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매체현실과 문화변화
I. 서 론
오늘날 우리는 정말로 낯선 사회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컴퓨터와 인터넷 등 다양한 전자매체에 의해
이뤄진 인공적 상황을 말한다.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이런 상황을 우리는 “매체현실”(Medienrealit?t) 혹은
“가상현실”(virtuelle Realit?t)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과 가상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유포하는 매체현실의 상황 자체에 놓여 있다.
이는 곧 전도된 현실을 지시한다.
그것은 최소한 우리의 존재를 본질적으로 규정해주던 근거를 상실토록 만드는 위기를 가져온다.
즉 매체현실은 우리에게 가상적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보여주는 듯 싶지만, 인간실존의 어떤 자기파멸의
가능성을 숨기고 있는지도 인식할 수 없게끔 만든다.
그것은 매체에 의한 가상 세계가 긴장 관계를 벗어나 현실을 일방적으로 해소하고 무화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을 그 본성 상에서 해체하도록 만드는 위험이 매체현실에 충분히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
에서 그러한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결여는 그 어떤 재앙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의구심과 함께 “매체현실과 문화변화”라는 광범위하고도 복합적인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밟는다.
우선 첫 번째 논의에서는 비물질성, 가상현실, 속도, 이미지, 매체작품 같은 새로운 매체현실을 구성하는 인자
들을 검토해보고 동시에 그와 같은 새로운 매체현실에 예술(특히 문학)이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두 번째 논의에서는 매체에 의해 가상적으로 만들어지는 현실, 즉 “가상현실”이라는 개념과 “가상” 개념 자체
의 철학사적 근원을 찾아볼 것이며, 또한 가상현실이 지닌 모순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세 번째 논의에서는 매체현실을 형성해 주는 핵심 개념인 “정보”, “소통”, “매체” 등을 체계이론적 시각에서
검토해보고, 동시에 사회체계가 “매체현실“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논의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정치사회학적 화두를 제공해 주는 두 명의 대표적 이론가(D. Bell, M. Poster)의 시각을 대비해
보면서 새로운 매체현실 혹은 정보사회가 어떠한 문화적 배경 하에서 형성하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기술공학적 매체 시대와 예술 개념의 변화
1. 새로운 매체현실과 문화의 변화
벤야민의 ?기술 복제 시대에서의 예술작품?의 첫 페이지는 기술적인 변혁과 그로 인한 예술 개념의 변화를
읽어낸 바 있는 순수문학의 대표적인 시인인 폴 발레리의 인용문으로 시작하고 있다.
“물질, 공간, 시간과 같은 물리적 요소는 지난 20년 사이 옛날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우리는, 위대한 신발명들이 예술 형식의 기술 전체를 변화시키고, 또 이를 통해 예술적 발상에도 영향을
끼치며 나아가서는 예술 개념 자체에까지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 발레리가 당시 20년 동안의 기술적 혁신과 그로 인한 예술의 변화를 읽어 낸 이와 같은 대목은 아무런 여과
없이 지금 우리 시대의 변화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적절한 현실성을 띠고 있다.
실제로 1980년 이후 지금까지 대략 20년 동안 사회의 역동성을 구성하는 물질, 공간, 시간 같은 요소는 엄청
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였는데,
소위 디지털(Digital) 혁명 혹은 기술공학적 혁신에 의한 “위대한 신발명들”(컴퓨터, 레이저 사진술, 디자인,
위성, 비디오 등)은 글자 그대로 “예술” 개념 자체뿐만 아니라 “예술 형식의 기술 전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제 기술공학적 “매체”에 대한 정의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매체”에 더 이상 단순한 “수단”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
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정의를 들 수 있다.
“매체를 경로(Kanal)로서, 즉 단순한 기술적 매개로서 파악하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매체는 매개 도구가 아니라 형성 도구인 것이다, 매체들은 언제나 형성수단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따라서 문화도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문화란 현실 구성의 목적을 위해 매체들을 창조적으로 다루는 행위이며,
과거에는 ‘인간 매체’를, 그 후에는 ‘인쇄 매체’를 다루었고, 그리고 오늘날에는 ‘전자 매체’를 다루고 있지만,
향후 아마도 완전히 다른 새로운 매체를 다루게 될 것이다.
” 금세기 중반 로만 야콥슨이 언어의 여섯 가지 기능을 그려냈을 때만해도 매체에 해당되는 “경로”는 단순히
“기술적 매개”의 의미로 파악되었으며 또한 그것의 기능도 대체로 도구적인 차원에서 인식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매체”는 전통적인 “매개”의 의미가 아니라 “형성”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와 같은 능동적인 매체와의 창조적인 소통이 곧 “문화”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능동
적인 매체에 의해 구성된 현실이 어떠한 특징을 지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2. 새로운 매체현실 시대의 제반 특징
1) 기술공학적 매체 시대의 첫 번째 특징 -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도 마찬가지로 공유하고 있는 점이기도 한데 - 은 다름 아닌 “비물질성”(das Immateri
elle)이라고 간주되는 소위 “정보”를 토대로 한 탈현대적 사회로의 전환에 있으며, 이것은 일찍이 리오따르의
대표적인 저서 ?포트스모더니즘적 지식?에서 이미 제시된 바 있다.
이를 근거로 전통적인 산업사회 혹은 그 사회를 움직였던 추동 이념인 “현대성”과 결별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이나 매체 이론가들은 사회와 세계를 새롭게 규정하려 든다.
예컨대 매체 이론가인 뢰처는 포스트모더니스트 리오따르의 사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는데,
사실 그 대목은 현대 사회에 대한 대부분의 매체이론가들이나 뢰처 자신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
“새로운 세계는 비물질성들, 가령 디지털화된 정보나 혹은 합성된 색깔과 소리들에 의해 구성될 것이며, 이것들
은 언제나 자의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물질적인 객체들과 관련된 현실에 대한 이해가 변화될 것이며, 누구나 정보화 세계에
적합한 새로운 감수성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다.”
색깔과 소리의 합성은 곧 이미지(영상)의 세계이며, 이러한 이미지와 디지털화된 정보에 의해 인위적이고도
자의적으로 “구성된” 것이 곧 세계를 가리킨다.
이러한 비물질성인 이미지와 정보로 구성된 세계는 전통적인 의미의 세계, 즉 물질로 구성된 세계라는 기존
개념과 결별하고 있다.
그리고 비물질적인 세계에 적합한 “새로운 감수성”이란 이미지에 상응하는 감수성을 말하면, 그것은 이성과
합리성에 의해 억압되어 왔던 감각적인 측면을 말한다.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이나 매체 이론가들에 의해 강조되는 “비물질성으로 구성된 세계”를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이해 단계가 필요하다.
우선 “비물질성”(넓은 의미로는 정보, 좁은 의미로는 이미지나 기호를 포함함)은 마찬가지로 비물질적 특성을
지닌 과거의 “정신” 같은 개념과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
또한 “비물질성”은 세계를 초월하는 초물질적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구체적으로 혹은
개연성 있게 구성해 내는 토대이다.
이 때 “비물질성”으로 구성된 세계 - 이것은 나중에 언급될 “가상 현실”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는데 - 와 인간
간의 관계는 더 이상 객체와 주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과 지배 관계로 설명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주체일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객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 어떤 대상의 주체일 수 있는 확고한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결국 포스트모더니즘도 주장하였듯이, 매체이론가들의 시각에서도 더 이상 전통적인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
식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렇다면, 비물질성으로 구성된 세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인간의 영혼이나 정신은 더 이상 주체나
객체가 아니라 매체에 의한 정보 처리 과정 중에 순간적으로 등장하는 일종의 “작은 점의 산정”(Punktkompu
tation) 내지는 프로젝트(Projekt)로 간주된다.
“우리는 더 이상 주어진 객관적인 세계의 주체가 아니며 수많은 대안적인 세계들의 프로젝트들이다.
종속된 주관적 위치에서 우리는 투영 속으로 향해 있다. 우리는 성장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우리가 꿈을 꾸고
있음을 알게 된다.”
“수많은 대안적인 세계들”이란 다름 아닌 매체에 의해 생산된 가상 현실을 가리키며,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가상 현실”에 속에서 인간 주체는 그 “가상 현실”을 관장하는 주체가 더 이상 아니며 그 가상 현실 속에 인위
적으로 구성되고 작동되는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하다.
이러한 새로운 사유는 세계와 존재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는 능동적인 주체 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하였던
전통적인 철학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며, 그 능동성은 오히려 기술공학적 매체 자체에 주어지고 있는 셈이다.
개념의 사용에서만 약간 차이를 보일 뿐, 인간의 자아 의식보다 선행하는 것은 “기표” 내지는 “글”이라고 강조
하였던 포스트모더니즘 및 해체론의 이론적 단초들은 매체 이론에서도 반복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매체 이론에서 강조되는 특징은 “비물질성”으로서의 정보를 구성해 주는 다양한 인자
들은 이미지, 기호, 코드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점에 대한 강조는 매체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쟝 보들리야르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보들리야르에 의하면, 다양한 기호와 매체에 의해서 구성되는 현재의 도시적 삶에서는 정치경제학적 주체와
고독한 주체의 창조적인 생산이 중시되는 것이 아니라 기호의 상호 교환 및 재생산 자체가 작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재생산 시대는 코드와 산종의 시대이며, 구성요소들의 완전한 교환성의 시대이다. (...) 이제부터 모든 것은
텔레비전과 자동차의 기호 속에서, 매체와 도시 안내서에 쓰여진 행위 모델의 기호 속에서 서로 나뉘고 무차
별적으로 된다.” 여기서 기호, 코드, 이미지 같은 요소들은 사물을 재현해 내는 도구적인 의미를 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재생산적” 내지는 “자기 배가적” 특성을 취하게 된다.
즉 기호가 사물이나 대상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 자체와 관계하며, 이미지도 사물의 실제와는 무관하고
오로지 이미지 자체와 관계하며, 결국 끊임없이 배가하고 증폭되는 기호와 이미지는 일종의 “자율성” 공간
속에서 움직인다.
“기호와 이미지는 기호와 이미지에 관계하며 일종의 매체현실적인 자율성을 획득한다.”
이처럼 기호가 자기 준거적 자율성을 지닌다는 해석은 ‘내용이 존재하고 매체는 그 내용을 전달하는 형식이다’
라고 주장하였던 전통적인 사유에서 해방되어 ‘매체의 내용은 곧 매체 자체이다”라는 시각에서 파생된 것이다.
결국 기술공학적 매체 사회에서의 “비물질성”은 그 자체 사회 인식의 수동적이고 능동적인 중요한 형성체로
부각되는데, 그것은 “탈물질화된 인식된 질료”이자 동시에 “비물질적인 인식하는 형식”의 “혼합물”인 것이다.
2) 기술공학적 매체의 두 번째 특징은
“비물질성으로 구성된 세계” 혹은 “가상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본질과 가상, 현실과 허구, 과학과 예술 같은
전통적인 이분법적 구분은 허구라고 인식되면서 “가상 현실”은 그러한 이분법의 해체의 자리에 들어서고 있
으며, 이는 현대의 매체 사회는 가상과 현실, 과학과 예술의 경계가 더 이상 구분될 수 없을 정도로 혼합적이고
합성적인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미메시스”(Mimesis)에서 “시뮬레이션”(Simulation)으로의 전환이라는 기본 범주의 대체가 중시된다.
즉 현실과 허구, 본질과 가상 같은 이분법이 존재할 경우 그 관계를 맺어 주는 범주가 “미메시스”였다면, 기술
공학적 매체 사회에서는 현실과 허구, 본질과 가상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시뮬레이션”이라는 범주가 작동
하는 것이다.
요컨대, “시뮬레이션은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 ‘실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의 차이를 항상 다시금 의문시
삼는다.”
마찬가지로 매체 이론의 선봉장 역할을 맡고 있는 플루서(V. Flusser)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와 더불어 인간화의 모험은 이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 점은 우리는 더 이상 진리와 허위 혹은
과학과 예술을 구분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가장 분명하게 들어 난다.”
그런데 매체가 만들어내는 “가상 현실”의 중요한 특징으로는 바로 “이미지”와 “속도”를 손꼽을 수 있다.
우선 “이미지”에 대해 살펴보자. 이미지는 감각적인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따라서 감각적 이미지 세계로의 전환은 그것과 대립하는 이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곧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과거 전통적인 철학의 경우, 이성의 이름 하에 감각적인 삶은 언제나 천박하고 조야한 것으로 외면당했거나
기껏해야 “불투명한 인식”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궁극적으로 감각적인 삶은 투명하고도 합리
적인 사유를 향해 조직된 위계 질서 내에서 통제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적 사유 전통은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사유를 억압해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통제적 이념”으로서의 이성에 의해 억압당했던 “감각”이 분명 매체 사회에서 다시 복권되고 있으며,
그것은 곧 감각적 이미지의 재생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물론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와 그로 인한 “일상의 심미화”라는 현상은 현상태만의 독특한 특징은 결코 아니다.
이미 산업화가 고도로 추진되었던 19세기 말에도 다양한 이미지로 뒤덮인 도시적 삶이 지배적이었고 또한
이미지의 기술적 생산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와 같은 이미지 생산이 환전, 물신숭배, 환락, 도취 같은 부정적 성향으로 발전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각적인 이미지 생산을 추구하는 성향이 무조건 부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었다.
당시 수많은 작가들(보들레르, 프루스트, 트라클, 카프카, 벤야민 등)은 새로운 감각적 이미지를 적극 수용하
면서 그것을 다시금 개념적이고도 비판적인 사유와 연결시키고자 노력한 바 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19세기 말의 현상과 지금의 현상 간에는 현격한 차이점이 보인다.
즉 현재의 매체 사회에서는 실제 사물을 재현해 내는 이미지보다는 실제의 사물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이미
탈의미화된 코드, 매체, 기호 등을 통해 이미지가 재생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19세기 산업화 시대와 새로운 기술공학적 매체 시대 간의 차이는 예컨대 사진기와 텔레비전, 타자기와 컴퓨터
의 차이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 영화, 컴퓨터, 디자인, 비디오 같은 소위 일종의 “시각기계”(Sehmaschine)는 “가상 현실”을 만들어 내는 현재 사회의 중요한 매체들이며, 여기서 텔레비전이 지닌
“이미지”의 위력에 대해서 맥루한은 이미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텔레비전의 위력이 가장 분명하게 증명된 것은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 때였다. 텔레비전은 조문객과 더불어
(시청자들로 하여금) 하나의 의식( l^)에 참여하게 했다.
텔레비전은 의식의 과정에 전세계인을 끌어들였다 (거기에 비하면 신문, 영화, 라디오는 소비들을 위한 들러리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는 이미지가 시청자 쪽으로 투사된다.
당신은 스크린이다. 이미지는 당신을 둘러싼다. 당신은 소멸점이다. 이것은 일종의 본질, 동양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종의 역( c)원근법을 창조한다.
이처럼 초창기부터 텔레비전의 이미지는 주어진 현실을 단순히 전달하는 차원에서 파악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적인 힘을 갖고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당신은 스크린이다”라는 놀라운 구절은 이미지를 관찰하고 인식하는 인간 주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에 압도당하는 수동적인 주체로의 전락을 암시해 준다.
이처럼 시각기계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가 과거 주체로서 설정된 인간의 냉정하고도 비판적인 의식 상태와 무
관하게 오히려 인간을 압도해 나가고 있다는 정황은 “지금 대상이 나를 지각하고 있다”고 선언했던 20세기
초기 화가인 파울 클레(Paul Klee)의 언급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매체의 이미지와 속도에 관한 뛰어난 연구를 제시하고 있는 비릴리오(Virilio)는 그와 같은 파울 클레의 언술을
자주 인용하면서 매체의 이미지(영상)와 인간 간의 전이된 관계를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다.
“담 뒤에서 나는 플래카드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 담 앞에서 플래카드가 나에게 밀려오고 그 이미지가 나를
지각한다.” 이미지를 지배하고 관장하는 것은 더 이상 “나의 의식”이 아니며, 오히려 “나의 의식”은 이미지의
영향(Wirkung)이나 효과(Effekt)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의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각 관계의 전환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우리 자신을 질료를 인식하는 주인으로 설정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우리 자신을 “지각의 질료”로서, “최후의 질료가 아니라 첫 번째 질료”로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비릴리오는 “이미지” 개념을 더욱 세분화하면서 오늘날 중시되고 있는 이미지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정신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다름 아닌 “도구적으로 생산된 가상적 이미지들”, 즉 “기계를 위해서 기계
에 의해 생산된 합성적인 이미지들”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합성적인 이미지”에는 “패러독스한 현존”(die paradoxe Pr?senz)이라는 시간의 논리가 작동한다.
즉 사물이나 사건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그리고 지금 현존한다는 모순적인 논리
가 그것이다.
이미지 이외에도 가상 현실에서 중요한 특징인 “속도”의 경우, 그것은 첨단 기술에 의한 정보 교환 및 소통의
특성을 대표하고 있다. 예컨대 그것은 빠르게 가기, 빠르게 읽고 쓰기, 빠르게 보기, 빠르게 사랑하기 같은
다양한 행동 양식에서 감지할 수 있다.
소위 전통적인 “구텐베르크의 활자 문화”가 일종의 “느림”의 문화로 치부되고 있다면, 지각 행위에서의 시간의
가속화 현상은 소위 매체 시대에서의 “빠름”의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빠름”과 “속도”에 대한 인식은 매체 시대의 독특한 특징만은 아니며, 오히려 “빠름”의 역사를
추적해 보면 그것은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목적론적 세계관으로 전환되면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이 열렸던
18세기 이후의 현대성의 산물이다.
즉 18세기 이후 소위 역사의 완성이라는 목적을 실현하려는 유토피아적 사상은 곧 시간의 가속화라는 상상력
을 분출시켜 냈으며, 이러한 상상력은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Machbarkeit)는 신념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력은 기술적인 변혁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가령 시간의 가속화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시킨 매체들로는 당시 빠른 속도를 주도했던 기계들(기차, 증기선,
전화 등)이었으며, 이러한 기계 장치들은 이전에 불가능하게 생각되었던 것을 실제의 공간 이동 및 시각 변화
를 통해서 가능한 것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기계 장치들의 발명에 의해 나타난 현상들, 즉 미래를 예측하고 그 미래의 아름다운 상을 현재로 불러
들이는 시간의 가속화와 역사의 상관관계는 보수적 혹은 진보적인 역사관을 대변하였던 모든 사상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었다.
