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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 28회. '청동거울의비밀 일본천황은 백제인인가'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3.11.29|조회수119 목록 댓글 0

kbs 역사스폐셜 28회 '청동거울의비밀 일본천황은 백제인인가' (1999.05.15.)

 

 

28회 : 청동거울의비밀 일본천황은 백제인인가

청동거울의비밀 일본천황은 백제인인가

방송일: 19990515 조회수 : 3291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 (99. 5. 15)

청동 거울의 비밀 - 일본 천황은 백제인인가

VCR1.

# 충남 공주 항공샷

1971년, 충남 공주에서는 한일 양국의 고대사학계를 흥분시킨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무령왕릉의 발견이었다.

- 무덤 입구

그것은 패망하여 잊혀진 왕국 백제가, 천 4백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부활하는 역사의 순간이었다.

- 무덤 내부, 각종 유물들

무덤에서는 108종 총 2천 9백 6점의 유물이 출토됐는데, 하나같이 무령왕 시대 백제의 융성했던 문화와 화려한

영광을 담고 있었다.

무덤이 발견된지 올해로 28년. 그렇지만 아직도 무령왕릉에는 많은 의문들이 남아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청동 거울인 동경이다.

- 방격규구신수문경에서 왕비의 수문경으로 PAN.

무덤에서는 모두 세 개의 동경이 발견되었다.

- 의자손수대경으로 PAN.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특이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 금제 뒤꽂이 돌출 CG.

동경이 발견되었을 때, 동경의 밑에서는 금으로 만든 장식물도 발견되었다. 그것은 왕의 뒷머리를 장식하는

금제 뒤꽂이였다. 동경이 발견된 위치가 바로 왕의 머리부분이었음을 말해준다.

- 동경의 가죽끈으로 Z.I.

또한 동경의 고리에는 당시의 가죽끈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이 가죽끈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스튜디오 1.

# 무덤 내부 CG.

지금까지 왕의 머리쪽에서 나온 청동 거울에 대해서는 별로 연구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동경은 발견된 위치로 볼 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동경은 바로 여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 MC, 앉아서 동경을 들면 금제 뒤꽂이가 나온다

또한 이 동경이 발견되었을 때, 이 밑에서는 왕의 뒷머리를 장식하는 금제 뒤꽂이도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어째서 금제 뒤꽂이가 동경의 밑에 있었던 걸까요?

- MC, 동경을 들면 동경의 가죽끈

그리고 여기를 보십시오. 동경이 출토되었을 때, 고리의 양 옆으로 이렇게 가죽끈이 걸려 있었습니다.

동경에 가죽끈이 남아있는 채 발견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 MC, 일어서서 동경으로 모션을 취하며

그렇다면 왕이 무덤에 묻힐 당시에 금제 뒤꽂이가 이렇게 꽂혀 있었고, 동경은 아마 이런 식으로 얼굴을 덮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경으로 왕의 얼굴을 감쌌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어째서 왕의 얼굴을 동경으로 가렸던 걸까요?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산 사람 이상으로 죽은 사람을 신성시했던 고대에, 일반인도 아니고 하늘과도 같은 왕의

얼굴을 가렸다면, 그만큼 이 동경이 중요했다는 뜻일 겁니다.

- 동경을 내려 놓는다

그렇다면 당시의 사람들은 동경을 무엇으로 생각했길래 왕의 얼굴을 덮었던 걸까요?

참으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VCR 2.

# 무령왕릉 전경

지금까지 백제의 왕급 무덤에서 동경이 발견된 경우는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다른 지역에서도 역시 왕릉급

무덤들에서 동경이 발견된다. 따라서 동경은 왕을 상징하는 물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의자손수대경 앞면

동경의 앞면은 이름그대로 거울이다. 거울의 첫 번째 기능은 얼굴을 비추는 것이다. 가장 큰 궁금증은 청동으로

만든 동경이 거울로 사용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 불속 물건 꺼내는 장면

청동으로 만든 제품이 얼굴을 비출 수 있을까?

그래서 청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 뒤집는 장면

청동은 철에 비해 성형이 쉽고, 녹이 잘 슬지 않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옛날부터 각종 제사용 도구나 생활 용품

등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됐다.

