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 6월호 원고] 고안나 詩 ‘가는 세월’ 외 2편
가는 세월
고 안 나
가만히 귀 기울이면
내 안에서 묵정밭 일구는 소리
시간의 허물 벗고
나의 그림자 돌아눕는 소리
나는 세월을
단단한 연륜으로 묶어
내 안에 가두어 두었다
저무는 노을이 마지막 힘 다해
붉은 혓바닥 거둬들일 때
내 몫으로 남은 것은
시들지 않는 홑꽃 한 송이
세월아
꽃들의 반란
오래 기억하거라
시간은 오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켜켜이 스며 나가는 것이었냐고
가는 뒷모습에 물으니
그래,
이제사 알겠다
<시작 노트>
시간은 내 안에서 꽃 피우며, 은은하게 바깥으로 스며 나가는 나의 빛깔이며 향기다.
내 영혼의 마당에 시들지 않는 홑꽃 한 송이, 그것은 내 시(詩)의 푸른 지문, 내 삶의 흔적이다. 바람 불고 흐린 날에도 시간은 속도를 멈추지 않고 내 안의 심상을 거두어 대지 위에 빛깔로 향기로 키워낼 것이라는 걸, 이제사 알겠다.
새벽이 오기까지
고 안 나
내 안에 오래 잠든 시간들을
조용히 깨워본다
허겁지겁 달려온 길 끝
부서진 조각들 모아
세월의 뼈대 단단히 엮었다
심장 박동 늦추는
굽이진 비탈마다
깊고 푸른 지문 남겨 놓았다
파도의 숨소리 읽어내듯
질척이던 슬픔도
맑은 이슬로 맺힌 끝자락
어둠을 떠나보내는 길 위에
희끗한 새벽빛 한 줄기
아침은 또 그렇게 오는가
<시작 노트>
돌아보니 가파른 고비마다 내가 남겨놓은 것은 삶을 뜨겁게 사랑했던 깊고 푸른 밤이었다. 거친 파도 같던 슬픔도, 희열에 달뜬 순간도 지나고 보니 새벽으로 가는 길목, 내 생의 시계추는 멈추지 않았다. 여기까지 굴러온 생의 고리 붙잡고, 나는 다시 묻는다. 아침은 또 그렇게 오는가 하고.
흐린 날의 독백
고 안 나
어두워도 새벽
해 뜨지 않은 아침이다
빛이 제 몸 사린다 하여
시간이 속도 멈춘 적 없었다
예측불허, 궤도 이탈한 날씨
우리는 하루라는 고리에 꿰어 실려갈 뿐
흐린 하늘 밑에서 밥 먹고
소리 죽은 어둠 속에서 잠 청하며
지나가고, 지워지는 것들 배웅한다
진흙 묻은 신발 털어내듯
비 오고, 흐리고 해 뜨는 골목 돌며
먹고 자고 다시 눈 뜨는
끈질긴 순환의 고리
삶은 맑은 날의 특권 아니었다
먹구름이 해의 이마 가려도
뒷걸음치지 않는 바다가 우는 날,
흐리다 다시 밝아지는
삶이라는 거대한 진실 앞에
변하지 않는 생각 하나
우주 만상은 위대하다
지금 일본 규슈는 *장미전쟁 한창이란다
*장미 : 2026년 태풍 이름
<시작 노트>
창밖을 보며 생각한다. 세상이 어둠에 잠기고 먹구름이 하늘을 가렸다고 해서 아침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빛이 잠시 제 몸을 사릴 뿐, 우주의 거대한 시계는 단 한 순간도 속도를 멈춘 적이 없다. 바다 건너 일본 규슈에는 태풍 '장미'가 몰아쳐 온 세상이 전쟁 같은 풍랑 속에 가라앉고 있다. 흐린 날의 골목길에서 우주의 거대한 자전을 본다. 폭풍이 몰아쳐도 뒷걸음치지 않는 바다처럼, 흐리다 다시 밝아지는 삶의 거대한 진실 앞에 고개를 숙인다.
▶<시에> 등단
▶시집『양파의 눈물』,『따뜻한 흔적』『기억의 방』
▶전자시집 『기억을 묶어 둔 흔적』
▶시낭송집(cd) 『추억으로 가는 길』
▶중국 도라지 해외문학상, 경기문창문학상
백두산문학상, 부산시인 작가상
중국 송화강 해외문학상, 한반도문학대상 수상
꽃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