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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정만주원류고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1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25.09.27|조회수120 목록 댓글 0

*들어가는 말 : 이 우리말 번역문은 초벌에 가깝다 하겠다. 

만주원류고 원문 전체를 충분히 읽어보고서 번역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서 잘못된 번역이 있으리니  감안하고

읽어주시기를 바라며 잘못 번역된 부분이 짚어지면 그때그때 고칠 생각이다. 또한 만주원류고 책 전체를 번역

할지 아니면 내용에 따라서 중간중간 건너 뛸지는 번역해 가면서  판단할 예정이다.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건륭(乾隆) 사십이년 팔월 십구일에 내각(内閣)이 상유(上諭, 임금의 말씀)를 받들었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다. :

요즈음 금사세기(金史世紀)를 열람하였는데 “금(金)나라 시조(始祖)가 완안부(完顔部)에 살았으니 그 땅에

백산(白山)과 흑수(黒水)가 있어 백산(白山)은 바로 장백산(長白山)이요 흑수(黒水)는 바로 흑룡강(黒龍江)

이다.”라고 하였다.

 

우리 청나라(本朝)가 동쪽 땅에서 처음 흥기(肇興)하였을 때 그 아름다운 풍토로 영(靈)을 모아서 뛰어난 인물을

탄생(鍾毓 : 鍾靈毓秀)시킨 산천(山川)은 대금(大金)과 바로 같다.

역사(史)에서도 ‘금(金)나라의 선조가 말갈부(靺鞨部)에서 나왔으니 옛숙신(古肅慎) 땅이다.’라고 가리키고 있다.

 

우리 조정(我朝)이 처음 흥기(肇興)하였을 적 그 옛날에는 만주(滿珠)라 일컬었고

그 땅 붙이(屬)들을 ‘주신(珠申)’이라 하였다.

뒷날 만주(滿珠)라 고쳐 불렀는데 한자(漢字)로 쓰면서 서로 따라가다 보니 만주(滿洲)로 와전되었다.

그러나 그 실제는 옛 숙신(古肅慎)이 주신(珠申)의 전음(轉音)이며 강역(疆域)은 주신과 옛 숙신이 서로 같다는

것에 대한 증험은 또한 충분히 많다. ①②

 

①상유(上諭) : 상유는 조서(詔書)이니 황제의 명령과 지시이다.

또한 청나라 황제가 명령을 발표한 공문서에 사용하였다 한다.

참고로 ‘지(旨)’는 ‘맛이 있다’, ‘뜻, 취지’라는 기본적인 뜻 외에 ‘임금의 명령인 조서’라는 뜻이 있는데 특별히

‘황제의 명령이나 지시를 찬미하고 추어주는 관점’에서 사용하는 글자라고 한다.

 

②주신(珠申) : 주신을 찾아보면 ‘여진(女眞)이니, 지금에 만족(滿族)이다’라는 설명이 나온다.

그러나 만주원류고에 따르면 주신은 바로 (옛) 숙신(肅慎)이다.

 

한편 후한서(後漢書) 삼한전(三韓傳)에 ‘진한(辰韓) 사람은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 머리를 납작하게(頭匾) 만들

려고 머리를 돌로 누른다’라는 말이 있다.

저 아이가 처음 세상에 나와 땅에 떨어졌는데 어찌 돌로 머리를 누르는 일을 감당하겠는가?

그 이야기는 이치에 매우 거슬린다.

우리 청나라(國朝) 옛 풍속에 아이가 태어나면 며칠 동안 이부자리(卧具)에 놓아두니 아이를 그 안에서 누워

자게 하고, 오래되면 뇌 뼈(腦骨)가 저절로 평평해져 머리 모양이 납작해진 듯하다.

이처럼 곧 대대로 내려온 습속대로 하여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니 무슨 특별한 것이 없다.

