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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일반

오리엔탈리즘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4.08.17|조회수166 목록 댓글 0

오리엔탈리즘

 

제 1부

위기

 

1.문헌학자들이 텍스트 의존적인 이유

1) 장소,시간적 원거리 극복 방법이 용이하다. - 한 권의 책으로 경험하기에 어려운 것도 극복 가능.
2) 이 방법을 사용하여 대개의 경우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것. - 기 알고 있는 지식과 현실을 이용 새로운 담론 창출가능.
- 텍스트 의존의 사례 : 볼테르 <캉디드>,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2. 텍스트 의존의 장점

1) 텍스트의 전문성이 보장된다면 오래 기억하게 된다.
2) 텍스트의 시너지 효과로 현실 자체도 창조 가능하게 된다. - 미셸 푸코의 담론 이론 원용 가능

*담론 이론 - P 18 푸코의 담론이란 개념 작용과 논리적 판단을 거칠 수 있는 표현, 곧 논리적이고 관념적인 이야기

 

 

3. 텍스트 (담론이론)의 준용 사례 : 실제 동양에서 실천하려는 움직임

1) 나폴레옹 : 이집트 정복
2) 드 레셉스 : 수에즈 운하 개통
3) 크로머, 벨푸어 논쟁 : 1부 1장 참조

 

오리엔탈리즘의 담론이 이들에게 허용한 것 → 이들의 행위에 의미,명석함,현실성 부여했고 동양은 이들의 행위에

무력상태로 방관할 수 밖에 없었음, 이들의 행위는 마치 희극 <배심재판>의 서양재판관 같은 역할 수행.

 

 

4. 텍스트 의존의 결과 (사이드의 견해 )

1) 오리엔탈리즘은 텍스트 의존의 차원에서 동양에 실제 적용하는 사례로 전환 되었음.
2) 이런 텍스트 의존적인 문헌학자들의 오리엔탈리즘은 결과적으로 동양을 유린한 결과를 초래했음.
3) 서양의 능동적 자세에 동양은 수동적으로 자기를 수정할 수 없었음.
4) 오리엔탈리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환경이 조성되었음.

 

 

5. 서양 오리엔탈리즘의 번영과 동양의 관계 - 안와르 아브델 말레크는 이를 두고 정치상의 주인과 노예로 비유함.
말레크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을 몇 가지 알아보자

첫째, 동양과 동양인을 "타자성" 특히, 자기와의 관계에서 비능동적, 비자율적, 비주권적으로 봄.
둘째, 주제만 본다면 동양인을 필두에 세우는 오리엔탈리즘은 궁극적으로 인종차별주의로 나간다고 함.
셋째, 오리엔타리즘을 역사성을 가진 것으로 보고 서양의 역사는 변동성이 있는 반면 동양의 역사성은 수동적 주체로

        보아 비역사성의 주체로 파악함.

넷째, 말레크는 오히려 18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른 소수 소유자에 의한 패권주의, 유럽중심주의와 결부된 인간중심주의

        토대가 오리엔탈리즘을 지배해왔고 이것 역시 동양에서 건너온 사본 즉 텍스트에 의한 것임을 주장한다.

*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 분석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그람시의 헤게모니즘이다.

헤게모니즘이란 소수가 다수를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지배하고 이것을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되는 것을

 말한다.

 

 

6. 오리엔탈리즘의 문헌학상 혁명

1) 의의 - 모든 언어는 인도- 유럽어와 셈어라는 두 개 언어족에 속한다는 가설을 이용한 비교 연구

2)특징 - 유럽에 대한 동양의 언어학적인 중요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과학적 자의식을 형성하는 것,
            동양의 동일성, 불변성, 획일적 환경을 인식 하는 것.
3) 적용 사례 -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인도유럽어족은 예술적으로 간소하고 충분하나 셈어는 그렇지 않다고함.
→ 셈족과 그 언어를 혹독하게 비판 하며 비교언어학, 비교문헌학은 인종차별주의 성향을 갖게됨.

