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학 논쟁의 영화 미학적 근거
I. 들어가는 말
기호는 자신이 스스로 함유하지 않는 외부의 그 어떤 의미를 ‘지시하는’ 대상이다.
따라서 그것은 본질상 어떤 수신자에 의하여 해독되어야 할 텍스트적 요소로서 기능을 한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 사이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비로소 그러한 소통 방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
(기호는 일종의 문화적 약속 체계인 것이다.)
영화 텍스트를 사회적 약호의 집합체로 해석하는 영화 기호학은 1960년대 후반 영화학의 주도적 패러다임으로
부상한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정신분석학이 인문학 일반에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면서 영화 속에 감쳐진
코드들을 낱낱이 찾아내는 식의 시도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인간의 정신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공유될 때 영화를 객관
적이고 실증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기호학 특유의 믿음은 별다른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통합적 패러다임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현대 영화학에도
변함없이 적용된다.
기호학이 충분한 방법론적 근거를 가지지 못하다는 것은 일찌감치 간파되었지만 반대로 이러한 문제점을 완전
히 극복할 대안적 지평은 오늘날까지 마련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상 기호학 논쟁은 여전히 진행형의 상태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이와 관련된 논의들의 주요 궤적을 통시적으로 추적해 본다.
이를 통하여 기호학 논쟁이 영화 이론사에서 차지하는 지형도를 재구성해 보며 동시에 이러한 종류의 방법론적
자기 성찰이 가지는 영화 미학적 의의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기호’라는 관점에 함유된 현대성을 재발견하는 것은 미래의 영화학을 위한 생산적인 정지(整地) 작업이 될 것
으로 기대한다.
II. 방법론적 고찰
본고의 서술 및 논증은 일차적으로 해당 개념들에 내포된 관념들 ideas의 논리적 연관 관계에 집중하는 이른바
‘관념론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실제로 영화사에서 어떻게 반영되었으며 영화이론가들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그 구체적 양상
을 살펴보는 실증적 고찰은 서술 및 논증의 맥락에서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생략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호학 논쟁은 궁극적으로 패러다임 논쟁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어떤 식으로 영화를 이해하고 어떤 식으로 영화 예술을 정초(定礎)해야 마땅할 것인지에 대한 원론적
고찰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에 기호학이라는 이론 체계를 어떻게 적용해야 마땅할 것이냐는 실천적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이 얼마만큼 논리적 정합성(整合性)을 가지느냐는 내재적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관념론적 고찰은 관념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여기에 있어서 세부적 의미 부여는 주로 인간 이성의 집적체인 정신사의 궤적을 쫓아가면서 비로소 가능
해진다.
왜냐하면 관념은 결국 인간이라는 주체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집적해 놓은 정신문화의 정수(精髓)이기 때문이다.
시대에 뒤쳐진 관념, 논리적 효용성을 상실한 관념은 더 이상 주도적인 패러다임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성숙해 가는 인류 정신사와 부단히 변모해 가는 관념 체계 사이에는 내재적 친연성(親緣性)이 존재하는
것이다.
문제 제기의 관점에서 볼 때 본고는 한 가지 테제를 그 기저에 깔고 있다.
그것은 기호학과 정신분석학간의 원론적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관념론적으로 고찰해 보는 것은 학적 논의
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다.
즉 순수 패러다임의 차원에서 기호학과 정신분석학을 비교, 분석하는 것은 결코 비생산적인 발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론 부분에서 밝히겠지만 이 둘 사이에는 모종의 정신사적 연속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당 패러다임으로서의 속성상 관념론적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원론적 차원에서의 고찰은 생산적이냐 아니냐의 여부를 떠나서 기호학과 정신분석학간의 영화 이론사적
상관관계를 체계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반드시 밟아야만 하는 수순인 것이다.
원론적 차원의 고찰에 있어서 체계의 방대함은 결정적 요소가 아니다. 사례 연구 및 세부 개념의 지식의 많고
적음은 패러다임 자체의 정합성을 논하는데 있어서 별반 중요성을 지니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기호학과 정신 분석학 사이에 어떤 발전의 모멘트가 있는지 패러다임 자체의 핵심적 요소를 관념적
차원에서 통찰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의 구성은 이 부분을 구명하는데 집중하고자 한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이 ‘발전’이라는 추상적 실체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서 정신사적 맥락을 해석적
지평으로 활용할 것이다.
