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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료

조선상고사 - 6.7.편 - 신채호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2.04.28|조회수92 목록 댓글 0

제 6편 고구려의 衰微와 北扶餘의 멸망

 

제 1장 고구려 대 支那의 패전

 

發岐의 반란과 제1의 丸都 殘破

 

기원 197년에 고국천왕이 돌아가고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왕후 우씨(于氏)가 좌가려(左可慮)의 난리 이후 정치에 입을

벌리지 못하고 답답하게 대궐 안에 있다가, 왕이 돌아가니 정치무대에 다시 나타날 열망을 품게 되자, 애통보다 기쁨이 앞서

국상을 숨겨 발표하지 아니하고 그 밤에 미복으로 비밀히 왕의 큰아우 발기(發岐)에게 가서 발기더러, “대왕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으니 그대가 뒤를 이을 사람이 아닌가.”하고 유혹하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발기는 순나(順那)의 고추가(古鄒加)

로서 환도성간(丸都城干)을 겸하여 요동 전체를 관리하고 있어서 그 위엄과 권세가 혁혁할뿐더러 또한 고국천왕이 돌아가면

왕위를 이을 권리가 당당하므로 우씨의 말을 새겨듣지 않고, 엄정한 말씨로 우씨를 나무랐다. “왕위는 하늘이 명하는 것이니

부인이 물을바가 아니고, 부인의 밤나들이는 예가 아니니 왕후의 행할 일이 아닙니다.” 우씨는 크게 부끄럽고 분하여, 그

길로 곧 왕의 둘째 아우 연우(延優)를 찾아가서, 왕이 돌아간 일과 발기를 찾아갔다가 핀잔 본일을 낱낱이 호소하였다.

연우는 크게 기뻐하고 우씨를 맞아들여 밤 잔치를 베풀었다. 연우가 친히 고기를 베다가 손가락을 다치니 우씨가 치마끈을

잘라서 싸주었다. 손목을 마주잡고 대궐로 들어가 함께자고 이튿날 고국천왕이 돌아간 것을 발표하는 동시에 왕의 유조

(遺詔)를 꾸며 연우로 왕의 후계를 삼아서 즉위하게 하였다.

발기는 연우가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격문을 띄워서, 연우가 우씨와 몰래 통하고 차례를 건너뛰어 왕위를

빼앗은 죄를 폭로하고 순나의 군사를 일으켜서 왕궁을 포위 공격하였다. 사흘 동안 격전이 벌어졌으나 나라 사람들이 발기를

돕지 아니하므로 패하여, 순나의 인민 3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 전토(全土)를 들어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항복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공손도는 한말(漢末)의 효웅(梟雄)이니, 기원 190년에 한이 어지러워지는 징조를 보고 요동태수가 되기를 자청하여 요동에서

노릇 하기를 꿈꾸었는데, 이때 요동의 본토는 차대왕이 점령한 뒤였으므로 고구려의 땅이었고, 한의 요동은 지금의 난주에

옮겨다 설치하여, 땅이 매우 좁아서 공손도는 항상 고구려의 요동을 엿보고 있던 참이라, 발기의 투항을 받자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정병 3만을 일으켜서 발기의 군사로 선봉을 삼아 고구려에 침입하여, 차대왕의 북벌군(北伐軍)의 본거지이던 환도성

- 제1의 환도에 들어가 마을을 불태우고 비류강(沸流江)으로 향하여 졸본성(卒本城)을 공격하였다. 연우왕(延優王)이 계수

(係數)로 ‘신치(전군 총사령관)’를 삼아서 항거해 싸워 한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 좌원(左原)까지 추격하였다. 발기가 다급

하여 계수를 돌아보고, “계수야, 네가 차마 너의 맏형을 죽이려 하느냐? 불의의 연우를 위해 너의 맏형을 죽이려느냐?”고 하자

계수가 말했다. “연우가 비록 불의하지마 너는 외국에 항복하여 외국 군사를 끌고와서 조상과 부모의 나라를 유린하니, 연우

보다 더 불의하지 않느냐?” 발기가 크게 부끄러워 뉘우치고 배천(裵川 : 곧 沸流江)에 이르러 자살하였다. 발기가 한때 분함을

참지 못하여 나라를 판 죄를 지었으나 계수의 말에 양심이 회복되어 함에 이르렀지마는, 그 팔아버린 오열홀(烏列忽) -

요동은 회복하지 못하고, 공손도의 차지가 되었다.

이리하여 공손도는 드디어 요동왕이라 자칭하고 요동 전역을 나누어, 요동(遼東), 요중(遼中), 요서(遼西)의 셋으로 만들고

바다를 건너 동래(東萊)의 여러 고을 - 지금의 연태(煉台) 등지를 점령하여 한때 강력한 위엄을 자랑하였다. 이에 연우왕은

지금의 환인현(桓因縣) 혼강(渾江) 상류(지금의 安古城)에 환도성을 옮겨 설치하고 그곳으로 서울을 옮기니, 이것이 곧 제2의

환도였다.

 

東川王의 제1의 丸都 회복 경영

 

연우왕이 형수 우씨의 손에 왕위를 얻고 우씨를 왕후로 삼았는데, 오래지 않아 우씨가 나이가 많음을 싫어하여 주통촌

(酒桶村)아름다운 처녀 후녀(后女 : 이름)에게 몰래 장가들어 소후(小后)를 삼아서 동천왕(東川王)을 낳았다.

기원 227년에 연우왕이 돌아가고 동천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지나가 네 세력을 나뉘어 ① 은 위(魏)의 조씨(曹氏)니 업 -

지금의 직예성(直匠省) 업현에 도읍하여 지금의 양자강(揚子江)이북을 차지하고, ② 는 오(吳)의 손씨(孫氏)니 건업(建業)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에 도읍하여 양자강 이남을 차지하고, ③ 은 촉(蜀)의 유씨(劉氏)니 성도(成都) - 지금의

사천성(泗川省) 성도(成都)에 도읍하여 지금의 사천성을 차지하고, ④ 는 요동의 공손씨(公孫氏)니 양평(襄平) - 지금의

요양(遼陽)에 도읍하여, 지금의 난하 동쪽과 요동반도를 차지하였다.

고구려는 공손씨와는 적국이었고, 촉과는 길이 너무 멀어서 교통할 수 없었거니와, 위(魏)ㆍ오(吳) 두 나라와도 왕래가

없었는데, 기원 233년에 공손연(公孫淵 : 공손도의 손자)이 간사한 꾀로 위ㆍ오 두 나라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려고, 오의

임금 손권(孫權)에게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려 신하라 일컫고, 함께 위를 공격하기를 청했다. 그러니까 손권이 크게 기뻐

하고 사신 허미(許彌) 등으로 하여금 수천의 군사를 주어 공손연에게 보냈다. 공손연이 허미로 위와 사귀는 미끼를 삼으려고,

먼저 허미의 보호 장사 진단(秦旦) 등 60여 명을 잡아서 현도군 - 지금의 봉천성성(奉天省城)에 가두어 죽이려 하였다.

진단 등이 성을 넘어 도망하여 고구려로 들어가서 거짓말로, “오제(吳帝) 손권(孫權)이 고구려 대왕께 올리는 공물이 적지

않았고 또한 고구려와 맹약하여 공손연을 쳐 그 토지를 나누어 가지자는 도서(圖書)도 있었는데, 불행히 배가 큰 바람을 만나

바닷길의 방향을 잃고 요동의 바닷가에 도착하였다가 공손연의 관리에게 알려져서 공물과 도서는 다 빼앗기고 일행이 다

잡혀서 갇혔습니다. 다행히 틈을 얻어 범의 입을 벗어나 이렇게 왔습니다.”고 하였다. 동천왕이 크게 기뻐하여 진단 등을

불러 보고 조의 25명에게 명해 바닷길로 진조 등을 호송하였는데, 초피(貂皮)의 1천 장과 갈계피 10장 등을 손권에게 선사

하고, 고구려의 육군과 오의 수군으로 공손연을 함께 쳐서 멸망시키자는 조약을 맺었다.

이듬해 3년 손권이 사굉(謝宏)ㆍ진굉(陳宏) 등을 사신으로 보내서 많은 옷과 보배를 바치니 동천왕이 또 ‘일치’ 착자(窄咨)

대고(帶固) 등을 보내 약간의 예물로 답사했는데, 착자가 오에 이르러 ① 오의 수군이 약하여 바닷길로 공손연을 습격할 수

없으면서 오가 다만 큰소리로 자랑하여 고구려로부터 후한 물건을 받고자 하고, ② 손권이 고구려를 볼 때에는 비록 공손

하였으나 그 내용을 그 국내에 선포할 때에는 동이(東夷)를 정복하여 그 신민(臣民)을 속이고 있음을 발견하고, 돌아와

왕에게 아뢰었다. 동천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위제(魏帝)(曹)에게 밀사를 보내서, 고구려와 위가 오와 요동에

대해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체결하여 고구려가 요동을 치면 위는 육군으로 고구려를 돕고, 위가 오를 치면 고구려는 예(濊)

수군으로 위를 도와서, 두 적을 토멸한 뒤에는 요동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오는 위가 차지하기로 하였다. 그 이듬해 오의

사자 호위(胡衛)가 고구려에 오자 그 목을 베어 위에 보내서, 고구려와 위 두 나라의 교제가 매우 잦아졌다.

 

公孫淵의 멸망과 고구려ㆍ魏 두 나라의 충돌

 

기원 237년에 동천왕이 ‘신가’ 명림어수와 ‘일치’ 착자ㆍ대고 등을 보내 수만의 군사를 내어 양수(梁水)로 나아가서 공손연을

치니, 위는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에게 명하여 또한 수만의 군사로 요수(遼水)로 나오므로, 공손연은 곽흔(郭昕),

유포(柳蒲)등을 보내 고구려를 막고, 비연(卑衍)ㆍ양조(楊祚) 등을 보내 위를 막았다. 오래지 않아 위의 군사는 패하여 돌아

가고, 공손연은 연왕(燕王)이라 일컬어 천자의 위의를 갖추고 전력을 다하여 고구려를 막았는데, 이듬해 위가 태위(太尉)

사마의(司馬懿)를 보내 10만의 군사를 일으켜서 먼저 관구검으로 하여금 요대(遼隊)를 쳐 공손연의 수비장 비연ㆍ양조 등과

대치하게 하고, 사마의는 가만히 북쪽으로 진군하여 마침내 공손연의 서울 양평을 갑자기 포위하였다. 공손연의 정예군이 다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양수로 나가고 양펴은 텅 비어 있었으므로 비연 등이 돌아와 구원하다가 크게 패하고 공손연이 선

안에 포위당한 지 30여 일에 굶주려 엄중한 포위를 뚫고 나오려다가 잡혀 죽으니, 공손씨가 요동에 웅거한 지 무릇 3세 50년

만에 망하였다.

