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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일반

양잠의 기원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3.07.16|조회수127 목록 댓글 0

양잠의 기원은 어느때인가?

지나 대륙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누에치기 양잠, 고치를 켜 실을 뽑는 소사( 絲), 비단을 짜는 직주(織綢)를

시작한 곳으로 임혜상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나사가도 그 주인공은 바로 동이 제 족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양잠의 기원에 대한 지나 사가들의 관점은 일시에 해결하기 어려운 허다한 관점이 존재한다.

우선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잠사에 관한 기록을 모두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단군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들을 두루 교화

하였다.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

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에게는 호적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희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에게는 군대를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장려케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미쳐 태평

치세를 이루었다. (환단고기 삼성기 전 상편 三聖記 全 上篇 안함로 지음)

*병진(BC,425)년, 주나라 고임금(BC,440-425)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고 바꾸고 백악으로부터 또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에 팔조를 법으로 하고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일과로 하며 하늘에 제사지냄을 종교로 하고 누에기르

기에 힘쓰도록 하였다.(환단고기 삼성기 전 상편 三聖記 全 上篇 안함로 지음)

*경자 93년(BC 2241) 단군께서 버들궁전에 계셨는데 흙계단이 저절로 생겼고 풀숲은 없어지지 않으니 박달

나무 무성한 그늘에서 곰 호랑이와 더불어 노닐며 소와 양이 크는 것을 보셨다.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며 고기잡이를 가르치니 백성들은 남는 물건을 나라 살림에 보태었다.(환단고기 단군세기)

*2세단군 부루 재위 58년 신축 원년(BC 2240) 단제께서는 어질면서 다복하셔서 재물을 저장하니 크게 풍부

하였으며, 백성과 더불어 산업을 다스리시니 한사람도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는 자가 없었다. 봄 가을로 나라

안을 두루 살펴보시고는 하늘에 제를 올려 예를 다하였다. 여러 왕들의 잘잘못을 살피시고 상벌을 신중히 하였

으며 도랑을 파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며 농사 짓고 뽕나무 심을 것을 권장하였다. 또 기숙사를 설치하여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는 크게 진보하여 그 명성이 날로 떨쳐졌다.(환단고기 단군세기)

지나 대륙에는 동이족에 관련한 많은 기록을 인멸해 그 기록은 앞으로도 계속 찾아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지나 대륙에서 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바로 가장 널리 유행하고, 가장 크게 영향을 준 한 가지 논점은

황제의 동이족 부인 누조( 祖)가 양잠의 시조라는 설이다.

*참고:전욱고양은 말할 것도 없이 동이족이지만 사마천이 화하의 시조로 내세운 황제마저 산동성의 수구에서 백의

민족(백민)으로 태어났음을 밝히고 있는 바다. 수세기에 걸친 부권에서 모권사회의 대립을 통해 지나족의 시조로 일컬

어지고 있는 동방족의 후예 황제헌원이 서방족의 모권사회 속에 데릴사위의 형태로 흡수되어 들어간다. 이를 증명하는

기록이 「사기 5제 본기」의 '황제는 소전의 아들(黃帝者 少典之子)이라는 대목과 동기록 '황보익이 말하되 황제는

수구에서 태어나서 희수(姬水)에서 성장하였으며 헌원에서 거주했다'라는 대목, 그리고 「제계사기」의 '황제는 백민

(白民)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동이에 속했다(自屬東夷)'는 대목, 황제는 백민 출신으로 동이에 속한다는(黃帝生於白民...

自屬東夷:『楚史』)  대목이다. 사마천의 「사기」『5제본기』에 3 황 5 제시대가 5 백 년인데, 황제는 100여 년 재위

했으며 황제는 유웅국(有熊國) 소전(少田)의 아들로 소전은 인명이 아니라 (환웅국의) "제후국 이름"이라 하였다.



누조는 전설 가운데 북방부락의 수령인 황제 헌원(기원전 2550년)의 원비(元妃)다. 황제가 북방부락의 수령

이라 표현하는 것만 보아도 황제가 자신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 부근을 떠난 수령이라는 점에서 치우와의 전쟁

에서 패하고 물러났음은 확실하다. 「수서(隋書)」<예의지(禮儀志)>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북주(北周:557-581)

누조를 "선잠(先蠶)" 즉 누에치기를 시작한 신으로 모셨다. 「통감외기(通鑒外紀)」에 기재하기를, "서릉(西

陵)씨의 자녀 누조( 祖)가 제(帝)의 비(妃)가 되어, 백성에게 누에를 기르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명주실을

관리해 의복 제조에 이바지했다."

「로사(路史)」에 칭하기를:"복희가 누에를 치고, 서릉(西陵) 씨가 양잠을 시작했다. 그러므로 「회남잠경(淮南

蠶經)」에 이르기를, '서릉(西陵)씨가 누에농사(蠶稼)를 권장하고, 친히 누에치기를 시작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송(宋), 원(元) 이후 성행하기 시작했다. 20세기 50년대까지 쭉 지나의 양잠 기원 문제에 대한 유관 문헌의 내용

은 기본적으로 찬동할 만 해서 많이 인용, 서술되었다.

