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바쟁의 영화 이론
앙드레 바쟁과 작가주의 par 류상욱
1. 바쟁 이전의 영화이론의 역사
1895년 12월, 프랑스의 빠리에 있는 그랑카페라는 곳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기차역으로 들어오는 기차와 공장
에서 퇴근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이미지를 담은 영화를 처음으로 상영했다.
이것의 근대적 의미의 영화상영 즉 상업적으로 영화가 상영되었음을 뜻한다.
뤼미에르 형제 이전에 수많은 카메라와 영사기가 존재했었지만, 돈을 받고 영화를 상영하는 행위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이제 영화는 19세기가 20세기에 안겨준 선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다큐멘터리로부터 시작되었다.
즉 현실의 재현하는 매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뤼미에르 형제의 그랑카페 상영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조루즈
멜리에스는 영화가 ‘환상’을 표현할 수 있음을 탁월하게 보여주었다. 영화는 탄생부터 ‘현실’과 ‘환상’ 모두를
표현할 수 있었다.
영화가 발전하게 됨에 따라서, 영화의 특성을 담론으로 표현하려는 이론가들이 생겨났다. 리치오토 카뉘도는
1911년에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고 명명했다.
루이 델뤽은 1926년에 ‘영화는 언어다’라고 선언했다. 제르멘느 뒬락에 의해서 ‘순수영화’와 ‘시각적인 교향곡(symphonie visuelle)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영화와 꿈 사이에 초현실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가 예술로 당당하게 인정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화가 기계적 매체에 의한 재현장치이고, 매우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에 의해 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영화가 예술로 인정받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1895년부터 1945년까지의 영화의 영역에서 나타난 현상은 ‘승인(l'acceptation)'으로 표현할 수 있다.
초기에 영화를 제작했던 사람들은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이 아니었다. 영화로 돈을 벌어보려는 사람
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래서 영화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볼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과정을 거쳐 화가나 음악가, 소설가들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제작에 참여하게 되고, 영화감독으로서
예술적 욕구를 표현해보는 사람들이 출현하게 된다.
영화가 당대의 시대정신을 표현하고 첨단의 예술형태라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
했다. 그 다음 단계는 ’특수한 측면의 강조(l'accentuation des aspects specialises)이다. 이것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특성 즉 무엇보다도 기술적인 측면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마지막 개념은 ‘국제화(l'internationalisation)'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영화에 대한 담론이 지역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었다.
소비에트의 몽타주 이론은 그 예외라고 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담론이 그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지역적인 장벽이 무너지고,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영화에 대한 담론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영화에 대한
접근방법이 다양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1945년에 이르면 프랑스의 영화적 환경은 많은 변화를 겪는다. 미국영화가 물밀 듯이 밀려오고 젊은 세대들은
그 미국영화의 영향 속에서 성장한다.
약 15년 후에 밀려올 누벨 바그의 격랑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영화이론의 역사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그것은 바로 앙드레 바쟁의 존재에 의해 이루
어진다. 이제 영화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방향이 제시되는 것이다.
바쟁은 영화가 어떻게 독자적인 예술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영화의 존재
론적 사유의 시작이다.
2. 존재론과 새로운 작가연구의 방향
바쟁의 여러 글들은 영화에 대해 새로운 인식의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그것은 영화의 존재론(Ontologie)라고
부를만한 것이었다.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는 영화가 아닌 사진에 관한 글로 시작된다.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이란 제목이 붙어있는 짧은 글은 예술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예술은 바로 죽음에 대한 방어의 소산이다.
즉 시간의 흐름에 대한 방어의 욕구의 실현인 것이다. 왜 이집트인들은 미이라를 만들었을까? 영원히 살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은 처음엔 미이라, 그 다음엔 초상화를 그리게 되는 원인이었다.
이제 조형예술의 역사는 미학의 역사일뿐 아니라 심리학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역시 그 심리학의 역사 속에 위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고대인들이 바위에 무엇인가를 새기고 미이라를 만들고 초상화를 그렸던 역사 속에서 사진을 거쳐 기계적
재현장치에 의한 예술인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영화는 다른 예술에게서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 회화의 프레임과 소설의 이야기구조와 연극의 무대장치 등은,
영화가 다른 예술에 빚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바쟁은 이것을 인정하라고 권유한다. 우리는, 영화가 독자성을 인정받기 위해 많은 시간을 기다렸음을 알고
있다. 아직도 영화를 예술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특히 발성영화가 등장한 이후에는 ‘불완전한 혼합물(amalgame imparfait)와 같은
것이 되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영화를 제대로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인식의 토대 위에서 바쟁은 영화의 본질에 대해 탐구했다. 그는 진정한 평론가이자 이론가였고 실천적
인 조직자였다.
에릭 로메는 바쟁의 사유를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바쟁을 ‘영화의 유클리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로메 역시 바쟁의 존재론을 계승했다.
로메는, 영화의 언어가 다른 예술의 언어를 합쳐놓은 것이고, 영화는 매우 어렵게 도착한, 다른 예술을 모방할
줄 아는 어떤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 모방은 나쁜 것이 아니다. 영화는 다른 예술에서 그 자신을 위한 자양분을 얻는다는 사실을 인정
하는 것이 좋다고, 그는 말한다.
영화의 독자성만을 강조하면서 다른 예술과의 관계를 축소시키는 것보다는, 그것이 훨씬 덜 위험한 사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쟁과 로메의 존재론적 영화인식은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것
들을 배제하는 것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이것은 작가를 연구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영화를 그리고 감독을 평가할 때는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일까? 어떤 감독을 작가라고 평가할 때 작용되는 이데올로기는 과연 무엇일까? 그 이전에 영화를 비평한다는
행위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이 질문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 문제들이다.
이것들을 이제 추상적이고 공허한 일반론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따져보기로 하자.
작가주의 혹은 작가정책이란 비평적 태도가 있다. 그리고 바쟁의 비평이 존재한다. 바쟁과 작가정책의 지지자들
이었고 나중에 누벨 바그의 주역이 되는 「까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은 어떤 생각의 차이를 보였을까?
그 ‘차이’를 드러내는 작업을 통해서 좀더 바람직하고 영화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이 드러나기
를 기대해보자.
3. 작가주의란 무엇인가
과연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이 연재는 앙드레 바쟁의 작가에 대한 사유의 본질을 밝히는 데에 있다.
그것을 위한 방법으로 먼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작가주의라는 것과 (누벨 바그의 주역이 되는)
1950년대 「까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들의 ‘작가정책’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들과 바쟁의 작가론에
대해서 논의를 해보려고 한다.
이 세 가지를 서로 비교하면서 그것들 사이의 차이가 무엇이고 어떤 변화과정을 거쳤는가를 해명하면서,
좀더 의미 있고 바람직한 작가에 대한 태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시대적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일단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작가주의’가 무엇인지 간단히 알아보기로
한다. 작가주의의 영어표기인 ‘auteurism'은 만들어낸 단어이다.