III. 현대 영화 미학의 효시로서의 기호학
고전적 영화 미학은 사실주의/형식주의의 대립항으로 요약된다.
영화예술에 대한 기본적 입장이 이미 원론적 차원에서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은 예술 매체로서의 영화가
가지는 이중성 때문이다.
‘매체’라는 말은 본래 어떤 특정한 것을 또 다른 어떤 것에 전달해 주는 연결체로서의 뜻을 가진다.
따라서 실체로서의 자기 정체성은 매개라는 맥락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연결 지어준다는 것 자체에 스스로의 존립 근거를 가지기 때문에 속성상 ‘기능적’ 대상인 것이다.
사실주의는 바로 이렇게 영화예술의 매체적 측면을 강조하는 패러다임이다.
영화를 현실의 반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사실주의 계열의 이론가들이 주안점을 두는 부분은 영화 자체가
아니라 영화에 담겨지는 내용이다.
따라서 그들이 영화를 대하는 기본 입장은 인식론적이다. 영화를 통해 현실에 대한 더 한층 폭 넓고 깊이 있는
앎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에 내재된 가장 큰 방법론적 문제점은 그것이 충분히 ‘영화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영화가 현실의 의미들을 전달해 주는 매개체에 불과할 때 영화예술이 스스로의 독자성을 잃게 되는 것은 자명
하다.
영화학에 있어서의 형식주의적 움직임은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영화예술은 매체로서의 역할에 안주해서는 안되며 반대로 스스로 고유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영화적 ‘정신’은 영화를 통해서 직접 표출되어야 한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비로소 영화형식이 자신의 물질성을 획득한다는 구호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이 영화사조로서 실존한 예가 바로 독일 표현주의인 것이다.
영화는 현실의 의미를 반영하는 도구가 아니다. 영화는 일체의 현실적 법칙이 지양된 ‘절대적’ 허구이다.
그러나 이제 영화사가 반세기를 넘어가면서 사실주의/형식주의의 이분법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사변적이라는 인식이 점차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역사적 이유에서 비롯될 터인데 실제 영화사에 있어서 기록으로
서의 영화와 허구로서의 영화는 각각 나름대로 확고한 입지를 얻게 된 것이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나란히 공존하는 것은 이제 자연스러운 영화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결국 고전적 영화이론은 관념론적 사고 방식에 얽매여 있었음이 판명되었다.
영화를 현실과 똑같은 기준에서 보느냐, 아니면 정반대로 현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허구로 보느냐는 것은 엄밀
히 따져 보면 영화 자체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영화의 존재를 논하는 사람들이 영화매체에 사실주의적 예술관을 투사하느냐, 아니면 형식주의적 예술관을 투사
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영화학계 안에서 점차로 반관념론적인 기운이 팽배해지면서 이론가들은 사실주의/형식주의의 이분법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탈피하고자 한다.
이를 위한 대안적 지평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일감으로 떠오르는 것은 고전적 영화이론에 공통적인 순수주의적
입장을 버리는 것이다. 즉 굳이 ‘절대적’ 차원에서 영화 존재를 규정짓지 않는다.
대신 영화예술이 시간과 공간의 맥락에 따라서 가변적일 수도 있는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맥락에서 왜 굳이 기호학이 대안적 지평을 제시하는 것일까?
기호학의 기본 출발점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 즉 기의와 그것을 담고 있는 대상인 기표 사이에 일체의 자연적
인과 관계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의와 기표를 연결 짓는 준거점은 인위적인 것이다. 사회와의 협약을 통해서만 해당 기의를 전달할
수 있을 뿐이지 자신의 실체 안에 전자에 상응하는 그 어떤 의미소들을 본래 함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인간 문화가 완전히 자의적인 의미 체계를 스스로 창출해 낼 때 해당 기표는 사실상 기호가 되어 버린다.
자연에서는 일체의 유사점을 찾을 수 없는 순수 상징의 차원에서 정보 전달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컴퓨터의 0과 1의 무수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분법적 언어 시스템은 이에 해당하는 극단적인 예일 것이다.
이러한 기호학적 발상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굳이 존재론적으로 의미를 단정 짓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체계
적인 텍스트 읽기가 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그 때 그 때 어떤 상징 체계가 사회 속에서 유통되고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은 반드시 우산을 지참하고 다녀야 하느냐 마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수시로 일기예보에 접하라고
대답하는 것과 대동소이한 방식인 것이다.