위가 이렇게 공손씨를 쉽게 멸망시킨 것은 고구려가 공손연의 후방을 견제해준 때문인데, 삼국지 동이열전(東夷列傳)에,

“태위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거느리고 공손연을 쳤는데 궁(宮)이 주부 대가(大加)를 보내 수천명을 거느리고 와서

도왔다(太尉司馬宣王 率衆討公孫淵 宮遣主簿大加 將數千助軍).”고 한 기사 이외에는 위의 명제본기(明帝本紀)나 공손도전

(公孫度傳)에는 한 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저네의 역사의 고유의 ‘국내 일은 자세하게, 외국과의 일은 간략하게

(詳內略外).’라는 필법을 지킨 것이어니와, 고구려 본기에는 “위의 태부 사마선왕이 무리를 거느리고 가 이를 도왔다

(魏太傅司馬宣王 率衆討公孫淵 宮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고 하였으니 사마의를 사마선왕이라고 한 것을 보면 삼국지

동이열전의 본문을 그대로 옮겨다 적었음이 분명한데, 수천 명을 1천 명이라 고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제 저네와 우리의

역사의 사실에 관한 기록의 시말을 참작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위가 공손연을 토멸하여 요동의 전부가 항복하자, 위는 고구려에 대한 맹약을 배반하고 땅 한쪽도 고구려에 돌려주지 아니

하므로, 동천왕이 노하여 자주 군사를 일으켜서 위를 토벌하여 서안평(西安平)을 함락시켰다. 서안평은 전사(前史)에 지금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라 하니, 이것은 한서지리지에 의거한 것이지마는, 공손연이 왕성할 때 고구려와 오ㆍ위의

교통이 늘 서안평 때문에 바닷길로 통하였으므로 이때의 서안평은 대개 양수 부근임이 옳다. 고대의 지명은 매양 천이(遷移)

가 잦았던 것이다.

 

丘儉의 침략과 제2丸都의 함락

 

기원 245년경에 위가 동천왕의 잦은 침입을 걱정하여,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서 수만의 군사로 침략해오므로 왕이 비류수

(沸流水)

에서 이를 맞아 싸워서 관구검을 크게 격파하여 3천여 명을 목베고, 양맥곡(梁貊谷)까지 추격하여 또 3천여 명을 목베었다.

왕은, “위의 많은 군사가 우리의 적은 군사만 못하다.”하고, 이에 여러 장수들은 후방에서 싸움을 구경하게 하고 왕이 몸소

철기(鐵騎) 5천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는데, 관구검 등이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을 벌여 전진해

오므로, 왕의 군사가 퇴각하니 후군이 놀라 무너져서 드디어 참패하여 상한 군사가 1만 8천을 넘었다. 왕이 1천여 기병을

거느리고 압록원(鴨錄原)으로 달아나니 관구검이 드디어 환도(丸都 : 지금의 安古城)에 들어와서 대궐과 민가를 다 불태워

버리고 역대의 문헌을 실어 위로 보내고는, 장군 왕기(王頎)로 하여금 왕을 뒤쫓게 하였다. 왕이 죽령(竹嶺)에 이르렀을 때

에는 여러 장수들이 다 달아나 흩어지고,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密友)가 왕을 시위하고 있었다. 뒤쫓는 군사가 급히 달려

들어 형세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는데, 밀우가 결사대를 뽑아 죽음으로써 위의 군사와 싸우고, 왕은 그 틈을타서 도망하여

산골짜기에 들어가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험한 곳을 지키고, 군중에게 영을 내련 밀우를 구원하여 오는 자는 큰 상을 내릴

것이라고 하니, 남부(南部)의 유옥구(劉屋句)가 이에 응하여 싸움터로 갔다.

밀우가 기진하여 땅에 엎드러져 있음을 보고 들쳐업고 돌아오니, 왕은 자기의 넓적다리살을 베어 밀우에게 먹여 한참만에

깨어났다. 이에 왕은 밀우 등과 함께 남갈사로 달아났다. 그러나 위병의 추격은 다급해졌다. 북부(北部)의 유유(紐由)가,

국가의 흥망이 달린 이같이 위급한 판에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위태로운 판국을 돌이킬 수 없다 하고, 음식을 갖추어

가지고 위의 군사들 가운데 들어가서 거짓 항복하는 글을 바치고, “우리 임금께서 대국에 죄를 해변에 이르러 다시 더 갈

곳이 없으므로 항복을 비시고, 먼저 얼마 안 되는 음식으로 군사들을 호궤하고자 합니다.”고 하니, 위의 장수가 그를 불러

보았다. 유유는 음식 그릇 속에 감추어 갔던 칼을 빼어 위의 장수를 찔러 죽였다. 왕이 군사를 명하여 위의 군사를 반격하니

위의 군사가 무너져서 다시 진을 이루지 못하고 요동의 낙랑으로 달아났다. 이 싸움에 대한 기사는 김부식이 삼국지와 고기

(古記)를 뒤섞어서 고구려 본기에 넣었으므로 앞뒤의 기사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① “관구검이 군사 1만 명

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하고 “왕이 보기(步騎) 2만 명으로 거역해 싸웠다.”고 하였으니 고구려 군사가 위의 군사보다

갑절인데, 그 아래 동천왕의 말을 싣되, “위의 많은 군사가 우리의 적은 군사만 못하다.”고 하였음은 무슨 말인가?

② 비류수에서 위의 군사 3천 명을 목베고, 양맥곡에서 또 위의 군사 3천여 명의 위병이 이미 6천여를 목베었다고 하였는데,

1만 명의 위병이 이미 6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어 다시 군대를 이룰 수 없었겠는데, 그 아래에 “왕이 철기(鐵騎) 5천으로 추격

하다 크게 패했다.”고 한 건 무슨 말인가? 관구검전에 그 결과를 기록하여 “논공행상(論功行賞)을 받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

고 하였으니, 그 출사한 군사의 많음과 싸움의 크기를 가히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인데, 어찌 겨우 1만 명의 출병이었으랴?

다만 저네의 역사에 상내약외(詳內略外)의 예를 지켜 그 기재가 이에 그쳤을 뿐이다. 고구려 본기에는 이 싸움을 동천왕

20년(기원245년)이라 하였으니, 동천왕 20년은 위의 폐제(廢帝)(芳)의 정시(正始) 8년이요, 삼국지 관구검전에는, “정시

(正始) 중에……현도의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치고……6년에 다시 정벌하였다(正始中……出玄ꟙ討句驪……六年復征之).”라고

하였으므로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정시 5년과 6년의 두 번의 전쟁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는데, 정시 5년과 6년은 동천왕

18년과 19년이다. 그러나 삼국지 본기에는 정시 7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쳤다(幽州刺史毌丘儉 討高句驪).”고 하여

고구려 본기와 맞는다. 어느 쪽을 좇음이 옳은 것인가? 최근 1905년 청(淸)의 집안현 지사(輯安縣知事) 아무개가 집안현

판석령(板石嶺) 고개 위에서 발견한 관구검의 기공비(記功碑)의 파편에 ‘6년 5월’의 글자가 둘째 줄에 보였으니, 만일 이것이

진정한 유적이라면 정시 6년, 동천왕 19년이 곧 그 싸움의 시작이고, 다시 싸웠다는 기록은 잘못이다. 그러나 옛 청조(淸朝)

인사들이 고물(古物) 위조의 버릇이 매우 많아서, 지나 현대에 빛을 보게 된 옛 비석, 옛 기와가 거의 가짜라 하여 그 비서의

파편은 아직 고고학자의 심정(審定)을 요할 것이고, 설혹 이것이 진짜 유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불내성(不耐城)의 명(銘)이요

환도성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집안현의 환도성은 제3의 환도성이요, 제3의 환도성은 동천왕 때에는 아직 건축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2장에서 자세히 기록하였다.

 

제2의 丸都城이 파괴된 후 평양에 還都

 

제2의 환도성이 파괴되자 동천왕은 그의 서북쪽 정벌의 웅대한 마음이 찬 재[冷灰]가 되어 지금 대동강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니, 이것이 고구려가 처음으로 남천(南遷)한 것이다. 평양 천도 이후 대세가 변한 것이 둘이니, 그 하나는 남낙랑에 딸린

작은 나라들이 비록 고구려에 복속하여 있었으나 오히려 대주류왕이 최씨를 멸망시킨 옛날 원한을 생각하여 복종과 배반이

드리없다가 평양이 고구려의 서울이 되어 제왕의 대궐과 군사의 본영이 다 이곳에 있게 되니, 작은 나라들이 기가 누러 차차

아주 꺾였고, 또 하나는 평양 천도 이전에는 고구려가 늘 서북으로 발전하여 흉노ㆍ지나 등과 충돌이 잦다가, 평양 천도 이후

에는 백제ㆍ신라ㆍ가라 등과 접촉을 하게 되어 북쪽보다는 남쪽에 대한 충돌이 많아졌다. 다시 말하자면 고구려가 서북의

나라가 되지 않고 동남의 나라가 된 것은 곧 평양 천도로 원인한 것이다. 그러나 평양 천도는 제2환도성의 파괴로 인한 것이니

그러므로 제2환도의 파괴가 고대사상 비상한 대사건이라 할 것이다.

 

 

제 2장 고구려 대 鮮卑의 전쟁

 

鮮卑 慕容外의 강성

 

선비가 늘 고구려에 복속하여, 비록 단석괴(壇石塊)의 용맹으로도 오히려 명림답부의 절제를 받다가, 고구려가 발기의 난을

지나 요동을 잃어버리고 나라의 형세가 약해지니, 선비가 드디어 배반하여 한에 가 붙었다. 한말에 원소(袁紹)와 조조가 서로

맞섰을 때 선비와 오환이 원소에게 붙었다가 원소가 망하니, 기원 207년에 조조가 7월의 장마를 기회하여 노룡새(盧龍塞)

5백 리를 몰래 나와서, 선비와 오환을 불시에 공격하여 그 소굴을 파괴하였다. 오환은 마침내 망하고 선비는 그 뒤에 가비능

(軻比能)이라는 이가 있어 다시 강대해져서 자주 한의 유주(幽州)와 병주(幷州)를 침략하였는데 한의 유주 자사 왕웅(王雄)

자객을 보내 가비능을 암살하였으므로 선비는 다시 쇠약해졌다.

기원 250년경에 선비가 우문씨(宇文氏)ㆍ모용씨(慕容氏)ㆍ단씨(段氏)ㆍ척발씨(拓跋氏)의 네 부로 나뉘어 서로 자웅을 다투

더니, 모용씨에 모용외(慕容外)란 자가 있어 용감하고 꾀가 뛰어나 부족이 가장 강성해졌는데 창려(昌黎) 태극성(太棘城) -

지금의 동몽고 땅 특묵우익(特黙右翼)의 부근을 근거지로 삼아서 사방으로 노략질을 하였다. 이때에 지나의 위ㆍ오ㆍ촉 세

나라가 다 망하고 (晉)의 사마씨(司馬氏)가 지나를 통일하였으나 자주 모용외에게 패하여 요서 일대가 소란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역사가들이 왕왕 모용씨가 웅거한 창려를 지금의 난주 부근이라 하지마는, 진서(晉書)의 무제(武帝) 본기에,

“모용외가 여창을 침노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위의 창려 - 지금의 난주가 진(晉)의 창려가 아님이 분명하니, 곧 나중의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이 서울한 용성(龍城)과는 멀지 아니한 땅일 것이다.