- 두드리는 장면

청동제품은 순수하게 구리만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럴 경우, 강도도 약할 뿐 아니라, 주물의 성질 때문에 표면이

깔끔하게 성형이 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구리에 주석이나, 아연, 혹은 상납 등을 첨가하여 재료의 성질을

강화시킨다.

- 각종 제기들, 그릇들

원래 청동은 빛을 반사하는데 뛰어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지금 보이는 제기들도 모두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들

이다. 마치 표면을 도금한 듯 아주 매끄럽게 반짝거린다.

이러한 것들을 다듬으면 청동거울로 사용됐을 것이다.

- 거울 닦는 장면

이러한 사실은 평생 청동만을 다루며 살아온 무형 문화재 이봉주 옹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형태의 청동 거울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들어온다고

한다.

이 옹은 자신이 만든 동경에 직접 얼굴을 비춰보며 청동으로 만든 물건들이 얼마나 잘보이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 INT. 이봉주 옹 중요 무형문화재

"청동으로 만든 거울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거울처럼 뛰어난 반사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리가 없던 옛날에 청동 거울은 지금 사용하는 거울처럼

......"

- 빛 반사 장면

거울은 빛을 반사시키기도 한다

- 얼굴을 비추면

거울의 이러한 기능이 왕권의 상징이 되는 것에 해답을 줄 수 있을까?

- 동경 뒷면

이러한 단서가 바로 무령왕을 동경에 있다.

- 전시실의 동경들

- 방격규경

고분에서 출토된 모든 동경은 한가지 공통점을 가진다.

- 동경으로 Z.I

바로 동경에는 하나같이 중앙에 불룩 튀어나온 둥그런 반구체 고리가 달려있다.

- 의자손수대경

그런데 왕의 얼굴을 덮었던 동경의 고리엔 끈이 달려 있었다.

그 고리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동경들 중 유일하게 가죽끈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소에도 동경에는 끈이 묶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INT. 김영원 공주박물관장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경은 대개 가슴에 차고 다녔다. ......"

- 어둠 속에 왕(효과음), 강렬한 섬광이 번쩍인다

일상적으로는 가슴에 차고 다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경은 왕의 가슴에 걸려 태양같은 왕의 권위를 상징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 바닷가, 태양이 뜨고 동경으로 디졸브

고대인들에게 태양은 생명의 빛이었다. 그 빛은 동경을 통해 땅으로 내려왔고, 그때부터 동경은 태양같은 왕의

상징물이 됐을 것이다.

# INT. 원광대 소진철 교수(촬영)

"고대에 동경은 태양의 상징물이었는데, 4세기 이후에는 이것이 권력 관계를 나타내는 증표로 사용되었다. ......."

스튜디오 2.

# 기본 세트

고대 사회에서 왕은 태양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태양을 의미하는 동경이 왕의 상징물로 쓰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 배경으로 동경의 앞면이 올려진 전시대

보시다시피, 동경의 앞면은 거울입니다. 여기에 빛이 반사되면 마치 태양이 땅에 내려온 것처럼 눈이 부셨을

겁니다. 또한 왕이 이 동경을 가슴에 차고 거리를 행차할 때면, 햇빛을 받아 동경이 더욱 번쩍거렸을 것이고,

그 것 자체로도 왕에게 상당한 권위를 주었을 것 같습니다.

이렇듯 동경은 청동기 시대에는 각종 마귀를 쫒는 주술적인 도구로 사용되었다가, 후대인 왕권사회로 접어

들면서는 왕의 상징물로 쓰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 다시 무령왕릉으로 가보겠습니다.

- MC, 걸으면 무령왕릉 내부

발굴 당시 동경은 왕의 머리 쪽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동경으로 왕의 얼굴을 감쌌을 것으로 추정했습

니다.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살펴본 것으로 볼 때, 동경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 동경의 뒷면이 올려진 전시대

그런데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동경을 보면 뒷면은 아주 복잡한 문양과 무늬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부식이 되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여기에는 글씨들도 새겨져 있었던 것 같고, 그림처럼 보이는 것도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앞면이 빛을 반사하는 거울로서의 상징성을 가졌던 것처럼, 뒷면에도 분명히 그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의미들이 담겨 있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그것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VCR 3.

- 의자손수대경 Z.I.

의자손수대경의 직경은 23. 45센티미터다.