1926년, 고고학자들은 산서성 하현(夏縣) 서양촌(西陽村)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아주 잘 정리된 반쪽의 잠충

(蠶 :누에풀,고치)을 발굴했다. 이는 세계 학술계의 지대한 흥미를 끌었다. 사람들은 이 반쪽의 잠충(蠶 )을 누조

( 祖)가 잠사를 시작했다는 설과 더불어 상호 인증(印證)하고, 이로 말미암아 앙소(仰韶) 문화시기의 황하유역에

양잠업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50년대로부터 사학계의 적지 않은 사람이 누조( 祖)가 잠사를 시작했다는 설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의

주요이유는 이 설법이 출현한 것이 비교적 늦다는 이유에서였다. 「사기(史記)」에는 비록 황제가 동이족 서릉

(西陵)씨의 여식 누조( 祖)에게 장가들어 처를 삼았다고 나오고 있으나, 누조가 잠사를 시작했다는 설명은 없으니,

가히 한초(漢初)에는 아직 이러한 설법이 출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로사(路史)」가운데 사용한 「회남(왕)잠경(淮南(王)蠶經)」은 일반인이 위서(僞書)로 여기고 있다. 비록 그럼

에도 불구하고 북주(北周)는 누조( 祖)를 잠사의 시조로 존경했는데, 단 이 이전의 북제(北齊:550-577)도 일찍이

황제(黃帝)를 잠사를 시작한 신으로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동시에, 산서성 하현(夏縣) 서양촌(西陽村)의 반쪽의 잠충(蠶 )이 던지는 의문점에 대해 약간의 고고학자들은

이의 발굴이 당대의 것이 아님에 기대어, 대개 이는 하나라 가마솥인 "하내(夏 )"의 예와 같이 후세에 혼입해 들어

간 물건으로 보고있어, "화북 황토지대 신석기 시대 유적지의 문화층 가운데서 나온 잠사(蠶絲)의 재질은 그와

같이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기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신석기 시대에 무슨 예리한 칼끝 같은 도구가 있어서 그같이 예리하게 분할해 자를 수 있겠으며, 아울러 극히

정교하고 가지런한 가장자리를 만들 수 있었겠는가?(「아국고대잠상사주적역사(我國古代蠶桑絲綢的歷史)」)

「문물(文物)」 1972년 2호를 보면, 이러한 이의와 질의가 비록 아주 많은 지지자를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륙 내 유관 연구자의 찬동은 없다.

사람들은 누조가 잠사를 시작했다는 "누조시잠설( 祖始蠶說)"이, 비록 후세인이 추측해 만들어 넣은 것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는 하나, 일찍이 황제시대에 양잠업이 이미 있었다는 사실은 가히 믿을 만 한 것이

여기고 있다. 자못 권위를 갖춘 「중국방직과학기술사(고대부분)」(진유직(陳維稷) 주편(主編) 과학출판사

1984)는 이러한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하나라 가마솥인 "하내(夏 )"의 의견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반박하는 글을 발표했다. 일인(日人)학자 포목순랑

(布目順郞)이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강우량이 극히 적은 황토고원에 있어 잠충(蠶 )은 4,5천 년 이상 완전한

보존이 가능한데, 그는 당시 사람이 사용하던 생산공구를 본뜬 모의 공구-엷은 석편과 골편을 이용해 시험을

진행한 결과, 절개된 잠충(蠶 )의 절개부위가 확실히 곧고 정교하게 절개됨을 확인했다.

별도로 50년대 이래로 장강(長江:양자강) 하류지구에서, 일 계열의 신석기 시대 유적지 발굴은 양잠기원의 논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1958년, 절강(浙江) 오흥(吳興) 전산양(錢山  ) 유적지에서 실로 짠 제품이 발굴되었는데

감정결과 그 절대 연대가 지금으로부터 4,5천 년 전 것으로 밝혀졌고, 1963년, 강소(江蘇) 오강(吳江) 매언(梅堰)

유적지에서 누에무늬(蠶紋)의 장식이 그려진 흑도기가 발굴되었고, 1977년, 절강(浙江) 여요(余姚) 하모도(河姆渡)

유적지에서 방직공구 세트들과 잠문(蠶紋)과 편직문(編織紋) 장식의 작은 어금니 조각 그릇(牙彫小 )이 출토되었다.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

많은 학자들은 잠문(蠶紋) 장식 도자기와 이러한 아조(牙雕)의 출현이, 당시 인류가 잠사의 인식정도에 대해

인류와 잠사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표명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잠문(蠶紋)과 편직문(編織紋)에서 방직

공구의 출토는 방직에 있어 잠사의 응용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발굴을 종합해 보면, 대륙의 동남

지구(양자강 하류) 역시 양잠업의 일개 발상지라 할 수 있으며, 이곳에서 양잠을 개시한 시대는 심지어 아주 오래

전 전설중의 황제헌원과 누조가 대표하는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절강성 지구(춘추시대의 월나라)의 고대문화는 중원보다 낙후되어 전산양

(錢山 ) 유적지 하층은 여러 시대의 유물을 포괄할 가능성이 있는데, 심지어 부분적으로 섞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보는 것은, 당시 전산양(錢山  ) 고고학 발굴에 참가한 학자들은, 발굴과정에 진행된 사실에 대해 언급

하기를, 기본적으로 뒤섞였을 가능성을 아예 처음부터 배제했다고 회고해 인정한다.

그러나 이를 회고한 시간과 발굴시간과의 차이가 비교적 긴 것으로 말미암아, 어느 세부적인 마디 구분을 확정적

으로 판정하기에는 곤란함이 있다. 또 사람들이 인정하듯이, 전산양(錢山 ) 지구에서 출토된 사직물(絲織物)에

사용된 섬유는 항상 집에서 양잠한 섬유가 아니고, 떡갈나무(상수리나무) 잠사 등 등 야생잠사도 있다고 인정한다.