불어의 ’작가auteur'에 ‘ism'을 합성한 것이다. 이것이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aureurisme'이 되었다(불어사전
에 이런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사실 이 ‘작가’라는 말은 프랑스 현대문학비평에서부터 유명해졌다. 바로 바르트와 푸코의 ‘작가(혹은 저자)의
죽음’에 대한 글들이 전세계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문학에서 전지적인 존재로 설정된 작가는 죽었고 오히려 독자의 탄생(바르트)를 지적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상하게도 작가주의라는 것이 비평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문학에서의 작가의 죽음도 물리적인 작가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두 영역에서 ‘auteur'에 대한 규정이 다른 것도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도 안 하고 있지만.
이제 작가주의에 대한 상식적인 설명을 보도록 하자. 영화작가는 개성적인 자기표현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작가는 영화를 창조해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의 개성을 작품 속에 담아낸다. 그 개성이라고 하는 것은 일관성을 가진다.
그 일관성은 주제와 스타일로 나타나야 한다. 그것을 작가주의에서는 ‘강박관념obsession'이란 말로 표현한다.
그러니까 작가들은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제작된다. 또 거대한 산업체계 속에서 상업적인 압박이 엄연히
존재한다. 거기에 장르적인 제약이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자신의 영화 속에 자신의 개성을 담는다. 그러니까 작가인 것이다. 제작자의 압력에도 불구
하고 상업적인 성공에 대한 압박감이 감독을 괴롭혀도 자신의 개성과 강박관념을 어떻게든 자신의 영화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설명을 노엘 캐롤의 말로 반복해본다:“작가의 영화들에는 일관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작가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나타나는데 주로 주제와 등장인물, 스타일 등으로 표현된다.
작가주의는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흔적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작품의 질과 의미를 작가 혼자서 책임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작가가 영화 장르의 관습이나 제작방식, 재생산구조 등을 발명해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강박관념을 작품 안에 기입한다” 어떻게 보면 이른바 작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강박관념에 평생 시달려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미국의 영화학자 앤드류 새리스 같은 이는 작가주의를 나름대로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감독들을 등급을 매겨
분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영화에 대해 별점을 매기는 것만큼이나 권장할 만한 것은 못 된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시스템 속에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예술가이다. 영화는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이고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야 하는 정말 피곤한 예술이다. 그
런 작가의 작가성(authorship)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은 물론 평론가와 연구자들이 해야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누구나 다 작가로 대접받는 이상한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다. 무책임한 영화저널들은
웬만하면 영화감독들을 작가의 반열에 등극시킨다.
「까이에 뒤 시네마」의 작가정책을 말할 때 설명하겠지만, 어떤 감독을 ‘작가’로 평가하고 또 다른 감독을 그저
그런 ‘연출가’로 평가할 때는 나름의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어떤 감독을 작가라고 평가할 때는 그 감독의 작가성을 엄격히 밝히고 그 감독의 작품들에서 보여
지는 강박관념이 무엇인지 설명해야 하며 스타일의 특징이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그런 과정이 없이 단순히 영화제에서 상을 받거나 예술가인척 하는 감독에게 작가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그 감독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화개론서에 나오는 작가주의에 대한 설명은 그저 상식으로 알아두면 된다. 이제 앞으로 1950년대 「까이에
뒤 시네마」가 전개한 작가정책에 대해 알아보고, 이 잡지의 창간자의 한 사람이었고 누벨 바그 감독들의 스승
이었던 바쟁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알아본 다음에, 그렇다면 바쟁은 과연 작가론을 어떻게 펼쳤
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영화는 문화다.
2003년이 밝았습니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먼저 영화의 역사 속에 있던 우리 영화가, 지난 2년 동안 처절한
싸움을 통해 조금씩 우리에게 한 걸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영화를 단순한 경제논리에 입각해 바라보려 합니다. IMF 위기를 틈타 영화 뿐만 아니라
도저히 상업적으로는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분야들이 문화상품의 이름으로 포장되고 세계화의 과정에서 다른
초국적 상품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지식 또한 진리 추구와 보다 진보된 세상을 위한 고민 대신, 지식을 통해 생산 가능한 재화의 규모에
따라 평가받아 왔습니다.
때문에 새로운 지식인은 치열하게 학문에 정진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경제적인 이윤을 창출해내는가의 능력
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이런 풍토 내에서 영화를 포함한 다른 예술장르와 순수학문들은 많은 타격을 받아왔습
니다. 그 논리 속에서 우리 영화는 비약적인 규모의 성장을 일궈냈습니다.
그 예술적 가치나 내용적 진정성을 고민하기 이전에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살아남게 되는 것을 먼저 배워야
했습니다.
때문에 우리 자신의 성찰적 시선으로 우리의 영화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올 한해도 WTO의 협상을 통해 우리 영화들이 새로운 환경 속으로 내던져집니다. 과거 정권은 한 편의 영화를
수백만대의 자동차를 팔 때 발생하는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하나의 상품으로 보려는 시각이 팽배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얼마나 많은 시장에서 다국적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게 되는가가 영화를
보는 정책 입안가와 행정가들 그리고 기업인들의 관점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명 영화는 문화입니다. 영화는 상품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한 나라와 한 시대를 그려내고 있는 문화
임에는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불확실 하지만,
먼 훗날 우리와 영화를 연구하게될 사람들은 그것들의 가격표만 보고 그 전체를 평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런 작은 고민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단순히 우리의 것들을 가격을 매겨 평가되게 방치한다면,
더 이상 우리 세상의 주인은 우리가 아닐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의 가격표들을 떼어내고 그
진정한 의미들을 만나봅시다.
씨네씨테 13호는 그 진정한 의미들을 찾가 위한 첫걸음입니다. 도씨에에서는 영화와 영화이론을 진지하게 고민
해볼 기회를 마련합니다. 영화가 문화일 수 있고 예술일 수 있었던 것은 누벨바그의 기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누벨바그에 영향을 준, 그리고 영화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앙드레 바쟁을 만나봅니다.
앙드레 바쟁의 이론에 대한 짧은 논문과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과의 관계를 짚어보고, 영화를 사랑한 질 들뢰즈
의 번역글 또한 담았습니다.
씨네아스트는 보헤미안의 정서를 담아낸 이젠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린 유고슬라비아인이었고, 지금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연방의 감독인 에밀 쿠스트리차를 만나봅니다.
그의 민족적 정서를 가장 잘 나타낸 <짚시의 시간> 그리고 유고 연방 해체 이전의 이야기를 다룬 <아빠는 출장중>
을 만납니다.
