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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 10 (9) - 유학계의 친일협력 친일한시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7.05.10|조회수204 목록 댓글 0

제5회 좌담회


일시 11월 4일 (오후 7시부터 동 8시 30분까지)
장소 경남 동래 봉래관


○ 영전 단장 앞에 이어서 좌담회를 다시 열겠습니다.


○ 부산 함북 강사 저는 국어도 할 줄 모름에도 불구하고, 내지성지참배단에 가담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또 그 사이 20일간에 걸쳐 여러분과 함께 각 성지를 참배할 수 있었던 것은 한 평생 잊을 수가 없는 인상이었으며, 여러가지 편의를 봐 주신 각 당국자에게 마음으로부터 심심한 감사를드리는 바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게 경청하였으나, 저는 전반에 걸쳐 제 소감을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번 우리들 유림단이 성지를 참배하게 된 것은, 조선의 종래의 유교를 시대에 맞추어, 황도정신에 입각한 황도유학을 세우고자 하는, 일종의 문화시찰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산업시찰이나 농촌시찰과는 그 유(類)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책임도 중차대한 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내지에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20일간에 걸쳐서 내지를 돌아 본 인상은 필설로서는 형언하기 어려운, 오직 숭고하다고 하는 느낌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특히 상요선(山陽線) 연선의 옥야천리, 명산과 큰 못이 전개되는 그림과 같은 풍경은 신국 일본의 본연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와 같이 땅의 이점과, 일억일심(一億一心)인 사람들의 화목과 천우신조의 하늘의 때가 아울러 존재하는 일본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 제국은 현실적으로 대동아공영권의 확립과 세계평화의 수립을목표로 성전을 계속하고 있는 중대난국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화(和) 즉 일억일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일억일심은 내선일체를 제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유림단의 성지참배 목표는 황도유학 수립입니다만, 이것도 요는 내선일체의 한 요소임으로 우리들 유림은 이제 한층 황국정신을 철저하게, 황도유학을 연찬해 나감과 동시에, 내선일체의존귀한 이상을 향하여 매진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을, 이번 성지참배를 계기로 강하게 느낀 것입니다.


○ 서촌 충남 강사 저는 이번에 단장님 덕분에 성지참배단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이점 마음으로부터 감사드립니다.
이번 성지참배에서는 능이나 신궁·신사 혹은 사찰을 참배했습니다만, 이 일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분이 감상을 피로하시고 또 저도 소감을 말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 밖에 일에 대하여 감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민중생활이 예상 이상으로 안정되어 있는 것에 감격해 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안온한 생활 중에도 정신적으로 긴장된 모습이 확실히 보여서, 우리 반도민중이 아직 전시 기분에 철저하지 못하고 있는데 비해서 엄청난 차가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둘째로 내지인의 근로정신에 감탄했습니다.

철도연선에서 남녀노소가 총동원이 되어 논밭 가운데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참으로 내심 부끄러운 느낌을 억누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우리 유림은 일하는 것을 천시하기쉬움으로, 이와 같은 잘못된 정신을 고쳐나가도록 지도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 강본 평남 대표 저는 20일 간에 걸친 내지 여행에서 2, 3가지 느낌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즉 내지는 교통기관이 조선보다 빨리 발달했으나, 이에 수반되어야 할 교통도덕에 관해서 생각해 보면, 얼핏보아서 만족스럽지 못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느 전차 안에서 본 것이지만, 파마를 한 여성이 안하무인의 태도로, 자기 앞에 나이 많은 늙은이가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을보고, 소위 신여성이라고 이름 붙여진 자들에게는 경조부박(輕佻浮薄)한 태도가 남아 있는 것을 통절하게 느꼈습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저도 그 점은 통절하게 느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지의 단점을 보기보다도,좋은 점을 보고, 그것을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 강본 평남 대표 가는 곳마다 전시 기분이 들었지요. 첫째, 상점도 이전과 같은 화려한 장식이 없어지고, 또 가장 전시의 색채를 나타낸 것은, 철이나 기타 금속종류의 회수인데, 마쓰에 성에서도 본 바와 같이 철로 만든 사슬을 전부 제거한 것이 특히 눈에 띠게 보였습니다. 또 오사카의 여관에서도, 옛날 같으면 밥을 달라고 하기 전에 내오게 되어 있었으나, 이번에 갔을 때는 아침밥을 달라고 했더니 시간이 지났음으로 점심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전시의 긴장된 정도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 영전 단장 다음으로 오사카의 협화사업 시찰에 대해서 감상을 이야기 해주십시오.


○ 가천 경기 강사 오사카에 살고 있는 조선인은 30여 만이나 되는 것 같은데, 그중에는 성공한 사람도 있고, 또 일반적으로 무의무탁이었던 조선거류민이, 이제는 완전히 직업을 갖게 되었으며, 또 거처가 편하게 된 것은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또 그들은 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보다 한 걸음 앞서서 황국신민으로서 부끄럽지 않는 기반을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마음 든든하게 느낀 것입니다.


○ 강본 평남 대표 오사카에 살고 있는 반도인의 수는 후쿠오카(福岡)시의 인구에 필적한다고 하는것 같은데, 이만큼 많은 조선인을 협화회에서 뒷바라지 해 준다는 것은 우리들로서 심심한 감사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또 그들은 습관도 완전히 내지인과 마찬가지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 어쩐지 마음든든하게 느꼈습니다.


○ 영전 단장 저도 오늘까지 몇 차례 내지여행을 해 왔으나, 이번에는 더욱 더 친밀감이 커졌습니다.

내지에 가서 살고 싶은 느낌이었습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일반 조선인의 기분이 전부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선일체는 양자의 친숙함이 깊어가야 할 것입니다.


○ 가천 경기 강사 제가 이번에 내지에 갔었던 것이, 마치 우리들 태어난 고향을 시찰하고 온 느낌이었습니다.


○ 강본 평남 대표 오사카의 협화회에서 가장 감탄한 것은, 반도인 자제가 의무교육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반도 내에 사는 학령아동은 전부가 취학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지에 살고 있는 반도인의 학령아동이 취학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 산가 경북 강사 그러나 또한 내선인 간의 생활정도에는 아직 천양지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활 레벨을 동일한 선까지 향상시키는 것이 내선일체의 선결조건이라고 확신 하는 바입니다.


○ 가천 경기 강사 산가 씨의 이야기는 동감입니다. 내선인이 입으로 아무리 내선일체를 부르짖어도 무모하기만 합니다. 결국 실천궁행으로써 말을 바꾸어 하면 생활에서 내선일체의 열매를 끄집어 올리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영전 단장 다음은 이번 성지참배단이 개선해야할 점은 없습니까.


○ 가천 경기 강사 이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다만 이후부터는 단원을 젊은 무리에서 선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산가 경북 강사 단원은 될 수록 젊은 사람이 좋습니다만, 그 지방에서 인망이 두터운 사람이 아니면 안되겠습니다.


○ 영전 단장 이후부터는 진무(神武)천황이 동정(東征)하셨던 성적(聖跡)이나 혹은 황종황조(皇宗皇祖)의 유적을 하나 빠짐없이 참배하고, 또 학자를 많이 배출한 곳에 가서, 학문과 강론도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20일 간의 일정으로는 모자라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완전히 그렇습니다. 이번 일정도 짧은 느낌이 듭니다.

주마가편의 바쁜 일정이었음으로, 충분한 관찰을 할 수 없었다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 강본 평남 대표 평산 씨에게 개선방법을 의뢰하면 될 것입니다. 다만 제 희망으로는, 전에 평산씨가 이야기한 것처럼, 출발 전에 예비지식을 충분히 넣어 주어야할 것입니다.

특히 내지에 처음 가는분에게는 간단한 내지의 예의풍습을 가르쳐야 합니다.

또 일반적으로 유림은 국사(國史)에 약하기 때문에, 성지고적의 유서를 간단하게 설명한 책자를 만들어 주면, 그 효과는 매우 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성지참배는 관청의 위로출장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유도진흥에 이바지하는 바가 없으면 안 됩니다. 당국의 목적도 이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국은 바야흐로 멸사봉공의 열성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신문에도 나와 있음으로 여러분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경방단원(警防團圓)이 처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보면서, 훈련에 나왔다고 하는 미담과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정세를 맞이하여 우리 성지참배단은 안일하게 그저 여행 기분으로 끝내서는 안됩니다.

또 당국부터 유도진흥에 이바지할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 영전 단장 이것으로써 좌담회를 끝내고자 합니다.
성전은 4년 남짓이 되지만, 이제 와서 또 태평양문제를 중심으로 국제정세는 미묘하게 맥이 뛰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제정세 하에 우리 1억 국민은 불덩어리가 되어 난국돌파에 총진군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시절관계로 각종 행사는 중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유림대표 9백여 명만이 한 자리에 모여서, 우리의 단결을 더 한층 튼튼하게 하고, 더욱 만난을 무릅쓰고 성지참배행사를 단행한 것은, 참으로 의의가 깊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미나미 총독 각하 및 오노 정무총감 각하의 고마운 지도와, 상사의 뜻을 받들어 잘 처리 해 주신 마사키(眞崎) 학무국장 각하나 박택(朴澤) 대제학, 계(桂)사회교육과장의 배려에 의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으로 의의 깊고 또한 중대한 책무를 짊어지고 있는 성지참배단임으로, 저는 단장의 임무를 재삼 사양하였음에도 할 수 없이 이 임무를 맡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여러분의 성의와 끊임없는 편달에 의하여, 예상 이상의 효과를 얻어서 오늘 해산하기에 이르렀음은 함께 경하하는 바입니다.

또 제가 단장으로서도 상사에게 체면이 서게 되어서, 내심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말씀드릴 것 없이, 성지참배 목적은,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신국 일본의 본연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지만, 이러한 목적은 여러분의 예리한 관찰에 의하여 또한 명사의 강연에 의하여, 충분히 체득하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현재의 세계정세는 우리 제국을 둘러싸고 미묘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만, 바야흐로 제국의 성쇠나 동아의 흥망의 갈림길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정세 하에 내지동포의시국 극복의 성의는 최고조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 그때그때에 현장에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도동포인 우리들도 내지동포에 뒤지지 않는 정성을 가지고, 시국 극복에 매진해야 되겠습니다.

이번 내지여행에서 가장 기뻤던 것은, 내지동포가 조선을 잘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조선 민중 또는 우리 자손도 내지동포와 마찬가지로, 혹은 남으로 혹은 북으로 진출하여 활약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되든 우리는 먼저 내선일체의 구현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유림은, 내선일체의 대이상을 향하여 황도유학 확립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나아가서, 황도유학을 확립함과 동시에, 대동아공영권 확립에도 공헌하는 바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여러분의 건강을 기원함과 동시에, 대과 없이 단장으로서의 제 책임을 다하게 해주신 여러분의 후의에 심심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 가천 경기 강사 일행의 연장자로서 한 말씀드리면서, 단장에 대한 감사 말씀에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번에 불초 우리 일행이 성지참배를 한 것은 참으로 영광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또 의의 깊은 행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단장님을 비롯하여 각 당국자의 후의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성지참배를 한 목적은, 단장님이 말한 것처럼, 일본의 본연의 모습을 아는 것과 동시에 황도에 입각한 유학을 확립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유림을 마치 무용의 장물(長物)인 것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다분히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 유림이라고 일컫는 대부분은 노년으로서 완고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유림을 현 세태에 맞는 유림으로 만드는 것이, 당국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당국은 이와 같은 완고한 유림을 어떻게 해서든지 각성시키려고, 이번 내지의 성지참배를 시도했다고 보는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 성지참배단 일행의 책임은 중차대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일행도 단원 전원이 결코 당국이 요구하는 정세에 맞는유익한 유림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부하된 책임을 완전히 다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력이나마 힘이 미치는 한, 유림 통합에 혹은 완고한 사상의 시정에 노력하는 것은 물론, 당국에 협력하여 종래의 유교를 황도유학으로 재건하는데, 정혼(精魂)을 기울여 매진할 것을 단원 여러분과 함께 단장님 앞에서 맹서하는 바입니다.

단 하나 당국에 염원하고 싶은 것은, 우리 후배 중에서 유익한 인물을 한 사람이라도 많이 양성하여, 황도유학 수립에 이바지하는 것이, 끽긴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임으로, 이러한 점에 유의해 줄 것을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이상)
1943년 2월 10일 인쇄
1943년 2월 15일 발행
편집 겸 조선총독부 학무국 연성과 내
발행자 조선유도연합회
대표자 마츠바시 키요지(松橋喜代治)
인쇄자 경성부 태평통 1-31
천산익진(天山益進)
인쇄소 경성부 태평통 1-31
매일신보사 인쇄부
발행소 조선유도연합회


<출전 : 朝鮮儒道聯合會, '朝鮮儒林聖地巡拜記', 1941년 10월 17일~11월 4일까지,每日新報社, 1943년 2월 15일>


3) 우노 데쓰진(宇野哲人), 유교와 일본정신(계속)
문학박사 우노 데쓰진(宇野哲人)


3. 유교의 전래(傳來)


오우진(應神)천황 15년,192) 백제의 사신 아직기(阿直岐)가 조정에 와서 양마(良馬) 2필을 헌납했으나,아직기는 경전을 잘 읽었음으로, 태자 우지노와키 이락고(菟道稚郞子)가 이를 스승으로 모셔, 또 다시 그 다음 해에 아직기의 추천에 의하여 백제박사 왕인(王仁)을 초청했으나. 왕인이 조정에 와서 “논어10권”, “천자문 1권”을 올리며 유교는 이렇게 하여 전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왕인이 처음에 경전을 전한 것이 아니며, 경전은 그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알려지고 있는 것은, 태자가 아직기를 스승으로 삼은 것으로도 상상이 되며, 또 훨씬 이전부터 우리나라와 한토(漢土)와의 교통이 상당히 빈번했다는 것에도 상상할 수 있으나, 그러한 것은 잠시 두기로 한다.
應神 20년 가을 9월에 고려의 상소에 고려왕이 일본국을 가르쳤다고 했음으로 이락고(稚郞子)가 크게 노하며, 그 무례를 나무라는 것이나, 應神천황이 서거한 후, 왕위를 형인 황태자의 닌토쿠(仁德)천황에게 양위하는 것은 이락고(稚郞子)가 천자(天資)총명함에 의한 것은 물론이나, 유교의 영향이 적지 않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덕(仁德)천황의 백성이 넉넉한 것은 이것 짐(朕)이 넉넉하게 하였노라고 말씀하신 것은 “물론 안연 편”에서 볼 수 있으며, “백성이 넉넉하면 임금도 더불어 넉넉하며, 백성이 넉넉하지 않으면 임금도 함께 넉넉지 않다”라는 뜻인 것이다. 케이타이(繼體) 천황 7년(503년)에 비로소 오경(五經)의 학(學)을 수립하고, 그때부터 춘추 중월(仲月)의 상정(上丁)

193) 날에 석전(釋奠)을 올리며, 공자를 선성공선부(先聖孔宣父)라고 하며 뒤에 고쳐서 文宣王이라고 불렀다.

킨메이(欽明)천황의 대에 梁나라 사람 사마달(司馬達) 등이 불교를 전한 것은 유교의 전래에 뒤지기를 실로 2백3십7년인 것이다.

불교가 도래한 초기에는, 배불(排佛)파와 숭불(崇佛)파와의 격렬한 다툼이 있었으며, 드디어 숭불파의 승리에 돌아갔으나. 유교 도래 시에는 아무런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었다.

이러한 것은 불교는 종교이며, 종래의 신(神)들과의 충돌이 있었으나, 유교는 도덕으로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도덕과 특별한모순이 없었던 것도 그 이유의 하나인 것이다.
수이코(推古)천황의 대에 제정된 관위(冠位) 12계(階), 덕인예신의지(德仁禮信義智)가 각각 크고 작은것에 나누어 진 것도, 앞에서 말한 유교의 덕목에 따른 것인 것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또 쇼토쿠타이시(聖德太子)의 헌법 17조는 그 둘째에, 돈독하게 삼보(三寶)를 공경하며, 삼보란 불법승(佛法僧)이라고
되어 있는 외에, 첫째의 화(和)를 고귀하다고 한 이외 각조의, 유교경전에 따르는 것이 적지 않는 것은 누구든지 이것을 승인할 것이다.

타이카(大化)의 신정대보령(新政大寶令)의 제정 등은, 수나라와 당나라의 모방이지만, 그사이에 유교경전에 의하는 것도 적지 않다. 수당(隨唐)의 유학은 소위 훈고(訓詁)의학문이며 유교세력이 미미해서 떨치지 못하고, 당시에는 화려했던 시문(詩文)이 유행했음으로 우리나


192) 역주 : 5세기 전후.
193) 역주 : 첫 정날.

