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산해경발췌)
산해경에 서술된 치우(蚩尤)에 관한 부분을 차례대로 서술하겠습니다.
원문(原文)은 원가(袁珂)의 산해경교주(山海經校注)를 인용했으며,
해석은 律坤 李重宰 선생의 산해경 편역을 인용했습니다.
1. 山海經 第六 해외서경(海外西經) 편
形天與帝至此爭神, 帝斷其首, 葬之常羊之山…
형천(形天)은 황제와 이곳에 이르러 신(神)의 자리를 두고 싸움을 했다.
황제는 그의 머리를 잘라 상양산(常羊山)에 묻었다…
(註釋)
御覽七九引歸藏…昔黃神與炎神爭鬪涿鹿之野…
呂氏春秋蕩兵篇…黃炎故用水火矣.
淮南子兵略篇…炎帝爲火災, 故黃帝禽之.
大戴禮五帝德…黃帝敎熊羆貔豹, 以與赤帝戰於版泉之野…炎帝兵敗, 乃又蚩尤崛起以與黃帝頡抗.
蚩尤者炎帝之後.
(玉函山房輯佚書輯遁甲開山圖), 亦炎帝之臣也.
(世本宋衷注), 大荒北經謂蚩尤作兵伐黃帝者, 蓋爲兵敗之炎帝復仇也. 蚩尤與黃帝之戰, 乃古代神話傳說
中一大戰爭.
태평어람(太平御覽) 79권의 귀장편에는, 옛날 황제(黃帝)와 염제(炎帝)가 탁록(涿鹿)의 들에서 싸움을 했다.
여씨춘추(呂氏春秋) 탕병편(蕩兵篇)에는, 황제와 염제는 물과 불을 사용했다.
회남자(淮南子) 병략편(兵略篇)에는, 염제는 화공(火攻)을 사용했고, 황제는 맹수(猛獸)를 이용했다.
대대례오제덕편(大戴禮五帝德篇)에서는, 황제는 곰ㆍ큰곰ㆍ흰여우ㆍ표범(율곤선생의 해석:웅부족ㆍ
피부족ㆍ비부족ㆍ표부족을 뜻한다)을 길들여, 판천(版泉)의 들에서 적제(赤帝:炎帝神農氏)와 전쟁을
치렀다.…
염제(炎帝)의 군사가 패했다.
이에 치우(蚩尤)가 떨치고 일어나 황제에게 항전했다.
치우는 염제의 후손이다.
옥함산방집일서(玉函山房輯佚書)에 있는 둔갑개산도(遁甲開山圖)에는, 또는 염제(炎帝)의 신하다
세본(世本)의 송충(宋衷) 주석(註釋)에서는, 대황북경(大荒北經)에서 치우(蚩尤)가 병기(兵器)를 만들어
황제(黃帝)를 쳤다는 것은, 대체로 전쟁에 패한 염제(炎帝)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이다.
치우와 황제의 싸움은, 고대신화전설 중에서의 일대 전쟁이었다.
山海經復涉夸父謂應龍(黃帝神龍)已殺蚩尤又殺夸父,
(大荒北經), 應龍殺蚩尤與夸父,
(大荒東經), 夸父者, 大荒北經云, 后土生信, 信生夸父.
而海內經謂后土爲炎帝之裔, 是夸父亦炎帝之裔也.
산해경 과보(夸父)편에 의하면, 응용은 황제의 신룡(神龍)인데 치우(蚩尤)를 죽였으며 또한 과보(夸父)도
죽였다고 적고 있다.
대황북경(大荒北經)에서는 응용(應龍)이 치우와 과보를 죽였다.
대황동경(大荒東經)에서는, 과보(夸父)는 대황북경에서 이르기를, 후토(后土)가 신(信)을 낳고, 신이 과보
(夸父)를 낳았다.
해내경(海內經)에 의하면, 후토는 염제(炎帝)의 후손인데, 이에 과보 역시 염제의 후손이다.
在黃帝與蚩尤之戰中, 夸父自亦當參加蚩尤戰團, 因而始相繼爲應龍所殺蚩 尤與夸父喪亡後, 乃又有刑天舞
其干戚, 與帝爭神.