씨네꼬레는 최근의 우리 영화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80년대 복고영화들에 대한 단상을 제공합니다.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 <몽정기>, <품행제로>등 이전의 80년대 영화와는 다른 시각을 통해 한 시대를 재현
하는 이들 영화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새로 신설된 코너인 라르 프랑세 에서는 프랑스 영화, 또는 프랑스 예술들을 고민하면서 영화가 상품이 아님을
당당히 외칠 수 있었던 프랑스 인들의 지혜에 한 걸을 다가가려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아벨강스의 영화들에
대한 단상과, 연극과 영화에서 공간에 대한 생각들을 들어봅니다.
악튀알리떼에서는 개봉영화들에 대한 짤막한 리뷰들과 최근 한국영화의 경향에 대한 글을 다룹니다.
마지막으로 씨네씨테는 올 한해도 독자 여러분에게 한층 다가간 매체로서 자리잡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씨네씨테는 영화관련 산업에 대한 완전개방을 요구하는 WTO의 요구에 대한 양허안에서 영화에 대한
예외적 입장을 요구하는 스크린쿼터 문화연대의 입장을 지지하며 정권 인수위원회의 양허안 재고 입장을
환영합니다.
네오리얼리즘에 대한 바쟁과 들뢰즈의 입장 par 김호영
들뢰즈는 Cinema 2. L'image-temps의 첫 머리에서 네오리얼리즘에 대한 바쟁의 입장에 근본적으로 동의
하면서도, 작은 이견을 제시한다.
네오리얼리즘의 영화들을 단지 사회적 주제에 충실한 영화로만 해석하던 당대의 통상적 의견들에 반발해 네오
리얼리즘이 갖는 ‘형식적인 차이’를 언급한 바쟁의 주장을 높이 평가하지만, 거기서 좀더 나아가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네오리얼리즘이 영화 작품 속에 (바쟁이 말한) ‘사실-이미지’나 ‘잉여-현실’을 생산하는 수준을 너머,
일종의 ‘순수한 시각적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즉, 오로지 ‘운동-이미지’의 재현에만 급급했던 고전영화의 틀에서 벗어나고, 작용-반작용 혹은 원인-결과 같은
도식적인 체계들과 무관한 순수한 시각적 상황들이 작품 곳곳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시각적 상황의 출현과 그것을 묘사하는 ‘순수한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행동’보다는 주시하고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에 더 몰두하는 인물들. 이것은, 바로 (카메라를 통한) 영화적 지각이 현실의 움직임의 재현이라는
태생적 멍에에서 벗어나 사유의 차원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설명하는 증거들이다.
즉 네오리얼리즘 덕분에, 영화에서의 지각 기능은 단순한 인간 행동의 재현의 수준을 벗어나, 인간의 사유 작용
에 관계하는 수준으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아래에 들뢰즈의 Cinema 2. L'image-temps의 처음 일부분을
그대로 번역해 실어놓았다.
직접 읽어보면서, 네오리얼리즘에 대한 바쟁과 들뢰즈의 입장의 유사성 및 차이를 판단해보기 바란다.
제1장. 운동-이미지를 넘어서
(Gilles Deleuze, Cinema 2. L'image-temps, Editions de Minuit, 1985, pp. 7-10. 진한 글씨에 의한 강조는
역자에 의한 것임)
바쟁은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을 그것의 사회적 내용으로만 정의하려는 이들에 반대하면서 미학적 형식의 기준들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바쟁에 따르면, 이 미학적 형식의 기준들이란 분산적이고 소략적이며 부유하거나 흔들린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형태의 현실에 관계된다. 그리고 그 기준들은, 의도적으로 느슨해진 관계들 및 겉도는 사건들을 내포한 채 돌아가는 현실에 관계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네오리얼리즘에서 현실은 재현되거나 복제되는(reproduit)기보다는 "조준(vise)"되었다. 네오리얼리즘은 이미 해독된 현실을 재현하기보다는, 언제나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는, 해독해야 할 어떤 현실을 조준해 보여주었던 것이다.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이 재현된 것들을 위한 빠른 편집보다 시퀀스-쇼트를 선호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요컨대, 네오리얼리즘은 새로운 형태의 이미지를 만들어냈으며, 바쟁은 그것을 가리켜 "사실-이미지(image-fait)"라 명명했다. 바쟁의 이러한 주장은 그에 반대하는 주장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으며, 네오리얼리즘이라는 하나의 사조가 초기 작품들의 경우에서처럼 단지 영화의 내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바쟁이든 그 반대편의 주장이든, 상반된 두 주장은 어찌됐건 문제를 현실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네오리얼리즘이 형식적인 차원에서건 물질적인 차원에서건, 일종의 "잉여 현실(un plus de réalité)"을 생산해냈다는 주장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네오리얼리즘의 영화들이 행한 문제제기가 형식에 관계되건 내용에 관계되건 오로지 실재(reel)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는 확언할 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사유의 과정에 혹은 "정신적(mental)" 차원에 제기되는 문제들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지각-이미지이건 행동-이미지이건 감정-이미지이건, 운동-이미지 전체가 네오리얼리즘적인 전복을 따랐다면, 그것은 바로 지각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방해하면서 대신 사유와 관계를 이어가도록 만드는 어떤 새로운 요소가 출현했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영화의 이미지를, 운동 너머의 차원으로 이끄는 어떤 새로운 기호들의 요구에 종속시키려는 요소 말이다.
