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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일반

한국의 귀면와(鬼面瓦) 2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5.08.22|조회수347 목록 댓글 0

한국의 귀면와 [鬼面瓦 ] Ⅱ

 

 

 통일신라의 귀면와(鬼面瓦)

 

도깨비기와라고도 한다. 나쁜 귀신을 쫓는 것은 영악한 귀신이라야 할 수 있다고 옛날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마을의 재앙을 막아준다고 믿은 장승이 귀면()인 것도 귀신에게 벽사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도깨비탈[]을 문에 걸어서, 잡귀나 마마의 침범을 막는 풍속이 있었다.

이러한 생각에서 사래 끝에 귀면와를 만들어 달았다.

아래는 넓고 위는 약간 좁으며, 둥근 방패 모양의 넓적한 기와 표면에는 눈·코·입을 중점적으로 강조해서

무서운 표정을 나타냈다.

눈썹 사이에 구멍을 뚫어서 사래 끝에 못을 박게 만들었다. 입에는 날카로운 어금니가 양쪽에 돋아 있고,

머리에는 뿔이 2개가 나 있다.

거친 수염과 머리카락이 더 무서워 보인다. 양쪽 옆과 윗면에는 넓은 주연대()가 튀어나와 있다.

거기에는 인동무늬·당초무늬·연주무늬 등이 조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옆면에도 당초무늬대를 돌렸다.

귀면의 조각은 깊이 패어 햇빛을 받은 면과 그늘진 면의 농담()의 차이가 뚜렷하여 인상이 강렬하다. 신

라시대의 귀면와 중에는 녹유()를 입힌 것도 있다. 


[출처] 귀면와 [鬼面瓦 ] | 네이버 백과사전

 

 

 

 

귀면와는 지붕의 추녀마루기와와 곱새기와 사이를 막아 장식하는 추녀마루 장식기와에 사용된 도깨비무늬

기와이다.귀면와(鬼面瓦)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에 걸쳐 성행된 와종인데, 귀면문 수막새와 내림마루

귀면와가 제작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건물의 내림마루와 귀마루 끝에 부착하는 귀면와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

하였는데, 대량으로 제작할 뿐 아니라 형태와 구도면에서도 완벽한 수준에 이르게 된다.  

 


<鬼面瓦의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이것은 통일신라시대 귀면와로 반파된 것이다. 기와 중앙에는 귀면의 일부만 남아있다.

이것은 잡귀를 몰아낸다는 벽사의 뜻을 가진 특수한 용도를 가진 기와 중의 하나이다.

이 귀면와는 많이 파손되어 있지만 뿔과 부라린 눈, 큰 코, 치켜 벌린 입 등인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형태이다.

눈썹과 눈, 코와 입들의 간격을 좁히고, 눈보다 안구를 강조함으로써 무섭게 느껴지도록 유도하면서도

갈기와 뿔, 눈썹, 입의 가장자리 선들을 매우 섬세하게 다듬었고, 전체적으로 부드러우면서도 율동감 있게

다루고 있다. 주연대는 연주문이 돌려져 있다.

 

지붕의 추녀마루기와와 곱새기와 사이를 막아 장식하는 추녀마루 장식기와에 사용된 도깨비무늬 기와.

귀면와(鬼面瓦)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에 걸쳐 성행된 와종인데, 귀면문 수막새와 내림마루용 귀면와가

제작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건물의 내림마루와 귀마루 끝에 부착하는 귀면와가 본격적으로 제작

되기 시작하였는데, 대량으로 제작할 뿐 아니라 형태와 구도면에서도 완벽한 수준에 이르게 된다.

고려시대 전 시기에도 귀면 기와는 지속적으로 제작되는데 눈과 코만 약간 돋게 표현하여 귀면다운 느낌은

사라진다.

조선시대에는 통상 사람의 얼굴형상을 하고 있어 통상 인면와(人面瓦)라고 부르는 귀면와가 등장하게 된다.

귀면와는 건물의 장엄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벽사의 의미를 갖는 동단식와(棟端飾瓦)이다.

귀면와의 표현 형식은 다양하나 일반적인 특징은 도깨비 특유의 힘차고 성난 듯한 뿔, 부리부리하고 툭 튀어

나온 큰 눈, 거기에 오똑하고 높게 솟아오른 콧등과 깊게 파여진 콧구멍(鼻孔), 날카롭고 억센 이를 드러낸

큰 잎 등 괴수의 면상을 귀면화하고, 특히 눈·코·입 등을 중점적으로 고육조(高肉彫)의 기법으로 와면을

장식한 점이다.


 

<신라시대의 도깨비>

신라시대의 귀면와도 아직 발견된 예가 없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불교문화의 융성과 더불어 서역(西域)의 영향을 받은 동·식물문계 와당과
서수문(瑞獸紋), 서금문(瑞禽紋), 비천문(飛天紋), 가릉빈가문 등을 비롯하여 도비문양을 새긴 다양하고 우수
하며 조형미등을 비롯하여 도깨비문양을 새긴 다양하고 조형미 넘치는 화려한 문양와당이 성황을 이룬다.
수막새기와의 도깨비 문양은 얼굴을 위주로 표현하는 형식인데 때로는 연화, 귀갑, 연주문 등이 테두리에
배치되는 경우도 있고, 암막새기와는 출토예가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대기 융기선으로 표현되어 고구려의
귀면와 형식과 유사하다.
 
테두리에는 화문(花文), 당초문(唐草文)이 장식되는 등 화려하게 꾸며졌고 간혹 녹유한 것도 발견되는 등 매우
발전된 양상을 띠고 있고 불교의 영향을 엿볼 수 있으며 따라서 통일신라기의 건축이 얼마만큼 화려하고 장엄
하였던 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 승복사지 출토 귀면와(鬼面瓦)  

 
 
 

 
숭복사지 통일신라 현재 너비  16cm 현재높이 17cm 두께 3.2cm
 

 
2.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출토 귀면와(鬼面瓦)  
 

 

四天王寺址 출토.귀면와 統一新羅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너비 25.0cm 높이 23.5cm 두께 3.7cm 

  

사람은 아무리 입을 크게 벌려도 귀면와의 입 모양이 되지 않고 둥글게 만들어진다.

사람은 뺨이 넓고 입이 작기 때문이다. 사람은 입을 크게 벌리든 옆으로 길게 벌리든 자연스럽게 혀가 앞니

뒤에 놓여 보이지 않게 된다.  누구든지 마찬가지이다. 한 번 실험해 보길 바란다.

그러나 입을 벌리면 귀면와의 입모습과 똑같이 되고 자동적으로 혀를 반쯤 내미는 동물이 있다. 

황룡사와 안압지 발굴 귀면와 두 점을  제외하면 모든 귀면와가 혀를 반쯤 내민 형상이다. 

 

사람은 코와  윗입술 사이에 인중이란 오목하게 패인 곳이 있다. 인중이 길면 수명이 길다는 말도 있듯이

인중은 사람의 관상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모든 신라 귀면와에는 인중은 말할 것도 없고 윗입술조차 표현되지 않았으며 코 밑에서 윗니가 바로

나와있다.  사람이 아니란 뜻이다.

 

 

 


 

 

 

四天王寺址 출토.귀면와 統一新羅. 通度寺聖寶博物館.너비23cm  높이19.9cm 두께 4.5 ~8.0cm

 

 

 

사천왕사지 출토된 귀면와 통일신라

 

 

사천왕지 출토 와당

 


3. 안압지 출토 귀면와

 

안압지는 신라 제 30대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674년에 왕궁 안에 만들어 놓은 궁원지(宮苑池)이다.

