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돌궐제국
돌궐·위구르로 이어진 유목제국, 유라시아의 무역·군사 초강국 군림. 흉노 붕괴 500년 만에 유연 멸망시키고
초원의 유목민 통합. 돌궐, 세부족 반란으로 무너진 후 위구르가 새 제국 건설.
돌궐, 정체성 지키기 위해 중국의 불교·도교 배척하고 고유의 ‘탱그리’신앙 숭배.
위구르, 唐 반란 제압해주고 비단 헐값에 독점매입.
6세기 중반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는 만주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강력한
유목제국이 출현했다. 이 제국을 건설한 사람은 스스로를 ‘튀르크(T?rk)’라고 불렀고, 중국 측 자료에는 ‘돌궐
(突厥)’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오늘날 터키(Turkey)라는 나라의 이름도 그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이 ‘튀르크’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
이다.
돌궐제국은 기원후 1세기 중반경 흉노가 붕괴된 뒤 실로 500년 만에 초원의 유목민을 통합하고 출현한 국가
였다. 그런데 그 영역은 훨씬 더 커졌다. 과거 흉노의 경우 서쪽 경계가 대체로 파미르고원 정도까지였는데,
돌궐의 범위는 서쪽으로 더욱 확장되어 카스피해와 흑해까지 미쳤으니 실로 유라시아 규모의 대제국이었고
당시 동아시아의 당제국, 서아시아의 압바스 칼리프조, 유럽의 동로마제국과 함께 유라시아의 국제질서를 좌지
우지했던 큰 기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료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돌궐’이라는 부족은 원래 알타이 산맥 부근에서 유목하면서 거기서
철을 캐내어, 몽골리아 초원의 맹주 유연(柔然)에게 공납을 바치던 일개 미약한 부족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문으로 된 사료에는 돌궐인의 조상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고난으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적 기억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즉 언젠가 돌궐인이 주변의 강력한 국가의 공격을 받아 주민 모두가 살해되고 어린 사내아이 하나만 겨우 살아
남았는데, 암늑대 한 마리가 그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고기를 물어다 주어 키웠다. 후일 이 아이가 커서 암늑대
와 혼인을 하고 거기서 10명의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가운데 막내아들의 이름이 ‘아사나(阿史那)’였고, 그가
바로 돌궐제국의 카간(qaghan·황제)을 배출하는 씨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아사나’라는 말이
튀르크어로 ‘늑대’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통상 ‘낭생설화(狼生說話)’라고 불리는 이러한 전설은 돌궐뿐만 아니라 몽골인에게도 보인다.
칭기즈칸의 계보와 그의 일대기를 기록한 ‘몽골비사’라는 책을 보면 맨 처음에 ‘잿빛 늑대’와 ‘흰빛 사슴’이 만나
서 아이를 낳고 그 후손 가운데 칭기즈칸이 출현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물론 늑대가 이들의 조상일 수는 없고, 다만 초원의 약탈자적 강인함의 상징인 늑대를 토템동물로 숭배했던
유목부족의 관습에서 비롯된 설화일 텐데,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돌궐인이 이같은 난생설화를 실제로 믿고 있었
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발견된 것이다.
오늘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400㎞ 정도 떨어진 곳에 체체를렉이라는 도시가 있다. 현지어로
는 ‘꽃이 만발한 곳’이라는 의미인데, 사실 이 도시는 항가이라는 이름의 산맥 북사면에 있으며 해발 1700m의
비교적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봄이 되면 푸른 초원에 아름다운 야생화들이 만발
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던 것 같다.
이 도시의 중앙에 박물관이 있고 정원 한가운데에 높이 2.45m의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기단 부분에는
거북이 모양을 조각한 귀부(龜趺·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가 있다. 이수(首·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
새긴 형상)에 해당되는 부분은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는데, 흔히 이수에 새기는 용은 보이지 않고 대신 어린
아이가 늑대의 젖을 빨아먹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비석의 삼면에는 모두 중앙아시아에서 사용되던 소그드(Soghd) 문자가 새겨져 있고 마지막 한 면에는 인도
에서 사용되던 브라흐미 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원래 체체를렉 근교에 위치한 부구트(Bugut)산에서
발견되어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기 때문에 통상 ‘부구트비’로 부른다. 비문을 판독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제작연도는 대체로 580년대이며, 비석은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돌궐왕족에 속하는 마한 테긴(Mahan Tegin)
이라는 인물의 기념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돌궐제국의 지배집단은 자기들 조상이 늑대의 젖을 먹고 살아남은 ‘아사나=늑대’의 후손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처럼 비석의 머리 부분에 자신들의 뿌리를 보여주는 내용을 부조해 넣은 것이다. 늑대와 아이가 조각된 것은 퀼
테긴이라는 왕자의 비석 상단에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사나 일족이 모두 믿고 있던 설화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돌궐의 건국은 553년의 일이었다. 그 해에 투멘(T?men·만호장)이라는 이름의 수령이
몽골리아에 있던 유연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일릭 카간(Ilig Qaghan)’이라는 칭호를 갖고 즉위했다고 한다.
