총력 추진대원으로서의 긍지를 지니고 황국정신을 연마하고 수문(修文) 연무를 통해 임무 달성에 대비해야 한다.
- 상급 지휘자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하고 대원 서로의 단결을 견고히 해야 한다.
- 일단 비상시에는 몸과 마음을 바쳐 황국의 안태와 발전에 공헌하여야 한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다망하였다. 1939년의 주요 행사만 보더라도 연말연시 총후경제 조강(調强)주간, 일본정신 발양주간, 육군기념일, 애마(愛馬)의 날, 천장절, 아동애호주간, 해군기념일, 지나사변 2주년 기념일, 장고봉사건 1주년 기념일, 총후후원강화주간, 군마제(軍馬祭), 결핵예방 국민운동, 국민정신작흥주간 등 주간행사와 기념행사가 이어졌다. 또 그동안 8월에는 연맹원의 실천요목 중에서 특별히 궁성요배, 근로저축 두 가지의 철저한 실행이 강조되었다.
9월에는 내각에서 흥아봉공일이 결정되었는데, 조선에서는 종래의 애국일 행사를 더욱 철저히 실시하도록 강조하고, 지원병의 취지 선전에도 특별히 힘을 쏟았다.
여름에는 미증유의 한해로 인해 전년보다 천만석이 감수 예상되었는데, 연맹에서는 8월에 헌수절대폐지운동을 반미(飯米) 절약과 결부시켜 일으키고, 또 식사는 7분도 이하의 쌀을 사용할것, 가정에서 소비를 절약할 것, 혼식과 대용식을 장려할 것 등 세 항목을 애국반 조직을 통해 철저히 보급시켰다.
또 한해 극복을 위해 농촌의 근로도 애국반 조직을 통해 실시하였고, 1940년 춘궁기에도 인고지구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더욱이 철저한 절미 운동을 실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과거 조선의 통례에서 본다면 많은 희생이 따를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한사람의 아사자도 나오지 않았다.
실로 대한해는 애국반 조직을 통해 극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40년 기원절에는 전선(全鮮) 모범연맹원 19명과 모범연맹이 표창을 받았다. 이들은 폐품회수, 절미, 저축, 근로에서 각각 많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연맹은 이미 조직의 확대기를 지나 단순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강력한 전시생활조직으로서 성장하였다.
1940년부터 일반 국어를 모르는 자를 대상으로 '새벽(曉)'이 35만부 인쇄되어 일반 애국반장에게 배포되었다.
애국반장은 이를 애국반에 회람시켰기 때문에 거의 모든 호수가 이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광고에는 조선출판계의 신기원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에서 실로 35만부의 정기간행물이 발간된 것은 처음일 것이다.
이는 8월호부터 '애국반'으로 제호를 바꾸고 국어판과 언문판을 동시에 발행하였다.
1940년 3월에는 라디오 정기방송으로 매월 둘째 넷째 목요일을 국민정신총동원의 시간으로 전 조선에 중계하게 되었
다.
또 전 조선의 초등학교, 중등학교에 각각 연맹 결성을 촉진시킴과 동시에 각각 정동리부락연맹 및 애국반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더욱이 전 조선 16만 단원의 청년단에 국민정신총동원 보급부를 설치하여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항상 노력하는 강대한 추진력으로 삼았다.
5월에는 사무국 직제가 개정되어 총무, 기획, 선전의 세 과가 설치되었다. 7월에는 과거 조선 제20사단의 사단장이자 지나사변 발발 당초의 병위장(兵圍長)으로서 혁혁한 무훈을 떨친 가와키시 분사부로(川岸文三郞) 중장이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전임고문이 되었다.
9월에는 내지의 사치생활 억제에 호응하여 전시국민생활체제가 확립되었다.
아침 사이렌은 궁성요배, 정오 사이렌은 묵도를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13항목이 결정되었다. 그중에는 일상 중에서의 외국어사용 제한, 불필요한 회식 폐지, 극도로 굽이 높은 신발 및 괴이한 부인복의 폐지, 극단적인 전발(電髮) 및 화장 메뉴큐어의 억제, 남자의 장발 억제, 마작의 폐지, 상점가는 오후 10시에 일제히 폐점 등 외국적 풍속과 사치의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는 7월 7일의 사치품폐지령에 호응한 것으로 개선혼례기준과 더불어 생활의 철저한 쇄신을 추진하였다. 향락생활면에 많은 영향을 준만큼 흥미 있는 신문기사도 당시 크게 보도되었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라면 사치를 배격한다는 일반 통념을 만들 정도였다.
제5장 국민총력운동
1. 조선의 신체제-국민총력조선연맹의 발족
1940년은 기원 2600년에 해당한다. 화려한 식전이 거행되었고 국민은 그 영광스러운 역사를 회고함과 더불어 현재 지나사변의 해결은 동아신질서의 건설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미영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구질서를 타도하고, 팔굉일우의 이상(理想)을 통한 강력한 신세계사의 수립에 있다는 점을 깊이 자각하였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삼국동맹이 체결되었고, 일만화(日滿華)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내지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 등에서 종래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 검토가 이루어지고, 국체의 본의에 의거한 모든면에서의 새로운 출발이 신체제운동으로서 추진되었다.
여러 번 개편된 국민정신총동원 중앙연맹과 오랜 전통의 지반을 지닌 정당도 해체되었고, 국민조직으로서 고노에 총리대신을 회장으로 한 대정익찬회가 발족하였다.
조선에서도 이 해는 시정 30년에 해당하였다. 창씨제도를 통한 내지식(內地式) 씨는 8할을 넘어섰다.
지원병 지망자는 3천명 모집에 8만 명을 돌파하였고, 의무교육의 실시 착수가 발표되었다.
국민운동도 새롭게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대정익찬회 운동과 호응하여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금후 진로에 대한 비약적인 검토가 이루어졌다.
여기에 10월 7일에는 가와시마 총재가 사임하고 미나미 총독이 대신하여 신체제운동을 실행하였다.
대정익찬회 운동의 커다란 특징은 국내의 많은 대립적인 것을 국체의 본의에 의거하여 일원적 국민조직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 더욱이 그 기능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하급 인보(隣保)조직으로서 부락상회(部落常會)와 정내회(町內會) 25만개, 인조(隣組) 200만개를 만들고, 정례적 상회(常會)를 개최하였다.
이는 서로 협동하여 국민생활의 충실과 향상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조선에서의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실로 조선 내에서의 최고 조직이고, 이에 대립하는 것은 인정받지 못하는 지위에 있다.
또 하부조직으로서는 인조에 해당하는 애국반을 이미 2년 전부터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상회도 내지에서는 교화적 지도를 위해 각지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행정적인 측면과 합체시킨 조직으로서 전국적 통일체제가 된 것은 1940년 9월 11일 내무성 훈령에 따른 부락회와 정내회 정비요강이 제정된 다음이었다.
경성부에서는 이에 앞서 5월 8일자로 정회 규정의 일부가 개정되어 정회에 구(區) 및 반이 설치되었고, 상회는 매월 1회 정례일에 거행되었다. 그리고 정회의 상회는 구장 회합, 구의 상회에는 반장 회합, 반의 상회에는 반 내 각 세대의 대표자가 회동하도록 결정되었다.
당시 기획원 조사관이었던 스즈키 가이치(鈴木嘉一)는 그의 저서 '인조와 상회(隣組と常會, 1940년12월 간행)'에서 경성이 내선인 모두 재주하는 곳이면서 내지의 도회지 이상으로 상회가 발달한 이유로 다음과 같이 지도자의 정열을 들고 있다.
“조선과 내지의 상회 운영을 비교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조선에서는 수도가 활발하고, 내지에서는 시골이 활발하다. 또 조선에서는 관청의 국과장과 대학 교수와 같은 인텔리 가 솔선하여 참가하지만, 내지에서는 일반 대중이 열심이다.”
그리고 주를 붙여 “외지의 지도에 대해서는 조선에 범례가 있다”며 다른 외지의 모범이라고 말한다.
내지의 상회 연구가의 눈에 이렇게 비추어질 정도였다.
내지의 대정익찬회가 발족 당시 중점을 둔 것은 이러한 이유로 조선은 그 모방할 필요가 없었다.
내지의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은 새로운 국민조직을 만들기 위해 즉각 해소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약체 조직이었지만, 조선의 그것은 해소가 아니라 전진적인 개조였다. 이러한 첨에서 조선의 신체제는 독자적인 입장에서 추진되었다.
신체제운동의 칭호는 ‘국민총력운동’이라고 불렀다. 지금까지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칭호는 내지를 추종한 것이었지만, 이번 내지의 ‘대정익찬회’의 칭호는 너무나도 정치운동으로서의 뉘앙스를 대중에게 준다는 점에서 채용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봉사적 실천을 총력 발휘한다는 취지에서 ‘국민총력연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정신의 총동원보다도 모든 힘을 발휘한다는 명문이었다. 이처럼 규약 상에는 종래 참가에 자유 의지가 있었지만, 그 점에서 “조선의 모든 단체 및 개인으로 조직한다”로 개정되어 국민조직으로서의 본지가 명확해졌다.
또 총독과 국민정신총동원운동 총재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잘못하면 이원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총력연맹에서는 총독이 총재, 정무총감이 부총재가 되었다. 이는 대정익찬회의 총재가 내각총리대신이라는 규정에 호응한 것이다.
행정조직과 국민운동 조직을 완전히 일체화시켜 종래의 각종 정신운동의 조장 장려 또는 지도독려시설, 관계 단체의 하부조직은 동일한 목표인 정동리부락연맹 및 애국반으로 발전적으로 통합되어 총력운동으로 하나가 되었다. 이를 위해 총독부 및 각 도 내에는 국민총력과를 설치하고, 기존의 국민정신총동원위원회를 폐지하여 ‘국민총력운동지도위원회’를 총독부 내에 조직하였다.
이는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관계 국장과 과장, 조선군 관계자, 총력연맹 전무이사 등을 위원으로 국민총력운동의 기본방책을 조사 심의할 목적으로 조직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관청 내의 할거적인 관념을 일소하여 농촌의 농촌진흥운동, 도시의 상공회의소를 비롯한 각종 단체, 또 민간의 여러 운동도 이에 통일적으로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이 점에서 대정익 찬회는 개인을 단위로 삼아 단체의 가입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총력연맹은 단체의 가입을 인정하여 유력한 경우는 그 대표자를 평의원으로 참가시켰다.