신라의 궁성인 월성(月城) 동북쪽에 있으며 임해전터는 안압지 서편에 세운 동궁(東宮)의 정전(正殿)이 있었던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안압지에 관한 여러 기록이 나온다.


(1) 문무왕 14년(674) 2월에 궁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귀한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2) 문무왕 19년(679) 8월에 동궁을 짓고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지었다.

(3) 효소왕6년(697) 9월에 군신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4) 경덕왕 11년(752) 8월에 동궁아를 설치하고 상대사 한 사람과 차대사   한 사람을 두었다.

(5) 혜공왕 5년(769) 3월에 군신들을 임해전에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6) 소성왕 2년(800) 4월에 폭풍으로 임해, 인화 두 문이 파괴되었다.

(7) 애장왕 5년(804) 7월 임해전을 중수하고 새로 동궁 만수방을 지었다

(8) 헌덕왕 14년(822) 1월에 동생 수종을 태자로 삼고 월지궁으로 들였다.

(9) 문성왕 9년(847) 9월에 왕이 임해전에 군신을 모았다.

(10) 경문왕 7년(867) 1월에 임해전을 중수하였다.

(11) 헌강왕 7년(881) 3월에 군신들을 임해전에 모아 향연을 베풀고, 주연 이 한창일 때 왕이 거문고를 타고

       좌우의 신하들은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놀고 파하였다.

(12) 경순왕 5년(931) 2월에 고려 태조를 임해전에 모셔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조선 성종 17년(1486)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으로는,

“안압지는 천주사(天柱寺) 북쪽에 있으며 문무왕이 궁 안에 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어 무산 12봉을

상징하여 화초를 심고 짐승을 길렀다. 그 서쪽에는 임해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주춧돌과 섬돌만이 남아 있다.”


조선 시대 매월당 김시습은 <안하지구지>(安夏池舊址)에서 안압지를 읊기를,

“못을 파서 바다로 만들고 고기와 소라를 길렀는데, 물을 끌던 용의 목은 그 형세 우뚝도 하여라, 이는 신라

망국의 일이건만 지금 봄 물은 좋은 벼를 기르는구나.” 라고 하였다. 여기까지의 기록에는 “안압지”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안압지는 조선시대에 와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안압지 출토 유물 중에는 와전류가 가장 많이 나와서 파편을 포함하여 24,000여 점이나 된다고 하며,

이 가운데 50여 점을 제외하고는 삼국 통일 직후부터 통일신라가 망할 때까지 260여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라

한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 용두와 신라 귀면와들의 형태를 비교해 보면 많은 차이점이 보인다. 입의 모습, 코의

형태, 귀의 생김새와 위치, 뿔의 생김새와 위치, 눈의 크기와 위치, 혀의 형태 등이 분명하게 다르고, 금동

용두에는  비늘이 음각되어 있다고 하는데 귀면와는 얼굴 주위에 긴 털이 많이 났으며 턱 수염도 있는 동물

이다.

금동 용두의 눈은 작고 옆에 붙어있는데 귀면와의 눈은 매우 크고 코와 가까이 있으며 정면을 향하고 있다.

귀면와는 혀를 살짝 내민 형태가 대부분이라서 평소 혀를 잘 내밀고 있는 동물이라는 추측을 하게 하는데,

금동 용두의 혀는 입안에서 입천장 쪽으로 올려 붙어 있다.

더구나 귀면와의 귀는 그 형태와 위치가 다양해서 모델이 된 동물이 여러 형태의 귀를 가진 동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리에 있는 뿔도 금동 용두와 비교해 보면 모양과 위치가 다르고, 상징적인 뿔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동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덧붙여 귀면와의 위 아래 앞니는 치아 형태가 사각형이며 공간이 없이 붙어있는데 금동 용두의 앞니는 사이가

떨어져 있고 사각형이 아닌 날카로운 형태이다.  상상 속의 동물이라 해도 봉황은 조류이며, 용은 파충류의

특징을 갖고 있다.

금동 용두의 앞니는 파충류의 이빨로 보이지만, 귀면와의 앞니와 송곳니는 포유류 중에서도  식육목에 속하는

사나운 동물의  이빨로 보인다. 아래는 안압지에서 출토된 신라 귀면와의  사진들이다.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를 발견할  것으로 본다.            

 

 


 

 

안압지 출토 귀면와 통일신라 

 

동물의 귀 중에서 안압지 귀면와의 귀와 동일한 귀를 가진 동물이 어떤 것일지 가까운 곳에서 찾는다면

말과 개과 동물일 것이다. 소과 동물인 양과 염소의 귀는 다르며 고양이과 동물의 귀는 저런 모습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다.

고양이의 귀는 끝이 뾰족한 모습이지만 호랑이나 사자의 귀는 U자를 엎어 놓은 형태이다.

그리고 두 귀의 폭이 매우 넓다. 중국국보전에 전시된 한(漢)나라 진묘수의 두상과 귀가 그런 모습이다.

전시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동물상이다. 둥근 형태의 귀를 가지고 있다.


이 안압지 귀면와와 비슷한 귀는 말도 가지고 있지만 얼굴과 역할의 특징을 고려할 때 말은 아니기에 대상에서

제외하면, 똑같은 귀를 가진 동물은 개다.

긴장해서 귀 폭을 좁히고 있는 개가 바로 안압지 귀면와의 귀와 똑같다.

 

 
 
 
안압지 출토 귀면와 통일신라 국립경주박물관

 


이 귀면와의 머리에는 두 뿔이 없다.

고잔사 귀 세운 코마이누의 외뿔이 있는 자리에 뿔처럼 돌출한 흔적이 있고 "王"이란  글자가 있다. 

숭복사지 귀면와의 귀는 위로 세워져 있는데 이 사진의 안압지 귀면와 귀는 양 옆에서 열려 있다.

고잔사 코마이누의 세워진 귀가 옆으로 열려 있는  것과 안압지 귀면와의  옆으로 열린 귀는  동일한 형태이다. 

 

 

 

 소화 6년 7월에 일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아키다견은 일본 황실에서 기르던 개에 유래를 두고 있는 대형견

다.  아키다견의 유래를 설명하는 책자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仁德天皇 (358年) 百濟より養犬者, 養鷹者と共に 黑駁の鷹犬, (養鷹記)     (824年) 渤海より 契丹大狗二口】

초원에서 말을 타고 작은 동물을 사냥하는 매사냥은 유목민족들의 풍습인데, 매사냥에 사용하는 검은 얼룩

무늬의 개는 티베탄마스티프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지금도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들이 티베탄마스티프로 매사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사냥 전문 기술자인 양견자와 양응자가  서기 358년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 왔다는 것과  발해에서

서기 824년에 거란의 큰 개 2마리를 일본에 보내왔다는 기록을 말하고 있다.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백제와 발해에서 일본에 보내진 개들은 모두 티베탄마스티프이다.

 

이 내용은 티베탄마스티프가 거란과 같은 북방 유목민족의 개라는 것과 우리 민족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렇게 일본에 보내진 티베탄마스티프는 일본 황실의 개가 되었고 이 개를 신수상(神獸像)으로 안치하면서

고구려개란 뜻을 지닌 코마이누(狛犬)라 불리게 된 것이다. 

경주 궤릉의 석수상처럼 귀 숙인 것과 귀 세운 코마이누가 한 쌍으로 안치되어 있다.

 

안압지 출토 귀면와 통일신라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  출토 녹유귀면와 통일신라.국립경주박물관 사진출처:<新羅瓦塼> 

 

 

안압지 녹유귀면와의 입부분 확대모습

 

 

녹유귀면와. 안압지. 통일신라. 국립경주박물관 사진출처:<新羅瓦塼>

 

중국국보전에서 서진(西晉) <청자신수존>이 가장 반가웠던 이유는 귀 숙인 신수(神獸)가 입에 물고 있는

구슬(寶珠)때문인데, 신라 귀면와 중 안압지 출토 녹유귀면와가 입에 똑같은 구슬을 물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신라 귀면와의 실체를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를 하고 있었다.