 

진한(辰韓)도 아마 이런 종류이리니, 그런데 후한서(後漢書)를 지은 범울종(范蔚宗)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그에 대한 해석을 곡해하였으니 그 경솔함이 엄중하였다.

 

예컨대 저 삼한(三韓)이라고 이름을 부를 때(命名) 그저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을 쭉 나열만 하여서

그 의미나 가치(義意)를 살뜰히 알지 못하였다.

당시에 이 세 나라(三國)는 분명히 세 칸(三汗)을 두고서 각각 그 세 나라 중에 한 나라씩을 통치하였다. 사가

(史家)들은 칸(汗)이 군장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결국, 음이 같다는 이유로 잘못된 한자로 해석하였으

니 어리석고 너절한 점이 대단하다.

 

한(韓)을 겨레의 성(族姓)이라고 그릇되게 아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한바탕 웃음거리를 맞기에도 부족하다. 예전에 삼한(三韓)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는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미처 사람들로 하여 그 자료들을 죄다 읽게 하여 모두를 깨우치게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애석하다.

 

예를 들면 당(唐)나라 때에 일컬었던 계림(雞林)은 당연히 지금 길림(吉林)의 잘못(訛)으로 신라(新羅)와 백제

(百濟) 및 여러 나라도 모두 그 부근 땅이었다.

다만 옛 사람(昔人)들 중에 고증(考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명(明)나라 말기에 지랄병과 거짓(狂誕)에 들린 무리가 문자와 어구(字句)를 찾고 들추어내어(尋摘)

함부로 속이고 훼손(詆毁)하였다.

 

이처럼, 폭군 걸(桀)의 개가 충성스럽게 짖어대듯 깊이 비교하여 따지는 노력도 없이 어그러져 잘못됨이 심한

경우라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가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저 동이(東夷)에 대한 설명은 땅으로 인해서 이름을 얻었다 하니 맹자(孟子)가 말씀한 ‘순(舜)임금은

동이(東夷) 사람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 사람이다.’라는 것에 대해 이는 숨길(諱) 수도 없고, 역시 숨길

필요도 없다.

 

우리 청나라(本朝)를 존경하고 숭상하는 사람들에서도 “비록 대금(大金)과 더불어 모두 동방(東方)에 있지만 바로 같은 부(同部)는 아니다.”라 한다.

 

그렇다면 보는 시야가 너무나도 좁다.

우리나라가 성(姓)을 얻어 애신각라씨(愛新覺羅氏)라 하는데 우리말(國語)에 금(金)을 ‘애신(愛新)’이라 하니

가히 금나라(金源)와 같은 갈래(同派)임을 방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대개 우리 조정(我朝)은 대금(大金) 시대에도 있었으니 이때 한 번도 완안씨(完顔氏)에 복속(服屬)되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마찬가지로 완안씨(完顔氏)는 오늘날에 모두 우리 조정(我朝)의 신하(臣僕)들이 되어 온 하늘 아래

(普天) 땅끝(率土)까지 홀로 존엄한 존재(一尊)에게 거느려지고 있으니 이치가 참으로 이와 같은 것이다.

이를 한(漢)과 당(唐)과 송(宋)과 명(明)나라가 자기보다 앞선 나라를 대신하여 나라를 세운 것에 비유하자면,

모두 그들이 이긴 나라의 신하(臣僕)들이 아니었겠는가?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 조종(祖宗)이 한때 명(明)나라에서 용호장군(龍虎将軍) 봉호(封號)를 받은 적이 있다.”

라는 말을 하니 이 역시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우리 조정(我朝)이 처음 일어났을 때 명(明)나라는 오히려 아직 국력이 줄어들어 약해지지 않아 우리와 우호를

닦고 이를 빌어서 두 나라에 반가운 만남(兩國之歡)을 다지고자(結) 하였다.