 

 

7. 19세기 이후 오리엔탈리스트

1) 19세기 초 ~ 19세기 중엽
- 고비노,르낭,훔볼트,슈타인탈,뷰르노프,르뮤자,팔머,바일,도지,뮤어
- 오리엔탈리즘 담론구축에 도움을 준 작가 : 괴테,위고,라마르틴, 샤토브리앙,킹레이크, 네르발, 플로베르, 레인
   버튼,스콧, 바이런,비니, 디즈레일리,엘리엇, 고티에

2) 19세기 후반 ~ 담론 구축에 도움을 준 작가 - 다우티, 바레스,로티, T.E 로렌스, 포스터

3) 오리엔탈리즘 관련 협회 - 1822 아시아 협회(프랑스) , 1823 왕립 아시아 협회 (영국), 1842 미국동양협회

 

 

8. 네르발의 지적

1) 오리엔탈리즘 학문의 발전과 정치적 정복의 한계에서 오는 반비례성 지적함.
2) 서양인들의 동양에 대한 상상의 세계로 환원시킨 작품 : 괴테의 " 마호메트의 노래"나 위고의 " 안녕, 아랍의 여인"
3) 개인적인 환멸과 일반적인 고정관념에서오는 괴리감은 동양에 대한 상상력을 오히려 개별화 극대화 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9."동양" 의 범주에 관한 여러 고찰 (by 오리엔탈리스트)

1) 디즈레일리가 바라본 동양
- 그의 소설 <탕크레드> 에서 " 모든 것은 인종 문제이다. 따라서 구원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동양과 그 종족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
- 즉, 동양인은 동양인이기 때문에 동양에서 살아간다.
2) 플로베르가 바라본 동양
- 그는 <이집트지> 에서 동양은 텍스트로부터 준비될 수 없는 구경거리가 더 이상 아니게되고, 규율된 방식에 따라

   서술되는 것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 동양의 이질성을 제거하고 다시 "일반성" 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3) "루이 마시뇽" 이 바라본 동양- 그는 이슬람의 최대 영웅은 마호메트가 아니라 이슬람 성자인 알- 할라주 였다.

    왜냐하면 알-할라주는 자신을 기독교적인 신의 화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알-할라주 : 이슬람에서 이단으로 취급받지만 " 우리들이야말로 신이다" 라고 주장함.
4) 소결 : 현대 오리엔탈리스트들은 동양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
전문지식에 의존한 교조적인 자세,관념 등을 버려야 한다. 즉, 동양화된 동양을 인식해야 한다.

 

 

10. 오리엔탈 리즘의 두 가지 선택
- 위와 같은 다양한 동양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오리엔탈리즘은 결국 제국주의 시대와 맞물려 정치적 무장을 한

   동양과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종전의 방법을 고수하는 법과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 예를 들어 동양의 개념에서 이슬람을 구분해서 연구하는 학자군이 형성되기에 이르렀고, 르낭, 골트치허,맥도널드,

   폰 그루네바움,기브,루이스는 이슬람을 "문화적 통합체"로 보았다.

* 기브의 " 이슬람의 근대적 조류" P 194 참조

11. 오리엔탈리즘의 한계

- 텍스트 의존에서 비롯된 " 소수 수유자의 패권 주의 " 와 유럽중심주의와 결부된 인간중심주의는 결국 다른 문화,

   민족, 지리적 구분 속의 인간존재를 무시하고, 그 정수를 뽑아버린다.
- 동양을 서양에 대해 시간적.공간적으로 고정된 그대로의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다.
- 서양은 동양의 행동의 모든 측면에 관한 관찰자,재판관, 배심원이 된다.
- 동양 역사 변화의 내부적 요인을 오리엔탈리즘은 인정하지 않는다.
- 텍스트로부터 예견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면 외부로부터의 선동, 동양의 잘못된 우둔함으로 치부했다.

 

 

 

부제 : 합리주의적 인류학과 문헌학적 실험실

 

 

실베스트르 드 사시(합리주의적 인류학)

 

 

1. 약력

 

- 왕정주의자, 현대동양어학교의 초대 아라비아어 교사, 프랑스 외무부 전속 오리엔탈리스트 ,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 1806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정교회를 징계하기 위하여 '이슬람 교도의 광신'을 선동하고자 발표한 선언을

번역. 오랫동안 미래의 학자와 프랑스의 동양어 통역관을 양성. 1830년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시 알제리아인에 대한

포고문을 번역함. 동양관계의 모든 외교문제에 관하여 외무부 장관, 육군장관의 정기적인 자문에 음함.

