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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료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 10 (4) - 유학계의 친일협력 친일한시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7.05.07|조회수120 목록 댓글 0

◈ 함경남도(咸鏡南道)


밤에 알리는 승리 보고에 시운(時運)이 말고 夜報捷書時運淸

일장기 아래에서 황성(皇城)에 절을 하네 日章旗下拜皇城
산하는 춤추는 용처럼 천번 변하는데 山河如舞龍千變
우주는 잠 깨는 닭의 한 울음소리에서 시작되네 宇宙始醒鷄一聲
좋게 매화 술잔을 들고 역사(歷事)를 논하고 好把梅樽論歷事
영원히 역사에 꽃다운 이름을 적네 永令竹史著芳名
이제 천하에 개선가 여러 곡을 부르니 凱歌數曲今天下
남녀 기뻐하고 태평함을 즐거워하네 女悅男欣樂泰平


풍산(豊山) 한호련(韓皜鍊)


우방에 병란이 무슨 원인인지를 물어 友邦兵變問何因
악을 응징하고 동인(同仁)439)정책이 새롭네 懲惡同仁政策新
북쪽 변방에서 많이 애쓴 이는 전쟁에 장수요 幾勞北塞干戈將
동조(東朝)에 주초석이 되는 신하이네 可是東朝柱石臣
장한 책략은 능히 진야의 사슴(秦野鹿)을 길들이고 壯略能馴秦野鹿
공명은 또한 한대린(漢坮麟)440)에 그려지리 功名亦畵漢坮麟
평화 기대한 연후에 기쁘고 期待平和然後喜
일본과 중국은 예부터 서로 이웃이네 日支自古共爲隣


풍산 신홍식(申弘湜)


영원한 평화 이때에 있으니 永遠平和在此時
한번 난국이 열리니 그 마땅함을 얻었네 一開難局得其宜
모질고 사나운 적은 마땅히 응징하니 복종하지 않음이 없고 暴戾當懲無不服
간사한 적을 정벌함이 어찌 더딜것이냐 邪奸可伐是何遲
의로운 선봉에는 다행히 더할 적이 없고 義鋒幸加莫能敵
어진 정사를 널리 베풂은 기약한 것과 같네 仁政博施如有期
동양을 가르쳐 이끎은 동양의 손으로 하니 東洋指導東洋手
황국정신(皇國精神)은 만국이 아네 皇國精神萬國知


풍산 김만성(金萬聲)


439) 同仁 : 親疎의 차별없이 널리 평등하게 사랑하는 일.
440) 麒麟閣.

우리 천황 다스리는 덕은 본래 맑고 진실하고 我皇治德本淸眞
두두(﨣﨣)한 무부(武夫)는 용맹한 신하에서 나오네 赳赳武夫出虎臣
늠름하고 웅대한 풍모는 손빈(孫臏)441)의 손이요 凜凜雄風孫臏手
당당하고 장한 기세는 맹명(孟明)442)의 몸이네 堂堂壯氣孟明身
으뜸 공은 상해(上海)에서 삼조(三朝)를 얻었고 元功上海三朝得
비밀스런 책략은 태원(太原)을 하루에 함락시켰네 秘策太原一日淪
멀리 금단(金壇)443)에서 승전한 국면을 생각하고 遙憶金壇勝戰局
위로에 사례하는 시를 읊으니 참된 정성이 새롭네 慰吟謝律赤誠新


풍산 하중청(河重淸)


황군이 한번 일장기 아래 출정하니 皇軍一出旭旗下
나라 사랑하고 백성 편안히 하는데 각기 정성을 다하네 愛國安民各盡誠
나라 태평한 오늘 뛰어난 승리 알리고 升平今日報龍捷
소식은 맑은 하늘에 기러기 소리에 오네 消息晴空來鴈聲
영웅은 만고에 평생 일이니 英雄萬古平生事
역사책에 천추에도 이름이 없어지지 않으리라 竹帛千秋不死名
책과 칼은 뒤늦게 군대에 투신해 씻고 書釼晩投兵馬洗
멀리 하늘위에서 황하 물 맑기를 만류하는 것을 바라보네 遙望天上挽河淸


풍산 유준흥(柳俊興)


북벌해 남서와 동쪽까지 이르니 北伐至南西又東
황군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공을 이루네 皇軍到處必成功
도리에 따르면 흥하고 거슬리면 패하는 것은 천하 공변된 이치니 順興逆敗天公理
나라 있고 내 몸 없이 하는 것이 장사(將士)의 충성이네 有國無身將士忠
상해(上海) 강산은 폭탄이 비오 듯하고 上海江山濕彈雨
태원(太原) 초목은 포탄 바람에 쓰러지네 太原草木靡砲風
원컨대 중화는 빨리 반성하게 하고 願使中華促反省
우리 동양 평화에 서로 마음과 힘을 합해야하네 吾洋平和協心同
황군이 점령한 화북의 성은 皇軍占領北支城
맹렬한 기세에 당당하여 해와 달에 밝네 猛氣堂堂日月明
늘 독일과 이탈리아(獨伊) 연합국에 좋아하였으니 常喜獨伊聯合國


441) 孫臏 : 春秋時代 兵法家 孫子의 이름.
442) 孟明 : 중국 秦나라의 名將.
443) 主將 居處.

능히 영미 후원병을 막을수 있네 能防英米後援兵
중간에 장사의 전쟁에 이긴 곡에 中間將士戰勝曲
안팎의 신민(臣民)은 금으로 정성을 바치네 表裏臣民金獻情
천황은 너희가 가서 위무에 힘쓰라 하니 帝曰勗哉汝往撫
동양 전국(全局)은 평화를 주로 하리라 東洋全局主和平


풍산 주태원(朱泰源)


오래 전장에 있어 노고가 쌓여 돌아오는데 長在戰場積苦回
계속 이겨 어느 날 큰 공이 열리려나 勝勝何日大功開
가슴속에 넘쳐나는 것은 와룡(臥龍)444)의 지략이요 胸中剩濶臥龍智
칼 아래에도 즐거움이 넘친 것은 곽상(郭相)445)의 재주이네 釼下快餘郭相才


풍산 이낙수(李樂洙)


우리 황군 일은 각각 충성을 옮김이니 吾皇軍事各移忠
온 나라 위로하는 정성 하나같이 똑같네 擧國慰誠一致同
사상자 많이 나(漂杵血流)446) 차마 보지 못하는데 漂杵血流看不忍
비행기술법 씀이 무궁하네 飛機術法用無窮
성인(聖人)이 나오니 중국 일본에 축하하고 聖人出矣祝華日
용맹한 군사 얻어 이제 질풍에 노래하네 猛士得今歌大風
승승장구함은 대개 소식 들어 좋으니 乘勝盖聞消息好
곳곳에 맹세하고 빌어 공 이루기 원하네 誓祈處處願成功


풍산 이규하(李奎河)


육해공군이 용감히 가는 앞에 陸海空軍勇往前
폭악한 중국 징계하는 이치 당연하네 暴支懲戒理當然
관안(管晏)447)이 공을 세운 것이 홀로 뛰어남이 아니요 管晏立功非獨妙
손오(孫吳)448)의 계책을 씀이 독단으로 할 수 없는 것이네 孫吳用策莫能專
적의 기세 궁한데로 가니 무너질 듯한 흙 같고 敵勢入窮崩似土
민심이 귀순하기 내에 물을 쏟아붓 듯 하네 民心歸順注如川
한 병사도 충성스런 뜻을 다하지 않음이 없으니 一兵靡不盡忠意


444) 蜀漢의 謀臣인 諸葛亮.
445) 郭相 : 郭子儀. 중국 당나라 때 武將.
446) 漂杵血流 : 血流漂杵. 피가 흘러 공이를 띄운다는 뜻으로 전사자가 많음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
447) 管晏 : 春秋時代 齊나라 名相인 管仲과 晏嬰.
448) 孫吳 : 春秋時代 兵法家인 孫武와 吳起.

황군의 위대한 풍모는 만년에 전하리라 皇軍偉風傳萬年
홍원(洪原) 김기협(金基協)
남 중국이 이미 평정되고 다음은 화북 북쪽이니 南支已定北支北
하늘에서 황군을 보내어 씻어 맑게 하려 하네 天譴皇軍洗欲淸
강한 군사에 어질고 용감하니 누가 대적할 수 있으랴 精兵仁勇孰能敵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은 반드시 이루리라 戰則必勝功必成


홍원 박임수(朴林洙)


사(士)가 많이 종군(從軍)하기를 원하니 士多從軍願
사람이 모두 헌금하는 정성을 보이네 人皆獻金誠
하늘은 반드시 통하여 느끼리니 上天必應感
어떤 어려움에도 폭악한 중국을 평정하리 何難暴支平


홍원 한준석(韓準錫)


비상한 시국에 당한 때에 이르니 非常時局迨當時
사변이 거듭 일본과 중국에서 일어나네 事變層生在日支
강하게 일어난 갑병(甲兵)은 막는 적에게 나아가고 强起甲兵防賊進
매번 고하고 알림을 내려 사람이 알게하네 每頒申報使人知
진용은 질서가 있고 군기(軍器)을 닦으니 陣容有序修軍器
오랑캐 무리 끊없이 국기를 받드네 戎黨無端奉國旗
반도 신민(臣民)은 모두 일치해서 半島臣民幷一致
괴로워하는(皺眉)449)말과 뜻에 시를 읊는 것을 그치네 皺眉言志却吟詩


풍산 이종환(李鍾奐)


◈ 함경북도(咸鏡北道)


응징하는 계책은 평안에서 나오니 膺懲籌策出於平
동쪽에서 건너 온 장병(將兵)은 비로소 북경에 들어가네 東渡將兵始北京
만리 산하를 석권한 듯하고 萬里山河如席捲
한 바둑판 세상에 바둑돌 놓기를 다투네 一枰宇宙着棊爭
가깝거나 멀거나 영토의 백성 다스림은 여유롭고 邇遐領土寬民政
많던 적던 헌금은 나라 사랑하는 정이네 多寡獻金愛國情


449) 皺眉 : 눈썹을 찌푸림. 괴로워하거나 근심하는 모양.

남녀 집집마다 기원하는 제사 드리고 男女家家祈願祭
하늘 한복판에 상서로운 해는 회조(會朝)450)에 맑네 中天瑞日會朝淸


무산(茂山) 정종석(鄭宗錫)


만주사변이 이미 평정된 후 滿洲事變已平後
또 중국과 일어나 충돌하네 又與支那起衝突
궁중부 중에 일체를 갖추고 宮中府中一體具
응징하는 대책은 호도(糊塗)451)하지 않네 膺懲大策不糊塗
나라에서 군대를 출정하는데 한해를 걸리지 않고 邦家出師未經年
도처에서 오랑캐는 다 달아나네 到處單于盡遁逃
당당하고 씩씩하고 호방한 기상을 누가 감히 깔보랴 堂堂豪氣孰敢侮
일장기 아래 저들 혼을 잃은 듯하네 日章旗下彼喪魂
밤낮 경계함은 무궁한 계책이고 晝哨夜角無窮計
가슴속에 갑병(甲兵)을 백만을 감추었네 胸中甲兵藏百萬
두 말과 활은 조두(刁斗)452)하는 병사요 二馬重弓刁斗士
날도 아니도 달도 아니고 오래도록 수루에 있네 非日非月久在戌
삼강(三江)에 나무와 돌은 귀신에 울고 三江木石泣鬼神
7일 구름이 만들어져 견양(犬羊)을 깨뜨리네 七日雲成破犬羊
바다와 나라에서는 안도하고 생업에 즐거워하고 安堵樂業海國內
작은 우리 황군 어육(魚肉)되니 어찌하나 微我皇軍魚肉何
천리 다른 나라에서 계책을 세우는 군막 아래 千里異域帷幄下
집과 아우 생각 얼마나 또렷한가 思家憶弟幾歷歷
요란한 대포소리에 산악이 진동하고 殷殷大砲動山岳
돌격하고 모이고 흩어지는 장한 기개 많네 突擊聚散意氣多
공중에 은빛 날개 위력 번득이고 空中銀翼威閃閃
어양(漁陽)의 북453)은 다시 울리지 않네 漁陽鼙鼓不復鳴
고국 시골에 있는 어린아이들 在鄕故國孺子輩
하나도 포복해 군복에 절하지 않음이 없네 一不匍匐拜戎衣
맑은 첫새벽 멀리서 요새를 나오는 군가 들리고 淸晨遠聽出塞曲
장부의 좋은 속마음 없네 無乃丈夫好肝膽
용맹함은 격골(鴃骨)에 바람과 불이 나는 듯하고 勇如鴃骨風火生


450) 會朝 : 諸侯가 모이어 天子에게 알현함.
451) 糊塗 : 명확하게 결말을 내지 않고 일시적으로 감추거나 흐지부지 덮어 버림.
452) 刁斗 : 구리로 만든 솥 같은 기구로 군중에서 낮에는 음식을 만들고 밤에는 이를 두드려 경계하는 데 썼음.
453) 鼓鼙 : 적이 쳐 올 때 신호로 치는 북.

큰 싸움터 진영 앞에 당돌하게 서있네 大場鎭頭立唐突
장성 이남은 밟아 평지로 하고 長城以南踏平地
한 가지 같은 패잔한 적군은 바람아래 쓰러지네 一枝殘軍風下靡
중원의 적수가 비록 항우(項羽)라고 하나 中原敵手雖項羽
순간에 병사를 쓸어 물리치는 신선 같은 술법이네 睫間掃退兵仙術
황사(黃沙)가 쌓인 속에서 갑옷은 견고하고 黃沙磧裡金甲堅
풍백(風伯)에 겸하여 대호령을 내리네 風伯兼行大號令
오송강(吳淞江) 위에 횡행하는 부대는 吳淞江上橫行隊
적을 격퇴하는데 파죽과 와해시키는 기세이네 擊退破竹瓦解勢
주검이 산처럼 쌓이고 피가 바다처럼 흘러도 평범하게 보고 尸山血海視尋常
잠깐에도 얼굴에는 자지구레한 것에 슬퍼하지 않네 須臾顔不悲屑屑
오랑캐는 다 섬멸하리니 如麻胡虜畢殲滅
노래하고 춤추며 어느 날에나 장안에 들어오려나 謌舞何日入長安


무산 오상필(吳相弼)


황군이 사방에서 견고하기 성과 같고 皇軍四面固如城
백번 이김에 꼭 백성의 뜻을 좆아 이루네 百勝必從民意成
추운후에 해바라기 해를 향함은 신자(臣子)의 절개이네 寒後葵陽臣子節
곡 중에 매화와 피리는 무부(武夫)의 소리요 曲中梅笛武夫聲
소화의 세월은 다 생기가 나네 昭和日月皆生彩
강덕(康德) 산천은 같이 번영하고 康德山川共帶榮
멀리 중국에서 방어하는 땅을 생각하니 遠想中華防禦地
개선가를 부르는 다른 날에는 빈속에 정이 차리라 凱歌他日滿腔情


무산 김동희(金東暿)


위에서 베푸는 황은(皇恩)은 천하에 밝고 宣上皇恩天下明
신민(臣民)은 같이 만민의 영화로움에 축하하네 臣民共祝萬民榮
종군하여 적의 죄를 토벌하는 것이 집집마다의 소원이요 從軍討罪家家願
애국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이 곳곳마다의 맹세일세 愛國盡忠處處盟
죽을 각오로 전쟁에 공을 세우려함은 장사(壯士)의 절개요 決死戰功壯士節
임금을 구하고 적을 정벌하고 공략함은 대장의 명예일세 救主征略大將名
내선일체의 개선 노래 內鮮一體凱旋曲
위문하는 마음과 글은 승리를 이루네 慰問心書勝利成


무산 김흥제(金興濟)

불법의 중국을 한번 응징하고자 不法支那一膺懲
원정하여 몰아내어 꼭 공을 이루었네 遠征驅逐必成功
남쪽을 도모하려는 붕새의 날개(鵬翼)454)는 때때로 떨치는데 圖南鵬翼時時奮
바로 떠받쳐 올리는 만리풍(萬里風)을 기다려서이네 正待扶搖萬里風


무산 허언(許土彦)


위무(威武)를 드러내어 널리 떨친 우리 황군 宣揚威武我皇軍
한번에 백만의 무리들을 모두 제거했네 一擧屛除百萬群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순수한 충성의 해바라기는 해를 향하고 報國精忠葵向日
진영을 나온 총기(銃氣)와 칼은 빛이 나네 出陣銃氣釼生文
서쪽을 진압하고 동쪽에서는 합쳐서 위세가 세상을 덮고 西壓東和威盖世
남과 북쪽에서 승리하니 전쟁에서 공을 이뤘네 南勝北捷戰成勳
공존(共存)은 총 뒤에 백성의 힘에서 나오고 共存銃後生民力
효로 어버이 섬기고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네 孝以事親忠事君


무산 한주승(韓周承)


하늘이 우리에게 국운(國運)을 회복하라 하니 天使吾人國運回
눈앞에 소식 화북에서 통하네 眼前消息北支開
한 강에 물을 더하니 고기가 다투어 사네 一江添水魚爭活
많은 나무가 그늘지면 새들은 절로 날아오네 萬木成陰鳥自來
부월(斧月)은 집마다 장경해(長鏡海)요 斧月家家長鏡海
근풍(斤風)은 곳곳에 기루대(起樓臺)이네 斤風處處起樓臺
소영(蘇英 : 소련과 영국)의 비밀스런 욕심은 이제 어찌하나 蘇英秘慾今如許
제탑(帝塔)에서 멀리 바라보며 헌수(獻壽) 술잔을 올리네 帝塔遙望獻壽盃


무산 한진만(韓鎭萬)


제국(帝國) 문명은 동아에 으뜸인데 帝國文明冠亞東
갑작스런 사변이 전 중국이 같네 猝然事變全支同
친선의 지극한 사귐을 어찌 막는가 親善至交何敢抗
응징하는 대책은 실로 헛된 것이 아니요 膺懲大策實非空
삼군을 호령해 물러남이 없게 한 후에 號令三軍無退後
천리에 결승을 진행하는 중이네 進行千里決勝中
온 나라 영토 안 신민(臣民) 충성은 의를 떨치고 率土臣民忠奮義


454) 鵬翼 : 붕새의 날개, 원대한 계획.

신 앞에 서원은 우리 군이 개선하며 돌아오는 공이네 神前誓願凱還功
종성(鍾城) 김용호(金容鎬)
불법을 응징하는 명은 하늘에서 받았고 不法膺懲命受天
중국 남쪽과 북쪽에서 싸움이 이어지네 支南支北戰塵連
형편은 파죽지세이니 누가 복종하지 않으랴 形同竹破誰非下
형세는 석권이니 누구도 감히 앞에 있지 못하네 勢若席捲莫敢前
군심(軍心)은 용감히 뛰어나가듯 하고 민심은 굳건하고 軍心勇躍民心固
무력(武力)은 강성하니 국력은 온전하네 武力壯强國力全
소리 듣고서 엎드려 바람에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니 聞聲而伏望風潰
아시아 동쪽 서쪽에 황도(皇道)가 펼쳐짐을 노래하네 歐亞東西皇道宣


종성 우창명(禹昌命)


이같은 대전(大戰)은 우리 동방에 처음이고 如斯大戰始吾東
같은 종족에 같은 글을 사용하는데 의는 같지 않네 同種同文義不同
암흑의 폭탄 연기속에 계속 승리하는 땅에 暗黑彈煙連勝地
영롱한 극월(戟月)은 길고 먼 하늘에 걸려있네 玲瓏戟月掛長空
쌍방 적수가 침탈하는 밖에서는 雙方敵手侵漁外
아홉 개 이웃 나라가 협약중이네 九個隣邦協約中
황군이 이르는 곳에 오로지 마음과 힘을 쏟으니 皇軍所到專心力
상서로운 해와 산하에 그 공을 고하네 瑞日山河告厥功


종성 장영수(張永洙)


아름다운 운은 순환하여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돌보고 休運循環天眷東
우리 천황은 위에서 순응함이 같네 吾皇在上順應同
평화의 국세에 조선과 만주가 은혜를 입고 平和國勢蒙鮮滿
향상된 군용은 해군과 육군과 공군이네 飛躍軍容海陸空
향하는 바 전에 없던 병력 하에 있고 所向無前兵力下
다투어 귀순함은 뒤의 백성 마음을 두려워함이네 爭歸恐後衆心中
일장기 폭은 중국에 두루미치고 日章旗幅支邦遍
여러 사람 말로도 전쟁에 이긴 공을 말하기 어렵네 萬口難言戰勝功


종성 김주민(金周敏)


남쪽과 북쪽의 중국을 소탕하고 掃蕩南支與北支
평화의 큰 대책은 지금부터 베푸네 平和丕策自今施
신의를 잃은 심상치 않은 적은 淪喪信義非常敵
병장기 익숙히 써서 모두 군사를 움직이네 習用干戈總動師
염치를 잃은 중국 적은 어둡고 沒廉華賊昏惟暗
위문하는 영령은 슬픔에 감탄하네 慰問英靈感歎悲
백성 편안하고 나라 태평함은 누구의 덕인가 民安國泰爲誰德
신에게 받들어 고하는 말씀을 시 한수로 축하하네 奉告神詞祝一詩


종성 한석붕(韓錫朋)


중국 남북과 아시아 동쪽과 서쪽에 支那南北亞西東
전쟁하지 않으려는 연맹은 공고하기가 같네 不戰聯盟鞏固同
중국 적은 염치없고 윤리도 잃었으니 華敵沒廉倫理喪
황군은 죄를 토벌하고 순치(脣齒)가 공허하네 皇軍討罪唇齒空
우러러 보는 적은 달아나 무너지는 홍진 속에 望風奔潰紅塵裡
승전 보고는 한낮에도 빨리 알려지네 報電乘勝白日中
만주와 대양(大洋)을 통일함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요 統一洲洋天所賜
태평과 개선을 노래하는 곡에서 신공(神功)을 연주하네 泰平凱曲奏神功


종성 장추섭(張樞燮)


기쁘게 장사(將士)들이 승전한 보고가 통함을 들으니 喜聞將士捷書通
먼저 우리 천황 덕화가 융성함을 축하하네 先祝吾皇德化隆
줄지어 나부끼는 깃발아래 멀리서 절을 하고 聯隊旗翻遙拜禮
신사(神祠) 집 우뚝한데 으뜸 공을 고하네 神祠堂屹告元功
성운(腥雲)은 장차 모래사장 북쪽에서 개일 것이니 腥雲將霽沙場北
아침 해는 해협(海峽) 동쪽에서 다시 밝네 旭日復明海峽東
숨어 있는데 작은 정성으로 어찌 답하는가 蟄在微誠何所答
많은 마을 중에 시가(詩歌)을 부르고 보내네 詩歌唱送萬村中


종성 이보순(李輔舜)


