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 6월호 원고] 고안나 詩 ‘가는 세월’ 외 2편

작성자여름향기|작성시간26.06.09|조회수2 목록 댓글 0

[심상 6월호 원고] 고안나 詩 ‘가는 세월’ 외 2편

 

 

가는 세월

​고 안 나

​가만히 귀 기울이면
내 안에서 묵정밭 일구는 소리
시간의 허물 벗고
나의 그림자 돌아눕는 소리


​나는 세월을
단단한 연륜으로 묶어
내 안에 가두어 두었다


​저무는 노을이 마지막 힘 다해
붉은 혓바닥 거둬들일 때
내 몫으로 남은 것은
시들지 않는 홑꽃 한 송이


​세월아
꽃들의 반란
오래 기억하거라


​시간은 오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켜켜이 스며 나가는 것이었냐고
가는 뒷모습에 물으니


​그래,
이제사 알겠다

 

 

 

 

<시작 노트>

 

시간은 내 안에서 꽃 피우며, 은은하게 바깥으로 스며 나가는 나의 빛깔이며 향기다.
​내 영혼의 마당에 시들지 않는 홑꽃 한 송이, 그것은 내 시(詩)의 푸른 지문, 내 삶의 흔적이다. 바람 불고 흐린 날에도 시간은 속도를 멈추지 않고 내 안의 심상을 거두어 대지 위에 빛깔로 향기로 키워낼 것이라는 걸, 이제사 알겠다.

 

 

 

 

 

새벽이 오기까지

​고 안 나


내 안에 오래 잠든 시간들을
조용히 깨워본다

​허겁지겁 달려온 길 끝
부서진 조각들 모아
세월의 뼈대 단단히 엮었다

심장 박동 늦추는
굽이진 비탈마다
깊고 푸른 지문 남겨 놓았다


​파도의 숨소리 읽어내듯
질척이던 슬픔도

맑은 이슬로 맺힌 끝자락
​어둠을 떠나보내는 길 위에
희끗한 새벽빛 한 줄기


아침은 또 그렇게 오는가

 

 

 

<시작 노트>

 

돌아보니 가파른 고비마다 내가 남겨놓은 것은 삶을 뜨겁게 사랑했던 깊고 푸른 밤이었다. 거친 파도 같던 슬픔도, 희열에 달뜬 순간도 지나고 보니 새벽으로 가는 길목, 내 생의 시계추는 멈추지 않았다. 여기까지 굴러온 생의 고리 붙잡고, 나는 다시 묻는다. 아침은 또 그렇게 오는가 하고.

 

 

 

 

흐린 날의 독백

​고 안 나

​어두워도 새벽
해 뜨지 않은 아침이다
빛이 제 몸 사린다 하여
시간이 속도 멈춘 적 없었다
​예측불허, 궤도 이탈한 날씨
우리는 하루라는 고리에 꿰어 실려갈 뿐
흐린 하늘 밑에서 밥 먹고
소리 죽은 어둠 속에서 잠 청하며
지나가고, 지워지는 것들 배웅한다
​진흙 묻은 신발 털어내듯
비 오고, 흐리고 해 뜨는 골목 돌며
먹고 자고 다시 눈 뜨는
끈질긴 순환의 고리
삶은 맑은 날의 특권 아니었다
​먹구름이 해의 이마 가려도
뒷걸음치지 않는 바다가 우는 날,
흐리다 다시 밝아지는
삶이라는 거대한 진실 앞에
변하지 않는 생각 하나
우주 만상은 위대하다
​지금 일본 규슈는 *장미전쟁 한창이란다


​*장미 : 2026년 태풍 이름

 

 

<시작 노트>

 

창밖을 보며 생각한다. 세상이 어둠에 잠기고 먹구름이 하늘을 가렸다고 해서 아침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빛이 잠시 제 몸을 사릴 뿐, 우주의 거대한 시계는 단 한 순간도 속도를 멈춘 적이 없다. ​바다 건너 일본 규슈에는 태풍 '장미'가 몰아쳐 온 세상이 전쟁 같은 풍랑 속에 가라앉고 있다. 흐린 날의 골목길에서 우주의 거대한 자전을 본다. 폭풍이 몰아쳐도 뒷걸음치지 않는 바다처럼, 흐리다 다시 밝아지는 삶의 거대한 진실 앞에 고개를 숙인다.

 

 

 

▶<시에> 등단
▶시집『양파의 눈물』,『따뜻한 흔적』『기억의 방』

▶전자시집 『기억을 묶어 둔 흔적』
▶시낭송집(cd) 『추억으로 가는 길』
▶중국 도라지 해외문학상, 경기문창문학상
백두산문학상, 부산시인 작가상
중국 송화강 해외문학상, 한반도문학대상 수상

꽃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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