라에서도 시문이 성행하여 ‘懷風藻’의 편찬이 완성했다.
쇼토쿠(稱德)천황의 대에 승려 도쿄오(道鏡)가 불신(不臣)의 뜻을 품었을 때, 와케노키요마로(和氣淸磨呂)공(公)은 우사(宇佐)의 신칙(神勅)을 받들고 개벽이래 처음 군신(君臣)의 푼수를 정했다, 천황의 계승은 반드시 황윤(皇胤)으로서 하며, 간흉(姦凶)의 도배는 신속하게 쓸어 없애라고 하였으며, 道鏡의 간을 빼앗은 것은 키요마로 공의 충절에 의한 것은 물론이나, 그 당시의 일을 ‘大日本史’ 본전(本傳)에,“때로는 路豊永이 있으며, 키요마로는 말하기를 왈, 道鏡이, 천자 위치에 오른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이것을 섬길 것인가, 나는 바로 2, 3의 아들과 함께 백이(伯夷)를 따라서 지내겠다고, 키요마로는 죽음을 맹세하며 가겠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유학의 영향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송학(宋學)의 수입은, 우리나라 학풍을 일변(一變)시켰다. 겡에(玄惠)승도(僧都)194)는 ‘사서신주(四書新注)’를 고다이고(後醍醐)천황의 어전에서 강석(講釋)을 하며, 켄부노 추우코우(建武中興)의 단초를 열었다.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 경(卿)의 “神皇正統記”는 춘추학의 영향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설명했다.

전국시대에 있어서는, 오산(五山)의 중이 근근히 문학을 유지했으나, 도쿠가와(德川) 시대에 와서, 문교(文敎)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뜻이 있었으며,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고제(高弟) 하야시라잔(林羅山)을 등용하여, 그 자손은 대대로 대 학두(學頭)가 되며, 천하문교의 칼자루를 쥐며, 유교 특히 주자학이 德川 15대 동안, 거의 국교와 같은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오와리(尾張)의 敬公, 미토(水戶)의 義公과 같은 소위 친번(親藩)이라도, 유교를 장려했으나, 각 번(藩)에서도 각각 학교를 일으켜서 유교를 장려했다.

쿠마모토(熊本)의 時習館, 하기(荻)의 明倫館, 카고시마(鹿兒島)의 造士館, 사가(佐賀)의弘道館, 요네자와(米澤)의 興讓館등은 그러한 것 중 쟁쟁한 것이었다. 그 사이에 학자를 배출하여, 오로지 주자학뿐만 아니라, 오우미(近江)의 성인(聖人) 나카에 토우주(中江藤樹), 그 문하인인 쿠마자와 반잔(熊澤蕃山) 등은 양명학을 고취하여, 그것을 江學이라고 한다. 이것에 대하여 남학(南學)의 일파는 타니 지추우(谷時中), 노나카 켄잔(野中兼山), 코쿠라 산세이(小倉三省) 등은 주자학을 주창하고,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齊)는 이러한 일파로부터 나와서 기문(崎門)의 학(學)을 이루었다.

또 한편에서는 야마가 소코우(山鹿素行)의 고학(古學), 경학(京學)이라고 불리는 호리카와(堀川)파의 이토 진사이(伊藤仁齊) 및 그의 아들 토우가이(東涯)의 고의학(古義學), 物徂徠 일파의 고문사학(古文辭學)이 있으며, 내려와서는 절충파(折衷派), 고증파(考證派) 등의 여러 대가를 배출해서 학문과 문장으로써 울리거나 처사(處士)로써 인의(仁義)를 고취하였으며, 혹은 사관(仕官)을 해서 경륜을 실시하며, 우리 카모노 마부치(賀茂眞淵),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 등 국학의 대가를 배출하고, 유교에 대해서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여기에서 국학자 대 한학자의 논쟁이 일어났으나, 과연 공자에 대해서는 성인인가, 공자는 좋은 사람이라고 평을 하고, 공자 이하를 혹평하는 것은, 그러한 혁명론의 대의명분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는 기문학(崎門學), 미토학(水戶學)과 같은 것은 소위 황도에 순화한 유학으로서 비난의 여지는 없는 것이다.
서양문명의 수입과 동시에, 고래(古來)의 학문, 도덕, 종교는 일시적으로 이것을 일소하는 듯한 세력이 있으며, 우리 유교도 고루하고 완고한 것으로 되돌아볼 것이 없었으나, 1890년 10월 30일에 하사된


194) 역주 : 관승.

교육에 관한 칙어(勅語)는, 그야말로 일시적으로 혼돈하여 나아가는 곳을 몰랐던 사상계의 지침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유교는 참으로 칙어의 각주(脚注)로서 가장 적당하다고 할 것이다.


4. 유교와 일본정신


우리 일본은 신국(神國)인 것이다. 상고시대는 8백만의 신들이 여러 가지 능력을 갖고 있어서 우리 인간을 지배 해 왔던 것이나. 그 최고의 신은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유교가 천(天)을 지고무상(至高無上)으로서, 그 아래에는 천신(天神)지지(地祗)인귀(人鬼)를 예속시키는 것과 유사(類似)하고 있다. 이것은 유교가 각별한 장애(障碍)없이 우리나라에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인 것이다.
신을 섬기는 것은, 액땜을 하고 심신을 청결하게 하여, 제사를 집행하는 것을 일상으로 하며, 제사는 위 한 분의 정치적인 중대한 임무의 하나로 아는 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정(祭政)일치인 것은 널리알려져 있는 사실인 것이다. 목욕제계하여 심신을 청정하게 하고, 경건(敬虔)으로써 신을 섬기도록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둘째 이유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군민동조(君民同祖), 가족주의에 의해서 나라를 세웠다. 우리나라가 개벽의 처음부터 미래영겁에 걸쳐,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하시는 것은 헌법에도 명문으로 되어 있는 대로이나, 천황은 천손(天孫)이신 것과 동시에, 외람되게도 국민의 대종(大宗)이신 것이다. 이러한 일은 즉 역사적인 사실인 것이다.

유교 특히 공자가 설명하는 군신관계에 관해서의 논의는, 대부분 우리 국체를 설명하고, 찬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인 것이다.

단 이러한 점에 대해서 맹자, 순자(荀子) 이하 많은 유자(儒者)들은, 혁명 취향을 풍기는 지나 국체 때문에 우리 국체와 서로 받아들이지 않는 혁명예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맹자의 서적을 실은 배가 우리 연안에 도착하면 난파한다는 전설도 생겨나서 우리 국학자들이 활발하게 논란을 했던 것도 알맞은 것이다.
또 가족주의이기 때문에, 효행을 존중하는 것은 물론이며, 특히 충효 한 가닥을 설명한다.

이것이 네번째인 것이다.

단 우리나라에서는, 충효를 근본으로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충을 중하게 여기고, 유교는 효로를 크다고 여긴다.

이것이 그러한 상위점인 것이다.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에는 한편 과감하고 용맹스러운 것이 있으며, 이러한 거친 것을 혼이라고 말하며, 한편으로 조용하며 부드러운 것이 있다.
이것을 화혼(和魂)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이 유교적으로 말한다면 인덕(仁德)과 용덕(勇德)인 것이다.

그 이유의 다섯 번째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세어나간다면, 유교가 각별히 모순이 없으며, 우리나라에 받아들여진 이유는,그래도 적지 않게 열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 번거로움을 피하여 잠시 두기로 하다.
우리나라는 언령(言靈)의 행운이 있는 나라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며,많은 논의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거의 선전을 하지 않는 것이 옛날부터의 국풍(國風)이었다.
그러나 소위 신으로서의 도(道)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도의가 실시된 나라인 것이다.

말하자면 당풍(唐風), 많은 선전이나 논의를 하는 지나풍(風)과는 거기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공자가 말을 아끼며 실행에 민첩할 것을 열망한 것은 오히려 우리나라 풍에 가깝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단, 인의(仁義)도덕에 의하여 예악(禮樂)의 정치를 말하며, 예의삼백 위의(威儀)삼천으로써 국가사회를다스리고자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유교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존중하는 신(神)으로서의 길과는, 무어라고 해도 크게 틀린 것이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은 유교가 전래함으로서 부터,우리나라도 애써서 인덕(仁德)도덕의 설을 고취(鼓吹)하고, 제도문물을 제정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적지 않는 영향을 미친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정신은 신(神)으로서의 길을 기초로 하고, 유교의 인의(仁義)도덕으로써 이것을 수식하는 외에, 나아가서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도 또한 심대(甚大)한 것이 있으나, 지금은 불교에 관한 논의는 잠깐 두고, 여기에서는 오로지 유교에 관해서 사견을 조금 말해 보고자 생각한다.
엎드려서 생각하건대 교육에 관한 칙어는, 우리 일본전신의 진수를 말씀하신 것으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우리 국민의 정신인 것이다.

이것은 칙어 중에서 “그 길은 참으로 우리 황조황종의 유훈으로서 자손신민과 함께 준수해 나가야할 바”라고 말씀하시며 명백(炳焉)한 것이 해와 별(日星)과 같은것이다.
황조황종의 나라를 건국하신지가 요원하며, 덕을 세원 것이 심후(深厚)하며, 신민은 잘 충(忠)에 잘 효(孝)에, 만민의 마음을 하나로 하고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마침으로써 국체의 정화(精華)라고 말씀하고 있으나, 이것이 즉 유가사상의 극치인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이것이 즉 역사적인 사실인 것이다.
만민이 한 마음이라거나 세세(世世)제미(濟美)와 같은 성구(成句)를, 유교의 경전에서 취하게 한 것은, 사람의 장점을 채택하고 자신의 낭중(囊中)의 물건으로 삼는 사유인 것이다.
칙어에서 말씀하시는 바의 궁극의 목적은, 천양무궁(天壤無窮)의 황운(皇運)을 부익(扶翼)해서 받드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보조(寶祚)가 융성해 지는 것을 천양(天壤)과 더불어 끝이 없다고 말씀하신 신칙(神勅)을 준수하는 사유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참으로 유가(儒家)의 대의명분론이 주장하는바인 것이다.
천양무궁의 황운을 부익하고 받드는 것에는, 국민은 먼저 이 목적을 수행하는데 이길 수 있을 만큼의 덕성(德性)을 함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칙어 중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가 우애로, 부부는 서로 화목하고, 붕우는 서로 믿고 스스로의 행동을 삼가하고, 박애는 여러 사람에게 미치며, 학업을 닦아서 지능을 계발하여 덕기(德器)를 성취하며”라고 말씀하신 것은, 즉 그러한 뜻으로 배찰(拜察)하여 받드나, 이러한 것은 참으로 유교윤리의, 본무론(本務論), 덕론(德論), 수양법(修養法)의 요지인 것이다.
공익을 넓히며 세무(世務)를 열고, 항상 국헌을 중히 여겨 국법에 따르며, 일단 위급한 일이 있으면 의용(義勇)을 공(公)에 받드는 것처럼, 유가(儒家)의 자가 독선으로써 만족하지 않고, 나아가서 국가사회에 공헌할 것을 주장하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상 약설(略說)한 바와 같이, 유교는 대체로 교육에 관한 칙어의 주석(註釋)이며, 또한 아마도 가장 적절한 주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유가(儒家)의 소설(所說) 중에 한두 가지가 부당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유교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우리 일본국민정신과 밀접(密接)불리(不離)의 관계에 있다
고 말해야 할 것이다. (끝)


<출전 : 宇野哲人, 「儒敎と日本精神」(續), '儒道' 제4호, 朝鮮儒道聯合會, 1943년 8월 1일, 5~9쪽>

4) 타까다 신지(高田眞治), 대동아전쟁과 유가(儒家)의 길(전회 계속)
문학박사 타까다 신지


4. 대동아건설과 사문(斯文)


대동아전쟁의 목적은, 미, 영을 격양(擊攘)하고, 미, 영 의존과 완미(頑迷)한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항일을 지속하는 重慶정권을 섬멸해서 영광 있는 대동아를 건설하며, 빛나는 공존공영의 신 동양을 수립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구미(歐美)숭배에 빠지며, 미, 영 사상에 기우리고 있었던 일반적인 대세는, 지금 아직도 그 타락한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점이 있으며, 가장 자유주의이며 개인주의의 분위기에서 자라 온자들이, 입으로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배격을 주창하며, 시대상에 맞추고 있는 것처럼 모순이 아직도 도처에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진실한 혁신을 단행할 수 없는 상태인 경우가 적지 않는 것 같다.

구미사상에 배양되어 온자들이 어떻게 해서 급하게 동양사상을 체득하여 실현시킬 수가 있을 것인가.

거기에다가 이러한 때에 유가(儒家)의 길이 떨치지 못하는, 명치(明治)이래의 차차 능이(陵夷)195)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또 오늘날만큼 유가의 길을 현양(顯揚)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명치 이래의 맹목적인 구미 숭배의 세력에 압도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 사이에는 동양정신에 눈을 뜬 인사들의 경세(警世)적인 언동도 있었으나, 이러한 것이 되새김을 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나, 대충 말하면 사학(斯學) 그 자체의 학풍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조(淸朝) 3백년의 학풍을 결정한 고증학(考證學)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하여, 고증을 위하여 고증을 한 것이었다는 것은, 근대 서양에서 이루어 진 학문을 위한 학문이라거나, 과학을 위한 과학이라는 정신과 서로 공통된 것을 가지며, 그 자체로서는 학문의 길에 충실한 방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학문을 위한 학문이라거나, 과학을 위한 과학이라는 개념이, 서양의 학문이나 과학을 규정하는 방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동양 고래의 전통인 학문의 길 개념과는 그 내용을 달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근세 서양에서 학문이나, 과학의 개념은 대부분 대학에서 말하는 바의 치지격물(致知格物)196)이나, 주자(朱子)가 말하고 있는 궁리(窮理)의 의의에 가까운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특히 과학 같은 것은, 이것이 격물(格物)의 학문인 것이다.

과학자가 과학으로써최고 절대의 학문인 것처럼 생각하고 과학만능을 뽐내고 있는 것은 마치 대학의 팔조목(八條目)의 첫걸음인 격물(格物)에 시종(始終)하며 학문의 능사(能事)가 끝났다고 하는 자와 같은 것이다.

과학은 물질의 분석이나 연구인 것이다.

동양의 학문의 개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사이언스는 오히려격물(格物)이라고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격물은 수제(修齊)치평(治平)의 대학의 첫머리의 한 항목인 것이다.

주자의 궁리는 그 위학법(爲學法)의 한 면에 지니지 않는다. 동양학문의 의의는 치도(治道)를 근


195) 사물이 차차 망해 가는 것 : 망국의 징조.
196) 주자학에서는 후천적으로 知를 확충(致知)하여 자신과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개별의 理를 탐구하며, 궁극적으로 우주보편의 理에 도달(格物)하는 것을 지향한다.

본으로 하는 것으로서, 수양(修養)의 학문이며, 실천의 학문이며, 경륜의 학문이며, 분석과 동시에 종합적인 학문이며, 성현의 길을 닦는 학문이며,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며, 학문사판행(學問事辨行)을 포함하는 것이며, 지행(知行)을 겸하고 있는 것이며, 지행합일(知行合一)에 다다르는 것이며, 이러한 것이 없는 것은 공허한 학문이며, 입이나 귀의 학문이며, 적고 외우는 학문이며, 단순한 훈고고증(訓詁考證)의 학문인 것이다.

학(學)에도 대학과 소학이 있으며, 전자는 대학이며, 후자는 소학인 것이다.

청조(淸朝)의 고증학은 한당학(漢唐學)의 부흥이기 때문에, 소학을 위주로 하는 것이며 대학의 길의 현양(顯揚)과 실천에 있어서는 말하기에 만족한 것은 없는 것이다. 청조(淸朝)가 망하자,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일어나서 의(義)를 부르짖는 자도 없으며, 국난(國難)에 순직하는 자도 없었다고 하는 것을 보아도, 그 학문이 미친 사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청조는 중국인이 이적(夷狄)시한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그 멸망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것을 좋다고 생각하고 좌시(坐視)한 자가 있었다면, 견마(犬馬)일지라도 그 주인의 은혜를 알 것이다.

청조 3백년의 녹(祿)을 먹은 데 대하여, 백이(伯夷) 魯仲達이라고 하는 자는 당장에 무엇을 생각했어야 했을까.

고증을 위한 고증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학문을하는 자는, 명도정의(明道正誼)의 학문의 실천을 잊었던 것이다.
강희(康熙)건가(乾嘉) 즈음 때,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한학이 가장 왕성했다.

한학은 경학(經學)을 주로했다.

경학은 명도정의(明道正誼)의 학문인 것이다. 그들은 이것의 규명을 기했다.

그 논저(論著)는 정확(精確)하고 심투(深透)를 끝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파악하는 근본정신은 무엇 이였었
느냐, 그들은 하고자 해도 공맹(孔孟) 같은 성현은, 도저히 배워서 될 것이 아니라는 자인 것이다.

나중에 학문에 뜻을 두는 자는 마땅히 유생으로서 성현의 길을 받드는 경(經)을 강론하며 경의(經義)를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경(經)은 만세(萬世)의법을 기록하는 것임으로 이 이상의 길은 없는 것이다.

경의(經義)를 얻기 위해서는 옛것에서 벗어나는 가장 가까운 한유(漢儒)의 주석에 의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억측으로써 함부로 사견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송명(宋明)의 유자가 성인을 배워서 그것에 다다르고자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며, 그 사견을 힘차게 경(經)의 본의를 어지럽힐 것을 알았다.

생각하건대 청조(淸朝)의 경학자가 경(經)을 지키며 옛것을 연습하여 징거(徵據)의 학(學)을 만든 공적은 인정해야 할 것이나, 또 그 기본정신에서는 크게 변함이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먼저 공맹을 배워서 이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이것이 공자의 소위 스스로를 긋는 것으로서, 거의가 자포자기 하는 자의 말에 가까운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천덕(天德)이 나에게 생긴다.

안연(顔淵)이 말하기를, 순(舜)이란 누구냐, 나는 누구냐고. 맹자 가라사대, 바라는 바는 즉 공자를 배우겠다고.
공맹을 배워서 이르러지 말라고 한 자는, 거의가 공맹의 정신을 모르는 자의 말인 것이다.