단지는 별로 크지 않지만 중국에서 정선된 국보급 유물에 속하는 만큼 <귀 숙이고 입에 구슬을 물고 있는

동물상>이 얼마나 우수한 조각 솜씨를 가진 장인이 만들었는지 짐작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시대의 대표적 유물 중에 벽귀(辟鬼)를 목적으로 했던 기와 이름을 귀면와(鬼面瓦)라고 한 것은  명칭부터

모순이 있지만, 귀면와가 출토된 곳이 주로 신라 왕실의 호국사찰이었던 점을 감안해야 문양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귀면 문양이 사람 형상이라는 주장을 하려면 귀면와의 여러 형태적 특징들과 함께 구슬을 입에 물고 있는

이유도 충분히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귀면와. 안압지 출토 통일신라 사진출처:<신라와전>

 

동물의 귀 중에서 안압지 귀면와의 귀와 동일한 귀를 가진 동물이 어떤 것일지 가까운 곳에서 찾는다면

말과 개과 동물일 것이다. 소과 동물인 양과 염소의 귀는 다르며 고양이과 동물의 귀는 저런 모습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다.

고양이의 귀는 끝이 뾰족한 모습이지만 호랑이나 사자의 귀는 U자를 엎어 놓은 형태이다.

그리고 두 귀의 폭이 매우 넓다. 중국국보전에 전시된 한(漢)나라 진묘수의 두상과 귀가 그런 모습이다.

전시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동물상이다. 둥근 형태의 귀를 가지고 있다.


이 안압지 귀면와와 비슷한 귀는 말도 가지고 있지만 얼굴과 역할의 특징을 고려할 때 말은 아니기에 대상에서

제외하면, 똑같은 귀를 가진 동물은 개다. 긴장해서 귀 폭을 좁히고 있는 개가 바로 안압지 귀면와의 귀와 똑

같다.  

 

 

귀면와. 안압지 출토 통일신라 사진출처:<신라와전>

 

 

. 8세기. 국립 경주박물관 소장 

 

 

 

 


 

 

귀면와[鬼面瓦] 편(片) 통일신라시대,  편(片) 높이 15.5cm, 너비 12cm

 

 

녹유귀면와. 안압지. 통일신라. 국립경주박물관 사진출처:<新羅瓦塼>

 

  
 
안압지 출토 녹유귀면와 통일신라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귀면와. 안압지 출토 통일신라 사진출처:<신라와전>

 

흥륜사는 고려시대에도 왕실의 도움을 받아 번창했지만 조선시대에 화재로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

일제시대에 우연히 토단과 석조가 발견되었고  1970년대에 발굴조사에서 금당지 앞쪽에 8각 탑지와 동쪽의

회랑지가 확인되었으며 많은 기와가 출토되었다.

흥륜사지는 “영묘사(靈廟寺)”란 글자가 새겨진 기왓조각이 나와서 선덕여왕 4년(635) 여왕의 발원에 의해

창건한 영묘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영묘사는 양지스님이 제작한 장륙삼존상과 사천왕상, 기와와 편액으로 유명하고 신라 왕실에서 <영묘사성전>

(靈廟寺成典)이란 관청을 두어 관리했던 왕실사찰이었다.

신라에 체계화된 밀교를 받아들인 사람은 영묘사 승려 불가사의였다.

그는 당 개원(開元)연중에 선무외삼장에게 사사하여 대일경(大日經 )을 연구하고 대일경 제 7권의  공양차제

법의 구결(口訣)을 기술한 <대비로자나경공양차제법소> 2권을 찬술하였으며 신라는 불가사의에 의해 대일경

계통의 발달된 밀교가 도입될 수 있었다.

 

흥륜사지에서 발굴된 일명 귀면와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그중 짧은 앞다리가 표현된 기와는 불국사와

안압지에서 발굴된 귀면와와 동일한 형태이다.

귀(鬼)는 신라에서 나라와 왕실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불력(佛力)의 힘으로 진압하고 물리치려던 대상인데,

그 간절한 염원을 표현한 기와문양에 귀(鬼)란 이름을 붙이다니.... 귀면 문양에 나타나는 여러 특징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실체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먼저 올린 포스트에서 짧은 앞다리의 모습이 사람의 다리와 용의 다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머리를 숙이고 대상을 향해 사납게 달려드는 모습에 가깝다. 입을 벌린 모습, 혀를 반쯤 내민 특징, 인중이

없이 코에서 바로 윗 이빨이 나오고, 아래위 송곳니가 길게 뻗어있으며,

특히 영묘사지 발굴 기와는 귀가 이마 위쪽에서 아래를 향해 반쯤 숙여져 있었다. 


오늘 지적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 귀면와의 코 형태이다.

일부 콧구멍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사람의 코를 흉내 낸 귀면와도 있지만 대부분 귀면와의 코는 동물의 코와

똑같이 입과 콧구멍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사람의 경우는 입이 정면을 향하면 콧구멍은 지면을 향하게 돼서 서로 직각을 가깝다.

고릴라와 침팬지 같은 영장류는 콧구멍이 들여다보이는 형태이지만 사람의 인중에 해당되는 부분이 매우

길다.

 

불국사에서 발굴된 귀면와의 모습은 안압지 발굴 귀면와와 형태가 거의 동일하게 보인다.

다른 귀면와들은 머리 부분만 표현했는데 이 귀면와는 상체를 버티고 선 짧은 다리까지 표현해 놓았다.

만약 사람의 형상이라면 팔이 되겠지만 형태가 사람의 팔로 보이진 않는다. 

동물이라면  앞발에 해당한다고 보고 일본 나라 소재 고후쿠사(興福寺)에 소장된 화원경(華原磬)에 있는  

용(龍)의 앞 다리 위치와 발가락의 모양을 참고로 올린다.

신라시대 제작된 용(龍)도 같은 모습이지만 고후쿠사 화원경의 용(龍)이 더 섬세하기 때문에 비교하는 것이다.


 

 

 

안압지 출토 귀면와 통일신라 국립경주박물관. 너비 26.1cm 높이 22.7cm 두께 3.2~ 5.8cm

 


안압지 출토 귀면와. 잡귀가 건축공간 쪽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려는 벽사의 주술적인 예술장식이다.

주로 돼지코 몰골과 흡사한 들쑥코를 과장 확대시켜 중앙에 배치하고 상부 쪽에 우락부락한 통방울 눈, 아래

쪽에 으르렁거리는 이빨들을 생략기법으로 일그러뜨려 삽입하는데 특히 폭이 매우 넓은 귀의 모양과 양 귀에

걸려 있는 입의 웃는 모습, 그리고 '귀면'을 둘러싼 가장자리의 섬세하고 따스한 문양들의 뛰어난 조형예술성을

주목해 보게 한다.


 

 

 

경주 안압지 출토 귀면와  통일신라   

 

 

귀면와. 안압지 출토 통일신라 사진출처:<신라와전>

 

 

 

귀면와(鬼面瓦)란 지붕마루 끝을 막음하는 기와의 일종으로 잡귀를 물리치는 듯을 가지고 있으므로 무서운

도깨비 형상이지만 부드럽게 웃는 듯한 여운이 있다. 이 기와는 경주 임해전지출토(臨海殿址出土)로 전해

지며 녹유(綠釉)가 입혀졌고 측면에는 당초(唐草)무늬를 새겼다. 