 

통치 체계를 수립하고 있던 우리 왕조(我朝)는 진실로 하늘의 뜻을 즐거워(樂天)하여 세상을 지키(保世)려는

계책에 거리낌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명성과 위엄(聲威)이 날로 떨쳐 졌지만, 명(明)나라는 기강이 날로 무너진 데다 저 허무맹랑(讒言)한

말을 믿고 싶은 대로 믿어서 우리를 죽이고 해칠 계략을 남몰래 세웠다.

이에 우리 태조(太祖)가 벌컥 진노(震怒)하여서 일곱 가지 크게 사무치는 한(恨)을 하느님께 알리고 군대를 일으

켜 보복하였다.

 

살이호(薩爾滸), 송산(松山), 행산(杏山)에서부터 여러 전투를 벌여 명(明) 군대를 크게 이겼다.

명(明)나라 사람이 우리와 화친할 길을 찾고 싶어 했지만, 우리는 이를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았으니 저들이 주제

에 오히려 어떻게 우리 왕조를 깔보고 업신여길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한(漢)나라 고조(髙祖)는 곧 진(秦)나라의 정장(亭長 : 지금에 파출소 소장)이었고 당(唐)나라 고조(髙祖)는 바로 수(隋)나라의 뭇 관원 중 하나(列公)였을 뿐이며 송(宋)은 주(周, 곧 후주(後周)) 임금이 가까이하던 신하(近臣)였다.

명(明)은 원(元)나라의 백성이었으니 어떤 자는 나라를 훔치고 어떤 자는 침략하여서 더는 명성이나 도의(名義)를 생각해 보거나 아끼지 않았다.

 

우리 왕조(我朝)의 경우는 명(明)나라와 여국(與國, 동맹국)이었다.

명나라 말기 농민 봉기 선봉장 이자성(闖賊)이 사회 근간을 흔들고 어지럽히는 상황을 만나서 명(明)의 사직(社稷)은 이미 본래 있던 곳에서 옮겨졌다. 뒤에 오삼계(吴三桂)가 청나라 군대(王師)를 맞아 관(闗, 북경으로 가는 길목

인 산해관)으로 들여서 명나라를 위해 원수를 갚고 적을 죽였다.

그런 뒤 우리 세조(世祖) 장황제(章皇帝)께서 연경(燕京, 북경)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여 세우고(定鼎) 어마한

세상 땅(寰㝢)을 하나로 거느리셨다. 이런 천하(天下)에 눈부시게 공정하며 의젓할 수 있음을 그 누가 우리 청나라만큼 한 경우가 있었던가?

 

우리나라가 하늘의 보살핌(天眷)을 크게 받아 주과(朱果)라는 상서로운 징조가 드러났던 일 같은 것은, 역시 상(商)나라가 제비(元鳥)가 알을 떨어뜨려 그 알을 먹고 설(契)을 낳아서 생겨났고 주나라 시조가 고매(髙禖, 郊禖) 제사

에서 큰 신(神)이 남긴 발자국을 밟고(履武) 잉태되었던 일들과 같다 하겠다.

기(紀)에서는 이러한 일들을 ‘천명(天命)의 부(符)를 받았다.’라고 한다.

요컨대 대금(大金) 부족(部族)과 그대로 이어지며 또한 천녀(天女)가 목욕하는 곳인 포륵호리지(布勒瑚里池)는

바로 장백산(長白山, 백두산)에 있으니 원래 백산(白山) 흑수(黒水)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한편 금사(金史) 세기(世紀)에 ‘당(唐)나라 때 말갈(靺鞨)에 발해왕(渤海王) 있었는데 그 후대가 전해져 십여 세대가 이어졌다.

문자(文字)와 예악(禮樂)이 있었다.’라고 가리켜 말하였는데 이는 금(金)의 선조이니 곧 글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글자(國書)는 태조(太祖) 때부터로 액이덕니 파극십(額爾徳尼 巴克什)들에게 명하여, 있던 것들을 따라서 청나라 글자를 만들고(遵製) 사람들 사이에 사용되게끔 하였다.