학문에 대인(大人)의 학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말하는 바인 것이다.

만약에 알고서 이 말을 한다면 호신술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청대(淸代)의 한학의 종사(宗師)로써 지목되는 학자로서, 그래도 굳이 그렇게 말하는 자가 많은 것은 어찌된 일일까. 원래 그 식견이 모자라는 탓일까. 더욱 괴상한 것은,현대의 황국이 중심이 되어서 대 동아건설에 매진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의 지나학계에 경학(經學)이나 한학 같은 것을 주로 하는 자가, 그러한 청대의 경사(經師)의 설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지키며, 다만 고증을 위해서 고증을 한다는 것만으로써 학자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며, 적어도 명륜강도(明倫講道)에 뜻을 두고 경세치용(經世致用)을 말하며 무책(務責)을 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을 가르쳐 불급(不急)의 학문이라고 하며, 혹은 학자의 본분을 일탈(逸脫)한다고 말하며, 또는 이름을 구하는 자라고 나무란다.
스스로가 주장하는 바는 2백여 년 전의 외유(外儒)의 조박(糟粕)을 핥으며, 사기(士氣)의 함양, 정신앙양, 사상발전을 도모할 줄 모르며, 따라서 시대의 도움이 되지 않고, 또 스스로의 학문의 길은 이밖에없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래서는 우리나라의 지나학은 영원히 청조의 고증학의 침을 핥는데 참을 수 밖에 없으며, 말하자면 대동아건설을 맞이하여 새롭게 창조해야 할 문화건설에 기여해야 할 아무것도 제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옛날 몽예(蒙曳)의 무리들은 교묘하게 우언(寓言)을 만들어서 유자(儒者)들을 비방했다. 장자(莊子)의 천지 편에 싣고 있는 바의 포휴(圃畦)를 만드는 곳의 장인(丈人)이 자공(子貢)을 나무라는 말에 가라사대, 네가 박식(博識)하다고 하여 성인을 본받고 명성을 천하에 팔고자 하는 것인가. 너는 자신의 몸마저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찌 천하를 다스릴 틈이 있느냐. 이것을 현대 지나학을 주장하는 자가, 공맹을 배우서 그렇게 될 필요가 없으며, 학자는 독서하고 연구하면 족한 것이다. 명륜 경세를 논하는 것은 이름을 좋아 하는 선비가 하는 바이라고 비방하는데 비하면, 홀로 그 몸을 잘 가지며 천하를 밖으로 할 때에, 어찌 그 뜻이 가까워 질 것인가, 현대 지나학계에서 그러한 인사의 주장은, 입으로는 경학을 일컬으며, 한학(송학에 대한)을 주창하는 것도, 사실은 경학의 본뜻에 철저하지 않고, 오히려 노장(老莊)의 아류(亞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논어에 가라사대, 군자는 본분에 힘을 쓴다. 본분이 세워짐으로서 길이 생긴다고.

맹자는 가라사대,군자는 경(經)에 반대할 뿐이다. 경이 올바르게 서민에게 일어날 때. 경(經)은 만세불역(萬世不易)의 길
을 싣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경서에 쓰여 있는 것은 빠짐없이 틀림이 절대 없는 진리라고 맹신하는 것은, 기둥에 ○하는 견해인 것이다. 삼대(三代)의 제작이 각각 손익을 내는 데가 있으며, 공맹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전부가 절대의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 토지를 엄습하여 교(敎)를 달리하고, 고금과 내외를취사를 잘 하며, 실시하는 것을 잡는 것이 공맹의 길인 것이다.

이것을 경(經)에 쓰여 있는 바는 전부 쉽게 보지 말라고 하는 것은, 배에 표시를 하여 검(劍)을 구하는 따위인 것이다.

말하자면 한주(漢注)가 옛날을 지난 것이 가장 가깝기 때문에, 경의(經義)를 얻는데 가장 증거로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말은 확실히 이치에 맞으나, 단순히 이것만으로써 한주(漢注)만 맹종하는 것은, 이것 역시 나무뿌리를 지키는 것을 본 것을 면하기 어렵다.

사람에게는 대인이 있고 소인이 있으며, 힘에도 강약이 있는 것처럼, 지(智)에도 역시 심천고하(深淺高下)가 있다.

장님 무리가 아무리 많이 모여서 코끼리를 박힌다고 해도, 눈 뜬 자가 한 번 보는 데와 같지 않다. 한당(漢唐)의 注蔬人의 취해야 할 근거가 되는 것은 원래 많으나, 그렇다고 해서 전부가 정곡(正鵠)을 찌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송명(宋明)의 유자(儒者)인 해(解)는 단순히 경구(經句)를 빙거(憑據)할 뿐으로, 사실은 시대적인 진전에 따라서 새로운 표현방식으로써 자기주장을 설명하는 것이 많음으로, 때로는 옛 뜻과 동떨어진 것이 있으나, 공맹의 참 정신을 받아 들이는 데는, 程朱 陸王 등의 여러 철명(哲明)한 인물이나 식견이라는 것은, 훨씬 한당(漢唐)의 注蔬家 위에 있는 것이다. 阮元은,竊謂士人讀書, 當從經學始, 經學當從注蔬, 空蔬之士高明之徒, 讀注蔬不終卷而思臥者, 是不能潛心平素, 終身不知聖賢諸儒經典之學矣. 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물론 반성해야 할 것이나, 대체로 말하건대 注蔬 설에도 우론(愚論)벽설(僻說)이 적지 않음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注蔬는 원래 존경해야할 것이나, 그는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점이 많고, 식견이 모자라는 것을 간파(看破)할 수가 없다면, 아직도 더불어 경(經) 및 경학(經學)을 논하기에는 모자라는 것이다.
내 자신은 결코 고증학(考證學)을 비방하는 자는 아닌 것이다. 소위 한학(漢學)적인 고거(考據)도 송학(宋學)적인 의리도 모두 그 필요를 인정하는 자인 것이다. 다만 학계 전반을 통하여 도도(滔滔)한 고증학의 여류(餘流)에 타락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종래에는 학문적인 태도에서 한송(漢宋)양학(兩學)의 다툼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동서 양 문화의 종합융회(融會) 위에 서서 대동아건설을 기도(企圖)하는 현대에서는, 그러한 하찮은 문제는 이미 과거의 일로서 지양(止揚)되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지나학계를 통하여, 거의 오늘날은 아직도 청조(淸朝)의 고증학의 여세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인 것은 어찌된 일일까. 청조 고증학의 업적에는 귀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는 이것을 구사(驅使)하여, 보다 고차적인 신문화의 창조에 매진해야 할 시대인 것이다.
공자는 세상이 쇠퇴하고 도(道)가 희미할 때에 태어났으며, 인간의 대도(大道)인 인(仁)을 제창하여,제세구민을 위하여 분주(奔走)하고, 바쁘게 목탁을 천하에 두들기며 자리가 따뜻할 틈도 없이 동서남북을 주류(周流)했으나, 끝내 뜻을 얻지 못하고, 공언(空言)을 유경(遺經)에 남기며, 홀로 만세인류의 스승이 된 것이다.

공자는 단순한 상고(尙古)주의자가 아니며, 또 경박한 진보주의자도 아니며 대도(大道)에 따라서, 중정(中正)을 이끌며, 문무가 나누지 않고, 지인용(智仁勇)을 겸하며, 존왕(尊王)애국, 가장 일본적인 정신에 일치하는 것을 지니고 있다.

그 덕교(德敎)는 가장 좋은 우리 황도에 순화(醇化)하여 오래도록 황도를 부익(扶翼)하고 있는 것이다. 공맹의 유촉(遺躅)인 山東이, 이제야 우리 황군의 치하(治下)에 있으며, 그 자손이 황군의 비호(庇護) 아래에 편하게 지내고 있는 것은 성현의 길이 황국에 실천되고, 나아가서 이후 대동아건설의 중추(中樞)가 되어 천업(天業)을 익찬하여 받들 것이라고 믿는다.

오호라 성천자(聖天子)가 위에 계시며 공맹을 하여금 영(靈)이 있으시다면, 그 필세(畢世)의 경륜을 들어서, 곧바로 바다에 뜨며 국곡(輦穀) 아래에 뛰어 왔을 것이다.

옛날 지나 숭배의 풍조가 심했던 도쿠가와(德川)시대에,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齊)는 문하인에게 묻기를, 만약에 공맹이 대군을 이끌고 일본에 쳐들어온다면, 여러분은 무엇으로써 이에 대처할 것인가 하고 물었다. 문하인들은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안자이는 소리를 사납게 하며, 그때는 갑옷을 입고 칼을 잡으며, 곧바로 공맹의 목을 베는 것이 즉 공맹의 길인 것이라고 말했다. 余○으로써 볼 때는 공맹이 일본에 쳐 들어온다는 것은 단연코 없는 것이다,
공맹은 그 이상이 일본에서 실시되고 있는 것을 보고 기쁘기는 해도 쳐들어온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짜 공맹인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당장에 붙잡아서 목을 날려서 좋을 것이다.

공자의 존왕(尊王)의 정신, 인정덕치(仁政德治)의 이상, 맹자의 도의설(道義說), 왕도론, 모두 전부 다 우리나라에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공맹의 탄생 국에 잔존하는 지나 重慶 정권은, 잘 못된 민족주의를 고집하고 자멸적인 항일정책을 하고 있으며, 스스로 괴멸의 늪에 빠져가고 있는 것이다. 자계사신(牝鷄司晨)197)의 화(禍)도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의 재현(再現)이 중국인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이었다. 오호라 4억의 창생의 고통을 어찌할 것인가.

지사인인(志士仁人)은 마땅히 일어서서 백성의 도탄의 고통을 구하며, 천일(天日)의 은혜를 입혀야 할 것이다.


197) 암탉이 새벽을 다스린다 : 암탉이 운다.


5. 신유교의 제창과 공부자 탄생 2천5백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사상은 혼란 저미(低迷)하고, 문학은 저조(低調)비속(卑俗)에 빠져 있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데모크라시와 유물사관에 화를 입은 20세기의 세계가 더듬어야 할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의 전반에서부터 유럽의 물질문명의 막힘을 개탄하고, 이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동양의 정신문화로써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었던 자도 있을 정도였다.

그것이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자가 되어 세계제패를 하고 드디어 영, 미의 자의(恣意)에 의한 발호(跋扈)와 소련의 가공할 적화(赤禍)의 불꽃이 아울러서 세계는 물질적이 되며, 사회사상은 공산사상이 만연 해온 것이었다. 사상의 혼란과 문학의 비속(卑俗)이란, 그 결과로서 필연적으로 가져오게 한 세계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이것의 반동으로서 일어난 것이 이태리의 파시스트이며 독일의 나치스이고, 미, 영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전체주의를 채택하고, 국가사회주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을 단독으로 개인적이고 자유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진실로 국가적이고 전체적인 존재라고 보며, 국가적 공익은 항상 개인적인 이익에 우선 하는 것이라고 하여 자본가적인 착취를 배제하고, 국민의 통합을 꾀하며 국가전체의 약진을 기도한다.

우리나라가 황도정신에 돌아가고 조국(肇國)의 홍모(鴻謨)를 들어서 신세계에 임하고 있는 것은, 원래 독일과 이태리의 모방에 의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독일과 이태리야 말로 황국에 배우고 있는 상태이며, 여기에서 우리나라는 구미사상을 탈피하여 황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양정신에 환원함으로써 장래 세계를 지도해야 할 신문화의 창조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명치 이래의 구미문화의 수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너무나 급했기 때문에 선택의 여유도 없었으며, 모든 점에서 구미를 좋은 것으로 여겨서 이러한 수입에 힘썼었음으로서, 무척이나 그 폐단도 아울러 받아들인 느낌이 있었으나, 이제야 우리나라 사람의 독자적인 안목으로써 그 장단점을 아울러 알수 있는 지혜를 가져 왔기 때문에, 이후는 잘 취사선택의 태도로써 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선인들이 지나사상, 인도사상에 대해서 그 장단점을 섭취하고 우리 국민의 혈육 속에 넣어
들인 전례가 있음으로, 서양사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것을 걷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종래에는 학문이라고 하면 모든 방면에서 서양학문을 주로 한 것은, 커다란 폐단이었기 때문에, 이후는 서양학문을 닦은 사람들도 애써 동양학의 정수(精髓)를 알고자 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동시에 동양학을 수학하는 자도, 고루(固陋)독선에 빠지지 말고, 서양학문이나 과학의 장점을 취해서 이것을 활용하는데 힘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비로소 세계를 지도하는데 충분한 신문화가 일본인의 손에 의하여 창조되어 가는 것이다.
민국이 되고 난 이래의 지나에 관해서 보면, 삼민주의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미 말해두었으나, 重慶정권의 잘 못된 민족주의나 위만(僞慢)정책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천주(天誅)가 내려져야 할 것이다.

그들의 완미(頑迷)는 진무(神武) 천황이 동정(東征)을 할 즈음의 나가수네히코(長髓彦)에 비교할 것이 있으며, 이를 격멸하지 않으면 명랑한 신동양은 기대되지 않는다. 단지 그들처럼 위만(僞慢)과 포학(暴虐)으로써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자는, 조만간에 멸망의 늪에 가라앉는 것은 천리(天理)의 필연인 것이다.

그들이 아직 그 비행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그 완우(頑愚)함이나 불쌍히 여기며 그 오학(傲虐)을 미워해야 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華北의 신민회(新民會)의 활동이나 南京 국민정부의 신 국민운동이 착실하게 신생중국의 발전을 향하여 걸음을 나아가고 있는 것은 참으로 경축 해 마지않는 바인 것이다.

신생중국은 순진한 중국청년에 의하여 건설 될 것이다. 본인은 중국청년의 빛나는 장래성을 기대하여 마지않는 자인 것이다. 그들이 숭고하고 청순한 일본정신을 이해하고, 더불어 제휴하여 대동아의 건설에 매진할 때, 비로소 위대한 신문화의 창조가 빛나기 시작할 것이다. 삼민주의는 이러한 커다란 창조에 이르러야 할 하나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4천년의 오랜 문화를 가지며, 5백년 이래의 동서사상의 교섭과정을 거쳐, 만방(萬放)무비(無比)의 국체를 갖는 일본의 지도 아래에서, 비로소 빛나는 세계의 최고 종합적인 신문화의 출현이 기대되는 것이다.

본인은 일본을 사랑하고 중국을 사랑하며 동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새로이 태어나고자 하는 대동아의 장래를 향하여 그와 같은 커다란 기대를 가지는 것이다.
민국 이래의 문학혁명이나 백화(白話)운동이, 구태에 침태(沈頹)하는 지나문학의 앞길에 향하여 일말의 신선한 화제를 찾아낸 것과 같은 움직임을 나타낸 것은 사실이나, 그 결과는 아직도 저조한 경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찬란한 빛나는 과거의 지나문학의 정화(精華)에 비추어 보면, 민국 이래의 그것은 오히려 침퇴 타락의 꼴을 보이고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을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서구문학이나 우리 명치문학에 비교하면,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백화(白話)문학은 일본에서는 어문학(語文學)에 해당하는 것이나, 본인의 견해로 말한다면, 구어(口語)나 백화(白話)는 물론 그 발생이유는 인정되며, 소설이나 잡화(雜話)의 서술에는 적합하다고 해도, 장중(莊重)하고 전아(典雅)하거나 웅혼(雄渾)정대(正大) 등의 문장에는 적합하지 않는 것이며, 데모크라시 적인 평이(平易)하고 비속(卑俗)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지나문학의 정통은 이디까지나 문어문(文語文)에 있으며, 논자(論者)가 말하는 것처럼 백화문(白話文)의 희곡소설이나 어록류(語錄類)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요는 사상적으로 보아도, 민국 이래의 것은 세계수준에 비추어서 저조하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정신앙양과

문학 정화(精華)의 인식이, 이때에 가장 긴요하다고 생각된다. 요는 동양 고래(古來)의 대도(大道)에 따라서, 그 문화(文華)의 정영(精英)을 식득(識得) 현현(顯現)하는데 있다.
일본은 이제야 아세아대륙의 지도자가 되며, 남방공영권을 형성해서 세계에 군림하고 있다.

대동아건설은, 세계 신질서를 제패하는 것이 되며, 일, 독, 이 추축(樞軸)국 측의 승리는 굳이 움직을 수 없는 형세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후방의 문화전사는 전선의 용사에 뒤지지 않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동양에서 신문화의 창조는, 동양의 특수성을 가짐과 함께 세계에 대한 보편성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천명(天命)신의(神意)에 순응해서 최대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동양도덕은 서양과학으로서는 유신 이래의 표어였었던 것이었다. 대륙을 경륜(經綸)하고 남양을 약취(略取)해야 한다는 것은, 막부(幕府)말기와 유신의 선각자가 이미 주창하는 바였다. 외람되게도 명치천황은 1886년가을 동경 제국대학에 가신 후, 시강(侍講)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를 초치하여, 원래 대학은 일본고등교육을 하는 학교로서, 고등인재를 성취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현재의 학과를 하여금 정치치요(政治治要)의 길을 강습해야 할 인재를 구하고자 하나 결코 얻지 말지어다. 가령 이화이과(理化醫科)의 졸업을 하여금 그 인물이 되었을지라도, 들어와서 대신이 되어야 할 사람이 아니다.