 

 

 

 

        

                                       

 안압지 출토 금동 용두. 가로 16.4cm 세로 10.7cm

 

 

 

 

 

 4. 감은사지 출토 귀면와


 


 

감은사지 출토 귀면와   통일신라.국립중앙박물관. 사진출처:<新羅瓦塼>
 

 

신라 왕실의 다른 호국사찰들과 마찬가지로 감은사지에서도 귀면와가 발굴되었다.

그동안 신라 귀면와의 특징에 대해 기존에 간과되었던 부분들을 열거했지만 감은사지 귀면와도 그 부분은

동일하다.

감은사지 귀면와에도 인중과 윗입술이 생략되고 코 밑에서 윗니가 나왔으며 입을 벌린 상태에서 혀가 약간

나와 있다.

 

사람은 입을 벌리면 자연히 혀가 입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여러 특징을 종합하여 귀면문양이 사람은 아니

라고 했지만, 감은사 귀면와가 사람이 아닌 특징이 또 하나 있는데 귀면와는 정면의 모습을 조각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콧구멍이 정면에서 들여다보이는 형태이다.

 

이는 사람이 아닌 동물의 코이기 때문이다. 혀가 중간에 갈라진 모습도 사람의 혀가 아니며,

위아래 날카롭고 길게 돌출된 송곳니 또한 사람의 송곳니가 아니긴 마찬가지이다.

 


5. 경주 북천면 신당리 출토 귀면와

 

  

경주 북천면 신당리 출토 귀면와 통일신라 시대

 

귀면와 北川面 神堂里. 統一新羅. 國立慶州博物館. 사진출처:新羅瓦塼



신라 귀면와 대부분이 입을 벌리고 혀를 약간 내민 모습이라는 공통점을 설명했다.

사람은 입을 벌리면 자연스럽게 혀가 안으로 들어가지만 입을 벌리면 혀를 내미는 동물 중에 대표적인 동물이

개이며, 개 품종 중에도 몸에 털이 많은 품종의 개들이다.

서진의 <청자신수존>에서 귀 숙인 신수(神獸)가 입에 물고 있는 구슬은 이 신수가 용과 동급이라는 뜻이

있다고 본다. 용과 중국 사자상의 격이 같다는 것은 <중국 북방건축 정배>라는 포스트에서  용머리 위에 귀

숙인 사자상들이 올라가 있는 사진으로 설명한 부분이다. 신라 귀면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신라 귀면와의 대부분이 혀를 내민 모습인데 살짝 내민 혀의 모습을 구슬로 바꿔서 제작한 신라 장인의 예술

성으로 이해하고 싶지만 용과 격이 같다는 뜻도 있을 것이다.

서진의 신수가 신라 귀면와와  다른 것은  혀를 내민 상태에서 구슬을 물고 있다는 점이다. 

황룡사지 귀면와는 작은 구슬 네 조각으로 나누어진 구슬을 물고 있으며 사자의 갈기털처럼 얼굴 주변에

긴 갈기털을 표현해 놓았다. 신라 귀면와들의 코가 동시대에 제작된 용의 코와 판이한 점을 설명했었다. 

용의 코는 한.중.일 세 나라의 형태가 동일하다.

 

아시다시피 티베탄마스티프는 아시아의 북방 유목민족들이 수천 년 전부터 기르던 개이다.

시베리아에서 썰매 끄는 스핏츠그룹의 개들과는 혈통이 전혀 다른 개이고. 일본에서 코마이누라고 부르며

『박견(狛犬)』이라고 쓰는 “狛”이란 글자에 목양견이란 뜻이 들어있다.

코마이누는 고구려개라는 뜻인데 고구려개가 목양견이란 말이 되는 것이다.

코마이누의 형태도 목양견으로 길러왔던 티베탄마스티프이지만 글자에도 목양견이란 뜻이 담겨 있다. 

 

 우리 민족의 북방역사는 만주대륙에서 있었던 역사를 말하고 나라 이름은  부여와 고구려와 발해이다.

만주 대륙에서 강대한 국가를 건설했던 고구려가 부여에 뿌리를 두었고 백제도 부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은 충청남도에 지명으로 남아있는 부여는 우리민족 북방역사의 상징이었던 나라이다.

부여의 행정은 왕(王) 밑에 마가(馬加). 우가(牛加). 구가(狗加),.저가(豬加)가 있었고, 견사(犬使). 견사자

(犬使者). 사자(使者) 등의 관인이 있었다고 한다. 견사와 견사자를 대사(大使)와 대사자(大使者)라고 하기도

한다.

 


6. 영묘사지 출토 귀면와

 

신라에 정순밀교를 처음 들여 온 영묘사 승려 “불가사의”란 사람이 있다. 당나라 개원 연중에 밀교승 선무외

삼장에게 사사하여 <대일경>을 궁구하고 그 제 7권인 공양차제법에 대해서 들은 구결(口決)을 기록하여

<대비로자나경공양차제법소>(大毘盧遮那經供養次第法疏) 2권을 찬술했다.

불가사의는 자기가 다행히 선무외삼장을 만날 수 있어서 그에게서 얻은 요지를 여기에 기록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영묘사승 불가사의로 인해 <대일경> 계통의 체계화된 밀교가 신라에 도입되었다는 것을 말하며,

영묘사가 그런 역할을 하던 사찰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선무외(637~735)는 동인도 오릿사 출신으로 <대일경>에 통달한 밀교승이었고, 716년에 80세 고령으로

입당하여 당 현종의 칙령으로 낙양 대복사에서 <대일경> 7권을 번역했다고 한다.

선무외가 번역에 사용한 범문은 무행(無行)이 가져온 것이라 하며  그의 제자 일행이 그의 강석을 필기하여

<대일경소> 20권을 지었다.


영묘사는 635년(선덕 4)에 창건됐으며 <영묘사성전>(靈廟寺聖典)이란 관청을 두어 국가가 관리했다.

759년(경덕 18)에는 <수영영묘사사원>(修營靈廟寺使院)으로 개칭했다가 776년(혜공왕 12)에 원래대로

복원됐다.

영묘사에 작품을 남긴 승려 양지(良志)의 조상이나 고향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선덕여왕 때 사적이

삼국유사 의해(義解) 제5 양지사석(良志使錫)에 나타나 있다.

양지가 석장(錫杖)에 포대 하나를 걸고 다녔는데 그 석장이 저절로 날아가서 어느 집에 떨어져 울리면 그

집에서 양지가 온 것을 알고 제비(齊費)를 포대 속에 담아 주었고, 포대가 찬 뒤에 돌아옴으로써 그가 살던

절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다 한다.

 

양지는 도력이 높아 행적이 신이(神異)함이 헤아릴 수 없었고 필찰(筆札)을 잘하여 영묘사의 장육삼존상

(丈六三尊像)과 사천왕상, 전탑의 기와, 사천왕사 탑의 팔부신장상과 녹유사천왕상,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금강신(左右金剛神)이 모두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사천왕사와 영묘사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신라 왕실에서 관청을 두어 관리하던 호국사찰이며  밀교경전에

의한 밀교의례를 열던 곳이라는 곳, 사천왕상이 있었고 사찰의 기와에 귀면와로 불리는 기와가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호국사찰인 도다이사의 다른 이름인 “금강명사천왕호국사”가 <금광명경> “사천왕품”에 근거하듯이

신라 사천왕사와 영묘사의 사천왕상에 의한 동.서.남.북을 방위하는 근거도 같은 이유로 볼 수 있다.