1822년 아시아협회의 초대회장, 75세때 다시에르 후임으로 금석문연구소장에 취임, 왕립도서관의 동양관계 사본

관리 책임자가 됨. 1832년 큐비어와 함께 프랑스의 새로운 귀족으로 임명됨.

 

- <아랍 명문집>3권 외 수많은 저서와 번역, 주해 작업을 함.

- 1802년 프랑스학술원이 1789년 이래의 인문, 자연과학의 현상과 발전에 관한 '일람표' (<프랑스학술의 역사적 일람표>,

다시에르의 보고서)의 작성을 나폴레옹으로부터 위탁받았을 때 집팔자 중의 한사람이었음.

 

 

2. 그의 위치

 

- 근대 오리엔탈리즘 초창기의 중요한 역활을 함.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작업의 체계화된 텍스트의 총체와 교육적

   실천과 학문적 전통과 동양에 관한 학술과 공공 정책의 중요한 연결을 제시함.

 

 

3. 그의 특징, 의미

 

- 빈 교회회의 이래 유럽에서 처음으로 자각적인 방법론적 원리가, 그의 작업 속에서 학문상의 규율과 동시에

   작용하게 됨.

- 자신을 수정주의적인 사업의 출발점에 선 인간임을 언제나 자각함. '자각적인 창시자'

- 세속화된 성직자와 같은 자세로 학자의 자세(철학과 수학)와 신학을 조화시키켰으며 그곳에 제시된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닌 이미 말해지고 쓰여진 최고의 부분을 발췌하여 개정한 것이었고 학생에 대한 교육적 저서를 제시함.

- <프랑스 학술의 역사적 일랍표>의 서설에서 : 한눈에 인류 지식의 전모를 간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며 지식을 보존

하고 그 지식을 직접 확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함. 이런 연극적 형태에 필적하는 유용성을 같는 것은

현대의 백화점 아케이드나 매장뿐임.

오리엔탈리즘의 초창기를 이해하는데 중요함. 일람표의 목적이란 일종의 벤담식 '원형감시시설'을 건설하는 것

었음. 선구적인 오리엔탈리스트인 사시의 명성과 결부됨. 그는 책과 규칙, 보기를 만들었다.

그 결과 동양을 둘러싼 소재, 그것을 연구하기 위한 방법, 동양인조차 가진 적이 없었던 보기를 만들어 냈다.

당시 동양 그 자체는 오리엔탈리스트가 동양으로부터 만들어 낸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오리엔탈리스트의 동양은 사시에 의해 교육적 일람표라고 하는 밀폐된 논리적 조작의 장소에 끌어 넣어졌고

그 후 스스로 현실 속에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게 되었다.

그는 아라비아 시와 같은 것에 나타난 유용성과 흥미로움을 옹호하였지만 진실로 말한 것은 오리엔탈리스트에 의해

적절하게 변형되어야 비로소 아라비아 시는 감상의 대상으로 평가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 "단편이론" - 오리엔탈리스트는 동야의 심연으로부터 유익한 보석만을 낚아 올리기 때문에 오리엔탈리스트라는

존재가 필요하며 동양 문헌 자체를 통째로 취해서는 안된다는 사시가 도입한 주장. 이는 당시 낭만주의에 공통된 관심

이었음. 동양의 문학작품은 유럽인에게 본질적으로 맞지 않기 떄문만이 아니라 독자의 흥미를 충분히 지속시킬 만한

것을 포함하고 있지도 않으며 충분한 취미와 비판정신에 의해 씌여지지도 않았으므로 발췌하는 것 외에는 간행될

가치가 없다는 것.

 

- <아랍명문집> - 사실은 오리엔탈리스트가 동양에 가한 검열을 내부에 숨기고 은폐한 것.

독자는 오리엔탈리스트가 기울인 이러한 노력을 잊고 각 문집이 뜻하는 동양의 재편성을 통하여 단선적으로 동양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동양에 오리엔탈리스트의 합리성이 장식된다. 동양의 여러원리는 오리엔탈리스트의 것이

된다. 과거에는 그 자체로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이제는 교육상 유용한 것이 된다. 과거에는 상실된 것

이었으나 이제는 발견되었다. 동양의 부족함을 보충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존재를 서양에 공급했다.

