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은 20세기 영화평론에 있어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탁월하고 예언자적인 비평가였다.
1918년 4월 18일 중세풍의 도시 앙케르에서 나서 1958년 11월 11일 오후 3시 40세라는 나이로 요절할 때 까지
영화에 대한 애정을 잊은 적이 없다.
정신건강이 나빠 자주 정신병원에 드나들었고 동물을 사랑하여 서재가 온통 작은 동물원 같았다고 한 이 박애
주의자는,그를 정신적 아버지'로 따르고 영향을 받은 프랑소와 트뤼포의 첫 장편 [400번의 구타]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자라고 나중에 현대 영화의 쟁쟁한 작가들이 된 장 뤽 고다르, 끌로드 샤브롤, 에릭
로메르,자끄 리베트 그리고 무엇보다 프랑소와 트뤼포가 그의 '작가 중심설' (Politique des Auteurs)이 더욱
발전 계승되고 그이 정신적 자녀들이 그 주장을 실천해 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애석하게 눈을 감은 것은 현대
영화예술을 위해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특히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등이 몽따주이론을 중심으로 영화언어의 독창성을 주장하던 미학 에 대응
하면서 영화언어의 보다 진화된 단계로서 공간의 깊이를 추구하는 영화미학적 이론으로 그의 뛰어난 [영화언어
의 진화]를 집필했다.
뿐만 아니라 로베르 브레송에서 네오 리얼리즘에 이르기까지 지성적이고 분석적이며 또한 미려한 문체 로서
영화비평이 무엇인가를 실제 몸으로 보여주고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울러 이미 모두가 알다시피 누벨 바그의 산실이었던 [까이에 뒤 시네마]의 주간으로 활약 하며 많은
정신적 아들을 낳았는가하면 스스로 시네 클럽을 주도하는 등 영화를 위해 온갖 정력을 기울인 독창적인 이론
가요 날카로운 비평가요 활기에 찬 영화운동가였다
앙드레 바쟁과 미장센
(Andre Bazin & Mise-en-Scene)
앙드레 바쟁은 프랑스 태생의 영화 비평가로서 세르게이 에이젠쉬테인의 형식주의적 영화 이론에 반하는 리얼
리즘 영화 이론을 펼친, 지금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이론가이다.
2차 대전 이후부터 영화 평론을 시작했으며 1951년 [까이에 뒤 씨네마]라는 잡지를 발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잡지에서 함께 활동했으며 자신의 제자였던 프랑스와 트 뤼포와 끌로드 샤브롤, 장-뤽 고다르 등은
1960년대에 세계를 풍미한 누벨 바그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누벨 바그는 바쟁과 트 뤼포를 중심으로 작가주의 이론을 내세우며 과거에 묻혀졌던 훌륭한 감독들을 재발굴
한다.
영화에서 사실성을 중시한 바쟁은 의도적인 방법과 기술 즉 인위적인 조명, 셋트, 편집 등을 동원하여 영화의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에 반대한다.
그는 꾸며진 상징성 및 몽따쥬를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지 않고 조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 전함 포템킨 Bronenosets Potymkin>류의 러시아 형식주의 영화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Das Kab
inett des Dr.Caligari > 등의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그는 "모든 예술은 인간의 개입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오직 사 진만이 인간의 마음을 배제한다.
사진은 자연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나 눈송이와 같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을 그대로 느끼도록 만든다."고
이야기했다.
영화에서의 편집이나 인위적인 조명 역시 인간의 개입이라고 여긴 것이다.
따라서 바쟁의 영화론은 인간의 개입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영화에 후한 점수를 주게 된다.
그는 몽따쥬에 의한 영화대신 미장센 에 의한 영화나 다큐멘터리 식의 사실성을 강조한 영화들을 중요시했다.
미장센이란 '사건을 무대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연극 용 어이다.
영화에서 미장센은 단일한 쇼트 shot 또는 테이크 take, 곧 카메라가 장면을 찍기 시작하여 멈추기까지의 시간
동안에 화면 속에 담기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장 르느와르나 오손 웰즈,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영상을 발견했다.