위에는 우리 천황 성덕(聖德)이 밝고 在上吾皇聖德明
출정하는 장사(將士)는 충성을 다하네 出征將士盡忠精
공훈을 이룬 이름은 마땅히 원신각(元臣閣)에 기록하고 勳名當記元臣閣
날카로운 기세는 능히 열국에 병사를 응징할수 있네 銳氣能懲列國兵
만세 소리 높음 좋은 세상과 같고 萬歲聲高同樂世
여러 집에 걸린 깃발 드날림은 나라 태평을 연주하듯 하네 千門旗揭奏昇平
침거한 먼 땅에서 어찌 축하하는가 蟄居遐土緣何祝
한 줄 거친 시로 작은 정성을 표하네 一頁蕪詩表鯫誠


종성 이상욱(李商煜)


노구(蘆溝) 동쪽에서 불법을 행하니 行爲不法蘆溝東
원정하는 황군은 일체가 같네 遠征皇軍一體同
칼과 창은 높이 솟아 변방에 달을 가리는데 釼戟森森掩塞月
전차는 번득이며 북풍을 맞네 電車閃閃迎胡風
긴 창이 건드리는 곳마다 적 시체가 쌓이고 長槍觸處尸山積
대포를 쏠 때마다 피가 흘러 바다가 붉네 大砲放時血海紅
나라에 은혜에 보답하려는 충성스러운 마음은 물러섬 없는 걸음이요 報國忠心無退步
개선가는 여러 번 부르니 화북이 공허하네 凱歌屢唱北支空


경성(鏡城) 석호련(石鎬鍊)


화북 사변이 돌연 발생하니 北支事變突然生
백만 황군이 멀리 출정하네 百萬皇軍遠出征
세계에 유명한 충의(忠義)의 부대이니 世界有名忠義隊
결국에는 적의 항복하는 성을 얼마나 쌓았나 到頭幾築受降城


경성 여종하(呂鍾夏)


몸을 버려 나라 은혜에 보답하고 충성을 다하니 捐身報國竭忠誠
중원에 울리는 칼은 만리를 가네 鳴釼中原萬里行
백 번 싸우는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네 百戰開場攻必取
한 마음 단체 일은 다 이루게 되고 一心團體事皆成
황하물 북쪽에 이어진 군영은 멀고 黃河水北連營遠
양자강 남쪽 석권한 곳은 맑네 楊子江南捲席淸
동양을 활보하는데 같이할 적이 없고 闊步東洋無與敵
많지 않은 세월 나라 태평함을 즐거워하네 不多歲月樂昇平


경성 정기남(鄭基南)


<출전 : '聖戰誠詩集', 經學院, 1937년 12월 19일>

3. '경학원잡지' 게재 친일논설 사례


1) 김대우(金大羽)


(1) 지나사변에 대하여


총독부 사회교육과장 김대우


○ 북지사변을 확대 전환시켜 지나사변이라 불렀다.
○ 무릇 국민된 자로서 마땅히 거국일치하여 중대한 시국의 간난을 극복해야 한다.
○ 이후로 마땅히 산업에 힘을 쏟아 국력을 육성하는 것이 장구히 지탱하는 데 가장 긴요하다.
○ 지나사변 종료일은 즉 동양평화 실현의 아침이다.
○ 오늘날 우리 일본이 목적으로 삼은 것은 그들 지나의 4억만 죄 없는 민중을 구원함으로 우리 동양평화를 실현함으로써 세계에까지 이르게 하려는 것이다.
○ 이 용감하고 위대한 일을 이루려면 반드시 더욱더 필요한 것은 내선일치의 노력으로 기대할 수 있다.
○ 우리 반도 동포는 말할 것도 없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달리 어떻게 마땅히 일치단결하여 힘을모아서 애국의 지극한 정을 다할 것인지를 꼭 해달라고 힘써 바란다.


<목차>


1. 지나사변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2. 북지사변은 점차로 전지(全支)사변으로 전환되었다.
3. 지나사변과 조선인 각오


1. 지나사변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지나사변이 일어난 원인을 알고자 할진댄 만주사변과 만주건국의 원인을 추억하면 자연 명료한 것입니다.

만일 기인(起因)을 생각해도 알지 못하면 이번 사변을 입에 올려 말할 수 없는 연고입니다.
대저 만주는 자고로 우리 일본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의 노농러시아(勞農露西亞)는 이전의러시아(露西亞) 제국인데, 이 러시아 제국이 일찍이 만주 및 조선을 자국영토로 삼고자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 정의와 평화를 국시로 하는 우리 일본제국은 분연히 일어나 저 노국(露國)을 격퇴하고 동양을 평화한 지대에 두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러전쟁으로 인하여 수십억의 물자를 소비하고 다수의 인명을 희생하였으며, 전후에는 또 거금을 만주에 철포(撤布)하여 산업개발에 주력하였습니다. 이 결과로 만주는 평화한 사업이 떼를지어 잇달아 생겨나와 지나인 조선인이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고자 조수(潮水) 밀듯 다수가 집중되었습니다.

1908년에는 만주 인구가 1,710만에 불과하더니 금일에는 3,286만이란 인구를 가진 거국(巨國)이 되었습니다. 만주가 이와 같이 발전하여 훌륭한 왕도낙칠(王道樂七)이 되게 된 것은 전혀 일본제국의 혜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만주에서 원마적(元馬賊) 두령이든 장작림(張作霖)과 기자(其子) 장학량(張學良)은 동북군이라 칭하는 지나군대를 인솔하고 만주의 정치를 행하고 있었는데 만주를 이와 같이 문명케한 일본의 은혜를망각하고 장학량은 만주에서 일본을 구축(驅逐)할 계획을 하다가 마침내 1931년 9월 16일 류조구(柳條溝)에서 철도를 폭파한 일까지 있습니다. 이에 장(張)의 악랄한 정치를 만주에서 멸절하고자 우리나라는 정의의 군대를 만주에 출정시켜 장가(張家)가 인솔한 동북군과 비적(匪賊)을 격퇴하였습니다.

이와같이 하여 1932년 3월에 만주국이 새로 건설된 것인데 지금까지 장(張)의 부자(父子)로 인하여 번잡한사건이 여러 번 일어나던 만주도 이제서야 확실한 하나의 국가가 되어 정당한 정치가 시행되고 3,300만 국민은 안심하고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주에서 추방을 당한 장학량과 지나의 국민당 정부와 지방에 할거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나쁜 정치를 하고 방자하게 행동하는 군벌 등은 자기들의 야망을 쫓고자, 일본과 만주국과의 친선을 백방으로 방해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컨대 장학량 군대의 동북군과 송철원의 군대가 합동하여 우리나라 군대로 향하여 도전하여 왔습니다.

우리 황군은 이것을 직시하여 격파하였는데 패한 지나군이 “오늘 이후로부터는 결코 전쟁을 감행치 않겠다.”는 요청이 있음으로 당고(塘沽)라는 지방에서 1933년 4월 정전(停戰)협정을 약속하였습니다.

이 약속으로써 지나군은 불량부정한 행위를 행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지나는 또 다시 이전약속을 상관하지 않고 전과 같이 배일(排日)을 계속함으로 우리나라는 이에 대하여 힐책한 바 있었는데 이때에 지나는 또 다시 사과하고 1935년 6월에 매진하응흠(梅津何應欽)협정이 성립되었습니다.

이는 지나의 중앙군이 하북성에 침입하지 않을 것, 또 그 땅에 배일(排日) 단체를 멸절시킬 것 등을 결정하였습니다.
그 후 북(北)지나에는 일본과 만주국에 대하여 친한 기동방공자치정부(冀東防共自治政府)와 기찰정무위원회(冀察政務委員會)가 생겨나 피막(皮膜) 처리는 약간 양호한 듯하되 이면의 항일운동은 여전히 계속 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7월 7일 밤에 북평 부근의 노구교(盧溝橋)에서 일본 거류민을 수호하던 주둔군과 지나의 제39군이 교전하였으니 이것이 금번의 지나사변의 시초입니다. 우리 주둔군은 노구교 부근에서 자유로 연습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으로 연습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지나의 29군은 이를 방해하고 여러 차례 총포를 발사하였음으로 우리나라도 부득이 응전 하였습니다.

북지나에 있던 지나 29군이라는 것은 송철원(宋哲元)이 인솔하던 군대인데, 이면은 일본과 친선하는 양으로 보이고 이면에서는 배일(排日)만하여 온 군대로서 야간연습을 하고 있던 우리 일본군대를 불법으로 사격한다는 일은 결코 과실이 아니고 이전부터 계획적인 고의로 나온 것이 무원(無遠)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사건을 될 수 있는 대로 평온하게 처리하고자 하여 29군을 인솔하는 군관들과 상의하였으나 그들은 교묘히 회피하고 조금도 진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만약 이때 우리나라의 홍도(弘度)를 기분지일(幾分之 一)이라도 양해하고 사과하였다면 사건은 이로서 원만히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에서는 국민정부의 장개석(蔣介石)을 위시하여 일어나 우리나라와 29군과의 신속해결을반대할 뿐 아니라 국민정부의 움직임이 심함으로 지나 각지에서는 일본을 배척하고 혹은 매도하고 일본에 항전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고, 그것이 날마다 반복될수록 점차 확대하여 일지관계(日支關係)는더욱더 험악해졌습니다.

장개석은 이전에 약속한 매진하응흠(梅津何應欽)협정을 지키지 않고 자기가 인솔하는 중앙군 다수를 북지나에 수송하여 또 29군을 이동하여 우리 황군에 도전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7월 20일에는 완평(宛平)에서, 7월 25일에는 랑방(廊坊)에서 일본과 지나의 군대가 전쟁하였습니다.

전쟁할 때마다 우리 황군이 승리한 것은 물론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1개월 미만에 북평(北平)천진(天津)지방은 전부 우리 일본군이 점령하고 29군은 전멸되었습니다.

특히 그중에 8만 대군을 근소한 군대로서 단 2일 간에 격퇴하였다는 것은 실로 경탄할 일이며, 우리 황군의 용감을 여실히 증명하였습니다.


2. 북지사변은 점차로 전지(全支)사변으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사건은 일단락을 지은 모양으로 보이나 지나의 난폭한 행위는 인도(人道)를 벗어나 더더욱격심해져서 7월 29일 통주보안대(通州保安隊)로 인하여 근 200명의 우리 내선인(內鮮人)이 형언할 수없는 참혹한 방법으로 학살을 당하고 또 8월 9일 상해공동조계(上海共同租界)에서 대산용부(大山勇夫)중위가 참혹하게 살해를 당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상해에서는 8월 13일부터 우리 일본제국 해군의 육전대(陸戰隊)와 지나군이 전쟁을 시작하고 지나의 비행기가 날아와서 우리나라 군함에 폭탄을 투하함으로 우리나라 공군도 이 지나 공군에 대전하여 지나 공군에 아주 큰 손해를 입혔습니다.

북지나에서는 8월 11일 지나의 중앙군과 우리 육군이 남구(南口)에서 교전하여 전쟁 국면은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일본제국 정부는 전쟁국면 불확대방침을 단연 포기하고 전쟁이 확대되더라도 끝까지 지나를 토벌하여 사리에 어둡고 완고한 지나가 완전히 각성되기까지 적극적 응징주의로 방침을 변하였습니다.

일의 추세가 이렇게 되었음으로 자연 국민도 친히 각오치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3. 지나사변과 조선인 각오


앞에서 서술한 바에 의하여 우리는 지나사변이 얼마나 중대한 일임을 인식하였을 줄 믿습니다.

반도에 있는 조선인은 일본국민의 일부인즉, 지나사변에 대하여 긴장하고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국가가 이러한 비상의 때를 당한 지금, 우리는 일체의 능력과 성심을 다하여 국가의 넓고 큰 은례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치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일본은 동양문화 중 가장 좋은 부분은 전부 소유할 뿐 아니라 서양문명의 장점도 전부 섭취하여 세계 3대 강국 중 하나가 되어있습니다. 향월(香月) 사령장관이 이번 사변으로 궁지에 빠진 지나인에 동정하여 10만 원이라는 거금을 기부하고 또 우리 해군이 상해에서 식량이 없어서 곤경에 처한 지나인에 식물을 나누어 준 일이 있는데, 이것으로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욕망은 결코 지나의 선한 백성을고통케 하자는 것이 아님을 미루어 알 것입니다. 즉 일본 만주 지나 삼국이 서로 제휴하여 평화적 또는명랑화한 동양을 건설하자는 것이 우리나라가 희망하는 바입니다.
조선인은 내지인과 달라서 징병의무를 이행치 못함으로 직접적인 전선의 행동은 불가능하지만 애국의 정은 조금이라도 달라서는 안 될 것이니 즉 내지인(內地人)과 일치하여야 됩니다.

이것을 내선일체라고 부릅니다.

상하(上下), 빈부(貧富), 남녀(男女), 노유(老幼)의 구별이 없이 누구를 막론하고 나라 안의 사람들은 전부 일치하여 충의의 성심을 다하며 애국의 진의를 발휘할 것은 실로 이 시기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내선(內鮮)이 동일하냐 하면 우리 조선은 자고로 내지와는 순치(脣齒)의 관계로 생활하여오다가 1910년 우리 조선인도 전부 명예스러운 일본국민이 되었습니다.

그때 한국이 일본국에 병합된 이후로 조선은 실로 신선명랑(新鮮明朗)하여지고 우리는 비로소 문명국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일본이라는 국가로 인하여 농업, 공업, 상업이 발전되고 경찰, 위생, 교육산업이 월등히 완비 되어서 우리는 안락한 생활을 하여왔습니다.

이와 같이 생활이 향상됨에 따라 외형과 내용이 내지인과 동일한 일본국민이 되었는데 이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가 긍정하는 사실입니다.
조선은 일본의 선두에 서서 활동할지니 이번 사변에도 국방이라는 점으로 보아 상당히 중대한 경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에 살고 있는 내선인 2,200만 형제는 일심협력하여 이 사변의 중대시기에 충분히 활동치 않으면 안 됩니다.

특히 출정한 군인들은 조선 형제들의 열렬한 환영에 실로 감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만주건국을 위하여 약 2천억 원이라는 거금을 쓰고 또 지나 전체에 대하여는 약 20억원의 자본을 투자하여 문명한 국가가 되도록 노력하였으며 또 다수의 국민이 이 동양평화를 위하여 만주와 지나에서 생명을 희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일본, 만주, 지나는 비록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데 이와 같이 긴밀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폭악무도(暴惡無道)를 감행한 지나의 국민정부를 우리가 과연 참고 침묵함으로 방치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지나사변에 대하여 시세(時勢)에 어두운 자 등은 노국(露國)은 이 사변을 못되게 이용하는 기회로 삼고 일본에 도전하리라는 등 혹은 또는 영국, 미국이 일본을 방해하여 세계전쟁을 야기하리라는 등 실로 우매하고 예상하기 어려운 유언비어를 하는 사실이
있는 듯한데 이것은 몽매한 생각입니다. 일본은 추호라도 세계 각국의 이익을 유린하고자함이 아닐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중히 여기고 있음으로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이 일본에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여러 국가가 혹 방해를 한다고 하면 방해하는 편이 불가하니까 우리나라는 추호라도 겁낼것 없고 또 방해하자는 생각이 있는 국가도 전무(全無)합니다. 또 우리나라는 독일과 합력하여 도리에 부적한 공산주의운동을 반대하기로 약속하였으나 그러나 공산주의 노국의 영토를 탈취하자는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단 노국은 공산주의를 철포(撤布)하여 동양평화를 교란한다면 우리나라는 노국의 행동을 묵인하고 허락할 수 없습니다. 러시아는 지금 자국을 통치하기에 곤란하여 각각 의견충돌이 되어 국본(國本)이 동요키 시작하고 있으니 만약 우매한 지나 국민정부의 실패를 답습한다하여도 결단코 노국은 조금도 승산이 없는 상태입니다.

물론 일본은 노국을 승리할 능력이 있습니다.

즉, 노국은 만·러 국경에 수십만 군대와 수백 대 비행기를 비치하였다하나 우리나라는 이것을 격파할 능력이 충분합니다.

노국이 일본에 대하여 방해를 한다든지 혹은 안한다든지 횡설수설하는 것은 실로 망언이니,우리는 상호 간 이러한 망언 즉 유언비어를 금하도록 주의치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우리 군대의 용감만 믿어 안심하고 마음 편히 침착하게 좌시하여서는 안 되니 우리는 이번 지나사변이어떻게 영속하더라도 더욱더 분발하여 각 방면으로 합력하며, 일방으로는 산업을 더 일층 진전 시켜야 됩니다.

일억이나 되는 우리나라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의분용진(義憤勇進)한 군인은 전쟁에서 분투하고 원군호국하는 국민은 한층 더 면려하여 산업을 진전시킨다면 전 세계가 우리나라에 대적하더라도 조금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특히 가정에 있는 일반 부인은 절약하고 애국단체에 가입하여 가내가외의일을 선처(善處)하여 견실한 부도(婦道)를 지켜야 됩니다.
또 농민과 노동자도 국민의 일부로서 애국의 적성(赤誠)을 다하여야 됩니다. 이 지나사변은 이름은사변이나, 실은 전쟁이라 칭하여도 무방한데 비행기가 날아가는 금일 전쟁은 그 전장이 지나의 남북지방에 불한(不限)하고 비행기 공습이 가능한 지방은 모두 전장이 되는데 일본전체가 그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으니 우리 조선도 물론 그 범위 내 입니다. 또 현대전쟁은 군인만의 전쟁이 아니고 국민 전체가 일심합력(一心合力)하여 전쟁하는 곳에 승리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승리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국민 전체가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이 전쟁을 위하여 활동치 않으면 불가합니다.

조선 부인도애국부인회와 대일본국방부인회(大日本國防婦人會)에도 가입하여 각각 그 분수에 상응하게 진충보국
(盡忠報國)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사상을 보급하고자 뜻있는 다수가 회합하여 금번에 애국금차회가 출생하였는데 이는 실로 시의에 적당한 것이라 합니다. 조선인이 지금까지 평화 안락한 생활을 계속하여 온 것은 전부 일본국가의 은혜이니 이 사변에 제하여 한층 더 자업(自業)에 정진하는 동시에 애국성금을 헌납하여 위문비를 발송하여 출정군인가정을 방문하는 등 국가의 넓은 은혜에 보답치 않으면 불가합니다.

이는 실로 총후봉사의 당연한 일이며 또 국민의무라고 대부분 주지하는 바입니다.
○ 오직 우리 일본은 강하고 바르다.
○ 이제 우리 일본은 정의롭게 궐기한다.
○ 우리 조선인은 마땅히 일심협력하여 일어서야 하는 일본국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출전 : 金大羽(總督府 社會敎育課長), 「支那事變에 對하야」, '經學院雜誌' 第42號,1937년 12월, 18~25쪽>


(2) 전라남도유도연합회 결성식, 도참여관 훈화요지


오늘 이렇게 많은 내빈객과 도내유림들이 한 자리에 모여 유도진흥방책을 논의하고 유도의 입장에서 국민정신총동원에 이바지하기 위해 전라남도 유도연합회결성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소회의 일단을 피력할 기회를 얻게 되어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유교는 주지하다시피 고래(古來) 동양문화의 정수로 유교에서 말하는 삼강오륜의 도는 인륜지대본이며 충효인의는 도덕의 근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역대 총독은 유교진흥과 덕풍진작에 뜻을 두고 문묘를 참배하며 경학(經學)을 강론하셨는데, 유교가 조선민중을 교화하는 데 일조한 바가 적지 않았다는 것은내외를 불문하고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근세의 조선유교는, 대체로 그 정신을 보완하기보다는 형식에 얽매여서 결국 공리공론(空理空論)과 허식(虛飾)에 치우친 풍습을 만들어내고 근거 없이 고래의 미풍양속을 배척하여 민심을 위축·황폐화시키고, 자각진취(自覺進取)기상이 부족해 구습을 고집하여 시세에 따라 대응하는 기개와 도량이 결핍되기에 이른 것은 심히 유감스러울 뿐입니다.

유교에 뜻을 둔 사람은 일진일신(日進日新)하는 시운(時運)에 걸맞게 모든 구태를 벗고 황국정신에 기초한 참된 유도의 진흥을 꾀할 수 있는 기백과실천력을 지니고 있어야만 합니다.
돌이켜보니 지나사변은 벌써 2년 4개월이 경과하였고 동아의 신질서는 순조롭게 건설되어가고 있으니, 이 성업(聖業)이 동양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어마어마한 대사업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지금 일억의 동포는 상대(上代)의 능위(稜威)를 받들어 전선의 용사도 총후의 국민도 일체가 되어 이 영광스런 대사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러분이 주지하시는 바대로, 우리 조선에서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이 결성되어 사회 각층을 일괄하여 집대성하고 또한 대규모의 조직부터 소규모의 조직까지 하나의 망처럼 엮어 하나의 지도정신으로 이를 이끌어가며 유감없이 국가총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운동의 목표는, 보통의 조선인에게 황국신민임을 철저히 인식시키고 내선일체를 깊이 성찰해 가는 것, 특히 이러한 마음가짐을 갖고 전시하의 중요국책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수행과 동아신질서 건설에 참여하는 것인데, 환언하면 미나미(南)총독께서 견지하시는 대방침을 충분히 체득해 관민 할것 없이 솔선수범하여 이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차대한 시국에 직면하여 오늘 도내 유림의 상의 하에 본 연합회를 결성해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산하에서 황도정신을 발휘하고 유도의 진수를 체득하여 실행하게 된 것은 본도유림의 공전의 장거(壯擧)로써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갖고 그 성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요즈음 종래의 잡물(雜物)을 배척하고 불철저함을 벗어던져서 황국신민운동의추진력이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와 동시에 지방유림의 본보기다운 여러분의 향당(鄕黨)에서의 일언일행이 정말로 일반민중 교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바랄 정도입니다.
두 말할 필요 없이 학문의 중요성은 쓸데없이 문집을 만들어 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학(學)은 이제배운 것을 실행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오로지 문헌에 있는 것을 그대로 이해해 단순히 지식을 얻기만할 뿐 실행을 수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박식해도 존경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공맹(孔孟)이 말씀하셨습니다.

부디 여러분은 솔선궁행(率先躬行)하여 한 세기를 인도할 최대의 용맹심을 분기시켜 향당의선각자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핵심으로서 충군애국의 지성을 일상생활에서 구현하기를 충심으로 바랍니다.
이상 본 회동을 기회로 간단히 말씀드렸습니다.
1939년 11월 16일


<출전 : 金大羽, 「全羅南道儒道聯合會結成式, 道參與官訓話要旨」, '經學院雜誌' 제45호,1940년 12월, 100~101쪽>

2) 김완진(金完鎭)


(1) 이 시대의 유교


강원도유도천명회(江原道儒道闡明會)에 소속된 각 지회(支會)의 대표자들이 협의회를 하는 자리에서


<김완진(金完鎭)>


못난 제가 이번에 귀회(貴會)의 성대한 초대로 인하여 대제학(大提學)의 명을 받들고 와 귀회의 각지회(支會) 대표자들의 협의회 석상에 참여하게 되어, 여러 선생들께서 한 당 안에 모인 데에 함께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경학원의 직임에 있는 분들이 일찍부터 소원하던 바였으며, 미천한 저에 있어서는 큰 광영인 것입니다.
못난 저는 경학원에서 성묘(聖廟)를 소제하고 경학원의 일반 사무에 종사는 직임을 맡고 있는 자입니다.