사무국에는 총장을 두어 가와키시 중장이 이를 담당하였다. 총무, 기획, 식산, 농림, 저축, 보도(輔導),사상, 훈련, 선전의 9부를 두고, 총무와 선전을 제외하고 모두 총독부 각 국장이 주관전무로서 관계있는부의 부장을 담당하였다. 11월에 선전부장으로 경성일보사 사장 오테아라이 노리오(御手洗辰雄)가 취임하였고, 또 사상부가 해소하여 문화부 및 방위지도부가 설치되었다. 문화부장에는 민간에서 야나베에이사부로(矢鍋永三郞)가 선출되어 취임하였다. 또 1941년 11월 총독부에 후생국이 신설되었을 때, 연맹 내에도 후생부가 조직되었다.
도, 부, 군, 도, 읍, 면연맹의 규약 준칙도 제정되어 도연맹은 도지사가 회장, 내무부장이 이사장, 경찰부장, 산업부장, 관계 과장 및 민간유력자를 이사로서 운동의 중추 지도부를 만들었다.
그 하급도 각각 그 장을 연맹 조직의 장으로서 이에 준하는 기구로 정비하였다.
애국반은 종래의 조직 그대로 답습하였다. 정회 또는 부락의 구역을 단위로 하는 부락진흥회, 저축조합, 향약 등 그 목적이 총력운동에 포함되는 것은 해소 통일하였다. 또 관공서, 학교, 회사, 은행, 관산,공장, 상점 등에도 이번에 각각 빠짐없이 연맹 조직을 만들었다.
그 조직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국민총력운동기본조직도
(생략)
잡지 이름도 '총동원'에서 '국민총력'으로 바꾸고, 라디오의 ‘정동의 시간’은 ‘국민총력의 시간’으로 변경되었다.
12월 11일의 이사회에서 총력연맹 실천의 최고 목표는 고도국방국가체제의 확립으로서 사상의 통일, 국민총훈련, 생산력 확충 세 가지를 실천대강으로 한 실천요강을 결정 발표하였다.
총독부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일체화함에 있어 가장 커다란 의의는 농산어촌진흥운동과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하나가 되는 것을 지양하는 것이다.
농산어촌의 진흥운동은 실로 1932년 이후 제1차 5개년 계획, 제2차 5개년 계획으로 전 조선 220만호의 농촌, 10만호의 어촌을 대상으로 착실히 추진되었다. 그 근본이념에 대해서 새로운 시대의 입장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던 사정은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그것은 아주 깊이 농가의 경제갱생과 관련되어 추진된 것이었기 때문에 일조일석에 전환할 수 없었다.
미나미 총독은 1937년 1월에 농업보습학교 및 농민훈련소 교육강습회 석상에서 농산어촌진흥운동에 관한 훈시 중에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결의를 다졌다.
본 계획은 조선에서는 미증유의 획기적인 대계획으로서 전임 총독의 탁월한 착의(着意)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 노력한 사업이기 때문에 후임인 나 또한 깊이 그 취지에 공감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고자 결심하고 있습니다.……많은 시설 가운데 농촌진흥정책만큼 직접 민중의 생활과 결부된 정치는 없습니다.……하지만 이 사업은 1년이나 2년이라는 단기일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그 정도로 곤란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뜨거워지거나 혹은 급속히 식어버리는 것처럼 인생의 약점에 휘둘리지 않고……과거 만주사변의 열하전(熱河戰)을 성전이라고 말한 것처럼 농산어촌진흥정책은 조선의 정치상 가장 중요한 것으로……가장 귀중한 성업이라는것에 관심을 갖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폭풍처럼 반도의 모든 분야를 휩쓸었지만, 농산어촌진흥운동도 견실히 농민을 상대로 한걸음씩 갱생을 추진하였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국민정신총동원운동, 농촌진흥은 농촌진흥이었다.
양자의 관계에 대해서 1939년 봄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강화를 둘러싼 도지사회의에서 논의될 때, 오노 정무총감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농산어촌진흥운동은 지난 6년간에 걸친 기초와 훈련이 이번 사변에 즈음하여 국가비상 시의 시련을 넘어 반도의 물심양면에서 전시 태세의 강화에 아주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를 바라보면 정말 마음의 위안이 됩니다. 원래 농산어민의 계도(啓導)의 중요성은 생산보국의 지향을 일으키고, 민중생활의 개선안정과 시국 하의 필수농산자원의 증강을 도모하는 데 있어 필경 본 운동과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서로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양 운동 간의 긴밀한 연계통합을 기도하여 민중의 계도에 빈틈이 없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은 말할 필도도 없을 것입니다.
또 1940년 4월 도지사회의에서 미나미 총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커다란 한해에 대해……다행스럽게 작년 이후 시국 하에 활동 진전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운동과 1932년 이후 배양된 농촌진흥운동과의 상호보완적인 훈련의 성과를 통해 인심의 동요없이 전시극복, 생업보국의 길로 나아간 것은 반도 관민이 자랑할 만할 일입니다.……이 때문에본년도는 더욱이 국민정신총동원의 기구를 강화하고, 농촌에서는 농촌진흥운동과 표리일체가 되어야합니다.
말단에서의 운동방식을 보더라도 농산어촌진흥운동의 근본 기저인 진흥회와 정신총동원운동의 기저인 부락연맹은 서로 대립되지 않도록 다양한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
1939년 6월 23일자 전라북도 지사가 정무총감에게 보낸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기구정비에 관한 건’에 대한 소견 요항은 다음과 같다.
1. 부락연맹의 구역은 필히 이미 설치된 진흥회의 구역과 동일할 것.
2. 부락연맹의 이사장은 필히 진흥회장을 추천할 것(기타 간부도 동일).
3. 부락연맹의 기저로서 애국반을 두고, 그 단위는 모두 5호 내지 10호로 할 것.
4. 애국반은 부락연맹에 소속시키고 동시에 진흥회에도 이를 예속시킬 것.
5. 부락의 5인조 등과 같은 것은 애국반에 통합하고 이를 폐지할 것.
6. 진흥회는 앞으로도 읍면연맹의 구성단체로 변경하지 않을 것.
7. 부락의 여러 행사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연맹과 진흥회 공동으로 실시할 것.
8. 부락의 각종 단체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 내용과 지방의 실정을 고려하여 연맹 또는 진흥회로 통합할 것.
농촌진흥운동이 추구한 개인생활의 구제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추구한 국민정신은 조선의 신체제를 위해 하나로 지양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양자의 운동이 말단에 이를 때 서로 대립하는 실례가 많아, 이 쌍방은 표리일체라는 관계로부터 한걸음 나아가 단일조직으로서 운동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반도의 신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문제의 해결이었다. 이에 대해 미나미 총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종래 국민정신총동원운동, 농산어촌진흥운동을 비롯해 물심양면에 걸친 각 부문의 운동을 통합하여국민총력운동으로 만들고……농산어촌진흥운동은 1932년 이후 연차계획으로 계속 진행하여 그 지도부락에서의 세소농가 경제갱생의 실적은 실로 괄목할만하고,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협력하여 물심양면의 지도계발에 힘써왔습니다.
이번 이들의 계통, 기구를 단일화하고 그 지도력을 합일하여 공통의 대상을 향해 각 부문에서 지도를 집중한 것은 양 운동의 효과를 최대한 발휘하는 것입니다. 또 이는 행정조직망의 중복을 없애는 일에도 아주 적절한 조치였다고 믿습니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이름은 사라지고 이와 함께 농산어촌진흥운동의 명칭도 없어졌다.
1940년 12월 5일, 정무총감이 각 도지사에게 보낸 농산촌생산보국지도방침이라는 통첩에는 매년 계속한 10개년계획을 중지하고 종래 ‘농산촌 민중생활의 안전향상’의 목표라는 개인 본위를 대신하여 ‘국방국가체제완성을 위한 생산력 확충을 도모한다’는 국가 본위를 지도목표로 삼았다. 지도방법으로서는 종래 농가갱생계획을 부락생산확충계획으로 변경하여 가정보다도 마을에 중점을 두는 새로운 3개년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2. 총력운동의 진전
종래 정오의 묵도는 축제일의 행사나 애국일의 상회(常會), 기타 특수한 회합 장소를 제외하고 일부지방밖에 실시되지 않았지만, 12월 1일 이후 필히 매일 정오 1분간 사이렌 기타 암호로 모든 조선에서 일제히 실시하게 되었다.
아침의 궁성요배와 더불어 철저히 실시되어 내지에서 조선에 건너온 사람들조차 놀랄 정도였다.
그 해 휴회를 앞둔 의회에서도 이 점이 부각되었는데,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분명내지보다 활발히 이루어졌다고 예찬받았다. (1분간은 너무 길어 1941년 6월 19일자로 30초로 단축되었다.) ‘국민총력의 노래’와 ‘애국반의 노래’가 창정되어 애국일의 상회에서 불려졌다.
총력운동의 표어도 결정되어 총력기분을 끌어올렸다.
특히 총력운동의 추진위원의 충실에 힘을 쏟아 향후 3개년에 10만 명의 대원을 양성할 계획을 세우고, 여자정신대원의 양성도 계획되었다.
11월 1일부터 12월 4일까지 중앙을 비롯해 전조선 각 도 대회를 빠짐없이 개최하고 총재, 부총재가 필히 임석하여 신체제 이후 전개될 총력을 앙양하였다. 또 전매, 체신, 교통연맹 등도 발족하였다.
무엇보다도 당시 내지에서의 신체제운동은 커다란 주목을 받았고, 대정익찬회의 행보는 조선의 총력운동의 진로에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 대정익찬회를 모방하여 문화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가 민간에서 이루어지자 그 목소리는 그대로 받아들여져 1월에 문화부가 신설되었다. 학술, 교화, 예술, 출판등 각 방면에서 문화위원 60명을 선출하여 문화위원회를 구성하고 야나베 에이사부로를 부장으로 문화부회를 결성하였다. 특히 이에 앞서 선구적으로 연말에 문인이 지방으로 순회강연에 나서는 등 당시의 민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반도의 신진작가 목양(牧洋)의 ‘조용한 바람’(静かな嵐)은 당시의 체험을 소설로 만든 것으로 당시 많은 고민을 뛰어넘고 앞으로 나아가는 반도 지식계급의 사상을 잘 그려냈다.