장 르느와르 와 오손 웰즈의 영화는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공간의 깊이감이라고 이야기하는 데 포커스 deep focus와 짧게 편집하지 않고 보여주는 롱 테이크
long take로 영화를 이룬다.
웰즈의 <시민 케인 Citizen Kane>과 르느와르의 <게임의 규칙 La Regle du Jeu>은 그러한 예를 훌륭히 보여
준다. 그리고 안드레 바쟁은 네오-리얼리즘에 나타난 '영화 속의 현실감' 을 높이 평가한다.
네오-리얼리즘의 영화들은 현지에서 직접 촬영되었기 때문에 조명을 거의 쓰지 않았고, 비직업 배우가 출연하여
영화에 생생한 사실감을 불어넣었다.
또한 그들은 전후 이탈리아의 처참한 현실을 보여 주기 위해 편집보다는 장시간 촬영에 의존했다. 이것은 바쟁이
중시한 리얼리티를 충실하게 재현해 낸 것이다. 이런 바쟁의 견해는 사실주의 영화 이론으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사진적 이미지가 사실적인 효과를 낸다고 믿었고 그 때문에 사실주의 영화 이론을 편애했던 바쟁의 이론
이 지금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도 조작이 가능하고 다큐멘터리 영화나 사실주의 영화에도 만드는 사람의 개입 이 이루어질 수 있다.
소재가 왜곡될지라도 사실성만 지니고 있으면 된다는 그의 시각은 현재에는 많은 의문점을 남겨준다.
또한 현재에는 몽따쥬를 강조한 에이젠쉬테인의 이론을 바쟁이 주장한 사실주의적 영화 언어가 동시에 고려
되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에 초기의 영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바쟁의 이론을 전면적으로 수용해서
영화를 만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 쟁의 영향은 아직까지 다양한 감독과 영화 이론에 미치지 않는다.
비록 바쟁의 이론에 직접적인 토대를 두고 있지 않더라도 미장센을 자신의 중요한 영화 형식으로 발견하고
실현한 감독들은 르느와르와 웰즈를 비롯하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잉마르 베르 히만 등이 있다.
이들은 현대 영화에 자취를 남긴 위대한 감독들로 평가받고 있다.
연극과 영화-text로서의 영화에서, 앙드레 바쟁의 견해를 참고하여 텍스트(text)는 아직 일반화된 영화용어는
아니다. 원래는 단순히 글 또는 한 권의 책이나 서류에서 본문을 가리키는 말인 이 단어는, 주로 언어학자, 문화
비평가, 기호학자들이 자신의 연구대상을 부르는 데 사용되어 왔다.
그러므로 영화를 '텍스트'로 봄은 이러한 인접학문의 영향권 속에 영화가 놓이게 됨을 뜻한다.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가지 것들, 구회영, 한울, p.25)
이러한 견해는 앙드레 바쟁에게 잘 나타나는 듯싶다.
이는, '또 다른 한편으론, 영화는 일종의 언어이기도 하다'고 말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그는 영화를 현실과 역사로부터 분리된 닫힌 체계로 보지 않고 이들 텍스트와 현실 사이(리얼리즘)
또는 텍스트와 작가 사이(작가주의 영화론)의 관계를 설정해 나가게 된다.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가지 것들, 구회영, 한울, p.25)
나는 오늘날의 연극과 영화를 비교함에 있어서 이러한 앙드레 바쟁의 견해를 참고하려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이룩했던 새로운 영화의 흐름(누벨 바그)이 오늘날의 영화의 모습을 형성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또 이와 관련된 리얼리즘이나 작가주의적 견해들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글 중에서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 '연극과 영화'를 인용하여 서술하려 한다.
'연극과 영화'는 당시의 연극영화('헨리 5세', '멕베스'등)에 대한 평론이다.