 

北扶餘의 파멸과 依慮王의 자살

 

북부여는 제3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 여러 나라의 문화 원천의 나라였다. 그러나 신라ㆍ고구려 이래로 압록강 이북을

잃고는 드디어 북부여를 조선의 영역 밖의 나라라 하여 그 역사를 정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해모수왕 이후로 그 치란(治亂)

성쇠를 알 수 없거니와, 다행히 지나의 역사가들이 저희의 정치적으로 관계된 사실을 몇 마디나마 기록하였으므로, 그 대강을

말할 수 있다.

후한(後漢) 안제(安帝)의 영초(永初) 5년, 기원 112년에 부여왕(이름은 모름)이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거느리고 한의 낙랑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역사에 보인 북부여의 외국에 대한 용병의 시초일 것이요,

연광(延光) 원년, 기원 121년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한의 군사와 힘을 합하여 고구려ㆍ마한[百濟]ㆍ예ㆍ

읍루(挹婁) 등을 격파하였다고 했으나, 이듬해 한이 차대왕에게 화의를 청하고 배상으로 비단을 바친 것을 보면 북부여와 한이

고구려를 격파하였다는 것은 거짓 기록일 것이다. 기원 136년에 위구태가 왕이 되어 2만의 기병으로 한의 현도군을 습격하고

그 뒤 공손도가 요동왕이 되어서는 부여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종실(宗室)의 딸로 아내를 삼아서 고구려와 선비에 대한 공수

동맹을 맺었으니, 위구태왕은 마치 고구려의 차대왕처럼 가장 상무(尙武)한 임금이고, 또 그가 왕위에 있던 동안이 해모수

이후 북부여의 유일한 전성시대일 것이다.

위구태왕의 뒤에 간위거왕(簡位居王)에 이르러서는 적자가 없어 마여(麻餘)가 즉위하였는데, 오가(五加) 중의 우가(牛加 :

이름은 모름)가 반역할 마음을 품었으나, 우가의 형의 아들은 왕실의 충성되고 나라 일에 부지런하고 나라 사람들에게 재물을

잘 베풀어 주어 인심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우가 부자가 모반하니 위거가 이를 잡아 죽이고 그 재산을 압수하고, 마여왕이

죽으니 위거가 마여왕의 아들 의려(依慮), 겨울 6살 난 어린아이를 세워 보좌하였다.

위거가 죽고 의려가 왕위에 오른 지 41년만에 국방이 소홀해졌는데, 드디어 선비 모용외가 이를 정탐해 알고 무리를 이끌고

북부여와 서울 아사달에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모용외가 침입하니 의려왕은 수비가 허약하여 막아내지 못할 줄 알고 칼을

빼어 자살해서 나라를 망친 죄를 국민에게 사과하고, 유서로 태자 의라(依羅)에게 왕위를 전하여 나라의 회복에 힘쓰게 하였다.

의려왕이 국방을 힘쓰지 못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한 죄는 없지 아니하나, 그러나 항복하느니보다 차라리 죽으리라는 의기

(義氣)를 가져 조선의 역사상 처음으로 순국한 왕이 되어 피로써 뒷사람의 기억에 남겼으니, 어찌 성하(城下)의 맹세를 맺어

구차스럽게 생명을 보전하려는 용렬한 임금에 비할 바이랴.

의려왕이 자살하니 의라가 서갈사나(西曷思那) - 지금의 개원(開原) 부근의 숲속으로 달아나 결사대를 모집해 선비의 군사를

물리치고, 험한 곳을 지켜 새 나라를 세웠다. 아사달은 왕검 이래 수천 년 문황의 고도로써 역대의 진귀한 보물뿐 아니라

문헌도 많아, 신지(神誌)의 역사며, 이두문으로 적은 풍월 등이 있었고 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를 가르쳤다고 하는 금간옥첩

(金簡玉牒)에 쓴 글도 있었는데, 모두 선비의 만병(蠻兵)에 의해 타버리고 말았다.

 

고구려의 濊亂 討平과 명장 達賈의 참사

 

선비가 북부여에 침입하기 6년 전인 기원 280년에 고구려는 예(濊 : 本紀의 肅愼)의 반란이 있었다. 예는 원래 수렵시대의

야만족으로서, 처음에는 북부여에 복속해 있었는데, 북부여가 조세를 과중하게 받자 배반하고 고구려에 가 붙었다가,

고구려가 요동을 잃고 나라의 형세가 쇠약해지자 드디어 반란을 일으켜 국경을 침입하여 수없이 인민을 죽이고 가축을 약탈

하였다. 서천왕(西川王)이 크게 걱정하고 장수될 인재를 구하니, 여러 신하들이 오아의 아우 달가(達賈)를 추천하였다. 달가는

기묘한 계교로 예의 소굴을 습격하여 그 추장과 6,7백 집을 포로로 하여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으로 옮기고 그 여러 부락의

항복을 받으니, 서천왕이 달가를 안국군(安國君)봉하였다.

서천왕이 죽고 아들 봉상왕(烽上王)이 즉위하였는데, 왕은 천성이 남을 시기하고 의심하기를 잘하여 달가가 항렬로 숙부요,

위명(威名)이 전국에 떨치므로 죄를 얽어 사형에 처하였다.

국민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안국군이 아니더면 우리가 예맥(濊貊)의 난리에 죽은 지가 오래였을 것이다.”하고 슬퍼하였다.

 

募容廆 取退와 烽上王의 교만 포악

 

모용외는 일대의 효웅이었다. 진의 정치가 부패하여 지나가 장차 크게 어지러워질 것을 내다보고, 바야흐로 전 지나를 아울러

가질 야심을 가졌다. 그러나 만일 동으로 고구려를 꺾지 못하면 뒷걱정이 적지 아니할 것을 잘 안 그는, 북부여를 격파한 뒤에

그 이긴 형제로 곧 고구려를 침노하려고 했는데, 다만 안국군의 위명을 꺼려 주저하다가 안국군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기원 292년에 날랜 군사로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침범하였다. 이때 봉상왕이 신성에 순행해 있었는데, 모용외는

이를 알고 성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하여 매우 위급해졌다. 신성 성주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가 5백 기병으로

모용외의 군사를 돌격하여 이를 크게 깨뜨리고 왕을 구해냈다. 왕은 기뻐하고 고노자의 작위를 높여 북부대형(北部大兄)

임명하였다.

이듬해 3년에 모용외가 또 공격해와서 졸본(卒本)에 침입하여 서천와의 무덤을 파다가 구원병에게 격퇴당했다. 왕이 모용씨가

자주  침노해옴을 걱정하니, ‘신가’ 창조리(倉助利)가 아뢰었다. “북부대형 신성의 성주 고노자는 지혜와 용맹이 다 완전한

장수인데, 대왕께서는 고노자를 두고 어찌 선비를 근심하십니까?”하고 왕에게 권하여 고노자로 신성의 태수를 삼았다.

고노자가 백성을 사랑하고 군사를 단련하여 여러 번 모용외의 침략군을 격퇴하여 국경이 안정되고 모용외의 군사가 다시

침노하지 못하니, 봉상왕은 그만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여래 해 흉년으로 국민이 굶주리고 피로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라

안의 인부를 징발하여 대궐을 지으니, 국민이 달아나서 인구가 자꾸 줄어들었다. 기원 300년에 이르러서는 왕이 여러 신하들의

간하는 말을 다 물리치고 나라 안의 15살 이상의 남녀를 죄다 징발하여 건축에 부리니 ‘신가’ 창조리가 간했다 “천재(天災)

잦아 농사가 되지 않아서 나라 안의 인민이 장정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약자는 구렁에 빠져 죽는데, 대왕께서는 이를 돌아

보지 아니하시고 굶주린 백성을 몰아 토목의 역사를 시키시니, 이는 임금의 할 일이 아닐 뿐더러, 하물며 북쪽에는 강적

모용씨가 있어 날마다 우리의 틈을 엿보고 있으니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백성을 아끼지 아니하는데

신하가 임금을 간하지 아니하면 충(忠)이 아니므로, 신이 이미 ‘신가’의 자리에 있어 말할 것을 숨길 수 없어서 아룁니다.”

그러나 왕은, “임금은 백성이 우러러보는 것이니 임금이 사는 대궐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백성이 무엇을 우러러보겠소?

‘신가’는 백성을 위해 명예를 구하지 마오. 죽지 않으려거든 다시 말하지 마오.”하였다. 창조리는 봉상왕이 잘못을 고치지 않을

줄을 깨닫고, 동지들과 비밀히 의논하여 왕을 폐하였다.

 

烽上王의 폐위와 美川王의 즉위

 

봉상왕은 처음에 그 숙부 달가를 죽이고, 또 그 아우 돌고(咄固)를 의심하여 죽였는데,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이 화가 자기

에게 미칠 줄 알고 달아났다. 봉상왕은 그 뒤에 여러 번 을불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을불은 도망하여 성명을 갈고 몸을

팔아, 수실촌(水室村) 사람 음뢰(陰牢)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데, 음뢰가 일을 매우 고되게 시켜, 낮으면 나무하고 밤이면

쉴 사이 없이 그 집 문 앞 늪에 돌을 던져 개구리를 울지 못하게 해서, 그 집 식구들이 편안히 자게 하였다. 을불이 견디다 못

하여 1년만에 또 도망하여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함께 소금장사를 하였다. 소금을 사서 배편으로 압록강으로 들여와

소금집을 강동(江東) 사수촌(思收村) 사람의 집에 부려놓았다.

그 집 노파가 공짜로 소금을 달라고 하므로 1말쯤이나 주었는데도, 노파는 마음에차지 않아 더 다라고 보채었다. 을불이 주지

않았더니 노파는 도리어 꽁한 마음을 먹고, 해치려고 소금짐 속에다가 몰래 신 한 켤레를 묻어놓았다가, 을불이 그 집을 떠나

오자 뒤쫓아와서 소금을 뒤져 신을 찾고, 을불 등 두 사람을 절도로 말아 압록제(鴨綠宰)에게 고소하여, 을불은 태형(笞刑)

맞고, 소금은 빼앗아 노파에게 준다는 판결이 내렸다. 을불은 이에 소금장사도 할 수 없고 머슴살이 할곳도 얻을 수가 없어서,

숱한 마을 온갖 동네로 돌아 다니면서 걸식하여 날을 보냈다. 옷은 너덜너덜 찢어지고 얼굴은 보기에도 무섭게 파리하여

아무도 옛날의 왕손(王孫)인가 하는 의심을 갖지 아니하였다. 이때 ‘신가’ 창조리(倉助利) 등이 봉상왕을 폐하면, 임금 될

인재로나 차례로나 모두 을불이 가장 합당하다고 하여, 북부(北部)의 ‘살이’ 조불(祖弗)과 동부(東部)의 ‘살이’ 소우(蕭友)

등으로 하여금 을불을 찾게 하였다. 그들은 비류수에 이르러 을불을 만났다. 소우가 을불의 어릴 때 모습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나아가 절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지금 임금이 무도하므로 ‘신가’ 이하 여러 대신들의 의논하여 지금 임금을 폐하고

왕손(王孫)을 세우려고 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지금 임금이 인심을 잃어 나라가 위태로우므로 여러 신하들이,

왕손이 품행이 단정하시고 성격이 인자하시어 조상의 업을 이을 만하다고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왕손은 의심치 마십시오.”