사천왕상과 인왕상이 사찰의 불법뿐 아니라 사찰이 존재하는 국가의 진호를 염원하여 봉안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밀교경전에 의한 사방불신앙(四方佛信仰)과 사천왕상의 역할은 불탑의 사방을 방위하는 사사자상(四獅子像)

과 건물의 사방에 장식되던 귀면와(鬼面瓦)와 그 개념에 있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작자가 분명한 영묘사지 출토 귀면와의 귀 형태는 다른 귀면와 연구 관찰에 중요한 참고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귀면와가 출토된 사천왕사와 영묘사가 밀교법회를 개설하던 호국사찰이었다는 점은 귀면와의 실체를 이해

하는데 반드시 해석되어야 할 부분이다.


 


귀이다. 그것도 사람의 형태가 아닌 분명 짐승의 귀이다 

 

                                                                   

계대사 관음전 월대 난주 석사자(4)

 영묘사지 출토 귀면와와 귀의 숙여진 모습과 위치가 같다.



중국 계대사(戒臺寺) 관음전(觀音殿) 월대(月臺) 난주(欄柱)에 있는 사사자상(四獅子像)을 영묘사지 출토

귀면와와 비교하여 올려본다. 

 

 

 

 

 

 

경주 영묘사지 출토 귀면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귀면와 통일신라  경북대 박물관소장 파도문양의 배경을 보여준다

             

 

7. 황룡사지(皇龍寺址) 출토 귀면와

 

제 17대 내물마립간의 5대손이며 이찬(伊湌) 물력의 아들인 거칠부는 어려서 큰 뜻을 품고 전국을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때 고구려에 몰래 들어가 승려 혜량(惠亮)의 강론과 설법을 듣고 큰 감명을 받는다.

545년(진흥왕 6)에는 왕명으로 <국사(國史)>를 편찬하고 551년(진흥왕 12)에는 장군이 되어 백제군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국경지대의 10군을 빼앗는다.

그때 혜량은 진군 중인 거칠부를 만나 신라에 귀화하였고 진흥왕에 의해 신라 최초로 승통에 이른다.

그후 혜량은 여생을 신라의 호국을 위해 신명을 다 바친다.

<인왕반야바라밀다경>을 강설하여 백좌강회와 팔관회를 행하고 밀교의례에 의한 호국불교를 신라에 널리

전파한 이가 혜량이다.


헤량이 신라의 승통이 된 2년 뒤인 진흥왕  즉위 14년(553년)에 용궁(龍宮) 남쪽에 자궁(紫宮)을 지으려고

할 때 황룡이 나타나자 고쳐서 불사(佛事)를 삼고 황룡사라 하였고, 기축년에 이르러 담장을 둘러쌓으니

17년이나 걸렸다고 했다. 

얼마 후 남쪽 바다에 큰 배 한 척이 나타나서 하곡현의 사포(지금 울주의 곡포)에 정박하므로 조사했더니

첩문(牒文)이 있는데 인도 아쇼카왕이 석가삼존불을 조조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황금 3만분과

황철 5만 7천근,  석가삼존의 모형을 만들어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내며 축원하기를 ‘인연이 있는 국토에

도착하여  장륙의 존용(尊容)을 이루소서’ 라며 조성되기를 축원했고  배가 경주 앞 바다에 닿은 것이다.

이에 574년에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만들어 안치했는데 장륙존상의 무게는 3만 5천 7근으로 황금이 1만

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철 1만 2천근과 황금 1만 136분이 들었다고 한다.

이듬해 불상이 발꿈치에 닿도록 눈물을 흘려 바닥을 1자나 적시니 대왕이 승하할  조짐이라고 하였다. 

 

 

 

당(唐) 개원 연간에 중국에서 밀교의 고승 선무외삼장에게 사사했던 불가사의가 경주 영묘사에 머물렀고,

영묘사는 신라 조정에서 영묘사성전이란 관청을 두어 관리하던 국가사찰이었다. 

그 영묘사에서 출토된 귀면와의 귀가 눈 위쪽에서 아래 방향으로 숙여졌다는 것을 설명했다.

사람이나 용은 그런 귀를 갖고 있지 않다. 신라 귀면와의 귀는 형태가 다양하고 숙여진 귀와 세워진 귀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숙여진 귀는 다시 눈 위에서 숙여진 귀와 눈 옆에서 八 자 형태로 숙여진 귀로 나눌 수

있다.

 

 

 

황룡사지 출토 귀면와  통일신라 너비 20.5 cm    높이 23.5 cm  두께 3.7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황룡사지에서 발굴된 귀면와는 입에 특별한 형태의 구슬을 물고 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귀면와 중에도 입에 구슬을 물고 있는 기와가 있지만 황룡사 귀면와의 입에 물린 구슬은

작은 구슬 네 개가 합쳐서 하나가 된 것 같은 형태이다.

 

명랑법사의 문두루비법으로 세워진 사천왕사는 고려 태조가 개성에 현성사(現聖寺)를 세운 뒤에 신인종

(神印宗)이라는 일종(一宗) 의 본산이 된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도 사천왕도장(四天王道場)은 경주

사천왕사에서 개설되었다고 한다.

밀교 사찰인 사천왕사에서 출토된 귀면와의 모습을 올려서 황룡사 귀면와를 이해하려고 한다.


 

 

 

 

 

위 황룡사 치미의 인면문  

 

 

 


8. 흥륜사지 출토 귀면와

 


삼국유사 아도본비(我道本碑)에는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 승려 아도의 아버지는 정시연간(正始年間)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던 조위인(曺魏人) 아굴마(我堀摩)이며 어머니는 고구려인 고도령(高道寧)이라고

하는데,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서축(西竺)사람이라고도 하고 오(吳)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도 한다.

아도는 5세 때 출가했고 16세 때 위(魏)에 가서 아굴마를 만나보고 현창화상(玄彰和尙)에게 배운 뒤 19세 때

고구려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명으로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263년(미추이사금 2)에 신라에 왔다가 박해를 피해 일선현

(一善縣: 경북 선산)에 있던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 지냈다.

미추이사금의 딸 성국공주의 병을 고칠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궁궐에 들어가서 공주의 병을 고쳐주고

불교의 전파를 허락받고 흥륜사(興輪寺)를 짓고 불법을 강연했다. 이때의 흥륜사는 작은 절이었을 것이다.


미추이사금이 죽자 불교를 믿지 않는 신라 사람들의 박해를 받아 다시 모례의 집으로 피신을 하고 무덤을

파고 들어가 문을 닫고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아도가 묵호자(墨胡子)란 이름으로 되어있으며 일선군(一善郡) 모례의 집에 머무르다 죽었

으며 시자 3명이 불경을 강론했다고 한다.

 

강화도 정족산 삼랑성내에 있는 고찰 전등사(傳燈寺)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72년)에 아도화상이 개산

(開山)하고 진종사(眞宗寺)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전등사 사찰측의 기록이 있다.   

전등사는 고려 충열왕비 정화궁주(貞和宮主)가  폐허가 된 가람을 중창하고 그의 원찰(願刹)로 삼으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傳燈寺"  :韓國佛敎硏究院 著)

 

선덕여왕 때 김양도(金良圖)가 조성하고 봉안한 미륵삼존상이 금당 안에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에는,  “동벽에 서쪽에 앉아 이소(泥塑)를 향한 것은 아도. 염촉. 혜숙. 안함. 의상이며,

서벽 동쪽에 앉아 이소를 향한 것은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이다.” 라고 하여 신라 불교 십성(十聖)의

모습을 진흙으로 조성해 흥륜사 금당에 모셨다고 한다.

 

이웃나라 일본에는 그 사찰과 관련된 고승들의 실물 모습을 조성해 놓은 경우가 많이 있는데 신라의 흥륜사가

그랬고 분황사가 그랬던  것이다. 