刑天者炎帝之臣, 或亦炎帝之後也.…
則刑天者, 亦猶蚩尤夸父, 奮起而爲炎帝復仇, 以與黃帝抗爭者也.
황제와 치우의 전쟁 중에 과보(夸父)는 스스로 치우의 전단(戰團)에 참가했다.
인해 처음과 서로 연결한다면, 응용이 치우와 과부를 죽여 장사지내고 난 후에 또다시 형천(刑天)이란
자가 있어 방패와 도끼를 휘두르며 제왕(帝王)과 신(神)의 자리를 두고 싸우려 했다.
형천은 염제의 신하라고도 했고, 염제의 후손이라고도 했다.…
즉 형천은 치우와 과보와 같이 염제의 원수를 갚고자 떨치고 일어나, 황제와 맞서 싸운 자이다.
常羊山之北, 經歷數地卽是軒轅國, 軒轅, 黃帝之號, 則葬首常羊之刑天所與爭神之帝, 豈非黃帝而何.
蓋軒轅常羊一帶, 均屬黃炎鬪爭神話傳說之範圍.…
상양산(常羊山) 북쪽에는 옛날에 헌원국(軒轅國)이 있었다.
헌원(軒轅)은 황제(黃帝)의 호이다.
즉 상양에 머리가 파묻힌 형천(刑天)과 더불어 신(神)의 자리를 두고 싸운 제왕은 어찌 황제(黃帝)가
아니겠는가.
헌원국이 있던 상양(常羊)의 일대에는 황제와 염제의 싸움에 관한 신화와 전설이 고르게 퍼져있다.
是蚩尤刑天諸巨人前仆後繼鬪爭情神之最好寫照也.
而陶潛讀山海經詩稱, 刑天舞干戚猛志固常在.
爲尤能得此斷頭英雄凌厲無前之神態.
치우와 형천은 모두 거인(巨人)으로, 그 앞에 엎드리건대 뒤를 이어 싸운 그 정신은 길이 빛날 것이다.
도잠(陶潛)의 독산해경(讀山海經)이라는 시(詩)에 이르기를, 형천(刑天)이 방패와 도끼를 휘둘렀던 굳센
뜻이 여전히 남아있네.
능히 머리는 잘리게 되었으나, 그 영웅의 기개는 신의 태도라고 할만하다.
2. 山海經 第八 해외북경(海外北經) 中
夸父與日逐走. 入日. 渴欲得飮. 飮于河渭河渭不足. 北飮大澤. 末至. 道渴而死. 弃其杖 化爲鄧林.
(註釋)
而姜姓之蚩尤, 亦獸身人語, 銅頭鐵額.
(御覽卷七八引龍魚河圖), 齒長二寸.
(述異記)…是炎帝裔屬中, 顔不乏魁梧奇偉之巨人也.
강(姜)씨 성을 가진 치우는 역시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했다.
구리로 된 머리에 철로 된 이마를 지니고 있었다.
치우(蚩尤)가 짐승이라고 하는 것은 호랑이(虎) 부족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며, 머리가 구리라는 것은
머리에 구리로 된 투구를 썼다는 뜻이며, 이마가 철이라고 한 것은 쇠처럼 강인하다는 것을 뜻한다.
태평어람(太平御覽) 78권에서 용어하도(龍魚河圖)를 인용한 것을 보면 이빨이 이촌(二寸, 6㎝)이라고
적고 있다.
술이기(述異記)에는, 염제(炎帝)의 후손에 속하는 가운데 치우치지 않는 뛰어난 우두머리로 기이하고
위대한 거인(巨人)이라고 되어 있다.
3. 山海經 第十四 대황동경(大荒東經) 中
大荒東北隅中. 有山名曰凶犂土丘. 應龍處南極. 殺蚩尤與夸父. 不得復上. 故下數旱. 旱而爲應龍之狀.
乃得大雨.
대황(大荒)의 東北 모퉁이 가운데 산이 있는데, 이름을 흉여토구(凶犂土丘)라고 한다.
응용(應龍)은 남쪽 끝에 살고 있는데, 치우(蚩尤)와 과보(夸父)를 죽이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한 연유로 수없이 가뭄이 들었는데, 가뭄이 들 때마다 응용의 형상이 나타나면 큰비가 내린다고 했다.