경학(經學)의 깊은 뜻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연구해 본 적이 없어서, 여러 선생들께서 기대하는바에 부응하지 못하는 바, 몹시도 부끄럽습니다. 저와 같이 학식이 보잘것없는 자가 어찌 감히 망령되이 여러 선생들 앞에서 하찮은 말을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경학을 강연하는 것은 본디 제가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각하의 소개를 받아한 자리를 차지하여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이런 기회를 다행으로 여겨 한 마디 거친 설을 말씀드려서 평소에 제가 지방의 유림계에 있는 여러 훌륭하신 분들께 바라고 있던 바를 피력해 보고자 합니다.

무릇 우리 공부자(孔夫子)의 도는,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을 조술(祖述)하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본받아, 넓고도 크기가 천지(天地)와 같고 빛나고 밝기가 일월(日月)과 같아, 우뚝하면서도 드넓어 능히 무어라 이름 하여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비유하자면, 요 임금과 순 임금은 봄날의 하늘과같고, 탕왕(湯王)와 무왕은 여름날의 하늘과 같습니다. 오직 우리 부자께서는 사시(四時)를 겸하여 갖추고 있어서 어디를 가던 적당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지극히 크고 극도로 갖추고 있으므로,사람들이 이를 배우고 이를 행하는 것 역시 배우는 사람의 인품의 높고 낮음과 시대의 융성하고 더러움에 따라, 한 이치가 만 가지로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대성(大聖)과 아성(亞聖)의 간격이 있습니다.
공자는 '춘추(春秋)'를 지어서 주(周)나라 왕실을 높였고, 맹자는 제(齊)나라와 양(梁)나라 임금에게 왕도(王道)를 행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증자(曾子)가 무성(武城)에 있을 때와 자사(子思)가 위(衛)나라에 있을 때에는 각각 만난 바에 따라서 대처하는 바가 같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있어서 당(堂)에 올라가고 실(室)에 들어가서 친히 지도 받은 자들은 육예(六藝)에 널리 통하였는데, 덕행(德行)과 언어(言語)와 정사(政事)와 문학(文學)의 과목이 있어 서로 구별되었습니다.

후세 학자들에게 있어서는육상산(陸象山)과 왕양명(王陽明)의 파가 있어 서로 나누어졌습니다. 지나(支那 중국)에 있어서는 존양주의(尊攘主義)가 되었고, 일본(日本)에 있어서는 황실주의(皇室主義)가 되었고, 우리 조선에 있어서는 윤리주의(倫理主義)가 되었는데, 이는 혹 벌열주의(閥閱主義)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 도(道)는 하나로써 꿰는데, 오직 그것이 지극히 넓고 지극히 크므로, 배우는 자의 눈에 의지하여 형상을 그려서 말하게 됩니다.

이에 네모난 거울을 통해서 보는 자는 그것이 네모반듯하다고 하고, 둥근 거울을 통해서 보는 자는 그것이 둥글다고 말하며, 우물 속에 앉아서 보는 자는 그것이 답답하고 작다고 말하고, 태산 위에 올라가서 보는 자는 그것이 높고 크다고 말합니다. 그 도가 곳에 따라 발현됨에 있어서는 이와 같이 차이나는 점이 있습니다. 이것을 또 가르쳐서 배우면 문(文)이 이로써 드러나고,쳐들어서 놓으면 정치가 이로써 행해지고, 닦아서 기르면 덕이 성취되고, 밀쳐서 열면 종교로 변화하게됩니다.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구구한 견해가 있음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공부자께서 돌아가신 것이 2,400년 전이었는데, 그 도는 일찍이 한 순간도 끊어진 적이 없어서 영원히 무궁하게 드리워졌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태어나고 여기에서 자라나면서 일상생활에 늘 행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에 성하다느니 쇠하였다느니 흥하였다니 폐해졌다느니 합니다.

이것은 역시 한 때의 인사(人事)를 가리켜 말하는 데 불과한 것으로, 도체(道體)는 일찍이 어그러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도를 행하는 것 역시 반드시 밥 먹을 때 밥을 먹고, 옷 입을 때 옷을 입어 시대의 생활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진부한 옛날의 죽은 법만을 지키고 있다면, 사람과 도가 함께 사그라질것입니다.
저 지나(支那)는 유교의 발원지입니다. 그런데 청(淸)나라 황실이 전복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조직된 오늘날에 미쳐서는 의논이 셋으로 갈렸습니다. 수구파(守舊派)와 반대파(反對派)와 혁신파(革新派)가 그것입니다. 수구파라는 것은 옛날을 그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반대파라는 것은 공화국(共和國)의 정체(政體)를 띠면서 '춘추'의 의리를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혁신파라는 것은 때에 따라서 절충하여처지가 바뀌어도 어긋남이 없는 자들입니다.

분열됨이 이와 같아서 서로 통일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에 있어서는, 학계(學界)의 영수(領袖)와 학사(學士)와 박사(博士) 등의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쳐, 우리 유도를 진흥시키기를 일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맑게 하여 만대토록 한 계통으로 내려온 크나큰 교화를 우러러 찬양하고, 과격하고 조리가 없는 이상한 사상을 미리 막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경학원의 직원과 각도의 유림들이 한 무리가 되어 동경(東京)의 사문회(斯文會)가 주최하는‘공자가 죽은 뒤 2400주년을 맞이하여 공자를 추모해 올리는 기념 제사(孔子歿後二千四百年追遠紀念祭)’에 가서 참여하여 제전(祭典)의 성대한 모습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강당 안에서 정상 박사(井上博士)의 강연을 들었는데, 그의 고매한 식견과 명쾌한 논변은 환히 통달하였고 드넓었습니다.

이에 비로소 우리 유학의 도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넘어왔다는 것을 깨달았으며,또한 우리들이 평소에 능히 글을 읽으면서도 능히 연구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깊이 탄식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양학자들을 가지고 말을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단지 서교(西敎)가 동쪽으로 스며든 것만 알지, 누가 동쪽의 교화가 서쪽에 입혀진 것을 알겠습니까? 일찍이 듣건대, 어떤 서양 사람이 지나 사람을 대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비록 나라는 위태롭지만 가정은 편안하고, 우리는 실로 나라는 있지만 가정은 없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개 개인주의(個人主義)가 절정에 달한 것을 깊이 느끼면서 가족제도(家族制度)의 덕이 남아있는 것을 탄식하면서 부러워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동쪽은 저들의 종교에 젖고, 서쪽은 우리들의 교화를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재 우리 조선의 현상을 보면, 새 습속과 옛 습속이 변환되고 바뀌고 있으며, 동양 풍조와 서양 풍조가 뒤섞이어 엉망이 되고 있습니다. 옛날에 고루하던 것과 오늘날의 기괴한 것은 서로 간에 간격이현격히 벌어져 있으며, 동양의 가족제도와 서양의 개인주의가 장점과 단점을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해서는 사상을 조화시키고 문명을 건설하기에 실로 천재일우의 기이한 만남이며, 또한 앞날에 있을 어려운 관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뜻을 가진 각지의 유림들이 분발하여 일제히 일어났는바, 경성(京城)의 유도진흥회(儒道振興會)와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 등 여러 단체 및 평남(平南)의 유림회(儒林會), 전남(全南)의 유도창명회(儒道彰明會), 경북(慶北)의 유도진흥회(儒道振興會), 귀도(貴道)의 유도천명회(儒道闡明會)가 그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장차 우리 유도를 진흥시켜 시대에 응하고 세상을 구제하며, 홍수를 다스리고 맹수를 몰아내어서 동양 문명의 원 상태를 회복시킬 것입니다. 우리 경학원의 직임을 맡고 있는 자들로서는 이러한 때를 당하여 기대하는 마음이 마땅히 다시금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귀도는 우리 동방의 성인이신 율곡 선생(栗谷先生)께서 탄생한 신령스러운 지역입니다.

그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은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 있습니다.

산악(山嶽)의 빼어난 기운이 모여 인걸(人傑)을 내는 것은 의당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 산골 마을의 풍속은 순박하고 예스러우며, 사람들의 마음은 순수하고 착한 것이 이미 역사서 및 지지(地誌)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 지역에 사는 제현들께서는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쳐서 온 도를 통틀어서 유도천명회의 본회와 지회를 설립한 다음, 향교의 직임을 맡고 있는 분들과 더불어 서로 연결되게 조직해서, 뭇사람들의 마음을 모두 한 깃발 아래로 모았습니다.

이것은 다른 지방에서 여러 단체가 많이 생겨나 사람들로 하여금 따를 바를 알지 못하게 하여, 날로 알력을 빗어내기를 일삼고 있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당당한 진(陣)과 정정(井井)한 깃발이 대도(大道)를 따라서 온건하게 앞으로 나아간다면, 우리 유도를 천명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더군다나 귀도의 지사 각하(知事閣下)께서 온 힘을 다해이룩하도록 도와주고 잘하도록 권장하는 데이겠습니까. 동쪽 하늘에 비친 서광을 장차 귀도에서 눈을씻고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실로 어리석은 제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귀도에서 설립한 귀회의 조직과 시설은 이미 아름답고 좋은바, 저와 같은 무리가 감히 한 마디 더덧붙여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저를 초대해 준 성대한 뜻을 저버리기가 어려워, 감히 엉성한 견해를 가지고 몇 가지 일에 대해 진달 드리고자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귀회의 본회와 지회 및 귀지방의 향교와 우리 경학원은 정신을 하나로 합치고, 보조를 서로 맞추고, 방향을 잘 정하여, 서로 제휴하고 참작하여야만 중도에서 어긋나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는 공자(孔子)의 별모(別廟)와 영당(影堂) 및 선현(先賢)들의 사원(祠院)과 단당(壇堂)의 새로 새우고 다시 새우는 등의 일은 아주 신중하게 하여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부자(夫子)를 존숭하고 흠모하는 것은 사도(師道)를 위해서인 것이지, 신령을 모시기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마땅히 온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은 오직 그 도(道)를 밝히는 데 있을뿐입니다.

비록 집집마다 사당을 세우고, 사람마다 제사를 지낸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그 학문을 강구하지 않고 도를 밝히지 않는다면, 그 사당과 그 제사 역시 장차는 형식적인 데에 그쳐 의미가 없게 될것입니다.
각 지방에서는 이미 모두가 문묘(文廟)를 설치하고 석전제(釋奠祭)를 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유지하는 것만도 오히려 제대로 하지 못할까 걱정인데, 또 어느 겨를에 다시 겹쳐서 설행하겠습니까.

그리고 또다시 무슨 마음으로 옛 사당을 버려둔 채 수리하지 않고, 새로운 사당을 짓느라고 분주히 오가겠습니까.

만약 개인의 자력을 가지고 세운 것이라면, 그 사람의 성인을 흠모하는 정성은 경탄할 만합니다.

그런 사람이 참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재물을 모은다면, 쉽사리 문묘(文廟)를 겹쳐서 설립할 수 있을것입니다.
지나간 해에 본원의 강사(講士)로 있었던 함북(咸北)의 이학재(李鶴在) 선생은 학문에 독실한 분이었습니다.

이에 일찍이 자신의 집에다가 니산사(尼山祠)를 설립하고, 부자(夫子)의 영정(影幀)을 모신 다음, 초하루와 보름마다 우러르면서 참배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사실을 들어 본원에 글을 지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이에 본원에서는 비록 그 일에 대해서는 공경하면서도 글을 지어주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대개 그 분이 사당을 만들어 섬긴 뒤에 혹 껄끄러운 점이 있을까 염려해서였습니다.
선현의 사원과 단당을 겹쳐서 설립하는 것은 사람들이 우러러보게 하는 데에는 크게 유익한 점이 있으며, 또한 풍속 교화가 융성해 지느냐 폐해지느냐에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감히 설립해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참으로 설립하는 처음에 영구히 유지할 방도를 강구하지 않는다면, 오늘 세운 것이 뒷날에 폐해지는 것이 되기에 족할 뿐입니다. 처음에는 흠모하고 숭배하던 일이 끝내는 더럽히는 데로 귀결되고 만다면, 역시 우리 사림의 수치가 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후손이 조상을 제사지내고, 후생이 스승을 제사지내는 것에는 모두 정해진 예법이 있어, 자신의마음에 따라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조상을 제사 지내는 것이 4대에 그치고, 석전제를 지내는것을 태학(太學)에서만 지내고 현학(縣學)과 서원(書院)에서는 겹쳐 지내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바로이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인사들은 오직 마음과 정성을 오로지하여 이미 설립되어 있는 문묘에 귀종(歸宗)455)을 하여야 하고, 재력을 키워서 후진들을 교육시키는데 정성을 다해야만 합니다. 이는 비유하자면 마치 가난한 유학자의 집에서 조상들을 제사지내는 것과 자손들을 교육시키는 것을 어느 한쪽도 하지 않아서는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참으로 자손들의 생활에만 급급해 하고 조상들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참으로 아주 형편없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미 익숙해진 것에만 마음을 두면서 백년의 대계(大計)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것 역시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현재 학교의 비용은 인민들이 함께 부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향교의 재산은 지방에서 공유하고 있습니다.

비록 향교의 재산에 대한 관리 규칙이 개정된 오늘날이지만, 제사 지내는 물품을 풍성하게 하지 않고 정성을 들여 깨끗하게 하면서, 재력을 키워 지방을 교화하는 사업에 대고 사회를 교육하는 기능을 신장시키도록 하되, 허황되게도 하지 않고 서두르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해 나가, 작은 물이 바다에 도달하여 꽉 찬 뒤에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기를 제현들께 깊이 바라는 바입니다.
두 번째는 사회 간에 서로 협조하는 것입니다.
근래에 이상한 풍조가 청년들의 사상계에 파급되어 성현들을 헐뜯고 모욕하는 말들이 논단(論壇)과


455) 귀종(歸宗) : 양자(養子)로 갔던 아들이 그 양자를 파하고 본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모든유자(儒者)들이 문묘에서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신문(新聞)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학자들치고 어느 누가 놀랍게 여기면서 분노하지 않겠습니
까. 이로 말미암아서 신사회와 구사회가 서로 간에 반목하여 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아주 불길한 일입니다.

이것이 비록 젊은 사람들의 과격한 행동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그 이유를따져 본다면, 애당초 노유(老儒)들의 완고함과 비루함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우리 유자들은 요 임금을 보고 짓는 개456)와 같은 이런 자들에 대해서는 배척하고 경원해야 할뿐입니다.

옛날에 행하였던 북을 치면서 벌을 시행하고, 복합(伏閤)하여 성토(聲討)하는 등의 예는 오늘날에 그대로 답습하여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신교(新敎)의 자유로운 헌법 하에서도 역시 극력으로 배척하여 내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인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현인들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스스로를 면려하는 것이 마땅할 뿐입니다.
‘자신을 바르게 해서 다른 사람을 바르게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과격한 논조를 펴서 교파(敎派)간에 분쟁을 야기 시키는 단서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단(異端)을 공격하는 것은 폐해가 있을 뿐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옛날에 당론(黨論)으로 분열되어서 나라의 명맥이 끊어지게 하였으니, 어찌 경계해야만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해에 의병(義兵)들과 일진회(一進會)가 모두 똑같이 우리 조선의 동포이면서도 단지 형식(形式)이 같지 않고 취향(趣向)이 각각 다름을 인하여, 총과 칼을 가지고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어찌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우리 부자(夫子)의 충서(忠恕)의 도를 잘 인식하고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하고 우리의 힘을 가지런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는 유림계(儒林界)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인재를 양성하는 방도는 오로지 경학(經學)을 숭상하는 데에만 달려 있지 않으며, 역시 과학(科學)도두루 통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도를 주장하면서 진흥시키기를 창도하는 다들은 비록 적임자가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그 재예가 단지 한문을 아는 데에만 그치거나, 혹은 새로운 규칙에 대해 어두워, 열심히 행동하는 것이 도리어 법령(法令)에 저촉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사업을 행함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이 시대에 맞은 인물이 필요한 법입니다.
산골짜기에 틀어박혀서 글만 읽는 것은 헐뜯을 바가 아니지만, 시무(時務)에 통달하는 것은 배우지않으면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모름지기 유림회의 자금을 적립하고 향교의 재산을 출연하여, 학생을 뽑아 파견해서 보통사범학교(普通師範學校) 및 고등사범학교(高等師範學校)와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의 사범과에서 수업하게 해, 교사를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후일에 보통학교와 고등학교의 교사들이 대부분 유문(儒門)에서 나와, 유학으로써 교육을 장악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학사(學士)와 박사(博士) 등이 유림계에 늘어서 있어 이 사회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림계는 간성(干城)의 재주를 가진 인재를 얻어서 이 시대에서 낙오되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편(敎鞭)을 잡은 자들 가운데 유교인(儒敎人) 가운데에서 나온 사람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


456) 요 임금을……개 : 요 임금은 성인이요 걸(桀)은 악인이나, 걸의 집 개는 요 임금 보고는 짖는 것이 당연한것처럼, 각자 자신이 섬기는 임금을 위하여 상대 임금에게 대드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신학문을 하는젊은 사람들이 유학을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런데도 이를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은, 유교를 믿는 데에서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만약 유회(儒會)와 향교(鄕校)의 이름과 재산을 가지고 길러서 육성한다면, 그 사람이 유자(儒者)가 됨이 아주 명백하여서 대부분 착오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부자(夫子)께서는 만고의 사범(師範)이십니다. 지금의 향교는 옛날의 학교입니다.

학교이면서도 반드시 문묘(文廟)를 받드는 것은, 이것을 사범(師範)으로 삼아 여러 학생들이 보고서 느끼게 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과가 모두 부자의 도에 마땅하지 않은 것이 없기는 하지만, 오직 사범과가 부자의 가르침에 가장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삼가 바라건대 유회(儒會)에서 인재를 양성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 사범과에 치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등사범학교나 경성제국대학의 학생은 자본이 있으면 파견하여 양성할 수 있으나, 재력에는 한계가있어서 많은 학생을 파견하기를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오직 보통사범학교는 학비가 그에 비하여 아주 싸며, 숫자 역시 많이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사범과는 관(官)에서 운영한다는 한계가 있으며, 향교의 재산은 관청의 감독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런즉 이러한 따위의 시설은 유림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저의 생각을 지사 각하(知事閣下)가 임하여 있는 자리에서 마음대로 말하는것은 마땅치가 않습니다. 그러나 각하께서는 도(道)를 근심하는 간절함과 유학을 장려하는 부지런함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십니다. 그리고 현재 지방교육이 착착 보급되고 있어 공립보통학교가 매년마다 증설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에 따라 교원들을 배치함에 있어서도 역시 교사의 숫자가 부족할 것이 걱정됩니다.

비록 국고(國庫)로써 양성한다 하더라도 숫자를 충분히 채우기를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때에 관청과 민간이 협의한 것을 각하께서 채택하여, 시골의 인재를 양성한다면, 거의 걸림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이에 대해서 거듭하여 말하는 것은, 한 훈도(訓導)가 복무하는 연한 동안에 가르치는 아동들의 숫자가 몇 백이나 몇 천이 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배우면서 덕에 들어가는 것은 빈 집을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것과 같으므로, 실로 유교의 앞날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현들께서는 잘 참작하시고, 지사 각하께서는 잘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이 모임에 참석해서는 단지 예나 펴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런데도 감히 저의 속마음을 말씀드려 외람되이 참람한 짓을 하게 되었는바, 몹시 죄송스럽습니다. 그러나 혹 우리 유도를 진흥시키는바탕에 채택되게 된다면, 몹시 다행이고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출전 : 金完鎭, 「時代之儒敎」, '經學院雜誌' 제24호, 1923년 12월 25일, 81~88쪽>


(2) 유가의 자위책


귀도457)의 지사 각하(知事閣下)께서 귀회(貴會)의 총회를 여는 날에 맞추어 강사(講師)를 파견해 강


457) 전라남도.

연을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본도에 거주하고 있는 본 경학원(經學院)의 강사(講士)인 심선택(沈璿澤) 씨께서 명을 받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경학원의 일원으로서 성대한 모임을 참관하고 겸하여 경하하는 뜻을 표하기 위해, 이제 심 선생을 따라서 와, 남쪽 지방의 명사들을 한 장소에서 마주하게 되었는바, 몹시도 영광스럽습니다.

그러나 경학원에서 파견한 강사는 바로 심 선생입니다.
저는 본디 경학(經學)에 어두워서 강연을 하는 것은 본디 잘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이에 오직 한마디만 말을 하여 예모를 차리는 뜻을 대충이나마 펴고자 합니다.
경학원과 각 지방의 향교(鄕校) 및 서원(書院)은 바로 옛날의 관립(官立)과 공립(公立과 사립(私立)의학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회교육(社會敎育)을 하는 기관으로 변하여,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를 제사하고 경학(經學)을 연구하여 이륜(彛倫)을 부식하고 풍화(風化)를 돕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즉 보통학교나 종교단체나 사회단체와는 그 지향점이 조금은 다릅니다.

그러나 그 연원(淵源)의 유래로 말씀드리면, 유교의 본당(本堂)이 됨에 있어서는 어긋나는 점이 없습니다.
유교라는 것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도를 강명하여 이를 실천하면서 몸소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로부터 시작해서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정신계(精神界) 및 육신계(肉身界)를 통괄하는 것입니다. 비록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교법(敎法)에 저촉되는 몇 가지의 형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우리 유교로부터 말미암은바,조금도 서로 방해될 것이 없습니다.

인의(仁義), 예지(禮智), 효제(孝悌), 충신(忠信) 등과 같은 덕목에 속하는 행위가 바로 이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조선은 성인이신 기자(箕子)께서 가르침을 베푼 이래로 예의(禮義)를 숭상하면서 문명(文明)을 크게 천양하였습니다. 신라와 고려 시대 이래로 유현(儒賢)들이 배출되어 국정(國政)을 주도해 왔으며, 사회를 지배해 왔습니다. 이에 인륜은 위에서 밝아지고 교화는 아래에서 행해져 일대 문화의 융성함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도가 점점 낮아지게 됨에 이르러서는, 풍속이 나빠져 슬금슬금 어둡고 침체된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여기에서 왕왕 우리 유교의 폐단을 말하는 자들이 있게되었습니다.

대개 큰 강물이 멀리까지 흘러가면 말류에서는 정체됨이 없지 않은 것이며, 대중들이 의지하면 견해 역시 여러 가지로 나오게 됩니다. 이는 형세상 참으로 면하기 어려운 것이며, 이치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도가 쇠해지고 배움이 느슨해진 것이지, 가르침이 어긋나거나도가 변한 것은 아닙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상태를 보면, 옛날의 도덕은 이미 쇠해졌고 오늘날의 새 풍조는 진작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비유하자면 마치 농사짓는 집의 팔월과 같아서, 지난해의 쌀은 이미 썩었고 새 곡식은 아직 익지 않은 상태와 같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과도기 중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렇다면우리 유교가 오늘날에 취할 자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전에 미리 장마에 대비하는 것을 그만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이른바 유가의 자위책이라는 것에 대해 몇 가지 사항을 진달드릴 것인데, 이는 늙은이가 항상 하는 얘기로, 별로 신기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귀 기울여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 교파(敎派) 간에 서로 안정되는 것입니다.