자바티니는 네오리얼리즘을 우연한 만남의 예술, 즉 단편적이고 일시적이고 단속적이며 실패한 만남들로 이루어진 예술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단, 로셀리니의 <파이자>나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에는 그런 종류의 만남들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움베르토 D>에는 바쟁이 인용했던 그 유명한 만남의 시퀀스가 있다. 즉, 젊은 하녀는 아침에 부엌에 들어가 기계적이고 권태로운 일련의 행동들을 한다. 간단히 청소하고 물을 쏘아 개미들을 쫓고 커피 가는 기구를 든 채 발끝을 내밀어 문을 닫는데, 그 순간 그녀의 눈은 우연히 임신한 자신의 배를 향한다. 마치 세상의 모든 불행이 태어나는 것처럼. 그런데 이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하나의 상황 속에서, 무의미할 만큼 아주 단순한 감각-운동의 체계에 종속된 일련의 동작들 중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어린 하녀가 아무런 응답이나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순수한 시각적 상황(situation optique)이다. 눈, 배, 이것이 바로 자바티니가 얘기한 그 우연한 만남이다. 이런 만남들은 예외적인 경우를 포함해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지만, 대개는 순수한 시각적 상황이라는 동일한 공식을 유지한다. 따라서, 로셀리니의 위대한 4부작은 네오리얼리즘을 포기하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완성을 지향한다고 보아야 한다. <독일 영년>에서는 전후 낯선 나라가 되어버린 현실을 경험하는(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 작품이 네오리얼리즘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사회적 뿌리를 갖고 있지 않다고 비난했다) 아이가 결국 자신이 ‘본 것’ 때문에 죽음을 택한다. <스트롬볼리>에 등장하는 이방 여인은 섬에 대해 아주 깊은 ‘통찰’을 해낸 탓에, 그녀의 눈에 보이는 폭력들이나 참치잡이의 거대하고 강렬하고 장관("그것은 끔찍했다...") 혹은 화산의 분화의 가공할 만한 힘("나는 끝났다. 나는 두렵다. 맙소사, 이 얼마나 큰 불행이자 커다란 아름다움인가...") 등에 대해 전혀 둔화시키거나 상쇄하려는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또, <유럽 51>에서는 자식의 죽음으로 인해 이름 모를 공간들을 떠돌면서 빈민굴과 공장 같은 집단 생활의 삶을 체험하는 한 부르주아 여인이 등장하는데("나는 죄수들을 본 것만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점차 사물들과 사람들을 정돈하는데 익숙한 가정 주부로서의 실용적인 기능에서, 비탄, 동정, 사랑, 행복, 수용 같은 내적 시선으로 모든 상태를 파악하는 기능으로 바뀌어간다. 그러나 그녀는 "볼 수 있고, 보는 법을 배웠다"는 일종의 잔다르크 재판과 같은 미명하에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한편,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눈앞에 펼쳐지는 ‘시각적인 이미지들’과 클리셰들에 온 마음을 빼앗기는 한 여행자 여인이 나오는데, 그녀는 그 이미지들의 범람 속에서 개인적으로 참아낼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벗어나는 참기 어려운 어떤 것을 발견한다. 바로 이 모든 것은 행동의 영화가 아닌, ‘견자의 영화’를 가리키는 조건들이다.
그러므로 네오리얼리즘을 규정짓는 것은, 구-리얼리즘에서의 행동-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감각-운동적 상황들과 근본적으로 차별되는 이러한 ‘순수한 시각적 상황들’(물론 네오리얼리즘의 초기에는 동시녹음 사운드가 없었지만, 차후에는 청각적인 상황들도 포함된다)의 출현이다. 이것은 회화에서 인상주의가 순수하게 시각적인 공간을 정복한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물론 누군가는, 영화 관객은 항상 "묘사(되는 것들)" 앞에, 즉 단지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이미지들 앞에 존재해왔었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네오리얼리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자체가 이 순수한 시각적 상황들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고전 영화들에서 간혹 인물들 중 하나가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다 해도 그것은 어떤 행동이 일으킨 사건들로 인해 속박되고 함구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관객이 지각하는 것은 그들이 등장인물들과의 동화를 통해 어느 정도 참여했던 감각-운동 이미지일 뿐이다. 히치콕은 관객을 영화 작품 안에 끌어들이면서 처음으로 이러한 관점의 전복을 실현했었지만, 네오리얼리즘 영화에서는 이러한 인물을 향한 관객의 동화가 보다 확실하게 전복된다. 무엇보다, 인물이 일종의 ‘관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인물은 움직이고 뛰어다니고 활동하려 애쓰지만, 그의 모든 운동 능력을 넘어서는 상황은 그에게 더 이상 반응이나 행위의 논리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보고 듣게 만든다. 인물은 점점 '반응'하기보다는 ‘기록’하게 된다. 즉 어떤 행동에 뛰어들기보다는, 어떤 시각(통찰 행위)에 내맡겨지면서 그 시각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의해 떠밀려 나가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비스콘티의 <강박관념>은 보다 넓은 의미의 네오리얼리즘에 있어서도 분명한 효시 작품이라고 인정받을 만 하다. 관객에게 일단 충격을 안겨주는 요소는 검은 복장의 여주인공이 거의 환각적인 관능에 사로 잡혀가는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유혹하는 여인이라기보다는 ‘견자’(환영을 보는 사람)나 ‘몽유병자’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이후 비스콘티의 <센소>에 등장하는 백작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우리가 『영화1. 운동-이미지』에서 행동-이미지의 위기를 정의하며 언급했던 특징들, 즉 부유의 형식, 클리셰의 확산, 당사자들과 유리되는 사건 등과 같은 감각운동고리의 이완을 포함한 모든 특징들은 단지 일종의 전조로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특징들은 새로운 영화이미지를 가능하게 했으나, 그것을 형성해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 새로운 영화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와해된 감각-운동의 상황을 대체하는 ‘순수한 시청각적 상황’이다. 이런 연유로, 네오리얼리즘 영화, 특히 데 시카의 영화(이후 프랑스에서는 트뤼포의 영화)에서는 어린아이의 역할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성인 세계에서 어린아이는 운동의 차원에서 무력한 일면을 갖지만, 그 무력함은 오히려 아이로 하여금 보고 듣는데 있어 더 뛰어난 능력을 갖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적 요소도 마찬가지의 중요성을 갖는다. 이런 요소들은 현실에서 기존의 자동적인 감각운동의 도식에 종속되어 있지만, 자극과 반응 사이의 균형을 깨는 아주 작은 사건에 의해서도(예를 들면 <움베르토 D>에서의 하녀의 씬) 그 도식의 법칙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으며, 그러면서 현실 자체를 온전하게 날것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어느 순간 갑자기 일상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면서 그것에 꿈과 악몽의 형태를 주는 시청각적 생생함(날 것, 돌발스러움)을 전달할 수 있다. 여하튼, 행동-이미지의 위기와 순수한 시청각적 이미지 사이에는 반드시 거쳐야 할 ‘전이’의 단계가 있다. 한편으로, 이 전이의 단계란 하나의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의 진화, 즉 ‘부유’의 영화들에서 시작해 ‘감각운동 고리의 이완’을 거쳐 ‘순수한 시청각적인 상황’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서로 다른 차원이 공존하는 작품 안에서의 전이, 즉 첫 번째 차원이 단지 두 번째 차원의 멜로디 라인으로서만 기능하는 어떤 작품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이를 가리키기도 한다.
번역 및 해설 김호영
앙드레 바쟁의 리얼리즘
par 최영수
서구 미학의 전통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부터 기원하는 서구 미학의 주된 전통은,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는 관점을 취했다. 르네상스 초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회화는 점점 더 성공적으로 이러한 이상을 추구했으며, 이후 발자크와 톨스토이의 소설들은 이전의 그 어떤 문학보다 더 섬세하게 자연과 사회를 재현했다. 그러나 사진의 발명은 이 모든 성취들을 단번에 능가했다. 왜냐하면 카메라는 자연을 재현하는 능력에 있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실재의 환영을 창조하는 것이 예술의 이상이라면, 영화는 전례 없는 방법으로 이러한 이상의 성취를 가능케 했다.