(註釋)
郝懿行云…史記五帝紀索隱引皇甫謐云…黃帝使應龍殺蚩尤於凶黎之谷. 卽此, 黎, 犁古字通.
珂案, 唐王瓘軒轅本紀(見雲笈七籤卷一百)云…(黃帝)殺蚩尤於黎山之丘, 說本此, 然蚩尤被殺之地.
학의행(郝懿行)이 이르기를, 사기(史記) 오제기(五帝紀)의 색은(索隱)을 인용하여 황보밀(皇甫謐)이 말한
바에 의하면, 황제(黃帝)의 사신인 응용이 치우(蚩尤)를 죽인 곳은 흉여곡(凶黎谷)이라 했다.
여(黎)는 여(犂)의 옛 글자와 통용된다.
원가는 당(唐)나라 왕관(王冠)의 헌원본기(운급칠첨 100권)에 의하면, 황제(黃帝)가 치우(蚩尤)를 여산구
(黎山丘)에서 죽였다고 했는데, 설명하자면 본래 이곳으로 치우가 피살된 땅이다.
或又傳在南方. 大荒南經云…有宋山者, 有木生山上, 名曰楓木. 楓木, 蚩尤所棄其桎梏, 是謂楓木.
郭璞注云…蚩尤爲黃帝所得, 械而殺之, 已摘其械, 化而爲樹也.
혹은 남방(南方)에 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대황남경(大荒南經)에 의하면 송산(宋山)이 있는데, 산 위에 나무가 자라는데, 이름을 풍목(楓木)이라 했다. 풍목은 치우가 찼던 쇠고랑과 족쇄가 화해 풍목이 되었다고 했다.
곽박(郭璞)의 주석에 의하면, 치우가 황제에게 잡히자, 황제는 치우를 형틀에 채워 죽였는데, 그 형틀이
화해서 나무가 되었다고 했다.
或又傳在東方. 初學記卷九引歸藏啓筮云…蚩尤出自羊水, 八肱, 八趾, 疏首, 登九淖以伐空桑, 黃帝殺之靑丘.
靑丘, 東方地名也.
전하는바에 따르면 혹 동방(東方)에 있다고도 했다.
초학기(初學記) 9권에서 귀장계서(歸藏啓筮)를 인용한바에 의하면, 치우가 스스로 나온 곳은 양수(羊水)
이며, 8개의 팔(뚝)과 8개의 발이 있었고, 그리고 머리를 자유자재로 소통할 수 있다고 했다.
구요(九淖)에 올라 공상(空桑)을 치고자 했으나, 황제가 그를 청구(靑丘)에서 죽였다.
청구(靑丘)는 동방(東方)의 지명이다.
或又傳在中冀. 周書嘗麥篇云…蚩尤乃逐帝(赤帝), 爭于涿鹿之河(阿)也. 赤帝大懾, 乃說於黃帝, 執蚩尤殺
之於中冀, 用名之曰絶轡之野.
中冀蓋卽大荒北經所記冀州之野, 亦卽𣵠鹿之河(阿)也.
然路史後紀四云…(黃帝)傳戰執尤於中冀而誅之, 爰謂之解. 解者, 宋之解州, 今山西之解縣也.
沈括夢溪筆談卷三云…解州鹽澤, 滷色正赤, 俚俗謂之, 蚩尤血.
則解州雖不必如路史所附會之中冀, 後世固亦有蚩尤被殺於其地之神話也.
蚩尤被殺之地, 於不同之諸說中, 要以冀州之野卽涿鹿之阿爲近正.
至此經之凶犁土丘固應龍所居之地, 未必卽蚩尤夸父被殺之地, 云黃帝使應龍殺蚩尤於此丘者, 亦由誤讀經
文而生之附會.
혹 전하는 말로는 중기(中冀)에 있다고도 한다.
주서(周書) 상맥편(嘗麥篇)에 이르기를…치우는 적제(赤帝:炎帝神農氏)를 좇아 탁록하(涿鹿河, 또는
탁록의 언덕)에서 전쟁을 했다.
적제가 크게 두려움에 떨었는데, 황제가 치우를 잡아 중기에서 죽였다.