아마도 금(金)나라 초기에 글자들이 그 뒤에 나라가 쇠퇴하여 흩어져 없어짐에 따라 마침내 그렇듯 글자의 전수를 놓쳐버렸고 우리 왕조에 이르러서 글자를 다시금 만들었지만, 그 문자가 어떠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다른, 예컨대 건주(建州)의 연혁(沿革)이나 만주(滿洲)의 첫 기틀(始基)은 저 고금(古今)의 땅 이름과 차이가 있어 싹 다 꼼꼼하게 헤아려 살펴서 책에 새겨넣어 천하에, 만세(萬世)에 드리워 보여주어야 한다.

 

대학사(大學士) 아계(阿桂), 우민중(于敏中)과 시랑(侍郎) 화신(和珅), 동고(董誥)를 파견하여 마음을 다 쏟아내어 조사하고 사실을 캐내어 조목을 나누어 편집하게 하고서 훑어볼 수 있도록 편집한 것을 차례대로 올리게 하라!

짐(朕)이 직접 개정(釐定)하여 전해진 이야기(傳信)들을 분명히 밝히고서 뭇 의혹을 쓸어버리리라!

아울러 이 글 한 통을 가지고서 백성들을 깨우쳐 알게 하라! 공경히 인용한 황제의 글월은 여기까지이다(欽此)! ③∼⑱

 

③ 건륭(乾隆) : 건륭(乾隆)은 청(清)나라 고종(高宗) 애신각라(愛新覺羅) 홍력(弘曆)의 연호(年號)이다.

연호의 기간은 60년이고 그 처음은 1736년 2월 12일에서 시작하여 1796년 2월 8일까지이다.

 

④ 아계(阿桂) : 누린 세월은 1717년 9월 7일에서 1797년 10월 10일까지이다.

장가(章佳) 씨(氏)이고 자는 광정(廣庭)이요, 호(號)는 운암(雲岩)이시다.

청나라 중기에 중신(重臣)이자 대학사(大學士)였던 아극돈(阿克敦)의 아드님이다.

처음에 만주(滿洲) 정람기(正藍旗)이었는데 건륭(乾隆) 24년(1759년) 천산(天山) 남쪽에 백산파(白山派) 수령

곽집점(霍集占) 형제의 반란을 평정하고서 이리(伊犁) 땅에 머물며 일을 잘 다스린 공로가 있어서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바꾸어 소속되었다.

벼슬은 무영전(武英殿) 대학사(大學士) 겸 수석 군기 대신(兼首席軍機大臣)에까지 이르렀다 한다.

 

⑤ 우민중(于敏中) : 누린 세월은 1714년에서 1779년이다.

자(字)는 숙자(叔子), 또는 중당(重棠)이고 호(號)는 내포(耐圃)이시다.

강남 진강부(江南鎮江府) 금단현(金壇縣 : 지금 강소성(江蘇省) 상주시(常州市) 금단구(金壇區)) 사람이다.

서법가(書法家)이자 학자였다.

장원급제로 관직에 나아갔고 벼슬은 문화전 대학사(文華殿大學士) 겸 호부상사(兼戶部尚書)에 이르렀다 한다.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⑥ 화신(和珅) : 누린 세월은 1750년 7월 1일에서 1799년 2월 22일까지이다.

뉴고록(鈕祜祿) 씨(氏)이고 자(字)는 치재(致齋)이며 스스로 가락당(嘉樂堂) 또는 십홍원(十笏園), 녹야정(綠野亭) 주인이라 불렀다 한다.

원래 이름은 보선(善保)이고, 선보(善寶)라고도 쓴다.

만주 정홍기(滿洲正紅旗) 사람으로, 본적은 봉천부 개원현(奉天府 開原縣, 지금 요녕성(遼寧省) 청원현(清原縣))

이다.

청나라 건륭(乾隆) 시절에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 군기대신(軍機大臣)을 지냈다. 머리가 좋아서 만주어, 중국어, 몽골어, 티벳트어들에 뛰어났다.