그는 우선, 연극영화에 대한 당시의 혹평에 대하여 이야기면서, 그 당시 호평 받던 짤막한 희극 형태의 영화들
속의 연극적인 요소를 들어 연극과 영화의 관계는 단순히 연극영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연극과 영화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
극은 연극의 혼이다. 그러나 이 혼은 다른 형식 속에 깃들기도 한다. ...(중략)... 희곡은 극적이지를 않고는 될
수가 없는 것이나 소설은 극적이건 아니건 자유라는 의미에서이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을
전적으로 극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 연극의 영향은 엄청나게 커진다는 것을, 또 영화는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예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허나 그런 조건이라면 문학의 절반과 영화의 사분의 삼 정도가 연극의 지부가 되고 마는 셈이다.
요컨데 문제는 그와 같이는 제기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문제는 실제로는 연극작품이 배우에게서가 아니라 대사에 의해서 구체화되어짐으로써만 결국 존재하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작, 박상규 옮김, 시각과 언어, p.181)
즉, 연극은 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극적 요소는 연극뿐 아니라 다른 많은 문학과 특히 영화에서
또한 발견되는 것이므로 연극만의 특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대신 그는 연극의 대사를 연극의 구체적인 존재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연극을 영화로 각색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근거로 든다. 그것은
첫째로, 조소(嘲笑)에 대한 두려움이며, 그보다 더 큰 장애는 원문에 대한 저작권을 강조하는 현대의
관점이다. 이는 저자의 사후에까지도 계속되는 것이므로, 오직 원작자만이 각색의 권리를 가질 수 있다.
둘째로, 원작자가 살아있을 경우인데, 이런 경우에는 크게 두 가지가 문제가 된다. 하나는 작가의 각색하는
재능이며, 다른 하나는 연극의 영화화를 가능케 하는 원인이다.
극작품을 영화화하는 이유는 그것이 무대에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인데, 이렇게 그 흥행성이 입증된 연극의
경우 극작품의 대사는 결정화되며, 이것이야말로 영화관객이 찾고 싶어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연극의 각색이 가능한 마지막 경우에 있어서 연극이 가진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대사인 것이다.
셋째로, 극작품의 질이 훌륭해질수록 극적인 것(내용면)과 연극적인 것(내용 외적인 면)의 분리가 어려워진다
는 점이다. 결국 연극 전체가 극적인 면에 동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나, 희곡에서 소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극적인 것이 소설적인 것을 담기 위해서는 새로운 창조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희곡에 비해 소설은 단순한 극적 요소로부터 도출할 있는 많은 가능한 종합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기 때문
이다. 이런 점은 소설뿐 아니라 영화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극이 영화화되는 경우, 희곡의 사진인 것이거나-이 경우가 바로 저 유명한 연극영화인 것이다-
혹은 희곡이 영화예술의 필요에 따라 각색되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작, 박상규 옮김, 시각과 언어, p.183)
앞에서 바쟁은 연극영화는 희곡의 사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초기의 연극영화에 한정되는 것으로,
그는 ‘헨리5세’, ‘무서운 양친’등과 같이 성공한 연극영화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앞서 정의했던바와 같이 연극
영화는 희곡의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강조한다. ;
최근 15년간의 매우 특기할 만한 성공작들은 모두가 대사와 연극적 구성의 존중이라는 하나의 역설을 예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제재를 각색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라는 수단에 의해 한 희곡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작, 박상규 옮김, 시각과 언어, p.197)
이것은, 다음의 예시를 통하여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연극로부터 영화를 만들어냄에 있어, 그는 연극적인 연기나 연극적인 관례를 숨기려고 하지를 않고 그런 것들
을 처음부터 오히려 영화로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연극적인 착각을 방해하는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저당물을
없애버렸다.
로렌스올리비에는 관객의 공모 속에서 이들의 심리적 토대를 일단 확보하고나자, 아쟁쿠르 전투의 리얼리즘뿐
만 아니라 배경의 회화적 데포르마시옹까지도 감행할 수가 있었다.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작, 박상규 옮김, 시각과 언어, p.189)
바쟁은, 실패한 연극영화는 연극적인 관례를 감추고 영화의 기술적인 우월성-공간의 무한함, 쇼트의 변화-으로
덮으려하고, 성공한 연극영화는 그러한 연극적인 관례를 드러내고, 영화적인 연출을 이용하여 이를 더 잘 부각
되도록 한다고 말한다.