중기(中冀)는 절비야(絶轡野)라고도 한다.
중기는 대황북경(大荒北經)에 기록된바에 의하면, 기주(冀州)의 들이라고 했는데, 탁록하(𣵠鹿河) 또는
탁록의 언덕이라고도 했다.
그런즉 노사(路史) 후기(後紀) 4에 의하면…황제가 치우를 잡아 중기(中冀)에서 주살했는데, 중기는 해
(解)라는 곳을 말한다.
해(解)는 송(宋)나라 때의 해주(解州)이며,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해현(解縣)이다.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 3권에 의하면, 해주의 염택(鹽澤)은 소금색깔이 검붉다.
세상 사람들은 치우의 피라고 말했다.
즉 해주(解州)는 비록 노사(路史)에서 말하는 중기(中冀)와 반드시 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후세에는
치우가 피살된 곳이 그곳이라는 신화로 굳어져있다.
치우가 피살된 곳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일치하지 않지만, 그 중에서 기주(冀州)의 들이 탁록(涿鹿)의
언덕이라는 것이 가장 정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흉여토구(凶犁土丘)는 응용(應龍)이 사는 땅으로, 반드시 치우(蚩尤)와 과보(夸父)가 피살된 곳은 아닐
것이다.
황제가 응용을 시켜 치우를 이 언덕에서 죽였다고 하는 것은, 경문(經文)의 오독으로 인해 생겨났을 것이다.
郭璞云…蚩尤作兵者.
珂案…管子地數篇云…葛盧之山, 發而出水, 金從之, 蚩尤受而制之, 以爲劍, 鎧, 矛, 戟, 雍狐之山, 發而出水,
金從之, 蚩尤受而制之, 以爲雍狐之戟, 芮戈.
呂氏春秋蕩兵篇云…人曰…蚩尤作兵.
太平御覽卷七八引龍魚河圖云…蚩尤造立兵杖, 刀, 戟, 大弩.
곽박(郭璞)에 의하면, 치우는 병기(兵器)를 만들었다.
원가 자신이 살펴보자면, 관자지수편(管子地數篇)에 이르기를, 갈로산(葛盧山)에서 물이 발하여 나올 때
금(金)을 생하므로, 치우가 이를 제련하여 칼과 투구, 세모난 창과 두 갈래 창을 만들었다.
옹호산(雍狐山)에서도 물이 발하여 나올 때 금(金)이 생하므로, 치우가 이를 제련하여 옹호극이라는 창과
예과라는 창을 만들었다.
여씨춘추(呂氏春秋) 탕병편(蕩兵篇)에 의하면…사람들이 말하기를 치우가 병기를 만들었다고 했다.
태평어람(太平御覽) 78권 용어하도(龍魚河圖)를 인용하자면, 치우가 도(刀), 극(戟), 대노(大弩)라는
병기를 만들었다.
東海中有流波山. 入海七千里. 其上有獸. 狀如牛. 蒼身而無角. 一足. 出入水則必風雨. 其光如日月.
其聲如雷. 其名曰夔. 黃帝得之以其皮爲鼓. 橛以雷獸之骨. 聲聞五百里. 以威天下.
(註釋)
珂案…流波山一足夔神話亦黃帝與蚩尤戰爭神話之一節.
繹史卷五引黃帝內傳云…黃帝伐蚩尤, 玄女爲帝製夔牛鼓八十面, 一震五百里, 連震三千八百里.
吳任臣山海經廣注(大荒北經)引廣成子傳云…蚩尤銅頭啖石, 飛空
走險, 以馗牛皮爲鼓, 九擊止之, 尤不能飛走, 逐殺之. 卽其事也.
원가의 案에 의하면, 유파산(流波山)의 외발 기(夔)의 신화 역시 황제와 치우와의 전쟁과 관련된 신화의
한 대목이다.
역사(繹史) 5권에서 황제내전(黃帝內傳)을 인용한바에 의하면, 황제가 치우를 칠 때, 현녀(玄女)가 황제를
위해 기우(蘷牛)로 80면 짜리 북을 만들었는데, 북을 한번 울리면 그 진동이 5백리에 이르렀고, 여러 번
울리면 3천8백리까지 울렸다.