‘일릭’은 ‘나라를 건설한’이라는 의미의 튀르크어이지만, ‘카간’은 돌궐인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유목민의 군주를 뜻하는 명칭인 ‘카간’ 혹은 ‘칸’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지는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늦어도 5세기 중반경이 되면 선비·유연 계통의 유목민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라에서 4세기 중반경 처음 출현하는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칭호에서 ‘간’을 ‘칸’과 동일한 단어로 보는 견해
도 있다.
6세기 중반 몽골리아를 장악한 돌궐은 곧바로 대외원정에 나서기 시작한다. 제2대 카간은 서쪽으로는 헤프탈
(Hephtal)을 쳐서 사산조 페르시아와 접경을 이루고, 동쪽으로는 거란족을 복속시켰으며, 북으로는 바이칼호에
이르고, 남으로는 고비사막을 넘어 당시 북주·북제로 나뉘어져 있던 북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당시 이 두 나라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의 돌궐에 잘 보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재물을 갖다 바쳤으
니, 돌궐의 제3대 카간은 “남쪽에 효성이 지극한 두 아이들이 있는데, 내게 물자가 부족할까 무슨 걱정을 하겠는
가?”라고 호언장담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서고 당태종이 대북방 강경책으로 선회하면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특히 지배층 내부의 갈등이 격화되고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돌궐은 급속하게 쇠약해졌고, 결국 630년 태종은
북방의 또 다른 유목세력과 연합작전을 펼쳐 돌궐의 카간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로써 초원의 대제국은 일거에 무너져버렸고, 유라시아의 유목민은 졸지에 당제국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634년 당태종은 포로가 되어 끌려온 돌궐의 카간과 남월(南越)의 수령에게 자신의 궁정에서 한 사람은 시를 읊게
하고 한 사람은 춤을 추게 하면서 “이제 호(胡)와 월(越)이 한 집안이 되었으니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하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는 중원의 통치자인 ‘황제’이면서 동시에 북방 유목민의 지배자로서 ‘천가한(天可汗)’이라고 불렸으니, 이는
‘하늘 같은 카간’이라는 뜻이다. 물론 당나라의 북방지배는 현지의 부족장이나 씨족장을 도독(都督)과 자사(刺史)
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간접적인 지배형태를 취하였다. 당시에는 이를 두고 ‘기미(羈)’라고 불렀으니 ‘소와
말의 고삐’를 뜻한다. 꼼짝 못하게 꽉 묶어두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마음대로 풀어주는 것도 아닌 느슨한 통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돌궐인은 중국의 지배를 받은 지 반세기 만에 놀랍게도 제국의 부흥을 이룩하였다. 만리장성 주변의
내몽골 지방에 살면서 당나라의 감시와 통제를 받던 부족민 사이에서 570년대 후반부터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나타나다가, 682년에는 쿠틀룩(Qutluq)과 톤육쿡(Tonyuquq)이라는 두 사람의 지도자가 이끄는 돌궐인이
고비사막을 넘어서 북방으로 갔고, 마침내 687년에는 자신들의 성산(聖山)인 외튀캔 산지를 회복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재건된 나라를 돌궐 제2제국이라 부르며, 당의 지배를 받기 전, 즉 553년부터 630년까지 존재했던
국가를 제1제국이라 부른다.