중앙에는 공을 반으로 자른 듯한 반구체의 고리가 붙어 있으며, 주변엔 아홉 개의 돌기가 고리를 감싸고 있고,

그 바깥엔 두 개의 원이 둘러져 있다.

또한 네 개의 잎으로 장식된 일곱 개의 돌기가 원으로 돌출돼 있으며, 그 사이마다 여러 가지 문양들이 있지만,

부식이 심해 거의 알아 볼 수 없다.

다시 바깥에는 두 개의 원이 있으며, 원 안을 둘러가며 글씨들이 새겨져 있었다.

역시 잘 보이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동경은 출토될 때부터 일반인들이 문양과 글씨를 식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 KBS 특수영상 자료실 인서트, 문양 복원 작업 장면

그래서 동경을 보관하고 있는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사의 도움을 받아 KBS 특수영상자료실에서 동경에서 부식된

내용들을 자세히 복원해 봤다.

- INT. 김종만 학예사 sync

- 의자손 명문 돌출 CG.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반구체 고리와 아홉 돌기 사이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복원해 보았다.

그러자 돌기 사이에서 '의'라는 한자가 복원되었다.

다음으로는 동경의 오른쪽에 있는 흔적들을 찾아내자, '자'자가 확인됐다.

세 번째는 동경의 윗쪽에서 발견되었는데, '손'자였다.

지금까지 확인된 의, 자, 손은 자손을 널리 번창시키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 청룡 문양 돌출 CG.

그동안 연구 결과로 밝혀진 문양들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로 확인 된 것이 백호였다. 다음은 청룡이다.

그런데 이번 문양 복원 과정에서 문양이 더 확인됐는데 주작이었다.

그래서 동경에 일곱 개의 문양 중 세개가 밝혀지게 된 것이다.

- 복원된 의자손수대경

아직 판독되지 않은 문양과 글씨들은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남아있다.

- INT. 김종만 학예사

"현재까지 연구된 것은 여기까지다. 이 동경은 부식되어 쓰여진 글씨를 모두 해독할 수 없으나,

현재까지 宜, 子, 孫이 확인되었다. 또한 일곱 개의 돌기 사이에 청룡, 백호 등의 문양이 확인되었다."

스튜디오 3.

# MC, 오른쪽에 CG.로 복원된 동경

이것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경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가지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한 동경입니다.

이 동경은 부식이 심하지만, 청룡과 백호, 그리고 주작을 새긴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문양들은 아직 판독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 동경으로 Z.I.

원래 뒷면에는 동경을 제작한 곳과 제작한 목적, 그리고 이 동경을 만들 당시, 왕의 신앙이나 통치 이념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문양을 판독해 보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관계등을 확인할 수 있는 것

입니다.

- 기본 세트

또한 다른 지역의 왕릉에서 동경이 출토되었더라도, 이 문양을 비교해 보면,

두 지역의 상호 관계를 규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유물로서의 동경이 갖는 중요성입니다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 이 동경에 담겨진 내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취재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동경이 출토되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곳은 바로 일본 천황의 무덤으로 알려진 인덕릉입니다.

VCR 4.

# 오사카 인덕릉 항공샷

일본 제 2의 도시 오사카.

이곳에는 이집트 피라밋보다 큰, 총 길이 486미터인 세계 최대 규모의 고분이 있다.

일본의 건설회사에서 첨단 장비를 동원해 계산한 바에 따르면,

하루 2천명의 노동자가 15년 8개월이나 동원되어야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고분이다.

- 인덕릉 나무 현판

바로 일본 제 16대 천황의 무덤인 인덕릉이다.

- C.G. 인덕릉이 무너지며 동경이 나온다.

1872년, 무덤의 앞이 산사태로 무너지면서 몇 점의 부장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동경이었다.

- 보스턴 미술관 전경

일반인들에게 접근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신성시돼 온천황릉에서 출토된 유물.

그렇지만 이 동경은 엉뚱하게도 지난 1백여년 동안 미국에 있었다.

- 버스가 들어오고

취재진은 미술관 측에 촬영 협조를 요청했다.

그렇지만 6개월 동안의 섭외 끝에 겨우 얻은 것은 동경이 촬영된 사진 한 장뿐이었다.

이것조차 한국인에게는 최초로 공개하는 것이라고 했다.

- 미술관 내부

보스턴 미술관의 소개서에는 인덕릉 출토, 5세기라고 쓰여져 있다.

