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스폐셜 33회. '한국전쟁 최대의 미스터리
- 북한군은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1999.06.26.)
33회 : 한국전쟁 최대의 미스터리 - 북한군은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방송일: 19990626 조회수 : 7514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 역사스페셜 -방송 6월 26일
한국 전쟁 최대 미스터리
북한군,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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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새벽에 포탄 터지는 그림 6" (앞의 효과음..흘리다가)
-포탄 쏟아내는 포 보이면작 6월25일 새벽..기습적으로 공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경계선 무너진다. 2" 그리고 단 3일만에 남한의 심장부인 서울을 점령했다..그러나 북한군은 갑자기 서울에서
-진격해들어오는 군인들 6" 진격을 멈췄다.(강조)
-탱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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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타이틀
한국전쟁 최대 미스터리
북한군,왜 서울에서 3일간 머물렀나? (더빙원고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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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1(기본 세트...중간에 문서 등장)
북한군이 서울을 완전히 점령한 건 6월28일 오전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본격적으로 강을 건너기 시작한 건 7월1일입니다.
우리가 의문을 갖는 건 바로 이 6월28일부터 7월1일까지 3일간의 북한군의 동정입니다.
이들은 왜 3일간 강을 건너지않고 멈춰있었던 것일까?
뭐 어쩌면 이상한 일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당시 한강다리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고 남한의 심장부인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기쁨에 들떠 잠시 축제의 분위기에 젖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쉴새없이 진격해 내려온 북한군이 군의 재정비를 위해 잠시 쉴 수도 있는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 머문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데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3일 때문에 전쟁의 양상이 아주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정보지들이 쌓여있는 곳으로 가서 종이를 하나 꺼낸다..)
자,이 문서를 한번 보십시오
이건 전쟁 중에 미군사령부가 매일매일 군부대에 내려보냈던 군정보집니다.
그 중에 1951년 5월15일자를 보면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방어선을 뚫지못하자 김일성은 북한군 사령부에 그
원인을 분석하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여러 가지 원인을 뽑았는데
정보지의 해당부분 글씨 크게 뽑아져서 나온다..)
그 중 하나가 (손으로 가리키며)바로 서울을 점령한 뒤 한강을 건너는데 시간을 지체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울에서 3일간 머문 건 김일성 스스로가 전쟁실패의 원인으로 분석할 정도로 아주 중요한 것이었습
니다. 그렇다면 실제 3일은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친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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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문제의 3일,그로인해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다!!!
- 한강 헬기 10" 1950년 6월28일,강이북은 북한군의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강이남엔 다리가 폭파된 뒤
- 유람선 3" 중장비는 모두 버리고 나룻배를 이용해 겨우 몸만 빠져나온 한국군이 주둔해있었다
- 백선엽과 PD 투샷 3" 북한군에게 밀려 강이남으로 쫓겨내려온 한국군의 상황은 열악했다.
- 한강이남에서 강북을 바라보는 -------------------------------------
PD와 백선엽... *백선엽(테이프 26 4850)
기가 막혔지..어떤 사람은 모자도 없고 어떤 사람은 농군옷 입었던 사람은 짚신신고도 오고
(4530짜집기)중무기는 다 미약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강 이북에 버리고 왔다
건널 수 없잖아..여긴 맨주먹이거든..무슨 저항이고 뭐고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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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화면) 36" -현장음-
강이북의 북한군 "6월28일 서울은 해방됐습니다."
이에 비해 6월28일 오전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했다.
당시 북한군은 다섯 개의 사단과 함께 35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방어능력을 거의 상실한 한국군에 비해 북한군의 전력은 막강했던 것이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곧바로 한강을 건넜다면 전황은 겁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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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수 인터뷰(육사 교수...테이프31 1034)
초기에 25일부터 28일까지의 진격속도를 계산해보면 45키로를 3일동안.진격한 것이다.
1칲평균 15키론데 그 계산은 아측이 상당한 정도의 정항을 했다는 전제하에서 보인 진격속돕니다.
그러나 한강이남에서의 진격은 아측이 거의 전투력을 상실했다고 가정한다면 이건 보병사단이 1일 진격하는
최대속도로 내려갔다고 할 수 있다. 그건 역사상 1일 25키로로 계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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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도 18" 만일 북한군이 한강을 곧바로 건넜고 이후 1일 25키로 속도로 진격했다고 가정한다면 북한군은
3일만에 조치원, 그리고 6일만에 대전을 점령하게된다. 무서운 속도로 남한을 점령하게되는 것이다.
- 자료화면)강이남 한국군
재정비 모습 22" 그러나 북한군은 강이북에서 갑자기 진격을 멈췄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군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바로 그 사이 한국군은 재정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트럭에 손 흔들어준다 6" 28일 오후부터 한국군은 분산철수하는 낙오병들을 수습한다.
-C.G. 18" 그리고 다음날 시흥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수습된 세개부대를 한강이남에 배치하게된다..