쿠틀룩은 ‘일테리시 카간(Ilterish Qaghan)’이라는 칭호를 취하였는데 이는 ‘(흩어진)백성을 모은 군주’라는
뜻이다. 그를 도운 건국공신 톤육쿡은 재상이 되었고 두 사람은 자녀들의 혼인을 통해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반세기에 걸친 중국의 지배는 그들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식민의 기억이었지만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역사적
교훈이기도 했다. 제국을 부흥시킨 그들은 돌궐인이 어떠한 굴욕을 감내했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같은 각성을 통해서 돌궐 유목민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중국적’ 종교인 불교와 도교를 경계하고 그 대신 유목민 고유의 ‘탱그리(t?ngri=하늘)’ 신앙
을 강조했다. 돌궐의 카간은 ‘탱그리에서 태어나’ ‘탱그리와 닮고’ ‘탱그리가 세운’ 군주로 묘사되었다.
돌궐의 지배층은 이같은 사실을 일반 유목민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거대한 비석을 초원 여러 곳에 세우기 시작
했다. 비석을 세우는 전통은 부구트비를 세운 제1제국 때부터 있었지만, 제2제국이 되면 전에 없던 중요한 변화
가 하나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돌궐인 자신이 창제한 고유한 문자에 의해 비문이 새겨지기 시작했다는 사실
이다.
제2제국이 존속했던 680년경부터 8세기 중반까지 소위 ‘고대 투르크문자’로 새겨진 비문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비문의 탁본은 학계에 소개된 지 불과 몇 년 만에 해독되었다. 그 결과 이 문자는 돌궐인
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이 사용하던 소그드 문자를 고쳐서 만들었고 표음문자의
원리를 받아들여 35개 내외의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동시에 이란계 소그드어와는 달리 돌궐인이 사용
하던 튀르크어의 언어적 특성에 적합한 체계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는 보통 유목민이라고 하면 가축을 치고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쟁은 잘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미개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글이 창제되기 무려 750년 전에 이들 유목민이 자신의 언어적
특징을 잘 나타내는 표음문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돌궐제국은 752년 그 지배하에 있던 세 부족의 반란으로 무너졌고, 이들 가운데 하나였던 위구르(Uyghur)가
몽골리아의 모든 유목민을 제압하고 돌궐의 뒤를 이은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위구르는 때마침 중국에서 터진
안사의 난(755)에 개입하여 당 왕조를 대신해서 반란군을 토벌하고 수도 장안과 낙양을 수복해주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양귀비에 빠져 반란을 자초한 현종 대신 즉위한 숙종은 위구르의 요구
를 거절하지 못하고 758년 자신의 어린 딸을 ‘영국공주(寧國公主·나라에 안녕을 가져다 주는 공주)’라 이름하여
나이 많은 카간에게 보내야 했다. 중국 역사상 황제가 이민족의 강요에 의해 친딸을 시집보낸 것은 매우 드문 일
이었다. 물론 후일 몽골의 쿠빌라이가 친딸을 고려 왕실의 태자에게 시집보냈지만 그것은 경우가 달랐다.
아무튼 숙종은 국경까지 친히 배웅 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딸을 보냈는데, 시집간 그 다음 해에 카간은 죽었고
어린 딸은 유목민의 풍습에 따라 얼굴을 칼로 그으면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후일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소박’을 맞고 중국으로 돌아오는 신세가 되었으니, 오히려 그녀에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판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위구르의 위세에 눌린 당나라는 그들에게 비단을 헐값에 매도할 수밖에 없었다. 위구르인은 자신들과 연맹했던
국제상인 소그드인에게 말떼를 넘겨주고 그것을 비단과 교환해 오도록 했다. 원래 말 1필에 비단 1필 하던 것이
나중에는 비단 40필을 요구할 정도가 되었으니, 당나라가 이런 불공정한 교역조건에 대해 항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를 시정할 힘은 없었으니 그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엄청난 규모의 중국산
비단이 위구르·소그드인의 손으로 들어갔고, 이들은 서아시아나 유럽과 원거리 비단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경제
적 이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6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몽골리아에 등장한 돌궐·위구르와 같은 유목제국은 미증유의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면서 유라시아 대륙 여러 지역의 문명권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들의 이같은 번영과 발전은 물론
유목민족의 기동성과 그에 기초한 기마군단의 탁월한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그들과 손을 잡고
일했던 국제상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는지도 모른다. 이들 중앙아시아 출신의 소그드인은 유목민에게 농경
지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물자, 비단 교역을 통해서 획득한 거대한 재화, 마니교와 같은 종교는 물론 자신들의
문자까지 전달해 주었고, 나아가 유목민의 세계관을 유라시아 전체로 넓혀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
이다.
