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제5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조조가 낙양(洛陽)을 떠나 진류(陳留)에 도착한 이후, 즉각 조서(詔書)라고 사칭한 문서를 각지로 보내어 각 로(路)의 영웅들에게 조정대권을 찬탈하여 함부로 나쁜 짓을 자행하고 있는 동탁을 토벌하자고 호소한다. 18로(路)의 제후들은 즉각 군사를 일으켜 낙양 부근으로 모여들어 군영을 설치하고 진지를 구축했는데, 그 길이가 장장 200여 리나 이어졌으니, 참으로 기세가 드높고 위풍당당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이 토벌작전은 용두사미(龍頭蛇尾)처럼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지만, 그것은 《삼국지연의》에 묘사된 한바탕 매우 중요한 전쟁이며, 전 작품을 통해 활약하는 주연급 인물들의 집중적인 등장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온주참화웅(溫酒斬華雄)」이라든가,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 등의 훌륭한 줄거리가 들어 있어서 독자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제후 연합군이 동탁을 토벌하는 이 단원의 줄거리는 기본적으로 역사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지만, 그 중에는 허구적 성분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우선 독자들이 알아야할 것은, 제후들에게 공동으로 동탁을 토벌하자고 호소한 사람은 조조가 아니라 교모(橋瑁)였다는 사실이다. 《삼국지·위서·무제기》의 주(注)에서는 《영웅기(英雄記)》의 내용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동군태수 교묘가 수도의 삼공이 주군(州郡)에다 서신을 보내왔다고 거짓으로 꾸민 뒤, 동탁의 죄상을 상세히 설명하며 이르기를, 「핍박을 받아 스스로 구원할 길이 없으니,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환란을 풀어 주기를 희망하노라」고 했다(東郡太守橋瑁詐作京師三公移書與州郡, 陳卓罪惡, 云見逼迫, 無以自救, 企望義兵, 解國患難).』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일을 조조가 시행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조조의 비범한 영웅적 기개와 동탁을 토벌하는 동안에 있었던 그의 지위와 작용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개조한 내용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결코 나관중이 고의적으로 조조를 추하게 묘사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동탁을 토벌하는데 참여한 제후들의 숫자는 결코 18로의 제후처럼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삼국지·위서·무제기》에 의하면, 중평(中平) 6년(189) 12월에 처음으로 조조가 군사를 일으킨 일을 제외하고, 초평(初平) 원년(190) 정월이 되어 동시에 군사를 일으킨 주군(州郡)의 장관(長官)들은 다음과 같이 10명뿐이었다. 즉, 후장군(後將軍) 원술(袁術)·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예주자사(豫州刺史) 공주(孔 )·연주자사( 州刺史) 유대(劉岱)·하내태수(河內太守) 왕광(王匡)·발해태수(勃海太守) 원소(袁紹)·진류태수(陳留太守) 장막(張邈)·동군태수(東郡太守) 교모(橋瑁)·산양태수(山陽太守) 원유(袁遺)·제북상(濟北相) 포신(鮑信) 등이다. 또 《후한서·원소전》에 의하면, 동탁 토벌에 참여한 제후는 11명으로 되어있는데, 《삼국지·위서·무제기》에 기록된 것과 내용을 비교해보면 광릉태수(廣陵太守) 장초(張超)의 명단이 첨가되어 있다. 그 외에 《삼국지·오서·손파로전》에는 장사태수(長沙太守) 손견(孫堅)이 동탁 토벌에 참여했던 활약상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역사적으로 동탁을 토벌하기 위하여 연합했던 제후들은 실제로는 모두가 13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13명 이외에도 북해태수(北海太守) 공융(孔融)·서주자사(徐州刺史) 도겸(陶謙)·서량태수(西 太守) 마등(馬騰)·북평태수(北平太守) 공손찬(公孫瓚)·상당태수(上黨太守) 장양(張楊) 등 5명을 더 보태고 있다.
하지만, 역사상에서의 공융은, 이 때 비록 북해상(北海相)이기는 했지만, 황건적과 맞서고 있는 상황이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동탁을 토벌하기 위한 전투에 참여할 겨를이 없었다. 도겸도 당시 서주자사를 맡고는 있었다. 그러나 동탁의 난이 일어나고, 각 주군(州郡)마다 군사를 일으키고, 천자는 장안을 수도로 삼고 있는 상황이 되자, 이러한 내용을 파악한 도겸은 몰래 서경으로 사람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고 그로 인해 안동장군(安東將軍)·서주목(徐州牧)으로 승진하고 율양후( 陽侯)에 봉해졌다.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판이니 자연히 동탁 토벌과는 무관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상의 마등은 영제(靈帝) 말년에 변장(邊章)·한수(韓遂) 등과 함께 양주(凉州)에서 군사를 일으켜 조정에 반항하다가 초평(初平) 3년(192)에 이르러서야 투항하여 정서장군(征西將軍)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동탁 토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공손찬은 당시 분무장군(奮武將軍)의 신분으로 군사들을 이끌고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주둔하며 오환(烏桓)·선비(鮮卑) 등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동탁을 토벌하는데 참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장양(張楊)은 이 때 겨우 군사 수 천명을 이끌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아직 정착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신세였다. 이렇게 제후의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고 처지였는데, 후에 동탁이 그를 하내태수(河內太守)로 임명하였으니, 당연히 동탁 토벌에는 참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역사상에 있어서 유비와 동탁 토벌과의 관계이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지·촉서·선주전》의 주(注)에 인용된 《영웅기(英雄記)》에서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글을 찾아볼 수 있다.