방직계에 관련된 인원이 석포(石脯) 절편과 현미경으로 투영해 보는 방법을 사용해 전산양(錢山 )에서 출토된

견직물 조각을 거듭 새로 감정하니 그들이 확실히 집에서 인공 양육된 잠사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들은 출토된 견직물 조각이 아주 적은 이유로 인해서 탄화과정이 아주 심해 분석작업이 한계에 도달

했다고 인정했다. 이외에, 하모도 유적지 등지에서 출토된 기물상의 무늬장식 연구는 필경 누에가 아니면 기타

곤충의 형상이라는 한결같지 않은 의견이 존재하고 있다. 임혜상이  양자강의 비옥한 동이 9족의 나라에서 실크를

처음 재배했음을 전하고 있듯이 고구려의 10월 동맹(東盟) 제천행사에서는 모든 사람의 의복이 비단에 수놓은

옷을 입고 금, 은으로 장식한다 했다.(「삼국지」<고구려전>)

또 당(唐)의 영호덕분(令狐德 ) 등이 찬(撰)한 「주서(周書)」 <고려전>에는 장성한 남자의 관(冠)은 골소(骨蘇)라

부르는데, 대부분 자색의 얇은 비단으로 만들며 금은을 섞어 만든다(多以紫羅爲之 雜以金銀爲飾) 하고 세금부과는

명주와 베 곡식으로 한다(賦稅則絹布及粟) 하였다.    

"래이(萊夷:동이 9夷의 하나)는 목축을 했으며, 공물 광주리에는 산뽕나무 실이로다.(闕  絲)"(우공) "래이는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래산(萊山)의 이(夷)다. 제나라에 래후(萊侯)란 관직이 있으니 래인은 곧 지금의

래주의 땅(산동, 강소) 출신이다. 목축을 한다는 것은 가히 방목함을 말하는 것이니, 이(夷) 인은 목축업을 생업

으로 삼았다. 산뽕나무는 뽕나무이니 산뽕나무의 실은 질겨서 거문고, 가야금의 현으로 사용된다. 소(蘇) 씨가

말하기를 생각건대 동쪽의 래(萊)에 이 실이 있어서 그림 있는 비단이 되며 그 견고하고 질김이 이상하여 래인은

이를 일러 '산누에고치'라 부른다."(채주)

우공(禹貢)에 "기주(冀州)......조이피복(鳥夷皮服)"이라 하였고, 「채주(蔡註)」에 "해곡(海曲)을 섬(島)이라 하고,

해도(海島)에는 이(夷)가 사니, 가죽옷으로 공물을 바친다."했다. 「상서」<금고문 주소(注疏)>에 "사가 사마천이

도(島)를 조(鳥:새 조, 땅이름 작, 섬 도=해곡(海曲)이라는 뜻이 있다.)로 바꾸었으니, 마융(馬融)이 가로대 조이

(鳥夷)국 정(鄭:정강성으로 불리는 정현이 스스로 동이족의 하나인 조이족이라 고백)씨가 말하기를 조이(鳥夷)는

타고날 때부터 새와 짐승을 먹는 동북의 백성이라 했다."

「우공(禹貢)」에 "양주(揚州).....도이(島夷)는 풀로 짠 옷을 입으니, 공물바구니인 대나무 광주리에는 무늬비단

(織貝), 공물 보따리에는 귤, 유자, 가는 삼베"라 했고, 「채주(蔡註)」에 "도이(島夷)는 동 남해의 섬에 훼초(卉草)

로 사는 이(夷)이다....치패(織貝:무늬비단), 금(錦:비단)이 뛰어난데, 무늬비단이 돈(貝文)이 되었으니 시(詩)에

이른 패금(貝錦)이 이것이다. 지금도 남이(南夷)의 목면(木棉:면화)은 만듦새가 정밀하고 좋으니 또한 이를 일러

길패(吉貝)라 한다. 해도(海島)의 이(夷)는 초목을 입고 조공을 바치니, 만듦새가 정밀한 무늬비단(織貝)을

광주리에 넣어온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복희가 누에를 가르쳤으며 복희가 사람들에게 잠사와 실을 잣는 섬유식물 사용을

가르치고, 사람에게 잠사를 가르쳤다는 다음의 기록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다.-《路史汲記·(羅注引<星圖

要覽>)》 云(노사급기 나주에 성도요람을 인용해 말하기를),  伏羲氏化蠶(복희가 누에를 가르쳤다) 上羅注引

<白氏帖> 云(나주를 인용해 "백씨첩"이 이르기를) "伏羲化布 敎人用蠶絲 植物纖維紡線(복희가 사람들에게 잠사와

실을 잣는 섬유식물 사용을 가르치고) *網織布 縫衣著裝 使人們抵禦寒冷的能力有了大提高(천을 짜 옷을 봉제해

꾸며입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추위를 막는 능력을 제고시켰다) 다시 말해 양잠은 바로 동이족의 조상이신 태호

복희때부터 시작했으니 바로 배달국 환웅시대부터 시작했음을 확실히 하고 있는 셈이다.

