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가 실제 사용한 무기는 무엇이였을까?

작성자양양대장관우|작성시간03.08.12|조회수660 목록 댓글 6
관우의 진짜 무기는 무엇이었을까?

《삼국지연의》 첫 회에 나오는 내용이다. 유비·관우·장비가 의형제를 맺고 나자 쇠를 녹여 병기를 만든다. 유비는 쌍고검을, 장비는 장팔점강모를, 그리고 관우는 무게가 팔십 두 근이나 나가는 청룡언월도를 주조한다. 청룡언월도는 일명 "냉염거(冷艶鋸)"라고도 불린다. 대부분의 삼국지 독자들 가슴속에 새겨진 관공은 적토마 위에 높이 앉아 길다란 청룡도를 휘두르는 위풍당당한 모습일 터이다. 청룡언월도란 반달과 같이 생긴 칼끝에다 길다란 자루가 달린 대도이다. 그러나 실재대로 말한다면 이 한 자루의 청룡언월도란 이야기꾼(說書人)들이 꾸며낸 허구에 불과하다. 역사적 진실을 찾아본다면 관우는 결코 이러한 종류의 대도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삼국지·관우전》을 살펴보면 될 것이다. 아무리 샅샅이 살펴보아도 "칼 도(刀)"자가 나오는 부분이라곤 없다. 그가 사용한 무기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은 아래와 같은 문구가 잠시 보일 뿐이다.

"소(紹: 곧 원소)가 대장군 안량(顔良)을 보내어 백마성에 주둔한 동군태수(東郡太守) 유연(劉延)을 공격토록 했다. 조공(曹公: 곧 조조)은 장료와 관우를 선봉으로 삼아 안량을 공격토록 했다. 멀리 안량의 깃발과 일산(日傘)을 바라본 관우는 곧 수많은 병사들 속으로 말을 몰아 안량을 찌르고는 그의 머리를 베어 돌아 왔다. 원소의 여러 장수들은 당할 사람이 없었고, 마침내 백마성의 포위를 풀 수 있었다."

당시 관우는 잠시 항복하여 조조에게 의탁하던 처지였기에 조조를 도와서 백마성의 포위를 풀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사실은 만약 관우가 사용한 무기가 대도(大刀)였다면, 결코 "찌를 자(刺)"자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란 점이다. "자(刺)"의 의미로 미루어볼 때, 관우가 사용했음직한 무기는 당연히 "모(矛)", 또는 "극(戟)"과 같은 종류의 병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안량을 "찔러(刺)" 죽인 뒤에, "그의 머리를 베어 돌아 왔다"는 부분의 병기도 패도(佩刀) 또는 패검(佩劍) 따위의 짧은 병기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왜냐하면 문맥상으로나 이치상으로나 창으로 "찔러" 죽인 이후라야 비로소 목을 "벨(斬)"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노숙전(魯肅傳)》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비로소 관우와 관계 있는 "도(刀)"자를 찾아볼 수가 있다.

"비(유비)가 소식을 듣자 공안(公安)으로 돌아와서는 관우를 보내어 세 군(郡)을 뺐도록 했다. 노숙은 익양(益陽)에 머물면서 관우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노숙이 관우에게 서로 만날 것을 요청했다. 각기 백 보 거리에 병마를 주둔시키고는 오직 여러 장수들만이 단도(單刀)를 갖추고 함께 모였다. …… 노숙이 사나운 목소리로 그 자를 꾸짖는데, 언사와 낯빛이 매우 엄절했다. 관우가 칼(刀)을 잡고 일어나면서 이르기를 ……."

하지만 이곳에서 말하는 "단도"나 "도" 역시 청룡언월도가 아니라, 배도(配刀) 또는 단도(短刀)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쌍방이 회합을 가질 때는 언제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상해를 입힐 우려가 있는 자루 긴 종류의 무기 따위는 휴대하지 못하게 한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지 호신용의 가벼운 병기정도만 휴대가 허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용문 속에서 언급된 "여러 장수들만이 단도(單刀)를 갖추고 함께 모였다"란 말의 의미는 관우 단독으로 칼을 휴대했다는 말이 아니라, 노숙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칼을 가지고 있었으며, "단도" 또한 결코 관우의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후인들이 이 사실을 오해하는 이유는 원(元) 나라 관한경(關漢卿)의 잡극인《관대왕이 혼자서 단도회에 나아가다(關大王獨赴單刀會)》와 《삼국지연의》 제66회의 "관운장이 단도로 모임에 나아가다(關雲長單刀赴會)"란 이야기에서 발단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 말미암아 관공의 전용 격투무기가 대도(大刀)로 변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대도가 미화되어 "청룡언월도"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적 기록에 근거해 보더라도 관우가 살았던 삼국시대에는 아직도 이런 종류의 자루 긴 대도는 사용되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당시의 격살용 병기로는 주로 극(戟)이나 모(矛) 따위의 창 종류였을 따름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비록 신형 병기에 속하는 대도가 출현했다고 할지라도 관우가 사용했다는 식의 자루 긴 대도가 아니라, 칼 머리에 고리를 장식한 긴 칼 종류, 즉 기껏해야 1m정도의 길이를 가진 장도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청룡언월도"란 길거리 이야기꾼들이 묘사한 양식을 근거로 후대의 문학가들이 꾸며낸 허구적인 무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이런 종류의 대도란 전쟁터의 병사들이 서로 격살하는데 사용한 실전용 병기가 아니고, 의장(儀仗) 혹은 연기용으로 사용했던 병기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예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명(明) 나라 사람 모원의(茅元儀)의 《무비지(武備志)·군자승(軍資乘)·기계(器械)》에는 "언월도는 (관중을 앞에 두고) 웅장하게 보이기 위해 연기용으로 사용한 것일 뿐, 실제의 전장 터에서는 쓸 수 없는 것이다"라고 지적한 내용이 그것이다.