지난날에는 오로지 우리 유교만을 숭상하여 민심이 일치됨으로써 난적(亂賊)을 성토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하면서 수천 년간의 통치를 전적으로 맡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종교가 들어와 각자 문호를 열어놓고는 각 유파별로 나누어지거나 모이면서 서로 다투어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만약 갑작스럽게 그들을 배척하면서 강제로 그들의 종교를 버리고 유교로 귀일시키고자 한다면, 비단 서로 희생되는 것이 염려스러울 뿐만 아니라, 아마도 실제적으로불가능할 것입니다.
억만 명이나 되는 창생들을 한 집 안에 수용한다는 것은 형세상 쉽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헌법에서각자 자유롭게 종교를 택하도록 용인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들어가는 문은 비록 다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착한 마음으로 도를 닦으면서 세상을 구제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유가의 법도는 가는 자는 뒤쫓지 않고 오는 자는 막지 않는 것을 요체로 삼고 있는 데이겠습니까.
동양이나 서양에서 전쟁이 일어난 역사를 상고해 보면, 교파 간의 분쟁에서 말미암은 경우가 아주많습니다.

그러니 사나운 말과 과격한 의논으로 뭇사람들의 노여움을 불러일으키거나 사회를 뒤흔들어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성인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현인의 교훈을 실행하면서, 스스로 힘쓰고스스로 가다듬어 세상 사람들에게 규범을 수립하기를 도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 사회가 서로 협조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 집안이 여기에 있어서 3대가 함께 살 경우, 할아버지는 고서(古書)를 읽어서 의리로 속을 채우고, 손자는 새로운 기예를 배워서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 하며, 아버지는 윗사람을 받들고 아래 사람을 거느리는바, 그 책임이 막중합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바깥으로 나가 일을 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한가로이 집안에 있으면서 손자와 더불어 바둑을 두다가 끝내 서로 다투게 되어 서로 간에 버티어서 결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아버지가 돌아와서 이 광경을 보고 손자를 꾸짖으며 억지로 양보하게 하였을 경우, 할아버지는 웃고 손자는 울게 됩니다.

이것으로 논해본다면, 아버지가 처리한 바가 마땅함을 잃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손자가 승복하지 않는 것도 역시 그 이유가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회 현상은 대개 이와 비슷합니다. 예전 풍조와 새로운 사조가 서로 부딪치면서 비벼대고 있는바, 이를 조화시키고 소통시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아버지의 자격을 가지고 사회의 중요한 자리에 처해 있을 경우, 윗사람을 잇고 아랫사람을 접하여 집안의 도를 유지시키는 것은 바로 그의 책임입니다.

그런즉 예전에 늘 하던 방식을 가지고 이미 죽어버린 법만 고수하고 있어서는 안 되며, 조용하게 지내며 자신의 도리만을 지키면서 방임하고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바람을 타고 시세에 영합하면서 쫓아가거나 선동해서는 안 되며, 팔뚝을 치켜들고 격론을 주장하면서 급격하게
공격하거나 사납게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오직 널리 듣고 깊이 생각하여 분명하게 판단하고 힘써 행하면서 몸소 선훈(先訓)을 실천하여 유속(流俗)의 모범이 되어, 후진을 잘 계도하여 방향을 잃지 않도록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고금(古今)을 절충하고 동서(東西)를 참작해, 한 시대의 신문명(新文明)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지금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 산업(産業)을 진흥시키는 것입니다.


이곳 호남(湖南) 고을은 기름진 들판이 천리에 뻗쳐 있고 바다와 육지가 맞닿아 있어, 물산이 아주풍성합니다.

그런데다가 뽕나무를 심고 목화를 재배하여 거두어들이는 이익도 또한 아주 큽니다.

그런즉 산업이 발달하는 것이 다른 도보다 한결 낫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이상적인 데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요원한 듯합니다.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논에 피와 가라지가 수북하게 자라 있는 것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의지하는 바는 오직 하늘과 땅입니다. 하늘이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장차 먹을 식량이 없게 될 것이며, 땅이 잘 길러주지 않으면 우리는 장차 입을 옷이 없게 될것입니다.

지금처럼 인구가 날로 불어나는 때에 미쳐서는 토지를 이용하는 것도 역시 배는 되게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니 어찌 한 줄기의 피라도 좋은 논 가운데에서 자라나 비료를 축내고 지력을 떨어뜨리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한 백년의 행복을 생각하여 당국의 지도를 잘 따라, 근본이되는 능사에 힘써서 부력(富力)을 늘려, 공공(公共)의 사업에 공급(供給)하고 문명의 세계를 꾸며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사는 이곳이 낙토가 되어 런던이나 파리 등은 비길 바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 교육(敎育)을 보급하는 것입니다.


종전부터 유학을 하는 사람들은 가운데에는 신교육에 대해서 좋아하지 않는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시대의 진보와 교육의 보급을 뒤 따라서, 새 풍조와 옛 관습을 점차 융화되는 데에 이르게 되었으니,이는 실로 기뻐할 만한 현상인 것입니다. 사회 교육의 기관이 되고, 지방의 어른의 지위에 처해 있을 경우, 교육을 장려하고 후진을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천직(天職)입니다. 그런데 이 천직을 일삼지 않은채 한가로이 유유자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이 바로 소년배들로부터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귀도의 각 군에는 이미 모두 교육회(敎育會)가 설립되어 있습니다. 모름지기 여기에서 솔선수범하고 분발하여, 사회의 토대를 만들고 백년의 대계를 수립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회원으로서의 의무를 능히 다하여야지, 스스로 해이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교육을 함에 있어서는 역시 방침이 있어야만 합니다.

실정은 헤아려보지 않은 채 헛된 곳으로만 내달리는 것이 실로 오늘날 지방 청년계의 잘못된 풍조입니다.

모름지기 지방의 사정 및 경제 상태를 생각해서 자본과 능력이 미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실업가(實業家)들로 하여금 수용하게 해, 지식을 길러 주고 기능을 전수해 주어, 온건하게 발달시키기를 도모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시기를 저는 간절히 바랍니다.


- 재력(財力)을 함양하는 것입니다.


근래에 지방의 경제 상태를 보면, 금융은 경색되고 산업은 진흥되지 못해, 도처에서 공황 상태가 되어 생활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쪽 방면을 돌아보면, 재산이 있는 자들이 호화와 사치를 부리면서 제멋대로 굴어, 사회에 여러 가지 유감을 쌓고 있고 자손들에게 해독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모름지기 근검절약하여 유학자로서의 본분을 잘 지키면서 사업을 진흥시키고 일세의 모범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향교나 서원 및 기타 사우(祠宇)를 숭봉하는 일에 이르러서도 능히 옛 예를 준수하여 그 예법을 실추시키지 말아야 하나, 새로 짓고 다시 행하는 등의 일에 있어서는 아주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혹 선덕(先德) 가운데 아직도 사전(祀典)을 행하지 않고 있어서 추가로 올리는 것이 합당하여 혹 새로 제향하게 될 경우에는, 역시 함부로 거행하지 말고 백대 뒤의 공론을 기다려서 해야만 합니다.

한 지방에서돈을 갹출하여 계를 조직한 다음, 땅을 빌려 나무를 심어, 유회(儒會)의 자금을 조성하고 향교의 재산을보조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임시로 지출하는 비용을 향교에서 내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 어찌 아주 편안하면서도 성사될 가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먹지 않으면 유학자도 역시 죽는 것이며, 돈이 없으면 일은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비록 세속에서 늘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실로 이치에 맞는 말입니다. 정신을 기르고 힘을 비축한 다음 순서에따라서 해 나간다면, 처음부터 차곡차곡 해나가면 작던 물줄기가 끊임없이 흘러 가 바다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깊이 바라는 바입니다.


- 인재(人材)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한 번 향교재산관리규칙(鄕校財産管理規則)을 개정한 이래로 그 재산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 대강의 내용을 살펴보면, 공교대학(孔敎大學)을 나라 안에 설립해야 한다고 하고, 경의강습소(經義講習所)를 각 군의 명륜당(明倫堂)에 설치해야 한다고 하고, 신서적(新書籍)을 구입해서 배포해야 한다고 하고, 관광단(觀光團)을 조직해야 한다고 하고, 강연회(講演會)를 열어야 한다고 하고, 백일장(白日場)을 개최해야 한다고 하고, 제구(祭具)를 새로 갖추어야 한다고 하는등의 일들입니다.
지금 여러 도에 있는 향교의 재산에서 들어오는 수입을 살펴보면, 일 년의 총액이 20여만 원에 불과합니다.

여기에서 350여 곳에 있는 문묘(文廟)에서 봄가을로 올리는 제사의 제수 비용과 기타의 비용을 제하고 나면, 그 나머지 액수로는 대학을 유지하는 비용을 대기에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설립하는 비용이겠습니까. 이 뿐만이 아닙니다. 지난해 각 군에 있는 보통학교(普通學校)의 경비를 충당하던 때를 되돌아보면, 지방의 유림들이 재산을 빼앗겼다고 하면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었습니다.

지금 이 돈을 모두 모아서 한쪽 방면에 쏟아 부을 경우, 다른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일들은 우리 유림의 사업이 발전하기를 기다려서 의논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강습소를 설치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유명무실하게 되어 한갓 향교의 재산만 낭비하게 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제구를 갖추는 일에 이르러서는, 해마다 적당히 나누어서 보수하는 이외에 한꺼번에 새로 갖춘다는 것은, 그 역시 불가능합니다.

그 나머지 여러 가지 일들의 경우에도 모두 무익한 것이라고 할수는 없으나, 역시 으뜸으로 삼기에는 부족합니다.
저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오직 이것으로 학자금(學資金)을 삼아 학생을 뽑아 보내어 그로 하여금 보통사범 및 고등사범, 제국대학의 사범학과를 이수하게 해, 교사가 될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전해 듣건대, 귀도에서는 이미 학자금을 대준 전례가 있기는 하나, 아직 학과까지 지정해서 준 일은 없다고 합니다.

제가 바라는 바는 사범과에 한해서 학자금을 주었으면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공부자(孔夫子)께서는 만고의 스승이십니다.

그 학문을 배우고 그 뜻을 뜻으로 삼아,배우면서 실증 내지 않고 가르치면서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유자(儒者)의 천직인 것입니다.

그리고 향교라는 것은 옛날의 학교이며, 오늘날의 문묘입니다. 향교의 재산이라는 것은 지방의 공공의 재산으로서 지방비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롭게 써서 교육을 발달시키고 유도를 진흥시킨다면, 겸하여 하면서 치우치지 않게 되어 일거양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재산의 원래 성질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각지에서 공립보통학교를 증설하고 있는데, 교원이 부족할 것이 걱정됩니다.

비록 관공(官公)의 비용으로써 기른다고 하더라도, 역시 교원의 숫자가 많아질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고등학교의 교사에 이르러서는 자격을 갖춘 자가 겨우 몇 명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때에 향교의 재산을 떼어 내어 군마다 각각 보통사범학교의 학생 한 사람씩을 양성한다면, 한 회에 배출되는 자가 장차200여 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도마다 각각 고등사범학교나 제국대학 학생을 몇 명씩 양성한다면, 한회에 배출되는 자가 적어도 수십 명은 될 것입니다.

이 향교의 재산을 바탕으로 하여 이 세상에서 필요한 인재를 양성해 교육계에 공헌을 하고 부족한 교원을 보충한다면, 이 역시 우리 유가의 일대 사업이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른바 유가의 자위책(自衛策)이란 것은, 이상에서 말한 몇 가지 일에 지나지 않는데, 번다하게 전달드렸습니다.

그러니 들을 만한 내용은 없으면서 한갓 시간만 허비하셨을 것으로, 몹시도 송구스럽고 부끄럽습니다.

다행히 이 뒤에 심 선생께서 경학(經學)에 대해 강론할 것이니, 귀를 씻고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출전 : 金完鎭, 「儒家之自衛策」, '經學院雜誌' 제25호, 1924년 12월 25일, 53~58쪽>


(3) 유시(儒是)


강설(講說)


저 김완진은 바로 이곳 충남 사람입니다. 이 고을에 사는 여러 분들은 옛 친구가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또 지난해에 제가 이웃 군에 군수(郡守)로 와 있으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죄를 얻고 옛 친구들에게 수치를 끼친 것도 대개 적지 않습니다.

이에 마음속으로 항상 여러분들의 덕을 그리워하면서 감사해마지않았습니다.
그로부터 10년간 헤어져 있다가 다행스럽게도 이처럼 다시 만나게 되었는바, 저의 기쁜 마음은 비할바가 없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단지 저 오하(吳下)의 아몽(阿蒙)458)은 특별히 괄목상대(刮目相對)459)할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군수 각하께서 멀리에서 저를 초청하여 오게 하신 것은,458) 오하(吳下)의 아몽(阿蒙) : 학식이 없고 진보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하는 지명이고 아몽은 여몽(呂蒙)을 말한다. 손권(孫權)이 여몽과 장흠(張欽)에게 학문을 권장했는데, 그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였다.

뒤에 노숙(魯肅)이 여몽과의 대화에서 여몽의 진보에 놀라 “그대는 이제 어리석었던 오하의 아몽이 아닐세.” 한데서 연유한 말이다. '三國志' 吳志 呂蒙傳.


459) 괄목상대(刮目相對) : 서로 헤어져 있는 동안 학문이 크게 진보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옛말에 “선비가 서로 작별한 지 사흘 만이면 눈을 닦고 서로 대한다.(士別三日刮目相對)”는 말이 있다.


예전에 저를 만나본 적이 있었기 때문인 것에 불과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나 시골 무당은 영험함이 없고 촌스런 사람의 말 역시 졸렬하여, 여러 대가(大家)들께서 기대하는 바에 부응하지 못하고 옛 친구에게 거듭 수치를 끼치게 되었는바, 몹시 부끄럽습니다.
저 김완진이 경학원(經學院)에 재직하고 있는 것은 사유(師儒)의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고비(皐比)의 자리460)에 높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단지 성묘(聖廟)를 청소하는 일개 하역자(下役者)로서,한갓 일반 사무나 보는 일을 맡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에 본디 경학(經學)에 어두우니, 어찌 능히 강연(講演)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향교(鄕校)와 경학원(經學院)의 일에 관계됨으로 인하여, 멀리에서 초청해 주신 성대한 뜻을 저버릴 수가 없었기에, 억지로 달려와서 외람되이 여러분들의 모임에 끼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즉 미천한 저의 분수에 있어서 영광스러움이 어찌 비단옷을 입고 훤한 대낮에 돌아온 것만 같을 뿐이겠습니까.

강연을 하는 것은 본디 본도를 순회하는 강사(講士)가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저로서는 감히 입을 놀리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단지 답례하는 뜻으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릇 경학원(經學院)이라는 것은 옛날의 태학(太學)이고, 향교(鄕校)라는 것은 지방의 학교입니다.

대개 옛날의 학제(學制)는 중국에서 규범을 취해 와 도성에는 국학(國學)을 설치하고, 고을에는 향교(鄕校)를 설치한 다음, 양곡을 비치하여 선비들을 양성해 이 세상의 쓰임에 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향교를 거치지 않고는 태학에 올라갈 수가 없었음이 오늘날의 보통학교(普通學校)와 고등학교(高等學校)의 제도와 같았습니다. 이것은 학교 교육을 베푼 것입니다.
또 향교의 안에는 문묘(文廟)를 세워 대성(大聖)을 제사지내고 명현(名賢)을 배향(配享)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러러 볼 바를 높이어 사림(士林)이 모범으로 삼을 바를 만들고, 이로써 덕성(德性)을 함양하고, 이로써 이륜(彛倫)을 천명하였습니다. 이에 교화(敎化)가 행해지는 것이 아주 아름다워 볼만한 점이있었습니다.

이것은 사회교육을 베푼 것입니다.
학제(學制)를 신식(新式)으로 고친 이후에는 별도로 학교를 설치하여 학교의 교육을 베풀었으며, 이어 향교도 그대로 보존하여서 사회교육의 기관으로 갖추었습니다.

여기에서 학교와 문묘가 나눠지게 되어서 학교 교육과 사회 교육이 각각 그 업을 구분하였습니다.
대개 옛날에 사장(詞章)을 기송(記誦)하던 학문은 천하의 대세에 대항하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이때문에 시대에 부응하고 형세를 따라서 법학, 경제학, 의학, 농학, 공학, 상학 등의 과목을 가르치게 된것입니다.

그러나 공(功)을 이루고 업(業)을 성취하여 격물(格物)과 치지(致知)와 궁리(窮理)와 진성(盡性)에 이름에 미쳐서는 모두가 하나로 귀결됩니다. 그러니 참으로 강하(江河)를 만회하여서 세도(世道)를융성하게 하고 인심(人心)을 착하게 하고자 한다면, 이 도덕(道德)의 본원인 옛 학문을 내버려두고 어디에서 구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문묘를 그대로 봉안하여 해마다 거르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갓 그 귀신에게 제사만 지내면서 성인의 학문을 강구하지 않으며, 한갓 그 책만 읽으면서 그 도를 시행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유자(儒者)가 될 수 없으며, 일삼을 바가 없게 됩니다.

이 때문에 이에 경학원의 규정 제1조에 크게 써서 게시하기를, “경학을 강구하여 교화를 돕는다.(講究經學 裨補敎


460) 고비(皐比)의 자리 : 고비는 호피(虎皮)로, 옛 사람들이 호피를 깔고 앉아서 강학(講學)하였으므로, 후대에는 사석(師席)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化)”고 운운한 것입니다.

무릇 향교와 경학원은 한 몸이어서 실로 나아가는 바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향교와 경학원은 모두 경학을 강구하는 곳이며, 교화의 사업을 하는 기관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이 자리에 처해 있으면서 이런 기능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임무가 역시 중하고도 크지 않겠습니까?

생각건대 이 제도를 쇄신한 지가 이미 수십 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경학원의 관원과 향교의 교원들이 마치 잠에 취해 있는 것과 같아서 사회사업을 이루었다는 말이 전혀 들리지가 않고 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시대가 과도기에 속하고 풍기(風氣)가 떨쳐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역시 쌓여온 폐습이 고질화되어서 묵은 폐단을 그대로답습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사업을 시행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모두가 반드시 강령(綱領)을 먼저 세우고 기치를 분명히 세워, 뭇사람들의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뭇사람들의 힘을 모으는 법입니다.

가령 오(吳)나라 사람과 월(越)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서도 오히려 능히 반대편의 기슭으로 건너갈 수가 있는법461)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유림사회(儒林社會)가 뿔뿔이 흩어져서 시들시들한 채 투덜대며 흐물흐물해져 한 가지 일도 조처하지 못하고, 한 가지 사업도 시행할 수 없는 것이, 어찌 다른 이유에서이겠습니까.

오로지 유시(儒是)가 일정하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삼가 오늘날의 유림계의 상태를 보건대, 모두가 같은 유자(儒者)인데도 행하는 바는 서로 간에 아주 딴판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단체인데도 주장하는 것은 서로 어긋납니다.

이에 진짜와 가짜가 서로 뒤섞여 있고, 붉은 색과 자주색이 서로 어지럽습니다. 모두들 자신들이 옳다고 하면서 서로 간에 통일되지못하여 억만 사람이 억만 가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날에 실패한 경험을 내버려둔 채 전혀 돌아보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끝내는 군자다운 유자는 꼬리를 끌고 날마다 물러가고, 소인 같은 유자는 빈틈을 엿보면서 날마다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명목(名目)이 좋으면 표방(標榜)을 하고, 재료가 좋으면 판매를 하면서, 유자의 옷을 입고 유자의 관을 써서 머리를 고치고 얼굴을 바꾼 다음, 요(堯) 임금을 칭하고 순(舜)임금을 칭하면서 다른 사람을 협박하고 자신을 살찌웁니다. 유교가 제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다른 종교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유학의 앞날을 생각하매, 어찌 걱정과 탄식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일반사회의 현상을 보건대, 지난날의 덕은 이미 쇠하였고, 새로운 풍조는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종교와 학문은 여러 갈래로 나눠져 나아갈 바를 정할 수가 없고, 법과 기강은 날로 치밀해지지만 사기와 거짓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선한 행실은 본받지를 않고, 악한 행실에만 감염되어, 남자는 부랑한 데로 빠져들고, 여자는 사치스러운 데에 물들었습니다. 풍속과 기강이 날로 문란해지고, 이륜은 날로 무너져, 자제들은 제멋대로 굴면서 정상적인 법도를 벗어나고, 부형들은 어둑해져 아버지로서의 권한을 상실하였습니다.
이런 말류의 폐습은 도도히 흘러 서로 이끌고서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유자들은 이러한 때 완전히 그 기능을 잃은 채, 시골로 물러가 모른 척하면서 수수방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고상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형세를 쫒아 부화뇌동하고 바람을 타고 선동하면


461) 오(吳)나라……법 : 사이가 아주 나쁜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간다는 뜻으로, 원수끼리도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면 함께 서로 힘을 합친다는 뜻이다.

서, 태연히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도(世道)에 대해 생각해 봄에 있어서 통탄스러운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우리 유교는 실로 도덕(道德)의 본원이 되며, 향교와 경학원은 이에 유림(儒林)의 중심에 있습니다.

부유함에는 역사(歷史)가 있으며, 옹위함에는 대중(大衆)이 있습니다. 참으로 능히 향교와 경학원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서 유시(儒是)를 분명하게 정하고 방향을 제시해 준 다음, 성심으로 인도하여 이끌면서 강론을 하여 밝히고, 닦으면서 거행한다면, 풀잎 위로 부는 바람을 어느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날랜 수레가 익숙한 길을 가듯, 길을 가는 것이 절로 배는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이륜(彛倫)을 부식하고, 그렇게 하여 세도(世道)를 유지한다면, 사문(斯文)에다가 해와 달을 내걸어 만대토록 영원할 태평시대를 열고, 이 백성들을 도탄에 빠진 가운데에서 구제하여 함께 태평스러운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 이로부터 차례대로 시행될 것으로, 역시 높고 멀어서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보건대, 세도는 날이 갈수록 낮아져서 군자의 도가 쇠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에 말하기를,“왕도(王道)는 오활하고, 유교는 부패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심사숙고하지 않고서 단지 한때의 현상만 보고서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만약 치란(治亂)에 대해서 통달한 사람이 보고 원칙에 입각해서 말한다면, 사람의 상정은 추우면 입을 것을 생각하고 배고프면 먹을 것을 생각하는 법입니다.