《路史汲記·(羅注引<星圖要覽>)》 云(노사급기 나주에 성도요람을 인용해 말하기를),  伏羲氏化蠶(복희가 누에를

가르쳤다) 上羅注引 <白氏帖> 云(나주를 인용해 "백씨첩"이 이르기를) "伏羲化布 敎人用蠶絲 植物纖維紡線(복희가

사람들에게 잠사와 실을 잣는 섬유식물 사용을 가르치고) *網織布 縫衣著裝 使人們抵禦寒冷的能力有了大提高

(천을 짜 옷을 봉제해 꾸며입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추위를 막는 능력을 제고시켰다)

 

황제의 동이족 부인 누조(女+累,祖)의

양잠(養蠶) 고사

<필자가 2002년 8월 섬서성 황릉 현지에서 채취한 향토사료 국내 최초 공개>

*
타계한지 얼마 안되는 중국의 갑골문 고고학자  낙빈기는 「금문신고(金文新攷)」에서 황제의 부인 누조의

실체에 대해 황제와 치우의 싸움의 본질을 밝히면서 기존의 지나사학자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게 다음과 같이

파격적으로 말한다.
-결국 신농은 황제에게 패해 임금자리를 내놓게 되는데 이에 신농의 어머니계 군주인 치우가 지금의 탁록( 鹿)

에서 황제와 수년간 전쟁을 벌인다. 그래서인지 황제는 임금자리에 앉지 못하고 아들인 소호금천(기원전2474-

2468)이 제위를 잇는다. -
여기서 신농은 염제신농이 아니고 염제국의 말왕인 염제 유망인 줄은 이제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필자는 낙빈기가 말하는 이 대목이 아주 쓸모있는 대목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기존의 학자들은 치우가 황제에게

패했다 왜곡하고 있지만 낙빈기는 환단고기의 기록대로 치우에게 패해 역사에서는 동이족으로 더 많이 어필된

아들 소호에게 제위를 넘기고 도망간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마융과 훈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정현은

「사기」<오제본기> 황제편에서 치우가 천하를 제패했음을 말한다.(鄭玄云 蚩尤也覇天下)

치우천왕과 황제의 전쟁에 대한 진실은 환단고기에도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낙빈기가 지목하는 이 대목은

황제의 딸 한발(旱魃) 과 관련한 다음의 전설에서도 그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극심한 가뭄을 일컬어 한발이라 한다. 한발의 발(魃)은 여신의 이름으로 그녀는 전설에 따르면 황제(黃帝)의

딸로서 몸은 이글거리는 용광로와 같았다 한다. 당시 황제와 대권다툼을 하던 동방의 천제 중에 치우가 있었는데

짙은 안개를 일으켜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유인하여 죽이곤 했다. 황제는 치우가 용의 울음소리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응룡과 신룡을 불러 대비코자 했다. 그러나 응룡과 신룡이 조화를 부르기도 전에, 치우는 선수를

쳐서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로 하여금 폭풍우를 일으켰다. 황제의 군대는 궤멸되고 말았다.

황제는 딸을 불렀다. 용광로와 같았던 여신 발(魃)이 나타나자 폭풍우는 그쳤지만 그러나 폭풍우를 잠재우느라

기진맥진한 발은 기진맥진하여 인간 세상에 머물고 말았다. 그녀가 머무는 곳은 용광로처럼 뜨거워 산천초목이

말라죽고 식수가 고갈되었다. 그녀가 나타나는 곳마다 비 한방울을 구경할 수 없었으므로 사람들을 그녀를 한발

이라 하며 미워했다.

이에 아버지는 딸에게 적수(赤水) 이북에만 살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방랑벽이 있었던 그녀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사람들은 적수쪽으로 도랑을 파놓고 기도를 올렸다.."당신 집으로 어서 가주세요." 사람들의 기도를

들은 한발은 미안하여 사라지곤 했다 한다.-

그러나 이와같이 치우천왕에게 패한 황제의 전설 일화는 무슨이유에서인지 후일 우임금때 쓰여진 「산해경(山

海經)」에서 황제와 맞선 형천(刑天)과 과보의 일화를 말하면서 바꿔치기되고 만다.
  
*「산해경(山海經)」 해외서경(海外西經) 편에, 形天與帝至此爭神, 帝斷其首, 葬之常羊之山…형천은 황제와

이곳에 이르러 신의 자리를 두고 싸움을 했다. 황제는 그의 머리를 잘라 상양산에 묻었다

*山海經復涉  (자랑할 과誇에서 말씀언 뺀 글자 과父謂應龍(黃帝神龍)已殺蚩尤又殺誇父,  (大荒北經), 應龍殺蚩

尤與 誇父, (大荒東經), 誇父者, 大荒北經云, 后土生信, 信生誇 父.  而海內經謂后土爲炎帝之裔, 是誇父亦炎帝之

裔也.(과장할 과(誇)에서 말씀언을 삭제하면 자랑할 과이고 어버이 부는 보로 읽는다 글자 지원이 부족해 자랑할

과 대신 과장할 과誇로 쓴다)
-산해경 과보(誇父)편에 의하면, 응용은 황제의 신룡(神龍)인데 치우(蚩尤)를 죽였으며 또한 과보(誇父)도 죽였

다고 적고 있다.  대황북경에서는 응용이 치우와 과보를 죽였다. 대황동경에서는, 과보(誇父)는 대황북경에서

이르기를, 후토가 신을 낳고, 신이 과보를 낳았다. 해내경(海內經)에 의하면, 후토는 염제(炎帝)의 후손인데,

이에 과보 역시 염제의 후손이다.

*在黃帝與蚩尤之戰中,誇父自亦當參加蚩尤戰團, 因而始相繼爲應龍所殺蚩尤與 父喪亡後, 乃又有刑天舞其干戚,

與帝爭神.  刑天者炎帝之臣, 或亦炎帝之後也.… 則刑天者, 亦猶蚩尤誇父, 奮起而爲炎帝復仇, 以與黃帝抗爭者也.
-황제와 치우의 전쟁 중에 과보는 스스로 치우의 전단에 참가했다. 인해 처음과 서로 연결한다면, 응용이 치우와

과부를 죽여 장사지내고 난 후에 또다시 형천이란 자가 있어 방패와 도끼를 휘두르며 제왕과 신의 자리를 두고

싸우려 했다.