- 인덕릉 동경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경과 마찬가지로 중앙에 반구체의 고리가 있으며, 아홉 개의 돌기가 외곽을 감싸고 있다.

외곽에는 네 개의 잎이 장식된 일곱 개의 돌기가 중앙을 중심으로 돌출되어 있으며, 그 사이로 각종 동물의 문양

들이 그려져 있다.

무령왕릉의 동경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 동경 전면에서 명문으로 Z.I.

또한 중앙에 둘러진 두 개의 원 사이로 서른 다섯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청개가 거울을 만드니 크게 손상됨이 없이 공교하게 조각하여 문장을 이루었네.

좌측에는 용이오, 우측에는 범이 있어 상서롭지 않음이 없고,

주조와 현무가 음양에 순조로우며, 오랫동안 어버이가 계시니 즐겁고 부귀 창대하다네.

- 컴퓨터 앞에서 작업 장면

과연 무령왕릉 인덕들 두 왕릉에서 출토된 동경은 얼마나 비슷한

것일까?

- 마우스 Z.I

두 동경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붙여보니 별 작업 없이 정확히 일치했다.

-와이퍼로 밀면서 두 동경을 반씩 결합

- 반구체 고리, 아홉 돌기 돌출 CG.

반구체 고리의 외곽에 있는 아홉 개의 돌기도 일치했다.

- 일곱 돌기와 문양들 돌출 CG.

또한 두 동경 모두 4개의 잎으로 돌기가 일곱 개 새겨진 칠자경의 형식이었다.

- 명문의 위치 돌출 CG.

전체적으로 두 동경은 마치 형제처럼 닮아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동지사 대학 전시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 고고학계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현재 일본 고고학계의 최고 권위자 중 한사람인 모리 고우이치 교수가 있는 동지사 대학교를 방문했다.

그를 만난 곳은 대학내 박물관이었다.

그런데 박물관에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실에 가득했다.

무령왕릉 동경과 인덕릉 동경에 대해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던 모리 고우이치 교수에게 양국의 왕릉에서 비슷한

동경이 출토된 의미를 들어보기로 했다.

- INT. 모리 고우이치

"이 거울은 둘 다 복사한 거울이라 생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복사를 한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중국이었는가, 백제였는가, 일본이었는가.

이것은 백제에서 만든 것 중의 하나가 일본에 건너올 수도 있었을 것이고,

일본에서 만든 것 중의 하나가 백제에 넘어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중국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이유는, 중국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거울이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로 보면 무령왕릉과 인덕릉은 굉장히 중요한 학문적 문제를 안고 있다."

- 인덕릉 동경의 명문 돌출

이렇듯 두 동경이 형제처럼 닮았다는 것이 입증됐다.

더욱 구체적인 특징은 사신신앙이라는 동일한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덕릉 동경에는 동서남북의 네 방위에 청룡, 백호, 주조, 현무 등의 신령스러운 동물을 세워 왕을 보호하려 했던

사신신앙이 명문으로 새겨져 있음을 확인했다.

- 무령왕릉 동경의 사신문양 돌출

무령왕릉 출토된 동경의 경우, 명문의 판독은 불가능하지만, 청룡, 백호, 주작이 확인됐다.

따라서 주작의 반대쪽에도 현무가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반씩 결합된 두 동경

그렇다면 한일 양국의 왕릉에서 그 형태와 사상이 동일한 동경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INT. 김영원 공주박물관장

"한일 양국의 왕릉에서 비슷한 동경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양국의 관계가 밀접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

스튜디오 4.

# 기본 세트

- 배경은 전시대 위의 두 개의 동경

어떻습니까?

언뜻 보기에도 두 동경은 마치 형제처럼 닮아 있습니다. 특히 여기 보이는 네 개의 꽃잎으로 둘러쌓인 일곱 개의

돌기가 이 동경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형식의 동경을 칠자경이라고 부릅니다.

비록 하나의 틀에서 찍은 것은 아니지만, 두 왕릉에서 출토된 동경이 이렇게 비슷하다는 것은 정말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백제 왕가와 일본 천황가는 서로 어떤 관계였는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그렇다면 두 동경이 보여주는 양국의 관계는 어떠했던 것일까요? 이것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일본서기입니다.