하고 데리고 돌아와 창조리의 동지 조맥남(鳥陌南)의 집에 숨겨두었다. 가을 9월에 창조리가 봉상왕을 따라 후산(侯山)

가서 사냥을 하다가, 갈대잎을 따서 갓에 꽂고 외쳤다. “나를 좇으려는 이는 나와 같이 갈대잎을 따서 갓에 꽂으시오.”하니

모든 사람이 다 창조리의 뜻을 알고 일제히 갈대잎을 갓에 꽂았다. 이에 창조리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봉상왕을 폐하여 딴

방에 가두니, 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스스로 깨닫고 그 아들 형제와 함께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을불이 왕위에 오르니

곧 미천왕(美川王)이다.

 

美川王의 遼東 전승과 鮮卑 구축

 

기원 197년 발기가 반란을 일으키고부터 기원 370년경인 고국원왕(故國原王) 말년까지는 곧 고구려의 중엽 시대인데,

미천왕의 일대는 이 중쇠(中衰) 시대 중에서 가장 왕성한 때이다. 저자가 일찍이 환인현(桓因縣)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지방의

문사 왕자평(王子平 : 본래 만주인)의 말을 들으니, “고구려의 고대에 ‘우굴로’란 대왕이 있었는데, 그가 아직 왕이 되기 전에

불우하여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걸식을 할 때 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었으므로, 지금도 만주에서 가죽신은 ‘우굴루(우굴로는

만주 노동자의 신)’라 함은 그 대왕의 이름으로 이름 지은 것입니다. 그 대왕이 그렇게 걸식하도록 곤궁하였지마는, 늘 요동을

되찾을 생각을 가지고 있어 요동 각지를 돌아다닐 때, 산과 내의 험하고 평탄한 것, 길의 멀고 가까운 것을 알기 위해 풀씨를

가지고 다니면서 길가에 뿌려 그 지나간 길을 기억했으므로, 지금 요동 각지의 길가에 ‘우굴로’란 풀이 많습니다.”고 하였다.

‘우굴로’가 을불과 음이 같고 또 고구려 제왕 중에 초년에 걸식한 이가 을불뿐이니 ‘우굴로’는 아마 미천왕 을불이 한미할 때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미천왕은 기원 300년부터 331년까지 무릇 31년 동안을 왕위에 있은 제왕이고, 그 31년 동안의 역사가 곧 선비 모용씨와의

혈전한 역사다. 간략하고 허술한 고구려 본기와 허황하고 과장된 진서(晉書)를 합하여 그 진실에 가까운 것을 뽑아 왕의

역사를 서술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1) 현도의 회복 - 왕자 수성이 회복한 요동이 연우왕 때에 또 한의 소유가 되었음은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미천왕이 즉위

하고는 그 제2년에 곧 현도성을 격파하여 8천여 명을 포로로 하여 평양으로 옮기고, 16년에 현도성을 점령하였다.

2) 낙랑의 회복 - 낙랑도 또한 한나라 무제(武帝) 4군(郡)의 하나로서 대대로 드리없이 옮겨졌지만, 대개 역시 요동 땅에

가설(假設)것이고, 평양의 낙랑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동천왕(東川王) 본기에, 위군(魏軍)이 낙랑으로 물러

갔을 때 동천왕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도 위ㆍ진(魏晉)의 태수는 여전히 존재하였으니,

만일 지나의 낙랑이 곧 조선의 평양 - 남낙랑이라 한다면 이는 평양이 고구려의 왕도인 동시에 또 지나 낙랑군의 군치(郡治)

되는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같은 모순 당착(撞着)되는 역사적 사실이 있으랴? 미천왕의 낙랑 점령은 그 재위 14년, 기원

313년의 일이니, 진(晉) 사람 장통(張統)이 낙랑ㆍ대방 두 군(대방도 요동의 假設郡이요, 長湍 혹은 鳳山의 帶方國이 아님)

웅거하고 있었으므로 왕이 이를 공격하니, 장통이 항거할 힘이 없어 모용외의 부하 장수 낙랑왕 모용준(募容遵)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모용준은 그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마침내 장통을 꾀어 백성 1천여 집을 몰아가지고 모용외에게 투항

하여, 모용외는 유성(柳城) - 지금의 금주(錦州) 등지에 또 낙랑군을 가설하여 장통으로 태수를 삼았으니 이제 요동의 낙랑은

고구려의 차지가 되었다.

3) 요동에서의 전승 - 요동의 군치는 양평(襄平), 다시 말하여 지금의 요양(遼陽)이니, 진서(晉書)에 의하면, “미천왕(美川王)

요동을 공격하다가 자주 패하고 물러나고 도리어 맹약을 청하였다.”고 하였으나 양서(梁書)에는 “을불(乙弗 美川王)이 자주

요동을 침범하되 모용외가 제어하지 못하였다(乙弗頻冠遼東 廆不能制).”고 하여 모용외가 늘 미천왕에게 패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어 두 책이 서로 모순된다. 그러나 진서는 당태종이 지은 것이고, 당태종은 요동이 아무쪼록 지나의 요동임을 거짓

증명하여, 저희 나라 신하와 백성들을 고무해서, 고구려의 요동에 대한 전쟁열을 일으키려 하여, 전대의 역사책인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등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 열국(列國), 그 중에서도 특히 고구려에 관계되는

문구를 많이 고쳤으니, 하물며 그 자신이 지은 진서(晉書)에서야 더 말할 나위 있으랴. 그러니 양서(梁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도리어 진실하고, 현도와 낙랑이 이미 차례로 정복 되었으니 겨우 몇 현(縣)밖에 남지 않은 요동도 고구려에게 되돌아

왔을 것이지마는, 아직 충분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만하여둔다.

4) 극성(棘城) 전쟁 - 기원 320년에 미천왕이 선비의 우문씨(宇文氏)와 단씨(段氏)와 진(晉)의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

(崔毖)와 함께 연합하여서 모용외의 서울 극성으로 쳐들어갔다. 모용외가 네 나라의 사이를 이간시키므로 미천왕과 단씨는

물러나고, 우문씨와 최비가 모용외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서 최비는 고구려에 투항하고 고구려 장수 여노자가 하성(訶城)에

웅거해 있다가 모용외가 장수 장통에게 패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진서(晉書)에 전해진 것으로서 거의 사실인 듯하며, 여노자는

고노자(高奴子)의 잘못인 듯하나, 고노자는 모용외를 여러 번 격파한 명장이니 이제 장통에게 붙잡혔다는 말이 자못 의심

스럽고, 또한 고노자가 봉상왕 5년 이후에는 다시 본기(本紀)에 보이지 아니하니 그 동안에 이미 죽었을 것인데, 근 40년만에

갑자기 나타난 것도 매우 의심스럽다.

아마도 거짓 기록인가 싶다.

 

제3의 丸都, 지금의 輯安縣 紅石頂子山의 함락

 

기원 331년에 미천왕이 죽고 고국원왕 교(釗)가 왕위를 이었다. 이듬해 3년에 모용외도 죽고 그의 세자 황(皝)이 왕위를

이었다. 고국원왕은 그 야심은 미천왕보다 더했으나 재략이 그에 미치지 못했고, 모용황은 그 야심과 재략이 아버지 외보다

뛰어난 효웅일 뿐더러, 그의 서형(庶兄)(翰)과 그의 두 아들 준(雋)과 각(恪) 등이 다 절세의 기재(奇才)였다. 고국원왕이

평양의 서울을 서북(西北) 경영에 불편하다 하여 지금의 집안현 홍석정자산(紅石頂子山) 위에 새로 환도성을 쌓아 서울을

옮겼다. 이것이 제3의 환도성이니, 태조왕(太祖王) 때에 왕자 수성이 쌓은 제1환도는 아직 적국의 땅으로 되어 있고, 동천왕

(東川王)이 쌓은 제2환도도 너무 적국에 가까이 있으므로, 나아가 싸우기에 편하고 물러나 지키기에 용이한 지방을 가려

서울로 하려고 이 제3의 환도성을 쌓은 것이다. 모용황은 고국원왕이 제3의 환도성에 천도하였다는 말을 듣자, 고구려가

장차 북벌할 것을 알고, 먼저 고구려에 침입하여 타격을 주는 동시에, 겉으로는 고구려를 피하여 멀리 달아날 곳을 가장하여

고구려로 하여금 방비를 소홀히 하게 하려고, 극성 - 모용한(募容翰)이, “우문씨는 비록 강성하나 실로 지킬 뜻을 가졌을

뿐인데, 고구려는 그렇지 아니하여, 우리가 만일 우문씨를 쳤다가는 고구려가 우리의 뒤를 엄습할 염려가 없지 아니하니

먼저 고구려를 치는 것이 옳습니다. 고구려를 치자면 두 길이 있으니, 하나는 북치(北置)로부터 환도성으로 향하는 북도

(北道)인데, 북도는 평탄하고 넓으나 남도는 험하고 좁아서 고구려가 남도보다도 북도를 더 엄중히 방비할 것이니, 우리가

먼저 일부 군사를 내어 북도로 침입한다 일컫고, 가만히 대군을 내어서 남도로 공격하면 환도성을 개뜨리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여, 황은 한의 계교를 채용하였다.

고국원왕은 모용황의 군사가 북도로 침입해온다는 보고를 듣자 저들의 계교를 모르고 아우 무(武)를 보내 5만의 군사로

북도를 방비하게 하여, 무는 황의 장군 왕부(王富)를 목베고 그 군사 1만 5천을 전멸 시켰으나, 왕은 적은 군사로 남도를 방어

하다가 황의 대군을 만나 크게 패하여 단기(單騎)로 도망하니, 환도성이 드디어 적병에게 함락되어 왕태후(王太后)

주씨(周氏), 왕후 모씨(某氏)도 다 적병에게 잡혔다. 모용황은 환도성을 얻고 다시 왕을 쫓으려다가, 황의 장군 한수(韓壽)가,

“고구려의 왕이 비록 패해서 달아났으나, 여러 성의 구원병이 다 모여들면 넉넉히 우리 대군의 적수가 될 것이고 또 고구려의

국내에는 험한 산이 많아 추격하는 것이 위험하니, 고구려 왕의 아버지의 무덤을 파서 해골을 가지고 그 모후(母后)와 아내를

잡아가면, 그는 죽은 아버지와 살아 있는 어머니와 아내를 되찾기 위해 할 수 없이 항복할 것이니, 그런 다음에 은혜와 믿음

으로 무마하여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면 장래 우리의 중원(中原) 경영에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황이

그의 말을 쫓아 국고(國庫)에 들어가 역대의 문헌을 불태우고 모든 진귀한 보물과 재산을 약탈하고, 성곽과 대궐과 민가를

모조리 파괴하고, 미천왕의 능을 파 그 시체와 왕태후 주씨, 왕후 모씨를 싣고 돌아갔다. 적병은 비록 돌아갔으나 죽은

아버지와 생모가 적국에 잡혀갔으므로, 고국원왕은 부모를 찾아오기 위해 공손한 말과 많은 예물로 모용씨와 교제하고, 하는

수 없이 지나 대륙에 대한 경영을 포기함에 이르러 수십 년 동안 약한 나라가 되었다.