신라 말 반란군의 방화로 소실된 것을 경명왕 5년(921)에 중수할 때 제석천이 하늘에서 내려와 수리를 도왔

다고 하며 그 모습을 그리려 하자 보현보살의 원력이 자신보다 크니 보현보살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흥륜사는 고려시대에도 왕실의 도움을 받아 번창했지만 조선시대에 화재로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

일제시대에 우연히 토단과 석조가 발견되었고  1970년대에 발굴조사에서 금당지 앞쪽에 8각 탑지와 동쪽의

회랑지가 확인되었으며 많은 기와가 출토되었다. 흥륜사지는 “영묘사(靈廟寺)”란 글자가 새겨진 기왓조각이

나와서 선덕여왕 4년(635) 여왕의 발원에 의해 창건한 영묘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영묘사는 양지스님이 제작한 장륙삼존상과 사천왕상, 기와와 편액으로 유명하고 신라 왕실에서 <영묘사성전>

(靈廟寺成典)이란 관청을 두어 관리했던 왕실사찰이었다.

신라에 체계화된 밀교를 받아들인 사람은 영묘사 승려 불가사의였다.

 

그는 당 개원(開元)연중에 선무외삼장에게 사사하여 대일경(大日經 )을 연구하고 대일경 제 7권의  공양차

제법의 구결(口訣)을 기술한 <대비로자나경공양차제법소> 2권을 찬술하였으며 신라는 불가사의에 의해

대일경 계통의 발달된 밀교가 도입될 수 있었다.

 

  

 

인면무늬와당.흥륜사지 출토.국립경주박물관

 


 

 

귀면와.흥륜사지.통일신라.국립경주박물관 사진출처:<신라와전>



경주시 사정동에 있는 흥륜사 절터는 이곳에서 “영묘사(靈廟寺)”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수습되어 선덕

여왕 때 창건된 영묘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성국공주의 병을 고쳐주고 미추이사금으로부터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지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흥륜사를 지었다고 한다.

 

아도화상이 성국공주의 병을 고쳤던 방법은 밀주의 비법이었지 침 놓고 뜸 뜨는 동양의술은 아니었을 것이다.  

흥륜사의 창건 연대는 눌지왕대(417~457)로 추정하고 있어서 신라 최초의 절이 흥륜사인 셈이다.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이 순교한 뒤  533년에 중창하기 시작해서  진흥왕 5년(544) 2월에 완공되었다. 


진흥왕은 중창한 이 절을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고 하고 일반 백성들도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으며,

만년에는 왕 스스로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을 받고 흥륜사의 주지가 되었다고 한다.

주지가 된 진흥왕은 왕실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법회를 주관했으며, 흥륜사는 신라의 왕실사찰이며 호국

사찰로서 제 1의 절이 되었다.

 

매년 초파일에는 서라벌의 남녀들이 금당 앞에 있던 탑 주위를 도는 복회(福會)가 열렸다고 한다.

요즘도 초파일에는 불교사찰에 일반불자들도  법회에 참석하지만 여야 정치인들이 다투어 조계사에 가서

개인의 소원을 통해 나라의 발전과 안정을 이루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진흥왕이 만년에 주지로 있던 서라벌 흥륜사의 광경이 초파일 조계사의 풍경과 비슷했을 것이다.

 

 

            귀면와.통일신라.흥륜사지

 

흥륜사지에서 발굴된 일명 귀면와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그중 짧은 앞다리가 표현된 기와는 불국사와

안압지에서 발굴된 귀면와와 동일한 형태이다.

 

귀(鬼)는 신라에서 나라와 왕실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불력(佛力)의 힘으로 진압하고 물리치려던 대상인데,

그 간절한 염원을 표현한 기와문양에 귀(鬼)란 이름을 붙이다니.... 귀면 문양에 나타나는 여러 특징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실체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 사람이 만든 것인데...


먼저 올린 포스트에서 짧은 앞다리의 모습이 사람의 다리와 용의 다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머리를 숙이고 대상을 향해 사납게 달려드는 모습에 가깝다. 입을 벌린 모습, 혀를 반쯤 내민 특징, 인중이

없이 코에서 바로 윗 이빨이 나오고, 아래위 송곳니가 길게 뻗어있으며, 특히 영묘사지 발굴 기와는 귀가

이마 위쪽에서 아래를 향해 반쯤 숙여져 있었다. 

 

대부분 귀면와의 코 형태이다. 일부 콧구멍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사람의 코를 흉내 낸 귀면와도 있지만

대부분 귀면와의 코는 동물의 코와 똑같이 입과 콧구멍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사람의 경우는 입이 정면을 향하면 콧구멍은 지면을 향하게 돼서 서로 직각을 가깝다.

고릴라와 침팬지 같은 영장류는 콧구멍이 들여다보이는 형태이지만 사람의 인중에 해당되는 부분이 매우

길다.

 



9. 불국사 출토 귀면와

 

 

 <제 54대 경명왕 때 흥륜사 남문 및 좌우 낭무(廊廡)가 불탔으나 수리하지 못했다. 정화(靖和)와 홍계(弘繼)

라는 두 승려가 시주를 받아서 장차 수리 하려고 하였는데, 정명(貞明) 7년 신사 5월 15일에 제석(帝釋)이

절의 왼쪽 경루(經樓)에 내려와서 열흘쯤 머무르자 전탑(殿塔) 및 오색구름이 절을 덮고 남쪽 못의 어룡(魚龍)

이 기뻐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면서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하여 옥백(玉帛). 양도(梁稻) 등 시주가 산처럼

쌓이고 공장이 스스로 오니 며칠이 되지 않아서 완성되었다.

공사를 마치고 천제(天帝)가 장차 돌아가려고 하자, 두 승려가 아뢰기를, “천제께서 만약 환궁하고자 하신

다면 청컨대 성용(聖容)을 그려서 지성으로 천은(天恩)에 보담하고, 또한 이로 인하여 영정을 남기고 영원히

하방(下方)을 진압하도록 하소서.” 라고 하였다.

천제가 말하기를, “나의 원력(願力)은 저 보현보살이 조화력을 두루 내리는 것만 못하니 보현보살상을

그려서 경건히 공양하여 폐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므로, 두 승려가 가르침을 받들어서 벽에 경건히

보현보살상을 그렸는데, 지금까지도 그 상이 남아있다.>   삼국유사 제 3권 탑상 제4. 흥륜사의 벽화 보현

 



10. 경주 월성 출토 귀면와

 

 

귀면와 월성 출토 통일신라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이마 한가운데에는 왕자가 있다. 이 기와는 임금이 머무는 궁궐 4기퉁이를 장식하는 기와이다.

가끔 신라에서는 왕자가 새겨진 기와들이 출퇴되는데 바로 궁궐터였기 때문이다.

이 귀면에는 뿔이 없다. 양쪽에 달려 있는것이 뿔처럼 보일수 있으나 뿔이 있는 귀면과는 묘한 차이점을

보인다. 이런 귀면와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월성 안에는 귀정문(歸正門). 인화문(仁化門). 현덕문(玄德門). 무평문(武平門). 준례문(遵禮門)과 월상루

(月上樓). 망덕루(望德樓). 명학루(鳴鶴樓). 고루(鼓樓) 등의 문과 누각이 있었고, 왕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고 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朝元殿)과 삼궁(三宮) 등 많은 궁성 건물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세월 속에 사라

지고 없으며 1741년 조선 영조 17년에 축조한 석빙고만 남아 있다.


월성은 동쪽의 명활산성(明活山城), 서쪽의 서형산성(西兄山城), 남쪽의 남산성(南山城), 북쪽의 북형산성

(北兄山城)이 나성(羅城)으로 위치했었다고 한다. 월성의 성벽은 부분적으로 남아있으며 서남쪽 월정교지

(月精橋址)를 바라보는 곳이 가장 높게 남아 있다. 석탈해설화에 의하면 원래 호공(瓠公)의 거주지였던 것을

탈해가 거짓 꾀를 써서 호공을 몰아내고 차지했다고 한다.