기호학 태동 무렵 이후 오늘날까지의 영화 이론사의 궤적을 조망해 보면 영화의 의미가 사회에 따라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는 것이야말로 현대 영화 미학의 출발점임이 드러난다.
기호학, 작가주의, 정신분석학, 이데올로기 비판뿐만 아니라 현대의 장르 이론)까지 모두에게 다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은 ‘영화는 인간 문화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그들의 사고 체계의 저변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서 영화의 의미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차대전 이후 비로소 텍스트의 분석이 영화 해석에 있어서 핵심적 요소로 부각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이 전에는 영화가 실제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텍스트를 낱낱이 해부해 보는 것은 이례적인 경우에 해당되
었던 것이다.
철학, 문학 등 이미 자리를 잡은 인문학의 패러다임들은 별다른 비판적 성찰 없이 영화학에 투사되었으며 그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화 자체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에 대한 논의의 수준을 결정 짓는 것은 사실상 영화 자체에 대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인문학 일반에 대한
소양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영화가 진정한 의미에서 독자적 예술장르로서 학제적으로 인정을 받기까지에는 아주 많은 시간이 소요
되었다. 그리고 뒤늦긴 했지만 그래도 이러한 도래의 순간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는 데에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영화기호학이다. 이제 현대 영화 미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기표와 기의가 아무런 필연적인 인과 관계가 없다는 발상은 본래 범 인문학적 패러다임인 구조주의에서 유래
한다. 한 현상의 의미는 그것의 심층에 ‘숨어’ 있는 실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체’라는 지평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론적 허구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 따로 그 어떤 피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현상이 가지는 의미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현상적 요소들의 상관 ‘관계’를 통해서 ‘생겨날’ 뿐이다.
소쉬르 류의 언어학에서 활용되는 기본적 방법론은 일견 이러한 조건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관찰 대상은 일단 분절 가능하고 그들의 관계망을 통한 의미 부여의 방식은 이미 사회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바로 이렇게 언어가 기호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똑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말들이 나라에 따라 가지각색이 되고
있는 현실이 설명된다. 해당 상징 체계, 즉 용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언어 차원에서의 의사 소통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IV. 영화 기호학에 내재된 방법론적 문제점
한편 ‘구조’라는 관점이 가지는 혁신적 측면이 혹시 과대 포장된 것은 아니냐는 문제 제기는 인문학계 일각에서
꾸준히 존재해 왔다. 구조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방법론적 모순이 특히 문제시되었던 것이다.
사회라는 것이 결코 구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객관적으로 고찰될 수 없다는 점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공동체적 삶이라는 것도 결국 개별적 인간들이 모여서 가능한 것인 만큼 그들의 개인적인 생각, 느낌,
입장, 관심사 등에 의해 영향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사회 역시 인간이 그런 것만큼 주관적인 것이다.
정태적으로 관찰 가능한 ‘구조’라는 것은 최소한 인간의 문화를 다루는 인문학의 영역에 있어서는 실존하지
않는다. 공허한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이다.
설령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시시각각 변모해 가기 때문에 애당초 객관적 고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문화에는 인간의 희노애락이 어쩔 수 없이 개입되기 마련이고 그것은 다시 인간의 생로병사라는 법칙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다.
결국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해 가는 통시적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구조주의자들이 방법론적 패러다임으로 설정하는 ‘구조’라는 개념이 내포하는 공시적 뉘앙스는
비판의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되는 이데올로기적 성질의 것이다.
즉 이론적 정당성으로 포장된 ‘구조’라는 개념이야말로 인간의 숨결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또 하나의 박제화된
거대 담론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위 패러다임상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영화 기호학은 한 가지 분명한 결함을 가지는데 그것은 ‘적합성’
의 문제이다.
구조주의가 방법론상으로 가정했던 텍스트의 분절 가능성이 언어에는 상당 부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단어가 모여서 문장을 만들며 문장이 모여서 단락을 만들며 단락이 모여서 하나의 완결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그것이 잘 적용되지 않는다.
영화 이미지는 그 용어가 내포하는 ‘하나로 뒤섞여진 모호한 감성의 집합체’라는 뉘앙스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본래 비분절적이기 때문이다.
찰리 채플린의 해맑은 미소를 그의 눈, 코, 입 등의 움직임으로 나누어서 분석한다는 것이 난센스인 것도 마찬
가지의 이유에서이다.