- 고사본 일본서기에서 '신공기 52년조'

일본서기를 보면 신공황후 52년에 백제에서 일본에 칠자경을 전해 주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일본서기에 쓰여져 있는 글씨는 헌상입니다.

헌상이라, 그렇다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바쳤다는 의미가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무튼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더라도 동경이 백제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 MC, 걸으면 전시대 위의 인덕릉 동경

그렇다면 인덕릉에서 발견된 이 동경도 백제에서 일본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어떤 역사 기록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아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이러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요?

- 인덕릉이 표시된 오사카 지도

혹시 그것은 동경이 출토되었던 바로 그 지역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일 백제와 일본이 그런 관계였

다면 어떤 형태로든 그 흔적들이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인덕릉이 있는 일본의 오사카로 가보겠습니다.

VCR 5.

# 오사카 만 항공샷

오사카 만은 지리적으로 한반도 - 대마도 - 세토나이카이 연안을 거치는 해류의 일직선 상에 있다.

일본의 고대 국가는 바로 이곳에서 출발했다.

# 인덕릉으로 PAN.

이짚트의 피라밋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고분인 인덕릉은 오사카만에 인접해 있었다.

무령왕릉의 발굴로 역사 속에서 새로운 위치를 찾기 시작한 인덕릉.

이곳에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하자.

# 주군총으로 PAN.

인덕릉의 바로 옆에는 주군총이 있다. 인덕천황과 매사냥을 함께 다녔을 정도로 가까웠던 백제왕족 주군의 무덤

이다. 이곳의 옛날 명칭은 백제군 남백제촌이었다.

남백제촌의 유래는 백재 왕족 주군과 관련이 깊다.

- 남백제 소학교

주군총 가까운 곳에 남백제 소학교가 있다.

학교 교장에 의하면 이 학교의 유래는 백제 왕족 주군과 관련이 깊다고 한다.

- 백제교

또한 이 일대를 가로지르는 다리에도 백제대교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 골목으로 PAN.

심지어 백제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들까지 살고 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성씨가 한반도 고대국가 백제라는

곳에서 유래했다고는 알고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한다.

- 백제역

이곳 오사카에는 한국에도 없는 백제역이 현존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사람이 적어 화물만 취급하고 있는 이 역

근처에는 얼마 전까지도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 오사카에는 한국인들만 모아 놓아도 하나의 시가 되고 남을 정도로 많은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 응신릉으로 PAN.

주군총 옆에는 인덕천황의 아버지로 알려진 응신천황의 무덤 응신릉이 있다. 일본을 개화시킨 천황으로 일본

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응신천황은 백제에서 박사들을 불러다가 천자문과 논어등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 응신릉 말안장

이것은 응신릉 대총에서 나온 말안장이다.

고대 일본에는 말이 없었다. 일본서기에는 응신천황 때에 최초로 백제에서 말을 전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 말안장은 그때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 INT. 재야 사학자 이시와타리

"응신천황 시대에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소가씨며, 야마토노야야씨, 하타씨등

백제계 씨족등이 다수 왜국에 도래했다. 그들은 토목, 농업, 제철기술을 가지고 왔다. 또 그들은 카와치와

야마토 등의 평야를 개척하고 농업을 성하게 했다.

응신천항의 시대에 이러한 문물이 들어온 것이다. 또 응신천황의 릉인 곤다야마 고분 주변에는 후나씨와

아스카베 씨 등의 유력한 씨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후나씨와 아스카베 씨는 백제 왕족의 후손이며, 그들은 곤다야마 고분을 지키는 형식으로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응신릉 항공샷

인덕천황의 아버지의 무덤으로 알려진 응신릉 일대는 위치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앞 뒤 모두에 백제 왕족의 후손인 후나씨와 아스카베 씨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어째서 일본천황릉의 주변에 백제계 세력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일까? 역사의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이 고분 역시 인덕릉에 버금갈 정도로 엄청난 규모다. 이렇듯 거대한 왕릉의 축조는 일본에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가 탄생되는 4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이러한 거대 고분의 축조는 대규모 인력 동원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그 당시 강력한 정치조직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 아스카베 천총

백제계 세력들이 포진하고 있던 평야지대를 지나면 조금 높은 구릉지대에는 아스카베씨들의 무덤인 아스카베

천총이 있다. 한때는 상당히 많은 수였지만, 지금은 모두 파괴되어 열 한 기만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 곤지신사로 PAN.