사시의 작업은 동양을 규범화 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연구자가 이 세대에서 저 세대로 계승하여 가는 '텍스트의 규범'을

낳았다. 근대의 동양이란 무질서하고 알 수 없는 존재라고 보면서 그럼에도 그것을 회복해야 할 어떤 것으로 취급한

점에 그 계보적 차원의 독창성을 갖는다.

사시는 아랍을 동양속에 배치했는데 이는 동양 그 자체를 근대적인 학문의 일람표 속에 배치한 것이었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의 학문적 전통에 속하게 되었으나 그 소재는 오리엔탈리스트가 재창조하여 라틴학이나

그리스학과 같이 백화점의 진열장에 진열될 수 있었다.

손익에 관하여 사시가 최초로 제공하고 이행한 인식론적 기본원칙에 따라 오리엔탈리스트는 각각 자신의

동양을 재창조했다.

 

에스네스트 르낭(문헌학적 실험실)

 

 

1. 그의 위치

 

사시가 오리엔탈리즘의 창시자라면 르낭은 계승자임. 타고난 자질 면에서 본다면 완전히 독창적인 인간은 아니었음.

미셸푸코가 '시대의 고문서관'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오리엔탈리즘적 진술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양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인물임. 오리엔탈리즘에 가장 중요한 기술적인 여러 특징을 부여한 그 점이야말로 문헌학이라는

학문 분야의 지극히 풍부하고도 높은 문화적 지위였음.

 

 

2. 그의 특징과 의미

 

* 문헌학 : = 문화인류학 = 언어학

 

- 니체는 자신도 문헌학자라고 공언함. 니체, 바그너, 쇼펜하우어, 레오파르디를 모두 문헌학자로 포괄하는 범주란

어떤것일까? 문헌학자라는 직업은 1777년 F.A.볼프가 자신을 부르기 위햐여 발명한 호칭.

니체가 생각한 문헌학 역시 인간적인 사업의 상징으로서 비코가 말한 대로 발생하고 만들어진 것이며 인간적 발견,

자기발견, 독창성의 한 범주로 창조된 것이다.

 

- 문헌학이란 위대한 예술가가 그랬듯이 스스로를 그가 속하는 시대와 심지어 근접한 과거로부터 역사적으로

단절시키는 방법이다. 이는 역설적이고 모순되는 것같이 생각되지만 인간은 바로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의

현대성을 실제로 특징지을 수 있다.

 

- 문헌학이 문제삼는 것은 문헌학 그 자체와 그 전문가들 그리고 현재이다. 그것은 현대적임과 동히에 유럽적이라는

   고유한 조건을 체현하는 것이다.

 

- 문헌학자의 주변에는 명백한 권력의 분위기가 있다.

 

 

* 르낭이 말한 문헌학 :

 

- 근대적 정신을 창조한 것은 문헌학자이다.

근대적 정신이란 문헌학과 같은 날에 창조된 합리주의, 비판정신, 자유주의 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15세기부터

인류가 달성한 모든 진보는 문헌학적이라고 불러야 할 정신에 귀착된다.

 

- 문헌학이란 정신적 대상에 대한 정밀과학이다. 여러 인문학에 대한 문헌학의 관계는 물체에 관한 여러 철학적 과학에

대한 물리학, 화확의 관계와 마찬가지이다.

 

- 나는 중앙에 앉아 모든것의 향기를 빨아들이고 판단하며 비교하고 결합하며 귀납한다.

이런 방법으로 나는 사물의 체계 그 자체에 도달하게 된다.

 

- 그의 저서 <과학의 미래>에는 문헌학에 대한 찬사로 가득하다. 문헌학을 진정한 인간과학으로 만들고자 희망

하면서 자신을 명시적으로 비코, 헤르더, 볼프, 몽테스키외와 같은 사람들과 동등하게 생각했고 거의 동시대의 문헌

학자와 결부하여 생각했다. 그는 문헌학을 지식 행진의 중심에 위치시켰으며 실제로 그의 저술 자체가 인류의 진보

사관의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

 

* 그의 역설성 :

 

- 1848년(2월혁명)과 관련된 저술 <부바르와 페퀴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생각해보면 그의 이런

진보사관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을 1848년 이라는 해가 불러일으킨 거대한 사회

문제에 대하여 분명히 자각적인 형태로 관련시키고자 함.