크리스티앙 메츠의 ‘거대통합체’ 등에서 발견되는 일련의 통일된 언어 체계를 통하여 영화를 읽어내는 시도는
결국 작위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실제로 그렇게 영화를 읽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도 영화 이미지를 비분절적으로 해독하는 것이 더 관습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기호학의 입장을 지지
하는 이론가들에게 풀기 어려운 딜레마를 남겨 놓는다.
분석을 구체화하면 구체화할수록 이론의 적용 범위가 작아지는 것이다.
이렇게 체계성과 일반성이 원론적 차원에서 이미 반비례 관계에 있다는 것은 영화를 이해하는 통합적 패러다임
으로서의 기호학의 가치를 현저하게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딜레마에 맞설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은 영화 텍스트를 분절 요소들로 분석하는데 연연하지 않고 영화
의미가 사회 속에서 소통되는 실제 양상들을 실증적으로 분류, 정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적 성향이 강화
되면 강화될수록 기호학은 장르 연구의 성향을 띄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와 관련지어 한 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영화를 어떻게 하면 더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는 패러다임 논쟁의 차원에서 장르는 공허한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화를 ‘관습’ 또는 ‘발전’이라는 장르 특유의 통시적 개념소들로 느슨하게 정의한다는 것은 한 편으로 보자면
현실적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 볼 때 시간,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현상을 일반화하고자 하는 이론 본연의 취지
는 퇴색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개념화를 하는데 있어서 파생되는 현상의 단순화라는 문제는 개념화 자체를
포기함으로써 해결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
V. 정신 분석학적 문제 제기
기호학이 직면하게 된 위기란 도대체 어떤 성격의 것인가? 왜 기호학은 스스로 흥망성쇠의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가?
기호학이 남겨 놓은 이론사적 궤적을 추적해 보기 위해서는 문제 지평을 ‘현대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전적 사실주의/형식주의의 이분법만으로는 기호학의 현대 영화 이론에 대해 가지는 과도기적 성격을 이해
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기호학, 작가주의, 장르연구, 정신분석학, 이데올로기 비판 등 좀 더 동시대적인 패러다임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현대성을 지닌다.
우선 이 중 가장 먼저 등장한 작가주의의 경우 영화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작가 즉 생산자라는 관점을 상정해 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 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 실체를 가진 자연인으로서의 영화 감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괄호 안의 작가라는 용어가 그렇듯이 실제로 작가주의자들의 관심을 끄는 관심사는 오히려 영화를 통해 재구성
되는 감독의 미학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로소 그들이 한 편으로는 작가의 존재를 강조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는 영화 고유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식의 모순된 태도를 보여주는 이유가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왜 작가주의와 기호학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곳에서 태동하게 되었는지도 짐작 가능하다.
이 둘은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공통점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양자가 모두 텍스트라는 독자적인 미학적 지평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감독의 실제 연출 의도와 상관없이 그 의미가 수용자에 의해 ‘객관적’으로 읽혀질 수 있음이 암시되고 있는 부분
이다.
한편 여기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수용자 중심의 영화 미학은 오늘날의 장르적 영화 읽기의 단계에
다다르면 더한층 활성화된다.
영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는 관객이다.
더 이상 실제 일어나는 수용방식을 도외시한 영화이론은 설자리가 없어지기 시작하는데 그러한 경향은 최신
패러다임인 인지주의 이론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이제 전체 구도를 정리하면 작가/ 텍스트/ 수용자의 삼분법이 중층 매개되면서 펼쳐지는 다양한 현상이 곧 현대
영화이론의 광대한 스펙트럼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비로소 영화 기호학의
이론사적 위상이 좀 더 뚜렷해진다.
텍스트를 기호라는 하나의 객관적 대상으로 고찰한다는 것은 고전적 영화 이론의 철학적 성향에 내포되었던
인간 중심적 영화관이 즉물화되어 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무한한 사유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근대인의 자의식이 이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가치 판단
대신 구체적인 영화 현실이 주요 관심사가 된다.