그 실례로 마르크스는 “세계사의 전동차”라는 비유로 혁명을 묘사하였고 또한 벤야민은 혁명을 “그 전동차를
타고 여행하는 인간들이 비상 브레이크를 밟는 행위”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서 혁명 내지는 역사를 “전동차”에 비유한 것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빠르고도 힘차게 달려나간다는 의미
로 사용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빠름의 역사를 고려한다면, 매체에 의한 현재의 “속도” 문화는 과거에 존재했던 시간의 가속화 경향을
더욱 가속화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심히 들여다보면, 현재의 “빠름”은 지난 세기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특징을 띤다.
과거의 빠름은 유토피아적인 사회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향한 질주였으며 비교적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이와 반면에 지금의 “빠름”은 미래에 대한 예측이나 기대감과 전혀 결합되지 않을 정도로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속도”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의 행위를 조금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
또한 과거의 경우 기술적 생산물이 지닌 속도에 대한 예찬이 한편으로 합리성, 효율성, 경쟁 같은 자본주의적
사회 이념들과 결합하면서도 다른 한편 “비판적인 대상”으로 인식되었다면, 현재의 경우 속도와 효율성의
결합은 지나치게 무비판적인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19세기의 사회적 발전의 경우 기계와 인간 사이에는 어느 정도 적대감과 소외가 작용하였다면,
현재의 경우에는 기계와 인간 간의 소외보다는 오히려 양자의 친밀감이 삶의 주된 현상으로 수용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과거의 경우 유한과 무한 같은 개념들이 인간의 고유한 능력에 부여되었고 따라서 기술을 관장
하던 개인이 자기성찰적인 능력을 통해 기술 발전의 속도를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이제 기술공학화 및 자본화 과정에서는 테크닉과 속도가 유한성 속에서 무한성을 창출해 내는 “절대성”
내지는 다양성을 하나로 결합시켜 주는 “통일성”의 힘을 지닌다.
오늘날의 매체 사회에서 주된 물음은 더 이상 “시공간적인 거리감”이 아니라 “속도의 잠재력”이며, 이러한
속도가 곧 사물의 포착과 이해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예를 들어, 현재의 대표적인 매체로는 “컴퓨터”를 들 수 있으며, 이 때 컴퓨터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속도”와
“통일성”이다. 텔레비전의 경우 공간적으로 멀리 놓여 있는 사건이 현재에 방영됨으로써 결국 공간의 차이를
소멸시키고 있다면, 컴퓨터의 경우 빠른 속도에 의해 모든 것이 순식간에 결합됨으로써 시간적인 차이까지도
소멸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여타 매체보다도 컴퓨터는 “속도”를 전형적인 잠재력으로 삼는 매체이다. 빠름의 문화를 조성하는 컴퓨터
에 의해서 소위 “컴퓨터식 지각 방식”이 새로운 지각 방식으로 분석되고 있다.
예컨대 컴퓨터를 이용한 인터넷 검색 작업의 경우 오늘날의 사용자는 하나의 영상에 대략 6초 정도 동안만
머무르며, 이와 같은 화면의 빠른 속도는 의사소통 행위에도 영향을 끼친 나머지 빠른 방식의 의사소통을
부추기고 있다.
또한 이전의 지각 방식들이 대체로 실제적인 “존재”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컴퓨터식 지각 방식은 “가능성”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이것은 “가상 현실”이 곧 “가능성 있는 현실”로서 이해되는 것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또한 영화에 컴퓨터를 도입할 경우 지각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이 경우 “지각”“일종의 스캐닝”
처럼 작용함으로써 그러한 지각에서 중시되는 것은 “세계의 사물”의 재현이 아니라 “관계들의 검토”가 중시된다.
매체 시대에서 모든 현상은 빠른 속도 내지는 시간에 의해 움직여지는데, 이 때 매체이론가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객체의 실제 공간을 대체하는 이미지는 다름 아닌 “순수 시간”(Echtzeit) - 이것을 흔히 라이브(live)
라고 부르는데 - 을 통해 전달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텔레 컴뮤니케이션을 통해 “순수 시간”에 의해 전달되고 창출되는 이미지의 시간을 비릴리오는 “응집된 시간”
(die intensive Zeit)라고 부르면서 이러한 시간을 전통적인 “확장된 시간”(extensive Zeit)과 구분하고 있다.
즉 후자의 경우 과거, 현재, 미래의 기간이 어느 정도 장기적인 시간 단계를 통해서 구분되어 있었다면, 매체에
의해 합성된 이미지는 순간적이고도 직접적인 “응집된 시간”의 경우에 의존하며 여기서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은 사라진다.
과거, 현재, 미래가 경계와 구분 없이 공존하는 인터넷의 세계는 그와 같은 “응집된 시간”이 작동하는 대표적인
예이기도 하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해체된 “응집된 시간”에 대한 강조는 매체 자체의 속성뿐만 아니라 서술
형태까지도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기존의 내러티브 구조는 과거, 현재, 미래의 형태로 시공간적으로 나열되었지만, 응집된 시간이
작동될 경우 그와 같은 사건의 시간적인 연속성 구조는 파괴되고 “연상 장면들이 무성하게, 많든 적든 돌발
적인 사슬”로 엮어지는 형태가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뮤직비디오의 경우 수많은 화면들은 기존의 내러티브 구조가 완전히 파괴된 채 마치 초현실적이
고도 우연한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식으로 합성되어 있다.
3) 비물질성, 가상 현실, 이미지, 속도 등은 기술공학적 매체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이며, 이러한 특징을 토대로
매체 이론가들은 예술의 세계에도 사유의 전환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들의 논리는 대체로 기술과 예술의 적대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그 양자가 이상적으로 결합해야만 한다는 식
으로 귀착하고 있다.
물론 기술과 예술의 결합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Techn?”라는 개념 자체가
기술과 예술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기술과 예술의 본래의 밀접한 관계를 재론하면서 매체 이론가들은 이제 전통적인 “예술작품”(Kunstwe
rk) 개념을 포기할 것을 주장하고 그 대신에 “매체작품”(Medienwerk)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변화가 존재하기에 전통적인 “예술작품”이라는 개념이 그 타당성을 상실하는 것일까?
“매체작품”의 새로운 특성에 대한 강조는 무엇보다도 전통적으로 예술작품에 부여되었던 몇 가지 의미망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전통적인 예술이론 및 미학에서 예술작품은 독자적이고도 천부적인 예술가의 창작물로 간주되었으며,
이 때 “예술가”는 다름 아닌 “계몽의 프로젝트에서 출현한, 자기의식적으로 사유하는 주체의 특권화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예술가”에 대한 이러한 표상은 동시에 곧 절대적인 “정치가”를 암시하는 기호로도
작용하였는데, 즉 “개인과 창조적인 조물주의 정신을 마지막까지 지켜낼 수 있는 상징”으로 예술가를 옹호
하는 것은 절대권력자로서의 정치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주어진 질료를 자유롭게 다루면서 만들어 낸 예술가의 생산물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완전히 모방될 수 없는
원본(오리지날, Original)의 가치를 지녔으며, 그러한 원본을 모방하거나 복사하는 모방물은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매체에 의한 생산물, 즉 오늘날의 기술공학적 작품의 특성은 완전히 다른 현상에서 출발
한다. 그 대표적인 특징으로는 탈개인화의 현상인데, 즉 새로운 매체는 점차 “생산과정에 대한 능동적인 관여
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그에게 기껏해야 관찰자의 위상을 부여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요컨대, 매체 시대에서의 심미적 생산물은 “예술가의 계몽적이고 개인적인 창조 정신에 기초한다기보다는 그
기술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더욱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오늘날의 미학적 생산을 주체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더 이상
“인간 주체”가 아니라 “장치”(Apparatur) 자체인 셈이다 (이러한 점은 지각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 기호나
이미지 자체라고 언급되었던 대목에 암시되어 있다).
그로 인해 절대적인 고독한 주체의 창조물과 관계된 “예술작품” 개념이 사라지고 수많은 가능성 있는 현실을
생산해 내는 매체 장치들 간의 상호 교환 내지는 소통의 결과물인 “매체작품”이라는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
매체 장치들의 상호 교환은 두 가지 현상을 야기시킨다. 그 하나는 우선 장르의 혼합 현상인데,
즉 각 매체들 사이에 놓여 있던 경계가 해체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이질적인 장르와 생산물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매체들의 혼합으로 인해 컴퓨터 에니메이션, 홀로그래피(Holografie: 레이저 사진술), 텔레마틱(Telematik)
같은 새로운 혼합 개념 내지는 합성 개념이 등장하고 있고, 이러한 영역에서의 생산물이 곧 “매체작품”이라는
개념으로 명명되고 있다.
자신은 전통적인 글자 문화의 대표적인 장르인 “이야기 서술”(Erz?hlung)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비릴리오도 마찬가지로 개별 매체보다는 혼성 매체를 더욱 강조하고 나선다.
“나는 무엇보다도 결합 방식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진이나 영화 각각에 대해서보다는
사진영화법에 대해 언급하려 합니다.
마찬가지로 비디오나 인포그래픽(Infographie)보다는 비디오인포그래픽이라고 언급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수많은 매체들이 다양하게 합성된 인공물의 미학이 새롭게 고찰되고 있으며, 이러한 미학은 “단편 시리
즈로 조합된 미학”(?sthetik der Serialit?t)이라고 명명될 수 있다.
매체 장치들의 상호교환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중요한 현상은 그 매체 생산물과 관련하여 더 이상 전통적인
“오리지날” 개념이 사용될 수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매체작품 자체는 수많은 복사물의 합성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 “오리지날”이라는 용어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기술적 복제 시대의 경우 예술작품은 대량생산됨으로써 그 일회성과 독창성이 파괴된다고
언급한 바 있던 벤야민에게서 찾을 수 있다.
“복제 기술은 복제를 대량화함으로써 일회적인 산물을 대량 제조된 산물로 대치시킨다. 복제 기술에 의해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 속에서 복제와 그 수용자가 서로 대면하게 됨으로써 복제품은 현재화된다.
이 두 과정은 결국 전통적인 것을 뒤흔들어 놓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맥락과 비슷하게 맥루한도 전자
복사술(Xerography)의 예를 들면서 오리지날, 저자, 개인 같은 전통적인 개념의 무효를 선언하고 있다.
“전자복사술 - 모든 사람의 두뇌도둑이라고 일컬어지는 - 은 즉석출판시대를 예고한다. 이제는 누구나 저자
와 발행자가 될 수 있다.
어떤 내용의 어떤 책이든 집어들고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씩 복사하여 자기 책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대두되면서 사람들은 자기 표현의 중요성에 대한 신뢰를 점점 더 상실해 가고 있다.
팀워크가 개인적 노력을 앞지르고 있는 것이다.
” 예술가라는 개별적인 주체의 고독한 작업보다는 “팀워크”가 중시되고 또한 시작, 중간, 결말의 구조를 바탕
으로 하는 완전한 책보다는 다양한 부분들의 복사 자체가 공공연하게 현시대의 매체 문화의 특성으로 제시
되고 있는 것이다.
“오리지날”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붕괴시키고 “복사”라는 개념을 중시하는 현상은 문화적 복사물의 예에
서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미국 디즈니 월드에 전시된 수많은 다른 나라의 문화적 건축물(가령 중세시대의 유럽식의 성)은 오리
지날과의 차이를 통해서 평가절하되거나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자족적 특성을 지니며,
이러한 복사물을 즐기는 이용자는 그런 건축물에 대해 전혀 반감을 갖지 않는다. “그(이용자)는 낯선 것에
대한 충격으로부터 보호된 채 복사물의 미를 향유한다.
어떻게든 의식되는 오리지날로 되돌아가려는 마음은 완전히 불필요해 진다. 복사물이 그 자족적인 특성(Autarki
e)을 획득하며 새로운 현실 자원으로 주장된다.
” 아방가르드가 낯선 것을 제시하면서 그 수용자에게 노린 것은 다름 아닌 “충격”이었지만, 이제 현재의 기술
적인 복제 문화는 그와 같은 충격조차도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기술과 예술의 결합은 일종의 “포스트아방가르드적” 특성을 띠고 있다.
이처럼 오리지날 개념이 붕괴되고 “복사”라는 개념이 더욱 중시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정보”나 “매체” 자체가
모든 수용자들에 의해 언제나 도처에서 적절하게 사용되는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일종의 “사용가치”
라는 문화적 시장 생산된 매체작품은 결코 오리지날의 특성을 처음부터 지닐 수 없게 된다.
“이것(매체작품 생산의 새로운 조건들)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데 있다. 즉 매체작품이란 오리지날일 수도
없으며 또한 원작자의 권한이나 카피라이트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보호될 수도 없다.
매체작품을 구성하는 새로운 질료는 정보이며, 여기서 정보란 이미 벌써 가치 있는 천연자원이라는 위상을 획득
하고 있는 것이다.
[...] 지금까지 존재해 있던 정보의 교환가치에 이제는 구체적인 사용가치를 추가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구체적인 사용가치는 기술적인 소통 체계와 정보 체계를 유용하게 응용하는 방식에서 나타나게 된다.
” 마르크스가 제시했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두 개념이 매체시대, 즉 정보화 시대에서 다시 논의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여기서 “정보”라는 질료에 의해 만들어지는 “매체작품”은 자본주의 시대에서처럼 “교환
가치”에만 머물지 않고 “사용가치”를 지닌다는 지적은 새롭게 들린다.
“사용가치”로의 전환은 매체작품이란 더 이상 “목적에서 벗어난 자율적인 창작의 시기”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 공간 속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는 데 그 가치를 두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매체
작품의 특징은 철저히 “사회적인 예술”에 있다고 주장된다.
“매체작품”이라는 개념의 성립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르게 인식되는 예술, 기술, 그리고
현실의 관계이다. 전통적인 예술도 기술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이 때 기술은 언제나 “부가적인
보조 수단의 기능”만을 수행했었다.
그러나 현재의 경우 기술과 예술은 전통적인 주종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대등하고도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기술은 물질적인 현실에만 국한된 전통적인 “기술”의 의미를 벗어나 “지적인 지식과
정보”라는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의미에서의 기술과 적극 교류하는 예술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처럼 예술, 기술, 현실 간의 이상적인 상호작용을 기대하는 매체이론가들의 경향은 사실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은 결코 아니며 이러한 점은 일찍이 아방가르드 예술이나 바우하우스의 전통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은 현재의 경우 “매체들 중의 매체”인 “컴퓨터”가 “매체작품”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출해 나간다는 현상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쉽게 읽어낼 수 있다.
“예술가로서 우리는 데이터 공간 내의 개별 작업 양식에 대해 더욱 초조해 진다. 우리는 이미지의 종합, 소리의
종합, 텍스트의 종합을 찾게 된다. 우리는 인간적이고도 인공적인 운동, 환경의 역동성, 분위기의 전이를 끌어
들이고 싶어한다. 그 모든 것들을 하나의 이음새 없는 전체로 말이다. 요컨대, 우리는 하나의 종합데이터작품(GESAMTDATENWERK)을 찾게 된다.” 컴퓨터는 “문화들의 분열을 극복해 주며” 동시에 “보편적인 소통으로
서의 통일의 이념”을 실현해 낼 수 있으며, 그 결과 컴퓨터는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오페라를 통해 구현하
고자 했던 “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의 형태를 뛰어 넘어서 소위 “종합데이터작품” (Gesamtdaten
werk)라는 형태를 구현해 낼 중요한 매체로 간주되고 있다.
소리, 이미지, 텍스트, 속도가 동시적으로 현존하는 컴퓨터를 통해 이제 예술, 기술, 현실의 종합적 표현으로서
의 “매체작품”이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3. 기술공학적인 매체 시대에서의 예술과 문학
기술공학적인 매체 시대의 특성을 살펴봄으로써 이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즉 현재의 기술공학
적 매체에 의한 문화 산업 속에서 어떻게 예술과 문학이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기술공학적 매체에 의한 문화 산업이 점차 “디지털 가상”(Digitaler Schein)이라는 개념 하에 자극적이고 가상
적인 문화의 성격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는 시점에서, 이제 예술과 문학은 어떠한 성찰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지나친 이분법적 대립과 “배타성”을 극복하는 일이다.
그 이분법적 배타적 논리의 위험은 특히 전통적인 문자 문화와 결별하려는 매체 이론가들의 시각에서 찾을 수
있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매체 이론가들은 주로 글자 �이미지, 고독한 사유가로서의 예술가 �데이타
합성자로서의 사용자, 하얀 백색의 종이 �다양한 시청각적 질료(이미지, 소리, 기호)의 종합, 수동적 관객
�능동적 관객, 현실 �가상 현실, 느림 �빠름 등 다양한 대립을 설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대립을 통해 문화 변화의 새로운 정황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와 같은 대립적인 시각을
일반화시킴으로써 배타적인 논리로 귀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문학과 관련하여 이제 전통적인 글자에 의한 저장 문화에서 벗어나고 그 대신 이미지에 의한 생산과 수용
만이 현재와 미래의 보편적인 흐름이라고 강조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는데,
이러한 논리 전개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언어 예술작품의 무용론이라는 결론까지도 도출되고 있을 정도이다.
“예술가들, 즉 고전적인 예술가들이라기보다는 영화 감독과 비슷한 예술가들에 의해 창조된 상상적 공간을
체험해 보는 가능성이 주어질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그와 같은 체험 공간 속에서 움직일 수 있으며, 고전적 예술의 수동적 관객보다 더 능동적으로
될 것입니다. 즉 우리는 특정한 결정을 통해서 사건의 방향과 지속을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 우리는 언어가 절대적으로 우세했던 몇 세기를 지내왔으며, 거의 문화 전체는 문자로서 글로 저장되어
왔습니다. 높은 가치를 지니는 컴퓨터 그래픽 방식이 현재는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그것
이 보편적 재산이 되는 다가오는 세계에는 이미지가 표현 수단에 있어서 독자적인 기능을 갖게 될 것이며,
그 결과 누구나 이미지로 더욱 잘 표현될 수 있는 것을 이미지로 만들어 낼 것이며 더 이상 문자 표현수단에
매달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대목을 꼼꼼히 읽어보면, “고전적 예술가/수동적 독자/글자 문화”는 “낡은 틀”로 설정되고 있고 반면에 영화
감독과 비슷한 감수성을 “현재적 예술가/능동적 독자/이미지 문화”는 “새롭고 동시에 미래적인 틀”로 설정되어
있다.