여기까지의 전개대로라면, 연극영화는 기술적?미학적 측면에서 보다 발전된 모습의 연극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바쟁은 연극영화가 마치 희곡의 사진과 같은 모습에서 주목할만한 성공을 거두게 되는 모습에 이르는,
그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연극과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말하게 된다.
앙리 구이에는 ‘연극의 본질Ⅰ’에서, 연극의 본질은 배우의 현존에 있다고 하였다. 즉, 배우는 다른 이의 혼과
다른 이의 음성을 가지고 변장하여 거기에 나타난다고 해도 그는 역시 거기에 있고 또 그럼으로써 공간은 그의
필요성과 그의 두께의 지속성을 되찾는다.
그러나 영화는 배우의 신체적 현존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연극의 본질이 배우의 현존에 있다면 영화는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소득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작, 박상규 옮김, 시각과 언어, p.198)
따라서 연극영화의 성공의 원인을 알아보려면 이러한 배우의 현존에 대하여 검토해 보아야 한다.
현존은 당연히 시간과 공간에 의해 결정된다. 누군가가 “현존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그가 우리와 동시대인이라
는 것을 인정하며 그가 우리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미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이다. ...
(중략)... 사진은 전혀 또 다른 것이다. 그것은 대상이라든가 인간이라든가 하는 것의 영상인 것이 아니라,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흔적인 것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작, 박상규 옮김, 시각과 언어, p.199)
조형예술은 근본적으로 시체의 방부보존 관습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작, 박상규 옮김, 시각과 언어, p.13)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조형예술은 조형물과 모델의 동일성(미이라와 죽기전의 사람과 같이) 대신에 초상화와
같이 모델의 회상을 돕는 도구의 기능을 갖게 된다. 그러나 사진과 영화는 이러한 초상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진은 기계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얻어지는 영상이다. 따라서 사진은 초상화와 같이 대상과의 유사성이 아닌
대상과의 동일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영화는 사진과 달리 시간까지도 함께 본을 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우리에게 배우들의 현존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연극과 영화의 차이는 존재론적인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심리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에 대해 로젠크란츠가 썼듯이, “스크린의 등장인물들은 전적으로 자연히 동일화의 대상들인데 반해 무대의
등장인물들은 오히려 명확하게 정신적 대립의 대상들인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실제 현존이 그들에게 객관적인 실재성을 부여하고 있는 까닭이요, 그들을 상상세계의 대상
들로 옮겨놓기 위해서는 관객의 적극적인 의지가, 즉 그들의 신체적인 실재성을 고려치 않고 사상(捨象)해
버리고자 하는 의지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이다.
이런 사상은 충분히 자각적인 이들에 대해서밖엔 요구될 수 밖에 없는 지성적인 한 과정의 소산인 것이다.“
영화의 관객에게는, 결과적으로 관중을 군중으로 바꾸어놓고 감동을 획일화하는 심리과정에 의해 자기를
주인공과 동일화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무대와 스크린에서의 코러스 걸들의 의미깊은 예를 들어보자.
스크린에선 그녀들의 등장은 무의식적인 성적 욕망을 만족시켜주어 남자주인공이 그녀들과 접촉하게 될 때에
그 주인공들은 관객이 그와 동일화되고 있는 한, 관객의 욕망에 만족을 준다.
무대위에서는 코러스 걸들은 그녀들이 실생활에서 그러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관객의 관능을 자극시켜 놓는다.
따라서 주인공과의 동일화는 일어나지를 않는다. 주인공은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 된다.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작, 박상규 옮김, 시각과 언어, p.202-203)
결국 영화와 연극의 차이는 구경하는 사람-관객-의 심리상태인 것이다.
연극은 관객과 배우의 현존, 연기를 목적으로 한 현존에 대한 상호의식이 그 토대를 이루고 있다.