그만큼 더 텍스트와 수용자의 비중이 커지는 것이다. 영화는 감독의 피조물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보면 가변성이 강조되는 장르적 관점은 이성의 이론적 사유 능력이 더한층
약화되어 가면서 나타나는 일종의 데카당스적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기호학에서는 최소한 객관적 고찰이 가능한 ‘텍스트’라는 하나의 미학적 지평은 존재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마저 유동적이 되어간다. 영화학도 이제 다원론적 상대주의에 침윤되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와 같은 주체의 이완 현상이 극단으로 치달아서 이른바 ‘주체의 죽음’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여기서 소위 포스트 구조주의의 세계관과 맞닥뜨리게 된다.
인간의 사고 차원에서마저 ‘구조’라는 지평이 사라진다면 이제 주체는 스스로를 통제할 능력을 상실하고 카오스
의 상태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정신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 이면을 살펴보면 무의식적 욕망들의
불균질적 집합체인 것이다.
이러한 탈 구조주의 시대의 정신 분석학이 영화학에 유입될 때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작가/ 텍스트/ 수용자의
경계가 본격적으로 와해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영역은 이제 각각 자신의 실체가 약화되면서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부유하게 된다.
결국 존재의 이면에 늘 그것의 정반대인 그 무엇으로 표상되는 ‘타자 the other’라는 그림자가 쫓아다닌다.
예를 들어 텍스트는 관객에게 읽혀지는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의당 있어야 할 것을 보이지
않는 은폐의 기제로 이해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분석학 계열의 영화이론에서는 영화가 무엇을 보여주는가의 문제만큼이나 영화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작가의 관점에도 이러한 이중성은 그대로 적용된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가적 정신의 진수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욕망들 또한 같이 표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적 행동은 같은 논리에서 수용자에게도 역시 해당된다. 그가 영화에 만족하는 것은 반드시 자발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성적 차원에서 볼 때는 개탄해 마지않을 내용과 표현에 대해서도 수용자는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본능적 차원에서 이러한 퇴행적 상태에 탐닉한다.
결론은 무엇인가? 영화는 결코 지성미 넘치는 문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말로 형언하기 수치스러운 욕망들마저도 ‘영화적 즐거움’으로 그럴 듯 하게 포장된 채 마음놓고 활개를 치는
이데올로기의 장(場)인 것이다.
우리는 왜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보는가? 일상에서는 현실화되기 힘든 저질스러운 욕망들을 대리 만족시키기
위함이다.
결국 포스트 구조주의의 시대에 도달하면 구조라는 지평에 연연했던 기호학은 시대 착오적 시도였음이 드러
난다. 결코 코드라는 사회적 약속 체계를 존중해줄 정도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기호학의 전성기를 뒤돌아보면 그것은 소멸해 가는 근대적 주체가 마지막 남은 유토
피아적 비전을 영화라는 대상에 투사해 본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로 일어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실제’라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VI. 정신 분석학적 영화이론에 내재된 방법론적 문제점
모든 것에 ‘타자’가 있다는 주장은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하게 적용 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은 역설적으로 ‘주체의
죽음’이라는 포스트 구조주의적 허무주의에도 예외 없이 해당된다.
즉 모든 이성적 사유는 퇴행적 무의식이 표출된 것에 불과하고 따라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라는 주장 역시
이데올로기일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 논리에서 영화는 이데올로기의 놀음에 불과하다는 주장 역시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죽음을 선포하면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했던 니체 또한 ‘당신은 그러한 진리를
도대체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절대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절대적 불가지론이나 마찬가지로 표상 불가능하다.
즉 유토피아적인 것이다. 극단적인 허무주의나 냉소주의는 결국 자신이 의도한 완전한 반 휴머니즘을 결코 달성
할 수 없다는 기묘한 역설이 생겨난다.
이러한 결론은 본고가 진단하고자 하는 기호학의 현대적 위상과 관련지어 어떤 의미를 함유하는가?
우선 정신 분석학적 문제 제기가 영화 기호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이 될 수는 있지만 만약 원론적 차원에서
‘구조’라는 관점을 부정한다면 그것 또한 근거가 충분치 않은 거대담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연 우리가 영화의 즐거움을 느끼는 데 있어서 전혀 ‘미학’이라는 지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리적 오류가 종종 영화이론가들에게서도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 무의식의 아마도 대단히 복합적일 것으로 추측되는 작동 기제를 단순화시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라깡 계열의 정신분석학에 경도된 영화이론가들은 종종 다음과 같은 점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자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인간은 결국 허상에 불과한 주체/객체의 이분법적 시뮬레이션에 탐닉할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무의식은 이러한 퇴행상태에 탐닉하는 성향을 지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무의식이
언술 행위에서와 똑같이 심리 상태에 있어서도 주어 - 빈사의 의사 pseudo 형식을 지니고 있다는 가정을 전제
로 하고 있다.