환도성의 세 번의 천도는 고구려 상대(上代)의 성쇠의 역사를 충분히 설명해주는 것이니, 태조왕 때에 왕자 수성(遂成 : 뒤의

次大王)이 요동을 점령하고 제1의 환도성을 지금의 개평 부근에 처음으로 쌓던 때가 고구려의 가장 강성한 때이고, 발기가

모반하여 요동을 들어 공손씨에게 항복하므로 산상왕(山上王)이 제2의 환도성을 지금의 환인현 부근에 옮겨 쌓았다가 이것

까지 위의 장수 관구검에게 파괴당하려 하던 때가 고구려의 쇠퇴해진 시기이고, 미천왕이 선비를 구축하여 낙랑ㆍ현도ㆍ요동

등 군을 차례로 회복하여 중흥의 실적을 올리다가 중도에 죽고, 고국원왕이 왕위를 이어가지고 제3의 환도성을 지금의 집안현

부근에 다시 쌓았다가 또 모용황에게 파괴당하니, 이때는 고구려의 가장 쇠미해진 시기였다. 삼국사기에는 비록 이러한

관계를 자세히 서술하지 못하였으나, 본기(本紀)의 지리를 자세히 고찰해보면 그 대강을 얻을 수 있고 삼국지(三國志)

이이모(伊夷謨)가 다시 새 나라를 만들었다고 한 것은 곧 제2의 환도성 신축을 가리킨 것이다.

이상의 기록은 조선사략(朝鮮史略)과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을 뽑아 기록한 것이어니와, 진서(晉書)는 이미 대략 말한 바와

같이 당태종이 고구려를 헐뜯고 욕하기 위해 허다한 사실 아닌 기사를 거짓으로 만든 것이 많은 글이다. 그러므로 위의 기사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아니하니, 예를 들면 모용황이 미천왕의 무덤을 파갔다고 하였으나, 미천왕 때의 고구려 서울은 평양

이었고, 미천왕이 돌아간 지 12년만에 고국원왕이 환도성에 천도하였으니, 고구려 역대의 왕릉은 다 당시 왕도(王都) 부근에

있었으므로, 미천왕은 돌아간 뒤에 반드시 평양에 묻혔을 것이고 환도성에 묻히지 않았을 것인데, 환도성을 침략한 모용황이

어찌 평양에 묻힌 미천왕의 능을 파갈 수 있으랴? 그러므로 미천왕의 능을 파갔다는 말이 극히 의심스러운 동시에, 그 이하에

기록된 왕태후와 왕후를 잡아 갔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다만 이 뒤에 고구려가 30여 년 동안 곧 모용씨가 멸망하기 이전에는

다시 지나 대륙을 경영하지 못했음을 보면 모용씨에게 크게 패하여 불리한 조건의 조약을 맺은 사실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제 7편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의 충돌

 

제 1장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 관계 유래

 

南樂浪ㆍ北扶餘의 存亡과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의 관계

 

고추모(高皺牟)와 소서노(召西奴)의 한 쌍 부부가 분리하여 고구려ㆍ백제의 남북 두 왕국을 건설한 후에 고구려는 북쪽 여러

나라들을 차차 정복해 들어가 북방의 유일한 강대국이 되는 동시에, 백제의 온조왕(溫祚王)이 마한(馬韓) 50여 나라를 통일

하고, 진(辰)(弁) 두 나라와 신라 가라(加羅)를 정복하여 남방의 유일한 강대국이 되었음은 이미 제4편ㆍ제5편에서 대강

서술하였다. 두 강대국이 이처럼 남북에서 대치하였으나 수백 년 동안 피차 한 번의 접촉도 없었음은 남낙랑과 동부여가 두

나라 중간에서 장벽이 되었던 때문이다. 이제 두 나라의 접촉 사실을 쓰려고 하매, 먼저 남낙랑과 동부여의 존망(存亡) 관계

부터 말할밖에 없다.

남낙랑과 동부여의 열국이 고구려 대주류왕의 정복을 받고는 고구려를 원망하여 늘 지나의 후원을 얻어 이를 보복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고 태조왕 때에 왕자 수성(遂成)이 한(漢)과 싸워 이기고 요동과 북반랑을 회복하니, 남낙랑과 동부여는

물론 고구려에 눌려 꼼짝을 못 하고, 백제도 고구려에게 신복(臣僕)하여 그 요구에 응해 기병을 내서 고구려의 서정(西征)

참가하였으니, 이는 제4편과 5,6편에 말하였거니와 백제사가 중간에 연대가 줄어들어 고구려 태조왕 때가 백제의 어느 왕 어느

시대에 해당하는지 아직 발견할 수 없고, 백제 초고왕(肖古王) 이후에야 그 연대를 겨우 믿을 수 있게 되었는데, 초고왕 32년은

곧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원년(기원 197년)이니, 고구려가 발기(發岐)의 난으로 하여 요동과 북낙랑을 한인(漢人) 공손씨

(제5편 제1장 참조)에게 빼앗기자 남낙랑과 동부여가 고구려를 배반하고 자립하였으며, 남낙랑의 남부인 대방(帶方) - 지금의

장단(長湍) 내지 봉산(鳳山) 등지의 호족(豪族) 장씨(張氏)가 또 남낙랑을 배반하고 대방국(帶方國)을 세우니, 백제도 이를

기회하여 고구려와 관계를 끊고 자립하고, 초고왕의 아들 구수왕(仇首王)은 예(濊)의 침노를 물리쳐서 나라의 형세가 더욱

강성해졌다.백제의 고이왕(古爾王)은 초고왕의 한 어머니의 아우인데, 기원 234년에 구수왕이 돌아가니, 구수왕의 태자 -

자기의 종손(從孫) 사반(沙伴)이 나이 어림을 기회하여 그 왕위를 빼앗았다.

이때 고구려가 관구검에게 패하고 낙랑을 습격하여 남낙랑의 옛 서울 - 지금의 평양을 빼앗아 도읍을 옮기고, 남낙랑은

풍천원(楓川原) - 지금의 평강(平康)ㆍ철원(鐵原) 부근으로 옮기자 고이왕이 남낙라의 변경을 침노하여 그 백성들을 붙잡아

갔다.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남낙랑과 한편이 되어 동부여를 쳐서 이기고 회군하는지라, 고이왕은 아직

건국한 지 얼마 안 되는 백제로서 위(魏)를 대적하지 못할 줄을 알고 그 약탈한 사람들을 돌려주고 화의를 청했다.

그러나 유무 등이 듣지 않고 신라 북부의 여덟 나라를 다 남낙랑에게 떼어붙이려 하였다. 왕이 노하여 진충(眞忠)으로 하여금

대방(帶方)의 기리영(畸離營 : 지역 미상)을 거쳐 궁준(弓遵)을 목베고 위의 군사를 물리치니 대방왕 장씨가 이에 백제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그 딸 보과(寶菓)를 고이왕(古爾王)의 태자 책계(責稽)에게 시집보내서 백제와 북방에 대항하는 공수

동맹을 맺었다. 기원 285년에 책계왕이 장인과의 동맹의 의리를 위해 대방을 구원하니 이것이 백제와 고구려의 첫 충돌이었다.

그 뒤에 고구려는 선비 모용씨(慕容氏)의 발흥(勃興)으로 하여 서북쪽 방어에 급급해서 남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나

남낙랑과 동부여는 백제의 강성해짐을 시기하여 기원 298년에 두 나라가 진(晉)의 구원병과 합력하여 침노해왔다. 책계왕이

나아가 싸우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고, 분서왕(汾西王)이 서서는 아주 남낙랑의 자객에게 암살을 당하고, 비류왕(比流王)

이 섰다.고구려 미천왕이 북으로 요동과 북낙랑을 격파하여 선비를 격퇴할 뿐 아니라 또 남쪽의 경영에도 힘을 써서 남낙랑과

대방을 토멸하고, 오래지 않아 백제와도 결전을 하게 되었으나 미천왕이 죽어 그 문제가 유야무야의 속에 묻히고, 미천왕의

아들 고국원왕이 서서 선비에게 패했음은 앞편(編)에서 말했거니와 고국원왕이 북방 경영을 포기하고 남진(南進)주의를

취하여 자주 백제를 침노하다가 마침내 백제의 근구수왕(近仇首王)을 만나 패해 꺾여서 드디어 남북혈전의 판국을 이루었으니,

다음 장에서 이를 서술하려 한다.

 

 

제 2장 近仇首王의 英武와 고구려의 쇠퇴(附 : 百濟의 海外 征伐)

 

백제의 帶方併吞과 半乞壤의 接戰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처음에는 왕후 진씨(眞氏)를 몹시 사랑하여 왕후의 친척 진정(眞淨)을 신임하고 조정 좌평(朝廷

佐平 : 형벌과 옥에 관한 일을 담당)을 삼았는데 진정이 권세를 믿고 함부로 날뛰어 모든 신하들을 억압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서 20년 동안 국정을 어지럽혔다. 그러다가 태자 근구수(近仇首)가 영특하고 밝아서 마침내 진정을 파면하고 폐단을

고치고, 대방의 장씨(張氏)를 낮추어 그 땅을 군현(郡縣)으로 만들고 육군의 군제(軍制)를 개정하고 해군을 처음으로 설치하여

바다를 건너 지나를 침략할 야심을 품었다.

이때 고국원왕이 환도(丸都)를 버리고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는 선비에게 실패한 치욕을 남쪽에서 풀려고 자주 백제를 침노

하다가 기원 369년에는 마병ㆍ보병 2만 명을 황ㆍ청ㆍ적ㆍ백ㆍ흑의 다섯 기(旗)에 나누어 거느리고 반걸양(半乞壤) - 지금의

벽란도(碧瀾渡 : 예성강의 한 나루)까지 이르러 근구수왕이 나아가 싸웠다. 이보다 앞서 백제의 나라 말 목자(牧子) 사기

(斯紀)가 잘못하여 말의 굽을 다치고 죄가 두려워서 고구려로 달아나 고구려의 군인이 되어 이 싸움에 왔는데 비밀히 탈출하여

근구수왕을 보고 “저네의 군사가 비록 많지마는 거의 남의 이목을 속이려고 수채움한 의병이요, 오직 적기병만이 날래고

용감합니다. 그러니 이것만 개뜨리면 그 나머지는 스스로 무너져 흩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근구수왕이 그의 말을 좇아

날래고 용감한 군사를 뽑아 적기병을 격파하고, 고구려의 군사를 죄다 쳐 흩어서 수곡성(水谷城) - 지금의 신계(新溪) 서북쪽

까지 진격하여 돌을 쌓아 기념탑을 만들고 패하(浿河 : 대동강 상류, 지금의 谷山ㆍ祥原 등지) 이남을 거두어 백제 영토를

만들었다.