그런즉 궁함을 인하여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은, 절로 그러한 때가 있는 법입니다. 천도(天道)는 순화하는 법으로,가지 않으면 돌아옴이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만대토록 뻗치고 천지가 다하도록 실추됨이없는 것은 이 도(道)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역시 곡식이나 피륙 따위와 같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릇 도는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먼 곳에서 구하며, 일은 쉬운 데 있는데도 어려운 데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 점이 바로 도를 구하는 것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도에서 어긋나는 것이 더욱더 멀어지는 것입니다.

도라는 것은 길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마다 각각 하늘의 법칙을 따르고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면서 자포자기(自暴自棄)하지도 않고 또 벼 싹을 뽑아 올리지도 않으며,462) 편안한 집에 거처하고 똑바른 길을 통해서 가면서 효제(孝悌)로 들어가고 충신(忠信)으로 나오면 됩니다. 그럴 경우 처음에는 한사람이나 한 집에서 인(仁)에 흥기하고 예(禮)에 흥기하는 데에서 시작하여, 끝내는 능히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도 온 나라 안에 교화를이룰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른바 경학원과 향교가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도 역시 특별하게 결속하거나 특별하게 친밀한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군자의 사귐은 담담하기가 물과 같은 법입니다. 오직 성심으로 서로 믿음이 있어야만 신의의 도가 이로써 도타워지게 되어, 덕(德)을 서로 같이 하고 업(業)을 서로 권면할수가 있습니다.

지나간 날을 회고해 보건대, 경학원이 향교에 대해서 움직이지 않고 고요했으며, 뜨겁지 않고 차가웠습니다.

그리하여 지방 사람들의 두터운 소망을 저버리고, 유림들 사이에 미혹됨을 불어나게 한 것이 많았습니다.


462) 벼 싹을……않으며 : 빨리 성과를 이루고자 하여 억지로 조장(助長)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 송(宋)나라 사람 중에 벼 싹이 빨리 자라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벼 싹을 뽑아 놓은 자가 있었는데, 나중에 그 아들이 달려 나가 보니 벼 싹이 바짝 말라 죽어 있었다고 한다. '孟子' 公孫丑章句上.

그러나 경학원의 행동과 시설 역시 자본과 힘에 맞추어서 하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이 없는 데에서 뛰어오르는 것은, 바로 망령되이 날뛰는 것일 뿐입니다.

저 향교의 재산을 엿보고 지방의 행정에 간섭하는 것과 같은 것은, 실로 경학원에서 감히 할 수 없는 바이고, 역시 경학원에서 원하는 바도 아닙니다.

더구나 유학자들의 습속이 깨끗해지지 않아서 아직도 냄새를 피우는 자가 있는 데야 더 말해 뭣하겠으며, 여러 모임이 많이 결성되어서 향교에서 그들의 명을 따르기에도 피곤한 데야 더 말해 뭣하겠습니까.
경학원에서는 항상 금전 관계에 대해서는 신중히 하여, 일찍이 향교에 대해 일이나 물품을 가지고 해를 끼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대개 폐단의 근원을 막고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고자 해서인 것으로,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다는 기롱쯤은 돌아볼 겨를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십 년 동안이나 수절(守節)하는 것이 어찌 마음속으로 즐거워서 하는 바이겠습니까? 그리고 삼 년 동안 울지 않는 것은 역시 무언가 크게 해보고자 해서인 것입니다.463)

바라건대 귀 향교의 제현들께서는 이 점을 깊이 양해하고서 다시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께서는 경학원의 직임에 있는 사람들과 제휴하여 더욱 도타이 연결되고, 엄정하게 스스로서고 온건하게 자중하시면서, 제(齊)나라와 초(楚)나라에서 시끄럽게 군다고 해도 동요하지 말고, 바람과 물결이 뒤흔든다고 해서 흔들리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유림계의 중심에 서서 거센 물결의 가운데에 선 지주(砥柱)464)가 되어, 분발하고 가다듬어 교화의 사업을 일으키고, 물을 주고 잘 북돋아서 유림의 좋은 인재들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크게 하고 싶어 하는 바이며, 바로 이른바 유시(儒是)를 정하며 유치(儒幟)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교화사업(敎化事業)이라는 것은 바로 이른바 사회교육입니다. 그 의의(意義)에 대해 말해 보면, 성현(聖賢)을 숭봉하고, 후진(後進)들을 장려하고, 선행(善行)한 자를 표창하고, 빈궁한 자를 구휼하는 등의 일이다.

그 종류를 말해 본다면, 문묘(文廟)를 유지하고, 도서관을 건립하고, 진흥회(振興會)나 교풍회(矯風會), 장학회(獎學會) 등의 사업을 힘써 행하는 것입니다. 무릇 이러한 것들은 의당 시행해야 할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이 없는바, 참으로 우리 유림의 능력으로 경영하고 성취하는 것이 저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특별히 더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유림장학회를 특별히 설립하여 사회교육의 비용을 적립하고 가난한 집의 뛰어난 자제들을 거두어 길러, 학계가 처해 있는 현재의 곤경을 풀어주고, 유가의 백년대계를 세우는 것입니다.
자질구레한 말을 많이 늘어놓아 시간을 허비하였는바, 몹시 죄송합니다. 못 다한 말은 다음 기회에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전 : 金完鎭, 「儒是」, '經學院雜誌' 제27호, 1926년 12월 25일, 62~66쪽>


463) 삼 년……것입니다 : 삼 년 동안 울지 않는다는 것은 삼 년 동안 날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은인자중하며뜻을 기르다가 원대한 포부를 펴는 것을 말한다. 춘추 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인 초 장왕(楚莊王)이 자신을 새에 비유하여 “3년 동안 날지 않은 것은 날개의 힘을 기르기 위함이었으니, 날지 않으면 몰라도 한번 날기만 하면 하늘 위로 솟구칠 것이다.(三年不翅 將以長羽翼 此鳥不飛則已 一飛沖天)”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韓非子' 喩老.


464) 지주(砥柱) : 삼문협(三門峽)을 통해 흐르는 황하의 한 복판에 있는 산 이름으로, 황하의 거센 물결에도 굳건하게 서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난세(亂世)에 절조를 지킨다는 뜻으로 쓰인다.

(4) 백곡(百穀)을 씨 뿌리고 오교(五敎)465)를 편다


이번에 귀군(貴郡)466)의 군수(郡守) 각하께서 멀리에서 저를 불러 주었는바, 감사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저 역시 문묘(文廟)에서 봉사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향교의 여러 동료들 및 유림의 여러 현자들과 더불어 오래도록 서로 접하면서 서로 간에 이택(麗澤)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의사를 서로 소통하고 방침을 서로 협정하여, 사업을 일으키고 유도(儒道)를 진작시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본인이 해야 할 바이고 원하는 바여서, 감히 하루라도 마음속에서 잊을 수가 없는것입니다.
다행히도 오늘 한 당 안에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하찮은 저의 소견을 피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쉽사리 얻을 수 없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나 못난 저 자신을 돌아보건대, 이미 평소에 학문을 쌓은 것이 부족하여 여러 분들의 기대에 만분의 일조차도 부응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비유하자면, 제(齊)나라의 국문(國門)에서 비파를 뜯는 것467)과 같아서 여러분이 듣기를 원하는 말에 딱 맞아떨어지지않을 것인바, 몹시도 부끄럽고 몹시도 두렵습니다. 그러나 너그러운 마음으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세상의 도가 쇠미해지고 경전의 가르침이 해이해졌는데, 시대가 과도기에 속하여 서정(庶政)을 다스릴 겨를이 없습니다. 이에 이륜(彛倫)은 무너졌고 풍속(風俗)은 퇴폐해졌습니다. 부자(父子)의 친함은 자유로움을 찾는 데에서 빼앗겼고, 부부(夫婦)의 구별은 이혼(離婚)하는 데로 돌아갔으며, 붕우간에는 믿음이 없어져 문서를 작성해 계약을 맺으며, 장유(長幼) 간에는 질서가 없어서 서로 간에 인격(人格)을 가지고 다툽니다.

이와 같이 되어 나가다는 오륜(五倫)이 비로 쓴 듯이 모두 없어져서 모두 휩쓸려 나가 서로 간에 이끌면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의 폐해가 어찌 단지 홍수가 나고 맹수가 설치는 피해 정도에만 그치겠습니다.

홍수가 난 물이 하늘에 닿더라도 이러한 천재(天災)는 오히려 막을 수가 있으며, 맹수가 사람을 잡아먹더라도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면서도 윤리가 없고 도덕이 없어, 서로 간에 잡아먹는 지경에 이른다면,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하나도없는 것이니,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귀군의 향교에 계신 여러 동료들과 유림의 여러 현자들께서는 이런 점을 걱정하여 마음을 떨쳐 한꺼번에 일어나, 단체를 결성하고 크게 써서 표방하여 ‘명륜회(明倫會)’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급급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풍기(風紀)를 진작시키고 엄숙하게 하며, 이륜(彛倫)을 부추겨서 세우는 것을 우리들의 임무로 삼는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은 애달프고 그 사업은 중합니다.

같은 일에 종사하고 있는 저로서 어찌 여러분들과 같은 심정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인륜이 밝지 않은 것을 밝게 하고자
하였는바, 여기에서 이 명륜회도 역시 쇠퇴한 세상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결성된 것임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465) 오교(五敎) : 삼강 오륜(三綱五倫)의 오륜을 말한다.
466) 충청북도 충주군.
467) 제나라……것 : 남우(濫竽)의 고사와 같은 말로, 무능한 사람이 재능이 있는 척하는 것을 말한다.

제나라 선왕(宣王) 때 남곽(南郭)이란 사람이 여러 악사(樂士) 틈에 끼어서 잘못 부는 큰 생황(竽)을 잘 불었으나
민왕(暋王) 때에 이르러 한 사람씩 불게 하자 도망쳤다는 고사가 있다.

그러나 ‘인륜을 밝힌다.

인륜을 밝힌다.’ 하면서 가만히 앉아서 하늘이 인륜을 밝혀주기만을 기다린다면, 인륜이 저절로 밝혀질 수 있겠습니까? ‘인륜을 밝힌다. 인륜을 밝힌다.’ 하는데, 인륜을 밝히고자 한다면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역시 시설(施設)이 있은 다음의 일인 것이며, 돈이 있은 다음의 일인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창고가 꽉 찬 다음에야 예절을 알고, 의식(衣食)이 풍족한 다음에야 영욕(榮辱)을 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제가 오늘 강론의 제목을 정한 것도 오직 ‘백곡을 씨뿌리고 오교를 편다.’고 한 것입니다.
곡식을 씨 뿌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굶주리게 됩니다. 그럴 경우 장차 굶어죽는 것을 구제하기에도충분하지 못한데, 어느 겨를에 예의를 닦을 수가 있겠습니까. 씨를 뿌리고자 하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맹자(孟子)가 제(齊)나라와 양(梁)나라에서 왕도(王道)를 말하면서도 특별히 신통한 묘술(妙術)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직 ‘다섯 묘(畝)를 가진 집에 뽕나무를 심고, 닭과 돼지와 개 등의 가축을 기름에 새끼 칠 때를 놓치지 않게 하며, 백 묘의 밭에 농사철을 놓치지 않게 한다.’ 하였으며, 또 ‘도끼와 자귀를 때에 따라서 산림에 들어가게 하며, 촘촘한 그물을 웅덩이와 못에 넣지 못하게 한다.’고 하였을뿐입니다.468)
곡식을 씨 뿌리면 백성들은 이에 먹을 것을 얻게 됩니다. 먹을 것이 여유롭게 되는 것이 이에 부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유하면서도 일정한 업(業)이 없으면, 부형들은 교만하고 사치스럽게 되어 화려한 집에 고운 첩을 들이고 한 끼 식사에 만전(萬錢)을 허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유한데도 가르치지 않으면, 자제들은 부랑한 데 빠져서 술집이나 기생집을 돌면서 한 번에 백만 전을 허비하게 됩니다.

그럴 경우 패가(敗家)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끝내는 반드시 망신(亡身)하고서야 말게 됩니다.

부(富)라는 것은 이와 같이 사회에 해독을 끼치고, 조상들에게 욕을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리어 지난날에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도리에 대해 마음을 쓰던 것만도 못하게 됩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배불리 먹고 따스한 옷을 입어서 편안히 거처하기만 하고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禽獸)에 가까워진다.” 하였습니다. 무릇 금수에 가까워지는 것은 그 폐해가 단지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데에서만 그치는 바, 폐해가 오히려 크지 않습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참으로 혹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다고 한들 내가 어찌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이면서 윤리(倫理)가 없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먹을 것이 없으면 죽으며, 윤리가 없어도 역시 죽습니다. 그 죽는 것은 똑같으나, 윤리가 없어서 죽는 것이 먹을 것이 없어서 죽는 것보다 더 심합니다.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먹을 것이 없는 자는 굶주려서 죽는데, 이는 무능(無能)한 것입니다. 그러나 윤리가 없는 자는 어지러워져서 망하는 것으로, 이는 무도(無道)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도 역시 반드시 구분해야만 할 경중(輕重)과 선악(善惡)이 있는 것입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이미 부유하게 되었으면 가르쳐야 한다.” 하였으며, 맹자가 말하기를, “상(庠)과 서(序)와 학(學)과 교(校)를 설치해서 가르친다.” 하였습니다. 상과 서와 교는 모두 향학(鄕學)이며, 학(學)


468) 맹자(孟子)가……뿐입니다 : 맹자가 양혜왕(梁惠王)을 만났을 때 한 말로, '맹자'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상(上)에 나온다.

은 국학(國學)입니다. 이는 모두가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 강제(講題)에서 말한‘오교(五敎)를 편다.’는 것입니다.
오교를 펴자면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편다는 것은 펴서 베푼다는 뜻입니다. 이미 부유하게 되고나서는 더욱더 근검절약을 하여, 생활의 수준을 높이지 말고, 공익의 사업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먹을 것이 남으면 이를 저축하여 자본(資本)을 만들어, 그 자본을 가지고 기관(機關)을 설치하여 교육을 널리 펴야 합니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 교육시설이 다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으며, 도시와 향촌에 학교가 없는 곳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태어나 8세가 되면 모두 소학(小學)에 입학하여 사람치고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게 해서 지식을 널리 보급하고 정신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각각 그 직(職)을 전수해 주어서 각자 자신들의 생업에 안정되게 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 모든 일이 다 빛나게 되고, 백성들이 모두 화합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위로는 영웅호걸이 마구 날뛰면서 발호하는 일이 없게 되고, 아래로는 필부필부가 제 살 곳을 잃는 일이 없게 됩니다.
지금 천 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천 년 전의 일을 거슬러 올라가 상고하고, 이미 지나간 자취를 인하여 다스려지고 혼란해진 이유를 찾아보면, 다스림이 오래 되면 어지러워졌고,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면 다스려졌는바, 흥성하고 피폐함과 얻고 잃는 것은 그 단서가 똑같이 일치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요체는, 다스림은 올바른 도를 인하지 않는 경우가 없고, 어지러워짐은 그릇된 도를 인하지 않은 경우가 없음은 아주 분명하고도 분명하여 어긋나지가 않음이 마치 나누어진 부절(符節)을 서로 합해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어찌 일찍이 옛날과 오늘날의 다름이 있겠습니까.
오늘날에는 언제나 늘 구학문(舊學問)이니 신교육(新敎育)이니 하고 떠들어댑니다.

그런데 이는 학문과 교육에 있어서는 원래 신교육과 구학문의 구별이 없다는 것을 전혀 모른 것입니다.

이는 정치(政治)나 법률(法律)에 이르러서도 역시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단지 잘하느냐 못하느냐, 공평하냐 공평하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옛날에는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설치하였는데, 지금에도 역시 이것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쇄소(灑掃)와 응대(應對)와 진퇴(進退)하는 절차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도를 가르쳤는데, 지금에도 역시 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세도(世道)가 낮아지고 제도가 미비 됨을 면치 못하고 있을뿐입니다.
오늘날에 말하는 자들은 구학문과 신교육을 둘로 나누어 서로 다른 제도로 만들고서는 함께 나아가며 아울러 시행하여, 구학문으로는 예전 것을 보존하게 하고, 신교육으로는 신지식을 알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는 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이와 같이하여 오래도록 끌고 나간다면, 묵은벽에 새로운 흙을 바르는 것과 같아, 그 형세가 고르지 않게 됩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구학문은 신교육을 배척하고, 신교육은 구학문과 반대로 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는 늙은이와 젊은이가 서로다른 길을 걷고,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반목하는 데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이와 같이하여 각자 따로따로 서게 된다면, 교육기관을 어느 날에 통일 시킬 수 있겠으며, 우리들의 정신을 어느
때에 일치시킬 수 있겠습니까?

저의 소견으로는, 구학문을 새 교육기관에 전수해 주고, 신지식을 옛 사회(社會)에 수입해 들여서, 구학문을 하는 자는 능히 새롭게 변할 줄을 알고, 신학문을 하는 자도 역시 옛 학문에서 배울 줄 알게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럴 경우 늙은이에게는 아들이 있고 손자가 있게 되며, 우리 유학은 열려지고 계승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늙은이와 젊은이가 협조하고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살면서, 그 재용을 절약하고 그 마음과 힘을 일치시켜, 덕을 닦고 업을 닦아 앞으로 나아가기를 마지않아 모두가 함께 밝은문명 속에서 태평스럽게 사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유자(儒者)들에 대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유자들로 인해 조선이 완고하게 되었다.’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세계화(世界化)하고, 시대화(時代化)하고자 합니다. 참으로 세계화하지 않으면, 깊은 골짜기 속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지난날의 잘못된 전철(前轍)을 다시 밟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시대화하지 않으면, 지난날의 잘못된 일들을 고수하면서 발전할 가망이 없게 됩니다.
또한 우리 유자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양반노인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평등화(平等化)하고 소년화(少年化)하려고 합니다. 참으로 평등화하지 않으면, 동반자가 없이 혼자서 길을 가게 되어 우리 유학이 더욱더 고립될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소년화하지 않으면, 우리 늙은이들이 죽고 난 다음에는 우리 유도 역시 그에 따라 망하게 될 것입니다.
변화하고자 하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무릇 변화한다는 것은 없던 데에서 있게 되고, 작은 데에서 크게 되고, 약한 데에서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앞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만약 있는 데에서 없게 되고, 큰 데에서 작게 되고, 강한 데에서 약하게 되는 것은, 바로 뒤로 퇴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변질되는 것이지 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우리 유학자들이 날마다 더욱 분발하여, 진보만 하고 퇴보는 하지 않으며, 변화는하되 변질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진보하고 변화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표준(標準)을 세우고, 미리 계획을 정해 놓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용감하게 나아가면서 힘써 전진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일러 자력(資力)을 준비하고, 사업(事業)을 선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릇 유림(儒林)이라는 것은 학자들의 단체를 이른 것입니다. 유림으로서는 교육을 장려하는 것이 참으로 기본적인 임무입니다. 교육을 말미암지 않고서 유도를 진흥시킨다는 것은 역시 근본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유림이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은 교육 사업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범범하게 교육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모두 학교에서 하는 일이라고 인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학교 이외에도 역시 반드시 가정과 사회가 있어 학교의 짝이 된 다음에야 비로소 교육의 큰 목적을 달성할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림은 이 세 가지 가운데에 마땅히 어떠한 것을 담당하여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사회교육인 것입니다.
오늘날 향교와 경학원(經學院)은 바로 옛날의 소학과 대학입니다. 학교 교육을 여기에서 실시하여선비를 기르고 인재를 양성해서 이 세상의 쓰임이 되게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회교육 역시 여기에서 행하여 문묘를 세우고 석전제(釋奠祭)를 지내어 세상의 모범이 되게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학제(學制)를 개선한 뒤로는 별도로 학교(學校)를 설립하여 학교의 교육을 하고, 향교를 그대로 보전하여 사회교육의 기관을 갖추었습니다. 여기에서 학교와 문묘가 분리되어서 학교 교육과 사회 교육을각각 그 업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대개 예전에 사장(詞章)을 외우던 학문은 더 이상 이 세상의 대세에 대항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시대에 따라서 제도를 정하여 법학, 경제학, 의학, 농학, 공학, 상학의 과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공(功)을 이루고 업(業)을 성취하여 격물(格物), 치지(致知), 궁리(窮理), 진성(盡性)의 경지에 이름에 있어서는, 한 곳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강하(江河)와 같은 흐름을 만회하여 세도(世道)를 높이고 인심(人心)을 착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이 도덕(道德)의 본원이 되는 유학을 버려두고 어디에서 구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문묘를 그대로 받들면서 거르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갓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기만 하고 그 학문을 강구하지 않으며, 한갓 그 책을 읽으면서 그 도를 행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유자(儒者)가 될 수가 없고, 이것을 일삼을 바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학원의 규정 제1조에 분명하게 게시하기를, “풍교(風敎)와 덕화(德化)를 돕는다.”고 한 것이며, 또한 향교의 재산 관리 규칙 제4조에도 교화사업을 명시하였습니다. 무릇 향교와 경학원은 일체인 것으로, 실로 그 뜻을 같이하며 함께 교화사업을 행하는 기관입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이 지위에 있으면서 이 기능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임무가 역시 중하고도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화사업이라는 것은 바로 이른바 사회교육인 것입니다. 그 종목 역시 하나가 아니고 여럿입니다.

그것을 대략 거론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문묘(文廟)를 숭봉(崇奉)하면서 유지하는 것입니다. <석전제(釋奠祭)를 거행하여 우러러보는 바를높이고, 건물을 수선하여 영구히 보존하는 것입니다.>
2) 경전(經傳)을 번역하고 저술하며 발간하는 것입니다. <성현들의 경전 뜻을 만약 한문을 충분히 강습하여 이해하기를 기다린다면, 보급할 기약이 없습니다.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대학(大學)', '시경(詩經)', '서경(書經)'의 글을 언문으로 번역하고 속어(俗語)로 풀어서, 부녀자나 어린이들도 이해하고, 나무꾼이나 목동들도 송독할 수 있게 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3) 도서관(圖書館)을 설립하고 경영하는 것입니다.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서적과 과학(科學) 도서 및 신문과 잡지를 비치하고서 돌아가면서 읽게 하는 것입니다.>
4) 강연회나 강습회, 전람회를 열거나 시찰단을 파견하는 것입니다. <취지를 선전하고, 실물을 널리보게 하는 것입니다.>
5) 선행(善行)을 한 사람을 표창하는 것입니다. <효열(孝烈), 자선(慈善), 공익(公益) 등에 특별한 행실이 있는 자를 식을 열고서 상을 주어 표창하고, 그 대장(臺帳)을 비치하여 내용을 기록해 두는 것입니다.>
6) 인재(人材)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집의 총명한 자제를 선발한 다음, 학자금을 주어서 인재로 자라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한 것과 같은 풍속을 흥기시키는 모든 사업이 모두 그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덕성(德性)을 함양하고, 풍속(風俗)을 개량하고, 지식(智識)을 계발하고, 시세(時勢)에 통달하고, 후진(後進)을 장려하고, 성학(聖學)을 잇는 것입니다. 이상의 몇 가지는 학교 교육이 겸하여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닌것이 있으며, 그 공효 역시 어찌 한 학교를 설립하여 한 학급을 가르치는 것보다 못하겠습니까.
지금 노성한 유학자들은 소학교 아동들의 행실과 예의가 어긋나고 패만한 것에 화를 내고, 향교와 유림이 직임을 잃고 흩어진 것을 답답하게 여겨, 향교의 재산을 가지고 한문학교(漢文學校)를 명륜당(明倫堂) 안에 설립하여, 경전의 뜻을 강론하고 유학의 맥을 길게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그 뜻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며, 이로움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소극적인 시설로서, 읍내에 한 서당(書堂)을 설치하는 데 불과할 뿐으로, 먼 시골의 유생들은 그 혜택을 입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한갓 향교의 재산만 허비할 뿐, 그 비용을 계속해서 대기가 어렵습니다.