고대 튀르크 비문과 그 내용
현재까지 고대 튀르크문자가 새겨진 다수의 크고 작은 비문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도 규모가 큰 것으로는
제3대 군주였던 빌개 카간의 비, 그의 동생인 퀼 테긴의 비, 그리고 건국공신이자 빌개 카간의 장인인 톤육쿡의
비가 있다.
이들 비문에 적힌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처음으로 한문자료라는 이방인의 프리즘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목민
자신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육성, 초원의 바람처럼 거칠면서도 솔직하고 수식없는 진솔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늘과 같고 하늘에서 태어난 튀르크의 빌개 카간, 나 이제 보좌에 앉았노라. …너희는 내 말을 잘 듣고 단단히
귀를 기울여라!”로 시작되는 빌개 카간의 비문은 중국인이 달콤한 말과 나긋나긋한 비단으로 어떻게 돌궐인을
유혹해서 변경 가까운 곳으로 끌고 가서 절멸시켰는가, 그 후에 자신의 아버지 일테리시 카간이 어떻게 백성을
이끌고 나라를 재건하고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입혔으며, 군대를 이끌고 사방의 적들을 모두 쳐부수고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게 하였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돌궐(투르크)칸의 비문 예언.
우리나라 사람이 투르크(돌궐)민족과 가장 유사한 두개골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 KBS <몽골리안 루트>
에서 보도된 바가 있습니다. 아래 돌궐칸의 비문 내용을 보면 단군왕검(당골올칸)의 후손들의 <미래 예언>에
대한 매우 흥미있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또한 <환단고기>의 단군임검께서 백성을 교화하실 때 말씀하신 내용과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탱그리(단군)와 해모수 그리고 광개토대왕에 대한 구절도 있네요.
이하의 글은 이인화의 소설(초원의 향기)중 각 부의 서문에 인용된 "돌궐비문"의 번역본 중 일부랍니다.
7세기 돌궐 제 2 가한국(칸국)의 비문이며 탈랴트 테킨 교수란 분이 번역한 것이구요.
"북방제국"에 대해서 우리나라 학계의 지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
1)
이방(異邦)이 동방을 짓밟으니 삶의 쇠락함은 가을날의 잎사귀와 같았다.
당골 올칸은 핍박을 피해 아사달로 들어 갔으나
마침내 잔인한 폭풍의 날이 있어 키즈의 무리에게 잡힌바 되었다.
사슬에 묶인 당골 올칸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 말라. 당골의 백성들이여. 신들은 다시 오리라.
세상에 이길수 없는 자가 하나 있나니 지혜롭게 사랑하는 자이니라.
저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재물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무정하며,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언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며 친구를 팔며 조급하며 죽이는도다.
너희는 남을 사랑하며 베풂을 사랑하며 생각하며 겸허하며 관용하며 부모께 순종하며 다정하며,
원한을 잊으며 나쁜말을 하지 말며 참으며 순하며 악한것을 미워하며
깨끗하며 신실하며 실다우며 살림을 사랑 할지라.
용기를 가지고 참고 견디라. 당골께서 다시 오시리라.
착한 자식들을 낳고 서로를 아끼며 진심으로 당골을 경배하라.
당골께서 너희에게 불멸을 주시고 시간의 모래밭에서 구하시리라.
이말을 마친 당골 올칸께서는 목이 베여 죽었다.
-돌궐의 투르크룬 문자로 쓰여진 "당골 올칸(단군왕검)"중에서-
--------------------------------------------------------------------------------
2)
이 예언을 기억하라. 당골의 백성들이여.
멸망의 날에 태평의 왕이 있어 너희를 어둠으로부터 끌어내리라.
비탄과 재앙의 땅에서 당골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 하리라.
너희는 그 땅에서 잡신과 잡귀를 섬기는 모든 무리를 멸하라.
이것은 당골께서 정하신 운명이니 망각하지 말라.
불은 공기의 죽음으로 살고 공기는 불의 죽음으로 사나니.
죽지않는 신은 죽어가는 신들과 함께 살수 없나니.
-돌궐의 투르크룬 문자로 쓰여진 "해모수칸인 카인릭-해모수칸의 예언"중
--------------------------------------------------------------------------------
<을두지 2서> 마지막 부분
성스러운 추모께서는 하늘나라에서 해모수님과 아란두님을 모시고 동방의 신령 107위와 함께 고구려의 역대
군주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푸셨다.