또 대정익찬회에서 부인부가 논의되었을 때, 내선의 부인을 망라한 십 수 명의 지도위원을 두고 총력운동의 취지에 의거한 부인운동의 지도가 계획되었다. 또 부읍 등 시가지의 정연맹을 비롯해 하부연맹에 부인부가 조직되었고, 다음과 같은 실시요항이 정해졌다.
(목표) 내선일체, 나라를 위하여
(중점) 생활간소화, 건강생활, 국방훈련
(실시요항) 가정총동원, 예정생활, 물자애호, 위생사상의 철저, 영양식의 보급, 심신연마, 국방사상의철저, 국체훈련, 방공훈련
하지만 애국부인회, 국방부인회가 통합되어 대일본부인회가 결성되자 부인운동은 대일본부인회로 일임되었다.
대일본부인회는 총력연맹의 참가단체라는 관계상, 직접 총력운동을 지도하지는 않았다.
2월 대정익찬회운동 내외지 연락협의회가 도쿄에서 개최되어 조선, 타이완, 사할린, 관동주, 남양으로부터 대표가 모였다. 당시 남양과 관동주는 운동이 시작되었을 뿐이고, 타이완과 사할린은 준비 중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의 총력운동은 조직을 정비하고 당당히 진군하고 있다는 보고는 극도의 예찬을 받아 전국의 주목을 받았다. 그 회의에서 내외지 익찬운동연락협의회의 설치가 결정되어 상호 긴밀한연락을 취하게 되었다.
4월에는 내지의 익찬 만화 ‘야마토 일가’(大和 一家)에 필적한 ‘밝은 애국반’(朗らな愛國班)이 만화인협회의 손으로 그려졌다. 또 7월부터 내지의 흥아봉공일 상회에 호응하여 상회를 숙정하고, 8월부터는 매월 실천철저사항도 결정하였다.
하지만 익찬회가 이후 정치적 영향으로 인해 어려운 길을 걸어 나갔을 때, 역시 조선은 조선으로서의 독자성을 강화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41년 1월, 상공업 분야에서는 각 도부군읍의 경제단체업자조합으로 도부군읍협력회를 구성하였고,그 대표자 및 전선지구경제단체 대표자로 조선경제통제협력연락회를 조직하여 그 지도를 실시하였다.
3월에는 각 광산을 조직한 국민총력 조선광산연맹이 결성되었다. 4월에는 국민총력 조선수산연맹이 결성되었고, 도부군도에 수산연맹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필요한 곳에는 그 지부를 두어 어업조합운동을활발히 전개함과 동시에 그 실천사항의 구현에 노력하였다.
2월에는 가정방호조합을 애국반에 통합하였고, 4월에는 면포, 타올, 고무신 등의 배급은 애국반 조직을 활용하였다. 5월에는 연맹 하부조직과 기구범위를 하나로 만든 저축조합이 설치되어 애국반은 드디어 전시국민생활 수행조직의 강력한 단위가 되었다.
4월부터는 부여신궁 어조영(御造營)에 근로봉사가 개시되었다. 7월에는 의례의 간소와 엄숙화를 도모하여 혼례장의의 기준이 제정되었다. 당시는 시기상조라는 느낌도 있었지만, 오늘날의 비상시에는당시의 것이 기준이 되었다.
그해 가을, 국민개로운동을 전개하여 근로보국대의 조직요강이 결정되었다. 14세부터 40세 미만의남자 및 14세부터 25세까지의 미혼 여성은 부읍면연맹, 동정리연맹, 학교연맹 기타 각종 연맹으로 편성되어 특정 기간 동안 근로 봉사하도록 규정하였다. 오늘날의 징용령운동에 이르기까지, 아니 오늘날일지라도 이러한 근로보국대 운동이 수행한 역할은 반도근로동원에서 실로 컸다.
3. 민의를 살린 발랄한 체제
12월 8일,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였다. 만주사변으로부터 10년간, 지나사변에서 대동아전쟁으로 일본의 결의의 발걸음 속에 조선의 전력(戰力)도 육성되었다. 물자, 인력 그리고 조직에 지나사변 이후 대륙병참가지라 불린 조선은 대동아전쟁에서는 이제 병참기지가 아니라, 내지와 혈육을 함께 나누는 전력이 되었다.
“짐이 육해장병에게 모든 힘을 쏟아 교전에 종사하고, 짐이 백료유사(百僚有司)에게 여정(勵精) 직무를 봉행하고, 짐이 백성에게 각각 그 본분을 다하여 억조 일심국가의 총력을 다하라”는 성전의 조칙에 군관민 모두 한마음이 되어 총력 결집하였다. 대조(大詔)를 봉공하여 총력운동이 드디어 그 단단한 결의로 진격하고 있다.
1942년 1월 8일부터 내지에서는 종래의 흥아봉공일을 폐지하고, 8일자로 대조봉재일(大詔奉載日)을삼았다.
이 날을 중심으로 필승의 국민사기앙양에 중점을 두어 적극적인 국민행사가 전개되었다.
조선에서도 애국일을 폐지하고 대조봉재일을 중심으로 행사를 실시하였다.
개로, 절약, 저축이 전투하는 총후의 3수칙으로서 앙양되었고, 대조를 봉공하여 이 전투에서 승리하려는 결의가 반도를 휩쓸었다. 4월 중순의 이사회에서 미나미 총독이 역설한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기위한 현세 즉응의 운동방침이고, 지도자의 양성과 그 중대한 책무의 강조였다. 애국반은 이제 이러한 결전에 그 조직을 어떻게 전력화할 것인가라는 구체적 전투단위가 되었다.
대동아전쟁은 연이은 전과를 올리고 대동아 모든 지역에 일장기가 휘날리던 때, 5월 9일 조선에도징병제도 실시가 발표되어 조선의 전의는 더욱 높아졌다. 이를 전후하여 사무국 총장이 교체되었다.
가와키시 중장을 대신하여 나미다(波田) 중장이 취임하였다. 6월 18일에는 총독 정무총감이 교체되었고,
미나미 총독을 대신하여 고이소(小磯) 총독이 취임하였다.
대동아전쟁의 웅혼한 전개와 전력기지로서 조선의 역할이 더욱 가중되었을 때, 반도의 국민운동도 새로운 입장에서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총독 총재가 일체가 되어 총력운동이 전개되고 총독부의 각 국장이 각 부장을 겸했을 때, 그 누구도 이는 너무나도 관제적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국민운동과 관과의 관계는 완전히 하나가 되어 추진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 대해 고노에는신체제운동의 발족 당시의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래 국민운동은 국민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야한다. 정부가 이런 종류의 운동을 기획 지도하거나 이를 행정기구화하는 것은 국민의 자발적 총력의 발휘를 방해할 우려가 있다. 하지만 현하 정세는 이러한 운동의 자연발생적 전개에만 기대할 수 없다. 또한 밑으로부터의 운동은 잘못하면 분파적 항쟁에 빠져 진실한 국민운동이 될 수 없는 염려도 있다.
여기에서 정부 또한 이 운동에 대해 당연히 적극적으로 이를 육성 지도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보면 국민조직의 운동은 실로 관민협동의 국가적 사업이고, 전국적인 국민익찬운동일 수밖에 없다.
관민일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선처럼 관의 힘이 큰 곳의 국민운동 본부에는 또한 민을 대표할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였다. 이는 총력연맹의 조직이 생겨난 당초부터 비판받았다.
'국민총력'(1940년 12월 발행)에 실린 「조선의 신체제를 말하는 좌담회」 가운데 연맹기자단 A기자와시오하라(鹽原) 훈련부장은 다음과 같이 응수하고 있다.
A기자 : 우리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민중의 자발적 발의를 통해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힘을 통해 만드는 것처럼 느꼈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관제라는 것이 이상하다. 그러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시오하라 : 관리가 많이 얼굴을 보인다고 하여 관제라는 것은 아니다. 내지의 대정익찬회 준비위원회의 주요한 사람인데, 그중의 한 명이……대정익찬회는 민간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밑에서부터 일어났는데, 그렇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쪽에서 만들었다는 아주 노골적인 설명인데,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
A기자 : 내지는 준비위원회 등을 만들어 관민협력을 통해 그런 것을 만들었다고 느끼는데, 이쪽은관리들이 언제가 모르게 만들었다고 느끼는데……
시오하라 : 조선에서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 조직이 종래부터 상당히 존재했기 때문에 준비위원회와 같은 것이 필요 없었다. 내지처럼 지리멸렬한 곳과 여기처럼 처음부터 체제가 정비된 곳은 다르다.
대동아전쟁은 조선에 최고도의 전력을 요청하고 있다.
조선 내의 국민운동에도 더욱 적극 과감한 활발한 약동성이 필요하였다. 관이 책임을 지면 아무래도 관의 입김이 셀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일이라지만 관의 힘으로 일할 수밖에 없다. 너무나도 관료적인 분위기로 인해 총력운동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인기가 없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를 과감히 타파해야 했다.
고이소 총재는 6월 18일에 착임하여 30일에 이사회를 개최하고 국민운동에 대한 소견을 당당히 훈시하였다.
총재는 그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6항목을 역설하였다.
1. 국체의 본의에 철저하며 천업회홍(天業恢弘)에 매진할 것.
2. 일시동인의 성지에 의거한 도의(道義) 조선을 건설할 것.
3. 지도자 스스로 수양연마에 정진할 것.
4. 상의하달과 하정상통(下情上通)을 더욱 철저히 할 것.
5. 성전 완수의 신념을 더욱 깊이 실천으로 구현할 것.
6. 운동은 항상 발랄청신(潑剌淸新)할 것.
특히 제6항에 대해서 총재는 “총력운동은 조금이라도 시국의 추이로부터 벗어나고, 현실로부터 일탈해서는 안 된다.
또한 기(氣)를 품어 작은 것에 빠지지 말고, 과거의 사치에 빠지지 않는 항상 청신미(淸新味)를 발휘해야 한다. 또 사소한 인심도 파악하여 미연에 세태의 동향을 성찰하여 시책을 발랄시켜 인심이 동요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며 활발하고 과감한 실천을 기대하였다.
다나카(田中) 부총재도 이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건네며 혁신의 포부를 밝혔다.