반사실주의적 전통(anti-realist tradition)
그러나 반사실주의적 전통은 예술의 목표가 자연의 모방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어떤 반사실주의자들은 예술작품을 창조한다는 것은 단순히 세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또 다른 대상을 세계에 더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대상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나, 세계의 이상화를 제공하거나 혹은 완전히 자율적인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기 때문에 가치 있을 수 있다. 또한 반사실주의적 전통에 있어, 어떤 이들은 그와 같은 대상의 가치는 그것이 예술가의 느낌이나 감정을 표현하거나 혹은 예술가가 작업한 소재에 아름답거나 의미 있는 형식을 부과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술가의 느낌은 추상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으며, 결과적으로 형식은 순수하게 상상적일 수 있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자연을 전혀 암시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반사실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영화는 세계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거나, 카메라의 조작을 통해 대안적 세계를 창조해야만 한다. 회화가 거울이 아닌 캔버스 위의 물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처럼, 영화는 단순히 스크린 위에 투사된 이미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반사실주의적 관점에 있어, 다른 종류의 이미지들과는 달리 스크린 위의 이미지가 물리적 실재의 이미지여야만 한다는 주장은 단순한 도그마일 뿐이다.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의 사실주의
영화의 사실주의를 주장한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는 그의 저서 『Theory of Film』에서 영화는 문자 그대로 실재를 촬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만이 자연을 그대로 반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서 영화는 실제로 물리적 세계의 소재를 예술작품 내에서 재생하며, 따라서 영화가 예술가의 형식적 의도에 대한 순수한 표현이거나 예술가의 감정에 대한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표현이 될 수는 없었다. 크라카우어는 물리적 실재를 기록하고 드러내며, 따라서 물리적 실재를 되찾는 것이 영화의 분명한 의무이며 동시에 특권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세계에 대한 감상을 불가능하게 만든 근대 과학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일반적인 불만에 대해, 크라카우어는 예술의 명백한 기능은 우리가 다시금 구체적 세계를 소유하도록 돕는 것이며, 영화가 실제로 이것을 수행한다고 믿었다. 즉 영화는 문자 그대로 카메라를 통해 세계를 경험함으로써, 수면 상태, 즉 사실상 비존재의 상태에 있는 세계를 되찾는 것이다. 결국 크라카우어에게 있어, 영화는 우리를 테크놀로지에 의해 테크놀로지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의 사실주의
앙드레 바쟁 역시 영화의 사실주의를 주장하였지만, 크라카우어와는 분명히 다른 관점에서였다. 크라카우어와는 달리, 바쟁은 영화의 사실주의를 과학적 정신이 아닌 신화적 정신으로 바라보았으며, 그것의 기능을 물리적 실재를 되찾게 해주는 것이 아닌 우리를 물리적 운명으로부터 구제해 주는 것이라 믿었다. 이러한 마술적 목적은 “총체영화의 신화(myth of total cinema)”, 즉 영화 이미지 내에 세계를 완벽하게 재창조하려는 이상에서 표현된다. 바쟁은 유성영화를 이러한 이상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단계로서 환영하였으며, 이탈리아 신사실주의(Italian neorealism)가 그 위대한 성취들 가운데 하나를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바쟁 역시 크라카우어처럼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영화가 호소해야할 핵심이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영화와 실재를 같은 것으로 보았던 크라카우어와는 달리, 바쟁은 영화의 원재료는 실재 그 자체가 아닌 필름에 남겨진 실재의 흔적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실재의 흔적은 두 가지 중요한 성질을 지닌다. 첫째, 석고 틀이 그 모델과 연결되어 있듯 필름에 남겨진 실재의 흔적은 실재와 발생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둘째, 이러한 실재의 흔적은 즉각적으로 이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지문이나 심전도, 또는 엑스레이처럼 해독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실재의 다른 흔적들은 순간적으로 그것의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지만, 사진은 일상적인 시각처럼 즉각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즉 영화는 세계의 흔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세계의 시각적 실재를 거의 완벽하게 복제해낸다. 그러나 크라카우어가 주장하듯,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것은 실재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바쟁은 영화를 실재에 한없이 접근하는, 영원히 실재에 의존하는, 실재로의 점근선으로 보았다.
실재의 흔적이라는 영화의 원재료는 다양한 영화적 언어를 통해 의미화하게 되며, 그것에 적합한 형식을 발견할 때 적합한 의미작용을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영화의 양식과 형식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실재의 흔적이라는 영화의 원재료를 다루는 과정 가운데 채택하는 추상화의 종류와 정도에 주목함으로써 결정될 수 있다. 그러나 바쟁은 추상화, 상징화, 관습과는 반대되는 영화의 사실주의 또한 의미작용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키려는 일종의 양식으로 간주하였다. 다시 말해 바쟁은 ‘양식의 거부 역시 잠재적인 양식의 선택으로 간주’한 것이다.
따라서 바쟁의 관점에서, 영화의 주된 관심과 목적은 경험적 실재와 추상화라는 두 요소 간의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 영화 미학은 경험적 실재의 총체성을 행위의 의미에 종속시킴으로써, 일련의 추상적 기호로 변형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만 영화가 예술로 성립된다고 간주하였다. 이와 같은 전통적 영화 미학의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실재의 이미지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형상화하기 위해 그 이미지가 지닌 몇몇 형식적 측면들을 조작하는 것으로 ‘이미지의 조형성’에 관련된 것이며, 두 번째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형식주의적 편집 과정인 ‘몽타주’를 통해 실재의 이미지에 자신이 원하는 어떤 맥락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쟁에게 상황은 분명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경험적 실재를 이용하거나 또는 경험적 실재 그 자체를 위해 실재를 탐구한다. 전자의 경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미학적 또는 수사학적 진실을 지시하거나 창조하기 위해 경험적 실재를 일련의 기호로 변형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필름에 남겨진 실재의 흔적 어딘가에서 그 장면의 의미를 찾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영화화된 사건에 보다 가깝게 다가서도록 한다.
바쟁은 그 당시까지 제기되었던 기존 영화 이론이 명백한 종류의 영화 양식과 형식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라고 느꼈다. 가장 추상적인 기술이나 형식만을 가장 영화적이며 예술적인 것이라고 일관되게 칭송해 온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쟁은 영화적 의미작용이란 꾸미지 않은 가장 사실주의적인 영화에서부터 가장 추상적인 영화에 이르기까지의 연속이라는 것을 증명하려했다. 이러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위해, 바쟁은 오직 추상적인 기술과 영화만이 진정하게 영화적이라는 견해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으며, 다른 한편 형식주의 영화이론에서 무시되었던 수많은 양식의 영화와 기술들을 소개하며 그 가치에 주목했다.