오임신(吳任臣)의 山海經廣注(大荒北經의)에서 광성자전(廣成子傳)을 인용한 것에 의하면, 치우(蚩尤)는
구리로 만든 머리에 돌가루를 먹었다.
그 몸은 공중을 날고 험한 곳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비호같았다.
이에 규우(馗牛)의 껍질로 만든 북으로 9번을 공격한 끝에야 치우가 더 이상 날고 달리지 못해, 추격하여
죽일 수 있었다.
즉 그 사실이다.
4. 山海經 十五卷 대황남경(大荒南經) 中
有宋山者. 有赤蛇. 名曰育蛇. 有木生山上名曰楓木. 楓木. 蚩尤所棄其桎梏. 是爲楓木.
송산(宋山)이 있다.
송산에는 붉은 뱀이 있는데, 이름을 육사(育蛇)라고 한다.
산 위에 나무가 자라는데 이름을 풍목(楓木)이라한다.
풍목은 치우가 찼던 쇠고랑과 족쇄가 버려진 것이, 화해 풍목이 되었다.
(註釋)
路史後紀四蚩尤傳于紀蚩尤被殺之後…後代聖人著其像于尊彝, 以爲貪戒.
其說當有所本. 羅苹注云…蚩尤天符之神, 狀類不常, 三代彝器, 多著蚩尤之像, 爲貪虐者之戒. 其狀率爲獸形,
傳以肉翅.
노사후기(路史後紀) 제4 치우전(蚩尤傳)에서 치우가 피살된 후에…후대 성인(聖人)들이 치우의 상을
만들어 떠받드는 것은 탐심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위의 설을 뒷받침하는 글로는, 나평(羅苹)의 주(注)에 이르기를, 치우는 천부신(天符神)으로서 그 형상이
보통과 달랐다.
삼대(三代)에 걸쳐 치우의 상이 많이 그려졌는데, 탐욕과 포학함의 경계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 형상은 몸에 날개가 있다고 전해지는 짐승의 형상을 따랐다.
吳任臣山海經廣注(大荒北經)引博古圖略同此說. 揆其所說, 殆饕餮也.
左傳文公十八年云…縉雲氏有不才子, 貪于飮食, 冒于貨賄, 侵欲崇侈, 不可盈厭., 聚斂積實, 不知紀極.,
不分孤寡, 不恤窮匱, 天下之民, 以此三凶, 謂之饕餮.
오임신(吳任臣) 山海經廣注(大荒北經)에서 박고도략(博古圖略)을 인용한바에도 대략 이 설과 동일하다.
그 설을 살펴보자면, 도철(饕餮)에 가깝다고 했다.
좌전(左前) 문공(文公) 18년에 의하면, 진운씨(縉雲氏)에게 재능이 없는 아들이 있었는데, 음식을 탐하고,
돈과 재물을 침탈하며, 사치와 낭비벽에 욕심이 과하여 억제하지 못했으며, 재물을 긁어모아 쌓기에 여념
이 없었다.
그리하여 자신을 알지 못하고 기고만장했으며, 고아나 과부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들을 궁휼함이 없었으
므로, 사람들이 이 흉악한 세 가지를 들어 도철(饕餮)이라고 했다.
史記五帝本紀集解引賈逵曰…縉雲氏, 姜姓也, 炎帝之苗裔, 當黃帝時任縉雲之官.
而蚩尤姜姓, 亦炎帝之苗裔, 故說蚩尤卽是此縉雲氏之不才子, 饕餮, 乃大有可能也.
大戴禮用兵篇云…蚩尤, 庶人之貪者也. 與狍鴞, 饕餮之貪惏, 義固相應, 故古以蚩尤比於狍鴞…
사기(史記) 오제본기집해(五帝本紀集解)에서 고규(賈逵)가 인용하여 말하기를, 진운씨(縉雲氏)는 강(姜)씨
성이며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후예인데, 황제 때에 진운씨는 관리였다.
치우도 강(姜)씨 성이다.
역시 염제신농씨의 후예이다.
옛 설에 의하면 치우는 바로 이 진운씨의 불재자, 도철이라함은 크게 가능함이 있다.
대대례용병편(大戴禮用兵篇)에는, 치우는 서인(庶人)으로 탐심이 많은 자였다.