형천은 염제의 신하라고도 했고, 염제의 후손이라고도 했다.…   즉 형천은 치우와 과보와 같이 염제의 원수를

갚고자 떨치고 일어나, 황제와 맞서 싸운 자이다.


낙빈기가 해석하는 혈통 계보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황제는 신농의 모일급 정비가 낳은 딸 누조( 祖)와 결혼한

신농의 큰 사위고, 소호금천은 신농의 자일급차비가 낳은 딸 소진(小辰)에게 장가든 작은 사위다.

낙빈기가 바라보는 세계는 부권제가 아닌 모권제이므로 외가의 권력이 황제를 좌우한 것으로 본다. 황제가 도망

가고 아들 소호가 제위를 잇자 신농계열에서는 소위 "구려(九黎)의 난"이 일어나 7년 만에 소호는 제위를 신농의

손자이자 황제의 외손자인 전욱고양에게 넘긴다.

* 동이족은 상고시대부터 양잠을 시작해 각 시대의 조정에서 왕비들이 양잠의 책임자로 백성들의 양잠을 玲�

수범해 왔다. 특히 가장 저명한 것이 양자강 유역의 동이 9려(黎) 족(래이족)과 동이 묘족의 양잠은 아주 유명

하여 그 전통이 지금의 항주 소주 인근에 아직 남아 대륙의 특산품이 되고 있다.

그럼 누가 양잠을 처음 시작했는가? 이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에 대해 국내에서는 아직 상고사학으로

끌어올릴 사료는 없다. 다만 환단고기나 단기고사 등에 환웅시대의 잠사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우리민족이

잠사를 하는 것이 아주 당연한 듯이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태호복희가 태어난 감숙성 성기(成紀)- 곧

지금의 천수(天水)시 복희 사당에 들르면 다음과 같이 복희가 누에를 가르쳤으며 복희가 사람들에게 잠사와

실을 잣는 섬유식물 사용을 가르치고, 사람에게 잠사를 가르쳤다는 글을 만날 수 있다.

《路史汲記·(羅注引<星圖要覽>)》 云(노사급기 나주에 성도요람을 인용해 말하기를),  伏羲氏化蠶(복희가

누에를 가르쳤다) 上羅注引 <白氏帖> 云(나주를 인용해 "백씨첩"이 이르기를) "伏羲化布 敎人用蠶絲 植物纖維

紡線(복희가 사람들에게 잠사와 실을 잣는 섬유식물 사용을 가르치고)

*網織布 縫衣著裝 使人們抵禦寒冷的能力有了大提高(천을 짜 옷을 봉제해 꾸며입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추위를

막는 능력을 제고시켰다) 다시 말해 양잠은 바로 동이족의 조상이신 태호복희때부터 시작했으니 바로 배달국

환웅시대부터 시작했음을 확실히 하고 있는 셈이다. 동이족은 상고시대부터 양잠을 시작해 각 시대의 조정

에서 왕비들이 양잠의 책임자로 백성들의 양잠을 솔선 수범해 왔다.(환단고기 참조 요) 특히 가장 저명한 것이

양자강 유역의 동이 9려(黎) 족(래이족)과 동이 묘족의 양잠은 아주 유명하여 그 전통이 지금의 항주 소주 인근

에 아직 남아 대륙의 특산품이 되고 있다. 특히 치우천왕의 묘예인 동이 묘족은 지금도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

을 전통적으로 입어오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지나의 양심있는 학자 임혜상은 대륙의 모든 실크는 양자강 유역의 동이 제 족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주나라때에도 이들 동이족이 궁중의 모든 비단을 공급했으며 심지어 서역으로 향하는 실크로드를 개척한

주인공도 바로 그 실은 동이족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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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양자강 중류 호남성 동정호 주변  4대문명보다 앞선 양자강 문명 발굴Click!
2.벼농사와 밀접한 관련, 최초 문명의 양자강Click!
3.양자강의 도작문화 유적지 Click!-
상기 1,2,3번을 읽으면, 최초의 벼농사 지역인 동이 제 족의 상고대륙사의 유적지에 대해  한반도를 제끼고 일본

야요이 문화의 직접적인 뿌리로 이어보려는 일본상고사학계의 고심을 이해할 수 있으며 반대로 대륙고고학으로

광역화된 일본 고고학계의 거시적인 학문태도와는 달리  해방이후 지금까지 반도고고학에 머물고 있는 한국

강단사학계의 한심한 실정을 다시한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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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족은 지나족이 황별의 시조로 내세운 황제헌원의 부인과 관련된 양잠고사를 내세워 마치 양잠이 지나족에

의해 시작된 것 인양 오도하려 하고 있지만 다음의 황제헌원 부인 동이족 누조의 양잠고사는 역설적으로 동이족

의 면면한 양잠의 역사를 각인해 줄 뿐이다. 참고로 황제는 4인의 여자가 있는데 정실부인은 누조(女+累,祖)로

동이족 후손답게 근로 총명하고 양잠을 가르치고 직조제의했다하며 후인이 "先蠶娘娘"이라 불렀다 하며 나머지

3인은 방뢰(方雷), 동어(丹+터럭삼,魚), 모모(女+莫,母)다. 모모(女+莫,母)는 장상(長相)이고 가장 추했으나

심지가 선량하고 가장 현덕했다 한다. 자식은 모두 25인으로 14인이 새 성씨를 가졌다. 황제는 어머니는 서교

(西橋)씨의 여자인 부보(附寶)로 부보는 24개월만에 황제를 낳은 것으로 사료상 되어 있으나 역시 신비화하기

위해 왜곡된 것이다.