 

故國原王의 전사와 백제의 載寧 천도

 

반걸양(半乞壤) 싸움 후 3년에 고국원왕이 그 빼앗긴 땅을 회복하려고, 정병 3만으로 패하(浿河)를 건넜다. 근초고왕(近肖古王)

근구수(近仇首)를 보내서 미리 강 남쪽 언덕에 복병하였다가 불의에 맞아 싸워서 고국원왕을 쏘아 죽이고, 패하를 건너

서울을 함락시키니 고구려가 이에 다시 국내성(國內城) - 지금의 집안현(輯安縣)으로 도읍을 옮기고, 고국원왕의 아들

소주류왕(小朱留王 : 본기의 小獸林王)이 서서 백제를 방어했다. 근초고왕이 상한수(上漢水) - 지금의 재령강(載寧江)에 이르러

황기(黃旗)를 세워 크게 열병식을 행하고 서울을 상한성(上漢城) - 지금의 재령(載寧)으로 옮겨 더욱 북방 진출을 꾀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지리지(地理志)에는 고국원왕의 평양 천도를 기록하고 소주류왕의 국내성 재천도는 기록하지 아니하여,

역대의 사학가들이 모두 고국원왕 이후에는 고구려가 내처 평양 등지에 서울한 줄로 안다. 그러나 고구려가 국내성을

고국천(故國川)ㆍ고국양(故國壤)ㆍ고국원(故國原)이라 일컬었으니, 고국원왕의 시체가 그 천도의 역사(役事)를 따라 북쪽에

옮겨 장사지내졌으므로 고국원왕이라 일컬은 것이다.

이는 이때 고구려가 국내성에 환도(還都)한 한 증거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光開土境平安好太王)의 비문에 의하면 평안

호태왕은 국내성에서 생장하여 국내성 부근에 장사지냈음이 분명하니 이는 평안호태왕의 전대(前代)에 국내성에 환도한 또

한 증거다. 국내성 환도는 곧 백제의 침략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근초고왕이 고구려 평양을

빼앗고 물러나 한성(漢城)에 도읍하였다.”고 하였고, 지리지에는 한성을 곧 남평양(南平壤)이라 하였으며, 이 밖에도 삼국사기

가운데 한성을 고구려의 남평양으로 친 데가 대여섯 군데나 된다. 그러나 지금의 한성은 오직 장수왕(長壽王)이 한 번 함락

시킨 일 이외에 그 이전에는 어느 해 어느 달에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는 기록이 전연 없으니 북평양(北平壤)은 북낙랑(北樂浪)

곧 요동의 개평(蓋平)ㆍ해성(海城) 등지요, 남평양은 곧 지금의 평양이니 근초고왕이 쳐 빼앗은 평양이 지금의 한성(서울)

아니라 지금의 평양인 한 증거요, 지리지에 중반군(重盤郡 : 지금 재령의 딴 이름)이 한성(漢城)이라 하였으니, 백제가 이미

평양을 함락하고 북진하여 지금의 재령에 도읍하였을 것이 사리에 맞을뿐더러 만일 근초고왕이 쳐 빼앗은 평양이 지금의

한성이라고 한다면 어찌 “고구려의 평양을 빼앗아 도읍하였다.”고 기록하거나 “고구려의 한성을 빼앗아 도읍하였다.”고

기록하지 않고 구태여 평양과 한성을 갈라서 “고구려의 평양을 빼앗고 물러나 한성에 도읍하였다.”라고 기록하였으랴? 이것은

근초고왕이 빼앗은 평양이 한성이 아니라 지금의 평양인 또 하나의 증거이다. 본기에 의하면 근초고왕이 물러난 한성 부근에

한수(漢水)ㆍ청목령(靑木嶺) 등 지명이 있으므로 어떤 이는 위의 한수를 지금의 한강(漢江)이라 하고, 위의 청목령을 지금의

송악(松嶽)이라고 하지마는 대개 고대에 서울을 옮기면 그 부근의 지명도 따라 옮겼으니 위의 한수ㆍ청목령 등은 다 근초고왕이

천도할 때에 따라 옮긴 지명이요, 지금의 한강과 지금의 송악이 아니다. 백제에 원래 세 한강이 있었으니 지금 한성에 가까운

한강이 그 하나요, 앞에 말한 재령(載寧) 한성의 월당강(月唐江) 한강이 그 둘이요, 나중에 문주왕(文周王)이 천도한 직산(稷山)

위례성(慰禮城) 한성에 가까운 지금 양성(陽城)의 한내가 그 셋이다. 이 책에서는 그 구별의 편의를 위하여 제1은 중한수

(中漢水)ㆍ중한성(中漢城)이라 하고, 제2는 상한수(上漢水)ㆍ상한성(上漢城)이라 하고, 제3은 하한수(下漢水)ㆍ하한성(下漢城)

이라 한다.

 

近仇首王 즉위 후의 海外 經略

 

근구수왕이 기원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 10년 동안에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한 번 평양 침입이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

대륙을 경략하여 선비(鮮卑) 모용씨(慕容氏)의 연(燕)과 부씨(符氏)의 진(秦)을 정벌하여, 지금의 요서(遼西)ㆍ산동(山東)

강소(江蘇)절강(浙江) 등지를 경략하여 넓은 땅을 장만하였다.

이런 기록이 비록 백제 본기에는 오르지 않았으나 양서(梁書)와 송서(宋書)에 “백제가 요서와 진평군(晋平郡)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百濟 略有遼西晋平郡).”고 했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부여(扶餘)가 처음에 녹산(鹿山)에 웅거하였다가

백제에게 격파당해 서쪽 연(燕) 가까이로 옮겼다(扶餘 初據鹿山 爲百濟所殘破 西徒近燕).”고 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대개 근구수가 근초고왕의 태자로서 군국(軍國) 대사를 대리하여 이미 침입하는 고구려를 격퇴하고, 나아가서 지금의 대동강

이남을 차지하고는 해군을 확장하여 바다를 건너 지나 대륙에 침입하여 모용씨를 쳐서 요서와 북경(北京)을 빼앗아 요서(遼西)

진평(晋平) 두 군을 설치하고, 녹산(鹿山) - 지금의 합이빈(哈爾濱)까지 들어가 부여의 서울을 점령하여 북부여가 지금의

개원(開原)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으며, 모용씨가 망한 뒤 지금의 섬서성(陝西省)에서는 진왕(秦王) 부견(符堅 : 역시 선비족)

이 강성해지매, 근구수왕이 또 진과 싸워 지금의 산동(山東) 등지를 자주 정벌하여 이를 피곤하게 하였으며, 남으로 지금의

강소ㆍ절강성 등지를 차지하고 있는 (晋)을 쳐서 또한 얼마간의 주군(州郡)을 빼앗았으므로 여러 책의 기록이 대략 이러한

것이다.그러면 진서(晉書)나 위서(魏書)나 남제서(南齊書)에는 어찌하여 이를 빼버렸는가? 지나 사관(史官)이 매양 국치(國恥)

를 꺼려 숨기는 괴상한 버릇이 있어, 지나에 들어가 주인 노릇한 모용씨의 연(燕)이나 부씨(符氏)의 진(秦)이나 척발씨(拓跋氏)

의 위(魏)나 근세의 (遼)ㆍ금(金)ㆍ원(元)ㆍ청(淸) 같은 것은 저들이 자기네의 역대 제왕으로 인정하므로 그 공업(功業)을

그대로 기록하였거니와 그 외에는 거의 이를 삭제하였을뿐더러 당태종(唐太宗)이 백제와 고구려를 침노하여 핍박할 때 그

장사를 고무하기 위해 양국의 지나 침입 기록을 없애버리고는 조선의 양국 토지의 절반이 본래 지나의 소유였다고 위증(僞證)

하니, 진서는 당태종 자신의 저서이므로 말할 것도 없이 백제 근구수왕의 대 지나 전공(戰功)을 뺐을 것이고, 위서ㆍ남제서 같은

것은 당태종 이전의 것이므로 또한 구수왕의 서정(西征) 이야기를 뺐을 것이며, 오직 양서(梁書)나 송서(宋書)의 “백제가 요서를

공략해서 차지하였다.”고 한 구절은 그 기록이 너무 간단하고 사실이 너무 소략(疏略)하므로, 당태종이 우연히 주의하지 못하여

그 문자가 그대로 유전(流傳)된 것일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백제 본기에는 이런 일을 빼었는가? 이는 신라가 백제를 미워하여

이를 뺐을 것이고, 또는 후세에 사대주의가 성행하여 무릇 조선이 지나를 친 사실은 겨우 이미 지나사에 보인 것만을 뽑아다

기록하고 그 나머지는 다 빼버린 때문이다.

근구수왕의 무공에 관한 기록만 이같이 삭제되었을 뿐 아니라 문화에 관한 것도 많이 삭제되었으니, 이를테면 근구수왕이 10여

년은 태자로, 10년은 대왕으로 백제의 정권을 잡았는데 본기에 근구수왕의 문화적 사업에 관한 기록이라고는 겨우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백제서기(百濟書記) - 백제사를 지은 것 한 가지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일본사의 성덕태자(聖德太子)

사적이 거의 근구수왕의 것을 훔쳐다가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구수의 근(近)은 음이 ‘건’이니 백제 때에는 성(聖)을 ‘건’

이라 하였으므로, 근초고ㆍ근구수ㆍ근개루(近蓋婁)의 근(近)은 다 성(聖)을 의미하는 것이요, 구수(仇首)는 음이 ‘구수’,

구수는 마구(馬廐)를 일컬음이므로 일본의 성덕태자의 성덕(聖德)이란 칭호는 근구수의 근(近)을 가져간 것이요, 성덕태자가

마구간 언저리에서 났으므로 구호(廐戶)로 이름했다고 하는 것은 근구수의 구수(仇首)를 본받은 것이다. 이로 미루어 ‘성덕

태자가 헌법 17조를 제정했다.’고 하는 것과 ‘불법(佛法)을 들여갔다.’고 하는 것도 다 일본인이 근구수왕의 공적을 흠모하여

이를 본떠다가 저 성덕태자전 가운데 넣은 것이 분명하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 침류왕(枕流王) 원년(기원 384년)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晋)으로부터 왔다.”고 하였는데, 역사가들이 이를 빙거하여 백제 불교의 시초를 침류왕

원년으로 잡지마는 삼국사기에 매양 전왕의 말년을 신왕의 원년으로 삼고, 인하여 전왕 말년의 일을 신왕 원년의 일로 잘못

쓴 것이 허다하니 이는 따로 변론할 것이거니와 마라난타가 백제에 들어온 해는 근구수왕 말년 기원 383년이요, 침류왕 원년

기원 384년이 아니다.