특히 전통적인 글자 문화는 매우 좁은 활동 가능성을 주고 있다면, 앞으로의 이미지 문화에서는 매우 능동적
이고 열린 활동 가능성을 열어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적인 시각은 일찍이 선형적인 문자 문화와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새로운 매체 시대의 감수성을 강조
했던 맥루한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술공학적 매체 문화(이미지 문화)가 전통적인 문자 문화에 배타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만큼, 마찬가지로
글자 문화를 옹호하는 시각에서도 지나치게 매체 문화에 대한 “배타적인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매체 문화란 새로운 “제 2의 문맹주의”를 야기시킬 수 있거나 혹은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반론이 그것이다.
대체로 전통적인 창작 방식을 고수하는 이들의 그와 같은 우려 섞인 목소리는 한편으로 이미지 문화의 특성만
을 절대적인 것으로 숭배하는 매체 이론에 대항하는 정당한 항변처럼 들리지만, 다른 한편 “배타적인 논리”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사실 기술공학적 매체의 이미지 문화를 적대시하는 문학 진영의 그와 같은 모습은, 역사적으로 보면,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문학적 글쓰기가 대중성을 획득했을 당시 문학 자체에 가해졌던 “위험한 경고의 목소리”와 거의
동일한 모습을 띠고 있다.
예컨대 “소설” 의 독서 문화가 본격적으로 태동되었던 18세기 당시 칼 필립 모리츠(K. Ph. Moritz)의 감성적
소설 ?안톤 라이저?는 대단히 위험한 소설로 간주되었다.
즉 그 소설은 마치 “동양 사람들의 감각을 기분 좋게 마비시켰던 아편”처럼 작용한다거나 혹은 “사유의 힘이
완전히 마취되고 자신과 세계를 망각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이것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소설”이라는 장르는 분명 새로운 문화를 주도하는 중요한 매체였으며, 이처럼 새로운 매체 문화의 위험
에 대해 경고하는 그와 같은 독설적인 문구는, 그 역사적인 맥락을 떼어놓고 보면, 마치 오늘날의 새로운
기술공학적 매체를 비판하는 문구와 거의 흡사한 내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즉 18세기의 소설 문화에 쏟아졌던, 그리고 현재 기술공학적 매체에도 마찬가지로 가해지는 비판의 공통점은
‘매체가 수용자의 이성적인 의식을 앗아가고 오로지 도취의 세계 속으로만 몰아 간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점은 매번 새롭게 등장하는 매체의 소위 “나쁜 영향력”의 문제인데, 요컨대 소설 문화의 경우
“문학적인 허구”의 나쁜 영향력이며 기술공학적 매체의 경우 “가상 현실” 내지는 이미지 문화의 나쁜 영향력
이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에 대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소설 문화는 18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하였고 때로는
사회 및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획득한 바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예를 고려한다면,
현재의 매체 문화의 경우에도 충분히 다음과 같은 전망이 가능하다.
즉 기술공학적인 새로운 매체 문화(영화, 컴퓨터 등)도 향후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정상적인 문화 형태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대답은 과거를 보면 곧 미래를 알 수 있다는 역사주의적인 방법에 근거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고,
또한 낙관적인 기대와는 달리 기술공학적인 매체 문화는 전통적인 문학 형태와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소설 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사악한 결과”를 낳게 될 수도 있다.
매체 문화에 대한 낙관적 전망과 비관적 전망이 동시에 가능한 현 시점에서 결국 그 누구도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없고 단지 주관적인 판단만을 내리게 될 뿐이며, 따라서 글자 문화와 기술공학적 매체 문화의 상관 관계를
조명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배타의 논리와 극히 주관적인 미래 전망의 논리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렇다면, 기술공학적 매체 시대와 문학의 관계는 어떻게 조명되어야 할까? 언어와 이미지, 글자 문화와 매체
문화라는 서로 구별되는 관계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대립을 기초로 하는 상호 보완이지 “상호
배타적인 논리”로 흘러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언어와 이미지, 문학과 매체가 대립적으로 파악할 경우, 그 대립은 몰락과 상승, 사라짐과 다가옴의 논리를
통해 배타적 논리로 귀결할 것이 아니라 “차이의 존중”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가령 매체 문화를 옹호하는 시각에서 자주 언급되는 소위 “이미지”의 강조는 그 매체 문화의 특성 자체로 간주
되어야 하며, 그것이 곧 이미지가 결여된 문학의 무가치라는 결론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
설혹 문자를 기반으로 하는 문학이 매체 문화의 이미지 특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미지” 표현에 있어서 소극
적이고 간접적일지라도, 언어 예술작품도 근본적으로 이미지를 추구하는 데 있으며 또한 상상적 이미지가
없는 문학이란 존재할 수 없다.
역으로 문학도 새로운 기술공학적 매체에 대해 “새로운 문맹주의”를 조장한다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새로운 매체의 타당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결국 이미지 표현 방식에서 문학과 기술공학적 매체가 서로 차이점
을 갖고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차이는 존중되어야만 한다.
글자 문화의 대표적 장르인 문학과 기술공학적 매체 문화의 대표적 장르인 영화가 상호 보완될 수 있는 가능
성도 엿보이는데, 그것은 예컨대 문학작품의 영화화의 경우이다.
이 때도 중요한 시각은 어느 하나를 절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존중”이다. 즉 문학 작품을 영화로
전환시켰을 경우 그 절대적인 기준을 “문학 작품”으로 삼아 영화가 “문학 작품”에 충실했는가를 묻는 시각은
결코 타당할 수가 없다.
그것은 문학 작품을 영화로 옮겼을 경우 영화에 중요한 것은 문학 작품 자체가 아니라 영화 자체의 내용인
“기술”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영화 자체를 절대화함으로써 문학 작품의 무용론으로 나가는 시각도 타당할 수
없는데, 그것은 문학 작품이란 영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그 고유함과 특수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과 컴퓨터의 관계가 서로 간의 차이 속에서 상호 보완을 주고받는 가능성은 다른 경우에서도 찾아질 수
있다. 예컨대, 컴퓨터 매니어들이 작가의 창작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경우 그러한 새로운 작품 생산 방식
이 ‘작가의 고독한 글쓰기로서의 문학 작품’이라는 전통적인 기준에 의해 배제되거나 부정적으로 폄하될 것이
아니라 적극 수용되어야 하며, 동시에 전통적인 글쓰기 방식(한 사람의 작가가 총체적인 계획 하에 자신의
고유한 작품을 완성한다는 방식)이 폐기 처분되어야 할 낡은 것으로 인식되어서는 안될 말이다.
중요한 점은 전통적인 생산 양식에 의한 작품과 새로운 기술공학적 매체와의 소통 방식에 의한 작품(예: 사이버
문학)이 상호 비교 분석됨으로써 파생되는 양자간의 차이이며,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문학적/비문학적인 기준
으로 무시될 것이 아니라 넓은 지평 내로 수용되어야 할 새로운 문학적 동인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호 존중의 테제만으로 무조건 기술공학적 매체에 의해 특히 위협받고 있는 예술과 문학이 보호
될 수는 없다.
예술과 문학은 자신의 영역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자기 반성을 취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면, 이 때 비로소
예술은 스스로의 영역을 능동적으로 지킬 수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기술공학적 매체가 예술 영역의 존재 가치를 위협한다고 언급되지만, 그러나 다른 각도
에서 접근해 보면 사실 예술이 겪고 있는 현재의 위기는 예술 외적인 차원보다는 예술 내적인 차원에서 초래된
것이라고 분석된다.
요컨대 “예술”은 지금까지 지나치게 전통적인 범주에 의존된 나머지 그 역동성과 개방성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술은 자연의 모방, 진리의 현현 같은 식으로 정의되어 왔는데, 이러한 전통적인 개념 정의
에 의해서는 더 이상 예술이 기술공학적 매체 시대에서 살아 남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자연과 진리를 중심으로 삼는 본질론적 시각에서 벗어나서 예술의 정의가 다양한 차원에서 새롭게
전개될 때 비로소 예술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기술공학적 매체 시대에서 예술이 자신의 영역을 새롭게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구체적인 예로는 다름 아닌 독일
초기낭만주의적 예술관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문학의 새로운 자기 반성에 대한 알레고리일 뿐이다!).
물론 당시 초기낭만주의적 예술 시대와 현재의 매체 시대 사에는 질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현상적
으로는 “생산적인 무질서”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서로 일치하고 있다.
예컨대 슐레겔은 예술의 정의에 있어서 새로움, 자극, 기발함 등을 포괄하는 “흥미로움”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바 있으며, 더욱이 이를 토대로 그는 흥미로운 “가상”(Schein)이라는 개념까지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후에 슐레겔은 흥미로운 가상을 항구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문학적 동인으로서 다름 아닌 “낭만적
아이러니”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물론 “흥미로움”이라는 범주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변화된 환경 속에서 예술이 그 영역을 넓혀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서만 제시되었을 뿐이다.
기술공학적 매체가 더욱 유혹적으로 나타나면서 예술(특히 글자 문화의 대표적인 장르인 문학)의 입지가 좁아
지고 있다면, 예술과 문학은 어쩔 수 없이 자기 변혁을 시도해야만 한다.
오늘날의 예술 수용자가 진선미의 이상적인 합일, 진리 구현, 인본주의 같은 전통적인 이념에 바탕을 둔 “아름
다운” 문학을 외면하고 그 대신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현상”이나 “흥미로움 �지루함”을 요구한다면, 문학은
자신의 범주를 변화시킴으로써 이러한 새로운 환경 변화를 적극 인식해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변화의 당위성은 새로운 것이 결코 아니다. 몇 세기 동안 전개해 온 예술의 역사를 엄격하게 들여
다보면, 예술과 문학은 항상 시대적인 현상을 적극 “자신의 의상”으로 취해왔기 때문이다.
그 점은 일찍이 보들레르를 통해 읽어낼 수 있다. 보들레르에 의하면, 예술과 문학은 “초역사적인 절대미”와
“역사적인 현대성”이라는 양면성을 취해 왔고 이 때 그 “역사적인 현대성”은 매 시대의 새로움과 유행을 뜻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역사적인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기술공학적 매체 시대라는 새로운 유행
이며, 따라서 예술은 그러한 새로운 유행을 결코 도외시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예술은 한편으로 기술공학적
매체 시대라는 유행과 적극 소통하면서도 자신의 절대적인 예술미를 추구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지닌다.
Ⅲ. 가상현실의 철학적 의미
1. “가상현실”의 정의
가상현실의 본격적 논의는 철학분야에서 제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은 기술분야나 문학영역에서 먼저
등장했다. 예컨대 윌리엄 깁슨(W.Gibson)의 소설인『뉴로맨서?(Neuromencer)에서는 인공두뇌에 의해 지배
되는 현실묘사의 용어로 최초로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가 사용됐다.
이것은, 특히 ‘사이버’란 표현은 새로운 문화에 대해 대중적 관심의 확산을 자극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문제의 실질적 단초는 멀리 노버트 위너(N. Wiener)의 정보기술학 연구인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에서 유래한다.
이 학문은 사이버(cyber)의 그리스어 어원인 ‘kybernetes’이 지닌 조종과 통제의 의미에 따라 통신기술과 정보
처리기술인 두 축으로 형성된다.
여기서 사이버네틱스가 구현하려는 ‘사이버공간’은 원래 컴퓨터 테크놀러지가 형성하는 공감각적 환영의 세계,
혹은 네트워크란 전자매체에 의해 이뤄진 정보와 의견의 소통환경을 가리키는 개념인 것이다.
그래서 현대적 의미의 출현에서부터 ‘사이버공간’은 이미 ‘가상현실’(virtual reality) 개념과 엄밀히 구분되지
않은 포괄적 성격을 띤다.
이후의 연구자들에게서 각자의 관심에 따라 나타난 다양한 쓰임새가 이를 잘 말해준다.
우선 사이버공간과 가상현실의 구분 없이, 컴퓨터 기술에 의해 제공되는 매체현실이라는 의미로 지칭되는
경우이다. 이런 입장으로 “가상환경을 창조하는 일련의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으로 가상현실을 규정하는
데이빗 트라우브(D. Traub)의 정의를 들 수 있다.
물론 그는 그 시스템에서 머리부착형 영상장치, 신체동작추적장치 등 인테페이스, 즉 인간과 기계간의 특별한
연결의 보조역할을 강조한다. 클로드 카도즈(C. Cadoz)도 둘 간의 구별 없이 “모든 컴퓨터의 데이터 뱅크에서
추출된 데이터들의 그래픽 재현”으로 규정한다.
마이클 스프링(M. Spring) 역시 “환경 시뮬레이션의 특징을 지닌 인터페이스의 한 형태”로 가상현실을 정의
한다. 이에 반해 가상현실과 사이버공간의 구분을 엄격히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대체로 이 견해는 사이버스페이스는 광의적으로 주로 네트워크를 통해서 형성되는 공간으로, 가상현실은
좁게 컴퓨터 기술에 의해 시뮬레이션되는 인위적 환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랜들 월셔(R. Walser)는 구분에 동의하지만 “가상현실에서 자기자신과 가상현실이 일체가 된 느낌을 강하게
줄 수 있는 새로운 매체”로 사이버공간을 오히려 좁게 정의하기도 한다.
그는 구축된 현실감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신체전부를 사용할 특별공간으로 사이버공간을 파악하는 듯하다.
이처럼 우리는 이 가상현실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언급하고 있는 다양한 규정들 혹은 약간 상충되는 개념적
정의들을 보게 된다. 이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불일치가 전제되어 있기보다는 대체로 다음의
공통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가상현실과 사이버공간의 구분은 네트워크 기술과 가상현실 기술의 통합이 용이하지 않았던 기술발전의
초기단계에서 나타난 과도기적인 현상일 뿐이며, 가상현실이란 멀티미디어 기술과 컴퓨터에 의해 인공적으로
구성되는 모든 매체현실을 지시하는 넓은 의미를 갖는다.
이 맥락에서 이 분야의 선두주자인 크뢰거의 견해는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사이버공간이나 가상현실 대신에
사용된 인공현실의 개념을 다양한 전자장비에 의해 창조된 영상세계로 정의하면서 한정적으로 멀티미디어의
공간과 구별하지만, 그는 멀티미디어 기술과 인공현실의 통합을 예견하면서 이 둘 간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포괄적인 이런 규정도 우리의 논의 맥락에서 볼 때 개념적으로 충분치 못하다. 그것은 이러한
이해가 중요한 차원의 내용, 즉 가상현실이 지니는 존재론적 성격에 관련된 내용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매체현실이란 규정은, 가상현실이 지닌 외연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그것을 현대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화현상의 일부로 한정시킬 뿐이다.
그러나 가상현실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그 가상성(virtuality)은 현대사회의 존재양식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도래하는 새로운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 더욱이 가상성은 그 어원을 고대 철학에 두었고, 존재이해의
확장의 역사 안에서 잠재적으로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과 관련해 볼 때, 가상현실에 관한 철학적 접근은
더욱 요청된다.
2. “가상성” 개념의 철학사적 변천
우선 문제의 가상성에 해당되는 ‘버츄얼’(virtual) 규정은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공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조 혹은 가짜의 의미를 지닌 “가상”이라는 우리말 번역은 그리 적절치 않으나, 버츄얼과 리얼리티(reality)의
합성에서 실재는 아니나 그와 같은 효과를 지닌 것이라는 본래적인 뜻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실제로 이 분야에서 다수의 학자들은 그 단어의 모순적 특성을 개념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버츄얼이 리얼리티에 대립되는 규정으로서 전문적으로 조성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그것의 일상적
쓰임 안에서 상반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이 개념은 실제적인, 현실적인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적
이지는 않지만 효과적으로만 보이는 것의 의미로 쓰인다. 이 개념의 대립구조 속에는 존재 이해가 변천하는
역사의 흔적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버츄얼은 그 대응하는 실재 개념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고 있다.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그
어원이 출현하는 존재론의 역사를 다시 살펴야 한다. 버츄얼이란 실제적 표현은 중세 철학에 출현하고 있지만,
그 의미적 기원은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인 뒤나미스(dynamis), 즉 가능태로 소급한다.
그는 존재자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이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 가능태는 스스로 자신을 산출하는
능력이 아니라 형상의 규정을 통해 현실화될 수 있는 그런 존재 양태인 것이다.
또한 이 존재자의 특수한 형식은 다른 존재 영역을 별도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실체로서의 개체, 존재자가
자기완성이라는 현실화에서의 한 과정으로서 혹은 개체의 (질적) 운동 안에서 변화될 가능적 계기로서 파악
된다. 가능태는 현실태로서의 형상과의 관계를 잃지 않는 한에서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존재 특성을 지시한다.
이로써 가능태의 개념은 존재의 일과 다 관계에 관한 전통적 물음에 답을 하게 되고, 유비론적(analogical)
시각에서 존재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을 가능케 하였다. 이 개념은 동일한 존재론적 기반에 서있는
중세에 수용되면서 포텐시아(potentia) 혹은 비르투스(virtus)로 번역된다.
그런데 문제의 ‘버츄얼’은 어원적으로 가능성이라는 포텐시아가 아니라 오히려 힘과 덕을 의미하는 비르투스
에서부터 파생된다. 버츄얼의 변용사를 살펴보기 위해 비르투스가 중세에 어떤 맥락에서 도입됐는지를 추적
해야 한다. 뜻
밖에도 비르투스는 포텐시아와는 분명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전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한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에서 존재, 즉 신의 문제와 깊게 관련된다. 교부철학의
맥락에서 신존재는 그 이전의 전통 철학과 달리 존재자와의 관계를 규정한 창조의 개념에 의해 해명된다.
따라서 신은 창조된 피조물과 완전성의 정도에서 다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존재론적 차이를 지닌 존재
이다.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존재자의 원인은 신 안에 없을 수는 없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특정 존재자의 속성이 그 자체에 속하듯이 그렇게 형상적으로는 아니라도,
신에게는 그런 속성이 더 탁월하게(현실적으로), 즉 비르튜알터(virtualter)하게 속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규정은 존재자들 간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영혼은 물론 동물의 영혼을 형상적으로는
아니지만, 비르튜알터하게 가지고 있다. 이처럼 이 규정은 존재, 즉 다양한 존재자의 관계에 관한 유비적 이해
를 가능케 해주고, 이로 인해 지시되고 있는 실재성의 양태와 위상을 드러내 준다.