건륭제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나 권세를 이용해 부정부패를 일삼았다가 건륭제가 붕어하자마자 내쳐졌다.

 

⑦ 동고(董誥) : 누린 세월은 1740년에서 1818년이다. 자(字)는 아륜(雅倫)이요 호(號)는 자림(蔗林)이시다.

절강(浙江) 부양(富陽) 사람이다. 청나라 정치인이자 군기대신(軍機大臣)이며 화가(畫家)였다.

 

⑧ 범울종(范蔚宗) : 범엽(范曄)이다. 후한서(後漢書)를 지었다. 남조(南朝) 송(宋) 시대 사람으로 역사가이자

문학가였다.

순양군(順陽郡) 순양현(順陽縣), 곧 지금 하남성 석천현(淅川縣) 이관교진(李官橋鎮) 사람이다.

누린 세월은 398년에서 445년이다.

 

⑨ 용호장군(龍虎将軍) : 명나라에서 설치한 보잘것없는, 구체적인 직책이나 직위가 없는 일종의 명예직 무관.

 

⑩ 윗글에서 본조(本朝), 아조(我朝) 들이 쓰이는데 본조(本朝)는 조정(朝廷)을 뜻하는 말로 옛사람들은 조정을

나라의 뿌리라고 여기어 본조(本朝)라고 불렀다 한다.

좁게는 한나라 때 군수(郡守), 소속 관원들이 그 군의 치소(郡治)를 가리켜 본조(本朝)라고 말하기도 하였고,

자기가 몸담았던 왕조를 본조(本朝)라고 가리켜 말하기도 했다.

또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조대(朝代)를 본조(本朝)라 하기도 하였다 한다.

조(朝)는 dynasty의 뜻이 있으니 가) 대를 이어 통치한 그 전반적인 시기를 가리키고,

나) 어떤 한 제왕의 통치 시기를 말하기도 한다.

 

⑪ 살이호(薩爾滸) : 지금 요녕 무순(撫順) 동쪽, 혼하(渾河) 남쪽에 있다. 1619년에 후금(後金) 노이합적(努爾哈赤)이 명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른 곳이다. 1620년 노이합적이 계번성(界藩城)에서 이곳 살이호로 천도하였다.

계번성은 계범채(界凡寨)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철배산(鐵背山) 위에 산세를 따라 담을 쌓아 세워졌고 그 서쪽

멀지 않은 곳에 혼하(渾河)와 소자하(蘇子河)가 모인다.

계번(界藩)은 만주어이고 그 뜻은 ‘두 내(河)가 모이는 곳’이라 한다.

 

⑫ 틈적(闖賊) :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에 봉기한 농민 지도자 이자성(李自成 1606년-1645년)이다.

그의 선조는 감숙(甘肅) 진안(秦安) 사람으로 섬서(陝西) 미지(米脂)로 옮겨와 살았다.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서 틈왕(闖王)이라 일컬었는데 세상에서는 틈적(闖賊)이라고도 하였다.

이자성은 서북(西北)에서 봉기하여 북경을 함락하며 명나라를 멸망시키기까지 단 15년이 걸렸다.

그러나 명나라 말기에 청(淸)에 투항한 오삼계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에 깨졌다고 한다.

 

⑬ 정정(定鼎) : 하우(夏禹)가 구주(九州)의 금(金)을 거두어 녹여서 정(鼎)을 만들었는데 나라를 전승(傳國)하는

상징물인 중용한 기물이 되어 수도에 모셔졌다.

이로 인해 수도를 정하여 세우는 것을 ‘정정(定鼎)’이라 하였다. 좌전(左傳) 선공(宣公) 3년 “성왕(成王)이 겹욕

(郟鄏, 지금 하남(河南) 낙양(洛陽))에 수도를 세웠다(定鼎).” 하였다.