황제의 처 누조는 부락의 부녀를 데리고 산 위에 올라 야생 과일을 따러 산 위에 올라갔다. 태양이 막 얼굴을

드러낼 때, 그녀들은 키 작은 산 위에 기어올랐다. 산 위의 키 작은 나무 위에는 빨갛고 붉은 작은 열매가 열렸

는데, 누조는 나이가 많은 부녀 몇 몇은 기다리게 하고 나이 어린 여자아이들을 시켜 그 열매를 따오게 했다.

태양이  산허리 위로 반쯤 얼굴을 내밀자, 그녀들은 옆에 있는 큰 산 위로 올랐다. 몇 그루인지 셀 수 없는

태고적 나무 위에 맑은 황색을 띤 적지 않은 열매가 열려 있어서, 누조는 임신한 부녀는 기다리게 하고 자신이

직접 신체가 건강한 소수의 부녀를 거느리고 다른 산 위로 매달려 올랐다. 태양이 온전히 머리를 들자, 그녀

들은 세 번째 산 위를 타고 올랐다.

산 위의 가파른 절벽 위에 붉고 검은 색의 작은 열매가 만발해 있어서 누조는 남은 부녀를 데리고 절벽 위의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이 열매는 비록 먹음직스러워 보였으나, 열매는 많지 않았다. 누조는 자기 혼자 다른

산위로 올라 열매를 찾기로 결정했다. 태양이 서산 위에 걸리자  , 누조는 네 번째 산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뜻하지 않게 산 고개 옆에 초록으로 울창한 나무 위가 모두 실로 작은 열매로 가득 찼음을 발견했다.

"이 곳은 가히 우리가 찾고 있던 바로 그 곳이다. 오늘은 능히 적지 않은 열매를 딸 수 있게 되었다. 내일 다시

이곳에 올 수 있다. 부락 사람이 가히 이 열매를 오랫동안 잘 먹을 수 있으니 아주 잘 되었다."

태양이 점점 지기 시작해 산 뒤로 숨으려 했다. 누조(女+累,祖)는 곧바로 노곤한 허리를 일으켜, 태양을 바라보고

또 손가에 놓인 열매를 바라보니, 한줌의 열매로 그치기에는 너무도 원치 않는 것이어서, "열매가 너무 많으니,

사람들을 데리고 여러 번 오면 충분히 딸 수 있어!" 누조는 나긋나긋한 허리 아래 큰 광주리를 준비하고, 수 차례

힘을 쓰니, 광주리를 지고 일어날 수 없었다. 이 때 누조(女+累,祖)는 가까스로  위장이 텅빈 나머지 허기져서

사지가 무력한 것을 깨달았다.

누조(女+累,祖)는 열매 하나를 입에 넣고 깨물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깨지지가 않아서, "이 종류 열매는 삶아야

겨우 먹을 수 있겠군!" 누조(女+累,祖)는 단지 허리춤 사이의 가죽 주머니 속으로부터 한 덩어리 고기를 꺼내

들었다. "먹기가 안 좋지만, 힘을 들이면 먹을 수 있어!" 누조는 고기를 씹어 목에서 배로 넘기려 노력했다.

그녀는 또 손을 끌어 몇 조각 나뭇잎을 입에 넣어  씹어 갈증을 느끼는 인후를 다소 적셨다. 날이 저물자 누조

(女+累,祖)는 큰 광주리를 등에 지고 일어나려 노력한 끝에 겨우 비틀비틀 뒤뚝뒤뚝 거리면서 산 아래를 향해

하산했다. "빠르게 달리자, 모닥불 가의 사람들이 아직도 나를 기다릴거야!" 누조(女+累,祖) 는 황혼에 접어든

산꼭대기에서 빠르게 하산했다.

"산은 높지 않아, 열매 하나 깨무는 사이 올라왔다. 산 고개가 높지 않아서 단 한번에 내려갈 수 있어" 누조는

위를 기어올라오다시피 할 때 스스로에게 다졌던 말을 내려갈 때도 되뇌었다. 멀리서 검은 구름 사이에

번쩍 빛나는 초록의 으시으시한 눈동자가  보이더니, 울부짖는 호랑이와 이리가 불시에 산중을 덮칠 것 같았다.

"두려워하지 마, 두려워하지마, 맹수들은 감히 오지 못해,  빨리 달려! 빨리 달려! 그들은 내게 달려오지 않아!"

누조(女+累,祖)는 달리는데 만 열중해 날듯이 앞만 보고 달렸다. 마침내 부락의 햇불 더미가 보이기 시작하고

자기를 부르는 부락민의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돌아왔구나, 여러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누조(女+累,祖)는 아주 신이 나서, 마을 사람 곁으로

속히 달려가고자 하여, 공포와 누적된 피로가 가셨다. 그녀는 다시 움직여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해 땅위에

넘어져 기어다니다시피 해 걸었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아련한 경황 속에, 누조는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 오고

있음을 깨닫고, 다시 무거운 발걸음에 힘을 주어 사력을 다해 걸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양어깨에 걸머

지고 있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어 그에게 말하려 안간힘을 썼다.

"열매가 딱딱하니 삶아 드세요!" 모기만 한 소리로 전한 이 말 뜻이 제대로 전해지자 마자, 그녀는 마음이 풀리고

스르르 눈이 감기더니,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튿날, 누조(女+累,祖)가 눈을 뜨자 빛나는 태양이 하늘에 걸려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주위는 지극히 평화롭고

조용했다. 이 시간은 남자들이 모두 수렵을 나가고, 여자들은 열매를 따러 나가는 시간이었다. 부락에는 단지

연로해 힘없는 사람과 아이들만이 남았다. 누조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혼신을 다했으나 몸이 욱신거리고 시었다.