당세(當世)의 복고(復古)의 공신이 들어와서 정치를 하더라도 영원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을 잇는 상재(相材)를 육
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학의 교과가 화한(和漢)의 수신(修身)과목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며, 국학(國學)과 한유(漢儒)의 고루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고루함은 그 사람의 과오인 것이다.

그 길의 본체는 원래 이것을 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모토다 토오노(元田東野)선생이 적었던 성유기(聖喩記)에 보이는 바이다. 사문(斯文)의 무리는 참으로 감격 참괴(慙愧)하여 성명(聖明)에 봉답하는 바가 없으면 안 될 것이다.

사문(斯文)이 책임이 무겁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 사문회도 역시 그 전신인 사문학회에서 회의 기록을 조사하였더니,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었다.

사문회는 1880년 6월 6일의 창립에 관계되며, 당시 조야(朝野)가 구미문명에 심취하여, 때문에 우리나라 고유의 덕교를 폐기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음에 감안하여, 당시의 좌대신(左大臣)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가 이것을 깊이 개탄하여, 타니 타테키(谷干城)와 시게노 야스츠그(重野安繹) 등의 여러 사람을 종용하여, 주로 당시 유명했던 한학자를 망라하여 조직한 것으로서, 그것이 성사가 되자, 외람되게도 명치천황으로부터 내탕금(內帑金) ○○엔을 하사받고, 또 회장은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有栖川宮熾仁) 전하를 받들며, 코아지마치(麴町)구 寶田 수사관(修史館) 자리를 무상으로 빌려 받고 허가를 받아서 교사로 삼으며, 생도를 교양하고, 궁내성(宮內省)으로부터 매년 2천4백 엔 씩 하사를 받았다.

그 후에 위 아래로 국수(國粹)보존이 필요한 것에 눈을 떠서, 사문학회의 설립목적을 달성했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한학을 닦고 사문(斯文)에 종사하는 자는,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배움의 본령을 분별하고, 그 대도(大道)를 명백히 함으로써 황운(皇運)을 부익(扶翼)하고, 현대에 공헌함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야 더욱 외람되게도 작년 가을 본회가 흥아사업에 힘쓴다는 것을 들으시고 내탕금을 하사하시는 영광을 입은 사문회가, 전력을 다하여 유교진작에 매진하며, 성지에 봉답하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경하 해 마지않는 바인 것이다.
이 가을을 맞이하여 공부자 탄생 2천5백년이 바로 7년 뒤에 오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우연이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공자의 길은 고금(古今)을 통해서 덕은 천지를 지배하고, 오래도록 만세의 스승이 되며, 특히 우리 일본에서 그 이상의 실현을 본다.

우리는 2년 전 자운(紫雲)이 자욱한 大內山 앞에서 기원2천6백년 봉축의 감격을 가지며, 보조(寶祚) 무궁(無窮)과 국체의 존엄과를 여실히 우러러 본 것이었으나,이것에 이어서 곧 동양유교의 대종사(大宗師) 공부자의 생탄 2천5백년을 기념하는 다행을, 이러한 대동아건설이 한참일 때 맞이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 있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일만화(日滿華)삼국을 통하는 도의적인 결성의 뉴대는, 참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두고는 다른 곳에 없을 것이다. 덕으로써 다스리는 자는 왕이며, 힘으로 다스리는 자는 패(覇)인 것이다. 우리 황도의 정화(精華)는 왕도의 이상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주(周)나라 공(孔)의 도(道), 추로(鄒魯)의 가르침은 우리 황도에서 그 정수(精髓)를 발휘하고 있다.

도(道)로써 맺고 덕(德)으로써 교류하는 것은, 나라의 안팎을 불문하고, 지역의 원근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본인은 세 번 태산에 올라가서 세 번 曲阜의 성묘(聖廟)를 배알(拜謁)하고, 또 다시 鄒縣의 아성묘(亞聖廟)를 배알하는 기회를 얻어서, 공안맹(孔顔孟)의 성예(聖裔)현손(賢孫)과 맞이하는 영광을 가졌다.

성현의 길의 참다움은 세계에 빛이 널리 퍼질 것, 오늘날의 일본을 중심으로 한 대동아의 건설기운(機運)과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본인은 성예현손(聖裔賢孫)이 잘 그 명석함을 유지하고 선성(先聖)선현(先賢)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라건대 대성(大聖) 성탄 2천5백 년을 기하여, 일만화(日滿華)친선의 사도(斯道)대회를 개최하여, 이것으로서 대동아의 문호건설의 기초를 닦음으로써 대동아의 영원한 태평(泰平)의 길을 열고, 세계 신질서를 확립하며, 이것을 목표로 삼아 지나사변의 처리와 대동아전의 완수와를 기하는 것이, 우리 사문(斯文)의 무리에게 주어진 하늘의뜻이라고 믿어지는 것이다.
이제야 모든 현상은, 세계적인 관련 아래에서 움직인다. 이러한 성대(聖代)에 생을 향유한 사학(斯學)의 무리는, 남김없이 눈빛을 크게 하고 세계의 추세를 대관(大觀)하며, 황국민인 자각을 근본으로 하고,성현의 길의 진수를 발휘하며, 경학을 근저로 하는 것과 동시에 잘 시대의 진운(進運)에 따르는 신사상의 창조에 참가하고,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리고, 공명정대하게 천지의 대도에 준하며, 우주의 절대성과 순수성과에 합일하는 사도(斯道)의 길의 현양(顯揚)을 익찬함으로써 세계의 최고 종합문화의 건설에 정신(挺身)할 각오가 없으면 안 될 것이다.


<출전 : 高田眞治, 「大東亞戰爭と斯文」(前回繼續), '儒道' 제4호,朝鮮儒道聯合會, 1943년 8월 1일, 10~19쪽>


Ⅲ. 신문·잡지 게재
친일시문


1. 문명기(文明琦)


1) 만주절(滿洲節)


경북도평의원 문명기 씨가 일전에 다음의 노래를 지어서 관동군 사령관 앞으로 송부, 사기를 고무하는 것과 함께 코다마(兒玉) 군참모장과 야스이(安井) 비서관에게도 이것을 제시하여 재차 DK에서 방송하도록 단단히 마음먹고 있다고.


1. 滿蒙의 삭풍 차가운 눈오는 아침


위풍당당한 일본군
錦州城으로 진입하니
아침햇살에 다시 빛나는 일장기


2. 산산이 흩어지는 大和櫻의 용맹함이여


廟行鎭의 세 용사
세계에 떨친 공훈은
죽어서도 천추에 이름을 남긴다


<출전 : 文明琦, 「士氣鼓舞の歌-慶北の文氏が, 滿洲節」, '京城日報', 1932년 3월 19일>


2) 부여신궁 참가 근로봉사 소감


부여 성역에서 신궁을 건축하니 扶餘聖域築神宮
같은 조상 같은 뿌리 하나로 보는구나 同祖同根一視同
천 년 백제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千年百濟今安在
이 날 우리 모두 가서 봉사하니 此日皆吾行更奉公
백마강가 봄 풀은 싱그럽고 白馬江頭春草綠
낙화암 물가 석양은 붉구나 落花岩畔夕陽紅
순환하는 자연에 천황의 은혜 크니 循環天地皇恩大
덕정과 인화는 만세의 공이로구나 德政人和萬世功


<출전 :文明琦一郞, 「扶餘神宮 參加 勤勞奉仕 所感」, '國民總力' 제3권 제8호, 1941년 8월, 95쪽>

3) 축 징병제도 발표


팔도는 천황이 한 집처럼 여겨서 八道皇紘一宇春
어진 정치로 백성을 두루 다스리시니 就治仁政普偏民
바다 같은 성은 어떻게 하면 보답할까 聖恩如海何爲報
징병에 기쁘게 복종하며 한 몸 바치길 원하네 悅服徵兵願以身
반도의 남아가 뜻을 얻으니 半島男兒得意春
모두 황민이 되어 간성임을 비로소 깨달았네 干城始覺總皇民
요기 서린 변경에 완고한 적이 많으니 邊境氛祲多頑敵
나라 위해 출정하여 한 몸을 바치리라 爲國出征獻一身


<출전 : 文明琦一郞, 「祝徵兵制度發表, 雲岩詩抄」, '國民總力' 제4권 7호, 1942년 7월, 29쪽>


4) 필승 격시사율(檄詩四律) 한 편


미국과 영국 곳곳에서 침략을 자행하니 米英無處不相侵
동아시아 백성들 분노와 유감이 깊구나 東亞群黎憤憾深
세상의 판세를 보니 이익과 권력을 훔치는 것 暴利偸權探世局
선교한다는 허명에 사람 마음을 사네 虛名宣敎買人心
윤리를 없앤 죄가 천지를 가득 채우니 蔑倫罪惡盈天地
풍속과 모습이 짐승과 비슷하네 該俗形容較獸禽
우리 천황 군대 명령을 받들어 惟我皇軍親奉命
충무를 드날려 음흉한 이를 정벌하네 直揚忠武伐凶淫


<출전 : 雲岩 文明琦一郞, 「必勝檄詩四律一首」, '國民總力' 제4권 5호, 1942년 5월, 100쪽>


5) 명치절 송사


백곡이 익는 때에 성군이 탄생하시니 百穀登時誕聖君
해마다 이 날은 날씨가 화사하구나 年年此日氣和薰
일시동인하여 한 집안이 되었구나 一視同仁紘一宇
천황의 은혜 어찌 글로 마음을 표현할까 鴻恩那心五條文
명치천황의 감화는 옛날부터 이어온 것 明治皇化八千代
암석에 낀 이끼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巖石苔生今昔態
영원히 성왕의 탄생 함께 기뻐하며 축하하니 無彊聖節同歡祝
남자는 아관 쓰고 여자는 박대 둘렀네 男若峩冠女博帶


<출전 : 文明琦一郞, 「明治節頌詞」, '國民總力' 제4권 11호, 1942년 11월, 27쪽>


2. 박영철(朴榮喆)


1) '다산시고(多山詩稿)'(1939)1) 발췌
일본유학(遊學日本)


庚子


대장부 일생의 뜻은 丈夫一生志
서책에만 있지 않았다네 固不在書檠
임포의 학이 보내는 소식만을 전하리오 肯作林鶴息2)
마판을 떠나 천리를 달리려고 한다네 思馳櫪驥程3)
문장과, 제도를 하나로 하며 軌文同制度4)
천하를 경영하고자 하였다네 弧矢有經營5)
짧은 노를 저어 창명을 건너니 短棹滄溟去
부상엔 밝은 해가 떠오르네 扶桑旭日明


1) 박영철, '多山詩稿', 1939년 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2) 임학은 곧 송(宋) 나라 때 은군자(隱君子)로 불리던 임포(林逋)의 학을 이른다. 임포가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항상 두 마리의 학을 길렀는데, 임포가 항상 작은 배를 타고 서호(西湖)에서 노닐었으므로, 혹 손이 임포를 찾아올 경우, 동자(童子)가 학의 우리를 열어 주면 학들이 나가서 날므로 임포가 그것을 보고서 손이온 것을 알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宋史' 卷四.

3) 조조(曹操)의 시에 “늙은 준마는 마판에 엎드려 있어도 뜻은 천 리 밖에 있고, 열사는 늘그막에도 장대한 마음이 그치지 않는다.(老驥伏櫪 志在千里 烈士暮年 壯心不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4) '중용(中庸)' 28장에 “지금 천하가 궤철을 같게 하고 글은 같은 문자를 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5) 호시성(弧矢星)으로 일명 천궁(天弓)이라고도 한다. 모두 아홉 개의 별 가운데 여덟은 궁형(弓形)을 이루고 바깥의 한 별이 화살 모양을 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7년 계묘(1783, 건륭 48) 9월 7일(을미) 「구휼에 관한 윤음을 내리다」에 보면 ‘…… 호시(弧矢)를 두는 것은 옛적부터 하던 것으로써, 남자는 온 사방에 뜻을 두어야 한다는 의의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는데, 내가 원자에게 기대하고 바라게 되는 바는 단지 온 사방에 뜻을 두어야 함에 있을 뿐만이 아니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로서 보건대 弧矢는 남자가 천하에 듯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일러전쟁에 종군하여(從軍日露戰役)


甲辰


풍운이 감도는 일로(日露)의 전장터 風雲日露兩交兵
동아시아의 안위는 여기에 있다네 東亞安危在此行
머나먼 전장으로 떠나려 붓을 던지고 일어서니 萬里從征投筆起
누가 정주 땅에 서생이 올 것을 알았으리오 誰知定遠是書生6)
정주에서의 첫 전투(定州初捷)
대포는 연기가 자욱하게, 총알은 비처럼 날리며 산이고 바다고 울리는데 礮烟丸雨海山轟
보이는 곳마다 시체는 가로로 세로로 쌓여있네 當面堆屍縱復橫
천 여 명의 철기군이 놀라 후퇴하니 鐵騎千群驚膽退
욱일기 정주성에 높이 게양되네 旭旗高揭定州城
압록강에서의 두 번째 전투(鴨綠江再捷)
압록강 좌우로 큰 하천이 있는데 鴨江左右夾鴻溝
전쟁의 승패는 과감한 전략에 있다네 進退戎機在決籌
대포 소리 우레처럼 울리고 천지는 암흑과 같으며 礮響轟雷天地暗
검의 광채 눈처럼 나부끼고 귀신은 시름에 잠기네 劍光飜雪鬼神愁
곧장 호랑이 굴로 달려가듯 하니 어찌 위험하다고 사양하리오 直探虎穴寧辭險
뺏고 빼앗기는 병법을 서로 주고 받네 爭奪龍鞱各效酬7)
갑옷을 벗은 교만한 우두머리 싸울 마음을 잃고 卷甲驕酋都喪氣8)
기세는 파죽지세여서 만류하기가 힘드네 勢同破竹自難留
봉황성9)에서 도태10)의 환영회를 받아들이며(鳳凰城受道台歡迎會)
봉황성 밖에 주둔한 군대 구름처럼 빗겨있는데 鳳凰城外陣雲橫


6) 定遠은 定遠城이니 곧 정주(定州)이다.

7) 龍韜 : 병법(兵法)에 깊은 조예가 있는 것을 말한다. 주(周) 나라 여상(呂尙)이 지은 '육도(六韜)'라는 병서(兵書) 속에 용도(龍韜)와 호도(虎韜)의 편명이 들어 있다.

8) 왕양명[王陽明 양명학(陽明學)의 시조 왕수인(王守仁)]이 15세 때 꿈속에서 절구(絶句) 한 수를 짓기를, “갑옷벗고 전장에서 돌아온 마 복파, 젊어서 병법 익혀 어느새 머리 희어졌네. 우레 속에 떨어져 나간 흙먼지 구리 기둥, 여섯 글자 지은 시는 지워지지 않았어라.(卷甲歸來馬伏波 早年兵法鬢毛 雲䨪銅柱雷轟拆 六字題詩尙不磨)”라고 하였다.

9) 단동 북쪽에 위치한 오골성(봉황성鳳凰城)이라고 한다.

10) 道台는 지사보다 높은 관리이다.

적의 보루는 위풍만 보고도 각각 살려고 숨어 버렸네 敵壘望風各竄生11)
환영회는 성대하게 열리니 一境歡迎開盛會
삼군은 개선가를 제창하네 三軍齊唱凱歌聲
수암성에서 승첩하다(岫巖城奏捷)
안장 푼 분수령에 달은 휘엉청 解鞍分水嶺頭月
칼 씻은 수암성엔 샘이 솟는다 洗劍岫巖城下泉12)
적개심에 찬 모두가 노력한 것이니 敵愾諸人咸努力
진기한 행동은 거기장군이 선우를 격파하고 공적비를 세운 일과 같다네 奇動何似勒燕然13)
전쟁 후에 감상을 적다(戰役後述懷)
한나라와 조나라가 순치의 관계인 것은 의지함이 있어서이니 韓趙齒脣原有賴
월인이 진나라 사람 肥瘠한 것을 보는 것처럼 어찌 무관하리오 越秦肥瘠豈無關14)
지금 북방의 요상한 기운이 멈추었으니 而今北塞妖氛歇
우리 동아시아 잠시라도 평화롭게 되길 바라네 庶使吾東得暫閒
총군정에 올라(登銃軍亭)
산하의 안팎이 요새인 곳 表裏山河關防地
총군정에 오른 고금의 영웅은 몇 이던가 登臨今古幾英雄
허리에 찬 보검엔 신룡의 울음소리 들리고 腰間寶釼神龍吼
술 마신 후 노래 소리 길게 뽑자 호방한 기는 무지개를 뚫네 酒後長歌氣貫虹
일본 시바리큐의 국화연에 참석하다(日本芝離宮觀菊陪宴)
깨끗하게 구름사이로 어로는 길게 뻗어 있고 淸蹕雲間御路長15)


11) 望風은 멀리서 위세를 바라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12) '시경'의 下泉은 조(曹) 나라 사람들이 포학한 공공(共公)을 미워하고 명왕(明王)과 현백(賢伯)을 사모하여 지은 시이다.

13) 후한 화제(後漢和帝) 때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과 집금오(執金吾) 경병(耿秉)이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북선우(北單于)를 공격하여 회계산(會稽山)에서 크게 격파하고 연연산에 공적비를 세우고 돌아왔다. '後漢書' 卷27 竇憲傳.