이상에서 볼 때, 뒤나미스가 개별적 실체(보편자)의 실재성에 비중을 두며, 비르투스는 탁월한 존재인 신의
현실성에 중점을 둔 점에서는 다르지만, 이 둘 모두는 존재론적 지평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버츄얼의 개념사 안에서 주목할만한 변화가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에서 나타난다. 그의 문제는
경험과 대상간의 관계에서 제기된 것이다. 그는 인식에 관련한 주관의 측면을 강조하며, 형상적 실재로서의
사물이 경험적으로 파악 가능하다는 주장을 편다.
그래서 경험적 속성들이 형상적으로 주어지는 대상인식과 다르게, 대상 자체에는 그런 속성들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이 요구된다.
이 해결로 그는 비르튜알터의 개념을 사용한다. 대상 자체에는 그런 속성들이 비르튜알터하게 담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 안에서 이제 대상과 인식내용간의 유비적 측면과 실재성의 비중이 구체적인 개별대상에게로
전환됨을 주목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버츄얼 개념의 급진적 변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이 후퇴하고 기계론에 의해 지배
되는 근대전기의 형이상학에서 이뤄진다.
그것은 인식론적 의미를 갖는 방법론적 회의에 통해, 증세까지는 적어도 현실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던 형상적
실재(realitas formalitas)를 무화시키고 그 대신에 표상적 실재성(realitas objectiva)를 주목한 데카르트에
의해서이다.
이 표상성은 정신 안에 있는 어떤 관념들이 갖는 존재양태를 뜻한다. 이 관념적 대상은 중세의 존재론에서와
달리 인식으로부터 독립적인 위치를 점유하지 못하고 정신에 대해서 정립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정신에 의해 산출된 것은 아니며, 의식에 대해 여전히 더 현실적으로 있는 존재
자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표상성으로 구현된 비르투스에 의해 인식내용과 인식간의 유비적 관계가 유지되며,
경험적 대상만이 현실성을 부여받는 결과를 보게된다.
이제 비르투스의 역사는 확연한 전도를 경험한다. 인식의 질서가 존재의 질서를 압도하는 그런 측면이 드러
나고, 존재론에서 인간 중심적인 전회가 성취된다. 그 이후 존재론의 역사에서 비르투스의 획기적인 변용이
다시금 나타난다.
이것은 데카르트에게서 드러난 버츄얼 의미와 다르며, 그 이상의 내용을 함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변화는 이미 앞서 성취된 존재론에 근거하고 논리적 의미에서 그로부터의 필연적 귀결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실질적 시작은 컴퓨터 공학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메모리의 가상성이다.
보드리야르(J. Baudrillard)는 이런 사태를 일반화하여 ‘과실재’(hyper?el)라고 규정하기에 이른다. 결국에
시뮬레이션에 의해 구축된 가상 현실은 자연적 현실보다 더 탁월한 면모를 갖게 된다. 바로 이러한 사실 속에서
새로운 존재론적 특징이 움트고 있는데, 이 시기를 포괄적으로 디지털 시대로 구획을 지울 수 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은 베르그송이나 들뢰즈 등의 철학자들에 의해 포착돼 이론적으로 개념화되었다.
베르그송은 가상성(virtualit?)과 가능성(possibilit?)의 구분을 토대로 가능성을 현실적 사태 이후에 수반되는
것으로, 반면 가상성은 현실적 사태 이전에 있는 생성의 잠재력으로 간주한다. 이 경우에 생성의 잠재력인 이
가상은 그것의 파생적 효과인 현실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다. 들뢰즈는 현실적 정체와 고착을 와해시켜
주는 힘으로 가상성 개념을 더욱 심화하고 있다. 이처럼 긍정적 방식으로 철학적 정당화가 가능할 수도
있지만, 존재론의 역사에서 드러난 버츄얼의 실질적 모습은 호도될 수 없다.
이제 버츄얼은 우리를 근거지우는 존재를 지시하는 존재방식에서 벗어나, 우리가 산출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근거짓는 그런 것의 존재양태, 즉 존재론적 역설을 지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현실은 도착된 현실
로 경험된다. 분명히 위에서의 다양한 정의가 말해주듯, 가상현실은 진행하고 있는 미확정적인 사건이며, 아직
실체를 다 드러내지 못 한 가능적 세계일 수 있다. 그래서 속단은 위험하나, 존재론의 역사에 관한 고찰을 통해
버츄얼이 지시하는 사태는 모순적 성격이 내재화한 현실임에 틀림없다. 버츄얼의 일상적 쓰임 속에 이미 그런
모순이 투영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제 가상현실의 모순적 실질과 존재의미에 대해 구체적 분석이
필요하다.
3. 가상현실의 모순성
현대사회를 압도해 오는 존재양식의 토대로서 가상현실은 이미 근대의 세계에 드러난 존재방식과 깊이 관련
되어 있으며, 근대에 의해 새로이 자리매김된 인간 실존과 운명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가상현실에는 근대의 인식범주나 어떤 특정한 존재양식을 벗어나는 탈근대적 측면이 있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어느 순간 갑자기 출현한 사태가 아니라, 본질적인 측면에서 그 맹아를 근대의 존재론적
특성에 두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가상현실을 ‘계몽기획의 완성’으로 본 사이몬 페니(Simon Penny)의 견해는 설득력을 갖는다.
그는 그 근거로 종교적, 철학적, 문화적 그리고 산업적 의미의 핵심 개념들을 제시하고, 그 연관성을 분석한다.
그 대표적 것으로 데카르트적 공간개념, 기독교사상, 식민주의, 산업혁명 등등을 들 수 있다.
물론 가상현실의 출현에서 이런 요소들의 기여가 간과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논의장 안에서는 가상현실의
역사적 배경요소로서 기술, 정보, 그리고 자본을 언급하려 한다.
더 보편적인 성격을 지닌 이 개념들은 근대를 근본적으로 특징짓는 토대일 뿐만 아니라, 가상현실의 출현에
결정적인 계기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은 기술의 어떤 특성에 의해 구축되는가? 가상현실은 분명 첨단 기술에 의존해 있으며, 이를 통해 가상
현실의 존재방식이 구성되고 있다.
그런데 현대의 첨단기술은 이미 원리적으로 근대의 기술방식 속에서 배태되었다.
따라서 가상현실의 분석을 위해 현대 기술 형태 속에 자리하고 있는 근대의 기술개념의 고유성에 관한 해명은
불가피하다.
물론 기술의 양상은 그 발전적 형태에 따라 도구의 시기, 기계의 시기, 그리고 자동기계의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이런 구분은 기술의 작동방식과 동력원의 성격에 의해 나눠진 것이다.
이외에도 기술은 자연적 대상에 대한 도구적 조작능력이라는 도구주의적 기술관에 근거해, 기술의 성격은
대상과의 관계방식 내지는 존재론적 위상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된다.
우선 기술적 산물이 자연과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되던 고대의 기술이 있다. 그 다음으로 자연에 대한 모방으로
기술을 정의하여, 그 생산물을 자연의 대리물로 자리매김한 중세의 기술이 등장한다.
여기서 기술은 여전히 자연에 대한 열등성을 면치 못한다. 그 후에 출현한 것은 근대의 기술이다. 여기서 도구
주의적 기술이해가 전반적인 특징을 이루지만, 기술의 새로운 측면이 원리로 자리하게 된다.
그것은 기술이 단지 모방적 단계를 벗어나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것이 기술의 자기정립이다. “도구는 접촉의 동인이요, 기계는 커뮤니케이션의 인자이다.
도구는 투사적이며, 기계는 회귀적이다.”
이처럼 근대의 역사는 원리적으로 기술의 새로운 비약이 모색된 시기이다. 이 측면이 우리의 논의에서 주목될
부분이다. 거기에 가상현실의 실질적 기술로 구현되어 가는 두가지 원리가 기능하기 때문이다.
정보교환의 등가성에 기초한 인터페이스(interface)와 피드백(feedback)이 그 원리이며, 이것은 근대적 의미
의 자연에 관한 존재론적 특성을 근거짓는다.
이 두 원리는 긴밀히 연관되어 있고 후에 사이버네틱스의 구성원리로 자리한다.
기계와 인간의 인터페이스를 구현하는 정보교환의 가능성은 인간과 기계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변화에서 마련
된다. 데카르트에 의해 철저히 근거지워진 인간과 자연 혹은 기계간의 엄격한 구분이라는 일반적 시대통념과
달리, 우선 기계에 대한 태도변화가, 즉 단순한 모방에서 몸의 ‘유기체적’ 연장이라는 인식이 형성된다.
이 변화는 인간영혼에 관한 집착이 완화되고, 산업화에 따라 기계에 대한 지배력이 상실되고, 더 나아가 인간도
진화의 산물이란 인식이 자리함으로써 야기된다.
이를 토대로 인간과 기계간의 결합은 ‘유기체적’ 공통성을 유지시키는 정보개념에서 모색된다.
모든 사물, 특히 유기체는 환경세계와의 물질 및 에너지교환을 효과적으로 실행함으로써 생존한다.
이 경우 그 실행의 성공적인 통제는 정보에 의해 가능하다. 여기서 정보란 교환될 내용을 이미 수학적으로 양화
한 것이며,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과 유형에 불과하다.
이런 전제하에서 기계도 정보교환의 과정 속에 위치하게 되며 인간과의 동등성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것의 현실적 구현을 위해 기술적 과정의 선행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정보전달의 메커니즘을 부울(Boole) 대수학에 의해 해석된 전기릴레이 회로로 치환하는 것이다.
즉 논리적 정보의 전달이 스위츠의 개폐조합에 의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보의 형태를 디지털화시키는 기술이다. 자연적 상태에서의 정보는 대부분 아날로그화(analog)
되어 있다.
이와 달리 0과 1로 표시된 +,- 전하값에 불과한 비트(bit)에 의해 정보를 처리하는 디지털(digital)방식은 정보를
더욱 형식논리적으로 구조화하고 수학적으로 양화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게 된다.
가상현실을 초래하는 또 하나의 가능성은 피드백 원리에 의해 제공된다.
이 개념은 원래 증기기관의 보급과 함께 발명된 자동제어장치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세기 전기공학에서 도입된 피드백이란 유기체에게서 나타나는 “감각과 운동의 순환적 과정”을 의미한다.
공학적 응용은 다음과 같은 연구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우선 생명체는 항상 어떤 평형상태로 돌아가려 하는 생리적 경향을 뜻하는 항상성(homeostasis)이란 생리학
적 개념에 관한 캐넌(W. Cannon)의 연구가 그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과 기계의 연결 메카니즘에서 나타나는 결함 현상이 잘 설명된다.
피드백의 특징을 더 분석하기 위해 위너는 다른 학자들과 더불어 유기체의 행동방식에 관한 연구를 시도한다.
그 결과 동물의 행동을 의도와 목적에 따라 구분할 수 있었고, 인간의 행위처럼 의도와 목적을 겸한 행동을
기계의 경우에도 적용하기에 이른다.
그 대표적 예로 파괴용의 추적 어뢰가 제시되었다. 그것은 피드백에 의한 통제에 의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피드백에 의한 통제’라는 공통점에 의거해 인간의 행위는 기계의 작동으로 환원가능해지며, 더욱이
기계는 자기통제가 가능한 유사주체로서 자율성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결국 이런 기술적 집적과 확장에 의해 실현된 사이버네틱스와 그것에서 수반된 가상현실은 기계와 인간의
융합을 가속화시킨다.
사이보그의 출현은 이미 도래해 있다. 따라서 이런 현실 속에서는 인간과 기계간의 경계가 더 이상 무의미해
지고 기술은 인간 안으로 내재화되며 심지어 기술적 통제와 조작에 의해 인간적 삶이 철저히 압도당하게 된다.
이런 가상현실의 도래에 정보의 역할 역시 간과될 수 없다. 생산양식이 아니라 정보양식에 의해서 비로소 현대
사회의 변동과 그 관계양태가 설명될 수 있다는 마크 포스터(Mark Poster)의 견해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의 현실은 사회전반에 걸친 정보관련행위의 내면화를 겪는 정보화사회로 진입되었다.
즉 사회의 조직과 관계가 정보기기나 설비와 같은 정보환경에 의해 통제되고, 개인의 사회인지나 입장, 가치관,
그리고 행동양식까지 정보개념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이다.
기술과 마찬가지로 정보도 인간존재의 존재론적 지형을 이루는데 중요한 구성성분이다.
그런데 정보양식도 시대마다 그것의 식별기준이 될 정도로 다양한 양상을 보여왔다.
가상현실의 구축에 토대가 되는 정보화 사회를 관통하는 고유한 정보양식은 무엇인가? 정보화 시대에 고유한
언어는 어떤 성격과 어떤 존재론적 함의를 지니는가? 이 지배적인 정보양식의 분석은 가상현실의 해명에서 또
하나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소통의 수단과 의미작용에 의해 구분하는 포스터의 입장에 따르면, 현대의 정보양식은 대면적이고 구어적으로
매개된 의사소통의 시대를 거쳐 인쇄를 매개로 글로 쓰여진 의사소통의 시대를 거쳐, 전자적으로 매개된 의사
소통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각각의 시기는 상징적 유사물, 기호의 재현, 정보적 시뮬레이션(simulation)에 의해 이뤄지는 의미생산방식을
취한다.
언술행위 속에 반영된 말과 사물의 관계양태에 따라 시대의 구분을, 즉 상사, 표상, 그리고 비지시적 관계의
구분을 앞의 경우와 유사하게 행한 푸코(M. Foucault)의 견해도 있다.
이 둘 모두에게서 세 번째 단계로서의 정보화 시대는 정보의 주체였던 자아가 끊임없는 불안정 속에 탈중심화
되고 분산되어 여럿으로 분열된다는 것과, 정보전달에서 주체와 객체의 일방적 관계가 부정된다는 것, 그리고
기호와 이미지의 산출은 지시나 의미관계를 중시하던 모방의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모델을 합성하는
자기지시방식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보의 이런 언어학적 전회에 초점을 맞추어 기호양식의 변천과정을 밝힌 보드리야르의 생각은 우리의 논의
에서 더욱 주목할만하다.
그는 크게 네 단계의 진화를 언급한다.
첫째 단계에서 기호는 사실을 반영하거나 재현한다.
둘째 단계에서 기호는 사실을 감추고 변질시킨다. 왜곡하는 것이다.
셋째 단계에서 기호는 사실의 부재를 감춘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다. 마지막
넷째 단계에서 기호는 어떠한 사실과도 무관하다.
사실에 대한 어떠한 지시 관계도 없는 시뮬라크르(simulacres)가 되는 것이다.
이 구분에서 보듯이 정보화사회의 토대는 시뮬라크르에 의해 구성된다. 그것은 더 이상 실재와의 교환관계를
벗어나서, 지시와 한계를 부정하는 무한순환 속에서 자기교환적 모습을 띤 사태이다.
그것은 가상현실을 구조적으로 특징짓는 계기가 된다. 이런 기호와 이미지체계에 의한 구축된 가상현실은
분명히 표상관계에 기초한 근대의 정보양식을 벗어난 것이다.
기술과 달리 정보의 경우에서는 가상현실 출현의 근거가 정보양식과 관련된 근대 범주나 존재틀로 소급될 가능
성은 별로 커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정보양식에서 근대의 언어관과 다른 급격한 전환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환의 특성이 분석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근대 언어양식의 범주적 특성에 관한 재해석을 전제로 하는 한에서 원리적 의미의 연관가능성이
제시될 수 있고, 나아가 가상현실의 모순성이 드러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정보기술의 분석만으로도 가상현실의 논의가 충분한 듯 하다. 기술과 정보에 의해 탄생한 문화적 현상, 가상
현실에 자본의 논리가 실질적으로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이 가상이 아니듯이, 자본의 지배가 억압의 형식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가상성의
현상을 생산양식을 대체하여 정보양식만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정보기술의 발달은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대대적 변화를 야기시키지만, 그 생산양식 자체가 해소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광역화와 정보기술의 발전이 맞물려 있으며, 자본집중의 극대화로 노동과정의 재
편성이 촉진되어 왔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한다.
가상현실과 정보화의 과정에도 자본 재생산의 구조가 내재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가상현실을 산출하는 이 결정적 계기인 자본은 어떤 특성을 지니는가 살펴야 한다.
인간은 경제적 활동을 통해 삶을 영위해 왔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정도에 따라 생산양식은 다양한 모습을 띠어
왔다. ‘자본’이란 독특한 형태는 특정시기에 출현한 생산양식이다. 그것은 근대 사회의 생산관계와 생산력을
지배하는 경제원리인 것이다.
여기서 자본은 “물적 존재가 아니라, 물적 존재에 의해 매개되는 인간들간의 사회적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구조를 결정짓는 토대로서의 자본의 성격은, 그것이 사회적 관계를 함의한 노동일반이며, 자본
주의의 전과정 안에서 내재적 가상으로 역동적으로 현실화되어 감을 지시한다.
그러나 가상성으로서의 자본개념은 자본이 <상품-화폐-자본>의 전개과정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이 과정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우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적 부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
이 경제체제 내에서 상품은 교환가치로서 그 고유성을 갖는다. 상품에서 이런 기능이 가능한 것은 노동에 의해
산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동 역시 교환가치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교환가치로 표현된 노동이란 단순한 육체적 형태에서의
노동이 아니라, 일반적 가치로서 추상화된 것이며, ‘노동일반’으로 규정된다.
이제 상품과 노동은 교환체계 안에서 현상하는데, 그것이 화폐에 의해서이다. 노동일반의 현상형태로서 화폐
는 교환가치의 저장고이고 동시에 다른 상품에 대한 ‘가상’이다.
교환가치를 보존하는 이 가상적 기능에서 화폐에 대한 무한한 욕망이 치솟고, 이 욕망에 의해 사회적 형태로
서의 화폐권력이 형성된다.
화폐는 이렇게 그 자체가 욕망을 내재화시키는 가상, 곧 그 자신의 권력을 무제한적으로 욕망하는 ‘가상’이다.