이러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기반으로 지적 학문분야 중에서 가장 관련성이 적은 분야(문헌학), 곧 인민과의 명백한

관련정도가 가장 희박하고 가장 보수적이며 가장 전통적인 분야를 선택한 점.

 

- 한편에서 본다면 문헌학이란 전 인류의 과학이고 인류의 결합과 개별 인간의 존엄성을 전제로 한 과학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론 문헌학자는 인류를 고등인종과 하등인종으로 난폭하게 구분한 인간에 불과

하고 또 시간성, 기원, 발전, 관련성, 인간가치에 관한 가장 신비한 관념을 품은 리버럴한 비평가에 불과하다.

- 르낭이 동양 셈족 그자체에 대하여 악명 높은 인종적 편견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증명되듯이.

그는 강렬한 "길드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이는 그를 민중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듬.

문헌학에 관하여 말하기 보단 도리어 문헌학적으로 말하는 사람이었음.

 

* 문헌학과 종교, 과학

 

- 기독교가 내부적으로 제시하는 역사와 비교적 새로운 학문인 문헌학이 제시하는 역사사이의 차이야말로 바로 근대

문헌학의 존재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고 르낭은 이를 완전히 이해했다. 문헌학의 중요한 성과는 비교문법학, 언어들을

어족으로 재분류하는 것, "언어의 신성기원설"을 최종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샤토브리앙이 서술하듯이 산스크리트어가 히브리어보다도 훨씬 옛날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새롭게 알았음에도 그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 콜리지 '언어는 인간정신의 무기고이다. 그곳에는 과거의 전리품과 미래의 정복을 위한 무기가 함께 저장되어있다'

- 1830년대 중반 ~ 1840년대 후반에 걸쳐 교육받은 르낭의 세대가 동양을 둘러싼 이 모든 열광으로부터 지키

고자 한 것은 언어, 문화, 종교를 연구하는 서양 학자들의 동양에 대한 지적인 필요성 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안내자가 된 텍스트는 동양 르네상스를 선언하고 동양과 서양을 각각의 기증적인 상호관계 속에 위치

시킨 에드거 퀴네의 <여러 종교의 정수>였다.

 

퀴네의 정식 - 상이한 것 이질적인 것 멀리 떨어진 것에 대처하는 학자(역사가)의 필요성을 통감함. 동양은 문제를

 제기하고 서양은 그것을 해결한다. 양자의 만남으로부터 새로운 도그마나 새로운 신이 생겨난다.

1840년대, 문헌학자로서의 수업시대에 르낭의 내면에는 더 이상 연극적인 자세는 유지되지 않았고 그것은 과학

적인 자세(문헌학)로 대체되었다.

퀴네에게 갓 태어나려고 하는 새로운 신의 관념은 낡은 신이 방치한 장소를 채우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르낭에게 문헌학자라는 것은, 낡은 기독교 신과의 모든 연관성을 완전히 단절하는 것, 그 결과 그것에 대체되는

새로운 교의(과학)가 소위 자유롭고 새로운 장소를 차지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 셈족과 셈어

- 르낭 자신이 오리엔탈리즘의 문헌학적 연구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솔직히 말함.

> 창조 : 1) 발성. 2) 과학자가 조명함으로써 그 침묵으로부터 떠오른 배경-

셈어의 경우 동양의 역사, 문하, 인종, 심성 3) 분류체계의 정식화

 

- 르낭의 자아에서 셈어가 유럽인의(따라서 그의) 동양 지배의 상징이며, 또 자신이 속한 시대를 지배하는 것의 상징

이기도 했음.

 

- 책속에 씌이고 박물관의 진열장 속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사시의 동양관계 뱔췌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하게

과장된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대상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또는 과학자)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전시하는 것이다.

 

- 생명체 및 준생물체(인도-유럽어, 유럽문화)와 그것에 병행하는 거의 기형적이고 비유기적인 현상(셈어,

동양문화)을 통합시키고자 하는 비전의 유지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유럽의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이룩한

것이었다.