영화의 조형적 가치에 관한 바쟁의 관점은 연극의 무대장치에 대한 그의 견해와 관련해 가장 잘 드러난다. 연극 무대와 영화 스크린 사이의 차이에 대해 바쟁의 인식은 매우 선명하다. 연극의 무대장치와 세트는 추상적이며 절대적인 또 하나의 우주와 다름없는, 무대위의 드라마에 관객의 정신과 시선을 집중시킨다. 따라서 연극의 힘은 불 주위에 모여드는 나방처럼, 관객을 흡입하는 구심력이다. 반면 바쟁의 관점에 따르면, 영화의 스크린은 그림의 프레임과 같은 프레임이 아니라, 실재의 한 부분만을 보여주는 가리개(mask)이다. 또한 바쟁은 가리개로서의 스크린의 기능은 창문과 같다고 주장한다. 즉 관객은 스크린을 넘어서는 공간을 보지는 못하지만, 결코 그러한 공간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힘은 원심력이며, 스크린 내의 공간은 항상 스크린 밖의 공간을 암시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카메라가 끊임없이 조명하고자 하는 실제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한다.
이와 같은 바쟁의 관점에서 보자면, 영화가 연극의 무대장치나 세트와 경쟁하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기획이며, 영화의 조형적 가치는 그것의 본질적인 사실주의를 고려해야만 한다. 따라서 바쟁이 보기에 독일 표현주의자들의 기획은 하찮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조형적 조작을 거부하고 사려깊게 실재를 선별해 관객으로 하여금 실재 그 자체에 내재해 있는 의미의 다양한 계층을 인지하도록 요구한 장 르느와르(Jean Renoir)야말로 바쟁에게 있어 위대한 작가였던 것이다.
이미지의 조형성에 대한 논의의 경우 그 기본 단위는 바로 대상이다. 즉 문제는 ‘경험적 실재 안의 어떤 대상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한편 몽타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바로 영화의 기본 단위가 사건이라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즉 ‘주어진 사건을 어떻게 영화화할 것인가?’가 문제다. 바쟁 이전의 고전 영화이론들은 양식화(樣式化?Stylization)가 대상을 해석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편집에 사건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었다.
바쟁은 몽타주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했다. 첫 번째는 기본적으로 무성영화와 관련된 것으로서, 이 경우 이미지는 논변이나 드라마 또는 형식과 같은 어떤 추상적 원리에 따라 결합된다. 두 번째는 영화에 사운드가 도입된 이후 주로 사용된 것으로, 이러한 몽타주는 우리가 영화의 사건에 실제로 있었다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경험했었을 주목의 변화를 묘사하는 단편들로 사건을 세분화하는 심리적 몽타주이다. 바쟁에게 이러한 몽타주는 모두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 특징이란 몽타주가 이미지들이 객관적으로 내포하고 있지 않은 어떤 의미, 즉 오직 이미지들 상호 간의 관계로부터만 나오는 어떤 의미에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즉 몽타주는 그것을 구성하는 객관적인 내용보다는 이들 구성 요소의 구성 그 자체 속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한다. 따라서 이야기의 주제는 개개 이미지의 사실성이 어떤 것이건, 본질적으로는 이들 이미지 간의 관계로부터 발생한다. 이른바 몽타주는 이야기의 궁극적 목표와 가공되지 않은 이미지 사이에 하나의 보조적인 중개자, 일종의 미학적인 변압기로 작용한다. 즉 의미는 이미지 속에 있지 않고, 몽타주에 의해 관객의 의식 평면에 투사된 이미지의 그림자 속에 담기게 된다. 따라서 바쟁이 보기에, 무대장치와 조명이라고 하는 영상의 조형요소에 자의적인 변형을 가했던 독일 표현주의자들이나, 몽타주의 이론과 실천을 그 궁극적 결론에까지 밀고 나갔던 소비에트 영화는 모두 실재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관객에게 강요하는 일종의 폭력이었다.
따라서 영화적 이야기를 논리성 있게 설명하는 형식으로서의 몽타주는 일종의 ‘분절된 담화’이며, 따라서 현실의 ‘모호성’을 파괴한다. 그렇다면 바쟁에게 모호성이란 어떤 가치를 지닌 것일까? 바쟁에게 모호성은 숨기거나 인위적을 구성해서 없애버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세계에 존재하는 실재이다. 즉 바쟁은 세계의 모호성은 실재하며, 따라서 세계의 다른 면들에 대해서 끊임없는 회의를 가져야 하며 현재의 명료성을 끊임없이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바쟁의 시대는 세계에 대한 결정론적 시각의 붕괴가 가장 민감하게 다가오고, 그 붕괴가 유발한 세계관의 혼동이 새로이 정립되기를 열망하던 시기였다. 전쟁은 인간에 대한, 신에 대한 기존의 신뢰를 가차 없이 무너뜨려 버리고, 낭만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세계를 바라볼 필요성을 알려주었다. 따라서 바쟁에게 현실이란 어떠한 사건도 선험적으로 결정된 의미로 파악할 수 없는 현실, 즉 함축적 ‘모호성’으로서의 현실이었다. 그러므로 카메라는 동시에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스스로가 보려고 택한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한다고 생각한 바쟁에게 있어, 영화의 이미지는 그것이 현실에 대해 무언가를 덧붙여주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현실 속에서 무엇을 드러내는가에 의해 우선적으로 평가되어야만 했다. 즉 바쟁이 생각하기에 영화는 모호성을 가진 세계를 표상하거나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쟁은 몽타주에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시야심도(depth of field)를 영화 언어의 역사에 있어 변증법적인 진보로 간주했다. 바쟁이 이처럼 시야심도 촬영을 선호한 까닭은, 우선 그것이 내재적으로 보다 실재와 가까우며, 또한 시야심도 촬영은 사건을 처리하는 우리의 정상적인 심리적 방법과는 충돌하기 때문에, 우리가 종종 인식하지 못하는 ‘실재들’ 즉 의미의 불확실성을 보여준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지각적 실재를 추상적인 시간과 분할된 공간으로 대체함으로써 지각의 연속성을 파괴하고 정신적 연속성을 창조하며, 실재를 분석함에 있어 극적인 사건이 지닌 의미의 단일성을 가정하는 몽타주는 바쟁의 관점에서 비사실적인 양식이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보편적 초점을 대상들 사이의 공간에 맞추는, 시야심도 촬영은 차별화되지 않은 공간적 동질성 안에서 대상의 자율성을 보존함으로써, 이미지의 구조 속에 필연성이 아닌 애매성을 다시금 도입한다. 즉 자연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게 ‘모호하게’ 말을 걸어온다고 생각한 바쟁에게, 자연의 애매성을 보존함으로써 관객이 그 가능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시야심도 촬영은 매우 사실적인 양식이었다.
따라서 바쟁에게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화들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니며, 다음과 같이 그 가치를 이야기했다.