즉 인간의 무의식을 언술 행위를 하는데 있어서의 실제적 ‘나’와 (주어, 빈사에 있어서의 주체적 ‘나’가 아니고)
등가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가부를 논리적 차원에서 단정 짓는 것은 현대 철학의 수준을 감안할 때
불가능하다. 이론적 증명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 점에만 국한시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의식과 무의식의 상관관계를 불가해한 상태로 유보해 둔 라깡의 정신적
선배 프로이트가 전자보다 더한층 진보적인 것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대한 모든
담론은 궁극적으로 ‘의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국 하나의 주관적 해석일 뿐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인간의 정신 상태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식견을 얻게 될 때까지
한시적일지언정 인식론적 회의주의, 세계관적 상대주의 그리고 방법론적 절충주의를 견지하는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할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잠정적인 결론은 기호학의 위상을 동시대적으로 정립하는 데 있어서도 생산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기호학은 결코 원론적 차원에서 정신분석학 계열의 이론에 의해 전복된 것이 아니다.
아니, 좀 더 냉철하게 살펴보면 기호학 태동 이후 완전히 소멸되어 버린 특정한 영화적 패러다임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전적 이분법인 사실주의/형식주의도 여전히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직도 그렇게 많은 이론가
와 평론가들이 영화 관련해서 현실 반영론적 입장 또는 반대로 형식주의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단지 현대에 와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첫째, 영화학의 주도적 흐름이 다변화되었다는 것이고 둘 째, 패러다임들
간의 착종 현상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특정한 영화이론이나 영화평론에서 상이한 계열의 담론들이 혼재하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다지 진기
한 일이 아니다.
고전적 영화이론이 현대적 영화이론에 의해 궁극적으로 전복되었다는 발상은 영화 이론사를 발전 일변도로 해석
했기 때문에 일어나게 되는 이론적 착시 현상이다.
VII. 나오는 말
기호학 논쟁은 영화 미학적인 근거를 가지는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정신사적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고전적 사실주의/형식주의 이분법에서 현대의 정신분석학으로 전개해 나가
는 도상에 있어서 기호라는 미학적 지평을 설정해 본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 가능한 중간 단계였던 것이다.
현대적 자기 정체성이 객체화되어가면서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인 것이다.
물론 더 이상 기호학은 영화학에서의 주도적 패러다임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살펴보면 방법론적인 결함 때문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유일무이한 방법론을 추구한다는 발상 자체가 시대 착오적이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정신 분석학을 영화라는 현대적 문화현상을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는 거대담론으로 간주하는 것
역시 생산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방법론적 절충주의가 대세가 된지 오래이다.
이렇게 다원론적 상대주의가 영화학에 본격적으로 도래하면서 기호학의 영화 미학적 위상을 재정립할 여지가
다시 생긴다.
‘기호’라는 관점을 원론적으로 이해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생산적으로 원용될 여지가 충분히 있다.
무엇보다도 주관적으로 치우치기 쉬운 영화 읽기에 있어서 객관적 ‘거리’를 유지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더구나 보통의 영화대중들이 어떤 식으로 영화를 읽어 나갈 것인지에 대해 적절한 균형 감각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영화장르에 대한 거시적 조망을 원활히 해준다.
영화의 사회적 측면에 예민해지면서 생겨나는 당연한 반사 이익이다.
그러나 기호학이 논쟁으로서 영화학에 남겨 놓은 소중한 유산은 ‘현대성’이다.
선험적 차원에서의 영화적 가치 판단에 연연했던 고전적 영화이론은 기호학을 계기로 하여 영화의 역사, 사회적
측면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영화는 작가/ 텍스트/ 수용자의 오묘한 함수 관계 속에서 소멸과 생성의 순환을 거듭하는 역동적 문화 그 자체
이다.
영화가 이렇게 시간에 민감한 것이라면 영화를 읽는 작업 또한 시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영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의 정신이 일견 그와는 정반대에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가변성 그 자체, 즉 ‘시간’
이라는 것과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또한 인간적이다.
시대 정신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문화이다.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자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
다는 점만으로도 기호학 논쟁은 충분히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박지홍 (단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
신양섭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