14) 한유(韓愈)가 간의대부(諫議大夫) 양성(陽城)을 비판하며 지은 쟁신론(爭臣論)에 “그는 일찍이 정치에 대해서 한마디도 발언한 일이 없으니, 이는 그가 정치의 잘잘못을 보는 것이 마치 남쪽의 월 나라 사람이 북쪽 진 나라 사람의 살지고 여원 것을 보는 것처럼 무관심해서, 그의 마음속에 기쁨이나 슬픈 느낌이 전혀 들지않기 때문이다.(未嘗一言及於政 視政之得失 若越人視秦人之肥瘠 忽焉不加喜戚於其心)”라는 말이 나온다.

15) 淸蹕은 임금이 거동할 때 도로를 깨끗이 쓸고 통행인을 물러서게 하는 것을 말한다

별궁에 행차하시어 가을 국화를 감상하시네 別宮駕幸賞秋芳
귀족, 관리들 달려와 배열하니 千官趨列公侯伯
일 만 가지의 꽃은 일제히 붉고, 희고, 노랗게도 피었네 萬朶齊開紫白黃
그림자는 어른거리고 바람은 선듯 불어와 허리에 찬 검을 휘감는데 密影引風侵劍佩
담백한 향기를 내뿜는 이슬에 적은 국화 꽃잎을 잔에 띄우네 淡香和露泛壺觴16)
두 나라는 이미 우호조약을 맺었기에 兩邦固已修隣好
외람되이 오늘 잔치에 참석하여 영광을 갑접로 누리네 是日叨筵倍有光
동양협회 환영회 석상에서(東洋協會歡迎會席上)
동양협회의 명성은 높고 훌륭하며 뜻은 진실되어 大社隆隆旨義眞
동아시아가 서로 친해지도록 힘써 노력하였네 力張東勢密相親
하늘에 있는 하나의 달과 하나의 해가 천지를 밝히듯 一天日月光華裏
동양협회는 원래 내외의 구분이 없다네 團協元無內外人


대만을 시찰하며(視察臺灣)


壬戌(임술년 1922)


만 리 먼 길을 배 한척에 의지해 바다를 건너니 萬里孤篷入海中
대만은 春色으로 四時가 동일하구나 臺灣春色四時同
하늘은 치우쳐 편애하지 않고 天公自是無偏覆
세상을 기르심에 골고루 우로를 적셔주시네 化育均沾雨露功
대만에서 아카시총독 묘에 바칩니다17)(臺灣上明石總督墓)
산마루 지는 해는 忠碑를 조문하는 듯 峴山落日弔忠碑
한양에서 사령관 하시던 때를 추억하네 回憶漢陽司令時
해마다 봄이 오듯 그 남은 한도 끝도 없으니 春色年年無限恨


16) 당대(唐代)의 문신 고섬(高蟾)의 낙제시(落第詩)에 “하늘 위의 벽도는 이슬에 적시어 심고, 태양 곁의 홍행은 구름 의지해 심거니와, 연꽃은 가을 물 위에 나서 자라는 것이라, 봄바람을 향해 못 피는 걸 원망치 않는다오.(天上碧桃和露種 日邊紅杏倚雲栽 芙蓉生在秋江上 不向東風怨未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7) 明石元二郞(1864~1923)는 1883년 步兵소위로 임관하면서 군에 들어가 여러 번 승진하여 때로는 독일에서 때로는 프랑스에서 주재 무관으로 있었으며, 1908년에 한국주둔군 參謀長 겸 헌병대장으로 조선에 왔다. 1910년 7월에 이르러 統監府 警務總長이 되어 조선 전국의 警務를 총괄하여 그 호령에 조선이 기침 소리 하나 없는 듯 했다.

1912년 12월 中將으로 승진하고 1914년 4월 參謀次長으로 영전하여 조선을 떠났으며, 이어서 제6師團長이 되고, 다시 臺灣總督이 되고 大將으로 승진하였으며, 1918년부터 1923년까지 名總督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사망하였다. 러일전쟁 때에는 수훈을 세워 功3級 金鵄勳章을 수여받았으며, 조선에 부임과 동시에 勳2等에서 勳1等으로 승급되었다.

아카시 장군께서 웅혼한 지략을 완전히 펼쳐보지 못하신 것이라네 將軍雄略未全施
이쓰쿠시마18)에서 미즈노 정무총감19)의 시에 차운하며(嚴島次水野香堂總監韻)
단풍이 든 산하는 절정에 달하였고 楓溪山水最多情
이곳에 온 사람들 옷차림도 정결하네 到此遊人巾屐淸
고금 간에 나라를 걱정하던 많은 사람들 多少古今憂國事
평범한 시어에서도 그 마음 보이네 尋常詩語見丹誠
가고시마 나에시로가와20)의 조선촌을 방문하다(鹿兒島苗代川訪朝鮮村)
임진왜란 때 조선인들이 많이 바다를 건너와21) 壬役鮮民多渡海
도예촌을 만들어 10대토록 자손에게 전했네 一邨窰業十傳孫
만나보니 동족의 피붙이 相逢自有同邦誼
이별임해 슬픔의 눈물이 흘러내리네 怊悵臨歧帶淚痕


뤼쉰전적지(旅順戰蹟)


지꽌산과 얼링산22)은 鷄冠山與爾靈山
철벽금성으로 험한 요새였네 鐵壁金城是險關
우습구나, 러시아 황제의 극동책이여! 可笑露王極東策
어찌 기를 거두고 돌아갈 걸 기대했겠는가 那期當日捲旗還
백골이 성안 가득 쌓인 (지금은)백옥산은 萬骨堆城白玉山23)
지혜로 알아채고 용감히 돌격하여 견고한 요새를 돌파하였네 推知勇敢破重關
충성을 새긴 높은 탑은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으니 表忠高塔令人式
말가죽에 쌓인 송장이 되어 돌아간대도 어찌 원망하겠는가 何恨當年裏革還


18) 嚴島. 일본 히로시마만에 있는 섬.

19) 水野鍊太郞(1868~) 1892년 동경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03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9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에 임명되었다.

20) 임진왜란 때 강제 연행된 조선인 기술자와 도공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은 나에시로강(苗代川)을 중심으로 4개 지역에 흩어져 저마다 특색있는 도자기를 생산했을 뿐 아니라, 대대로 가업으로 물려받아 뛰어난 기술을 이어오고 있다.

21) 일본이 조선의 도공을 강제로 끌고 온 것을 자발적으로 ‘바다를 건너’온 것처럼 묘사하였다.

22) 뤼순(旅順)에 있다.

23) 뤼쉰커우완(旅順口灣)의 북쪽에 있는 산.

설날 어제 曉山雲에 화답하며(元朝謹和 御題曉山雲)


癸亥(계해 1923)


푸른 산 위로 빛을 내뿜으며 해는 떠오르고 蒼山方曙日將昇
만가닥의 구름엔 상서로운 기가 엉겨있네 萬朶浮雲瑞氣凝
조각마다 비를 머금고 片片俱含作霖意
천하 모두 풍년이 들게 하네 能令環海樂年豊
미즈노 정무 내상(內相)의 시에 차운하다(次香堂內相韻)
靑邱에 변동이 일던 때24) 靑邱時事際艱辛
교화를 3년간 베풀어 백성들을 진휼하였네 宣化三年在養民
베개를 높이 베고 멀리 계신 香堂박사를 생각하노니 遙想香堂高枕夜
꿈에라도 영혼이 무궁화가 만발한 조선에 찾아오시길 夢魂來問槿花春
모리야 에이후를 구미 각국에 보내며(送守屋榮夫25)君送歐美各國)
명성은 이미 해동에 가득한데 令名已滿海東洲
붕새의 뜻을 지닌 모리야군은 멀리까지 날아오르길 바라네 此日鵬圖賦遠遊
구주 삼 만리를 두루 밟고 踏遍歐洲三萬里
문명을 손에 담아 오시길 文明風物掌中收
皐水 총독26)이 작위에 오른 것을 축하하며(賀皐水總督陞爵)
나라를 위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고 一心爲國秉公平
靑邱를 진정시켜 조선의 산하를 깨끗하게 하였네 坐鎭靑邱海嶽淸
특별한 공훈을 세워 작위에 올랐으니 建得殊勳陞爵位
빛나는 황은의 말씀 영광 더욱 새롭게 하시네 煌煌恩誥荷新榮
24) 3·1운동과 그 후 연이은 독립운동을 말한다.
25) 모리야 에이후(守屋 栄夫)는 1884年 11月 8日에 태어나 1973年 2月 1日 사망하였다. 그는 宮城県에서 守屋徳
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宮城三中과 二高를 다녔고 1910年에 東京帝国大学法科大学 独法科를 졸업하였다. 内務省에 들어가 千葉, 愛知各県理事官, 内務参事官, 朝鮮総督府秘書課長, 同庶務課長, 社会局社会部長等 등
을 역임하다가 1928에 퇴직하였다. 이후 6차례에 걸쳐 衆議院 議員에 당선 되었다. 1942年 3月 3日부터 1946
年5月1日까지 塩竈市長에 재직하였다.


26) 사이토 총독.


오오츠카 內府翰長의 승진을 축하하며(賀大塚內府翰長榮陞)
뛰어난 영재로 업적도 많이 쌓으시며 英才超邁績優良
조선에서 현명한 정책을 수고로이 펼치며 17년을 보냈네 槿域賢勞十七霜
한림원의 측근으로 발탁되는 은총을 입었으니 密邇金門承寵擢27)
기린과 같고 천리마와 같은 大塚 內府翰長은 먼 길에 발을 내딛으셨네 展蹄麒驥路程長
유아사 政務總監을 일본으로 전송하며(送湯淺政務總監歸東)


戊辰(무진, 1928)


우뚝하신 숙망은 세상에서 보기 드물었고 宿望嵬然一代稀
몇 년 동안 정무총감으로 중추원을 담당하셨네 幾年政務攬樞機
명석하고 재주 있는 이를 중추원에 등용하시니 明待材負巖廊中28)
변방이라고 어찌 귀의하지 않았겠는가 遐土那能挽不歸
나라를 위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시니 一心爲國秉忠誠
심부름하는 하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이름을 칭송하네 走卒兒童誦姓名29)
일본으로 가시는 만 리의 머나먼 길 萬里東溟歸路遠
하늘 저 멀리라 너무나 슬퍼 그 마음 억제할 수가 없네 天涯怊悵不禁情
야마나시 총독의 잔치에 가며(赴山梨總督宴)
버들가지 날리고 벚꽃이 은 저녁 바람에 나부끼는데 柳絮櫻花帶晩風
주가의 붉은 기는 높이 달려있구나 酒旗高處綺羅紅
상춘의 멋진 일은 모두들 즐기는 법 賞春勝事人同樂
담소는 화기애애하네 和氣融融笑語中
펑텐에서 장쭤린30)을 애도하며(奉天弔張督軍作林)
중국에서 제왕의 자리를 다투는 것에 온 세상이 놀랐고30) 逐鹿中原一世驚31)


27) 금문(金門)은 금마문(金馬門)의 준말이다. 여기서는 한림원을 가리킨다. 한 무제(漢武帝)로 하여금 금마문(金馬門)에서 조서(詔書)를 기다리게 한 데서 기인하였다
28) 옛날 ‘의정부(議政府)’의 다른 이름이다.
29) 走卒은 심부름하는 하인을 말한다.
30) 張作霖 (1873~1928)은 랴오닝성(遼寧省) 출생이다. 마적단 출신으로 러·일전쟁 때 장징후이(張景惠) 등과 함께 일본군의 별동대로 비밀리에 활약하였고, 그 후 둥산성(東三省) 총독의 지배하에 들어가 순방(巡防)대장이 되었다. 중화민국 수립 후 펑톈(奉天 :현재의 瀋陽)에 들어가 1919년경 펑톈 독군(督軍) 겸 성장(省長)으로서 전(全) 동북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920년 화북에서 즈리파(直隷派)와 안후이파(安徽派)의 군벌전쟁에

수년간의 전쟁에 백성들은 고통 받았네 多年戰伐惱蒼生
웅장한 지략과 뛰어난 업적은 물과 같이 흘렀으나 雄圖伯業同流水
펑텐에서 굳게 성을 지키지 못한 것 한스럽네 悔不奉天堅守城


이루국구역(伊婁局口驛)


극동도독이 옛날 거처하던 곳 極東都督舊時居
축조했던 보루는 쓸쓸히 터만 남아 있구나 營壘蕭蕭尙有墟
짜르가 만주와 조선을 삼키려던 정책은 嗟爾滿韓吞倂策32)
봉천의 전투에서 헛일이 되었네 奉天一戰總歸虛


러시아 황제를 조문하며(弔露帝)


우랄산위 검은 구름 떠있는데 烏拉山33)上黑雲浮
황제의 영화는 한낱 꿈이었구나 大帝榮華一夢休
소녀는 천년의 한을 알고 못하고 少女不知千載恨
언제나처럼 풀밭을 헤치며 꽃을 따고 있다네 摘花鬪草尋常遊


모스크바34) 정치 상황(莫斯科政情)


억지로 빈부를 고르게 하니 强要貧富賦平均
노동하지 않고 빈둥대는 백성을 도리어 만들어내네 還作不勞遊惰民
공산주의는 원래 좋은 방책이 아니니 共産元來非勝算
다만 약소국으로 강한 나라를 따르게 할 따름이라네 但令弱國聽强隣
옛날 전횡했던 제정시대엔 憶昔專橫帝政時
부호가 자비를 베풀지 않은 것을 증오하였네 最憎豪富不慈悲


서 즈리파를 지지하고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러허(熱河)·차하르(察哈爾) 등을 세력범위에 넣은 뒤즈리파의 우페이푸(吳佩孚)와 화북쟁탈전을 여러 차례 벌여 장쑤(江蘇)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한때 형세가 불리하게 되어 북동으로 후퇴한 다음, 1926년 즈리파 군벌과 합세하여 다시 베이징(北京)에 진출, 민국혁명
군 북벌저지에 임하였다.

1927년 열강의 묵인하에 베이징의 공사관 구역으로 군사를 투입하고 소련대사관의 수사 등 탄압을 가하여 리다자오(李大釗) 등 20명을 처형하였다. 그 해 6월 대원수라 칭하고 일본을 배경으로 베이징정부를 장악하였으나, 북벌군에게 패배하여 베이징으로부터 철수·퇴각하던 중 1928년 6월 그가 탄 열차가 펑톈 부근에 이르렀을 때 폭파되어 사망하였다.


31) 사슴(鹿)은 즉 천하제위(天下帝位)를 비유한 것이다. ‘정대창속연번로(程大昌續演繁露)’에 “진(秦)이 사슴을잃었는데 천하가 다 같이 쫓는다.(秦失其鹿天下共逐之)” 하였다.
32) 嗟爾는 짜르 즉 러시아 황제를 가리킨다.
33) 烏拉山은 우랄산을 지칭한다.
34) 莫斯科는 모스코바를 말한다.

가련하다! 혁명의 진정한 하늘의 뜻이어야 하니 可憐革命眞天意
어찌 일찍 재앙이 여기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가 何不早知災在玆


퇴위한 독일 황제궁(獨逸退帝宮)


貝關에 길게 무지개 뻗어 있는데 貝關連雲百丈虹
지금 주인은 어디 있는지 而今安在主人公35)
웅혼한 지략으로 천하를 驚動시켰으나 一時雄略驚天下
애석하구나! 전쟁을 제대로 마치지도 못하였구나 可惜戰爭功未終


독일 국민성(獨逸國民性)


남녀노소, 관민 할 것 없이 모두가 노력하니 老少官民皆努力
농업, 상업, 공업, 예술에 있어서까지 세계의 중심이 되네 農商工藝亦中心
부흥을 도모하니 얼마나 훌륭한가 指期興復何其壯
모진 시련도 두루 겪고 많은 고통도 받았지 閱歷風塵積苦深


영국에 대한 소감(英國所感)


泰西 문화의 중심지 泰西文化中心地
누대에 훌륭한 군주와 재상들 있었지 歷代君主老大家
국민의 정도는 국민에게 권력이 있다는 것이라네 國民正道多權力
템즈 강 가에 의사당 높이 서있네 議事堂高耽水河


네덜란드 올림픽 경기대회36)(和蘭萬國競技大會)


국가가 울리는 가운데 국기는 높이 게양되고 國歌聲裏國旗揚
남자 선수들 기상도 씩씩하지 選手男兒意氣强
15만 명은 갈채를 다투며 十五萬人爭喝采
네덜란드 성 위로 국위를 빛내네 和蘭城上國威光


35) 1888년에 즉위한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와 대립하여 1890년에 그를 은퇴시킨다. 비스마르크가 실각하자마자 친정을 실시한 빌헬름 2세는 적극적으로 3B 정책이라는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그 이후로는 3C 정책을 내세워 영국 및 러시아 등과의 대립을 낳아, 최종적으로 비스마르크 체제가 파탄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1918년 11월 9일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과 함께 독일 11월 혁명이 일어나 제국은 붕괴되고,다음날 빌헬름 2세가 망명한 후에 바이마르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공화제가 세워졌다.
36) 1928년 5월 17일부터 8월 12일까지 열린 제9회 암스테르담올림픽을 말한다.