-한강방어선. 북한군이 강이북에 머물러있는 사이 한강이남의 한국군은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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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선엽(테이프 26 4739)
삼삼오오 낙오병 다시 수습해가지고 육군본부나 사단에 있던 장교들을 갖다가 이제 지휘관으로 내보내고
핵가지고 그쪽에 얇은 방어선을 여기서 구축을 했는데 적이 여기서 사흘동안 본격적인 도하를 하지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 여유를 가지고 낙오자수습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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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아더 비행장 도착 18" 그런가하면 그 사이 한국에선 새로운 변수가 발생한다. 6월29일,
수원비행장에 도착한 맥아더는 한강의 상황을 보고 미군의 참전을 결정한다.
- (자료화면)미군 투입그림 그리고 이틀 뒤인 7월1일 미군 육군 부대가 긴급히 투입된다.
-(자료화면)한강부근 자료화면 28" 이렇게해서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러있는 3일동안 한국군은 방어력을
갖추게된다.
북한군에 밀려 한강이남으로 쫓겨내려왔던 3일전과는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전쟁의 양상도 바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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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조박사 인터뷰(테이프32 0335)
북한군이 서울에 3일동안 체류하는 동안 한국군은 지연전을 수행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됩니다.
지연전이라고하는 것은 공간을 내어주고 시간을 얻는다는 작전계획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낙동강방어선을 형성해서 반격작전을 실시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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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방어 자료화면 33" 방어력을 갖춘 한국군은 지연전을 펼치게 되었고 그사이 시간을 번 한국군은
반격작전을 준비하게된 것이다.
-포우즈-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러있었던 3일의 시간은 이렇게 한국전쟁의 양상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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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VCR 마지막 화면과 비슷한 느낌...줌아웃되면 영사실같은 분위기의 방)
군사전문가들은 세계 어느나라 전쟁에서도 초기에 진격을 멈추는 예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전쟁초기에 상대방에게 시간을 준다는 건 군전략상 아주 치명적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간 머문 것을 한국전쟁 최대 미스터리로 여겨온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오늘 역사스페셜에서는 그 의문을 풀어보려고 합니다.
(뒤에 흘러가던 화면 멈춘다..다리 끊어진 서울 항공사진..)
우선 당시 서울의 상황을 보면
(한강사진 잠시 보다 돌아서며..)
지금 보시는게 한강 인도교 폭파장면입니다.
28일 새벽 북한군이 서울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미아리방어선을 돌파하자 국군이 곧바로 폭파한 것으로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위한 것입니다.
사실 당시 북한군은 350대의 탱크를 앞세운 5개사단으로 대규모의 병력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다리가 끊어진 상태에서 중장비를 갖춘 대부대가 일제히 강을 건너기란 쉽지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한강인도교의 폭파가 (손으로 사진 가리키며)
북한군이 강을 건너지못하게한 결정적인 원인이었을까요?
뒤의 화면으로 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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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북한군,도하하려면 할 수 있었다..
- 위의 한강 사진 14" (앞에 여유 두고 들어가기)
당시 한강은 수심이 3미터에 강폭이 700미터에서 1500미터에 달하는 넓은 강이다.
12" 이러한 강을 탱크를 앞세운 대규모사단이
-자료화면)도하장비 이용한 건너기위해선 도하장비가 필수적이다.
도하모습으로 디졸브 그렇다면 당시 북한군에게 이런 도하장비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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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 교수 *육사교수 인터뷰(테이프32 0518)
도하수단으로는 2차대전의 예를 본다면 가장 간단한 것으로서는 모터가 달린 도하용 주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문교 또는 부교를 설치하게되면 트럭이나 전차같은 장비 도하할 수있다.
그러나 이 당시 북한군으로서는 이런 장비 없었던 것 같습니다.금강선에서도 북한군은 도하장비가 없어서
땟목을 이용한다거나 수영을 한다거나 이런 방법의 도하를 시도했고 낙동강방어선에도 마찬가지고 그러한
방법으로 도하를 기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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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강나루터 자리 19" 그렇다면 이렇다할 도하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북한군은 강을 건너지 못한 것일까?
-현장에 PD와 증언자들 그러나 당시 한강에는 배가 많이 다녔다.
한강엔 마포, 서빙고 서강 나루터등 여섯 개의 나루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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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인터뷰(테이프 24 5111)
삼판이라고해서 바다에 나가서 고기 잡는 배
그것들이 저기 마포 강변으로 작 있었고 서강쪽에도 나무 실러 나르던 배들 그런게 늘배라고 긴게 있다..
그런게 있었다
많이 타나?
많지..아마 군대로 치면 1개소대정도는 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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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마포나루터 동화면 8" 실제 28일 한강다리가 끊어진 뒤 나루터는 강을 건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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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인터뷰
그때 당시엔 배 남아있었겠네?
그렇지..남아있었지
그때는 그러면?
많이 이용했어..
군인들도 썼고 피난민들도 썼는데 그때 피난민들은 고생들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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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철교줌인 27" 이외에 강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이 또한가지가 있다.
당시 한강에 가로놓였던 다리는 철교를 포함해 모두 네개였다. 그 중광진교와 인도교,그리고 경인철교 상행선은
파괴되었지만
-C.G.로 인도교 경인상행선 파괴 경부철교는 거의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철교 일부구간의 철로와 침목만이 파손되어있었다
- PD,철도청 찾아감 14"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이 철교를 이용하려면 어느 정도의 보수시간이 필요한 걸까..