만월의 어머니 아란두께서 연회장 입구에 큰 거울을 두시어 군주들이 통과 할때마다 그들이 나라를 다스리
면서 범했던 악덕과 결점과 어리석음 들이 나타나게 하셨다.
해애루 칸(解愛婁可汗:모본왕)이 거울에 떠오른 자신의 폭정들을 다시보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돌아갔다.
사브시루 칸(揷矢婁可汗:봉상왕)과 또 다른 몇몇 군주도 두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뒷걸음질 쳐 돌아갔다.
연회장으로 들어온 군주들은 즐겁게 먹고 마시면서 생전에 각자가 이룩했던 위업과 영광을 이야기 했다.
특히 타이가주루 칸(大解朱留可汗:대무신왕)과 탐덕 칸(談德可汗:광개토대왕)이 높은 존경과 흠모를 받았다.
그러나 신령들은 시종일관 한구석에서 얌전하게 침묵을 지킨 우르부르 칸(乙弗可汗:미천왕)의 이름을 불렀고
발언을 청했다.
우르부르 칸은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신들의 덕성을 본받기에 힘썼으나 인간으로서도 매우 불완전 했던 사람 입니다. 소년에 불우하여 여러
곳을 떠돌아 다녔고 남의 집 머슴살이,소금장수,거지노릇을 하기도 했읍니다. 가난 했을때나 옥좌에 있을때나
항상 남에게 죄를 짓지 않고 살다가 삶을 마치기를 원했읍니다.
오늘 이곳에 들어 올때에 저의 일생이 청백 했음을 돌아보고 그것을 한없는 기쁨으로 생각하며 조상들과 신령
들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찍이 신들께서는 부패와 폭정, 대국의 전제(專制)를 타기하시고 백성들을 널리
행복으로 세울 율법을 세우셨읍니다. 저는 지고한 신들의 향기가 아직도 저희의 손에 순결하게 쥐여져 있음을
확신 합니다.
신들께서는 저희에게 대지와 창공에 가득한 큰 생명의 목소리를 따라 자유롭게 살라고 하셨읍니다.
누구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된다고 하셨읍니다. 이 가슴에 타는 생명의 불꽃이 무한으로 이어지는 더 큰 생명의
불꽃과 똑같다고 하셨읍니다. 저는 신들의 가르침에 감사의 공물을 바치고 싶읍니다."
-돌궐의 투르크룬 문자로 씌여진 외경(外經)"탱그리닌 지야펫(하늘나라의 잔치)중에서-
--------------------------------------------------------------------------------
아란두님의 혼은 하늘로 올라가 만월의 어머니가 되셨다.
그 모습 만만리 강에 비취나니 우리를 낳는 생명의 젖줄이시다.
당신의 아들과 딸을 깃들게 하는 밤의 기쁨이시다.
해모수님의 혼은 하늘로 올라가 태양의 아버지가 되셨다.
그 모습 산을 깨우고 땅을 떨게 하시니 우리를 키우는 빛의 권세이시다.
모든 더러움을 정화하는 아황천 불길 같은 힘이시다.
박달, 밝으신 신명께서 이렇게 정하시었다.
아란두님은 두손으로 달을 머리 위에 받쳐들고 동쪽으로 가신다.
해모수님은 두손으로 해를 머리 위에 받쳐들고 서쪽으로 가신다.
박달, 밝으신 신명께서 이렇게 정하시었다.
나무는 이파리 하나하나로 아버지 해모수를 향해 타오른다.
불은 나무의 깊은곳에서 잠자다가 문득 깨어 아버지께로 일어선다.
물은 어머니의 눈물로 불을 재우고 땅으로 뻗어간다.
흙은 물을 감싸며 어머니 품으로 생명을 이끈다.
쇠는 어머니의 정을 머금어 흙이 감춘 은밀한 힘을 드러낸다.
박달, 밝으신 신명께서 이렇게 정하셨다.
마음은 변하고 세월은 흘러가며 목숨의 모래는 쉬이 없어진다.
오직 두분의 사랑만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
얼음의 바다에서 카르디한 이쉬까지 두분이 영원히 우리를 지키신다.
-돌궐의 투르크룬 문자로 번역된 이문진(李文眞)의"예니덴 봇자(新集)"중에서..-
--------------------------------------------------------------------------------
해모수는 말을 타고 어떤 인간도 가보지 못한 길을 따라
오랬동안 버려진 잿빛 광야를 건너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다.