워터루전장(烏達古戰場)


나폴레옹은 일대의 영웅으로 奈翁一世大英雄
30세에 천군만마를 거느렸네 三十登壇萬馬中
해하 전투의 항우처럼, 패한 나폴레옹은 垓下秋風輸一戰37)
외로운 섬에서 죽었으니, 한스럽기도 하네 終身孤島恨無窮


나폴레옹묘(奈翁墓)


나폴레옹묘 근처의 펄럭이는 전쟁기 奈翁墓畔戰嬴旗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네 百歲而今萬口碑
러시아 황제가 새로운 석곽을 보내니 露帝贈遺新石槨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했던 것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아서였네 不嫌苦鬪在當時


파리 미인(巴里美人)


초저녁 홍등가에 서니 紅燈初夜立街頭
섬섬옥수의 미인이 나를 구애하는 듯 玉手輕輕若訴求
교태로운 몸짓으로 사람을 끌기에 몇 발자국 같이 가보니 嬌態引人聯數步
파안대소하며 樓臺에 오를 것을 으름하네 破顔一笑脅登樓


素無古 전장(素無古戰場)


영국과 독일의 사나이들은 국가의 위난을 위해 죽었고 英獨男兒死國難
아무도 없는 무덤가 비석엔 꽃만이 꽂혀있네 空留片石揷花殘
아녀자들은 당시의 일을 모르는지 兒娘不識當時事
무리지어 쇠구슬 잡는 놀이만 한다네 遊戱成群採鐵丸
말로는 평화를 말하더니 갑자기 전쟁이 터져 口說平和輒起難
창칼로 서로를 죽이네 干戈鋒鏑動相殘
사람의 목숨을 상하게 하는 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니 損傷人命非人道
어찌 다시 총알을 만들게 하리오 安得敎無更製丸


37) 한 나라를 건국한 유방은 초패왕(楚覇王)인 항우(項羽)와 여러 해를 두고 싸우다가, 최후에 해하(垓下)라는곳에서 항우에게 큰 타격을 주어서, 항우는 오강 나룻가에서 자살하였다.

스위스(瑞西)38)


눈 덮인 봉우리 하늘 밖으로 반쯤은 꽂혀있고 雪嶽崚嶒半揷天
케이블카 덕분에 곧장 산꼭대기로 올라가네 齒車39)直上最高顚
천년의 민국을 마치 천하를 바둑판 놓듯 다투니 千年民國如棊局
역력히 전쟁의 포화 눈앞으로 다가오는 듯하구나 歷歷風烟來眼前
스위스의 산수는 조선과 같아 瑞西山水似朝鮮
호수가의 누대 위세가 우뚝하구나 湖上樓臺勢屹然
사방 풍경 둘러보니 看盡東南多少景
금강산의 절경이 이에 비견되네 金剛絶勝次比肩


부례이수향(夫例二水鄕)


하늘에 가득 찬 달과 별들 물결위로 비추고 滿天星月照波光
호수 위 시인의 흥취를 끌어내네 海上詩人引興長
바람이 문득 불어오니 노래 소리 어디서 들려오는가 風便歌聲何處至
멋진 배를 탄 여인은 납량을 나왔나보네 畵船遊女納新凉


로마회고(羅馬懷古)


기원전 2000년 풍우에 紀元風雨二千年
로마왕궁은 밭두렁이 되었네 羅馬王宮化陌阡
백대토록 기독교를 이어왔으니 百世相傳基督敎
공자, 석가와 더불어 賢者라 하겠네 並參孔釋共推賢


폼페이(寶音夫而)


10만 인이 살던 도회지가 十萬人居都會地
2000년 전에 화산재에 매몰되었네 噴灰埋沒二千年
발굴해낸 모든 것이 정교하니 掘來物物多精巧
(이렇게 해서) 고대 문명이 비로소 전해지는구나 古代文明始可傳


이집트(埃及)


항구에 정박해 있는 이집트 행 배를 타고 坡上停船埃及行


38) 瑞西는 스위스를 말한다.
39) 齒車는 톱니바퀴를 말한다.

열풍이 휘도는 사막의 도성에 도착하네 炎風沙漠一都城
낙타의 등에 올라 유적을 탐방하니 駱駝背上探遺蹟
금탑 층층이 저녁 노을 비추네 金塔層層夕照月


수에즈운하(蘇士運河)


수에즈운하가 불통되었다면 蘇士運河若不通
하늘 끝 희망봉으로 우회했으리 迂回天末喜望峯
지중해가 홍해와 연결되니 地中海水連紅海
예절과 운하를 뚫은 공적은 수나라 양제와 같구나 禮節夫功煬帝同40)


白山丸 선상에서(白山丸船中)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 평지를 가는 듯하고 航海猶贏平地還
오층의 선박은 산보다 크네 五層船閣大於山
표연히 羽化登仙하는 것 같아 飄然羽化如仙子41)
忙中閑을 우연히 얻은 듯하네 偶得忙中一日閒


인도(印度)


석가모니가 탄생하신 신령한 땅 靈地誕生釋迦佛
룸비니 청정한 땅, 함지의 동쪽에서 목욕하듯 해는 떠오르네 尼園淸淨浴池42)東43)


40) 隋煬帝(569~618). 3대로 끝난 중국 수(隋)나라의 제2대 황제로 이름은 양광(楊廣)·양영(楊英)이고 시호는 양제이다. 아버지인 문제(文帝) 양견(楊堅)과 황태자인 형 양용(楊勇)을 죽이고, 604년 제위에 올랐다. 그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토목 및 정복 사업을 벌였다. 608년 남쪽의 쌀 산지와 북쪽의 베이징(北京) 지역을 잇는 대운하를 건설하고, 610년 이러한 수송체계를 더욱 확대했다. 이것은 후에 남쪽의 식량을 수도권과 북쪽 변방의 군대에 공급하는 데 이용된 대운하망의 시초가 되었다. 또한 내륙 아시아로부터 중국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여 장성을 수축했다. 더욱이 궁궐을 짓고 장식하는 데 국고를 낭비함으로써 위축되어가는 재정에 더욱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그는 특별히 제작한 수레로 멀리 떨어진 숲에서 잘 자란 나무들을 실어다 정원을 꾸몄다. 후에는 몇 차례의 대외원정을 단행하여 제국의 영토를 남쪽으로는 지금의 베트남, 북쪽으로는 내륙 아시아까지 확장했다. 그러나 612~614년 3차례에 걸쳐 벌인 대(對)고구려 원정이 완전히 실패로 끝나자, 백성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전국은 반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양제는 강도[江都 : 지금의 양저우(揚州)]의 이궁(離宮)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그곳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었다. 수의 관료였던 이연
(李淵)이 전국을 재통일하고 당(唐 : 618~907)을 세웠다.

41) 소동파(蘇東坡)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 나오는 말이다.
42) 浴池의 池 는 咸池로 함지는 동방에 있다는 큰 못의 이름이다. '淮南子' 天文의 “해가 양곡(暘谷)에서 나와 함지에서 목욕한다.”에서 나온 것이다.
43) 藍毘尼園로 룸비니(藍毘尼)라고도 한다. 이곳은 고대 중인도 가비라위성(迦毘羅衛城)에 있었던 숲의 이름인데 석가모니가 탄생한 장소로서 성지(聖地)이다. 현재 네팔의 남부 타라이 지방에 있다. 남비니(藍毘尼), 남비니원(藍毘尼園), 유비니(流毘尼), 유미니(留彌尼), 가애(可愛), 화향(花香), 해탈처(解脫處)라고도 한다.

근심이 없는 나무 밑에 자비의 비가 내리니 無憂樹下慈悲雨
만겁중의 창생들을 널리 구제하셨네 普渡蒼生萬劫中


홍콩(香港)


전국시대엔 오월의 땅 戰國當時吳越地
지금은 홍콩이 되어 영국에 속하네 今爲香港屬英蕃
동양과 서양의 배들이 숲처럼 들어서있고 東西船舶如林立
만국의 수출입 물건들로 가득하네 萬國通輸物物繁
난징 국민당에 대해 듣고서는(聞南京國民黨)
난징 국민당이 借問南方國民黨
평화통일하자는 것이 진심인가 묻고 싶네 平和統一果眞情
한집안에서 창 들고 싸운다면 응당 이익 되는 것은 없으리니 一室操戈應不利
남북이 대동맹을 맺는 것만 못하네 莫如南北大同盟


세계대세(世界大勢)


백인종과 황인종은 동서로 각각 나뉘어져 白黃人種各西東
문자나 말이 서로 통하지 않는다네 文字方言互不通
길이 평화롭기를 구하니 欲究平和長久策
부디 그보다 먼저 아시아 전체가 단결을 해야하네 先須全亞結心同
이시모토 남작에게 드리다(贈石本男爵)44)
六大洲의 문물은 날마다 새로워지지만 六洲文物日趨新
뽕나무와(일본과) 무궁화(조선은) 원래 봄을 같이 한다네 桑槿元來共一春
강토가 현해탄을 사이에 두었다고 말하지마오 彊土45)休言玄海隔
마음을 같이하는 이웃이라네 同情便是比隣人


사이토 총독 초대연(齋藤總督招宴)


녹천정에서 한가로이 읊조리는데 綠泉亭上得閒吟
마침 꾀꼬리 날아오자 골짝은 더욱 그윽해지네 黃鳥時來谷又深


44) 石本新六(1854~1912)는 일본 육군 대신으로 러·일 전쟁 때 육군차관을 지냈다.
45) 疆土의 誤記인 듯하다.

늙은 재상의 풍류는 더욱 멋있어지시니 老相風流今益壯
반나절간 신선과의 인연에 옷깃을 여미네 仙緣半日整盡襟
니노미야 손토쿠 옹 신사(二宮尊德翁神社)
근검을 몸소 실천하시고도 즐거움 남음이 있어 勤儉躳行樂有餘
더벅머리, 이미 배울 나이가 지난 자도 모두 책을 들고 모여들었네 髫齡已學手持書
후인들의 흠모의 정은 끝이 없어 後人感慕終無極
지금도 시의 역전에서 모두 下馬하네 今市驛前皆下馬


와다 박사를 전별하며(別和田天民博士)


오늘까지 21년 此來二十一年間
우국우민에 잠시도 쉬지를 못하셨네 憂國憂民暫未閒
재무를 담당했으나 문학적 재능도 풍부하셨지 財賦身兼文學富
공이 귀국하시는 걸 누가 애석해하지 않은가 如今誰不惜公還


국경경비(國境警備)


나라를 위해 간성이 되는 것이 최고의 공적인데 爲國干城功最高
어지러이 봉화는 올라가도 경비도 없고 말만 교만하게 울어대네 狼烽無警馬嘶驕
출정한 사나이는 원망에 연연해하지 말지니 莫言戀戀征夫怨
나라가 편안해지고 소란이 잠잠해지는 것은 그대에게 달렸으니 百堵皆安斷繹騷


국경의 분위기(國境情調)


강가에서 많이들 이별을 하는데 江頭留別綺羅群
넋을 잃은 듯 반쯤 취해 기대있네 却爲消魂倚半醺
가지마다 축축 늘어진 수양버들 楊柳絲絲垂不得
아침마다 가지를 꺾여 몇 사람에게 이별의 선물 되는가 朝朝折贈幾人分


또 다시(又)


아침에 자성을 출발하여 저녁에 초산에 도착하니 朝發慈城暮楚山
돌아가는 배 무탈하게 용만에 도착했네 歸帆無恙下龍灣
한 줄기 피리소리는 어디에서 들리는지 一聲長笛知何處
중국 상인들도 정녕 노를 돌아가는 노를 내려놓고 있구나 定有胡商放櫂還
동행한 아베 선생께 드리며(贈同行阿部無佛先生)
아베선생의 儀表는 산과 같고 先生儀表重如山
槿域에서 동분서주 하시며 수고로우셨네 杖屨頻勞槿域間
천리 먼 곳을 오신 것은 유람하기 위해서는 아니라네 千里來遊非攬勝
크게 보호해주려는 뜻 지니셨으니 만주의 모든 이들 환영하네 志存大庇摠歡顔


만주의 시사(滿洲時事)


만주는 통군정을 사이해 있거늘 滿洲隔在統軍亭
편지 교환도 잠시 멈춰졌구나 玉帛交歡46)暫滯停
변방을 나옴에 먼지가 자욱하고 머리는 봉두난발의 백발인데 出塞前塵蓬鬢白
성경의 소식 들리길 포연이 자욱하다하네 盛京消息砲烟靑
연맹은 전쟁을 중단하려하나 聯盟要緩休兵革
조정은 장성들에게 강한 군대를 양성하라고 하네 廟議持强讓將星
평화가 지금엔 응당 마땅하지만 平和而今應有道
누가 정책을 펴서 일깨워줄까? 誰能展策可提醒47)


관동군을 위문하며(慰問關東軍)


봉천성밖엔 찬바람도 되게 불어오는데 奉天城外朔風多
노련한 천황의 군사는 차가운 창을 베고 잠드네 老살王師枕凍戈
다만 거류민의 안전을 위한 방책이지 只爲居民安定策
분명 만주를 침략해 이웃과의 교린을 해칠려는 것은 아니라네 判非掠地失隣和


코가 연대장을 애도하며(弔古賀聯隊長48))


장군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이라 將軍一死死猶榮
천년토록 청사에 길이 훌륭한 이름 남기게 되었네 竹帛千秋有盛名
충성의 혼령 응결되고 흩어지지 않을 것이며 也是忠魂凝不散
위엄으로 금서성을 진압하시리라 儼然來鎭錦西城49)


46) 歡은 換의 誤字인 듯 하다.
47) 提醒은 남이 일깨워준다는 뜻이다
48) 古賀 伝太郎(1880년 3월 1일~1932년 1월 9일)은 日本陸軍의 軍人으로 최종계급은 陸軍大佐였으며 「古賀聯隊長」이라고도 불렸다. 佐賀中学校을 거쳐 1901년에 사관후보생(15期)이 되어 騎兵3連隊에 입대하였고 1904년에 騎兵少尉로 任官하였다. 러일전쟁에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931년 満州事変에 混成第三十八旅団에 배속되어 출동했다. 그곳의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49) 錦西城는 古賀연대장이 사망한 곳이다.

요다 장군에게 드리다(贈依田將軍)
금주성에 욱일기 높이 게양하고 旭旗高揭錦州城
단칼에 만병을 퇴각시키셨네 一釼猶能却萬兵
부디 개선의 축하일이 빨리 와서 爲祝凱還須及早
기린각에 이름을 새기길 기다리네 麒麟高閣待君名50)
만주국 건국을 축하하며(祝滿洲新建國)
9월의 만주에 천황의 군대가 滿洲九月下天兵
簞食瓢飮으로 진군하니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환영하네 一境簞壺老幼迎
구정부를 혁파하고 새 나라를 세우니 革舊而今新政好
3천만 민중 다시 소생한 듯하네 三千萬衆得蘇生
종군시의 감상을 회고하며(憶從軍時有感)
이미 3년 전에 종군하였는데 從軍已過歲三庚
추억해보니 감정이 새록새록 回憶偏多感舊情
금석처럼 중중한 목숨 아끼지 않고 惜命縱如金石重
난에 임해 깃털처럼 가벼이 여기네 臨難視若羽毛輕
용병술엔 용감한 것이 최고 用兵宜有兼人勇
적을 막는데 만리장성은 필요하지 않다네 防敵無要萬里城
기린각에 이름 걸리는 것은 본래 뜻이 아니니 獜閣題名非素志
다만 보고 기억난 것을 모아 한편의 글을 완성해 보려 한다네 秪51)將記覽一篇成
마츠다 七十自述에 화운하다(和松田學鷗七十自述韻)
인간의 시비에서 벗어나니 肯向人間管是非
오늘 맺은 신선의 인연 세속의 더러움이 없구나 仙緣今日俗塵稀
불함산의 눈과 두만강의 비를 맞으니 不咸山雪豆江雨
옛날 붕새가 만 리를 날았던 것과 같네 伊昔鵬程萬里飛
오랫동안 쌓은 문장은 정화를 다하였고 多年詞壘盡精華
은혜와 혜택은 넘쳐 멀고 가까운 모든 곳에 두루 미치네 流澤洋洋及邇遐
한줄기 문의 근원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니 一脈文源猶不絶


50) 한(漢) 나라 선제(宣帝) 때에 곽광(霍光) 등 11인의 공신(功臣) 초상화를 기린각(麒麟閣)에 걸어두고 기념하였던 고사를 말한다. '漢書' 蘇武傳.
51) 祗의 오기인듯하다.