철도청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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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청 관계자인터뷰 (테이프28 2600)
철도와 교량은 거드 트러스 교각 교대가
-중간에 철교사진 인서트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런 중요한 부분이 손상되면 복구하는데 한달 이상 걸린다.
그러나 세 번째 경간의철로와 침목이
-C.G.교체 약간 손상을 입었다면 주요경간의 레일과 침목을 이용해서 교체만 하면된다.특별한 장비없이 보수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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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한강모습 14" 철로와 침목을 교체하는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않는다.
이렇듯 북한군이 경부철교나 나루터를 이용했다면 도하장비없이도 강을 건너는 것은 가능했다.
- 당시 사진 10" 실제 7월1일 북한군이 본격적으로 강을 건너기 시작할때의 상황을 보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북한군의 일부는 나룻배를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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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터 증언자 인터뷰(테이프 24)
낮에는 비행기가 폭격할까봐 그런지 물을 채워놓아요..밤에는 물을 퍼내요..
그래서 밤에 사용하는거지.. 왔다갔다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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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교보수 사진 20" 또한 북한군은 경부철교도 이용했다
7월1일 밤부터 철교보수작업에 들어간 북한군은 한국군의 저항을 피하기위해 밤에만 작업을 했다.
그 결과 이틀만인 7월3일 새벽 북한군의 전차는 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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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스튜디오 2와 같이 영사실같은 분위기의 방)
비록 다리가 폭파되고 특별한 도하장비가 없었더라도 북한군이 강을 건널 의지만 있었다면 28일 서울점령
직후에도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어쩌면 한국군이 미처 재정비가 되지않은 28일 당일 강을 건넜다면 더욱 쉬웠을 겁니다.
그러니까 북한군이 강을 건너지못한 건 다리가 폭파되었기 때문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뭘까?
뒷화면에 유성철얼굴 등장한다)
지난 90년 한국을 방문하기도했던 북한군증언자가 있습니다.
6.25당시 작전국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에 있던 인물로 지금 러시아에 망명중입니다.
그는 북한군이 서울에 머문 것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뒷 화면 유성철 인터뷰 모습..보는 유인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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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철 증언 :"20만당원이 궐기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지리산 빨치산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니까 서울만 함락하면 조선전쟁은 끝날 것이라 예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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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보고있다가 고개 갸우뚱하며)
서울만 점령하면 전쟁은 끝난다..?
언뜻 이해가 되지않는 이야깁니다만 이것이 한때 학계에서도 자주 거론되었던 서울제한점령론입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앞서 들은 유성철씨의 이야기대로 북한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한내 남로당이 봉기를 해서
군사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3일간 기다려도 봉기가 일어나지않고 더욱이 미군이 예상보다 빨리 개입하게되자 작전을
바꿔서 남하를 하게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
뒷화면이 VCR 첫화면으로 바뀌고 유인촌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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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서울만을 제한 점령하려고 했다?
-최태환 만나러가다. 13" -(3-4" 여유있게)-
우선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북한군증언자
-마주앉다. 한사람을 더 만나보기로했다..
-마주앉다. 17" 최태환씨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6사단
최태환씨 수첩 역사기록부장으로 부대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고 기록했던 사람이다.
-사진 17" 그는 당시 북한군의 전쟁계획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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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환 인터뷰(테이프25 3603)
23일 9시즈음되었을거다.문화부사단장 홍은철이 사회를 보고 조선민주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두봉이 시국담화...
그 내용이 서울만 장악하고 있으면 과거의 지하세력이 자체 폭동..내전으로 끝날 것이다.
서울의 집권층 없으면 자연히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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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봉 사진 11" 전쟁이 일어나기 이틀 전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던 김두봉이 북한군장교
들을 모아놓고 서울제한점령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북한내 모습 18" 실제 전쟁직전 북한군내에선 서울제한점령에 대한 이야기들이 거론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전쟁을 계획했던 김일성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자료화면)김영삼과 옐친 15" 지난 94년 러시아 대통령 옐친은 김영삼전대통령에게 소중한 자료를 전해주었다.
바로 한국전쟁에 관련해 소련과 북한사이에 오갔던 외교문서들이다.
- 외무부 자료실로 들어가는 PD17" 현재 그 자료들은 외무부에 보관되어있다.
전쟁1년전인 1949년1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전쟁 전기간에 김일성과 스탈린간에 오갔던 문서들이다.
-마이크로필름 18"
-화면에 띄운다. 자료손상을 막기위해
외교문서는 마이크로 필름상태로 열람되고 있었다.
-화면 타이트 그러나 전쟁직전 외교문서에서는 서울만 제한적으로 점령하겠다는 내용을 발견할 수 없었다.
-문서 뽑아내다. 8" 그런데 한가지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바로 남한내 빨치산 활동에 대한 내용으로 서울제한 점령론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문서 줌인 15" 1949년 9월12일과 13일자 외교문서로
당시 북한에 거주했던 소련 공사 툰킨이 김일성,박헌영과 함께 나누었던 대화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한 것이다.