조금이라도 힘이 있으면서 시대의 흐름을 아는 자들은 공립학교에 보내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단지 시골의 가난한 학구(學究)가 조금 성장한 아이 5, 6명과 아직 어린 아이6, 7명과 더불어 남아 있으면서 중얼중얼 대며 글이나 읽으며 세월을 허송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럴경우 사람들의 마음은 날로 소원해져서 세상과는 더욱 멀어지고, 우리 유학은 날로 좁아져서 발달할 가망이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조항의 시설과 활동에 미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 향교의 재산을 투자해서 유회(儒會)의 자금을 보충한 다음, 향교의 안에 서책을 진열하고, 명륜당안에 공회(公會)를 설치해, 사회에 가르침을 베풀고 청년들에게 도를 전하여, 각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감화하고 스스로 믿어 우러르게 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 그 범위와 효과가 어찌 넓으면서도 크지않겠습니까. 이것을 일러 시대화(時代化)라 하고 소년화(少年化)라고 하는 것입니다.


<출전 : 金完鎭, 「播百穀敷五敎」, '經學院雜誌' 제28호, 1927년 12월 25일, 58~63쪽>


3) 박상준(朴相駿)


(1) 대동아전쟁과 국체본의의 투철(권두언)


대제학 박택상준(朴澤相駿, 호우사와)469)


고이소(小磯)총독 각하가 그 동안 대명을 받자옵고, 취임 당초부터 국체본의의 투철이 절실히 요망된다고 절규하셔서, 또한 도지사회의의 훈시에서는 “시정일체의 뿌리를 여기에 두고, 관민이 일치협력 함으로써 도의(道義)조선을 동요하지 않게 건설하고, 또 할 수 있다면 황국일본의 한 테두리 중에서, 국체의 본의를 기조로 하는 도의지역은 조선으로써 제일 가게 하는 것을 염원한다.”고 말했다.

대동아 경륜중의 현하에서, 반도의 발전을 위해서도, 장차 또한 정전(征戰)목적을 완수하기 위해서도, 참으로 국체본의의 투철보다 더 급한 것은 없을 것이다.
작년 12월 8일, 선전(宣戰)의 대조(大詔)470)가 환발(渙發)된 이래, 1억의 국민이 한 사람이라도 정전(征戰) 완수에 일로 매진할 것을 맹세하지 않았던 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국체 명징(明徵)이 부르짖어지고 있고, 몇 번이나 교학(敎學)의 쇄신도 주창되어 왔으나, 아직도 구미사상(歐米思想)


469) 박상준(朴相駿)의 창씨명.
470) 일왕 쇼와의 선전포고.

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시국에 대한 인식에서도, 혹은 신질서 신체제의 본질과, 그것을 건설하는 방책 등에 관한 의식에서, 아직도 불(不)명징한 자가 반도 서민층에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대동아신질서의 중핵이 되어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반도의 우리 스스로가, 아직 국체의 본의에 투철하지 않고, 거기에다가 더욱이 미영(米英)사상을 쳐부수지 못했거나, 시국에 대한 불명징한 점이 일소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공영권(共榮圈)의 주민에게 황도를 선포하고, 일본정신을 이해시키는 것은, 먼저 우리 반도 민중이국체본의에 투철하고, 이것에 의하여 황도를 반도에 구현시켜서 그 모범을 그들에게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경제·사회·문화·정치 등의 각 분야에서, 미영적인 색채가 강한 민족에게 황도를 선포하고, 일본정신을 이해시키는 것은 물론 쉬운 사업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은 아무리 곤란하다고 해도, 아무리 지난(至難)일지라도 꼭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본의 세계적인 대사명인 것이다.
우리 일본인이 된 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국체의 본의에 투철하고, 황국신민이라는 자각을 철저하게 향상시키고, 황도에 대한 자각을 강하게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황도가 참으로 고금불류(古今不謬)이며, 중외불패(中外不悖)라는 것을 자각하고, 자신이 있다면 이것을 선포하고자 하는 일본의 대 사명 관에 반드시 불타오를 것이다. 그리하여 이 대 사명 관에 불타오르며, 이러한 것을 우리가 체인(體認)하는 것이야 말로 이번 대동아전쟁의 출발점인 것이다.
황국일본의 궁극적인 대 사명인 팔굉위우(八紘爲宇)의 세계 신 질서건설을 위해서는, 반도민중은 국체본의에 보다 투철하고, 황도실천에 매진해야 할 것이며, 이것을 달성하는 것이야말로 현하 우리에게 주어진 숭고한 사명이라는 것을 통감하는 바이다. (1942.10.1. 기록)


<출전 : 朴澤相駿(經學院 大提學), 「大東亞戰爭と國體本義の透徹」(卷頭言), '經學院雜誌' 제47호,1943년 1월 25일, 1~2쪽>


4) 박제빈(朴齊斌)


(1) 강사시찰견문소기(講士視察見聞所記)


전(傳)에 이르기를, “인한 자는 그것을 보고서 인이라고 하고, 지자는 그것을 보고서 지라고 한다.(仁者見之 謂之仁 知者見之 謂之知)” 하였다.471) 인(仁)과 지(智)는 덕(德)은 같으면서도 일은 다른 것이다.
이미 일에 다름이 있다면 판연히 두 가지가 되는바, 같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무릇 한 가지 물건이나 한 가지 일을 보면, 큰 것은 작은 것이 아니고 작은 것은 큰 것이 아니며, 동쪽은 서쪽이 아니고 서쪽은 동쪽이 아니다. 한 가지 물건이나 한 가지 일인데도 보는 것에는 각각 차이가 있어, 각각 나뉘어져서 두 가지 물건이나 두 가지 일이 되며, 나아가서는 천만 가지 물건이나 일로


471) 전(傳)에……하였다 : 전은 '역경(易經)' 「계사 상(繫辭上)」을 말한다.

나눠지게 된다. 어찌 이런 이치가 있단 말인가. 아아, 이것은 우리 성인(聖人)의 문호(門戶)에서 물(物)을 체로 삼고, 사(事)를 비유하면서 광대하게 유통하는 큰 도리인 것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산사(山寺)에 올라가 글을 읽었는데, 뇌산(雷山)으로 이루어진 소과괘(小過卦)한 괘를 삼년 동안 읽어서 역학(易學)이 크게 이루어졌다. 이에 하산을 하였다가 돌아가는 길에 중로에서 한 풀과 한 나무를 만났는데, 눈에 보이는 바와 귀에 들리는 바가 뇌산으로 이루어진 소과괘가 아닌것이 없었다.

그런 뒤에 '주역(周易)'에 대한 공부가 크게 이루어져 64괘에 대해서 칼날을 자유자재로 놀리듯이 환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에 읽지 않은 것에 이르러서도 다 통달하게 되었으며, 점치지 않고서도 알 수 있게 되어, 드디어 '주역'의 대가(大家)가 되었다고 한다.
이번에 총독부(總督府)에서 중외(中外)에 있는 여러 강사(講士)들을 내지(內地)472)의 동경(東京)과 서경(西京) 등 각지에 파견하면서 ‘대정박람회시찰단(大正博覽會視察團)’이라고 이름 하였다.

무릇 이른바 박람회라는 것은 병농(兵農)과 공가(工賈)의 물품과 재산을 제1박람회장과 제2박람회장에 모두 모아 놓고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국력(國力)과 민지(民智)의 융성과 발달을 알게 하고, 임동(臨潼)의 투보(鬪寶)473)와 파사(波斯)의 진화(陳貨)474)로써 나라를 높이고 백성을 가르치는 주의(主義)를 붙인 것이다.
총독부에서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한 해를 다 보내는 조선의 가난한 유생과 궁한 백성들이 안목이 작아 트이지 않는 것을 깊이 진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경학(經學)을 깊이 연구하는 이외에도 많고도 큰 일과 공이 있어, 옛 성현의 육부(六府)와 삼사(三事)의 정사(政事)475)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하였다.
여러 강사들은 이미 목탁(木鐸)476)을 잡는 임무를 각 경내(境內)에서 맡고 있다. 그런즉 지난날에 힘쓰던 바가 바로 경학(經學)과 유행(儒行)이다. 요컨대 그들로 하여금 시계(視界)를 새로운 곳으로 열고 가슴 속을 한번 새롭게 한 뒤에 이 많고도 큰 사업으로써 목탁을 잡은 속에 섞어 넣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깊은 산골짜기와 외진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계를 함께 개척하고 가슴속을 함께 일신시킨 연후에야, 비로소 그들과 더불어 크게 변하여 유신(維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릇 그렇게 하면 경학과 유행이 이 많고도 큰 사업과 더불어 판연히 서로 다른 두 개의 길이 되어,함께 비교할 수 없는 것인가? 대개 병사(兵事)를 가지고 논해 본다면, 공부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려


472) 일본을 가리킴.
473) 임동(臨潼)의 투보(鬪寶) : 임동은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지명이다. 원문에는 ‘臨漳’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옛날에 주(周)나라 목공(穆公)이 이곳으로 17국의 제후(諸侯)들을 불러 모은 다음, 각자전국(傳國)의 보물을 한 가지씩 내놓게 한 일이 있다. 여기에서 전하여 아주 사치스러운 물품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474) 파사(波斯)의 진화(陳貨) : 파사는 나라 이름으로, 페르시아를 음역한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이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이 많이 나는 나라로 알려져 왔다. 진화는 오래된 물품으로, 아주 값진 골동품을 뜻한다.


475) 육부(六府)와 삼사(三事)의 정사(政事) : 육부는 수(水), 화(火), 금(金), 목(木), 토(土), 곡(穀)이고, 삼사는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을 말한다.


476) 목탁(木鐸) : 성인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옛날에 정교(政敎)를 베풀 때 목탁을 가지고다니면서 길에서 울려 백성들에게 고한 데서 온 말이다.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이르기를, “하늘이장차 부자로써 목탁을 삼을 것이다.(天將以夫子爲木鐸)” 하였다.

(軍旅)에 대한 일은 일찍이 배운 적이 없다.”고 하였고, 농사를 가지고 말해 본다면, 공부자께서 말하기를, “소인이로구나, 번수여. 하필 농사짓는 것에 대해서 묻는구나.” 하였다. 물품을 만들고 장사하는 것에 대해서 논해 본다면, 모두가 부자께서 일찍이 당실(堂室)에 있는 여러 현인들에게 가르친 적이 없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판연히 전혀 다른 두 가지 길이 되는가? 그것은 아닌 것이다.
공부자께서 노(魯)나라 임금을 협곡(夾谷)의 회합(會合)에서 배행(陪行)하였을 적에, 큰소리로 말하기를, “문(文)을 일삼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무비(武備)를 갖추는 법입니다.” 하고는, 이에 좌우의사마(司馬)를 갖추어 따르게 하여, 그 위세를 펴고 그 일을 완수할 수가 있었다.477) 부자께서는 또 일찍이 젊어서는 신분이 천하여 비천한 일에 대해서도 대부분 능하였다. 이에 비록 낚시질하고 사냥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일찍이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 어찌 혹시라도 천하의 근본이 되는 것에 대해서 중하게 여기지 않았을 리가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안연(顔淵)이 밭고랑을 지키면서 조정에서 나가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자, 부자는 학문하기를 좋아하기로 첫 번째 가는 사람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공(子貢)이 조(曹)나라와 노(魯)나라사이에서 물자를 쌓아두기도 하고 팔기도 하여 재산을 모으자, 부자께서는 ‘천명(天命)을 받지 않고서도 능히 재물을 늘린다.’고 하였으며, 또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사478)를 얻어서 앞에서는 빛이 났고 뒤에서는 광채가 있었다.” 하였다.

이는 대개 수레를 돌려 돌아올 적에 자공이 항상 곁에서 모시면서 재물과 식량을 대는 일을 전적으로 떠맡아서 공급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경학(經學)과 유행(儒行)이 어찌 일찍이 많고도 큰 사공(事功)과 더불어 한 가지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통달한 유학자로서 실제적인 학문을 하는 사람은 병학(兵學)이 극도에 달한 것을 보고는말하기를, “이것은 경학이 정신을 분발하고 의기를 앙양시키며, 널리 알리고 치욕을 막는 데에 붙은 것이다.” 한다.

그리고 농학(農學)이나 공학(工學)이나 상학(商學)이 극도에 달한 것을 보고는 말하기를,“이것은 경학이 사민(四民)들로 하여금 각각 제 살 곳을 얻어 각자 그 생업을 다하게 한 것이다.”라고한다.

염제(炎帝)가 밭 갈고 장사하는 것을 가르치고, 황제(黃帝)가 군대와 공장이를 쓴 것이 어찌 일찍이 성인의 학문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여러 강사들이 3주일 간 시찰하면서 본 것과 들은 것은 모두가 눈으로는 본 적이 없는 것을 날마다 보았고, 귀로는 들은 적이 없는 것을 날마다 들었는데, 적이 생각하기를, “경학을 하는 자가 보면 그것을 일러 경학이라 하는 것이 인자(仁者)와 지자(智者)가 보고서는 그것을 일러 인(仁)이라고하고 지(智)라고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여긴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본 바와 들은 바의 병농(兵農)이나 공가(工賈)의 많고도 사공(事功)은 모두가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고 내려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본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가 모두 뇌산(雷山)으로 이루어진 소과괘(小過卦)로서 보이는 것이다.

이에 대략 내가 기억하고 있는 바를 기록하여 같이 갔던 사람들의 안목을 함께 하는 바이다.


477) 노군(魯君)이……있었다 : 노군은 노나라 정공(定公)을 가리키며, 협곡은 노(魯) 나라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지명이다. 노나라에서 공자를 등용하여 정치가 잘 되자, 이웃나라인 제(齊)나라에서 그것을 억제하려고협곡에서 두 나라 임금이 회합하기를 요청하였는데, 이때 공자가 군사들을 시위하게 하고 적절하게 대처하여 노나라의 위세를 높이었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478) 賜 자공의 이름.

4월 16일. 바다를 건너갔다.
4월 17일. 엄도(嚴島)에 도착하여 시찰하였다.


광도(廣島)에서 엄도를 바라다보니, 큰 바다의 물이 흘러들어서 작은 항구가 되었는데, 양쪽 해안의 거리가 대략 2후(堠) 정도 되었다. 하얀 돌과 맑은 시냇물 및 붉은 난간과 금빛 기둥이 여러 겹의 산과 숲 사이에서 언뜻언뜻 아스라하게 보이었다. 한 줄기의 시냇물이 잔잔하게 흘렀으며, 아름다운 배가 끊임없이 오갔다.

이에 마치 은하수에 오작교(烏鵲橋)를 만들어 놓아 한 순간에 건너갈 수 있는 것과 같았는바, 바람을 타고 봉영(蓬瀛)479)에 닿았다가 되돌아오는 것과는 달랐는데, 몸은 이미 신선 세계에가 있었다.
도내(都內)에 이르러서 시찰해 보니, 정당(正堂)에는 대신사(大神社)480)의 패방(牌榜)481)을 봉안하였는데, 앞면에는 일본말로 ‘새가 사는 곳(鳥居)’482)라고 쓰여 있었다. 회랑(回廊)이 사방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신좌(神座)를 모시고 있었으며, 채번(綵旛)483)과 향화(香火)가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

이것은 신선 세계에 제새(祭賽)가 있는 것이다. 박물관(博物館)에는 황가(皇家)에서 역대로 쓰던 물건으로서 손때가 묻은 보기(寶器)와 서화(書畵)를 많이 모아 놓았다, 숲 안에는 무지개다리가 있었는데,천황(天皇)이 탄 어가(御駕)가 엄어하기를 기다리는 탓에 자물쇠를 채워두고 열지 않았으며, 경비하는 것이 특별히 엄하였다.

이것은 신선 세계에 조정(朝廷)이 있는 것이다.
천첩각(千疊閣)484)에 이르자, 벽에 걸려 있는 나무 국자나 숟가락 등이 아주 많아 수천 개나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쟁을 나갈 때 군사들이 모여 맹서를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신선 세계에 사율(師律)이 있는 것이다. 또 줄지어 있는 시가지는 삼거리가 되거나 오거리가 되어 곁으로 뻗어나가고 옆으로 뻗어나갔는데, 일상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들이 구름처럼 쌓여 있으며, 높다란 지붕의 가게들이 죽 늘어서서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은 신선 세계에 시정(市井)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신선 세계와는 털끝만치도 관계가 없는 것인데도 이곳에는 대략 구비되어 있다.

옛날에 신선술(神仙術)을 배우던 자들은 속세를 끊고 음식을 먹지 않으면서 고요히 앉아서 쓸 데 없는 학문을 하는 데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제새(祭賽)를 인하여 나라의 풍속을 보존하고, 어용(御用)을 인하여 나라의 복을 기원하고, 사율(師律)을 인하여 변방의 방비를 신칙하고, 시정(市井)을 인하여 재용을 통용시키고 있는바, 유용한 학문을 익히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이 없으면서도 신선 세계의


479) 봉영(蓬瀛) : 발해(渤海) 가운데 있다고 하는 신선이 사는 산인 봉래산(蓬萊山)과 영주산(瀛洲山)을 말한다.
480) 대신사(大神社) : 히로시마에 있는 이츠쿠시마 신사를 말한다. 이 신사는 593년에 창건되었으며, 그 이후타이라노키모리(平淸盛)에 의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481) 패방(牌榜) : 간판과 같은 작은 표판(標板)을 말한다.
482) 새가 사는 곳 : 오오토리이(大鳥居)를 말한다.
483) 채번(綵旛) : 채번(綵幡)이라고도 하는데, 오색 종이나 비단을 잘라서 만든 작은 깃발로, 일종의 장식물이다. 이는 흔히 봄을 맞이하는 데 쓰는 장식물인데, 여기서는 기복(祈福)을 하면서 올리는 신물(神物)을 의미하는 듯하다.
484) 천첩각(千疊閣)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짓다가 그가 죽자 미완으로 남아 있는 전각이다. 이곳에는아주 넓은 공간이 있어서 천첩각이라 불리며, 안에는 각자의 소원을 적어 놓은 나무판이 가득 차 있다.

경치가 그 속에 있음에 껄끄럽지 않는 것이다.
공자가 위(衛)나라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부유하구나, 이 백성이여. 이미 부유한데다가 또 가르쳤구나.” 하였다.

그러니 어찌 진(秦)나라 시황(始皇)이나 한(漢)나라 무제(武帝)처럼 약초(藥草)를 채집하여 불로장생(不老長生)하기를 구한 자들의 식견이 미칠 수 있는 바이겠는가. 여기에서 실제적인 학문이 외도(外道)를 익히면서 오래 살기를 구하는 무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4월 18일. 경도(京都)에 이르러서 시찰하였다.


천만궁(天滿宮)485)을 시찰하였다. 이 궁은 관원도진(菅原道眞)의 혼령을 모신 곳이다. 옛날 제호 천황(醍醐天皇)486) 때에 관원도진이 문장과 도덕으로 집정대신(執政大臣)이 되었는데, 명망이 한 시대에 중하였으나, 하루아침에 참소를 입고 비명횡사하였다. 그 뒤에 이 궁을 창건하였는데, 혹 북야신사(北野神社)라고 부르기도 한다. 돌비석을 가운데뜰에 세워놓았는데, ‘계왕계래(繼往啓來)’487)라는 네 글자를 전자(篆字)로 새겨 놓았는바, 실로 후세 사람들이 경모(景慕)하는 곳이다.

관원도진은 문학(文學)을 창설한데다가 겸하여 충절(忠節)까지 있어서 본방(本邦) 학문가들의 개산초조(開山初祖)로 떠받들어졌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반드시 양쪽 회랑(回廊)이 만난 곳에 특별히 크게 제사를 올리는 자리 하나를 마련해 놓는다.

그리고 문묘(文廟)의 옛 제도는 지키기를 엄하게 하여 신사(紳士)나 유생(儒生) 이외의 한산(閑散)한 사람은 감히 대문을 넘어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이에 드디어 여항에 사는 부녀자나 어린이들이 성현의 학문을 보기를 마치 계단을 통해서는 올라갈 수 없는 하늘과 같이 보아, 유학의 대도(大道)가 사람들과 더불어 멀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본방(本邦 일본을 가리킴)의 제도는 유(儒)외 신(神)을 아울러 높이는바, 이는 대개 선왕(先王)께서 신도(神道)를 가르침을 베풀고 여러 백성들로 하여금 경모하게 하는 아름다운 전례(典禮)인 것이다.
천만궁의 앞에는 우러러보면서 절을 하며 참배하는 자들이 날마다 시장판을 이루어 도인(道人)이나 속인(俗人) 및 승려나 젊은이나 여인네들이 어깨를 마주칠 정도로 많이 몰려들기를 지금까지 몇 천 년이 지나도록 하루 같이 한결같이 하는데, 모두들 말하기를, “우리 관원 선생(菅原先生)”이라고 한다.

이것은 온 천하의 성현을 떠받들면서 묘모(廟貌)를 높이려는 자들이 제도(制度)를 헤아려서 법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서화미술학교(書畵美術學校)를 시찰하였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는 나가서는 서예(書藝)나 미술(美術)의 대가가 된다. 학과(學課)의 제도는 실기시험(實技試驗)을 가장 중요시한다.

무릇 꽃이나새 및 일상생활용품을 그림에 있어서는 반드시 진짜 물품을 가져다가 앞에 놓고 사방에서 바라보면서


485) 천만궁(天滿宮) : 오오사까(大阪)에 있는 궁으로 스가와라미찌자네(管原道眞 : 헤이안시대의 대표적인 학자로, 학문의 신(神)으로 받들어짐)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486) 제호천황(醍醐天皇) : 우다 천황(宇多天皇)의 태자로, 이름은 돈인(敦仁)이다. 원년은 정사년(897, 신라 효공왕(孝恭王) 원년)이고, 아들에게 선위한 해는 경인년(930, 신라 경순왕4)로, 재위한 기간은 34년이고, 수는46세이다.

후궁 11인으로부터 아들 36명을 낳았다. 사위한 주작 천황(朱雀天皇)은 제호 천황의 열한 번째아들이라고도 하고, 혹 장자(長子)라고도 한다.
487) 계왕개래(繼往開來) : 전 시대 성현들의 사업을 뒤에서 잇고, 후세대의 후생들이 나아갈 길을 앞에서 틔워주는 것을 말한다.