성중에서 때때로 (마츠다 선생의 시를) 읊고 노래하네 城中時有誦絃家
갑술년 봄에 북관경비대를 위문하며(甲戌春作北關警備壯士慰問之行)
두만강과 압록강 이어진 곳 豆滿江連鴨綠江
북풍은 불고 눈 내리는 변방의 추위는 두려울 정도네 朔風塞雪冷威懼
변방 천리 백성조차 안도하니 邊關千里民安堵
천황의 군대가 우리나라 보호해주어서라네 爲是王師護我邦
백두산 아래 사람들 보기 드무니 白頭山下見人稀
오랫동안 변방을 지키느라 돌아가지 않아서라네 邊戍多年未解歸
간혹 한밤중에 봉화가 일어날까봐 或恐烽烟中夜起
전군은 잠시도 갑옷을 벗지 않고 있다네 全軍暫不卸戎衣


무산을 노래하다 右茂山52)


옛날 누가 육진을 세웠나 往昔誰營六鎭城
거주민들 아직까지 절재 김종서 居人尙誦節齋名53)
남이장군과 윤관원수의 이름을 칭송하네 南將軍54)與尹元帥55)
두만상 물결에 이미 출정했었지 豆萬江波已洗兵56)


52) 무산은 함경북도(咸鏡北道) 무산군의 군청(郡廳) 소재지(所在地)로 두만강(豆滿江)을 사이로 중국(中國)의 간도(間島) 지방(地方)과 접하여 있는 국경(國境) 요충(要衝)이다.
53) 절재(節齋)는 김종서(金宗瑞, 1383~1453)의 호이다. 본관 순천(順天)이고 자 국경(國卿)이며 시호 충익(忠翼)이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 1419년(세종 1)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으로 등용되고, 이어서 지평(持平)·집의(執義)·우부대언(右副代言)을 지냈다. 1433년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야인(野人)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鎭)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1435년 함길도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를 겸직하면서 야인들의 정세를 탐지·보고하고, 그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우의정 정분(鄭苯)과 함께 좌의정으로,유명(遺命)을 받아 12세의 단종(端宗)을 보필하였다. 대호(大虎)라는 별호까지 붙은 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신(名臣)이었으나,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 : 후의 世祖)에 의하여 1453년(단종 1)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擊殺)되고 대역모반죄(大逆謀叛罪)라는 누명까지 쓰고 효시(梟示)됨으로써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첫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746년(영조 22) 복관(復官)되었으며, 시조 2수가 전해지고 있다. 저서에 '제승방략(制勝方略)'이 있다.
54) 남이(南怡, 1441~1468)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1433년 야인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수양대군에 의하여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되고 대역모반죄라는누명까지 쓰고 효시됨으로써 계유정난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55) 윤관(尹瓘, ?~1111)은 여진을 정벌하다 실패해 별무반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여진 정벌군의 원수로 9성을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했다. 그 뒤 여진은 9성의 환부와 강화를 요청했고 조정은 9성을 지키기 어렵다하여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56) 군대(軍隊)를 젖게 한다는 것은 곧 대장(大將)이 출정(出征)하는 것을 뜻한다. 위 무제(魏武帝)의 '병요(兵要)'

회령을 노래하다 右會寧


백설과 황사 차갑게 섞이어 어지러이 날리고 白雪黃沙冷不收
황량한 성곽위로 떠오른 달은 사람을 슬프게 하네 荒城片月向人愁
봉화가 일어나지 않은 변방의 밤은 적막한데 烽烟不起邊宵寂
한곡의 징치고 부르는 노래(군인들의 노래) 소리 수루에 들리네 一曲鐃歌在戍樓


종성에서 노래하다 右鍾城


단단한 얼음위로 한자의 눈이 쌓인 두만강 堅氷尺雪滿江堆
북풍이 세차게 천리 밖에서 불어오네 浙瀝胡風千里來57)
적막한 고성에 추위는 살을 에는데 寂寞古城寒欲裂
羌笛소리 사람들 슬프게 하네 一聲羌笛使人哀58)


경원을 노래하다 右慶源


변방엔 예전에 호랑이가 횡횡하여 關塞曾年豺虎橫
해가 지고 뒤숭숭해지면 나타나서 사람들 놀래켰다지 紛紛日夕使人驚59)
지금 국경엔 피비린내 가셨으니 如今一境腥塵斷
집집마다 절구공이 두드리며 태평을 노래하네 亂杵家家搗太平


갑산을 노래하다 右甲山60)


강가의 수루에서 밤에 점호를 하는데 戍樓連江夜點呼
에 의하면 “대장이 출정하려고 할 때 비가 내려서 의관(衣冠)을 적시는 것을 세병(洗兵)이라 한다.”고 하였다.


57) 浙瀝은 바람부는 소리이다.
58) 羌笛은 고대 羌族의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유포된 吹管 악기의 일종으로 강관(羌管)이라고도 한다. 그 역사는 유구해 漢代 이래 역사문헌에서 그에 관한 기록이 적지 않다. '풍속통(風俗通)'에 이르기를 “漢武帝時에丘仲이 笛을 作하니 그 후에 또 강적(羌笛)이 있었다”고 했다. 陳暘의 '樂書'에는 또 이르기를 “羌笛은 구멍이 다섯이다. 馬融이 賦笛에서 이르기를 羌中에서 왔으며 舊制에는 구멍이 4개였을 뿐이다. 京房에서는 구멍 하나를 더하니 그리하여 五音을 갖춘다”고 했다. 隋·唐에서 宋·元·明 各代에 이르기까지 강적은 文人의 詩文에서 자주 보인다. 王之渙의 '涼州詞'에 이르기를 “羌笛何須怨楊柳, 春風不度玉門關”라고 했으며. 範仲淹은 '漁家傲'에서 읊기를 “羌管悠悠霜滿地, 人不寐, 將軍白發征夫淚”라고 했다. 羌笛은 油竹으로 制成하니, 雙管은 並連在一起하며, 장식에는 竹簧口哨이 있으며, 豎吹한다.
59) 紛紛 : ① 떠들썩하고 뒤숭숭함 ② 흩날리는 모양(模樣)이 뒤섞이어 어수선함 ③ 의견(意見) 등(等)이 갈피를잡을 수 없이 많고 어수선함.
60) 함경남도 갑산군에 있는 면이다. 개마고원의 중심부로, 교통이 불편하고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특유의 풍토병(風土病)이 있다. 갑산군의 군청 소재지이다.

북풍은 뼛속을 쑤시고 눈은 살 속을 헤집네 朔風砭骨雪侵膚
세상사람들아 征夫의 고통을 말하지말게나 世人莫道征夫苦
나라를 위하는 남아는 원대한 뜻 가지고 있다네 爲國男兒有遠圖


산수를 노래하다 右三水61)


이즈모다이샤62)를 참예하며(參詣出雲大社)
이즈모다이샤 세워진지 몇 천 년 되었나 出雲大社幾千秋
커다란 나무들이 가득하니 경내 더욱 그윽하다 喬木森嚴境轉幽
씨족이 원래 신앙으로 하는 것이 많으니 氏族元來多信念
부상은 신주라 불리는 게 맞구나 扶桑端合號神州
荻市를 거닐며 요시다 쇼인 선생63)을 추억하다(遊荻市憶吉田松陰先生)
쇼인 선생은 진정한 碩儒이셨네 松陰先生眞碩儒
죠슈의 호걸들 모두가 선생의 문도였다네 長州豪傑總文徒64)
메이지유신이 없었다면 若非明治維新業
동아시아는 누굴 의지하였을까 東亞山河孰竟扶
만주국 정샤오쉬65) 총리대신에게 바치다(呈滿洲國鄭總理大臣孝胥)
당하의 3정승, 그림자 물결에 비추고 堂下三槐影碧沉66)


61) 함경남도(咸鏡南道) 삼수군의 군청(郡廳) 소재지(所在地)이다. 압록강(鴨綠江) 지류(支流)에 임하여 있고 곡식(穀食), 목재(木材)의 산지이다. 갑산과 같이 교통(交通)이 불편(不便)하고 다른 지방(地方)과 풍속(風俗),습관(習慣)이 다르다.
62) 이즈모다이샤(出雲大社)는 일본 건국신화와 연관된 오쿠니누시노미코토(大國主命)를 모신 신사다. 오쿠니누시노미코토는 행복·결혼의 신으로 신사 내부에는 사랑을 기원하는 아기자기한 축문을 쉽게 볼 수 있다. 시마네현 동부 히카와군 다이샤마치에 위치한 이 신사의 본전은 일본 국보로 8세기 이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건축법인 다이샤 양식(大社)으로 건축됐다.
63) 吉田松陰(1830~1859)는 ·長州藩士였으며 思想家이자 教育者, 兵学者이다. 一般的으로 明治維新의 事実上에있어 精神的指導者이자·理論家로 불리운다.
64) 사쓰마(薩摩), 도사(土佐), 죠슈(長州)등 3개 번은 막부를 타파하고 메이지유신을 주동적으로 이루어냈다.
65) 정샤오쉬(鄭孝胥 ?~1938)는 清末의 官僚이며 満州国의 政治家이자 書家이다. 字는 太夷, 호는 蘇戡,·蘇盦등이다. 1932년 만주국이 건국되자 初代国務院総理(首相)을 지냈다. 1938년 사망하자 만주국 국장으로 치러졌다.
66) 삼괴구극(三槐九棘)의 준말로 세 그루 홰나무와 아홉 그루 멧대추나무라는 뜻인데, 주(周) 나라 때 조정의뜰에 홰나무 세 그루와 멧대추나무 아홉 그루를 심고 공경 대부와 삼공(三公)들이 그 아래에 자리를 나누어앉았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맑은 바람 불어오니 가슴이 상쾌해지네 淸風一席爽胸襟
처음 만나보니 정샤오쉬 총리대신의 의기는 산과 같이 중후하고 初逢意氣如山重
환영하는 마음은 바다처럼 깊네 及話歡情似海深
난리 후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노력도 많이 하시어 亂後多艱須努力
여유가 생겨 고상하게 읊조리기까지 하시네 公餘有暇且高吟
공의 충성심은 일찍이 휘호하신 곳에서 읽었는데 丹衷曾認揮毫處
만년까지 철석같은 마음을 간직하셨네 晩歲猶存鐵石心67)
정효서(鄭孝胥) 씨가 ‘晩歲猶存鐵石心’ 7자로 글을 써서 鄭孝胥氏以晩歲猶存鐵石心七字
족자를 만드시어 주셨기 때문에 결구로 삼았다 自題立幀以贈故結句及之


신징(新京)68)


팔월의 신징에 이슬이 내리는데 八月新京玉露天
계림에서 온 객 이곳에 며칠 머무네 鷄林行客此留連
도성에서 먼지 일으키며 수레바퀴는 닳도록 달리고 香塵九陌磨車轍
천문에 밝은 달은 뜨고 악기 소리 시끌거리네 明月千門沸管絃
사녀들 다투어 요임금 시대왔다고 돌아오나 士女爭歸堯日月
판도는 아직 우임금의 산천까지 들어가지 못하였네 版圖不入禹山川
구방에 다시 유신의 업을 이루었으니 舊邦再造維新業
국운은 천년만년 길이 드리우리라 寶祚應垂萬萬年
쑨원의 추도회에 참석하다(參孫中山追悼會)
명성은 팔방에 유명하며 大名傾八域
삼민주의에 뜻을 두었네 主義在三民
4억 중국인 중에 四億群叢裡
쑨원은 독보적이었네 中山獨一人
아! 공이 가신 후 嗚呼公去後
10여년이 지났구나 十載閱星霜
모든 사람들 추모하며 萬姓猶追慕
집집마다 향을 드리네 家家盡供香


67) 백거이가 일찍이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하고 나서 향산의 스님 여만(如滿)과 함께 향화사(香火社)를 결성하고 서로 종유하였으므로, 소식(蘇軾)의 식이거세춘하시립이영운운(軾以去歲春夏侍立邇英云云) 시에 “하찮은 인생이 우연히 풍파의 땅을 벗어나, 만년까지 철석같은 마음을 간직했으니, 정히 흡사 향산의 늙은 거사와 똑같이, 속세 인연은 옅고 도의 뿌리는 깊기 때문일세.(微生偶脫風波地 晩歲猶存鐵石心 定似香山老居士 世緣終淺道根深)”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68) 일본이 만들었던 만주국의 수도로 현재 중국 지린 성(吉林省) 창춘 시(長春市)이다.

내 이미 그 명성 예전에 들어 余已聞名久
마음속 깊이 우러러 사모하였네 中心仰慕深
오늘 참배해보니 今當參拜席
머리가 절로 숙여지네 稽首自難禁
늦봄 도쿄를 여행하며(暮春東京行十八韻)
한성의 강에서 3천리 떨어진 곳 漢城江戶路三千
기차로 이틀, 배로 하루 밤을 가야한다네 二日汽車一夜船
동풍에 의지해 일엽편주로 현해탄을 건너니 一葦東風玄海上
해가 三竿 높이 떠오르고 赤關에 도착했네 三竿紅日赤關前
가고시마 단군사에 참배하고 進參鹿島檀君社
죠슈의 고려촌을 가 보았네 散見長州高麗阡
두 곳은 문화가 끊어지지 않고 길이 이어져 兩地文華長不絶
천년의 역사가 조선과 서로 이어진 곳이네 千年歷史久相連
광활한 비와호 바다로 흘러들고 琵琶湖闊來全海69)
후지산은 하늘위로 높이 솟아있네 富士山高出半天
부상과 근역은 가지가 이어진 하나의 지역 桑槿連枝通一域
晉秦의 맺은 수호처럼 전대부터 계속 이어지네 晉秦修好續前緣70)
농원은 비옥하여 춘색을 머금은듯하고 農園肥沃含春色
공장은 들쑥날쑥 빼곡히 검은 연기를 토해내네 工竈參差吐黑烟
극장이 열리자 온갖 재주 자랑하고 演劇開時呈百技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샤미센 연주소리 들리네 歌聲高處奏三絃
도로는 평평하고 매끈한 것이 숫돌같고 行途平滑如砥石
경지는 고른 것이 마치 정전제한 것 같구나 耕地均齊似井田
사무라이들은 집집마다 보검을 소장하고 士族家家藏寶釼
명승지 곳곳에선 온천이 나오네 名區處處出溫泉
아리따운 여인네들 홍도화같은 도로 위를 천천히 걷고 佳姬緩步紅桃路
어부들은 시로이가와에서 낚시대를 던지네 漁子投竿白石川
사람마다 신심이 있어 모두 염불을 하며 人有信心皆念佛


69) 琵琶湖(비와호)는 혼슈(本州) 중서부 시가 현(滋賀縣)에 있다
70) 정목공(鄭穆公 기원전 649~기원전 606)이 처음 즉위했을 때 진목공(秦穆公)이 병사를 일으켜 침공했다. 정나라의 상인 현고(弦高)가 진나라 군대를 지치게 만 든 뒤 급보를 아뢰자 경계와 대비를 엄중하게 하니 진나라 군대가 물러났다. 3년 진(晉)나라를 도와 진(秦)나라를 공격했지만 왕(汪)에서 패했다. 이후 상황에 맞춰진·진(晉秦) 두 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18년 진영공(晉靈公)이 다시 호(扈)에서 제후들을 불러 모았지만 목공을 거부한 채 만나주지 않았다. 정나라 대부 자가(子家)가 조선자(趙宣子)에게 글을 보내 강대국사이에 낀 정나라의 어려운 입장을 설명하여 비로소 진나라의 양해를 얻을 수 있었다.

열도 대부분이 신령스런 땅이라 따로 신선되길 구하지 않네 地多靈境不求仙
가벼운 수레는 벗꽃 속을 질주하며 輕車疾走櫻花裡
준마는 버드나무 가에서 길게 울음을 빼네 駿馬長嘶楊柳邊
백종의 온갖 서적엔 온갖 지식이 실려 있고 百種諸書多博識
신문의 광고는 선전하기에 좋다네 新聞廣告好宣傳
군인이건 일반인이건 모두 근왕의 사무라이 軍民皆是勤王士
사회엔 애국의 현자 아닌 이 없네 社會無非愛國賢
경제 기관이 가장 발달하였고 經濟機關先發達
정신 단체는 중견이 되네 精神團體是中堅
이웃나라를 부식해주었고 외적을 물리쳐주었으며 扶存隣國能攘外
가장 솔선해서 연맹에서 이탈하였네 離脫聯盟最率先
협력 공영을 누가 감히 업신여기리오 協力共榮誰敢侮
동양은 이로부터 안전을 얻을 것이네 東洋從此得安全


만주국기행(滿洲國紀行)


강덕황제폐하를 알현하고71)(康德皇帝陛下謁見)
복숭아꽃 만발한 구중궁궐의 봄 仙桃爛熳九重春
지척에서 성인을 알현하였네 咫尺龍樓拜 聖人
관제는 중국식으로 정비되고 의식도 회복되니 官備漢廷儀復見
황제(천황?)께서 중국에 유신을 명하셨기 때문이라네 帝懷周室命維新
한 집안으로 보고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차별 없으시니 一家同視無遐邇
육부가 먼저 은혜스럽고 어진 은혜 실천했네 六府先修盡惠仁
특히 조선과 만주는 친밀하여야할 것이니 特念滿鮮親誼密
노둔한 제게 거류민 보호를 명 하셨다네72) 權差駑質護留民73)


71) 康德皇帝는 푸이(溥仪 1906.2.7~1967.10.17)를 말한다. 光緖帝의 동생 醇親王의 아들로 청조(清朝)의 제 12대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统帝)이며 퇴위 후 청(清)의 멸망 후 일본이 만주침략을 위해 세운 만주국의 왕이되었다. 1908년 3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으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퇴위하였고 만주사변 때 일본군에의해 1932년 만주국 집정(執政), 1934년 강덕황제(康德皇帝 : 재위 1934~1945)가 되었으나 1945년 만주국이붕괴됨으로써 퇴위되고 공산정권하의 중국에서 수감되었다가 특사로 풀려 나와 1964년 인민정치협상회의전국위원이 되었다. 저서로는 '나의 전반생(前半生)'을 출간하였으며, 1967년 10월 16일 사망 후 북경의 팔보산(八宝山)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가 1980년 5월 팔보산 혁명공묘(革命公墓)로 옮겨졌고, 1995년 1월 26일북경 남서쪽 하북성(河北省) 이현(易县)에 있는 청(清)의 황릉(皇陵)으로 이장됨으로써 사망한 지 28년 만에 청조의 황제로 복권되었다.
72) 박영철은 1936년 鮮滿拓植會社 설립위원에 임명되었다.
73) 權差는 여기서 허용하다는 뜻이다.