-박헌영부분 9" 당시 박헌영은 남한내 빨치산활동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 내 용 7" ..타이프 소리와 함께 자막 나온다,,
자막내용"박헌영은 빨치산으로부터 큰 원조를 기대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박헌영사진 13" 박헌영은 북한내 최고의사결정기관인 조선노동당의 부주석으로 남한내 빨치산활동에 대한
책임을 맡고있던 인물이다. 박헌영은 남한내 빨치산활동에 대해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있는 인물인 것이다
-남로당 활동 49" 실제 전쟁이 일어나기 전, 남한에선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으며 그 규모다 컸다.
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당시 산으로 들어간 빨치산의 숫자는 2.500여명 정도였으며
이후 그 수가 더욱 증가해 49년 봄엔 약 20,000명으로 늘었다.
더욱이 49년 여름 북한에선 모두 10회에 걸쳐 2.400명의 빨치산을 남파했다.
49년 여름은 빨치산활동의 절정기였다...
49년 가을 김일성과 함께 툰킨을 만난 박헌영이 빨치산 활동에 대해 기대를 걸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김일성사진 6" 그렇다면 김일성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문서 14" --타이프 쳐당시 박헌영의 기대와는 달리
(김일성 이야기부분) "김일성은 빨치산들로부터 큰 원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관계 11" 김일성은 박헌영과 달랐다. 조선노동당 주석이었던 김일성에게 부주석인 박헌영의
영향은 컸다.
그런데도 49년 9월 툰킨과의 면담자리에서 김일성은 전쟁이후 빨치산의 활동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빨치산 사진 32" 실제로 50년 초가 되면서 김일성은 빨치산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게된다
49년 여름 활발히 활동했던 빨치산들은 남한에서의 대규모 빨치산 소탕작전에 의해 50년초 위기를 맞게되기
때문이다. 지리산으로 쫓겨올라간 북한군들은 50년 봄을 고비로 대부분 토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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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교수 인터뷰(테이프22 5150)
남한내에 널리 퍼져있던 북한을 지지하는 게릴라를 완전히 소탕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게릴라소탕전에 참가했던 구군들이 모두 전방으로 재배치됩니다.
그 결과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면전을 하지않고는 남한을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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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도하하라 12" 실제 전쟁직전 북한에선 전면전을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는 여러 문서들이 있다.
6월23일 한 소련고문이 인민군장교들에게 한강지역에 도착하면 먼저 도하하라는 내용의 훈시를 했다고 한다.
-크레믈린궁 7" 또 김일성의 남침에 직접적으로 개입되어있던 스탈린은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러있던 7월1일
-스탈린전문 35" 다음과같은 내용의 전문을 북한에 보냈다.
-자막과 효과음-
-마무리 그림 이렇게 북한은 서울만 점령하려했던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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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4(기본세트)
생각해서 되뇌이듯)
다리폭파로 인해 강을 건널 수 없었던 것도 아니고 김일성과 스탈린이 서울만 제한점령하려했던 것도 아니라면
과연 북한군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6.25당시 북한의 남침작전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 단서를 찾을 수도 있을 것같은데요
작전상황지도 있는곳으로 가서 지도를 끌어내리면 선제타격작전도 나온다.)
이 문서를 한번 보십시오
이 지도는 지난 92년 한 소련 연구원이 <러시아 국립자료보존소>에서 발견한 것으로 전쟁직전 만들어졌던
북한의 남침작전돕니다.
이 작전도에서도 당시 북한이 서울만 제한점령하려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의 진격방향은 (손으로 가리키며)이렇게 한반도남단까지 그어져있으니까요...
(다시 정면 보며) 뿐만아니라 이 작전도는 북한이 어떻게 남한을 점령하려했는지도 아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귀중한 자룝니다.
잠시 작전도를 살펴보면 (손으로 가리키며) 일단 1차목표지점은 수원,원주,삼척입니다.
그리고 이후엔 세개 방면으로 나눠서 남한을 완전히 점령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작전도에 담긴 북한의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부터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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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북한의 원래계획은?..속전속결로 남한을 점령하려했다.
그러기위해 1단계작전이 중요했고 수원포위의 타이밍이 아주 중요했다
- 자료화면) 24" 작전도에 담긴 북한의 의도를 읽으려면 우선 남침작전이 나오게된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일성과스탈린 만난다 김일성이 남침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건
(1949년 3월5일) 1949년3월5일..모스크바에서 열린 김일성과스탈린의 회담에서다.
-회의장의 김일성얼굴 당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한을 침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전투장면 22" 그러나 이에 대해 스탈린은 북한군의 전력이 남한군에 비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지않는 한
먼저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전쟁 전 38선 출동 실제 전쟁1년전만해도 북한군과 남한군의 군전력은 비슷했다. 38선에서 자주 일어났던
남한군과 북한군과의 충돌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확인된다.
소련은 이후에도 남북한의 군전력에 상당히 관심을 보였다. 1949년 9월 소련대사 스티코프가
-문서 15" 스탈린에게 남북한 군전력을 비교해서
(1949년 9월15일 외교문서) 보고하기도 했다.