광야가 끝나는 곳에 황색의 바다가 있었다.
그는 흰 거품의 파도가 이는 해변을 따라 다시 동쪽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그는 생명과 기쁨을 주는 강 푸른야루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버드나무 보다 더 날씬하고 수련꽃보다 더 맑고
아름다운 아란두가 살고 있었다.
아란두는 푸른야루를 다스리는 요정왕의 첫째딸이었다.
해모수는 아란두에게 첫눈에 반햇다.
그는 나는듯이 달려가 평화로운 풀밭에 아란두를 쓰러 뜨렸다.
여인이여 겁먹지마오.
나는 탱그리의 아들 해모수.
아리따운 당신에게 혼을 빼앗겼소.
내 당신의 수레를 끄는 말이 되리니 나의 곁에 있어 주시오.
송백나무처럼 훤칠한 님이여. 만인의 위에 뛰어난 님이여.
아란두의 가슴은 타올라요. 당신을 따라가고 싶어요.
당신의 팔에 내 머리를 얹어 주세요.
그러나 몇달이 지나지 않아 해부루의 군대가 뒤쫒아 왔다.
해모수는 탱그리에게 기도 하기 위해 높은산에 올라 갔다가 그들에게 사로 잡혔다.
해모수는 말하였다.
어둠의 권세여. 하늘의 주인 탱그리의 이름으로 말하노라.
지금은 너희의 때이나 사람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꽃을 찾아 헤메이리라.
다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사람이 있어 세상의 마음에 깃든 비밀한 불꽃을 얻게 되리라.
나보다 더 훌륭한 왕이 내뒤에 오리라.
그 왕은 흩어졌던 당골의 신성왕국을 다시 세우고 신의 화살로 너희를 멸하리라.
해부루의 군대는 해모수를 죽였다.
그리고 다시는 환생하지 못하도록 몸을 다섯으로 토막내어 사방에 흩어 버렸다.
- 돌궐의 투르크 룬 문자로 쓰여진 "해모수칸인 카인릭(해모수 칸의 예언)"중에서
(돌궐비문연구中)
궐특근비(闕特勤碑)

<오르콘 강변에 있는 궐특근비문>
이 비를 세운 사람이 1300년 전 북방초원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유목민 돌궐(突厥)의 한 왕자로 `궐특근
(闕特勤)'이었다. 그의 이름은 투르크어로 `퀼 테긴'이었다. 그는 유목민의 관행에 따라 어린 동생이 후계자로
임명된 것에 반발하여 숙부가 사망한 뒤 쿠데타를 일으켜, 자기 형을 카간으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즉위한
인물이 빌게 카간이었고 그는 바로 호쇼 차이담에 남아있는또 하나의 비문의 주인공이다.
이 두 형제의 비석의 존재가 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울란바토르 남쪽 40km 지점에 또 다른 비석이 발견
되었다.
이는 톤육쿡이라는 노재상(老宰相)을 위해 세워진 것이다. 그는 제국건설의 장본인이자 동시에 빌게 카간의
장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비문들은 중국을 거치면서 왜곡된 기록이 아닌, 유목민의 생생한 육성을 들려주
었다. 그들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고,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인가.
“하늘과 같고 하늘에서 생겨난 나 투르크의 빌게 카간, 이제 카간의 자리에 올랐노라. 너희들은 내 말을 단단히
듣거라!” 이렇게 시작되는 빌게 카간의 비문은 초원의 구릉 위를 쓸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당당하게 우리를 향해
소리치고 있다. 비문은 무엇보다도 고대 유목민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거기에 나타난 그들의 세계관은 중국인들의 `중화'를 중심으로 하는 일원주의적 천하관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다.
우선 그들의 독특한 방위관념이 눈길을 끈다.
흔히 우리가 동→서→남→북이라 하는 것과 달리 그들은 동→남→서→북이라는 순서를 따른다.
이것은 다름 아닌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진행하는 방향을 나타낸다. 그들은 천막을 칠 때도 문을 언제나 동쪽
으로 열어 놓았고, 아침에 해가 뜨면 밖으로 나와 해를 향해 세 차례 큰 절을 올렸다고 하는데, 이 역시 그들의
태양숭배를 입증하고 있다.