 

 

제 3장 廣開土大王의 북진정책과 鮮卑 정복

 

광개토대왕의 北討南征의 시초

 

기원 384년에 근구수왕(近仇首王)이 죽고 맏아들 침류왕(枕流王)이 왕위를 이은 지 2년 만에 죽으므로, 둘째아들 진사왕

(辰斯王)즉위 하였다. 진사왕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용감하다 일컬어졌으나 천성이 호탕하여 근구수왕이 성취한

강대국의 권력을 빙자하여 인민을 가혹하게 부려서 청목령(靑木嶺) - 지금의 송도(松都)로부터 팔곤성(八坤城) - 지금의

곡산(谷山) 등지까지 성책(城柵)을 쌓고, 다시 서쪽으로 꺾어 서해(西海)까지 이르러 천여 리 장성을 쌓아 고구려를 막게

하고, 서울에는 백제 건국 이래 처음이라 할 만한 장려한 대궐을 짓고 큰 연못을 파서 여러 가지 고기를 기르고 연못

가운데는 가산(假山)을 만들어 기이한 새와 이상한 풀을 길러서 오락이 극도에 이르러 인민이 원망하고, 해외의 영토는 다

적국에게 빼앗겨 나라의 형세가 점차 쇠약해졌다.고구려 고국양왕(故國壤王)은 곧 진사왕과 한때이니 조왕(祖王) 피살의

원수와 국토를 깎인 치욕을 갚기 위해 늘 백제 치기를 별렸다. 이때 선비의 모용씨(慕容氏)가 진(秦)에게 망하고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강성하여 90만 군사로 동진(東晋)을 치다가 크게 패했는지라 고국양왕이 이를 기회하여 요동ㆍ북낙랑(北樂浪)

ㆍ현도 등 군을 다 회복하였는데, 모용씨 중에 모용수(慕容垂)자가 다시 궐기하여 지금의 직예성(直匠省)에 웅거하여

천왕(天王)의 자리에 나아가 나라 이름을 다시 연(燕)이라 하여 세력을 회복하고, 자주 군사를 내어 요동을 직접거리고, 또

몽고 등지에 와려족(䂺麗族 : 本紀의 契丹)이 강성해져서 고구려의 신성(新城) 등지를 침략하였다. 그래서 고국원왕은 즉위

후에 모용수와 싸워 요동을 회복하고 와려족을 몰아내서 북쪽 경계를 지키기에 급급하여 남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고국양왕 말년에 이르러 태자 담덕(談德) 곧 뒤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영특하고 용감하여 병마(兵馬)를 맡아 매양

신속한 전략으로 백제의 군사를 습격하여 석현(石峴) 등 10여 성을 회복하니, 진사왕이 여러 번 크게 패하여 드디어 한강

(漢江) 남쪽의 위례성(慰禮城) - 지금의 광주(廣州) 남한산(南漢山)으로 도읍을 옴기고, 담덕의 군사가 두려워서 나아가

싸우지 못하여, 중한수(中漢水) 지금 한강 이북의 땅이 거의 고구려의 차지가 되고 관미성(關彌城) - 지금의 강화(江華)

예부터 천험(天險)으로 일컫는 곳이지마는 또한 담덕의 해군에게 함락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이 전쟁을 기록하였으나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석에는 이런 말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삼국사기는 원래 고기(古記)에 의거한 것인데, 고기가 이제

전하지 않지마는 여러 책에 인용된 고기의 문자를 보면 편년사(編年史)가 아니고 기전체(紀傳體)이기 때문에 연대의 조사가

매우 곤란하다. 김부식이 착실히 조사해보지 않고 아무렇게나 모든 사실을 각 왕의 연조에 분배하였으므로 아라가라

(阿羅加羅)의 멸망은 법흥왕(法興王) 원년의 일인데 진흥왕(眞興王) 37년의 일이라 하였고, 담덕의 석현(石峴) 등 성의 회복과

나려족의 격퇴는 고국양왕 말년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태자 담덕으로 있을 때의 일인데 왕이 된 뒤의 일로 잘못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잘 분별한 뒤에 삼국사기를 읽는 것이 좋다.

 

광개토대왕의 䂺麗 원정

 

고구려 태자 담덕(談德)이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나려가 자주 변경을 침노하므로 즉위 5년, 기원 395년에

원정군을 일으켜 파부산(ㆍ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부락 6, 7백을 파괴하고 소ㆍ말ㆍ양을 노획하여

돌아오니, 파부산은 수문비사(修文備史)에 지금 음산산맥(陰山山脈)의 와룡(臥龍)이라 하였고, 부산은 지금 감숙성(甘肅省)

서북쪽의 아랍선산(阿拉善山)이라 하였으며, 염수는 몽고지지(蒙古地誌)에 의하면 소금기[鹽分]가 있는 호수나 강이

허다한데 아랍선산 아래에 길란태(吉蘭泰)란 염수가 있어 물가에 늘 2자 이상 6자 이하의 소금더미가 응결된다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보면 대개 광개토왕의 발자취가 지금의 감숙성 서북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고구려 역사상의 유일한

원정이 될 것이다. 이 원정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누락되었고, 광개토왕의 비문에만 기록되었는데 와려가 혹시 본기에

있는 대로 글안[契丹]이 아닌가 하지마는 실은 글안은 선비(鮮卑)의 후예니 광개토왕 당시의 선비는 모용씨ㆍ우문씨 등이요,

글안이란 명칭이 없었으니 본기의 글안은 곧 후세 역사가들이 와려를 글안으로 망령되게 고친 것이다. 와려가 글안이 아니면

어느 종족인가? 위서(魏書)나 북사(北史)에 의하면 흉노(匈奴)의 후예인 유유(蠕蠕)라는 종족이 지금의 몽고 등지에 분포되어

한때 강성하였으니 와려나 유유가 그 글자의 음이 ‘라라’이니 와려는 곧 흉노의 후예이다.

 

광개토대왕의 倭寇 격퇴

 

(倭)는 일본의 본이름이니, 지금 일본이 왜와 일본을 구분하여 왜는 북해도(北海道)의 아이누 족이요, 일본은 대화족

(大和族)이라 한다. 그러나 일본음에 화(和)(倭)가 같으니 일본이 곧 왜임이 분명한데 저들이 근세에 와서 조선사나 지나사에

쓰인 ‘왜’가 너무 문화없는 흉포한 야만족임을 부끄럽게 여겨 드디어 화(和)란 명사를 지어냈다. 백제 건국 이후까지도 왜가

어리석고 무지하여, 일본삼도(日本三島 : 일본의 국토를 이룬 세 섬, 곧 本州ㆍ四國ㆍ九州)에서 고기잡고 사냥으로 생활을 할

뿐 아무런 문화가 없었는데, 백제의 고이왕(古爾王)이 그들을 가르쳐 인도해서 봉직(縫織)과 농작(農作)과 그 밖의 백공(百工)

의 기예를 가르치고 박사 왕인(王仁)을 보내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쳐주고 백제의 가명(假名) 곧 백제의

이두자(吏讀字)에 의하여 일본의 가나(假名)란 것을 지어주었으니 이것이 소위 일본자라는 것이다. 왜가 이와같이 백제의

교화를 받아 백제의 속국이 되었으나 천성이 침략하기를 좋아해서 도리어 백제를 침범하여 진사왕 말년에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에게 석현(石峴) 등 10여 성을 빼앗김을 통분히 여거 기원 391년(광개토왕 원년)에 왕이 진무

(眞武)로 하여금 고구려가 새로 점령한 땅을 공격하고, 한편으로 왜와 친교하여 함께 고구려에 대한 동맹을 맺었다. 5년

(기원 395년)에 광개토왕이 와려 원정에서 회군하여 수군으로 백제의 연해(沿海)와 연강(沿江)의 일팔성(壹八城)ㆍ구모로성

(臼模盧城)ㆍ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관미성(關彌城) 등을 함락시키고, 육군으로 미추성(彌鄒城)ㆍ야리성(也利城)ㆍ소가성

(掃加城)ㆍ대산한성(大山韓城) 등을 함락시키고 왕이 몸소 갑옷 투구를 두르고 아리수(阿利水) - 지금의 월당강(月唐江)

건너 백제 군사 8천여 명을 죽이니,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이 다급하여 왕제 한 사람과 대신 10사람을 볼모로 올리고 남녀

1천 명, 세포(細布) 1천 필을 바치고 ‘노객(奴客)’의 맹서(盟書)를 쓰고 고구려를 피해 사산(蛇山) - 지금의 직산(稷山)으로

천도하여 ‘신위례성(新慰禮城)’이라 일컬었다. 그 뒤 고구려가 북쪽 선비와의 싸움이 있을 적마다 백제는 그 맹약을 어기고

왜병(倭兵)을 불러 고구려가 새로 점령한 땅을 침노하고 또 신라가 고구려와 한편 됨을 미워하여 왜병으로 신라를 침노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용병이 신과 같이 신속하여 북으로 선비를 치는 틈에 매양 백제의 기선(機先)을 제어하여 왜를 격파해서

신라를 구원하였다. 임나가라(任那加羅) - 지금의 고령(高靈)에서 왜병을 대파하여 신라의 내물왕(奈勿王)이 몸소 광개토왕을

찾아보고 사례함에 이르렀으며, 기원 407년 지금의 대동강 수전(水戰)에서 가장 기묘한 공을 세워 왜병 수만 명을 전멸시키고

갑옷 투구 1만여 벌과 수없이 많은 무기와 물자를 얻으니 왜가 이를 두려워하여 다시는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여 남쪽이

오랫동안 평온하였다.

 

광개토대왕의 丸都 遷都와 鮮卑 정복

 

광개토왕은 야심이 많고 무략(武略)이 뛰어난 인물이지마는 동족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만은 대단하였다. 그래서 백제를

공격함은 그가 왜와 결탁함을 미워해서이지 땅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왕의 유일한 목적은 북쪽의 강성한 선비를

정벌하여 지금의 봉천성(奉天省)ㆍ직예성(直匠省) 등지를 차지하려 하였던 것이므로 남쪽에 대한 전쟁은 늘 소극적 의미를

가진 것이요, 북쪽의 전재이 비로소 적극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래서 왕은 제5의 서울인 안시성(安市城) - 지금 개평

(蓋平) 부근으로 천도하고, 선비 모용씨와 10여 년 전쟁에 계속하여 매양 허를 찔러 불의에 쳐서 선비를 격파, 마침내 요동

으로부터 요서(遼西) - 지금의 영평부(永平府)까지 차지하니, 상승(常勝)의 명장이라 일컫던 연왕(燕王) 모용수(慕容垂)

패하여 물러나고, 그 뒤를 이은 연왕(燕王)(盛)ㆍ희(熙) 등 지나 역사상 일대의 효웅들이 다 꺾여서 할 수 없이 수천 리의

땅을 고구려에게 떼어주어 광개토왕이란 그 존호(存號)와 같이 국토를 넓혔다. 진서(晉書)에 겨우 “태왕(太王 : 好太王)

연 평주(燕平州)의 숙군성(宿軍城)을 침노하므로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달아났다.”고 기록하였을 뿐이고,

그 외에는 도리어 연(燕)이 상승한 것으로 기록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춘추(春秋)에 적(狄)이 위(衛)를 멸망시킨 것을

기록하지 않음과 같이 외국과의 전쟁에 패한 것을 숨기는 것은 지나 사관(史官)의 상례거니와 당시 이 모용씨(慕容氏)의 연이

멸망하고 척발씨(拓跋氏)의 위(魏)가 강성하였음도 호태왕이 연을 공격한 것과 직접으로 관계가 있고, 동진(東晋)의 유유

(劉裕)가 일어나서 선비족(鮮卑族)과 강족(羌族)을 이기고 송고조(宋高祖 - 앞서 말한 劉裕)가 황제될 터를 닦은 것도

호태왕의 연을 공격한 것과 간접적으로 관계있는 것인데, 저들이 그 완고하고 편벽된 상례를 지켜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아니하였으므로, 기원 5세기 초의 지나 대국(大局)의 변화한 원인이 가려진 것이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은 진서(晉書)

완 달리 곧 호태왕의 후손 제왕이 세운 것인데, 그 가운데 선비정벌에 대한 문구가 기재되지 아니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호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輯安縣)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 사람 영자평(英子平)이란 소년을 만났는데,