이 단초적 가상이 내재적으로 전개된 가상이 바로 자본이다.
이처럼 자본에서 보여지는 가상의 재생산이 바로 가상현실의 출현을 원리적으로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가상현실은 근대의 범주로서의 자본의 성격을 통해 충분히 드러낼 수 없는 새로운 측면을
갖는다. 그것은 자본의 논리 자체와는 무관하나, 생산양식 쪽으로 정위된 자본의 근대적 한계와 맞물려있다.
가상현실을 배태하는 사회적, 경제적 조건의 변화가 그 새로움을 형성한다.
우선 생산에서 소비에로의 중심이동이 그것이다. 게다가 그 소비행태가 단지 물질만이 아닌 기호,
즉 이미지와 상징성의 소비로 변모된다. 물론 이런 변화는 자본주의의 전략에 의해 추동된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확대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의 논리는 실물생산을 위주로 한 경제의 한계와 대량생산에 따른
차별성의 폐기에 직면해 탈출을 모색한다.
인간의 내면 속에 자리한 차이에의 욕망과, 그리고 차이의 원리에 의해 무한 산출되는 기호체계에서, 즉 포화될
수 없는 시장의 발견에서 그 탈출이 성취된다.
이런 상황 하에서 새로운 관점을, 즉 변별적 차이에 의한 기호의 발생을 주장하는 후기구조주의자의 입장을
수용함으로써 이론적으로 포착하려한 이가 보드리야르다.
그는 오늘날 상품은 그 기능과 유용성에 따라서만 구입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오히려 그 상품이 갖고 있는 이미지 혹은 그것이 상징하는 신분, 세대 등의 기의가 소비행위를 유발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동차는 효율적인 교통수단이라는 이유로 구입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하는 것 때문에 더 중요하다.
그것은 사회적 신분의 기호역할을 하기도 하고, 세대의 기호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 스포츠카의 기호는 자유와
분방함의 이미지로 생산된다.
차가 아니라 이미지 혹은 기호가 소비되는 것이다. “오늘날 소비란 ?...? 상품이 곧바로 기호로서, 기호가치로서
생산되는 단계를, 즉 기호(문화)가 상품으로 생산되는 바로 그 단계를 말한다.” 그것은 정보처리, 영상테크닉에
의해 생산되는 기호와 기호의 논리에 따라 사회체계가 조직되고, 실물생산을 위주로 한 사회조직의 원리를
대체함으로써 가능하다. 자본은 이제 교환과 등가의 원리 위에 세워진 하나의 기호체계로 스며든다.
여기서 자본은 기호의 모태로 작동한다.
실물의 본래적 가치가 무효화된 거래공간 안에서 시뮬라르크인 기호들의 차이가 지속적으로 증폭되고 기호들이
산출되며, 욕망의 체계인 자본은 스스로 유지한다.
이렇게 무제한적인 기호의 소비 속에서 인간들의 욕망에 대해 가상적으로 충족이 보장될 것으로 약속된다.
대상의 이미지와 코드가 지배하는 가상현실에서 기호의 생산과 교환을 무제한적으로 활성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극단화된 이유이다.
여기서 인간의 욕망은 타자는 물론 자신까지도 지배하는 체계화된 욕망의 구조 안에 갇혀있다. 욕망과 그 대상이
하나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밖으로 향하지 않은 채, 욕망의 대상으로 자신을 소비하면서 욕망은 충족해 간다. 더한 갈망과 함께 말이다.
이처럼 자기욕구적이고 자기소모적 방식으로 가상현실이 새롭게 출현하고 있다.
이상에서 가상현실에 대한 기술, 정보, 그리고 자본의 분석은 인간과 세계간의 매개의 성격에서 후자의 개념들
이 보인 가상성을 토대로, 가상현실 역시 가상성을 그 특성으로 갖고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이 가상현실은 동시에 근본적으로 자신의 가상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자신을 실현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 모순적 실질을 역시 드러냈다. 이렇게 가상현실은 의도적이지 않게 자신의 정체성 혹은 그 존재론적 함의를
은폐한다. 이 해명은 가상현실의 원리적 토대로서 기능한 세 개의 개념들이 자리하고 있는 근대의 고유한 존재
양태를 분석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4. 가상현실의 성격과 구조: 탈물질화, 탈영토화, 탈중심화
앞서 가상현실의 발생적 토대에 관한 언급에서처럼, 근대이후에 객관적 관찰과 실험에 근거한 자연과학의 지식
과 새로운 기술력을 토대로 이뤄진 자동화된 기계사회가 가상현실의 출발점이다.
이 기술력은, 그 자체를 실질적으로 배태하고 있는 그런 특정한 자연인식에 의거해, 우리의 현실을 역시 기술
의존적 공간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그것은 컴퓨터, 멀티미디어, 극소전자기술과 같은 첨단기술이 합리적 계산과 측정에 의해 파악 가능한 이상적
세계로서 펼쳐 보여주는 가상현실의 출현에서 더욱 첨예하게 확인된다. 이런 의미에서 가상현실은 오늘날
가장 주목받는 기술분야이며,
기술공학의 근본주제로서 우리를 흥분시키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처럼 이 기술의 비약적인 전개와 확장에 의해
어쩌면 인간의 전통적인 의식구조와 생활방식이 획기적으로 변혁될 것이라는 기대가 현실화되고 있으며,
그것은 분명히 가상현실의 출현을 그저 또 하나의 기술적 결과물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기술적 성격의 획기적 변화라는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다. 기술이 자연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외재적인
매체에서 인간 내재적 성질의 기술로 전환된 사실이다. 이로써 인간과 자연간의 경계는 무의미해지고, 인간에
대한 몰가치적 접근과 해석이 가능해진다.
가상현실의 구체적 가시화는 정보양식의 변화로부터 본격화되었다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정보양식의 변천이
가상현실에로의 과정에 본질적 계기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문제삼을 경우에, 정보개념의 이중성에 대해 주목
하게 된다.
정보는 의사소통의 수단과 방식인 미디어라는 매체와 의사소통의 행위양식인 언어로 크게 구분된다.
여기서 이 둘간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논의될 자리는 아니나, 미디어와 언어방식의 상호영향은 가상현실을 촉진
했다고 여겨진다.
자연언어로부터 전자언어로의 양식의 변화가 의식표현의 한계에서 선행적으로 야기돼, 그것을 담는 그릇으
로서 표현매체의 변화를 촉진했는지, 아니면 역으로 기술적인 발전에 의해 형성된 매체기술의 발전, 즉 인쇄,
복사기, TV, 멀티미디어 그리고 인터넷 등의 매체의 혁신이 표현양식의 내용적 변화를 수반했는지 분명히 단정
할 수 없다.
앞서의 논의맥락에서는 주로 언어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가상현실과의 연계를 추적했다. 거기서 언급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언어가 전통적 의미에서 그 본질로 여겨진 재현적 기능을 상실하고 자기지시적 기능을 갖는 것
으로 드러난 데 있다. 코드, 기호, 커뮤니케이션 등의 새로운 양식 속에서는 실제와 허구, 진실과 허위, 안과
밖이 그 경계를 허물며, 그 결과 담론의 주체는 방향감각을 잃고 오로지 언어체계만의 자율성이 확보되는 상황이
초래된다.
이것은 언어의 전통적 양식이 보여준 기표-기의관계, 음성 중심성을 배제하는 새로운 시뮬라르크(기호)를 산출
하는 시뮬레이션의 출현을 말한다, 이 맥락에서 이러한 가상현실은 자연과 몸의 지배를 넘어서 인간의 의식
영역에 대한 통제방식으로 등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지배의 관점에서 볼 때, 가상현실을 구현하는 또 하나의 중요요소는 자본에서 찾을 수 있다. 근대의 범주인
자본은 특히 생산의 측면에서 자연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관계를 결정적으로 구조화하는 물적 토대이다.
특히 자본은 노동과 상품을 추상화시켜 교환가치로 정립하며, 그 가치를 그 자체로 추구하도록 재생산하는
욕망체계인 것이다.
이와 같이 타자지배의 욕망을 강화하는 사회적 기제라는 측면에서 자본은 가상현실을 선취한다.
그러나 이 가상현실의 성취는 자본의 변화에 의해 가속화된다. 그 변화는 이미 언급한 대로, 소비적 성격의
부각에 있다. 이제 자본은 기호라는 상품 속에서 소비되며, 자신을 재생산한다. 기호는 상품의 실물가치를
넘어선 이미지나 상징으로 욕망을 부추긴다. 욕구대상은 합리적 사유로 파악이 어려운 것, 즉 느낌, 에로티즘,
이미지에 의해 만들어진 미학적 환영으로 무의식과 욕망의 대상인 것이다. 이렇게 기호화된 자본은 소유될
수 있은 것으로 욕망을 충족시키고, 그 변별적 차이에 의한 기호생산을 통해 지속적으로 욕망을 지배하며
욕망 자체가 된다.
가상현실의 지배는 자신에게조차 은폐되었던 인간의 감정, 무의식과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극한
을 드러낸다. 진정한 향유는 사라지고 소유만이 지배하는 욕망체계의 허무한 자기지배가 바로 가상현실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가상현실이 지닌 근본적인 성격과 의미를 현실지배나 억압의 관점에서 조명하였다.
이런 내용들로부터 우리는 가상현실을 구성하는 어떤 특정구조을 추론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구조라는 전통적
개념은 가상현실에 의해 부정되는 요소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 분석이 다시 사용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도래한 현실을 적절하게 해명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적 틀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조란 표현의 사용은 이 논의에서 불가피하다.
우선 가상현실은 탈물질화 속에서 그 구조적 모습을 드러낸다. 탈물질화란 디지털로 재구성되는 가상공간에서
주체든 객체든 그것은 육체의 흔적을 매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육체에 새겨진 신분, 복장,
형태도 없으며, 그 정체성을 보장할 어떤 확정된 기록들마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가상현실이 시뮬레이션을 통해 육체의 흔적을 기호로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체에 기호와 담론으로
작동하던 미시적 권력이 그 대상을 잃게 되며, 물질적 제한성에 의해 통제하던 자본적 권력이 그 지반을 상실
하게 된다. 이제 이 이 공간 속의 결합된 기호는 그 순간 명목상의 주체일 뿐이고 스스로를 지시하면서도 구조화
되길 거부한다. 굴절 없이 욕구를 드러내며 한정되지 않는 자아로서 그것이 지속적으로 자신으로부터 탈주하
도록 가상현실의 탈물질화는 그렇게 기능한다. 이 탈물질화는 이미 이를 조건지우는 시공간의 탈구축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의 삶을 표준화했던 갖가지 제도와 근대적 장치들은 역사적 시간성과 국지적 장소성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빛과 같은 속도로의 상호작용과 수많은 네트워크와 노드(node)들의 비선형적 결합을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이런 공간에 대해 영토를 구획하고 대상을 포획하던 근대적 방식은 그 지배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이미 결정된 무리적 시공간이나 완결된 체계 그리고 고착된 문맥이 와해되는 변화가 불가피한데,
이것이 바로 탈영토화(d?territorialisation)이다. 이 때 드러나는 공간은 시뮬레이션에 의해 이뤄진 영역일
뿐이다.
마치 인터넷의 사이트나, 홈페이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배할 대상도 실재도 없으며, 다만 의미 없는
기호와 관계들로 충만한 가상공간으로 어떤 경계지움도 어떤 시간적 제약도 벗어나 있다. 따라서 이 공간에
서는 마치 비트처럼 본래의 물질적 결박상태에서 이탈하여 임의적으로 분리되고 우연적으로 결합하고, 자유
롭게 대화하고 강제성 없이 ‘관계’를 맺는다. 이것은 다양한 대상들을 배치하는 구조적 형태가 기반으로 한
한 중심점의 해체로부터 가능한 것이다.
가상현실은 병렬적으로 산포된 그물형의 네트워크처럼, 그 내부에 어디에도 중심을 거부한다.
이것이 바로 탈중심화 (decentralization)이다. 이제 이러한 근원적 운동과 함께 가상현실 속에서는 모든 위계,
질서, 가치가 와해되며, 무한히 분산되는 공간이 된다.
그것은 중심도, 영토도, 육체도 없는, 그래서 구조가 없는, 그러나 욕망되길 기다리는 ‘빈 공간’이다.
이처럼 가상현실은 전통적으로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여겨지진 모든 위계질서, 제도, 가치를 전복하고,
모든 대상들을 평등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균질화되고 획일화된 공간(탈중심적, 탈영토적 공간)을 마련하며,
평등을 지향하나 평균화될 수 없고 고유한 개성과 인격의 가능성을 보장하려는 전통적 인간규정을 상대화
하고 내지는 더 나아가 그것의 허구성을 고지할 새로운 삶의 공간(탈물질화)의 존재론적 특성들을 제시한다.
이 특성은 실재적 세계의 실존적 성격과 달리 가역성, 의식의 탈물질화, 다수현실, 자유변환, 조작 그리고
체험자의 몰입 등으로 나타나며, 이제 이것은 분명 어떤 해석을 기다리는 ‘열린 공간’이다.
Ⅳ. 새로운 매체현실과 체계이론적 접근
1. 매체와 사회
현대의 정보화 사회는 새로운 매체들의 유포와 더불어 대두한다. TV, 비디오, 퍼스널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전자 매체들은 정보 생산, 가공 그리고 전달에 있어서 전통적인 매체를 넘어서며 정보 사용자들에게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놓는다.
특히 컴퓨터를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상현실(혹은 제 2의 자연)은 지금까지 이해되어 온 현실 개념을
상대화시키면서 새로운 환경을 구축해 가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 이 새로운 환경은 오늘날 “매체
현실”이라고 지칭된다.
이러한 매체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체, 정보 그리고 사회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현실을 기능주의적으로 분석하는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이론을 통해 의사소통, 정보 그리고 사회의
관계를 살펴보자. 이를 바탕으로 전자 매체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또한 매체현실이 어떤 구체적인
윤곽을 띠고 있는지 설명해 보자.
루만의 체계이론에 의하면, 사회란 특정한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수행된 의사소통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 하부
체계들의 집합을 뜻한다. 여기서 사회 하부체계들은 그 어떤 가시적이고 지각될 수 있는 제도가 아닌 의사소통
으로 이루어진 체계들이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환경으로부터 필요한 정보들을 걸러서 자신을 재생산하는
체계들이다.
환경이 바뀌면 사회 하부체계들은 필연적으로 이에 반응하게 된다. 왜냐하면 바로 사회 하부체계는 정보들 -
이것은 곧 체계의 자기 재생산에 필수적이며 동시에 자신의 구성요소이기도 한데 - 을 스스로 체계 자신과 환경
간의 변별을 통해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새로운 매체현실이라는) 환경의 변화는 사회 하부체계들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사회 하부체계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의사소통으로
부터 어떻게 형성되는가?
1) 사회 하부체계와 의사소통
사회를 구성하는 하부체계들은 특정한 요소들과 그 요소들 간의 일정한 수의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고 동시에
이 요소와의 관계들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기준거적인 체계들이다. 체계의 자기준거성이란 다름 아닌 체계가
자신의 구성요소를 스스로 재생산하는 것을 뜻한다. 체계의 정체성이 결국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들과의 변별
에서 획득될 경우, 이와 마찬가지로 체계의 형성 과정은 자기와 자기가 아닌 것들 간의 변별, 즉 “체계와 환경
간의 변별”에 방향을 맞춘다.
체계/환경의 변별은 체계와 환경 간의 경계로서 각각의 해당 체계에 의해서 안정되어야 하고 보존되어야 한다.
이때 의미가 바로 이 변별과 경계 기능을 떠맡는다. 즉 개개의 사회 하부체계들은 자신의 구성요소들과 그
관계들을 독자적인 의미 형태(정보)로 생산해내고 그럼으로써 각 체계들은 서로 상이한 의미영역으로 존재한다.
이 의미의 상이성이 체계들 간에, 그리고 체계와 환경 간에 그어진 경계인 셈이다. 그렇다면 사회 하부체계들의
경계를 이룰 뿐만 아니라 사회 하부체계들의 구성요소와 그 관계들의 토대로 작용하는 의미(Sinn)란 무엇인가?
루만에 의하면, 의미는 사회 하부체계들의 어떤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며, 어떤 단어나 문장의 뜻(Bedeu
tung)도 아닌 까닭에 일상적으로 이해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그것은 오직 현상학적으로 기술될 수 있을 뿐이다. 요컨대 의미는 “보다 넓은 체험과 행위의 가능성들에 근저
하고 있는 지시의 과잉”으로 나타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의미는 체험과 행위의 순간에 현재적으로 된 그 무엇이며, 이 무엇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보다 커다란 체험과 행위 가능성들의 지평으로서 지엽적으로 암시된다.
따라서 의미란 의미의 다른 가능성들에 대한 지시를 통해 현재적 현실성(aktuelle Realit?t)을 갖게 된다.
의미는 다음 순간에 현재화될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부여하면서 보다 커다란 가능성들의 과잉 속
에서 경과함으로써 그것들 중에서 선택을 강요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모든 사회 하부체계들이란 곧 의미체계이다’라는 점은 체계가 자신의 요소들과 그 연관
성의 생산을 의미 선택의 형식으로 취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의미영역을 만드는 과정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환경이란 것도 체계가 갖는 의미영역을 제외한 모든 다른 의미 가능성들의 총집합이다. 이에 정치
체계와 경제체계 그리고 교육체계 그리고 예술체계 등 모든 사회 하부체계는 자신의 고유한 의미 영역과 동시
에 자신을 다른 모든 의미체계들과 분리하며, 그럼으로써 자신만이 갖는 의미적인 환경을 수반하는 의미경계
를 갖는다.
여기서 의미는 체계와 환경의 경계를 넘어서는 “세계의 형식Weltform”으로 나타난다. 그도 그럴 것이 환경도
역시 의미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미와 의미경계는 체계와 환경 간의 지양될 수 없는 연관성이다. 결국 사회 하부체계들의 분화는 의미
경계로, 의미의 선택 형식으로, 즉 체계의 자기준거적인 의미생산으로 기술된다. 의미경계가 체계 자신에 의
해서 조건지워지므로 체계들은 또한 자신에 대한 관찰에서 환경과의 차이를 성찰할 수 있고 주제로 삼을 수
있다.