-소련내 모습 19"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문제를 결정하는데 이렇게 군전력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미국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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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인터뷰(테이프 22 5803)
북한의 남침을 스탈린이 승인한다는 건 소련이 미국과 합의한 얄타협정을 파기한다는 걸 의미하고 그것은
결국 미국과의 전면적인 대결을 승인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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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내 모습 22" 소련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제정세속에서 소련이 생각한 건 북한이 남침할 경우 자력으로 빠른 시간안에 승리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위해선 북한군이 남한군에 비해 군전력상 절대적인 우위에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던 소련이 1950년 1월 태도를 바꾼다.
- 김일성과 스탈린 사진으로 10"
(문서 함께 효과쓰기) 1950년 1월19일 김일성은 남침문제를 상의하기위해 스탈린을 만나고싶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낸다.
-김일성 전문내용 16" 자막과 음악
-스탈린 사진 8" 그로부터 열흘뒤인 1월30일 스탈린은 남침문제를 놓고 김일성과 적극적으로 논의할 의사가
있음을 밝힌다.
- 스탈린 답신내용 자막과 음악
소련의 입장이 바뀐데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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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인터뷰(테이프22 0802)
19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게 되고 또한 중국은 공산혁명에 성공하게된다. 아시아에서 이렇게 공산권에
유리한 국제정세가 전개되자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기로 결정하다.
- 자료화면: 38" 국제적인 정세가 다소 소련에게 유리하게 변한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여전히 미국을 의식하고 있었다.
남침지원을 결정하자마자 곧바로 소련은 북한의 군전력을 강화하기위한 적극적인 지원을 한다.
우선 1949년 6월 항공기,전차,소총을 비롯한 110여종의 전쟁물자를 북한에 보낸다.
또한 하면 군사훈련을 담당할 소련장교들을 급파하고 북한의 남침작전을 수립하고 지휘할 작전참모도 보낸다.
-선제타격작전도 13" 이렇게해서 나온 것이 바로 선제타격작전도다.
이 선제타격작전도엔 미군이 개입하기 전전쟁을 끝내려했던 소련의 의도가 담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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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 인터뷰(테이프 21 0718)
수원이남에서 남해안까지 이르는 지역에는 지금 여기서 보시다시피 산맥이니 이런 도로망을 고려하지않고
방향만 고려한 상탭니다.
이것은 2단계작전에서는 거의 평정작전을 계속 해가면서 남쪽까지 간다는 것을 상정한 계획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서울과 수원이북지역에서 국군을 포위섬멸한다는 것이 북한군 남침작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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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군사연구소 12" 당시 북한의 남침작전을 좀 더 자세히 알려주는 문서들이 있다.
-자료 가지고 나오며 -현장음
"정찰명령하고 전투명령에 대한 자룝니다."
-문서들 내리며 20" 바로 전쟁당시 미군이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문서로 전쟁직전 북한군 사령부가 각 사단에
내려보낸 일종의 작전명령서들이다.
-정보계획자막 12" 그 중 남침작전을 단계별로 상세히 기록하고있는 정보계획서를 보면
1단계작전이 바로 주력을 섬멸하는 작전이다.
-지도 17" 1단계작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보면
(1단계) 특히 수원이북지역이 강조되어있다.
이는 서울에서 한국군을 강이남으로 밀어내면 춘천을 거쳐 수원에 도착한 부대가 한국군을 포위섬멸한다는
것이다.
-2단계부분 9" 이렇게 수원이북에서 한국군주력부대를 포위섬멸하면 이후엔 큰 저항없이 쉽게 진격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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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조인터뷰(테이프4 3153)
선제타격작전이라고하는 건 세계 제 2차대전가운데 독일군과 소련군이 사용했던 전략전술개념이었습니다.
주공병력으로서 전면공격을 하고 조공병력으로 포위공격한다는 것이 핵심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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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장면 18" 당시 북한은 한국의 주력부대를 섬멸하면
1개월내 전쟁이 끝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군의 개입을 막기위한 속전속결의 작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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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5..기본세트에 선제타격작전도가 오른쪽에 걸려있고 걸어나오면 오른쪽에 상황도 등장)
선제타격도 오른쪽에..말하며 걸어나오면 선제타격도 작아지고))
북한군 작전의 핵심은 바로 1단계작전에 있었습니다.
북한군주공부대가 서울을 점령 한국군주력부대를 강이남으로 밀어내면 춘천을 점령한 북한군 조공부대가
수원으로 내려와 강이남으로 내려온 한국군주력부대를 포위 섬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전이 성공을 하기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주공부대의 서울점령시간과 조공부대의 수원점령시간이
맞아야합니다.
그래야 효과적으로 한국군주력부대를 포위섬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MC,멈춰서면 오른쪽에 상황도 등장한다..)
실제 처음엔 북한군의 의도대로 되는듯했습니다.
설명에 따라 서부전선 부분 번쩍번쩍..멘튿대로 C.G.움직임)
서부전선에 투입된 북한군은 개성 동두천 포천을 단숩에 점령했습니다..
이때 한국군 주력부대와 예비부대는 마지막 방어선인 의정부로 황급히 투입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기세로 내려오던 북한군에 의해 의정부마저 함락되었고 단 3일만에 서울이 점령되었습니다.
북한의 작전대로 서울에서 밀려내려간 한국군 주력부대는 섬멸될 위기에 놓여있었던 것입니다.