장징후이 총리가 조선에 오는 것을 삼가 감사하며(奉謝張總理景惠來鮮)74)
길게 흐르는 강위로 다리는 빗겨있는데 長江如帶一橋橫
조선과 만주는 원래 형제의 국가였다네 鮮滿由來是弟兄
승상의 지금 행차는 용이한 일이 아니오 丞相今行非易事
통상의 호혜조약은 특별한 일이라네 通商互約特殊情
처음 대면부터 이미 감복하여 마음을 다해 말씀하시니 初筵已服傾心話
가시는 곳마다 다투어 손을 들어 환영하네 到處爭看擧手迎
외람되이 같은 조정에 의탁하는 것 매우 기쁘나 猥托同朝雖甚喜
바람같이 달려가 미천한 제 정성을 어찌 바치리오? 趨風何以效微誠75)
지린성에서 吉興 장군을 방문하다(吉林訪吉興將軍)
장군이 진압하여 지키시는 지린과 선양 將軍鎭守吉瀋營
누차 軍門을 방문하여 태평성세를 하례드렸네 歷訪轅門賀太平76)


74) 정샤오쉬의 뒤를 이은 장징후이(張景惠)는 만주국이 몰락할 때까지 10년간 총리직을 유지했다. 관동군의 눈밖에 날 때마다 각 부서 장관이 빈번히 교체됐지만 장징후이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만주 토박이로 청년시절 두부 장수였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두부판을 뒤집어 엎고 자위단을 결성해 부자들의 재산을 보호해 주는 일을 하던 중 마적 두목 장줘린(張作霖)을 만나 인생이 바뀐 난세형 인물이었다. 원래 이름은 장징후이가 아니었다. 장줘린이 본명이었다. 그리고 현재 장줘린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의 본명이 장징후이였다. 이둘은 의형제를 맺으며 서로 이름을 바꿨다. 장줘린이 장징후이가 되고, 장징후이는 장줘린이 됐다. 술 취한김에 형님, 동생 하며 의형제를 맺었다고 떠들고 다니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군벌로 성장한 장줘린이 동북 3성 보안 총사령관을 거쳐 베이징 정부의 대원수로서 중국의 실질적인 국가원수로 활동할 시절 장징후이는 육군부 총장과 실업부 총장이었다. 동북으로 돌아오던 장줘린이 일본군에 의해 폭사할 때 그도 부상을 당했지만 건장한 체질을 타고났기 때문에 생명에는 이상이 없었다. 장줘린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을 거들어 만주의 친일세력을 제거했고, 장쉐량이 동북 3성을 장제스(蔣介石)의 중앙정부에 편입시킬 때도 조카의 결정이라며 지지했다. 장제스가 그를 통일정부의 군사 참의원 원장에 임명했던 것만 보아도 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만주사변이 발발했을 때 장징후이는 친구의 문상차 선양(瀋陽)에 와 있었다. 장쉐량은 장제스의지시로 일본군과의 충돌을 피했고, 군대를 동북에서 철수시켰다. 장징후이는 외톨이가 됐지만 정계의 원로며 만주 제일의 명망가였다. 그를 주시하던 일본이 합작을 요청하자 수락했고 국무총리와 협화회 회장, 건국대학 총장 등을 겸했다. 총리가 된 뒤부터 그의 활약은 관동군이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관동군이 시키는 것이라면 뭐든지 다했고 원하는 것이라면 양식·석탄·철강 등 뭐든지 달라는 것보다 더 줘야 한다는 것이 철칙이었다. 10년간 관동군과 단 한차례의 충돌도 없었다. 일본군의 공급부장으로 자처하며, 총리 집무실 손잡이까지 떼 군수물자로 바쳤다. 그에게는 7명의 부인이 있었다. 희극배우 출신인 일곱째 부인 사이에 태어난 아들 장사오지(張紹紀)를 부처님 모시듯이 했다. 이 아들은 일본 와세다대에 유학하며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진보적 조직인 ‘독서회’에 가입했고, 귀국 후엔 항일단체인 ‘동북청년구망회’에 가입했다. 총리 관저가 비밀집회 장소가 됐지만 장징후이는 알 턱이 없었다. 일본 패망 후 푸이와 함께 소련에 끌려갔고, 중공정권 수립 후 중국 측에 인도됐다. 푸순(撫順)의 전범수용소에서 염불을 외며, 하루에 한 번씩 장제스 욕을퍼붓다가 59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일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장사오지는 베이징국제관계대학(北京國際關係大學) 교수로 있다가 은퇴했다.
75) 趨風은 귀인을 공경하여 그 앞을 바람처럼 빨리 달려간다는 뜻이다.
76) 轅門 : 옛날 중국(中國)에서 전렵(田獵)할 때나 전진(戰陣)을 베풀 때에 수레로써 우리처럼 만들고, 그 드나드는 곳에는 수레를 뒤집어 놓아 수레의 끌채를 서로 향하게 하여 만들었던 것으로부터 ‘군영(軍營)’, ‘진영

간척민을 보호 하시니 푸른 들판이 개간되고 撫護墾民靑野闢
비적을 소탕하시니 푸른 숲은 깨끗해졌네 掃除匪客77)綠林淸
구방에 다시 춘추의 정의를 실현하시니 舊邦復見春秋義
후세에 청사에 이름 드리우리다 後世能垂竹帛名
허리 띠 느슨히 하고 가벼운 털옷 입고 잔치에 가니 緩帶輕裘臨夜宴
송화 날리는 강가의 달은 환영하는 이들 비추네 松花江月照歡情


신징(新京)


기틀을 세우고 국가를 건국하여 막 다스려지는 초기니 肇基洪業順治初
이 땅은 주나라의 豳, 한나라의 沛과 같구나 此地周豳漢沛如
돌아가는 곳에서 시작하고 근원에서 마치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니 會始歸終原有理
사방이 와서 만년도록 무궁할 것을 하례하네 四方來賀萬年居
나라는 오래되었지만 유신을 명하니 邦雖舊矣命維新
정치는 요순의 도의를 본받아 따르네 治效唐虞道義遵
아! 국기가 회복되니 나라 다스리는 것이 마치 손을 뒤집듯 쉽네 欹器復安如反手
태평성세 황제의 덕에 백성들 편안하네 春臺78)玉燭79)皥如民


봉천에서의 감회(奉天感懷)


천황의 군대 선양의 강적을 꺽은 天兵摧拉瀋陽强
30년 전 이곳 전쟁터에서 三十年前此戰場
의사는 금의환향하여 개선한 뒤이지만 義士錦衣凱旋後
산하는 지금 더욱 생기가 도는구나 山河今日倍生光
소년병은 종군했던 것을 추억하며 부른 노래엔 從軍回憶少年行
웅대한 마음 품은 채 칼을 잡고 만 리를 떠나 一釼雄心萬里程
아직도 얼음 얼고 포연 감돌던 보루와 尙記氷壕烟壘際
징소리 북소리가 귀가에 맴도네 依依鉦鼓耳邊聲
(陣營)’의 문, 영문(營門)을 말한다.


77) 匪客은 匪賊을 말한다.
78) 춘대는 '노자(老子)' 제12장에 “세속의 중인들은 화락하여 마치 푸짐한 잔칫상을 받은 듯, 다스운 봄날 높은누대에 올라 사방을 조망한 듯 즐거워한다.(衆人熙熙 如享太牢 如登春臺)” 한 데서 온 말로, 태평성대의 화락한 기상을 말한다.
79) 옥촉(玉燭)은 임금의 덕이 옥처럼 아름답고 촛불처럼 밝다는 뜻이다. '爾雅' 釋天.

황군을 위로하다(慰勞皇軍)


같은 동아시아에, 같은 황인종, 같은 언어의 同洲同種又同文
일본과 만주는 마땅히 친하게 지내야지 소원해지는 것은 옳지 않네 日滿宜親不可分
경제와 국방은 순치보거의 형세라 經濟國防脣齒勢
관동 만 리 까지 와서 황군이 주둔하네 關東萬里駐皇軍
사나운 바람과 눈은 남쪽 일본과는 다르니 獰風虐雪異南天
우리 천왕의 군대가 얼마나 견딜까 고민되네 悶我王師耐幾年
위무를 선양할 책임이 있으니 分內宣威揚武責
나라에 보답하려는 한결같은 마음이 양어깨에 무겁네 一心報國重雙肩


러시아군 정세(露國軍情)


만주의 머리 부분은 러시아의 꼬리와 서로 이어져 滿頭露尾境相連
각자 침략을 대비해 그 기세 굳건하네 各備侵凌勢固然
개미구멍이 둑을 무너뜨리는 것은 쉬운 일 蟻穴壞堤容易事
적들로 하여금 어지러이 활시위를 울리지 못하게 하라 莫敎游騎亂鳴弦80)
호랑이처럼 바라보며 극동을 경영하며 眈虎經營駐極東
군대를 늘리고 책문을 수선하여 헛되이 보내는 시간이 없네 增兵修柵歲無空
몰래 국경을 넘은 보초병은 새와 같이 날아 潛越哨軍飛鳥似
하늘을 배회하며 기회를 엿보네 徘徊碧落覘機中


이민을 권유하다(勸諭移民)


눈앞의 광야는 좋은 자원 眼前曠野好資源
백만의 동포 중 몇이나 사나 百萬同胞幾處村
보습 메고 국경을 나갈 때 알아야 할 것은 負耜出彊81)知有意
경작지를 개간하는 것은 천황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는 것 須將耕墾答天恩
인생의 최고로 귀한 것은 天彛人生最貴是天彛
근검하고 온량하며 분수에 만족할 것 勤儉溫良乃分宜
화복은 자기에게서 구해야하니 禍福由來求自已
천황의 가르침을 정성껏 한다면 누가 우리를 속이랴 丁寧聖訓豈余欺


80) 游騎는 적을 말한다.
81) 彊은 疆의 오자인듯하다.

만선일여(鮮滿一如)


조정의 사신, 상선들이 자주 왕래하는 官車商舶往來頻
한줄기 강을 좌우로 한 이웃이네 一帶江分左右鄰
모욕을 막아주고 위난에는 급히 와 구해주는 서로 사랑하는 두 나라 禦侮急難相愛地
형제와 같은 정이 있다네 兩情視若弟兄倫
동양 패권을 점하였다고 명성이 났으나 聲世東洋占覇權
(일본의) 관심은 풍우가 사방을 어둡게 하는 것이라네 關心風雨暗西天
황인종과 백인종이 제휴하는 평화책을 시행한다면 提携黃白平和策
떠오르는 해가 사방을 빛으로 깨끗이 하리라 旭日光明淨四邊
北支의 川岸 중장에게 드리다(呈北支川岸中將)
철기로 고북평을 종횡하더니 鐵騎縱橫古北平82)
위무도 당당하게 개선가를 부르시네 堂堂威武凱歌聲
언젠가 기린각에 이름이 새겨지고 從知他日麒麟閣
청사에 천년토록 위대한 명성 빛나리라 靑史千秋耀偉名
북지를 干戈로 동탕시키시고 北支一幅動干戈
내홍이 분분하니 망할 날이 멀지 않았네 內訌紛紛日索多
지금 황군의 위의로 견제하시니 今人皇威牽制裡
천하가 평화로워지리라는 것을 알겠네 從知八域盡平和
북지출정황군 위문가(北支出征皇軍慰問歌)
베이징에서 승리하고 다시 난징 北京戰捷又南京
만리의 산하를 해가 뜨는 하루 만에 돌파했네 萬里山河旭日程
(만리의 산하는 욱일기가 지나간 길이네)
혁혁한 황군의 위엄은 사방을 비추고 赫赫皇威光四表
동양은 이로부터 평화를 보존하게 되리라 東洋從此保和平


82) 영평부(永平府)는 서쪽으로 연경이 500리 떨어져 있다. 요(遼) 나라는 요흥군(遼興軍)을 두었고, 금(金) 나라는 남경(南京)으로 삼았고, 원(元) 나라 때는 흥평(興平) 또는 평란(平灤)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니, 상(商) 나라의 고죽(孤竹), 진(秦) 나라의 요(遼), 서한(西漢)의 우북평(右北平), 위(魏) 나라의 노룡(盧龍) 땅이다. 후위(後魏)는 평주(平州)를 두었고 또 북평관(北平館), 노룡현(盧龍縣)을 두었다. 성의 둘레는 9리 남짓인데, 남문으로 해서 들어가 비스듬히 동쪽으로 향해가면 영평부의 관아가 있다. 바깥문 현판은 ‘고북평(古北平)’이라 하였고, 안문은 보리(保釐)라고 했다.

전몰장군을 애도하며(弔戰歿將兵)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려 멀리까지 참전하여 一身許國遠從征
파죽지세의 위의로 청사에 이름을 남겼네 破竹威成汗竹名
다수의 충혼은 흩어지지 않고 응결되어 多數忠魂凝不散
길이 太原城을 지키리라 永年留護太原城


鄭孝胥를 애도하며(輓鄭總理孝胥)


왕을 보좌하는 재주에 유학의 전아한 자질을 겸하시고 王佐才兼儒雅資
명성은 사방에 넘쳐나셨네 聲名藹溢四方知
무장도 당세에 진정 대적할 이 없었고 文章當世眞無敵
공훈도 새로 건국된 만주국에선 누가 다시 있을까 勳業新邦更有誰
대신으로 3년간 있다 이미 물러나시고 秉軸三年身已退83)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니 운명을 어찌 바꾸리오? 騎箕一夕命奚醫84)
만 리 먼 곳에서 장례를 지내 가지 못하고 만사만 짓네 素車萬里違含紼85)
눈물을 거두며 상자 속의 시를 어루만지고 있을 뿐이네 收涕摩挲篋裡詩


정주 충혼비(定州忠魂碑)


정주성 밖에 세워진 충혼비를 읽어보니 定州城外讀忠魂
예전 종군하여 승전했던 때가 생각나네 憶昔從軍勝捷時
전쟁은 또 발발 했지만 지금은 모두 그때의 전우들 없으니 戰又而今皆不在
충혼비 가를 배회하며 홀로 슬퍼하네 徘徊使我獨傷悲
장고봉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하다(張鼓峰日露交兵)
붉은 러시아 왕이 장고봉을 침략하니 赤露王侵張鼓峰
천황의 군대 일격에 선봉을 대파했네 皇軍一擊破先鋒
적은 불리함을 알아 정전하지만 敵知不利雖停戰
다시 온다면 모두 섬멸시킬 것을 맹세한다네 若有重來誓滅凶


83) 秉軸은 요로(要路)의 대신(大臣)이다
84)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부열(傅說)이 죽은 뒤 그 정신이 기성(箕星)과 미성(尾星) 사이에 응결되었다는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莊子 大宗師'.
85) 紼은 만사를 말한다.

博文寺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시에 차운하다(博文寺次伊藤博文公遺韻)

광염처럼 시를 토해내시고 노을처럼 붓을 휘둘러 詩吐光炎筆落烟
한편을 써 낼 때마다 천황을 위한 한결 된 마음이셨네 一篇寫出一心天
읽어보면 저절로 처연한 감정이 일어나네 讀來自起悽然感
고개 돌려보니 공께서 돌아가신지 어언 30년이네 回首公歸三十年


한커우 함락(漢口陷落)


가을하늘에 벽력이 쳐 천황의 군대를 도와주어 秋空霹靂助天兵
강남의 무한성을 격파하였네 擊破江南武漢城
잔인한 적은 정신을 잃고 저항할 뜻도 없으니 殘敵失魂無抗意
중원의 대부분이 평정되어가는 것이 대세로구나 中原大勢九分平


1938년 11월 고 육군대장 코다마 겐타로 씨를 신사에서 제사하는 데 도쿄의 유지자들이 와서 장군의 생전 공적을 기억하고 시를 바치고자 하였다. 그래서 한편 지어 바친다

(昭和十三年十一月 卽故陸軍大將 兒玉源太郞氏 神社祭也 東京有志者 欲記將軍之生前功績獻詠歌詩故搆呈)


혁혁하신 공훈 별처럼 반짝이고 赫赫功勳炳日星
아름다운 명성 없어지지 않고 단청에서 빛나네 芳名不泯耀丹靑
그때의 장엄한 기는 아직도 응축되어 있어 當年壯氣凝猶在
오래도록 호국령이 되시리라 長作千秋護國靈
한강은 넘실대고 북악은 높은데 漢似湯湯嶽似嵩
위무를 선양하여 우리 동아시아를 안정시키셨네 宣揚威武奠吾東
오늘날 성전의 몰아치는 기세 如今聖戰長駈勢
다 훈련하고 도야시키신 공 덕분이라네 盡是將軍鍊冶功


청주신사(淸州神社)


와우산의 산색 우뚝한데 臥牛山色碧崢嶸86)
새로 지어진 신사 눈 앞에 나타났네 神社新成眼忽明
나라를 보호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일 모두 여기에 달렸으니 護國安民皆賴此
만인이 한결 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야한다네 一心信仰萬人誠


86) 와우산은 충북 보은에 위치하였다.

도쿠토호 소호 선생의 희수를 축하하며(祝德富蘇峯先生喜壽)
문장은 세상을 독단할 정도로 이름이 났고 文章獨擅世間名
신문사에서 다년동안 활동하시니 명성도 뛰어나네 報館多年筆有聲
만수무강하시는 것 지금부터니 黃耉無疆從此始
어진 사람은 반드시 장수한다고 하네 仁人必壽理分明


<출전 : 朴榮喆, '多山詩稿', 朱白印刷所, 1939년 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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