체계가 어떤 의미를 선택하면 그것은 체계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체계형성과 연관된 정보의 획득과 정보의
처리를 뜻한다. 의미가 체계와 환경 그리고 그들 사이의 경계 설정을 형성한다면, 정보는 사회 하부체계의 어떤
상태를 선택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오직 체계내적인 의미의 기능성을 지닌다.
정보는 이미 체계의 구조에 의해서 규정된 가능성들의 지평에서 이루어지는 의미선택이다. 선택된 정보는
뒤따르는 의미선택의 가능성들과 연계되어 다시금 체계의 구조형성에 작용하고. 이로부터 체계의 자기 재생산
이 수행되는 것이다. 구조를 통해 정보들을 선택하고 자신을 재생산함으로써 체계들은 독자적인 인과율을
지닌다.
사회 하부체계들은 자신의 인과율 형성을 통해 “환경의 인과적 압력 Kausaldruck der Umwelt”에서 벗어난다.
따라서 외부의 사건들은 체계에 대해 직접적 원인성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체계에게 단지 일회적인
사건들의 의미로 존재하며, 이것은 체계 스스로에 의해 선택된 정보의 형태로서 이용되기 때문이다.
2) 의사소통과 매체
사회 하부체계는 의미체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의사소통체계이기도 하다. 이 말은 사회 하부체계가 의사소통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체계의 구성요소인 의미, 즉 정보는 의사소통으로부터 획득된
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사소통으로부터 사회 하부체계의 형성이 가능할까? 미리 강조하자면 그것은
바로 의사소통의 비개연성이라는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에서 비롯한다.
의사소통은 분명히 적어도 둘 이상의 소통 파트너간의 문제 상황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소통 파트너는 서로의
내면을 읽을 수 없으므로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블랙박스(black boxes)로 존재한다. 소통 당사자들
의 의식은 서로에게 블랙박스로 존재하기 때문에 단지 텔레파시라는 상상적 가능성을 제외하고서는 서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소통 파트너는 다른 파트너의 처신을 꿰뚫어 볼 수 없고 예견도 할 수 없다.
의사소통은 alter가 ego에 대한 기대지평을 만들고 이를 토대로 이루어진다. 기대지평이 alter가 만들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alter와 ego사이의 소통은 바로 alter가 자기 시각에서 ego의 시각을 구성해놓고 ego에게 추정
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의사소통은 단순히 alter와 ego 사이에서 객관적으로 매개되는 정보
의 전달로서 기술될 수 없다. 이 의사소통의 과정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정보, 전달(방식) 그리고 이해
라는 세 가지 의미 선택의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때 이해는 정보와 전달을 나누어 소통 파트너에게 전이
하는 행위이다. “만일 어느 누군가가 말을 걸었는데도 반응을 하지 않을 때, 그것은 청각장애의 증상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것은 그러면 하나의 정보일 뿐이지 결코 전달이 아니다. 그러나 이해하는 편에서 그 상대방이 대답
을 하지 않으려고 청각장애를 이용하고 있다고 간주하면 그것은 의사소통인 바, 왜냐하면 이때는 정보와 전달이
나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해라는 것은 타자성(alter-ego)에 의한 구성 과정, 즉 ego가 어떻게 행동했다는 것을 alter가 자신의
관점에서 구성하는 과정을 뜻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해란 대상(체계)에 대한 기대를 “잉여물”의 형태로
취하고 그 잉여물을 대상에 적용시켜보는 것이다.
이러한 의사소통 과정에서 정보는 매체/형식의 변별을 수단으로 해서 획득된다. 여기서 매체/형식의 변별이란
전통적인 소통이론에서 핵심적인 전이(?bertragung)개념을 대체하며, 소통은 이러한 매체/형식의 변별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매체/형식의 변별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매체/형식의 변별은 정보와 마찬가지로
체계 내에서 작동할 뿐, 정보와 마찬가지로 환경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정보나 매체/형식은 환경의 어떠한 물리적인 사태를 재현하지 않는다. 생물체들의 지각과정은 이미 이러한
매체/형식의 변별을 작동시키고 있다. 생물들의 지각과정은 빛, 공기, 자장( �) 같은 특정한 지각매체들(Wahrnehmungsmedien)을 전제로 한다.
이것들은 지각하는 생물체에 의해서 특정한 형식으로 묶여, 복잡한 신경생리적인 과정을 거쳐서, 특정한 사물
로서 혹은 특정한 소리로서 혹은 특수한 신호 등으로 나타난다. 이로써 매체는 형식으로 된다.
다른 예를 들자면, 빛이라는 매체는 교회의 창을 통해 들어가서 기둥과 벽에서 유희하는 형식이 된다.
이것은 물론 세계의 물리적인 구조에 의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빛과 관련하여 그것의 매체와 형식을
구분하는 지각 행위는 생명체 스스로가 담당한다. 이와 같은 매체/형식의 구분은 의사소통 체계에서도 발견
된다.
가령 ‘미국 PGA 골프대회에서 박세리의 우승’이라는 사건의 경우, 것은 개개 단어들의 느슨한 결합을 통해 문장
들이 만들어지고, 이 문장들로부터 특정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요소들의 긴밀한 결합, 즉 형식이 나타난다.
이것이 언론체계의 뉴스라는 새로운 정보이다. 그러나 이것은 언론체계에게만 형식으로 존재할 뿐이며, 경제
체계에게는 환경이다.
경제체계는 나름대로 이 환경 사건을 매체로 만들 수 있다. 경제체계는 그 느슨한 결합으로부터 박세리의 선전
홍보가치나 박세리 악세사리라는 형식을 조직한다. 여기서 분명해지듯이 체계는 자신의 매체를 자신의 형식
으로 결합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매체는 “요소들의 느슨한 결합”인 반면에 형식은 “동일한 요소들을 긴밀히 결합”시킨
것이다. 전통적인 행위도 곧 매체가 될 수 있으며, 그 결과 사회란 행위들의 총합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자유도 개개인들의 차원에서 가능한 행동들의 긴밀한 결합이며, 느슨한 결합이란 그때그때 발생
하는 - 개인과 무관한 - 그 어떤 목적을 위해 행동을 조직하는 가능성인 것이다. 결합이란 시간을 내포하는
개념이고, 결합이란 형식을 부여하는 순간적인 통합이다. 매체는 형식으로 결합되었다가 다시 풀린다.
매체 없는 형식이란 없으며 형식 없이 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매체/형식의 변별을 재생산하는 것은 시간
속에서만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체계들은 느슨한 결합과 긴밀한 결합 변별 과정을 통해 특정한 정보를 만들어 내면서 시간적인 진행
속에 놓이게 된다. 지속적인 결합과 풀음의 시간적인 경과를 통해서 체계는 자기생산을 하게 되고 이에 필요한
구조의 결합과 변화가 또한 이루어진다. 즉, 체계의 통일성이란 것은 더 이상 안정적인 구조에 의해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체로 인해 형식들이 만들어지는 특수성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연관은 보편적인 매체인 의미에서도 나타난다. 의미는 항상 단지 그때그때 현재화될 수 있으며
이것은 수많은 다른 가능성들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 순간 소통된 의미는 하나의 형식, 즉 변별의 구분
이다. 그러나 하나의 의미가 형성된 순간 그것은 다른 의미 가능성들을 지시하며, 그 결과 다른 식으로 현재화
될 수 있는 느슨한 결합 상태를 갖게 된다. 긴밀한 결합은 현재에 실현된 것인 반면, 느슨한 결합은 확정되지
않은 의미 결합의 가능성을 지닌다. 이렇게 해서 느슨한 결합과 긴밀한 결합은 서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소통
파트너들을 중개하는 기능을 지닌 전이 매체에 대한 낡은 사고를 대체한다. 공통 체험을 만든다는 의미를
지닌 “소통”(communicatio)이라는 낡은 개념 역시 이로써 지양되거나 부수 효과로 격하된다.
형식이 매체적 내용보다 더욱 강력한 결합인 까닭에 매체와 형식 사이에는 순환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형식은 현재적으로만 긴밀하게 묶인 것이고 다음 순간에는 풀려버리는 까닭에 형식은 매체적 내용보다
지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형식들은 기억이나 문자 혹은 인쇄라고 하는 특별한 조처들에 의해서 보존된다.
그러나 형식이 보존될 경우에도 자유로운 매체의 내용들은 항상 새로운 결합을 위해 남는다. 즉 인쇄된 문학
작품의 경우 그 내용은 또 다른 작가에게 패러디 대상이 되거나 그 내용과 연관을 맺는 매체로 작동하게 된다.
묶여 있지 않은 요소들, 즉 매체와 형식으로 결합될 요소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예를 들어 단어들은 결합을
통해서 임의적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이때 활용 가능성은 전혀 제한되지 않는다. 따라서 매체/형식의 변별이
라는 형식규정을 통해 이제 매체는 특정한 매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의미화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사회 하부
체계에게 매체와 형식의 변별로 사용된다.
3) 매체와 사회의 진화
소통 파트너들이 서로에게 블랙 박스로 존재하는 까닭에 의사소통의 성공은 극히 비개연적이다. 이러한 요인
이외에도 기술적인 관점에서 의사소통의 성공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첫 번째의 비개연성
은 다음과 같은 사태에 기인한다. 이해는 alter와 ego가 서로 공유하는 공통된 콘텍스트와 연계되어 있다.
사회의 진화가 전혀 이루어져 있지 않은 단계의 경우, 서로 다른 두 개의 육체와 서로 다른 의식만을 지닌
존재인 alter와 ego가 서로 이해한다는 것은 극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공통된 텍스트와 연관된 것만이 이해
될 수 있는데 그 단계에서 공통된 콘텍스트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언어의 발달에 의해서 이 문제가 해결된다. 언어는 기호덩어리(Zeichenkomplex)로써 alter와 ego에게 공통된
텍스트를 성립하게 만들며, 이것은 언어화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테마에 대해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한다.
그 외에도 언어는 긍정과 부정을 통해서 모든 정보들을 두 배로 늘린다. 그 결과 언어는 의사소통의 복합성과
의미가 변화되는 양을 증가시킨다. 그러나 언어로 인한 사회 진화는 궁극적인 문제의 해결로 일관성 있게 진행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소통의 비개연성이 언어에 의해서 해결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때 비개연성은 단지 억제된 것에
불과하며 언어를 통해서 억눌린 비개연성은 다른 문제로 바뀐다.
의사소통이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 발생한다고 하지만, 이것이 소통에 있어서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된다는
데에 소통의 두 번째 비개연성이 기인한다. 인간상호관계는 비록 동시적인 공간성을 보장하지만 그것은 드문
경우이다. 따라서 소통 파트너가 공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서로 다른 곳에 있다는 점이, 공간적이고 시간
적인 팽창(Extension)이 문제를 야기한다.
예를 들면 소통 파트너들이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일로 바쁘면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비개연
성으로 인해서 문자나 인쇄 그리고 전파와 같은 “유포 매체들(Verbreitungsmedien)”이 진화를 하게 되는데,
이것들은 alter와 ego를 시공간적인 제한으로부터 해방시켜서 서로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유포 매체”들의 발달로 인해 의미의 변화영역은 엄청나게 넓혀진다. 한 가지 예로서 문자의 발달을 들 수 있다.
문자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은 모든 정보들을 더 이상 잊어버리지 않고 축적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과거와 그리고 지역적 제한을 뛰어 넘어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문자의 발달은 사회의 진화를 이끄
는 동인이 되는데 그것 역시 정보 양의 엄청난 팽창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소통의 비개연성과 연관된다.
언어가 의사소통의 비개연성을 해결할 수 없듯이, 유포 매체들의 발달은 긍정적인 측면 이외에도 또 다른 문제
점을 낳는다. 왜냐하면 의사소통이 유포 매체들의 발달로 인해서 시공간적인 한계를 넘어설 경우 이해는 더욱
힘들어지는 반면 제안된 선택에 대한 거절은 더욱 쉬어지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인간상호관계에 상존해 있는 해석의 도움과 선택을 받아들이게 하는 압력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와 유포수단들의 진화로 인해 이제 어떤 의사소통들이 성공될 수 있는지, 즉 선택된 제안이 수용될
수 있는지가 극도로 의심스럽게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점증하는 성공적인 의사
소통의 비개연성을 온갖 노력을 통해서 제한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유창한 화술이 교육의 목표로 대두하고
특별한 소통기술로서 수사학이 발전하며 토론이 분쟁 해결과 의지 관철의 수단으로서 등장하지만, 인쇄술의
발전조차도 이런 노력들을 사라지게 하기는커녕 - 해석 이론들의 발전에서 보듯이 - 문제상황을 더욱 심화
시킨다.
의사소통의 성공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세 번째의 비개연성은 의사소통을 통해서 제안된 선택의 수용여부와
연관된다. alter가 의사소통을 시도하고 그 제안된 선택이 비록 ego에 의해서 이해될지언정 수용하는데 있어서
확실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안된 선택에 대한 수용, 즉 의사소통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 의사소통 매체들이 진화한다. 이 소통매체들은
“상징적으로 보편화된 소통매체들(symbolisch generalisierte Kommunikationsmedien)”이라 불리며 제안된
선택과 (제안된 선택의 수용을 위한) 동기유발의 연관성을 하나로 묶어주는 기능을 한다.
여기서 “상징”이란 개념은 어느 특정한 의미들이 이루는 단일성의 형성을 지칭하며, “보편화”라는 개념은 이
의미들의 다양성을 바로 하나로 묶는 기능을 뜻한다. “진리”, “돈”, “법”, “예술작품” 등이 이런 소통매체들이다.
소통에서 alter가 이러한 매체들을 사용하면 그는 매체와 연관된 특정한 선택을 제안하는 셈이며 ego에게 제안
된 선택을 잘못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배제하고 그것과 연계된 특정한 선택들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렇게 보면 소통매체들은 alter와 ego에게 선택 매커니즘의 기능을 수행한다. 나아가서 이 매체들은 선택을 “
가치가 있는 것/가치가 없는 것”으로 배가시키는 코드를 갖고 있다. 소통매체들은 자체가 지닌 코드, 즉 “진리/
거짓”, “소유/비소유”, “합법적인/비합법적인”, “오직 너만/그 외에 아무도 아닌”이라는 코드를 통해서 양자택일
(? ���을 결정하게 한다. 따라서 소통매체는 선택을 이원적으로 축소하는 코드를 통해서 모든 거절의 가능성
을 하나의 관점으로 집중시키며 이로써 제안된 선택을 수용하게 하는 동기유발의 수단이 된다.
이런 연유에서 소통매체들은 극히 비개연적인 의사소통의 상황에서도 특정한 테마의 선택을 기대하게 할뿐만
아니라, 선택의 수용 가능성까지도 극도로 높여 준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이 부자에게 돈을 주거나 (상거래),
비개연적인 것을 진리로 파악하거나 (학문), 사악한 자를 임의로 벌 준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경우(재판)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소통매체들은 아무런 사전 이해 없이 소통을 직접적으로 테마에 연관시킴으로서 테마의 전문
적인 소통을 가능케 하며, 이로써 축적된 정보는 전문성을 띠어가며 그 내용은 심화된다. 특별히 전문화된 정보
들의 축적과 심화는 앞에서 살펴 본 사회 하부체계, 즉 정치체계, 법체계, 경제체계, 예술체계 등의 형성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2. 매체현실과 사회 체계
사회 하부체계에게 사회 하부체계가 아닌 모든 것, 즉 기술체계, 화학체계, 의식체계 등은 모두 환경으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기술체계에 의해서 발전된 전자나 디지털의 기술은 사회 하부체계에게 새로운 환경의 생성
을 뜻하며, 오직 환경과의 변별을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과 단일성을 재생산하는 사회 하부체계에게 매체현실
이라는 새로운 환경은 그 변화를 강요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피드 백 구조로 설명되어 온 이 현상이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살펴보자.
사회와 기술체계라는 환경 간의 피드 백 구조는 이미 앞서서 밝힌 유포 매체와 사회의 관계에서 드러났다.
유포 매체로 인해 발생한 정보의 엄청난 팽창은 사회의 폭발적인 변화를 낳았고, 이 점은 18세기 후반에 나타
나는 사회 분화 현상 내지는 의사소통체계들의 분화 현상에서 보여진다. 그것들은 정치, 법, 교육, 종교, 사랑,
예술 등의 사회 하부체계들이며 이것들은 각각의 고유한 코드를 갖고 소통의 방향성을 결정지으며 사회의
특정한 문제들에 대해 그것을 해결하는 기능성을 지닌다. 18세기 후반부터 이루어진 사회의 기능적 분화는 20
세기에 나타난 전자매체로 인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다.
이 전자매체의 대표적 매체는 다름 아닌 문화의 총아로 등장하고 있는 컴퓨터이다. 오늘날 모든 사태들은 수학
적으로 정의된 형태로 만들어지고, 비현실주의의 새로운 동영상들로 구성된다. 이 비현실적이고 인위적인 것에
대한 도취는 현재 정보기술과 전자 오락물에서 하나의 커다란 시장을 형성케 하며, 이것이 얼마나 확장될 것인
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기술은 공상적인 것을 생산해 내는 수단 뿐만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오히려 기계장치를 통해서 상상적인 것을 구체화시키는 더 할 나위 없는 투사매체(Projektionsmedien)임이
틀림없다. 이로 인해서 가능성의 영역은 확장되고, 현실은 변화될 수 있는 것으로 상대화된다.” 사회를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기술과 매체의 발전에 대해서 정치체계는 새로운 매체현실로 인한 사회 구조와 기술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때에만 미래가 있다고 외친다. 그렇다면 전자매체로 인해 사회의 환경이 새로이
만들어진 현재의 매체현실은 어떤 양상을 보이는가?
우선 첫 번째의 양상은 새로운 환경과 의식체계 지각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전자매체를 이전의 인쇄
매체와 비교했을 때 다음과 같은 차별점이 분명해진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컴퓨터라는 전자매체는
유포 매체의 발달로 엄청나게 팽창한 정보의 소통량을 효율적으로 축적하고 관리한다는 차원에서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매체이다. 그러나 컴퓨터 매체는 정보 처리와 관리라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나 각각의 사회 기능체계
들이 고려해야 하고 반응해야 할 새로운 환경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경제분야에서 생산 공정, 관리 판매 등의
경제행위는 컴퓨터로 처리되며 컴퓨터로 자동화되는 새로운 경제 현실을 만들고 있고, 이 전자매체로부터 전자
화폐, 전자 주식거래 등의 새로운 경제 형식이 파생된다. 컴퓨터라는 전자매체로 인하여 법률체계의 새로운
현실이 형성되기도 한다. 요컨대 해킹이나 소프트웨어 무단 복제, 정보의 불법적 남용의 문제들은 법률상의
문제로서 다루어지고 이로 인해 법률체계의 새로운 현실이 생성된다.