태양은 그들이 최고의 신으로 여겼던 `탱그리(Tangri)' 즉 `천신(天神)'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태양의 운행을
중심으로 하는 그들의 방위관념은 해가 뜨는 곳(동)' `해가 한 가운데인 곳(남)' `해가 지는 곳(서)' `밤이 한 가운
데인 곳(북)'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비문은 돌궐제국의 창건자가 사망했을 때 조문사절을 보내온 각국의 명단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 명단의 순서
역시 동→남→서→북으로 되어 있다. 즉 동방의 고구려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중국과 티베트, 이어 서쪽으로는
동로마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북쪽으로 키르기즈와 거란 등이 언급되어있다.
그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나라와 민족들을 정치적인 친소나 지리적인 원근에 따라 배열하지 않고,
태양의 운행에 기초한 독특한 세계관에 따라 정열시킨 것이다.
이 비문에는 고구려도 등장한다. 고대 돌궐인들이 남긴 여러 비문들을 조사해 보면 해가 뜨는 동방에 `뵈클리
(B kli)'라는 이름의 나라가 등장하고 있고, 이 나라는 모두 두 번 언급될 뿐이다. 한번은 앞서 말했듯이 조문
사절을 보낸 나라의 하나로, 또 한번은 돌궐인들이 당나라를 도와 `뵈클리'에 대한 원정에 참가했다는 내용이다.
`뵈클리'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것이 고구려를 나타낸다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이의가 없는 편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고구려의 군주가 비문에서 `뵈클리 카간'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카간'이란 최고의 군주를 나타내는 투르크 말로서 한자로 옮기자면 `황제'에 비견되는 칭호이다.
황제가 `천명'을 받아 천하의 질서를 주관하는 존재이듯이 카간 역시 `탱그리의 명령'과 `탱그리의 축복'을 받아 `
위로는 푸른 하늘, 아래로는 누런 땅' 사이에 있는 `사람의 아들들'을 다스리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고대 유목민들은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지상에 두 명의 황제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중국인들의 정치 관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돌궐제국의 군주뿐만 아니라 중국, 고구려, 티베트, 키르기즈 등 주변의 나라를 지배하는
군주들도 `카간'이라는 칭호로 불렀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인들이 황제의 지배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주변의 민족들을 `야만인'이라고 규정했던 일원적인
세계관을 표방했던 것과 달리, 투르크인들은 다른 지역 문화 국가 민족들이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정치적 질서
와 문화적 특징을 지니는 존재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다원주의적 세계관의 소유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비단 비문을
남긴 돌궐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목민들 모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유목민들의 이러한 정치적. 문화적 유연성은 그들이 다른 문화와 접촉할 때 개방적인 태도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들이 건설한 제국 안에서 여러 이질적인 문화가 서로 공존하며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리아 초원에 남아있는 비석들은 그동안 중국인들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각인된 '유목민은 잔인하고
미개한 문명의 파괴자'라는 이미지를 벗겨내고, 오히려 그들이 자신과 동등한 정치적 실체를 인정하고 서로
다른 민족과 문화의 공존을 인정하고 장려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고구려는 언제 우리 역사에 등장하였을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는 기원전 37년에 시조 주몽이 동부여로부터 남하하여 졸본
지역에 도착하여 고구려란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른바 주몽 설화입니다.
그렇다고 고구려란 국명이 이 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멸망시키
고 그 땅에 낙랑군ㆍ현도군ㆍ진번군ㆍ임둔군 등 4개의 군현을 설치하였는데, 그 중 현도군이 바로 고구려 지역
에 설치되었습니다. 이 현도군에는 3개의 현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에는 ‘고구려현’이란 이름이 보입니다.
이 때가 기원전 107년이니, 이미 상당히 오래 전부터 ‘고구려’라고 불리는 세력집단이나 종족이 그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고학 자료를 보아도 고구려라고 부르는 집단이나 종족이 기원전 2세기 경부터 압록강과 혼강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철기문화와 농경을 기반으로 강가나 계곡에 자리잡은 지역 정치집단
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지역집단을 ‘나(那)’라고 불렀는데, 땅(地)이나 내(川), 또는 냇가의 평야를 뜻합니다.