연극은 관객의 참여에 의해 관객에게 효과를 낸다. 그러나 영화는 관객의 존재를 모르는 다른 세계를 엿보는
것이다. 따라서 분석을 집중시켜야 할 부분은 육체적으로 현존하는 배우가 아니라 관객의 적극적 참여를
빼앗는 영화의 세계 전체이고, 이는 배우의 현존보다는 무대장치의 측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이 존재치 않는 연극은 없지만 영화에서의 드라마는 배우없이도 해나갈 수가 있다. 덜거덕거리는 문, 바람
에 뒹구는 낙엽, 해변에 부딪히는 파도 등은 극적인 힘에 도달할 수가 았다. ...(중략)... 인간과 자연의 투쟁이
영화 주제가 되어 있는 경우에서조차도 그 투쟁을 연극의 액션에 비교할 수는 없으며, 극적 수단의 거점은 인간
이 아닌 자연 속에 있다.
장-폴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연극에서는 드라마가 배우로부터 출발하지만 영화에서는 그것이 무대장치로부터
인간에게로 나아간다. 드라마의 흐름의 이와 같은 역전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띠는 것으로서, 그것은 연출의 본질
자체에 관련되고 있다.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작, 박상규 옮김, 시각과 언어, p.206)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무대장치 자체가 아니라 무대장치의 성질과 그 역할에 있는 것이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참가자들의 상호의식에 바탕을 둔 연극은 연기가 현실과 대립되고, 공모가 무관심과 대립
되며, 전례가 실익의 비속성과 대립되듯이 세계의 다른 부분과 대립됨을 필요로 한다. ...(중략)... 그런 구별의
가장 분명한 징표는 무대로서, 이 무대의 건축구조는 실제로, 혹은 실질적으로 자연과는 다른 특권적인 공간
이라는 것을 계속 명시하면서 변화되어왔다. ...(중략)... 그림이 그것이 표현하는 풍경과 혼동되지를 않고 벽
속의 창인 것도 아님과 마찬가지로 액션이 펼쳐지는 무대와 무대장치는 세계 속에 무리하게 삽입된,
그러나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미학적 소우주인 것이다.
영화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른데, 영화의 원칙은 액션의 모든 한계를 부정한다고 하는 것이다. ...(중략)... 스크린
은 그림의 액자 같은 하나의 틀이 아니라, 사건의 일부분밖엔 지각되게 하지를 않는 일종의 마스크이다. ...(중략)
... 이 폐쇄된 공간에 둘러싸인 배우는 이중의 오목거울의 중심에 있다.
관객석과 무대 장치로부터 그에게 의식의 침침한 불빛과 풋라이트의 불빛이 집중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를
태우는 이 불은 또한 그자신의 정열과 그리고 그가 서 있는 초점의 불이기도 하다.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작, 박상규 옮김, 시각과 언어, p.210)
연극은 세계 속에서 분리된 하나의 새로운 세계-무대-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연극의 무한성은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폐쇄된 공간의 중심에는 배우가 있으며, 그 배우의 정열과 그와 교감하는 관객의 정열 또한 연극의
중심에 있다.
이에 반해, 영화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를 대치하며 무한히 펼쳐진다.
스크린은 무대와 같이 두 세계를 구분 짓는 경계가 아니라, 영화의 세계의 나머지 부분을 가리는 마스크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주인공이 카메라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가려진 부분 어딘가에 주인공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스크린 상에서 인간은 드라마의 중심이 아니며, 그 위치에는 영화 속의 세계 자체가 있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연극에서와 같은 특권을 누릴 수 없다. 결과적으로, 연극과 영화의 차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극적
인 에너지의 차이, 언어(텍스트)의 차이이며, 또한 공간의 무한성의 측면에서 공간의 리얼리즘의 차이이다.
여기서, 공간의 리얼리즘은 구체적으로 표현되는지 알아보자;
실제로, 영화의 사진적 성질을 근거로 그것의 리얼리즘에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용이한 일이다. 영화에 있어서
불가사의한 것이나 환상적인 것의 존재는 영상의 리얼리즘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영상 리얼리즘의 가장
유효한 증거가 되기까지 한다.