“… 나는 그러한 영화언어의 혁명이 야기된 바의 확인을 다른 방법을 통해 이탈리아 영화 속에서도 발견할 수가 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파이자?Paisa>와 <독일 영년?Allemania Anno Zero> 그리고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Ladri de Biciclette>에서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은 모든 표현주의의 포기와 특히 몽타주에 의한 여러 가지 효과의 완전한 결여에 의해 영화적 리얼리즘의 이전(以前) 형식들과 대립하고 있다. 웰즈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그것과의 양식상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네오리얼리즘은 현실의 애매성이 갖는 의미를 영화에 되돌려주고자 한다. …”
바쟁 이전, 영화이론은 원재료들을 영리하게 조각내고 병치하며 모형을 변형시켜 새로운 추상적 의미를 만들어내는 영화적 양식만을 가치있게 보았다. 그러나 언어에 있어 ‘은유’와 유비될 수 있는 이러한 양식에 모든 가치를 집중시켰던 상황에 대해, 바쟁은 영화 언어의 다른 가능성과 장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할 시기임을 깨달았으며, ‘은유’뿐만 아니라 ‘생략’이나 ‘환유’와 같은 다른 양식들의 가치에도 주목했던 것이다. 즉 바쟁이 보기에 스크린 위의 이미지는 통일된 의미를 지닌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연스럽게 속해있는 세계라는 실재의 애매성을 드러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기존의 의미작용을 포기하고 세계의 다양한 감각을 재발견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따라서 ‘진정한 예술가는 일차적으로 좋은 관찰자여야 하며, 사건의 전체로부터 혹은 주어진 세계로부터 그것을 가장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부분들을 골라내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바쟁에게,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화들은 영화의 존재론적 가치와 의미를 드러내주는 좋은 모범이였다.
바쟁과 로셀리니 그리고 네오리얼리즘 par 이선주
리얼리즘, 리얼리티, 네오리얼리즘
“<파이자>(1946)에서 리얼리즘적인 것은 이탈리아의 레지스탕스이고, 네오리얼리즘적인 것은 로셀리니의 연출과, 사건들을 생략하는 동시에 종합하는 그의 제시방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앙드레 바쟁(1918-1958)은 그의 저서 『영화란 무엇인가』를 통해, 영화의 존재론에 대한 견해를 그가 극찬했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을 사례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현실’이란 단지 겉으로 보이는 것을 쌓아놓는 것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모든 것을 벗겨내는 것이요, 단순성 속에서 전체성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바쟁은, 복잡하고 모호한 이 세계의 현실을 주제와 형식의 긴밀한 상호연관 속에서, 마치 스케치(소묘)하듯 영화적 공간속에 재현해낸 로셀리니야말로 현실성의 본질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뛰어난 감독이라고 여겼던 듯 하다.
바쟁은 네오리얼리즘에 대해 논하면서 리얼리즘과 리얼리티를 구별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전통적 의미에서의 리얼리즘과 네오리얼리즘과의 차이 또한 구분하고 있다. 그가 영화사적 측면에서 <전함포템킨>의 출현에 비견할만하다고 평가했던 영화 <파이자>는 분산적이고 동요하는 리얼리티에 대한 현실인식이 생략과 우연의 단절적인 구조로 제시되는, 로셀리니 영화의 미학적 특징을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다. 네오리얼리즘의 신호탄이자 로셀리니의 전쟁 3부작의 첫 영화인 <무방비도시>(1945)가 영화가 역사와 만나 현실기록의 문제를 탐구하기 시작한 의미를 가진 작품이었다면, <파이자>는 본질적으로 애매성으로 가득한, 구멍난 현실의 단편을 인과관계에 의존하지 않은 채 에피소드식 구성이라는 형식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다.
<무방비도시> <파이자>
2차 대전 말기 이탈리아 해방의 시기에 일어난 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파이자>를 바쟁은 “한 권의 중편소설같은 영화”라고 칭하면서, 암거래, 매춘, 수도원, 레지스탕스 등의 독립적인 이야기를 하나의 통일성(전체성) 속에 결합시키는 로셀리니의 연출스타일을 네오리얼리즘적인 것으로 특징지었다. 바쟁에게 있어 네오리얼리즘이란 객관적 기록주의도, 전통적인 사실주의도 아닌, 예술가의 총체적인 의식에 의해 걸러지고, 재구성된 현실이다. 그것은 총체성을 보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존재론적인 리얼리티라고 할 수 있으며, 결정론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진화의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는 개념이다.
바쟁은 <파이자>를 분석하면서, 로셀리니, 데 시카, 펠리니 등 이탈리아 감독들의 공통성이 드라마 구조를 포기함으로써 현실감의 재현에 우월성을 부여하는 점에 있다고 말한다. 바쟁은 로셀리니가 복잡다단한 현실을 담아내기 위해 사용한 롱테이크 -플랑 세캉스- 와 더불어, 우연성의 강조, 생략 등의 기법을 통해 새로운 현실성을 창조해 냈다고 보았고, 이를 <시민케인>의 오손 웰즈 스타일(딥 포커스)과 비교하기도 한다. 비직업배우를 기용해 등장인물조차도 전체의 한 부분으로 여겨, 배경이나 다른 인물과 분리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포착해냈던 로셀리니의 촬영법은 웰즈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가졌음에도, 근본적으로는 양자 모두 ‘현실’을 존중하는 미학적 개념을 가진 리얼리즘이라고 본 것이다. 로셀리니 영화에서 배우는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리얼리티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네오리얼리즘적 태도
<무방비도시>(1945), <파이자>(1946)에 이은 전쟁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독일영년>(1947)은 신비하고 모호한 표정으로 폐허의 도시를 내내 거닐며 부유하는 한 소년의 표정과 제스처를 지속적으로 따라간다. 일체의 감상적인 동정을 거부하며 최후의 비극을 향해 치닫는 이 영화에서 바쟁은 오직 마지막 행위만이 소년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열쇠가 된다고 보았다. 그 열쇠란 놀이의 표시와 죽음의 표시가 아이의 얼굴에서는 같은 것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 (소년의 자살로 이르는 마지막 시퀀스는 그야말로 쓸쓸한 놀이들의 제의(祭儀)처럼 느껴지지만, 거의 모든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이 영화에서 그 전조조차 눈치채기란 쉽지 않다)
<독일영년>
황량한 빈 터에서 한 발 뛰기 놀이를 하고, 거리에서 주운 건물 잔해들과 녹슨 철조각으로 손장난을 하다, 자신의 집 맞은편 건물 꼭대기로가 장난감 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누던 소년은 미끄럼을 타고 내려와 너무도 자연스럽게(혹은 갑작스럽게) 투신한다. 살기 위해 무덤파는 노동을 하고, 아버지를 독살했던 소년은 바쟁의 표현대로, ‘죽음을 향해 뭔가에 홀린 듯’ 걸어간다. 몸짓, 변화, 육체적인 움직임이 인간적 현실의 본질 그 자체를 구성하며, 등장인물들이 배경(환경)에 쉽사리 영향받는 로셀리니의 영화세계는 바쟁의 관점에서 볼 때, 영화의 본질(객관적 리얼리티에 대한 존재론적 재현)에 근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출과정에서 도덕적이거나 극적인 의미를 결코 현실의 표면에 드러내지 않는 로셀리니의 심리적 객관성을 바쟁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로셀리니의 리얼리즘은 이전까지의 리얼리즘과 공통된 점을 조금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제재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스타일의 리얼리즘인 것이다 ...... 로셀리니야말로 이탈리아의 모든 영화감독들중 네오리얼리즘의 미학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나간 인물이다”
네오리얼리즘을 주제나 제재의 문제로 국한시키려는 입장들(주로 당대의 이탈리아 비평가들)과 달리, 형식과 스타일을 부각시킨 바쟁의 이러한 견해는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의 ‘현대성’에 주목했던 들뢰즈에게도 후에 수용되었다. 어떠한 이론에 대해서도 결정론적 태도를 갖는 것을 경계했던 바쟁은 네오리얼리즘에 관해서도 순수한 네오리얼리즘이란 없으며, ‘네오리얼리즘적 태도’란 일시적 사조로서 그것을 이해하는 한계를 넘어, 우연적이고 모호한 이 세계의 현상들을 판단중지를 통해 인식하는, 영화에 대한 현대적 사유의 출발로 보았다.