 

 


11. 그 밖의 국립 경주박물관 소장 귀면와

 

 

                       경주 월지 출토 귀면와  통일신라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西部里 邑城 西側  귀면와

  <얼굴 양 옆으로 열려진 형태의 귀가 세워져 있다.>  

 

신라 귀면와의 귀는 크게 나누어 숙여진 귀와 세워진 귀로 분류된다.

숙여진 귀는 다시 두가지 형태로 나뉘며 머리에서 눈 방향으로 숙여진 영묘사지 귀면와(신라와전 1095)와

얼굴 양 옆으로 귀가 숙여진 사천왕사지(신라와전 1081), 안압지(신라와전 1088), 천북면 신당리 출토

귀면와(신라와전 1082)가 있다. 

숙여진 귀의 두 가지 형태는 중국의 귀숙인 사자와 일본의 코마이누에서도 신라 귀면와와 똑같이 발견된다.

 

세워진 귀의 대표적 예는 진돗개나 세퍼트의 귀를 연상케 하는  숭복사지 귀면와(신라와전 1121)가 있고,

사천왕사지(신라와전 1090), 월성(신라와전 1091), 안압지(신라와전 1115), 감은사지(신라와전 1120) 귀면

와의 귀도 머리에서 위로 직립해 있는데, 안압지와 사천왕사지는 한 장소에서 숙여진 귀과 세워진 귀를 가진

두 종류의 귀면와가 발굴된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이는 경주 궤릉의 돌사자상이 숙여진 귀와 세워진 귀를 가진 두 종류의 동물상을 제작한 예와 같고,  

후대에 제작되는 일본 코마이누들이 세워진 귀와 숙여진 귀의 두 가지 형태로 제작되는 것과 신기하게도

동일하다. 


 

        가스관 埋設地 귀면와  

          <얼굴 양 옆으로 열려진 형태의 귀가 세워져 있다.> 

 

신라 귀면와의 세워진 귀도 두 형태로 분류 되는데 오늘 올리는 귀면와의 세워진 귀는 일본 도가노오 고잔사

에 있는 코마이누에서 동일한 예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세워진 귀를 표현하는 이런 제작기법은 신라 귀면

와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참고 자료가 될 것으로 본다.

고잔사 코마이누 뿐만 아니라 일본 신사의 코마이누들은 이와같은 형태의 귀가 많이 있으나 이 포스트에는

고잔사 코마이누만 올리는 것 뿐이다.

 

신라 귀면와의 네 가지 형태의 귀를 모두 가진 동물을 찾는다면 유일하게 개 밖에 없다.

신라 귀면와에 나타나는 이런 특징들을 세밀하게 관찰했다면 실체를 밝히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동물의 얼굴 특징을 비교 분석하는 분들은 동물학이나 수의학을 전공한 분들인데, 그 분들에게 신라 귀면와

를 연구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어렵지 않게 귀면와의 실체를 알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統一新羅. 國立慶州博物館. 사진출처:新羅瓦塼

 

부여의 “가(加)”는 독자적인 수천 호의 세력기반을 가진 족장으로서 국정에 참여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전했다고 한다. 

부여의 산업은 농업과 목축을 겸했으며 기마민족이기도 했다. 기르던 가축은 말과 소와 개와 돼지였는데

부여의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매우 유명해서 중국에 수출되었다고 한다.

우수한 말과 뛰어난 기마술이 부여로 하여금 수 세기동안 만주 대륙의 패자가 되게 한 것이다.

부여에서 기르던 말을 상상하라고 하면 어떤 품종의 말일지 상상을 할 수 있다.

칭기즈칸 군대가 타고 세계를 제패한 몽골말과 거의 같은 품종이었을 것이다.

요즘 부여와 고구려 사극에서 타고 다니는 그런 말은 그 시대엔 없었다 

 

 

서진(西晉) 청자신수존의 신수(神獸)는 신라에서 장식 기와가 제작되던 시기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불교문화

속에서 제작되었고, 용(龍)도 아니면서 입에 구슬(寶珠)를 물고 있다.

여의주는 용의 턱 아래 있다는 구슬이고 이 구슬을 얻으면 온갖 조화를 부릴 수 있다고 한다.  

 

귀 숙인 중국사자상들  상당수가 발에 공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 있다.

중국의 유물을 설명하는 곳에는 “수구사자(繡球獅子)”라고 설명되어 있지 여의주(如意珠)라고 되어 있지 않다.


 

 

 

귀면와 統一新羅. 國立慶州博物館.

너비 25.4 cm  높이 19.9~24. cm  두께 4.8~7.9  cm  사진출처: 新羅瓦塼

 

밀교의궤에는 분노하는 얼굴의 불상들이 많습니다.

인왕상과 사천왕상이 그렇고 부동명왕, 군다리명왕, 항삼세명왕, 위덕금강은 쌍신불(雙身佛)에서도 분노의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외에 연화생대사, 마두금강, 재보천왕, 금익조왕, 자재신과 여러 호법신들이 모두

분노의 표정으로 만들어져 있다.

밀교의궤를 설행했던 대표적인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귀면와를 비롯해서 신라 귀면와들이 모두 분노의

표정이다. 귀면와의 무서운 얼굴은 밀교불상들의 분노의 표정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서진(西晉) 청자신수존의 신수(神獸)는 신라에서 장식 기와가 제작되던 시기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불교

문화 속에서 제작되었고, 용(龍)도 아니면서 입에 구슬(寶珠)를 물고 있다.

여의주는 용의 턱 아래 있다는 구슬이고 이 구슬을 얻으면 온갖 조화를 부릴 수 있다고 한다.  

 

귀 숙인 중국사자상들  상당수가 발에 공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 있다.

중국의 유물을 설명하는 곳에는 “수구사자(繡球獅子)”라고 설명되어 있지 여의주(如意珠)라고 되어 있지 않다

 

 

 출토 장소 미상 귀면와   

 

 

 

 

 

 

 

 

 

 

 

귀면와 통일신라

 

통일신라시대에는 귀면와가 대량으로 제작되었으며, 형태와 구도 면에서 완벽한 수준에 이르게 된다.

특히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에 제작된 귀면와는 모든 면에서 절정을 보여준다.

위 자료는 비록 안면부 중 일부 편(片)에 해당하나, 귀면와 특유의 볼륨감을 충분히 보여주는 자료이다.

 

 

 

 

 


 

 

 

 



 

지방 박물관 소장 귀면와

 

 

경남 함안군 출토 토제 귀면와 통일신라

 

 

고달사지 출토 귀면와  통일신라 시대

 

 

고달사지 원종국사 부도 귀면문양

 

 

 

 

 흥덕사지에서 출토된 망새. 국립청주박물관. 귀면와란 결국 '고래얼굴' 또는 고래를 조상으로 여긴  

'고래숭재'에 연관한 무속적인 주인공의 얼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각 대학교가 소장하고있는 귀면화

 

 

귀면와 통일신라 길이 19cm 너비  19.8 cm  두께 2.1cm  경주대소장

 

사래용 귀면와로 파손된 부분을 복원한 파손 복원품이다. 1mm ~ 3mm 내외의 세사립이 첨가된 정선된

태토이다.외면 색소는 회백색을 보인다 . 귀면와의 주연부에는 굵은 구슬모양의 돌기가 확인된다.

문양면에는 주연부와 귀면의 머리사이에 화염보주가 옅은 양각으로 표현되어져 있고,두갈래로 갈라져 올가는

뿔사이로 산자형 사이로 화염문이 있다. 뿔의 아래에는 화염문이 있다.