조선의 총력운동은 내지의 대정익찬회운동에 비해 그 결집력이 훨씬 발전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총력연맹의 기구와 조직 방법에서 여전히 개혁의 여지가 남아있다.
즉 집 위에 집을 쌓은 느낌이다. 총독정치와 표리일체라고 말하지만 그 실천할 점에서는 진솔한 열정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총력운동을 전개한 지난 4년 반, 그 설교라던가 문자는 가장 강렬한 말과 문구가 사용되었지만, 여전히 일억일심의 결집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에 본 운동의 고민이다.
기구의 개혁은 결국 11월 4일에 실현되었다. 먼저 본부의 사무국을 간소하면서 강력하게 만들었다.
종래의 11부를 총무, 연성, 후생, 경제, 선전의 5부로 축소하고 14개 과를 두어 그곳에는 모두 순진한 민간인을 배치하여 관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다.
새로운 부장은 칸규우 다다오(簡牛凡夫, 총무), 오야 도라노스케(大家虎之助, 연성), 김연수(金秊洙,후생), 다나가 에이(田中英, 경제), 쓰다 고우(津田剛, 선전) 등 30대부터 40대의 청신 발랄한 민간 기예였다.
이들은 창의 공부를 통한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여 진실로 민심의 금선(琴線)을 접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순수 민간의 애국운동으로 만들고자 기도하였다. 또 종래 조선인으로만 조직된 임전보국단 및 군사사상 보급을 본지로 하는 군사보급협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하여 총력연맹에 포섭시켰다.
또 당시 연맹규약이 약간 개정되었다. 그 요지는 제2조를 “본 연맹은 국체의 본의에 의거하여 내선일체의 내실을 올리고, 각각 그 직역에서 봉공의 정성을 다하여 그 총력을 결집하여 황도를 부익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바꾸었고, 지역연맹과 참가단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제16조 도·부·군·도·읍·면·정·동·리·부락에 각각 연맹을, 정동리부락연맹에 약간의 애국반을 두고 각각 그 상급의 연맹에 예속시킨다. 도 이하의 연맹 및 애국반에 관한 규정은 별도로정한다.
제17조 참가단체는 각각 국민총력 무슨(단체명) 연맹으로 칭하고 그 업무영역이 2개 도에 걸친 것은조선연맹에, 도내 2개 부군 이상에 걸친 것은 그 도연맹에, 군도 내 2개 읍면 이상에 걸친 것은 그 군도연맹에, 부읍면 내 2개 동리 이상에 걸친 것은 그 부읍면연맹에, 정동리 내 2개 부락 이상에 걸린 것은 그 정동리연맹에 예속한다.
전 항의 연맹에 관한 규정은 별도로 정한다.
또 국민총력운동지도위원회를 국민총력운동연락위원회로 변경하여 새롭게 발족하였다.
이는 관과의 관계가 지도가 아니라 연락이었다. 이것이 기구개혁의 정신이다.
조선의 국민운동은 이로써 관제운동으로부터 강력히 부상한 민의에 의거한 운동으로 그 본부의 진용을 전환하였다.
1942년 말, 4부장의 공개강연회가 개최되어 활발한 포부를 대중에게 전달하였고, 새로운 해와 더불어 사무국은 드디어 활발히 약동하였다.
도의 조선 확립을 총력운동의 근본이념으로서 총독부와의 연락회의에도 활발한 논전 토의가 이루어졌다.
목욕재계에서 유래한 조선운동(鳥船運動)이 조선에서 유행하였고, 미영격멸 전의고양의 노래가 개창운동(皆唱運動)으로 확대되었다.
각 과를 중심으로 사회 기예들과의 사이에 연락간담회가 끊이지 않고 개최되었다. 문인보국회도 연맹의 알선으로 결성되었고, 잡지 '국민총력'도 월 2회 발간되었다.
4월에 사무국은 신축한 총독부 제3별관으로 이전하였다.
총회에서 운동의 주목표가 도의(道義) 조선의 확립, 황민의 연성, 결전 생활의 확립, 필승 생산력의 확충, 징병제 실시의 준비로 결정되었다. 고이소 총독은 행정면에서 말단 조직의 충실을 강조하였지만,연맹 총재로서도 총력운동의 말단인 애국반장의 책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매월 실천 철저사항으로 경신숭조(敬神崇祖), 보은감사운동, 청소운동, 조기(早起)운동, 시간이행운동, 가두 도덕운동 등 종래와는 다른 청신 潑刺한 정신운동을 지속하였다.
대동아전쟁 수행에 즈음하여 반도가 지닌 사명이 더욱 높아졌다. 8월 1일 징병제 실시를 계기로 그 취지철저와 사기앙양을 위한 각종 행사가 거행되었다. 또 내지인 학도출진에 호응하여 10월 조선 측의학도 궐기 지원의 길이 열리자 사무국도 급거 모든 반도 지도층을 총동원하여 학도지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의 발걸음과 더불어 연맹의 발걸음도 활발해졌다. 전시하 1년의 움직임은 과거의 수 십 년에 상당하다고 말한다.
1년간의 실천에 더 새로운 조직을 요청하고 있었다.
1943년 11월, 사무국은 1942년의 개조 이후 1년째로 새로운 개조를 실시하였다. 총무, 연성, 실천, 홍보 이외에 징병제와 마찬가지로 사무국에 살도한 헌금을 바탕으로 징병후원사무국이 설치되었다.
이번 개조로 나미다 총장이 용퇴하고 새로운 총장에 조선 측의 지도력이 있는 한상룡(韓相龍) 씨가 영입되었다.
차장제가 새롭게 도입되었고, 또 금융조합과의 연계로 '조선농촌 이야기'(朝鮮農村物語)의 저자 시게마츠 마사나오(重松髜修)가 금융조합 교육부장 겸무로 실천부장으로 발탁된 것은 일반 사회로부터 크게 주목받은 바이다.
부겐빌(Bougainville)에서 올린 전과에 보답한 100기 헌납운동은 총액 1천만 원을 돌파하여 1086만 원,108기 헌납이 이루어졌고, 4월에는 다시 200기 헌납운동이 일어났다. 이 또한 48기를 추가하는 효과를 올렸다.
전투기는 각각 육해군에 헌납되었지만, 조직의 완비와 높아진 전의가 이러한 숫자를 말해주고있다고 말할 수 있다.
2월부터 3월에 걸쳐 미영격멸국민총궐기대회가 개최되어 백 수십 명의 보도정신대원이 조선 각 읍면을 순회하면서 전의앙양을 역설하는 등 반도의 국민운동에 새로운 면을 열었다. 1월에는 총력선전의 강력한 실천 활동을 목적으로 한 홍보정신대가 생겨났다. 또 매월 3번 방송되던 ‘연맹정보’는 3월 1일부터 ‘연맹홍보’로서 매일 밤 오후 9시의 보도에 이어 방송되었다.
결전의 혹열(酷熱)과 더불어 조선이 지닌 힘은 물자와 인력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징병제로 반도의 병사는 내지의 병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싸웠고, 총후의 전력으로서 반도의 증산 전사는 다수가 내지로 건너갔다. 내선일체, 이는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대해서 아직도 과거의 인식만을 지닌 것이 가장 유감이다.
1943년 9월 29일과 30일 양일에 걸쳐 총력연맹 주최로 내선만화(內鮮滿華) 연락강화 간담회가 개최되어 국민운동의 대표자가 각각 경성에 모였다. 이들은 상호 그 열렬한 소견을 개진하고 대동아적 시각에서 검토하였다.
1944년 5월부터 6월에 걸쳐 총력연맹의 이사급 30명은 13개 반으로 나뉘어 내지에 대해 조선사정 소개 및 반도 산업전사의 위문격려 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조선의 총력운동이 조선해협을 건너 내지로까지 확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44년도 총회에서는 국민신앙의 확립, 황민연성의 철저, 내선일체의 철저, 황도문화의 작흥, 사봉(仕奉) 증산의 강화, 결전생활의 철저, 징병제도의 완수 등 7항목을 총력운동 전개의 중점으로 삼았다.
국민신앙 확립을 위해 관의 위탁을 받아 1면(面) 1사(祠) 계획에 따른 봉무자 양성이 대규모로 이루어졌고, 징병제 완수를 위한 국어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어 징용령 발동과 더불어 근로동원 취지의 철저에 전력을 기울였다.
여름에 고이소 내각의 등장과 더불어 아베(阿部) 총독, 엔도(遠藤) 정무총감이 각각 총재와 부총재가되었고, 연맹은 제2차 개조를 단행하여 총무, 실천, 근로, 병사후원의 4부가 되었다. 특히 근로부가 조직된 것은 결전 아래 반도 증산면에 대한 국민운동의 중책을 반영한 것이다. 징병후원에 군인후원을 추가하여 병사후원이 되었고, 징병제 실시 하에서의 태세를 정비하였다. 차장으로는 아마카스 시게타로(甘粕重太郞) 중장, 총무부장은 이토 노리오(伊藤憲郞), 실천부장은 마츠모토 마코토(松本誠), 근로부장은 정연기(鄭然基, 草本然基)가 각각 취임하였다.
4. 새로운 단계
1942년 가을의 새로운 출발 이후, 연맹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특히 조직적으로 중점을 둔 것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각 직역연맹을 사봉대(仕奉隊) 조직으로 강화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각 도연맹의 조직을 정비하는 것이었다.
전쟁의 격화와 더불어 내지에서 가장 가까운 조선인을 더욱 전력으로 요구하게 되었다. 종래의 총력운동은 조선의 모든 인구를 대상으로 지역연맹의 정비에 힘을 쏟았지만, 직역연맹(職域聯盟)의 조직은아직 미진하였다.
시국의 요청은 먼저 광산공장의 조직 강화였다. 광산에는 이전에 국민총력 조선광산연맹이 조직되었는데, 공장조직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커다란 과제가 되었다. 이 문제를 계기로 모든 직역연맹의 조직에 대한 근본안이 만들어졌다.
8월에 총력연맹은 직역연맹의 준칙 일부를 개정하였다. 군대적 조직을 채용하여 이를 ‘사봉대’라는이름을 붙였다. ‘사봉’이란 ‘섬긴다’는 말로 고전에 있는 한자의 용법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종래 일반적으로 ‘사봉’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지만, 이를 잘못하면 상품이나 노동력이 남은 것을 서비스한다는 외래어의 해석적 의미로 주로 사용되기 때문에 그 말을 사용하지 않고, 생활과 일 모두를 대군(大君)에게 바치는 의의라며 먼저 이름부터 그 정신을 고조시켰다.