로셀리니와 현대영화 : 네오리얼리즘과 누벨바그
“<이탈리아 여행>(1953)이 출현하면서 모든 영화들은 갑자기 10년이상 뒤떨어진 것으로 되어버렸다. 지금 시점에서도 그것은 여전히 아방가르드 영화이다”
- 자크 리베트
자크 리베트가 1955년 4월호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기고한 ‘로셀리니에 대한 편지’는 <이탈리아 여행>의 평가를 두고 카이에 내부에서 발생한 이견들에 대해 자신의 지지를 표명하는 영향력있는 비평이었다. 나폴리를 여행하고 있는 어느 부부의 해체된 관계를, 에피소드 위주의 자유로운 ‘에세이’적 형식을 통해 (즉흥적으로) 스케치하고 있는 이 영화는, 여주인공의 내면심리를 따라 펼쳐지는 ‘균열’과, 삶과 죽음의 이미지, 영혼의 신체적 현현, 카톨릭적 종교의식 등이 순간순간마다 폭발할 듯한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현대영화’라는 것이다. 이를 이야기하거나 증명하는 게 아니라, 다만 보여주고 있을 뿐인 로셀리니를 리베트는 “가장 현대적인 작가” 라고 극찬했다.
<이탈리아여행>
한편, 비슷한 시기에 바쟁 또한 이탈리아 잡지 『치네마 누오보』의 편집장인 아리스타르코와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영화란 무엇인가』에 수록된 글 ‘로셀리니의 옹호(『치네마 누오보』 1955년 8월호)’를 보면 <이탈리아 여행>을 중심으로한 로셀리니 영화들에 대한 바쟁의 애정과, 네오리얼리즘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을 느낄 수 있다. 두 논객의 세계관(철학), 종교, 이데올로기(에 의한 매체의 지향성), 국가 등의 차이로 인해 접점을 찾을 수 없었던 이 논쟁에서, 아리스타르코는 바쟁과 로셀리니, 네오리얼리즘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로셀리니가 진정 네오리얼리스트였던가,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그러한가?’ 라는 질문에 대해 아리스타르코는 <독일영년>(1947)에서 이미 쇠퇴의 기운이 발견되었고, <스트롬볼리>(1949)에서부터는 결정적으로 변화했으며, <유럽 51>(1952), <이탈리아 여행>(1953)에 이르러서는 파국에 이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네오리얼리즘 시대의 전쟁 3부작(<무방비도시>, <파이자>, <독일영년>) 이후, 로셀리니는 주로 개인의 내면과 종교적 문제를 자연(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그려내기 시작했는데, 현실에 대한 영화적 발언을 중시했던 이탈리아 좌파진영의 아리스타르코의 입장과 달리, 바쟁은 네오리얼리즘이란 ‘정신적인 태도’를 전제로 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바쟁은 그 실례로 <이탈리아 여행>을 들어 보이면서, 여주인공의 의식을 통해 걸러진 빈약한 나폴리의 모습이야말로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이기도한 하나의 ‘정신적인 풍경’이라고 설명했다.
현실의 일상적 파편들로 이루어지는 우연한 사건들과, 리얼리티의 모호성, 비드라마적 구성과 생략의 문제 등은 바쟁에게 세계의 본질로서 인식되었고, 로셀리니의 영화(네오리얼리즘)가 보여준 이러한 현상학적 리얼리티야말로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구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탈리아 여행>은 뛰어난 네오리얼리즘적 영화이며, 로셀리니는 네오리얼리즘을 가장 진화시킨 이탈리아 감독이라는 것이다.
바쟁과 마찬가지로 로셀리니(네오리얼리즘)에게 열광했던 『카이에 뒤 시네마』의 고다르, 리베트, 트뤼포, 로메르는 훗날 ‘현대영화’의 상징인 ‘누벨바그’의 주역들이 된다. <네 멋대로 해라>(1959)를 비롯한 고다르의 초기영화 (특히, 로셀리니가 시나리오 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기관총부대>(1963)) 에서 로셀리니의 영향은 로케이션 촬영과 비전문배우의 사용, 다큐멘터리적 장면의 활용 등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영화의 역사>(1989-1998) 3부에서 고다르는 상당 시간동안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 화면들을 보여주면서, 2차 대전 동안 미국에 의한 영화만들기의 획일성에 저항한 유일한 세력은 이탈리아 영화 뿐이었노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 세계의 거대한 모호성은 언제나 리얼리티의 본질이었다. 바쟁의 로셀리니(네오리얼리즘) 지지가 의미를 갖는 것은 이렇듯 분산적이고, 우연적이며, 부유하는, 불완전한 세계에 대한 현상학적 인식을 통해 영화의 본질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역사속의 한 시대에 그대로 박제될 수도 있었을 영화사조를 발굴해서, ‘네오리얼리즘적 태도’라는 명명을 통해 진화시키고, ‘현대영화’ -누벨바그-와 만나게 한 바쟁의 영화이론은, 영화의 존재론적 본질에 입각한 완전 영화의 신화에 도달하고자 한 것이었다. 대상을 영구보존하려는 영화의 강박증처럼 바쟁은 사라지는 이미지들을 보존하려는 기억의 강박에 의해 글을 썼고, 그것이 바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는 바쟁의 영화비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