생물체계나 화학체계에서 치료행위나 실험 및 계산들이 간편해지고, 컴퓨터에 의해, 컴퓨터로부터 파생된 새
영역에 몰두하며 그것의 확대 재생산으로 나가고 있다. 하이퍼텍스트의 대두로 인해 학문 체계에서는 더 이상
미리 기획하고 처음부터 질서 있게 논리적으로 구성해나가는 작업이 사라지며, 매 순간 임의적으로 구성되는
파편의 합성 작업이 들어서게 된다. 따라서 후천적으로 교육받고 연습하며 익히는 학문적 행위 대신, 이미지
표상에 따른 선천적이고 순간적인 선택의 순간이 중시된다. 여기서 전자매체로 인한 정보의 폭발적인 팽창은
개개 자료에 세세한 신경을 쓰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주의를 끄는 새로운 글쓰기 형태가 나타나기도 한다.
나아가서 새로운 환경의 탄생은 모든 체계들의 자기반성적 차원에서 이에 대한 적응을 요구한다. 예술 체계
에서는 일회적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들이 정보로 처리됨에 따라 그리고 이것이 세계 네트워크를 통해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는 까닭에 그것의 일회성은 평가절하되고, 독자성과 천재성이란 전통적인 담론은 이 새
로운 매체현실에서 불신된다. 이에 모든 것들은 말 그대로 단지 요소들의 느슨한 결합의 의미로서 매체로서만
존재하며, 이것들은 보다 긴밀한 결합을 위한 가능성으로서 항상 열려있게 된다.
텍스트의 작성에서 컴퓨터를 타자기와 동일선상에서 파악하는 사람들은 단지 타자기가 지닌 효율의 극대화
로서 컴퓨터를 이해한다. 그러나 타자기는 이미 타자를 치기 이전에 머리 속에 그 내용을 일관성 있게 정리한
다음에야 필요한 것이며, 타자기를 통해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커다란 교정이 비교적 불필요했다.
타자기는 정신적인 타자기의 베끼기인데 반하여, 컴퓨터는 이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다 짜여진
일관된 머리 속의 텍스트를 요구하지 않는다. 단편 형식으로 입력된 텍스트는 잘라내기, 끼워넣기, 붙이기,
복사 등의 “유희”를 통해서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오거나 그 자체로 훗날을 위해 저장된다.
컴퓨터 상의 텍스트는 따라서 근본적으로 몽타주이며, 이것은 언제 어디에서도 불러내져 가공될 수 있는 일시
적이고 유희적이며 기호 덩어리로서 존재한다. 이런 연유에서 수많은 기술 비판자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던지고 있다. 예컨대 순간적이고 유희적인 문화가 도래할 것이며, 그 결과 기억하는 현재화의 과정으로서의
역사가 소멸될 것이라는 점이다. 기술에 의한 문화의 질서는 더 이상 선형적-연쇄적인 것이 아니라 몽타주에
의해서 생산될 수 있는 아주 상이한 단편들의 동시성을 띠게 된다.
여기서는 내적인 연결고리가 상실되고, 그럼으로써 결과에서 아주 달리 보일 수 있는 요소들의 배열과 혼합
이라는 실용주의가 중시되고 만다. 이런 현상은 하이퍼텍스트뿐만 아니라 영상에서도 대두되는 현상이다.
두 번째 양상은 “소통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재생은 문자에 의해서는 분명하게 구분
되었지만 새로운 전자매체에서는 하나로 합쳐진다. 말해지는 모든 것이 논박될 수 있었기에 언어나 문자매체
가 포기해야 했던 실재성은 이로써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동영상(���에 놓이게 된다. 시청각적 영상을 통해
실재성을 보장하는 전자매체는 아주 분명하게 존재의 실재성과는 다른, 그러나 존재의 실재성에 바탕을 둔
허구의 실재성을 보여준다.
이 실재성은 정보의 의미로서 파악되는 까닭에 이제 전통적인 존재론은 그 타당성을 상실하기 시작하고 존재
의 현상의 자리에는 소통의 현상이 들어선다. 그러나 전달매체가 언어에서 영상으로 바뀌는 까닭에 의사소통
의 변화 또한 야기된다.
사람들은 세계를 영상소통이 보여주는 방식대로 관찰한다. 비록 현실처럼 극적이지 않으며 깨끗하지도 않고
총천연색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때 영상 소통은 언어나 문자매체처럼 정보와 전달방식을 구분하는 가능성
과 필연성을 도입한다.
그 결과 텔레비전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거나 심지어는 무대 배경에서 울려나오는 웃음을 통해서 시청자
역시 이 매체로 함몰되지만, 영상매체에서 이루어지는 이 전체의 조합은 전달과 정보의 구분이라고 하는 토대
위에서 수 천년간 발전되어 온 통제에서 벗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 소통의 긍정/부정의 코드화 역시 작동
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동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을 좋게 혹은 나쁘게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영상을 통해서 지각된 것에는 소통의 수용이나 혹은 거부의 구분을 가능케 하는 저 극단화, 즉 코드의
양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소통을 비록 알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인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작의
의혹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감수한다.
텔레비전은 일상생활의 모든 설득 수단을 포함한 형식을 생산한다. 그리고 형식의 이 다른 면이 바로 조작
의혹이다. 시청각적인 방송은 지각을 완전히 중계할 수 있는 까닭에 개체적인 상상의 가능성과 필연성은
떨어져 나간다. 개인적인 동시에 대중적인 수용은 소통의 설득 작업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지각방식의 동일성은 이미 화면에 의해서 구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와 세계관의 차별성은 그 윤곽을 잃고,
그것의 점차적인 동일화는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영상 소통에서 모든 것이 소통될 수 있으며 정보와 전달의 구분이 거부된다면 도대체 무엇을 소통이라고 할
수 있는가? 보드리야르가 주장하는 바대로 총체적인 소통은 소통의 소멸로 귀결되는가? 혹은 사회적인 의사
소통체계의 눈 먼 폐쇄성이 이제 정말 현실화한 것인가?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 대신에 이 러한
조건하의 소통에 있어서 “선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자.
기술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소통의 한쪽 면만을 강요했다. 이것은, 이미 서적 출판에서 알 수 있듯이, 대중소통
의 필연성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서 선택의 발생이 변화한다. 사람들은 소통 과정에서 더 이상 능동적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소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을 선택할 뿐이다. 예를 들어 방송국은 주제와 형태, 연출
들 그리고 무엇보다 방송시간대와 방송시간을 선택한다. 수용자는 주어진 선택 가능성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
할 뿐이다.
그러나 이 경우 소통은 비록 겉으로는 상호간의 선택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 양자 간의 수정과
보완이 보장되지 않은 소통일 뿐이다. 현재의 전자매체는 이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컴퓨터에 의해 중개된 의사소통이다. 이 의사소통은 정보를 컴퓨터에 입력시키는 것과 정보를 불러내는
것을 서로 멀리 분리시킬 수 있는 까닭에 어떠한 동일성도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소통과의 연관성에서 이는
전달과 이해의 단일성이 포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무엇인가를 입력하는 사람은 다른 편에서 무엇이
빼내지는지 알지 못한다(만일 그가 알았더라면 컴퓨터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보들은 그 사이에 “가공되어” 버린다. 그리고 수용자 역시 “무엇이 자기에게 전달되어야 할 지”를 알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은 소통이 지니는 매체적 내용이 사회성(즉 이중의 임의성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타난 소통 파트너간
의 관계)을 상실함을 의미한다. 즉 모든 의미 형식들이 컴퓨터 프로그램에 예속되어 버리는 전자매체가 지금 생
성 중에 있는 것이다. 이전의 소통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이러한 소통 상황에서 소통될 수 없는 것은 존재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소통의 한정성에 기인한 근원의 권위와 더불어 이에 필요한 모든 사회구조적인 보장들
(구분, 명예)이 함께 불필요한 것으로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이제 사람들은 필요한 정보를 불러내어 재판관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권위는 기술에 의해서 제거되고 그리고 원본(Original)은 인식될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달의 의미들을 인식하거나 이에 대해 의혹을 떠올리거나 제안된
소통의 수용과 거절로 귀결되는 다른 식의 결론을 내리는 가능성들 역시 모두 사라져버린다.
Ⅴ. 매체, 정보 그리고 사회
이제 앞에서 살펴본 문학적, 철학적, 사회학적 접근을 토대로 본 연구는 매체현실 혹은 정보 테크놀로지에 의해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는 현재 사회를 어떻게 명명할 수 있는지를 마지막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새로운 매체현실에 의한 사회는 일명 “정보사회”로 불릴 수 있으며, 이러한 정보사회의 추세와 내용은, 새로운
매체의 출현과 그 빠른 확산으로 인해, 포착하기 힘들 정도로 매우 복잡하고 광범위하게 전개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매체에 의한 정보사회를 메타 차원에서 분석하고 이해하는 관점들도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며,
이런 연유로 정보사회에 관한 논의들의 대체적 윤곽을 그려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정보사회에 관한 대표
적인 두 이론가를 우선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들은 정보사회를 가장 먼저 사회과학적으로 논의해 온
다니엘 벨과,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이론들을 강하게 수용하면서 벨(Daniel Bell)의 후기산업사회론적 정보
사회론을 비판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마크 포스터(Mark Poster)이다. 새로운 매체현실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
각기 독보적인 사회이론적 입장을 대표하고 있는 두 이론가들은 서로 독창적인 개념을 제안하고 있는데,
즉 전자의 경우 후기산업사회(postindustrial society)라는 개념이며 후자의 경우 정보양식(mode of informati
on)이라는 개념이다.
이들은 정보테크놀로지 혁명의 사회적 변화를 분석하고 이해할 때 기술결정주의를 부정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새로운 매체현실과 문화변화의 관계를 조망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만약 기술결정주의가 정당
하다면, 새로운 매체의 출현으로 인한 문화적 변화를 논의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매우 “단순”해질 것이다.
그러나 논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밝혀지겠지만 새로운 매체현실과 문화변화의 관계는 복합적이고, 그런 만큼
이론적 편차도 결코 작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이들의 이론을 검토해봄으로써 새로운 매체현실과 문화변화
사이의 복합적 관계를 이해해 보자.
1. 정보사회에 대한 문제제기: 다니엘 벨의 후기산업사회론
정보 테크놀로지 혁명과 새로운 매체현실에 대한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의 하나는 기술결정주의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물음에 관한 논의이다.
다니엘 벨은 우선 정보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사회와 문화의 변동의 관계를 설명하기 이전에 테크놀로지 일반이
인간사회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하는지를 이론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에서 인간사회의
행복한 미래를 예측하려는 입장과 이와는 정반대로 테크놀로지의 발전에서 인간사회의 불행을 읽어내려는
입장 모두를 비판한다.
전자의 대표적 예로 벨은 마르크스를 들고 있다. 그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테크놀로지가 유토피아에 이르는
왕도라는 믿음을 견지했다고 한다. 후자의 대표적 예로는 벨이 묵시론적 수사학이라고 명명한 것에 해당된다.
그 예로 그는 핵전쟁에 대한 인류의 공포와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을 들고 있다. 물론 벨은 묵시
론적 수사학을 동원하여 생태학적 위기를 유포시키려는 예언들을 믿지 않는다. 벨에 의하면, 테크놀로지를
묵시론적으로 배격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데에는 프랑스 사회철학자 자크 엘룰(Jacques Ellul)의 영향력이
크다고 판단하고 있다.
벨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엘률의 이러한 시각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벨은 테크놀로지
자체와 그것의 사용을 서로 구별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예컨대 자동차와 도로망은 테크놀로지 시스템을 구성
하지만 이 시스템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는 것은 사회적 조직화의 문제라는 것이다. 벨은 여기서 테크놀로지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중립적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문화와 사회구조 양자를 변형시키는가하는 물음에 대해 그는 마치 테크놀로
지의 변형 자체가 문화와 사회구조 양자의 변화를 내재적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것인 양 진술하고 있다.
심지어는 그는 테크놀로지란, 예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상상력을 고도로 발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서로 질적으로 상이한 상상력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판단하지 않는 한, 예술을 포함한 문화와 테크놀
로지는 동일한 상상력의 지평 위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벨은 기능, 에너지, 제작, 커뮤니케이션과 통제, 그리고 알고리즘 등의 측면에서 테크놀로지가 문화
와 사회구조를 변형시키고 있음을 논의하고 있다.
다른 한편, 벨은 총체성의 이론을 부정한다. 이 부정 속에는 이른바 기술결정론을 포함한 모든 결정론이 포함
된다. 벨은 반총체성의 이론을 공개적으로 피력해 왔다. 벨에 의하면, 사회는 분석적으로 뚜렷한 세 가지 차원
을 가진다. 그 세 가지는 문화, 정체, 사회구조로서 각각은 각기 다른 중추원리로 특징지어지고,
각기 다른 역사적 리듬을 가진다. 이렇게 세 영역으로 분리하는 가운데, 벨의 이른바 후기산업(탈공업) 사회
개념이 구성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며, 그의 후기산업사회 개념은 그가 사회구조 영역이라 부르는 영역에 국한된 것이다. 물?
후기산업사회라는 개념이 어떤 완전한 사회질서를 묘사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내의 (경제, 기술 및
계층체계로 규정되는) 사회구조 영역에서의 중추적 변화를 서술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이다.
벨은 이 사회구조영역을 기술경제적 영역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의 변화는 단선적이다. 즉, 이는 대체의
원리가 분명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보다 적은 비용으로 단위 에너지당 더 많은 동력을 뽑아내고 더
높은 생산성을 얻는 것이 다른 것을 대체한다. 정보 테크놀로지의 혁명적 변화에 관한 그의 논의는 이러한 방법
론적인 반총체주의를 전제로 삼고 있다.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바로 이 반총체주의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이데올로기란 총체성을 가정하거나 주장하는 이론적 관념적 강령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마르크스
주의는 한 예에 불과하며, 당시 파슨스 식의 체계 이론 역시 그는 이데올로기로 보았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맥락은, 정보 테크놀로지 변동과 문화변화의 상호관계에 관한 것이다. 방법론적 반총체
주의를 곧게 이해한다면, 이러한 상호관계를 설정하는 이론적 시도 자체가 잘못되거나 무의미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방법론적 반총체주의를 선언하는 논지에서 벨은 테크놀로지가 사회의 다른 영역들의 변화를
‘결정’하지는 않으나 정치 질서와 관련해서 ‘관리’(management)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말함으로써 사회 기술
영역과 문화영역 사이의 관련성을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련성에 관한 논의는 벨의 핵심적인 또
하나의 명제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벨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이란 무엇인가? 벨은 이 모순을 이중적으로 확인한다. 그 하나는 기술경제
영역에서의 문화와 문화영역에서의 문화 사이의 모순이다. 다른 하나는 기술경제영역 내부에서의 모순이다.
이제 이 이중적인 모순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전자에 대하여 벨은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에서 현대
경제의 사회학적 형태인 부르주아 자본주의와 현대의 문화적 특질인 아방가르드 모더니즘이 과거에 대한 거부,
역동성 그리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변화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의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밝히면서,
불가피하게도 이 두 영역의 중추원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기술경제영역은 인간을 ‘역할들’로 파편화시키는
반면, 문화는 전인(whole person)을 이룩할 것을 요구한다), 부르주아 경제체제는 모더니즘 문화와 심한 갈등
상태에 빠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후자에 대해서 그는 먼저 부르주아 윤리가 검약과 요구충족의 지연,
그리고 또 다른 노동에 대한 강조 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한다. 그렇지만 1920년대 이래 현대 기업자본
주의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경향을 띠게 되면서 쾌락주의가 고무되었고, 그 결과 부르주아 사회에서 개인
에게 제 1동기와 정당성을 부여했던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잠식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사회 자체가
하나의 모순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과 생산 영역에서는 사회가 개인에게 어떤 한 가지 규범에
따라 살도록 요구하는데, 소비와 여가의 영역에서는 그와는 또 다른 규범을 가질 것이 조장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벨은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이 아니라 “모순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모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벨
에게서 우리는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존재론적으로 경제, 정치 그리고 문화의 영역별 자율성을 주장하면
서도 이들 사이의 문화적 모순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그것은 ‘모순’으로 보인다. 어쨌든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이라는 벨의 명제에는 그의 문화론이 결정적이다. 특히 그의 문화론에서 문화는 다름 아닌 실존적
상황에 대한 이해의 지평에서 정의되고 있다.
문화를 실존적 상황으로 정의하면서 벨은 원칙적으로 문화를 이중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 하나는 세속화라는 명칭을 새롭게 (아래에서 곧 설명되겠지만, 벨은 세속화를 기존의 종교사회학에서 이해
해왔던 바와는 달리 이해하고 있다) 이해하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독신화(profanation)라고 부르는
과정이다. 벨에게서 신성성과 세속성은 제도와 사회 체계 내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하는 짝이고, 신성성과
독신성은 문화 내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하는 용어의 짝이다. 벨은 주로 후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이것은 그 동안 일반적으로 종교사회학자들이 사용해온 세속화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둔탁한 개념”이어서
사회의 변동양상을 섬세하게 조망해주지 못한다고 벨이 판단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기존의 세속화 개념
에는 종류가 완전히 상이한 두 현상, 즉 사회적 현상과 문화적 현상이 뒤섞여 놓여 있고, 그 변화 과정도 상이
하여 서로 일치하지 않는 현상들을 혼합해 놓았기 때문이다. 특히 벨의 독신성 개념은 세속화 개념 아래 종교
의 사멸을 예견했던 계몽주의적 사회학주의를 비판하면서 “넘어갈 수 없는” 영역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다.
모더니즘 운동에 대한 그의 논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다. 벨에게서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그 점을 요약해 보자. 벨은 모더니즘을 19세기에 일어난 두 가지 사회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한다.