조직은 중견 간부부터 일반 노동자까지 모두 하나로 만들어 25세 이하를 청년, 26세 이상을 장년, 그리고 부녀자 세 개로 구분하였고, 인원에 따라 대, 중, 소 분대를 편성하였다.
또 직장의 장을 대장으로 삼아 지도하도록 만들고 모두 종래대로 직역연맹에 소속시켰다.
근로자에게 국체의 본의에 의거한 철저한 황국 근로관을 주지시키고, 야마토(大和)의 정신에 따라 언제나 위로는 자애, 밑으로는 규율준봉(規律遵奉)으로 상하 단결과 혼연일체의 정신을 함양시킨다.
이를 업무와 일상생활에서 현현(顯現)시켜 근로 능률의 증진을 도모하고, 생산력 증강의 기반으로 삼는다.
이러한 정신 아래 먼저 광산공장 사봉대의 연성이 시작되었다. 지구별 협의회가 개최되어 개근(皆勤)운동과 진두지휘운동 등이 활발해졌고, 증산 능률이 더욱 향상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은행회사연맹 사봉대도 결성되었다. 더욱이 이 운동은 상업계에도 확대되었다.
1944년 3월 10일을 전후로 각 지역별(부군도 단위)로 상업사봉대를 결성하였다, 또 그 종합적 지도기관으로 조선연맹 및 각 도, 군, 도연맹에 상업사봉운동위원회를 설치하고, 나아가 부군도연맹에 상업사봉정신대를 특별히 만들었다.
상업사봉대 강령은 다음과 같다.
하나, 우리는 국체의 본의에 의거하여 황국상업도(皇國商業道)를 철저히 한다.
하나,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상업사봉의 정성을 바친다.
하나, 우리는 국책에 순응하고 전력 증강에 정신한다.
상업을 돈 버는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상업 그 자체를 ‘섬긴다’는 사고방식으로 만드는 것이 근본적인 전환이다.
눈앞에 다가온 기업 정비를 둘러싸고 이러한 정신의 전환은 업자들의 마음자세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을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내지의 산업보국운동과 상업보국운동은 조선에서는 사봉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사봉증산가(仕奉增産歌)가 선정되어 ‘증산은 섬기는 것이다’는 노래가 반도 생산 진영의 군가로 불렸고, 또 결전사봉체조가 각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전시 하에서 조선의 농업 증산도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였는데, 그 조직안도 다방면에 걸쳐 고려되었다.
총력연맹 발족 이후 조직이 정비되었다. 처음으로 애국반이 조직되었을 무렵, 다른 사람 일처럼 생각하거나 상회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도 언제부터인가 교대로 반장이 되거나 후견인이 되었다.
애국반이야말로 전시 하에서 담당할 책무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다.
적의 공습에 대비하는 방호방화도 애국반 단위로 설치되었다.
배급을 받는 기구도 애국반을 유력한단위로 삼았다.
근로에 출동을 요청받았을 경우에도 애국반이 단위가 되었다.
국가적 조사도 애국반 조직을 통해 이루어졌다.
저축과 공채의 소화도 애국반 조직을 통해 이루어졌다.
만약 이러한 애국반이 없었더라면 대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전혀 조직되지 않았던 조선의 민중은 이 조직을 통해 국민으로서 총력을 바쳐 전쟁에 돌입하였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국민조직을 고안하고 많은 고투를 거쳐 여기에 까지 온 선배들에게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크게 고마워해야 한다.
애국반 조직이 만들어졌다. 또 그 운동 본부로서 사무국에 많은 우수한 인재가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 애국반은 가장 저변의 조직이고 사무국과의 중간에는 도연맹, 부군도연맹, 읍면연맹, 정동리부락연맹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중간 조직 가운데 정동리부락연맹은 어느 정도 자치적인 충실함을 보였지만, 부군도, 읍면은 완전히 관공서의 업무를 대행하는 것에 불과하다. 중간의 국민운동적 조직의 정비가 무엇보다 긴요하다.
사무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운동은 잘못하면 광범위하고 산만해진다. 이는 조선 전체가 대상이기 때문이다.
남쪽은 제주도부터 북쪽은 함북의 끝까지가 운동의 시야이다. 남북의 기후 차이, 인정(人情)의 차이는 크다.
또 경성도 거리도 각 도의 농촌도 일괄된 대상으로서 지령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모든 지시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북쪽을 지향하면 남쪽에 맞지 않고, 농촌을 지향하면 도회지에 맞지 않는다.
그것은 전 조선을 대표하는 입장일 수 있지만, 전 조선을 모두 지도하는 강력한 지시는 각 도별로 각각 내려질 수밖에 없다.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힘도 도에서 정리한 형태로 보고되지 않는다면 파악할수 없게 된다.
종래 경성에서 만들어지던 매월의 실천 철저사항도 이상의 이유로 1944년 1월 이후 각 도별로 결정되었다.
철저한 실천 철저사항의 취지를 알리기 위해 조선의 애국반장에게 배포되던 43만부의 월간지'애국반'도 5월에 폐간이 되고, 대신 각 도로 발행이 이관되어 각 도판이 간행된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였다.
5월에는 도연맹 규약 준칙이 변경되었다. 도지사를 회장으로 선출했고, 부회장은 2명이었다.
부회장1명은 내무부장이고, 또 한 명은 민간 이사 중에서 선출하였다. 부는 총무, 전시생활, 증산, 징병후원사업, 홍보의 5부를 기준으로 삼았고, 부장 이외에 차장을 두었다.
또 이 무렵부터 도연맹 이하 각급 연맹에 금융조합 관계자를 배속시켜 말단에 이르기까지 양자의 긴밀한 연락을 도모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도연맹 기구가 정비되었고, 도연맹의 활약도 점차 활발해졌다.
도연맹의 인재 배치, 도연맹의 운동 강화, 도연맹과 사무국의 유대 강화 등이 현재 총력운동의 중요 과제이다.
결론
‘내선일체’, 이 말도 이제는 낡은 말이 되어버려 새로운 말을 찾고 있다. 처우문제도 이제 구체화되고있다.
하정상통(下情上通)을 위한 연맹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다. 내지와 조선의 국민운동의 결합도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내선의 진정한 합체를 위한 국민생활의 구체적 지도가 명학하게 촉진되어야 한다.
국민총력운동의 출발에 즈음하여 총력운동은 대정익찬회와 같은 정치적 색채를 회피하면서 정신운동에 집중하였지만, 지금 정치적인 처우를 계기로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돌입하고 있다.
가열되는 결전아래, 내지에서의 국민조직의 일원화와 강력함이 고조되는 오늘날, 반도의 국민운동에도 종래와는 다
른 웅대한 구상과 강력한 전진을 위해 더욱 엄숙한 자기탈피가 요망된다.
국민운동은 어디까지나 일본국민으로서의 운동이다. 병합의 성지를 받드는 운동이다. 시정 30여 년,그 유종의 미는 앞으로의 국민운동에 달려있다. 대동아전쟁의 완승을 위해 조선에 요구되는 전력의 최대 발휘도 이러한 국민운동의 조직 강화 여부에 달려있다.
<부록>
Ⅰ. 규약의 변천
국민정신총동원연맹 규약(1938년 7월 7일)
제1조 본 연맹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라 칭한다.
본 연맹의 사무소는 당분간 조선총독부 안에 둔다.
제2조 본 연맹은 내선일체 거국일치 국민정신총동원의 취지 달성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하고, 본 취지에 찬동하는 조선의 각종 단체 및 개인으로 조직한다.
제3조 본 연맹은 앞 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음 사업을 실행한다.
1. 강연회 좌담회 등의 개최 또는 강사의 알선 및 파견
2. 인쇄물의 제작 배포
3. 가맹단체 및 개인 상호간의 연락조성 및 가맹단체 이외의 단체 및 본 운동 실시 기관의 활동 원조
4. 기타 앞 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사업
제4조 본 연맹은 본 운동에 관해 당국의 자문에 응하거나 당국에 건의할 수 있다.
제5조 본 연맹 설립 이후 가맹하려는 자는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한다.
제6조 본 회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명예총재로 추대한다.
본 회에 고문 약간 명을 둔다.
제7조 본 회에 다음 임원을 둔다.
이사장 1명
이사 약간 명(이 가운데 약간 명을 상무이사로 한다)
평의원 약간 명
참여 약간 명
제8조 이사장은 이사회에서 추천한다.
이사장은 본 연맹을 대표하고 회무를 총리한다.
이사장 사고 시에는 이사장이 지명한 이사가 그 직무를 대리한다.
제9조 이사는 이사장이 지명한다.
이사회는 평의원회의 의결에 회부되는 것을 제외한 본 연맹에 관한 중요한 사건을 심의하고,상무이사는 본 연맹에 관한 사무를 장리(掌理)한다.
제10조 평의원은 가맹단체 관계자 및 개인 중에서 이사장이 위촉한다.
평의원회는 본 연맹의 중요한 사건으로 이사장이 논의를 회부한 사건을 심의한다.
제11조 고문과 참여는 이사회에서 추천하나다.
참여는 본 연맹에 관한 중요한 사건에 참여한다.
제12조 이사회와 평의원회는 이사장이 소집한다.
이사회와 평의원회의 의장은 이사장이 맡는다.
제13조 본 연맹에 필요한 직원은 이사장이 임면한다.
부칙
본 연맹 설립 당초의 이사장은 설립 발기인이 추천한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규약(1939년 4월 15일)
제1조 본 연맹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라 칭한다.
본 연맹의 사무소는 경성부 내에 둔다.
제2조 본 연맹은 내선일체 거국일치 국민정신총동원의 취지 달성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하고, 본 취지에 찬동하는 조선의 각종 단체 및 개인으로 조직한다.
제3조 본 연맹은 앞 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음 사업을 실행한다.
1.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관한 실시 계획 및 그 실행
2. 가맹단체 및 개인 상호간의 연락협조 및 가맹단체 이외의 단체 및 본 운동 실시 기관의 활동 원조
3. 기타 앞 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사업
제4조 본 연맹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
제5조 본 연맹은 총재 1명을 추대한다.