(중부전선쪽을 가리킨다.)
그런데 문제는 중부전선이었습니다.
(중부전선쪽 타이트)
북한군의 1단계작전이 성공하기위해선 중부전선에서 하루만에 춘천을 점령, 수원으로 내려와야합니다.
그런데 춘천에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유인촌씨 얼굴로)
당시 춘천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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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춘천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
- 춘천 상공..헬기 13" -잠시 포우즈-
당시 춘천으로 투입된 부대는 북한군 2사단이다 이들은 북한군이 전쟁 2개월전에 실시한 검열작업에서 최우수
정예부대로 뽑힌 부대로
-38선 지표석 5" 6월25일 새벽,38선을 넘어 춘천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현장음-
모진교가 넘어가는거..
-모진교 풀 17" 지금은 수몰되어있지만 당시 이곳엔 춘천의 첫관문인 모진교가 있었다.
38선을 넘은 북한군 2사단은 채 30분도 지나지않아 이곳 모진교를 돌파했다.
-전투명령 13" 당시 2사단은 춘천을 하루만에 점령한 뒤 곧바로 가평..가촌을 거쳐 수원으로 향하도록 되어
있었다.그 작전의 첫 목표지점인 모진교돌파는 예상대로 되었다.
-옥산포로 이동 10" 그런데 문제는 옥산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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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인터뷰(테이프 10 4500)
여기 내가 출동한 게 아침 10시경이다.
그때 벌써 일부가 들어왔다. 포탄이 저쪽으로 자꾸만 떨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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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포전경 20" 당시 이곳 옥산포는 보리밭이 넓게 펼쳐져있었다
춘천을 방어하고있던 한국군 6사단은 뒤늦게 남침소식을 듣고 이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진격해오는 북한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북한군은 잠시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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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인터뷰(테이프 10 4500)
이렇게 기러기 날아가는 대형으로 오더라구 그래서 우리가 저기서 싸웠지요 그때 나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보이밭밖에 없기때문에 그냥 투명하게 보이지..
막 쏘니까 못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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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 15" 오후가 되자 북한군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한국군은 이미 예비대까지 출동해 우두산측면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거세어진 한국군의 반격에 북한군은 또다시 주춤하고 말았다.
-북한군 자료화면 28" 결국 북한군은 옥산포에서 더 이상 진격을 하지못한채 하루를 보내게된다.
당시 북한군의 병력과 화력손실은 막대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손실은 춘천을 하루만에 점령한다는 계획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당시 철저히 준비를 하고 진격해왔던 북한군을 어떻게 한국군6사단은 막아낼 수 있었을까?
- 옥산포에서 바라본 산 17" 당시 한국군 6사단은 옥산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남침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국군6사단은 곧바로 이곳 진지로 투입돼 진격해오고있는 북한군을 향해
정확히 총을 겨눌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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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 인터뷰(테이프12 2551)
허) 참호가 있었기에 정확히 포를 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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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오르다. 18" 당시 6사단7연대는 전쟁이 나기 한달 전
군사병들과 춘천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이곳 우두산에 참호를 팠다
그리고 참호의 주인을 정해놓고 실전처럼 훈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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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인터뷰(테이프11 3127)
전쟁 나기 전에 선정해서 진지 구축했다는 건 높이 평가할 일이고 유비무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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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교로 트래킹 12" 이렇게 이틀간 옥산포를 지키고있던 한국군은 다음날 소양강일대로 후퇴한다.
-물에서 소양교로 팬 양구쪽에서 진격해오고 있는 북한군으로부터 포위의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양교 15" 이곳 소양교를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한국군6사단은 이틀간이나 격전이 벌어졌다.
-포탄흔적 23" 당시 치열한 전투의 흔적은 지금도 소양교 다리에 남아있다.
소양교는 춘천으로 들어가기위한 마지막 관문이었다.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못한 북한군 2사단은 소양교를 건너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미리 진지를 구축하고있던 한국군의 거센 반격에 꼼작을 하지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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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프 12 2551
보병이 막을 것도 포병이 막아줬다. 포병이 춘천방어에 공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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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로심문서 10" 실제 당시 춘천으로 진격해왔던 북한군포로들의 심문서를 보면 포병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컸음을 알 수 있다.
-포로심문서 해당부분
(자막) -음악-
자막: "남한포병정확...유산탄이 공포야기"
자막 : "2사단 춘천에서 40%사상..포병 탓..
자주포도 파괴되다."
-6사단 차 들어가다 48" 그렇다면 당시 한국군 6사단이 북한군을 맞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관 들어가다.
춘천전투 틸다운 무극리전투 6사단은 춘천전투외에도 많은 전과를 올린 부대다..
당시 한국군 6사단의 병력과 화력은 북한군에 비해 현저히 약했다.
-포그림 비교 병력은 북한군에 4분의 1도
(북한군과 한국군포) 안되는 수준이었으며 화력도 북한군의 수준에 못미쳤다.
20" 당시 포만 비교해봐도 북한군의 포는 122미리포였고 한국군6사단의 포는 105미리 곡사포였다.