〈左傳·宣公三年 : “成王定鼎於郟鄏”〉 또 다른 뜻은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것을 ‘정정(定鼎)’이라 한다.

 

⑭ 식미(式微) : 식(式)은 말을 ‘발어사’이고 미(微)는 ‘쇠퇴하다’를 뜻하는데 이 글자는 시경(詩經) 패풍(邶風)편

‘식미(式微)’에서 유래하는데 사물이 흥성하였다가 시들어진다는 뜻까지 포괄한다.

 

⑮ 천명(天命) : 1616년에서 1626년까지이다.

이는 청(清) 태조(太祖) 애신각라(爱新觉罗) 노이합적(努尔哈赤)이 칸(汗)이라는 지위에 오르면서 대금(大金, 곧

후금(后金)을 말함)을 세웠을 때 사용한 연호(年號)이다.

 

⑯ 파극십(巴克什)은 만어(滿語)로 ‘ᠪᠠᡴᠰᡳ’이고 독일인 목인덕(穆麟德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이 옮겨 적은 말은 ‘바크시(Baksi)’이다.

또 방시(榜式), 파시(把式), 방시(榜什)로도 쓴다.

몽고어에서 온 말이니 그 뜻은 스승(老師)이다. 또한 지식이 있는 문인(文人)이라는 뜻도 된다.

파극십/시(巴克什)은 훗날 청조(清朝) 학자들의 일종의 직함이 되었다 한다.

 

⑰ 납라 액이덕니(納喇 額爾德尼) : 태어난 해는 알려지지 않았고 1623년에 돌아가셨다.

또는 1592년에서 1634년이라는 말도 있다.

성(姓)은 납란(納蘭)이시고 대대로 도영액(都英額)에서 살았다.

만주 정황기(滿洲正黃旗) 소속이었고 후금(後金) 관원이었다. 도영액(都英額)은 혁사리씨(赫舍裏氏)와 나랍씨

(那拉氏)가 대대로 살았던 곳이다. 그 위치는 지금 심양시 동쪽에 청원현(清原縣)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다.

액이덕니(額爾德尼)는 일찍이 누르하치(努爾哈赤)를 따라 남과 북으로 정벌 전쟁을 나갔었다.

그는 몽고어(蒙古語)와 한문(漢文)에 다 통달하여 이를 바탕으로 누르하치의 정복 전쟁 과정에서 많은 공적을

이루었다.

만력(萬曆) 27년(1599년) 태조 누르하치가 만주글자를 창제하라는 명을 받아 액이덕니(額爾德尼)와 갈개(噶蓋)가 종요롭게(主要) 일을 하다가 갈개(噶蓋)가 태조 누르하치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고서 액이덕니 홀로

글자 창제를 완성하였다. 액이덕니(額爾德尼)는 에르데니(Erdeni)로 발음이 되니 그 뜻은 보물, 진귀한 보물(珍寶)을 뜻한다 한다.

청사고(清史稿)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액이덕니(額爾德尼)는 납라씨(納喇氏)이고 대대로 도영액(都英額)에서 살았다.

젊어서 똑똑하고 민첩하여 몽고(蒙古) 말과 한문(漢文) 둘 다에 통달하였다.

누르하치 태조(太祖) 때 와서 섬기었으니 정황기 만주(正黃旗滿洲)에 소속시켰다.

누르하치 태조를 따라 몽고 여러 부(部)를 정벌할 때 그 부족들의 토속(土俗)과 말(語言), 문자(文字)를 말미암아서 태조의 뜻과 바램(意旨)을 펼쳐 보이고서 상대를 끌어들이고 받아들이거나 항복시켜 붙게 하였다.

태조가 호(號)를 내려서 파극십(巴克什)이라 불렀다.