제6조 본 회에 다음 임원을 둔다.
평의원 약간 명
이사장 1명
이사 약간 명(이 가운데 약간 명을 전무이사 및 상무이사로 한다)
참사 약간 명(이 가운데 약간 명을 전무참사로 한다)
간사 약간 명
제7조 총재의 추대는 이사회가 한다.
총재는 본 연맹을 총리한다.
제8조 본 연맹에 고문 약간 명을 두고, 총재가 이를 위촉한다.
고문은 본 연맹에 관한 중요사항에 대해 총재의 자문에 응한다.
제9조 본 연맹에 참여 약간 명을 두고, 총재가 이를 위촉한다.
참여는 본 연맹의 시설계획에 대해 총재의 자문에 응한다.
제10조 임원은 총재가 이를 위촉한다.
제11조 평의원은 평의원회를 조직하고, 본 연맹에 관한 중요사항으로서 총재가 심의에 회부한 사항을 심의한다.
제12조 이사장은 총재를 보좌하고 본 연맹의 전무를 장리한다.
총재 사고 시에는 이사장이 그 직무를 대리한다.
제13조 이사장 및 이사는 이사회를 조직하고, 본 연맹에 관한 중요사항을 심의한다.
전무이사는 총재 및 이사장을 보좌하고, 이사장 사고 시에는 총재가 지명한 전무이사가 그 직무를 대리한다.
상무이사는 상무이사회를 조직하고, 총재의 자문에 응한다.
제14조 참사는 본 연맹의 전무를 참여한다.
전무참사는 본 연맹의 전무에 상시 참여한다.
제15조 감사는 본 연맹의 경리를 감독한다.
제16조 이사회 및 평의원회는 총재가 이를 소집한다.
제17조 본 연맹에 유급직원을 둘 수 있다.
국민총력조선연맹 규약(1940년 10월 16일)
제1조 본 연맹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이라 칭한다.
제2조 본 연맹은 국체의 본의에 의거하여 내선일체의 내실을 거두고, 각각 그 직역에서 멸사봉공의
정성을 바쳐 협심육력(協心戮力)으로 국방국가체제의 완성, 동아신질서의 건설에 매진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 본 연맹은 조선의 모든 단체 및 개인으로 조직한다.
제4조 본 연맹에 총재 및 부총재 1명을 둔다.
제5조 본 연맹에 다음 임원을 둔다.
고문 약간 명
이사 약간 명(이 가운데 약간 명을 전무이사로 한다)
참여 약간 명
평의원 약간 명
참사 약간 명(이 가운데 약간 명을 전무참사로 한다)
제6조 총재는 조선총독을 추대한다.
총재는 본 연맹을 총리한다.
제7조 부총재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추대한다.
부총재는 총재를 보좌하고, 총독 사고 시에 이를 대리한다.
제8조 고문은 총재가 이를 위촉한다.
고문은 총재의 자문에 응하고, 중요사항에 대해 의견을 진술한다.
제9조 이사는 조선총독부의 국장, 국민총력과장 및 학식과 경력이 있는 자 가운데 총재가 위촉한 자로 구성한다.
이사는 총재의 명령을 받아 전무를 장리한다.
이사는 이사회를 조직하고, 본 연맹에 관한 중요사항을 심의한다.
제10조 참여는 총재가 이를 위촉한다.
참여는 참여회를 조직하고, 총재의 자문에 응한다.
제11조 평의원은 각종 단체의 임원 기타 학식과 경험이 있는 자 가운데 총재가 이를 위촉한다,
평의원은 평의원회를 조직하고, 총재의 자문에 응한다.
제12조 참사는 총재가 이를 위촉한다.
참사는 이사를 보좌하고, 전무의 집행에 참여한다.
제13조 이사회, 참여회 및 평의원회는 총재가 이를 소집한다.
제14조 임원에게는 수당을 지급할 수 있다.
제15조 본 연맹의 전무를 처리하기 위해 경성부 내에 사무국을 둔다.
사무국에 유급 직원을 둘 수 있다.
사무국의 직원은 총재가 이를 임면한다.
사무국에 관한 규정은 별도로 정한다.
국민총력조선연맹 규약(1942년 11월 4일)
제1조 본 연맹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이라 칭한다.
제2조 본 연맹은 국체의 본의에 의거하여 내선일체의 내실을 거두고, 각각 그 직역에서 봉공의 정성을 바쳐 그 총력을 결집하여 황도를 부익하고 받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 본 연맹은 조선의 모든 국민 및 참가단체로 조직한다.
제4조 본 연맹에 다음 임원을 둔다.
총재
부총재 1명
고문 약간 명
참여 약간 명
이사 약간 명(이 가운데 약간 명을 전무이사로 하고, 약간 명을 상무이사로 한다)
평의원 약간 명
참사 약간 명(이 가운데 약간 명을 전무참사로 한다)
제5조 총재는 조선총독을 추대한다.
총재는 본 연맹을 총리한다.
제6조 부총재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추대한다.
부총재는 총재를 보좌하고, 총독 사고 시에 이를 대리한다.
제7조 고문 이하 임원은 학식과 경험이 있는 자 가운데 총재가 이를 위촉한다.
이사, 평의원, 참사의 임기는 1년으로 한다. 단 관공리 및 전무임원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임기 중도에 앞 항의 임원으로 위촉된 자의 임기는 위촉 시에 이를 지정한다.
제8조 고문 및 참여는 총재의 자문에 응하고, 중요사항에 대해 의견을 진술한다.
제9조 이사는 총재의 명령을 받아 전무를 장리하고, 임시의견을 진술한다.
이사는 이사회를 조직하고, 본 연맹에 관한 중요사항을 심의한다.
제10조 평의원은 평의원회를 조직하고, 총재의 자문에 응하고 수시로 의견을 진술한다.
제11조 참사는 이사를 보좌하고, 전무의 집행에 참여한다.
제12조 이사회, 참여회 및 평의원회는 총재가 이를 소집한다.
제13조 임원에게는 수당을 지급할 수 있다.
제14조 본 연맹의 전무를 처리하기 위해 경성부 내에 사무국을 둔다.
제15조 사무국에 사무국 총장을 두고, 이사 가운데 총재가 이를 임명한다.
사무국에 관한 규정은 별도로 정한다.
제16조 부·도·군·도·읍·면·정·동·리·부락에 각각 연맹을, 정동리부락연맹에 약간의 애국반을 두고, 각각 바로 위의 연맹에 예속시킨다.
도 이하의 연맹 및 애국반에 관한 규정은 별도로 이를 정한다.
제17조 참가단체는 각각 국민총력 무슨(단체명) 연맹으로 칭하고 그 업무영역이 2개 도에 걸친 것은 조선연맹에, 도내 2개 부군 이상에 걸친 것은 그 도연맹에, 군도 내 2개 읍면 이상에 걸친 것은 그 군도연맹에, 부읍면 내 2개 동리 이상에 걸친 것은 그 부읍면연맹에, 정동리 내 2개 부락 이상에 걸린 것은 그 정동리연맹에 예속한다.
전 항의 연맹에 관한 규정은 별도로 정한다.
제18조 본 연맹의 경비는 국고보조금 기타 수입으로 충당한다.
Ⅱ. 운동방침, 목표, 요목의 변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실천요목(1938년 9월 22일 결정)
1. 매일 아침 황거요배
2. 신사참배 장려
3. 조상의 제사 장려
4. 기회 있을 때마다 황국신민의 서사 낭독
5. 국기의 존중, 게양의 장려
6. 국어생활의 장려
7. 비상시국민생활기준양식의 실행
8. 국산품 애용
9. 철저한 소비절약과 저금의 장려
10. 국채응모권장
11. 생산의 증가 및 군수품 공출
12. 자원의 애호
13. 근로보국대의 활약 강화
14. 1일 1시간 이상 근로증가의 장려
15. 농산어촌갱생 5개년 계획의 완전 실행
16. 전가(全家) 근로
17. 응소 군인의 환송 환영, 부상병의 위문
18. 출정군인 및 순국자 유가족의 위문 위령, 가족방문
19. 기회 있을 때마다 순국자 영령에 묵도
20. 유언비어의 삼가와 간첩의 경계
21. 방공방첩의 협력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강령(1938년 9월 22일 결정)
하나. 황국정신의 현양
본 연맹 결성의 최초의 동기이자 마지막 이상(理想)은 황국 일본의 정신을 반도 곳곳에 이르기까지 고루 미치게 하고 국민의 마음에 침투시켜, 반도 민중 모두가 황국신민이라는 신념으로 불태워 항상황실을 존숭하고, 국가를 사랑하며 신사를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하여 자기의 소아(小我)를 버리고 국가 유구(悠久)의 대의(大義)에 합체하는 숭고지상의 정신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연성하여 이를 발양하는 것에 있다.
다음의 여러 강령의 근본정신도 그 연원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연맹원은 모두 그 진의를 체득하여 스스로 다스려 사린(四隣)을 고치고 후진을 이끌어 다음 세대에 미치게 함으로써그 이상을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
하나. 내선일체의 완성
반도 민중의 진정한 행복과 향상은 내선일체의 완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내선은 오래도록 바다를 경계로 언어 풍속을 달리했지만 원래부터 뿌리가 동일하다.
이제 시절이 도래하여 고대의 모습으로 환원하여 그 병합을 보기에 이르렀다. 황도에 의거하여 인정(仁政)은 일시동인의 성지를 본받아 다만 양지일가(兩地一家)의 건설에 노력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동아의 맹주로서 대륙에 영년(永年)에 걸쳐 군림하던 요기(妖氣)를 일소하고 명랑한 신생 아시아 건설의 중임을 떠안아 많은 어려움을 물리치면서 소신 있게 매진하고 있다.
조선은 그 전진기지로서 중대한 사명을 떠안고 있다.
이번 가을에 우리 연맹원은 서로 성의를 피력하여 내선을 상호이해하고 서로 친목하여 융합일체의 실질을 거두었다.
또 반도의 일반 민중에게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신아시아 건설의 성전에 협력 참가하는 것은 국민으로서 더 없는 영예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반도의 영원한 안녕과 향상에 있어 정도(正道)라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하나. 생활의 혁신
구래의 관습을 타파하고 천지의 공도(公道)에 따르는 것이 메이지 신정의 커다란 이상이자 황국 일본이 세계로 비약한 원유(原由)의 하나이다.