한 나이 많은 부인이 놀라서 탕 그릇을 들고 나타나 누조(女+累,祖)에게 반강제적으로 먹이니 정신이 다소 호전

되었다.

누조(女+累,祖)는 급히 간절한 마음으로 말했다. "산위에 아주 많은 하얀 열매가 있는데, 모으면 우리들이 아주

오래 잘 먹을 수 있습니다." 노부인은 기어들어 가는 새 소리 지저귀듯 멀지 않은 곳의 큰솥을 가리켰다.

누조는 몸을 겨우 지탱하며 솥 앞으로 갔는데, 솥 안에는 곤충이 오므라든 것이 마치 가는 나뭇가지와 같았다.

손으로 한번 잡으니 미끄럽게 흘렀으며 찬 실같은 것이었다. 노부인이 수행해 와서 말하기를;"하얀 열매를 물에

넣고 삶으니, 모두 이런 가늘고 긴 벌레로 변해 누구라도 감히 먹지 못합니다."

누조(女+累,祖)는 힘없이 나무 아래에 기대어 의복을 바느질했다. 누조가 가죽옷을 다 수선하자 ,또 거친 베옷을

손에 들었다. 팽팽했던 베(麻)실이 불시에 끊어져 축 늘어졌다. "아직  마(麻) 실이 남아 있나요?" 누조가 물었다.

"없습니다. 채집하러 나간 여자들이 마(麻)를 가지고 오면 가까스로 실을 비벼 잣는 것이 가능할겁니다." 노부인

대답했다. 누조는 낙심해 의복을 내려놓고, 가늘게 뜬눈을 치켜 부릅뜨고 솥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먹지 못하게 되었을까? 이를 얻으려 큰 힘을 들였는데, 실로 애석한 일이로다!" "어? 이는 당연히 실로

사용활 수 있겠는걸?" 누조(女+累,祖)는 영감이 한번 스쳐지나가자, 솥 안의 "누에고치" 가지 하나를 건져, 골침

구멍을 뚫어 실을 뽑아 의복을 바느질했다. 그녀는 바느질이 잘 된 베옷을 질질 끌고, 들어 올리며 좋아했으니

이는 아주 특별한 결실이었다.

누조(女+累,祖)는 극도로 신이 났다. 그녀는 벌레를 집어들고 햇빛에 말려 베로 짠 실과 같이 말아서, 마포(布)를

짠 것 같이 그 실로 포(布)를 짰다. 그리고는 그 포로 작은 의복을 만들어 황제에게 주었다. 누조가 이 일을 하는

데는 허다한 날이 걸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옷인가? 연(軟)하기도 하고, 매끄럽기도 한 것이 진실로 우아한 옷

이로다." 황제는 이 옷을 한참 이리저리 연구한 뒤에 기뻐서 말했다.

누조(女+累,祖)는 다시금 신이 나서 황제에게 나아가 의복의 내력을 설명했는데, 말미에 가서 그녀는 흥분해서

말했다: "이후, 여름을 나고 있는 우리 족인들로 하여금 모두 이 의복을 연구하게 할 것인 바, 옷이 아주 서늘하고

또 햇빛과 모기 등의 곤충이 물어뜯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누조는 다시 그 산으로 하얀

열매를 따러 갔으나 하얀 열매는 이미 하나도 없고  온 산에 잿빛 나방만 가득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듬해 봄, 누조는 다시 하얀 열매를 찾아 그 산에 올라갔으나, 나무 위에서 단지 허다한 백반반(白,目+半,目+半)의

작은 벌레만 발견했다. 또 일단의 시간이 경과하자, 누조는 작은 애벌레가 한 가닥의 미세한 실을 토하더니, 그

실들이 스스로를 감싸는 것을 발견했다. 며칠 뒤, 산 위에는 또  작고 흰 열매가 허다하게 선보였다. 누조는 마침내  

백색의 물건은 열매가 아니라, 작은 애벌레 집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았다.  

누조는 산 위에서 몇 년간을 관찰하여, 마침내 이 "작고 하얀 열매"가 변태해 나아가는 전 과정을 파악하여, 작은

벌레를 집에서 길러 하얀 열매(고치)를 뽑아내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누조는 부락의 부녀를 거느리고 작은

애벌레를 기르기 시작했다.  누조는 작은 벌레에게 "잠( :누에)"라는 이름을 부쳐주고, 누에를 기르는 나무를

뽕나무(桑樹)라 불렀다.

 

이로부터 인간은 새 의복을 갖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옷은 점점 더 정미(精美) 로와졌다. 후세 사람은

모두 양잠의 시조 누조를 잊지 않을 것이다.

 

 

동이족의 전통적 주전공 잠사를 장려한 동이족 강족(羌族)의 후예 촉산씨와 잠총씨가

웅거한 사천성 무산대계유적지는 앙소문화권역

 

전통적으로 동이족이 장려한 잠사와 관계한 「산해경」<해외북경>의 내용을 보면,

"구사지야(歐絲之野)가 대종(大踵)의 동쪽에 있는데, 한 여자가 무릎을 꿇고 나무에 기대어 실을 토해내고 있다

(一女子 據樹歐絲)" "가지 없는 세 그루의 뽕나무가 구사(歐絲)의 동쪽에 있는데 그 나무의 키는 100 길이며

가지가 없다"

그리하여 이 촉산씨(신농의 딸)가 피칭 잠총(蠶叢)씨가 되어 이 잠총씨가 부강하게 되어 촉국(蜀國)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나라 대시인 이백(李白)은 「촉도난(蜀道難)」이라는 시에서  "잠총(蠶叢)과 어부

(魚鳧)가 나라를 여니 어찌 망연한가"하고 개연히 한숨쉰다.