사정거리만으로도 그 성능이 두배가까이 차이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한국군의 포는 북한군에게 위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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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사단 포 관계자(테이프 7 0232)
포병은 다른 병과와 틀려서 제 요소가 통합되었을 때 올바틀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예를들어 사격지휘라든지 관측등 제요소가 서로 통합되었을 때 요망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건 평시 교육훈련을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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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 훈련모습 15" 당시 미리 구축해놓은 방어진지에서 철저히 실전훈련을 했었기에 화력이 약한 포로도
북한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진 11" 철저한 준비와 실전과같은 훈련이 있었기에 한국군6사단은 춘천을 방어할 수 있었다.
-사단장 사진부터 7" 그러나 한국군6사단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서부전선은 모두 허물어진 상태였다.
결국 27일저녁엔 6사단도 후퇴하게되었다.
- 춘천 소양강 11" 하지만 한국군 6사단은 하루만에 춘천을 점령한다는 북한군의 계획을 무너뜨리고 사흘이란
시간을 지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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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6(기본세트...지도 뒤에 풀로 걸리게)
당시 북한군의 중부전선쪽의 작전을 다시 살펴보면
옆의 상황도의 C.G.살펴보며)
북한군 2사단이 하루만에 춘천을 점령하고 북한군 12사단이 같은 시간에 홍천을 점령...당시 춘천,홍천지역을
방어하고있던 한국군6사단을 섬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춘천에서 작전대로 일이 진행되지않자.
홍천쪽으로 진격해가던 북한군 12사단중 2개연대를 춘천으로 급히 보냅니다
이는 당시 춘천지역에 있던 북한군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이번엔 홍천쪽을 보겠습니다.
당시 홍천에 투입된 북한군 12사단은 중공군출신으로 실전경험이 있는 아주 막강한 부댑니다.
설사 춘천지역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북한군 12사단이 계획대로 홍천을 점령했다면 춘천을 방어하고 있던
6사단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북한군 12사단 역시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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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말고개전투..
-말고개 현장 16" 홍천점령의 임무를 맡은 북한군12사단은 양구를 거쳐 홍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군방어선을 뚫고 거침없이 내려오고 있었다..이러한 12사단의 발목이 잡힌 곳이 이곳 말고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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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사람 손으로 가리키며 *당시 마을 사람 인터뷰 (테이프 16 0835)
삼각표시있는데 노란 것 이쪽으로 거기요 거기
(전차) 두 대 있었다. 그건 아주 직사포로 맞아서 뚫리고 불에 나서 시체 녹다.
처음엔 옆에 가지고 못하다 냄새나서 북한군 시체 묻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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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고개 13" 당시 북한군의 피해는 막심했다.
북한군의 가장 강한 무기인 탱크가 이곳에서 10여대나 부숴졌다.
-증언자와 함께 지금은 잘 닦여진 도로지만 당시 이곳은 산길로 한국군에겐 천혜의 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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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조달진(테이프14 1341)
여기서부터 휴계소까지 좁았지..길은 차가 겨우 하나 정도 한 5미터즈음 되겠지..꼬불꼬불하고 S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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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군 포진상황(c.g.로) 21" 당시 이곳을 지키고있던 부대는 한국군
6사단 2연대였다.
북한군 12사단에 밀려 후퇴하던 한국군 6사단은 이곳에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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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단 (테이프 8 2350)
우리 연대장께서 그 당시 교육중에 있었다 6.25나자마자 원대복귀해서 도저히 적 탱크를 육탄으로 막지않으면
막을 수가 없다.그러니 여러분이 대표해서 희생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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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27" 당시 북한군이 보유하고있던 T-34는
(전쟁기념관의 탱크) 85미리 포를 장착하고 있는 최신형의 중전차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의 경전차를 일거에 부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T-34전차에 맞설만한 무기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말고개 현장 헬기 20" 6사단 2연대는 좁은 길을 따라서 진격해 올 T-34전차와 맞서기위해 인근산에 대전차포와
소총을 배치했다. 그리고 11명으로 구성된 육탄돌격대도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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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달진인터뷰(테이프15 1815)
주먹밥을 가지고왔다..밥을 먹으려는데 소총전 벌어지다..그래 싸우다싸우다 안되니까 탱크 들이밀다
탱크 어디있었냐하면 ...
주먹밥 먹다가 집어던지고 배치되다.
굉음소리를 내고 나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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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21" 당시 육탄돌격대들은 꼬불꼬불한 지형을 이용해 길옆에 몸을 숨기고있었다.
대전차포의 기습을 받은 탱크들은 느린 속도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전차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육탄돌격대들은 전차에 뛰어올랐다.
-부숴진 탱크 15" 전차에 수류탄을 던지고 다시 뛰어내리는 것이 육탄돌격대의 임무다.