응신릉에서 직선거리로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아스카베 씨족들이 자신들의 선조로 모시고 있는 곤지 신사가

있다.

일명, 아스카베 신사라고도 불리는 이 신사의 안내간판에는 백제계인 아스카베 노미야쓰코 일족의 조상인 백제

곤지왕을 제신으로 모시고 있다고 쓰여져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곤지는 백제 무령왕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다.

직선거리로 4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 응신릉에서 곤지신사까지의 일대에는 백제계 세력들의 무덤과 유적,

그리고 유물들이 남아 있다.

# 이치수카 고분군으로 PAN.

이러한 오사카 일대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백제인들의 군집묘로 알려진 이치수카 고분군이다.

조영 연대는 인덕릉과 비슷한 5세기 말에 시작되어 7세기 초까지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횡혈식 석실, 각종 유물들

이곳의 무덤 형식은 백제의 전형적 양식인 횡혈식 석실들이며, 무덤에서는 백제의 것이 분명한 유물들이 대량

으로 쏟아져나왔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도 백제가 고고학적으로 대단한 주목을 받게 된다.

- 이진희 인터뷰

"거기가 바로 이치수카 고분군 백제 양식 횡혈식 아주 많이 발견 70년대 주택 개발하면서 발견

유물들도 백제 유물들 수없이 많이 나오면서 70년대 후반부터 고고학적으로 대두하는 결과 "

- 이치수카 고분군 정상에서 PAN.

이치수카 고분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오사카 전경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곳에서는 초기 일본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았던 최초의 발상지였던 발전과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 INT. 이시와타리

"이곳이 이상산이다. 저쪽은 아스카 천총이고, 그 밑에 아스카베 신사가 있다. 그리고 조금 왼쪽으로 응신릉이

보인다. 그리고 후루이치 고분군이 많이 보이고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덕릉이 보인다. 그리고 이쪽이

오사카 만이다. 정홗히 이 오사카 만에서 백제계의 세력이 가와치 에리아로 들어와 이 서쪽 부분을 본거지로

정한 것을 잘알 수 있다."

# 아스카 항공샷

고대 일본의 기틀이 된 지역에서 이상산을 넘으니, 바로 아스카다. 일본인들에게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라는

아스카.

# 니이자와 천총으로 PAN.

이곳 아스카에는 백제인들이 대규모로 건너왔음을 말해주는 고분군들이 있다. 바로 니이자와 천총이다.

이곳에서는 갑옷들과 다량의 신예무기들이 출토됐다. 그것은 이곳에 묻힌 세력들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도굴 당하기 전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588기로 아직 대부분이 미발굴

상태다.

- 니이자와 126호분

이 고분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126호분이다.

- 방제형 금관으로 디졸브

무덤에서는 금관이 출토됐는데, 무령왕릉 왕비의 금관과 그 형태와 기법이 놀랍도록 일치한다.

- 청동다리미

또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아주 유사한 청동다리미도 출토됐다.

- 니이자와 173호분 동경

이 일대 고분이 얼마나 백제와 밀접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73호분에서 나온 동경이다.

이 동경의 문양은 무령왕의 의자손수대경과 일치한다.

다만 무령왕의 것에 비해 크기가 작을 뿐이다.

109호분의 동경에 새겨진 글씨도 마찬가지다.

- 이진희 인터뷰

"니이자와 천총은 백제인들이 묻힌 고분인데, 특히 126호분의 경우 상당히

지체높은 백제 여인이 묻혀있다......"

# 아스카사

이곳 아스카 지역에는 일본에 진출했던 백제인들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 하나 있다.

그곳은 일본 최초의 사찰로 알려진 아스카사다.

이 아스카사를 건립한 사람은 천황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졌다는 백제계 권력자 소아마자였다.

- 이시부타이 고분

이 고분의 주인공은 아스카사를 건립한 소아마자다. 지금 남아있는 돌들은 봉분이 사라지고 남은 석실뿐이다.

석실의 크기만으로도 일본 최대의 규모인 이 석실의 양식은 전형적인 백제의 횡혈식 석실이다.

천장을 받치고 있는 돌들 중에 가장 큰 것은 무게만 77톤에 달하고,

이 석실 전체의 무게는 2천 3백톤이나 된다.