포효(狍鴞)와 도철(饕餮)의 탐욕은 서로 상응하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옛날에 치우를 포효에 비유하기도 했다.
皇覽冢墓記云…蚩尤冢, 在東平郡壽張縣闞鄕城中, 高七丈, 民常七月祀之.
述異記亦云…太原村落間祭蚩尤神不用牛頭. 又云…今冀州有樂名蚩尤戱, 其民兩兩三三, 頭載牛角而相觝..
황람 총묘기에 의하면, 치우총은 산동성 동편군 수장현 감향성에 있는데, 높이가 7장(七丈)이다.
백성들은 항상 7월이면 제사를 지낸다.
술이기에 의하면 태원(太原) 촌락간에도 치우신(蚩尤神)에 대해 소머리를 사용하지 않고 제사지낸다고
했다.
또한 지금 기주에는 치우희(蚩尤戲)라는 놀이가 있는데, 사람들이 둘둘 삼삼으로 소뿔을 머리에 이고
서로 찌르는 놀이이다.
太平御覽卷七八引龍魚河圖云…(黃帝)制伏蚩尤, 以制八方, 蚩尤沒後, 天下復擾亂不寧, 黃帝遂畫蚩尤形象,
以威天下, 天下咸謂蚩尤不死, 八方萬邦皆爲殄服.
태평어람 78권에서 용어하도(龍魚河圖)를 인용바에 의하면, 황제가 치우를 항복시키고 팔방(八方)을
제압하고자 했다.
치우가 몰락된 후에도 천하가 여전히 어지럽고 편안하지 못하자, 황제는 천하를 위압하고자 치우를
형상을 그렸다.
천하가 모두 치우가 죽지않았다고 하므로, (치우의 형상으로 치우가 죽었다는 것을 알려) 천하를 모두
복종시키기 위함이었다.
5. 山海經 第十七 대황북경(大荒北經) 中.
大荒之中. 有山名曰成都載天. 有人珥兩黃蛇. 把兩黃蛇. 名曰夸父. 后土生信. 信生夸父. 夸父不量力.
欲追日景. 逮之于禺谷. 將飮河而不足也. 將走大澤. 未至. 死于此. 應龍已殺蚩尤. 又殺夸父. 乃去南方處之.
故南方多雨.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이름은 성도재천(成都載天)이다.
양쪽 귀에 누른 뱀을 걸고 있으며, 양손에 누른 뱀을 잡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름을 과보(夸父)라고 했다.
후토(后土)가 신(信)을 낳았고, 신(信)은 과보를 낳았다.
과보는 역량이 부족했다.
해(日)를 쫓아가다가 우곡(禺谷)에 이르렀다.
갈증이 나서 황하(黃河)의 물을 마셨으나 부족하여 다시 대택(大澤)으로 달려가다가 이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응용은 치우를 죽이고 다시 과보를 죽인 후 남쪽으로 가서 살았다.
그러므로 남방에는 비가 많았다.
(註釋)
珂案…蓋夸父乃古巨人族名(玄珠中國神話硏究 ABC說), 非一人之名也.
夸父逐日與應龍殺蚩尤與夸父, 蓋均有關夸父之不同神話.
원가에 의하면, 과보는 고대 거인부족의 이름이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현주의 중국신화연구
ABC설에서).
과부축일(夸父逐日)이라는 말과 응용살치우여과보(應龍殺蚩尤與夸父)라는 말은 과보와 연관된 서로 다른
신화라고 할 수 있다..
有係昆之山者. 有共工之臺. 射者不敢北鄕. 有人衣靑衣. 名曰黃帝女魃. 蚩尤作兵伐黃帝. 黃帝乃命應龍攻
之冀州之野. 應龍畜水. 蚩尤請風伯雨師. 縱大風雨. 黃帝乃下天女曰魃. 雨止. 遂殺蚩尤. 魃不得復上. 所居
不雨. 叔均言之帝. 後置之赤水之北. 叔均乃爲田祖. 魃時亡之. 所欲逐之者. 令曰. 神北行. 先除水道. 決通
溝瀆.
계곤산(係昆山)이 있다.