 

만주(滿洲, 후금, 청나라)가 처음 시작되었을 적 여전히 몽고문자(蒙古文字)를 썼지만, 만주와 몽고 두 나라의 말이 달라서 반드시 옮겨 번역하여서 문장을 만들어야만 했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불편하게 여겼다. 태조(太祖)가 군대를 일으킨 지 십육 년, 해는 기해(己亥) 이월(二月) 신해

초(辛亥朔)에 파극십 액이덕니(巴克什額爾德尼)와 찰이고제(扎爾固齊), 갈개(噶蓋)를 불러 나랏말(國書)를 만들게 하였다.

액이덕니(額爾德尼)와 갈개(噶蓋)가 오랫동안 몽고문자(蒙古文字)에 익숙하여 쉽사리 제도를 고치지 못한다라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상(上) 말씀하기를 ‘한(漢)사람들이 한(漢)의 글(文)을 읊어도 아직 한자(漢字)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무엇을

읊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몽고(蒙古) 사람들이 몽고(蒙古) 글(文)을 읊어도 아직 몽고 글자(蒙古字)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무엇을 읊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나라 말이 반드시 몽고어(蒙古語)로 번역되어야만 그제서야 문장(文)이 되고 읊을 수가 있게 된다면야 아직

몽고어(蒙古語)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우리나라 말을 글자로 만드는 것은 어렵다고 하고서 다른 나라말에 익숙한 것은 쉽다고 말하는가?’

하였다.

액이덕니(額爾德尼)와 갈개(噶蓋)가 글자를 창제할 방법을 다시 요청하자 상(上)이 말씀하기를 ‘이는 어렵지가

않다. 그저 몽고 글자(蒙古字)를 써서 우리나라 말소리에 어우러지게 하고 쭉 이어 구(句)를 만들어서 문장을 통해서 그 뜻을 드러내면 될 뿐이다.’ 하였다.

 

이에 나라글자(國書)를 만들어 나라 안에서 쓰여지도록 하였다.

만주(滿洲)는 이로부터 시작하여 문자를 가지게 되었다. ... 태종(太宗) 때 액이덕니(額爾德尼)가 이미 전에 세상을 떴는데도 한번은 유문관(諭文館)의 여러 신하가 ‘한 시대 걸출한 인물’이라고 감탄하였다.”

〔국서(國書)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가) 나라글자(國字), 나) 나라 사이에 오가는 문서, 다) 나라 역사(國史)이다.〕

 

清史稿 卷二百二十八 列傳十五 : 額爾德尼,納喇氏,世居都英額。少明敏,兼通蒙古、漢文。太祖時來歸,隸正黃旗滿洲。從伐蒙古諸部,能因其土俗、語言、文字宣示意旨,招納降附。賜號『巴克什』。

滿洲初起時,猶用蒙古文字,兩國語言異,必迻譯而成文,國人以為不便。太祖起兵之十六年,歲己亥二月辛亥朔,召巴克什額爾德尼、扎爾固齊、噶蓋使製國書。額爾德尼、噶蓋辭以夙習蒙古文字,未易更制。上曰:『漢人誦漢文,未習漢字者皆知之;蒙古人誦蒙古文,未習蒙古字者皆知之。我國語必譯為蒙古語,始成文可誦;則未習蒙古語者,不能知也。奈何以我國語製字為難,而以習他國語為易耶?』額爾德尼、噶蓋請更制之法,上曰:『是不難。但以蒙古字協我國語音,聯屬為句,因文以見義可矣。』於是製國書,行於國中。滿洲有文字自此始。...太宗時,額爾德尼已前卒,嘗諭文館諸臣,歎為一代傑出。

 

⑱ 흠차(欽此) : ‘欽’는 ‘공경’을 뜻한다.

흠차(欽此)는 황제의 유지(諭旨)를 인용하여 서술한 뒤에 그 글월이 끝났음을 알리는, 일종의 끝맺음을 나타내는

격식 문구이다. 뜻은 ‘공경히 인용한 글월은 여기까지이다.’라고 한다.