곳곳에서 성장한 이들은 『삼국사기』나 『삼국지』에 조나(藻那), 주나(朱那), 소노(消奴), 절노(絶奴) 등등의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고구려를 세운 종족은 보통 예(濊)족, 혹은 맥(貊)족, 혹은 예맥(濊貊)족으로 중국 역사책에 기록된 종족과 관련
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맥족이 직접적으로 관련됩니다. 물론 고구려를 세운 맥족은 크게는 예족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보입니다. 예족은 발해 동북지역의 종족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었기에,
부여나 옥저?동예들도 모두 예족에 해당한다고 생각됩니다.
고구려가 일어난 첫 수도에 남아있는 오녀산성. 중국 요녕성 환인현에 있다. ⓒ임기환
그래서 중국 역사책에는 2세기경 고구려의 풍속이 부여ㆍ옥저ㆍ동예 등과 비슷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맥’이라는 칭호는 고구려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발전하여 다른 집단과 구분되기 시작하면서 따로 불리워진
칭호로 생각됩니다.
고구려의 칭호와 관련하여 몇가지 재미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지금 외몽고 오르콘강에서는 돌궐이란 종족이
남긴 옛 비문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비문은 730년에 만들어졌는데, 그 내용 중에는 돌궐 시조인 이스타미의
장례식에 ‘동쪽의 해뜨는 나라’에서 조문사가 왔다고 하면서 그 나라 이름을 ‘배크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배크리는 ‘매크리’와 통하는 발음으로 곧 ‘맥(貊)구려’가 됩니다. 이는 맥족인 고구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는 돈황문서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위그르족이 남긴 기록에 과거 돌궐인들이
고구려를 ‘무구리’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역시 ‘맥구리’와 통하는 말입니다. ‘무쿠리'라는 이름은
티베트의 기록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서로마제국의 기록에는 무크리트(Mukruit)로, 동로마제국의 기록에는
'모굴리(Moguli)'라고 나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통상 고구려라고 부르는데, 당시에는 이를 어떻게 읽고 불렀겠습니까?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습
니다만, 맥그리, 우구리의 예를 보아 아마도 ‘고구리’ 또는 ‘고우리’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추정됩니다.
비슷한 예가 중국 기록에도 보입니다. 즉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나 고우리로 부르는 것이 당시 발음에 근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고구려의 뜻을 새겨 봅시다. 고구려에서는 성(城)을 ‘구루’라고 불렀습니다. 고구려의 ‘구려’는 ‘구루’와
통하는 말로서 ‘성’이란 뜻이 되겠습니다. 우리말의 골, 홀이란 말과 통하는 것입니다. 고(高)자는 크다, 높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고구려라는 이름은 대성, 큰 성이란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중원고구려비 - 고려라는 이름을 전하는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 충북 중원군에 있다. ⓒ임기환
그런데 우리는 고구려란 이름만 알고 있는데, 고구려는 ‘고려(高麗)’라는 이름으로도 불렀습니다. ‘고려’하면
흔히들 왕건이 세운 고려 왕조만을 생각하는데, 고구려도 고려라는 국명을 사용하였습니다. 잘 알다시피 왕건의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명도 그대로 따온 셈이죠.
고구려가 언제부터 ‘고려’라고 불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략 5세기 이후의 중국 역사책에서부터 고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충청북도 중원 지방에 남아있는 중원고구려비에서도 고구려인 스스로가 ‘高麗’라고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비는 장수왕대 세운 것으로 짐작되고 있는데, 아마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
한 이후에 분위기를 쇄신하는 뜻에서 ‘高麗’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나 추측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 역사상 고려라고 불리운 왕조는 두 번 있었던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칭호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날 우리 남한의 국호는 대한민국이라고 하는데,
여기의 ‘한(韓)’은 과거에 ‘삼한(三韓)’ 등으로 불리운 바 있듯이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칭호에서 나온
것입니다. 북한의 공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데, 여기의 ‘조선’ 역시 역대에 조선이라 불리운 왕조가
2차례나 있었으며, 근세의 왕조 명칭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칭호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남북한이 통일된다면, 통일 국가로서의 칭호를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을까요. 이미 한(韓)이란 이름과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남북한이 각각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둘 중의 하나를 사용하게 되면 아무래도 다른
쪽에서 반대하겠지요. 그러면 결국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칭호로는 ‘고려(高麗)’라는 칭호가 남게 됩니다.
역대에 고려로 불리운 왕조가 2번이나 있었고, 또 고려에서 유래하여 지금도 서구에서는 ‘코리아’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적당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그 이름부터가 다시금 통일을 지향하는 오늘
우리들에게 새롭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임기환/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