공공(共工)의 누대가 있는데,, 활을 쏘는 자는 감히 북쪽을 향하지 못한다.
푸른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의 이름은 황제여발(黃帝女魃)이다.
치우가 무기를 만들어 황제를 치자, 황제는 응용에게 명하여 기주(冀州)의 들에서 치우를 공격하게 했다.
응용이 물을 모아둔 곳을 치우는 풍백과 우사에게 청하여 큰 비바람을 몰아치게 했다.
이에 황제가 천녀(天女)인 발(魃)을 내려보냈다.
발은 비를 그치게 하고 치우를 죽였으나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으므로, 그가 있는 곳에는 비가 오지 아니했다. …
(註釋)
珂案…太平御覽卷七十二引世本云…蚩尤作兵.
宋衷注云…蚩尤, 神農臣, 是也, 則所謂蚩尤作兵伐黃帝者, 蓋黃炎鬪爭, 炎帝兵敗, 蚩尤奮起以與炎帝復仇也.
원가가 살펴보자면, 태령어람 권72에서 세본(世本)을 인용하여 이르되, 치우가 병기를 만들었다.
송충(宋衷)의 주에서 이르기를, 치우는 신농씨(神農氏)의 신하(臣下)다. 라고 하는 것은 치우가 병기를
만들어 황제를 쳤는데, 대체로 황제와 염제의 싸움이다.
염제의 군사가 패하자 치우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염제(炎帝)의 원수를 갚고자 했다.
珂案…關於黃帝與蚩尤戰爭之神話, 古來傳說多端.
較早者有初學記卷九引歸藏啓筮云…蚩尤出自羊水, 八肱, 八趾, 疏首, 登九淖以伐空桑, 黃帝殺之靑丘.
其後太平御覽卷七八引龍魚河圖云 黃帝攝政前, 有蚩尤兄弟八十一人, 並獸身人語, 銅頭鐵額, 食沙石子,
造立兵仗, 刀, 戟, 大弩, 威振天下.
誅殺無道, 不仁不慈. 萬民欲令黃帝行天子事. 黃帝仁義, 不能禁止蚩尤, 遂不敵, 乃仰天而歎, 天遣玄女下
授黃帝兵信神符, 制伏蚩尤, 以制八方
蚩尤沒後, 天下復擾亂不寧, 黃帝遂畫蚩尤形象, 以威天下, 天下咸謂蚩尤不死, 八方萬邦皆爲殄服.…
원가가 살펴보자면, 황제와 치우 간에 관련된 전쟁의 신화는 고래 전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초학기 9권에서 귀장계서를 인용한바에 의하면, 치우가 스스로 나온 곳은 양수(羊水)이며, 8개의 팔(뚝)과
8개의 발이 있었고, 그리고 머리를 자유자재로 소통할 수 있다고 했다.
구요에 올라 공상(空桑)을 치고자 했으나, 황제가 그를 청구에서 죽였다.
태평어람(太平御覽) 78권에서 인용한 용어하도에 의하면, 황제가 섭정하기 전에 치우가 있었는데,
형제가 81명이었다.
모두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했다.
치우(蚩尤)는 구리로 만든 머리에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으며, 모래와 돌가루를 먹었다.
그리고 칼, 창, 대노(大弩)와 같은 병기를 만들어 천하에 위엄을 떨쳤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무도했으며, 어질지도 않았고, 자비롭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황제가 천자의 일을 행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황제는 인의는 있었으나, 능히 치우를 감당할 힘이 없었고, 치우를 대적하지 못했다.
이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자, 하늘에서 현녀를 황제에게 보냈다.
황제는 현녀로부터 군사들에게 믿음을 주는 신부(神符:신의 진리)를 부여받고 치우(蚩尤)를 굴복시키게
되었으며, 팔방(천하)을 제압했다.
치우가 몰락된 후에도 천하가 여전히 어지럽고 편안하지 못하자, 황제는 천하를 위압하고자 치우를 형상을 그렸다.
천하가 모두 치우가 죽지않았다고 소란하므로, (치우의 형상으로 치우가 죽었다는 것을 알려) 천하를 모두
복종시키기 위함이었다.
御覽十五引黃帝玄玄戰法云…黃帝與蚩尤九戰九不勝. 黃帝歸於太山, 三日三夜, 霧冥.
