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헤립의 명각
< 역사 배경 >
본문 말씀 = 사36:1~2
본문에는 B.C. 701년 히스기야 왕 제 14년
앗수르 왕(王) 산헤립이 46개의 유다의 견고한
성읍 들을 쳐서 취한 다음 예루살렘을 포위한
사실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리고 37장에는 교만에 빠진 앗수르가 이같은
예루살렘공략(攻略)에 실패한 사실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비록 그 관점은 다르지만
산헤립이 자신의 무용(武勇)과 승리(勝利)를 남기고자
기록(記錄)한 그의 명각(銘刻)에도 나타난다.
1. 산헤립의 명각
이는 각 면마다 설형문자가 기록(記錄)되어 있는
높이 37.4m의 육각(肉刻) 기둥으로서 산헤립 왕이
자신의 공적(功績)을 기록(記錄)한 만은 비문(碑文)들
중의 하나이다
당시 앗수르 왕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후대(後代)에 남기기 위해 자신의 무용담(武勇談)과
승리(勝利), 전리품등을 기록(記錄)하여 자신이 세운
궁전(宮殿)이나 도시 성문(城門) 등의 기초에 묻었다.
산헤립의 명각은 1830년(年)에 발견되어 졌는데
여기서는 산헤립의 예루살렘 공략(攻略)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다인 히스기야는 나에게 복종하지 않았도다.
나는 잘 다져진 비탈길과 공성포, 보병의 공격,
함정과 사다리 공격 등으로 그의 46개 성읍과
주변(周邊)의 무수한 마을들을 휩쓸었도다....
나는 그를 그 도읍(都邑) 예루살렘에
마치 새장의 새처럼 가두어 놓았도다...
그는 금(金) 30달란트와 은(銀) 300달란트(Talent),
....남녀 악사들을 나의 도읍 니느웨로 보내 왔도다.
그는 사신을 보내어 나에게 조공(朝貢)을
바치고 신하(臣下)의 예(禮)를 갖추었노라."
2. 성경 기사와의 상이점
산헤립의 명각의 기록(記錄)에 따르면 히스기야가
그에게 항복(降服)하고 막대한 조공(朝貢)을 나중에
니느웨로 보낸 것으로만 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성경에서는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包圍)하여 성문(城門)을 열도록 종용(慫慂)하며
히스기야를 사로잡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오히려
하나님의 기적적(奇蹟的)인 손길로 말미암아 앗수르
군대가 갑자기 약해져서 산헤립의 군대는 곧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전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산헤립이 그렇게 빨리 철수하게
된 이야기를 자기 체면상(體面上) 후대에 알리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해(理解)할 수 있다.
또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함락하는 데 실패한
사실(事實)은 그가 예루살렘을 점령(占領)했다고
주장하지 않고 히스기야의 항복을 니느웨에서
사신(使臣)들을 통(通)해 받았다고 말한 데서도
확인(確認)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예루살렘 함락(陷落)에 성공했다면
그 사실을 틀림없이 왕국 벽에 전투(戰鬪) 장면을
새겼을 것인데, 니느웨에 있는 그의 궁전(宮殿)에는
라기스 성읍을 점령(占領)하는 장면만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그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라기스 점령에만 크게 비중을 두어 자랑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하스기야로부터 조공(朝貢)을 받았다는 기록은
이 전투 초기(初期)에 히스기야가 불신앙 가운데 바쳤던
조공의 내용(왕하18:14)과 일치(一致)하는 것으로 산헤립이
자신의 과실을 숨기고 공적 만을 드러내었음을 알 수 있다.
3. 의의(意義)
이상의 사실(事實)로 비록 그 관점(觀點)은 다르나
산헤립의 명각 내용은 본문의 역사적 배경(背景)을
뒷받침 해주는 중요(重要)한 고고학적(考古學的)인
자료(資料)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산헤립의 군대(軍隊)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아무도 그 도시(都市)에 드나들 수 없게
만든 극도(極度)의 위기 상태(狀態)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確信)하고 항복 권유(勸誘)를
무시한 히스기야의 담대한 믿음을 깨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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