 

欽定滿洲源流考

 

乾隆四十二年八月十九日内閣奉

  上諭 頃閲金史世紀云 金始祖居完顔部 其地有白山黒水 白山即長白山 黒水即黒龍江 本朝肇興東土 山川鍾毓 與大金正同 史又稱金之先出靺鞨部 古肅慎地 我朝肇興時 舊稱滿珠 所屬曰珠申 後改稱滿珠而漢字相沿訛為滿洲 其實即古肅慎為珠申之轉音 更足徴疆域之相同矣 又後漢書三韓傳謂 辰韓人兒生 欲令頭匾 押之以石 夫兒初墮地 豈堪以石押頭 其説甚悖于理 國朝舊俗 兒生數日置卧具 令兒仰寝其中 久而腦骨自平 頭形似匾 斯乃習而自然無足為異 辰韓或亦𩔖是 范蔚宗不得其故 曲為之觧 甚矣其妄也 若夫三韓命名苐列辰韓馬韓弁韓而不詳其義意 當時三國必有三汗 各統其一 史家不知汗為君長之稱 遂以音同誤譯 而庸鄙者甚 至訛韓為族姓 尤不足當一噱 向曽有三韓訂謬之作 惜未令人盡讀之而共喻耳 若唐時所稱雞林 應即今吉林之訛 而新羅百濟諸國 亦皆其附近之地 顧昔人無能考証者 致明季狂誕之徒 尋摘字句肆為詆毁 此如桀犬之吠 無庸深較而舛誤之甚者 則不可以不辨 若夫東夷之説因地得名 如孟子稱舜東夷之人 文王西夷之人 此無可諱 亦不必諱 至于尊崇本朝者 謂雖與大金俱在東方 而非其同部 則所見殊小 我朝得姓曰愛新覺羅氏 國語謂金曰愛新 可為金源同派之証 盖我朝在大金時 未嘗非完顔氏之服屬 猶之完顔氏在今日皆為我朝之臣僕 普天率土統于一尊 理固如斯也 譬之漢唐宋明之相代 豈皆非其勝國之臣僕乎 又有云 我

  祖宗時 曽受明龍虎将軍封號 亦無足異 我朝初起時 明國尚未削弱 因欲與我修好 借此以結兩國之歡 我朝固不妨為樂天保世之計 迨我國聲威日振 明之綱紀日隳 且彼妄信讒言潜謀戕害 于是我

  太祖赫然震怒 以七大恨告

  天 興師報復 自薩爾滸松山杏山諸戰大敗明兵 明人欲與我求和 斥而不許 彼尚安能輕侮我朝乎 且漢髙乃秦之亭長 唐祖乃隋之列公 宋為周之近臣 明為元之百姓 或攘或侵 不復顧惜名義 若我朝乃明與國 當闖賊擾亂 明社既移之 後吴三桂迎迓王師入闗 為之報讐殺賊 然後我

  世祖章皇帝定鼎燕京 統一寰㝢 是得天下之堂堂正正 孰有如我本朝者乎 至若我國家誕膺

  天眷朱果發祥 亦如商之元鳥降生 周之髙禖履武 紀以

  為受

  命之符 要之仍係大金部族 且天女所浴之布勒瑚里池 即在長白山 原不外白山黒水之境也 又金世紀稱 唐時 靺鞨有渤海王傳十餘世 有文字禮樂 是金之先即有字矣 而本朝國書 則自

  太祖時 命額爾徳尼巴克什等 遵製通行 或金初之字 其後因式㣲散佚 遂爾失傳 至我朝復為剏造 未可知也 他如建州之沿革 滿洲之始基 與夫古今地名同異 并當詳加稽考 勒為一書 埀示天下萬世 着派大學士阿桂于敏中侍郎和珅董誥 悉心檢覈 分條編輯 以次呈覽候 朕親加釐定 用昭傳信而闢羣惑 並将此通諭知之 欽此

 

 

출처: https://hongjaedong.tistory.com/198 [장성: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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