본떠 그려 진짜의 참 모습을 그리기를 힘쓰는바, 대충 그림자만을 본떠 그리는 것이 비교할 수 있는바가 아니다.
전신(傳神)488)의 배움에 있어서는 반드시 살아있는 사람에게 옷을 차려 입고서 의자 위에 소상(塑像)과 같이 앉아 있으면서 시선이나 움직임을 모두 자연스럽게 하게 한 다음, 그림을 그리는 자로 하여금 그에 따라서 그리게 한다.

그리하여 고니를 바라보면서 화살을 쏘는 것과 같이 해 반드시 적중되게 하기를 힘쓴다.

그러니 비록 고장강(顧長康)489)으로 하여금 아도(阿堵)490)를 찍고 이마와 머리털을 그리면서 그 의장(意匠)491)을 운용하여 아주 흡사하게 그리게 하더라도 반드시 이 그림보다는 훨씬 뒤쳐질것이다.
이를 말미암아 추론해 나아가 나름대로 터득한 것이 있다. 대개 서화(書畵)는 문(文)의 여사(餘事)이고, 문은 또 도덕(道德)의 여사이다. 문을 배우고 도덕을 배우는 자가 아울러 이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써서 익힌다면, 비단 유학을 하는 자들이 속히 유학을 이루는 성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사문의구체적인 바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제국대학(帝國大學) 문과부(文科部)를 시찰하였다. 서책을 쌓아둔 곳을 보니 40여 만 질이나 되었으며, 3층으로 이루어진 집에 보관해 두었다. 가장 위층에는 동양의 고서적을 보관해 두었고, 중간층과 아래층에는 일본의 서적과 태서(泰西)492)의 양장(洋裝) 책자를 보관해 두었다. 고서적만 가지고 논하더라도, 위로는 육경(六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로부터 아래로는 역대의 서적에서 명청(明淸)의 작가에 이르기까지를 구비해 놓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청조(淸朝)의 근일의 조탑(詔搨)과 등초(謄草)도 거의 몇 백 권이나 되었다. 조선(朝鮮)의 경우에는 위로 신라(新羅)로부터 근세(近世)에 이르기까지 열조(列朝)의 장고(掌故)와 각가(各家)의 전집(全集)에 이르기까지를 역시 갖추어 놓지 않은 것이 없
었는데, 본방(本邦)493)의 사람들이 일찍이 보거나 듣지 못한 것들도 모두 구비되어 있었으며, 찌를 뽑아서 찾아볼 수 있게 하기를 오직 하고 싶은 대로 다할 수가 있게 해 놓았다. 그 이외에도 단경(丹經)과내전(內典)과 기문(奇文)과 벽서(僻書) 등 이 세상에서 자취가 없어진 책들도 모두 이 안에는 보관되어있었다.
각 교사(敎師)가 학생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풀줄기로 종을 치는데도494) 소리가 울려 답하는 것은 막힘이 없게 한다. 그러다가 혹 어려운 문제에 마주치게 되면 반드시 연구실로 들어가는데, 한편으로는 널리 상고해 보고, 한 편으로는 깊이 생각해 보아, 생도들에게 응답해 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488) 전신(傳神) : 정신을 전한다는 뜻으로, 문장이나 그림 등으로 인물의 진수(眞髓)를 묘사해 내는 것을 말한다.
489) 고장강(顧長康) : 진(晉) 나라의 이름난 화가인 고개지(顧愷之)로, 장강은 그의 자(字)이다. 고개지는 당시에재절(才絶), 화절(畵絶), 치절(癡絶)의 3절로 일컬어졌다. '晉書' 卷92.
490) 아도(阿堵) : 이것이라는 말인데, 눈이나 혹은 눈동자를 가리키며, 혹 돈을 가리키기도 한다. 진(晉) 나라고개지(顧愷之)가 인물화를 그려 놓고는 몇 년 동안이나 눈동자에 손을 대지 않았는데, 누가 그 이유를 묻자 “그림 속에 혼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바로 이것 속에 있다.(傳神寫照 正在阿堵中)”고 한 고사가 있다. '晉書' 文苑傳 顧愷之.
491) 의장(意匠) : 작문(作文)이나 회화(繪畫) 등에 있어서의 구상(構想)을 말한다.
492) 태서(泰西) : 극서(極西)의 뜻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를 지칭한다.
493) 우리나라를 가리킴.
494) 풀줄기로 종을 치는데도 : 재주와 지식이 얕은 사람이 고명한 사람을 향해 질문하는 것을 말한다.

학과 가운데 문과(文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남화경(南華經)'495)과 '한비자(韓非子)'인데, 2, 3학년생은 모두 능히 이것들을 잘 알아서 말을 한다. 그러니 어찌 다른 나라가 미칠 바이겠는가.

이로 인해서 논해 보면, 병농(兵農)과 공가(工價) 등 일체의 신학문 및 천구(天球)와 지운(地運) 및 이화(理化)와 동식(動植), 기관(機關)과 제조(製造) 등의 학술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보다 한 걸음 앞서가며, 한 머리는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런즉 오래 묵은 진부한 학문을 가지고 스스로 평생토록 힘을 쏟아야 할것으로 여겨 대를 이어 서로 전수하는 자들이 바라볼 경우, 마치 하백(河伯)이 바다를 바라보는 것496)과 같으니, 어찌 부끄럽고 민망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 조선인의 공통된 병통은 옛것에만 푹 빠져서 헤쳐 나올 줄 몰라 그 본래의 면목(面目)을 잃어버리는 데 있다.

이에 '시경(詩經)'을 읽어 초목(草木)과 조수(鳥獸)의 이름을 많이 아는 것조차 이르러서도 역시 대부분 끝까지 궁구하지 못한다.

이런점은 우리 조선의 유학가들이 더욱더 맹렬하게 반성하면서 다시금 공부해야 마땅한 것이다.
4월 21일. 도산(桃山)의 어릉(御陵)을 참배하였다. 나량(奈良)에 이르러서 시찰하였다.

도산의 어릉을 보니, 목석(木石)과 화훼(花卉)와 당무(堂廡)와 담장을 건축하고 설치하는 공사가 아주 크고도 커서 오랜 시일이 걸쳐서야 완성할 수 있을 듯하였다. 능을 지키고 있는 관리에게 물어보니,“부역하러 온 사람들은 모두 충성을 바쳐서 자원하는 사람들이라서 공임을 받지 않는다. 서민(庶民)으로서 와서 일하는 자도 있는데, 그 기상이 의연하다.

그리고 장사를 마친 뒤에는 노인은 부축하고 어린이는 손을 잡고 먼 길에 짐을 짊어지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오는데,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와서는 멀리 울타리 밖에서 바라보면서 절을 하고 물러나는 자들이 매일처럼 몇 만 명이나 된다.” 하였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사람들이 적게 올 경우에도 몇 천 명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아, 산골짜기의 길이 거의시장판처럼 되었다.
무릇 이른바 성인의 학문이란 것은, 마땅히 어버이에게 호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을 강령(綱領)에 있어서 첫 번째로 삼고 있다. 그런데 나라에 충성하는 자는 반드시 집에서 효도하므로, 효자의 집안에서 충신을 구하라는 것이 옛날의 훈계이다.

공자(孔子)의 문인은 '효경(孝經)'을 지었고, 한(漢)나라의 마계장(馬季長)은 '충경(忠經)'497)을 지었는데, 이를 읽으면서 실천하는 자는 대개 유술(儒術)을 익히거나 경학(經學)을 익히는 선비들이고, 어리석은 일반 백성들은 이를 익히지 않는다.

지금 이 공장이나 노동자들과 시골에 사는 우매한 무리들 가운데에는 의당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
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떳떳한 천성은 하늘로 뻗혀나가고 땅에 세워져서 사람들이


495) 남화경(南華經) : '장자(莊子)'를 말한다.
496) 하백(河伯)이……것 : 자기 자신의 재주나 인품이 다른 사람만 못한 것을 탄식하는 것이다.

옛날에 장마철이 되어 모든 물이 황하로 흘러들어 오자, 황하의 신인 하백(河伯)이 천하의 아름다움이 모두 자기에게 갖
추어져 있다고 하면서 흐뭇해하였는데, 강물을 따라 동쪽으로 가 바다에 도착하여 바다를 바라보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기만 하였다. 이에 바다의 신인 해약(海若)을 우러러보면서 자신의 소견이 작은것을 탄식하자, 해약이 말하기를,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이야기하여도 알지 못하는 것은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여름 벌레에게 겨울에 대해 이야기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시간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莊子' 秋水.


497) 충경(忠經) : 한(漢)나라 마융(馬融)이 지은 책으로, '효경'을 본떠서 지은 것이다. 마융은 자가 계장(季長)이다.

모두 코끼리가 땅을 갈고 새가 풀을 김을 매는 정성498)을 본받고 있다.
이것으로 논해 본다면, 경술(經術)이란 것은 오직 충효(忠孝)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고, 백성들이 날마다 쓰는 것으로, 각자 갖추고 있는 충효의 성품은 배우지 않고서도 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바로 사람마다 저절로 경학(經學)을 한다고 해도 괜찮은 것이다.

이런 점은 의당 그 이치를 자세히 궁구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조정에 있어서는 사람들을 진작시키는 교화가 있을 것이고, 향당(鄕黨)에 있어서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학술이 있어서 능히 여기에 모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에 충신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학문하기를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는 자들이 의당 속히 강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량(奈良)은 최초에 도읍을 세웠던 곳이다. 소나무와 잣나무와 삼나무와 회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는데, 모두 천년 이상 묵은 나무들이다. 혹 아주 크면서 그 속이 텅 비어 있는 나무도 있었는데,길을 가는 사람들이 혹 밤에 그 속에서 머물렀다가 가기도 한다. 노루와 사슴이 무리를 이루고 있으면서 사람에게 다가와 먹을 것을 달라고 하여 영유(靈囿)에서 엎드려 있는 모습499)이 있었다.
춘일신사(春日神社)500)에는 이상한 나무 하나가 있는데, 등나무와 동백나무와 남천나무와 육영나무와 앵두나무와 단풍나무가 한 뿌리에 몸을 의탁하고 있어 마치 한 나무인 것처럼 보이었다.

옛날에 서구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이 나무를 보고는 어루만지면서 찬탄하기를, “오주(五洲)의 인종들로 하여금 모두 이 나무와 같게 한다면 대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고 한다.

이는 비유하자면, 행단(杏壇)501)의 문정(門庭)에 사과(四科)의 백행(百行)이 각각 그 체(體)를 갖추고 있어서 다함께
성인께서 부식해 주는 교화를 입어 한쪽 기운만 편중됨이 없는 것과 같으니, 아주 귀한 것이다.
동대사(東大寺)502)의 대불(大佛)을 보았다. 길이는 5장 3척 5촌으로, 조선의 금산사(金山寺)에 있는 입불(立佛)이나 송광사(松廣寺)에 있는 좌불(坐佛)보다도 훨씬 더 크다. 지난 신해년(1911)에 관광단이 이곳을 거쳐 갔을 때 정부에서는 특별히 탕은(帑銀) 수만 원(圓)을 하사하여 그 누각을 개축해 대불(大佛)을 덮었는데, 이 역시 수천 년 된 옛 유적이다.


498) 코끼리가……정성 : 민심이 순박하여 요순시대의 유풍(遺風)이 있는 것을 뜻한다. 전설에 의하면 순(舜)임금을 창오(蒼梧)에 장사지낼 적에 코끼리가 땅을 갈았고, 우(禹) 임금을 회계(會稽)에 장사지낼 적에 새들이 와서 김을 매었다고 한다.


499) 영유(靈囿)에서……모습 : 영유는 황제가 휴식하거나 사냥을 하는 원유(園囿)를 말한다.'시경' 「영대(靈臺)」
에 이르기를, “왕이 영유에 계시매, 사슴들이 그 자리에 엎드려 있도다. 사슴들은 살찌고 윤택하거늘, 백조는 깨끗하고 희도다.(王在靈囿 麀鹿攸伏 麀鹿濯濯 白鳥翯翯)” 하였다.


500) 춘일신사(春日神社) : 나라에 있는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를 말한다. 768년에 창건된 신사이다.

일본 헤이안(平安)시대 가장 유력한 집안이었던 후지와라(藤原) 가문의 씨족신을 모신 것에서 유래했다.

후지와라 집안의 융성과 함께 확대되어 헤이안시대 전기에 현재와 같은 규모가 되었다. 화재로 여러 차례 소실되고 복
구되는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경내에는 사슴이 많으며, 수백 개의 석등이 있는데, 이석등들은 모두 신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새겨 기부한 것이다.


501) 행단(杏壇) :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공자의 묘(廟) 앞에 있는 단으로, 공자가 이 단 위에서 제자들에게 강론하였다.


502) 동대사(東大寺) : 나라에 있는 절로, 높이 16.2m의 청동불상인 대불로 유명하다. 대불이 안치된 금당은 세계 최대의 목조물로 8세기 중엽에 세워진 본래의 건물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1709년에 재건되었다. 금당의 북서쪽에는 쇼소인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중요한 미술, 공예품, 각종 문서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많은 문화재들이 소장되어 있다.

불교는 역시 동양에 있어서의 하나의 큰 종교로, 유교나 도교와 더불어 정립(鼎立)하고 있다.

이에 역대의 제왕 가운데 양(梁)나라 무제(武帝)나 당(唐)나라 헌종(憲宗)과 같이 높여서 떠받든 임금도 있고,혹 당나라 무종(武宗)이나 주(周)나라 세종(世宗)과 같이 배척하여 금지한 임금도 있다.

그에 따라 그 가르침 역시 흥성하고 쇠함이 일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왕신건(王新建)503)의 논(論)에 이르기를, “부
처는 이적(夷狄)들 가운데 성인(聖人)이다.” 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풍속을 인하여 가르침을 베풀어 악을 제거하고 선을 따르는 큰 요체가 피차간에 서로 다름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송(宋)나라 유학자가 산사(山寺)에 가서 승도들이 예양(禮讓)에 법도가 있는 것을 보고는 위연히 탄식하기를, “삼대(三代)의 예의(禮儀)가 모두 이곳에 있다.” 하였다. 더구나 부처는 수천 년이나 된 종교의 교주로서 누대 동안 공양을 받아 백성들에게 스며들어 풍습이 되다시피 한 것을 어찌 옛 자취가 없어지도록 하여 수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역사가 장구한 나라에서는 옛 자취와 제사하는 예법을 가장 중하게 여기는바, 이 또한 강학하는 사람들이 불가불 법도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4월 22일. 산전(山田)에 이르러서 시찰하였다.


천조대신(天照大神)504)은 제국민족(帝國民族)의 시조(始祖)이다. 옛말에 전하기를, “천조대신이 일찍이 일본 사람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산전(山田)에 살 것이다.’ 하였으므로, 그때부터 사당을 세워서 제사지낸다고 한다.” 하였다.

이것을 내궁(內宮)이라고 부른다. 또 별도로 그 근처에다가 사직(社稷)의 신을 모시고 있는데, 이것을 외궁(外宮)이라고 부른다. 이 두 궁에는 모두 궁을 지키는 관리가 있다.

정전(正殿)은 대개 띠풀로 지붕을 해 이었으며, 기둥은 모두 옛날의 제도에 따라서 만들었는데, 예를 올리며 향을 피우는 사람들은 모두 정문 밖에서 참배한다. 제사를 올리는 당(堂)에 전(奠)을 진설함에 이르러서는, 악사(樂師)와 어린 무녀(舞女)가 곡조에 맞추어서 합쳐서 하는데, 옛날에 비파의 구멍을 성글게 뚫고, 한 사람이 창하면 세 사람만이 화답하는 뜻505)이 있는 것이다. 또한 우러러보면서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하던 자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물러나 나간다.


4월 23일. 명고옥(名古屋)에 이르러서 시찰하였다.
4월 24일. 동경(東京)에 도착하여 10일간 머물렀다.


정국신사(靖國神社)506)를 관람하였다. 정국신사는 아홉 계단으로 된 축대 위에 있었는데, 건국한 이


503) 왕신건(王新建) : 명(明)나라의 유학자로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진 왕수인(王守仁)을 가리킨다. 왕수인은 절강(浙江) 사람으로, 호가 양명(陽明)이며,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을 주장하여 주자학파(朱子學派)와 서로 다투었는데, 세상에서는 그의 학파를 요강학파(姚江學派)라 불렀다.


504) 천조대신(天照大神) :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는 일본 신화에 나오는 태양의 신으로, 일본 고유 종교인 신도 최고의 신이다. 아마테라스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늘에서 빛나다.’라는 뜻이다.

천황과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아마테라스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한다.


505) 옛날에……뜻 : 유창한 소리가 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이르기를, “청묘에서 연주하는 비파는 붉은 줄을 마전하고, 비파의 구멍을 성글게 뚫었으며, 한 사람이 창하면 세 사람만이 화답하여 남은 음이 있다.(淸廟之瑟 朱絃而疏越 壹倡而三歎 有遺音者矣)” 하였다.


506) 정국신사(靖國神社) : 동경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로, 천황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신으로 모

래로 공이 있는 장사(將士)와 잘 삼가서 충절을 다한 자의 혼령을 향사하는 곳이다. 또 초혼사(招魂社)라고도 한다.

사면 벽에는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모두가 그 당시에 공을 세우고 충절을 지킨 사람들의 사적을 그려 놓았으며, 그들이 평생에 착용하던 갑옷이나 창칼 및 손때나 입 때가 묻은 자질구레한 도구들까지 갖추어 놓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바라보는 자들은 마치 훈신(勳臣)의 당(堂)에 오르고 충신(忠臣)의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 부녀자나 어린아이들로서 무지한 자들까지도 감탄을 하면서 고무되어, 모두들 자신들이 그들과 같은 행실을 하면서 죽음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와서 배알하자는 자들이 날마다 새로운 느낌을 가진다.
가장 말단의 자리에는 남녀 두 사람의 초상 및 일체의 집안에서 늘 쓰는 물품을 봉안해 두었는데,이는 바로 근일에 아래에서 올린 것을 따라주어서 설치한 것으로, 바로 목공(木公) 부부를 모신 것이다.

옛 전례(典禮)를 보면, 나라를 바로잡는 데 공을 세우면 제사지내고, 나라의 일에 목숨을 바치면 제사지내며, 어린 아이가 나라를 위하여 죽자 공자가 특별히 명하여 상례(殤禮)로 장사지내지 말라고 명하였다.507)

이것은 비단 높이 보답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특히 권장하는 의리를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신사(神社)와 같이 초상을 설치해 놓은 것이 굉장하고 커서 분명하게 눈앞에 있는 듯한 경우는없었다.
삼월오복점(三越吳服店)을 관람하였다. 삼월오복점은 동경(東京) 내에서 가장 큰 상점으로, 세 개의 층에 물품을 진열해 놓았는데, 없는 물품이 없다 오복(吳服)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단지 그렇게 이름을지은 것일 뿐이다. 원점(原店)의 곁 가까운 곳에 또 새로 3층 집을 짓고 있는데, 크기가 원점에 비해 두 배는 되며,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원점의 현재 임원과 직원은 거의 몇 천 명이나 되며, 물품을 파는자가 매일처럼 물품을 사는 자 수만 명을 상대하여 물품을 판다.

임원 가운데에는 청인(淸人)도 있고 양녀(洋女)도 있어 함께 일을 하는데, 이들은 모두 많은 월급을 받는다.

이 상점은 거의 동양에서 가장크다.
'맹자'에 이르기를, “관문과 시장에서 기찰하기만 하고 세금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천하의 장사치가 모두 기뻐하면서 그 시장에서 물품을 매매하고자 한다.” 하였다.

또 중고(中古) 시대에는 백성들의 근본이 되는 농업을 중시하여, 장사를 할 경우에는 세금을 중하게 매겨 곤욕스럽게 하였다.

이 두 가지의 일은 서로 상반된다.

그러나 이는 모두 옛 가르침이다. 대개 정령(政令)과 법제(法制)는 옛날과 지금의 마땅함이 다르다. 나라에 장사꾼이 없으면 부유하게 할 수가 없고, 교역(交易)을 할 수가 없다.

요컨대 장사치들로 하여금 모두가 와서 물품을 교역하게 하고자 하면, 역시 세금을 가볍게 매기어서 권장하는 방도가 있어야 한다.
술과 담배 두 가지 물품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그 값이 배는 되는데, 이는 청나라가 아편(阿片)으로인해 화를 불러온 것에 경계되어서 법을 세운 것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옛날을 잘 법 받으면서도 옛날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일본에 있는 신사 가운데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507) 어린 아이가……명하였다 : 어린 아이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동자 왕기(汪踦)를 가리킨다.

왕기가 미성년자로서 국난(國難)에 나서서 싸우다가 죽은 뒤에 사람들이 공자에게 “그에게 상례(殤禮)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가 “아무리 미성년자라도 국난을 위하여 죽었으니, 상례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답하였다. 상례(殤禮)는 미성년자의 죽음에 적용하는 상례(喪禮)이다. '禮記' 檀弓下.

의 법에만 빠져들지 않으며, 오늘날에 잘 쓰면서도 오늘날의 크고도 먼 규모에 파란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조선유학생감독부(朝鮮留學生監督部)를 시찰하였다. 감독부에는 감독(監督) 2인과 사감(舍監) 2인이 있어 유학생들을 감독하여 공부를 게을리 하지 못하게 한다. 현재 내지(內地 일본을 가리킴)에 와 있는 선인(鮮人)은 대략 700명 정도 되는데, 그 가운데 동경에 있는 자가 대략 500명 정도 된다.

그리고 감독부 내에 있는 기숙사에는 60여 인을 수용하여 그곳에서 거처하게 하고 있는데, 다른 하숙집에 비하여 그 비용이 절반 밖에 안 들어간다. 얼핏 들으니, 이곳 이외에 다른 여관 같은 곳에 기숙하고 있는 자들 가운데에는 혹 학자금을 낭비한 자가 있기도 하고, 혹 하숙비에 곤란을 겪는 자들도 있다고 한다.

그런즉 부형들이 자제들을 일본에 유학 보내고자 하면, 신중하게 생각하여서 편지를 써 보내어 해당 감독에게 의뢰하는 것이 좋다.


여러 공원(公園)을 시찰하였다. 이번 시찰단에서 본 바는 지공원(芝公園), 일비곡공원(日比谷公園),천초공원(淺草公園), 상야공원(上野公園) 네 곳이었다. 또 봉래원(蓬萊園)이라는 공원이 있는데, 이는 송포(松圃) 백작(伯爵)의 별장(別莊)이다.
지공원은 비스듬히 서서 내려다보면 멀리까지 한눈에 보이고 평평하게 끌어당기는바, 전망에 있어서는 첫째가는 곳이다. 일비곡공원은 꽃과 돌이 모두 아름답고 맑은 물이 여울져 흐르는 바, 그윽한 경치에 있어서는 첫째가는 곳이다. 천초공원은 불당(佛堂)과 신사(神社) 및 연희(演戱)를 베푸는 극장(劇場)이 있는바, 오락을 즐기기에는 첫째가는 곳이다.