이 무덤의 주인공인 소아마자는 아스카 시대를 열고 일본 서기의 기조서가 된 천황기와 국기라는 일본의

역사서를 쓰기도 했다.

- INT. 이노쿠마 카네카츠 아스카 자료관 학예실장

"아스카 지역에는 궁전과 무덤등이 많이 있다. 이러한 곳에서 출토된 물건들에 의해 당시의 일본은 많은 문화가

백제에서 넘어온 것이며, 동경의 나라 백제이기도 했었다.

이러한 것들이 지하에 묻혀있었고, 이것들이 1천 4백년만에 발굴되었다.

물론 그중에는 일본인이 만든 것도 있고 백제인들이 만든 것도 있을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이 부근에는 도래인이 80, 90% 있었던 것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이러한 걸로 볼 때, 아스카는 백제인들에게 있어 '리틀 백제'라는 것이 형성되었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한다."

- 아스카 전경

무령왕릉 동경과 형제처럼 닮은 동경이 출토된 오사카!

이곳 오사카와 인접한 아스카 지역은 온통 백제인들이 세운 유적들과 무덤들로 가득차 있다.

속일본기조차 이주민 열명 중 아홉명이 이주민들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스튜디오 5.

# 일본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한일 지도

- MC, 걸으면 유적지들 돌출

(인덕릉, 곤지신사, 응신릉, 이치수카 고분군, 니이자와 천총, 이와후네)

일본 고대 왕조의 발상지였던 이곳 오사카, 나라 지방에 있는 유적과 유물들은 대부분 5세기 말 이후에 만들어

졌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하나같이 모두 백제인들과 직,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고분인 인덕릉이 만들어진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또한 그 왕조의 시조가 묻혀있는 응신릉 일대에는 백제역, 백제교, 백제소학교 등 백제가 들어가는 지명들이

상당수 남아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 지명들도 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이곳에는 1천 4백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그때의 지명들이 남아 있습니다.

- MC, 걸으면 기본 세트, 전시대 위의 두 동경

그렇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렇듯, 일본 고대 왕조의 발상지가 온통 백제의 유적들과

유물들로 뒤덮혀 있는 것은 확인했지만, 아직도 무언가 미진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이 두 개의 동경이 같다는 것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 의하면, 동경에는 당시의 시대상과 왕의 통치 이념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동경 안에도 무언가 그것을 확인해 줄 핵심적인 사실이 들어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그것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VCR 6.

# 인덕릉 동경에서 삼족오 문양 돌출 CG.

인덕릉 동경에는 주목할 만한 문양이 하나 있다. 바로 태양의 중심에 산다는 세발 달린 새다.

이것은 동경이 소장되어 있는 보스턴 미술관의 소개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 보스턴 미술관 도록

인덕릉에서 출토된 동경의 문양을 설명하는 안내문에는 청룡, 백호, 주조, 현무의 사신도와 함께, 발이 세 개인

새, 즉 세발 달린 새를 설명하고 있다.

- INT. 김용운 교수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 천황들은 새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것은 각종 역사 기록들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 무령왕릉의 무덤 내부

그러나 무령왕릉 동경에선 부식돼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유물들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동경 밑의 금제 뒤꽂이 돌출 이것은 왕의 뒷머리에 꽂혀있었던 금제 뒤꽂이다. 얼핏 보면 단순히 삼각형 문양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발 달린 새의 형상을 하고있다.

- 금동신발에서 새들이 돌출

또한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것으로 보이는 두 켤레의 금동제 신발이 발견됐다.

그런데 그 중 왕의 발쪽에 놓여있던 신발에서는 세발 달린 새들이 여러마리가 발견된다.

육각형의 구갑무늬에는 세발 달린 새가 각각 한 마리씩 들어 있다.

- 무령왕릉 환두대도 Z.I.

그 뿐이 아니다. 거울과 함께 왕권을 상징하는 무령왕의 환두대도에서도 금동제 신발에서와 똑같은 모양의 새가

새겨져 있다.

- 인덕릉 환두

그런데 인덕릉에서도 무령왕의 칼과 동일한 모양의 칼이 출토되었다.

- 환두의 머리 부분 Z.I.

- 인덕릉 환두 손잡이의 위아래

손잡이의 양쪽에는 무령왕의 칼과 마찬가지로 위아래로 모두 새가 투각돼 있다.