이러한 국시는 병합 이후 반도에서도 착착 실현되어 예전의 모습을 바꾸고 있다.
하지만 일반 민중의 생활은 그 양식이 신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오래된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적지 않다. 국민이란 항상 시대의 진운과 국가의 이상을 통찰(洞察)하고 스스로 생활을 반성해야 한다. 불합리와 번잡스러움에 빠져 민력의 신장을 저해해서는 안 되고, 이를 혁신하려는 진보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지금 우리 황국은 동아의 지도자로서 아시아의 대중을 구제 향상시키고, 손을 맞잡고 일대약진을 이루려는 도상(途上)에 있다.
우리 연맹원은 현하시국을 고려하고 먼저 분기하여 반도 민중의 선도가 되어야 한다. 합리와 능률의 원칙에 비추어 생활의혁신을 도모하고, 도덕적 물질적으로도 생활의 내용을 풍부히 해야 한다. 선풍미속의 보급과 내선의 풍속과 관습의 내선융화에 힘써 국운의 진전에 강력히 기여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데 힘써야 한다.
하나. 전시경제정책에 대한 협력
근대 전쟁은 실로 국가의 모든 힘을 동원하는 종합적인 국력전이다. 최후의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최고도로 동원된 일국의 모든 정신력과 경제력을 전쟁 목적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쟁 필수품의 종류는 다방면에 걸쳐 거의 모든 물자를 망라할 수밖에 없다. 또한 직접 전투용으로만 제공되는 물자도 일반 국민생활에 소요되는 한, 국가 총력전의 불가결한 요소라는 점은 논할 필요도 없다.
물자동원에 관해서는 여러 법규가 규정하고 있으며 수시로 정부도 지시하는 바이다.
우리는 이러한 지침에 물론 따르겠지만, 그 정신을 깊이 이해하고 나아가 열성적으로 협력하여 전쟁 목적 수행에 유감이 없도록 단단히 결심해야 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모하는 공사(公私) 생활상의 물자는 종이 한 장이라도 국가자원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절약에 유념하고, 국가가 명령하는 제한통제의 취지를 충분히 수행하여야 한다. 더욱이 생업보국의 정신에 따라 생산의 증가를 도모하고, 물자를 통해 국가의 전쟁목적 수행에 참가 협력하겠다는 각오를 다져야한다.
하나. 근로보국
우리는 각자의 생업에서 근로에 종사하고 있다. 하지만 한 단체나 한 부락 전부가 집단적 근로를 통해 공익에 봉사하는 것은 특히 거국일치의 비상시에 국민훈련으로서 그 의의가 중대하다.
즉 공공적 근로를 통해 개인의 소아(小我)를 전체 속에 융합하여 희생협력의 정신을 연마하고, 친화적이고 화목하며 규율적 계획적 작업에 순종하여 인고지구(忍苦持久)와 근로호애(勤勞好愛)의 정신을 조장하는 등 공동생활에 필수적인 덕(德)을 체험함과 동시에 국가경제에 기여하여 국력의 증강에 바탕이 되어야 한다.
연맹원은 이러한 의의를 이해하여 일반 민중이 강제적이지 않고 자발적으로 기꺼이 이 사업에 참가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하나. 생업보국
우리가 일상 종사하는 업무는 원래 각 개인의 생활에 밑바탕일 뿐 아니라, 국가적 대분업 체제에서 우리는 각자의 생업을 통해 국력증강의 일부분을 담당할 책무가 있다. 이를 자각하여 항상 총력전의한 전사(戰士)로써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이를 합리화하여 그 효율을 증진시켜야 한다.
또한 소비절약과 물자이용에 유의하면서 특히 산업방면에서는 그 장점에 따라 생산의 확충에 노력해야 한다.
국가의 통제를 감수하고 직간접적으로 군수품의 조달과 국제수지의 균형에 힘써야 한다.
국민 모두가 생산과 소비 양면에서 장기 경제력의 충실과 유지에 협력할 필요가 있다.
하나. 총후의 후원
미증유라 불리는 비상시국에 즈음하여 우리 총후의 국민이 날마다 그 생업에 안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크고 끝없는 황은(皇恩)의 덕택이자 존엄한 위세로 제일선에 있는 장병의 밤낮을 불구한 고투 덕택이다.
우리의 친애하는 동포는 우리가 다리를 펴고 편히 쉬는 사이에도 잘 먹지도 잠들지 못하고, 전쟁터에서 모든 어려움과 결핍을 참아내면서 호국의 귀신이 될 각오로 오직 성전 그 하나에 몸을 바치고 있다.
우리 총후에 있는 자 모두는 편안함에 안주하지 말고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물심양면에서 장기지구전에 대비함과 동시에 적성(赤誠)을 피력하여 응소 출정한 장병을 고무 격려하고 그 유가족을 위로하여 후원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또한 물질과 노력으로 군국의 필요성에 희생을 아까워하지 않는 정신이 필요하다.
하나. 방공방첩
싸우려는 자는 먼저 적의 상황을 상세히 알아야 한다. 현대의 종합적인 국력전(國力戰)에서 국가의의도와 실력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내치, 외교, 군사의 기밀과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인적 물적 자원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적국의 상황은 어떤지 강구할 수 있는 수단을 동원하여 그 실정을 탐지할 필요가 있다.
간첩은 평시와 전시를 불문하고 상상 밖의 교묘한 수단과 모습으로 항상 우리의 주변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단단한 제방 둑도 바늘구멍 하나로 무너진다.
특히 우리나라가 모든 힘을 바쳐 황도 선포의 커다란 이상에 매진하는 지금에 즈음하여 우리의 일상적이고 불필요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국가의 목적 수행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행동과 주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적에게 한 치의 틈이라도 주면 안 된다.
공산 적화의 사상은 인류의 적으로 우리 국풍으로 보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음이 명백하다.
항상 정치(精緻)한 주의와 왕성한 전의를 품어야 한다. 방공에 노력하여 이 방면에 관해서는 특히 방첩상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방공협회는 이러한 목적으로 조직되었는데, 동 협회의 회원은 물론 그렇지 않은 자도 이 정신을 체득하여 행동해야 한다.
방공협회에 대한 외적 원조는 연맹의 목적에서 보아 지당한 일이다.
하나. 실천망의 조직 및 지도의 철저
연맹은 국민총동원을 이상으로 삼는다. 철저한 연맹의 실천망 보급은 총동원운동의 근본을 결정한다.
애국반원은 거국일치의 중핵이 되어 동료 반원의 증가에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즉 황화(皇化)를 심화시키는 일이다.
가령 반원 1명씩을 우리의 맹우로 만든다면 연맹 교화의 힘은 배가될 것이다.
신중히 연맹의 취지를 이해시켜 기꺼이 자발적인 결의로 황도선포의 전사라는 포부를 지니고 참가하도록유도할 필요가 있다. 연맹의 궁극적인 이상은 반도 2,300만 동포 모두를 참가시킨 종횡의 조직망을 철저히 확립하고, 전원 일혼(一魂)의 힘으로 황도선양의 추진력이 되겠다는 각오를 확고히 하는 것이다.
한편 연맹원 상호간의 원만한 친화는 연맹의 결속을 확고히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연맹원은 각각 스스로 황국신민으로서의 책무를 지님과 동시에 다른 연맹원 동지를 깊이 인식해야 한다.
서로 친하게 돕고 고락을 함께하여 화복을 나눔으로써 애국반을 비롯해 연맹 내부의 화합을 도모할 필요가있다.
또한 연맹 외부의 일반 민중에 대해서도 온화와 자혜의 태도로 대함으로써 자연적으로 공존공영을 융화가 이루어지도록 지도할 필요가 있다.
1940년도 국민정신총동원운동 방침
황기 2600년, 반도 2300만 창생은 상하 모두 숭고 청순의 정념(情念)으로 그 얼마나 광휘(光輝)한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를 대망(待望)하고 있는가. 더구나 흥아의 성전 아래 이러한 의미 있는 해를 맞이하여 우리의 감격은 그 어떠한 말로 다하기 어렵다.
금년은 동아에서의 신질서의 건설에 비약적인 진전이 기대되지만, 여전히 성전이 계속될 것이다.
조선은 작년에 조우한 미증유의 대한해가 금년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칠 것이다.
국민은 물심 모두 자숙자계의 마음을 한층 강화하고 인고 단련하여 인고와 결핍을 참아내야 한다. 물론 이완되거나 게으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더욱 강화하여 불퇴전의 용맹심과 확고불발한 각오로 많은 어려운 사태를 극복하면서 조국정신(肇國精神)의 현현(顯現)과 황운의 부익(扶翼)에 매진해야 한다.
황기 2600년이 지니는 의의의 발양에 노력하면서 국민총훈련의 촉진을 도모해야 한다.
따라서 본 연맹은 1940년도 전개할 운동의 기본적 방침을 다음과 같이 정한다.
모든 시설은 이에 의거하여 이루어져야 하고, 중앙과 지방이 연락 호응하여 상기 목적의 달성을 도모해야 한다.
1. 조국(肇國) 대정신의 앙양 천명
우리 조국의 대정신은 진무(神武) 천황의 즉위 시에 수립되어 이후 2600년 동안 나날이 제국의 진로를 비추어왔다. 신동아 건설이나 내선일체의 실현은 모두 이러한 대정신의 발로이다.
우리는 지나 대륙에서의 성전의 세계사적 의의를 재인식하고, 현하 세계정세의 추이와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의 역사,
문화 등에 대한 이해를 한층 깊게 하여 조국정신의 앙양 천명에 힘써야 한다.
2. 내선일체 완성의 촉진
내선일체의 완성은 본 연맹이 제창한 바이다. 반도에서 내선 민중의 진정한 행복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 구현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내선일체라는 것은 멀리 신대(神代) 무렵부터 그 사실을 찾을 수 있다.
신라와 백제 시대에 그 구현이 특히 현저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즉 내선일체라는 것은 결코 이론이나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다. 오늘날 총독정치의 여러 시설은이러한 사실의 복원을 목표로 그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특히 최근 부여신궁의 창설, 교육제도의 개정,지원병제도의 제정, 창씨제도의 설정 등은 모두 이러한 내선일체의 대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민중은 깊은 감격의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동아의 맹주로서의 제국의 기초를 강고히 다지기 위해서도 이번에 내선일체를 완성을 특히 정신방면으로부터 촉진하고, 본 연맹 운동의 한 축으로삼아야 한다.