상야공원은 폭과 너비가 넓고도 크다.

이곳은 또 다음 대정박람회(大正博覽會)를 설립하기로 정해진 곳이니, 그 넓고도 큰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봉래원은 연못을 파서 호수를 만들었고 언덕을 인해서 산을 만들었는데, 초목의 향기가 정대(亭臺)에서 있으면 옷 속으로 스며든다. 꼭대기의 절벽 가에는 하나의 작은 누각이 물을 내려다보면서 만들어져 있는데, 그 위에 앉아 있으면 양쪽 겨드랑이가 서늘해지면서 참으로 바람을 타고 봉래(蓬萊)에 갈 수있을 것만 같다.

그러므로 공원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다.
옛날에 제(齊)나라의 원유(園囿)는 둘레가 40리나 되었고, 한(漢)나라의 상림원(上林園)508)은 백성들의 시장보다 더 컸는데, 모두 위에서 사사로이 소유하고 있어서 백성들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평천장(平泉莊)509)과 녹야당(綠野堂)510)과 벽강원(辟彊園)511)과 옥산당(玉山堂)512)은 모두 부귀한 자들의 사유(私有)라서 외부인이 들어가 노닐고자 하면 정원을 지키는 자에게 많은 돈을 뇌물로 주어야만 비로소 하루나 하룻저녁을 노닐 수가 있었으며, 화초나 나무를 꺾을 경우에는 벌칙이 있었다. 그러므로 송나라


508) 상림원(上林園) : 한 나라 무제(武帝)가 만든 궁궐 안의 정원이다.


509) 평천장(平泉莊) : 당(唐) 나라 때의 명재상인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이름이다. 이덕유는 평천장을 짓고 천하의 기화 이초(奇花異草)와 진송 괴석(珍松怪石)을 거기에 모으고서 스스로 즐겼다.


510) 녹야당(綠野堂) : 당 나라 때 중서령(中書令)을 지낸 배도(裵度)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지내던 당의 이름이다. 배도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낙양(洛陽) 남쪽의 오교(午橋)에 꽃나무 만 그루를 심고서 그중앙에 여름에 더위를 식힐 누대와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집을 짓고 녹야당(綠野堂)이라 이름을 붙이고는 백거이(白居易)·유우석(劉禹錫) 등 문인들과 모여 시주(詩酒)로 소일하였다. '新唐書' 卷173 裵度傳.


511) 벽강원(辟彊園) :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의 경내에 있는 정원으로, 진(晉)나라 때 고벽강(顧辟彊)이 만든정원이다.


512) 옥산당(玉山堂) : 강소성 곤산현(崑山縣)의 서쪽 시냇가에 있는 당으로, 원(元)나라의 고중영(顧仲瑛)이 세웠다.

의 범희문(范希文)이 말하기를, “사대부의 원림(園林)이 서로 잇달아 있으니, 누가 유독 나의 놀이를 가로막는가?” 하였다. 이는 대개 남과 나를 분별하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낙양(洛陽)에는 이름난 공원이 많이 있는데, 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원림의 성쇠를 가지고 천하의 성쇠를 점칠 수가 있다.”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기영회(耆英會)513)의 제공(諸公)들도 각자 사사로이 가지고 있는 원림이 있어, 속수(涑水)와 같이 청렴하고 검소한 사람도 오히려 5묘나 되는 독락원(獨樂園)을 가지고 있었는바,514) 꽃과 대나무 및 아름다운 들판을 사유물로 삼은 것은 대개 옛날부터 그랬던 것이다.
공원의 제도가 한번 나오자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나는 나의 공원을 사랑한다.” 하였다.

오늘날이 옛날보다 나은 점이 있는 것은 이러한 것이 그 한 가지 단서인 것이다.

바라건대, 우리 공자와 맹자의 도를 배우는 자들은 정주(程朱)와 육왕(陸王)515)으로 서로 간에 문호(門戶)를 나누지 말고, 단지 공(公)이라는 한 글자를 가지고 그 장점을 취하고 그 의(義)를 합하기를 바란다.

그럴 경우 천하에 공적(公的)인 것이 될 것이다.
제국대학교(帝國大學校)를 시찰하였다. 제국대학교는 서경(西京)에 있는 것과 대략 같았다.

그러나 각 단과 대학은 각자의 구역이 나누어져 있어서 각각의 방위에 따라 대치하고 있는 탓에 한 학교의 사람이라도 졸업할 때까지 얼굴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 한문학(漢文學) 한 과만 보더라도 서적(書籍)이 많기가 동아(東亞) 전체에서 으뜸으로, 다 기술할 수가 없다.
그 다음에는 맹아학교(盲啞學校)에 가서 시찰하였다. 맹인들은 다른 곳에 있어서 이번에 본 것은 바로 벙어리들이다.

벙어리들로서 졸업을 한 학생들이 다시 그대로 이 학교의 교사(敎師)가 되는데, 눈으로써 귀를 대신하고, 손으로써 입을 대신하여, 턱으로 가리키면서 가르치고 고개를 끄덕여서 응답하였다.

그런데 이해하는 것이 아주 빠르고 민첩하여 두 귀가 달려 있으면서 세 번째 귀를 속에 가지고 있는 자516)보다도 더 민첩하였다.

서구인의 말에 이르기를, “나라 안에 농아가 있는 것은 이에 학규(學規)가 세워지지 않은 것이다.

학규가 세워질 경우에는 귀머거리는 귀머거리가 안 되고, 벙어리는 벙어리가 안 된다.” 하였는데, 이것을 보면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513) 기영회(耆英會) : 송나라 때 문언박(文彦博), 부필(富弼), 사마광(司馬光) 등 낙양의 나이가 많은 자 13명이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서로 즐긴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말한다.

'송사' 문언박전(文彦博傳)에 이르기를, “문언박이 부필, 사마광 등 등 13인과 더불어서 백거이(白居易)의 구로회(九老會) 고사(故事)를 따라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으며 즐겼는데, 나이의 순서에 따라 자리를 정하고 관직의 높고 낮음은 따지 않았다. 이를 낙양기영회라 하였는데, 호사자들이 모두들 부러워하였다.” 하였다.


514) 속수(涑水)와……있었는바 : 속수는 송(宋)나라의 명상 사마광(司馬光)을 가리키며, 독락원은 그의 장원이다.

사마광이 일찍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강력히 반대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관직에서 물러나 낙양(洛陽)에 독락원을 짓고 15년 동안 한가로이 지냈다.


515) 정주(程朱)와 육왕(陸王) : 정주는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말하고, 육왕은 육구연(陸九淵)과 왕양명(王陽
明)을 말한다. 정자의 학문이 주자로 이어졌는데, 주자는 ‘성즉이(性卽理)’와 천리인욕설(天理人欲說)을 주장하였는데 반해, 육구연은 ‘심즉이(心卽理)’의 주관적유심론(主觀的唯心論)를 주창하여 주자의 학설에 대항하였는데, 이때부터 유학은 주(朱)와 육(陸)의 두 학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뒤에 육학은 왕양명(王陽明)에게 계승되어 양명학(陽明學)으로 발전되었다.


516) 두 귀가……자 : 중국의 궤변가(詭辯家)인 공손용(公孫龍)의 설에 ‘두 귀는 실제로 소리를 듣는 귀를 말하며,이 두 귀로 하여금 잘 듣게 하는 데에는 이 두 귀 밖에 반드시 다른 귀 하나를 더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이 세 번째 귀는 듣는 신(神)이다. 이를 합치면 모두 귀가 세 개가 된다.’ 하였다.

옛 제도에 홀아비나 과부나 고아 및 폐질(廢疾)이 있는 자는 먹여주는 법이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어찌 단지 먹여주기만 하는 것이겠는가. 이것은 사람을 길러주는 것이니, 아주 아름다운 일이다.

어찌하면 우리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유학(儒學)의 대도(大道)를 펼쳐서 온 마음이 귀머거리가 되고 성품이 벙어리가 된 온 천하의 사람들을 열어줄 수 있겠는가.


대정박람회(大正博覽會)를 시찰하였다.


대정박람회를 시찰하는 것이 이번 시찰의 본래 목적이다. 사민(四民)의 온갖 기물을 갖추어놓은 않은 바가 없어서 그 박람회에 들어가 보는 자는 단지 표주박을 가지고 황하를 퍼 마시는 자가 각자 자기의 양에 따라 배를 채우는 것과 같은바, 참으로 한 가지 본것만 가지고 치우치게 논해서는 안 된다.
박람회장 안에 새로 하나의 집을 지었는데, 대략 조선의 궁실(宮室)과 전폐(殿陛)의 제도를 모방하여 만들었으며, 목석(木石)과 단청(丹靑)은 모두 본지(本地)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었다.

당(堂)의 중앙에는 인형(人形)을 만들어 세워놓았는데, 신랑(新郞)은 (紗帽)와 화(靴)와 장복(章服)과 서대(犀帶) 차림을 하고 초례(醮禮)를 하러 가는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고, 신부(新婦)는 화관(花冠)과 몽두(蒙頭)와 원삼(圓衫)과 대대(大帶) 차림을 하고 신랑을 맞이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다.

또 상인(喪人)은 참최(斬衰)의 효복(孝服)에 상장(喪杖)을 짚고 서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는 대개 우리나라의 국속(國俗)을 본떠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다.

그 맞은 편 행각(行閣)에는 조선요리점(朝鮮料理店)과 삼다점(蔘茶店)을 세워놓았는데, 외방인들도 특별히 와서 사 먹는 자들이 있다.
다음으로 대만관(臺灣館)에 이르렀는데, 역시 대만 본지(本地)의 물품을 진열해 놓았다.

다음으로 연예장(演藝場)에 이르러서 남양(南洋) 사람들이 칼춤과 봉재주와 가무하는 것을 관람하였는데, 앵무새가
지저귀기는 것과 같아서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무슨 뜻을 말하는지는 상상해 알 수 있었다.
등 뒤에 긴 꼬리가 달린 인종(人種)이 있었는데, 이것은 지난해에 내지인이 남양(南洋)을 돌아다니다가 이를 얻어 박람회의 물품으로 출품하여 팔고자 해서 같이 오려고 하였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하지않으려고 해서 사진만 찍어 가지고 와서 특별히 한 관에 전시한 것이다.

한쪽에는 또 식인종(食人種) 세 사람이 있었는데, 모습은 갈색 피부를 가진 인도인(印度人)과 같으면서 체격은 조금 작았다.

들이 사는 곳에 있을 적에는 약육강식을 하면서 사람을 양식으로 삼아 서로 잡아먹기까지 하면서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몰랐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보건대, 우리들의 행실은 이미 안다는 것으로써 스스로 만족하지 말고, 더욱더 앎을 구하여 기어이 사람의 본성을 다하는 데 이르게 해야만 한다. 사람으로서의 어리석음과 흉악함이 서로 잡아먹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어치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본성이 없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강아지에게도 역시 불성(佛性)이 있는 법인데, 어찌 본성이 없다고 해서야 되겠는가.

이는 본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배우지 못한 것이다.
대개 또 옛날에 영웅이라고 칭해지면서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했던 자나 수령으로서 사람들을 박해하기를 좋아했던 자들을 가지고 논해 보면, 이 식인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난날에 성인께서 규례를 세우지 않고 학교를 설립하지 않았다면, 온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이와 같게 되었을 것이다.

천지는 장구한바, 이런 식인종들로 하여금 모두 우리들과 같은 인종으로 변하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성인의 가르침이 온 천하 만세에 크게 행해졌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성당(聖堂)을 관람하였다.


성당은 공부자(孔夫子)를 모신 사당이다. 문에는 ‘앙고(仰高)’라는 편액을 달았고, 문미(門楣)에는 ‘행단(杏亶)’이라고 편액을 달았으며, 전(殿)에는 ‘대성(大成)’이라고 편액을 달았다.

중앙에는 문선왕(文宣王)의 우상(偶像)을 봉안하고서 그 앞에 휘장을 드리웠으며, 동서의 양쪽 감실(龕室) 중 동쪽에는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의 우상을 봉안하였고, 서쪽에는 자사(子思)와 맹자(孟子)의우상을 봉안하였는데, 모두 옛날 왕자(王者)의 복식을 하고 있으며 손을 무릎에 얹어놓고 있는 모습의 우상이다.

옛날에 덕천씨(德川氏)가 막 성대해지기 시작하였을 때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특별히 이 당(堂)을 지었는바, 지금까지 2백여 년이 되었다고 한다.
앞쪽의 청(廳)과 양쪽을 행랑(行廊)에는 통속교육박물관(通俗敎育博物館)을 설치하여 교육에 관계되는 모든 물품을 죽 진열해 놓았는데, 학자들과 그 물품을 사려는 자들로 하여금 모두 살 수가 있게 해놓았다.

행랑의 바깥쪽에는 제전회사무소(祭典會事務所)가 있었다. 경외(京外)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발기(發起)해서 선성(先聖)에게 올리는 석전제(釋奠祭)의 전례를 만들어 놓고는 때에 맞춰서 향사(享祀)한다.

회에 소속된 사무원들이 번갈아가면서 숙직을 한다. 명치(明治) 40년부터 존귀한 작위를 가진 사람들과 문학박사(文學博士)들이 특별히 규약을 만들었는데, 그 규약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우리나라는 공자의 교화를 감사하게 여기면서 제전(祭典)을 거행한다.
제2조. 매년 4월 네 번째 일요일에 본향(本鄕)의 탕도성당(湯島聖堂)에서 제전을 거행하며, 제사를 마친 뒤에는 강연회를 개최한다.
제3조. 본회의 목적에 찬성하는 자는 위원회의 승인을 거친 다음에 비로소 회원이 될 수 있다.
제4조. 회원은 본회의 비용을 부담할 의무를 진다.
제5조. 평의원(評議員) 약간 명, 위원(委員) 20명, 지방위원(地方委員) 약간 명을 둔다.
제6조. 각 임원의 임기는 기한이 없으며, 결원이 생길 경우에는 위원회에서 결원을 보충할 인원을선정한다.
제7조. 위원은 본회를 조직하고, 사무를 처리한다. 단 위원은 호선(互選)으로 하여 한 사람이 위원장을 맡는다.
제8조. 평의원은 위원회에 중요한 사항에 대해 평의(評議)해 줄 것을 청구할 수 있다.
제9조. 본회의 비용은 회원들의 회비 및 유지(有志)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이 밖에도 별도로 세칙(細則) 15조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제4조에는 ‘매년 3월 15일에 회비 1원(圓)을 낸다.’고 하였고, 제7조에는 ‘제전(祭典)의 의식은 신관(神官)이 관장한다.’고 하였으며, 제8조에는 ‘대표자 1인이 제문(祭文)을 읽는다.’고 하였고, 제12조에는 ‘회원 이외의 사람이 참배하는 것은 식을 마친 뒤에 모두 허락한다.’ 하였고, 제15조에는 ‘기부금은 돈 이외에 물품으로 기부하는 것도 모두 받아들인다.’하였다. 이상이 그 대략이다.
동양(東洋)에서 선성(先聖)을 받들 경우에는 관(官)에서 제사의 비용을 대고 특별히 예관(禮官)을 차임하여 유생(儒生)으로서 설전(設奠)하는 자를 거느리고서 올리는 것이 예전의 방식이다. 지금 이처럼 사사로이 제전회(祭典會)를 설립한 것은 더욱더 의의가 있는 것이다. 대개 선성께서는 포의(布衣)로서 백대의 스승이 되신 분이다.

백 대 이후에 공론이 아래에 있었다. 이에 유림(儒林)이 주창하여 각자 뜻과 정성을 가지고 빈번(蘋蘩)과 서직(黍稷)의 제수를 바치었다. 그러면서 아래로 일반백성이나 부녀자들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뜻과 정성을 모아서 호응하여, 그 법도를 외우고 우러러 흠앙하는 충정을 폈으며, 위에서 그것을 도와 이루게 하였다. 그러니 참으로 제전(祭典)이 장구하게 이어질 수 있게 하는 좋은 계책이 여기에서 그 방도를 얻었다 하겠다.


30일, 상야역(上野驛)을 출발하여 일광산(日光山)에 이르러 시찰(視察)하였다.
일광산은 덕척막부(德川幕府)가 대대로 장사(葬事)지낸 곳이다. 윤왕사(輪王寺)와 동조궁(東照宮), 이황산신사(二荒山神社), 중선사호(中禪寺湖)가 이 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양명문(陽明門) 바깥에 종(鍾)이 하나 걸려 있는데, 바로 조선(朝鮮)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조선의 선조(宣祖) 때 서로 간에 우호를 맺어 사신들이 줄을 이어 오갔는데, 법종(法鍾) 하나를 주조하여 보내면서 종의 표면에 명문(銘文)을 새기기를,
“일광도량(日光道場)은 동조대권현(東照大權現)을 위하여 설립한 것이다. 대권현은 헤아릴 수 없이 큰 공덕이 있으니, 한없이 숭봉(崇奉)하는 것이 마땅하다. 도량의 웅대함은 이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바이며, 뜻을 잘 이어받은 효성은 더욱더 선대의 공렬을 빛나게 하였다. 이에 우리 임금께서 들으시고는 마음이 기뻐서 법종(法鍾)을 주조하여 영산(靈山)의 삼보(三寶) 가운데 하나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는 이어 신(臣) 이식(李植)에게 명하여 서문을 짓고서 명(銘)을 짓게 하였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 공렬 크게 드러내어서 丕顯英烈
처음으로 신령스런 진성 높였네 肇闡靈眞
신선 사는 현도517) 이에 넓히었으며 玄都式廓
보배로운 종을 이에 달아놓았네 寶鐘斯陳
아름다운 인연 따라 수행을 하매 參修勝緣
명복을 빌 제사 이에 지내게 됐네 資薦冥福
고래 우는 소리에다 사자후 내자 鯨音獅吼
어리석은 마귀들이 다 엎드렸네 昏覺魔伏
이는 도구 중해서가 아닌 것으로 非器之重
효성스런 맘이 그리 되게 한 거네 惟孝之則
용천518) 이에 보호하게 되었거니와 龍天是護
크나큰 복과 함께 끝까지 가리 鴻祚偕極


조선국 예조판서 이식(李植)은 찬하고, 행 사직(行司直)오준(吳竣)을 쓴다.” 명문(銘文)은 여기까지이다.

517) 현도(玄都) : 전설에 나오는 신선들이 사는 곳을 말한다.
518) 용천(龍天) : 팔부[八部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팔종(八種)의 이류(異類)] 가운데 용중(龍衆)과 천중(天衆)을
말하며, 또는 용수(龍樹)와 천친(天親)의 병칭(倂稱)으로 쓰기도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조선은 제국(帝國)의 덕천(德川) 시대로부터 우호관계를 맺음이 한 집안과 같아 물품을 주고받음이 빈번하였다. 이것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덕천씨의 묘사(廟祠)는 도량의 안에 있는바,실로 조선의 능침(陵寢)에 조포사(造泡寺)519)가 있는 것과 같다. 금속임궁(金粟琳宮)이 일광산과 더불어 이웃이 되어 있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명문(銘文)에서 ‘뜻을 잘 이어받은 것을 기쁘게 여겼다.’고 말한 것은, 대개 불가(佛家)에서는 선세생천(先世生天)520)하는 것을 효라고 여기고, 왕가(王家)에서는 계지술사(繼志述事)521)하는 것을 효성이라고 여기므로, 그 말에 이르기를, “이는 도구가 중해서가 아닌 것으로, 효성스런 맘이 그리 되게 한 거네.”라고 하여, 유학가(儒學家)의 본래 면목으로 중함을 돌린것이다.
그 뒤로 조선의 사신 및 유람객들이 서로 오갔는데, 김동명(金東溟)522) 김세렴(金世濂) 등 여러 사람들이 모두 시를 남겨 놓아 권축(卷軸)을 이루었다. 지금 시찰하러 온 일행들도 역시 제명(題名)을 하고서 돌아왔다.
이상은 강사시찰단(講士視察團)이 유람을 하면서 느낀 심정을 기술한 대략이다. 못난 내가 외람되이경학원(經學院)의 직을 맡고 있으나, 학식은 얕고 학문은 보잘것없어서 그 사이에 이러쿵저러쿵 말을한 처지가 못 된다.

그리고 가장 못난 처지면서도 중간에 끼게 된 자가 강사시찰단보다 10여 일 앞서진신시찰단(搢紳視察團)과 함께 동경(東京)에 도착하여 각 도회(都會)를 시찰하였다.

이번에 시찰하러 간 것은 실업(實業)을 시찰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런즉 시찰한 모든 것들은 농학,공학, 상학의 정도(程途)와 발전(發展)에서 벗어나지 않는바, 문학(文學)에 관한 일은 논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그런데도 시찰하는 가운데 문학에 관련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대략 마음속으로 헤아리면서 주목해 보았다.

그러나 이를 손으로 쓸 수는 없어서 망연하기가 마치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시찰을 하고 돌아오는 다음날에 비로소 강사시찰단이 계속해서 왔다고 들었는데, 제비가 떠나감에 기러기가 오는 것과 같아, 서로 어깨를 스치면서도 만나보지는 못하였기에 더욱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여러 강사들이 감상을 기술한 것에 힘입어 이 한 편의 글을 이룰 수가 있었다.
이는 모두가 못난 내가 앞서 말하고자 하면서도 말하지 못하였던 것들이었으므로, 얼음이 풀리듯이 시원스럽게 풀리고 순리에 따르듯이 기쁜 마음이 들었다.
이에 세 번이나 장엄한 자세로 읽어본 다음 대략 몇 마디 말을 제하여, 여러 강사 일행들이 터득한것이 있음을 찬미하였다.

그러면서 아울러 못난 내가 처음에는 찜찜하였다가 끝에는 시원스럽게 풀린


519) 조포사(造泡寺) : 능(陵)이나 원(園)에 딸려서 제향(祭享)에 쓰는 두부를 맡아 만드는 절을 말한다.

조포소(造泡所)라고도 한다.


520) 선세생천(先世生天) : 부모님으로 하여금 사후에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열가지 선행을 한 사람은 죽은 뒤에 하늘나라에 태어난다고 한다.


521) 계지술사(繼志述事) : 계지는 어버이의 뜻을 잘 계승하는 것을 말하며, 술사는 어버이의 일을 잘 따라서 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는 효자일 것이다.

효란 것은 어버이의 뜻을 잘 계승하며, 어버이의 일을 잘 따라 행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중용'


522) 김동명(金東溟) : 김세렴(金世濂 1593~1646)으로,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자는 도원(道源)이며, 호는 동명(東溟)이다. 인조 14년(1636)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을 다녀왔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는 '동명집(東溟集)', '해사록(海槎錄)' 등이 있다.


것을 기록하였다.
부제학(副提學) 박제빈(朴齊斌)은 삼가 기록한다.


<출전 : 朴齊斌, 「講士視察見聞所記」, '經學院雜誌' 제3호, 1914년 6월 25일, 37~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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