 

> 기형학 - 어떠한 비정상이라고 하여도 불필요한 예외로 고찰될 수는 없다. 도리어 비정상이야말로 동일한 계층에

속하는 모든 구성요서를 하나로 묶는 규칙적인 구조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것이다.

 

* 문헌학적 실험실

 

- 특별한 문화주기율과 문화비교주의(이것들로부터 자민족중심주의, 인종이론, 경제적 억압이 부화된다) 가

도덕적인 비전을 훨씬 앞서는 힘을 부여받았다.

 

- 르낭의 역사와 학문의 세계는 특이하게 황량하고 광폭할 정도로 남성적인 세계다. 그는 그 힘을 이용하여 그 시대의

생활에 개입하고 종종 상당한 효과를 얻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이상적으로 본 역할은 구경꾼의 그것이었다.

 

- 르낭이 모든 노력을 기울인 것은 인공적으로 실험실 속에서 생겨난 것을 제외하면 동양문화에서 생겨나는

권리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문화가 낳은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엇다.

 

- 문헌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것은 문화란 어떤 의미에서 구축물이며 하나의 접합체이고 심지어 하나의

창조물이고 준유기체적인 구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르낭에 관하여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시대와 자민족중심주의적인 문화에 의해 생겨난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느정도 자각했는가 하는 점이다.

 

"자국민보다 현명하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사람은 자기 조국에 대하여 고통을 느낄 수 없다.

국민들엥게 가혹한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과 함께 과도하게 올바르게 사는 것보다 도리어 국민과 함께 오류를 범하는

쪽이 났다."

 

제 2부

 

♦오리엔탈리즘에 고유한 어휘서술 기능이나 제도가 강화되어 가는 과정

ex)칼마르크스의 인도론

 

♦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어휘서술 기능과 제도가 강화되어가는 메커니즘이 본래는 그것과 모순된 개개인의 인간적

경험에 대해서도 어떻게 하여 독특한 방법으로 작용을 미칠 수 있었는가.

-학술적 성과/ 동양에 산다는것

 

♦동양과 현실상의 실존적 접촉을 가지며 스스로의 전통성 피력

- 원정나폴레옹 은 이런 전통의 초기 윤곽을 규정함

- 19세기 동양이 즐거 여행하고 저술하는 장소였다는 사실이 이런 사태를 더욱 풍부하고 복잡하게 만듬

-구제척인 경험을 추구하며 동양을 여행하며 동양에 있을 때조차 서양에 있고자 하였는가

1)학문적인 소재를 전문적 오리엔탈리즘에 공급한다는 특별한 과제를 위해 의도를 갖고 체류를 학문적인 관찰의

한 형식으로 생각하는 저술가

ex) 레인의 <현대 이집트인의 풍습과 습관>

2) 개인적 의식의 스타일을 비개성적 오리엔탈리즘에 의한 정의의 희생으로 삼지 않으려고 하는 저술가

ex) 버튼의 <메디나와 메카의 순례>

3)동양의 현실적 여행을 어떤 마음의 근저에서 간절히 느끼며 그 실현을 급학한 사업의 달성으로 삼는 저술가

ex) 네르발의 <동양여행>

- >유럽인이라는 의식이 갖는 이기적인 권력에 의존

->동양을 위하여 창조된 모든 해석, 모든 구성은 사실상 동양의 재해석이고 재구축

 

♦ 레인의 <현대 이집트인의 풍습과 습관>

-유럽인으로서 그가 갖는 비밀의 권력을 유지하면서 그 주위의 모든 것을 비평하고 확보하며 소유

-일방통행의 거래속에서 얻어진 서술

-연극적인 이중인격과 이야기 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주체를 조작, 세부묘사의 수법

-학문적인 신뢰성과 정통성 확보

: 인간생활에 대한 보통의 설화적인 경과를 방해하는 방법

: 이집트인-동양인의 생활에서 자손증식 과정으로부터의 이탈

 

제3부. 오늘의 오리엔탈리즘

 

최근의 전개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을 할당받을 것을 약속받은 유대민족은(벨푸어 선언)

이스라엘을 건국했고 중동지방은 심각한 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로 인해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정책을 결정하는 중심국가로 떠오른 미국은 아랍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오리엔탈리즘은 문헌학적인 학문 분야가 아닌 사회과학의 전문분야의 하나로 전환되었으며 오리엔탈

리스트들은 지역연구 전문가라는 얼굴을 가지고 미국의 대 아랍 정책 결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 대중의 이미지와 사회과학적인 여러 표상.