-돌격대 사진 10" 대전차포와 육탄돌격대의 기습으로 6월28일 말고개에서는 북한군의 전차진입을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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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프 15(4050)
순간적으로 나도 정신없이 뛰어오르지 어떻게 뛰어올랐는지 모르고 어덯게 뛰어내렸는지도 모르고 올라와
가지고 올라오기전에는 머리맞아도 피도 안나오고 아무것도 안나오니까 그제서야 와보니까 새카마니
전차는 깔렸지 나묵사지에 탁탁 걸렸지 아 진짜 눈뜨고 못있을 정도로 비참했어요
전쟁나면 이렇게 비참하구나 나도 죽으면 저렇게 가루가 되는데 저렇게 죽이려하나 말이지요..이런 심정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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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비 ... 29" -잠시 음악-
당시 육탄돌격대원 대부분이 유명을 달리했다
-잠시 음악-
-추모비 이렇게 한국군6사단 2연대의 방어전으로 인해 북한군 12사단 역시 28일까지 홍천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춘천 이렇게 춘천,홍천지역의 점령을 맡았던 북한군 2사단과 12사단의 계획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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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7 (소양교에서)
북한군과 남한군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소양굡니다.
이곳 춘천 소양교와 홍천 말고개에서의 전투는 북한군에게는 전혀 예상치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북한군의 충격은 컸습니다.
춘천-홍천지역에서의 전투가 끝난 뒤 곧바로 북한군과 소련고문단은 북한군조직의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합
니다. 춘천,홍천점령의 총책이라고 할 수 있는 2군단장을 교체하고 2사단장도 해임합니다.
그리고 이외에 2사단과 12사단의 책임자들을 일제히 바꿉니다.
상황실의 2사단 12사단 조직표..교체되는 지휘관들 얘기할때마다
이름 바뀐다...)(바뀔 때 잠시 포우즈)
사실 전쟁초기 군조직의 개편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이는 북한군이 춘천전투에서의 실패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이 두 지역에서의 작전 실패로인해 북한군이 애초에 계획했던 남침작전에 큰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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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7 .. 춘천전투..그 이후..
- 헬기 10" 북한군 2사단이 춘천을 점령한 건 6월28일이다.
당일 점령계획에서 3일이나 지연된 것이다.
-C.G.(7월15일) 5" 이후 이들이 남하해 양평쪽의 한강을 넘은 건 7월1일이었으며
용인을 점령한 건 7월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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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영조 (테이프6 0158)
북한군 2사단이 춘천을 거쳐서 양평쪽에 강을 도하한 시점이 7월1일 새벽이었습니다.
한편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주력병력이 3사단과 4사단이 도하하는 시점도 7월1일 새벽이었습니다.
이걸 통해 봤을 때 북한이 3일동안 체류하고 있었다고하는 사실은 2군단과 작전협정을 즉 일정을 맞추기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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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화면 43" 춘천과 서울을 점령한 부대가 한강을 건넌건 7월1일이었다.
이로인해 북한군의 계획엔 차질이 생긴다. 북한군 2사단이 수원에 도착한 건 7월5일이었다..
이때 강이북에 있던 북한군도 내려오지만 이미 한국군은 이남으로 안정된 후퇴를 하고 있었다.
수원이북에서 주력부대를 섬멸하려던 계획이 무너진 것이다.
-자료화면 더욱이 이미 이 때 한국군은 전력을 보강했으며 미군과의 협력하에 방어계획을 수립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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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인터뷰(테이프 4232)
7월4일 이후부터 미국과 국군은 역할분담을하게됩니다. 서부의 경부축선에서는 미군이 방어를 담당하게되고
국군은 중동부지역에 투입되게되는데 이때 국군은 재정비를 마친상태에서 전투력이 향상된 상황이지요
북한군은 1차작전에서의 여의치않은 결과로 인해 일부부대 1사단을 중부지역에 투입하는 등
작전변경을 가져왔지만 그러나 이미 방어력이 강화된 국군의 저항에 의해 공격기세가 둔화되고
점차 작전이 생각하던 방향과는 다르게 어렵게 되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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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타격작전도 7" 이렇게해서 한달만에 한국을 점령하려던 북한의 작전은 무너진다.
-부서진 뒤 김일성 분석문서 5" 김일성은 전쟁실패의 원인을 한국군을 섬멸나오다.
하지못하고 남쪽으로 밀어냈기때문이라며 통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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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철교수 (테이프20 2950)
춘천전투는 적게는 한국군6사단이 인민군 2사단과 7사단을 춘천지역에서 3일간이나 진격을 저지한 내용
이겠습니다만 이것은 크게 본다면 서울대포위작전이라는 자체가 상당히 어렵게 됐습니다.
결국 전쟁을 속전속결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것이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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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15" 이렇게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3일간 머물렀던 건 춘천전투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로인해 북한의 남한점령계획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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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징
1950년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이땅에선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기나긴 전쟁기간중에 있었던 무수히 많은 전투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 춘천전투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있지않습니다.
제대로 방어 한번 하지 못하고 쫓겨내려왔던 초기전투 중의 하나로 묻혀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살펴본대로 춘천전투엔 큰 의미가 담겨져있습니다.
춘천에서의 효과적인 방어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주력부대의 한강남하를 막았으며
이로인해 단 1달만에 남한을 점령하겠다던 북한군의 남침작전은 무너지게됩니다.
그리고 또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한국전쟁 초기전하면 일방적으로 북한군에 밀려 후퇴했으며 미군이 개입한 뒤에야 재정비를 갖출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미군이 개입하기 이전...
춘천에서의 성공적인 방어전으로 인해 우리는 이미 재정비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이 땅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전투-
그 중에서 지금 우리가 춘천전투를 기억하고 돌아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