뿔의 아래에는 음각선으로 양분되어 끝 부분이 양분되어 끝이 둥글에 말려 올라가는 눈섭이 있으며 반구형

으로돌출된 눈동자가 보인다. 눈동자의 주위에는 2조의 권선이 돌려져 있고 눈의 사이에는 타원형의 돌기와

지름 1.1cm의 구멍이 있다.

크로바 모양의 들창코를 따라 연결된 입에는 한쌍의 날카롭게 뻣어 있는 송곳니가 위치하여 있고 3개의

니가 보인다. 입의 주위에는 끝이 둥글게 밀려 올라가는 수염이 있다.

 

   

귀면와 파편 통일신라시대  경주대학교 소장

주연두께 1.4cm  두께 1.7cm 주연너비 3.8cm  현재너비 6.9 cm 현재 길이 10.5cm


사래용 귀면와 상단부 파편으로 주연부와 문양면 일부가 남아 있다.  1mm ~ 3mm내외의 세사립이 첨가되어

있다.

외면 색조는 회청색 내면 속심은 회백색을 보인다. 귀면와의 주연부 아래에는 가는 구슬모양의 돌기가 장식

되어 있다.

문양면에는 끝이 둥글게 말려 올라가는 눈섭이 있으며 눈섭과 연결된 지름 1.1cm구멍이 있다.

 눈섭아래에는 반구형이 돌출된 한쪽 눈동자가 절반정도 남아 있다.


귀면와 통일신라시대 경주대학교

주연두께 1.3 cm 주연너비 3.2 cm 두께 3.6cm 현재길이 15.5cm  너비 21.9cm


사래용 귀면와로 1/2만 남아 있다. 태토는 1mm 내외의 세사립이 정선된 태토이다.

외면 색소는 회청색 내면 속심은 적갈색과 회청색이 겹을 이루어 보인다 .

귀면와의 주연부에는 굵은 구슬모양의 돌기가 장식되어 있다. 원두방형 형태를 이루고 있다.   

문양면에는 숫자 삼형의 주름이 3조확인되는 이마가 높게 솟아 올라가 있고. 이와 연결되어 눈섭 아래로

툭튀어 나온 눈이 보인다 . 미간에 1.6cm의 구멍이 있으며 구멍을 따라 연결된 코는 뭉툭하게 퍼져있다.

크게 벌려진 입에는 한개의 날카롭게 뻗어있는 송곳니가 위치하고 있다

  

 

         귀면와   통일신라  경주 출토  너비 23.2   길이 21.7  두께 4.6   통일신라  연세대학교 소장


괴수와 같은 귀신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조각한 원두방형의 기와로 지붕을 덮는 일은 중국에서 시작되었고

중국 건축의 하나의 특색이지만 은대의 건축 유지에서는 아직 기와가 발견되지 않아 당시에는 나무나 풀로

지붕을 덮었던 듯하다. 디와의 발견에는 주말 연의 하도인 역현 또는 제의 국도인 임치 등에서 반원형의

와당을 포함한 많은 기와의 발견이 보고되었으며 이후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우리나라는 중국은 영향을 받았고 형태나 문향에서 시대적인 차이를 뚜렸하게 나타낸다 우리나라에서 기와

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 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수 없으나 아마도 삼국 시대임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디와는 목조건물의 지붕에서 이어져 눈과 빗불의 침수를 막는 방수성과 온.습도의 기후 변화에

오래 견딜수 있는 내수성을 본래의 기능으로 한 기본 기와와 건물의 경관과 치장. 그리고 위용을 돋보이기

위한 와당과 서까래 기와, 그리고 마루기와 등으로 구분되어 다양하게 제작되고 있다.

그중 귀면와는 마루기와에 속하는 것이다


마루기와는 마루축조용과 마루 장식용으로 나눌수 있데. 마루축조용은 각 마루를 쌓아 올리는데 쓰이는

기와로 적새,착고, 부고가 있다. 마루장식용은 마루 끝에 삽입하거나 그 위에 얹어 각 마루의 곡선과 반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기와로 치미,귀면화,마루원와당, 마루평와당이 있다.

귀면와는 괴수와 같은 얼굴을 장식한 원도방형의 기와로 내림마루 끝의 기와등 위에 얹칠 수 있도록 하단부에

반원형의 홈이 파여있다.

그런데 사래기와도 통일신라시대 직후 부터 연화문 대신 귀면문을 사용하여 마루용 귀면와 매우 흡사하다.

하단부의 중심에 반원형의 홈이 파여 있으면 마루용이고 편평하면 사래용으로 용도가 구분된다.

이러한 귀면기와는 악귀의 침입을 막는 벽사의 상징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제작되었다.


귀면은 인간을 희로하고 해치는  잡귀신의 하나인 도깨비와 비교할 때 그 격이 다르며 의장성과 함께 특성도

서로 차이가 나고 있다. 또한 귀면와 가운데는 머리에 화염보주을 배치하고 있거나 입에 보주를 물고 있는

형태가 다량 출고되어 용의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알수 있다.

말면이 편평한 사래용 귀면와로 , 부착하기 위한 구멍이 귀면의 미간 사이에 뚫려 있으며 머리에 작은

화염보부가 있다. 부릅뜬 두눈, 양측으로 솟아난 뿔과 그리고 크게 버린 입의 표현은 생동감이 넘치며 귀면

주위에 서기를 표현하여 역동적인 느낌을 증가시키고 있다.

테두리는 작은 그슬무늬를 일정하게 배치하였다. 일부분 파손되고 마모되어 흐릿하나 전체적인 상태는 양호

하다


  

 

 

 

귀면와 통일신라  너비19.5cm   길이 22cm     두께21cm 경북대소장

 

귀면와 통일신라  너비 26.7cm  길이  29.0 cm  두께 3.9cm 경북대 소장


회색 와질의 귀면화이다 태토는 백색의 굵은 사립이 다향포함된 정선된 점토이며 소성은 양호하다.

전체적인 형태는 윗면이 둥근 사다리꼴이나 가운데 부분이 잘룩하게 들어 갔다.

밑면은 지붕위의 기오아등에 걸치기 위해 반원형으로 처리된 마루용 귀면와로 이는 귀문 가득새겼다.

 

 

 

귀면와 통일신라  너비23.5cm   길이 24.5cm  대구카돌릭대학교 소장

 

 

귀면와 통일신라 시대 대구대학소장

너비 20.3cm 길이 19.2cm 두께 2cm 주연두께 0.6cm 주연너비 1.4cm

 

양 눈섭 사이에 는 못을 박아 고정하기 위한 지름 0.8 cm 가량의 원공이 뚫려 있다.

주위에는 수조의 서기가 돌아가 여백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양측의 턱면에는 당초무늬를 배치하였다 폭 2cm가량의 주연대의 둘레는 돋을 선을 돌렸고 그사이에 이중

원문을 배치하였다.

귀문이 베풀어진 앞면 외에는 모두 도구를 이용하여깨끗히 정리하였다. 귀문 및 주연대의 일부가 결실되었다.

 

 

귀면와 통일신라 시대 가로 24.5cm  세로 23cm 동국대학교 소장


이기와는 경질의 귀면문이며 바탕흙은 연회색이고 모래 알갱이가 섞여있다  눈은 솟아 올라 잇고 상징화된

눈썹과 변형된 뿔이 펴현되어 있어 사래용으로 사용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입은 크게 벌렸고 그 안에 날카로운 송곳니와 3개의 이발이 위 아래로 새겨있다 입부위에는 변형된 털이

표현되어 있다 표면은 물 손질하였으며 기와 칼로 다듬은 흔적이 있다 뒷면에는 손으로 다듬은 흔적인

손자국이 많이 남아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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