필담(筆談)으로 한 비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비가 오랫동안 풀섶 속에 묻혔다가 최근에 영희(榮譆 : 역시 만주

사람)가 이를 발견하였는데, 기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모두 칼과 도끼로 쪼아내서 알아볼 수 없게

된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 볼 수 없는 글자가 생겨나서 진적(眞的)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니까 이 비문에 호태왕의 정작 선비(鮮卑) 정복한 큰 전공이 없음은 삭제된 때문이다. 아무튼 호태왕이 평주(平州)

함락시키고 그 뒤에 선비의 쇠퇴를 타 자꾸 나아갔더면 호태왕이 개척한 토지가 그 전호 이상으로 넓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호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이였으므로 연신(燕臣) 풍발(馮跋)이 연왕 희(熙)를 죽이고, 고구려의

선왕의 서손(庶孫)으로 연에서 벼슬하던 고운(高雲)을 세워 천왕(天王)이라 일컫고 호태왕에게 보고하니, 호태왕은 “이는

동족이니 싸울 수 없다.”하고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고 촌수를 따져 친족의 의를 말하고 전쟁을 그만두니 호태왕의

북진(北進) 정책이 이에 종말을 고하였다. 호태왕은 기원 375년(백제 근구수왕 원년)에 나서 기원 391년에 즉위하여 413년에

돌아가니 나이 39살이었다.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조각난 비석이 지금 봉천성 집안 현 북쪽 2리쯤에 있는데 길이가 대략 21척

(폭 4척 7촌 ~ 6척 5촌)이니, 근세에 만주 사람 영희(榮禧)라는 이가 발견하여 인행(印行)하였는데 비석에 떨어져나간 글자가

많았다. 그 뒤에 일본 사람이 그 비를 차지하여 인행해서 팔았으나 그 떨어져나간 글자를 혹 석회로 발라서 글자를 만든 곳이

있어서 학자들이 그 진상을 잃었음을 한탄한다.

 

 

제 4장 長壽太王의 남진정책과 백제의 천도

 

長壽太王의 歷代 政策의 변경

 

기원 413년에 장수태왕이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491년에 돌아가니 재위 79년이었는데, 이 79년 동안은 조선 정치

사상에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기간이다. 무슨 변화인가? 곧 고구려 역대 제왕들이 혹은 북진주의(北進主義)를 쓰고 혹은

남북병진주의(南北竝進主義)를 써왔는데 북수남진주의(北守南進主義)가 장수태왕 때부터 비롯되어 드디어 남방 세 나라 대

고구려 공수동맹을 환기(喚起)시켰다. 남방의 백제는 이미 강성해졌고, 신라와 가라(加羅 : 駕洛)도 차차 강성해져서 전일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니 고구려 정치가가 되어서는 부득이 남쪽을 돌아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광개토왕은 다만 외족(外族) 여러 나라 지나ㆍ선비ㆍ와려(䂺麗) 등을 정복하여 동족 여러 나라는 자연 그 깃발 아래 무릎을

꿇도록 하였거니와 장수태왕은 이 정책을 위험시하여 먼저 도족 여러 나라를 통일한 뒤에 외족과 싸우는 것이 옳다고 하여

드디어 광개토왕의 정책을 변경하여 평양으로 천도하고 북수남진주의를 쓰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에 연(燕)의 신하 풍발(馮跋)이 연왕 희(熙)를 죽이고 고구려의 지손(支孫) 고운(高雲)을 세워 황제를 삼아서 광개토왕의

문죄(問罪)를 면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풍발이 고운을 죽이고 스스로 서서 천왕(天王)이라 하였다. 제2세 홍(弘)에 이르러는

선비 별부(別部)의 척발씨(拓跋氏)가 지금의 산서(山西) 등지에 나라를 세워 날로 커져서 황하(黃河) 이북을 거의 다 차지하고

군사를 내어 연을 치니 홍의 국토가 날로 줄어들어서 견디어내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자주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서 구원을

빌었다. 장수왕은 북수남진(北守南進)이 그의 작정한 정책이었으므로 위(魏)와 말썽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연이 모용희(慕容熙) 이래로 백성의 힘을 빼앗아 대궐과 동산을 극히 장려하게 만들 뿐 아니라 궁중에 진귀한 보물과 미인을

수없이 모아들여서 음탕과 호사가 모든 나라의 으뜸이었으므로, 비상한 이기심을 가진 장수왕이 이를 탐내어 연의 사신을 속여

“고구려가 남쪽 백제의 난이 있어 아직 큰 군사를 낼 수 없으나 연왕이 즐겨 고구려에 와서 머무르면 마땅히 장사를 보내서

영접하고 일후에 기회를 보아 구원해 주겠느라.”고 하니 연왕 홍(弘)이 이를 허락하였다.

기원 426년에 위가 기병 1만과 보병 수만을 내어 연의 서울 화룡(和龍) - 지금의 업(鄴)을 침노하매, 장수왕이 ‘말치[左輔]

맹광(孟光)을 보내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연왕 홍을 맞이하게 하니, 위의 군사가 이미 연의 서울에 이르러 서문으로

입성하는지라 맹광이 급히 동문으로 들어가 위에 항복한 연의 상서령(尙書令) 곽생(郭生)의 군사와 싸워 곽생을 쏘아 죽이고

격파하고 대궐에 불을 지르고 진귀한 보물과 미인을 거두어가지고 돌아왔다. 위의 임금은 그 보물과 미인을 빼앗겼음은

나무라지 못하고, 다만 연왕 홍이 고구려에 머무름을 싫어하여 그를 넘겨주기를 청하였으나 장수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의 환심을 잃지 아니하려 하여 자주 위와 교통하고 또 남지나의 송(宋)을 친히 사귀어 위를 견제하였다.

 

圍碁僧의 음모와 백제의 疲弊

 

장수왕은 외교의 수단으로 지나의 위(魏)와 송(宋)을 견제하고는 백제를 파멸시키기에 전력하였다. 그러나 왕은 부왕 광개토

왕과 같은 전략가가 아니라 흉측하고 악독한 음모가였다. 적국에 대하여 칼이나 활로 정면을 공격하지 않고 먼저 간사하고

악독한 계책으로 심복을 썩인 뒤에 손을 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 비밀히 조서를 내려 백제의

내정을 문란케 할 기묘한 계략을 가진 책사(策士)를 구하였는데, 그 조서에 응하여 불교승(佛敎僧) 도림(道琳)이 나섰다.

당시 백제의 근개루왕(近蓋婁王)은 바둑의 명수였고 도림도 바둑의 명수였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비밀히 아뢰어 거짓 죄를

지은 사람의 행장으로 차려 백제로 들어가서 근개루왕을 만나보고 바둑동부가 되어 아침 저녁으로 근개루왕을 모시고 바둑을

두었다. 근개루와은 자기의 바둑 적수가 천하에 오직 도림 한 사람뿐이라 하여 사랑하기 짝이 없었다. 도림이 몇 해 동안

근개루왕의 곁에 있어 왕의 성격과 행동을 자세히 알아보고는 “신이 한낱 망명해온 죄인으로서 대왕의 총애를 받아 의식

거처를 이같이 사치하고 아름답게 하니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제 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다하여 한 마디 대왕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대왕의 나라가 안으로는 산을 끼고 밖으로는 바다와 강이 둘러 있어 적병이 백만이라도 어찌하지 못할

천험(天險)이니, 대왕께서 이같은 천험에 의하여 숭고한 지위와 부유한 왕업을 가지고 사방의 눈과 귀를 일으켜세울 만한

기세를 지으시면 사방의 여러 나라들이 바야흐로 존숭하여 섬기기를 겨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을 높이 쌓지

못하시고 대궐을 크게 짓지 못하시며 선왕의 해골을 작은 뫼에 파묻고 인민의 집은 해마다 장마에 떠내려 보내서 외국인이

보기에 창피한 일이 많으니 누가 대왕의 나라를 우러러보며 높이 받들려고 하겠습니까? 신은 대왕을 위하여 취하실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근개루왕이 그의 말을 달게 여겨 전국의 남녀를 전부 징발하여 벽돌을 구워 둘레 수십

리나 되는 왕성(王城)을 높이 쌓고 성 안에는 하늘에 닿을 듯한 대궐을 짓고 욱리하(郁里河) - 지금의 양성(陽城) 한래 가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대석관(大石棺)을 만들어 부왕의 해골을 넣고 큰 왕릉을 만들어서 묻고, 왕성의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까지 욱리하의 제방을 쌓아 어떠한 장마에도 물의 재난이 없도록 하였다.

이 같은 공사를 치르고 나니 국고가 탕진되고 군자(軍資)도 모자라고 백성들의 힘도 쇠잔해지니,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나라 형세가 위태롭기가 누란(累卵)과 같았다. 이에 도림이 성공한 줄을 알고 도망하여 고구려에 돌아와서 장수왕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다.

 

고구려군의 침입과 近蓋婁王의 순국

 

장수왕이 도림의 보고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치’ 제우(齊于)와 백제의 항복한 장수 재증걸루(再曾桀婁)ㆍ고이만년(古爾萬年)

등을 보내서 3만의 군사로 백제의 신위례성(新慰禮城) - 지금 직산(稷山) 부근의 고성을 치니, 근개루왕이 고구려 군사가 공격

해온다는 말을 듣고 이에 도림의 간사한 계책에 속은 줄 알고 태자 문주(文周)를 불러 “내가 어리석어서 간사한 자의 말을 믿어

나라가 이 꼴이 되었으니 비록 위급한 환난이 있은들 누가 나를 위하여 힘쓸 이가 있겠느냐? 고구려 군사가 이르면 나는

국가의 희생이 되어 속죄 하려니와 네가 나를 따라 부자가 함께 죽으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너는 빨리 남쪽으로 달아나

의병을 모으고 외국의 원조를 청하여 조상의 업을 이어라.”하고 울면서 문주를 떠나 보냈다. 제우(齊于) 등이 북성(北城)

쳐 7일 만에 함락시키고 군사를 옮겨 남성(南城)을 치니, 온 성중이 떨고 소동하여 싸울 뜻이 없었다. 근개루왕이 친히 나가서

싸우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잡혔다. 걸루(桀婁)ㆍ만년(萬年) 등이 처음에는 전일 군신의 의리를 차려 말에서 내려 두 번

절하더니 갑자기 왕의 얼굴에 세 번이나 침을 뱉어 꾸짖고, 왕을 결박하여 아차성(阿且城) - 지금의 광주(廣州) 아차산

(峨嵯山)에 이르러 항복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해쳤다. 이에 신위례성 - 지금의 직산(稷山) 이북이

모두 고구려의 차지가 되었다.

아신왕(阿莘王)이 광개토왕을 피해 신위례성으로 서울을 옮겼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정다산(丁茶山)이 직산을

문주왕(文周王) 남천(南遷) 후의 잠도(暫都 : 임시로 잠시 있던 서울)라 한 것은 그릇된 판단이다. 사성(虵城)은 직산의 옛

이름이고 숭산(崇山)은 아산(牙山)의 옛 이름이니, 이 장(章)을 참고하면 직산 위례성이 문주왕 이전 곧 아신왕이 천도한

곳임이 더욱 명백하다.

 

 

(淸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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