 

1973년의 4차 중동전쟁 이래 아랍은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한다. 그러한 배경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로 아랍이 반 시오니즘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아랍이 이스라엘의

건국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인식되면서 아랍은 이스라엘과 서양의 존립을 파괴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둘째로 아랍이 석유공급자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3~1974년의 석유 파동으로 세계의 선진국들은

심각한 경제 불황을 겪었고 그로 인해 아랍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원인은 전통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이 주장하던 동양과 동양인에 대한 이미지와 맞물리면서 아랍에

부정적이고 왜곡된 이미지를 부여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오리엔탈리스트들은 문헌연구를 통해 동양을 해석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저작은

기본적으로 아랍의 문학을 인용하여 저술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이러한 전통을 벗어났다. 사회

과학자로 전환된 미국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지역연구의 전문가를 자처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문학적인 텍스트보다

 ‘사실’이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그 결과 아랍은 ‘ 태도’ 나 ‘ 경향’, 통계상의 숫자와 같은 단순한 개념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문헌연구를 벗어나게 되자 동양의 언어 학습은 정치적인 목표를 이루고 선전활동을 하기 위한 도구로 전환되었다.

 

2. 문화관계 정책


시오니즘의 지지와 팔레스타인 식민이 미국의 국가이익에 영향을 미치자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썼던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후, 미국의 중동국가들을 대상으로 이권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이를 증명한다.

1950년 미국의 모티머 그레이브스가 정의한 ‘ 문화관계정책’은 미국이 아랍을 이해하는 것이 국가이익과 결부된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써 국가안전보장의 한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아랍을 이해

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바탕엔 오리엔탈리즘이 전통적으로 주장해 온 동양과 동양인에 관한 사고가 깔려있다.

첫째 서양은 합리적이고 인도적으로 우월하게 발전해 왔고 동양은 정체되어 있고 열등하므로 양자 간에 절대적이고

체계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현대 동양의 현실에서 알 수 있는 사실보다도 문헌에 근거한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셋째, 동양은 영원히 획일적이고 자기를 스스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양은 본질적으로 두려운 존재이므로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정책에 관여하는 지역연구자

들의 사고에는 여전히 이러한 전통적인 오리엔탈리즘이 자리 잡고 있다.


3. 단순한 이슬람


시오니즘 운동으로 인해 셈족이 두 갈래로 분화되면서 아랍은 좋은 아랍인과 나쁜 아랍인 두 가지로 단순화 되었다.

이러한 단순화로 인해 나쁜 아랍으로 규정된 이슬람인들은 테러리스트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아랍이 피의 복수를 즐기며 심리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정의라는 관념이

결부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그러한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하려 했다. 따라서 아랍세계에서 일어난 혁명적인 대변동

들은 적절하게 설명될 수가 없었다. 예컨대 루이스와 같은 학자는 1945년 벨푸어선언 기념일에 일어난 이집트의 데모

행진을 반유대인 폭동이라 규정함으로써 아랍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었다.



오리엔탈리즘이 가지는 문제점은 오리엔탈리즘이 주장하고 있는 ‘ 동양’ 그 자체가 하나의 구성된 실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탈리즘은 심지어 동양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랍지역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인 이익으로 인해 오리엔탈리즘이 미국에 확산되었고 그렇게 확산된 오리엔

탈리즘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 새로운 제국주의’ 에 적용되었다. 동양은 오리엔탈리즘을

수용함으로써 그러한 제국주의에 길들여지고 있다.

일부의 동양에서는 지식계급이 오리엔탈리즘을 받아들여 자국을 미국의 지적, 정치적, 문화적인 위성국가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과거 영국과 프랑스가 재력과 정치적인 위치를 이용해 동양의 지적인 지평선을 지배했던 것처럼

지금은 미국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기호의 획일화가 생겨났으며 지식인들은 미국에서

받아들인 근대화와 진보, 문화에 관한 여러 관념에 정통성과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요컨대 현대의 동양은 오리엔

탈리즘이 구축한 ‘ 동양’의 이미지를 받아들여 스스로를 동양화시키고 있다.

 

 

(함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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