3. 전시생활의 철저
성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국민은 이에 대한 강한 의식 아래 각자 생활을 명심해야 한다. 제1선의 황군 장병과 인고를 함께 나누겠다는 생각을 품어야 한다. 경제통제의 강화에 순응하고 극도의 간소생활을 실천해야 한다. 필요 없는 것을 배제하고 전시식량을 확보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한해의 영향을 극복하려는 시책의 실행에 힘써 생산의 증가를 도모하고, 전시경제 도덕의 확립을 강조해야 한다.
다만 이로 인해 정신이 위축되거나 활기나 진취적 기상이 사라지지 않고 어디까지나 불퇴전의 용맹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4. 모든 국가적 시설 실행의 추진
본 운동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련되어 있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불문하고 그 어떤 국가적 시설의 실행에는 모든 분야에 걸쳐 협조해야 한다. 또 이것이 추진력이 되어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취지로 언제나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5. 도시에서의 운동 강화
도시에서의 본 운동 실적이 아직도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단지도시만의 슬픈 일이 아니다. 그 영향은 나아가 지방에도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도시에서의 본 운동의 강화에 특별히 힘을 쏟아야 한다. 도시에는 사회의 지도적 지위에 있는 자가 많다.
먼저 이들 계급부터 실천하는 모범을 보이는 태도로 나서야 한다.
또 은진(殷賑) 산업관계자에게 강력히 호소하여 본 운동 정신의 침윤 철저를 도모해야 한다.
6. 운동 능률의 증진
본 운동의 효과를 크게 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적 자질의 향상과 기구조직의 충실개선을 도모해야 한다. 종횡 간의 연락을 원활히 하고 현재의 유기적 조직을 한층 강고히 해야 한다.
또한 본 운동의 성질을 고려하면 특히 말초조직을 정비하여 운동 능률의 증진 향상을 도모해야 한다.
7. 국민총훈련으로의 유도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한편으로 국민총훈련이다. 국민총훈련은 실질적으로 사변 발생 이후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전개를 통해 이미 실시되어왔다. 하지만 현재 시국 하의 국내외 정세는 한층 철저하고 강력한 국민의 총체적 훈련이 요구되고 있다.
국민총훈련의 목표는 크게 보면 영원한 황국 융창의 초석을 다지는 것으로, 우선은 신동아의 건설을 추구한 사변의 유효한 처리에 집중해야 한다. 즉 금후의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기존의 기구와 세포를 이용하여 각개훈련과 전체훈련을 통해 운동의 효과를 국민총훈련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향해 이를 귀납적으로 유도해야 한다.
1940년도 국민정신총동원운동 방침에 기초한 사업 계획
1. 조국(肇國)의 대정신 앙양 천명
(1) '국체명감(國體明鑑)' 및 '연맹정전(聯盟正典)'(가칭)의 기념 간행
(2) '국체의 본의(國體の本義)'의 조선어 역(또는 중국어 역) 간행
(3) 기념축전의 거행
(4) 기념순회강연회의 개최
(5) 동아신질서 건설의 취지 및 그 추이의 부단한 주지 선전
2. 내선일체 완성의 촉진
(1) 부여신궁 어조영 근로보국 작업
(2) 내지에 대한 시설
가. 강사파견
나. 좌담회 및 영화회 개회
다. 조선 이주자의 증가 및 정착의 선전
라. 소책자의 간행 배포
마. 라디오 전국방송
(3) 선내(鮮內)에 대한 시설
가. 국어의 보급
나. 강습회 개최
다. 지원병제도의 상시 선전 보급
라. 지원병 합격자의 표창
마. 창씨제도의 보급 철저
바. 내선결혼의 장려 및 편의 제공
사. 만주, 북지 및 내지행 이민에 대한 선전 교화
아. 내선 풍속의 융합
자. 내선 습관의 융합
카. 일본 취미로의 유도
(4) 대외 시설
가. 만주국 전반에 조선사정 선전
나. 북, 남, 중지의 반도인에 대한 조선사정의 선전
다. ‘가’와 ‘나’ 민중에 대해 팔굉일우의 정신 및 신동아 건설의 취지 선전
3. 전시생활의 철저(인쇄물, 강연, 방송, 좌담회, 표어 등)
(1) 시국인식의 철저 강화
(2) 국방사상의 보급 강화
(3) 황군 위문
(4) 은진(殷賑) 산업단체에 국민정신총동원운동 정신의 보급
(5) 생활개선위원회의 설치
(6) 물자의 애호절약
(7) 생산의 증가와 한해 영향의 극복
(8) 저축장려
(9) 1인 1기념사업의 필행(必行)
(10) 근로보국작업의 장려
4. 모든 국가적 시설 실행의 추진
그때마다 시책할 것.
5. 도시에서의 운동 강화
(1) 경성부연맹의 강화 촉진
(2) 기타 도시연맹에 대한 촉진
가. 도별 도시연맹 진흥타합회 개최
나. 도시에서의 각종 연맹의 운동 강화
6. 운동 능률의 증진
(1) 조선연맹의 기구 강화
(2) 위에 준한 지방연맹 기구의 강화
(3) 애국반의 철저 강화
가. 애국반의 정비
나. 애국반장의 훈련
다. 우량 애국반의 표창
라. '애국반지도필휴(愛國班指導必携)'의 간행
(4) 학교연맹의 정비
(5) 학교교원지방연맹의 애국반 지도
(6) 청년단에 국민정신총동원운동 보급부 설치
(7) 각 도연맹 사무담임자 타합회 및 지방연맹 관계자 강습회
(8) 각 도별 지도자 타합회
(9) 부군도 이상 연맹 이사장대회
(10) 추진대원의 훈련강습회
(11) 만주국 파견 근로보국대의 지도
(12) 도연맹에 국민정신총동원운동 조사위원회의 설치
(13) 지방연맹 및 애국반의 시찰지도
7. 국민총훈련으로의 유도
(1) 여러 행사의 목표를 이 점에 집중할 것
(2) ‘국민총훈련’의 표어보급 및 선전
(3) 매일 아침 행사 및 애국일의 보급 철저
(4) 라디오 ‘정동의 시간’ 활용
(5) 영화 제작 및 순회영사
(6) 연맹가의 보급
(7) 연맹 및 애국반의 집단훈련
8. 기타
(1) 사변기념 및 연맹결성대회의 거행
(2) 부, 읍, 면 또는 정, 동, 리, 부락연맹 마다의 기념식 거행
(3) 일반 연중행사에 대한 협력
(4) 국민정신총동원운동 소개책자 및 도표 간행
(5) 각종 강연록, 강습록의 간행
(6) '총동원' 및 '새벽(曉)'의 개선충실
국민총력조선연맹 실천요강(1940년 2월 11일 결정)
▪ 최고목표 : 고도국방국가체제의 확립
▪ 실천대강
제1. 사상의 통일
제2. 국민총훈련
제3. 생산력 확충
▪ 실천요목
제1. 사상의 통일 : 1. 일본정신의 앙양, 2. 내선일체의 완성
제2. 국민총훈련 : 1. 직역봉공의 철저, 2. 생활신체제의 확립
제3. 생산력 확충 : 1. 전시경제의 추진, 2. 증산의 수행
▪ 중점
⋅일본정신의 앙양 : 국체 관념의 명징, 경신숭조 거국일치, 멸사봉공의 대정신 발양, 황국신민의 신념 철저
⋅내선일체의 완성 : 일시동인의 성지 봉체(奉體), 내선일체 이념의 철저, 내선 사실의 재확인 신애협력의 실천
⋅직역봉공의 철저 : 고도국방국가체제 확립의 결의, 국가제일주의의 실천, 책임 관념의 철저
⋅생활신체제의 확립 : 성전완수의 결의, 인고연마의 철저, 국방사상의 보급, 공덕심의 발양
⋅전시경제의 추진 : 경제전 필승의 결의, 통제법령의 엄수, 공익우선 사상의 철저
⋅증산의 수행 : 증산 필행의 결의, 건설적 기백의 앙양, 유한(流汗) 근로의 실천
▪ 실천사항
⋅일본정신의 앙양
1. 아침의 궁성요배
2. 신사참배
3. 정오의 목도
4. 국기게양
5. 황국신민의 서사 낭독
⋅내선일체의 완성
1. 국어의 보급
2. 내선 풍습의 융화
3. 단결의 강화
⋅직역봉공의 철저
1. 책임의 완수
2. 능률중진 직능발휘
3. 의무의 즉결 즉행
4. 무위도식의 배격
⋅생활신체제의 확립
1. 간이절약생활의 강행
2. 국민복의 보급
3. 건전오락의 장려
4. 국민체위의 향상
5. 위생사상의 보급
6. 과학정신의 앙양
7. 단체훈련의 철저
8. 방공, 방첩, 방공, 방화, 방범
9. 총후후원의 강화
10. 상회(常會)의 장려
⋅전시경제의 추진
1. 매점매석, 암거래 폭리행위의 괴멸
2. 적정 이윤의 엄수
3. 식량대책의 장려
4. 물자배급에의 협력
5. 자원의 절약활용
6. 저축장려 국채응모
⋅증산의 수행
1. 계획증산의 강행
2. 근로배가
3. 창의 공부의 장려
4. 잉여 노동력의 활용
5. 노자(勞資) 협조
6. 미간지 공유지 활용
<실천방책>
1. 실천준비의 철저
(1) 실천방법의 개선 주도와 중점 파악
(2) 요목(要目) 정신의 보급 철저
(3) 주도면밀한 실천준비의 완비
2. 지도진영의 강화
(1) 조직의 정비확립
(2) 강력한 지도망의 충실
(3) 지도자의 솔선수범
(4) 지도자와 피지도자와의 상호신뢰
(5) 지도의 간절(懇切)과 간명
(6) 기선(機宣)의 조치를 통한 지휘의 철저
3. 실천의 철저
(1) 상호제휴와 실천의 장려
(2) 실천공부와 창의의 창달
(3) 모범적 실천자의 표창
(4) 호조적(互助的) 주의(注意)와 반성의 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