『영제의 죽음을 맞이하여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유비도 군사를 일으켜 동탁 토벌에 나섰다(會靈帝崩, 天下大亂, 備亦起軍從討董卓).』
그런데, 《삼국지·촉서·선주전》 본문과 《삼국지·촉서·관우전》·《삼국지·촉서·장비전》 등에는 이에 관한 일을 언급한 글이 한 자도 없다. 이것은 유비 등이 당시 아직 지위가 미천하여 거저 남을 따라서 동탁 토벌에 참여만 했을 뿐, 전쟁 중에서도 이렇다할 뚜렷한 공적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송원(宋元) 이래 통속문예 중에는 이미 18로 제후가 동탁을 토벌했다는 표현이 출현하고 있다. 더욱이 원대(元代)의 《삼국지평화》 및 원(元) 잡극(雜劇)〈호뢰관삼전여포(虎牢關三戰呂布)〉 등에 이르면 18로 제후가 함께 동탁을 토벌했을 뿐만 아니라, 유비·관우·장비 등의 전공이 가장 뛰어나며, 그들을 가장 주목받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의 맥락에다 역사적 사실을 결합한 나관중은 기왕의 통속문예작품 중에서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터무니없는 성분들을 삭제해가며 새로운 예술적 가공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18로 제후가 동탁을 토벌하는 전쟁을 매우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동탁을 토벌하는 제후 연합군 중에서도 특히 조조(曹操)·유비(劉備)·손견(孫堅) 등 세 집단을 유별나게 돋보이게 하였다. 조조의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포부 그리고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 손견의 호매한 성격과 전투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 등을 걸출하게 묘사하였다. 게다가 이러한 조조와 손견의 활약을 배경으로 하여, 「온주참화웅(溫酒斬華雄)」·「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 등의 허구적인 줄거리를 조성함으로써, 유비·관우·장비 등 세 사람을 천하제일의 영웅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뒤에 형성될 천하 삼분 국면의 유력한 복선을 깔아놓았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촉(劉蜀) 집단의 영웅들로 하여금 시종 독자들의 시야 중심에 머물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단원의 줄거리는 나관중의 총체적 예술구상을 성공적으로 구현했을 뿐만 아니라, 전서의 내용을 하나의 유기적인 구조로 유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제후 연합군이 동탁을 토벌하는 이 단원의 줄거리는 기본적으로 역사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지만, 그 중에는 허구적 성분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우선 독자들이 알아야할 것은, 제후들에게 공동으로 동탁을 토벌하자고 호소한 사람은 조조가 아니라 교모(橋瑁)였다는 사실이다. 《삼국지·위서·무제기》의 주(注)에서는 《영웅기(英雄記)》의 내용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동군태수 교묘가 수도의 삼공이 주군(州郡)에다 서신을 보내왔다고 거짓으로 꾸민 뒤, 동탁의 죄상을 상세히 설명하며 이르기를, 「핍박을 받아 스스로 구원할 길이 없으니,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환란을 풀어 주기를 희망하노라」고 했다(東郡太守橋瑁詐作京師三公移書與州郡, 陳卓罪惡, 云見逼迫, 無以自救, 企望義兵, 解國患難).』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일을 조조가 시행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조조의 비범한 영웅적 기개와 동탁을 토벌하는 동안에 있었던 그의 지위와 작용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개조한 내용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결코 나관중이 고의적으로 조조를 추하게 묘사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동탁을 토벌하는데 참여한 제후들의 숫자는 결코 18로의 제후처럼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삼국지·위서·무제기》에 의하면, 중평(中平) 6년(189) 12월에 처음으로 조조가 군사를 일으킨 일을 제외하고, 초평(初平) 원년(190) 정월이 되어 동시에 군사를 일으킨 주군(州郡)의 장관(長官)들은 다음과 같이 10명뿐이었다. 즉, 후장군(後將軍) 원술(袁術)·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예주자사(豫州刺史) 공주(孔 )·연주자사( 州刺史) 유대(劉岱)·하내태수(河內太守) 왕광(王匡)·발해태수(勃海太守) 원소(袁紹)·진류태수(陳留太守) 장막(張邈)·동군태수(東郡太守) 교모(橋瑁)·산양태수(山陽太守) 원유(袁遺)·제북상(濟北相) 포신(鮑信) 등이다. 또 《후한서·원소전》에 의하면, 동탁 토벌에 참여한 제후는 11명으로 되어있는데, 《삼국지·위서·무제기》에 기록된 것과 내용을 비교해보면 광릉태수(廣陵太守) 장초(張超)의 명단이 첨가되어 있다. 그 외에 《삼국지·오서·손파로전》에는 장사태수(長沙太守) 손견(孫堅)이 동탁 토벌에 참여했던 활약상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역사적으로 동탁을 토벌하기 위하여 연합했던 제후들은 실제로는 모두가 13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13명 이외에도 북해태수(北海太守) 공융(孔融)·서주자사(徐州刺史) 도겸(陶謙)·서량태수(西 太守) 마등(馬騰)·북평태수(北平太守) 공손찬(公孫瓚)·상당태수(上黨太守) 장양(張楊) 등 5명을 더 보태고 있다.