우스운 일은, 지금도 낙양(洛陽)의 관제묘(關帝廟) 문 앞에는 무게가 팔십 두 근이나 나가는 한 자루의 청룡언월도가 놓여있는데,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것을 일찍이 관공이 진짜로 사용했던 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없었던 사실을 있었던 일로 만든 것이니, 그게 어찌 진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삼국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던 전업 이야기꾼들이 무엇을 근거로 관우가 이런 종류의 병기를 쓰는 것으로 꾸며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삼국지·노숙전》에 나오는 관우와 관련된 "도(刀)" 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의 착각으로 관우가 사용했던 무기를 대도(大刀)로 인정하게 되었을 것이고, 착각이 착각을 불러일으키자 나중에는 고의적으로 관우에게 이러한 특이한 무기를 배당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장비가 사용한 모(矛)나 조운이 사용한 창(槍)과 대비를 이루어 독자들로 하여금 단조로움에서 탈피할 미감(美感)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이 한 자루의 대도로 인하여 관우란 인물이 얼마나 신비스런 형상으로 자리 매김 하게 되었는가? 관우가 등장하는 장면이라면 으레 높이 치켜들었다 내려치는 칼날 아래 얼마나 무수한 적장의 목이 추풍낙엽과도 같이 말발굽 아래로 떨어지곤 했던가?

이리하여 "청룡언월도"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다양한 종류의 이야기를 통해 마침내 관우 가문의 "전용물"로 변신하고 말았다. 《삼국지연의》에만 해도 관우가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인 관흥이 답습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수호전》에 와서도 관승(關勝)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의 별호를 "대도"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후세의 사람들은 "청룡언월도"를 일러 "관씨네 전용 칼", 즉 "관도(關刀)"라고도 호칭하게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은 관도와 같은 종류의 그림이나 물건을 대할 때마다 그 내력을 알고싶어 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홍루몽》에 나오는 엄청나게 허망한 환상 경, 즉 "태허환경(太虛幻境)"에 걸려 있는 한 폭의 대련(對聯)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짜를 진짜라고 우겨대면 진짜 또한 가짜로 변하고,
없는 걸 있는 것이라고 우기면 멀쩡한 것 역시 없는 것이 된다네.
假作眞時眞亦假, 無爲有處有還無

지금까지 얘기해 온 것만이 모두는 아니다.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그 당시 실전에 사용되지 않았던 무기였을 뿐만 아니라, 황충이 사용한 대도, 위연이 사용한 대도, 서황이 사용한 대부(大斧), 황개가 사용한 철편(鐵鞭), 공융의 부장 무안국(武安國)이 사용한 철추(鐵錘), 만왕(蠻王) 사마가(沙摩柯)가 사용한 철질려골타(鐵 藜骨朶) 등도 역시 그 당시 상황에서는 있을 수 없었던 무기들이다. 장비가 사용한 것으로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모(矛)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장팔사모(丈八蛇矛)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동진(東晋) 시대에 와서야 진안(陳安)이 비로소 장팔사모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여포가 극(戟)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그 역시 결코 방천화극(方天畵戟)이 아니라는 걸 단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의 방천화극은 의장용으로 설치한 것일 뿐 실전에 사용한 무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같이 나관중의 붓끝에서 바꿔치기 되거나 재창조된 무기들이다. 위대한 소설가 나관중은 역사적으로는 훨씬 후대에 나타나거나 실전에 사용되지 않았던 병장기들을 이용하여 작품의 질을 한층 높였던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이민족!!! | 작성시간 03.08.12 이거 전에 제가 픈거같은데...
  • 작성자적n흑기사 | 작성시간 03.08.13 관우가 그랫다면 세상사람의인식바꾸자
  • 작성자적n흑기사 | 작성시간 03.08.13 관우가 그랫다면 세상사람의인식바꾸자
  • 작성자오 키 타 | 작성시간 03.08.13 아 무 거 나 사 용 하 든 쌔 지 않 나 요 ?
  • 작성자夏厚尊 | 작성시간 03.08.13 몽댕이..;;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