환각은, 영화에선, 연극에 있어서처럼 공중에 의해 암묵리에 승인되고 있는 약속들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공중에게 보여지는 바의 절대적 리얼리즘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트릭은 영화에서는 물리적으로 완전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작, 박상규 옮김, 시각과 언어, p.213)
영화에서의 공간의 리얼리즘이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 속의 세계 내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들이 바로 영화의 공간의 리얼리즘이다. 즉, 영화 속에서의 호수는
스크린 위에 실제로 존재하는 호수인 것이다. 그러나 연극 속에서는 관객들의 암묵적 동의(convention)하에
특정 공간을 ‘호수’라고 지정하는 것 뿐이다.
“무대는 오직 현존의 환각을 제외하고는 모든 환각을 환영한다.”고 한 앙리 구이에의 정식(定式)을 변형시켜,
“우리는 다만 공간이라는 단 한 가지 현실을 제외하고는, 영화의 영상으로부터 모든 현실을 퇴거시킬 수 있다.”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작, 박상규 옮김, 시각과 언어, p.214)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현실의 감각은 실제의 세부의 합이 아니라, 영화 속의 현실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연출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극 영화의 성공은 폐쇄적 공간속의 연극과 영화적인 공간 사이의
페러독스 사이에서의 균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는 표현이나 소재의 리얼리즘이 아닌 공간의 리얼리즘의
승리인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연극영화를 통하여 하나의 텍스트로서의 영화와 연극의 관계와 차이점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앞서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영화를 텍스트로 봄은 인접학문의 영향권(즉, 여기서 다루어진 연극이나, 소설
과 같은 문학작품 등)에 영화가 놓이게 됨을 뜻하며, 결과적으로 단순히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로서 영화를 보게 된다.
이렇게 텍스트를 ‘관계’속에서 봄은 영화 ‘읽기’뿐 아니라 영화‘쓰기=만들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영화가 독자적인 기호체계로서 스스로의 역사를 가짐에 따라, 영화 텍스트 자체를 ‘인용’하거나 아니면 특정한
표현방식의 근거로 삼는 경향이 새롭게 나타났다. (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가지 것들, 구회영, 한울, p.26)
이러한 영화들 사이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예로는 속편 제작의 범람이나 장르’의 파괴 현상 등이
있다. 텍스트 사이의 상호연관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알게 된 관객들은 장르 영화의 반복성에 만족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영화에 있어서의 ‘탈 장르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탈 장르화’의 영향은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 가운데 가장 먼저 그 틀을 갖춘 서부영화에도 미치게 되었
는데, 이에 따라 1930년대와 40년대를 거치면서 구축됐던 ‘고전 웨스턴’의 틀을 벗어버리고 ‘수정주의 웨스턴’
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세계영화 100, 안병섭 외 지음, 한겨례신문사, p.295)
이탈리아의 세르지오 레오네는 1964년부터 ‘달라 3부작’(‘황야의 무법자’, ‘속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를
차례로 만들었고, 서부영화의 변종격인 마카로니 웨스턴이 탄생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마카로니 웨스턴의 상업적 성공과 함께 스타가 되었다. 바로 그가 환갑을 넘긴 1992년에
만든 영화가 ‘용서받지 못한 자’이다. (세계영화 100, 안병섭 외 지음, 한겨례신문사, p.295)
‘용서받지 못한 자’는 내용 면에서 다른 서부영화들과는 다른 특이할 만한 사항을 지니고 있다. 전통적으로 선과
악의 대립의 이분법으로 구축된 다른 서부영화들과는 달리, 이 영화는 이러한 틀을 뒤집어버린다.
보안관은 더 이상 정의의 구현자가 아니며, 불의에 분노하는 이들은 매춘부인 식이다. 또한 주인공 윌리엄
머니는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한 삶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살인을 저질렀다”
(세계영화 100, 안병섭 외 지음, 한겨례신문사, p.295)
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서부영화 장르의 성찰과 해체가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오염된 현실을 은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용서받지 못한 자’의 예를 통해서, 텍스트로서의 영화 읽기가 영화를 단순한 희극이 아니라, 다른 문학,
다른 영화, 나아가서는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과의 관계를 성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서 연극과는 다른 영화만의 독특한 정체성도 확립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