그 하나는 사회환경에 대한 감각지각의 차원이고, 또 하나는 자아의식의 차원이다. 전자는 벨이 문화영역의
자율적 변화를 존재론적으로 주장하면서도 문화변화를 테크놀로지의 변동과 관련이 있음을 다시 강하게 시사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정보 테크놀로지 혁명적 변화와 곧 바로 연결된다. 동시성과 즉시성을
가능케 한 정보 테크놀로지의 혁명은 모더니즘 운동(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급진적 심화로 이해
하고 있고, 이러한 점에서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사조상의 변화는 벨에게서 연속선상에서의
변화에 불과하다)을 촉진하거나 양자 사이에는 강한 친화성이 있음을 벨은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벨은 독신화 과정 자체보다는 현대성(modernity)의 이해에 먼저 주목하고 있다. 즉 현대성의 문화적 표현
가운데 독신화 과정이 있는 것이다. 벨은 이 현대성을 다음과 같은 세 변동에서 확인하고 있다. 첫째, 정치 경제
부문에서는 급진적인 개인주의 사상이 성장하고, 문화 부문에서는 해방된 자아가 성장한다는 점이다. 둘
째, 충동, 특히 악마적인 충동의 강화를 다루는 문제에서, 종교에서 표현예술(소설, 시, 음악, 미술)의 전환이
나타난다. 그리고 셋째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고 아무 것도 없음에 대한 공포가 부각한다.
이를 벨은 니힐리즘의 확산이라 본다. 그 핵심은 죽음의 이해라고 벨은 보고 있다. 모든 것을 넘어서려는 니힐
리즘은 종국에 가서는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서는 그 속에서 새로운 공포가 자라난다는 것이다. 벨은 존재론적
으로 죽음을 넘어설 수는 없다고 전제한다. 니힐리즘적 모더니즘이 신을 부인하고 신이 가진 것으로 생각했던
능력을 인간이 갖는 것으로 믿으려는 충동을 추구하면서 종교를 대신하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숭배를 불러
올 수 있다고 그는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 벨은 이 독신화 과정, 즉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하나의 정점
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문화적 현대성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예술과 생활의 구분 해체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그렇다면, 벨의 대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흔히 신보수주의라 부르는 그것이다. 벨은 스스로 문화적으로 보수
주의라고 자처하는데, 그것은 흔히 “전통”이라는 논술어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벨 스스로 강조해온 자본
주의의 문화적 모순 명제가 가리키고 있듯이, 전통을 해체하고 이를테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나아가는 모더
니즘 운동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기능적 요구라고 인정하고 있는 한에서는, 또한 자본주의의 현실을 전면적으로
총체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한에서는, 전통을 주장할 수 있는 논거가 처음부터 이론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벨의 모순은 그의 후기산업사회론이 미완성된 기획임을 예증하고 있다.
2. 생산양식론을 넝어서는 정보양식론: 마크 포스트의 정보양식론
포스트는 정보 테크놀로지의 혁명에 따른 사회변동을 설명하기 위해 정보양식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논의 전면
에 부각시켜왔다. 그는 새로운 매체현실을 적절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를 취하는 사회적 상호작용
의 언어적 차원을 독해할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그가 제안한 개념은 바로 정보양식 개념
인데, 이 용어는 마르크스의 생산양식론을 흉내낸 것이다. 포스터는 이 정보양식 개념과 함께, 정보 테크놀로지
의 혁명을 논의하는 자들에게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패러다임의 전환 같은 것을 주장하고 있다.
비판이론의 전통에서 보자면, 그것은 생산양식에 대항하는 개념인 셈이다. 포스터는 가장 진화되고 발전된 것이
다른 것들을 설명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정보양식이 생산양식
보다 진화한 것임을 전제한다.
또한 포스터는 자신은 비판이론을 계승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비판이론에서 벗어나고 있다.
예컨대 포스터에게서 정보양식은 언어를 여러 맥락들 속에 고정시키는 데 사용되었던 시공간 좌표들을 무너
뜨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정보양식론에서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 또는 본질과 실존은 더 이상 대립적이지 않다.
그리고 말은 실제 행위의 시간/공간 좌표에 의해, 글은 책과 종이면의 시간/공간 좌표에 의해 각기 틀지워진다.
요컨대 그는 재현의 논리를 급진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여기서 의문시되는 점은 포스터가 주로 마르크스의 문제 틀을 발전시키려는 입장에서 제기해온 생산양식
개념과 정보양식 개념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포스터는 ?뉴미디어의 철학?이라는 자신
의 책에서 생산양식의 이론을 반영하지만 또한 정보양식의 이론으로 그것을 대체하는 식의 극단성에 스스로
경계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같은 책의 다른 곳에서는 자신의 정보양식 개념은 생산양식 개념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사용한 인간과 원숭이의 해부학이라는 수사법 자체가 정보양식이 생산양식보다 더 진화한 것임을,
단계론적으로 생산양식을 넘어선 것임을 시사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더 나아가 그 수사법은 인간 해부학 이전에는 원숭이의 해부학이 불완전하거나 불충분하다는 내용을 함의하고
있듯이, 자신의 정보양식론의 출현 이전에 사용되어왔던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론이 불완전하거나
불충분하다는 비판을 내비치려 한다. 포스터에게서 정보양식의 부상은 마르크스가 알고 있던 프롤레타리아트
의 종언을 의미한다. 그의 정보양식론에서 노동은 더 이상 물질적 행위라기보다는 인식적 작업, 즉 모니터 위
에서 기호들을 해석하는 인식행위이다.
그 결과 그는 프랑스 사회철학자 고르에 이어 프롤레타리아트와 결별하는 차원에서 “정치의 시대, 즉 변증법과
계급투쟁의 시대에 관한 책을 덮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결포스터가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이론적 영향 속에서 재현의 논리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그는 총체성 범주 일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후기구조주의적 사유에 젖어
있는 포스터가 벨의 정보사회론을 무엇보다 총체성 이론의 하나로서 확인하고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포스터는 벨이 정보사회론의 앞문에서는 기술결정주의를 피하려 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뒷문에서 다시
기술결정주의를 불러들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포스터가 보기에는 벨이 의도와는 달리 실수하고 말았다고
해석하면서 벨을 변호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호하는 듯한 인상은 더 가혹한 비판을
가하기 위한 그의 수사적 책략에 불과하다. 포스터에 의하면 벨이 기술결정주의(technological determinism)
를 피하려고 했지만 실제로는 후기산업사회의 원인을 기술적 혁신에 귀속시켜 버림으로써(컴퓨터+매스미디어
=후기산업사회, 탈공업사회) 스스로 모순되게 진술하고 있다. 포스터는 기술결정주의의 문제를 넘어 총체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벨은 사회적 리얼리티의 전체 영역이 컴퓨터화된 매스미디어의 도입에 의해 한결같이 동질
적으로 영향받는다고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역들의 존재론적인 분리를 전제하면서도 벨이 테크놀로지의 역사적 변화가 역사를 결정짓는다고 논리를 전개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게다가 그의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 명제의 한 차원은 포스터가 거부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기능적 논리에 문화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밝히는 논의의 지평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도 사실
이다. 이 지점에서 포스터는 벨의 탈공업사회론에 흐르는 사유를 예리하게 파고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포스터에 의하면, 벨은 총체성 범주를 존재론적으로 부정하고 있지만 총체성의 사유에 무의식적 차원에서 빠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벨은 스스로 사회과학의 경험적 연구의 태도를 취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사회과학의
방법론적 원칙을 위배하고 있다고 포스터는 비판한다.
즉 지식과 정보가 주요 변수라고 결론짓기 위해서는 사회의 변수 모두가 확보되고 또 그들 사이의 가능한 상관
관계 모두가 검토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과 정보는 탈공업사회
의 핵심적 변수라는 벨의 주장은 미리 주어진 이론적 논증이 사실 입증의 외양을 가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
다고 한다. 포스터의 이와 같은 비판적 진술은 지식과 정보를 강조하는 벨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벨의 방법
론적 사유 그 자체를 겨냥하고 있다. 요컨대 결정주의의 총체성 이론을 거부하는 것이 포스터의 이론적 전략에서
핵심인 셈이다.
사실 포스터 스스로는 후기구조주의의 날개로 비상하려 하기 때문에 후기구조주의의 텍스트주의와 강한 친화력
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만큼이나 논술에서 결정적인 지식과 정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 점은 포스터가 벨의 정보사회론이 정보를 주로 상품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언어학적 관점을,
보다 정확히 말하면, 후기구조주의적 기호론을 강조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런데, 포스터는 벨의 후기산업사회
론적 정보사회론을 비판하면서 정보와 상품의 관련성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요컨대, 그는 정보를
기본적으로 경제적으로 상품화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는 벨의 관점을 근본적인 잘못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정보를 상품으로 이해하는 맥락에서 벨이 정보사유제를 옹호하고 있다면, 이에 대항하여 포스터는 정보공유제
를 제안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정보는 어떠한 관점에서 이해하는가? 그것은 상품으로서의 정보를
공유하자는 제안이 결코 아니다. 전자정보라는 정보 테크놀로지 그 자체가 정보사유제를 해체한다고 포스터는
주장하고 있다. 벨 등의 후기산업사회론은 정보를 언어적 사실보다는 경제적 사실로 다루기고 있기에 전자
기술이 개방하는, 정보통신의 새로운 가능성이란 문제를 간과한다고 그는 논술하고 있다.
포스터의 정보공유제 주장은 사회운동을 주장하고, 또한 이론화할 수 있는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정보 테크놀로지 그 자체의 특성으로서 정보의 공유를 읽는다. 포스터는 상품화의 성격 혹은 본질
을 희소성 범주 아래 이해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경제학이 전제하는 바에 따르면, 자원은 희소하며 따라서
그러한 자원의 할당은 시장기제에 의해 가장 잘 결정된다고 한다. 그런데 포스터에 의하면 정보는 희소하기는
커녕 풍부하고 값싸다. 정보양식에서 시장은 전도된다. 즉 시장은 정보의 흐름을 제한시킴으로써 경제학자들이
자명한 사실이라고 말하는 희소성을 산출하는 것이다.
포스트에게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고 오직 희소성의 원칙에 의해서만 결정되는데,
그가 정보양식의 시대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경우 희소성의 범주를 해체시키는 정보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정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반영하고 있다. 포스터는 정보주의의 인식론적 기초로서 일종의
물질폐위론(the overthrow of matter)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물질폐위론은 두 명제로 구성되어 있다.
그 하나는 정보는 물질/에너지와 달라서 열역학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명제이다. 앞에서 포스터가 강조한
정보의 반희소성 명제는 바로 이 명제를 함의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정보가 물질/에너지를 대체한다는 명제
이다. 정보는 정보라는 것이다. 이 정보의 물질폐위론은 정보의 물질성을 급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설사 정보
그 자체는 물질이 아니라 할지라도, 정보의 생산, 유통, 소비의 과정에서 물질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보의 종류와 그 특성은 다양하다는 점을 그는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현실적으로 상품과 시장으로서
의 정보 네트도 있고, 공론의 장으로서의 정보 네트도 있다. 포스터는 정보의 한 특성을 전체로 과장하는 오류
를 범하고 있다. 포스터는 책과 음향기록물 등에 대한 논의를 통해 정보의 성격을 시사하려 한다. 포스터에
의하면, 소비자는 책이란 물품에 돈을 지불했지, 가령 공공도서관의 경우 돈 안들이고 이용할 수 있었던 책의
정보에 대해 대가를 지불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설도서관이 아니라 공공도서관이라는 공적
제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책의 정보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고 해석하기도 어렵다. 저자의 정보생산에 대해서 어떻게 대가를 지불하는가는
원칙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각 국가의 역사적 정책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책과 음향기록물의 정보 그 자체가 상품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포스터는 “본래적으로” 공유할
것에 속하는 것(“순수한” 정보)을 공유한다는 논리를 기초로 정보공유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인식론적
으로 철저히 순수한 것의 존재를 부정해온 후기구조주의의 늪에 있지 않은가. 여기에 또 하나의 모순이 있다.
벨의 후기산업사회론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면서 자신의 정보양식 개념을 발전시키는 가운데 포스터는 인공
지능학에 기초한 정보의 경제학, 언어학에 기초한 정보이론, 포스트모던한 광고 이론 등을 통해서 정보양식
이론을 기획하고 있지만, 그의 이론적 기획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미완성으로 남는다. 첫째, 생산양식 개념과 정보양식 개념의 관계가 명백하게 이론적으로 설명되고 있지 못하다.
물론 적어도 언표상으로 정보양식의 비판이론을 기획하고 있는 만큼 포스터는 자본주의, 상품화, 심지어는 해방
등의 용어를 자신의 정보양식론에 포함시키려는 태도를 완전히 버리지 않고 있으므로 이 문제는 중요하다.
둘째, 포스터는 행위이론을 부정하면서도, 다른 한편 주체이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 양자 사이의 관계에 대
해서 이론적으로 충분히 개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제 2미디어시대』에서 포스터는 일튀세르 이래의 구조
주의 운동에 의해 전개된 반인간주의적 호명이론을 반복하고 있다. 그것은 의식철학적 행위이론을 부정하고
주체가 언어에 의해 구성된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포스터 스스로 이 후기구조주의적 주체이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주체는 늘 언어에 의해 매개된다. 둘째, 이러한 매개는 호명의 형식을 취한다.
셋째, 이 과정에서 발화와 호출의 중심에 있는 주체 위치는 봉합되거나 폐쇄되지 않고, 불안정하며 과잉적이고
다중적인 상태로 남아 있다. 이 같은 주체이론은 알튀세르의 주체 없는 과정의 이론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것은 주체의 부정을 의미할 뿐이고, 자아정체성의 위기를 넘어 그 해체를 함의하고 있다. 하지만 포스터는,
매우 애매하기는 하나, 주체의 부정이 아니라 주체의 다중화 정도를 의도하고 있는 듯하다. 포스터에 의하면
전자적으로 매개된 커뮤니케이션에서 주체란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진 담론과 실천의 구성체
이고, 이것은 자아를 다중적이고 늘 변할 수 있고 파편화된 존재로, 그러니까 자신을 구축하는 고유한 기획을
짜는 존재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여기에서 애매하다는 것은 사실 양자 사이에 아직은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음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포스터는 “주체의 죽음”이라는 구조주의 운동을 수용하면서도 비판이론의 기획을 구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터는 생산양식의 시대에서 정보양식의 시대로의 패러다임 전환를 주장할 때 마르크스의 비판이론
을 해체해 온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에 크게 기대고 있다. 예컨대, 보드리야르는 비판이론을 생산양식
의 경계를 넘어 테크놀로지와 문화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추구할 수 있는 좀 더 기름진 이론의 들판으로 옮겨
왔다고 그는 보드리야르를 예찬한다. 포스터에 의하면, 보드리야르는 기호학을 역사적, 비판적으로 적용한
최초의 프랑스 사상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기호학이란 마르크스의 생산양식론이 현대사회의 분석에서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는 판단 아래 (형식적) 의미들의 차이를 생산하는 지시양식(mode of signification)을 가리킨다.
사실상 그것은 비판이론의 전통에서 요청해 온 해방의 기획을 최종적으로 종언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숲에서 성장해 온 보드리야르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고, 마침내 자신의 책 ?상징적 교환과 죽음?(1976)
에서 비판이론적 전통과의 완전한 작별을 선언한다. 그런데 포스터는 바로 이 선언에 부정적인 태도를 표명
하고 있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우울한 결론, 즉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코드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죽음만이
똑같은 가치가 되돌아오는 것, 즉 교환가치가 없는 행위이며, 죽음은 순수한 증여 속에서 기호의 역전 가능성,
즉 시뮬라크라, 모델, 코드들의 세계를 부정하는 실제의 상징적인 행위를 뜻한다는 결론에 대하여 포스터는
이론적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에 대해 포스터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논평한다. “[...] 적절한
인식이나 이론적인 설명 없이 보드리야르는 부유하는 기표가 사회적 공간에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한다. [...]
코드에서 탈출하는 것은 의미가 기호의 악몽에서 재통합되지 않는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보드
리야르의 객관주의는 분명 시끌벅적한 기호의 세계를 떠나 아득히 먼 사막 속으로 은거하는 것과 다름없다.”
포스터는 한편으로 보드리야르의 기호학에 근거하여 신미디어에 내재한 해석과 분석을 전개하지만, 다른 한편
으로 그것의 밖에서 주체들의 생동하는 행위이론적 대응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Ⅵ. 맺는 말
이상과 같이 본 연구는 다양한 관점에서 “매체현실과 문화변혁”이라는 주제를 살펴보았다. “매체현실” 자체는
언뜻 보기에 단순하게 이해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매우 복잡한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가상현실”,
“정보사회” 같은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러한 개념들과 관련된 논의는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매체현실 내지는 테크놀로지가 문화와 사회구조를 급진적으로 변형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예술의 경우에도 전통적인 예술관이 거의 붕괴되면서 “매체예술”에 대한 새로운 예술관이 요청되고 있다.
어쨌든 매체현실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며, 이러한 상황 하에서 놀랍게도 “기술 이상주의”라는 낙관적인
기대감이 팽배해 있다. 예컨대 1960년 말 학생운동 당시 일종의 구호처럼 사용되었던 횔덜린의 시 ?파트모스?
의 그 유명한 구절(“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커진다”)이 이제는 정치 영역을 넘어서 기술공학적 매체 시대와
관련하여 자주 인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위험”이고 무엇이 ”구원“일까? 그 대답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의 유형은, 위험과 구원을 전통적인 자연과 기술의 상관 관계에서 찾는 방식이다. 자연이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는 “위험한 힘”으로 작용할 경우 이 때 기술은 그것을 극복해 줄 수 있는 “구원”의 성격을 띨 수 있다.
이것은 기술공학적 매체 발전을 옹호하는 시각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기술적 발전을 곧 위험으로 파악
하는 방식이 있다. 그럴 경우 기술이 초래할 수도 있는 위험한 발전에 직면하여 동시에 싹트는 구원은 무엇
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술과 문학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기술적 발전, 효율성, 기능성만을 무조건적
으로 찬양하는 매우 부박한 상황으로 나아갈 때, 그러한 맹목적인 발전 이데올로기를 파국과 위기로 직시할 줄
아는 작은 목소리들은 바로 예술과 문학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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