- 뱀배무늬

두 칼 모두 뱀을 상징하는 무늬가 일치된다.

- INT. 모리 고우이치

"환두라는 것은 중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지만 이것은 철제다. 전부 철제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백제나 신라에서 발달된 것은 칼날 부분은 물론 철제지만 손잡이 부분은 동제품에 금도금을 한 것이다.

그리고 칼잡이와 칼날 사이에 도나츠같은 부분에 용이라든가 하는 조각을 넣는다. ......

이러한 것은 지금 현재 중국대륙에는 없다. 있는 곳은 한반도와 5세기 이후의 일본, 그 중에서도 무령왕릉과

인덕릉의 것은 대단히 가까운 것이다.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대단히 닮은 것이다.

거울은 형제 관계지만 환두는 형제보다는 할아버지 정도의 닮은꼴이라 할 수 있다."

- 오미아시 신사 전경, 안내간판

여기 백제와 일본 천황과의 관련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유적이 남아있다.

바로 일본 아스카에 있는 오미아시 신사다.

안내간판에는 말을 전해준 백제인 아지사주의 후손인 야마토노아야씨의 본거지였다고 적혀있다.

- 센카천황 비석

뒷편에 있는 9층 석탑은 백제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신사에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내용이 매우 흥미롭다. 이곳이 센카 천황의 궁터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백제계 세력의 본거지에 일본 천황의 궁터가 있었다는 말이다.

- 백제대사 안내판, 전경

백제계와 천황과의 관련성을 더욱 분명히 해주는 유적이 있다.일본서기에는 7세기 중엽에 천황이 스스로를

백제인이라 자처했던 기록이 나온다. 그가 바로 백제대사를 지은 서명천황이다. 그는 639년에 야마토의 중심부를

흐르는 강을 백제천이라 이름짓고, 서쪽의 백성들은 궁을 짓게 하고 동쪽의 백성들은 절을 짓도록 명했다.

- 백제대사

640년 겨울 10월, 백제인 서직현이 조영을 책임졌던 백제궁이 완성되었다.

거처를 옮긴 서명천황은 이듬해 겨울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궁 북쪽에 빈궁을 지어 천황의

죽음을 애도했다. 사람들은 이 궁을 백제의 대빈이라 불렀다고 한다.

- 법당 전경

당시에는 최고의 절이었던 이곳은 지금 경내에 3층 석탑과 본당을 비롯해서 부근에 몇 개의 탑터와 건물터만

남아있다.

- 연못

백제천이 흐르는 땅에서 백제인이 세운 백제궁에 살다가,

죽어서는 백제 대빈에 안치된 서명 천황. 우리는 그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 <왜, 왜인, 왜국> 책 표지

최근 일본 문헌사학계 최고의 권위자 중 한사람인 이노우에 히데오는 그동안 우리가 일본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왜'라는 성씨를 통해, 백제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밝혀냈다.

- INT. 이노우에 히데오

"왜의 인명에 관해서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집중적으로 쓰여지고 있다. 흥미있는 것은 이들 인명이 신화시대

에는 천황의 이름과 그 일족들에게 사용되었다. 전설시대에 오면 야마토 지방, 즉 나라현에 살고있던 귀족,

호족들에게 사용되었다. 역사시대에 오면 도래인들에게 주는 인명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것으로 보면 천황계와 도래인의 관계는 대단히 밀접한 걸 알 수 있다. ......."

- 왜 성씨 도표 CG.

백제인들을 지칭하는 왜라는 성씨를 썼던 천황과 그의 자식들이 스물 세명에 이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스튜디오 6.

# 기본세트

(배경으로 '倭'라는 글자)

천황의 이름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인과 일치한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또한 천황과 그의 자식들이 함께 백제인들의 성씨를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양국의 관계가 단순히 선진 문화를 전해주어서가 아니라,

당시 일본의 천황가가 바로 백제계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 점을 오사카, 나라 지역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유적들에서, 또한 각종 역사의 기록들과 과학적인 연구

결과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MC, 동경을 든다

이렇듯 무령왕의 동경에는 많은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동경을 통해 당시 일본의 천황가가 백제계였음

을 추정했습니다.

- 동경을 내려 놓는다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바로 이 동경이었습니다.

# MC, 걷다가 동경 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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