有一婦人, 人首鳥形, 黃帝稽首再拜伏不敢起, 婦人曰, 吾玄女也, 子欲何問. 黃帝曰, 小子欲萬戰萬勝.
受得戰法焉.…
어람(御覽) 15권에서 인용한 황제현현전법에서 이르기를, 황제는 치우와 9번을 싸웠으나 9번 모두
이기지 못했다. 황제는 태산으로 돌아갔는데, 삼일 밤낮으로 안개가 자욱하여 어두웠다.
사람의 머리에 새의 형상을 한 부인이 있었다.
황제는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고 엎드려서는 감히 일어나지 못했다.
부인이 말했다. 나는 현녀이다. 그대는 무엇을 묻고자 하는가.
황제가 말했다. 나는 싸움에 임할 때마다 이기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전법을 전수받았다.
尙有御覽卷十五引志林(晉虞喜撰)云…黃帝與蚩尤戰於涿鹿之野, 蚩尤作大霧彌三日, 軍人皆惑.
黃帝乃令豊后法斗機以別四方, 遂擒蚩尤.
通典樂典云…蚩尤氏帥魑魅以與黃帝戰於涿鹿, 帝命吹角作龍吟以禦之.
어람 15권에서 인용한 志林(晉나라 우희 찬)에 의하면, 황제와 치우는 탁록(涿鹿)의 들에서 싸웠다.
치우가 3일 동안이나 큰 안개를 피워내자, 황제의 군인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는 이에 풍후에게 영을 내려 두기(斗機)를 만들게 하여 사방을 분별하고는 치우를 사로잡았다.
통전 낙전에 의하면 치우씨는 이매(魑魅)를 거느리고 황제와 탁록에서 전쟁을 했다.
황제는 영을 내려 뿔을 불게 하고 용을 불러내는 노래를 부르게 하여 막았다.
述異記雜敍蚩尤軼事云…蚩尤能作雲霧. 涿鹿今在冀州, 有蚩尤神, 俗云, 人身牛蹄, 四目六手.
今冀州人掘地得髑髏, 如銅鐵者, 卽蚩尤之骨也. 今有蚩尤齒, 長二寸, 堅不可碎.
술이기(述異記) 잡서(雜敍) 치우일사(蚩尤軼事)에서 이르기를, 치우는 능히 구름과 안개를 만들었다.
탁록(涿鹿)은 지금의 기주(冀州)에 있다.
치우신(蚩尤神)은 민가에서 이르기를, 사람의 몸에 소발굽이며, 눈이 4개에 손이 6개이다.
지금의 기주 사람들이 땅을 발굴해서 유골을 파내었는데, 그 유골이 구리나 쇠처럼 단단했다.
즉 치우의 뼈라고 했다.
지금 있는 치우의 이빨은 길이가 2촌인데, 단단하여 부수어지지 않았다.
秦韓間說…蚩尤氏耳鬢劍戟, 頭有角, 與軒轅鬪, 以角觝人, 人不能向.
今冀州有樂名, 蚩尤戱, 其民兩兩三三, 頭戴牛角而相觝. 漢造角觝, 蓋其遺制也.
太原村落間, 祭蚩尤神, 不用牛頭.
今冀州有蚩尤川, 卽涿鹿之野.
漢武時, 太原有蚩尤神畫見, 龜足蛇首, 抵疫, 其俗遂爲立祠.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사이의 설에 의하면, 치우씨(蚩尤氏)의 귀밑 터럭은 칼이나 창과 같다고 했으며,
머리에는 뿔이 있어 황제 헌원과 싸울 때 뿔로 사람들을 쳤으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지금 기주에는 치우희(蚩尤戱)라는 놀이가 있는데, 사람들이 둘둘이나 삼삼으로 머리에 소뿔을 이고 서로
찌르는 놀이이다. 한나라 때 만들어진 각저도 모두 그 유물이다.
태원(太原) 촌락간에는 치우신에게 제사지낼 때 소머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무제(漢武帝) 때의 태원(太原)에 있는 치우신(蚩尤神)의 화상을 보면, 거북이 발에 뱀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역질을 막는다는 풍속에 따라 사당을 세워두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