「고문원(古文苑) 注」에 <선촉기(先蜀記)>를 인용해, 잠총씨가 살던 곳을 설명하기를 "잠총은 민산 석실가운데

살기 시작했다(蠶叢始居岷山石室中)"고 한다. 몽문통(蒙文通)은 잠총씨가 민산(岷山) 아래 저습한 곳인 청의(靑衣),

임공(臨 :언덕공) 일대 하곡(河谷)에 살았으며 나라를 세운 곳도 이곳이라 말한다. 물론 와옥산이 그 중심임은

말할 것도 없다.(사천성 양자강변 성도, 중경일대는 10월부터 2월까지 늘 저습하고 안개가 많다.)

이같이 잠총씨는 촉산씨의 뒤를 이어 번영, 부강해졌다. 그리하여 「태평어람」에 "촉왕(蜀王)의 선조는 잠총

(蠶叢)이라 이름하고, 후대에는 백관(柏灌)이라 이름하고, 다시 어부(魚鳧)라 이름했으니 이 3대 각 수 백 세(歲)

는 신으로 화해 죽지 않았으며 그 백성 역시 왕을 따라 신으로 화해 따라갔다"고 전한다.

신은 곧 군장이요 잠총은 촉국의 군장이니 곧 청의신(靑衣神)이다. 민간에 전하기를 잠총은 항상 청의를 입고

민간을 왕래하며 잠사를 가르친다 한다. 그런데 강족(羌族)의 습속이 본래 지금까지 푸른 두건에 푸른 상의를

걸치는데 지금도 와옥산엘 가면 이 복장을 한 노인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민강(岷江) 상유하곡(上游下谷)의 땅에 잠릉(蠶陵)과 같은 허다한 유적지가 있다. 와옥산(瓦屋山)의 잠총묘는  

잠총조묘(祖墓)로 민강 하곡의 잠총묘는 잠총 후세의 묘로 이는 석관, 석곽이 아니다.

이곳 사천성의 고고학적 인류학적 발자취를 잠시 짚어보면, 1951년 3만 년 전 구석기 시대 인류인 "자양인(資陽

人)"이 발굴되고 59년 이 곳 장강(양자강) 유역에서 대표적 신석기 시대 유적지인 무산대계(巫山大溪) 유적지가

발굴되어 이후 호북(湖北), 호남(湖南)의 장강 유역에서 광범위하게 분포된 동류의 문화유적지- 소위 대계(大溪)

문화유형이 존재했음이 드러났다.

이곳에서 발굴된 1250영건의 석기, 도기, 골기와 옥기, 인면형 석패(노리개), 홍도 공심구(空心球),채도 병, 채도

항아리(罐)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채도 병과 채도 항아리(罐)는 하남 석천(淅川), 서안 반파 출토 도자기와

같은 제품어서 채도 신석기 문화유적지인 앙소(仰韶)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참고로 두산세계 대백과 EnCyber 자료에 의하면, 앙소문화는 중국 황허강[黃河] 중류의 채도(彩陶)를 동반한

신석기문화로 1921년에 J.G.안데르손이 허난성[河南省] 민츠현[池縣] 양사오 부근에서  발견한 신석기시대의

대취락지이다.

-화북(華北)에서 일어난 최초의 농경문화를 양사오문화라고 하는 것은, 이 유적의 이름에 연유한다. 채도가

특색이어서 채도문화(彩陶文化)라고도 하며, 간석기 ·뗀석기 및 양날이 있는 돌식칼과 구멍이 한 개 뚫린

돌식칼로 수확한 것, 돌을 갈거나 흙을 구워 만든 팔찌를 애용한 것 등도 특색으로 들 수 있다.

그리고 당시의 사람들은 주로 조를 재배하였으며 돼지 ·개 등을 사육하였다. 유적은 허난성 서부, 산시성[山西省]

남부, 산시성[陝西省] 중부에 널리 분포하는데, 그것들은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의 반포[半坡]유적을 표준

으로 하는 반포 유형의 문화와, 허난성 산셴[陝縣]의 먀오디거우[廟底溝]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먀오디거우

유형의 문화가 있다.

전자(前者)는 채도가 적고 토기의 무늬는 단순한 동물무늬 등이 특색이며, 후자(後者)는 채도가 비교적 많고

토기의 무늬는 기하학무늬를 주로 하여 변화가 많다. 양자의 전후관계에 대하여는 아직 정설이 없다.-

그러면 채도기만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굴가령(屈家 ) 문화와 관련 있는 흑도 곡복배(曲腹杯) 회도기와 운남  

원모대돈자(元謀大墩子) 유적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동이족 기원의 도자기도 출토되었다.

은허유적지는 우리 동이족 글자로 밝혀진 갑골문에 의해 밝혀진 것이지만 바로 이 갑골문과 고문헌 등 사료에

의해 은주시대의 사천지구 문명이 밝혀지고 있다. 상대(商代)의 촉(蜀)인과 은 왕조의 관계는 때로는 복종도 하고

때로는 반항도 하는 관계였노라고 사천성 박물관 자료는 전한다.

중원의 은상시대의 병장구와 흡사한 무기들이 출토되기도 했고 1959년, 80년에 팽현(彭縣) 죽와가(竹瓦街)에서

출토된 청동기 가운데는 용봉 도등(토템로고) 문양이 이 새겨된 용봉문동뢰(龍鳳紋銅 :술독 뢰)가 유일하게 발굴

되었으니 이는 이하일가(夷夏一家) 동서방연맹의 족적이 여기까지 미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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