하지만, 역사상에서의 공융은, 이 때 비록 북해상(北海相)이기는 했지만, 황건적과 맞서고 있는 상황이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동탁을 토벌하기 위한 전투에 참여할 겨를이 없었다. 도겸도 당시 서주자사를 맡고는 있었다. 그러나 동탁의 난이 일어나고, 각 주군(州郡)마다 군사를 일으키고, 천자는 장안을 수도로 삼고 있는 상황이 되자, 이러한 내용을 파악한 도겸은 몰래 서경으로 사람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고 그로 인해 안동장군(安東將軍)·서주목(徐州牧)으로 승진하고 율양후( 陽侯)에 봉해졌다.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판이니 자연히 동탁 토벌과는 무관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상의 마등은 영제(靈帝) 말년에 변장(邊章)·한수(韓遂) 등과 함께 양주(凉州)에서 군사를 일으켜 조정에 반항하다가 초평(初平) 3년(192)에 이르러서야 투항하여 정서장군(征西將軍)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동탁 토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공손찬은 당시 분무장군(奮武將軍)의 신분으로 군사들을 이끌고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주둔하며 오환(烏桓)·선비(鮮卑) 등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동탁을 토벌하는데 참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장양(張楊)은 이 때 겨우 군사 수 천명을 이끌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아직 정착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신세였다. 이렇게 제후의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고 처지였는데, 후에 동탁이 그를 하내태수(河內太守)로 임명하였으니, 당연히 동탁 토벌에는 참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역사상에 있어서 유비와 동탁 토벌과의 관계이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지·촉서·선주전》의 주(注)에 인용된 《영웅기(英雄記)》에서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글을 찾아볼 수 있다.
『영제의 죽음을 맞이하여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유비도 군사를 일으켜 동탁 토벌에 나섰다(會靈帝崩, 天下大亂, 備亦起軍從討董卓).』
그런데, 《삼국지·촉서·선주전》 본문과 《삼국지·촉서·관우전》·《삼국지·촉서·장비전》 등에는 이에 관한 일을 언급한 글이 한 자도 없다. 이것은 유비 등이 당시 아직 지위가 미천하여 거저 남을 따라서 동탁 토벌에 참여만 했을 뿐, 전쟁 중에서도 이렇다할 뚜렷한 공적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송원(宋元) 이래 통속문예 중에는 이미 18로 제후가 동탁을 토벌했다는 표현이 출현하고 있다. 더욱이 원대(元代)의 《삼국지평화》 및 원(元) 잡극(雜劇)〈호뢰관삼전여포(虎牢關三戰呂布)〉 등에 이르면 18로 제후가 함께 동탁을 토벌했을 뿐만 아니라, 유비·관우·장비 등의 전공이 가장 뛰어나며, 그들을 가장 주목받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의 맥락에다 역사적 사실을 결합한 나관중은 기왕의 통속문예작품 중에서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터무니없는 성분들을 삭제해가며 새로운 예술적 가공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18로 제후가 동탁을 토벌하는 전쟁을 매우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동탁을 토벌하는 제후 연합군 중에서도 특히 조조(曹操)·유비(劉備)·손견(孫堅) 등 세 집단을 유별나게 돋보이게 하였다. 조조의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포부 그리고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 손견의 호매한 성격과 전투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 등을 걸출하게 묘사하였다. 게다가 이러한 조조와 손견의 활약을 배경으로 하여, 「온주참화웅(溫酒斬華雄)」·「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 등의 허구적인 줄거리를 조성함으로써, 유비·관우·장비 등 세 사람을 천하제일의 영웅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뒤에 형성될 천하 삼분 국면의 유력한 복선을 깔아놓았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촉(劉蜀) 집단의 영웅들로 하여금 시종 독자들의 시야 중심에 머물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단원의 줄거리는 나관중의 총체적 예술구상을 성공적으로 구현했을 뿐만 아니라, 전서의 내용을 하나의 유기적인 구조로 유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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